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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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속 사투리-1.박목월과 사투리詩 이채근 기자  매일신문  2021-01-29        가 가 사투리는 향토인의 살과 피이자 호흡이다   경주에 있는 목월문학관의 박목월 생가 그림. 그의 생가는 건천읍 모량리에 있다. 시인 박목월       1.박목월과 사투리詩 일반적으로 언어에 대한 우리의 인식 수준은 매우 낮다. 언어예술의 전문가들이나 이러한 언어의 미묘하고 섬세한 측면에 눈을 돌릴 뿐이다. 사투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마찬가지다. 사투리를 단순히 중심과 주변의 차이로 인식하거나 한낱 흥미 차원에서 희화화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언어의 본질에 대한 깊은 고려 없이 나온 얕은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언어를 단지 기능적 차원에서만 다룰 수 없다. 정보와 의사 전달 도구로서 뿐만 아니라 정서적 울림을 전하는 주요한 수단이 언어다. 지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표준어는 기능적 측면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대로 살아온 향토민의 삶과 그 내면의 기질과 성정을 전달하려면 반드시 사투리를 통해야만 가능하다. 기실 사투리는 정신적 판단 이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겨울밤 '할무이'가 내오시던 배추적과 저녁상의 들깨 듬뿍 뿌린 뭇국의 맛을 어찌 사투리와 따로 떼어낼 수 있으랴. 그러므로 사투리는 향토민의 피와 살이요 호흡이라 할만하다. 일찍이 이러한 사실에 착안한 박목월 시인은 1960년대 후반 시집 '경상도 가랑잎'을 중심으로 경상도 사투리 시의 미학에 천착했다. 박목월 시인은 「사투리」라는 시에서   우리 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러운 악센트로/ 오라베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 라고 노래했다. 나긋나긋하고 애교 넘치는 말씨로 부르는 오빠라는 말 대신 '무뚝뚝하고 왁살스러운 악섹트로' 부르는 오라베라는 말! 이 막막하고 아득한 정서적 울림을 어찌 표준말이 감당할 수 있으랴.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박목월 시인은 초기에 민요적 리듬과 감각적 이미지로 환상적인 자연의 세계를 탐구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소소한 일상의 삶을 녹여낸 일상시 계열의 시를 거쳐 196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경상도 사투리와 경상도 식 삶의 이면을 더듬는 일에 몰두했다. 많은 시인들에게 고향의 정서와 미학이 시적 소재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투리를 외면하고 고향의 정서와 미학을 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해 경상도 사투리는 경상도 미학을 시에 담는 데 필요한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래서 박목월 시인은 '사투리'란 작품을 통해 경상도 사투리의 맛을 시로 형상화했던 것이다. 이 작품 이후 그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자신의 시 속에 적극 활용했다. 특히 고향의 삶을 노래할 때는 경상도 사투리의 어감과 분위기에 크게 의존했다. 그에게 고향 사투리의 예찬은 곧 고향에 대한 예찬과 그리움이 된다. 경상도 사투리는 거칠고 시끄럽다. 시인은 이를 '왁살스럽다'란 말로 표현한다. 하지만 시인은 그 왁살스러움 뒤에 숨겨진 혹은 그 왁살스러움 속에 들어 있는 순박하고 포근한 정서를 기린다. 굳세고 의연하나 질박하고 담박한 기질이 경상도 사람 본연의 성정이다. 겉으로는 무뚝뚝하나 그 안에는 따스한 인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 박목월 시인은 이러한 경상도 정서를 사투리로 절묘하게 구현해냈다. 박목월의 시 중에서 사투리가 많이 활용된 작품은 '눌담', '적막한 식욕', '치모', '만술아비의 축문' 등이다. 하지만 박목월 시인의 경상도 시편의 정수는 '이별가'가 아닌가 한다. 청천벼락 같은 아우의 죽음을 맞이한 지극한 슬픔과 그 극복과정을 노래한 시다. 이 시를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는 이유는 경상도 사투리의 특징인 성조(聲調)를 활용해 동일한 시어에서 여러 감정을 전달했다는 점이다.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이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을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이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박목월, 「이별가」 전문 이 시의 특징은 언술방식이 대화체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청자가 없는 독백체이지만 단순한 독백이 아니다. 상대가 바로 눈앞에 있듯이 말을 붙여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점은 '뭐락카노'와 '오냐'의 대화 반복을 통해 죽음을 수용하고자 하는 시적 화자의 태도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 시에서 '뭐락카노'는 8차례에 걸쳐 나타난다. 1연과 3연, 5연, 8연에 사용된 '뭐락카노'는 경상도 성조를 사용해 같은 단어이지만 충격적 죽음에 대한 부정, 죽음에 대한 푸념, 죽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체념, 어느 정도 마음의 평정을 얻은 후 죽음을 납득하고자 하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표현해낸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단순히 사투리의 어휘나 종결형 어미를 활용해 시를 짓는데 반해 박목월 시인은 경상도 사투리의 특징인 성조를 통해 시적 주체의 감정을 표현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좋은 문학은 내용과 형식이 완전히 밀착된 상태를 꿈꾼다. 향토성을 담은 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투리만 쓴다고 향토시가 되는 일이 아니고, 향토의 풍물이나 인물을 찾아 그려낸다고 좋은 향토시가 되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질과 성정을 제대로 품어야 경상도 시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문학의 재료인 언어와 사투리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글 장옥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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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4,14-19

나 요한이 14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셨는데,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들고 계셨습니다.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에서 나와,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16 그러자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셨습니다.

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왔는데,

그도 날카로운 낫을 들고 있었습니다.

18 또 다른 천사가 제단에서 나왔는데, 그는 불에 대한 권한을 지닌 천사였습니다.

그가 날카로운 낫을 든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 날카로운 낫을 대어 땅의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들을 거두어들이십시오.

포도가 다 익었습니다.”

19 그러자 그 천사가 땅 위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들이고서는,

하느님 분노의 큰 포도 확에다 던져 넣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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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5-11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또는, 기념일 독서(지혜 3,1-9)와 복음(마태 10,17-22)을 봉독할 수 있다.>

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The destruction of the temple foretold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것을 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인데, 그때에 하늘에서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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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사도는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낫을 들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는 것과, 천사가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느님 분노의 큰 포도 확에 던져 넣는 것을 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라며,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사칭하고 전쟁과 지진과 기근, 큰 표징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종말에 대한 성경 말씀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언급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는 내용을 전하는 이들인데, 그들이 종말 때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거짓 예언자들의 그릇된 예언을 경고합니다. 참된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는 선포하는 말씀이 실현되는지 여부에 따라 구분됩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종말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종말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오는지에만 관심을 둡니다. 어쩌면 두려움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인지도 모릅니다. 말 그대로 이 세상의 끝을 뜻하는 종말을 성경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소개합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지진과 전염병이 생겨나며, 하늘에는 표징들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표현으로 종말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고 구원의 완성을 나타내기도 하기에, 두려움의 시간만이 아니라 희망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올 종말을 준비하기보다는 ‘지금’ 종말처럼 살아야겠습니다. 신앙인들은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미래에 있을 종말에 대비하여 삶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마치 종말의 때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에게 ‘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종말에 관한 말씀은 우리가 현재의 삶에 좀 더 충실하도록 초대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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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받는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의 종말은 그다지 멀지 않은 사건으로 여겨졌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님 재림의 희망이 가득 찼고, 죄악과 죽음에 대한 그분의 궁극적 승리의 선포는 박해를 견디고 신앙을 지키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 전쟁과 반란, 큰 지진, 기근과 전염병 등의 표징들이 나타날 것을 예언하신 말씀을 떠올리던 제자들에게 세상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은 곧 완성될 세상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박해의 상황은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교회가 로마 제국에 선포되면서 끝났고, 어떤 교부들은 이것이 예수님 복음의 승리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2천 년의 역사 속에 교회는 다시 세속의 질서에 편입되어 복음의 순수성을 잃고 권력과 결탁하여 부패의 온상이 되기도 하였고, 중세 말 마르틴 루터는 종교 개혁 당시 교회 권력에 탐닉한 교회 지도자들과 이를 둔 투쟁의 상황을 세상 종말의 표징으로 보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세기말의 종말론과 시한부 종말론, 요한 묵시록을 재해석해서 재림 예수를 자처하는 수많은 이단들이 교회를 위협하고 신자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낫과 불로 나타난 하느님의 분노는 진리를 왜곡하는 이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형태의 박해와 교회 분열의 시도, 인간이 신이 되고 싶어 하는 과학적 무신론의 흐름은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은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완성이고 종결이며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의 선포입니다. 언젠가 맞이할 우리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보다 하느님 안에서 완성될 생의 희망을 기억하고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임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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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성전을 보고 감탄하는 이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십니다. 성전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표징이고, 우리 구원의 상징이지만, 외관만을 갖추고 내면이 비어 있다면, 그 성전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그 운명은 결국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며, 전쟁과 기근과 자연재해가 이어지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붕괴되고 전통과 관습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종말은 늘 우리에게 먼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다가옵니다. 

역사적 혼란의 시기에 늘 새로운 세상의 방향을 알려 주는 예언자들과 시대의 징표들이 있었지만,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예수님의 오심으로 새롭게 알게 된 종말은 새로운 출발이며, 동시에 멸망이 아닌 완성입니다. 그래서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희망이 되며, 그리스도인을 움츠러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직접 살아가게 만듭니다. 

세상 안에 있는 많은 존재들이 자신의 진짜 모습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껍질로만 살아가는 경우를 봅니다. 우리가 고대하고 기다리는 하느님의 나라는 모두가 참나를 찾고, 진정한 자아를 충만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완성인 종말도, 그리스도인의 목표인 하느님의 나라도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첫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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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마지막 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언뜻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지 자세가 요구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때가 온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촉구하시며, 또한 그때가 왔음을 알린다고 하는 요란한 말과 기이한 표징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는 서로 어긋나 보이지만 함께 지녀야 할 이러한 자세를 묵상하며 진정한 종말론적 삶의 두 차원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종말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은 현세의 흐름과 옛 질서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진지하게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믿고 바라는 가운데 닥쳐오는 고난과 시험을 이겨 내려는 결연함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종말론적 삶이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 뿌리내린 삶입니다. 일상생활에 충실하며 종말론적 희망을 ‘선취’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세상과 우주의 완성에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사건이라 할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세상과 세상에서 얻는 행복에 모든 관심을 두기보다는 죽음 뒤 주님과 마주할 영원한 행복에 더 큰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언젠가 사라질 현세의 삶이 지닌 소중함을 깊이 깨닫고 감사하며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참된 종말론적 희망은 역경과 진부함이 지배하는 일상 속에서도 우리를 더욱 생생하고 빛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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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진실은 덮이고 거짓이 판을 칩니다. 권력과 명예와 재물이 숭배를 받을수록, 진리와 사랑과 정의와 평화는 가려지고, 가짜와 사기가 판칩니다.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진리와 진실, 정의와 평화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대신에 재물과 권력과 명예 따위가 그 자리를 차지하니, 더불어 가짜와 사기와 중상모략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거짓말쟁이이고, 가짜이며, 사기꾼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겉모양만 보고 그들을 따라나섭니다. 휴거니, 종말이니, 재림이니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짜처럼 흉내를 내었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들 뒤를 따라가다가 낭패를 당하였습니까?

종말, 곧 주님의 날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의 날은 이미 시작되었고, 장차 주님께서 오시는 날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종말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종말은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믿음이 깊은 이들에게는 주님을 만나 뵙는 기쁜 날이지만, 가짜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슬픔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가짜 그리스도와 권력과 명예와 재물에 현혹되지 말고, 참그리스도를 만나 뵐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주님의 자녀답게 성실한 마음으로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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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거짓된 가르침이 난무할 것이고, 또한 전쟁과 반란, 큰 지진, 기근, 전염병뿐 아니라 천체의 재앙들도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40년이 지난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그 당시 죽은 사람들의 수가 백십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나, 학자들은 이 숫자가 과장된 것이라며, 대략 팔만 명의 희생이 있었다고 봅니다. 

어 쨌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무렵 예수님의 말씀대로 대규모의 학살과 약탈, 기아 등이 있었고, 인근 18킬로미터 이내 지역의 무분별한 벌목으로 예루살렘은 황폐화되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역사 안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예고를 하셨던 것일까요?

그 당시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앙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지금까지 해 오던 신앙생활의 방식이 무너진다는 것을 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파괴의 예고를 통하여 성전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곧 지금까지 해 오던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의 방식이 사라지고 새로운 방식의 신앙생활이 온 것입니다. 그 새로운 방식이란 예수님을 중심으로 삼는 신앙생활입니다. 다시 말해, 성전의 시대가 지나고 예수님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제자들에게 알리심으로써,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가 성전 파괴가 오더라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교회는 성전의 시대가 아니라 예수님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을 우리의 성전으로 삼아 그분의 돌아가심을 성전의 파괴로, 그분의 부활을 영원한 새 성전의 재건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신부님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올해 처음으로 본당 신부를 나간 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본당 신부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저의 의도를 알고 좋아할 줄 알았는데,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저도 사랑만 받는 신부가 되고 싶은데, 그렇게 인기만을 추구해서는 사제 양심상 도저히 그럴 수 없네요. 너무 힘들어요.”

그러자 어느 선배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환영받는 사람은 딱 한 부류밖에 없어. 바로 사기꾼이야. 사기꾼은 자신의 사기 의도가 노출되지 않게 하도록 모든 이에게 환영을 받도록 만들거든. 그래야 사기를 치지. 너 사기꾼이 되고 싶어? 아니지? 그러면 딱 30%의 지지만을 목표로 살아. 그 정도로도 잘 사는 거야.”

어느 책에선가,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은 30%, 싫어하는 사람도 30%,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이 40%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100%의 지지는 예수님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100%의 지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요구를 채우지 못해서 아프고 힘들다고 말합니다. 100%의 지지는 사기꾼만 가능한데도 말이지요.

오늘 복음의 장면은 성전에서의 마지막 설교에 관한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성전을 보며 감탄의 이야기를 하자, 주님은 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와 함께 세상의 멸망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처음부터 세상 종말에 관해 이야기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생활 중에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셨고, 그 표징으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과 같이 강력한 말씀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라면서 자신의 변화보다 놀라운 표징을 보고 싶은 욕심만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아마 30%의 지지도 없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몇몇 사람만이 예수님 곁에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모든 이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사기꾼과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지했던 종교지도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에게 유익한 생각만을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하느님 말씀보다 인간이 쓴 글을 강조하면서 거의 모든 이의 지지를 끌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거짓 예언자의 모습일 뿐입니다.

사기꾼이 아닌 참 그리스도를 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더는 사기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비난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노력한 게 스스로를 감동시킬 정도가 되어야 그게 정말로 노력하는 것이다(조정래).

진실한 이야기

화려하고 매력적인 옷을 입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지요. 그녀의 옆에 또 다른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도 매력적이지만 초라한 옷을 입고 있는 그녀에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초라한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으니 나눠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에게 옷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은 흔쾌히 허락했고, 초라한 옷을 입고 있던 여인 역시 화려한 옷을 입고 함께 거리를 나갔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두 여인 모두에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초라한 옷을 입고 있었던 가난한 여인의 이름이 진리(truth)라 하고, 처음부터 매력적인 옷을 입은 여인의 이름은 이야기(story)라 한답니다. 즉, 이야기는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숨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진리 역시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숨입니다. 바로 이때, ‘진실한 이야기’(true story)’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세상에 밝히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선포만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선포 전에 이야기(story)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진리에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에 나의 생활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모든 행위가 담겨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혹독한 고통은 영원한 나라를 보다 적극적으로 준비하라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직까지도 교회 교도권에 대한 철저한 불순명과 황당무계한 교리, 유치찬란하면서도 이상야릇한 현상을 강조하며, 점점 더 보편 교회와 멀어져가고 있는 한 단체를, 공동체 형제들과 함께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외치는 것이 치유요 기적이더군요. 모든 가르침이나 간증의 전개 방식은 대동소이했습니다. 중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였다. 절망과 두려움 속에 오늘 내일 하고 있던 중, 은혜롭게도 그분을 만나뵙게 되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던 중, 강렬한 한 줄기 치유의 빛이 내게 다가왔다. 갑자기 끔찍했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박수와 함께 아멘!) 들어올 때 타고 왔던 휠체어는 필요없게 되어 내 발로 걷어 차버렸다! (아멘!)

제대로 걷지도 못했었는데 덩실덩실 춤을 추며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었는데, 주치의 선생님께서 깜짝 놀라시며 하시는 말씀! 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함성과 함께 아멘!)

나약한 한 사람을 철저하게도 신격화시키고 우상화시키며 교회 분열을 획책하고, 교묘한 방법을 총동원해서 선량한 교우들을 현혹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경고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복음 21장 8절)

물론 매일같이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 사람들, 불치병이나 병이 깊어감에 따라 백약이 무효인 사람들에게 있어 치유라는 것, 너무나 달콤하고 큰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여기 저기 나대고 있는 사이비 교주들은 이런 우리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심각한 병고로 인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혹독한 고통, 기도빨이 센 누군가를 만나 순식간에 치유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경우는 로또 맞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갑작스레 찾아온 병고 앞에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노력을 하는게 정답입니다. 첨단 의학의 도움을 받아, 빨리 원인을 찾아야겠습니다. 병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파악해야겠습니다. 전문성을 지닌 의료진들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고, 적극적인 치료와 함께 슬기로운 투병생활을 시작해야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치료 과정에서 신앙은 큰 도움을 줍니다. 난데없이 찾아온 병고를 수용하지 못하고 억울해 하며 밤낮없이 울부짖고 있는다면, 병세는 더 깊어질 것입니다. 병상에서 보다 열심히 기도하며, 모든 것을 주님 손에 의탁하고 마음 편히 지낼 때, 반드시 좋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을 크게, 낙관적으로 먹고, 이왕 다가온 병고를 친구처럼 맞아들이며, 어떻게 하면 잘 다스릴까 고민하고, 의료진들의 권고에 따라 최선을 다해 성실히 환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노력이 곧 치유의 기적을 불러올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전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메시아임을 자처하고 등장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마지막 예언자라고 외쳤습니다. 기원후 44~45년경 로마 총독 시대에는 테우다스라는 사람이 나타나 한 바탕 난리를 쳤습니다.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 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명 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사도행전 5장 36절)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한번 당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워낙 교묘하고 달콤해서 진의를 식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그럴듯 하게 자신을 포장합니다.

따라서 어딘가를 갔는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고 애매할 때는 즉시 사목자들의 의견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에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 묵시 문학은 세상 끝날을 꽤나 무시무시하게 표현합니다. 전쟁과 반란, 파괴와 질병 등 참담한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 그와 유사한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한 가지! 전쟁과 반란, 파괴와 질병 같은 대참사들도 크신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겪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질병이 곧 종말의 징조는 아닙니다. 참혹하고 끔찍한 일이지만 이 또한 다 지나갑니다. 그런 혹독한 고통은 다가올 영원한 나라를 보다 적극적으로 준비하라는 하느님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칼이 무뎌지면 적이 활개를 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도 역시 종말에 관한 말씀이십니다. 몇몇 사람이 성전의 화려함에 대해 말합니다. 이는 내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외적인 화려함에 사람들이 집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성전이 멸망하는 과정이 세상의 멸망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표징은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큰 자연의 재앙이 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재앙을 넘어 하늘의 무서운 일들과 표징들이 일어나면 그때가 마지막입니다.

온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성전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외적으로는 화려하겠지만 하느님을 버리게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과정에서 무엇이 먼저 일어나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려주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스도는 ‘진리’이십니다. 이 말은 세상과 교회 안에서 먼저 진리가 흐려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명확한 진리를 알려주고 있지 못하면 교회는 물론이요, 세상도 거짓 그리스도들에게 속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진리가 흐려져 무엇이 진리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 그때 전쟁도 잦아지고 자연재해도 잦아질 것입니다. 

1992년 9월 11일 추석, 경상남도 마산에서 조상님 산소에 갔다가 내려오던 한 사람이 고압선 철탑에 무언가 매달려있는 것을 봅니다. 30대 젊은 여성이 목을 매어 자살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쓴 유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0월 28일을 앞두고 세상 살기가 싫어졌어요.”

인천의 한 산부인과에서 또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산부인과 의사가 30대 임산부를 설득 중이었습니다. 낙태 수술을 하겠다는 여인을 말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10월 28일에는 아이가 있으면 안 돼요. 무거워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거든요.”

이번엔 군포에서 엄마, 아빠와 삼 남매가 한꺼번이 사라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10월 28일이 되면 이런 것들은 아무 필요가 없어져요”라고 하며 집안의 모든 가재도구를 친척들에게 나누어주고 어디론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데에는 한 목사가 쓴 책이 주요했습니다. 성산동 ‘다미선 교회’의 ‘이장림 목사’이고 그가 쓴 책이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였습니다. 휴거 이후 7년 대환란(3차대전과 대학살)으로 50억 명이 고통 중에 죽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1999년 인류의 멸망을 말한 것에 빗대어 7년 환난이 시작되는 때는 1992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셔서 십억 명을 하늘로 들어 올릴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도들은 이 예언이 맞는다는 꿈을 꾸어 간증하였습니다. 여기저기 교회들이 이 예언에 가세하기 시작하며 약 10만 명의 개신교 신도들이 1992년 10월 28일 24시에 휴거되기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이장림 목사의 책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종말을 위한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모르는가?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도 구원받을 기회를 놓친다면 그것은 당신의 책임일 것이다.”

10만 명이란 인원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정부는 이장림 목사를 잡아들였습니다. 그의 통장엔 신도들이 낸 돈 약 34억 4천만 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자발적으로 신도들이 낸 것이기에 그것으로는 기소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사기 혐의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그의 집에서 채권이 발견되었는데 만기일이 1993년 5월 22일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이장림 목사는 그것은 자신은 휴거가 되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기에 이 환란의 때에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활동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증거로 그에게 사기죄가 적용되어 구속되게 됩니다.

이것으로 사람들이 휴거를 믿지 않게 되었을까요? 더 많은 신도가 교회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예언자라 믿는 이가 박해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미선 교회에서는 휴거 되는 사람들에게 출입증을 주어 그 사람들만 흰옷을 입고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수많은 인파와 기자들이 다미선 교회에서 휴거가 일어나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현재 이장림 목사는 이름을 바꾸고 어디선가 또 교회를 이끌고 있다고 합니다.

[출처: ‘10만 명을 겁에 떨게 한 증발 사기극’, 꼬꼬무 6화, 유튜브 SBS NOW] 

이장림 목사의 주장에 기름을 부었던 사건은 1991년 초에 일어났던 걸프전이었습니다. 최초로 TV로 생중계되는 전쟁의 참상은 많은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그런데 1992년 10월 28일 자정에 이장림 목사는 감옥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합니다.

악의 세력을 알아보는 것은 단순합니다. 분명 그들은 진리를 말한다고 하면서도 돈을 추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성전이 금으로 되어 있고 귀한 돌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자랑했던 것과 같습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면 진리의 칼은 무뎌집니다. 그러면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고 더불어 수많은 자연재해와 전쟁, 사건·사고의 소식이 들릴 것입니다. 누군가 나의 칼이 무서워 덤비지 못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무도 자를 수 없는 무딘 칼이라면 마구 덤벼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의 환란 전에 가짜 그리스도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라고 하신 이유는 이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칼이 무뎌질 때 악의 세력들이 넘쳐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들이나 사이비들의 교리에 속아 넘어갈 것을 걱정할 정도로 교리 지식이 얇아졌을까요? 우리 교회의 진리의 칼이 무뎌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두려워 떨기 이전에 나의 칼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어떤 공격도 두렵지 않은 말씀과 교리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과 세상을 위해 지금 회개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남이 휘두르는 칼에 겁먹지 말고 내 칼이 날카로운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14년에 ‘왕가네 사람들’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습니다. 건전한 가족드라마였습니다.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데 극중 할머니가 가족들에게 하던 대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6.25를 겪은 사람은 5백만 명이 안 될 정도입니다. 90%이상의 국민은 6.25 이후에 태어났습니다. 저도 6.25가 끝나고 10년 뒤에 태어났습니다. 할머니께서는 6.25의 참상을 다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가족들이 함께 지내면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를 6.25 때의 난리와 비교합니다. 과장된 면이 있지만 할머니는 요즘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2020년 코로나를 겪으면서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박해 중에도 있었던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교회의 가장 거룩한 전례인 사순과 부활을 교우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있는 미국도 가장 많은 확진자가 발생하였고, 한국에서 안부를 묻는 전화를 받아야 했습니다. 유럽은 확진자가 증가하면서 제2의 코로나가 시작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생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스크 착용이 일상이 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닌 코로나19가 사라질 수 있도록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면 좋겠습니다. 

지구의 역사는 40억년이 넘는다고 합니다. 생명의 역사는 30억년이 넘는다고 합니다. 30억년 생명의 역사에서 5번의 ‘멸종’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성의 충돌, 지진과 화산 폭발이 멸종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빙하기와 같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명이 멸종되었습니다. 90% 이상의 생명이 멸종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 생명의 멸종은 다른 생명에게는 기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공룡이 멸종되면서 지구는 포유류의 세상이 되었고, 포유류의 한 종인 인간이 출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매년 5만종 이상의 생명이 멸종되고 있다고 합니다. 멸종의 원인이 인간인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코로나19는 인간과 다른 생명이 서로 공존하라는 자연의 경고라고도 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이른 새벽을 볼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축복입니다. 그것은 매일 부활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빛이 밝아오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른 아침에 1시간을 기도하는 것은 하루를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어둠이 아무런 조건 없이 아침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을 봅니다. 기꺼이 비울 수만 있다면, 나눌 수 만 있다면 하루의 끝이 아쉬울 것 없습니다. 삶의 끝도 걱정될 것이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가는 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걱정 때문에 지금 기쁜 마음을 날려 버리지 마십시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별로 없으니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다만 오늘을 충실하게 살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미 지나간 과거로 기억 될 것입니다. 오늘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남게 될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적극적 대결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성전이 허물어지고, 전쟁과 반란이 일고, 민족과 민족이 맞서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고, 지진이 생겨나고 기근과 전염병이 생겨나고, 이로써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두려움이 견딜 수 없는 공포로 다가온다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울까? 까무러치고 말 것이다. 심약자들은 무대책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서워하지 말라, 그것이 끝이 아님을 명심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종말같은 큰 표징을 보게 되더라도 ‘피하지 말라’ 이르신다. 살아가며 나는 두려움과 공포가 언제나 있었다. ‘엄마 나 어떡해!’ 이거 엄마가 해결해 줄 일이 아니다. 그것에 내가 직면해서 극복하고 이겨내야 한다. 그렇다면 최악의 상황에서 승자는 누구일까? 자신 안에 생겨난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낸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신앙에서 비롯된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21,8)

나약할 때 우리는 용하다는 사람에 기대서 방법을 찾는다. 현혹되고 그 사람에게 기대기 사작한다. 심약한 소인이 될 뿐이다.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 허는가? 그분께서 용하니 기대서 살려고? 그것은 아닐 것이다. 최악이 너에게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런 표징이 나타나더라도 나는 두려움과 공포에 직면하고, 승자가 될 고개를 넘어야겠다는 적극적 믿음이 내 안에서 밖으로 생생이 솟구치기 위함이다. 이때 나는 적어도 두려움에서 벗어나 초연해질 수 있고 지속되는 두려움도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종말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종말의 표징이 나타나더라도 끝이 아니다’(루카21,9참조)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는 사람이어야 그리스도인으로 빛이 난다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다... 재난의 시작 ... 주해

김대군 베네딕도

루카복음에는 종말론 두 편이 있는데 17,20-37은 어록의 종말론을 옮긴 것이고, 21,5-36은 마르 13장을 옮긴 것이다. 그런데 루카 21,5-36에는 마르 13장에 없는 요소(18.21ㄴ.26.28.34-35절) 또는 그와 다른 요소 (15-16. 25ㄴ36절)가 상당히 많다. 루카는 마르 13장을 곧이 곧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말관에 따라 수정,가감했다 하겠다. 

