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교수 자네는 왜 여자처럼 말을

안녕하세요!

오늘은 "너"에 해당하는 2인칭 대명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에서는 기본적으로 이름을 부르고,

2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는 편입니다.

하지만, 관계에 따라, 상황에 따라서,

"아나타, 키미, 오마에"를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어의 여러가지 "2인칭 대명사" 같이 배워봅시다!


貴方

먼저 "貴方(아나타)"입니다.

"아나타"는 기본적으로 "당신"이라는 뜻입니다.

동등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주로 사용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또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사용합니다.

친구를 부를 때도 사용하는데,

이 때는 "너"라는 의미가 됩니다.

"あんた(안타)"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쓰면 굉장히 기분 나쁘게 들립니다.

그래서 주로 싸울 때나 화났을 때 사용합니다.

남자보다 여자가 좀 더 많이 씁니다.

아나타, 안타 모두 자신보다

윗사람에게는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君(키미)"는 기본적으로 "자네"라는 뜻입니다.

직장 상사, 교수 등 지위가 높은 사람

부하 직원이나 제자 같이 본인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견례 자리에서 아버지가 상대 측 배우자

부를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노래에서 "키미"라고 나오면 "그대"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간혹 애인에게 "키미"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때는 "자기"정도로 해석하면 됩니다.

친구끼리 쓰면 "너"정도로 해석하는데

실생활에서 이렇게 부르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많이 나오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お前

"お前(오마에)"는 굉장히 거친 표현입니다.

"인마, 새끼" 와 같은 느낌입니다.

과거에는 상대를 존중하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나쁜 표현임에도 존중하는 느낌을 주는

접두어 "お"가 붙어있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의미가 바뀌어서

"막 불러도 되는 상대, 낮잡아 보는 상대"

부를 때 주로 사용됩니다.

주로 남자끼리 친한 친구를 부를 때 사용합니다.

화가 났을 때 "오마에"를 쓰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남편이 아내를 부를 때도 사용했으나,

최근에는 이름이나 애칭으로 부르는 등

"오마에"의 사용빈도는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오마에"라고 불리면 상당히 싫어합니다.

애인을 계속 "오마에"라고 부르면 싸울 수도 있어요.

여자보다 남자가 더 자주 쓰는데,

되도록 쓰지말고, 이름 등으로 부르는 게 좋습니다.

여기까지 일본어 2인칭 대명사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포스팅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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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시 다자이후 텐만구, 스가와라 미치자네

2015.1.21

 

일본 학문의 신,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真)

일본 학문의 신(神),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의 세계

이 정 희 (위덕대학교 교수)

 1. 유배지에서 핀 꽃 - 주인을 따라간 매화 -

일본에서 학문의 신이라 불리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 845~903)가 57세 되던 해에 좌천 당해 교토(京都)를 떠나면서 집에 있는 매화나무를 보며 읊은 시(詩)는 너무나도 유명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꽃바람 불거든 향기를 보내다오.

매화꽃이여

주인이 없어도 봄을 잊지 말아다오.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유배지로 떠나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심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다. 우선 먼저 원문을 살펴보도록 한다.

こちふかば匂ひおこせよ梅の花あるじなしとて春をわするな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다자이후로 좌천된 사실을 이 와가(和歌)를 통해 알았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맨 첫 단어인 ‘こち(꼬치)’이다. ‘こち(꼬치)’는 일본인들의 설명에 의하면 지금은 쓰고 있지 않는 사어(死語)라는 설명만 있고 뜻도 모른다곤 한다. 『大鏡』에는 이 부분이 ‘東風(こち)’라 되어 있다. 이것을 보고 후세 사람들은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영희씨의 지적에 의하면 일본어 ‘꼬치(こち)’는 우리말의 ‘꽃’ 이란 뜻이라고 한다. 한국어 ‘꽃’이 고대 일본어 표기에 ‘꼬치(こち)’가 된 것이다.  봄이 되면 동쪽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고, 그리고 나면 꽃이 핀다는 것에서 한자로는 동풍(東風)으로 적었을 거라는 이야기다. 지금도 일본어로 ‘こち(꼬치)’를 쳐서 한자 변환키를 누르면 한자로 ‘東風’이 나온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적어도 당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한국어인 ‘꽃’ 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조상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하나의 근거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위 인용한 시가 더욱 더 유명하게 된 것은 이 매화나무가 하룻밤 사이에 주인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따라 유배지인 후쿠오카(福岡) 다자이후(大宰府)로 날아가 그곳에서 꽃을 피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날아온 매화’, 즉 ‘토비우메(飛梅)’의 유래다. 이 매화나무가 교토(京都)에서 다자이후까지 약 50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하룻밤 사이에 하늘을 날아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의 일화로 이야기 형태로 전해지다가 나중에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에 얽힌 신비로운 전설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물론 매화가 하룻밤 사이에 그 먼길을 날아 갔을 리는 만무다. 그런데 매화가 날아갔다고 전해져내려 오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지금도 다자이후 덴만구(大宰府天満宮)에 가면 본전(本殿)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있는 거목에 토비우메(飛梅)라는 이름표가 달려있다.

토비우메(飛梅)

이 이야기는 지금의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순간 이동인 셈이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왠지 이 토비우메(飛梅) 이야기에는 리얼리티가 있는 듯이 보인다. 어쩌면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존경한 하인이 자신의 주인의 억울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드리려고 밤새도록 매화나무를 짊어지고 옮겨다 심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같은 맥락에서 주인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위해 다자이후 근처에 있는 매화나무를 하룻밤 사이에 옮겨다 심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토비우메(飛梅)이야기 보다 이쪽 이야기가 훨씬 더 감동적일 것이다.

