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안설하?” 눈앞에 나타난 안설하의 모습에 오지헌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늦으신 거 아니에요? 위험했다고요.” “제가 없었어도 간단하게 빠져나가셨을 거면서. 엄살이 심하시네요~” “간단하게는 절대로 안 돼요.” A급 헌터도 비명횡사할 이런 곳을 어떻게 간단하게 빠져나간단 말인가. “그래요? 뭐, 강유식 생도가 그런 취급이 좋으시면 맞춰드릴게요. 가녀린 남자도 나쁘진 않으니까…” 싱긋 웃는 안설하의 이야기를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린 강유식은 이쪽을 멍하니 보고 있는 안설하를 바라보았다.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간단하게 소개해드릴게요. 이쪽은 천일 길드의 공략 1팀장이자 천검으로 불리는 S급 헌터.” 누구나 알 법한 신상을 주르륵 읊은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그리고 일곱 영지 중 하나, 월화月華의 주인이신 안설하님입니다.” 털썩! 강유식의 소개가 끝나고, 그 이야기를 들은 오지헌이 그대로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이건…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천일 길드의 공략 1팀장인 당신이…” 세계 10대 길드인 천일 길드의 차기 길드장으로 꼽히는 여인이 일곱 영지의 주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죠. 10대 길드 정도 되면 하위 길드나 지부 정도는 두는 법이잖아요?” 그 지부가 뒷세계의 일부를 차지한 일곱 영지라는 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오지헌은 그에 대해 따질 수 없었다. “슬슬 도망치려는 분들이 보이니까 정리부터 할게요.” 주변을 슥 돌아본 안설하는 등에 짊어지고 있던 수십 자루의 검을 바닥에 내다 꽂았다. 쿠웅! 한 자루의 검처럼 엮여 손잡이들이 나란히 뻗어있는 독특한 형태. 안설하는 그중 측면의 손잡이를 하나 잡아 끌어당겼고. 카가강! 쇳소리와 함께 한 자루의 사복검이 뽑혀 나왔다. 후웅─ 안설하가 휘두른 검이 채찍처럼 늘어나 거대한 원을 그려냈고, 흩뿌려진 궤적이 공장의 벽 전체에 새겨졌다. “끄아아악!” “아아악!!” 공장 바깥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카라랑! 청명한 울음소리와 함께 비늘이 돋아난 장검이 나왔고, 안설하가 또다시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그러자 검날이 수백 개의 비늘로 화해 바깥으로 쏘아졌고, 또 다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진다. 콰아앙! 바깥을 포위하고 있던 수십 명이 공장의 벽과 창문을 부수며 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푸콰악! 몸 안에 박혀있던 비늘들이 하나둘씩 빠져나와 다시 검의 형태로 돌아갔고, 피를 털어낸 안설하가 담담하게 검을 꽂아 넣었다. “으으윽…” “사, 살려줘…” 산더미처럼 쌓여 꿈틀거리고 있는 수십 명의 모습에 오지헌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리 간단하게…’ 하지만 오지헌의 그런 생각은 완전히 착각이었다. ‘이게…S급 헌터.’ 표기되는 등급으로는 A급보다 한 단계 이상이지만, 그 격을 표현하자면 수십으로 나뉘어도 이상하지 않을 압도적인 힘.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의뢰인을 죽이고 흑림의 명예를 더럽힌 당신들에게 월화의 주인이자 흑림의 일원으로서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일곱 영지의 주인쯤 되면 명예직으로도 간부인 경우가 많았는데 그렇다고 해도 몇 가지 권한은 지니고 있다. “전원 공식 랭크를 말소하고 비공식 랭크로 강등. ‘낙인’을 새겨 봉사를 명하겠습니다.” “아…안 돼…” “낙인만큼은…” “그럴 수 없어…그런 말도 안 되는…!” 안설하의 선언에 꿈틀거리던 이들도 기겁하며 움직였고, 여기서 도망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모두 끌고 가세요.” 후웅! 하지만 그보다 먼저 검은 야행복을 차려입은 자들이 말없이 나타났고, 쓰러진 이들을 붙잡은 다음 사라졌다. “오지헌 씨.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할게요.” “제…제안?” “예. 당신이 받아들인다면, 낙인을 받지 않을 수 있어요.” “…뭐?” “안설하님한테 허락받았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끌고 온 사람들을 넘긴 대로 허락받은 거니까요.” 오지헌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안설하를 보았고, 그 시선에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무슨 일입니까?” 떨리는 오지헌의 물음에 강유식이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모든 일.” “…” “내가 시키는 일이라면 어떤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쓰레기처럼 바닥을 나뒹굴면서 바닥에 뱉은 침까지 핥아가며 오늘 내게 진 빚을 갚는 거야.” 단순한 비유일 텐데도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야기에 오지헌이 침을 꿀꺽 삼켰고, 강유식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어때요.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강유식의 물음에 오지헌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가능성은 있다.’ 이런 제안까지 해오는 것을 보면 녀석은 분명 자신의 능력이
필요한 게 것이다. “…하겠습니다!” 그 일념 아래에 오지헌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언젠가의 복수를 위해 그때까지 얼마든지 고개를 숙여주겠노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당신을 위해서 일하겠습니다! 어떤 빚이든 모두 받아들일 테니…제발 저를 써주십시오!” 정말 무슨 일이든지 할 것 같은 그 대답에 강유식은 물끄러미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오지헌’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F급으로 판정합니다.] “하.” 그 알림창을 직접 읽은 순간. 강유식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분명히 예상했을 텐데 직접 보게 되니 웃음이 절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구만…’ 채권자는 상대가 느끼는 마음의 빚에 따라 등급을 매긴다. “아…다행이다.” “예?” “네가 은혜도 모르는 새끼라서 다행이라고.” 콰아아앙!! 명치를 후려갈긴 귀화창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고, 바닥을 나뒹군 오지헌이 살짝 그을린 채로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가, 갑자기 왜 그러시는…” “감사함이 안 느껴져서.” “그…그게 무슨…” “너. 지금 내가 널 필요로 해서 구한 거라고 생각하잖아? 다 자신이 뛰어난 탓이라고, 이렇게 자신을 부릴 수 있게 된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이야.” “그, 그건…” 자신의 속내를 완전히 읽혀버린 오지헌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그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었다. “괜찮아. 이런 상황은 익숙하니까 금방 깨닫게 해줄게.” 우우웅! 강유식의 뒤로 귀화창이 연달아 떠올랐고, 그 모습에 오지헌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네가 나한테 얼마나 쓸모없는 녀석인지.” * [채무자 ‘오지헌’ 강제집행에 들어갑니다. 스킬 ‘용린의 갑옷(S)’을 징수합니다.] [채무자 ‘오지헌’의 채무가 모두 납부되었습니다.] “후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은 강유식은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됐습니다.” “이쪽은 끌고 가서 처리하세요.” 안설하의 명령에 숨만 붙어있는
오지헌이 끌려나갔고, 폐공장 내부로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좀 살살할 걸 그랬나.’ 그래도 어중간하게 했으면 오지헌의 성격상 채무등급을 A급까지 끌어올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금 무리하신 것 같은데…괜찮으십니까?”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은 차시현이 걱정스럽게 살펴보았고. “강유식 생도…정말 최고네요.” 안설하가 묘하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뭘요. 강유식 생도가 혼자 차지할 수 있는 걸 저한테 나눠주신 건데. 오히려 제가 감사드릴 일이죠.” 규칙을 어긴 자를 찾아내 잡아 오면 흑림에서는 그 조사력과 힘을 인정해 랭크나 보상을 준다. ‘안 그래도 막 영지를 차지했으니 명성을 떨치기에는 좋은 시점이지.’ 이해관계가 일치했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 다만 이쪽에서 조금 경계되는 건 이번 일에 보인 안설하의 태도였다. ‘적당히 지원을 보내주고 끝낼 줄 알았는데…설마 처음부터 본인이 나와 버릴 줄이야.’ 처음 계획은 안설하가 자신에게 호감을 지닌 걸 알고 있으니 일부러 모르는 척 월화에 도움을 요청해 서로 나누어 가질 생각이었다. ‘아직 어린 줄 알았는데…다 큰 어른이셨네요~’ 그런데 연락을 하기 무섭게 전화가 걸려오더니 안설하가 정체를 드러냈고, 그 결과 본의 아니게 회귀 전보다도 더 빠르게 뒷세계에서 그녀와 안면을 트게 된 것이다. ‘이러면 뭔가 생각보다 깊이 얽히게 되는데…’ 안설하는 확실히 유용한 사람이지만, 회귀 전에 좀 질척하게 엮인 터라 이번에는 썩 가까이하고 싶진 않았다. “모쪼록 비밀은 잘 지켜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쪽은 오히려 제가 강유식 생도에게 부탁드릴 일이니까요.” 슬쩍 웃은 안설하가 공장 바깥을 바라보았다. “총 34명인데…이중에 9명만 블랙하운드라는 분들에게 넘겨주면 되나요?” “예.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번 일이 흑림에 보고되면 오지헌의 비자금 창고를 턴 행위에도 명분이 생기니 문제없고, 9명을 흑림에 넘겨주면 랭크도 대폭 오를 것이다. ‘저놈들도 넘기면 다 돈인데.’ 회귀 전에 이번 녀석들보다는 훨씬 약하지만 규칙을 어긴 놈들을 잡아다가 넘겨서 두당 2억 정도 받은 기억이 있기에 강유식이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 맞다.” 그리고 그런 강유식을 바라보던 안설하가 슬쩍 웃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런 녀석들을 넘기면 흑림에서 포상금이 나오거든요. 제가 다 가지는 건 그러니까 나눠 가지죠.” “정말요?” “물론이죠. 보자 저 정도면…” 전보다 죄질이 심한 녀석들이고 더 강한 녀석들이니 두당 10억 정도는 받을까. 그렇게 강유식이 생각하고 있을 때. “B급 수준은 두당 40억, A급은 200~300억 정도 해서 약 1,600억 정도니까 800억 정도가 강유식 생도 몫이네요.” “…얼마라고요?” 예상치 못한 금액에 강유식이 멍한 표정으로 묻자 안설하가 슬쩍 웃었다. “800억이요. 이번에 잡은 사람들은 죄질이 나빠서 제한이 거의 없거든요. 프리미엄 고객들 사이에서 보기 드문 ‘소재’로 마구 쓰일 테니 흑림에서 주는 보상이 꽤 클 거예요.” 과거 강유식이 잡아다 넘긴 녀석들과는 차원이 다른 몸값. 곧 명장으로 엄청난 돈을 벌 테지만, 그래도 이렇게 바로바로 사용 가능한 현금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아니아니. 이런 걸로 풀리기에는…’ 강유식이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폐공장 바깥에서 야행복을 입은 자가 큼지막한 무언가를 들고 왔다. “그건…” “이 사람들이 쓴 완전 차단막이네요. 강제로 해제돼서 내구도가 조금 남았나 봐요.” “흐음…” 지금 시점에서 구하려면 돈은 둘째 치고 찾기도 어려운 물건에 강유식이 살짝 흥미를 보였고. 그 모습을 본 안설하가 슬쩍 웃었다. “이것도 드릴게요.” “예, 예?” “이렇게 연비 안 좋은 물건은 필요 없기도 하고…무엇보다도 강유식 생도가 필요하신 거 같아서요. 뭐든지 물건은 필요한 사람이 가지는 게 좋지 않겠어요?” 미소를 짓는 안설하의 모습에 강유식은 마음에 그어뒀던 선을 몽땅 지웠다. “감사합니다.” “뭘요. 대신 파격적으로 드린 거니까 저도 좀 소소하게 받고 싶은데…아, 그게 좋겠네요.” 입술을 살짝 핥은 안설하가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강유식 생도가 저녁을 사는 걸로, 어떨까요?” “…” “내키지 않으시다면 역시 완전 차단막은 제가 가져가는 걸로…” 완전 차단막을 들고 나가려는 야행복의 모습에 강유식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니, 아닙니다. 물론이죠. 제가 저녁 사겠습니다.” “후후. 좋아요.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요~” 선을 긋자마자 폴짝 뛰어 들어오는 안설하의 모습에 강유식이 식은땀을 흘렸고. “…” 차시현이 있을 뒤쪽에서 아주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 얼마라고요?(6) > 끝 69화 전 세계의 유명 기업들이 참여한 기술 시연회. 우웅─! 장식된 장비들에 마력장벽이 선명하게 맺혔고, 그 모습을 본 구경꾼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 진짜 마력장벽 기능을 양산품에 탑재했다고?” “미쳤다. 진짜 미쳤어.” “말도 안 돼…” 인류가 풀어야 할 과제 중 하나로 여겨지던 마력장벽의 양산화를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중소기업이 해결하다니! “동훈아. 전에 말한 그 녀석은 어디 있느냐?” “예, 예? 그…아마 뒤쪽 천막에 계실 거예요…” “흠. 알겠다. 쉬어라.” 짤막하게 이야기한 노인, 명장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던’ 남철순이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알렉 암즈의 데이비드입니다. 잠깐 이야기라도…” “환상 공방의 안택현 팀장입니다. 사업 건으로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HW 팩토리의 영업부장 김일수입니다. 1분만 시간을…” 본래라면 오늘 시연회의 주인이 돼야 했을 대기업 직원들이 모두 저 자세로 남철순에게 달라붙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따낸다!’ ‘만약에라도 여기서 쳐지면 끝장이야!’ 이번 분기. 아니, 향후 몇 년간의 매출이 걸린 일이었기에 직원들이 처절하게 매달렸고, 그 모습에 남철순이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런 권한이 없으니 다른 사람 찾아보시오.” “예? 그게 무슨…” “그런 말씀 마시고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둘러댄다고 생각했는지 몇몇 눈치 없는 이들이 다시 들러붙으려 할 때. 남철순이 눈매를 팍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주인 바뀌었으니까 그 녀석이나 찾으라고!” “흐억!” “죄, 죄송합니다!” “당장 비켜!”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된다고 생각한 이들이 양쪽으로 쫙 퍼졌고, 남철순이 신경질을 내며 그 사이를
지나쳐갔다. ‘그 사이에 명장의 지분구조가 바뀐 건가?’ ‘누군지 몰라도 무조건 먼저 만나봐야 한다!’ 서로 눈치를 살피던 직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오오…” 부스의 뒤편. 명장의 진짜 주인인 강유식이 호들갑 떨고 있는 남궁륜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다, 당연하지 임마. 다른 것도 아니고 마력장벽 기능을 양산한 물건인데. 이건 진짜 기술계의 혁명이라고.” 이런 설비 쪽에 관심이 많으니 데려오면 빚 좀 쌓이겠다 싶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정신없이 살펴보는 남궁륜의 모습에 강유식이 은근히 덧붙였다. “이거 다 제 덕분입니다. 아시죠?” “물론이지. 다 네 덕분이야. 진짜 고맙다.” [채무자 ‘남궁륜’의 빚이 증가합니다.] 대충 대답하긴 했지만 고마움은 느끼고 있는지 쏠쏠하게 빚이 늘었고, 그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었다. ‘역시 기반을 잘 다져놔야 해.’ 처음에 잘 쌓아놓기만 하면 그다음은 그냥 알아서 쭉쭉 구르며 빚이 쌓인다. 회귀 전에는 해보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일이었기에 강유식은 절로 편안함을 느꼈다. ‘그때도 채권자 능력은 안 까고 다녔어야 했나…아니, 그랬으면 분명 죽었겠지.’ 그때는 폐병도 있고 전학도 가고 상황 자체가 다 안 좋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흐음. 회귀 전 때랑 비교하면 좀 아쉽기는 하네.’ 28년 뒤의 기술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양심이 없지만, 그래도 남철순의 장비를 애용했던 강유식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대성공 시리즈도 있으면…’ 하지만 회귀 전에도 그쪽은 잘 넘겨주지 않았고, 최소 5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물건이라 기대를 안 하는 게 낫다. “여기 있었군.” 상체에 딱 달라붙는 검은색 스포츠 웨어에 청바지를 입은 중년인. 회귀 전보다 정정한 남철순이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털썩! 남철순이 말없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고, 그 모습을 알아본 남궁륜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남철순 명인님!” 존경하는 위인이라도 만난 것 같은 깍듯한 태도. 그 예상치 못한 인사에 남철순이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바, 반갑네.” “그 혹시 사인이나 사진 좀…” 아주 자연스럽게 펜과 종이를 꺼내는 남궁륜의 모습에 남철순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건네받았다. “사진은 안 되네.” “알겠습니다!” 성의 없이 이름 석 자를 좍좍 그어준 남철순은 종이와 펜을 넘긴 다음 들뜬 남궁륜은 무시하고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강유식이라고 했던가?” “예. 처음 뵙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이는 강유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철순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뭘 노리고 있는 건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의 뜻일세. 우리에게 뭘 원하고 그런 투자를 한 건지. 그걸 알고 싶네?”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야겠다는 남철순의 모습에 강유식이 잠시 생각하다가 깊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돈입니다.” “…그게 다인가?” “원래 투자라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상한 비밀집단을 이끌고 있다던가 뭐 그런 게 아니라?” 대놓고 물어보는 남철순의 모습에 강유식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요.” 길드는 운영할 거지만 그런 묘한 비밀집단을 운용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숨으면 나름의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괜한 오해를 받는다는 단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강유식의 부정에 남철순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 혹시 또 개발 예정 중인 물건이 있으십니까?” “음? 뭐, 당분간은 마력장벽 기능을 개선하는 것 말고는 딱히 없을 것 같다만…”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남철순의 모습에 강유식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분위기를 한껏 잡고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이번에 어렵게 손에 넣은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게 엄청난 기능을 지닌 물건인데…” 은근하게 이야기하는 강유식의 모습에 옆에 있던 남궁륜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느냐는 듯이 바라보았고, 남철순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크흠. 그 도대체 무슨 물건이길래…” “그게…음. 남궁륜 선생님. 바깥에 사람들 못 들어오도록 좀 지켜주실래요?”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분위기를 얼마나 잘 잡느냐다. “나중에 나도 보여주라.” “물론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고개를 끄덕인 남궁륜이 밖으로 나갔고, 그 모습을 본 강유식은 품에서 공간확장 주머니를 꺼냈다. “그건…”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남철순의 눈이 가늘어졌고, 강유식이 드래곤의 흉상 세 개가 붙은 형태인 완전 차단막을 살짝 두드렸다. “이번에 설계도를 빼돌린 녀석들과 싸우면서 우연히 얻은 물건입니다. 어르신이 만들어내신 기술과는 다른 의미로 엄청난 물건이죠.” “흐음.” 흥미를 보이는 남철순의 모습에 강유식은 이어서 완전 차단막의 기능을 설명했다. “허…이게 그런 물건이라고?” “예. 그런데 연비가 좀 많이 안 좋습니다.” “얼마나 안 좋길래?” 의아해하는 남철순의 물음에 강유식이 텅 비어있는 용의 입가를 가리켰다. “여기에 딱 맞게 들어가는 주먹만 한 A급 마석이 3개가 필요합니다. 거기에 일회용이고요.” “주먹만 한 크기면 개당 80억은 넘을 텐데…연비가 완전히 돌았군.” “아직 완성된 게 아니라 그런 것 같은데 그래서 결함도 꽤 많습니다.” 실제로 흑림에 제대로 유통되는 건 약 8년 뒤였고, 그 때문에 오지헌이 이걸 가지고 나왔을 때는 상당히 놀랐다. ‘설마 이때부터 시제품이 돌아다니고 있었을 줄이야…어떤 연줄로 구해온 건지도 신기하단 말이지.’ 회귀 전에 오지헌을 조사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을 넘겼지? 싶었던 일이 많았는데 어쩌면 그때마다 이 완전 차단막의 시제품을 썼던 걸지도 모르리라. “그래서…이걸 보여주는 이유가 뭐냐?” 흥미로운 물건에 살짝 흥분한 남철순은 내색하지 않으며 물었고, 그것을 알아본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어르신께서 괜찮으시다면 이걸 막아낼 수 있는 장비를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완성하는 게 아니라 막아내는 물건?” “예. 제 입장 상 사용하기보다는 당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 같아서요.” 실제로 앞으로도 흑림과 얽힌 녀석들과 이래저래 만나다 보면 비장의 카드랍시고 완전 차단막을 꺼낼 가능성이 높다. ‘그래야 빚도 잘 만들 수 있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완성인 물건을 완성하는 게 아니라 막아낼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달라고 해야 남철순의 의문도 넘겨버릴 수 있을 것이다. “흐음…” 실제로 조금 전까지의 의심은 어디로 갔는지 남철순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완전 차단막을 바라보았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한 번 만들어보지.” “가능하시겠습니까?” “처음부터 하라면 조금 어렵겠지만 이렇게 견본이 있으니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이 외형의…” 뭔가 불이 붙었는지 남철순이 몸을 들썩이며 몇몇 부분들을 설명했고, 그 모습에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역시 사람이 똑같구만.’ 조금 전 남철순은 불온한 일에 가담하는 것을 내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것과 다르다. ‘그게 아니었으면 내가 만들어달라는 걸 만들어줬을 리가 없지.’ 물론 채권자로 목줄을 채우기도 했지만, 그 상태에서도 죽어도 안 만들겠다고 버틴 적이 있는 걸 보면 남철순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의 흥미가 중요하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이거 구하기 힘든 물건이니까 안 부서지도록 조심히 다뤄주세요.” “걱정하지 마라. 그런 쪽으로는 익숙하니까.”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남철순의 모습에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그가 익숙하든 말든 이 완전 차단막은 조금만 조사해도 부서질 것이다. ‘부수고 나면 미안해할 테고, 그때 적당하게 확 코를 꿰어버리면…’ 아무런 문제 없이 채무관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네게 줄 게 있다.” “예?” “잠시만 기다려라.” 자리에서 일어선 남철순이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 큼지막한 가방을 들고 왔다. ‘저건…’ 회귀 전 남철순이 완성된 장비를 담아주는데 주로 사용했던 특제 가방. 그 예상치 못한 물건에 강유식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건…?” “줄지 말지 고민했다만…이런 귀중한 물건을 받았으면 상응하는 만큼 줘야겠지.” “열어봐도 되나요?” “이제 네 물건이니 마름대로 해라.” 남철순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가방을 눕힌 다음 잠금장치를 풀었다. 딸깍─ 잠금이 해제되며 내부에 가둬진 마력이 흘러나왔고, 생각보다 제대로 된 양에 강유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이 시절에 영감 솜씨면 그리 대단하지도 않을 텐데…’ 의아한 표정을 지은 강유식이 가방을 열었고, 새하얀 연기 속에 가지런히 놓인 장비가 보였다. ‘이거…마력 보조기잖아?’ 주먹만 한 크기에 십자형태를 띤 보조기 여섯 개. 그리고 등에 붙여 착용하는 갈비뼈처럼 생긴 조종기. ‘내 기억으로는 이거 마력장벽 기능이 풀리고 나서 한참 뒤에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완전 차단막의 시제품처럼 지금 나올 물건이 아니다. 복잡한 표정을 지은 강유식은 이쪽을 흘끔 보고 있는 남철순을 바라보았다. “저…이건 뭡니까?” “연구하면서 잠시 숨 돌릴 때 만들던 게…으음…그냥 어쩌다가 잘 나온 거다.” 살짝 둘러서 설명하는 남철순의 모습에 강유식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작 스킬의 대성공.’ 본인은 스킬의 힘을 빌린 물건이라고 껄끄럽게 여기지만, 실질적으로는 장인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치의 물건이다. ‘그러고 보니 마력 보조기를 최초로 개발한 곳이 HW 팩토리였었지?’ 그때는 그냥 그쪽의 기술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되면 또 뭔가 의미심장하다. ‘…일단 써보자!’ 회귀 전에 이 물건이 어떻게 됐든지 간에 일단은 성능부터 확인해야 한다. [제작자 ‘남철순’의 승인을 확인. 사용자를 인식합니다.] [사용자 ‘강유식’을 등록. 연산 보조 AI ‘식스 아이’를 가동하겠습니다.] 우웅─ 여섯 개의 보조기가 공중으로 떠올랐고, 중앙에 있는 렌즈에서 푸른색 빛이 번뜩였다. ‘연산 보조 AI?’ 본래 마력 보조기는 이름 그대로 마력을 저장해두고 급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간이 탱크 같은 역할이었다. ‘간단하면 효과를 알기 힘드니까…트윈 템페스트를 소규모로 발동시켜볼까.’ 사용하기 간편한 스킬이라고 해도 규모를 축소하면 추가로 계산할 변수가 많아 까다롭다. 휘우우웅─ 5초 만에 손바닥 위로 두 개의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어?” 30초는 걸릴 거라고 생각한 연산이 5초 만에 끝나다니? [사용자에게서 공명 가능한 파츠를 확인. 비각성 상태이므로 자동 공명에 들어가겠습ㄴㅣㄷ….] 힘차게 떠오르던 알림창 끝 부분이 갑자기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고, 가슴팍이 묘하게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강유식은 조종기를 쥔 채로 화장실로 달려갔고, 대변기의 빈칸에 들어가 가슴에서 느껴지는 열기의 근원을 꺼냈다. ‘이 새끼는 또 왜…’ 다른 부품을 구하기 전까지 아무런 기능도 없는 이놈이 왜 갑자기 난리란
말인가. […파츠 공명 완료. AI ‘페르스발’ 기동합니다.] 뭉개졌던 알림창에 다시 고급스러운 필기체가 떠올랐고.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로드. 중후한 사내의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 헛똑똑이(1) > 끝 70화 시연회가 끝난 뒤. [HW 팩토리, ‘명장의 기술은 세계 최고의 수준’] [알렉 암즈의 CEO 데이비드, ‘타인의 업적을 깎아내릴 줄밖에 모르는 쓰레기들은 업계에서 퇴출해야 한다’] [환상 공방, ‘언제든지 명장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것.’] 대기업들이 솔선수범해서 명장에게 쏟아지는 견제들을 걷어냈고 지속적인 러브콜을 보내 그 기술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진짜 기술 한 방으로 정점을 찍네.” “에이. 그래도 정점은 매출액으로 따져야지.” “매출액이 뭔 상관이야. 마력장벽 기능 없는 장비는 이제 경쟁력 자체가 없어져 버릴 텐데.” 원자재 값이 비싼 것도 아닌지라 가격 차이도 안 큰데 성능은 몇 배로 이상으로 차이 난다. “들었어? 명장 실소유주가 중소길드 총무 출신이라던데.” “나도 들었는데…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총무가 그렇게 주식을 사들여. 남 씨 일가 지인이나 친척 아냐?” “들어보니 그건 또 아닌 거 같던데. 그냥 귀신같이 감이 좋은 사람인 거 봐” 쓰러져가던 명장에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하여 몇십 배로 살려낸 투자자. 그 전설적인 인물이 누구일지 계속해서 언급되었고, 그 내용은 가관이었다. “저게 뭐라고?” -장인이 직접 만들어낸 식사용 나이프군요. 밸런스도 잘 잡혀있고 가공도 훌륭하니 오랫동안 사용해도 그 빛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로드에게 걸맞은 물건입니다. 강유식은 AI와 나이프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저건?” -외형은 비슷하게 흉내를 냈으나…전체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나이프로군요. 사용하시지 않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나이프들을 하나하나 품평하는 목에 걸린 펜던트, 이제는 AI가 되어버린 페르스발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강유식은 덮어뒀던 종이를 읽었다. “이야…진짜 다 맞췄네. 대단한데?” 사전에 정보를 알려준 것도 아닌데 각 나이프의 특징이나 상태를 완벽하게 꿰뚫어 보았다. 그 능력에 강유식이 감탄했고, 페르스발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로드를 보필하는 AI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원리가 뭐라고 했었지?” -로드의 감각기관을 통해 사물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내부 연산 장치로 분석하여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같이 본 다음에 자신보다 더 똑똑하게 결과를 낸다. 감정계열 스킬은 아니지만 비슷한 기능이었기에 강유식이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살다 살다 이런 아이템도 다 보네.’ 지성을 가진 장비라면 정령무기라던가 에고무기라던가 많이 듣기도 듣고 접해보기도 했지만 이런 종류는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처음이었다. ‘일단 뭐…보니까 나쁜 건 없는 거 같은데.’ 요 며칠 여러 방향으로 실험해본 결과. AI 페르스발은 매우 훌륭한
장비였다. ‘다만 걸리는 건…여전히 이놈을 모르겠다는 것 정도인가.’ 시간이 나는 틈틈이 펜던트나 보조기와 조종기 모두 살펴보고 있지만,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남철순한테 가져가서 확 뚜껑을 따버려?’ 답답한 마음에 충동적으로 생각이 들었지만 강유식은 금방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안 되지.’ 남철순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아직
채무관계가 없기도 하고 그쪽은 완전 차단막을 연구하느라 바쁜 상황이다. ‘그렇다면 역시…그 사람뿐인가.’ 최대한 혼자서 알아보려고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기왕 쌓아둔 채무를 제대로 쓰는 수밖에 없다. “이것 좀 봐주세요.” “…뭐?” 반혜영에게 페르스발의 부품을 내밀었다. “그거 영국에 트루아인가 뭐 신가한테 받아온 거 아냐?” “맞아요.” “근데 뭘 봐줘? 부수기라도 했어?” “보시는 게 빠를 거예요.” 펜던트를 앞으로 슥 내밀자 반혜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받아들였고, 묘한 표정을 내려다보았다. “흐음? 이거 뭔가 흐르는 마력의 구조가…” 눈매를 찌푸린 반혜영이 펜던트와 강유식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고 허공에 손을 휘젓더니 어디선가 화려한 형태의 단안경을 꺼내 오른쪽 눈에 끼웠다. 우웅─ 단안경의 앞으로 작은 마법진이 줄지어 떠올랐고, 반혜영은 그것들을 미세하게 조정하며 펜던트를 살펴보았다. “너…혹시 나 몰래 장악마법으로 라운드 아카데미 보물창고 털었냐?” “예?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럴 리가 없는데 어디서 이런 걸 구해온 거야 이 미친놈아…”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린 반혜영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에는 이런 물건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갑자기 이렇게 됐다는 건…전에 150억 잠깐 빌려 간 거랑 관련된 일인 거지?” 이쪽으로는 처음부터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강유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줄 수 있지?” “그러니까…” 오지헌과 관련된 일은 안설하가 다 정리해뒀기에 강유식은 그 부분만 적당히 빼놓고 모두 이야기해주었다. “니, 니가 명장 실소유주라고?” “일단은요?” “…뭔가 말도 안 되는 거 같은데 평상시 행동 생각해보면 또 그렇게 말이 안 되지는 않네.”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반혜영은 페르스발이 변이하게 된 과정을 곱씹다가 물었다. “그 보조기랑 조종기라는 거 가지고 왔어?” “지금 장착 중이에요. 잠시만요…” 철컥! 등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대자 조종기가 풀려나왔고, 가슴 쪽에 갑옷처럼 달라붙어 있던 보조기들도 떨어져 나왔다. “이것들이에요.” “흐음. 보자…” 다시 단안경을 꺼내 살펴보던 반혜영은 금방 확인을 끝낸 다음 안경을 벗었다. “음 확실하네. 이쪽이 원인이야.” 펜던트를 툭툭 건드린 반혜영은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다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이게 겉보기에는 그냥 비싼 펜던트 정도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몇 겹으로 봉인이 된 물건이야. 좀 더 알기 쉽게 말하자면, 본체는 있는데 배터리가 빠진 상황?” “그럼 이 보조기가 배터리가 된 겁니까?” “맞아. 근데 이게 원래 배터리가 되는 부품들이 따로 있었던 거 같은데…그 보조기가 호환성이 너무 좋은 탓에 덜컥 자리를 차지한 거지.” 즉 예정에도 없던 세트효과가 일어났다. 그 설명에 강유식은 혹시나 싶어 물었다. ‘저 설명 맞아?’ -정확합니다. 로드시여. 그런데 왜 처음부터 제게 물으시지 않으셨는지…? 널 뭘 믿고 물어봐, 라는 말을 삼킨 강유식은 페르스발의 물음을 슬쩍 넘기며 반혜영을 바라보았다. “그럼 크게 문제는 없는 건가요?” “딱히? 좀 음침한 구석이 있는데 사용자에게 해를 끼치는 느낌은 아니라. 오히려 이번에 주인으로 인식 돼서 더 잘됐다고 해야 하나…” 펜던트를 바라보며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반혜영은 이내 결론을 내렸는지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나. 이거 연구해볼래.” “예?” “기존 부품이 아니어도 잘 맞으면 봉인이 해제되는 거 같은데…어쩌면 그 허용범위를 좀 더 넓힐 수 있을지도 몰라.” 반혜영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잘만 풀리면…이거 완전 날로 먹겠는데?’ 물론 호환되는 부품을 구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반혜영이 저렇게 연구해보겠다고 말할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그럼 저도 부탁드릴게요. 펜던트는 드리면 돼요?” “봉인 구조 분석할 때까지만 가지고 있을게. 아마 7월 중순…여름방학 시작 전에는 끝날 거야.” “여기요.” -로, 로드? 당황한 페르스발의 목소리를 무시한 강유식은 펜던트를 홀라당 넘겨주었고, 반혜영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아. 이런 건 오랜만에 해보는데…괜히 들뜨네.” “그게 그렇게 대단해요?” 강유식이 모르는 척 물어보자 반혜영이 펜던트를 툭툭 건드렸다. “당연하지. 다른 부품으로도 봉인을 풀 수 있다는 건 능력을 기존 형태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거니까.” “그러니까…저한테 딱 맞는 아이템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거네요?” “바로 그거지.” 자신에게 딱 맞는 물건으로 만들 수 있다. 그 이야기에 강유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맞는 물건이라…’ 페르스발과 호환이 될 만한 물건으로 뭐가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강유식은 문득 여름방학에 가게 될 이탈리아에서 찾을 반지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 반지가 페르스발이랑 연동할 수도…’ 재앙급 마인이 휘둘렀던 마검
페르스발과 마찬가지로 그 반지 역시 수많은 마인들의 손을 거쳐 간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재수 없는 물건이라고 다 호환될 리가.’ 명색의 10대 장비 중 하나인데 분명 더 어려운 조건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강유식이 반혜영을 바라보았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맡겨만 둬.” -저…로드. 레이디에게 부수지만 말아달라고… 반혜영의 강함을 알아본 것인지 페르스발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고, 강유식이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부수지만 말아달라네요.” “걱정하지 마. 부수지는 않아.” 씩 웃은 반혜영이 페르스발을 내려다보았다. “부수지는.” * 이탈리아의 부둣가. “정말…이걸 넘기기만 하면 약속한 대로 10억 유로를 받을 수 있는 건가?” “그래. 넘기기만 하면 끝이다. 추적도 모두 따돌렸고, 포위망을 벗어날 경로도 확보했으니 이제 걱정할 건 없어.” 그 이야기에 사내들이 긴장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았고,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스무 명에서 시작했는데 남은 건 다섯 명이네.” “이만큼이나 남은 것도 다행이지. 마지막에 추적을 못 따돌렸으면 우리 전부 죽었을 거다.” 1년 전부터 내통자의 도움을 받아 준비한 계획인데 이만큼이나 피해를 입다니. 몰락하고 있다 해도 디세타 일가의 저력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우리들을 놓친 시점에서 이미 끝장난 거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후계를 상징하는 징표다. 그것을 빼앗겼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직은 뿔뿔이 찢어질 것이고 새로운 탄생을 위해 디세타 일가도 끝날 것이다. “흐음. 근데 이거 한번 열어보면 안 되냐?” 다섯 명 중 한 명이 궁금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뭐?” “이번에 넘기고 나면 가까이서 볼 수도 없을 텐데 그 전에 잠깐 보면 안 되나 싶어서.” “그건…” “나도 보고 싶긴 하네. 후계의 징표니 뭐니 저 개 같은 물건 때문에 온갖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면 솔직히 억울할 것 같구만.” 다른 두 명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동의한다는 듯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에 사내가 눈매를 찌푸렸다. ‘정통한 후계자가 아니면 다룰 수 없는 저주받은 물건이라고 했는데…’ 그런 걸 봐도 좋은 걸까.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사내는 기대를 담아 바라보는 네 명의 시선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한번 보자.” 착용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보기만 하는데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사내는 이미 열려있는 가방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딸깍─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등골이 오싹해졌고, 다섯 명이 시선을 교환했다. 분명히 위기를 느꼈지만 그 누구도 그만하자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푸화아악!! 밀실의 안에서 검은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흐흐…그래. 너는 내꺼다…그렇게 애원하지 않아도 너는 영원히 내꺼야…”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사내는 자신의 손에 반지를 끼운 다음 그대로 출구를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 헛똑똑이(2) > 끝 71화 7월 초. “수석…?” 다이아클래스 1학년 수석을 단번에 먹어버린 강유식의 성적에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실기도 실기인데 필기가 압도적이네.” “마력시험 만점이 가능한 거였어?” “강유식이 못 받으면 그게 더 말이 안 되지. 쟤가 못 받으면 누가 받아?” “…그것도 그러네.” 성진 사관학교에서 그토록 악명이 높던 마력 시험. “설마 그런 답을 적을 줄이야…진짜 만점을 안 줄 수가 없었다니까?!” “알겠으니까 그만 좀 하세요…” 신나서 이야기하는 반혜영의 모습에 강유식이 차를 홀짝이며 시선을 슬쩍 돌렸다. “마지막 답안 그거 논문에 싣자. 마법의 핵 설명하는데 제격일 거 같아.” “편한 대로 하세요.” “뭘 남 일처럼 이야기해. 내일부터 여름방학이니까 약속한 대로 논문 써야지.” “…” 기어코 오고야 만 순간에 강유식이 살짝 머리를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물론이죠. 저도 다 준비해뒀어요.” “정말?” “제가 이런 걸로 거짓말하겠어요.” 사실 전혀 준비를 안 했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강유식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고, 반혜영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그래. 주변에서 계속 발표 좀 해달라고 난리를 부려서 말이야. 이번 여름 안에 미뤄뒀던 증명 싹 끝내버리려고.” 의욕을 활활 태우는 반혜영의 모습에 강유식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페르스발은요?” “아, 맞다. 참.” 따악! 반혜영이 손가락을 튕기자 옆방에서 작은 상자가 하나 날아오더니 강유식 앞에 놓이며 열렸다. ‘보석이 4개 늘었잖아?’ 그것도 매우 자연스럽게 덧붙여져 있었는데 모르고 봤다면 본래 그런 형태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추가된 보석은 뭐에요?” “아. 너한테 필요할 거 같은 정보들을 추가해서 달아본 거야. 다행히 호환이 잘되더라고.” “정보를 추가했다고요?” 강유식이 놀란 표정을 짓자 반혜영이 씩 웃었다. “봉인 해제야 부품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정보추가 정도야 간단하지. 앞으로 꽤 유용할 거야.” “허…어떤 식으로 되는 건데요?” “기초적인 지식을 학습시켰다고 보면 돼. 그걸 바탕으로 둔 상태에서 추가 정보를 받고 연산을 하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빠르고 정확해질 거야.” 간단하게 말하자면 원래보다 더 똘똘한 놈으로 바꿔놨다는 소리다. 반혜영의 호의에 강유식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선생님.” “아니, 뭐…앞으로 논문 쓰고 이래저래 고생할 테니까 그냥 미리 서비스해준 거야.”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죠. 진짜 고마워요.” “아니, 뭐. 크흠!” 얼굴을 슬쩍 붉히며 헛기침한 반혜영은 고개를 슬쩍 돌렸다가 표정을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이었다. “그리고 타오 페이 영감한테서 연락 왔어.” “무슨 일입니까?” “미안한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네. 물건은 정했는데 꺼내려니까 사방에서 뜯어말린다고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데.” 반혜영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물건을 꺼내길래 주변에서 말리기까지 한단 말인가. ‘타오 페이가 가지고 있던 아이템 중에 제일 좋은 거라면…’ 곰곰이 기억을 곱씹던 강유식은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겠지.’ 그 물건은 타오 페이 사후 여러 기능이 밝혀지며 나중에는 중국의 국보로 취급될 만큼 엄청난 성능을 지닌 S급 장비다. ‘보아하니 시간을 끄는 거구만.’ 지난번에 천무궁으로 와줄 수 있냐고 물었던 걸 생각해보면 이대로 시간을 끌어서 직접 찾아오게 만들려는 걸 수도 있다. “되는대로 달라고 하세요. 급한 것도 아니니까요.” “알겠어. 정 늦으면 내가 쪼아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예. 그럼 전 약속 때문에 먼저 일어날게요.” “그래. 여름방학 때 보자~” 반혜영의 배웅을 받으면서 나온 강유식은 다음 약속장소인 공원으로 가서 벤치에 앉았다. ‘아직 시간 좀 남았고…올 때까지 메세지나 볼까.’ 휴대폰을 꺼내든 강유식은 반혜영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도착한 메세지들을 읽었다. [골드클래스 유지 성공! 기념대련도 승리! ^O^V] 시험결과에 오늘 같은 날 어떻게 대련을 잡았는지 평상시처럼 대련 인증샷을 보내온 이하린. [다이아클래스로 진급했어요!! 모두 유식이 형 덕분이에요!! 할아버지도 고맙다고 본가에 꼭 한 번 와달래요! 그리고 이번 여름방학 때 제가 진짜 제대로 한번 대접해드릴게요!] 글자로도 흥분한 게 보일 만큼 잔뜩 들뜬 이병호. [방학 중에도 계속 뵐 수 있을까요?] 묘하게 저돌적인 차시현. [결과발표 보고 나서 잠시 볼 수 있을까?] 묘하게 가라앉은 듯한 내용. 그것을 다시 읽어 본 강유식은 턱을 쓰다듬었다. ‘이거…그거겠지.’ 이런 문자를 보내올 이유라면 하나밖에 없다. 강유식이 살짝 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아. 일찍 왔구나.” 공원에 도착한 김진혁이 곁으로 다가왔다. “늦어서 미안.” “아직 10분 전인데 뭘. 점심은?” “가볍게 먹고 왔어. 넌?” “나는 아침 늦게 먹어서 나중에 먹으려고.” 나란히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은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눴고, 적당히 분위기를 살피던 강유식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시험결과는 어떻게 나왔어?” 강유식의 물음에 김진혁이 잠시 입을 꾹 다물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골드클래스일 거 같아.” 남들은 올라갔다 하면 쾌재를 내지르는 일이지만, 내심 다이아클래스를 노리고 있던 김진혁에게는 나쁘지는 않더라도 기쁘지 않은 결과. “너무 실망하지 마. 스탯이 부족해서 그런 거니까 2학년쯤에는 무조건 다이아클래스 갈 수 있을 거야.” “그럴 수 있으면 나도 좋을 텐데…” 생각보다도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모습에 강유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강유식의 물음에 김진혁은 말할지 말지 고민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털어놓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등했었는데 최근 들어서 병호한테 연달아 지고 있거든. 무기술도 감은 잡혀가는데 큰 소득은 없고. 혹시 성장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하나 싶어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뇌신화를 제대로 다루기 시작한 이병호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한 거지만, 그걸 말해준다고 해서 딱히 위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성장속도가 느려지긴 했으니까.’ 정확히는 자신이 다른 무기를 익히게 만들어서 늦춘 것이지만, 그 기억은 쏙 빼버린 강유식이 턱을 쓰다듬었다. ‘나도 자리 잡았고 슬슬 각성시켜볼까.’ 동아리에 가입도 시켜뒀으니 잘 각성시키면 관심을 뺏기는 게 아니라 같이 평가가 오르게 될 것이다. ‘던전은 아직 위험하고…역시 이럴 때는 스승이지.’ 이병호도 자신에게 배워서 눈 깜짝할 사이에 성장하지 않았는가. 지금 김진혁에게 필요한 것은 실전보단 본인의 재능을 일깨워줄 훌륭한 스승이다. “진혁아.” “응?”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김진혁의 모습에 강유식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랑 같이 이탈리아 가자.” “어, 어? 갑자기 왜?” 당황하는 김진혁의 모습에 강유식이 씩 웃었다. “네 스승 찾으러.” * 지중해 최대의 섬이라 불리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와…” 난생 처음 팔레르모를 방문한 김진혁은 입을 떡 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고, 그 모습에 곁에서 같이 걸음을 옮기던 강유식이 피식 웃었다. ‘촌놈 티 다 내고 다니는구만.’ 강유식은 회귀 전에 종종 왔던 곳이라 익숙하게 살펴 넘기며 휴대폰을 꺼냈고, 부재중인 전화와 메시지를 슬쩍 읽어보았다. [오늘부터 논문 써야지! 연구실로 출근하자!] [아직 자니? 여름방학 첫날부터 게으름 피우면 안 돼.] [차 식는다. 언제 와?] [이탈리아 여행…? 장난이지? 메시지 보면 전화해줘.] [전화 받아 이 개새…] “쓰읍.” 아무리 봐도 보내줄 것 같지 않아서 몰래 넘어왔더니 반혜영의 반응이 생각보다 격렬하다. ‘뭐, 시간 나는 대로 써서 가져가면 되겠지!’ 지금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 강유식은 휴대폰을 슬그머니 집어넣으면서 주변 주소를 확인했다. ‘그나저나 이 근처일 텐데…아, 저기다.’ 한참 걸음을 옮기던 강유식은 기억 속의 골목길을 찾아내고는 김진혁을 붙잡았다. “이쪽이야.” “아, 응.” 살짝 아쉬워하는 김진혁의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었다. “관광할 시간은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따라와.” “아, 알았어.” 속내를 들킨 게 부끄러운지 김진혁이 얼굴을 붉히며 뒤따라왔고, 강유식이 주변의 건물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유식이 네가 말한 그 도장이야?” “응. 여기야.” “으음…간판이나 그런 게 아예 없는데?” 의아한 표정을 짓는 김진혁의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으며 손잡이를 잡았다. “손님이 안 오길 바라는 도장이거든.” 끼이익 문이 열리면서 깔끔하게 정돈된 복도가 보였고, 강유식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으음…” 아무리 봐도 잘못 들어온 것 같은 상황에 김진혁이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탁자 위에 놓인 테이블벨을 발견한 강유식은 슬쩍 웃으며 가볍게 두드렸다. 티잉─ 거실에 벨소리가 청명하게 울려 퍼졌고, 잠시 후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한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 하지만 그 모습을 본 김진혁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목에 걸린 페르스발도 살짝 다급하게 중얼거렸다. -로드. 상대의 사정거리에 노출되었습니다. 안전을 위해 300m 이상 거리를 확보하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적의를 드러낸 것도 아닌데 상대를 절로 긴장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기세. 그 모습에 강유식은 눈앞에 떠오른 메모리맵의 정보를 읽어보았다. (피오레 안젤로) (S급 헌터) (의문의 죽음) “자네들은 누구지?” 마스터Master라고 불리며 단 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검의 정점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 “당신의 제자입니다.” 김진혁의 검혼을 각성시켜줄 스승이었다. < 헛똑똑이(3) > 끝 72화 -최근 들어 범인을 알 수 없는 의문의 살인사건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습니다. 당국은 마인이 벌인 연쇄살인 사건으로 의심하고 있으며 현재 조사를… 어색함에 틀어둔 TV에서 무거운 소식이 전해졌고, 그 이야기를 들은 강유식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슬슬 오고 있나 보구만.’ 이제 반지가 이쪽으로 넘어오는 것도 얼마 안 남았겠구나 하고 강유식이 생각하고 있을 때. 앞쪽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 커피를 내준 이후 아무런 말 없이 앉아만 있는 피오레. 그 모습에 김진혁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눈치만 살폈고, 강유식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기다렸다. “어디서 듣고 온 건가?” 포기한 척 하면서 또 시치미를 떼는 피오레의 모습에 강유식이 싱긋 웃었다. “들은 게 아니라 보고 왔습니다. 해안가의 절벽 아래, 파도가 몰이치는 구석에 좁쌀만 하게 새겨두셨잖아요? 누구든지 찾아오면 검술을 가르쳐주겠다, 라고.” “…” 강유식의 이야기에 피오레가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대로 보고왔군…” “찾느라 힘들었습니다.” 싱긋 웃는 강유식의 모습에 피오레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찾은 건가? 흔적은 안 남겼을 텐데.” “그쪽으로 전문가를 알고 있어서요. 그다음은 뭐, 잠수해서 열심히 찾았죠.” 사실은 피오레의 사후 그의 제자가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지만 강유식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이야기했다. ‘가르치기 싫어서 그런 데 적어두는 인간인데 말 다 했지.’ 그래도 서약서로 맹세한 사항이니 거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강유식은 당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피오레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쩔 수 없군. 따라…” 띵동 현관에서 울려 퍼지는 벨소리. 그에 피오레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지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려주게.” 피오레가 현관 쪽으로 향했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진혁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정말 저 사람이 내 스승이야…?” “너도 아까 느꼈잖아? 실력은 확실해.” “그건 그런데 뭔가 가르쳐주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뭐, 그렇긴 하지.” 자신이 원해서 한 게 아니라 결투에서 패배하고 굴욕적으로 맺은 약속이다. ‘하지만 어쩌겠어.’ 본인이 자초한 일인데 남 탓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이번에 어떻게든 김진혁 이놈을…’ 강유식이 다시금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복도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이 내 제자들이오.” 아주 태연한 표정을 지은 피오레가 자신들을 가리켰다. “…” “…” 그 이야기에 강유식과 김진혁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았고, 그 사이 복도에서 세 명의 모습이 드러났다. ‘저 여자는…’ 회귀 전에 봤던 사진과 똑 닮은 얼굴. “마스터 피오레.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저를 존중해주신다면 오늘은 물러가 주십시오. 루치아 아가씨” “감히…!” 피오레의 이야기에 옆에 서 있던 덩치가 인상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서려던 순간. 그보다도 먼저 여인, 루치아가 손을 뻗어 막았다. “그만둬.” “하지만 저 녀석이 보스의 권위를 무시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아직은 보스가 아니지.”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손가락을 쓰다듬은 루치아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스터 피오레도 그걸 지적한 거야.” “그, 그건…” 덩치의 얼굴이 침울하게 변했고, 루치아는 고개를 돌려 피오레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다음에 또 찾아오겠습니다. 마스터 피오레.”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루치아 아가씨.” 거실을 슬쩍 살펴보던 루치아가 그대로 밖으로 걸음을 옮겼고, 사내들도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우리를 핑계로 쓴 거구만.’ 저쪽에서 뭘 요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어느 정도 감이 잡히긴 하지만 아무튼 그걸 거절하기 위해 자신들을 내세운 것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이러나저러나 피오레는 서약으로 인해 김진혁을 제자로 받아야 한다. 그러니 이미 귀찮게 된 거 그걸 빌미로 다른 일을 떨쳐낸 것이리라. “…하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피오레는 씁쓸한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올라가지.” “네, 네.” “예.” 김진혁이 피오레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고, 강유식도 그 뒤를 따르면서 조금 전에 찾아온 루치아를 떠올렸다. ‘루치아 디세타.’ 이탈리아의 뒷세계를 주름잡는 디세타 일가의 가주이자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조직 ‘코사 노스트라’의 보스. 정확히는 ‘될’ 예정이었던 여인. ‘설마 피오레와 연관이 있었을 줄이야.’ 이쪽은 회귀 전에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기에 강유식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들어오게.” 강유식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2층의 한 방 안으로 들어갔고, 전신에 묘한 기시감과 함께 내부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하인즈 마법학장님의 공간마법이군요.” “…하인즈님을 아는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묻는 피오레의 모습에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예. 이전에 뵌 적이 있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젊은이라고 생각은 했네만…아무래도 내 생각 이상인 모양이로군.”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대회에 몇 번 참가하면서 안면을 튼 정도입니다.” “흐음. 하인즈 님이 대회도 주최하신 모양이군.” 최신 정보는 아예 모르는 듯한 피오레의 모습에 강유식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방 중앙까지 걸어 들어가 서로 마주 보고 섰다. “통성명이 늦었군. 나는 피오레 안젤로. S급 헌터로 검을 주로 다루고 있네.” “강유식입니다. 성진 사관학교에 다이아클래스 1학년으로 재학 중입니다.” “김진혁입니다. 저는 실버클래스에 재학 중입니다…” 풀죽은 김진혁의 자기소개에 피오레가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말게나. 가르치기로 한 이상 클래스로 판단하지는 않을 테니.” 겉으로 보기에는 자애로운 미소. 하지만 그 눈동자를 본 강유식은 피오레의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아차렸다. ‘안도하고 있구만.’ 아마 김진혁의 실력이나 재능을 걸고 넘어 지려는 게 분명하리라. 그 부질없는 모습에 강유식이 속으로 피식 웃으며 바라보았다. “검술은 어떻게 가르쳐주실 생각입니까?” “흐음. 일단 자네들의 실력부터 먼저 봐야 할 것 같군.” 벽에 걸린 가검 세 개를 가져온 피오레는 두 개를 건네주었다. 강유식은 딱히 배울 생각이 없었지만, 김진혁을 혼자 두면 저쪽의 수작에 말려들게 뻔했기에 같이 참여했다. “한 사람씩 오게나.” 검을 치켜세운 피오레의 모습에 강유식은 옆에서 바짝 긴장한 김진혁의 등을 툭 쳤다. “기죽지 말고 되는대로 싸워. 그러면 알아볼 거야.” “…응.” 고개를 끄덕인 김진혁이 먼저 앞으로 나섰고, 강유식은 뒤로 물러서서 둘의 대치를 바라보았다. ‘근접 계열은 참 이런 거 좋아해.’ 회귀 전에도 질리도록 봐온 그 구도에 강유식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생각해보니 이번에는 다르지 않나?’ 회귀 전에야 스탯이 정말 개판이었지만, 지금은 스탯이나 좋은 스킬도 여럿 가지고 있지 않은가. 카앙! 투웅! 들릴 리가 없는 쇳소리와 타격음이 귓가에 들려왔고, 조금씩 둘 사이에 희미한 아지랑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보인다 보여.’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강유식은 신기해하다가 금방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뭔지 모르겠네.’ 서로 공방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과 피오레가 여유롭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검술이나 무학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보니 감도 안 잡히는 것이다. -로드. 저 두 사람의 대결에 대한 해설이 필요하십니까? 귓가에 울리는 페르스발의 중후한 목소리. 그 물음에 강유식이 살짝 신기한 표정으로 펜던트를 슬쩍 바라보았다. ‘알아볼 수 있어?’ -제 근원인 펜던트 안에 담긴 검술의 지식을 활용하면 해설 자체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검술이 있다고?’ -예. 외부로 전수하는 것은 봉인의 제약으로 불가능하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연산하여 다른 검술에 대한 감정을 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마검 페르스발에 담겨 있는 검술을 기반으로 한 해설. 살짝 흥미가 생겨난 강유식은 곧장 허가했다. ‘좋아. 한 번 해봐.’ -알겠습니다. 로드. 페르스발의 영향으로 전신의 감각이 일순간 예민해졌고, 눈앞의 공방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로드의 친우께서 어떻게든 간격 안으로 들어가 승부를 보고 싶어 하지만 저 자가 그것을 모두 쳐내고 있군요. ‘간격 안으로 들어오려는 걸 쳐내는 건 당연한 거 아냐?’ -일반적인 간격과는 조금 다릅니다. 알기 쉽게 말씀드리자면 자신과 싸울 수 있을 장소를 보여줬지만 정작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실력을 본다기보다는 치욕스러움을 주려는 듯한 그 모습에 강유식의 눈이 가늘어졌다.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 뭐 그런 걸 노리고 있는 건가.’ 김진혁의 재능을 알아보고 감탄하면서도 저 짓을 계속하고 있는 걸 보면 분명 그런 걸 노리는 게 분명하리라. ‘계속해서 매달리면 결국 포기하고 가르쳐주겠지만…그러면 시간을 너무 낭비하는데.’ 회귀 전의 제자였던 그 어부야 시칠리아에 사는 녀석이니 계속 매달릴 수 있었겠지만 김진혁은 학생이고 여름방학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로드. 친우분께 조언을 드려 저 자의 허점을 찌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페르스발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조언을 준다고 허점을 찌를 수 있어?’ 이래저래 얌체같이 굴고 있기는 하지만 저래 보여도 S급 헌터. 거기에 검술로는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뛰어난
자다. -전력이라면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지금은 적당히 힘을 조절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검술의 허점을 정확하게 찌르기만 한다면 놀라게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페르스발은 정말 가능성이 있다는 듯이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뭔가 듬직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에 강유식은 한참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좋아. 한 번 해보자.’ 이러나저러나 밑져야 본전이다. 강유식의 허락에 페르스발이 곧장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로드. 파훼법의 연산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웅─ 펜던트 쪽에 미미한 열기가 맴돌았고, 전신의 감각이 극도로 날카로워지며 공방을 보다 섬세하게 보기 시작했다. ‘이거…인지 극대화를 완전히 끌어올린 거 아닌가?’ 그런데도 폭주하는 느낌이나 고통이 전혀 없다. 완벽하게 컨트롤되는 감각에 강유식이 신기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연산이 끝났습니다. 로드. ‘뭔데?’ -세 개의 원이 만나는 공간. 그 중앙을 정확하게 파고들어 결을 끊어내십시오. 그러면 길이 열릴 겁니다. ‘…뭐?’ 난해하기 그지없는 조언에 강유식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좀 더 풀어서 설명 안 돼?’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설명할 경우 검술을 유출하게 되는 것으로 인지되어 불가능합니다. 파훼법은 만들 수 있으면서 그걸 남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는 건 제한되어서 못한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답을 알아내도 그걸 못 알아들으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으음…그래도 기왕 알아낸 거 말해주는 게 낫겠지.’ 연산한 게 아까웠기에 강유식은 김진혁에게만 들리도록 마력을 조절하여 속삭였다. “세 개의 원이 만나는 공간.” “…?”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김진혁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강유식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그 중앙을 정확하게 파고들어 결을 끊어내. 그러면 길이 열릴 거야.” 길이 열린다. 콰앙! 대련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김진혁이 달려 나왔다. ‘어리석은.’ 파고들 틈조차 없는데 정면에서 들어오다니. 조급함에 너무 섣부른 판단을 내렸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피오레의 손이 잔상을 흩뿌렸다. 후웅─! 정면에서
동시에 펼쳐진 세 번의 검격. 전신에 쇄도해오는 공격 앞에서 김진혁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더니 한 점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콰득! 온 힘을 다해 마력의 결을 끊어냈다. “?!” 그 일검으로 세 번의 검격이 비틀어졌고, 눈앞에 만들어진 길을 향해 김진혁이 이빨을 꽉 깨물며 뛰어들었다. 투웅! 거대한 충격파와 함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쿠웅!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김진혁은 금방 자세를 다잡다가 눈매를 팍 찌푸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으윽…” 조금 전의 일격으로 손아귀가 찢어졌는지 뚝뚝 흐르는 피. 그에 반해 피오레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떡 벌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피오레. 결과만 놓고 보면 김진혁의 패배지만, 표정을 보면 사실상 정반대인 것이다. ‘진짜 됐잖아?’ 뭘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조언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김진혁이 피오레에게 한 방 먹였다. “자네.” 어느새 눈앞에 와있는 피오레가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방금 그 일격. 자네의 조언이지?” “그게…” “속삭이는 걸 다 봤으니 발뺌할 생각은 말게.”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한 피오레의 모습에 강유식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김진혁의 재능을 보여주는 것. 조언을 들었다
해도 그걸 성공한 것은 별개의 영역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자네…” 피오레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내 검술을 봐주지 않겠나?” < 헛똑똑이(4) > 끝 73화 “…” 피오레의 부탁을 들은 강유식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진지하고.’ 만약에라도 거절하면 난리 날 것 같은 피오레의 눈동자.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검술을 봐달라는 게 진심인 건 확실했다. “그게…으윽!” 이야기하면서 눈매를 일그러트리고 이마를 부여잡는 강유식. 그 모습에 피오레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고, 저 멀리 앉아있던 김진혁이 후다닥 달려왔다. “유, 유식아! 괜찮아?!” “괘, 괜찮아. 그냥 조금 과열된 것뿐이니까…” 과열된 건 뜨뜻한 펜던트뿐이지만, 강유식은 정말 만성두통을 앓는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괜찮은가?” “예. 그냥 일시적인 현상일 거예요. 조금 전에 집중력이 좀 많이 증폭돼서…” “흠…역시 평범한 현상은 아니었나.” 우연으로 넘기려는 듯한 피오레의 모습에 강유식은 곧장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마법을 연구할 때는 종종 있었던 일인데…검술 중에는 처음이네요.” “…자주 있는 일인가?” “그렇게 자주는 아니지만 저보다 높은 수준의 마법을 볼 때는 종종 있었습니다.” “으음…!” 피오레의 얼굴에 다시 흥미가 떠올랐고, 밑밥이 제대로 깔린 것을 본 강유식이 속으로 슬쩍 웃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그런데 아까 검술을 봐달라고 하신 건 무슨 말씀입니까? S급 헌터이신 피오레님이 왜 제게…” “조금 전 자네가 일러주고 김진혁 생도가 찌른 허점. 그건 방심해서 생긴 게 아니네. 나도 모르고 있었던 틈이지.” “…모르고 계셨다고요?” 고개를 끄덕이는 피오레의 모습에 강유식은 진심으로 놀라며 답을 알려줬던 페르스발에게 물었다. ‘그게 그렇게 교묘한 틈이었어?’ -예. 제가 가능했던 것도 바탕이 되는 검술의 특성, 그리고 다른 이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로드의 감각기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페르스발의 검술과 인지 극대화를 지닌 몸이었기에 찾아낼 수 있었던 틈. 그거라면 확실히 그럴싸하지만, 그래도 강유식은 믿기지 않았다. ‘S급 헌터들이 어떤 놈들인데…’ 회귀 전 기준이긴 하지만 어쨌든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게 S급 헌터의 무력이다. 그런 인물이 자신이 발견할 수 있는 틈도 몰랐다? ‘어쩌면…이 시점의 피오레한테 뭔가 더 있었을지도.’ 과거의 행적이나 제자의 이야기,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어 의문사로 처리된 것을 제외하면 피오레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럼 피오레님은 검술에 그런 틈이 더 있는지 봐주셨으면 하는 겁니까?” “그렇네.” 예상한 그대로의 부탁에 강유식은 무엇을 요구할지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관은 없지만…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인가?” “우선 진혁이에게 검술을 제대로 가르쳐주십시오.” “…” 강유식의 이야기에 피오레가 살짝 의외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조건이라기에 돈이나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을 요구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조금 전처럼 포기하게 만들려는 게 아닌, 같은 헌터이자 검사로서 싸우는 법을 진혁이에게 가르쳐주셨으면 합니다.” “유식아…” 일말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 담긴 요청. 그 모습에 김진혁이 감동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자연스럽게 결과가 나타났다. [채무자 ‘김진혁’의 빚이 증가합니다.] [채무자 ‘김진혁’의 채무등급이 A급으로 상승합니다. 징수목록이 추가됩니다.] ‘오…꽤 쏠쏠하네.’ 그동안 차근차근 모여서 A급을 눈앞에 두고 있기는 했지만 설마 이번 한 방으로 될 줄이야. “…미안하네.” 앞에 있던 피오레가 돌연 고개를 숙였다. “자네들에게 모범을 보여도 모자랄 판에 형편없는 모습만 보여줬군. 특히 김진혁 생도.” “예, 예?” “조금 전 대련에서 보였던 추태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네. 부디 용서해주게나.” 피오레가 다시 고개를 숙였고, 그 모습에 김진혁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치욕을 받았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리라. “잘은 모르겠지만…괜찮습니다. 그 대련도 충분히 공부가 되었으니까요.” “…고맙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피오레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내 모든 역량을 다해 김진혁 생도를 가르치겠네. 한 번만 더 믿어주겠나?” 이번에는 진심이 담긴 피오레의 모습에 강유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믿겠습니다.” “기회를 줘서 고맙네.” “별말씀을요.” 손을 내저은 강유식은 자연스럽게 다음 이야기로 이어갔다. “그리고 다른 조건도 있습니다만…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이네. 마음껏 이야기하게나.” “두 번째는 제 조언이 조금 난해한 표현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단어들을 이야기하는 거라 이 부분은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흐음. 예를 들어서 어떤 식인가?” “조금 전 대련에서의 조언은…” 강유식이 페르스발이 말한 파훼법을 알려주었고, 그것을 들은 피오레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네. 걱정하지 말게나.” “감사합니다.” 이걸로 파훼법을 풀이해달라는 요청은 무시할 수 있게 됐다. 속으로 슬쩍 웃은 강유식은 마무리를 위해 마지막 조건을 꺼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제 조언이 정말로 도움이 되셨다면 그걸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기억해 달라?” “예. 그것을 기억하고, 언젠가 제게 힘이 필요할 때 그만큼 도와주십시오. 그게 저의 마지막 조건입니다.” 자신이 받는 게 검술을 가르쳐주는 ‘대가’가 아닌 ‘은혜’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시킨다. 그것이 강유식이 의도한 것이었고, 피오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자네가 준 가르침과 앞으로 줄 가르침. 그 은혜는 빠짐없이 기억하도록 하겠네.”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피오레 안젤로’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E급으로 판정합니다.]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 그것을 본 강유식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피오레 님.” * 시칠리아에 오고 사흘. 퍼억! “크윽?!” 눈 깜짝할 사이에 여덟 번 두들겨 맞은 김진혁이 뒤로 나뒹굴었고, 가검을 가볍게 털어낸 피오레가 입을 열었다. “반격까지는 좋았지만 보폭을 줄인 건 실수였네. 거리를 좀 더 넓게 잡은 다음 본인의 영역을 확실하게 두게.” “으윽…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오게나.” 카앙! 한 차례의 조언이 끝난 뒤 다시 김진혁이 달려들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흠씬 두들겨 맞으며 뒤로 나뒹군 다음 조언을 듣는다. -로드의 친우분께서는 정말 무서운 재능을 지니고 계시는군요. 사흘 만에 벌써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김진혁의 움직임을 살펴보며 페르스발이 감탄했고, 강유식도 그 공방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페르스발의 해설을 듣다 보니 강유식도 조금 검술을 보는 눈이 늘어났고, 김진혁의 실력이 얼마나 일취월장하는지도 확실하게 보였다. ‘저게 흔히 말하는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같은 거겠지.’ 하루마다 달라지는 김진혁의 모습에 강유식이 감탄하고 있을 때. 계속될 거 같던 훈련이 끝났다. 쿠웅! 뒤로 튕겨 나갔던 김진혁이 대자로 뻗어 그대로 기절해버렸고, 곁으로 다가온 피오레가 피식 웃었다. “오늘도 기절할 때까지 버티다니…김진혁 생도도 참 대단하군.” “그러게 말입니다.” 흔히 전력을 다한다고 말해도 정말 그렇게까지 힘을 쥐어짜 내는 것은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두통을 느낀다는 설정을 깐 게 베스트였구만.’ 자신 때문에 통증을 견디는 걸 미안하게 생각하더니 자유시간까지 줄여가며 훈련에 몰두한다. ‘결과만 좋으면 됐지 뭐.’ 이만한 기세면 여름방학 안에 검혼의 단초를 확실히 잡거나, 아니면 아예 각성할지도 모른다. “크흠. 수업도 끝났으니 우리들도 슬슬 시작하지” “예예. 올려다 놓고 내려갈게요.” 피식 웃은 강유식은 기절한 김진혁을 3층의 방 침실에 눕혀놓은 다음 1층으로 내려왔다. ‘참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네.’ S급 헌터보다는 뭐든지 처음 배우는 초짜 헌터 같은 모습. 그에 강유식은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할게요.” “부탁하네.” 열정적으로 바라보는 피오레의 모습에 강유식은 대기 중이던 페르스발에게 명령했다. ‘오늘 결과 부탁해.’ -알겠습니다. 로드. 미리 연산을 끝내둔 페르스발이 오늘 피오레가 펼친 검술에서 발견한 파훼법을 알려주었고, 강유식은 적당히 분위기를 잡으며 고스란히 이야기해주었다. “오늘은 계속해서 몰아치는 파도 같았습니다.” “음…” “그리고 사이에 파도를 틀어지게 만드는 거대한 암초가 있었는데…거기까지 파고들어 파도가 물러나는 순간 같이 베어낸다면 길이 열릴 것 같네요.” “파도…암초…” 진중한 표정을 지은 피오레가 혼자서 중얼거렸고, 이내 뭔가를 깨달았는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과연…과연. 그런 건가! 검로의 변화를 주기 위해 잡았던 중심이 연격이 끝날 때쯤에는 빈틈이 되어…” 감탄을 터트린 피오레가 수첩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고, 강유식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네.’ 검술을 보는 눈은 확실히 늘어났는데 이놈의 괴팍한 파훼법은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채무자 ‘피오레 안젤로’의 빚이 증가합니다.] 하지만 피오레에게는 확실하게 도움이 되는지 채무가 쏠쏠하게 올랐고, 강유식은 소파에 기댄 채 그 필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덜컥 초인종 없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직후 수십 명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필기하던 피오레의 손이 멈추며 표정이 굳어졌다. “오랜만이오. 마스터 피오레.” 몰려온 이들 중에서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사내. 모자의 그늘에 얼굴이 가려져 알아볼 수 없었지만, 가슴팍의 브로치는 확실하게 보였다. ‘검은 장미에 붉은 잎이 네 개라.’ 코사 노스트라의 핵심 간부임을 나타내는 증표. 그것을 알아본 강유식은 상황을 지켜보았고, 피오레가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는 왜 찾아온 거지?” “요즘 들어 계속 이상한 이야기가 들려와서 한 번 확인 찾아온 걸세. 그런데…” 고개를 돌린 간부가 강유식을 바라보며 슬쩍 웃었다. “꽤 대단한 손님을 데리고 있군.” “신경 꺼라.” 한층 더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간부가 살짝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알겠네. 알겠어. 그냥 용건만 이야기하지.”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간부는 시종일관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굳히며 이야기를 이었다. “요즘 들어 루치아 아가씨가 이곳을 계속해서 방문한다던데…이미 끝난 일에 끼어 들어봐야 자네나 나나 피곤하기만 할 걸세.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 “자네가 선대에게 입은 은혜는 징표를 지닌 ‘진짜’ 후계자에게 갚아야 할 게 아닌가. 혹시라도 상대를 헷갈리지 말게나.” 간부의 이야기에 피에로의 눈매가 일그러지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개입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라.” 피에로의 대답에 간부가 다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자네라면 이해해줄 거라 믿었네. 조직 내부의 일이 외부에 영향을 받으면 이래저래 지저분해지니 말일세. 뭐든지 스스로 해결해야 하지 않겠나?” “…” “아, 이런 내 말이 너무 길었군. 용건은 끝났으니 그만 가도록 하지.” 뒤의 조직원들이 물러서며 길을 만들었고, 간부가 천천히 그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아, 그렇군. 그걸 깜빡했어.” 그러다 돌연 간부가 몸을 돌리더니 강유식을 바라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날 그렇게 올려다보면 안 되지?” 피잉! 조직원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고, 한 자루의 단검이 강유식의 심장을 노리고 쏘아졌다. 서걱! 하지만 그것이 닿는 것보다도 먼저 번쩍이는 검광이 단검을 수십 토막으로 잘라냈고, 어느새 자리에 일어서 검을 쥔 피오레가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신경 꺼라고, 그렇게 경고했을 텐데.” 피오레의 살기에 조직원들이 모두 긴장하며 대형을 갖췄고, 그 모습에 간부가 흥미롭게 바라보다 씩 웃었다. “장난일세 장난. 정말이지 농담을 모르는군.” 익살스럽게 넘어가려고 하지만, 간부가 전하고자 하는 뜻은 분명했다. 혹시라도 허튼짓을 했다가는 강유식이 위험할 거라고, 그렇게 경고한 것이다. “그렇군. 나 역시 장난이다” 푸콰아악!! “끄아아악!!”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단검을 던졌던 조직원의 양팔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 모습을 본 간부의 입가에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분명…녀석의 검은 녹슬었다고 했을 텐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간부의 표정이 굳어가고 있을 때. 검을 겨눈 피오레가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합당한 이유 없이 너희들의 구질구질한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하지만 만약에라도 내 손님에 손을 댄다면…” 싸늘한 안광을 흩뿌린 피오레가 짙은 살기를 담아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네놈들을 모조리 죽여주마.” 털썩! 그 한 마디에 조직원 중 몇 명이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고, 그 광경을 바라보던 간부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기억해두지.” 그 말을 끝으로 간부가 빠져나갔고, 양팔이 잘린 녀석은 다른 조직원에게 들려 밖으로 나갔다. “미안하네. 더러운 일에 휘말리게 했군.” “아뇨. 괜찮습니다. 그보다…” 수십 조각으로 토막난 단검을 바라본 강유식이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엄청나시네요.” 단검이 날아오는 건 바로 알았고, 그에 대한 대비도 쉬웠다. 그런데 그것을 베어버린 피오레의 검은 다 휘둘러진 뒤에야 깨달은 것이다. “다 자네의 조언 덕분이지. 이전이라면 그렇게 빠르게 할 수 없었을 걸세.” “예? 단검을 베는 것 정도야…” “단검 말고 팔을 말한 거네. 그때 같이 벤 것이었으니.” “…” 날아오는 단검을 베고 이어서 조직원들 사이에 숨어있는 녀석의 양팔을 베어버렸다? “정말 귀찮게 만드는군…” “저…혹시 무슨 일인지 저도 들을 수 있을까요?” 대강 알고 있는 일이지만 강유식은 모르는 척 물었고, 피오레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자네는 모르는 게 낫네. 그냥 못 본 척해주게나.” “으음. 알겠습니다.” “잠시 나갔다 올 테니 오늘 하루는 집에 있어 주게.” “예.” 그 말을 끝으로 피오레가 밖으로 나갔고, 묘한 마력파장이 주택 전체에 퍼졌다. 아마 공간마법과 함께 걸려있는 방호마법을 걸어둔 것이리라. ‘루치아랑 안면이 있는데도 왜 안 돕나 했더니…이런 이유였었나.’ 조금 전 간부는 피오레를 외부인으로 이야기하며 코사 노스트라 내부 일에 끼어드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피오레가 합류해서 녀석들과 손을 잡은 외부세력이 들어온다면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지겠지.’ 피오레가 죽는 일은 거의 없겠지만, 루치아의 경우는 생존률이 지금보다도 더 떨어질 것이다. ‘결국은 반지가 키 카드네.’ 이탈리아 전역을 떠돌며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는 반지. 코스 노스트라의 정통 후계자임을 나타내는 그 징표를 누가 가지느냐에 따라 상황이 바뀌게 된다. ‘내 기억으로는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의아한 표정을 지은 강유식이 TV의
뉴스채널을 틀었고,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계속 나왔다. -오늘 또다시 연쇄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번 피해자는 시칠리아에 머무르는 60대 어부로 범인의 흔적은 아직도 발견되지… 계속되는 연쇄살인 사건 소식에 살짝 가라앉은 아나운서의 목소리. 그 속보를 들은 강유식이 눈이 커졌다. ‘왔다.’ < 진정한 후계자(1) > 끝 74화 골목길 밖으로 나온 코사 노스트라의 간부, 살바토레 페로는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며 양팔이 잘린 사내를 바라보았다. “저 쓰레기. 치워둬.” “알겠습니다.” “보…보스…!” 팔이 잘린 사내가 뭐라고 하기 전에 다른 조직원들에게 끌려갔고, 고개를 돌린 살바토레가 신경질적으로 이야기했다. “출발해.” “예, 예.” 부드러운 시트에 몸을 기댄 살바토레는 조금 전까지 보았던 풍경을 떠올렸다. ‘도대체 피오레 그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오레의 상태는 지금처럼 좋지 않았다. 육체적으로 멀쩡하지만 정신적으로 녹이 슬고 있는 상황. ‘만약 징표가 루치아의 손에 있었다면…거기서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너무 기고만장해 필요 이상으로 자극한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한 살바토레는 준비 중인 병력을 떠올렸다. ‘계획을 수정해야겠어.’ 예전이라면 모를까 본래의 실력을 되찾아가고 있는 피오레라면 지금의 병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 ‘설마…강유식이라는 그 녀석 때문인가?’ 엄청난 마법술식을 연달아 공개하여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수많은 길드와 거물들의 관심을 받는 천재. ‘그 녀석을 정말로 처리해야 하나?’ 만약 피오레가 저기서 더 강해진다면 더 골치 아파진다. ‘아니, 그게 가장 멍청한 행동이군.’ 지금은 피오레라는 괴물 한 마리만 품고 있지만, 강유식을 죽이는 순간 그에 버금가는 괴물 두 마리가 이곳으로 들어와 난동을 피울지도 모른다. ‘그냥 계획대로 간다.’ 약간의 변수가 생겼지만 그래도 아직은 상정 내다. ‘겸사겸사 루치아 쪽도 슬슬 손을 봐야겠군.’ 죽이지는 않더라도 그 곁에 붙어있는 녀석들을 털어내야 앞으로의 일이나 피오레를 컨트롤하는데 쉬워질 것이다. 꿀럭 그리고 그 안쪽에서 붉은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흉측하게 꿈틀거렸다. * “허억…허억…” 길도 없는 울창한 숲. 우웅─ 그때 사내의 왼손에 끼워진 황금색 반지에서 거무튀튀한 기운이 일렁였고, 희미한 안개 같은 것이 몸을 휘감았다. “…” 그렇게 추적조가 나무를 지나치며 산길을 내달렸고, 소리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돼, 됐어…모두 네 덕분이야…” 몽롱한 표정으로 웃은 사내가 반지를 쓰다듬자 주변을 휘감은 안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냐…아직 넌 내거야…다른 녀석에게 줄 수 없어…” 실성한 듯이 중얼거린 사내가 산길을 터덜터덜 내려갔고, 그 뒤를 쫓는 이들은 더 이상 없었다. 후웅! 십자 형태의 기계들을 제외하고는. “…!” 자신이 포위당한 것을 깨달은 사내는 곧장 검을 뽑아 든 다음 방벽을 향해 휘둘렀다. 카앙! 하지만
