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좋지 못했던 선택의 결과들을 극복하려면 {신명기 30:15~20} 뉴욕의 한 법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인간의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우리의 과거 생활들을 뒤돌아볼 때, 우리가 언제나 나쁜 것들만 선택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좋은 것들도 많이 선택을
했습니다. 얼마 전 TV의 한 프로에서 이번 국회의원 17대 당선자들 가운데 서울대 출신들로만 모여진 모임이 있는 자리를 다루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좋은 선택을 한 여세를 몰아서 계속적으로 더 좋은 선택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좋은 성품에 대한 선택의 순간들을 많이 맞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는 좋은
선택할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의 좋지 못한 선택들로 인하여 아주 심각한 마음의 고통들을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선택이라는 단어의 핵심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에게는 좋지 못한 선택을 하고 난 결과는 ‘후회’라고 하는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첫째, 그러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올바른 선택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①
믿어지든지 안 믿어지든지 성경에 위배됨이 없는 것들을 선택해야 합니다. ② 하나님의 뜻에 위배됨이 없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성경본문 신명기 30:15~20)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이 들어 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사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은 주변의 몇 사람, 내가 보기에 ... 그런 식으로 결정해서 선택하면 후회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③ 상식에 위배됨이 없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가 과거에 잘못 선택한 일들에 대한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한 것들에 대한 변명의 여지는 없는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했겠습니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인들이 있습니다. ① 무지 ‘몰랐다.’는 것,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알고 잘못 선택했든, 모르고 잘못 선택했던 선택은 선택입니다. 며칠 전에 유로 2004년 프로 축구가 열렸습니다. 우리가 지난 월드컵 때 히딩크를 감독으로 선임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 너무너무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선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복을 주시겠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9-12) 이와 같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고, 좋지 못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② 게으름 우리가 과거 좋지 못한 선택을 한 것에 대한 이유로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게으름을 선택한 사람들은 훗날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다음의 말씀들을 살펴볼 때 그렇습니다. 우리가 좋은 선택들을 몰라서 못하는 수도 있고, 게을러서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③ 실수 그런가 하면 우리는 알면서도 실수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수도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 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삿 16:21) 성경에 보면 두 눈을 뽑힌 사람이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삼손이고, 또 한 사람은 왕으로 시드기야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더라”(왕하 25:7) 교만한 선택을 실수로 했든 실수로 하지 않았든 그 결과를 하나님께서는 오바댜를 통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를 열국 중에 미약하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 바위 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옵 1:2-4) 우리는 미국이 지금 무리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에만 너무 관심이 치우쳐 있습니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서 후세인이 교만하지만 않았으면 저 전쟁은 안나도 되었던 것입니다. 셋째, 선택은 어떠한 방식으로 해야 하겠습니까? 간디는 학생 시절에 성경을 진지하게 읽고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고려했었다고 그의 자서전에 쓰여져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인도 사람들을 구별했던 카스트라는 계급제도에 대한 해결책이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주일, 가까운 교회에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께 기독교인이 되는 것에 대해 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배당으로 들어서자 안내원은 그에게 그가 앉기 원하는 자리 내주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때
간디는 만일 기독교인들에게도 계급의 상하가 있다면 자신은 그냥 힌두교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길로 그 다음부터는 교회에 안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는 마음에 드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든다.’라고 말하면서 교회 다니는 것을 중단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간디는 예수 믿는 사람들 몇몇 사람들이 평등의 법을 안 지켰을 뿐인 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간디는 마치 그것을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보편적으로 행하는 것이고, 그것이 교회의 제도인양 잘못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잘못된 정보에 의해서 자신이 예수님을 안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좀더 진지하게 살펴보고 선택해도 늦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음은 마르다가 예수님께,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셨던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매 순간 ‘내가 지금 옳은 선택을 하고 있는가, 옳지 않은 선택을 하고 있는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나무꾼들이 산 속으로 들어가 한 짐씩 나무를 해서 지게에 지고 돌아오는 길에 함정에 빠진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한 사람만 살았고 나머지는 다 죽은 것 같았습니다. 착한 나무꾼이 동료들에게 "보고만 있지 말고 구하자."고 했으나 동료들은 "우리도 힘들고 바쁜데 ..."라고 말하며 현장에서 떠났습니다. 착한 나무꾼은 목숨을 걸고 살아있는 한 사람을 구했는데 알고 보니 그 나라의 왕자였습니다. 왕자가 신하들과 사냥을 나왔다가 왕자를 죽이려는 함정에 빠졌던
것입니다. 왕이 이 '착한 나무꾼'에게 '큰 상'을 내려 잘 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은 사람이 기회 있을 때 행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누군가가 아인슈타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합니다. 뮤지컬 남태평양의 원작자 제임스 미치너라는 사람은 1,925회라는 공연 기록에 의해 백악관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습니다. 현재는 과거의 성적표와 같습니다. 다윗이 하루는 인구 조사를 실천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조사가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그 조사를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모세처럼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군대가 얼마나 강성한가를 알아보고 싶은 교만함에 의해서 한 것입니다. 결과로 그 조사를 행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선견자 갓을 보내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 후, 다윗은 다음과 같이 여호와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고난 때 선택한 일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고난 때 우리가 선택한 일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고난 때 어떤 선택을 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설교하는 교회에 전도사 한 분이 방문했습니다. ‘지옥은 하나님께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방종에 의한 선택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아담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선택한 책임을 당사자에게 물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 능력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넷째, 그러면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게 될 때, 그 수치의 절정을 어떻게 하면 잘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선택들로 인한 결과들을 오늘 맞이하면서 고통스러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하면 잘 극복할 수 있겠느냐? 잘 견딜 수 있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과거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오늘 맞이하면서 이 극심한 고난의 터널을 잘 참고 견디고 통과할 수 있겠습니까? 그 해결책은, ①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여호수아와 사도 요한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내가 당면한 수치스러움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과거에 내가 어떤 잘못된 선택을 했기에 오늘 이 지점에 도착하게 되었는가?’를 면밀하게 검토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 성령님의 강력한 위로를 얻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짖는 자들에게 수치를 당치 않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수치에서 건져내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옛날처럼 물고기를 잡으러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그를 다시 찾아가서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수치스러울 때 하나님에게 나아가도 어느 정도 일정기간 동안 수치감이 드는 것은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손을 다쳤습니다. 그러면 일정기간 동안 아픔의 고통을 겪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면 수치의 고통이 일정기간 동안은 감수를 해야 하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수치에서 우리를 건지셔서 명예로운 회복을 시켜주십니다. ③ 너무 민감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내일보다 하루 빠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울 때 ‘다른 사람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다 욕하고 비난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 시간에 새 출발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들은 60억 인구 중에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략 200명밖에 안됩니다. 결혼식을 해보십시오. 한 사람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초청해도 그 관계성이 200명 내외입니다. ④ 완전히 낮아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데리고 다니다가 조카 롯 보는 앞에서 아내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체면이 완전히 구겨진 것 아닙니까? 그리고 나니까 조카 롯과 그 종들이 아브라함을 얼마나 만만하게 봤는지, 아브라함의 재산에서 다 롯에게 준 것인데,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이 다투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반응을 하였습니다. 완전히 자기 자신을 낮추고 더 이상 아무 기대도 안 했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문제해결을 받은 이유 ⑤ 재건의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눈은 멀고 손은 가깝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대구지방경찰청 기동대 1중대에서는 아주 특별한 지 기독교인터넷 방송설교 http://www.cts.tv/ http://www.cbs.co.kr/ 위 홈페이지에 접속하시면 언제든지 금 우리의 문제는 기도는 많이 드린다고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간절성과 정성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소경 바디매오 같은 사람은 기도를 드린 시간은 짧았지만 그 간절성이 오랫동안 기도를 드린 사람보다 더 강했던 것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 입장에서는 소경 바디매오의 기도응답 해주는 것을 외면 할 수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CTS 기독교 TV 방송설교 교회 홈페이지 교회 소식과 설교내용을 접할수 있습니다. 주일 묵상 칼럼 첫째, 저질의 사람들이 제안하는 사안이나 공격 등에 대하여 일단 즉시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침착하게, 충분히 생각한 후에, 기도로 성령님께 지혜를 충분하게 구한 후에 대처하는 것입니다(약 1:5). 둘째, 저질의 사람들에게는 주로 강력한 스토커(stalker) 기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입니다(느 2장, 4장). 전역 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은 현재 주로 그 결과만을 놓고 한 숨만 쉬다가 시간을 다 보내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복만 두신 것이 아니고, 저주도 두셨고, 생명만 두신 것이 아니고, 사망에 해당되는 것도 두셨다는 가르침입니다. 