66~70년 유다인들은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1차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70년 8월 29일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불태워 버림으로써 독립전쟁은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마르코는 70년 참변 이전에 복음서를 집필한 것 같다. 그는 예루살렘과 성전 파괴를 예감,예고하면서 그 끔찍한 참변이 일어난 다음에는 곧 역사의 종말이 닥칠 것이라고 했다(13,14-23). 그러니까 마르코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종말의 전조로 보았던 것이다. 

마르코와는 달리 루카는 70년 참변 이후 10여년이 지나서 80년경에 복음서를 집필했다. 루카는 그 참변을 한낱 역사적 비극으로 보았지 종말의 전조로 보지는 않았다(20-24절). 또한 루카는, 구약성서(22절)와 예수님(20-24절)이 그 참변을 예언한 바 있는데 실제 그대로 되었다고 보았다. 

성전 파괴 예언(5-6절)은 마르 13,1-2를 옮겨쓰면서 약간 고친 것이다. 마르코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성전을 떠나 (13.1)이 예언을 하셨는데, 루카는 이를 고쳐 계속 성전에서 예언하셨다 한다. 또한 마르코에 의하면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성전 건물에 대해 탄복했는데 루카는 막연히 어떤 사람들이 탄복했다 한다. 

예언의 내력과 내용은 마르코복음을 보자. 예루살렘 파괴 가운데 ”네 안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루카 19.44ㄴ)라는 예언은 성전 파괴 예고와 일치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성전 파괴를 예고한 것처럼(미가3.12; 예레 26.6.18)예수님도 실제로 성전과 예루살렘 파괴를 예고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유다인들은 이 예고를 일부러 왜곡하여 마치 예수 친히 성전을 파괴하겠다고 공언하신 양 선전했다(14. 48: 15.29). 70년 8월 29일 성전이 타버리고 벽만 남았는데, 그 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명에 따라 벽마저 허물어 버렸다. 

7절의 질문은 마르 13,3-4를 옮긴 것인데 마르코에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아가 은밀히 예수께 여쭈어 본다. 7절의 ”이런 일들“은 명시적으로는 성전 파괴를 뜻하나(5-6절) 함축적으로는 ”종말“도 뜻하겠다(9절) 

21,8-19는 루카가 마르 13,5-13을 베끼면서 더러 수정. 가감한 것이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우선 거짓 그리스도들을 조심하라고 한다(5-6). 마르코복음 집필 무렵에 그리스도로 자처하는 무리가 나타나 이미 종말이 닥쳐 재림했노라고 떠벌리며 그리스도인들을 현혹시켰다(2데살 2. 2.3ㄱ참조) ”또 ‘때가 닥쳤다“할 터인데 여러분은 그들을 따라가지 마시오”는 루카의 가필. 

루카는 “전쟁과 전쟁 풍문”(마르 13.7)을 고쳐 “전쟁과 발란(풍문)”이라 한다. 아마도 여기 반란은 68-70년의 로마 황제 계승을 둘러싼 내란과 66-70년의 유다 독립전쟁을 가리킬 것이다.

11절은 “곳곳에 지진이 일어나고 기근이 들 것입니다”(마르 13.8ㄴ)를 확장한 것이다.

<회개하라는 경고>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34주간 화요일>(2020. 11. 24. 화)(루카 21,5-11),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1)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실 때,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은 없애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전이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라는 말씀을, 허례허식으로 가득 찬 예배는 종식될 것이라는 예고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2) 하느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언젠가 종말이 완성되면 모두 소멸될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랑하는 문화, 문명, 학문, 예술, 과학 기술 등도 모두 그렇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느님 뜻에 합당한 것은, 즉 참되고 선한 것은 모두 남아 있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8-9).”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21,10-11).”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짜 메시아와 종말론자들의 등장,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어떤 천문학적 현상들은 ‘종말의 표징’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늘 있었던 재난들입니다. (‘종말의 표징’은 아니고, 회개하라는 경고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사이비 종교의 주장에 현혹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인데,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들이 ‘재림 예수’ 라는 주장과 종말에 관한 주장입니다. 지난 이천 여 년 동안 그런 주장을 하는 사이비 종교가 끊임없이 등장했다가 사라졌고,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재림의 날’에 관해서,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루카 17,2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번개가 치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누가 그것을 알려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저절로 그것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재림하시는 모습에 관해서는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루카 21,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떨치면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 누구나 그분이 심판관으로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다.” 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고, “오늘이 바로 ‘재림의 날’이다.” 라고 알려줄 필요도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그리스도다.’, 또는 ‘내가 재림 예수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백 퍼센트 가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이 언제인가?”에 관해서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마태 24,36).” 라고 말씀하셨고, 또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4,50).

‘재림의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미리 계산하거나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들 마음대로 종말의 날짜와 시간을 계산해서 말하는 종말론자들의 주장은 백 퍼센트 거짓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어떤 천문학적 현상들을 겪으면 흔히 “종말의 징조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종말의 징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우선 먼저 회개부터 하는 것이 당연한데, 회개는 하지 않고 피하려고만 하고, 달아나서 숨으려고만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의 심판을 피해서 숨으려고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회개하지 않는 것이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다가 그런 일들이 지나가고 나면, “종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라고 안심하고, 그러면서 방심하고, 마음이 풀어져 버립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계속 그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재난들이 종말도 아니고, 최후의 심판도 아니고, 종말의 징조도 아니지만, 바로 그런 재난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들에게는 그 일이 사실상 종말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3-15).”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느님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연기처럼 사라지는 허무한 존재일 뿐입니다. 반대로, 하느님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면, 하느님과 함께 참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영원한 존재가 됩니다.>

“전 지구적인 대재난들이 종말의 징조는 아니다.”, 또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같은 말을 듣고서 “종말이 곧 닥치는 것은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생각은 오해이고 착각일 뿐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모른다는 뜻일 뿐입니다.

오늘이 그날일 수도 있고, 내일이 그날일 수도 있습니다. 대재난들이 종말의 징조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바로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하느님가족들을 괴롭히는 악의 세력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사람이 해 놓은 여러 일들이 사람들에 의해 무너지는 날들 이어집니다.

세우는 사람 부수는 사람 만드는 사람 망치는 사람 가지가지 많습니다.

언제 부수고 망치는가는 교만 거만 독재가 설칠 때면 바로 그리됩니다.

거만 교만 독재 이기주의가 자기를 신의 자리까지 올려놓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못된 인간이 신처럼 굴며 하느님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죠.

공산주의 독재뿐 아니라 하늘 뜻을 어기고 산다면 누구나 그리 됩니다.

지금도 하느님 가족처럼 사는 사람들을 상대로 악의 세력은 활동합니다.

그러니 속는 일없도록 조심하고 그들 뒤따르지 말고 예수님만 따릅시다.

순교자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한다.

성 바오로 레바오틴이 1843년에 케빈 신학교 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Launay A.: Le clerge tonkinois et ses pretres martyrs, MEP. Paris 1925, pp.80-83)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묶여 있는 나 바오로가 날마다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알림은 여러분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불타 올라 나와 함께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이 감옥은 영원한 지옥에 비길 만하니 족쇄, 쇠사슬, 포승 등 온갖 종류의 잔인한 형벌과 더불어 미움, 복수, 비방, 폭언, 불평, 악행, 거짓 맹세, 저주와 궁핍과 근심 등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옛적에 세 소년을 불가마에서 구원하신 하느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시면서 나를 이 고난에서 구하시고 이 고난을 달게 받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는 이러한 형벌 가운데서도 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기쁨과 즐거움에 넘쳐 있으니,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그분은 그 무거운 십자가를 전적으로 지시고 나에게는 겨우 한쪽 끝부분만 지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나의 싸움을 구경만 하시지 않고 친히 싸우시고 승리하시며 모든 번민을 이기십니다. 그 까닭으로 그분은 머리에 승리의 관을 쓰셨으며 그분의 지체들은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케루빔과 세라핌 위에 앉아 계시는 주님, 황제와 그 관리와 신하들이 날마다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모독하는 광경을 보면서 제가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보십시오. 주님의 십자가는 이방인들의 발에 짓밟히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이 모든 것을 보면서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불타 차라리 사지가 찢겨 죽어서 그 사랑을 증거하기를 열망합니다.

주님, 주님의 권능을 보여 주시고 저를 구원하시며 붙들어 주시어 제 연약함 안에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주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행여나 제가 고난의 도정에서 비틀거려 원수들이 거만하게 머리를 쳐들지 못하게 하여 주소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을 듣고서 만선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기쁨 가운데 끊임없이 감사드리고 나와 함께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이다.”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뭇나라 백성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온 세상 사람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하느님은 세상에서 연약한 이들을 뽑으시어 힘을 주시고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이들을 뽑으시어 들어 높이셨음이로다. 주께서 나의 입과 지능을 통하여 이 세상 지혜로운 이들의 제자들인 철학자들을 혼란에 부끄럽게 하셨도다.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과 나의 믿음을 일치시키려는 것입니다. 나는 이 폭풍우 가운데서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의 옥좌에 희망의 닻을 던집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의 수호자 성 바오로께서 가르치신 대로 여러분은 힘껏 달려서 월계관을 얻도록 하십시오. 믿음의 갑옷을 입고 오른손과 왼손에 그리스도의 무기를 드십시오. 한 눈이나 불구의 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온전한 몸으로 밖에 버려지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당당하게 싸우도록, 훌륭하게 싸우고 끝까지 싸우며 달릴 길을 다 달리도록 기도로 나를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보지 못할지라도 후세에서는 흠 없는 어린양의 옥좌 앞에서 승리의 기쁨에 넘쳐 한마음으로 영원토록 그분을 찬양하는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세상 종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

몇몇 사람이 성전 외양을 보면서 감탄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용을 충실히 보여주기 위해서 외형을 갖추는 것도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내면에 있지요. 우리가 감탄하고 경외하며 찬양해야 할 존재는 성전 건물이 아니라 성전 안에 계신 분이십니다.

육적 감각에 의존해 사는 이들은 감각을 통해 들어온 겉모습에 묶여 그 안으로 들어가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의 본질을 만나려면, 사물과 사건 표면에 그려진 정보에 매이지 않고 그 외피를 관통해 들어가서, 그 안에 새겨진 본질을 직면해야 합니다. 영적인 시각은 본질을 보면서 다듬어지고 향상되어 갑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 무서워하지 마라."(루카 21,8-9)

뭇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던 성전의 호화로운 장식들이 다 허물어진다고 하시니, 사람들이 놀라서 그때가 언제인지, 무슨 표징으로 알 수 있는지 여쭙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에 대한 즉답이 아니라, 그들이 그때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권고하십니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재해, 증오와 폭력이 부른 전쟁, 그리고 생명과 관계를 파괴하는 전염병이 삶의 외연을 깨뜨릴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위험은 영혼을 속이고 기만하고 절망으로 이끌려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악입니다. 하느님께서 섭리 안에서 준비하신 일을 인간 힘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평생을 사랑하고 믿어 온 주님께 충실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추수와 수확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묵시문학에서 곡식이나 열매의 추수와 수확은 종말에 이루어질 일을 뜻합니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묵시 14,15)

"포도가 다 익었습니다."(묵시 14,18)

그때는 주님 보시기에 세상이 무르익은 때일 겁니다. 인간의 선업과 덕행의 열매도 익어가지만, 죄악과 탐욕도 함께 농익어 곪을 지경에 이르렀을 겁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낫을 대실 수밖에 없는 순간이 된 겁니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 모두 기뻐 뛰어라. ... 모두 환호하여라. ... 그분이 오신다. ...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화답송)

그저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종말의 장면이 독서에서 펼쳐지는데, 그에 대한 시편저자의 응답은 이처럼 기쁘고 환희 넘칩니다. 독서와 화답송의 이 상반된 분위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의 화답송 시편은 종말이 파괴, 심판, 징벌과 함께 닥치리라는 글자들의 외피를 뚫고 들어가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마지막 날은 이 모든 것들로 분명 두렵고 혼란스럽겠지만,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서 껍질들은 허물어지고 무너지고 사라져야 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날은 우리가 지상 삶의 지난했던 마라톤을 마치고 사랑하는 주님을 해후하는 사랑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또 온갖 부조리와 불공정이 판을 치던 이 세상에 비로소 주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경사롭고 축복 가득한 날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겉꾸미던 모든 허세와 장식, 가면들은 벗겨지고 진정 알맹이만 남겠지요. 고이 간직하고 정성껏 닦아 매만지며 아름답게 피워온 영혼의 정수가 맑고 밝게 빛을 내면, 주님은 우리를 한눈에 알아보실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영혼의 본체이신 그분 안으로 익숙하게 잠겨 들겠지요.

기후변화, 코로나19 전염병, 차별과 폭력의 문화가 우리 문턱까지 들이닥친 요즘입니다. 그동안 미덕으로 알고 누리던 좋은 문화들을 잠시 멈추고 새 패러다임에 적응해야 하는 혼돈의 때이기도 하지요.

이 동요와 어둠을 틈타, 분열과 두려움을 조장하는 온갖 소문과 위협이 존재를 흔들려 다가오더라도 관심을 주지 않아야 합니다. 어차피 오게 되어 있는 그날은 반드시 올 것이니까요. 악은 우리의 두려움을 먹고 커가니,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조심하여라, 따라가지 마라. 무서워하지 마라" 하시는 주님 목소리를 기억하고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하실 일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면서 시편저자와 함께 기쁨과 설렘으로 주님을 기다리면 좋겠지요. 이렇게 주님의 날을 기다리며, 우리의 한 해도 마무리가 되어 가는 중입니다. 새해를 기다리는 이 마지막 한주간이 내면을 정화하고 튼튼히 다지는 시간 되시길 축원합니다.

종말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

정성윤 베드로 신부님

많은 이들이 ‘종말=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도식을 자연스럽게 떠올립니다. 그래서 종말 이후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완전무결한 유토피아처럼 여기곤 하지요.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통치권을 받아들이는 이,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여전히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이 있고 또 세상의 부조리에 희생당하고 불의에 상처받는 이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생을 바친 이들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들이 지금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방증일 것이며 종말의 표징 속에서도 희망을 둘 수 있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해 거짓 예언자가 나타나고, 전쟁과 재앙이 존재하는 이 세상도 종말의 과정이며 그 안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가는 순간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표징이 가져오는 세상의 혼돈처럼 하느님 나라의 존재에 의구심이 드는 순간에도 사랑이신 하느님의 뜻이 더 머무는 세상을 믿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여 종말의 표징이 두려움을 주는 것과는 반대로 거짓 속에서 참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온갖 재난과 고통에서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삶을 사는 ‘내’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존재한다는 또 다른 표징이 되기를 희망해봅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제가 인상깊게 본 영화 중에 <어바웃 타임>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시간여행’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겪는 삶의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매일 ‘지지고 볶는’,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상’이 얼마나 의미있고 소중한 것인지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이지요. 그 영화의 남녀 주인공은 ‘당 르 누아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에서 처음 만납니다. 그 레스토랑은 빛이 전혀 없는 완전한 ‘암흑’ 속에서 식사를 하는 독특한 컨셉으로 유명한 곳인데, 그들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에 서로 상대방의 목소리에만 온전히 집중하면서 오랜 시간동안 여러가지 대화를 나눕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어 연인으로 발전하지요.

상대방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면서 예전 ‘펜팔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그 시절 우리는 편지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을 줄 아는 참 감성적인 사람들이었지요. 그에 비해 요즘 젊은 세대들은 사랑을 함에 있어서 외적인 부분을 참 중요하게 여깁니다. 아는 사람의 주선으로 이성친구를 소개받으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그의 SNS를 찾아보면서 그의 외모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그 정도는 미리 확인해봐야 하는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외모가 내가 기대한 것 ‘이상’이든 ‘이하’이든 상관없이 어떤 식으로든 그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만든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 형성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몇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꾸며진 성전의 화려한 ‘외형’에 대해 감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성전이 완전히 허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들은 그 말씀을 앞으로 일어날 환난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환난이 ‘언제’ 일어나겠느냐고, 그런 환난이 일어나기 전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느냐고 묻습니다. 대상의 ‘본질’보다는 ‘겉모습’에 치중하는 그들이었기에 환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찾아내어 그런 슬픈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될 시기와 그 일이 일어날 것을 사전에 알아볼 수 있는 ‘전조’를 미리 확인하여 그 환난을 피할 생각만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환난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 환난이 초래하게 될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두번의 ‘전투’는 운 좋게 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가져올 참혹한 폐해는 그 나라에 속한 모두가 함께 짊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어야 했습니다.

“주님, 그런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저희가 지금부터 어떻게 노력하면 되겠습니까?”

그런 마음가짐을 지니고 하느님의 뜻에 깨어있는 모습으로 사는 사람은 종말이 닥쳐와도 파멸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당장은 큰 피해를 입게 되겠지만 정말 소중한 가치들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말이 닥쳐오면 그 때가서 대처하겠다는 안일한 마음으로 지금 가진 것을 지키려고만 하는 사람에게는 종말이 곧 파멸이 될 것입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것들에 집착하느라 정말 소중한 것들을 잃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겉모습이 아닌 마음을, 현상이 아닌 본질을 볼 줄 아는 지혜를 길러야 합니다.

‘삶의 아마추어’가 아닌 ‘삶의 프로’가 됩시다.  -한결같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삶의 프로, 삶의 성인’-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만추晩秋의 수도원 아름다운 하늘길 축복 선물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사랑하는 자매님(형제님)!”

어제 여러분들에게 보냈던 메시지와 더불어 황홀한 아름다움의 만추의 하늘길 사진입니다. 보이는 세상이 이렇듯 아름답다면 보이지 않는 우리 궁극의 미래인 하느님 나라는 얼마나 아름답겠는지요! 오늘도 피정중이지만 시간을 내어 못보낸 분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할 작정입니다.

‘곱게 늙기’는 피정 주제인데 참으로 곱게 늙기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만추의 아름다운 수도원 하늘길 풍경입니다. 빛과 단풍의 절묘한 조화가 빚은 하느님의 살아 있는 작품처럼, 우리 인생도 은총의 빛과 순리대로의 한결같은 삶이 조화를 이룰 때 ‘곱게 살고 곱게 늙다가 곱게 죽기’의 아름답고 고운 삶과 죽음의 인생이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삶의 아마추어가 아닌 삶의 프로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베트남의 순교자들,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를 포함한 117명 동료 순교성인들의 기념일입니다. 순교성인 현황은 베트남인 96명(사제37, 평신도 59), 외국인 21명(스페인 도미니코 수도회 출신 주교6, 사제5, 프랑스 외방 선교회 주교2, 사제8)입니다. 참으로 우리나라 가톨릭 교회의 박해 역사와 흡사한 역사를 가진 베트남입니다. 17세기에서 19세기 까지 3세기에 걸쳐 1만여명이 순교자들을 배출한 베트남 가톨릭 교회입니다.

참으로 잔인하고 잔혹한 갖가지 고문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죽음을 맞이했는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 민주화 역사의 빛나는 성취로 이런 일체의 고문이 없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격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어느 순교한 베트남 신학생이 쓴 감동적인 편지중 끝부분만 인용합니다.

“만일 우리가 현세에서 다시 못 본다해도, 내세에서 우리가 흠없는 어린양의 옥좌 앞에 서 있을 때 이것은 우리의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승리의 기쁨에 환호하며 그분께 한 목소리로 찬미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 엄혹한 순교 상황에서도 승리의 기쁨을 앞당겨 살며 곱고 품위있게 죽음을 맞이한 젊은 순교 신학생입니다. 오늘 복음이나 제1독서의 묵시록은 종말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모두가 의도하는 바는 결코 우리에게 공포의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하루하루 종말론적 삶을 살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언젠가의 심판이 아니라 오늘이 바로 심판의 날이자 구원의 날인 것처럼 생각하여, 하루하루 한결같이 깨어 곱게 살다가 곱게 늙어 곱게 죽자는 것입니다. 오늘의 현재는 내일의 미래입니다. 오늘 최선을 다해 깨어 곱게 살면 내일의 미래는 전혀 걱정 안해도 됩니다. 내일은 내일이 잘 해결해 줄 것이니 바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의 때가 왔습니다.”

언젠가의 죽음으로 인생 수확의 때가 이르기 전 우리가 할 일은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하루하루 내적성장과 성숙의 여정에 충실하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일체의 유혹에 휘말리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무서워하지 말고 제 삶의 자리에서 충실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결코 부화뇌동, 경거망동 하지 말고 제 삶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며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이들은 하루하루가 종말이요 그 종말은 어둠이 아니라 희망의 빛, 구원의 빛으로 활짝 열린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짙은 구름속에서 배어 나오는 태양빛이요, 밤의 어둠이 깊어갈수록 가까워지는 일출의 빛나는 태양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구원을 상징하는 태양입니다. 이런 태양같은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 때 일희일비함이 없이 깨어 한결같이 곱게 살 수 있습니다.

어느 삽화가의 잔잔한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은 노력으로 자기 경지에 이른 분입니다. 정말 아름답고 한결같은 삶의 프로입니다. 저절로 ‘프로는 아름답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하지만 남들의 속도에 더는 흔들리지 않아요. 자기 증명에 대한 강박에서도 놓여나고요. 얼핏 무의미해 보이는 노력의 시간이 가져다 준 결과예요. 스스로 설득이 되는 지점까지 노력해본 자가 가질 수 있는 고요이지요. 자기를 끝까지 소진하면 오히려 결과에 겸허해져요. 더 할 수 있는 노력이 없을 때까지 해보면 남들이 뭐라든 스스로 인정할 수 있어요.

저의 눈에 반짝이는 작가들이 보여요. 자유롭고 거침없이 그리는 작가들이요. 배가 아프죠. 샘도 나요. 그런데 그게 전부예요. 며칠 질투하다 제자리로 돌아와요. 정보의 이해를 돕는 데에 최적화된 저의 그림체는 오랫동안 평범하다는 평을 들어요. 하지만 그것이 내 것이예요. 삽화가로 부단히 애쓴 10년이 만들어준 소중한 내 것이죠. 빛나는 재능을 가진 이들처럼 일필휘지로 그리지 못하지만, 제 책이 자랑스러워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고. 이것이 내가 만들 수 있는 최상의 것임을 알기 때문이에요.

온 힘을 다해 뛰어도 우리는 여전히 자기 자신밖에 되지 못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 볼 필요가 있어요.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윤곽을 확인하기 위해서요. ‘여기까지가 한계이고, 너는 최선을 다했어’라고 자신이 설득되는 지점을 찾기 위해. 경계에 울타리를 세우면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마음이 있고, 보이는 소중함이 있어요.“

(한겨레;11월21일 ‘돌파하는 힘-유설화 삽화가)

이렇게 긴 개인의 인터뷰 기사를 인용하기는 처음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프로의 삶에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해 제크기, 제모습, 제색깔, 제향기로 참나를 살 때 비로소 주님을 닮아 삶의 프로요 삶의 성인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한결같고 아름다운 삶의 프로, 삶의 성인이 되어 곱게 살다 곱게 늙다가 곱게 죽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루하루 한결같고 아름다운 삶의 프로, 삶의 성인이 되어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분이 오신다.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우리를 다스리러 오신다. 그분은 우리를 의롭게, 진리로 다스리신다.”(시편96,13). 아멘.

속지도 속이지도 마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남을 속이지 말아야 하지만 속지도 말아야 합니다.

속고 속이는 관계는 정말로 더러운 관계이고, 대부분의 관계가 이런 관계라면 인생을 정말 잘못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지 말아야 함은 죄 때문만이 아닙니다.

죄 때문만이라면 속이는 것은 죄이니까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속는 것은 죄가 아니니 속아도 된다는 말이 되지요.

그러므로 속지도 속이지도 말아야 함은 죄 때문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서이고 적어도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인데 아무튼, 속고 속이는 인생은 불행한 인생이고 잘못 사는 인생입니다.

먼저 속이는 인생이 잘못 사는 거라는 점을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속는 인생이 불행하지 속이는 인생은 괜찮다고, 속여 이익을 볼 수만 있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반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의 안에 진실이 없고 거짓만 있으며 그래서 진실한 행복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바리사이들을 위선 때문에 불행하다고 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 말은 또 남을 속이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속여야 한다고 하는데 그 말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남을 속이는 것이 자신을 괴롭게 한다면 속이는 짓을 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속이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할 거라고 자신부터 속여야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인생 사기일 뿐이고 이 인생 사기가 돈 몇 푼 사기치는 것보다 더 남도 불행하게 하고 자신도 불행하게 하는 사기입니다.

남을 속이는 삶과 속이기 위해 자신도 속이는 삶을 살다가 인생 막장에 이르러 문득 우리는 진실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자신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자신을. 속인 것이 아니라 속았음을 그래서 남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도 불행함을.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또 다른 차원에서 속지 말라고 하십니다.

누가 주님의 이름으로 와서 자기가 그리스도라거나 때가 왔다고 하더라도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십니다.

이것은 인생 사기 정도가 아니라 영생 사기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믿느냐는 영생이 걸린 문제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위기가 왔다고 느낄 때 그래서 두려움에 휩싸일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무나 붙잡게 되고 그의 말에 혹하게 됩니다.

미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래도 한 번 뭐라고 말하는지 가 본 거라고 말하는 것에서부터 진짜로 믿고 그들을 따라 가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그들의 교설을 믿고 그들을 따라 가는 것은 우리가 따라야 할 주님을 평소 붙잡지 못하였고 그래서 믿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생명에서부터 영생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믿고 맡겨야 할 분은 누구인지 성찰하고, 그분은 일생 믿어온 주님임을 다시 확인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며 그 끝을 예언하십니다. 실상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 군대의 손으로 완전히 허물어지고 맙니다. 

이 세상 것들은 언젠가는 다 사라질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지금 굳건히 서 있고 영원할 것 같지만 언젠가는 무너지고 유한할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미 종말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깨어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기를 깨어 기다립시다. 깨어 있는 사람은 유한함 안에서 영원함을 이미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베트남의 순교자들도 유한한 생명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미 살았기에 기꺼이 목숨을 주님을 위해 내어놓았습니다.

선의 끝은 없어도 악의 끝은 있다,<루카,21/5-11>11/2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괘를 예언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의 바르지 못한 삶을 지적하시며 말씀하신 것도 됩니다. 세상의 시작부터 악과 선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으며 악의 승리는 없고 선은 승하고 영원히 지속됩니다. 우리는 악의 끝은 에견하지만 선의 끝은 없고 영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를 아려준 것은 각자 안에 현존하는 양심의 법입니다. 시편 36/ 12-29를 보면 “ 억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영원히 남으리라. 의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당신의 성도를 아니 버리시나, 악인은 망하고 그 종락도 끊어지리라. 의인은 땅을 차지하여 길이길이 거기서 살으리라. ” 

오래전에 와우 아파트의 무나쪄 박살이 난 사건은 불양 제료 마그 지은 결과였으며 성수대교의 무너짐도 같은 원리입니다.

사람도 기초가 불실하면 오랴 견디지 못합니다. 코로나는 면역역과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요사이도 스포즈 선수들은 연습도 하고 운동시합도 하는 것은 바로 면역역과 힘입니다. 

악이란 그 자체 힘없는 모래성과 같고 선이란 단단한 쇠와돌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재료는 부실합니다. 구약에 바밸탑을 쌓던 사람이 실패는 하느님을 대적해서 세상의 재료로 탑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에 찌들린 우리 삶은 평화 기쁨의 삶으로 만들려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절망할 일은 아닙니다.

