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역사책에 나와있는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모든 보편적인 종교에서 말하듯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저자는 전제하고, 그렇지만 이 고통을 현명하게 이겨낼 수 있는 12가지의 법칙이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의 많은 부분을 성경을 해석하여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어쩔 수없이 마주하게 되는 많은 비극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싸울 수 있는 힘은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상당히 넓고 깊은 저자의 생각을 피력한 책인지라 내용도 광범위하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저자가 직접 강의한 동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UQpLaQ-TdWY)은 책의 내용을 요약한 1시간 반의 강의로 책의 내용을 일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

프롤로그

질서의 공간에서는 모든 사람이 사회적 규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행동하므로 예측할 수 있고 협력적이다. 질서의 상태는 일반적으로 남성적인 상징이나 상상으로 그려진다. 반면에 혼돈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이다. 혼돈은 주로 여성적인 상징이나 상상으로 표현된다. 도교는 안정과 변화의 경계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경계를 걷는다는 것은 삶의 길 위에 있다는 것이고, 신성한 중도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삶의 길을 걷는 것이 행복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다.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상대를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들은 상대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상대에게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알기에 사이좋게 협력할 수 있고, 심지어 경쟁마저 평화롭게 할 수 있다. 공유한 신념 체계는 모든 사람을 단순한 잣대로 판단하게 만들고, 서로를 잘 아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세계를 길들이기에 세계도 단순해진다. 사람들은 신념을 지키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기대, 욕망 등이 서로 일치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기대와 사람들 행동이 일치하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그런 것들이 서로 일치해야 모두 생산적이고, 예측할 수 있으며, 평화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평화는 약해서 언제든 깨질 수 있다. 배신이라는 행위는 강력한 힘으로 평화를 파괴한다. 배신당한 사람은 자신과 배신자에 대한 혐오와 경멸, 죄책감과 불안감, 분노와 두려움 같은 끔찍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갈등은 피할 수 없고, 때로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공유된 신념 체계는 이런 강력한 감정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그리고 그로 인한 갈등과 다툼에서 우리를 구해 줄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행동과 인식은 목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타당한 목표는 필연적으로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된다. 가치 체계가 없다면 목표를 판단할 기준이 사라져 행동과 인식이 무의미 해진다. 목표는 주로 긍정적인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어떤 가치가 포함되어 판단되는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 없이는 행복해지기 어렵다. 인간은 나약하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자, 그 사실을 잘 아는 유일한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내재한 고통을 견디게 해 줄 심원한 가치 체계에 내재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희망을 잃고 절망적인 허무주의의 유혹에 빠져들고 만다.

하지만 가치 체계들은 자주 충돌한다. 서구인들은 전통과 종교를 중심에 둔 문화에서 멀어졌고, 심지어 국가 중심 문화에서도 멀어졌다. 그 덕분에 집단 사이의 갈등 위험은 조금 줄었지만, 절망적인 무의미의 포로가 될 위험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것은 결코 발전이 아니다.

20세기에 세계를 뒤흔든 엄청난 갈등은 인간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고, 게다가 지금은 파괴적인 기술의 위력이 지구를 통째로 날려버릴 정도로 강력해졌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치 체계와 신념 체계, 문화 체계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갈등이라는 끔찍한 딜레마에서 세상이 해방되고, 동시에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해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개인의 향상과 발전’ 그리고 ‘누구나 자발적으로 존재의 부담을 어깨에 짊어지는 것이다.

원칙이 정리되지 않으면 카오스(혼돈)가 유혹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법칙과 기준, 가치가 필요하다. 우리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짐을 짊어져야 한다. 우리는 좁고 곧은 길을 걸어야 한다. 치 책에서 언급하는 12가지 법칙은 혼돈과 질서의 경계선 위의 ‘그곳’에 있기 위한 지침이다. 그곳은 우리의 삶, 그리고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정당화하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산다면, 부담스러운 자의식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을 것이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유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할 것이고, 원망으로 시작해서 시샘과 복수심과 파괴적 욕망을 차례로 자극하는 피해 의식에도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불완전하고 무지한 존재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전체주의적 이념에 의지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지옥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법칙 1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

바닷가재와 영역 – 바닷가재는 자기 영역 안에서 먹잇감을 사냥하고, 먹을 만한 부스러기를 찾아 주변을 뒤적거리며, 안전하게 지낼 수 있고 수렵과 채집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안락한 보금자리를 원한다. 그러나 안전한 보금자리는 적고 그런 곳을 원하는 바닷가재는 많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바닷가재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이런 문제에 부닥친다.

조류와 영역 – 굴뚝새도 바닷가재와 같은 다른 동물처럼 지위와 영역에 집착한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공동생활을 하는 닭은 물론이고 공동생활을 하지 않는 굴뚝새도 서열이 있다. 이 서열은 더 넓고 더 좋은 영역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에서 드러난다. 영역권과 사회적 지위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영역은 간혹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영역이 중요하지만 좋은 영역은 항상 부족하기 때문에 동물의 세계에서 충돌은 피할 수 없다.

바닷가재들의 영역 다툼 – 수만 년 동안 같은 공간에서 다른 동물들과 공존할 수밖에 없던 동물들은 피해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수법을 터득해 왔다. 바닷가재는 4단계에 걸친 전투 방법으로 가능한 치명적인 승부를 피한다. 그러다 싸움에서 패배한 바닷가재는 더 싸우려 들지 않는다. 특히 영역을 지배하던 바닷가재가 패배하면 그 뇌 구조는 완전히 해체되어 약자에 적합한 새로운 뇌가 만들어진다.

패배와 승리의 신경 화학 – 신경화학적 관점에서 패배한 바닷가재와 승리한 바닷가재는 크게 다르다. 자신만만한 모습인가 아니면 위축된 모습인가는 신경 세포의 교감을 조절하는 세로토닌과 옥토파민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

세상은 원래 불평등하다 – 영역 다툼에서 패한 바닷가재가 다시 싸움에 나설 때 승률은 일반적이 예상보다 낮다. 한마디로 승리를 거둔 상대가 다시 승리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뜻이다. 인간 사회가 그렇듯이 바닷가재 세계에서도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한다. 잔혹하고 야만적인 분배 원칙은 경제 영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창의성이 필요한 영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원칙을 ‘프라이스의 법칙’이라고도 하고, 그 분배를 ‘파레토 분포’라 한다. 실제로 이런 불평등한 분배 원칙은 정부 형태를 말론하고 지금까지 연구된 모든 사회에 적용되는 듯하다. 그분만 아니라 도시 인구, 천체의 질량, 단어의 빈도에도 이 원칙은 적용된다.

모든 암컷을 독차지하는 우두머리 수컷 – 정상에 오래 머무는 수컷은 낮은 지위에 있는 수컷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도움을 주고받고, 집단 내의 암컷과 새끼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바닷가재는 원시적이기 때문에 이런 기술이 필요 없다. 바닷가재는 3억 5천만 년 넘게 이 땅에 산 동물로 지금도 그때의 신경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단순한 뇌와 신경계에서도 사회적 지위와 계급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는 신경 화학이 작동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는 서열 구조가 생명체의 생존과 적응에 필수적이었다는 뜻이다. 우두머리 수컷 바닷가재는 최고의 사냥터를 독점하고, 가장 안전한 보금자리를 차지할 뿐 아니라, 모든 암컷의 구애를 받는다.

자연에 대한 몇 가지 오해 – 진화는 대체로 유전자 조합과 무작위적 돌연변이 등의 변이와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개체 중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개체를 선택하는 자연 선택을 통해 보수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면 자연과 환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교의 핵심 개념인 음양(혼돈과 질서)은 정적인 동시에 역동적인 자연과 환경에 대한 관계를 훌륭하게 도식화했다. 혼돈과 질서는 언제나 나란히 존재하고 서로 교체될 수 있다.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혁명적 변화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다. 모든 죽음은 곧 형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자연선택’이라고 할 때의 선택은 ‘적응성’이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적응성’에서의 ‘적응’은 환경의 요구에 유기체의 자질을 맞춘다는 뜻이다. 자연은 선택하는 행위자이지만 정적인 행위자는 아니다. 자연의 역동성은 단순하지 않아 어떤 것은 매우 빨리 변하는데, 그 안에는 아주 천천히 변하는 것이 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서열 구조를 사회적이나 문화적 특성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서열의 변화는 일시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서열 구조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서열 구조는 문화보다 자연에 더 가깝다. 따라서 서열 구조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뇌의 영역은 아주 오래전에 생성된 뇌에서 가장 원초적인 부분이다. 그래서 패배나 실패를 경험한 인간은 서열 싸움에서 진 바닷가재와 비슷하게 행동한다. 인간과 바닷가재는 행동과 경험에서만 유사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신경 화학도 여러 부분에서 똑같다. 세로토닌의 수치가 낮아지는 것도 그중 하나다.

