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아웃 4 도그밋 어떻게 살아남았죠

페이지1 2012 시대의 민낯 - 종합판 (2012.9.21~2012.10.17) 담담당당/권오홍 <2012 시대의 민낯> 제 1~10 부를 함께 묶는다. 이것은 앞서 쓴 <2012 시대 읽기>의 후속편이기도 하지만 주제를 더욱 확장해보는데 의미를 두었던 글이기도 하다. 여기에 언급된 사안은 우리가 당면해서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내내 오랫동안 겪게 될 문제들에 속한다. 왜냐하면 여전히 미완 ( 未 完 )의 딱지로 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남겨지는 순간, 기록이 되면서 숙 제도 되어 버린다. 어쩔 수 없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로부터 자유로 울 수 없는 굴레를 안게 된다는 의미기도 하다. 누구나 모두 시대를 생각은 한다. 마음 한 켠에서라도 그것이 도망갈 수는 없다. 그것이 생명이 가진 율법이고 이건 살았거나 죽었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읽어야 하는 글로 남을 거라고 확신한다. 제 1 부 5 1. I m Gray 2. 그 놈의 소크라테스!! 3. 언플 정말 쩐다. 4. 포퓰리즘은 뭐고 대중은 뭔가? 5. 김상조을 기용하는 자가 이긴다. 6. 아우를 때는 지났고 이젠 벗길 때 7. 속고 또 속는다. 8. 진짜 반성은 진솔하지도 진지하지도 않다. 9. Happyness 10. 투표의 이유 제 2 부 59 1. 최악의 정치, 정치인은 무엇이고 누구인가? 2. 역지사지( 易 地 思 之 ) 백날 해도 소용 없다. 3. 왜색보수가 국수주의가 아닌 이유 4. 원칙이란 벙커에 숨다. 5. 천박한 듣보기장사꾼의 세상 6. 피를 섞어가는 것도 세계화라고? 7. 디스

페이지2 8. 노무현의 다( 多 )문화 정책은 사기다. (1) 9. 노무현의 다( 多 )문화 정책은 사기다. (2) 10. 더 드릴 말씀이 없다. 제 3 부 106 1. 도라산에 다시 선다고 해서 2. 안경론( 眼 鏡 論 ) 3. 전략기획통 윤여준 4. Intellectual Integrity 5. 왜 이러는 걸까요? 6. 박근혜의 진짜 한계를 보면 7. 문재인의 진짜 한계를 보면 8. 안철수의 진짜 한계를 보면 9. 목에 걸린 가시 10. 그러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제 4 부 149 1. 경제민주화의 목적과 초점 2. 파부침주( 破 釜 沉 舟 )와 송양지인( 宋 襄 之 仁 ) 3. 말도 안돼요, 정말 안되지요 4. 트라우마 & 편도체 5. 한 번은 비극, 한 번은 뭐라고? 6. 한국의 진보 는 왜 욕을 먹는가? (1) 7. 한국의 진보 는 왜 욕을 먹는가? (2) 8. 한국의 진보 는 왜 욕을 먹는가? (3) 9. 학생인권조례와 인권문제 10. 코르사코프 증후군 제 5 부 192 1. 욕망과 권력, 그리고 책임 2. 내가 만들 세상이 마음에 들어? 3. 참 재미난 글 한 편 4. 역술 마케팅과 심상 5. 동기화( 同 期 化 )와 비동기화( 非 同 期 化 ) 6. 출제 시험문제 7. You are blind! 8.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할 기회 9. 느껴지나? 희망이 무너지는 걸? 10. 너는 옳다! 그건 사실이야! 그러나

페이지3 제 6 부 224 1. 5.22 사태 를 아십니까? 2. 뭘 두려워하지? 3. 정권심판론은 뜨거운 감자인가? 4. 누군가 설계하는 꿈 5. 수상( 殊 常 )한 정치 6. 성공 스토리 = 돈 사건? 7. 나머지는 네가 해야지! 8. 덜 떨어진 딱지 9. 구체성의 결여( 缺 如 )를 벗어나는 법 10. 냄새 나지 않는 X은 없다. 제 7 부 267 1. 살 맛 없는 길로 가면 2. 장준하와 노무현 3. 8가지 어리석음 4. 지역구도 해체법 5. 시장의 배반, 정치의 배신 6. 네거티브 경쟁구도의 허허실실 7. 나도 그저 풀인 줄 알았지. 8. 묻지마 범죄에서 묻지마 의 의미 9. 기득권이 겸손해져야 하는 이유 10. 경제 문화 사회 자본의 세습 제 8 부 308 1. 정치혁신의 제 1 과제 2.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없앨 때? 3. 사법개혁은 피할 수 없는 대세다. 4. 검찰개혁은 시급한 수준을 넘어섰다. 5. 법원 조직법과 사법개혁 6. 몽 펠르랭 소사이어티(Mont Pelerin Society) 7.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8. 정치라는 직업병에 시달리는 사람들 9. Coriolanus 10. 금융위, 정권 말기의 추악한 꼼수

페이지4 제 9 부 356 1. [전문]무소속 안철수 대선후보 정책비전 선언문 2. Implementation 3. 정치개혁은 정권교체의 상위인가? 4. La commedia & La divina commedia 5. 대한민국 중산층의 새 기준 6. 속담, 그 무서운 세상살이 이야기 7. 바람의 종류 8. 딜레마(Dilemma)와 트릴레마(Trilemma) 9. 경험의 함정, 인지의 함정 10. 사력( 四 力 )에 기댄 곳을 어찌 치려구? 제 10 부 398 1. 트적질, 생트집, 구해( 構 害 ) 2. 칼로 찌르고 침 놨다 하면 3. 공휴일과 역사 4. 거대담론으로 욕보이기 5. 쪽박과 벼락 6. 떡 만드는 법이 통일하는 법이지. 7. 쥐 구멍에 홍살문 세우기 8. 산 호랑이 눈썹 달라나 9. 숫자로 보는 대선 세부 방정식 (1) 10. 숫자로 보는 대선 세부 방정식 (2)

페이지5 2012 시대의 민낯 제 1 부 (2012.9.21~2012.9.24) 담담당당 민낯,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다. 요즘은 이 단어보다는 쌩얼 이 훨씬 더 많이 쓰 인다. 뜻은 같다. 단지 하나는 사용빈도가 높지 않고 다른 하나는 아주 많아진 것 의 차이가 있다. 후자는 내가 처음 저 말을 접한 것이 10년 전인지 그 안 쪽인지 가늠할 수 없는 신조어이긴 하지만. 2012년 8월말부터 <2012 시대읽기>의 오리엔테이션 20편과 본편 1~10부 100 편을 쭉 이어서 썼다. 저 글의 전체가 아마도 한국 사회의 오늘을 읽는 일종의 전반적인 설명자료, 즉, 오리엔테이션의 영역에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로 그런 의미에서 글을 썼고, 충분히 그 수준은 채웠다고 판단한다. 이 정도의 정 리를 판단 영역에 들여놓지 않고는 한국 사회를 보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서 시작한 글이었지만 다 끝내고 보니 약간 부족한 부분도 없지 않아 보인다. 그 러나 저 패턴으로 글을 이어나가는 건 현 시점에서 일단 멈추고 좀 더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보기로 한다. 시대의 민낯 은 말 그대로 화장이 없는 상태의 얼굴을 보는 거다. 말하자면 자꾸 심하게 포장된 모습, 현상으로 인하여 진정 봐야 하는 이야기들을 놓치고 또 감 춰지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인 셈이다. 굳이 그 얘기들을 묻어 두어야 할 필요 성이 없는데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현상은 왜 벌어지는 걸까? 이 의문도 한 몫 한다. 말해도 듣지 않을 거라는 패배주의는 이 글의 본의( 本 意 )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앞서처럼 글과는 달리 따로 전반부 오리엔테이션을 두지 않는다. 바로 주제로 들 어가본다. 가급적 에둘러 표현하지 않겠다. 직접적인 대상을 앞에 두며 가보는 것 도 그 한 방법이다. 1. I m Gray 2. 그 놈의 소크라테스!! 3. 언플 정말 쩐다. 4. 포퓰리즘은 뭐고 대중은 뭔가? 5. 김상조을 기용하는 자가 이긴다. 6. 아우를 때는 지났고 이젠 벗길 때 7. 속고 또 속는다. 8. 진짜 반성은 진솔하지도 진지하지도 않다. 9. Happyness 10. 투표의 이유

페이지6 1. I m Gray 아름다운 오드리햅번 / 공광규 우리가 정말 아름다운 오드리 햅번을 만난 것은 <로마의 휴일>에서가 아니라 아프리카에서였다고 문화일보 1996년 10월 21일자 32면에 고객과 함께 하는 세계로 미래로-삼성 이 전면 이미지 광고를 냈다 흰머리 쭈그렁탱이 할머니가 아프리카나 어느 나라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인간 막대기를 안고 세상을 슬프게 응시하고 있다. 영풍문고판 48쪽에 실린 믿어지지 않을 만큼 탱탱한 몸매로 번 재산을 기아의 아가리에 털어 놓고서야 천사가 되다니 피부가 헌 가죽부대처럼 쭈글쭈글 해져서야 아름다워지다니 평생을 거쳐 아무도 아무것도 제대로 사랑해보지 않은 나는 언제 나에게서 해탈하여 이 할머니처럼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 비판을 이어나가면서 제법 많이 듣는 소리 가운데 하나가 이런 말이다. 그럼 누굴 지지한다는 말인가? 한국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성격이 급( 急 )한 걸 많이 꼽는다. 네 편 내편 골라 내기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 그 마음이 에너지로 전환이 되면 역동성( 力 動 性 )을 가지며 좋은 방향의 결과로 갈 수도 있지만, 그에 비해 성급함이 가지고 있는 단점을 상쇄할 수 없을 때는 걷잡을 수 없이 과정이 나빠지기도 한다.

페이지7 정치적인 선택 은 각자의 마음이다. 나는 선택 이란 단어에 많은 무게를 둔다. 그 것은 최종적이며 선택만으로도 책임은 져야 한다고 믿어서다. 선택하고 책임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의 선택은 아니다. 나는 그레이 (gray) 영역에 있다. 굳이 숨길 이유도 없다. 지금은 그렇다. 이 유는 많지만, 뚜렷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최 선 이기에 어떤 이에게서도 그 최선을 보지 못한다면, 차라리 최선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나의 정치적인 소견을 밝히는 것에 더 합당하다 여긴다. 회색분자( 灰 色 分 子, fence sitter)라는 말은 꽤 정치적이다. 이건 소속, 정치적 노선, 사상적 경향 따위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킬 때 쓴다. 그것이 이분법 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면 흑백( 黑 白 )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이 때 써먹는 방법이 바로 이 단어다. 자기 견해에 동의하지 않으면 무조건 적( 敵 )으로 분류하고, 피 아( 彼 我 ) 구분을 하지 않는 자는 모두 회색분자 로 몰아붙이는 바로 그 방식 말 이다. 여기에는 전제가 붙어야 한다. 왜 뚜렷한 경향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가 하 는 바로 그 이유가 나와야 한다. 그 제시되는 타당성이 회색분자의 속성을 가른 다. 이것마저도 들어보려 하지 않는 아주 지독한 부류들이 있다. 흔히 말하는 빠 다. 그들에겐 귀 가 없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상대의 입 을 입 으로 취급하지 않는 다. 그러면서 자기 입 만 생각한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저 이유 다. 그걸 모르는 빠 는 에너지가 될지는 모르나 과정과 판단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이성적인 에 너지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빠 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좋아하는 선택을 했다면 오히려 눈 을 더 크게 떠야 하는데, 이미 눈에 무엇인가 씌었다. 그걸 장애인 이 라 표현해도 좋다. 시력이 떨어지면 안경을 써야 하고, 그마저 되지 않으면 시력 을 잃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보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그건 최악 이다. 맹신( 盲 信 )의 단계에 들어간 것이니까. 사실 이렇게 하면 세력은 모인다. 애매한 것보다는 믿어라! 고 몰고 가는 것이니. 믿습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말 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그렇게 해왔다. 결과는 어땠는가? 참혹하지 않는가? 그 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라고는 내게 말하지 말기를. 그런 엉터리 논법으로는 아무 런 진보 를 말할 자격이 없다. 어떤 라벨 (label)을 붙일 때는 과거가 있다면 과 거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해야 한다. 바쁜 세상에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면 그게 또 선택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기성 정치에 대한 혐오 수준의 기피증세를 보이는 환자 가 많아졌다. 이들이 노선을 정해서 갈 곳은 마땅치 않다. 사회가 그런 대표성을 보 이는 정치집단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걸 반증한다. 이들은 제법 요동의 진폭이 크