어느날  수녀원에 입화하여 또 힘든 일을 당한 수녀가 저는 성소를 이렇게 얻었습니다. 저녁에 밖에서 놀고있는 데 갑자기 어둠이 닥아 와서 자기도 모르게 “ 아버지 집으로 가자.” 하며 달려가다가  다음 사실을 깨닫고 세상의 바벨탑을 버리고 수녀원으로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성소는 하느님 집에 안식이 있고 수녀로 사는 것이 가장 함당한 일입니다.

악에서 선으로 전환은 적은 아들의 비유에서 증면됩니다. “ 아지집으로가자.” 시작입니다. 이세상의 성전은 무너져도 하늘의 아버지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저는 수도원에 찾아온 이유는 하루저녁 잠을 자면서 꿈을꾸웠는데 6,25후 길거리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상이 군인이었습니다. 저를 절둑 거리며 좇아 오기에 길을 따라 도망가도 계속 따라오기에 피할 길이 없어 절절 매다가 마침 높은 산이 옆에 있어 저 사람은 저 산을 절둑 거리며 오를 수 없으니 나는 산을 오르자 하여 산을 오르니 상인군은 좇아오지 못하고 오를수록 돌이 황금빛으로 변하고 마침내 정상에 오르게 되니 잡고 오를 도구가 없는데 약한 풀 밖에 없었지만 마음속으로 모든 성인이 이 풀을 잡고 올랐으니 나도 오르겠다고 하여 올라서 보니 광활안 큰 길이 있어 어는 수녀님 같이< 그 수녀님은 살아있는 분이며 제가 성소에 최고의 위기일 때  피정시켜 주신분입니다 꼬마 공주라 합니다.> 그길을 한없이 걸어가다 꿈을 깨고 내 길은 세상이 아니라 저 높은 하느님의 길이라 생각하고 수도원에 입회 지금도 60년 이상  그길을 세상과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길은 죽음도 멸망도 없는 영원히 빛나는 탑을 세우며 영원한 노리 터에 살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온유한 사람 땅을 차지하리니.“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은 선한ㄴ 사람입니다.

악이 들끊은 그곳 세상의 탑을 쌓고 안전을 기하는 곳 아닙니다. 주님의 집 시온 산에 자리 잡기 위해 오늘도 주님을 찾아 해매고 내일도 찾아 나서며 멸망하지 않은 나라에 살기를 기도합니다.

<겨울나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짓이겨지고 찢겨진

갈빛 낙엽들을

서걱서걱 밟고 지나다

서글픈 나를 바라보는

침묵 속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를 보았어요

제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떨구어내고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채

초록 여린 잎으로

온 몸 새로이 단장할

찬란한 봄을 기다리는

한 잎 낙엽 마음에 박혀

비틀거리는 나를 품는

굳건히 살아 있는 나무를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그 성전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진 것을 감탄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재산, 지위, 명예, 그 외의 어떤 인간적인 영화도 영원하지 않고 분명 영원한 것은 하느님 한분뿐이십니다.

아주 오래전 신학생 때 외출을 하면서 복권을 산 적이 있었습니다. 워낙에 용돈이 궁했던 시절이라 혹시나 해서 처음 산 것이 오천 원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오천 원을 가지고 오백 원 짜리 열 개로 바꾸었습니다. 그 날 밤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10개니까 더 많은 돈이 당첨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당첨이 되면 사고 싶은 것들을 사려고 리스트까지 뽑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발표가 되자 열 개 중에 오백 원 짜리 두 개가 당첨이 되었고, 두 개를 다시 바꾸고 결국 나중에는 다 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보니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지 깨달았고, 그 이후에는 한 번도 복권을 사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언젠가 다가올 죽음으로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야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이 언제나 자기 것인 양 착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결국 죽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이 헛된 욕심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희망은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은 영원하신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1785년 베트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사제가 된 그는 베트남의 여러 지역에서 열정적으로 사목 활동을 펼쳤습니다. 베트남 교회의 박해 시기에 교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관헌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체포되어, 1839년 참수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를 비롯한 베트남의 순교자들을 시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지어졌다고 하는 성전을 두고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8절) 라고 이르십니다.

  내년도 2021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탄신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유네스코에서도 2021년 세계기념 인물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선정한 바 있습니다. 유네스코는 김대건 신부님의 삶과 업적이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부합한다는 점을 들어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고 추진인 당진시는 전했습니다. 유네스코는 2004년부터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가 일치하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 명사의 기념일을 유네스코 연관 기념행사로 선정해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순교로 인해 짧은 삶을 살았음에도 평등사상과 박애주의를 실천하고 조선전도를 제작해 조선을 유럽 사회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당진시는 지난 2019년 6월 프랑스, 베트남, 필리핀 등 3개국으로부터 지지 선언을 확보한 뒤 유네스코에 세계기념인물 지정 신청서를 제출했고,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10월 17일 제207차 회의에서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아 김대건 신부니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습니다. 

  베트남 성인들을 기억하는 오늘 이제는 더 이상 누군가의 박해로 인해 우리의 신앙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 아니면서도, 우리 스스로의 안락과 편의에 빠져 주 예수님과 복음을 향한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고 있지는 않은가 성찰해 보게 됩니다. 주님과 복음을 향한 내적인 충실성과 신앙실천의 깊이 없이 외적인 교세성장과 물질문명사회에서 주는 편안함과 안락함에 빠져 신앙의 본질을 잃지 않도록 순교의 정신을 되살아 냅시다.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 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허물어지고

바스러지는

낙엽이다.

허물어지기에

사람이다.

허물어지기에

겸손을 배운다.

허물어지는

우리자신을

주님께서

껴안아 주신다.

허물어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우리들 삶이다.

허물어지는

여정도 기꺼이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허물어진

우리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이시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자비이다.

새로워져야 할

우리들 삶이다.

부질없이

허물어지는

것들안에서

영원한 것을

다시 갈망한다.

우리에게는

어김없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 계신다.

인간의 욕심은

이와같이

허물어지지만

주님의 사랑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허물어지는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가

가득하길

기도드린다.

세상에서

깃들이던

육신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될

것임을 진심으로

나는 믿는다.

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한때 저에게는 부러운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노래 잘 부르는 사람, 말 잘 하는 사람, 운동 잘 하는 사람, 공부 잘 하는 사람, 친구가 많은 사람, 부유한 사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등등... 세상에는 왜 이렇게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더군요. 그런데 어느 날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 보이는 친구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 마음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지요.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뿐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무게까지 헤아려야 한다는 것을 말이지요.

지금 현재 제 마음의 무게는 그 누구보다도 무겁다고 자부합니다. 비록 겉보기에는 볼품없어 보이지만, 마음의 무게만은 그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무겁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통과 시련이 찾아와도 밝게 웃을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제외하고는 형편없는 제 모습이지만, 주님과 연결해보니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항상 마음의 무게가 무거운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마음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바로 마음이 가벼워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마음이 가벼워질 때를 떠올려보면 주님과 함께 하지 못했음을 깨닫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더 많은 집중을 하고 있을 때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세상의 것들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뜻에 집중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마음의 무게가 더욱 더 무거워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세상 안에서 어떤 시련과 고통이 찾아와도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몇몇 사람이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화려한 성전을 보면서 감탄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화려함도 금세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즉, 영원할 것만 같았던 성전이 곧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만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 날과 그 시간은 알 수가 없지만 주님을 충실하게 따름으로 인해 하늘에서 보여주는 큰 표징들을 알아챌 수 있게 된다고 하시지요.

주님의 이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주는 화려함과 풍요로움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을 선택하게 될 때, 내 마지막 순간에서도 큰 두려움 없이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내 마음의 무게가 그만큼 무거워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선택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풍요보다는 마음의 풍요를 통해서 더욱 더 기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삶의 길목마다 사는 맛이 마련돼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박완서).

죽음을 떠올리며....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분노를 다스리는 법’에서 “내가 죽여 버리고 싶은 사람을 굳이 죽이지 않아도 자연이 알아서 죽인다.”라고 말했습니다. 어차피 늙어 죽을 사람을 복수라는 이유로 좀 더 빨리 보내고 싶어 살인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우리 인생의 마지막은 모두 ‘죽음’으로 끝납니다. 이 마지막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 누구에게도 그러한 권한이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라보고 힘을 쏟아야 할 것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세계를 바라보고,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힘을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영역은 주님의 영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역을 침범하는 죄를 범해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 순명하면서 주님의 자리를 지켜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게 됩니다.

값싼 신앙을 거부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천년 전 예수님께서는 기가 막히게 오늘 한국의 현실을 예견하시며,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조언을 건네주셨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분의 말씀은 생생하게 살아있고 유효하니, 정말이지 참된 예언자시며, 참된 주님이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복음 21장 8절)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민족은 참으로 종교에 대해 관대하고 너그럽습니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종교가 진출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를 일컬어 ‘종교박람회장’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발생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역사와 전통이 배경이 된 정통 신앙,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에 바탕을 둔 종교가 아닌 사이비 종교가 등장했습니다. 이상하고 어색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사이비 교주들이 출몰했습니다. 스스로를 우상화시켰으며, 갖은 감언이설로 선량한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최근 세간에 큰 물의를 일으킨 한 사이비 대형 교회만 하더라도 보십시오. 사이비 교주는 스스로를 우상화시켰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그는 적절치 않은 행동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고 사악한 죄의 댓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사이비 교주가 행한 집단 최면이 얼마나 강했던지, 아직까지도 수많은 신도들이 법정의 판결에 대해 울부짖으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는 예수님의 조언에 조금만 귀를 기울였더라면, 이처럼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일을 겪지 않았을텐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갖은 사이비 종교와 지도자들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갖춰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식별력입니다. 그릇된 지도자들의 어처구니 없는 처신 앞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터무니 없는 가르침 앞에서, 맹목적으로 따라갈 것이 아니라, 복음에 비추어, 인간 이성과 상식에 비추어, 참인지 거짓인지, 참 목자인지 삯꾼인지를 정확히 식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값싼 신앙을 거부해야겠습니다. 고통과 십자가 없는 구원은 기대조차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이비 지도자들이 던지는 감언이설에 절대 속아넘어가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이비 지도자들이 드러내고 있는 특징은 대체로 황당무계합니다.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입니다. 뭔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기괴하고 끔찍합니다. 만일 그런 기미가 보인다면 즉시 경계를 시작해야 마땅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분위기나 가르침은 조금 밋밋해보입니다. 가톨릭 교리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통상적이어서 그렇습니다. 이성적이고 평범한 것이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에서는 고통스럽고 부당한 현실, 단박에 뒤집힐 것이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우리 눈 앞에 신천지가 나타날 것이라고 사기치지 않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끔찍한 병고 즉시 치유시켜주겠노라고 과장하지 않습니다. 목돈을 갖고 오라고 협박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가톨릭 교회는 고통스럽고 부당한 현실 앞에서도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자고 초대합니다. 기도 속에 주님의 뜻을 찾아보자고 안내합니다. 호의적이지 않은 이 현실,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자고 가르칩니다. 천천히 가자고, 인간의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자고 권고합니다.

<내가 성전임을 잊을 때 종말이 재촉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올 여름 태국 유소년축구팀 소년들이 동굴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물이 불어나 갇히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이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립된 지 17일 만에 구조대원들의 수고로 축구팀 코치와 선수 13명이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습니다. 

그들의 구출에 큰 공을 세웠던 이들은, 가장 먼저 그들의 생존을 확인한 영국 전문 잠수사, 그들을 구해내온 각국에서 모인 구조대원들, 소년들의 건강상태를 세밀하게 살핀 호주 의사 등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그들과 함께 있었던 축구팀의 코치였습니다. 칠흑같이 캄캄한 동굴에서 두려움에 떠는 소년들을 추스르며 이들에게 끝까지 자리를 지킬 힘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이들은 움직이면 살아날 수 없는 곳에 갇혀있었습니다. 코치는 그 소년들을 다 내보낸 뒤 가장 마지막으로 동굴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 필요한 것이 다 있습니다.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분은 부모님이듯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분은 하느님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신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구상 시인은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라고 말합니다. 파랑새를 찾아 나서봐야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내가 있어야하는 자리를 이탈하게 되는 이유는 내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그 있어야 할 자리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 모르니 이리저리 있지도 않은 것을 찾아 헤매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교회라는 큰 성전을 이루는 작은 돌들입니다. 하느님은 성전에 사시기 때문에 교회가 성전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이 세상은 더 이상 하느님이 살지 않아 허물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종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징조들이 벌써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댐도 작은 구멍으로부터 시작해 허물어지듯 성전도 작은 벽돌들이 제 자리를 지키지 않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될 때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작은 벽돌들이란 우리 신앙인 각자를 의미합니다. 우리 각자도 작은 성전들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 하느님께서 사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는 이들이 늘어나면 교회는 약해집니다. 자신이 성전이고 자신 안에 하느님이 계신데 세상 적인 것들에서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면 그 성전은 당연히 허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도 속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주님은 교회에서, 그리고 각자의 마음 안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시간을 기도라 합니다. 교회 전례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주님을 만나며 개인 기도 안에서도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야합니다. 마치 교회가 충분한 진리를 주지 못하는 것인 양, 세속적인 것들에서 진리를 찾게 된다면 그것이 마지막 때가 다가오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서 승인하지 않은 이상한 기도모임이나 성경공부, 혹은 세속적 학문인 심리학으로부터 온 상담이나 명상 등을 하며 교회에서 부족한 것을 채운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하느님이 사시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세상 것에서 주님을 찾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내 안에 주님이 계시는데 어디에서 진리를 만나려고 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진리이시고 평화이시고 위로이시고 전부이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을 교회 외적인 것에서 찾으려하는 것이 곧 속는 일입니다. 이렇게 내 자신, 그리고 교회가 하느님을 모신 성전임을 조금씩 잊어가게 될 때 마지막 때는 앞당겨지게 될 것입니다. 

“Dirty is out of the place” 라는 말이 있습니다. ‘더러움이란 자기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어항 속에서 물고기들이 헤엄칠 때에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물고기가 침대에 있다면 더럽다고 말합니다. 흙이 논밭에 있다면 괜찮겠지만 방바닥에 있다면 더러운 것이 됩니다. 내가 무엇인지 안다면 어디 있어야 하는지도 압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위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나 또한 큰 성전인 교회를 이루는 작은 성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성전임을 잊을 때 자리를 이탈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주도의 날씨도 바람과 함께 제법 추워졌습니다. 목초지의 풀은 깎여져서 커다란 뭉치가 되었습니다. 목장 주인들은 그 풀을 겨울을 지낼 소와 말들에게 줄 것입니다. 깨끗하게 깎여진 들판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두 가지입니다. 1년 동안 자란 풀들이 깨끗하게 정리된 것 같은 감정입니다. 들판은 다시 평평해 졌습니다. 내년 봄이면 어김없이 들판에는 새로운 풀들이 자랄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일몰이 어둠을 가져오는 표징이지만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어둠을 밝히는 일출이 있기 때문입니다.

들판과 풀은 변함없지 자리를 지키지만 그 들판과 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각자의 처지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할 것입니다. 들판을 관리하는 사람, 들판을 스쳐가는 사람, 매일 들판을 거니는 사람은 각자의 입장과 처지에서 생각하고, 판단할 것입니다. 미술관에는 많은 작품들이 있습니다. 작품을 만든 작가는 나름대로의 의도와 생각을 작품을 통해서 드러냈을 것입니다. 작품을 보는 관람객은 자신들의 생각과 관점에 따라서 작품을 감상할 것입니다. 모든 관람객이 작가의 의도와 생각대로 작품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작가는 모든 관람객에게 자신의 의도와 생각을 설명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스스로 생명력을 갖는다고 합니다. 작가의 의도와 생각이 중요할 수도 있지만 작품과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됩니다.

과학은 절대 불변의 진리를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졌고, 알려진 가치와 원리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방법, 새로운 가치와 원리가 생기면 기존의 방법과 가치는 기꺼이 자리를 내어줍니다. 그렇다고 기존의 가치와 원리가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어달리기처럼 새로운 가치와 원리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의 문화, 역사, 삶의 방식을 담아서 남겨준 책입니다. 과학, 고고학이 발전하였고, 새로운 학문의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작가들의 손을 떠난 성경은 성령의 감도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전해 줄 것입니다.

오리게네스 성인은 성경해석의 3가지 차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첫째는 자구적인 해석입니다. 성서를 있는 그대로의 글자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는 문화, 역사, 시대의 차이가 있기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성경도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리게네스 성인은 글자 그대로의 해석은 가장 초보적인 성경 읽기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비유적인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비유를 들어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고, 하느님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비유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씨 뿌리는 이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뜻을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셋째는 영적인 해석입니다. 교부들과 학자들은 성경의 말씀을 영적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시대의 징표가 무엇인지 보았고, 그 시대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였습니다. 영적인 해석을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확실한 암호’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암호’를 알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한 책입니다.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께서 자신들이 하느님을 만난 이야기를 꾸밈없이 이야기 합니다. 그럼에도 감동이 있는 글들입니다. 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저마다 하느님께서 숨겨 놓으신 ‘암호’를 이웃 안에서, 내면의 부르심 안에서, 때로는 시련과 고통 중에서,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찾아내었습니다. 암호를 발견하기 전의 삶은 무의미하고 허망하였지만, 암호를 발현 한 후의 삶은 희망과 기쁨이 계속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확실한 암호를 알고 계시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차를 운전하기 전에 성호를 긋고, 기도한다면 그분은 암호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손에 스마트 폰 대신, 묵주를 들고 버스틀 타는 분도 암호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받기 보다는 먼저 사랑하려고 하고, 이해받으려 하기 보다는 먼저 이해하려는 분도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불평하기 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떨어지는 낙엽에서도, 하늘을 날아가는 구름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다면 또한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암호를 참 많은 곳에, 그리고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남겨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 바다 깊은 곳에만 당신의 암호를 숨겨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은하에만 당신의 암호를 숨겨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철학의 논리 속에, 수학의 규칙 속에, 과학의 심오한 원리 속에만 숨겨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의 웃음에도, 작은 들꽃에도,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에도 하느님의 암호는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암호를 우리들만 간직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그 암호를 나누어 주어도 좋아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만나야 될, 마지막 순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그 끝에서 하느님과 대면할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암호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 예고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감탄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 성전이 돌 위에 돌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로마가 성전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을 불태울 것이며 이스라엘은 주님을 살해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뒤 이 모든 일을 겪어야 했다.

성전이 언제 무너질 것이며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냐는 질문에, 주님께서는 그 표징들에 대해 일러 주시며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오류에 빠져 참된 믿음을 버리고 떠나갈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주님의 날이 올 것이다. 주님께서 첫 번째 오심은 속죄를 위해서였고 두 번째 오심은 더 많은 이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시며 그들에게 경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8절)고 하신다.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비밀리에 오시지 않고 무시무시하고 화려하게 오실 것이다.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기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오실 것이다.

하느님은 참으로 진실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다. 또 모든 말씀을 읽고 들었다. 우리는 언제 종말이 오는지 우리 모두 들었다. 그때에는 전쟁과 지진과 환난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마르 13,7-8). 그러므로 우리는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다. 이런 일에 관한 말씀을 읽을 때에는 그 말을 믿다가 막상 그 일이 일어나면 불평을 늘어놓곤 한다.

마지막 날에 민족과 민족이 맞서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다. 너희가 전쟁과 지진과 기근을 보게 되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일어날 표징들을 알려주신다.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신다.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태 24,19)

‘예루살렘’하면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고 당신 백성들과 만나신 얼마나 유서 깊은 곳인가? 그런데 그토록 파멸을 당했다는 사실은 당신의 어느 한 마디도 헛되지 않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며, 또한 예루살렘처럼 회개하지 아니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하느님을 따른다고 할 때에 이러한 파멸을 우리 자신도 당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벌주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뜻을 역행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그 길을 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언제나 주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 그분 안에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 될 것이다.

주님의 품으로!

김기현 요한 신부님

몇 달에 한 번 신학생들의 신문인 ‘애솔’지가 본당으로 배달 되는데요.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글이 있어서 옮겨 봅니다.

신입생이 쓴 글인데요. 내용이 이렇습니다.

【제가 신학생이 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냉담을 풀고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냉담을 풀게 된 데에는 조금 기이한 사연이 있습니다.

제가 한참 미사와는 담을 쌓고 살던 시절, 어머니께서 도대체 제가 왜 성당에 다니질 않는지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미사보다 노는 게 더 좋았던 것이 이유였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분명히 어머니의 잔소리가 이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에 저는 되는대로 ‘신부님들이 너무 고루해서 싫어요.’ 라고 답을 했었습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당시 신부님이 어느 분인지도 몰랐으니까요. 그러자 어머니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어떤 신부님이 오시면 네가 성당에 다시 가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이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었던 저는 대충 생각나는 대로 아무 신부님이나 어머니께 설명 드렸습니다.

‘아 왜 그 있잖아.. 예전에 보좌 신부님으로 오셨던 그 밝으신 분.’

그리고 저는 이 대화를 이내 까맣게 잊고 다시금 냉담한 채로 살았습니다. 얼마 뒤 본당이 분당을 한다는 소식이 들리고, 어느 새 저의 교적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사실 교적이 어디로 바뀌든 말든, 어머니께서 그 사실을 말씀해 주실 때도 그저 건성건성,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다음 말씀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오셨다. 네가 말하던 그 신부님...’

그랬습니다.

제가 별 생각없이 어머니께 설명드렸던 신부님이 바로 분당된 본당 초대 주임신부님으로 오신 겁니다, 그것도 보좌가 아닌 주임신부님으로요. 무심코 내뱉은 말이기는 하지만, 제가 말했던 상황이 백 퍼센트 실제로 이루어지고 나니 더 이상 댈 핑계가 없기도 하고, 조금은 무섭다는 생각도 들어 결국 냉담을 풀고 신앙생활을 다시 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4년 후, 저는 신학생이 되어 강화도에 살게 되었습니다.】

기이하고도 놀라운 일이 그 신학생을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했던 거 같은데요. 우리도 살다보면 그러한 체험을 종종 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무신론자들은 어느 순간 ‘하느님이 살아계신 거 아니야..’하고 뒤로 물러서게 되는 때가 있고, 냉담자들도 순간적으로 ‘하느님께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하고 뒤를 돌아보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겁니다.

또 오늘 복음에 내용들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 일들을 대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순간적으로 ‘나를 구원으로 이끌어 줄 공동체가 필요한 거 아닌가..’

하고 가던 길을 멈추어 서는 순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진리의 길을 함께 걸어 갈.. 또 용서와 화해와 사랑을 만들어 낼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을 텐데요.

그러한 순간에 보게 되는 메시지를 외면하지 말고 주님께 돌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신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신다.

“갈라진 손이나 시꺼먼 얼굴이 시골에서는 괜찮은데, 나가면 창피해요~”

그런 비슷한 경험을 나도 하게 되는 거 같다.

시골에 있으면 당연히 차가 작업차량이 되기 때문에 지저분하다.

시골에서는 다 그러니 별로 창피하지가 않은데 도시에 나가면 조금 창피하다.^^;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우리는 종종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아름다움에 감탄을 많이 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람을 만나면서도 외적인 아름다움에 많이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행여나 사람의 외적인 모습이 동안이었을 때 그 사람이 젊고 아름다운 것에 감탄을 하면서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고 찬사를 전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몇몇 사람이 성전의 아름다움을 두고 이야기 하자 그 이야기를 들으시던 예수님께서는 마치 그 이야기에 초를 치듯이 성전의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의 몸이 주님을 모시는 주님의 성전임에도 불구하고 내적인 아름다움을 채우기 보다는 혹시나 외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었는가. 입니다. 

내적인 아름다움을 채워가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주님의 영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기도와 성사, 그리고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 21장 3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사라지지 않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는 거룩한 성전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남궁민 루카 신부님

"천사가 땅 위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들이고서는,  하느님 분노의 큰 포도 확에다 던져 넣었습니다." (독서) 

"민족과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 기근과 전염병,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복음) 

첫 독서의 묵시록 파멸 예고에 이은 복음의 예루살렘 파멸 예고는 두렵고 혼란스럽다. 

그런데 독서와 복음 사이에 놓인 화답송 시편 96은 기쁨의 찬미가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은 소리쳐라. 들과 그 안에 있는 것도 모두 기뻐 뛰고, 숲속의 나무들도 모두 환호하여라." 

파멸 예고 가운데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이유는 "세상을 다스리러 주님이 오신다."라는 후렴에 담겨있다. 

종말 예고는 근본적으로 세상과 개인의 삶에 "끝이 있다"라는 선언이다(H. u. von Balthasar). 

실제로 묵시록의 배경인 로마 제국이나 복음의 배경인 예루살렘은 끝이 났다. 

끝을 외면하고 자신이 영원할 줄 알고 자아에 집착하는 이에게 종말은 두려운 파멸이다. 

끝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이는 세상을 순례자로 살며 언제든 하느님을 찬미한다. 

종말의 경고는 언젠가 끝날 일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말고 자유로운 순례자로 살라는 초대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그 끝이 언제일까? 

주님께서는 명료한 답을 주시지 않는다. 

종말은 우리 각자의 일, 스스로 책임 있게 맞이할 일임을 암시한다. 

소문에 속지 말라는 말씀은 타인의 소문이 아니라 나의 지금 여기를 종말로 맞으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 

지금 여기 내 삶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어디에 있든 모두 두려움과 파멸의 때이고,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있다면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구원의 순간이다.

삶의 전지剪枝  -늘 새로운 희망과 구원의 시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하늘 나라 역시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가까이 있습니다. 주변에 마음을 뺏기면 참 어수선하고 복잡하여 길을 잃기 쉽습니다. 밝은 긍정적 뉴스보다는 온통 어둔 부정적 뉴스가 신문을 도배하다 시피 합니다. 국내 정치권은 물론 국제외교정치면이나 남북관계, 북미관계도 참 복잡하고 힘들게 생각됩니다.

어제 고백성사차 방문했던 한 사제의 말도 생각납니다. 거리에서 보는 얼굴들이 대부분 굳어있고 무엇에 쫓기는 듯 불안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밝고 기쁜, 넉넉하고 편안한 얼굴들이 참 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요즘 참 많이 나도는 ‘인간쓰레기’라는 천박한 말입니다. 사람이 1회용 소모품처럼 얼마나 가볍고 천하게 취급되는지 보여주는 참 천박한 오늘날 사회 현실입니다. 

우선 나부터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품있고 아름답게 사는 것입니다. 이래서 삶의 전지가 필요합니다. 어제부터 수도원 배밭의 배나무 전지가 시작되었습니다. 순간 신선한 기쁨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배농사의 끝은 새로운 배농사의 시작입니다. 배밭 전지를 통해 또 새로 시작된 배농사임을 깨닫습니다. 거룩하고 위대한 반복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배나무들마다 불필요한 가지들을 쳐내니 얼마나 홀가분해 보이는 지요. 여기서 즉시 착안한 강론 제목이 ‘삶의 전지’입니다. 배밭 전지야 1년 한번이지만 우리 영적 삶의 전지는 크게 사순시기와 대림시기 둘로 나눌 수 있고, 바야흐로 이제 연중 마지막시기에 이은 대림시기 대대적 삶의 전지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배나무 전지가 필수이듯 삶의 전지도 필수입니다. 배나무 꼴을 잡아주는 배나무 전지이듯 삶의 꼴을 잡아주는 삶의 전지입니다. 배나무 전지를 하지 않으면 배나무 꼴은 엉망이고 좋은 열매의 결실도 기대할 수 없듯이, 삶의 전지가 없으면 삶의 꼴은 엉망이 되고 좋은 덕의 열매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배나무 전지도 때가 있듯이 삶의 전지도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쳐 버려 오랜동안 배나무 방치하여 굳어지면 전지도 어렵거니와 효과도 없습니다. 마찬가지 냉담이나 나태함으로 삶의 전지의 때를 놓쳐 굳어지면 삶의 전지도 힘들고 효과도 없습니다. 

