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우리 자신의 정신도 알지 못하는가

제3부 결과
 
제13장그리스도인의 적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 에베소서 6:12
 
  이제 당신은 결단을 내렸다. 이제 당신은 거듭난 것이다. 이제 당신은 회심했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바 되었다. 이제 당신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인가? 이것이 전부란 말인가? 다만 한순간의 결단으로 모든 것이 끝이란 말인가? “나에게 다른 책임은 없는가?” 하고 당신은 물을 것이다.
  그렇다. 당신은 이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막 시작하였다. 당신은 이제 새로운 세계, 영적인 세계에 막 태어났다. 모든 것이 전혀 새로워 보인다. 당신은 사실 영적인 갓난 아기가 된 것이다. 당신에게는 사랑과 보호와 영양과 돌봄이 필요하다. 양육이 필요하고 보호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도저히 혼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가 없다. 당신에게는 도움이 필요하고 교제가 필요하다.
  아마 당신은 당신에게 적(들)이 있다는 것을 이미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당신을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패배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이라도 써야 직성이 풀리는 악랄하고 위험한 적들이다. 결심한 지 몇 분이 못 되어 당신은 이들 적들이 이미 활동하기 시작했음을 발견할 것이다. 어떤 죄를 범하도록 유혹을 받았거나, 낙담되고 실망되는 순간을 경험할 것이다. 물론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한 직후에는, 모든 것이 감격스러워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약진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의심과 문제, 의문, 시험, 실망과 좌절, 그리고 어려움 같은 것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경은, 당신이 사는 날 동안 세 가지 원수(적)가 당신을 대항하여 싸울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당신은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적들을 단호히 격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먼저, 우리가 직면해서 싸워야 하는 적들이 어떠한 것들 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적의 정체를 밝혀 그들이 무엇을 하며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번째 적은 마귀the Devil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유혹하는 강력한 인격체임을 살펴보았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마귀를 물리쳤지만, 마귀는 아직도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성경에서는 그를 “악한 자"(마 13:19), "더러운 귀신"(눅 4:33), "살인한 자”(요 8:44),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요 8:44), “삼킬 자를 찾아 헤매는 너희 대적”(벧전 5:8), “큰 용”,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계 12:9-10)라고 부르고 있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하는 순간, 마귀는 패배를 당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 노할 대로 노해 있다. 지금부터 그는 당신을 유혹하여 죄로 유인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것은 없다. 마귀가 당신에게서 구원을 탈취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는 당신으로부터 확신과 승리를 빼앗을 수도 없다. 다만 그는 당신의 마음속에 의심의 씨를 집어넣으려고 갖은 힘을 다할 것이다. 당신은 마귀와 논쟁을 벌일 수 없다. 왜냐하면 마귀는 인류 역사상 최고가는 변론가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유혹과 함께 시험의 순간이 왔다. 감정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감정(느낌)이라는 것은 회오리바람 속의 바람개비처럼 항상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귀가 다음으로 자주 쓰는 방법은, 당신을 교만하게 하고 스스로 중요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당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과 포부와 목표에 자신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또 어떤 때는 당신의 마음속에 증오심을 불어 넣을 것이다. 그는 당신으로 하여금 남에게 불친절하고 격한 말을 하도록 유인할 것이다. 그는 당신의 마음속에 시기심과 불만과 악의를 넣어줄 것이다. 또 어떤 때는 당신으로 거짓말을 하게 만들 것이며, 당신은 종종 자신이 위선자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거짓말은 모든 죄 중에 가장 악독한 죄의 하나로서, 우리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거짓말을 범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속일 의도로 행하는 것은 모두가 거짓말이다. 마귀는 당신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기 위하여 갖은 수단을 다 쓸 것이다. 그는 또한 당신을 유인하여 다른 사람을 죄로 유혹하게 만들 것이며, 그럼으로써 다른 그리스도인 친구들을 타락시키려 할 것이다. 만일 조심스레 행하지 않으면, 당신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의 수중에서 이용당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힘이 있고, 화술이 능란하고, 지능적이고, 간사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세상 신”(고후 4:4), “세상 임금”(요 12:31),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엡 2:2)라고 불리고 있다.
  당신은 “어떻게 마귀를 이겨낼 수 있습니까?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어느 쪽으로 돌아서야 할까요?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하나님께서는 이 구절에서 피할 길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셨다. 마귀의 시험이나 유혹은 당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뜻하는 신호가 아니다. 이 한 가지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잊지 말라. 사실 마귀의 시험은 당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임을 뜻하는 것이다. 시험받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을 시험하시는 일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로 의심을 품게 하는 일이 없다. 모든 의심과 시험은 마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또한 사탄이 하는 일은 시험하는 일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라. 사탄이 당신을 강요하여 시험에 넘어가게 하는 일은 없다. 사탄은 이미 그리스도에 의하여 정복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 완전히 주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마귀의 힘은 무력한 것이다.
  성경에서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에 앞서, “하나님께 순복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만일 당신이 온전히 순복하고 그리스도께 100퍼센트 완전히 자신을 맡기고 있다면, 당신은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마귀가 도망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마귀는 당신이 기도할 때, 두려워 떨 것이다. 당신이 성경 말씀 중의 한 구절을 읽어주거나 인용하면 그는 패배를 면치 못할 것이며, 당신이 그를 대적할 때 그는 마치 끓는 물벼락을 맞은 개 처럼 달아날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당신은 하루 24시간 줄곧 마귀로 하여금 도망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의 둘째 대적은 세상the world이다. 세상은 이 세상 조직을 뜻한다. 세상은 우리를 죄 가운데로 유인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즉 마귀는 우리를 나쁜 친구나, 향락, 유행, 의견 또는 세상적인 포부로 유인하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거듭난 체험 가운데서, 당신이 좋아하던 향락이 완전히 새롭고 영광스러운 차원으로 변화된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많은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일련의 규칙과 금기이며,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는 조항으로 가득 차 있다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이것은 마귀의 또 다른 거짓말이다. 그리스도의 생활은 “하지 말라”don’ts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하라”dos는 말로 이루어져 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일로 바쁘고 그리스도의 일로 완전히 만족하기 때문에 세상 것에 한눈팔고 있을 시간이 없다.
  가령 내가 훌륭한 비후스테이크를 시켜 먹은 후에, 어떤 사람이 빵 조각을 접시에 하나 가득 담아가지고 와서 먹으라고 권한다면 나는 “배가 불러서 못먹겠다”고 거절할 것이 아닌가!
  갓 태어난 그리스도인이여, 비결은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일로 충만해 있고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쏟고 있으므로, 이 세상 쾌락에 마음을 돌릴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worldliness이라는 말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너무나 큰 오해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이 말의 뜻을 여기서 좀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아마 이것은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경험이 부족한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는 가장 곤란한 문제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그리피스 토마스 박사Dr. Griffith Thomas는 말한다.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는 그 자체가 죄악된 것이 아니지만, 잘못 남용하면 죄로 인도할 경향이 있는 요소들이 있다. 남용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일정한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합법적인 것을 지나치게 사용함으로써 죄가 되는 것이다. 쾌락이라는 것은 합법적으로 분수에 맞게 쓰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를 남용하면 유익하지 못하고 불법이 되는 것이다. 야망은 참된 인격자에게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그러나 야망은 합법적이고 유익한 대상을 향해야 하며, 적절히 분수에 맞게 쓰여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 직업이나, 독서나, 의상, 교제와 같은 생활 국면은 모두 정당하고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곧 비합법적이고 불필요하고 유해한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생활 필수품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쉽게 근심 걱정으로 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비유하신 대로, 이 세상 생활에 대한 염려가 우리 마음속에 뿌려진 영적인 씨를 질식시켜 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돈을 버는 것은 우리의 일상 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만, 돈을 버는 것이 돈을 사랑하는 것으로 전락할 수가 있으며, 재산의 유혹이 우리의 영적 생활에 침투하여 신앙 생활을 망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속적인 것, 세상적이라는 말은 어느 특정한 부류나, 행동, 환경에 한정될 수 없고, 따라서 한 가지를 꼬집어 이것은 영적인 것이고, 저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적인 것은 우리의 모든 생활과 인간 사회를 침투하는 하나의 정신이며 분위기이며 영향력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항상 끊임없이 경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고 했으며 또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 하에서는 이런 것들이 우리의 현대 생활 가운데 분간하기 곤란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와서 “이것은 잘못입니까?” “저것이 잘못입니까?” “이것이 죄입니까?” “저것이 죄입니까?”라고 묻는다. 그러나 한가지 질문만 진실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문해 보면 당신의 문제 중 99퍼센트는 해결될 것이다. 매번 “그리스도라면 나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실까?”하고 스스로 자문 자답해 보라. 또 한가지 당신이 자문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해서 주님의 축복을 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오락이나 취미, 내가 만나는 친구와 내가 읽은 책, 내가 즐기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생각하실까?” 우리는 여기서 타협할 수 없는 것이다. 또 값싼 흥정을 해서도 안 되겠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확실히 철저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에서 우월감을 갖거나 건방진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영적으로 교만해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적인 것보다 훨씬 더 악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많은 이들이 세상과 병행해서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인과 죄인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러한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
  그리스도인은 어두컴컴한 배경 앞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처럼 두드러진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건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균형이 잡히고, 교양미가 있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야 하지만,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판별할 때에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그는 미소를 짓고 화기에 찬 명랑한 사람이라야 하지만 세상이 그를 세상 수준으로까지 끌어내리도록 버려 두어서는 안 되겠다.
  성경은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고 했다. 또 성경에 서는 의심스럽게 생각하면서 그 일을 할 때에는 죄가 된다고 했다. 바꾸어 말해서, 확실히 명확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일체 손을 대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일에 대하여 의심스럽거든,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리고 세번째로 당신이 직면하게 될 대적은 육신의 정욕이다. 육신은 당신의 내적인 자아가 지니고 있는 악한 성향이다. 당신이 구원받은 후에도 당신의 옛 성품, 곧 죄의 성품은 다시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 당신은 놀라서 이런 것들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성경은 이 성품이, 그 모든 부패성물 버리지 않은 채 우리 안에 잔재해 있으며, 이 악한 유혹이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반역자가 우리 안에 내주內住하고 있는 것이다.” 죄로 인도하는 좋지 못한 경향이 항상 우리 속에서 우리를 땅 아래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다. 전쟁은 선포되었다! 당신은 이제 두 개의 성품이 갈등하며 싸우는 가운데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옛 성품과 새 성품은 서로 승리를 거두려고 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갈 5:17)라고 했다. 그것은 자아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생명과의 싸움이다. 이 옛 성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것은 변화될 수도 없고 기워서 수리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예수께서 죽으실 때에 하나님은 그의 죽음 속에 당신을 포함시켜서 이 옛 성품이 더 이상 작용할 수 없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당신은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롬 6:11)로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믿음에 의해서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선용과 악용, 즉 유익한 것과 유익하지 못한 것 사이를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한다. 표면에 나타나는 것 중에 어떤 것은 중죄重罪에 속하는 육욕과 같은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토마스 박사Dr. Thomas는 “육욕이라는 말의 본 뜻은 강한 욕심이지 반드시 죄에 속하는 욕망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육신의 생활 가운데는 동물 세계와 공통된 일정한 욕심, 즉 식욕과 갈증과 같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심은 동물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자연적인 것이고 죄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욕망을 남용하거나 악용할 때에 그것이 악하다는 것이다. 배고픔 즉 식욕은 자연스러운 욕심이다. 목마름 즉 갈증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런 욕구이다. 그러나 과음 과식은 죄에 속하는 욕구이다. 게으름은 죄된 습관이다. 결혼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으로서 인간의 본성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이치에 따르는 행위이다. 그러나 간음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며 우리의 깨끗한 몸과 마음에 어긋나는 죄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에는 그 자체부터가 죄의 속성을 지닌 관능적인 죄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우리의 증오심과 복수심을 채우고 싶은 욕구가 그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히 강한 욕심과 죄에 속하는 욕심을 주의 깊게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육신의 죄는 다른 어떤 죄보다도 무서운 죄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죄는 악을 행하고 싶은 우리의 본성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마귀도 세상도 그리고 우리 악한 마음도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우리의 동의와 의지의 허락이 없이는 죄를 범할 수 없다. 그런데 악한 성품이 그 무서운 힘과 악의 가능성을 지니고 침투해 들어오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라고 했다.
  바울은 육체를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고전 9:27)이라고 썼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양도하고 내어 맡김으로써 믿음에 의하여 우리의 옛 성품을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여길 수 있어야겠다.
 