방벽에 부딪친 검은 허망할 정도로 간단하게 튕겨 나갔고, 그 모습을 본 사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따악! 사내의 눈앞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크윽?!” 예상치 못한 불꽃에 몸이 휘청거렸고, 이어서 두 다리를 휘감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파앙─! 그러자 반지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두 다리를 휘감았던 쉐도우 스네이크를 갈가리 찢어버렸고, 자유를 되찾은 사내가 이빨을 꽉 깨물며 적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파츠즉! 그리고 번개를 흩뿌리며 쇄도해오는 은색 주먹이 보였다. 우드득! 라이트닝 엑셀에 아케트라브까지 발동한 주먹이 사내의 얼굴을 박살 냈고, 거기에 강유식은 캐스팅을 끝낸 마법까지 발동했다. ‘트윈 템페스트.’ 콰가가각!! 손끝에서 터져 나온 두 개의 폭풍이 사내의 몸을 완전히 찢어버렸고, 사방으로 피와 살점이 튀었다. “너무 거창했나…” 혹시라도 저쪽에 빛이 보일까 봐 귀화창과 귀화옥 대신 트윈 템페스트를 쓴 건데 이쪽은 이쪽대로 문제였다. ‘뭐 어때.’ 좀 더 내려가서 멀쩡한 시체가 발견되나, 이래저래 난장판인 시체가 발견되나 그 자체는 똑같다. ‘보자…’ 주변을 둘러보던 강유식은 근처 나무 아래에서 반짝이는
빛을 발견했고, 곧장 그 앞으로 다가갔다. -난 네 물건이야…나를 잡아줘… 머릿속에 울리듯이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 -로드! 저건 저주가 서린 반지입니다! 얼른… 페르스발의 목소리가 끊어지며 다시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고, 강유식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내가 계속해서 널 사랑해줄게. 얼른 날 잡아. 목소리에 이끌리듯이 바닥에 놓인 반지를 집어 들었고, 속삭이던 여인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얼른 날…! “시끄러.” 티잉! -꺄악?! 손가락으로 반지를 후려치자 비명이 울려 퍼졌고, 페르스발의 목소리를 차단했던 마력이 흩어졌다. “언제까지 떠드나 봤더니 끝까지 떠드네. 이래서 저주 아이템은…” -로, 로드!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아. 문제없어.” 살짝 어지럽기는 했지만 딱 그 정도. 이런 아이템은 회귀 전에 미끼용으로 여러 번 써봤기에 다루는 데는 익숙했다. ‘그래도 확실히 강하기는 하네.’ 마음의 대비도 해두고 아케트라브와 페르스발이 어느 정도 저주를 떨쳐냈을 텐데도 이만한 영향력이라니. -으으…어떻게… 방금보다 중성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강유식이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뭐긴 뭐야. 그냥 안 통한 거지.” -그, 그럴 리가…어떻게 너 같은 녀석이.. “됐고, 얌전히 있어. 또 맞기 싫으면.” 자리에서 일어선 강유식은 방벽을 친 보조기를 모두 수거한 다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들키지는 않은 것 같은데.’ 다만 주변으로 광범위하게 포위망이 구성되어 있을 터라 빠져나가려면 살짝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저…로드. 급하신 중에 죄송하지만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그 반지. 잘하면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 걸음을 옮기던 강유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야?’ -예. 로드께서 저를 맡기셨던 레이디, 반혜영 님이 입력해주신 지식에 의하면 확실합니다. ‘선생님이…’ 반지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강유식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해봐.’ -알겠습니다. 로드. 반지를 오른손에 착용해주십시오. 강유식은 곧장 안드바라나우트를 오른손의 중지에 끼워 넣었고, 그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녀석이 다시 여인의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괜찮아…모두 나에게 맡겨… 전보다 확실하게 강하게 울려 퍼지는 울렁증. 그에 강유식이 눈매를 살짝 찌푸리고 있을 때. -로드께 불경한 목소리로 속삭이지 마라! 페르스발과 안드바라나우트가 다투는 소리가 귓가에 시끄럽게 울려 퍼지더니 반지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검은 기운이 펜던트 쪽으로 질질 끌려갔다. -로드. 반지를 사용해보십시오. ‘아, 그래. 알겠어.’ 강유식은 안드바라나우트에 정신을 집중했고, 금방 사용할 수 있는 힘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웅─ 안드바라나우트에서 흘러나온 안개가 몸을 휘감았고, 강유식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흐음. 된 거 같은데.’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안 느껴지지만, 인지 극대화로 느껴지는 존재감은 확실히 희미하다. “도대체 언제 잡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지금 또 놓쳤다고 하던데.” 신경질적으로 이야기하는 두 헌터의 곁을 지난 강유식은 그 뒤로 쳐진 경찰의 포위망도 간단하게 지나 도시로 돌아왔다. ‘이야…진짜 됐네?’ 설마 그 안드바라나우트를 이렇게 깔끔하게 사용할 수 있을 줄이야. 강유식이 감탄하고 있을 때. 조금 자신만만해진 페르스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떠셨습니까? ‘완벽했어. 그런데 어떻게 가능한 거야?’ -안드바라나우트가 지닌 저주는 반지에 서린 ‘안드바리’라는 사념체 때문입니다. 제가 그것을 본체인 펜던트로 끌고 왔기에 편하게 사용이 가능하신 겁니다. ‘호오…’ 안드바라나우트도 꽤 좋은 아이템이지만 역시 페르스발보다는 한 급수가 낮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로드. 방금 또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뭔데?’ -봉인 중 하나가 절반 정도 풀린 것 같습니다. “뭐라고?” 깜짝 놀란 강유식은 자신도 모르게 육성으로 물었다. 갑자기 봉인은 또 왜 풀린단 말인가? -아무래도 안드바리의 사념체가 반혜영 님이 조정해두신 봉인의 단말에 맞았던 모양입니다. 다만 녀석이 약해서 절반 정도만… 억울해하는 안드바리의 외침이 다시 묻혔고, 페르스발이 설명을 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되어 봉인이 절반 정도 풀린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럼 나머지 절반은 이 녀석이랑 비슷한 걸 얻으면 풀리는 거겠네.’ -예. 아마 안드바리와 같은 사념체를 또 얻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페르스발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턱을 쓰다듬었다. -어, 잠깐. 어디서 익숙한 피 냄새가 나는데? 안드바리가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고, 그에 페르스발이 곧장 대답했다. -이놈! 또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아니. 놔둬 봐. 피 냄새가 어디서 나는데?’ 뭔가 낌새를 느낀 강유식이 안드바리에게 물었고, 반지에서 작은 빛이 반짝였다. -저쪽! 저쪽에서 망할 놈이랑 비슷한 피 냄새가… 안드바리의 외침에 강유식은 동화를 유지한 채 그쪽으로 달려갔고, 잠시 후 다급한 숨소리와 내달리는 발걸음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루치아?’ 수십 명의 이들에게 쫓기고 있는 붉은 머리칼의 여인을 발견했다. < 진정한 후계자(2) > 끝 75화 한 차례 싸움이 있었는지 상처투성이인 루치아와 금방이라도 따라잡을 것 같은 추적자들. ‘양옆에 있던 두 놈이 없네.’ 강유식은 다른 곳을 둘러보며 귀를 기울였고, 잠시 후 희미하지만 먼 곳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당히 거리 벌려서 위치만 확인해둬. 알겠지?’ -알겠습니다. 로드. 루치아를 쫓아 보조기가 날아갔고, 강유식은 곧장 싸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뭐야. 저 녀석은 그냥 놔둘 거야? “안 죽어.” -뭐? “저쪽은 그냥 위협만 하고 있는 거야. 진짜로 죽이진 않을 테니까 안 끼어들어도 돼.” 만약 적이 후계자의 징표, 안드바라나우트를 확보한 상태였다면 모르겠지만 그건 현재 자신의 손에 있다. ‘움직임을 보아하니 특정 장소로 유인하는 것 같고…아마 미리 매수한 녀석이 구해주는 걸로 쇼를 한 다음에 옆에 붙여둘 생각이겠지’ 혹시라도 루치아에게 안드바라나우트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완전히 고삐를 쥘 셈이리라. “크으윽!” “이놈들…!” 루치아를 보필하던 덩치와 말라깽이가 각각 할버드와 장검을 휘두르며 응전했고, 주변을 포위한 녀석들은 무리하지 않고 차근차근 상처를 늘려갔다. -너 정말 도울 생각이 있긴 한 거야? 그 모습에 안드바리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물었고, 강유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직은 아니야.’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지만 아직은 모른다. ‘지금!’ 창뢰일보를 밟은 강유식의 몸이 아래로 쏘아졌다. 콰앙!! 덩치가 휘두른 할버드가 말라깽이의 목 앞에서 멈췄다. “이, 이게…” “너…” 휘둘러졌어야할 공격이 뭔가에 붙잡히자 덩치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등을 맡긴 동료가 자신을 배신한 상황에 말라깽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화르륵!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꽃의 창이 나타났다. 콰아아앙!! 다급하게 양팔로 막은 덩치가 불꽃에 휩싸인 채 뒤로 튕겨 나갔고, 이어서 사방으로 귀화창이 쏘아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공격이다!” “방어마법을 펼쳐!” 추적자들은 당황하면서도 재빠르게 방어마법을 펼쳐 폭발을 막아냈다. 그 재빠른 대처에 강유식은 귀화창을 쏘면서 말라깽이의 몸을 붙잡았다. 후우웅─ 그러자 안개가 말라깽이의 몸도 같이 뒤덮으면서 허공에 녹아들었다. 동화가 같이 적용된 것을 확인한 강유식은 곧장 바닥을 박차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도, 도망쳤다!” “녀석을 찾아!” 여유롭던 녀석들이 다급하게 사방으로 흩어졌고, 강유식은 그 사이를 유유히 지나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들어온 다음 말라깽이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허억…허억…” 조금 전 일로 긴장이 풀렸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눈동자는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데리고 갈 여유는 없고…대충 보내는 수밖에 없겠네.’ 공간확장 주머니에서 비상용 포션을 꺼낸 강유식은 그대로 말라깽이의 몸에 뿌렸다. 치지직! “크윽…” 상처들이 빠른 속도로 아물었고, 강유식은 이어서 한 병을 더 꺼내 입안에 흘려보낸 다음 응급처치를 끝냈다. 짜악! “으윽…” 흐릿하던 말라깽이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변한 것을 본 강유식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루치아는 내가 구해오겠다. 도망칠 수 있어?” “당신은…” “통성명하면서 잡담할 여유는 없어. 루치아를 구하고 싶다면 먼저 대답해. 도망칠 수 있어?” 강유식의 물음에 말라깽이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따돌렸으면…도망치는 건 충분합니다.” “좋아. 봐서 알겠지만 그 덩치가 아는 장소로 도망치면 그대로 죽을 거야. 녀석이 모르게 합류할 포인트는 알고 있어?” “보스와 정해둔 장소가 있습니다.” 루치아도 이런 상황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모양이다. 강유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라깽이를 바라보았다. “기껏 살려줬는데 허무하게 죽지 마.” “…예. 감사합니다.”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파르코 페리니’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C급으로 판정합니다.] 아직 사태가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 그런지 목숨을 구해준 것 치고는 조금 짰지만, 이쪽은 크게 상관없었기에 강유식은 곧장 자리를 박차고 루치아에게 달려갔다. ‘페르스발. 상황은?’ -아직 도주 중입니다. 하지만 주변에 포위망이 촘촘해지는 것을 보아 목적지에 도착 중인 것 같습니다. 저쪽에서 대기 중인 구역으로 들어가면 귀찮아진다. 상황을 파악한 강유식은 곧장 루치아를 몰아넣고 있는 추적대의 후방에 트윈 템페스트를 후려갈겼다. 콰가가각! “끄아아악!” “기습이다!!” 전력으로 들이박은 트윈 템페스트에 추적대의 진형이 완전히 붕괴됐고, 그 틈에 창뢰일보를 밟아 루치아를 따라잡은 강유식은 곧장 손을 붙잡았다. “이쪽!” “?!” 루치아의 낚아챈 강유식은 옆 골목길로 들어가 시야에서 벗어난 다음 루치아에게도 동화를 적용시켰다. “쫓아라!” 그것을 보지 못한 추적자들은 골목길로 우르르 들어갔고, 강유식은 손을 잡고 있는 루치아를 바라보았다. “…”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지만 혹시라도 저쪽에 소리가 들릴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루치아. “반드시 찾아!” “이 주변에 숨어있다!!” 주변을 몇 번이고 지나가는 추적자들 사이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긴 두 사람은 그대로 피오레의 주택까지 도착했다. “이제 됐어요. 여기면 들킬 일은 없을 겁니다. 들켜도 상관없을 테고요.” “…” 강유식의 이야기에도 루치아는 아직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 드러난 얼굴은 루치아도 예상외였는지 두 눈을 휘둥그레 떴고, 그 시선을 넘긴 강유식은 살짝 지친 표정으로 소파에 걸터앉았다. ‘안드바라나우트가 없었으면 좀 힘들었겠네.’ 말라깽이를 도울 기회는 아예 없었을 것이고, 루치아도 방금처럼 쉽게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후후. 나처럼 좋은 물건을 구하기가 쉽지는 않지. 어때? 그냥 내 속삭임에 모든 걸 맡기는 건… 은근히 유혹하려다가 또 페르스발에게 두들겨 맞는 안드바리.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에 강유식이 피식 웃고 있을 때.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진정된 루치아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일단 앉으세요.” “…예.” 고개를 든 루치아는 맞은편의 나무 의자에 조심스레 앉았고, 그것만으로도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얼굴에 깊은 피로가 떠올랐다. “방금 일은…마스터 피오레의 지시였나요?”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추론. 그쪽으로 가는 방법도 있지만, 강유식은 직접 나서기 위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제 의지로 한 겁니다.” “…” 강유식의 대답에 루치아는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다 이내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물었다. “저를 왜 도와주셨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음…” 어떻게 말하는 게 매끄러울까. 잠시 고민하던 강유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포석입니다.” “포석이요?” “예. 아직은 생도지만, 미래에 길드를 만들 생각이거든요. 그때를 대비해서 여러 곳에 명함을 돌리고 있었는데…오늘 마침 루치아 님에게 드릴 기회가 보여서 나선 겁니다.” “…들은 것보다도 훨씬 진취적이신 분이군요.” 이유를 들었는데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루치아. 확실히 이제 17살밖에 안 되는 생도가 이러고 돌아다닌다 하면 자신 같아도 믿기지 않았으리라. “대비는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쪽이라서요. 아무튼 오늘 일은 미래를 위한 선금, 일종의 빚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강유식의 대답에 루치아가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갑작스레 거액의 빚이 생겨버렸네요.”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루치아 디세타’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C급으로 판정합니다.] ‘…’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에 강유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그 빚을 갚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루치아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뭔가 큰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그건…” 이야기를 할지 말지 고민하던 루치아는 이내 뭔가를 포기한 듯 털어놓듯이 이야기를 이었다. “저희 조직의 간부…제게는 삼촌 같던 분이 오늘 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셨어요. 중립으로 상황을 지켜보겠다고 하시더군요.” “흐음…” “그래서 어떻게든 설득하기 위해서 직접 찾아뵈려 했는데 그렇게 습격을 당했던 거예요. 바보같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루치아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 같은 모습. “어린 시절부터 저를 보살펴줬던 비토와 파르코도 적을 막기 위해서 몸을 던졌어요. 지금쯤이면 아마 두 사람 모두 죽었겠죠.” 말라깽이, 파르코는 살아있을 테지만 강유식은 그것을 굳이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모두 끝나버렸어요. 후계자의 징표는 탈취당해 사라졌고, 조직에서는 눈엣가시인 존재가 되어 이제는 아무것도 없죠.” 쓴웃음을 지은 루치아는 힘없이 고개를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곧 대화합의 장이 열릴 거예요. 후계자의 징표가 유실되었으니 조직의 전통에 따라 간부들의 투표로 새로운 보스를 선출하겠죠.” “…당신이 될 가능성은 없습니까?” “없죠. 이번에 반기를 든 조직원들은 선대 보스들…저희 디세타 일가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자들이니까요.” 시칠리아를 비롯해 이탈리아 전체에 암약하는 코사 노스트라. 당연하게도 이들은 음지에 머무르는 범죄조직이지만, 생각만큼 거칠지는 않았다. ‘하지만 잘 나가도 불만스러운 녀석들은 있기 마련이지.’ 힘이 거대해지면 그것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자가 생기거나 그런 이들이 얽혀오기 마련. ‘흐음….어떻게 한다.’ 강유식은 루치아가 보지 못하게 동화로
숨겨둔 안드바라나우트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정도면 쓸모가 없단 말이지.’ 강유식이 원하는 것은 코사 노스트라의 정통 후계자 같은 것이 아니다. ‘버릴까. 아니면…“ 강유식은 잠시 고민하며 루치아를 바라보았고, 우연히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이대로 조직을 넘기고 넘어갈 겁니까?” “조직은…넘겨야겠죠. 제가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담담하게 대답한 루치아가 팔걸이를 매만졌고, 이내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절대로 온전히 가져갈 수는 없을 거예요.” 그 대답을 들은 강유식은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좋은데.’ 나쁘지 않다. “방법은 있습니까?” “몇 가지는 있어요. 다만 이전보다 세력이 많이 줄었으니 할 수 있는 건 얼마 없겠네요…” “제가 돕는다면 어떻습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루치아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50%는…가능하겠네요.” 자신이 끼어도 50%. 아쉬운 수치에 강유식은 잠시 고민하다가 슬쩍 웃었다. “피오레 님이 돕는다면요?” “…네?” “만약 피오레 님이 도와주신다면 얼마나 할 수 있습니까?” “그, 그게 가능할 리가…” “계산해보세요.” 강유식의 이야기에 루치아가 입술을 깨문 채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무너트리는 게 아니라…되찾을 수도 있어요.” 후계자의 징표가 없어도 조직의 보스가 될 수 있다. 그 이야기에 강유식도 잠시 생각에 잠겼고,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걸로 가죠.” < 진정한 후계자(3) > 끝 76화 시칠리아의 대저택. “그래서…루치아를 놓쳤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파캉! 노인이 던진 재떨이가 조직원의 얼굴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헌터출신이었기에 다치지는 않았지만 담뱃재로 엉망이 된 얼굴.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네놈들에게 붙지도 않았다! 분명 내게 루치아를 데리고 오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상대가 고유스킬로 추측될 만큼 강력한 은신능력을 사용한 탓에…” “그런 변명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 내 지지를 받고 싶다면 당장 루치아를 내 앞으로 데리고 와! 찾아내란 말이다!!” 발작에 가까운 외침에 고개를 숙인 조직원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가 금방 표정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최대한 빠르게 찾아내도록 하겠습니다.” 조직원들이 모두 방에서 빠져나갔고, 홀로 남은 노인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안 돼…이대로는 위험해…” 깡마른 노인, 코사 노스트라의 핵심 간부 중 한 사람인 주세페 마타렐라는 두려움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대로라면 녀석이…그놈이 올 거야…” 디세타 일가에게 은혜를 받아 충성을 보이는 괴물. “찾아야 해…무슨 일이 있어도…반드시…” 아무리 살바토레의 뒤를 봐주는 그들이 대단하다 해도 S급 헌터의 검까지 완벽하게 막아내리란 보장은 없다. “쉿.” “!” 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에 주세페의 두 눈이 커졌고, 귓가로 나긋나긋한 청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이야기를 하러 온 것뿐이에요. 소란스러운 건 싫으니까…무슨 뜻인지 아시죠?”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주세페는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의 저택에 설치된 방호마법만 몇 개던가. “이래서 경험이 많은 분들이 편하다니까. 설명할 필요도 없고. 대화는 이대로 조용히 나누자고요. 아시겠죠?” “아, 알겠소.” 긴장한 주세페의 대답을 들은 청년, 강유식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양어깨에 손을 얹은 질문을 시작했다. “루치아 디세타를 배신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 나는 그저 중립을 표명했을 뿐이오. 배신할 생각은…” “흐음.” 주세페를 내려다본 강유식은 잠시 생각하다가 오른손을 가리켰다. “오른손잡이?” “그, 그건 왜…” 서걱!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세페의 오른손이 바닥에 툭 떨어졌고, 그 모습을 본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용히.” 강유식의 속삭임이 그 비명을 막았다.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죠. 이제 시간 끌면 과다출혈로 죽는다고요?” “아..아아…” “알겠죠?”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인 주세페의 모습에 강유식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배신한 이유는?” “노, 놈들은…판데모니움의 후원을 받고 있소.” 주세페의 대답에 강유식의 눈이 살짝 커졌다. ‘처음 이탈리아를 먹은 게 누군가 했더니…판데모니움이었구만.’ 이제야 왜 회귀 전 이탈리아가 마인들로 북적거리는 지옥으로 변했는지 이해한 강유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저쪽도 거물들이네.’ 이탈리아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조직을
집어삼키려는 것이니 생각해보면 덩치가 작은 게 이상하리라. 우웅! 그러자 의자에서부터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마력. 그 뒤에 발동될 방호마법을 알고 있는 주세페는 곧장 앞으로 몸을 내던졌고. “…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이게 어떻게 된…” 자신의 보호해야 할 방어마법이 보이지 않자 주세페가 당황하며 주변을 바라보았고, 이내 그 마법을 발견했다. “약속 어기셨네.” 강유식이 싱긋 웃으며 주머니에서 꺼낸 캡슐을 튕겼다. 푸욱! 가슴에서 들려온 섬뜩한 소리에 주세페의 눈이 아래를 향했고, 이내 붉은 말뚝이 보였다. “블러드…벤데타…” 적의 피를 사용해 반영구적으로 가동되는 말뚝. 쿠웅! 코사 노스트라의 핵심 간부 중 한 명 치고는 허망한 죽음이었지만, 강유식은 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애초에 이쪽은 거의 허수아비니까.’ 지금 코사 노스트라의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살바토레가 모두 손에 넣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도 방호마법은 루치아가 없었으면 귀찮았겠네.’ 반나절은 족히 걸릴 만한 침입을 몇십 분으로 줄여줬으니 훌륭한 밑 작업이라 볼 수 있다.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요?” 자리에서 일어선 루치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고, 그에 강유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뇨. 다 끝내고 오는 길인데요?” “네? 어떻게…” “어떻게 라니. 미리 말씀해진 루트로 들어갔죠. 금방 끝나던데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강유식의 모습에 루치아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리 방호마법의 사각지대라 해도 며칠은 걸릴 수준이었다. ‘마법실력이 엄청나다고 듣기는 했지만…설마 이 정도일 줄은…’ 전에 50이라고 대답했지만, 어쩌면 강유식 한 사람만으로도 80 이상이 가능했을지도 모르리라. “그래서 살바토레의 배후는 알아내셨나요?” “예. 판데모니움이라더군요.” 강유식의 대답에 루치아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하필 판데모니움이라니…” 배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재앙급 마인까지 다룬다는 판데모니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흐음. 이게 그 ‘오메르타’입니까?” “아, 네. 오늘 주세페의 아들과 맺은 거예요. 숙청이 성공하면 저희 편이 될 거예요.” 루치아의 대답에 강유식은 오메르타를 살펴보았다. ‘꽤 유용하게 썼었는데…’ 혹시 남는 게 없나 강유식이 오메르타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귓가로 안드바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엑. 그놈이 만들게 한 물건이잖아. ‘…뭐라고?’ -아, 아니야! 아무것도… 갑자기 당황하는 안드바리의 모습에 강유식은 곧장 페르스발에게 명령했다. ‘데려가서 알아내.’ -알겠습니다. 로드. 안드바리의 단말마를 들은 강유식은 슬쩍 웃으며 오메르타를 내려다보았다. ‘이거…잘하면 엄청난 걸 건져가겠는데.’ 예상치 못한 이득에 강유식이 히죽거리고 있을 때. 한참 머리를 생각을 거듭하던 루치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음?” “상황이 조금…아니, 많이 어려워진 것 같아요.” 살바토레가 생각이 있다면 당연히 피오레와의 전투를 상정하여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들이 정말 철저하게 준비했다면…재앙급 마인을 투입할지도 몰라.’ 그렇다면 아무리 피오레가 뛰어난 S급 헌터라고 해도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겨우 방법이 보이나 했는데…’ 선대부터 악착같이 살아남아 일궈온 조직이 그저 힘이 부족하단 이유만으로 모두 넘어가게 되다니. ‘이거…기회인데.’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유식은 망설임 없이 징수를 발동했다. [채무자 ‘루치아 디세타’ 강제집행에 들어갑니다. 상태이상 ‘의존성 증가’.] [채무자 ‘루치아 디세타’ 강제집행에 들어갑니다. 상태이상 ‘의존성 증가’.] 상태이상에 걸린 루치아의 두 눈이 흔들렸고, 이내 강유식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이제 어쩌면 좋죠? 저로서는 도저히 방법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텨오던 이성이 흔들리는 모습. 그에 강유식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저, 정말인가요?” “예. 판데모니움의 지원과 맞서 싸울 방법이 있습니다. 다만…” 말꼬리를 흐린 강유식은 나긋한 목소리로 루치아에게 대답했다. “그에 상응한 대가가 필요합니다.” “대가라면…?” “그건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리 손쉽게 갚을 수 없다는 거죠. 어쩌면 평생 루치아 님을 속박할 수도 있을 겁니다.” 세세하진 않지만 그 무게감은 알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이 받을 도움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강유식은 그렇게 나긋하게 각인시켜나갔다. “그래도 코사 노스트라는 온전히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선대의 유지에 따라 계속해서 이 이탈리아에 남게 될 겁니다.” 강유식은 회귀 전에 소속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정말…코사 노스트라는 온전히 유지할 수 있나요?” 그렇기에 조직을 지키기 위해 값을 치르려는 루치아의 모습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유식은 그것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나한테는 좋은 일이니까.’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다. 요는 얼마나 완벽하게 이용하여, 채무를 안기는가. “루치아 님이 각오가 되셨다면, 가능합니다.” “…” 강유식의 이야기에 루치아는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주먹을 꽉 움켜쥐며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어떤 대가든…지불하겠습니다.” 조직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루치아. 그 모습에 강유식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저대로 준비할 테니 루치아 님은 대화합의 장을 열 준비를 해주세요.” 대화합의 장. 이름은 친목회지만, 이번에는 사실상 총력전이나 다름없는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그럼 저는 잠시…” 아지트를 빠져나온 강유식은 휴대폰을 꺼내 들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피오레는 그냥 이야기 좀 나누면 되고, 그 둘은…’ 어떻게 하는 게 효과적일까. 잠시 고민하던 강유식은 휴대폰을 꺼내 두 개의 문자를 전송했다. [시칠리아에 근사한 식당을 찾았는데 저녁 어때요? 비행기랑 호텔 값은 제가 낼게요.] [시칠리아에 있어요. 마법의 핵 논문 다 써뒀는데 돌아갈 방법이 없어요.] 문자가 날아가고 10초가 지나기도 전에 답장이 도착했다. [어디로 가면 돼요?] [딱 기다려.] “…너무 빠른데?” 휴대폰을 계속 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은 속도. < 진정한 후계자(4) > 끝 77화 늦은 새벽. “기다리고 있었나?” “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피오레는 맞은편의 나무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최근에 계속해서 밖으로 나가셨던 일. 루치아 님을 보호할 장소를 찾고 계셨던 겁니까?” “…” 강유식의 물음에 피오레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리더니 기묘한 빛이 일렁였다. ‘아직은 애매했나보구만.’ 그래도 디세타 일가를 향한 충성도를 생각해보면 칼을 안 뽑은 것만 해도 괜찮은 편이다. “지난번에 피오레 님이 밖으로 나가셨을 때.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던 루치아 님을 도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나중에 루치아 님에게 직접 물어보셔도 상관없습니다.” 강유식의 이야기에 피오레는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 “처음부터 설명해줄 수 있겠나?” 피오레의 물음에 강유식은 이전에 루치아에게 이야기했을 때처럼 향후 설립한 길드의 인맥을 형성하기 위해 그녀를 도왔다고 설명했다. “판데모니움이 녀석들의 배후였다니…”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건 제 개인적인 추측이지만…아마 선대 보스의 갑작스러운 죽음과도 연관이 있을 겁니다.” 사실 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 선대 보스의
죽음과 관련되었다는 이야기에 피오레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고, 꽉 움켜쥔 나무의자의 팔걸이가 완전히 가루로 변해버렸다. “곧 대화합의 장이 열립니다. 아마 그때가 총력전이겠죠.” “…그래서 나도 거기에 참여해달라는 건가?” “예. 그게 루치아 님의 뜻입니다.” 강유식의 이야기에 피오레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나는…” 마지막에 망설이는 피오레의 모습에 강유식은 혹시 몰라 빼뒀던 안드바라나우트를 떠올렸다. ‘이번 기회에 바로 잡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조직을 탈환한다고 해도 루치아의 기반은 금방 흔들리고 말 것이다. “피오레 님은 자신을 코사 노스트라에서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건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코사 노스트라 내부에서 어떤 입지와 힘을 지니고 있는지. 그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피오레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하다 대답했다. “S급 헌터이며 후계자가 한 번 휘두를 수 있는 검이니…두려워하겠군. 자신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을 테니.” “예. 그렇죠. 선대 보스의 목적도 그랬을 겁니다.” 코사 노스트라의 정통 후계자만이 가질 수 있는 권위이자 무력. 그것이 피오레가 지닌 힘이었고. “그래서 조직이 이렇게 흔들린 거죠.” 루치아를 아무 힘도 없는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린 원인이기도 했다. “그게…무슨 뜻인가?” “선대 보스는 피오레 님을 권위의 상징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공했죠.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점은 S급 헌터가 지닌 무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피오레가 단독으로 외부의 개입이 없는 코사 노스트라와 전쟁을 벌이면 어떻게 될까. “피오레 님. 당신은 권위 같은 게 아닙니다. 당신 자체가 이미 코사 노스트라의 일부인 겁니다.” 무력으로 약한 코사 노스트라의 약점을 단독으로 보완하는 존재. 그렇기에 간부들은 피오레를 다룰 수 있는 안드바라나우트에 두려움과 존경심을 보냈다. “…” 생각해본 적 없는 이야기들에 피오레의 얼굴이 굳어졌고, 강유식은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아마 피오레 님이라면 코사 노스트라의 안위보다 루치아 님의 안전이 우선이겠죠. 하지만 루치아 님은 코사 노스트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 “그러니 지금 선택해주십시오. 루치아 님을 외면하고 코사 노스트라에서 완전히 떠날 것인지, 아니면 그 곁을 보필하여 새로운 조직을 만들 것인지.” 발을 걸친 채 부외자로 남아있을 시간은 지났다. * 일반적으로 대화합의 장은 보스의 저택에서 열린다. “개소리로군.” 살바토레의 설명을 들은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제나 말은 그렇게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저쪽도 이 정도는 다 알고 있을 겁니다.” “…”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사내의 모습에 살바토레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지만, 금방 내색하지 않고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의 녀석들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슬쩍 미소를 지은 살바토레는 자신의 옆에서 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재앙급이 되면 인간의 형태가 거의 남지 않을 줄 알았는데…꼭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군.’ 당장 자신만 해도 충성의 징표로 약간 변이했을 뿐인데 왼쪽 눈을 비롯하여 머리 전체가 흉측하게 변하지 않았던가. “온다.” 아가레스의
이야기에 살바토레가 앞을 바라보았고, 잠시 후 저편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결국 이렇게 보게 되는군. 마스터 피오레.” “…” “보아하니 루치아 아가씨께서는 여전히 후계자의 징표가 없는 듯하고…그럼 선대 보스의 은혜를 배신하겠다는 건가?” 거듭되는 물음에 피오레는 살바토레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과거의 은혜를 지키는 것보다 지금의 보스를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피오레의 대답에 살바토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나 지금이나 안목이 없군.” 살바토레의 비아냥에 피오레는 무시로 대답했고, 의자에 앉은 루치아가 대신해서 이야기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힘 빼고 싶진 않아요. 살바토레.” “…그렇군요. 저도 동감입니다.”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요.” 살바토레를 바라본 루치아는 자신의 피로 만들어낸 말뚝, 블러드 벤데타를 앞으로 밀어 보냈다. “자결하세요. 그러면 외부세력과 결탁하여 조직에 반기를 든 당신의 명예만큼은 지켜드리죠.” “…” 눈앞에 던져진 블러드 벤데타에 살바토레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다 단숨에 일그러졌다. 콰아앙!! 블러드 벤데타가 부서져 그대로 피로 변했고, 주먹을 움켜쥔 살바토레가 씹어 내뱉듯이 대답했다. “방금 네년이 해야 할 말은 살려달라고 빌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그 같잖은 자존심을 치켜세우는군.” “…” “사지를 찢어 광장에 내걸어주마. 그 정도면 시대가 변했다는 것 정도는 모두가 알 수 있겠지.” 살바토레의 이야기에 뒤에 시립 해있던 조직원들이 모두 무기를 꺼내 들었고, 평야 곳곳에 숨겨뒀던 복병들이 마법진을 가동시키며 겨눴다. 띠링! 그때 어디선가 문자 알림음이 울려 퍼졌고, 자리에 모인 이들이 그 소리를 쫓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 그리고 아가레스가 살바토레를 붙잡고 뒤로 몸을 날렸다. 콰아아앙!!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테이블이 놓여있던 자리가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살바토레 측은 모두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후욱…후욱…” “…”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두 눈이 피로로 충혈된 반혜영. 그리고 등이 파인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있는 안설하. “뭐…뭣…아니…어째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S급 헌터 두 명이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여기에 나타난단 말인가! “서, 설마 그 녀석을 통해 저 둘을 끌어들인 거냐!?” 루치아는 아무런 말 없이 미소를 지어 대답했고, 그 모습에 살바토레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마, 말도 안 돼…어떻게 이런 일이…” 상상하던 최악의 일이 벌어지자 살바토레가 완전히 패닉에 휩싸였고, 테이블을 박살 내며 나타난 두 사람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새끼…어디 갔어.” “좋은 식당이라고 한 것치고는…상당히 초라하네요.”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한 것인지 한기가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 그런 둘의 모습에 루치아는 미리 언질을 받은 대로 이야기를 꺼냈다. “두 분께 강유식 생도가 남기신 전언이 있습니다.” 강유식이란 단어에 두 사람의 목이 훽 돌아갔고, 그 흉흉한 시선에 루치아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준비 중이던 논문은 저들이 태웠고, 식당은 저 마인들의 패악질로 문을 닫았다더군요. 다시 준비 중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십니다.” 그 이야기에 살바토레를 비롯한 전원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렇군요.” 하지만 그런 의도가 어떻든 상관없었다. 따악! 반혜영이 손가락을 튕긴 순간. 그녀의 발아래에서 뻗어 나간 마력이 평야를 휩쓸었고, 찬란하게 빛나던 마법진들이 스파크를 튀며 점멸했다. “뭐, 뭐…” “마법진의 컨트롤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반혜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별로지만, 뭐 일단은 쓸까.” 키이잉─! 반혜영의 손짓에 제어권을 빼앗긴 마법진들이 하늘 위로 솟구쳐 서로 얽히며 재조립되어 새로운 형태로 펼쳐졌다. “다 뒤져.” 신의 권능을 훔친 마법이라고 표현했다. ────! 전쟁 중에 포격이 쏟아지는 것처럼 무차별로 쏘아지는 공격에 살바토레의 조직원들은 혼비백산하며 장벽을 펼쳐 공격을 막아내려 했다. “어, 어떻게 합니까! 아가레스님! 뭔가 방법이..” “…없다.” “예?!” “앞을 봐라. 얼간아.” 아가레스의 싸늘한 이야기에 살바토레가 고개를 돌렸다. “저 둘이 온 시점에서 전장의 밸런스는 무너졌다. 네놈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어.” “그…그러면 어떻게…” “간단하지.” 우득득! 살바토레의 목이 분질러져 그대로 축 늘어졌고, 아가레스는 쓰레기를 버리듯이 옆으로
내던졌다. “네놈들의 승리다.” 콰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피오레와 안설하가 아가레스를 향해 덤벼들었고, 세 사람의 신형이 얽히며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우웅─! 돌연 아가레스의 몸에 가슴에 검은 구멍이 생겨나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것을 발견한 반혜영이 손을 뻗었다. “어딜 가!” 쩌저적! 사방에 생겨난 마법진에 아가레스를 빨아들이던 구멍이 흔들렸고 그 반발로 육체 곳곳에 금이 새겨졌다. “크으윽…!” 하지만 검은 구멍은 꿋꿋이 전송을 이어갔고, 마침내 엉망진창이 된 아가레스의 몸이 그 안으로 모두 빨려 들어가려던 순간. ────! 저 멀리서 쏘아진 새하얀 광선이 아가레스와 동시에 포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커헉!” 아가레스가 토해낸 검은 피가 바닥에 쏟아졌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몸이 검은 구멍 안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후웅! 포성으로 시끄럽던 평야에 침묵이 내려앉았고, 그 광경을 저 멀리서 바라보던 강유식은 달궈진 아케트라브를 늘어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스 샷.” -감사합니다. 로드. 페르스발의 백업으로 전력을 다해 날린 클리스 솔리슈. ‘뭐, 명색에 판데모니움 최정상 간부 중 한 명인데 죽었을 리는 없겠지.’ 녀석의 생사보다는 저만한 거물이 지원을 왔다는 사실에 더 호기심이 생겨났다 이탈리아의 세력권에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이 안드바라나우트에 있었던 걸까. ‘지금 생각할 문제는 아니구만.’ 어느 쪽이든 앞으로 루치아를 통해서 관리하다 보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팔자 좋다?” “정말 화끈한 저녁 초대네요. 속이 화끈거리는…” 뒤에서 울려 퍼지는 차가운 목소리. 눈앞에 보이는 둘의 그림자에 강유식의 움찔거리다가 체념한 표정을 지었고. -킥킥. 안드바리가 꼴좋다는 듯이 웃었다. < 진정한 후계자(5) > 끝 78화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저택. ‘흐음. 그러니까 안드바리의 저주로 제약을 강화하고, 파프니르의 낙인으로 탐욕을 부여해서 만든다는 거야?’ -그래. 그게 오메르타인가 뭔가를 만드는 방법이랬어. 안드바리의 대답에 강유식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저주를 대기상태로 뒀다가 제약과 함께 발동시키는 것도 그렇고 탐욕을 이렇게 활용한 것도 신기하네.’ 파프니르의 낙인이 부여하는 ‘탐욕’의 효과는 이름 그대로 지정된 사물을 갈망하게 만드는 효과였다. ‘그래서 안드바라나우트가 마인들 손에 넘어갔던 회귀 전에는 오메르타가 사라졌던 거구만.’ 예전에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된 강유식이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뭐해?” 어느새 들어온 반혜영이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써?” “쓰, 씁니다. 마무리 중이에요.” “정말? 그럼 10분 뒤에 확인한다.” “큭…자, 잠시만…” -도와드리겠습니다. 로드! 마무리는커녕 중간부터 생각도 안 하고 있었던 강유식은 잽싸게 마법펜을 구동해 머릿속으로 떠오른 마법의 핵에 관한 논문을 써냈다. ‘이거…괜찮은 건가?’ 생각나는 대로 쭉 쓴 것치고는 앞뒤가 잘 맞긴 하지만 너무 쉽게 써내서 이걸 보여줘도 될지 살짝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렴 어때.’ 오랫동안 쥐어짜 내서 쓴다고 이 머리로 기똥차게 나올
리도 없고, 틀린 부분이나 부족한 게 있으면 반혜영이 알아서 고쳐줄 것이다. “흐음…” 건네받은 반혜영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헛?! 허어…이건…히야…” 논문을 보는 건지 대본을 읽는 건지 기묘한 추임새를 덧붙이며 살펴보던 반혜영은 마지막 장까지 넘긴 다음 논문을 책상에 다시 내려놓았다. “좋네!” 반짝거리는 눈으로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예시도 좋고! 이해하기도 쉽고! 증명 부분에서 틀린 것도 없고! 다 잘했네!” “그, 그래요? 근데 선생님 왜 자꾸 흔드시는…” “근데 왜 도망쳤던 거야 이 망할 놈아~!” “…” 울분을 토해내는 반혜영의 모습에 강유식은 가만히 흔들렸고, 머리가 다 흐트러지고 나서야 멈췄다. “후우…일단 이거는 채용. 다만 사이사이 설명이 부족한 부분들 있으니까 그 부분은 주석 참고해서 추가해.” “예…” “그리고 내가 쓴 논문도 가져왔으니 제대로 됐는지 한 번 읽어보고, 8월 초 미국에서 열리는 마법학회에서 발표도 할 거니까 발표 연습도 해둬.” “8월 초요?” 생각보다 빠른 일정에 강유식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반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논문 진행 상태보고 나서 결정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면 굳이 미룰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 이번에 꽤 크게 열릴 테니까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 “미국…” 지금 시기에 그쪽에서 뭔가 건질 게 있었던가. 강유식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반혜영이 로브 안쪽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주었다. “그리고 이거.” “음? 뭐에요?” “설하 언니가 두고 간 거.” “…” 마른침을 삼킨 강유식은 폭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편지를 건네받아
직인을 뜯고 봉투를 열었다. [강유식 생도가 장소를 찾기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제가 잡아뒀어요. 7월 17일, 오후 7시. 뉴스카이 빌딩 최상층 라운지에서 봐요.] ‘이건 가야겠구만.’ 반혜영이야 채무관계가 있으니까 어영부영 넘길 수 있지만, 안설하의 경우는 아직 제대로 된 관계도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부려먹은 것이다. ‘오늘이 13일이니까…조만간 돌아가야겠네.’ 어차피 이탈리아로 찾아온 목적은 대충 이뤘으니 한국에 잠시 들러도 문제 될 건 없다. “선생님. 전에 제가 부탁드렸던 물건. 다 끝났어요?” “아, 맞다. 논문 다 쓰고 나면 주려 했는데 깜빡했네.” 로브 소매 안쪽을 뒤적거리던 반혜영은 자그마한 검은색 큐브 하나를 건네주었다. “근데 그걸 어떻게 쓰려고? 마인의 육체로도 장비를 만들 수 있다고 듣긴 들었는데 그런 종류로는 안 될걸?” “그렇긴 한데 기왕 자른 거 버리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보통 마인 팔이라면 찝찝해서 당장 없애버리려고 할 텐데…너도 참 별종이다.” 어이없어하는 반혜영의 모습에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이하린 실력이 좀 늘었어야 할 텐데.’ 강유식은 큐브를 주머니 안에 챙겨 넣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밖에서 노크소리와 함께 피오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일세. 잠깐 들어가도 괜찮겠나?” “아, 예. 들어오세요.”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피오레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반혜영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이야기 중이었구려. 실례하게 됐소.” “아뇨아뇨. 저도 방금 용건이 모두 끝나서.,.이거 나중에 꼭 봐둬. 알겠지?” “예.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안 도망쳐요.” “말은…” 책상 위에 가지고 온 논문을 내려놓은 반헤영은 고개를 꾸벅이며 밖으로 나갔고, 마주 인사를 한 피오레는 문이 닫힌 것을 보고 슬쩍 미소를 지었다. “좋은 사람이로군.” “그러니까 제자를 위해서 이 멀리까지 와주셨죠.” “후후. 그것도 그런가.” 이전보다 편안한 표정으로 웃은 피오레가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보스께서 잠시 뵙자고 하시는군. 잠깐 괜찮은가?”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싶은 강유식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따라오게나.” 두 사람은 그대로 방을 나가 복도를 걸었다. ‘그러고 보니 이쪽도 슬슬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언제쯤 오려는 건지 강유식이 고민하고 있을 때. 앞서 걸음을 옮기던 피오레가 입을 열었다. “김진혁 생도 말일세.” “예?” “정말 대단하더군.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게 매일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네.” “아…” 최근에 루치아를 돕고 방에 갇혀 논문을 쓰느라 김진혁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것을 이제야 떠올린 강유식은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앞으로 바쁘실 텐데 계속 가르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네. 급한 일은 다 해결했고, 요 며칠 동안도 시간을 내서 틈틈이 봐줬으니 앞으로도 문제는 없을 걸세.” “그렇군요.” 이렇게 된 거 여름방학 내내 아예 김진혁을 피오레에게 맡겨두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최근 들어 한 가지 좀 특이한 게 보이네.” “특이한 것 말입니까?” 검혼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강유식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보자 피오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네만…때때로 검에 억눌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 “…검에 억눌린다고요?” 회귀 전에 금강신검이라고 불렸던 녀석이 뭐 때문에 검에 억눌린단 말인가. 강유식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물어보자 피오레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을 걸세. 실제로 김진혁 생도는 검술에 대한 재능이 가장 뛰어나니.” “그런데…” “다만 그 뛰어난 재능이 정말 검에 한정된 것인가? 같은 의문이 조금 든다는 말이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네만…” 본인도 긴가민가한지 말꼬리를 흐리는 피오레의 모습에 강유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S급 헌터나 되는 사람이 아무런 근거 없이 저런 걸 느꼈을 리는 없고…실제로 낌새도 있긴 했단 말이지.’ 지난번에 김진혁의 징수목록에서 회귀 전에 사용한 적 없는 A급 창술 스킬 ‘관월참천’이 미각성 쪽에 있었던 걸 생각해보면 정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진혁이한테도 말씀해주셨습니까?” “김진혁 생도는 자네의 결정에 따르겠다는군.” “뭘 이런 것까지…” 피식 웃은 강유식은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오레 님이 그렇게 느껴지신다면 분명 뭔가 있는 거겠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음! 검 이외에는 기본 정도네만 열심히 가르쳐서 개화시켜보겠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루치아의 방 앞에 도착했고, 몸을 돌린 피오레는 강유식을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가 늦은 감도 있지만…지난번에 나를 설득하고 보스를 도와 조직을 지켜줘서 정말 고맙네.” 진지한 분위기에 강유식은 올 게 왔구나 싶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까지 거창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닐세. 자네가 없었다면 나는 그날 잘못된 판단을 내렸을 테고…평생을 후회하며 살았겠지. 이번에는 정말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하네.” 알아서 채무의 크기를 불려주는 피오레의 모습에 강유식은 속으로 쾌재를 내지르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요 며칠 동안 자네에게 어떻게 답례를 하면 좋을지 생각해봤네만…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더군. 혹시 필요한 게 있는 가?” “음…한 가지 있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필요할 때 제 힘이 되어주시는 것.” 이전과 똑같은 대답에 피오레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강유식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제게 필요한 건 그것뿐입니다.” “으음. 그건…” 가볍게 받아들였던 전과 달리 고민하는 피오레. 그때야 홀몸이었지만 지금은 보스를 보필해야 하는 위치니 섣불리 말하기 힘든 것이리라. “보스가 허가하는 한에 한해서, 라는 조건을 달아도 상관없습니다.” “…정말인가?” “예. 루치아 님에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으니까요.” 물론 그런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어차피 상관없다. 결국 루치아도 채무가 맺어질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부탁을 들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말…고맙네.” [채무자 ‘피오레 안젤로’의 빚이 증가합니다.] [채무자 ‘피오레 안젤로’의 채무등급이 A급으로 상승합니다. 징수목록이 추가됩니다.] 그 감사함이 고스란히 적용되어 나타났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네.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채무가 오르면서 이쪽을 향한 신뢰를 팍팍 보내오는
피오레의 모습에 강유식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 이런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이야기하세.” “예. 그럼.” 고개를 꾸벅인 강유식은 루치아의 방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강유식입니다.” “들어오세요.” 방문을 열고 들어간 강유식은 처음으로 들어가게 된 루치아의 집무실을 살펴보았다. ‘역시 돈은 이런 쪽이…’ 속으로 감탄하던 강유식은 뒤늦게 루치아를 찾아 고개를 돌렸고, 거대한 창문을 등진 채 서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오랜만이네요. 루치아 님.” “예. 진작 찾아뵀어야 했는데 내부 정리가 조금 늦어져서…정말 죄송합니다.” “아뇨. 그쪽이 더 중요한 일이니까요. 너무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니 마음이 조금 놓이네요. 아, 일단은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두 사람은 집무실 옆쪽에 놓인 소파에 앉았고, 강유식은 맞은편에 앉은 루치아를 바라보았다. ‘좋네…’ 개인의
무력으로는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코사 노스트라 정도 되는 조직이라면 훌륭하게 이끌어갈 수 있을 수준. “우선 이번 일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깊이 고개를 숙이는 루치아. 그 모습에 강유식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할 수 있는 일만 했을 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루치아 님이 하신 일이죠.” “이번에 제가 한 일은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강유식 님이 없었더라면…아마 저는 이곳에 있을 수 없었을 거예요.” 쓴웃음을 지은 루치아는 소파의 팔걸이를 쓰다듬었다. “코사 노스트라의 보스는 제가 되었지만…사실상 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죠. 이 모든 걸 이룩해낸 건 강유식 님이니까요.” 자신의 부족함에 연신 씁쓸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루치아의 모습에 강유식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건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저는 루치아 님이라면 누구보다도 뛰어난 보스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진심이 담긴 강유식의 이야기에 루치아의 두 눈이 커졌고,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네. 강유식 님의 말씀대로…지금보다도 더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채무자 ‘루치아 디세타’의 빚이 증가합니다.] [채무자 ‘루치아 디세타’의 채무등급이 A급으로 상승합니다. 징수목록이 추가됩니다.] ‘오…오오…’ 차시현 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엇비슷한 수준까지
단번에 차오른 채무! ‘좋다. 좋아.’ 이만하면 조직이 휘청거릴 부탁도 몇 번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루치아를 바라보던 강유식은 문득 그녀의 손에 눈이 향했다. ‘저건…’ 오른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황금색 반지. 안드바라나우트와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그와 달리 어떠한 힘도 담겨 있지 않은 평범한 물건이었다. “이번에 후계자의 징표를 잃어버리면서 새롭게 만든 물건이에요. 본래 물건의 외형만 따서 만든 거죠.” “흐음. 그럼 그게 앞으로 새로운 후계자의 징표가 되는 겁니까?” “아뇨. 아마 그렇게 되진 않을 거예요.” 고개를 가로저은 루치아가 손의 반지를 쓰다듬었다. “조직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권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앞으로는 이런 상징성에 기대기보단 단련에 힘쓸 예정이에요.” 루치아의 대답에 강유식은 살짝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현명하시군요.” 곧 다가올 미래는 타인의 힘으로만 살아남기는 힘들다. ‘이러면 안드바라나우트는 안 주는 게 낫겠군.’ 안드바리의 이야기에 의하면 선대 보스는 여러 안전장치를 사용하여 겨우겨우 자신을 사용했다고 한다. ‘끌고 가.’ -알겠습니다. 로드. 귓가에 들려온 단말마에 강유식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루치아가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 강유식 님에게 받은 도움을 어떻게 보답할지 여러 가지를 생각해봤습니다. 원조만 약속하는 건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뇨. 그것만으로는 제가 너무 죄송해요.” 고개를 가로저으며 강하게 이야기하는 루치아의 모습에 강유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또…눈빛을 보면 그런 종류가 아닌 것 같은데.’ 하루라도 빨리 빚을 청산하고 싶어 하던 이현창보다는 이쪽을 어떻게든 돕고 싶어 하던 차시현에 가까운 눈빛. “그리고…지금 제가 강유식 님에게 드릴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는 걸 방금 확신했습니다.” “음? 그게 뭡니까?” “코사 노스트라.” “…예?” 강유식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어보자 루치아가 진중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었다. “지금 제게 있어 가장 값진, 그리고 강유식 님에게 보답할 수 있는 것은 코사 노스트라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아, 아니. 그래도 보스의 자리를 받는 건…” 그야 루치아를 부려먹으면서 코사 노스트라도 같이 먹겠지만, 그걸 표면적으로 차지해버리는 건 상황이 다르다! “물론 저도 무턱대고 보스의 자리를 넘길 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정통성이라는 것도 있고, 아직 생도이신 강유식 님의 입장도 있으니까요.” “음음. 그렇죠.” “그러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제 나름대로의 진심을 받아주셨으면 해요.” “예?” 자리에서 일어선 루치아는 당황한 강유식의 곁으로 다가왔고, 그대로 무릎을 꿇더니 오른손 약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빼냈다. “조촐한 서약식이지만…루치아 디세타의 이름을 걸고 당신을 섬길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습니다.” 강유식의 왼손을 슬쩍 든 루치아가 손등에 짧게 키스했다. “보스중의 보스(Capo Di Tutti i Capi).” 모든 마피아의 정점이자
코사 노스트라의 주인만이 받을 수 있는 칭호. 루치아는 그것을 자신에게 양보했고, 덩달아 충성을 맹세했다. ‘배신당할 일은 없겠구만.’ 조촐하지만, 그만큼 깊은 서약식이었다. < 진정한 후계자(6) > 끝 79화 “으윽…” 허리부터 시작해 전신이 욱신거렸고 머리가 깨질 것처럼 울린다. 숙취에 더불어 오는 탈력감에 억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힘들다…힘들어…” 옆에 뒀던 물병을 탈탈 털어먹고 그대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따악! 연기가 희미하게 퍼져 나갔고, 주변을 바라보니 침대 옆 탁상에 작은 종이 한 장이 접힌 채로 놓여 있었다. [필요한 금액은 다 처리해뒀으니까 마음대로 쓰세요. 그리고 조만간 S급 던전 공략 예정이 잡혔는데 끝나면 보고 싶어질 테니까 마중 나와 줘요. 기대할게요~] “기대는 개뿔…” 사람 몸을 이렇게 박살 내놓고 또 보자니. “짠~” 등 뒤에서 누군가가 꼭 하고 안겨들었다. “…먼저 간 거 아니었어요?” “후후. 먼저 가고 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요. 조금 입이 거칠기는 했지만…그래도 합격이에요~” 한 손으로 몸을 쓰다듬으며 볼을 쿡쿡 찌르는 안설하의 모습에 등골이 절로 오싹해졌다. ‘개년…’ 속으로 욕하는 걸 엿 들은 걸까. 목에 난 상처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고, 살짝 따끔거리는 감촉에 몸이 움찔거렸다. “흐음~역시 이런 스타일이 더 잘 어울리네요. 앞으로도 저 만날 때는 이렇게 입고 와주세요.” “어차피 찢을 거면서…” “어제는 조금 흥분해서 그런 거예요. 다음에는 안 찢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고 안 찢어진 적이 없다. 어차피 지켜지지도 않을 약속이었기에 한 귀로 들으며 흘려 넘겼고, 앞으로 슥 다가온 안설하가 품에 슬쩍 안기며 어깨에 턱을 올렸다. “그리고…사실 부탁할 게 있어요.” “또 뭡니까?” “이번에 갈 S급 던전. 같이 가주세요.” 안설하의 이야기에 몸이 딱 굳어졌다. S급 던전이면 기본적인 환경부터가 미쳐 돌아가는 장소다. “농담이죠?” “진담이에요. 이번 던전이…조금 많이 까다로워서요. 실력이 뛰어나기보다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 필요해요.” “길드에 많잖아요. 뭐하러 이런 비싸기만 한 병신을 데리고 들어갑니까.” “또 그런다~충분히 괜찮다니까요?” 슬쩍 웃은 안설하가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튼 부탁할게요. 끝나면 전에 말한 그 물건. 구해다 줄 테니까.” “…” 늘 뭐 같은 일을 부탁하지만, 그 보상은 확실하게 챙겨준다. 아마 이런 수완이 좋으니 천일 길드의 부길드장도 겸하면서 월화를 이끌 수 있는 것이리라. “예예. 알겠습니다. 하면 될 것…” 쿵!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벽으로 밀려났고, 얼굴 옆에 짚어진 안설하의 새하얀 손이 보였다. “출근해야 한다면서요.” “방금 지각으로 바뀌었어요.” “…몇 분?” “3시간.” 안설하의 선언에 눈가가 파르르 떨렸고, 자포자기하며 중얼거렸다. “살살합시다…” * “윽…” 조수석에서 눈을 뜬 강유식은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이번에는 조심해야지.’ 그때와 달리 폐병도 없고 스탯도 더 좋으니 덜하지 않겠냐 싶지만, 그래도 상대는 근접계열의 S급 헌터. ‘그때는 처음부터 하청 느낌으로 만난 거니까…’ 지금도 안설하에 비하면 조금 부족하긴 해도 꿀리는 건 없다. 그러니 이번에는 적당히 호감을 지닌 채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는 것. ‘오늘이 중요하겠어.’ 강유식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차가 멈춰서며 이현창이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도착했습니다.” “아, 고마워요.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해도 된다니까요?” “크흠. 둘이 있을 때는…이게 편해서…” 명장의 주식이 오르고 채무가 A급으로 변한 이후 매우 공손하게 변한 이현창. 여전히 이쪽을 무서워하는 기색은 남아있었지만, 그래도 벗어나려는 시도는 줄어들었다. ‘나중에 아예 운전기사로 고용할까.’ 보아하니 그렇게 못 싸우는 편도 아니고 자잘하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나중에 돌아갈 때 연락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이현창을 보낸 뒤. 강유식은 휘황찬란한 뉴스카이 빌딩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탄 다음 최상층 라운지를 눌렀다. “안설하 님의 초대로 온 강유식이라고 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고개를 꾸벅인 데스크 직원이 특수 무전기로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눴고, 잠시 후 안쪽에서 다른 직원이 다가왔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강유식은 그대로 직원의 안내를 받아 내부로 걸어 들어갔고, 스폐셜 플로어 1층에 있는 레스트랑으로 이동했다. ‘좀 더 비싼 메이커로 입을 걸 그랬나?’ 적당한 중저가 메이커에 안설하가 좋아하는 취향의 검은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 나쁘지는 않지만, 싼 거 입었다고 졸부들이 무시하기 딱 좋은 느낌이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설마 강유식인가?” “허어. 저 나이에 VIP로 인정받은 건가…” “확실히 그만하면 받을 만도 하지. 그래도 대단하군.” “풍기는 기세가 남다르긴 하군. 아직 생도인데도 저런 분위기를 낼 수 있다니…” “…” 곳곳에서 들려오는 평가에 강유식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회귀 전에는 매번 무시당했던지라 당연히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는데 완전히 정반대였던 것이다. ‘아니 뭐, 회귀 전보다 지금이 더 좋은 쪽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극과 극으로 차이가 날 줄이야! “이쪽이에요~” 어깨에 걸친 하얀 자켓에 검은 드레스. 뭐가 좋을지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 모습에 강유식은 살짝 오싹함을 느끼며 맞은편에 앉았다. “조금 늦었죠?” “아니에요. 제시간에 왔는걸요.” 미소를 지은 안설하는 강유식의 옷차림을 슥 훑어보더니 눈동자가 살짝 반짝거렸다. “옷 강유식 생도가 고른 거예요?” “예. 괜찮나요?” “좋네요. 정말 잘 어울려요. 정말…” 입맛을 다시는 듯한 안설하의 중얼거림에 강유식은 못 들은 척 감사 인사를 하며 옆 창가를 바라보았다. “예쁘죠?” 그 모습에 안설하가 슬쩍 웃으며 물었고, 강유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신기한 매력이 있네요.” “마음에 들으셨다니 다행이에요. 몇몇 분들은 게이트가 훤히 보인다고 이 자리를 싫어하거든요.” 실제로 이 자리는 회귀 전에도 안설하의 고정석이었다. ‘그 덕분에 천일 길드가 그쪽으로는 도사였었지.’ 다른 곳에서는 실적이 부족해 홀대받던 게이트 연구 부서를 끝까지 밀어주던 게 천일 길드였고, 그 덕분에 나중에는 이쪽 분야로는 알아주는 던전이 되었다. “예전부터 느꼈던 건데 뭔가 강유식 생도는 저랑 잘 맞는 느낌이에요. 마치 오랜 시간 사귄 연인을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 그렇습니까? 그것참 신기하네요.” “…방금 농담으로 생각했죠? 이쪽은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살짝 토라진 안설하의 모습에 강유식이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진심인 걸 누가 모르겠는가. 그걸 알아서 더 무서울 뿐. “됐어요. 너무 갑작스러워도 부담스러울 테니까. 오늘은 이 정도만 할게요.” “크흠. 감사합니다.” “그럼 밥부터 먹죠.” 미소를 지은 안설하는 직원을 불러 음식을 주문했고, 잠시 후 코스요리들이 차례대로 나왔다. ‘실수…겠지?’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식사를 끝낸 뒤. 두 사람은 그대로 식당 내부에 이어져 있는 계단을 통해 2층에 있는 라운지 바로 이동했다. 후우웅 평범한 바람일 텐데도 짙게 묻어있는 마력. 회귀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감각에 강유식이 묘한 표정으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인지 극대화 때문인가…뭔가 묘한 느낌이네.’ 멀리서도 이 정도면 가까이 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 강유식이 신기하게 보고 있을 때. 옆에 앉은 안설하가 슬쩍 웃었다. “조금 전에 저한테 맞춰주신 건가 했는데…정말 마음에 드시나 보네요.” “여러 가지가 느껴져서요. 역시 공부로만 접하는 거랑 직접 보는 건 다르군요.” “뭐든지 그렇죠.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이에요. 물건이든, 사람이든.” 입꼬리를 슬쩍 비튼 안설하는 손에 들린 칵테일을 홀짝였다. 여러 가지로 뼈가 느껴지는 이야기였지만, 강유식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슬슬 이쯤인가.’ 적당히 분위기가 잡힌 것을 본 강유식은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 일은 죄송했습니다. 아무리 급했어도 안설하 님의…” “씨. 님은 너무 딱딱해요.” “…안설하 씨의 호의를 이용한 것이었으니까. 정말 죄송했습니다.” 강유식의 사과에 안설하는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코를 톡 쳤다. “기껏 다 잡힌 분위기에 그런 진지한 사과는 나빠요.” “그래도 꼭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사실은 이때 사과하는 게 가장 효과가 좋아서 했을 뿐이지만, 아직은 순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으리라. “괜찮아요. 어쨌든 강유식 생도의 인맥을 넓히기 위한 거였고, 저도 그 혜택을 누릴 수도 있을 테니까요. 서로 상부상조하는 사이에 그 정도도 못 하겠어요?”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다행이네요.” “물론 공적으로는 그렇다는 거고, 사적으로는 아직 용서 못 해요. 그때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토라진 표정을 짓는 안설하의 모습에 협상 시점이 왔음을 깨달은 강유식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해드리면 기분이 나아지겠습니까?” “흐음…” 잠시 고민하던 안설하는 좋은 게 생각났는지 슬쩍 웃었다. “7월 말에 각 길드의 유력인사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파티가 있거든요. 거기에 마침 파트너가 필요한 참인데…어때요?” “파티라…” 이쪽도 회귀 전에 안설하와 몇 번 나간 적 있기에 익숙하기는 하다. 다만 그때는 여러 가지로 못 볼 꼴을 많이 봤는데 이번에는 괜찮을지도 모르리라. ‘그리고 유력 인사들이면 뭐, 얼굴도장 찍어둬도 나쁠 건 없겠지.’ 아마 안설하도 그런 부분을 생각해서 권유해준 것도 있을 것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음을 확인한 강유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그날같이 나가겠습니다.” “후후. 좋아요. 만약 이번 약속도 어기면 그때는 정말 화낼 거예요?” “걱정하지…” 강유식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려던 순간. 테라스 쪽의 문이 열리며 이쪽을 향해오는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기껏 만난다는 게 이런 녀석이었나?” 초면인 상대에게도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안하무인 한 사내. 그 모습에 강유식은 그 곁으로 떠오른 메모리맵을 바라보았다. (노블레스 길드) (안설하 약혼자) (강화 인류계획 후원자)세계 10대 길드에서 내려왔지만 여전히 강력한 노블레스 길드의 후계자. 아직은 아니지만 미래에 안설하의 약혼자. ‘이 새끼 이때부터 이러고 있었네…’ 그리고 회귀 전에 안설하와 처음 만나게 해준 표적이었다. < 이놈의 명성이란(1) > 끝 80화 “내 제안을 거절하고 만난 게 고작 이런 녀석이라면 정말 실망이군.” 안설하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던 사내, 박유찬은 다시 고개를 돌려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참. 30대 때나 20대 때나 다를 게 없네.’ 속으로 피식 웃은 강유식이 무덤덤하게 올려다보자 박유찬의 눈매가 더욱 일그러졌고, 잠시 숨을 고르며 씹어 내뱉듯이 이야기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니 한 가지 충고해주지. 안설하는 너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다.” “…” “어중간하게 휘말리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게 좋을 거다.” 번지르르하게 말하긴 했지만 정리하자면 급 떨어지니까 당장 꺼져라 이 말이다. 박유찬의 이야기에 강유식은 잠시 생각하다가 옆의 안설하를
바라보았다. ‘재밌어하고 있네.’ 아마 이번 기회로 이쪽의 속마음을 떠보려는 거겠지. 안설하의 생각을 대강 꿰뚫어 본 강유식은 잠시 고민하다가 박유찬을 바라보았다. “감당이란 표현이 좀 그렇긴 합니다만…확실히 안설하 씨랑 저랑 안 어울리기는 하죠.”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군.” 입꼬리를 씩 올리는 박유찬의 모습에 강유식이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설하 씨는 천일 길드 후계자에 S급 헌터니까요. 저처럼 최근에 유명해진 애송이나…세계 10대 길드도 안 되는 어중간한 길드의 반푼이 후계자는 급이 좀 떨어지죠?” “푸흡!” 옆에서 듣던 안설하가 그대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돌려 어깨를 들썩였고, 멍한 표정을 짓던 박유찬의 얼굴이 확 일그러지더니 살기가 주륵주륵 흘러나왔다. “지금…말 다 했나?” 만난 시점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박유찬의 역린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제 나름의 충고입니다. 휘말리면 이도 저도 안 될 테니까요.” “이 건방진…” 나름 경험을 기반으로 한 충고였지만, 그게 더 화를 돋은 모양이다. 꽉 움켜쥐어진 주먹이 파르르 떨렸고, 박유찬이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만하죠?” 안설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큭…!” 전신을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섬뜩한 살기에 박유찬이 창백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으으.” 강유식은 몸을 부르르 떨며 팔을 쓰다듬었다. ‘저놈의 살기는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네.’ 온몸을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한기에 강유식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에 박유찬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저런…’ 조금 전 안설하의 살기는 자신만 노린 것이 아니라 이 일대에 무차별적으로 뿌려진 것이다. “역시 강유식 생도는 특이하네요.” “그냥 익숙해서 그런 거예요.” “후후. 그런 태도도 정말 마음에 들어요.” 담담하게 대답한 강유식의 모습에 안설하가 작게 중얼거렸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 박유찬을 바라보았다. “이걸로 알겠죠?” “뭐, 뭘 말이냐…” 조금 전 살기의 여파로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이야기하는 박유찬. 그 모습에 안설하는 피식 웃으며 강유식의 팔을 껴안았다. “자격을 운운할 거면 최소한 강유식 생도처럼 무서워하지는 않아야죠. 감당할 수 있느냐 마냐 해놓고 그런 모습은 좀…꼴불견이잖아요?” “…” 안설하의 비웃음에 박유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그리고 수치심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언젠가…네 옆에 서는 게 누군지 확실히 깨닫게 해주마…” 그 말을 끝으로 박유찬이 테라스 밖으로 나가버렸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안설하가 한숨을 내쉬며 강유식의 어깨에 기댔다. “아아. 아버님은 저런 녀석이 뭐가 마음에 들어서. 정말 보는 눈이 없으시다니까…” “약혼자입니까?” “아직은 아니에요. 마땅한 상대가 안 나오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회귀 전에는 이러다가 결국 약혼자가 되었지만, 두 사람이 결혼까지 가는 일은 없었다. ‘그 이후에 바로 부길드장으로 올라갔었지.’ 말이 부길드장이지 실제로는 길드장이나 다름없는 입지를 가졌었는데 연루됐다면 천일 길드가 휘청거렸을 사건을 미리 막은 덕분이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할까…’ 지금 당장도 강화 인류계획의 꼬리를 잡을 수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알기로 이 시기는 그렇게 좋지는 않다. ‘황영 그룹하고 제대로 후려칠 수 있는 사건인데…지금은 아껴두는 게 좋지.’ 그때는 황휘찬의 휘하에 있었던 때라 자신의 손으로 증거를 정리해야 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흐음. 강유식 생도를 아버님께 소개해 드려야 하나…” 껴안은 팔을 쓰다듬던 안설하가 오싹한 소리를 중얼거렸다. “…예?” “강유식 생도를 보고 나면 아버님도 생각이 조금 바뀌실 것 같아서요. 어때요? 파티 대신에 본가에 한 번…” “아, 아뇨. 그건 조금 너무 이른 게…” “…” 안설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올려다보았고, 강유식은 그대로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뭐, 지금 당장 급하지는 않으니까요~ 나중에 급해지면 부탁할 게요.” “급하다면야 뭐…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어차피 그 전에 처리할 테니까 문제없다. 그런 강유식의 대답에 안설하가 싱긋 웃었다. “그때는 기대할 게요.” 안설하가 팔에 살짝 기대어왔고, 그 모습에 강유식은 빼낼까 하다가 미동도 하지 않는 팔에 피식 웃었다. * 다음날. ‘어느 정도 잘해주겠거니 했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해줄 줄이야…“ 다른 사람의 집에 온 것 같은 풍경에 주변을 훑어보던 강유식은 옷을 갈아입은 다음 반혜영의 연구소로 향했다. ‘그나마 성진이 훈련시설이 좋으니까 이 정도지…다른 학교는 코빼기도 보기 힘든 수준이었지.’ 회귀 전의 기억을 곱씹으며 강유식이 걸음을 옮겼고, 반혜영의 연구실 앞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 보였다. “아. 부장!” 이쪽을 발견하자마자 활기차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여인, 비스트 퀸 이하린의 모습에 강유식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갔다. “뭔가…많이 바뀌었네요?” “아, 거추장스러워서 최근에 정리했어요. 보기 좋죠?” “예. 잘 어울리기는 하네요…” 회귀 전 비스트 퀸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녔기에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단발머리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방학이라 이래저래 바쁠 텐데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요.” “그렇게 바쁘지도 않았어요. 전보다 대련 상대도 잘 안 찾아져서…” 아쉬워하는 이하린의 모습에 강유식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하린은 던전으로 빨리 보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테이머의 특성상 환수들 때문에 성장 속도가 남들보다 느리니 준비가 끝나는 대로 투입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일단 들어갈까요.” “네!” 강유식은 그대로 이하린과 함께 연구소의 안으로 들어갔고, 반혜영이 기다리고 있는 실험실로 들어갔다. “왔냐.” “예. 이쪽은 이하린 씨. 우리 동아리 부원이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예전의 소심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활발한 인사. 그에 반혜영이 손을 살짝 내저으며 대답한 뒤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일단 말해둔 건 다 준비했는데…너 진짜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 거야?” 설명을 미리 들었음에도 긴가민가해 하는 반혜영. 그 모습에 강유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능할 거예요. 이론상 틀린 부분은 없으니까.” “그렇기는 한데…에이 몰라. 네가 말한 거니까 잘 되겠지.” 의심하기를 포기한 반혜영의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으며 옆에있는 이하린을 바라보았다. “이하린 씨. 오늘 뭐 하는지는 기억하시죠?” “네. 새로운 환수를 종속시키는 거잖아요?” “맞아요. 그리고 거기에 쓰일 매개체는 재앙급 마인의 왼팔이에요.” “…네?” 강유식의 이야기에 이하린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가능한가요?” “예. 가능해요. 마인도 몬스터나 다름없으니까요.” “하지만 전에는 인간이었는데…” “그 안에 몬스터가 섞였잖아요. 뭐, 너무 그 부분을 파고들 필요는 없어요. 어쨌든 가능한 일이니까요.” 마인의 일부를 매개체로 사용한다. 몇 명은 생각해볼 주제였고, 실제로 알려지지는 않아도 수많은 연구가 있었다. ‘신체의 주인인 마인이 부상이거나 죽은 상태일 것. 그리고 어느 정도 최대한 많은 부위를 사용할 것.’ 이는 마인 소환의 특징으로 일반적인 환수 소환은 매개체와 테이머의 역량에 따라 달라지지만 마인 소환은 사용되는 신체의 비율만큼만 힘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보통 왼팔이라면 그리 강하지 않겠지만…아가레스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 게다가 이렇게 테이밍에 성공하면 마인도 힘을 빼앗겨 약화되기 때문에 나쁠 게 거의 없는 방법이었다. “으음…잘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볼게요!” “좋아요. 선생님. 부탁드릴게요.” “그래그래. 만약에 잘못된다 싶으면 매개체째로 날려버릴 테니까 나한테 뭐라 하지 마.” 세 사람은 미리 소환 준비를 해둔 방으로 이동했고, 강유식은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은 큐브를 소환진 위에 올려뒀다. 촤라락! 검은 큐브가 겹겹이 풀리며 안에 봉인되었던 아가레스의 왼팔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광룡의 팔.’ 재앙급 마인인 아가레스의 별칭은 용완龍腕. ‘그리고 아가레스의 힘도 많이 깎여나갈 테고.’ 대략적으로 견적을 낸 강유식은 소환진 밖으로 물러선 다음 준비 중인 이하린을 바라보았다. “힘들어 보이면 전처럼 제가 들어가서 백업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세요.” “네!” “시작하죠.” 강유식의 신호와 동시에 이하린이 손뼉을 쳤고, 그 마력에 따라서 소환진 전체에 휘황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우우웅─! 중앙에 놓인 아가레스의 팔이 먼지로 분해되어 소환진 전체에 스며들었고, 하얀빛이 검붉은 색으로 물들며 불길한 형태로 변했다. ‘뭔가…많은데?’ 왼팔로 소환될 마력의 양이라면 대략적으로 25% 정도. 재앙급 마인의 25%면 상당히 많겠지만, 눈앞에서 뿜어져 나오는 양은 그걸로 설명이 안 된다. “야! 괜찮은 거 맞아!?” 반혜영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다급하게 물었고, 강유식은 잠시 고민하다가 두 눈을 번뜩였다. “괜찮아요!” 일반적으로는 이상하지만, 만약 아가레스의 부상이 정말 심한 상태라면 25% 이상 넘어와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잘 됐어!’ 어차피 반혜영이 함께 있으니 테이밍은 반드시 성공하는 상황. 강유식은 계속 진행하라고 손짓했다. 콰가가각!! 마침내 한계까지 넘어온 검붉은 색 마력이 소환진의 중심으로 순식간에 뭉쳤고 육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쿠웅! 땅을 디딘 굵직한 네 다리와 양옆으로 뻗은 길쭉한 날개. 전신은 검붉은 색의 비늘로 뒤덮였고, 뿔과 이빨이 날카롭게 돋아났다. [네놈들이 나를 소환했나?] 팔의 이름 그대로 광룡이 소환진에서 나타났다. < 이놈의 명성이란(2) > 끝 81화 “요, 용족?” 소환진에 나타난 광룡의 모습에 이하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모든 개체가 기본적으로 A급 이상인 최악의 종족. [네가 날 소환했군.] 무심하게 중얼거린 광룡은 이하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이내 고개를 슥 돌렸다. [너는 안 된다.] “네, 네?” [나는 나보다 약한 녀석의 명령 따위는 듣지 않는다.] “…” 이하린의 눈매가 단숨에 일그러졌고, 광룡은 옆에 있는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너는 날 소환했나?] “어…관여는 했지.” 강유식의 대답에 광룡이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뭐지?] “뭐가?” [버러지 같은 느낌인데 이상하게 강하군. 일부러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거라면 고쳐줬으면 좋겠다. 보기가 좀 그렇군.] “…” 잘 꿰뚫어 보기는 했지만 아니꼬운 말투에 강유식의 눈매가 꿈틀거렸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광룡이 의아해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건…뭐지?] “…저거?”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군. 저런 괴물 같은 녀석이 있다니. 주인으로 모시기에도 무서운 녀석이다.] “…” 강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겠지만 뭐 같은 표현에 반혜영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고 주변의 분위가 굳어졌다. [하나 같이 이상한 놈들밖에 없지만 그래도 의식은 치러야겠지….거기 약해빠진 놈을 제외하고 둘 중 나와 계약을 맺을 자는 누구냐.] 광룡의 물음에 세 사람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고, 강유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패죠.” * [크헤엑!] 쿠웅! 이하린에게 턱을 제대로 후려 맞은 광룡의 몸이 뒤로 넘어갔고, 그대로 기절하면서 혓바닥이 밖으로 축 늘어졌다. ‘그래도 꽤 강하긴 하네.’ 아가레스가 상처을 입은 상태라 힘이 많이 넘어와서 그런지 광룡의 힘은 대략 A급 중에서도 상급 정도. ‘처음부터 이하린을 무시하던 걸 보면 종속시킨다고 해도 제대로 부릴 수 없겠지.’ 성격과는 별개로 무력적인 부분에서의 모자람. 그렇기에 이 경우에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 “이하린 씨.” “하아…하아…네?”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광룡을 두들겨 팼던 이하린이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이하린 씨가 다루기에는 힘들 것 같아서요. 가능하다면 이전에 피닉스처럼 공동소유로 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아. 그럼 그렇게 할게요. 바로 할까요?”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공동소유에 딱히 거부감은 없는지 고개를 끄덕인 이하린이 광룡에게 다가가 손을 얹었다. 우웅─ 이하린의 손에서 마력이 은은하게 흘러나와 광룡의 몸을 휘감았고,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반혜영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쟤 테이밍 독특하게 하네. 보통 쇠사슬 같은 거 소환해서 하지 않나?” “그러게요.” 강유식은 모르는 척 대답했지만, 사실 이하린의 방식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으으…] 연결고리가 만들어져서 그런지 기절한 광룡이 신음을 흘렸고, 어느 정도 진행됐다 싶을 때 이하린이 입을 열었다. “지금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강유식은 광룡의 위에 올라타 기마술을 발동했다. ‘되네?’ 공동소유가 될지 안 될지 긴가민가했던 강유식이 놀란 표정으로 내려다보았고, 귓가로 페르스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로드와 저 레이디의 방식이 정반대라 그런 것 같습니다. ‘정반대라고?’ -예. 로드의 연결고리는 외부에 형성되지만, 레이디의 연결고리는 내부에서 피어나는 형태입니다. 그러니 두 분이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융화되는 것이지요. ‘흐음…’ 외부에 목줄을 채우듯이 테이밍하는 기마술과 몸 안에 뿌리를 내려 한 몸이 되듯 테이밍하는 교감. ‘이러면 이하린이 앞으로 종속시킬 환수에도 내가 다 발을 걸치는 것도 가능하다는 건데…’ 비스트 퀸의 재능에 숟가락을 얹어 환수들을 공유한다. 잠시 생각해보던 강유식의 입꼬리가 슬쩍 올랐다. ‘괜찮은데.’ 환수를 공유하는 게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좋은 매개체를 가져다줘서 전보다 군세를 강하고 많이 만들어주면 해결되지 않겠는가. [환수 ‘광룡 크림슨(A)’을 완전하게 종속하지 못했습니다. 남은 권한을 수습합니다.] [환수 ‘광룡 크림슨(A)을 ’이하린‘과 공동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과 달리 처음부터 권한을 나눠 가지는 것이었기에 조금 다른 알림창이 떠올랐고 강유식은 광룡, 크림슨의 아래로 내려왔다. “와…” 크림슨이 자신의 소유가 된 것을 확인한 이하린이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고, 그 속내를 알려주듯 알림창이 떠올랐다. [채무자 ‘이하린’의 빚이 증가합니다.] [채무자 ‘이하린’의 채무등급이 B급으로 상승합니다. 징수목록이 추가됩니다.] ‘B급이라…이 정도면 가능할지도.’ 어느 정도 차오른 채무등급에 강유식은 이하린의 곁으로 다가가 은근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저랑 이하린 씨랑 뭔가 잘 맞는 게 있나 봅니다.” “네, 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이하린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에 강유식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저희 말고 공동소유가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없고…이번에도 성공했잖아요. 이건 뭔가 궁합 같은 게 좋다고밖에 할 수 없죠.” “구, 궁합…” “이하린 씨는 아닌 것 같습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이하린의 눈이 팽글팽글 돌았고, 잠시 후 얼굴을 살짝 붉히며 끄덕였다. “아, 아뇨. 부장님하고라면…확실히 구, 궁합이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긍정적으로 보이는 반응에 강유식이 속으로 슬쩍 웃으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그런데…이하린 씨만 괜찮으시다면 앞으로도 계속 공동 소유하는 건 어떻습니까?” “계속이요?” “예. 그러면 환수를 다루는데 부담도 덜해지고, 저한테도 이득이니까 이번처럼 좋은 매개체를 지원해드릴 수도…” “좋아요.” “네?” “저도 괜찮아요.”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하린의 모습에 강유식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입니까?” “환수를 공유한다는 게 조금 어색하긴 한데 그게 부장님이라면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게다가 그동안 도움만 받았잖아요?” 크림슨의 비늘을 살짝 매만지던 이하린이 슬쩍 웃었다. “계속 빚만 늘릴 수는 없으니까요.” “이하린 씨…” 미소를 짓는 이하린의 모습에 강유식이 살짝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채무가 오르니 당연한 거긴 한데…이렇게 이야기로 들으니 또 기특하네.’ 매번 이상한 짓을 일삼던 부하직원이 큼지막한 계약을 따온 것 같은 기분. 그에 강유식이 칭찬이라도 해주려던 순간. “크흠.”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반혜영이 헛기침하며 노려보았다. “여기 나도 있거든? 없는 사람 취급하지 말아 줄래?” “죄, 죄송해요…” 이하린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고, 강유식의 곁으로 다가온 반혜영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푹 찔렀다. “적당히 해.” “예?” “…아무튼 적당히 하라고 임마.” 또 옆구리를 찌른 반혜영이 투덜거리며 크림슨을 향해 몸을 돌렸고, 잠시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레스 쪽과의 연결고리도 같은 것도 없는 것 같고, 앞으로 문제 일으킬 일은 없겠네.” “그렇죠?” “근데 아까 보니까 성격 때문에 다루기 힘들 거 같은데…그건 괜찮겠어?” 반혜영의 물음에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말 통하는 놈이면 다 방법이 있죠.” * “여기였나…” 전에 들은 기억을 더듬으며 강유식이 기숙사의 호실을 확인했고, 그대로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건조하게 울렸고, 잠시 후 안쪽에서 살짝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그 물음에 인터폰 카메라 바깥에 서 있었던 강유식이 그 앞으로 가며 대답했다. “접니다.” 쿠당탕! 대답과 동시에 문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잠시 후 평상시와 같이 차분한 차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뭔가 테이프를 뜯어내고 물건을 치우는 듯한 소리가 문 너머로 작게 들려왔고, 인지 극대화로 그것을 들은 강유식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러나저러나 집에서는 풀어져서 지내는 보구만.’ 평상시에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만큼 집안에서는 상당히 어지르고 지낼지도 모른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조금 지쳐 보이는 차시현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을 본 강유식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변하기는 하는구나.’ 회귀 전에 차시현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그녀의 집에 들렀을 때. 강유식은 그녀의 옷장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안 어울리는 것 같습니까?” 자신의 옷을 보고 있음을 깨달은 차시현이 조심스레 물었고, 그에 강유식이 씩 웃었다. “아뇨. 너무 잘 어울려서 보고 있었어요.” “…” 강유식의 대답에 차시현의 얼굴이 살짝 경직되었고, 이내 몸을 슬쩍 돌렸다. “우, 우선 들어오시죠.” “실례하겠습니다.” 차시현의 집 안으로 들어선 강유식은 내부를 살펴보았다. ‘먼지로 윤곽이 보이는 걸 보니 사진 같은 것들을 엄청나게 붙여놨었나 보네.’ 아까 테이프 소리가 뭔가 했더니 저걸 치우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사진 취미까지 있다니…그럼 아까 치운 것들은 자기가 찍은 건가?’ 그런 거라면 왜 숨겼는지도 살짝 이해가 간다. 아마 본인이 찍은 걸 보여주는 게 조금 부끄러웠으리라. ‘그리고…쿠션이나 인형도 있었잖아?’ 게다가 주변에 다 치우지 못한 실밥이 있는 걸 보면 심지어 직접 만든 물건인 모양이다. “간식 같은 걸 따로 안 먹는지라…죄송합니다.” “아니, 뭘 그런 걸로 죄송해요. 신경 쓸 것 없어요.” 손을 내저은 강유식은 묘하게 긴장한 차시현의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카메라랑 봉제 취미는 언제부터 생긴 거예요?” “…” 강유식의 물음에 차시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고, 잠시 후 시선을 슬쩍 피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기 사진 붙여둔 자국이랑 카메라도 있고 실밥도 보여서요. 아니었어요?” “그, 그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차시현의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었다. “너무 그럴 필요 없어요. 남 취미로 놀리지는 않으니까.” “…네.” “다음에 시간나면 사진이랑 봉제로 만든 것들 좀 보여주세요. 어떤 걸 만들었을지 궁금하네요.” “노, 노력해보겠습니다…” 또 시선을 슬쩍 피하며 대답하는 차시현의 모습에 강유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못했길래 저렇게 보여주기 싫어하지.’ 애초에 조율자가 있는데 못할 수가 있나? 강유식이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차시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연락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로…” “아.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차시현을 바라본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드래곤 전용 서약서. 같이 만들어볼래요?” < 이놈의 명성이란(3) > 끝 82화 서약서. “거기서 조금만 더 왼쪽으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이 두 생도의 손안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치지직! 강유식이 펜을 움직이는 경로에 따라 서약서에 불로 지져지듯이 자국이 남았고, 그 위로 은은한 마력이 감돈다. “이번에는 50도 정도 기울어진 형태로.” “예.” 강유식의 지시에 차시현은 그 속내를 읽은 것처럼 완벽하게 이행했고, 어느새 서약서가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제 잔존마력을 봉합해 코팅하면 끝이에요. 혼자서 할 수 있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차시현이 서약서를 빠르게 훑어보며 윤곽을 잡았고, 그 직후 망설임 없이 두 손을 움직였다. 우우웅─ 희미하게 흩뿌려져 있던 잔존마력이 순식간에 반투명한 막으로 엮여 그대로 서약서 위에 씌워졌다. “끝났다…” 이쪽 분야의 전문가가 했어도 한 달은 족히 걸렸을 물건. 그걸 단둘이서 나흘 만에 완성해낸 것이다. ‘어떻게 되긴 됐네.’ 회귀 전에 전문분야도