그러니 아니 일년 두 번 영적 삶의 전지가 아니라 매일매일 전지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생각도 말도 행동도 전지해야 하고 불필요한 소유물도 나누고 버림으로 전지해야 합니다. 바로 끊임없는 회개가 삶의 전지임을 깨닫습니다. 아니 회개뿐 아니라 모든 수행을 통해 이루어지는 삶의 전지입니다. 매일 새로운 희망과 구원의 시작을 알리는 삶의 전지입니다. 구체적 삶의 전지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본질을 직시하는 삶입니다.

눈이 열려 본질을 직시할 때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환상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전의 아름다운 외관에 감탄하는 제자들은 본질을 직시하지 못합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다 변합니다. 다 지나갑니다. 영원한 분은 하느님 뿐입니다. 하느님 말씀뿐입니다. 헛된 환상을 깨고 본질 직시로 이끄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 큰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성전 외관의 화려함에 현혹되지 말고 본질을 직시하여, 오늘 지금 여기 현실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삶의 전지가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본질을 직시하지 않을 때 온갖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재난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가 있어도 흔들리지 마라 하십니다.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무슨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하십니다. 결코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마라 하십니다. 깨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주어진 일에 충실하라 하십니다.  

바로 우리 분도 수도자의 정주서원이 목표하는 삶입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충실하는 정주생활이 안정과 평화를 줍니다. 하느님 중심에 정주의 뿌리를,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할 때 끝없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둘째, 기본에 충실한 삶입니다.

기본에 충실함이 구원입니다.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하고 바로 기본에 충실한 삶입니다. 심판과 구원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기본에 충실할 때 단순한 삶이요 두려움과 불안도 사라집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 묵시록은 종말 심판과 구원을 보여줍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천사의 외침에 주님은 즉시 응답하여 땅의 곡식을 수확하니 바로 의인들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이어지는 포도의 수확은 불신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마지막 심판을 가리킵니다.  

‘그러자 그 천사가 땅 위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들이고서는, 하느님 분노의 큰 포도 확에다 던저 버렸습니다.’ 

불신자들에 대한 최후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모두의 충격적 표현은 회개의 표징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희망과 구원의 삶을 시작하라는 초대입니다. 오늘이 미래입니다. 하루하루 기본에 충실한 삶을 사는 이들은 오늘이나 내일의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요지부동 삶의 제자리에 충실합니다. 늘 기뻐하며, 기도하며, 감사하며 삽니다.  

하느님은 너그러우시고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세상 모두가, 모든 시간이 하느님 수중에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때 본질 직시의, 기본에 충실한 단순한 삶입니다. 단순한 삶이 구원입니다. 결코 유혹이나 환상에 빠지지 않습니다. 헛된 우상의 허상을 섬기지 않고 참 하느님만을 섬깁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삶의 전지를 잘 할 수 있도록, 또 본질을 직시하여 기본에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을 정화하신 다음, 어느 날 성전에서 하신 긴 담화의 한 부분입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파괴에 대한 예언과 세상종말이 오기 전의 표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전은 주님의 현존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룩한 것이라 하더라도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면 그 존재의미를 잃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 6) 

성전 파괴에 대해서는 이미 예언자 미카, 예레미아, 에제키엘 등에 의해서 진술된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옛 솔로몬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에 의해 즈루빠벨의 치하에서 기원전 515년에 재건된 제 2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헤로데 왕에 의해 기원전 19년부터 확장되고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지면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그 때와 표징을 묻는 이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루카 21, 8) 

이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이비 메시아는 누구일까요?

대체, 우리는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 속고 있을까요? 

그것은 물질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사이비 구세주로 따르고, 속아 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소.” 하고 외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결국에는 우상을 따르고 섬기도록 부추기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입으로는 주님을 구원자라 고백하지만, 정작 무엇에 목매달고 쫓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 재물뿐만이 아니라, 세속정신을 따르고 섬기고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현대사회의 가장 큰 병폐로 지적하신 신자유주의 정신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 2) 

또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고약한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녀석입니다. 우리는 남이 아니라 곧잘 자신을 속이고, 자신에게 속기도 합니다. 자신의 욕망과 생각, 자신의 견해와 뜻을 섬기고 추종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말합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살피시오.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1티모 4, 16) 

분명, 우리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뜻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현대 전자 전쟁< 루카, 21/5-1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많은 사람이 한국에 전쟁이 일어 날 것이라 예측하고 전날 6,25와 같은 불행이 일어 날것이고 우리나라는 안보다 허술하고 재래식 전쟁이 일어나 서울이 쉽게 정의 손에 들어가 나라가 없어질 것이다 걱정하고 있지만 지금 전쟁은 충들고 대포를 쏘며 전차를 몰고 쳐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공격이나 방어나 모두가 전자식 방식으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면 전쟁의 규모를 쉽게 알게 알게 됩니다. 위성에서 전자무기를 발사하여 정확하게 목표물을 파괴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생각하지 못한 전쟁이 일어날 것이 구나 그러나 사로 그 위험을 감지하면 핵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상대국을 함부로 침범할 수 없습니다.

전쟁의 기미가 보이면 즉시 반격이 일어나 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전의 아무리 잘 꾸민 성전이라도 전쟁이 일어나면 전부 무너져 버린다는 말씀은 우리를 공포와 두려움으로 몰고 갑니다.

그럼으로 전쟁의 기미가 보이는 두려움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마음가짐에 따라 우리는 서로 갈등과 불화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무서운 전쟁은 사람의 마음가짐이 시기 질투 원망 복수심 받은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해 암처럼 몸에 지니고 마음은 불안 갈등으로 살다가 어느 날 폭발 하여 인격 살인 또한 육체적 살인으로 자신이나 타인에게 손실을 주는 극담 적 행위는 모두가 마음 깊은데서 나옵니다.

아런 것은 말에서 나옵니다. 말로 불의를 범하고 말로써 상처를 주고 서로 풀지 못하고 마음 안에 무서운 폭발력을 가진 무기로 변하면 “오 육 월에도 여자가 한을 품으면 서리가 온다” 는 말처럼 무서운 결과를 낳게 합니다.

전쟁의 무기를 서로 정확한 정보로 잘 다스리고 보존해야 함 같이 서로 마음과 마음의 문을 열러 의사소통이 잘되어 서로 내적 갈등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현대 편리한 전자시대를 잘 이용하면 행복한 삶이 이루어지지만 잘못 이용하면 감당 할 수 없는 불행이 닥칩니다.

평상시처럼 보여도 전쟁의 조짐이 보이고 위험이 내재한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평온한 것처럼 보여도 온갖 쓰레기 같은 생각과 오물로 가득한 마음이 가스 복팔 일으키지 않도록 서로 마음가짐을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진실과 사랑이 깃든 주님을 믿고 희망 하고 사랑합시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루카21,8)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삶을 연극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연극은 각본이 없다고도 말한다.

또한 그 연극의 주인공이 되라는 말도 자주 듣게 된다.

우리 각자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각본을 써나가고 있을까?

보통 소설, 연극, 드라마, 영화를 보면 재미난 현상이 하나 있다.

선하고 옳은 주인공이 있다.

작가는 주인공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관객들에게 재미와 호응을 일으키기 위해서, 가능하면 나쁜 역할의 배역을 최대한으로 악하게 만든다.

나쁜 역할의 배역이 악하면 악할수록 관객들은 더욱 흥분하고 선한 주인공을 응원하게 된다.

흔히 헐리우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력도 자연스럽게 미화되고 만다.

이렇게 쓰는 각본을 보통 세상논리에 맞춘 각본이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써야 할 연극은 하느님이 가장 큰 관객이 되시는 연극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그 연극의 주인공이 되라는 말은 잘못된 말일지도 모른다.

혼자의 삶이 될 수도 없고,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삶도 아니다.

나 아닌 다른 누구를 주인공이 아닌 역할로 밀어내어서는 행복한 끝을 맺을 수 없는 연극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차라리 주인공이 되라는 말보다는 선하고 옳은 배역을 택하라고 말하고 싶다.

일회 상연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연극 속에서 스스로 악한 역할의 배역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비록 바보스럽다는 말을 듣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른 역할의 배역을 선택해야 한다. (2013)

"무서워하지마라!"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여기저기서 '이번에는 진짜다' 하며 불안을 조성하여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현혹된 사람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기전에 미리 죽음을 택하기도 하고 가족을 버리고 사이비 집단에 들어가 찾을 수 없었지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자극이 됩니다.

진정 종말이 온다면 무서워 피할 수도 없고, 여기만은 안전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꾀임이 부질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오늘을,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끝까지 살자.

살면서 연탄제 함부로 발로 차지 말고! 

따뜻함을 품고 따뜻함을 주는 사랑하자.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묵시 14, 15)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듣는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21, 5~11)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고하시고, 또 요한 묵시록에서는, 땅에 곡식이 무르익어 수학해야 한다(묵시 14, 15)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요한 묵시록의 말씀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요한은 묵시를 통해 흰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같은 분이 앉아 계시고,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들고 계신 분이 계시는데,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 분께 "낫을 들어 수학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라는 말씀을 아뢰자, 구름 위에 계신 분이 땅으로 낫을 휘들어 땅의 곡식을 수학한다고 합니다.(묵시 14, 15~16)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 종말에 모든 사람들의 행실에 따른 결실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이라고 보겠습니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자기 생명의 시간이 있고 그 생명의 결실을 내놓게 됩니다. 나무들은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서 결실을 내놓고 가지요. 우리 인간들도 이 세상에 다른 존재들처럼 그러한 삶을 산다면, 우리 인간에게도 생의 결실을 내놓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자기 삶의 결실입니다.

우리 존재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목적이 있는데, 우리 교리에 의하면,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하느님을 알고 섬기며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살도록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알고 섬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성실히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삶의 결실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마치 추수 때가 되어서 잘 여문 곡식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들은 모아서 불을 태우듯이, 자기 삶의 결실을 잘 이룬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삶도 끝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우리가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입니다. 우리는 한해 한해 나이를 먹어 가고 있지요. 그것은 그 세월을 통해 자기 삶의 인생도 익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익어가고 있는 것들은 결국 떨어지게 됩니다. 내 삶의 절정기와 내 삶을 마무리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존재를 주신 것은 각자 자기 삶의 결실을 주님께 보여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주님을 만날 때 내 삶의 어떤 결실을 보여 드리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룩한 일들이 될 것입니다. 나의 선행, 친절, 배려, 용서, 또 주님을 신뢰함, 주님과 뜻을 같이하여 이룬 올바른 일들, 이런 것들이 내 삶의 결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내 삶의 결실을 소담스럽고 주님 보시기에 좋은 결실로 가져갈 수 있도록 내 삶의 시간들을 값지고 보람 있게 활용하도록 합시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내 삶의 결실을 어떻게 마련하여 주님께 가져가겠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결국은 무너지고 사라질 것들 

남상근 신부님

수십 년간 어마어마한 재원을 동원하여 건설된 성전은 이스라엘 자부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을 바라보면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온다 하셨으니 당대의 신심가들이 듣기에는 너무 충격적이죠. 돌기둥에 금이 가는 것이 아니랍니다. 완전히 깨끗하게 무너진다는 것이죠. 사실 모든 것은 다 사라지기 마련이죠. 지상에서 영속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 위대한 업적도 사라집니다. 그 위대한 인물도 결국 사라지죠. 시간의 풍화를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죠. 상전벽해도 되지만 초토화되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 사라지면 당연히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더불어 나쁜 것도 사라집니다. 그리고 사라져야만 새로운 것이 등장하고 자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너질 성전을 대신할 새로운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이 새로운 성전은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신령한 것이 될 것임을 보증하셨습니다. 사라짐을 묵상하며, 사라지는 것들 붙드느라 애쓸 것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을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다 허물어진 폐허 위에서 비로소 신생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예전에 스피노자라는 철학자가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요즘은 자기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적어 놓는 ‘버킷 리스트’라는 것이 있답니다. 여러분은 죽기 전에 또는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를 논하거나 죽음과 관계없이 오늘 내가 믿고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 삶의 자세를 논하거나 다 죽음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개인적인 취향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8-9) 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도 대비해야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 올 한 해가 시작할 때 무엇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다짐했는지 되새겨 보십시오. 무엇입니까? 기억나십니까? 아직도 그 마음이 변함없다면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실현함으로써, 스스로 뿌듯하고 그 누군가에게 그리고 어려운 이웃에게 기쁨을 가져다줌으로써 다 같이 행복하게 한 해를 마무리 하면 좋겠습니다. 

늘 만나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하고 말할 것이다.”

오늘 복음은 멸망의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전쟁과 반란이 일어나고 모든 것들이 다 허물어질 터인데 그때 가짜 그리스도도 나타난다고 하시며 속지 말라 하십니다. 

멸망의 때가 오면 사람들이 당황하여 아무나 자기를 구원해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는 병원에서 불치병이라고 판단을 받은 환자가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나서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사실 이런 때에 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우리는 늘 멸망의 때를 대비해 살아야 하는데 이것을 신앙적으로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종말론적인 신앙을 잘 사는 것은 멸망의 때를 잘 대비하는 것이고, 멸망의 때를 잘 대비한 사람은 당황치 않고 침착하게 종말을 맞이할 겁니다.

자신의 멸망이 아니고 세상의 종말이며, 자신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자를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종말의 때에 우리는 자신의 멸망을 만나지 말고 주님을 만나도록 합시다.

그렇지요. 건강할 때의 우리는 의사를 찾지 않고 아프더라도 웬만큼 아프면 명의까지 찾지 않아도 됩니다.

아플 때 의사가 필요하고 중병일 때 명의가 필요한 거지요.

이와 같이 우리는 종말의 때에 구원자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게 되기에 오히려 우리는 종말의 때를 주님을 만나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면 되는데 종말이 닥쳐와도 우리가 구원자 주님을 올바로 찾아 만나기 위해서는 다급할 때만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늘 만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마치 명의를 주치의로 두고 상비약을 늘 옆에 두는 것과 같지요. 

사실 저를 찾는 사람이랄까 만나는 사람이 크게 두 부류입니다.

어려울 때 찾는 사람과 늘 만나는 사람입니다.

살만할 때는 찾지 않다가 어려울 때만 찾는 사람을 보면 필요할 때만 찾는 그의 얄팍함이 얄밉기도 하고 제가 그런 사람밖에 되지 않음이 씁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가 불필요한 사람보다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지요.

그러나 저는 제가 필요한 사람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이길 바라고 저와 만나는 사람들도 필요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이기보다는 사랑하기에 만나는 사람들이기를 바랍니다. 

어제는 두 가지 스쳐가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는 이곳 수녀원에 오기 위해 꼭두새벽에 혼자 미사를 봉헌하는데 위령성월의 끝 무렵에 죽은 친구들이 생각나 그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 친구들 살아있을 때 제가 데면데면하여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지만 제 기도 속에 이렇게 자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친구입니다.

하느님도 이런 친구들과 같습니다.

오후에는 수녀님들께 성사를 주고 산보를 나섰는데 고양이가 눈에 뗬습니다.

그런데 고양이 특유의 그 경계하는 모습이 그리 안 좋게 느껴지며 개와 고양이를 비교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양이와 개를 데리고 살다가 두고 이사를 갈 경우 고양이는 결코 사람을 따라가지 않고 자기가 살던 곳에 남지만 개는 주인을 끝까지 따라간다고 하지요.

우리는 고양이가 아니라 개처럼 주님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고 멸망의 때가 되어서야 주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늘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살고자 하는 살아있는 벗이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11. 27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루카 21,5-11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재난의 시작)

살아있는 것은 그 무엇이든

한 순간도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조차 느낄 수 없는 미미함에서

천지가 개벽할 듯한 격렬함까지

오직 쉼 없이 변함으로써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음을 드러냅니다

질서를 깨뜨리는 혼란이

새로운 질서로 이어지고

생명을 다한 죽음이

또 다른 생명을 낳는 것

오직 살아있는 것만이 누리는

빼앗길 수 없는 특권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벗이여

그러니 진정 살고자 하는 벗이여

혼돈을 피하지 맙시다

혁명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대로 있으라고

움직이지 말라고

죽음을 강요하는 무리들의

검은 속삭임에 결코 현혹되지 맙시다

느슨해진 몸과 마음 곧추세워

부딪히고 깨뜨리고 새로 세웁시다

삶은 죽음으로 끝나겠지만

죽어야만 부활을 살 수 있으리니

죽음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보다

영원한 삶에 대한 더욱 강렬한 희망으로

살고자 하는 살아있는 벗이여

우리 힘차게 또 한 걸음 내딛읍시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 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주어지는

나눔의 나라이며

생명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향해

순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영원한 삶을 향한

여정에는 언제나

식별이 필요합니다.

식별은 그 무엇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정의 마무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식별은 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식별은 자아가

무너지는 믿음의

시작입니다.

속고 속이는

자아가 드디어

회심하는 마무리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믿음에도 소신이

필요한 여정임을

뜨겁게 체험합니다.

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영국의 한 의과대학에서 웃음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는데, 글쎄 어린아이는 하루에 평균 400~500회를 웃는데 반해 어른이 되면 그 웃음이 현저하게 줄어들어서 하루에 15~20회로 급격하게 감소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웃음이 감소하게 될까요? 웃으면 실없는 사람처럼 보여서일까요? 가장 큰 원인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커지면서 웃음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에 대해 저도 크게 공감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미사를 하다보면 그런 느낌을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미사는 참 재미있습니다. 별 것도 아닌 이야기인데 아이들은 정말로 신나게 웃고 격렬한 반응을 보입니다. 물론 아이들의 시끄러움이 도를 넘어설 때도 있습니다. 아이들 미사를 하게 되면 반응이 참 뜨겁습니다. 하지만 중고등부 미사로 넘어가면 너무나 힘듭니다. 잘 웃지도 않고 도대체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걱정이 많아지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성인의 경우는 어떨까요? 성인들도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면서 열심히 기도하시는 분들은 대체적으로 많이 웃으시고 미사 중에도 적극적이십니다. 하지만 지금 어떤 걱정과 불안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절대 웃지 않으십니다. 미사 중에도 그냥 가만히만 계십니다.

이렇게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커지는 사람일수록 분명히 웃음이 줄어듭니다. 그렇다면 그 불안과 염려를 없애면 되지 않을까요? 언젠가 어떤 책에서 우리 인간이 하고 있는 걱정의 96%가 일어나지 않을 일, 바꿀 수 없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즉, 스스로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걱정이란 단지 4%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걱정 96%를 집어 던지고 웃음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성전의 파괴가 언제 일어날 지를, 그리고 그 일이 벌어질 때의 표징을 묻습니다. 46년 동안 지은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지요. 더군다나 이제까지 놀라운 기적과 힘 있는 말씀을 하셨던 예수님인지라, 그분의 말씀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어서 언제 일어나고 또 어떤 표징이 벌어질 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에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어떤 소문에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분명히 올 일이고 반드시 거처야 할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걱정으로 지금 내 자신이 할 일을 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나 지금 해야 할 일에 충실하다면, 마지막 날이 와도 기쁘게 그 순간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의 명언: 걱정은 흔들의자와 같다. 계속 움직이지만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월 로저스).

쓸데없는 걱정(노먼 빈센트 필)

노먼 빈센트 필 박사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글에서 한 연구기관의 조사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걱정 중에서...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닌 작은 것에 대한 걱정으로 22%.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걱정이 4%.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사건에 대한 걱정이 4%이다.

결국, 사람들은 96%의 불필요한 걱정 때문에 기쁨도, 웃음도, 마음의 평화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배우이자 칼럼리스트인 윌 로저스의 말이 크게 와 닿습니다.

“걱정은 흔들의자와 같다. 계속 움직이지만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한 달은 질풍노도와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국민들은 평소에 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견고할 것 같았던 청와대와 대통령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흔들렸고, 국민들은 허탈과 분노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대통령의 측근들은 조사를 받고 있고, 대통령과 수십 년을 함께 했던 사람은 국민적인 지탄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변명과 몰염치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민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리당략에 따라서 부평초처럼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민족입니다. 넓고 깊게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눈앞의 일에 너무 들뜨거나, 흥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밀알 하나가 떨어져서 썩으면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만나게 될, 마지막 순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저는 1991년 9월 10일에 청량리 바오로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9월 5일에 중곡동 성당의 보좌 신부로 발령을 받았는데, 5일 만에 입원하였습니다. 열을 재니, 40도였습니다. 바로 중환자실로 갔습니다. 20여 일 병실에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저는 조금 일찍, 삶의 끝자락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언젠가 그 끝에서 하느님과 대면할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저는 그때 이후로 저의 삶은 주님께서 주신 ‘덤’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별로 두려워할 것도 없고, 큰 욕심도 없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는 너무나 큰 가르침이고,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투병하던 동창신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완쾌되어 스스로 걸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병문안을 온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서 병실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병문안을 온 분들은 사진 밑에 위로와 격려, 쾌유를 바라는 글을 적어 놓았습니다. 제가 병문안을 갔을 때, 병실의 벽에는 많은 사람들의 사진과 쾌유를 바라는 글들이 있었습니다. 아직은 불편한 몸이지만 고백성사는 언제든지 줄 수 있다고 말하는 동창신부, 그래서 성당은 언제든지 지킬 수 있다는 동창신부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행복은 희망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행운은 용기를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선배신부님께서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순간을 살아도 우리 인생은 흑자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은 모두 날려버리고, 희망의 날개를 펴고 주님께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생의 밑바닥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원전 19년 헤로데 대왕에 의해 시작된 예루살렘 성전의 증개축은 서기 46년에 완공됩니다. 이 성전은 서원 이행의 표시로 혹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성전에 바쳐진 ‘예물’(2마카2,13)과 “아름다운 돌”(21,5)로 건축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경탄하자(21,5), 예수님께서는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21,6) 하시며 성전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전 건물의 파괴뿐 아니라 유다인의 희생제사가 종말을 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예고대로 70년 8월 29일 로마군에 의해 성전은 파괴되고 일부 벽만 남긴 채 불타버렸습니다. 그 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69-79년)는 남은 벽마저 허물어버립니다. 또한 포위 공격에 의해 110만 명이 죽었고, 9만 7천명이 포로로 끌려가서 그곳은 완전 폐허가 되었습니다(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성전은 유다인들에게는 신앙의 본거지이자 존재의 구심점이었기에 그 파멸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인 80년경에 복음서를 집필하였기에 이 충격적인 사건은 종말의 전조가 아니라 역사적 비극으로 봅니다(21,20-24). 

우리는 주님의 성전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 또한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주님의 거룩한 집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 파괴는 역사의 비극이요 인간과 생명이신 하느님과의 단절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성전이 파괴되듯 우리의 영혼도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사회도 비극적인 상황으로 치닫곤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자초하는 이런 파멸 상황에서도 다시 주님께 얼굴을 돌리고 희망을 잃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제 어려운 시기가 올 것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이지만 주님께서 함께 계실 것이니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당신의 거처로 삼아주십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거짓과 불의가 판치는 세상 그 어느 구석에도 사랑과 정의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더라도 함께 해주시는 주님께 믿음을 두고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위협과 멸망을 본다 하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도 사실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요, 죄에 넘어지고 시련을 겪고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는 순간마다 거기에는 주님의 생명과 의미가 담겨있음을 보도록 힘써야겠지요. 행복을 바라거든 살아가며 다가오고 겪게 되는 모든 것을 희망 가운데 받아들여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세상에 불의와 불평등과 부조리와 부패가 넘친다 하여도, 불안과 혼란에 빠뜨리는 자연 현상이나 전쟁과 기근, 생각을 뒤흔드는 거짓 사상에 휘말려 비극을 자초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는 거짓과 부패로 얼룩진 뻔뻔스런 최고 권력자를 포함한 정치가들과 탐욕스런 자본가들의 모든 것을 다 허물고 새로운 성전을 지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과 물질을 따라가지 말고 깨어 기도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충실히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당신들이 만든 예수는 모셔가시오 

- 윤경재 요셉- 

인도 독립의 아버지 간디의 일화를 보면 깨달을 점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뉘우쳐야 할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간디가 영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1919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변호사로 개업했을 때입니다. 한번은 일등석 기차를 탔는데 표가 있어도 단지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쫓겨났습니다. 그때부터 간디는 기독교란 종교를 믿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곧이어 인도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시작하고 30년 동안 몰두했습니다.

그는 기독교는 믿지 않기로 작정했지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사랑의 말씀은 실천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예수님 말씀 중에 특별히 산상수훈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누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 대라, 그 말씀을 지키기로 작정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간디의 상징인 비폭력 운동의 시작입니다. 그 결과 제국주의 영국이 그의 비폭력주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영국이 항복하고 인도를 떠날 때입니다. 그때 간디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간디는 철수하는 영국인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들이 만든 예수는 가져가고, 성경 속에 살아계신 예수는 두고 가시오. 내가 볼 때 당신들이 떠드는 예수는 당신들이 만든 예수지, 성경 속의 예수가 아니요. 성경 속에 계신 예수는 두고 가시오.”

한번은 유명한 선교사가 간디를 찾아가 힌두교가 판치는 이 인도에 어떻게 하면 기독교가 뿌리 내릴 수 있을지 질문했습니다.그랬더니 몇 가지 방법을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당신네 선교사를 포함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기 인도에서도 기독교가 뿌리를 내립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순종하십시오. 그 가르침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기독교가 삽니다. 셋째는 사랑을 강조하고 그것을 추진력으로 삼으십시오. 그것이 기독교의 중심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간디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전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사람들을 신앙에서 쫓아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네가 이렇게 발전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기독교를 받아들여서이니 너희도 믿으라고 주장하는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일침을 가한 것입니다.

사실 요즘도 이런 억지 주장을 내뱉는 종교 지도자가 여전히 눈에 뜨입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가 지진해일 같은 자연 재해도 적고, 더 잘 산다나 어쩐다나? 하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성전을 두고, 성전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감탄하며 이야기하는 사람의 심정일 겁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착각을 여지없이 물리쳤습니다. 번지르르한 겉모습에 도취되지 말고 진정한 믿음을 지키라는 지적입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라는 예언이 실현되고 있습니다.

묵시록에서 말하는 ‘적그리스도’란 내가 그리스도라고 자칭하는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들먹이며 오히려 사람들을 쫓아내는 일만 일삼는 부류를 지칭합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고 이런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출현할 때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예언이 실현될 것입니다.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비그리스도교 선언을 통해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에 알맞게 산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으며 그들도 동등하게 구원 받을 것이라 선언했습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매력에 빠져 실천하려고 노력한 간디와 같은 인물이 바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여기서 비록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지 못한채 돌아가신 우리 선조들의 구원 문제도 해결될 수 있겠습니다.

높고 화려하게 지은 성전은 그 알맹이가 빠졌을 때 여지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싸우는 일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곡해하고 자신들이 만든 그리스도를 주장할 때 벌어집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큰 표징이란 이런 사건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는 사건의 조짐이 이미 나타났습니다. 서구문명과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전쟁이 그 서막입니다.아직은 본격적으로 다툼이 불붙지는 않았지만, 얼른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고비가 찾아오리라는 예측을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정신으로 되돌아가는 일만이 세상에 닥친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겠습니다.

늘 새로운 시작  -해뜨는 마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늘 해뜨는 마을처럼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놀라운 것은 날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일출장면 보다 아름답고 황홀한 장면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세상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희망을, 사랑을, 믿음을 반영합니다. 

얼마전 나라 사정도, 본당 사정도, 가정 사정도 어수선하고 시끄러워 마음 둘 곳이 없다던 어느 자매의 탄식이 생각납니다. 늘 반복되는 세상이요 어수선한 시국이 종말적인 상황처럼 느껴집니다. 요즘 연중 마지막 주간의 말씀은 모두 종말상황을 가리킵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종말은 심판이자 동시에 구원의 시작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가까웠습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에서 천사의 외침에 낫을 들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는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언젠가 구원의 그날이 아니라 매일매일 의인의 삶을 수확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매일매일이 회개의 날이자 구원의 날입니다. 반면 날카로운 낫을 든 천사에게 다른 천사가 외칩니다.