지위에 따른 차이 – 생각과 감정이 감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뇌 가장 깊숙한 곳에는 우리가 사회에서 어는 정도의 서열을 차지하고 있는지 정확히 추적하고 관찰하는 장치인 아주 원시적인 계산기가 하나 있다. 뇌에서 사회적 지위를 평가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부분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는지 관찰한 증거를 근거로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고 우리에게 지위를 부여한다. 동요들이 우리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여기면 세로토닌 분비가 줄어들어,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사건이나 환경에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더욱 강하고 빠르게 반응한다. 최하층에서는 비상 사태가 자주 일어나므로 어떤 상황이든 생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 민감한 반응을 ‘스트레스’라 하며, 이는 심리적인 현상만 아니라 부정적인 상황에서 비롯되는 제약에 대한 반사 작용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비상사태가 닥치면 뇌는 면역 체계까지 가동을 중지시키고 미래를 위해 남겨 둬야 할 에너지와 자원을 끌어 쓰며 위기를 모면하려 하는데, 이럴 때 사람들은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쾌락의 기회가 드물기에 그런 기회가 오면 일단 저지르고 본다. 당신이 높은 지위에 있다면 뇌 속의 계산기는 안전하고 편안하며 먹을 것도 많다는 것을 알고 주변에 도와줄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계산에 포함하고 자신에게 피해를 줄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낮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변화를 위협이 아닌 기회로 여긴다.

뇌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 때때로 수면과 식사가 불규칙할 때 뇌의 계산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일상적인 행위는 자동화되어 안정되고 신뢰할 만한 습관으로 자리 잡혀야 한다. 그래야 일상적인 행위에서 복잡성이 줄어들어 단순해지고 예측 가능성이 커진다. 그런데 나쁜 습관 때문에 복잡한 양성 순환 고리가 작동하면서 계산기 기능이 떨어지기도 한다. 뇌와 몸과 사회는 상호 작용하며 양성 순환 고리에 휘말릴 수 있다.

허리를 세우고 가슴을 펴야 하는 이유 – 괴롭힘을 당하는 이유 중 하나는 피해자들이 맞서 싸울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의 세계에서는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면 엄한 처벌을 받기 때문에 이런 힘의 차이가 사라진다. 그런데 괴롭힘을 당하는 가장 흔한 이유는 맞서 싸울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기질적으로 동정심이 많고 자기희생적인 사람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초기부터 단호히 거부하고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면 가해자는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행동에도 제약을 받는다.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이 느끼는 억울함은 다름 아닌 화가 난 상태로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신호다. 착하고 순진하던 사람이 현실의 냉혹함을 깨닫게 되면, 즉 자기 내면에 사악하고 극악무도한 씨앗이 있으며 자신도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스스로를 짓누르던 두려움이 줄어든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에서도 긍정적인 순환 고리가 작동할 수 있다. 가슴을 웅크리고 고개를 숙인 채로 다니는 이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왜소하고 자신감 없는 것으로 보일 뿐 아니라 자신도 의기소침하고 무기력한 느낌이 들게 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 반응 때문에 무력감이 더욱 증폭된다. 몸을 똑바로 하라는 말에는 정신 역시 똑바로 하라는 요구가 들어 있다. 우리가 삶의 요구에 자발적으로 응답하면 신경계가 완전히 다른 식으로 반응한다. 이런 모든 변화가 물리적 재구성이나 개념적 재구성을 통해 현실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구체화된다.

싸움에서 승리한 바닷가재를 기억하라. 바닷가재는 3억 5천만 년 동안 이어져 온 삶의 지혜를 알고 있다.

법칙 2 당신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하라

왜 처방받은 약을 먹지 않는가? – 처방받은 약을 복약 지시대로 먹지 않으면 더 큰 고통이 따르는 치료를 해야 하는 병의 악화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대로 복용하는 사람은 1/3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반려동물들의 건강을 더 챙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 〈창세기〉 이야기는 중동에서 기원한 두 편의 창조 설화를 조합한 것처럼 보인다.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다루지만 기록 시기는 비교적 최근으로 알려진 〈제사장 문서〉와 〈야훼 문서〉가 그것이다. 과학적 진리는 기껏해야 500년 전에야 세상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과학적 세계관이 등장하기 전에는 현실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 예컨대 ‘존재’를 사물적 공간이 아니라 행위의 공간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삶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개인적 경험이다. 이를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보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과학적 설명보다는 소설이나 영화에 더 가깝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극적인 사건이다.

인생의 경험을 구성하는 3가지 요소 – 과학의 세계에서 물질을 분자, 원자, 쿼크라는 기본적 구성 요소로 환원하듯, 경험의 세계에서도 혼돈, 질서, 혼돈과 질서를 중재하는 과정의 3가지 원초적 구성 요소가 있다. 이 과정을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혼돈과 질서에 영원히 예속된 까닭에 존재의 정당성에 의혹을 품고, 절망에 빠지면, 우리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혼돈과 질서를 중재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그런 예속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혼돈은 미지의 영역이자 ‘탐험이 안 된 땅’이다. 혼돈은 모든 상태, 모든 생각, 모든 규율을 넘어 무한대로 끝없이 확대된다. 혼돈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것과 모든 상황을 의미한다.

반면에 질서는 ‘탐험을 한 땅’이다. 지위와 신분, 권력에 따른 계급 구조가 수억 년 전부터 지배하던 영역이다. 질서 속에서는 모든 것이 확실하다.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예정대로 진행되므로 새로운 것도, 충격적인 것도 없다.

혼돈이 나타나면 뇌가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나무에서 살 때부터 있던 시스템이 작동한다. 즉각적인 몸의 반사작용이 나타나고 그 이후에는 다소 복잡하고 느릿한 감정적 반응이 이어진다. 감정적 반응 후에는 생각하는 행위가 뒤따른다. 이 모든 반응은 어떤 의미에서는 본능적이다. 반응이 빠른 것일수록 더 원초적인 본능에 가깝다.

혼돈과 질서: 인격체, 여성과 남성 – 혼돈과 질서는 삶의 경험을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이며,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혼돈과 질서는 사물이나 대상이 아니고, 그런 석으로 경험되지도 않는다. 사물과 대상은 객관적인 세계의 일부이며, 생명도 없고 영혼도 없다. 따라서 사물과 대상은 죽은 것이다. 하지만 혼돈과 질서는 인격체로 인식되고 경험되면 이해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온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물이나 대상, 혹은 환경이 아니라 바로 인격체였다, 인간은 오랜 시간 진화하여 마침내 인격체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인격체들은 우리 주변에 예측할 수 있는 형태로 항상 존재해 왔다. 의도와 목적이 분명한 아주 원초적인 계급 구조 형태로 말이다. 생명체는 다세포 생물로 진화하기 전에 먼저 암수로 구분되었다. 암컷과 수컷, 부모와 자식은 인간의 인식과 정서, 동기 부여에 깊이 내재한 자연적인 범주라는 뜻이다. 뇌는 철저하게 사회적이다. 생존과 번식, 진화를 위해서 다른 피조물, 특히 다른 사람들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그런 피조물들이 생활 환경이었고 그야말로 자연 서식지나 다름없었다.

주변 세계를 의식적으로 바라보면 많은 것이 맞아떨어지기 시작한다. ‘무엇’에 대해 알게 되면 동시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게 된다. 객관적인 사실에서 ‘의무’와 ‘책임’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질서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 질서의 세계는 혼돈으로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이미 알려진 영역에 차지하고 있고, 그 영역은 미지의 영역으로 둘러싸여 있다. 혼돈과 질서라는 두 세계의 경계에 서 있을 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근본적으로 다른 두 세계의 경계에 서 있으려면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삶이 다른 의미로 다가올 때, 혹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엇인가에 몰입할 때, 그 순간 바로 혼돈과 질서의 경계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다. 그때의 느낌은 신경학과 진화론에 근거를 둔 본능적 자아의 반응이고, 가장 깊은 내면의 목소리다.

에덴동산 – 현실 세계는 필연적인 한계가 존재하고, 통제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현실 세계 바깥의 힘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도 불가능하다.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에도 뱀은 숨어 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근면하고 성실한 부모라도 자식을 완벽하게 보호할 수 없다. 우리의 원초적인 부모는 뱀의 유혹에 귀를 기울여,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그리고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어설프게 아는 것보다 아예 모르는 게 낫다. 아담과 하와는 고작 몇 가지 처참한 현실을 자각했을 뿐이다. 그중 첫 번째가 자신들이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발가벗은 유인원 – 발가벗었다는 것은 나약하고 상처 입기 쉬운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진 직후 수치심을 느꼈다. 우리가 꽤 나쁜 사람이라는 걸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짐작보다 더 추악하고 연약하고 저질스럽다는 비밀을 아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다. 질서와 혼돈, 생명과 죽음, 죄, 희망, 노동, 고통은 〈창세기〉의 주요 주제이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짊어져야 할 숙명이지만, 고통스러운 깨달음을 하나 더 얻은 것이 도덕성이다.

선과 악 –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진 후 알게 된 사실 중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선과 악’에 대한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어디에서, 왜 다칠 수 잇는지를 정확히 아는 자의식이 있고, 자신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걸 안다. 또 고통을 주는 것임 무엇인지, 두려움과 괴로움이 어떻게 생기는지도 알기 때문에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을 의도적으로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자의식의 발달만큼이나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현실 세계의 선과 악을 구분하는 첫 번째 지식이었고,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인간의 두 번째 굴레였다. 이로써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도덕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이 모든 것은 자의식이 정교하게 발달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인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특성을 유일하게 지니고 있다. 어쩌면 인간은 애초부터 존재하면 안 되는 무엇이었을지도 모른다.

