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는 어떻게 2차대전을 피할수 있었나

과거 2차대전 기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태인 대량 학살에 스위스가 협조했었다는 사실이 한 독자적인 보고서에서 밝혀 졌습니다.

600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2차 대전 기간중 스위스가 수 천명의 유태인 피난민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독일로 돌려 보냄으로써, 이들 유태인 피난민들을 나치 강제 수용소의 학살 위협에 직면하도록 만들었다고 밝혔 습니다.

이 보고서는 또한 전쟁이 끝난후에도 스위스 정부와 박물관 및 은행,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던 자산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 주지 않았으며,원 소유주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태인들 이라고 밝혔 습니다.

스위스 정부는 지난 1995년, 2차대전 당시 유태인 피난민들을 독일로 되돌려 보낸 스위스의 피난민 정책에 대해 사과했으며, 유태인 희생자이 은행들을 대상으로 청구한 배상 요청에 대해서도 해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스위스

세기가 시작될 때 스위스는 섬유산업(직물과 의류)의 선두주자로서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1900년, 모든 산업인력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섬유산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많은 스위스인들이 이민을 떠났다 : 1900년에서 1910년 사이 50,000명이 자신의 고향을 떠났다. 동시에 많은 외국 근로자들이 스위스에서 일거리를 찾았다. 그들은 주로 건축분야에 종사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외국인 근로자가 전체 인구의 12%를 차지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과 중립

1차 세계대전 기간(1914-1918) 동안 스위스는 중립으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전쟁은 정치, 사회 그리고 경제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스위스는 자원이 부족했지만 고도로 산업화 되었고 관광산업에 의존했다. 때문에 최소한의 원료를 수급하기 위해선 전쟁 중인 국가들과 협상을 해야만 했다. 전쟁 기간과 이후에도 수입 석탄에 의존해야 했던 스위스는 (국내)수력 전기발전을 더욱 확장하게 되었다. 또한 증기 기관차에서 전기 기관차로의 전환에서 보인 스위스 철도의 선구적 역할은 많은 부분 전쟁으로부터 얻은 경험 덕이었다.
전쟁 중 여러 가지 이유로 사회 분위기가 악화 되었다 : 식품 수입 부족, 폭동, 급격한 물가상승, 현역 복무 중의 임금 삭감은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심각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전쟁 중 남성은 국경을 수비하기 위해 거의 어떤 보상도 없이 군복무를 해야 했다. 복무 중 삭감된 임금에 대해서도 보상받지 못했으며 전쟁 후 복귀할 직업도 없었다.
산업과 농업에 있어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전쟁에 대한 분노가 퍼졌고 좌파 내에 평화주의의 기류가(Max Daetwyler, Romain Rolland/로맹 롤랭) 흘렀다. 특히 국가 위원회에 주 48시간 노동과 사회 민주주의에 찬성하는 비례대표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1918년, 국외의 고난과 정치운동,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은 국내 파업으로 이어졌고, 11월 11일에서 14일간 스위스 전국에서 참여한 노동자와 노동조합원 총파업은 250,000명이었다. 하지만 거대한 병력 배치 앞에서 파업은 곧 허물어졌다.
요구 중 일부는 스위스 노동자를 대표하는 최상위 그룹 올텐 행동대(Olten Action Committee)에 의해 만들어졌고 처음 거부당하고 나서야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 국가 선거제도가 절대다수 대표제에서 비례제로 전환되었다. 또한 이미 모색되고 있었던 주당 48시간 노동 공장법도 통과되었다. 다른 요구사항들 역시 대부분 민주적 과정을 통해 실현되었다.
또한 전쟁으로 독일어 사용 국민과 스위스 서부(Romandie)의 프랑스어 사용 국민 사이의 긴장감이 악화되었는데, 전자는 독일에 공감하는 경향이 있고 후자는 프랑스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주의 활동

1차 세계대전은 국제 적십자사(ICRC)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적십자사는 회원국들과의 긴밀한 협조로 변화를 감당해낼 수 있었다. 적십자의 인도주의 활동 외에도, 1914년 10월 Central Agency for Refugees(피난민 중앙기구)를 설립했는데, 이미 12월엔 이미 1,200명의 자원봉사자가 기구에서 일하고 있었다. 관련 기록 파일들은 현재 유네스코(UNESCO)의 세계유산 문서 중 일부가 되었고 1916년에서 1919년까지 제네바(Geneva)의 라트 미술관(Musée Rath)에 본부 사무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스위스의 이러한 인도주의적 노력은 191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Julie Bikle가 설립한 “빈터루트 실종자 조사 서비스(Investigation Service for Missing Persons Winterthur)”도 있었다. 연방 평의회는 1916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양쪽 진영의 68,000명에 이르는 다치거나 아픈 군인들을 스위스로 보내어 회복하도록 하는 협약을 독일, 프랑스, 대영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벨기에와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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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변화

1918년 국민 발안으로 비례 대표제도가 만들어졌다. 그 결과 1919년 선거에서 자유 민주당(FDP)은 절반에 가까운 의석을 잃게 된다.

