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직업을 잘 선택하기 위한 방법

    < 어떻게 살 것인가 >

- 지은이: 유시민

- 도서출판 아포리아(2013년 3월)

- 독서 동기: 정치인 유시민은 매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그의 정연한 논리와 치열한 삶의 본모습을 들여다보기 전에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들은 직설적인, 즉 자기들과 다른 태도와 방식에 대해 불편해 하는 듯하다. 하지만 사람과 그 사람의 생각을 제대로 비판하려면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쨌든 이런저런 정치적 지향성과 방식에 얽힌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상 글쟁이다. 그의 글이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약간 버거울 정도의 깊이와 넓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단문 형식의 문장, 쉬운 용어, 매끄러운 글 전개,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설득과 공감을 이끌어내는 방식 등 닮고 싶은 부분이 많다. 그가 직업으로서의 정치판을 떠난 후, 그의 표현대로 ‘정치적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생각을 만나고 싶어 읽기 시작했다.

< 프롤로그 > 나답게 살기

o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책을 내자는 출판사의 제안을 받았을 때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자격이 있는가? 그런 책은 성공적인 삶을 살았거나 고매한 인품을 인정받은 사람이라야 쓸 수 있는 것 아닌가? 인생에 무슨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닐 터, 별 도움이 되지도 않고 옳다는 증거도 없는 ’공자님 말씀‘ 비슷한 것을 따분하게 늘어놓게 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했다.

- 하지만 결국 쓰기로 했다. 내 인생을 관통하는 목표와 원칙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무엇이었는지, 내 삶을 지배한 감정과 욕망은 어떤 것이었는지, 과연 나는 내게 맞는 삶을 살았는지 살펴보는 일이 앞으로도 짧지 않는 시간을 더 살게 될 내 자신에게만큼은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 비슷한 고민을 하게 있다면 혹시 참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o 작업이 수월하지는 않았다. 초고부터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책의 구성을 여러 차례 바꾸었다. 좋아 보였던 문장은 다음 날 읽으면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책을 여러 권 썼지만 이렇게까지 더듬은 적은 없었다. 이렇게 된 데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던 것 같다.

- 우선, 나를 드러내는 게 왠지 불편했다. 1988년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출간한 이후 지금까지 내 생업은 지식소매상이었다. 유용한 지식과 정보를 찾아 요약하고 발췌하고, 해석하고, 가공해서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 지식소매상이 하는 일이다.

- 내 자신의 인생 경험과 가족사, 살면서 느꼈던 개인적 고민과 감정을 직접 드러내는 글은 많이 써보지 않았다. 그런데 ‘인생론’을 쓰려니 어느 정도는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o 더 난감한 장애물은 정치적 자기 검열 습관이었다. 글쓰는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자기 검열을 한다. 글의 진실성, 논리의 정합성, 인간에 대한 예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 대한 존중, 그런 것들을 위해 자기가 쓴 글을 객관적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수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 자기검열은 성격이 다르다. 그것은 ‘정치적 올바름’을 갖추기 위해 무엇인가를 감추거나 꾸미는 작업이다.

- 십여 년 전 ‘직업으로서의 정치’에 뛰어들어 국회의원이 된 뒤로 내가 쓴 글은 모두 정치적 자기 검열을 거쳤다.

- 쉽지는 않았지만, 나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이 책을 썼다. 정치적 자기 검열 습관을 벗어던지려고 노력했다.

o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오래 덮어두었던 내 자신의 내면을 직시할 기회를 가졌고 그것을 드러낼 용기를 냈다.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감추거나 꾸미는 습관과 결별했다. 내 자신의 욕망을 더 긍정적으로 대하게 되었다. 마음이 내는 소리를 들었다. 삶을 얽어맸던 관념의 속박을 풀어버렸다. 원래의 나, 내가 되고 싶었던 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게 해서 내가 원하는 삶나답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o 나는 열정이 있는 삶을 원한다. 마음이 설레는 일을 하고 싶다. 자유롭게, 그리고 떳떳하게 살고 싶다. 인생이라는 짧은 여행의 마지막 여정까지, 그렇게 철이 덜 난 그대로 걸어가고 싶다. 내 삶에 단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 그렇게 사는 게 나다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 나는 이런 내가 좋다. 자유로움과 열정, 설렘과 기쁨이 없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o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은가? 의미 있는 삶, 성공하는 인생의 비결은 무엇인가? 품격 있는 인생, 행복한 삶에는 어떤 것이 필요한가?

제1장 어떻게 살 것인가

마음 가는대로 살자

o 나는 노는 게 좋다. 일도 좋지만 노는 건 더 좋다. 그렇다고 해서 맘껏 놀며 산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일보다 노는 걸 더 좋아하는 건 분명하다. 도통 놀 줄 모르고 오로지 일만 하는 사람도 더러는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 같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일중독증(workaholism)이라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런데 도무지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o 모든 사람이 박원순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일은 누구나 한다.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돈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먹고 살고, 아이들을 키우고, 부모님을 잘 모시고, 노후 대비를 하고, 그리고 여유가 있다면 재미있게 노는 게 목적이다.

- 만약 돈벌이가 되는 그 일이 즐겁기 까지 하다면 금상첨화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프로’라고 한다. 그 일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교사, 공무원, 가수 건축가 등 무슨 직업이든 좋아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프로다.

- ‘진정한 프로’가 되는 것, 이것이 삶의 행복과 인생의 성공을 절반 결정한다. 그런 점에서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일이 아니라 놀이를 앞자리에 두어야 한다. 일이 먼저가 아니다. 놀이가 먼저다.

o 내가 좀 아는 밴드가 하나 있다. 크라잉넛(Crying Nut)이다. 공식 홈페이지에서 크라잉넛은 ‘대한민국 록계를 말 달려온 최강자’를 자처한다.

- 크라잉넛 멤버들은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이 아니라 자기네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한다. 그렇게 하면 돈이 잘 벌리지 않는다.

- 크라잉넛은 ‘진정한 프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하고 싶은 일을 제멋대로 하면서 돈도 번다. 그래서 자기네가 행복하다고 침을 튀기며 자랑한다.

- 저 하고 싶은 대로 악기를 연주하고 저 좋아하는 노래를 자기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불러대는 크라잉넛은 나름의 인생철학을 담은 책을 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거창한 제목에 ‘좋아한다면 부딪쳐, 까짓 거 부딪쳐!’라는 부제가 딸려 있다.

o 무엇이든 좋아하는 일잘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나는 그것이 품위 있는 인생, 존엄한 삶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o 나는 크라잉넛 멤버들이 나보다 훨씬 훌륭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다. 왜, 어떤 생각으로 그 일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크라잉넛 멤버들은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설계했고 그 삶을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았다.

-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지도 않았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지도 못했다. 마음 가는 대로 살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 이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o 크라잉넛은 좋아하는 놀이를 직업으로 삼았다. 이것만으로도 ‘절반’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인생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 일과 놀이가 인생의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사랑과 연대(solidarity)라고 믿는다.

내 인생은 나의 것

o 청년의 고민과 숙제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청년기의 핵심 과제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o 나는 별 돈 들이지 않고 빨리 출세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법학과가 포함되어 있던 사회계열을 선택했다. 시험을 잘 보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선택이었다.

- 환갑을 눈앞에 두었던 아버지는 이상주의(아버지는 영문과를 권하셨다. 영문학을 해서 서양철학을 공부한 다음 동양철학을 더 공부해서 서양인들에게 동양철학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를 추구했는데, 고작 열아홉 살이었던 나는 현실주의를 택한 것이다.

- 내게는 무엇인가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없었다. 인생을 어떤 색조로 꾸미고 싶다는 소망도 없었다. 그저 현실에서 잘 적응했을 뿐이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 목표도 방향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살았다. 마구잡이로 살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때그때 눈앞에 닥쳐온 일을 나름 성실하게 열심히 하면서 살았다.

o 최선을 다해 ‘닥치는 대로’ 살았으니 후회는 없다. 생각해보면 그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인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 그러나 훌륭한 삶은 아니었다. 내 자신이 설계한 인생, 내가 원한 삶의 방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o 독재자 밑에서 공무원을 하거나 독재자를 찬양하면서 돈을 가져다 바치고 그 대가로 특권을 받는 재벌의 일꾼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좋지 않은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自尊)은 확실하게 지키고 싶었다.

- 이런 비뚤어진 세상을 향해 소리 한번 지르지 않은 채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면 내 청춘이 너무나 비천하고 남루해질 것 같았다.

o '닥치는 대로‘ 산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원망할 수 없다. 세상은 제 갈 길을 가고, 사람들은 또 저마다 자기 삶을 살 뿐이다.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S.Mill)의 표현을 가져다 쓰자.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o 가장 먼저 바꿔야 할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이제부터라도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살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은 절대 없어야한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을 더 훌륭하게 만드는 데 보탬이 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내 자신도 더 훌륭해져야 한다.

o 여태껏 오로지 남을 위해서 산 건 결코 아니었다. 세상을 위해 살았다고 주장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나를 위해,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는 인생은 훌륭할 수 없다는 관념에 눌려서 산 것만은 사실이다.

- 무엇에선가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때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히곤 했다. 행복을 느끼는 순간마다 누구에겐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꼭 그래야만 할 이유는 없었다.

o 내게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 권리가 있다. 이제부터라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 어떤 이념에도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떳떳하게 그 권리를 행사하고 싶다.

-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기쁘게 살고 싶다. 스무 살의 크라잉넛 멤버들처럼

왜 자살하지 않는가

o 나는 ‘먹물’이다. 좋은 뜻에서든 좋지 못한 뜻에서든 확실히 그렇다. ‘먹물 근성’이 있는 사람은 무슨 문제가 있으면 책이나 자료부터 찾아본다. 이것이 먹물의 약점이자 강점이다.

o 열등감은 삶의 기쁨을 갉아먹는 부정적인 감정 중에서도 단연 고약한 것이다. 열등감에 깊이 빠지면 자기 자신을 비천한 존재로 느끼게 된다. 그래서는 기쁜 삶을 살지 못한다. 기쁘지 않은 삶은 훌륭하기 어렵다.

o 예전에는 실존주의 철학이 넘지 못할 벽으로 보였다. 그런 것에 시간과 열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실존주의를 무시함으로써 정신적 승리를 얻었다.