  따라서 이상 열거한 세 가지, 즉 마귀와 세상과 육신이 우리의 적이다. 이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포기한다는 한마디 말로 축약할 수 있다. 여기에는 어떤 흥정이나 타협이나 주저가 있을 수 없다. 완전히 포기하는 것만이 승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쳐서 복종시킬 때에만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대해서는, 성경에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고 했다. 육신에 관해서는, 성경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고 훈계하고 있다.
  여기에, 이와 같은 유혹과 시험을 대항해서 이미 싸우고 있는 분들에게 기쁜 희소식이 있다. 당신은 혼자서 이 싸움에 임하지 않아도 좋다. 로마서 8장 13절에서 성경은, 당신이 성령으로써 육신의 행위를 죽일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이 한 가지 사실을 잊지 말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 삼위三位 중에 제 3위, 즉 보혜사라고 부르는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보혜사Comforter는 사실 “옆에서 돕는 자”라는 뜻이다. 이 분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실 분이시다(요 14:16).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겠다. 나는 너희에게 올 것이다. 나는 성령이라는 인격으로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다. 구약성경의 시대는 성부 하나님의 시대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였다. 이제 오순절 후로 우리는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성경은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님께서 당신의 영 안에 거처를 정한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당신의 몸은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고전 6:19)이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든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당신은 말한다. “그렇지만 저는 제 마음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하겠습니다. 제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심을 느끼지 못합니다.”
  감정(느낌)을 무시하라. 당신은 느낌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영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성령을 믿음에 의해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이라. 성령께서는 지금 이 순간, 당신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당신 안에 살아 계시다. 성령께서는 당신 안에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당신 안에 거하셔서, 당신으로 하여금 행복하고 활기에 찬 생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승리의 생활을 하도록 해주신다.
  성경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고 명령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성령으로 충만해 있다면, 당신은 성령의 열매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23)를 거둘 것이다. 성령 충만은 우리가 임의대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은 순종해야 할 명령이며, 이행해야 할 의무이다.
  당신은 어떻게 성령 충만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또 어떻게 충만할 수 있겠는가? 성령 충만은 우리가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감정적인 경험인가? 아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죄가 깨끗이 씻음을 받고 완전히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그 분이 당신의 전부를 장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 외에 아무도 없다. 사실 헌신은 복종, 즉 전체적이고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순종을 의미한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 :1).
  세상과 마귀와 육신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자는 성령에 충만해 있는 헌신된 그리스도인이다. 성령께서 당신을 위하여 싸워 주실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이것이 영적인 싸움이다.
  당신은 보통 무기로는 이상의 세 가지 적을 대항하여 싸울 수 없다. 우리가 성령의 통로가 되어서,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게 할 때에만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숨기지 말라. 그리스도로 하여금 당신의 생활에 완전한 주인이 되도록 하라.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13:13)고 하셨다.
  어느 날 매우 귀중한 꽃병을 가지고 놀던 어린 아이가 손을 꽃병에 집어넣어서 꺼낼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도 최선을 다해 보았지만 헛일이었다. 그들이 꽃병을 깨뜨리려고 할 때 아버지가 말했다. “자, 한 번만 더 해보자. 내가 하는 대로 손을 펴 손가락을 똑바로 뻗친 다음 빼도록 해 보아라.” 어린 아이가 말했다. “아이! 안 돼요. 아버지. 그렇게 손가락을 펴면 제 손에 있는 동전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당신은 아마 웃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다수는 이 어린 아이처럼 세상의 무가치한 동전에 애착을 가지고 놓지 않기 때문에 해방을 얻지 못하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 마음속에 잡고 있는 조그만 동전을 놓으라고 간청한다. 순복하라! 당신의 길을 버리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활을 주장하도록 하라.
 
  당신이 헌신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완전히 그리스도께 내맡긴 후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바친 것을 받아 주셨음을 잊지 말라.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믿음을 발휘한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은 주님께 나왔다. 이제 주님께서 당신을 받아주셨다. 이후로 당신은 완전히 헌신한 생활,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의 결과로 전에 알지 못했던 용기와 담력을 갖게 될 것이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만을 두려워할 뿐 다른 두려움을 알지 못한다. 다른 두려움은 즉시 사라질 것이다. 그는 초자연적인 용기와 담력으로써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취할 것이다. 만일 사도행전을 정독한다면 당신은 성령이 충만한 사도들이 “담대함boldness”이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담대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갖가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 속한 것임을 잊지 말라. 성령의 열매를 우리가 스스로 맺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초자연적인 성령의 열매는 당신의 생활을 날마다 새롭게 구별시켜 줄 것이며, 그것은 초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거기에는 사랑이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큰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라는 것이다. 당신은 인종이나 언어, 신조나 정치적인 배경을 초월하여 초자연적인 사랑으로 당신의 동료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분쟁과 시기와 싸움이 그치고 형제애가 당신의 생활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내적인 기쁨이다. 환경이야 어떻든 간에 그리스도인에게는 기쁨에 찬 마음과 밝은 미소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조금도 영광이 되지 못하는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을 만나든 간에 즉시 그가 승리의 생활, 즉 신령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주위 환경을 자고 명랑하게 해줄 수 있는 안정되고 만족한 생활을 해야 한다. 성경은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고 했다.
  다음으로 성령의 열매에는 평안이 있을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후 4:8, 9)고 했다. 이외에도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와 같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열매를 열거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열매를, 참으로 헌신하여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속에서 볼 수 있다.
 
  승리는 당신의 것이다. 승리, 그것은 당신의 생득권生得權이다. 당신에게는 한번이라도 더 패배를 경험할 이유가 없다. 당신은 진정 “깊고 넓게 그리고 멋있게” 살 수 있다. 제일 좋은 것은 당신의 것이다. 인생은 하나의 멋있는 그리고 영광에 넘치는 모험이 될 수 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것을 유감으로 여길 정도로 당신은 매일매일 매순간을 즐기면서 살 수 있다. 그리고 매일 매일을 새롭게 맞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새로운 하루는,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는 새로운 하루이기 때문이다. 하루 하루가 봉사할 수 있는 기회로 채워질 것이며, 하나님과 보낼 수 있는 시간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흥미진진한 하루하루를 살게 될 것이다.
 
 
 
 
제14장신앙생활의 규칙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누가복음 6 : 31
 
  당신이 차를 운전할 때, 운동 경기할 때, 아니면 과자를 구울 때 올바로 잘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계속적인 성장 과정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당신이 거듭났을 때, 당신은 신령한 세계로 태어난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가정에 갓난아기로 태어났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키가 자라고 성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목적하시는 바이다. 만일 당신이 갓난아기로 머물러 있고 조금도 자람이 없이 영적인 난쟁이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도 어긋나는 것이고 자연 법칙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성경은 베드로 후서 3장 18절에서 우리가 꾸준히 발전하고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지혜가 자라가는 것을 암시한다.
 
  올바로 자라기 위해서는 영적인 건강을 위해 필요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첫째로, 당신은 매일매일 성경을 읽어야 한다. 당신의 영적인 생명은 양식을 필요로 한다. 어떠한 양식인가? 영적인 양식이다. 이 영적인 양식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에서가 아니면 어디서 이러한 양식을 얻을 수 있겠는가? 성경은, 당신의 배고픈 영혼에 생명의 떡이 되시고, 당신의 갈증 나는 마음에 생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다.
  만일 이 영적인 양분을 매일 섭취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서서히 아사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며 영적인 생동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고 말했다. 읽고 상고하고 묵상하고 암기하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이 경험하게 될 문제의 95퍼센트는 그 원인이 성경을 읽고 상고하는 일을 게을리하는 데 있다.
  양심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한 장씩 읽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 적은 부분을 잘 소화하는 것이 긴 부분을 서둘러서 지나치는 것보다 훨씬 더 영적인 가치를 지닌다. 한꺼번에 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라. 쉬운 부분, 단순한 메시지를 먼저 읽도록 하라. 당신은 갓난 아이에게 첫날부터 쇠고기를 먹이지 않는다. 어린 아이는 젖을 먹어야 한다.
  나는 요한복음부터 읽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다. 읽어 나감에 따라서 성령께서 조금씩 깨달음을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어려운 말을 깨우쳐 주시고 모호한 의미를 명확하게 해주실 것이다. 비록 당신이 읽은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계속 읽어보라. 성경을 읽는 것 그 자체가 당신의 마음을 정결케 해주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매일 습관화하여 다른 일이 이 귀한 습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둘째로, 기도의 비결을 배우라. 이제 당신에게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계시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예수께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고 말씀하셨다. 교회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업적을 남기고 간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 없이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 너무나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무능력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시간을 기도로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때때로 산 위에 홀로 오르셔서 하나님 아버지와 영교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주님께서도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하겠는가!
  당신은 처음에는 더듬는 기도를 할 것이다. 당신은 어색한 말을 하고 조리 없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 안에 살아 계신 성령께서 당신을 도울 것이며 가르쳐 주실 것이다. 당신이 기도하는 모든 기도가 응답될 것이다. 때로는 기도의 응답이 부정적일 때도 있을 것이며, 또 어떤 때는 긍정적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이렇게든 저렇게든 응답되는 것이다.
  당신의 기도는 항상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로 조건을 삼아야 한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언제나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앞에 온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기 자녀들에게 제일 좋은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당신은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도랑을 파면서,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면서, 상점에서, 운동장에서‥‥‥‥당신은 기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다!
  체계적으로 기도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라. 성경 공부를 겸한 기도는 완전한 승리의 생활을 가능케 할 것이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권고하고 있다. 만일 하루 동안에 일정한 기도 시간을 정해 놓는다면, 기도 시간 사이사이에 당신의 무의식 세계는 기도로 채워질 것이다. 그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몇 마디 중얼거리는 것으로서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것들 제쳐놓고 오직 하나님과 조용한 대화를 갖는 시간을 정해야 한다.
  마귀가 언제나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이다. 마귀는 갓난아이를 울릴 것이며, 전화벨이 울리게 할 것이며, 문을 노크하게 하여 기도를 못하도록 방해할 것이다. 이외에도 많은 방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는 버릇을 기르자! 얼마 되지 않아 당신은 기도하는 시간이 당신의 생활 가운데 제일 기쁘고 즐거운 때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다른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시간을 고대하게 될 것이다. 매일매일 꾸준히 체계 있는 기도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생활은 메마름과 실망을 느낄 것이며,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내적인 평안을 결코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셋째로, 언제나 성령님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당신의 몸은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3위,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처소이다. 마치 하인이나 종에게 부탁하듯이 하나님께 도움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들어오셔서 일체를 다 주님께서 처리하시도록 간구하라. 주님께 당신의 생활을 점령하라고 간청하라. 주님께 당신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무력하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인가를 말씀드리라. 옆으로 비켜 서서 주님으로 하여금 생활의 모든 선택과 결정을 주장하도록 하라.
  자신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을 붙들어 주실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지탱하기 위하여 스스로 악전 고투, 열을 올린다면 성령님께서는 당신을 붙들어 주지 못할 것이다. 다만 주 안에서 편히 쉬면서 안식을 취하도록 하라. 마음속의 모든 긴장과 복잡한 고민을 버리라. 완전히 성령님을 의지하라. 중요한 결정을 놓고 초조해서 걱정하지 말고 주님께서 당신 대신에 모든 중요한 결정을 하시도록 하라. 내일을 위해서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내일의 하나님이시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자초지종을 다 보신다. 생활필수품을 위해서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말라.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마련해 주실 것이다.
  참으로 승리의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걱정과 내적인 갈등과 긴장감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완전히 성령께 의지하는 가운데 당신은 많은 심신의 병적인 요소가 자취를 감추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넷째로, 규칙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라. 요한 웨슬리는 “성경은 혼자서만 신앙심이 좋다고 하는 외로운 경건심에 대하여 아는 바 없다”고 했다. 기독교는 교제의 종교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사랑과 의와 봉사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것은 횡적인 교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는 교회 내에서 가능하다.
  교회는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기관이다. 교회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나누는 장소이다. 성경은 교회를 “거룩한 족속”,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권속”, “주님의 거룩한 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상은 모두 교회의 영적인 실재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쓰여진 비유와 상징과 묘사이다.
  다른 어떤 것도 교회 출석을 대치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날씨가 너무 춥거나 너무 더워서 교회에 갈 수 없다든가 눈이나 비가 너무 와서 못 가겠다는 둥의 경박한 핑계는 대지 않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에 집에 앉아서 조용히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아야 할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과 혼만을 지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몸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다 함께 하나님께 완전한 예배를 올려야 하는 것이다.
  또한, 집에서 방송 설교를 들으며 교회 예배를 대신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방송 설교를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당신은 설교를 듣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다른 성도들과의 교제 가운데서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는 것이다. 교제에 충실하지 않고는 성공적인 그리고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 자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봉사하라고 구원받은 것이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은 바쁜 그리스도인이다.
 
  다섯째로,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 만일 앞의 네 가지 규칙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이 다섯번째 규칙은 저절로 이행될 것이다. 왜냐하면 컵에 물을 계속 채운다면 물은 계속 흘러넘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은 왕 중의 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위임 발령을 받은 것이다. 당신은 대사관 위에 깃발을 높이 달아야 한다. 만일 소련 주재 미국 대사가 미국 국기가 소련에서는 인기가 없다고 해서 끌어내린다면 그는 본국으로 소환될 것이다. 그는 미국을 대표할 만한 사람이 못 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가정이나, 사무실이나, 상점이나, 당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깃발을 날리지 못한다면, 즉 당신의 일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할 의도가 없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당신은 태도를 분명히 취해야 하며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알게 해야 한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말과 생활, 이 두 가지 방법으로 전도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말과 생활 각각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가 구원받은 후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주님의 구원하는 능력과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결사대원이다. 또 그리스도를 위하여 소집이 있을 때는 즉각적으로 응할 수 있는 긴급 응소병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라고 말씀 하셨다. 사도행전 28장 23절은 우리들에게 흥미있는 장면을 제시하고 있다. 당시 로마에 팔려간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수에 관하여 사람들을 설복시키기에 바빴다. 우리 각 사람에 대해서도 “보라, 씨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갔다”고 말할 수 있어야겠다.
  전보 배달원에게는 독창성이 별로 허용되어 있지 않다. 그의 유일한 책임과 의무는 우체국에서 받은 전보 내용을 수취인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는 그 전보를 전달하고픈 마음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전보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될지 가슴 아픈 소식이 될지 알 수 없다. 그는 도중에 멈추어 봉투를 뜯어서 전보 내용을 다시 쓸 수 없다. 배달원의 임무는 전보를 전달하는 것뿐이다.
  우리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 있다. 우리의 총사령관께서 “가서, 죽어가는 세상에 이 메시지를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메시지를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메시지를 찢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말로 대치시키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중에서 일부분만을 취하여 내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사실은 예수께서 자기가 한 말을 그대로 의미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메시지가 그 진리의 본뜻을 오해하고 있는 범인들ordinary men에 의해서 쓰여졌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 세기 전에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만을 가르치라고 권고한 것을 기억해야겠다. 우리는 씨를 뿌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어떤 씨는 다져진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질지 모르지만, 어쨌든 계속 비를 뿌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어떤 땅에는 별로 소산이 없을 것 같아 보인다고 해서 씨뿌리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되겠다.
우리는 등불을 들고 있다. 우리는 이 등을 비치도록 해야겠다! 우리가 가진 빛이 캄캄한 세상에 반짝거리는 촛불같이 미미하게 보일지라도, 그 빛을 계속 발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우리는 나팔을 불고 있다. 전장의 폭음과 소음 속에 나팔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같이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계속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한다.
  우리는 불을 붙이고 있다. 증오심과 이기주의로 가득 차 있는 이 냉랭한 세상에 우리들의 조그만 불꽃이 별로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계속 불을 태워야 한다.
  우리는 망치로 때리고 있다. 그 일격을 가하는 것이 우리의 손을 저리게 할 뿐 아무런 힘도 나타내지 않는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망치질을 해야 한다.
  우리는 검을 쓰고 있다. 처음 한두 번은 헛찌르게 되고, 적을 깊숙이 찌르겠다는 우리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듯 싶더라도 우리는 계속 검을 휘둘러야 한다. 그것은 “성령의 검”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빵이 있다. 사람들은 다른 것을 먹기에 바빠서 생명의 떡을 받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생명의 떡을 사람들의 영혼에 제시하면서 계속 권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목말라 허덕이는 자들을 위한 물이 있다. 우리는 “목마른 사람은 다 이리로 와서 흡족하게 마시라!”고 소리쳐야 한다.
  우리는 참고 견뎌야 한다.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계속 말씀을 활용하라!
  예수께서는 당신이 뿌리는 씨는 옥토에 떨어져 열매를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의 마음과 입술에 있는 불이 어떤 냉랭한 마음에 성화星火의 불꽃을 점화시켜 그들을 거듭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망치가 단단한 마음을 깨뜨리고 그 마음으로 통회하게 만들고 끝내는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검은 죄의 갑옷을 깨뜨리고, 자기 만족과 교만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영 앞에 마음을 열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굻주린 남녀 영혼이 생명의 떡을 먹을 것이며, 갈증을 느껴 물을 찾아 헤매던 영혼이 생명수를 마실 것이다.
  영혼을 구하는 구령인救靈人이 되라. 우리 인간에게 알려져 있는 가장 감격스러운 경험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다. 수천 수만 명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특권이다. 나는 잃어졌던 영혼이 손을 내밀고 “저도 당신이 믿는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언제나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돈보다도 더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른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보다 더한 행복도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낭만적인 모험이라도 이 감격에 비교 할 수 없을 것이다. 구령자가 되라!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라!
  성경은 “지혜로운 자는 사람(영혼)을 얻느니라”(잠 11:30)고 했다. 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고 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마 5:13)이라고 했다. 소금은 사람으로 하여금 갈증을 느끼게 한다. 당신의 생활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수에 대하여 갈증을 느끼게 하는가?
 
