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느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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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느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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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도덕적 개인주의

도덕적 개인주의자들에게 자유란 내가 자발적으로 초래한 의무만을 떠 맡는 것이다. 내 책임은 내가 떠맡은 일에 한정된다는 생각은 자유주의적 사고다. 자유에 대한 이런 생각에는 집단적 책임의식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자유를 바라보는 도덕적 개인주의자들의 시각이 옳다면, 공식 사죄에 대한 비판도 일리가 있다.
합의와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의 정치뿐만 아니라 근현대의 정의론에서도 크게 부각된다. '선택하는 자아'라는 생각은 존 로크에서부터 1세기 후에 임마누엘 칸트, 그리고 20세기 존 롤스까지 이어진다. 자율적 의지에 관한 칸트의 생각과 무지의 장막 뒤에서 이루어지는 가언합의에 관한 롤스의 생각에는 공통점이 있다. 도덕적 행위자를 특정한 목적이나 애착에 구속되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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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국가는 역사적 잘못을 사죄해야 하는가?
정치 공동체에서 과거 부당함을 받거나 부당함을 방치한 사람들은 보상을 받거나 책임을 져야 한다.

- 조상의 죄를 우리가 속죄해야 하는가?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을 책임질 수 없다.(도덕적 개인주의)

- 도덕적 개인주의
우리는 부모나 조부모 또는 같은 동포의 죄에 책임을 질 수는 없다. 도덕적 개인주의자들에게 자유란 내가 자발적으로 초래한 의무만일 떠맡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문제를 소극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다. 우리가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독립적 존재라면, 우리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을 설정할 때 특정한 도덕적ㆍ종교적 사고에 좌우되지 말아야 하며, 좋은 삶을 규정하는 서로 다른 시각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 노력해야 한다.

- 정부는 도덕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는가?
정부는 좋은 삶의 의미를 두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 – 고대 정치 개념 탈피
아리스토텔레스 - 정치는 좋은 인격을 기르게 하고 좋은 시민이 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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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역사적 잘못을 사죄해야 하는가?

한세대가 앞선 세대의 행위를 공식 사죄해야 하는 책임을 인정한다는데에 거부하는 생각도 다수이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한 행동들을 사죄하려 한다며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모나 조부모 또는 같은 동포의 죄에 책임을 질 수 없다

도덕적 개인주의

존 로크의 선택하는 자아는 우리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이지 아버지의 권위나 왕의 신권에 종속되는 존재가 아니다 칸트도 도덕법을 따르는 것을 특정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순수 실천 이성을 따르는 사람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도덕법(칸트)를 따르거나 정의의 원칙(롤스)를 선택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정하고 지금의 우리를 만든 역할이나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로버트 리

남분 전쟁 때 남부연합군 사령관을 지낸 로봇 리는 링컨 대통령이 이끄는 연방군을 지지하지만 남부의 고항과 가족, 친척, 가정을 선택했다

벌저형제

동생 윌리엄 은 상원 의원, 메사추세스 대학 총장을 지냈고 형 제임스는 절도, 갈취, 마약거래, 기타 불법행위를 총괄하는 범죄집단의 우두머리이다 그러나 쫓기는 형에 대해, 동생 윌리엄은 수사 협조에 거부한다. 어떤 기고가는 '그는 올바른 규범을 택하기보다 거리의 규범을 선택했다 '라고 썼다

유나바머

대학과 항공사를 표적으로 테러를 벌인다고 붙여진 유나 바머는 17년 동안 쫓기는 테러리스트였는데 동생의 제보로 체포되 종신형을 받게 된다 그러나 동생 데이비드는 받은 포상금으로 형 때문에 죽거나 다친 사람에게 전달하고 형을 대신해 사죄했다

  독일은 진실로 나치의 범죄와 만행에 대해 사죄하였다. 미국도 전쟁중에 저질러진 무리한 행위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심지어 하와이 왕국 전복에 대해서도 사죄하였다. 

  일본은 아직도 진심에서 우러나는 사죄를 하기 보다는 외교적 수사로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때때로 심심하면 극우익 정치인들이 망발을 늘어놓아 우리의 분노를 치솟게 하고 양국의 우호를 해치며 대립과 미움의 국민감정을  일으킨다. 실로 두 나라 화합과 발전에 해악을 끼침이 지대하기 이를 데 없다. 심지어 최근에는 정신대 피해보상청구에 대일청구권 지불로 해당 없다느니, 또는 우리돈 1000원을 지불하기까지 하는 어처구니 없는 결정까지 하는 일본정부를 보면 도저히 용서하기 싫은 감정을 누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친일 청산작업의 일환으로 실시한다는 친일파 명부작성에 반대한 바 있다. 숨은 저의도 의심스럽거니와 그렇게 크게 떠들일도 아니라는 판단과 함께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득보다는 오히려 실이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일본에 대한 반감이나 우호적 감정이나와는 관계없이 객관적이고 합리적 판단으로 재단해야 하는 엄중한 사안이라고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친일파를 거창하게 재조사해서 명부록을 만들었음에도 한일관계개선이나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면에서나 달라진 것을 나는 거의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평화로운 처녀지를 강탈한 유럽인들은 아직도 미국사회에서 당당한 모습으로 군림하지만 이들에게 조상대대로 지켜온 자신들의 땅을 빼앗긴 인디언 원주민들은 아직도 마치 침략자들에게 시혜(?)아닌 시혜를 받으면서 살아간다. 오스트레일리아도 다름 아니다.