낙심, 좌절, 의욕상실감 등을 극복하려면 {마가복음 5:21~43} 1968년 8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헬렌 켈러 여사가 남기고 간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응답을 하시기 직전에 마귀가 정말로 사람이 실망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낙심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그 마음이 언제 낙심과, 좌절과, 의욕상실감 등을 일으키게 되겠습니까? ① 예수님을 믿다가 낙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다가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깨닫고 그 마음에 자유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으나 자신보다 물질이 풍요로운 사람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행악자들에 대해서까지도, 시편 기자를 통해서 그들 때문에 어떤 일을 하고 안 하고 등의 영향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 37:1-2)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다른 사람들,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일들, 그리고 요청하지 않은 충고, 자신이 맡은 일들도 다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일에 관여하는 것도 금물임을 다음의 말씀들을 통해 좋지 않게 여기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② 기도응답 기다리다가 응답이 빨리 안 오므로 낙심하는 것입니다. 다니엘 같은 분은 21일 동안 절식을 하면서 기도를 드리다가 비로소 21일만에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만일 다니엘이 20일 동안만 기도를 드리고 그만 포기를 하였다면 기도 응답을 못 받았을 것입니다. 다음의 내용을 읽어보면 그 때의 상황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 드린 첫 날부터 그 내용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천사에게 그 응답을 출발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사국 군, 마귀가 그 기도응답을 가지고 전달하러 가는 천사의 길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미가엘의 도움을 받으므로 말미암아 마침내 다니엘에게 응답을 전달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응답이 빨리 안 오면 하나님에 대해서 굉장히 섭섭하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많이 낙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에 장애를 받는 것은 마귀의 역사가 큰 효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드리다가 응답이 빨리 못 받으므로 낙심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간절하게 드리면 결국은 원하는 응답을 받게 될 것인데, 응답이 결국은 도착하고 말 것인데 대부분의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만 중간에 포기를 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 응답이 원하는 때, 제 때 안 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때는 기도를 더 간절하게, 더 세게 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 나아갔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다음과 같이 반응하여 마침내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고보와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③ 선을 행하다가 결과가 좋지 않아 보일 때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시몬의 바리새인 집에 초청을 받아서 가셨습니다(눅 7:36-50). 그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이 좋아서 초청을 한 것이 아니라, 당시는 동네에서 유지 정도 되는 사람은 1년에 한 번
정도 그 지역 사람들을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하는 관례 때문에 자신의 체면 유지를 위해 초청을 하였습니다. ④ 기대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낙심하는 것입니다. 들어도 들어도 은혜가 되는 예화 중 하나는 루터와 그 아내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네, 초상이 나서요!”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여러 형태로 낙심들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회당장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일로 낙심하게 되었겠습니까?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막 5:21] 마가복음 5장 1절부터 20절까지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거라사인 땅에 가셔서 무덤 사이에 거처하며 지내던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다시 건너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계셨습니다.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막 5:22] 최근에 후세인이 법정에 섰습니다. 그리고 후세인은 펜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행위를 했는데 그것은 “내가 아직도 이라크의 권력자다.”라는 주장을 하고 싶은 심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뚫어지게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은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려는 고도의 훈련된 바디랭귀지라는 것입니다. 지금 회당장 야이로 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 발 앞에 완전히 엎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기 절망을 체험한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절망 안 한 사람은 이렇게 못 엎드립니다. 야고보의 권면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1:1 대면기도를 믿음의 기도라고 합니다.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막 5:23] 많이 무엇이라고 간구 했겠습니까? 마귀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도 쓰다가 마지막으로 안 될 경우, 좌절이란 도구를 사용합니다. 1980년 2월 어느 날 월스트리트 저널에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렸습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면이 가장 장점이시겠습니까? 시편 기자의 고백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피 할 수 있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막 5:24] 만일
우리가 현재 좌절감을 심하게 겪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문제를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하다가 보면 꼭 돌발적인 장애가 발생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25-34] 지금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을 간신히 설득해서 당시 교통 수단도 좋지 않은데, 모시고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그 중간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 여인이 만일 40세부터 아팠다고 하면 지금 그녀는 52세입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 무리, 군중들, 그 힘이 센 남정네들을 밀어 가면서 간신히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을 잡았는데, 그냥 옷을 잡은 것과의 차이는, 믿음으로 잡았다는 것입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막 5:35]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이 안 끝났습니다. 그런데 회당장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소식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하겠습니까? 보아 전쟁(1899-1902) 중에 한 사람이 아주 특이한 죄명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절대로 우리가 생각과 입을 가지고 다른 사람 낙담과 좌절시키는데 사용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일에 쓰임에게 받아야 합니다. “딸이 죽었습니다.”라는 말은, “사업이 부도났습니다.” “관계가 끝났습니다.”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다음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막 5:36] 이제 회당장 야이로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려서부터 간질 걸리고 벙어리 되고 귀머거리 된 아들을 둔 아버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문제를 계속해서 하나님께 맡기고 믿을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문제를 맡기면, 위임하면 정확하게 처리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막 5:37] 제자들이 왜 안 따라가면 안 되었느냐 하면, 그 때 안 따라갔으면 기록이 안 남기 때문입니다.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막 5:38] 인간은 언제 기대를 포기를 하느냐 하면, 가나안 혼인 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입니다. 빈들에서 오병 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때, 바다에서 바다 위를 걷던 베드로, 이것은 전부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농부가 금을 캐겠다는 야망을 품고 모든 농토를 팔아 금광을 매입했습니다.
농부는 그 금광에 매달려 모든 물질과 노동과 시간과 지혜를 쏟아 부었지만 금맥을 찾지 못했습니다.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막 5:39-40]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측하는 방향으로는 가능하면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주로 우리가 예측 못한 쪽으로 응답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중국에는 '모소'라는 대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기도 응답이라는 것이 거의 흡사합니다.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37-44)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 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막 5:41-42] 잠시 전에 열두 해 동안 고통을 당하던 여성을 기억하십니까?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권면입니다. 그러나 열두 해 동안 고통 받던 여인은 어제까지의 고난이 오늘 행복으로 전환되었단 말입니다. 유태인의
지혜를 말해주는 <미드라쉬>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보석 세공인을 불러 명령을 내렸답니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막 5:43] 예수님께서 그 일을 왜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시기를 원하셨느냐 하면, 죽은 사람을 살렸다고 괜히 잘못 소문이 나면 죽은 사람들 살려달라고 다 쫓아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이름을 호명하신 이유는 그냥 ‘나오라’고 하면 그 주변에 죽은 사람들이 ‘다 나올까봐’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낙심과 좌절과 의욕상실감을 극복하려면, ① 감사하는 생각을 늘 유지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파선을 당하여 무인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가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자꾸만 감사하는 생각을 안 하고 원망하면 안 됩니다. ② 삶의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③ 사랑하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을 머릿속으로 자꾸 떠올려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지, 미운 대상을 자꾸 떠올리면 아드레날린 과다 방출로 빨리 죽습니다. ④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붙들고 믿어야 합니다. 오늘 회당장 야이로가 어떻게 문제 해결을 받게 되었습니까? 첫째, 예수님께 정면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둘째, 간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셋째, 장애물을 긍정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넷째, 믿음을 포기하고 싶을 때 인내했습니다. 실추되어진 명예하락을 극복하려면 {잠언 22:1} 이번 달 들어서 죽게 된 유명한 미국 배우 한 사람이 생전 인터뷰 중에 말한 내용입니다. 그는 자신이 축적한 부로 아들 하나는 마약 중독자가 되었고, 딸은 자살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명예가 하락되어지는 이유는 많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① 어려움이 다가올 것을 미리 예상치 못하고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그럽니다. ②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잠언 16장 1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래가 언제 작살을 맞느냐 하면, 물로 올라와서 등으로 물을 내뿜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바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좀 안 되겠다’라고 판단하셔서, 우리를 놓아 버리시면, 그것은 마치 모세가 지팡이를 던졌을 때 그 능력의 지팡이가 뱀이 되어버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놓으시면 그 때는 우리는 낮아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③ 변화를 싫어할 때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지금까지 소유했던 것을 놓아 버리면 더 낮아지고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말하겠느냐? 망했다고 하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을 가지고 불가피한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명예하락이 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습니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몰라서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변화를 미루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해서, 변화를 두려워해서 게으르다가 보면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④ 하나님께 여쭈어보지 않고 무슨 일을 함부로 결정하고 처리하고 했기 때문입니다..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려면, 첫째,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부지런해지기는 해져야 하는데, 균형 있게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육으로만의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정신, 혼’이라는 것이 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육만 위해 시간을 사용해서는 명예로워지지 못하고, 혼도 함께 발전을 시키는 노력을 겸비할 때 비로소 명예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치우친 것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영만을 너무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 열심히 일하는 분들은 보면 혼만을 너무 발전시키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장하실 때, 몸과 지혜가 균형 있게 발전하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균형 있는 발전이 이루어질 때 지금보다 더 명예로운 결과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 2:40) 영적인 것은 ‘죄를 짓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하를 다 얻었어도 육이 병들어 주사 맞고 누워 7년씩 살아가면 어떻게 그것이 명예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전도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사자는 썩어 가는 중이고, 산 개는 활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살은 단번에 하는 자살이 있고, 만성적 자살이 있습니다. 그리고 심리적 자살도 있습니다. 계속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히고, 그러면 사람은 서서히 죽어갑니다. 예를 들어 40년 살 사람도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계속 괴롭히면 20년 정도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이 먹지 말아야 할 것, 몸 안으로 들여보내지 말아야 할 것들을 계속 몸 속으로 축적을 시키면 50년 살 몸도 20년만 살다가 가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마약 중독자들이 40세를 미처 못 넘기고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지금보다 더