아니었고 어쩌다가 논문을 읽어본 것이 다였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로드. 우선 페르스발의 연산력과 안드바라나우트의 능력. “고생 많으셨습니다.” 기존 논문에 없던 수많은 변수를 아무렇지 않게 보완하고 엄청난 정확도와 속도로 작업을 마무리한 차시현. ‘조율자가 진짜 엄청나긴 하구만.’ 보면 볼수록 이런 재능을 썩게 만든 황영 그룹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차시현이 목적이 아니었던 건가?’ 생각해보면 차시현의 조율자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그녀가 황휘찬을 습격하고 자신에게 의뢰했을 때였다. ‘그러면 차시현의 친가를 무너트린 목적이 따로 있다는 뜻인데…’ 단순히 공격적인 인수합병이라고 보기에는 차시현을 강제로 묶어낸 것도 그렇고 수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다. “강유식 님?” 맞은편에 앉아있던 차시현이 얼굴을 가까이하며 불렀다. “아, 예.” “괜찮으십니까? 뭔가 문제라도…” “아뇨. 괜찮아요. 살짝 피곤해서 그런 거니까…” “그렇군요.” 몸을 일으켰던 차시현이 다시 의자에 앉았고, 그녀를 바라본 강유식은 머릿속의 의문을 일단 잠시 미뤄뒀다. ‘이건 차차 알아보면 되겠지.’ 어차피 황영 그룹과는 앞으로 얽힐 수밖에 없다. “지금부터 사용하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네.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저도 보고 싶습니다.” “그럼 개인 단련실로 가죠.” “아, 그러면 잠시 옷을…” 방으로 들어가려는 차시현의 모습에 강유식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날도 더운데 그대로 가도 괜찮지 않아요?” 살짝
흘러내릴 것처럼 큼지막한 하얀색 반팔티와 거의 가려져 끝자락만 살짝 보이는 핫팬츠. “외출복과 실내복은 본래 다릅니다.” 그렇게 이야기한 차시현은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평상시처럼 생도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가시죠.” “아, 네…” 평상시처럼 완전무장한 차시현과 함께 개인 단련실로 향한 강유식은 서약서를 그녀에게 넘겨준 다음 숨을 골랐다. ‘소환은 처음인데…’ 회귀 전에 환수랑은 연이 없었던지라 다뤄본 경험 자체가 없었다. 조금 낯선 감각에 강유식은 살짝 긴장하면서도 손뼉을 쳤다. 짜악─! 간단한 시동어로 눈앞에 거대한 소환진이 생겨났고, 강유식은 자연스럽게 크림슨의 모습을
떠올렸다. “용…” 그 모습에 차시현이 살짝 놀란 듯이 중얼거렸고, 소환이 끝난 크림슨이 황금색 눈동자를 번뜩이더니 고개를 돌렸다. [이 비겁한 놈! 그런 개짓거리를 벌여놓고 감히 나를 소환하는 가!] 예상한 그대로 소환하기 무섭게 호통을 치는 크림슨. 그 모습에 강유식이 씩 웃었다. “뭔 개짓거리야. 니가 맞을 짓 했잖아.” [시끄럽다! 비겁하게 그 괴물의 힘을 빌려 나를 때려눕히다니…힘을 증명하기 전까지는 네놈이나 그 애송이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지 않겠다!] “힘만 증명하면 돼?” [으음?] 생각보다 강유식이 쉽게 대답하자 크림슨의
눈동자가 가늘어졌고,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설마 또 저 여자랑 합심해서 나를 두들겨 팰 셈이냐?] 만약에라도 싸우면 자신이 두들겨 맞는 쪽인 건 아는지 크림슨이 질색하며 물었고, 강유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을 증명하라며. 그래 봐야 의미 없지.” [으음…! 양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지난번보다는 괜찮아졌구나!] “…” [그래서 어떻게 네 힘을 증명할 테냐?] 크림슨의 물음에 강유식은 자켓을 벗어 차시현에게 맡기면서 간단하게 대답했다. “어떻게가 어디 있어. 싸워서 이기면 되지.” [호오…] 강유식의 대답에 크림슨의 눈동자가 반짝였고, 전신의 비늘이 날카롭게 돋아나며 으르렁거렸다. [자신 있느냐? 강하기는 해도 결국은 누더기. 광룡의 힘을 지닌 이 몸에는 닿지 않을 것이다.] “해보면 알지. 대신 조건이 있어.” [뭐지?] “내가 이기면 서약서에 사인하는 거다. 알겠지?” 강유식의 제안에 크림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약서? 그건 뭐지?] 순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크림슨의 반응에 강유식이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징표지. 진정한 강자만 할 수 있는 거야.” [흐음…그런 거라면 나도 조건이 있다.] “음?” 강유식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크림슨이 두 눈을 번뜩였다. [만약 네가 나에게 패배하면 나를 해방하고 제대로 된 주인을 섬길 수 있게 도와라. 그게 조건이다!] 약간 예상치 못한 조건에 강유식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좋아. 그 정도야 뭐, 간단하지.” [좋다!] 타앙! 바닥을 꼬리로 후려치며 기세 좋게 대답하는 크림슨. 그 모습에 강유식이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해보자고. 차시현 씨. 뒤로 물러서 있어요.” “예.” 차시현을 뒤로 물린 강유식은 전투준비를 갖췄고, 그 모습을 본 크림슨이 입가를 비틀었다. ‘크큭. 누더기 따위가 주제를 모르는군.’ 지난번에 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했을 때. 크림슨은 사정없이 두들겨 맞는 와중에도 상대의 힘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마법은 꽤 쓰는 듯하지만…그 정도로는 나의 비늘에 제대로 된 상처도 줄 수 없지. 이 싸움…나의 승리다!’ 이번 일로 누더기와 애송이, 괴물의 손에서 벗어나 훌륭한 주인을 찾고 말 것이다. 우우웅! 오른팔이 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며 여섯 개의 보조기를 꺼내든 강유식의 모습이 보였다. […아?] 지난번보다 두 배 이상으로 증폭된 마력과 흉흉한 빛을 번뜩이는 여섯 개의 십자모형. “간다.” 전력을 발휘한 강유식이 크림슨에게 달려들었다. * [크헤엑!?] 쿠웅! 꼬리를 붙잡혀 바닥에 패대기쳐진 크림슨이 그대로 바닥에 뻗어버렸고,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는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으으…]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는데 이렇게 져버리다니! “약속은 지켜야지?” 강유식의 물음에 크림슨의 몸이 흠칫 떨렸고,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다. 네 힘을 증명했으니 너는 진정한 주인으로…] “됐고. 다시 앉아봐.” […알았다.] 크림슨이 곧장 고개를 숙였고, 강유식은 차시현에게서 다시 받아온 서약서를 보여줬다. “자. 이게 서약서. 여기 위에다가 발바닥을 살짝 찍으면 나한테 충성을 맹세하는 거야.” [으음…근데 이건 무슨 내용인가?] 글자를 못 알아보는 크림슨이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강유식이 몸을 토닥였다. “별거 아냐. 주인님에게는 충성을 다하고, 늘 최선을 다하며…주인이 원할 때마다 맞춰서 대련해주는 것 정도?” [음. 당연히 해야 할 것들이군.] “그런 거지. 자자. 얼른 사인해.” 강유식의 재촉에 크림슨은 살짝 의아해하면서도 서약서에 발바닥을 살짝 가져다 댔다. 우웅─! 정상적으로 서약서가 발동되며 몸을 휘감았고, 그 기묘한 감각에 크림슨이 묘한 표정을 짓다가 어깨를 쫙 폈다. [어찌 됐든 앞으로 충성을 다하겠다!] “음음. 그래. 그래야지.” […뭔가? 그 안쓰러운 표정은.] “응? 아냐 아냐.” 손을 내저은 강유식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문자를 보냈고, 답장을 받은 다음 크림슨을 바라보았다. “주인님한테 열심히 해.” 후웅! 그 말과 동시에 주변의 시야가 바뀌었다. “아. 왔다!” 누더기 주인보다도 인정할 수 없는 애송이 주인이 보였다. […과연. 그런 거였나.] 이하린을 본 크림슨은 그제야 서약서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눈매를
찌푸렸다. ‘하지만 잘못 봤군. 나름대로 제약을 가한 듯하지만 이까짓 서약. 내가 진심만 발휘한다면…’ 두 눈을 번뜩인 크림슨이 날개를 쫙 펼쳤고, 이내 자신의 전력을 다해 몸을 속박하고 있는 서약을 부수려 했다. 쿠구구궁! “어, 어어…!” 크림슨의 전력이 발휘됨과 동시에 쭉 빨려 나가는 마력. [어리석은 놈들! 내가 그리 호락호락…] “앉아!” 쿠웅! 말이 다 이어지기 전에 전신에 끓어오르는 힘이 모두 사라졌고, 크림슨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이게 무슨…] “착하네~” [감사합…헛?!] 자신도 모르게 나올 법한 굴욕적인 대답에 크림슨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작은 종이 쪼가리 하나로 어떻게 그런 힘을…’ 겉보기에는 그래도 수많은 테이머의 지식이 수십 년간 응축되어 만들어진 결정체였지만, 그것을 모르는 크림슨은 그저 강유식을 향해 전율했다. ‘나,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반항할 수단이 사라진 크림슨이 두 눈을 파르르 떨었고, 그 모습에 이하린이 뒤쪽에 있던 피닉스를 끌고 왔다. “이쪽은 피닉스. 네 동료야.” “끼엑…” 묘하게 측은한 눈빛을 보내오는 불꽃의 새. 그 모습에 크림슨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고. “앞으로 잘 부탁해. 크림슨.” 주먹을 꽉 움켜쥔 애송이 ‘주인’이 자신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오늘도 다 졌어요 ^^;;] 엉망진창이 된 채로 멋쩍게 웃는 이하린과 이겼는데도 바닥에 뻗어 혓바닥을 늘어트린 크림슨의 사진. ‘임자 만났구만.’ 며칠 전만 해도 자기가 이겼다고 늠름하게 포즈를 잡더니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기운을 잃어 기어코 뻗어버린 것이다. ‘이쯤 되면 이하린이 이상하다고 봐야겠는데….’ 아무리 남궁륜의 케어를 받으면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해도 저런 근성과 체력이라니. “뭐 봐요?” 리무진의 맞은편 좌석에 앉아있던 안설하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 별거 아니에요.” “흐응…아무래도 좋지만 오늘은 에스코트 대상한테 집중해줘야죠? 엄연히 벌충이니까.” 살짝 새침하게 이야기하는 안설하의 모습에 강유식이 슬쩍 웃으며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안설하 씨만 볼게요.” “…좋아요.” 강유식의 이야기에 안설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파티장. 도착했습니다…” < 이놈의 명성이란(4) > 끝 83화 리무진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주변에서 플래쉬 소리가 터져 나왔고, 강유식은 먼저 내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슨 시상식도 아니고 기자들이 왜 이렇게 많아?’ 오늘 모이는 이들이 국내 헌터 업계에서 알아주는
사람들이니 기자들의 관심이 모이는 건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이렇게까지 몰려온 것은 조금 이상하다. “잡으세요.” “고마워요.” 슬쩍 웃은 안설하가 강유식의 손을 잡으며 리무진에서 내렸고, 아주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뭔 일 났대요?” “뭔 일 났죠. 귀하신 분이 나왔잖아요?” “…그거 저 말하는 겁니까?” 강유식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안설하가 피식 웃으며 팔짱을 낀 팔을 슬쩍 끌어안았다. “궁금한 건 알겠지만 지금은 에스코트 먼저.” “예예. 알겠습니다.” 피식 웃은 강유식은 그대로 안설하와 걸음을 맞추며 입구까지 이어진 카펫 위를 걸었고, 셔터음은 쉬지도
않고 울려대며 빛을 터트렸다. “안설하 팀장이랑 사이가 예사롭지 않다더니…설마 정말 그런 사이인 건가?” “아무리 그래도 미성년자인데 설마 그럴까. 그냥 스카우트겠지.” “오늘 다른 길드 간부들 몰려온 것 보면 아직 논의 단계라는 소문이 많은 모양이야.” “그래도 저렇게 사이좋은 걸 보면 천일 길드가 유리하기는 하겠네.” “파티장 내부는 난리 나겠구만.” 그 대화를 들은 강유식은 대강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진짜 나 때문이었네.’ 자신이 파티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눈여겨보고 있던 길드의 간부들이 파티에 참여했고, 그로 인해 주변의 관심도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그리고 밑밥도 적당히 잘 깔아뒀군.’ 만약 안설하가 자신에게 욕심을 냈다면 이미 스카우트 됐다는 식으로 소문을 흘려 침을 발라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욕망에 충실하다고 봐야 할지…사람이 좋다고 봐야 할지…’ 아무튼 이만큼 신경을 써줬으면 자신 역시 그만큼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제대로 한 번 찍죠. 첫 에스코트 기념으로.” “…저야 좋죠.” 입구 앞에서 두 사람이 기자들을 향해 몸을 돌렸고 안설하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더 깊이 꼈다. “회장으로 모시겠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한국 헌터협회 직원이 고개를 꾸벅이며 회장으로 안내했고 그 뒤를 따르며 팔짱을 느슨하게 푼 안설하가 의외인 표정을 지었다. “꽤 능숙하네요. 카메라 앞에서 당황할 줄 알았는데.” “이런 쪽으로는 내성이 좀 있어서요.” 법원에 출두할 때나 썩 좋지 않은 일로 겪었다는 게 조금 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저쪽으로는 내성이 완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뻣뻣하게 굳었어도 귀여웠을 거 같은데.”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흐응…그래요?” 두 눈을 반짝이는 안설하의 모습에 강유식은 눈동자를 슬며시 피하며 앞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두 사람이 그대로 파티회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 즉시 주변에서 시선들이 일제히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우웅 휘몰아치듯 밀려오는 강렬한 감각. 상위 등급 헌터 수십 명이 한 장소에 모여 있으면서 은연중에 새어 나왔던 위압감이 그들의 시선을 따라 단숨에 쏟아진 것이다. ‘골드 클래스급은 들어오자마자 얼어붙겠네.’ 다이아클래스도 경험이 없다면 여기서는 굳었을 것이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흘려 내다니…’ ‘안설하가 도운 건가? 아니, 돕지 않았는데도 저걸 단신으로…역시 대단하군.’ 강유식의 잠재력을 알아본 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았고, 그들을 살짝 훑어본 강유식이 안설하에게 속삭였다. “오늘 참가진 왜 이렇습니까…?” 회귀 전에도 안설하를 따라 몇 번 참여한 적이 있었기에 강유식도 이쪽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게요. 10대 길드도 몇몇 보이고…화려하네요~” 그러나 이번 파티는 기존과 달리 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굵직한 거대 길드들이 모두 참여했고, 그중에는 중소길드를 이끄는 이름있는 헌터들도 몇몇 있었다. ‘이해가 가긴 하는데…’ 지금 자신의 인지도와 활약상이라면 어느 길드라도 욕심이 날 법도 했다.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죠.” “아, 네.” 강유식은 안설하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고, 구석에 천일길드의 마크를 달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안 팀장님!” “…오셨습니까.” 활기차게 인사하는 천일길드 공략 2팀의 한예지 부팀장과 안현민 팀장. 그 둘의 모습에 안설하가 미소를 지었다. “일단은 파티 장소니까 그렇게 거창하게 인사할 필요 없어요. 편하게들 즐겨요.” “넵! 알겠습니다.” “…” 한예지는 기합이 잔뜩 들어간 채로 경례를 했고, 안현민은 아무런 말 없이 눈을 슬쩍 옆으로 돌렸다. ‘이 남매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구만.’ 자신의 누나인 안설하 쪽으로는 시선도 보내지 않으려는 안현민. 미래의 천일 길드장치고는 상당히 속이 좁아 보였지만, 이 남매 사이는 어쩔 수 없었다. ‘둘이 호흡만 잘 맞췄어도 천일 길드가 훨씬 커졌을 텐데 말이야.’ 자신이 알았을 때는 이미 손 쓸 수 없는 단계이기도 했고 애초에 나서기에도 입장이 애매했다. ‘이번에는 어떠려나.’ 그때는 이래저래 자신의 소문이 썩
좋지 않아 처음부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 “네가 강유식이군.” 아무런 감정 없이 이야기하는데도 묘한 불편함이 느껴지는 모습. 그에 강유식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 강유식의 인사에 안현민이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짤막하게 대답했다. “팀장님을 잘 부탁한다.” “어, 어어…같이 가요 팀장님!” 이야기를 끝낸 안현민은 그대로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고, 한예지가 다급히 그 뒤를 쫓아갔다. ‘이번에는 느낌이 좋은데?’ 어쩌면 이 답도 없는 남매의 사이를 어떻게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예상외로 좋은 반응에 강유식이
슬쩍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뭘 잘못 처먹었나…” “…” 냉랭한 안설하의 반응에 강유식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좋으신 분 같네요.” “뭐…나쁜 녀석은 아니죠. 좀 미련하고…눈치 없고…싸가지 없어서 문제지.” 누가 봐도 나쁘게 보는 모습에 강유식이 어이없이 보고 있을 때. 안설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팔을 당겼다. “그보다 이제 돌아다니죠. 아는 사람들 소개해줄게요.” “예예. 갑시다.” * “…” 파티회장 전체가 보이는 통제실. ‘저딴 쓰레기에게 전부 눈이 뒤집혀서…’ 하지만 그런 박유찬의 계획은 처음부터 틀렸다. ‘안설하…’ 미소는커녕 자신에게는 흥미도 한 번 보이지 않았던 차가운 여인. 그런 안설하가 다른 남자의 앞에서는 다채로운 표정을 드러내며 두 눈을 반짝인다. ‘천일 길드장이 강유식과 안설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 같다. 혼담이 무산되지 않도록 처신을 잘해라.’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과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것이 안설하였고, 그렇기에 무리한 방법을 사용해가며 약혼을 진행하고 있었다. ‘반드시…반드시 손에 넣고 말겠다.’ 여기서 쓸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안설하를 이대로 허무하게 놓칠 수는 없다. “이모탈 드림. 두 개 준비해.” “예? 하지만 그 물건은 아직 미완성인…” 당황하는 부하의 모습에 박유찬의 두 눈을 번뜩였다. “당장. 가져와.”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수하가 어디론가 향했고, 박유찬은 다시금 CCTV를 바라보았다. ‘네 곁에 있을 사람이 누군지…오늘 깨닫게 해주마…’ 아주 잠깐 점멸된 CCTV 화면. 그 검은 화면 위로 추악하게 일그러진 사내의 얼굴이 잠시 비추었다 사라졌다. < 이놈의 명성이란(5) > 끝 84화 “후우…” 회장 바깥으로 연결되는 발코니. “여기 마실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강유식이 잔을 받아들였고, 안설하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들고 온 칵테일을 홀짝였다. “조금 많이 돌아다녔죠?” “받은 명함만 한 50개는 되는 것 같은데요.” “다들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명함은 필수죠.” 예상보다 두 배는 많은 양에 강유식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음에 하나하나 연락 돌리고 나면 지쳐 쓰러지겠습니다.” “그만큼 도움이 될 테니까 참아요.” “그렇기야 합니다만…” “아. 맞다.” 뭔가 떠올린 안설하가 갑작스럽게 자신의 가슴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더니 강유식 앞에 내밀었다. “제 명함이에요. 여태까지 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그냥 평범하게 꺼내서 주시면 안 됩니까?” “강유식 생도를 위한 특별 명함이니까요. 주는 것도 특별해야 기억에 남죠. 자자. 얼른 받아가요~” 짓궂게 웃으면서 명함을 들이미는 안설하의 모습에 강유식이 눈꼬리를 파르르 떨면서 마지못해 받아갔다. “왜 번호가 두 개입니까?” “하나는 강유식 생도 전용이에요. 저도 꽤 바쁜 사람이기도 하고…비밀스러운 이야기도 해야 하니까요,” 뒷세계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보안용 세컨드폰 번호. 회귀 전에도 받은 적 있었기에 놀라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의외였다. ‘이상하게 전보다 빠른데…’ 심지어 이번에는 그렇고 그런 관계도 없었는데 왜 이리 빠르단 말인가. 강유식이 의아한 표정으로 보자 안설하가 슬쩍 웃었다. “강유식 생도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서 준 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그 부분은 잊지 말고요.” “흐음. 그런 거군요.” 예전과 달리 부정적인 전과가 없으니 신뢰는 빠르게 쌓였지만, 그렇다고 더 깊은 관계가 구축된 것은 아니다. ‘좋긴 한데…여전히 위험하긴 하구만.’ 어디서 꺼내졌던 것인지 떠올린 강유식은 애써 기억을 털어내며 명함을 따로 챙겨 넣었고, 안설하가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이제 충분히 쉬었으니까 다시 들어가야죠.” “그러게요. 몇 명이나 봤었죠?” “글쎄요. 이제 한 절반…” 이야기를 하던 안설하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고,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섬전처럼 휘둘러졌다. 피잉! 칵테일에 올리브를 꽂아둔 쇠막대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더니 정원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라졌어.” 바닥에 떨어진 작은 핏자국을 본 안설하가 눈매를 찌푸렸고, 강유식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지?’ 한국 헌터 협회가 주관하는 파티인 데다 온갖 상위 등급 헌터들이 모인 장소인데 어떤 미친놈이 여기서 사고를 친단 말인가. “…음?” 코끝을 희미하게 스치는 달콤한 냄새. -로드! 저주입니다! 페르스발의
외침에 강유식은 되물어보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안설하를 껴안으며 바닥을 박차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이모탈 드림?’ 강화 인류계획의 키 카드이자 박유찬이 자신의 영향력을 넓힐 때 사용했다는 기묘한 물건. ‘1차로 사용자의 욕망을 폭주시키고 2차에는 사용자의 암시에 휘둘리게 된다.’ 마지막 3차의 경우 완전히 노예 상태로 만들기에 매우 위험하지만, 그쪽은 특수한 설비가 따로 필요하기에 지금 주의할 필요는 없다. ‘그때 확보한 자료에 의하면 제대로 실용화된 건 3년 뒤였을 텐데…박유찬 이 새끼 미쳤나?’ 아무리 자신이 싫다 해도 아직 완성도 안 된 물건을 여기서 사용하다니. ‘저주는…안 걸린 건가?’ 노출된 시간이 짧기는 했어도 그래도 어느 정도는 영향이 있어야 할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로드에게 끼친 저주라면 제가 모두 저항했습니다. ‘뭐?’ -빠르게 영향권에서 벗어나기도 했고 제 본체가 강력한 저주와 연관된 물건이라 이런 은밀성 위주의 저주 정도는 쉽게 저항할 수 있습니다. ‘…’ 해결법을 알고 있으니 원래 문제가 없긴 했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막아낼 줄이야. 터억! 품에 안겨있던 안설하가 어깨를 붙잡았다. “가, 강유식 생도…얼른 떨어져요.” “예?” “뭔가…뭔가 이상한 거에 당했나 봐요. 머리가…” 얼굴을 가린 안설하가 몸을 비틀거리면서 자신에게서 떨어트리려는 듯 손을 밀었다. 꾸욱! 하지만 그 행동과 달리 어깨를 쥔 손에는 여전히 힘이 꽉 들어가 있었는데 손가락 틈 사이로 이쪽을 바라보는 눈도 기이하게 번뜩였다. ‘1차 징조.’ 원래 S급 헌터라면 소량에 노출된 것 정도는 쉽게 저항할 수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안설하는 본인이 지닌 욕망과 지금의 상황이 딱 맞아떨어져 제대로 시동이 걸린 모양이다. ‘해결법을 알긴 아는데…’ 원초적인 저주답게 해결법도 의외로 간단하다. ‘근데 그건…’ 아무리 저주를 풀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한 번 고삐 풀리면 안설하 성격상 저돌적으로 돌진할 건 뻔할 뻔 자다. -뭐야. 저걸로 끙끙거리고 있어? 그냥 쪽 빨아서 뱉으면 되겠구만. 안드바리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뭐라고?’ -그냥 쪽 빨아서 뱉으면 안 되냐고. ‘저주를 빨아들일 수 있어?’ -저주가 강한 게 아니라 얍삽한 거라 가능해.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안드바리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머리를 빠르게 굴렸고, 이내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빨아들이면 내가 쓸 수도 있어?’ -어? 으음…될 거 같긴 한데. 복잡한 구조도 아니고… 안드바리의 대답에 강유식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거라면 소중한 것도 지키고 채무관계도 만들며 박유찬에게 답례도 가능하다. ‘어떻게 빨아들이는데?’ -저 여자랑 닿게 만들어. 간단하게만 접촉해도 돼. ‘좋아.’ 안드바리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곧장 손을 뻗은 순간. 꽈악! 얼굴을 부여잡고 있던 안설하의 손이 갑작스럽게 뻗어와 맞잡으며 깍지를 꼈다. “어?”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강유식이 당황하고 있을 때. 눈앞이 빙글 돈다 싶더니 밤하늘이 위쪽에 펼쳐졌다. “이건…이건 오케이인거죠?” “잠깐. 안설하씨. 좀 진정을…” “이쪽에서 열심히 참고 있었는데 그렇게 손을 뻗는 건…누가 봐도 오케이잖아요?!” 벌써 반쯤 고삐가 풀려버린 안설하의 모습에 강유식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걸 어떻게…’ -끝났어. ‘뭐?’ -손닿았잖아. 저주 다 빨아들였어. 이제 괜찮아. 위쪽을 올려다보니 안드바리가 살짝 분홍빛으로 반짝였고, 그 모습에 강유식이 다시 안설하를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장소는 가리니까 그렇게 거창하게는…” 눈이 맛탱이가 가긴 했는데 묘하게 차분하다. 그것을 알아차린 강유식이 진정하며 이야기했다. “저주 풀었어요.” “…네?” “방금 저주 풀었어요. 괜찮으실 거예요.” “…” 강유식의 대답에 안설하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고, 이내 뭔가를 고민하듯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하면 두 번은 없어요.” 뭐가 없는지 따로 설명은 안 했지만, 대충 알아먹은 안설하가 꽉 누르던 손을 놓고 그대로 일으켜줬다. “해주한 뒤에도 남을 만큼 강한 저주였네요…이제야 진정됐어요.” -저거 거짓말이다. 나도 알아, 라고 속으로 대답한 강유식은 시뻘겋게 변한 안설하의 귀를 애써 무시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보다 정말 괜찮으세요?” “네. 정말이에요. 그보다 조금 전 그건 도대체 어떤 녀석이…” 조금 진정된 안설하가 싸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박유찬에 대해서 말해줄까.’ 그녀에게 털어놔도 상관은 없지만, 그러면 안설하의 성격상 지금 당장 강화 인류계획을 비롯해 노블레스 길드를 모조리 쓸어버리려 할 것이다. “일단은 돌아가죠. 우선 안에 들어가서 상황을 봐야할 것 같습니다.” “아. 네. 그래야죠.” “그리고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안설하 씨를 노리는 사람은 많으니까.” “확실히 그렇네요. 방금은 강유식 생도 덕분에 살았어요.” 미소를 지은 안설하가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도와줘서.”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안설하’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D급으로 판정합니다.] ‘됐다!’ 이래저래 앞에 도움받았던 게 많아 채무등급이 조금 낮게 측정되기 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형성됐다는 것이다. ‘이걸로 어느 정도 간 보는 건 되겠군.’ 물론 아직 D급밖에 안 되는 만큼 좀 더 신경을 써야겠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이제 남은 건…저쪽인가.’ 아마 녀석의 노림수를 생각한다면 지금쯤 파티회장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시켜주지.’ < 이놈의 명성이란(6) > 끝 85화 파티회장으로 돌아온 뒤. “그건 대단하네요. 다음에 꼭 보고 싶습니다!” “하핫. 강유식 생도가 찾아온다면 얼마든지 보여주겠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생도라고 생각할 수 없었을 만큼 차분했던 조금 전과 달리 나이에 걸맞게 잔뜩 들뜬 모습. “설마…” “아무리 그래도 미성년자인데…” “그래도 안설하 팀장 성격을 생각하면…”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러겠느냐, 라는 말이 대다수지만 밖에 나갔다 온 뒤로 아무 말 없이 옆에 딱 붙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 또 의심을 부추긴다. ‘제대로 먹힌 모양이군.’ 이모탈 드림 자체가 저주라고 인식하지 못할 만큼 은밀한 데다 특유의 달콤한 향도 금방 사라져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비 자체가 불가능하다. ‘미완성품이라 조금 걱정했는데…저 정도면 성공이다.’ 안설하는 S급 헌터답게 조금 저항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강유식은 확실하게 1차 징조가 나타난 것으로 보였다. “오랜만이군.” 박유찬의 인사에 강유식이 고개를 돌렸고, 얼굴을 보자마자 노골적으로 눈매를 찌푸렸다. “썩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이전에 능글맞던 모습과 달리 감정적인 반응. 그 모습에 박유찬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까칠하게 반응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우리들과 인연을 만들어도 네게 나쁠 건 없을 텐데.” “글쎄요. 굳이 노블레스 길드와 인연을 만들 필요성은 없을 것 같은데요.” “어리석군. 그렇게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면 앞으로 헌터 업계에서 살아남기는 힘들 거다.” 파캉! 박유찬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강유식의 손에 들린 유리잔이 깨지며 사방으로 액체가 튀었고, 음료의 달달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뭐 하는 짓이지?” “죄송합니다. 최근 들어 스탯이 갑자기 늘어나서 힘 조절이 서툴렀네요.”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변명. 그 뻔뻔한 모습에 살짝 욱하고 올라온 박유찬이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지금 나를 위협한 건가?” “위협이라뇨. 정말 실수였을 뿐입니다. 옷에 묻은 건 죄송…” 손수건을 꺼내든 강유식이 다가가려던 순간. 그보다도 먼저 박유찬이 거세게 손을 후려쳤다. 짜악! 앞으로 뻗어 나갔던 강유식의 손이 뒤로 튕겨 나갔고, 박유찬이 차가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네 명성이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되지.” “아니…저는 정말 그런 게 아니라…” 당황한 강유식의 모습에 박유찬은 통쾌한 한편으로 뭔가 욱하는 기분이 계속해서 밀려 올라왔다. “뭐가 아니라는 거냐! 내 앞에서 잔을 깨부수며 위협을 한 것도 모자라 노블레스 길드의 이름을 깎아내린 주제 끝까지 부정하겠다는 거냐!”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이상한 추측은 그만하시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치는 강유식의 모습에 박유찬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고, 뒤쪽에 대기하던 수하에게 은밀하게 신호를 보냈다. “지금 제게 이러는 것도 모두 안설하 씨와 제가 가까워서 그러시는 것 아닙니까!” 강유식의 한 마디에 모든 생각이 끊어졌다. “…뭐?” “제 말이 틀렸습니까! 지난번에 뉴스카이빌딩에서도 갑자기 폭언을 퍼부으셨고, 이번에도 그렇고. 아무리 안설하 씨가 차갑게 대하신다고 해도 제게 이러실 권리는 없습니다!” 지금 외치는 이야기에 대응법은 간단했다. “너…너…” 그 알 수 없는 충동에 박유찬은 동요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눌러 참았다. “애초에 당신과 안설하 씨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빠악! 강유식의 외침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닥쳐…닥쳐!!!” 빠악! 퍼억! 강유식을 덮친 박유찬이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둘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얼굴을 마구 후려쳤다. “안설하는 내 여자다! 네놈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내 것이 되었을 거란 말이다!!!” 헌터들을 뿌리친 박유찬이 다시 달려들어 멱살을 붙잡아 들어 올렸고, 코피가 터져 엉망이 된 강유식의 얼굴이 보였다. “…?” 그 모습을 본 순간. 박유찬은 조금 전까지 끓어오르던 머리가 완전히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우드득! 멱살을 붙잡고 있던 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였다. “?!!” 처참하게 비틀린 팔에 박유찬의 머릿속에 새하얗게 물들었고, 그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려 했다. “박유찬.”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들려온 싸늘한 부름. “아…으아…” 속이 매스껍고 눈물과 침이 흐르며 바지가 축축해진다. 추한 꼴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몸을 주체할 수가 없다. 푸욱! 수백 토막으로 잘린 자신의 몸이 눈앞에 보였다. “으아악! 으아아아악!!” 괴성을 내지른 박유찬이 미친 듯이 몸을 비틀며 안설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됐어요…” 강유식이 안설하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정도면…됐어요. 그만 하세요.” “…알았어요.” 그 한 마디에 살의를 거둔 안설하가 팔을 놓았고, 그대로 박유찬이 바닥을 나뒹굴며 주저앉았다. “흐억…커헉…” 침을 질질 흘리며 겨우 숨을 몰아쉬고 있는 박유찬. 그 모습을 본 강유식은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내면서 바라보았다. “역시…누군가에게 저주를 받으셨군요.” “저주?” “누가 여기서…”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회장이 어수선하게 변했고, 강유식은 그 혼란이 잠시 퍼지기를 기다린 다음 이야기를 이었다. “조금 전 박유찬 씨는 흥분했을 때. 저주내성 스킬이 없었다면 몰랐을 정도로 매우 은밀한 저주가 저희 둘에게 날아왔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저는 다행히 저항에 성공했지만, 아무래도 박유찬 씨는 거기에 휘말려버린 모양입니다.” 강유식의 이야기에 회장에 모인 이들이 모두 굳은 표정을 했다. 자신들이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저주라니. “그리고 저는 그 저주가 누구에게 연결되어있는지 똑똑히 봤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저 사람입니다.” 강유식의 손을 따라 모두의 시선이 따라갔다. 그리고 지명된 사내. 노블레스 길드의 김원형 비서실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저는 아닙니다! 제가 왜 강유식 생도와 박유찬 도련님에게!” 김원형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내저었고, 강유식은 단호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당신에게 저주가 연결된 것을 똑똑히 봤습니다. 이건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건다는 이야기에 김원형을 바라보는 헌터들의 표정이 살짝 싸늘하게 변했다. “아, 아냐. 난…” 실제로 멀리서 이모탈 드림을 발동시켰던 김원형이 당황하며 뒷걸음질 치던 순간. 투욱! 어깨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새하얀 도복을 입은 사내가 앞을 가로막았고, 진중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죗값을 치르십시오.” 후웅! 그 말과 동시에 김원형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고, 그대로 양팔과 다리가 비틀어 하나로 묶인 채 바닥에 쓰러졌다. “!!” 사지에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지는데도 벌려지지 않는 입. 고통스러워하는 김원형의 모습을 멀리서 본 박유찬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가…뭐가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자신의 심복인 김원형이 저기서 저렇게 제압됐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넘겨야만 한다. “충격이 크시겠죠. 부상도 심하니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모르는 척 박유찬이 물어보자 강유식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희 둘에게 저주를 걸어 분란을 일으키도록 유도한 겁니다. 앞서 정원에서도 이상한 일이 있었는데…아마 그때부터 밑 작업을 했던 것 같습니다.” “!” 강유식의 이야기에 박유찬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기서는…저 이야기를 따라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안설하 뿐만 아니라 미래에 누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마…맞습니다. 지난번에 뉴스카이빌딩에서도 그렇고 이상하게 감정이 동요하는 일이 늘었었는데 설마 저 녀석이…” “!!” 김원형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뭔가 외치려 했지만, 박유찬은 그 시선을 외면하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박유찬 님의 누명을 완전히 벗겨드릴 테니까요.” “고, 고맙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강유식이라면 이를 갈았던 박유찬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감사를 표할 수가 없었다. “별말씀을.” 그 진심이 담긴 인사에 강유식은 피를 닦아내는 척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며 씩 웃었다.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박유찬’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A급으로 판정합니다.]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 “서로 도와가며 사는 거죠.” [채무자 ‘박유찬’ 강제집행에 들어갑니다. 스탯 ‘근력’을 50징수합니다. 육체에 적용되어 총 63이 증가합니다.] [채무자 ‘박유찬’ 강제집행에 들어갑니다. 스탯 ‘내구’를 50징수합니다. 육체에 적용되어 총 57이 증가합니다.] [채무자 ‘박유찬’ 강제집행에 들어갑니다. 상태이상 ‘마력폭주’.] [채무자 ‘박유찬’ 강제집행에 들어갑니다. 상태이상 ‘광화’.] [채무자 ‘박유찬’의 채무가 모두 납부되었습니다.] “으…으아아악!!” 갑작스럽게 괴성을 내지른 박유찬이 피거품을 물며 강유식에게 달려들었고,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걱! 그리고 누구보다도 빠르게 안설하의 손이 움직였다. “크아아악!” 손날에 팔과 다리의 힘줄이 모조리 잘려나간 박유찬이 바닥을 나뒹굴며 괴성을 내질렀다. “마력폭주와 광화현상이야. 제압해.” “알겠습니다!” 안설하의 명령에 한예지가 손을 뻗었고, 지면에서 넝쿨이 솟구쳐 오르며 박유찬의 몸을 포박했다. ‘이걸로 얼추 됐나.’ 박유찬은 깔끔하게 보내버렸고, 녀석의 심복이자 강화 인류계획을 진두지휘했던 김원형도 겸사겸사 같이 처리했다. “괜찮아요? 다친 곳 없어요?” 걱정이 가득한 안설하의 모습에 강유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어요.” “문제없기는…완전 엉망인데.” 살짝 속상한 표정을 지은 안설하는 손수건을 꺼낸 다음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뭔가 이상했으면 그냥 바로 물러서지 그랬어요.” “그게…” 정말 크게 안 다쳤다고 대답하려던 강유식은 문득 정원에서 얻었던 안설하의 채무등급을 떠올렸다. ‘고생한 것치고 좀 짜기는 했지.’ 약간 얍삽한 방법이긴 하지만 조금 정도는 더 얻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결심한 강유식은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안설하 씨를 넘기는 것처럼 보이기는 싫었어요.” “…” 강유식의 이야기에 안설하의 손이 딱 굳어졌고,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요동쳤다. [채무자 ‘안설하’의 빚이 증가합니다.] [채무자 ‘안설하’의 채무등급이 B급으로 상승합니다. 징수목록이 추가됩니다.] ‘…어?’ 너 때문에 나섰다는 말을 그냥 간단하게 던졌을 뿐인데 뭐가 어떻게 되면 채무등급이 두 단계나 껑충 뛴단 말인가? “금지.” 피를 닦아주던 안설하가 손수건으로 입술을 툭 건드렸다. “그 말. 단둘이 있을 때 빼고는 금지에요.”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활화산과 같은 미소. 그 모습과 함께 입술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피 맛에 강유식은 한 가지 깨달았다. ‘어지간하면 이쪽은 건드리지 말자.’ 호감을 이용한 채무불리기는 다른 의미로 위험하다는 것을. < 이놈의 명성이란(7) > 끝 86화 파티가 끝난 뒤. “이 뒤는 내가 알아서 할 게요.” 안설하가 본격적으로 나서자 김원형의 휘하에서 청소부로 일했던 소규모 길드들이 드러나며 살인교사 및 뇌물수수 등 혐의가 커져갔다. “이번 사건에 대해 노블레스 길드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음을 이 자리에서 밝히며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온 힘을…” 박유찬의 아버지이자 노블레스 길드장인 박정훈은 기자회견을 열면서까지 상황을 진화하려 했고, 실제로 꼬리를 잘 잘라뒀기에 크게 번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어, 마법의 핵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암기한 대본을 따라 강유식이 발표를 끝마쳤고, 강의실에 홀로 앉아있던 반혜영은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완벽해.” “흐아…” 반혜영의 오케이 사인에 강유식은 한숨을 내쉬며 단상에서 내려와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연습인데 좀 살살해주시면 안 됩니까?” “실전 같은 연습에 살살이 어디 있어. 그리고 잘만 대답했으면서 무슨 엄살이야.” “머리 쥐 나는 줄 알았습니다. 진짜로.” 그나마 페르스발의 연산력이 있어서 이 정도지 없었다면 한참은 더 버벅댔을 것이다. “나중에 발표 때 봐봐. 별 말 같지도 않은 트집 잡으면서 늘어지는 영감탱이들 만나면 나는 천사처럼 보일걸?” “흐음…천사?” “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물끄러미 바라보는 강유식을 툭 때린 반혜영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너 요즘 막 기어오른다?” “기어오르는 게 아니라 가까워진 거죠.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해요.” “말은…” 흘겨보면서도 싫지는 않은지 피식 웃은 반혜영이 뭔가 떠올린 듯 강유식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미국은 언제 넘어갈래? 일단 학회 발표는 8월 10일인데.” 반혜영의 물음에 강유식은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대답했다. “8월 3일 괜찮아요?” “이틀 뒤라…상관은 없는데 뭐 때문에?” “8월 5일 날 하이코스트에 VIP 경매가 열린다고 해서요. 거기에 한 번 가볼까 싶어서요.” “…거길 간다고?” 강유식의 이야기에 반혜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돈은…뭐, 너 정도면 괜찮을 테고. 초대장은 있어?” “물론 구해뒀죠.” 예전이라면 조금 고생했겠지만, 명장의 대주주가 된 지금은 조금만 힘을 써도 구할 수 있었다. 준비도 모두 끝내둔 강유식의 모습에 반혜영이 살짝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뭘 사려고?” “그냥 구경이나 해보려고요. 나중에 종종 들리게 될 것 같아서.” 물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유식은 이미 이번 경매에서 살 물건을 정해둔 상태였다. ‘원한의 실.’ 약 5년 뒤. 경매에 나온 다른 물품과 공명하여 하이코스트 경매장을 반파시키고 수천 마리의 벤시를 풀어 뉴욕을 뒤집어놓았던 악성재고. ‘이름부터가 딱 페르스발 전용이야.’ 안드바라나우트의 사념으로 절반만 해제된 봉인. 그 남은 절반을 채우기 위해 딱 봐도 사념이 넘칠 것 같은 원한의 실을 사기로 한 것이다. ‘안 돼도 뭐…벤시폭탄으로 쓰지 뭐.’ 그때 공명을 일으킨 물건이 뭔지는 알고 있으니 정말 뭣하면 마음에 안 드는 놈들 은거지에다가 냅다 던져버리면 그렇게도 써먹을 순 있으리라. “알았어. 그럼 8월 3일 비행기로 잡아둘 테니까 너도 짐 챙겨둬.” “예. 선생님은 가시면 약속 있으세요?” “아니. 딱히 없는데…왜?” 의아해하는 반혜영의 모습에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시간 나면 같이 관광도 하고 그러려고 했죠.” “…” 강유식의 이야기에 반혜영이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크흠. 뭐…확실히 너는 뉴욕 초행이니까 관광도 하고 그러는 좋겠지. 가고 싶은 곳들 정리해둬. 가이드 해줄게.” “예. 유럽 때처럼 둘이서 잘 놀아보죠.” “그, 그렇지…둘이서…” 살짝 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반혜영의 모습에 강유식은 의아해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그래. 조심히 가.” 강의실에서 나온 강유식은 숙소에 들러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학교
근처에 있는 번화가로 향했다. ‘오래 살고…아니, 회귀하고 볼 일인가.’ 실내에서뿐만 아니라 바깥에서도 차시현의 사복을 볼 수 있다니. 신기한 표정을 지은 강유식은 곧장 다가갔다. “미안해요. 좀 늦었죠?”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습니다.” 뻔히 눈에 보이는 거짓말에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그래요? 기다린 만큼 분위기 좋은 곳으로 갈까 싶었….” “1시간 32분 정도 기다렸습니다.” “…” 차시현의 즉답에 강유식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엄청 좋은 곳으로 갑시다.” 강유식은 차시현과 함께 예약해둔 일식집으로 향했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저…가격이 조금 비싼 것 같습니다만…” “가격은 신경 쓰지 마세요. 오늘은 지난번에 답례로 사드리는 거니까요.” “그래도…” “그리고 저 복스럽게 먹는 사람이 좋아요.” “2인 메뉴로 시키겠습니다.” 즉답하는 차시현의 모습에 강유식은 그대로 주문했고, 식사를 하면서 취미생활 같은 평범한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사진은 언제 보여줄 거예요?” “좀 더 잘 찍을 수 있게 되면 보여드리겠습니다…” “인형은요?” “그, 그것도 잘 만들 수 있게 된다면…” 그렇게 좋은 분위기 속에서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학교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잘 먹었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혹시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나 걱정했었거든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하는 차시현의 모습에 강유식은 문득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최근에 좀 너무 많이 부려먹기도 했고…한 번 정도는 속을 떠봐야 하나.’ 아무리 차시현의 채무가 남들보다 월등할 정도로 많은 편이라 해도 소홀하게 대했다가는 어느 날 갑자기 채무가 대폭 깎일지도 모른다. “차시현 씨.” “예?” “혹시 뭔가 원하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강유식의 질문에 차시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원하는 것 말씀입니까?” “예. 오늘 식사로 끝내기에는 지난번에 신세 진 게 너무 커서요.” 실제로 환수용 서약서는 아직 개발이 안 된 상태라 그렇지 회귀 전 기준으로만 잡아도 규격에 따라 몇십 억까지 올라가는 물건이었다. “…” 갑작스러운 제안에 차시현은 우두커니 선 채로 생각에 잠겼고, 이내 강유식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싶습니다.” “네?” 인지극대화가 있는데도 안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 “강유식 님과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저돌적인 부탁에 강유식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차시현은
저질렀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확실히…방학동안 차시현 씨하고 차분하게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기는 하네요.” “…” “여행이나 갈까요?” “!” 강유식의 대답에 차시현의 두 눈이 번쩍 떠졌고,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 정말입니까?” “물론이죠. 여행정도야 뭐, 제가 이곳저곳에 받아둔 돈이 많아서요.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그, 그렇다면…저도 좋습니다.” 수줍게 웃는 차시현의 모습에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음. 그럼 같이 가죠. 미국.” * “…” “…” “…?” 뉴욕의 JFK 공항의 입국게이트로 나온 강유식은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미에요?” “…” “…” 두 사람은 대답 대신 싸늘한 표정으로 응시했고, 그 묘한 압박에 강유식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흠. 사람이 많네…” 원래 이렇게 이유를 모를 때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그런 강유식의 모습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숙소나 가자.”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묘하게 죽이 맞은 반혜영과 차시현이 앞장서서 캐리어를 끌며 나갔고, 강유식은 그 뒤를 조용히 따라나섰다. ‘이번 발표에 대한 기대가 크긴 큰 모양이네.’ 이드마법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이쪽도 공개되면 한바탕 난리가 날 테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지금부터 학회장 보러 갈 건데 너도 갈래?” “학회장이라면…줄리어스 르메이?” “맞아. 지금 1층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어.” 반혜영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줄리어스는
학회장으로 나쁜 이는 아니었지만, 마법사로서는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몇 분 만에 맨해튼의 3분의 1을 불바다로 만들었지…’ 다행히 재앙급 마인으로 성장하기 전에 토벌하여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어쨌든 최후는 썩 좋은 인물이 아니었다. ‘흐음. 뭐 만나서 나쁠 건 없나.’ 힘을 탐하다가 마인으로 변질된 양반이니 맛이 가기 전에 관계를 잘 만들어두면 유용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그의 마법이라면 꽤 흥미가 깊다. “예. 따라갈게요.” “좋아. 그럼…너는?” 반혜영의 물음에 차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남아있겠습니다.” “그래. 그럼 금방 다녀올 테니까 쉬고 있어.” 두 사람은 곧장 방에서 나와 호텔의 1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내려와 구석에 위치한 자리로 향했다. “윽…” 몇 시간을 태우고 있었는지 재떨이에 수북하게 쌓인 담뱃재와 지독하게 풍기는 담배냄새. 그에 눈매를 찌푸린 반혜영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후우웅! 그러자 담배연기가 바람을 타고 환풍기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빈 풍채 좋은 중년인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군. 아크메이지.” “그렇게 피면 헌터도 골로 가요.” “괜찮다. 시간 나는 대로 정화도 받고 있으니. 그보다…” 강유식을 향해 고개를 돌린 중년인, 줄리어스가 두 눈을 반짝였다. “자네가 강유식인가?” “예. 처음 뵙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강유식의 모습에 줄리어스가 가만히 바라보더니 새로운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하이드룬?’ 회귀 전에도 몇 번밖에 사용해보지 못한 물건이지만, 강유식은 그 효과나 사용자들의 공통점을 알고 있었다. ‘이 인간 몸이 맛탱이가 갔었어?’ 하나같이 자신만큼 심각하거나, 그보다 더한 수준으로 몸이 망가진 이들. 송장을 살아 움직이게 해주는 불로연초가 바로 저 하이드룬이었던 것이다. ‘이게 뭔…잠깐만.’ 회귀 전에도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강유식은 뭔가가 머릿속에 번뜩하고 떠올랐다. “자네.” 하이드룬을 입에 문 줄리어스가 씩 웃었다. “나랑 마법 하나 만들어보지 않겠나?” < 이건 또 내 전문인데(1) > 끝 87화 “…” 마법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말 그대로, 협업을 요청하는 거다.” 딸깍! 라이터를 꺼낸 줄리어스는 입에 문 하이드룬에 불을 붙였고, 그대로 한 모금 빨아들이며 연기를 흘려냈다. “사람 앞에서 담배 좀 피우지 말라니까.” “어쩔 수 없다. 안 피면 죽으니까.” “피면 죽거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 반혜영의 모습에 강유식이 힐끔 바라보았다. ‘역시 하이드룬은 모르나 보네.’ 자신이야 피워보기도 했고 인지극대화로 후각도 민감하니 바로 알아차렸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평범한 담배로 보일 수밖에 없다. ‘자격이 없으면 얻을 수도 없으니까 말이지.’ 회귀하고 나서 하이드룬을 찾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구하고 싶다고 해도 지금처럼 건강한 몸으로는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네는 어떤가?” 재차 물어보는 줄리어스의 모습에 강유식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정확히 어떤 마법입니까?” “흥미는 있는 모양이군.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테니 우선은 앉게.” 고개를 끄덕인 강유식은 곧장 자리에 앉았고, 반혜영은 바람의 막을 몸에 두른 다음 그 옆에 앉았다. “일단 규격은 극대. 속성은 불꽃으로 화력 위주 마법을 구상 중이다.” 복잡한 효과 없이 오직 한 방. 줄리어스의 성격을 보여주는 구조에 강유식이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단순히 위력을 높이시려는 겁니까, 아니면 불꽃 자체를 개조하시려는 겁니까.” “흐음. 좋은 부분을 짚는군.” 연기를 내뱉은 줄리어스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두 가지를 복합적으로 다룰 생각이다. 위력을 증대시키는 마법식을 구축하면서 동시에 그걸 극대화할 불꽃도 새롭게 만들어야겠지.” “지금 진행도는 얼마나 됩니까?” “이제 막 뼈대를 만들었을 뿐이다. 만들어진 건 거의 없다고 봐도 되겠군.” 줄리어스의 대답에 강유식은 그가 계획하고 있는 마법이 무엇인지 대강 알아차렸다. ‘레바테인이네.’ 회귀 전에는 완성하지 못했던 줄리어스의 비전마법. ‘흐음. 이건 좀 구미가 당기는데…’ 만약 줄리어스를 도와 레바테인을 완성한다면 채무는 물론이고 강력한 위력을 지닌 비전마법도 손에 얻게 된다. ‘다만 문제는…줄리어스의 상태인가.’ 타들어 가고 있는 하이드룬을 본 강유식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회귀 전 기준이라면 줄리어스는 앞으로 10년도 넘게 더 살 수 있다. ‘지금이야 하이드룬 덕분에 어느 정도 힘을 보존하고 있다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악화될 수밖에 없어.’ 하이드룬은 시간을 연장하는 것이지 결코 낫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레바테인의 완성도 중요하지만 채무를 굴리려면 몸 상태가 더 중요해.’ 일단 차근차근 알아보기로 한 강유식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당장은…대답해 드리기가 힘들겠네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럼 차차 생각해봐라. 고민이 길어진다면 한국에 돌아간 뒤에 연락해도 상관없으니.” “감사합니다.” 언제든지 상관없다는 줄리어스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고개를 숙였고,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반혜영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용건은 이걸로 끝?” “강유식 생도에게는 그렇군.”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 같은 말투에 강유식은 자리에서 슬쩍 일어섰다. “그럼 저는 먼저 올라가보겠습니다.” “응. 먼저 가 있어.” “다음에 또 보지.” 줄리어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입구를 향해 나가던 강유식은 불현듯 떠오른 것처럼 다시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음?” 의아한 표정을 짓는 줄리어스의 모습에 강유식이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담배…혹시 무슨 메이커인지 알 수 있을까요?” 강유식의 물음에 줄리어스의 눈에서 잠시 이채가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아무렇지 않게 다 피운 하이드룬을 재떨이에 비비며 대답했다. “직접 만든 담배다. 이쪽으로 취미가 있어서.” “그렇습니까…?” 애매한 표정을 짓는 강유식의 모습에 줄리어스가 태연하게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궁금하지?” “다른 담배들과 조금 다른 것 같아서요. 비싼 담배 인가 해서 여쭤봤습니다.” 너무 깊게 들어갈 필요 없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 강유식의 대답에 줄리어스는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대답했다. “이쪽은 관심 가지지 마라. 좋을 것도 없으니.”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강유식이 그대로 걸음을 옮겨 카페 밖으로 나갔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줄리어스가 중얼거렸다. “엄청나군.” “그렇지? 내가 이런 말 하기도 그렇지만 저 녀석만큼 대단한 녀석 어디 가서 못 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이야기하는 반혜영의 자랑을 슬쩍 흘려들으며 줄리어스는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 반응…하이드룬을 구분해낸 것이 분명하다.’ S급 헌터도 구분하지 못하는 하이드룬을 단번에 알아보다니. 상상을 뛰어넘는 인지력에 줄리어스는 조금 전까지의 평가를 모두 뜯어고쳤다. ‘저 정도 잠재력이라면 반드시 힘을 빌려야 한다.’ 만약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남은 시간 안에 레바테인을 완성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뭐, 일단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고 하고.” 강유식의 자랑을 끝낸 반혜영이 가볍게 책상을 두드렸다. 후웅─ 그러자 주변의 공기가 단숨에 변하며 테이블 주변에 수십 겹의 마법진이 펼쳐졌다. 그 엄청난 마법진을 본 줄리어스는 살짝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손짓 하나로 이만한 수준의 인식 왜곡장을 펼치다니…못 본 사이에 괴팍할 정도로 성장했군.” “다 뛰어난 제자 덕분이지.” “과연. 더욱더 흥미가 가는군.” “요즘 바쁘니까 억지로 시킬 생각은 하지 마.” “걱정하지 마라. 그보다…” 주변을 살짝 둘러본 줄리어스는 품에서 편지를 꺼내 앞으로 건네주었다. 새하얀 바탕에 H라는 이니셜만 새겨져 있는 조촐한 편지. “이것 이외에는?” “딱히 없다.” “거참…좀 자주 볼 수 있고 그러면 좋을 텐데. 답답한 양반이야.”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는 반혜영의 모습에 줄리어스가 피식 웃었다. “나름의 사정이 있는 거겠지. 이해해라.” “그래야지 어쩌겠어. 매번 귀한 물건 가져다주는데.” “이번에는 무슨 물건이지?” 줄리어스의 물음에 반혜영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시선을 피했다. “그, 그런 게 있어.” “흐음. 그렇군. 하긴 제자라도 받은 만큼은 챙겨줘야지.” “뭐, 뭔 소리야. 아무튼 발표회 날 봐!” 자리에서 일어난 반혜영은 인식 왜곡장을 없앤 뒤 곧장 가버렸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줄리어스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다 새로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중증이군…” 그리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연기를 내뱉었다. * 미국에 도착하고 사흘. ‘흐음. 뭐 이 정도면 괜찮나.’ 엄청나게 비싸지는 않지만, 그래도 체면치레는 할
만큼 적당한 메이커의 정장. 무의미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본래 이런 사소한 부분도 신경 써야 뭐든지 원활하게 돌아가는 법이다. 똑똑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밖에서 들려오는 차시현의 목소리. 그에 강유식은 남은 단추를 마저 잠그며 곧장 대답했다. “들어와요.” 대답과 동시에 문이 열렸고, 강유식과 똑같은 메이커의 정장을 입은 차시현이 걸어 들어왔다. ‘그때는 바지 아니면 안 입는다고 했는데 말이야.’ 강유식이 살짝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차시현이 슬쩍 눈치를 살폈다. “뭔가 문제라도…?” “아뇨. 다시 봐도 잘 어울린다 싶어서요.” “…감사합니다.”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꾸벅이는 차시현의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었다. “넥타이만 매면 되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 그거라면…” “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슬쩍 눈치를 살피던 차시현이 앞으로 성큼 다가왔고, 그대로 손에 들려있던 넥타이를 가져가 목에 둘렀다. “다 됐습니다.” 각이라도 재둔 것처럼 깔끔하게 묶인 넥타이의 모습에 강유식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보다가 씩 웃었다. “완벽하네요.” “감사합니다…” 만족스럽게 웃는 차시현의 모습에 강유식은 옷매무새를 다시금 점검하며 물었다. “선생님은요?” “조금 전에 나가셨습니다. 새벽쯤에 돌아올 테니 먼저 주무시라고 하셨습니다.” “흠. 오늘이 그 바쁘다던 날인가 보네…” 가능하면 반혜영도 함께 갔으면 했지만 어쩔 수 없으리라. 준비를 모두 끝낸 강유식은 아쉬움을 털어내며 차시현을 바라보았다. “그럼 갈까요.” “예.” 호텔 로비로 내려온 두 사람은 미리 대기시켜둔 차를 타고 뉴욕 번화가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 하이코스트의 앞에 도착했다. ‘여전히 장난 아니구만…’ 이만한 건물을 땅값이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뉴욕 위에다 지은 것도 그렇지만 더욱더 대단한 것은 외부에서도 적나라하게 보일 정도로 견고한 저 방호시설이었다. ‘저 정도 규모 마법진이면 제어권을 탈취해도 빡세겠는데.’ 최대한 우회해서 들어가는 쪽으로 계획을 짠다고 해도 최소 일주일. 물건이 보관되어있을 창고나 이후 도주로까지 고려하면 한 달은 넘게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하긴. 안에 들어있는 물건값들이 얼마인데.’ 기본 조부터 시작해야 하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과연…듣던 대로 대단하군요.” “그렇죠?” 자신이야 회귀 전에 몇 번 봤지만 차시현은 처음이니 감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몰래 침입에만 한 달…창고나 도주로를 고려하면 몇 배는 더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생각보다 삭막한 감상평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훌륭해요.” “감사합니다.” 만족스러워하는 차시현의 모습에 강유식은
그거면 됐겠지, 라고 생각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저쪽으로 가죠.” “예.” 두 사람은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는 엘리베이터로 다가갔고, 대기 중이던 직원에게 초대장을 보여줬다.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직원과 경호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두 사람은 최상층인 6층, 그 위에 숨겨진 7층에 도착했다. 띠잉!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1층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실내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모습에 차시현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긴…정말 대단하군요.” 이번만큼은 순수하게 감탄하는 차시현의 모습에 강유식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기는 하죠.” 돈을 정말 아낌없이 쓰는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압도적인 광경. 좀 심한가 싶다가도 여기서 오가는 액수를 생각해보면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시작하려면 아직 남았으니까 중앙 홀로 가보죠.” “예.” 경매가 시작되기 전까지 참가자들이 머무르는 장소. 각종 간식거리와 음료들이 준비되어 있어 사실상 사교 회장이나 다름없었다. ‘거물이 좀 있으려나.’ 주목적은 경매에 나올 원한의 실이지만 그래도 겸사겸사 이름 있는 이들과 연결고리를 만들어두면 나쁠 것도 없다. “오늘은 하나도 안 넘겨줄 줄 알아!” “자네 물건도 아닌데 넘겨주고 말고가 어디 있나. 그리고 시끄럽다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타고 난 거라고 몇 번을 말해!” “또 그 헛소리를…!” 우렁차게 외치는 험상궂은 노인과 눈매를 팍 찌푸리는 마법사 같은 노인. “…둘 다 쪽팔려.” 수많은 참가자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다 못해 난장을 피우고 있는 그 모습에 강유식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강유식의 목소리에 세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고, 동시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어…설마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오랜만이로군.” “!!!!”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면서도 반갑게 인사하는 하인즈와
깜짝 놀라서 그냥 굳어버린 빌헬미나. “오, 오랜만이구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타오 페이가 맞이해주었다. < 이건 또 내 전문인데(2) > 끝 88화 예상치 못한 세 사람과 만난 강유식은 중앙 홀의 구석으로 가 다시금 인사를 나눴다. “이쪽은 제 동아리 부원인 차시현 씨이에요.” “차시현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차시현의 모습에 하인즈와 타오 페이가 살짝 이채를 띈 눈으로 바라보았다. “과연. 매우 뛰어난 생도로군.” “저만한 수준은 천무궁에서도 보기 힘든데…” 감탄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강유식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몇 달 만에 뵙는 것 같은데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잘 지내고 있지. 창고를 보수한 것 말고는 별달리 특별한 일도 없었으니.” 슬쩍 웃은 하인즈는 강유식의 오른팔, 그 안에 있을 아케트라브를 바라보며 물었다. “선물해준 물건은 잘 쓰고 있나?” “물론이죠. 매번 사용할 때마다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핫. 뭘 감사함까지야. 나야 그냥 ‘약속’을 지켰을 뿐인데 말일세. 매우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인즈의 강조에 옆에 있던 타오 페이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고, 살짝 기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나도 지키려고 했었어…” “누가 뭐라 했나? 그냥 ‘당연한’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괜히 까칠하게 반응하는군. 뭔가 찔리는 거라도 있나?” “끄응…” 뭐라고 대답하지 못한 타오 페이가 다시금 시선을 돌렸고, 미안해하는 그 모습에 강유식이 살짝 의외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적반하장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예상외네.’ 강유식은 타오
페이가 아이템을 넘겨주지 않는 것을 천무궁으로 직접 찾아오게 하려는 술책인 줄 알았다. ‘타오 페이가 좀 능구렁이 같아도 저렇게 저자세를 연기할 만한 인물은 못되고…그러면 정말 뭔가 사정이 있다는 건데.’ 유독 자신이나 반혜영 앞에서 이래저래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줘서 그렇지 타오 페이 정도면 전 세계에서 알아줄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다. ‘아니, 그 괴물은 아니겠지.’ 더럽게 강하긴 하지만 이런 일에 관여할 만큼 적극적인 자는 아니다. 주석도 이런 일에 압박할 리가 없고, 결국 남은 건 한 명. ‘천무궁주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천무궁주가 타오 페이가 약속한 물건을 보내는 것을 만류하고 있다. 꾸욱 “음?” 만날 때부터 옆에 착 달라붙어 있던 빌헬미나가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고,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오…” “오?” “오, 오랜만이야. 오빠.” “…” 예상치 못한 호칭에 강유식이 멍한 표정을 지었고, 빌헬미나가 고개를 푹 숙이며 팔에 달라붙었다. “이해해주게. 자네가 간 뒤로 보고 싶다고 얼마나 칭얼거렸는지 달래느라 진 다 빠졌었네.” “그랬습니까?” “하, 할아버지…!” 새빨개진 얼굴로 외치는 빌헬미나의 모습에 살짝 웃음을 터트린 하인즈가 미소를 지었다. “경매 전까지만 그쪽 팔 좀 양보해주게.” “그 정도야 물론이죠.” “으으…” 부끄러워하면서도 소매를 꽉 잡는 빌헬미나의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고 있을 때. 여태까지 눈치를 살피던 타오 페이가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너는 뭐 사려고 온 거냐?” “아, 딱히 정해 두지는 않았고. 한 번 구경이라도 해보려고 왔습니다.” “하긴 들어보니 이번에 나올 물건들은 다 시원찮더군. 나도 이번은 학회도 겸해서 온 거다.” “나도 그렇다네.” 산책 나온 것처럼 이야기하는 둘의 모습에 강유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조금 전에는 왜 그렇게 다투신 겁니까?” “저놈이 사려고 하는 건 사야 하니까. “저 녀석이 사려는 건 사야 해서 그러네.” “…” 서로의 안목을 믿는 건지, 아니면 그냥 승부욕인 건지 알 수 없는 모습에 강유식은 어처구니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떠올라 물었다. “이번 물건들이 영 시원찮다고 하셨는데…그럼 두 분은 오늘 나올 물건들이 뭔지 알고 계십니까?” “뭐, 우리들은 단골이니까. 원래는 비밀이지만 대충 들려오기는 하지.” “일단은 다 알고 있다네.” “그럼 혹시 오늘 뭐가 나오는지 알 수 있을까요?” 원한의 실이 악성재고로 남아있다는 건 알지만, 혹시라도 오늘 안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원래 이런 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물건을 직접 보고 사는 게 재미일세.” “암 그렇고말고. 원래 초행일 때 즐겨야해.” “…” 합심해서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강유식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고 있을 때. 타오 페이가 슬쩍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뭐, 그래도…지뢰는 피해야 하니까. 그것만 말해주지.” “지뢰요?” “그래. 겉은 번지르르 해보여도 꽝인 놈들이 있거든. 특히 이번에는 악성재고가 둘이라 그건 무조건 피해야 해. 덤터기 당하니까.” 악성재고가 둘이라는 말에 강유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기억에는 원한의 실이 다였기 때문이다. ‘남은 하나는 뭐지?’ 강유식이 의문에 휩싸여 있을 때. 타오 페이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제일 먼저 피해야 할 건 원한의 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티르빙이다.” “…티르빙?” 타오 페이의 이야기에 강유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다시금 물었다. “그…혹시 마검 티르빙입니까?” “어? 뭐야. 알고 있었냐? 말해줄 필요도 없었구만.” 김빠진 표정을 한 타오페이의 모습에 강유식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이야기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걸 어떻게 몰라.’ 마검 티르빙. ‘이건…’ 원한의 실만 먹고 빠지려 했지만 저런 게 차려져 있으면 무시할 수는 없다. “참고하겠습니다.” * 예정된 시간이 다가오며 경매장의 문이 열렸고, 오페라 극장과 비슷한 구조로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로 사람들이 차례차례 들어왔다. “흐음…이번 초행자는 두 명뿐이네?” “예. 강유식과 차시현이라는 한국인인데 그중에 강유식은 최근에 가장 유명한 생도입니다.” “아, 강유식.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네.” 참가자 목록을 다시금 살펴보던 마이클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기 중이던 직원에게 물었다. “강유식 그 생도 마법계열이었지?” “예? 예…일단은 그렇습니다만.” “흐음…그렇단 말이지…” 마이클이 입술을 슬쩍 올리며 직원을 바라보았다. “원한의 실이랑 티르빙. 둘 다 순번 뒤로 미뤄놔.” “예? 어차피 안 팔릴 건데 앞에 걸어놓는 게…” “팔릴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 미소를 지은 마이클의 모습에 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괘, 괜찮겠습니까? 그 생도 거물들하고 연결고리가 많다던데…” “강매도 아닌데 걱정할 필요 없어. 본래 가격보다 좀 싸게 해줄 테니까 나쁜 거래는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다른 경매품은 오너가 지정된 가격으로 판매하지만 악성재고인 원한의 실과 티르빙 같은 경우는 진행자인 마이클의 재량에 맡겼다. “자. 슬슬 시작하자고.” 자리에서 일어선 마이클이 밖으로 나가 단상 위로 올라섰고, 주변의 조명이 살짝 약해지며 그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이번에도 저희 하이코스트를 찾아주신 고객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오늘 출품될 물건들에 대해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마이클의 신호에 따라 경매에 나올 물건들의 이름과 형태가 차례대로 나열되었고, 그 모습을 본 참가자들이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호구 물기잖아?’ ‘타켓이 될 만한 게…설마 강유식?’ 상황을 파악한 VIP들이 28번 좌석에 앉아있는 강유식을 곁눈질로 바라보았고,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하인즈와 타오 페이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뭐, 문제는 없겠군.’ ‘이미 말해줬으니 저걸 사려고 하진 않겠지.’ 앞서 경고해주길 잘했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편안한 표정을 지었고, 강유식도 주변의 시선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유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마이클은 익숙하게 물품들을 소개하며 경매를 진행했고, 초반에 나오는 물건들은 비교적 빠르게 낙찰되었다. ‘아직까지 팻말을 한 번도 안 들었군.’ 여유롭게 지켜보기만 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딱 구경만 온 초행이었는데 마이클은 초조해하는 대신 슬쩍 웃었다. ‘이제 시작해볼까.’ 어느덧 경매가 중반에 접어들고, 마이클은 입술에 침을 바르며 입을 열었다. “경매가 벌써 중반에 접어들었군요. 아실 분들은 아시겠지만 지금부터가 바로 경매의 묘미, 진짜배기들이 나오는 시간이지요.” 거창한 소개에 참가자들이 실소했고, 그 반응을 무시하며 진행을 이어갔다. “그럼 분위기를 전환할 첫 번째 물품. 원한의 실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이클의 신호에 무대 위 조명이 화려하게 움직였고, 직원이 끌고 온 케이스 쪽으로 단숨에 집중되었다. 우우웅 반투명한 케이스 안쪽에서 거무튀튀한 기운을 흩뿌리며 공중에 떠 있는 동그란 구. “이번 물품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무려 AA급 재료 아이템. 강력한 마력이 서려있으며 뛰어난 마법사분들이 조사했지만 아직 밝혀내지 못한 미지의 물품이지요.” 마이클의 설명만 들으면 흥미가 갈 수밖에 없는 물건으로 보였는데 실제로 하나하나 자세히 까보면 180도 달라졌다. “원한의 실. 입찰가 1,000만 달러부터 시작하겠습니다!” AA급 재료아이템이 1,000만 달러, 한화로 약 118억 원. 지난번 입찰가가 1,500만이었던 걸
