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은 왜 사라지는가

-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모르기에 우리 앎의 구축에 유일한 토대는 과거 경험이다. (이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 세계사의 몇몇 의붓자식을 본보기적으로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 초기 인류는 이미 고도로 완성된 기술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사냥 무기로 쓰인 창은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하이델베르크인) 시기에 이미 기술적으로 오늘날 투창 선수가 올림픽 경기에서 사용하는 투창용 창과 거의 비슷하게 만들어졌다.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정착 농 경민이 아니라, 그보다 수천 년 전 드넓은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에서 수렵과 채취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손에서 탄생했다.
* 사회적 위계질서와 가부장적 사회 형태는 모든 초기 고도 문명 의 규범이 아니었다. 매우 이른 시기부터 수준 높은 문명에 토대를 둔 평 등한 사회 모델도 존재했다. 대략 6000년 전쯤 유럽 최초의 고도 문명을 이룬 도나우 문명에서다. 
* 그리스 문화어에서 나온 많은 표현은 그리스 이전 시대에서 유래했으며 고古유럽의 문화유산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세라믹, 메탈, 시어터, 앵커, 프시케 같은 개념이 그것이다.
* 로마 문명의 급속한 발전은 에트루리아인의 영향을 빼놓고는 상 상할 수 없다. 유럽 문화어에서 차용한 수많은 라틴어 어휘는 에트루리 아어에서 유래했고, 창작자를 후원하는 전통도 예술과 문화 발전에 열 성적이던 에트루리아 출신의 한 귀족에게서 비롯되었다.
* 여전사로만 구성된 아마존 부족(아마조네스)을 언급한 그리스 신화에는 역사적 실체가 담겨 있다. 고고학자들은 흑해 초원에서 여전사들의 무덤을 발견했다.
* 현대 투우의 기원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러나 현재 에스파냐와 라틴아메리카에서 행해지는 피비린내 나는 투우 경기는 평화로운 형태의 투우보다는 오래되지 않았다. 평화로운 형태는 미노아 시대 크레타에 서 제례 의식의 일환으로 행해지던 투우에서 발견된다.
* 실크로드의 시작은 기원전 제3천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이 무역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중국인이 개척한 것도 아니다. 
* 아프리카는 식민지 시대 이전에 이미 광대한 무역망을 갖춘 다양 한 고도 문명을 꽃피웠다. 좀 더 자세히 관찰해보면 원주민과 이방인의 요소로부터 공생적 전체를 만들어내는 전형적인 아프리카적 발전 과정 이 드러난다.
*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침략하기 전의 아마존 분지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원시림이 결코 아니었다. 이는 최근의 위성사진에서 잘 나타난다.
- 고고학자와 인종학자는 뚱뚱한 조각상 유형이 다산의 상징과 연관성이 있다고 가정한다. 반면에 날씬한 유형은 자연의 모든 생명에 깃든 수호신을 표현한 애니미즘적 관념과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유라 시아 민족의 전래 신화에 따르면 이 수호신들은 하나같이 여성이다. “대 지와 중간계의 다양한 원소와 자연 현상(물, 불, 바람, 숲 등)을 여성적 신 성, 곧 '어머니 정령'의 화신으로 보는 것은 핀우고르족'의 전형적인 생각이다. 날씬한 조각상은 유라시아 빙하기의 사냥꾼 공동체에서 단결의 상징으로서 전문화되었다. 사냥꾼 공동체는 씨족이나 씨족 연합으로 조직 되었고, 여성은 이러한 사회 조직 내에서 조정자라는 특권적 역할을 맡았다. 1990년대에 말타 유적의 발굴을 주도한 연구 팀장은 “집에서 주도권을 가진 인물로서의 여성과 주거 공동체와 아궁이의 시조로서의 여 성”(Abramova 1995: 82) 사이의 관계가 긴밀하게 결합되었다고 가정했다. 여성의 이러한 이중적 역할은 유라시아 민족의 전래 신화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모계 중심적이고 씨족 질서에 기초한 성스러운 원칙으로서”(Ovsyannikov /Terebikhin 1994-77) 어머니 - 씨족 시조의 관련성을 나타낸다.
