정선의 인왕제색도 의 표현 설명 작품에 조화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

사진 설명 : 山의 험준한 화강암벽. 좌에서 우로 하강하는 형세(勢)로부터 속도감이 느껴진다. 조선 후기의 화성(畵聖) 정

                선의 눈에도 이 화강암벽은 그대로 보였을 것이다. 그는 이 바위의 속도감을 표현하기 위해 묵찰법(墨擦法)을 사용했

                다. 위에서 아래로 비질하듯 쓸어내리는 그의 대담한 필치는 바로 이 인왕산을 위한 것이었다.

 

인왕산은 사연 많은 산이다.

 1392년 조선왕조가 개창(創)하던 당시 낙산()을 좌청룡()으로 삼으면서 우백호()로 삼은 산이 바로 이 인왕산인 것이다. 풍수사상적으로 볼 때 이 산은 조선왕조의 우향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는 매우 길한 산이었다.

 실제로 이 산은 그 높이가 338.2m밖에 되지 않지만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서 서울의 진산() 중 한 곳으로 꼽힐만한 자격을 갖췄다. 이런 이유로 이 산은 조선의 600년 역사, 그 국운이 다할 때까지 백호랑이다운 기세를 보여주며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나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자신의 본 이름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본시 山이었으나 旺山으로 표기가 변경된 것이다. 나라가 망하였으니 의당 산의 명칭에서도 王은 존재치 말아야 한다고 일본인들은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들이 주지하는 바처럼 이 산을 넘어온 '김신조'라는 인물 때문에 1968년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러니까 인왕산은 조선이 망하면서 이름을 잃었고, 남과 북으로 갈리면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 당하는 비운의 산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1993년 3월 25일 정오가 되어서야 이 산은 다시 일반인들의 출입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으며, 199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본 이름이었던 仁王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처럼 이 산은 우리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때 한 축을 담당했으며, 우리의 역사가 잠시 중단 되었을 때는 함께 슬퍼하였던 그런 산인 것이다.

사진 설명 : 인왕산의 정상은 다른 산과는 달리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북악산 때문에 포근한 느낌을 풍긴다. 어진(仁) 왕의 산이라 그럴

                것이다.

이곳 인왕산은 조선의 역사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겸재(謙齋) 정선(敾)의 작품인 '인왕제색도'의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畵)의 거두 겸재(謙齋) 정선(敾)에 대한 나의 관심은 오래된 것이다.

  그가 일생을 두고 남긴 400여 작품 중에서 특히 내가 관심을 갖는 작품은 그가 64세 때 그린 '청풍계도'와 76세 때 그린 '인왕제색도'이다. 이 두 작품 모두 그의 진경산수화법이 잘 표현된 대작인데, 특히 '인왕제색도'는 우리나라 국보 216호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미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진경산수화(畵)

 겸재는 율곡으로부터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 삼연 김창흡으로 이어지는 율곡학파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는 화가이기 이전에 조선성리학을 공부한 선비였으며 특히 성리학의 가장 핵심이 되는 텍스트 《주역》에 능통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주역의 근본원리인 음양조화의 원리를 화면 구성원리로 삼고, 다시 중국 남방화법인 묵법을 이용하여 우리의 토산을, 북방화법인 필묘를 이용해 암산을 표현하는 독창적인 기법을 창안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성리학의 이미지적 표현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남방화법과 북방화법이 대립하는 동안 겸재는 이 둘의 화법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기법을 주역원리에 맞춰 창안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겸재의 진경산수기법이다.

  인왕산은 작고 아담한 산이지만 우리 역사의 뿌리가 되는 곳이기에 결코 가볍게만은 볼 수 없는 산. 이곳에서 나는 화강암벽을 타고 흐르는 강렬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겸재가 그린 작품 인왕제색도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겸재(謙齋) 정선(敾),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1751년.

 지금 보는 이 작품이 바로 '인왕제색도'이다. 그림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인왕산을 표현한 것이다. 중간에 들어가 있는 글자 '제(霽)'자는 '비가 개였다'는 뜻이므로 비가 온 후에 그려진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겸재는 인왕산의 수 많은 풍경 중 비가 갠 후의 풍경을 선택했던 것일까?