페이지8 다. 선거판에서는 이들을 무당파 라고 하기도 하고, 선거의 변수로 부르기도 한다. 본질은 이들이 대체로 회색지대에 있어서다. 2008.8.6 안철수의 프레시안 인터뷰는 그 점에선 다시 새겨봐야 하는 한 대목이 다. KAIST 석좌교수로 융합학문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 내 용이다. 문과 이과의 구분이란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부터 산업계의 대기업 과 중소기업에 관한 견해 등이 이어서 나온다. 그에 회색분자 라는 말이 등장한 다. 회색분자 가 왜 나쁜 말이죠?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803184208 기업 경영에 대해서도, 그는 '교과서'에 담긴 원칙과 기본을 거듭 강조했다. 그 는 대주주가 전권을 휘두르는 기업 경영 방식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사회가 경 영자를 적절하게 견제해야 하며. 그러려면 기업지배구조가 투명해져야 한다는 지 적을 곁들였다. 그는 인터뷰 도중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왜 '운동하는 사 람들'에게서만 나와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투명한 기업지배구조는 운동의 과제 가 아니라 당연한 원칙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뜻이다. 정상적인 시장 경제를 위한 원칙이 교과서 속에만 가둬져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프레시안>: 한국에서는 학문 간 장벽이 두터운 편이다. 또 직종 간 장벽도 두 텁다. 그래서 다른 영역들을 오가면서 독창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사람이 나오기 어렵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안철수: 그렇다. 그게 너무 답답하다. 한국에선 대학에서나, 사회에서나 분야 와 분야 사이의 벽이 너무 높고 두텁다. 다른 분야에 대해 이해도 못하고, 포용력 도 없다. 대신, 편견은 강하다. 요즘 '통섭'( 統 攝. 지식의 통합을 뜻한다.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가 에드워드 윌 슨의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번역하면서 사용한 말이다.)이라는 말이 유행 이다. 그래서 학문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자주 나온다. 하지만 그저 말뿐이다. 현실 속의 벽은 여전히 견고하다. 융합학문을 전공한 사람들이 직장을 잡기 어렵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법학과 의학을 함께 공부한 사람의 경우를 보자. 이런 사람에 대한 수요는 아주 많다. 생명공학 분야의 저작권 전문가가 될 수 있다. 또 의료 소송 전문가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의료 윤리 생명 윤리 쪽에서 활동할 수도 있다. 이들 세 가지 분야 모두 전문 인력이 매우 부족하다. 이들 분야 인력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 도 높다. (중략)이런 상황을 바꾸려면, 윗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 서로 부딪히는 이해 관계를 조율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과 공공기관, 기업을 이끄는 이들 가 운데 대부분은 이런 생각이 없다. 학문과 산업에서조차 '네 편, 내 편'을 나누는 버릇은 어리석은 짓이다. 전형

페이지9 적인 흑백논리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관행이 아주 견고하다. '회색분자'라는 말이 안 좋은 어감으로 통하는 데서도 드러나는 사실이다. 참 궁금하다. '회색분자'가 왜 나쁜가. 안철수가 잘 보이는가? 그는 융합 이란 단어를 컨실리언스 개념으로 확실히 보 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정상적인 시장경제 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에게 있어 정 상(normal)과 비정상(abnormal)은 어떤 경계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어법이다. 혹자는 안철수를 평가하기를 어쩔 수 없는 엘리트 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건 비판이었다. 한계라고 못을 박는.) 그러나 나는 이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엘리티즘의 영역에서도 숱한 엘리트들이 개념의 오류 속에서 헤매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서다. 오히려 나는 안철수가 말하고 있는 저 마지막 말에 주목하게 된다. 참 궁금하다. 회색분자 가 왜 나쁜가. 앞서 나는 그레이 영역에 있음을 분명히 했지만, 그것은 최선 을 찾아간다는 전 제가 있을 때 에너지를 가지게 된다. 만일 이것이 자유영역에서 침묵의 자유 로 간다면 그것은 그 혼자만의 에너지로 좁혀질 공산이 크다. 그래서 침묵하는 다수 라고 말을 할 때, 그것이 이미 그것을 자유로 받아들인 측과 아닌 측을 구분해서 보는 것처럼. 전자는 이미 어떤 일이 벌어져도 선택을 하지 않는다. 투표율이 높 으니 낮으니 해도 민주주의에서 100% 투표율은 나오지 않는다. 다시 돌아가서 안철수의 회색분자론 을 읽어본다.

페이지10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은 사회생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개미박사라는 명칭이 말 해주듯 그는 개미 를 통해 세상을 본 생물학자다. 그의 생물학적 지식은 인문 사 회과학으로 번져서 위의 저서 통섭 을 비롯해서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 개미, 인간본성에 대하여 등의 저서가 있다. 이들은 모두 학문간 대통합을 시도한 결 과물이다. 숭고한 도덕 가치들의 문화적 진화가 스스로 방향을 설정하고 자체 추진력을 획득해 유전적 진화를 대체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유전자 는 문화를 가죽끈으로 묶어놓고 있다. 끈은 상당히 길지만 가치들은 자신들이 인 간의 유전자 풀(gene pool)에 미치는 결과에 따라서 불가피하게 속박될 것이다. 뇌는 진화의 산물이다. 인간의 행동은-그것을 유도하고 지도하는 가장 깊은 감정 적 반응 능력들처럼-인간의 유전 물질이 자신을 고스란히 보존해 가는 우회적 방법이다. 도덕은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어떠한 궁극적 기능도 갖고 있지 않다. 인간 유전학은 다른 모든 과학 분야와 더불어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조만간 사 회적 행동의 유전적 토대에 관한 많은 지식이 축적될 것이고, 유전공학과 복제 기술을 이용해 유전자를 바꿀 수 있게 될 것이다. 적어도 완만한 진화적 변화는 기존의 우생학을 통해 실현 가능해질 것이다. 인간 종은 자신의 본성을 바꿀 수 있다.인간 종은 무엇을 선택할까? 부분적으로 낡아 버린 빙하기의 적응 양상과 동일한, 날림으로 지은 흔들거리는 토대 위에 그대로 남아 있을까? 아니면 더 많 은-혹은 더 적은-감정적 반응 능력을 지닌 채 더 고도의 지성과 창조성을 향해

페이지11 나갈까? ( 인간본성에 대하여 [On Human Nature] 중에서) 유전자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관계를 리모컨과 무선 비행기의 관계로 비유하는 설명이 있다. 정규재의 고전읽기는 학문적 접근을 한다. 그 속에서 몇 가지 개념 만을 빌려와서 보면, 이것은 리모컨의 조종을 받는 무선 비행기가 리모컨을 대체 하고 스스로 조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마찬가지 리모컨도 무선 비행기를 대체할 수는 없다. 윌슨은 어떤 리모컨(어떤 인간 유전 자)을 선택하느냐와 관련된 이 딜레마를 나중 세대들이 해결할 문제 로 남겨 놓 았다고 해석한다. 굳이 이 복잡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짐작할 이도 혹은 복잡하게만 생각할 이도 있을 것이다. 리모컨과 무선 비행기라는 저 주제는 바로 선택 으로 돌아간다. 그 것은 리모컨의 한계나 진화 혹은 다른 변형까지도 염두에 두고 봐야 한다. 어쩌 면 이것이 딜레마가 되는 건, 그 수준에 대한 평가(나는 이것을 최후의 소통 이 라 부르지만)에 있어, 과연 선택이 미치는 영향을 우리가 쉽게 파악 가능할 것인 것 문제로 남게 된다. 안철수의 회색분자론은 통섭 (Consilience)의 지식융합적 성격만을 생각한 듯 보 인다. 그래서 이헌재가 등장했다면 그건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 수 준에서 절대 끝나지 않는다. 이건 단순히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경험과 과거, 그 리고 이미 선택된 노선의 결과, 그리고 그 소통부재의 현실과 연관된다. 이미 축 적된 내용에 관해서는 변명이 그 해답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평가가 관건이 된 다. 그 답은 정해져 있다. 책 몇 권 낸다고 해서 뒤집어질 사안도 아니다. 고통 의 현장에 있는 대중이 있다. 그래서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것이다. 이 결론은 자꾸만 안철수의 철학적인 깊이가 옅다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너무 얄팍하다는 것, 그게 자꾸 보인다는 것으로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다. 별로 좋은 일은 아니다. 회색분자 는 최선을 그릴 때에만 그 진정한 가치를 가진다. 침묵의 자유 속에서 빠져 나와서 이제 회색분자가 될 수 없는 안철수에게 주어진 숙제는 통섭 의 영 역이 아니라 바로 현장 이다. 그가 궁금해하는 회색분자를 나쁘게 취급하는 문화 를 벗어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 또한 최선의 영역이 아니면, 차선이 무 엇인지 말해야 하는 입장이란 것이다. 지금 안철수의 이헌재 류( 類 )의 선택 은 결코 우리 사회에 소통을 주는 행위가 아니다. 그걸 고쳐야 하는 기회마저 생 각하지 않는다면 안철수를 통해 볼 세상은 겉치레만 화려한 그렇고 그런 짬뽕 수준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페이지12 2. 그 놈의 소크라테스!! 하늘을 깨물었더니 / 정현종 하늘을 깨물었더니, 비가 내리더라. 비를 깨물었더니 내가 젖드라. 악법도 법이다. (Dura lex, sed lex; 법은 엄하지만 그래도 법이다.) (A law is a law, however undesirable it may be) 하여간에 이 놈의 교육이 문제다. 이 말 지겹게 들어서 이제 귀에 못이 박힌다. 이 말의 변형이 뭔가 하면 바로 법치주의 ( 法 治 主 義 )라는 거다. 억압적인 법 집 행에서 그걸 정당화하는 데는 이 단어 하나면 만사 오케이 된다. 그 법을 장악한 자는 모든 대중을 법의 틀에만 넣고 돌리면 된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권창은, 강정인, 고려대학교 출 판부)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저 말을 하지 않았음을 논증한다. 궁극적으로 중학교 도덕 교과서가 잘못된 법이라도 지켜야 한다 는 준법정 신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교육은 합리적인 논증, 위대한 철학자의 권위 그 리고 그 진실성을 주장하기 위한 죽음의 숙연한 효과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무조 건적인 준법 의무에 관한 합리적인 설명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부분을 소크라테스 가 지닌 권위의 후광효과에 의해 보완하고, 이로써도 충분하지 않은 부분은 급기 야 악법을 위한 순교 (?)라는 극적인 효과에 의해서 메워지게 된 것이다. (위 책 167쪽) 소크라테스의 <크리톤(Kriton)>에 나오는 가장 유사한 구절은 이것이었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말해 주게. 당신은 당신의 행동으로 가능한 한 우리들, 그리고 국법과 국가 전체를 쓰러뜨리려고 하지 않는가? 법의 결정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개인에 의해 무효가 되고 짓밟히는 경우에도 당신은 국가 가 존속하고 전복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다행히 2004년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이 내용은 삭제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 이렇게 교육받은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저 말의 후광효과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페이지13 예를 종종 본다. 사실 저 말을 한 사람은 로마의 법학자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Domitius Ulpianus)다. 악법도 법 이란 말은 고대 로마의 법률 격언 dura lex, sed lex 를 번역한 말이다. 잉걸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가 Hoc quod quidem perquam durum est, sed ital ex a est (이것은 진실로 지나치게 심하다. 그러나 그게 바로 기록된 법이다) 라고 썼고, 이 긴 표현을 딱 줄여서 쓴 것이 바로 dura lex, sed lex 다. 이것이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 법철학 교수 오다까 도모오( 尾 高 朝 雄 ) 이란 자가 악법도 법 이라고 번역해서 소개한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러니 까 우리는 2004년까지 이 말의 노예가 되어서 헉헉대면서 법이라면 무조건 악법 도 법치에서는 법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고, 그 늪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던 거다. 왜정의 잔재가 우리를 이렇게 머리 속에 말뚝을 박는 지경에 이르렀던 걸 여기서 도 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걸 써먹은 바로 국가 사회 지배계층의 꼼수였다. 몰라서 걷어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뻔히 알고도 저 놈의 소크라테스를 빌려와서 아주 극적인 효과를 내는 그림-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는 장면-까지 덧붙여 우리 를 교육시켰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저 작품이 난데 없이 법 잘 지켜야 올바른 시민이라고 선전하는데 써 먹혔는데,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위정자들이 늘 입 에 달고 다니는 말이 여전히 저 말이다. 왜? 그들은 그렇게 교육 받았다. 소크라 테스는 법을 지킨다고 독배도 들었다고, 그러니 너희도 지키라고. 아! 정말 지독 스러운 교육법이다.

페이지14 이건 떼법 이라고 조롱하듯 불리는 말에서 극치를 달린다. 대중이 군중을 이 루어서 법을 고치자 요구하면, 그걸 떼법 이라고 해버린다. 떼(군중)로 요구하면 모두 법으로 만들어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교묘하게 법치주의 와 섞이 면서 군중의 요구를 지금 법에 저촉되는 걸로 거는 걸 당연시 하도록 만든다. 본 질, 그러니까 요구는 온데 간데 없고 남은 건 그냥 왜 법-예를 들어 도로교통법 같은 것-을 어겼냐 소리만 남는다. 더 심각한 건 이 단어를 끌어들여 사실보도 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진 언론이 사설 ( 社 說 ) 수준이 아니라 기사도 그렇게 쓴다. 무슨 놈의 기자가 벌써 정치꾼이 되어 있다. 논리적으로 말해서 법치주의 가 법 잘 지키는, 그렇게 복종하는 무식한 게 아 니다. 법이란 기본이 시민 사회의 공론이 반영되는 것이고 당연히 입법의 정당성 이 없으면 법치란 게 절대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건 강제일 뿐이고 바로 독재다. 유신헌법처럼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 다 는 헌법 1조 2항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 민투표에 의해 주권을 행사한다 로 고쳐진 그 법이 정당성을 지니지 못한다. 왜 이 법이 잘못된 것인가는 명확하다. 이건 소수에 의해 고쳐진 법률이지 민의에 의해 만들어진 문구가 아니다. 더군다나 법치주의 란 건 절차상 하자만 없으면 모든 법이 정당화되고 그에 국민 이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이론을 갖다 붙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건 형식 적 법치 에 불과하다. 실질적 법치 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법이 입법 과정과 적 용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타당성을 입증해야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국회가 입법부라고 불리지만, 어떤 입법이건 함부로 할 권한을 준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 로 그 입법은 근본 자체가 떼법 즉, 법을 요구하는 군중의 입장이 반영되어야 하고 조정되어야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토록 아메리카 좋아하니 그들은 이렇게 한다.) 악법도 법 이란 왜정 치하의 법 적용 정당성을 위해 만들어져서 오 늘까지도 그대로 이어지는 대표적인 정신개조의 범례에 속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위정자들은 이 말을 쓴다. 그 말을 하는 자들은 모두 실질적 법치의 개념 즉, 인 간이 중심이 되는 법이란 말을 모르는 거다. 어떤 국회의원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입법부입니다. 법은 우리가 만들지 국민이 만드는 게 아닙니다. 행정부 는 행정만 하면 되고, 사법부는 집행만 하면 되는 겁니다. 법 만드는 건 우리 소 관입니다. 한 마디로 웃기는 소리다. 아주 기본도 모르는 놈이 국회의원이 되어 있는 거다. 저런 놈은 당장 옷 벗겨야 한다. 그런데 법으로 그걸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있