명예로워지기 위해서는 균형 있게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성경에는 게으른 자들에게 나타나는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열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 게으른 자들은 필요는 느끼나 끝까지 하는 일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다고 합니다. ② 잠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사람이 잠은 생존의 필수 조건만큼의 양만 자면 됩니다. 그러니까 잠이라고 하는 것은 오면 자고, 안 오면 굳이 좇아가면서까지 잘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들은 잠을 좇아 다니면서 잡니다. 그리하여 충분히 자고도 안 오는 잠을 억지로 또 자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③ 가난해진다는 것입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 128:2) 사람은 실패해서 가난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을 안 해서 가난해지는 것은 동정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④ 관계성을 가진 자들을 피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 10:26) ⑤ 핑계와 합리화와 부정적 추측이 많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3, 16) ⑥ 자기 중심적인 반복된 일상생활에서 못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잠 26:14) 문짝이 돌쩍이를 따라 도는 것은, 반복된 일상적 행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⑦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 미루어 상황을 악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잠 15:19) 게으름이 자신의 불필요한 취미에 적용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은 꼭 생산적인 일들에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들은 개발 등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⑧ 의무 이행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증왕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 24:30-34) ⑨ 말이 많고 거짓말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잠 15:19) ⑩ 게으름은 악한 성품에 의한 선택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6) 그러면 게으른 것의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이
왜 지각하겠습니까? 저는 약학계와 의학계에 건의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게으르면 어떤 형태로든 표시가 난단 말입니다. 저는 또 무좀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좀약도 바르다가 아무리 발라도 끝장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발을 하루에 두 번씩 씻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은 무좀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루만 발을 청결하게 안 하면 무좀이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게으르면 어떤 형태로든지 그 후유증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죄를 안 짓겠습니까? 저는 제 체중이 처음에 몇Kg이 나가야 적당하게 보기 좋은 사람이 되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한 때 주는 대로 계속 먹었습니다. 어떤 날은 저녁을 세 번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날 체중을 달아보니까 86Kg으로 최고 체중이 나갔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계속 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들려지는 얘기들이 ‘목사님 얼굴이 고무풍선에 바람 빵빵하게 넣은 것 같다.’는 ‘둥, 뒤에서 보면 옷이 1mm도 여유가 없다.’는 둥 별의 별 소리가 다 들리는 것입니다. 제가 그 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지하는 것을 그냥 유지하느냐? 아닙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게을러 가지고는 하나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전도사 때 서울로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데 아침에 그 동네에서 새벽기도하고 올라오다가 보면 출근시간이라 두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서 그냥 올라 와서 서울에서 새벽기도 드리고 그리고 학교 앞에 가서 차 세워놓고 차에서 잠깐 자고, 그리고 다시 학교 들어가서 공부하고... 그렇게 시간을 줄여봤다는 말입니다. 저는
1시30분에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을 해도 하루 종일 일을 다 처리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기상시간을 12시까지 당겨보려고 하는데 체력에 한계가 있어서 못 당기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게을러서 되는 일은 없다 라는 것입니다. 악습이 어떻게 그냥 끊어집니까? 세상에 악습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권면하셨습니다. 잠언 기자의 권고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감정적인 교류로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석 안 해도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수가 나의 마음에 나타났을 때 부지런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게으르지 않고, 원수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다가 보면,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던져질 것이요’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있지만, 산을 한 삽씩 옮겨 없어지게 하는 방법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수를 용서하기 위해서도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기도해서 원수와 더불어 화목케 하는 방법도 있다는 말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의 특징이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고,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습니다. 게으르면 반드시 명예 하락을
동반하게 됩니다. 그 점은 각오하고 게으르자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실추된 명예하락을 극복하려면, 반드시 첫 번째 넘어야 할 산이 바로 게으름의 극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이웃의 명예를 해롭게 하는 일에 절대 쓰임 받지 않는 것입니다. 현재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계명 중에 3계명을 안 지키는 것입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이것은 아주 큰 잘못입니다. 그런데
9계명에 ‘이웃에 대한 명예를 하락시켜서도 안 된다.’는 계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에 대해 비난하면 언젠가 그 비난은 반드시 그 사람의 귀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반드시 나에 대해서 좋게 말 안 합니다. 비난합니다. 잠언 기자의 경고입니다. 그러니까 ‘아, 이 소식은 전달을 해 봐야 당사자의 명예 상승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이겠구나.’라는 판단이 들면, 그러면 그 일을 내 입으로는 전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날 신문들이 만일 기사를 긍정적인 내용으로만 쓰게 되면 신문사가 6개월 안에 망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갈 6:7). 물론 사람이 너무너무 분하고 억울하면, 처음에 몇 마디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셋째, 우리의 성품을 지금보다 좋게 계발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가장 심하게 겪는 어려움이 그것입니다. 너무 억울한 일들을 많이 당하니까 밖에서는 천사처럼 행동하다가도 집에 들어가서는 있는 대로 화를 내는 것입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교회에서 너무 자신을 괴롭히는 평신도가 한 명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날은 가만 안 있으려고 작정을 하고 넥타이를 힘껏 매면서 ‘오늘은 혼내주리라’고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잠언 기자의 권면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화를 내야 합니다. 분명히 상대가 잘못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나에게 공격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순간에 내가 인자함을 나타내면 그 인자함이라고 하는 펀치를 나에게 맞은 사람은 평생 빚을 진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기가 걸려 약국을 가면 약을 한 알만 딱 줍니까? 이 약도 주고, 저 약도 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다 섞어 먹어야 감기가 낫는 것처럼 우리가 지금보다 명예가 하락된 명예를 상승시키기 위해서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어느 한 가지만 노력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넷째, 절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말 백 마리를 우리에 가두고 물을 굶기기 시작했습니다. 강 아래 물이 보이는 개천이 있는데 우리를 만들어 가두어 두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말들이 더 이상 물을 못 먹어서 쓰러지기 직전에 울타리를 열었습니다. 그러자 말들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말을 정지시키는 종을 울렸습니다. 그랬더니 96마리는 무시하고 개울로 뛰어갔고, 4마리만 그 자리에 섰더라는 것입니다. 그 네 마리를 끌어다가 왕실의 종마로 삼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죄짓고 싶어합니다. 다섯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의 고백입니다. 모세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나의 고백입니다. 시편 기자의 가르침입니다. 잠언 기자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음의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같은 질문을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마크 트웨인이 한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가면서 이런 말을 한마디 남기고 죽었다고 합니다. 독일의 정치가 비스마르크가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여섯째,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간절하게 열심히 드리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가 권면하여 말했습니다. 일곱째,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명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결단에 대하여 {빌립보서 3:12~14} 토마스 카알라일이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그의 방대한 원고 작업을 끝냈을 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어찌 그렇게 큰 결단을 잘 내렸겠습니까. 그는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인생을 살다 갈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1. 첫째, 망각하는 것입니다. 다음의 고백을 들어 볼 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과거에 잘 한 것들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과거에 대해 애착적 여러 기억들을 가지고 있기가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거에 대하여 잊어버려야 되는 것들을 의지적으로라도 잊어야 하는데, 그러면 무엇을 잊어버려야 하겠습니까? ① 잘 했던 것들 물론 성공 경험을 무조건 기억에서 지워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작은 성취는 오히려 실패만도 못할 때가 많다는 겁니다. ② 이미 철저하게 회개하여 깨끗하게 용서받은 죄들 물론 사람은 죄책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죄에 대한 기억은 평생 갑니다.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한번 지은 죄를 잊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 기억은 평생 갑니다. 그러나 죄책은 잊어버리자는 것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 하나님께서 우리가 회개한 죄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셨다고 하면 우리도 기꺼이 잊어버려 드리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③ 과거 실패에 대한 기억 주식투자에 실패해 7억 원의 빚을 졌던 김동조(49․마이웨이스탁 대표)씨는‘실패학’이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는 실패하여 12년 동안 총 7억의 빚을 졌다고 합니다. ④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죄들 우리는 다음의 말씀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거 허물과 죄도 잊어버려야 되겠습니다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죄와 허물도 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은 보통 부부간이나 대인관계를 가지면서도 자꾸 상대방에 대해 어떤 요구가 있을 때 불평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가르치신 내용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다음과 같이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뭐, 권면할 것 없으세요?”라고 물으면 “왜 없겠어요. 있지요. 적으세요. 내가 21가지 정도 적어뒀어요.”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유, 말도 마세요. 문제점이 뭐 한 두 가지여야지 ...’라고 생각하거나 반응을 보이면 ...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 세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잖습니까. 어떤 남편이 아내의 부엌살림까지 일일이 다 지적을 했습니다. 아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감사한 남편 ... ’ 그랬겠습니까? 그 부인이 유서를 써 놓고 죽었습니다. ‘나보다 더 좋은 여자 만나서 잘 사세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⑤ 과거의 가슴 아팠던 기억들 우리는 다음의 구절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의 슬펐던 것들, 다른 사람의 허물들, 나의 실패에 대한 기억들, 내가 옛날에 잘 했던 것들, 이미 회개한 죄들, 그것들은 기억해서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가 왜 새로운 결단을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느냐 하면, 과거의 쓸데없는 기억들에 너무 강하게 붙잡혀 있어서 그렇습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2. 둘째,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결단을 방해하는 것은, 분명한 목표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됩니다. 목표 부재가 결단을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결단이 분명했던 바울은 다음과 같이 목표 의식이 분명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분명한 목표입니다. 위의 말씀의 의미는 바울 자신은 ‘이리 뛰었다 저리 뛰었다.’ 안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결단하는데는 타이밍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방향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프라 윈프리에 대해서 쓴 책을 보니까, 그녀는 어떠한 조건을 보더라도 정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에 대해 쓴 책의 어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니까 ... 그녀가 어떻게 하나님께 축복을