 사실 이 그림 속에는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겸재 나이 76세 되던 해에 진경시의 거두 사천 이병연이 8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는데 그는 겸재와 더불어 진경문화의 쌍벽을 이뤘던 인물이자 겸재의 평생 벗이었다. 따라서 사천의 타계는 겸재에게 매우 큰 슬픔일 수 밖에 없었다. 일생을 두고 진경화를 위해 애썼던 겸재. 그런 그가 사천을 잃고 얻은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결국 그림이었다. 평소 사천과 함께 올랐던 북악산 남쪽 서록에 올라 자신의 집이 있는 인왕곡 일대를 바라보며 비 개이는 정경을 그린 작품이 바로 '인왕제색도'이니 이 작품은 친구 잃은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술픔은 맑은 날씨에 표현하기 어렵다. 그것은 너무 잔인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가 개이면서 안개가 자욱하게 낀 인왕산의 풍경을 택했던 것이며 그 안개에 자신의 감정을 숨겨놓고자 했던 것이다.

 어쨌든 인왕산은 우리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므로 많은 이들이 즐겨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서울 인왕산 모습. 김규원 선임기자

“우리 옛 그림 가운데 가장 웅혼하고 장엄한 감동을 주는 작품을 한 점 들어보라면 나는 주저 없이 ‘겸재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국보)라고 대답하겠다. (…)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대가 겸재 정선이 일흔여섯 살의 고령에 그려낸 거작이다.”(오주석,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 신구문화사, 1999)

“<인왕제색도>는 정말 걸작입니다. (…) 화면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동시에 인왕산의 암벽을 적묵(겹먹칠)으로 묵면(먹칠면)을 만들어서 압도합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괴량감(덩어리 느낌)을 느끼게 합니다. (…) 아래 허연 바탕과 음양도 잘 맞게 되어 있습니다.”(이용희,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연암서가, 2018)

지난 4월28일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가족들은 “이 회장이 평생 수집한 개인 소장 미술품 1만1천여 건(2만3천여 점)을 국가 박물관 등에 기증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인왕제색도> 등 국보 14건, 보물 46건이 포함됐다. 2만3천 점 넘는 미술품이 기증됐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띈 것은 <인왕제색도>였다. 겸재 정선의 최고 걸작이자 진경산수화의 최고 걸작, 한국 회화 역사상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미술사학자 최열은 “영조(재위 1724~1776) 때는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경제가 재건돼 생산력이 왜란과 호란 직후의 몇 배로 커졌다. 바로 이 조선 후기의 황금시대가 낳은 걸작이 <인왕제색도>다. 조선 건국 초기 천년 왕국의 꿈을 담은 걸작 <몽유도원도>와 비교되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 의 표현 설명 작품에 조화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그림의 성격과 관련해 그림 오른쪽 아래의 집이 누구 집인지 논란거리다. 리움미술관

겸재 정선이 75살에 그려… 생생한 묘사 돋보여

<인왕제색도>는 겸재 정선이 75살 때인 1751년 윤5월 하순에 그렸다. 겸재가 그림 오른쪽에 ‘신미 윤(5)월 하완(하순)’이라고 적어놔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인왕제색이란 ‘인왕산의 비 갠 모습’이란 뜻이다. 당시 <승정원일기>를 보면 윤5월19일부터 25일 오전까지 7일 동안 장맛비가 내렸다. 그래서 미술평론가 오주석은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를 윤5월25일 오후로 추정한다. 곳곳에 묘사된 폭포와 비구름이 장마가 끝난 직후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무엇보다 서울의 내4산 중 서산인 인왕산의 실제 모습(진경)을 충실하면서도 강렬하게 표현했다. 인왕산의 주요 봉우리인 범바위와 치마바위(정상), 작은봉우리, 기차바위(왼쪽부터)를 생생하게 그렸다. 또 주요 골짜기인 수성동과 옥류동, 청풍계, 주요 언덕인 필운대와 세심대도 모두 그렸고, 인왕산 능선의 한양성곽까지 표시했다.