매화로 유명한 다자이후에 도착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그곳에 피어있는 매화를 보고 기뻐하며 “네가 나를 잊지 않고 따라왔구나”하고 위안을 삼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매화였을까.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일생을 통해 볼 때 매화는 늘 미치자네를 따라다닌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아니, 천신(天神)이라는 존재가 사람들에게 친근한 감성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은 아마도 매화 때문인 것 같다. ※큐슈타비 수정안 : 텐진(天神) 매화 이미지는 주로 그가 읊은 시(詩)나 그의 일대기, 그와 관련된 설화, 가문의 문장(紋章) 등에 항상 심볼와 아이콘으로 쓰여져 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감성과 인간성, 사상의 증표로 계속해서 전해져 내려 왔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천신(텐진)(天神)의 의미, 이념, 신앙의 표상으로도 매화의 이미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미치자네를 중국 송나라 시대의 시인 임화정(林和靖, 967~1028)에 비유하기도 한다. 임화정은 평생 결혼하지도 않고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자연과의 일체감을 꿈꾸며,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서 20여년 동안 한 발짝 나오지 않고 정원에는 매화를 심고, 학을 키우며 살았다고 한다. 매화는 벚꽃과는 달리 사람이 정성들여 가꾸어야 자라는 식물이라고 한다. 그냥 들이나 산에 내버려 두면 죽어버린다. 정원에 피어 있는 매화를 부인이라 부를 정도로 사랑했으며, 학을 자식으로 여기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평생을 보냈다. 일본의 문인이나 예술가들은 이러한 임화정을 하나의 이상적인 표상으로 여겨 그의 고결함과 청렴함을 본받으려 했다. 매화를 둘러싸고 지금까지도 미치자네와 임화정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보고 있다.

예로부터 매화는 혹한 추위 속에서 아름다움을 갈고 닦아, 봄에 맨 먼저 의연하게 꽃을 피워 그 기개로 존중 받아왔다. 매화는 그 꽃의 자태가 단아하고 고결하여 흔히 군자에 비유되어 우리나라에서는 선비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난초,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로 칭송되었다. 옛 사람들은 매화를 ‘생각하며 피는 꽃’이라고 했다. 아마도 얼어붙은 땅 위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꽃을 피워야하므로, 그 꽃 피울 시기를 충분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거라고 해서 나온 말일 것이다. 또 하얀 눈과 달빛으로 핀다는 꽃이라 일컬어졌다. 봄이 와서 매화가 피는 것이 아니라, 매화가 피어서 봄이 온 것을 알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꽃이 벚꽃이라고 한다면, 매화는 대륙의 꽃이다. 따라서 매화는 대륙의 교양을 상징하면서 일본 문화 속에 깊이 침투해 들어갔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문장박사(文章博士)의 가문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이면서 자연스럽게 매화를 비롯한 대륙문화를 접했을 것이다. 매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싹 트게 된 것도 이러한 환경의 영향도 컸으리라고 본다. 특히 매화 문양은 일본적인 문화가 자리 잡아가는 와중에 중국풍 문화의 대표로 일본문화 속에, 나아가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확산되어 가고 침투해 갔던 것이다.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초상

2. 신라의 왕자 천일창의 후손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조상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소위 ‘도래인’이라는 학설이 유력시 되고 있다. 약 30년 전만해도 9세기의 일본 거물 정치가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일본 선주민 계열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일본 역사학자들이 고대 황실 족보라고 할 수 있는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을 연구하면서부터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한국계임이 밝혀졌다. 『신찬성씨록』은 헤이안(平安)시대(794~1192) 초기인 815년에 사가(嵯峨)천황(809~823)의 명에 의해 편찬한 고대 씨족명이 수록된 책이다. 여기에 의하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왕자 천일창(天日槍, 일본어로는 아메노 히보코)의 후손이 된다. 간단하게 가계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아메(天) → 노미(野見) → 하지(土師) → 스가와라(菅原)

우선 하지(土師) 집안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하면, 하지(土師)는 고대의 씨족으로 아메(天) 집안의 14대 후손으로 전해지는 이즈모노쿠니(出雲国)의 용사인 노미노 스쿠네(野見宿禰)가집안의 조상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노미노 스쿠네는 스이닌(垂仁)천황의 명을 받고 스모(씨름)를 하기 위해 소환되어 시합에서 이겨서 스이닌 천황의 신임을 얻고 천황 곁에서 충성을 다해 천황을 모셨다고 한다. 

특히 스이닌 천황의 황후가 죽자 당시의 풍습에 따라 순장을 해야 하는데 순장을 놓고 황실에서 의견이 분분할 때, 노미노 스쿠네가 순장을 대신할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 노미노는 산 사람 대신 흙으로 사람과말을 만들어 무덤에 묻을 것을 제의하고, 스스로 흙으로 사람과 말 형태의 인형을 만들어 천황에게 바쳤다고 한다. 즉 토용(土俑)을 만든 것이다. 이를 일본어로는 하니와(埴輪)라고 부른다. 일본의 하니와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고고학자들은 이것은 하나의 전설에 불과하다고 한다.  스이닌 천황은 산 사람을 매장하지 않고도 순장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 노미노 스쿠네의 아이디어에 만족해 하며 그 공적을 높이 치하했다고 한다. 이에 스이닌 천황은 노미노스쿠네에게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완벽하게 만들었으므로 흙을 잘 다룰 줄 아는 흙의 스승이라는 뜻의 토사(土師, 일본어로 하지)라는 성을 하사했다. 그 후로 하지(土師)씨족은 대대로 천황의 고분을 만들거나 장례식을 도맡게 되었다. 

하지(土師) 씨족의 번영은 계속되어 4세기 말부터 6세기 전기까지 약150년간 고분시대의 중기를 대표하는 고분군, 고분조성, 장례 의례에 관여했다. 나라(奈良) 지역 일대를 지금도 ‘하지(土師)마을’이라고 불리는 데, 여기가 하지 씨족의 본거지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후 하지(土師) 씨족은 간무(桓武)천황(781~806) 대에 이르러 학자였던 하지노 후루히토(土師古人)는 천황으로부터 다시 스가와라(菅原)라는 성을 하사받아 스가와라 집안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밖에도 하지 씨족은 스가와라 이외에 오오에(大江), 아키시노(秋篠)라는 성을 하사받아 분가하기에 이른다. 이때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증조부 때의 일이라고 한다.