  여섯째로, 사랑을 당신의 생활에 첫째가는 원리로 삼으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요한도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7-10).
  하나님께서 그 분의 자녀들에게 주신 모든 선물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다. 성령의 모든 열매 가운데 첫째도 사랑이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사랑을 주신다고 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첫째가는 증거는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신앙생활 초기에 일찍 이 하나님의 비결을 배운다면, 당신은 성숙하고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향하여 크게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일곱째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 당신의 생활 가운데 있는 모든 결정과 선택에 있어서 그리스도께 우선권을 드리라. 그리스도로 주인을 삼으라. 주님께서 당신의 배를 조종하시게 하라.
 
  여덟째로, 시험과 유혹을 이기는 법을 배우라. 우리가 이미 배운 대로 유혹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시험(유혹)은 죄가 아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시험하시는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시험당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시험은 마귀의 일이다. 시험이 올 때는, 마귀의 유혹인 줄 알라. 그리고 시험을 당할 때는, 그 시험하는 자에게 성경 구절을 인용하라. 그러면 마귀는 언제나 도망쳐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제대로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그 분의 유일한 힘의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예수께서는 세 번이나 “기록되었으되”라고 대답하셨다.
  당신이 마귀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면 그는 도망칠 것이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을 대신하여 싸울 수 있도록 하라. 어린 소녀가 “나는 마귀가 노크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예수님을 문으로 보낸다”고 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모든 사람에게 유혹이 따른다. 그러나 호감을 가지고 그것을 영접하는 이들이 있다. 빗자루로 생쥐를 쫓아보라. 그러면 당신은 생쥐가 빗자루를 주시하는 것이 아니고 들어갈 구멍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의 눈을 유혹에서부터 그리스도께로 옳기라!
  나는 육군 장교에게, 전쟁에서 부하들이 용기와 순종을 놓고 어느 쪽을 택하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 때 그는 거침없이 “순종”이라고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다른 무엇보다도 당신이 순종해줄 것을 원하고 있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이 명령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성경은 당신의 나침반이며 법전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순복하라!
 
  아흡째로, 건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라. “어떤 그리스도인은 너무나 천국에만 정신을 쏟고 있기 때문에 지상에 사는 인간으로서는 가치가 없다”고 어떤 사람이 말했는데, 과연 세상에는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다.
  물론 성경은 죄로부터의 분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가 비정상적으로 독특하게 나타나거나 부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기사답고, 예의가 바르고, 몸이 청결하고, 마음씨가 바르고, 안정되어 있어야 하며, 고상한 멋이 있어야 한다. 어리석은 장난이나 불건전한 잡담, 좋지 않은 대화, 유혹적인 오락 같은 것은 모든 면에선 피해야 한다.
  당신은 이상적인 신사가 되어야 하며 이상적인 숙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당신의 외모는 단정하고 깨끗하여 사람들을 끌 만한 모습이어야 한다. 스마트하게 고상한 멋을 잃지 않아야 하며, 극단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는 것이 좋다. 당신의 삶(생활)과 모습에서 복음을 권면해야 하며, 다른 이들로 하여금 복음에 매력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반하우스Banhouse 박사가 말한 대로, “사람들은 소가죽 복음서나 양가죽 복음서는 읽지 않을지 모르지만, 행동으로 나타나는 복음은 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열번째로, 환경을 극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있는 그대로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현재의 위치에 두셨다. 따라서 당신은 지금 있는 현재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제일 잘 섬길 수 있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담너머로 이웃만 넘겨다 보고 다른 사람들이 항상 자기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사람들은 사정이 달랐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공상하고, 어째서 현재의 사정이, 뜻하는 바와 같이 되지 못하는가 이유를 따지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비하기 때문에, 현재 위치에서 당장에 활용할 수 있는 기회와 이점을 놓치고 있다.
 “이 중에 어떤 것도 나를 움직이지 못했다”고 말한 사도 바울 같이 되라. 바울은 넉넉한 데 처할 줄도 알고 비천한 데 처하는 법도 배웠다고 했다. 그는 감옥에서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스도인이 되는 법을 배웠다. 당신의 환경 때문에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오히려 현재의 환경 속에서 안락하고 풍족하게 사는 법을 배우라.
 
  이상의 규칙들은 단순하게 보이고 하찮은 것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모두 지키도록 하라. 틀림없이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나는 위에 열거한 규칙이 수천 수만 명의 그리스도인들 생활에서 시험되는 것을 보아 왔다. 나는 이상의 규칙이 나 자신의 생활 속에 적용되는 것을 보았다. 바로 충실히 이행한다면 이상의 규칙은 당신에게 마음의 평안과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며, 당신은 만족하게 살아가는 생의 비결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제15장그리스도인과 교회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2:22
 
  인간은 나면서부터 사교성을 지니고 있는 사회적인 동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와 취미나 태도를 같이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최대의 만족감과 안정감을 발견한다. 그러나 인간이 집단생활을 시작하여 그룹을 형성하기 시작한 이래로, 많은 족속과 부족과 기구와 기관과 단체가 생겨났지만, 교회만큼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보편성을 지닌 집합체는 일찍이 없었다.
  원시 시대에는 사람들이 서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집단생활을 했다. 그리고 훨씬 후에는 서로의 이익과 쾌락을 도모하기 위하여 모이는 법을 알았다. 문명이 더욱 발달되면서, 비밀 단체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렇게 하여 단체에 가입한 회원은 비회원과는 구별되어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게 되었다. 특별한 서약이나 의식, 규약이 제정되었고 또 이러한 규약에 특별한 의의를 부여하였다.
  기원을 같이하거나 같은 깃발 아래 충성을 다하는 무리들은 인종적, 국가적 단체를 조직하였다. 컨트리 클럽, 대학생들의 갖가지 모임, 조합, 문예 써클, 정당, 군대의 각 조직 등 - 가장 세련된 “신사 클럽”에서부터 학생들의 오락 클럽에 이르기까지 모든 그룹이, 자기의 생활 방식을 인정하고 호응하는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는 가운데서 위안과 안정과 확신을 얻기를 원하는 인간의 욕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어느 단체활동 속에서도 교회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안정과 위로를 발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교회 이외의 단체들은 다분히 사람의 생각에 의하여 생겨난 조직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위적인 경계선을 그어 놓고 보호라는 환상의 벽을 그려 놓았다. 그러나 교회는 내부로부터 솟아나오는 생동적인 유대 관계가 있다. 교회는 외부 세계에 의존하여 그 생명력과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교회church”라는 말은 그리스어(헬라어) “에클레시아ecclesia”를 번역한 말로서 “불려나온 무리”, “선택된 사람들”또는 “사람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비록 교회는 기독교의 전용어처럼 되어 버렸지만, 이 말은 기독교 이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헬라어가 통용되던 세계에서는, 어디서나 이 “교회”라는 말은 자유도시 국가에 사는 시민들의 정기적인 집회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공동사업을 토론하고 결의하기 위해서 일정한 그룹의 시민들이 전령관에 의해서 소집되었던 것이다.
  교회라는 같은 말이 구약성경에서도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말로서 “회중congregation”이라고 번역되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모세를 “광야 교회”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할 때에 이 말을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1세기에는 교회가 희랍인들의 자치적인 민주주의 사회를 뜻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 구성원이 되어 있는 신권사회를 연상하게 했던 것이다.
  기독교 사회에서 현재 쓰이고 있는 의미로서의 교회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하신 것이 처음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교회를 세우셨다. 자신이 교회의 모퉁이 주춧돌이 되어서 그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바탕이 되시며 교회는 그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기”(고전 3:11)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교회의 건축자이며 창설자라고 천명하셨다. 교회는 그에게 속하는 것이며 그 분께만 속하는 것이다. 그는 교회의 구성원, 즉 그의 지체가 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 안에 살겠다고 약속하셨다. 여기에 세계 어느 곳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조직체 아닌 유기체로서의 교회의 특징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교회의 지체가 되는 일반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시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이 세계에 사실상 단 하나의 교회가 있지만, 각지의 지역적인 교회와 각종 교파와 단체와 협의회가 있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교파나 지역적인 교회는, 국가와 신학 노선의 차이점에 따라 갈라질 수 있고 각 교회 구성원들의 기질에 따라 분리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비록 교회 조직 내에 갖가지 분파와 구분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단 한분의 주가 계실 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찬송가 가사 대로 “교회의 참된 터는 우리 주 예수”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대우주 교회의 머리이시다. 모든 교회의 활동과 가르침은 주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체험의 원천이 되시기 때문이다.
  전기 공학이 발달된 시대라서 광범한 전화 조직을 예로 들면 쉽게 이해되리라 믿는다. 전신 전화 조직을 보면, 중앙에 중앙 전화국이 있어서 전화선이 이곳에 연결되어 있고 전화와 전화간의 접선도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철도망도 마찬가지다. 중앙에 철도국이 있어서 이곳에서 모든 기차 운행에 관한 지시가 하달되는 것이다. 군대에서도 한 명의 사령관이 자기 관할 하에 있는 지역의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그의 수하 부대장들은 그의 명령을 조금씩 다르게 해석할지 몰라도, 어디까지나 사령관의 명령이 그들의 행동의 기준이 된다.
  교회와 관련시켜 생각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총사령관의 위치에 계신 것이다. 그의 명령을 토대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며, 교회의 능력 그 자체도 그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교회 구성원은 최대한의 충성심을 발휘하여 그 분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사령관이 자기의 명령이 충실히 이행되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예수께서도 각 교회의 구성원이 자신의 가르침에 순복할 것을 기대하신다.
  교회는 교회 내부의 많은 논쟁과 갈등과 표면화된 불일치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순은 모두 피상적인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사령관의 명령을 조금씩 달리 해석하는 데선 빚어지는 갈등이지, 절대로 사령관의 지혜를 의심하거나 사령관의 절대적인 명령권을 좌우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여러 교파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신앙 신조를 연구해 보라. 당신은 그들이 근본적으로 역사적으로 동일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배 의식에 차이점이 드러나고 신학적인 조목에 있어서 조금도 양보하지 못할 것처럼 대립되고 있지만, 이들 교파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그 분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똑같이 인정하고 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전인류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당신은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일생을 주님의 손에 의탁했다. 따라서 당신은 유일한 세계 교회의 일원이 된 것이다. 당신은 믿음의 대가정의 한 식구로 등록되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 당신은 그리스도께 순종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께 순종한다면 주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신 대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역적인 표현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지금 우주적인 세계 교회를 논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지역적인 교회, 즉 많은 흠과 불완전성을 지닌 교회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일 가운데 완전이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만드는 기구는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도 똑같이 흠으로 차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지상을 거쳐간 유일한 완전인完全人이다. 예수님 외의 나머지 인간들은 아무리 그의 본을 따르려 할지라도 회개한 죄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 자체나 성도들에 대해서 완전무결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모르는 맹목적인 판단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셨을 때, 그 분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교회에 가입하여 끝까지 교회에 충실할 것을 의도하고 목적 하셨다. 만일 당신이 지금 아무 교회에도 속해 있지 않다면 당신은 당신을 받아줄 교회가 너무 많다는 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교회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당신은 자연히 어릴 때 나가던 교회로 돌아가고 싶거나 아니면 좀더 성숙한 영적 판단력에 따라 교회 선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교회 가입은 간단히 가볍게 다룰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가 당신에게 최대의 봉사를 베풀어 줄 것을 기대하고, 또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당신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제일 잘 섬길 수 있다고 생각되는 교회를 선정해야 할 것이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왜 이름을 달리하는 교파가 그리 많으냐고 비판적으로 덤비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언제나 각각의 남녀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스타일의 모자가 만들어지고 있느냐고 되묻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인류의 대열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육신적으로 모양을 달리 타고났기 때문에 같은 스타일의 모자를 쓰고 같은 만족을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거대한 건물에서 일정한 형식의 예배 의식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워짐을 느낀다. 반면에 또 어떤 사람들은, 아주 단순함 속에서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종류의 예배에서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런 분위기에서 더 친근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예배를 드리는 진실성과 목적의 깊이에 있다. 우리는 각자 이러한 예배를 드리기에 적합한 교회를 찾아 가입해야 할 것이다.
  일생 동안 살 집을 구한다면 당신은 먼저 그 집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한 목적도 이유도 없이 교회에 가입했다가, 그 교회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 욕구에 맞을 만한 교회를 찾아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전전하며 방황하고 있다. 이러한 방황은 하나님께도 자신에게도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
  교회는 모두 서로 다른 배경과 다른 전통과 다른 습관과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알아본 교회가 자신의 영적 성장에 기회를 줄 것 같고, 자신의 인간적인 필요를 제일 잘 충족시켜 줄 것 같고, 주위 사람들에게 유익한 봉사를 베풀 수 있는 곳이라 싶으면 자신의 결정에 따라 교회를 선정해야 할 것이다.
  특정한 목사에게 가까이 하다가 교회의 몸 자체에 대해서는 경원시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 목사는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신조는 그대로 남는다. 당신이 충성을 다해 받들 것은 교회와 교회가 섬기는 그리스도인 것이다. 교회 회중을 이루고 있는 교인들이, 그들을 하나로 연합되게 하는 것은 그들이 서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하는 공통된 욕구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안정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다니는 것이 유행에 맞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또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다고 나가지도 않는다. 또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을 목적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영혼의 안식과 평안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것은 교회 회원이 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풍성한 은혜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것은 교회 출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것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교회에 보탤 수 있는 것 때문에 교회에 나간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더하고,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찬송 소리에 자기 음성을 더하고,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축복을 구할 때에 자기의 힘을 더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자기의 간증을 더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간다. 그는 주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묵상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다.
 