  흑인들은 마치 인간아닌 동물인양 백인들에게 취급되며 유럽으로 실려와 매매되었다. 아아! 유럽인 자신들은 자유주의와 천부인권을 부르짖으며 시민의 자유와 권리 획득을 위해 투쟁하고 농노제를 페지하면서도 같은 인간인 아프리카 흑인들은 인간으로 보지 않고 동물로 여기고 부렸다.

  일본은 16세기말에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7년간 모진 고통과 상처를 주었다(우리 선조들이 이유없이 당한 처참한 고통을 생각하면 분함과 복수심에 가슴이 에인다). 400여년 후 그들은 다시 우리나라 주권을 빼앗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우리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중국에게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만행과 고통을 안겼다.

  불모지를 발견하고 이를 점령하고 이를 개척하고 많은 이들이 이주하고 나라를 세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것은 지나가버린 승자들의 발전적 역사라고 치자. 그러나 흑인들의 슬픔과 고통은 아직 종식되지 않았다. 현재 진행형이다. 유럽의 침략자들은 앞으로 오랫동안 반성하고 뉘우치며 이를 보상하기 위한 참된 마음으로 우러나는 물질적 보상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은 언제까지나 아프리카와 흑인들에게 빛을 갚아 나가야 한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와 중국에 저지른 죄악은 언제까지라도 깨끗이 씻어질 수는 없다. 여태까지는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의 위상으로 진정한 사과에 인색하고 가끔씩 우익들이 우리와 중국인들의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용서할 수 없는 언사를 함부로 밷어내기도 하였지만 이젠 그러면 안된다. 지금은 중국과 우리 대한민국이 이미 일본인들의 언어도발에 묵묵히 참거나 그저 묵과할 나라가 아니다. 중국이 세계의 양극체제를 형성하는 주체요, 우리 대한민국도 세게 10대 강국이자 선진국이 되었다. 장차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와 발전을 통해 세나라가 공동번영하는 21세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일본은 진정으로 겸허해야만 하고  우리나라와 중국은 그러한 일본의 모습을 인정할 수 있을때 만이 미움과 원망과 복수심을 자제하고 그들을 용서하며 따뜻한 악수를 나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소수라 하지만 그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아주 잘못된 역사관, 빗나간 우월주의, 허황된 자부심을 과감히 버려야만 한다. 현실을 똑 바로 보아야 한다. 독선적 사고를 버리고 미래지향적 평화적 역사관을 정립하여야 한다. 일본은 역사를 왜곡하지 말고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도 진실되게 가르쳐서 새로운 세대는 진정으로 동북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갖도록 해야만 한다. 독도에 대한 일본인들의 분쟁조장과 러시아와의 쿠릴열도 분쟁, 중국과의 센카쿠 열도 분쟁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일이다. 일본인들이 저지른 죄악은 아직도 씻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일정부분 후손들이 안고 가야할 숙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조상이나 부모 또는 동포들의 죄에 전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친일파 자손들이 부모가 남긴 재산으로 호의호식하고 출세하여 살아온 것도 부족하여 어딘가 숨어 있던 땅을 찾으려 소송을 걸어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부끄러운 부모들의 민족에 대한 반역죄는 자신들에게 전혀 책임이 없고, 오직 문서로 남겨준 토지에 대한 권리만 주장하는 행태는 옳은 것인가? 일말의 죄의식도 없기에 여론의 질타나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재판을 걸고 땅을 찾기에 혈안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조기숙은 조병갑의 증손녀라는데, 소위 대학교수가 노무현 정부의 전도사마냥(사실은 앞잡이로 표현하고 싶다) 마구 설쳐대는 모습도 도저히 용서하기 힘들었으나, 조병갑 증손녀 운운에  <내가 왜 증조부의 죄를 책임져야하느냐?>고 항의하며 조병갑을 변호하고 옹호하는 모습에서는 오히려 애처럽기까지 했다. 그녀가 조병갑이의 학정의 죄를 온통 뒤집어 쓸 이유까지는 없다. 그러나 고부농민을 가렴주구한 조병갑에 대해 마치 그가 무슨 애민정신을 가진 대단한 지방관이었으며 자신은 자랑스런 자손인양 당당한 변호논리를 펴는 것은 차라리 파렴치 하다.

  동요 <고향의 봄>을 지은 이원수 선생이 일제에 의해 옥고까지 치르고도 말기에 친일시 5편을 지어 평생을 어린이 문학을 위해 헌신한 공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었는데, 선생의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둘째딸인 이정옥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사과합니다. 이제 아버지를 용서해 주세요>

  관습이나 전통 또는 물려받은 지위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만이 우리를 강제하는 도덕적 의무를 정할 수 있다는 말은 어느정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에는 집단적 책임의식이 들어설 여지가 없으며 선조들이 저지른 부당행위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무감이 없다. 두어 세대를 뛰어넘는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는 자손들은 조상들이 저지른 비인간적 행위들에 대해 상대방에게 반성하거나 미안하거나 사과할 아무런 필요조차 없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도 있다. 참으로 위험한 도덕적 개인주의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나 어느정도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존재한다. 관습과 전통과 법률과 규칙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 나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자유를 갈구한다 하더라도 남을 의식하지 않는 개인주의적 자유행위는 반 도덕적 행동이 되기 십상인 것이니, 타인들로부터 부끄럽게 되고 비난을 감수하여야 하며 남에게 끼치는 손해는 마땅히 보상해야만 한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언제라도 마음대로 함부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아니다. 내가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개인적 자유를 추구한 만큼 나도 남이 나에게 개인적 자유를 추구함에 대해 마땅히 허용해야함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 정부는 도덕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는가?