“그 날카로운 낫을 대어 땅의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들을 거두어들이십시오. 포도가 다 익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땅 위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느님 분노의 큰 포도 확에다 던져 버립니다. 포도송이가 상징하는바 불의한 이들입니다. 불의한 이들의 심판상황을 실감나게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과연 주님께서 오늘 지금 여기에서 내 인생을 수확해 가신다면 어느쪽에 속하겠는지요.

깨어 하루하루 알차게 사는 것입니다. 어떤 종말 상황이 온 듯 해도 결정적 종말은 아닙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지체하지 말고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말고 깊이 들여다 보며, 멀리 내다보며 지혜롭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미혹되지 않습니다. 속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주님께서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깨어 조심하면서 주어진 제삶의 자리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고 내적평화를 지니고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평화롭게 하시어 제 삶의 자리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너는 죽을 때 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희에게 주겠다.”(묵시2,10). 아멘.

유비무환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 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로마의 헤로데 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합니다. 이 성전이 다시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을 하셨는데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 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1948년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하느님을 외면하고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런 재앙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이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의 길을 걸었더라면 멸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유비무환’이라는 말을 기억합니다. ‘미리 준비하면 근심할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고 남도 추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깨어 준비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약속한 미래를 희망할 뿐입니다. 희망하는 만큼 지금에 충실합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 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에서 하신 긴 담화의 첫 부분입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파괴에 대한 예언과 세상종말이 오기 전의 표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전은 주님의 현존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룩한 것이라 하더라도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면 그 존재의미를 잃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성전 파괴에 대해서는 이미 예언자 미카, 예레미아, 에제키엘 등에 의해서 진술된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옛 솔로몬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에 의해 즈루빠벨의 치하에서 기원전 515년에 재건된 제 2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헤로데 왕에 의해 기원전 19년부터 확장되고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지면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와 표징을 묻는 이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루카 21,8)

남을 속이는 일은 당연히 말아야 하겠지만, 남에게 속지도 말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이비 메시아는 누구일까? 대체, 우리는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 속고 있는가?

그것은 물질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사이비 구세주로 따르고 속아 넘어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 재물뿐만이 아니라, 세속정신 특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현대사회의 가장 큰 병폐로 지적하신 신자유주의 정신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남에게도 속지 말아야 하겠지만, 또한 자신에게도 속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곧잘 자신을 속이기도 하고, 자신에게 속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특히, 자신의 생각이나 자기의 주장이 옳고 타인의 그러한 것들은 틀렸다고 여기며, 자기의 주장만을 섬기고 쫓아 나설 때가 바로 자기라는 우상에 빠졌을 때임을 알아차려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뜻을 알아듣고 응답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분이 주님이신 까닭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디모테오에게 말합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살피시오.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1티모 4,16,)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독일 수도원 순례를 간 적이 있습니다. 독일의 대도시에 가서 카페에 들어갔는데 높은 벽에 십자가도 걸려있고, 성모상도 있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도 있었습니다. 성전을 화려하게 지었지만 신자들이 다 빠져 나가서 카페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왜관 분도 수도원을 파견한 모원 성당은 지방 중소도시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우리 성당보다 큰 성당인데도 주일날 미사가 9대나 되었습니다. 내년 상반기에 뉴타운 재개발로 우리 성당 신자 5,100명 중에 1,200명이 이사 갑니다. 제 임기 중에 1,700명만 남고 다 이주하게 됩니다. 이사 가신 분들은 다시 들어오시겠죠.

20년 후 제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병석에 누워있기라도 하고 같이 살던 김 신부님이 병문안을 왔을 때, 제가 “수색 성당 어떻게 되었어?”라고 물을 때, 김 신부님이 “수색 성당 지금 1층은 카페가 되었고 2층은 디지털 미디어 시티의 촬영장이 되었습니다.”라는 소식을 전해주게 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하는 아찔한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성전을 바라보시며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돌이 오래되었거나, 건물을 잘못 지었거나 또는 이 민족의 침범으로 무너져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엇보다 성전과 관련된 사람들이성전에 걸맞게 살지 못할 때 성전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없어져 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위기의 상황을 접하며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성전에 나와 주님을 찬미하며 기도하면서 하느님 대전에 맞갖은 삶을 살 때 우리 교회는 주님의 교회로 남을 것이고, 우리 교회가 양적 질적으로 튼튼해 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실현하며 우리 교회를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켜 나아가기로 합시다.

파멸의 때를 재림의 때로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지금 있는 것들은 무엇이나 다 무너지거나 허물어질 때가 언젠가 있을 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한창 젊은 사람일지라도 그것은 알고 있고 나이든 사람은 더더욱 잘들 알고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요즘같이 그 푸르던 잎이 질 때에는 젊은이들도 모든 것이 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은 하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젊은이들이 그 점을 생각은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임박한 것인지 실감치 못하여 절박함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2-30대 때, 아니 40대가 되었을 때도 우리 인간의 젊음과 아름다움이 얼마나 형편없이 무너지는지 실감치 못했고, 그래서 허물어진 육신을 지닌 어르신들을 불쌍히 여기고 돕기는 했어도 나하고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꼈었지요.   

그러다가 저의 어머니의 육신과 정신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며 그때서야 남의 일이 아니고 실감이 나기 시작하였고, 제 이빨이 빠져 이제 여덟 개까지 빠지니 더욱 실감이 나지요.   

그러고 보니 실감이라는 말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실감이란 틀림없이 한자로 實感일 텐데 실제 감정의 준말이고, 실제로 그런 일이나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일 거라 생각됩니다.   

실감이 안 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느낌이나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고, 왜 그럴까요?   

보통의 경우 너무 뜻밖에 또는 갑자기 어떤 일이나 상황이 닥칠 때 그렇지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고, 그래서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그런 거지요.   

그런데 이런 것은 ‘꿈인가 생신가?’할 때의 그런 것입니다.

너무 좋은 것도 갑자기 이루어지면 ‘꿈인가 생신가?’하고 너무 안 좋은 일에도 ‘꿈인가 생신가?’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충분히 예견이 되었고, 그래서 마음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도 그 일과 상황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는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일이나 상황을 예상은 했었지만 그것이 막상 실제가 되면 우리의 마음은, 특히 우리의 감정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누군들 그것을 인정하고 싶겠습니까?

아무리 오래 앓았고, 의사가 마음 준비 하라고 했어도 사랑하는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사랑하는 내 자식이 죽었는데 어떻게?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고 그래서 실감이 나지 않아도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사라질 때는 반드시 닥칠 겁니다.

그러니 파멸의 때가 들이닥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애착하는 것을 하나하나 끊어버리고, 파멸의 때를 마음으로 각오하고 준비도 해야겠지만 파멸의 때를 그리스도 재림의 때로 바꾸고 주님을 기다리는 겁니다.   

그러므로 전례력으로 이 한 주가 가면 벌써 대림절이 시작되는데 모든 것이 낙엽 따라 가버린 뒤에 오시는 주님을 우리는 기대하도록 합시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카 21,6)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옛날 바벨탑부터 시작해서 인간은 늘 하늘 높은 데까지 다다르고 싶은 욕망을 건축으로 표현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능력자가 된다해도 하느님을 대적할 수야 없겠지요.

아무리 높고 웅장한 랜드마크도 어이 없게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심심찮게 목격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와우 아파트 붕괴, 삼풍 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를 보았고, 미국에서는 911에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붕괴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가까운 일본과 중국의 대지진과 쓰나미도 보았고 최근에 경주에서 발생한 중급 지진에 가슴을 쓰러내리기도 했답니다.

해운대의 고층빌딩 집값이 폭락할 조짐까지 보일 정도로 자연의 힘 앞에 무기력한 인간의 한계를 봅니다.

그 막강한 권력도 비선 실세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요즘입니다.

그렇습니다.

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견고한 바위도 똑똑 한방울씩 떨어지는 물에 구멍이 뚤리고 아무리 높은 빌딩도 지진 한방에 무너져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잘 나간다고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권력이 있다고 자만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돈 좀 있다고 갑질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좀 안다고 떠들어서도 안됩니다.

그저 매사에 신중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무너질 때가 언제 닥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같은 시국에 너무 감정적으로만 흔들리지 말고 신중하게 멀리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합니다.

나 또한 작은 일을 무시하다가 큰 봉변을 당할 수 있음을 배우며 겸손하게 묵묵히 살아갑시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꼴찌가 첫째가 될 수 있습니다.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런 일들을 많이 보게 될 겁니다.

높이 쌓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기초를 더 넓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함을 몸으로 배우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살고자 하는 살아있는 벗에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아있는 것은 그 무엇이든

한 순간도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조차 느낄 수 없는 미미함에서

천지가 개벽할 듯한 격렬함까지

오직 쉼 없이 변함으로써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음을 드러냅니다

질서를 깨뜨리는 혼란이

새로운 질서로 어이지고

생명을 다한 죽음이

또 다른 생명을 낳는 것

오직 살아있는 것만이 누리는

빼앗길 수 없는 특권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벗이여

그러니 진정 살고자 하는 벗이여

혼돈을 피하지 맙시다

혁명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대로 있으라고

움직이지 말라고

죽음을 강요하는 무리들의

검은 속삭임에 결코 현혹되지 맙시다

느슨해진 몸과 마음 곧추세워

부딪히고 깨뜨리고 새로 세웁시다

삶은 죽음으로 끝나겠지만

죽어야만 부활을 살 수 있으리니

죽음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보다

영원한 삶에 대한 더욱 강렬한 희망으로

살고자 하는 살아있는 벗이여

우리 힘차게 또 한 걸음 내딛읍시다

어떤 처지에서도 희망을 품자

-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세상에 태어났으면 죽음이 있고, 꽃이 피면 꽃이 지게 됩니다. 그러나 끝이 시작이며, 죽음이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며, 꽃이 지면 열매를 맺고, 열매가 떨어지면 다음 해 열매를 맺으려고 나무 위를 가랑잎으로 감싸 다음날을 기다립니다. 함께 살던 수도자의 죽음 앞에 이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하고 나도 같은 방법으로 죽고 다시 살아남을 알고 있습니다.

나라의 흥망성쇠 자연적 이치이며 “파괴는 건설의 어머니다.” 라는 말처럼 어떤 처지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저는 16살부터 가정을 떠나 부산에서 혼자 피난생활하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고 부산 부두에서 부두 노동을 하면서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꿀꿀이 죽을 먹으면서 돈을 벌며 저축을 하여 쌀 20가마 정도의 돈을 벌어 인천 가족이 있는 곳에 갔다가 인천에서 할 일이 없어 다시 부산 가서 비행장 쓰레기 치우는 조합에서 1년 이상 일하다가 유치장에 들어가기도 하고 미군 부대 목공소에 들어가 일하다 인천의 가족을 부산으로 모셔 오고, 가정이 경제적으로 안정이 될 때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공부를 18 살에 시작하여 학교를 세 번 옮기고 수도원에서 경영하는 순심학교에서 졸업 후 신학교를 들어가 서원하고 신학을 공부하던 중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위기가 왔습니다. 칠 남매 중 장남인 저는 가정을 돌보아야 하지 않는가? 이보다 더 많은 시련과 위기가 있었지만, 하느님이 저와 함께 계시어 끝자리에서 바로 끝이 아니라고 하시며 저를 이끌어 주셨고 여기까지 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처지에 있든 저에게 희망이 된 것은 주님만 믿는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촛불 들고 거리에 나가지 않아도 애국가에 있듯이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우리나라 어떤 처지에 있어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도와 희생을 하면서 기다립니다. 어느 날 핵폭탄으로 완전히 초토화된 일본의 나가사키에 가서 더 나은 도시가 그 위에 세워진 것을 보고 이 나라 정치가 더욱 나은 정치로 더욱 정의롭고 거짓이 없고 국민이 더 정신 차려 지금보다 더 나은 나라가 되리라 굳게 믿고 희망합니다. 바다의 파도를 저어 희망이 기다리는 희망의 나라로 함께 갑시다.

"다 허물어 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 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낡아가고

허물어 지는 것은

엄연한 자연의 

순리입니다.

허물어지는 

거기에서

생명은 새로이 

시작됩니다.

허물어지는

우리를 위해

서로 기도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아름다움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우리의 모습에

있습니다.

새로워지지 않는

내면은 더는

아름다워질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의

생명력은

새로워지는

회개에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배제한

아름다움은

또 다른 추함이

될 수 있습니다.

떠나야 할

우리존재를

아는 것에서

삶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달라져야 할

우리의 오늘입니다.

삶이라는 변화는

언제나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을

떠받들고 있습니다.

작은 것의

가치에 눈 뜰 때

새로운 삶이

펼쳐지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품지 않고서는

새로움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새로운 삶이란

십자가처럼

허물어지는 희생을

동반합니다. 

사랑이라는 성전은

허물어지고

또 허물어지는

정화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살다가 떠날

우리들입니다.

떠나야하기에

가야할 곳이

어딘지를 

알아야 합니다.

다 허물어질 때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게 될 것이며

허물어지는 거기에서

다시 시작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녀 체실리아처럼

삶이 아름다운

우리들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제2차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도 참석했었던 체스티 풀러(Chesty Puller) 장군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한번은 아군이 적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되었다는 보고를 받게 됩니다. 그때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고 하지요.

“덕분에 문제는 간단해졌다! 이제 우리는 모든 방향으로 공격할 수 있다.”

어떤 순간에도 절망을 하지 않는 모습은 과거 역사 안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스파르타 장군 디오케네스는 적군인 페르시아 군대의 화살이 태양을 가릴 정도로 많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거 잘됐네. 덕분에 그늘에서 싸울 수 있게 되었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희망은 문제들을 간단하게 풀 수 있는 길을 제공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희망을 자주 놓으려고 하지요. 대신 다른 것으로 그 자리를 채우려고 합니다. 절망으로... 슬픔으로... 고통으로....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인 이 희망이라는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워 놓으려는 어리석음을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아마 희망의 자리를 빼앗는 이유는 ‘걱정’이라는 걸림돌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제 성경을 읽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에서 생활할 때 만나를 먹던 장면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이 만나는 다음날이 되면 상해버렸지요. 그날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는 그날 안에 다 먹어야만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하루 몫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하루 몫의 희망, 하루 몫의 사랑, 하루 몫의 겸손, 하루 몫의 기쁨 등이 아닐까요? 더 많이 갖고,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마음에서 걱정이 생기고 그래서 하루 몫으로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날 겪는 고통과 시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루분의 고통과 시련일 뿐인데, 아직 오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걱정으로 계속된 고통과 시련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성전 파괴에 대한 말씀을 하시지요. 그러자 사람들은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걱정되고 두려웠던 것이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해야 할 것들을 못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지금이라는 순간에 충실할 때, 이 충실함이 쌓이고 쌓여 주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은 모습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가족들이 서로 맺어져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 정말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행복이다(퀴리부인).

건강한 사람이란(‘좋은생각’ 중에서)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프리치 펄스 박사는 건강한 사람에 대한 특징을 4가지로 말한다. 첫째,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 둘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 셋째,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도전의지를 가지고 있다. 넷째, 자기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안다.

이 글을 보면서 내 자신의 건강은 어떤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특히 정신적인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책임회피, 도전의지 없음, 순간의 감정에 쉽게 흔들림... 요즘에 이런 분들이 더욱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제 안에도 이런 모습들이 너무나도 많았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건강한 사람이 됩시다. 특히 정신적으로…….

깨어 평범한 일상에 충실하십시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루하루가 구원의 날이자 심판의 날입니다. 깨어 살면 구원의 날이고 잠들어 살면 심판의 날입니다. 오늘 요한묵시록의 구원과 심판은 언젠가 있을 일이 아니라 날마다 일어나는 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종말론적 삶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되었습니다.“

땅의 곡식의 수확이 상징하는바 의인의 구원입니다. 과연 우리의 삶은 잘 무르익어 가는지요. 주님께서 오늘 지금 수확한다 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무르익은 삶이겠는지요.  

나이와 함께 가는 성숙이 아닙니다. 깨어 하루하루 노력하지 않으면 여전히 익지 않은 미숙한 삶일 수 있습니다.

"그 날카로운 낫을 대어 땅의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들을 거두어 들이십시오. 포도가 다 익었습니다.“

천사는 땅 위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느님 분노의 큰 포도 확에 던져 버립니다. 그대로 불의한 이들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구원과 심판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이 자초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은 11월 위령성월이자 연중 34주간으로 우리의 죽음과 심판에 대해 묵상하는 연중 마지막 주간입니다. 우리의 일년 삶을 수확하는 주간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일년사계(一年四季)로 내 인생을 압축할 때, 과연 나는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요. 과연 잘 익어가고 있는 내 인생인지요.

오늘 복음은 종말론적 삶을 위한 지침입니다. 어는 상황에서도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지 않고 지금 여기의 현실에 충실할 것을 촉구합니다.  

얼마 전 여기에서 어느 분께 면담고백 성사 중 드린 충고의 말씀입니다. 

"깨어 평범한 일상에 충실하십시오. 그것이 치유와 구원의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깨어 평범한 규칙적 일상에 충실할 때 구원입니다. 일상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또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깨어 평범한 일상에 충실하지 않으면 타인은 물론 착각과 오해로 자신에 속는 일도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누가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하더라도 그를 따라가지 마십시오. 우리가 따라갈 분은 주님 한분 뿐입니다.  우리 삶은 외적 여정이 아니라 내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충실히, 항구히 주님을 따라가는 내적 여정의 삶입니다. 하여 깨어 제자리의 정주에 충실하는 길이 구원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중심에 뿌리를 내릴 수록 평화와 안정의 삶입니다. 어디서 전쟁이나 큰 사건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흔들리거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중심에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때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이 구원의 날이자 심판의 날입니다.  

깨어 평범한 규칙적 일상에 충실하며 하느님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리는 정주(定住)의 삶에 충실할 때 성숙(成熟)과 구원(救援)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깨어 '제 자리'에서 '제 정신'으로 주어진 '제 일'에 충실함으로 구원의 날을 살게 하십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묵시2,10).  아멘. 

구원은 영원세상의 행복자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뭐라 하지요? ‘어이쿠 이젠 살았다.’하겠지요? 

대박, 재벌의 유산, 로또, 등이 자기를 살리는 줄로만 아는 사람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살리는 건 재물이라며 돈을 보고 열심히 따라갑니다..

그러니 세상구원이라며 재물을 따르고 예수님의 구세주 의미는 뒷전이지요.

그들은 자기 재산에 비하면 구원(救援)은 9원(九圓)일 뿐이라 하겠지요

. 재산은 세상에서 쳐주지만 구원은 영원세상의 행복자로 쳐주는 겁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21,8)”

미리 준비하면 걱정할 것 없어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 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로마의 헤로데 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합니다. 이 성전이 다시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을 하셨는데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 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1948년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하느님을 외면하고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런 재앙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이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의 길을 걸었더라면 멸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유비무환’이라는 말을 기억합니다. ‘미리 준비하면 근심할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고 남도 추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깨어 준비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약속한 미래를 희망할 뿐입니다. 희망하는 만큼 지금에 충실합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 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허상에 현혹되지 않는 삶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원전 19년 대 헤로데가 증개축에 들어간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 시대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성전은 건축 자재나 건물 장식물로 쓰일 ‘자원 예물’(2마카2,13)과 “아름다운 돌”(21,5)로 건축하였다. 예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헤로데 왕이 바친 황금포도나무였는데 포도송이만 해도 한 사람만큼의 부피였다(유다 전기 V 4,4). 돌 하나의 길이가 약 12.5미터, 높이 4미터, 폭이 5미터 정도였다(유다 고사 XV 11,3)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경탄하였다(21,5). 이에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21,6) 하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인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의 구심점’이었다. 이 성전이 파괴되어버릴 것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이다. 이 참변은 루카 복음사가의 관점으로 보면 종말의 전조가 아니라 역사적 비극이었다. 내 삶을 보자. 내가 이룬 성공적 결과들, 부와 권세, 명예, 튼튼한 인맥 등 우리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 그것은 나의 모든 것을 만족시켜주며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 같지만 그러한 것들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것이다. 우리가 죽음의 순간을 모르거늘 찰나에 스쳐가고 먼지에 지나지 않는 생의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것들에 집착하며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디 그뿐인가! 우리네 삶은 건강할 때가 있으면 아플 때가 있고,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가 있으며, 올 때가 있으면 갈 때가 있지 않은가? 화려한 성전이 파괴되듯 우리네 삶에서도 매일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기대어 살아가는 많은 것들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누구든 우리 존재의 뿌리요 모든 것이신 영원하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왜냐하면 영이 아니고서는 영이신 하느님을 보지도 만날 수도 없으며, 하느님을 뵙지 못한다면 내가 지닌 모든 것은 헛된 장식품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런 참변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묻자(21,7), 예수께서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하는 이들을 뒤 따라가지 말라고 하신다(21,8). 펠릭스 총독시대에도 이집트에서 온 한 열광가가 자기의 음성이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린다고 자랑하며 약 3만명을 모았다(유다 전기 Ⅱ 13,5). 우리는 살아가면서 갑작스런 실패,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질병, 중대한 선택,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일 등을 겪는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당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아니 어디에 매달리는가?

기도생활을 꽤나 열심히 하는 사람, 오랫동안 성경공부를 하던 사람, 교회 안에서 각종 활동을 헌신적으로 하던 이들조차도 때로는 그런 일을 겪으면 하느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경우가 많다.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소리, 경험이 많다는 이들의 소리, 땀 흘리지 않고 단기간에 큰 수익을 올린다는 선전 등 허상을 찾아 매달리는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화려한 성전의 아름다움에 감탄만 하며 거짓 예언자를 따르고 우상을 좇고 있다면 그보다 더한 비극이 어디 있을까?

예수께서는 이어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21,9) 하신다. 그렇다! 영원하신 분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네 삶은 영원성을 지닌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그 어떤 일이 닥쳐와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적인 것들에 현혹되지 말고 마음의 중심을 영혼의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하리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번 주 일정표를 보았습니다. 일정표는 ‘핸드폰, 숙소의 탁상 캘린더, 사무실의 캘린더와 보드 판’에 기록해 놓습니다. 요즘은 많은 분들이 일정표를 핸드폰에 저장해 놓습니다. 주일에는 성가 소비녀회에서 레지오 단원들을 위한 ‘성사론’ 강의가 있습니다. 월요일에는 옹기장학회 회원들을 위한 강의가 있습니다. 화요일에는 수원교구 노인대학 학생들을 위한 강의가 있습니다. 목요일에는 여의도 성당에서 레지오 단원들을 위한 강의가 있습니다. 주 중에 지인들과의 만남이 있고, 제가 함께 하는 단체들과의 모임도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평화신문에 연재하던 복음묵상이 끝난 것입니다.

지난 1년간 일정표에 기록된 일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올해는 교황 방한 준비 모임이 많았습니다. 식사 약속, 강의, 미사, 운동, 여행 등과 같은 일정들이 많았습니다. 주어진 일들이 잘 마쳐졌을 때는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함이 있을 때는 다음에는 더 잘하려는 다짐을 합니다. 어떤 일들은 생각지 못한 결과를 얻기도 합니다. 어떤 일들은 기대한 것만큼 성과를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건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맡겨진 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미사와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사제직을 허락해 주심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이른 새벽을 볼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축복입니다. 그것은 매일 부활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빛이 밝아오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른 아침에 1시간을 기도하는 것은 하루를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어둠이 아무런 조건 없이 아침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을 봅니다. 기꺼이 비울 수만 있다면, 나눌 수 만 있다면 하루의 끝이 아쉬울 것 없습니다. 삶의 끝도 걱정될 것이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가는 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걱정 때문에 지금 기쁜 마음을 날려 버리지 마십시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별로 없으니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다만 오늘을 충실하게 살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미 지나간 과거로 기억 될 것입니다. 오늘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남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장기적인 목표가 있는 이들에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중앙대 경영학과 위정현 교수가 ‘한국이 노벨상을 못 받는 이유’란 글을 썼습니다. 물론 한 사람의 분석이 전적으로 옳을 수는 없을지라도 일리가 있어 소개합니다.

우선 그는 지난 12일 유럽우주국이 혜성 위에 탐사선을 착륙시킨 사건을 소개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면 그 화성과 목성 사이에 있는 혜성이 움직이는 속도는 초속 18km라고 합니다. 총알의 속도가 초속 1km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총알의 속도보다 18배나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에 탐사로봇을 올려놓는 엄청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탐사선이 지구를 떠났던 것은 2004년이었다고 합니다. 무려 10년 5개월 동안 유럽우주국은 13억 유로(1조8000억 원)을 투자하며 인내심 있게 기다려왔던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이익을 줄 수 있는지는 몰라도 유럽은 이 무모한 도전을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투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10년 전에 어떤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했을까요? 지금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아기를 낳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때 이미 아기 많이 낳기 운동에 전력을 기울였어야 하지 않을까요?그러나 우리는 순간적인 이익창출에만 집중하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일본은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하나 빼고는 수상자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큐도 세계에서 가장 높고 고등학교 때까지는 학교 성적이 전 세계의 탑을 유지하는데도 그 이후엔 어떤 좋은 결과도 나오고 있지 못합니다. 이번 일본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3명의 교수 중 아카사키 이사무는 올해 85세라고 합니다. 그가 마쓰시타 연구소 시절인 1973년부터 청색 발광다이오드(LED) 개발을 시작했으니 40년 만에 성과를 인정받은 셈입니다. 아카사키 교수는 수상자 발표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연구를 시작할 때 20세기 중에는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연구를 그만두는 사람도 많았지만 나는 조금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위정현 교수는 위 두 사례의 공통점이 ‘길고 긴 장기프로젝트’라고 말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도 장기적으로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연구 평가 척도는 이공계라면 SCI, 문과계열 교수라면 SSCI라는 미국 민간회사의 논문집에 논문이 얼마나 여러 개 실리느냐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인정받기 위해 논문집에 논문이 실리게 하기 위해 대량의 단기적인 논문만을 써 내기 때문에 커다란 목표를 잡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카사키 교수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유행하는 연구에 매달리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좀처럼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계속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시각을 근시안으로 만들어버려 지금 현재 이익만 바라보고 멀리는 바라보지 않게 만들어버립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 죽음이나 영혼구원에 대해서는 신경 쓸 여지가 없습니다. 남들이 학원을 보내니 나도 보내야 하고 남들이 대학을 보내니 나도 보내야 하며 남들이 결혼을 시키니 나도 시켜야합니다. 단기적인 성과만 생각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구원받는 이들은 정말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외국의 교육들은 이미 멀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구구단도 글도 일찍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조금은 늦더라도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도 나중에는 위대한 수학자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실생활에 아무 쓸모도 없는 미적분을 모든 학생이 공식을 대입해 풀어야만 대학에 들어가는 시스템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독서는 마지막 날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름 위에 앉으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다 익은 곡식들을 추수하십니다. 그 곡식이 다 익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까지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기다리시는 것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리만큼 거룩해지는 것인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만 생각하다가 시간을 허비한다면 그분의 기다림도 한계에 다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추수꾼은 다 익어버린 포도송이들을 거두어 ‘하느님 분노의 확’에다 던져 넣습니다. 그동안 참고 기다려온 그 인내가 끝나는 시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때까지 완전해지지 않은 것들은 이 분노의 확에서 나오는 피처럼 그렇게 짓밟혀지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선인을 구하는 시간이 악인이 벌 받는 시간입니다. 노아가 구출되는 시간이 모든 인간이 파멸하는 시간이었고, 롯과 가족들이 소돔 땅을 빠져나오는 시간이 소돔이 유황불로 멸망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진노는 점점 더 차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잘 살기만을 바라며 장기적으로 무엇을 목표로 힘을 쏟아 부어야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혼구원을 위해 전력을 다 해도 모자라는 시간인데 어쩌면 우리는 단기적인 세상에서의 기쁨만을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기다려 주시지 않을 시간이 바로 오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구원을 위해 목표를 세워놓고 매일 합당한 투자를 하고 있습니까? 세례자 요한도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보다 크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황당한 계획을 세워야 하겠습니까? 세례자 요한보다도 더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한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이 달려야합니다. 바오로 서간에서 마지막 날이 바로 임박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 이유는 영혼구원을 위해 달려야 하는 지금 이시간이 너무도 절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이 세상 단기적인 것들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마지막 때가 되었을 때 기쁘게 수확될 수 있도록 모두가 하늘나라 성인이 되기 위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만을 바라보며 열심히 달려갑시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한 해를 마감하며

제 자신에게 

더욱 정직해지자는

다짐을 해봅니다.