  교회라고 불리는 이 그리스도인 사회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리가 예배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 우리는 그저 설교를 듣기 위하여 교회에 나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목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배 의식과 찬송과 메시지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동안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돕기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기독교적인 활동이나 구령 운동, 성경 읽기, 기타 교회의 다른 어떤 활동도 예배가 차지하는 부분을 대신할 수 없다. 우리가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려 한다면, 예배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예배와 찬양을 원한다.
 
  둘째로, 교회는 교제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우리가 지상에서 천국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그리스도인들 상호 간의 교제일 것이다. 만일 당신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다른 그리스도인과의 교제를 바라게 될 것이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지역 사회의 대부분의 사회생활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말은 물론 교회 건물이 유흥장이나 당구장이나 볼링장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그리스도의 감독 하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상호간의 기도와 도움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하나의 몸에 비유하고 있다. 손은 입에 대하여 할 일이 있으며, 눈은 귀와 혼연 일체가 되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발은 손과 조화가 맞아야 한다. 이와 같이 몸의 각 지체는 각각 자기의 짐을 져야 한다. 그러나 다른 지체의 짐을 지는 일에도 협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독교는 교제의 종교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사랑과 의와 봉사를 의미하며 이러한 것은 사회적인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표현되는 것이다. 이 사회적인 관계는 교회 내에서 발견된다. 우리가 서로서로를 강건케 해주는 것은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의 사회적인 그룹으로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할 필요를 가르치신 것이다.
 
  셋째로, 교회는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 내의 갖가지 기관을 통하여 함께 기도하고, 간증을 나누고, 설교하고 가르칠 때 당신의 믿음은 굳게 다져질 것이다. 교회는 우리가 이미 14장에서 다룬 신앙생활의 규칙들을 재강조해 줌으로써 당신을 가장 거룩한 믿음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넷째로, 교회는 봉사의 매개체이다. 우리는 봉사하기 위해서 구원 받은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이 일은 지역적인 교회의 교제를 통해서 제일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생동력 있는 기독교가 교회를 떠나서 따로 존재한 적은 없다. 교회는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단체다. 교회에 여러 가지 흠과 실수와 분쟁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는 어디까지나 교회인 것이다. 다른 어떤 기구나 기관도 교회를 대신할 수 없다.
 
  다섯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 당신의 재물을 투자하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십일조를 가르치고 있다. 십일조는 당신의 고정된 수입의 십분의 일을 말한다. 이 수입의 십분의 일은 주님께 속하는 것이다. 십일조 이외에도 주님께서 달리 이득을 주신 대로 당신은 더 많은 돈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주는 것, 즉 바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덕목 가운데 하나로서 우리의 일상생활에 당연한 일처럼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주는 것을 습관화함으로써 다른 것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되어야겠다. 관용이 모든 일에 동기가 되어야겠다.
  그리스도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다(행 20:35). 주님께서는 주는 것이 얼마나 마음을 감동시키고 영혼에 만족을 주는 것인지를 잘 아셨다. 주님은 당신이 이 특별한 축복에서 제외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다. 이기심은 두려움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이 없이 담대히 서야 한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벌린 손으로 서 계셨다. 그것은 이기심이나 탐욕으로 가득 찬 손이 아니었다.
  주는 것giving은 돈으로만 측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우정을 나누고 이웃을 가깜게 대해 주는 것이 최대의 선물이 될 수도 있다. 친절한 말 한마디, 다정한 인사, 외로운 사람과 하루 저녁을 같이 보내는 것으로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당신 자신이 스스로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당신이 영혼을 인도하는 구령자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의 돈뿐만 아니라, 당신의 시간과 당신의 재능까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해서 바쳐야 한다.
  십분의 일 이상으로 바치는 헌금은 정해진 규칙이나 조직적인 방법에 의해서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의 관심이 가는 대로 필요에 따라 낼 수 있어야 한다. 헌금의 대상은 이웃일 수도 있고, 매일 신문을 배달해 주는 소년일 수도 있고, 먼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에 있는 어떤 영혼일 수도 있다. 우리의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크나큰 사랑에 보답해서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사방에 전파하는 것이다.
  주는 데에는 기술이 있다. 찬물 한잔으로도 한 생명을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가 하면, 사랑 없는 돈을 줌으로써 한 생명을 멸망의 길로 인도할 수도 있다. 문제는 주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느끼게 주는 것은, 사랑으로 준다기보다는 악의를 가지고 주는 선물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력이나 금력을 보여주기 위하여 준 헌금은 조금도 축복이 될 수 없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또는 주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나 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서 주는 헌금에도 축복이 따를 리 없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주어야 한다. 남에게 도움과 위로를 주기 위해서 주어야지, 이 헌금을 하면 나에게 어떤 덕이 돌아올까를 생각해서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헌금이 은혜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가 되지 않도록 현명하게 친절하게 주어야 한다.
주는 일에는 참되고 지속적인 기쁨이 있다. 이 기쁨은 구두쇠 같은 사람이나 이기심이 강한 사람은 맛볼 수 없는 기쁨이다. 이 기쁨은 탐심에 차 있는 사람에게는 먼 기쁨이다. 이것은 희생에 동반되는 기쁨으로 어떤 사람들이 고상한 자기 연민(자기 동정)이라고 부르는 감정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기쁨이다.
  우리의 헌금이 공동 모금에 바치는 것이든, 구세군에 내는 것이든, 적십자에 내는 피 한방울이든 간에, 모두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는 것이어야 한다. 당신의 헌금이나 헌혈을 받는 사람들이 당신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쳤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반 위에 바쳐지는 헌금이 너무나 많다. 그리스도인의 헌금은 특별한 것이어야 한다. 사회단체나 자선 단체에 헌금할 때 보내는 헌금 봉투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헌금함”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 이것은 금전을 다루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재정적인 헌금을 제공함과 동시에, 기쁜 소식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성경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고 했다.
  루이스 에반스Louis Evans박사는 “복음은 거저 주셨지만, 복음의 물을 운반할 물통을 준비하는 데는 돈이 든다.”고 말했다.
  주는 행위는 기도나 찬송과 같이 중요한 예배의 행위이다. 미국 정부는 현재 세금없이 수입의 20퍼센트를 헌금할 것을 국민들에게 허락하고 있다. 이것은 소득세에서 제하는 액수이다. 그런데도 미국민 중에서 이 특혜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전 국민의 10퍼센트도 못 된다. 회사의 경우는 5퍼센트를 바칠 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으나 이 정부의 특혜 조치를 이용하는 회사는 15퍼센트미만이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축복해 주신 대로 헌금한다면 전세계는 하루 만에 복음화될 수 있을 것이다. 기꺼이 주는 사람이 되라! 하나님께서는 100배로 되돌려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투자에 대하여 100퍼센트의 보상을 약속하신다. 세상에, 당신이 투자한 돈에 이만한 이자를 붙여주는 은행이나 경제 단체가 있는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는 시험해 보라고 말씀하신다. 힘에 겹도록 바쳐 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떠한 보상을 내리시는가 살펴보라.
 
  여섯째로, 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온 천하에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교회의 첫째가는 근본 사명은 잃어버린바 된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세계는 오늘날 교회에게 구조의 손길을 뻗쳐 달라고 구조 신호를 발신하고 있다. 세계는 사회적인 문제, 도덕적인 문제, 경제 문제로 비명을 올리고 있다. 사람들은 죄악과 수치의 물결에 삼키운 바 되어 점점 아래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세계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교회의 사명은 사방에 멸망해가는 죄인들에게 생명줄을 던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셨다. 우리는 성령의 권능을 가지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손을 마주잡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인구의 65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세대에 살면서, 목마르게 구하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무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성경이 번역되지 않은 언어와 방언이 아직도 1,000개가 넘는다.
  초대 교회에는 성경도 없었고, 신학교도 없었고, 인쇄기도 없었고, 서적도, 교육 기관도,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자동차도, 비행기도 없었다. 그러나 한 세대 안에 복음은 당시에 알려진 세계에 거의 모두 전파되었다. 복음 전파의 비결은 성령의 권능이었다.
  오늘날 굉장히 발달되고 향상된 전달 수단 앞에서 성령의 권능은 등한시되고 있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힘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하고 있다. 수백만의 미국인들은 아직도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이다. 그들은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의 신전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가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듣고 있다. 시간이 촉박해 오고 있다. 세계는 미친 듯이 멸망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 전쟁에 지친 세계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예수께서 가지고 계신 발은 당신의 발뿐이다. 예수께 있는 손은 당신의 손뿐이다. 예수께서 말할 수 있는 입은 당신의 입뿐이다. 가능한 모든 재능과 시설과 방법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라. 이것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대사명이다. 우리들의 방법은 여러가지로 다를 수 있다. 호별 방문전도, 교육전도, 설교단 파송전도, 산업전도, 감방전도, 라디오-텔레비전 방송전도, 영화 전도, 그리고 소위 말하는 대중전도가 그 좋은 예이다. 어떤 방법을 쓰든 그것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자.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하는 데까지 인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그를 교회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갖게 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와 지식 가운데서 자라도록 하여야 한다. 한 영혼을 구원받게 할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는 교회 안에서 교제를 나누도록 인도하는 것, 이것이 최선의 전도다.
 
  끝으로, 교회를 통하여 우리의 인도주의가 가장 광범위하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우리의 형제들을 지키는 자이다. 비기독교 국가를 방문해 보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과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의 차이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그의 인도주의적인 명령을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주입시켜 주기 위해서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남의 필요가 자신의 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남의 불쌍한 형편을 도외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어떤 나라에서는, 인간적인 고통이나 인간의 정의와 인간의 필요가 무시되는 일이 적지 않다. 어린 아이가 길가에서 먹지 못한 지가 오래되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아이가 자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해서 수많은 사람이 보고 지나가면서도 거들 떠 볼 생각을 않는다. 그러다가 아이가 죽으면 시체를 치우는 것이다. 이러한 무관심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사람들과 갇혀 있는 사람과 매여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모르는 체하면, 사람들의 옳지 못한 처사나 비행에 냉담하고 인간적인 불의에 무감각하다면, 우리는 사실 주님께 냉담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많은 병원과 고아원과 양로원과 극빈자들을 위한 기관을 발견한다. 이런 것들은 대개가 교회에 의해서 조직된 것이고, 여기서 우리는 이 가르침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뿌리박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병자를 간호하고 사회사업에 종사하는 것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직 침투되지 않고 있는 세계 어떤 지역에서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최하층 사람들만이 병자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교인은 설혹 자기 가족이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지 않더라도 허술한 공공 위생시설을 보면 의분을 느껴야 한다. 연합된 교회 운동으로 인해서 공무원들의 권력 남용이 시정되고 사회 수준이 향상되는 예는 허다하게 많다. 그것이 보다 공정한 법률 시행을 위한 운동이든, 쓰레기 처리의 개선을 위한 운동이든, 이러한 건설적인 운동은 인간 생활 전체를 위해서 유익한 것이다. 이와 같이 건설적인 봉사는 교회의 진실한 교인이 당연히 취해야 할 첫째가는 의무이다.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묻지 않고 먼저 도움의 손길을 뻗쳤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는 모든 진실된 그리스도인이 자기 형제에게 대하는 봉사의 태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장 맨 처음에 언급한 대로,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같이 하는 데서 최선의 봉사를 할 수 있고, 가장 힘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고, 가장 원활하게 자기 훈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운동을 해본 사람이면, 혼자 운동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그룹으로 할 때 훨씬 더 운동에 충실해진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불순종한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를 바른 길에서 다른 길로 탈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다. 먼 길이라도 같은 방향, 같은 목적지로 가는 동행이 있으면 외로움이 덜하며, 무거운 짐이라도 같은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가면 가볍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제를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리스도인 각 사람의 영혼이 영적인 가정을 발견하는 것도 교회 안이며, 모든 인간적인 활동의 구심점을 찾을 수 있는 곳도 교회 안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이, 그룹 안에서 일하고 살면서 휴식과 오락을 즐길 필요가 있음을 잘 알고 계셨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교회에 속하여 이러한 특권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제16장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누가복음 6:31
 