신의 불꽃 – 의식의 탄생은 우주적으로도 중요한 현상이었고, 따라서 우주적 의미에서도 자유 의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 가치에 의심을 품고 괴로워하게 된 것은 자의식이나 죽음과 추방에 대한 도덕적 깨달음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연약하고 사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동행하지 않으려는 거부감이 주된 원인이다.’ 세상을 바로 세운다는 것은 혼돈으로부터 좋은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이다. 의식적으로 그리고 자유 선택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을 제대로 보살피려면 먼저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타락한 피조물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 우리 ‘존재’는 타인의 ‘존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우리 자신에 대한 학대가 다른 사람에게 재앙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을 고문하고 학대할 권리가 없다. 당신이 누군가를 세심하게 배려하듯이, 당신 자신도 똑같이 챙겨야 한다. 인간이라 가지는 결점이 있다고 해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살기 힘든 곳으로 전락할 것이고, 모든 사람이 세상을 더 비관적으로 볼 것이다. 나 자신을 책임지고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한다는 것은 나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임 무엇인지를 찾는다는 뜻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나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을 ‘좋은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 지금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당신 자신을 다스릴 수 있고 결국에는 원망과 앙심과 잔혹성을 떨쳐 낼 수 있다. 당신만의 원칙을 명확히 세워야 당신을 부당하게 이용하려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당신을 지킬 수 있고, 안전하게 일하며 삶을 즐길 수 있다. 꾸준히 심신을 단련하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을 때는 스스로에게 충분한 보상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신뢰하고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자신을 어떻 게 대해야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목표와 방향의 힘은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장애물도 넘을 수 있는 길로 바꿔 놓고, 기회의 문을 열어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당신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하는 것, 당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법칙 3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

내가 살던 고향 마을 – 엄청나게 추운 곳으로 혼 엔터테인먼트 기기도 없는 때라 재미있게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 친구 크리스 이야기 – 무슨 이유인지 항상 화가 나 있던 크리스와 그의 사촌 에드와 어울렸다.

멋모르던 10대 시절 –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조금이라고 신나는 일이 있으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었다는 생각이지만, 사실은 냉소적이고 염세적이었다.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둔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는 이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돈 이외의 이유로 자녀의 대학 진학을 반대하는 부모도 많았다.

친구들의 엇갈린 운명 – 고향을 떠난 대학에 진학한 처음에는 모든 것이 막연하고 혼란스러웠지만, 혼돈 속에는 항상 새로운 가능성이 꿈틀거린다. 자신의 가치를 낮게 보는 사람들은 대체로 삶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친구로 둔다. 그들은 스스로 좋은 삶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인생에 대해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다. 이는 과거의 두려운 상황을 반복하려는 무의식적 충동인 ‘반복 강박’이다. 과거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은 실패를 반복하는 운명을 낮게 된다. 그런 면에서 ‘반복 강박’은 운명이나 무능함의 다른 말일 수도 있다. 혹은 특별한 목표와 의도를 가지고 배우기를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쉬운 삶과 어려운 삶 –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은 사람을 친구로 선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중 하나가 누군가를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지나치게 상냥하거나 순진하거나 충동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이런 선택을 한다. 그러나 실패하는 사람이 모두 피해자는 아니며 말단에 있는 사람이라고 모두 승진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고통을 무력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다. 지위가 낮다고 해서 억압자 성향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순간순간 가장 쉬운 길을 택할 뿐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지옥으로 향하는 길이다. 지금 누군가를 구해주려고 하는 노력이 당신의 동정심과 선의를 과시하고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신의 그런 행동이 사실은 가장 어려운 선택이 아니라 가장 쉬운 선택이었는지 모른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도우려면 가정하지 말고 그 사람이 왜 곤경에 빠졌는지 알아야 한다. 누군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거부한다면, 그 이유는 그 길이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의 불행은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휘두르는 무기인지도 모른다. 성공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바르게 산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만약 내가 불행한 당신을 도와주어야 한다면, 당신이 진정으로 변화를 원할 때까지 먼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당신은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 가족에게 소개하기가 꺼려지는 사람을 ‘의리’ 때문에 계속 친구로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의리는 우직함과 달라 상대방을 공정하고 정직하게 대하겠다는 약속으로 우정은 상호 합의다. 이럴 경우 도와주는 것이 오히려 그릇된 선택이다. 세상을 더 좋게 만들려는 사람들 곁에 두어야 한다. 우리에게 유익한 사람하고만 관계를 맺는 것은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라 바람직한 행위다. 당신의 원대한 목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함부로 행동하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사소한 선택이라도 신중하게 결정하고, 소임과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각오를 다지게 된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려면, 강인한 의지와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겸손해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한다. 모든 걸 스스로 판단해야 하고, 조건 없는 동정과 연민도 경계해야 한다. 그럼에도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야 한다.

법칙 4 당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어제의 당신하고만 비교하라

내면의 비평가 – 우리 내면에는 우리를 잘 아는 비평가가 살고 있다. 그 존재는 자기주장을 펼치며 우리의 소소한 노력을 무자비하게 깎아내린다. 객관적인 자기비판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가혹한 자기비판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현실을 외면하게 된다. 인생이라는 게임이 항상 불리하게 돌아간다면 나도 모르게 스스로 게임을 조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면의 비평가가 늘 당신의 노력과 삶의 가치를 깎아내린다면 그 목소리에 귀를 닫아야 한다. 매사에 부정적인 내면의 목소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따뜻한 돌려가 아니라. 합리성으로 위장한 비열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인생이라는 게임 –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이 들어간다. 가치 판단이 배제된 선택은 없으므로, 모든 선택과 모든 행동의 전제 조건이다. 일단 어떤 행위를 선택하면 그에 대한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내면에서 작동해, 그 행위는 성공 기준을 넘어서거나 못 미치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로 이어진다. 따라서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은 정해진 목표가 있는 게임을 한다는 뜻이다. 의미는 더 좋은 것과 더 나쁜 것의 차이를 전제로 한다. 내면의 비판적인 목소리를 잠재우는 방법을 찾기 위해 ‘성공’과 ‘실패’라는 흑백 논리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성공과 실패의 관점으로만 보면 대안도 없고 중간 지대도 없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두 잣대로만 보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이분법에서는 중요한 가치들의 미세한 차이가 완전히 지워진다. 정확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성공과 실패는 단 한 번의 게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게임이 있으므로 내가 처한 상황을 고려해 더 나은 게임을 선택할 수도 있다. 게임을 바꿔도 효과가 없으면 아예 새로운 게임을 만들면 된다. 당신은 이미 하나 이상의 게임을 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게임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성장이 가장 의미 있는 승리다. 당신이 어떤 게임을 선택하든 그 게임만의 고유한 특성이 있다. 인생의 게임들은 사람마다 달라서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무의미하다. 그런데도 내면의 비평가는 먼저 특정한 비교 영역을 임의로 선택한 다음, 그 영역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의미를 부풀린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 자신이 아는 그 영역 최고의 스타들과 비교한다. 이는 당연히 불리한 비교다. 이런 과정을 통해 뭘 해보기도 전에 의지가 꺾여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평가하는 사람들을 너무 편하게 산다고 비난할 수 없다. 지나치게 어려운 길만 걷는 것도 바람직하지 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인간에게는 본성이 있다. 잠시 억누를 수는 있지만 십중팔구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일에 대한 욕구를 억지로 유지하거나 가치관이 다른 사람을 맞춰주는 일은 매우 어렵다. 상대에게 바라는 것이나 당신의 의무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내가 감당해야 할 도덕적 행위의 본질을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책임으로 연결된 촘촘한 관계망 속에서 살고 있기에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임무가 있다. 그 임무를 완수할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렇다고 순종적이고 얌전한 강아지처럼 굴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용감하게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당당하게 진실을 말하고, 생각을 분명히 밝히고 당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적어도 당신의 삶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할 때는 늘 신중해야 한다. 우리는 성인이 된 순간부터 고유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자신만의 문제와 씨름한다. 이런 문제는 각자가 살아온 삶으로 빚어진 피할 수 없는 것들이다. 직업과 하는 일이 각자의 삶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우리 삶의 다른 부분들과 상호 작용하며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가운데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디 않으려면 어디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투자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포기해야 할 것과 계속해야 할 것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들 – 인간은 시각적인 종재이므로, 관심 있는 대상에 눈길을 보내고 다가가서 살펴보고 만져 보고 소유한다. 목표가 없으면 우리는 항해할 수 없다. 리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끝없이 항해해야 한다. 우리 자신뿐 아니라 이 세상 역시 불충분한 상태로 보기 때문에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늘 무엇인가를 시도한다. 현재는 부족하고 미래는 낫다는 생각, 이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다. 무엇인가를 보려면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초점을 맞추려면 먼저 대상을 정해야 한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대상 중에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예지력과 창의력은 만성적인 불안과 불만을 유발하는 단점이 있다. 충분한 성공과 가치를 이루어 내지 못한 현재의 삶을 깎아내리는 대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신에 대한 철저한 ‘점검’이다. 잘만 활용한다면 내면의 비평가가 점검 작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상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나아가려는 방향이다. 행복은 산 정상에서 느끼는 잠깐의 만족이 아니라, 산을 오르는 길에서 느끼는 희망이다. 내면과의 진정한 대화는 작지만 세심한 친절과 적절한 보상으로 가능해진다. 내면의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으면 바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이번에도 내면의 전문가에게 의견을 물어볼 수 있다.

‘하루를 마무리할 때 아침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내가 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그에 대한 보상을 정하라. 서투르더라도 결심한 것들을 행동으로 옮겨 보라. 행동으로 옮겼으면 그 보상으로 자신을 위한 작은 것이라도 해주어라. 이런 나이 켜켜이 쌓이면 엄청난 변호가 생긴다.

