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

영원한 독립운동가, 한편의 영화 같은 인생을 산 서영해(徐嶺海·1902~?). 독립운동사 연구가 중 서영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히려 그의 이름은 불문학자나 외교사를 전공하는 사람이 더 많이 알고 있을 정도다. 그만큼 서영해의 독립운동 방식과 삶은 특이했다. 아니 그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 바로 그 자체였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지만 만약 이승만이 아닌 김구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됐다면 남북한을 통틀어 서영해만한

외무부 장관감은 없을 것이다.

서영해의 본명은 희수(羲洙). 그는 1902년 부산에서 태어나 1919년 17세에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을 피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임시정부의 ‘막내’로 통하던 그는 이듬해 장건상, 조소앙 등 선배의 권유로 프랑스로 유학갔다. 당시 국제외교는 국제연맹이 있는 파리를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서영해는 프랑스에서 초등학교부터 고교까지 10년 과정을 6년 만에 졸업했다. 그리고 1929년 파리에서 고려통신사를 설립해 유럽 각국 언론사에 일제의 한반도 강탈과 잔학한 만행을 알리는 데 전념했다.

그는 1929년 프랑스어로 한국의 역사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을 집필했다. 백승조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 소설은 단군신화로부터 구한말 국제정세와 청일, 러일전쟁 등이 묘사된, 소설이라기보다 일종의 당시 한국 상황보고서였다. 독립선언서 전문이 불어로 번역돼 실려 있는 이 소설은 한국인 최초의 불어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영해는 또 34년 ‘흥부와 놀부’ ‘심청전’ ‘토끼의 간’ 등 우리 전래동화와 우리의 풍물을 소개한 ‘겨울-불행의 원인’이라는 책을 불어로 출간하고 통신사 프리랜서로 중동은 물론, 아프리카까지 오가며 취재한 기사를 프랑스 언론에 기고한 기자이기도 했다.

서영해는 35년 임시정부 주 프랑스 외무행서(外務行署)로 임명돼 유럽 각국에 한국의 독립에 관한 원조를 요청하는 한편, 44년에는 임정 주 프랑스 예정대사로 선임됐고, 45년 3월에는 임시정부 주 프랑스 대표 등 해방때까지 임시정부의 유럽외교를 책임졌다.

임시정부의 외교에 있어서 ‘미국에 이승만이 있다면 유럽에 서영해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외교적 능력은 탁월했다. 서영해의 조카 서정인씨는 “큰아버지는 불어는 물론, 영어 중국어 독어 등 7개 국어를 능수능란하게 했다”고 말했다.

서영해는 이승만이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여사와 연애 당시 편지를 전달해 주는 등 이승만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이승만보다 김구를 더 추종했다. 해방후 임정 요인과 함께 귀국한 그는 김구, 조소앙, 장건상 등과 어울려 고국에서 해야 할 일을 도모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김구·김규식이 추진한 남북협상에 통신사 기자 자격으로 방북을 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47년 연희전문(현 연세대)과 경성여의전(고대 의과대) 이화여전(이화여대) 등에서 틈틈이 불어를 가르쳤다. 그는 당시 일본인이 만든 불어 교재를 모두 버리고 자신이 직접 타자기로 ‘초급 불어’라는 교재를 만들어 가르쳤다. 그에게 불어를 배운 제자가 극작가인 차범석씨와 김동길 전 연대 교수,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 등이다. 그는 일본을 극도로 싫어해 일식집에도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48년 부산에서 당시 26세의 경남여중 교사 황순조와 결혼했다. 조카 서정인씨는 “사실 큰아버지는 프랑스 유학중 소련 여학생과 결혼해 딸까지 뒀으나 귀국할 때 헤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며 “우리 집안이 부산의 교육자 집안이어서 자연스럽게 일본 유학을 마친 여선생님과 결혼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서영해는 김구의 암살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데다 이승만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회의를 느껴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는 작업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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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해 부부는 48년 10월 서울을 떠나 프랑스로 가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 상하이에서 부인의 프랑스 여권을 기다리는 사이, 장개석 정권이 무너지면서 상하이가 공산화됐다. 한국인은 모두 억류 상태가 됐고 49년 11월 정부차원의 막후 협상끝에 한국행 수송선이 왔다.