-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문장과 논리가 난해한 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부조리와 한계에 천착한 문제의식에는 크게 공감한다. 사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잘 사는(well-being)데 관심이 있다. 그런데 아무리 잘 살아도 죽지 않을 도리는 없다. 사형 집행일과 집행 방법이 정해져 있지 않을 뿐, 살아 있는 인간은 모두 사형수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니 잘 사는 것뿐만 아니라 잘 죽는(well-dying) 문제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o 삶은 곧 죽음이다. 살아 있는 것은 다 죽는다. 지금 책을 쓰는 나도, 이 책을 읽는 독자도 모두 죽는다. 실존주의를 흉내내서 말하면, 이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부조리이다. 인간은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한 걸음씩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 다 살면 그 때 죽는 게 아니다. 살아 있는 모든 순간, 우리는 조금씩 죽어간다. 죽음은 단지 삶의 이면(裏面)일 뿐이다.

o 결코 영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과 충성을 서약한다. 죽음을 원해서가 아니다. 의미 있는 삶을 원해서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 인생 전체가 의미 있으려면살아 있는 모든 순간들이 기쁨과 즐거움, 보람과 황홀감으로 충만해야 한다.

o 그런데도 때로 그것을 잊는다. 오늘의 삶을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원한으로 채운다. 가진 돈이 많은데도 더 많은 돈을 얻으려고 발버둥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을 탕진한다. 이미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오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내일로 미루어둔다.

- 다른 한편에는 어차피 찾아들 죽음을 서둘러 맞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 반드시 건너야만 할 죽음의 강을 바삐 건너간다. 삶을 견디기 힘들어서, 더 살아야 이유를 찾을 수 없어서, 또는 죽음이 아니고는 표현할 수 없는 소망이나 분노 때문에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o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카뮈는 물었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삶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 정답은 없다. 누구도 타인에게 삶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대신 결정해줄 수 없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건 나름의 답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삶은 훌륭할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의미를 모르는 삶은 비천하고 허무할 뿐이다.

위로가 힘이 될까?

o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인생의 품격과 성패를 결정짓는 중대사이다.

- 부조리 가득한 세상에서 존엄한 인간으로서 품격 있게 살아가려면 나름의 답을 찾아야만 한다.

o 자기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타인의 위로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청년은 아기가 아니다. 넘어져 무릎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상처를 입어도 혼자 힘으로 일어나야 한다. 그런 사람이라야 비로소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o 삶의 의미는 사회나 국가가 찾아주지 않는다. 찾아줄 수도 없고, 찾아주어서도 안 된다.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 찾지 못할 경우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

o 자기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은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책임이든 사회의 책임이든, 닥쳐온 고통은 일단 내가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세상을 원망해본들 달라질 것은 없다.

o 오늘의 청년들 역시 자기 책임이 아닌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필요가 있다. 평생이 하루라면 20대 청년의 인생 시계는 겨우 오전 9시에 왔을 뿐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고 노력하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 그러니 절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라.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면 아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위로의 힘은 거기까지다. 아버지가 아들의 아픔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아픔을 견디는 능력을 상속해줄 방법도 없다.

o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o '왜 자살하지 않는가?‘ 카뮈의 질문에 나는 대답한다.

- 가슴이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있다.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너무 좋아서 더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오를 것 같은 일이 있다. 누군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시간이 있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미안한 사람들이 있다. 설렘과 황홀, 그리움, 사랑의 느낌…. 이런 것들이 살아 있음을 느기쁘게 만든다. 나는 더 즐겁게 일하고, 더 열심히 놀고,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손잡고 더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 미래의 어느 날이나 피안(彼岸)의 세상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렇게 살고 싶다.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o 일을 잘하는 사람은 놀듯이 한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면 일이 놀이만큼이나 즐거울 수 있다. 정치투쟁, 글쓰기, 연극 연출 이 모든 것들이 카뮈에게는 일이자 놀이였다.

- 그는 또한 ‘여자들’을 사랑했다. 스물두 살에 한 첫 결혼은 둘 모두의 거듭된 혼외정사와 아내의 마약중독 때문에 오래 가지 않아 파경을 맞았다. 카뮈는 곧바로 수학자이나 피아니스트였던 프랑신느 포르와 결혼했다. 하지만 다른 여인들을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요약자 주: 制度, institution은 사회적 제도로 번역되는데 사회학에서는 사회질서 유지의 본질적인 요소이면서도 인간의 본성에 부합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음)에는 단연코 반대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포르가 쌍둥이를 낳는 와중에도 다른 여자들을 사랑했다. 그가 사랑한 여인 목록에는 유명한 스페인 여배우도 있었다. 왜 두 번씩이나 결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카뮈는 많은 여자들을 사랑했다.

- 카뮈가 한 일, 그가 즐긴 놀이 그리고 그가 사랑한 방식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른 평가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카뮈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했고, 자기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놀이와 사랑에 열정적으로 임했다. 사회의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면서 많은 사람과 손을 잡고 협력했다. 그런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기에 자살하지 않았다.

o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이라는 임상심리학자가 수많은 관찰과 상담사례에서 얻은 결론 : 삶의 ‘위대한 세 영역’은 사랑, 일, 놀이이다. 이 셋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실제 이 셋으로 삶을 채우고, 여기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위대한 세 영역’이라고 하는 것이다.

- 나는 셀리그만의 견해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 셋 말고도 ‘연대(solidarity, 連帶)’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 연대는 일과 놀이를 함께하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구현되지만 또한 그것을 넘어선다. 세금을 납부하고, 병역의무를 이행하고, 투표를 하고, 정당을 만들고, 이웃을 돕고, 시위를 하고, 유기동물을 보살피고, 온실가스 배출과 에너지 소비를 자제하는 행위들은 모두 사회에, 국가에, 인류에, 생명에, 지구 행성에 대한 귀속감을 느끼고 표현하는 일이다.

- 연대에 참여하는 것은 일, 놀이, 사랑과 함께 의미 있고 기쁜 삶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다. 이것 없이는 삶을 완성할 수도 없고 행복을 누릴 수도 없다고 나는 믿는다.

o 누군가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다. “그래, 당신 자신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을 알겠다. 그러면 당신은 구체적으로 무얼 하면서 어떻게 살고 싶은 건가?

- 특별한 것은 없다. 무엇보다 먼저 내가 즐거운 일을 하고 싶다. 그 일이란, 배우고 깨닫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작업이다. 아내와 아이들, 어머니와 형제자매들, 삶과 세상에 대해 깊은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적은 수의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 세상과 민중에 대한 추상적 사랑보다는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고 몸으로 껴안는 실체적인 사랑을 더 많이 나누고 싶다.

- 나는 또한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더 넓게 연대하면서 살고 싶다. 사명감과 의무감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내가 기꺼이 하고 싶고 내가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하고 싶다.

제2장 어떻게 죽을 것인가

죽음이라는 운명

o 삶의 모든 순간은 죽음이라는 운명과 대비할 때 제대로 의미를 드러낸다.

o 젊은이들에게는 죽음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기치 못한 사고나 급성 질병에 걸려 갑자기 죽는 불운이 자신을 덮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은 알지만 아직은 살날이 무한정 남이 있는 것만 같다.

- 사실 청년들에게 시간은 아직 ‘희소한 자원’이 아니다. 조금쯤은 낭비해도 괜찮다. 방황과 시행착오를 겪어도 될 만큼의 여유가 있다. 이것을 가리켜 ‘청춘의 특권’이라고 한다.

o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고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훌륭한 삶, 품격 있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 나름의 견해를 세워야 한다.

- 그러려면 삶과 함께 죽음도 알아야 한다. 죽음을 모르거나 오해하면 삶을 망칠 수 있다.

o 나는 요즈음 죽음에 대해서 예전보다 자주 생각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자꾸 죽음이 생각나서 더 깊게 삶을 고민하게 된 것인지 선후를 알 수 없다.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을까.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 고민이다.

o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소설도, 영화도, 연극도 모두 마지막이 있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스토리가 크게 달라진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 품격이 달라진다.

-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이 길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은 더 큰 가치가 있다. 아직 젊은 사람일수록 더 깊이 있게 죽음의 의미를 사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남자의 마흔 살

o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이 젊은 시절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하기는 매우 어렵다.

- 진보든 보수든, 사상적 성향이 어떠하든 사람은 누구나 생물학적 성장과 퇴행을 겪는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자아 정체성이 형성되고 발전하고 변화하고 퇴행한다.

o 나이가 너무 많이 들면 남의 삶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일과 자리는 피하는 게현명하다. 대통령이 되는 것은 물론이요, 국회의원과 장관, 기업의 최고 경영자도 사양하는 게 좋다. 좋은 일 하자고 나섰다가 외려 큰 민폐를 끼칠지 모른다.

- 잘못하면 나라가 흔들리고, 국민의 생활이 꼬이고, 노동자들이 거리에 나앉고, 사람이 죽고, 강과 바다 뭇 생명이 숨이 막히게 된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 시대에 대한민국이 겪었던 사회적 비극도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o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이나 넬슨 만넬라 남아공 대통령이 바로 그런 예외적인 인물이다. 돌아가신 문익환 목사와 리영희 선생도 그런 분이었다. 보수지식인으로 알려진 윤여준, 남재희 같은 분들도 그렇다. 하지만 아무나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나이가 많이 든 후에도 철학적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킨 예외적 인물들은 공통점이 있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젊은 사람들과 수평적으로 대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분들은 나이가 많이 들어도 변함없이 개방적으로 생각하며 유연하게 행동한다. 나도 그렇게 품위 있게 나이를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o 나이가 많이 들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으면서 후배들이 지혜를 구하러 오면 조심스럽게 조언을 하는 선에 머무르는 게 바람직할 것 같다. 조언을 할 때도 꼭 옳은 생각은 아닐지 모른다는 단서를 붙이면 더 좋을 것이다.