페이지15 긴 있는데-제명-다 한 통속끼리 하는 거지 감시기구는 아니다. 오직 임기 끝나 고 투표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도 지역구면 그 지역 대중만 선거가 가능하니 이 것 참 난감하게 해뒀다. 이럴 때는 허튼소리 하는 자는 법으로 옷 벗겨야 하는 그런 법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저항권(Right of Resistance)이 있다. 혁명권(Right of Revolution)도 있다. 법치의 기본은 헌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이것이 기본원리에 중대한 침해가 있으면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다른 합법적인 구제 수단으로 목적달성이 어렵 다면 실력 저항하는 권리를 말한다. 그러나 저항에 실패하면 이건 그 끝이 정해 져 있다. 혁명이 성공하면 영웅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저항 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합법적 구제수단 의 한계가 있어서다. 자력구 제 하지 말라고, 사회 혼란이 벌어진다고 설레발을 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저게 겁나서다. 무슨 놈의 비폭력 저항이나 시민불복종 같은 항의시위 수준에서 말하 는 건 아니다. 오죽하면 저항권을 생각하고 목숨 걸 생각하겠는가. 어디서 빌려왔는가 했더니만 간디의 비폭력을 시위 현장에서 열심히 외치는 사람 이 있길래 물어봤다. 정말 간디주의를 아느냐고? 간디주의(Gandhism)은 불복종 비협력 비폭력주의적 무저항주의의 대표명사처럼 되어 있다. 이건 그의 철학이었 고 영국으로부터 독립운동에 이 철학의 힘이 크게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사티아 그라하(satygraha, 진리파악), 브라흐마차랴(brahmacharya, 자기 정화), 아힌사 (ahis, 무 상해)의 3가지를 내세우고 거기에 스와라지(swaraj, 자치)를 결부시킨 것이다. 그런데 그의 철학은 이렇다 셈치고, 정작 그는 인도의 계급주의인 그 악 명 높은 카스트제도 철폐는 사회혼란을 이유로 반대했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물 었던 셈이다. 간디주의를 빌려 올 것을 빌려와야지 했다. 어차피 시장만능주의로 고착 수준은 넘어서는 이 계급시대에 간디가 뭔 말이냐고. 그럼 이렇게 반문이 들어온다. 뭔 혁명하자는 소린가요? 웃으며 답한다. 혁명이 필요 없다 생각하는 자는 그 소리 들을 자격도 없는 거지요! 아직도 대한민국은 미개하다. 위정자들뿐만 아니라 계급사다리의 상층부에 있는 자들은 자꾸 교과서에서도 사라진 악법도 법 을 꺼내고, 형식적 법치를 법치주의 의 전부인 것처럼 우긴다. 그러니 이제라도 저 놈의 소크라테스를 확 지워야 한 다.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는 자를 지워야 한다. 그 말에 숨겨진 그 위세하며, 복 종을 강요 못해 안달하는 조급함을 지워 버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하시 세월 흘러도 2004년에야 없어진 저 왜정의 망령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으니. 참 불안 불안하다. 정신개조운동이 제대로 벌어지든지 해야지.

페이지16 3. 언플 정말 쩐다. 상처는 여전히 붉다 / 정용화 나는 그 새 이름을 알지 못한다 깃털만 만져도 가슴에 상처 하나씩 갖게 된다는 그 새는 내 입 안 깊은 동굴 속에 살다가 무심코 입을 벌리자 기어이 세상 밖으로 빠져 나왔다 새가 빠져나간 자리, 허공이 자꾸 아프다 햇빛의 온기가 남아있는 돌 위에서 새는 아까부터 견고한 비밀을 쪼아대고 있다 저녁은 어두워지게 내버려두고 오래도록 물어뜯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처음엔 그저 작게만 보였던 새 걷는 것이 전부인 듯 보이더니 날개가 생겼다 날카로운 발톱이 생기고 부리가 점점 커져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다 어둠도 가둘 수 없는 새가 날아간다 무엇으로도 저 새를 잡을 수 없다 새가 날아간 자리 두고 간 소문만 무성하고 노을 너머 상처는 여전히 붉다 대한민국에서 언론은 존재 이유가 여러 가지 있는 것 같다. 알 권리 라고 부르는 국민의 대표 격임을 내세워 사실보도, 공정보도 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 그들이

페이지17 내놓는 일종의 존재 명분이다. 그러나 그에 덧붙여서 온갖 짓거리 를 다 한다. 불 공정 보도는 그 작은 한 예에 속한다. 그래서 언론은 이제 이 사회에서 더 이상 공기 ( 公 器 )라고 불리는 위치는 벗어난 상태다. 이 글도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글을 쓰면 그들은 비웃고 만다. 그러나 과연 언제 까지 그럴 수 있을까, 그들 내부에서도 이 위기 상황을 생각은 하고 있을까? 그 건 잘 모르겠다. 그래서 한 번 찾아가보자는 생각을 한다. 일반 대중에게는 이런 그들의 모습, 생각이 잘 읽히지 않는다. 무턱대고 그들 이야기를 모두 듣는 건 아 니지만 그래도 어느 수준인가는 생각해봐야 할 아주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더 이상 이렇게 가면 안될 것 같은 쓰레기 냄새가 너무 나고 있어서 말이다. 우선 대표적인 몇 가지의 범례를 종합해보면 이런 것이 나온다. 편향성의 함정에 빠진 예다. 아주 노골적으로 어느 한 쪽의 편을 든다. 나꼼수 는 친노다. 이 정의는 틀리지 않는다. 아예 대놓고 들어간다. 처음엔 속 시원하게 이 명박 정권을 까대는 게 속 시원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거 원 너 무 일방적이다. 좀 질린다. 그리고 편향이란 건 언론이 가진 사실 과는 좀 다른 과장이 많이 들어가게 되어 있다. 게다가 좌충우돌 한다. 이를테면 론스타 사건 같은 걸 끄집어내려면 김대중-노무현-이헌재 까지 다 이어진다. 솔직히 나는 나 꼼수가 정보를 제한적으로 걸러낸다고 생각한다. 즉, 시야를 좁혀두고 들어간다는 거다. 자신들이 보호할 대상을 정해두고 가다 보니 비판의 진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그게 한계일지 모르겠다. 이 현상은 이미 욕을 먹을 만큼 먹는 조중동 -요즘은 문화까지도 넣는 듯하다- 도 그렇지만, 한국경제나 매일경제 등도 일단 일방적으로 기업 위주의 정책지지 를 공공연하게 말한다. 그러니까 이 신문들은 기본이 신자유주의 신봉자의 광고 지 인 셈이다. 물론 경제뉴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겐 경제전문 일간지니까 보 지 않을 수도 없다. 경향, 한겨레는 사실보도와 관련해서는 높은 신뢰도를 가졌다 고 여론조사에서 나온다. 그런데 이들도 마찬가지 편향성은 명확하다. 그 논조를 주입하려는 경향성을 버리지 않는다. 이들끼리 막 싸운다. 그러니 어느 한 신문만 읽다 보면 딱 그 시각에 고정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두루두루 보자니 그 시간이 아깝다. 찬반이 있는 수준은 벗어났으니까. 그래서 인터넷 뉴스가 대세로 자꾸 간다. 다양하게 올려주니까. 극좌 극우 시각 도 있고, 경제나 IT 전문지도 올라오고 그러니 내용보기가 참 쉽다. 인터넷 매체 들의 경우는 페이퍼가 나오질 않으니 거기서 봐야 한다. 시각은 참 다양하다. 동 일한 사안을 두고도 어느 부분만 고르느냐에 따라 다르고, 어떻게 보느냐는 결정 적으로 다른 경우도 많다. 사회를 보는 눈이 그 기자 (언론사)에게 세뇌되는 건 데, 사람들은 나는 세뇌되지 않을 자신이 있다 고 자신의 변별력을 믿지만, 정작 의견을 내놓아라 하면 툭 자신이 보는 기사의 논조가 튀어 나온다.

페이지18 특히 요즘 같은 경우에는 인터넷 댓글 알바들이 그렇게 많다. 뭔 놈의 지시를 받 았는지 온갖 말들을 쏟아 놓는다. 드러날 것 같지 않지만 빤히 보인다. 그러니까 아주 수준 낮은 알바를 고용해서라도 인터넷 여론이라도 조작을 해야 하는-이건 엄밀히 조작 중의 조작이다. 인터넷 쇼핑몰의 댓글 조작이 직접적으로 돈과 연계 되지만 이건 우리의 판단 을 잡아 먹는다.- 조급증을 드러낸다. 배후는 대체로 정치세력들이다. 그러니까 개인 의 의견을 듣자는 건데, 개인은 없고 조직된 집단만 있는 꼴이다. 그런 댓글이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지난 4.11 총선이 대표적인 예이긴 했는데, 그 때 인터넷은 참 난리가 났다. 결 론은? 야권의 완전 참패였다. 댓글로만 보면 여권은 무조건 졌어야 한다. 그런데 아니었다. 댓글의 가치가 완전 참혹한 패전을 맛본 케이스지만 그래도 꾸준히 이 에 투자(?)한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개인의 표현자유 영역과는 전혀 상관없다. 멀티 아이디에 멀티 닉네임은 개인정보가 여기 저기 다 털려버린 대한민국에선 쉽고도 쉬운 작업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저렇게 하더라도 최소화 하려면 IP를 통해서 제어가 가능할 텐데 안 한다. 어쨌거나 마트에는 사람이 몰려야 분 위기가 난다는 것인데, 글쎄다. 그게 앞으로도 그럴지는 모를 일이다. 슬슬 그런 모습에 짜증날 때도 되었는데 말이다. 언론에 광고가 아닌 기사를 실어주고 돈을 받는 소위 홍보대행사 가 많다. 이 것이 가능한 이유는 결국 돈 때문이다. 식당 홍보도 새로운 사업 런칭도 그 런 식으로 한다. 광고가 아니다. 기사다. 그런데 기사가 아니다. 언론 플레이에 활용 당하는-돈을 받고 기사니까 언론의 본분은 일단 벗어났다. 상품으로 치면 불량이니까 회수되거나 폐기 되어야 한다. 그런데 뭐 그냥 지나간다. 이게 뭐 지?! 제재하는 곳도 없다. 이건 또 뭐지?! 언론마다 경쟁 심리가 많이 작용하고 또 그러다 보니 낚시 기사도 많다. 내용은 별 것도 아닌데 제목만 눈길 끌게 붙여 놓고 마구잡이로 간다. 낚시는 허위 과장 광고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냥 지나간다. 에이 씨! 한 번 하고는. 더 심각한 건 아예 대놓고 빨아주는 경우다. 공정성은 뭐 염두에 둘 것도 없다. 뻔한 거짓말을 할 장소 제공을 해준다. 그런데 이젠 부끄러워할 줄도 모른다. 그 언론이건 기자 건 그걸 보는 독자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부끄럽다 말하는 기자들은 있었다. 그런데 그건 뻔히 아는 처지에 그런 거고, 대충 그 자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 언론의 정체성 은 뭘까? 종편까지 시작된 마당인데, 요즘 그 놈의 방송 이 스스로 나는 공정보도는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선전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기자 윤리강령이니 뭐니 그런 거 다 소용도 없다. 굳이 그걸 끄집어 내 서 토론하자고 덤비거나 덤벼 드는 그런 언론인도 없다. 그냥 다 죽었다. 입 닫고 살기로, 저런 거 고치는 데는 전혀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건 진보니 보

페이지19 수니 표방하는 어떤 곳도 마찬가지고, 공영이니 사영 방송이니 그도 별 문제, 인 터넷 매체니 페이퍼니 그런 것도 가리지 않는다. 주간 월간도 별 관계 없고. 한 마디로 개/판 이다. 도대체 이런 상황을 우리 말로 뭐라고 표현해야 고민 고민해서 찾아낸 단어가 있 다. 쩐다. 이 말 정말 돋는다. 엉! 돋네 는 쩐다 는 말과 같은 뜻이라는데. 이게 뭐지? 친 구가 황당한 사진을 보여주면 와! 쩐다 이렇게 말한단다. 좋다는 뜻? 그것도 아 닌 것 같다. 인천지역에서 90년대 후반부터 사용된 신조어 가운데서 쩔어 라는 게 있다는데 그 말의 원형도 쩐다 란다. 오~ 쩌는데?, 이러면 감탄, 강조에서 쓴다고 하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에 핵심이 되는 단어를 강조할 때, 감정 강조 때에도 쓰고, 악감정 강조 때도 쓴단다. 참 넓게 쓴다. 이를테면 이 말은 전라도 의 거시기 처럼 쓸 수 있는 모양이다. 이 단어 설명 가운데서 가장 잘 정리해둔 것만 골라 정리해보면 이렇다. 좋은 기분을 과장해서 표현할 때 쓰기도 하지만, 나쁜 기분을 과장할 때도 역시 사용한다. 인천 지역에서 쓰기 시작해서, 인터넷(특히 피망 스페셜포스)과 수도권 청소년 대학생들에게 보편화되었다. 가끔 비꼬는 의미까지 살짝 내포되어 있다.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북쪽의 사투리 전다 가 피난민을 통해 전해졌다는 것과 특히 인천쪽에 쩐다 의 원형인 전다 가 전해졌다는 설도 있다. 어떤 재능이 나 능력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남달리 뛰어나다고 할 때도 쩐다 를 쓰고 그 변형 으로 어떤 일에 완전히 몰두하여 고수나 달인이 될 때까지 계속하다는 의미로 쩔 었다, 쩔었구나 과거형으로 쓰인다. 그래! 이 단어 쓰기도 좀 쩌네! 이렇게 가면 대한민국 사회에서 언론은 더 이상은 없다고 하는 게 옳다. 지금 확 실하게 그렇게 정의하는 게 옳다. 오늘 기준으로. 자정( 自 淨 )은 없다고 봐야 하고, 그럼 어떤 방법이 있을까? 쓰레기를 쓰레기 취급할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뒤져 봤다. 왜 지금 대한민국의 언론이 쓰레기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지를. 1949년 미국에서 제정된 공평의 원칙 (Fairness Doctrine)은 미국연방통신위원 회의 자체 규정이었지만 1985년 폐지했다. 기계적이고 숫자적 중립을 요구하는 공평의 원칙 이 언론인들의 취재의 자유를 억압해서 미국수정헌법 1조가 보장하 고 있는 표현자유 침해 소지가 있다고 봐서다. 그렇다고 모든 언론에 적용되는

페이지20 공정성을 지킨다는 의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관건은 이게 법적 의무조항도 아 니란 것이다. 그래서 언론 경영인이나 방통위가 기자들이나 프로그램 제작진에게 기계적 숫자로 중립성을 말하면 기자들이 권력감시 역할을 축소시킨다고 대든다. 그런데 이렇게 대들 이유도 솔직히 사라진 지 오래다. 왜? 언론인 스스로가 자기 네의 공정성에 문제가 많다고 인정해버렸으니까. 2009년 언론인 공정도에 대한 여론 통계는 이 점에서 많은 걸 드러낸다. 한국언 론진흥재단에서 시행한 이 결과는 참 보기 드문 자료이긴 하지만 어쩐 일인지 2009년 이후의 자료가 없다. http://mediasis.kpf.or.kr/surveystatistics/kpf_mediasurvey.aspx?title_master_code=03253&item_ Index=0&MASTER_CODE=99925&CLASS_CODE=001&menu_Index=1 공정한가를 물으니 공정하지 않다는 대답이 48%다. 절반 넘지 않았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다. 언론의 공정성은 잃었다고 인정한 수치로 봐야 한다. 아래 내용을 더 이어서 보면 그 심각성은 상상을 초월한 상태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의식조 사를 한 번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설문을 아주 잘 정리해서 해야 한다. 워낙 여론조사란 것이 설문의 테크닉에 따라 그 답이 오락가락 한다.

