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새파랗게 어린 것에게 마음이 동할수가 있어

구대(九大) 법문학부(法文學部) 정문(正門)의 표정(表精)- 대학(大學) 정문(正門)의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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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규슈(九州)제대 법문학부 정문의 모양을 그려 보면 이렇다. 네 기둥이 서 있다. 가운데 두 기둥이 크고 가로 선 두 기둥이 작다. 기둥의 구조는 화강암으로 된 축대 위에 벽돌을 깎아 올려 놓았으며 가운데 두 기둥 꼭지에는 전등이 달려 있다. 그리고 두 큰 기둥 사이로 두 짝으로 된 쇠창살 문이 달렸고, 큰 기둥과 작은 기둥 사이로 또 각가 외짝으로 된 쇠창살 문이 달려 있다.

이 간단한 묘사로도 상상할 수 있겠거니와 돌과 쇠와 벽돌로 된 이 문은 퍽이나 무 뚝뚝한 문이다. 그러나 그 문은 내가 3년 동안 그것을 드나드는 동안 말할 수 없이 많은 표정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내가 처음 입학시험을 보려고 이 문을 들어갈 때 이 문은 내게 여간 냉담한 바가 아니었다.
제 주인의 아들이 되려고 찾아오는 나를 반기기는커녕 "너는 감히 이곳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고 위협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선뜻 그 문 안으로 들어서지를 못하고 얼마 동안 망설이다가 "오냐. 네 주인이 나를 귀한 아들로 맞아 줄 때 네 꼴이 어찌 되나 구경 좀 하자" 이렇게 마음을 올크려먹고 속으로는 어찌했든 겉으로는 유유히 걸어 들어갔었다.
그러나 두어 걸음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에서 또 보기 싫은 것을 만났다.
문 안으로 십여 척 떨어진 곳에 마치 순사 파출소 같이 벽도로 쌓아 올려 지은 박스 속에 순사 같은 양복과 모자를 쓴 수위가 오만하고, 냉정하고, 아니꼬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이때 또 다시 한 번.
"오냐, 내가 이 학교 제복을 입고, 교모를 쓰고, 네 활개를 펴고, 이 문을 드나들 때 네 초라한 행색을 구경 좀 하자." 하고 마음에 옥먹지 않았던들 그대로 비위가 상해 돌아 나왔을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시험이 끝날 때 까지 연 3일을 두고, 나와 이 문과 그 수위 사이에 이러한 암투가 경험되었다.

그러나 시험을 다 마치고 나올 때 나는 수위의 조소하는 듯한 눈초리와 이 문의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흥 하고 콧등으로 묵살하여 줄 수가 있을 만큼 나의 수험결과에 자신을 얻었다. 그때부터 2주일이 지나 합격의 통지를 받았을 때 나의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제 네 활개를 펴고 그 오만한 교문을 마음대로 들어 다닐 수가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문과 그 수위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루바삐 개학일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개학일이 왔다.
그러나 그 학교 제복과 제모를 쓰고 복수에 불타며 그 문 앞에 설 때, 그 문의 표정이 전혀 달라져 있었다. 그 냉담하던 표정은 어머니와 같은 보드라운 웃음으로, 위협하는 듯하던 표정은 아버지와 같은 무거운 위엄으로 변하여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쌀쌀하던 수위의 눈초리는 늙은 마음의 눈과 같이 선량하게 빛났다.

나는 더 그들과 암투를 경험할 수가 없었다.
나의 그렇게 옥먹었던 마음도 곧 봄눈처럼 스러졌다. 나의 이 눈치를 보고 이 문은 나를 포옹하려고 가슴을 벌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님의 품 안에나 안기듯이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어머님의 자애로운 미소와 아버님의 엄하나, 그러나 관대하신 웃음이 꿈처럼 서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로 인지 소리 있었다.
"이곳은 배우고 사람의 길을 닦는 곳이니라. 그러니 너는 진리를 찾고 덕을 닦아나가는 데 있어서만 너의 기쁨을 찾아야 할지니라." 낮으나 그러나 뼈 속까지 울리도록 힘 있는 어조로 말하였다.
이 소리에 알지 못할 경건한 마음이 일어나서 나는 부속도서관 앞 잔디밭 위에 가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부터 나의 기쁨은 오직 읽고, 생각하고, 스스로 매질하는 데만 있을 것입니다." 하고 굳게 맹세했다.
나로 하여금 이렇게 경건한 마음으로 맹세를 하게 한 것도, 그리하여 이곳에서 배운 3년 동안을 나의 일생에 가장 즐겁고 의의 있는 시기로 만들어 준 것도 이 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문이 밖 속세의 모든 불순한 공기와 훤조를 막고 교문의 신성하고 엄숙하고 긴장한 분위기를 빚어 주었으며, 또 아침에 학교를 들어설 때마다 나로 하여금 세속의 모든 잡념을 잊게 하고, 진리욕에 불태워 준 덕택으로 나는 나의 대학 3년 동안을 헛되어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진리를 찾고 사람의 길을 닦으라"라는 학교의 기대에 과히 크게 어긋남이 없이 3년을 마치고 사각모자를 벗고 중절모를 쓰고 "절금(折襟)"을 벗고 "배광(背廣)"을 입고 나올 때, 교문은 마치 갑자기 성장한 아들을 보는 아버지와 같이 놀람과 기쁨에 넘치는 표정을 하여 주었으며, 또 한편 사랑하는 아들을 멀고 험한 길에 떠나 보내는 어머니와 같이 서러워하고 안타까워하여 주었다. 그리고 "부디 큰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잊지 말고 또 찾아 주렴⌟이렇게 부탁하여 주었다.

세상 바다에 나온 지 3년, 그 동안 몹쓸 풍파를 겪을 때마다 나의 가장 그리워지는 곳은 아무런 근심·걱정 모르고 오직 배움에만 열중할 수 있었던 따스한 모교의 품안이다. 그곳에는 언제든지 평화와 정실과 기쁨이 있다. 지금도 아마 정문은 나를 반가이 맞아 주겠지. 그리고 그 품에 안겨 나의 괴로움과 슬픔을 다 잊게 해 주겠지. 정문 앞에 서서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바다처럼 노스탤지어가 나를 엄습한다.

([사해공론], 1권 5호, 1935. 9.1)

우수수 비오는 소리에 놀라 창을 열었더니, 바람이 뜰 앞의 오동나무 잎을 희롱하는 소리요, 별도 자지 않고 열사흘 둥근달까지 하늘 한복판에 해말쑥 밝다. 벌써 가을이로구나.

창을 닫았으나 뭇 생각이 설레어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아 마루 끝으로 나갔다.
"사람이란 무엇이며, 삶이란 무엇이냐?" 문득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며 늘 잊히지 않는 두 여인의 환상이 눈앞에 떠오른다.
내가 교토"京都"에 있을 때 일이다. 어느 봄날 학교에서 군사 교련의 야외연습이 있었다.
나는 중국군대의 후행군(後行軍)모양 "변당(辨當)"을 하나 차고 어슬어슬 뒤를 따라갔다.
나의 마음은 지향 없이 산으로 들로 떠돌았다. 이제 압천(鴨川)을 격하여 한창 맹렬한 산병전이 전개되었다.

바로 그때 나 있는 쪽을 향하여 언덕 위로 괭이를 메고 한 젊은 여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건들건들 걸 어왔다.

나는 그의 다시없이 튼튼한 몸집과 명랑한 웃음에 끌리어, 그가 멀리 어느 농가 속으로 사라질 때까 지 그에게서 돌리지 못하였다.
함박꽃 같이 온 얼굴에 활짝 핀 그의 웃음은 삶의 기쁨, 그것의 상징 같았다.
"삶이란 기쁨이다." 돌을 하나 쥐어 압천 건너로 힘껏 팔매를 쳤다. 나는 그날 종일 행복스러웠다. 그리고 그 뒤로도 그의 환상이 떠오를 때마다 잠깐 동안 모든 시림을 잊고 삶의 기쁨을 즐긴다.

그러나 삶이란 기쁨만이 아닌 것 같다. 삶의 기쁨의 상징 같은 이 여인의 환상이 나타날 때마다, 외롭 고 쓸쓸한 얼굴을 한 한 여인이 조심 조심히 그 뒤를 따라온다.

이는 내가 후쿠오카"福岡"에 있을 때 일이다.
어느 가을날 H군과 들로 산책을 나가서 우주니 인생이니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이야기 끝에는 누구나 다 그런 바와 같이 둘이 다 서글픈 마음으로 묵묵히 하숙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거의 인가 근처에 왔을 때 우리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쓸쓸한 가을들을 향하여 하염없이 걸어가는 버들가지와 같이 유약하고 밤보다도 침울한 얼굴을 한 한 여인을 만났다.
그 순간 우리는 알지 못할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혀 거의 무의식적으로 발을 멈추고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한참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다시 발을 돌려 하숙으로 돌아왔으나 어쩐지 마음이 무겁고 어두워졌다.
그가 걸어가던 그 방향에는 들 가운데에 시내가 흐르고, 그 시내를 조금만 타고 내려가면 철교가 있고, 곧 바다와 접한다.
그리하여 그 부근에서 철도자살이나 투강자살을 하는 사람이 퍽이나 많다고 하며, 그곳에서 죽은 원혼들이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을 기차바퀴 밑으로나 강물 속으로 불러들인다고 한다. 나는 그의 일이 마음에 끼어 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고, 조간신문을 조바심히 기다려 전날 저녁에 그 부근에서 아무런 자살사건이 없었음을 보고 비로소 적이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그 뒤에도 며칠 동안 나는 신문 사회면에 더욱 주의가 끌렸으며 오래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일이 아주 잊혀지지가 않는다.
황혼을 타고 쓸쓸하고 애처로운 얼굴로 가을 들을 향하여 서글피 걸어가던 그 여인은 삶의 외로움과 서글픔, 그것의 상징 같았다.
"삶이란 기쁘고도 서러운 것. 즐겁고도 외로운 것." 나는 이 두 여인을 통하여 삶의 얼굴을 본다.

내가 즐겁고 기쁠 때는 언제나 저 괭이를 메고 싱글벙글 웃던 그 여인이, "그렇소, 삶이란 이렇게도 기쁜 것이오." 하고 소리쳐 준다. 그리고 외롭고 쓸쓸할 때는 언제나 어두워 가는 가을 들 속으로 사라진 그 여인이, "그래요, 삶이란 참말 외롭고 쓸쓸한 것이야요." 이렇게 한숨으로 나를 위로하여 준다. 함박꽃같이 웃던 그 여인보다도 고개를 숙이고 가을바람이 말을 달리는 들로 사라진 그 여인이 이 밤에는 몹시도 그립다. (8월 12일 오전 2시)

([조광], 창간호, 1935. 11. 11)

차(車)중이나 선(船)중에서 얻은 로맨스를 써 달라는 청탁이나, 나에게는 차중이나 선중에서 얻은 이렇다 할 로맨스가 없다. 그러나 차중이나 선중에서 얻은 로맨스란 무슨 복잡한 사건의 전개와 갈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차나 기선 속에서 안타깝게 끝나고 마는 단순한, 그러나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그런 로맨스일 것이다.
그리고 로맨스란 결국 남자와 여자 사이에 얽혀지는 한때의 꿈인지라, 그것을 회상(回想)할 때에 그 가장 전면에 나타나는 것은, 남자이면 그 상대되었던 여자, 여자이면 그 상대되었던 남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기차나 기선 속에서 얻은 로맨스를 쓰라는 말은 기차나 기선 속에서 만나 잠깐 동안 나와의 사이에 정신적 교섭이 있었던, 그리하여 그 후로도 아주 잊혀지지 않는 어떤 여인의 이야기를 쓰라는 말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기차 속에서 만났던 여인으로 지금까지도 아주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다.

지금부터 6, 7년 전 어느 해 봄, 내가 귀향했다 다시 교토로 갈때의 일이다. 낭하토"氷同"에서 시모노세키"下關"까지 갈 동안에 나는 한 사람의 말동무도 얻지를 못해서 무료하기 짝이 없었는지라 시모노세키에서 차에 오를 때에는 누구든지 말동무가 될 만한 사람의 옆에 가 앉으려고 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칸 저칸으로 찾아다니던 끝에 나는 웬 젊은 여자의 앞에 자리를 정하고 앉았다.

"대체 이 여자는 나이가 몇이나 될까? 스물 일곱으니 여덟일까? 그래서는 나와 비교해서 너무나 많다. 그러면 나보다 두 살 위인 스물넷? 한 살 위인 스물 셋? 동갑?" 이렇게 나 혼자 한참 바쁘게 나이를 추정하고 있는데, 그 여자는 자기의 앞에 앉아 있는 나의 존재조차 의식치 않은 것처럼 눈 한번 보내는 법 없이 그저 먼 산만 한참 동안 바라보고 앉았더니 소매에서 담배를 꺼내서 피우기 시작하였다. 이를 보고 나는 이 여자의 나이보다 그 정체가 더욱 알고 싶어졌다.