- 바이칼 호숫가 사냥꾼들의 애니미즘적 세계관은 수천 년 동안 유지 되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도 기본적인 특징은 미세한 변형만 보였다. 말타 유물의 전체 목록과 장르를 통해 알려진 조형 예술의 모든 모티프는 이후의 문화 발전 시기인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도 그 의미를 잃지 않았고, (Haarmann / Marler 2008: 70ff)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자연 수호신의 상징이자 씨족 시조로서의 여인상, 토템 동물이자 '숲 의 왕'으로 표현된 곰, 토템 동물이자 두 세계의 중개자인 물새, 삶의 순 환(탈피에 의한 부활)을 상징하는 뱀 등이 그것이다. “북반구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오랜 생명력을 지닌 관습은 샤머니즘이다. 샤머니즘은 가족과 씨족의 관습이다. 수렵인과 채취인과 농민들 사회에서는 우리 시대에까지 통용되고 있으며, 산업화 시대에도 계속 살아 있다.” (Kare 2000:104) 바이칼 호숫가의 빙하기 사냥꾼이 남긴 예술 작품의 주요 형태와 모티프는 예로부터 시베리아인의 문화유산에 속하며, 유라시아의 구전 신화와 다양한 샤머니즘 의식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소비에트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은 1930년대부터 원시적 사회 형태의 잔존물인 샤머니즘이 극복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91년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자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Glavatskaya 2007) 토착 시베리아인은 서양에서 온 방문객을 자신들이 그사이 비밀리에 의식을 거행하던 장소로 안내했다. 소비에트가 통치하 던 수십 년 동안 그곳에서 선조의 문화유산을 보존해온 것이다.  시베리아의 역사 시대 샤머니즘은 시기적으로 빙하기 사냥꾼의 관 념 세계와 살아 있는 자연에 대한 관념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오늘 나까지 시베리아인 사이에서 드러나는 투철한 자연 보호 의식은 우리 모두에게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 사냥꾼에게 육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식량은 바다에서 나왔고, 사냥을 하는 동안에는 바다 가장자리의 얼음덩어리 위에 천막을 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막에 필요한 기둥은 배로 실어왔고, 기둥에 씌울 재료인 물범 가죽은 계속해서 새로 만들 수 있었다. 사냥꾼은 먼바다로 나갈 필요가 없었고 변덕스러운 파도에 내맡겨진 상태도 아니었다. 날이 좋을 때는 배를 타고 얼음덩어리 근처 바다에서 사냥을 했고, 날이 좋지 않을 때는 얼음덩어리 한쪽에 마련한 임시 거주지에 머물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서쪽으로 잡아당기는 태양의 움직임을 뒤따랐다. “이 사람들은 바다 환경을 이용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기술과 생활 방식을 적응해나갔고, 여러 세대에 걸쳐 탐색하는 동안 북대서양을 횡단하는 길을 찾았으며, 마침내 북아메리카 북동부 지역의 육지에 이르렀다.” (Stanford / Bradley 2012:247) 사냥꾼의 서쪽 이동은 결코 의도적인 대서양 횡단이 아니었 다. 그저 새로운 사냥 구역을 탐색하기 위해 얼음 가장자리를 따라서 이동한 결과였다.  