- 예전에 이런 생각을 부적절하게 과격하게 표현했다가 ‘노인 폄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마흔 살이었을 때도 쉰다섯 살이 된 지금도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

o 나도 남들처럼 훌륭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 어떻게 사는 인생이 훌륭할까. 일단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 ‘하고 싶어서 마음이 설레는 일을 하자. 그 일을 열정적으로 남보다 잘하자. 그리고 그걸로 밥도 먹자. 이것이 성공하는 인생 아니겠는가.'

-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 나는 ‘먹물’인 게 확실했다. 글쓰기는 유익한 지식, 감동을 주는 정보를 남들과 나누는 일이다. 그런대로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죽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o 그대,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혹시 지금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더라도 자신을 지나치게 책망할 필요는 없다. 그건 그리 특별할 일이 아니다.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 대한민국 국민 여섯 가운데 하나가 1년에 한 번쯤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60대는 넷 중 하나, 70세가 넘은 노인들은 셋 중 하나가 그렇다. 생각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자살을 생각한 사람의 다섯 가운데 하나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다. 자살은 인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철학적 실존적 선택이다. 특별히 못나서 자살을 생각하는 게 아니다.

o 자살은 단순한 충동의 표출이 아니다. 누구도 가벼운 마음으로 자살하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마치 한 순간의 분노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목숨을 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음이 직접 동반하는 것보다 더 혹심한 몸과 마음의 고통을 겪은 끝에 자살을 감행한다.

- 학업 성적, 경제적 궁핍, 질병의 고통, 가족 간의 불화, 명예 실추, 타인의 비난, 풀 길 없는 억울함…그 동기가 무엇이든 다르지 않다. 그런 것들이 자존감을 회복할 수 없는 양상으로 파괴할 때, 인간적 존엄성을 회복할 수단이 남아 있지 않다고 느낄 때 자살은 탈출구가 된다.

o 세상도 인생도 다 굴곡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평화로운 번영의 시대가 있는가 하면 포연 자욱한 전쟁의 시대도 있다. 개인의 삶에도 내리막과 오르막이 있다. 사업은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선거는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사랑의 황홀함이 실연(失戀)의 쓰라림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것이 인생과 세상의 이치이다.

- ‘지금이 오르막인 게야. 그래서 힘이 든 것이야. 이 시간을 견디고 나면 다시 앞이 보일 거야.’ 그렇게 내 자신을 위로한다.

o 우리들 각자는 사회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생활 사건이 주는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o 공부의 출발은 호기심이지만 그 과정은 의심이다. 공부한 모든 사상을 다 받아들인다면 누구도 특정한 ‘주의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읽었지만 ‘주사파’가 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치였다.

- 글쓰기와 방송활동, 정치를 하는 동안 칭찬도 들었지만 욕도 참 많이 먹었다. 그렇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지는 않았다. 욕먹는다고 뭐 죽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며 지냈다.

o 내 나름의 ‘비법(秘法)’이 있기는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거리감’이다. 세상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좋은 세상을 원하지만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을 저주하지는 않는다. 좋은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믿지는 않는다. 내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는 경우에도 모두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 내가 하는 일들은 의미가 있다고 믿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임을 인정한다. 삶이 사랑과 환희와 성취감으로 채워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좌절과 슬픔, 상실과 이별 역시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요소임을 받아들인다.

o 내 삶에 대한 평가는 살아 있는 동안만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먼 훗날, 또는 긴 역사 속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내 스스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활동으로 내 삶을 채우는 것이 옳다.

- 그러니 내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살자.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얽매이지 말자.

찬 이성 더운 가슴

o 수출 제일주의와 더불어 박정희 독재의 이념적이 기둥이 된 것은 반공주의였는데, 공산주의 사상의 철학적 기초인 유물론(唯物論)도 부정하고 금지했다.

- ‘공산당은 유물론 철학은 신봉한다. 유물론자는 사람의 몸이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신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죽으면 물질로 분해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한다. 공산당은 종교를 부정하며 윤리 도덕도 없는 패륜 집단이다.’

- 중학교 ‘반공도덕’ 교과서를 만든 사람들이 유물론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알면서도 거짓말을 썼을 수도 있다.

o 나는 유물론이 공부할 가치가 있는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유물론은 인간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정신과는 무관하게 물질세계가 존재하며, 정신 역시 물질의 운동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또 유물론자라고 해서 반드시 종교를 거부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 유물론은 자연과 사회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는 데 다른 어떤 철학 못지않게 유익하다. 내가 관념론보다 유물론을 선호하는 것은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데 유물론이 더 큰 도움을 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관념이다. 죽음을 유물론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삶이 크게 일그러질 수 있다.

(*요약자 주: 우리 사회에는 합리적 근거 없이 집단적 광기로 몰아붙이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북한에서 빨간색을 쓴다고 해서 빨간색을 쓰는 집단을 종북좌파라고 몰아붙이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특정 집단이 쓰는 용어, 습관, 주의주장을 따로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고 싸잡아서 몰아붙이는 것은 사회수준의 저급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이론을 전개하면서 유물론을 활용하였다고 해서 유물론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것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참 유아적이고 집단적인 광기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공산주의건 자본주의건 어떤 이념을 신봉하건 관념론 철학(사유가 존재를 결정한다)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서 유물론(물질과 존재가 인식과 사유, 관념에 영향을 미친다. 가령 이 책을 읽다 보면 인간 사고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뇌라고 하는 물질의 작동원리를 규명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태도는 유물론적 접근입니다) 철학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나아가 관념론 철학이 기존 질서와 기득권층의 이익을 옹호하는 논리로 활용된데 대한 역사적 반론의 측면에서 유물론 철학을 자기 사상의 기반으로 삼은 측면도 있습니다. 하여튼 잘 공부하고 합리적으로 이유를 찾아서 주장해야 합니다. 이런 모든 경향들은 우리 사회가 비이성적, 비합리적, 비논리적인 면들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주장에 무비판적으로, 너무 쉽게 동조, 묵인하고 따라하면서, 애꿎은 특정 집단과 개인들을 ‘을’로 매도하고 ‘왕따’시키고 폄하하는 고약한 습성이 있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항상 잘 들여다보고 그 주장의 근거가 있는지 따져보고 나의 생각과 행동노선을 정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한 가지 수정하고 가야할 것은 공산주의의 반대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경제질서의 한 유형일 뿐입니다. 자유민주주의와 독재는 어떤 사회와 국가의 통치방식과 관련됩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와 독재라는 용어를 함께 섞어서 비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의 대척점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입니다. 자유민주주의의 반대는 진보적이건 보수적이건 독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살아오면서 자유민주주의의 반대가 공산주의, 사회주의라고 세뇌 당해왔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대공항을 거치면서 자본주의 경제질서 안에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적 요소가 많이 녹아있습니다. 공정거래를 위해 국가에서 규제를 하거나 사회보장, 공적부조를 도입한 것 등은 모두 양 주의가 수렴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이제 특정 철학과 경제적 사조를 공부하고 믿는다고 해서 ‘빨갱이’라고, 또는 ‘극우 보수’라고 몰아붙이는 주의주장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o 죽음은 무엇인가? 생물학적으로는 신비로울 게 하나도 없다. 죽음은 곧 세포의 소멸이다. 인간은 약 100조 개의 세포를 가진 다세포 생물이다. 팔이나 다리, 눈, 신장 등 신체 장기의 세포 일부가 통째로 사라지거나 죽어도 사람은 살 수 있다. 심장 박동과 호흡, 두뇌활동이 정지되어 모든 세포들의 기능이 총체적으로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야 사망한 것으로 인정한다.

o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고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모든 신체활동과 정신활동을 세포 덩어리가 관장한다. 인간 정신은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인 뇌세포 활동의 산물이다. 물질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 정신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유물론에 기대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의 죽음과 나의 죽음

o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을 ‘나’로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지성적 ‘자아’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나’는 이 세상에 하나뿐이며 단 한 번만 살 수 있다.

- ‘나’는 욕망에 끌린다. 먹고, 마시고, 자고,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싶어 한다.

- ‘나’는 감정을 느낀다. 기쁨, 슬픔, 질투, 황홀감, 경쟁심, 동정심, 그리움, 적개심, 외로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휘둘린다.

- ‘나’는 과거를 기억한다. ‘나’를 행복하게 또는 고통스럽게 했던 사람과 사건과 관계를 비판적으로 기억하면서 성찰한다.

- ‘나’는 소망과 지향을 지니고 있다.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어서 혼자 또는 남들과 함께 어디론가 나아간다.

- 사람은 지문이나 염색체만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각자 다르게 배합되어 상호작용하는 욕망과 감정, 기억과 지향이 사람을 서로 다른 철학적 자아로 만든다.

o 언젠가는 죽어야 하고 잊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이다. 살아 있는 동안,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를 ‘나’로 인식하는 철학적 자아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 ‘나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무엇을 할 때 살아 있음을 황홀하게 느끼는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인가? 내 삶은 나에게 충분한 의미가 있는가?’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인생의 의미도 삶의 존엄도 없는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o 나는 ‘운동(movement)'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학생운동에서 청년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 정치운동까지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때가 없었다. ’하고 싶다‘는 욕망보다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이끌려 사는 인생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나들이를 가는 것과 비슷했다.

- 마흔 넘어 정치를 시작한 다음에도 그랬다. 장관을 할 때도 다르지 않았다. 마음이 전혀 없이 억지로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하고 싶다기보다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공익근무라고 생각하면서 했다. ‘제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o '나는 어떤 사람일까?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온 것일까? 계속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긴 시간 내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누구를 사랑하는지 잘 안다. 내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나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

-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o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면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피지배계급만이 현실을 변혁하려는 진보적 의식을 가질 수 있다. 지배계급은 당연히 현상 유지를 바라는 보수적 의식을 가지게 된다.