그러나 당시 중국 국적의 여권을 가진 서영해는 중국인으로 간주돼 귀국하는 배에 타지 못하는 기막힌 처지가 됐다. 서영해는 부인에게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을 유지하시오, 오늘같은 안타까움도 웃어 넘길 만큼 행복하게 살아봅시다”라는 말을 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서영해의 소식은 끊어졌다.

혼자 한국으로 돌아온 부인은 교사로 복직, 40년 동안 소식없는 남편을 기다렸다. 부인은 경남여고 교장을 끝으로 교직을 마치고 간직했던 남편의 책과 저서 등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는 등 신변을 정리하고 89년 세상을 떠났다. 서영해의 이런 비운의 행적은 1987년 ‘주간한국’을 통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서영해의 그후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조카 서씨는 “중국 공산화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고 프랑스에 갔다는 설도 있다. 심지어 북한으로 갔다는 얘기도 있지만 중국 병사설이 유력하다”고 말했다. 조카 서씨는 94년 큰아버지의 행적을 모아 독립유공자 상훈을 신청했고, 정부는 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서영해. 사망연대에 물음표를 남겨둔 그의 극적인 삶에 비추어 아마 그는 지금도 중국대륙을 넘어 프랑스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원희복기자 〉

서울도서관,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의 저자 정상천 작가와의 만남 개최

서울도서관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오는 21일,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의 독립운동과 삶’을 주제로 정상천 작가의 강연을 진행한다.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의 저자인 정상천 작가는 프랑스 파리 제1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외교관으로 15년간 근무하면서 한국과 프랑스 관계연구에 매진했다. ‘일요일의 역사가’로 불리는 정 작가는 한국과 프랑스의 역사에 대한 집필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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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서관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의 독립운동과 삶’을 주제로 정상천 작가의 강연을 진행한다. [사진=서울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서영해는 1920년 혈혈단신 프랑스로 건너가 유럽 사회에 조선의 독립을 외치고, 일본의 한반도 침략상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일본에 의해 왜곡된 조선의 이미지를 바로잡고, 참모습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였으며, 외교로 항일투쟁을 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알렸다.

외교관이자 언론인, 소설가로 활동했던 서영해는 불어로 쓴 장편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의 주변’, 민답집 ‘서울, 불행의 원인’ 등을 출간하여 문학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유럽사회에 알리고자 했다. 특히, ‘어느 한국인의 삶의 주변’은 프랑스 언론의 높은 관심을 받았고, 1년 만에 5쇄를 인쇄할 만큼 주목을 받기도 했다.

오랜 기간 타국에서 활동하여 국내 활동기록이 적고, 해방 후 국내의 복잡한 사정에 따라 잊혀졌던 독립운동가 서영해는 정상천 작가의 저서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직접 자료를 발굴하고, 가족과 친척 등 관련자들을 만나 서영해의 삶을 짚어간 정상천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펜을 들고 조선 독립에 앞장선 서영해의 삶을 만나보면 어떨까?

강연은 오는 21일 저녁 7시, 서울도서관 4층 사서교육장에서 진행된다. 작가가 서영해의 문서를 발견하여 책으로 출판한 과정 등 흥미로운 이야기와 함께 질의응답 등 작가와 소통하는 시간도 가질 예정이다.

강연 참가 신청은 서울도서관 홈페이지→신청·참여→강좌신청(lib.seoul.go.kr/lecture/applyList)에서 할 수 있다. 성인 누구나 무료로 참여할 수 있으며, 선착순으로 50명을 모집한다.

이정수 서울도서관장은 “이번 강연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을 살펴보고, 그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의미 있는 시간으로 준비하였다.”며 강연의 취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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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해

(徐嶺海, 1902-?)

직업 독립운동가, 외교관, 언론인, 소설가

본명 희수(羲洙)

사인 실종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1995)

불어는 물론이요 영어, 중국어, 독어 등

무려 7개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언어천재셨고,

그것도 모자라 프랑스에서 최고의 지식인으로 인정받는 다는

저널리스트로도 성공하신 분입니다.  