이처럼 콜럼버스 이전 북아메리카 이주 연대기와 관련한 새로운 정황이 드러나면서 관련 학계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불거졌다. 그 결과 솔뤼트레 가설을 중점적으로 다룬 수많은 논문이 발표되었다. (Balter 2013, Raff / Bolnick 2015, Straus 2017, 1. a.) 이러한 대서양 이주설에 특히 반대한 이들은 인간유전학자였다. 그러나 이 논쟁의 찬반 입장을 뒤쫓다보면, 인류의 빙하기 이주 문제는 논쟁에 참가한 인간유전학, 고고학, 인류학, 언어유형학의 입장을 모두 고려하지 않고는 논리적인 대답을 찾을 수 없다는 인상이 강해진다. 고아메리카인 유전자풀의 세분화에서는 특히 하플로그룹 X2의 분포 관점에서 두 갈래 혈통dual ancestry(Raghavan 2013) 으로 분류된다. 즉 연대 의 차이로 논리적으로 설명되듯이 X2를 가진 집단은 유럽에서, X를 가 진 집단은 아시아에서 이동한 것이다. 바스크어와의 비교에서 알곤킨어의 구조에 나타나는 유사성을 단 순한 우연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언어구조의 유사성은 고립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역(유전자 특징과 도구 제작)에서의 일치로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특히 솔뤼트레 문화의 도구 제작은 클로비스 기술의 발전을 분명히 알게 해준다. 그 기술은 유럽에서 전해진 노하우 없이는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 이러한 대서양 가설의 조명 속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주 역사는 빙하기의 두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 이주 초기(2만 3000년~1만9000년 전)에는 솔뤼트레 문화를 이룬 집단 중 일부가 유럽에서 옮겨갔다. 둘째, 이주 후기에는 아시아에 거주하던 집단이 베링 육교를 통해 알 래스카 (약 2만 4000년 전부터)로 건너갔다가 거기서부터 북아메리카 내륙(약 1만 1500년 전)으로 진출했다. 베링 해협을 통해 알래스카로 들어가는 일은 빙하기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빙하기 이후의 이주는 계속해서 캐나다와 북아메리카 내륙으
- 괴베클리테페 신전은 조금은 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신전은 파괴되지 않았고, 기원전 제8천년기 초 언젠가 그냥 버려진 채 묻혀버렸다. 그렇게 묻히게 된 것도 오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퇴적 작용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인간의 활동으로 만들어진 못 쓰게 된 석기와 석회석 도구, 깨진 돌 용기, 그 밖에 동물의 뼈로 계획적으로 신전이 덮여버렸다. 그런 재료 중에서는 인간의 뼈도 일부 발견되었다. 신전은 그렇게 덮여버 림으로써 날씨의 변화와 사람의 손에 파괴되지 않을 수 있었다. 땅 밖으 로 솟아 있던 유일한 부분인 몇몇 기둥머리는 나중에 인근 농부들에 의 해 파괴되었다. 그중 일부는 집을 짓는 재료로 사용되었고, 일부는 경작 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 치워졌다. 신전 건물 전체를 메워버린 이 이례적인 행위는 단 하나의 설명으로 만 이해될 수 있다. 즉 이전에 이동 생활을 하던 사냥꾼 집단이 사냥과 채집에서 식물 재배의 경제 형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과정에 적응했고 이후 정착 생활을 하는 농민이 된 것이다. 새로운 경제 형태에 적응하다. 보니 동시에 세계관도 바뀌었다. 자연의 정령 자리에는 농경의 신이 등장 했다. 이로써 괴베클리테페 신전은 사냥꾼에게 성스러운 장소로서의 기능을 잃었고 결국 버려지고 묻혀버렸다.