원하는 것이 바뀌면 보이는 것도 바뀐다 – 인간은 부주의맹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것에만 시선을 두면, 나머지는 보이지 않게 된다. 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므로, 무엇을 볼 것인지 신중하게 선택하고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 우리 눈은 도구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 목표를 분명하게 보게 된 대가로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시각을 잃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우리가 위기에 빠졌을 때는 그간 보지 못하던 산적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보이게 된다. 다행스러운 점은 그 문제들 속에 해결의 실마리가 들어 있다. 보지 못하던 것이 많았기 때문에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기회도 많다는 뜻이다

하나의 욕망은 나의 다른 욕망과 충돌하고, 다른 사람의 욕망과 경쟁하며, 더 나아가 세계 전체의 욕망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도 업고 사소한 것 하나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구약 성경》의 하느님과 《신약 성경》의 하느님 - 《구약 성경》의 하느님은 곧 자연의 힘이었다. 《구약 성경》의 이스라엘 민족과 그 조상들은 하느님을 하찮게 여길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느님을 분노케 하면 무지막지한 지옥을 현실에서 경험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편 《신약 성경》의 하느님은 확연히 다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인간의 교만함을 매섭게 나무라고 최후의 심판을 내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자비롭고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오로지 최선을 다해 살라고만 할 뿐이다. 기본적으로 사랑의 하느님이다. 따라서 《신약 성경》의 세계는 낙천적이고 온기 가득한 아름다운 곳이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 죽음과 파멸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 그런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삶의 조건이 보편적으로 향상된 모든 인간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면 독단적이고 무시무시한 능력을 지닌 《구약 성경》의 하느님을 자애로운 《신약 성경》의 하느님처럼 대하기로 결심한다. 두 하느님을 동일시한다는 것이 여러 면에서 불합리하다는 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선한 마음과 선한 행동으로 존재 가치를 입증하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인간 스스로 의미를 찾지 않으면 이 세계와 자신의 삶에는 아무 의미도 남지 않는다. 스스로 존재 가치를 입증하겠다는 이런 결정은 실존적 믿음의 선언이고, 증오심과 그 증오심이 만들어 낼 모든 안 좋은 것에서 벗어나게 해줄 믿음의 선언이다. 이런 결정을 통해 우리는 허무주의와 원한과 오만을 극복할 수 있다. 실존적 믿음은 의지로 가질 수 있는 믿음이 아니다. 실존적 믿음은 삶의 비극적 불합리성은 본질적인 선을 향한 헌신으로 맞서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감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목표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것을 이해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다. 그런데 이 험난한 여정을 견디는 방법은 지금까지의 편협한 경험과 지식, 생각으로 새로운 믿음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지그까지 잘 써먹어 온 낡은 수법을 버리고, 한 번도 주목하지 않은 것에 주목하라는 말이다.

현재에 집중하라 – 현재 내 주변을 둘러싼 물리적인 환경과 심리적인 환경에 집중해야 한다. 짜증 나게 하는 게 뭔지, 신경 쓰이는 게 뭔지, 걱정거리가 뭔지 정확히 파악하여 바로잡을 수 있는 것과 바로잡아야 할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 내면을 환히 밝히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찾겠다고 결심해야 오늘에 집중할 수 있다. 희생해야 할 것은 그게 무엇이든 희생하고, 그렇게 최고의 선을 추구하는 삶에 헌신하겠다고 결심해야만 오늘에 집중할 수 있다. 현재의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당신과 비교하라.

법칙 5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라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들과 내버려 두는 부모들 – 아이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알아야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일 부 남아 선호를 하는 사람들은 아들을 정복자가 된 듯한 느낌으로 살도록 키운다. 그만큼 자신의 성공에 대한 믿음이 강해져 실제 성공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정복자 느낌’ 때문에 실제 정복자가 되기도 한다. 성별이나 성격 혹은 상황에 상관없이 부모의 무의식적 또는 의식적 증오가 자녀의 올바른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부모의 시간은 얼마나 낭비되는가 – 일상적인 문제는 뚜렷한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늘 일어나는 일이라서 사소하게 여기기 쉽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다. 매일 일어나는 흔한 일이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이들은 순수하므로 나쁜 아이는 없다는 생각은 무척 순진하고 낭만적이며 위험하다. 모든 것은 사회 탓이라는 주장도 한쪽으로 치우친 이데올로기적 이론에 불과하다. 사회를 개혁한다고 개개인의 골칫거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변화가 사회의 안정을 해쳐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는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함께 사는 법을 익혀 왔고 점진적으로 조금씩 복잡한 사회를 체계화해 왔기 때문에 우리 행위와 생각 중에는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하는지 잘 모르는 것이 많다. 따라서 사회를 검증되지 않은 이론으로 뜯어고치려 들면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많은 문제를 양산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순수한 아이’라는 허상 – 인간은 선함과 악함을 동시에 지닌 존재이므로 어린아이도 어른만큼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악한 면을 통제하는 법을 배운다. 인간의 어두운 면을 역사와 사회의 책임으로만 볼 수 없는 증거들이 보여준 여러 연구들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가 커지고 체계가 잡힘에 따라 인간의 폭력성이 줄었음을 입증하는 객관적 증거도 많다. 따라서 인간의 폭력적 성향을 병든 사회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악한 행동을 억제하고 선한 행동을 장려하는 데 사회화 과정은 필수적이다. 부모의 ‘자상한 무관심’으로 인해 아이가 규칙과 절제를 배우지 목하고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바로 어린아이 자신이다. 부모의 방치로 인해 생기는 의존적 성향은 임시방편적이고 부적절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존을 받아 주려면 엄청난 시간과 자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응석을 받아주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부모인가, 친구인가 – 요즘 부모들은 대체로 아이들을 꾸짖거나 체벌하면 아이와 멀어질까 봐 두려워하며, 자녀들과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부모는 평생 둘뿐인 친구를 넘어서는 존재다. 친구의 권위는 잘못을 교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부모라면 자녀가 순간적으로 쏟아 낸 분노와 증오를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부모는 자녀와 사회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자녀가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고 생산적으로 교류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자녀 훈육은 책임이 따르는 행위다. 훈육은 잘못된 행위에 대한 분노가 아니고, 그릇된 행위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공감과 장기적 판단을 세심하게 결합한 행위다. 자녀를 틀에 가두어서는 안 되고, 어른들의 교육과 참견 때문에 아이들의 무한한 창의력이 제약받는다는 생각은 여러 연구 결과를 보면 사실이 아니다. 아이는 어른들 반응을 보고 자유의 한계와 범위를 인식한다. 그 한계를 확인하는 시점에는 일시적으로 짜증을 내거나 불만을 가질 수 있지만, 그 한계가 바로 아이들의 안전망이다. 세 살짜리 아이들이 인간 종족 중에서 가장 폭력적이다. 그것은 새로운 영역을 탐험하고 분노와 좌절을 표현하며 충동적인 욕망을 해소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허용되는 행동의 한계를 알아내려는 것이다. 잘못된 행동을 지속적으로 교정해 주면 어린아이는 허용되는 공격의 한계를 알게 된다. 교정 조치가 없으면 호기심이 커져서 공격적인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 교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다른 사람을 때리는 행위가 그다지 효고적인 사회적 전략이 아니라는 걸 깨우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훈육과 처벌 – 훈육과 처벌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이해하지만, 둘 다 양육에 꼭 필요하다. 물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다.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상을 통한 훈육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바람직한 행동을 장려하는 데 보상은 아주 효과적이지만 적절한 보상을 준다는 게 굉장히 어렵다. 인간은 이익보다 손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므로, 위협과 처벌은 나쁜 행위를 중단시키는 수단이 된다. 아이가 실패하지 않고,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배워야 할 것들을 잘 배울 수 있도록 아이의 학습 능력을 길러 주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사회는 어떤 엄한 부모보다 비판적이고 매정하다. 자녀의 훈육을 맡지 않으면 그 책임을 냉혹하고 무정한 세상에 넘기는 것이다. 사랑을 핑계로 훈육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비겁한 직무 유기다. 개인의 정신 건강은 공동체에 얼마나 순조롭게 진입했는가에 큰 영향을 받는다. 올바로 행동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 외톨이로 사는 것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보상을 통해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보상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단지 처벌과 위협을 언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잘 알아야 한다. 하지만 사람마다 기질이 모두 달라 쉽게 알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생물학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 성향은 사회적 요인에 의해서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 이런 큰 편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통제 기법들을 적절히 사용하면 모두 혜택을 누릴 수 있다.

필요한 최소한의 힘 – 가장 중요한 훈육 원칙은 중요한 최소한의 규칙만 남기고, 그 규칙을 적용할 때 최소한의 힘만 사용하라는 것이다. 자녀와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려면 아이가 훈육을 위한 개입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처벌에는 자유 박탈과 사회적 격리가 있지만 체벌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효과적으로 훈육하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훈육 자체를 포기하지만 않으면 효과적이지 않아도 괜찮다. 경계를 넘나드는 어린아이에 대한 체벌은 책임 있는 부모가 고려해야 할 훈육 행위다.

훈육 원칙의 재정리 – 첫 번째 원칙은 ‘중요한 최소한의 규칙만 남겨라’, 두 번째 원칙은 ‘그 규칙을 적용할 때 최소한의 힘만 사용하라’, 세 번째 원칙은 ‘부모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네 번째 원칙은 ‘부모는 자신들도 냉정하고 교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기만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 원칙은 ‘부모에게는 현실 세계의 대리인으로 행동할 의무가 있다’ 등이다.