  여성을 속박하고 인권을 유린하며 의무적으로 부르카를 입게 하고 간통한 여성에게 돌을 던져 죽게 하고 마녀사냥을 일삼는 종교적 근본주의는 정의로운 행위인가?

  칸트와 롤스가 보기에 좋은 삶에 대해 종교적으로든 세속적으로든 특정한 개념을 강조하는 정의론은 자유와 어울리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개신교는 수많은 종파로 갈라져 서로 싸우다 못해 자신들과 이념이 다른 종파들은 이단이라 몰아부치는가 하면 세계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신도와 교회당과 축적된 부를 자랑하나 그 안을 조금 들여다 보면 개인숭배에 부자세습에 부귀영화에 자금횡령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위를 저지르며 교인들에게 바타협을 가르치고 부정을 비난치 못하게 하고 자중지란을 일으켜 싸우고 갈라지고 재판하고 다툰다. 그들 집단은 정의로운 종교집단이며 정의로운 사제들인가? 전혀 아니다.

  또 불교계는 최근 최고위층들의 어느 회의장에서 폭력이 행사되고 이로 인하여 분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아니 자비를 베푸는 그 불교 지도자는 이전에도 폭력을 가끔씩 휘둘렀다니 그가 과연 스님인가? 어찌 그런 인간이 조계종의  감찰부장을 했단 말인가? 조폭출신으로 힘께나 쓰는 강패승려인가?

  나는 지금 종교적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살고 있나니, 아직까지는 어느  절대자에게 나를 의지하고 싶은 욕망이 없기 때문이지만, 저러한 사이비 내지 깡패같은 인간들이 이끌어가는 부끄러운 종교의 울타리안으로 나를 함부로 밀어 넣을 수는 더더욱 없겠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아! 나는 아직까지 이념적으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아주 아주 자유롭나니 그 자유로움을 마음껏 만끽하는 바이며, 스스로 매우 자부심을 가지는 바이며, 구태여 저러한 구속의 굴레에 갇혀있지 않음에 매우 감사하며 충분히 행복하나니라.

 ♣ 정의와 자유

  평등을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시민의 자유와 사회적 경제적 기본권, 즉 의료 교육 고용 수입안정성등에서의 기본권을 주장한다. 루스벨트는 1944년 복지정책강령을 발표하면서 이를 <경제의 권리장전>이라 불렀다. 그는  경제적 권리가 <진정한 개인의 자유>에 필수라고 주장하면서 <궁핍한 사람은 자유롭지 않다> 고 덧붙였다. 그러나 인간은 궁핍해서만 자유롭지 않은 것만은 아니다.

  죄를 지어 감옥에 갇혀 있거나 숨어 사는 사람들은 아주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난폭하거나 무지막지한 남편에게 억눌려 사는 여성들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계율에 묶여 자유로운 연애도 못하고 자유롭게 직업도 가지지 못하는 이슬람 여성들도 역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입대한 젊은이들은 의무기간중 아주 많이 자유롭지 못하다.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모든 직장인들은 다들 근무시간을 잘 지키랴, 주어진 목표량을 달성하랴 항상 상당히 자유롭지 못하다. 일요일이면 꼬박 꼬박 교회에 가야하고 새벽기도다 구역예배다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매우 많이 자유롭지 못하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우들, 몸이 건강하지 못하여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 매일 병원에 다니며 일을 못하는 아픈 사람들, 대한민국의 학교에서 입시공부에 찌든 학생들까지도 다들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엄격한 부모를 둔 아이들은 행동에서 매우 자유롭지 못하다. 결혼하는 순간 부터 이미 부모 섬기는 일부터 아이 기르는 일까지 하자니 어른들은 정말 많이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남녀간에 사랑하게 되어 교제가 성립되는 순간부터 두 사람은 일정한 속박을 감수해야하며 자유를 많이 접기 시작하여야 한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으며 따라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나 자유롭지 못한 이유들은 무지 무지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자유롭지 못하다하여 반드시 불행한 것은 아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갇히고 속박받음으로서 오히려 훨씬 행복해 질 수도  있다. 먹을 것이 없어 떠 돌아다니는 버림받은 개들은 얼핏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 듯 하지만 결코 자유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더 사나운 짐승에게 쫒기고 사람들에게 혼이 나고 굶주림에 지쳐 먹을 것을 찾아 정처없이 떠돌아야 한다. 그것은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다. 비록 집안에 갇히고 쇠사슬에 얽매여 있다 해도 시시때때로 귀여워해주는 주인의 큰 관심과 사랑속에서 제공되는 편안한 잠자리와 맛있고 풍족한 먹을 거리는 오히려 그 개를 아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인간도 그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기는 매우 어렵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자유로운가? 그들도 역시 반드시 모두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고 있거나 불구가 되어 성치 못하거나 자식들간에 재산싸움으로 마음이 편치 못한 사람들은 결코 몸과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단지 부자는 좀 더 자유롭기가 편하고 좀 더 행복을 찾기가 편 할 뿐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울 수는 없다.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그렇게 만들 수도 없다. 다만 모든 사람들이 물질적 측면에서 조금은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그 나라의 경제적 수준에서 추진하기에 가능한 인간답게 살수 있을 정도의 복지 정책은 계속 추진되어야 한다. 부자들은 세금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는 실천하지 못한다하여도 적어도 탈세하는 기업인들만큼은 철저하게 추징당하고 법의 처단을 받아야 한다. 부자 탈세자들은 더 확실하게 가혹하게 처리되어야 한다. 수 십억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재산을 은닉하고 세금 한푼 안내고 살면서 오히려 추징하러 나온 공무원들에게 적반하장으로 큰소리치는 경우를 보았는데 이 따위 인간들은 강력한 법을 제정하여서라도 조속히 해외추방이라도 시켜야 한다.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세금한 푼 안내는 대형교회 목사들의 정신도 바로 잡아야 한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몸이 멀쩡한데도 일 안하고 놀고 먹는 사람들을 색출해야 한다. 새로 취업한 기업에서 월급을 받으면서도  업주가 눈감아 주는 가운데 실업수당을 받고 있는 대 국가 대 국민 사기꾼들 역시 색출해야 한다.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성실한 최저소득층 서민들이나, 아들 딸 다 키우고 노후 대책없이 모진 고생하는 늙으신 노인들이나, 돈을 잘 벌 여지가 없는 장애우 가족들이나, 북한을 탈출하여 대한민국에서 잘 살아 보고자 노력하는 탈북민들은 국가가 강력한 제도적 뒷받침으로 우리나라 수준에 맞는 기본적인 경제적 자유를 회복시켜 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국가가 할 당연한 책무요, 바람직한 복지정책이다.

