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어느 소 no copyright

일화가 많은 명재상 황희 

세종때 그의 인재중시로 하여 많은 명사들이 배출되고 민족사에 자기의 이름을 남겼으니 그가운데는 령의정을 지냈던 황희도 있다.

황희(1363-1452년)는 장수현사람으로서 처음 이름은 수로이고 자는 구부, 호는 방촌이며 시호는 익성이다. 그의 아버지는 판강릉부사를 지낸 황군서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알려졌고 5살이 되여서는 총명이 뛰여나 보는 족족 기억하니 아는 사람들은 그가 큰 사람이 되리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14살이 되는 해에 음직으로서 안복궁륵사가 되였고 21살에 사마시를 거치고 23살에는 진사시를 치르었다.

황희가 26살이 되던 해에 부친이 충주로 전직되여나가자 그는 따라가 여가시간에 학문을 탐구하고 낮에 밤을 이어 부지런히 경전을 읽어 깨치지 못한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정치적생애의 밑천으로 된 풍부한 지식은 대체로 이때에 마련된것이였다.

황희는 27살에 문과시험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성균학관이 되여 발전의 길이 열려있었으나 당시 고려의 국운은 쇠퇴되여가고있었다. 그는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은퇴하여 적성훈도가 되였다.

리왕조가 수립된 후 다시 벼슬길에 나선 황희는 30살부터 46살사이에 정자, 교관, 경력, 사간대언 등의 직을 력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재능에 비하여 벼슬은 그리 높지 못하였다.

그의 정치적수완은 47살에 지신사로 임명되여서부터 남김없이 발휘되였다. 그의 전임이였던 박석명은 오래동안 지신사로서 국가의 기밀을 맡고있다가 내놓으며 태종에게 황희를 천거하였다.

황희는 지신사가 되여 국가기무를 맡아보았는데 태종은 12일만 보지 못해도 그를 불러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아는것이니 루설되면 나 아니면 경이라고 하면서 믿음을 주었다.

그후 황희는 형조, 병조, 호조, 공조, 례조 등 6조의 판서를 력임하고 그사이에 대사헌, 지의정,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신, 참찬, 평안도순문사, 한성판사로도 임명되였다.

1410년부터 1418년사이에 황희가 리상적정치로 구상하던 문물제도가 정비되였다. 《경제륙전》의 제정, 병마의 점검과 군사력강화조치, 농사와 누에치기의 장려, 《고려사》개작, 30여종의 례법제정 등 리조일대의 제도와 례악을 완성하였다.

리조의 문물제도확립에 분투하던 황희는 뜻하지 않는 곡절을 겪게 되였다. 1418년 태종은 세자인 양녕대군을 밀어내고 새 세자를 세우려고 하면서 황희에게 의견을 물었다. 황희의 생각은 복잡하였다.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맏이를 밀어내고 동생을 세우는것은 후날에 화란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았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세자가 비록 덕을 잃었으나 나이가 아직 젊어서 기가 뻗칠 때여서 그럴수 있으니 큰 과실은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태종은 자기의 뜻과 어긋나는 이 대답을 듣고 격분하였다. 그는 황희가 전에는 여러 민씨(세자의 외척)를 제거하자고 주장하더니 지금은 세자를 옹호하고있다, 이것은 세자에게 붙어 민씨의 원한을 풀어 후날에 총애를 굳히자는 뜻이라고 하면서 그를 신임하지 않고 한성부판사로 좌천시켰다가 얼마후에 공직에서 추방하여 서인으로 만들어버렸다.

남원에 내려간 황희는 59살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5년동안 독서와 글쓰기로 한가한 나날을 보냈다.

그후 태종은 황희를 불러 직첩을 주고 세종에게 곧 등용하라고 하였다.