- 괴베클리테페 신전에 묘사된 다양한 그림 모티프에서는 유라시아 석기 시대 사냥꾼의 그림과 역사 시대 유라시아 민족의 전래 신화 사이 의 유사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특정한 동물 형상의 모티프와 상징적 구상은 바이칼 호숫가에서 야영하던 집단과 동부 아나톨리아에 신전을 세운 집단에서 동시에 발견된다. 예를 들어 뱀, 물새, 신화적 조상에 대 한 구상이 그런 것이다. 근동 지역의 초기 신전 건축물은 선사 시대 사냥꾼 문화의 주변 지역에서 탄생했다. 이러한 사냥꾼 문화는 북쪽에서는 계속 이어진 반면, 아나톨리아에서는 정착 생활과 식물 재배, 도시적 거주 방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과정으로 들어서면서 묻혀버렸다. 괴 베클리테페 이후 약 2000년 뒤 차탈회위크를 세운 사람들이 남긴 고고학 유물에서 그러한 과도기를 읽을 수 있다. 괴베클리테페 발굴은 인류의 문화 발전에 대해 갖고 있던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라고 요구한다. 도시는 문명의 출발점이 아니었고 도시적 환경이 거대 건축술 탄생의 전제 조건도 아니었다.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 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세계 질서의 결정체이자 사회 집단의 연대감 강화 의식이 거행되는 중심지인 신전이 문화적 발전의 이정표가 된다. 중 심지의 역할은 도시적 취락지로까지 확대되며, 여기서 신전 건축은 초기 문명의 중요한 형식으로 대두된다.
- 차탈회위크의 도시 역사는 매우 이례적인 종말을 맞이하는데, 그 이유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들볶은 모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기는 분명 도시가 형성되었을 때부터 줄곧 있었을 것이다. 습기가 많은 저지대와 강변 초지는 모기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차탈회 위크 주민은 수백 년 동안 모기에 잘 대처하며 살았다. 고고학자들이 확인한 바로는 도시의 건물 안 주거 공간은 눈에 띌 정도로 깨끗하게 유지된 상태였다. 내부 공간에 모기 서식처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어쩌면 모기를 체계적으로 제거했을지도 모른다. 집 안 화덕에는 연기 배출구가 따로 없었고, 지붕에 난 구멍을 통해서만 연기가 빠져나 갈 수 있었다. 화덕의 연기가 오랫동안 집안 전체에 퍼지게 만든 구조는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야 동시에 모기도 막을 수 있었을 테니말이다. 그러나 기원전 제6천년기 언제부터인가 어쩌면 기원전 5800년 무렵 발생한 기온 상승의 결과로 축축한 저지대에 말라리아모기가 서식하게 되었다. Bater 20:28)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말라리아에 걸렸다. 전문가들 은 무덤 속 유골에서 말라리아로 야기된 일련의 기형적 뼈를 확인했다. 만연한 말라리아는 도시 주민의 삶을 몹시 힘겹게 만들었고, 그들은 고향을 영원히 떠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기원전 5600년 무 렵 차탈회위크는 버려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차탈회위크 서쪽, 오늘날의 터키어로는 하질라르로 불리는 곳에 새 도시가 탄생했다. 신석기 문화는 여기서 계속 이어졌다. 하질라르를 세운 사람들이 차탈회 위크 주민의 후손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비밀로 남을 것이다.
- 차탈회위크의 특이한 역사는 초기 문명 발전에 대안적 모델이 존재 했다는 인상을 준다. 차탈회위크에서 본보기적으로 증명된 바와 같이 초기 신석기 시대의 도시 취락지는 사적 건물과 공적 건물의 구분 없이 생겨날 수 있었다. 또한 도시적 환경에 수천 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조직도 사회적 위계질서 없이 얼마든지 기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차탈회위크만 그런 공동체를 이룬 것은 아니다. 그보다 늦게 등장한 도나우 문명의 대도시들에서도 비슷한 조건을 가진 도시 공동체가 형성 되었다. 사회적 위계질서로 특징되는 일직선적인 도시 역사는 그 이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
- 남동유럽의 신석기 시대와 동기 시대 유적지를 연구하는 고고학자 들은 고유럽 농경 사회를 고도 문명의 의미에서 초기 문명으로 보아야 할지를 놓고 지금까지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이 초기 농경민의 정착지에서 국가적인 조직 형태가 증명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집트 문명은 상세하고 다양한 연구로 속속들이 잘 알려졌고, 거기서부터 모든 초기 문명의 태동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본보기적 유형이 파생했다. (Albertz et al. 2003: 8 ff., 13 f) 그에 따르면 국가 조직의 구축은 모든 고도 문명이 발전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이 논리에 따라 고도 문명은 유럽이 아닌 고대 오리엔트에서 처음으 로 증명되었으며('빛은 동방으로부터'ex oriente lux), 따라서 남동유럽의 신석 기 시대 문화 단계는 문명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틀에 박힌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나 구세계와 신세계의 초기 문명을 전체적으로 비교하면, 고대 이집트와 고대 수메르 문명" 모델이 규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외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오늘날의 고고학자, 인류학자, 문화학자는 초기 단계에서 국가적 질서가 전혀 증명되지 않았거나 초보적으로만 발 전한 초기 문명이 있다고 말한다. 고유럽이나 인더스 문명도 그런 경우다. 따라서 초기 문명에 대한 논의는 인더스 문명과 도나우 문명과 같은 다른 초기 고도 문명으로도 확대되어야 한다.