  부자들에게까지 혜택이 저절로 돌아가는 복지정책이 없는지 살펴보고, 우리 수준을 지나치게 넘어서는 복지정책이 추진되는 것은 아닌지 또 살펴보고, 여야가 함께 쏟아내는 저 식상한 정치인들의 무상쓰나미 정치쑈에 우리가 속고 있지나 않는지 항상 유의해야 한다.

  복지 정책에 비판적인 자유방임주의자인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자유시장을 옹호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번 돈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가장 훌륭한 정론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동아일보는 이 점에서 나눔정책에 인색한 경제 논리를 펴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반성해야 한다.(동아일보는 내가 애독하는 신문이지만 사측이나 기자들의 경제적 주장과 논리를 나는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소외된 이 나라 국민들을 보살피는 노력을 해보았는지 아니면 부자들의 경제 논리에 지나치게 동조하여 왔는지 진지하게 되돌아 보아야 한다.

 ♣ 공동체의 요구

  공동체는 마땅히 소속을 요구하고 우리는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내가 정하지 않는 도덕적 요구도 받아들일 자세를 지녀야만 한다. 비록 공동체가 주는 부담이 억압적이라하여도 그 억압보다 나를 자유롭게 하는 조건들이 더 많다면 나는 능히 그 억압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공동체가 주는 억압이 지나쳐서 나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한다면 용감하게 보트 피플을 감행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합의적으로 또 합리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지켜져 내려온 전통이나 관습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이야기하는 존재

  매킨타이어는 인간을 자발적 존재로 보는 시각의 대안으로 서사(敍事 :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음)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서사는 곧 자신의 역사이며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회자되기 시작한 Story Telling이라고 보면 되겠다. 내 앞에 놓인 어느 길이 내 삶의 궤적과 가장 잘 어울리는지는 나보다 남이 더 분명히 알 수도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느낙
이 글을 쓰다보니 이미 내 블로그 인사말에 궤적이니, 스토리 텔링이니 하는 말씀을 올렸는데 이 블로그는 곧 나의 삶의 궤적을 서사한 것이니 내 블로그를 혹 관심있게 보시는 분이 있으시다면(나의 아들과 나의 딸도 잘 안본다는데 설마 그럴 분은 없겠지요만)그 분은  나보다도 더 나의 미래를 잘 내다 볼 수도 있다 하겠다.   

  매킨타이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 도시나 저 도시의 시민이며, 이 클럽 아니면 저 계모임의 회원이다. 나는 이 친족, 저 지역사회, 이 나라에 속한다. 따라서 내게 이로운 것은 그러한 역할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이로워야 한다.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지역사회. 내나라의 과거에서 다양한 빚,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 받는다. 이는 내  삶에서 기정사실이며 도덕의 출발점이다. 또한 내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나라가, 자신들의 조상이 저지른 악덕에 대해 모른체 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천박한 도덕성이다. 나는 사회적 역사적 역할과 지위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하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가치관이다. 어어서 그는 말한다.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를 안고 태어나는데, 개인주의자처럼 나를 과거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내가 맺은 현재의 관계를 변형하려는 시도다.>

  역사의식이 없는 인간은 개인적 자유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어 이기적이고 반사회적이고 비타협적이고 독선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다.

♣ 합의를 넘어서는 의무

  자연적 의무는 보편적이다.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 즉 이성적 존재에게 지는 의무다. 인간을 존중하고 정당하게 행동하며 잔인한 행동을 삼가는 등의 의무가 여기에 속한다. 

  자발적 의무는 보편적이지 않고 특수하며 합의에서 생긴다. 약속이나 계약에 의해 발생한다. 자유주의 개념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하지만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우리가 약속한 것만 지키면 된다.