많이 받을 수 있었는가를 자세히 봤더니 ... 그녀는 늘 마음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마음의 어떤 소원을 보내시는가를 아주 예의주시하면서 살았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분명한 목표를 설정할 때, 무조건 그냥 무식한 방법으로 아무 때나 타이밍도 맞추지 않고 설정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소원을 잘 살펴서 성령께서 후원하시는가, 안 하시는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잘 보면서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목표를 설정할 때 중요한 점은, 내 마음의 소원을 근거로 목표를 정하면,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적응하지 못하여 실패할 확률이 큼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마음의 소원을 근거로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내가 가는 길을 올바르게 여기신다’라는 확신을 근거로 ‘나는 이 사명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겠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 그것을 근거로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의 은사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분명한 결단을 하기 위해서는 첫번째로 과거에 대해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두번째는 분명한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셋째, 상급을 바라는 것입니다. 보상 목록을 분명히 바라보는 사람이 결단도 잘 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특징이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의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상을 바라보고 결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자의 권면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은 자기 일에 열심을 내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행복이 없다고 전도자가 권면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언제 가장 행복할 수 있느냐? 칼
힐티 같은 분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사명은, ‘아 내가 남은 생애를 이 일 하다가 죽어야 되겠구나!’라고 깨닫고, 그것을 발견한 날부터인 것입니다. 사명은, 일반 사명과 특수 사명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과거에 대해서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리고 분명한 상급을 기대하게 될 때 비로소 네번째로 분명한 결단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4. 넷째, 결단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 말씀은, ‘결단했다.’는 말입니다. 비가 올 것 같은 날, 결단을 우리가 하고 살아가면 안 하고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합니다. 결단을 다른 표현으로 선택이라고 합니다. 실패를 경험해 본 사람들 2,500여명에게 “당신의 실패 원인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링컨은 노예 해방에 대해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 일이 ‘옳다’라고 믿었기 때문에 결단했고, 그 결단은 흑인들을 살렸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6천여 명의 목숨을 구한 스기하라 지우네(衫原千畝.1900-86.사진)가 탄생 1백주년 만에 '복권'이 됐습니다. 옳은 결단, 그것은 옳은 선택입니다. 계속해서 사람이 결단을 잘 못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결단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작심삼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결단한 결심을 지속시키게 하는 힘,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담배에 들어있는 600가지 첨가물이 포함되어 있는데, 독가스실에서 사용하는 시안화수소, 로켓연료인 메타놀, 세정제로 쓰이는 암모니아, 부탄, 좀약, 자동차의 배기가스에서 배출되는 물질 등 각종 독극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이주일씨가 죽기 전에 ‘담배는 가정도 망치고 개인도 망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새해 결심을 비웃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결심을 새해에만 잠시 하다 마는 경향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발 끈은 계속 풀어지면 다시 묶는 것이 좋습니다. 좋은 결심은 비록 못 이룰지라도 계속 다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뿌드는 20살 때, 다음과 같이
결단했습니다. 어제 맨 끈은 오늘 허술해지기 쉽고, 내일은 풀어지기 쉽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정탐꾼이 분명히 가나안 땅에 갔다와서, 왜 열 명은 가나안 땅에 대해서 공격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불평을 했겠습니까? 왜 이스라엘 정탐꾼 중 두 명만 언어가 달랐겠습니까? 그러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불평한 열 명은 어떻게 처리하셨겠습니까?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좀 더 참아주시지 않고 왜 그 열 명을 포기하셨겠습니까? 나오미에게
오르바가 정확하게 자기를 따라오려고 하는 결단적 선택이 없었기 때문에 안 데려 간 것입니다. 결단적 선택이 없는 사람을 데리고 가 봤자, 계속해서 문제만 지적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따라가는 것이
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결단 잘 하는 사람이 결단 안 하는 사람보다 훨씬 성공도 많이 하고 하나님께 복도 많이 받습니다. 에스더가 그 어린 나이에, 예쁜 여인이 얼마나 아쉬운 것이 많겠습니까? 그런데 모르드개에게 말을 들어보더니 상황인식을 제대로 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죽어도 한 번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언제 유혹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세상에 합당치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씁니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그들 부모에게, 자녀들에게 쓸데없는 자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결단 안 하는 것도 결단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은 결단하였습니다. 10년 후에 명예로운 삶을 선택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결단해야 합니다. 그냥 현재처럼 살다가 죽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결단 안 해도 됩니다. 미켈란젤로가 다윗 상을 조각하기로 결심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결단이라고 하면, 무엇인가 이루어냈을 때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마음으로 결단했을 때입니다. ‘가족의 대화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TV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TV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TV가 나를 푹신한 소파에 눕게 하시며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도다. 내 영혼을 파멸시키고 폭력과 죄악의 길로 인도하는도다. 내가 수없이 결단을 할지라도 언제나 허물어지는 것은 TV가 항상 나와 함께 함이라. TV의 리모컨과 채널이 항상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TV가 내 가족의 목전에서 내게 파멸의 상을 베푸시고 인본주의의 기름을 바르셨으니 내 영혼이 부패하나이다. 나의 평생에 나태와 방탕이 나를 따르리니 내가 TV가 있는 곳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지금 우리의 결단을 누가 방해하고 있습니까? 마귀는 우리의 결단을 방해하는
대상자로 가족 중에 많이 선별합니다. 아니면 교회 내에서 많이 선별하고, 교회에서 없으면 외부에서 영입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도 없으면 찾아다니게 만듭니다. 자신 용서에 대하여 {누가복음 7:36~50} 자신의 현재 비열지수를 알아 볼 수 있는 심리 테스트가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자기 정죄감’,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가 안 됨’ 등의 감정적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비열함을 느낌과 동시에 정말로 회개해야 함을 알면서도 동시에 회개도 안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정죄는 계속 쌓여만 가게하고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용서도 못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금보다 더 향상시키려면 여러 형태의 노력들을 취하여야 함이 분명합니다. 사람은 죄 용서받았다고 하는 확신이 없으면 확신이 없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현재의 상황들, 현재의 끊어야 하는 것들, 이러한 것들을 끊었을 때 ‘내가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들이 앞을 가로막아서 결국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 여인은 대단히 용기 있는 여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입장이 그런 입장이신데, 거기다가 또 그 동네에서 죄 많기로 소문나고, 지나가면 아이들이 돌까지 집어 던질 수도 있는 그런 여인이 이어 그 집에 찾아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때 그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1, 9) 그런데 사람은 회개하는 대가로 용서를 받는 것인데, 예수님의 발에 눈물을 떨어뜨리고 향유 붓고 ... 행위로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당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가 그 압박스러운 분위기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향유를 뿌렸다고 해서 어떻게 죄 사함의 선포까지 받을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중풍병 걸렸던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가 마음 속으로 죄를 회개하는 것을 아셨고 선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바탕 위에 선언을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용서를 받느냐면, 예수님께로부터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하였느니라. 네 많은 죄가 사하여졌느니라’라는 선언만 받아내면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선택한 방법이 옛날 직업으로 되돌아가는 방법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무슨 방법을 선택하셨겠습니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핵심적인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만큼 예수님께서 자기를 용서하셨다는 것이 믿어질 것이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 안 하면 예수님께서 아무리 ‘내가 너를 용서했다’고 말을 해도 못 믿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용납이 안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인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여인에게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너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는 말을 억만 번 말을 해도 못 믿었을 것입니다. 못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오히려 붙잡아도 놓으면 도망가고, 붙잡으러 가면 도망가고, 자꾸 피해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여인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해지니까 그 압박스러운 분위기, 그 멸시스러운 분위기를 다 헤쳐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와서 다른 사람이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든가 말든가 눈물을 흘리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오히려 예수님의 품안으로 뛰어 들어왔단 말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비열성, 정죄감을 어떻게 극복해야 되겠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도저히 자기 자신이 용납이 안 되고 용서가 안 되자 ‘나 고기 잡으러 간다’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좇아가셔서 ‘너,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셔서 다시 온전한 정신으로 만들어 예수님 승천하시는 것 본 다음에 그리고 베드로가 그 때 남아 있는 그 충전 분량으로, 충전 분량이 떨어지기 전에 기도를 시작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려고 별 방법을 다 동원해 보십시오. 되는가?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용서에 대한 다섯 가지’의 표현들 입니다. ① ‘카파르’. 이것은 ‘덮어준다.’는 뜻입니다.