페이지21 부서별로 보는 이 자료 정말 재미나다. 공정하지 않는 쪽으로만 보면, 정치부는 37.3%, 사회부는 41%, 경제/산업부는 45.7%, 과학/IT부는 64.3%, 문화부는 52.3%, 체육/생활부는 51.5%, 국제/북한은 58.4%, 편집/독자/조사부는 57.3%, 사진/카메라부는 44.9%, 기획/탐사는 42.1%다. 가장 낮은 불공정 인정 부서가 정치부다. 가장 높은 쪽이 과학/IT부다. 그러나 더욱 주의해서 봐야 할 부분은 매우 공정하다가 사진/카메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0%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공정함을 떠나서 기본적으로 매우 공정한 언론 은 우리 사회에 없는 셈이다.

페이지22 신문 종류별로 한 번 보자. 중앙일간지는 54.7%, 경제지는 41.5%, 스포츠지는 65.4%, 지방일간지는 43.5%, 중앙방송사는 46.4%, 지방방송사는 40%, 특수방 송사는 50.9%다. 중앙일간지의 불공정성은 스포츠지만 빼고는 으뜸이다. 이미 공정을 떠난 편향성 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매우 공정하다 대답은 중앙 방송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0%대다.

페이지23 직위별로 봐도 이 트랜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상급자로 가면 갈수록 불공 정에 대한 의견은 옅어진다. 국장급은 33.3%, 부장급은 44.1%, 차장급은 48.5%, 평기자는 50.5%가 불공정 편에 손을 들었다. 주목해야 할 수치다. 평기 자의 경우, 이미 50%가 넘었다. 이것은 직위별 보도 공정성에 대한 평가지만 그 렇다 하더라도 수치상 절반이 넘는 불공정함이 인정된 상태라는 건 곧 우리는 지금 불공정한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고 말하는 것이다. 아마 이 수치는 2012년 현재 다시 조사를 한다 해도 그 숫자가 높으면 높았지 낮아질 것 같지 않고, 여기에 인터넷 매체를 대상으로 조사를 한다면-군소업체 까지-아마도 수치의 상당 부분은 절반이 아니라 가장 높은 불공정 수치를 보인 60% 이상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결론은? 대한민국 언론은 일단 불공정 언론이다. 이렇게 보면 된다. 그들은 지금 도 언론 플레이를 한다. 언론은 공정하다, 진실을 추구한다, 객관적인 진실을 찾 는 게 언론의 사명이다 등등. 개/뿔! 언론은 다 죽었다. 진실도 마찬가지로 죽었 다.

페이지24 4. 포퓰리즘은 뭐고 대중은 뭔가? 닻 / 함민복 파도가 없는 날 배는 닻의 존재를 잊기도 하지만 배가 흔들릴수록 깊이 박히는 닻 배가 흔들릴수록 꽉 잡아주는 닻탑 상처의 힘 상처의 사랑 물 위에서 사는 뱃사람의 닻 저 작은 마을 저 작은 집 소위 보수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입만 열었다 하면 꺼내는 상대를 비난하는 단어 는 빨갱이 류( 類 ) 다. 좌좀이니 좌빨이니 하는 말들은 이젠 그 말 꺼내는 자들이 좀 희화화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한참 종북 ( 從 北 )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 다가 요즘은 대충 극우 쪽 인사들 빼고는 잘 쓰지 않는 것도 같고 그렇다. 통합 진보당에서 유시민 심상정 등이 빠져 나와 버리니 이제 남은 자들은 꼼짝없이 이 단어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도 특기할만한 일이다.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거다. 포퓰리즘 도 대표적인 그런 종류로 등장하고 있다. 경제민주화와 함께 복지 문제가 언급되면 항상 이 단어가 마치 자석처럼 나온다. 보수 언론과 여당이 여 기에 가세하고, 경제신문도 부정적 이미지로 사용하는 걸 보면 이 단어의 소속은 한국 사회에서는 가진 자 의 편이라고 봐야 옳다, 그런데 서울경제신문 창간 51 주년 설문에서 복지 포퓰리즘의 성격 에 대해 조사한 설문에 의하면, 합리적인 논쟁이나 검증과정이다 답변이 41.1%, 합리적인 논쟁과 검증과정이 아니다 50.3%, 모름 무응답이 8.6%였다. 즉, 포퓰리즘=정쟁( 政 爭 )이라는 인식이 있다 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복지 포퓰리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보다는 합리적이

페이지25 냐 아니냐를 묻는 점에서는 합리적이라 답한 이들의 경우에도 한국적 포퓰리즘의 규정이나 성격에 있어서는 다른 견해도 나올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포퓰리즘= 부정적이라는 의견은 비판을 받은 셈이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었던 류근일 은 이 단어를 참 좋아한다. 아예 조선일보 주필에서 떠나던 날의 고별사에도 신판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는 말을 썼을 정도 다. 그 이후에 이 단어는 더 발전하여 생계형 좌파 포률리즘 (2007.8.7 인질 을 이용한 정치꾼들 )까지 등장했다. 요즘도 다양하게 쓴다. 이를테면 현 정부가 포 퓰리즘 노선을 걷는 이유 (2011.5.31), 선거철 대북 포풀리즘인가 (2012.2.29) 같은 제목의 글도 쓴다. 위풍당당한 자유언론의 정도(정도)로 용맹정진해 주십시요, 시대의 변화에 능동 적으로 대처하되,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가치만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지켜주십시요. 신판 독선주의, 신판 전체주의, 그리고 신판 포퓰리즘이 우리앞에 몰려오고 있습니다. (2003.2.25 류근일 조선 고별사) 이 정도면 류근일은 포퓰리즘 하나로 글을 써서 먹고 살았다 해도 과언은 아니 다. 역시 대한민국에서 포퓰리즘이란 단어를 대중인기 영합 정치인이라는 이미지 전략으로 규정한 첫 번째 사람으로 지목된다. (1997년 김대중이 출연한 KBS 방 송 프로그램에 대한 칼럼-현재 조선일보 인터넷판에서도 찾을 수 없음.) 그 후 많은 보수를 자처하는 언론, 정치인들이 이것을 더 확장하여 사회 복지정책을 꺼 내기만 하면 즉시 포풀리즘, 포퓰리스트 로 공격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대중의 인식에 복지=포퓰리즘=사악한 것=진보좌파 라는 공식을 주입시키려고 했고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부의 분배적 정의, 즉, 평등의 개념 자체 를 뒤집어 없는 정말 사악한 악의를 가진 접근이었다.

페이지26 이들이 손쉽게 꺼내는 예는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 다. 노조의 과도한 임금인상 요구는 도덕적 해이를 불러와서 산업경쟁력을 저하시켜 2002년 디폴트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인데, 이는 좀 더 접근해보면 오히려 19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 정 책이 강력하게 적용된(1976년 집권한 군부가 무분별하게 외자를 유치하고 집권 에 협력한 다국적 기업을 끌어들였지만 이들은 잇속을 차린 후 천문학적 외채와 살인적 인플레를 남기며 경제파탄을 불러오게 됨.) 상태에서 메넴 정부가 IMF의 권고에 따라 고정환율제, 긴축재정, 고금리 정책을 사용했고, 이 과정에서 1994 년 말까지 아르헨티나 전체 공기업의 98%가 민영화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1991년 미 달러화와 페소화 교환비율을 1대1로 고정시킨 태환정책을 쓰면서 막 대한 무역적자에 직면하게 되었던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유럽 경제위기에도 예외 없이 포퓰리즘 단어가 등장했다. 그리스 같은 경우가 대 표적인데, 포퓰리즘과 부패를 지적하는 논리를 고스란히 우리 사회에 대입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복지의 핵심은 2004년 이후 의료복지와 연금을 확대하는(GDP의 5.8% 의료복지, 임금 대비 연금액 비율 95%) 정책으로 인해 재정악화가 초래된 것이고, 민간부문 근로자사회보험기금(IKA)의 경우 자신이 낸 금액의 1.1배 연금 수령하는 반면 공무원과 공공기관 종사자 등 공공부문은 연금기여액의 2~5배를 받는 불공정이 사회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정 작 그리스의 공공복지지출 비중은 GDP의 21.3% 수준으로 OECD 평균(19.3%) 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탈세구조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어 세수부족이 벌어지고 경상수지 적자 지속, 단일통화 체제 그리고 부동산 거품 붕괴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타당하다. 유로 가입 후에 화폐가치 상승으로 인해 저금리 자 금 조달이 가능해진 상태에서 해외 부채를 끌어와 만성적인 재정적자를 메우는데 사용했고 이 자금들이 부동산 산업으로 흘러가 거품경제를 유발했다. 또한 세수 기반의 취약성은 그리스의 발달된 지하경제(국내 총생산의 25% 규모)에서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고, 2004~2007년 법인세율 35%->25% 하향 조정, 개인 소득세율 면세점 상향 조정, 친척간 부동산 상속세 폐지 등 감세정책으로 세입 지출간 불균형 고착화를 지적해야 할 문제인 셈이다. 더군다나 독일 슈피겔의 분 석(2011.11.5)처럼 여간해선 바뀌지 않는 비대한 족벌주의 시스템을 창조한 3 대 유력 정치왕조-파판드레우, 카라만리스, 마초타키스 가 그리스를 망쳐놨다 는 지적이 더 타당하게 보인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기존 인력을 줄이지 않은 채 주요 정치지도자 측근과 이들의 가족과 친척들 수천 명을 정부 관료로 채용하 는 전통이 있는 나라, 부유층은 세금을 탈세하고 공무원들은 뇌물을 받고 곳간을 열어주는 나라가 바로 문제였다는 사실은 지적조차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브라질 룰라정부의 성공한 포퓰리즘은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노르웨이 진보당의 우파 포퓰리즘의 성공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 한국 내에서 복지, 노동 문제만 나오면 거품을 물고 포퓰리즘 으로 밀어붙인다. 왜 이런 현상이 벌 어지는 것일까? 단순하게 재벌이나 기업의 이익만을 대변하기 위해, 혹은 진보나 좌파로 불리는 세력에 대응한 이념 대립의 한 형태로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1997년 이후 지금까지 사례를 쭉 보면(이 용어를 통한 보수언 론의 반대 형태) 뭔가 숨겨진 이유가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페이지27 특기할만한 사실도 아니지만 류근일은 2001년 한국 뉴라이트 운동이 시작된 이 후 꾸준히 친 뉴라이트 논객 활동을 했고, 마침내 2008년에는 뉴라이트가 개명 을 했던 시대정신 (이사장 안병직)과 합친 자유주의연대 상임고문을 역임했다. 이 사람을 단순히 우파 논객, 이렇게 정의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제 뉴라이트가 가진 성격적 규정은 한국 사회가 하고 있는 단계다. 그들은 철저한 왜색이다. 경제발전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 자체가 바로 정치단체 이고 또 정치세력이 분명하니까. 그런데 왜 왜색보수는 이렇게 포퓰리즘이란 용 어로 복지나 노동 등(노동복지, 평화복지, 민생복지, 사회복지 등) 사회 공공부문 의 강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인지, 이유를 생각해보라. 해답은 정해져 있 다. 포퓰리즘은 라틴어 포퓰루스 (populous)에서 유래된 말이다. 사전적 정의에서도 포퓰리즘은 보통사람들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려는 정치사상, 활동 (캠브리지 사전), 포풀리스트를 부자나 지식인 보다는 보통 사람들을 대변하는 자 (영국 롱 맨 사전)으로 본다. 민주주의 자체가 포퓰리즘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러므로 이 단어를 함부로 쓰는 사람은 지금부터 경계해야 할 사람임에 분명하다. 특히 이 단어를 정치적 쟁론의 소재로 사용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발상법에 속한 다. 바로 민주주의 훼손을 위한 것이고 좀 더 심하게(약간의 악의적인 표현을 더 하면) 그 사람이야말로 반 민주주의적 정서를 가지고 또한 반 서민주의자 로 보 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사람의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5. 김상조를 기용하는 자가 이긴다.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 문인수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 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페이지28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몸값 한 번 올려드리겠다. 아니, 오를만한 가치가 있다. 혼자서도 잘 가는데 괜히 기우 삼아 적는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앞서 포퓰리즘을 봤다.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미꾸라지 하나가 어떻게 이 나라를 농락했는지,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지금도 그렇게 한다. 우파 논객? 그런 이야기 하면 안 된다. 나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목적을 가지고 극우 논리를 사회에 강제 주입하는데 동원된 글쟁이 수준에서 본다. 그 목적, 솔직히 그 행적 이 이야기를 해준다는데 이의를 걸면 큰일난다. 한 사회에서 때론 영웅도 혹은 역적도, 간신도, 장사치도 모두 나오는 법이다. 건 달도 양아치도 논두렁 깡패도 공존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러니 모두 있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가 있어도 그 사회를 이끄는 흐 름이 있는 법이다. 그걸 주도하는 사람이 곁에 없으면 쉽게 무너지고 만다. 그걸 읽는 사람을 인정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김대중은 지독한 정치 편향적 인물이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받아 들였다. DJ노믹스? 웃기는 이야기 하지 말라고 그래라. IMF사태가 벌어지고 걷잡 을 수 없이 받아들인 신자유주의 노선은 확실히 아르헨티나의 그 모습과 너무 흡 사하게 닮았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 한국은 미국이나 막장 금융자본주의 입장에 선 신자유주의 바람만 불어 넣으면 아주 뽑아 먹을 게 너무 많았다. 그리고 전략 적으로 동북아는 가장 큰 적인 중국이 있어 미국이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웠다. DJ가 잘해서 마무리를 하게 된 게임이 아니었다. 지독스런 부채를 사회에 남겼 다. 물론 그런 여건을 잘 활용해서 한국을 마치 소비가 미덕인 나라로 만들어버 리면서 지독스러운 모르핀을 맞게 만든 책임이 성과일 수는 있지만 그 또한 벗어 나긴 어렵다. 자꾸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니 6.15 선언 이야기를 하지만 지금 다 시 그 선언문 한 번 봐라. 공식 협정문서의 의미에서는 1991년 12월 13일 대한 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 의 발끝도 따라오지 못 한다. 그에 부속된 남북화해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 남북불가침의 이 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 남북교류협력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까 지 보면 서류로 평화를 이야기하는 건 얼마나 쉬운지 금방 이해된다. 집권 말기 건강상의 이유로 제 구실을 못하고 약물에 의존했던 DJ를 자꾸만 진보정권 1기 로 부르는 건 뭔가 자꾸 영웅 혹은 우상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냉혹하지 못