  당신은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하고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한 이후로, 갖가지 사회적인 책임과 사회적인 문제에 부딪히고 있다. 당신은 하나님과 평화를 맺었다. 당신은 더 이상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있지 않다. 죄가 용서되었다. 당신은 새로운 사고思考의 눈을 뜨게 되었고 삶에 대하여 새로운 인생관을 갖게 되었다. 온 세상이 바뀌었다. 당신은 이제 예수님의 눈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보기 시작했다. 전에 가졌던 생각과 이상이 바뀌었다. 당신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편견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과거에 당신의 생활을 여러 방면에서 지배하고 있던 이기심이 이제 없어진 지 오래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긍정적인 양상보다는 부정적인 면에서만 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거부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재미있고 유익한 모든 것을 반대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흡사 이생에서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비도덕적이거나 불법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불평했다는 여인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모든 참된 쾌락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적인 쾌락, 죄에 속하는 쾌락이란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이기적인 사랑에서 야기되는 쾌락이며 물 쓰듯이 돈을 쓰게 하는 쾌락을 말한다. 그리스도를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이 서있는 사람이라면, 즉시 참된 쾌락의 근원이 되는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으로 인도될 것이다. 아직 거듭나지 아니한 분에게는 이 말이 쾌락을 멀리하라는 말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매일매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맛보는 쾌락이 세상적인 쾌락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시편 기자는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시 36:8)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시 84:11)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족한 것을 충분히 주셔서 우리가 그것을 즐기게 하셨다고 썼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갖는 매일의 교제는 우리로 하여금 실제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생활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정당한 포부나 정당한 흥미를 모두 포기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비록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언제 돌아오실지 모른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동시에 주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우리의 하던 일을 계속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 한 예로, 노아의 때에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간 데에 잘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러한 활동이 죄가 될 정도로 악용되고 남용되었다는 것이다. 또 롯의 시대에 사람들이 사고 팔고 계획을 세우고 집을 지은 것에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일을 죄된 방법으로 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노아와 롯의 시대에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있었다면, 그 당시 사람들이 이런 것을 그들의 “유일한” 흥미거리로 삼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쾌락과 개인적인 재산과 물질적인 이득만을 생각했다. 그들은 이 세상 생활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생각을 돌릴 시간이 없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노엽게 했고 범죄자들은 끝내 형벌을 받아야 했다.
  어떤 사람이 말한 대로 “성경은 사람들이 세상 일에 관심을 갖도록 권고하려고 쓰여진 것이 아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이미 세상사에 필요 이상의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성경은 사람들이, 영적인 사실의 중요성과 가치에 비추어서 세상사를 보도록 권장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맡고 있는 매일 매일의 일을 수행할 것과 맡은 바 일에 충실한 데서 보람을 느낄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지상에 남아 있는 것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에 열심일 뿐만 아니라 최선을 다할 것을 권면 받고 있다.
  성경은 금속과 목석木石을 다룬 사람으로 브사렐을 매우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목자였다. 요셉은 일국의 수상이었다. 다니엘은 정치가였다. 요셉과 예수는 둘 다 목수였고, 예수님의 제자 중 몇은 어부였다. 또 우리는 성경에서 간다게의 국고를 맡았던 에티오피아 내시를 볼 수 있고, 자주 장사 루디아와 천막 짓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 바울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그리고 의사였던 누가를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이상理想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생활에 대하여 일체 흥미를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이상으로 하는 바는 인간이 그의 일상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라는 것이며, 항상 자기의 일과 포부를 주님보다 하위에 두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일상생활에 긍정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을 돕고 우리가 참으로 인생을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주님께서는 또한 우리가 사회 문제를 직면할 때 도움의 손길을 주신다. 그런데 우리가 흔동하기 쉬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바로 우리가 일상적인 일과 주위의 사회 문제를 처리하는 태도에서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이다.
 
  넬슨 벨L. Nelson Bell박사는 남장로회 시보Southern Presbyterian Journal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이 주일날 교회에 나가면, 그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요일을 제외한 다른 날, 당신이 사무실과 점포,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그 외 여러 장소에서 접촉하는 사람들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전통적인 교회의 신앙고백은 필요한 것이고, 교회의 프로그램과 활동에 참가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 가정에서의 책임, 기타 일상생활 가운데 접하는 세세한 일들이 다 서로 얽혀져서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신앙의 진실성을 시험하고 있다. 우리가 매일 여러 가지 접촉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볼까? 우리가 평일에 접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잠깐 동안 만나서 얘기했던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과 특별나게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참으로 테스트되는 것은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활에서인 것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의 진실성 여부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은 물론 말하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가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기독교가 외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대화나 오락이나 습관이나 포부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생활은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우리의 습관은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습관일까? 우리가 즐기는 오락은 주님께서 같이 하신다 해도 무방한 것일까? 우리는 공중 석상에서 식사를 할 때 머리를 숙이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우리가 물질을 대하는 태도 여하를 보고, 사람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 애착을 느끼고 있는지 위의 것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혹 우리의 포부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지위욕이나 명예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이상의 질문과 기타 여러 가지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러한 것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인종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떤 것인가? 성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떤 것인가? 노동 관리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떤 것인가? 음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떤 것인가? 이러한 일은 다 우리의 동료들 앞에서 해명되고 해석되고 생활화 되어야 할 지극히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이다. 주위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지배하는 대원칙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 6:31)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사회 복음social gospel”이라는 것을 비난해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가 한편으로 중생(거듭남)의 복음을, 또 한손으로는 “찬물 한잔”을 들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사회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부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난 여러 세기를 거쳐오는 동안, 교회는 다른 어떤 면보다도 사회적 기준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데 공헌해 왔다. 어린이의 노동이 금지되었고,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 여성의 지위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이 향상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 이외에도 여러 가지 개혁이 일어났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옳고 정당한 일, 칭찬할 만한 일을 대교해서 도덕적 용기를 가지고 사회적 위치를 다져야 할 것이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훌륭한 시민이어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법에 순응해서 살 것을 가르치고 있다.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한다는 것은 특정 그룹을 차별하는 부당한 법에 대하여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정부가 우리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또 우리가 정부와 협조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께서는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을 받으신 적이 있다. 예수께서는 세금을 냄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본을 보여 주셨다. 정부를 운영하고 법률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는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은 민중의 기생충이며 사실상 도둑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탈세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막 12:17)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금을 내는 데 그쳐서는 안되겠다.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이익을 구하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때때로 우리는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할 때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하듯이 기꺼이 그리할 수 있어야겠다. 우리는 선한 시민, 훌륭한 시민으로서 우리의 일을 양심적으로 이행해야겠다.
  인류의 향상을 위해서 선한 일에 종사하고 있는 자선 기관에 대해서는 박애 정신을 발휘하여 할 수 있는 것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또 공동 모금이나 적십자, 구세군과 같은 건전하고 건설적인 기구의 활동에 참가해야겠다. 그리스도인은 고아원과 병원과 요양원, 형무소와 같은 사회 기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고 말씀 하셨다. 아무런 자선 단체도 없는 삭막한 사회를 한번 생각해 보라! 아무도 그러한 국가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웃 간의 사랑이 넘쳐흐르는 사회에서 살고 싶어한다. 우리는 지역사회 내에서 각각 자신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 책임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마땅히 존경과 신뢰와 협조를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나그네를 대접할 줄 알아야 한다.성경은 우리의 가정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고 우리의 가정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가질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을 축복해 주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성sex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성 자체가 죄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성경을 사사로이 푸는 사람들은 성 그 자체가 죄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성경은 성을 잘못 쓰는 것이 죄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지상의 모든 생명은 성으로 인하여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성행위는 모든 인간의 경험 가운데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의미가 깊고 가장 만족할 만한 경험이다.
  그러나 추잡하고 자멸적인 성품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은, 가장 고상하고 영광스럽고 완전한 사랑의 관계로 의도되었던 행위를 가장 저속하고 추잡하고 값싼 것으로 전락시켰다. 상호간의 사랑과 존경심과 상대방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려는 의욕이 상실된 성sex은 단순히 동물적인 행위로 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한 말로 경고하고 있다.
  성경은 성이라는 주제를 세계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다룬 책이다. 성경은 성에 대해서 쉬쉬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성경은 성의 옳은 면이나 그른 면에 대해서 일체의 가식적인 말을 쓰지 않고 있다. 성에 대해서 “그렇지 않은 체하는 태도”를 취하여 당황해 하고 비밀히 하려는 엉큼한 태도는 순전히 인위적인 것이다.
  이 성에 대해서 쉬쉬하려는 태도를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현대 문명은 성의 기교적인 면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다 보니 현대 문명은 인간의 압도적 표현의 원천이 되어 있는, 그 영적인 분위기에 대해서는 너무나 소홀히 하게 되었다.
  우리의 가정 재판소를 메우고 있는 이혼 소송은, 영적인 가치관 위에 확고히 서 있지 않은 남녀 관계는 영속적이며 날로 충실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비극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성은 우리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인생의 한 단면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다면 모든 생명이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용된다면, 성은 가정에 천국을 가져 올 수도 있다. 한편 잘못 오용한다면, 성이 가정을 지옥으로 만드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 성을 현명하게 사용해 보라, 훌륭한 종이 되어 줄 것이다. 잘못 써 보라. 성은 지독한 주인 행세를 하려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 문제가 신문에 큰 제목으로 장식되고, 광고란에 이용되고, 천한 선정적 흥미를 끌기 위한 재료로 이용되어지는 것을 보면 분노와 격분을 느낀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이 행위를 더럽히고 너무나 저급하고 조잡하고 음탕하게 취급하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얼굴을 붉히게 된다.
 
  넷째로, 성에 대하여 기독교적인 견해를 가지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결혼관을 갖게 될 것이다. 결혼 생활에 들어가기 전에 지상에서의 결혼을 천국으로 연결시키는 결혼의 진실된 의미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조금씩 성숙해 감에 따라, 우리의 부모와 친구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후에는 “자신과 일생을 같이 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이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인가를 이미 보아 왔다. 거듭나지 않은 죄인에게서 자연 발생적으로 나오는 것은 증오이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남녀는 아직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간계에 묻혀 사는 동안에, 그리고 그들이 선택하는 결혼 상대자가 아직 완전한 죄의 생활에 빠져 있을 동안에 배우자를 선택하는 불행한 전철을 밟고 있다. 따라서 영적으로 무지한 두 영혼이나 참으로 영속적인 사랑을 주고 받을 역량이 없는 남녀 간에 이루어진 결혼이, 결국에는 이혼 법정에서 끝을 맺고 매년 75만 명이나 되는 고아를 내고 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결혼은 “거룩한 굴레”이다. 왜냐하면 결혼 생활을 통해서 두 사람이 상호간의 영적인 운명을 개척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선하다고 선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 돕는 배필이 필요하고 여자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다.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가 결혼의 일차적인 목적을 상실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남편을 사랑하고 돕고 보살피는 것은 여성의 역할이다. 그리고 아내와 자식들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것은 남자가 할 역할이다. 이와 같이 해서 가정은 하나님의 평화와 조화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법을 분명히 이해하고 한 결혼이라면 이혼 소송이 필요 없는 것이다. 이 이상적인 목표에 이르지 못하는 결혼은(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상적인 결혼 생활에 대하여 무지한가!) 먼저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것이며, 주님의 명령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로, 우리는 노동 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성경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 3:23, 4:1)라고 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모든 노동관계를 지배하신다면 파업 소동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 상대방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서 빚어지는 노조 분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경영자는 관대한 마음으로 고용인을 취급할 것이며, 고용인은 고용주를 위하여 하루의 일을 충실히 해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임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각종 형태의 노동에는 고귀한 존엄성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의욕적이고 유능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공장이나 상점에서 공정을 원하는 사람으로 두각을 나타내야 하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고 머리를 숙여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고용주는 고용인을 존경심과 관대함으로 대하여 다른 고용주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참으로 기독교적인 인격을 지닌 사람이라면, 자기 수하에 있는 피고용인들의 안전조치와 양호한 작업 조건, 복지 등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자기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인력人力으로만 보지 않고 “인간”으로 볼 것이다.
  경영자 측과 노동자 측은 둘 다 그들이 현재 향유하고 있는 향상된 조건과 상호간의 이해는, 그 기원이 영적인 대부흥의 결과임을 기억해야겠다. 노동조합의 전통은 그 기원을 교회와 18세기에 일어났던 웨슬리 부흥회 운동에 두고 있다. 노동 계급을 위한 사회적인 자유는, 기독교 지도자 쉐프테스베리 경Lord Shaftesbury이 가족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위한 보다 나은 노동 조건과 짧은 노동 시간과 보다 많은 임금과 공정한 대우를 내 걸고 일생 동안 투쟁을 벌였을 때 시작되었다.
  18세기의 부흥 운동이 없었던들 노동자 측에서 얻은 이득은 이룰 수 없었을 것이며, 훨씬 뒤로 미루어졌을지도 모른다. 노동 지도자 중에 종교적 신앙의 불법화를 운운하고, 하나님을 무시할 것과 성경과 교회를 제거하자고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그들이 오늘날 받고 있는 혜택 중에 많은 부분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에 기인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어떤 노동계 지도자들은 교만과 자만에 빠지고 부유해지고 자기만족에 빠져 권력을 추구하기에 바쁘다. 많은 실업가들도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서로간의 필요를 인정하고 완전히 서로를 의탁하고, 나아가 황금률을 철저하게 사실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생활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로, 그리스도인은 인종 분규 문제를 그리스도의 눈을 통해서 본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교회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음을 시인한다. 우리는 이린 점에서 체육계와 연예계와 정계, 군대, 교육계, 사업계에 뒤지고 있다. 교회는 모름지기 이들에게 모범을 보였어야 했을 것이다. 교회는 현재 연방 법정에서 하고 있는 일을 억지와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인종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우리가 함께 형제애의 기반 위에서 십자가 밑에 나오는 데 있다. 서로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라도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가까워질수록 서로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고, 남자 여자가 따로 없고, 희랍인이나 야만인도 없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따로 없다고 말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실 때, 우리는 피부색이나 계급이나 상황이나 조건을 보지 않고 우리와 같은 소원과 필요와 두려움과 갈망을 가진 인간을 보게 된다. 우리는 주님의 눈을 통해서 사람들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일곱째로, 경제(금전)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예수께서는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셨다. 돈은 훌륭한 종은 될 수 있어도 훌륭한 주인은 못 된다. 재산은 지갑과 은행에 속해 있을 수 있어도 마음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재물이 필요한 자리가 있고, 그 힘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금전이 왕좌를 차지할 권한은 없는 것이다. 탐심은 인간성보다 돈을 중시한다. 탐심은 돈에 미친 사람을 선동시켜서 자기의 재물로 삼는다. 탐심은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고, 사람의 고상한 충동을 죽이고 인생의 생명적인 요소를 파괴한다.
  갖가지 형태의 탐심을 경계하고 조심하라! 우리는 모두 경계와 기도와 자제와 훈련을 통해서 자신을 탐심으로부터 멀리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인생은 달러나 센트의 문제가 아니고, 가옥이나 전답의 문제도, 돈을 벌 수 있는 역량과 경제력의 문제도 아니다. 탐심이 우리를 금전의 노예로 삼도록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되겠다.
  예수께서는 두 형제간의 유산 분쟁을 해결해 달라는 요청을 받으셨을 때, 한마디 경계의 말씀과 훌륭한 비유를 들어 유산 분규에 개입할 것을 단호히 거부하셨다. 주님께서는 천국의 메시지를 지상에 적용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비유의 말씀을 자주 쓰셨다. 그는 부유한 지주의 얘기를 하셨다. 그 지주는 부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 더 큰 부를 꿈꾸고, 그가 가장 사모하던 모든 물질적 위안과 자신의 영광으로 일생을 채우기 위하여 방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분명히 그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검소했으며 부지런했으며 분별력이 있고 정직했으며, 모든 처세에서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처럼 돈과 야망과 이기주의의 노예였다.
  그는 넓은 들과 가득 찬 창고를 성공의 척도로 삼았으며 인간적인 허영심으로 자기 영혼을 먹였다. 그의 생활은 부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자아 중심적인 것이었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 대한 생각이나 인생의 무상함 같은 것은 생각지 않고 그의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단언을 내리셨다. 여러 해를 염두에 두고 짜여진 그의 장황한 계획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가 그와 같이 땀을 흘려가며 쌓아 두었던 재산은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가 분배되고 나누어져 탕진되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외로이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서, 우리가 빈손으로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빈손으로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사실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우리는 재산이나 사람 등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소유한 이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지상에 머무는 동안 주님의 재산을 잠깐 맡은 청지기로서 사는 것뿐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소유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빌려 쓰는 “차관”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중요한 진리를 망각할 때 우리는 욕심과 탐심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물건이나 사람을 붙들고 “이것은 내 것이라”고 말할 때나, 부러워하는 눈으로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보거나 “좋은 방법으로든 나쁜 방법으로든” 그것을 취하려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까지는 그것을 도저히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물론 지상의 부, 그 자체가 죄라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재능과 소질과 상황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것을 기대하고 계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성sex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돈을 버는 데는 정당한 방법이 있고 부당한 방법이 있으며, 권력을 취하는 데도 정당한 방법과 부당한 방법이 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오해하고 자신이 가난한 것에 대하여 영적인 자부심을 갖는 죄를 범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식구와 자녀가 고통을 받고 제대로 보살펴지지 않는데도 이들은 이 괴상한 영적 자부심을 버리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어떤 부자가 먼 나라로 여행하는 동안, 일정한 양의 돈을 하인들에게 맡기고 간 얘기를 통하여 바로 위에 지적한 사실을 시사적으로 예증하셨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는 맡긴 돈을 현명하게 투자하여 여러 배의 이익을 남긴 종들의 건전한 판단과 신중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도둑맞을까봐 돈을 숨겨 두었다고 하는 창조력이 없는 겁쟁이 하인은 심히 꾸짖고 책망 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법에 따라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돈을 벌도록 하라. 그리고 그 돈을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라. 소득의 십분의 일을 주님께 드리라. 십일조를 충실히 하라. 왜냐하면 성경이 이를 당연하고 옳은 것이라고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가치에 대해서 어떤 의문이 생기면, 그 때마다 성경을 꺼내 예수께서 돈에 대하여 가르친 말씀을 읽으라. 주님께서 돈을 버는 문제와 재산을 분배하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읽어 보도록 하라. 그저 “예수님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하고 자문해 보라. 그리고 그 답만을 따라 행동하도록 하라.
 