학자인 하지노 후루히토를 시작으로 스가와라 집안은 ‘문장박사(文章博士)’가 배출되어 가문 대대로 학자 가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문장박사’는 730년경 정착된 명칭으로 한문학과 역사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등용시켜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 이외에도 천황이나 섭관(攝關), 관료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일을 전담했다. 또한 그들의 의뢰를받아 한시를 짓거나 문장을 집필하거나 했으므로, 권력 중추들과 친해져 문장박사에서 최고관료인 쿠교(公卿)가 되는 사람도 많았다. 이들 문장박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바로 스가와라 가문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스가와라노 키요키미(菅原清公, 770~842)다. 스가와라노 키요키미는 새로운 문물을 접하면서 새로운 제도 등을 시도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집으로 그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여 문장원(文章院)이 생겨나 처음으로 박사와 학생들 간의 사적인 사제지간의 관계가 형성되어 일종의 학벌을 조장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자녀들의 교육 육성에 힘을 기울여 스가와라 집안에서 문장박사가 3대에 걸쳐 배출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 해당하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뛰어난 실력과 재능을 갖추기는 했지만, 이러한 것들이 다른 귀족들의 반감을 사기 시작했다. 스가와라 가문에 대한 반대파들의 시기와 반대는 다음 세대에 까지 이어져, 미치자네가 좌천당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스가와라노 키요키미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다 보면, 그는 지금으로말하면 진취적이고 혁신가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가 견당사판관(遣唐使判官)으로 있을 때에 홍법대사 쿠카이(空海)와 함께 당나라 견학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천황에게 건의하여 조정의 의식이나 풍습이 당나라 풍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후세에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이름 짓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그때까지의 이름들이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가 ‘타무라 마로(田村麻呂)’와 같이 성과 이름이 두 문자씩되도록 바꾸었다고 한다. 또는 이름이 외자인 경우도 이때부터 나타났다고 한다. 특히 여성의 이름 중에 ‘코(子)’를 붙이는 관습도 스가와라노 키요키미의 건의에 의해 도입한 것이라고 한다. 스가와라 키요키미는 손자인 미치자네가 천신(텐진)(天神)으로 추앙받고 있기 때문에 손자 덕분에 그도 덴망구(텐만구)(天満宮)에 모셔져있다.

이렇게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윗 세대를 조사해 보면 천일창(天日槍)의 후손이 되는데, 그럼 이번에는 천일창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제11대 스이닌(垂仁)천황 3년 3월에 신라의 왕자 천일창(天日槍, 아메노히보코)이 왜(倭)나라에 건너왔다. 천일창 왕자는 신라에서 옥, 칼, 창, 거울, 등 모두 7가지 물건을 가지고 왔다고 되어 있다. 천일창 왕자가 왜나라 스이닌 천황 때에 신라 왕가의 보물인 옥과 거울, 칼과 창 등을 가지고 건너갔다는 것을 신라 왕실과 스이닌 왕가와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스이닌 천황은 스진(崇神)천황의 셋째 아들로 천일창 왕자가 스이닌 천황에게 직접 신라의 보물을 갖다주었다는 것은 스진 천황의 정통을 든든하게 세워주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스진 천황이 바로 신라계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고사기(古事記)』에도 실려 있다. 고사기에 ‘옛날에 신라의 국왕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천일모(天日矛,아메노히보코)라고 했다. 이 사람이 건너왔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천일창(天日槍)이나 천일모(天日矛) 모두 일본어로는 ‘아메노히보코’라고 하며. 천일모의 ‘모(矛)’도 천일창의 ‘창(槍)’과 마찬가지로 ‘창’을 가리키는 ‘창 모’자이다. 그러므로 ‘천일창’과 ‘천일모’는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고사기(古事記)에 실려 있는 천일창 신화를 좀 더 이야기 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의 아구누마(阿具奴摩, 아구노마)라는 늪가에 한 여인이 낮잠을자고 있었다. 한 남자가 지나가다 보니, 낮잠 자는 그녀의 생식기를 햇빛이 무지개처럼 비추는 것이 아닌가. 이상하게 여겨 살펴보니 그 여인은 곧 아이를 배고 빨간 구슬(赤玉)을 낳았다. 남자는 여인에게 청하여 그 구슬을 얻어 허리에 차고 다녔다. 어느날 농사꾼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기 위해 소를 몰고 고을로 들어서다가 신라 왕자 천일창에게 잡혔다. “소를 잡아먹으려고 산골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냐?” 호통을 치는 천일창에게 빨간 구슬을 뇌물로 주고 풀려났다. 빨간 구슬이 아름다운 소녀로 화했기 때문에 천일창은 그녀를 아내로 삼았다. 그녀는 지아비를 극진히 모셨으나 오만한 천일창에게 실망한 나머지 일본으로 도망쳤다. 천일창은 그녀를 쫓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여자를 얻어 살았다……는 것이다.