페이지29 한 열광에 불과하다. 특히 경제분야에선 바로 그 시절이 오늘 우리를 만든 장본 인이라는 사실을 왜 모르는지 모를 일이다. 노무현. 측근의 말마따나 참여정부 색깔이 나는 정책이 없다 는 말이 딱 정리 에 해당한다. 색깔? 경제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선 친미통상관료를 비롯하여 모피 아의 손에 맡겼고, 정치는 과반수 넘는 의석을 가진 열린우리당을 가지고도 죽을 쒔다. 무능의 상징이었다. 오죽하면 좌측 깜빡이, 우측으로 핸들은 돌린 그 엉성 함을 말했겠는가 마는 DJ의 영활함의 1/10도 구현하지 못하고 그저 낡은 이미지 로 채워진 권력 분산론자에 서거로 애틋한 서민 대통령 이미지만 겹쳐졌다. 경제 측면으로만 보면 철학부재의 현장이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도 못한다. 폐족 맞다. 그런데 다시 살아나는 걸 보면 서거 국면의 영향력이 지금도 감성적으로 이어지 는 것 같아 안타깝다. 냉정한 평가가 필요한데 말이다. 마구잡이로 재벌 이익을 견지해준 대가는 참혹했다. 그리고 아무리 양극화 해소를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한미FTA라는 그 초유의 자청한 경제식민의 발의자로써의 책임은 피할 길은 더 이상 없게 보인다. 결론은 두 번 다시는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는 교훈만 남겨 주었다. 감성은 제쳐두고. 그로 인해 이명박 정권 같은 괴상망측한 저질 장사꾼 집단이 들어오게 만들었다. 이 또한 큰 과실 책임을 져야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져 버렸으니 할 말이 없기 도 하다. 그렇다고 할 말은 해야겠지만. 이명박 정권엔 영웅이 없다. 오로지 이 정권의 명칭 그대로 이명박 이란 주연배우가 있고, 나머지는 모두 책임회피를 위해 급급한 모습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할 것이다. 지금 총리하는 김황식 이란 사람이 이명박 정권의 과오를 책임질텐가? 아니다. 그럼 누가? 이 정권 초 창기부터 브레인으로 활동한 박재완 장관이 질 건가? 4대강부터 시작해서 면면 드러날 이야기에 최종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뭔 도마뱀이 많기도 하지만 어 느 순간 눈 깜빡할 사이에 다 사라질 사람들만 모인 것 같으니. 5대 천황 중에서 유일하게 이명박 대통령만 남았지만, 나머지 4대 천황도 더 나빠지면 질 일만 남 았지(이 정도에서 심판 끝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좋을 일은 없게 보인다. 전 형적인 화무십일홍이다. 문제는 21세기 친일을 밀어붙인 그 세력들과 요즘은 사 이가 좋은지 모르겠다는 건데, 살 길 찾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게 안타깝게 보이 긴 한다. 곳곳에 스며드는 그들 세력을 보면서 혼자 생각하기에 참 미련스럽다 여겨지지만 워낙 뒷심이 좋은 자들이어서 경계를 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경계해 야 한다. 흐름으로 봐서는 이명박 정권이 만든 쇼크가 너무 컸기 때문에 지금은 새롭고 신선한 것이 대세가 된다. 그런데 너무 엉뚱하다. 문재인. 일단 수권의 자격이 없다. 실패자의 그림자를 안았을 때는 그 실패가 왜 생겼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모르는 척 해버린다. 진짜 모를 수도 있다. 안철수. 새로운 이미지 들고 국 민추대라고 자기는 주장하며 나왔다. 그러면서 달고 나온 것이 지난 시절 우리를 가슴 아프게 만든 수괴( 首 魁 )다. 순진한 백성들에게 수평적 협의체 같은 형식의 의사결정 구도를 말하지만 그거 다 구라 다. 솔직히 정체성이 이 사람처럼 애매 한 경우를 뭐라 해야 할지 아직 정하질 못하겠다. 그래도 10월 중엔 뭔가 이름 하나 규정은 될 것 같다. 박근혜.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이름 바꾸고 4.11

페이지30 총선도 이겼다. 친이를 친박으로 대체했지만, 또 힘 합치자면서 그들을 끌어들일 게 뻔한 스토리. 뭔 놈의 보수대결집, 이러면서 모여 갈 길은 정해진 듯 보이고. 바꾸자고 하면 제법 바꾸는 티 나야 하는데, 아직 그 정도 보여주려면 한참 멀었 는지 아니면 그럴 생각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경제민주화 같은 이슈 선점은 잘했 는데, 내부에서 삐걱댄다. 과거 삼성보고서로 공부한 관료들이나 정치인들처럼 똑 같은 레토릭이 나올 법도 하지만, 아직 그런 보고서는 못 받은 모양 같고. 옆에 있는 자들이 한결같이 구태에 찌든 사람들이니, 도무지 저렇게 해서 어디 새로운 미래를 말할 건지 한숨이 푹푹 나온다. 흐름으로는 분명 이 지점 정도면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일정 수준은 반드시 고치 고 지나가야 한다. 정확하게는 제대로 된 포퓰리즘이 먼저 동반되는 걸 전제로 해서 성장의 방법론, 그 조정책을 거론하는 게 기본이다. 그런데 아니다. 한미 FTA 비준 해놓고 나니 살판이 났는지 아예 복지도 민생도 서민도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아직도 일단 파이를 키우고, 나눠 먹는 건 내가 결정할 때까지 란 구호가 통할 거라고 믿는 모양이다. 그 사이 재계는 착착 한미FTA에 어떤 실 익을 서로 나눌지 머릴 굴린다. 트리클 다운은 이미 판 깨졌다는 건 잘 알 거다. 오히려 막장 금융자본주의의 그림자가 아닌 본체가 이제 곧 한국 땅에 상륙하려 고 한다. 9월 14일인가 15일인가에 끝난 24차 한미재계회의에서는 한미FTA의 판을 키우려고 동북아 금융센터 만들자는 안을 적극 토의했다. 여기에 한미일 3 국이 주축이 되어 금융경제의 한 판, 그러니까 한미FTA 축하 기념판을 금융으로 돌려보자는 잠정 합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게 일이고, 서민은 그들이 만들어준다는 일자리, 때론 경제가 나빠서 시급 100원 인상도 못하겠다 고 버티는 판에서 이제 정말이지 막장 금융자본주의라는 똥물을 덤터기 씌움 당 해야 하는가 말인지. 새누리에서 장하준 스카우트 이야기가 나왔지만 장 교수는 갈 생각은 없는 듯하 다. 재벌의 순기능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태도여서 경제민주화의 판엔 그런 논리 가 옳다고 본 모양이다. 김종인-이한구의 감정대립은 1라운드 수준 정도인 듯한 데, 그렇다고 경제민주화 방안이 잘 나올 것 같지도 않다. 재벌의 이익을 대변하 는 사람들이 여당 내에 많은 건 당연한 일이고 보면, 김종인의 토사구팽 이야기 도 그리 확률이 낮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게 뭐 탕평책은 아닐 듯 보 인다. 문제는 이 틀 속에는 여전히 이헌재 류의 모피아가 곳곳에 숨어서 이 방안 에 대해 살 길을 찾는-보다 정확하게는 친 개방형 통상/친 신자유주의/친 국제금 융카르텔/친 국제와 연결된 사업주체들/친 그런 류의 정치세력-모습은 힐끗 봐도 숨바꼭질 자체가 될 지경이니 거기에 무슨 노동 복지, 민생복지, 평화복지, 공생 복지가 끼어들 틈은 아예 없다. 선후( 先 後 )의 문제이지 절대 무조건 병행이 가장 무리 없다는 식의 개념을 들이 댈 때가 아니다. 서민 입장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여기서는 한 번 정리하고 지나 가야 한다. 악다구니 쓰면서 신자유주의를 전도했던 자들이 한 템포 여기서 숨고 르기를 하게 해야지 나라가 사회가 산다. 그래서 가만 주변을 둘러 본다. 닳고 닳아버린 경제관료, 헤프디 헤프게 친미로 흘러간 외교통상관료, 거기다가 이 정 권처럼 흘러간 옛노래로 고환율 정책을 비롯해서 소망노믹스를 쓰며 희대의 정권

페이지31 ATM 기기를 산업은행을 통해 구가해보려고 했던 잡것 영역의 인물들은 이제 경제정책 일선에 끼면 안 된다. 그들이 물러나야 나라가 제자리로 간다. 이헌재의 책 제목이 옳긴 하다. 경제는 정치다 는 말,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경제를 쥐는 자가 결국 정치 헤게모니도 장악한다는 뜻인 듯 한데, 그렇지 않다. 지금은 정치 로 경제의 방향을 쥐는 자가 나와야 할 때다. 이 사회를 위한 올바른 책 제목은 정치로 함께 새로운 우리 경제를 이 되어야 한다. 이게 섹시한 맛이 없으면 줄여 서 이러면 된다. 정치는 경제다 로. 보수 입장에서는 악을 쓰며 비판하는 대상일지 모르지만 그나마 합리적으로 정치 는 경제다, 이렇게 읽는 경제분야의 두 사람은 김상익, 전성인 두 사람이다. 워낙 진보라 불리는 쪽에서 이 사람들을 털어 먹어서 그런데, 이 사람들 살펴보면 볼 수록 진보니 보수, 이런 문제와는 다르다. 지독스런 실용주의자들에 속한다. 김상조 교수, 경제개혁연대 소장 1985년 서울대 경제학과 1993년 서울대 경제학박사, 1994년 이후 한성대 경상 학부 교수, 노사정 위원회도 있었고 참여연대도 있엇고 재경부 금융산업발전심의 회 위원도 했고 뭐, 이력은 쭉 그렇다. 장하진도 김상조 이야기를 한다. 재벌 저 격수란 별명도 있고, 하여간에 성향으로 보면 좀 친재벌 이런 계통은 아니다. 그 러나 지금 시급한 문제를 따지는데 있어서는 정확한 각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적도 많이 있긴 하지만. 나는 이 분과는 아무런 개인적 인연이 없다. 그가 경향신문에 남긴 칼럼 가운데 몇 대목을 보자.

