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단면을 나타내는 개념이 아니라 각 단면들의 총채

이 해를 보내며                                                                                                              1995

한 해가 저물어 간다. 한 장 남은 달력이 힘겹게 벽에 걸려있다. 요즘은 마지막 이라는 단어가 늘 가슴에 와 닿는다. 거리에 스산하게 마른 낙엽들이 뒹굴고 나목의 앙상한 가지가 바람에 흔들거리며 초 겨울의 찬 바람이 목 등을 스쳐갈 때 왠지 모르는 슬픔이 휘감아 온다. 미국이지만 이곳 NY와 NJ 기후는 한국과 비슷하여 다른 나라에 와서 산다는 것을 잊어버리며 사계절의 감각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여러 기관, 단체, 상가, 길 거리에는 연말 연시 분위기로 흥청대며 즐겁고 분주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해마다, 한 해를 마무리 할 때 마다 치르는 나만의 상념의 시간이 된다.

이 한 해도 하루 하루를 매 순간 충실 하려고 심신을 단련시키며 정진의 구도 자세로 살려고 했건만 늘 부족함에 가슴이 저려온다. 고인 물로 머무르지 않기 위해 읽고, 쓰고, 듣고, 그리고 만들고, 배우며 끊임없는 욕구를 창작욕으로 승화 시켜 보려고 하였건만 후회와 나의 한계에 부딪혀 좌절감을 맛보며 그런 나날이 있은 뒤 이것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주어지는 관문이라고 받아들이며 다시 한번 용기를 갖고 꿈을 안고 끝없는 종착역을 향하여 나의 마음은 달려가는 것이다. 이 “나”라는 존재 가치를 가까운 곳에서 찾기 위하여 사춘기를 열병처럼 심하게 치른 한 해였다.

 타인에게 보여지는 “나”라는 허상보다 나의 실상에 자아 추구 하려고 지난 날의 나를 객관적으로 투시하여 심리학적으로 낱낱이 파헤쳐 보며 그럴 수 밖에 없는 나! 지금의 나를 인정하면서 앞으로의 나를 그려보기도 한다. 행복, 불행도 아니며 단지 공허 하기만 하다. 인생에서 완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에 종교가 생기고, 철학을 사색하고 긴 역사 속에서 인간들은 방황하지 않았던가?

 자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건만 내가 아는 만큼 보여지는 것이 다르게 받아 들여지는 것이다. 고목의 가지가 위로 뻗쳐갈 때 밑을 받쳐주는 뿌리가 땅 속에서 얼마나 깊게 뿌리 박혀서 버팀목을 해주는가? 땅 속의 뿌리를 연상케 하는 내면을 보는 안목을 키우고 싶다. 희로애락 그 모두가 나로 인하고 자신의 감정 유희에 휘말려 본질을 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심오하게 진리를 탐구하고 싶다. 멀리서나 아니라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금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의무는 내가 있는 이 곳이 이 가정 안에서 밀린 일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계획하는 것이다. 뽀얗게 된 거울을 닦아내고 거울이 맑아질 때 마음의 때까지 닦아진 것 같은 기분, 헌 옷, 안 쓰는 물건의 정리 뒤 물질의 노예에서 해방감을 맛보며, 나보다 이 물질들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나눔의 정도 느끼며 먼지, 묵은 때, 거미줄을 깨끗이 청소 하면서 노동의 신성함을 깨닫고 96년도를 보내며 버려야 할 나의 단점의 가지치기를 생각해 본다. 정리된 집 안에서 내 손으로 다듬어진 쾌적함을 가져보며 얼마 후면 다시 가라앉을 먼지, 머리카락, 쓰레기의 흔적을 두려워하지 않으리, 어차피 삶이란 이런 되풀이의 연속이 아니던가.

 아이들이 벗어대는 옷들과 흐트러진 책들을 바라보며 이 일상적인 반복 속에 비범함을 보여주고 싶다. 이것이 나의 주부로써의 삶이 진정한 한 몫이라는 것을, 또 가사 일을 실천 함으로써 깨닫게 될 때 나의 가족들은 충전된 나의 에너지를 받으며 평온한 가정의 사랑을 받으며 원대한 힘의 원천을 맛보리라.

 지난 날 한국에서 12월의 흥청망청 하던 망년회의 분위기를 추억 속에 아스라히 떠올려 보지만 중년이 된 지금의 이 자리의 가치를 나는 인식한다.

 하잘것없는 일의 연속일지라도 가끔 뚜렷이 빨래, 밥, 청소, 장보기, 아이들 키우는 것, 남편에게 내가 필요로 하는 절대 가치를 나는 인정한다. 그리고 12월 어느 모임 행사에 입고 갈 옷을 준비하면서 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연출할 여러 가지 준비물을 정리해 본다. 옷, 구두, 액세서리에서 머리 스타일까지 생각하며 그 모임에서 아이들에게 배운 마카레나 춤을 추리라.

 일한만큼 해소할 분위기를 즐기며 그 속에 또 다른 나를 담아보면서 삶의 폭을 넓히고 싶다. 역사의 회오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96년도를 미련 없이 보내고 다가오는 새해 97년도를 소망을 안고 맞이 하리라.

Museum Village(뮤지엄 빌리지)                                                                                 1995

어느새 나무들이 윗부분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서 정처 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방랑자가 되고 싶기에 일상적인 생활이 끝나는 주말을 택하여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여행을 가기로 이 가을에 계획을 하였다.
남편은 컴퓨터로 뉴욕과 뉴저지의 관광지를 찾고 나는 허드슨 밸리 가이드 책으로 지도공부와 허드슨 강변에 있는 장소를 찾아 나섰다.
9월 들어 매 주 떠나고 보니 단풍이 물드는 단계가 눈으로 재 확인되며 팔렛트에 물감이 퍼지듯이 초록색의 잎이 노랑, 진자주, 주황, 붉은 색으로 번져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 색깔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시간과 자연 나와의 관계가 이어지는 것 같았다. 이민 생활에서 새롭게 시도한다는 것은 선택하는 기간에 적응이 필요하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늘 긴장감을 요구하는 것 같다.
한국에 살면 구태여 찾지 않아도 저절로 습득 되는 것도 여기서는 처음 시작하는 것처럼 계획이 필요한 것이다. 슈퍼마켓에 들어서서 그 많은 종류의 음식을 고를 때 시간이 걸리고 새 상품에 대한 혼란이 주어지며 선택하는 데 어려움이 가는 것처럼 매 사에 그러한 여건에 대한 익숙하지 않음에 거부감이 오는 것이다. 지난주에는 뉴욕주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뮤지엄 빌리지에 다녀왔다. 
파킹장부터 음식 굽는 냄새와 모닥불 연기가 보이며 Tee Pee(인디언 집)처럼된 캔버스 천의 천막들이 보이며 17c 서부시대 옷들을 입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마을에 들어선 듯 200년 전 마을 그대로였다.  
Log Cabin(통나무 집)에 들어서니 시골 집에서 나는 냄새와 방 안 분위기가 한 눈에 다 들어왔다. 흔들 의자에 앉아있는 여인은 긴 치마에 앞치마를 하고 우리들을 반겨주며 그 시대의 생활 양식을 설명해 주었다. 나무 침대 밑에 매트가 있고, 벽난로 앞에 아기침대와 주방기구들, 식탁 위에 있는 그릇들 그 집은 원형 그대로여서 아직도 따스한 사람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빗자루를 만드는 곳에 가니 빨래판, 총채, 가정도구와 빗자루를 만드는 노인이 보인다. 
숙달된 솜씨로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며 요즈음은 다 플라스틱을 사용하기에 10년 전부터 만들어 왔지만 대량 생산은 안하고 있다고 한다. $4.00을 주며 산 빗자루와 벼 이삭을 얻어서 단풍잎을 끼어 문 앞에 거는 리스를 만들어 걸었다. 드러그 스토어에 약병들과 진열장은 유리의 한약방 서랍장을 연상케 하였다.
안경들은 조그마한 동그란 금테 안경들과 거북이 등으로 만든 것 등 무척이나 케이스가 섬세해 보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Natural History로 가는 길에 땅 속에 큰 벌 집을 보았다. 주위에 벌집 껍질들이 모여 있어서 큰 아이가 주우려 하다가 윙윙 거리는 벌 소리에 놀라 포기 하였다. 
공룡 뼈가 전시되고 조개, 돌, 화석이 있으며 액자에 하얀 새 깃털로 만든 깃털 꽃 모양을 보며 장식품으로 가벼우며 여러 새들의 깃털 색상이 보기에 아름다워서 어느 액세서리 보다 모자에 많이 다는 것 같다.
몬로 저널 신문사에 들어서니 잉크 냄새와 인쇄기로 찍어놓은 종이들이 벽보에 걸려있다. 좁쌀만한 글자체를 보여주며 세계 인쇄술의 역사를 설명해 주는데 남편은 한국의 팔만대장경이 최초의 금속활자로 독일의 쿠텐베르크보다 빨랐다고 하니 알고 있다고 하면서 동양에서는 중국이 목판화로 일본은 색채 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여름 밤의 축제                                                                                                              1995

타판지 다리를 끼고 허드슨 강줄기가 흐르고 여름의 우거진 신록이 햇살 아래 타오르고 조그만 타운 피어몬트가 여름이 되면 관광객으로 붐빈다. 집에서 15분 거리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와 카니발을 보러갔다.

남편은 두 딸들의 손목을 꼭 잡고 인파 속으로 묻혀져 간다. 돌고 돌아서 찾은 파킹 자리는 잔디밭 위에만든 임시 주차장이었다. 인근 주민들이 다 왔기에 경찰들이 인파 정리를 도와 주었다. 자전거 타고 좁은 길 사이로 가는 젊은 경찰의 모습이 평화로운 중 소도시의 모습으로 보여진다.

멀리 하얀 돛단배가 한가로이 순풍에 떠가고, 날쌘 보트들이 속력을 내며 달리고 있다. 다리 위를 지나는 수 많은 저 차들은 다들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남녀노소들요즘 선풍적인 인기가 있는 Spice Girls의 Wanna Be이다. 솜사탕을 들고 가는 아이들, 신혼부부가유모차에 한 돌도 안된 아기를 싣고 간다.

그들의 연애 시절을 만끽한 듯이 짙은 애정표현을 하고 가며, 싱글 부모들이 아이들과 모처럼 좋은 시간을 보내며, 희한한 옷차림을 한 틴에이저들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몰려 다니고, 손자들과 게임을 즐기는 노인들이 동심으로 돌아간 듯 즐기는 모습이 보인다. 예전에는 못 느끼던 아름답게 늙어가는 모습이너무나 보기 좋은 까닭은 무엇일까? 느랙은 파는 가게에서 구수한 냄새들이 카니발의 열기를 더해가고있다. 한 코너에 붙은 팻말에 21세 이상에게만 맥주를 판다는 사인이 보인다. 팔뚝에 문신을 한 근육질의 남자가 이미 취한 듯 얼굴이 붉어져 있다. 모두들 흥겨운 분위기에 젖어 보인다. 아시아 인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갑자기 드는 이질감과 함께 군중 속에서 밀려오는 고독을 느꼈다. 이곳에 태어난이들은 이 휴일을 이렇게 즐기고 있지만, 과연 나는 얼마나 받아들이는 것일까?

남편과 딸들이 풍선 터뜨리기, 물총 쏘기 등을 하며 게임을 하는 모습이 보이기에 나의 상념은 흐트러지며 그 물결 속에 휩싸여 들었다. 이 미국 속에서 문화 속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가족 중에 나만이 더한 것 일까. 아니면 습관화되어 무감각해진 것 일까. 가족들은 또 다른 놀이기구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어둠이 깔리면서 드디어 다리 건너 테리타운 쪽에서 폭죽이 터졌다. 일제히 함성히 터지며 여기서도 시작을 한다. 빨간 불꽃, 파란 불꽃, 성조기의 색상으로 꽃처럼 퍼지며 밤 하늘을 수 놓는다. 풀밭 위에 담요를 깔고 누워서 보는 이들, 오색 찬란한 불길이 밤 하늘을 장식 한다. 아이들은 불꽃이 바뀔 때 마다환호와 박수를 친다. 저 아름다운 밤하늘의 불꽃처럼 아이들의 꿈도 그렇게 피어서 펼쳐 나가기를 바라며 한 여름 밤이 축제는 그렇게 깊어만 간다.

늦은 밤, 돌아와서 쓰는 아이들의 일기 속에 그려진 그림은 펑 하는 소리와 빛 줄기가 퍼져 나가는 강렬한 이미지로 가슴 속에 새겨진 불꽃의 추상화였기를.

봄의 향연                                                                                                                  1995

꽃샘 추위가 3월에는 있지만 대지 위에는 땅속에서 움틀거리는 새순의 소리가 J. Strauss의 멜로디처럼 율동 하는 듯 하며 마른 나뭇가지에서도 겨우내 잠들었던 잎새들이 솟아나려고 한다. 고동색 나무색들이 연둣빛 껍질로 바뀌어져 가면서 여인의 연약한 보드라운 살결처럼 보여진다.

매해 봄이면 디자이너들이 파스텔 톤의 색상을 선호하는 이유가 대중들의 구매욕구를 충동시키기 위해서이다.

첫 아이를 임신하고 아기용품을 준비할 때 연노랑 색 옷으로 준비하였다. 분홍색은 딸이고 하늘색은 아들이기에 상관없이 입히기에 좋은 흰색 아니면 노랑색으로 사면서도 늘 연분홍색의 유혹이 나의 시선을 머물게 하였다.

그런 나에게 두 딸을 키우면서 무수히 많은 분홍색 옷들과 몇 해를 보내서 그런지 하늘색은 나에게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땅 속 깊이 잠자던 겨우살이 동물들도 기지개를 펴며 새 봄을 맞을 준비들을할 것이다. 예전에도 오늘도 예술가들은 이 느낌을 화가들은 색감으로 음악가들은 음률로 무용가들은선율로써 작가들은 언어로 봄을 찬미 한다.

가곡 “봄 처녀”에서 우리네 정겨운 시골 풍경의 봄 내음이 나고 대중음악에서도 절규하듯 부르는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 그 노래를 우리 고유의 창으로 들어본 일이 있는데, 가슴을 시원하게 적시며 급기야는 눈물이 절로 나왔었다. 아직도 그 여운이 이 글을 쓰면서 들리는듯 하다. 아지랑이가 아물거리고 씨 뿌린 대지 위에 비가 촉촉히 내리면 땅 위에 삼라만상은 움트기 시작한다. 삶 속에서도 이런 삼박자의 조화가 있다고 본다. 모든 일이 태동하기 위하여 굳은 땅 위에 생명이 솟으려면 비와 열기가 필수적이듯, 인간사 맺어지는 일들도 피, 땀, 눈물 없이는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사랑, 성공, 명 작품(음악, 미술, 무용, 영화) 모두 작가의 고뇌와 열정이 수반되는 것이다.

고통 없이는 창조가 없으며 탄생을 위하여 10개월간의 산모의 태동과 진통의 과정이 따르는 것처럼 본능적인 강성에서 이성적으로 다듬어 열정으로 표현된다. 이 봄 약동하는 봄, 햇살과 미풍의 기를 받아서 봄 대청소를 하려고 겨우내 묵었던 흔적을 털려고 창문을 열면 새 소리와 아직은 조금 찬듯한 바람이 안으로 들어온다. 이 봄은 여자들에게 더 민감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가을은 남자들이 쓸쓸한 고독감을 한잔의 술로 달래듯이 봄은 우리 여인네들을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한다.

봄바람 난 처녀들 서울로 상경 하듯이 봄은 이 곳 대도시 맨하탄의 꿈을 봄바람에 싣고 오는 것이다.

거기에는 힘차게 태동하는 힘을 갖고 있다. 긴 옷에서 반팔의 옷을 입을 때 그 기분도 그러하며 묵은 김치가 떨어지고 봄 김치의 산뜻한 맛, 투박한 부츠에서 발목이 보이는 구두로 바꾸어 신 듯이 상큼한 노출이 여성 특유의 멋 속에서 봄을 느끼게 한다. 책장에 꽂혀있는 시집을 꺼내 읽으며 마음속 깊이 감추어두었던 지난날 첫사랑 마음의 보자기를 풀어 꺼내 보고 싶은 봄날이다.

미숙했기에 가질 수 있었던 젊은 날의 특권이 아니었나 보다.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애달프고 멀리 있기에 그 순수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결혼 전 꿈꾸었던 달콤한 인생은 현실과 부딪히며 단련시켜서성숙으로 달관 시키듯이 봄은 유아적이며 여름은 청년이며 가을은 중년, 겨울은 노인들의 변화하는 과정의 이미지를 판화로 찍어 보았다. 인간은 자연과 같아서 절대 법칙 순환계가 있고, 윤회설이 따르고,삶과 죽음이 연결되며 극과 극의 일치의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처음과 끝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긴겨울 속에서 새 봄이 그 속에 있듯이…… 봄의 화려함과 봄이 우울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삶의 관찰자가 되어 마음의 현미경에 초점을 맞추고 심미안적인 눈으로 이 봄을 느끼리라.

봄 꽃이 개화하듯 마음의 창을 열어서 보고픈 친구에게 봄의 향연의 소식을 전하며 우리들만의 축제를가져보리라.

초록의 계절                                                                                                                  1996

어제 온종일 내린 비로 오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쾌청한 날씨이다. 녹음이 짙은 골목길 수풀 사이로바람이 불고 습기가 없어서 햇살이 더욱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한 여름 풍경이 마음의 묵은 찌꺼기를말려주는 것 같다. 사계절의 변화를 색감으로 표현하자면 겨울은 순백의 흰색이며 봄은 피어나는 새싹들의 노란색, 여름은 신록의 초록색, 가을은 낙엽의 주황색으로 하나의 이미지 형상으로 눈 앞에 그려져 보인다. 지난 여름 한국에서 한달 반을 보냈었다.

연세 대학교 한국어 교사 연수과정 4주 교육을 받기 위해서 가족들과 휴가 겸 떠났다. 가는 길에 하와이에서 일주일을 보내면서 와이키키 해변의 노을을 보며 패티김의 노래 하와이 연정과 어렴풋이 기억나는 남정임이 하와이언 드레스를 입고 야자수 그늘에 서 있던 영화가 떠오르며 그때 내가 생각했던 하와이는 아주 머나먼 곳에 있는 낭만과 꿈 미지의 섬이었다. 미풍의 바람과 지는 노을의 붉은 빛을 어둠이 깔릴 때까지 모래사장에 앉아서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사진기로 찍어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의 7월을 보내면서……

대학가 찻집에서 지난날 나의 청춘을 되새겨가며 중년의 지금 나와 미래의 노년기를 그려보며 지금 이순간 주어진 이 나날들에 충실하자 다짐도 해보았다. 상점 쇼윈도의 화려한 진열은 나의 두 딸들에게소비충동을 일으키기에 적격이었다. 아이들에게 한국에서 지낸 동안 무엇이 제일 기억나니? 하고 물었더니 단연코 쇼핑이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돈을 주고 예쁜 학용품과 소품들을 사는 즐거움을 아는 듯했다.

연수 기간 중 9시부터 3시까지의 수업과 수업 참관 중 재미교포 학생들의 자유로운 모습과 반바지와배낭을 메고 열심히 배우는 모습이 한국어가 세계화하는 단면을 보여주는 듯 했다. 40여명 연수생들은10여개국에서 모인 외국인 교사들이었다.

그들과 회식을 노래방에서 하였는데 가라오케가 한국어 읽히기에 좋은 교과서라는 것을 알게 하였다.자막을 읽으면서 외국인들은 한국인의 정서를 알고 생활 한국어를 배운다고 했다. 삼풍상가 소식으로온 거리가 술렁일 때 강남에서 지낸 나는 밤새 사이렌 소리와 긴급 뉴스로 보내게 되었다. 2호선 전철을 탈 때마다 보는 성수대교는 영화사 스튜디오의 한 세트처럼 중간에서 끊겨진 다리는 나의 가슴을 시리게 하고 당시 그 사고 장면을 떠올려 보게 되었다.

모두들 무감각한 표정으로 그곳을 지날 때 마다 대형사고에 익숙한 그들의 적응력에 왕창 부수고 다시짓고 빨리 빨리 이루고 모든 것이 새것, 세계 제일 그러기에 모두들 앞만 보고 전진하는 것 같다. 목표점에 다 왔을 때 왜 이렇게 자신들이 달렸나를 깨달을 것이다. 과정의 중요성을 잊고 경쟁의식 속에서진정한 자아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사는 우리네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영위하고있지는 않는가?

3호선을 탔을 때 십 여명이 말없이 내리며 선두주자가 빨리 걸으면 그 뒤 사람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저편에서 오는 한 무리와 교차할 때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 속에 출연하는 엑스트라의 기분이 든다.나 역시 그 군중들 속에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 길을 택하여 따라가는 것이다. 아침, 저녁마다 느껴보는묘한 기분이었다. 동숭동 거리 대학로는 문화의 거리로 자리잡고 각양각색의 선전물과 연주의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몇 개의 연극을 보며 예전보다 세분화 되고 의상, 조명, 무대장치가 수준이 높아진 것 같아서 아무 때나시간이 나면 볼 수 있는 이 거리가 참으로 부러웠다. 브로드웨이 쇼를 가려면 한달 전 표 사기와 시간조절, 아이들 문제 등 큰 행사인데……

한국에서는 마음먹기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서울은 나에게 낯설지 않은 나의 의식이 성장한 곳이며 이렇게 가끔 방문해도 다시 나와 연결이 되는곳이다. 서울을 다니면 인사동은 소호 같았고 압구정동은 맨하탄 5가와 같았으며 끊임없이 나는 이곳과 그곳을 연결시키며 많은 것을 내 가슴에 담으려고 했다.

그 긴 여름을 보내고 집에 오는 집 앞 화단에 키 큰 해바라기와 호박이 넝쿨로 커져 있었으며 설마 남편이 심었을 리는 없고 물어보니 다람쥐들이 씨를 떨어뜨려서 생긴 것이었다. 집 안에 들어오니 조명이새삼스럽게 노랗게 느껴졌다. 한달 반 사이 형광등에 익숙해진 내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에서 사나이곳에서 사나 사는 것은 마찬가지 이다. 그렇기에 내가 택한 이 삶에서 나는 최선을 다하여 이곳에 적응하여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여름날씨에 마음의 보자기를 열어 나의 조국 한국을 추억하며 사는 것이다.

이곳에 사는 우리 모두는 조국을 위해 애국하는 것이라고 자부한다. 세계화 대열에서 우리는 실천하는자로 이곳에 와서 좁은 밀도의 땅을 이곳에서 넓히고 있으니 말이다.

이 여름의 강렬한 태양 아래 익어가는 모든 곡식과 피어나는 여름 꽃처럼 자연 순환계에 나를 담으며여름의 싱그러움을 흠뻑 받아드리는 것이다.

메모리얼 퍼레이드 스케치                                                                                           1995

싱그러운 초여름과 함께 지역 주민들은 메모리얼 퍼레이드를 시작한다. 초등학교 앞에 9시부터 남녀노소 제각기 속해있는 그룹으로 향한다. 15개 클럽들의 각양각색의 유니폼과 깃발, 마크가 플랜카드와함께 부산히 움직이고 있다.

경찰 차가 선두에 있고 고등학교 밴드, 내가 속한 Women’s Club의 흰 티셔츠를 입은 여성들, 그 뒤로 노란 모자를 쓴 Lions’ Club의 오픈카에 노인들이 타고 간다. 보이스카웃, 걸스카웃, PTA…… 학교, 주민, 공공 단체들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행진을 하며 음악에 맞춰 모두들 손을 흔들며 오랜만에보는 이웃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매번 행사 때마다 느끼지만 우리네와 다른 문화의식과 역사관을 가진 이들 속에 나와 우리 아이들은 속해 있는 것이다. 권위와 질서 속에서 획일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움 속에서 자율적으로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스스로 택한 선택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출석률의 확인도 없이 자의에 맡겨지는, 그러면서도 차질 없이 진행되는 행사를 볼 때 이것이 바로 미국의 저력을 보여주는 삶의 교육현장이며, 세대가 이어져 가는 역사의 현장인 것임을 느꼈다. 행진이끝나고 올해엔 특별히 베트남 전선에서 순직한 용사들 20명의 이름이 참전 기념비에 새겨져 만들어졌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그리고 내년에 한국 전쟁비가 세워진다고 한다.