속이는 주체가

다름아닌

제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잡고

산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때입니다.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더더욱 지혜와 슬기가

필요한 우리의 삶입니다.

살면 살수록

능숙한 삶이란

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헤쳐나갈 수 없는

위험천만한 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빠르게 가로질러 가려다

오히려 가던 길을 

잃어버린 적이 많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비우고 낮아지시는

겸손의 길을 

오늘도 사람들 안에서

걸어가실 뿐입니다.

죽음보다 더 큰

겸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진실해지는 겸손일 것입니다.

주님께 다가가기 위해

거만했던 지난 시간을

반성하는 겸손이

필요한 것입니다.

겸손이 우리의 한 해를

깨끗이 씻어줄 것입니다.

한 해를 잘 마무리하는

귀한 겸손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겸손한 사람은

세상과 물질에

속는 일 없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충만히

걸어갈 것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저 살아가는

오늘이 아니라

가치있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버려진 시간과

고립된 마음이

서로를 속이며

무너지는 아픔이 아니라

서로를 기쁨으로 깨닫는

나누어지는 사랑이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안에는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란 없습니다.

사랑을 통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간절한

자녀임을 만나게 됩니다.

하루의 종말이란

하느님을 향해 가야 할

우리의 삶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본성까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사랑의 섭리임을

우리의 삶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려야 합니다.

종말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무언지를 가르쳐줍니다.

영원한 기쁨을 주시는

주님안에서

삶의 가치와 본질인

사랑을 통하여

버리고 따라야 할

정직한 소명에

더욱 충실해지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매순간 사랑으로

이어져가는

십자가의 신비를 묵상하는

시간 되십시오.

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어제 아침, 하루 일과를 떠올리면서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얼마 남지 않은 올해에 해야 할 일도 정리를 해보았지요.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제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소위 ‘바쁘다’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면서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다 하지? 라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려집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죽게 될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다 보니, 정말로 중요한 일들은 주님과 관계되는 것들 뿐 나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바쁜가가 아니라, 왜 바쁜가이다. 꿀벌은 대접해주지만, 모기는 때려잡는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꿀벌이나 모기 모두 단 한시도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꿀벌의 성실성에 대해서는 인정해주는 반면, 모기는 성실하다고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기는 바쁘게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 바쁨이 오히려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바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왜 바쁜가에 항상 초점을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내가 바쁘다고 못하는 것보다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최후의 순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그 순간에 어떤 표징이 일어나겠습니까?”라고 묻지요.

겁이 나고 두려운 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해주십니다. 왜냐하면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는 이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인류 최후의 순간에 대해 걱정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큰 잘못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죽게 될 일들을 먼저 하면서 주님의 뜻을 생각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아니라,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최후의 순간을 잘 준비하는 것이며, 그 최후의 순간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을 위해 지금 여러분은 어떤 것을 하고 있습니까? 혹시 바쁘다는 말만 하고 있으면서 엉뚱한 일에만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인생을 방관하는 자세를 언제나 증오했다. 참여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인가? 내가 무언가가 되려면 참여해야 한다(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두려움에 대해...

신학생 때였습니다. 어느 날 혼자서 어딘가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너무나도 답답한 내 마음을 여행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지요. 그러나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단 한 번도 혼자서 여행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여행을 하면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고, 특별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두려웠습니다.

이러한 두려움 속에서 망설임이 가득했지만, 이번만큼은 꼭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했던 첫 번째 혼자만의 여행. 너무나도 좋은 시간이었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혼자만의 여행을 통해 많은 생각과 함께 삶의 의미를 충전하는 소중한 시간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두려움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 앞에서 주저하며 다가가지 못하는 것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두려움도 사실 부딪치면 별 것 아닐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할 수 없음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곳으로 다가가지 않는다면 먼 곳은 그저 먼 곳일 뿐이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먼 곳이 아닌, 특별한 나만의 공간이 되기 위해 내가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왜 두려움을 간직해서 그냥 상징적인 공간으로만 멈추게 만들까요?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나의 두려움을 모두 떨쳐 내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영광과 보상으로 주어지는 주님의 심판 

-경규봉 신부님-

요한은 환상 중에 흰 구름 위에 앉아계신 분을 본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신데 심판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 흰 구름은 하늘 위에 계신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을 상징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구름을 타고 심판하시기 위해 재림하실 것이다(1,7; 마태 24,30). 금관은 부활을 통해 사탄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와 세상에 대한 그분의 영원한 통치권을 상징하며(6,2; 19,12), 손에 낫을 드신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심판권을 상징한다(요엘 3,12-14).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신다(15절; 마태 13,37-43; 요한 4,35-38). 추수는 성서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의미하는데(호세 6,11; 요엘 3,13), 여기서는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택하신 성도들을 모음으로써 구원하는 것을 뜻한다.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은 포도 수확의 비유로 묘사된다(17-19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을 통하여 심판하도록 하실 수도 있으나, 성도들을 거두어들이는 일은 친히 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을 대적하여 악을 행한 자들에 대한 심판은 천사가 수행하도록 하신다(18절). 

불(마태 18,8; 루가 9,54; 2테살 1,7)과 포도를 추수하는 것(이사 63,2-3; 요엘 3,13)은 성서에서 심판을 상징한다. 포도가 다 익었다는 것은 악한 자들의 불신과 죄악이 절정에 달하였고 성도들의 부르짖음이 하느님께 상달되어 최후의 심판이 임박하였음을 가리킨다. 땅의 포도는 하느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며 짐승과 사단을 추종하는 모든 악한 자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포도는 수확의 때에 하느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지게 된다. 수확된 포도를 포도주 틀에 넣고 포도즙을 짜는 행위는 성서에서 하느님께서 적대자에게 진노하시어 심판하시는 것을 상징한다(19,15; 이사 63,3; 애가 1,15). 짐승과 사탄의 추종자들이 이 땅 위에서 성도들을 무참히 박해하여 피를 흘리게 했듯이 그들도 하느님의 혹독한 심판을 당할 것이다.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와 힘을 준다. 우리의 스승이요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을 누리고 이 세상의 통치권을 가지고 계시면서 세상을 심판하실 준비를 다 마치셨다. 그리하여 당신의 길을 걷는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심판을 준비하고 계신다. 심판이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자들에게는 징벌이요 멸망이 된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심판이 두려움과 공포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심판은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니라 기쁨이요 상급이다. 마치 열심히 공부한 학생에게 시험은 걱정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을 드러낼 좋은 기회가 되듯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심판은 지상 삶에 대한 보상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듯이 주님의 지체인 우리도 마땅히 영광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실 때, 우리도 주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판을 통해서 만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뵘으로써 행복을 누리고, 심판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누릴 것이다. 심판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하고 말씀하실 것이다. 

사람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산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 미래는 단순히 이 세상에서 앞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선 하느님 나라까지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미래에 우리에게 영원하고 완전히 주어질 하느님 나라와 그 영광을 보장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비록 현세의 삶이 고통스럽고 박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참고 견디어 나가자. 현세에 여러 가지 유혹이 우리를 뒤흔든다 할지라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겨나가자. 그리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향하여 힘차게 걸어가자.

자비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 김순중 수녀님-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여러 예언자가 성전 파괴를 예고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왜 그렇게 절망스러울까? 잘못 이끌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곰곰이 잘 생각해 보면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아들을 무척 사랑하시어 그 속 깊은 비밀을 털어놓으시는 것 같다. 아하!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생명의 주인이신 그 어른을 알아보는 일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한가? 내 작은 생명이, 생명의 원천이신 분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주님은 종말을 예고하시면서 어서 당신께 돌아와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라고 초대하신다. 아직 자비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무서운 심판이 닥치지 않도록 사랑을 향하여 어서 달려가야 하지 않을까? 영원한 삶이 존재한다면 영원한 죽음도 존재한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자유를 주셨다. 당신의 크신 사랑에 ‘예’ 또는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는 선택은 오직 우리 인간한테만 주어졌다. 나를 위한 영원한 삶은 전적으로 이 대답에 달려 있다.

최후 심판 때 사람의 아들이 왕으로 와서 가난한 사람, 헐벗은 사람,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아픈 사람, 낯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는지 물으실 것이다. 소외받는 노인들, 보잘것없는 이들을 정성스럽게 맞아들이고 베풀어 주는 이들이 의인의 반열에 들어갈 것이다. 정신이 번뜩인다. ‘주님, 이 행복한 대열에 들게 하소서.’

자기 자리에서 충실하기

-조명연 신부님-

제자리에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무더운 여름날 시원하고 깨끗한 물 한 컵을 만나면 무척이나 반갑지요. 하지만 그 물이 화장실 변기통 속에 들어 있다면 같은 물이지만 인상을 찌푸릴 것입니다. 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햅쌀밥이 예쁜 사기그릇에 담겨 있으면 먹음직스럽지만, 바닥에 떨어지면 순식간에 그 밥은 양식이 아니라 쓰레기가 될 것입니다. 

또한 남편이 아내 곁에 누워 있으면 아무도 나무랄 사람이 없지만 그 남편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 곁에 누워 있으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겠지요. 이처럼 자기 자리에 있을 때,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각자의 자리에서 얼마나 충실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파괴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꾸며진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전이 자기 자리에서 충실하지 않은 이상 존재의 중요성은 사라지게 됩니다. 

지금 자기 자리에서 충실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신 주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역시나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순례 다녀오면 좀 여유 있게 살겠다고 다짐을 했었는데, 그렇게 살 수는 없는 팔자인가 봅니다. 또 제가 할 수 있다고 하느님께서 판단하시고 그렇게 일거리를 주시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다시금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게 됩니다. 

성지순례를 가면서 휴대전화 역시 가지고 갔습니다. 혹시 연락할 일이 생겼을 때 또 반대로 급한 전화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 가지고 갔지요. 이스라엘에 도착한 뒤, 잘 도착했다고 부모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전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본당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역시 전화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 문자 메시지로 전화 거는 것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지요. 요즘 휴대전화는 일부러 로밍 신청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즉 자동로밍이 된다고 들었는데 왜 내 전화는 이럴까 하면서 계속해서 투덜댔습니다. 

성지순례 마지막 날, 동창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만 제 휴대전화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에 전화 거는 방법을 이야기해주는데, 제가 이제껏 잘못했던 것이 판명 났습니다. 제 휴대전화는 지극히 정상이었지요. 문제는 제가 사용방법을 잘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용방법을 알아야 전화도 제대로 걸 수 있는 것처럼, 우리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도 그 방법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이 요즘 기계를 다루는 것처럼 어려울까요? 아닙니다. 그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 역시 사랑하며 살면 됩니다. 문제는 실천이지요. 이론으로만 그리고 말로만 ‘사랑’을 외쳐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보시면서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하십니다. 그때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요?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이시기에, 그들이 당할 고통을 보시고 무척이나 괴로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희망도 전해주십니다. 

오늘 우리들은 베트남의 순교 성인이신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을 봉헌합니다.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은 바로 하느님께서 전해주는 희망을 간직했고, 그렇기 때문에 순교의 순간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말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순교로 사랑을 실천했기에 하느님 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어렵고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모든 분들에게 주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사랑의 실천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비웃거나 탄식하거나 싫어하지 말라. 오로지 이해하려고만 노력하라.(스피노자)

천천히 살아가는 인생의 5가지 지혜(‘피에르 쌍소’ 글 중에서)

1. 들을것

대개 듣기보다 말을 하기를 더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여 듣는 것도 중요하다.

상대방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잊는다는 것이다. 급하게 대답하는 것을 자제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몰입할 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며 그만큼 삶은 성숙해진다.

2. 권태로울 것

권태로움은 아무 것에도 애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마음으로 멀찌감치 느끼는 것이다.

우리를 가두어 놓는 온갖 것들을 느긋한 마음으로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며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고 만족스런 하품도 해보자. 그러나 '권태'는 세상을 보다 성실하게 살기 위한 것이므로 언제나 절제되어야 함을 잊지 말자.

3. 기다릴것

자유롭고 무한히 넓은 미래의 가능성이 자신에게 열려 있다는 마음가짐을 갖자. 내가 꿈꾸는 것이 삶 속에 들어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조바심내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기다리면 미래는 곧 눈앞에 활짝 펼쳐질 것이다.

4. 마음의 고향을 간직할 것

마음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퇴색한 추억들을 떠올려 보자. 개울에서 발가벗고 멱 감던 일. 낯설음에 눈물짓던 초등학교 입학식, 동무와 손잡고 걷던 먼지투성이 신작로... 지나간 흔적 속에서 우리는 마음의 평안과 삶의 애착을 느끼게 된다.

5. 글을 쓸 것

마음속 진실이 살아날 수 있도록 조금씩 마음의 소리를 글로 써 보자. 자신의 참 모습에 가까이 다가서려면 인내와 겸손이 필요하다. 스스로를 꾸미고 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마음속 깊은 곳의 진실에 귀 기울여 보자.

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어제는 인천신학교에서 동창 모임이 있었습니다. 점심식사 후에 오랜만에 신학생들과 축구를 하자고 했었거든요. 조금 걱정이 되었습니다. 예전과 같은 실력이 나올까? 혹시 헛발만 차고 자빠지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망신만 당하는 것은 아닐까?

모두 몇 년 만에 축구공을 차보는 것이라서 자신은 없었지만, 옛날 기억을 살려서 재미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생각 하나만을 갖고서 열심히 공을 찼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무려 다섯 골이나 넣은 어떤 신부의 맹활약으로 저희가 8:2로 승리를 한 것입니다. 처음에 생각했었던 걱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지요. 물론 신학생들이 신부들을 많이 봐 주었겠지만, 그래도 기분은 너무나도 좋더군요.

생각해보니 우리는 먼저 늘 걱정부터 합니다. 걱정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걱정부터 하면서 할 수 있는 것도 스스로 소극적으로 변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따라서 마음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걱정이라는 부정적 마음이 아닌 희망이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야 할 수 없는 것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30년 도널드 헤브가 실시한 실험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6세~15세의 학생 600명에게 더 이상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교실에서 행동을 잘못하면 벌로 밖에 나가서 놀도록 하고, 행동을 잘하면 상으로 교실에서 공부하도록 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하루 이틀이 지나지 않아 모든 학생들이 노는 것보다 공부를 택했다. 그리고 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많은 이들이 공부나 일을 하나의 의무처럼 생각합니다. 그렇다보니 지겹고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의무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라고 생각한다면 훨씬 더 풍족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끔찍하게 생각할 수 있는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성전의 아름다운 돌과 자연 예물이 다 허물어져 남아있지 않게 된다고 하시지요. 바로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사건에 예언인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었지요. 하느님의 집이니만큼 절대로 함락되지 않을 것이며, 파괴되는 일은 더더구나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에 앞서 말씀해주십니다.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생각의 전환을 시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걱정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삶은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등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나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절망과 고통의 순간에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신 이 세상이라는 선물 안에서 더욱 더 많은 것을 누리면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공부나 일을 의무보다는 특권으로 생각합시다.

칭찬 한마디가 이끈 성공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멍청이’라고 놀림받는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두 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 오른쪽 다리에 장애를 입은 소년은 도통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열등생들이 쓰는 종이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교실 한구석에서 침울하게 앉아 있었으며, 숙제도 해 오지 않아 선생님께 꾸중을 듣기 일쑤였지요. 하지만 문학 시간만 되면 소년의 눈은 초롱초롱 빛났습니다. 좋은 시를 보면 열심히 외웠고, 직접 시를 지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열세 살 무렵, 소년은 어느 문필가 모임에서 자작시를 낭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명한 시인이었던 로버트 번즈가 우연히 시 암송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꼬마야, 너는 감정이 풍부할 뿐 아니라 놀라운 표현력까지 가지고 있구나. 반드시 위대한 인물이 될 거다.”

번즈의 칭찬을 들은 소년은 그때부터 용기와 꿈을 가지고 인생을 개척해 훗날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문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1800년대 영국의 위대한 시인이며 ‘아이반호’의 작가인 월터 스콧입니다. 만약 로버트 번즈의 칭찬이 없었다면, 윌터 스콧은 평생 열등감을 지닌 채 세상을 패배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어떤 일을 힘들게 해냈다면 칭찬해 주세요. 당신의 칭찬 한마디로 인해 그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요.

때의 결정 , 때의주인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때의 결정.

여러 가지 때가 있습니다.

밥 먹을 때,

기도할 때,

잠잘 때,

만날 때,

죽을 때 등.

성서 희랍어에서 시간을 나타내는 말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Chronos입니다.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입니다.

다른 하나는 Kairos입니다.

주관적인 시간, 그러니까 나에게 좋건 나쁘건 의미 있는 시간, ‘때’입니다.

어제는 어떤 자매님한테서 전화를 받았는데 “신부님, 오늘 축하드려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데 제가 축하를 받느냐고 했더니 한우리 카페를 시작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작년 11월 1일은 평화 봉사소가 축복식을 한 날이고 작년 11월 23일은 한우리 카페가 시작된 날입니다.

그러니까 이 날들이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11월 어느 날이었지만 저에게는 오랜 갈망이 이루어진 의미 있고 중요한 때, Kairos였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영원한 반려자를 만난 Kairos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를 누가 결정하고 누가 이 때를 압니까?

작년 11월 1일 평화 봉사소 축복식을 하게 된 것은 저의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작년 9월까지만 해도 거의 끝장이 난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의 뜻이면 되겠지 하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축복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평화 봉사소를 하게 됨도 하느님의 결정이요, 평화 봉사소를 시작하게 된 때도 하느님의 결정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우리 정부가 방북을 불허하여 평화 봉사소가 중단되었고 안동 대마 회사도 어렵습니다.

언제 다시 열릴지 영영 그만 두게 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저의 결정 사항이 아니고 하느님의 결정 사항입니다.

밥 먹을 때와 잠 잘 때와 일러날 때와 같이 많은 것들은 우리가 그 때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들은 우리가 그 때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태어난 때를 우리가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죽는 때를 우리가 결정하지 않습니다.

때의 주인은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그 모든 때에 순종할 뿐입니다.

이 가을에 나무들이 하느님이 정해 놓으신 때에 순종하여 자신의 이파리를 미련두지 않고 떨구는 것을 보았듯이 우리는 우리의 그 어느 때의 주인이 아닌 종으로서 그 때에 순종할 뿐이고 그 때를 의미 있게 받아들일 뿐입니다.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의미 있게 사는 것, 의미 있는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기념하는 것, 어느 순간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Kairos를 의미 있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한우리 책임자요 카페 지기인데도 그 의미 있는 때를 놓쳤는데 어제 저에게 전화를 준 그분은 그것을 기억하셨으니 그분은 정말 Kairos를 잘 사는 분입니다.

대체로 여자들에 비해 남자들이 결혼기념일을 잘 기억 못한다는데 저도 남자라서 그런 것일까요?

징후 (SYMPTOM)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희가 살던 곳은 장마 때만 되면 물난리를 치러야하는 시골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해에도 물난리가 나서 저는 포대기에 쌓여진 채 집 지붕을 뚫고 헬기로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비행기를 타 본 것입니다.

좋은 것도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는 비만 오면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냇가가 있었는데 어린이들이 건너기에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학년 때는 개근상을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장마 때면 초긴장을 하셨습니다. 밤잠을 설치며 피난을 가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어른들끼리 연락을 주고받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것보다도 냇가가 불어나서 그것이 제방을 무너뜨리면 큰일이었습니다. 지금 동네에 비가 그쳤더라도 그 물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밤새 제방이 안전한지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자정이 넘었는데 제방이 무너지려고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누군가가 계속 그 제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전하게 대피 할 수 있었습니다. 제 기억엔 제방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만약 제방이 터졌다면 마을사람들 모두 큰일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어렸기 때문에 밤새 제방을 지켜보던 분이 누구신지 잘 모릅니다. 한 분이었는지 마을 분들이 돌아가면서 지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멋모르던 우리들은 편히 잠을 잘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큰 사고가 예고 없이 일어나는 일은 거의 드뭅니다. 제방이 한 번에 터지는 일은 없습니다. 조금씩 물이 새어나오다가 그것이 더 커지면서 제방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틈이 생겨 물이 새어나올 때 재빨리 대피하지 않으면 큰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징후’라고 합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도 건물에서는 갈라지는 소리가 났고 직원들은 그런 소리들을 이미 여러 번 들었다고 합니다. 성수대교 사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다리가 갑자기 내려앉을 리는 없습니다. 누군가 작은 문제점이 있을 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면 큰 사고는 면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해 미리 예언을 하십니다. 요즘 복음들이 자꾸 이런 종말론적 사건들을 이야기하는데 지금이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즉 종말로 향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성전의 아름다움을 두고 감탄하자 예수님께서는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허물어질 날이 온다고 예언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언제쯤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거짓 스승이 나타나 사람들을 속일 것이고 전쟁과 반란이 일어 날 것이고 큰 지진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하늘에서 무서운 일들과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일러주십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전쟁과 기근 등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전에 지진과 하늘의 표징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조금만 주위를 기울이면 바보들이라도 예루살렘이 언제 멸망할지 알 수 있을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이런 ‘징조들’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남아있던 많은 이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그런 징조들을 잘 지켜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한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큰 죄부터 짓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죄를 짓고 기쁨과 평화도 아주 작은 것들로부터 빼앗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잘 보고 빨로 돌아서는 사람은 큰 어려움에 떨어지지 않겠지만 방관하면 깊은 구렁에 빠지고 맙니다.

죄를 알기 위해 죄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의사가 병을 알기 위해 병에 걸려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사가 병을 알기 위해 공부하고 다른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충분하듯이 우리도 교회의 가르침과 영혼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이들을 보면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른쪽 어금니에 자꾸 음식물이 끼어서 오른쪽으로는 음식을 잘 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 들어가 예전에 금으로 때웠던 곳을 다시 하려고 떼어냈는데 그 안이 썩고 있었습니다. 치아가 썩고 있어서 아팠던 것인데 음식물이 끼어서 그런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치아를 다 썩힐 뻔 하였습니다.

이렇게 몸에 신경이 있어 통증을 느끼는 것도 느낄 때는 아프지만 더 몸이 나빠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좋은 역할을 합니다.

삶에 있어서도 작은 아픔들이라도 그 원인을 찾아 잘 고쳐나가야 합니다. 작은 것이 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파수꾼이 되어야합니다. 혹은 주위에 자신을 지켜봐주는 그런 파수꾼이 있다면 더 없이 좋을 것입니다. 어쨌든 매일매일 내 자신을 살펴보고 반성하는 묵상이 없는 영혼은 ‘갑자기’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세상 마지막 날이 다가오면 하늘에서까지 굉장한 표징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은 미리 준비하라고 예고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들의 영혼도 작은 표징들이 있으면 방치해 두지 말고 그때그때 고치려 하는 민감한 의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제자리에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조명연 신부님-

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이 개구리는 개굴 개굴 우는 자기 자신의 둔탁한 목소리를 싫어해서 몹시 속상해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들이 너무나도 부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그 개구리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 때문에 우울해 하고 있는데, 천사가 나타났어요. 그리고는 이 개구리에게 왜 그렇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개구리는 자기 자신의 소원을 말했지요. 그랬더니 천사가 개구리의 목소리를 아름다운 종달새의 목소리로 바꿔 주었습니다.

개구리는 너무나도 신이 났지요. 그리고 이 개구리는 새로 얻은 목소리를 자랑하고 싶어서 부지런히 개구리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마을의 모든 개구리를 불렀습니다. 이윽고 개구리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는 아름다운 새소리로 감미로운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가 끝나자 개구리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둔탁한 목소리로 개골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개구리 목소리가 저렇게 흉칙할 수도 있담!"

무엇이든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 개구리 역시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야 아름다운 목소리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새 소리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참, 듣기 좋은 소리라고 말을 하지요. 하지만 사람이 사람 말을 하지 못하고, 새 소리만을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이고, 저 사람 참 안됐어."

그밖에도 제자리에 있어야 아름다운 경우는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하고 깨끗한 물 한 컵을 만나면 무척이나 반갑지요. 하지만 그 물이 화장실 변기통 속에 들어 있다면 같은 물이지만 인상을 찌푸릴 것입니다. 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햅쌀밥이 예쁜 사기 그릇에 담겨 있으면 먹음직스럽도록 귀하지만, 바닥에 떨어지면 순식간에 그 밥은 양식이 아니라 쓰레기가 될 것입니다. 또한 남편이 아내 곁에 누워 있으면 아무도 나무랄 사람이 없지만 그 남편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 곁에 누워서 제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겠지요.

이처럼 자기 자리에 있을 때,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하신 것 같아요? 여러분들의 자리에 충실히 계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구경시켜 주십니다. 제자들은 모두 갈릴래아라는 시골 출신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서 입이 쩍 하고 벌어졌을 것입니다. 마치 시골 사람이 서울에 와서 사람이 많고, 높은 건물을 보고, 많은 차들을 보면서 놀라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아름답고, 웅장한 이 성전이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성전은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곳으로 절대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 아름답고 웅장한 이 성전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성전이 전부인 양 생각하고 이곳에서만 최선을 다하는 행동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종말이 다가왔다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이 현재에 대해서 충실한 삶을 살 때, 즉 지금 어떻게 살아야 구원받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열심히 지금 내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리를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얼마나 그 자리에 충실했는가를 반성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즘 우리 사회의 문화 안에서 눈에 띄게 우려되는 측면이 한가지 있습니다. 제가 가장 혐오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철저하게도 인간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조직폭력배들의 삶이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의리"니 "우정"이니 뭐니 하면서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자연스럽게 용인되고 미화되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이 시대의 암적인 존재들이지요. 그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은 거의 없습니다. 오로지 파괴를 일삼으면서 살육을 본업 삼아 무위도식하면서 동물처럼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가정과 공동체, 이 나라를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조폭들의 일상을 미화시키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습니다. 그들은 이 시대 청소년들과 부모들에게 무릎꿇고 백배 사죄해야할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9시 뉴스를 보다가 기가 차서 할말을 다 잃었습니다. 현금지급기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 한 여성을 한 강도가 쇠파이프로 인정사정 없이 휘갈기는 광경이 여과 없이 그대로 방영되더군요. 피해자는 너무도 많이 맞아 혼수상태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고 있답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그리도 철저히 파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불구대천의 원수지간도 아닌데 말입니다.