  여덟째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주변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다. 당신이 살고 있는 지방이나 나라의 빈민 지역에 대해서 당신은 마음에 부담을 느낄 것이다. 당신의 이웃에 살고 있는 수많은 동포들의 가난과 고통이 당신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당신은 주위의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기관과 협회의 일에 참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고상한 운동과 사업에는 막대한 돈을 투자하지만, 당장 눈앞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관심도 돌리지 않고 있다.
  성경은 평범한 일반 남녀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병자를 고치시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은 불행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병원과 고아원과 양로원 등 자선기관의 건설과 발전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또 그리스도인은 그의 나라의 막대한 부를 다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일에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을 담당하려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불행한 사람들을 돕는 국가적인 단체나 국제적 사회단체를 지원할 것이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가 사회로부터 멀어져야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반대로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덜어주기 위하여, 선한 목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원조를 아껴서는 안 되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사회사업가와 의사와 간호원과 자선 사업가를 필요로 한다.
  로터리 클럽Rotary Club의 모토motto(표어)는 “자아 위에 봉사를!”이다. 키와니스 클럽Kiwanis Club의 모토는 “우리는 세운다”이다. 라이온스 클럽Lions Club의 모토는 “자유와 지성과 조국의 안정”으로 되어 있다. 모던 우드멘Modern Woodmen의 모토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모든 아이디어는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다. 많은 이방 종교들은 봉사 단체를 전혀 가져본 적이 없다. 비록 회원 가운데 불신자가 섞여 있다 하더라도 위의 단체들은 모두가 기독교의 산물이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모든 사회봉사 속에 스며 있다. 과거 시대에는 병원이 없었다.
  장개석 총통의 부인은 “유교는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지만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 하나 지어 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위에 열거한 모토를 생활화할 수 있어야겠다. 우리가 이를 생활화할 수 있다면 세계는 훨씬 더 살기 좋은 세계가 될 것이 다. 예수님의 모토는 “사랑과 봉사”, 즉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 동료에 대한 사랑, 동료를 위한 봉사였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하셨다. 바꾸어 말해서,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에게 순종하고 나를 섬기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의 사랑을 테스트해 볼 자격이 있으시다. 봉사(섬김)가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
 
  아홉째로, 그리스도인은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동료 그리스도인이란 특별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초자연적인 사랑을 느낀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박해하고 갖가지 거짓으로 우리를 욕하는 사람들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인간적 사랑 가운데 가장 큰 사랑은 우리 외에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상호간에 서로 섬길 줄 알아야겠다. “형제들아, 사랑으로 서로에게 종노룻하라.”
 
주님, 나로 나 자신을 잊고
하루하루를 살게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기도 드리려고 무릎을
꿇으면 남을 위한 기도를
하도록 도와주소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도우사
나를 언제나 진실되게 하여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남을 위함임을 알게 하소서,
주여, “남을 위하여”를
저의 목표로 삼게 해주소서.
주여 남을 위해 삶으로
당신을 닮아가게 하소서.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서로를 대하여 가지는 책임은 서로에게 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딤전 4:12)고 했고, 이것은 제안이 아닌 명령이다. 이것은 하나의 추천이 아니고 책임이다. 우리는 모두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다.
  성경은 또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예수께서는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또한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5)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형제 앞에 걸림돌이나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가 상호간에 서로 복종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하여 겸손으로 옷 입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서로 위해 주고 존경하기를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을 먼저 내 세우고 나 자신을 제일 뒤로 미루는 겸손을 배워야겠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의 짐을 져야겠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각각 스스로 져야 하는 짐이 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이 짐을 져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짐을 지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 짐을 져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져야 할 짐 가운데는 정직해야 하는 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짐, 자녀를 신앙 가운데 교육시킬 부담, 당신의 아내를 행복하게 해줄 책임 등 많은 부담이 있다. 이 모든 경우에 우리는 자신의 짐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 가운데는 슬픔이나 불운이나 시험, 고독, 가정 사정, 영적인 문제, 공적인 책임과 같이 다른 친구들이 덜어 줄 수 있는 짐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짐에 대하여 염려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짐을 한데 묶어서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우리를 강건케 지켜 달라고 주님의 능력을 바라면 된다. 그러나 우리의 동료가 그의 짐을 질 수 있도록 도와줄 임무가 우리에게 있다.
  성경은 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 관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아 줄 책임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교회 내의 가난한 자를 도와줄 의무가 있는 것이다. 성경은 말하고 있다. “성도들의 필요를 따라 도와주고, ‥‥‥‥ 손 대접하기를 잘하며‥‥‥ 나그네를 재워주고‥‥‥‥ 성도의 발을 씻어 주고‥‥‥ 고통 받는 자를 위로해 주고‥‥‥ 그리고 나그네를 접대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를 사랑하시나니”라고 하셨다. 이상의 모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에게 져야 할 사회적인 책임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은 관대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미덕 가운데 제일 힘든 미덕이다. 우리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 확신으로 인해서 우리는 옳고 다른 사람들은 다 그르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것은 우리의 확신이 우리 스스로의 생각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성경의 “하라”와 “하지 말라”에 근거한 것일 경우에는 좋은 것이다. 교회 내에 자주 일어나는 분쟁과 당파는 사소한 문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자기들만이 옳다고 우기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고 해리 아이언사이드Harry Ironside박사가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확신으로 착각해서는 안 되겠다.”
  물론 우리는 사악한 부정과 잘못을 개탄해야 한다. 그러나 죄에 대한 우리의 칭찬할 만한 관용은, 종종 죄인에 대한 묵인으로 발전해 버리는 수가 있다.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비교적 종교적인 배경이 있는 사람이 텔레비전을 통하여 “예수님은 인격적으로 의심스러운 사람들이나, 근본적인 사상과 태도가 자기 자신이 생각하시는 존귀하고 올바른 기준과 모순되는 사람들과는 상종하지도 않으셨고 교제하시지도 않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충격적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
  이러한 사람이 알 것은, 예수께서는 어떠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두려워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제일 싫어했고 가장 신랄하게 비난한 것이 바로, 예수께서 세리나 도둑이나 강도, 유식한 학자나 창녀, 빈부를 가리지 않고 누구하고든 기꺼이 상종하셨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그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과 공공연히 함께 했던 사람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 눈먼 사람,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하여 느꼈던 동정(사랑)을 약화시키지 못했다.
 
  예수님은 세계 역사상 가장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마음을 소유한 분이셨다. 그 분의 내적인 확신은 너무나 강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도 동화되지 않는다는 확신 하에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섞일 수 있으셨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꺼리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 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두려움이나 편협한 생각을 갖지 않으셨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담을 쳐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셨다. 예수께서는 온유하고 관대한 것과 타협하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계셨다. 우리도 이런 면을 주님으로부터 배워야겠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시대를 통해 가장 훌륭하고 빛나는 긍휼과 결합된 진리의 본을 보여주시고 떠나면서, “너희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상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인 책임 가운데 몇 가지만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한 구석에 틀어박혀 고독한 은둔 생활을 할 수 없다. 그는 사회 구성원의 하나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해서 동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르치셨다.
  성경을 공부하고 읽으라. 그리고 그대로 따라 살라. 그럴 때에만 당신은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이 혼란한 세상에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제17장그리스도인의 미래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3
 
  세계는 모두가 일치된 어조로 우리가 극히 위험한 시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재난이 임박해 오고 있다고 예언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전 인류가 멸망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 많은 이들은 문명 자체가 붕괴될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믿고 있다.
  가장 판매고가 높은 베스트셀러가 한결같이 미래의 위기를 다루고 있다. 신문과 잡지의 사설이 아마겟돈 전쟁과 역사의 종말과 문명의 파멸을 논하고 있다. 대통령 한 분은 그의 취임사에서 “과학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파괴시킬 수 있는 능력을 전해 주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월리암 보그트William Vogt는 그의 저서 ‘생존에 이르는 길Road to Survival’에서, "오대륙의 벽 위에 적혀 있는 낙서가 심판의 날이 목전에 와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고 했다. 또 리차드 울만 박사Dr. Richard K. Ullmann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결정의 시대, 즉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선택하고, 선과 악을 선택하고, 생명과 죽음을 택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잘못 선택하면, 우리는 아마 인류의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다."
  소로킨 교수Professor Sorokin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위기 속에 살고 있다. 전쟁과 기근, 전염병, 혁명뿐만이 아니라, 갖가지 참화가 전 세계를 횝쓸고 있다. 모든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 모든 규범은 파괴되고 있다. 인간성은 그 자체의 존엄성을 왜곡시켜 버렸다. 위기는 도처에 만연하고 있으며, 문화와 사회의 최하층에서 최상층에 이르기까지 스며들고 있다. 예술과 과학에서 위기의식을 느낄 수 있으며, 철학과 종교, 그리고 윤리와 법률에서 위기의식을 느낄 수 있다. 위기의식은 사회 조직과 정치 조직, 경제 조직을 비롯하여 우리의 모든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 속에 침투되어 있다. 이러한 재해의 무서운 결과가 더욱 심각하고 큰 규모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파국적인 시대를 습격해 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예견할 수 있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원자탄이나 수소탄의 발명으로 인해서 저술된 많은 서적, 즉 한편에서는 네바다 사막이나 비키니 섬에서의 실험을 진술한 책이나 기사를, 또 한편으로는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불가피한 위기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묘사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책을 읽을 때, 우리는 과학이 성경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원버 스미스 박사Dr. Wilbur Smith가 말한 바와 같이 “플라톤이나 세네카,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서 사실상 위대한 철학자 들 중에 미래를 규명해 보려고 시도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성경은 세계에서 종말론을 다루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세계의 절정(종말)을 기다리는 사건으로 가득 차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교회 지도자들은 미래의 사건을 논할 때에 나타나는 광신적인 경향을 두려워했으나, 이제 인류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성경 말씀에 대해서 새로운 견해를 보이고 있다.
  세계 교회 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가 1954년 에반스톤Evanston에서 개최되었을 때, 협의회의 주제로 “세계의 희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선택했었다. 세계 교회 협의회는, 그 당시 위원회를 임명하고 교회가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세상에 바로 제시할 수 있도록 성경의 가르침을 연구하도록 위촉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있어서,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과거의 위기에도 그러했듯이, 거짓 선지자와 신비주의와 손금쟁이와 점쟁이 그리고 기타 미신을 추종하기 쉽다. 공포에 싸여 있는 수많은 영혼이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 수천 수만 달러의 돈을 낭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해야 할 일은 가까운 책방에 가서 비싸지 않은 성경을 사서 그 안에 담겨 있는 미래에 관한 비밀을 찾아보는 것이다.
  메리 베이커 에디Mary Baker Eddy(크리스천 사이언스 교파의 창시자)의 책 ‘과학과 건강Science αud Health’에서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희망적인 빛을 주는 문장을 한 구절도 읽을 수가 없다. 회교의 경전 코란Koran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아도 당신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구절을 일언반구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신비에 싸여 있는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빛을 보여주는 책은 성경 한 권 밖에 없다.
  신비의 베일이 벗겨지고 미래가 드러난다. 성경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세계에 종말이 올 것을 예언하고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인류 역사의 절정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성경은 인류 역사상 가장 성대한 대관식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과 만주의 주로 관을 쓰실 때에 벌어질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종종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이며 많이 오해되고 있는 문제임을 알고 있다. 우리는 과거 여러 해 동안 세상에 돌아다니며 주님이 오실 날짜를 예언하여 사람들을 기록한 광신자 들을 수없이 보아 왔다. 따라서 이 영광스러운 진리가 빛을 잃을 때가 있었다.
 