세 발의 조총 소리가 푸른 창공을 향해 사라지고 15개의 헌화와 200여명이 넘는 주민들의 모자와 티셔츠, 단상에 서 있는 시장과 목사님 몇 분의 넥타이가 모두 성조기 무늬이다. 펄럭이는 큰 깃발과 집집마다 걸려있는 성조기들, 내 시야에는 모든 이들이 빨강, 하양, 파랑으로 보여지며 마치 매스게임을 하는 것을 연상 시켰다.

슬픔이 승화되어 아름다움으로, 조국애로, 사랑으로 퍼져가는 God Bless America 노래로 행사는 끝나고 흩어지는 인파들…… 회원들과 기념비 앞에서 사진을 찍고 밴드에 있는 딸아이를 찾으러 가면서내년에는 더 많은 한국인들이 참여하여 메모리얼 퍼레이드의 의미를 느껴보았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가져 보았다.

공기놀이                                                                                                                       1995

여름 방학 때 한국에 다녀온 후로 두 딸아이가 갖고 다니는 놀이 기구가 있다. 플라스틱에 금색이 칠해진 공기이다. 지금은 하도 많이 가지고 놀아서 색이 벗겨져 흰색이 되었다. 그 속에 들어있던 쌀도 빠져나와서 가벼워졌다. 다시 열어 쌀을 집어 넣어서 무게를 맞추고, 통통 튕기면서 잘 가지고 논다. 많은공기 10개가 든 무지개 색 공기를 이곳에서 사줬는데, 종이 앞에 써진 문구가 공부에 관한 것이었다.

‘공부’라는 단어가 정서지수(EQ)에 대한 과잉 열기가 상업화되는 데까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한국의초등학교에서는 공기 놀이 대회까지 있다고 하니, 많은 공간이 필요치 않는 놀이기구로써는 좋은 것 같다.

두 아이는 아침 저녁으로 공기 연습을 한다. 처음에는 큰 아이가 손이 커서 꺾기와 접기를 잘 하더니만이젠 역전이 되어 둘째가 더 잘한다. 혼자서 아침에 눈 뜨자 마자 잡는 것이 공기이다. 두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공기를 풀어놓고 ‘탁탁’ 소리를 내며 아침 운동을 하고 나서야 학교 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손 주머니처럼 조그만 헝겊 가방에 공기를 넣어 놓고 손에 걸고 학교에 간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 하기 위해서이다. 미국 학교에 공기 열풍을 만들었다. 여러 미국 학부형들이 어디서 ‘콩키’를 샀느냐고 물어온다. 그래서 한국 가게에 가서 많이 사다가 반 아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한국 문화의 하나인 공기 놀이를 알리는 일이 내심 뿌듯하기도 하였다. 아직 공기놀이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고 한다.

길가에서 주운 돌로 집안에서 하다 보니 마루바닥에 자국이 나고, 탁자 위에 두었더니 이번엔 바닥으로떨어져서 발에 밟힌다. 책상 위, 거실 탁자 위, 곳곳에 돌과 플라스틱 공깃돌이 놓여졌다. 한 구석에1000여 개 되는 퍼즐 pieces까지 놓여있으니 온통 놀이기구 천지이다.

온 식구가 가끔 공기놀이를 하곤 하는데, 큰 아이는 집는 것을 남편과 똑같이 하고 둘째는 나와 똑같이집는다. 이때 아이들은 큰 발견을 한 듯이 데나는 “언니는 아빠하고 똑같이 하고 나는 엄마하고 모양이같다”고 한다. 대단한 눈썰미이다. 그러고 보니 매사에 그런 것 같다. 성격과 체질이 공기놀이 하는 데까지 나타나는 것이다. 교육적인 효과로 본다면, 공기놀이가 숫자개념을 알게 하고 암기력을 높이며 손동작을 민첩하게 하는 것이다.

가끔 내가 공기를 할 때 내 순서가 돌아와도 어디서 끝났는지를 잊어버리면 아이들은 먼저 ‘콩’ 이라 외치면서 자기네들이 하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온 아이들에게서 배운 고춧가루, 달팽이 공기 등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6개월의 강도 높은 훈련 뒤에 우리 집에서 공기를 제일 잘 하는 선수는데나가 되었다. 남편이 가끔 져주는 것을 모르고 아이는 승부욕에 기뻐하며, 자신감 있게 자신이 무언가를 터득했다는 양, “엄마, 모든 것에는 연습이 중요해요.” 라는 말을 하며 언니보다 더 열심히 노력한대가의 결실을 느끼는 것이다. 공기놀이를 통해서 스스로 연습의 중요성을 알았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없다. 아직까지 우리 집은 공기놀이 열풍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언제쯤 저 공깃돌들이 책상 서랍 안에 들어가게 될지 기다려 본다.

한국에서 온 딸의 편지                                                                                                  1995

여름 캠프를 한국에서 민박을 하며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딸 아이를 처음으로 혼자 한국을 보내려고 결정을 하고 나니 걱정을 하기에 앞서 가르쳐야 할 문제들이 떠올랐다. 복잡한 도시생활에 대비하여 가기 전에 일주일을 친구의 비어있는 아파트를 빌려서 그리니치 빌리지에서뉴요커 생활을 둘이서 해보았다.

대 도시 맨하탄은 서울과 비슷하기에 차 없이 다니며 버스타기, 지도를 보려 서브웨이를 갈아타고 다녔다. 박물관 갤러리를 다니며 기록하는 스보간, 길을 걸을 때 유의하여야 할 점 등을 익히게 하였다. 편한 신발과 간편한 옷차림이 여행자의 필수조건임을 익혀서 한국 갈 가방을 챙길 때 짐을 간소화 할 수있게 되었다.

저녁을 오픈 카페에서 먹으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의 예절과 여자로써의 몸가짐, 14살 사춘기인 딸 아이는 많은 질문을 했다. 부모들의 데이트 시절과 자신의 나이일 때의패션과 친구들과는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였다. 몇 년 사이 무척이나 커버린 것 같다.
“엄마는 너를 믿고 어디서나 잘 할 것을 알고 있단다.” 한국으로 떠나는 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해주고보냈다. 
하늘에는 잔뜩 먹구름이 끼었고 비가 내렸다. 마치 불안한 내 마음속의 배경과도 같이 흐려져 있었다.

늦은 밤, 잠은 오지 않고 딸 아이가 떠났음이 실감이 났다. 책을 들고 아이의 방에 가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재일동포 유미리의 자전 에세이 “물가의 요람”이었다. 일본의 최고 문학상 아쿠타카와 상을 수상하며 2세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의 별거로 빚어진 가족의 상처, 이지메, 자살, 퇴학, 성적 학대 등 유년 시절의 이야기로 24세 때 쓴 과거사였다. 문제아 사례 연구대상의 보고서를 읽는 것처럼 가슴에 와닿았다. 
열악한 가정 환경 속에서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갈 수 밖에 없었던 반항아였던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찾기 위한 자의식이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요즘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청소년 문제는 어른들의 문제이면서 우리들의 문제이다. 지금 고통을 당하고 방황하고 있는 2세들이 각자의 취미와 특기를 찾아서 유미리처럼 상처를 문학으로 승화하여 자기길을 걷듯이 이겨 나가는 강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금 내가 걱정하는 것도 과잉보호의 애착심인 것이다. 나 자신의 불안심리의 요소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음 날 받은 전화에선 딸 아이는 잘 도착했으며, 민박하는 집의 부모님과의 통화는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이제부터라도 좋은 생각을 텔레파시로 보내 자신 있게 적응할 수 있는 에너지를 보내주자. 개체의 한인격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떠난 연습이며 홀로서기이다.

일주일 후 기다리던 편지가 왔다.
예쁜 그림 편지지에는 야광 색의 볼펜으로 한 줄은 영어, 그 다음 줄은 한글이었다. 주말이면 친척들을만나고 전철도 타며 버스 타고 학교에 다닌다고 한다. 민박하는 집에 손님으로써 지켜야 할 예절을 잊지 않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짱! 한국은 좋고 재미있어요. 새 친구들을 만났어요.”
친구? 혹시 남자친구가 생긴 핑크 빛 사연을 가득 안고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들려줄 이야기를 기다린다. 
가족들과 여러 번 갔던 방문보다 처음으로 한 여행에서 한국문화를 배우고 많은 것을 느끼고, 떠나온곳을 생각하며 자신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할 기회가 이번 여행에서 주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여름바다가 주는 신비                                                                                                   1995

  어디론가 떠난다는 사실만으로 여행은 즐겁다. 아이들은 여름방학의 선물로 바다로의 여행을 제일 좋아한다. 뉴저지 해안선은 대서양을 따라 이어져 있어 집에서 스테이트 파크웨이를 타고 2시간 정도 달리면 조용하고 깨끗한 오션 그로브 비치를 만날 수 있다. 주중이어서 예약 없이도 고풍스러운 호텔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1920년대에 지은 빅토리아 스타일의 아담한 건물이 바닷가의 정취를 더해 주었다.
로비에는 마호가니로 만든 전화 부스까지 있어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방, 우리는 짐을 풀자마자 아이들처럼 파라솔과 의자를 들고 바닷가로 달려갔고 남편도 책 한 권을 들고 함께 나섰다. 한 폭의 아름다운 병풍 같은 푸른 바다가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짙푸른 바다 빛은 반짝이는 은빛 물결로 찰랑이고 비릿한 바다내음도 바람에 실려온다. 백사장의 타오르는 태양 아래서 젊음을 태우기라도 하듯이 한가롭게 선탠을 즐기는 선남선녀들, 셀폰을 들고서 누군가와 통화를 나누는 사람들. 올 해는 그들 모습에서도 유난히 낭만이 깃들어 보였다. 드넓은 바다, 밀물과 썰물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념을 감싸 안고 출렁거린다. 먼 전쟁터로부터 기다리던 연인의 비보에 접한 듯 그 무엇인가 원인 모를 슬픔으로 밀려와 허무의 노래가 되어 부서지기도 한다.

광야에 홀로 선 것처럼 고독한 오늘의 문명인들. 회색 숲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 쌓여 몸부림치는 도시의 육신들. 바다는 그런 현대인들의 모든 상처를 보다는 그런 현대인들의 모든 상처를 보듬어 준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예나 지금이나 바다에 와서 시를 노래하며 그림을 그리며 사랑을 가꾸었던가!
일출과 일몰의 태양 빛. 갈매기가 날아오르고 뱃고동 소리 울리는 항구의 부둣가, 달빛이 교교한 밤 바닷가의 산책. 산책 길에 부는 바다 바람의 감미로움……

바다는 문명의 뒤 켠에서 고독해하는 현대인의 고달픈 삶을 침묵의 대화로 어루만져준다. 고해의 인생 길, 얽히고 설킨 실타래처럼 엉클어진 세상사. 저 바닷 속 깊숙이 인간을 빨아들이는 자연은 조각난 인간들의 가슴을 한 없는 모성애처럼 되어 포옹해 준다.
한 손 가득히 조개를 주워서 들고 오는 아이들은 다시 모래성을 쌓기 시작한다. 남편은 책을 접고 아이들과 어울려 바다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는다. 파라솔 그늘 아래서 먼 지평선 넘어 아스라히 보이는 돛단배를 찾아본다. 해마다 오는 바다지만 여름바다는 또 다른 것은 느끼게 한다. 명상에 젖게 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깨달음을 주며, 껍질은 벗기고 새롭게 거듭나는 법도 가르쳐 준다. 진정한 삶은 뜻을 이루어 완성하는 데 있지 않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하여 끝없는 미완성의 길에 서는 것. 끝 없이 준비하는 과정 그 자체이던가.
암초에 부딪히며 흰 거품을 토하고는 다시 밀려 갔다가 되돌아 오는 파도처럼 바다는 나를 그렇게 살라고 한다. 바다는 생명의 신비를 일깨우게 해 주고 넉넉한 마음을 갖게 해주는 대 자연의 어머니이다.

나의 일상적인 나날들                                                               1월 5일 94’

새해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별다른 변화 없이 작년과 다름없는 나날이다. 
그러나, 늘 머리 속에는 올 해의 새로운 결심을 생각해본다.
새해면 으레 치러야 할 의식 행사처럼 수첩 첫 장에 적어야 하는 습관인 것이다. 몇 해전 기억나는 결심은 ‘Yes와 No를 분명히 하자’였다. 대인 관계, 미국 생활을 하려면 일상적인 일에도 정확한 의사 표현을 못하여 오해가 생기는 경우가 있었고, 정에 이끌려 후회하는 일을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우유부단한 내 성격을 한심하게 느껴 세웠던 새해 결심이었던 것이다
냉정하고 이지적인 소유자, 일을 가진 여성들의 표본처럼 마치 Full Time Job 가정 주부에서 벗어나는 듯한 착각을 하게 하는 발상인지, 나이에서 오는 지혜인지, 아니면 미국 생활 10년이 지나서 미국화되려고 하는 의지인지…… 복합적인 것 같았다. 이렇게 오늘 하루도 흘러가는 거다.

날아가는 것처럼 빠른 시간들……                                                     1월 20일 94’

1월도 벌써 중순이 넘어간다.
새해의 결심을 화두로 정하고 집안일(청소, 빨래, 식사준비, 아이들 치다꺼리, 남편시중)을 하면서도 내 머리 속은 늘 그 생각뿐이다. ‘순간에 충실하자!’ 바로 올 해의 나의 새해 결심이 순간에 스쳐갔다. 일할 때 일하고 놀 때는 놀고 즉, 그 순간 주어진 과제에 만족하자는 단순한 원리를 찾았다.

늘 무언가 쫓기듯 불안, 초조, 긴장하는 내 자신이 싫었다. 밥 먹으면서 설거지 할 것과 그 뒤에 아이들 시킬 과제를 생각하니 식사 분위기를 즐기지 못했던 것이다. 주부인 내가 서두르면 온 가족이 다 모이는 시간의 중요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학생 때 노트에 적어둔 격언을 상기하며, 지금 내 삶에 주부로써의 오늘 일, 이 순간 내가 하는 일에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일상적 생활, 바로 내가 늘 하는 그 속에 생의 철학이 있는 것 같다.

2월 3일 94’

겨울이 길면 봄이 그 속에 있다 하듯이 긴 동면에서 깨어나는 자연의 숨결이 들리는 듯 햇살이 따사롭다. 판화에 찍을 구상을 하느라 스케치북 위에 여러 선을 그려본다. 주제는 십장생인데 여러 형태가 잡히지 않는다. 잠재의식의 한계점을 느낀다. 책을 보아도 아무런 영감이 떠오르질 않는다.

차 한잔을 마셔도 눈 앞에 널려있는 집안 일로 마음이 다급해진다.
이럴 때에는 모든 것을 다 잊고 Drive를 하러 간다.

10분 거리를 차를 타고 가면 Hudson 강이 보이고 가까이 Tappanzee 다리가 산들과 겹쳐서 산수화를 보는 듯 눈 앞에 다가온다. Nyack 강변주위를 산책하며 마른 나무 가지에 봄의 입김이 피부로 느껴지는 구상이 떠오르고 종이 위에 그것을 그려본다.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2월이다.
우리들 모두가 모르는 것에 부딪히기 보다는 아는 것에 매달리곤 하는 습성이 상상력을 저하시키는 요인인 것 같다.

2월 14일 94’

아이들이 아프고, 그 뒤 나 역시 몸살로 목이 잠기고 계절이 바뀔 때 마다 맞이하는 손님으로 우울한 생각이 나를 휘감는다. 고독도 이럴 때는 사치, 감정 유희이다.
그저 건강한 내 몸의 유지가 이 가정을 이끌어 가는 기동력인 것이다. 집안일 본 상태의 유지를 하기에는 끝 없는 일의 연속이 중단되니 쳇바퀴 돌듯이 지속되는 나날에 대한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약해지고, 한 편으로는 기도하려는 마음도 우러나온다. 절박한 심정, 그것도 때로는 생활의 활력소이지만 이 순간은 피곤한 심신을 수면 속에 나를 담으려 한다. 한 잠자고 일어나 할 일을 하자. 아프지도 못하는 내 팔자여!

2월 25일 94’

아이들과 도서실에 가서 각자 좋아하는 자리에 가서 보고 싶은 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많은 장서와 Tape, 교재들, 학년별로 추천하는 책을 찾아서 골라주면서 글과 그림의 다양함에 부러움이 앞선다. 
스폰지처럼 빨아들이는 아이들의 머리 속에 얼마나 많은 것이 그들 마음에 베어 들어갈까?
내가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성장하지 않아서 이 미국 땅에서 겪어보지 않아서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 국민학교 시절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나는 이 도서실에 자주 옴으로써 대치하려고 한다.
나도 이민 13세인 십대의 혼동기에 접어든 때, 내 자신이 헤매고 답을 못 찾는 것을 이곳에서 얻는 것이다. 
도서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곳에 있는 것이다.

3월 4일 94’                                                                                                                        

완연한 봄 날씨이다. 한국에서 꽃샘 추위와 비슷한 기후를 느낄 수 있어서 동부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계절 감각에서 오는 열병도 즐긴다. 
나이가 들수록 봄의 내음을 더 맡는다. 
생동하는 기운이 대지에 감돌 때, 바람난 처녀처럼 내 마음도 술렁인다.

중년의 위기인가?

내 자신의 감정에 예민해지고 봄의 향연에 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묘한 마력을 계절 탓으로 돌리고 싶다.

매 해 봄은 그렇게 유혹하는 것이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미지의 세계로……

나의 의식의 눈을 뜨고 싶다.

작년 봄에 다녀온 독일 여행은 이 미국이 내가 살 곳이라는 확신감을 가지게 해준 여행이었다. 산을 벗어나야 산이 보이듯이 가끔은 나의 궤도에서 벗어나 나를 다시 알 수 있게 하는 여행을 이 봄 기대해 본다.

과연 우리의 미는 무엇인가?                                                                                         1995

가끔 샤핑을 하다가 우연히 거울에 비춰지는 모습에 화들짝 놀라는 일이 종종 있다. 비교감각에 세뇌되어 “내가 왜 이렇게 작을까?” 느끼며 이 납작하고 평편한 얼굴, 노르스름한 얼굴로 인해 자신을 비하시키곤 한다. 이유는 역시 우리는 서양의 미 기준가치에 익숙해져 온 탓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한국인을 요구하면서 한국문화를 전달 시키기에 앞서 우리의 것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일본의 시웨이도 화장품의 모델을 보면 가부끼 전통 일본연극에 나오는 듯한 이미지를 연상케 하며 미국인들에게 환상적인 효과를 느끼게 한다. 많은 한국 화장품 기업체도 세계시장에 성공하려면 한국 여성 특유만의 전통미를 고수시켜야 하는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이 새삼 가슴 깊게 다가온다. 96년 가을 패션을 보면 70년대로 다시 돌아간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유행은 돌고 돌듯이 옛 것 속에 새것을 찾아내는 작업을 디자이너들은 연구하며 상업화하는 것이다. 그 당시와는 다른 선의 형태를 추구하면서 대중들을 유혹하며 다가온다. 헤어 디자이너 역시 머리의 따라 인상이 달라지듯 집의 지붕처럼 매우 중요한 몫을 하는 것이다. 더 많은 혼돈과 갈등이 주어지기도 한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기에 앞서 건강한 모발영양과 상태에 따라서 청결이 우선인 것이다. 가끔 길에서 동양삼국 여성을 구분하기에는 머리형태에서 구분하여 본다.

대부분 중국인들은 머리를 자주 감지 않고 기름기가 잔뜩 낀 머리의 여성들이 눈에 띄고, 일본 여성들은 나이에 따라 일정한 머리모양을 하는 것을 나는 눈 여겨 본다. 결혼한 여성의 단발머리와 퍼머 머리, 노인들의 짧은 퍼머 머리들로 한결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훨씬 다양해졌지만 통계적으로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다.

획일화된 멋 속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기에 과감하게 부분가발, 악세서리도 필요하고 정기적인 전문가의 조언에 따르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의 머리 모양이라든지 잡지를 눈여겨보며 센스 있는 표현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

관심과 노력이 자신의 미에 대한 책임의식이다. 중년의 나태함과 무력증을 립스틱 하나에 해소하듯 헤어스타일의 새 변신이 생활의 활력소가 되는 것을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미장원에 다녀옴으로써 느끼는 기분전환의 가치는 사치와 시간낭비가 아니라 여성은 물론 남성들도 즐기는 시대가 온 것이다.

‘45분의 의미’                                                                                                                1995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루의 시간은  똑같다다만 24시간을 어떻게 쓰고 보내는가에 따라  삶의형태가 달라지는  같다

어느덧 여름도 중턱을 넘어가고 일년의 2/3 지나가고 있다작열했던 햇살도 무더웠던 열기도 서서히 누그러져 간다.

피고지고오고가고만남과 헤어짐일상사의 되풀이 속에서 우리들은 살면서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다절대불변의 법칙자연의 순환계에서 시간의 개념은 환경의 적응에 따라 보편적인 숫자의 인식이주어진다지금   순간이 과거미래현재를  담고 있기에 순간을 놓치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것이다예술가들은  “순간 포착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수행자들 같다.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순간 깨어나 있으며 깨어져 가며 일구어져 가는 작업이다자연과의관조에서 얻어지는 이미지를 자신의 표현 방법으로 추구해 나가며시간 속에서 선택된 상황에서 자신의 열정으로  나가는 것이다.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 거치는 과정은 고행의 연속이다.

창조를 하는데 필요한 인내와 철학과 사색이 따르며삶이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이며 어떤 환경에서도행복하게   있는 넉넉한 마음을 스스로 터득해 나간다.

현실 수용의 지혜는 물질적인 집착과 소유를 주간적으로 벗어나야 얻게 된다.

시공(Time& Space) 넘나드는 Time Machine 타고 역사의 여행을 하는  현실주의자가 되어간다.

시간과 나와의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에서 길은 주어지게 된다.

교직생활 20년에서   속에 길들어진 45분의 수업시간과 10분의 휴식시간은  삶에 있어서 가장 습득의 효과적 훈련기간 이었다인간의 집중력은  시간을 넘지 못하기에  강의도 함축성 있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직장에 매어져 있는 사람은 시간 속에 담겨 움직이지만전업주부들은 시간의 효율성을 스스로 엮어 나가는 힘을 필요로 한다.

가사노동이 가족에 의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이  천직임을 알고 자기연마의 노력이 주어져야한다흔히들 노는 사람이  바쁘다는 것은 시간의 노예가 되어서 마냥 주어진 시간을 보내기에 맺고끊는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찌는 듯한  여름의 폭염이 대지 위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의 광선으로 모두들 늘어지고 지쳐있을 , 45분의 의미를 생각하며  일을 우선 순위로 정하여 목표설정을   계획을 하여 하루 일과에서 진정한 내시간을 찾는 것이다.

모두들 바쁘게 무언가에 쫓겨 사는지 모르지만  순간  모든 것을  놓고 자기만을 위한 시간을 만들어 본다.

8

월의 시원한  줄기 바람에 피어난 꽃들과  자연 속에서 주어지는 안목을 배워 나가야 한다자연과의 침묵의 대화에서 주어지는 명상을 통하여 시간의 의미를 다시금 음미해 본다

전기가 없는 마을                                                                                                         1995

초등학교 때 여름방학이 되면 시골에 갔을 때 초롱불에서 그림자 놀이를 하며 달빛 따라 논길을 걸을 때 유난히도 개구리 소리가 밤의 적막을 깨고 울어대던 기억이 난다. 그 추억을 떠올리며 아이들에게 이번 여름방학은 전기를 쓰지 않는 Pennsylvania 에 있는 Amish village에 가자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바닷가에 가자고 한다. 4시간 정도 운전을 해서 다다르니 끝없는 옥수수 밭, 한가로이 젖소들이 노닐고 그 옆에는 긴 꼬리를 흔들며 말들이 풀을 뜯고. 한없이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떠 있는 저편 이름 모를 여름 꽃들이 피어있고 농촌의 아담한 벽돌집과 목장이 펼쳐져 있다. 그 넓은 초원에 새들이 날아다니며 연못가에 어미오리가 선두에 서고 새끼들은 그 뒤로 줄지어 간다.