- 현재까지 확보된 지식을 토대로 하면 도나우 문명은 평등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평등을 보여주는 특별한 고고학적 증거가 있으며, 그 증거는 이른바 부정적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다시 말해서 고유럽인의 취락지에는 특권 지도층과 사회적 위계질서를 보여주는 특징이 없다. 첫째, 묘지 문화에서는 빈부 차이와 남녀 차이가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둘째, 지배권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상징이 없다. 예를 들어 신분을 상징하는 왕홀이나 지배 계급에 속하는 종족을 확인할 수 있는 문장 등의 상징적 인공물이 없다. 셋째, 취락지의 배치에서 족장이나 사회 지배층 구성원의 집으로 확인할 만한 더 큰 건물의 윤곽이 없다. 넷째, 궁전과 같은 세속적인 권력을 드러내는 웅장한 건축물이 없다. 이와 같은 부정적 요소들이 말하는 바는 자명하다. 고유럽의 초기 농경민 공동체는 노동 분업이 발달해 있었다. 아이 돌보기, 직조, 원예처럼 여성이 선호하는 활동 분야와 건축, 금속 가공, 원료 조달처럼 남성이 선호하는 분야가 있었다. 그렇다고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거나 반대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지는 않았다.
- 도나우 문명은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알려준다. 즉 위계질서에 따라 조직되지 않은 공동체에서도 사회와 경제, 기술적 수준이 고도로 발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배층의 형성은 고도 문명의 생성에 필 요한 일반적인 전제 조건이 아니다. 초기 연방의 형태를 보인 고유럽의 사 회 모델은 남녀 양성의 협력이 특징적으로 나타난 공동체였다. 도나우강 과 그 지류 그리고 에게해에서 흑해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지역 및 지 역 상호 간의 무역 관계는 각 지역에 고루 분포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서양의 고대 문화를 연구하면서 그리스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에 깊 은 인상을 받을 때는 그 이전의 문화 시기에도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대 문화의 전형적인 특징은 고유럽을 출발점으로 한 특유의 발전 과정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 딜문은 단순히 구리가 거래되던 땅만은 아니었다. 딜문의 항구는 교 류하는 여러 나라의 물건을 옮겨 신는 환적장 역할도 했다. 수메르의 거래 물품은 딜문을 거쳐 인도에 도달했고, 인도에서 가져온 물건은 딜문 의 상인이 수메르로 운반했다. 딜문에서 멜루하로 이어지는 해상 루트에 서는 마간(오만 반도)이 중요한 중간 기착지였다. 그 루트를 통해 딜문으 로, 계속해서 메소포타미아로 운반된 물품에는 원료나 완성품 형태의 금속(구리와 아연, 은)과 상아, 고급 목재, 직물, 장신구가 포함되었다. 금속은 다른 금속과 교환되었다. 아카드 문헌에는 그러한 사실을 보여주 는 수많은 대목이 나온다. “딜문에서 수입된 구리는 물물교환 거래에서 양모, 은, 기름, 다양한 유제품과 곡물로 지불되었다. 그 밖에도 무역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에는 이른바 딜문 배의 청동 모형을 난셰' 여신에게 바치는 것이 관습이었다.” (Ray 2003: 85) 딜문을 거치는 무역과 물품 환적이 얼마나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 지는 딜문의 무게와 길이, 부피 단위가 수메르의 도시와 인더스의 무역중심지에서도 똑같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문화재도 서쪽과 동쪽에서 딜문으로 보내졌다. 바레인섬 북쪽의 취락지에서는 인더스 문자가 새겨진 도장과 쐐기문자로 쓰인 문장의 단편도 발견됨. 딜문 상인은 업무활동을 할 때 수메르의 쐐기문자를 사용했다.