- 과연 그럴까? 대학생 시절 『공산당 선언』을 읽으면서 품었던 의문이다. 중산층출신에 공부도 잘했던 마르크스는 왜 공산주의자가 되었을까? 맨체스터 방직공장 자본가의 아들로서 그 자신도 자본가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왜 마르크스의 사상적 동지이자 후원자가 되었을까? 그들의 의식은 어떻게 계급의 제약을 넘어설 수 있었을까? 똑같은 의문을 다르게 표현해 보자. 소득수준이 낮은 유권자들이 부자를 섬기는 부자정당에 투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o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월 소득 2백만 원 이하 소득계층의 유권자 셋 가운데 둘이 박근혜 후보를 찍었다고 한다. 킬힐을 신고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서울 강남 청담동의 젊은 여성 유권자가 왜 촛불집회에 가담하고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것일까? 같은 선거에서 월 소득 7백만 원 이상 최고소득계층 유권자 열 명 가운데 넷 이상이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1천만 명이라는데 그들은 왜 진보정당에 표를 주지 않을까?

- 나는 계급적 귀속이 사회적 의식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가 아니며 가장 결정적인 요소 역시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식의 주체는 계급이 아니라 개인이다.

o 삶은 욕망(色)과 규범(戒)의 충돌이라는 말에도 나는 공감한다. 나는 주로 규범의 세계에서 살면서 남들한테 욕을 먹지 않을 만큼만 욕망의 세계를 넘나들었다. 이러면 안될 텐데, 늘 자책하면서. 그렇게 산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 그러나 남은 삶을 어떻게 사느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해서 계속 지금까지 살았던 것처럼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o 내게는 매순간 미래의 삶을 새로 설계하고 새로운 도전을 할 권리가 있다. 물론 욕망을 충족하는 것보다는 규범을 따르는 삶이 더 훌륭할 수 있다. 개인을 중심에 놓고 생각할 때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unselfishness)이라는 라인홀드 니버의 말이 옳다고도 본다.

- 욕망을 억압하면서 규범을 따르는 일이 참기 어려울 만큼 어색하고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면 욕망을 표출할 수 있는 문을 더 넓게 열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규범은 자기 자신이 기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따르면 된다.

레이건의 작별 인사

o 나는 몸보다 정신이 먼저, 생물학적으로 사망하기 전에 철학적으로 먼저 죽는 것이 두렵다.

- 예순다섯 살 넘은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52만 명이 치매를 앓고 있다. 환자의 딸 아들, 며느리 사위에 손녀 손자까지 합치면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생물학적 죽음보다 먼저 찾아온 철학적 죽음을 고통스럽게 경험하는 중이다.

o 나이를 먹고 죽는 것도 삶의 과정이다. 그런데 중증 치매에 걸리면 자기 주도적으로 죽을 수 없다.

o 로널드 레이건은 아흔네 살 나이로 2004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미국 대통령을 두 번 지냈으며 죽기 전 십 년 동안 알츠하이머 병을 앓았다.

- 그는 보기 드문 방식으로 이 병을 맞아들였다. 알츠하이머병 확진을 받은 사실을 미국 국민들에게 알린 것이다. 이 담화문에서 레이건은 병을 공개하는 것이 치매에 대한, 그리고 환자와 가족이 겪는 고통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 바란다고 했다.

- 그리고 자신은 조국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죽음으로 가는 마지막 여행길에 나섰으며 나라의 앞길에 밝은 아침이 올 것임을 믿는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o 레이건은 미국 경제를 망쳤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기 위해 정부와 국민을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 곳곳에서 전쟁을 벌여 죄 없는 어린이와 여성, 노인들을 폭격과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게 만들었다. 전쟁터로 내몰렸던 미국 청년들도 숱하게 죽고 다쳤다. 미국 안에서나 밖에서나 정의와 평화를 해쳤다.

- 나는 레이건이 훌륭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훌륭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레이건은 철학적 자아의 죽음에 의연하게 대처했다. 그의 담화문은 자유의지를 가진 지성적 인간으로서 할 수 있었던 마지막 결단이었다.

존엄한 죽음

o 2011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아기는 47만 명이었다. 같은 기간에 26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 머지않아 신생아와 사망자의 수가 역전될 것이다. 사망자 26만 명 가운데 3천6백 명은 열아홉 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한창 일할 나이인 40대 사망자가 2만 명에 가까웠다. 16만 명은 70세가 넘은 고령자였다. 사망자 열 명 가운데 일곱은 병원이나 요양 병원에서, 두 명은 집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나머지 한 명이 사망한 장소는 사회복지시설, 도로, 일터 등 병원도 집도 아닌 곳이었다.

o 사람은 대부분 병에 걸려 죽는다. 압도적 다수가 암, 뇌혈관 질환, 심장 질환, 당뇨병, 폐렴, 고혈압, 간 질환 등의 질병으로 사망한다.

- 질병 다음은 자살이다. 2011년 한 해 동안 1만 6천여 명, 하루 평균 4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자가 여자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 교통사고 사망자는 자살자의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언론보도만 보면 사람들이 온통 자살, 범죄, 교통사고, 자연재해, 산업재해로 죽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은 대부분 병에 걸려 죽는다.

o 열 살도 되기 전에 죽은 아기와 어린이들의 경우에는 교통사고, 암, 선천성 장애가 주된 원인이었다.

- 열 살부터 서른아홉 살까지, 몸과 마음이 가장 건강하고 활기찬 인생 황금기의 최대 사망 원인은 자살이다. 10대 사망자는 넷 중 하나, 20대 사망자는 둘 중 하나, 30대 사망자는 셋 중 하나가 자살이었다. 마흔 살이 넘어가면 모든 연령층에서 암이 가장 큰 사망 원인으로 떠오른다. 그래도 40대와 50대는 자살이 여전히 두 번째로 큰 사망 원인이다. 60대가 넘어가면 비로소 암, 뇌혈관 질환, 심장 질환이 3대 사망 원인이 되어 자실이 뒤로 밀려난다. 그러나 이것은 고령층에 질병 사망자가 많아서 그런 것일 뿐, 실제 자살률은 고령층이 가장 높다.

o 오래 사는 것은 좋은 일인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장수(長壽)는 기회인 동시에 위험이다. 운이 없거나 잘 대비하지 못하면 재앙이 된다. 일정한 조건의 충족되는 경우에만 장수는 축복이 된다. 무엇보다 먼저 삶이 의미가 있고 사는 것이 즐거워야 한다. 장수는 또한 건강해야 축복이 된다. 마지막으로 어느 정도는 돈이 있어야 장수가 축복이 될 수 있다.

o 사람들은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가훈이나 좌우명을 정하고 삶의 지혜를 담은 책을 읽는다.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고 싶어서 이른바 ‘자기 계발서’를 읽는다. 모두들 좋은 삶, 성공하는 인생에 관심을 둔다.

- 그런데 오직 사는 데만 집중할 뿐, 잘 죽는 법을 알고 품위 있게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o 이제는 살아남는 것, 오래 사는 것 자체가 삶의 목표일 수 없는 시대가 왔다. 죽음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일상적인 사건의 되었다. 사망자의 절대 다수가 노환과 만성 질병으로 서서히 죽는다.

- 죽음은 무작정 기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차분히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o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나날들이 지속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만약 그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나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추구하던 가치들, 한때는 기쁨과 의미를 주었던 모든 것들과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 작별하는 것은 누구도 막아서는 안 될 자유이며 존엄한 권리라고 나는 믿는다. 남겨줄 재산이 없어도 유언장은 써두는 것이 좋겠다.

자유 의지

o 존엄이란 무엇인가? 이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디그니타스(dignitas)'이다. 존엄은 일상 언어생활에서는 존경과 고귀함을 의미한다. 인간 존엄성의 필수 조건은 자유의지(free will)이다. 살든 죽든, 인간의 존엄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o 스페인의 라몬 삼페드로는 스물다섯 살 때 물이 빠진 해변에서 떨어져 7번 경추를 다쳤고 이후 30년 동안 누워서 생활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유를 잃은 고통은 살아 있는 한 벗어날 수 없었다.

- 라몬이 제안한 준칙은 “기쁨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로지 벗어날 수 없는 고통만 남은 상황에서, 그 고통을 견디면서 삶을 이어나가는 데 스스로 아무 의미도 부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이 자유의지에 따라 죽을 권리를 인정해주자.”는 것이었다.

제3장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쓸모 있는 사람 되기

o 글쓰기에도 재능이 필요하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연습과 훈련을 해야 한다. 스릴러 작가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스티븐 킹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글을 쓰면서 놀았다. 선생님들을 놀려먹는 글을 쓰거나 극장에서 본 공포영화를 소설로 만들어 친구들에게 팔았다가 징계를 먹기도 했다.

- 글을 잘 쓰려면 어휘를 많이 알아야 한다. 나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1부를 다섯 번 넘게 읽었다.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과 황석영 선생의 『장길산』도 여러 번 읽었다. 어휘가 풍부하고 문장이 아름다운 문학 작품을 반복해서 읽는 것은 베껴 쓰기 못지않게 어휘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된다.

- 또 다른 훈련법은 작은 수첩을 지니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메모하는 것이었다.

o '폐 끼치지 말고 살자.‘ 이것이 내 좌우명이다. 남들에게, 사회에 폐를 끼치지 않고 살려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착한 사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만 기본은 ’쓸모 있는 사람‘이다.

o 나는 글을 쓴다. 이것이 내 일이다. 내게 글쓰기는 단순한 생업이 아니다. 글을 써서 내 생각과 내가 가진 정보를 남들과 나누는 행위 그 자체가 즐겁고 기쁘다. 글쓰기는 그런 면에서 놀이이기도 하다.

- 그런데 일이든 놀이든, 이것이 제대로 의미를 가지려면 내가 쓰는 글이 쓸모가 있어야 한다. 독자가 공감하고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혹시라도 누군가 내 글에서 재미에 덧붙여 깨달음이나 감동까지 얻는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o 나는 많이 읽히는 동시에 훌륭한 책을 쓰고 싶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읽고,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고 써야 한다. 그렇게 열심히 하면 훌륭한 글쟁이는 못되더라도 최소한 쓸모 있는 글쟁이로 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즐거운 일을 잘하는 것

o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벌어 생계를 이어가려면 꾸준히 일을 해야 한다 놀이는 삶의 위대한 영역 가운데 하나이지만 놀이만으로는 삶을 의미로 채울 수 없다. 일할 능력이 있으면 누구나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한다.