"대체 무엇하는 여자일까. 카페 여급일까? 그러나 그 얼굴이나 몸맵시에 어디인지 귀족적인 품이 있다. 그러면 어느 귀족이나 부호의 영양(令孃)일까? 그러나 그 얼굴에는 아무런 근심과 고생 없이 커난 사람에게 보는 그런 앳된 곳이 없고 어디인지 오랜 고생에서 온 검은 자취가 깃들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그 우울한 표정으로 보아서 사랑하는 남편을 여의고 쓸쓸해 못견디어서 정처없이 여행을 떠난 미망인일까?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사랑하는 남편의 추억을 아로새기며 그것을 도리어 즐기는 그런 침통한 빛이 없다.
그러면 어느 부호의 소첩일까? 옳다. 그럴는지도 모른다. 저 입가에 떠도는 자조하는 듯한 빛을 보아라.
그리고 간고(干苦)에 풀리지 않을 저 이에 깃들이고 있는 우울과 세상을 멸시하는 듯한 저 싸늘한 눈을 보아라. 아마도 이 여자는 할 수 없는 사정으로, 말하자면 자기 한몸을 희생하여 부모나 형제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또는 어떤 맺히고 맺힌 의리에 못이겨 양심을 굽히고 뜻에 없이 어느 부호의 소첩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이 여자는 실연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 슬픔을 영원히 잊어 버리려고 어디 죽을 장소를 찾아 다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두어 시간이나 나 혼자 부질없는 추측을 하고 있을 동안 그는 조금도 쉬지 않고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 머리를 들어 차창을 내어다 보기도 하였으나 대개는 고개를 숙이고 자기의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이 여자와 말을 붙여 그 정체를 알아내어 보고 싶었으나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힌 그 입술과 우울이 호수물처럼 담겨 있는 그 두 눈을 보고는 그럴 용기가 조금도 나지를 않았다.

이러는 동안에 차는 벌써 히로시마"廣島"를 지났다. 이 여자가 다음 정차장에서라도 내려 버리면 어쩌나 하고 생각 할 때 나는 더욱더 초조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그에게 먼저 말을 붙일 용기가 나지 않는지라 마음을 바깥 경치로나 보내어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도"瀨戶" 내해"內海"의 파란 물을 보고는 "이 여자의 수심도 저렇게 푸르려니"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들어 도리어 그 여자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 주었다.
그러자 나의 시선은 새파란 잎새 속에서 아담스리 내어다 보고 있는 노란 밀감으로 끌렸다.
내가 고향을 떠날 때에는 찔레 잎이 반만 피고 양지쪽 잔디가 조금씩 푸르러 올라올 뿐이었는데 이곳에는 밀감이 한창 익어가는 것이다. 얼마 동안 밀감나무에서 흐르는 남국정조를 즐기고 있다가 나는 갑자기 이 남국정조를 씹어 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열차가 그 다음 정차장에 도착하였을 때 밀감장사를 불렀다. 나는 밀감을 한 꾸러미를 받아 들고 돈을 내주었으나 장사 사람은 거스름돈이 없다고 하고 게다가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할 수 없이 밀감을 창 밑으로 도로 내어 주려고 할 때 내 앞에 앉은 그 여자가,
"내게 잔돈이 있어요."
하면서 내가 말릴 사이도 없이 창밖으로 돈을 던져주었다.
그는 내가 치사하려는 것을 막으면서,
"창밖에 내어다 보이는 나무에 매달린 밀감이 어찌 그리 고와요!"
하면서 웃음이 그곳을 떠난 지가 태곳적같이 생각되던 두 입술에서 엷은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밀감을 먹을 때 그 미소는 더욱 생생하여졌다. 이에 나는 그에게 차차 말을 건네어 볼 용기를 얻었다.
"실례 말씀입니다마는 고향이 어디이십니까?"
이 물음에 그는 얼마 동안 어물어물하더니 고향이 어디라는 말을 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저 - 오사카[大阪]까지 돌아갑니다." "그러면 어디 여행을 갔다 오시는 길이십니까?
" "네 - 가고시마"鹿兒島"까지 봄맞이 갔다 오는 길이여요. 호호호. 봄이 가까워 오면 저 남쪽에서 봄이 걸어오는 것 같애서요. 2, 3년을 두고 이른 봄만 되면 가고시마까지 갔다 차차 봄을 따라서 북으로 올라와요."
나의 여자에게 대한 호기심은 더욱더 깊어갔다. 그래서 이 여자가 혹 죽음을 그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나 않은가 그것이 알고 싶어서, "아소산(阿蘇山) 구경도 하시고 오셨습니까?" 하고 물어 보았다.
"빨간 불길을 토하는 아소상의 분화구를 보고도 싶었어요. 그러나 그 곳에를 올라가면 내가 따라오던 봄을 놓칠까 두려워서, 그러나 한두 번만 이 봄을 즐기고는 아소산에 올라가겠어요."
이 말을 하고는 그가 갑자기 또 침울해지며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그는 그 한 개를 다 태우고 나서는 내가 다시 그에게 건넬 말끝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듯이 자기가 또 먼저 말을 걸었다.
"참, 담배를 안 자시는 모양이시군요. 그런데 여자가 이렇게 담배를 피워서……그렇지만 수심 많은 사람에게는 담배가 누구보다도 정다운 동무가 되어요. 선생도 인제 진애(眞愛)를 하시고 하게 되면 담배를 피우게 되실걸요. 호호."
한 번 자지러지게 웃고는 너무나 실없는 것을 뉘우치는 것처럼 또다시 정색을 하고 침울해졌다. 이윽고 차가 오사카에 닿았다. 나는 그의 트렁크를 들고 플랫폼까지 따라 내려가서 작별을 하였다.
"오사카에 놀러오거든 들르셔요."
"네, 고맙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주소를 가르쳐 주려고도 않았으며, 나도 또한 그것을 물으려고도 않았다. 오사카에서 교토까지 가는 동안에 그가 남기고 간 수없는 담배꽁초를 발끝으로 비비면서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의 나이가 적어도 서른아홉 살을 되었으리라는 결론을 내리었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여인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조광], 2권 6호, 1936. 6. 1)

우리 고향에서 한 30리 가량 되는 곳에 적성산(赤城山)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산허리가 마치 성벽 같은데, 가을이 되면 그 성벽이 빨갛게 물이 듭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적성산입니다. 또 어떻게 보면 산이 빨간 치마를 두른 것 같기도 하다고 하여 적상산(赤裳山)이라고도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고향 어린이들은 어머니 품에 안겨 젖을 먹다가는 이 산을 손가락질하며 어머니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가 나이 열 살이 엄으면 아버지 뒤를 따라 그곳으로 땔 나무를 패러 갑니다. 그러다 나이 들어 허리가 굽고 백발이 성성하면 마루 끝에 장죽을 물고 앉아 멀리 이 산을 바라보며 긴 해를 보냅니다. 노인네들의 대대로 전해 오는 말을 들으면 이 산이 생긴 이후로 아직 한 사람도 그 절벽에서 떨어져 횡사한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절벽 밑에 웅크리고 있는 맹수들도 이 산에 들어온 사람은 결코 해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우리 고향 사람들의 이 산에 대한 정감은 마치 어머니에 대한 그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용모와 마음이 뛰어나게 아름다움은 이 산의 정기를 타고 이 산의 애무 속에서 자란 까닭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느 해 여름방학에 나는 큰 괴로움을 안고 고향에 돌아갔었습니다.
예전 놀던 산으로 시냇가로 싸다니었으나 나의 괴로움은 좀처럼 멎지를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적성산에 올라가서 그 곳 절에서 보름달을 바라보며 하룻밤을 새워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 산이 서러운 어린애로 하여금 눈물을 닦고 웃으며 일어서게 하는 그런 어머니의 품이 되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나는 묵은 절 앞 풀밭에 가 누워서 달을 기다렸습니다. 보름달이건만 앞을 가린 봉우리에 막혀서 스무날 달보다도 늦게 떴습니다. 그러나 그 달은 유독히도 푸르고 맑았습니다. 그리고 그 달이 그린, 절을 둘러싼 그림자는 호수보다도 깊었습니다. 달빛에 잠기자 뭇 풀벌레 소리는 한층 맑고 높아졌습니다.

나는 그만 질식할 것 같았습니다. 심장의 고동도 쉬인 것 같았습니다. 내가 얼마 동안이나 그곳에 정신을 잃고 누웠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박쥐가 집을 짓고 있는 마당 같이 넓은 나의 방에 돌아온 때는 아마 자정이 훨씬 넘었었을 것입니다.

깜 빡 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떡을 해 가지고 오랜만에 찾아 오셨습니다. 나는 설움이 복받쳐서 그 떡이 목에 걸려 그만 잠을 깨었습니다. 보니 달그림자가 창문 끝에 겨우 달려 있었습니다. 이윽고 밑에 절에서 새벽 염불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아침 해를 나는 전에 없이 거뜬한 마음으로 맞았습니다. (5월 26일 오전 2시)

([조광], 2권 7호, 1936. 7. 1)

내가 일본 내지에 유학한 것은 교토에서 3년, 후쿠오카에서 3년, 전후 6년 동안이다. 그 중에서도 교토 시대의 3년은 나의 오랜 학창시대를 통하여 가장 유쾌했던 시대이다. 이에 교토 시대에 있었던 일로 지금 추억되는 몇 가지만 적어 보겠다.

그때 나는 도쿄까지 가는 길이었었는데, 우리 고향 친구 K와 Y라는 사람이 있어서 그들을 찾아 이삼 일 쉴 양으로 그곳에 내렸었다. 그랬던 것이 이 두 친구를 떨어질 수가 없고 또 전려우아(典麗優雅)한 이 옛 도읍을 떠나가기가 싫어서 D대학 예과를 들어가게 되었었다 .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재학생들이 신입생 환영회를 열어주고, 그 자리에서 처음 시인 정지용씨를 만났다. 나는 그의 시를 읽고 키가 유달리 후리후리 크고 코끝이 송곳같이 날카로운 그런 사람으로 상상하고 있었는데, 키는 5척 3촌밖에 되지 않았고 이빨만이 남보다 길었다. 그날 그는 동요<띠>와 <홍시>를 읊었다. 그 후 어떤 칠흑과 같이 깜깜한 그믐날 그는 나를 상국사(相國寺) 뒤 끝 묘지로 데리고 가서 <향수>를 읊어 주었다.

옛이야기 지절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으로 울음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이 노래는 나에게 그지없는 향수를 자아내 주었다.
그래서 그는, 향수에 못이겨 하숙으로 돌아가기를 싫어하는 나를 데리고 사조(四條) 어떤 찻집으로 가서 칼피스를 사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또 어떤 초여름 석양에 그는 나와 압천(鴨川)을 거닐면서<압천>을 읊었다.

압천(鴨川) 십리(十里) ㅅ벌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젓다…… 여울 물소리……

원 모래알 쥐여짜는 한 사람의 마음
쥐여짜라. 바시어라. 시원치도 않아라.

역구풀 욱어진 보금자리
뜸북이 흩어냄 울음 울고

제비 한 쌍 떳다
비비지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렌지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압천 십리ㅅ 벌에
해가 저물어…… 저물어……

이 시가 노래한 그 시간의 그 풍경 속에서 작자 그 사람의 입으로 읊는 것을 들을 때 이 시가 주는 감명은 말할 수 없이 깊었다. 이리하여 <압천>은 <향수>와 함께 정지용씨의 시 중에서 가장 나에게 친숙한 시가 되었다. 이듬해 봄에 그는 금단추 다섯 개를 떼어 버리고, 새파란 세비로양복을 지어 입고 "참벌처럼 닝닝거리며"귀향했다. 공처럼 퐁퐁 튀어다니는 그의 그림자가 교정에 보이지 않을 때 한동안은 퍽 적적했다.

1년을 지난 동안에 P, K, Y, H, C, 이렇게 늘 같이 모여 노는 친구가 생겼다. P는 나이 30이 훨씬 넘어 중학 3학년에 다니는 노학년이었다. 그러나 모자는 늘 쓰지 않고 들고만 다녔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전문부 학생으로 알았다.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딸이 생각날 때는 늘 "내 고향을 이별하고……"하는 노래를 하였다.

K는 어떤 여자를 짝사랑하느라고 중학을 10년을 다녀도 늘 3학년이었다. 그 동안에 그가 혼자 사랑하고 있는 그 여자는 벌써 전문부를 마치고 D대학 법학부 학생이었다. 그는 때때로 색종이를 오려서 사람의 해골을 만들어 놓고는 감상회에 우리를 초대하여 억지로라도 우리로 하여금 최대급의 감탄사를 연발시켜야만 만족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남의 이삿짐 옮겨주기를 좋아하였다. "저 강 건너 마을에는 연기도 그치고 기적도 쉬었다……"하는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Y는 우리 그룹에서 얌전하고 착실한 모범학생이었다. 신문배달을 하고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고학을 했지만 한 번도 불평을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고 그의 얼굴에서 성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신경질인 우리들에게 감각이 둔하다고, 동작이 민활치 못하다고 비방을 받는 일이 있었지만은, 그럴 때도 그는 싱긋 한 번 웃고 말았다. 그러나 술을 먹으면 젓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리면서 목청을 짜내는 듯한 소프라노로 "청년들아 나가세 앞으로 나가세……"를 불렀다.

H도 또한 나이 30이 넘어 청운의 뜻을 품고 현해탄을 건너와 신문배달을 하며 고학을 하였는데 불평과 불만이 가슴 속에 뒤끓는 듯하였지만은 결코 그것을 입 밖에 내는 일이 없었고, 시시덕거리고 농담을 하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각각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 일대 코러스를 시작하거나 의미 없는 농담·잡담이 점점 불측한 데로 미치거나 하면 "에 깐나새끼들!" 하며 밖으로 나가 버리고는 하였다. 수염이 많이 나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퍽 무섭고 뚝뚝한 인상을 주었지만은 사귀면 사귈수록 인정이 드는 사람이었다. 노래는 우리들 중에 가장 잘불렀으나 좀처럼 그것을 잘 피력하려고 하지 않았다.