일본의 고대 지방지리서인 『하리마국풍토기(播磨國風土記)』에도천일창은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 ‘신대(神代)에 천일창신(天日槍神)이 조선으로부터 건너왔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의 천일창은 한 발 먼저 일본에 건너가 살던 가야계 도래인들과 곳곳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영토 쟁탈전이다. 이 하리마국에는 질이 좋은 사철(砂鐵)의 산지였다고 한다. 즉 천일창은 ‘창’으로 대표되는 철기문화를 전래해주고, 그리고 일본에서 제철을 장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최근 10월 7일 경북일보 주최 ‘제2회 한일 연오랑 세오녀 국제 세미나’에서 이영희씨는 천일창과 연오랑은 동일 인물이라고 발표를 했다. 그럼 천일창은 어느 신라왕의 왕자일까. 실은 천일창의 부왕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밝혀진 자료도 없고, 어느 역사서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천일창이 왜나라 스진(崇神)천황 때 건너간 시기가 과연 언제쯤이 될지를 추적해 보면서 당시 신라 왕을 대조해 보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스진천왕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재위기간이 B.C.97~B.C.30년으로 되어 있지만, 초기 천황들의 재위 기간은 늘리거나 부풀려서 확실하게 추정하기가 불가능하다. 고대 천황들 중에서 비교적 확실하게 추정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천황은 오진(應神)천황이다. 오진천황의 재위기간은 270년에서 310년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스진천황 이전의 시대에 천황이 있었다는 실제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한다. 스진천황이 야마토(大和) 정권의 최초의 천황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야마토 정권은 3세기 여왕 히미코가 다스리는 야마타이 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연합국 시대를 거쳐, 4세기초 긴키(近畿)지방의 야마토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같은 시기인 신라의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의 왕은 기림이사금(基臨尼斯今, 재위 298~309)이며, 4세기 중엽까지는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재위 310~356)이다. 이 두 명의 신라왕 중에 천일창 왕자의 부왕이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림이사금조에 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왕은 성질이 관대하고 온후했기 때문에 모두가 그의 덕을 칭송했다. 왕 2년(299년) 2월에 시조묘를 참배했다. 왕 3년 음력 정월에 왜국과 사신을 서로 파견했다. 음력 2월에 왕은 비렬홀(比列忽)을 순행했고, 음력3월에 왕은 우두주(牛頭州, 지금의 춘천설)에 이르러서는 태백산(太白山)을 향해 제사를 지냈다.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두 나라가 신라에 항복하고 귀순해 왔다.’  뒤이어, 흘해이사금조에 대한 내용을 보면, ‘왕 2년(311년) 2월에 왕은 친히 시조묘에 참배했다. 왕 3년(312년) 3월에 왜나라 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들의 혼사 때문에 구혼했으므로, 왕은 아찬 벼슬 급리의 딸을 왜국으로 보내주었다. 왕 5년(314년) 정월에 아찬 급리를 이찬에임명했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 중에 주목하고 싶은 곳은 기림왕 때에 신라가 왜국과 사신을서로 파견했다는 것은, 왜국의 스진왕조를 3세기 말에서 4세기 중엽으로 추정할 경우, 신라왕조와 스진왕조 사이에 최초의 외교 교류로서 주목 할 수 있다. 이때 사신으로 파견된 왕자가 천일창왕자가 아닐까 하고 추정하는 바이다. 즉 천일창의 부왕은 기림이사금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천일창의 자손들은 그 후 일본에서 제철을 장악, 관계(官界)에서도 입지를 다져 요직을 두루 차지했던 것이다. 

다자이후 텐만구 - 가운데 출입구는 신(神)만이 지나는 곳이다. 텐만구에 들어가고 나올때는 양쪽 출입구를 이용하자.   

3. 미치자네의 영광과 좌천

한 집안의 가문이라는 것이 자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다고 하겠다. 우수한 유전인자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와 대개는 우수한 혈통 속에 유능한 자손이 나오게 된다. 스가와라(菅原) 가문은 보기 드물게 유학의 우두머리격인 조부 스가와라노 기요키미(菅原清公,770~842)와 부친인 스가와라노 고레요시(菅原是善, 812~880)에 이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3대에 걸쳐 문장박사(文章博士)에 발탁된 일본 굴지의 학자 가문이다. 문장박사는 원래 한시문(漢詩文)과 역사를 가르치는 교관으로 728년에 설치되었는데, 9세기 이후에는 중국문화의 유입과 영향으로 더욱 중요시 되었다.

이와 같은 성격은 중국의 한림학사(翰林學士)와 비슷하다. 중국의 한림학사가 천황 측근의 브레인으로서 때때로 간언을 서슴지 않으며, 천황의 정무 사이에 펼쳐지는 연회에서는 시(詩)를 바치는 것이 임무였던것처럼, 당시 우다(宇多)천황은 외척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문장박사를 한림학사와 같은 역할을 부여했다. 당시 우다 천황이 이러한 문장박사를 둔 것은 우다 천황 자신은 후지와라(藤原) 가문과 혈연 관계가 일체 없으므로 후지와라 가문을 배제하고, 스스로 정치의 실권을 잡고 친정(親政)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우다 천황은 자기자신의 신하를 스스로 육성하고 조직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는 결국 미치자네가 모함을 받게 되는 빌미가 되고 말았다. 이렇듯 당시 문장박사인 미치자네는 정치가이며 동시에 대학자였던것이다.

영웅, 위인들의 탄생에는 항상 신비로운 탄생 설화가 있기 마련이다. 미치자네도 이러한 기인한 탄생 설화가 있다. 미치자네의 부친 스가와라노 고레요시(菅原是善)가 정원에서 대여섯살난 아이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아이의 용모가 범상치 않아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더니 사는 곳이 정해져 있지 않고, 부모도 없고해서, 당신을 부모로 여기고 싶다고 하여 고레요시는 기쁘게 받아들여 키웠다고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오히려 영웅들의 탄생 설화로서는 지극히 평이한 이야기다. 역사적인 사실로서 미치자네가 태어난 해는 845년으로, 부친 고레요시가 34세 때의 일이다. 미치자네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병약했다는 기록과 11살 때에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15세 때부터 문장생(文章生)이 되기 위해 부친 고레요시는 매일매일 시(詩)를 짓도록 과제를 제출하였는데 그 시가 수 십 수에 달했다고 한다. 18세 때에는 드디어 문장생(文章生) 시험에 합격하여 문장생(文章生)이 된다. 18세에 문장생이 된 것은 그때까지의 기록에 의하며 미치자네가 가장 어린 나이인 것이다.