- 세상에는 수많은 직업이 있다. 그 모든 직업은 사회에 필요하기 때문에 생겼다. 사회에 필요하다는 점에서 모든 직업은 저마다 가치가 있다.

o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비교하지 말자. 철학자는 그 자체로 훌륭한 것이지 돼지와 비교해서 훌륭한 게 아니다. 배가 고파야만 철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아무리 잘난 철학자도 먹지 않고는 철학을 할 수 없다.

o 우리나라에는 직업이 11,655개 있다. 그렇다면 11,655가지 직업에 종사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자기가 하는 일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을까? 대표적인 직업 760여 개 종사자 2만 6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 직업 만족도 조사가 있다.

- ‘톱 10’은 초등학교 교장, 성우, 상담전문가, 신부, 작곡가, 학예사, 대학교수, 국악인, 아나운서, 놀이치료사 등이다.

- 한의사, 대학교 총장, 초등학교 교사, 세무사, 컴퓨터 프로그래머, 판사, 화가, 등이 10위에서 30위 사이에 있다.

- 그 다음 순서로는 소설가(35위), 육군 장교(49위), 시인(54위), 고위 공무원(55위), 변호사(57위), 미용사(65위), 국회의원(73위), 요리 강사(93위), 프로 골프선수(96위), 증권 애널리스트(100위) 등이다.

- 의학 연구원과 웃음치료사는 100 위 안에 있지만 의사는 들어 있지 않다. 판사, 변호사, 법학 연구원은 들어있지만 검사는 없다.

- 만족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직업은 목재가공, 플라스틱제품 조립, 노점이나 이동 판매, 제화, 단열시공, 주차관리, 식당 홀 서빙, 청소원, 하역 등 사회에는 꼭 필요하지만 하는 사람이 많이 고된 일이다.

o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열 가지 직업은 교사, 공무원, 경찰, 간호사, 회사원, 기업 CEO, 의사, 요리사, 사회복지사, 생명과학 연구원 순으로 나타났다.

- 반면 학부모가 선호하는 자녀 직업은 공무원, 교사, 의사, 간호사, 경찰관, 회사원 순이었다. 아이들의 선책에 맡긴다는 응답이 5위였고 학생들과는 달리 검사, 직업군인, 한의사가 학부모들의 자녀 직업 희망 순위 ‘톱 10’의 끝 세 자리를 차지했다.

o 진로 결정과 관련하여 학생과 학부모들은 모두 소질과 적성에 압도적인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범 답안일 뿐 속마음은 다르다. 직업 능력을 기르기 위해 대학 전공을 선택할 때 결정적인 것은 학업 성적이다. 소질과 적성은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정도밖에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o 그렇다면 어떤 직업이 좋은 직업일까? 사람들은 안정되고, 근무 환경이 좋고, 돈을 많이 벌고, 남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을 선호한다.

-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일 자체가 즐겁게 느껴지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성공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

o 여든 살 먹은 스위스 남자가 자기 인생을 기록해서 통계를 냈다.

- 그는 21년 동안 일했다. 잠을 잔 시간은 26년이었다. 밥 먹는 데 6년을 썼다. 사람을 기다리거나 만나느라 보낸 시간이 5년이었다.

- 오늘날 젊은 대한민국 남자들이 일하는 데 쓰는 시간은 그보다 훨씬 길다고 보아야 한다. 출퇴근에 들어가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더 길어진다. 깨어 있는 시간의 최소한 절반을 일하는 데 쓴다고 보면 될 것이다. 만약 직업으로 하는 일이 즐겁지 않다면, 그것은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이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다.

o 인생의 성공은 멀리 있지 않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그것을 남들만큼잘하고, 그 일을 해서 밥을 먹고살면 최소한 절반은 성공한 인생이다. 돈 때문에, 남의 눈을 의식해서,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 또는 사회의 평판 때문에 즐겁지 않은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다면 그 인생은 처음부터 절반 실패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 꼭 즐겁지 않더라도 최소한 괴롭지 않은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 한다.

재능 없는 열정의 비극

o 천부적 재능이란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다. 타고난 음악 신동은 시키지 않아도 몇 시간씩 피아노를 친다. 타고난 지적 재능이 있는 아이는 강요하지 않아도 하루 종일 책을 읽는다. 재능이 있으면 재미를 느끼고, 재미를 느끼기 때문에 더 집중한다.

-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더욱 열심히 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결합한 ‘1퍼센트 재능과 99퍼센트 노력’이 천재를 만든다.

- 그런데 재미를 느끼고 집중한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취향과 재능이 반드시 함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o 생각이 자라고 사회를 배우면서 아이들은 알게 된다. 어떤 것은 자신의 능력과 재능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을, 다른 것은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또 다른 것은 자신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무 살쯤 되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마흔 살쯤 되면 인생을 크게 바꾸는 선택은 하기 어려워진다.

- 그러나 결단이 너무 늦는 법은 없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자신이 일상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쪽으로 직업을 바꾸는 것은 언제나 바람직하다고 본다.

o 직업을 잘 선택하려면 열등감을 극복해야 한다.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 남들이 어떤 직업을 선호하는지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골라야 한다. 남들이 좋아하지 않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해서 열등감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다.

o 김연아의 연기를 보면서 내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꼭 그녀가 1등을 해서가 아니다. 김연아가 스케이팅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 무슨 일이든 그것이 즐겁다면 1등이 아니어도 행복할 수 있다

o 열정과 재능의 불일치는 회피하기 어려운 삶의 부조리이다. 재능이 있는 일에 열정을 느끼면 제일 좋다. 그러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기만 하다면, 재능이 조금 부족해도 되는 만큼 하면서 살면 된다.

- 경쟁은 전쟁이 아니다. 져도 죽지는 않는다. 이겨서 꼭 행복한 것도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가진 것으로 인생을 산다. 가진 것이 많다고 꼭 행복한 건 아니다. 적게 가져도 행복할 수 있다. 끝없는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하지만, 즐기면서 경쟁에 임하면 이겨도 이기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o 대학에서 강연을 할 때 꼭 하는 이야기가 있다. 대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평생 해도 즐거울 것 같은 일을 찾는 것이다.

- 그 자체가 자기에게 즐거운 일을 직업으로 삼고, 그 일을 적어도 남들만큼은 잘할 준비를 하라. 자격증이 필요하면 기능을 익혀 자격증을 따야 한다.

- 무슨 일을 하든 사람들과 소통을 잘해야 하니 스스로 글쓰기 훈련을 하라.

- 중요한 정보의 대부분이 영어로 유통되는 게 현실인 만큼 영어로 듣고 말하는 능력을 충분히 기르는 것이 좋다.

- 아무런 목표도 세우지 못하고 그저 막연히 스펙만 쌓으려고 한다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옳은 일을 필요할 때 친절하게

o 뛰어난 기능을 갖추었다고 해서 반드시 일을 잘하는 건 아니다. 남들과 소통하면서 호흡을 잘 맞추는 것이 기능 못지않게 중요하다.

- 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다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남들과 소통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그 자체가 좋은 일일 뿐만 아니라 직무를 잘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 직장 동료, 상사, 고객, 거래처 사람들과 잘 지내려면 서로 좋은 기운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인간관계를 잘 가꾸어야 한다.

o 남에게 좋은 기운을 주려면 먼저 내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내가 누군가를 싫어하거나 무시하거나 미워하면 그 사람도 내게 똑같은 마음을 가지게 된다.

- 기라고 하든 텔레파시라고 하든, 하여튼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대화를 할 때 느끼는 어조(語調)의 미세한 변화, 마주보면서 감지하는 안면 근육의 소소한 움직임, 악수하면서 가하는 힘의 강약만으로도 호불호의 감정이 오고 간다. 아무리 닳고 닳은 처세술의 황제라 하더라도 마음을 완벽하게 감추지는 못한다.

- 소통과 인간관계의 비결은 자기 마음을 닦는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해도 타인을 미워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섣불리 평가하려 하기보다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교감해야 한다.

- 내가 다른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없다. 바꾸려 해도 안 된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대한다. 이것이 재미있는 일을 즐겁게 하는 비결이다.

o 좋은 혁신 아이디어와 제도 개선책을 만든다고 해서 혁신을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층의 저항을 극복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우고 혁신의 동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옳은 개혁도 실패한다.

o 내가 추구한 정치적 목표는 옳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정당을 혁신하고 지역 구도를 타파해 우리 정치를 발전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 ‘국회의원 소선구제와 결선 투표 없는 대통령 선거는 특정 지역을 배타적으로 장악한 거대 정당의 기득권을 철옹성처럼 보호하는 진입 장벽이다. 그 기득권 안에서 직업정치인들은 당원들을 지배하고 동원해 자기의 기득권을 지킨다.

- 이 정당들이 국민의 삶과 별 관계없는 문제로 끝없는 감정적 대결과 이전투구를 벌이는 한 농어민과 노동자, 영세상공인 등 사회적 약자들은 자기의 요구를 정치와 국가 운영에 반영하기 어렵다.

- 그러나 기득권을 누리는 거대 정당들이 스스로 진입 장벽을 낮추어 새로운 도전자의 진입을 허용하는 선거제도 개혁을 할 리가 없다. 따라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강력한 제3의 정당을 만들어 기존의 지역주의 정당지형을 허물고 정책 경쟁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정치 시대를 열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o 그래서 정치인으로 성공하려고 하기보다는 낡은 정치 그 자체를 상대로 싸웠다. 내가 개혁당, 열린우리당, 참여당,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에 몸담은 것은 모두 국민참여형의 강력한 제3의 정당 없이는 정치 혁신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 나는 이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내가 몸담았던 정당은 모두 사라지거나 좌초했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나는 한국 정치에 대한 내 진단과 처방이 옳다고 확신하지만 그것이 꼭 옳다는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 그것이 옳다고 할지라도 다수의 국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기성 정당을 비판하면서도 제3의 정당에 참여하기를 꺼렸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의지는 드높았지만 국민의 이해를 구하고 신임을 얻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o 정치에 뛰어든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올바른 목표를 추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잘 해내지 못했다. 제대로 정치를 하려면 가치관이 뚜렷하고 정책에 밝아야 한다.