- 펠라스고이인의 문화를 열심히 배운 그리스인은 나중에 남동유럽의 패권을 장악하는 로마인과 똑같은 길을 걸었다. 그리스는 점차 펠라스고이인을 지배했지만 그들의 많은 문화를 받아들였고 다양한 차용어 로 자신들의 언어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그리스를 지배한 로마도 그리스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수많은 차용어를 자신들의 라틴어 어 휘로 받아들였다. 펠라스고이인 문화의 전성기는 청동기 시대(기원전 제3천년기~기원전 제2 천년기)였다. 이들은 에게해의 다른 문명, 그러니까 키클라데스 제도 사람들과 크레타섬의 미노아인과 교역 활동을 했다. 그리스 남쪽(펠로폰네소스)의 펠라스고이인 취락지들은 고전기 이전(기원전 8세기~기원전 6세 기)까지도 언급되었다. 그 후 펠라스고이인은 전체적으로 그리스 문화에 동화하고 그리스어를 받아들였다. 유전학자들은 1990년대에 '지중해형 특이 유전자' 특징을 확인했다. 그리스에서 그리스 선주민의 유전자 풀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유전자지도로부터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다. (Cavalli-Sforza 1996: 63) 그리스인의 문화적 기억에서 펠라스고이인과 그들의 성취는 점차 밀려났다. 나중에 로마인의 집단적 기억에서 에트루리아인이 전반적으로 지워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고대의 문헌에서는 여전히 펠라스고이 인이 자주 언급되었다. 가령 호메로스의 서사시(『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와 역사학자들의 저술(특히 헤로도토스의 『역사』), 그리고 문학가와 철학자 의 작품에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II 840, X 429)에 따르면 펠라스 고이인은 트로이의 연맹이었고, 따라서 트로이 전쟁에서는 반反그리스 연맹에 속했다. 이것이 그들이 쫓겨나게 된 하나의 이유일 수 있다. 전래된 이야기에서는 민족적 반감도 표현된다. 그중 한 이야기에는 펠라스고이인이 아테네 처녀를 강간하고 여인을 납치했으며, 그 때문에 렘노스섬으로 추방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헤로도토스의 『역사』, VI 137~38). 그리스 문화에 끼친 펠라스고이 문화의 영향을 평가절하하려는 또 다른 동기는 점점 강해지는 그리스 지배층의 자기 찬양과 야만인' 및 그들의 외래 문화에 대한 거리 두기였을 것이다. 그리스 문화권 밖에 있는 민족(가령 켈트인, 스키타이인, 일리리아인')뿐만 아니라 헬라스 내에 있는 비그리스인도 야만인으로 간주되었다.
- 보통 서양의 고대라고 하면 현대 세계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떠올린다. 역사책에서는 이 두 고도문명 을 대표적으로 부각하고, 그들의 업적을 이상화된 중점에 따라서 조명한다. 과학과 철학, 예술은 그리스 문명의 성취로 찬양하고, 기술 분야나 제국 차원의 엄청난 건축 활동, 행정과 국가 업무에서의 탁월한 조직력은 로마 문명의 핵심으로 이상화한다. 고대에 관한 일반적인 기술에서 에트루리아인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거나 개별적으로만 언급되는데, 이 로써 고대 역사의 이해도 불완전하게 남는다. 그러나 고대 역사는 그리스-에트루리아 - 로마'라는 삼각관계의 관점에서 보아야만 감춰져 있던 중요한 상호 의존성이 비로소 드러난다.