때로 이 사회 안에 버젓이 그리고 당당히,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는 구조적인 사회악 앞에서 너무도 분노에 찬 나머지 할말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끝도 없이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양상을 더해만 가는 하위 문화의 구조 안에서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슬픈 눈동자로 바라만 보고 있어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도 가슴아픕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하는 약육강식의 시대, 아비규환의 세상에서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들의 삶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물고 물리는 먹이사슬 안에서 빈자와 약자만을 골라 등을 쳐서 호의호식하는 사람들,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접대문화 안에서 그저 하루 하루를 동물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제 부족한 소견으로도 이런 상황들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너무 화가 납니다. "도대체 이 세상이 어디까지 갈려고 이러나?"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귀신은 뭐하나? 저런 *들 데려가지 않고!"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하느님은 도대체 뭐하시나? 저런 *들 벌하시지 않고!"하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끝도 없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타락 앞에 예수님의 마음 역시 저 못지 않게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죄악도 타락도 어느 정도여야지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던 예수님께서는 극약처방으로 "성전파괴"를 예언하십니다. 비통한 심정, 애끓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의 대재앙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최후의 경고마저 우리 인간을 향한 무한한 예수님의 자비, 아버지로서 애끓는 연민의 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이시기에 죽어 가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최후의 처방전으로 성전파괴와 이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십니다

너를 허물고 나를 세우리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다보면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속해있는 자그마한 모임이나 공동체에 대해서,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에 대해서 내심 뿌듯하게 생각하며 자족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도가 지나쳐 이런 것들에 집착하거나 자만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고 그저 외적으로 드러난 것에만 눈길을 보낼 때 이런 어리석은 짓을 너무나 당당하게 행하게 됩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자신, 자신이 속해있는 자그마한 모임이나 공동체(교회안에 있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 이 모두를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겉으로 그럴듯 하게 보인다 할 지라도 그 안에 주님의 뜻이 담겨 있지 않다면, 주님의 뜻으로 정향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이내 허물어지고 말 모래성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신앙인들이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와 자신의 일을 주님의 뜻으로 채우기 보다는, 인간적인 욕심과 명예, 알량한 자존심과 하찮은 지식으로 채우려 합니다. 그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뜻을 이룬다는 미명하에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 무척 당당합니다. 이들의 당당함 앞에 오히려 측은함을 느끼게 됩니다. 도대체 자신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당당하게 아니 뻔뻔스럽게 자신의 뜻만을 고집하는 이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도 이내 인간적 한계안에서 헤매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고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조금만 주님의 뜻을 헤아린다면, 조금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면 자신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참된 신앙인으로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텐데 무척이나 아쉽습니다.잘못된 것이라고 하더라도(사실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잘못인지 안다면 그것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 안에서 쌓여 온 여러가지 것들을 떨어버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잘못된 생각이나 관점들도 오랫동안 자신 안에 묵혀 있으면 옳은 것처럼 느껴지고, 주님의 뜻과 무관하거나 심지어 상반되는 인간적인 뜻도 이기심에 눈이 먼 자신에 의해, 자신이 속한 단체의 잘못된 전통에 의해 주님의 뜻으로 둔갑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 바로 주님과 맞대고 앉아 솔직하게 대화하는 것,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자신을 거기에 맞추는 것, 교회 공동체 전체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신앙인은 아무도 없겠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실천을 하고 있는지 솔직히 의심스럽습니다. 사제로서 살아가면서 교회 공동체안에서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라고 해서 여기서 특별히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때때로 교회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특히 교회안에 있는 여러 단체간의 미묘한 갈등이나 입장 차이, 이로 인한 개인 신상에 관련된 문제에 이르기까지) 안타까운 경우도 많고, 심지어 주체하기 어려운 격정과 분노를 일으키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솔직히 사제로서의 한계를 체험하면서 하느님께 한탄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계시는 주님이 너무나도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멋대로 교회 활동을 하는 이들이 교회 공동체 전체의 입장이나 다른 신앙인들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나 입장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 함부로 주장하는 경우에 참으로 암담한 생각이 듭니다. 이들의 그릇된 생각이나 행동을 바로 잡아주되, 이들이 지니고 있던 것들이 무너질 때 오는 상처를 최소화시킴으로써 교회 공동체를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주님의 사제로서의 책임이기에 사제 생활이 참으로 어려운가 봅니다.

요즈음 이런 저런 일련의 일 때문에 고민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서 희망을 얻습니다.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

자신의 생각만으로, 자신이 속한 단체의 전통만으로,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만으로 세워놓은 아성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을, 다른 단체를, 교회 공동체 전체를, 모두 함께 일구어가는 주님의 일을, 하느님의 뜻을 보지 못하는 미숙한 이들이 참 신앙을 되찾게 되리라는 말씀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일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아픔을 겪어야만 하겠지만, 제 안에서 먼저 이 일을 이루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보시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이들 안에서 이 일을 꼭 이루시기를 기도합니다.이 기도를 이루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주님의 자그만한 도구로서 사목 현장으로 기쁘게 그리고 당당하게 달려가렵니다.

<천국 체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모닝 미팅" 때에는 6개월 만기를 채우고 귀가하는 한 친구의 참으로 가슴 찡한 작별인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괜히 여기저기 간섭하다가 형들에게 혼도 많이 났었고, 목소리가 유난히 커서 오버할 때도 많았던 친구였지만, 모닝미팅 "신나요" 코너-장기자랑-단골손님으로 팍팍한 모임의 청량제가 되었던 친구, 참으로 심성이 곱고 정이 많았던 친구였습니다.

아침 모임이 끝나갈 무렵, 진행하시는 선생님이 그 친구를 앞으로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신부님, 수사님, 선생님들 앞에서 "한 말씀"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마디에 다들 뒤집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전체를 한번 둘러본 그 친구는 자신이 생각했을 때 자기보다 더 어리버리하고 비실거린다고 생각되는 친구들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면서 한마디씩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야, 너! **! 너는 수사님들한테 개기지 말고 열심히 살아. 그리고 **! 너는 말이지 빨리 담배끊어. 일생에 도움이 않되. 또 **! 너 제발 가출 좀 하지마. 여기서 나가봐야 특별한 게 있는 줄 아냐?" 등등.

그리고 마침내 표정을 가다듬더니, "신부님, 수사님, 선생님들 그간 잘 지도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주 놀러오겠습니다"로 마무리지었습니다. 떠나가는 아이의 표정은 연신 싱글벙글 너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천국체험을 하는 듯 했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복음의 주제가 "종말"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 작별의 날이 우리 착한 친구가 체험했던 기쁨의 순간, 행복의 순간, 감사의 순간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마지막 날이 오랜 세월 우리가 품어왔던 모든 두려움과 고통, 십자가가 영원한 삶으로 승화되는 순간이면 좋겠습니다. 그날은 하느님께서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는 날,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뵙는 은총에 너무 기뻐 뛰노는 날이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날이 공포의 순간, 멸망의 순간이 아니라 은총의 순간, 희망의 순간이 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할 전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속적인 봉헌생활입니다.

다시 말해서 각자 주어진 처지에서 기회가 닿는 대로 꾸준히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각자의 삶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언제나 기도하는 일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이방인 왕을 통해서도 계시된 하느님 나라 

-경규봉 신부님 -

어느날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기이한 꿈을 꾸었다. 그는 바빌론의 재사나 술객, 점성술사 등을 불러 자신이 꾼 꿈을 알아맞히고 해석하라고 명했으나 아무도 꿈을 알아맞히지 못했다. 이에 다니엘이 나서서 그 꿈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왕에게 앞일에 일어날 일을 계시해주신 것이라며 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준다. 

하느님께서 왕에게 힘과 권세를 주시어 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다. 금으로 된 머리는 느부갓네살 왕을 가리킨다(바빌론 제국 : 기원전 605). 가슴과 두 팔이 은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왕 다음에는 왕보다 못한 다른 나라(페르시아 제국 : 기원전 539-331)가 다스린다는 것을 뜻한다. 세 번째는 놋쇠로 된 나라(그리스 제국 : 기원전 331- 기원 476)가 다스리고, 네 번째 나라(로마 제국 : 기원전 63 - 기원 476)는 무쇠처럼 단단한 나라가 다스릴 터인데 그 나라는 다른 많은 나라들을 부술 것이다. 그 후 나라는 분열되어 강대국과 약소국이 공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것인데, 그 나라는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부수고 영원히 서게 될 것이다. 이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당시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뛰어난 전략가이며 정복자였다. 그의 군대는 막강하여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고,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꿈은 그의 나라도, 그의 뒤를 이은 다른 나라도 결국은 무너질 것임을 알려준다. 

아무리 크고 화려하며 막강할지라도 인간은 결국 스러지고 마는 것이며, 인간의 나라는 멸망할 것임을 꿈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다. 영원한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며 하느님 나라만이 영원할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다른 모든 인간의 나라를 부수고 영원히 계속될 것임을 보여주셨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통해서도 인간은 스러지며 오직 하느님 나라만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힘과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며 하느님 백성은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백성이다. 하느님께서는 틀림없이 당신 나라를 주실 것임을 이방인의 왕을 통해서도 말씀하셨으므로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지금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다니엘 서는 전하고 있다. 

현세가 힘들고 어려울 때 많은 이들은 낙심하고 절망한다. 하느님을 의심하고 부인하며 원망하기까지 한다. 이는 그가 현세에 매여 있고, 현세만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현세가 아무리 실망스럽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고 있다. 그에게 현세란 지나가는 뜬구름과 같은 것일 따름이다. 현세의 고통이나 즐거움도 뜬구름처럼 지나갈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는 하느님 나라만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그 나라를 희망하며 믿고 살아간다. 

오늘 이 세상의 덧없음을 생각하자. 세상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되 세상에 매이지 말자.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전도 1,2-3)는 말씀을 생각하며 하느님 나라를 믿고 바라는 신앙인이 되자.

그때에 이르면

- 원영배-

오늘 복음을 읽으며 4년 전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열렸던 미국 CLC(Christian Life Community)의 전국대회에 참가했을 때가 떠올랐다. 대회 프로그램 중 사회정의 사도직 체험의 일환으로 현지의 빈민구제와 난민보호사업 견학이 있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조금 벗어난 거리에 들어서자 이곳이 미국 땅인가 의심이 들었다. 야자수만 무성한 먼지투성이 길에 갈색 피부의 하이티 출신 난민들 모습을 보니 가난하고 정치가 불안정한 카리브해 섬나라의 살풍경을 그대로 옮겨온 듯싶었다. 

그런 거리 한가운데 건축이 장엄하고 내부 장식이 화려한 코퍼스 크리스티 성당이 난민들의 보호소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본당신부님은 그곳 신자들의 99퍼센트가 불법체류자라고 했다. 50년 전만 해도 이 지역은 로스앤젤레스의 비벌리힐스처럼 미국에서 손꼽는 부촌이었으나 쿠바와 하이티 등에서 난민이 밀려오고 슬럼화되면서 부자들이 떠난 자리를 가난한 이들이 대신 차지했다. 아름다운 성당은 이제 불법체류자들을 위한 수용소, 구호기관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처음 건립할 때는 부유층 신자들을 위한 성당이었지만 반백 년 세월이 바꿔놓은 것이다. 

사람이 처음에 꿈꾸던 목적과 계획대로 모든 게 이루어진다면 과연 하느님이 계셔야 할 필요를 느낄 수 있을까? 사람의 생각과 하느님 생각은 다르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히 멀 듯 그 단절된 거리를 한달음에 이어주신 분이 예수님이다. 비록 마지막 때가 오기까지 우리는 그분이 예시하는 것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성급한 호기심에 애탈 필요도 없다. 다만 그분이 가르치신 대로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함을 알고 삶을 기도처럼 수행할 뿐이다. 그러면 그때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손길이 보일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일어날 일들이 다 일어난 후에 종말은 올 것이니,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신뢰하며 순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단련하는 것뿐이다.

무당 신앙

장재봉 신부님

성경은 하느님과 인간의 경지를 하느님 안에 그리고 내 안에 하느님이 들어오시는 임마누엘이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삶의 가장 최고의 기쁨은 하느님이심을 말하고 최대의 축복은 복덩이 자체이신 하느님을 누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속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속이는 자는 늘 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존재할 것입니다.

이들은 땅의 것을 해결해 준다고 선언하여 기복으로 기울어진 마음을 홀립니다.

혹은 땅의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며 맹신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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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은 속지 말아야지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속을 리가 없겠지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교회 안에서조차 기복신앙이 허다합니다.

기복신앙이란 꼭이 점을 치고 굿을 하는 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 모든 것이 ‘기복’입니다.

삶 안에서 하느님을 밀어 두고 하느님의 뜻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꾸만 세상 것에 안달하고 조바심을 친다면 ‘기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많이 갖고 누리는 것을 행복인양 인식하는 까닭에 이단과 적그리스도가 기승을 부립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잘 먹고 잘 입는 일이 축복이라 생각하고 큰 소리 치면서 섬김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만을 복이라 여긴다면한 마디로, 무당신앙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의 에센스는 ‘기뻐하라’는 명령입니다.

기뻐하는 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은 모든 상황에 감사합니다.

하느님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을 세상이 속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기쁜 사람에게는 ‘그날’마저 기쁨의 때입니다.

그분을 모시기 위해 그분을 뵙기 위해 변화되고 성숙되는 최고의 오늘이기를 원합니다. 아멘

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뒤뜰에 있는 큰 바위를 보았습니다. 반은 땅 속에 묻혀있고 반은 나와 있어서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돌을 보면서 ‘쓸모없는 돌이 왜 여기에 있어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느냐’고 불평과 불만을 터뜨렸지요.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돌 속에 다윗이 들어있다. 다윗이여, 나오라.”

미켈란젤로는 그때부터 수 만 번의 정을 쪼아가면서 거대한 돌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조각상인 다비드 상으로 변신시켰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 쓸모없는 바위만을 보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바위 안에 있는 다윗을 보았고 그 다윗을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걸작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세상은 주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으로 그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겉모습만을 바라보고 쉽게 단정하고 포기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를 비롯해서 많은 이들이 중요한 것을 찾지 못하고, 헛된 것만을 쫓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중요한 것을 바라보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 그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 아니며, 그래서 감탄할 필요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이 말씀에 사람들은 걱정이 되었는지 어떤 표징이 나타 나냐고 묻지요. 예수님은 답변하세요.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종말 언제 올지, 그 정확한 시기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의 추측이나 계산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 부분은 하느님께만 맡겨진 것이기에 우리가 굳이 그 종말의 때를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하여 주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이지요. 

어느덧 11월이라는 시간도 끝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달력을 바라보면서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이 참 빨리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의 빠름만을 한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는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을 생각만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주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계명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세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고, 종말을 준비하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실패자가 하지 않으려는 일(‘행복한 동행’ 중에서)

제이크 버튼 카펜터, 그는 스노보드를 대중화시켜 겨울 스포츠의 ‘대명사’로 만든 사람이다. 1977년 12월 그는 장사가 잘되던 소규모 사업을 그만두고 한 목공소에서 스노보드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자신의 이름을 딴 ‘버튼 스노보드’ 회사를 차렸다. 친구들과 은행에서 빌린 2만 달러를 들고 새로운 스포츠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물론 그에게 돈을 빌려 준 은행 관계자까지 버튼을 비웃었다.

“그런 되지도 않을 사업을 왜 시작했소?”

“당신은 왜 다른 사람은 손도 대지 않는 일을 시작해서 돈을 빌려 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거죠?”

그때까지만 해도 설원은 스키어들이 독점하고 있었고, 스노보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스포츠로 전문가들이나 극소수의 사람들만 타던 시절이었다. 그때 버튼이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실패한 사람들이 하지 않으려는 일을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실패한 사람들의 뒤를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결국 그의 생각은 맞아 떨어졌고 1998년 버튼은 연간 1억 5천만 달러가 넘는 매출을 올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스노보드 회사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스노보드는 전 세계 8천만 명이 즐기는 겨울 스포츠로 자리 잡았으며 1998년 동계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어제 점심에는 어떤 자매님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 식당은 직접 집에서 두부를 만드는 두부 전문점이었지요. 저희들은 두 테이블에 나누어 앉았습니다. 그리고 전문 두부집이니까 생두부를 먼저 주문하고서는, “두부전골은 대(大)자 두 개 시키면 되지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생두부 주문하시니까, 두부전골은 작은 것 두 개면 되겠습니다.”

한 자매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저희들 많이 먹으니까요, 그럼 대(大)자 하나 소(小)자 하나 주세요.”

하지만 아저씨께서는 음식 남길 것이라고 하면서, 그냥 소(小)자 두 개를 가져오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떻게든 많이 팔려고 하잖아요. 따라서 손님이 소(小)를 시킨다고 해도, 너무 적을 것이라고 하면서 대(大)자를 시키도록 유도하는데 이곳은 오히려 거꾸로 입니다. 더군다나 손님이 대(大)를 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손님 편에서 생각해서 소(小)자를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손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해주시는 주인아저씨가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두부보쌈도 하나 더 주문을 했지요. 그러자 아저씨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많을 텐데…….”

결국 함께 갔던 자매님들이 모두 주인아저씨한테 반했습니다. 외모에 반한 것이 아니라, 손님을 배려해주시는 그 아저씨의 마음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어떻게 다시 오냐면서 전화번호를 적어가시더군요. 아마 어제 이 주인아저씨의 마음을 보셨던 자매님들은 다시 이 식당을 찾아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두부 집을 선전하시겠지요.

이 주인아저씨를 보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눈앞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지금 이 순간의 이득에만 신경을 쓰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방에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의 입장보다는 나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아픔과 상처가 가득한 이 세상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님도 바로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우리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셨지요. 바로 그런 모습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서 기분이 좋았을까요? 아무도 이 이야기에 좋은 감정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누구도 죽음, 종말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이 보다 더 올바르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에는 듣기 싫은 소리라 할지라도 반드시 하셔야만 했습니다.

바로 주님의 배려가 여기에 담겨져 있다는 것이지요. 그 배려의 마음을 받아들여서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더 열심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주님처럼 내 이웃에게 그 사랑의 마음을 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의 모습과 행동이 나의 종말을 위한 가장 훌륭한 준비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을 간직하면서 차 한 잔이라도 대접하세요.

게으름도 착각이다('Plus3h.com' 중에서)

"게으른 것이 고민"인 사람이 있었다. 어떻게 지내냐고 안부를 물으면 늘 "천성이 게을러서…" 하고 대답했다. 게으른 습관만 고치면 인생이 확 달라질 것 같다고 하면서도 그는 "천성이 게을러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고민을 털어놓는 그에게 나는 암벽타기를 권했다.

"근육을 단련하고 담력을 키우는 데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암벽타기가 게으름을 고치는 데 무슨 도움이 될까요?"

의아해 하면서도 그는 내 말대로 암벽타기를 시도했다. 밧줄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절벽을 기어오르자면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는다. 힘주어 밧줄을 잡고 있으면 손이 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낀다. 평소에는 그 고통의 십분의 일만 되어도 포기해버리고, "게을러서…" 하며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죽을 힘을 다해 절벽 끝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절대 밧줄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를 쓰고 밧줄을 잡고 있는 저 자신을 보며 게으름도 착각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의 종말

-서현승 신부님-

약 15년 전쯤에 한바탕 ‘휴거’ 소동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묵시적 표현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며 준비되고 선택된 이들만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하늘로 들어올려져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었죠. 

세기가 전환되는 때였던 지난 1999년에도 예언가들의 말을 빌려 한바탕 사이비 종말론이 극성을 부리더니 요즘에 또 다시 인류의 대재앙설이 회자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인류의 고대문명을 이루었던 마야인들에 의해서 예언된 해인 2012년을 전후로 여러 생태 환경적 요인들로 인한 지구의 파국을 거론하고 있는 형국이죠. 지난 종말론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2012년 대재앙설은 종교적 종말론의 관점이 아닌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들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 정도입니다. 

문득 오늘 복음에서마저 세상의 물리적 종말을 예언하는 듯한 예수님의 말씀은 딱 오해받기 쉽겠단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종말을 내심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필요한 말씀들로만 ‘취사선택’해서 인용하기 좋은 말씀들이죠.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종말은 언제고 올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시작이 있었다면 끝이 있는 것은 당연지사이니까요. 오히려 저는 그러한 ‘끝’이 있기에 언젠가는 끝날 모든 것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고 영원한 것을 그리워해야 할 이유가 생긴다고 여겨집니다. 누군가가 말했다는 세상의 종말 앞에서도 사과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그 마음은 영원에 대한 소망과 그 실현이 이미 지금 시작되고 있다는 깨우침에서 비롯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

-정애경 수녀님-

연중 제34주간은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간이다. 이제 며칠 후면 새해를 맞이하게 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교회의 전례는 세상의 종말과 그 징조에 대해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화려하게 장식된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고, 종말의 끔찍한 표징들이 있을 것이며 당신을 사칭한 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종말은 오지 않았다. 제자들이 예수께 언제 그러한 때가 오겠느냐고 묻자 예수께서는 종말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하신다. 우리의 현실이 마치 종말로 치닫는 징조로 보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징조에 속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도대체 무엇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하느님께서는 종말로 치닫는 인간의 잘못에 대해 경고는 하시지만 그것으로 인한 세상의 종말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속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나의 구원과 관계없는 것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 안에서 겪는 나의 참담한 상황, 곧 직장을 잃고 병으로 고통 받으며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이 해체되고, 범죄와 무질서로 사회가 무너지고, 테러와 전쟁으로 무고한 이들이 생명을 잃고, 지구 온난화로 인한 심각한 자연재해 현상`…. 이러한 표징들 안에서도 결코 이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은 심판자이시지만 그 이전에 우리를 살리고자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이시다.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탈출 22,26)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여러 표징이 나타날 때 그것을 인간의 잘못에 대한 심판의 때로 알아듣기보다는 다시 주어지는 새로운 구원의 시작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곧 그러한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오늘 우리의 믿음을 촉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이며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이다.(2코린 6,2 참조)

우리 자신의 종말에 대한 묵상 

-한영일 신부님-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어제에 이어 오늘도 저와 함께 복음 말씀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초점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반듯이 종말이 있을 것이며 우리 자신의 종말 즉 죽음에 직면할 때 우리가 한 일에 후회없이 만족할 수 있도록 이 세상에서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야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 자신의 종말에 대해 함께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옛날에 땅 갖기를 좋아하는 욕심쟁이가 있었습니다.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땅을 꼭 사곤 했습니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는 그를 불렀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인가?"

"예, 땅을 많이 갖는 게 소원입니다." "그러면 네가 좋아하는 땅을 선물로 주겠다. 여기 이 말을 타고 하루동안 마음껏 달려라. 네가 탄 말이 밟고 지나간 땅은 모두 주겠다."

이 욕심쟁이는 신이 나서 다음날 아침 새벽부터 말을 몰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지고 밤이 되도록 쉬지 않고 말을 달린 욕심쟁이가 돌아왔습니다. 큰 땅 부자가 된 그를 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부러운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던 욕심쟁이는 긴장이 풀려 말에서 떨어져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사람의 땅은 이 나라의 절반이나 될 뻔했지만 지금 그의 땅은 한 평의 무덤 밖에 없도다.' 

우리는 권력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남에게 인정받고 뻐기고 싶은 욕심, 마음껏 놀고 싶은 욕심, 좋은 집, 좋은 차, 갖고싶은 욕심 등등 하루를 살아가면서 온갖 종류의 욕심이라는 두 글자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욕심을 잘 조절하여 잘 다스리는 것이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길이요 덕인이 되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이 올 때 쯤에는 무서운 일들과 기근과 전염병, 지진 등 굉장한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개인의 종말에 대해서는 무슨 징조가 없을까요? 애청자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죽어 본일 없이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형님이 네 분이나 계셨는데 세 분은 이미 작고하시고 한 분은 메리놀 병원 중환자실에서 한 달이 넘도록 투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 느낌에 형님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아마도 자기 삶의 종말을 예견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 늘 깨어 준비하는 생활을 하기를 주님께서는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잡는 이야기로 오늘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원주민이 자그마한 조롱박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밤과 땅콩 같은 것을 가득히 넣어 가지고 해가 질 무렵에 그걸 커다란 나무에 튼튼히 매달아 놓았습니다. 밤이 되자 뭔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던 원숭이가 나무에 올라 이 조롱박을 발견하고 조롱박 안에 먹을 것이 들어 있는 것을 안 원숭이는 얼른 그 안에 손을 넣었습니다. 조롱박에는 간신히 손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었고 이 구멍을 통해 원숭이는 손을 조롱박 속에 넣어 땅콩과 밤을 집었습니다. 그렇지만 구멍이 작아서 땅콩과 밤을 집은 손은 빠지지가 않았습니다. 손을 빼려 안간힘을 쓰지만 손이 빠질 리가 없었습니다.

어느덧 아침은 밝아 오지만 땅콩을 잡은 원숭이의 주먹은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원주민들이 다가와 미련한 원숭이를 사로 잡았습니다. 주먹에 든 먹을 것만 놓으면 손이 빠질텐데 - 그리고 목숨도 건질 수 있었을텐데 - 안녕히 계십시오 내일 또 뵙겠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통해

-오 마리아 수녀님-

지난 여름 미국에서 카트리나라는 무서운 허리케인으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재난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그 일이 미국에서 일어났는데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재난을 당했다면 제3세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얼마나 더 큰 재난이 있었을까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나라도 지난 추석에 충청도에 뜻하지 않은 폭우로 농경지가 모두 물속에 잠겼을 때 한 농부가 뉴스 인터뷰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뭐, 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이 하시는 일인데요.” 천재지변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수 있는가. 과학이나 어떤 준비로도 당해낼 수가 없었던 이런 체험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오늘 복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즈음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는가고 묻는 장면을 본다. 예수께서는 그때를 말씀하시지 않고 다만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끝날이 곧 온다고만 하셨다. 아마도 이것은 언제나 준비하고 있으란 말씀이신 것 같다. 나 역시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통해 그런 징조를 보기보다는 어떤 외부적 큰 사건을 통해 주님을 알고 싶어하는 것 같다. 좀더 내 맘을 예민하고 섬세하게 들여다보며 마음을 닦고 그분의 움직임에 반응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우화가 있다. 두 사람이 굴뚝을 청소했는데 한 사람은 얼굴에 까맣게 검댕이 묻어 있었고 또 한 사람은 깨끗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굴뚝 청소를 끝내고 얼굴을 닦으러 간 사람은 검댕이 묻은 사람이 아니라 깨끗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상대방 얼굴에서 검댕을 보는 순간 자기 얼굴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진정 자기가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하며 그후에 일을 준비하고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전상규 신부님

예루살렘 성전은 실제로 기원 후 70년경에 성전 파괴라는 재앙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단순한 역사적인 비극이었을 뿐, 세상의 종말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군가 자칭 그리스도라 하더라도 속지 말라고 경고 하셨고, 전쟁과 반란의 소문을 듣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겉모습을 보고 감탄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누구보다 먼저 그것의 허무한 끝을 보셨습니다. 

아름답고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이는 성전이 파멸되어 없어지듯이, 세상 모든 것에는 다 끝이 있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모든 것도 변하고, 늙어가고,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도 언젠가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끝 날이 언제 올지는 예수님만이 아시고, 우리가 아는 것은 오늘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인은 막연히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말이 있지만, 그 종말을 날마다 준비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끝이 있기 때문에, 그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늘에 의미부여를 할 수 있고, 그래서 더욱 소중한 오늘입니다. 

오늘은 영원히 단 한번밖에 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을 어떤 믿음으로, 어떤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았는지 세상 끝날 주님께서 물어보실 시간이 바로 오늘입니다.