따지면 꽤 싸졌지만, 원한의 실이 어떤 물건인지 아는 참가자들은 외면했다. ‘살까?’ ‘저 정도면 구미가 당길 만도…’ 기대를 담은 다른 참가자들의 시선을 본 하인즈와 타오 페이는 피식 웃었다. ‘시간낭비로군.’ ‘이미 다 말해뒀는데 헛짓거리한다.’ 그렇게 두 사람이 여유롭게 보고 있을 때. “1,000만.” 강유식이 산뜻하게 팻말을 들어 입찰했다. “?!” “!!” 그 모습에 하인즈와 타오 페이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고, 마이클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1,000만 달러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당연하게도 입찰자는 없었고, 마이클은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세라 냅다 낙찰시켰다. “원한의 실. 28번 손님에게 1,000만 달러로 낙찰됐습니다!” 제대로 호구가 찾아왔음을 깨달은 마이클은 곧장 다음 물건을 가져왔다. “수많은 검사의 손을 거쳐 간 희대의 마검 티르빙! 이것 역시 AA급 무기이며 상대에게 강력한 저주의 낙인을 남길 수 있어 검사뿐만 아니라 마법사들에게도 매우 뛰어난 효용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기인데 여러 사람을 거쳐 갔다는 것부터가 매우 불길한 뜻이었고, 확인되지 않았지만 저주의 낙인이 주인에게 사용된다는 목격담도 있었다. “마검 티르빙. 입찰가 1억 달러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억 달러, 한화로 약 1,180억. 지난번 입찰가인 2억 달러에 절반 값이지만 사정을 아는 참가자들은 당연히 외면했고. “1억.” 강유식은 이번에도 냅다 팻말을 들었다. “그, 그만…!” “저놈은 뭘…!” 그 모습에 하인즈와 타오 페이가 당황하며 소리쳤지만 소란을 예상한 마이클은 시설 내부의 방음마법을 발동시켜 소리를 묻어버린 다음 외쳤다. “1억 달러. 더 없으십니까!!” 당연히 나올 리가 없었고, 마이클은 환희에 찬 표정으로 외쳤다. “마검 티르빙. 28번 손님에게 1억 달러로 낙찰되었습니다!!!” 요 몇 년 동안 하이코스트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던 악성재고. 지긋지긋하던 물품을 팔아버린 마이클은 속으로 환호를 내지르며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고맙다 호구야!’ 그리고 미래의 S급 마검과 AA급 재료 아이템을 거저먹은 강유식도 미소를 지으며 마이클을 바라보았다. ‘잘 받아갑니다.’ * 경매가 끝난 뒤. 우웅!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충격흡수진. 모든 준비를 끝낸 강유식은 하이코스트에서 받아온 두 개의 가방을 꺼냈다. ‘이것도 나중에 써먹어야겠네.’ 봉인부를 조심스럽게 떼어낸 강유식은 우선 원한의 실이 들어있는 가방부터 열었다. 스으으으 가방을 열기 무섭게 주변에 자욱하게 퍼져나가는 안개. 닿자마자 소름이 올라오는 게 예사롭지 않았는데 그 감각에 강유식이 슬쩍 웃으며 완전히 열었다. 우우웅 검은 기운을 흩뿌리고 있는 원한의 실. 그 모습을 본 강유식은 확신을 가지며 페르스발에게 물었다. ‘페르스발. 사념체는!?’ -없습니다. 로드. ‘…’ 단칼에 나온 대답에 강유식이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페르스발을 내려다보았다. ‘없다고?’ -예. 원한이 서리 물건이기는 하지만, 사념체라고 할 만한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호환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조금도?’ -예. 조금도 없습니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강유식이 김빠진 표정으로 원한의 실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건 폭탄으로 써야하나…’ 성능이야 나쁘지는 않지만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에 강유식이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로드.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그보다는 조금 전까지 함께 계셨던 레이디께 드리는 것이 괜찮아 보입니다. ‘차시현?’ -예. 그렇습니다. 페르스발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나중에 한 번 줘볼게.’ -감사합니다. 로드. 원한의 실이 들어있는 상자를 다시 닫은 강유식은 티르빙이 들어있는 상자의 봉인부를 벗겨냈다. 후우웅 원한의 실과는 차원이 다른 한기. 제대로 저주받아 있는 것 같은 그 감각에 강유식은 입맛을 다시며 내려다보았다. ‘이건 제대로 쓰려면 손도 많이 가는데…’ 물론 방법을 아는 것만 해도 큰 메리트지만, 지금 당장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아쉬움을 달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호, 호환 가능합니다. 로드! “뭐?” 티르빙과 페르스발에서 거무튀튀한 빛이 터져 나왔다. < 이건 또 내 전문인데(3) > 끝 89화 “…?” 뒤에서 느껴진 이질감에 반혜영이 고개를 돌렸고, 빌딩 사이로 보이는 호텔을 바라보았다. ‘착각이었네.’ 지금쯤이면 경매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왔을 테니 사 온 물건이 있으면 들떠서 이것저것 하다가 감지 마법에 영향을 줬을지도 모르리라. ‘여기인가.’ 곳곳에
녹이 슬어 열릴 것 같지도 않은 문. 투웅─ 기묘한 파문이 문고리를 시작으로 건물 전체에 퍼져나갔고, 8층 정도 되던 낡아빠진 콘크리트 건물이 2층 남짓한 작은 카페가 되었다. ‘여전히 말도 안 되는 마법이야.’ 속으로 혀를 내두른 반혜영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딸랑~ 청명하게 울리는 종소리와 희미하게 풍기는 커피냄새. “아이스 아메리카노.” “네네~” 활기찬 목소리가 부엌 안에서 울려 퍼졌고, 잠시 후 30대 정도로 보이는 여인이 커피를 들고 좌석으로 다가왔다. “여기 있습니다~” 한 줄기로 묶어 내린 긴 머리와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앞치마를 두른 건강미 넘치는 모습. “이번에는 여자야?” “뭐, 그렇게 됐네.” “머리 까진 50대 아저씨였다가 젊은 여자로 바뀌는 건 좀 아니다 싶은데…” 커피를 홀짝이며 경멸스럽게 바라보는 반혜영의 시선에 여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공간의 주인이 그녀인데 어떡해. 누누이 말하지만 이건 내 선택이 아니라고?” “그럼 원하는 인물상이 있는 공간으로 하면 되지. 본인 마법도 제대로 못 다루면서 S급 헌터라는 게 말이나 돼?” 반혜영의 핀잔에 미소를 지은 여인, 미국의 S급 헌터 허미트(Hermit)가 턱을 괴며 바라보았다. “너는 늘 이걸 마법이라고 부르는구나.” “이게 마법이 아니면 뭔데?” “글쎄…기적?” 피식 웃는 허미트의 모습에 반혜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았다. “기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 내가 이 마법 못 쓴다고 놀리는 거지?” “그럴 리가~ 전부 관점의 차이라고.” “…두고 봐. 조만간 확실하게 익힌 다음에 네 앞에서 펼쳐줄 테니까.” 이를 갈며 이야기하는 반혜영의 모습에 허미트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지난번보다 자신감이 넘치네?” “실마리를 찾았거든. 아직은 확인 단계지만 이제는 긴장하는 게 좋을 거야. 완성하면 우선 가면만 쓰고 다니는 네 얼굴부터 볼 테니까.” “흐음~ 사랑하는 제자님이 좋은 깨달음을 줬나 보네.” “그렇…뭐,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소리를 빽 지른 반혜영의 모습에 허미트가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스승이 제자 사랑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잖아? 뭘 그런 거로 화를 내실까.” “…너 지난번 보다 더 재수 없어.” “여기 주인 성격이 좀 고약하거든.” 피식 웃은 허미트가 옆으로 손을 뻗더니 언제 꺼냈는지도 보지 못한 책 한 권을 탁자 위에 올렸다. “자. 찾아달라고 했던 S급 스킬북.” 허미트가 건넨 스킬북을 가져간 반혜영은 자신이 요구했던 물건이 맞는지 확인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힘들게 구한 거니까 잘 써야 해. 맥없이 주지 말고.” “시끄러…그래서 이번 대금은 뭔데?” 반혜영의 물음에 허미트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는 없어.” “없다고?” “응. 원래는 있었는데…이번에는 아무래도 누가 대신 내줄 거 같아서. 마법 연구나 열심히 해.” 이만한 물건을 넘겨주면서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니.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에 반혜영이 허미트를 바라보았다. “매번 물어보는 거다만…넌 도대체 뭐 하는 녀석이야?” 반혜영의 물음에 허미트가 슬쩍 웃었다. “카페 주인. 지금은.” * 방안을 가득 채웠던 빛이 조금씩 사그라들었고, 반사적으로 장벽을 펼쳤던 강유식은 눈앞을 바라보았다. “오…” 전체적인 형태는 크게 변함이 없지만 새롭게 생겨난 붉은색 보석. 전보다 화려하기도 하고 묘한 위압감이 흘러나오는 그 모습에 강유식이 기대를 담아 페르스발을 불렀다. ‘페르스발?’ -예. 로드. 이전과 크게 변함이 없는
목소리. ‘봉인 풀린 거 맞지?’ -그렇습니다. 로드. ‘정확히 뭐가 달라졌는지 설명해봐.’ -우선 연산력을 비롯해 마력 증폭, 그리고 보조기 조정 등 모든 기본 성능이 강화되었습니다. 기존의 약 2배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2배라고?” 페르스발의 대답에 강유식은 자신도 모르게 육성으로 대답했다. 안 그대로 준수하던 페르스발의 성능이 지금의 2배로 상승하다니. -그리고 봉인 해제에 사용된 티르빙과 안드바라나우트의 특성에 본체의 능력이 어우러져 한 가지 스킬이 생성됐습니다. ‘스킬?’ -왼손 검지를 펼쳐보시지요. 강유식은 시키는 대로 왼손의 검지를 펼쳤고, 페르스발이 희미하게 달아오르더니 손가락 전체가 빛으로 물들었다. “허…” 죄다 칙칙하거나 어두컴컴한 아이템들에서 나온 능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얀 빛. -스킬의 이름은 ‘죄인의 낙인’으로 지정한 상대의 능력을 제한하고 위치를 알 수 있는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흐음. 제한의 정도는?’ -상대의 능력이나 무구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2할 정도의 능력치와 일부 스킬 사용을 제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치 추적의 한계는?’ -거리의 제한은 없으며 특수한 공간에 들어갔을 경우에만 감지할 수 없어집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오는 순간 재탐지가 가능합니다. 설명이 거듭될수록 가슴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낀 강유식은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사용 자체에 대한 제약은 있어?’ -한 번에 다섯 명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없습니다. ‘다섯 명…’ 새롭게 생긴 ‘죄인의 낙인’에 대한 곰곰이 생각하던 강유식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이건 S급이다.’ 이만한 성능이면 AA급은 충분히 넘고 S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상상을 초월하는 효과에 강유식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봉인이 다 풀리면 도대체 얼마나 강해지는 거야?’ 회귀 전에도 10대 무기 중 손꼽히는 마검이기는 했지만 봉인 하나 풀었는데 S급 수준이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터무니없는 수준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답을 해드릴 수 없습니다. ‘본래 힘을 알기에는 봉인이 덜 풀렸어?’ -그게 아닙니다. 제가 최종적으로 가지게 될 힘은 앞으로 로드께서 호환시키는 장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아.’ 페르스발의 이야기에 강유식은 그제야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정석이 아니었구나?’ 회귀 전에는 타천의 계시가 정석적인 각성법을 통해서 ‘마검 페르스발’로 만들어냈다면 강유식은 호환이 되는 장비들을 끼워 맞춰 다른 방향으로 개화하고 있다. ‘그런 거라면…지금 성능도 이해할 수 있겠군.’ 회귀 전에 페르스발을 각성시키기 위한 물건들은 대부분 특수한 재료 아이템들이었지만, 지금은 악명 높은 아이템들로 각성시키고 있다. ‘원하는 성능으로 커스텀만 될 줄 알았는데…그냥 미친 무기로 변하고 있네.’ 이 정도면 최종 형태 때는 어떻게 될지 상상도 안 간다. 헛웃음을 지은 강유식은 페르스발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얌전히 놓여있는 티르빙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티르빙은 뭐 달라진 거 없어?’ 페르스발의 봉인 조건은 사념체. 안드바라나우트에 있는 안드바리 같은 녀석을 얻는 것이다. -아. 그 부분에 대해서 몇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티르빙 내부에도 사념체가 있었습니다만 봉인을 풀고도 힘이 많이 남은 데다 원념도 지독해 로드께 악영향을 끼칠까 봐 내부로 끌고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흠. 그래서?’ -그래서 체내에 있던 안드바리를 이용해 티르빙의 사념체를 제어할 수 있는 목줄을 만들어뒀습니다. “…아?” 예상치 못한 대답에 강유식이 이해 못 한 표정으로 되묻자 페르스발이 곧장 설명을 이었다. -티르빙을 한 번 잡아보십시오. ‘아, 응.’ 강유식이 얌전히 놓인 티르빙의 손잡이를 움켜쥔 순간. -죽인다!! 죽인다아아!! 죽일 거야!!! 날카롭게 찢어지는 목소리와 질색하며 소리치는 안드바리. 그 정신 사나운 상태에 강유식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티르빙을 내려다보았다. -안드바리의 저주를 통해 티르빙의 판단력을 흩트려 주인을 향한 공격성을 틀어놨습니다. 안드바라나우트의 소유주에 한해서는 티르빙에게 공격받지 않을 것입니다. ‘뭐라고?’ 주인을 향하던 폭력성을 모두 제거했다. 그 사실에 강유식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크르륵. 죽인다! 너 죽인다!! “…” 안드바리가 저대로 티르빙한테 죽으면 끝장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잘 버티겠지 하고 넘긴 강유식은 티르빙의 검날을 살펴보았다. ‘흐음. 그럼 성능 부분은 달라진 거 없어?’ -피와 영혼을 흡수하면 점점 강해지는 능력이 있었습니다만 안드바라나우트와 함께 사용하면 영혼 부분은 해결되기 때문에 피만 흡수해도 될 것 같습니다. ‘성장이 쉬워졌네.’ 안드바라나우트와 세트로 사용하면 이전보다 쉽게 각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티르빙에게 당할 위험도 줄어든다. ‘게다가 저놈도 성격이 전보다 물러진 거 같기도 하고…’ 봉인이 풀리면서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두 확인한 강유식은 티르빙을 다시 내려놓은 다음 상자를 덮었다. -이…망할 놈들… 탈진한 안드바리와 이번에는 조금 미안한지 달래주는 페르스발. 그런 둘의 목소리를 들은 강유식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흐음. 한 번 제대로 힘을 써보고 싶은데…’ 하지만 그러기에는 뉴욕에 마땅한 시설도 없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무작정 써먹기도 그렇다. ‘어디서 좀 등신 같은 놈이 덤벼주면 좋겠지만…아무래도 그건 힘들겠지.’ 전 세계의 모든 마법사가 주목받는 자신을 노린다니. 어지간히 힘에 자신이 있거나 머리가 돌아버린 녀석이 아니면 꿈도 꾸지 못하리라. ‘만약에 있다면…’ 누군가에게 습격당하는 상황을 생각한 강유식은 어떻게 될지 예상해보다가 피식 웃었다. ‘아니. 그런 세상 물정 모르는 병신들이 있을 리가 없지.’ * 불이 꺼진 어두컴컴한 대저택. “가는 거냐?”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자신의 형인 더글러스의 부름에 아치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왜 갑자기 이렇게 급하게 구는지 모르겠구나. 마법의 성취도 순조롭고 길드장님…아니, 어머님도 지원의 확대를 약속하지 않았느냐.” 지난번의 무력하던 때에 비해 가능성이 생겨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아닙니다. 형님. 지금이 아니면…지금이 지나면 더는 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이해가 안 간다는 더글러스의 물음에 아치볼드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안 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치볼드는 확실히 느꼈다. ‘크윽. 빌어먹을 놈…’ 단순히 떠올렸을 뿐인데도 두려움에 떨리는 손. 그 모습을 본 아치볼드는 입술을 꽉 깨물며 다시금 이야기를 이었다. “지금 밖에 없습니다.” “…결행은 언제로 잡고 있느냐.” “아마 발표가 끝난 직후일 것 같습니다.” “네 뜻이 정녕 그렇다면…” 더글러스가 무언가를 던져주었고, 아치볼드가 의아해하면서도 받았다. “이건…” “그걸 가져가면 그들이 널 도와줄 거다.” 더글러스가 차가운 눈으로 아치볼드를 바라보았다. “할 거라면 확실하게 해라. 네 목숨을 헛되이 버리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더글러스의 이야기에 아치볼드가 표식을 꽉 움켜쥐었고,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반드시…녀석을 죽이겠습니다.” < 이건 또 내
전문인데(4) > 끝 90화 학회발표까지 나흘. “도대체 무슨 발표길래 그렇게 난리인 걸까…” “그냥 제자 띄워주기 아니야? 솔직히 강유식 그 녀석도 천재라 잘하는 거지 우리가 득 볼 건 없을 거 같은데…” “천재만 쓸 수 있는 종류였으면 아크 메이지가 그런 이야기도 안 했겠지.” “뭐가 됐든 빨리 열리기나 하면 좋겠다.” 학회를 오가는 마법사들이 기대 반 흥분 반으로 며칠 뒤에 있을 발표에 대해 떠들었고, 모자를 쓴 채 지나가며 그 이야기를 듣던 강유식이 피식 웃었다. “관심이 엄청나네요.” “내가 앞에 떠들어둔 게 있는데 당연하지. 그리고 실제 결과물을 생각해보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떠들썩해야 해.” 후드를 꾹 눌러쓴 채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반혜영의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여전히 난잡하네요.” “방문하는 놈들이 죄다 괴팍하니까 그렇지. 어, 근데 너 여기 와본 적 있어?” “사진이랑 영상으로 본 적 있었어요.” 대강 둘러댄 강유식은 회귀 전 기억을 떠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모습을 숨기고 방문했었는데 그때는 이유가 조금 달랐다. ‘마법사들 속 좁은 건 알아줘야 해.’ 물론 자신이 날려버린 저장고에 이런저런 중요한 연구 자료나 재료들이 많이 있기는 했지만, 마인에게 뺏길 바에야 놈들과 같이 날려버리는 편이 더 좋지 않은가. “여기는…구조가 신기하군요. 위로 올라갈수록 마법을 사용하기 힘들게 만들다니. 이런 식으로 마법진을 엮을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이전 학회장이 장난삼아 만들어둔 건데 그걸 개량하다 보니 저런 형태가 된 거야. 어. 근데 너 보여?” 반혜영이 살짝 의외라는 듯이 물어보자 차시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보인다기보다는 느껴집니다.” “흐음. 감이 꽤 좋네…”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던 반혜영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일단 구경은 나중에 하고 위로 가자.” “예. 차시현 씨 이리로…” “아, 잠깐.” 다가오려는 강유식을 멈춰 세운 반혜영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바라보았다. “너는 직접 올라와 봐.” “…예?” “학회 전통이야. 너는 이리로 와.” 차시현을 데리고 간 반혜영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고, 두 사람의 발아래에 투명한 발판이 생기더니 엘리베이터처럼 위쪽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뭐, 뭐야. 저 사람 단숨에 10층까지 갔는데?” “S급 헌터인가?” 막힘없이 위로 올라간 반혜영의 모습에 1층을 비롯해 각층에 있던 마법사들의 이목이 쏠렸고, 자연스럽게 같이 있던 강유식에게도 시선이 몰렸다. ‘대충 신고식…그런 건가?’ 확실히 몇 층까지 올라가느냐를 보고 실력을 점칠 수 있으니 그런 나쁜 방법은 아니다. ‘뭐…가볍게 해볼까.’ 체내의 마력을 끌어올린 강유식은 허공을 향해 한 발을 내디뎠고, 투명한 계단이 발아래에 생기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력 억제진이로군요. ‘응. 층마다 펼쳐져 있어.’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강해지고, 결과적으로 뛰어난 마법사일수록 더 많은
시설을 사용할 수 있다. ‘그때 내가 2층까지 갔던가.’ 3층으로 가려다가 폐가 더럽게 쑤셔서 못 올라갔을 것이다. 이전 기억을 떠올린 강유식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후웅 이전의 고비였던 3층은 가볍게 넘어섰고 그 이후로도 막힘 없이 7층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저쪽도 장난 아닌데?” “7층까지 쉬지 않고 올라가다니…”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인지 주변 사람들의 관심이 더욱 쏟아졌고, 그 시선 속에서 강유식은 가볍게 몸을 풀었다. ‘위쪽부터는 본격적이구만.’ 여기까지는 제대로 배운 B급 헌터면 어떻게든 올라올 수 있는 수준이지만 8층부터는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 A급 헌터도 숙련도에 따라 미끄러진다. 우웅─! 이전보다 마력 억제진이 더욱더 끈질기게 달라붙지만, 이 정도면 아직 허용범위다. “와. 8층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가네. 10층까지도 되는 거 아냐?” “그럼 저 사람도 S급 헌터라는 셈인데…도대체 누구지?” 시끌벅적한 주변의 이야기를 흘린 강유식은 그대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음?’ 뭔가 알 수 없는 이질감. 휘우웅 9층과 10층 사이에 자리 잡은 불투명한 서양식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다.’ 저게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저기로 들어가는 게 정답이다. 후웅! 강유식의 신형이 공중에서 깔끔하게 사라졌다. “아…9층인가.” “거의 다 올라갔었는데 조금 아쉽네.” “A급 헌터였었나 보구만.” 그 모습을 본 구경꾼들은 살짝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등반 도중에 모습이 사라졌다는 것은 마력이 떨어져 안전장치로 인해
해당 층의 대기실로 이동되었다는 뜻. “근데 결국 누구야?” “흐음. 앞에 사람이 S급이었으니까…아크 메이지랑 온 강유식인 거 아냐?” “에이.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17살이 9층까지 뚫는 건…” “역시 그렇겠지?” 저마다 정체를 추측하면서 사람들이 다시 걸음을 옮겼고, 학회 내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상시로 돌아갔다. * “이건…뭐지?” 복도 안으로 들어온 강유식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걸 마법이라고 볼 수 있나?’ 9층과 10층
사이에 숨겨져 있는 공간 같은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무언가 다른 장소. ‘페르스발. 어때?’ -으음…죄송합니다 로드. 연산을 거듭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역시 그런가…’ 강유식은 주변을 둘러보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고, 잠시 후 복도의 끝에 큼지막한 문이 나타났다. 구구궁 희미한 떨림과 함께 문이 열렸고, 안쪽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인즈의 집무실을 떠올리게 할 만큼 고풍스러운 느낌으로 꾸며진 내부. “흐음.” 누군가 있는 건 확실한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푹신하네.’ 소파가 딱 좋게 몸을 잡아주었고, 강유식은 긴장하는 일 없이 편안하게 몸을 기대었다. “벌써 여기를 들어올 줄이야…아크 메이지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나?” 나이 꽤 들어 보이는 중후한 목소리. 노인으로 추정되는 자의 물음에 강유식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아뇨. 처음은 직접 올라오는 게 전통이니까 올라와 보라고 들은 게 다였습니다.” “과연…그럼 갑자기 사라져서 난리 났겠군.” 살짝 웃음을 터트린 노인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금 이야기를 이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 것 같은가?” “아뇨. 솔직히 전혀 모르겠습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함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어디서 느꼈던 감각인지는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알 수가 없다. “자네 눈앞에 있는 것은 모두 사실일세. 다만 자네가 아는 것과는 다른 사실이지.” “그건…참 복잡한 구조네요.” “그렇지. 그래서 나는 그냥 기적이라고 부른다네. 아크 메이지는 끝까지 마법이라고 부르지만.” 아크 메이지, 반혜영과 친하다는 듯이 말하는 노인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과는 아는 사입니까?” “일단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반혜영과 친하고 뭔가 알 수 없는 마법을 사용하는 존재.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프로필에 강유식은 잠깐 고민하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살짝 긴장한 강유식의 물음에 노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리 특별한 건 없네. 선물을 하나 받고, 자격을 얻은 다음 10층으로 돌아가는 것. 그게 전부일세.” “선물과 자격이라면.” “선물은…” 노인의 말이 잠시 끊어졌고, 잠시 후 아주 약간의 기시감이 서류 너머로 느껴졌다. “호오. 과연…이런 물건이 필요했던가.” 흥미로운 목소리가 들리더니 서류 너머에서 물건 하나가 앞으로 날아왔고, 그것을 받은 강유식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바라보았다. ‘하이드룬…은 아니야.’ 케이스만 보면 회귀 전에 몇 번 받았던 하이드룬이 떠올랐지만, 그것과는 향도 그렇고 조금씩 달랐다. “그건 제림니르라는 물건이다. 일시적으로 능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효과를 지녔지. 물론 그 이외에도 사용법은 많으니 그건 차차 알아봐라.” 하이드룬과 비슷하지만 다른 물건. 그 설명에 강유식은 제림니르를 살펴보다 노인에게 물었다. “이걸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조금 전부터 묘한 익숙함을 느끼고 있었던 강유식은 그 정체가 무엇인지 방금 확실하게 깨달았다. ‘저 노인은 분명 그때 약방의 할멈과 연관이 있다.’ 예사롭지 않은 정체에 강유식이 서류 너머를 뚫어져라 보고 있을 때. 노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말하기 싫군.” “예?” “아직은 이르다. 지금은 필요한 걸 얻으며 열심히 성장해라. 그게 우선이다.” 노인의
단호한 대답에 서류를 확 날려버릴까 고민하던 강유식은 살짝 들었던 손을 다시 내렷다. ‘게다가 일단은 좋아 보이는 물건도 줬으니까…굳이 기분을 잡칠 필요는 없지.’ 아직은 이르다는 것은 다음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급하게 굴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강유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깔끔해서 좋군.” 만족스럽게 대답한 노인은 그걸로 이야기가 끝이라는 듯이 다시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앞으로 열심히 해라. 차기 마법학회장.” “…?” 후웅! 강유식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주변의 풍경이 다시 바뀌었고 현대적인 사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뛰어나도 탈이군.” < 이제 좀 알 거 같냐?(1) > 끝 91화 “그러니까…그 사람이 S급 헌터인 허미트라고요?” “그래.” 줄리어스의 대답에 강유식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허미트가 노인이었다니…조금 의외네요.” “노인은 아니다.” “예? 그럼 목소리를 변조한 겁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줄리어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서는 노인이지만 다른 곳에서 만나면 그 장소에 따라 성별이나 나이, 인종이 모두 변한다. 본 모습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셈이지.” “변장…하고는 좀 다른 거 같네요.” “그냥 본 모습이랄 게 없다고 생각해라.” 줄리어스의 이야기에 강유식은 문득 회귀 전에 하이드룬을 건네줬던 약방의 할멈이 떠올랐다. ‘그럼 그 할멈도 허미트였을 수도 있다는 건가.’ 어쩐지 실성한 것처럼 이상한 소리를 주절주절하더니 역시 예사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 차기 마법학회장은 어떻게 된 겁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줄리어스는 거의 다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학회장이 되기 위해서는 허미트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너는 그 인정을 받은 거다. 뭔가 특별한 일이 있거나 그런 종류는 아니니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흐음. 생각보다 조건이 간단하네요.” 마법학회는 기본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며 마법사들
간의 화합을 도모하는 집단이지만, 그 힘은 절대 약하지 않다. “간단하다…” 하지만 그런 강유식의 이야기에 줄리어스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스승이나 제자나 말하는 게 똑같군. 혹시나 하지만 다른 데서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예?” “눈 돌아간 영감들이 마구잡이로 마법을 쏘아댈 수도 있으니. 비유가 아니라 진짜 그럴 수 있으니 조심해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조금 까다롭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상상 이상으로 찾아내기 힘든 복도였던 모양이다. “일단 확실하게 말해주자면 자격을 얻었다고 해서 무조건 학회장을 할 필요는 없다. 네 스승인 아크 메이지도 거절했었으니.” “그렇습니까?” “물론 내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은퇴한다면 새로운 후보가 나올 때까지 좀 앉아있어야 할 테지만…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물러날 생각도 없고, 던전에 갈 생각도 없으니.” “학회장 자리가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제공되는 촉매들이 많거든. 연구만 할 생각이라면 학회장 자리만큼 좋은 곳이 없지.” 피식 웃으며 담배를 태우는 줄리어스의 모습에 강유식은 조금 전 이야기를 떠올렸다. ‘무조건 학회장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건 좋네.’ 학회장이란 자리가 나쁘지 않기는 하지만 그만큼 할 일도 많고 무엇보다도 주변 이들의 주목도 더 심해진다. “그럼 지금은 달라지는 게 없군요.” “자네가 그러기를 원한다면 말이지. 뭐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으니 전보다 돈독해질 순 있겠군.” 담배를 입에 문 채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는 줄리어스. 그 모습에 강유식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 정도면 하이드룬에 관해서 물어봐도 괜찮을 거 같은데.’ 하이드룬의 공급처가 누구인지도 알게 됐고, 마침 화제를 꺼내기 좋은 물건도 받았으니 딱 적절할 것이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줄리어스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이 두 개. 차이점을 알 수 있겠나?” 책상 위에 놓인 담배 두 개비. 그것을 내려다보던 강유식은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 다 똑같은 물건이네요. 그것도 일반 담배와 다른 특수한 물건이고요.” “…역시 구분할 수 있었군.”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줄리어스를 담배, 하이드룬을 챙겨 넣으며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자네 말대로 이건 하이드룬이라는 특수한 담배로 허미트에게 받은 물건이지.”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 건가요?” “효과가 상당히 복합적이다만…간단하게 말해주자면 생명의 연장이군.” 여기까지는 예상한 그대로의 대화다. 강유식은 줄리어스를 바라보며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물었다. “그러면…크게 다치신 상태인 겁니까?” 강유식의 질문에 줄리어스가 잠시 입을 다문 채 바라보았고, 이내 입고 있는 옷의 단추를 풀었다. 화르륵─! 불꽃에 휩싸인 갈비뼈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인화?” 강유식의 물음에 줄리어스는 와이셔츠의 단추를 다시 잠그며 이야기를 이었다.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절. 던전에서 파티원들이 전멸하고 나도 큰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다. 구조대도 기대할 수 없어 포기하려 했는데…문득 한 가지가 떠오르더군.” 마법 연구를 위해 사뒀다가 깜빡하고 던전에 들고 와버렸던 마석 주머니. 줄리어스는 의식이 희미하던 와중 그 주머니를 꺼냈고, 마석 하나를 꺼내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이런 경우도 있었을 수 있었나.’ 죽어가던 육체를 연명하기 위해서도,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일단은 살았지만 그것도 문제였지. 마인은 인간이 아닌 존재이며…살인충동을 조절할 수 없는 괴물이니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은거를 해버릴지,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 줄리어스가 고민하고 있을 때. 그 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허미트였다. “그때는 가판대에서 담배를 파는 청년이었는데…하이드룬을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하더군. 기회가 올 때까지 인간으로 있을 수 있게 해줄 거라고.” “그렇군요…” 하이드룬에 그런 사용법도 있었구나. 하고 강유식이 순순히 감탄하고 있을 때. “그리고 그 기회가 바로 오늘이다.” “…예?” 강유식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줄리어스가 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앞에 내밀었다. [이제 물건 안 들어와요. -H-] “…?” “어제 허미트가 남기고 간 쪽지다. 앞으로는 하이드룬이 없다는군.” “…” 줄리어스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이내 그 말뜻을 이해하며 물었다. “그러니까…제가 허미트가 이야기한 기회라는 겁니까?” “어제까지는 애매했지만…방금 이야기로 확신했다. 네가 나에게 주어진 기회라는 걸.” 일말의 의심도 없이 이야기하는 줄리어스의 모습에 강유식은 황당해하다가 문득 떠올라 물었다. “그런데 애초에 뭘 완성한다는 겁니까?” “지난번에 네게 협업을 제안했던 나의 비전 마법. 그게 우리가 완성해야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우리라고 이야기하는 줄리어스의 모습에 강유식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생각을 곱씹었다. ‘그러니까…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허미트는 비전마법을 완성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이야기한 건가.’ 솔직히 비전 마법과 마인화가 무슨 연관이 있는지 눈곱만큼도 모르겠지만 허미트는 그렇게 이야기했고, 줄리어스는 그걸 철석같이 믿는 듯했다.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아직 앞에 준 물건이 남아있으니…1년은 버틸 수 있겠군.” “1년…” 조금 빠듯한 것 같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다. ‘그걸로 적당히 당기고, 주변에 똑똑한 놈들 머리 쥐어짜 내서 개발하다 보면…’ 머릿속으로 빠르게 주판을 튕기며 고민하던 강유식은 줄리어스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도와드리죠.” “…정말인가?” 생각보다도 시원스럽게 나온 대답에 줄리어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저렇게 간단하게…’ 대범하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습에 줄리어스가 기묘한 표정으로 보았고, 그에 강유식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대신 공짜는 아닙니다.” “…대가를 받겠다는 건가?” “예.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서약서도 써주셔야겠습니다.” 줄리어스의 이야기는 누가 봐도 진심을 담아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강유식은 그걸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믿을 건 채무랑 서약서뿐이지.’ 지금 당장 채무를 안기기는 조금 빠듯하니 결국은 서약서 뿐이다. 단호한 강유식의 이야기에 줄리어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해주지. 서약서는 어떻게 하겠나?” “제가 가지고 있는 걸로 하죠.” 강유식은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안드바라나우트를 통해 만드는 강력한 서약서 ‘오메르타’. 그것을 본 줄리어스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용케 이런 물건을 구했군…” “세상이 워낙 험악하니까요. 이런 게 아니면 서약서도 믿기 힘들죠.” “흐음. 그래서 조건은 뭐지?” “우선은 안전에 대한 조항이겠네요.” 펜을 잡은 강유식은 익숙하게 조항을 작성했고, 그 내용을 본 줄리어스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군…’ 줄리어스가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강유식은 이어서 보상 부분을 적었다. “1년 안에 마법을 완성했을 경우. 아직 사용하지 않은 하이드룬을 모두 양도한다…꽤 자신 넘치는 조건이군.” “그런 엄청난 물건을 얻을 수 있다면 더 열심히 하지 않겠습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줄리어스가 피식 웃었다. “그것도 그렇군.” 처음부터 적절하게 밸런스를 잡았기에 줄리어스는 조항들에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고, 잠시 후 모든 조건이 정리되어 서약서가 완성되었다. “제 조건은 이게 전부입니다. 사인하시겠습니까?” 서약서와 함께 내민 펜을 내려다본 줄리어스는 슬쩍 웃으며 펜을 들었다. “안 할 이유가 없지.” 우웅─! 줄리어스가 사인을 마치는 것으로 서약서가 발동되었고, 그것을 챙겨 넣은 강유식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아쉽네.’ 이렇게 구체적으로 보상을 정해두면 채무관계가 만들어지기가 어려워진다. 합당한 보상을
앞서 약속해뒀기에 조건을 맞추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잘 풀리기만 하면 채무 정도야 쉽지.’ 뭐가 됐든 비전 마법을 완성하기만 한다면 모두 잘 풀리리라. 그렇게 강유식이 생각하고 있을 때. “일단은 그동안 혼자서 구상해둔 것들이다.” 줄리어스가 눈앞에 두꺼운 파일을 건네줬고, 강유식은 그대로 받아 내용을 살펴보았다. ‘흠. 레바테인 맞네.’ 아직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기본적인 골자는 회귀 전에 본 것과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강유식이 파일을 넘기고 있을 때. ‘어? 왜 페이지가 아직 남아있지?’ 자신의 기억에 의하면 분명 줄리어스가 남긴 레바테인의 기획서는 총 14페이지. 하지만 벌써 10페이지인데도 아직 곱절이 되는 페이지가 남아있다. ‘기획서가…더 있었다고?’ 회귀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기획서. 그 사실에 강유식은 문득 줄리어스의 최후를 떠올렸다. ‘…그때 탔었구나!’ 회귀 전에 레바테인은 기획서가 부족한 상태였고, 그 때문에 줄리어스가 기획한 것의 6할밖에 재현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면 난이도가 더 어려워지는데…’ 일단 후속 기획서가 있는 시점에서 회귀 전에 개발된 레바테인과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음?” 분명 처음 보는 내용인데 묘하게
낯이 익다. “어떤가?” 그 물음에 강유식은 기획서를 다시 내려다보았고,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혹시 이창완 선생님 아세요?” < 이제 좀 알 거 같냐?(2) > 끝 92화 흔히 비전 마법이라고 불리는 기술들은 두 가지 경우로 나눠진다. “압축식이 이렇게 헐거우면 연성 도중에 그대로 분해될 텐데. 구조가 안일한 게 아닌가 싶다만.” “압축과 장악을 같이 봐야지요. 적절하게 밸런스를 맞추지 못한다면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전 마법이 겹쳤다는 것은 본인들의 장기나 지향점이 완전히 겹쳤다는 뜻이고, 이 경우 결말은 세 가지로 나뉜다. “밸런스를 맞췄다는 것치고는 이 귀화옥이라는 기술은 화력이 좀 많이 떨어지는군. 너무 균형에만 치우친 거 아닌가?” “화력에 집중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기술에 비하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마법을 사용하려다가 죽어버려야 본말전도니 말입니다.” 대부분은 첫 번째 결말로 끝나는 데 누군가 인정할 때까지 싸워서 셋 중에서도 가장 피곤한 유형이었고. “말도 안 나오는군. 이런 게 도대체 어디가 내 비전 마법과 닮았다는 거지?” “제가 할 이야기입니다. 아직 뼈대도 다 안 만들어진 마법과 비슷하다니. 자네는 내 비전 마법을 그 정도로밖에 안 본 건가?” 중간에 낀 사람의 등도 같이 터져나갔었다. “…” 양 옆에서 불만스럽게 바라보는 이창완과 줄리어스의 모습에 강유식이 눈매를 매만졌다. ‘망할 영감탱이들…’ 하지만 본격적으로 비전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순간. 두 사람은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서로의 비전 마법을 헐뜯으며 싸우기 시작했다. ‘이창완이야 나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줄리어스 이 양반이 이렇게 심할 줄은…’ 이창완만 난리였다면 채무로 잘 조정했겠지만 줄리어스까지 저렇게 나온 이상 강제로 풀어봐야 효율도 안 좋고 결과도 별로다. “물론 완전히 겹치는 건 아니지만 주력으로 다루는 기술이나 구상 부분에도 같은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서로 의견을 교류하며…” “미안하지만 같은 부분은 하나도 없다. 뭐가 겹친다는 건지 알 수가 없군.” “이번만큼은 학회장님의 말씀에 동감일세. 도대체 어디가 겹친다는 건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반박하는 두 사람. 분명 알고 있을 텐데도 부정하는 그 모습에 강유식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 “…” 담담한 물음에 두 사람이 움찔 떨었고, 강유식이 이창완과 줄리어스를 노려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진짜 모르시겠다면 제가 설명해드릴 수 있습니다. 두 분의 ‘안목’이라면 모르는 게 이상하겠지만! 피곤하셔서 넘겼을 수도 있으니까요.” 어지간한 마법사라면 공통점이 눈에 보인다고 해도 그걸 증명하기가 어렵겠지만, 눈앞의 강유식이라면 그걸 하고도 남을 녀석이다. “크흠.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군. 방금 발견했다.” “음. 미국까지 오느라 피로가 누적됐던 모양이야. 이런 간단한 것도 발견 못 하고 있었다니…” 능청스럽게 이야기하는 두 사람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던 강유식은 표정을 풀며 물었다. “두 분 다 비전 마법을 완성한 것도 아닌데 서로 교류하면서 고쳐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솔직히 제 생각에는 나쁠 게 없다고 봅니다만…” 줄리어스는 이제 기획서를 만든 단계고, 이창완은 발동은 가능하지만 아직 몇몇 부분들이 부족해 스킬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 “자네 말대로 어느 정도 공통된 요소가 있다는 건 인정하네.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정반대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걸세.”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이창완이 레바테인의 기획서 중 일부분을 가리켰다. “이걸 보면 알겠지만 학회장님의 비전 마법은 체내에서 공정을 끝낸 다음 외부로 방출하는 걸세. 외부에서 공정을 하는 귀화옥과는 정반대지.” “흠…” “공정 과정이 비슷하다고 해도 그걸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지네. 그리고 그에 따라 추구하는 방향성도 달라지고.” 이창완의 이야기에 강유식은 레바테인의 기획서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이 부분이 문제인가.’ 회귀 전 레바테인은 화력을 극대화시켜 쏘아내는 대포 같은 마법이었지만, 완전판 레바테인은 조금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둘 다 새로운 걸 만드는 것 자체가 싫은 모양이구만.’ 이창완은 완성을 앞둔 상태인 만큼 굳이 크게 바꾸고 싶지 않을 것일 테고, 줄리어스도 자신의 생명과 직시된 마법인 만큼 짜놓은 틀에서 보완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좀 그런데.’ 어떻게 두 사람이 협력하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잠시 고민하던 강유식은 진지한 표정을 둘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시간?” “예. 두 분이 힘을 합해서 비전 마법을 만들어야 할 이유를 찾아내겠습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강유식의 이야기에 두 사람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정말 그런 이유가 있다면…’ ‘그래도 완전히 정반대인데 어떻게…’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잠시 마주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급한 일도 아닌데 단칼에 자를 필요는 없지.” “나도 당장 급한 일은 없으니 차분하게 생각해보게나.” “감사합니다.” 비전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미룬 강유식은 호텔로 돌아온 다음 거실의 소파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어떤 식으로 연결고리를 찾아야 하지…’ 강유식이 한창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옆 소파에 앉아 책을 읽던 차시현이 눈치를 살피다 조용히 물었다. “뭔가 고민되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마법 관련으로 생각할 게 있어서요.” “이번 발표와 관련된 일입니까?” “아뇨. 그거랑은 다른 건데…비슷하면서도 다른 마법을 어떻게 하면 섞을 수 있지 고민 중이었어요.” “흐음.” 강유식의 이야기에 차시현은 책을 덮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고, 이내 뭔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비슷하다면…그 중간지점을 먼저 만들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중간지점이요?” “예. 효율적이든 비효율적이든 우선 두 개를 이을 수 있는 수단부터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 효율이 높아지도록 점차 조율해나가는 거지요.” 일단은 두 마법을 연결시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나쁘지는 않지만, 문제는 효율이었다. ‘처음에 효율이 안 좋은 거야 그렇다 쳐도…그게 개선될 수 있는 부분은 보여야 하는데.’ 과연 그런 방법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강유식의 머릿속에서 문득 차시현의 이야기가 다시금 들려왔다. ‘중간지점…중간지점?’ 외부와 내부를 이을 수 있는 새로운 매개체.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강유식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있다.’ 회귀 전에 적성에 맞지 않아서 제대로 배우지 않았지만, 딱 좋은 방법이 있다. “고마워요!” “네, 네? 아뇨…별로 대단한 것도…” “아뇨. 충분히 도움이 됐어요. 이번 일 끝나고 나면 꼭 보답할게요!” 차시현의 손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꼭 잡아준 강유식은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고, 홀로 남은 차시현은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았다. “보답…” 기대가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마법학회 본사 1층에 위치한 대강당. “그, 그래서 이 부분은…” A급 헌터가 된 지 벌써 10년이 넘어 마법학회 내부에서도 베테랑으로 꼽히는 마법사. 그런 그가 몇 번이고 선 발표회장에서 말을 더듬는 실수까지 한다. “…이게 정말 반혜영 선생님과 강유식 님 때문입니까?” 무대 뒤편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차시현이 신기하다는 듯이 물어보자 반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런데…나도 이렇게까지 몰려올 줄은 몰랐네.” 사실 하인즈와 타오페이, 그리고 자신이 참여한 것만 해도 일반적인 발표회보다 엄청난 성황이다. ‘근데 찾아온 멤버들이 어째 다 그렇네…’ 일본의 신녀는 성격이 안 맞아서 그렇고, 백련길드에서 온 백련문주나
일화단주는 만나본 적이 없어서 껄끄럽다. ‘내가 기억하기론 마지막으로 나왔던 게 5년 전이었을 텐데…무슨 바람이 분 거지?’ 로브로 전신을 가린 채 자리에 앉아있는 허미트의 모습에 반혜영은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하니까 가서 유식이 불러와 줘.”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인 차시현이 곧장 대기실로 향했고,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강유식 님. 이제 슬슬 준비하셔야 한다고 합니다.” “아. 나갈게요.” 대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강유식이 밖으로 나왔다. 두 눈에 다크서클이 짙게 서린 게 영 좋지 않은 상태. “괜찮으십니까?” “아, 예. 괜찮아요. 오늘까지는 버틸 만합니다.” 발표를 준비하면서 틈틈이 두 사람을 설득할 카드까지 준비하느라 고생을 좀 했지만 그래도 그만큼 결과는 얻었다. 철커덕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흐트러져있던 몸이 짜 맞춰져 간다. 몸을 짓누르던 피로가 사라져가는 것을 느낀 강유식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입니다. 마지막까지 힘내십시오.” 살짝 부끄러워하면서도 이야기하는 차시현의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힘낼게요.” 악수하듯이 가볍게 손을 흔든 강유식은 그대로 발표회장으로 걸어갔고, 탈진한 앞 차례 발표자를 지나치며 반혜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잘할 수 있지?” “말해봐야 입만 아프죠.” “딱 좋은 대답이야.” 등을 손바닥으로 툭 친 반혜영이 씩 웃었다. “내가 말한 거. 잊지 마.” “예. 다녀오겠습니다.” 반혜영의 응원을 받으며 강유식이 단상 위로 걸음을 옮겼고, 그 순간 좌석에 앉은 이들의 시선이 단숨에 쏟아진다.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야 뭐.’ 단상 위로 올라선 강유식은 좌석을 마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발표를 맡은 성진 사관학교의 다이아클래스 1학년. 강유식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테오르의 허수공간 가설과 라그문트의 마력술식 추측의 증명을 발표하겠습니다.” 후웅─ 가벼운 손짓에 증명에 필요한 영상 자료들이 공중에 떠올랐고, 강유식은 여유롭게
발표를 시작했다. “허어…” “설마 저 가설들이 증명될 거라고는…” “믿을 수 없군…” 수많은 마법사가 탄성을 내뱉으며 경청했고, 발표가 끝난 뒤 이어지는 질문들도 모두 매끄럽게 넘겼다. “정말 저게 일개 생도가 가능한 일인가?” “과거의 아크 메이지를 떠올리게 만드는군…” 발표는 완벽했고 흠잡을 곳은 없었다. 하지만 몇몇 이들의 입에서는 아쉬움의 목소리가 나왔다. “결국 과장이 섞인 건가?” “그럴 거 같기는 했다만…” 앞서 증명한 가설들은 모두 대단했지만 그렇다고 헌터 업계가 뒤엎어질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냐 하면
부족했다. ‘아직 부족하겠지.’ 자신이어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 이걸로 준비운동은 된 것 같군요.” 강유식의 이야기에 좌석 전체가 얼어붙었고, 잠시 할 말을 잊어버린 마법사들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주, 준비운동…?” “저런 증명을 두고 어떻게 그런 말을…” “오만하기 그지없군.” 오랜 시간 마법학계에 남아있던 난제 두 개를 증명했는데 그보다 대단한 게 도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지금부터 새롭게 발견된 요소. 마법의 핵에 대한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 이제 좀 알 거 같냐?(3) > 끝 93화 공중에 수백 가닥의 푸른 선이 모여 거대한 구체가 만들어졌고, 그 형태를 본 마법사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저런 걸 어떻게 쓰려고…’ ‘뭐지?’ 모두가 의문에 찬 눈으로 보고 있을 때. 강유식이 완성된 화염구의 모형을 슬쩍 봤다가 입을 열었다. “마법의 핵이란 이름 그대로 마법의 이루고 있는 근원. 모든 마법이 가지고 있는 요소입니다.” “뭐라고?” “저 무슨 시건방진…” 강유식의 이야기에 좌석이 크게 술렁거렸다. “우선 화염구의 모형을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마법의 핵이란 쉽게 말해서 발동된 마법에 자리 잡은 사용자의 ‘의식’을 뜻합니다.” 강유식의 손짓에 따라 화염구의 모형이 반으로 갈라지며 내부의 구조가 드러났다.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소원, 욕망, 바람. 그것들이 육체에서 분리되고, 거기에 마력이 깃들어 성질이 생겨납니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술식이란 틀이 씌워지면 우리들이 아는 마법이 되는 거죠.” 강유식의 이야기에 좌석이 또다시 술렁였고, 이내 한 마법사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지금 그 말은 마법의 주체가 술식이 아니라 우리들의 의식이란 말인가?” 쏘아붙이는 듯한 마법사의 물음에 강유식은 순수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허.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는군.” “무슨 저런 억측이…” 그동안 마법학계에 알려진 이론은 마법술식과 마력배열법에 따라 결과가 정해지는 철저한 계산의 영역이었다. “지금 제가 붉은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화염구를 만드는데 핵심적으로 작용하는 술식입니다. 저것들이 제거되면 화염구가 만들어질 수 없죠.” 공중에 떠오른 화염구의 모형을 올려다본 강유식은 손을 가볍게 흔들어 붉은색으로 물든 술식을 지웠다. 화르륵─! 불꽃이 튀어 오르며 완성된 화염구. 후우웅 원형으로 만들어진 화염구가 반으로 갈라져 넓게 펼쳐졌고 공중에 떠올라있던 모형처럼 술식의 핵심 부분이 사라졌다. 화르륵 “어…어어…” “저, 저게 무슨…!” 하지만 강유식의 손위에 있는 불꽃은 변함없이 타올랐고, 그 모습에 마법사들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마, 말도 안 된다!” “별도의 술식을 추가한 것이 분명해! 그게 아니고서야 저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어!” 그것이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상황이었고 강유식은 그 외침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A급 헌터분들이야 모르겠지만 S급 헌터분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 만큼 제 실력이 뛰어난지는 모르겠네요. 회장에 계신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유식의 이야기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S급 헌터들을 향해 쏟아졌고, 그에 하인즈와 타오 페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없소.” “눈이 달렸으면 딱 봐도 알겠지.” 호의적으로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다시 한번 좌석이 술렁였지만 논란이 완전히 잠재워지진 않았다. “한 가지 괜찮을까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나긋한 인상의 여인, 백련문주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예. 말씀하시죠.” “강유식 생도는 마법의 핵이 모든 마법에 존재한다, 라고 말했었죠. 그렇다면 자신의 마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법에서도 그걸 증명할 수 있나요?” “가능합니다.” “제 술법으로도 말인가요?” “물론이죠.” 망설임 없이 나온 대답에 백련문주의 두 눈에 이채가 감돌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그럼…” 자리에서 일어난 백련문주가 무대 위로 걸어 올라왔고, 강유식은 맞은편에서 손을 내밀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백련문주의 오른손바닥 위로 새하얀 봉우리가 맺혔고, 희미한 안개와 흘러나오며 여덟 잎이 천천히 펼쳐졌다. 촤라락 바깥쪽의 봉우리가 열리며 안쪽에 있는 작은 봉우리가 드러났고, 그것이 펼쳐지며 더 작은 봉우리가 나타난다. 후우웅 무대 전체를 자욱하게 물들이는 새하얀 안개. ‘이게 그 유명한 백련환몽인가.’ 베이징을 초토화시키던 몬스터 군세를 무려 일주일이나 붙잡아 공략의 단초를 마련했다던 백련문주의 비기. ‘쉬운 건 아니지만…불가능한 건 아니야.’ 몇 달 전이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두 눈을 빛낸 강유식은 손을 앞으로 뻗어 마력을 끌어올렸다. 우웅─! 강유식의 손에서부터 뻗어 나간 술식이 백련환몽의 만다라에 스며들어 빠르게 구조를 훑어냈다. “이건…” 백련환몽의 구조를 눈 깜짝할 사이에 읽힌 백련문주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괜히 S급 헌터가 아니다 이 말이지.’ 전력을 다해 펼친 백련환몽이 아닐 텐데도 단순히 구조를 훑어본 것만으로 머릿속에 아득해진다. ‘찾는 것과 이해하는 건 다르다.’ 자신의 목적은 백련환몽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핵을 찾는 것.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다. -연산력 백업을 시작하겠습니다. 로드! 페르스발의 목소리와 함께 강유식의 감각이 한계까지 확대되었고, 백련환몽의 내부가 눈앞에 선명하게 보였다. 후우웅 드넓게 펼쳐진 만다라의 내부로 새로운 문양이 덧씌워지듯이 새겨졌고, 펼쳐진 연꽃의 사이사이에 검은 잎이 피어나 뒤섞였다. “저…저건 도대체…” “설마…백련문주의 독문 술법에도 간섭했다는 것인가?” 과거 대회에서 선보였던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업적. 그에 모든 이들이 경악했고, 백련문주 역시 깜짝 놀랐는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떻게 한 거죠?” 믿을 수 없다는 백련문주의 물음에 강유식은 살짝 숨을 고른 다음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이게 마법의 핵이라는 겁니다.” 따악! 손가락이 튕겨지며 연꽃의 잎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 하늘에 흩날렸다. “…” “…” 그 광경을 본 모든 이들이 말을 잇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았고, 백련문주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게 마법의 핵이었군요. 잘 배웠어요.” “과찬이십니다.” “아뇨.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고개를 돌린 백련문주는 좌석에 있는 모든 이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마법의 핵이 존재한다는 것을 백련문주의 직책을 걸고 보증하겠습니다.” “지, 직책까지 건다고?” “마법의 핵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한단 말인가…?” 백련문주까지 보증하자 부정적이던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고, 그래도 인정하지 못한 자들은 남은 신녀와 허미트를 바라보았다. “저분의 말씀이 맞는 것 같군요.” “…” 담담하게 대답하는 신녀와 대답은 없지만 부정은 하지 않는 허미트. “…” 아무런 말 없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반혜영. 그 모습을 본 강유식은 문득 어제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엄청난 걸 처음으로 발표하면 일단 의심부터 받아. 네 따위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뭐 그런 느낌으로 깔보거든.” “그렇습니까…?” “그래. 근데 웃긴 게 나중에 어느 정도 설명이 되잖아? 그러면 그때부터는 제발 가르쳐달라고 아우성이야. 진짜 더럽게 치사하지 않아?”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을 때는 틀린 것으로 여기고, 이해할 수 있게 될 때는 가르침을 요구한다. “그러면 안 가르쳐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근데 그러면 안 돼.” 슬쩍 웃은 반혜영이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발견이라는 건 결국 누군가가 만들어둔 기반 위에 찾아지는 거거든. 우리들도 마찬가지야.” 그렇기에 알아낸 것을 숨기려 들지 말고, 가르치는 것에 인색하지 마라. 그것이 반혜영이 생각하는 마법사로서의 덕목이었고 강유식은 거기에 어느 정도는 공감했다. ‘혼자 안고 가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회귀 전과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결국 자신은 자신일 뿐이다. ‘이만큼 열심히 하는데 수수료 좀 챙길 수도 있지.’ 자신도 잘 먹고 잘살면서 겸사겸사 세계도 더 평화로워질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 “마법의 핵은 기존 마법체계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위기를 제대로 넘긴다면, 그 뒤로는 더 고차원적인 마법들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강유식의 이야기에 반박하는 이들은 없었고 모두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채 경청했다. “발표는 끝났고, 질문 있으십니까?” “질문 있습니다!” “한 가지만 여쭙고 싶습니다!” 좌석에 앉은 수많은 마법사가 손을 들며 외쳤고 강유식은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발언권을 주며 질의응답을 이었다. “이야기에 열중하다 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질문은 여기서 끝내고, 슬슬 발표도 마무리하겠습니다.” “아아…” “조, 조금만 더…” 좌석에서 흘러나오는 애타는 목소리에 강유식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조금 사적인 이야기입니다만…한 번 해보고 싶으니까 그냥 하겠습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모습에 강유식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저와 반혜영 선생님이 새로운 시대를 연 겁니다. 모두 감사하면서 나아가십쇼. 이상입니다.” “…” “…” “푸흡!” 강유식의 이야기에 모두가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바라보았고, 반혜영은 그대로 웃음을 터트렸다.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조지 코스비’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C급으로 판정합니다.]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타오 페이’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D급으로 판정합니다.]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자니 양’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B급으로 판정합니다.]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빌헬미나 아인부르크’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A급으로 판정합니다.] . 강의 도중에 계속 떠올라 결국 눈앞을 꽉 채운 알림창의 모습에 강유식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만하면 새로운 시대지.’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인지 다시금 깨달은 강유식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채무자 ‘아치볼드 헤이그’의 채무가 증가합니다.] [채무자 ‘아치볼드 헤이그’의 채무등급이 A급으로 상승합니다. 징수목록이 추가됩니다.] “…어?” 떠오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알림창. ‘니가 왜 거기서 나와?’ < 이제 좀 알 거 같냐?(4) > 끝 94화 사전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외부로의 송출도 없었고, 발표를 들은 것은 회장 내부에 있는 사람들뿐이다.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건데…어디지?’ 무대 뒤편에 관계자인 척 숨어있을 수도 있지만, 오늘 발표의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보안이 그렇게 허술하게 뚫렸을 리가 없다. ‘이 안에…’ 강유식이 눈매를 찌푸리며 안을 둘러보고 있을 때. 문득 한 사람이 눈 안에 들어왔다. 콰앙! 허미트가 다급하게 강당의 밖으로 달려나갔다. ‘페르스발!’ -예. 로드! 휘웅! 강유식의 외침과 동시에 보조기 하나가 쏜살같이 허미트를 뒤쫓아 날아갔고, 강유식은 무대 뒤편의 출구로 빠져나가며 머릿속으로 구조를 되새겼다. ‘내부에서는 공간전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할 테니 빠져나갈 입구를 생각해보면…’ 상대가 향할 탈출구를 생각하며 강유식이 재빠르게 달리고 있을 때. 그 곁으로 차시현이 눈 깜짝할 사이에 따라붙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우측 복도로 나가서 동관 출구 쪽으로 수상해 보이는 사람 있으면 잡아주세요!” “알겠습니다.” 사정도 듣지 않은 채 차시현은 곧장 앞질러 달려갔고, 강유식은 반대편으로 달리며 페르스발에게 물었다. ‘녀석은?’ -지금은 놓쳤습니다만 레이디를 발견하고 로드께서 가시는 방향으로 틀었습니다. 신체강화를 사용한 상태인 듯하니 서둘러야 합니다! ‘알았어.’ 회귀 전에는 헐떡이다 놓쳤겠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콰아앙! 징수로 차곡차곡 성장시킨 육체에 아케트라브를 통해 일시적으로 증폭한 마력. “윽…?!” 때마침 안으로 들어섰던 허미트와 마주쳤다. “비, 빌어먹을!!” 고함을 내지른 허미트, 아치볼드는 달려오는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그대로
양손을 뻗어 마법을 쏘아냈다. “윽?!” 그 모습을 본 아치볼드는 당황하며 급소를 향하던 얼음창의 궤도를 틀어냈고, 자연스럽게 피하게 된 강유식은 그대로 바닥을 밟았다. 파츠즈즉! 창뢰일보를 밟은 강유식의 몸이 번개를 흩뿌리며 아치볼드의 앞에 도달했고. 퍼억! “크헉!” 전력을 다해 휘두른 주먹이 그대로 복부에 틀어박혔다. 쿠웅! 주먹에 맞은 아치볼드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쉐도우 스네이크로 확실하게 포박한 강유식은 얼굴 끝까지 눌러쓰고 있는 후드를 벗겼다. ‘허미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단순히 로브를 뒤집어쓰고 신분을 사칭했다고 허미트의 이름으로 발표회장에 들어올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뭔가 개수작을 부리려고 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허술하고…’ 묘한 표정을 지은 강유식은 단서가 될 만한 게 있나 싶어 품을 뒤적거렸고, 이내 손에 잡힌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설마 이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손에 들린 징표, 타천의 계시가 사용하는 물건을 잠시 내려다보던 강유식은 품 안에 집어넣었다. ‘나한테 복수한다고 이 갈고 있을 거야 알고 있었지만…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여전히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건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되리라. 아치볼드의 품을 마저 뒤진 강유식은 그대로 둘러업은 다음 걸음을 옮겼다. * “으윽…” 배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아치볼드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고,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쿠웅! “크윽…” 하지만 온몸을 꽁꽁 묶인 상태였기에 그대로 바닥에 자빠졌고, 턱을 제대로 찍은 아치볼드는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일어났구만.” 문이 열리며 강유식이 나타났다. “윽…?!” 강유식의 모습에 아치볼드가 당황하며 도망치기 위해 다시 몸을 움직이려 했다. “음…어지간하면 발버둥은 치지 마라. 재롱떠는 것 같아서 징그럽다.” “이, 이 자식…” 여느 때처럼 이를 갈며 노려보는 아치볼드. 그러나 전보다 독기가 상당히 빠져 있었는데 그 모습에 강유식이 살짝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끝까지 이를 갈던 녀석이 A급 채무가 생기면 이런 느낌이 되는 건가.’ 보통은 후속관리를 위해서 기를 꺾어두면서 채무를 달아두는데 아치볼드의 경우 본인이 알아서 생겨난 종류라 그런지 이를 갈면서도 묘하게 주눅 들어있다. “뭐, 서로 안부 인사 나누면서 정답게 이야기할 사이는 아니니까. 그냥 딱 할 이야기만 하고 끝내자고. 허미트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야?” 강유식의 물음에 아치볼드의 눈매가 꿈틀거렸고, 그대로 입술을 꾹 깨물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원래 A급 정도면 바로 술술 불었어야했는데…저항을 한단 말이지.’ 징수를 사용하면 곧장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쓰기에는 조금 아쉽다. “아니면 이거랑 같이 넘겨버린다?” “…그 물건이 뭐가 어쨌다는 거지?” 이쪽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당당하게 나오는 아치볼드의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타천의 계시에서 사용하는 마인화 각성장치잖아.” “뭐, 뭐라고…” “이거랑 같이 협회에 처넣기 전에 불어. 괜히 귀찮게 하지 말고.” 강유식이 약속을 지키리란 보장이 없는 이상 큰 효과가 없을 협박이었지만, 아치볼드는 입술을 꾹 깨물며 고뇌했다. “알겠다. 다 말할 테니 부디 그것만큼은…” “일단 허미트랑 어떻게 된 건지 말해봐.” 각성장치를 챙겨 들며 이야기하는 강유식의 모습에 아치볼드는 엎어져 있는 상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뉴욕으로 넘어오고 이 근처에 잡아둔 숙소에서 쉬고 있었는데…갑자기 검은색이었던 현관문이 전혀 다른 디자인의 푸른색 현관문으로 바뀌더군.”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치볼드는 현관문을 피해 창문으로 탈출을 시도했고, 그 순간 바깥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 안으로 이동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지금 생각해보니 창문도 바뀐 상태였었다. 아마 현관문을 피하는 경우도 상정했던 거겠지.” “그런 자잘한 건 됐고 본론만 쭉쭉 말해.” “…거기서 자신을 허미트라고 소개한 중년인을 만났다.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명찰이 붙어 있어 마치 호텔 직원처럼 보였지.” 줄리어스의 설명대로 장소마다 달라지는 모습. 그 이야기에 강유식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명찰에 뭐라고 붙어 있었는데?” “음?” “명찰 있었다며. 거기에 이름 같은 거 적혀있었을 거 아냐.” “그건…” 강유식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아치볼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군. 뭔가 적힌 것 같았는데…기억이 안 난다.” 신상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부자연스럽게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 부분을 기억해둔 강유식은 다음으로 이야기를 넘겼다. “이미 나를 알고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더군. 그리고 내게 발표회장에 참관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이유는?” “…기회를 준다고.” 아치볼드의 대답에 강유식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떤 기회라고 했었는데?” “그건…” 잠시 입술을 깨물던 아치볼드는 강유식의 눈치를 살피다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지은 죄를 뉘우칠 기회라더군.” “지은 죄라…” 아치볼드의 이야기에 강유식은 턱을 쓰다듬으며 내려다보았다. 지금 아치볼드가 지은 죄라면 한 가지밖에 없다. ‘타천의 계시와 꾸미고 있을 그 일이겠지.’ 움직일 동기를 생각한다면 높은 확률로 자신을 노린 것일 테고, 허미트는 그런 사실을 알고 사전에 개입한 것이리라. ‘뭘 꾸미고 있는지 알아내는 거야 어렵지는 않은데…’ 문제는 정보만 알아내고 그대로 처리를 할 것인가, 아니면 넓은 아량으로 개과천선을 시켜줄 것인가. ‘애가 좀 모자라기는 해도 헤이그 가문 정통후계자고…재앙급 마인이 될 정도로 능력도 빵빵하니까.’ 게다가 조금 전에 징수목록을 확인해보니 이번 마법의 핵과 관련된 발표를 듣고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는지 S급, A급 스킬이 1개씩 습득된 상태였다. ‘게다가 이번에 타천의 계시를 제대로 털어먹으려면 이 녀석은 필수지.’ 사실 여기서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뭘 말이지?” “허미트가 말한 기회 말이야. 무슨 죄일지 모르겠지만, 뉘우칠 기회가 생긴다면 할 것 같아?”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아치볼드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올려다보았고, 이내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가 이 세상에서 뉘우쳐야 할 죄는…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것밖에 없다!” 나름대로 비장한 외침. 하지만 그 와중에 눈을 못 마주치는 것만 봐도 속내가 어떨지는 빤히 보였다. ‘참 귀찮게 한다.’ 자신이 틀린 것을 알았음에도 끝까지 고수하는 외골수들. 상대하기 귀찮은 부류지만, 채무가 생긴 뒤라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이번에 발표. 어땠냐?” “뭐…뭐가 말이냐.” 살짝 동요한 아치볼드의 목소리에 강유식이 미소를 지었다. “말 그대로 감상을 물어보는 거야. 너도 일단은 거기에 있었던 마법사니까.” “그…그건…” 원래라면 여기서는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꽤 인상 깊었겠지. 그도 그럴 게 마법의 핵은 네가 주력으로 다루는 마법역산의 시작점이니까.” “…시작점?” 그동안 쭉 고개를 돌리고 있던 아치볼드가 멍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고, 다 넘어온 그 모습에 강유식이 씩 웃었다. “그래. 설마 마법의 핵 같은 게 마법역산의 궁극이라고 생각한 거냐?” “하, 하지만…어떻게 그런 엄청난 게…” “한 가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을 더듬는 아치볼드의 모습에 강유식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지은 죄를 뉘우치고, 나를 돕겠다면 딱 한 가지만큼은 내 이름을 걸고 이뤄줄게.” 아치볼드의 눈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고, 이내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무엇을…?” 그 질문에 강유식이 미소를 지었다. “마법의 궁극. 그걸 네게 보여주마.” 그 한 마디에 아치볼드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강유식은 마무리를 위해 징수를 발동했다. [채무자 ‘아치볼드 헤이그’ 강제집행에 들어갑니다. 상태이상 ‘충성심 증가’] [채무자 ‘아치볼드 헤이그’ 강제집행에 들어갑니다. 상태이상 ‘충성심 증가’] [채무자 ‘아치볼드 헤이그’ 강제집행에 들어갑니다. 상태이상 ‘충성심 증가’] . “아…” 하지만 아치볼드의 경우는 다르다. “궁극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약소하지만, 시작점의 다음은 너한테만 특별히 먼저 보여주지.” 강유식이 가볍게 손을 앞으로 뻗었고, 그 위로 마력으로 이뤄진 푸른색 구체가 떠올랐다. 우웅─ 오브를 생성해낸 강유식은 그대로 그것을 아치볼드의 몸에 연결된 보조기와 공명시켰다. “아…아아…” 전신의 모든 마력을 강유식에게 지배당한 아치볼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겠습니다…뭐든지…뭐든지 할 테니 부디!” 채무는 더 이상 남지 않았지만, 그것보다도 더욱더 단단하게 굳은 충성심이 드러난다. “정말로 나를 돕고 싶냐?” “예! 기회만 주신다면…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네 그 잘난 가문의 명예도?” 반혜영에게 버림받은 아치볼드에게 마지막 남은 구심점. “바치겠습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모든 것을 바칠 테니 부디 제게도 기회를!!” 하지만 지금은 바닥에 나뒹구는 쓰레기나 다름없었고, 그 대답에 강유식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아. 기회를 주지.” “감사합니다…정말 감사합니다!!” 거의 오열하듯이 외치는 아치볼드. 조금 너무 갔나 싶어 강유식이 떨떠름하게 쳐다보고 있을 때.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아치볼드 헤이그’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C급으로 판정합니다.] “…” 앞에 내건 조건을 그냥 받아들인 것뿐인데 다시 C급까지 단숨에 생겨난 채무. ‘남자가 이 상태니까 뭔가 더 꺼림칙하네.’ 살짝 소름 돋는 표정을 짓던 강유식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몸을 포박하고 있던 보조기와 와이어가 모두 풀렸고, 자유의 몸이 되기 무섭게 아치볼드가 곧장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어…어. 그래.” 그 빠릿빠릿한 모습에 강유식은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 “…” 와이어가 풀린 걸 신호라고 생각했는지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그대로 딱 굳어있는 반혜영과 차시현. “일단 타천의 계시부터 조지죠.” < 이제 좀 알 거 같냐?(5) > 끝 95화 뉴욕의 하수도. 그곳에서 한 인영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투웅 그러자 벽면에 파문이 일어나며 하수도보다 밝은 복도가 나타났고 안으로 들어온 그림자,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는 길을 따라 쭉 들어갔다. “아. 오셨군요.” 인자한 미소를 지은 중년인이 안쪽 문에서 걸어 나왔다. “준비는 얼마나 됐지?” “거의 다 끝나갑니다. 뉴욕의 전력차단 장치도 막바지고, 머무르는 호텔과 파티장으로의 이동경로. 그리고 대략적인 호위시설도 모두 파악했습니다.” “…그것만으로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이지요.” 사내의 물음에 신부, 타천의 계시의 간부인 코너 번이 미소를 지었다. “협공이었다고는 해도 아가레스님을 그렇게 만든 자 중 한 명이니까요. 다른 준비도 철저하게 하고 있습니다.” 코너의 이야기에 로브의 사내, 판데모니움의 간부인 바알의 눈이 번뜩이더니 희미한 살의를 담아 중얼거렸다. “아가레스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이며 사과하는 코너의 모습에 바알은 불편한 심기를 다시 거두며 물었다. “그래서, 또 다른 준비는 뭐지?” “우선 그녀를 확실하게 끌어들이기 위해 그 제자를 죽일 생각입니다.” 코너의 대답에 바알이 두 눈에 이채를 띄며 물었다. “강유식이라는 녀석이 말이군…방법은?” “헤이그 가문 출신의 괜찮은 모체가 있습니다. 마법사를 죽이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으니 타천 후 보낸다면 간단하게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확실한 녀석인가?” 바알의 물음에 코너가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지요. 그만큼 추악한 욕망을 지닌 자라면 살짝 등을 떠미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미소를 지은 코너의 모습에 바알은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져주었다. 우웅 공중에 떠오른 자그마한 앰풀. 보라색의 끈적끈적한 액체가 담겨있는 모습에 코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소문에 의하면 강유식이라는 녀석의 실력도 심상치 않다더군. 그걸로 확실하게 강화시켜라.” 마석을 농축시킨 각성액. 겉보기에는 양이 별로 많아 보이지 않지만 이 정도면 B급 마인을 단숨에 A급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생각보다도 파격적으로 움직이는군…’ 공중에 떠오른 앰풀을 챙긴 코너는 의아한 표정으로 바알에게 물었다. “이전의 사건이 있었다고는 해도 너무 다급하게 일을 진행하는 것 같습니다만…아크 메이지에게 또 무언가 문제점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판데모니움에서도 핵심간부로 손꼽히는 아가레스가 의식불명이 된 것은 분명 큰일이기는 하지만, 반혜영과 같은 거물을 노리는 것은 어떤 면에서 그보다 더 큰 일이다. “지금보다도 더한 괴물이 되기 전에 죽여야 한다. 그걸 지난번에 깨달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바알의 몸이 검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 마법학회의 발표가 끝난 다음 날. “…” 떨쳐낼 수 없는 열등감과 오갈 데 없는 분노로 얼룩진 얼굴. 그 찌들어있는 모습에 옥상으로 올라온 코너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예.” 갈라진 목소리에 코너가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새롭게 만든 각성장치를 건네주었다. “앞서 만든 것의 개량품입니다. 아마 기존의 것보다 최소 2배 이상의 효율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 아치볼드는 아무런 말 없이 각성장치를 건네받았고, 코너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특히나 이번 모체는 더욱 특별하다.’ 품고 있는 감정도 감정이지만 타고난 재능 자체가 매우 뛰어나다. 마법사를 죽이는데 천부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능력. ‘가능하면 이번 사건 이후로도 살려두고 싶군…’ 본가 측은 사용한 다음 어지간하면 죽이라고 했지만, 이런 훌륭한 모체를 그렇게 낭비할 수는 없다. “…?” 어디선가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 ‘뭔가…’ 자신이 잘못 느꼈던 것일까. 코너가 미묘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펴보고 있을 때. 귓가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혜영이 움직인다. ‘알겠습니다. 곧 정전이 일어날 테니 신호에 맞춰 움직여주십시오.’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코너는 아치볼드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이 일대에 정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강유식은 학회장의 부름이라고 속여 이 아래에 마법도구점으로 불러냈으니 그때 맞춰 내려가 그자를 죽이십시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아치볼드는 옥상 아래로 시선을 내렸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코너는 밝게 빛나고 있는 뉴욕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파앙─! 저 멀리서 터져 나온 파장이 뉴욕을 어둠으로 물들였다. 우우웅─ 그리고 어마어마한 마력이 아래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 아래층에서 터져 나온 광선이 어둠을 찢어발기며 옥상을 완전히 증발시켰고 거기에 휩쓸린 코너는 피할 새도 없이 하늘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크아아악!!” 전신을 불사르는 어마어마한 에너지! 콰아앙!! 하반신 전체를 폭발시킨 코너는 그 반탄력으로 클리브 솔리슈에서 벗어났고, 그대로 다른 건물의 옥상에 떨어졌다. 쿠우웅! “크윽…” 전신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코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콰드드득! 새하얀 빛과 함께 날아갔던 하체가 단숨에 재생되었고, 녹아내린 육체는 느리지만 조금씩 재구성되어갔다. “후우…후우…이게 도대체…” 상처가 회복돼 겨우 숨을 돌리게 된 코너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조금 전까지 있던 옥상을 바라보았다. ‘정보가 새어나간 것인가? 아니, 하지만 새어나갈 구멍은…’ 원인을 찾던 코너의 머릿속에 한 얼굴이 떠올랐고, 이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코너의 눈이 휘둥그레질 때. 투욱 두 사람이 옥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치볼드! 우리를 배신…” “닥쳐라!!!” 코너의 말을 자른 아치볼드는 당장이라도 그를 갈아 마셔버릴 것 같은 흉흉한 눈빛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감히 내게 그분을 해치라는 개 같은 소리를 하다니! 당장 쳐 죽여주마!!” “뭐…” 강유식을 향한 증오는커녕 비정상적인 존경심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 그 감정에 코너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내 앞에서 감정을 숨길 수 있었던 거지?’ 마인이 되고 나서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던 눈이 아닌가. 코너는 아치볼드를 다시금 살펴보았고, 몸에 연결되어있는 새하얀 실을 발견했다. ‘설마 저게…’ 정확히는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실이 아치볼드의 감정을 숨겼던 것이 분명하다.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이…!!” 재앙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 생도인 애송이 둘을 죽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끼기긱 차시현의 손끝에서 검은 와이어가 번뜩였다. 콰아앙! 내달린 그대로 4m 크기의 거대한 몸이 옆 건물에 처박혔고, 벽을 부수고 안쪽에 내동댕이쳐진 코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크윽…이게 도대체…” 발목은 깔끔하게 잘려나갔고
다른 곳은 황급히 끊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절반 이상 파고들었다. 아아아─ 귓가에 희미한 절규가 울려 퍼지며 전신이 무거워졌고 흔들리는 시야를 비롯한 오감이 모두 비틀어진다. ‘저주가 서린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니…!’ 그런 무기가 있는 줄 알았다면 무모하게 덤벼들지 않았을 텐데. 전신에 지독하게 달라붙은 저주에 코너는 이빨을 꽉 깨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아직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았지만, 오랜 세월 음지에서 숨어 지내온 코너의 직감이 이야기했다. ‘도망친다!’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코너는 건물에서 탈출하기 위해 반대편 벽을 부쉈고. 끼기긱 눈 앞에 펼쳐진 검은 와이어에 간신히 몸을 멈췄다. “이…이건…” 자신이 이곳으로 올 것을 예상한 것처럼 빼곡하게 펼쳐져 있는 검은 와이어. “도망칠 곳은 없습니다.” 부서진 구멍에서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차시현. “…” “…”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코너는 자세를 다잡았고, 차시현도 사정거리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콰아앙!! 두 사람이 동시에 바닥을 박차며 움직였다. 콰앙! 콰아앙!! 코너가 휘두른 손톱이 건물의 벽을 종잇장처럼 갈라냈고, 차시현의 손끝으로 원한의 실이 휘둘러져 살을 파먹는다. “크아악!” 처음부터 기울어져 있던 싸움이었기에 코너가 압도당했고, 여기에 아치볼드가 합류하면서부터는 유린에 더욱더 일방적으로 변했다. “죽어!!” 아치볼드가 쏘아낸 마법들이 코너의 몸을 두들겼고, 그사이에 휘감긴 검은 와이어, 원한의 실이 오른팔을 잘라낸다.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어쩔 수 없다!’ 더 이상 뭔가를 아끼고 할 상황이 아님을 깨달은 코너는 혀를 굴려 이빨 사이에 숨겨둔 앰풀을 깨부쉈다. 콰득! 각성액이 몸 안에 스며들며 모든 상처가 단숨에 회복되었고, 일시적으로 전신에 힘이 끓어 넘친다. 콰아앙!! 바람을 휘감은 손톱이 주변의 와이어를 모조리 찢어발겼고, 예상치 못한 반격에 차시현과 아치볼드가 뒤로 튕겨 나갔다. “…” “윽…” 갑옷이 약간 베인 차시현과 마력장벽이 깨져 마력이 살짝 뒤엉킨 아치볼드. “장난은 이제 끝이다. 당장 죽여…” 푸우욱! “크아아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슴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 “어이쿠.” 뒤에서 티르빙으로 찔렀던 강유식이 공격을 피해 훌쩍 물러섰고, 그 모습을 본 코너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네놈은…” “도망칠 거면 바로 도망쳐야지. 체면 좀 살려보려다가 그게 무슨 꼴이야?” 피식 웃으면서 손에 들린 티르빙을 흔들어 보이는 강유식. 그 모습에 코너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금방 그 감정을 가라앉혔다. ‘저 녀석까지 합세하면 가망이 없다.’ 거기다 자신을 꿰뚫은 검도 저주가 서린 무기였는지 상처가 재생이 안 되고 잠깐 사이에 어마어마한 양의 피가 빨렸다. “두 번 다시…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거다!!” 퍼억!! 코너의 손이 자신의 머리통을 박살 냈고, 그와 동시에 붉은 빛이 전신을 휘감았다. 사르르륵! 상처투성이인 코너의 몸이 가루로 변해 흩날렸고, 싸울 준비를 하던 차시현과 아치볼드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망쳤네.” “예?” “마지막에 번쩍인 붉은색 빛. 그거 자기소생스킬일 거야. 이런 상황을 대비해 뇌 일부분을 은신처에 숨겨둔 거겠지. 가루로 변하는 것도 다른 곳에서 재생 중이라 그런 걸 테고.” “아…” “그, 그런…” 아쉬운 표정을 짓는 강유식의 모습에 차시현과 아치볼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쓰읍…피를 좀 더 빨았어야 했는데. 어중간하게 먹이니까 더 난리네…” “예?” “네?” 예상과 다른 중얼거림에 두 사람이 당황하며 물었고, 그제야 둘의 얼굴을 본 강유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둘 다 왜 그렇게 울상이야?” “방금 마인이 도망치셨다고…” “그래서 실망하신 게 아닌가 하고…” “아아. 그거 때문이었구나.” 차시현과 아치볼드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아직 어두컴컴한 뉴욕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망치기는 했지.” 그리고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도망치기는.” * “크학!” 특수용액이 차있는 거대한 배양관 안에서 코너가 몸을 일으켰고, 거칠게 숨을 내쉬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제기랄…” 자신이 실패했으니 바알 쪽도 좋게 풀리지는 않았을 테고, 결국 이번 계획에 사용된 모든 것들이 허사로 돌아갔다. “강유식…네놈은 반드시 죽여주마…” 원한을 떠나서 오늘 계획을 망가트린 주범이 강유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 분명 평소와 다를 게 없는데 미묘하게 드는 기시감. ‘뭔가 이상하다.’ 설마 자신들의 은신처가 발각된 것인가? 하지만 이쪽은 아치볼드에게도 알리지 않은 숨겨진 장소인데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후우웅 새하얀 안개가 그의 주변에서 피어올랐다. “!!” 갑작스럽게 피어난 안개에 코너는 곧장 바닥을 박차며 뒤로 물러섰다. “이…이건…” 안개 속에 갇혀버렸다. “백련환몽…” 그 중얼거림과 동시에 곳곳에서 새하얀 봉우리가 피어올랐고, 잎이 펼쳐지며 만개했다. 짜악─ 백련문주의 손안에 모든 것이 가둬졌다. “흐음…” 하수도 안에 있는 은신처를 손안에 통째로 가둬버린 백련문주는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발표 축하 선물로 적당하겠군.” 용건을 끝낸 백련문주는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뉴욕의 하수도 아래에 존재하던 비밀은 그날로 완전히 사라졌다. < 이제 좀 알 거 같냐?(6) > 끝 < 인기가 너무 많다(1) > 96화 뉴욕의 대규모 정전과 함께 일어난 아크 메이지 반혜영 피습사건은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해결되었다. -콰가가각!! 어두컴컴한 뉴욕의 도심 속에서 폭풍우와 비바람이 휘몰아쳤고, 그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갈려나 갔다. -콰앙! 쿠구궁! 유성이 번쩍일 때마다 습격해온