C는 니힐리스트나 염인병자였다. 따라서 그의 행동도 우리의 추측을 분질렀다. 같이 이야기 하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아무 말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 그리고 같이 길을 걷다가도 아무 말없이 행방불명이 되는 수도 많았다. 그때 그는 매월 집에서 오륙십 원씩의 송금이 있어지만은 우리는 그가 돈을 어디다 쓰는지 그의 주머니에 돈이 들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담배가 떨어지면 으레히 K를 찾아와서 "담배가 떨어졌당께" 하고는 K의 눈치를 본다. 그러면 K는 "모른다. 나도 어제부터 굶었다" 이렇게 톡 쏘아 붙이고는 슬며시 어디론지 나가서는 반드시 밧도를 한 갑씩 들고 들어왔다. 그러면 C는 갑자기 생기가 나서 등원의강(藤原意江)의 흉내를 낸다고 괴상한 몸짓을 해 가며 "이소우도도랴 히구레랴 가에루……"하고 목청을 빼었다.

이렇게 우리들의 그룹은 모두 다 특이한 성격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디인지 서로 마음이 맞는 데가 있어 하루라도 만나지 않으면 못견디었다.
하기야 어쩌다 수가 틀리면 1, 2개월씩 만나지 않는 일도 있었다. 한방에 있으면서도 며칠씩 서로 말을 하지 않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나 한 사람이 "너 암만 그래 봐라"하고 말만 걸면 "그래 보자"이런 대답이 나오고 그 다음에 "어디 상판 좀 보자. 자식 쌍통 묘하다" 이렇게 두서너 번만 설왕설레하면 "허허"웃어 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친구들 이야기가 길었다. 그러나 나의 교토 시대의 추억은 무엇 하나 이 친구들의 생각과 얽히지 않는 것이 없다. 아라시야마사구라 구경간 것도 그들과였다. 술을 말로 받아다 놓고 통음하던 것도 그들과였다. "내 고향을 이별하고 타향에 와서……"를 합창해서 이웃집 처녀들에게 박수 갈채를 받은 것도 그들과였다. 인삼가루를 미숫가루라고 속여 한 편 눈이 찌부러진 주인 영감을 속여 "못다이나이 못다이나이"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은 Y와 나의 장난이었다. 2층에서 씨름을 해서 주인마누라로 하여금 집 넘어진다고 경풍을 하게 한 것도 H와 나였다. 밤중에 2층에서 오줌을 누어서 뜰 앞이 한강이 된 것을 보고 놀라는 주인에게 "차를 버렸더니 그렇게 되었노라"고 변명하느라고 땀을 뺀것도 Y와 나였다.

밤이 새도록 나와 문학 이야기를 하던 것은 C였다. 나의 첫 사랑의 괴로움을 알아 주고 그것을 어루만져 주던 것은 K였다. 3년째 되던 해 봄에 K가 혼자 그렇게도 사랑하던 XXX와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사랑의 괴로움을 알게 한 XXX가 귀향하였다. 우리는 가모가와 잔디밭에 가 누워서 하루 종일 사랑이니, 삶이니, 계집이니 이런 이야기를 하며 서로 위로하였다.

그 해 1년은 이 친구들과 어울려 늘 재미있으면서도 또 한편 외롭고 서글픈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해 겨울에 K와 C와 나와 셋이 봄이 되거든 도쿄로 가자고 하였다. 그랬던 것이 어떻게 바람이 잘못 불어서 C만 도쿄로 가고, K는 Y, H와 교토에 그대로 주저앉고 나는 후쿠오카로 가게 되었다. 서로 갈릴 때 "언제 또 다시 모두 한자리에 모일 수가 있을는지 모르겠다"고 누가 서글퍼하는 것을 "만날 때가 있겠지"하고 모두들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언제나 한자리에 모이게 될는지는 가망이 없다. 설혹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하더라도 그때 우리를 퍽이나 슬프게 할 사실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Y가 작년 이맘때 이 세상을 떠나 버린 것이다. 그는 중학 1학년에 입학하면서부터 고학한 학생이었다.

([조광], 2권 8호, 1936. 8. 1)

서반아와 중국의 내란(內亂) 기사를 아침 저녁으로 읽어 오는 동안에 나에게는 ⌜민중의 운명은"하는 큰 의문이 하나 생겼다. 그리하여 나는 아침 저녁으로 신문을 펴들고는 의문을 풀 열쇠를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중화민국의 민중의 복영(福榮)을 위하여 - 이것이 장개석이가 서남(西南)을 토벌하려는 이유다. 그런데 이종(李宗)이나 백자희(白紫禧)가 국민정부에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이유도 또한 ⌜중화민국의 민중의 복영"을 생각하는데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서반아의 반군이 수도에다 대포질을 하는 것도, 정부군이 반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독와석을 뿌리는 것도 다 "서반아 민중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어찌하여 그들이 그렇게도 행복되게 하여 주기를 염원하는 그들 민중으로 하여금 서로 총질을 하게 하여 그들에게서 사랑하는 어버이를, 자녀를, 남편을, 아내를, 형제를, 자매를 빼앗고 집을 불지르는 그런 가장 잔인한 행위를 감행하고 있을까?
민중은 오직 그들의 복락을 그들의 피로써만 쓸 수 있기 때문일까?

그러면 유사 이래로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린 민중이 언제 한번 그들의 진정한 복락을 피의 댓가로 받은 일이 있는가?
아마도 민중의 복락은 오직 권력자를 위하여 권력자의 입술 위에서만 사는 것이 아닐까?

([조선일보], 1936. 8. 29)

내마음의 이니스프리에는 소가 산다. 이리하여 네거리 아스팔트 위에서나 철근 빌딩 밑에서 바위그림자와 같은 이니스프리의 향수에 엄습될 때면 나는 내 마음 심지에 "못 가장자리를 핥는 잔물결 소리"외에, 또 골짝을 울리는 해설픈 소울음을 듣는다.

소가 사는 내 이니스프리의 경개(景槪)는 이렇다. 사방을 산이 빽 둘러쌌다. 시내가 아침에 해도 겨우 기어오르는 병풍 같은 덕유산 준령에서 흘러나와 동리 앞 남산 기슭을 씻고, 새벽달이 쉬어 넘는 강선대 밑에 휘돌아 나간다.

봄에는 남산에 진달래가 곱고, 여름에는 시냇가 버드나무숲이 깊고, 가을이면 멀리 적상산에 새빨간 불꽃이 일고, 겨울이면 먼 산새가 동리로 눈보라를 피해 찾아온다.

나는 그 속에 한 소년이었다. 사발중우를 입고, 사철 맨발을 벗고 달음질로만 다녔기 때문에 발가락에 피가 마르는 때가 없었으나 아픈 줄을 몰랐다. 여울에서 징게미 뜨기와 덤불에서 멧새 잡기를 좋아하여 낮에는 늘 산과 내에서만 살았고, 밤에는 씨름판에 가 날을 세웠다.

어떤 날 나는 처음으로 풀을 뜯기러 소를 몰고 들로 나갔다. "이랴, 어저저저"하며 고삐만 이리저리 채면 그 큰 몸둥이를 한 짐승이 내 마음대로 억어(抑禦)되는 것이 나의 자만심을 간지럽혀 주었다. 소가 풀을 으득으득 뜯을 때 그 풀향기가 몹시 좋았다. 산그림자 속에 풍경소리가 맑았다.

나는 해가 지는 줄을 몰랐다. 이웃집 영감님이 재촉하지 않았더라면 밤이 깊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아주 날이 깜깜했다. 모두들 마루에 불을 달아놓고 저녁도 먹지 못하고 걱정 속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오느냐?"
고 어머님이 꾸중을 하셨다. 그러나 나는 입술을 무신 어머니의 이빨 새로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보았다.
어머님은 얼굴에 더 노여움을 가장하려고 하시나 밑에서 피어오르는 기쁨을 억제할 길이 없으신 모양이었다. 끝내 웃으시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렇게 칭찬까지 하셨다.
"우리 환태가 인젠 다 컸구나."
머슴은 소고삐를 받아 말뚝에 매놓고는 일어서서 소 엉덩이를 손바닥을 철석때리며,
"네기랄 것, 이 놈의 소, 오늘 포식했구나. 어떻게 처먹었던지 배지가 장구통 같다." 이렇게 함부로 욕설을 했다. 그러나 소는 머슴의 이 욕이 만족의 표시인 것을 아는지, 목을 말뚝에 부빌 뿐이었다. 머슴은 다시 기쁨과 부끄럼에 얼굴을 붉히고 섰는 나를 돌아보며 농으로 칭찬을 해주었다.
"우리 작은 머슴 오늘부터 밥 두 그릇씩 주시갸."

이튿날 나는 학교에서 하학을 나오자마자 할머님이,
"어린 것이 어느새 어떻게 소를 뜯기려 다니느냐."
고 말리시는 것도, 동무들이 산으로 새알을 내리러 가자는 것도, 봇뜰로 고기를 훑으러 가자는 것도 다 물리치고 또 풀을 뜯기러 나갔다. 강변에서 혼자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보고 서서 염불만(소가 반추하는 것을 보고 어머님에게 소는 왜 늘 입을 저렇게 놀리고 있느냐고 내가 물을 때, 그것은 소가 죽어서 극락으로 가려고 염불을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하고 있던 소는 제 이 작은 주인을 보자 뒷발을 두어 번 하늘로 쳐들고 뛰었다. 이래서 나는 소와 아주 친한 동무가 되었다.

가을이 되자 나는 머슴을 따라다니며 겨울 먹일 소풀을 뜯어 말렸다.
겨울에는 여물을 썰고 소죽을 쑤었다.
그랬더니 이듬해 첫봄에 소가 새끼를 낳았다. 나는 동생을 보던 날처럼 기뻐 밤새도록 자지 못했다.
이 시절이 나의 가장 행복하던 시절, 내 마음의 고향이다.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날 때면 그 시절을 생각한다. 그리고 소를 생각한다. 고향이 그리울 때면 그 시절이 그립다. 그리고 소가 그립다.

([조광], 3권 1호, 1937. 1. 1)

나는 내 머리 속에 확실한 어떤 이상적 여성의 모습을 언제나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저 희미한 어떤 윤곽이 있어 때로 그 눈만 빛나기도 하고, 그 이마만 드러나기도 하고, 그 마음만 만져지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 온 모습이 한꺼번에 또렷이 드러나기도 하나, 그때에도 우리가 어떤 미인을 만나 어여쁘다고 느끼는 그 순간 결코 그의 코와, 눈과, 입과, 귀를 따로따로이 또렷이 인식하고 있지 않는 것과 같이 나는 그때 나의 머리 속에 있는 그의 이 모습 저 모습을 각각 구별해서 확실히 의식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도 내가 가장 아름답게 보는 그 순간의 나의 이상적 여성의 눈과, 코와, 인과, 귀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그의 그 순간의 마음가짐이 어떤지를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의 이 모습 저 모습을 따로따로이 인식하지 않고 그것들이 융합해서 빚어낸 그 전체만을 희마하게 의식하는 그때가 내가 그를 가장 또렷이 인식하는 때요, 어여쁘게 보는 때다.
이에 내가 나의 이상적 여성의 진정한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그리려면 곧 이 순간을 그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아직까지 그런 순간을 포착하여 그대로 재현하는 기술을 가지지 못했다. 발자크의 "알려지지 않은 걸작"의 주인공도 실로 이런 순간을 포착하여 그것을 분석하기 이전에 재현하려다 실패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어떤 영상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이상적 여성을 어떻게든 여기 그려 놓아야 한다. 이에 나는 그의 이 모습 저 모습을 따로따로 잘라 그려놓는 수밖에 없다. 그 각 모습을 융합시켜 어떤 영상을 얻을 수 있을는지 그리고 얻을 수 있더라도 그것이 나의 이상적 여성의 그것과 같을는지 그것은 나도 모른다. 어찌했든 그려나 놓고 보자.

그는 유순하기 양과 같다. 억척스런 여인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는 때도 있으나, 나는 그에게서 아름답다는 느낌을 얻지 못한다.
그는 상냥하기 비둘기 같다. 고집 센 여인은 나는 딱 싫다.
그는 다람쥐와 같이 영리하다. 미련한 여인은 곰보다 더 큰 비극이다.
그의 애정은 호수보다도 그윽하다. 그러나 카르멘적 정열은 갖지 않는다. 카르멘적 정열은 일종의 야성이다.
그는 이지가 날카롭기 칼날 같으나 얼음처럼 차지도 북쪽 바람처럼 매섭지도 않다. 그의 목소리는 종달새같이 영롱하나 참새처럼 재잘거리지 않는다. 참새소리는 이른 아침 이외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 못한다.
그는 인견치마보다도 삼베치마를 즐긴다. 사치는 일종의 추파다.
그는 병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시들은 장미꽃에 매력을 느끼는 때도 있으나 그것은 일종의 퇴폐적 취미다.
그의 머리칼에는 청춘이 깃들었다.
그의 눈에는 지혜가 빛난다.
그의 코에는 보드라운 의지가 섰다.
그의 귀에는 복이 탐스럽게 담겼다.
그의 입 가장자리에는 애정이 서리었다.
그의 손은 모나리자의 손이다.
그의 발은 결코 크지 않다.

자꾸 더 그리면 그릴수록 나의 이상적 여성과는 달라지고 전체 영상이 흩어져만 간다. 그만두자.