- 그러나 그런 것은 기본일 뿐이다. 정치를 잘하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자기의 마음을 잘 다스려 다른 사람과 효과적으로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 정치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모아 함께 사회적 선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o 옳은 일을 하려고 했지만 폭넓은 공감과 신뢰를 얻지 못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두가 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로서는 무엇보다 먼저 내 잘못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 문제의 핵심은 내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왕왕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해 적대감을 느꼈다. 남이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해 주기를 원하면서도 남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적게 했다. 그렇게 하면 소통과 협력을 이루어내기 어렵다.

- 어디 정치만 그렇겠는가? 사업을 하든, 기업이나 정부에서 조직 생활을 하든, 일을 잘하려면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뜻이 아무리 옳아도 사람을 얻지 못하면 그 뜻을 이룰 수 없다.

o 적어도 내게는 정치가 생업으로서 적합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왜 정치를 했는가? 내게 정치는 연대(solidarity)의 한 방법이었다.

- 연대는 아픔과 기쁨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 손을 잡고 사회적인 선과 미덕을 실현하는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내게 정치는 스무 살에 야학교사를 한 것과 방식만 다를 뿐 본질은 같은 것이었다.

문재인과 안철수, 도덕과 욕망

o 전두환이 만든 민주정의당에서 출발해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거쳐 이름을 새누리당으로 바꾼 보수정당이 2012년 국회의원 총선에 이어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o 내가 보수정당을 싫어하는 이유는 보수주의가인간 여러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을 대변하고 부추기기 때문이다. 물질에 대한 탐욕, 이기심, 독점욕, 증오, 복수심, 두려움, 강자의 오만, 약자의 굴종 같은 것이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 보수주의는 인간의 욕망과 본능 가운데서 가장 원초적인 것에 기반을 둔다. 그래서 어떤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에서나 강력한 보수정치 세력이 존재한다.

o 진보정당은 인간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것’을 대변하고 부추기는 정당이다. 자유, 정의, 나눔, 봉사, 평등, 평화, 생태 보호를 추구하는 것은 진화적으로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o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 선거에서 박원순에게 흔쾌히 후보 자리를 양보한 일을 계기로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던 안철수 박사를 생각해본다.

- 많은 시민들이 그를 주목한 것은 정치적 손익 계산에 집착하지 않는 ‘탈정치적 행동’때문이었다. 좋은 사람이며 성공한 벤처기업가라는 이미지를 가진 안철수 박사는 공정성과 새로움, 유능함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o 나는 안철수 박사가 정치에 뛰어드는 장면을 보면서 크게 놀랐다. 그리고 인간적인 면에서 심각하게 걱정했다.

- 그가 과연 정치가 내포한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서 충분한 심사숙고를 했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이상(理想)과 암수(暗數)가 맞부딪치는 권력투쟁이기도 하다. ‘건너온 다리를 불살라 버렸다’고는 하지만, 과연 권력투쟁으로서의 정치가 내포한 비루함과 야수성을 인내하고 소화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o 정치는 사회적 연대의 가장 차원 높은 형식이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제대로 하려면, 그것도 그냥 국회의원 정도가 되는 게 아니라 대통령 자리를 목표로 삼는다면, 권력투쟁을 놀이처럼 즐거운 일로 여기면서 그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 한마디로 인생을 통째로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o 문재인 후보는 1,470만 표를 얻고 낙선했다. 그렇게 많은 표를 받은 것은 무엇보다 그가 민주당 후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문재인이었기에 민주당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많은 득표를 할 수 있었다.

o 민주당은 장점과 단점이 있는 정당이다. 온건한 자유주의 성향의 진보적 정책 노선과 튼튼한 지역 기반은 강점이라 할 수 있다. 민주당은 이 강점 덕분에 아무리 어려운 상황을 맞아도 아주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 민주당 최악의 단점은 감탄고토(甘呑苦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정치문화라고 생각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떠난 후 늘 그러했다. 민주당은 국회의원 자리를 이미 차지했거나 다음 선거에서 차지할 가능성이 있는 직업정치인들의 기득권과 개별적 욕망이 정치적 대의를 압도하는 정당이 되었다. 민주당의 혁신은 이 사실을 인정해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o 문재인과 안철수는 크게 다르면서도 많이 닮은 정치인이다.

- 가장 크게 닮은 점은 욕망이 아니라 도덕과 대의(大義)에 발을 딛고 정치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국민들도 같은 판단을 했다고 본다. 그들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는 것을 ‘출세’ 또는 ‘권력 쟁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를 직업삼아 살려고’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위해서’ 정치를 한다.

o ‘큰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는 도덕적 기초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대중의 신임을 모아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대중의 욕망, 현실의 정치 세력을 구성하는 직업정치인의 욕망도 껴안아주어야 한다. 우리 정치는 이미 ‘산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 이것은 누구도 피하기 어려운 도덕과 권력, 탈정치와 정치 사이의 딜레마이다. 나는 안철수와 문재인 두 사람이 이런 어려움을 잘 견뎌내면서 도덕적 이상과 현실의 욕망 둘 모두를 이끄는 리더가 되기를 기원한다.

o 일이 즐겁다는 것은 목표를 이루었을 때 성취감이나 보람을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일을 하는 구체적인 과정 그 자체가 즐겁다는 뜻이다. 나는 정치의 일상을 즐기는 국회의원을 많이 보았다.

- 민주당 박기춘 의원은 초선의원 시절,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지역구 유권자를 한 사람이라도 만나지 않고는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자기만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 김태년 의원은 초선시절 임기 4년 동안 지역구에 있는 모든 중소기업을 다 방문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작은 공장들을 방문했다.

- 신기남 의원은 변호사를 하다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다. 그는 정말로 나름 재미있게 국회의원 생활을 한다.

o 나는 정치의 일상이 즐겁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내가 정치에 뛰어든 것은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 예전에 낸 책에서 정치를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의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일’이라고 쓴 적이 있다.

- 이젠 정치적 자기 검열 없이 정직하게 말하고 싶다. 나는 정치의 일상이 요구하는 비루함을 참고 견디는 삶에서 벗어나 일상이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 야수의 탐욕과 싸우면서 황폐해진 내면을 추스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아니라 내면이 의미와 기쁨으로 충만한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 정치를 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정작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시간은 언제나 부족했다.

o 나는 직업정치를 떠나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기쁘게 연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눈앞을 가리고 있던 두터운 먹구름이 걷혔다. 해방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떳떳하게 놀기

o 놀이는 즐거워서 스스로 하는 활동이다. 생존에 꼭 필요한 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의 반대말처럼 쓰기도 한다. 그러나 놀이와 일을 명확하게 나누기는 어렵다. 일도 즐거울 수 있다. 돈 때문이 아니라 좋아서 일하는 사람도 만다.

- 그러나 일과 놀이가 같은 건 아니다. 놀이는 반드시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 즐겁기 때문에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한다. 일은 그렇지 않다. 즐거워도, 즐겁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게 일이다.

o 당신은 어떤 놀이를 즐기며 사는가? 놀이는 단순한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행복한 삶의 핵심 요소이다.

- 경마 배팅, 카지노 도박, 주식 투자도 그것이 돈을 따기 위한 도박이 되기 전까지는 즐거움을 위한 놀이가 될 수 있다.

- 음주와 포르노 감상도 적정한 범위에서는 놀이가 된다.

- 중요한 것은 노는 즐거움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돈이나 승리를 목적으로 삼으면 놀이가 더 이상 놀이가 아니게 된다. 노는 시간과 방법을 스스로 통제하는 자기 결정권을 상실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놀이가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만 않는다면, 세상에 해서는 안 될 놀이는 없다. 놀이와 일 사이에 가치의 우열은 없다고 생각한다.

o 놀 때는 떳떳하게 노는 게 좋다. 하지만 약간의 도덕적 부담감을 느끼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부담감은 노는 시간과 방법을 스스로 제한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랑은 싹이 난 감자

o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며 산다. 부모, 형제, 자식, 연인, 아내, 남편, 친구, 동지, 직장 동료를 사랑한다. 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하는가? 사랑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그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는가? 당신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알고 있는가?

- 만약 사랑하는 사람 이름을 하나도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풀 한 포기 키우지 못하는 황무지나 마찬가지다.

o 갑작스럽게 찾아든 영원한 이별에 대한 상상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색깔과 맛을 확인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럴 때 사랑은 싹 난 감자처럼 아린 맛으로 다가온다. 누군가와의 영원한 작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리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깊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o 만약 영원히 헤어진다고 해도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사람이 없다면 그대는 잘못 산 것이다.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며 산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야 하고, 사랑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사랑의 대상은 제한이 없지만 가장 깊고 황홀한 사랑은 ‘성적(性的) 교감을 토대로 한 사랑’이라고 나는 믿는다.

-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성적인 교감을 바탕으로 맺어진 인생의 동반자가 반드시 생물학적으로 이성(異性)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동성(同性)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매개로 한 관계라면 그 본질은 같다고 생각한다.

o 겉보기에 멋지고 돈도 많은 사람이 마음도 곱고 진실하면 최선이다. 그래서 구애를 할 때는 자기도 좋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한다.

- 데이트 상대가 마음이 곱고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공원, 영화관, 커피숍, 술집과 같은 곳에서 허세와 속임수를 써가면서 유혹하는 상대방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면 함께 살아봐야 한다.

o 배우자에 대한 사랑은 그 배우자가 동성(同性)이든 이성(異性)이든, 성적(性的) 욕구와 교감이 기초가 된다. 이것 없이도 가족 관계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이것 없이는 온전한 배우자라고 할 수 없다.