매사를 시시콜콜 따지고, 들춰내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덮어주는 것’이것이 용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고 자꾸만 내가 나의 과거의 모든 죄들을 낱낱이 다 들춰내고 싶을 때이면 그 때는 다음과 같이 판단을 하면
됩니다. ② ‘나샤’. 이것은 ‘무거운 짐을 들어준다’, ‘등에 진 짐을 벗겨준다’는 뜻입니다. 어느 때고 내가 과거에 지은 죄들 때문에 갑자기 힘에 겨워지고,
주저앉고 싶고, 다 포기하고 싶고, 어디로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들거든, ‘아 나는 역시 죄가 많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남성들이 사용하는 전기 면도기가 충전 받으면서 쉬면서 그럽니다. ③ ‘살라크’. 이것은 ‘물에 흘려 보낸다’ ‘지워 버린다’ ‘도말’이라는 뜻입니다. ④ ‘아폴루오’. 이것은 신약에서 나오는 헬라어인데 ‘탕감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가
눈감기 전에는 절대로 안 받을 수 없어, 받아야 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서 반드시 받아야 해, 난 못 받으면 눈 못 감아’ 그랬을 때 예수님께서는 왕의 비유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탕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언제든지 ‘내가 또 다시 옛날에 지은 죄들이 막 생각이 나는 것을 보니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보니까 나는 역시 나쁜 놈이야’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잘못 된 해석 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충전을 시켜서 한 번에 파워를 넣으면 바로 전기기가 작동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옛날에 받았던 은혜를 되살려내는 것입니다. ⑤ ‘카리조마이’. 이것은 ‘은혜를 베푼다’는 뜻입니다. 순 공짜로 은혜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받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나폴레옹 때의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받는 것,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주님,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그래야지, ‘내가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더 이상 또 여기서 용서를 요구할 수는 없지, 그냥 죽어버려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할 때는, ‘주님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세요.’라고 하며 끝까지 주님 품에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한 아들이 밖에 나가서 온 몸에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 자신들을 뒤돌아볼 때 도저히 가만 둘 수 없는 상황입니다. 행함에 대하여 {야고보서 2:14~26} 고위공직자
1,0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강단 앞에는 1M정도 되는 깡통 탑이 쌓여 있었습니다. 연사가 나와서 청중인 고위 공직자 1,000여명에게 다음과 같은 주문을 했습니다. 영적인 행동을 하면 영적인 결과가 나타납니다. 사람이 하루 세 시간씩을 꾸준히 걸으면 7년이면 지구 한 바퀴 거리를 돌 수 있다고 합니다. 1878년 미국의 로더퍼드 헤이스가 1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 일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행동하면 결과가 나타나고 행동하지 않으면 그에 따라 아무 결과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별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천장이라도 닫게 되는 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기회가 찾아오면
그때 행동할 것”이라고 말을 하고 벼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행동하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1980년 카터 대통령은 재선에서
실패했습니다. 미국의 어느 개미학자의 조사 결과입니다. 그는 “왜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셨을까?”하고 개미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는 것은 “세상의 85% 게으른 자들을 따라 하지말고 부지런한 15%의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동하지 않으면 결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행동을 하기는 하는 것입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동을 이끌어내시기 위해서 어떻게 명령하셨는가, 가르치셨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가르치는 것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권세가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기관들과 같이 가르치는 것은 많이 가르치는데 행동하지 못하게 하시는 가르침이 아니고,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은 행동하게 하는 가르침 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식은, 에디슨이 말했습니다. 느헤미야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느헤미야는 당시 무너진 성을 재건하는 일을 52일만에 완성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야고보가 말 한대로 행함,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성취로 나타나든지, 기도하는 일로 나타나든지, 전도하는 일로 나타나든지, 봉사로 나타나든지 어떠한 형태로든지 나타나지 아무 형태도 취하지 않는 행함의 결과라는 것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행동이라고 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제발 그러지들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병자들에게 기적적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듯이 기적을 나타내주시지 않고 계속해서 무엇인가 요구를 하셨겠습니까. 중풍병자가 어떻게 침상을 들고 걸어갑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앉은뱅이를 치료시키신 일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믿음으로 인한 행동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행동할 때 그것을 믿음으로 간주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행동한다 라고 계속해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행동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다.’라고 규정을 짓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행동들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이 말은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에게 있는 믿음 중에서 그 믿음을 한 겨자씨만큼만 사용하면 산도 옮겨질 것이다 라고 가르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하면 믿음이 있는 사람은 행동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야고보가 한 말도 똑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일을 맞이해서 예배당에 나오는 행동의 대가를 치렀습니까? 잘하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대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절대로 나와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믿음만큼 행동하게 되어진다 라는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렇게 믿음은 잘 생각해 보면 그 본질이 믿음인 것과 아닌 것과 구분이 됩니다. 미국의 대통령 후보 예비선거가 한창일 때 일이었습니다. 야고보가 우리 교회 안의 성도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주 머리 좋은 목사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왜 기도하는가? 그런데 너무 오랜 시간 기도만 하고 행동은 안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친구 세 사람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돈을 은밀한 장소에 숨겼습니다. 사람이 왜 행동하지 않게 되는가? 야고보가 말한 것의 핵심이 그것입니다. 낙심이 오면 아무 행동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행동을 꾸준히 하다가 조금만 마음이 낙심이 되고 실망이 되고 좌절되면 그냥 하던 것 다 관둬 버리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토마스 버츠는 어둠 속의 호랑이들이라는 책에서 베일리 서커스단이 바르눔이라는 곳에서 공연하는 도중 전기가 나갔을 때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낙심이 조금만 오면 하던 일 다 관둬 버리고 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2:14-26까지 핵심적으로 다음의 내용으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영혼이 떠나버리면 앉은 채로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보고.. 그러면 도대체 야고보는 우리를 이렇게 믿음이 없다라는 얘기를 아주 가혹하게 아주 잔인하게 끝까지 인정받고 고백 받아서 뭘 어쩌겠다 라는 것입니까? 야고보가 제시한 대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성령께서 죄 짖는 것을 싫어하시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약 4:4-5) ‘간음하는 여자들이여’는 야고보서가 기록될 때 양반 분들이 많이 계실 때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때에 만약에 ‘간음하는 남자들이여’라고 했다면 그 동네에서 선교사들 다 쫓겨납니다. 둘째,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아, 내가 왜 세상에서 연약해서 쓰러질 수밖에 없느냐?’ 셋째, 마귀를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자꾸만 ‘내가 다음에는 안 그럴꺼야. 이 번만 참고, 다음에는 안 그러겠지.’자꾸 이렇게 합리화시키면서 정작 올바로 행동하고 싶으면 믿음을 가중시키면 되는 것인데, 믿음은 가중시키지 않고 자꾸 자기 행위적
결실만 좋아질 것이다, 오늘은 좋아질 것이다. 내일 좋아질 것이다.... 넷째,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8-10) 야고보가 제시한 대안입니다. 다섯째, 기도하라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 5:13-18) 그러니까 기도하면 이 육신의 연약함이 결국은 극복되어진다 라는 것입니다. 결론의 결론으로 믿음은 어떻게 하면 강해지는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라고 롬10장 1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는 지금까지 행동하지 못한 이유가 믿음이
부족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언어 사용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3:8~11} 세계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아흔 다섯 살이었을 때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사람은 나이 스물에 언어 사용, 말하는 법을 완벽하게 익히지 못합니다.
나이 서른이라고 해서 언어 사용, 말하는 법을 완벽하게 다 익힐 수도 없습니다. 또한 사람은 사십을 넘어 팝십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 누구도 언어, 곧 말을 늘 조심해서 하지 않는 한 당연히 실수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첫째, 사람은 언어 곧 말을 참으로 조심해서 해야 하지 함부로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가 한 말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말을 칼로 찌르는 것처럼 함부로 말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0년 간 새벽기도 등을 열심히 훈련 받아온 신앙인도 어느 날 갑자기 화가 나면 그 때는 앞 뒤 보이는 것이 없어 단 한 번에 언어 표현을 잘 못하고 남은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① 말이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나이 사십에 그의 동족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위의 대화로 보건대 모세가 했던 말은 전혀 그의 동족, 당시 싸우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못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이란 ‘그 때 그 사람에게 그렇게 말했으니까, 이 사람에게도 그렇게 말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이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으니까, 저 사람에게도 될 거야!’ 안 된단 말입니다. ② 우리가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그 자리에 맞게, 경우에 맞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손님이 많은 식당에 좌석이 부족해서 합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 말은, 아무리 좋은 배려라 할지라도 스님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권한 그 자체가 실례라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의 말입니다. 이와 같이 말이란 상황에 맞는 말이 있고, 상황에 안 맞는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③ 우리가 또 말 할 때 조심 할 것은, 자랑하는 말도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의 권면입니다. 우리가 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④ 또 우리가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이웃의 말이나 사람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어떠한 일이 있었다고 말을 하면 그냥 ‘아, 그런 일이 있으셨느냐?’고 하며 재미있게 들으면 됩니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⑤ 또 우리가 말을 할 때 생각할 것은 말이란 반드시 책임이 따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말이란, 어떤 말도 반드시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말이란 함부로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됩니다. 확인하고 또 하고 확인하고 또 하고, 확인하고 또 한 후에 조심스럽게 말을 입밖에 내야 합니다. 내 말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심각하게 다치게 할 수 있다든지, 억울하게 할 수 있다든지, 그런 가능성이 있을 때 그 말들은 함부로 개봉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언어 곧 말은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것이겠습니까? ‘말을
잘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학원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① 말이란 진실하게 하는 것이 말을 가장 잘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권면입니다. ② 말이란 상대가 들어봐서 기분
나쁘지 않게 하면 잘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이 말은, 말을 할 때 양념에 잘 절여진 것처럼 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내가 한 말 때문에, 내가 한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마음 아파 할 때는 무슨 일보다 그 일을 더 먼저 처리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십니다. ③ 말이란 침묵보다 더 가치 있는 말을 해야 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④ 말이란 타인을 칭찬하는 말을 할 때 그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가 권면하였습니다. 우리가
칭찬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옳은 칭찬은 아닙니다. ⑤ 말이란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말일 때 그 말이 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⑥ 말이란, 상대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말일 때 그 말이 잘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우리는 절대 긍정적인 언어, 가능성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지금보다 믿음을 더 향상시킬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말을 계속 들으면 그렇게 변화되게 되어 있는 것이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⑦ 말이란 상대가 들어봐서 감동을 느끼게 하면 그것은 잘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내가 이 문제로 상대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한 때 사도 바울은 마음의 문을 꽉 닫고 안 열어주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많이 연로하셨을 때 아주 젊은 빌레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과거 무수히 많은 말들로부터 상처들을 받으며 지금까지 살아 왔습니다. 베드로의 권면입니다. 미국 아리조나의