([조광], 4권 2호, 1938. 2. 1)

우리 바로 옆집에 셋방을 빌려가지고 사는 젊은 두 내외가 있다. 사내는 30여 세나 되어 보이는 파쇠장수요, 아내는 이제 17, 8세밖에는 안되어 보이는 애송이다. 그런데 이 두 젊은 내외가 밤중이나, 새벽이나, 한낮에나, 가리지 않고 거의 날마다 싸움을 한다. 싸움을 해도 이웃 모르게 말마디나 주고 받고 토닥토닥하다가 마는 것이 아니라 온 동리가 다 알도록 패고, 치고, 방성통곡을 하고, 그야말로 본격적으로 구(口)투쟁을 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내 아내는 자기가 맞기나 하는 것처럼 "에이 저런 짐승 같은 사내하고 어찌 살아"하고 까닭없이 화를 낸다. 그러면 나는 어린아이를 함부로 치고 받고 하는 그 사내가 괘씸하지 않은 게 아니나, 남의 싸움에 까닭없이 화증을 내는 것이 우스워 "계집이 너무 종알종알하는 게지"하고 빈정대어 주다가 우리까지 싸움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젊은 내외 싸움에 보기 드문 특징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렇게 "죽여라 죽여라"하며 맹렬히 싸우다가도 단 오 분이 못되어 "하하하" "허허허"하고 언제 화내고 분해하고 하던 티라고는 털끝만치도 없는 다시없이 명랑하고 평화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오고, 연해 "아이 여보오" "왜 그러우 " 이런 정다운 정경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면 한번 싸우면 이틀씩 풀어지지 않는 우리도 하도 어이가 없어 "허허" 웃고는 마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하도 그들 싸움하는 것이 이상해서 오늘 아침 행낭어멈에게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그들이 싸우는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들의 싸움의 원인인즉 이러한 것들이었다.
그끄저께 아침 싸움은 두 내외 앉아 밥을 먹다 남은 밥을 서로 사양하느라고,
"요거 당신이 자시우"
"아니 당신이 먹우."
"먹으라면 얼른 먹어버려요. 설거지 하게."
"싫어. 나는 배불러."
"나도 배불러요."
"그럼 조금만 하지, 많이 하니까 이렇게 남지."
"많이 하긴 누가 많이 해요. 딴때하고 똑같이 했구만. 내가 배를 곯아 가면서라도 자기 배를 불려주려니까."
"나는 이년아, 그럼 배부른 줄 아니."
"그럼 왜 그래"
"이년이."
"이년이 어째."
"이년을 죽여버릴라."
"죽여"
그래서 남편이 아내 머리채를 휘어 잡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저께는 남편이 벌이 나갔다가 걸어 준다고 한 솥을 아내가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제가 걸어 놓았더니 남편이 돌아와,
"왜 솥은 걸었어."
하고 화증을 벌컥 냈따.
"잘만 걸었으면 고만이지."
"누가 잘못 걸었대서 그래."
"그럼 왜 그래."
"추운데 떨고 걸었으니 말이지."
"당신은 걸을 때 안 추우."
"누가 안 춥데 이년아."
"왜 남보고 이년 저년이야."
"이년의 버르쟁이를."
이래서 또 아내 엉덩이를 가로챈 것이었다.

그리고 또 어제 저녁 싸움은 벌이가 적어서 풀이 죽어 들어오는 남편을 보고, 아내가 그런 줄을 뻔히 알면서도,
"오늘은 얼굴을 보니 돈벌이 많이 했구려."
하고 빈정대다가 다짜고짜로 등줄기를 얻어맞은 것이었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행낭어멈은 자지러지게 한번 웃고 이렇게 덧붙여 말을 맺었다.
"아 글쎄 그만 죽어버리든지, 달아나 버리든지 하지 왜 그런 짐승 같은 사내놈하고 사느냐"
고 했더니 도리어 해해 웃으면서 그래도 속은 좋다고 그러겠지요. 그렇게 때려놓고는
"내가 당신이 어디 미워 그랬오. 잘못했오."
그런대요. 그러면 그만 안 웃으려고 해도 우스워서 웃어버린대요.

이렇게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들의 싸움은 결코 사랑이 두텁지 않다거나 미워해서 하는 싸움이 아니었다.
그끄저께 싸움은 서로 배가 고픈 것을 참고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배부르게 해주려다가 한 싸움이요, 그저께 싸움은 남편이 어린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에 추위를 무릅쓰고 일을 했다고 해서 애처로워하는 마음이 넘쳐 화가 되어 싸운 것이요, 어제 싸움은 남편이 자기를 한번 친 다음에는 아무리 오래 갈 화증이라도 곧 풀어져 버리는 것을 아는 아내가 남편의 화증을 풀어 허허 웃기려고 일부러 화증과 복을 얻어 맞아 준 것이었다.

우리의 눈에 그렇게도 악착스럽게 보이던 그들 싸움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사랑싸움이었으니 그들의 누가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하다 싸운 우리의 정말 싸움이야말로 기막힌 웃음거리였다. 지금도 또 그 여인네의 찢어지는 듯한 부르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전과 같이 비명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우리도 그들 때문에 싸움을 하지 않게 되었다.

([여성], 3권 2호, 1938. 2. 1)

봄은 아직도 몇 천리 밖에 있는 줄로만 알고 꿈에도 꾸지 않고 있던 달팽이다( <옅은봄> ). 이런 소리를 들었는지라 놀랍고 반가움에 이불을 차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몇 천 리 밖을 걸어 오는 줄로만 알고 있던 봄물결이 벌써 내 발목을 잠겄다니 이 놀랍고 반가운 소식이 아니냐?

영하 17도 속에서 봄물결 소리를 들은 편집 선생의 실로 놀라운 육감에 감탄하기 오래다가 나도 어디 봄소리를 들어 보자고 계절을 완전히 차단할 양으로 벽에 건 방장을 걷고, 새우등을 하고 손을 홀홀 불며 뜰로 나갔다. 툇마루에 햇빛이 아롱댄다. 이것이 봄소식이냐? 가시나무잎에 조는 달팽인냥 팔장을 끼고 도사리고 앉았다. 그러나 바람이 뺨을 꼬집는다. 털버선 밑으로 고무신이 차다. 어째서 고양이가 봄볕을 찾아와 나의 손을 핥지 않는 것이냐?

나는 문득 부엌 한 귀에다 몰아 넣어둔 화분 생각이 났다. 화분이래야 석류, 옥잠화, 난초, 수국, 백년초, 겨우 보잘것없는 다섯 개다. 그러나 가난한 우리 마당이라, 다섯 개 보잘것없는 화문으로도 넉넉한 장식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남이 손질하여 키워놓은 것을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석류와 백년초는 가지를 꺾어다 뿌리를 붙인 것, 옥잠화는 뿌리를 캐다가 심은 것, 수국과 난초는 벗의 고운 뜻으로 얻어받은 것이어서 별다른 정이 붙었고, 또 두고두고 키우고 가꾸어 가며 재미를 보자고 소중히 여겨온 것이다.

다섯 개 화분을 하나하나 툇마루에 옮겨 놓고 바람을 막아 앉았다. 백년초가 얼어 허리가 부러졌다. 봄입김이 아무리 따스하게 불어 주어도 눈을 뜰까 싶지 않다. 봄에 잠기려던 옥잠화 눈[]이 따글따글 청옥같이 얼어 내 손바닥에 굴러 떨어진다. 석류가지를 꺾어 보니 파란 껍질이 매어달린다. 대단히 잠이 늦은 놈이거니 잠을 흔들지 말자. 옥잠화 뿌리를 더듬어 보려니 돌덩이같이 얼은 흙이 손톱 밑을 할퀸다. 영하 17도 찬 바람을 들여 보내지 말자. 난초 속잎은 아직도 파릇파릇 싱싱하다.

내 고향 뒷동산에서 울던 부엉이 소리가 그치면 나는 어머님과 할머님을 따라가 작년 가을 굳게 닫아 둔 패로 있는 텃밭 문을 열었다. 그러면 언제나 동산 밑으로 높은 곳 바위배기에 연연한 봄빛이 와서 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봄볕에 포근히 안겨 바위 틈새에는 돗나물이 가랑잎에 묻혀 머리만 내어놓고 조을고 있다. 어머님과 할머님이 마늘을 덮은 짚을 벗기면 나는 돗나물을 덮은 가랑잎을 손가락으로 헤치며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다 조을곤 했다.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로는 할머님을 따라가 졸았다. 생장하며 돗나물 맛을 익혔다. 타관에 가 나이를 먹고 봄에 돌아오면 나는 할머님 주머니에서 열쇠를 내어 누구보다도 먼저 이 텃밭 바위배기를 찾아가 돗나물의 가랑잎 이불을 벗겨 주었다. 재작년 할머님이 돌아가시던 해 이 텃밭도 우리집 소유에서 떠났다. 이제 이 터에 집이 섰다니, 봄볕이 한가로이 돗나물과 희롱할 수 있을거나? 자라며 고향을 찾는 내 발도 뜨거니와 고향엘 가더라도 바위 틈에 봄을 느끼던 내 오랜 습관을 밟을 수 있겠나.

난초 잎에
적은 바람이 오다.
난초잎은
칩다.

문득 나는 꿈길에서 깨었다. 난초 잎이 돗나물이요, 툇마루가 바위배기였다. 그러나 바람이 맵다. 햇볕이 차다. 난초잎이 얼었다. 내 손이 감각을 잃었다. 아직도 이 봄이 이른가 보다.
나는 화분을 좁다고 거절당했던 방안 윗목으로 들여왔다. 언손을 요밑에 녹이며 난초잎을 바라보고 놀았다. 이날부터 우리 집 윗목은 봄그림자가 하늘거리는 바위배기다.

([조광], 4권 3호, 1938. 3. 1)

어젯밤 방공연습을 하느라고 전 시가가 소등을 하여, 칠흑과 같이 깜깜한 길을 더듬으며 집으로 돌아오려니 무엇인지 싼득싼득 뺨에 가 닿았다. 여성지에서「봄비」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라는 부탁을 받고 비가 와서 나에게 좋은 상(想)을 불어넣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차이라, 옳지 이제 비가 오는 게로구나 하고 적이 기뻐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는 곧 내가 원고 쓸 때에 흔히 하는 버릇으로 베갯머리에다 만년필과 원고지를 놓고는 이불을 쓰고 누워서 소리없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여 무슨 상을 기다리다 그만 깜빡 잠이 들었다.

오늘 아침 늦게야 들창을 흔드는 바람소리에 잠이 깨이니 주룩주룩 처마물 소리가 들린다.「아직도 비가 그치지를 않았구나」하여 영창을 여니 앞집 지붕에 하얗게 눈이 주룩주룩 흘러 내린다. 이 눈이 녹아 된 낙숫물을 보자 나는 기분이 좋지 못해졌다. 그것은 나의 기대가 어그러졌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보다도 내가 봄눈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내가 눈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눈길을 밟을 때의 살풋한 그 촉감과 그때 발 밑에서 부는 그 꽈리소리 때문이었다. 그런데 봄눈은 밑으로부터 녹아서 밟으면 철퍽하고 물이 신 위로 튀어 오른다. 철퍽 하는 그 음향이라든지 그때 발 밑으로 느끼는 그 감각이란 나에게는 다시없이 불쾌한 것이다.

나는 문을 다시 닫고는 눈이 철철 녹아 내리는 낙숫물 소리가 듣기 싫어서 이불을 뒤집어 써버렸다. 그랬더니 낙숫물 소리는 멀어졌으나 들창을 흔들어 제치는 바람소리는 여전히 요란하다. 이윽고 이 바람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문득 사라져가는 멜로디와 같이 감미한 옛기억의 한 토막이 내 가슴 속에 울려온다.

봄은 남쪽에서 오느니, 햇살을 타고 오느니 하지만, 내가 어렸던 시절에 나에게는 북쪽 바람을 타고 왔었다. 겨우내 뒷동산 늙은 소나무가지에서 바람이 퉁수를 불기는 했으나 그 소리는 나를 곤한 잠으로 이끌어 주는 자장가는 될지언정 나의 단꿈을 흔들지는 않았다.

그러다 겨울이 거의 깊은 어떤 날 밤 늙은 소나무 등걸이 휠만큼 맹렬한 북풍이 불어 어린 내 잠을 마구 흔들어 고운 꿈조각을 산산히 헐어놓는다. 이 바람은 으례히 해거름에 시작해서 밤이 깊어지면 잤다. 그러면 나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깊은 잠에 빠져 으례 늦잠을 잤다. 이런 늦잠에서 깨이면 앞창에 비친 햇빛이 유달리 따스하고 부시었다. 그리고 그 창을 열면 이웃집 지붕이 어지러이 벗겨져 있었다.

머슴의 시끄런 소리에 뒷문을 열면 우리 뒷담 용마람도 또한 함부로 말려 장광 뒤로 동댕이쳐 있었다. 나는 머슴이 용마람을 걷어 다시 담위로 얹는 것을 문턱에 턱을 고이고 구경하고 있다가는 큰 경이를 발견하고는 맨발로 뛰어 나간다. 이제 막 머슴이 걷어 올린 그 용마람 밑에 맘물굿 잎이 뾰족이 눈을 들고 있는 것이다. 그날은 해가 저물도록 나는 담 밑 맘물굿 옆에서 흙을 만지며 논다. 할머님의 밥 먹으라는 소리를, 어머님의 감기 들리라는 걱정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방 안에 들어 있지를 않고 바깥으로만 나돌았다.