  인간을 서사적 존재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의무에 대한 자유주의의 설명은 너무 빈약하다. 시민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특별한 책임을 언급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자발적 의무만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니며 자연적 의무와 연대의무는 더 소중한 것이다. 아름다운 사회와 아름다운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 연대와 소속

 ◈가족의 의무

  가장 기본적인 예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서로에게 느끼는 특수한 의무다. 피를 나는 가족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이익과 합의라는 자유주의 윤리를 넘어선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자신의 고향마을에 대한 폭격명령을 받고 임무에서 빼달라고 요청하는 조종사의 도덕적 판단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판단이자 요구이다. 그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는 정체성을 인식하였으며 그 인격은 휼륭하다. 도덕적 판단과 함께 그 용기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 에디오피아 유대인 구출하기

  1984년 이스라엘이 기근으로 인해 수단으로 대피하여 신음하는 에디오피아에 살고 있던 7,000명의 유대인들을 구출하여 이스라엘로 수송하고, 1991년에는 내전과 기근에 시달리는 남은 유대인 1만 4000명을 또 이스라엘로 수송하여 구출한  행위는 전혀 비판당할 이유가 없다. 이스라엘은 모든 에디오피아인들을 구출할 의무는 없지만 유대인들을 구출해야하는 민족적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도덕적 책임이 있다. 이는 기근에 허덕이는 지구상의 모든  난민들은 꼭 구해주어야 한다는 일반적 의무를 넘어서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북한을 탈출하여 대한민국에 정착한 탈북민들이 2만 여명이라 한다. 우리가 북한에 살고 있는 2천 4백만 인민들을 모두 구출해야할 도덕적 의무나 책임은 없다. 그러나 죽음을 무릅쓰고 북한을 탈출하여 제 3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오기를 희망하거나 요즈음 빈번한 보트피플을 감행하여 찾아오는 인민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국제법을 떠나 도덕적으로 아주 당연하고 마땅한 행위이다. 또 한편으로 북한을 탈출할 여건이 되지 못하여 먹을 것으로부터의 자유마저 박탈당한채 신음하는 (평양을 제외한) 2천만 동포를 구하고자 하는 노력에 소홀한 정부의 정책은 민족적 공동체 의식이 결여된 지나친 강경정책이다. 정부와 여당은 적어도 식량을 비롯한 의료품까지는 지원을 계속하여야 하며, 좌파성 야당이나 사회단체들은 적어도 북한 백성들의 인권을 위한 최소한의 정당한 요구나 장치를 강력하게 요청하는 국제사회와 정부의 정책을 방해하는 정신병적 정치행위를 당장 중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갈등과 조정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와 사회가 일보씩 진전하는게 아니라 온나라가 갈등과 분열과 적대와 미움만이 가득한 진흙탕속에 갇혀 버렸다. 오늘신문에는 박원순이 어제 동국대에서의 특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뉴스가 있다.

 - 등록금은 예산과 재정의 문제가 아니라 비전의 문제이고 가치의 문제이다. 왜 반값 등록금 투쟁만 하느냐? 왜 철폐 투쟁은 하지 않느냐?

 - 감옥대학에서 읽었던 책만큼 감동적으로 읽은 것이 없다. 여러분은 감옥에 꼭 한번 가보시기 바란다.

  그는 이 시대를 완전히 뒤집어 보고자 하는 선동가이며 혁명가인가? 아니면 머리 좋은 머저리인가? 그도 아니면 재치있는 개그맨인가? 셋중 어느 하나일 것임이 분명하다.

  나라는 선진국이 되었으나 국가와 사회는 갈수록 혼란하고 일자리는 부족하고 미래는 불안하여 20 - 40은 기성세대와 현재의 상황에 절대적 거부반응을 보이는 가운데 선거에 의한 작은 혁명적 상황이 전개 되고 있다. 지극히 우려되는 상항이나 정부나 여당이나, 야당이나 사회단체 그 누구도 해법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기필코 나라가 망할지 흥할지 모르는 대 변화가 예측되고 있는 놀라운 변화의 시대에서 우리는 짐짓 마치 남의 일인마냥 그저 일하고 월급받으며 조용히 살고 있는 형국이다. 이를 어쩌랴?

♧애국심이 미덕인가?

  애국심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애족심이나 애교심, 애사심, 애향심이 아름다운 미덕이듯이 애국심도 미덕에서 비판받아야할 특별한 여지는 없다.

  그러나 국가가 죄 없는 나를 박해하거나 악법으로 짓밟거나 나의 행복을 망가뜨린다면 국가나 다른 국민들이 무리하게 내게 애국심을 요구하지는 못한다. 이는 애족심이나 애교심 애향심. 애사심뿐 아니라 가정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나에게 주어지는 어떠한 대가나 사랑이 전혀 없는데도 무조건적 사랑을 주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내게 크나큰 상처와 피해를 준다면 더 이상 사랑을 베풀 수만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애국심은 대단하다. 국가는 우리 국민들이 더 행복하고 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과 의원들을 잘 뽑아야 한다. 경제의 성장을 은근히 무시하고 솔깃한 궤변으로 분배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법도 무시하고 폭력을 부추기며, 온갖 이유로 분열과 갈등을 야기하며,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국민을 속이고 오직 정치를 하기 위한 정치를 하고 국민과 국가를 위한 집권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들의 집권을 위한 집권야욕을 불태우는 정치 사기꾼 집단을 모두 퇴출해야만 한다. 결국 그들이 집권하는 날부터 금방 다시 그들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게 되고 또 다시 우리는 후회하게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실패를 또 범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는 금방 후회한다. 거짓말하는 정치인들이 금년 총선에서 깡그리 퇴출되고 오로지 진실되고 행동적인 양심으로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정치인들이 국회에 가득하기를 기대한다. 국민들의 애국심은 더욱 고양되지 않겠는가?