뜨거운 여름에 한 여 청년은 늘 두껍고 긴 까만색 드레스만을 입고 다녔습니다. 우리가 말로 상처를 받습니다. 말이란 부정적 언어가 있고, 긍정적 언어가 있는데, 절대로 긍정적 언어로 주제를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언어 곧 말을 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① 말을 하기 전에 미리 잘 준비하여, 다듬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정성을 들여 해버릇 해야 합니다. 사람은 파 한 단, 양파 껍질 한 개를 벗기더라도, 사물함 정리 한 번을 하더라도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요, 그 사람의 정성이요, 그 사람의 노력의 예표와 같기 때문에 잘 해야 합니다. 잠언 기자가 말했습니다. 언어에 조급하다는 것은 준비 없이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미리 준비를 잘 해서 해 버릇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잠언 기자가 한 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의 권면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말 할 기회를 주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를 안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만나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친구들을 만나서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항상 미리 준비해 버릇해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미가 선지자의 권면입니다. 우리 남자 분들은 제발 집에 가서 아내들에게 할 말, 안 할 말 가려가면서 해야 합니다. ② 우리가 말을 할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비판하는 내용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가위와 톱과 혀가 서로 자기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형제를 비판으로 억울하게 만드는 사람은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로 사람들은 만나면 정치 얘기한다고 하다가 정치인 비난하고, 교회 얘기한다고 하다가 목사님 비난하고, 물론 우리 교회는 절대로 목사님 비난 안 합니다만 그리고 친구 얘기한다고 하다가 친구 비난하고, 주제가 항상 그런 식으로 넘어간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③ 상대의 중요감을 해치지 않기 위해 절대 긴장을 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권면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했던 말입니다. 특별히 데살로니가 전서 4장 4절은 우리 남성들이 꼭 기억해야 할 말입니다. 우리 남성들이 아내를 어떻게 대하여야 하느냐? ④ 상대가 나의 말을 듣고 위로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다른 나라의 한 청년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많은 말들 중에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언어적 선택 능력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죽자 두려워하던 형들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권면하였습니다. ⑤ 상대가 나의 말을 듣고 화가 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했어야 했겠습니까? 유순하게 대답을 했어야 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합니다. 잠언 기자의 권면입니다. 그 여성은 소매치기가 화가 나서 전화를 했을 때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내가 그 날 정말 정신이 없어서 진짜를 넣고 간다는 것이 가짜를 넣고 갔는데 다음부터 절대 조심하겠습니다.”라고 공손하게 답을 했어야 합니다. 잠언 기자의 권면입니다. 나에게 말로 소리 지르고 상처를 입히고, 그런 사람은 언젠가는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조용하게 공손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꼭 소리질러야만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권면입니다. 우리의 혀는 얼마든지 통제가 가능합니다. 설득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3:15}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많은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위대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강력한 설득을
당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얼마나 올바른 설득을 당하느냐, 얼마나 강력한 설득을 당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 사람이 의지가 강해서 타고난 죄성이 없어서 훌륭한 인생을 살다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야고보서 5장 17절에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설득을 당해야 하겠습니까? 이 분은 그 책에서 세 가지를 지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완벽하게 구비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을 설득하려면 정확한 시간에, 설득이 될 때까지 시간을 함께 보내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사람은 한 사람대 한 사람으로 묶여버리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설득을 당하고자 결심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든지 설득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설득 당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되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만 우리를 설득시키실 수 있습니다. 데마 같은 사람은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를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주의 영이 그를 설득시키지도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리고 지금도 살아서 역사 하시는 성령님께 강력하게 설득 당하기만 하면 우리의 남은 인생은 볼 것도 없습니다. 우선 설득은 하는 분도 중요하지만, 당해야 하는 사람이 안 당하면 재간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력하게 설득을 당할 수 있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강력하게 설득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위협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실험을 해 봤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방식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한 사람은 여러 중독에서 못 빠져나오게도 하십니다. 지금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벌여놓고 우리에게 파병 요청을 하는데 파병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6.25를 경험하고 고생을 많이 한
분들 가운데서는 그것이 철없는 짓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어려울 때 미국이 얼마나 도와줬는데 미국이 지금 같이 도와 달라는데 안 도와주느냐?’ 이렇게 말을 합니다만, 사실은 그것은 자존심상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협설득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협적으로 설득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으면 결국은 나는 못 살아남는다.’ 이것을 인정을 해야 우리가 설득이 됩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떡집)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남편을 데려 가셨습니다. 모세 당시
바로 왕이 얼마나 강한 사람이냐면, 당시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 안 들으면 가만히 안 두십니다. 세상에 소중한 것들은 다 하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번 주일 예배가
마지막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다음 주에 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이득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이득을 제시하는 겁니다.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면 그 유혹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마귀에게 유혹을 제안을 받으면 정직하게 가지고 나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셋째, 질문방식의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질문도 설득의 일종입니다. 우리가 컴퓨터에서 무엇인가를 불러내려면 명령어를 쳐야 합니다. 꼭 질문을 해도 망할 질문만 스스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 언제 죽을래?’, ‘곧 죽게 될걸 아마’ 예수님께서는 질문으로 설득을 대신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넷째, 불평 불만을 잠재우게 할 수 있는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불만 불평을 가득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입니다. 다섯째, 불안 심리를 조성할수 있는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광고 회사에 한 렌트카 업체가 광고를 요청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입니다. 여섯째, 공평의 원칙을 준수할수 있는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두 아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간 아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 것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며”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느냐면, 서로 사랑을 안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바로 사랑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설득의 원칙 가운데는 공평의 원칙을 잘 준수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 말씀을 볼 때 참으로 공평을 중시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째, 압력설득방식에 의한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의 일입니다. 여덟째, 본능적 모방심리를 자극 당할 수 있는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니, 아인슈타인과 우유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우유박스에 아인슈타인 사진이 인쇄되어 있으면 우유가 더 잘 팔리는 것입니다. 사무엘 시대 때의 일입니다. 아홉째, 약속을 잘 지킬수 있게하는 신뢰에 의한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야구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약속은 기대를 발생시킵니다. 바울이 권면하였습니다. 열번째, 정확하고도 감동적인 목표 설정에 의한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왜 목표를 안 세우겠습니까? 바울이
권면하였습니다. 마귀 대적에 대하여 {야고보서 4:7} 한 남자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동물원에 갔습니다. 부자가 사자 우리를 지나 갈 때였습니다. 어린 아들은 포효를 하며 어슬렁거리는 사자에 놀라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얘야, 왜 그러는데?” 새파랗게 질린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아빠, 저 사자의 사나운 이빨 좀 보세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들아, 사자의 이빨만 보지 말고 안전한 철장도 함께 보아라. 사자는 무섭고 힘이 센 것은 사실이지만 안전한 철창 때문에 우리에게 쉽게 공격을 할 수가 없단다.”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자나, 호랑이 보다 몇 백 배 더 강한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의 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이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조금만 방심하게 되면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에게 순식간에 끌려가 참혹한 공격에 의해 극심한 부상을 입기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마귀와 싸워서 이길 것이며, 어떻게 대항을 할 것이겠습니까? 첫째, 마귀의 공격 유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우리는 바람이 눈에 안 보이지만, 바람에 의해 흔들리는 물체를 통해서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공기가 눈에 안 보이지만, 공기에 의한 결과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 공기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방송국에서 방송하는 사람들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전파를 통해서 실제 방송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귀의 공격 유형 세 가지는 무엇이겠습니까? ①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은 환경적인 재해를 통해서 역사 합니다. ②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은 신체적인 공격을 통해서도 역사 합니다. 특별히 누가복음 13장에는 열여덟 해 동안을 귀신이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있는 것, 귀신이 들려서 통증, 앓으며 가시적으로 꼬부라져 있는 사람을 예수께서 안수 하시사 즉시 펴시며 그랬습니다. 성경을 보면 병은 마귀가 만들어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③
생각을 통해서 역사 합니다. 이렇게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통해서 역사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 입으로 금방 은혜스러운 말을 했다고 해서 그 다음 나오는 말도 은혜스러운 말일 것이다.’라고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마귀는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마음을 가룟 유다의 마음에 넣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마귀는 크게 세 가지를 공격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씨름은’ 곧 ‘우리가 당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사실은 배후에서 마귀가 역사 하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사도 바울은 지적했던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위고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성경적으로 맞아떨어지는 얘기입니다. 둘째,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 준비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 전에 미리 준비 기도를 하셨습니다.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의 현장에서 ‘아, 이 일은 이제 됐다’라고 확신이 오면 이기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또는 “하나님 제 아이가 속을 썩입니다.”라고 계속 기도를 드리면 그 때도 처음에는 마치 큰 산 하나를 만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기도하면 마침내 어느 순간에 ‘아 됐다.’라고 확신이 온단 말입니다. 마귀를 대적해서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 자리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 자리에서 이기지 못하고는 아무리 환경적으로 쫓아다녀도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 자리에서 이기지 못하고는 아무리 결심을 해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수없이 결심을 하고 장담을 해도 이길 수 없습니다. 셋째,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귀를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면, 많은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인데, 그리스도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뭐냐 하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을 대적하고 있단 말입니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귀를 대적하는 사명을 받았는데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는 사명을 받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단 말입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세운 모세를 하나님께서 처리하시도록 맡겨 놓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살지 못했지만 다윗은 깨끗하게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 드렸습니다. 다윗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3,000명씩 데리고 사위인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그 사울 왕이 이해가 안 됐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셨던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떻게 시간을 줄 수 없을 정도로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사울은 회개하지 않았고 전쟁터에서 아들 셋과 함께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마귀를 대적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가족들을 공격하는 마귀를 대적해서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군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교인들은 마치 동물의 왕국을 보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맙니다. 일 톤이 넘는 물소가 무리 지어 떼지어 갈 때는 사자들이 공격을 못합니다. 그런데 사자들이 십여 마리가 따라 붙어서 예의 주시합니다. 그러다가 정확하게 병든 소, 그리고