이 그림에서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것은 산 정상인 치마바위에 위아래로 시커멓게 칠해진 붓질이다. 이른바 ‘부벽준’(도끼로 나무를 쪼갰을 때 나타나는 거친 줄무늬)인데, 겸재는 크고 거친 붓질로 수차례 덧칠함으로써 치마바위의 벽면을 어둡고 무겁게 표현했다. 또 전통 그림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가로세로 138.2×79.2㎝ 엄청난 크기도 보는 이를 압도한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책 <겸재의 한양 진경>(2004)에서 “인왕산의 백색 암봉(바위봉우리)을 정반대의 흑색 묵찰법(붓을 쓸어내리는 먹칠법)으로 대담하게 쓸어내렸는데, 그 인상은 백색에서 느끼던 그것과 동질이니 이 무슨 신비의 조화란 말인가”라고 감탄했다. 그러나 사실 인왕산의 흰 바위벽은 비에 젖으면 어두운 빛을 띠므로 정선이 치마바위를 시커멓게 칠한 것은 오히려 ‘실제 모습’(진경)에 가깝다.

정선의 인왕제색도 의 표현 설명 작품에 조화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

겸재 정선의 <서원소정>. 이춘제의 정자와 집을 그렸다. 정충기 소장

묵찰법, 흑백 조화, 강렬한 표현으로 압도

산봉우리들의 어두운 빛과 산자락의 하얀 비구름이 조화를 이룬 점도 높이 평가받는다. 미술사학자 최열은 책 <옛 그림으로 본 서울>에서 “만약 이 안개를 산 사이로 깔아두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은 그저 먹물만 머금은 암흑천지였을 것이다. 짙은 바위산의 무게와 맑은 안개의 가벼움을 적절히 뒤섞어 흑과 백의 조화를 절정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인왕제색도>는 많은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다. 가장 오랜 논쟁은 이 그림 오른쪽 아래에 그려진 기와집 한 채가 누구 집인가다. 이 논쟁은 그림의 성격과 직결된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겸재의 평생 절친이자 당대 유명 시인인 사천 이병연의 집이라는 가설이다. 당시 겸재보다 5살 많은 이병연이 와병 중이었는데, 겸재가 친구의 회복을 빌면서 우정을 담아 그렸다는 해석이다.

이 가설의 근거는 이병연의 사망 시기가 1751년 윤5월29일로, 이 그림 제작 시기와 겹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집을 서울 종로구 궁정동 육상궁(현재의 칠궁) 부근에 살았던 이병연의 집 ‘취록헌’으로 본다. 이 가설은 최완수 연구실장과 오주석 평론가가 제시했고 많은 이가 인용했다. ‘평생 우정’이라는 감동적 이야기가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외엔 다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백운동천 너머 이병연의 집 위치도 그림의 집 위치와는 거리가 멀다.

2011년 고미술사 연구자인 김가희는 이 집이 정선 그림의 주요 주문자 중 하나였던 판서 이춘제의 집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이춘제가 주문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근거는 이춘제가 그전에 겸재에게 주문한 그림 <옥동척강>(옥류동 언덕 오르기), <서원소정>(서쪽 정원 작은 정자), <서원조망>(서쪽 정원 조망) 등에 나오는 이춘제의 서원 위치가 <인왕제색도>에 나오는 집의 위치와 비슷하다는 점이다. 이춘제의 서원은 서울 종로구 신교동 세심대(선희궁터 서쪽)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춘제가 자신의 집을 겸재가 그린 <오이당도>에 대해 시를 썼는데, 이 내용이 <인왕제색도>의 풍경과 매우 비슷하다. “필운산(인왕산) 아래는 연기와 안개로 가려졌지만 은자(숨은 사람)의 가옥은 옛날과 같다.”