착한 아이와 책임을 다하는 부모 – 자녀가 언제 좋고 언제 싫은 지 배우자나 아이를 잘 아는 사람과 의논해 보라. 아이를 잘 키우려면 먼저 당신의 마음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당신에게는 자녀를 훈육할 책임이 있고, 그동안 저지를 수밖에 없던 실수에 대해서도 책임져야 한다. 어른이라도 잘못했으면 사과해야 하고, 더 나은 방법을 끊임없이 찾고 배워야 한다. 아이가 미워질 때는 다른 사람들은 그 행동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해 보라. 그들은 당신 아이에게 훨씬 가혹한 벌을 줄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대비하여야 한다. 아이에게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알려 주어야 한다, 그래야 당신 자녀가 집 밖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으로 클 수 있다. 분명한 규칙은 자녀 성장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차분하고 합리적인 부모가 되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사회성 발달과 심리적 성숙이 최적의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훈육과 처벌 원칙은 용서와 공정함의 바탕 위에 있어야 한다.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라.

법칙 6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

종교적인 문제 – 증오가 복수심으로 가득한 인간의 파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인 것은 사실이다. 삶은 고단하다. 모두 삶의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때로는 의도적인 맹시, 잘못된 판단, 악의적 행동 같은 나의 잘못 때문에 고통이 찾아오기도 한다. 고통을 겪는 사람이 행동을 바꾸면 그 후의 삶이 덜 비극적으로 전개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통제력은 제한되어 있다. 절망과 질병, 노화와 죽음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결국 우리가 나약한 이유는 우리 잘못이 아니다.

복수 혹은 변화 – 대량 살해범은 자신의 삶에 가해지는 고통이 심판과 복수를 정당화해 준다고 믿는다. 끔찍한 학대를 당하며 성장한 사람에게 타인에 대한 용서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런데 “악을 경험한 사람은 악을 퍼뜨림으로써 악을 존속시키려는 경향이 있으나, 악을 경험함으로써 오히려 선을 학습할 가능성도 있다”고 니체는 말한다. 복수심은 간혹 정당화되기도 하지만 생산적인 생각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솔제니친의 사례를 보면 현실의 구조 자체를 바꿀 수는 없을지 몰라도 인생은 바꿀 수 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 위대한 정신은 현실을 탓하지 않는다. 삶을 혐오하지도 않고, 하느님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안정적인 삶을 위해 체제를 세운다. 가족을 이루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국가를 만든다. 이런 체제의 밑바탕이 되는 원칙을 정하고 믿음의 체계를 만든다. 처음에는 순수한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성공이 계속되면 무사안일에 빠져 마땅히 해야 할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현재 가진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어렵고 귀찮고 안 좋은 일에는 눈을 감아버린다. 세상이 변하고 타락의 씨앗이 자라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히브리인들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면 항상 자신을 탓했다. 당신이 고통받고 있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고, 삶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하지만 그 고통이 더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그래서 그 때문에 비뚤어지고 있다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당신 삶을 깨끗이 정리하라 – 당신 삶을 깨끗이 정리하지 않고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해 보자. 당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합리화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지금 당장 중단하라. 우리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여서 누구도 자신을 완벽하게 알 수 없으므로, 중단해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면 그냥 중단하라. 다른 사람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당신의 판단이 행동의 기준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속한 문화의 전통을 무시하지는 말아라.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지혜는 어렵게 얻은 것으로, 전통과 문화 속에는 분명 삶에 유익한 지혜가 있다. 자본주의나 정치권을 탓하거나 적들을 욕하지 말아라. 체제를 손봐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당신의 경험을 먼저 정리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라. 당신의 양심과 이성이 시키는 일만 하라. 그리고 하루 그리고 몇 주가 지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제대로 실천하면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것들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자신부터 달라지려고 계속 노력한다면 인간의 삶에서 비극마저 사라질지도 모른다.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

법칙 7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

피할 수 있을 때 피하라 – 삶은 고통이다, 분명한 사실이고 반박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진실이다. 삶은 고통이라는 사실은 사실 오래전부터 즉각적이고 이기적인 쾌락을 좇는 삶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되었다. 쾌락은 순간적이고 덧없을 수 있지만 그래도 즐거운 것이다. 한때의 즐거움은 삶의 두려움과 고통에 견줄 만하다. 그런데 더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대안을 조상들은 다양하게 내놓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답들이 대체로 함축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그 답들을 실행에 옮기고 이야기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해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그 이유가 무엇이며, 누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경험을 통해 그러 것들을 배웠다. 우리가 가진 지식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습관적인 절차와 행동 양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혀 다른 사람들이 대체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예측할 수 있다. 그런 양식들은 오랜 시간을 거쳐 진화한 것이다.

만족 지연의 중요성 – 노동은 ‘나중에’ 얻을 이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행위다. 노동을 포함한 희생은 ‘만족 지연’이다. 만족을 늦출 수 있다는 발견은 시간의 발견이었고, 시간의 발견은 인과 관계의 발견이었다. 자발적이 이간의 행위가 특정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충동을 자제하고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시간과 장소에서 보상을 받는다. 그래서 충동을 통제하고 관리함으로써 다른 사람이나 우리 자신의 미래에 악영향을 줄 만한 일을 하지 않는다. 사회도 이런 방식으로 틀을 잡아 왔다. 오늘의 노력이 내일로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인과 관계의 발견이 사회 계약을 활성화했다. 사회 계약은 주로 사람들과의 약속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를 통해 오늘의 노동은 안정적으로 미래의 보상이 되어 돌아왔다. ‘이해’는 말보다 행동으로 먼저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희생과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두 종류의 근본적이고 원형적인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해야 한다. 첫 번째는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가?”이고, 두 번째는 희생으로 미래가 나아진다는 기본적인 원칙에 관련된 구체화 과정으로 이 기본적인 원칙에 한계는 없는지 하는 의문이다.

만족 지연은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내재해 있는 동물적 본능과 반대되는 것이다. 문명이 지연된 보상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안정된 상황에서만 만족 지연이 효과를 발휘한다. 사회 안정과 만족 지연이라는 두 목표를 동시에 이룬 방법은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화한 덕분이었을 것이다. 발전적으로 진화한 첫 번째 이유는 먹을 것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를 위한 저축’이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여기서 희생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이런 생각이 더욱 발전하여 공유라는 사회적 개념으로 확장된다. 공유한다는 것은 교환 과정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낯선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망설임을 극복해 간다. 전통적이 관습과 설화가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희생과 공유의 지혜를 담아 우리에게 전해져 오고 있다.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큰 희생은 무엇이고, 최고의 보상은 무엇인가? 현실 세계에 대한 인식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따라서 눈에 들어오는 세계가 원하는 세계가 아니면 가치관을 점검해 봐야 한다. 지금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야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당신이 목표로 하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죽음과 노역과 악 – 인간은 자의식을 가진 유일한 존재다. 자의식 덕분에 인간은 스스로 나약하고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인 존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런 자의식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야기한다. 그 고통으로 인해 이기적이고 즉각적인 만족을 중요시하는 생각, 즉 편의주의에 빠져든다. 사회와 자연은 사실 고통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다. 심지어 주된 원인도 아니다. 인간들의 비인간적인 행위가 훨씬 심각한 문제다. 이런 이유로 희생의 의미는 더욱 복잡해진다. 단지 가난과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하고 희생하며 현재의 만족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악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와도 관련이 있다. 인간의 악함이 만들어내는 고통은 세상이 주는 시련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다. 자의식 형성을 우주적 규모의 대재앙이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재앙이었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악한 짓을 하면 어떤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던 정신을 무너뜨릴 수 있다. 이런 사악한 행위는 단지 삶이 힘들고 가혹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노력이 계속해서 거부당하면 상황이 달라져 뒤틀리고 일그러져 괴물처럼 변할 가능성이 크다.

악에 맞서다 – 군인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주된 이유는 목격한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행위 때문이다. 정신이 황폐한데 배를 채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올바른 삶이 빵이나 돈보다 낫다. 개인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것으로는 인간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신분이 상승할수록 내면의 어둠이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도 커진다. 피와 약탈, 파괴에 대한 욕망은 권력욕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하지만 계급 구조의 최정점 위에는 또 다른 자리가 있으니, 그것을 위해 즉각적인 만족과 본능적인 욕망을 거부하고 최고의 선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기독교와 그 문제점 – 융은 유럽의 지성이 물질세계를 연구하고 과학 기술 발전에 힘을 쏟게 된 이유가 기독교에 대한 실망 때문이라고 가정한다. 기독교가 영적인 구원을 강도하면서 현실의 고통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생각이 유럽인의 집단 심리에 자리를 잡았다. 기독교는 불완전한 요소가 있었지만 실패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 교리는 서구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의 영혼을 강조했고,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평등함도 강조하였다. 유럽에서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깨달음을 통해 스스로 개인과 사회를 재조직하는 길을 선택했다. 인간의 본성을 생각해 보면 이런 변화는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그러나 성공 가도를 달려온 기독교도 인간을 괴롭히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고통을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못하였다.