♧국경순찰

 대한민국 사람들은 애국심에 관한 생각에서 다른 나라사람들과는 다른 묘한 느낌을 가지며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이 적용되고 주권이 미치는 영토는 한반도의 휴전선 이남에 존재한다. 그 누구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들이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우리 헌법 제1장 제 3조에는 버젓이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되어 있으니 이 아니 헷갈릴 일인가? 그러나 이는 언젠가 통일될 그날의 우리 한반도 영토를 결코 대한민국이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상징적 표현일 뿐임을 잘 인식해야 한다. 북한 사람들중 탈북하여 우리 대한민국에 귀순하여 국적을 획득한 사람만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말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들이 진정으로 김일성 3대 세습을 좋아하고 굶어 죽어도 빈부격차 적은 공산주의를 사랑한다면 그저 통일이고 뭐고 관심 없이 우리만 잘 살면 될 일이다. 그러나 진정 북한 주민들이 그러하다고 믿을 수 있는가? 남북의 격차가 없을 때나 적을 때는 그들도 애국심과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이젠 아니다. 평양시민만 부자이고 당 간부들만 잘 살고 국민소득 1천 달러 수준으로 세계의 최빈국이 되어버리고, 대한민국은 상대적으로 선진국이 되어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고 G20이 되어 베푸는 나라가 되고 탈북자 수만 명에 대한민국으로 귀순한자가 2만 명이 넘어서서 그들은 북한의 가족들에게 달러를 송금한다. 이 만큼 자신들의 나라가 무너져 내렸는데도 아직도 그 인민들은 마음속에 애국심이 남아 있다?

  언젠가 서서히 찾아올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 언제까지나 북한 사람들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더 이 나라가 부자가 되고 더 강해져서 결코 주변 강대국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하나가 되어 다 함께 잘 사는 통일한국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의도성을 띠면 띨수록 좌파들은 극성을 부려대서 이념갈등으로 국론이 분열하며 북한은 도발을 강행하고 국가 경쟁력의 도약은 멀어진다. 5천년 역사에서 최고의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을 창출해낸 우리가 더 이 나라를 더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면서 북한주민 2천 4백만을 도와 7천 4백만이 하나가 되는 그 날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통일에 너무 관심 없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지나치게 조급하게 부르짖는 일도 부질없는 일이다. 강한 나라를 만들며 끈질기게 기다려야 한다. 저 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날까지.

 ♧미국산을 사라는 주장은 불공평한가?

 한국인이 동남아시아나 중국동포들, 심지어 아프리카인들에게까지 일자리를 빼앗기는 이유는 일자리가 남아돌아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독특한 교육행태와 자본주의 경제구조와 임금구조가 만들어낸 기현상일 뿐이다. 한국의 실업률이 8%에 청년층 실업률은 30%이상이라고 보고 있는데도 수십만 명의 외국인들은 여전히 들어와 일하고 있고 우리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이며 많은 젊은이들이 그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

  왜 우리는 이국인들에 대한 애정보다 한국인들의 일자리에 더 관심을 보여야만 하는가? 유능한 외국 근로자들은 우리나라의 산업에 도움을 주고 있고, 우리 청년들은 그 힘들고 보수적은 일자리는 마다하는데 우리는 그들을 싫어하거나 미워할 근거가 있는가? 오히려 고마워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근본적인 문제해결 없이는 풀 수 없는 난제다.

  요즈음 어느 대학생이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ꡒ왜 가난한 사람은 비싼 등록금 때문에 대학을 다니지 못해야 합니까?ꡓ라고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ꡒ왜 대학등록금이 이렇게 비싼 겁니까? 가난한 사람이 다니기 어렵습니다.ꡓ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대학에 다니기를 원한다하면 모두 다닌 역사가 없다. 대학에 다니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

둘째, 대학수학능력이 있다. 

셋째, 대학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학구조와 입시행태를 바람직하게 보는 사람은 없다. 대학이 300여개에 너도 나도 대학에 가게되니 대학진학률이 세계최고인 80%를 넘어(금년은 76%대로 긍적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다) 겨우 우리 한글을 깨우친 아이들도 대학생이 된다. 등록금만 내면 졸업은 누워 떡 먹기다. 가난한 사람이 모두 대학에 다니는 나라는 현재에도 이 지구상에 없다. 중국도 공산주의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고등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고 대학은 꿈도 못꾼다. 북한에서 가난한 지방의 청소년들이 대학에 다들 다니고 있기나 한 것인가?  상상도 못할 일이며 터무니 없는 일이다. 우리도 더 잘사는 나라가 되어 국민소득이 4만달러가 되고 대학은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가게 되는  사회가 만들어지면(대학진학률이 다른 선진국들처럼 30-50% 수준만 된다면)가난한 사람도 국가지원과 더 많은 장학혜택을 받으면서 모두 대학에 갈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한 나라의 국민이라면 모두 다녀야 하는 의무교육이나 중등교육이 아닌 대학교육이기 때문에 빈부와 관계없이 실력과 관계없이 누구라도 다 다니는 것이 국민에게 주어진 당당한 권리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왜 학점이 낮은 사람은 대기업이나 공기업같은 좋은 직장을 다니지 못해야 하는 겁니까?”

“왜 못 생긴 사람은 모델이나 아나운서가 되지 못해야 하는 겁니까?”