미풍에 방향계가 돌아가며 저 멀리 마차가 보인다. Amish 사람들이 마차를 몰고 간다. 밀짚모자와 검정 옷, 그 옆에 곱게 흰 모자와 앞치마를 두른 화장기 없는 여인의 얼굴이 보인다. 아이들은 와 소리를 치며 영화 속 한 장면 같다고 한다. 집 앞 마당에 널려있는 빨랫줄에 옷들은 한결같이 검정, 흰색, 파랑, 초록이다. 관광객 차들과 마차들이 묘하게 대조를 이룬다. 

기계문명과 17c 생활을 그대로 전기 없는 생활을 하며 공존하는 21c의 모습이다. 길 옆에 많은 선물 가게. 시골 특유의 공예품이다. 한 가정에 8명 이상의 자녀와 그들의 전통문화를 고수하며 컴퓨터화 되가는 인간들 모습에 잃어버린 인간과 자연의 어울림의 조화는 한 폭의 풍경화였다. Amish House Tour s를 하면서 그들이 사는 부엌에 들어서니 큰 스토브와 냉장고가 보여서 물어보니 프로판 개스로 사용한다고 하며 식탁의 개스등과 달력만이 벽에 있으며 큰 사기 그릇과 퀼트 깔개가 잘 매치되어 있으며 시계도 있었다. 침실로 올라가보니 마루바닥과 파란 벽이 보이며 손으로 만든 침대보와 재봉틀이 놓여 있다. 검정신발과 밀짚모자, 옷들이 걸려져 있으며, 참으로 단조로운 꼭 필요한 물품만이 있는 것이다. 지하실로 가니 몇 개의 큰 가마솥과 빨래 통이 보인다.

손으로 만든 생활 기구가 어느 제품보다 근사해 보인다. 만져보니 투박하여 몇 대는 물릴 것 같다. 농장을 걸어가니 우리에 돼지가 꿀꿀거리며 물레방앗간을 지나 대장간을 가 보았다. 조각작품처럼 잘 진열된 연장도구와 썰매와 말 안장이 걸려있고 그 안에 있는 마차에 우리가족은 타보며 사진을 찍었다. 원룸 스쿨에 가보니 1~8학년이 함께 배우기에 앞줄의 작은 책상과 뒤로 갈수록 큰 책상이다. 큰 난로와 선생님의 책상과 아이들의 그림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선물가게에 가서 처음 맛본 토마토 잼을 몇 개를 사가지고 왔다. Hush Farm 모텔에 짐을 풀었다. 시골농가 그대로였다. 저녁을 먹으러 Amish 식당에 갔는데 13개의 Dish로 나오는 홈메이드 음식은 푸짐하고 맛있었다. 원하면 더 주는 시골인심의 후한 대접을 받으며 먹고 나오니 어느덧 석양빛에 들판은 붉은 빛으로 물들고 밀레 만종의 명화의 화폭처럼 농부 부부가 서 있었다. 어디선가 교회의 종소리가 은은히 들리는 듯 했다. 하루 일을 끝내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대지에 인사를 하는 정경이다. 

아! 이 평화로운 한가로움이여!

단 하루만이라도 전기가 없는 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이 스쳐갔다.

삶을 긍정적으로 살자                                                                                                 1995

초 겨울의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매서운 바람이 몸과 마음을 움츠리게 한다. 어느덧 한 해가 지나가는 문턱에서 지난 날을 되새겨 보며 후회와 연민 속으로 앞으로 맞이할 날들에 대한 마음가짐을 가져본다. 어제는 이미 지난 날이고 내일은 다가올 날이니 오늘 이 현재를 성실히 보내면 그 오늘이 바로 어제이며 내일이 아닌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완전’ 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 진리를 다시금 알게 되었다. 아이가 아플 때 그 고통이 나에게 아이를 더 잘 돌볼 수 있게 하여 그 동안 소홀했던 정을 일깨워 주며 밤 새웠던 날이 나를 어머니로서의 자격을 갖게 해 주었던 길이 아닌가 싶다. 세상사 모든 것이 고비 없이는 이루어 지지 않는 다는 것을 매사 모든 일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린다면 인생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살아갈 방법을 얻게 되는 것 같다.

기호놀이                                                                                                                      1995

 
그이의 머리에는 0./로 나누어져 있고

   나의 가슴에는 /.- -로 나누어져 있다.

     아이들 마음에 수 많은 선으로 기호놀이를 한다……

   ‘112#$%^88****(())_+)@#{[[]]//?//..””””:;;;??////

   135690=-\ \\\==   -0  4  1  2  3  4  5/  / / / /? /’ ‘ ‘ ‘;’

그래서 나도 예전에는 그러하였는데, 
다시 찾고 싶다.

잃어버린 꿈의 기호들을……

Spring                                                                                                                         1995

Spring is bright and warm

Flowers are blooming

Birds are singing

Oh, bright singing

I look at the sky

The clouds are crystal blue

Oh, bright sunshine

My heart is warm

I am lying down on the grass

I heard the earth whisper

지금이 가장 좋을 때                                                                                                  1995

지나간 세월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지금 나는 이 때가 지나면

그날이 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어요.

우리들 모두 먼 미래를 꿈꾸며

그날을 위해 오늘을 잊고 살지만

그날도 결국은 오늘의 연속이라는 것을

지금 이 순간 가장 좋을 때

지난날도 다가올 미래도

지금 이 순간에 다 만들어지니까요.

이 나날들을

이 가장 좋을 때를 놓치지 말아요

글쎄요?

아는 이에게 묻는다.

여기서 사실거에요?

글쎄요……

아는 이가 나에게 묻는다.

여기서 사실거에요?

글쎄요……

우리들 모두 그렇게

타향에 살듯 이곳에 살면서

언제가는 돌아갈 곳이 

따로 있는 듯이 생각한다.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그곳이 어디일까요?

이곳에 사나 거기에 있으나

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데

그곳을 잊지 못해 하는 것은 무엇일까?

늘 먼 미지의 세계를 그리듯

마음의 고향을 안고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화장                                                                                                                             1995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본다

한 중년의 여인이 서 있다.

세월의 흐름과 연민, 

얼굴에 담겨 있다.

눈 위에 아이라인을 긋는다.

눈 끝에 선을 살짝 위로 올려 그리고

아이섀도우를 브러쉬 위에 바른다.

눈가에 퍼지는 색조에

분위기를 만들어 본다.

입술 선을 긋고 루즈를 칠한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본다.

내 안의 내가 겉에 있는 나에게

미소를 보낸다.

자연이 예술이요                                                                                                           1995

어디선가 고요히 흐르는 계곡의 물 소리

노송이 절벽 바위 위에서 어울어져 있고

이끼 낀 수석 산들이 정취를 이룬다.

깊은 산중의 암자에 들어 앉아 참선을 

하는 산신이 된 듯 좌선이 절로 되어

마음을 모아 닦는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 소리……

푸르름이 더 해가는 잎사귀들,

노니는 잉어들 사이로 비치는 햇살.

자연이 예술이요,

예술이 자연이다.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온돌방 문 창호지 열린 창 넘어로

파란 하늘 아래 녹음이 우거져 간다.

숲 속에 숲이 이 안에 있다.

집안 가득히 한국의 정서가 깃들어 있다.

마음 속 깊이 자연을 안고

선을 가슴 속에 담고 싶다.

돌을 모으면서                                                                                                               1995

돌에 애착을 갖고부터 여행을 하고나 길을 걷다 가도 특이하게 생긴 동서양의 미적 감각의 표현이 차이는 있지만 자연의 정취를 즐기고자 하는 마음은 같은 것 같다 어릴 때 집안에 분재와 수석에 문을 끼얹는 심부름을 할 때에는 무심코 하였는데 이제야 부모님께서 가꾸시며 즐기시던 의미를 알 것 같다. 리나가 GXMOLOGIST 되겠다고 하면서 남편은 여러 종류의 책들을 사주며 돌들의 이름을 아는 것을 사 주었다

자기방에 걸어 두는 콜렉션 박스에 진열에 두었다.

EARTHTONE 의 진회색 암청색 고동색 내가 알고 있던 돌들의 색이 아니었다.

자연사 박물관 인디언 박물관을 데리고 다니면서 자연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뉴저지 남쪽 FRANCLIN MINES 광산에 가서 본 화강암에서 응회석 수천 종류의 돌들 이세상의 그 모든 색을 보는 것 같았다.

아이들과 망치를 들고 채석장으로 가서 돌을 쪼갤 때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돌들 꿈을 찾아 금을 캐러간 이들의 마음속의 신기루가 아이들도 갖고 있는듯 빛나는 돌을 찾았다.

폐쇠된 탄광속 광부들의 연장도구 한여름인데 시원함이 왠지 서늘하게 다가왔다. 전시실 어두운 곳에서 빛을 내는 야광석의 화려함은 네온싸인 보다 더 현란하였다.

돌 이란?

지구가 부서진 조각 지각이 부서져서 생긴 것 땅과 기후에 따라 달라지는 돌들 갈고 닦고 쪼개면서 빛과 색을 발하는 보석이 되어지는 돌들…….

이 지구 전체가 돌 덩어리가 아닌가!

사랑하는 여인들이 정표로 보석을 선호하는 의미는 어려운 과정을 인내로써 갈고

다듬어 빛을 내기까지의 작업처럼 어렵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바닷가 에서 주은 타원형의 매끈한 조약돌이 한손에 들어온다.

모래가 촘촘히 박힌듯 정교하며, 물살에 씻기어 다듬어졌다.

납짝한 돌위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여행의 기억을 담아 PAPERWEIGHT 으로 누를 때 마다 잔잔한 감동이 일어난다.

그중에 하나가 워싱톤주 시애틀에 갔을 때 MT. RAINER 을 보고 산의 겸허한 모습에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며 눈물이 흘렸다.

산의 정기가 전신을 휘감고 태고의 고요와 신비함을 느꼈으며, 인디언들은 그 산을 THE MOUNTAIN THAT WAS GOD: 이라고 하였다 한다.

산심을 천심이라고 시공을 초월해 자연의 이치는 인간에게는 하나의 진리 인 것 같다. 인디언들이 돌을 OPAR 이라고 한 것은 돌중에 가장 많은 색을 갖고 있기에 지구의 하늘과 땅을 다 나타내는 오색찬란한 빛을 담고 있다.

우리들 모두 이름 모를 돌이지만 그 속을 깨면 내면 속에 영롱한 빛을 각자가 갖고 있듯이, 길가에 구르는 흩어져 있는 돌 하나 에도 수 억년 세월의 나이가 있기에 나 역시 흙으로 돌이 되어 돌아 가기에 자연은 인간이 영원한 고향이 아니던가…..

점에서 선으로 면이 되다. (Novel)                                                                               1995

 언제나 그러하듯이 차가 팔리세이드 파크웨이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상념에 빠져 들었다. 마치 풍경화 속으로 들어 가듯이……..도로옆에 물오른 나뭇가지에 새순들이 물이 올라 솟아나고 개나리가 한 무더기씩 피워져서 키 작은 수양버들과 벚꽃이 한데 어울려져서 활짝 피었고 진달래가 수줍게 만발하여 봄의 햇살에 피어나 봄날의 화려한 색채에 따스함이 전신에 느껴져 다가온다. 열기인지 아지랑이가 아물거리고 차는 속도감 없이 60마일을 달리면서 길이 한 곳에 모여지다가 다시 벌어진다. 마치 내 인생의 목적지가 여기 였던가 싶었는데 다시 길이 시작되듯이………

 이렇게 내가 맨하탄까지 운전을 하게 될 줄이야. 작년 까지만 해도 생각할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이 발령을 받고 서울로 갈 때 까지 아이 때문에 있어야 된다고 당분간 고3 부모병을 둘이서 치를 바에 차라리 여기서 남아 있기를 힘들게 결정하고 나서 새삼스레 별거 아닌 생 이별을 맞이 하게 되었다. 딸 아이도 5년 여기서 힘들게 적을 하고 나서 다시 입시 전쟁을 치를 바에야 여기 있기를 원하여서 였지만은 주위 에서도 그런 친지들이 있어서 시대적 조류 한국에서 많이 일어 날수 있는 교육이민으로 이산 가족이 된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선택한 결정에 의한 삶을 택한 것이다. 결과는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고 미국의 선진교육 혜택을 받고 세계인으로써 지구촌 어디를 가서라도 적을 할수 있는 그러한 목적 의식을 앞세우고 나의 이기심이 바로 주어진 여건을 충분히 누리고자 했던 본심이 아니 었는가 하는 회의도 들었지만 어쨌건간에 처음 으로 맛보는 독립심, 홀로서기를 자식 덕분에 하게 된 것이다. 

 차들이 없어서 손만 핸들에 놓고 앞만 바라보며 나아간다. 이 길만 들어서면 잊어 버렸던 나의 본심이 무의식 내면 세계에서 솟아 나는 것이다. 조오지 워싱톤 브리지에 들어 서면서 트럭들이 몰리기 시작하고 나는 브레이크를 자주 걸면서 생각이 끊기기 시작했다가 다시 연결되어 진다. 차선을 바꾸고 들어오는 차에 현기증을 느끼며 봄날의 아른함이 짜증스럽게 후끈 열기로 느껴진다,

 허드슨 강변 물결이 출렁거린다. 햇살에 빛나는 물결 밑에는 강물아 유유히 흐르고, 세월도 저강줄기 처럼 쉬지 않고 흘러 간다.

 정지 되었다고 느꼈던 내 삶도 저 강줄기 처럼 흘러, 흘러, 어디로 가는 것일까……

 56가 부터는 관광객들이 보인다. 주중인데 많은 인파가 몰려 다닌다. 유럽관광객인듯한 커플들이 캐주얼 복장 차림으로 금발에 스카프를 휘날리며 걸어간다. 항공 모함 배가 있는곳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다. 동양인들의 왜소함 보다 당당히 서 있는 그들은 이 미국의 무엇을 보러 왔을까? 역사도, 유물도 없는데 인간들이 만든 신도시 문명을 만끽하려, 혹은 그들의 선조들이 피, 땀 흘려 이룬 개척지를 둘러 보려, 우리와는 다른 관광 목적이 있으리라는 것도 사대주의 콤플렉스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조급함 없어 보이는 그들이 부러울 뿐이다.

 차는 이제 그리니치 빌리지로 들어 섰다. 늘 파킹 하는곳을 찾았다. 건물 한 모퉁이 터를 파킹장으로 하여서 길에서 찾기가 쉽고 물건을 사서 실기가 편한 곳이다. 콧수염을 기른 남미에서 온듯한 남자가 표를 주며 몇시에 오느냐구 묻는다. 손을 다섯 개로 쫙 펴고 보여주니, 다섯시면 저 안으로 넣어야 한다며 시동을 끄지 말라고 손짓을 한다. 

 언니가 서울서 아트 갤러리를 강남에 내고 나서 내가 미국에 있을 동안 공예품, 수제품, 앤틱소품을 부탁을 받고 소일 삼아, 아니 이제 부업으로 물건을 사로 나온것이다. 서울도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외국에서 살다온 지상사, 유학생들이 많아지고 안목있는 이색적인 물건이 날개돋힌듯 팔려서 물건 대기가 바빠졌다. 디자인 계통 회사를 다니다가 자신이 가게를 낸 언니는 유럽과 일본을 다니며 미국에 있는 나에게도 수시로 전화와 팩스를 원하는 것을 알려준다. 덕분에 소호와 맨하탄 나이악 프리마켓등을 다니며 소품을 사러 다니게 된것이다. 유니크하고 한 개 뿐인 장신구 들로하여 고객이 늘어나고 단골을 확보하였기에 몇 달 만에 평수를 늘린다고 구경나오라는 언니의 성화에 다들 잘 사기는 정말 잘 사나보다. 일반일들에게는 박물관의 전시품 보듯 하지만, 있는 사람들이야 어떡하면 남들이 안하는 것을 할까가 고민인 사람들에게는 욕구를 채워주기 안성맞춤인 말 그대로 갤러리이다. 나 역시 인테리어 실내 장식가 못지않은 센스가 가격을 재게 되고 물건을 볼 줄도, 살줄도, 딜 을 하게 되었다. 남아도는 시간을 이 일로하여 생활촉진제가 되고 책도 사며 박물관, 갤러리도 다니게 된 것이다. 한때는 골프로 아침 나절을 보내기도 하다가 허리 통증으로 쉬다가, 타운에 자원봉사 널싱홈에 가서 노인들도 돌보다가 짧은 영어 소통에 답답함을 영어공부 한다고 도서실에 가서 미국 할머니를 소개 받기도 하여 그룹으로 배웠지만은, 흐지부지 끝내버린 일이었지만 물건을 사러 다니는 것에는 묘한 대리 만족을 주었다. 내가 산 물건이 팔린다는 자신감이 나를 일깨워 주고 아직 내 감각기관에도 살아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에 정신적인 위안감 마저 가져다 주고 활기 있게 하루를 맞이하게 된것이다. 무료함과 나태함에서 건져준 일거리 였다. 남편이 있으면 주말에 손님 치루기에 바빴지만 그림마저 안하니 사람들과의 만남도 소원해지고 성격마저 변하기도 하고 견디기 힘든 상황이 되어져 갔다. 사교성 없고 적극적이지 못한 내성적 성격의 우울한 나날의 연속이어서 아이에게는 신경질적으로 대하기도 하였다. 남편과는 대학졸업 하자마자 선을 보고 중매 결혼을 하여 조건대조건 어른들이 성사시킨 결혼에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남들처럼 살아 왔던 결혼 생활이었다. 대기업체에 다니며 학벌이 있고 80년대의 풍속대로 아파트 23평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고, 아이를 낳고 남편의 승진에 기뻐하고, 나의 인생은 남편의 부속품이었다. 사랑, 그것은 막연히 어렴풋한 환상이며 꿈조차 꾸지 않으며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어느 부류에만 속한 된 것이라며 단정지어 버렸다. 남편 역시 무던하여 조직생활에 잘 길들여진 사회적 부품 역할을 잘 해오고, 집에 오면 별다른 남자들과 다를바 없는 전형적인 한국 중년 남자 아버지 였다. 애뜻한 사랑, 그리고 열정도 없이 그저 남들이 좋다고 결정한 그 길을 우리도 택해서 살아 온것이다, 남의 이목 때문에,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아니면 무감정한 부부사이에 큰 반란을 위해서 주어진 요즘 이 상황에 나는 많은 번민과 인간적 성숙 계기를 맞은 것이다. 잊었던 친구들도 만나고 그 속에서 나를 찾은 것이다.

 어느날 찾던 가게 에프터레인에 들어섰다. 제목처럼 근사한 아트 소품 가게이다. “비온뒤” 얼마나 잘 지은 이름인가! 상쾌한 기분이 가게 안에 스며있다. 반갑게 맞이하는 주인여자가 목에 걸고 있던 안경을 쓰고 다가와 캐다록과 물건을 보여준다. 기다리고 있었다며 책상앞에 놓여진 향수병, 크리스탈 유리잔을 보여주며 찬사를 보낸다. 유리알이 박힌 저 향수병에 향수를 넣고 바르면 이세상의 남자들을 다 녹이며 유혹할수 있을거라고 나이든 여자들도 그런생각을 할까? 아니면 미국에 살아서 그럴까. 나에게는 금기된 항목 부문 이야기가 나오면 왠지 더 예민해 지는 것이다. 헝가리 춤곡 5번이 흘러 나온다. 애잔하며 드라마 틱한 영화 장면이 떠오르나. 마치 저 향수병을 가진 여인이 애인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스쳐 떠오른다.

 마루 바닥에 깔린 액센트 카펫트가 비스듬히 놓여있다. 똑바로 놓고 싶은데 우리와 다른 감각이 나를 갑갑하게 하곤 한다. 

 냅킨 홀더에 꽃으로 된것과 철사로 감고 구슬이 낀 것을 보여준다. 봄 상품이라고 하며, 나는 다 구입하고 지갑에서 돈을 꺼낸다. 이때의 기분은 정복한 땅을 밟는 기분이다. 지불할 때의 쾌감이 나를 전율케 한다. 이따가 집에 갈 때 물건을 가져간다고 하고 포장을 잘 부탁했다. 항공소포인지 이미 알고 있다. 큰 고객의 기분을 최대한으로 부추기면서 내주에도 유명한 아티스트가 쥬얼리가 나온다고 꼭 들르라고 한다. 그 작가의 엽서 크기의 포스터를 보여주면서, 벨 이 달린 문을 밀고 나왔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끝냈으니 수진이가 하는 델리에 가서 점심을 먹어야 겠다며 발길을 옮겼다. 2 블락을 지나서 그린스트릿을 가면 친구가 하는 가게로 가는 길에서 수많은 거리 군상들을 만난다. 길가에 앉아서 지도를 찾는이들 보라색 머리에 체크무늬 짝붙는 바지 70년대 히피 스타일이 다시 거리에 등장이 되고 광대 신발처럼 둥그런 검정 굽높은 신발을 신은 저 남자는 한달전에도 이길에서 본것같다. 처음 이곳 소호 그리니치 빌리지에 와서는 너무나 해괴한 사람들 모습에 뒤 돌아보며 쳐다 보았으나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냥 스친다. 머리카락을 송곳처럼 세운 다음 빨강색 머리 염색을 한 코에 코걸이를 한 여자가 옆에 지난다. 겨울 코트에 부츠 차림이다. 이곳에 와야만 볼수 있는 차림이다. 나역시 그들 눈에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 무슨 영감이 떠 오를 것 같다. 

 그저 이 미국의 큰 시장에 한 고객이 되어서 그 문와희 일부를 달러로 사서 지구 저편의 한곳으로 보내는 보따리 장수인 것을 알까ㅡ 이제는 이 소호의 문화를 즐기며 사는 나라가 되어서 대접받는 한 사람으로써 활보하며 당당하게 걷는것이다. 수진이의 가게는 언제나 다름없이 붐빈다. 가게앞에 비닐로 쳐진 선반대에 많은 꽃들이 집열되고 바구니에 꽃혀있고 병에도 담아 두었다. 꽃파는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눈 인사를 한다. 그리고 씩 웃는 모습이 묘하게 느껴진다. 넌 팔자가 좋아 놀면서 다니고 나는 자본이 없어 이 가게 한 구석을  맡고 있다는 자조 어린 웃음을 입가에 흘리고 있다.

 가게에 들어서니 점심시간이 지난 후 이어도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차 있다. 제각기 들고 있는 것이 다르다. 물 한병, 샐러드바에서 산 플라스틱 통에 담긴 샐러드, 쿠키 한통을 들고 서있는 이들 양쪽 캐쉬대 사이로 샐러드바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식, 중국식, 스페니쉬식, 이태리식 총망라 되어있는 음식들 찬 음식과 더운 음식들이 나누어져 보기만 해도 손이 많이 간 것이 보인다. 색상도 다양하여 입맛이 당겨진다. 세상에 있는 온갖 채소는 다 이용한 것 같다. 아침 5시에 해낸 억척 주인 아줌마와 일꾼들이 솜씨가 이 가게 매상의 큰 몫이라고 수진이는 자랑삼아 말하곤 한다. 조카애가 먼저 나를 쳐다보며

 “이모, 지금 너무 바빠요.” 하며 인사를 대신 하니까는 수진이는 나를 쳐다보며 손만 흔들고 다시 물건 가격을 찍기 바쁘다. 손님들에게 땡큐를 기계처럼 똑 같은 톤으로 한다. 

“괜히왔나!”

“아니야, 보고가야지 안오면 더 섭섭해 하니까는.”

나는 서있기가 민망해 닭튀김과 잡채를 담고 주스 한병을 들고 줄에 섯다. 내차례가 되니 “조금기다려. 이제 한숨 돌릴수 있어.” 하며 옆에 의자를 내민다. 나는 $5을 주고 포크와 나이프 냅킨을 집어 들었다. 의자에 앉아 무릎위에 놓고 먹으려니 떨어지려고 해서 기다리자 한가해 질때까지.

“수진이는 이렇게 바쁜 가게를 왜 혼자서 맡아 고생을 할까.” 그것은 내 생각이다. 수진이는 나와 다른 것이다. 