마인들의 몸이 폭발했고, 하늘에서 마법을 쏘아내던 재앙급 마인도 세 사람의 견제에 쉽사리 공격하지 못했다. -우우웅! 지름 1km가 넘는 대형 마법진. “허…” 학회장실에서 줄리어스와 이창완을 기다리며 어젯밤의 영상을 보고 있던 강유식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바알이 나타났을 줄이야…’ 아가레스와 마찬가지로 판데모니움의 최정상 간부로 손꼽히는 재앙급 마인. 어디 가서 절대 꿀리지 않는 강자였지만, 이번에는 싸운 상대가
나빴다. “반대쪽 눈깔도 확 뽑아버렸어야 했는데…” 꺼진 동영상을 바라보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반혜영. 그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었다. “다른 한쪽은 박살 냈다면서요. 그거면 됐죠.” “저놈들은 재생하잖아. 한 1년 지나면 쌩쌩해질 텐데 다치게 하는 게 뭔 소용이야.” 평범한 마인도 아니고 바알 같은 재앙급 마인에 판데모니움의 최정상 간부가 1년 동안 활동을 못 한다면 사실상 사지 중 하나가 작살난 것이나 다름없다. “아가레스 때도 그렇고 계속 살려 보내기만 하고…으으. 짜증 나.” 반혜영의 말대로 적을 살려 보낸 걸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강유식은 조금 달랐는데 판데모니움이 완전히 무력화되는 것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개 같은 놈들이어도 생각은 할 줄 아니까.’ 판데모니움은 세계의 패권을 노리고 있기는 하지만, 전 세계를 파괴하고 모든 인간을 마인으로 만들겠다는 개소리를 하는 미친놈들은 아니었다. ‘뭐. 이놈들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똑같지만…’ 그래도 준비가 끝나기 전까지 눈치껏 잘 움직이니 아직 성장 중인 강유식의 입장에서는 이번처럼 적당히 견제해 조용히 지내게 하는 게 베스트였다. “역시 쫓아가서 싹 쓸어버려야…” 하지만 반혜영은 지난번 아가레스 이후로 또 얽힌 게 신경 쓰이는지 흉흉한 눈으로 중얼거렸고, 당장이라도 전쟁을 일으킬 것 같은 그 모습에 강유식이 슬쩍 어깨를 잡았다. “이번에는 이 정도면 충분해요.” “그래도 확 쓸어버리는 게…” “녀석들이 바보도 아니고 똑같이 당하겠어요? 그리고…” 살짝 말을 늘어트린 강유식은 반쯤 진심을 담아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선생님이 걱정돼서 참을 수 없어지잖아요. 그러니까 혼자서 위험한 짓은 하지 마세요.” “무, 무슨…”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말을 버벅거리던 반혜영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그대로 고개를 훽 돌렸다. “뭐 하세요?” “시, 시끄러! 얌전히 맞아!” 그렇게 고개를 돌린 채 토닥이듯이 강유식의 가슴을 때린 반혜영은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돌아보았다. “뭐, 확실히 네 말대로 놈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게.” “잘 생각하셨어요.” 강유식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줄리어스와 이창완이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하군.” “밖이 혼잡해서 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네.” “두 분 다 딱 좋을 때 오셨어요. 일단 다들 앉으시죠.” 세 명을 줄지어 앉힌 강유식은 맞은편에 선 다음 미리 준비해둔 이동식 칠판을 옆으로 끌고 왔다. “지금부터 알려드릴 건 마법의 핵을 응용한 새로운 마법운용법입니다. 아직 체계화가 덜 되긴 했지만 세 분한테만 미리 알려드릴 테니 집중해주세요.” 강유식은 칠판에다가 기억하고 있는 오브의 형성방법을 그대로 적어 넣었고, 그 내용을 읽은 반혜영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마법의 핵을 외부에 구현해서 마력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거야?” 아직 초반부인데도 바로 오브의 정체를 알아보는 반혜영의 모습에 강유식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진짜 뭐 보여주기가 겁나네.’ 도대체 회귀 전에 아치볼드는 반혜영을 어떻게 죽일 수 있었던 것일까. “예. 맞아요.” “아…아으…” 강유식의 이야기에 반혜영의 입술이 달싹거리더니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이젠 뭘 어떻게 칭찬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너무 기뻐서 말도 못 하는 반혜영. 오랜만에 보는 그 벅차오른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었다. “일단 설명부터 끝내고 이야기하죠.” “그, 그래…그래야지.” 얼굴이 살짝 빨갛게 달아오른 반혜영이 고개를 들었고, 강유식은 다시 오브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스승이나 제자나 둘 다 똑같군…’ ‘이제 녀석을 가르치는 건 꿈도 못 꾸겠구만…’ 두 사람의 실력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지만 마법의 핵 자체가 이틀 전에 발표된 개념이고, 오브는 그것을 응용한 고급운용법이다. 우웅 손위에서 피어오른 푸른색 구체. 그 형태를 본 줄리어스와 이창완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앞선 발표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마법의 핵이란 결국 사용자의 의식입니다. 그리고 이 오브는 그 의식을 압축시켜 만들어낸 것이니 일종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죠.” “분신…” “으음…” 뭔가 알 것 같은 기묘한 간질거림에 두 사람이 눈매를 찌푸리고 있을 때. 옆에서 또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오…이렇게 인가…” 강유식보다 작기는 하지만 설명을 듣자마자 오브를 만들어낸 반혜영. [채무자 ‘반혜영’의 빚이 증가합니다.] ‘오…꽤 올랐네.’ 고급 운용법이라서 그런지 상당히 많이 오른 채무. “제가 두 분께 이걸 왜 가르쳐드리는지 알 것 같으세요?” 오브를 바라본 두 사람이 한참 생각에 잠겼고, 이창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오브를 통해서 체내와 체외의 가공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뜻인 게냐?” “뭐…” 이창완의 이야기에 줄리어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강유식이 씩 웃었다. “예. 바로 그겁니다.” 오브는 마법사의 분신. 관점에 따라서 육체의 일부라고 봐도 무방했다. “확실히…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군. 오브 내부에서의 가공과 외부에서의 가공을 동시에 진행하여 마력 간의 공명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하지만 만약 그 경우 폭주할 시 더 큰 폭발이 일어날 텐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육체를 매개체로 하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하겠지. 오히려 여러 실험을 거칠 수 있어 완성도가 더욱 높아질 수도 있다.” 이전까지만 해도 절대 합칠 수 없다던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눴고, 그 모습을 살펴보던 강유식은 적당한 때에 다시 이목을 모았다. “일단 저는 어디까지나 가능성만 느꼈을 뿐. 정말로 가능할지는 알 수 없고, 완성에 얼마나 걸릴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귀 전에는 없었던 조합이기에 여기서부터는 괜히 아는 척하다가는 그대로 역풍이 분다. “하지만 두 분이 만약 저와 같은 가능성을…최강의 화염마법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꼭 힘을 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 강유식의 이야기에 두 사람이 잠시 생각에 잠겼고, 자연스럽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알겠다. 한 번 해보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보겠네.” 굳은 결심을 내비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줄리어스와 이창완. 레바테인 연구의 하청이 완료된 것을 본 강유식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이걸로 레바테인은 저 두 사람이 알아서 잘 연구할 것이다. 조금 막히면 자신이 보고, 영 안 된다 싶으면 반혜영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되리라. “근데 너 이거 공짜로 가르쳐주는 거야?” “예?” “아니. 나야 뭐, 같이 논문도 준비했고 스승이니까 그렇다 쳐도 두 사람한테는 뭐라도 받아야지. 따지고 보면 비전마법 같은 건데.” 반혜영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살짝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어차피 나중에 레바테인 완성되고 나면 그거 홀라당 익힐 거라 따로 안 받으려 했는데…’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오브 같은 엄청난 고급 기술을 그냥 가르쳐주는 건 조금 아깝지 않나? “두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요?” “뭐…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군.” “결과적으로는 남들보다 한발 앞서게 된 것이니…” 대가로 뭘 줘야 할지 잠시 곰곰이 고민하던 두 사람은 서로 속닥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렇고 나중에 귀국할 때 찾아와라.” “쓸 만한 걸로 구해두겠네.” “아, 예. 알겠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 두 사람이 챙겨주는 물건이라면 아마 꽤 괜찮을 것이다. ‘…좀 옮았나?’ * 강의를 끝낸 뒤. “좋은 아침에요. 강유식 생도.”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백련문주. 그리고 그 뒤편에서 무뚝뚝하게 서 있는 일화단주. “어젯밤에는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걸요. 그렇게 예를 차릴 필요는 없어요.” 손을 내젓는 백련문주의 모습에 강유식은 맞은편 의자에 앉으면서 물었다. “은신처는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아직은 건드리지 않고 보류한 상태입니다. 이건…보는 편이 빠르겠군요.” 백련문주가 책상 위에 손을 올렸고, 잠시 후 탁자의 위로 새하얀 봉오리가 피어올라 연꽃이 피어나더니 그 안쪽에 자그맣게 압축된 한 공간이 드러났다. ‘이게 진짜 백련환몽인가.’ 이런 걸 보면 회귀 전에 왜 ‘백련문주가 있었더라면’ 같은 앓는 소리가 계속해서 나왔는지 알 것도 같았다. ‘도대체 베이징 사태가 무슨 일이었길래 이런 거물이 연루되었던 걸까.’ 다시금 밀려오는 궁금증에 강유식이 흥미롭게 보고 있을 때. 백련문주가 피어오른 연꽃을 앞으로 슬쩍 밀었다. “이건 이번 발표 축하 선물로 드리죠. 도주하기 전에 그대로 보존했으니 아마 괜찮은 물건들이 꽤 있을 거예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빈말이 아니라 타천의 계시의 뉴욕지부라면 회귀 전에 알려진 은신처 중에서는 손에 꼽히는 규모로 내부에 은닉되어있을 재산도 상당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강유식 생도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어떤 제안입니까?” 이만한 물건을 넘겨주면서 하는 제안이라면 상당히 까다로울 가능성이 높다. “저의 제자가 되어보지 않겠어요?” “…예?” < 인기가 너무 많다(1) > 끝 97화 백련문주의 제안에 강유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이지?’ 재능 있는 유망주에게 사제관계를 제안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물론 회귀 전에는 백련문주가 눈에 차는 유망주가 못 본 걸 수도 있지만…그렇다고 나를?’ 객관적으로 보자면 전 세계에서 자신만큼 뛰어난 유망주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강유식은 백련문주의 제안을 단순하게 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단순하게 받아들이기는 힘든 모양이군요.” 그런 강유식의 속내를 알아본 것인지 백련문주가 가슴 쪽으로 늘어트린 땋은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제가 강유식 생도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국가나 길드와 같은 세력에 의도를 두고 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저를 가르쳐보고 싶으신 게 전부입니까?” “네. 그게 전부에요.” 미소를 지은 백련문주가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강유식 생도는 매우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특별한 재능이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백련환몽의 재능이에요.” “…” 백련문주의 대답에 강유식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이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잘못 보신 것 아닙니까?” 환영계열은 다른 계열보다도 재능을 많이 타는 쪽이었는데 특히 강유식은 그쪽으로 지리멸렬한 수준이었다. “강유식 생도는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기질이 있군요.” “아뇨. 그게 아니라 전에 환영마법을 사용할 때는 영 소질이 없어서…도대체 어떤 부분을 보고 재능이 있다고 하시는지 감이 잘 안 잡히네요.” “어떤 부분이냐고 물으셔도 전부입니다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백련문주는 뭔가를 떠올렸는지 미소를 지었다. “잠시 손을 줘보시겠어요? 제 손바닥에 손등이 닿도록.” “예?” “잠깐이면 돼요.” 오른손을 앞으로 내민 백련문주의 모습에 강유식은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올렸다. “그대로 가만히 있으세요.” 우웅─ 손등 아래에서 마력이 울려 퍼졌고, 잠시 후 부드러운 감각과 함께 강유식의 손 위로 새하얀 봉오리가 나타나 만개했다. ‘연결된 게 없는데 연결된 것처럼 느껴지잖아?’ 마치 자신의 손에서 백련환몽이 펼쳐진 것 같은 기묘한 감각. 그에 강유식이 이상하게 보고 있을 때. 화아악 돌연 주변에 안개가 깊이 깔리기 시작했고, 눈앞에 있던 백련문주와 일화단주를 비롯하여 접객실 전체가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그거 들었어요?” 뒤쪽에서 들려오는 안설하의 목소리. ‘…회귀 전이네?’ 보기 전까지는 몰랐지만, 본 순간 어렴풋이 떠오른다. “뭘요…” 살짝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자신. 그에 가슴을 쓰다듬던 안설하가 슬쩍 웃었다. “백련문주가 감금된 게 아니라 도망쳤다는 소문이요.” “…그렇답니까?” “말했잖아요. 소문이라고. 근데 아예 신빙성 없는 이야기는 아닌지 꽤 떠들썩하더라구요.” 기억을 엿본 강유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여기서 분명 뭔가 이상한 이야기가…’ 떠오를 듯 말 듯 한 기억에 강유식이 눈매를 찌푸리고 있을 때. 안설하가 이야기를 이었다. “무생원의 안개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백련문주가 도망쳤기 때문이다, 라는 식으로 퍼져서.” 안설하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 무생원이 있었구나!’ 백련길드의 사옥에 위치한 정체불명의 정원. ‘그런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번에 백련문주의 가르침을 받는 겸해서 알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예상치 못한 가능성에 강유식이 흥미로운 표정을 하고 있을 때. “그렇군요…” “뭐야. 재미없어요?” “아니 뭐. 중국 쪽 이야기인 데다가 관계도 없으니까…” 세상만사가 다 귀찮다는 듯이 대답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 순간. 강유식은 목덜미가 오싹해지는 감각과 함께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미없나 보네.” 어둠 속에서 히죽 웃은 안설하가 뱀이 기어가듯이 움직이더니 어느샌가 위에 올라탄 채로 눈을 반짝였다. “그러면 재밌는 거 할까요?” “자, 잠깐…아직 20분도 안 지났…” “재밌게 해줄게요~” “아, 안 돼…!” 뱀의 송곳니가 그대로 과거의 자신을 깨물었고, 그 참담한 기억에 강유식이 고개를 돌렸다. “강유식 생도?” 그리고 안개가 사라지며 주변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백련문주의 손이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백련환몽이 유지되고 있단 말인가. “백련환몽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걸 피울 수 있는 토양이 필요한데…강유식 생도는 그걸 지니고 있기 때문에 술법을 유지할 수 있는 거예요.” “토양이요?” “예시로 설명해드리죠. 일화단주. 잠시 도와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백련문주의 이야기에
뒤에 서 있던 일화단주가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바닥 위에 손을 올렸다. 솨아악 연꽃이 안개로 변해 사방으로 흩날렸다. ‘페르스발. 네가 보기에는 어때?’ -레이디께서 이야기하시는 토양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조금 전 상황에 개입하지 않은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로드. 똑같이 술법을 펼쳤는데 다른 결과가 나온다. 손 위에 피어난 백련환몽을 본 강유식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토양이란 말이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조건이 충족된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재능이 있다면 배우는 게 좋지 않을까. ‘백련환몽과 공명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까지 하고 있다니…’ 어쩌면 지난번에 백련환몽의 구조를 훑어보면서 무의식적으로 사용법을 체득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아이밖에 없어.’ 백련환몽을 전수받아 자신이 못다 할 사명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눈앞에 있는 이 아이밖에 없다. “그래서…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음. 대답하기 전에 몇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무슨 일이죠?” “제자가 되려면 제가 중국으로 건너가야 하는 겁니까?” 가는 쪽으로 기운 것이나 다름없는 강유식의 물음에 백련문주가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국외에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기도 하고, 백련환몽을 습득하는데 효율적인 수련 장소가 백련길드의 사옥에 있기 때문에 중국으로 건너오는 게 괜찮을 거예요.” “아시겠지만 제가 아직 성진 사관학교에 재학 중이라 중국으로 완전히 건너가는 건…” “듣자하니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생도는 외부활동을 쉽게 허락해준다더군요. 저희 백련 길드 정도면 괜찮지 않나요?” 이미 다 알아보고 온 것인지 막힘없이 나오는 대답. “제가 스스로 말하는 것도 조금 그렇습니다만…아마 이번 발표가 세간에 공개되고 나면 꽤 유명해질 겁니다. 밝은 쪽으로든, 어두운 쪽으로든.” 자기 몸을 챙길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또 모르지 않는가. “만약 중국으로 간다면 호위를 어떻게 해주실 생각입니까?” 강유식의
질문은 두 가지 의도였다. “강유식 생도의 호위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백련문주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저. 그리고 제 뒤에 있는 일화단주. 저희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반드시 그 곁에 있을 겁니다.” S급 헌터 두 사람이 자신의 호위를 번갈아 가며 맡는다. 그 파격적인 배치에 강유식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백련문주가 의기양양하게 바라보았다. “이걸로 대답이 되었나요?” “…예. 충분히 됐습니다.” 이 정도면 더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이건?” “서약서입니다. 서로의 신뢰를 높여주는 필수품이죠.” 미소를 지은 강유식이 볼펜을 잡았다. “일단 호위 시간이랑 숙소 위치부터 맞춰볼까요?” 강유식이 접객실을 나간 것은 그로부터 3시간 뒤였고, 협상이 모두 끝난 뒤. 방에 남은 백련문주과 일화단주는 초췌한 표정을 지었다. “…강유식 생도는 어디서 암살당한 일은 없겠군요.” “그럴 것 같습니다…” 피곤한 표정을 지은 일화단주, 라오 창이 백련문주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외부인을 제자로 받아들이면 내부에 반발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렇다고 가질 수 없는 것을 안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한 백련문주, 리 메이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백련환몽을 습득할 수 있는 것은 아마 강유식 생도밖에 없을 거예요. 그러니 제가 사명을 못다 할 경우에는…” 잠시 말을 멈춘 리 메이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을 움켜쥐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 리 메이의 이야기에 라오 창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조용히 그 뒤를 지켰다 * “둘 다 이쪽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네.” 두 사람이 사인한 서약서를 본 강유식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여기저기 티가 안 날 정도로 아주 살짝 꼼수를 부렸는데 하나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이걸로 나중에 중국 여행은 편하게 하겠구만.’ 피식 웃은 강유식은 그대로 서약서를 다시 챙겨 넣었고, 호텔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투웅─ 엘리베이터 문에 파문이 일어나며 형태가 바뀌었고, 본래 형태보다 더욱더 화려하게 꾸며진 문이 나타났다. 띠잉! 본래 최상층의 복도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 ‘허미트인가.’ 아치볼드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에게 찾아오겠거니 했는데 설마 그게 오늘이었을 줄이야. ‘여기는 변화가 없군.’ 허미트와 만나고 싫다면 위쪽 뚜껑을 열고 빠져나가면 된다. 두 가지 선택지에서 강유식은 잠시 고민하다가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넓네.’ 스위트룸의 절반 정도는 되는 크기. ‘여기서는 어떤 모습이려나.’ 이번에는 얼굴을 볼 수는 있을까. “늦었네요.” 책장의 뒤편에서 어깨까지 오는 금발 머리의 여인이 걸어 나왔다. “허미트?” “제가 아니면 누가 이런 곳을 만들겠어요?” “…그렇긴 하죠.” 묘하게 까칠한 모습에 강유식이 떨떠름하게 바라보자 소파에 앉은 금발 머리의 여인, 허미트가 옆에 눈짓했다. “앉아요.” “아, 예.” 강유식은 곧장 옆 소파에 앉았고, 허미트는 그대로 다리를 꼬며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훌륭했어요. 솔직히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은 몰랐는데….” 뭔가를 내다본 것처럼 이야기하는 허미트의 모습에 강유식이 이채를 띤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치볼드의 설득. 그리고 이번에 판데모니움의 습격이죠. 저는 설득에 실패하고 반혜영이 중상을 입을 거라 예상했거든요.” 예상외로 술술 대답하는 허미트의 모습에 강유식이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았다. “좀 더 숨기려고 할 줄 알았는데…조금 의외네요.” “숨긴 다라…혹시 예지능력 같은 것 말인가요?” “뭐, 그렇죠.” 처음 아치볼드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강유식은 허미트가 예지계열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또 지금 보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예지능력이라고 보기에는 불확실성도 많고 본인도 살짝 놀란 눈치가 보인다. “확실하게 말해두자면 저는 예지능력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남들보다 조금 많이 알고 있을 뿐이죠.” “많이 안다…” “예를 들자면…아, 그게 좋겠네요.” 소파에 살짝 기댄 허미트는 허벅지 위에 양손을 포개며 설명을 이었다. “만약 똑같은 재료를 놓고 일반인과 요리전문가에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의 종류를 말해라면 누가 더 많이 알까요?” “당연히 전문가겠죠.” “저도 그와 비슷한 거예요. 똑같은 상황을 봐도 저는 더 많은 경우의 수를 예상할 수 있고, 그중에서 최선의 수를 골랐던 거죠.” 미래를 알아낸 것이 아니라 경우의 수를 보고 골랐을 뿐이다. 그 이야기에 강유식은 허미트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냥 도박이네.’ 가장 좋은 수를 고르지만 그게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이번 사건을 보니 적극적으로 개입도 못 하는 것 같던데 완전 빛 좋은 개살구 아닌가. “그럼 정말 어떻게 될지 몰랐던 겁니까?” “물론이죠. 만약 제가 정말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왜 판데모니움이 뉴욕에서 설치는 걸 봤겠어요?”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싶었지만, 강유식은 굳이 말로 하지는 않았다. 지난번 만났을 때와 성격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허미트가 악인처럼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괜히 틱틱거리다가 밉보일 필요는 없지.’ 허미트에 관한 생각은 일단 접어두기로 한 강유식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일로 초대한 겁니까?” “아. 별 건 아니고 대금을 치르고도 잔금이 꽤 많이 남아버려서요. 그걸 정산하려고 찾아왔어요.” “대금?” 강유식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허미트가 피식 웃었다. “아직 안 준 모양이네요. 뭐, 그건 그때의 즐거움으로 두고 우선은 잔금부터 처리하죠.” 허미트가 소파 아래쪽으로 손을 가져갔고, 이내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상자 세 개를 탁자 위에 올린 다음 열었다. 딸깍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각각 한 켤레의 검은 장갑과 초록색 보석이 작게 박힌 귀걸이. ‘드라우프니르?’ 9일마다 마력을 저장해둘 수 있는 AA급 보조용 아이템. < 인기가 너무 많다(2) > 끝 98화 ‘이걸 이렇게 볼 줄은 몰랐는데.’ 드라우프니르를 본 강유식은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뭐…좀 미묘하지만.’ 폐병도 사라지고 스탯도 풍족해진 지금은 손해는 아니지만 AA급 장비라고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정도.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아, 이게 제일 비싸 보여서요.” 성능을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었기에 강유식은 대충 둘러댔고, 그 모습에 허미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중에 인챈터도 생각하면 그 팔찌만큼 좋은 게 없긴 하죠. 저장된 ‘힘’을 9일마다 증폭시켜주니까요.” “…예?” 강유식의 물음에 허미트가 드라우프니르를 가리켰다. “그거. 거의 인챈터에게 전용 물건이에요. 적용치가 고정된 인챈트도 9일마다 증폭시킬 수 있으니까요.” “…진짜입니까?” “당연하죠. 그거 이외라면 마력탱크로 밖에 못 쓰는 건데…그 정도면 AA급 장비라기에는 조금 미묘하죠.” 허미트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놀란 표정으로 드라우프니르를 바라보았다. ‘이게 인챈터 전용 아이템이었다고?’ 기본적으로 인챈터는 보기 드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매우 희귀한 존재였다. ‘그런 거라면…확실히 밝혀지지 않을 만도 하구만.’ 안 그래도 보기 드문 인챈터가 감정스킬로도 나타나지 않았던 활용법을 우연히 실험해보다가 그 방법을
알아낸다? ‘…그런데 이 녀석은 어떻게 아는 거지?’ 물건을 준 녀석이니 알고 있겠지, 라고 넘길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회귀 전에 알려지지 않은 게 설명이 안 된다. “혹시 감정스킬이 있는 겁니까?” “음.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아이템 쪽으로는 조금 조예가 깊거든요.” “그럼 다른 아이템도 감정해주실 수 있습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허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은 해요. 대신 이번처럼 ‘대금’ 필요해요.” 허미트의 이야기에 강유식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역시 그쪽인가.’ 정확히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허미트에게 물건을 받거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대금’을 지급해야한다. ‘헌터가 아니라 그냥 장사꾼이구만.’ 허미트가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강유식은 한결 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대금이라는 건 어떻게 지급하는 겁니까?” “그건 저도 알 수 없어요. 원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건 아니니까요. 다만 가능성이 높은 건…” 자세를 다잡은 허미트가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번처럼 최선의 결과를 내는 것.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미묘한 조건에 강유식은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두겠습니다.” “그럼 잔금이 아직 조금 더 남아있으니까 다른 아이템들에 대해서도 알려드리죠.” 검은 장갑은 아라크네의 장갑으로 감각의 둔화 없이 착용이 가능하며 마력의 운용에 따라 다양한 효과를 지닌 실을 만들 수 있었다. ‘둘 다 선물용이구만.’ 앞서 일이 끝나면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한 차시현이나 걱정이 늘어난 반혜영에게 주면 딱 좋을 물건이다. “잘 쓰겠습니다.” “다음 활약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문밖으로 나가면 원래대로 돌아갈 거예요.” “그럼…” 자리에서 일어선 강유식이 막 문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강유식 생도.” 허미트가 나지막하게 불렀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뭡니까?” “강유식 생도는 어떤 세상을 원하는 거죠?” 잔뜩 무게를 잡은 허미트의 물음에 강유식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가 살기 좋은 세상이죠.” 그 대답에 허미트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다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고마워요.” “그럼…” 그 말을 끝으로 강유식이 밖으로 나갔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던 공간이 흐릿해 져갔다. “응원할게요.”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타천의 계시의 은신처를 봉인한 백련환몽의 지속시간은 백련문주의 손에 벗어난 이후로 사흘. “크윽…네놈들…” 여태까지 봉인되어있었지만 금방 상황을 파악한 것인지 이빨을 드러내며 노려보는 코너. “제압해요.” “알겠습니다.” “예!” 눈을 번뜩인 두 사람이 코너에게 달려들었고, 눈 깜짝할 사이에 개박살을 내버린 뒤 은신처 전체를 수색했다. “보자…이빨 안에 독약 두 개에, 체내에 자폭마법 하나. 자살용 반지도 꼈고…얼씨구. 깔창 아래에도 숨겼네.” “으읍…!” 자결수단이 차차 사라지자 빼앗긴 녀석을 비롯해 잔당들의 눈이 모두 휘둥그레졌다. ‘저, 저놈이 어떻게…’ ‘정보가 유출된 것인가?!’ 평범한 헌터라면 절대로 구분할 수 없는 자신들의 수단을 어떻게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움직이지 마십시오.” “헛짓거리는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잔당들에게 조율자를 연결한 차시현과 이번 발표를 통해 습득한 S급 스킬 ‘마력 회귀’를 발동한 아치볼드. “이런 거 쑤셔 넣을 시간에 강화마법이나 쳐넣지. 쯧쯧.” 혀를 찬 강유식은 잔당들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거의 몬스터에 가까운 외관을 지닌 코너와 달리 대부분은 4분의 1정도가 변이한 어정쩡한 수준. -피! 피!!! 낌새를 눈치 챘는지 날뛰는 티르빙과 비명을 내지르는 안드바리. 그 소리를 흘러 넘기며 강유식이 제압당한 잔당을 바라보았다. “쓸 만한 정보 넘길 사람?” “…” 잔당들은 대답대신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고, 대강 대답을 들은 강유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알았어.” 푸욱! 티르빙이 코너의 옆에 앉은 잔당의 허벅지를 꿰뚫었고, 검날에 붉은 기류가 휘몰아치더니 변화가 생겨났다. 철컹─ 중앙 부분이 갈라져 확장된 검날과 내부에 숨겨져 있다 드러난 붉은색 검면. 장검에서 대검처럼 바뀐 티르빙에서 붉은빛이 희미하게 번뜩인 순간. 콰드득! “끄아아악!!” 무언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속도로 피가 빨려 들어갔다. 우드득! 콰득!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 괴기한 광경에 강유식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고, 10분이 지나고 나서야 주변을 가득 채우던 소리가 끊어졌다. 카앙 허벅지를 꿰뚫었던 칼날이 지면에 부딪쳤고, 피가 빨린 잔당은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넘길 사람?” “…”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고, 강유식은 조금 전보다 두 배는 느린 속도로 흡혈을 지시했다. -천천히 좀 먹어! 안드바리의 제어 하에 티르빙은 비교적 천천히 피를 빨아들였고 생생하게 이어진 고통과 비명에 남은 자들의 얼굴이 계속해서 파리하게 물들어갔다. “B-27복도의 다섯 번째 바닥을 열어보면 그 안에 통로가 있습니다. 거기에 비상용 마석이 보관된 창고가 …” “이 빌어먹은 자식이…!” 얼굴 절반이 변이된 녀석의 실토에 코너가 이빨을 으르렁거리며 소리쳤고, 강유식은 보조기 세 개를 작동시켰다. ‘페르스발. 가서 확인하고 와.’ -알겠습니다. 로드. 강유식의 명령에 보조기가 날아가 확인했고, 비상용 마석을 발견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넌 통과.” 강유식은 티르빙을 꽂아 죽기 직전까지만 피를 빤 다음에 질 낮은 농축액이 담긴 앰풀을 건네줬다. “이게 뭔지는 알지?” “예…예…” “살고 싶으면 나가자마자 먹어.” 따악!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실토한 녀석이 안개에 휩싸여 사라졌고, 그 모습에 남은 녀석들이 술렁였다. “만약 여기서 발설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반드시 죽여…” 푸욱! “크아아악!” 코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유식이 배를 찔렀고, 티르빙의 완급조절에 익숙해진 안드바리가 최대한 고통스럽게 피를 빨아들였다. “으아아악!” 명색의 간부인 코너가 고통을 못 참고 몸부림치는 그 모습에 남은 녀석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더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입을 열었다. “이쪽 은신처 말고도 근처 건물 옥상에 숨겨둔 재산이…” “비밀리에 사용하고 있는 차명계좌가 있습니다!” 뉴욕에 타천의 계시가 숨겨둔 재산들이 하나둘씩 나왔고, 강유식은 증거가 확인되는 대로 피를 빨고 앰풀을 넘겨준 다음 내보냈다. “크으윽…” 그렇게 해서 은신처에는 코너 한 명만 남았고, 처음부터 벼르고 있었던 아치볼드가 흉흉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제 저 녀석만 남았군요. 제가 처리해도…” “아니. 기다려.” 아치볼드를 제지한 강유식은 피를 빨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코너를 바라보았다. “이제 다 나갔는데 슬슬 끝내자.” “…그것도 그렇군요.” 방금까지 고통스러워하던 코너가 바로 표정을 고치며 대답했고, 그
모습에 차시현과 아치볼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읽어봐.” 서약서를 건네받은 코너는 내용을 훑어보았고,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확실하군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하면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 봐.” “물론이지요. 펜 좀 주시겠습니까?” 강유식은 그대로 펜을 꺼내 던져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시현과 아치볼드가 이해가 안 가는 표정을 지었다. “저…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 처음부터 따로 이야기하고 있었거든요. 나를 돕겠다는 서약서에 사인하면 살려주겠다고요.” “그럼 앞에 나간 자들은…?” “밖에서 대기 중이던 크림슨이라는 놈이 죄다 먹었어.” 담담하게 대답하는 강유식의
모습에 두 사람 모두 묘한 표정을 지었다. “타천의 계시는 말단 조직원도 따로 관리하는 영역이 있을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하나하나 다 뒤져본 거예요.” “그랬었군요.” “과연. 그런 방법이…” 상대가 가진 것은 그야말로 남김없이 쥐어짜 내는 강유식. 그 모습에 차시현과 아치볼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저쪽 분야로도 연구를 해봐야겠군…’ 두 사람이 매우 위험천만한 분야로 발을 넓히려 하고 있을 때. 코너가 펜과 서약서를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서약서의 핵심조건은 기억하지?” “제가 알고 있는 타천의 계시완 관련된 모든 기밀을 이야기하고 당신을 도울 것. 그리고 당신은 제가 타천의 계시를 장악하는데 도와줄 것.” “좋아. 그럼 우선 기밀부터 들어볼까. 빨리 말해.” 강유식의 물음에 코너가 아직 제압당해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우선 이것부터 풀고…” 푸욱! “크아아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벅지를 꿰뚫은 티르빙. “다…당신. 나를 향한 적대 행위는 서약 위반이…” “적대 행위? 내가 언제?” “그게 무슨…크으윽…!” 조금 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빨려 나가는 피에 코너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했잖아. 빨리 말하라고.” “무슨…” “서약서에 명시되어있었는데. 못 봤어?” 티르빙을 푹 찔러놓은 다음 강유식은 서약서를 꺼내 한 부분을 가리켰다. [코너 번이 약속된 협력 요청을 지연할 경우, 강유식은 그에 대한 재촉행위를 할 수 있다.] 지금 상황과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내용에 코너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그에 강유식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까부터 몇 번을 말해 빨리 말하라고.” “뭐, 뭐 설마 이게 지금 재촉행…으아아악!” 안쪽을 후벼 파는 검날에 코너가 떠나가라 비명을 내질렀고, 그 모습에 강유식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가벼운 새끼는 입만 열면 구라지.’ 그런 놈을 솔직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 가지밖에 없다. “마…말하겠소. 말할 테니…그만…” 재생력이 뛰어나서 그런지 피가 빨려도 비교적 멀쩡한 코너. 그 모습에 강유식이 슬쩍 웃으며 티르빙을 잡았다. “빨리 말하라니까?” < 인기가 너무 많다(3) > 끝 99화 “흐음. 영입파랑 척살파랑 반으로 나뉘었단 말이지.” “예! 그, 그렇습니다!” 벌벌 떨면서 대답하는 코너의 모습에 강유식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나는 거의 반반인가.’ 마인으로 타락시켜 여느 때처럼 영입하자는 영입파. 그리고 기존과 다르게 각 조직의 커넥션을 이용해 죽이자는 척살파. ‘반혜영을 타락시키려고 나를 쓸 줄은 몰랐네.’ 아끼는 제자의
죽음으로 감정을 폭주시키고 곁에서 선동하여 반혜영을 재앙급, 그 단계를 넘어서는 괴물로 만들어낸다. “그럼 이번 계획은 척살파 쪽이었어?” “예. 그렇습니다…” “그럼 넌 척살파 쪽 간부네?” “그…그게…” 강유식의 물음에 코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빨리…” “마, 맞습니다! 저도 척살파 간부였습니다!” 빨리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즉답하는 코너의 모습에 강유식이 티르빙으로 머리를 툭툭 쳤다. “대가리 굴리는 소리 들릴 때마다 1분씩이야. 알았어?” “알겠습니다!” “그래. 그래서 뭐, 척살파 너 말고 또 누구 있는데?” 코너는 그 즉시 척살파와 연관된 타천의 계시 관계자들을 줄줄이 읊었고, 강유식은 그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넣어뒀다. ‘굵직한 놈들은 거의 다 척살파네.’ 아무래도 반혜영의 마인화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해서 그런지 기대가 상당히 큰 모양이다. “그 밖에 쓸 만한 거 없어?” “예…?” “쓸 만한 정보 없냐고. 알아서 좀 꺼내 봐.” “그, 그게 좀 더 정확하게 말해주시지 않으면…” 푸욱! “크으윽!” -크르릉 피를 양껏 먹어서 그런지 얌전해진 티르빙과 익숙해진 안드바리. 고통에 눈매를 찌푸린 코너의 모습에 강유식이 차가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말했잖아. 대가리 굴리는 소리 들릴 때마다 1분이라고.” “하, 하지만…말씀드리기 위해서는 생각을…” “그럴 필요 없지. 정말 중요한 정보는 듣자마자 딱 알잖아. 넌 그냥 그중에서 그나마 덜 중요한 정보를 말해주려고 그러는 거 아냐?” “아,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게…” 당황한 코너의 모습에 강유식이 티르빙을 꾹 눌렀다. “그럼 생각나는 대로 전부 말해. 정말 중요하다 싶으면, 네 처분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 뒤로 코너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말했고, 그중에는 강유식이 회귀 전에 알고 있었던 것도 있었는데 한 가지 놀랄만한 이야기도 있었다. “일본 쪽에 그런 일이 있었나…좀 의외네.” “그게 제가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그러니 부디…” 부들부들 떨면서 이야기하는 코너의 모습에 강유식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그래. 진심이 느껴졌으니까 이번에는 이걸로 봐줄게.” 거의 한계까지 피를 빨아들인 강유식은 티르빙을 뽑은 다음 코너를 바라보았다. “서약서가 있으니까 허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예…알고 있습니다.” “좋아. 그럼 다음에 보자고.” 따악! 손가락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안개가 전신을 휘감았고, 그 모습에 코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번뜩였다. ‘반드시…반드시 복수해주마!’ 서약서의 빈틈이라면 자신도 봐둔 것이 있다. [이번에는 늑대인가…하나같이 격이 떨어지는군.] 강유식의 소유이면서도 소유가 아닌, 검붉은 용이 투덜거리며 그를 맞이했다. 후우웅 당사자가 죽으면서 서약서의 빛이 사라졌고, 강유식은 그대로 불태우면서 몸을 풀었다. ‘이걸로 은신처도 다 끝냈고 남은 건…’ 잠시 생각하던 강유식이 피식 웃었다. ‘뉴욕 마지막 수금인가.’ * 뉴욕에서 벌어진 피습 사태가 일단락된 뒤. “하하. 감사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강유식이 축하연에 참가한다는 소문이 주변에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강유식 님의 마법을 견식 해보고 싶습니다!” “아 물론이죠. 다음에…” 두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는 중년인의 모습에 강유식은 자연스럽게 대답하면서 징수목록을 훑어보았다. ‘별거 없네. 징수.’ [채무자 ‘조지 캐스비’ 강제집행에 들어갑니다. 스킬 ‘화염강화(B)’를 징수합니다.] [채무자 ‘조지 캐스비’의 채무가 모두 납부되었습니다.] 조지 캐스비의 스탯과 쓸 만한 스킬 하나가 고스란히 넘어왔고, 채무가 모두 사라진 것을 본 강유식은 미소를 지었다. “기회가 된다면 찾아뵙겠습니다.” 이야기를 끝낸 강유식은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다른 마법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징수목록을 살펴보았다. ‘잠재된 A급 스킬도 꽤 되고…미래도 깔끔하구만.’ 앞서 범죄자가 되어 수감되는 조지 캐스비와 다르게 마법학계에서 적당히 자리도 잡게 된다. “그 마법술식은 괜찮군요. 하지만 이번에 발표된 마법의 핵을 의식한다면 조금 더 변주를 줘서…” 강유식의 설명에 자니 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런 방법이…감사합니다!” 어림잡아도 두 배는 효율적인 배치에 자니 양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에 강유식이 미소를 지었다. “같은 마법사끼리 도우면서 사는 거죠. 혹시 알겠습니까? 미래에 자니 양님이 제게 큰 도움을 주실지.” “…” 강유식의 이야기에 자니 양이 살짝 감동한 표정을 지었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눈앞에 떠올랐다 [채무자 ‘자니 양’의 빚이 증가합니다.] A급까지는 안 됐지만 상당히 올라간 채무. ‘전부 관리하는 건 불가능하지.’ 발표에 참여한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각국에서 활동하다가 모인 이들이라 관리도 힘들고 뒤가 구린 인물도 섞여 있다. “후우…엄청 몰려왔네요.” 정리를 끝낸 강유식은 마지막으로 찾아온 하인즈와 타오 페이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대충 만날만한 놈만 만났어야지. 그걸 왜 다 상대한 거냐?” “간단한 응용법이라고 해도 그렇게 쉽게 알려줘서는 안 되네. 호의가 호의로만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 이번에 생겨난 채무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보다 걱정해주는 두 사람. 그에 강유식이 피식 웃으며 손에 들린 음료를 마셨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착한 사람들한테만 가르쳐줬으니까요.”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놈들도 있는 거다.” “뭐, 이번에는 다 착한 거 같던데요.” 미소를 지은 강유식은 눈앞의 스탯창을 바라보았다. [강유식] 근력 : 242 민첩 : 212 고유 스킬 : ‘채권자’ 보유 스킬 : 인지 극대화(S), 용린의 갑옷(S), 트윈 템페스트(A), 멀티 캐스팅(A), 기마술(A), 금강성골(B+). 번개 사슬(B), 귀화창(B), 불꽃강화(B), 쉐도우 스네이크(B)… ‘미쳤구만 미쳤어.’ 평균적으로 S급 헌터의 스탯 합은 1,000 이상. ‘이걸 거의 반년 만에 만들다니…내가 봐도 더럽네.’ 하지만 여기까지 도달했으니 앞으로는 성장속도가 훅 떨어질 것이다. ‘티클 모아 태산이라지만 그것도 어지간해야지.’ 지금부터는 스탯의 성장보다는 상승효과를 볼 수 있는 스킬. 또는 장비를 모으면서 관계를 확장해나가는데 주력하는 것이 좋다. “아. 그리고 저 잘하면 중국에 한 번 갈 거 같습니다.” “뭐?” “백련 길드로 견학 가기로 했거든요. 그때 천무궁도 한 번 들를게요.” 다른 때라면 아무래도 구린내가 나서 천무궁을 방문하기 찝찝했겠지만, 백련문주나 일화단주를 대동한 상태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의뢰를 맡아줄 생각이냐?” “그건 아직 고민 중이고 일단은 아이템부터 받아가려고요.” “아…그렇군.” 살짝 아쉬워한 타오 페이는 금방 표정을 바꾸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바뀔 만큼 엄청난 물건을 준비해두지.” “기대할게요.” 슬쩍 웃은 강유식은 문득 주변을 둘러보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하인즈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빌헬미나는 어디로 갔습니까?” “아. 그 아이라면 지금 방에 있네. 감이 제대로 잡혔는지 발표회 날 이후로 쭉 방에서만 지내더군.” “…그래요?” 확실히 채무가 A급까지 껑충 뛸 정도였으니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강유식이 대충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하인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만나면 깜짝 놀랄 걸세. 기대하게나.” “예…알겠습니다.” 이번이 아니면 조만간 만날 일이 있을까 싶지만 강유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슬슬 둘한테 가볼까.’ 안 그래도 한참 방치해뒀으니 약이 바짝 올라있을 것이다. “저는 그럼 잠시 다른 곳으로 가보겠습니다.” “반혜영은 테라스로 나갔어.” “자네 친구도 같이 나갔으니 그쪽으로 가보게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둘의 모습에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강유식이 테라스를 향해 걸어가던 순간. 자연스럽게 한 여인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유식 생도.” 단정한 정장 차림에 가지런히 늘어트린 장발머리. “신녀께서 저한테 무슨 일로…” 허미트, 아크 메이지와 함께 늘 마법계 최강자 논쟁에 끼어드는 일본의 S급 헌터. 신녀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강유식 생도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잠시 괜찮으신가요?” 딱딱한 말투로 물어보는 신녀의 모습에 강유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무슨 용건이지?’ 회귀 전의 신녀는 외부활동이 꽤 드문 인물이었는데 정기적인 게이트 방문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정부에서 만들어준 거처인 ‘신궁’에서만 지냈다. ‘그런 걸 보면 외부로 나돌아다니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보려고 뉴욕까지 왔다란…’ 이유가 무엇일지 잠시 생각하던 강유식은 자연스럽게 코너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과연. 그건가.’ 신녀가 만약 코너가 이야기한 일본 측의 사건과 관계가 있다면,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이렇게 밖을 나온 것도 이해가 간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신녀는 테라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따라 나가자 뉴욕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라. 없잖아?’ 두 사람에게 들은 것과 달리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차시현과 반혜영. 그 모습에 강유식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우웅 신녀의 중얼거림과 함께 주변에 투명한 막이 쳐졌고, 소리가 새어나가는 게 막힌 것을 본 강유식이 앞을 바라보았다. “만약에 사태를 대비한 것이니 불편하더라도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강유식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용건으로 찾아오신 겁니까?” “제가 강유식 생도를 찾아온 것은…현재 제게 봉착한 문제를 당신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허미트에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허미트의 소개라는 이야기에 강유식이 두 눈에 이채를 띠며 물었다. “어떤 문제를 말씀하시는 거죠?” “…” 강유식의 물음에 신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현재 일본 내에 타천의 계시가 암암리에 자리를 잡은 상태입니다만…부끄럽게도 그 꼬리를 찾아내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걸 강유식 생도가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신녀의 제안에 강유식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보상은 뭡니까?” 할 수 없다는 말 대신 보상부터 물어보는 강유식. 가능성이 보이는 그 질문에 신녀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만약 강유식 생도가 그 꼬리를 찾아내 주신다면 저의 창고에 보관된 AA급 아이템 중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강유식은 신녀와 관련된 아이템들을 메모리맵으로 떠올려보았고, 이내 몇 가지 후보군이 떠올랐다. ‘알려진 것 중에 제일 좋은 건 신편귀독주인가.’ B급 마석 농축액 한 병당 그 50배의 가치를 지닌 특수한 영약을 만들어낸다는 아이템. 사용법이 까다롭기는 하지만 페르스발도 있으니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약소하지만 착수금도 드릴 수 있습니다.” “착수금이요?” “예. 태령음양술이라는 주술이 담긴 부적으로 사용하면 하루 동안 모든 능력을 1.5배로 증폭시킬 수 있습니다. 단시간이라면 그 이상도 가능하고요.” 스탯을 높여주는 신녀의 주력 버프기. 생각보다도 괜찮은 착수금에 강유식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보여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지요.” 후웅! 신녀가 허공에서 가볍게 손을 비틀자 손가락 사이에 부적 한 장이 끼인 채로 나타났고, 강유식은 그것을 건네받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과연. 겉으로만 봐도 예사롭지가…음?’ 뭔가 묘한 감각에 강유식이 부적을 내려다보았고, 이내 혹시나 싶은 마음에 페르스발에게 물었다. ‘페르스발. 내부에 술식구조. 분석할 수 있겠어?’ -알겠습니다. 로드. 희미한 발열과 함께 부적 내부의 술식이 훤하게 보이는 듯했고, 잠시 후 약간의 두통과 함께 대답이 들려왔다. -로드. 확인 결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신체를 강화하는 기술과 버프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혹시나 싶은 생각에 강유식이 긴장하고 있을 때. -장비를 교묘하게 강화하는 인챈트로 파악됩니다. 페르스발의 대답을 들은 순간. 설렁설렁 두드렸던 머릿속의 계산기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두드려졌고. “그거. 스미와 길드일 겁니다.” 단숨에 의뢰를 완료했다. < 인기가 너무 많다(4) > 끝 100화 “…” 갑작스러운
대답에 신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짓다가 뭔가 짐작 가는 게 떠올랐는지 생각에 잠겼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최근 5년 사이에 스미와 길드가 기업들과 협력하여 만든 시설들이 있을 겁니다. 그 시설 지하에 타천의 계시와 협력하여 만든 은신처들이 숨어 있습니다.” 단순히 지어냈다고 하기에는 너무 구체적인 이야기. 거기에 말하는 강유식의 눈동자에도 확신이 깃들어있다. “어느 경로로 알게 되신 건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신녀의 물음에 강유식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내부고발입니다.” “내부고발…?” “예. 그 이상 말하기는 조금 곤란하네요. 타천의 계시에게 주목받으면 위험해지거든요.” 뉴욕지부를 털었다든가 그런 이야기가 알려져 봐야 좋을 것도 없다. 강유식의 뜻을 이해한 신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즉시 스미와를 조사해봐야겠군요. 약속드린 보상은…” “아. 그건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주셔도 됩니다. 아직 믿기지 않으실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신녀의 모습에 강유식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이외에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릴 테니까요.” “기억해두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인 신녀가 회장 안으로 돌아갔고, 그 뒷모습을 본 강유식은 손에 들린 부적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나쁘지는 않지.’ 운이 좋으면 이번 일이 해결되면서 채무가 생길 수도 있고, 설령 생기지 않아도 어느 정도 신뢰 관계는 생길 테니 차후 만남을 위한 포석이 될 수 있다. ‘그나저나 신녀가 인챈터라…그러면 회귀 전에 행적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네.’ 아마 일본 정부나 길드들은 그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 힘을 독점하기 위해 신녀를 신궁에 감금하며 자신들만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정부랑 길드가 작정하고 손잡은 거면 인질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 아마 회귀 전 시점에서는 그런 약점이 붙잡혀 어쩔 수 없이 이용당했을 것이 분명하리라. “크흠.” “…” 여태까지 느껴지지 않던 인기척이 뒤에서 나타났다. “둘 다 어디 있었던 거예요?” “주변에 산책 좀 하고 왔어. 그렇지?” “네. 그렇습니다.” 뻔뻔하게 대답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으며 곁으로 다가갔다. “그래도 때마침 잘 오셨네요.” “그래? 나는 한~창 재밌을 때 온 거 아닌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 신녀랑 있던 게 그리 불만인지 툴툴거리는 반혜영과 마찬가지로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차시현. “두 사람 다 받아요.” “어, 어?” “이건…” 눈앞에 내밀어진 선물에 방금까지 퉁명스럽던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강유식이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 신세 진 것도 많아서 이번에 준비한 거예요.” “아니, 이런 건 미리 말을 하지…”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는 반혜영과 뭐인지도 모르는데 마냥 좋은지 상자를 꼭 안는 차시현. “둘 다 열어봐요.”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이 포장지를 벗기며 상자를 열었고, 안에 들어있는 요정의 속삭임과 아라크네의 장갑을 보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어떤 물건이냐면…” 강유식은 각 장비가 가진 효과를 설명해줬고 자신에게 딱 맞는 효과에 두 사람 모두 살짝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나, 나쁘지는 않네.”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채무자 ‘반혜영’의 빚이 증가합니다.] [채무자 ‘차시현’의 빚이 증가합니다.] A급이라 등급의 변동은 없지만 쏠쏠하게 오른 채무. 얼마나 기뻐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그 반응에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둘 다 지금 착용해 봐요.” “지금?” “잘 어울리는지 보고 싶어서요.” “…알았어.” 반혜영은 부끄러워하면서도 곧장 요정의 속삭임을 자신의 귀에 착용했고, 차시현 역시 본래 쓰던 장갑을 벗고 아라크네의 장갑을 착용했다. “두 사람 다 잘 어울려요.” “다행이군요.” “…” 미소를 지은 차시현과 부끄러운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반혜영. 처음에 심상치 않던 분위기가 모두 사라진 것을 본 강유식은 그대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이끌었다. “자. 그럼 이제 슬슬 다시 들어가죠.” “알겠습니다.” 살짝 들뜬 탓인지 차시현이 앞장서서 회장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따라 반혜영과 강유식이
걸음을 옮겼다. “야.” 반혜영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이거 받아.” 정성스럽게 포장한 선물상자. 그에 강유식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반혜영이 냉큼 떠넘겼다. “이번에 논문 준비하고 여러모로 고생해서 주는 거야. 귀한 거니까 잘 써야 돼!”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으름장을 놓듯이 이야기하는 반혜영. 그 모습에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사용할 때마다 선생님 생각하면서 잘 쓸게요.” “너, 너…으으!!” 뭐라고 하려던 반혜영은 도망치듯이 안으로 들어 가버렸고, 그 풋풋한 반응에 강유식이 피식 웃었다. [나야말로 선물 고마워…소중히 간직할게.] 귓가로 들려오는 자그마한 속삭임. ‘별말씀을.’ 뉴욕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나름대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 “그렇게 돼서, 당분간 이 녀석 좀 돌봐주세요.” “…” 강유식의 이야기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궁륜이 떫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고, 지저분하던 머리카락과 수염을 깔끔하게 정리한 아치볼드가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예의 바른 인사에 남궁륜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만…” “예.” “이 녀석 내가 알기로는 집안에서 실종신고를 한 것 같은데. 아니냐?” “예. 맞아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강유식의 모습에 남궁륜이 자신의 눈매를 매만졌다. 그리고는 살짝 피곤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납치냐?” “아뇨. 그럴 리가요.” “그러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일이 일인지라 채무가 있어도 신중하게 물어보는 남궁륜. 그 모습에 강유식은 미리 맞춘 대로 설명했다. “저한테 지고 퇴학당한 것 때문에 가문 내에서 미운털이 박혔거든요.” “음.” “그래서 타천의 계시에 팔아넘겨 진 걸 제가 우연히 구하게 돼서 이렇게 데려왔습니다.” “…차라리 납치했다는 쪽이 더 신빙성 있겠다.”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남궁륜은 옆에 앉은 아치볼드를 힐끔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돌보라는 거냐?” “그냥 의식주 챙겨주면서 마법연구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세요. 금액은 제가 전부 부담할게요.” “그나마 손이 많이 갈 일은 없겠구만…이게 뭔 일인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은 남궁륜의 모습에 강유식이 미소를 지었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전에야 좀 그랬지만 지금은 개과천선했으니까요.” “…그러냐?” “물론이죠. 그렇지?” “예. 강유식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치볼드가 기묘하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대답했다. “강유식 님에게 저지른 죄를 뉘우치기 위해, 그리고 구해주신 은혜를 갚기 위해 이 한 몸을 모두 바칠 생각입니다. 그러니 저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리 봐도 걱정할 수밖에 없는 모습. 남궁륜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짓을 보내자 강유식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충격 때문인지 머리가 좀 이상해져서..,뭐 제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일단은 알았다.” 찝찝한 표정을 지은 남궁륜은 변장한 아치볼드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고, 그 둘을 배웅한 강유식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헤이그에서 선수만 안 쳤어도 더 잘 써먹었을 텐데.’ 본래 강유식의 계획은 아치볼드를 다시 헤이그 가문으로 돌려보낸 다음에 내부를 염탐하면서 집어삼킬 기회를 보는 것이었다.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녀석이 돌아와 봐야 눈엣가시처럼 여겨지겠지.’ 이번에 칼 같은 일 처리를 보건대 어쩌면 쥐도 새도 모르게 아치볼드를 죽이거나 다른 마인 집단에 팔아치울 수도 있다. ‘조금 일이 늦춰지기는 했지만…뭐 이쪽도 나쁘지는 않나.’ 지금 아치볼드의 실력 정도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전력이고, 일이 조금 밀린 거지 헤이그 가문을 집어삼킬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건 일단 나중에 즐거움으로 두고…’ 생각을 정리한 강유식은 카페에 나와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좀 빡세게 돌아다니기는 했구만.’ 여름방학 중에 있을 굵직한 일은 다 해결했으니 며칠은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 강유식이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우우웅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 누군가 싶어 꺼내서 보니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이병호] 창은 길드의 장손. 그리고 미래의 S급 헌터인 이병호. “어. 병호야. 무슨 일이야?” -유식이형.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다름이 아니고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저녁식사 언제쯤 괜찮으신가 하고… “아. 할아버님하고 같이 본가에서 저녁 식사하자던 그거?” -네네. 그거에요. 이병호의 대답에 강유식은 잠시 턱을 쓰다듬었다. ‘이정룡이라…나쁠 건 없나.’ 5년 뒤에 자연사한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그 전에 빛을 안겨서 징수하는 편이 좋고, 만약 자연사가 아니라면 주변 환경을 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나는 오늘도 상관없는데. 할아버님은 어떠셔?” -아. 그러면 오늘 바로 뵙죠. 할아버님도 지금은 집에서 쉬고 계셔서 언제든지 괜찮다고 하셨어요.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저녁에 마중을 나온 차를 타고 이병호의 본가에 도착한 강유식은 눈앞의 주택을 바라보았다. “아, 오셨어요!” 마당으로 들어가자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병호가 달려왔고, 그 똥개 같은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었다. “오랜만이네.” “방학하고는 처음이니까요. 한 달 사이에 엄청 늠름하게 변하셨네요.” 스탯이 달라진 것을 알아봤는지 살짝 감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병호. 그에 강유식도 대강 훑어보며 슬쩍 웃었다. “너도 꽤 달라졌다?” 키도 조금이지만 자랐고 무엇보다도 스탯이나 기술적인 부분도 대폭 늘어난 것으로 보였다. “유식이형이 문자로 보내준 단련법 계속 혼자서 연습했거든요. 이제 뇌신화도 능숙하게 조절해요.” “그래? 그럼 오랜만에 확인 좀 해봐야겠네.” 두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면서 이정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병호야. 손님을 밖에다 세워두고 뭐 하는 게냐.” “아, 죄송해요. 너무 반가워서…” 이병호가 멋쩍은 표정을 짓자 곁으로 다가온 이정룡이 슬쩍 웃었다. “미안하네. 이놈이 아직 어린놈이라…” “아뇨. 괜찮습니다. 잠깐 이야기한 것뿐인데요 뭘.” 미소를 지은 강유식은 오랜만에 보는 이정룡을 바라보았다. ‘이만하면 쉬엄쉬엄할 만도 할 텐데…참 절륜한 영감이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면 이렇게 기운 넘치는 노인장이 5년 뒤에 자연사하게 되는 걸까. -어…뭐야. 안드바리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영감. 저주 걸린 거 같은데? < 인기가 너무 많다(5) > 끝 101화 ‘저주라고?’ 강유식이 살짝 놀라며 되묻자 안드바리가 살짝 애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아, 아닌가? 근데 뭔가 좀 구린내가 나는데… ‘장난친 거면 티르빙에 하루 종일 걸어둔다.’ -아, 아냐! 잠시만 기다려봐! 그…여, 영감! 나 좀 도와줘! 페르스발에서 희미한 미열이 떠오름과 동시에 이야기가 끊어졌고, 이정룡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음? 뭔가 문제라도 있는가?” “아. 전에 뵀을 때보다 더 강해지신 것 같아 저도 모르게…죄송합니다.”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답이 흘러나왔고,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듯 이정룡이 슬쩍 웃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생도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영광이로군.” “과찬이십니다.” “자네를 띄워야 내 얼굴에 금칠도 하는 셈이니 그냥 그렇게 듣게나. 아, 이런 또 이야기가 길어졌군. 남은 이야기는 안에 들어가서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두 사람을 따로 본가로 들어선 강유식은 복도와 거실을 지나며 주변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보통 S급 정도면 배 째라고 다니는 녀석들도 꽤 있는데…준비성이 좋은 양반이야.’ 사실 S급 헌터 정도면 어지간한 방호시설보다 본인의 능력이 더 뛰어나 갖출 필요가 거의 없지만, 아마 이정룡은 자신보다는 이병호를 생각해 설치한 것이리라. “이쪽으로 오게.” 부엌으로 오자 가정부로 보이는 중년인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며 맞이해줬고, 음식이 한가득 차려진 식탁이 드러났다. “음식은 입에 맞았나?” “예. 맛있었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평소에 먹는 사람이 나나 병호 밖에 없어서 혹여나 입맛에 안 맞을까 봐 걱정했네.” 이정룡의 이야기에 강유식은 소파의 남은 자리를 보았다. ‘큰아들을 후계자로 밀던 부모가 작은아들이 각성해 후계권을 빼앗자 반발을 일으키며 나갔다, 였던가.’ 그리고 부모가 작은아들을 버리고 나간 것에 ‘이병호는 사실 이정룡의 사생아다!’ 같은 온갖 막장 소문이 돌았는데 그에 대해서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거의 없었다. ‘뭐가 진짜일까.’ 강유식이 살짝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차를 마시던 이정룡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와 마지막으로 본 게 불과 몇 달 전인데…그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군.” “그렇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다른 사람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일세.” 강유식의 몸을 가볍게 훑어본 이정룡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마력은 두 배 이상으로 성장했고…육체도 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성장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오랜 세월 동안 무를 단련해온 이정룡의 눈에는 강유식의 근골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선명하게 보였다. ‘그 사이에 스킬을 얻었거나, 아니면 기존에 얻었던 스킬이 빛을 본 것일지도 모르겠군.’ 동년배 중에서 따라올 자가 없으리라 생각했던 자신의 손자보다도 압도적으로 뛰어난 잠재력. “자네. 혹시 알아봐 둔 길드는 있는가?” “하, 할아버지?” 이정룡의 이야기에 이병호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제대로 마음에 들었나 본데.’ 무슨 일이 있어도 영입하고 말겠다는 다짐을 보내오는 이정룡. 그 모습에 강유식은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따로 길드에 가입할 생각은 없습니다.” “길드에 가입할 생각 자체가 없단 말인가?” “예.” 강유식의 대답에 이정룡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며 살짝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았다. “설마 따로 길드를 차릴 생각인가?”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아니, 확실히 자네라면 가능하겠군.” 쉽지 않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려던 이정룡은 자신이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처음부터 이런 걸 노린 거라면…무섭군.’ 보통 생도들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다음 기존의 길드에 들어가려고 하지 처음부터 길드를 만들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럼 협업은 어떤가?” “협업…말입니까?” “향후 자네가 길드를 설립하면 창은 길드와 작게나마 협업을 하는 걸세.” 말이 협업이지 사실상 동맹을 맺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정룡의 제안에 강유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창은 길드 정도면 든든하긴 한데…문제는 그만큼 적도 늘어난다는 거지.’ 누군가와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적이 된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말이 중립이지 잘못하면 양쪽으로 두들겨 맞는 샌드백 신세니까.’ 회귀 전에 그렇게 얻어터져 사라지는 집단을 여럿 봐왔기에 강유식도 어정쩡한 위치를 고수할 생각은 없다. -저…로드. 귓가로 살짝 멋쩍은 페르스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속해서 분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만…몇몇 정보들이 부족해 결론을 낼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게 부족한데?’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전투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분석을 끝내기 위해서는 전투 데이터가 필요하다. 어떻게 할지 잠시 생각하던 강유식은 금방 결정을 내린 다음 이정룡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이른 이야기라 확정적으로 대답해드리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 미안하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멋쩍은 표정을 짓는 이정룡의 모습에 강유식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그만큼 저를 높게 평가해주셔서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죠.” “하핫. 자네가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다행이군.” “그리고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음? 무슨 일인가?” 이정룡의 물음에 강유식이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게 한 수 가르쳐주시지 않겠습니까?” * 본가의 지하에 있는 훈련실. ‘잘못하면 이 주변 땅이 폭삭 내려앉을 테니.’ 주변에 견고하게 쳐져 있는 장벽을 강유식이 흥미롭게 보고 있을 때. 훈련복으로 갈아입고 온 이정룡이 물었다. “옷은 맞는가?” “예. 딱 맞습니다.” “혹시나 싶어 사이즈별로 갖춰뒀는데 다행이야.” 몸을 모두 풀어준 이정룡은 손에 들린 연습용 장창을 가볍게 휘둘러본 다음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배리어가 파괴되거나 항복 선언을 할 때까지 계속한다. 그걸로 괜찮겠는가?” “예. 그 정도면 됩니다.” “그 이외에 핸디캡은?” 무시하기보다는 제대로 대련이 성립되기 위한
제안. “캐스팅을 위해 1분만 주시겠습니까?” “…그 정도로 괜찮겠나?” 1분이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마법을 준비하기에는 또 부족하다. 하물며 상대가 자신보다 강한 상대라면 더 힘들겠지만, 강유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충분합니다.” “흐음…알겠네.” 흥미로운 표정을 지은 이정룡은 뒤로 물러섰고, 강유식 역시 자리에 선 다음 마주 보았다. “그럼…시작!” 이병호는 외침과 동시에 휴대폰의 스톱워치를 눌렀고, 강유식은 마법을 캐스팅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1분 가지고 S급 헌터를 상대로 화력 싸움을 거는 건 바보짓이고, 무엇보다도 전투 데이터 확보도 힘들어.’ 결국은 난전으로 간다는 것인데 이것도 상대의
힘이나 경력을 생각한다면 쉬운 일은 아니다. 투웅─ 이정룡의 창이 강유식의 코앞으로 쇄도했다. 파앙!! 간발의 차로 빗겨져 나간 창이 충격파를 터트렸고, 그와 동시에 강유식이 지면에 만들어둔 마법진이 발동되었다. 콰가가각! 위력을 낮추고 여러 겹으로 쌓아둔 트윈 템페스트. 지면에서 솟구쳐 올라온 광풍에 이정룡은 뒤로 물러서는 대신 창을 찔러 넣으며 휘저었다. 파앙─! 간단한 회전 앞에서 그대로 분쇄 당한 트윈 템페스트. ‘누가 S급 아니랄까 봐…!’ 막아낼 거라고 이미 알고 있었던 강유식은 당황하는 일 없이 즉각 준비해둔 마법을 연달아 펼쳐냈다. 파츠즈즉! 라이트닝 엑셀을 관통한 귀화창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쏘아졌고, 그 엄청난 속도와 정확도에 이정룡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가속시킨 마법을 이만한 정확도로 다루다니…!’ 마법사와의 전투 경험도 풍부한 이정룡이었기에 지금 강유식이 펼치는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 수준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정도로는 안 된다 이거지.’ 어떻게든 이정룡의 반응을 이끌어내기로 결심한 강유식은 곧장 멀티 캐스팅으로 준비했던 오브를 꺼내 들었다. 우웅! 푸른색 마력으로 만들어진 원형의 구. 키이잉─ 푸른색으로 이뤄져 있던 오브가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잠시 후 그 주변으로 귀화창이 생성되며 이정룡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했다. ‘조금 전보다 더욱 가속했다고?’ 저만한 마법을 만들어내면서 어떻게 이 정도까지 가속을 걸 수 있단 말인가. 깜짝 놀란 이정룡의 모습에 강유식이 입가를 비틀었다. ‘자동마법은 처음 봤겠지.’ 오브를 응용한 자동 캐스팅. 쿠구궁 “?!” 주변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묘한 마력의 파동. ‘폭발 안에 마법진을 잠재시키다니…!’ 거의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는 정체불명의 마법진에 이정룡이 막 움직이려던 순간. 따악! 그 간극을 노리고 눈앞에서 터진 불꽃. 철컥─! 눈앞에서 터진 그 불꽃으로 인해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콰아아앙!! 주변으로 흩어지는
화력을 저장했다가 다시 터트리는 화력응축 마법진. 기이잉─! 마력공급을 통한 화력 유지와 주변으로 흩어지는 열기를 다시 순화시키는 마법진. 콰가가각! 눈앞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불꽃의 용광로에 강유식은 자신이 만들어내고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강한 거 아냐?’ 실전에서 사용한 건 처음인데도 S급 헌터인 이정룡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다니! [이정룡-54%] 아직 남아있는 배리어를 확인했다. 쩌엉─! 이정룡을 감싼 염옥의