세종대에 황희는 령의정이 되여 국정을 보좌하고 문물제도확립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국정의 기본제도가 이때에 마련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가 정승으로 있은 20년간 정부의 무게가 그로 인하여 올라갔고 그는 리조 500년사에 첫째가는 령의정으로, 명재상으로 일러주게 되였다. 그가 90살의 고령으로 죽던 날 조야가 모두 놀라며 하늘이 우리 현상(현명한 재상)을 빼앗아갔다고 슬퍼하였다고 한다. 그가 세종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는것은 죽은 후에 세종의 릉에 배양된 5명의 신하(령의정 황희, 령중후 최윤덕, 좌의정 허조, 좌의정 신개, 리조판서 리수)가운데 한사람이였다는 사실로써도 잘 알수 있다.

오래동안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임금과 신하들에게 큰 미움을 사지 않고 비교적 무난하게 자기의 정치적목적을 달성한 황희는 유명한 일화들도 많이 남겼다.

황희의 성격은 상당히 느슨하고 온건한것이 특징이였는데 그가 이렇게 된 리유를 전해주는 이런 일화가 있다.

황희가 고려말기 적성훈도로 있을 때 송경으로 가던 길에 한 늙은 로인을 만나게 되였다.

그 로인은 누런 소와 검은 소 두마리로 밭을 갈다가 방금 연장을 벗겨놓고 정자나무그늘아래서 쉬고있었다. 황희 역시 그의 곁에서 말을 쉬우면서 로인과 더불어 서로 이야기를 하게 되였다.

《소 두마리가 모두 비대하고 건장한데 밭가는 힘도 역시 우렬이 없는가요?》 이렇게 묻는 황희의 말을 듣자 로인은 얼른 곁에 다가와 《어느 빛갈 가진 소가 낫고 어느 빛갈 가진 소는 못하오.》라고 소곤거렸다.

황희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로인께서는 왜 소를 그렇게 꺼리여 귀속말을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로인은 몹시 실망하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도 모르오. 그대는 나이 젊고 들은것이 없는 까닭이요. 짐승이 비록 사람의 말은 모른다 해도 좋다 나쁘다는 말은 알아듣는다오. 만일 제가 남만 못하다는것을 듣게 되면 마음의 불평이 어찌 사람과 다르리요.》

황희는 로인의 이 말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는데 한생 겸허하고 관후한 도량은 실로 이 말로부터 이루어진것이라고 한다.

황희의 이러한 넓은 도량을 보여주는 이런 이야기들도 있다.

그는 령의정이 된이래 말과 얼굴에 기쁨과 노여움을 나타낸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비복들에 대해서도 은혜와 의리로써 대우하며 매질을 해본적이 없었다. 자기가 귀여워하는 몸종이 젊은 남종과 보기 민망할 정도로 노는것을 보고도 웃을뿐이였다고 한다. 그는 늘 평소에 《노복들도 같은 사람이다. 어찌 혹사하겠느냐.》라고 말하고 이런 뜻을 글로 써서 자손들에게 남기기까지 하였다.

한번은 그가 후원을 거닐 때 이웃의 장난군애들이 후원안의 배나무에 돌을 던졌다. 무르익은 배가 땅에 가득 떨어졌다. 황희가 큰소리로 시종을 부르자 아이들은 겁이 나서 달아나 의슥한 곳에 숨어 엿보았다. 황희는 종에게 광주리를 가져오라고 하여 배를 주어담아 그 애들의 집에 가져다주었을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선비가 장원급제하고 정언이 된 인사차로 왔을 때 시녀가 음식을 차린 소반을 들고 들어와 황희에게 기대고서 술을 치라는가고 물었다. 황희가 기다리라고 하자 시녀는 왜 그렇게 늦추는가고 볼멘소리로 두덜거렸다.

황희는 빙그레 웃으며 상을 차리게 하였다. 그러자 어린아이 두어명이 달려들었다. 모두 헌옷에 맨발로 매달려 어떤 애는 수염을 잡아끌고 어떤 애는 옷을 짓밟으며 상에 놓인 음식을 모두 움켜먹었다. 아이들은 공을 이리저리 때리는것이였다. 황희는 《아야! 아야!》 하고 웃을뿐이였다. 그 애들은 모두 노비의 아이들이였다.

봉건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너그러운》 정치가 황희였지만 자식들에게는 매우 엄격하였다.