‘미국에 이승만이 있다면 유럽에 서영해가 있다’

거기에 더해 일본을 극도로 싫어해서

일식집 근처에는 발길도 안하셨다는 것은 우스개로 넘긴다쳐도,

레지스탕스로 무려 3년이나 활동하신 전적이 있네요.

제국주의에 진정으로 몸서리치셨던 분이었고,

인간의 자유와 국가의 독립이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아셨던 것이죠.   

- 이런분이 광복후에 외교부 장관이 되셨어야 했는데..

광복이라고 찾아든 대한민국에 결국 발을 붙이지 못하고 실종되셨네요,

이승만이 등살에 베겨나질 못했던 것이지요.  

ㅎ- 긴 한숨이 세어 나오네요,

이승만과 대한민국 외교 원로들의 현주소가 떠오르면서..

- 그런데.. 좀 우습지만.. 이 분 생애를 쭈욱 들여다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도 스치네요.

하수상하던 그 시절을 비극적이지만 되게 로맨틱하게 살다 가셨다, 이런.

    진짜 한편의 영화같은 삶이 아니였나, 그런.

너무 철이 없나.. 

1. 생애..

부산 초량에서 한약방집 아들로 태어났고,

1919년 17세에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0년 임시정부의 ‘막내’로 통하던 그는 본명 '희수'를 영해로 바꾼 뒤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장건상, 조소앙 등의 권유로 프랑스 유학을 결행한다. 
모두가 미국 유학을 선호하던 때

서영해가 프랑스를 택한 것은 전략적 판단이었다.
국제연맹이 있는 파리가 외교의 중심지였고

불어는 외교가의 공용어였지만

막상 한국에서 불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 축구부 급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

1920년 12월, 임정 파리위원부의 주선으로 파리 북쪽의 소도시 보베에 정착,

20세인 나이를 속여 초등학교 2학년 과정에 들어갔다.  

1921-1926년까지 초등~고교과정을 6년 만에 졸업했고,

1927-1928년쯤 파리 소르본느 대학 및 고등사회연구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부친이 사망해 학비조달이 어려워지자 학교를 그만두고

포도농장과 식당 등에서 일하며 도서관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이 때 프랑스 신문에 한국을 깎아내리는 기사가 나오면

반박문을 기고했고 그러면서 기자의 꿈을 갖게 된다,

그렇게 1928년에는 파리 언론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 2월 이집트 월간지 ‘이집트 여인’에 실린 서영해의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Autour d'une vie Coreene)의 소개 글

- 그가 ​독립운동을 본격화하게 된 계기는

1929년 파리에서 열린 반제국주의 세계대회에서 유창한 불어로

한국 문제를 의제의 중심으로 부각시키는 활약상을 보여주면서다. 

이후 그는 자신의 숙소인 말브랑슈 7호(7 rue Malebranche, Paris)에

고려통신사를 설립하고,

유럽 각국 언론사에 일제의 한반도 강탈과 잔학한 만행을 알리기 시작했다.

* 고려통신사(社)- 1929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가

프랑스 파리에 설립한 외교 기관.


또한 프랑스어로 한국의 역사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1929)’을 집필했다.

​"제국주의 열강은 약소 민족과 국가의 불행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분노와 절망을 넘어 그럴수록

더 한마음 한뜻으로 결속하면서 독립운동의 깃발을 힘차게 날렸다."

- ‘어느 한국인의 삶’(Autour d'une vie Coreene) 중 -

이 소설은 ​가상 인물인 주인공 박선초의 활동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리고 있다.

  ▲ ​1925~1926년 무렵의 모습 

1부는 구한말 박선초의 반일(反日) 의거,  

2부에서는 관혼상제와 상투, 족보 등 한국 전통 문화를 다룬 뒤,

마지막 3부에서 3·1운동과 제암리 학살, 임시정부 수립,

파리강화회의 대표단 파견 등 주요 사건을 소개했다.

불어판 출간 당시 책의 제목은 불어로 썼지만

부제는 '한국역사소설'이라고 한글과 한자를 병기했다.