안에서 푸른색 초승달이 뿜어져 나와 절반으로 갈라냈고, 이어서 푸른색 섬광이 오브를 꿰뚫었다. “이것 참…어느 정도 다 알았다 싶으면 자네는 나를 더 놀라게 하는군. 혹시 아직도 숨겨둔 게 있나?” “몇 가지는 더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크하핫. 그렇군. 이것 말고도 더 있단 말이지…” 웃음을 터트린 이정룡은 다시금 자세를 다잡았고, 창끝을 강유식에게 겨눴다. 우우웅 창 전체에 선명하게 맺혀있는 푸른색의 기운. S급 헌터 창은룡蒼銀龍을 상징하는 창은기蒼銀氣의 발현에 강유식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한 방 먹었나보네…’ 조금 전까지는 깔끔하게 이기려고 했다면, 지금은 자신이 다치든 말든 이쪽을 박살 내려고 한다. -알아냈습니다. 로드. ‘저주는?’ -안드바리의 이야기대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분석해본 결과…‘노화’와 관련된 저주로 보입니다. ‘과연. 노화란 말이지…’ 페르스발의 이야기를 들은 강유식은 그제야 지금 이정룡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딱 떠오르기도 힘든데…’ 머릿속으로 그려진 공방에 강유식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반혜영 선생님한테 감사하다고 해야겠구만.’ < 제가 좀 용합니다(1) > 끝 102화 강유식이 머릿속으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을 때. 이정룡은 연습용 장창을 움켜쥐며 숨을 골랐다. ‘그대로 끝날 뻔했군.’ 만약 창은기를 끌어올리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배리어가 바닥나 그대로 끝나버렸을 것이다. 우우웅─ 창에 맺힌 창은기가 가라앉으며 일렁거림이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주변이 얼어붙을 만큼 섬뜩한 압박감이 흘러나왔다. “숨겨둔 수를 보고 싶군. 보여줄 수 있겠나?” 차분하면서도 살벌하기 그지없는 그 모습에 강유식은 입가를 슬쩍 올리며 대답했다. “그럼 저도 어르신의 한 수를 볼 수 있는 겁니까?” “물론일세. 지금 그러려는 참이니.” 서로 전력을 다한 한 수로 부딪친다. 그 제안에 강유식은 천천히 숨을 고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좋군.” 짧게 대답한 이정룡은 멍하니 이쪽을 보고 있는 이병호를 바라보았다. “5초를 세거라.” “네? 아, 예!” 이병호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고, 강유식은 페르스발의 연산력에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굴리면서 마법을 캐스팅했다. “시작!” 이정룡의 모습이 일순간 사라졌다. 콰과가각! 강유식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무시무시한 마력. 앞서 본 적 있는 마력의 흐름에 이정룡은 무슨 마법을 사용하는 것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조금 전에 사용한 그 폭풍을 쏟아낼 생각인가.’ 물론 그때와 위력은 다르겠지만 이쪽에 회천이 있는 이상 상성이 나쁠 수밖에 없다. ‘그런 무의미한 선택을 할 리가 없다.’ 무언가 노림수가 있으리라 생각한 이정룡은 이 이상 힘을 아끼는 일 없이 예정대로 자신의 전력을 끌어올렸다. 쿠구구궁! 창대에서 회전하여 창끝으로 모여드는 창은기. ‘폭풍을 끊어낼 일격과 결정타에 맞춰서 힘을 배분한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가다듬은 이정룡은 곧바로 회전을 더한 창은기를 창끝에 압축했고, 그에 맞춰 강유식의 마법진이 발현되었다. 콰가가각!!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는 두 개의 광풍. 콰드드득! 푸른색 마력이 창끝을 따라 회전하며 광풍을 휘저었고, 조금 전과 같이 이정룡의 창끝을 따라 이끌려갔다. ‘개방.’ 키잉─ 시동과 동시에 네 개의 오브가 주변에 솟구쳐 올랐고, 강유식은 미리 준비해둔 마력술식을 안으로 집어넣어 발동시켰다. 쿠구궁! 발동과 동시에 하늘을 향해 쏟아지는 광풍과 불꽃의 창. 라이트닝 엑셀을 관통하며 발사되는 어마어마한 폭격에 이정룡의 눈이 번뜩였다. ‘승부…!’ 여기서 승패가 결정된다. 콰가가각! 창끝을 따라 휘둘러지는 광풍에 강유식이 쏘아낸 마법들이 부딪치며 어마어마한 불꽃과 충격파를 흩뿌렸다. ‘유식이형은…도대체…’ 저게 정말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자신보다 약했던 사람이 맞단 말인가? ‘뭐지?’ 분명히 바람의 주도권을 잡아낸 것은 자신인데 기묘한 압박감이 창끝을 통해 느껴져 온다. 콰과가각! 두 개의 오브가 쏘아내는 트윈 템페스트와 귀화창이 폭발을 일으키고, 남은 두 개의 오브가 거기서 만들어진 새로운 기류를 이쪽의 바람에 덧붙인다. ‘자멸하게 할 셈인가…!’ 이쪽이 바람을 역이용하는 것을 보고 만들어낸 계획. ‘뒤로 뺄 필요는 없지.’ 어떻게 생각하면 바라던 바다. 쿠구구궁! 조금 전까지 버겁게 느껴지던 광풍이 이정룡의 창끝을 따라서 휘둘러졌고 대련장 전체가 뒤흔들렸다. 우우웅 네 개의 오브가 마력이 다해 빛을 잃었고 쉴 새 없이 쏟아지던 마법의 공세가 끊어졌다. 콰가가각 이정룡이 휘두르는 창끝을 따라 그동안 쌓아 올린 광풍이 휘몰아쳤고, 모든 힘을 쏟아낸 강유식은 그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듯이 양손을 펼치며 올려다보았다. “확장.” 네 개의 오브가 다시금 빛을 토해냈다. 투웅─! 바람을 덧붙이면서 숨겨둔 마력술식들. ‘뚫렸다!’ 그리고 그 끝에 보이는 이정룡의 모습에 강유식은 마지막까지 아껴둔 마력을 끌어올려 바닥을 박찼다. 콰아앙! 창뢰일보의 푸른 뇌전을 휘감은 채 바람의 길을 꿰뚫으며 쇄도해오는 강유식. ‘체력이 여기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무술을 배우지도 않은 젊은 생도에게 당할 수는 없다! 빠득! 이빨을 으스러져라 깨문 이정룡이 창은기를 끌어내는 대신 손목을 비롯하여 전신의 모든 관절을 가동해 창대에 회전을 더했다. ‘차원점멸.’ 최후에 최후까지 아낀 비장의 한 수를 사용했다. 파카앙! 배리어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고, 조금 전 충돌을 보지 못한 이병호는 반사적으로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이정룡-2%] [강유식-0%] “후우…” 간발의 차이로 강유식의 패배. ‘더럽게 쎄네…’ 저주로 인해 체력이 떨어진 것을 보고 힘겨루기로 유도해 지치게 만들었고, 반혜영에게 선물로 받은 S급 스킬 ‘차원점멸’까지 사용해서 코앞까지 온 공격을 피해서 반격했다. ‘만약 풀 장비였으면….전면전은 꿈도 못 꿨겠네.’ 이런 걸 보면 회귀 전에 온갖 더러운 수를 다 써가면서 싸웠던 게 역시 정답이었던 것 같다. “다친 곳은 없는가?” “예. 몸이 좀 무겁기는 하지만…” “그건 다행이군.” 이정룡은 그대로 강유식의 앞에 주저앉았고,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혹시나 싶어 묻고 싶네만…” “예.” “설마 거기서 또 숨겨둔 한 수가 있는가?” “…” 이정룡의 물음에 강유식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마지막에 마력이 좀 더 남아있었다면 이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근데 뭐, 애초에 그건 사용할 생각이 없었으니…’ 용린의 갑옷은 근접전에 미숙하다고 알려진 자신에게 있어 회심의 한 수다. “아뇨. 없었습니다.” “그런가…그래도 조금이나마 체면은 살렸군.” 아직 생도인 청년을 상대로 아직 완성도 안 된 ‘비기’를 사용해서 이기다니. 이겨도 이긴 게 아닌 결과에 이정룡은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강유식 생도가 근접계열 스킬을 하나라도 습득하고 있었다면…’ 그랬다면 자신의 배리어가 같이 깨지거나, 먼저 깨지지 않았을까. “강유식 생도.” “예, 예?” “나중에 길드를 창설하면 우리 창은 길드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생각해주게나. 내 이렇게 부탁하겠네.”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이정룡의 모습에 강유식은 떨떠름해 하다가 슬쩍 웃었다. “예…뭐, 저야 창은의 대주주가 될 사람이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대주주?” “전에 계약내용. 잊으셨습니까?” 강유식의 이야기에 이정룡은 이병호가 S급 헌터가 되었을 시의 주식양도 조항을 떠올렸고,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크큭…크하하! 그렇군! 내가 그걸 잊고 있었어!” 어깨를 팡팡 두드린 이정룡은 그대로 강유식을 일으켜주면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는 힘든 일 있으면 뭐든지 말해주게나. 내 보탬이 되어줌세.”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이정룡’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E급으로 판정합니다.] 마음에 꽤 들었는지 약소하지만 생성된 채무관계. ‘이 정도면 분위기 깔 필요 없이 믿겠네.’ 딱 맞게 준비된 상황에 강유식은 살짝 고민하는 표정을 보이다가 이정룡을 바라보았다. “저…어르신.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의아한 이정룡을 바라보며 강유식이 진중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지금 저주에 걸리신 것 같습니다.” * 달동네의 구석진 곳에 있는 폐가. “제길. 왜 이런 쓰레기장 같은 곳까지 내가 직접…” “당신이 고용한 사람이잖아요. 뭘 그렇게 투덜거려요?” “엄마랑 아빠만 가면 될 걸 왜 나까지 불러와서…”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불만을 토해내는 세 사람. 그들은 바로 이정룡의 아들 내외인 이갑수와 한여희. 그리고 장손인 이을현이었다. “설마 보고를 이런 곳에서 할 줄 내가 알았어?! 당신은 알아본 적도 없으면서 이제 와서 화풀이야!” “좋은 사람 소개받았다고 멋대로 진행한 건 당신이잖아요! 뭐가 잘났다고 큰 소리예요 큰 소리는?!” “둘 다 조용히 좀 해요. 밖에서 쪽팔리게 진짜…” 서로 삿대질을 하며 싸우는 부부와 그런 둘을 쪽팔리게 여기며 노려보는 아들. “그러다 집 무너집니다.” “!!”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세 사람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네가…흑망黑?께서 소개해주신 독귀毒鬼인가?” “예. 맞습니다.” 어둠 속에서 대답한 사내, 독귀는 초록색 눈을 번뜩이며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덜떨어진 놈들 같으니…’ 창은 길드를 부리기 위해서는 필요한 놈들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저 한심하기 그지없는 낯짝을 보고 있으면 그냥 죽여버리고 싶어진다. “앞서 의뢰하신 일의 진행에 대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으음. 말해보게.” “…우선 의뢰대상인 창은룡의 중독은 확인되었습니다. 아마 지금쯤 독이 완전히 퍼져 몸에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퉁명스러운 독귀의 보고에 이갑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그게 정말인가?” “예. 다만 다른 이를 통해서 우회적으로 중독시켰으니 시간이 걸리는 것은 감안을 해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감안하고말고!” 이갑수가 넘긴 공략인선을 통해 이정룡과 자주 접촉하는 이들을 이용한 간접 중독. ‘독이지만 독이 아니니까 말이야.’ 독은 그저 중독시키기 위한 바탕일 뿐. 실제로는 자신의 주인인 흑망이 본인의 권능까지 영구적으로 떼어내 만든 고도의 저주였다. ‘몇 번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이정룡에게 사용한다면 나쁠 건 없지.’ 지금은 그저 눈에 거슬리는 정도지만 창은 길드의 폭발력과 이정룡의 가치관을 생각하면 향후 한국에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불필요한 충돌이 생긴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뒤에서 조용히 대화를 지켜보던 장손 이을현이 독귀를 바라보았다. “그 독. 정말 안 들키는 거 맞아?” “을현아! 그게 무슨 소리니!” “아 왜. 확실하게 확인을 받아야 나중에 딴소리가 안 나올 거 아냐.” 이을현이 팔짱을 끼며 바라보았고, 말리는 척하던 한여희와 조용히 있는 이갑수도 힐끔 눈치를 살폈다. “내 이름과…명예를 걸고 장담하지.” 독귀의 말이 짧아진 것을 본 세 사람이 식은땀을 흘렸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그 독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다!!” < 제가 좀 용합니다(2) > 끝 103화 훈련실에서 나온 세 사람은 서재로 자리를 옮긴 다음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정말 저주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정룡의 물음에 강유식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군. 조금 전에 체력이 이상할 정도로 떨어진 것도…” 어느 정도 짐작 가는 것들이 있었는지 이정룡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강유식은 그사이 페르스발에게 저주에 관련된 것들을 자세히 들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저주보다는 축복에 가깝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신체를 노화시키는 것 이외에도 기술적 숙련이나 마력의 증가치도 함께 오르기 때문입니다. ‘거참…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더럽게 얍삽하네.’ 단순히 몸이 쇠약해지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이상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약 그 정도가 아주 미미하고, 기술이나 마력은 오히려 준수하게 오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게다가 그 쇠약해지는 증상도 실질적으로는 노화에 따른 증상이니…’ 나이가 많은 1세대 헌터라면 의심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교묘한 저주. ‘1세대 S급 헌터 중에 자연사로 간 양반들이 꽤 있었지.’ 사람이 노화로 죽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정룡의 상황을 보니 다시금 생각할 수밖에 없다. “혹시 해주도 할 수 있겠나?” “음…” 이정룡의 물음에 강유식은 안드바리에게 이모탈 드림 때처럼 흡수할 수 있냐고 물었다. -힘들겠는데. ‘왜?’ -앞에 영감이 말한 것처럼 저주보다는 축복에 가까워서 흡수하기 까다로워. 엄청 교묘하게 걸린 것도 있고. 이모탈 드림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난 저주. ‘역시 해주는 힘든 것인가.’ 설명을 들은 지금도 정말 저주에 걸린 것인지 확신할 수 없을 만큼 교묘한 저주다. ‘내게 저주를 걸 녀석이라면…그놈들이로군.’ 집 밖으로 나간 아들 내외를 떠올린 이정룡은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다른 헌터라면…아니, 그런 게 가능할 인물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저주를 해주할 수 있을 법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 가지.” 두 사람의 시선이 모여들었고, 그 모습에 강유식이 진중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었다. “시도해볼 만한 방법이 있습니다.” * 저주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 “동화형의 저주가 까다로운 이유는 말 그대로 동화가 끝난 뒤에는 ‘저주’로서 인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효과와 신체가 자연스럽게 합쳐져 본래 그런 육체였다, 라는 식으로 해주마법을 피해버린다. “동화되었다고 해도 저주의 술식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교묘하게 숨어있을 뿐이죠. 그러니 술식을 정확하게 떼어내기만 한다면 해주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마냥 쉽지는 않았는데 어설프게 술식을 떼어내려다가 대상의 신체나 마력에 해를 입혀 더 다치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와 차시현 씨가 술식의 분해 및 해주. 아치볼드는 마력 회귀를 사용해 마력의 움직임을 억누르고, 선생님은 그 과정을 모두 총괄해서 백업해주시면 됩니다.” 강유식이 저주를 떼어낼 계획을 모두 설명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이들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차시현과 아치볼드는 그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정룡과 이병호는 체계적인 구조에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너…지금 진심이야?” 그리고 반혜영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이 멤버로 저 저주를 해주한다고?” “예.” “…” 확신을 담아서 이야기하는 강유식의 모습에 반혜영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저런 미친 저주를 어떻게 해주한다는 거야?’ 이야기를 듣고 직접 살펴봐도 있나? 싶을 만큼 교묘한 저주를 해주하겠다니. “선생님.” “왜. 또 뭐라고 말하려고.” “저 믿으시죠?” “…” 강유식의 물음에 반혜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다가 가늘게 떠졌고,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노려보았다. “너. 다 끝나고 나면 혼날 줄 알아.” “걱정하지 마세요.” 투덜거리는 반혜영과 미소를 지은 강유식.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정룡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문으로 듣기는 했지만…반혜영과 저렇게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을 줄이야.’ 반혜영 정도 되는 거물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보상의 액수 같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강유식 생도가 길드를 설립하는 날…어쩌면 엄청난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이정룡이 감탄하며 보고 있을 때. 각 담담파트의 설명을 끝낸 강유식이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진행할 예정입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음. 괜찮네. 어차피 자네가 아니면 부탁할 사람도 없으니…모든 일은 전적으로 맡기겠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이쪽을 의심해서 밀어내면 어쩔까 싶었는데 채무 덕분인지는 몰라도 쉽게 넘어왔다. “그럼 시작하죠.” 반혜영이 손가락을 튕기자 수술대와 각종 설비가 나타났고, 이정룡은 반바지만 입은 채로 그 위에 누웠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곁으로 다가간 강유식은 이정룡의 가슴에 손을 올린 다음 페르스발을 불렀다. ‘확인해봐.’ -알겠습니다. 로드. 전신의 감각이 확장되며 이정룡의 신체 내부가 속속 들여 느껴졌고, 이내 아주 희미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진짜 거지같이도 붙어 있네.’ 이렇게 보고 있는데도 저주가 맞는지 의심이 드는 수준. 아무래도 저주에 인식을 저해하는 효과도 함께 걸려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해볼 만하다.’ 혼자라면 절대로 불가능했겠지만, 온갖 사기적인 스킬을 지닌 눈앞의 멤버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시작하죠. 아치볼드.” “예.” 우우웅─ 강유식의 신호와 동시에 아치볼드가 이정룡에게 마력 회귀를 발동했고, 모든 마력의 움직임이 억제되기 시작했다. “너무 강하게 발동했어. 효과를 낮추고 범위를 넓혀”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조율을 맞추며 마력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억제했고, 그 덕분에 저주의 술식이 조금 전보다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지난번처럼 제 신호에 따라서 백업하면 돼요.” “알겠습니다.” 이다음부터는 말이 아니라 움직여가면서 조절한다. 우우웅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덧씌워야 하는 술식. “거기서 좌측 3mm 부근. 그리고 대각선 방향으로 1mm 부근입니다.” 차시현은 조율자를 통해 강유식도 제대로 감지 못하는 부분을 알려주었고, 조금씩 술식이 만들어져갔다. ‘순조로워.’ 이대로라면 생각보다도 쉽게 저주를 해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강유식이 술식을 계속 짜고 있을 때. 스스스 심장 부근에 위치한 저주에 변화가 생겨났다. ‘뭐…’ 아직 감싸지 못한 저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듯 사라졌고, 강유식이 눈매를 찌푸리며 차시현을 바라보았다. “차시현 씨. 저주는 어디에 있습니까?” “…마력 쪽으로 아예 넘어간 것 같습니다.” “예?” “저주의 유지를 포기하고 체내의 마력에 잠복한 것 같습니다. 위치는 여전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만…” 말 끝을 흐리는 차시현의 모습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강유식이 곧장 물었다. “말해 봐요.” “…지금 술식을 짜는 곳을 기준으로 0.5mm 앞. 거기서 총 여덟 갈래로 퍼져있습니다.” “…정말입니까?” “예.” 차시현의 설명에 강유식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뭔 거지 같은…’ 당장 저주의 효과를 유지하는 걸 포기하고 해주하기 까다로운 형태로 마력에
잠복했다. ‘지금 감싼 부분만 떼어내도 어느 정도 억제하면서 시간을 벌 수 있지만…저주의 특성을 생각하면 금방 재생된다.’ 일정 주기마다 계속 저주의 일부를 떼어내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이번 일의 배후에게 자신들이 협력하고 있음을 대놓고 알리는 꼴 밖에 안 된다. ‘진짜 거지 같구만.’ 자신이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강유식은 자신의 능력을 올릴 방법들을 떠올렸고, 이내 한 가지가 떠올랐다. “이대로 상태 유지하고 있어요.” 손을 떼어낸 강유식은 곧장 연구실의 밖으로 나가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주머니를 뒤졌다. “…모처럼 금연이었는데.” 그렇다고 이정룡과 이병호에게 확실하게 채무를 안길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두근! 가슴이 강하게 맥동쳤다. ‘…?’ 눈앞을 본 강유식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자신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던 하이드룬과 달리 여기에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 ‘느껴진다.’ 능력이 증폭된 탓인지 몰라도 마력 속에 혈관처럼 뻗어져 있는 저주의 술식이 흐릿하게나마 보인다. “시작합니다.” 우우웅 혈관처럼 뻗어져 있는 저주에 가느다란 술식이 미리 짜여있던 것처럼 형성되었고, 그 모습을 본 반혜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건…’ 정밀도가 조금 전보다 두 배 이상으로 증가한 듯한 모습. “분리.” 투웅─! 이정룡의 몸이 들썩임과 동시에 체내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던 저주가 단숨에 떼어졌고, 분리된 순간 안드라비가 기세 좋게 외쳤다. -좋았어! 흡수! 우우웅! 안드바리의 내부로 단숨에 흡수된 저주. “…아?” 그리고 정신이 끊어졌다. < 제가 좀 용합니다(3) > 끝 104화 솨아아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굵은 빗줄기. “…너도 왔었나.” 시비를 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뚝뚝한 목소리. 그에 고개를 돌려 얼굴을 바라보았고. “아…시발…” 폐가 찢어질 것처럼 욱신거렸다. “내놔.” “…”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녀석, 김진혁은 자신의 품에서 담뱃갑을 꺼낸 다음 마지막 돗대를 건네줬다. “뭐야. 돗대였네. 새로 사둬.” “…” 불만스럽게 쳐다보는 김진혁을 무시하며 새로운 담배를 물었고, 살짝 떨어진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아는 사이였나?” “누구. 알렉산드르 영감?” 고개를 끄덕이는 김진혁의 모습에 고개를 돌리며 연기를 내뱉었다. “알고 있기는 한데…아는 사이라 말하긴 애매한 정도네.” “…너는 늘 말을 이상하게 꼬아서 하는군.” “너처럼 딱딱 잘라 말하는 것보다는 낫지. 그러니까 적 아니면 동료밖에 없잖아.” 이쪽의 핀잔에 김진혁이 입을 꾹 다물었고, 그 모습을 힐끗 보며 재를 털어냈다. “…S급 헌터라고 무적은 아니구만.” “당연한 걸 말하는군.” “당연한가…뭐, 하긴 그렇겠지.” 살아있는 이상 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야.” 이쪽의 부름에 말없이 쳐다보는 김진혁. “느슨하게 살아. 괜히 뻗대지 말고.” 쥐도 새도 모르게 가버리면 오랫동안 아껴둔 채무를 쓸 수 없지 않은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한 뒤 걸음을 옮기자 뒤쪽에서 묘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투두둑 굵은 빗소리에 금방 파묻혀 사라졌다. * “끄응…” 희미하게 느껴지는 두통에 신음을 흘리며 눈을 뜬 강유식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유식 님. 괜찮으십니까?” “뭐야. 마력역류야?” “아뇨. 그런 것 아닌 것 같습니다만…” 연구실에 있던 세 사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고, 의식을 끊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깨달은 강유식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야…그 짧은 새에 그렇게 긴 꿈을 꿨다고?’ 이것도 제림니르의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모로 신기한 경험이다. “괜찮아요. 살짝 현기증 온 것뿐이니까요.” “정말이야?” “정말이에요. 심한 수준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당장이라도 병원에 넘겨버릴 것 같은 반혜영의 모습에 강유식이 손을 내저으면서 다시 일어섰다. “차시현 씨. 해주는 어떻게 됐어요?” “조율자로 확인해본 결과 남은 술식은 없었습니다. 완벽히 제거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어르신의 상태는요?” “잠시 의식을 잃으셨습니다만 신체에 이상은 없습니다.” “후우…” 차시현의 설명에 강유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건값은 제대로 했네.’ 성공적으로 끝난 해주 작업에 강유식은 제림니르를 사용했을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능력이 증폭되는 메커니즘이 어떻게 되먹은 걸까…’ 하이드룬은 그냥 단순한 각성제라고 넘길 수 있지만 이쪽은 그렇다고 보기에는 효과가 너무 독특하다. ‘조금 전에 내 몸에서 뭔가 크게 변한 거 있었어?’ -음…로드의 능력이 크게 증폭하셨던 걸 제외하면 큰 변화는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 -예. 그나마 다른 점이라면…로드가 지금보다도 더 성숙한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숙이라…’ 강유식이 제림니르에 대해서 살짝 흥미가 생겨나고 있을 때. 저주를 흡수한 안드바리가 다급히 외쳤다. -야야. 너 일어났으면 이거 좀 어떻게 해봐! ‘무슨 문제라도 있어?’ -이거…진짜 예사 저주가 아닌 것 같아. 해주되고 나니까 갑자기 어딘가로 뛰쳐나가려고 난리야! ‘뛰쳐나가려고 한다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강유식이 놀란 표정으로 안드바라나우트를 살펴보았고, 안에서 맥동 치고 있는 힘을 발견했다. 우우웅! 당장이라도 안드바라나우트를 뚫고 뛰쳐나갈 것 같은 저주. 예상보다도 거센 맥동에 강유식이 눈매를 찌푸렸다. ‘이걸 어디다가 쓰지?’ 원래는 어떻게 만들어진 저주인지
분석하려고 했지만, 이대로라면 안드바라나우트 밖으로 나가 놓쳐버릴지도 모른다. ‘너 이거 다른 녀석한테 걸리게 할 수 있어?’ -가능하긴 해! ‘좋았어.’ 이정룡이 걸렸던 저주는 노화를 가속하지만 그 대신 성장 속도 역시 증가시켜주는 일종의 축복이다. “잠깐만요!” 강유식은 연구실의 넓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대로 마력을 끌어올려 소환진을 발동했다. [무슨 일로 불렀는…] ‘지금!’ -간다!! 투웅! 안드바라나우트에서 쏘아낸 저주가 거무튀튀한 덩어리로 변해 크림슨의 얼굴을 강타했고. [크허억!] 그와 동시에 바닥을 나뒹굴며 의식을 잃었다. “후우…” 성공적으로 저주를 옮긴 강유식은 곧장 크림슨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펴보았다. ‘어때?’ -잘 달라붙었어. 이 정도면 앞에 노인보다 더 떼어내기 어려울 거야. ‘음음…’ 안드바리의 대답에 강유식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급하게 떠올린 방법치고는 완벽했어.’ 크림슨의 몸 안에 넣어둔 상태면 향후 연구하는 것도 쉽게 가능해지니 그야말로 완벽한 해결법. “뭐한 거야?” “아, 그게…” 딱히 숨길 건 아니었기에 강유식은 페르스발에 넣어둔 저주가 난동을 부렸다는 식으로 설명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반혜영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흐음. 어딘가로 돌아가려는 식으로 움직였단 말이지?” “예.” “그런 거라면…”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기던 반혜영은 금방 결론을 내며 입을 열었다. “그거. 고유스킬일 가능성이 높겠는데.” “고유스킬이요?” “응.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유스킬을 적절하게 응용해서 만들어낸 저주겠지. 그게 아니라면 이런 효과를 보긴 힘들어.” 반혜영의 설명에 강유식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이거 그 양반 맞나본데.’ 회귀 전의 기억인 알렉산드르의 장례식. ‘그리고 당시 알렉산드르를 눈엣가시로 여겼던 건…흑망. 그 양반이었지.’ 흑룡천주의 측근이자 요인암살을 담당했던 존재. ‘그럼 이 저주도 흑망의 능력인 게 확실하네.’ 흑망과 합을 맞춘 적은 거의 없지만, 몇 번 본인의 능력을 사용해 처벌하는 것은 본적이 있었다. ‘흐음. 벌써 움직이고 있었단 말이지…’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보다도 훨씬 활동 시기가 빠르다. ‘좀 띠꺼운데.’ 설마 이렇게 배신감을 느끼게 될 줄이야. [큭…크으윽…?!] 연구실 구석에서 널브러져 있던 크림슨에게서 터져 나오는 거무튀튀한 빛.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 순간. [환수 ‘광룡 크림슨(A)’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의 파편을 습득하였습니다.] [새로운 힘을 개화합니다.] “…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알림창이 떠올랐다. * 사람의 발길이 드문 폐가. -나의 권능 일부가 완전히 소멸했다. “…” 수정구
너머로 들려오는 묵직한 목소리, 흑망의 이야기에 독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누군가 나의 권능을 해주해서 흡수한 모양이다. “그, 그럴 일이 가능할 리가…!” -불가능하지는 않지. 지금 이렇게 일어나지 않았느냐. “…” 흑망의 이야기에 독귀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자칫 잘못하면 기존에 뿌려둔 권능도 모조리 소멸할 위험이 있다. 그러니 즉시 해주한 자를 찾고 아직 남아있는 자들은 회수해라. “그러면 방패막인 의뢰인들에게는…” -앞으로 권능을 사용하기 힘들어진 이상 어쩔 수 없지. 실패했다고 전달한 다음 의뢰금을 돌려줘라. 흑망의 명령에 독귀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빌어먹을…’ 하지만 독귀는 흑망의 명령에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예…알겠습니다…” -빠르게 정리해라. 후웅! 수정구의
불빛이 꺼지고, 독귀는 입술을 꾹 깨물며 가장 최근에 완료했던 이정룡 측의 의뢰인에게 연락을 넣었다. “뭐, 뭐?! 지난번에는 성공적으로 붙었다고 하지 않았나!!” “으이구! 이 양반아! 그러니까 내가 그러니까 다른 사람한테 맡기자고 그랬잖아!”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소리를 높이는 이갑수와 한여희. “이름…” 이을현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명예…” 그 중얼거림에 서로 다투던 이갑수와 한여희도 바라보았고, 세 명의 시선을 뚫어져라 받게 된 독귀가 시선을 돌리며 이빨을 꽉 깨물었다. ‘빌어먹을…’ 독귀의 이름과 명성이 모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제가 좀
용합니다(4) > 끝 < 제가 좀 용합니다(5) > 105화 연구실을 꽉 채우던 빛이 단숨에 사그라들었고, 널브러져 있던 크림슨의 모습이 다시금 보였다. “허어…” 임기응변으로 시도한 방법에 예상치 못하게 따라온 변화. [오…오오! 새로운 힘이 솟아 넘친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힘차게 외치는 크림슨. 그 모습에 강유식이 몸을 툭툭 치며 물었다. “정확히 뭐가 어떻게 달라진 거야? 설명 좀 해봐.” […] 강유식의 부름에 크림슨이 가늘게 뜬 눈으로 흘겨보더니 살짝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직 힘의 조각이 부족해 각성한 능력은 없다. 하지만 전반적인 신체능력과 마력이 증가하고 성장 속도도 조금 늘어난 것 같군.] “흐음. 그렇단 말이지…” 아무래도 흡수한 힘의 양이 적어서 새로운 능력을 각성하는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럼 저주를 더 모으기만 하면 된다는 건데…’ 다른 사람에게는 모래사장에 뿌려둔 바늘 중에서도 다른 제품을 찾아내는 수준이지만, 강유식에게는 다르다. ‘벌써 몇 명 추려지긴 하는데…문제는 접근 방법이구만.’ 만약에라도 흑망 쪽에서 자신이 건 저주가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면 당장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저주에 대해서 설득하는 것도 일이고…흑망한테 정체를 숨기는 것도 일이네.’ 채무가 생겨나면 이야기가 새어나갈 걱정은 없지 않으냐, 라고 할 수 있지만 뭐든지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뭔가 좋은 수단이…’ 강유식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문득 머릿속으로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 녀석이라면…’ 회귀 전에도 곳곳에서 신출귀몰하게 나타났던 녀석이라면 괜찮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좋아. 너는 일단 들어가 있어.” 다리를 찰싹찰싹 때린 강유식의 모습에 크림슨이 본인의 꼬리로 손을 툭 쳐내며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명령조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계약된 관계라고는 해도 나또한 엄연한 지성체다.] 막무가내로 저주를
후려친 게 불만스러웠는지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크림슨. “조각. 피닉스한테 넘겨준다?” [먼저 들어가 보겠다. 힘이 필요하면 말해라 주인!] 꼬리를 만 크림슨이 냉큼 빛과 함께 사라졌고, 상황을 정리한 강유식은 뒤에서 어리둥절해 하던 세 사람에게 다가갔다. “저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까 어르신 깨어나면 간단하게 설명해주세요. 그리고 선생님 잠깐만…” “어, 어어…” 반혜영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온 강유식은 복도에서 주변을 살펴본 다음 물었다. “선생님. 허미트 만나보신 적 있죠?” “응? 뭐…만난 적 있기야 한데…” “보통 어떤 식으로 만났어요?” 강유식의 물음에 반혜영은 의아해하면서도 대답했다. “보통은 그쪽에서 먼저 편지를 보내. 언제, 어디로 찾아와라. 이런 식으로.” “그 이외에 방법으로 만나보신 적 없어요?” “으음…”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반혜영은 뭔가 떠올랐는지 눈치를 살피다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속으로 쌍욕하니까 찾아오던데…” “…예?” “급해서 필요할 때 없다고 쌍욕하면서 화내고 있으니까 어떻게 알고 찾아오더라고. 아니, 뭐 매번 그러는 건 아니고…” 부끄러워하는 반혜영의 모습에 강유식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하면 말이 되나 할 수도 있지만 허미트라면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물건 가져다주는 것도 다 적절했고…어쩌면…’ 이러나저러나 시도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 결정을 내린 강유식은 반혜영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요. 선생님. 그럼 저 가볼게요!” “어, 어….아! 그놈 뭐 이상한 소리 하면 다 무시해!” 반혜영을 뒤로한 채 연구실에 있는 한 방문 앞에 선 강유식은 가볍게 숨을 골랐다. ‘어차피 다 알고 있을 테고…시간낭비하지 말고 싸게 싸게 나옵시다.’ 강유식이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눈앞의 문이 변하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본래는 쉼터였던 방은 온갖 플라스크들이 놓인 실험실로 변했는데 기묘한 약 냄새와 수상쩍은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적어도 몇 달 뒤에 볼 줄 알았거늘…이렇게 금방 만날 줄은 몰랐군…” 구석에서 들려온 힘이 쭉 빠진 목소리. “이번 모습은…어째 좀 그러네요.” “그러게 말이야…다음에는 장소를 좀 활기찬 곳으로 해주게. 연구실 같은 곳은 보통 살아있는 시체들이 걸어 다니는 장소니까…” 피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허미트는 힘겹게 고개를 들면서 바라보았다. “지난번 선물도 그렇고 여러 가지 물어보고 싶지만…이 몸으로는 피곤해서 힘들군. 무슨 일로 나를 찾은 건가.” “도움을 받고 싶은 게 있어서요.” 강유식은 지금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했고, 그 이야기에 허미트가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 “그러니까…네 정체를 숨긴 채로 저주에 걸렸을지도 모를 헌터를 치료하고 싶단 말이지?” “예. 그겁니다.” “흠. 다른 사람의 저주도 확실하게 제거할 수 있나?” “아마도요?” 살짝 애매하게 이야기하지만 확신이 담겨있는 목소리. 그에 허미트는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해주가 가능한 저주였다니…’ 저주의 근원인 당사자를 죽여도 사라질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끈질긴게 바로 노화의 저주였다. 그런데 그것을 깔끔하게 제거할 수 있다니. ‘제림니르의 힘을 빌렸다고는 해도 정말 믿을 수 없군.’ 어떻게 이 짧은 시간 안에 막대한 ‘대금’을 쌓은 것인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갔다. “알겠다. ‘대금’도 충분히 쌓였으니 네가 원하는 상황으로 자리를 마련해보지.” “정말입니까?” “그래. 다만 몇 가지 제약이 있다.” 옆 테이블의 서랍장을 연 허미트는 차트표를 하나 꺼낸 다음 책상 위에 올렸다. “내가 주선해줄 수 있는 자들은 거기에 있는 녀석들뿐이다. 거기에 없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접근을 시도하거나, 아니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허미트의 이야기에 강유식은 차트표를 받은 다음에 내역을 살펴보았다. ‘대충 보이는 게…3명 정도인가.’ 알고 있는 몇몇이 빠진 게 조금 아쉽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너무 욕심을 부려도 좋을 건 없다. “알겠습니다.” “좋아.” 고개를 끄덕인 허미트는 자리에서 일어선 다음 자신의 새하얀 가운을 벗어 내밀었다. “지금부터 넌 의사다.” * 인도의 A급 헌터인 사티아 칸. “크윽…” 가슴을 움켜쥔 사티아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상처가 또다시 발작을 시작한 것이다. “빌어먹을…” 목을 콱 조여 오는 통증에 사티아는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하아…하아…” 가슴을 반으로 찢어버릴 것 같던 통증이 점차 가라앉았고, 거칠게 숨을 내쉰 사티아는 멍한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분명 반년밖에 안 됐을 텐데…몇 년이 흐른 것 같군.’ 후유증 때문인지 몰라도 확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에 사티아가 지친 표정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하루라도 빨리 현역으로 복귀해야 하거늘…’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로카팔라의 영향력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띵동 현관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 “안녕하십니까. 오늘 사티아 님의 진료를 맡은 모한다스 보세라고 합니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초로의 노인과 그를 수행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인. ‘그래 봐야 앞의 이들과 똑같겠지.’ 자연히 치료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며 진통제나 주고 가버릴 것이다. “들어오시오.” “실례하겠습니다.” 거실로 들어간 사티아와 의료진은 곧장 자리에 앉은 다음에 진찰을 시작했다. 우웅 몸 안으로 파고든 마력에 사티아가 심드렁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때. 진찰을 끝낸 모한다스가 이야기했다. “저주로군요.” “…방금 뭐라고 했소?” “지금 사티아 님은 저주에 걸린 상태이십니다. 상태를 보아하니 오래전부터 걸리신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모한다스의 이야기에 사티아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저주에 걸렸다니? “매우 교묘한 저주라 다른 사람들을 찾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대로라면 저주가 사티아 님을 천천히 갉아먹어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확신을 담아 이야기하는 모한다스의 이야기에 사티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소?” 보통 같으면 더 물어볼 필요도 없이 돌려보냈겠지만, 자신의 친우가 추천한 의료진이었기에 다시 물어본 것이다. “물론이지요. 사티아 님께서 원하신다면 서약서를 작성할 수도 있습니다.” “…” 생각보다도 강하게 나오는 모한다스의 모습에 사티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기다리시오.” 자신의 방으로 간 사티아는 구비해둔 서약서를 가져온 다음 앞으로 내밀었다. “만약 그 저주라는 것이 실존한다면, 그리고 그걸 제거할 수 있다면 이 서약서에 사인을…” “자. 얼른 사인합시다.” 서약서를 슥 훑어보던 모한다스가 곧장 사인을 끝마친 뒤 다른 이들에게도
건넸고, 눈 깜짝할 사이에 작성이 끝났다. ‘저…정말로 내게 저주가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누구도 알지 못한 저주를 제거할 수 있다니. “자자. 그럼 수술을 준비하도록 하지요.” 모한다스의 신호에 세 사람이 재빠르게 움직였고, 앗차하는 사이에 눕혀진 사티아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정말 제거할 수 있는 것 맞소?” “서약서가 증명해주지 않습니까. 자. 마력에 저항하지 마시고, 일어나시면 몸이 개운하실 겁니다.” 전신의 마력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느껴진 순간.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모한다스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상처를 입은 장기에 저주를 동화시키면 이렇게 되는구나…신기한 사용법이네…” 노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말투. 그 알 수 없는 모습에 사티아의 의식이 끊어졌고. “허엇!” 다시금 눈이 번쩍 떠졌다. “…” 안방의 침대에서 일어선 사티아는 다급히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서…설마…정말로…” 믿을 수 없는 상태에 사티아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모한다스가 들어왔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뭐가…어떻게 된 것이오?”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어보는 사티아의 모습에 모한다스가 미소를 지었다. “저주는 깔끔히 제거했고, 치료가 덜 된 상처도 마무리했습니다. 당분간 후유증이 조금 남아있기는 하겠지만 영약을 복용하면서 꾸준히 재활하시면 금방 나으실 겁니다.” “저…정말 상처가 치료됐단 말이오?” “예. 그렇습니다.” 모한다스의 대답에 사티아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 보다가 이내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 같은 자가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을 터…도대체 정체가 무엇이오?” 사티아의 물음에 모한다스, 변장한 강유식은 잠시 고민하다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그냥 의사라고만 기억해주십시오. 언젠가 제대로 마주 볼 기회가 올 것입니다.” 강유식의 이야기에 사티아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이날의 은혜. 이 사티아 칸의 이름을 걸고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오!”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사티아 칸’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A급으로 판정합니다.] [현재 ‘모한다스 보세’라는 신분으로 정체를 숨겼습니다. 채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정체를 공개하십시오.]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에 강유식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았다. “그럼 이만…” “잠깐.” 강유식을 불러 세운 사티아는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조금 실례가 될 수도 있겠지만…도대체 어떻게 저주를 알아내고 해주한 것이오? 다른 S급 헌터도 알아내지 못했거늘…”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사티아의 모습에 강유식이 잠시 고민하다가 씩 웃었다. “제가 좀 용합니다.” < 제가 좀 용합니다(5) > 끝 106화 인도의 사티아 칸을 치료한 뒤. “이반 그 빌어먹을 놈이 기어코 비겁한 방법까지 사용해 나한테 칼을 겨눴단 말이지…” 2m를 훌쩍 넘기는 키에 사람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흉악한 근육. 그리고 상의를 탈의한 채 바지만
입고 있는 괴팍한 노인.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군. 오늘의 도움은 잊지 않겠다. 정체불명의 의사!”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알렉산드르 자이체프’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A급으로 판정합니다.] [현재 ‘미하일 그리고리에프’라는 신분으로 정체를 숨겼습니다. 채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정체를 공개하십시오.] 호쾌하게 외친 알렉산드르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밖으로 달려나가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전란을 막고자 웅크렸지만…그 어리석은 생각이 암운을 끌어들이고 있었군.” 강직한 눈매에 거대한 나무를 보는 것처럼 단단한 몸.
용병길드 ‘보르테 치노’를 이끄는 A급 헌터 보르지긴 쿠빌라진. ‘이 양반. 이미 S급이네.’ S급 헌터의 승급 기준은 이야기로만 들어서 자세히 모르지만, 수많은 강자를 봐온 강유식이기에 알 수 있었다. “그대의 은혜로 나의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었소. 이 은혜. 다시 만날 그날 곱절로 갚으리라.”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보르지긴 쿠빌라진’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A급으로 판정합니다.] [현재 ‘살리타이’라는 신분으로 정체를 숨겼습니다. 채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정체를 공개하십시오.]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창은의 길드장 이정룡. 세계 10대 길드에 들었으나 금방 몰락한 로카팔라의 길드장 사티아 칸. ‘어떻게든 되겠지.’ 어차피 이런 걸로 끙끙거리면서 고민한다고 미래에 벌어질 모든 일을 예측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정체를 숨기고, 할 수 있는 선에서 움직인다. 그게 적당해.’ 분에 넘칠 정도로 큰 그림을 그리면 어떻게 뒤통수가 깨지는지는 회귀 전에 뼈저리게 깨우쳤다. “조각을 그렇게 처먹어 놓고 능력 하나 발현 못 하다니! 니가 그러고도 용이냐?!” [그…그렇게 말할 것까지는…] “그럴 거면 다 토해내! 피닉스한테 먹일 테니까 죄다 토하고 가서 샌드백처럼 두들겨 맞아!” [크아악!] 조각을 모조리 처먹고 덩치가 6m 가까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특수 능력도 완전히 개화하지 못한 크림슨. ‘이것도 괜찮은데?’ 방학 동안 쉴 새 없이 움직였던 강유식에게는 편안한, 크림슨에게는 지옥 같던 나날이 흐르기를 닷새. * 개학식이 열리는 것은 학교마다 사정이 다르지만, 성진 사관학교의 경우는 반드시 개학식을 열었다. “아. 이번에 우수생도 선발 뽑히면 좋겠는데…” “너 실습 두 번밖에 안 갔잖아. 퍽이나 되겠다.” 방학 동안 참여한 현장 실습과 단련으로 인한 성장. “근데 최우수생도는 이미 정해진 거 아닌가?” “그건 없는 셈 쳐야지.” “에휴. 다음 학기 때 노려야겠다…” 하지만 최상위권에 속하는 생도들은 살짝 김빠진 표정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너 논문은 봤냐?” “봤지. 머리 터지는 줄 알았다.” “그런 걸 어떻게 발견했는지 몰라…” 어느 한 곳에서 강유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순식간에 모든 생도의 화제가 그쪽으로 옮겨갔고, 강당 전체가 시끌시끌하게 변했다. “오늘부로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1년을 마무리하는 학기인 만큼 모두 최선을 다하여…” 형식적인 조례를 진행한 다음 윤강현이 적당히 매듭을 지었고, 진행을 맡은 이현창이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우수생도 수상식이 있겠습니다. 호명하는 생도부터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윤강현이 호명하는 대로 생도들이 앞으로 나와 차례대로 상장과 함께 혜택을 약속 하는 증서를 받았다. ‘드디어…’ ‘나온다.’ 몇 달 전만 해도 학교와 한국에서 유명한 정도였다면 지금은 전 세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유명인이 되었다. “최우수생도. 다이아클래스 1학년. 강유식!” 이현창의 부름과 동시에 다른 생도와 달리 무대 뒤편에서 강유식이 걸어 나왔다. “귀하는 마법의 핵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발견해내 마법학계의 발전을 앞당기며 본교의 이름을 전 세계에 떨치는 공헌을 하였으므로 이에 최우수생도로 선정한다.” 상장과 증서가 앞으로 내밀어졌고, 강유식은 그것을 능숙하게 받아내며 악수를 위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아아. 우선 제가 최우수생도로 뽑힐 수 있게 된 것은…” 그 뒤로는 친한 사람들의 이름을 한 번씩 불러주는 정석적인 소감이 이어졌는데 앞서 대표 우수생도와 달리 강유식은 그 파급력이 달랐다. “저 정도면 그냥 헌터로 쳐야 되는 거 아냐?” “길드 어디로 갈지 고민할 필요는 없겠다.” “차라리 길드를 만들어도 되겠네. 만들면 난 무조건 간다.” 폭풍 같던 강유식의 소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생도들이 자신의 클래스로 돌아갔고, 강유식은 윤강현의 부름을 받아 바벨탑 최상층에 있는 학원장실에 들어섰다. “매번 느끼지만 자네는 사람들 앞에서 위축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군.” “자랑해도 모자랄 일인데 죄지은 것처럼 위축되어 있으면 아깝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군그래.” 슬쩍 웃은 윤강현의 모습에 강유식이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따로 보자고 하신 겁니까?” “자네 앞으로 도착한 편지가 있어서 불렀네.” “제 앞으로 말입니까?” 의아한 표정을 지은 강유식의 앞으로 윤강현이 세 개의 편지봉투를 앞으로 내밀었다. “백련 길드와 천무궁. 그리고 세인트 유니버시티군요.” “그렇네.” 앞에 놓인 편지를 바라본 강유식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백련 길드야
자신이 사전에 이야기해둔 것이 있으니 편지가 도착해도 이상할 건 없다. ‘세인트 유니버시티가 제일 뜬금없네…’ 강유식이 의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때. 윤강현이 편지지를 가리켰다. “우선은 읽어보게. 그편이 이야기가 더 빠를 테니.” “음. 알겠습니다.” 윤강현의 이야기에 강유식은 각 집단에서 자신에게 보내온 편지를 읽어보았다. “천무궁과 세인트 유니버시티. 이 둘은 사실상 전입제안 아닙니까?” “그렇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시원스레 대답하는 윤강현의 모습에 강유식은 다시금 편지를 바라보았다. [직접 만나서 협상하자. 우리 쪽으로 넘어오면 해달라는 건 다 해줄게!] 성진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는 열렬한 러브콜. “조금 의외네요. 중간에서 막으실 줄 알았는데.” 지금 성진의 입장에서 강유식이 밖으로 나가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중간에서 가로막는다고 다 막히겠는가. 어떻게든 새어나갈 수밖에 없지.” 하지만 윤강현은 그런 일이 벌어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거랑은 조금 다른가.’ 나가든 말든 상관없다기보다는, 절대로 내보내지 않을 자신이 있는 모습. 윤강현의 모습에 강유식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내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천무궁과 세인트 유니버시티는 꼭 방문해줬으면 하네.” “전부요?” 강유식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윤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를 초청할 구실로 교류회도 같이 제안했기 때문일세. 좀처럼 없는 기회니 이번 기회에 본교의 생도들을 보낸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겠지.” “흐음…” 확실히 회귀 전에 성진이나 라운드 아카데미, 천무궁과 세인트 유니버시티처럼 최상위권 기관끼리의 교류회는
없었다. ‘저쪽 유망주를 빼 올 수 있는 기회니 나쁠 건 없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나간다면 결국 더 큰 손해가 될 텐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리고 그쪽에서 제안하는 전입 조건을 듣고 알려줬으면 하네.” 윤강현의 이야기에 강유식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이내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으며 물었다. “얼마나 더 챙겨주실 생각입니까?” “두 배.” 강유식을 바라본 윤강현이 무심한 듯, 그리고 절대로 번복하지 않겠다는 듯이 강렬한 눈으로 대답했다. “그들이 제안하는 조건의 두 배씩 챙겨주겠네.” “…” 윤강현의 대답에 강유식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 윤강현의 다짐을 들은 강유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돈이야 많을수록 좋지만…그것도 이제 슬슬 여러 방면으로 생각할 때란 말이야.’ 초기에는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지만 나중에 가면 어디서, 어떻게 쓸 수 있는지가 중요한 법이다. ‘권력.’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지만, 권력은 때때로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다. 하물며 성진에서의 권력이라면 어떨까. ‘괜찮은데.’ 원하는 대로 한 바퀴 돌면서 조건을 최대한 불려서 받고, 적당히 협상해서 권력을 받아낸다. “믿고 있었습니다. 학원장님.” < 완벽한 제자(1) > 끝 107화 “…중국이라고?” 놀란 반혜영의 물음에 강유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언제 가는데?” “다음 주요.” “…” 강유식의 대답에 반혜영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새로 연구할 것들도 잔뜩 준비해뒀는데…’ 마법의 핵이 발견되면서 본격적으로 착수에 들어간 새로운 마법체계. 이드마법을 연구할 생각에 잔뜩 부풀어 있던 반혜영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꼭 가야 돼?” “예. 지난번에 백련문주님이랑 약속한 것도 있고, 학교 측이랑 약속한 것도 있거든요.” “네가 마실 차도 잔뜩 준비해뒀는데…” 살짝 심통 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반혜영의 모습에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섭섭하세요?” “뭐, 뭔 소리야! 그냥 할 일이 늘어나니까 그런 거지!” 빽 소리를 지르는 반혜영의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으며 영약으로 달인 차를 홀짝였다. “저한테 맡기려고 하셨던 파트 정리해서 주세요.” “…진짜?” “진짜예요. 혼자서 하는 거라 잘할지는 모르겠지만…되는 대로 해볼게요.” 이드 마법의 개론서라면 회귀 전에 질리도록 읽었기에 메모리맵 없이도 떠올릴 수 있었지만, 강유식은 일부러 엄살을 부렸다. ‘천재인 척하는 것도 힘들어…’ 그래도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협조해두는 게 좋다. 그래야 밑천이 바닥나면 여러 사람에게 빨대를 꽂을 수 있지 않은가. “알았어. 그럼 참고할 자료들까지 같이 챙겨줄게.” “예. 혼자서 하는 거니까 너무 많이 넣지는 마세요.” “걱정하지 마. 나 그렇게 사람 굴리는 성격 아니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며 웃는 반혜영의 모습에 강유식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본론으로 넘어갔다. “아. 그리고 선생님. 가기 전에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응?” “나중에 천무궁 쪽에서 교류 목적으로 학생들이 오거든요. 그중에 좀 팔랑귀 같은 녀석들한테 이것저것 가르쳐주실 수 있어요?” 예상치 못한 부탁에 반혜영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씩 웃었다. “타오 페이 영감한테 혼나도 모른다?” “다 알고 보내는 건데요 뭘.” 본래 헌터 육성기관이나 길드나 이렇게 서로 사람을 빼가면서
굴러가는 법이다. “학원장님도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다 정말…” “이번 기회에 1위 노리고 제대로 올라가시려는 거겠죠. 선생님도 슬슬 대비해두시는 게 좋을걸요.” 강유식의 이야기에 남궁륜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설마…지도자 말하는 거냐?” “애초에 평생 숨길 생각도 없으셨잖아요. 슬슬 기회가 오고 있는 거죠 뭐.” “…그건 또 그렇구만.” 머리를 긁적인 남궁륜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온 거냐? 아무런 이유 없이 오지는 않았을 테고.” “이번에 저랑 같이 천무궁으로 넘어갈 생도들. 선생님이 서류랑 면접으로 뽑으신다면서요?” 강유식의 이야기에 남궁륜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너 그거 유착행위다?” “에이. 돈이 오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선생님 선별하는데 피곤하시지 않게 조언해드리는 거죠.” “말은…그래서 누군데. 너도 알지만 많이는 못 넣어.” 딱 잘라 이야기하는 남궁륜의 모습에 강유식이 씩 웃었다. “김진혁이랑 이병호. 이 두 사람 부탁드릴게요.” “뭐. 그 둘이면 우수생도로 뽑히기도 했으니 별다른 말 없이 넘어가겠네. 알았다.” “그리고…중국에서 건너오는 녀석 중에 괜찮아 보이는 녀석 있으면 지도자 사용해서 꼬셔주세요.” 강유식의 이야기에 남궁륜이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신 눈에 차는 녀석들 없으면 안 한다.” “물론이죠. 아, 그리고 왜 이런 걸 제안하냐고 하면 제가 눈여겨봤다는 식으로…무슨 말인지 알죠?” 미소를 지은 강유식의 모습에 남궁륜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양아치 같은 놈…” 그렇게 천무궁의 학생을 맞이할 준비가 끝이 났고, 개인적인 채비도 끝낸 강유식은 교류회단과 함께 중국으로 향했다. * 베이징 공항을 향해가고 있는 여객기. ‘역시 천무궁이라고 해야 할지…이쪽 씀씀이도 만만치 않단 말이야.’ 라운드 아카데미가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 돈을 쓴다면, 이쪽을 돈을 과시하기 위해서 돈을 쓴다. ‘이것만 보면 천무궁도 나쁘지는 않은데.’ 하지만 천무궁이 휘두르는 무시무시한 재력도 결국은 국가와 후원하는 기업, 길드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뭐, 관점의 차이겠지만.’ 아마 이런 단점이 있어도 근접계열의 생도들은 성진보다 천무궁을 마음에 들어 할 수도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이놈도 좀 걱정이네.’ 옆자리를 슬쩍 바라본 강유식은 벌써 잠들어있는 김진혁을 바라보았다. ‘각성하면 좋기는 할 텐데…예상외의 인물 때문에 해버리면 귀찮단 말이야.’ 김진혁이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각성한다고 해서 채무가 사라진다거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는 않는다. ‘그동안 열심히 작업해뒀으니 애먼 놈한테 뺏기는 꼴은 안 나겠지만…그래도 여러모로 난감하구만.’ 각성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데려왔지만 정말 도움을 받을까 봐 신경 쓰이는 난감한 상황. “강유식이.” 비어있던 옆자리에 인솔교사로 참가한 한무진이 앉았다. “학원장님한테 뭐 들은 거 있나?” “예?” “진짜 평범한 교류회일 리는 없을 테고…우리 학교의 보배나 다름없는 자네를 이렇게 직접 보낼 정도면 뭔가 있다는 뜻 아닌가.” 뭔가 기대하는 듯한 한무진의 모습에 강유식은 잠시 고민하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냥 저를 부르는 핑계로 교류회를 제안한 것 같던데요.” “진짜 그것뿐이야?” “예.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뭔가 큰 사건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런가…” 살짝 아쉬워하는 한무진의 모습에 강유식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양반은 도대체 뭔 생각일까.’ S급 헌터로의 승급을 앞두고 돌연 현역에서 은퇴한 뒤 성진의 교사가 된 용기사 한무진. ‘활동을 안 하니 알 턱이 있나.’ 한무진은 교사가 된 뒤로 게이트에 방문한 적이 없었고, 몬스터나 마인을 상대로 전투를 한 횟수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가능하면 이 양반도 좀 어떻게 해보고 싶은데…’ 워낙 특이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실력만큼은 회귀 전에 몇
없는 사건에서 확실하게 증명한 사람이다. “나중에 보자.” 전용기는 부드럽게 베이징 공항에 착륙했고, 거의 프리패스 수준으로 입국 심사를 넘어가 화물을 찾았다. “환영인파 같은 거 있을까?”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은 김진혁의 물음에 강유식이 피식 웃었다. “우리가 연예인도 아닌데 환영인파가 왜 오겠어. 뭐, 천무궁 관계자랑 기자 정도는 오겠지.” “그런가…그것도 좀 떨리네.” “어차피 유식이 형 말고는 관심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아. 그것도 그렇네.” 김진혁과 이병호의 대화에 슬쩍 웃은 강유식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데 좀 많이 오긴 했나 보네. 엄청 어수선하구만.’ 자신들이 나갈 입국 게이트를 공항경비원들이 따로
관리하고 있었고, 관계자랑 이야기를 나누러갔던 한무진과 이현창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겁나 왔구만.’ 어떻게 왔는지는 몰라도 상상을 초월하는 라인업이 분명하다. 다른 생도들도 어느 정도 분위기를 파악했고, 한무진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다들 얼빠진 표정 안 찍히게 긴장해라. 그리고.” 고개를 돌린 한무진이 강유식을 바라보며 손짓을 했다. “강유식. 네가 그냥 선두에 서라.” “알겠습니다.” 한무진의 권유에 강유식이 일행의 선두에 섰고, 그대로 캐리어를 이끌며 입국 게이트로 향했다. “나왔다!” “강유식이다!” 소란스러운 이야기 소리와
함께 카메라의 셔터가 미친 듯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부드러운 인상에 단정한 정장 차림. 30대 정도로 보이는 나이 때문인지 평범한 회사원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 실체는 완전히 달랐다. ‘천무궁주. 자오 신쿠.’ 전 세계에 손꼽히는 천무궁의 실질적인 주인이자 현 A급. 그리고 미래에는 S급 헌터로 성장하게 되는 강자. “…이렇게 마중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유식 생도를 비롯한 성진의 인재들이 우리 천무궁을 견학하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왔는데 마중은 안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대표자로서 당연한 일이지요.” 혀에 기름칠을 얼마나 해뒀는지 매끄럽게 이야기하는 자오 신쿠. 성진 쪽에서 학원장이 마중을 안 나왔을 경우 엿 먹으라고 살짝 말미를 던져두는 게 일품이었다. ‘마중 나가라고 말해두길 잘했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만만찮은 인물이다. “오느라 고생 많았다.” 뭔가 석연찮은 표정을 짓는 타오 페이. ‘자오 신쿠가 억지로 끼어들었구만.’ 게다가 저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건대 자신의 아이템지급에 관여한 인물도 자오 신쿠가 맞는 것으로 보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한쪽에서 인파를 가르며 다가오는 두 사람. “배, 백련문주다!” “갑자기 왜…설마 강유식 때문인가?” “몰라. 일단 찍어!” 기자들은 특종이라도 잡은 것처럼 마구 셔터를 눌렀고, 구경 온 인파들이 달라붙으면서 주변이 포화상태가 되었다. “먼저 나와 있어야 했는데 기다리게 해버렸군요. 미안해요.” “저의 운전이 미숙했던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뇨아뇨. 사과하실 일까지는…” 살짝 고개를 꾸벅인 리 메이와 거의
90도에 가깝게 고개를 숙인 라오 창. “오랜만에 뵙는군요. 백련문주님. 그리고 일화단주님.” “인사가 늦었군요. 천무궁주님. 잘 지내셨는지요.” 리 메이의 부드러운 미소에 자오 신쿠도 미소를 지었다. “저야 뭐 언제나 똑같지요. 그런데 강유식 생도라면 성진의 교류회단과 함께 이동하기로 정해졌습니다만…조금 늦으신 것 같군요.” “그런가요?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갔던 건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화에 두 사람의 사이에서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피곤할 텐데 우선 숙소로 이동하시지요. 베이징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5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으로 잡아뒀습니다.” “이상하네요. 저희도 베이징 최고의 5성급 호텔 스위트룸으로 잡아뒀는데…혹시 예약에 실수가 있으신 건 아닌지?” “하하핫. 백련문주님도 농담이 참 심하십니다.” “천무궁주님이야말로 이럴 때 실수도 다 하시고 참.” 호쾌하게 웃는 자오 신쿠와 입가를 가리며 웃는 리 메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신경전이 계속되더니 이내 선택지를 강유식에게 돌렸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다른 쪽으로 가면 잡아먹을 것처럼 이글거리는 시선. “어디 밥이 더 맛있습니까?” 새우가 고래의 등을 터트렸다. < 완벽한 제자(2) > 끝 108화 강유식을 두고 벌어진 천무궁과 백련 길드의 신경전은 결국 백련 길드의 승리로 끝났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다음에 뵙죠. 천무궁주.” 입가를 씰룩거리는 자오 신쿠를 뒤로한 채 강유식이 백련 길드측과 함께 빠져나갔고, 기자들이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이 정도면 쉽지 않다는 건 확실히 알겠지.’ 사실 음식이 아니었어도 강유식은 처음부터 백련 길드를 따라나설 생각이었는데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정말 평범한 교육기관이었다면 천무궁주가 향후 중국을 쥐락펴락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아직 정확하게 알아낸 것은 없지만 천무궁이 정치권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깊게 얽혀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중국처럼 폐쇄적인 국가는 한 번 일이 꼬이는 순간 밑도 끝도 없이 꼬이게 된다. “타시지요.” 기자들과 인파를 지나 강유식이 차에 올라탔고, 리 메이도 이어서 타면서 차량이 공항 밖으로 빠져나갔다. “많이 소란스러웠죠?” “아뇨. 저 정도야 뭐 어딜 가나 있는 일인데요 뭘.” 저기서 썩은 계란이나 토마토 정도는 더해져야 소란스럽다고 할 만하다. 여유로운 강유식의 대답에 리 메이가 슬쩍 웃었다. “확실히 강유식 생도라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래도 피곤하니까 앞으로 움직일 때는 가급적 조용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천무궁과 백련 길드 측에서 수배한 기자들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챘기에 강유식이 곧장 부탁했고, 리 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이 뒤에 따로 생각해두신 일정은 있으십니까?” “음. 우선 식사를 대접하고, 백련 길드의 사옥을 안내해드릴까 싶네요.” “사옥이라면 어느 쪽의?” 강유식의 물음에 리 메이가 미소를 지었다. “백련문이요.” 호텔에 도착해 점심을 해결한
뒤. 짐을 풀어둔 강유식은 다시 차를 타고 백련 길드의 사옥인 백련문을 향해갔다. ‘엄청나게 넓구만…’ 베이징 외곽에 있는 산 다섯 개를 깎아 세운 사옥. ‘원래는 절이라고 했던가.’ 본래 스님이었던 1대 백련문주가 일대의 땅을 사들였고, 이후 2대와 지금의 3대까지 걸쳐 증축되어 세워진 백련문. ‘뭐. 좀 오버해서 지은 것 같기는 하지만…’ 산 초입에 있던 ‘백련문白蓮門’이라고 적힌 거대한 현판을 떠올린 강유식은 피식 웃으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올라가야 합니다. 내리시지요.” “아. 예.” 라오 창의 이야기에 강유식은 곧장 차에서 내렸고, 주변의 풍경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야. 마력이 왜 이렇게 많아.’ 본래 도심보다 생명력이 넘치는 자연 쪽에 마력이 더 풍부하기는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비정상적인 마력량. “술법진이네요. 그것도 건물의 형태를 응용해서 만들어낸 반영구적인 구조고요.” 강유식의 이야기에 리 메이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단숨에 알아차리기는 힘든데…역시 대단하네요.” “이쪽은 전문이라서요. 주변에 흩어진 마력을 끌어모으는 것 같은데…그걸 고려해도 엄청난 마력량이네요.” “마력을 증폭시키는 효과도 더해져 있어요. 어떤 구조인지는 당연히 비밀이에요.” 싱긋 웃는 리 메이의 모습에 강유식은 주변을 보았다. ‘이것 참…돈 값하는 건물이네.’ 마력을 끌어모아 훈련 효율을 높이는 시설은 외부에도 있지만, 그쪽은 공간이 한정되는 데다가 소모되는 마석량도 꽤 크다. “저는 내부에 용무가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예.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럼…” 고개를 꾸벅인 라오 창은 그대로 바닥을 박차고 어딘가로 사라졌고, 리 메이가 곁으로 다가왔다. “저희도 이제 슬슬 출발하죠.” “예.” 리 메이는 앞장서서 걸으며 강유식에게 백련문 내부의 건물과 구역에 관해서 설명해주었다. “생각보다 외부인의 방문에 너그럽네요.” “실질적인 길드의 업무는 도심의 백련 빌딩에서 처리되어 유출될 정보도 없으니까요. 이 넓은 토지를 굳이 아낄 필요는 없죠.” “그래도 테러리스트 같은 게 걱정되지 않습니까?” “그건 본문에 펼쳐져 있는 술법진이 발견하고 막아주기 때문에 괜찮답니다.” 백련문에 펼쳐진 술법진에 강한 자신감을 보이는 리 메이. 그 모습에 강유식은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긴. 회귀 전에도 여기서 일 터졌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네.’ 거기에 이렇게 시설을 이용하던 이들 중에 백련 길드로 전향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하니 느슨해 보여도 그리 나쁘지 않은 정책이었다. ‘괜히 세계 1위가 아니었구만.’ 베이징 사태 때문에 금방 내려와서 그렇지 역시 정점은 아무나 오르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여기는…” 출입을 막기 위해 높이 세워져 있는 담장과 문. 그리고 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자욱한
안개. [무생원無生園] ‘과연. 여기였구만.’ 백련 길드가 무너지고 백련문주의 행방이 묘연해진 뒤로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는 신비로운 장소. “이 안은 본래 백련문주인 저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에요. 길드원도, 간부인 단주들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죠.” “그러면 여기서 돌아가는 겁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리 메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들어갈 거예요. 백련환몽을 단련할 수 있는 수련장은 이 무생원의 내부에 있거든요.” 리 메이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흠. 그래도 소속원이 아닌 제가 들어가면 좀 곤란해지시는 거 아닙니까?” 무슨 일이든 예외가 생겨나면 거센 반발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강유식의 물음에 리 메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강유식 생도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니까요.” “그러면 다행입니다만…” “일단 들어가죠.” 문 앞으로 다가간 리 메이는 그대로 손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살짝 밀었다. 쿠구구궁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무생원의 거대한 문이 활짝 열렸고 강유식은 그대로 리 메이를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를 매개체로 만들어내고 있는 건가.’ 주변에서 마력의 흐름이 크게 안 느껴지는 걸 보아 마법진보다는 특수한 아이템에 의한 발생으로 보였다. “백련환몽은 총 네 개의 단계로 이뤄져 있어요.” “예?” “첫 번째 단계는 ‘관觀’. 자기 자신을 통해서 세계 전체를 관측하는 단계를 말하죠.” 술법의 구결을 전수 중이라는 것을 깨달은 강유식은 조용히 리 메이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관觀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구심점이에요. 하나로 통일되지 않은 관측은 인지를 왜곡시켜 버리거든요.” 구심점을 잡아야 한다. 그 설명에 강유식은 잠시 고민하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주관을 세우라는 건가?’ 어째 술법보다는 인생 조언 같은 느낌이 강했지만, 강유식은 굳이 되묻지 않고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구심점은 어떻게 만드는 겁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리 메이가 계속해서 등을 돌린 채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그건 이 무생원의 안개가 도와줄 거예요.” “이 안개가요?” “무생원의 안개는 인간을 외부와 완전히 차단해요. 즉 자기 자신을 어떠한 간섭도 없이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죠.” 외부와 차단한다. 듣기만 해도 예사롭지 않은 설명에 강유식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거 오감하고 차단되는 그런 종류 아닌가?’ 직접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이런 비슷한 저주에 걸려서 완전히 맛이 간 녀석은 몇 번 본적이 있다. “조금 힘들 수 있겠지만…백련환몽을 다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에요. 그러니 여기서 선택하세요. 계속하겠어요. 아니면 그만두겠어요?” 진중한 리 메이의 물음에 강유식은 잠시 고민하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조금 힘들어 보이기는 하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제대로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강유식 생도는 정말 대단하군요…” “예? 뭐…그 정도까지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너무 거창한 칭찬에 강유식이 멋쩍게 대답하자 리 메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초행인데 여기까지 막힘없이 걸어온 것만 해도 엄청난 거예요. 그런데 이다음까지 이어서 하겠다니…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재능이네요.” “…?” 뭔가 묘하게 안 맞는 이야기에 강유식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리 메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더 할 수 없겠다 싶으면 포기라고 외치세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 한계일 때는 바로 외쳐야 해요.” “아…예…” “그럼 무생원의 입구에서 다시 만나죠.” 그 말을 남긴 리 메이가 다시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강유식은 그 뒤를 곧장 따라갔다. ‘보통 이렇게 따라가다가 어느새 길을 잃어버리게 되지.’ 곧 다가올 엄청난 상황에 강유식은 잔뜩 긴장하며 걸음을 옮겼고, 주변의 안개도 점점 자욱하게 변했다. 투웅 안개의 밖으로 걸어 나왔다. “…?” 희미하게 안개가 깔린 아름다운 화원. ‘혹시 여기가 안개가 보여주는 환상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주변의 풍경이나 눈앞에 있는 리 메이의 뒷모습이나 너무 현실감이 넘친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게 아닌데…내가 너무 다급했던 건가…”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확신한 강유식은 잠시 상황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저…백련문주님?” “?!” 강유식의 부름에 리 메이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고, 안개 밖에 나와 있는 모습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아니…어떻게…도대체…”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잘 안 나오는지 버벅거리는 리 메이. 제대로 당황한 그 모습에 강유식은 뭐라고 할지 고민하다가 멋쩍게 대답했다. “그냥…되던데요?” “…” 그 대답에 리 메이는 할 말을 잊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 완벽한 제자(3) > 끝 완벽한 제자(4) 안개로 둘러싸인 무無의 공간. “아…아아…” 관觀을 이뤄야 한다 투웅─! 소녀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커흑!” 쿠웅! 무생원의 문밖으로 튕겨 나온 어린 소녀, 리 메이는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1분이다.” 무생원에서 걸어 나온 비구니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1분 사이에 정신이 무너질 뻔했구나.” “…” 비구니, 2대 백련문주의 이야기에 리 메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이른 일이었거늘…내 마음이 급하여 너를 제대로 말리지 못했구나.” “…” 스승의 씁쓸한 중얼거림에 리 메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이야.’ 하지만 이번 일로 리 메이는 확실히 깨달았다. “처음부터 다시 수양을 쌓겠습니다.” 여전히 몸을 떨면서도 침착하게 이야기하는 리 메이의 모습에 백련문주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정말 처음부터 하겠느냐?” “예. 제가 소홀히 했던 것들, 놓쳤던 것들을 다시 쌓아 올리고 싶습니다.” 확신이 담긴 대답에 백련문주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제대로 쌓아 올렸구나.” “죄송합니다.” “과거의 나도 너와 똑같은 전철을 밟았었다. 이는 범인凡人이라면 으레 겪을 수밖에 없는 단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느니라.” 백련문주의 이야기에 리 메이는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범인이 이렇다면…천재天才는 어떻습니까?” 대외적으로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자신 정도라면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천재라 할 수 있었다. “무생원의 안개를 단숨에 넘어서는 이들은 천재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면…?” “기인奇人.” 고개를 돌린 백련문주가 무생원을 바라보았다. “나의 스승님이 그러했듯이 그들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그저 기인밖에 없다.” “…” 도대체 백련환몽을 습득하는 것이 무슨 일이기에 기이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일까. * 투웅 입구로 나갔던 강유식이 다시 무생원까지 들어왔고, 그 모습을 본 리 메이는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내 대에서 기인을 보게 되다니…’ 백련환몽에서 뜻하는 기인이란 별 다른 것이 아니다. ‘강유식 생도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구심점을 단순히 주관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어…혹시 뭔가 문제라도?” 뭐가 잘못됐나 싶은 강유식의 물음에 리 메이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강유식 생도가 너무 뛰어나서 놀란 것뿐이에요.” “그럼 문제는 없는 겁니까?” “네. 첫 번째 단계는 이미 완성했으니 곧장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되겠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리 메이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무생원으로 걸음을 옮겼고 강유식도 그 뒤를 쫓았다. ‘뭔가 정말 꿈같은 장소구만.’ 연못 위에 피어나있는 백련과 희미하게 깔린 안개. “여기는…현실이 맞습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한 건가요?” 리 메이의 되물음에 강유식은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그냥.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신비로워서요.” “신비롭기에 환상이다, 라고 생각하는군요.” 정자로 이어지는 작은 다리를 건넌 리 메이는 그대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던전은 현실이 아닌가요?” “…” 리 메이의 물음에 강유식은 바로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던전의 내부는 매우 신비로운 장소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안개 속처럼 빈 공간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강유식은 그리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허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는다니. “현실이죠.”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나요?” 이런 이야기에 이유라고 할 게 있는가 의문이지만, 강유식은 그냥 떠오르는 대로 대답했다. “제가 그렇게 보고 있으니까요.” 내가 그리 생각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강유식의 대답에 리 메이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대답이에요.” “그렇습니까?” “물론이죠. 저는 그렇게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거든요.” 미소를 지은 리 메이는 정자의 가운데에 선 다음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두 번째 단계는 ‘인認’.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틀을 깨닫는 단계에요.” “세계의 틀이요?” “네. 강유식 생도가 관측한 세계의 한계. 그 틀을 찾아내는 거죠.” 리 메이의 설명에 강유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틀이라고 할 만한 게 있나?’ 세계의 한계니 뭐니 그런 걸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뭔가 확하고 와 닿는 게 없다. 아리송한 표정을 지은 강유식의 모습에 리 메이가 슬쩍 웃었다. “인은 조금 어려울 거예요. 여러 시행착오가 필요하거든요.” “흐음. 이번 건 어떻게 수련합니까?” “백련환몽의 기본이 되는 술식을 알려드릴 거예요. 거기서 앞서 말씀드린 관觀과 인認을 의식하면서 펼쳐 이렇게 봉오리를 만들면 된답니다.” 우우웅 리 메이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새하얀 봉오리. “해보겠습니다.” “좋아요. 우선 구결은…” 리 메이는 백련환몽의 바탕이 되는 술식을 알려주었고, 강유식은 그 내용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우우웅 손안으로 뭉쳐드는 새하얀 마력. “큭…” 그 아슬아슬한 감각에 강유식은 눈매를 찌푸려졌고, 곁에서 보고 있던 리 메이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부터 봉오리의 형상을 만들어 내다니…’ 안개덩어리도 겨우 만들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 리 메이는 기인이 왜 기인이라 불리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으음. 쉽게는 안 되네요.” “인을 깨달으면서 동시에 관을 어우러지게 만들어야하니까요. 저도 능숙하게 펼치는 데는 반년이 걸렸으니 너무 급하게 생각할 건 없어요.” 미소를 지은 리 메이는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는 무생원을 둘러보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알겠습니다.” 수련을 마무리한 두 사람이 다시 안개를 지나 무생원의 밖으로 나온 순간. “드디어 나오셨군요. 문주.” 입구 앞에서 등불을 들고 서 있는 수십 명의 이들. ‘표정이 왜 이렇게 다 띠꺼워?’ 단순히 낯설다고 해서 나올 수 없는 적의가 가득한 표정. “무슨 일로 찾아온 거죠?” “외부인에게 백련환몽을 전수한다고 들었는데…그 말이 사실이었군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문주!” 대놓고 힐난하는 그들의 모습에 리 메이가 단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전수자를 찾는 것은 제가 지닌 고유의 권한입니다. 그에 대해서 단주들이 왈가불가할 권한은 없을 텐데요.” “권한이 없다 해도 말씀을 올릴 수는 있지요. 백련환몽이 무엇을 뜻하는지 문주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맨 앞에 선 노파의 이야기에 리 메이가 눈매를 찌푸렸고, 그 모습에 강유식이 대강 상황을 파악했다. ‘간부진들이었구만.’ 백련 길드를 이끄는 여덟 명의 단주들. 그중 다섯 명과 수하들이 이곳으로 우르르 몰려와 항의를 하는 것이다. ‘근데 백련환몽이 뭐길래 이렇게 항의하는 거야?’ 그냥 전수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맥이 끊어질까 봐 자신에게 가르쳐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란 말인가? “백련환몽은 오직 문주만이 다룰 수 있는 술법. 그걸 외부인에게 가르쳤다는 것은…그를 차기 문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차기문주?” 이화단주의 이야기에 강유식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문주. 당신은 저 외부인을 차기문주로 받아들일 생각인 겁니까?” “그에게 자질이 있어 가르쳐보는 것뿐. 아직 습득하지 않았으며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만두시지요.” 단호하게 이야기한 이화단주가 리 메이를 바라보았다. “백련환몽을 습득하기 위해 백련문에서 수행하는 단원들이 몇 명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장 이 본산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 흩어진 지부를 더하면 수십만 명이 넘습니다.” “…” “그를 받아들이고 차기문주로 두시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신중하게 생각해주십시오.” 말을 끝마친 이화단주가 그대로 몸을 돌렸고. 함께 온 단주들도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곤란하다?’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 그 모습에 강유식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라앉히며 물었다. “도와드릴까요?” < 완벽한 제자(4) > 끝 완벽한 제자(5) “…예?” 예상치 못한 물음에 리
메이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도와준다니? “저 때문에 곤란해 보이셔서요. 혹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아뇨. 이건 백련문 내부의 일이니까요. 강유식 생도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단주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도 관계자 아닙니까?” 백련환몽은 차기 백련문주만이 전수받을 수 있는 술법. 그게 사실이라면 강유식도 외부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차기문주는 백련환몽을 완전히 습득된 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에요. 관觀과 인認이라면 단주 중에도 습득한 자가 있으니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예. 한때 후보였던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리 메이가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강유식 생도에게 피해가 갈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 리 메이의 이야기에 강유식은 그녀의 생각이 무엇인지 대강 알아차렸다. ‘공식적으로는 관과 인을 습득한 수준에서 끝냈다고 할 셈이구만.’ 본래라면 관을 습득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고, 인의 경우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백련환몽의 맥은 유지하려면서 정작 그와 함께하는 백련 길드의 명맥은 이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처리한다고 해도 사정설명 정도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그건…세 번째 단계인 ‘파破’를 습득하신다면 설명해드릴게요.” “세 번째 단계요?” “네. 그 이전에는 논하는 게 무의미하니까요.” 적어도 세 번째 단계까지는 가야 자신에게 부탁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그 때 하죠.” “…미안해요.” “아뇨. 백련문주님이 사과할 일은 아니죠. 다만…” 주변을 슬쩍 둘러보던 강유식이 미소를 지었다. “호텔이 아니라 앞으로 여기서 머물고 싶은데요. 괜찮죠?” * “…문주께서 그 자에게 삼관의 숙소를 내주셨다는군. 그리고 그 곁을 일화단주가 지키고 있다고 한다.” 이화단주 첸 티엔의 이야기에 방에 모여 있던 다른 단주들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외부인에게 삼관의
방을 내줄 뿐만 아니라 일화단주를 호위로 붙이다니? “문주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차기문주도 아닌 자에게 백련환몽을 전수하다니. 이대로라면 백련문 전체가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라도 이 소식이 그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단주들의 모습에 첸 티엔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백련환몽은 마력에 대한 재능과 별개로 습득이 어려운 천외天外의 술법. 짧은 시일에 문제가 일어날 만큼 깊은 성취는 얻지 못할 것이다. 너희들도 알지 않느냐.” “그건 그렇지만…” “으음…” 이화단주의 이야기에 단주들은 납득하면서도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강유식이라면…’ ‘녀석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세간에 퍼져있는 강유식의 압도적인 재능. “쯔쯧. 그렇게 걱정이 많아 어찌 큰일을 도모할꼬…” 걱정스러운 단주들의 모습에 첸 티엔은 노골적으로 혀를 차며 흘겨보았다. “그 강유식이라는 아이가 매우 뛰어난 재능을 지닌 것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누누이 말했듯이 그와 백련환몽의 성취는 별개. 기간을 생각하면 두 번째 단계도 힘들 것이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혹시 모르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첸 티엔의 이야기에 단주들도 어느