- “가족끼리 섹스 하는 건 근친상간이야.” 이것은 중년 남자들이 하는 농담 가운데 단연 최악이다.

o 결혼은 구애의 종착점이 아니다. 혼인한 이후에도 배우자에게 이성으로서 매력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외모를 건강하고 보기 좋게 가꾸어야 한다. 다정한 말과 이벤트로 계속 점수를 따야 한다. 손잡기와 입맞춤, 팔베개와 같은 소소한 구애 행동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생활이 고달프고 일이 바쁘고 아이들 때문에 속상한 일이 있어도 남편 또는 아내를 연인으로 여기면서 배우자가 다른 여자 또는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사로잡아야 한다.

- 구애는 단순한 짝짓기 수단을 넘어 소통과 공감의 기쁨을 만드는 행위이다. 구애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아이들을 옳게 사랑하는 방법

o 사랑하면 주고 싶다. 깊이 사랑하면 무엇이든 줄 수 있다. 사람이 무엇이든 아낌없이 주는 사랑의 대상은 자식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녀에 대해서만큼은 조건 없이 이타적인 게 보통이다.

o 자식을 어떻게 사랑해야 좋은 것일까? 무엇이든 주는 것이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일까?

- 그렇지 않다. 사랑을 잘못 표현하면 자식의 삶을 망칠 수 있다.

o 사람들은 자식에게 무엇이든 주려고 한다. 많은 돈, 특별한 재능, 뛰어난 지능, 멋진 외모, 건강, 높은 지위, 일류 대학 졸업장, 큰 야망 등 이런 것들을 줄 수만 있다면 주려고 한다.

o 부모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잘못은자녀의 삶을 대신 설계하고 자녀의 행복을 대신 판단하는 데서 시작된다.

- 그러나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사람도 자녀에게 행복을 상속해 줄 수는 없다. 행복은 사람이 저마다 느끼는 주관적 만족감이기 때문이다.

-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행복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지켜보고 격려하면서 필요할 때 적절한 도움을 주는 선에 머물러야 한다.

o 만약 자식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두 가지를 가지도록 도와줄 수 있다.첫째는 행복을 느끼는 능력, 둘째는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가지려면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자녀가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시행착오를 경험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o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초의 행위는 좋은 태교(胎敎)이다. 흡연, 음주, 마약, 다이어트, 독극물은 태아 뇌에서 뉴런이 생기고 제자리를 찾아가며 시냅스를 형성하는 과정에 작용하는 화학 물질의 분비체계를 혼란에 빠뜨린다. 산모에게 강한 정신적 충격이나 스트레스를 주는 정보와 자극도 해로운 약물과 비슷한 악영향을 미친다.

- 건강한 식생활, 좋은 생활 습관, 평화롭고 따뜻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자녀에게 건강하고 우수한 뇌를 상속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o 유년기의 양육방식도 매우 중요하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배우는 세 살 이전에는 말할 나위도 없으며, 그 이후에도 아이의 뇌에 미치는 부모의 영향은 아주 강력하다.

- 좋은 양육은 가훈이나 규칙을 정해놓고 예의범절을 익히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이를 사랑해주고 부모 스스로 좋은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양육의 핵심이다.

o 아이를 잘 키우려면 도를 닦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 따지고 드는 아이를 존중해야 한다. 공정성(fairness)에 대한 인식이 일찍 발달하는 아이일수록 지적 재능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회성은 가장 높이 발달한 생물학적 재능이다. 끝없이 “왜?”를 쏟아내는 아이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 최악의 훈육 방법은 아이를 때리는 것이다. 폭력은 어떤 것이든 정서 발달을 왜곡한다. 승복할 수 없는 폭력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경험은 소통과 공감 능력 발달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언어로 대화하는 것이다. 말을 하기 전에 아이들은 먼저 말을 알아듣는다. 뱃속에 들어 있을 때부터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완전한 문장으로 아이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갓난아이 때부터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아이를 씻길 때도 지금 목욕을 할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놀다가 할 것인지를 물어보는 게 좋다. 어느 쪽이든 큰 문제가 없는 경우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o 사람의 경쟁력은 인지적, 정신적, 정서적, 신체적 능력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부모들은 흔히 이 가운데 인지적 능력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인지적 능력을 기르는 사교육은 투입 요소에 불과하다. 투입 요소를 늘린다고 해서 반드시 산출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인지적 능력을 기르는 데 아이를 밀어넣음으로써 아이들이 행복을 느낄 능력을 제약한다.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키우지 못한 아이일수록 더 쉽게 인터넷 게임이나 술, 폭력 등에 빠져든다. 삶의 의미와 기쁨을 모르기에 스트레스에 짓눌려 자살을 생각하고 시도한다.

o 자녀를 사랑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다. 그러나 잘못 사랑하는 것은 말려야 한다. 자녀를 사랑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아이들 스스로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설계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 많이 사랑하고 그 사랑을 최대한 표현함으로써 작은 일에도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제대로 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나 스스로 인생을 만들어나가는 사람은 아주 작은 일에도 쉽게 행복을 느끼게 된다.

품격 있게 나이를 먹는 비결

o 나는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도 삶은 똑같이 귀한 것이다.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이다. 자기 힘으로 삶을 꾸려가야 존엄과 품위를 지킬 수 있다.

- 늙어도 젊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설계하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몇 가지를 제대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다. 돈, 건강, 그리고 삶의 의미이다.

o 은퇴하기 전에 노년기의 소비생활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돈을 확보해두어야 한다. 자식에게 과도한 투자를 하거나 너무 일찍 재산을 증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노년기에는 만성 질병에 걸릴 위험이 크기 때문에 생활비 말고도 더 많은 자산을 비축해둘 필요가 있다.

o 노년기 삶의 자기 결정권을 지키려면 되도록 건강해야 한다. 나이를 많이 먹은 다음에 노력하는 것도 의미는 있지만 효과는 적다. 건강을 좌우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생활 습관이다.

- 의사와 약사는 병을 고쳐줄 수 있지만 나를 건강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건강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임을 잊지 말자.

o 자기 결정권을 지키는 세 번째 조건은 삶의 의미에 대한 확신이다. 젊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 놀이, 사랑, 그리고 연대를 계속해야 한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면 하는 게 최선이다.

- 놀이도 중요하다. 바둑, 등산, 낚시, 당구, 산책…. 그 무엇이든 젊을 때 하던 놀이를 계속하거나 새로운 놀이를 배워야 한다. 노년을 함께 보내는 배우자나 연인, 친구가 있어야 한다. 전면적이고 깊은 정신적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외로움이 찾아든다.

o 나는 멋있는 노인이 되고 싶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나이를 품격 있게 먹을 수 있는지 자주 생각한다. 젊은 시절 칼럼니스트로 이름을 떨쳤던 홍사중 선생은 아름답게 나이를 먹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일흔여덟에 쓴 수필집에서 그는 밉게 늙는 사람들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했다.

1. 평소 잘난 체, 있는 체, 아는 체를 하면서 거드름 부리기를 잘 한다.

2. 없는 체 한다.

3. 우는 소리, 넋두리를 잘 한다.

4. 마음이 옹졸하여 너그럽지 못하고 쉽게 화를 낸다.

5.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한다.

6. 남의 말을 안 듣고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o 내가 리영희 선생을 노년의 롤모델로 여기는 것은 그가 보여준 인간적 품격 때문이다. 리영희 선생은 어디에서도 대접 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모임에서는 윗자리에 앉는 것을 사양했다. 자기주장을 하기 보다는 남의 말을 경청했다.

- 건강이 악화된 후에는 사회적, 정치적 발언을 절제했고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평화롭게 시간을 보냈다.

o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덜 진보적 또는 더 보수적으로 변한다. 진보적인 젊은이가 보수적인 노인이 되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그런 점에서 안 해본 것이 없었다던 이명박 대통령의 ‘해봐서 아는 것’ 목록에 한일협정 반대 시위가 들어있었던 것은 특별할 게 없다. 그런 사람조차 젊었을 때는 데모를 할 만큼 진보적이었다는 이야기다.

- 보수적인 젊은이가 진보적인 노인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o 고령 유권자일수록 보수정당을 더 많이 지지하는 것은 사회정치적인 현상인 동시에 생물학적 현상이라는 이야기다.

- 그러니 청년 유권자들은 부모님 세대 유권자들을 너무 원망하지 않는 게 좋겠다. 고령 유권자들도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리된 것일 뿐이다.

o 나는 또한 청년들을 위로하고 싶다. 젊은 그대들, 더 많이 참여하고 더 힘껏 연대해서 원하는 미래를 열기 바란다. 대통령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청년들에게 위로와 더불어 한마디 고언(苦言)도 드리고 싶다. 모든 선거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다. 내가 열렬히 지지한 후보의 당선이 내게 주는 강렬한 환희의 건너편에는 낙선한 후보를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들의 깊은 절망이 있다.

- 누군가를 지지하는 것은 그 후보가 패배할 가능성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남이 내게 해주기 원하는 것을 내가 남에게 해주지 않는다면 공정하지 않은 것이다. 공정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은 떳떳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o 만약 내가 평균수명까지 산다면 앞으로 다섯 번 정도 더 대통령을 뽑을 것이다. 그 다섯 번 중에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 희망사항이다.

o 이제 ‘멘붕’을 털고 일어서기 바란다.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면서 기쁜 삶을 찾아나가자. 대통령이 마음이 들지 않아도 마음에 드는 대한민국은 만들 수 있다고 믿으면서.

글쓰기로 돌아오다

o 나는 글쓰기가 좋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 일 자체가 주는 기쁨과 만족감 때문이다. 무엇이든 쓰려면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고 내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 느껴야 한다. 쓰는 일은 비우는 동시에 채우는 작업이다. 배움과 깨달음이 따라온다.

- 가지고 있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거나 모르고 있던 것을 새로 알게 되었을 때, 좋은 문장 하나를 쓰고 혼자 감탄하면서 싱글벙글할 때, 나의 뇌에서는 도파민이나 세로토닌이 대량 분비되는 것 같다.

o 나는 글쓰기로 돌아왔다. 내 인생의 남은 시간 동안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서다. 그래서 더 절실한 마음으로 자문해본다.