누구도 선뜻 대답하기 힘들다. 대답이 어려운 까닭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질문이며 모든 사람들의 실력이 평등하고 미모가 평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직 경제적 불평등만 개입되면 그 요구가 너무나 당당해진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을 부정하는 이념공세가  젊은이들에게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서울시 무상급식문제로 시장선거에서 박원순이 승리하면서 복지 포퓰리즘이 당당하게 인정되고 그 주장과 요구의 여세는 끝없이 계속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를 지나 인격적 평등뿐만 아니라 경제적 평등까지 당당하게 요구하는 대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선진국도 거의 하지 않는 무상급식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가고 국민들은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무상급식으로 돈이 들면 얼마나 들겠는가? 이미 전북은 우리학교를 포함하여 고등학교까지 수년전부터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하등 국가적 차원에서 다투고 소란스러울 일이 전혀 아니다. 우리나라의 복지가 아직 선진국수준에 미달하고 있지만 최근 10여년 사이에 노인이나 장애우, 저소득층에 대한 복지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11년 우리나라는 OECD회원국 34개국중 1인당 GDP는 겨우 26위에 지나지 않는다. 인구가 5천만명이나 되기에 국내총생산(GDP)이 10위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회복지지출비중이 33위이니 물론 최저 수준이다. 그러나 현재에도 경제 성장율은 2위이고 복지에 예산을 많이 투입하기 시작한 것이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늦었으나 사회복지 지출증가율이 4위이므로 우리도 곧 1인당 GDP 26위수준은 충분히  따라 잡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마치 우리나라가 아무런 복지에 대한 관심도 , 노력도 하니 않는양 국가 운명을 짊어진 과제인양 부각시키며 경제수준이 우리보다 두배 또는 그 이상인 복지 선진국들의 전국민적 복지수준을 무조건 도입하고 보자는 식의 몰상식한 정치가 상식처럼 되어 가고 있는것이 오히려 문제인 것이다.

  우리학교에는 장애우 특별학급이 있고 아직까지는 신체장애우가 전혀 없다가 금년에 들어오는 단 한명의 신체장애학생의 입학에 대비하여 엘리베이터 시설을 하고 있는 중이며 휠체어가 편히 이동할 수 있도록 보완공사를 하며 들어가는 국가 예산이 2억원이다. 아무도 단 한 학생의 고교교육을 위해 저렇게 예산을 쓰는 것이 과연 옳은것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없고 복지국가가 되기 위해 당연한 일로 여기며 이만한 나라가 이 지구상에 어디 그리 많기나 하겠는가?

  우리나라는 출산휴직을 부부 모두 1년까지 할 수 있고 40%의 보수를 지급하는데 반해 핀란드는 부모중 한 사람만 할 수 있고 그것도 6개월만 허용되며 최초 1개월만 75%를 지급한다는데 우리가 복지 선진국인 핀란드 수준으로 바꾸자면 이해가 가능한 주장이라 할 수 있는가? 교육도 복지도 그저 핀란드다. 왜 세계 최강국 미국이나 중국은 핀란드처럼 못하고 있는데 한국만은 너도 나도 핀란드요, 마치 핀란드처럼 못하고 있는 것이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만의 잘못인양 몰아간다. 그리고 많은 국민들은 그러하다고 믿거나 그런가 보다고 여긴다. 아! 정치의 비이성과 비논리와 야당과 그 일단의 사이비 학자들의 비지성적 선동과 포퓰리즘의 무서움을 깨닫게 된다.

  이만큼 살만한 나라가 되었으니 그동안 뒤쳐지고 미루어온 복지를 좀 더 확대하자는 이성적이고 정의에 입각한 정책적 복지확대주장이 아니라 복지로 정부여당을 공격하고 복지로 정권을 잡기위한 야권의 고도의 장기적 전략으로 보인다. 일단 정권은 잡고 본 다음, 복지에만 매달리다 나라 경제가 무너지면 다시 정권을 내놓으면 그만인 것인가? 나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며 우려하고 있다.

  이제 외제차를 사거나 타는 사람에 대한 나쁜 인식과 비방은 사라졌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가 수입을 비난할 수 없는 일이고, 내 이익만 추구하며 전임대통령이 추진한 한미 FTA를 정권이 바뀌었다고 태도가 돌변하여 정권쟁취차원에서 반대투쟁을 벌이는데도 지지하는 국민들이 상당한 것은 이성적으로 용납하기 힘든데, 인간의 세상사는 이성으로만 풀 수는 없고,  감성의 소중함과 필요성을 크게 일깨워주는 것으로 해석하고 말 수 밖에 없다.

  애국심이 도덕에 기초를 두었다고 믿는다면, 그리고 우리에게는 한국인과 더 나아가 동포들의 행복을 추구할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면, 의무의 세 번째 범주인 합의가 필요 없는 연대의무나 소속의무를 인정해야만 한다. 북한동포들의 인권과 최소한의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자유와 권리, 복지를 위해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도와줄 것은 도와주는 당당함이 절대로 필요함을 그들은(북한은 오직 돕기만 해야 하는 상대일 뿐 그들에게 무언가 요구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일부 종북주의자들) 인정해야만 한다.

♧연대는 우리 사람만 챙기는 편애인가?

  막스 프랭크 연구소장 마이클 토마 셀로는<왜 우리는 협력하는가?>에서 인간이 서로 도와주고 협력해야 하는 것은 본능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 심성이라고 보았다.

  더구나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는 가족, 친구, 동료를 더 생각하게 마련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지나치면 편협하기 쉽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단을 저해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신중하게 경계해야 한다.

  K-POP은 수백만 해외동포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준다. 같은 민족 같은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기 때문에 얻어지는 기쁨이다. 북한의 3대 세습이나 선군정치, 사적 외화벌이, 비 개방 비 개혁, 국민들의 가난과 기아는 수백만 해외동포들에게 큰 수치다. 같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기 때문에 느끼는 슬픔이다.