정도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문주가 정말 그 아이에게 백련환몽을 전수할 생각이라면 이번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접근할 터. 배제할 거라면 그때 가서 계획을 짜도 무방하다.” 앞에 놓인 차를 홀짝인 첸 티엔이 단주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배제하기 전에 손을 내밀어봐야지.” “…그를 영입하실 생각입니까?” “우리들의 목적은 결국 무생원 내부에 안치된 물건. 그걸 가져올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다. 외부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지.” 오히려 재물 따위를 주고 그 물건을 빼 올 수 있다면 그만한 일이 또 없다. “그리고 그 강유식이라는 아이도 결코 순진한 아이는 아니다. 충분히 끌어들일 수 있어.” 자신들의 적의를 읽고 보인 그 사나운 눈동자. 실리를 위해서는 그 누구에게라도 이빨을 박아 넣을 상이다. “잘 이용한다면 훌륭한 번견이 될 게야. 그렇다면 차기 백련문주의 자리를 주어도 상관없지.” 허울뿐인 자리지만, 그것이 실리가 된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것이다. 단주들도 구미가 당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 관을 수련하고 있을 테니 시간을 들이면 정신이 불안정해질 터.” 그때만큼 목줄을 채우기 딱 좋은 순간이 없다. 곧 펼쳐질 광경에 첸 티엔이 미소를 지었다. “그때 자리를 마련하자꾸나.” * 백련문에 머무르게 된 지 사흘. “관과 인은 서로 나누어져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단계에요. 보고 깨닫는다. 사물을 보듯이 백련환몽으로 비칠 세계 역시 그렇게 보는 거죠.” 리 메이의 설명에 강유식은 자신의 손에 봉오리처럼 맺혀있는 새하얀 안개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뭔 소리인지…’ 보고 깨닫는 거야 눈앞에 있는 거지만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세계를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해하기 쉽지는 않을 거예요. 제가 말한 건 어디까지나 바탕이 되는 개념이지 세부적인 건 아니거든요.” “직접 깨달아야 하는 종류입니까?” “네. 구심점은 결국 사람마다 다른 법이니까요.” 자신만의 기준으로 경지를 이룩해야 한다. 정답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계열이었기에 강유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만의 기준이란 말이지.’ 자신의 기준에서 세계의 틀은 어떤 것일까. 그 질문에 강유식은 오래 지나지 않아 답을 떠올렸다. ‘세계의 끝이지.’ 그러면 여기서 세계의 끝은 무엇인가. 그 질문에도 강유식은 금방 답을 떠올렸다. ‘죽음.’ 자신의 관측으로 세계가 정해지는 것이라면 그 끝은 당연히 관측자인 자신의 죽음이다. 우우웅 살짝 흐릿하게 뭉쳐있던 안개가 점차 선명하게 맺혔고 이내 하나의 봉오리로 가다듬어지기 시작했다. ‘벌써 인을…’ 거의 완성단계이기는 했지만 본래 저기서 마지막 매듭을 맺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거늘. 투웅 강유식의 손 위에 맺힌 새하얀 봉오리 위로 검은 먹물이 떨어졌다. “…?” 새하얀 백지 위로 검은 먹물을 떨어트리는 것처럼 강유식이 만들어낸 봉오리가 검은색으로 물들었고, 들어보지도 못한 광경에 리 메이의 눈이 흔들렸다. ‘저건…뭐지?’ 검은색으로 물든 백련환몽이라니? ‘그러고 보니 뉴욕에서도…’ 마법의 핵을 증명하기 위한 시연 때. 강유식이 백련환몽의 제어권을 강탈당하면서 검은색 잎이 돋아난 적이 있었다. 우우웅 완전히 검은색으로 물든 봉오리. ‘죽음을 부순다?’ 그런 건 가능할 리가 없다. 가능했다면 진작 불사신으로 다 죽였겠지. 그렇다면 여기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다. ‘죽지 않도록 발버둥 치는 거네.’ 죽지 않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깨부순다. 조금 없어 보이지만, 그것만큼 간단명료한 대답이 없다. 사라락 굳게 닫혀있던 봉오리가 강유식의 손 위에 활짝 피어났고, 주변에 희미하게 깔려있던 안개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생원의 안개가 흩어지다니…’ 강유식이 세 번째 단계까지 깨우쳤다는 것은 자신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본래 그때 일어날 변화는 피어난 백련과 무생원의 안개가 공명하여 더욱 자욱하게 변하는 것이다. ‘이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네 번째 단계는 현現. 세계의 틀을 부수고 무한한 가능성을 구현해내는 힘. 그것이 바로 궁국의 환술이라 불리는 백련환몽이다. ‘마지막은…뭘까.’ 어떻게 해야 자신을 죽이려는 것들을 깨부술 수 있을까. ‘그렇다면…그걸 구현해낸다면?’ 눈앞에 나타난 변수를 바로잡을 힘. ‘무생원의 안개가 모두 흩어지다니!’ 이대로라면 물건이 보관되어있는 사당까지 안개가 모두 흩어져버릴지도 모른다. 스스스 자욱한 안개를 불러들이는 백련과 거기에 맞서 주변을 변화시키려는 흑련. 그 충돌을 본 리 메이는 강유식이 만들어낸 흑련의 힘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가능성을 줄인 대신 간섭력을 높인 건가?’ 백련환몽이 무한한 가능성을 구현하는 것이라면 강유식의 흑련은 단 한 가지의 가능성을 구현해낸다. ‘대단하지만…여기서는 안 돼!’ 이 무생원의 안개만큼은 결코 무너져서는 안 된다. 후웅 모든 것이 사라진 무無의 세계. ‘이게 진짜 백련환몽인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궁극의 환술. [스킬 ‘흑련개화(S)’을 습득하셨습니다.] 새로운 스킬을 습득했음을 알리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스스스 백련환몽이 해제되며 무생원이 본래의 풍경으로 돌아왔고, 숨을 고른 리 메이는 의식을 잃은 강유식을 멍하니 보았다. “…” 수많은 천재를 범인으로 만든 천외의 술법 백련환몽. 그 앞에서 강유식이 낸 대답은 자신만의 술법으로 다시금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확실히…기인奇人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구나.” < 완벽한 제자(5) > 끝 “빌어먹을…빌어먹을 개자식아!!!” 듣는 사람이 미안할 정도로 원통에 찬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고 그 절규에 반응하듯 사방을 포위한 헌터들이 더욱더 바쁘게 움직였다. ‘팔이 전부 박살 났는데 저것도 못 이기면 말이 안 되지.’ 숯덩이처럼 변해버린 네 개의 팔과 상반신 전체에 흉측하게 남은 화상. ‘그래도 버티는 걸 보면 역시 재앙급인가.’ 마력만으로 수십 명의 헌터들과 악착같이 싸우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저씨. 싸우고 나면 좀 가려. 흉측하게.” 이쪽의 핀잔에 옆에 서 있던 거구의 흑인, 쿠거 할라피노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모처럼 달아올랐는데 가리면 아쉬워하지 않겠는가.” “누가?” “나의 근육을 보고 싶어 하는 관중들이.” “개소리는…” 다 죽어가는 가 싶더니 헛소리를 하는 걸 보면 아직 살만한 모양이다. 근육을 꿀렁꿀렁 움직이는 쿠거를 무시한 채 품에서 담배를 꺼내려다 멈칫했다. ‘그냥 담배로는 안 되겠네…’ 품을 다시 뒤적거려 하이드룬이 들어있는 담뱃갑을 꺼내 들었고,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여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후우웅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던 정신이 또렷해졌고 발작의 기미가 보이던 폐 쪽의 통증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안 그래도 안 좋은 몸에 그런 담배를 피우다니. 그러니 자네의 마법이 진보하지 않는 걸세.” 연기를 피해 옆으로 물러난 채 눈매를 찌푸리고 있는 쿠거. 쥐뿔도 모르면서 한심하게 보는 눈빛에 피식 웃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이리와 봐. 나랑 똑같이 폐에다가 한 방 쑤셔줄 테니까.” “지금보다 더 나빠져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치료해줄 수 있는 거 아니면 신경 꺼. 하여간 이새끼고 저새끼고 지들이 되면 남들도 다 되는 줄 알아.” 혀를 차며 앞으로 시선을 돌리자 힘이 빠져 제압되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꾸드득! 문제가 없었다면. “크아아악!!” 바스라졌던 팔들이 갑작스럽게 돋아나더니 전신을 옭아맨 제압 도구를 박살 내기 시작한다. “이런…!” “기다려.” 다급하게 달려가려는 쿠거를 멈춰 세우고 바라보았다. “이거 차고 가.” 미리 준비해둔 벨트를 던져주었고 그것을 받아들인 쿠거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조금 전 녀석의 무기와 비슷한 것 아닌가?” “비슷한 게 아니라 똑같은 거야.” 무기의 자루 안에 숨겨뒀다가 놈의 팔을 모조리 날려버렸던 폭탄. “적당히 싸우다가 빈틈 보이면 바로 채워버려. 그때 맞춰서 바로 터트릴 테니까.” “나도 휩쓸릴 텐데.” “댁이면 버틸 수 있잖아.” 머슬 메이지하면 S급 헌터 중에서도 튼튼하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쿠거가 매우 불쾌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몸이 아픈 걸 다행으로 여기게.” “나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 피식 웃으며 벨트를 내던지자 쿠거가 그대로 받아들며 상반신에 대각선으로 채웠다. “내가 실패하면 자네가 어떻게든 마무리하게.” “노력은 해보지.” 그 말을 끝으로 쿠거가 달려갔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폭장치를 꺼내 들었다. ‘뭐. 그래도 저 인간이면 견딜 수 있을 테니까…’ 치열하게 싸우는 쿠거의 등을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날려버릴 거면 확실하게 해야지.’ * “흡…!” 자연스레 눈이 떠진 강유식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어깨를 매만졌다. ‘어쨌든 내 덕분에 이겼으면서…’ 회귀 전의 일이지만 기껏 다친 곳 없이 끝났던 자신을 전치 12주로 만든 것은 용서가 안 된다. [스킬 ‘흑련개화(S)’을 습득하셨습니다.] “…” 백련환몽을 전수받으려다 뜬금없이 다른 스킬을 습득해버렸다. 그 사실을 떠올린 강유식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참 어떻게 봐야 할지…’ 자신이 잘나서 습득했다고 하기에는 바탕이 된 백련환몽의 단계나 술식이 너무 적절하다. 우우웅 손 위로 맺혀 만다라와 함께 활짝 피어난 흑련黑蓮. ‘공간이 뒤틀린다? 아니…그거랑은 좀 다른데.’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전보다 주변이 자신에게 편한 상태로 뒤바뀌었다. 숨을 쉬기도 편안하고 몸 전체도 적당히 긴장되어 최상의 상태로 조정된다. ‘나한테 맞춰 주변을 변화시키는 거구만.’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뒤집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환상. 그것이 바로 흑련개화의 힘. ‘근데 조금 까다롭기는 하네.’ 숙소 내부만 조정하고 있을 뿐인데도 상당한 양의 마력이 소모된다. 범위가 넓어질수록 소모도가 커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펑펑 쓰기는 힘들어 보였다. ‘지금 상태로는 말이야.’ 스탯을 불리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했기에 그쪽으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페르스발.’ 평소라면 부름과 동시에 칼같이 돌아왔을 대답. ‘페르스발?’ -예. 로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답하는 페르스발. 그 모습에 강유식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 어디 아프냐?’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까 불렀는데 대답도 안 했잖아.’ -…그랬습니까? 정말로 몰랐다는 듯이 대답하는 페르스발의 모습에 강유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템도 아플 수가 있나?’ 어디가 부서져서 골골거리는 거야 가능할지 몰라도 멀쩡한 상태에서 이렇게 되는 건 들어본 적이 없다. -음…아무래도 그 무생원이라는 곳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무생원이?’ -예. 그곳에 들어서면 의식이 둔해지는 현상이 전부터 조금씩 있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로드께서 안개를 흩트렸을 때 강한 기시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흐음.’ 페르스발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안에 뭔가 엄청난 게 있는 건가?’ 무생원 내부에 뭔가 어마어마한 게 숨겨져 있다는 것은 전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쩌면 백련문주의 용건과도 관련이 있을지도…’ 여러 가능성에 강유식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유식 생도. 일어나 있나요?” 나긋한 리 메이의 목소리. 그에
강유식은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이거…’ 강유식이 유심히 보고 있을 때. 리 메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할 이야기가 있는데…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예. 들어오시죠.” 순순히 옆으로 비켜준 강유식은 리 메이를 안으로 들여보낸 다음 문을 닫았다. “당신. 누굽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맞은편에 있던 리 메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어차피 이목을 숨기고 들어오는 용도 아닙니까. 들어왔으니까 괜히 시간 끌지 말고 밝히시죠.”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짓는 리 메이의 모습에 강유식은 대표로 찾아올 인물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일화단주를 불러올까요? 이화단주.” “…” 강유식의 부름에 리 메이, 변장한 이화단주 첸 티엔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설마 단번에 알아볼 줄이야…세간의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구나.” 후우웅 몸 전체가 안개에 휩싸이더니 도복의 안으로 스며들었고 첸 티엔의 본 모습이 드러났다. ‘백련환몽이잖아?’ 도복과 공명한 것을 보아 완전히 습득한 것은 아닌 거로 보였는데 효과 자체는 거의 완벽했다. “이제 됐느냐?” “네. 훨씬 좋네요.” 여유롭게 대답하는 강유식의 모습에 첸 티엔은 속으로 감탄했다. ‘사냥개를 길들인다고 생각했거늘…이제 보니 늑대였구나.’ 목줄은커녕 제대로 된 거래를 제안하지 않는다면 역으로 이쪽이 당할지도 모른다. “너를 찾아온 이유는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어서다.” “어떤 제안입니까?” “강유식. 너를 백련문주로 만들어주겠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강유식이 놀란 표정으로 보았고, 그 반응에 첸 티엔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너를 백련문주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게 내키지 않는다면 그 직책에 버금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이나 물건을 줄 수도 있지.” 세계 10대 길드에 들어가는 백련 길드의 길드장, 또는 그 직책에 버금가는 보상. ‘생각보다 강하게 나오는데?’ 적당히 떡밥만 던질 줄 알았더니 처음부터 제안할 카드를 모두 오픈해버린다. “그만한 보상이라면 요구 조건도 엄청날 것 같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너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게다.” 아리송한 대답에 강유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아직 초입인 너는 모르겠지만…무생원은 안개를 넘어서면 화원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화원 너머에는 작은 사당이 존재하지.” 진작에 화원을 들어갔지만 강유식은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사당 내부에는 초대 백련문주가 봉인하여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물건이 있다. 내가 원하는 물건은 그것이다.” 무생원의 사당 내부에 봉인된 물건. 그 이야기를 들은 강유식은 문득 회귀 전의 정보가 떠올랐다. ‘중국 정부가 찾던 게 저거구만.’ 그런데 도대체 뭐 하는 물건이길래 둘 다 이렇게 가지려고 하는 걸까. 생각에 잠겨있는 강유식의 모습에 첸 티엔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어차피 이 일이 실행될 때는 네가 백련환몽을 완전히 습득한 뒤. 문주께서 데려온 것을 보아 적성은 있는 듯하지만 결국 몇 년 뒤의 이야기겠지.” “뭐…그렇겠지요.” 이미 백련환몽과 비슷한 걸 습득해버렸지만 강유식은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그러니 사흘의 시간을 주겠다. 수락한다면 그날로 서약서를 작성하고, 만약 거절한다면…” 잠시 말을 끊은 첸 티엔이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시는 백련문을 찾아오지 않는 것이 좋을 게다.” 그걸로 용건은 끝이라는 듯이 첸 티엔이 일어섰고, 그 모습에 강유식이 살짝 떠보듯이 물었다. “제가 오늘의 이야기를 백련문주님께 말씀드리면 위험한 것 아닙니까?” “문주께서 모르고 계신다고 생각하느냐?” “…반기를 든 걸 알고도 놔두고 있단 말입니까?” 이해가 안 간다는 강유식의 물음에 첸 티엔이 고개를 돌려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단 한 번도 백련문에 반기를 든 적이 없다. 오히려 백련문을 지금보다도 더욱 위대하게 만들 생각일 뿐…” “…” “문주께 이야기해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앞선 제안은 거절이라고 생각할 테니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 게다. 그럼 사흘 뒤에 다시 보자꾸나.” 그 말을 끝으로 첸 티엔이 밖으로 나갔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유식이 턱을 쓰다듬었다. ‘배신이 아니라 방향성의 차이인가?’ 아직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첸 티엔의 목적은 초대 백련문주가 봉인한 물건을 이용하여 백련길드를 키우는 것. ‘재밌게 돌아가네…’ 본래라면 지금 강유식의 상황은 그리 좋은 게 아니었다. ‘내가 흑련개화만 습득하지 않았다면 말이지.’ 백련환몽은 습득하지 못했지만 그와 비슷한 흑련개화를 습득했으니 리 메이도 사정을 설명해줄 터. ‘그럼 이번에는 저쪽 이야기도 들으러 가볼까.’ 한쪽의 제안을 들었으니 이제 반대쪽의 제안을 들어볼 시간이다. < 할 거면 확실하게(1) > 끝 다음날. “어제 사용한 기술…다시 한번 보여줄 수 있나요?” “예.” 고개를 끄덕인 강유식은 간단하게 흑련개화를 펼쳐냈고, 주변에 흩어지기 시작한 무생원의 안개에 리 메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연이 아니었군요…” 한순간의 깨달음이 아닌, 진정으로 기술을 체득한 것이다. “강유식 생도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리 메이의 이야기에 강유식은 그녀를 따라 화원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욱해지는 안개. ‘백련환몽 없이 들어오면 그냥 죽겠네.’ 초입의 안개는 그래도 돌아가려고 한다면 놓아주기라도 하지만 이쪽은 그런 출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도대체 뭐가 있는 걸까.’ 강유식이 궁금한 표정으로 주변을 보고 있을 때. 자욱한 안개 너머로 희미한 그림자가 조금씩 나타났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리 메이가 손을 앞으로 뻗자 주변으로 백련들이 피어나 안개가 그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우웅 안개가 빠져나가자 사당의 아래쪽에서 거대한 만다라가 빛을 발하며 나타났고, 이내 을씨년스럽던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다. ‘기왓장 하나하나가 술식의 일부잖아?’ 게다가 각 술식 간의 연결고리가 지금 시대에 알려진 마법 체계를 완전히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했다. “저 사당은 누가 만든 겁니까?” “초대 백련문주께서 세우신 사당이에요.” 초대라면 1세대 헌터인데다가 죽은 지 몇십 년이 지난 양반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기점으로도 수십 년 뒤에나 만들어졌을 기술과 비등한 결과를 만들었다니. “보여드리고 싶은 건 안에 있어요. 들어가죠.” 앞장서는
리 메이를 따라 사당으로 들어선 강유식은 내부를 살펴보았다. “…” 만다라의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미라를 발견했다. “선대 백련문주님입니까?” “…네. 제 스승님이에요.” 리 메이에게 백련환몽을 가르친 2대 백련문주. ‘좀 살벌한데…’ 혹시 리
메이가 자신에게 백련환몽을 가르친 것이 눈앞의 미라처럼 무생원의 안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던 걸까? ‘…아니구만.’ 슬픔과 각오가 깃든 눈동자. 회귀 전에 몇 번 본 적 있는 그 감정에 강유식은 리 메이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백련문에서 무생원은 백련환몽을 습득하기 위한 장소로 알려졌지만…실제로는 조금 달라요. 백련환몽을 통해 무언가를 봉인하고 있는 장소죠.”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강유식은 조용히 경청했고, 리 메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우우웅 손길에 따라 사당에 있는 등의 일부가 거세게 타올랐고 거기에 반응하듯이 가부좌를 튼 미라가 움직였다. 스스슥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미라는 이내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앞으로 드러냈다. ‘진공향로眞空鄕路…?’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 “저 책은 초대 백련문주께서 S급 던전에서 얻은 차원의 조각에서 나온 물건으로 백련환몽을 완성하는 기틀이 된 원전 비급이에요.” “백련환몽의 원전이라고요?” 리 메이의 설명에 강유식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원전이라면 진공향로라는 기술이 따로 있다는 뜻인데…’ 도대체 어떤 기술이기에 백련환몽이라는 엄청난 술법이 파생될 수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 이외에 진공향로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어요. 초대 백련문주께서 봉인과 함께 함구하셨고, 제 스승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죠.” “그렇군요…” “다만…딱 한 가지. 초대 백련문주께서 진공향로를 처음 발견하셨을 때 하신 말이 몇몇 이들에게 알려져 있어요.” 미라의 품에 안긴 진공향로를 본 리 메이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진공眞空에 이르러 불멸不滅을 깨닫는다.” “불멸…?” “해석하기에 뜻이 달라지죠.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접한 이들은 그걸 불로불사의 단서라고 생각해요.” 씁쓸한 리 메이의 이야기에 강유식은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깨달았다. “이 비급을 탐내고 있는 자들이 있는 거군요.” “네.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아마 미래에도 있겠죠. 불로불사란 그런 거니까요.” 게이트가 나타나기 전에 불로불사가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면, 지금은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는 소재이기도
했다. ‘왜 백련 길드가 단번에 무너졌는지 알겠네…’ 베이징 사태가 정확히 무슨 사건이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 이면에는 필시 진공향로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 참…’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설에 강유식이 굳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리 메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은 미래의 일이지만, 언젠가 스승님의 힘이 다하면 무생원의 봉인을 유지하기 위해 저를 희생해야만 해요.” “…백련문주님이요?” “네. 이 봉인은 백련환몽을 습득한 자의 생명을 통해 유지하는 거니까요.” 미라가 된 스승을 바라본 리 메이는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백련문주가 된다는 것은 그런 미래를 각오한다는 것. 저도 오래전에 그 각오를 마쳤지만…그게 정말로 옳을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어요.” 봉인을 유지하기만 하는 것에 의문을 품는 리 메이. 그 모습에 강유식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저는…” 잠시 말을 멈춘 리 메이는 이내 확고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저는 진공향로를 파괴하여 이 세상에서 없앨 생각입니다.” 두 세대를 거쳐 지켜온 비급을 파괴한다. ‘만약 앞의 말이 사실이라면 언젠가는 다른 녀석에게 넘어갔을 테니까.’ 회귀 전에 리 메이가 모습을 감췄던 것은 아마 비급을 빼앗기기 전에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서 무생원의
봉인을 연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방법은 있습니까?” “가설이지만…충분히 가능할 거예요. 강유식 생도가 펼친 흑련이라면 더더욱.” 아무래도 회귀 전과 달리 자신으로 인해 진공향로를 파괴할 수 있는 조건을 맞춘 모양이다. ‘한쪽은 손에 넣길 원하고, 한쪽은 파괴하길 원하는 건가.’ 극과 극인지라 일거양득을 취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 상황에 강유식은 어느 쪽이 더 자신에게 득이 될지 계산했다. ‘당장 이득으로는 첸 티엔인데…’ 첸 티엔에게 배후가 있다는 가정하에 생각해보면 아마 그 정체는 중국이라는 국가 자체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란 말이야.’ 언제 토사구팽을 당할지도 모르고, 만약에라도 불로불사를 진짜 개발이라도 하는 경우 감당이 안 된다. ‘결국 리 메이를 돕는 게 가장 좋네.’ S급 헌터인 그녀와 백련 길드의 우방이 될 수 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요?” “진공향로를 파괴하면 백련문주님은 어떻게 되는 거죠?” 강유식의 질문에 리 메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뻔하디뻔한 반응에 강유식은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았다. “죽는 거군요. 선대 백련문주들처럼.” 여러 전장을 오간 강유식이었기에 희생을 각오한 이들의 눈빛이나 분위기는 여러 번 봐왔다. “…무생원의 봉인은 진공향로 자체에 새겨져 있어요. 그래서 파괴하기 위해서는 봉인의 핵을 교체할 때처럼 저의 생명과 연결한 다음 파괴할 수밖에 없죠.” “어느 쪽이든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까?” “제가 사명을 다하려 한다면…그렇게 되겠죠.” 씁쓸하게 대답한 리 메이가 강유식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이건 약속을 한 다음에 말씀드리려했지만…사실 강유식 생도도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어요.” “저도 말입니까?” “네. 하지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절대로 치명적인 수준은 아니고, 일화단주에게 즉각 치료할 수 있게끔 S급 영약을 준비해뒀으니까요.” 모든 준비를 마쳐둔 리 메이의 모습에 강유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걸 숨기려고 하신 겁니까?” “제가 죽는다는 걸 알면…강유식 생도가 망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미안해요…”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은 리 메이의 모습에 강유식이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딱히 상관은 없지만.’ 사실 S급 영약을 받는다면 부상은커녕 오히려 스탯이 좋아질 수도 있다. 그리고 리 메이가 가장 걱정하던 마음의 상처 역시 강유식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걸로 패는 전부 열었나.’ 판에 깔린 패가 모두 공개된 것을 깨달은 강유식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가장 좋은 건…리 메이도 살리고 비급도 파괴하는 거군.’ 그렇게 되면 분위기상 A급 채무 정도는 식은 죽 먹기. 하지만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지금 상태에서 진공향로를 살펴볼 수는 없습니까?” “네?” 예상치 못한 강유식의 물음에 리 메이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진공향로를 파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궁금해서요.” “그런 방법은…” “또 모르지 않습니까. 포기하셨던 과거와 지금은 기술이 달라졌으니까요.” 그리고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이 바로 자신이다. “봉인 때문에 안의 내용은 읽어볼 수 없어요. 하지만 겉으로 살펴보는 건…가능할 것 같네요.”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리 메이는 다시금 손을 뻗어 사당의 봉인을 조절했다. 우우웅 진공향로가 미라의 손에 들려 앞으로 뻗어졌고, 사당 내부에 흐르던 무형의 힘이 사라졌다. “따라오세요.” 벽이 있는 것처럼 지그재그로 사당을 가로지르는 리 메이를 따라 걸음을 옮긴 강유식은 미라의 앞에 섰다. ‘이게 진공향로…’ 앞에 내밀어진 진공향로를 본 강유식은 눈매를 찌푸렸다. ‘뭐지?’ 무슨 이유로 이런 기시감이 느껴지는 걸까. ‘페르스발.’ 이번에도 바로 돌아오지 않는 대답. ‘일어나. 페르스발!’ 우우웅 팬던트가 희미하게 진동했고, 처음으로 무생원 내부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말씀하십시오. 로드. ‘눈앞에 있는 이 책. 분석할 수 있어?’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페르스발의 목소리가 다시 끊어지며 미열이 느껴졌고, 그 모습에 리 메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강유식 생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분석을 완료했습니다. ‘결과는?’ -봉인과의 호환 가능성이 확인되었습니다. 단, 실패할 경우 내부에 잠재된 봉인으로 인해 오히려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무생원의 봉인이 오히려 페르스발에게 더해질 수도 있다. ‘그렇단 말이지…’ 눈앞에 놓인 두 가지의 가능성. “…알겠습니다. 저도 협조하겠습니다.” “정말인가요?” “저게 정말 불로불사와 관련된 물건이라면…없애버리는 게 나을 테니까요.” 이건 어느 정도 진심이었고, 그것을 느꼈는지 리 메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강유식 생도.”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리 메이’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C급으로 판정합니다.] 위험한 일을 부탁한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일까. 생각보다도 많이 오른 채무에 강유식은 두 눈을 빛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준비가 끝난 것을 본 강유식은 리 메이를 바라보았다. “백련문주…아니, 리 메이님.” “네?” 리 메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강유식은 진지하게 물었다. “만약 당신도 죽지 않고, 진공향로를 파괴할 방법이 있다면 믿으실 수 있습니까?” “…” 그 한 마디에 리 메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이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채무자 ‘리 메이’ 강제집행에 들어갑니다. 상태이상 ‘희망’.] [채무자 ‘리 메이’ 강제집행에 들어갑니다. 상태이상 ‘희망’.] [채무자 ‘리 메이’의 채무가 모두 납부되었습니다.] 이미 자신을 희생하기로 한 리 메이에게 두려움 같은 것을 증폭시켜봐야 큰 효과는 없다. “그 말이…정말인가요?” 강유식을 본 리 메이가 주먹을 꽉 쥐며 물었다. “성공한다면 가능합니다. 그리고 실패한다면…” 수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하려던 강유식은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리 메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성공으로 바꿔보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기술이 아니던가. “알겠습니다. 믿을게요.” 리 메이의 대답에 강유식은 다시금 진공향로를 바라보았다. “그럼 가겠습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손을 뻗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흑련개화.” <
할 거면 확실하게(2) > 끝 사라락 강유식의 손 위로 흑련이 한 송이 피어난 순간. 검은 만다라와 함께 일대의 흐름이 바뀌었다. ‘봉인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건 감당이 안 돼.’ 소모되는 마력의 양도 양이지만 봉인식 자체의 수준이 너무 높아 제거하기도 까다롭다. ‘봉인을 해제할 수 있는 술식을 역으로 집어넣는다.’ 이미 완성된 술식에 없던 기능을 추가한다. 진공향로의 봉인식만큼 높은 수준일수록 어려운 일이지만, 흑련개화의 힘이라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투웅 희미한 파장과 함께 복잡하게 얽혀있는 봉인식의 내부로 새로운 술식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사당의 봉인식을 이렇게 간단히 수정하다니…’ 흑련개화가 이런 쪽으로 특화된 스킬이라고는 해도 습득한 지 하루밖에 안 된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결과다. ‘218..,219…220…’ 하나의 술식을 끼워 넣기 위해 200개가 넘는 술식을 살펴봐야 한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비효율적이었지만, 이건 어쩔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 시대에서 어떻게 이런 술식을 만들어낸 거지?’ 봉인식을 이루고 있는 수만 개의 조각. 그리고 그것들이 유기적인 구조를 이뤄 셀 수 없는 변수를 만든다. ‘도대체 뭘까.’ 초대 백련문주는 눈앞의 봉인식을 어떻게 만든 것일까. 그런 강한 의문이 강유식의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드디어 찾아왔구려.] 투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우웅 진공향로를 내밀던 자세에서 어느덧 가부좌로 돌아간 미라. [기인奇人이여. 늦지 않게 찾아와 다행이오.] “…당신은 누굽니까?” 미라가 목소리를 낸 것이라면 필시 2대 백련문주겠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뭔가 분위기가 묘하다. [본질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간단하게 말하자면 초대 백련문주라고 이해해도 좋소.] 미라, 초대 백련문주의 이야기에 두 사람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초대의 의식이 봉인식 내부에 녹아내려 있었던 건가.’ 강력한 봉인식에는 가능한 일이지만 강유식은 여전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 초대 백련문주의 기술은 개인의 역량이 뛰어나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기인이여. 눈앞의 상황에 의문이 많을 것이오. 소승 역시 그대의 의문을 풀어주고 싶지만…그러기에는 할애된 시간이 얼마 되지 않구려.] “그러면…무슨 목적으로 나타난 겁니까?” [진공향로의 올바른 인도. 그것이 소승의 마지막 의지요.] 우우웅 초대의 대답과 동시에 미라의
아래에 거대한 만다라가 피어났고, 연꽃의 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곳곳에서 백련이 피어났다. “가, 강유식 생도?” “제가 신호하면 맞춰서 백업해주세요.” “…알겠어요.” 리 메이와 이야기를 맞춘 강유식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공眞空이라 함은 색상色相을 초월한 공허空虛. 물질의 형상을 넘어서 진리를 비추는 세계.] 초대의 목소리에 맞춰 백련들이 공명하며 만다라를 빛냈고 무질서하게 뒤섞이던 색채들이 하나가 되어 사라졌다. [기인이여. 진공향로를 다룬다는 것은 이 공허의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 그렇다면 그 자격을 지녔음을 증명하시오.] 초대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걸 부수란 건가.’ 백련환몽으로 만들어낸 진공. “아…” 상념에서 깨어난 리 메이가 탄식을 내뱉었고, 강유식이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중요한 순간이었던 건 알지만…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어서요.” 리 메이가 깨달음을 얻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이 공간은 동일한 백련환몽으로 벗어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그렇죠. 미안해요. 한눈팔아서.” “아닙니다. 그보다…리 메이님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리 메이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담담히 대답했다. “제 관점으로 설명하자면…이 공간 자체가 백련환몽의 모든 것이 녹아내려 져 있는 정수에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세계.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세계…’ 그런 터무니없는 세계를 어떻게 부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정말 이곳을 부수는 게 초대
백련문주의 뜻인가? ‘만약 부수는 게 아니라면…초대 백련문주는 무엇을 의도한 것이지?’ 무엇이 자격을 증명하는가. 우우웅 희미한 파동과 함께 주변의 세계가 강유식을 위한 것으로 바뀌었고,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빨려 나갔다. 기이잉! 오른팔에 스며든 아케트라브가 빛을 토해내며 마력의 소모가 안정 범위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래도 오래 유지할 수 없었기에 강유식은 곧장 주변을 살펴보았다. ‘과연…이게 백련환몽의 정수인가.’ 손끝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가지가 뻗어져 나가고 의식의 편린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이
피어오른다. “리 메이님. 흑련개화로 손에 넣은 진공의 제어권을 공유해드리겠습니다.” “제어권을요?” “예. 그걸 이용해서 길을 만들어주십시오.” 강유식의 이야기에 리 메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길이라 함은…” “이 세계의 끝. 진공향眞空鄕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초대 백련문주는 진공향로를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찾아왔노라 이야기했고, 그것을 다루는 것은 진공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말했다. ‘나는 진공향로를 습득했다.’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끝을 향해가는 하나의 길. “흑련개화黑蓮改化.” 솨아아아 파도가 몰아치듯 흑련개화의 파장이 사방으로 뻗어져 나갔고 만개한 백련의 잎이 떨어져 사방으로 흩날렸다. 사라락 흑련들이 피어나며 하나의 길을 만들어냈다. “아…” 그 광경을 본 순간. ‘나는 또 같은 실수를 하고 있었구나.’ S급 헌터라는 세간의 칭송에, 백련문주라는 감투에 또다시 자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드시 밖으로 인도한다!’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리 메이’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A급으로 판정합니다.] 쿠구궁! 리 메이가 깨달은 심득을 운용한 순간. 흑련의 줄기가 서로 얽히며 보다 선명하게 다리가 만들어졌다. ‘이거면 된다.’ 혼자라면 마력을 모두 소모해 탈진했겠지만, 리 메이의 백업이라면 닿을 수 있다. “갑니다.” “네.” 두 사람이 동시에 앞으로 발을 뻗었고, 그 순간 주변의 공간이 모든 색채를 잃으며 헝클어졌다. 솨아아아 찰나이며 영겁으로 이어지는 그 사고 속에서 두 사람의 눈에 한 사람이 보였다. ‘페르스발!’ 강유식의 손 안에 진공향로의 비급이 움켜쥐어졌다. 파아앙─ 진공향로의 비급과 페르스발의 팬던트에서 검은 광휘가 폭발적으로 솟구쳤고 형형색색으로 녹아있던 세계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이렇게 빠르게 깨우칠 줄이야…그대도 역시 평범한 인물은 아니구려.] 진공향로를 빼앗긴 고승, 초대 백련문주가 온화한 표정으로 강유식과 페르스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신기를 통해 아직 감당키 힘든 진공향로의 심득을 담아냈으니 수십 년의 고행이 단축되어 인과가 그대를 향해 흐를 것이오.] 잔잔하게 이야기하는 초대의 모습에 강유식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한 가지라면 답할 수 있으니 물어보시구려.] “당신은 어떻게 내 질문을 모두 예상한 겁니까?” 처음 초대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강유식은 당연히 그의 의식 일부분이 봉인식에 담겨 있으리라 생각했다. […허허. 이 상황에서 본질을 꿰뚫는 질문을 하다니. 그대는 소승을 끝없이 감탄하게 만드는 구려.] “저는 이 대답도 예상했을 당신이 더 무섭습니다만.” [무서워할 필요는 없소. 이는 진공향로를 응용한 아주 사소한 잔재주에 불과하니.] 미소를 지은 초대 백련문주가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대가 인과를 마무리 지을 단서로는 적합하니…주제넘게 소승이 한 마디 남기겠소.] “…” [열반涅槃은 모든 것의 초월. 속세의 것을 얽매이지 말구려…] 초대 백련문주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고 세계를 가득 채운 검은 광휘도 사그라들었다. “….” 그 모습을 본 리 메이는 조용히 합장했고 강유식은 손에 들린 진공향로를 바라보았다. ‘제대로 흡수된 건가?’ 조금 전 빛이 뿜어져 나온 걸 보면 성공한 것 같기는 한데 뭔가 확 와 닿은 게 없어 아리송하다. ‘페르스발.’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아직 남아있는 무생원의 결계 때문인가 싶어 강유식이 다시 부르려던 그때. -늙은이 자고 있어. 안드바리가 대신해서 대답했다. ‘자고 있다고?’ -어. 안 좋게 뻗은 건 아닌 거 같고…아무래도 봉인이 여러 개 풀리면서 소화한다고 뻗은 거 같은데. ‘흐음. 그래?’ 확실히 진공향로의 심득처럼 어마어마한 걸 삼켰으면 소화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 없다. ‘과연…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구만.’ 적혀있는 내용은 진공향로에 대한 설명이기는 하지만, 초대 백련문주가 새겨둔 깨달음이 자신에게 스며들면서 단순한 교리서가 되어버렸다. ‘…잠깐. 겉으로는 그럴싸하다고?’ 손에 들린 진공향로의 비급을 바라본 강유식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고, 리 메이를 바라보았다. “리 메이님.” “아, 네. 무슨 일인가요?” 채무관계 때문인지 전보다 더 부드러워진 목소리. 그 반응에 강유식이 속으로 만족하며 물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뭔가요?” “백련환몽이 차기 백련문주의 징표라고 했는데…그러면 저는 어떻게 되나요?” 강유식의 물음에 리 메이가 예상치 못한 듯 살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이내 미소를 지었다. “초대 백련문주님의 의지를 물려받은 강유식 생도가 아니라면 누가 백련문주가 될 수 있을까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다고 전수되어오던 진공향로를 습득하고, 초대 백련문주조차 강유식의 잠재력과 힘에 끝없이 감탄을 터트렸다. ‘어떤 의미에서는…우리가 강유식 생도에게 매달려야겠지.’ 초대 백련문주의 재림. 아니, 어쩌면 지금의 성세를 뛰어넘어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를 차기문주의 등장. ‘선택에 맡기자.’ 백련문주직을 종용하지 않기로 리 메이가 결심하고 있을 때. 강유식이 다시금 물었다. “그러면…저도 이제 관계자인 거네요?” “물론이죠.”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리 메이는 문득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는 건가요?” 흑련개화를 습득한 뒤에도 백련문주직에는 관심하나 안 보이던 갑자기 왜 그러는 것일까. “조직 개편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요.” < 할 거면 확실하게(3) > 끝 백련문의 삼관에 위치한 이화각. “…” 백련문 내부의 상황이 한눈에 보이는 지도. ‘무언가…분명 무언가 바뀌었을 텐데…’ 지도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백. 무생원이 있는 곳을 바라본 첸 티엔은 두 눈을 찌푸렸다. ‘그게 착각이었다고?’ 무언가 걸리지만 그걸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다. “이화단주님. 강유식 생도가 찾아왔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하인의 목소리. 기다리던 손님의 방문에 첸 티엔은 지도를 덮으며 대답했다. “들라고 해라.” 잠시 후. 문이 열리며 강유식이 안으로 들어섰고 자리에 앉은 첸 티엔이 미소를 지었다. “먼저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했거늘…사흘을 꽉 채웠구나.” “중요한 일이라 그런지 생각이 깊어지더군요.” “제대로 된 대답은 생각해낸 것 같나?” “제 생각에는 그런 것 같습니다.” 여유로운 강유식의 대답에 첸 티엔이 살짝 의외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난번에도 그리 긴장하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또 그때와 다르다. ‘그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던 것인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첸 티엔은 긴장을 늦춰선 안 되겠다고 판단하며 차분하게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제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받아들이겠습니다.” “…정말이냐?” 살짝 놀란 첸 티엔의 물음에 강유식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수락한다고 해서 제가 손해 볼 일은 아니니까요.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군. 좋은 판단이야.” “그럼 바로 서약서부터 작성하죠.” 시원시원하게 일을 추진하는 강유식의 모습에 첸 티엔은 묘하게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별다른 문제가 보이지 않았기에 곧장 서약서를 가져왔다. ‘이쪽으로 능숙하군…’ 그 능수능란한 지적에 첸 티엔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원하는 방향대로 서약서를 모두 수정했다. “음. 이 정도면 완벽하네요. 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만족스러워하는 강유식의 모습에 첸 티엔의 눈매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착각이겠지.’ 그런 기분이 든다고 해서 다 풀린 일을 그르칠 순 없다. 우웅 서약서가 효력을 발휘함과 동시에 두 사람의 몸에 기운이 덧씌워졌고, 강유식은 서약서 한 부를 챙기며 바라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말해봐라.” “이전에 말씀하신 봉인된 물건을 가져오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첸 티엔이 눈매를 찌푸렸다. “그건 왜 묻는 거지?” “이제 저희도 협력…아니, 고용 관계 아닙니까. 약속받은 보상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을지 정도는 알고 싶습니다만.” 봉인된 물건, 진공향로의 비급을 가져올 시 강유식이 받기로 한 보상은 무려 S급 스킬북 1개와 S급 영약 2개. “그걸 지금 굳이 네가 알 필요가 있느냐?” “그렇습니까?” “어차피 네가 물건을 가져오는 것은 훗날의…” 툭 첸 티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언가가 책상 위에 던져졌고, 그 소리를 따라 그녀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 그건?!” 콰앙! 경악한 첸 티엔이 자리를 박차며 일어섰고, 강유식은 담담하게 그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이러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는 겁니까?” “그, 그럴 수가…이건…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이 물건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현실을 부정한 첸 티엔은 다시 책상 위에 놓인 진공향로의 비급을 바라보았다. ‘비급 표면에 흐르는 은은한 기운…이건 필시 백련환몽의 기운일터.’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눈앞에 놓인 진공향로의 비급은 진짜가 확실하다. 그것을 깨달은 첸 티엔은 여유로운 강유식을 노려보았다. “이 물건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건지 당장 설명해라!” “기껏 고생해서 가져왔는데 좀 심하시네…그냥 다시 가져갈까요?” “내가 농담하는 것으로 보이느냐!!” 격분한 첸 티엔의 외침과 동시에 단주실 내부에 자욱한 안개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우우웅! 세 번째 단계인 파破까지 이룬 첸 티엔의 경지. 그리고 초대 백련문주에게 받은 의복의 힘을 빌려 불완전하게나마 백련환몽을 펼쳐낸 것이다. 사라락 그 순간 책상 위로 검은 연꽃이 흐드러지듯이 피어났고 주변에 몰려오던 안개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뭣…” 전력을 다해 펼쳐낸 백련환몽이 손짓 하나로 깨지자 첸 티엔의
경악한 표정으로 검은 연꽃을 바라보았다. ‘설마…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백련환몽을 완전히 습득했단 말인가?’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며칠 전 무생원에 있었던 기묘한 파장도 설명이 된다. ‘어떻게 이런 녀석이…’ 초대 백련문주가 다시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이렇게 놀랍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주에게 이야기했나?” “아뇨.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 제약이 발동하지 않는 강유식의 모습에 첸 티엔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진공향로를 노리는 것은…‘천군天軍’이라는 단체다.” “천군?” “그래. 불로불사를 연구하고 있는 집단으로…비공식적으로 중국 정부와 중국 헌터 협회의 지원을 받는 단체지.” 첸 티엔의 설명에 강유식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러니 안 알려질 수밖에.’ 정부가 운영하기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헌터 협회까지 발 벗고 나선다? 핵심간부 정도 되는 인물이 폭로하는 게 아니면 알려질 리가 없다. “그럼 보상은 바로 받을 수 있는 겁니까?” “그 정도라면 물건을 넘겨줌과 동시에 받을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S급 스킬북 1개와 영약 2개가 그 정도라니. 다른 이들이 들으면 어이없어하겠지만, 배후가 누구인지 들은 강유식은 곧장 납득했다. “그런데 넘기자마자 정리당한다거나 그런 일은 없겠죠?” 중국 정부가 작정하고 운영하는 집단이라면 죽여서 입을 틀어막는 방법은 얼마든지 쓰일 수 있다. “그건…” 첸 티엔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확답하지 못했고, 그 모습을 본 강유식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 안전도 보장 못 해주신다면 저도 넘겨드리기는 힘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네게 그 이외의 선택지는 없을 텐데?” “글쎄요. 저야 크게 관심 없어서 내용을 안 봤지만…불로불사라면 찾는 집단이라면 꽤 많을 것 같은데요.” 여기서야 중국 정부가 강세지만 국외로 나간다면 무의미하며, 불로불사와 연관된 비급을 사려는 집단은 널리고 널렸다. ‘여기서 자극해봐야 내가 당할 뿐이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주변에 대기 중이던 길드원들도 모두 물려둔 상태였고, 전투가 벌어진다고 해도 조금 전에 보여준 숙련도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할 것이다. ‘이런 모습을 여태까지 숨기고 있었다니…’ 끝을 알 수 없는 강유식의 모습에 첸 티엔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다. 네 존재에 대해서는 반드시 함구하마.” “그렇다면 서약서를 하나 더 쓰셔야겠네요.” 미소를 지은 강유식이 품에서 서약서를 꺼내 들었고, 이미 작성까지 끝난 내용에 첸 티엔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주도면밀하군.” “안 그러면 살아남을 수가 없잖습니까.” 여유로운 강유식의 대답에 첸 티엔은 서약서를 가져간 다음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래도 진품을 넘긴다고 명시되었으니 문제 될 건 없나…’ 유용한 방패막이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쉽지만 어차피 천군과 계약을 할 때부터 위험은 감수했다. “윽…” 사인과 동시에 전신에 느껴지는 강한 억제력. “이런 물건은 잘도 가지고 있구나.” “가끔 제약을 각오하고 약속을 어기시는 분도 있어서요. 이 정도는 돼야 안심이 되거든요.” “…쯧. 나가라.” 속내를 빤히 읽힌 첸 티엔이 축객령을 내리자 강유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또 뭐냐.” “그 비급. 정말 괜찮은 겁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첸 티엔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말이지?” “사실 한 번 읽어보려고 했는데…묘하게 소름이 끼쳐서 그만뒀거든요. 혹시 안 좋은 물건인가 싶어서요.” 께름칙하게 이야기하는 강유식의 모습에 첸 티엔이 진공향로의 비급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반드시 봉인해야 한다는 이야기 말고는 들은 게 없었나.’ 어째서냐고
이유를 물어보아도 초대 백련문주는 말할 수 없다며 묵묵히 봉인을 진행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들도 나름대로 연구를 했다 하니 그들이 알아서 하겠지.” “음. 그렇다면야 뭐…다음에 뵙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인 강유식이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고, 홀로 남은 첸 티엔은 눈앞에 놓인 진공향로의 비급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럴 리가.” 정말 위험하다면 어째서 초대 백련문주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중에 시간이 날 때 보면 되겠지.’ 그리고 그 이후 첸 티엔은 단 한 번도 진공향로의 비급을 펼쳐보지 않았다. * 중국 어딘가의 깊은 땅속. “방호 술법진 얼른 세팅해!” “알겠습니다!” 연구소장의 지시에 따라 연구원들이 바쁘게 움직였고,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사내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순조롭군.” “오래도록 기다려온 일이니 말입니다. 여러 상황을 가정해뒀으니 분석에 차질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자네가 곤란해질 테니.”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사내의 이야기에 연구소장, 룽청이 눈매를 미미하게 찌푸렸다. ‘빌어먹을 자식…’ 자신의 연구를 지원해줘서 좋기는 하지만 이렇게 거들먹거릴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연구가 완성된다면 내게도 기회가 올 터…’ 이 울분은 그때 가서 터트려도 부족하지 않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흑후님.” “지켜보지.” 뒷짐을 진 사내, 흑후黑?를 뒤로한 룽청은 연구실로 내려온 다음 온갖 방호 술법진 위에 놓인 진공향로의 비급 앞으로 다가갔다. “흐음…” 신묘한 기운이 흘러넘치던 것과 달리 큰 변화는 없는 상황. [────] 머릿속에 울리는 싸늘한 속삭임. [낙인을 받아라] 흉흉하게 빛나는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켰다. “흐억?!”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파장에 룽청이 뒤로 넘어졌고, 주변에 설치된 방호 마법진이 발동하며 일대를 폐쇄했다. -룽청. 무슨 일이지? 설명해라. “…먹통이야.” -뭐? 흑후의 물음에 룽청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내 S급 스킬이 먹통이라고오오!!” 쿠웅! 그리고 그 외침을 끝으로 천군의 연구소장 룽청이 정신을 잃었다. < 할 거면 확실하게(4) > 끝 -로드. 위치가 사라졌습니다. 아무래도 특수한 방벽을 사용해 차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꽤 빠르네…” 페르스발의 이야기에 강유식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긴. 정부가 작정하고 숨겨둔 시설이면 이 정도 차단막은 당연하겠지.’ 이 정도도 못 막는 수준이라면 미래에 정체가 들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쉬움을 접은 강유식은 조금 전까지 강렬하게 느껴졌던 기시감을 곱씹었다. “그래도 일단 대략적인 위치는 나왔지?” -예. 지도를 펼쳐주시면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대략적인 위치만 알아도 충분한 이득이다. ‘안 되면 어쩔까 했는데…비급이랑 호환된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어.’ 본래 저주를 담아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진공향로의 비급은 페르스발과 호환한 일종의 분신체. ‘이제 이쪽만 대충 마무리하고…저쪽의 위치를 알아서 대강 시도해보면…’ 강유식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페르스발의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로드. 위치를 특정했습니다. “아. 그래. 어딘데?” -지금 표시하겠습니다. 우웅 페르스발의 팬던트에서 붉은빛이 레이저 포인터처럼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고, 그 위치를 본 강유식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페르스발. 진짜 저기야?” -예.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지만 저 부근으로 잡혔습니다. “…” 확신이 서린 페르스발의 대답에 강유식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이게…아니, 마냥 말이 안 되는 건 아닌가.’ 훗날 천무궁주 자오 신쿠는 중국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단순히 세력이 좀 있다고 해서 국가 하나를 쥐락펴락하지는 못하지.’ 아직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설마 나한테 접근한 것도 이거랑 관련 있는 건가?’ 만약에 실험체로 노리고 있었던 거면 살짝 열이 받지만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콰앙! 방문이 거세게 열리며 첸 티엔이 안으로 들어섰다. “아. 오셨어요?” “네, 네 이놈…” 주먹을 꽉 움켜쥐며 부르르 떠는 첸 티엔. “나이도 지긋하신 분이 그렇게 화내시고 그러면 안 좋습니다. 일단 침착하시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지금 네가 누구를 건드린 건지 알고는 있냔 말이다!!” 버럭 소리를 지르는 첸 티엔의 모습에 강유식이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천군을 건드린 거죠. 직접 설명해주셨으면 물어보십니까.” “크윽…” 태연하게 대답하는 강유식의 모습에 첸 티엔이 주먹을 부들부들 떨면서 뒷목을 잡았다. ‘어디서 이런 미친놈이…’ 중국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천군에게 팔아넘긴 물건에 강력한 저주를 실어놓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만약 자신들을 무너트릴 생각이라면 이화각의 단주실에 메모를 남겼을 리가 없을 터. “그래서…도대체 뭘 어떻게 할 생각이냐. 자칫 잘못하면 우리들뿐만 아니라 백련 길드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회귀 전에도 지금보다 더욱 강성한 상태였는데도 베이징 사태의 주범으로 걸고넘어져 해체해버렸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일단 이 상황을 넘길 방법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신 제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셔야겠습니다.” “뭐?” 당황한 첸 티엔의 모습에 강유식이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으로 천군과 거래한 건지는 알겠지만…정도가 너무 지나쳤습니다. 내부에 들어온 간자도 많고, 거의 하청처럼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 “외부인인 네놈이 뭘 안다고…” “외부인인 제가 알 정도로 상태가 안 좋다는 거죠. 솔직히 첸 티엔님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 강유식의 이야기에 첸 티엔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대륙 위에서 그들을 거역하는 게 가능한 줄 아느냐.” 백련 길드가 아무리 세계에서 손꼽히는 길드라고 해도 국가 자체가 견제한다면 쉽사리 저항할 수 없다. “뭐, 손잡은 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대신 너무 속을 내줬다는 거죠. 상대도 바보도 아니고, 길드원들도 모두 대단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첸 티엔의 지도력이 나쁜 건 아니지만 24시간 감시하는 게 아니라면 구멍은 뚫린다. 하물며 상대는 국가 전체.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깔끔하게 정리하죠. 손해야 있겠지만 또 모르잖습니까. 다른 좋은 기회가 있을지.” “말은 잘하는구나. 이 이외에 선택지도 없거늘…” 주범이 강유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앞서 맺은 서약으로 불가능하다. 즉 첸 티엔이 할 수 있는 것은 강유식의 도움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 뿐. ‘무서운 놈…’ 전신에 힘이 쭉 빠진 첸 티엔은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으며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그래서…무슨 계획이냐.” “뭐. 별거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방법입니다.” 진지한 강유식의 이야기에 첸 티엔이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우리에게 달렸다고?” “예. 여러분들입니다.” 첸 티엔을 바라본 강유식이 담담하게 물었다. “백련문. 어디까지 포기하실 수 있습니까?” * 연구소장인 룽청이 저주를 받아 쓰러진 뒤. 천군 내부는 그야말로 뒤집어지다시피 난리가 났다. “저주의 해제는?” “시도는 하고 있지만 통하지 않습니다. 물건이 물건인 만큼 매우 강력한 저주가 걸려있었던 모양입니다.” “…” 보좌관의 보고에
흑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백련 길드의 소행일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럴 가능성은 없을 거다.” 백련문주 쪽은 모르겠지만 실권을 잡고 있는 첸 티엔은 자신들을 두려워한다. ‘가능성이라고 한다면…초대 백련문주겠군.’ 진공향로를 습득하고 그것을 봉인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크게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존재. ‘무서운 존재로군…’ 하지만 저주야 언젠가 해제될 것이고, 정 뭣하면 새로운 연구원을 불러와도 된다. “그래도 책임을 묻지 않을 수는 없겠지. 적당한 책임자를 보내서 보상안을 받아와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인 보좌관이 밖으로 나갔고, 흑후는 여유롭게 따라둔 술잔을 기울였다. ‘이번 사건을 빌미로 백련 길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으니 마냥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군.’ 백련문주인 리 메이와 일화단주인 라오 창에게도 목줄을 채울 수 있다면 그야말로 최상의 시나리오. “흐, 흑후님!” 일을 보기 위해 나갔던 보좌관이 다시 들어왔고, 그 다급한 모습에 흑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일이지?” “배, 백련문의 건물에 화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뭐라고?” 어처구니없어하는 흑후의 물음에 보좌관이 곧장 패널을 조작해 그의 앞으로 화면을 띄웠다. 화르르륵! “주민들 대피시켜! 빨리!” “침착하게 움직이십시오!” 산맥에 걸쳐 만들어진 백련문이 화마에 집어 삼켜져 검은 연기를 내뿜었고 길드원들의 지시에 따라 주민들이 대피한다. “저건…” 백련문의 정상. ‘설마…저것도 초대 백련문주의?’ 세간에 알려진 그의 심성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진공향로의
비급에 새겨져 있던 저주를 생각해보면 또 모를 일이다. “백련 길드의 간부들은 어떤 상태지?” “백련문주와 일화단주는 화재를 잡으려 했지만 실패해 대피에 힘을 쏟고 있고…첸 티엔을 비롯하여 몇몇 단주들은 이상증세를 호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공통점은?” “전부 이번 거래와 연관된 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저주로군…” 아무리 후대의 이들이 자신의 뜻을 거역했다고는 해도 이렇게 지독한 저주를 남겨두다니. “아무래도 앞서 말씀하신 명령은…” “그만둬라. 저런 상황에서 책임을 물어봐야 격렬한 반발만 나올 테니.” 어쩌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백련 길드 측에서 자신들과 거리를 벌리려고 할 수도 있다. ‘조금 아쉽지만 잠시 시간을 두는 게 좋겠군.’ 어차피 최우선 목표였던 비급은 이미 확보한 상황. “차후 일이 수습되고 나면 그들에게 접근해 지원금을 제안해라. 받아들인다면 그걸 빌미로 다시 영향력을 확장하고, 거절한다면 미련 없이 물러나도록.” “알겠습니다.” 보좌관이 다시 밖으로 빠져나갔고, 홀로 남은 흑후는 화면 속에 떠오른 참상을 바라보았다. “초대 백련문주…엄청난 자였군.” * 백련문에 일어난 화마는 수많은 헌터들이 달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하루 동안 꼬박 타오르다 겨우 진정되었다. “각오는 했는데…이렇게 보니 조금 가슴 아프군요.” 백련 길드의 재력을 생각하면 이 정도 손실은 금방 복구할 수 있지만, 그게 추억까지 살려주는 것은 아니다. “죄송합니다. 이 이외에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강유식의 사과에 리 메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마 이 방법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만큼 그들은 집요하니까요.” 첸 티엔을 통해 모든 상황을 전해 들은 리 메이는 담담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앞에도 말씀드렸지만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상대는 국가 그 자체나 다름없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보다…이화단주는 괜찮은 건가요?” “예. 제약이 생기는 거지 생명에 지장은 없으니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지금쯤 병상에 누워있을 첸 티엔을 떠올린 강유식은 폐허가 된 백련문을 바라보았다. ‘해봐야 무생원 근처만 날리려고 할 줄 알았는데…설마 백련문 전체를 다 날리려고 할 줄이야.’ 아마 그 정도는 해야 천군이라는 역병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뭐, 아직 몇 명 남기는 했지만.’ 질이 안 좋은 간자는 자신이 ‘특별한’ 저주를 안겨 처리했지만 자잘한 이들까지 포함한다면 수가 꽤 된다. ‘리 메이가 제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엄청나니까 말이지…’ 심성이 착해 온화하게 사용해서 그렇지 백련환몽을 작정하고 심문용도로 쓰면 버틸 수 있는 이들은 몇 없다. ‘그렇게 둘 생각도 없고.’ 이번 일로 첸 티엔은 자신의 수하가 되었으며, 리 메이 역시 채무등급을 A급으로 만들어뒀다. ‘처음에는 망하기 전에 몇 명만 골라오려고 했는데…세상 참 모를 일이야.’ 강유식이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 폐허가 된 공터를 바라보던 리 메이가 고개를 돌렸다. “강유식 생도.” “아, 네.” “한 가지…부탁해도 될까요?” 감정을 숨겼음에도 미미하게 떨리는 목소리.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건 알지만…꼭 천군의 꼬리를 잡아주세요. 백련문주로서…그리고 스승으로서 부탁할게요.” 리 메이의 간절한 부탁에 강유식은 담담하게, 최대한 믿음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누구 부탁인데요.” 조금 소탈하지만, 믿음직스러운 대답. “고마워요. 강유식…씨.” 생도라는 표현을 생략하는 것은 자신을 인정한다는 뜻일까. 좀 더 부드럽고 가까워진 것 같은 리 메이의 부름에 강유식은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강유식은 리 메이를 뒤로한 채 폐허 아래로 내려왔고,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화단주 라오 창이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끝나셨습니까?” “예.” 고개를 끄덕인 강유식이 산 너머를 바라보았다. “천무궁으로 가죠.” < 할
거면 확실하게(5) > 끝 백련문의 부지가 마을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넓다면, 천무궁의 경우는 도시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만큼 넓은 부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만큼 헌터들도 많이 필요하지만 말이야.’ 소형 게이트가 출몰하면서 피해를 많이 본 국가들은 대부분 영토가 넓은 국가였고, 중국 역시 상당한 피해를 봤다. ‘이런 게 없었으면 인구수 많은 놈이 다 해 먹지.’ 커리큘럼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헌터의 배출은 확률싸움. 인구가 많은 국가일수록 유리할 수밖에 없다. “강유식 님. 천무궁의 북문에 도착했습니다.” 차를 몰고 있는 일화단주, 라오 창의 부름에 강유식이 앞을 바라보았다. “엄청 크네요…저게 50m 정도라고 했죠?” “예. 아마 그 정도 될 겁니다.” 저만한 크기의 문이 동서남쪽에 하나씩 더 있고 그걸 30m 높이의 방벽으로 전부 이어놓다니. ‘저게 이쪽 교복인가 보네.’ 도복을 현대적으로 개량한 복장. ‘그리고 실력은 가슴팍의 별의 개수로 나타내는 건가.’ 천무궁은 문하생들을 학년으로 구분하지 않고 실적에 따라 총 10성으로 나눈다. ‘선별해서 받아들이는 다른 교육기관과 달리 전부 받아들이고 어중이떠중이를 걸러낸다.’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본래라면 놓쳤을 원석들도 발굴해내고는 하니 그리 나쁜 방법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교류회 쪽은 오늘 친선대련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어떻게 되고 있으려나…’ 김진혁과 이병호에게 받은 문자를 떠올린 강유식이 궁금한 표정으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을 때. 차를 몰던 라오 창이 슬쩍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유식님.” “예?” “전부터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라오 창의 모습에 강유식이 살짝 의외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권왕拳王.’ 권법의 종사자가 넘쳐나는 중국 내부에서 정점으로 인정받은 뛰어난 권법 실력과
강인한 육체를 지닌 S급 헌터. ‘전부터 부탁하고 싶었던 거라니…뭐지?’ 라오 창과는 별다른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기에 강유식이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라오 창이 진지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사인을 해주실 수 있는지요.” “예?” “강유식님의 사인을 한 장 받고 싶습니다.” “…” 예상과 다른 라오 창의 대답에 강유식이 살짝 김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인이요?” “예. 제 동생이 강유식님의 팬인지라…호위로서 부적절한 언행이라는 것은 알지만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인 하나 부탁하면서 죄라도 지은 것처럼 저자세로 나오는 라오 창의 모습에 강유식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융통성 없는 양반이구만.’ 그래도 호위는 융통성 없는 사람이 맡아야 뒤통수 맞을 걱정이 없어서 좋다. “제 사인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일화단주님이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해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뭘 감사까지…그런데 동생분도 백련 길드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라오 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직은 천무궁에 재학 중입니다. 저랑 나이 차이가 22살이나 나는지라.” “그럼 여기서 직접 뵐 수도 있겠네요?” “지금은 교류회 학생으로 차출되어 한국에 가 있기 때문에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제가 사인을 부탁받은 것도 그런 이유이고 말입니다.” “…한국에 가 있다고요?” 라오 창의 대답에 강유식의 눈이 번뜩였다. ‘이쪽이 안 되면 동생을 써먹으면 되겠는데.’ 우애도 좋아 보이니 더할 나위 없다.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에 강유식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동생분 성함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라오 엔이라고 합니다.” “아. 라오 엔이라고 하는…군…요?” 고개를 끄덕이던 강유식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인 디자인에 참고하려고 하는데 혹시 동생분이 다루는 주 무기가 어떻게 되시는지…” “창을 다루고 있습니다. 강유식님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불린 데다 지금도 9성까지 도달했을 만큼 뛰어난 녀석이지요.” 동생을 상당히 아끼는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라오 창. 그 모습을 본 강유식은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 새끼인데?’ 신창 라오 엔. 중국을 대표하는 S급 헌터였으며, 자신을 두들겨 팼던 다섯 영웅 중 한 명! ‘형제였다는 기억은 없는데…도대체 뭐지?’ 딱 보면 모르냐,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중국에 라오라는 성을 쓰는 사람이 한 둘인가.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만…” “네?” “라오 엔이 제 동생이라는 이야기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비밀이라고요?” 강유식이 의아하게 물어보자 라오 창이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예. 제 위치가 위치인지라 엮여도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호적상으로는 성만 같지 거의 남이나 다름없는 관계입니다.” “그럼 이걸 알고 있는 건…” “지금은 문주님뿐입니다.” 라오 창의 이야기에 강유식은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얼추 깨달았다. “2대 백련문주님께서 권유하여 제가 받아들였지요. 지금 상황을 보면 그때 그 제안을 수락한 것이 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씁쓸해하면서도 담담하게 말하는 라오 창의 모습에 강유식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엄청난 비밀을 왜 제게 말씀해주시는 겁니까?” 사인 하나 받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유용한 비밀이다. 강유식의 물음에 라오 창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백련 길드의 미래는 강유식님의 손에 달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 그렇게까지는…” “강유식님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적어도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이루려 했던 문주의 사명을 간단하게 풀어냈고, 눈앞에서 조금씩 갉아 먹히는 길드를 단숨에 재정비했다. “제 동생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비밀을 모르신다면 향후 제가 발목을 잡을 때 대처하시기 힘드실 수도 있으니까요.” 자신으로 인해 일이 그르치지 않도록 약점까지 모두 공개한다. 그 이야기에 강유식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라오 창을 바라보았다. ‘상태가 엄청 좋은데?’ 아직 빚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기에 채무관계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이건 입만 잘 털어도 생겨날 상태다. “일화단주님의 말씀은 잘 이해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게 짊어진 짐이 많군요.” “죄송합니다.” “죄송하실 필요는 없죠. 일화단주님도 저와 함께 짐을 짊어지는 동료니까요.” “…” 운전대를 잡은 라오 창의 눈이 살짝 커졌고, 그 모습을 본 강유식이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같이 힘내보죠. 일화단주님.” 동료라거나 짊어질 짐이라거나 유대감이 생길만한 단어로 분위기를 만들고 상대가 원하는 답을 적절하게
던져준다.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라오 창’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D급으로 판정합니다.] 예상한 그대로 채무관계가 형성되었고, 그 알림창을 본 강유식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강유식님.” 차 안만 아니었다면 이쪽을 보고 고개를 깊이 숙였을 것 같은 감사 인사. 그 목소리에 강유식은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대답했다. “저야말로 감사드리죠. 아, 사인은 오늘 일 끝나고 숙소에 가면 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라오 창이 다시금 운전에 집중했고, 그 모습을 본 강유식은 슬쩍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선생님. 제가 괜찮은 후보 하나 찾은 것 같아요. 그리고 한국에 있을 남궁륜에게 짧은 문자 하나를 보냈다. * 천무문의 본관 앞에 도착한 강유식은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장난 아니구만…’ 스케일 하나는 어떤 학교와도 비교가 안 될 그 모습에 강유식은 라오 창과 함께 내부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유식 님.” 안으로 들어서자 고개를 깍듯이 숙이며 맞이해주는 노파. “천무문의 청룡단주인 바 윤파라고 합니다. 오늘 천무궁주님을 대신하여 본관의 안내를 맡았습니다.” 성진의 클래스처럼 문하생의 수준에 따라 나뉘는 사신단. 그중 최고로 꼽히는 것이 청룡단이었고 눈앞의 바 윤파는 그곳의 총책임자인 단주. “천무궁주님은 언제 돌아오시나요?” “빨라도 이틀 뒤에나 오실 듯합니다.” “그렇군요.” 어제 출장을 나갔다고 했으니 아마 천군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틀 뒤인 걸 보면 꽤 중요한 일이 생기는 모양이다. ‘하긴. 불로불사의 단서인 진공향로의 비급이 들어왔으니. 모일 수밖에 없겠지.’ 문제는 그게 텅 비어버린 껍데기라는 거지만, 아마 그걸 알아차리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른 생도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현재 청룡단의 대련장에서 친선대련을 진행 중입니다.” “아…아직까지 하고 있었나요?” “예. 일정에 잠시 변화가 생긴 바람에…” 살짝 껄끄럽게 이야기하는 바 윤파. 그 모습에 무언가 느낀 강유식은 담담하게 물었다. “그럼 지금 그쪽으로 가볼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바 윤파가 앞장섰고 그 뒤를 강유식과 라오 창이 뒤따라 걸어 들어갔다. “크윽!” 대련장 위에 있던 이병호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아. 유, 유식이형…”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이 뒤섞인 이병호의 표정. “뭐야. 저 녀석이 강유식인가 뭔가 하는 녀석이야?” 대련장에서 들려오는 앙칼진 목소리.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사나운 인상에 호리호리한 체형의 여인이 이쪽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저게 8성이라고?’ 강유식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거대한 도를 어깨에 걸친 여인이 입가를 비틀었다. “대단하다는 듯이 말하더니 그냥 샌님이네. 내 말이 맞구만 뭘 아니라고 난리를 피워서는…” 거들먹거리는 여인과 이 상황이 굴욕적인지 쓰러진 채로 부들부들 떠는 이병호. ‘이 새끼들. 대놓고 구라를 치네.’ < 주특기는 아니지만(1) > 끝 어느 집단이든 본인의 능력에 비해 낮게 평가받는 사람은 존재한다. 본인이 원해서일 수도 있고, 때로는 시스템 때문에 그런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기는 사정이 다르지.’ 천무궁은 문하생이 원하는 그 즉시 승급시험을 치를 수 있으며, 몇 성이냐에 따라 전수받는 기술이 달라진다. ‘최소 10성. 현역으로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야.’ 천무궁의 10성이 다이아클래스의 최상위권에 속하는 위치니 거의 A급 헌터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 ‘이상하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이해는 가지만 자신을 회유하려는 천무궁주가 굳이 자신과 친한 이병호를 건드리는 식으로 자극할 이유가 있을까? “…너 말이야. 뭔가 좀 더 반응 없어?” 대련장 위에 폼 잡고 서 있던 여인이 무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던가…뭐, 내가 대신 상대해주겠다거나 그런 말 하면서 덤벼들 타이밍이잖아?” 살짝 김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 강유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너랑 친한 녀석이 두들겨 맞았으니까 그렇지.” “뭐 반칙이라도 쓰셨습니까?” “내가 그런 걸 쓸 리가 없잖아!” 힘은 숨겼으면서 대련 중 반칙은 비겁하다고 생각하는지 여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고, 그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었다. “그럼 문제없는 것 아닙니까? 대련이 원래 서로 싸워서 실력을 겨루는 것 아닙니까.” “그, 그렇기는 한데…” 도발을 던졌는데 전혀 반응이 없는 모습에 여인의 눈동자가 한 곳으로 향했고, 강유식은 곧장 그 시선을 따라갔다. ‘저 녀석은…’ 특징적인 외모였기에 강유식의 기억이 금방 떠올랐고 메모리맵을 통해 단어가 나열되었다. (량 진) (귀호검) (자오 신쿠의 제자)천무궁주 자오 신쿠의 제자이자 미래에 청룡단주직을 맡게 되는 A급 헌터 량 진. ‘흐음. 과연. 그렇게 된 건가.’ 왜 이렇게 어설프게 자신을 도발하는 그림이 그려진 것인지 얼추 이해가 갔다. “병호야.” “네, 네…”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졌으면 부끄러워하지 마. 대련에서 진 게 잘못한 일도 아니잖아?” “…” “그런 것보다는 다음에 이길 방법을 생각해보자. 무슨 말인지 알지?” “네…” 강유식의 이야기에 이병호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예전처럼 자존심은 안 세워서 좋네.’ 빠릿빠릿하게 알아듣는 이병호의 모습에 강유식은 만족하며 바 윤파를 바라보았다. “친선대련은 어느 주기로 열립니까?” “기본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진행할 예정입니다.” “흐음. 그래요?” 천무궁의 문하생 측으로 고개를 돌린 강유식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량 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럼 다음에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그리고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대답했다. “무술만 쓰는 거로.” * 친선 대련이 끝난 뒤. “와. 아까 그 샌님 뒤에 권왕 맞지? 그 녀석 도발하니까 노려보는데 진짜 혀가 거꾸로 말려 들어 가는 거 같더라.” 강유식의 뒤에서 조용히 서 있던 라오 창을 떠올린 바오 린센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 바오 린센의 이야기에 량 진은 아무런 말도 없이 걸음을 옮겼고, 그 모습에 살짝 분위기를 파악한 그녀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이야기했다. “그…미안. 제대로 못 했네.” “상관없다.” 무뚝뚝한 량 진의 대답에 바오 린센이 살짝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 씨…이러다가 또 교심동에 들어가는 거 아냐?’ 교심동矯心洞. ‘이번에 들어가면 남은 2년 꽉 채워야 하는데…’ 바오 린센의 재능이 뛰어나기도 했고 교사의 상처가 치료 가능한 수준이라 수감은 피했지만 처벌은 피할 수 없는 상황. ‘아오. 진짜 천무궁을 확 나가버릴 수도 없고.’ 교심동에서의 근신은 강제는 아니지만 이를 다 채우지 못할 경우 천무궁의 졸업할 수 없다. “어차피 목적은 녀석을 끌어내는 것. 무술만 쓴다는 제약까지 걸게 했으니 오히려 성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 그렇지?!” 긍정적인 반응에 바오 린센이 활기차게 대답했고, 그 모습에 량 진이 힐끗 쳐다보았다. “그보다 그 녀석의 설득은 어떻게 됐지?” “10년 동안 여기서 썩고 있을 거냐고 툭툭 찔러보니까 반응은 하던데. 잘하면 나올 거 같아.” “반드시 꺼내라. 그러면 실패해도 1년은 깎아줄 테니.” “어! 너 방금 녹음했다? 나중에 말 바꾸면 궁주님한테 까발릴 거야?” 깜짝 놀라며 외치는 바오 린센의 모습에 량 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가서 설득하기나 해라.” “좋아. 딱 기다려!” 바오 린센이 교심동을 향해 달려갔고, 그 뒷모습을 바라본 량 진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이번 일로 나를 시험할 생각이겠지.’ 강유식이 엄청난 존재라는 것은 마주친 순간 알았지만, 저렇게 오만방자한 녀석을 상대로 질 만큼 허송세월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 건방진 얼굴을 뭉개주마…’ 두 눈을 빛낸 량 진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 “왜 그러신 겁니까?” 천무문의 구경이 끝나고 태허문으로 자리를 옮기던 도중. 차를 몰던 라오 창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뭘요?” “무술만 사용해서 싸우신다는 말씀 말입니다.” “아아. 그거 말이군요.” 강유식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라오 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천무문의 10성 문하생들은 모두 A급 헌터의 기량에 체계적으로 무술을 습득해 대인전에 특화된 이들입니다. 그런 상대와 강유식님이 무술로만 싸운다는 건…”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알겠습니다.” 자신을 걱정하는 라오 창의 모습에 강유식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미친 줄 알겠지.’ 헌터들은 기본적으로 무술과 마법을 혼용으로 사용하지만 좀 더 특화된 부분이
있기 마련.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말이야.’ 뿌려둔 채무는 많고, 징수해도 그걸 다시 채워줄 비료도 이번에 잔뜩 구했다. “나중에 대련해주실 수 있죠?” “호위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만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태허문의 본관에 도착했고 강유식은 내리면서 그 모습을 살펴보았다. “들어가죠.”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고, 이번에도 한 사람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작은 키에 어린 탓인지 중성적으로 느껴지는 얼굴.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예. 무탈하게 지냈습니다.” 강유식의 살가운 인사에 타오 란이 살짝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전에 대화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는데 갑자기 친근하게 나와 당황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시끄럽던데…손자 쪽은 영 무뚝뚝하네.’ 어떤 유형의 인물인지 알았으면 대하기가 편할 텐데 회귀 전에 남아있는 정보가 없어서 애매하다. “태허문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문주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타오 란을 따라 최상층까지 올라간
두 사람은 곧장 타오 페이가 있을 문주실 안으로 들어섰다. ‘쌓아두고 못 버리는 사람이 쓰는 방 같네.’ 어떻게 보면 타오 페이와 딱 어울리는 느낌의 방이다. “어서 와…” 우렁차게 외치려던 타오 페이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이내 옆에 서 있는 라오 창을 바라보았다. “…일화단주는 왜 네 옆에 있는 거냐?” “호위입니다.” “일화단주가?” “예.” S급 헌터, 그것도 권왕을 호위로 달고 다닌다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 음. 알겠네.” 떨떠름하게 대답한 타오 페이는 헛기침을 하며 바라보았다. “그보다 뭐, 어디 다친 곳은 없냐? 화재가 꽤 크게 났다고 들었다만…” “예.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자. 그럼 이제…” 막 이야기를 꺼내려던 타오 페이는 강유식 뒤에 있는 라오 창을 발견하고는 살짝 멋쩍게 이야기했다. “단둘이서 이야기하고 싶네만 잠시 괜찮겠나?” “그건…” “그러죠. 잠깐 나가서 기다려주세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인 라오 창이 밖으로 나갔고 타오 란이 그 뒤를 따라 문을 닫으며 나갔다. 문주실에 단둘이 남은 두 사람은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호위를 붙였으니 믿을 만하다는 뜻이겠지만, 그래도 아이템을 보고 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깐 말이다. 불편해도 좀 이해해라.” “물론이죠. 그보다 아이템은 어디에…” “잠시 기다려라” 자리에서 일어선 타오 페이가 두루마리가 담겨 있는 책장으로 향했고, 그중 세 개를 뽑아 든 다음에 돌아왔다. ‘그런데 뭔가 좀 이질감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루마리에 강유식이 의아하게 보고 있을 때. 타오 페이가 그중 하나를 펼쳤다. 후우웅 약간의 파문과 함께 두루마리 위로 아이템 하나가 나타났고 그 과정을 본 강유식은 감탄을 터트렸다. “그거. 인챈트 물품이죠?” “그걸 또 바로 알아보는구만…맞다.” 내부에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인챈트와 마력을 숨길 수 있는 인챈트. 두 가지가 이중으로 걸린 두루마리라는 것을 깨달은 강유식은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값이 상당할 텐데.’ 인챈터의 존재 자체가 희귀하지만 인챈트의 종류에 따라 또 평가가 달라진다. 특히 이 정도로 마력을 깔끔하게 숨길 정도라면 상당한 물건이었다. “그 두루마리도 사신 겁니까?” “젊은 시절에 선물로 받은 거다. 1세대 때는 인챈터들은 딱히 정체를 숨기거나 하지 않았으니까.” “아. 음. 그렇군요.” 타오 페이의 설명에 강유식은 더 이상 묻진 않았다. ‘이걸 만든 사람도 아마 죽었겠지.’ 살짝 분위기가 묘해지자 타오 페이가 환기하기 위해 두루마리에서 나온 묵빛의 두꺼운 팔찌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잠룡환이라는 AA급 장비다. 성장을 가속하는 능력과 일시적으로 힘을 증폭시키는 효과도 지니고 있지.” 특별하지는 않지만 성능 자체가 좋아 상위권에 속하는 준수한 물건으로 제자를 키우는 최상위권 헌터들이 모두 눈독 들이던 물건이었다. ‘내가 써도 되고…뭐하면 남한테 빌려줘도 되지.’ 적당히 분위기 잡고 넘겨주면 아마 채무가 무럭무럭 솟아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타오 페이가 떨리는 손으로 다른 두루마리를 펼쳤고, 그 위로 황금색으로 빛나는 물건이 나타났다. “S급 장비인 나타금전이다. 절대 명중과 회수. 그리고 마력흡수와 증폭을 통한 위력 강화를 지닌 투척 무기지.” 반드시 명중하고, 그 직후 주인의 손으로 되돌아온다. 간단하지만 매우 강력한 투척형 무기였고, 거기에 사용자의 마력을 머금고 증폭하여 위력까지 늘어난다. ‘S급 헌터 한 명에 A급 헌터 수십 명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었지 아마…’ 재앙급 마인의 손에 들어가고 석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니 그 범용성과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말이 필요 없다. ‘페르스발이나 아케트라브와 연계해도 괜찮고…전체적으로 좋아.’ 잠룡환과 나타금전. 타오 페이가 가지고 있던 물건 중에서도 손꼽히는 것들이었고, 강유식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나머지 하나는 뭡니까?” “음…그전에 한 가지 확실하게 짚고 갈 게 있다.” “예?” 강유식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타오 페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떤 S급 아이템을 주는지는 내 선택이다. 맞지?” “네…뭐. 그렇죠.” “좋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타오 페이의 모습에 강유식이 속으로 슬쩍 웃었다. ‘이번에는 좀 구린 건가 보구만.’ 남은 하나도 S급으로 주기로 했으니 어지간하면 좋은 장비겠지만 그중에서 안