-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가? 이 삶은 훌륭한가? 이렇게 계속 살아가도 괜찮은 것인가? 오늘 하루의 모든 순간들은 내게 의미가 있었는가? 나는 세상을 떠날 때 내가 지금 하는 일들에 대해 스스로 어떤 평가를 하게 될까?

- 내 마음이 이렇게 대답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나 글을 쓰는 일로 돌아가자. 마음이 설레고 일상이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자.

기적을 일으키는 거울뉴런

o 거울뉴런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신경생리학적 장치이다. 거울뉴런 덕분에 갓 태어난 아기는 부모의 표정을 모방할 수 있다. 이것이 있기에 아기는 사람들과의 감정적 접촉과 교류를 통해 상호 이해와 연대의 감정을 획득한다.

o 개인이 생존하는 데는 사회적 결속과 유대, 상호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경쟁에서 이겨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을 이기는 능력뿐만 아니라 타인과 쉽게 공감을 이루어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 그러려면 타인의 기쁨뿐만 아니라 아픔에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의 생물학

o 일과 놀이와 사랑만으로는 인생을 다 채우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과 기쁨에 공명하면서 함께 사회적 선을 이루어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자연이 우리에게 준 모든 것을 남김없이 사용해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런 인생이 아름답고 품격 있는 인생이다.

- 공감을 바탕으로 사회적 공동선을 이루어나가는 것을 나는 ‘연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가 이루어내는 아름답고 유쾌한 변화를 ‘진보’라고 이해한다.

o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진보의 거듭되는 패배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선의 패배나 악의 승리가 아니다. 진화적으로 익숙한 것이 새로운 것을 이긴 수많은 사건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그는 전두환처럼 할 수 없었다.

- 1992년 보수진영으로 투항한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그는 전임자보다 더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정치를 했다.

- 2007년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은 국가를 개인적 ‘수익 모델’로 만들었지만 민주주의 정치체제 그 자체까지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 2012년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그의 정책 공약은 5년 전 낙선했던 진보진영 대통령 후보의 공약보다 더 진보적이었다. 대한민국은 옳은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러니 문재인 대통령을 보고 싶었던 시민들이 ‘멘붕’에는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o 진보주의에 대한 낡은 고정관념을 버릴 때가 왔다. 진보주의는 사회적 계급과 관계가 있지만 특정한 계급의 배타적 특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회의 진보적 변화는 피지배계급의 궐기와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그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며, 그 계급에 속한 사람만이 진보주의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노동자와 농민 등 노동계급의 모든 투쟁이 다 진보적인 것도 아니다.

- 자기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투쟁할 경우 그 투쟁의 주체가 누구이든 굳이 진보라고 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이익투쟁일 뿐이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을 위한 임금 인상을 목표로 투쟁하는 것은 진화적으로 낯익은 것이며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공무원노조가 공무원연금 개혁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요약자 주: 기아차 노조가 채용시 자식들에게 가점을 줄 수 있도록 한 현대판 음서제는 대표적으로 보수적인 정책이다. 일반적으로 노동단체, 농민단체가 한 일은 모두 진보적이라고 분류하지만 ‘자기 조직의 기득권을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으로 지키고 강화시키려고 하는 노력’들은 자기들이 비판하는 보수단체의 행태보다 훨씬 부도덕하고 비합리적일 때가 많다. 그래서 보수건 진보건 조직 안에서 끊임없이 경계하고 절제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진보적인 진영일수록 조직내부에서 주의주장과 방식이 합리적인가를 스스로 검증하는 시스템이 절실하다.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 내린 고정관념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다)

o 진보주의는 만인의 것이다. 누구든 유전적으로 무관한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을 기꺼이 내놓는 자발성을 발휘한다면 그 사람이 진보주의자이다.

o 진보주의는 사람의 직접적 행동으로만 표출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타적 본능을 제도로도 표현한다. 김대중 정부의 국민기초생활보장법, 박정희 정부가 도입한 의료보험, 노태우 정부의 국민연금제도

- 공감을 표한하기 위해 돈만 내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시간, 건강, 열정과 같은 비금전적 생활 자원을 내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바친다.

o 우리는 어디까지 참여해야 할까/ 누구나 다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이타 행동을 하는 이기적 존재이다.

- 죽음까지도 감당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고, 그저 작은 성금을 보내는 정도만 감당할 수 있다면 그래도 좋을 것이다.

- 제일 손쉽고 비용이 적게 드는 것부터 살펴보자. 인터넷 포털 뉴스에 응원 댓글을 달 수 있다. 사람들을 돕는 단체에 후원금과 격려의 편지를 보낼 수도 있다. 버스투어에 참여할 수도 있다. 농성천막에서 함께 밥을 새워줄 수도 있다. 선거운동 자원봉사를 할 수도 있다. 아예 이런 일들을 직접 조직하는 운동을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다. 시민단체 상근 활동가나 직업정치인이 되는 것이다.

o 이런 이타적 본성, 공감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나는 연대라고 부른다. 연대는 일, 놀이, 사랑과 더불어 삶을 의미 있고 존엄하고 품격 있게 만드는 제4원소이다.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 “연대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지금 이곳의 행복이 그들의 것이리라!”

제4장 삶을 망치는 헛된 생각들

신념의 도구가 되는 것

o 인생에서 가장 ‘달콤 살벌한’ 것은 신념이 아닌가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옳다고 믿는 삶의 원칙이 있다. 그런 것을 모두 합쳐서 신념(信念)이라고 하자. 나름의 신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목표와 방법을 설정하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행위의 준칙을 세울 수 있다.

- 사람은 신념을 위해 살기도 하며 신념을 위해 죽기도 한다.

o 우리는 신념에 따라 살고 죽은 사람들을 안다. 신라 청년 이차돈, 고려 충신 정몽주, 조선 명장 이순신, 우리의 영원한 ‘누나’ 유관순과 민족 지사 안중근, 백범 김구 선생,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동서고금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을 이루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분투하다 신념을 버리지 않고 죽었다.

o 신념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런 삶이 훌륭하다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가?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 신념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이 훌륭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그것은 훌륭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 훌륭한 신념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그 신념을 위해 살고 죽어야 하는 것 역시 아니다. 신념을 위해 살고 죽는 것도 훌륭한 인생일 수 있지만, 그것과 다른 인생 역시 얼마든지 훌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o 신념에 따른 삶과 죽음이 훌륭하려면 먼저 그 신념이 훌륭해야 한다. 신념 자체가 훌륭하지 않으면 그 신념을 따르는 삶도 훌륭할 수 없다.

- 훌륭하게 살기 위해서는 훌륭한 신념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신념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대하는 태도이며 그 신념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신념이 잘못된 것이 아닌 경우에도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을 잘못 선택하면 삶이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o 신앙이나 이념은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앙에 대한 관용(tolerance)을 갖추는 것이다.

- 그럴 때에만 신념은 삶을 풍요롭고 기쁘고 의미 있게 만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이 이념의 도구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다. 빛나야 할 것은 신앙이나 이념이 아니다. 정말 빛나야 할 것은 자연이 준 본성과 욕망을 긍정적으로 표출하고 실현하면서 영위하는 기쁜 삶이다.

o 진보주의는 보수주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론, 철학, 세계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진보주의를 어떤 이론의 집합이라기보다는 타인과 세상을 대하는 감정 또는 정신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 감정이나 정신적 태도는 상대적이다. 어느 것은 옳고 어느 것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나와 다른 감정을 품고 다른 태도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너그럽게 대하는 게 합리적이다.

- 좌익 소아병과 극우 맹동주의 좌익 전체주의, 우익 국가주의는 모두 동일한 원인에서 파생된 이념의 병이다. 이 병의 원인은 ‘불관용’이다.

o 신념을 지니고 살면서 그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나도 정답은 모른다. 내 나름의 방법이 있을 뿐이다.

- 나는 내가 가진 신념 덕분에 내 자신과 내 삶이 더 훌륭해지는지를 주의 깊게 살핀다. 내 자신을 비루하게 만드는 신념은 좋은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도 신념 그 자체가 확실히 훌륭해 보인다면, 그 신념을 실천하는 방법을 잘못 선택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o 많은 국민의 관심과 비판을 받았던 이른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부정부실 경선 사건’을 겪으면서 나는 신념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 통합진보당 중앙당 사무총국과 선거관리위원회는 대리투표를 방지할 수 있는 ‘동일아이피 중복 투표 제한 조처’를 취하자는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 특정 후보와 연계된 중앙당 당직자들이 여러 차례 미투표자 명부를 다운로드하여 활용하였다.

- 투표 값에 대한 임의적인 수정이 이루어짐. 오프라인 투개표 관리도 엉망. 선거인 명부 사후 위조 변조 사례

- 진보정당이든 보수정당이든 치열한 경선을 하면서 투개표 관리를 이렇게 하면 부정이 생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기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보편적 본능이기 때문이다.

o 부정 경선 의혹을 처음 인지한 순간 나는 먼저 당원들을 떠올렸다. 다른 당원에게서 인증번호를 전송받아 대리 투표를 하는 모습, 투표하지 않은 당원들이 오프라인 투표소에서 투표한 것처럼 가짜 서명을 하면서 선거인 명부를 조작하는 모습이었다.

- 그들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권력에 눈먼 사람도 아니다. 노동자와 농민, 힘없는 서민들의 권익과 복지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귀한 시간과 열정을 바치며 진보정치운동에 참여한 활동가들이다. 그들은 선한 의지를 품고 더 훌륭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보정당에 참여했다.

- 그런데 정파를 가리지 않고 반칙을 했다. 당도, 후보도, 당원들도 모두 훌륭함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한 것이다.

o 운동도 정치도 하다 보면 성과를 얻기도 하고 얻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참여하는 사람의 행위를 비루하게 만든다면 그런 운동, 그런 정치, 그런 정당은 목표를 달성하는 경우에도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

- 민족, 자주, 한반도 평화, 민중 생존권 보장 등 그 어떤 아름다운 이념도 목표도 그 운동 속에서 사람을 더 훌륭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훌륭한 운동이 아니다. 그런 운동은 사람을 이념의 도구로 만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