 첫날 나를 만났을 때 반갑다고 말보다 “너 , 이 가게 어떤 가게 인줄 아니?””우리남편이 유학와서 공부할 때 파트타임 했던 곳이야, 그 주인 아저씨가 아이들 다 대학 보내고 쉬려고 우리에게 팔았어. 나는 그때 나 혼자 아메리칸 드림을 다 갖을 줄 알았어, 너무 좋아서 잠도 안오고 눈물까지 흘렸어. 우리 에게는 복덩어리지 그래서 가게 이름도 럭키세븐으로 했단다. 부르기 쉽고, 외우기 쉽고, 들어서 좋고 안그러니?” 상기되어 말하는 수진이의 얼굴이 떠 올랐다. 그다음은,

“너 교회다니니?” 묻던 기억이 난다. 안다니던 남편이 열심히 나가고 교회 봉사도 한다고…………

“그런데 지금 어디 가셨니?”

“응, 골프치러갔어”

“왜 친구들이 다 하는데 기죽일 일있니.”, “사회생활인데 해야지.” 하며 당당해 하던 모습도 그리고,

“우리 애들은 공부 잘해. 가끔 나와서 도와주지. 난 이 미국이 너무 좋아. 열심히 일한 만큼 대가도 받고, 건강하면 돈 벌어 집도 사고 여행도 가며……….” 그제서야, “넌 어떻니?” 묻는다.

“너 소식 들었어. 남편이 한국 갔다고, 혼자라고, 아무튼 한국 교육제도 큰일이다.”

내가 말을 안해도 묻고 답하던 수진이의 열정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20여년 이민살이하면 되는 걸까 아마 나는 정 반대로 될 것 같다. 더 폐쇄적, 부정적으로, 아니야 모르는 일이지, 수진이는 한국서부터 모범생이며 좀 모가난 성격 빼고는 한가지를 알고 그것이 전부를 아는 단순한 성격의 아이 였으니, 나는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려서 집으려하다가 수진이의 다리와 머리를 부딪치게 되었다. 나를 내려다 보며 “미안해”, “그래 나도 쉬자.”  “안드레 이리와” 스페니쉬청년에게 한국말로 부른다. 

 “저 청년 한국말 아니?” “뭐 대충 눈짓으로 알지.” 다가오는 청년에게 마리아를 오라고한다. 주방쪽에서 손에 물기를 닦고 나오는 예쁘장한 남미 처녀가 팽팽한 젖가슴과 터질것 같은 청바지위에 앞치마를 벗는다. 그리고 계산대 위에 오르더니 물건을 찍는다. 수진이는, “이제 숨좀 돌리자” “날씨가 좋으니 뒷방보다 밖이 좋겠지.” 하며 김밥과 수박을 넣는다. 커피 두잔을 각자 들고 가게 옆 계단에 사람들이 앉아서 봄볕을 쬐고 있다. 커피집 앞 벤치에 마침 일어서는 사람이 있어서 그리로 갔다. 가지고 나온 음식을 먹으며 나보고 김밥을 먹으라고 준다. 계란과 시금치, 홍당무로 만들어서 담백하였다. 수박을 한입먹고 나더니 과일중에 제일 물리지 않고 미국에서는 수박맛이 최고라고 한다. 그러면서 “너 오늘도 언니 심부름이니? 아니면 다희 만나러 왔니?, 그러고 보니 너 스타일이 다희같다.” 생머리 단발, 검정옷을 말하며 “너도 이 소호의 아티스트 같구나.” 하며 웃는다. “내가 그렇게 보이니, 이차림이 편하잖니?, 그럼 이곳에 오는데 정장을 하니?” 하면서 나는 수십년 사로 잡았던 다희의 환상을 쫒아가는 한 단면을 들킨 것 같아서 더욱더 태연하게 대답을 했다.

 “너희들 옛날부터 그러했잖니, 같은 옷 입고 다니고 실 가는데 바늘 가듯이 붙어 다녔잖니, 너 요즘 다희 만났나?” 

 “아니 저번에 너랑 본 후 못 봤어.”

 “그래, 우리 가게도 안 오더라, 아무튼 갠 바람 같아. 집이 세 군데 있으니 여기 없나 보다.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나서 도도 한줄 모르겠다. 고관집 딸이면 딸이지, 후처 딸이며 호강하는 것 다 부정 돈 아니니, 우리들 피땀 흘린 세금 아니니?”

 다희는 수진이와 학창시절부터 감정이 좋지 않았다. 나는 그 중간에서 왔다 갔다 서로를 이해시켜 주려고 애썼지만 역 효과만 있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흐른 지금 같이 만났을 때 다 지난 앙금이 가신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어서도 소녀 시절 어투에 새삼스레 수진이가 귀엽게 느껴졌다.

 “난 너희들이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우정이 부럽다. 나 역시 잘하려고 해. 그러나 반응이 없어. 너무 차가워. 중년이면 중후한 멋이 있어야지 새초롬 하게 혼자 지성인 척 하는 것 보면 정이 안가. 너 그런 것 못 느꼈나?”

 “걔가 본심은 안 그런데 너무 오래 혼자 살다 보니 그럴거야. 얘, 얘 엄마인 우리하고 다르지. 네가 이해해. 그래도 옛날 친구 아니니? 나는 요즘 산다는 것은 시련을 극복하고 고난과 싸우고 역경을 이겨내면서 운명에 도전 하면서 힘이 주어지는 것 같아. 너를 만나면 그런 생기가 있어서 좋아. 마치 넌 미국 세상 무대에서 연극 주인공을 맡은 배우 같아……”

 “어머 얘가 혼자 지내더니 철학자가 다 되었네. 그래 좋은게 좋다고 다희하고 잘 지내려고 해. 믿는 사람이 사랑해야지. 너 오늘 다희 만나러 나온 김에 가보던지. 나도 못 가봤는데. 너하고 친하니깐……”

 “나 전화 번호 안 갖고 왔어.”

 “걱정마, 우리 꽃 배달 주소록에 명함이 있어. 미스터 킴에게 물어줄게. 자, 이제 일어나자. 우리 아들이 올 시간이다.”

 “여사장님이 좀 봄 나들이도 하고 쉬어라. 근사한 café가 여기 많이 있잖니? 같이 가자.”

 “모르는 소리 해라. 남에게 맡기면 매상과 손님이 차이가 나. 내가 지켜야지. 난 그게 내 낙이다. 이제 습관이 되었어. 이미 내 인생은 이렇게 길들여졌어.” 하면서 툭툭 털며 일어서는 수진이의 두툼한 운동화와 푸석한 머릿결 에서 알 수 없는 비애가 보였다.  가게에 들어서니 조카가 오늘 법당 모임에 가야 한다고 길을 나선다.

 “저 애는 왠일로 교회에 전도를 못했니?”

 “젊어서 한 때 무엇을 믿든지 상관 있니. 심지가 있고 착하고 열심히 공부하니까 걱정 안해.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까? 조카 애 룸메이트가 낮에는 잠만 자고 밤에는 일하는데 같은 학생이기에 파트 타임 하는 줄 알았는데 속옷이 야하다고 나한테 말하더니 어느 날 집에 전화가 왔는데 룸메이트 찾는 전화가 손님 예약이 되었으니 나오라고 하더라고 조카인 줄 모르고 말을 했나봐. 기겁을 해서 나에게 못 지내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편하대. 서로 집에 있는 시간이 겹치지 않으니 말이다. 나도 조금은 걱정이 되었는데 몇 개월 지나면 떠나겠지. 세상 한 면을 배우는 거지 뭐.”

 그때 아들이 들어온다. 나이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젊은 애들이 입는 힙합 바지에 귀에 은 귀걸이가 달랑 걸려있다.

 “준서야! 인사해. 엄마 친구 화연이 아줌마다.”

 꾸벅 절하며 메고 있던 가방을 놓고 나더니 소다 한 캔을 들고 온다.

 “엄마 오늘 아줌마 하고 잠깐 나갔다 올게. 도둑 잘 지키고 큰 소리 내지 말고 눈짓만 해. 성질 내지 말고. 그럼 간다. 큰 돈은 내가 가져가고 체인지 할 것 그 안에 있다.”

 “진아, 정말이니?” 

 “고마워, 시간 내주어서.”

 “네 덕에 나도 좀 호사 하자.”

 “얘, 너도 신세대 엄마다. 네 아들 보니 너도 많이 세련 되었구나.”

 “응, 그 귀걸이, 바지 그 정도야 봐 줘야지. 그것마저 말리면 내 곁에 있겠니? 남편은 못 마땅해 해. 내가 중간에서 역할 노릇하기 힘들지. 난 이곳에서 하도 희한한 사람들 봐서 저 정도는 노말로 보여. 아무튼 전부다 미쳤어. 며칠 전 잘 오던 단골은 에이즈로 죽었어. 늘 긴 옷에 감기 기운이 있다고 파트너 남자에게 걱정하더니 죽었다고 하더라. 깔끔한 차림에 전문적 직업을 가졌는데 게이야. 의외로 깔끔한 매너가 있어서 대하기 편해.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이 캐쉬어 대에서 뒤만 돌아보면 껌을 훔치질 않나. 신문지 속에 치즈를 담고 나가지. 흑인 동네 보다 눈치 주고 말 시키면서 범죄심리를 막아 돈보다 스릴을 즐기는 병자들 같아. 너무 풍족한 것에서 무료를 느껴서 그런 자극을 받는건지. 너도 하루 캐쉬어 대에서 세상이 어떤가 볼래? 나야 이제 무감각 해졌어. 아, 다 왔다. 여기 들어가자. 난 이 집이 좋아.” 

 음악이 70년대 우리가 좋아하던 팝송이다. 한가한 시간 이어서 그런지 사람들도 없다. 치즈 케익과 홍차를 시키고 나무 의자에 홍차를 시키고 나무 의자에 앉아 수진이는 다리를 주무른다. 오래서서 있기에 근욱을 풀어 준다고 하면서 허리도 움직인다.

 “화연아, 여기 어떠니? 난 여기가 좋아 바로 옆 가게가 컨사이먼트 가게 왜 있잖니 중고품 파는데 한번 입고 도로 갖다 파는 곳이야. 비싼 브랜드 네임 옷을 싸게도 산다. 가끔 밍크도 있어 돈많은 유학생 애들이 싫증난 옷들 파는 곳이야. 주인은 일본 사람이야. 이름도 도코다. 소호도 이제 동양인들이 많이 와 젊은 일본 부부들은 2-3 년 살러 오나봐. 일본 사람들은 여행가이드북 들고 다니면서 구경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특히 양복입은 신사들이 가끔 모려다녀 우리 가게 와서도 줄도 안 서고 큰 소리로 나보고 물건 달라고 하지 하기사 한두 번 여행에 그럴수 밖에 없지. 언젠가 다의 동상이 왔어 재벌 사모님이 취미도 고상하게 그림 콜렉션이니 소호 갤러리에 왔는데 회사 직원을 3명이나 거동하고 말이다. 그 우아한 자태 차라리 다희가 더 인간적 인 것을 알았다. 가방까지 들고 다니는 사람들 공주와 시녀의 행차였지.” 

 “어머 그랬니? 미희는 결혼 했구나.”

 “너 잘 아니”

 “그럼 어렸을 때 봤지.”

사르르 입안에 녹는 케잌을 먹고 나서 우리는 옆 가게로 갔다. 단발 머리에 한가닥 기다란 머리를 꽁지처럼 기른 여자가 웃으며 다가 온다. 직원인듯 싶다. 구석에서 스팀으로 다림질하는 얼굴 하얀 남자가 서 있고 주인 인듯한 남자가 동그란 안경을 쓰고, 한 남자가 샤핑백에서 꺼내는 옷을 점검하고 있다. 상표와 옷 상태를 보는 것 같다. 기모노가 있고 액세서리는 유리 진열관에 있으며 목 없는 마네킹에 걸려 있는 꽃 무늬 드레스가 쿠찌라고 쓰여 있다. 고급 부띠끄 장식이지만 중고품 냄새가 난다. 요즘 유행하는 애니메이션 그림이 있는 T셔츠가 비닐 봉지에 쌓여있다. 60년대 모자와 핸드백, 구두가 보인다. 커스튬 파티 때 사 입는 시대별 옷들이 다 있다. 수진이는 “너, 저 가방 상표 아니? 다희 동생이 든거야. 천 가방인데.” 하면서 여자 점원에게 다가가 보여 달라고 한다. 프라다 가방이다. 퀼트로 스티치가 되어서 끈이 철 장식으로 된 유행인 인기 품목이다. 가격에 놀라서 수진이가 “중고가 $200이 넘니, 가죽도 아닌데.” 하면서 진열 장 속의 브로치를 하나 산다. 나도 방울 소리가 나는 키 체인을 하나 샀다. 그리고 우리는 가게에서 나왔다.

  “어떻니? 너 처음이지, 이런 가게. 이곳에 몇 군데 더 있어. 다음에 가자. 나 이제 가게 가야겠다. 참, 너 전화번호 안받았지. 같이 가자.”

  “그럴까? 아니야 그냥 갈게.”

  집에 가도 딸아이가 학교에서 워싱톤으로 여행을 갔으니 저녁 준비 할 것도 없고, 그래 하며 따라 가서 꽃 파는 미스터 김에게서 구석에서 끄집어 내어 주는 장부 속에서 다희의 전화 번호를 받았다. 

  “수진아, 그럼 나 갈게. 오늘 고마웠어. 다음에 또 보자.”

  “나도 네 덕분에 봄 내음을 맡아서 기분이 좋았다. 운전 잘하고 바이.”

하고 가게에 들어간다. 전화번호를 들고 에프터 레인 가게에 가는 길에 서서 전화기를 가방에서 꺼내서 돌렸다. 따르릉, 따르릉… 그때, 수화기 드는 소리가 난다.

“다희니? 나 희연이야. 나 지금 소호에 있어. 오늘 시간 있니? 만나자.”

“그래. 나도 갤러리에 갈 일이 있어. 너 웨스트 브로드웨이 선상에 있는 Ok Harris 갤러리 아니? 그리로 와라. 1시간 있다가 만나.”

뚝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전화기를 접어서 가방에 넣고 나는 뛰다시피 에프터 레인 가게로 향했다. 다희와 만나게 되는구나. 둘이서만…… 하는 심정으로 가슴이 뛴다. 지난날 내가 얼마나 그 애를 부러워하였던가? 나의 영원한 미지의 꿈 속의 한 아이였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한 다희였다. 한 때는 질투심에 불탔고, 미워도 했었다. 언제나 그 아이는 멀리에 있기에 나는 막연하게 미국에 오기만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지사 발령을 받았을 때 맨 처음 떠오른 얼굴은 다희였다. 아직도 그 아이가 나의 동경의 대상이 되는가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결혼 후 연락도 끊기고 미국 와서도 수진이를 만난 후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런 다희를 오늘 둘이서만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 나를 황홀하게 했다. 나에게도 아직 이런 살아있는 감정이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물건을 찾고 그 길로 우체국에 가서 부치고 나서 나는 다희가 말하던 갤러리로 향했다. 퇴근 시간이어서 인지 사람들이 많았다. 멋진 봄 정장 수트 차림에 운동화를 신은 여자가 지나간다. 그 뒤로 바바리 코트에 그로서리 봉지를 든 신사가 있고 버스 정거장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이들… 뉴요커들의 군상이다. 내가 그 속에 이 시간에 있다는 것도 의아스럽다. 이제야 나는 미국을, 아니 맨하탄을 알 것 같다. 정확히 그리니치 빌리지의 낭만과 멋을 내가 소유한 듯한 착각이 든다. 갤러리를 찾았다. 문에 들어서니 한 눈에 여러 형상의 모습인 사람들의 얼굴이 들어온다. 제목을 보니 108 windows였다. 108번뇌 인간의 상인가 보다. 입을 벌린 이, 꼭 다문 이, 외계인 같기도 하고, 원숭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눈을 감고 싶다. 눈, 코, 입에 따라 저렇게 다르게 느껴질까? 너무 강렬한 느낌이 온다. 그림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해도 언니 덕분에 책과 박물관에 다닌 결과 인상파 이외에도 현대미술의 흐름을 조금은 알게 된 것이다. 조각과 비구상도 작가의 의도적 표현이 무엇인지 감이 오기도 한다. 문 쪽으로 다가섰다. 지나가는 사람의 물결이 나에게는 더 확실하게 다가온다. 이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다희가 보였다. 검은 스웨터에 긴 치마와 큰 가방을 메고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이다. 

“희연이구나!” 

“잠깐 오피스에 가서 큐레이터에게 줄 포트폴리오 주고 올게.” 하며 저쪽으로 간다. 사무적인 그녀의 행동에 괜히 전화했나 하는 기분이 든다. 저러니 수진이가 냉정하다고 하지. 멍하게 서 있는데 다희가 왔다.

“많이 기다렸지, 그림 다 봤니?”

“응, 대충. 넌?”

“그럼, 몇 번째인데. 그럼 나갈까?”

“재미있지 않니? 108개의 사람 모습을 어쩜 저렇게 다양하게 이미지를 표현 할 수 있을까?”

“작가의 컨셉이 확고하게 느껴지지 않니? 중국 사람인데 필라델피아 칼리지를 나와서 불교적 배경이 이곳 사람들에게 신비함을 주는 것 같아. 요즈음은 사진전을 많이 하는데 사진의 확대가 영화이고, 비디오 아트 설치 미술은 공간개념 확대 캠퍼스에서 느낄 수 없는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해. 이제 아트는 칠하고 만드는 것에서 무한대 영상의 빛으로 잠재의식을 표현해.”

그녀는 나를 의식하지 않고 떨리는 듯한 흥분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하는지 혼자 이야기를 하듯이 말을 한다. 난 처음으로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보았다. 무안 하였는지 “너 배고프니? 저녁 먹으러 가자. 시간이 되니? 그럼 어디 갈까. 이곳은 세상 음식이 다 있어. 한국, 중국, 일본, 인도, 타일랜드, 말레이시아, 베트남, 싱가폴, 유럽은 물론이고 어디 가고 싶니?”

“그냥 가까운데, 국물 있는 것 먹고 싶다. 예약을 안하고 그냥 갈 수 있는 데로 가자.”

“넌 늘 그냥, 이란 말 아직도 잘 쓰는구나. 예전에도 그랬는데. 내가 묻는 말에 늘 그냥 그래, 그랬어.”

다희가 나를 기억하는구나. 그 부분까지도……

“이곳에서 가까운 말레이시아 식당 Penang에 갈까?”

스프링 스트릿에 있는 식당에 들어섰다. 스탠드 바가 보이고 통나무로 만든 원주민들이 사는 나무집 같은 방이 보인다. 말레이시아 냄새가 난다. 이 소호 안에 이렇게 완벽하게 다른 세계를 옮겨 놓았다. 식탁에 둔탁한 수저와 젓가락이 놓여있다. 조각품 같이 보인다. 메뉴판을 보니 모르는 이름들이다. 에그누들을 시키고 다희는 야채밥을 시켰다. 

“넌 늘 혼자 사 먹니?”

“아니 해서 먹어. 가끔 이렇게 나오기도 하고.”

“한국 음식은 안 먹고 싶니?”

“차이나 타운에 가서 야채, 고기 사서 요리 하는 것 좋아해. 요리도 예술이야. 색상과 그릇의 조화, 식탁에서의 어울림, 먹는 것 보단 만드는 것이 더 좋아.”

음식이 나왔다. 푸른 기가 도는 도자기 그릇에 국수가 있고 야채가 섞여 있었다. 국물은 닭 국물 같다. 다희 것은 큰 새우가 밥 위에 얹혀 있었다. 수진이와 낮에 함께 했던 분위기와 다른 분위기에 묘한 감동이 인다.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화연아, 요즘 나 많이 아팠어.”

“어디가?”

나는 묻고 나서 보니 많이 수척해진 얼굴이 더 파리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를 감싸주고 싶었다.

“마음이 아프단다. 사실 나 요즘 병원에 다녀. 간단하게 우울증이야. Major Depression이지. 아직 큰 증세는 없는데 기분이 늘 저조하고 공허하며 사람 만나기가 싫고 의욕이 없어. 상실감에 부정적 요소만이 나를 짓누르고 있어. 밥맛도 없고 그저 내가 싫어. 산다는 것 자체가 힘들어……”

“다희야, 우리 나이 다 그렇지 않니, 호르몬 분비로 인해 한 달에 한 번 누구나 PMS(월경중후 증)가 있잖니 나도 그래, 2-3일은 히스테릭 해져서 나도 나를 감당 못해.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 그러면 증상이 완화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당연한 나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견딜만해. 그러나 끝나면 내가 언제 그랬나 싶어. 그리고 한 달 있으면 그 상황이 똑같아.”

“화연아! 나는 내가 늙어 간다는 것, 젊음이 사라진다는 것을 못 받아 들이고 있어. 너무 허무해. 이대로 끝난다고 생각하면 두려워.” 하면서 그녀의 얼굴에는 주름이 이마에 잡히고 손에서는 경련이 인다. 웨이터가 음식의 맛과 디저트를 물어온다. 

“우리 그만 나가자. 다희야, 오늘 우리 집 갈래? 나 혼자야. 딸 아이는 여행 갔어. 학교에서 갔는데 모레 와.”

“글쎄, 안되 나 약 먹어야 돼. 네가 우리 집에 가서 차 마시자.”

검은 쟁반에 가져온 계산서에 돈과 팁을 주고 우리는 나왔다. 저녁을 내가 샀다고 다희는 자기 집에 가기를 권유했다. 나는 내심 그녀가 살고 있는 작업실이 보고 싶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그곳에 나는 초대받고 싶었다.

“너 차 어디에 두었니? 찾아서 가자, 우리 집 근처 파킹장에 두면 돼.”

밤 공기가 감미로웠다. 미풍이 내 전신을 휘감고 있다. 다희와 이 소호 거리를 걷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 학교 앞 빨간 벽돌집 이층까지 담쟁이가 넝쿨로 올라간 집에 사는 다희는 언제나 예쁜 드레스를 입고 다녔다. 그 당시 다희는 학교의 화제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소문이 그녀를 괴롭혔다.

“참, 네 동생 미희, 미국에도 왔었니? 수진이 가게에 왔다고 하더라.”