페이지32 이념 논쟁을 벗어나 신중하고도 유연한 정책적 접근이 필요한 때다. 다른 한편, 과잉충성의 대표적 사례는 4대강 사업과 감세정책일 것이나, 이는 필 자가 아는 게 없으니, 다른 문제를 보자. 다음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팽당 할 것이 확실한 사람은 누구인가. 경제 쪽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강만수 산은지주 회장과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일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최근 행보는 과잉충성을 넘어 자아실현 단계로 넘어갔다. 금융위 모피아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불신에서 나온 편견이라고 하지 마시라. 과거 경험에서 우러나온 근거 있는 판단이다. 1997년 외환위기가 목전에 닥친 상황에서도, 2000년 정현준 진승현 게이트 등 금감원 임직원이 연루된 비리 사건 이 터졌을 때도, 그리고 2004년 카드대란의 사후처리 과정에서도 모피아는 예외 없이 금융감독기구를 접수하기 위한 공작을 진행했었다. 금감원이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된 지금과 같은 호기를 그냥 흘려 보낼 금융위가 아니다. 물론 금융감독 기구의 조직 형태는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처럼 관료기구 형태로 조직된 나라도 많다. 그러나 우리의 특수한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금융감독 권한을 여타의 정치적 정책적 목적을 위해 오남용하는 관치금융이 판을 치는 우리의 현실에서 금융감독 권한을 관료 조직에 일임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여우(금감원)가 밉다고 늑대(금융위)를 불러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최근 정부는 공정사회 구현을 위해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과세 방안을 검토하겠 다고 밝혔다. 공정거래법 상법 등 실체법이 금지하고 있는 행위로 부당이득을 얻 으면, 과세당국이 세금을 매기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공정사회 등의 거창한 구호 를 내세울 것도 없다. 또다시 버스 떠난 뒤 손 흔드는 우를 범하지 말고, 서둘러 야 한다. 이미 많이 늦었다. 오늘도 전제조건을 미리 밝힌다.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초과이익 공유제를 제안 한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은 필자의 은사다. 따라서 아무리 객관성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오늘 글은 편향적이라고 읽힐 수 있겠다. 어쩔 도리가 없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정운찬 위원장을 정치인으로 바라보고, 더구나 4월 재 보선을 앞둔 현 시점에서 그의 발언을 정치적 맥락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쨌든 필 자에게는 선생님 이기 때문이다. 이번만큼은 원칙대로 하자. 경영진과 감독당국의 도덕적 해이를 근절하지 않고 서는 오늘 겪은 일을 내일 또 반복할 뿐이다. (중략) 이 문제는 대통령만이 풀 수 있다. 저축은행의 근본적 구조조정을 위해, 그리고 국정과제인 서민금융의 활 성화를 위해 공적자금을 쓰는 것이 불가피함을 대통령이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그래야 관료들이 원칙대로 움직인다. 참담하지만, 우리의 현실이다.

페이지33 이 사람의 주장에서 향후 10년 해결해야 할 문제로 꼽은 것이 민주주의와 법치 주의,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그리고 비정규직문제인데, 그의 생각은 종횡무진 한 국경제 에 나름 담겼다고 본다. 우선 해결과제로 꼽은 건 사회 곳곳에 산적해 있 는 경제문제, 중소기업 하도급 문제, 자영업자 문제, 비정규직 문제로 꼽는다. 워 낙 요즘 언론에 쿼터(인용)로 많이 등장하니 그걸 참고하면 좋을 거다. 내가 김 교수를 추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관치 적 접근을 해서는 풀리지 않는다는 것. 관치의 영역에선 정말 자유롭게 정책의 방향을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헌재를 데리고 나타난 안철수에게 실망하는 이유는 너무 손쉽게 가는 길-그 길이 자신의 추구점으로 가는데 편하다는 이유 로-을 선택했다는 것인데, 그것도 실패한 모델을 들고 마치 그것만이 확실한 길 인 것처럼 제시한 대목이 문제였다. 그건 너무 가벼워서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 려울 정도였다. 현 시점에서는 누가 경제를 맡는다 해도 험로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아 예 관치에서 자유롭고, 또 실사구시의 정책을 관치가 아닌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움직여야만 한다. 김 교수는 그 점에선 지금 가장 합당한 부류에 들 어간 인물로 본다. 감히 말하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김상조 교수 등의 시각이 반 드시 필요하다. 물론 선거판에서 그냥 활용하고 버릴 카드 정도로 대해서는 안 된다.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새누리 내의 논쟁을 보면, 그건 흡사 여당발 포퓰리즘 으로 비춰진다. 좋은 일이다. 재벌은 그걸 포퓰리즘이라고 욕하겠지만, 그런 포퓰 리즘이 태동될만큼 이 사회가 지난 시간 막장까지 흘러온 세월이 있다. 이대로! 를 외치기에는 너무 버겁단 소리다. 서로가 토론을 제대로 하려면 제대로 된 격을 갖추고 해야 한다. 그 점에서 진보 로 분류되긴 하지만 재벌-특히 삼성 -을 공격하고, 또 서민경제의 제 문제들을 반듯하게 지적해온 김상조란 인물을 누가 제 자리에 쓰는가에 이번 선거 판에서 는 경제와 관련 당면한 문제를 제대로 보는지 아닌지 잣대가 될 것 같다. 경향신문은 김호기-김상조 투 톱을 내세워 한국경제의 오늘을 보기 위해 여러 사람을 불러들인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 아주 좋은 시도다. 그 속에는 이미 정치 세력에 소속된 많은 이들의 아주 미묘한, 그러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족과 결함, 모순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많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292212585&code=910100 그런데 이 진행도 삐걱거렸다. 김호기 교수가 안철수 진영으로 전격 합류했다. 기 자회견장에서 나타나 버렸다. 김 교수는 사회학을 한 사람이다. 분배를 강조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엄밀히 경제통은 아니다. 참 묘한 모습이었다. 분배를 말하 며 이헌재라는 관치금융의 구 보스와 함께 있는 모습은 흡사 정치란 이런 거야! 를 몸소 보여주는 것 같았다.

페이지34 장하준-이병천 등 신자유주의 토론을 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여전히 노무현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경우도 있고, 학자 적 토론의 틀에서 벗어나 기 쉽지 않은 역할을 부여 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과거의 프레임 속에 있을 경우에는 반성 요구 강도가 너무 모호한 채 들어간다는 것이고 슬그머니 인 정으로 지나가는 예도 생긴다. 대표적인 예가 문재인 캠프에 합류한 이정우 교수 다. 그들은 두 번 실패는 하지 않는다는 걸 변명의 모토로 삼지만, 실패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말할 때는 너무 두루뭉실하다. http://sbscnbc.sbs.co.kr/read.jsp?pmarticleid=10000483037 김상조 교수의 시각이 반영된 경제접근이 지금 무척 필요할 때라 여긴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사적인 추천이다. 이론이 아니라 현장을 말하는 이들이 더 토론의 정점에 있어야만 좋은 방안은 나온다. 그게 실사구시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김 교수를 추천할 수밖에 없고, 이 선거판에서도 경제문제에 있어서는 잣대로 보는 셈이다. 여전히 줄푸세는 타당하다 말하는 새누리의 정책 을 보면서 느낀 아주 심각한 접근오류도 함께 느끼면서 말이다. 그건 민주당도 마찬가지고, 안철수에게선 심한 배신감마저 지금도 느끼고 있을 정도다. 하여간에 인물 빈곤 시대이긴 하지만 그래도 곳곳에 사람들은 있어 즐겁다. 6. 아우를 때는 지났고 이젠 벗길 때 단풍드는 날 /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 放 下 着 ) 제가 키워 온

페이지35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 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자꾸 통합 ( 統 合 )이란 말을 자주 쓴다. 선거철에 흔히 나오는 단어 가운데 하나 이기도 하지만 들으면서 뭔가 자꾸 부족한 감을 느낄 때가 많다.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전제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소통 ( 疏 通 )이란 말이 그냥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자세와 과정 변화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완성되는 것과 마 찬가지로 통합 또한 일정한 조건을 갖추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부족한 1%가 아니라 부족한 99%라는 말이다. 소통( 疏 通 )은 즉답이 아니다. 받아 들이는 열린 자세와 개선을 위한 실행이 수 반되어야 하며, 제3자를 통해 그 과정 변화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소통은 완성된다. (<2012 시대읽기> 본편 1부 1편) 저 단어가 가진 본래의 뜻은 둘 이상의 조직이나 기구 따위를 하나로 합치는 것 이다. 즉, 저 속에는 개인 이 없다. 민중은 조직이 아니며 개개인이 모인 기구도 아니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회통합이니 대통합을 말하는 건 순전히 그 런 조직, 기구를 상징해서 들어가는 것이지, 그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이고 그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는 강한 메시지를 가진다. 솔직히 이 단어는 쓰 면 쓸수록 그 요소 ( 要 素 )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은 소외된다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사용에 몹시 주의를 요한다. 그럼에도 이 단어 외에는 뾰족한 용어를 못 찾아서, 그리고 원체 구태의연하게 이 말을 많이 쓰다 보니 마구잡이로 이 말을 쓴다. 통합의 요소에 속하지 않고 또 조직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저 말에 현혹될 필요가 없다. 다 끼리끼리 모 이자는 말에 불과하니. 오히려 이 한자말 대신 좋은 우리 말이 있다. 아우르다. 여럿을 모아 한 덩어리나 한 판이 되게 하는 것이고, 우리 민속에서 하는 윷놀이 에서 말을 두 개 이상 한데 합치는 행위, 그 모양을 말한다. 우리 습속에 참 맞는 말이다. 거기다가 통합 이 명사인데 비해 아우르다 는 동사라서 듣기에 생동적이 다. 저 여럿 가운데는 대중 속의 개인도 포함될 수 있다. 당연히 아우르지 못할

페이지36 대상도 있을 것이다. 집단이 하나로 모두 합쳐진다는 건 어렵다. 대신 목표를 함 께 아우르는 건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과거-현재-미래 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건 지독스런 제한성이다. 그래서 시간을 아울러서 갈 방법을 찾는 건 일종의 제한성 을 염두에 두고 가야 하는 길이다. 흔히 과거까지 아울러 가는 길을 선택할 경우, 우리는 역사에 대해, 그 속의 인물에 대한 평가를 통해 껴안거나 배척하고 지나 가게 된다. 한국만큼 이 둘 사이의 첨예한 갈등이 있는 곳은 드물지 않겠나 싶은 데, 그 원인을 따라가보면 지난 몇 년 이상하게 더 심화된 것을 느끼게 된다. 그 중에서는 절대 안고 갈 수 없는 요소들이 있을 터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재를 갉아 먹고 미래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아우른다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을 테니까. 이제부터는 그걸 찾는 작업을 더 면밀하게 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02743.html 2008년 6월 책 한 권이 나왔다. <건국 60년의 재인식>(기파랑)은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낸 아주 중요한(?) 기록이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의 뉴 라이트는 반드시 재검증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될 사회현상의 대상이자 또한 사회공작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이들의 주장이 바라는 바를 생각하고 봐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본 과거, 그들이 그 과거를 통해서 무엇을 하자고 덤벼 들었는지 에 관한 문제라서 더욱 그렇다. 저 기사가 해당 인물들의 인용문을 잘 정리해두었다.

페이지37 반공주의, 국가주의, 성장지상주의라는 70~80년대 식 논리를 답습한다. 젊은 사 람도 있는데 말이다. 흥미롭게도 이 사진 속의 등장 인물들에는 여러 단어가 등 장하는데, 하느님의 축복, 미국, 공산주의, 권위주의, 자유민주주의의 기틀 이란 용어들이다. 이들은 학자도 정치인도 그렇다고 사회운동가들도 아니었다. 정체가 무엇이었던가? 바로 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이명박 정권에서 다양하게 모습을 감추며 김일영의 말처럼 권위주의가 전 체주의보다 나았고, 자유민주주의 기틀을 만들었던 그 역사를 잊지 말고 지금도 그 역사의 정신으로 역사교육을 바꾸자고 덤볐다. 안병직의 식민지근대화론 수준 이 아니었다. 얼마나 위세가 대단했던지, 이들 그룹에서 이 정권 정치권으로 들어 간 자들이 누린 행패는 거의 장관급 이상이었다고 한다. 청와대 회의를 마구 쥐 락펴락 하면서 몰고 간 전례도 알려진 바 있다. 이들은 정치세력이 맞았다.

페이지38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다. 사회는 이들의 21세기형 친일행각 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게 아마도 우리 역사의 20세기 과거가 가져다 준 트라우마니까. 아무 리 일본을 좋다고 해도 아래의 칼럼을 쓰는 자가 한국 땅에 한국 국적으로 있다 는 사실을 생각하니 몸서리가 친다. 차라리 일본 국적자라면 이해가 쉬울 수 있 겠다 싶다. (* 어지간하면 이번 연재에서는 인용 링크를 걸지 않으려고 했지만, 솔직히 아래 글을 옮겨올 가치가 없다 여겨 그냥 싣는다.) 일본 우습게 아는 당신, 이걸 읽어보시오! (조갑제)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20937 2012년 오늘도 이들은 몹시 조급하게 21세기 친일 을 퍼트리지 못해 안달한다. 그 거울의 바깥 쪽에는 친북, 종북을 깔고 내부에는 바로 저 2008년 아주 고개 를 뻣뻣하게 드러내고 친일을 외쳤던 이들이다. 이들 간의 이해는 딱 맞아 떨어 졌던 바로 그 지점은 사실 2008년 이전이었지만, 이명박 정권은 그 워밍업 이후 의 무대였던 셈이다. 통합이나 아우르는 일이나 그 기본은 바로 소통 에 그 핵심이 있다. 이 사실 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소통의 핵심은 바로 제3의 거울을 통해 과정의 변화가 평가가 끝났 을 때 진정한 소통의 단계 속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내 관점에서는 현재는 과거나 미래를 보는 일종의 징검다리다. 이 모습에서 멈추 지 못하고 계속 이어지고 또 계속해서 뒤쪽으로 시간을 넘기게 된다. 시간은 우 리가 통합하거나 아우르는 대상 가운데 가장 어려운 과제다. 그래서 갈등과 모순 이 벌어지지만, 이를 소통으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평가 는 필수적이다. 사회적으 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대중뿐이다. 대중만이 역사에 대해 잣대를 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민주공화국의 본질이고,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전 세계의 현 시점 강력한 사회이념의 베이스를 깔고 눌러 앉아 있는 이유다. 바로 주체가 대중이란 것이다. 자! 여러분은 저 세력까지 이 사회가 아우르며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누군가 저런 세력까지 통합의 대상이며-이 말은 바로 그들이 조직이고 기구라는 의미를 뜻하기 때문에-그래서 합쳐서 가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걸 옳다고 동의 하겠는가? 아무리 사회가 다양한 목소리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 두 가지로 압축하면 하나는 과거-현재-미래를 해치게 되는 것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검증된 결과 속에서 절대 아우를 대상, 통합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제3자인 대중의 평가가 나온 경우다. 이들은 비판의 대상도 아니고 심지어 비난의 주체도 되지 못한다. 그냥 쓰레기다.