지난해 봄에 나는 어느 집 뜰에서 맘물굿을 발견하고 그 한 포기를 캐어다가 화분에다 심었었다. 그랬더니 뿌리가 붓기는 했으나 잎이 보기 싫게 시들었다. 그래서 싱싱하게 나오는 새잎을 보려고 시들은 잎을 다 잘라 버렸다. 그런데 왠일인지 뿌리는 죽지 않았는데도 아무리 물을 주고, 나중에는 부엌에서 재를 퍼다 거름까지 해주어도 싹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어느 식물학자에게 물어 보았더니「금년에는 잎은 나오지 않으나 꽃대궁만은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뿌리만 묻힌 빈 화분에 정성을 다하여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며 가을이 다 저물도록 기다려도 종시 꽃대궁은 나오지 않았다.

이불을 차고 밖으로 나와 맘물굿 화분을 살펴보니 아직 잎이 나오지를 않는다. 그러나 이젠 드센 봄바람이 녹으니 툇마루 양지 쪽에 놓아두면 멀지 않아 연연한 잎이 나올 게다.

([여성], 3권 5호, 1938. 5. 1)

전라도 결혼 풍속을 쓰라는 부탁이나 같은 전라도라고 지방에 따라, 그리고 각 읍에 따라 다르므로 어느 것을 전라도 독특한 결혼식이라고 내놓기가 대단히 어렵다. 게다가 필자가 타도의 결혼식에 정통치 못하니 전라도에서 행해지는 결혼식 중에서 어느 것이 전라도 독특한 것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다만 전라도 중등계급 이상에서 많이 행해지는 결혼식을 한 가지 적어 그것이 타도의 결혼식과의 상이점은 독자의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식장
신부집 마당

식장 설비
문 앞에 대[竹]와 소나무 가지와 혹은 동백나무 가지를 꽂는다(대나 소나무, 동백꽃은 서로 절개(정조)를 굳게 지키자는 뜻이다). 마당에는 덕석을 깔고, 차일을 치고, 차일 밑에다 동뢰상(同牢床)을 차린다. 동뢰상 위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오른다. 술잔 두 벌, 그 술잔에는 각각 청사, 홍사를 매어 둔다.

술안주
잡곡 혹은 명씨[]를 담은 말[](결혼 후에 농사지을 밑천을 상징한 것이다), 그 위에다 솔과 대를 혹은 생화를 꽂는다. 동뢰상 밑에는 꿩이나 닭을 자웅을 묶어 놓는다(봉황을 대신해서 놓은 것으로 봉황처럼 부부 화합하자는 뜻이다).
이상 것은 전부 신부집에서 준비한다. 이외에 신랑집에서 준비해 가지고 가는 것으로 함이 있다.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물건이 든다. 콩, 팥, 명(한 송이에 새가 일곱 개 박힌 것으로)고치, 숯(첫아들 나서 금줄 칠 때 쓰자는 것)주머니를 셋이나, 다섯이나, 일곱이나, 기수로(이 주머니를 아들 못 낳는 여자가 가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청치마감 한감, 홍치마감 한 감(청치마감은 청보를 쌓고, 다시 홍보는 청사로 청보는 홍사로 맨다).
이외에 결혼식에 쓸 신부의 족두리, 원삼, 용잠, 댕기 등을 넣기도 하고 신랑이 신부에게 선사할 물품의 목록을 적어 넣기도 한다.
함 외에 또 신랑이 준비해 가지고 가는 것으로 나무로 만든 기러기가 있다. 기러기는 암놈이나 수놈이나 한편이 죽으면 절대로 다시 딴 놈과 부부관계를 맺지 않고 정조를 지킨다고 한다.

식차
신랑집과 신부집이 가까운 때에는 신랑이 결혼식 당일에 자기 집에서 출발하여 신부집으로 가나, 그렇지 않고 원거리인 때에는 결혼식 전날에 신부 사는 동리로 가서 그 이웃에 사처를 정하고 유한다. 결혼식날 신랑이 아직 신부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신랑 측에서 얼굴에 꺼먼 칠을 한 중방쟁이(혹은 함진 애비)에게 함을 지워서 신부집으로 보낸다. 이함을 지는 질빵은 끊지 않은 온필베로 만드는데, 이것은 중방쟁이 소유로 돌아간다. 이렇게 해서 함을 가져가면 신부집에서 한임(여자)들이 나와서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 다음에는 신랑이 목안을 안고, 사모관대를 하고, 신부집 마당으로 들어가 동뢰상 앞으로 가 목안은 상 위에다 놓고 동향을 하고 선다. 그대로 신부가 원삼 족두리에 용잠을 찌르고 한임 두 사람에게 부축되어 나와 동뢰상을 끼고 신랑과 맞선다. 이에 신랑은 다시 신부 쪽을 향하고 신랑 2배(拜), 신부 4배를 한다(혹은 신랑 1배, 신부 2배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신랑은 신부에게 신부는 신랑에게 술잔을 건넨다.
이것으로 의식은 끝나고 각각 방으로 들어가 신랑과 상쟁 앞에는 큰 상이 나오고, 안방 신부 있는 편에서는 함을 연다. 이때 아들 못 낳은 여인네들은 함 속에 든 주머니를 뺏으려고 한판 싸움이 벌어진다. 그리고 또 신부 이마에 빨간 종이로 올려 붙였던 곤지를 떼어 문지방 위에다 떼어 붙인다. 이것은 남편을 사람들이 우러러보아 귀하게 되라는 뜻이다. 그리고 신부가 곤지를 붙이게 된 것은 어떤 색시가 이마에 흉이 있어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결혼식날 이마에 빨간 칠을 하여 그 흉을 감추었다는 이야기에서 시초된 것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먹고, 마시고, 쑥덕이고, 흉보고, 재잘거리고 하는 동안에 밤이 되면 신방을 차려 신랑 신부가 비로소 한방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집안 사람들이나 동리 사람들은 그 속을 엿보려고 문 뒤에 가 숨는다, 문구멍을 뚫는다, 야단들이 난다. 이것은 신랑이 신부의 무슨 옷을 먼저 벗기나, 윗목에 차려놓은 술상에서 무엇을 먼저 먹나, 그리고 불은 무엇으로 끄나를 보아 그들의 장래를 점치려는 것이라고 한다.
신랑이 신부 저고리를 먼저 벗겨주면 아내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고, 비녀를 먼저 빼어주면 머리를 쥐고 아내를 학대를 하고, 밤을 먼저 먹으면 첫애에 아들을 낳고, 대추를 먼저 먹으면 딸을 낳고, 불을 손으로나 이불자락으로 끄지 않고 입으로 끄면 복을 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신방을 엿보는 것은 이것 때문보다도 처음 만나는 신랑 신부의 붙이는 수작을 구경하자는 호기심에서 더 그러는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조혼이 많던 옛날에는 10여 세밖에 안 되는 신랑이 자기보다 흔히 6,7세나 더 되는 신부에게 이름이 무어냐, 나이가 몇이냐 하고 심문을 하여, 또는 대님을 풀어라, 버선을 벗겨라, 술을 따라라 하고 달구는 감탄할 광경도 구경할 수가 있었으며, 나이 어린 신랑이 어머니뻘이나 된 늙은 신부가 무서워 윗목에 가 부들부들 떨고 앉았다 그대로 쓰러져 자는 것을 신부가 아랫목으로 안아다 재우는 우습고도 기막히는 광경도 구경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신방을 엿보는 풍습의 기원을 이 조혼의 풍속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조혼이 심하던 옛날에는 과년한 색시가 정부(중이 많다)를 두어 첫날밤에 나이 어린 신랑을 죽여 버리는 일이 많았다고. 그래서 신방을 엿보는 것은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하여 신방을 경계하던 풍습이 남은 것이라고.

([여성], 3권 11호, 1938. 11. 1)

요 며칠 전에 학생들을 데리고 만주에 갔다가, 대련(大連)에서 6년 만에 바다를 보았다. 바다는 역시 언제나 푸르렀다. 그 위에 포기포기 하얀 물결이 피었다. 멀거니 멀리 아물거리는 수평선 저쪽만 바라다 보고 있던 나는 학생들의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학생들이 만주인 선부들과 배삯을 흥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람이 있으니, 배를 타지 못하도록 하여야겠다」생각하였으나, 검고 주름잡힌 늙은 선부들의 핏줄 선 팔뚝이 믿음직스러웠고, 또 까닭없이 그저 고독해 보고 싶어서 모르는 체 돌아서 저편 낭떠러지를 향하여 조약돌을 밟으며 걸어갔다.

조약돌이 혹은 둥글둥글 혹은 납작납작 한없이 아름다웠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것들을 주워서 하나하나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윽고 낭떠러지까지 다달아 다시 그 낭떠러지를 끼고 바다 가운데로 자꾸만 걸었다. 걷다가 길이 막힌 곳에 바위가 하나 있어 나는 그 바위에 올라 앉았다. 그저 공연히 외롭고, 슬프고, 안타깝고, 쓸쓸하였다. 호주머니에서 조약돌을 내어서 만져보고 뺨에다 대어보고 하였다. 바다의 이야기가 다 그 속에 담긴 듯, 파도소리가 그 속에 어리인 듯, 미역 내음새가 그 속에 어리인 듯, 끝없이 그 조약돌이 정다웠다.

그러던 중 내 가슴 속에는 무슨 느낌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인 아닌 나임에, 그 느낌이 말이 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문득 지용의「바다는 뿔뿔이 달아날려고 했다」, 이 시구가 생각났다. 그리고는 연달아「고래가 이제 횡단한 뒤 해협이 천막처럼 펄럭이오」,「미역잎새 향기한 바위틈에 진달래꽃 볕조개 햇살 쪼이고」,「외로운 마음이 하루 종일 두고 바다를 불러」,「어딘지 홀로 떨어진 이름모를 서러움이 하나」,「바둑돌은 내 손아귀에 만져지는 것이 퍽은 좋은가 보아」,「바둑돌의 마음과 이내 심사는 아무도 모를지라도」, 이런 시구들이며, 바이런의「Roel on, thouder and dork blue Ocean-roll?」, 이런 시구들이 단편적으로 두서없이 입술을 새어나왔다.

그 아름다운 시들의 전편을 외우지 못함이 안타까운 바 아니었으나, 생각나는 그 시구들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외움만으로도 나는 완전히 행복했다. 이윽고 가까이 파도소리를 이기고도 남을 만한 우렁찬 합창소리가 들렸다. 갈매기처럼 멀리 바다 가운데로 날아갔던 학생들 탄 배가 돌아오는 것이었다. 집합 시간이 가까웠다. 나는 손아귀에 들었던 조약돌을 바다 가운데로 내어던지고 일어났다. 그러나 내가 걸어갔던 길은 벌써 들물에 잠겨 버렸다.
이제 바닷물에 씻겨 패이고 혹은 불거진 절벽에 붙어서 기어 나오는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 패인 자국과 불거진 모슬기란 결코 발디딤하고 손잡이 하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사건이 있고야 말까보다」하였다. 과연 그 낭떠러지를 다 돌아 나올 동안, 몇 번이나 물 속으로 떨어져 구두 속으로 물을 넣고, 양복바지 아랫도리를 적시고 하였다. 참말 자칫하면 사건이 있을 뻔했다.

거기서 우리는 단지 전차를 타고 성포(星浦)로 갔다. 성포는 뒤로는 조그만 언덕 위에 잘 정제된 공원을 등지고, 오른편에는 문화주택이며 요정이 즐비하고, 물렁우리에는 노호탄(老虎灘)과 달라, 장크며 범선 대신 보트가 매여 있고 아주 현대적 감각이 팽배하였다.
따라서 노호탄에서 맛보던 그런 조용하고 태고연한 맛을 얻을 수가 없었다. 파도가 아까 노호탄에서보다 더 높다. 그래, 그러함인지 보트를 타겠다는 학생이 없다. 학생의 욕구를 거절하는 때 맛보는 불쾌감을 맛보지 않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조약돌을 줍고 있던 중, 동료 한 분이 보트 타자 한다. 바닷가에서 자라난 분이라 배 젓는 데 자신이 상당하신 모양이다.
나는 그의 자신을 믿고 같이 보트에 올랐다. 그러나 막상 타고 보니, 들물인데다 파도가 제법 높아 은근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 이 불안한 마음을 스스로 끄기 위하였음이리라.
「내 잘은 못해도 보트도 좀은 젓고, 헤엄도 좀은 할 줄 알아. 이만한 바다에서는 죽지 않을 자신은 있지요」이런 객쩍은 소리를 동료에게 던졌다. 동료는 나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다만 나를 바라보고 미소할 뿐, 보트를 열심히 바다 가운데로 향하여 저을 뿐이었다. 멀리 큰 바위덩이로 된 섬이 하나 보이는데, 아마 거기까지 저어갈 결심인 모양이다. 아까 그런 풍은 쳤지만, 나의 불안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고 점점 커질 뿐이다. 그래 태연히 동료에게「이제 그만 돌아갑시다」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미소할 뿐 젓기만 한다. 그 미소에는 만만한 자신과, 적으나마 그 모험에서 맛보는 쾌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제 그로 하여금 뱃머리를 돌리도록 하자면「무서워 못견디겠으니, 인제 제발 뱃머리를 돌려 주시오」이렇게 애원하는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아까 쳐놓은 풍이 있으니, 이는 차마 대장부 체면에 못할 노릇이었다. 이에 나는 이런 꾀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여보, 저 섬까지야 언제 가겠소. 인제 집합시간이 다 되었는데, 그만 돌아갑시다. 학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면 어찌하오.」동료는 이 말에는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뱃머리를 돌려대었다. 그리고는 보트를 사장으로 끌어 올릴 때까지「에이, 저 섬까지 가 보았더면 좋았을 껄!」이렇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러나 나는 가슴을 쓰다듬으면서「섬까지 갔더라면 무슨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을는지도 모를껄!」이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돌아오는 길에 전차 안에선 호주머니에 주워 넣었던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며 오늘 하루 아무 사건도 없었음을 조용히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니 그때 내가 생명까지 잃어 버리지만 않을 무슨 사건이 있었던들, 편집 선생의「사건 있는 해변 풍경」이란 제목으로 글을 쓰라는 부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을 것을, 분한 노릇이다.