김옥균 등 개화파가 1884년 갑신정변이 아니라

1905년 을사늑약 당시에 활동했다거나,

개화파가 동학 주도 세력과 연계하려고 했다는 소설적 허구도 가미했다.

"서영해는 마르고 왜소한 체구에 가느다란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수줍은 중학생 같은 첫인상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말하기 시작하자 깜짝 놀랄 정도로 급변했다.

목소리는 활기를 띠고 얼굴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열정적인 웅변가의 모습이었다.

그는 한국인들의 고통과 수난의 이야기를 열어나갔다." 

- 프랑스 잡지 '르 프티 주르날'의 인터뷰 기사 중 -  

​"24세의 한국인이 프랑스어로 쓴 이 책은 이제까지 프랑스 작가들이

쓴 것과 다른 면으로 극동을 다룬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문장은 간결하지만 심오한 뜻을 지녔다..

8년 전 프랑스에 온 서영해가 이 책을 통해 프랑스의 참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프랑스국민으로서 그를 자랑스럽게 생각지 않을 수 없다."

- 프랑스 잡지 '비타협'(1930)의 인터뷰 기사 중-

- 이 책은 출간되자 '레 주르날', '르뷔 이스토리크'(역사비평) 등

프랑스 언론의 높은 관심을 받았고

 1년만에 5쇄를 인쇄할 만큼 잘 팔려나갔다.
'르 프티 주르날'이라는 잡지는 '파리는 망명의 수도'라는 제목으로

서영해를 심층 인터뷰까지 했다.

이 인기에 힘입어 그는 국제연맹 사무총장, 프랑스·체코 대통령,

파리 주재 중국 총영사 등 유럽 각계 지도층 인사를 만날 때마다

이 책을 증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국내에서는 최근에서야 번역본이 나와 출간된 상태다.

▲ 프랑스에서 이승만과 함께

- 1932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뒤

안창호가 일경에 붙잡히자

파리 외무성을 상대로 구원운동을 펼쳤고,

​1933년에는 당시 임정 전권대사였던 이승만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에서 함께 숙식하며

국제연맹에 본부에 대한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도 다.

▲ 당시 현실이 '거대한 감옥'이었다고 프랑스 국제정세 평론지

'에스프리'(Esprit)에 기고한 '한국의 문제(1933)' 중

34년엔 ‘흥부와 놀부’ ‘심청전’ ‘토끼의 간’ 등

우리 전래동화와 우리의 풍물을 소개한

‘겨울-불행의 원인’이라는 책을 불어로 출간하고

통신사 프리랜서로 중동은 물론, 아프리카까지 오가며 취재한 기사를

프랑스 언론에 기고하기도 했다.  

서영해 명함(사진 위)

- 35년엔 임시정부 주 프랑스 외무행서로 임명되었고,

1936년 9월에는 외무부 주법특파위원으로 브뤼셀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11월에는 구국공약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에 관한 원조를 요청했다.

1940년엔 파리통신원에 이어,

44년에는 임정 주 프랑스 예정대사로 선임되었고,

45년 3월에는 주파리특파원 주법대표 즉, 프랑스 대사로 공식 임명되었다.

- ​나치 손에 파리 넘어갔을 때엔 지하활동도 펼쳤는데,

일본의 밀고로 나치에 체포돼 6개월간 감금생활을 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풀려나 '스링하이'라는 중국인 기자로 행세했지만

나치의 체포령이 다시 떨어지자 지하로 잠적해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함께 약 3년여를 활동했다.

파리가 해방된 뒤엔 임시정부와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를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맡았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직전엔 김구의 대일선전포고서를

파리에 있는 일본대사에게 통고하기도 했다.

​2. 광복 이후​

광복 후 1947년에 임정 요인과 함께 귀국한 그는

김구, 조소앙, 장건상 등과 어울려

고국에서 해야 할 일을 도모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김구·김규식이 추진한 남북협상에 통신사 기자 자격으로 방북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47년 연희전문(현 연세대)과 경성여의전(고대 의과대)

이화여전(이화여대) 등에서 틈틈이 불어를 강의했다.

그는 일본인이 만든 불어 교재를 모두 버리고

자신이 직접 타자기로 ‘초급 불어’라는 교재를 만들어 가르쳤다고 한다.