니체와 도스토옙스키는 자유와 행동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이유로 교황청의 교조적인 독선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개인이 자유롭고 적법하게 행동하려면 엄격하고 일관적인 규율에 따라 파괴 직전까지 내몰릴 정도로 혹독하게 교육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모가 자녀를 올바르게 훈육하려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자유를 제재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의 자유로운 표현에 제한을 두고, 건전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자녀의 모든 잠재력을 일관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다양한 재능을 특정한 목적에 맞게 사용하게 함으로써 제약을 가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때로는 파괴자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녀는 영원히 어린아이로 남게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강요하는 전체주의에도 반발하지만, 우리 자신의 전체주의에도 저항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함부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니다. 우리는 이성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다. 특히 이성이 어떤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누구에게나 천성이 있다. 우리는 그 천성을 찾아내고, 그 천성과 한바탕 씨름을 벌린 후에야 자신과 타협할 수 있다. 문제의 본질을 알아야 그와 관련된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

의심, 순전한 허무주의를 넘어 –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 즉 ‘자각하는 나’야말로 어떤 회의에도 흔들리지 않는 존재의 초석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훨씬 오래전에 개념화된 것이었다. 근대적 자아는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생각하는 능력은 인간을 죽음을 이겨 내고 영원히 부활한 신과 비슷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인간은 생각을 통해 행동을 대신할 수 있다. 견딜 수 없는 부당한 고통이 변화를 요구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부터 포기해야 한다. 지금 적절한 희생을 해야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교묘히 고통을 가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악한 행위를 할 수 있다. 인간이면 누구나 선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안다. 최악의 죄가 순전히 고통을 주려는 목적에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짓이라면, 선은 그와 완전히 반대에 있는 모든 것이다. 그런 잘못된 행위를 멈추게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선이다.

의미, 혼돈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줄 해독제 – 인생의 필연적인 고통을 감안하면 불필요한 고통과 아픔을 줄이는 모든 행위는 선한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인격의 반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반되는 도 인격 중에 하나를 선택한 결과다. 편의주의는 맹목적인 충동을 따르는 편협하고 이기적인 선택이다. 불평등하고 고통스러운 삶은 아무리 원망해 보아도 바뀌지 않는다. 불필요한 고통과 아픔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훨씬 의미 있는 삶이다.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일을 가치 체계 가장 높은 곳에 두고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면 인생이 점점 충만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험은 신의 은총도 행복도 아니다. 알게 모르게 망가뜨린 삶에 대한 속죄다.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쉬운 길을 선택해서 원하는 것을 갖는 것보다, 어려운 길을 선택해서 의미 있는 것을 갖는 것이 훨씬 낫다. 의미를 찾았다는 것은 혼돈과 질서의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삶의 모든 요소가 최적의 상태에 놓여 있을 때 의미가 생겨난다. 현재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하루하루 더 나은 삶을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는 주변의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인간이 경험한 모든 고난과 역사의 모든 끔찍한 투쟁마저도 선하고 강력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데 필요한 동력이 되어 줄 것이다.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

법칙 8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라,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말라

임상 수업 첫날의 기억 – 임상 수업에 동행해도 되는지 묻는 환자에게는 적당히 에둘러 거절하거나 정직하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 편집증을 앓는 사람에게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주정뱅이 폭주족 집주인 – 쉬운 길을 택하는 것과 진실을 말하는 것이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이 아니다. 이 둘은 삶의 과정에 항상 함께 하는 서로 다른 길이며, 완전히 다른 존재 방식이기도 하다, 어는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세상을 조작하라 – 의도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세상을 조작하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행동하라’라는 말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다. 이는 결국 정보 조작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그들을 조종하려고 할 때 쓰는 수법이다. 알프레드 아들러가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이름 붙인 것들이다. 인생의 거짓말은 인식과 생각, 행동으로 현실을 조작하려는 시도다. 그래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미리 계획한 한정된 결과만 얻을 수 있다. 인생의 거짓말에 의존하는 삶은 현재의 지식으로 선별한 ‘좋은 것’들이 미래에도 좋을 것이고, 현실 세계는 있는 그대로 두면 견디기 힘든 곳이 된다는 두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첫 번째 전제는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고, 두 번째 전제는 현실 세계가 본질적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이어야 하고 현실이 얼마든지 조적하고 왜곡할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만족되어야 하는데 이 조건을 충족하려면 웬만한 교만과 확신으로는 불가능하다. 합리성이란 능력은 자만심으로 변할 위험이 있다. 자만심으로 인해 자기가 가진 것들에 애착이 생기고 애착이 심해지면 그것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어진다. 인생의 거짓말에는 거짓말을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때 나타나는 또 다른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 저지르는 죄를 ‘작위에 의한 죄’라고 하는데, 잘못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음에도 방치하는 행위 역시 작위의 죄다. 소극적인 방치가 적극적인 범죄 행위보다 덜 심각한 것은 아니다. 숨어도 질병과 광기, 죽음과 세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숨는다는 것은 실현되지 않은 자아의 잠재력을 억압하고 감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이 진짜 문제다. 자기 생각을 당당히 말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어디라도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미완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삶은 미완의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혹하다. 속마음을 감추고 가식적으로 행동하면 의지가 약해진다. 의지가 약한 사람은 삶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만나는 역경을 이겨내지 못한다. 그 결과로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바람직한 미래에 대한 비전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문제는 비전이 아니라 ‘의도적 무시’다. 의도적 무시는 최악의 거짓말로서, 교묘하게 이루어지고 쉽게 합리화된다. 우리가 어떤 게임을 하기로 했다면 그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며, 그 게임이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중요한 게임’이고 게임을 하는 동안의 움직임은 승리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만 유효하다는 숨어 있는 규칙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가치가 없는 게임을 해서는 안 되고, 당신의 움직임이 승리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다른 움직임을 시도해야 한다. 하지만 때로는 가치 체계 전체가 잘못된 경우가 있으므로, 이런 경우에는 그 자체를 버리고 완전히 다른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 혼란과 두려움 이 수반되기는 하지만 혁명이 필요한 때다.

고통이 감수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면 가장 약한 지점에서부터 산산이 부서진다. 가장 완벽한 삶도 이런 나약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만과 거짓이 팽배한 거짓과 가족, 사회는 선천적인 약점이나 재앙이 아주 심각한 위기로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해도 지상에 낙원을 세우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할 것이지만, 정직함은 삶과 관련된 고통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 정신적으로만 무너지지 않으면 인간의 회복력은 상상을 넘어선다. 이때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격려가 큰 힘이 된다. 우리를 구해주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부터 배우겠다는 의지이고,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또한 가능한 자아실현을 위해 현재의 자아를 희생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오직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이유 – 우리의 지식은 제한되어 있다. 최선의 목표와 최선의 수단이 무엇인지 확실히 판별할 수 없더라도 지금 이곳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목표와 야망은 행동에 필요한 시스템을 제공한다. 목표는 가야 할 길, 즉 현재에 대비되는 목적지를 알려 주고 모든 것을 평가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목표가 있어야 무엇이 진전인지 명확히 규정하고, 진전이 이루어질 때마다 자극받게 된다. 분명하고 의미 있는 목표는 불안감까지 줄여준다. 반대로 모호한 목표는 평온한 마음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따라서 깊이 생각해 계획을 세우고, 지식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전체주의적 확신이란 유혹에 빠지지 않고 가치 있는 미래를 설계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방법은 전통의 힘을 빌려 도움을 받고 현재 알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모르는 것과 친해지고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세히 관찰하여 남을 나무라기 전에 당신의 눈을 가린 들보를 걷어내는 것이다.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를 얻을 때마다 과거의 개념이 도전을 받고, 혼돈에 휩싸여 사라지면, 결국에는 더 나은 것으로 다시 태어난다. 간혹 그런 작은 죽음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회복이 무척 어렵고 회복하더라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언제라도 잃을 수 있는 지위나 권력보다 인격과 능력의 향상과 관계가 있는 야망을 품어라. 특히 자신에게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진실을 말하는 삶이 아니라면 더 나은 목표를 찾을 기회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성장하면서 가치의 기준도 바뀌어 중요한 것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변할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점진적으로, 때로는 급격하게 삶의 방향을 조절할 것이다. 진실이 밝혀질 때마다 항상 그 진실에 맞추어 살려면 삶의 방식에서 비롯되는 갈등을 받아들이고 해소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당신은 분별력을 갖춘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 조금씩, 때로는 크게 성장해 갈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을 더 지혜롭게 설정한 새로운 목표에 가까이 다가선다. 이 과정에서도 필연적인 실수를 발견할 때마다 바로잡으며 한층 지혜롭게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 이렇게 경험을 통해 지혜를 축적해 가면 중요한 것에 대한 당신의 기준도 자리를 잡는다. 그 결과 당신은 방황을 끝내고 선을 향해 똑바로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진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당신의 진실은 당신이 처한 독특한 환경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오직 당신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의 개인적인 진실을 파악한 뒤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신중히 그리고 명확하게 전달해 보라, 그러면 현재의 믿음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확실한 안전과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또한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서 벗어나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라.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말라.

법칙 9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것을 들려줄 사람이라고 생각하라

조언과 진실한 대화의 차이 – 심리 치료는 조언이 아니라 진솔한 대화다. 혼란한 사람은 합리적으로 정돈된 해석 체계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심리 상태가 질서를 회복하고 삶이 크게 나아진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다시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은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걸 예방하는 도구이므로, 과거에 대한 기억은 추론이고 어느 쪽도 진실은 아니다.