당시 제도에 의하면, 문장생 20명 가운데 가장 우수한 학생 2명을 선발하여 문장 특기생으로 최고의 관리 등용 국가시험인 방략(方略) 시험을 볼 수 있는 후보자가 될 수 있는데, 미치자네는 23세 때에 문장 특기생으로 선발된다. 문장 특기생은 정해진 기간 안에 방략 시험을 봐서 합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방략 시험을 본다는 것은 학자로서의 명예이고, 가문의 영광이 것이다. 미치자네는 방략 시험에 합격하고 난 7년 후인 877년, 나이 33세 때에 문장박사(文章博士)가 된다. 그 때 문장박사는 2명이었다. 다른 한사람은 미치자네 보다 11살이나 연장자이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2년뒤에 사망하고 만다. 그후에 약 5년 동안 미치자네 1인 문장박사 시대가 계속된다. 이때 미치자네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도 많이 있었지만, 한시에 능한 미치자네는 물 만나 물고기처럼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한 시대였다.지금 기준으로 보면, 한시를 짓거나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가를 즐기기 위한 취미로 생각되는 경향이 있는데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라를 다스리고 가문을 일구어 나가는 데에 시를 짓고 하는 학문 보다 좋은 게 없다고 할 정도로 정치의 일환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발해(渤海) 사절단이 오면, 천황은 관리에게 한시를 지으라고 명하고, 완성된 한시를 사절단에게 보내고, 한시를 받은 사절단도 한시를 지어 천황에게 올렸다. 이러한 것은 의사소통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당시 관리들의 한시 작성능력은 빼놓을 수 없는 자격이 되었다. 대부분의 문인귀족들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미치자네는 스가와라 가문의 학통을 계승하면서 9년간 문장 박사를 역임하고 42세인 886년에 사누키가미(讃岐守)에 임명되었다. 자타가공인하는 학문의 총수인 미치자네에게는 다소 갑작스러운 발령이었지만, 4년의 임기동안 헤이안 시대를 대표하는 주옥같은 한시를 지어, 시인으로서도 크게 성장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 교토에서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아형(阿衡)의 분의(紛議)가 일어났다. 우다(宇多) 천황이 당시의 권력자인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経)에게 보낸 칙서에 ‘아형(阿衡)’이라는 말이 쓰였다는 것을 빌미로 일어난 논쟁이었다. 논쟁은 우다 천황이 모토쓰네에게 종래대로 관백(關白)으로서 힘써 줄 것을 전하는 칙서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요직에 임명될 경우 신하는 한 두 번은 이를 사양하고, 왕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거듭 청하여 예를 다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에 모토쓰네는 사양의 뜻을 밝혔는데, 문제는 당시 칙서의 초안자인 다치바나노 히로미(橘広相)가 답한 칙답의 내용에, 아무쪼록 아형(阿衡)의 책임을 다해 줄 것을 당부하는 대목이 있었다는 점이다. 아형(阿衡)이란 중국의 은나라 명신 이윤(伊尹)에게 부과된 관직으로 ‘아(阿)’란‘ 의지한다’, ‘형(衡)’이란 ‘공정하다’는 뜻으로 천자(天子)를 보필하는 중대한 역할이기 하지만, 구체적인 직무 규정이 없었다. 모토쓰네는 이런 ‘아형’에 대해 일종의 명예직이 아니냐는 논조로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칙서 초안자인 다치바나노 히로미는 관백(関白)이라는 말을 중국식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인데, 모토쓰네는 아형에 임명한다는 것은 명예직에 안주하라는 말이라며, 조정에 나와 정무를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히로미에 대한 시위 행위로 그 사건에는 복잡

한 배경이 있었다. 히로미는 우다 천황의 측근이며, 게다가 히로미의 딸이 우다 천황의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만약에 그 아들이 즉위하게 되면 히로미는 외척으로 세력을 잡게 되므로 모토쓰네는 그것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우다 천황의 새로운 정치 구상에 의해 당시 문장박사인 히로미에게 참의(參議)라는 고위관직을 겸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 역시 모토쓰네에게 있어서는 신경이 거슬리는 일로 우다 천황 측근의 학자들을 질시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때 미치자네는 모토쓰네의 처세에 대해서 맹렬히 비난하며 사건의 핵심인물인 모토쓰네에게 서한을 보내는 과감한 행동을 하고 말았다. 미치자네의 이러한 행동이 우다 천황의 눈에 든 것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3년 뒤인 891년에 갑자기 모토쓰네가 사망했다. ‘아형’ 사건으로 혹독한 곤욕을 치른 우다 천황은 후지와라 집안의 후지와라노 스케요(藤原佐世)를 무쓰노카미(陸奥守)로 좌천시켰다. 이는 우다 천황이 행한 보복 인사임에 틀림이 없었다. 우다 천황은 속이 후련했었을 것이다. 우다 천황은 곧바로 미치자네를 발탁하여 정치 개혁을 착수하게 되어 미치자네는 전례 없는 파격적인 승진을 했으며, 우다 천황은 일약 정계의 주역이 된다. 물론 이러한 파격승진의 배후에는 후지와라 가문을 견제하려고 했던 우다천황의 적극적인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모토쓰네 사후 우다 천황의 친정(親政)은 성공한 듯이 보였다. 황실과 혈연관계가 깊은 사람들을 관직에 두고, 후지와라 집안사람들이 관직에 오른 것은 소수에 불과했고, 관백(關白)도 두지 않았다. 그런데, 897년 우다 천황은 13살의 아들(다이고(醍醐)천황)에게 전격적으로 양위를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불도(佛道)에 귀의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 진상은 수수께끼다. 다만, 우다 천황이 즉위 2년을 넘기지 않고 양위하려고 했을 때 미치자네가 동의를 하지 않아 9년 동안 재위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다 천황이 천황 자리에서 물러나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은 미치자네였다. 우다천황의 편애를 입었던 미치자네는 급격히 정계에서 고립되었다.

901년 교토에서는 격렬한 정변이 일어났다. 종2위(從二位) 우대신(右大臣)이었던 미치자네에 대해서 다자이곤소치(太宰権帥)에 임명한다는 다이고(醍醐)천황의 어명이 내려진 것이다. 이때 천황의 조칙(詔勅)이 『정사요략(政事要略)』에 실려 있어서, 미치자네가 왜 좌천당했는지 공식적인 설명을 찾아볼 수 가 있다. 그곳에는 우대신(右大臣) 스가와라 미치자네는 한직에서 발탁되어 기존의 대신들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분수로 모르고 권력에 마음을 두고 모함의 뜻을 품어 상황(우다 천황)을 기만하여 폐위를 시켜 부자간의 인연을 끊게 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파탄시키려 했다고 되어있다. 미치자네의 성격에 대해서는 겉으로는 온화하게 말하지만 마음은 그 반대라고 폄하했으며, 천황을 폐위하려한 모함은 천하가 모두 알고 있으니 우대신 자리에 앉아있을 사람이 아니라며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법률로 다스려야 하지만, 특별히 생각하여 대신직을 내놓고 다자이곤소치(太宰権帥)에 좌천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분수를 모른다고 하는 표현은 막연한 것으로 합당한 좌천 이유가 되지 않겠지만, 상황(우다천황)을 속이고 폐위를 음모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대죄인 것이다. 그 폐위의 구체적인 사항은 이 내용에서는 잘 알 수 없지만, 천황의 동생이자 우다상황의 셋째 아들인 도키요친왕(齊世親王)의 왕비가 미치자네의 딸이므로, 도키요친왕(齊世親王)을 천황으로 옹위하려는 음모였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천황 폐위를 도모했던 것이 사실이냐 아닌가에는 미치자네가 죄인이냐 아니면 무죄냐의 쟁점인 것이다. 스가와라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물론 사실무근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하며 혐의를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결국, 미치자네는 자신의 무죄를 이야기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미치자네의 좌천은 우다 상황에게는 전혀 알리지 않고 단행했던 것이다. 게다가 우다상황은 이 소식을 듣고 궁궐에 달려갔지만, 궁궐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밤이 되어서 되돌아갔다고 한다.