  '이생의 종교Religion in Life'라는 잡지에서 "기독교의 희망이 가지는 현대적인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이 미래에 관한 토론에는 세계의 석학 세 사람이 초빙되었는데, 그 중에 한 분은 유명한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 박사Dr. Arnold J. Toynbee였고, 또 한 분은 시카고 대학교의 저명한 신학자 아모스 와일더 박사Dr. Amos N. Wilder였고,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은 영국의 유명한 석학이요, 옥스포드 대학교의 교수였던 루이스 박사D.C.S. Lewis였다.
  토인비 박사는, 이 세상은 기술적인 진보로 인하여 관용과 사랑과 상호 이해가 없이 모든 사람을 가까운 이웃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져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토인비 교수에 의하면 기독교의 희망은 인간 숭배와 유물주의와 집단주의 괴물에 대하여 싸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와일더 박사는 인간이 역사 자체 속에서 기독교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의문시한다. 그는 인간의 구원은 인류 밖에 있는 영적인 원천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인간은 설혹 전쟁이나 비극의 불을 통하여 시련을 당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언젠가 자기 자신의 힘과 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할 것이라고 그의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적인 기반 위에서 생각한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루이스 박사의 글에 와서다. 루이스 박사는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는다. 그는 솔직하게 “약속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무시하거나 에누리하고서 한편으로 기독교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루이스 박사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신다고 하는 생각을 조소하는 이유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로,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초대 교회가 예측했던 대로 재림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은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시대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바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성취되어야 할 성경의 많은 예언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고 루이스 박사는 말한다.
  둘째로, 진화론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교리를 믿지 못하게 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인간은 계속 향상 진보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도저히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셔서 죄와 죽음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셋째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교리가 수많은 사람들의 계획과 꿈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의 이기적인 행동에 간섭을 받는 일이 없이 먹고 마시고 즐기고 싶은 것이다.
  노아 시대에 비웃었던 자들이 홍수를 믿지 않은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미래를 향한 계획이 다른 무엇에 의해서도 중단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성경은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고 자기의 정욕을 따라 비웃고 조롱하는 자들이 마지막 때에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희망을 제시하시고 경고하신 것은, 주님께서 떠나시면서 자신이 돌아올 날을 확정적으로 말씀해 주셨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돌아오시는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인 집을 항상 예비하는 것이다.
  대부흥사 무디D. L. Moody는 종종 “나는 또 다른 설교를 하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설교 하는 적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영국의 저명한 목회자 캠벨 몰간 박사Dr. G. Campbell Morgan는 “나는 아침 일과를 시작할 때마다 주님이 나의 일을 중단시키고 주님 자신의 일을 시작하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시작한다. 나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이 주님께서 언제 돌아오실지 모른다는 기대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 때에 이 날이 마지막 심판 전에 우리가 세상에 사는 마지막 날이 될 것 이라고 생각하고 산다면, 지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잘 짜여진 계획과 세심하게 세워 놓은 장기 계획이 하나님의 나팔 소리에 의해서 중단된다고 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소한 활동에 열중해 있기 때문에 차마 우리의 계획이 침해를 받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세상의 끝은 아직 오지 않았어. 그런데 세상의 종말은 무엇 때문에 생각해야 하는가? 그런 것은 아마 천 년 후쯤에나 있을지 모를 일이야”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그렇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세상의 끝을 예언하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선의였지만 세계의 종말을 예언함으로써, 기독교의 복음 전파에 비극적인 피해를 입히는 죄를 남겼다. 너무나 많은 광신자들과 이단의 괴수들이 거짓 예언을 뿌리고 다님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조롱거리로 만들어 왔다.
 
  종교사宗敎史를 공부한 학생이면 자칭 선지자라 하는 자들이, 시대마다 나타나서 얼마나 많은 대중을 조롱했는지를 역력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843년 월리암 밀러William Miller라는 사람은 3월 21일 밤에 세계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다. 3월 21일 밤 정각 12시에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날 것이며, 하늘이 종이축처럼 말려 올라가고 그리스도께서 두번째 나타나실 것이라고 그는 선언했다. 성경 대신에 월리암 밀러를 믿었던 사람들은 큰 무리를 지어 모여 들었고 예고된 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새벽까지 기다리다가 실망과 수치심에 싸여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 거듭 경고하신 말씀을 기억했더라면 이들은 이와 같은 망신을 모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 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막 13:35-37).
  위와 같은 거짓 예언자들의 낭설과 세계의 인간사가 우리의 외부의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서 갑자기 정지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는 태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재림을 조소하고 우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양 있다고 하는 문명인”들을 기만하면서 이들로 하여금 부당한 안도감을 느끼게 만드는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진보”라는 그릇된 교리이다.
  이 학설에 의하면, 인간과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서서히 인간 자신의 힘과 지능으로 말미암아 상승하는 중에 있다는 것이다. 이 학설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스스로 정화淨化되었을 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이 전쟁의 무익함과 탐심의 어리석음과 이기적인 행동의 무익함과 편견과 오해의 무익함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자기가 형제를 지키는 자라는 것을 명백히 깨닫게 될 것이며 황금률을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할 날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진보설이라는 신화는, 사람들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인간의 희망에 기인된 것이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대의 의학이 우리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었지만 오래 사는 사람도 결국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의학은 기껏해야 우리의 명을 몇 년 더 연장시켜 준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들은 현대의 진보 발달된 교통 통신 기관을 언급할 때, 우리가 그것을 공간과 거리를 정복하는 데에 썼고 복음과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에는 이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도외시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이 널리 보급 확장되고 있는 학교와 대학의 교육제도를 자랑할 때, 그들은 거의 대부분의 교육이 학생을 하나님께로 접근시키는 대신에 오히려 학생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을 지나치려 하는 것이다.
 
  이들은 드디어 원자의 신비를 풀어준 인간의 천재적인 두뇌를 칭찬하지만, 한편으로 이 “지혜의 극치”가 우리 위에 무엇을 떨어뜨릴 것인가를 생각하고 벌벌 떨고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인간의 “진보”가 이루어 놓은 업적이다. 이러한 업적 위에 사람들은 희망을 걸어보고, 보다 나은 세계, 보다 평화로운 세계를 꿈꿔 본다. 이들은 언제나 “진보”는 향상을 향해 전진한다고 당연시하지만, 실상은 “진보”가 우리를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퇴보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반증할 수 있는 논증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돌아오신다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이며, 우리가 그 영광스러운 날을 대비해서 항상 준비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확증은 무엇인가?
물론 우리의 증거는 성경이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은 성경에서 가장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학자 가운데 어떤 분들은 성경 구절 30절마다 이 재림의 교리가 언급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첫번째 오심이 한 번 언급되는 동안에 주님의 재림은 8번씩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 합쳐서 주님의 재림은 총 318번이 언급되어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재림이 예언자들의 주제가 되어 있으며, 신약성경에서는 책 전체(데살로니가전후서)가 재림을 다루고 있는가 하면, 장 전체가 (마24, 막13, 눅21) 재림을 취급하고 있다.
 
  신구약성경 전체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사야 66장 15절에서 우리는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둘러싸여 강림하시리니 그의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여움을 나타내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책망하실 것이라”고 한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예레미야서에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예루살렘은 주님의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며, 열국의 대표자들이 모여들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때에는 워싱턴이나 런던이나 파리에서 지금까지 열렸던 어떤 군비 축소 회의보다도 더 큰 군축 회의가 열릴 것이다.
  에스겔은 회복될 예루살렘과 재건될 성전과 이스라엘 고토가 회복되고 번창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다니엘은 환상 중에, 이 세상의 재판장과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다루고 있다.
  호세아는 말일에 주님께서 돌아오실 것이며, 그 때에 이스라엘은 그를 주와 왕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요엘은 마지막 날에 세계 열국의 군대가 천국의 군대를 대적하기 위하여 모여들 것을 묘사하고 있다.
  아모스는 다윗의 왕위가 예루살렘에 새로 서게 될 것을 계시하고 있다.
  오바댜는 왕 중의 왕이 오심에 비추어서 심각한 경고를 발하고 있다.
  미가는 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때 세상의 모든 전쟁이 종식될 것을 발표하고 있다.
  나훔은 주님의 발아래 산들이 흔들리고 그리스도의 임재하심과 함께 온 세상이 불탈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박국은 측량대로 새로운 왕국을 측량하시는 왕과 그리스도 앞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는 산을 지적하고 있다.
  스바냐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치실 새로운 노래에 관하여 말하고 거짓 그리스도가 매장될 것을 말하고 있다.
  학개는 만물이 흔들리되 오직 하나님께 속하는 것만이 남을 것을 말하고 있다.
  스가랴는 주님의 발이 감람산 위에 서실 것을 묘사하고 있으며, 산이 둘로 갈라지고 결전의 골짜기가 형성될 것을 기술하고 있다.
  말라기는 다시 오시는 왕을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잿물과, 영광으로 전 세계를 채우는 떠오르는 태양으로 묘사함으로써 주님의 재림에 대한 구약의 이야기를 끝맺고 있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신약에 오면 주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은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더욱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마태는 그리스도를 자기 신부를 맞으러 오는 신랑으로 비유하고 있다.
  마가는 그리스도를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여러 가지 일을 종들에게 맡기고 긴 여행길에 오르는 집 주인으로 비유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사업차 먼 나라로 떠나면서 자기 소유를 종들에게 부탁하며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여 이를 남길 것을 당부하며 떠나는 귀인으로 나타난다.
  요한은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 하겠다”(요 14:2, 3)고 하신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로마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만물이 그의 발아래 복종하는 것을 본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주님께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기 위해서 오시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고린도후서는 이 땅에 속한 장막집이 무너진 후에 우리가 소유하게 될 새 집을 묘사하고 있다.
골로새서 3장 4절에는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진술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라고 말하고 있으며, 데살로니가후서는 주님께서 그의 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영광스러운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디모데서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상주신다는 말씀을 읽게 된다.
  디도서에서는 “복스러운 소망”을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주님께서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실 것을 말하고 있다.
  야고보는 그의 편지를 읽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로서 기다릴 것을 권고한다.
  베드로는 주의 날이 밤에 도적과 같이 이를 것을 말하고 있다.
  요한은 모든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
  유다는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전체가 주님의 재림을 다루고 있다.
 
  구약성경만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두 번째 나타나심을 기대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신약성경만이 주님의 재림에 관한 약속으로 차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요 교파의 역사적인 문헌을 연구해 보면, 우리는 이들 주요 교파의 창시자들이 모두 이 약속을 믿고 받아들였음을 알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진리, 가장 감격적인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다. 우리 주변이 모두 염세주의와 우울과 실의로 둘러싸여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미래에 대한 확실한 약속이다. 사람들이 “도대체 어찌된 셈입니까? 우리는 어느 쪽으로 가는 것입니까?”하고 울부짖을 때, 성경은 정확하고 확실한 대답을 줄 수 있다. 성경은 만물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해서 마무리될 것이며,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는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영광스러운 사건이 언제 어느 때에 일어날 것인가를 함부로 상상함으로써 거룩한 하나님의 섭리에 도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사도들이 “주여,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6, 7)라고 대답하신 것을 잘 알고 있다.
  주님께서 오시는 시간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느 때에라도 주님을 맞을 수 있도록 우리의 생활을 영위하는 일이다. 강한 나팔 소리가 들리며 하늘이 나누이고 그리스도와 그의 천군 천사들이 인간의 눈에 다시 나타날 때, 그 시간과 그 순간이 언제일는지는 하늘에 있는 천사도 모르고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가까왔다는 것을 알리는 일련의 징조(경향)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눅 21:28-31)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눈을 들어 주의 깊게 살피라고 명하신 이런 징조란 어떤 것일까?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눅 21:25-26).
  모든 영원을 감찰하는 천사들이 측정하는 시간은, 우리가 시간을 측정하는 세상의 달력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정해진 6,70년의 수명에 전력을 다해 매달리며, 지상에서 머무는 각자의 시간과 관련시켜 날수를 계산하는 우리들에게는, 100년, 200년, 500년은 매우 긴 시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이러한 시간이 하루의 길이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세상에 되어가는 사태에 비추어서 성경을 바로 읽는 학자들은 대다수가, 지금 우리가 지상에서의 최후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수천 년 전 에덴 동산에서 시작되었던 인간사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마지막 시대에 돌입했다고 믿고 있다!
 