무리와 분리된, ‘무리와 분리되는 자는 자기 욕심을 따르는 자니라’라는 잠언 말씀처럼 무리와 분리된 소가 없나? 예의 주시하다가 어느 순간에 공격을 해서 무리로부터 일 톤이 넘는 물소를 격리시킵니다. 그리고는 그 십여 마리가 서서히 몰아가서, 나중에는 그 무리 중에 물소 다섯 마리가 실제로 와서 그 한 마리를 데리러 오는 것을 보고 제가 놀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수많은 기회를 주셨는데 지금 마귀에 의해서 무너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혼자 싸워서 마귀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대적해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군사들임으로 힘을 합해서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넷째, 마귀를 어떻게 대적하겠습니까? 마태복음 8장 16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다 쫓아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어떻게 쫓아내셨는가 보면 마태복음 8장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꾸짖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꾸짖어야 하겠습니까? 한 사람이 지혜로운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리고는 그 때부터 기도를 하는데 힘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너 내 남편에게서 손 떼.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손을 떼라!” ‘말씀으로 귀신을 쫓았다’라는 말은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권위 있는 명령으로 쫓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꾸짖어야 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귀신을 꾸짖을 수 있는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마귀는 언제 사단이고, 언제 마귀고, 언제 귀신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앞에 왔을 때 그 사람에게 분명히 하는 짓은 그 사람 속에 있는 귀신이 하는 짓이 맞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앉아 있을 때 그 사람을 보고 ‘귀신아’ 그러면 기분이 되게 나쁩니다. 그러니까 그냥 ‘이 사람을 괴롭히는 악한 것들이 다 정리되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점잖게 해야 합니다. 제가 한 번은 몸이 너무너무 아파 가지고 우리 집사님들에게 기도 좀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에게서 귀신이 나가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크게 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제가 다시는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안 합니다. 아무리 기도를 부탁해도 그렇게 적나라하게 할 수가 있습니까? 귀신은 어떻게 꾸짖어야 하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하도 못 믿으니까 그 안 믿는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믿어야 하는 것을 안 믿으니까, 답답하니까 꾸짖으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꾸짖는다는 개념으로 우리가 귀신을 꾸짖어야 한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우리 가족들과 가정과 사업장과 여러 가지를 괴롭히는 원수 세력들아 물러갈지어다’ 이렇게 단호하게 내어쫓는 것, 이것을 보고 꾸짖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마귀 대적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마귀하고 싸워서 반드시 이겨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기다림에 대하여 {시편 40:1~2}
한 부인이 오페라 공연을 관람한 후에 아주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그 공연장에서 잃어버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그 사실을 깨달은 부인은 공연장 관계자들 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그 결과를 확인하려 했습니다. 담당 직원이 그 내용을 알아 본 후 부인에게 그 사실을 말하려고 다시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다가 ‘아무래도 그 공연장에서 목걸이를 잃어버리지 않은 것 같다.’고 판단한 부인은 자신의 연락처를 남기지 않은 채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공연장 담당자는 결국 목걸이를 주인에게 돌려 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참 좋았을 것을 기다리는 인내가 부족해서 일을 그르친 경험들을 최소한 몇 건 이상씩 가지고 살아가고들 있습니다.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된 "너무 빨리 자라는 아이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성취도
중요하지만, 인내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니엘 웹스터는 친구들과 함께 성경 말씀 중 어떤 말씀이 가장 문학적으로 아름다운가에 대해 선별하기 시작했습니다. 위 말씀의 의미는 우리의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그러할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가? 첫째,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약속 없는 기다림은 성취된다는 아무 보장도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머리 위에 직접 안수를 준 역사상 전무후무한 선지자였습니다. 이 말씀은, ‘실망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너희들과 계약한 내용 범위 내에서 위배되지 않는 사실을 보고 실망하지 않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무엇을 듣고 보는 것’을 전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혼하는 청년들을 보면 주로 혼자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분명한 계약을 안 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너무 일방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다리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모세가 기록한 말씀입니다. 예수님 명령입니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답변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슨 일을 정할 때 그 때를 우리가 정하려고 하는데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권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분명히 주신 약속 그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어떤 분이 아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 한 분은 등이 굽은 곱사등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도응답을 무조건 하다 보면 어느 날 한 번에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한 번에 받는 응답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약속해 주시고 ‘이 문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명령을 해 주신대로 주로 순종하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성실하게 회개하며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성실하게 회개하면서 기다리는 내일은 각종 좋은 축복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조건이 됩니다. 독일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이 공작이 지난 3년 동안 너무너무 선행을 많이 하고, 성실하게 행하고, 소문이 좋게 난 결과 이 공작을 왕실에서 황제로 모셔야 되겠다는 결정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삼일 있다가 절대 안 죽고, 석 달 있다가도 절대 못 죽고, 삼 년이 뭐예요. 앞으로 삼십 년을 더 살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며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야 하느냐 하면 성실하게 회개하면서 각종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살아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다리되 회개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권면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기다리되,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갖추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다리되 회개하면서 천국적 가치관을 계속 받아들이면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회개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기다림은 회개하면서 성실하게 기다리는 기다림이 좋은 기다림이지, 우리는 주로 아무 행동도 안 하면서 기다리려고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희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불확실한 가운데 기다리는 것을 참으로 힘들어합니다. 결국 인생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지구력과의 싸움입니다. 사람은 얼마나 열심히 성실하게 잘 기다리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녀를 기다렸고, 모세는 민족구원을 위해 쓰임 받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40년 만에 포기했다가 결국은 하나님께서 찾아 와주셔서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고로’라는 의미는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안절부절 못한다.’는 표현입니다. 남아공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27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만델라 대통령이 감옥에 있을 때에 하루는 딸이 아이를 낳아 아버지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아버지,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세요."라는 딸의 요청에 따라 만델라는 아이의 이름을 'Hope' 곧, 희망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딸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감옥에 있는 동안 한번도 희망을 버려 본 적이
없단다." 희망을 너무 일찍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남은 생애동안 반드시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25절 말씀처럼 우리가 ‘참음으로 기다린다.’는 것이 너무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욥과 같은 고난의 상황을 지나가면서 인내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힘만으로는 참음으로 기다리지 못하는데, 아무리 희망을 가지고 아무리 인내를 하려고 해도 안 되는데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면 우리가 참음으로 내일을 기다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칼 매닝거라는 분은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 그 자체보다 삶의 자세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넷째, 기도가 응답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다가 너무 많이 중간에 포기하고 맙니다. 다음은 쌩떽쥐뻬리의 <어린왕자> 중에서 기록된 '행복한 기다림'이라고 하는 제목 글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잠시 후, 네 시에 좋은 일이 일어날 사람은 세시만 되면 너무너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견해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림을 너무 소극적이고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을 하려는데, 얼마든지 기다림을 희망이라고 하는 것으로 전환시켜서 행복의 도구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기다릴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행복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존이라는 소년은 열 살 되던 해 크리스마스에 할머니로부터 우표 앨범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요구하면서 열심히 기도드리다가 의심하다가 받는 응답도 많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우리 전 예배당에서 쓰던 기구들을 다 모아 보니까 돈을 주고 산다면 한 2,000여 만원 정도의 값어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꼭 망치 들고 못 들고 나서야
그제서 야 필요한 것들이 도착되게 하여 주시는 분이신가?’ 그렇게 해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기다리는 태도를 바꾸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에게 인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자신들은 변화가 가능합니다. 왜 죄를 짓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요한일서 3:8}
한 회사에서 사장과 감정이 뒤틀린 간부 사원이 끝내 일을 저질렀습니다. 첫째, 사람이 왜 죄를 짓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① 우리와 사랑의 관계성이 있는 자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나 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으로만 일이 끝나지 않습니다. ② 사람이 한 번 죄를 지으면 앞의 지은 죄를 은폐하기 위한 거짓을 해야 하기 때문에 불편한 여러 상황들을 맞이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의학에서 무감각증 환자들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세균 감염으로 인해 조직이 크게 손상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균이 중추신경계를 마비시켜 마취주사를 맞은 것 같은 효력을 발생시킨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시고 가인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답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상황을 모르고 물어보실 분이십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거짓말 탐지기 앞에서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거짓말을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앞으로 거짓을 밝혀 낼 수 있는 첨단 장비가 또 만들어져도 인간은 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③ 늘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므로 그리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가인이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④ 두려워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라고 물으셨을 때 아담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라고 대답했습니다.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께 두려워 떨리는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이 용기가 많은 것으로 알기 쉽지만, 그들은 늘 두려워 벌벌 떨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⑤ 사람이 죄를 한 번 짓게 되면 죄에 중독이 되어 또 다시 죄를 짓고 싶어지게 되므로 그러한 중독에 빠져들지 않기 위함입니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복부제라는 사람이 선부라는 고을의 원님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사람이
어떠한 죄든지 죄를 한 번만 짓고 끊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 훌륭한 사람이고 용감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마약 주사를 딱 한 번만 맞고 돌아설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입니다. 사람은 죄를 아침까지만 짓겠다고