“응, 가끔 와. 그림을 좋아하더니 콜렉션해서 요즘 화랑을 차렸나 봐. 이제 우리 엄마는 꿈을 이뤘지. 나에게 기대한 이상이 무너지고 미희가 대신 해주니, 미국 와서도 여기 안 오고 렉싱톤에 있는 콘도에 가 계셔. 내가 싫은가 봐. 이해를 못해 주시고 사서 세상 고민을 다 하는 양 못마땅해 하시곤 하였지. 글쎄, 어떻게 아시겠니! 평생을 오로지 한 남자 그늘에서 살기를 원하여 자식을 낳고 그 낙으로 살아 오셨는데, 이런 세계의 고뇌가 아무런 가치 없는 일로 간주하는 거야. 왜, 자신이 택한 삶을 이 세상의 최고의 뜻과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 답답해. 오늘이 있기에 어제가 있고 내일이 있는데……”

다희는 걸어 가면서 가끔 밤 하늘을 쳐다 보면서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네온 싸인이 둥글게 선을 이루고 돌아간다. 오랜만에 보는 밤 거리이다. 서울의 밤 현란한 광고 싸인과 네온싸인이 사람들을 유혹하는 불빛 이었던가? 내가 사는 동네는 해만 지면 적막 산속이다. 가로등 불빛이 없어서 동네를 모르는 사람들이 오면 어디 어두워서 길을 찾겠나 하던 말이 떠오른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는 길이니 상관 없다. 외부 잡상인들이 올 수 없어서 조용한 자기들만의 동네를 만들고 있는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의 주류를 이루는 동네이다. 이제껏 한 건의 큰 범죄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던 옆집 수잔의 말에 안전 보호지대에 앞서서 고립감을 가져 보았다. 아무 말 없이 걸어 가는 나와 다희는 그대로 있어도 편한 느낌이 들어서 좋다. 말 보다는 때로는 이런 침묵이 그녀와 나를 묶어 주는 것 같다…… 차를 찾고 나서 이스트 빌리지 다희가 사는 작업실 근처에 파킹을 하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보이는 거리로 나왔다. 건물마다 화하게 불이 켜져 있어서 안에 사람들이 보인다. 문을 열고 계단이 둥근 나사형 철재로 되어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나뭇잎 모양으로 된 철문이다. 바닥의 타일이 모자이크로 되어 붙어 있다.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빌리지처럼 오래된 건물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3층이야. 걸어서 가자. 나는 저 엘리베이터 움직이는 소리가 싫어. 그리고 그 속에 갇히는 공포감이 두려워. 나 너무 예민하지 않니? 소호는 30년 전만 해도 공장지대였는데, 아티스트들이 갤러리를 하거나 작업실로 하여서 나는 이곳이 편해. 어디를 가도 여기처럼 나를 담아주는 곳은 없어. 모두들 나름대로 각자를 존중하며 살아가. 요즘은 비싼 렌트비로 갤러리가 23가 첼시 에비뉴로 옮기고 있지만 그 대신 옷 가게, 카페, 선물가게로 변하고 있어. 상업화 되어 가고 있지. 이 세상에 안 변하는 게 있니. 다만 맥을 유지하며 흐르면 되니깐. 나 사는 동안은 말이다.”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고 불을 켠다. 한 눈에 들어오는 집안 내부다. 스튜디오 벽이 없이 원룸 시스템의 넓은 공간이다. 한국에서 요즘 전문직 젊은 여성들이 선호하는 실내 구조이다. 마루바닥 한 가운데 둥근 기둥이 눈에 들어온다. 다희는 나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한다. 나는 창가에 서서 건너편 빌딩에 사는 불빛이 보이는 안을 쳐다본다. 큰 이젤에 걸린 그림, 바닥에 걸린 캔버스들,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도 보인다. 그 옆 창문에서도 사람들이 모여 있다. 큰 작업대에 음식들이 보인다. 모여서 파티를 하나보다. 원색의 그림이 보인다. 커다란 벽 한 면을 다 차지한 그림이다. 맨하탄에 있는 오피스 빌딩에서 보이는 각 층마다 로봇 같은 하얀 화이셔츠를 입고 책상 앞 컴퓨터와 서류들 앞에 앉아 있는 회사 부속품 같은 숨막히는 똑 같은 모습마다 정겹게 느껴진다. 노란 불빛 탓인가. 인간이 기계의 노예가 되어가는 21세기에도 아직도 저 작가들은 내부의 의식과 자신들의 이미지 표현을 하기 위해 저렇게 혼자만의 공간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일까? 지시 전달을 받고 할 일만 끝내고 다음 지시 사항을 기다리는 인간 부품보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화연아, 무엇을 보니? 재미있지! 처음엔 나도 열심히 봤어. 숨은 그림 찾기처럼. 그리고 이제는 나 혼자 있다는 기분도 안 들고 서로 모르지만 창 밖으로 무언의 대화를 하지. 같은 행위를 한다는 사람이 있다는 위안을 서로들 하기 위해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에 커튼도 안 달고 싶다. 자극이 되어 붓도 잡게 되고 이제는 같이 공존하는 집단 같단다. 이제 앉아. 뭐 마실래?”

벌써 테이블 위에는 초와 도자기로 구운듯한 찻잔과 와인 잔이 놓여 있었다. 외국서 오래 산 정서가 한 눈에 보이는 감각과 분위기가 깃들어 있었다. 촛불의 향이 은근하게 방 안에 스며든다. 과일 향의 초 내음이다.

“다희야, 너무 로맨틱 하다. 너와 함께 이렇게 같이 있게 될 줄이야. 나 오늘 정말 용기를 잘 낸 것 같다.”

미소로 답하는 그녀의 애잔한 모습이 내 가슴 깊숙이 파고 든다.     

“네 그림은 어디에 있니?”

“그림…… 저쪽에 있다.”

앉기 전에 나는 보고 싶었다. 그녀의 그림을. 아크릴 화에 콜라쥬 같은 한지와 혼합용 흙, 모래, 나무 판자를 붙인 그림들 시리즈가 4개 나란히 있다. 자연색(흙갈색, 황토색, 자주색, 초록색)이 어울러져 토담집 벽을 느끼게 했다. 그녀의 화려한 정서 보다는 한국적 순수한 토종미가 느껴진다. 프레임은 컨템프러리한 나무 색 이여서 그 자체로 연결되어 보기 좋다.

“너 그림 좋아하니?”

“아니, 자주 보러 다니고 하니까 좋은 느낌은……”

“알겠어, 작가의 힘든 작업이 무언가도 알겠고, 너의 그림은 한국적인 정서가 느껴지는 구나.”

“그러니, 나는 요즘 한계에 부딪혔어. 붓으로 색감으로 나의 이미지를 형상화 하는데 역부족이야. 내가 했던 작업들은 이미 예전에 작가들이 해 놓은 것의 모방에 지나지 않아.”

“예술은 모방 속에서 창작 되지 않니? 그러다가 각자의 목소리로 자기 것을 찾게 되고.”

“난 나의 무능력과 무기력에 지쳤어. 내가 갖고 있는 양심의 소리가 진실을 소리치고 있어. 그리고 나보다 재능 있는 사람을 후원하고 싶어. 그나마 내가 갖고 있는 소유를 나누고 싶어.”

꽃 무늬가 사기 차 주전자에 그려진 것을 들고 찻잔에 따른다. 찻물이 흐른다. 그녀의 소리가 그 속에 담아지고 있다. 벽 한 구석 큰 항아리 속에 드라이 플라워가 있다. 온갖 꽃들이 말린 상태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긴 가지가 위로 감겨져 선을 이루고 있고 오랜 기간 동안 담아 놓은 듯 하다.

“너 꽃 좋아하니?”

“한 때는 꽃을 사다가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저 토기 항아리에 꽂아 두었는데, 요즈음은 저 마른 꽃들이 나 같아서, 마치 향기 없이 시들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없애 버리려고 해.”

“왜, 너무 좋은데. 참, 화장실 어디에 있니?”

“저 끝이야.”

나는 일어나서 화장실을 찾았다. 그렇구나, 유일하게 문이 있는 곳이구나. 목욕탕의 욕조는 엔틱 모양의 둥근 통 욕조이다. 깨끗한 아이보리 색 수건이 쌓여있고 큰 조개가 바닥에 놓여있다. 바다 내음이 나는 듯 하다. 나오면서 서재 같은 옆 코너에 나무 색 책꽂이가 놓여 있다. 컴퓨터 책상과 팩스머신이 있으며 수 많은 화집과 책들이 꽂혀있다. 유난히 눈에 뜨이는 성경책과 같은 두께의 한글 책이 눈에 들어온다. 한 마음 요전 불교 경전이 나란히 꽂혀있다.

“다희야, 너 종교가 있니?”

“아니, 가끔 아무데나 가고 있어. 마음 내키는 대로 그저 학문으로 알고 싶어. 남들이 왜 그렇게 열심히 믿는가 확인도 하고 싶고, 하지만 나는 잘 안돼. 예배 보면서 딴 생각 해. 차라리 혼자 가끔 읽어. 그러다가 깨닫게 된 구절도 있고.”

나는 자리에 다시 앉는다. 어둠이 검은 비로드 천처럼 드리워졌다. 다시 침묵이 흐른다. 다희는 와인 병을 들었다. 레드 와인이다.

“너도 한 잔 할래?” 하며 잔을 든다. 붉은 핏빛 같은 와인이 잔에 부어졌다. 우리는 잔을 부딪혔다. 다희는 나에게 묻는다.

“너, 행복하니?”

행복, 나는 웃음이 났다. 갑자기 아이와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껏 행복이라면 그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었다. 나를 잊고 잃어버린 나를 요즘 찾고 있다.

“다희야, 행복이라는 산이 있는데, 우리들은 그 산봉우리를 향하여 가면서 한 걸음 디딜 때 마다 행복을 갖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 정상에 가면 다시 내려가면서 다음의 산봉우리를 찾으면서 인생 고개, 고개를 넘어가는 것 아니겠니. 넌 어떻니?”

와인 한 줄기가 목젖을 타고 내려간다. 몸이 따뜻해 지는 것 같다. 그러면서 들리는 다희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리는 듯 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점으로 시작해서 선으로 이어져 하나의 형태로 형성 되지는 것 같아…… 행복도, 사랑도, 기쁨도 하나의 선이지. 그래서 각자의 선택한 선을 나름대로 만들어 가고 있어. 둥글게, 네모나게, 혹은 세모로 어떤 정의도 없어. 개인 취향대로 선천적, 후천적 습관대로 길들여진 대로 형성하며 자신들의 인생을 그려가는 것 같아. 사물을 주간적으로 보고 객관적으로 받아들여 주관적으로 다시 살아가는 것 같아. 그래서 극과 극은 일치 되고, 삶과 죽음, 낮과 밤, 젊음과 늙음이 늘 곁에 있다는 걸 잊고 사는 것 같아.”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이 흐른다. 이때, 전화 벨이 울린다. 다희는 3번 울릴 때까지 눈을 감고 있다. 소리가 뚝 끊기고 나니 눈을 뜬다. 그리고 나더니 “음악을 들을래?” 물어온다. 

“아니야 이대로 좋아. 그냥 이야기 하자.”

나는 왜 전화를 받지 않았냐고 묻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상적인 말을 하기엔 우린 너무 진지해져 있었다.

“다희야, 보통 결혼한 여자들은 40대가 되면 4가지 류에 빠진다고 해. 자식 교육열, 종교적 헌신, 봉사하며, 혹은 자신의 일에 빠지고, 제 3의 사랑을 찾아 헤매는…… 가끔 나는 그 어디에 속하나 생각해 봐. 다 아닌 것 같아. 자아 상실에 의한 나는 그 동안 잃었던 나를 찾고 있어. 과연 나는 왜 이렇게 되었고 지금의 나를 형성하게 되었는가 하고 의문을 갖기 시작했어. 더 많은 혼란과 고통이 주어지지만 어렴풋이 느끼는 것이 있어. 이제 더는 타인에 의한 삶을 영위하고 싶지 않아. 나이에서 오는 증상인지 간단하게 받아들여지는 내 문제를 너무 확대시키고 그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곤 해. 수진이를 만나면 어떤 강력한 힘이 부러워. 없음으로 해서 주어지는 능력으로 긍정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욕이 나에겐 없었어. 그저 주어진 내 삶의 굴레 속에서 쳇바퀴 돌 듯이 살았던 것 같아. 수진이에게는 올 A병, 남편은 홀 인원 꿈, 그 애에게는 케쉬병이 하나의 목적으로 되어서 그 애를 힘의 가속화로 몰아 가는 것도 알지만 그 에너지의 원천은 가족들과의 사랑인 것 같지 않니?”

“글쎄, 다 이룬 뒤에 오는 허무에서 오는 병은 더 심각하지 않겠니. 자신을 희생시키는 현대 한국 여성의 또 다른 표출 같기도 하고 그 전 세대 어머니의 한의기가 그렇게 흐르는 것 같기도 하다.”

갑자기 나는 수진이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어떤 분위기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시계를 보았다. 8시가 다 되었다.

“다희야, 너 약 먹었니? 오늘 우리 집에 가지 않겠니?”

“아니야! 오늘은 이대로 우리 집에 있자. 움직이기가 싫다. 이대로 우리 이야기 하자. 난 지금 나를 털어내고 쏟아 붓고 있어. 카타르시스의 절정이야. 너는 들어 주어야 해. 내가 얼마나 보잘것 없는 인간인가를, 나약하고 이기적이며 다만 좀 있는 부를 누렸다는 것 이외에는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난 내가 두려워. 언젠가는 이대로 파멸 될 것 같아. 죽고 싶어. 더 망가지기 전에……”

순간 나는 다희에게서 나의 한 면을 보았다. 그것은 내가 독백처럼 나열 했던 말이었다. 한 때,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어. 그러나 지금은 나를 알고 나서부터 그럴 수 밖에 없는 나를 인정하고 나서부터 나는 쇠사슬에서 풀린 듯한 해방감을 갖고 있어. 이제부터는 남을 위해서 나를 만들지 않으리라 결심해. 진정 내가 추구하는 삶을 똑바로 받아들이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나누고 싶어. 스스로 택하고 원해서…… 그러니까 생의 용기가 생기고 죄 의식에서 벗어나면서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이것은 그 누구나 겪는 중년 위기 의식이야. 그렇게 받아들여. 그러면 돼. 그리고 새 날이 주어져 이 지구가 돌아가는 한 우린 그 속에서 또 다시 태양을 볼 수 있어. 그리고 용기도 나고 자신도 생겨 내가 너에게 전화를 했듯 난 모든 것에 도전 의식이 생겨. 어떻게 나도 이렇게 변했는지 몰라. 남편이 떠나고 딸이 나에게 말하더라. 절대로 자기 때문에 미국에 남았다고 이야기 하지 말라고. 그리고 나를 위해서 한 걸음 뒤에 서서 그 애를 키우기로 했어. 언젠가는 다들 이렇게 홀로 서기를 하는 거야. 떠남으로 해서 얻은 인생 교훈이었어. 우린 이제 조금 냉정해져야 돼. 그리고 강해져야 되고. 시간은 우리를 늘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결정한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단다. 다희야, 너도 지금 겪어야 할 절망감을 성숙으로 가기 위해 겪고 있는 거야. 비, 바람으로 연마해 나가는 자연 속의 일부인 인간들의 달관하는 과정 아니겠니. 너에게는 그림이 있잖니. 그것이 너의 화신이야. 지난 날 자화상의 상처 치유를 네 그림 속에 표현하는 거야.

그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희는 흠칫 놀라며, “왜, 벌써. 더 있다가 자고 가면 안되니?”

“품 잠을 자. 그러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너 피곤해 보인다. 그리고 다시 만나자. 네가 연락해, 기다릴게.”

나는 길을 나섰다. 차를 타고 오면서 오늘 하루 너무나 많은 것을 느낀 이 날은 나에게 큰 전환점이 된 것이다. 수진, 다희 그리고 나. 우리 모두는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고 만남으로 서로를 확인하며 인정해주며 지난 날의 내 모습을 아는 그들에게 지금의 나를 보여주며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다. 서로를 위로해 주고 감싸주는 것이다. 밤 하늘에 별이 떠 있고 저 만치 초생 달이 걸려있다. 달이 내 차를 따라 오는 듯 차창에 보여지다가 조지 워싱톤 다리 위에 이르니 바로 앞에서 크게 떠 있다. 그렇게 크게 느껴졌던 초생 달은 이제껏 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달 빛의 한 줄기가 선명하게 내 가슴 속을 비추고 있다. 점에서 선으로 아직 모르는 어떤 형태의 면이 또 다시 만들어 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 순간 생겨났다.

지역사회 참여에서 얻은 교훈                                                                                     1995

미국은  타운마다 학교가 있으며 P.T.A 조직이 있다학부형이면 회원이 되는 것은 의무이며 권리인것이다.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 Class Mother 이기에 피자를 메뉴로 하는  도와주러 간다.

  20 학생들에게 피자를 나누어 주며 아이들과 얼굴을 익히게 되고 친해지면서 나와 아이를 주관적인  눈에서 객관화 시켜서 보게 된다학교행사에 참여하게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하게 되어서 아이들과 눈높이 대화도 하게 된다일을 함으로써 갖게 되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번째 월요일은 타운 도서실에 있는 Friends of Library 회의에 참석하여 스케줄을 만든다. 동안 도서실 장학 기부금 마련을 위하여 추석행사와   여름방학에 아동프로그램을 만들고 성인공예 반을 가르치면서 지역 주민들과도 친해졌다학부모들과 가깝게 되니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남의 나라에 와서 얹혀사는 셋방살이가 아니라 주인의식을 갖게 되고 자주 가는 도서실 덕분에 아이들에게 신간서적을 접할  있게 해주니 참여에서 오는 보람은 매우  것이었다.

 주전 일요일에 Woman’s Club 행사가 있었다. Craft Show  있어서 회원들과 카페테리아에서 스낵을 팔기도 했다남은 이익금은 우수학생 장학금으로 쓰기로 결정했다 돈보다 시간과 봉사로  참여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노인들의 자식 이야기살아온 지혜와 경험을 들으며역시 그들과 다를  없는 생의 굴레를 느끼게 된다아이를 낳고 키우고 다시  자식들이 결혼하여 할머니가 된다는 것은 평범하면서도 가장 숭고한 일이 아닌가 싶다.

성인 여성이면 누구나 가입되며  타운마다 회원들과 만나는 모임이 있어서 카운티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들을  있었다전문직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능력을   있기에 멀리 있는 이웃이 아니라가까이 있는 친지가 되어 삶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나에게 가장  경험은 학교 선거위원 멤버가 되어서 교육의원과 학부모 선거 위원들과 회의를자주하게 되면서 한인 부모의 P.T.A 참여도 문제와 한인 학생들의 문화적 배경에서 오는 문제를 알게되었다문화적 배경의 차이로 아이들의 갈등은 심한  같다.

미국의 민주주의 나라이다그러기에 아무리 좋은 의견이 있어도 선거에 있어서 통과되어야지만 실질적인 행사를   있다한국선거의 관심도 1세에게는 중요하지만 우리들의 주권을 포기하지는 않는지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정치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생각해  일이다.

모든 일은 시간과 과정이 따른다.

경험에 의해서 다음  선거를 위해 모두들 지역사회의 참여가 필요하며 자연스럽게 표밭 다지기가 되어야 한다 때의 열풍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2세들의 정치 터전의 기반을 위해서 우리들이 밑받침이 되어주는 길은 타운 이웃들과 자원 봉사를 하며 우리를 알리는 일이다.

부모들이 보여줌으로써 아이들에게는 좋은 본보기와 자주의식을 갖게 하며 경쟁에서 이기고 선두에 달리는  보다 같이 나누고 협동하는 마음이 따뜻한 아이들을 키워서 사회의 어느 자리에서나 필요로 하는  일원이 되어 자기가 맡은 몫을  하는 Korean-American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어 본다

숨은 그림찾기                                                                                                               1995

인생은 제각기 모두가 다른 형태의 그림을 가지고 있다. 어려서 꿈꿔온 밑그림 위에 사춘기가 되면서 지우고, 뒤집기도 하며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형태를 그리기도 한다. 주위 환경에 의해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고, 혹은 시련을 극복하여 밑그림을 구체적으로 색칠하기도 하다가 끝내 마치지 못하고 꾸겨 찢기도 한다. 성년이 되어서 지난날 꿈꿔온 설계도를 가끔은 아쉬운 듯 꺼내 그려보기도 하다가 아쉬움과 허탈감이 젖어 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그림도 끝나지 않았다. 색의 혼합과 아직 결정 하지도 접하지도 않은 수 많은 색들을 만나기도 하며 부딪히고 덧칠하고, 보고, 듣고, 만지고, 멀리서 자신의 그림을 보다가 한 발자국 다가서서 붓으로 한 측을 그어 보기도 한다. 살아 있는 한 마음 한 구석에는 그 숨은 그림들을 한 장씩 갖고 있다. 다만 모두들 다시 그림을 보는 작업을 마무리 하는 단계를 두려워할 뿐이다. 각자의 그림은 비교 할 수도 평가될 수도 없다. 나는 나 일뿐 그 누구도 아닌 것이다.

 정물화, 풍경화, 추상화, 조각, 어느 장르에도 속할수도, 아닐수도 있다. 대가의 그림에도 끝이 없듯이, 시작이 있을 뿐이다. 이제부터라도 용기와 희망을 안고 숨은 그림 찾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어설픈 그림일수록 더 많은 웃음을 줄 수 있다. 그 찾기 과정 속에서 우리는 행복을 찾아간다. 찾고자 하는 그 순간 우리의 마음에는 새로운 에너지가 발산하게 되어있다. 지금 이 순간의 마음 가짐에 달려 있는데 주저할 이유는 무엇일까? 

내 탓이지 남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우리는 세월의 흐름이 빠른 것과 시간이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명백한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올해도 어느덧 12코스 주행에 Exit 12로 빠져 나가려고 한다. 운전 할 때 멀리서 목적지가 소실점으로 한 점으로 보여 길이 끝나듯이 보이지만 그 곳에 다다르면 다른 길이 다시 벌어진다. 운전을 하는 한 끝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Exit 12를 빠져서 다시 새 목적지로 향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역시 끝도 시작도 없다. 모르는 길을 갈 때 잔뜩 긴장하여 목과 어깨가 뻣뻣해지지만 아는 길은 여유 있게 핸들을 부드럽게 잡고 갈 수 있지만, 이곳 미국에 사는 것이 길을 찾기 위하여 지도를 공부하는 나그네와 같은 여정이지만 긴장 속에서 늘 신선함을 맛 볼 수도 있다. 현대인의 스트레스는 잘 쓰면 약이 되기도 한다. 

해마다 이맘때 12월이 되면 지난날과 다가올 날들의 교차점에서 U턴 할 수 없는 저물어가는 한 해의 길목에 다다르니 아쉬움과 감사함이 엇갈린다. 아직 다 못 그린 내 숨은 그림을 다시 꺼내서 들여다 본다. 그 하얀 여백에 미지의 세계도 그려본다.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들 그 누구를 탓하랴! 나의 것이기에 나는 사랑하는 것이다. 나보다 먼저 산 역사 속의 선배들의 영향을 받으며 그들의 삶의 역경을 나의 인내로 받아들이고 사상과 열정을 알기 위해서 그 선까지 스스로가 가야 하는 것이다. 시공을 초월해 동, 서양을 막론하고 공감하는 교감을 얻는 것이다. 각자의 그림 속에서 Inspiration을 얻기 위해서 책 속에서 만나야 할 대가들이 많은 것이다. 

그들의 그림도 완전한 완성도는 없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에게 위안과 지혜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주어지면…… 저것을 잃게 되는 인생의 진리 속에서 자신의 삶을 재 조명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

한국 여성의 미의 색                                                                                                   1995

  맨하탄을 걷다 보면 수 많은 인종의 물결들과 부딪혀 흘러가게 된다. 금발머리는 파란 눈 서구적 팔등신에서 검은 베일에 싸여진 중동계 여인들과 반디의 붉은 점에 긴 머리를 땋아 내린 전통사리를 감은 인도 여인들 사이로 유난히 시야에 들어오는 동양 여인들 같으면서도 달라보이는 것은 그녀들에게 풍기는 외모의 모습들이 형태가 주어진다.

큰 목소리로 무리를 지으며 기름기 도는 머리, 비취 팔찌와 귀금속을 두르고 다니는 중국 여인, 굵은 웨이브 머리에 하얀 얼굴과 다소곳하며 소근거리며 브랜드 네임 가방을 명예 훈장처럼 지니는 전형적인 일본 주부들, 한국 여성들의 모습도 어느 장소에 가나 한 눈에 알게 되는 것은 나이에 따라 정해진 스타일 때문이다.

예전보다 젊은 층들은 그들의 개성적인 멋을 다양하게는 하지만 중년층들은 한결 같은 모습들에서 벗어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지난 여름 한국 방문 때 동창들의 일률적인 헤어 스타일과 정장을 한 모습에 고가품을 선호하고 다 같은 화장법이 지금의 유행 현주소 잡지 속에 나온듯한 거리 패션을 암시했다.

멋이란?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하나의 창조의 의미지 표현이다.

타인과 다른 나를 알리려는 개성이 존중 되어야 하며 내면의 멋이 자신감으로 충족되어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세월을 잘 다듬고 특유한 독특한 스타일이 있는 분들을 대하면 좋은 작품을 보는 듯 감동이 온다.

미국 속에 살면서 한국 여성만의 멋스러움을 몸에 베어나게 하기 위해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100년 전 조선시대 여인 시리즈 작품을 소재로 구상하면서 한국여인의 미는 지금과 달리 덕성스럽고 복성스러운 유교적 가부장 제도의 온화한 현모양처로 자리매김으로 여기었다.

반면에 풍류에 몸을 담은 기생들 사진은 그녀들만의 독특한 자세와 매력이 풍겼다.

사진관의 빅토리아풍 장식테이블 화초와 잎으로 기대 선 포즈부터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동백기름에 쪽을 진 모리에 장삼과 노리개 장신구도 다르며 도도함이 사진밖으로 까지 나와 끼가 기로 전해지는 듯했다.

문하게 있어서도 기생들의 시조들이 다시 재 조명되어 지는 것은 삶의 애환을 사랑으로 승화시키어 예술로 남아지게 한 것이다.

21C 는 여성학이 새 분야로 대두되어 구습에서 인간선언을 하는 여성들이 여러 전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100여 년 전 여성의 인권에서 진보된 듯 하나 자아실현을 하기 위하여 잠재력에 숨은 각자의 자질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삶은 하나의 과정이기에 나날이 새롭게 맞이하는 하루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고 만들어나가면 내적인 충만함이 자신감 있는 자신만의 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음악의 선율 속에서 춤의 율동 안에서 색채의 조화를 보면 서 향기 좋은 차 한잔을 나누면서 좋은 벗들과 만나 인생을 담소하며 그들 속에 나를 발견해 보는 것이다.