([조광], 5권 8호, 1939. 8. 1)

독서여록(讀書餘祿)_문법상(文法上)의 시형(時形)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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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문법상의 동사의「시상(時想)」을 말할 때는 거의 누구나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것을 본질적으로 시간의 관념과 결합하여 생각한다. 그러나 문법상의 시상과 시간이 서로 완전히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대개의 문법서를 펴고, 현재시상은「현재 행해지는 동작을 말함이라」든지 과거시형은「이미 지나간 의의를 표시」한다든지 하는 이런 정의 밑에 거시된 문례를 검토하여 볼 때 누구나 곧 알 수가 있다. 이제 마침 수중에 있는 박승빈씨의《조선어학》을 펼쳐 보니, 그 속에도 현재시상은①일반시 정리 ②상습적 사실 ③현재의 상태(기존한 상태) ④현재 진행하는 동작 ⑤미래의 대용 ⑥과거의 대용, 이렇게 여섯 가지로 언어의 내용을 표시하는 데 사용된다고 설명하여 왔다. 이는 보통 영문법에서 볼 수 있는 현재시상의 설명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이에서 일목요연한 바와 같이 현재시상은 벌써 현재 있는 일만이 아니라 이미 있은 일도, 장차 있을 일도 표시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이에 있어서 동사의 시상에 대한 이런 모순된 지리멸렬한 설명을 일축하고 시상의 진정한 의의를 포착하려는 노력이 동서에서 때를 거의 같이 하여, 그러면서도 서로 독립하여, 일본의 세강일기(細江逸記) 박사와 화란의 라안이란 학자, 두 사람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재래의 문법적 견해를 근저로부터 진감시킬 만큼 독자적인 견해에 도달하였다. 나는 그들의 견해를 빌어 조선어를 고찰해 보면 우리에게 많은 얻음이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상세한 고찰은 조선어학의 전문 학도가 아닌 나의 할 바 못 되므로, 다만 세강 박사의 설을 간단히 소개하여 대방(大方)의 참고에 공하려 한다.

세강 박사는 현재시상을 우리가「이렇다」든지「이렇지 않다」든지 느끼는 사항을 그 느끼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것은 사상의 소위「직접표상」의 도구라고 설명하고 이 현재시상을「직관직서」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묘출․표현하는 사항이 시간의 어떠한 구분 내에 존재하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견해를 전기 박승빈씨 저(著)《조선어학》의 예문에 적용할 때, 우리는 이 견해가 그 예문들에 완성(完成)히 부합되는 것을 본다. 독자의 참고로 그 예문들을 이곳에 전사(轉寫)하여 둔다.

① 일반적 정리 : 소는 동물이오.
② 상습적 사실 : 범은 산에 있소.
③ 현재의 상태(기존한 상태) : 오늘이 중복날이오.
④ 현재 진행하는 동작 : 날이 어둡는다.
⑤ 미래의 대용 : 내일에는 김씨가 숙직이오.
⑥ 과거의 대용 : 성명은 박흥보이오.

과거시형은「회상서술」이라고 명령한다. 그리하여 이 회상이라는 말은 다만「왕시(往時)를 회상한다」는 의미로만이 아니라 현재의 어떤 사항에 대해서나, 또 시간의 구별을 떠난 판단 사항에 대해서나 그것을 우리 머리 속에 상(想)으로서 굴린다는 의미까지도 포함시켜서 사용하고 있다.

이 견해도 또한 박승빈씨가 과거시상을 설명할 때에 사용한,
수일 전에 축구대회가 있었어요.
어느 학교가 우승하였나?
그날 일기가 매우 더웠다.

등의 예에 적용시켜 하등의 불합리를 느끼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더나아가 박승빈씨에 의하여 고찰되지 않은, 우리가 무슨 불의의 사건에 경악하여 발하는「아이고 죽었다」같은 이런 예까지도 완전히 설명할 수가 있다.「아이고 죽었다」의「죽었다」는 형은 과거나, 그 뜻은 이미 과거의 일을 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요 도리어 현재 혹은 미래에 있다. 이와 같은 서술은 시상과 시간과를 혼동하는 문법적 견해로는 과거시상에도, 현재시상에도, 미래시상에도 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시상을「회상서술」이라 하는 세강박사의 견해로 하면 완전히 모순 없이 설명된다.

다음으로 미래시상은「상상(추측)서술」이라 명령하고 시간상의 미래거나 현재거나를 불문하고 상상 혹은 추측을 표현한다고 한다. 이렇게 봄으로 우리는 똑같이 미래시형을 사용하여,

내일 밤에 달이 있겠소.
그러나 일기가 매우 춥겠다.

등의 미래계에 속하는 일을 상상할 수가 있는 동시에,

발소리가 아마 그 사람이겠소.
와 같은 현세계에 속하는 상상도 할 수가 있다.

최후로 또 하나 반과거, 즉 현재완료를「확인확술」이라고 부르고, 그것은 그 진술되는 사항이 발언하는 순간 그 지각의식 내에 강력한 인상을 주고 있을 때 그것을 명료․확실하게 표시하는 어형이라고 한다. 이것도 박승빈씨가 그저「동사 반과거로 표시함과 동일한 취지를 언어를 설시(設示)함에 그 현재형을 사용하여서 현상을 설시함으로써 족함」이라고만 하고 거시한 예문을 세강 박사의 각도에서 다시 고찰하여 볼 때, 우리는 그의 탁월한 견해에 다시 한 번 설복되지 않을 수 없다.

① 돈이 생겨 쓰오ㅡ돈이 잇소.
② 손님이 왔소ㅡ손님이 있소.
③ 선생이 되었다ㅡ선생이다.

이 예들을 볼 때 우리는 반과거란「확인확술」이라는 것을 수긍치 아니치 못하게 된다. 이 예문의 좌측과 우측은 결코 동일한 의미내용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상을 나는 세강 박사의 견해를 조선어에 적용하여 간단하나마 소개하였다. 조선어학의 전문 학도가 볼 때에 세강 박사의 견해가 완전히 그대로 조선어에 적용되지 못할 점이 없지 않을 것이며, 또 내가 시험한 적용에도 견강부회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학설의 절대성 여부는 막론하고라도, 언어를 내면적․심리적으로 고찰하는 이러한 방법, 다시 말하면 발언자의 견지에서 고찰하는 이런 방법은, 우리가 문학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리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줄 안다.

이 글에서 박승빈씨의 저술에 언급한 점이 있으나, 이는 결코 씨를 반박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여 둔다.

([문장], 1권 9호, 1939. 10. 1)

축견무용론자 구보(仇甫)가 들으면 가소롭다 할지 모르나 내가 개를 한 마리 기른다. 순조선종으로 목덜미와 네 발목에 흰 점이 있다. 몸가짐새가 좀 더 얌전하면 결코 추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이놈이 원체 거칠어서 부엌 속에서 자고 흙탕 속에 가 딩굴고 하여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이웃집 사람들에게「아이, 가이(황해도에서는 개를 이렇게 부른다)도 웬□□□□□□」이런 조롱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는 우리「가이」가 그들의「세퍼트」만 못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감기가 들까봐 목욕을 시키지 못해 털이 더 미워져 있을 뿐이니 날이 따스해진 다음 말끔히 씻어 주면 아주 면목을 일신할 게다.

이놈이 우리집에 오기는 석 달 전이다. 봄이 되면 어린것이 늘 밖에가 놀텐데 동무 없이 저혼자 적적해 할 듯하니 강아지를 한 마리 얻어다 기르자고 아내와 상의가 되어 학생들에게「강아지를 한 마리 얻었으면 좋겠다」고 광고를 해두었다. 그랬더니 어느 눈보라치는 날 한 학생이 30리 길을 자전차를 타고 이놈을 안고 왔다. 그때 나는 그 학생의 새파랗게 얼은 뺨과 두 손을 보고는 그 고마운 정에 정말 울 뻔했다. 그날밤 우리는 이 강아지 이름을 검둥이라 짓고 아랫목에다 이불을 덮어 재웠다. 30리 길을 눈보라를 무릅쓰고 갖다 준 그 학생의 고마운 정을 생각하여 이놈을 귀엽게 기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어린것이 개벼룩에 물려 온몸이 콩더덕이 된 것을 보고는 그놈을 밖으로 축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부터 검둥이는 아궁이 잿속에서 방아랫목만 못지않게 따뜻하게 자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검둥이가 밤에 따뜻하게 자면 잘수록 온몸이 재투성이가 되고 털이 그실러지고하여 동네 사람들의 조롱감이 되는 데는 어찌 하는 수가 없었다.

이렇던 놈이 그새 중개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철이 나지 못해서 잿간에나 진흙탕에 가 딩굴기가 일쑤요 또 그 몸을 해가지고 말끔히 닦아 놓은 마루 위에 가 낮잠자기가 일쑤다. 요사이는 저녁에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방문 앞 마루 위에 가 누워서 동네로 마실을 나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으레히 그는 앞집 세퍼트나 뒷집 삽살이한테 물려가지고 발을 절룩거리며 돌아왔다.

지난 6월 만주 방면으로 여행을 갔다온즉 당연히 맞아 주리라 믿었던 검둥이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순간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뒷집 삽살이가 미쳤는데 그 삽살이한테 물려서 벌써 이틀째 밥도 먹지 않고 뒷곁에서 누워 있다는 것이다. 검둥이 눈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눈꼽이 다닥다닥 끼고 가죽은 그야말로 뼈에 가 감길지경으로 살 한 점 없이 말라 붙었다. 그런 중에도 제법 도적을 지키는 체 고양이 발자국소리를 듣거나 쥐 그림자를 보고는 짖고 하는데 이날도ㅡ따스해서 집으로, 아궁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마루 위에 낮잠자던 게으른 습관이 그대로 저녁까지 연장된 것뿐일 것이다(예까지 읽은 분은 아마 이 글이 벌써 이른 봄에 써졌다는 것을 알리라. 올봄 아직 먼 산에 눈이 다 녹지 않았을 때 쓰다가 끝맺지 못하고 그대로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이 글의 주인공 검둥이가 우리집에서 만 2개월째 되는 오늘 나는 이 글의 끝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끝을 맺으면 그때와는 달라져서 이 글은 <축견의 변>이 아니라 <검둥이의 추억>이 될 게다).

마루 위에서 자고 마루 위에서 짖고 하던 검둥이는 그후 날이 차차 더워지자 뜰 응달진 곳으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자고 그곳에서 짖고 했다. 그러다 어린것이 장난을 청하면 기꺼이 응하여 둘이 마당에서 서로 어울려 딩굴고 했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는 날이면 그놈은 무사했고 또 행복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어린것이 자는 동안에 검둥이는 심심한지 나를 보자 꼬리를 치고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그는 앞발을 약간 움직일 수가 있었을 뿐 몸뚱아리는 완전히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검둥이가 미친 개의 발작이 시작되기 전에 처치하여야겠다 생각하고 개장수를 불렀다. 이웃사람이 3원은 받으리라 하였다. 그러나 검둥이를 잡아가는 것을 나는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때 가장 이기주의자인 나는 모든 것을 아내에게 맡기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가며 돈을 받지 말고 그냥 주어 버리라고 일렀다. 그리함으로써 검둥이에 대한 생각을 스스로 끄려 함이었으리라. 몇 시간 후에야 돌아오니 검둥이는 개장수가 2원만 내고 가지고 가겠다는 것을 거저 가져가라고 했더니 고맙다고 잡아 갔다 한다. 그런데 개장수가 검둥이 가까이 가니 검둥이가 알아차림인지 그런 중에도 한사코 반항을 하려고 하여 아내가 달래며 목에 올무를 씌워 주었단다. 그리하여 그게 불쾌해 못견디겠다고 살짝 빠져나간 내게 대해 욕지거리다. 아내는 그날 저녁밥도 잘 못먹었다.

사실 우리는 며칠간은 밥을 먹다 빈 개밥통을 바라보고는 밥이 목구멍에 걸리우곤 했다. 어린것에게 검둥이 어디 갔니 이렇게 물으면 팔을 하늘로 저으며 무슨 소린지 억가억가했다. 그러더니 두 달을 지난 요사이는 검둥이 어디 갔니 물어도 아무 반응이 없다. 아마 검둥이의 기억이 완전히 그에게서 사라진 모양이다. 우리도 또한 별로 검둥이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조광], 5권 11호, 1939. 11. 1)

조선(朝鮮)춤ㅡ조선(朝鮮) 정조(情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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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의 구성요소는 시간과 공간과 역학성과 표현성에 있다고 한다. 서양무용이나 조선춤이나 다 이것으로 설명되리라. 그러나 서양무용과 조선춤에서 받는 우리의 느낌은 완연히 다르다. 그러면 그 느낌의 차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서양무용과 조선춤을 비교하여 서양무용은 네 요소 중에서 공간성과 역학성이 더 현저하나, 조선춤은 시간성과 표현성이 더 현저한 데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무용 그것의 기초가 결국은 운동에 있고, 운동이란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므로 서양무용에 있어서도 시간성을 경시할 수는 없겠으나, 서양무용에서 우리가 느끼는 매력은 그 운동의 시간적 이행(移行)에서보다도 포즈, 즉 공간적 입체성에서 온다. 따라서 운동의 이완과 긴장이 명확히, 다시 말하면 직각적으로 처리되어 서양무용은 퍽이나 역학성을 띠게 한다.