황희의 아들 황수신이 젊었을 때 한 기생에게 깊이 정들어있었던적이 있다. 황희가 아들을 준렬히 꾸짖었지만 그는 애정을 일조에 끊어버리기 아쉬워 여전히 기생집을 찾아다니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황수신이 여느 날과 같이 집에 돌아왔을 때 황희가 의관을 차리고 아들을 맞아들이는것이 마치 귀한 손님을 영접하는것 같았다.

웬일인지 모르는 수신은 너무도 놀랍고 송구하여 땅에 엎디여 연유를 물었다.

황희는 《내가 아들로서 너를 대하였더니 너는 듣지 않는구나. 이는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것이니 지금 나는 손님에 대한 례로써 너를 대할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였다.

황수신은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고 그후 기생을 더는 찾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말이 습관대로 취한 수신을 싣고 기생집으로 향한적이 있었는데 그는 단호히 검을 빼여 말머리를 베여죽였다고 한다.

황희의 정치적재능을 보여주는 일화로서 파랑새이야기가 전해온다.

동북면에 6진을 개척할 때 비밀이 자주 새여나가 극비에 속하는 지시가 현지에 내려가기 전에 벌써 그곳에서는 다 알고있는 판이였다고 한다. 세종은 그 원인을 해명할 과제를 황희에게 주었다.

정치적감각이 예민한 황희는 그 원인을 대체로 짐작하고있었다. 어느 날 황희는 뒤간에 갔다와 근심스러운 낯빛으로 안해를 마주하였다. 그의 처는 어째서 그러는가고 물었다. 황희는 어데 가서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고 방금 변소를 보는데 파랑새 한마리가 나와 날아갔다고 하였다.

황희의 처는 혼자 있으면 너무도 기이한 일이라 때로 허구픈 웃음을 짓군 하였다. 그의 시녀가 묻자 황희의 처는 어데 가서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며 남편이 한 이야기를 하였다.

시녀는 또 그대로 어데 가서 이야기하지 말라면서 자기 남편에게 말하였다. 남편은 또 그대로 주막집에서 자기 친구에게 그렇게 이야기하였다. 이렇게 황희의 뒤로 파랑새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여기저기에 퍼져 대궐안에까지 들어갔다.

세종은 황희를 불러 그 연고를 물었다. 그 자리에서 황희는 그것은 자기가 꾸며낸것으로서 나라의 비밀이 바로 이렇게 새여나가고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궁중에서 비밀단속을 못하고 루설시키는 장본인인 세종에 대한 은근한 비판이였다.

이야기의 뜻을 알아차린 세종은 그후 비밀보장에 류의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황희의 정치적수완을 보여주는 이야기들가운데 한토막이다.

황희는 선견지명있는 정치가로서 장래 봉건정부의 중견력량을 꾸리는데도 깊은 주의를 돌렸다. 그는 당시 6진개척으로 명성을 떨치고 문무를 겸비한 대신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던 김종서가 과오를 범하면 되게 꾸짖거나 매질까지 하였다. 하루는 맹사성이 명성이 자자한 종서에게 너무하지 않는가고 물은적이 있었다. 황희는 종서가 성격이 강의하고 기질이 날카로우며 일을 함에 있어서 과단성이 있으니 후날 우리들의 지위(재상)에 있을것이라 스스로 신중하지 않으면 꼭 일을 그르칠수 있으므로 그 성격과 기질을 다스려주고 일을 경솔하게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은퇴하면서 김종서를 추천하여 자기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세종시대 《태평성세》를 이룩해놓는데 기여한 황희, 그는 퇴임하여서도 허조와 함께 임금이 수시로 불러 정국을 의논하였으므로 항상 옷을 벗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총명과 넓은 도량으로 수십년간의 정치생애를 빛나게 장식한 황희, 그의 성격에는 일부 보신주의적인 면모도 엿보이지만 리왕조의 건국초기 그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를 완비하고 발전의 기초를 축성하는데서 세운 공로는 그가 남긴 의미있는 일화들과 더불어 오래도록 전해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