우다 상황의 미치자네 구제 해명의 기회를 처음부터 철저히 막은 조정의 태도는 미치자네 좌천의 이유에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만약에 미치자네의 죄상이 증거도 확연하다면, 설령 우다 상황이 구제한다 해도, 천황은 이를 반박해서 좌천의 정당성을 충분히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우다 상황에게는 미치자네의 좌천에 대해서 최소한 통보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다 상황의 이야기도 듣지않고 좌천을 결정했던 것에, 미치자네의 죄상은 증거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돌기도 했다. 한편, 미치자네에 대한 화살이 꽂이기 시작한 것은, 다이고(醍醐)천황의 태자 책봉 및 즉위에 관해서 우다 천황의 뜻을 받들어 미치자네가 혼자서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치자네가 우다 상황을 대신해서 천황의 폐위를 꾀 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것이 도키히라(時平)를 비롯한 많은 관료들의 생각이었고, 다이고천황 자신도 그렇게 느낀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이고 천황의 입장에서 보면, 미치자네가 또 우다 상황과 획책해서 다음에는 자신의 폐위를 논의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의심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신하로부터 미치자네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보고를 듣게 되면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어버렸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우다 상황이 지나치게 미치자네를 신임했으며, 미치자네의 파격적인 승진, 게다가 미치자네의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본심을 터놓지 않아 생긴 분위기여서 구제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필자는 미치자네가 천황 폐위 등은 추호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미치자네의 말을 믿고 싶지만, 음모와 혐의를 받을만한 여지는 있었다는 생각하는 바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미치자네 측에서 좌천의 문제를 이야기 했는데, 이것을 후지와라(藤原) 측에서 보면 또 다른 시각이 나오겠지만, 그러한 음모는 결국은 후지와라 가문의 상투적인 수법으로 타 가문 세력을 배

척하는 것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후지와라 가문은 외척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황태후의 권세를 빌려 다른 가문을 견제해 왔다. 그렇게 해서 최고 전성기인 도키히라(時平)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때 최대의 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미치자네였던 것이다. 

미치자네는 학문적인 소양이 깊어 문장박사에 임했을 뿐만 아니라 드물게 대신(大臣)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게다가 미치자네 뒤에는 100명이나 넘는 문장생(文章生)들이 있다. 그들이 국가시험을 보고 나서 중요한 요직을 차지하게 되면, 그때의 미치자네 세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므로, 이것이 후지와라 가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공포였던 것이다. 조정의 최고의 관직은 태정대신(太政大臣)이지만, 태정대신 자리에 적당한 인재가 없으면 결원인 채로 놔 둘 수 있는 각별한 관직인 것이다. 오히려 태정대신이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태정대신이 있으면 비상시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을 정도다. 당시 사회에서는 891년 태정대신이었던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経)가 사망한 이후로는 태정대신이 임명되지 않아 공백상태였다. 보통은 좌대신이 최고이고 우대신이 그 다음이다. 대신으로서는 동등하지만, 좌(左)가 우(右)보다 우위에 해당된다.

미치자네는 899년 우대신이 되고, 정3위에서 종2위로 승진했다. 그러나 같은 해에 다자이곤소치(太宰権帥)로 강등 인사가 발표된 것이다. 다자이곤소치라고 하는 것은 다자이후의 장관 대리 정도의 직위라고 한다. 다자이곤소치 강등은 우대신 직위에서 본다면 잔혹한 처사라고 생각되겠지만, 다자이곤소치라는 직위의 중요도로 봐서는 그리 무자비한 결정은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이 이면에는 정치적인 대적인 후지와라 가문을 원망조차 할 수 없게끔 했다는 것이 다자이곤소치로 좌천한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들 한다. 다자이후로 좌천되고 나서 2년 뒤에 미치자네는 사망한다. 향년 59세였다.

4. 일본의 학문의 신(神)이 되다

미치자네는 일본에서 인간으로서 신(神)이 된 최초의 인물이다. 사후에 신으로 승격해서 모셔지고 있는 일본인은 미치자네 이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있다. 미치자네의 신으로서의 이름은 천만대자재천신(天満大自在天神)이다. 미치자네는 죽어서 신이 된 것이다. 천만대자재천신(텐마다이진자이텐진(テンマダイジザイテンジン))(天満大自在天神)을 줄여서 천신(텐진)(天神)으로 불린다. 일본에서 텐만구(天満宮)라고 불리는 곳에는 모두 미치자네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신사(神社)다. 이 텐만구(天満宮)는 일본 전국 각지에 약 100여개가 있으며, 스가와라 신사(菅原神社)는 약 10여개가 있다. 일본은 신이 많은 나라다. 흔히 800만 신이 있다고 한다. 천신(텐진)(天神)이라고 해서 모두 미치자네를 이르는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홍법대사(弘法大師) 구카이(空海)를 모신 고조천신(五条天神)이라는 신사(神社)가 있다. 홍법대사는 미치자네 보다 100년이나 후세에 활약한 대사(大師)이므로 고조천신(五条天神)과 미치자네의 천신(天神)과는 관련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미치자네는 903년 2월 25일에 다자이후(大宰府) 남관(南館) 숙소에서 59세의 생을 마쳤다. 살아 생전에 미치자네는 교토(京都)로 다시 돌아가기를 갈망했지만, 사후 유언에 “유골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상식이지만, 내 유골은 교토(京都)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했다. 다자이후(大宰府)와 같은 지방 관리를 지낸 고관의 유골은 교토로 보내는 것이 관습이지만, 미치자네는 그 관습을 거부했던 것이다. 미치자네가 죽자 미치자네를 따르는 하인들이 미치자네의 유언대로 유해를 교토(京都)로 보내지 않았다. 유해를 실은 마차가 남관(南館)에서 동북쪽으로 향해 가던 도중에 황소가 꼼짝도 않고 움직이지 않은 곳이 있었다. 하인들은 시신을 싣고 가던 황소마저도 하늘의 뜻을 아는 영물이라 생각하여, 이곳이 바로 주인인 미치자네가 머물고 싶은 곳이라 하여 그곳에 유해를 안치하여 묘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바로 오늘 다자이후 텐만구에 있는 황소상이 다자이후 텐만구(大宰府天満宮)라 불리는 성지의 출발점이 되었다. 지금도 다자이후 텐만구 입구에 황소 동상을 세워두었는데 황소의 뿔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황소 동상 앞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다자이후 텐만구 입구에 있는 황소상