그런데 서양무용과 달리 조선춤에서 우리가 느끼는 매력은 그 공간적 입체성보다도 운동의 시간적 리듬에 있다. 조선춤의 운동은 일반적으로 보아 입체적이 아니라 평면적이다. 즉 운동이 직각적이 아니라 둔각적이며, 따라서 이완과 긴장이 서양무용에서처럼 명확하지 않아도 다분히 유동적이다. 그리하여 서양무용의 운동이 때때로 서로 대립하나 조선춤은 연속적으로 흐른다. 그런데 운동이 이렇게 흐르는 동안에 가끔 순간적으로 맺혔다간 스르르 풀리고 한다. 그리하여 이곳에 서양무용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기막힌 매력이 있다. 이것이 조선춤의 가장 큰 특색으로「멋」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조선춤뿐 아니라 조선노래에서 느끼는 가장 큰 특색도 그「멋」이 아닌가 하는데, 노래의「멋」도 또한 리듬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맺혔다가는 풀려나가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춤은 유동이므로 그 운동의 역학성에 있어서 다소 희박하나, 그 표현성에 있어서 대단히 농후하다. 어느 점으로 보아서 서양무용은 흥을 돕기 위하여 추는 데 대하여, 조선춤은 흥에 겨워 춘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서양 사람은 춤을 추기위해서 추는데 조선사람은 춤을 추지 아니치 못해서 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무용은 처음에 흥이 없이도 시작하여 출 수가 있으며 그리하여 추는 동안에 흥이 나나, 조선춤은 처음에 흥이 나야 출 수 있는 것이며 흥이 없이 시작하여서는 추어도 흥이 솟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일전《조선일보》지상에 한성준씨의 담화로써 발표된 중에 무용이란 인간과 함께 온 것인 것이나 현금 조선에 남아 있는 춤은 궁중에서 민간으로 나온 것이라는 뜻의 말을 읽고 대단히 재미있게 생각하였다. 조선에서도 아직 원시시대에 있어서는 어떠한 종족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조상의 전 생활부문이 춤에 의하여 영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점점 단일화되어 그 사회적 연결이 긴밀화함에 따라 춤이 종족의 전 인원을 단일한 리듬 속에서 용해시킴으로써 수행하고 있던 종족의 통일화의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을 것이요, 따라서 점점 쇠퇴하여 갔을 것이다. 그리하여 춤은 겨우 오락적 직분과 종교적 직분에 그 차일(차日)의 광영의 잔영을 남기게 되었을 것이다.

이 종교적 직분에서 춤이 여명을 보존하였으리라는 것은 우리가 오늘날의 무당춤을 생각하여 보면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춤이 오락적 직분을 발휘할 곳은 종교적 직분과 달리 유한계급에 있었을 것이요, 옛날의 최대의 유한계급은 궁중이었을 것이므로, 춤이 궁중에서 또한 여명을 이어올 수 잇었으리라는 것도 쉬이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런데 행동거지에 대한 동양적 관념으로 생각하여 보아 임금이나 대관들이「노래 불러라. 춤추자」하여 노래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좋은 음률을 듣다가 상감께서 흥에 겨우셔서 팔을 가만히 들었다 무릎 위에 놓으시니 지금까지 흥에 겨워 몸을 제대로 두고 바로 앉았기가 거북할 지경이던 신하들이 이때라고 어깨를 들먹거리고 팔을 저으며 일어섰을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조선춤이 흥이 없이는 추지 못하게끔 된 그 특성이, 따라서 강렬한 내면적 표현성이 이런 곳에서 발생한 것이나 아닐까 한다. 그리고 또 조선춤이 외국무용보다도 대단히 태장(態長)한 맛이 있는 것이 한 특색인데, 이유는 그 운동이 직각적이요 역학적이 아니라 둔각적이요 유동적인 데도 원인이 있겠으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춤이 음률을 듣다가 흥에 겨워 그에 맞추어 춘 데도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조광], 6권 1호, 1940. 1. 1)

유처자(有妻者)와의 사련(邪戀)-나의 약혼시대(約婚時代)의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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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는 신성하다.」「연애는 맹목이다.」이것들은 우리가 연애에 대해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그리고 연애의 개념으로서 누구에게나 쉽사리 떠오르는 말이다. 연애란 한 혼과 혼의 가장 순수하고 엄숙하고 고양된 상태에서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과연 어디까지나 신성한 것이며, 순수하고 엄숙하고 고양된 상태에 있을 때에는 우리의 혼에 이해타산과 계급관념 등이 섞일 여지가 없는 것이어서, 그러한 상태에 있을 때에 혼과 혼은 빈부와 계급을 초월하여 서로 결합할 수 있는 것이므로 또한 맹목적인 것이다.

따라서「연애는 신성하다, 맹목적이다」하는 말은 언제나 진정한 연애에 대한 예찬이요, 변호가 되어야 할 이 말이 그릇된 연예를 예찬하고 변호하는데 사용되는 예를 우리는 허다히 본다. 단지 그릇된 만족을 채우기 위한 야합에 지나지 않을 때에도 그 당사자들의 입으로부터 자기들의 결합은 진정한 연애에서 된 결합이며, 또 연애는 신성한 결합이므로 자기들의 결합은 어디까지든지 신성한 연애라는 말을 듣는 수가 있다.

그리고 또 일반적인 도덕률로 보아 도저히 서로 연애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연애에 빠졌을 때에도 연애는 맹목적인 것이요, 또 신성한 것이므로 그들의 연애는 용서되어야 할 것이라는 변호의 말을 그 당사자들이나, 그들에게 동정하는 사람의 입으로부터 듣는 수가 있다.

그들이 이와 같은 변호를 하게 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연애는 한 혼과 혼의 가장 순수하고 엄숙하고 고양된 상태에서의 결합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거나, 그것을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모르는 것처럼 가장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연애가 성립되려면 서로 결합할 두 혼이 가장 순수하고 엄숙하고 고양된 상태에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므로, 만일 어느 편 혼에든지 조그마한 유희기분이나 불순한 감정이 섞여도 그 연애는 벌써 진정한 연애는 아닌 것이다.

이제 나의 문제인 유처자와 독신녀와의 연애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유처자와 유부녀와의 연애나 독신남과 유부녀와의 연애를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 것인가는 이 문제만 생각하여 보면 스스로 명백해질 것이다).

현재 부부생활을 하고 있는 남자와, 그가 아내가 있어 부부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여자와의 연애는 연애에 대한 앞에서 말한 정의에 비추어 보아 불순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남자에게 아내가 있으나 아내에 대한 사랑은 이미 다 식었고, 또 여자도 그것을 미리 잘 알고 있을 때에는 그들의 연애에 순, 불순의 판단을 내리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것은 앞에서 내린 연애에 대한 정의에 비추어 보아 그런 연애에는 진정한 연애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렇다고 하여 그런 연애를 우리는 무조건 용인할 수 잇을까.

이때에는 우리는 연애의 순, 불순의 문제를 떠나 연애가 과연 인생의 최고의 가치일까 아닐까를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연애가 인생의 최고의 그리고 유일한 가치라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연애는 진정한 연애로서 그대로 시인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연애가 인생의 유일하고 숭고한 가치는 아니다. 우리 인생에는 연애 이외에 학문, 종교, 도덕, 예술 등 연애만 못지않은 가치가 있다. 그리하여 이 모든 가치를 서로 마찰하지 않고 조화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으로 실현하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다.

그러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연애는 다른 가치와 마찰되지 않을까. 여기서 우리는 도덕과의 마찰 여부만 생각하여 보자. 도덕이란 것은 결국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적 공동생활을 가능케 하기 위한 근본원리다. 다시 말하면 도덕이란 인간의 사회적 공동생활에 질서와 조화를 부여하기 위한 규범이다. 그런데 규범이라는 것은 언제나 예외에 대하여 상도(常道)에 귀납하고 그것에서 이탈하지 말기를 요구하는 강제력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규범에 권위를 부여하는 길은 오직 그 강제력에 복종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이에 도덕의 인간사회에의 기여를 높이려고 할 때 우리는 도덕의 형식적 강제력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도덕이 인간생활에 기여하는 길의 하나인 그것의 형식성이 어느 시기 어느 국면에 있어서 인간성의 건전한 발양을 억압하는 질곡이 될 때가 있다. 이런 때 우리는 아무래도 이 질곡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도덕의 형식성이 인생의 어느 국면에 있어서 질곡이 된다고 그것의 형식성을 임의로 무시하여 버려도 좋을 것인가. 그리고 과연 그리할 수 있을 것인가. 각 개인이 도덕의 형식성을 임의로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각 개인이나 사회가 쉽사리 도덕의 형식적 강제력에 대한 존경이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도덕이 그들에게 대하여 아무런 권위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도덕은 결국 규범이므로 형식을 통하여서만 그것은 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인간성이 도덕의 질곡에 질식하게 되었을 때에도 우리는 도덕의 형식성을 타파해서는 안 될 것인가. 그리고 그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도덕은 인간의 사회생활에 질서와 통일을 부여하여 인간성을 건전히 신장시키려는 것이므로, 그것이 그 본래의 사명에서 어긋나 인간성의 건전한 신장을 저해할 때에는 그 형식적 구속력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도덕의 형식적 구속력을 타파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그 형식적 구속력이 지금 그 신장을 저해하고 있는 인간성의 어떤 국면에 대하여도 본래는 그 신장을 도우라는 것이었고, 또 그리했던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또 하나, 도덕이 어떤 국면에 있어서 인간성의 신장을 저해할 때에도 그것의 전체적으로는 결코 인간성이 조화 있고 건전한 발달을 저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꾸어 말하면 도덕의 구속력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우리는 다시 말머리를 앞으로 돌려 이미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식어 버린 남자와 연애에 빠졌을 때를 생각하여 보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런 때에 우리는 그들 사이에 연애 그것만으로 본다면 진정한 연애가 성립할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한 연애라 하여 그대로 무조건하고 용인할 수는 없다.

첫째 남자가 결혼을 하여 이름뿐일지 모르나 아직도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남자가 결혼을 하였다는 사실은 남자가 결혼형식을 그리고 그 발전형식인 가형(家形)(이것은 결국 도덕의 형식적 측면의 한 구현이다)을 통하여 도덕적 규범에 순응하여 한 인간과 인간과의 본성에 있어서의 도덕적 조화를 실현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그 실현에의 매진을 스스로나 아내에 대해서나 일반 사회에 대해서 굳이 약속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도덕의 형식적 구속력을 그 실현을 위하여 필요한 것으로서 스스로 기꺼이 제 자신에게 부과했던 것이다.

이에 결혼생활에서 애정이 떠났더라도 결혼에 대한 책임은 그리고 결혼상대자에 대한 의무는 더욱이 자녀가 있을 때 그 자녀에 대한 의무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내에 대한 애정이 벌써 사라져버린 사람이 딴 여자와 연애에 빠진다면 그곳에 반드시 의무감과 애정과의 사이에 마찰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고민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고민은 남자의 의무감이 크면 클수록 그리고 여자에게 대한 애정이 크면 클수록 커진다. 그리고 여자도 또한 양심적인 여자이라면 그의 연애에 있어서 남자의 고민을 나누어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곳에 아내가 있는 남자가 독신녀와 연애에 빠졌을 때에 그것을 어떻게 판단할까의 길이,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것을 해결의 길이 발견된다. 두 사람의 의무감, 다시 말하면 도덕감과 애정이 크면 클수록 그들의 고민은 커진다. 따라서 그들의 고민은 도덕성을 띤 고민인 것으로 우리는 그들의 고민의 양에 따라 그들의 연애의 도덕성을 비로소 측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처자와 독신녀와의 연애에 있어서 그곳에 우리가 고민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단지 나쁜 욕망만으로 결합된 야합으로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그 고민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머리는, 그렇다고 그 연애를 긍정하여 끄덕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연애를 그대로 시인하여 버린다면 그들이 연애의 도덕이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긍정하지 않는 데, 아니 못하는 데 그들의 연애는 더욱 도덕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연애의 고뇌가 진정으로 클 그때에는 고뇌는 반드시 그 연애에 해결의 방도를 열어 줄 것이다. 그 해결의 방도는 사랑하는 사람의 옆을 영원히 떠나버리는 괴테적 방도이기도 하고, 고민하는 정신을 질식시켜 버리는 베르테르적 방도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그 최고의 해결 방도는 사랑하기 때문에 도리어 사랑을 마음속에 가두어 버리고 의무의 부름에 따라가는 방도이리라. 앞에 말한 것과 같은 연애를 우리가 진정한 연애로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때문인 것이다.