주요 수혜자는 사회 민주당과 농부 상인, 무소속(BGB)당이었다. 사회 민주당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머지 않아 소위 부르주아 블록(급진 자유 민주당/FDP, 보수주의자 및 GBG)이 스위스 정치를 장악하기 위해 움직임을 계속했다.
사회 민주당은 노동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국민투표와 국민발안 제도를 사용할 수 있었고 대립보다는 개혁을 추구하는 당으로 진화해갔다.

1929년, 사회 민주당이 연방 평의회 의석을 얻으려던 시도했으나 보수주의자의 반대로 실패했다.

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경제

1921년에서 1929년까지 컨베이어 벨트의 등장에 의한 대량생산 덕에 미국 내의 산업 생산량은 두 배로 뛰었다. 이런 번영은 번성 중인 연예오락 산업에 반영되었다.(“Roaring Twenties” – 광란의 20년대) 1929년 10월 29일(“Black Friday” – 블랙 프라이데이) 거품은 터지고 뉴욕의 주식시장이 90%까지 붕괴되었다. 경제공황이 곧 닥쳐왔고 미국 내에서 실업자 수는 1,500만까지 치솟았다. 미국 채권의 철수로 무역과 함께 유럽 내의 국제 결제 시스템이 무너졌다.
스위스는 특히 농업분야에 심한 타격을 받았다.(1929년부터 1935년까지 우유 값이 22% 하락했고 소 도축비용은 38%까지 하락) 수출용 제품을 생산하던 산업도 나쁜 영향을 받았다.(시계와 기계산업 수출은 59%, 실크 산업은 84%의 수출하락) 1936초까지 일을 구하는 실업자는 124,800명에 이르렀다. 일을 하던 사람들도 10%에 달하는 임금인하를 감당해야 했다. 그렇지만 미국과 독일에 비하면 아직은 견딜만한 수준이었다.

전반적 경제 동향으로 농업분야 고용은 하락했고 산업은 침체했으며 이런 동향은 생산분야에서 서비스 분야로 옮겨갔다.

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외교

또 다른 세계적 갈등을 피하기 위해 국제 사회는 1920년, 제네바(Geneva)에 본부를 둔 국제연맹을 출범했다. 국민투표에서 시민들이 아주 근소한 득표 차로 국제연맹 가입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두 개의 이데올로기 – 공산주의(communism)와 파시즘(fascism) –가 되도록 많은 영향력을 얻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스위스 정부와 다수의 국민들은 파시즘보다 공산주의가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1930년대, 스위스 외교는 파시스트의 힘에서 비롯한 위협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1935년 이탈리아의 Abyssinia(아비시니아 – 에티오피아/Ethiopia의 옛이름) 침공을 비난하거나 1938년 히틀러(Hitler)의 오스트리아 합병에 대해 국가연맹이 요구한 제재를 실행하지 못했다.

이와 동시에 USSR(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내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다.
스위스와 파시즘(fascism) 1922년, 이탈리아에서 첫 파시스트 정부가 정권을 장악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1903년 스위스에서도 우익“전선(fronts)”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전선의 지지세력은 중산층 자영업자와 농업인이었고 그들의 지도자 중에는 젊은 지식인이 많았다.
전선의 이데올로기는 다음 사항들에 근거했다.:

독재 우익전선은 독재 정부를 지지하며 독재정부는 의회 민주주의를 폐지할 것이다.

협동조합주의(Corporatism) 자본주의는 협동조합주의로 대체해야 한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은 협동조합에서 함께 일하며 그들의 갈등을 풀어나가야 한다.

국가주의(Nationalism) 우익 전선은 굉장히 국수주의적이었고 국제적인 것(공산주의, 프리메이슨 제도, 평화주의, 유대교와 같은)은 어떤 것이든 거부했다.
처음 일부 보수당은 우익전선을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의 동맹으로 여겼다. 하지만 우익전선은 결코 사람들 사이의 광범위한 지지에 기댈 수 없었다. 그들은 가혹한 전략으로 많은 이들을 소외시켰기 때문이다.
1935년 헌법을 개정함으로써 자신들의 정강을 도입하길 원한 우익전선이 개정을 발의하지만 다른 유권자 70% 이상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즈음 몇몇 의견의 흐름이 형성되었다. 일부는 나치(Nazi)의 ‘새로운 질서’를 지지했는데 지지세력은 두 파로 나뉘었다 : German Reich(독일 제국-2차대전 당시의 독일)에 합류하고 싶어 하는 쪽이 있었고 반면, 다른 쪽은 필요하다면 독일과 좀 더 협조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였다.
다른 그룹은 전체주의 정권에 대항하고 민주주의 권리를 지키는 것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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