좋은 것들도 있기 마련. ‘뭐, 하나 정도는 인정해야지.’ 좋은 거로 두 개나 받았는데 하나 정도야 덜 좋은 거로 받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투웅 청명한 기운과 함께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 나타났다. “…어?” 외곽에 팔괘가 새겨지고 중앙에 태극이 그려져 있는 팔각형 물체. 그것을 보자마자 메모리맵이 거의 폭주를 하듯이 정보를 띄워냈다. (팔괘로) (중국 국보) (최강의 속성보조 장비)해방 시 페르스발과 함께 손에 꼽힐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지닌 S급 장비이며, 타오 페이의 사후 중국 정부에 넘어가 국보로 지정된 물건. “이건…” “남은 S급 하나를 이걸로 줄 수도 있다.” 강유식을 바라본 타오 페이가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신 나를 한 번만 도와다오.” < 주특기는 아니지만(2) > 끝 “…” 타오 페이의 제안에 강유식이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걸 냉큼 내준다고?’ 아직 해방되지 않은 상태라고 해도 팔괘로의 값어치는 타오 페이가 보유한 아이템 중 가장 뛰어난 물건이었다. “일단 무슨 일인지 듣고 싶습니다만.” 강유식의 침착한 대답에 타오 페이가 살짝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큼. 그래도 내가 가진 것 중에 제일 귀중한 물건인데…뭔가 혹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주면 안 되냐?” “그러니까 이렇게 침착한 거죠. 어중간하게 좋은 거였으면 저도 그랬을 겁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구만.”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타오 페이는 서랍에서 서약서를 하나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에 사인하면 무슨 일인지 알려주마.” 타오 페이의 이야기에 강유식은 서약서의 내용을 슬쩍 훑어보았다. ‘그냥 비밀엄수 조항이네.’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만 않으면 되는 간단한 서약서.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강유식은 흔쾌히 서약서에 사인해 넘겼다. “여전히 거침이 없군…잠시 기다려라” 서약서를 챙겨 넣은 타오 페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쪽의 책장으로 다시 향했다. ‘저것도 인챈트네.’ 작동하기 전까지 마력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금 전 두루마리보다도 더욱 상등품으로 보였다. “이런 걸 이렇게 주셔도 됩니까?” “상관없다. 어차피 뼈대밖에 안 세워진 물건이니.” “그럼…” 타오 페이의 이야기에 강유식은 그대로 서류를 넘긴 다음 목차를 살펴보았다. [사자정화] ‘죽은 사람을 정화한다라…’ 이름만 보자면 언데드 계열 몬스터를 겨냥한 것 같은 느낌. 뭔가 살짝 감이 온 강유식은 그대로 서류를 넘기며 내용을 훑어보았다. ‘상극인 빛과 화염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는 구조를 해제하는데 초점을 잡았단 말이지…’ 단순히 언데드를 상대하는 데 사용하기에는 비효율적인 방법. 그것을 본 강유식은 이 기술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바로 깨달았다. ‘이제야 회귀 전 말년이 왜 그랬는지 알겠네.’ 흑림의 암살자에게 암습을 당해 크게 다치고 병상에 누웠다가 투병 끝에 죽어버렸던 타오 페이. ‘흐음. 이걸 어떻게 한다…’ 어떻게 대화를 풀어나갈지 고민하던 강유식은 서류를 마지막 장까지 살펴본 다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냐.” “이 술법. 언데드를 겨냥한 게 아니죠?” 뼈대만으로 목적을 완벽하게 꿰뚫어 본 강유식의 모습에 타오 페이는 속으로 감탄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말할 수 없다.” “도움을 드리지 못할 수도 있는데요?” “이건 듣는 순간 너도 깊게 얽혀버리고 만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고는 해도 거기까지 끌어들이고 싶진 않다.” 단호한 타오 페이의 대답에 강유식은 살짝 의외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팔괘로까지 꺼내 도움을 요청하면서 깊게 끌어들일 생각은 없다니. ‘앞에 채무관계를 만들어둔 덕분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겠다는 타오 페이의 모습에 강유식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술법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드리면 는 거죠?” “도와줄 거냐?” “저만한 물건을 주신다는데 해보긴 해야죠. 단…” “단?” “물건은 술법이 완성되고 나면 받겠습니다.” 강유식의 조건에 타오 페이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이냐?” 타오 페이의 조건을 술법을 완성하기 위한 조언. “조언 몇 마디 던지고 받아가기에는 대가가 너무 크잖아요. 그리고 제 성격에 안 맞기도 하고.” “너…” “제가 도움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템은 그때까지 다 들고 계세요.” 언제든지 뒤통수를 칠 상대라면 보상을 빠르게 받아두는 편이 좋지만,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라면 그걸 뒤로 미루는 게 좋을 때도 있다. “…고맙다.” [채무자 ‘타오 페이’의 빚이 증가합니다.] [채무자 ‘타오 페이’의 채무등급이 C급으로 상승합니다. 징수목록이 추가됩니다.] D에서 C급으로 상승. ‘B급은 돼야 말을 좀 꺼내 볼 텐데.’ 사자정화를 통해 타오 페이가 천군과 적대하는 위치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신용할 수는 없다. ‘이걸 어떻게 채운다…’ 살짝 모자란 등급에 강유식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앞의 대화가 부끄러운지 헛기침한 타오 페이가 입을 열었다. “크흠. 뭐, 아무튼 돕기로 했으니까 지금까지 연구기록도 보여주마.” “아. 이게 다가 아니에요?” “그건 그냥 기획서다. 투자한 시간이 몇 년인데 설마 그 정도밖에 못 만들었을까.” 자리에서 일어선 타오 페이는 이번엔 벽에 숨겨진 공간을 연 다음 거기서 두꺼운 서류뭉치를 가져왔다. “꽤 많네요.” “수십 년 동안 연구했는데 이 정도는 돼야지. 이것도 뛰어난 거로 고르고 골라서 압축한 거다.” 건네준 연구물에 자부심을 느끼는 타오 페이의 모습에 강유식은 서류를 하나씩 훑어보았다. ‘확실히 그럴 만한 하구만.’ 발상도 좋고 술식의 구조도 나쁘지 않다. ‘파생이 그 정도면 완성품은 엄청나겠는데…’ 어쩌면 불로불사의 카운터뿐만 다방면으로 활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거. 8할은 갈아야겠네요.” “…뭐?” 멍한 표정을 지으며 되묻는 타오 페이의 모습에 강유식은 조금 전 봐둔 정보들을 토대로 서류들을 차례차례 분류했다. “이건 목표로 한 효과와 술식의 구조가 어긋났어요. 이 연구는 도중부터 계산이 미미하게 틀렸고요. 그리고 이쪽은 아예 다른 결과물이랑 연계가 안 돼요.” 강유식이 서류들을 종류별로 구분해내자 타오 페이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아니…아무리 그래도 한 번 훑어본 거로…’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자신들의 연구 결과가 모조리 판가름 난다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어르신. 기술이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건 아시죠?” “어, 어? 그야 그렇지.” “그럼 지금 마법학계는 시대가 어떻게 된 것 같습니까?” “그거야 네가 바꿔…” 자연스럽게 대답하던 타오 페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분류를 끝마친 강유식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은 연구인데, 마법의 핵을 반영하면 효율이 떨어지고 술식이 성립되지 않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런…” “물론 기본적인 분류가 이렇다는 거지 마법의 핵을 의식해서 수정하면 절반 이상은 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 이해도도 떨어지는 마법의 핵을 어떻게 이런 복잡한 연구물에 금방 적용한단 말인가. “크흠.” 강유식이 헛기침하며 이목을 모았다. “이건 예정에 없었지만…뭐…어르신이 필요하시다면 마법의 핵에 대한 노하우를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저, 정말이냐?” “물론이죠. 그래도 이건 정말 저한테 중요한 노하우니까…아시죠?” 씩 웃은 강유식이 타오 페이를 바라보았다. “저한테 빚지신 겁니다.” * 일주일 뒤. “…” 무뚝뚝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앉아있는 량 진. 그리고 그 양옆으로는 두 명의 인물이 서 있었는데 그 모습에 문하생들이 수군거렸다. “바오 린센이야 그렇다고는 해도 설마 사이 얀을 꺼내올 줄이야…” “아무리 그래도 저건 너무 심한데.” 기본적으로 교심동은 간단한 징계에도 사용되기 때문에 문하생들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지는 않는다. 잘그락 깡마른 양팔과 양다리에 채워진 쇠사슬이 부딪치며 소음을 냈고, 얼굴을 가린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희미하게 흔들리며 숨을 쉬고 있음을 보여준다. ‘괴호怪虎 사이 얀.’ 현 천무궁주인 자오 신쿠의 사제이자 차세대 S급 헌터로서 큰 주목을 모았던 유망주. “이야. 내가 나왔을 때보다도 시선이 더 살벌하네…예전에 진짜 어지간히 저질렀나 봐?” 주변의 시선에 바오 린센이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고, 량 진과 사이 얀은 못 들은 것처럼 무시했다. “사람이 아니라 벽이 두 개나 쌓여있네. 어휴. 진짜 조건 좋은 길드만 있었어도 확 나가버리는데…” 불만스럽게 중얼거린 바오 린센이 팔짱을 끼며 시선을 돌렸고, 문하생들은 긴장하면서도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성진이 저 셋을 이길 수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힘들 것 같은데…” 다른 문하생이라면 모르겠지만 저 셋은 현역 A급 헌터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으며 차세대 S급 헌터로 주목을 받거나, 받았었던 이들이다. ‘질 가능성은 없다.’ 지난번 친선대련에 강유식과 김진혁이라는 생도가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 두 명이 참가한다고 해서 결과가 바뀔 가능성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이 얀이라면…’ 배분으로 따지면 자신의 사숙. 교심동에 계속 머무르기는 했지만 실력은 분명 S급에 근접한 수준일 것이다. ‘다만 무슨 돌발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게 걸리는군…’ 스승의 말에 따르면 사이 얀은 예전부터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 집착하는 성미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사이 얀의 흥미를 끌려면 최소 스승보다는 강해야 할 터. 큰 문제는 없겠어.’ 생각을 정리한 량 진이 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 콰앙! 거친 소리와 함께 대련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저게 무슨…!’ 세 명의 기세 모두 만만치 않지만 량 진을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이병호의 변화였다. ‘대타? 아니, 하지만 그런 걸 청룡단주가 놓칠 리는…’ 그렇다면 일주일 만에 저렇게
성장했다는 것인데 그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허어…사이 얀까지 데려왔어?’ 이기려고 싹싹 긁어오는 거야 예상했지만, 설마 저런 대박을 끌고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여기서 저 녀석을 볼 줄이야. 진짜 중국이 인재가 넘쳐서 참 좋아.’ 넘쳐날 정도로 많으니까, 몇 놈 정도는 자신이 빼가도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해봅시다.” < 주특기는 아니지만(3) > 끝 < 주특기는 아니지만(4) > 본래 친선대련은 참가할 인원들이 자원해서 열리지만,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3대 3 구도로 만들어졌다. “마침 숫자도 딱 맞으니까 한 번씩 하면 되겠네요. 순서는 어떻게 정할래요?” “우리들이 먼저 한 명씩 올라서지. 성진도 그쪽에 맞춰서 사람을 올려보내라.” “깔끔하네요.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딱히 복잡할 것도 없었기에 순서는 빠르게 정해졌고, 10분 뒤에 시작하기로 정한 강유식은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저쪽에서 한 명씩 올려보낸다니까 저희는 그냥 거기에 맞추면 되겠네요.” “누가 나와도 이길 수 있다는 건가. 혈기 넘치는구만…” “뭐. 저희야 잘 됐죠. 가능하면 3승 챙기고 싶었으니까요.”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강유식의 모습에 한무진은 한쪽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김진혁과 이병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냐?” “뭐가요?” “아무리 봐도 일주일 만에 성장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뭔가 있는 거냐?” 흥미를 잔뜩 보이는 한무진의 모습에 강유식은 살짝 의외인 표정을 지었다. ‘의외로 교육에 관심이 있는 건가? 아니. 그거랑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생각보다도 흥미를 보이는 한무진의 모습에 강유식은 잠시 고민하다가 슬쩍 웃었다. “비밀이 밝혀지면 마법이 아니잖아요?” “뭐? 이 자식이…” “자자. 일단은 대련에 집중하죠.” 대화를 살짝 미뤄둔 강유식은 옆에서 대기 중인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컨디션은?” “괜찮아.” “문제없어요.” 차분하면서도 적당히 달아오른 두 사람. 날카롭게 갈고 닦아진 모습에 강유식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둘 다 내가 앞에 말했던 건 기억하지?” “응.” “물론이죠.” “좋아. 그거 잊지 말고…뭐, 친선대련이니까 거창한 말 없이 그냥 간단하게 정리하자.” 두 사람을 바라본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전부 박살 내자고.” 10분이 지나면서 천무문에 첫 출전자가 정해졌고, 바오 린센이 대련장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처음은 나다!” 사방으로 투기를 발산하는 바오 린센. 그 흉흉한 기세에 대련장 주변에 있던 천무문의 문하생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어. 뭐야. 너 나랑 다시 붙게?” “그래.” 짧은 이병호의 대답에 바오 린센이 턱을 쓰다듬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전보다 좋아지기는 한데…그래도 나랑 싸우기에는 딸려 보이는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고는 해도 아직 최상위권이라고 하기에는 미묘한 수준. 바오 린센은 그 수준을 바로 꿰뚫어 보았고, 이병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긴 하지.” “그럼 다른 녀석으로…” “그래도 네가 저 둘보다는 싸울만하니까 어쩔 수 없어. 무조건 이겨야 하거든.” 슬쩍 웃은 이병호의 이야기에 바오 린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저 둘보다는 싸울만하다. 즉 세 명 중에 자신을 가장 아래로 봤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호, 호오…그렇단 말이지.” 부들부들 떠는 바오 린센의 모습에 이병호가 피식 웃었다. “그래. 이제 슬슬 시작하지.” “좋아…해보자고.”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세를 다잡았고, 앞으로 내밀어진 바오 린센의 도에서 흉흉한 마력이 솟구쳤다. 우웅 그 모습에 이병호 역시 창끝으로 마력을 모으며 차분히 자세를 잡았고, 무형의 기운이 두 사람 사이에서 맞부딪쳤다. 콰앙! 타오르는 불꽃과 푸른 번개가 대련장 위에서 격돌했다. 카가강! 잔영을 흩뿌리며 두 무기가 쉴 새 없이 충돌했고, 거친 쇳소리와 함께 불꽃과 번개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저놈들이 적당히 해야지…” 언제라도 끼어들 수 있게끔 한무진도 자신의 창을 잡았고, 반대편의 청룡단주인 바 윤파도 허리춤의 검을 잡았다. ‘저게 염화천도炎火天刀인가.’ 바오 린센이 주로 사용하는 도법. ‘재앙급 마인은 못 됐지만 그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지.’ 시간만 충분히 주어졌다면 S급 헌터든 재앙급 마인이든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되었던 강자. 빠악! 이병호의 재능 역시 그에 뒤처지지는 않았다. “아…?” 빈틈을 파고들어 어깨를 후려친 장타에 바오 린센의 두 눈이 흔들렸다. ‘어떻게?’ 공간을 장악하는 염화천도의 특성상 주변은 완전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공격에 맞기 전까지 자신이 모를 수 있단 말인가? 퍼억! 이번에도 이병호의 정권이 복부를 후려갈겼다. “커흑?!” 제대로 대비도 하지 못한 채 들어온 주먹. 불시의 일격에 호흡이 흐트러졌고, 이어진 결과는 참혹했다. 빠악! 퍼억! 빈틈을 파고든 주먹과 발이 바오 린센의 몸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고 그 공세에 그녀는 변변히 저항하지도 못했다. ‘말도…말도 안 돼!’ 처음 이병호를 봤을 때. 바오 린센은 영약 같은 걸 먹고 스탯을 뻥튀기해온 것으로 생각했다. 카앙! 하지만 펼쳐진 결과는 정반대. “이 새끼가!!!” 화르륵! 바오 린센의 도에서 거대한 불꽃이 폭발적으로 솟구쳤고 그
모습에 바 윤파와 한무진의 두 눈이 커졌다. “그만.” 강유식의 목소리가 두 사람을 막았다. 투쾅! 푸른 번개가 그녀의 턱을 후려갈겼다. 쿠웅! 바오 린센의 무릎이 힘없이 대련장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고 그 앞에 선 이병호가 숨을 골랐다. “후우…후우…”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지…?” 몇 명을 제외하면 제대로 보지도 못한 공방. “너…어떻게…일주일 만에…” 변화의 이유를 물어보는 그 모습에 이병호는 사전에 준비했던 대사를 이야기했다. “유식이형한테 배웠어.” 그 말을 들은 바오 린센은 반사적으로 대련장 아래에 있는 강유식을 바라보았고,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부딪쳤다. 쿠웅 바오 린센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말도 안 돼…” “어, 어떻게…바오 린센이…” 눈앞에 펼쳐진 결과에 대련장에 모여 있던 이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뭘 어떻게 가르친 거지?’ ‘마법사가 단기간에 무술실력을 저렇게 높여낼 수가 있나?’ 강유식이 가르쳤다는 한마디에 천무문의 문하생들이 모두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이내 량 진을 힐끗 보았다. “아슬아슬했네.” “그러게요…진짜 한 방 싸움이었어요.” 일주일 동안 이병호가 수련한 것은 고유스킬 뇌신화의 응용기술인 뇌신초래雷神招來. ‘S급 영약으로 스탯을 급격히 뻥튀기시켜 상대에게 괴리감을 안겨주고, 그 틈을 뇌신초래로 찌른다.’ 그 결과 이병호는 일방적으로 공세를 잡아냈고, 마지막에 흥분하여 절기를 사용한 바오 린센의 빈틈까지 완벽하게 찌른 것이다. ‘그 덕분에 너덜너덜하지만…’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 속에서 사용하느라 정신은 녹초나 다름없었고, 아직 완전히 가다듬지 않은 상태라 효율이 낮아 마력도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수고했어. 앉아서 쉬어.” “예…” 이병호가 자리에 털썩 앉아 숨을 내쉬었고, 강유식은 대련장을 올려다보았다. ‘알기 쉽구만…’ 겉만 보면 회귀 전 귀호검이 떠오르지만, 속내는 역시 아직 미숙한 것이 보인다. “다음은 안 올라옵니까~?” “…기다려라!” 신경질적으로 대답한 량 진이 앉아있는 사이 얀에게 다가갔고, 그 뒷모습에 강유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진짜 나한테 왜 시비를 건 걸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을 영입하려는 천무궁주는 어째서 저런 제자를 방치했을까. 잘그락잘그락 양팔과 다리가 쇠사슬로 묶인 채 올라온 괴인. 사이 얀의 등장에 강유식은 살짝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저놈은 좀 애매한데…’ 어중간한 녀석이면 김진혁에게 맡기고 량 진과 싸우려 했지만 사이 얀은 수준이 너무 높은 것이다. ‘내가 상대하기도 까다롭고, 김진혁이 상대하기도 까다롭단 말이지.’ 뭔가 방법이 없을까 강유식이 고민하고 있을 때. 머릿속에 한 가지가 불현듯 떠올랐다. ‘페르스발. 모의전 예측 같은 것도 가능해?’ -정보만 충분하다면 가능합니다. ‘좋아 그러면…’ 결정을 내린 강유식은 곧장 량 진에게 소리쳤다. “잠시 컨디션 점검 좀 할게요.” “빨리 끝내라.” 김진혁에게 다급히 다가가는 강유식의 뒷모습에 량 진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역시 사이 얀은 방도가 없나 보군.’ 누구를 내세워도 질 수밖에 없는 상대. 사이 얀 자체가 문하생급이 아니었기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가능하면 김진혁이라는 녀석이 나섰으면 하지만…강유식이 나설 수도 있겠군.’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자신보다 사이 얀의 수준이 더 높으니 패배하더라도 체면치레를 하기 위해 나설 수도 있다. “올라갑니다.” 김진혁이 대련장 위로 담담하게 걸어 올라왔다. “이번에는 낙승이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이 얀인데…” “저쪽은 우연으로 될 만한 상대가 아니야.” 조금 전 이병호처럼 기술의 차이로 이길 수도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첫 호흡에…우측…” 강유식은 참고만 하라고 말해준 조언이었지만, 그것을 중얼거리고 있으면 긴장감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할 수 있어.’ S급 영약을 통해 성장한 스탯과 안개 속에서 반복해온 수련의 경험이 몸 안을 가득 채운다. “셋 세고 시작입니다!” 카운트 다운에 맞춰 사이 얀과 김진혁의 투기가 은은하게 고조되었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친다. “시작!” 외침과 동시에 두 사람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콰앙! 사이 얀이 펼친 것은 천참지관수天斬地貫手. 절세의 검법이라고 불리는 ‘권법’이며, 재앙급 마인이 된 그녀가 수많은 헌터들을 도륙 낸 궁극의
무술. 후웅─! 쇠사슬에 묶인 상태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날카로운 예기. 그 모습에 모든 이들이 김진혁이 베여 쓰러지는 환영을 엿보았고. 카가강! 튀어 오른 불꽃과 함께 김진혁의 일검이 그 환영을 단숨에 갈라냈다. “…” “…” 대련장을 올려다본 문하생들이 멍하니 바라보았고, 끊임없이 표정을 유지하던 량 진도 이번에는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조, 조작이지…?” “하지만…” “마지막에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너무 빨라 과정을 보지 못했던 이병호 때와 달리 이번에는 전후 과정을 모두 확실하게 보았다. 투둑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 사이로 드러난 사이 얀의 흐릿한 눈이 목에 겨눠진 검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이거…뭐야?” 자신의 패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 얀의 물음에 김진혁은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유식이가 가르쳐줬어.” 그 한 마디에 대련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괴물을 보는 것처럼 강유식을 바라보았고, 사이 얀도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 흐릿하던
눈동자에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한 빛. “애.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어?” 간단명료한 사이 얀의 물음에 강유식은 마찬가지로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당신보다는 무조건.” “…” 강유식의 대답에 사이 얀의 입꼬리가 아주 약간 히죽거렸고, 다시 김진혁을 바라보았다. “너. 따라갈래.” 그리고 보기 좋게 미끼를 물었다. < 주특기는 아니지만(4) > 끝 < 주특기는 아니지만(5) > “…그게 무슨 말이지?” 사이 얀의 폭탄선언에 량 진이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바라보았고, 바 윤파 역시 적잖이 당황한 듯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사이 얀님. 외부에서 그런 말씀은 함부로…” 카앙! 철컹! 두 사람의 이야기를 무시한 사이 얀은 팔과 다리에 묶인 족쇄를 테이프처럼 아주 간단하게 벗겨냈다. 서걱서걱 그러자 진짜 가위처럼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며 얼굴이 훤하게 드러났고, 가려져 있던 사이 얀의 얼굴이 보였다. ‘전적을 알고 있으면 아름답게 보기는 글렀지.’ 교심동에 근신 처분을 받기 전에 저질렀던 사건이나, 이후 일곱 영지중 하나인 ‘투신지회’의 주인이 되어 저지르게 될 행동이나 결코 정상인이라 보긴 어렵다. “오늘부로 천무궁 나갈 테니까, 그렇게 처리해줘.” 짧게 이야기한 사이 얀은 그대로 김진혁을 따라 대련장 아래로 내려왔고 분위기가 오묘하게 변했다. “당장 이리로…” “자자. 복잡해질 거 같은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일단 대련부터 마저 끝내죠.” 량 진의 말을 잘라먹은 강유식은 냉큼 대련장 위로 올라선 다음 내려다보았다. “아니면, 기권패로 하고 이대로 끝낼까요?” “…” 강유식의 이야기에 량 진이 눈매를 일그러트렸고, 바 윤파와 짧게 시선을 교환하더니 곧바로 대련장 위로 올라섰다. “후회하게 될 거다.” “그런 말 자주 들어요.” 목을 풀어준 강유식이 량 진을 바라보며 목을 풀었다. “한 번도 이뤄진 적도 없고.” “…” 눈동자가 차갑게 식은 량 진이 말없이 검을 뽑았고, 강유식 역시 챙기고 올라온 검을 뽑아 자세를 잡았다. ‘기세가 꽤 날카롭네.’ 중견 A급 헌터와 견줘도 부족함이 없을 훌륭한 모습. ‘조금 긴장되는데.’ 전문분야가 아닌 거로 싸운다니까 대단한 일이 아닌데도 사뭇 긴장된다. 게다가 저쪽이 노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대련을 핑계 삼아 목을 치는 건…불가능하겠지.’ 한무진도 있고 라오 창도 지켜보고 있으니 량 진의 실력으로 대련 도중 목을 노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잠깐. 대련을 본다?’ 불현듯 떠오른 이야기에 강유식의 머리가 번뜩였다. ‘그리고 내 마법실력을 확인하려는 이유가 천군과 관련되어있다면…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야.’ 머릿속에 떠오른 가설에 강유식이 흥미로워하고 있을 때. 그 기색을 읽은 량 진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나를 눈앞에 두고 여유를 보인다고…?’ 아직 본격적으로 격돌을 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무기를 뽑아 겨누고 있는 상태. 언제 어떻게 전투 상황으로 번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저런 여유를
보인다니! ‘그렇다면…그럴 마음이 들도록 해주지.’ 검을 쥔 량 진의 자세가 바뀌었고, 그에 맞춰서 기세가 일변한다. 후우웅 주변의 공기를 짓누르는 무시무시한 압박감.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문하생들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 저건 뭐지?” “몰라. 처음 보는 자세인데…?” 량 진과 함께 활동해온 문하생들조차 처음 보는 자세. 그 모습을 본 청룡단주 바 윤파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량 진님. 그건…” 이곳에서 펼쳐서는 안 되는 비전검법. ‘승패가 결정되기 전까지 섣불리 개입하지 마시오.’ 바 윤파가 수상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한 라오 창이 그 앞길을 막았고, 그 사이 량 진의 기세가 더욱더 날카롭게 갈고 닦아졌다. ‘저건…’ 량 진의 자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에 강유식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던 그 순간. 후웅 대련장 위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안 돼!’ 저대로라면 량 진의
검에 강유식이 죽는다! 카앙─ 강유식의 검이 턱 아래서 치솟아 올라온 검을 막아냈다. “…뭐?” 자신의 공격이 막혔다는 것에 놀랐고, 검법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고가 멈췄다. ‘이천화류二天化流.’ 김진혁에게서 징수한 S급 스킬. ‘스트림 체인지Stream Change.’ 이병호에게서 징수한 S급 스킬이 발동되었고, 검 끝으로 모이던 힘이 어느샌가 손바닥으로
옮겨졌다. 투웅 그 실낱같은 빈틈을 향해 일장을 내질러졌다. 콰아앙!! 량 진의 몸이 대련장 밖으로 튕겨 나가 벽에 부딪혔고, 그 모습에 모두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특히 그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한 바 윤파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저 검법을 처음 본 상태에서 파훼하다니…’ 자오 신쿠의 성취가 조금 부족하다고는 해도 비전검법의 특성상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마 백천검주의 검법이 갑자기 나올 줄은…’ 처음 본 이들은 그 정체도 깨닫지 못하고 죽는다 하여 일견탈혼一見奪魂이라고도 불리는 일검. 강유식이 그것을 막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자신의 목을 날릴 뻔했던 검법과 다시 마주하게 된 강유식이 오싹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콰앙! 대련장의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역시 보고 있었구만.’ 아마 어떤 방법을 사용해 대련을 엿보다가 자신이 백천검주의 검법을 피한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달려온 것이리라. “…량 진.” “예, 예!” 자오 신쿠의 서늘한 부름에 벽에 부딪혀서 꿈틀거리던 량 진이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서 부복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해봐라.” 마치 이 모든 상황을 몰랐다는 듯한 물음. 그 모습에 량 진은 입술을 꾹 깨물다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제가 강유식 생도를 도발하여 친선대련을 유도한 뒤 패배했습니다.” 량 진의 대답에 자오 신쿠가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다 차가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량 진은 오늘부로 교심동에서 1년 근신. 그리고 7성으로 강등하겠다.” 자오 신쿠의 선언에 대련장의 이들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고, 바 윤파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구, 궁주님! 그건 너무…” “청룡단주. 지금 당장 량 진을 교심동으로 이송하시오.” 단호한 자오 신쿠의 이야기에 바 윤파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바 윤파는 쓰러진 량 진을 부축하여 대련장 밖으로 나갔고 상황을 빠르게 정리한 자오 신쿠는 강유식을 돌아보았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구구절절한 변명도 없이 깔끔한 사과. “제가 제자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거듭해서 사과하는 자오 신쿠의 모습에 강유식은 묘한 눈으로 그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아예 몰랐다는 식으로 간다는 건가.’ 이번 대련은 어디까지나 제자의 폭주. 그렇기에 본인이 상황을 정리하고 트러블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예…뭐, 그렇군요…” 강유식의 애매한 대답에 분위기가 살짝 싸늘해졌다.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했으면 합니다만.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죠. 아, 그전에…” 김진혁 옆에 붙어있는 사이 얀을 힐끔 본 강유식이 자오 신쿠에게 물었다. “방금 천무궁에서 자퇴하신 저분이 제 친구와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가시겠다고 하셔서요. 잠깐 저희 숙소에서 머무르게 해도 될까요?” “…” 사이 얀을 바라본 자오 신쿠는 두 눈을 번뜩였지만, 그녀는 눈짓하나 주지 않고 김진혁만 살펴보고 있었다. “예. 그렇게 하시지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선생님. 손님은 잘 부탁드릴게요.” “오냐.” 깔끔하게 사이 얀을 받아낸 강유식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오 신쿠를 바라보았다. “그럼 갈까요.” * 라오 창을 대동한 채 천무궁주실로 자리를 옮긴 강유식은 소파에 앉아 그를 마주 보았다. “앞서 제자의 불찰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는 자오 신쿠의 모습에 강유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젊은 혈기에 그럴 수도 있는 거죠. 거기에 어른스럽게 대응하지 못한 제가 더 잘못이 큽니다.” 이제 17살인 강유식이 20대 중반인 량 진을 두고 그렇게 말하는 게 상당히 기묘한 그림이었지만, 자오 신쿠는 그에 이질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교심동에서 근신 중인 문하생까지 이끌고 친선대련에 임한 것은 큰 잘못입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꼭 책임을 묻겠습니다.” 계속해서 사과하는 자오 신쿠의 모습에 강유식은 살짝 의외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생각보다도 저자세로 나오는데…?’ 그냥 몇 번 사과만 하고 끝내리라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까지 나오는가. 그 이해할 수 없는 모습에 강유식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저…그런데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예?” “마지막에 제 제자가 펼친 일검. 기억하십니까?” 자오 신쿠의 물음에 강유식의 눈이 번뜩였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기억합니다.” “…” 강유식의 대답에 한참 고민하던 자오 신쿠는 그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그 검을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있으신 겁니까?” 자오 신쿠의 물음에 강유식은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달았다. ‘과연. 자오 신쿠가 보고 놀란 건 처음부터 그거였나.’ 량 진이 펼친 백천검주의 비전검법. ‘무를 추구하는 데 있어 외도를 걷는 것을 경멸하진 않는다. 다만 납득하지 못할 뿐.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다시 도전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재앙급 마인의 목을 쳐내면서 무심하게 중얼거리던 괴물 같은 노인네. ‘백천검주는 외도, 불로불사를 납득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제자인 자오 신쿠는 자신이 불로불사를 연구하는 천군을 지원한다는 사실이 혹시라도 알려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밖에서 기다려주실래요?” “알겠습니다.” 라오 창이 나가자 자오 신쿠가 더욱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강유식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괴물 같은 노인네가 무섭다 이거지.’ 어떤 의미에서 이해가 가기도 한다. ‘자. 여기서 뭐라 한다.’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강유식은 백천검주라는 인간을 연구한 적이 있었다. “앞서 말씀하신 검술에 대해 대답해드리자면…” 자오 신쿠를 바라본 강유식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잠시 스승으로 모셨던 분께 전수받았습니다.” 훗날 백천검주와 진짜 마주하게 된다고 해도 문제가 없을 수준. 그 이야기에 자오 신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스, 스승님이요?” 위엄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 주특기는 아니지만(5) > 끝 < 세상에 이런 착한 사람이 어디 있나(1) > 노인네의 일과는 간단했다. 후웅! 힘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검. 검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문외한이라도 알아볼 수 있는 아득한 경지. “징하구만…” 하루에 1초도 어긋남 없이 진행되는 일과. ‘놓치는 일이 없어서 좋기는 한데 말이지…’ 그래도 이렇게 잠이 안 와서 지켜볼 때는 지루하기 그지없다. 심심한 표정을 지으며 담뱃재를 주변 풀에 튀지 않도록 조심히 털고 있을 때. “나오거라.” 검을 휘두르던 노인네, 백천검주가 검을 멈췄다. 우드득! 콰득! 3m는 족히 되는 키와 달리 수수깡처럼 가늘고 길게 쭉쭉 뻗어 있는 육체.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웠지만 냉정하게 보면 완전 변이에 가까운
상태. [나는 투신지회鬪神支會의 18위 하오 쉔. 백천검주. 네놈의 목을 취하러 왔다.] 가늘면서도 불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백천검주는 무심하게 하오 쉔이라는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외도外道를 걸었구나.” [강해지는데 있어 옳고 그른 것이 어디 있단 말이냐! 적을 죽이고 살아남는 자가 옳은 것이다!] 카앙! 뭔가 찔리는 거라도 있었는지 버럭 소리를 내지른 하오 쉔이 양 손바닥에서 뼈로 추정되는 새하얀 검을 뽑아냈다. “그 말이 옳다.” 티잉 검 끝에서 울리는 청아한 검명劍鳴. “그러니 너는 틀린 것이다.” 반으로 갈라진 몸이 뒤로 쓰러졌다. 쿠웅! 시체가 바닥에
널브러지며 한 발짝 늦게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백천검주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강하긴 더럽게 강하구만…’ 아마 저 무관심한 태도도 저만한 강함이 있기에 뒷받침되기 때문일 것이다. “저걸 뭘 어떻게 하란 건지…” 때려 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 일어나고 있을 때. 둔해 빠진 자신의 감각으로도 느껴질 만큼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치워라.” 세상 편하게 사는 인류 최강을 따라다니기 위해 내건 조건. 잡일담당인 자신의 역할을 떠올리며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빨았고. “인생 시발.” 삽질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 “…” 강유식이 백천검주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는 사이. 자오 신쿠는 스승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더니 완전히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이러면 내가 치고 들어가야겠네.’ 너무 오래 뜸을 들여도 좋을 건 없다. 머릿속으로 대강 구도를 짠 강유식은 곧바로 자오 신쿠에게 물었다. “저도 몇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예? 아, 예. 말씀하십시오.” “량 진 문하생은 천무궁주님의 직전제자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그러면 오늘 대련에서 사용된 그 검법은 천무궁주님이 전수하신 겁니까?” 피하고 싶었던 주제를 정확히 찌르고 들어오자 자오 신쿠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자신이 질문한 시점에서 수습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검법의 창안자이신 스승님께 전수받은 검법입니다.” 생각보다 쉽게 인정하는 자오 신쿠의 모습에 강유식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그러면 혹시 그 스승님이란 분이 백천白天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검을 들고 다니셨습니까?” “…예. 맞습니다.” 대답하는 자오 신쿠의 표정에서 체념이 깃들었다. “사제가 인사 올리겠습니다. 사형!” 강유식의 깍듯한 인사에 자오 신쿠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리 깍듯하게 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스승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시지 않으셨다면 그런 관계를 원치 않으셨다는 뜻일테니…” “그래도 같은 스승 아래서 가르침을 받은 사이가 아닙니까. 무심하신 분이어도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으니 부디 사형이라 부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래. 편한 대로 하게. 사제.” 속으로 한숨을 삼킨 자오 신쿠는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천군의 존재를…내가 그들을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절대 알려지면 안 된다.’ 백천검주에게 검법을 배우는데 필요한 것은 두 가지. ‘뒤탈 없이 죽이는 건…아니, 그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감당도 안 되고 오히려 스승의 이목만 모으게 될 터.’ 결국 자오 신쿠에게 남은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일단 이렇게 만나서 반가웠네 사제. 갑작스러운 만남이기도 하고, 제자가 불미스러운 일을 벌인 직후라 이래저래 어수선하니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럼…” 고개를 꾸벅인 강유식이 순순히 나가려 하자 자오 신쿠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순간. “아. 그러고 보니 사형.” 강유식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스승님과 한 맹세. 기억하고 계십니까?” “물론이지.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 태연하게 대답하는, 그래서 더 위축된 것 같은 자오 신쿠의 모습에 강유식이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아뇨. 별다른 일은 아닙니다만…마지막으로 떠나시기 전에 중국에 있는 제자 중 한 명에게서 외도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말씀하셔서요.” 강유식의 이야기에 자오 신쿠의 목에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지만, 필사적으로 그 변화를 꾹 눌러 참았다. “사형께서 잊지 않으셨다고 하니 마음이 놓이네요. 그럼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자오 신쿠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긴 강유식은 그대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제 와서…돌이킬 수는 없다.’ 이 국가의 권력을 틀어쥐기 위해서라도, 더 나아가 자신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천군과의 관계는 유지해야 한다. “그래…돌이킬 수 없어.” 그렇게 자오 신쿠는 자신을 세뇌하듯이 중얼거렸고, 오랫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 두 번째 친선대련이 끝난 뒤. “사이 얀이 교심동 밖으로 나갔다던데?” “아니. 들어보니까 그냥 천무궁 자체를 나갔나 봐.” “어. 그럼 뭐 어디 다른 길드에 들어간 건가?” “소문으로는 성진 쪽으로 전학을 하러 간다고…”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한때 천무궁을 대표했던 유망주이자 지금도 차기 S급 헌터로 추측되는 사이 얀. “나도 제자로 받아줘!” 또 다른 유망주인 바오 린센이 천무궁을 자퇴하고 강유식을 찾아왔다. “제자?” 타오 페이에게 배정받은 태허문의 방 안에서 사자정화를 연구하고 있던 강유식은 종이를 내려놓고 바라보았다. “내가 왜?” “나도 그 이병호란 놈처럼 강해지고 싶으니깐!” 직설적이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모습. 알기 쉬운 바오 린센의 모습에 강유식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바라보았다. “그럼 나한테 뭘 줄 수 있는데?” “뭘 원하는데?” 강해질 수만 있다면 뭐든지 지불할 수 있다는 듯한 태도. 회귀 전에 소문으로 들은 것과 큰 차이 없는 그 모습에 강유식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조건을 달지.” “조건?” “그래. 교류회가 끝날 때까지 병호한테서 3번 이겨. 그러면 네가 원하는 대로 매우 강해질 기회를 줄게.” “못하면?” 바오 린센의 물음에 강유식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 조금 강해질 기회를 먼저 받는 거지.” 강유식의 대답에 바오 린센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결국 둘 다 좋은 거 아냐?” 보통 이럴 때는 한쪽은 그냥 꽝이 아니던가. 이해를 못 하는 바오 린센의 모습에 강유식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자퇴하고 달려온 사람한테 이 정도 기회는 줘야지.” “너…생각보다 좋은 녀석이었네.” 신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바오 린센의 모습에 강유식이 피식 웃었다. “아무렴 어때. 어쨌든 그런 조건이니까 병호한테 가봐. 참고로 도전기회는 하루에 두 번씩이야.” “좋아. 내일 안에 끝내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자신만만하게 소리친 바오 린센이 밖으로 달려나갔고, 그 뒷모습을 본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기겠지.’ 지난번과 같은 상태라면 바오 린센도 재능이 있으니 뇌신초래의 약점을 알아차리고 이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페르스발의 연산에 라오 창의 조언까지 더해서 찾아낸 약점들이니까.’ 하지만 타고난 재능이 있으니 이병호와 대련을 치르면서 약점이 보완해
이전보다 강해질 터. ‘단순히 강해지고만 싶은 애들은 강해지게 만들어주면 끝이니까 이게 참 편해.’ 바오 린센에 관한 일을 간단하게 해결한 강유식은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사이 얀은 김진혁의 값어치를 직접 깨닫게 만들기 위해 뜸을 들이고 있었고, 대련 이후로 자신에게 흥미로는 보이는 한무진도 점차 알아가고 있었다. ‘저쪽에서 먼저 움직이지 않을까 싶었는데…생각보다도 더 위축된 모양이야.’ 가장 좋은 것을 어설프게 자신을 정리하려다가 덜미를 잡히는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그냥 조용히 보내는 쪽을 선택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혼자서 압박을 들어가는 건 좀 그런데.’ 가능하면 자오 신쿠가 천군과 협력한 사실이나 증거를 가지고 있을
타오 페이와 힘을 합쳐 압박하는 게 좋다. ‘자오 신쿠를 압박하는 거에 동행시키기에는 조금 부족하단 말이지…’ 타오 페이의 입장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협력하고 있는 모두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끌어들일 수 있는 확실한 카드가 있어야 해.’ 그리고 타오 페이에게 있어 그런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알 것 같은데 묘하게 모르겠단 말이지.’ 거의 다 풀어둔 매듭을 입으로 푼다고 끙끙거리는 것 같은 느낌. 며칠 동안 고생해서 적어둔 술식을 한참 바라보던 강유식은 그대로 구겨서 태워버렸다. ‘이건 아니야.’ 대부분의 사람은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구상과 계산을 끝낸 다음 술식을 만들기 시작한다. ‘일단은 내 식대로 한다.’ 남이 알아보기 쉽고 말고는 나중에 생각한다. ‘요는 상대에게 적용된 술법을 무효화시키는 것.’ 문제는 그 효능이 인간을 불로불사로 만들 만큼 강력한 술법에도 통할 정도로 강한 간섭력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흑련개화.’ 현실에 대한 간섭력이라면 여기에 비할 게 없다. ‘좀 더 효율적이게, 그리고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도록.’ 점점 세부적인 목표를 잡아가며 술식의 구조가 압축되었고, 사용되는 종이의 양도 줄어갔다. “강유식님…” 돌아갈 시간이 되어 방문을 연 라오 창은 한참 집중하고 있는 강유식을 발견하고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저 나이에 저런 집중력이라니…’ 강유식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라오 창은 다시 문을 닫고 나가 다른 사람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입구를 지켰다. “후우…” 압축하고 압축해서 완성된 술식은 총 8장. ‘발동도 되고…남은 건 원하는 효과가 나왔냐는 건가?’ 이걸 어떻게 확인해볼지 고민하던 강유식은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뭐야…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야…? 아직 잠에 덜 깬 것인지 가라앉은 반혜영의 목소리. 그 대답에 강유식은 곧장 손에 들린 종이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새로 만들어본 술식이 있거든요. 한 번 훑어봐 주실 수 있나 해서요.” -그래? 으음…지금 좀 졸린데…일단 대충 한 번 볼 테니까 락 걸어둔 다음에 보내봐. “알겠어요.” 강유식은 곧장 반혜영만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계산식에 적용한 다음 팩스를 사용해 보냈다. ‘대충 보신다 했으니까 금방 대답 듣기는 힘들겠지.’ 일단 한숨 자기로 한 강유식은 술식이 적힌 종이를 챙긴 다음 호텔로 돌아갔다. [채무자 ‘반혜영’의 빚이 증가합니다.] “…음?” 갑자기 떠오른 알림창. [야, 야 이 미친놈아 뭘 만든 거야!!] 반혜영의 외침이 요정의 속삭임으로 울려 퍼졌다. < 세상에 이런 착한 사람이 어디 있나(1) > 끝< 세상에 이런 착한 사람이 어디 있나(2) > 우우웅 천군의 연구실 깊은 곳에 위치한 특수 폐쇄동. “으윽…” 방 전체를 가득 채운 정화의 기운이 중앙에 누워있는 창백한 인상의 사내, 천군의 연구소장 룽청의 몸에 스며들었다. 파캉! 쇠사슬이 부서지며 검은 구슬이 룽청의 몸으로 다시 스며들었고 동시에 주변에 놓인 물건 중 절반 이상이 파괴되며 공명도 끊어졌다. “룽청. 의식은 있나?” “으윽…예.” 룽청이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연구원들이 곧장 그 곁으로 다가가 잡아주었고, 흑후가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효과는?” 흑후의 물음에 룽청은 곧장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우웅 손끝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각. “다시 사용이 가능해졌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흑후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룽청도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래. 해결되었다니 다행이군. 연구는 이틀 동안 요양한 다음 다시 진행하도록.” “알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흑후는 그대로 수행원과 함께 밖으로 나갔고, 룽청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에 멍청한 놈들밖에 없어서 살았군.’ 만약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흑후는 자신을 치료하는 대신 처리하고 새로운 연구소장을 임명했을 것이다. “이만한 설비를 들여서 겨우 해제할 수 있는 저주라니. 스님 출신이라더니 완전 땡중새끼구만…”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린 룽청은 곧장 옷을 바로 한 다음 연구원들을 바라보았다. “이틀 동안 밖에서 쉬다 올 테니까 관리 철저하게 해둬.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연구원들의 대답을 들은 룽청은 며칠 만에 특수 폐쇄동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촤르륵 그리고 그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희미한 쇠사슬 소리가 울려 퍼졌다. * 태허문의 지하 실기장. 우우웅 강유식이 타오 페이와 타오 란의 앞에서 새롭게 만들어낸 술식을 펼치고 있었다. “…” “…” 눈앞에서 펼쳐지는 변화에 타오 페이는 입을 떡 벌렸고, 타오 란은 평상시의 무표정한 얼굴이 깨져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이건…불가능해…’ 1세대 헌터로 치열한 전장을 헤쳐나오며 수많은 일을 겪은 타오 페이.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수많은 이들을 감탄시킨 타오 란. 촤라라락 특수한 문양으로 이뤄진 원이 하늘로 떠올라 강유식을 중심에 두고 이리저리 회전한다. “시작해주세요.” “아, 알았다. 란.” “예.” 강유식의 신호에 두 사람이 일제히 부적을 꺼내 사방으로 날렸고, 그와 동시에 실기장 곳곳에
수십 가지의 술법들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파앙 그 신호에 맞춰 주변을 회전하고 있는 문양들이 각각 빛을 발하며 더욱더 빠르게 회전했고, 동시에 수십 개의 마력 파장이 흩뿌려졌다. 파스스슥 실기장 내부에 펼쳐진 모든 술법이 빛을 잃으며 해제되었고 그 모습에 타오 페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정말로 저걸 모두 해제하다니…’ 방금 펼친 술법 중에는 사자정화의 완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특별히 만든 ‘해제가 까다롭기만 한’ 술법도 섞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죠.” “…알겠다. 란. 물러서거라.” 타오 란이 실기장의 구석까지 물러섰고, 그 거리를 확인한 타오 페이는 그대로 펑퍼짐한 소매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지고 온 팔괘로를 꺼냈다. “시작하마.” 우우웅 타오 페이가 팔괘로에 마력을 집어넣자 바닥에 거대한 태극이 나타났고, 외곽에 팔괘의 문양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와라!” 전력을 다해 팔괘로를 발동한 타오 페이의 모습에 강유식은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술식을 움직였다. 후웅 태극과 팔괘의
흐름을 해석하며 주변의 원들이 회전했고, 이윽고 강렬한 빛과 함께 오색으로 빛나는 영롱한 파장이 솟구쳤다. 파앙─ 충격파와 함께 태극과 팔괘의 빛이 사라졌다. “후우…” 펼쳐진 술식을 거둬들인 강유식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역시 아직은 미숙하네.’ 효과 자체는 의도한 대로지만 효율이 많이 떨어진다. ‘그래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알 것 같으니 이건 금방 고칠 수 있겠지.’ 팔괘로를 상쇄하면서 일어났던 변화를 강유식이 곱씹고 있을 때. 타오 페이가 맞은편으로 다가왔다. “아, 어떠셨어요?” “어땠냐고?” 그런 엄청난 짓을 해놓고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다니. 쓴웃음을 지은 타오 페이는 자신의 손에 들린 팔괘로를 힐끗 보다 그대로 던졌다. “앗.” 공중으로 떠오른 팔괘로가 자연스레 강유식의 손안으로 들어왔고, 후련한 미소를 지은 타오 페이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 네 거다.” [채무자 ‘타오 페이’의 빚이 증가합니다.] [채무자 ‘타오 페이’의 채무등급이 A급으로 상승합니다. 징수목록이 추가됩니다.] 드디어 채무등급이 A급까지 올랐고, 팔괘로도 손에 들어왔다. 사자정화의 완성을 인정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강유식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네 덕분의 훗날의 재앙을 대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타오 페이의 모습에 강유식은 기회가 왔음을 깨닫고 바라보았다. “혹시 어르신이 말씀하신 재앙은 천군이 개발 중인 불로불사인 겁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타오 페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 놀라기는 했지만 의심이나 두려움은 없는 반응. “너 정도면 백련문주도 욕심을 낼 만하기는 하지…나도 조금만 더 실력이 좋았으면 제자가 되라고 꼬드겼을 테니까.” “지금도 충분하신걸요.” “입에 발린 소리는…그보다 그거 반혜영은 알고 있냐?” 타오 페이의 물음에 강유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일단은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군…녀석도 그리 여유롭지는 않구만…”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던 타오 페이는 표정을 가다듬고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너희들은 뭔가 알아내거나 계획 중인 게 있냐?” “지금은 천무궁주가 수상해서 그의 뒤를 캐고 있습니다.” “과연…그 녀석에 대해서도 감을 잡았나.”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모습에 강유식의 눈이 번뜩였다. “혹시 천무궁주가 천군에 협력하고 있다는 증거 같은 거 있으십니까?” “아니. 아쉽지만 그런 건 없다.” “으음. 그래요?” “그래. 있었으면 진작 백천검주한테 넘겼지.” 아무래도 자오 신쿠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보니 꼬리의 흔적조차 남겨두지 않은 모양이다. ‘협력을 구할 수는 있는데 문제는 기회네.’ 발뺌할 자오 신쿠를 몰아넣을 결정적인 단서가 없을까. 강유식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촤르르륵 검지의 끝으로 쇠사슬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 늦은 새벽. “헉…헉…!” 완전히 겁에 질린 듯 창백한 얼굴과 거칠어진 숨. ‘아니야.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흥분할 이유가 없다. [맹세를 어겼구나…] [외도를 걸었느냐…] [목을 거두어가겠다…] 무미건조한 스승의 목소리가 스산한 바람소리에 같이 들려왔다. 이 모든 것이 환청이라는 것을 알지만 자오 신쿠는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파스슥 “흐억…!”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처럼 보이는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고, 자오 신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허리춤의 검을 반사적으로 뽑아냈다. “후우…후우…”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바라보던 자오 신쿠는 숨을 고르고는 사진 뒤에 적혀있던 장소로 다시 향했다. “늦으셨군요. 사형.” 뒤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 강유식…” 적의와 두려움이 뒤섞인 자오 신쿠의 부름에 강유식은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벌써 검을 뽑으셨군요. 사제의 목을 취해 이야기를 묻으시려 한 것입니까?” “아, 아닙니다. 이건…그저…” 검을 뽑은 이유에 대해 변명하려던 자오 신쿠는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사형. 짧은 만남이었지만, 저는 천무궁주이신 사형을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단순히 사회적인 지위가 아니라,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시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사형께서는 절대로 저질러서는 안 될 과오를 저지르셨더군요.” 품에서 사진을 꺼낸 강유식은 그것을
앞으로 내밀었다. “…” 그 사진을 본 자오 신쿠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저게 스승님에게 넘어가버린다면…’ 백천검주의 성격상 당장 성벽을 베어서라도 확인할 것이고, 연구소로 이어진 통로는 아주 간단하게 발견할 터. ‘일단…일단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러면 입구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 정도는…’ 이런 경우는 이전부터 대비해왔기에 이 상황을 넘길 수 있기만 하면 된다. “사제.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자오 신쿠가 필사적으로 상황을 넘기려던 순간. 그 말이 끝나는 것보다도 먼저 강유식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쿠웅! 나무 위에서 떨어진 한 사내. “룽청…” 천군의 연구소장. “이자가 모든 것을 실토했습니다. 방금 보여드린 사진 역시 숲 주변에 쳐져 있는 술법진을 해제하고 찍은 것이지요.” “…” “아직 제게 하실 말씀이 남았습니까?” 강유식의 물음에 자오 신쿠가 이빨을 꽉 깨물었고, 이내 두 눈을 번뜩이며 노려보았다. “사제. 자네가 선택한 길일세.” 검을 움켜쥔 자오 신쿠가 살기를 흩뿌렸고, 적의를 드러낸 그 모습에 강유식이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멍청하기는.’ 자오 신쿠는 죽여서 입을 막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 같지만, 사실 이건 최악의 선택이다. ‘물론 진짜 제자는 아니라서 안 오겠지만.’ 아무튼 제자라는 상황을 가정한다면 틀린 선택. ‘내가 못 그러게 흔들어둬서 그런 거지만 말이야.’ 백련환몽을 응용한 환상과 환청으로 정신을 흔들어놓았고, 계속해서 몰아붙여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부와 권력은 수단일 뿐. 진짜 목표는 따로 있다.’ 아직 그 진짜 목표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경우에 따라서 장기말로 사용하기에는 충분하다. “확보하죠.” 그리고 묶여있던 룽청이 새하얀 유성으로 화했다. 콰앙! 우렁찬 진각과 함께 내질러진 룽청, 백련환몽으로 모습을 속인 라오 창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졌다. 키이잉! 백천검주에게 전수받은 비전검법. ‘어리석은.’ 라오 창은 이미 그 검법을 본 적이 있었다. 파캉─! “커헉!” 새하얀 유성처럼 쏘아진 붕권이 검을 부수고 자오 신쿠의 복부를 후려갈겼고, 그대로 그의 의식이 끊어졌다. 쿠웅! 바닥에 널브러져 혼절한 자오 신쿠를 뒤에서 바라본 강유식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데려가죠.” < 세상에 이런 착한 사람이 어디 있나(2) > 끝 천무궁주 자오 신쿠. ‘고위간부의 혼외자식. 백천검주의 아들이나 손자. 죽은 친구의 자손 등등…가져다 붙일 수 있는 건 다 가져다 붙였지.’ 여러 추측과 이야기가 돌았지만 결국 밝혀진 것은 없었다. 우우웅 강유식은 그 단서를 찾기 위해 자오 신쿠의 머리를 헤집고 있었다. “으윽…”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내는 것에 강하게 저항하는 모습. ‘정면돌파는 힘들고…역시 우회적으로 가야 하나.’ 흑련개화가 범용성이 상당히 좋아서 기억을 엿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 그쪽은 까다로운 모양이다. 사라락 태허문 지하의 숨겨진 방이 숲의 공터로 변했고 강유식의 몸에도 희미한 이질감이 감돌았다. “됐나?” 간단한 응용법이기는 하지만 A급 헌터를 완벽히 속여야 하는 것인 만큼 긴장될 수밖에 없다. “…흐억!”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튕겨나듯이 일어선 자오 신쿠. “스, 스승님…” 눈을 마주친 것뿐인데도 새하얗게 질린 표정. ‘이건 됐다…!’ 가짜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여기서부터는 쉽다. “외도를 걸었느냐.” “그, 그건…저는…” 꿈인지 현실인지 파악할 생각도 못 하고 당황하는 자오 신쿠. 그 모습에 강유식은 과거에 질리도록 관찰했던 백천검주의 성격을 떠올렸다. ‘모든 일에 무관심하고 원리원칙대로 움직인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즉시 자오 신쿠의 목을 베어야 하지 않겠느냐, 할 수도 있지만 강유식이 알고 있는 백천검주는 조금 달랐다. “말하거라.” “…” “외도를 걸은 이유가 무엇이냐.” 강유식의 물음에 자오 신쿠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만약 여기서 자신의 목을 베려고 했다면, 차라리 그랬다면 꿈이었구나 하고 편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어째서…’ 하지만 백천검주는 자신에게 ‘이유’를 물었다. “저는…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앞에 백천검주가 진짜라고 믿게 된 자오 신쿠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표정으로 천천히 대답했다. “형제들의 육신이 처참하게 비틀어져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던 그 모습이, 그 끔찍한 광경이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 “스승님. 그날 저에게 말씀하셨지요. 지나간 일에 얽매이지 말라고, 검을 들어 새로운 길을 걸으라고.” 백천검주를 바라본 자오 신쿠가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검 한 자루만으로는 걸을 수 없는 길이…검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적도 존재합니다. 어찌 그걸 모르시는 겁니까.”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고 검을 가르쳐주며 새롭게 살아갈 길을 만들어준 은인. ‘구구절절 맞는 소리 해놓고 왜 울상이야?’ 세상만사 모든 일이 검으로만 해결이 됐다면 사회는 진작 상위등급 헌터들에게 지배당하는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적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베어낼 수 있을 때까지 휘두르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금은 백천검주를 연기하고 있었기에 강유식은 그 성격을 고려하여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스승님이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와 달리 충분히 가능하실 분이니까요…” 담담하게 중얼거린 자오 신쿠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천군의 실험동에서 탈출하여 천무궁주의 자리에 올랐던 오늘까지…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스승님의 자비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자오 신쿠의 이야기에 강유식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바로 잡을 기회를 주셨지만…외도로 추락한 이 몸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쓴웃음을 지은 자오 신쿠는 조용히 강유식을 응시했다. “베풀어주신 목숨과 은혜. 직접 거두어가 주십시오.” “…” 각오를 다진 자오 신쿠의 모습에 강유식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방금 대화로 들어야 할 것은 모두 들었다. “어찌하여 외도를 걸었느냐. 그 질문에 너는 힘이 부족하다 대답하였다.” “…” “그러나 그것은 틀린 대답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자오 신쿠의 모습에 강유식은 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는 편한 길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그, 그런…저는…” “맹세를 어기고, 은혜를 배반하고, 호의를 거절하여 보다 쉬운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강유식의 힐난에 자오 신쿠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정녕 검으로는 걸을 수 없는 길이었느냐?” “…” 목 뒤로 겨눠지는 검에 자오 신쿠가 고개를 숙였다. “…예.” 그리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저도…그리고 스승님 역시 검만으로는 그들을 상대할 수 없을 겁니다!” 확신이 서린 자오 신쿠의 대답에 강유식은 속으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찾아라.” “…예?”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자오 신쿠의 모습에 강유식이 조용히 응시했다. “나는 외도를 걷지 말라 했지 검의 길만 걸으라고 말한 적은 없다.” “하, 하지만 그런 길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느냐?” “…” 할 말을 잃은 자오 신쿠의 모습에 강유식은 뽑아 든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찾아라. 그리고 찾지 못해 또다시 외도로 돌아간다면, 그때야말로 네 목을 거두어가겠다.” “스승님…” “그러니 이제 일어나 거라.” 그 말과 동시에 강유식은 곧장 흑련개화를 사용해 자오 신쿠의 의식을 재빠르게 제압했다. “후우…” 마력을 상당히 소모한 강유식은 살짝 숨을 고른 다음 입구를 바라보았다. “들어오세요.” 강유식의 부름에 밖에서 대기 중이던 타오 페이와 라오 창이 안으로 들어왔다. “다 끝났냐?” “예. 얼추 다 됐습니다.” “그래서…뭔가 좀 알아낸 것 같아?” 타오 페이의 물음에 강유식이 슬쩍 웃었다.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죠. 일단 자리부터 옮겨요. 일화단주님.” “예.” 라오 창에게 기절한 자오 신쿠를 넘겨준 강유식은 지하에 마련된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 황급히 일어나던 전과 달리 자오 신쿠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태허문주와 일화단주…” 두 사람의 얼굴을 본 자오 신쿠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내가 알기로는 태허문과 백련 길드 사이의 협력관계는 없었을 터…사제. 자네가 한 일인가?” 자오 신쿠의 물음에 강유식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목적이 같아 힘을 합치자고 했습니다.” “…무슨 목적이지?” “천군을 쓰러트리는 것.” 강유식의 대답에 자오 신쿠의 두 눈이 흔들렸다. ‘대단하군…’ 목적이 같다고 해서 태허문과 백련 길드 같은 대형 집단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제가 저들을 묶어낼 만큼 강력한 힘을 지녔다는 것인가.’ 만약 자신이라면 두 세력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을까. 아마 그러고 싶었어도 저들이 천군에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새로운 길인가…’ 단순한 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나타났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제.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어떻게 해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강유식의 질문에 자오 신쿠는 잠시 조용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과거 천군에서 진행한 강화 인간의 실험체였네.” 어렴풋이 예상한 내용이었기에 강유식은 담담히 들었고, 뒤에 선 타오 페이와 라오 창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체실험이라니…” “설마 정말로 진행했었을 줄은…” 그런 소문과 이야기가 돌기는 했지만 설마 수십 년 전부터 이뤄지고 있었을 줄이야. “실험체들은 국가에 신분이 등록되어있지 않은 흑해자黑孩子들로 이뤄져 있었고, 주로 다룬 내용은 상위등급 헌터의 유전자 이식. 상위등급 헌터의 양산이 목표였지.” 뒤세계에서 오랫동안 성행했던 연구로 한때는 효과가 있다는 식으로 알려졌었다. ‘그게 유행하던 시기였었나 보구만.’ 어째서 자오 신쿠가 천군에게 적의를 가졌는지 확실하게 이해한 강유식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사형께서 그들과 손을 잡은 것은 복수를 위해서였습니까?” “그랬었지. 국가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한 세력. 그들의 내부로 숨어드는 게 아니라면 절대로 상대할 수 없었을 것 같으니까.” 씁쓸하게 중얼거린 자오 신쿠는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결과가 결국 이렇군. 아마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번이고 죽었겠지.” “죽지 않았습니다만.” “그렇지. 자네가 내게 기회를 주었으니까.” 침대에서 일어선 자오 신쿠가 강유식의 앞에 섰다. “맹세를 어긴 대가는 모든 일이 끝난 뒤 직접 치르겠네. 그러니 사제…아니, 강유식님.” 천천히 몸을 숙인 자오 신쿠는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부디…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진심이 담긴 자오 신쿠의 부탁에 타오 페이와 라오 창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강유식은 담담히 응시했다. “고개를 드세요.” “…” “사형. 이래 봐야 사제가 난처할 뿐입니다.” “스승님을 배반한 이상 더 이상 그분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개의치 말아주십시오.” 물론 그럴 생각이다. “천무궁주님께서 그렇게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래도 우선은 고개를 들어주시지요.” 슬쩍 웃은 강유식이 어깨를 힘 있게 잡아주었다. “앞으로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제야 자오 신쿠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고, 강유식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가 기회를 드리고 말고를 이야기하는 게 조금은 어색하지만…그래도 감히 말해보겠습니다.” 숨을 고른 강유식은 확신이 담긴 표정을 지었다. “천군은 무너질 것이고, 그 주동자는 우리들의 눈앞에 무릎 꿇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천무궁주님께 드리는 기회는…” 살짝 뜸을 들인 강유식이 자오 신쿠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을 쳐낼 기회입니다.” 뭐든지 동기부여는 확실하게 해주는 것이 좋다. “감사합니다…!”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자오 신쿠’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A급으로 판정합니다.] 이걸로 백련 길드에 더불어 천무궁 전체까지 손에 얹었다. ‘회귀 전에는 아마 자오 신쿠 혼자서 천군을 처리했을 수도 있을 테니까.’ 물론 그 당시 행동을 보면 불로불사에 눈이 돌아가서 반쯤 천군이나 다름없는 놈이 된 듯하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자신이 살아있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자. 이제 우울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지금부터는 건설적인 이야기나 하죠.” “건설적인 이야기라면…?” 의아한 표정을 지은 자오 신쿠의 모습에 강유식이 입꼬리를 올렸다. “불로불사의 대법 만들기요.” < 세상에 이런 착한 사람이 어디 있나(3) > 끝 천무궁과 성진 사이의 충동, 사이 얀과 바오 린센의 자퇴 등 두 학교 간의 큰 다툼이 일어날 거라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쯧.” 그리고 한 사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더니…시시하긴.’ 오랜만에 재미난 일이라도 보는 가 했더니 역시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럴 시간에 연구에나 전념하면 좋을 텐데…천군도 쓸데없이 신중하단 말이지.’ 여러 사태를 대비해 만들어둔 위조 신분. ‘애초에 중국에서 천군을 건드릴 녀석들이 누가 있다고…’ 연구에 파격적인 지원을 해주는 건 나쁘지 않지만 이렇게 쓸데없이 신중해서 번거롭게 만드는 건 불만스럽다. ‘연구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렇게 주절거리는 건지. 이래서 윗대가리들은 싫단 말이야.’ 한참 푸념을 하며 룽청이 업무를 보고 있을 때.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굽니까?” “나다.” 퉁명스러운 물음에 돌아오는 짧은 대답. “문주님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네게 맡길 일이 있어서 왔다.” “…할당된 업무 이외에는 맡지 않겠다고 말씀드린 걸로 기억합니다만.” 여느 교육기관이든 자신의 연구나 수련을 지원받기 위해 교사로 들어온 헌터들도 꽤 있었고, 룽청의 역시
그런 신분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나도 하기 싫다는 놈을 억지로 시키고 싶지는 않다만…교류회 사정상 어쩔 수 없어.” “교류회라면…성진의 생도입니까?” “그래.” 타오 페이의 대답에 룽청이 눈매를 찌푸렸다. “그런 일이라면 다른 교사들에게 맡겨도…” “다른 교사들을 다 훑었거든. 이제 남은 건 너뿐이야.” “예?” 태허문에 있는 교사가 몇 명이나 되는데 그들을 벌써 다 훑었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훑었다는 게 무슨 뜻이야?’ 룽청이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타오 페이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강유식이라면 들어봤겠지?” “아…그 마법의 핵을 개발한?” “그래. 그놈이 부탁해서 다른 교사들하고 토론을 할 자리를 마련해줬는데…너 빼고 다 끝났다.” “다 끝났다는 건 교육이 끝났다는 겁니까?” 룽청의 물음에 타오 페이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교육이 끝났다고 해야 할지…오히려 교육을 받은 셈이지.” 타오 페이의 이야기에 룽청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쓸데없이 뭔가를 외우는 게 취미가 아니라면 그만큼 모든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나다는 뜻일 텐데…’ 희대의 천재인 아크메이지를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과장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강유식이라면 저도 흥미는 있으니까요.” “그래. 이쪽으로 보낼 테니까 혹시라도 실례되는 행동은 하지 마라.” 룽청에게 주의한 타오 페이는 그대로 떠났고, 잠시 후 강유식이 방으로 찾아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유식이라고 합니다.” “룽청일세. 들어오게.” “실례하겠습니다.” 안으로 들어온 강유식은 주변을 살펴보았고, 룽청은 그 모습을 차분히 살펴보았다. ‘확실히 일반 생도라고 하기에는 범상치 않군…’ 품고 있는 마력도 마력이지만 근골 역시 예사롭지 않다. 인간의 신체에 박식한 룽청이었기에 강유식이 지니고 있는 잠재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확실하게 보였다. ‘이런 녀석을 실험대로 삼으면…’ 보기 힘든 실험대에 룽청의 눈이 번뜩이던 그때. 문득 한 손에 들려있는 서류철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뭔가?” “아. 룽청 선생님과 토론할 때 보여드리려고 준비한 자료들입니다.” “나와 토론할 자료라면…생명마법을?” 룽청의 물음에 강유식이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식이 많지 않아 조금 엉성합니다만…그래도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는 실력을 확실하게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서 작성해봤습니다.” “호오. 봐도 되겠나?” “물론이죠.” 강유식은 흔쾌히 서류를 넘겼고 룽청은 그것을 받아들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급하게 만들었으니 그다지 특별한 건 없겠지만…’ 그래도 그 유명한 천재가 만들었으니 뭔가 다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룽청은 아주 약간의 기대를 담아 서류를 넘겨 훑어보았다. ‘흐음. 엉성하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구만. 이렇게 기초적인 부분부터 틀려서야…쯧.’ 어느 정도 구실은 하지만 세밀하게 보면 틀린 부분들이 너무 많다. 그래도 관점이나 주제는 꽤 흥미로웠기에 룽청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계속 넘겨보았다. ‘생명력을 외부에 보관? 무슨 말도 안 되는…잠깐. 마법의 핵을 통해 본체와 연결고리를 만들어 유지한다고?’ 처음에는 오답 체크를 하는 느낌으로 보았지만, 어느새 룽청은 강유식이 펼쳐놓은 지식에 홀린 듯이 서류를 넘겼다. ‘이건…어쩌면 잘만 가다듬으면 불로불사의 연구에도…’ 자신의 손안에 있는 서류가 얼마나 비범한 물건인지 깨달은 룽청이 두 눈을 빛내던 순간. “선생님?” “아, 음. 무슨 일인가?” “읽으시고 아무런 말씀이 없으셔서…혹시 별로셨습니까?” “그게…” 서류를 힐끔 본 룽청은 잠시 고민하더니 진중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확실히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군. 고쳐야 할 곳이 한둘이 아니야.” “역시 그렇군요…” 살짝 의기소침해진 강유식의 모습에 룽청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자네만 괜찮다면 부족한 부분들을 내가 고쳐주겠네. 혼자서 하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정말입니까?” “모처럼 준비한 자료니 나도 이 정도는 해줘야지. 어떤가?” 은근한 룽청의 물음에 강유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죠.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오늘은 일단 전체적으로 훑어볼 테니 내일 다시 찾아오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강유식이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그 뒷모습을 본 룽청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재능이 뛰어나도 멍청하면 답이 없구만…’ 이래서 연구만 잘하는 녀석들은 크게 되지를 못하는 것이다. 강유식을 비웃은 룽청은 곧장 서류의 남은 부분까지 읽어보았다. ‘역시 발상은 하나는…음?’ 서류를 살펴보던 룽청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고, 그다음 장을 넘겼을 때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거다. 이게 바로…’ 아직 투박하기 그지없지만, 조금만 가다듬는다면 불로불사의 영역에 충분히 닿을 수 있다! ‘만약 이게 천군 측에 알려져 강유식을 영입하게 된다면…’ 불로불사의 연구는 지금보다 몇 배나 빨라지겠지만 대신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건…나만이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서류의 잠재력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자신만큼 생명마법에 정통한 사람이거나, 아크메이지 같은 괴물밖에 없을 터. ‘그래도 기본기를 연습하는 데는 도움이 될 테니 이 정도면 적절한 거래지.’ 아예 모른 척 꿀꺽하는 것보다야 훨씬 양심적이다. 그리고 애초에 혼자 연구했다고 해도 이 술식에 숨겨진 잠재력을 완전히 끌어냈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은가? [채무관계 조건을 만족합니다] [채무자 ‘룽청’의 등록을 확인, 채무등급을 C급으로 판정합니다.] 나름대로 채무가 완성되었다. “와. 저 새끼 양심없네…” 그 과정을 모두 살펴보고 있던 강유식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 새끼는 스킬이나 스탯 뺏기도 뭐 같네.’ 희희낙락하면서 자료를 뺏기고 있는 룽청의 모습에 강유식은 아니꼽게 바라보다 문득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이 정도 수준이면…’ [채무자 ‘룽청’ 강제집행에 들어갑니다. 상태이상 ‘강박증’.] [채무자 ‘룽청’ 강제집행에 들어갑니다. 상태이상 ‘열등감’.] [채무자 ‘룽청’의 채무가 모두 납부되었습니다.] “윽…” 화면 너머로 룽청이 눈매를 살짝 찌푸렸고, 이내 고개를 신경질적으로 휘젓더니 다시 서류를 옮겨 적기 시작했다. ‘저런 놈들은 이게 딱이지.’ 본래 상태이상은 일정 시간만 적용되지만, 몇몇 효과들은 상황과 성격을 잘 이용하면 영구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 ‘뭐. 그래도 타고난 능력이 있으니 연구는 그럭저럭 진행하려나.’ 리 메이와 타오 페이. 그리고 반혜영에게도 조금씩 조언을 들어가며 만들어낸 불로불사의 대법, 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교묘한 술법. ‘그리고 해당 재료들의 유통을 통해서 천군의 다른 아지트도 알아보고…’ 여러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낸 교묘한 술법. ‘이 정도면 여기서 할 일은 끝냈나.’ 가능하면 천군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싶지만, 그건 좀 더 신중하게 봐야 한다. ‘게다가…그 배후가 흑룡천주면 더더욱 그렇지.’ 자오 신쿠에게서 들은 천군의 실질적인 지배자, 흑후에 대해서 떠올린 강유식이 눈매를 찌푸렸다. ‘마석 암시장 다루고 있던 건 정말 새발의 피였구만…’ 당시에는 그게 핵심사업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사업체 중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겠어.’ 과거 흑룡천주와 연관 있을 거라 추측되었던 길드나 국가, 그리고 뒤세계의 집단들도 철저하게 조사해봐야 할 것 같다. ‘뭐가 됐든 이번은 여기서 끝이야.’ 하지만 다음에 다시 찾아올 때는 중국에 천군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한 강유식은 떠날 채비를 갖추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 교류회의 일정이 모두 끝난 뒤 베이징 공항. “미리 말해두길 잘했군요. 설마 입국할 때보다 사람이 더 늘어날 줄은…” “그러게요. 저도 조금 놀랐어요.” 주변 인파를 바라보던 자오 신쿠는 뒤편에서 김진혁의 옆에 서 있는 사이 얀을 슬쩍 보고는 강유식을 바라보았다. “사매…아니 사이 얀 문하생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직 미숙한 아이라…”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런 부류의 사람들은 익숙하니까요.” 아직 채무관계는 못 만들었지만 견적 뽑는 거야 예삿일도 아니다. 미소를 지어 안심시켜준 강유식은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게 슬쩍 신호를 보냈다. “강유식 생도. 우리 천무궁으로 이적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공개된 장소에서 터져 나온 발언에 주변에 몰린 기자들과 인파의 시선이 한데 모였고, 자오 신쿠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천무궁으로 이적만 해주신다면 S급 아이템…아니, 스킬북도 지급할 용의가 있습니다.” 자오 신쿠의 선언에 공항 전체가 술렁였다. “죄송하지만…제 생각에 변화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만약에라도 생각이 바뀌신다면 꼭 연락해주십시오.” 자오 신쿠가 고개를 살짝 숙였고, 강유식은 겉으로 담담한 표정을 지으면서 속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걸로 S급 스킬북 두 개.’ 현물이 없어도 그와 비슷한
값어치를 뜯어낼 수 있다. “등골 빠지겠군…” 천무궁 측을 뒤로한 강유식은 옆에서 서 있던 리 메이와 라오 창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일화단주님.” “아닙니다. 제가 한 것이 뭐가 있다고…” “호위가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저랑 같이 다니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라오 창이 또 고개를 깊이 숙이려 하자 그보다 먼저 강유식이 오른손을 뻗었다. “마지막은 이걸로 하죠.” 강유식의 예상치 못한 악수 요청에 라오 창은 잠시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맞잡았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아마 금방 보게 될 것이다. 한국에 정말 소중한 사람이 머물러 있을 테니까. “모처럼 찾아와주셨는데 제대로 대접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미안한 표정을 짓는 리 메이의 모습에 강유식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쩔 수 없죠. 오히려 저 때문에 신경 쓰이신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이네요.” 실제로는 마법을 만드느라 종종 얼굴을 봤지만, 강유식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럴 리가요. 오히려 힘이 되어주셨죠.” 강유식은 어디까지나 연기였지만, 리 메이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나 자신이 너무 한심스럽구나…’ 저 여유로움 뒤에 숨어있을 초조함을 생각하며 리 메이는 모든 것을 맡겨버린 자신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다. “리 메이님.” “네, 네?” “다시 못 보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슬퍼하시면 오히려 제가 곤란합니다.” 사전에 이야기를 맞춰둔 대로 리 메이의 양손을 잡은 강유식은 여러 뜻을 담아 이야기했다. “웃으세요. 그게 보기 좋아요.” 나름대로 일이 다 잘 풀렸는데 울상을 지을 이유가 뭐가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쪽이 더 친해 보이고 그림이 좋다. “네. 그럴게요.” 이걸로 백련 길드의 S급 헌터 두 사람과 인연이 깊어졌다는 것도 잘 보여줬으니 모든 목적을 이뤘다. 꾸욱 “음?” 떨어져 나가려는 손을 역으로 붙잡는 리 메이의 손. 꽈악 리 메이가 강유식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허어…” “저, 저건…” “뭘 보고만 있어. 찍어!” 사방에서 셔터 소리가 마구잡이로 울려 퍼졌고, 자신에게 안긴 리 메이의 모습에 강유식의 사고가 잠시 멈췄다. “저…그…” 이게 도대체 뭔가 싶은 강유식이 물어보려 하자 리 메이가 먼저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이 정도면…깊은 사이처럼 보이겠죠?” “그, 그렇…죠?” 강유식의 대답에 고개를 뒤로 뺀 리 메이는 나긋하면서도 묘하게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이네요.” 그걸로 만족한 듯 리 메이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공항 밖으로 걸어 나갔고, 강유식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웃으란 말도 함부로 하면 안 되겠다.’ 한발 늦은 깨달음이었다. < 세상에 이런 착한 사람이 어디 있나(4)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