한국 여성만의 미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황진이의 애절한 사랑의 시도 읊고 신사임당의 그림 속에, 나혜석의 운명적인 삶의 애절함과, 선각자들 전 세대의 인생관 속에서 역사의 변천사와 함께 전통적인 한국여성의 미적 감각을 키워나가는 안목을 갖는 것이다.

 세기가 변하여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내 안의 나를 찾는 그 작업은 영환의 등불을 밝히는 것과 같다.

 자신을 사랑하는 내 안에 있는 진정한 자아와의 대화를 하며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며 부드럽고 자애로운 마음을 주는 사람이 향한 마음이 있을 때 미는 빛을 발하리라.

점, 선, 면                                                                                                                     1995

점으로 시작해서 모든 것은

선으로 이어져

면이 된다.

점은 하나에서 무수히 연결되어

선에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려진다.

면은 무수히 많은 형태로 주어진다.

점, 선, 면

선, 면, 점

면, 점, 선 

모든 것이 그렇게 시작 되었다.

입체와 평면                                                                                                                1995

 어디를 가나 세상은 볼 것으로 가득하고 아는 것만큼 보이고 살아 온 만큼 느끼는 것 같다.

 한국을 떠나 왔기에 떠난 곳의 자리가 크게 가슴 속에 자리 잡아서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문화 충격을 지나서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미 습득된 사고 방식과 다시 받아 들여야 하는 선택한 환경의 필수 조건들, 읽은 것 뒤에 얻게 되는 변화하는 과정의 연속들 속에서 그들과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 로 시작하여 나는 누구인가의 의문이 떠나지를 않는 것이다.

아이들의 학교에 갈 때마다 복도 벽면에 시청각 교육 자료 전시는 시선을 머물게 한다. 계절마다 교과 과정에 진도로 학년 별로 학습한 내용이 각 교실 안 밖으로 붙여져 있다. 학생들이 숙제를 한 제각기 다른 아이디어로 다양한 재료의 선택, 독특한 방법이 개성적인 표현의 한 면을 대하는 듯 하다.

 뜯고, 붙이고, 오리고, 접고, 자르고, 컴퓨터를 이용한 자료 수집의 여러 글씨체와 색상들이 종합 예술적 전인 교육 개념을 한 눈에 보이게 한다.

 초등학교 시절의 학교의 환경 미화는 반공 포스터, 계몽 표어와 몇몇 뽑힌 학생들의 작품들, 많은 학생 수와 교사 한 분의 지도, 획일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 창의성 있는 감성을 키우기 보다는 틀 속에다 생각을 맞추어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의 배출이 더 필요한 시절이었다.

 사물을 똑같이 그려 내야만 재질을 인정하는 미술 수업으로 잠재력을 가진 학생들도 재질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자녀들과 이렇게 다른 교육적 배경이 있는데 세대 차의 간격이기 전에 문화적 동, 서양의 미적 기준 가치의 차이점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종이를 가지고 벽면을 입체적으로 꾸며서 공간의 일부를 깊이와 넓이 두께를 나타내서 형상을 표현하는 데 어려서부터 익숙하다. 반 학생들의 얼굴과 체형의 높낮이 굴곡이 가족들의 평평한 외모와 덤덤한 애정 표시에 익숙해 지면서 부모들보다도 더 많은 혼란을 일찍이 받아들인다.

 서양의 입체적 이미지로 떠오르는 것은 유럽의 박물관에서 본 수 많은 조각품들, 고대의 대리석에서 청동, 철제, 유리 조각들은 공간 속에서 조화롭게 서 있었고, 공예품으로 왕족들의 화려한 그릇과 부조의 장식품, 보석류의 디자인들, 높은 옛 성과 고딕 양식의 뾰족한 탑, 여러 문양의 바로크 양식의 교회 건축물, 스테인 글라스의 신비로운 색채들, 주택가 창문들 앞에 놓인 갖가지 꽃들. 입체적 재단으로 몸매를 드러나게 만든 수 많은 장식의 드레스들과 깃털로 장식한 모자, 굽 높은 비단 구두들의 자수가 어우러져 입은 중세의 귀족들 전시실에서 내 기억의 단편 속에서 아스라히 떠오르는 우리의 것이 있었다.

 ㄱ 형의 단층집 기와 한옥과 절제된 선으로 만든 가구들, 단아한 곡선의 한복, 좌, 우 같은 버선의 코 끝 장식, 앞, 뒤와 처음과 끝이 하나의 실로 매듭 짓는 장신구 노리개, 설백색의 백자와 푸르스름한 청색의 청자, 풍속화 10폭 병풍은 평면의 유형이면서 주변 환경과의 조화 기능 사용에 따라 접고 펴고 변화를 집 안에서 했었다.

 동양화에는 공간을 구조적으로 구분하는 일정한 원근법 명암법이 없으면서 선으로 광활한 허공을 여백의 조화로 나타내었다.

 어린 시절 산수화를 보면서 강이나 계곡 속에 정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찾으며 울창한 숲 암석 뒤에 사람들은 조그마하게 그린 이유를 알 것 같다.

 세속 속에서 자연과의 동화였다.

 산 좋고 물 맑은 경관을 배경으로 어린 감상자를 그림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게 한 것이다.

 서양화로 맨 처음 기억에 남는 것은 세잔느의 정물화로 구조적 형체와 색채였다. 한국의 입시 미술로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20C 초 프랑스 회화의 유파로서 사물의 모양을 분석, 기하학적인 면을 표현하는 Cubism(입체파)이 생기고 추상 미술, 환경 미술, 설치 미술에서 소리, 빛까지 사용하여 지는 현대 미술의 흐름을 보면서 다 민족 문화를 수용하는 미국 사회 속에서 나의 의식은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자유 분방한 입체적 사고와 평면적 점과 점에서 끝 없이 이어지는 선을 추구하면서 두 가지 문화를 받아들이고 조화시켜서 보는 것 만큼 생각하여 조형의 극치미로 작업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써 살고 싶다.

백인 백색                                                                                                                  1995

 누구에게나 좋아하던 색상 속에서 자신의 성장함을 볼 수 있다. 지난날과 앞날, 현재의 자신의 빛깔을 알 수 있다. 여자 아이들은 붉은색(빨강, 분홍), 남자 아이들은 파란색(파랑, 초록)을 선호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미술을 전공하면서부터 보라색에 매혹 당했고 물건을 살 때, 그림을 그릴 때에도 그 색을 기본으로 하여 혼합색을 만들어서 채색하고 신비한 색의 기운에 빠지곤 하였었다.

인간들의 시력으로 볼 수 있는 색이 백 여 가지나 되나 눈으로 볼 수 없는 색 역시 수 백 가지가 된다. 어린 시절 비가 온 뒤 하늘에 수 놓은 무지개 색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면서 가슴 속에 사진을 찍어서 가끔씩 현상하여 황홀한 빛깔을 볼 수 있었고, 지는 해 석양의 빛, 그 형용할 수 없는 노을의 색도 간직하고 있다.

 아동화에서 주제의 상관없이 배경에 무지개를 그린다. 한국, 미국에서 자란 아이들도 무지개의 찬미가 시공을 초월해서 우리들 마음에 영롱하게 새겨져 있다. 

 색채학을 배우면서 색의 삼원색 빨강, 노랑, 파랑으로 만들어지는 색상환 10가지 색을 원으로 칠하면서 색의 개념을 알고부터 사람을 대하면서 인상이 주는 이미지와 색과 동일시 연관 시키는 재미가 생겼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7가지 유채색으로 나누다가 요즘은 3가지 원색으로 보여진다. 2가지 대비에서 1가지로 될 때가지…… 시야가 넓어져야 될 것 같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색은 친근하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색 일수는 없다. 각기 나름대로의 색감을 존중하고 싶다.

 때로는 보색의 대비에서 오는 극적인 효과도 보게 되고 동색의 대비에서 오는 안정감이 선의 절충을 하게도 한다. 인간관계와도 같은 백인 백색인 것 같다. 수 많은 색들이 혼합하여 절묘한 아름다움을 내는 색이 한 점으로 연결 되듯이 형상을 이루어서 그려지는 그림들을 대할 때마다 많은 색들의 조화야말로 미의 극치를 다 할 수 있다. 사회 조직의 한 일원으로써 한 점이 되어서, 자신의 한 일원으로써 한 점이 되어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하듯이 한 점, 한 점이 모여서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어려서 친구들에게 좋아하는 색으로 성격을 알아보는 놀이를 즐겨 하였었다. 이제는 성격으로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가늠하게 되었다. 밝음과 어둠으로 나누어 볼 때 심리적 치료에도 좋은 것 같다. 마치 꽃을 집 안에 두어서 빛깔과 향기로 생기를 느끼는 것처럼 밝은 색상이 주는 에너지는 큰 것 같다. 검정, 회색, 흰색에서 오는 무채색의 깊은 멋이 있다. 그 중간의 회색 중용의 의미, 심오한 색의 의미를 깨닫고 싶다.

 빈 마음으로 여러 모습의 사람들을 인정하며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나 자신의 혼탁한 색을 매일 닦아야 할 것이다. 각양각색인 여러 모양의 인간 모습 속에서 다양한 색깔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면서 나와 다른 그들을 알고 싶다. 그 속에서 다른 하나의 색을 만들고 싶다. 자연 속에서 보여지는 색상에 깊은 사색이 주어진다. 그리고 대가들이 끊임없는 열정의 작업 속에서도 그들이 만들어놓은 색의 절묘함을 볼 수가 있다. 가장 아름다운 색은 사람들이 사랑할 때의 색일 것이다.

 무색인 물은 그 모든 색을 만들기도 하며 되어 주기도 한다. 많은 의미를 주는 나의 색의 화두이다.

토요일

 12년 동안 매주 토요일이면 나는 문을 나선다.

7시에 일어나 내 준비가 끝나면 7시 30분에 아이들을 깨우고 학교에 갈 준비를 한다. 큰 아이가 한 살 때부터 남편에게 맡기고 유아반에 시작하여 올 해 고등반 졸업반이 되고 작년에 한국 학교 10년 근속상을 받았으니 세월이 그렇게 흘러간 것이다.

10년의 의미 인생의 한 단계 매듭을 그렇게 지어본다.

내 이민의 역사도 이렇게 한 매듭을 지어가고 있다. 매 학기 학생들은 달라도 몇 주가 지나면서 자음, 모음을 외우며 이름도 쓰고 가족 관계 태극기 한국 명절 등을 배우며 쓰기, 읽기를 하는 아이들을 보며 나에게 주어지는 사명감에 보람도 느낀다.

내 아이를 키워서 그런지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 하며 공감대를 가져서 눈높이 교육을 하려고 했고 수직 관계가 아닌 수평 관계로 대하니 지루한 수업보다는 서로 대화하는 방식을 취하는 교사의 테크닉도 가지게 되며 토요일 모처럼 늦게 일어나 T.V. 만화 보기를 원하는 아이들. 미국 학교에서 하는 여러 가지 행사도 물리치고 학교를 오는 아이들. 아직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도 없는 그들에게 효과적인 수업을 위해 부단한 노력 없이는 성과를 기대 할 수 없는 것이다.

 학생, 교사, 학부모가 일치되어 친밀한 관계에서 서로의 고충을 이해하고 양보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언어란 13세 이전에 습득하여야 영원히 기억 속에 남아 입으로 나오는 것이다.

첫 교시, 읽기 시간 새 단어를 card로 만들어 흥미유발을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시작하여 card game에 빠져있는 아이들에게 스티커를 주며 그날 제일 모범적인 아이에게 학용품을 상으로 주는데 반 학생들이 선출하는 것이다. 

미국 학교에서 민주 교육을 잘 받는 아이들이라 공평하게 잘 뽑는다. 2교시, 쉬는 시간을 끝내고 해이해진 수업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삼삼 박수도 시키고 가나다라 노래로 한 마음으로 모으기도 하며 때로는 stop 동작을 손은 아래로 얼굴은 책상 위에 턱을 내리게 하고 눈을 감으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는 것이다.  한시도 아이들이 딴전을 피우지 못하게 눈을 마주치며 무대 위에 선 배우인 것이다.  

 셋째 시간은 그 날 배운 문장을 칠판에 나와 쓰게 하면 처음에는 자신이 없어하는 학생들이 한자라도 맞으면 칭찬을 해주고 틀린 것 보다 try 하는 사람이 더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감을 부어주는 것이다.

4교시, 학생들은 각기 취미반 태권도, 무용반으로 가면 나는 학부형 재생 예술반을 가르치기에 일주일 동안 만든 재생 소품을 책상 위에 나열한다. 헌 옷을 잘라 만든 퀼트 조각, 꽃잎을 말려 만든 card, 종이를 갈아서 만든 handmade 종이, 가죽을 오려서 만든 코사지 꽃핀, 매 주 새로운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책을 보면서 선물가게에 가서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한다.  그 덕에 모아둔 소품을 올 해 1월 우리타운 도서실에 재생 예술 전시회를 하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늘어나는 한인 가구들이지만 지역 봉사에는 참여도가 없기에 나 스스로가 솔선수범이 되자는 차원에서 조그마한 나의 힘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타운에 많은 사람들이 문의도 오고 배우려 해서 여름에 summer program을 아이들 반과 성인용 반을 화요일 저녁에 강의하게 되었다.

이렇게 토요일을 아침부터 오후까지 보내니 집에 돌아오면 목도 잠기고 파김치가 되어도 그 성취감은 비교할 수 없고 덕분에 집에서도 훈련된 시간표가 몸에 베어 한 시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승리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공적인 삶은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 주어진 나날을 한 계단씩 밟고 올라가는 것이지 커다란 결과를 기대하고 살기에는 그 누구에게나 패배감이 오는 것이다. 토요 한국학교의 많은 문제점과 개선책이 요구되고 과도기 단계에서 97년 SAT 2에 채택되면서 풀어나갈 문제점이 많지만 우리는 그 과제를 안고 풀어가는 것이다.

 중국, 일본 그들도 우리와 같은 환경에서 진행 되었고 그 단계를 조금 일찍 받아들였던 것이다. 모든 일은 한 순간에 이루어 지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사인 나 자신이 깨어나야 한다. 지난 여름, 연세대 한국어 연수 4주 수업 참관에서 한국어 학당에서 공부하는 우리 2세들을 보며 무한한 힘을 얻은 것이다.  배낭과 티셔츠, 반바지 차림으로 더위 속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그들에게 한국을 사랑하는 한국인이라는 점을 보았다. 

이제 세계는 일일 문화권으로 지구촌이 되었다. 한국에서 사나 어느 나라에서 살던지 우리 아이들은 지구촌 어디를 가서 살더라도 살아가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나라를 이해하는 것은 언어와 음식인 것이다. 부모를 이해하게 하는 문화 전달체인 것이다. 나 역시 나의 작업의 컨셉을 한국 알파벳 자음과 모음을 표현화 하여 선으로 그리고 지도화 시켜보기도 하였다.

내가 10년 몸을 담고 보니 체취가 배고사 고속에 젖어 버린 것이다. 한국 학교 교육 현장에서 체험을 토대로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게 된 것이다. 한국의 정서 배경과 이곳 미국의 코스모 폴리탄 삶에서 얻어진 내가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물어가며 나는 판화를 하게 되었다.

 산을 나와야 산이 보이듯 나는 나의 학생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면서 더욱 더 나의 토양과 정신적 지주를 찾게 된 것이다. 나의 아이들에게도 나와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 작업을 하는 것이다. 끊어지면 다시 메고 더 단단히 조이고 느슨해지면 당기고 이렇게 나는 문화 전수를 생활 속에 담고 싶은 것이다. 

 

느낌이 좋은 사람                                                                                                         1995

  어느 모임에서나 느낌이 좋은 이들이 있다. 다 다른 직업을 갖고, 살아온 환경도 다르지만 첫 대면에 십년지기처럼 마음이 다가오는 것이다. 직관적인 총제는 감정의 집합소, 오감의 결산이 서로 맞는 것이다.  외모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가 코 끝에서 눈으로 전달되어 마음속에 퍼져서 속 마음과 겉 모습이 교화 되어 교감이 연결되는 것이다. 감성지수가 서로 맞기에 살아온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삶의 원기 회복과 활력을 주게 한다. 다양한 사람들, 그들의 색깔이 혼합되어 하모니가 이루어진다.
지식보다는 지혜로 산 이들에게는 편안함과 푸근한 인간미가 깃들어 있다. 남녀노소를 떠나서 수직관계 보다는 수평적 안정감과 편안함이 있다. 인간 내면 속에 다듬어진 단아함과 부드러움 속에서 강한 어떤 힘이 보인다. 나름대로 겪은 세월의 시련을 연금술로 잘 연마한 빛나는 광휘로움이 있다 진실성이 깃들어졌기에 대화를 깊이 나누지 않아도 일상성에서 풍겨 나오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진리의 출발점이 아닌가 본다.
정수의 투명함과 같이 맑은 것을 대하면 탁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아는 것 만큼 보고, 듣기에, 자신의 시야의 폭 만큼 느끼는 것이다.
그런 이들을 찾기 전에 나 자신이 되어 주어야 한다.
이기적인 주관적 사고와 흑백론 획일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중성 
다 양면성을 보아야 할 것이다.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다른 것이다. 서로 다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에 자기 점검이 필요로 말하기 보다는 들어주며 받기 보다는 주는 자세로 열린 마음이 되어야 길은 주어질 것 같다. 
이성 보다는 감정이 앞서고 이론과 실제는 차이가 있기에 돌아서면 후회되는 나날 속에서 자신의 기분 좌우 상태에 따라 남을 대하게 된다. 나의 시선으로 상대의 좋은 점을 볼 수도 있고 못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라는 옛 말이 있듯이 모든 원인 제공은 자신의 심성에서 나오는 것 같다. 
느낌이 좋은 이들과 만나 정감이 가는 대화를 나누며 향기 좋은 차 한 잔과 함께 깊은 맛과 멋이 있는 그런 사람들 모임을 따사로운 햇살의 봄 날에 그리워한

마음의 눈으로 보는 자연                                                                                              1995

새해가 시작 되었다. 
창가의 풍경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는데 새 숫자만이 주어졌다. 어디서 변화의 의미를 받아 들이는가? 
겨울의 세찬 바람, 푸르른 하늘 아래 버티고 서 있는 앙상한 나목에 새 둥지가 가지에 달려 있다. 다람쥐는 긴 꼬리를 날쌔게 움직이며 오르내리고 있다. 햇살은 언 대지를 감싸듯 비추고 있다. 다가오는 봄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새 천년에는 첨단과학의 산물, 미디어의 혁명, 인터넷 상의 한 점으로 지구촌은 일일문화권으로 들어가 가상공간에서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며 국가관이 무너지고 지구 안의 공간 시대에서 지구 밖 우주를 향하고 있다. 자연 속에서 인간들의 감성은 자아성찰을 통하여 문명의 노예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사고의 영역을 찾아야 한다.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기능의 다원화 속에서 개개인의 특성을 인정하는 다원주의에서 제각기 하나의 벽을 만들고 있다.
도시 속에서 쳇바퀴 돌 듯 현대인들은 문명의 이기 속에서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어가는 것은 무엇일까?
대 자연은 경전이며 인생의 교과서 이기에 그 모든 의문점은 눈 앞에 전개되는 자연 속에서 깨닫고 진리를 탐구하여야 한다.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생의 굴레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이다.

괴로움이나 고통도 자신의 향상을 위한 계기로 도전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열심히 갈고 닦는 마음공부는 기계문명이 준 개인적인 욕구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과거를 볼 수 있는 혜안을 뜨게 한다. 멀리 보고 크게 생각하는 여유는 광활한 우주의 숨결 그 공간을 보게 하는 것이다.

자기 훈련의 결과로 흐르는 물처럼 달관한 삶을 추구하며 자연 속에서 관조와 사색만이 현대인들의 진정한 명상의 휴식을 갖게 한다. 예전에도 그러했듯이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것은 계속 된다. 자연의 순환계는 시작도 끝도 없이 변하고 돌고 만유의 생성이 되어간다.

윤회의 무한성을 보여준다.                                     

사고의 영역이 넓어지고 나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 인간이 만든 지배 질서 속에서 더 무한한 자연의 법칙을 배우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지배 질서 속에서 더 무한한 자연의 법칙을 배우는 것이다.    
우주적 시선의 발생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그 전환점을 새해에 갖고 싶다. 고전 속에서 현대를 보고 어제의 실수를 오늘의 경험으로 터득해 가는 과정의 연속이 아니던가. 21세기는 시각적, 문화적으로 변화무쌍한 사이버 공간 속에 수십억의 신경 세포가 정보의 홍수 속을 헤엄친다. 마인드 바이러스가 침범하여 생각의 방향을 조정하며 생활의 압력을 이기는 그 원대한 힘과 초연해지는 무한한 잠재력의 원동력은 자연 그 속에 있다. 
새 천년이 열리고 세대가 교차되어 시공이 달라져도 영원한 신의 명 작품인 자연은 빛, 색채, 소리 그 모든 것을 창가의 풍경 속에 담아 내 앞에 주어졌다.

추석 한가위                                                                                                                 1995

가을의 바람이 거리에 스며있다.
맑은 햇살과 드높은 하늘 길가에 핀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국화꽃 향기와 들가에 핀 억새꽃 무르익는 풍성한 오곡백과 첫 가을의 수확을 조상님께 바치는 우리의 고유명절 추석 한가위가 다가왔다. 
한국 그로서리에 가면 사과, 배, 감, 대추, 밤, 햅쌀이 눈에 들어온다. 풍의 들판 농부의 순박한 땀의 결정체의 결실 팔월 보름 추석을 한가위로 하여 햇곡식과 햇과일을 이웃들과 나누며 수확의 계절을 맞이하였다. 겸허해지는 마음과 감사함이 마음 속 깊이 우러나온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녹음을 내뿜었던 이파리들이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와 숲 속의 청정한 공기와 물들어가는 낙엽들이 색채의 향연을 이룬다.
고즈넉한 밤 뜨락의 풀벌레 소리, 휘영청 뜬 달빛이 교교히 흐르는 이 가을, 밤에 취하여 시 한 수를 읊는 낭만을 가져본다.
아낙네들은 차례를 지낼 준비로 오랜만에 만나는 친지들과 얘기꽃을 피우고 성묘를 하며 조상님의 은덕에 자손들에게 유대감을 갖게 하며 아이들은 추석빔으로 사준 옷을 입고 처녀들은 맑은 달 아래서 강강수월래를 하며 춤사위를 돌아간다.
총각들은 새로 빚은 떡과 술을 준비하여 추수의 기쁨과 마음 설레게 하는 동네 아가씨를 위영청 뜬 달빛 아래서 사랑의 고백을 한다. 예쁘게 빚으면 고운 딸을 낳는다고 저마다 솜씨 있게 빚어서 솔잎을 넣어 쪄 만든 송편을 먹으며 풍년의 감사함을 기리었을 것이다. 가파른 세파 이국만리 이곳에서 명절이 오는지 가는지 잊으며 살다가 송편을 사먹으며 고국에 송금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에는 저마다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한 어린 시절의 명절의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가을 소풍 추석 빔으로 사준 꽃무늬 수가 있는 하얀 스웨터 쫑쫑 땋은 머리와 주름치마, 새로 사 신은 만화 그림이 그려있던 빨간 운동화의 공주그림이 너무 예뻐서 벗어서 따라 그려보며 가을 학교 운동대회를 손 꼽아 기다리며 찬합에 여러 가지 전과 떡들을 싸가지고 오는 친구들과 먹던 기억들……
집에 손님들이 가져오는 선물꾸러미들 사과궤짝, 태극당, 고려당 케익들, 뇌물이 아니라 정성이 든 마음으로 선물하는 미풍양속이 아니었던가 싶다.
나는 그때 부모님의 나이가 되어서도 받지도 주지도 않는 미국식대로 사는 잃어버린 풍습의 세대가 되어버렸다. 아이들은 한국학교에서 준비한 송편과 수업시간에 배우는 한국문화가 그나마 전통맥락으로 추석을 땡스기빙의 유래와 비교하여 배우게 하여 명백을 유지하게 한다. 
깊어가는 가을, 사색과 우수, 낙엽을 보며 다가오는 추석을 정신적으로 풍요함과 떠나간 그 많은 것들 사라져버린 아름다운 시간들을 떠오르며 맞아 들이리라.