([조광], 6권 2호, 1940. 2. 1)

게으른 사람을 훈계할 때에, 우리는 흔히「개미를 못 보느냐?」한다. 개미를 본받아 부지런히 노동하라는 말이다. 개미는 봄, 여름, 가을을 두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도 싫증을 내지도 않고ㅡ쉬어가면서 일을 하는지 싫증을 내어 꾀를 피며 일을 하는지 모를 일이지만, 인간의 감격벽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ㅡ일을 한다. 그리고는 겨울에 날이 추운 때는 굴 속에서 봄, 여름, 가을 동안에 저축해둔 양식으로 편히 먹고 쉰다. 이 사실을 우리 인간의 논리로 생각하여 본다면ㅡ개미는 인간과 비교하여 볼 때 기막히게 미소한 생물이지만 대단히 원대한 개미의 1년은 인간 백 년에 비교해도 될 것이다ㅡ계획과 예비심이 있다는 것이 된다.

이에 사람은 개미의 노동은 원대한 계획을 가진 유목적적(有目的的)인 노동이요 또 그 노동의 보수로 추운 겨울에는 아무 걱정 없이 편안히 쉰다고 믿고 여기서 우리 인간에 대한 교훈을 찾아 개미를 산 귀감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 교훈이 힘이 있으려면 개미의 노동은 유목적적인 노동이며 그 목적에 상응한 보수를 반드시 받고 있다는 것을 교훈을 받고 있는 사람도 믿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나는 요사이 이 믿음에 동요를 느꼈다. 그것은 겨울에도 노동을 하는 개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집 안방 벽 사이에 개미가 한 떼 산다. 그런데 이놈들은 구명을 방 안으로와 방 바깥 마루 밑으로 두 갈래를 뚫어 놓고 산다. 그리하여 저희들의 양식이 될 만한 것이 가장 많이 떨어지는 방과 마루를 국토로 가지게 되어 말하자면 대단히 행복한 의족(蟻族)이다. 더욱이 우리집에는 밥을 먹기보다도 흘리기를 더 많이 하는 어린것이 있고 또 우리 가족이 모두가 인자한 마음의 소유자들이라 살생을 하지 않는 데서라. 환경이 이와 같음으로 이 개미떼들이 겨울 양식을 저장하기는 딴 개미떼들보다도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하 20도가 가까운 요사이는 굴 속 깊이서 편히 먹고 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놈들이 요사이도 역시 방 안으로 양식 사냥을 나온다.

처음에는 나는 이놈들이 아마 심심하니까 방 안으로 산보를 나오는 것이겠지 하였다. 그런데 이놈들이 돌아갈 때는 반드시 무엇을 물고 가는 것을 보면 개미가 이렇게 나와서 방 안으로 싸다니는 것은 양식을 구해서라고 단정할 수밖에는 없었다. 이렇게 단정하고 나는, 나에게는 여러 가지 의문이 났다. 대체 개미는 봄, 여름, 가을을 두고 저장해둔 양식이 벌써 동이 났을까? 아무래도 벌써 동이 난 것만 같다. 하기야 아직도 양식이 많이 남았는데도 명년(明年)의 봄, 여름, 가을을 위하여 저장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따뜻하고 노동하기 좋은 때를 위하여 겨울에 노동을 한다는 것은 아까 개미의 노동에 대하여 감격케 한 우리 인간의 논리로ㅡ이 논리는 전우주의 법칙을 파악하는 것이다ㅡ보아 타당치 못하다. 그러므로 동이 난 것이라고 확신할 수밖에는 없는데, 그리 단정할 때는 여기 또 큰 문제가 일어난다.이 개미들이 양식이 벌써 떨어졌다면, 이개미들은 양식의 저장이 불충분했던 것이며 양식의 저장이 불충분했다는 것은 따뜻할 때 노동을 열심히 안했다는 것이 된다.

결국은 개미 중에도 게으른 개미가 있다는 것이 되어「개미를 본 받아라」하는 교훈이 아무런 설복성도 가지지 못하게 되고 만다. 하기야 이 개미들은「우리는 겨울에도 따뜻한 방 안에서 충분히 식량을 구할 수 있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따뜻할 때에 피땀을 흘릴 필요를 인정치 않았었노라」고 변명을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래도 궁한 변명일 것에 틀림없다. 혹은 개미는 정말로 부지런해서 노동을 할 수만 있는 환경에 있어서는 언제고 노동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개미의 노동은 숙명적인 노동으로 사람은 개미의 근면을 결코 본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박문], 3권 2호, 1940. 2. 1)

「영국의 5월」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 말이 있는 만큼 영국의 5월은 딴 어느 나라의 5월보다도 아름답다고 한다. 이「영국의 5월」에 대한 찬미와 묘사를 우리는 영국의「시가의 아버지」인 초오서 이래로 영국문학작품 속에서 무수히 찾을 수가 있다. 이에 나는 토머스 하디 작 <더버필가의 테스> 중에서「영국의 5월」의 한 장면을 초역(抄譯)하여 보려고 한다. 그런데 이에 앞서서 독자의 이해를 위하여 자연과 하디의 작품과의 관계와 여기 초역하는 장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여 둘 필요가 있을 줄 안다.

하디의 작품에 있어서는 자연은 단지 배경으로서 묘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대우주의 운명력과 함께 인간생활을 규정하는 결정력으로서 활현(活現)되어 있다. 그리하여 하디의 작품 속의 자연은 다분히 주관성을 띤 산 자연으로 인간생활과 불가분리적 관련을 맺고 있다. 이것은 이하의 짤막한 장면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하의 장면은 테스가 알레크에게 능욕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낳았다가 그것까지 잃고, 한때 완전한 절망상태에 빠졌다가 다시 새로운 생활의 힘을 얻어 이웃 지방에 있는 목장으로 고용살이를 살러 산길을 넘어가는 장면이다.

「녹향초가 향그럽고 새가 알을 까는 5월 어느 날 아침에 공기가 무거운 곳에서 가벼운 곳으로 올라온 때문인지, 혹은 불쾌한 눈으로 자기를 보는 사람이 전연 없는 딴 지방으로 온 때문인지 모르나, 테스는 이상하게도 새 기운이 났다. 보드라운 남풍을 얼굴로 받으면서 사푼사푼 걸어가는 테스의 온몸을 희망이 햇빛과 어울리어 이상의 빛나는 구슬이 되어 둘러쌌다. 솔솔 바람이 불 때마다 즐거운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고, 새들이 지저귈 때마다 그 속에 기쁨이 숨어 있는 듯하였다.

요사이 테스의 얼굴은 마음의 변화에 따라 달라졌다. 쾌활해지거나 침울해지거나 함에 따라 어여뻐지기도 하고 평범해지기도 했다. 장미색으로 활짝 피어 다시없이 아름다운 날도 있고, 창백하도록 침통한 빛을 띠는 날도 있었다. 장미색으로 빛나는 때는 창백한 얼굴을 한 때보다는 감정의 움직임이 적은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감정이 흥분해 있지 않으면 않은 만큼 완전한 미를 발휘하고, 감정이 긴장하면 하는 만큼 그 미가 감소되는 것이었다. 지금 남풍을 바로 받고 있는 테스의 얼굴은 생리적으로 가장 아름다웠다.()」

이리하여 테스의 기운과 감사의 마음과 희망은 점점 높아갔다. 테스는 몇 가지 노래를 콧속으로 불러 보았으나 어느 것이나 지금 그의 마음을 흠뻑 적셔주지 못했다. 그러다 테스가 아직 지혜의 과실을 먹기 전에 주일 아침으로 읽고 하던 시편의 한 구절이 생각나서 그것을 노래했다.

「오오 너희들 해와 달아□□□□□□ 오오 너희들 별아□□□□□□ 너희들 땅 위의 푸른 초목들아□□□□□□ 너희들 공중을 나르는 새야. 들의 짐승과 가축아□□□□□□ 사람의 아들아. 너희들아. 하느님을 축복하라, 하느님을 찬송하라. 몇 대(代)고 변함없이 하느님을 숭앙하라.」

한때 테스를 잔혹하게도 압도하고 있던 저 불행한 경험을 맛본 후에 테스의 나이로는 당연한 정력과 어머니의 혈통에서 받은 활력이 다시 불타오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로 말하면 여자란 대개 그러한 굴욕을 뚫고 나와 원기를 회복하여 다시 흥미에 찬 눈을 가지고 주위를 돌아보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희망이 있다는 말은 낙천가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믿게 하려고 하여도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 것이나「배반당한 사람」에게 제법 알려진 이론이다.

테스는 생에 대한 용기와 흥미를 한아름 안고 에그돈의 산비탈을 내려 목적지인 목장이 있는 곳을 향하여 걸어갔다.

테스가 살던 블랙모어 산골과 이곳 산골의 차이가 이제 그 최후의 특징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블랙모어의 비밀을 발견하려면 그 주위의 고지로부터 조망하는 것이 가장 좋았으나, 지금 테스의 눈앞에 전개된 산골을 제대로 완상하려면 아무래도 그 한가운데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테스가 이 목적으로 그 산비탈을 다 내려갔을 때 테스는 멀리 시선이 끝나는 데까지 동, 서로 열려 있는 카페트 펴놓은 것 같은 들 가운데 서 있었다. 시내는 고원지대로부터 이곳 일대의 평탄한 토사를 조금씩 빼앗아서 이 골짝으로 운반한 것이었다. 그 시내도 지금은 쇠약하여 노경에 들어가 세류가 되어 꿈틀거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테스는 도무지 방향을 알 수가 없어 마치 무한히 긴 빌리얻대() 위에 앉은 한 마리 파리 모양으로 산에 둘러싸인 넓디넓은 들 위에 혼자 윗돌같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파리와 같이 테스가 있다는 사실은 주위에 대하여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았다. 테스가 와서 이 산골에 준 다만 하나인 영향은 테스가 있는 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목을 하늘로 쑥 뽑아가지고 그를 바라다보고 있는 한 마리 청로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뿐이었다.

갑자기 이 산골짝의 이곳 저곳에서 길게 목청을 뺀「워이! 워이! 워워」하는 소리가 일어났다. 이 소리는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전염하는 것처럼 퍼졌다. 때로는 개짖는 소리까지도 섞이어 들리었다. 그것은 이 산골에 아름다운 테스가 온 것을 알아차리고 짖는 소리가 아니라 젖짜는 시간을ㅡ젖짜는 아이들이 소를 몰아 넣기 시작하는 4시반을ㅡ알리는 소리였다.

이 군호를 끈기 있게 기다리고 있던 가까운 데 잇는 흰 점이 박힌 붉은 소의 무리는 발을 떼어놓을 때마다 큰 젖통을 배에서 흔들거리면서 외양간으로 으슬으슬 들어갔다.

테스는 천천히 그 뒤를 따라 소들이 지나가느라고 열어 젖혀놓은 문으로부터 뜰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목장에서 테스는 엔젤 클레아를 알았다. 그리하여 봄이 무르녹아감에 따라 그들의 사랑도 무르녹아갔던 것이다.

([조광], 6권 3호, 1940. 3. 1)

바람을 막기 위하여 밤으로 병풍을 하나 문 앞에 치고 잔다. 그런데 이 병풍을 치던 날 세 살째 나는 어린것의 어휘가 다섯 개가 늘었다. 병풍이 다섯 폭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 폭에는 독수리, 둘째 폭에는 산, 셋째 폭에는 범, 넷째 폭에는 매화, 다섯 째는 죽(竹), 이렇게 다섯 장의 그림이 붙어 있다. 그래서 어린 것에게 그 그림들을 가리키며 발음 능력의 정도를 참작하여 발음하기 쉽도록 다소 정확성은 잃지만 새, 산, 범, 꽃, 대, 하고 가르쳤던 것이다.

어느 날 밤 어린것이 늦게까지 자지를 않기에 빨리 재울 작정으로「저 범 봐라. 저 범이 너 안 잔다고 저 산속에서 어헝 하고 뛰어 나왔다. 에이 무서. 이불을 푹 눌러쓰고 자자」하며 요 위에 뉘고 이불을 둘러쓰이려 하였다. 그러나 어린것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기는커녕 도리어 이불을 걷어 버리고 일어나 앉아 병풍속의 산과 범을 가르키며「범 산 앙앙」한다.
그의 눈은 분명히 무섭다는 표정을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 속에 진심으로 무섭다는 표정은 없었다. 나는 그의 표정에 흥미를 느껴 정말 범얘기를 시작하였다.

「옛날 한 사람이 금강산으로 범 사냥을 갔더란다. 그런데 엄마하고 애기하고 암만 기다려도 돌아오지를 않거든. 너만 하던 애기가 자꾸자꾸 커서 누나만 해지고 또 자꾸자꾸 커서 아빠만 해도 안 오거든. 그래서 아들이 총을 메고 금강산 골짝으로 골짝으로 자꾸만 자꾸만 들어갔지. 아 그랬더니 범이 이 산에서도 어헝 저 산에서도 어헝 어헝 어헝 어헝」이렇게 되도록 어린것에게 구상적 인상을 줄 수 있도록 온갖 표정과 손짓을 해가며 이야기를 하였다. 어린것은 의외에도 끝까지 조용히 듣고 있다. 그 눈은 가끔 무슨 그림자에 덥혀 잠깐 어두워지기도 하고 또 반짝 밝아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표정에서 무슨 의미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어린것은「아빠, 범얘기」하고 졸랐다. 나는 또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 전날 저녁에 하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 후로 나는 오늘까지 몇 십 번이나 이 이야기를 했는지 모른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러나 나의 이야기가 그의 머리 속에 어떠한 표상을 던져 주는지 그리고 어떠한 감정을 물대우리를 일으켜주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비밀만 알아내면 그 속에서 우리의 언어, 예술, 사상 등의 기원과 형성과정을 알아낼 수가 있을는지도 모를 것이다.

([조광], 6권 4호, 1940. 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