미치자네에게 있어서 다자이후(大宰府)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유배지로 한(恨)이 많은 곳이었지만, 사후에는 강력한 수호신이 되어 다자이후(大宰府)를 지키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미치자네는 어떻게 해서 신이 되었을까. 일본 역사흐름을 볼 때 원령(怨靈)에 관한 문제를 빼놓고 이야기 하면, 뭔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원령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원령 제1호는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 말기의 황족인 사와라 친왕(早良親王, 750~785)으로 당시 천도를 둘러싸고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당하고 말았는데, 무죄를 호소하기 위해 단식을 하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사와라친왕 사후 재앙이 끊이지 않자 진혼제를 올리고 숭도(崇道)천황으로 숭배하여 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후 다양한 원령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원령의 대부분은 정치의 패배자였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정치가의 원령일수록 그 보복도 강하다고 하는 원칙이 생겨나게 되었다.

미치자네가 세상을 달리한 903년부터 교토(京都)에서는 가뭄과 홍수가 이어졌고, 그 위에 전염병이 돌아 민심이 흉흉해졌다. 게다가 고위관직에 있던 정치가들이 차례차례 비명횡사를 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드디어 908년에 후지와라노 스가네(藤原菅根)가, 909년에는 후지와라노 도키히라(藤原時平)가 39세를 일기로 죽자, 누구나 할 것 없이 미치자네의 원한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미치자네의 좌천을 철회하려고 우다 상황(宇多上皇)이 궁정으로 뛰어갔지만, 그것을 저지하고 다이고천황(醍醐天皇)을 못 만나게 한 사람이 바로 후지와라 스가네였던 것이다. 그리고 후지와라 도키히라는 말 할 것도 없이 미치자네를 추방한 장본인이다. 미치자네의 원령이 곧바로 노린 것은 다름 아닌 도키히라와 스가네일 것이라는 추측은 당시 교토의 정계에서는 소위 상식이었던 것이다. 

923년에는 다이고 천황의 황태자인 야스아키라친왕(保明親王)이 23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의 부인은 도키히라의 딸이었다. 여기에 이르자 궁중에서는 미치자네의 원령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다. 궁중뿐만이 아니라 항간에서도 미치자네의 원령과 그 밖의 요괴에 관한 소문으로 가득하였다. 그래서 다이고천황은 미치자네의 원령을 달래기 위해서 좌천을 명한 조칙을 불에 태운 뒤, 우대신(右大臣)으로 복귀시키고, 더욱이 직위를 올려 정이위(正二位)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원령의 재앙은 계속되어 925년에는 황태자인 요시노리왕(慶賴王)도 다섯 살에 죽게되고, 930년에는 천황이 사는 대궐에 벼락이 떨어져 대신 여러 명이 죽는 참변이 일어났다. 이 충격으로 천황은 병으로 드러눕게 되고, 그 해에 히로아키라(寬明)에게 양위를 했지만, 결국 며칠 뒤에 천황도 죽고만다. 

이렇게 되자 미치자네의 좌천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미치자네의 원령이 두려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아니, 결국에는 천황의 목숨까지도 앗아가 버렸기 때문에 미치자네의 원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셈이다. 이리하여 미치자네의 원령을 신사(神社)를 만들어‘신(神)’으로 모셔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미치자네를 모신 텐만구(天満宮)의 시작이었다. 이후 귀족과 같은 지배자 층의 두터운 신앙을 배경으로 개축이나 재건을 반복해가면서 큰 신사로 발전해 갔다. 그러는 와중에 미치자네의 원한은 완전히 정화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미치자네의 비극적인 인생에 대해 후세 사람들은 원령 이야기를 만들어 냈고, 문장박사를 지낸 미치자네의 학문의 세계를 기리기 위해 학문의 신으로 떠받들게 되었다.

5. 미치자네의 시(詩)의 세계

일본은 9세기에 들어 견당사에 의해 중국의 문물이 물밀 듯이 들어가면서 일본 고유의 와카(和歌)가 일시적으로 쇠퇴하고 한시문(漢詩文)이 유행한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당대 최고의 학자이며 문장가로서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자신의 3대 가문의 시문을 수록한 가집(家集)인 『간케분소(菅家文草)』를 편찬하였다. 이어 미치자네가 유배지에서 쓴 한시가 『간케고슈(菅家後集)』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데, 두 가집에는 525수의 한시가 수록되어 있다. 미치자네 이후 한시는 귀족이나 유학자들에 의해 근근히 명맥을 유지할 뿐 와가(和歌), 렌가(連歌) 등의 일본 고유의 시가에 밀려 쇠퇴하게된다. 게다가 이때 한문을 간소하게 만든 문자 히라가나와 가타카나가 보급이 되기 시작하여 소위 문학의 대중화에 혁명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여류문학자들의 활발한 창작활동으로 인해 여성들의 세계에서 꽃피운 와카나 수필이 궁정문학으로 발달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궁정문학에도 하나의 전환기를 맞이한 셈이다. 미치자네는 문학의 흐름 속에서도 이러한 과도기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대표적인 한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九月十日