그에게 불어를 배운 제자가 극작가인 차범석씨와 김동길 전 연대 교수,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 등이다.

▲ 아들 스테판 서                                      ▲ ​손녀 수지 왕 


- 48년 부산에서 당시 26세의 경남여중 교사 황순조와 결혼했다.

“사실 큰아버지는 프랑스 유학중 소련 여학생과 결혼해 딸까지 뒀으나

귀국할 때 헤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집안이 부산의 교육자 집안이어서

자연스럽게 일본 유학을 마친 여선생님과 결혼했다”

조카의 증언은 이러하지만 좀 더 명확히 이야기 하자면,

파리에 유학 온 오스트리아 여인 ‘헨리에테 스텝케 비에센더’를 만나

1937년 결혼을 했고,

1939년 아들 ‘스테판 칼 알로이스 솔가시 서’를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서영해는 프랑스 망명정부를 따라 영국으로,

아내는 고향 오스트리아로 피신했고

그들은 그렇게 영원히 이별을 맞게 되었다고.

▲ ​전기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

▲ ​한국인 최초의 프랑스어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 번역서

“할아버지는 흐르는 물에 과감히 역행해서 헤엄치는,

그리고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하는 대단한 이상주의자였고,

평화수호자였으며, 반파시스트이자

섬세한 예술적 감각을 지닌 애국자였을 것이다.”

이후 고향 오스트리아에서 아들을 키우던 아내는 중국인 남자와 재혼했고

서영해의 아들 ‘스테판 서’는 건축가로 성장해서

딸 수지 왕(Suzie Wong·49)을 두었다고 한다.

수지왕은 할아버지인 서영해의 첫 전기에 추천사를 썼다고 한다.

​▲ 서영해와 백범 김구 임정 수반과 함께

▲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 경교장을 방문했을 때.

뒷줄 오른쪽 첫째가 서영해, 앞줄 가운데가 김구(1948)

- 황순조와 서영해는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서영해는 김구의 암살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데다

이승만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회의를 느껴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는 작업을 추진했다. 조카 서정인씨는

“큰아버지는 김구가 암살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비슷한 처지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만들려고 할 때

면전에서 심한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고 전한다. 서영해 부부는 48년 10월 서울을 떠나

프랑스로 가기 위해 경유지인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부인의 프랑스 여권을 기다리는 사이,

장개석 정권이 무너지면서 상하이가 공산화되고만다.

* 1949년 중국공산화

* 서영해는 이승만이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여사와 연애 당시

편지를 전달해 주는 등 이승만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이승만보다 김구를 더 추종했다.

한국인은 모두 억류 상태가 됐고

49년 11월 정부차원의 막후 협상끝에 한국행 수송선이 왔다.
그러나 당시 중국 국적의 여권을 가진 서영해는

중국인으로 간주돼 귀국하는 배에 타지 못하는 기막힌 처지가 된다.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을 유지하시오,

오늘같은 안타까움도 웃어 넘길 만큼 행복하게 살아봅시다.”

라는 말을 부인에게 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지만 이후 서영해의 소식은 끊어졌다.

혼자 한국으로 돌아온 아내는 교사로 복직했고,

40년 동안 소식없는 남편을 기다렸다.

아내는 경남여고 교장을 끝으로 교직을 마치고

간직했던 남편의 책과 저서 등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는 등

신변을 정리하고 89년 세상을 떠났다.

서영해의 이런 비운의 행적은 1987년 ‘주간한국’을 통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조카 서정인씨

- 서영해의 그후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조카 서씨는

“중국 공산화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고

프랑스에 갔다는 설도 있다.

심지어 북한으로 갔다는 얘기도 있지만 중국 병사설이 유력하다”

고 말한다. 조카 서씨는 94년 큰아버지의 행적을 모아

독립유공자 상훈을 신청했고 겨우 통과되어,

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32&aid=0000117330

http://www.wowtv.co.kr/NewsCenter/News/Read?menuSeq=459&subMenu=latest&wowcode=&Class=&articleId=AKR20180228010000081

​3. 잊어진 독립운동가 파리의 '서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