혼자 힘으로 직접 생각해 보라 – 경청은 내담자의 문제를 내담자에게서 빼앗지 않는 방법 중 하나다. 특별한 것 하나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때로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전부를 바꿔야 할 때가 있다. 말을 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생각한다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고 어떻게 행동할지 계획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해서는 안 될 어리석은 짓들을 알아낼 수 있고 고통을 피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목적에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혼자서 할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모의실험을 통해 행동을 계획한다. 오직 인간만이 그렇게 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한다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생각이라 여겨지는 것은 주로 자기비판이다. 진정한 경청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사고도 드물다. 생각은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세계관이 내면에서 하는 대화다. 진실하게 생각하려면 명료하게 말하고 신중하게 들어야 한다. 진실하게 생각하려면 갈등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그 갈등을 받아들여야 한다. 갈등에는 협상과 타협이 필요하다. 주고받는 법을 배우고 전제를 수정해 생각의 방향과 세계관을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 또는 여러 아바타의 실패가 있기 마련이므로 생각하는 행위는 정서적으로 괴롭고, 생리학적으로도 부담스럽다. 생각과 감정을 명료하고 정확하게 표현해야 이런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경청하는 사람 – 경청하는 사람은 군중을 대표한다. 말하고 있지 않을 때도 협력자인 동시에 적이다. 그런 양면적 상황을 피할 수 없다. 미묘한 표정 하나로도 반응이 상대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말을 해야 할 때도 있는데 그 판단 기준은 상대가 조금이라도 나아져야 한다는 목표다.

경청의 기술 – 상대의 말을 요약하는 대화법의 이점은 내가 상대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고, 상대가 기억을 강화하고 활용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고, ‘허수아비 논법’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면, 상대는 자기 생각을 빠짐없이 솔직하게 전달한다. 놀랍고 이상하고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꾸밈없이 털어놓는다. 아마 지루할 틈이 없을 것이다.

영장류의 서열 싸움과 상황에 대처하는 지혜 – 말하는 행위가 모두 생각하는 행위는 아니다. 또한 모든 경청이 변화를 유도하는 것도 아니다. 전혀 다른 의도로 진행되는 대화와 경청도 많다. 그것들은 대체로 수준이 낮고 역효과와 위험한 결과로 이어진다. 대화를 서열 경쟁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비슷한 유형으로 어느 쪽도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한편, 자기 생각을 강요하고 설득하려는 의도가 지배하는 대화도 있다. 이런 대화도 따지고 보면 서열 경쟁을 위한 것이다. 정치와 경제에 관련된 모든 논쟁은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이런 유형의 대화는 경청이 아니다. 경청은 한 번에 한 사람만 발언하고 상대방은 주의 깊게 듣는 것이다. 발언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사건에 대한 의견을 진지하게 개진할 기회가 주어지고, 다른 사람들은 그가 하는 말에 공감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런 대화가 중요한 이유는 화자가 사건을 설명하는 동안 마음속으로 그 사건을 정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화하며 머릿속을 정리한다.

지적 탐험을 위한 대화 – 이 대화는 경청과 비슷한 유형에 속한다. 듣는 쪽과 말하는 쪽 모두에게 진정한 상호성이 요구된다. 모든 참여자의 공통적인 관심사를 주제로 삼는 경우가 많고, 모드 그 문제를 풀려고 노력한다. 또한 모두 대화를 통해 뭔가를 배우겠다는 자세로 참여한다. 이런 유형의 대화는 실질적인 철학과 고결한 생각을 형성하므로 더 나은 삶을 위한 바람직한 준비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식을 체계화하고, 행동과 말의 기준이 되는 사상에 대해 논의한다.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인 철학을 굳게 믿고 깊이 이해한다는 뜻이다. 이 대화는 미지의 것이 이미 알려진 것보다 성장하는 데 도움이 돈다고 믿는 사람들이 참여한다. 그러니 당신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라. 그러면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새로이 얻은 지식이 합쳐져 지혜로 변할 것이다.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것을 들려줄 사람이라 생각하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라.

법칙 10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라

쓸모없는 노트북 – 인간의 지각 능력과 복잡한 세계가 드러나지 않게 상호 작용함으로써 노트북을 쓸모없는 물건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노트북이 성능을 발휘하려면 노트북 외에 필요한 것이 많은데, 이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신뢰’라는 사회 계약이다. 신뢰는 안정적인 정치적ㆍ경제적 시스템을 뒷받침하는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약속이다. 전체 시스템과 구성원은 상호 의존적이다. 시스템은 구성원의 책임과 의무로 유지되고, 구성원은 시스템으로 안전과 질서에 대한 보장을 받는다.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는 과정 – 사물과 대상을 보고 판단하는 과정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오랜 세월 진화한 인간의 지각 체계는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만드는 방법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사물을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고, 유용한 것 또는 방해되는 것 둘 중 하나로 구분하여 받아들인다. 이런 과정은 세계를 인식할 때 필요한 환원 과정이다. 이러 이유에서 정확하게 지각할수록 실제와 인식의 괴리를 줄일 수 있다. 우리는 도구와 방해물을 보는 것일 뿐 사물과 대상 자체를 보지 않는다. 우리에게 세계는 이용하거나 극복해야 할 목적물일 뿐 아무런 맥락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욕구와 능력, 제한적인 지각력을 고려하면 세상을 도구와 방해물로 구분하는 지각 방식은 유용하지만, 실제 현실과의 차이가 생길 가능성이 있어 위험하기도 하다. 우리 주변의 대상들은 단순히 우리에게 인식될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들은 그 자체로 완전한, 개별적이고 제한적이며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목표를 정확하게 설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복잡성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인식할 때도 다를 바 없다. 지각의 작동 원리상 피부라는 겉면이 자신과 세계를 나누는 경계라고 생각하지만, 그 경계가 수시로 변한다는 점은 잘 지각하지 못한다. 자아의 경계는 사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확장된다. 역시 국가와 개인 관계에 있어서도 나라는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동일시 대상이다. 우리가 자아라는 한계를 벗어나 가족과 국가 같은 대상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면 협력이 쉬워진다. 이는 또 다른 강력한 내적 메커니즘인 자기 보호 본능의 영향 때문이다.

올바른 행동과 단순한 세계 – 현실 세계를 대충 파악해서는 서로 복잡하게 얽힌 혼돈의 정체를 이해할 수 없다. 현실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움직이고 변한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독립된 단위는 더 작은 독립 단위로도 구성되고, 더 큰 단위의 부분이 된다. 그런데 전체와 부분을 가르는 층위들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다. 그 경계는 구체적이고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만 타당하다. ‘완전하고 충분한 지각’이라는 환상은 모든 것이 생각한 대로 진행되어야 유지되고, 목적에 맞게 작동한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에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아무 문제가 없을 때는 단순하게 보이는 세상이 무엇인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한없이 복잡해 보인다. 우리가 편하게 살기 위해 무시해 온 세상의 복잡함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올바로 움직여야 우리도 단순해질 수 있다 – 우리는 인과 관계로 연결된 거대한 그물망에서 극히 일부만을 지각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터지면 보잘것없는 지각 능력의 밑천이 드러난다.

혼돈 속에서 무엇을 봐야 하는가? – 우리가 사물과 주변 세계를 지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혼돈 덕분이다. 혼돈 속에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안정적인 것들에 반응하면서 지각의 메커니즘이 완성된다. 따라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는 바로 그 혼돈을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 혼돈은 조금씩 떠오른다. 태만의 파괴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말다툼을 하려면, 비참하고 위험한 가능성의 두 형태, 즉 혼돈과 지옥을 동시에 감수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혼돈은 모든 인간관계 혹은 삶 자체의 잠재적 유약성을 의미하고, 지옥은 당신과 상대의 악의가 동시에 튀어나와 모든 것을 망가뜨릴 가능성을 의미한다. 어떤 회피에나 그럴듯한 핑계가 있지만, 그것은 무엇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제를 명확히 규정하면 해결책을 구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성공을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실패도 규정하지 않기 위해서다. 실패를 규정하지 않으면 실패하더라도 상처받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지만, 실패를 인정하지 않아도 실패는 실패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혼돈이 얼굴을 드러낼 때 우리는 말을 통해 혼돈을 바로잡고 질서를 다시 찾을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협상을 통해 합의에 이르면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도 있다. 불확실성의 안개가 걷히지 않는 한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한 협상은 불가능하다,

영혼과 세계 – 우리가 인간으로서 최고 수준의 삶에 이르면, 영혼과 세계는 언어를 통해 체계화되고, 언어를 통해 연결된다.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면 세상은 지그까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면 삶은 제자리를 잃고 방황하게 된다. 뭔가 잘못되었으면 생각과 행동만이 아니라 인식 자체에 문제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어떤 오류가 발생했다는 것은 혼돈이 목전에 닥쳤다는 징조다. 명확히 이해되지 않는 끔찍한 혼돈으로 붕괴된 상태에서도 새롭고 긍정적인 질서의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명료한 생각과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문제에서 탈출하려면 먼저 문제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복잡하게 뒤얽힌 혼돈을 분석하고, 자신을 포함해 모든 것의 특성을 정확하게 규정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며, 세계를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아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동시에 자신의 힘으로 외부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

알곡과 쭉정이 – 정확하게 표현하면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일어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모든 가능한 사건을 구분할 수 있다. 예상하지 않은 일을 당해도 웬만한 것은 충분히 버텨낼 수 있다. 뜻밖에 닥친 일이라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면 현실 자체가 지속 불가능할 정도로 큰 혼돈에 빠질 것이다. 혼돈은 점점 확대되어 모든 질서와 미래와 감각을 삼켜 버릴 것이다. 어떤 사물을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면 복잡하게 서로 연결된 전체에서 떨어져 나와 쉽게 지각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변한다. 이런 식으로 주변을 단순화하면 모든 것이 명확하고 유용한 것으로 변한다. 대화할 때는 주제를 의식적으로 명료하게 규정해야 한다. 특히 까다로운 문제를 두고 대화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의 주제가 ‘모든 것’이 된다. 이런 무분별한 대화는 바람직하지 않다. 당신의 목표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당신의 의도를 말로 표현해보면 의도하는 바를 명확히 알아낼 수 있다. 당신이 말한 대로 행동하라. 그래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낼 수 있다.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라. 당신의 잘못에 주목하고, 그 잘못들을 정확하게 말로 표현하고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라. 이렇게 할 때 각자의 삶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삶의 비극에서 우리를 지켜낼 수 있다. 삶이 혼돈을 직시하고 정면으로 맞서라. 목적지를 명확히 설정하고, 그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지도에 표시하라. 당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말하라.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알려라. 주의 깊게 관찰하며 앞으로 나아가라. 항상 솔직하게!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라.