결심하고 점심에 또 짓습니다. 그리고 ‘점심까지만 죄를 짓고 다시는 안 지어야지 ... ’라고 생각한 후에 저녁에 또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 12시까지만 죄를 짓고 다시는 안 지어야지 ... ’라고 생각하고, 결심해 놓고 또 짓습니다.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활용해서 중독을 시킵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까 위치 추적 시스템이라고 하는 기계를 자신이 알고자 하는 차에 붙여두면 정확하게 그 현재 위치를 파악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흡연을 80년 동안 한 분과 흡연을 1년 동안 한 사람을 최면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마귀가 사람을 죄에 중독되게 한다는 말씀의 근거를 다음 말씀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다. ⑥ 마귀로 훼방 할 근거 발판을 마련하여 주게 되므로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타이타닉호는 1912년 영국에서 뉴욕으로 첫 출항을 하면서 침몰하여, 1,500여명이 익사하는 최악의 해난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동안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졌던 침몰사고의 이유는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부딪혀, 배 옆에 큰 구멍이 생겨 침몰하게 된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잠수부들과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국제적 조사팀이 음파조사를 통해 바다 밑 2.5마일 아래 진흙 속에 묻혀있는 이 유람선을 탐사한 결과, 배의 파손부분은 예상외로 작은 것이었습니다. 배 옆에 큰 구멍이 뚫린 것이 아니라, 비교적 작은 틈새 여섯 개 때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 온 사람들이 큰 죄 때문에 침몰되지 않습니다. 작은 한 가지의 일들 때문에 무너져서 결국은 마귀로 훼방을 받고 심판까지 받게 됩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⑦ 죄를 짓게 되면 판단력이 무디어지게 되므로 정상적인 판단력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의 지적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집중력이 분산되고 판단력이 무디어져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술을 많이 마신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길바닥이 따뜻하게 보여 누워서 자기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정상적인 판단력은 교만하기를 원치 않으나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자꾸만 교만해 져서 판단력이 비정상적으로 되어서 결국은 교만을 선택하고 망할 길을 선택하고 잘못된 길을 선택해 나간단 말입니다. ⑧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므로 좀 더 명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의 지적입니다. 사람이 죄는 지을 때는 그 죄가 상당히 매력이 있는 것 같고 ‘예술이네 문학이네 ... ’라고 말들을 하지만 나중에 제 정신이 나서 돌아보면 전부 부끄러운 것들뿐입니다. ⑨ 마음속에서 성령님께서 근심하심으로 평강을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이 죄를 짓고 밤늦게 들어오는데 어떤 부모가 집에서 근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여러 신체적 기능들이 분명히 죄책감으로 인한 나쁜 호르몬에 의해서 약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것은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⑩ 수치심이 생겨 자꾸만 현재 있는 곳으로부터 어디론가 도망하고 싶게 되기 때문에 떳떳하게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현재 어쩔 수 없어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지, 사실 사람은 여건만 되면 도망가고 싶어한단 말입니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민 가고 싶어하고, 도망가고 싶어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 사람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구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좀 지어도 괜찮은 줄로 압니다. 둘째,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① 경쟁 심리 곧 질투심 때문입니다. 가인은 아벨이 하나님에게 자신보다 더 나은 여김을 받는 것을 보고 질투하여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바울의 권면입니다. 사람이 나쁜 친구들을 옆에 두고 만나다보면 그 나쁜 친구들이 자신들이 짓는 죄를 자신만 짓지 않고 그 죄를 자랑을 합니다. 그러면 그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것이 부럽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저 정도는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인데?’ 사람이 욕하고 따라 한다고 ‘그러면 못써!’ 그래놓고는 돌아서서 ‘나도 한 번 해볼까?’ 그러고는 아주 은밀하게 자신은 조용하게 친구보다 더 정확하게 잘 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죄가 커진단 말입니다. 친구가 시행착오를 겪은 것까지 답습을 해 가지고 자신은 시행착오도 안 겪고 죄를 잘 지어 버립니다. 사람은 경쟁심리 질투심리에 의해서 죄를 짓게 됨으로 우리 주변에 있는 나쁜 친구들을 끊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정보를 주는 자들, 마음 아프지만 내가 정확하게 교회로 끌고 나와서 변화를 시킬 수 있으면 변화를 시키고, 그 능력이 없으면 끊어야 합니다. 괜히 그들을 교회로 이끌고 나오지도 못 할 것이면서 끌려 들어가서 침체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② 마귀가 우리를 우는 사자와 같이 죽을 때까지 쫓아다니며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뚝섬유원지에서 하루는 5살 먹은 아이와 7살 먹은 남매를 데리고 아빠가 나갔단 말입니다. 옛날에 한 사냥꾼이 독수리를 잡으려고 화살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독수리는 자기가 잠시 후에 화살을 맞게 될 줄도 모르고 뱀을 잡아먹으려고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뱀은 자기가 잠시 후에 독수리에게 먹힐 줄도 모르고 쥐를 잡아먹으려고 쥐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쥐는 잠시 후에 자기가 뱀에게 잡혀 먹힐 줄도 모르고 자기보다 더 약한 것을 먹으려고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③ 자신의 욕심 때문입니다. 야고보의 지적입니다. 처음에 마귀는 사람에게 죄를 가져 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만 넘겨줍니다. 그러면 사람은 그 욕심이 점점 잉태되어져 언젠가는 그 죄가 출산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험한 세상 살면서 죄를 지어보니까 얼마나 수치스럽고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죄책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 자녀들까지 그러한 죄의 환경에 노출을 시키겠느냐 말입니다. 다윗의 고백과 바울의 권면입니다. 셋째, 그러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①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이 죄를 덜 짓거나 안 지으려면 철저하게 회개를 해야 합니다. 다음은 회개에 필요한 말씀들입니다. ②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자동차는 그 연료를 어떤 것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기계가 보존도가 높아지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연료를 공급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성령 충만 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③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를 끊기 위해 문제를 향하여 명령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해야 합니다. 이번에 탁구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취득한 유승민 선수는 중국 선수를 이기기 위해 하루에 서브를 3,000개씩 넣었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죄를 끊기 위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루에 3,000번씩
한 가지 문제를 향하여 명령하면 우리가 어떤 죄인들 못 빠져나오겠습니까? 고난을 극복하려면 {마태복음 14:22~33} 한 포도원에 여우가 침입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얻기 위해서 아무런 대가를 안 치러도 되는 줄 알고 너무 쉽게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대가도 안 치러도 현재의 상황에서 내가 선택한 일들로 말미암아 척척 빠져나올 줄 아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다가왔을 때는 첫째, 지난날들을 어떻게 살아 왔는지에 대해 점검을 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난날들에 대한 평가를 분명히 하고 넘어가버릇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을 자신은 잊고 있어도 그 결과에 의해서 다시 기억나게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세의 지적입니다. 한 보트 수리공이 있었습니다. 보트 한 대 칠 할 것을 부탁 받았습니다. 페인트칠을 하다가 보니까 바닥에 조그마한 틈, 깨어진 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수리공은 페인트칠만 해 주면 되었지만 그는 그 보트를 누가 끌고 나가 사용할지도 모르고. 끌고 나갔을 경우는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부탁 받지 않은 일임에도 그것을 완전히 방수처리를 해서 잘 메워 칠을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많은 일들을 과거에 내가 처리해 놓고 잊어버리지만 그것이 나쁜 일일 경우에 좋지 못한 결과로, 좋은 일일 경우에는 상급으로 돌아오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의 권고입니다. 우리에게 현재 어떤 어려움이 와 있고, 고난이 다가 왔을 때 그것을 마치 ‘잘못 배달된 우편물처럼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무슨 원인이 있습니다. ‘아무 원인도 없이 다가오는 고난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변화되지 않는 상태’를 지적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강자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권력을 휘두를 줄 아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권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너무 많은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돌아서면 그 약속들을 잊어버리고,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고 안 지키고 합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곤고한 날에 생각하는 일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들처럼 계속해서 살아가면, 결국은 고난에 또 고난, 고난 중에 더 깊은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것은 본심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 하나님과 관계를 섭섭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와 잠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뭐 그렇게 별로 잘 한 것도 없으면서, 뭐가 그렇게 섭섭한 것이 많은지, 낯빛이 변해 가지고 지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와 예레미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 당하게 하시는 것이 취미가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시면 우리가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평안하고, 기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짓은 골라 가면서 다 하고, 하라는 것은 안 하고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각기 제 길로 나아가는 우리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의중을 바로 알고,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우리 사람 마음이므로(렘 17:9), 우리 마음을 새로운 마음으로 창조해 달라고 다윗처럼(시
51:10) ‘주님, 저는 무능력합니다. 제 마음을 제가 바꿀 수가 없습니다. 바꿔주세요.’라고 기도를 드리면서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 거역하는 태도를 중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거역하는 태도를 극복해야만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버스를 탔습니다. 그랬더니 한 아주머니가 강아지 한 마리를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앉혀놓았더라고 합니다. 너무 너무 피곤한 사람이 그 옆에 가서 “아주머니 강아지 좀 안고 탑시다. 그리고 제가 자리에 좀 앉읍시다. 제가 많이 피곤합니다.”라고 말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강아지 주인은 그 사람을 한 번 쳐다보더니 “우리 강아지 자리예요.” 하고는 그냥 앉아
있더랍니다. 우리는 탓을 돌리려면 잘못한 내 탓으로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탓을 환경 탓, 옆의 사람 탓, 하나님 탓, 이웃 탓 등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 우리에게 고난이 다가온 것은 다 우리가 하나님께 거역해서 다가 온 것들입니다. 넷째, 인생들에게 다가오는 고난은 크게 세 가지 형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고난이 많아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① 심리적 형태 ② 질병적 형태 ③ 환경적 형태 고난, 심리적인 것 다 내가 나쁜 생각을 끌어들여서 내가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고난을 불편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 시편 기자 그리고 욥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 마음이 쉽게 안 변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의 간증입니다. 한 악한 부인과 선한 남자가 만났다고 합니다. 결혼을 해서 함께 살았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보니 선한 남자가 악한 남자로 변했다고 합니다. 여섯째, 가장 많이 해야 할 일들은 기도를 드리는 일이어야 함을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다가왔다고 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이 다가오면 많은 사람들이 마약 중독, 알콜 중독, 도박 중독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고보의 권면입니다. ‘저 사람 그렇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기도를 안 하는데 참 왜 저럴까?’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을 위험하게 보시면 됩니다. 다윗의 기도입니다. 인간은 행동하게 되는 동기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죄를 짓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으로 몰아넣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간증입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와 예레미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이십니다. 느헤미야의 간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그렇게 잘 했다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건지시고, 그러시느냐 말입니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 했다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건지시고, 영화롭게 하시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이 어려움에 빠지면 그 자녀를 그 어려움에서 건지기부터 하지, ‘네가 나에게 괘씸하게 행동했으니까 너는 고생 좀 더 해야 해’ 그럽니까? 일곱째,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나 뵙고, 분명한 도움을 요청하고, 해결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징계하시기로 결정하시면 그 사람의 지혜부터 빼앗아 버리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야고보의 권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환경을 계속 바라보면서 두려워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 받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해결하여 주신 문제의 사례들 ① 물질 문제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창 31:42) 우리가 어떤 노력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현재 상황에서 그 수고의 대가가 안 치러진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넓은 의미에서 언젠가는 다 보상해 주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하면 됩니다. ② 상처 문제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창 41:51) 그러나 요셉이 당한 모든 마음의 상처를 하나님께서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③ 건져 주심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9) 결국 우리가 하나님에게 안 나아가서 그렇지, 일단 나아가서 “제가 상황을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저 좀 이 상황에서 건져주십시오.”라고 분명히 요청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난은 극복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한성호 목사(물가 심기운 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