  중동 지방에 소동이 일어나고 있다. 옛날 페르시아는 석유 때문에 주요 국가로 등장했다. 이스라엘이 별개의 독립 국가로 재건되고 자신의 통화와 군대와 주체성을 가진 국가로 회복됨으로써, 세계사의 바퀴는 강한 회전을 시작했고 완전히 한바퀴를 돌기 직전에 와 있다.
  우리의 문명이 시작된 것이 바로 이 근동 지방의 비옥한 땅에서 였다. 이 제한된 지역으로부터 문명이 모든 방면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그것이 지구를 한바퀴 돌았다. 때로는 우뚝서서 발걸음을 정비하기도 하고 힘을 기르기도 하고 만행과 무지와 불신과 공포의 암혹 시대에는 발이 묶일 때도 있었지만, 문명은 꾸준히 지구 상을 회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 시대에 와서 드디어 문명은 그 발상지로 되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성경 학자들은 현 세대의 상황을 보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임을 인정하고 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흥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흥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37-42).
  이 학자들은 또 다니엘서 12장 4절에서 마지막 날에 지식이 크게 증가하리라고 한 말씀으로 보아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라고 지적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에 지식과 사람들의 왕래가 급증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유사 이래로 오늘날과 같이 사건이 급속도로 일어나고, 인공적인 경이驚異가 오늘날과 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의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은, 인간의 몸은 이러한 긴장과 속도와 압력에 견딜 수 없게 만들어져 있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아랑곳없이 계속 줄달음치기에 바쁘다.
이와 같이 혁신적인 가속화를 가능케 했던 지도자들 중의 많은 인사들이, 자기들이 창조해낸 “프랑켄스타인”적인 괴물의 희생물로서 자기 책상 앞에서 죽어갔다!
  우리는 에스겔서 38장, 39장이, 러시아와 공산주의의 강력한 세력이 마지막 때에 큰 군대를 형성하여 주님의 뜻에 반항하여 이스라엘을 치러 내려올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지식인들이 베드로후서 3장 10절부터 12절의 말씀을 조소했었다. 그러나 수소폭탄에 이어 코발트폭탄이 가능해지자, 이들의 회의적인 태도는 성경의 정확한 예언에 대한 경이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 3:10-12).
 
  나는 월리암 밀러를 비롯한 많은 열성적이며 과격한 종교인들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서 날짜까지 정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과거 어느시대보다도 완전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음을 심각하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너무나 규모가 큰 사건과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얼마 전만 하더라도 일대 화제를 불러일으킬 사건들이 사건의 틈바구니에 끼어 그대로 지나가고 있다. 도덕적인 퇴폐풍조가 너무나 일반화되고 널리 인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려는 노력이 필요 없게 되었다. 정부 고위층의 부패는 거의 당연시되고 있는 실정이어서 예외이기보다는 하나의 법칙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공산주의라는 강적과 맞서고 있다. 공산주의는 이교 로마 시대 이래로 교회가 대항해 온 최대의 적이며 가장 잘 조직되어 있는 강적이다. 예언자들이 거듭 경고했던 적 그리스도가 마지막 날에 출현할 것이다. 적 그리스도는 우리가 보는 눈 앞에서 현저하게 성장하고 있고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의 정체를 감추려 하거나 그 목적을 가장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뻔뻔스럽고 대담하며 철저한 무장을 갖추었다.
  이상은 지금 바로 이 시각에 전 세계를 감돌고 있는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과 죽음으로 특징지워지는 계시적인 경향을 몇 가지 열거해 본 것이다. 하늘에 속한 천사들이 측정하고 있는 시간은 우리에게 10년, 100년, 1000년을 허락할지 모르지만, 하루 아니면 일 주일, 한 달만을 허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마 24:34)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시기인지도 모른다.
  그 최후의 날까지 모든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깨어서 기다리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회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43)고 말씀하셨다. 이 감격적인 희망은 한편 주님의 재림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한번 전적으로 봉사에 헌신하는 생활을 자극시켜 줄 것이다. 예수께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눅 19:13)고 말씀하셨다. 이 기간은 또한 준비할 기간이기도 하다. 주님께서는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눅 12:40)고 말씀하셨다.
 
  세계의 모든 역사가 이 날, 모든 원수가 주님의 발아래 들어오고 주님께서 왕관을 쓰실 날을 향해서 움직이고 있다. 성경은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고 기록하고 있다.
  그 날에는 전쟁과 분쟁이 멈출 것이다. 죄도 더 이상 없을 것이며, 궁핍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 날에는 슬픔이니 고통이니 하는 것은 말조차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 날에는 이방 사람도 회심할 것이다. 그 날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 날에는 모든 자연이 에덴 동산을 상징하는 광휘와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그 날에는 세상의 모든 맹수들이 화목하고 평화스럽게 살 것이다. 그 날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이 온 지구상에 덮일 것이다. 그 날에 드디어 우리의 간절한 기도, “나라에 임하옵시며”가 응답될 것이다.
 
예수님은 마침내 다스리시리라.
태양이 쉴 새 없이 달리는 나라,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뻗치는 나라,
달빛도 별빛도 필요 없는 나라를,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시리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다.
 
 
제18장 드디어 평화가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이사야 26:3
 
  이제 당신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어떤 것인가를 알았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당신은 평안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 어떠한 값이 지불되었는가를 알았다. 나는 평안을 얻을 수만 있다면 100만 불이라도 내놓을 사람을 얼마든지 알고 있다. 수천 수만의 영혼들이 마음의 평안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들이, 당신이 발견한 평안을 발견하려고 하면 마귀가 방해를 한다. 마귀는 그들의 눈이 멀도록 만든다. 사탄은 찾는 사람의 마음을 흔동시킨다. 그러면 그들은 속아 넘어가고 만다. 그리고 그들은 평안을 경험할 기회를 놓쳐 버린다. 그러나 당신은 이 평안을 찾았다. 이제 그 평안은 영원히 당신의 것이 되었다. 당신은 인생의 비결을 발견한 것이다!
  아직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다. 많은 신비가 남아 있고, 당신을 괴롭히는 문제가 많다. 그러나 마음속 깊숙이에는 확신 있는 삶으로 이끄는 내적인 안식과 평안이 있다. 당신은 기독교의 이상理想에는 다른 어떤 철학적인 개념에라도 도전할 수 있는 많은 이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물질주의와 공산주의, 기타 모든 철학적인 해석은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시는 것에 도저히 맞설 수가 없는 것이다.
 
  디이센 박사Dr. Thiessen는 그의 저서 ‘기독교 윤리Christian Ethics’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이득으로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로, 양자의 신분을 갖게 된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에, 당신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다. 당신은 이제 그의 자녀다. 당신은 이제 왕실의 가족이나 가질 수 있는 일정한 특권과 책임을 가지고 있다. 왕실의 자녀로 양자의 수속을 거침으로써 당신의 혈관에는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당신은 왕 중의 왕이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둘째로, 당신은 상속자이다. 성경은 당신이 거듭났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의 당신의 새로운 위치가 당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의 상속인이 되게 하였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제 당신은 만물을 물려받을 상속자이다.
 
  셋째로, 평화가 있다. 이 평안(평화)은 당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때에만, 즉 당신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분 안에서 또 형제 안에서 화해를 느낄 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시고 또 친히 우리의 화평이 되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며, 다른 데서 맛볼 수 없는 내적인 평안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오실 때, 우리는 항상 우리를 괴롭히던 죄책감에서 해방된다. 우리는 스스로 더럽고 결점이 많다는 일체의 감정으로부터 해방되어 정결케 될 때,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동료들을 쳐다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이보다 한층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죽음에 임할 때 이와 같은 확신과 평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도 다른 어떤 철학도 이와 같은 “죽음 앞에서의 평안과 확신”을 약속해 줄 수 없는 것이다.
 
  넷째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얻어지는 큰 혜택은 영적인 생활이다. 사람은 태어난 그대로의 상태로는 자신의 과거생활의 잘못된 점을 완전히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 영혼이 죽어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신학적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내적인 감정을 꼭 이와 같이 밝히지는 않지만, 영혼이 죽어 있는 상태를 잘 의식하고 있다. 모든 “자연인”, 즉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종종 자신의 선악에 대한 무관심에 놀라곤 한다. 분명히 잘못인 줄 알면서도 그 부정 앞에 타협하기를 좋아하는 자기 자신을 보고 괴로워하며, 올바른 것보다는 자신에게 편리한 쪽을 택하는 자신으로부터 혐오를 느낀다. 심지어 가장 간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때로 선해지고 싶은 욕망을 느낄 때가 있는 것이다. 가장 마음이 완악한 범인이나, 가장 철면피한 매춘부라도 마음속에 지금보다 더 잘되고 싶은 간절한 갈망을 지니고 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 중에 고상한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목표하는 생활보다 얼마나 뒤떨어지는 생활을 하는가를 알고 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어 있기 때문에 목표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며 여기에 불신자들의 비극이 있다. 그리고 영적 법칙을 따라 살기 이전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심령이 살아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데에 많은 이들의 비극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저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셨다. 또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했다.
  거듭난다는 것은, 새로운 이상과 새로운 포부와 새로운 희망과 이들 새로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으로 다시 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주님으로서 새 생명을 주셨다. 당신은 다시 난 것이다.
 
  다섯째로,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당신의 생활에는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기쁨이 따른다. 외로움은 가장 큰 공포의 하나다. 외로움은 인류 최대의 비극이다. 우리는 큰 무리 가운데서 얼마나 자주 “군중 속의 고독”을 말하는가! 시골 길을 혼자 걸을 때보다 거대한 도시 생활 속에서 더 큰 고독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이해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 같은 인생관을 가진 사람, 같은 동기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찾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말하는 사람을 찾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옛날 시편 기자의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시 142:4)라는 독백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든 생각과 염려를 이해해 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라는 것을 발견했다. 일단 그리스도와 친구의 관계가 성립되면, 당신은 절대로 외로움에 빠질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마음속에 올바른 위치를 잡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다는 일체의 소외감이 사라진다. 당신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존전에 서게 된다. 이 교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며 영광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어떠한 철학도 이 영광스런 혜택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여섯째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중에 새 힘이 온다. 사람은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엄격한 규율과 상세한 계명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이 세운 표준에도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는 최저한도의 인간 행위의 규범이다. 그리고 당신 스스로는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에 외부의 도움 없이는 이 표준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를 통하여, 인간은 이 표준에 이를 수 있고 완전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있기를 희망하면서 결심과 결의를 반복해 왔지만, 인간은 고작 일시적인 개선을 가져올 수는 있어도 영원한 변화는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인간적인 연약함은 너무나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에 새해에 “신년 결심”을 하는 것은 세계적인 조소거리가 되어 있고,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인생의 새 페이지를 넘긴다는 것은 공적인 조소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의 생활을 현 상태에서 좀 더 개조시키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새로운 인격을 창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길뿐이다.
  우리는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일어났던 변화를 잘 알고 있다. 그 때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마음에 임하심으로써 바울은 그리스도의 가장 파괴적인 원수에서 가장 강력한 복음의 옹호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많은 극적인 인격의 변화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켰던 바로 그 방법,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중생에 의하여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거나 이러한 힘을 줄 수 있는 인간의 철학은 없다. 이 크나큰 힘은 언제나 당신의 초청에 응해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 어떠한 소명이든지, 어떠한 의무든지, 어떠한 대가든지, 어떠한 희생이든지, 당신이 필요를 느낄 때에 주님의 힘은 당신의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일곱째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신앙생활을 하는 결과로 육체적인 유익이 따른다. 죄와 자신의 무가치함을 의식하는 열등감 같은 것은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해치는 요소들이다. 육체적으로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 육신적인 부도덕, 동료들에게로 향하는 증오심, 자신의 부족감과 좌절감, 목표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욕구 불만 ‥‥‥이러한 것들이 육체적인 병과 정신적인 병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그대로의 자연인이 지니고 있는 죄와 죄의식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만들고 심신을 병들게 만들고 있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설교와 가르침 속에 병 고침을 동반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영의 생명과 심신의 건강 사이에는 피치 못할 관계가 있다.
  하나님과의 평화와, 인간의 마음속에 깃드는 하나님의 평화,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기쁨은 그 자체가 우리의 심신의 힘을 강화하고 보전하는 데에 촉진제의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거듭남으로써 따르는 새로운 힘과,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기쁨, 영적인 생활의 성장과 내적 평안 이외에도 영과 혼과 몸의 질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참된 그리스도인만이 즐길 수 있는 몇 가지 특권이 있다. 예를 들어, 계속적으로 신령한 지혜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이 그것이다. 성경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참된 낙관주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모든 일이 결국에 가서는 잘될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또한 뚜렷한 세계관이 있다. 이 세계관은 하나님의 목적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만물이 어느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가를 제시한다. 이 세계관은 인간과 인간의 대결이나 싸움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우리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듯이 보이는 자연의 파괴적인 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왕좌에 앉으셔서 모든 만물을 통치하신다는 확신을 주는 세계관이다. 사탄 자신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제재를 받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범위 내에서만 그 악영향을 행사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각 시대를 위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심지어 각 나라와 각 개인을 위해서도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이미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의 나라가 세워질 것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삶에 계획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결국 모든 불의를 이기고 승리하신다는 확신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가지는 우월성을 요약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영원히 누리게 될 이점을 간과할 수 없다. 욥은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 14:14) 하고 말했다. 그는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5)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얼마나 큰 전망이며, 얼마나 희망찬 미래인가! 어떠한 삶이며 어떤 소망인가!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과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과도 나의 처지를 바꾸지 않겠다. 나는 차라리 왕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겠다. 그리고 천국 왕가의 일원이 되겠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와서 왜 여기 있으며 어디로 또 가는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마음에 평안을 누리고 있다. 주님의 평안이 나의 마음과 영혼에 흘러넘치고 있다.
 
  폭풍이 일고 있었다. 바다의 거센 파도가 바위 위에 부딪치고 있었다. 번갯불이 번쩍이고 천둥이 으르렁대고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그러나 조그마한 새가 바위틈에서 그러한 폭풍우에 아랑곳없이 곤히 잠자고 있었다. 이것이 평안이다. 폭풍 속에서도 잠잘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평화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쉼과 평안을 얻었다. 이생의 쓰디쓴 고난과 혼란과 문제 속에서도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폭풍이 일고 있으나 마음은 쉼을 얻었다. 우리는 드디어 평화를 찾은 것이다.
 
 
- The end   ^-^ 수고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