페이지39 누군가는 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을 것으로 본다. 이들의 정체를 벗기는 일은 지 금 드러난 일들로만 보면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닌 것 같지만, 이게 생각보다 복 잡하다. 감추고자 하는 자들의 입장은 항상 정체성을 변질시키면서도 보호를 위 해 움직이게 되어 있다. 벌써 이들 중의 상당수는 사회 곳곳에 전혀 다른 모습으 로 스며 들고 있고, 그들은 이런 드러난 이력을 감추려 하는 자, 감추지도 않는 자로 나눠진다. 왜 이명박 정권이 벗겨져야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이런 자들 과 너무 깊숙하게 함께 놀았다. 그 말이 의미를 찾아가면 매우 심플한 답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왜색을 우리에게 전염시키기 위해서 움직인 정치세력이었다. 바 이러스였던 셈이다. 스스로 바이러스임을 숨기지도 않는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는 모르지만. 아우르는가, 벗기는가? 선택의 길은 대중 앞에 주어져 있다. 지금은 물론 정치세 력 속에서 이걸 결정해야만 하는 단계에 있다. 7. 속고 또 속는다.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 복효근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페이지40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 중 몇 마리는 저 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 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지금 모두 속고 있다. 안철수가 이헌재를 꺼내자 말자 비판 아닌 비난이 이어진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지지율은 높아졌다는 여론조사가 나온다. 웃기는 일이다. 그 정도로 이 놈의 나라 대중의 인식력이 형편 없다는 걸 확인한다. 1 + 1 =2 라는 산수 수준도 안 된다 는 거다. 나는 무지랭이랍니다 라고 말한다. 그래 맞다. 무지랭이! 굳이 이헌재에 대한 비판은 더 이어가지 않겠다. 오히려 안철수를 본다. 똑같다. 거울이니까. 첫째, 안철수의 성장과정과 현재에 이헌재가 있었다. 이헌재를 꺼낸 건 어제 오 늘 시작된 것이 아니란 건 이헌재의 책 <경제는 정치다>로부터 나온다. 1999년, 바로 IMF 사태와 직접 연동되어 있다. 당시 1997년 즈음까지 안철수연구소는 죽을 쑤고 있었던 건 쉽게 확인된다. 심지어 지분 매각을 하려고 이곳 저곳 기웃 거릴 때였다. 20% 이상 지분의 매각 가격이 6~7억 수준에서 거론될 시절이었는 데, 어느 날부터인가 슬슬 투자도입이 시작된다. 이른바 벤처열풍이다. 그 때, 후 견을 시작한 이가 이헌재였다는 걸 본인 스스로 이야기를 한다. 모피아의 대부가 뒤에서 떡 버티고 섰으니 만사 탄탄대로였다. 이 구조를 탓하는 게 아니다. 어차 피 기업이란 재화를 벌어야 하는 것이니 수단 방법 가릴 처지란 아예 없다는 건 상식이다. 건전한 경쟁이 말이 쉬운 게 아니고, 저렇게 사람 잘 구하는 것도 능력 이다. 그런데 이 구조가 지금 와서 드러나고 지금부터 국가 국민경제 를 가지고 다시 한 판 을 외치는 상태가 되었다. 전 국민을 안철수처럼 키워줄 이헌재? 가 능한가? 지금 두 사람 모두 그렇게 말하면서 희망이 아니라 풍선을 불고 있다. 안철수연구소 12년간 정부사업 721억 수주 http://news.nate.com/view/20121002n17065 둘째, 진심의 정치란 말은 솔직한 것이었다. 안철수의 생각 에 담긴 진심은 많다. 문제는 이 생각의 프레임이 어떤 방향이냐는 것인데, 정승일의 표현대로 안철수 는 리틀 아메리카 를 한국에서 구현하려고 한다. 즉, 한미FTA를 확장하면 확장 했지 축소 할 생각이 아예 없다. 잘 걸러서 받아들일 생각도 없다. (이건 이헌재 식 자유시장주의라는 것이 어떠했는지 생각하면 아주 쉽다.) 그걸 진심이라고 말

페이지41 을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에 열광한다. 한 때 이 땅에 있었던 이른바 미국 병 이 도졌나. 파라다이스가 그곳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아예 이곳을 그런 파 라다이스로 만들어준다고 하니 미쳐 버렸나 싶다. 리틀 아메리카도 아메리카와 똑같이 하려면 차라리 총기 사용을 허가하게 해라. 공약으로 내거는 편이 좋다. 그게 더 바람직한 일이다. 셋째, 이 사람에게서 현장을 감추는 수법을 본다. 처음 이 사람 난 아마추어인 줄 알았다. 정치판에서는 분명 그런데 아니었다. 어딘가 키워진 흔적 마저 보이고 이제는 몹시 교묘한 프레임을 가진 책사( 策 士 ) 수준까지 평가한다. 매번 기가 막 힐 정도로 지지율 등락을 제대로 감안하며 협박 당했다는 금태섭 기자회견-박원 순 회동-5.18 묘역 방문-대선출마기자회견 을 진행한 그 타이밍 정치 는 경탄할 만하다. 일단 지난 일이니 제쳐두자. 9월 19일 출마를 발표하고 여전히 공약이라 부를 정책 내용을 꺼내지 않는 것도 내버려두자. 시간을 끌만한 이유가 있을 테 니까. 늦게 출마 결정했으니 준비도 늦어진다 그래도 내버려둘 밖에. 다 이유는 있을 테니까. 그런데 묘하다. 나는 소설가 조정래가 안철수를 시대의 요청 운운하 며 갑자기 난데 없는 인터뷰가 나올 때 이거 뭐 띄우는 거지 했다. 사전에 박수 를 쳤단 소리다. 이헌재가 책을 준비하고, 중앙일보가 이헌재의 연재를 받아주고 그럴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조정래는 사람 잘못 본 거다. 한강 에서 등장한 그 원통했던 서민들의 이야기가 정작 90년대 후반부터 오늘까지 20여년 동안 어 떻게 변질되고 더 심각해졌는지 알면 이헌재 곁의 안철수, 안철수가 데리고 온 이헌재와 함께 출마 선언장에서 나란히 마주보며 인사 못한다. 도대체 그런 정책 을 펴겠다는 사람의 허언을 진심으로 믿게 한 건 어떤 수법인가. 사람 잘못 봤다. 그리고 저런 엉터리 수준의 관념을 가진 사람을-철학이 아니다-진보의 진영의 핵심 일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엉터리인가. 안철수가 MB가 고른- 엄밀히 MB를 만든 세력들이겠지만-제2의 노무현이라는 세간의 이야기가 사실이 건 아니건 간에 지금 흘러가는 방향이 그 쪽이라면 그건 명백히 사실이 된다. 자 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국민 을 파는 무서운 자 하나가 출현했다. 기막히 게도 이 사람은 아주 지독스런 이미지 정치의 귀재다. 사람들 홀리는 재주가 상

페이지42 당하다. 이헌재의 등장을 수평적 리더십 이라고 포장한다. 수평? 아니다. 병풍이 지! 웃긴다. 그러나 꼬리 열 개 단 여우라도 호랑이가 될 수는 없다. 홀리는 방향 이 대중을 죽어라 모는 구석인데, 그거 정말 달갑지 않다. 변명도 안 한다. 슬그 머니 자꾸 어디론가 기어간다. 참 별나다. 이렇게 보니 문재인이 다시 보인다. 문재인이 칭찬하는 김현종이란 사람에 대해 생각하자. 한미FTA를 가장 먼저 입 안한 외교통상 관료가 김현종이다. 물론 노무현 정권 시절이니 관료들에 익숙하 지 않았던 문재인의 입에서 이 사람 똑똑하다 소리 나올 수 있다. 전문성이 가미 된 관료는 아주 사람을 잘 홀린다. 능력 있게 보인다. 그런데 누굴 위해 그 재주 를 쓴 것이었지? 한국을 위해, 노무현을 위해, 국민을 위해? 아니다. 드러난 일들 이 너무 많다. 그는 미국을 위해 일했고, 미국의 이익 이 곧 한국의 이익 이라는 리틀 아메리카가 아니라 아메리카 합중국의 한 주( 州 )인 대한민국을 그린 자이다. 그 사람의 입에서 무슨 감 나오고 떡 나오는 얘기가 나와도 그에 우리 대한민국 은 없다. 그런데도 그 틀에 잡혀 있다. 그래서 문재인은 여전히 친 한미FTA 친 노 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전문성을 가미한 관료집단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고 하 는 거다. 통제 당하기 좋은 사람, 이미 당한 적도 있는 사람, 그런데도 당한 걸 인정하지 않는 사람, 그럼에도 그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으로 불린다. 이 말은 문 재인 입장에서는 안철수가 이헌재를 병풍으로 세웠건 아니건 비판하지 못한단 의 미와 통한다. 왜? 똑같이 한국을 리틀 아메리카 만들자고 하는 자들이니까. 관치 금융을 이 땅에 정착시킨 사람을 욕하지만 이헌재는 재경부로 농락했고 문재인은 외교부로 농락 당했다. 그래도 좋다고 박수 치고, 잘 했다고 입 놀린다. 참 웃기 는 시대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있다. 워낙 거세게 진보진영 사이에서 한미FTA 반대를 외치 고 어차피 야당 세력을 소위 빅 텐트 로 끌어들여야 하니 주섬주섬 뭉치는 과정 에서 반 한미FTA 세력 도 끌어 안게 되면서 만들어진 게 바로 민주통합당이다. 그 판에서 문재인은 친 한마FTA만 주장해서는 안 되는 구도다. 해서, 만들어진 것이 한미FTA의 단계별 폐지가 공약이다. 단계? 무슨 단계? 이 말처럼 멍청한 말이 없다. 김진표처럼, 문재인처럼, 그리고 다수의 친 한미FTA론자처럼 노무현 의 결정은 무조건 옳았다, 이유 있었다고 하는 사람들의 머리로 내놓은 꼼수가 바로 저거다. 리틀 아메리카로 가는 방향은 타당했지만 이명박의 한미FTA는 잘 못된 것이다 라는 논리. 미친 입이다. 아주 얄팍한 입놀림에 불과하다. 그래서 문 재인도 여전히 김현종을 참 뛰어난 자라고 입에 닳도록 칭찬하는지 모른다. 말과 글이 같이 가지 않는다. 이헌재는 아예 자기가 뭐 잘못했냐는 식으로 장황한 변 명의 글을 경제는 정치다 등 2권의 책으로 (하나는 중앙일보 연재물이었지만) 내놓았다. 이것 참! 한미FTA에 있어 새누리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박근혜의 공약에서는 아예 한미FTA 단계별 폐지 이런 말도 없다. 정했으니 가야 한다는 원칙은 마치

페이지43 로봇을 보는 것 같다.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자의 원칙, 그 중에서도 약속했으니 해야 하고, 그게 국가간 약속이니 해야 한다는 아주 아마추어 같은 마음이 한미 FTA 국회비준까지 이르게 했다. 그 중심에 박근혜가 있다는 건 선명하게 드러난 다. 그래서 새누리를 보면, 박근혜를 보면 일단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이명박 정권에서 친이계라는 자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숨이 턱턱 막히지만, 친박 이라 해서 별 것도 아니다. 그들도 그 나물에 그 밥이다. 그나마 뭔가 달라진 모 습 보일까 해서 보긴 본다. 여전히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자기 목에 칼을 대겠다고 나선 저 한미FTA를 좋다고 박수 치는 사람들이 도대체 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싶어 주변을 많이 살폈다. 그랬더 니 한 가지 우스운 현상이 나왔다. 어차피 그렇게 가야 우리가 사는 거잖아! 그 렇다. 패배주의였다. 그것 외엔 딴 길이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 주입된 패배주 의였다. 그리고 다른 것도 있었다. 한국 입장에선 개방해야 뭐라도 해 먹고 살 지! 아! 여기서는 다시 수출입국 이 보였다. 맞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빠졌다. 저것 우리 먹고 살아라 하는 게 아니다. 상대는 가만 히 손 놓고 있나? 우리 손에 든 작은 빵마저 다 빼앗아 간다. 그게 금융경제다. 그게 막장 금융자본주의라는 거다. 그건 알고나 말하는 건가? 열심히 머리 몸 놀 려 일하는 용역 제공 일을 천만번 굴러도 금융자본주의는 손가락 까딱 한 번에 그 돈의 가치를 뚝 떨어뜨린다. 윤택이 좀 난다 싶으면 슬그머니 퍽퍽하게 만든 다. 끝까지 그 트랜드를 유지한다. 뒤돌아갈 수도 없게 약 을 먹인다. 소비라는 약, 경쟁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약, 사다리는 있다는 약, 1%는 당신 것이 될 수 있다는 마케팅의 약을 준다. 참 쉽다. 이걸 뭐라 부르지? 계급 사다리? 아니면 계급 바로 그 자체? 그런 게 개방이란 이름으로 깊숙하게 우리 곁에 자리 잡는다. 벌써 집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여기도 미친 인식력의 단순성이 나온다. 아직도 요즘 경제를 열심히 물건 만들고 수출하고 이윤을 얻고 하는 그런 경제학의 제 1 기초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 딱 그 수준에서 저 판을 보는 바로 그 머리. 머리가 아니라 대가리라 해야 한다. 먹고 살려고 창씨개명도 마다 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왜정 때도 있었다. 어느 시 절에도 있었다. 그러니 탓을 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그런데 말이다. 차라리 내 가 먹고 살 수 있다면 좋다. 아니다. 여기는 오로지 대중 다수에게 부과된 수탈 ( 收 奪 )만 남아 있다. 그게 막장 금융자본주의의 식민지적 수법이다. 여전히 그걸 좋아한다면, 그럼 그 길로 가면 된다. 뭐, 한국 국적이 별난 거냐. 리틀 아메리카 의 국적 따위는 별로 값어치가 없다. 짝퉁에 불과한 것을! 아! 이 마음도 패배주 의다. 절이 싫다고 중이 떠나야 하는 법이 어디 있나. 중이 그 절을 바꾸면 되지. 이쯤 되어야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게 아닌가!