“세상이 유지되는 밑바탕에는 주님께만 최종적인 희망을 두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홍성만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두고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를 하는 몇몇 사람을 향해,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이에 그들이, 이러한 일이 언제, 그리고 어떠한 표징으로 나타나겠느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이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반드시 먼저 벌어지고 말 '그러한 일'들이 현재의 세계 역사 속에서 누누이 일어나고 있지만 '바로 끝이 아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속지 말고 뒤를 따라가지 말며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에 시선을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헤쳐 나가지 못할 것만 같은 어두운 이 세상이지만, 주님께 궁극적인 희망을 두며, 속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이 세상은 유지가 됩니다. 이렇게 세상이 유지되는 밑바탕에는 주님께만 최종적인 희망을 두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암혹의 시기마다 성인ㆍ성녀들이 탄생했음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주님만 희망을 두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풍요로운 마지막 날

-김현영 신부님-

오늘의 성경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시면서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오기 전 여러 가지 징표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교를 표방하는 여러 종파에서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면서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던 사건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헌납하고 마지막 날을 기다렸지만 지도자들이 예고하였던 그 어떤 사건도 표징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허탈하게 공황 상태에 이른 추종자들에게 계산이 잘못되었다는 등의 변명을 일삼다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간 여러 사건들을 접하면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가 21:8)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고 표방하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제대로 믿고 따르지 않는 것과 그러한 잘못된 지도자들이라고 칭하던 사람들의 거짓된 언행만을 따르고 성경의 말씀을 소홀히 하는 추종자들 모두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굳이 ‘참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 즉, 사랑의 복음 말씀에 기초하여 세상의 삶을 올바로 살아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어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으셨던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은 언젠가는 올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개인의 삶이 끝나는 날 즉,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이 될 것이고, 세상에는 어느 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가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서로 서로를 사랑하여 미움과 질투 그리고 싸움과 전쟁이 사라질 때, 이 세상이 바로 천국이라 여겨질 때가 세상의 마지막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때에는 더 이상 지상의 삶이 필요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요?

먼저 나부터 출발하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의 삶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이 날은,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토록이나 더 갖기를 갈망했던 내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노라면, 나의 오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하루가 더 주어진다면, 사과나무를 심는 것보다 더 하고 싶은 일, 즉, 나를 사랑해준 이들에게 ‘고맙습니다’, 나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에게 ‘미안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하지 못했던 그 말 ‘사랑합니다’라고 진정으로 전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요 기회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갑자기 들이닥친 생애 마지막 사건에 초연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매 순간 기쁨을 살 수 있다면 인생 전체를 기쁨의 바다에서 유람할 수 있을 것이며, 나의 기쁨으로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이 세마디가 세상에서 미움도 질투도 갈등도 전쟁도 없앨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아내, 남편, 부모, 자식, 형제들, 동료들, 이웃들에게 여러분이 먼저 이 말들을 고백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신뢰심과 인내심 갖기

-백광현 신부님-

언젠가 불후의 명작 ‘벤허’를 본 적이 있습니다. 벤허가 잡혀 배를 젓는 노예가 되어 해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해전은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치열했습니다. 게다가 벤허가 탄 배도 말이 아니었고 얼핏 보기에 그들이 패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전세를 가늠하기 어려웠을 때 그 배를 지휘하던 지휘관은 그들이 패배한 줄 알고 자살을 결심합니다. 그 때 벤허가 자살을 하지 못하도록 노로 지휘관의 머리를 쳐서 기절시킵니다. 

한참 뒤에 지휘관이 깨어났을 때 그는 승전보를 듣게 됩니다. 

그가 기절한 사이에 전세는 역전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가끔 우리에게 불리한 현실에 직면할 때 상황에 따라서 우리의 패배와 실패를 쉽게 속단해 버리고 포기하는 경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속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그분의 계획에 온전히 맡기고 살아갈 때 패배나 실패처럼 보였던 상황이 바뀌어 더 큰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이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신뢰하고 인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늘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를 허무는 것들

-강영구 신부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

그대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무너뜨리는 무서운 적인지도 모르고 함께 삽니다.

정말 무서운 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독소가 온 몸에 퍼져서 죽음에 임박해서야 알게 됩니다.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적이 아닙니다. 

설사 적이라 해도 눈에 보이는 것은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으면서 나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겉모습은 견고하고 아름답지만 무너질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과 견고함에 도취되어 안으로부터의 허물어짐을 감지하지 못하는 성전이 안타까워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눈물 흘리면서 한탄합니다.(루가 19,41)

하느님의 사람 예수님의 눈에는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폐망이 훤히 보입니다.

AD66년 로마의 황제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완전히 파괴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린 것은 로마 제국이 아닙니다. 

내부로부터 이미 다 허물어진 예루살렘을 로마제국이 발로 찼을 뿐입니다. 

독선과 오만으로 하늘을 외면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욕망과 아집이 예루살렘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은?

-박상대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동전 두 닢이라는 과부의 헌금(루가 21,1-4)이 과연 자신의 가진 것 모두를 바친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당장은 알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다. 그 ‘언제’란 바로 종말 때의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종말까지 갈 필요는 없다. 누구보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이 행한 행동의 동기(動機, motive)와 지향(志向, intention)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바치는 헌금의 가치는 헌금하는 자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늘 제3자의 시각과 판단이다. 부자가 넉넉한 가운데서 많이 바치고 자랑스럽게 뽐내는 행동과, 과부의 경우처럼 가난한 사람이 어려운 가운데서 가진 모든 것을 바치고도 부끄러워 미안해하는 행동은 겉으로만 보이는 제3자의 인식이다. 그러나 부자와 가난한 자의 그 속마음과 사정을 제3자가 어떻게 알겠는가? 따라서 제3자의 인식에는 분명히 모순(矛盾, contradiction)과 불일치(不一致, discrepancy)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종말의 공심판이 필요한 셈이다.

교회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화~토요일)에 들려주는 매일미사의 독서와 복음말씀은 모두 세상종말에 관한 내용이다. 독서는 홀수 해의 경우, 다니엘서(1-7장)의 말씀을 듣고, 짝수 해의 경우에는 연중 제33주간 월요일부터 34주간 토요일까지 요한 묵시록(1-22장)의 말씀을 듣게 되며, 복음으로는 루가복음 21장을 듣는다. 모든 내용이 종말론적이고 묵시(?示) 문학적인 성격을 아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종말과 묵시적 성격이란 세상이 이제 그 마지막에 직면하여 드러내거나 맞이하게 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말한다.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개념이 ‘시작’과 관련하여 새로운 것과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단어라면, ‘종말’과 ‘묵시’와 관련하여 드러나거나 맞이하게 될 일들을 대표하는 개념은 현현(顯現, epiphany)과 폭로(暴露, apocalypse)라는 단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는 대변화,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생자(生者)와 사자(死者)에 대한 그분의 심판, 그리고 종말 후의 내세(來世)에 관한 일 등이다.

성서(聖書)상 종말과 묵시문학적 유형으로는 구약의 다니엘서(BC 160년경)와 신약의 요한묵시록(AD 100년경)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말기에 편집된 묵시문학적 작품들은 ‘에티오피아어 에녹서’, ‘희년서’, ‘시빌라의 신탁’, ‘열두 족장의 유언’, ‘모세의 승천기’, ‘솔로몬의 시편’, ‘제2 에즈라서’, ‘시리아의 바룩서’ 등 그 규모가 실로 방대하다. 묵시문학의 발생원인은 이스라엘이 외세의 지속적인 침략에 의해 주권(主權)을 잃고(BC 721년 북왕조 멸망, 587년 남왕조 멸망과 유배생활, 333년부터 알렉산더 대왕과 희랍의 지배, 63년부터 로마제국의 지배) 의기소침한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주권회복을 야훼 하느님이나 그분의 사자(使者) 또는 메시아에 의탁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묵시문학은 천지창조부터 세상종말까지의 환란과 난세의 역사를 다루면서 종말사건과 내세를 통한 통렬한 개벽(開闢)과 역전(逆轉)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염원하던 개벽과 역전은 없었고, 한 가닥 독립전쟁(AD 66-70)의 시도마저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대가로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이스라엘 자존심의 상징인 성전까지 불타고 말았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도 공생활 마지막 시점에서 세상종말과 관련하여 묵시문학적 가르침을 주셨다.(마태 24,1-25,46; 마르 13,1-37; 루가 21,5-36) 그러나 예수님의 종말교훈은 이스라엘의 염원이나 묵시문학자들의 생각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구약의 묵시문학적 염원과 예언의 성취자로 예수께서 이미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도래는 단지 ‘사람의 눈으로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뿐’(루가 17,20)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임재(臨在)하여 있는 하느님 나라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나는 것도,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이나 반란과 전쟁, 기근과 전염병이나 지진과 우주적 징조로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왜 공관복음들이 제각기 예루살렘성전의 파괴, 종말의 시작, 큰 재난의 예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최후 만찬을 앞둔 시점에 배치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마태 24장; 마르 13장; 루가 21장)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파스카의 성삼일)을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당신의 몸으로 이루어질 신약(新約)의 새로운 성전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돌과 사람들이 갖다 바친 예물로 인해 겉으로만 화려한 성전을 보고 넋 나간 듯이 감탄하지 말고, 그 성전 안을 맑은 눈과 마음으로 들여다보며, 자신의 성전을 내적 아름다움으로 채우는 일이다. 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결과만 놓고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침착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헛되고 표면적인 가치나 사상, 특히 부(副)나 재물이나 돈 같은 맘몬(Mammon)이나 우상을 따르지 말고,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겨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종말보다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가 21 5-11)

-유광수 신부님-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 질 때가 올 것이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이 끝날 때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리 알려 주는 말씀이다. 이 세상도 언젠가는 끝나는 날이 올 것이고 인간도 누구나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죽음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지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 언젠가는 반드시 올 세상 끝 날은 그리고 나의 죽음은 불행한 일이거나 슬픈 일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들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뿐이다. 즉 그 동안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안개 속에 쌓였던 신비스런 세계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뿐이다. 따라서 세상 종말이 온다는 것은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기쁨일 수도 있고 완성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정몽준 후보와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 치열한 경선 끝에 마침내 단일화를 이루워져서 그 동안 말도 많고 문제도 많았던 일들이 하나로 정리되고 일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듯이 나의 죽음은 그리고 세상 종말은 굳이 불행한 일이거나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마침내 우리가 바라던 때가 되어 모든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단일화가 두 사람 중에 하나가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었듯이 나의 죽음 후에 올 세계가 그리고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들이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누누히 말씀하셨던 것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종말에 가서 일어날 일들은 지금 현재 나의 삶과 무관한 전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현재의 삶의 결산이 종합적인 평가가 될 것이다. 즉 지금 내가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열심히 살았으면 상을 받을 것이고 아무리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다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반드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 세상이 올 것이다. 아니 우리는 매일 낡은 것을 보내고 새로운 날을 맞이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이며 하루 하루 지나가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언젠가는 모든 것이 다 완성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시간을 물을 흘러보내지 않고 고여있게 하면 반드시 썩듯이 매순간 영원을 향해 흘러가는 현재의 시간을 흘러가는 리듬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변화되지 않고 마치 영원히 살 것 같이 현재의 것들에 집착되어 있다면 새로워지지 않고 마침내 썩을 것이다. 따라서 루가는 종말과 현재의 삶이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 속에서 실현시키신다. 즉 죽음과 부활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삶을 통해서 구원 계획을 보여주시고 실현시키신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위해서 먼저 죽으셨다. 즉 이 세상을 그리고 나의 죽음을 심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세상 종말이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라고 묻는 질문에 "너희는 잘못 이끌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 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겁내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바로 끝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상 종말에 가서 갑자기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 오셨고 그분의 심판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 자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듯이 우리가 나와 이웃의 구원을 위해 죽지 않으면 세상 종말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심판하는 것은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2,19-2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삶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살도록 불리움을 받은 이들이고 그것을 증명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라고 말씀하셨듯이 세상 끝 날에 그리고 나의 죽음에서 영광스럽게 부활하려면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삶은 오늘 내가 걸어가야 할 삶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온갖 사치와 화려함으로 자기 자신을 꾸미며 사는 삶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으나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어제 복음에서 이야기한 부자들 즉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라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 다 바친 예수님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주님께 예물로 다 바친 가난한 과부이다. 그래서 가난한 과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델이라고 말한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이 세상도 인간의 운명도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또한 이 세상의 惡도 善도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이 모든 것을 증명하고 심판할 것이다. 즉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진 낡은 성전은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듯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즉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파괴되듯이 그렇게 피괴 될 것이다. 새로운 성전은 물질적인 것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루가 20,17)라고 말씀하셨던 십자가 위에 세워진 성전만이 남아 있을 것이며 승리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 제물에 또는 자기 자신 위에 성전을 짓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퉁이 돌 즉 십자가 위에 성전을 짓는 사람들이다. 십자가 위에 성전을 짓는 사람은 세상 종말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에 대해서 굳이 궁금해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미 승리가 보장된 삶을 살고 있고 또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 하늘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영원하고 완전한 것에 희망을 두자!

   -최호정 수사님-

예수님은 외적인 화려함과 감각적인 표징과 현상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사라지고 없어질 것에 희망을 두지 말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신다. 제자들을 포함한 그 당시 많은 이가 세속적 화려함과 힘을 갖고 통치하는 왕의 모습으로 오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지상에 가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오신 주님은, 세상을 통치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고,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비우면서 하느님으로 채우는 삶을 사셨다. 

오늘날도 많은 이가 이면의 허구와 옳지 못함을 보지 못한 채 표면의 화려함과 찬란함에 현혹되거나, 감각적이고 신비적인 현상을 쫓아서 신흥종교에 빠지는 사례가 종종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아름다운 성전을 단순히 건물로만 생각하는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세속적인 모습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현존하시는 거룩한 장소이고, 희생제물과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바치는 곳(사도 3,1)이라는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1코린 3,16)는 것을 늘 기억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주님은 감각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실 것이고 지상에서 영원하고 완전한 것에 희망을 두며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이다. 

<종말이 언제 오든지 간에>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옛날부터 사람들은 종말이 언제 오는지 알고 싶어 했고, 그 시기를 계산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종말이 언제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모른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모른다.' 라는 말은 '알려고 하지 마라.' 라는 뜻이기도 하고,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의 계획을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들도 모른다는 말은, 신성으로는 알지만 인성으로는 알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그 날과 그 시간이 언제인지 확실히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그 날과 그 시간이 몇 백 년 뒤, 또는 몇 천 년 뒤라면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은 아무도 긴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 날과 그 시간이 몇 시간 뒤, 또는 하루 뒤라면 인간 세상은 대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급하게 속성으로 회개하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예 회개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좀 더 여유 있게 몇 년 뒤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이 언제인지 알려고 하지 말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13,32-37).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2012년, 1999년, 1994년에 종말이 온다고 호들갑을 떨던 사람들이 똑같이 나중에 했던 말은 '계산이 틀렸다.'였습니다.

원래 계산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계산을 잘못했다고만 생각한다면 계속해서 그런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종말은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는 때이고,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날은 누군가는 영원히 멸망하는 때가 될 것이고, 누군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다고 하셨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이 말씀은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최후의 심판도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회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회개를 할 수 없으니 종말이 언제 오든지 간에 살아 있는 동안에 회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 자기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으니 지금 당장 회개해야 합니다.

사심판도 하느님의 심판이고, 공심판도 하느님의 심판이니 두 심판의 결과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각 개인의 죽음은 그 자신에게는 종말입니다.

인류 전체의 종말만 생각하고 자기 개인의 종말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전지구적인, 또는 전우주적인 재난이 닥쳐서 죽게 되든지, 자기의 수명이 다 해서 죽게 되든지...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는 점에서는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회개'를 죄를 뉘우치는 일, 또는 고해성사로만 좁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일이 '회개'입니다.

요한 1서의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이 말의 '사랑'을 '두려움'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뜻이 통합니다.

"세상을(또는 세상의 멸망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어차피 지나가는(소멸되는)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니 영원하신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이 말은 이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이 말씀을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의 멸망을 두려워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종말의 재난 때문에 죽는 일이 자기 영혼의 멸망보다 더 두려운 일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대비책을 마련하고, 피난처를 준비한다고 해서 종말 자체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에 혹시 피할 수 있어서 육신의 수명을 약간 연장한다고 해도 어차피 인간은 때가 되면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영원히 멸망한다면, 종말의 재난에서 살아남아서 육신의 수명을 조금 연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어제는 평화방송 녹화가 있어서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말도 잘 못하고 능력도 없는 저를 불러 주셔서 감사하기는 하지만, 역시 TV 방송은 참 힘든 것 같습니다. 내 얼굴이 나온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긴장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어제 방송 4회분을 힘들고 찍고 왔습니다. 그런데 인천에 다시 내려오기 위해 전철을 탔는데, 전철 안에서 큰 목소리의 주인공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중년의 아저씨 한 분이 친구들에게 목소리를 높여서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자네들, 은행 많이 먹으라고. 은행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특히 천식에 좋다고.“

“나이 먹을수록 건강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니까? 그래서 나는 요즘에 몸에 좋다는 것은 모두 먹고 있지. 그랬더니만 요즘 몸이 날아갈 것 같아.”

이에 대해서 친구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바쁜 세상에 그 모든 것을 어떻게 챙겨 먹나? 운동할 시간도 없는데...”

그러자 이 분은 다시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건강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어?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똑같다고.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야 해.”

이렇게 온갖 건강 정보를 늘어놓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이렇게 건강에 신경 쓴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더군요. 이야기의 끝이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시던 아내로 보이는 분의 한 말씀으로 더 이상 말씀을 하실 수가 없었답니다. 그 말씀은 이러했지요.

“당신, 그런 것 먹을 생각 하지 말고 담배나 끊어요.”

하긴 담배가 몸에 그렇게 안 좋다고 하지요. 따라서 좋은 것을 먹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는 것보다도 평소에 피우는 담배 하나만 끊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몸에 좋지 않은 담배를 피우면서 건강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세상 종말의 시간을 정확하게 말씀하시지 않지요. 정확하게 언제라고 말씀만 해주시면 잘 준비할 텐데,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의 시간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종말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자주 이야기하십니다. 

앞서 형제님께서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셨지만 평소에 피우는 담배 하나로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 역시 종말에 대한 말씀에 얽매이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지 못한다면 주님을 증거하고 있다는 신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철저한 생활 자체가 종말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되기 때문이지요. 

연중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는 요즘, 우리는 과연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반성해야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의 마음에 쏙 드는 모습일까요? 

행복은 알려진 목표를 향해 알려지지 않은 장애를 넘어서는 것이다(L.론 허바드).

엘리베이터 안에서 느끼는 13가지 감정

1) 당황: 여러 사람과 같이 있는데 방귀가 나오려고 할 때.

2) 다행: 그 순간 먼저 뀐 사람의 냄새가 풍겨 올 때.

3) 황당: 그 사람의 냄새에 내 방귀를 살짝 얹으려 했는데 소리가 나는 방귀일 때.

4) 기쁨: 혼자만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시원하게 한 방 날렸을 때.

5) 감수: 역시 냄새가 지독했을 때.

6) 창피: 냄새가 가시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탔을 때.

7) 고통: 둘만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사람이 지독한 방귀를 뀌었을 때.

8) 울화: 방귀 뀐 사람이 마치 자기가 안 그런 양 딴청 피우고 있을 때.

9) 고독: 방귀 뀐 사람이 내리고 그 사람의 채취를 혼자 느껴야 할 때.

10) 억울: 그 사람의 체취가 가시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타면서 얼굴을 찡그릴 때.

11) 울분: 엄마 손 잡고 올라탄 꼬마가 나를 가리키며 “엄마, 저 사람이 방귀 꼈나봐.” 할 때.

12) 허탈: 엄마가 “누구나 방귀는 뀔 수 있는 거야.”하며 꼬마를 타이를 때.

13) 슬픔: 그러면서 엄마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살짝 미소를 전할 때.

짧은 순간에도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 인간이죠.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단순하게 생각하고 판단할까요? 그래서 그 과정 안에서 나의 이웃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준적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섣부른 판단은 금지해야 합니다. 대신 넓은 마음으로 모든 이를 감싸 안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니까요.

생자지가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몰랐어요오 어디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새로운 일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그럴 때가 있었지요.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지루했고, 좀 더 창조적인 일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님의 말씀을 듣고는 내가 살아가며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언제나 새로운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형제님께서는 우체국에서 스탬프를 찍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지요.

“매일 편지에 스탬프를 찍는 일이 얼마나 지겹겠어요?”

그러자 이 형제님께서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스탬프에 찍히는 날짜가 매일 다른걸요. 이렇게 똑같지 않기 때문에 지겹지 않아요.”

매번 똑같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지루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쁘게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모든 일들이 다 그러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연극배우들 어떻습니까?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 같지만, 공연을 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반복적인 연습을 할까요? 끊임없이 반복된 연습을 통해서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평불만을 던지며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폭력적이 되고, 또한 자포자기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세상 안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세상의 흐름에 쫓아가기보다는 이럴수록 더욱 더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나눠주시는 참 행복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 시대 역시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특히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 보니 더욱 더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혼란과 분열의 상황에서 종말에 대한 특별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이 새로운 말에 사람들은 현혹이 되지요. 그래서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잘못된 길을 가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잘못된 세상의 길로 가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분명 종말의 시간이 오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서 큰 표징이 일어난다고 하시지요. 결국 세상의 말을 따름으로 인해 자기가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야 말로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바른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행복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문제는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내 자신에게 있음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주님의 뜻이 완성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믿음은 명사가 아닌 동사다. 믿음은 가진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다(칩 잉그램).

창의성의 비결(‘행복한 동행’ 중에서)

‘식객’, ‘타짜’ 등 여러 편의 만화를 히트한 허영만 화백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꾸준히 열정적으로 만화를 그리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그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기자에게 스케줄 표를 보여 주었습니다.

“규칙적인 생활이죠. 저는 늘 일정한 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상상합니다.”

기자가 “보통 예술가들은 자유롭잖아요. 규칙적인 생활이 사고를 딱딱하게 만들진 않나요?”하고 되묻자, 그가 허허 웃으며 답했습니다.

“창의적인 생활은 방종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규칙적인 생활에서 나옵니다. 상상력 또한 꾸준히 가꿔야 할 생명체입니다. 정성껏 매일 일정 시간 갈고 닦지 않으면 뮤즈는 쉽게 달아납니다. 꼭 이뤄야 할 꿈이 있다면, 일단 구체적인 일상의 틈 속에 별처럼 밀어 넣고 규칙적으로 빛을 내기 위해 노력하세요. 매일 매일이 쌓이면 큰 별이 될 것입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참된 성전 건립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지순례 때의 일입니다. 원 없이 ‘명품 성당’들을 셀 수도 없이 순례했습니다. 엄청난 규모를 바라보며, 고색창연하고 화려한 모습을 바라보며, 성당 내부에 가득 찬 역사적이고 찬란한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지어졌던 예루살렘의 대성전, 당시 사람들이 감탄하던 대성전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성전이 값비싼 돌과 진귀한 보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습니다. 얼마나 장중하고 화려했으면 당시 관광의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외형이나 허례허식, 겉치레를 누구보다도 싫어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외적인 화려함보다는 항구함, 영속성, 진실함을 추구하시던 분,본질과 핵심을 꿰뚫어보시던 분이셨습니다.

지금 비록 당신 눈앞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대성전이지만, 세월의 흐름 앞에 서서히 허물어질 건물, 언젠가 수명을 다해 사라질 ‘별 것 아닌’ 인간의 업적임을 잘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항구함입니다. 영속성입니다. 불변함입니다. 언제나 ‘거기 계심’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가변성입니다. 변화무쌍함입니다. 유한성입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성입니다.

이런 불완전한 인간이 짓는 인간의 성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성전이라 할지라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50년, 100년, 200년이 흐르면 서서히 허물어집니다. 마침내 수명을 다해 보수작업이 필수입니다. 리모델링을 해야 하며 마침내 완전히 허물고 재건축을 해야 합니다.

반대로 진정한 성전인 하느님의 집은 어떠합니까? 그 집의 특징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아름다운 대성전들이 하나하나 허물어 사라질지라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하느님의 집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 각자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 각자의 영혼입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거룩함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세월이 흘러 시대가 바뀌고 사람도 바뀌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영성이 언제나 지속되는 우리 교회입니다.

정말이지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모든 것이 변합니다. 영원할 것 같던 우리의 인생이 지나가고, 꿈결 같던 파릇파릇한 청춘도 가고, 꽃 같던 아름다움도 세파에 떨어지고, 한때 대단해보였던 모든 것들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만 갑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린 사랑입니다.

외형적인 성전 건립도 중요합니다. 웅장하고 화려한 문화재 성전의 유지 보수도 중요합니다. 성인들의 피와 땀이 서린 성지 계발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작업이 하나 있습니다. 참된 성전인 예수님, 그분의 사랑의 정신과 영성으로 충만한 제대로 된 나, 그리고 우리 가정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몇 백 년 세월이 흘러가면 수명을 다해 어쩔 수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런 성전이 아닌, 보다 영원한 성전, 보다 진실하고 아름다운 성전인 우리 본당공동체, 수도 공동체를 건립하는 일입니다.

마침표

-정희성 신부님-

우리는 지금 교회력으로 올해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듣게 되는 복음은 우리에게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성전이 언젠가 다 무너져 없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처음을 화려하게 시작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중간이 화려할 수도 있고, 가끔은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마침점이 존재합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언젠가는 모든 것에 마침표를 찍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 시간이 왔을 때, 어떠한 느낌일까요? 각자가 모두 다를 것입니다. 얼마만큼 마음을 쏟았는지,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살아온 모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시작하는 순간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내 삶의 모습은 마침표를 찍을 때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지금 시작하는 것들과 이루어 가는 모든 것 안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왔을 때, 후회하거나 아쉬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종말

-최인비 신부님-

아름다운 돌로 지어진 성전이 허물어져 남아 있지 않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문득 10년 전 세계무역센터를 붕괴시킨 9·11 테러가 생각났습니다. 더불어 올해 3월 11일에 일본을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도 떠올랐습니다. 사건으로만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 종말의 징조와 같습니다.

세상 종말은 분명 두려운 일이지만 루카가 바라보는 세계관에서 말하는 종말은 조금 다릅니다. 루카는 구약 시대 곧 모세오경과 예언자 시대를 거쳐 세례자 요한에 이르는 기간을 구원의 준비기간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 이어 예수님께서 기적을 보이시고 복음을 전파하시는 기간을 구원이 실현되는 시대로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 이후를 제자들에 의해 복음이 선포되는 교회의 시대로 보았습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루카는 이 교회의 시대가 끝나는 때를 세상 종말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세상 종말이 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지진, 기근, 전염병이 휩쓴다 해도 그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를 알리는 과정이요 징조라는 것입니다. 곧 세상 종말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의미는 결국 세상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마음을 두고 지향해야 하는 것은 세상 종말 그 너머에 계신 예수님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수많은 고난이 담긴 우리네 인생살이의 종말인 죽음을 통해 만나는 것은 예수님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삶이 고통에 지나지 않고 희망인 듯싶습니다.

언젠가는 허물어질 겁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몇몇 사람이 성전이 참으로 아름답게 지어졌다고 얘기하자 그것이 하나도 남지 않고 다 허물어질 거라고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슴하십니다.

허물어진다는 것은 세운 것, 쌓은 것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허물어질 때가 온다는 것은 세울 때와 쌓을 때가 있었다는 말이니, 과거 언젠가 쌓은 것이 지금 허물어지고 있으며 지금 우리는 언젠가 허물어질 것을 쌓고 있는 중이겠습니다.

그러므로 성찰해봅니다.

과거 나는 무엇을 쌓았나?

지금 나는 무엇을 세우고 있나?

그중 무엇이 허물어졌고, 앞으로는 무엇이 결국 허물어지게 될까?

우선 많은 친분관계를 쌓았습니다.

성격상 저는 많은 사람을 사귀는 편은 아닙니다.

영원히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알고지내는 분들을 잘 관리하는 편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많은 친분관계를 쌓았고 그래서 지금 많은 분들을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 친분관계가 그러나 허물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이 맺어주신 친분관계, 하느님 안에서 이어가는 친분관계는 지속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친분관계는 언젠가 허물어질 것입니다.

업적도 많이 쌓았습니다.

저는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고 의욕도 많아서 참으로 많은 것을 시도했고, 많은 것을 이룩하였습니다.

그제도 성가대를 하나 새로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계획들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세운 것은 언젠가 허물어질 겁니다.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이 아니면, 그리고 하느님 뜻에 맞지 않으면 세월이 가 허물어지기도 할 것이고, 누군가에 의해 허물어지기도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