법칙 11 아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탈 때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위험과 정복 – 아이들에게는 야간 위험한 놀이터, 즉 도전 의식을 자극하는 놀이터가 필요하다. 인간은 위험을 최소화하는 데 관심이 없다. 그보다 위험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한다. 인간은 너무 안전하면 다시 위험해지고 싶어 한다. 특별한 제약이 없고 환경이 받쳐 주면 인간은 도전적인 삶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성공하는 경험이 쌓이면 자신감이 생기고 혼돈에 맞설 만한 힘이 길러진다. 미래에 얻게 될 것을 기대하며 현재에 충실할 때 자극을 받고 활력을 얻는다. 과잉보호에 익숙해지면 위험한 상황이 느닷없이 나타났을 때 맥없이 무너진다.

성공과 원한 – 누군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숭고한 원칙에 따라 행동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사람의 동기가 진실하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욕에 불타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먼저 자신부터 그가 말하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

다시 내 친구, 크리스에 대해서 – 인간혐오증에 걸린 크리스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한다.

자칭 인류의 심판자들 – 우리는 이제 막 생명의 그물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적 도구와 기술을 갖게 되었지만 아직 완벽하지는 않다. 그러니 지금까지 저지른 파괴적 행위에 대해서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 우리에게 전 지구적인 규모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류를 심판받아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여 극악무도한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들은 지구의 암적인 존재인 인간을 영원히 제거하여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 될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인류를 비난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런 주장 뒤에 숨어 대재앙이 닥치기를 은밀히 바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과 결혼 –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은 연애 상대를 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안정적이지 않은 관계가 늘어난다. 성 해방 관점에서는 진전이라고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오히려 여성에게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안정적인 남녀 관계는 남성이나 여성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

가부장제에 대하여 - 문화는 예로부터 억압적 구조로 존재한다. 문화는 근본적이고 보편적이며 실존적인 현실이다. 문화는 우리가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우리를 정해진 틀에 가두고 여러 잠재적인 능력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도 크다. 문화의 억압적 요소만을 강조하는 것은 단순하고 위험하다. 어떤 서열 구조에서나 승자와 패자가 있다. 승자는 서열 구조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패자는 서열 구조의 부당함을 비판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공동체 내에서 특정한 목표를 집단적으로 추구할 때는 서열 구조가 형성된다. 목표가 무엇이든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평등을 추구하려면 가치 체계를 희생해야 하고, 그러면 삶의 목표로 삼을 만한 것이 사라질 것이다. 치밀하게 구조화한 문화 덕분에 우리에게는 다양한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승리할 길이 열려 있다. 문화가 상징적, 신화적, 원형적 관점에서 남성적이라고 남성의 창조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왜곡이다. 문화는 남성의 창조물이 아니라 인류의 창조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마르크스의 광범위한 영향력 – 여성학과 젠더 연구의 핵심 철학은 여러 학문에서 가져온 것이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인문학자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잊지 않기 위하여: 이념에는 결과가 따른다 –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을 세웠을 때,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이상향으로 제시한 집산주의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체제는 개인과 기관의 끝없는 거짓말로 지탱되었다. 불평등한 분배가 사회의 안정을 위협한다는데 동의하지만 부작용 없이 부를 재분배하는 방법은 아무도 모른다. 부의 재분배 방법은 국가마다 역사와 지리적 조건이나 인구 규모와 종족의 다양성 등 처한 상황이 다르기에 직접적인 비교는 거의 불가능하다. 계급이 존재하는 이유는 많다. 건강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는 ‘능력’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기본 요인이다.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능력과 역량과 실력이지 ‘힘’이 아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힘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힘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해야 그들이 힘을 사용하는 것도 정당화되기 때문은 아닐지 생각해봐야 한다. 모든 결과가 공정해질 때까지 사회를 변화시켜야 하고 편견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은 모든 결과가 공정해지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지, 사회 변화와 편견의 제거가 정의롭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결과가 평등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려면 먼저 결과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지만, 누구도 명확히 할 수 없는 작업이다. 집단 정체성은 개개인의 단계까지 분해될 수 있지만,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복잡성을 논의한 적이 없다.

소녀처럼 자라는 소년들 –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처럼 사회화하면 세상이 더욱 나아질 것’이라는 주장은 어느덧 사회 구성주의 이론의 핵심 원리의 하나가 되었다. 이런 이론의 전제가 되는 가정은 공격성이 학습되는 것이라는 것과 남성이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권장되던 행동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공격성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정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공격성은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지나친 연민의 문제점 – 희생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행동으로 여겨지지만, 충분히 공격적이지 않기 때문에 직장과 가정에서 곤란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역효과를 낳는 일이 많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원하는 것을 명확히 표현할 준비를 헤 두어야 한다. 상대방에게 과거에 한일, 지금 한 일을 구구절절 늘어놓기보다는 원하는 것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낫다. 한 여인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남성적 의식과 관계를 맺고 무서운 세계와 맞서야 한다. 한 남자가 여자의 성장을 어느 정도까지 도울 수 있지만,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모두에게 좋지 않다.

우리는 더 강해져야 한다 – 남성은 일반적으로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것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속성이 있다. 이는 여성에게는 명백한 이점으로 작용한다. 남성이 여성화되는 극한 상황에 내몰리면 냉혹하고 파시스트적인 정치 이데올로기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 남성은 강해져야 한다. 남성이 강한 남성을 요구하고 여성도 강한 남성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인함을 키우는 사회적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가혹하고 모멸감을 주는 단계가 포함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은 그런 과정을 좋게 보지 않는 듯하다. 건강한 여성은 소년이 아닌 강한 남자를 원하므로 소년이 남성이 되려고 애쓸 때 방해하는 시대 풍조는 여성의 편도 아니고 남성의 편도 아니다.

법칙 12 길에서 고양이와 마주치면 쓰다듬어 주어라

개에게도 똑같이 해 주어라 – 인간은 소속 집단 구성원을 좋아하기에 사회적이고, 다른 집단 구성원을 좋아하지 않기에 반사회적이다. 협력과 경쟁은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집단의 규모가 너무 작으면 권력이나 영향력이 없어 다른 집단의 공격을 막을 수 없어 그런 집단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유익하지 않다. 한편, 어떤 집단이 너무 크면 정상에 오를 가능성이 줄어들고 성공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집단에 소속되어 보호받기를 원하므로 성공 여부는 운에 맡기고 우선 어떤 집단에든 소속되려 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집단의 성장이 곧 자신의 성장과 이어지고 집단이 실패하면 유리할 것이 없다는 점을 깨닫고 점점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이것이 타이펠의 최소 집단 패러다임이다.

존재의 고통과 한계 – 삶이 고통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인 종교의 교리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나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쉽게 상처 입고 잘 망가진다. 누구도 노화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제대로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미 모든 것이고 어디에도 있다면, 굳이 가야 할 곳도 없고 굳이 뭔가 되려고 목표를 삼을 것도 없을 것이다. 한계가 없으면 어떤 이야기도 없으며, 따라서 삶도 없다. 합리적으로 이해받는 존재가 되려면 한계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변화하기 때문이다. 변화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 한계에서 오는 고통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삶이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삶을 증오하고 경멸하면 삶 자체가 더욱 힘들어질 뿐이다. 이런 증오와 경멸은 삶의 비극에 맞서는 자세가 아니다. 실존적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에 필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험난한 인생의 바다를 현명하게 항해하는 법 – 큰 질병이나 의기 상황에 놓였을 때 그 문제에 관해 대화하고 생각할 시간을 따로 정해 둔다, 그리고 매일 정해 놓은 시간에만 그 문제에 대해 상의한다. 그런 문제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제한하지 않으면 지치기 마련이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망가진다. 온종일 고민한다고 해서 더 나아지지 않는다. 힘을 아껴야 한다. 신중하게 행동하면 인간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인내하려면 절대자의 선한 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다시 개와 고양이 이야기 – 길을 걷다가 고양이와 마주치면, 존재의 경이로움이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보상해 준다는 것을 잠시나마 떠올릴 수 있다. 길에서 고양이와 마주치면 쓰다듬어 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