내속의 나                                                                                                                      1995

나는 나이다. 
그 누구도 될 수가 없다. 그러나 가끔 나는 나이기를 거부한다. 40의 문턱에서 나는 나를 알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일 수밖에 없는 나를 인정하며 연민의 정을 갖게 되었다. 정신이란 자아의 추구이며, 자아란 무한성과 유한성의 의식의 종합이다. 자신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지난 날의 나 속에서 지금의 나를 찾아내는 작업이 자아추구인 것이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잠재의식 속의 내가 꿈 속에서 나타난다. 
어떤 불안 속에서 상실감에서 오는 절망감이 엄습을 할 때 나는 나를 자학한다. 하지만 나는 나인 것이다. 자기 내부 깊숙이 숨어있는 나와 나는 숨바꼭질을 한다. 타인들과 있을 때 잠자고 있던 내가 나를 깨운다.
그럴 때마다 연극배우처럼 나는 나를 조절하며 내 속의 나에게 더 참으라고 타이른다. 내 속의 나는 늘 그래왔듯이 잘도 숨는다.

아! 내속의 나를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다.

내 속의 나는 글과 그림으로 더 살아서 이미지화 된다.

그리고 나에게 미소를 보낸다.

자… 이제는 내 차례야, 네가 술래가 되어 나를 찾아볼래?

물어온다.

속의 나와 겉의 나는 의식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내 속의 나를 감추기 위하여 역으로 표현한 이중성을 더는 하지 않으리라. 젊음의 상실 체험에서 나는 내 속의 나를 찾아냈다. 중년의 위기 의식을 나 스스로의 상처치유를 하면서 극복한다. 나는 나 일뿐 그 누구도 될 수 없다.

나의 한계에 부딪힐 때 마다 나는 내 속의 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갈등과 고뇌 뒤에 깨달음의 승화를 가지게 한다.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나는 무한대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상상과 공상 속에서 내 속의 나와 만날 때가 본연의 내 모습이 그 속에 존재하는 것이


독일 학교와 가정생활                                                                                                  1994

뉴욕에 있는 독일학교에서 동양문화를 학생들에게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한국, 중국, 일본의 공통적이며 그 나름대로의 특색이 있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해 학생들이 실습할 수 있는 과제로 붓글씨, 매듭, 종이 접기 등을 준비 해 갔다. 3가지 모두 공통적이며 조금씩 특색이 있는 것이다. 

매듭도 중국에서는 옷의 단추 또는 장신구로 쓰이며, 일본에서는 기모노를 입을 때 허리에 국화, 매화 매듭을 하고, 한국에서는 한복의 노리개로 쓰듯이, 무술에서도 태권도, 쿵푸, 가라데가 있는 것처럼 역사적 배경으로 비슷하면서도 고유 나름대로의 다른 기법을 가진 것은 모두들 아는 상식이다. 그런 계기로 인하여 독일학교와 인연을 맺게 되어 학부형들과 한 달에 한번 모임을 가지며 박물관도 가고 공예도 함께 하게 되었다. 그 중 독일로 돌아간 친구들이 초청을 해주어 독일 여행을 갈 기회가 생겼다. 

독일 친구 Ullie와 2주간의 여행을 계획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필요한 도구와 민박을 하기에 한국적인 선물도 준비하였다. 인삼차, 도자기, 매듭 목걸이, 한국과자를 사가지고 떠났다.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 본 독일은 군복 색깔과 같은 색상들이 조화되어 모자이크를 해 놓은 듯 했다. 

아이들 없이 혼자 여행을 한다는 자유로움과 한편으로는 집안 일, 아이들 걱정이 떠올랐지만 기회는 주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다는 것과 허선생님의 말씀, “교사는 제자리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며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 이라는 말씀이 나를 많이 위로해주었고 용기를 주었다.

10시간의 비행을 끝내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리니 봄바람의 미풍과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피기 시작한 봄의 향기가 나의 모든 상념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마중 나온 모린은 두 뺨을 번갈아 포옹을 하며 나를 반겨 주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8년 만에 소련 역사학 박사 학위를 이번에 받았다고 한다. Wiesbaden으로 가는 길, 속도제한 없이 달리는 차들은 작고 빨강, 노랑색들이 많았으며 우리나라 brand인 현대 차도 많이 보였다. 길들이 깨끗하며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동네 길에 이르니 한국의 골목처럼 좁고 정원도 아기자기하게 나무와 꽃들이 심어져 있었으며 창가에 놓여 있는 꽃들과 커튼들이 미국 아닌 유럽의 한 곳을 왔구나 하고 실감 하게 되었다.

7살인 마크는 미국서도 봤지만 나를 보며 반가워 하며 선물을 주었더니 거실 탁자 위에 놓아 두었다가 개봉 된 것은 이틀이 지난 후였다. 아이들에게 인내심과 선물의 감사함을 배우게 한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에게 붓글씨로 한글이름을 쓰며 노래, 매듭과 사군자, 종이 접기와 바구니와 공을 만들어 보였다. 모린은 한국가구 약장과 선반, 일본 그릇, 중국 그림을 보여주며 미국서 구입한 가구 찻잔과 장식장들의 연대를 설명했다. 남편 얀은 사진작가로서 어려서부터 우표와 고서를 모은 수집품을 보여 주었다. 내가 처음으로 조선 우표, 북한 우표를 보고 놀라는 것을 보고 우표 한 장을 주며 독일이 통일 되었듯이 한국도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내게 준 우표는 백두산의 사진이 찍혀 있었으며 보통 우표의 4배나 되는 큰 것이었다. 

그들과 다음날 마인드에 있는 Gutenberg Museum에 갔었다. 유럽에서 인쇄가 처음 발명된 곳이어서 Gutenberg 동상이 마을마다 서 있고 박물관 안에는 배낭 메고 온 일본 학생들이 모여 서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안내서에 동양의 인쇄술 중 팔만 대장경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상의 업적을 이역만리 이곳에 까지 와서 들으니 감격해 가슴이 뭉클 해졌다.

세종대왕의 업적과 고서들로 한국관이 진열되고 중국은 초서와 붓, 벼루, 일본은 판화 색채술과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내가 다녀본 그 어느 박물관 보다 많은 것을 소장한 한국관이었다. 토요일이어서 야외시장이 열려 꽃, 과일, 차, 소시지 등을 팔며 아이들과 시장에 나온 사람들로 붐비었다.

장을 본 많은 이들이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고 가는 모습을 보며 늘 신과 가까이 대화하는 그들의 한 면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독이라는 나라는 라인강의 기적과 근면, 검소, 절약하는 국민성과, 철학을 즐기며 울창한 숲, 그리고 전혜린의 독일 유학시절 쓴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는 아직도 아끼고 좋아하는 책이다. 

그녀의 고독과 개스등을 얼마나 동경 했었던가.

많은 교회와 건물들이 2차 대전 때 폭격을 받았지만 옛 것을 보존하려는 면이 보였다. 복구 시키면서 허물어진 채 역사성을 간직한 곳도 많았다. 오후 4시에는 차와 케잌으로 가까운 이웃과 대화하는 시간의 여유를 가지며 사는 것이다.

그 시간에는 Cafe마다 만원이며 깨끗한 작은 앞치마를 두르고 차를 나르는 것이 도시마다 똑같았다. 프랑크푸르트에는 많은 한국 선물가게들이 있었다. 괴테의 집에 가니 아직도 작동하는 큰 시계와 부유했던 그 시절의 생활을 볼 수 있었다. 철학자가 많이 있듯이 거리 어디에서나 책 읽는 모습, 버스나 기차간, 음식점에서도 들고 다니는 것이다. Ullie 역시 선물을 책으로 주면서 그녀도 언제나 여행 중 읽을 책을 먼저 가방에 넣는 것이다. Junstanwerk 박물관은 건물 전체가 하얀색 사각유리로 현대식 건물과 옛 것 조화의 극치를 보였다. 유리창마다 크기가 다 다르며 밖의 풍경이 그림으로 보여지는 것이었다. 마치 액자에 담은 풍경화처럼 동양도자기와 일본 꽃꽂이가 전시 되었으며 단순미를 가진 현대가구, 선의 다양성을 보인 장신구, 그릇, 유리 공예품을 보았다. 

Graphic 분야에서는 요즘 유행인 재생예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헌 책 위에 붓으로 그림을 그린 것, 사진 위의 판화기법 등 내가 요즘 하는 작업과 같은 복합 매개체를 통해 보여주는 시각의 다양성을 보았다. Historic 박물관에서 안네 프랑크의 사진전은 나에게 감수성이 예민했던 중학교 시절 단체 관람 영화 감상 후 그 감동으로 일기를 열심히 쓰게 된 추억을 떠오르게 하며 전쟁의 참혹함을 학생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알리며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아이들 박물관에는 시대적 배경으로 만든 무대 안에 실제 사람과 같이 만든 조그만 인형들의 나열된 사진, 그림 보다는 흥미와 상상력을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 나 역시 그것을 보며 무대의 사람들 속에 들어가는 착각을 하며 쳐다 보았다. 일부의 짐은 모린 집에 두고 기차를 타고 뮌헨으로 갔다. 차장들의 상냥함과 유럽 어느 곳도 갈 수 있다는 기차선은 주말에 어느 나라든지 자유롭게 다니는 학생들을 보며 여행이 주는 큰 교훈을 그들은 배워 나가는 것이다. 

학교 교육이 주는 일반적, 전문적 지식을 떠나 교육의 현장을 배낭과 지도를 들고 떠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앞으로 나의 삶에 있어서 기존 방식을 벗어나 생각하는 것과 남의 것을 감상하고 내 것을 가지며 많은 시간을 감상, 대화 하며 자연과 같이 지내며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리라. 

기찻길 옆 못쓰는 땅을 개간하여 주말농장으로 밭과 화단을 가꾸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자연학습을 시킨다고 한다. 수풀과 산등성이 포도밭, 하이킹을 떠나는 노인들, 길 옆의 프라터너스 나무와 가지 잘린 뭉툭한 나무들이 인상적이었다. 기차 안의 음식점은 간단한 식사와 꽃이 테이블마다 놓여 있어서 안락해 보였다. 그리스의 집에 가기 위해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갔다. 두 마리의 고양이와 남편과 함께 사는 그녀는 결혼해 떠난 아들 방을 그대로 둔 채 언제라도 아들이 와서 편하게 지내다 가게 한단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그린 그림과 모은 돌, 바닷가에서 주운 조개, 낙엽 등을 모아서 만든 그림을 걸어 두기도 하였다. 

광장 시티홀에서 11시 반이 되면 시계탑의 인형들이 나와 음악에 맞춰 돌아가는 것을 보기 위해 많은 인파들로 붐빈다. 많은 이들이 이 시간에 약속을 한다기에 우리도 바브라를 여기서 만나기로 했다. 바브라는 미국에서 4년 정도 살다가 이곳으로 왔다. 박물관과 교회를 같이 가기로 하고 야외시장에서 점심과 맥주를 마시고 부활절 장식품을 사고 초콜렛도 샀다. 길가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들에게 동전을 주며 젊음이 있는 뮌헨대학으로 갔다. 

그곳에 가서 판화에 쓸 종이와 물감을 사고 안경을 샀다. 모두들 기막히게 멋있는 안경을 쓰고 다니는 것을 보고 나는 넋이 다 나간 상태였다. 유행이 미국보다 3년이 더 빠르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엽서도 보내고 전화도 하니 남편이 모두들 잘 있으니 구경 잘 하라는 소리에 안도감과 여행에 빠져 들어갈 수 있었다. 엄마인 내가 이렇게 새로운 것을 향해 떠나는 것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가를 느낄 때 나는 그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머리 속, 마음 속에 글로 그림으로 표현하여 돌아가서 이야기 해 주리라 마음먹었다. 바브라가 저녁을 초대하여 내가 만든 목걸이와 색종이 접기 할 재료를 사가지고 갔다. 

두 딸은 미국에서 살다 가서 그런지 영어도 잘하고 독일학교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미술시간도 공예보다는 뎃생을 많이 하며 음악시간도 실기보다는 이론이 많았다. 선생들도 독일 지향적이어서 딱딱하다고 한다. Ullie 곁에 앉아서 긴 이야기를 나누다 얇게 썬 무우 위에 얹어 먹는 햄은 구절판에 고기를 얹어 먹는 맛이 있었다. 밥과 김치는 생각 안나도 야채와 뜨거운 국물을 먹고 싶어 하는 나에게 다음날 도리스는 과일과 삶은 야채를 주었다. 과일과 야채를 수입하기에 흔하지 않고 비싸다. 종이가방을 주지 않기에 바구니 아니면 남자들도 천으로 된 가방을 가지고 다닌다. 우유도 우유병에 넣어서 팔고 다음 날 반환하며 거리마다 리싸이클 쓰레기 통이 구분되어 있었다. 

베를린에 도착하니 여느 도시와 달리 많은 관광객들로 뉴욕에 온 것 같았다. 
첫 날은 버스로 시가를 구경하고 전쟁 시 폭격 맞은 교회 옆에 루루와 콤팩트라는 스테인 글라스로 전면을 장식한 현대 감각의 건물은 인상적이었다. 소련인들이 달고 있는 군장과 물건들을 보며 이제 시대는 공산주의의 이념도 현실로 무너지고 세계는 평화로 단합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허물어진 한 벽이 아직 남아있는 동독을 보며 언젠가 우리도 38선이 무너질 그 날을 그려보았다. 

다음 날 전망대에 올라가 식사를 하며 1시간 반 돌아가면서 동독과 서독을 한 눈에 구경하였다. 건설의 붐이 일고 있는 동독은 아직 넓은 공간을 간직한 채 많은 투자로 개발을 한다고 한다. 마지막 여행지인 Ullie 부모님 댁으로 향해 기차를 탔다. 

반갑게 맞이하는 노 부부는 구운 빵과 케익을 주시며 환영했다. 어머니가 예전에 도서원이어서 그러신지 많은 책이 한 벽을 다 채웠다. 독일 화가의 책을 10여권 보여주며 설명을 하고 내가 다니면서 본 화가의 그림 설명도 해 주었다. Pauklee Hudertwasser의 그림 엽서를 주며 아이들에게 줄 부활절 선물도 주는 것이었다. 

우리들 이민 1세도 아이들에게 한국어의 강요에 앞서 우리들 자신도 영어를 배우려는 능동적인 자세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들 하는 그 모습을 보며 그들도 부모를 이해하고 서로간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부모가 결혼했다는 1200년 된 고슬라에 있는 교회에 가서 일요 예배를 드렸다. 알 수 없는 독일어지만 성스러운 분위기와 경건한 모습이 나를 깊은 사색에 들게 하였다. 성문 안에 도시를 이룬 곳에 물레방아가 돌며 시냇물이 흐르고 몇 백 년 된 큰 집들을 가게와 음식점을 하며 전통성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이제 여행도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모린 집으로 향하기 위해 기차를 탔다. 라인강을 끼고 석양을 등진 로렐라이 언덕을 보며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많은 성들을 보았고 그 성들이 박물관 호텔이 되었다고 한다. 

프랑크 프루트에 도착하여 마중 나온 모린과 마크를 보며 여행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엽서와 자료를 주며 다음 날 새벽 5시 떠날 준비를 하였다. 떠날 때와 같은 부피의 가방을 만드느라 물건을 안 사려고 했던 것이 그들은 여행을 처음 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얻은 여러 가지를 어떻게 정리하며 아이들에게 들려 줄 것 인가. 그 과제를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생각하였다. 미국은 각기 다른 인종이 모여 서로의 것을 지켜나가며 화합하여 복합문화를 이루어 뿌리내리는 곳이 아닌가?

미국에 사는 우리 학생들에게 두 가지 좋은 점을 택하여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사로서 끊임없는 개발과 좋은 본이 되어서 이끌어 나가는 이민 1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일시적인 패배와 실망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 우리의 문화를 전수 시키리라. 

먼 훗날 나의 아이들이 커서 이번 여행에서 준 새로운 결심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빌며 나에게 이런 기회를 만들어준 독일 친구, 허 선생님,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과 두 딸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    

1960년 나의 유년시절                                                                                                  1993

옆집에 사는 혜정이와 나는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소꿉놀이 친구였다혜정이의 부모님은 번지 없는 주막나그네의 설움을 부르신 백년설씨와 아내의 노래를 부른 심연옥씨였다중년층들 사이에서는 국민애창곡으로 아직도 불려지고 있다.

포마드 기름을 바른 짧은 신사형 머리 스타일체크 양복 주머니에 꽂은 실크 손수건웃으실  입이약간 옆으로 웃으시는 서구적인 멋쟁이의 모습으로 기억 속에 떠오른다심연옥씨의 한복은 나의 어머니의 한복과 달랐다반짝이가 많이 있는 양단이며 약간 구부러진 파마머리와  눈과 붉은 입술이 기억난다지방 공연 관계로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친구에게 과자를 사주시고   주셨다

교육자 집안인 우리 집과는 모든 것이 너무 다른 분위기가 어린 나에게는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해주며 유년기 시절 성장에  영향을 받은  같다아침이 되면 언니들은 학교에 가고 조용해진 집에자야 언니는 가정부로  일이 많기에 동생과 나를 밖에서 놀게 하였다

백목분필을 들고 나는 땅바닥에 엎드려  키만한 왕관을  공주를 그린다기다란 드레스와 꽃을 들고 레이스 달린 옷을 그리곤 했다학교에서 가져오시는 누런 시험지보다  위에 선명하게 그려지는분필이 흙색이 조화되는 감촉이 좋았으며 규격화된 시험지 종이보다 마음껏 크게 그릴  있는 땅에 그리는 것이  좋았다동생은 구슬을 가지고 놀다가  따먹기 한다고 내가 그린 공주를 발로 지우곤 했다이때 혜정이는 나에게 와서 자기집에 놀러 가자고 한다

사내 아이들이 하는  타기구슬치기 보다는 그녀 엄마의 소품도구 방이 나는  좋았다지금의 워킹크라젯이었다 하나 가득히 형형색색의  드레스와 한복반짝이 구슬타조  부드러우면서도 털은  몸을   감고도 남았다무엇보다도 나를 황홀케 하는 것은 유리구두였다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높은 하이힐에 구슬이 장식된 구두였다

  책으로영화로 아이들에게 책을 사줄 때도  유리구두가 나의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시간 가는  모르고 놀다가 점심 때가 되면 나를 부르고 나는  놀려고 혜정이와 같이 점심을 먹곤 했다가끔 안방에 가면 화장대 위에 있는 여러 모양의 화장품도 인상적이었다 유리병 속의 노란 액체아마 향수병이었나 보다엄마에게는 코티분 주황색의 동그란 상자와 폰즈 크림이 전부였는데 그것도 쓰기를 기다려 소꿉놀이 통으로 썼다.

나에게는 없는 여러 가지  화장품이 혜정이에게 있어서 나는 굉장히 부러워했던 것이다방바닥에 놓여있는 책이 있었다한글은 아니고 영어 책이었던  같다그림은 선명하게 떠오른다둥근 지구에서사람들이 떨어져가는 그림이었다우리와 다른 서양사람 그때는  미국사람으로   지구에서떨어지는 걸까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의문이 갔다 후의 그림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 집은 여호와의 증인 집안이었으며 여호와의 증인 책이었다는 것을…… 나는 근처 새문안 교회를 친구들과 주일이면 다녔었다혜정이 빽으로 시민회관을 무료입장 하곤 했었다지금의 세종회관 자리였는데 집에서걸어 5분도 안되었다 간판 영화선전맨발의 청춘 엄앵란신성일씨 모습과 간판이 바뀔 때마다 나는  간판 그림을 보고 영화가 바뀌는 것을 알게 되고 쇼트머리의 이금희씨가 소매 없는 검정 원피스에 층층이 실로  무대의상을 입고 춤출  움직이는  물결의 사건에 너무나 신기해하며 열심히 흉내를 내곤 하였다.

피노키오 만화영화 헤어졌을 때와 만났을  헤리일즈가 나오는  영화를 아이들과 작년에 보았을 나는 30   시절이 떠올랐다많은  공연을 보고 집에 와서  치마를 입고 흉내 내는 것을 보고무용에 소질이 있는  알고 엄마는 유치원 보다 내자동에 있는 무용학원을 보냈으나 꼭두각시 춤을  다른 사람들이 가져오는 인형을 쳐다보다 순서를 잊어버리고 집에 돌아와 엄마 앞에서 연습할  혼나는 것이 싫어서 나는 수송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다 기억으로 나는  아이에게도 야단보다는 마디의 칭찬과 격려를 중요시 한다 안목으로 보면 그만두는 것보다 지속적으로 하는게  좋기 때문이다  혜정이는 세검정으로 이사를 갔다수송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오가는 길에 많은 것을 보았다시민회관 중앙청을 지나서 오가며 만나는 외국인들이 신비의 대상으로 비추어졌다

  날씨에 걸친 밝은  카디건 스웨터와 금발머리 위에 걸친 나비  선글라스가 눈에 들어오고 학교  문방구에서  m&m 초콜릿을 10 사가지고 집에  때까지 아끼고 녹여 먹으면서 빨간색을혓바닥에 놓고 녹여서 친구들에게 보이며 피가 난다고 놀라게 하곤 하였다이렇게 여럿이 모여 걸어오면 찻길 건너 시민회관  구내식당 유리문에서 연예인들이 나온다남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면 후라이 보이 지금은 목사님이신 곽규석씨가 아이들에게 돈을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아득한  시절 이야기이다 돈을 가지고 아이들은 동네 길목에 있는 설탁 볶기 아저씨에게 달려가 볶기놀이를 하는 것이다  엄마는 나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언니들과같이 다니게 하고 설탕을 형제들에게 나누어주고 국자를 주며 집에서 만들어 먹게 하였다베이킹 소다를 넣어 부풀어 오를  우리는 환성을 지르고 쟁반 위에 부어서 옷핀 모양을 만들어서 놀았다설탕을녹여서 나무 젓가락에 부어서 만든 사탕도  맛있었다나의 유년시절의 추억과 시민 회관동네친구가 떠오르며 어린 시절 본대로 받아들이는 문화의 영향이 끼치는 것을   EQ(감성지수) 중요성을 중요시 하는 것을 동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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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 풍물이  가슴 속에 이렇게 살아있어서  시절  노래와 패션을 대하면 절로 나는  추억안으로 들어간다   연예인들이 고향의 가까운 친척분들 같은 반가움 심정이 되어 이야기 하고픈 마음이 난다.

추억의 중고품 가게                                                                                                    1993

  모든 중고품 가게가 그러하듯이 퀴퀴한 냄새와 온갖 잡동사니에서 배어 나오는 냄새가 그 가게에서도 났다. 50년대 옷, 반짝이는 스웨터와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는 스커트, 꽃이 달리고 베일이 있는 조그만 모자를 팔꿈치까지 오는 부드러운 세무 장갑, 재클린이 자주 들고 다니던 핸드백 스타일…… 지난 날 내가 꿈꾸었던 서구세계 미지의 땅 미국의 모습이 그 가게에 가득 차 있었다. 동네 주인의 안목이 엿보이는 수집품 가게였다. 대도시 Manhattan West 끝, 2nd Ave.와 3rd Ave. 사이에 많은 Vintage shop이 있다. 소호와 그리니치 젊은이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style을 이렇게 헌 옷 Second Hand Shop에서 사서 입는 것에서도 열기가 대단하여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손님들이 많은 것이다. 많은 디자이너들도 Flea Market에 가서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옛 영화 속에서 디자인을 찾는 것이다. 올 봄에도 D.K(다나 켈런)도 헐리우드 스타일로 상품을 내놓고 있다. 속옷부터 온갖 액세서리로 가득한 이 가게 구석구석에서 나는 ‘어머!’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물건에 쌓여서 앉아있는 그 인형은 30여 년 전 서울 동대문 시장(일명 케네디 구제품 시장)에서 어머니를 졸라서 사달라고 했던 깜박이 눈과 곱슬머리는 블론드 머리를 한 인형이었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그 인형을 들었다. 바로 내가 가졌던 깜박이는 눈을 가진 그 인형인 것이다.