去年今夜侍淸凉   작년 오늘밤 궁전에서 임금님 모시고

秋思詩篇獨斷腸   가을 시를 쓰던 생각에 단장의 슬픔 느끼네

恩賜御衣今在此   상으로 받은 옷 지금 여기에 있어

奉持每日拜餘香   받들어 매일 같이 임금님을 생각하네

이 시는 유배지 다자이후에서 쓴 것이다. 1년전 9월 10일인 중량절 다음날 우대신(右大臣)이었던 작가가 청량전(淸凉殿)에서 시행한 시연(詩宴)에서 ‘가을 생각’ 이라는 제목으로 한시를 썼을 때를 회상하면서 지금의 애끊는 심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비록 몸은 유배지에서 꼼짝없이 있지만, 임금님으로부터 상으로 받은 옷을 꺼내어 임금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는 충절의 시(詩)라고 생각할 수 있다. 화려하지 않고 그리고 원망도 아닌 미치자네의 깊은 마음이 잘 전해지는 듯하다. 특히 이 한시는 『겐지 이야기(源氏物語)』에서 겐지(源氏)가 죄를 지어 궁궐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빠져나와 유배지에서 이 시를 읊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11세기 초기에 미치자네는 귀족사회에서도 사실무근한 죄로 인한 희생자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정착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한편 살펴보기로 한다.

惜秋秋不駐   가을을 아쉬워해도 머물지 않고

思菊菊纔殘   국화를 사랑해도 거의 다 졌네

物與時相去   만물과 시간이 더불어 가니

誰厭撤夜看   뉘라서 밤새워 보기를 마다하리

위 시는 늦가을의 국화를 보고 노래한 것이다. 가는 가을은 아쉽지만 가을은 멈추지 않고, 국화가 오래 피어 있기를 바라지만, 거의 다 져버린 모습을 고보, 시간과 더불어 덧없이 변해가는 가을과 국화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시기적으로 볼 때 가을은 만추(晩秋)에 해당 될 것 같다. 가을 중에서 만추가 가장 사람의 마음을 외로움에 잠기게 하는데, 가는 세월과 지는 국화와의 대비가 잘 이루어져 있다. 국화는 처음에는 탐스럽게 피었을텐데, 지금은 다 지고 말아 더 이상 자손들에게도 전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의미하는 것 같다. 이와 같이 미치자네의 한시는 일본 한시문(漢詩文)의 흐름에서 볼 때, 중국 한시문이 지닌 강한 억양과 단절 등에서 서서히 벗어나, 섬세한 정서가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다음은 와카(和歌)를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기러기가 가을에 우는 것은 이치를 아는 것인데

돌아가야 할 봄에 우는 소리는 왠지 마음이 아프네

가을에 날라 와서 봄에는 다시 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가을에 우는 까닭은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여지는데, 봄에 돌아간다고 우는 그때 그 우는 소리는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이다.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다자이후로 좌천되어 와서 다시 교토로 돌아가기를 기원했으나 결국에는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기러기와 좋은 대비를 이루며 그 심경을 그려냈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한 숨도 못자고 눈물만 흐르고 있네.

싸리꽃 예쁘게 피는 가을은 어느새 지나가버리고 말았네

미치자네는 다시 교토로 돌아갈 것을 간절히 기원했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매일 산에 올라 하늘을 우러러보며 절규하듯이 기도를 했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 있는 신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미치자네의 시는 유배지에서 느끼는 지방의 소박함과 쓸쓸한 생활, 그리고 좌천당한 약자로서의 시점이 그대로 잘 드러나 있다. 억울함에 피와 눈물로 엮은 서정적인 그의 시는 후세 사람들에게 강하게 전해져, 정치적인 좌천은 미치자네에게 있어서 휴머니티를 고양시키고 향기 있는 문학을 탄생시키게 했다고 말 할 수 있다.

6. 맺음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생애는 파란만장한 행복한 일생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그를 학문의 신, 수험의 신으로 떠받들고 있다. 이밖에도 미치자네는 와카(和歌)의 신, 약속의 신, 정직의 신, 자비의 신, 서예의 신, 국가수호신, 효도의 신, 왕생수호신 등 여러 지역·계층·종파에 따라 다양한 신으로 불리고 있다. 특히 이중에 ‘학문의 신’으로 가장 알려져 있어서, 1년 동안 일본 각지에 있는 텐만구(天満宮)를 찾는 수험생들은 수십 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신(神)에게 간절히 소원을 빌면 신이 그 소원을 들어 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다들 진지하게 기도를 한다. 게다가 해마다 2월이 되면 다자이후 텐만구(大宰府天満宮)에서는 매화 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 축제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학문의 신인 미치자네에게 매화를 헌화(獻花) 한다고 한다.

문장가(文章家)의 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문장박사라는 학자로서의 최고의 명예직에 올라 권세마저 누렸으나, 말년에 정치적 음모에 휩싸여 모함을 받고 좌천되어 유배지인 다자이후(大宰府)에서 생을 마감했다. 확실히 파란만장한 생애라고 말 할 수 있다. 미치자네는 자신이 동경한 백낙천(白樂天)과 같이 유배지에서 생활을 즐겼다기보다는, 유배지에서 읊은 시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자기 자신의 좌천으로 인해 자식들도 좌천되어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고 부인과는 헤어져 지내다가 사별하고만다. 

미치자네는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해서 산에 올라 하늘을 향해 자신의 무죄와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 있는 신과 대화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정계로부터의 버림은 유배 생활의 쓰라림을 더해주었고, 유배지에서의 고독은 마음의 상처를 더 깊게 했을 것이다. 이 깊은 고독은 보기 드문 서정적인 재능과 만나게 된다. 쌍방이 서로 얽혀서 자아낸 것이 유배지에서 나온 시(詩)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원망은 하늘에 통했는지 죽어서 원령이 되어 진노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를 각종 신(神)으로 떠받들게 되었다. 세상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에게 있어서 부조리를 느끼고 고독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한 미치자네는 지금까지도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영원히‘학문의 신’으로 추앙 될 것이다. 게다가 그는 한국에서 건너간 신라인의 후손으로 일본에서 신이 된 유일한 사람이다. 

다자이후 텐만구 경내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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