- 이주민들은 동물 중에서는 특히 폴리네시아 닭을 가져왔다. 그러나 화물 속에 몰래 숨어 있다가 아우트리거 카누에 실려 함께 들어온 불청객도 있었다. 바로 폴리네시아 쥐였다. 이스터섬에는 쥐의 천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곧 섬의 심각한 골칫거리가 되었 다. 쥐는 이주민이 심은 채소와 유용 식물의 열매를 갉아먹었을 뿐만 아 니라 야자수의 씨앗까지 먹어치웠다. 이는 장기적으로는 나무 부족 상태를 야기했다. 유용한 나무가 부족해진 이유는 섬 주민의 생활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아이를 산기슭의 채석장에서 평지로 운반하기 위해서는 굴리는 방식이든 썰매를 이용하는 많은 나무가 필요했다. 또 다른 요인은 이들 의 장례 풍습이었다. 보통은 화장이 행해졌으며, 거기에는 많은 땔감이 필요했다. “이스터섬의 화장터에는 불에 탄 시신 수천 구의 유골과 불에 탄 뼈의 재가 상당량 남아 있는데, 이는 화장 목적으로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되었다는 점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Diamond zoos: 106) 그러나 모아이 문화가 몰락한 결정적 이유는 1650년 무렵 시작된, 소빙하기로 불린 급격한 기후 변화였을 것이다. 그것은 전 지구적인 현상 이었지만, 이스터섬은 지리적으로 고립된 상태와 대안 경제 형태의 부족 때문에 그 충격이 훨씬 더 강했을 것이다. 기후 변화는 라파누이 사회에 도 심각한 파장을 불러왔을 것이다. 유용 식물 재배는 현저하게 줄어들 었고 생필품 공급은 점점 빠듯해졌다. 각 씨족은 점점 더 날카롭게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고, 족장은 상속된 권위를 잃었으며, 섬 주민의 언어로 마타토아 matatoa 로 불리는 군부 지도자가 등장했다. “마타토아의 지위는 사회적 신분이 높은 남성에 의해 독점되었고, 이들의 무자비함은 여러 이야기 속에 묘사되었다.”(Luce 1992:14)
- 씨족들은 패권과 농경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치명적인 전쟁으로 얽혀 들어갔고, 그 결과 전체 주민 집단 수가 감소했다. 언제부 터인가 섬 주민은 이런 전쟁의 자멸적인 결과를 깨달았고, 새로운 질서 를 도입했다. 매년 봄 평화로운 경쟁에 바탕을 둔 하나의 의식을 치렀다. 각 씨족은 대표 한 명씩을 시합에 내보냈다. 시합에서 승리한 씨족은 다 음 시합이 열릴 때까지 나머지 씨족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을 맡았다. 이 러한 선택 방법과 거기서 파생된 권력 수행의 제도화는 일종의 '대통령 제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 가톨릭 신부들이 이스터 섬에 처음 들어왔을 때 씨족들 사이에서는 이런 형태의 권력 분배가 일반적이었다. 의식에 따라 치러지는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그해의 조인鳥人 탕 가타 마누로 뽑혔고, 1년 동안 창조신 마케마케를 지상에서 대변하는 상징적 역할을 맡았다. 모든 후보자는 신체적으로 잘 단련된 상태여야했고, 시합은 엄격한 규칙에 따라 거행되었다. 참가자들은 섬 남쪽에 있는 높은 낭떠러지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강한 물살을 헤치고 상어와 싸 우며 헤엄쳐 나아가 이스터섬 앞에 돌출해 있는 암초 섬으로 가야 했다. 그런 다음 그곳에 둥지를 튼 새의 알을 하나 찾아 안전하게 이스터섬 해 변으로 가져와 거기서부터 다시 가파른 절벽을 기어 올라가야 했다. 온전한 새의 알을 들고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승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