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이 적은 자여 왜 의심 하였느냐

2020년8월2일/주일복음말씀묵상/ † 이 믿음이 약한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마태14,22-36)

<바다에 빠지는 베드로(마르6,45-52; 요한6,15-21)>

오늘 본문은 두 번째 주요 단락의 세 번째 소단락이다. 이것은 주님의 부활과 그분의 승천과(산을 올라가시다) 그분의 중보기도와(기도 하러) 제자들이 이 땅에 남겨짐과 대환난과(밤 사경에, 곧 가장 어두운 때에) 그리고 주님의 다시 오심(제자들에게 오시니)을 포함하고 있다.

마태22-23절은 “22 예수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에 태우셔서, 그분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동안 무리를 돌려보내셨다. 23 무리들을 돌려보내신 후에, 그분은 기도하시러 따로 홀로 산에 올라가셨고, 밤이 되어도 거기 혼자 계셨다.”(본문 참조)라고 말한다.

주님은 아버지께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시려고(마태14,23)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떠나게 하셨다. 성육신하셔서 사람의 위치에 서 계시는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실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천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아버지와 하나 되시고, 땅에서 무엇을 하시든지 아버지와 함께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분은 외딴 곳에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혼자 아버지를 접촉하시기 위해 모든 사람,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에게도 떠나시어 산에서 기도하셨다. 이 부분을 깊이 묵상해보면, 그 배는 바로 교회이다.

그 배가 바다에 있는 것은 교회가 세상에 있는 것을 상징한다. 주님께서 기도하러 산을 올라가신 것은 그분이 부활하시고 믿는 이들을 위하여 중보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임재 앞에서 승천하신 것을 상징한다.

24-25절은 “24 한편 배는 이미 바다 한가운데 있어 거슬러 부는 바람 때문에 파도로 인하여 요동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시니”(원문 참고)라고 말한다.

바람이 거슬리는 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당하는 핍박을 상징한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오르게 하신 것은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고난을 당함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셨음을 의미한다.

이 일은 밤중에 일어났으며 그 의미는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 이 세상이 어두워졌는데, 이는 주님께서 참 빛이셨기 때문이다(요한1,9; 9,5). 세상은 그분께서 새벽별과 의의 해로써 나타나시는 두 번째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묵시22,16; 말라4,2). 그러므로 주님의 눈에 교회는 등대이며(묵시1,20), 믿는 이들은 세상의 빛이다(마태5,14).

사경은 가장 어두운 기간 곧 대환난을 상징한다. 가장 어두운 때가 지나면 새벽이 올 것이다.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이사21,12). 이 구절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곧 대환난 기간 동안에 주님은 제자들이 있는 곳에 오실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 바다 위를 걸으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주의 창조주이시요 통치자이심을 증명한다(욥기9,8).

26-27절은 “26 제자들이 그분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 ‘유령이다’ 하고 무서워 소리 질렀다. 27 예수님께서 즉시 그들에게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시자”(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이 일 이전에 사람들은 그분이 비밀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을 멸시했고, 따라서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마태13,54-57). 그러나 주님이 너무나 비밀스러운 분이 되셨을 때, 사람들은 그분을 두려워했다. “즉시”라는 말은 주님의 사랑의 표현을 나타낸다. 주님은 즉시 제자들을 안심시키셨다.

28-31절은 “28 베드로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시거든 물 위로 주께 오라고 내게 명하소서.’ 하니 29 그분께서 ‘오라’, 하시매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갔으나, 30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여 물에 빠져 들어가자 소리 지르며,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미시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 믿음이 약한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원문 참조)라고 하시니라.

이 단락은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걷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 점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제자됨이 무슨 의미인가? 라는 문제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전권에 완전히 참여한다(29절). 그들에게는 의심으로 말미암은 시련이 또한 끊임없이 존재한다(31). 의심이란 주님에 대한 신뢰와 또한 위험을 불안한 눈초리로 응시하는 심리 사이의 갈라진 틈새이다.

마태오복음에 의하면, 제자들과 그들의 사역을 항상 위협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 약한 것(또는 작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랬듯이 제자들은 그러한 위험에서 구출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33절의 고백을 하게 된다(시편18,17; 69,2-3; 144,7). 우리는 이 단락에서 몇 가지 원칙을 볼 수 있다.

첫째,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요청을 필요로 한다. 곧 "주여, 만일 주시거든 물 위로 주께 오라고 내게 명하소서.”(28절). 믿는 이들은 주님께 명령하여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둘째, 믿는 이들은 베드로의 단순함과 적극성을 본받아야 한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스스로 주님께 나아왔다.

셋째, “내게 명하소서(28절).” 이 말은 베드로가 순종했음을 가리킨다.

넷째, 비록 배 안에서 베드로는 파도의 요동 때문에 고통을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더 전진해서 나아가기 위하여 움직였다.

다섯째, “오라(29).” 이것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주님의 약속이 없이는 우리가 취한 어떤 행동도 무모한 모험이 될 뿐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베드로가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꾸짖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약속과 격려로써 “오라”고 말씀하셨다.

여섯째, 사람들은 배 안에 있으면 안전하며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바다 위를 걸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 이들의 생활이 전적으로 믿음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믿음은 개인적인 것이다.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은 것은 그의 개인적인 믿음이었으며 주님은 그것을 칭찬하셨다.

일곱째, 위험을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믿는 이들은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위험에 대항해야만 한다. 이러한 위험은 체험과 인정을 산출하는 믿음의 위험이다.