60년대만 해도 한국은 미국의 원조를 받고 고아원으로 보내는 물건 즉, 구호물자를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동대문 시장에 흘러나온 것이다. 그 당시 아동복은 원색으로 빨강, 노랑, 파란색이 많았는데 미제옷은 파스텔 색조와 꽃 장식 레이스, 체크무늬 등으로 한국 아동복에서 볼 수 없는 디자인들이 많았다. 지금은 기성복들이 유럽 옷 못지않게 패셔너블하고 색상도 좋지만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는 그리 다양하지는 않았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 동대문 시장에 나오면 천을 파는 골목을 눈물을 흘리며 다니곤 했다. 아마 염색 화학품이 독해서 그 골목을 지날 때 눈을 비비며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골목을 지나 2층 계단을 오르면서 벽에 걸려있는 털 복실거리는 여러 모양의 스웨터와 맘보바지, 가슴에 수 놓은 미제 브라, 하늘거리는 잠옷을 쳐다보며 꿈에 젖은 듯 따라 걸어 3층 광장에 이르면 막 Box에서 꺼내놓은 옷을 다듬는 아주머니, 가위로 큰 옷을 자르는 이들-대개 미국인들 옷이 커서 한국인 체형에 맞게 다시 자르고, 재단하는 것이다. 한 구석에는 미싱 돌아가는 소리며 도시락을 먹으며 일하는 상인들, 옷을 사서 줄이려고 기다리며 앉아있는 사람들의 잡담소리, 흥정을 하면서 다시 지는 주인들…… 나는 그 케네디 구제품 시장을 가면 그곳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라고 생각하며,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그곳에 서성이는 착각을 연상하며 옷을 구경했었다.

단추만 모여있는 통 속에는 온갖 희한한 모양의 반짝이는 구슬이 있으며 요즘 유행하는 색색의 가는 Belt들이 뱀처럼 묶여있고 겹겹이 망사로 된 속치마를 사고 너무 좋아서 그것을 입고 발레 한다고 돌다가 온돌 방에 미끄러져 넘어진 기억도 난다. 도저히 학교에는 입고 갈 수 없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소꿉놀이를 했던 것이다. 그런 구호물들이 지금도 이 곳 미국에서 구세군으로 보내지면 후진국 나라로 보내지는 것이다.
한국은 5개년 경제 개발을 시도하였고 국민학교에서는 옥수수 빵을 급식하였으며 우유먹기를 국민 운동할 때였다. 그 후 중학교 가서는 가정시간에 재단을 배워 천을 사러 동대문 천 시장을 다니고 대학교에 가서는 양장점에 옷 맞추러 갈 때 천을 직접 사가지고 가려고 그곳에 가곤 했었다. 대학교 때 대학미전 풀품 시 작품 직조에 필요한 실을 구하다가 염색을 하여도 색상이 안나와서 구제품 시장을 가보니 어린시절 내가 기억한 만큼 화려한 옷들은 없었다. 싼 값으로 헌 미제 스웨터를 사서 풀어서 주전자에 나오는 김을 이용해서 곧게 만들려 해도 오래되어서 잘 되지 않아 곱실거리는 그 실감 자체를 이용하여 만든 작품이 특선이 되어서 나에게 기쁨을 준 시장이기도 하다. 그 때 그 추억이 여기에도 재료로 특이한 것을 구하려면 중고품 가게를 다니는 것이다. 가라지 세일, 엔틱 샵, 웨체스트 카운티, 버겐 카운티, 맨하탄 이스트 80가부터 90가의 고급 아파트 물건을 내놓는 것을 교회에서 운영하는 곳, Resale store 등 50여 곳을 알게 되었다.

지역에 따라 특성도 있고 가격차도 많다. New York Times지에서도 명소로 가끔 소개를 하는 것이 가난한 서민들 중남미 인들, 흑인들, 영세인 들만 애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끔 운 좋게 Antique을 갖는 행운도 있으니 보물섬이 따로 없는 것이다. 일본 물건들, 아기자기한 선물 용품으로 만든 것, 30년에서 40년 된 것, 그 당시 선물 받던 이들이 죽고 나서 흘러나온 것이다. 한복 수 놓은 손수건, 자기병을 보면 너무나 반가워 값을 생각 하지 않고 손에 쥔다. 25센트에서 시작되는 잡동사니에서 그림까지 없는 중고품가게. 오늘도 나는 추억의 깜박이 인형을 만나고 30년 흐른 세월을 생각하여 본다.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헝겊 인형. 얼굴을 연필로 그려준 눈, 코, 입 보다 누우면 눈 감고 서면 눈을 뜨는 그 인형을 갖고 나서 목욕할 때도 잠잘 때도 옆에 놓고 잤던 것이다. 머리도 비누질 하여 감기고 빗기도 하고, 인형 놀이를 하면 친구들이 부러워 나를 둘러 놓고 서로들 만지고 싶어했다. 딸 아이가 바비인형을 생일 선물로 받고 해 마다 나오는 다른 모양의 바비 인형에 매료되더니 요즘은 예쁘게 옷 입히고 책장에 앉혀 놓았다.  너무나 날씬한, 그래서 정이 안간다. 볼록한 가슴, 최신 유행옷, 화장까지 한 바비 인형도 처음 나와서 인기를 받지 못하더니 여자 아이들은 한 번씩 열병 앓듯이 갖고 싶어하는 선물 상품이 되었다. 추억의 책까지 나왔으니 벌써 역사상의 장난감이 되어버린 것이다. 50년만 지나도 골동품 가치로 간주되는 짧은 역사의 미국이어서 그런지 무엇이든지 잘 소장하면 희소가치에 의해 골동품 애호가의 품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군복을 입는 것을 많이 본다. 해군복 점퍼, 긴 독일 장 교복 코트, 육군 장교복, 액세서리도 훈장 모양이 많다. 50년대 동대문 시장에 군수물자 군복을 검정색으로 물감을 들여 팔았다고 하니 세상의 모든 일은 돌고 도는 것 같다. 지금의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부상하였고 세계 대 도시 안에 서울이 들어가는 경제 대국이 되었으니 지난 날 전시 후 한국은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곳 미국에 와서 아메리카의 드림을 안고 서부 개척자 파이오니아의 정신을 갖고 이제 이 땅에서 풍요했던 50년대의 미국을 더 이상 환상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서 한 번 이끌어가는 꿈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쏟아져 나오는 새 상품이 있어도 향수의 중고품가게에서 나는 지난 날과 그리고 먼 훗날의 꿈을 꾸어 보았다.

자기 이미지 만들기 (Self Image Making)                                                                    1993

사람들마다 자신들의 직업에 따라 그 스타일이 주어지고 우리들은 겉모습 치장에 그 나름대로의 신분을 알 수 있다. 물론 사람과 겉모습이 일치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겉도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래서 시간, 장소, 모임에 따라서 격식을 갖추어야 하지만 그 양식을 벗어나서 언제나 풍기는 그 사람만의 독특한 분위기도 주어지는 것이 진정한 멋을 아는 멋쟁이 일 것이다.

흔히들 멋이라고 하면 최고급 brand(상표)와 최신 fashion(유행)으로 온 몸을 감싸야 한다는 잘못된일류병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일시적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퇴색된 잡지 속 구식이 되어버린다. 그러기엔 지나친 유행을 따라가는 경박함보다는 지나치게 유행에 둔감해도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교복문화에 젖은 내 세대에는 가장 감수성이 민감할 때 수녀와 같은 순결을 뜻하는 검정치마와 흰 블라우스에 규정된 머리 스타일을 하고 검은 도마핀으로 꽂은 우리들은 대학에 가서 사회에 나가서 수많은색상과 선들을 대할 때 당혹해 할 수밖에 없었다. 기성복 역시 그리 많지 않아서 양장점에 가서 맞춤복으로 지어 입었던 기억이 난다. 카탈로그, 영화배우 등의 의상을 흉내 내어 왔다. 헤어 스타일 역시perm하고 cut을 하고 하다가 자신에게 편한 성격대로 자신의 스타일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민을 와서도 그 시절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이들도 있지만 때로는 심정의 변화에 따라 여자들은 미장원에 가서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하다가 남편이 원하는 대로 모양을 못 바꾸는 친구들도 더러 보게 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다양한 잡지와 Coordinate, total fashion, 교복 자율화로 각자 개성시대를 맞이하였지만 말이다.

예부터 옷이라는 것도 피부 보호와 신분을 나타내듯이 직장에서도 조금 신경만 쓰면 즐기며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많이 종사하는 그로서리에서 서서 일하기 편한 작업복에 깨끗한머리를 맡길 때 만지는 헤어드레서의 스타일을 보면서 편하고 안심하며 머리를 맡기게 된다. 또Boutique shop에서 saleswoman이 고객이 입을 옷을 유독 찾는 것만 보아도 고객심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Uniform을 입는 업종이나 service 업계도 청결함이 큰 인상을 주며, restaurant에서 음식을 serving할 때 손톱의 청결함과 깨끗한 화장법이 그 분위기를 더해주며, 상냥한 말씨, 미소가 기분을전달해 주는 것이다.

 Accessories의 역사가 원시시대 잡아온 동물의 이와 뼈, 털을 다듬어서 몸에 지니고 다님으로써 자신들의 용맹을 과시하듯이 오늘날 귀금속이 부를 나타내듯, 목, 손, 귀에 착용하면 말 그대로 액세서리가 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옷을 멋내기 위해서 입고 일본인들은 귀엽게 보이기 위해서 입고, 미국이들은 섹시하게 보이기를 염두에 두고,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분위기 스타일을 나타내기 위해 입는다고들었다.

진정한 멋이란 우러나는 멋과 더불어 풍겨 나올 때 어우러져 좋은 첫인상을 만드는 것이다. 지나침 보다는 절제의 미를 가꾸는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미국에서 자란 10대들은 어려서부터 색감각과 자신들의 체형에 맞는 멋을 더 알게 된다. 이런 아이들은 둔 부모들은 지나친 간섭을 하는 것 보다는 아이들이보는 잡지, TV 쇼 프로그램을 보면서 아이들을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며, 아이들과의 세대차이를 줄이는 길이다. 모든 것에 시행착오가 따르듯이 자녀들에게 그 감각을 기르는 기회를 경험하게 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멋이란 바로 자기 자신이 살아 있다는 하나의 표현인 것이다. 우리 모두 거울 앞에서 Self Image Making을 연습 해 보는 것이 어떨까?

창가의 사계절 풍경                                                                                                    1993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창가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바뀐다. 산수화의 절묘한 모습으로 은은하게 비치고 때로는 추상화의 기하학적인 선의 나열로 하늘과 큰 고목들이 어울러져 있는 막다른 골목 이어서 차들도 다니지 않으니 깊은 숲 속가를 연상 시킨다.

지난 가을 사슴 한 쌍이 긴 다리를 사뿐 거리며 골목어귀에 나와서 홀연히 그 숲 속으로 사라지곤 한다.

아이들이 엄마! 밤비가 나왔어 하며 환호성을 치며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말! 하고 창 밖을 보니 그림 같은 한 쌍의 사슴들이 보인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시간만 나면 넋을 놓고 창가를 내다보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내가 숨쉬고 있는 이 공간 속에서 우주의 본질을 깨닫게 하며 이 거대한 우주의 법칙 속에 극히 작은 일부분인 내가 어떻게 관련 되는가의 의문점을 갖곤 한다.

나 혼자 있는 시간이면 자연의 정취를 보며 몰입 하며 사색을 하는 것이다.

아름드리 나무가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자연 순환계에 감동을 하며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거기에는 몇 천년 내려오는 질서가 숨쉬고 있는 것이다.

우리네 인생도 그 고목과 다를 바 없는 대를 이어 인행 항로를 하는 것이다.

올 겨울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고 추워서 벽난로를 많이 지폈다.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위로 치솟는 불길은 붉은색 만이 아니라는 것 그 불은 무수히 많은 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심미안전인 눈이 뜨여서 알게 되었다. 과학적 지식으로 온도에 따라 다르다는 일반적인 상식 보다는 미적인 추구로 나는 불길을 쳐다보면 가장 절정기 불길일 때는 소리도 색상도 없이 불꽃이 타오르는 것이다. 고금동서를 통해 사랑의 열병을 불로 비유하지 않았던가! 타다 남은 검정 재도 완전히 연소되면 하얀 가루가 되어 한 줌의 부드러운 가루가 된다는 것도……

그 옛날 우리 어머니들도 아궁이의 불길을 지피면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지혜를 자연과 더불어 터득하며 나름대로의 생의 철학을 가졌던 것이다. 현대인의 기계문명 조직 사회에서 잃어가는 인간미를 우리는 휴가철에 자연의 품 속에 담가져 오면서 재충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자연의 품으로 영원한 고향의 안식처에서 수 천년 내려오는 이 굴레의 법칙, 하늘의 뜻을 안다는 40대에 이르러서 간혹 무릎을 치며 맞아! 그 말이 그래, 하며 나 혼자 소리를 치는 적도 있는 것이다.

하루도 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물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는다.

담는 용기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변하여 차가운 고체 얼음에서 뜨거운 김으로 수 많은 음료수로 신의 걸작품 자연과 더불어 인간의 작품 술로 우리들 곁에서 울고 웃는 것이다.

위에서 아래서 떨어지는 삼투압의 원리를 보며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원리를 적용시키며 때로는 비로 눈으로 대지를 적셔 주는 것이다. 물거품을 바라보면 무수히 일고 있는 그 물방울이 하얀 레이스로 보여질 때가 있다. 만지면 사라져 버리고 많은 아련한 꿈을 그 속에서 보는 것이다. 눈의결정체의 아름다움은 그 어느 작가가 그려 보았겠는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미세한 선의 아름다움에 나는 감탄해 마지 않는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돌아가듯 지, 풍, 화, 수. 그 자연 속에서 나는 무한한 진리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수용하기에는 나의 마음이 평정을 가졌을 때, 열렸을 때, 더 똑바로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하늘을 쳐다보며 뭉게구름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만들어 보기도 하며 여름날 풀밭에 누워 어려서 했던 구름 놀이를 해본다. 구름의 형상이 흐트러질 때 참! 지구는 회전을 하지 하며 못내 아쉬움도 가져보는 것이다.

스산한 저녁노을의 색이 그렇게 다양한지는 예전에는 미쳐 몰랐어요. 시 구절이 떠오르는 것이다. 분홍색 하늘이 주황빛에서 타는 노을이 불그스름한 색이 돼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는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눈물이 절로 흐르는 것이다. 이다지도 아름다움을 창가는 가지고 있다. 하나의 거대한 액자에 그 누구도 그려내지 못한 완전한 구도와 색상을 담고 수시로 변화무쌍하게 표현 해내는 것이다. 인위적인 작가의 Concept도 없다. 다만 그렇게 계절과 함께 내게 다가와 준다. 저 나뭇가지의 연결되는 수 많은 선과 이는 바람으로 흔들리는 가지가 교차되며 어우러지며 나뭇가지의 선들과 가끔 날아 앉는 새들과 나무줄기를 타고 오르는 다람쥐들, 햇살에 빛나는 배경을 인상파 화가들이 저 빛에 발하는 색감을 화폭에 담기에 인간이 만든 색에는 한계를 느끼어 작가들의 그 순간 빛에 빛나는 색상을 한 순간에 화폭에 담으려고 감히 시도들을 하지 않았던가……

어두운 아뜨리에서 빛으로 빛이 담긴 자연을 인상파 화가들은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겨울비가 나리고 있다. 쌓인 눈을 녹이고 적시고 있다. 기나긴 겨울 속에 봄이 그 안에 움트고 있듯이 이 차갑고 긴 겨울을 끝내고 푸른 잎 돋는 창가를 연상하며 한없이 파란 하늘과 찬 바람이 나의 영혼을 깨우고 눈 속에 얼은 흙의 유연성을 보며 그 속의 봄을 나는 마음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기다리면서……

독일 친구들에게 한국 문화를 가르치다                                                                        1993

 독일 친구 Ulry의 부탁으로 NY에 있는 독일 학교에서 아시아 문화를 학생들이 배우는데 동양의 물건과 풍습을 알릴 기회가 있었다.

한국인으로서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안고 고심하다가 우리 뉴욕 한국 학교에서 한국문화 시간에 가르치는 교재 중에 붓글씨, 매듭, 색종이 접기를 준비하여 갔었다.

그들은 동양(한국, 중국, 일본)의 서로 다른 글자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한글은 자음 14개와 모음 10개가 합쳐져서 글자가 된다는 것을 알리고 학생들의 이름을 한글로 써 주었다. 매듭은 기초 도래를 가르쳐 주고, 간단한 목걸이를 만들었다. 그 후로 많은 학생들이 더 배우기를 원하여 책과 사진을 보내 주었다.

그런 기회로 인하여 독일 학교와 인연을 가지게 되면서 각기 다른 일로 NY에 와 있는 독일 부모들과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박물관도 가고, 집을 돌아가면서 모여 각자 만들어온 Craft를 서로 배우고 만들기도 하였다. 아직도 7명이 계속 만나며 책을 만들기 위해 매번 사진도 찍고 체계적으로 일을 잘 진행하고 있다.

이태리, 스페인, 스코트랜드, 영국, 프랑스 등 독일인이 아닌 어머니나 아버지를 가진 아이들도 부모들 중 한 쪽이 독일인이면 독일 학교에 다니는 것이다. 같은 유럽인이지만 각기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임을 갖던 사람 중 한 사람인 Maureen이 독일로 돌아가면서 초청을 하여 14일간의 독일 여행을 하게 되었다. 학기 중이라 학교와 아이들, 남편, 집안일이 걱정이 되었지만 기회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다는 생각을 하며 허 교장 선생님의 ‘교사는 제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배우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며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 이라는 말씀에 용기를 얻어 독일행을 강행하게 되었다.

짐을 챙기면서 그곳에 가서 가르칠 재료들을 준비하였다. 붓, 먹, 도장, 매듭실, 색종이를 마련하고 민박을 4곳(프랑크프루트, 뮌헨, 본, 베를린)에서 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선물을 한국적인 것으로 고르려고 힘썼다. 미국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독특한 것을 사기가 힘이 들어서 직접 만든 화선지로 card를 만들고 포장지도 쓰며 매듭 목걸이, 종이 접기, 귀걸이 등도 만들어 학용품과 인삼차, 한국 과자를 가지고 갔다.

Wiesbaden에 사는 학생들에게 붓글씨와 사군자를 가르치고 부활절 때라서 색종이 접기로 공과 바구니를 만들어 계란을 바구니에 담긴 것처럼 만들어 장식하였다. 한글로 이름을 써 주며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들과 다음 날 Mainz에 있는 Gutenberg Museum에 갔었다. 금속활자가 처음 발명 된 곳이어서 책의 조각품과 Gutenberg 동상이 각 마을에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팔만 대장경과 우리 한국의 14c 책, 그리고 세종대왕의 업적을 글로 전시한 것을 보며 감격과 자랑스러움으로 가슴이 뭉클하였다. 내 나라가 있다는 것과 그 찬란한 문화의 조상의 후예라는 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 인가를 새삼 느꼈다.

같이 간 학생, 학부모들도 팔만대장경에 대한 설명문을 읽고 이렇게 일찍 문화가 발달 했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중국, 일본관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그 어디서 본 박물관보다 크고 소장품도 많았다. 그 전시를 보며 다짐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것을 알고 알리기에는 동, 서양 문화는 물론이며 지형적으로 가까운 중, 일 문화를 알고 그것과 다른 우리 특유의 문화를 배워야지만 자신 있게 우리 것을 알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인들이 라틴어를 배우면서 그들의 역사를 연구하듯, 미국에 있는 우리 한국 아이들도 한자를 배워야지만 우리 것을 더 자세히 알게 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한국어를 배우고 고등 반에서 한자를 배우는 것이 필요한 교과 과정인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하다 온 클라라 라는 학생은 미국학교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곳의 미술시간이 만들기보다는 뎃생을 주로 하며 주제도 일률적이어서 재미가 없고, 음악시간도 이론이 많아서 흥미가 없으며 선생들도 딱딱하다고 하면서 독일 지향적인 교사 태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독일 학교는 1~4학년들은 9시 반에 시작하여 11시 반에 끝나고 점심을 집에서 먹었으며, 5학년부터는 직업 반과 학구 반이 나뉘어져 있었다. 5학년 이상 학생들은 7시면 학교에 가는데, 이는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일찍 시작하고 끝내는 것이다. 오후 시간은 각기 다른 모임에 가입하여 배우는 것이 많았다. Maureen이 자기는 더 이상 운전수가 아니라고 한다. 아이가 학교도 걸어 다니고 자전거로 운동하러 가며 먼 거리는 버스로 혼자 다니기에 미국에서 바쁘게 Lesson 시간에 맞춰 데려다 주던 일은 끝났다고 한다.

현대식 집과 몇 백 년 된 집들이 마을마다 어우러져 있었고, 좁은 길목과 아파트는 한국 동네 길목을 연상 시켰다. 걸어 다니는 학생들을 보면서 내가 국민학교 시절 오전반을 끝내고 집으로 걸어가던 기억이 났다.

거리마다 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주부들의 모습이 시장 갈 때 어머니가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셨던 옛날을 상기 시켰고 우유도 병에 담아 팔아 다시 그 병을 돌려주는 것이 철저히 재활용을 하는 근면한 독일 시민의 생활을 보여 주었다. 기찻길 옆 안 쓰는 땅을 주말 농장으로 만들어 주말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자연 학습을 시키기도 하였다.

오후 4시가 되면 친구들과 차와 케익을 먹으며 대화를 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었다. Ullie와 다니면서 4시쯤이면 café에 가서 차를 마시며 기행문을 쓰고 그림도 그리곤 하였다. 저녁 6시 반이면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음식점과 꽃가게만 열었다. 어느 집을 가도 창가에 놓여 있는 꽃과 아이들이 만든 미술품과 그림이 있었고 각기 취향에 따라 모으는 수집품들이 달랐다. 골동품의 경제적 가치보다는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물건에 관심을 두고 모으는 것이다. 한국 고가구를 많이 갖고 있었고, 약재장, 문갑 등은 물론 중국그림, 도자기, 일본그릇 등 동양문화에 대한 관심이 아주 깊었다.

저녁시간에는 그 날의 일을 이야기하며 2시간 넘게 식탁에 모여 앉아서 먹는데 주부가 저녁준비에 그리 시간을 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빵, 햄, 치즈, 샐러드 등 같이 관광을 다녀왔어도 힘들지 않게 준비하는 것이 편해 보였다. 주부가 힘이 들지 않아야 아이들과 대화를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되는 것이다.

식사시간에 대화를 하는데 나 혼자만 독일어를 못하기에 모두들 영어를 하며 아이들 역시 서투른 영어를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나이든 노인들도 영어를 배우려고 모임을 만들어 일주일에 한번 만나 읽은 책을 서로 돌려가며 읽는다고 한다. TV에서도 영어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영어공부는 필수라고 하였다.

영어는 세계만국의 공통어로 통한다. 각 도시를 다니면서 영어로 물으면 다들 알아 듣는다. 우리 1세들도 미국에 살면서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강요하기 전에 우리들 자신이 먼저 영어를 배워야 하겠다. 서로 같은 평등한 관계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해야 하며 우리들도 조건을 갖춰야만 그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선생, 부모이기 전에 한 시대에 살고 있는 하나의 공동체임을 자각하고 2세들에게도 그것을 알려야 한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아이들은 각기 방으로 가고 어른들은 Wine이나 차를 마시며 다양한 대화를 한다. 그 날 구경한 박물관의 전시품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 주고 자신들의 수집품을 보여주는 데 나는 처음으로 북한 우표를 보았다. 놀라워하는 나에게 한 장을 주며 독일이 통일이 되었듯이 한국도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하이네의 시를 읽고 독일인들 특유의 역사성을 자랑삼고 라인강의 기적을 긍지로 여기며 그것을 지켜나가는 그들에게서 자부심이 보였다. 미국에 사는 우리 아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 라는 과제를 안고 돌아왔다. 나 자신의 끊임없는 개발과 스스로 좋은 본보기가 되어서 대화하고 공부하며 이끌어 나가는 이민 1세가 되어야 하겠다.

독일에서의 외국인들의 삶은 뿌리내리기 힘들어 보였다. 미국은 각기 다른 인종이 모여 서로의 것을 지켜 나가며 화합하여 뿌리를 내리는 곳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