그러나 이 시에서 보듯 이춘제가 겸재에게 주문한 자신의 집 그림은 <인왕제색도>가 아니라 <오이당도>였다. 또 다른 10여 점의 그림과 달리 이춘제가 <인왕제색도>를 주문했다거나 소장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오히려 <인왕제색도>는 겸재의 손자 정황에게 전해졌다가 1790년께 당대 권력가인 심환지에게 넘겨졌다. 주문받은 그림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선의 인왕제색도 의 표현 설명 작품에 조화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

겸재 정선의 <인곡정사>. 겸재의 옥류동 집을 그렸다. 리움미술관

권력가 심환지, 수집상 손재형 거쳐 이건희 일가로

미술연구자인 정민영 아트북스 대표는 “이 집의 소유자에 대해선 여러 가능성이 있다. 이병연의 집이라는 가설에 너무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집이 겸재 자신의 집이라는 의견도 있다. 미술사가 홍선표는 이 집을 겸재의 집으로 해석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그림으로 성공한 겸재가 말년에 대표작에 자신의 집을 그려넣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집은 정선이 자신의 집을 그린 그림 <인곡정사>의 집과 매우 비슷하다. 겸재는 인왕산 자락을 그린 다른 그림인 <수성구지>에도 이와 비슷한 집을 그려넣었다. 이들 그림을 그릴 때 겸재의 집은 옥류동에 있었는데, 현재의 서울 종로구 옥인동 군인아파트 자리다.

겸재의 집일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다른 근거는 1790년께 이 그림을 넘겨받은 심환지가 이 그림에 붙인 시다. 이 시에서 심환지는 “늙은 주인이 깊은 장막 아래서 하도·낙서(<주역>을 뜻함)를 즐긴다”고 썼다. 실제로 겸재는 말년에 주역을 연구해 책을 쓰기도 했다. 당대 사람인 심환지가 이 집을 겸재의 집으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미술사학자 최열은 “겸재가 자신의 인생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본다. 평생 남을 위해 그렸던 전업 화가가 말년에 자신을 위한 그림을 한 점 그린 것이다. 손자에게 전해진 점도 그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겸재의 외할아버지인 박자진의 집이라는 의견도 있다. 박자진의 집은 세심대에서 조금 북쪽인 청풍계에 있었는데, 그 모습이 겸재의 그림 <풍계유택>에 잘 나타나 있다. 청풍계는 청운초등학교 북쪽 일대다. 청운초 건너편 유란동(경북고등학교 안)에서 태어난 정선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어 외할아버지에게 많이 의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집의 규모를 보면, 정선의 외가는 상당한 재력을 가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기록을 떠나 순수하게 이 그림을 그린 관점(본 자리)만으로 평가하면 다른 결과가 나온다. <한겨레21>은 4가지 가설에서 제기된 집들의 5개 위치를 찾아가 사진을 찍어봤다. 이병연이 살았던 칠궁(종로구 궁정동) 근처에선 <인왕제색도>와 조금 비슷한 모습이 잡혔다. 그러나 이춘제의 집 세심대(선희궁 부근), 겸재의 집 유란동(경복고등학교 안)과 옥류동(군인아파트 부근), 외할아버지의 집 청풍계(청운초등학교 북쪽)에선 비슷한 모습이 잡히지 않았다. <인왕제색도>와 가장 비슷한 모습이 잡힌 곳은 종친부가 있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언덕이다.

정선의 인왕제색도 의 표현 설명 작품에 조화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

겸재 정선의 <풍계유택>. 겸재의 외할아버지 박자진의 집을 그렸다. 리움미술관

최소 수백억, 최대 1천억원대 가치

<인왕제색도>는 겸재의 집안에서 소장하다 손자이며 화가인 정황이 삼청동에 살던 권력자 심환지에게 넘겼다. 심환지 사후 충남 당진에 살았던 그의 후손은 심환지의 친필이 붙어 있는 이 그림을 제사 때 모셨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 이 그림은 서울의 최난식, 개성의 진호섭 손을 거쳐 서예가이자 유명 수집가인 손재형에게 넘어갔다. 손재형은 이 그림과 함께 김정희의 <세한도>도 소장했던 사람이다. 이것을 1970년대에 이건희·홍라희 부부가 수집품 1호로 매입했다. <인왕제색도> 가격은 최소 수백억원에서 최대 1천억원 이상으로 추정돼 국내 회화 중 최고 수준이다.

김규원 선임기자 참고 문헌정민영, ‘<인왕제색도>의 기와집 주인은 누구인가?’, 2019윤진영, ‘조선 후기 서촌의 명소와 진경산수화의 재조명’,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