여덟째, 베드로는 바다 위를 실제로 걸었으므로, 곧 그가 즉시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건너는 일에 성공할 수도 있었음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더 이상 바람을 바라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주님의 말씀을 가졌으므로 그는 더욱더 바람을 쳐다보지 말아야 했다. 일단 그가 바람을 쳐다보았을 때, 그는 즉시 주님의 말씀을 잊어버렸다. 주님의 말씀이 없다면, 그는 아무리 바다가 잠잠하고 파도가 없다 하더라도 그 위를 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베드로가 바다를 걷는 것이 바람이나 파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으므로 그는 그것을 바라보아서는 안 되었다. 바다 위를 걸을 때, 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바람과 파도를 보지 않을 것이다.

아홉째, 주님은 사람이 배(교회 안의 형제자매들)에서 내려와서 바다 위를 걸음으로써 믿음의 진보를 갖기를 기대하신다.

열 번째, 사람이 바람과 파도에 직면했을 때, 그는 주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며, 이것만이 적극적인 저항을 하기 위한 유일한 무기이다.

열한 번째, 때로는 믿는 이들은 충분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므로 그분은 그분의 은혜로 여전히 그들을 붙들고 계실 것이다.

열두 번째, 베드로가 빠져 들어가기 전에 주님은 즉시 그분의 손을 펴서 베드로를 붙잡으셨다.

열세 번째, “오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31절)” 의심은 믿음이 적은 데서 온다. 먼저 믿음이 적어지고 그 후에 의심이 생긴다.

32-33절은 “32 함께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쳤다. 33 배에 있던 자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며 ‘진실로 주는 하느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하였다. 주님의 임재는 모든 폭풍을 멈추었다. “함께”라는 말은 주님과 베드로를 가리킨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너무나 만족스럽고 기쁜 체험이었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만 주님께 경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기적은 주님께서 하늘들과 땅의 통치자이실 뿐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분을 따르는 길에서 역경을 당할 때에 그들을 돌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배 안에 주님이 계실 때, 폭풍은 그친다. 이 장에 기록된 두 기적은 그리스도께서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사람들에게서 배척받으셨을 때, 그분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외딴 곳과 폭풍이 이는 바다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분은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실 수 있으셨고, 역경을 헤쳐 나가게 하실 수 있으셨다. 주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식하는 것은 그분께서 하느님과 동등하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요한5,18). 이것은 제자들이 주님의 신성을 인정했다는 것을 가리킨다(마태1,23; 3,17).

<겐네사렛에서 병자치유(마르6,53-56)>

34-36절은 “34 그들이 건너가서 겐네사렛(게네사렛) 땅에 들어가매, 35 그곳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 주변 온 지역에 사람을 보내어 병든 모든 자들을 그분께로 데리고 와서, 36 그들이 다만 그분의 옷 술에라도 손을 대게 하실 것을 그분께 간청하더니, 손을 댄 자들은 다 완전히 온전하게 되니라.”(원문 참조)고 말한다.

34-36절은 이것은 두 번째 주요 단락의 네 번째 소단락이다. 그것은 천년 왕국의 때에 주님께서 유대 땅에 돌아오시는 것에 관한 예표이다. 겐네사렛이라는 말은 왕의 보호구역, 곧 왕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미 천년왕국 안에 계신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요한묵시록(계시록)은 과거시제로 되어 있다. 곧 하느님의 눈에는 이 책에 예언된 모든 일들이 이미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 주변 온 지역에 사람을 보내어 병든 모든 자들을 그분께로 데리고 와서,” 주님께서는 주 그리스도이시므로 그분은 그분의 사랑과 동정과 거룩함과 의로움을 숨길 수 없으시다. 마찬가지로 믿은 이들 또한 그리스도인들로서 인식되어질 수 있는가? 모든 병든 사람들은 단지 주님을 접촉하기만 해도 고침을 받았다.

이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우리의 모든 기도가 이처럼 응답받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도 바오로의 기도도 모두가 응답받지는 못했다. 바오로는 티모데(디모데)의 위장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1티모5,23). 완전한 치료함은 천년왕국에서의 일이다. “손을 댄 자들은 다 완전히 온전하게 되니라.” 그분은 손을 만질 필요도 없다.

그리스도의 겉옷은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를 상징한다(민수15,38-39). 하늘에 속한 다스림을 받는 그리스도의 행위에서 나온 미덕이 병을 고치는 능력이 된다(마태14,36). 그러므로 그분의 옷 술을 접촉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할 때도 또한 주님을 접촉해야 한다. 우리의 영으로 우리의 영안에 계시는 성령을 접촉하는 것이 예배이다(요한4,24).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 주위에 몰려 있지만, 그러나 그분을 접촉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접촉할 수 있는가? 우리가 주님께 나아올 때 우리는 목적 없이 와서는 안 된다. 많은 때 우리의 믿음과 동기와 말들이 우리가 그분의 주변에 몰려 있을 뿐, 그분을 접촉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요한4,24절은 “하느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 안에서 진실함으로 예배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서의 중점은 영이며, 진실과 실재를 동반한다. 무엇이 진실인가? 진실은 사람의 영이 하느님을 접(접촉)하는 것이며, 사람의 영이 하느님을 접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가 진실이 아니다. 여기서 예배는 경배 또는 접촉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실재(reality)란 무엇인가? 그림자, 모조품의 반대말이 실재이다. 그러므로 진실과 실재는 동일한 뜻이다. 하느님과 관계되는 모든 것은 영 안에 있다. 진리의 영은 실재의 영이다. 그러므로 영적 실재는 성령 안에 있게 마련이다. 오직 성령 안에 있는 것만이 참이며, 이는 모든 영적인 것이 성령 안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알렐루야! 아멘!

*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