  자부심과 수치심이라는 윤리와 집단적 책임이라는 윤리가 이처럼 밀접히 연관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집단의 공과에 대한 역사적 공동책임을 회피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 조상의 공과까지도 우리는 우리의 어깨에 나누어 져야만 한다. 부모의 잘못을 자식이 부끄러워하고 다 큰 자식의 불량행동도 부모가 일단의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듯이 말이다.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근대사에 한국과 중국에 대해 저지른 죄악에 대한 진정한 사죄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런 리더십을 발휘할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충직이 보편적 도덕 원칙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만 않는다면 가족이나 동료 시민처럼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타인을 돕는 일반적 의무를 수행 할 수 있다. 연대 의무가 지탄받을 때는 자연적 의무를 방해할 뿐이라고 하지만 부당한 방법으로 번 돈이 아니라 하여 가족을 위해 무지막지하게 함부로 돈을 쓰는 자는 결코 존경을 받을 수 없고, 오히려 사회적 지탄을 면키 어렵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연대의무에는 도덕적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남부군 사령관 리 장군이 자신의 평소의 가치관과 대의명분에 충실하지 못한 선택을 한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돈독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 속한 기독교단과 자신의 부모가 믿고 자신의 고향에서 대부분 믿어온 불교계와 논쟁이 벌어지고 다투게 되었을 때 자신의 신앙과 신념과  가치관을 가차 없이 내버리고 부모와 고향을 택하여 자신이 속한 종교집단의 주장과 행동을 저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성인이 되어 가치관이 성숙된 이성적 인간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물론 많은 고민과 고통이 따르겠지만 말이다.

♧형제를 지키는 사람 Ⅰ : 벌저형제

  은행절도를 저지르고 갈취, 마약거래, 기타 불법행위를 총괄하는 조직범죄집단의 우두머리이자 열아홉 건의 살인혐의를 받던 형에 대해 함구하고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 동생은 형에게는 충직했으며 일면 이해되는 측면이 있기는 하나, 그가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무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기에는 그의 사회적 위치가 너무나 높고 크다. 주 상원의장과 대학총장을 지낸 그가

ꡒ형에게 피해가 간다면 누구에게도 협조하고 싶지 않다. 형을 체포하도록 협조할 의무가 없다.ꡓ라고 하기 보다는

ꡒ죄송합니다. 제가 사회적 지도자로서 제 형이 범죄자인 사실이 시민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발할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형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ꡓ라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

♧형제를 지키는 사람 Ⅱ : 유나바머

  수차례 우편물 폭발사건을 일으켜 세 명을 숨지게 하고 스물세 명을 다치게 한 테러범인 형을 수사당국에 제보하고 폭력을 중단시켰다. 그는 형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100만 달러나 되는 엄청난 포상금을 형으로 인해 죽거나 다친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 그는 또 가족을 대표해 형의 범죄를 사죄했다.

  훌륭한 인간이다. 주상원의장과 대학총장을 했던 윌리엄 벌저 보다 일개 사회복지사인 데이비드 카진스키의 행동은 너무나 정의롭고 가치 있고 바람직하며 모범적이다. 그의 행동은 매우 존경스러우며 인격은 결코 권력이나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정의와 좋은 삶

  우리는 연대의식 없이는 삶을 살아가거나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도덕적 개인주의라는 말로도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나 지나친 연대의식에 대한 집착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훼손하고 정의적 판단과 행동을 제약하거나 거스르게 되고 이에 따라 우리는 지괴감에 빠질 수 있다.

  칸트는 도덕법에 도달하려면 우연한 이해관계와 목적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롤스는 정의를 고민하려면 특정한 목적, 애착, 그리고 좋은 삶에 대한 주관적 견해를 배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지의 장막 뒤에서 정의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원칙이 좋은 삶에 대한 여러 견해에서 중립을 지킬 수 있다거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칸트와 롤스가 정의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을 거부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런 견해가 타인의 가치를 강요할 위험이 있으며 자유의 의지를 남겨두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정치론은 정치와 법이 도덕적 종교적 논란에 휩쓸리는 일을 막기 위해 탄생했다. 칸트와 롤스의 철학은 그러한 야심을 아낌없이, 그리고  더 없이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정의에 관한 뜨거운 쟁점 중 상당수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논란이 되는 문제를 피해가지 못한다. 같은 논쟁의 쟁점을 두고 이념이 다르거나 종교가 다른 집단끼리 극명하게 대립하며 싸운다. 심지어 전라도의 시민들이 대선과 총선에서 특정인물을 무지막지 하게 배제하는데 동의하고 다른 특정인물에게 93%의 절대적 지지를 보내는 정치쇼를 자행하는 것을 볼 때 과연 무지의 장막 뒤에서 생각하는 정의가 통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언제까지나 털어내지 못한다.

  대화와 타협과 소통이 없는 일방적 결정은 진실 되지 못하거나 정의롭지 못할 가능성이 언제나 농후하다. 설사 아무리 국가와 백성을 위한 최선의 옳은 결정이라고 해도 반드시 반발과 분노와 시위와 투쟁이 뒤따르기 십상이다.

  이명박정부가 정치와 인사에서 지역적 종교적 학맥적 요소를 개입시킴으로서 대단히 정의롭지 못하다는 비난이 이어지고, 독단적 판단만을 중시하며 특정집단들에 대한 지나친 편견의 표현으로 국민적 저항까지 불러 일으켜서 지지율은 급강하하고 야권의 계속되는 촛불집회와 폭력적 반대투쟁으로 인하여 될 일도 아니 되고, 잘한 일도 칭찬받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되어버린 데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