페이지44 8. 진짜 반성은 진솔하지도 진지하지도 않다. The Road Not Taken Robert Lee Frost(1874~1963)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가지 않은 길/ 피천득 번역

페이지45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가지 않은 길 / 김종길 번역 노랗게 물든 숲 속 두 갈래 길을 다 가 보지 못할 일이 서운하여서, 풀섶 속에 길이 구부러지는, 눈 닿는 데까지 오래오래 우두커니 선 채로 바라보았네. 그리곤 나는 갔네, 똑같이 좋고,

페이지46 사람이 밟지 않고 풀이 우거져 더 나을지도 모르는 다른 길을, 사람이 별로 다니쟎기론 두 길은 실상 거의 같았네. 그리고 두 길은 다 그날 아침 밟히쟎은 가랑잎에 덮혀 있었네. 아 첫째 길은 훗날 가리고 하고! 길은 길로 이어짐을 알았기에 돌아오진 못하리라 생각했건만. 세월이 오래오래 지난 뒤에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리. 두 길이 숲 속에 갈라져 있어 사람이 덜 다닌 길을 갔더니 그 때문에 이렇게도 달라졌다고. 걸어 보지 못한 길 / 정현종 번역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페이지47 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고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 먼저 길은 한번 가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라고. 매일 선택이란 걸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실수가 없을 수는 없다. 무엇이건 다 실 수는 하게 되어 있다. 선택이 가진 다면성은 모든 걸 실수 없도록 만들 수만은 없는 아주 골치아픈 구도를 만든다. 사사건건의 대상을 보는 각도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여기는 둥근데 저긴 각진 것도 있으니. 그래서 공감을 말한다. 평가의 공감은 기계적 수치만으로 나타나진 않지만 그 뚜렷한 흐름은 보 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성인의 경우, 후손이라 할 수 있는 아이들의 학생 시절 교과서를 귀하게 여긴다. 그 속에서 일정한 공감은 형성된다고 믿기에.(앞서 2004년에야 없어진 악법도 법이다 의 경우를 봤지만 어릴 적 생각은 쉽게 고착 화된다.) 요즘은 그마저도 많이 흔들린다. 그렇게 나이 먹어가면서도 공감 때문에 생기는 해프닝은 없을까? 많다. 너무 많다. 반성할 일이 안 생길까? 많다. 너무 많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명백한 잘못과 부족함 이 드러난 사안일 경우에는 어떤 처리방법이 있느냐는 거다. 잘못, 부족함. 이 용어는 주체적이기도 객체적이기도 하다. 자기가 느끼는 것, 그 래서 돌이켜 보고 고치려고 하는 것이 반성이고 타인이 느껴서 촉구하는 건 반성 요구(요청)이 되는 거니까. 딱 거기서 멈추기도 한다. 반성은 하는데 고치지는 않 는 것.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라는 걸 했지만 그건 반성 이 아니다. 사과 ( 謝 過 )는 잘못했다 하고 용서를 비는 거다. 한 걸음 더 나간다. 용서해주지 않으면? 거듭 사과를 요구하다 보면, 요구하는 측도 피로하고 요구를 받는 측도 괴롭다. 이걸 사과피로증후군 ( 謝 過 疲 勞 症 候 群 )으로 부를 수도 있다. 끝내 우기면 뭐 할 말은 없는 거다.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그 다음 문제이긴 하다. 그렇다고 잘못이 나 부족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래! 뭐, 반성이란 게 진솔( 眞 率 ; 진실, 솔직)하지 않아도 진지( 眞 摯 ; 참됨)함이

페이지48 없어도 무슨 관계가 있겠나! 어차피 정치라는 게 처음부터 그런 거 없어도 되는 그냥 거대한 서커스 판의 쇼 같은 것인데! 이렇게 말해도 틀린 건 아니다. 반성->사과->용서 는 한 묶음으로 간다. 이 경로를 모두 다 거치지 않으면 반성에 필요한 게 진실도 아니란 이야기다. 겉으 로만 한들 그게 뭐 어렵지도 않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는 것도 쉬운 게 아니다. 그건 반성->사과->용서->용서 못함 의 단계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반성한다고 모두 용서되는 건 아니다. 사실 이렇게 깊숙하게 따져보는 것도 귀찮고 피곤한 일이다. 애써 그 사람 혹은 대상이 반성하지 않겠다는데, 죽어도 자기 주장이 옳다는데 뭐 시시콜콜 따지는 가 이런 생각하기 쉽다. 아주 쉽다. 그런데 굵직한 현안들 가운데서는 그렇게 하 지 못해 오늘 우리 사회의 두통거리가 되어버린, 아니 직접적으로 우리의 생활을 좌우하는 사회여건이 만들어져 버린 예는 흔하다. 반성과 반성촉구의 무관심 이 초래한 사회의 정체, 퇴화 현상이다. 왜정에서 해방된 이후 이 땅의 역사에서 가장 최악의 패착은 바로 친일파를 청산 하지 못한 것을 꼽는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그들은 절대 반성하지 않았다. 그 래서 청산되는 절차에 이르기도 전에 반성->사과->용서->책임 의 단계를 밟지 도 않았으니 지금도 저렇게 후안무치( 厚 顔 無 恥 )를 이어가는 거다. 그렇게 여건을 만들어준 자가 바로 이승만이다. 그가 저지른 숱한 만행은 차치하고 바로 이 대 목에서 그는 반성해야만 하지만, 부정선거로 그냥 망명지에서 죽고 말았고, 이제 와서 그를 못 살려서 안달하는 극우-사실은 왜색보수우익이지만-의 이름으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하나가 제기된다. 이승만이 이 땅(대중)에 반성하고 사과할 일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지는가?

페이지49 바로 이 점을 이승만 띄우기에 나선 뉴라이트 등은 해결하지 못한다. 그들이 거 기까지 책임질 일은 아니란 거다. 이승만이 4명의 부통령과 알력을 거친 끝에 마 침내는 4번째 부통령이었던 장면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사실까지 이르면, 도대체 이 정도 사건을 그냥 묻고 지나가는 게 한심스럽고, 심지어 왜색친일의 대명사인 김성수 부통령과도 알력을 일으켰다는 사실까지 이르면 무조건 건국의 아버지 운 운은 못하는 거다. 참 무책임한 짓이다. 왜 역사의 평가에 공과 ( 功 過 )라는 냉혹한 잣대가 붙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평가가 진행이 되면 반드시 역사라는 테이블에 올라오는 사실을 있는 그 대로 놓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5.16의 어쩔 수 없었음에 공감 하는 바가 없지 않지만 유신의 그 지독스런 욕망에는 한숨을 푹푹 내쉬게 된다. 근현대사의 경제적 초석을 만들었단 점에서는 동의하는 바 있으나 그로 인해 너 무도 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에 만연했던 부정부패와 이승만 이후 친일의 세력을 제거하기는커녕 그들과 같은 살 길을 모색했던 그 바탕도 인정하지 않는다. 박정 희에 대해서는 반성의 주체가 누가 되어야 하는가, 이 문제가 박근혜에게까지 내 려온 것은 연좌제가 아니다. 개인이자 정치인 박근혜가 보는 바로 그 시각을 원 하는 것이다. 그녀가 지금까지 밝힌 건 전혀 잘못한 바가 없다고 했기에 반성 은 없다고 본 것이었고 그래서 2012.9.24 역사인식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역사 이야기의 사과를 했다. 당연히 그 이후 사과->용서 로 이어지는 길을 가지 못한 상태에는 반성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피로하더라도 사과증후군에 걸리는 한이 있어도 계속 그 후속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문재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앞서 김현종 이야기를 했지만 문재인은 어쩔 수 없 이 노무현의 부채를 안고 있는 사람이다. 박근혜에 비할 바 아니다. 정권의 핵심 으로 기능했고, 그 결정의 영역에 있었던 사람에게 한미FTA에 재벌에 농락당한 사건, 양극화를 외면해버린 그 참혹한 정책노선의 견지 등에 대한 반성을 묻는 것이다. 이걸 모른 척하면 똑 같은 일이 벌어진다. 반성하지 않겠다? 즉, 언제든 지 그 길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음을 말한다. 반복이 벌어진다는 예측은 단순히 근 거 없는 예상이 아닌 셈이다. 지금 무슨 놈의 정책을 내놓아도 마찬가지다. 안철수. 난 이 인물에 대해선 이제 좀 알 것도 같다. 과거에 정치판에 있지 않았 으니 그의 말대로 그만큼 빚진 것도 없다 는 이야기인데, 과연 그럴까? 아니다. 지금부터 모조리 사람을 빌려와야 한다. 박선숙은 DJ사람, 이헌재는 DJ, 노무현 때 사람 뭐 이런 식이다. 빌려오면 무엇을 빌려오는지를 말해야 한다. 인재풀이 약한 나라다. 특별할 것이 사실 없이 여기 저기, 새누리의 누가 표현하듯 연어 가 된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 말할 자격 여의도 판의 누구도 없다. 철새야 때가 되면 날아온다는 식이니 그걸 탓하지도 않는다. 핵심은 바로 정책에 있다. 가는 방향에 대해서는 말해야 한다. 지금 경제, 복지가 1순위로 올라오지만 통일외교 안보도 곧 그 입장을 밝혀야 한다. 사람을 빌려오는 태도로만 본다면-이헌재에 서 보여지듯-그는 수평적 협의체 라는 걸로 포장하려고 하는 모양인 듯한데, 별 로 달갑지 않은 접근법이다. 모두 다 가능하다는 실용이니 통합이니 통섭은 모든

페이지50 걸 엉망으로 만들 가능성, 개연성이 아주 높은 비( 非 ) 실용과 직접 강하게 통한 다. 반성을 말한다. 그건 책임에 대한 부분, 책임정치의 의미를 새겨보란 뜻이고, 지 켜보는 이들에게 반성과 사과, 그리고 용서받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맡 겨야 한다는 의미다. 이게 싫으면 민주주의에서 정치를 하는 게 아니다. 그냥 독 선으로 가도 된다. 그럼 독선적이라는 딱지가 붙게 된다. 그 시작이 바로 저 단어 반성 에 걸리는데, 뭐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솔직해질 필요도 진지하게 참된 말 을 늘어놓지 않아도 된다. 그냥 반성한다고 말만 해도 된다. 그런 이미지만 형성 해도 된다. 그러나 용서는 대중이 하는 거다. 용서까지 염두에 두지 않은 사과라 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남겼는지, 이명박 정권이 너무 잘 보여준다. 이들은 단 한 번도 반성한 적이 없는 집단이기에. 그래서 오히려 더 좋은 범례가 될 것이다. 참 쉽다. 시간이 흘러서도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일이 벌어지면 참 못난 백성들이라 고 욕해줄 거다. 내내. 9. Happyness 마른 장작 / 김용택 비 올랑가 비 오고 나먼 단풍은 더 고울 턴디 산은 내 맘같이 바작바작 달아오를 턴디 큰일났네 내 맘 같아서는 시방 차라리 얼릉 잎 다 져부렀으먼 꼭 좋것는디 그래야 네 맘도 내 맘도 진정될 턴디 시방 저 단풍 보고는 가만히는 못 있것는디 아, 이 맘이 시방 내 맘이 아니여! 시방 이 맘이 내 맘이 아니랑게! 거시기 뭐시냐 저 단풍나무 아래 나도 오만 가지 색으로 물들어갖고는 그리갖고는 그냥 뭐시냐 거시기 그리갖고는 그냥 확 타불고 싶당게 너를 생각하는 내 맘은 시방 짧은 가을빛에 바짝 마른 장작개비 같당게

페이지51 나는 시방 바짝 마른 장작이여! 장작 <행복을 찾아서>(The pursuit of Happyness). 2006년 가브리엘레 무치노 감독 작품,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였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건 노숙자 이야기가 아니다. 어떻게 계급사다리의 바닥에 떨어져서(세금도 못내고 자동차도 압류당하고 주머 니에 21달러 33센트뿐이었던 주인공이) 기어 올라갔는가를 올라갔느냐 보여주는 는 성공담이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 로 들어갔던 미국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특히 성공을 한 영역이 주식중개 인이라는 사실에서 주식자본주의, 막장 금융자본주의를 선전하기 위한 영화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관람후기도 있다. 서류가방을 든 록키 (뉴욕타임즈)의 영화평이 맞다. 영어 제목이 준 묘한 신조어 Happyness가 (원래 철자는 Happiness) 무슨 의 미를 담고 있는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주인공의 아들 크리스토퍼가 다니는 보육원 바깥벽에 적힌 Happyness를 철자가 틀렸다고 말해보지만 중국인 은 알아 듣지 못한다. 이걸 행복은 자신만의 느낌, 남들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자 신에게 의미 있는 감정을 말한다 해석해준 사람도 있다. 별로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름 영화 후기는 생각할 수 있으니까 상관이 없다. 경제와 복지.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빅 이슈로 나온 분야다. 복지도 경제의 한 영역이고 여기서 경제라는 건 성장이나 성장동력을 유지하는 관점의 경제정책을 말한다고 보여진 다. 접근하는 방식은 각각 다르다. 대세는 일단 세 가지 관점에서는 비슷하다. 하 나는 현재의 성장일변도 정책이 가진 모순과 갈등은 해소 되어야 한다는 것. 다 른 하나는 이를 위해서는 적정 수준의 복지정책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를 조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책방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페이지52 이 정도 수준까지만 오는 것도 참 대단한 일이다. 이 공감대가 퍼지는 건 그리 쉬운 건 아니었지만 워낙 지난 15년여 사람들이 악이 받친 구석도 있다. 그러나 이 방향이 전부는 아니다. 갈등은 여전히 구조화되어 있고 지금껏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이를 테면 막장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이 한국 땅에 이미 상륙했고, 더 위세를 떨 칠 거라는 사실부터 보자. 김대중 정권 이후 지금까지 국가부채는 끊임없이 가파 른 상승세를 기록 중에 있다. 그 중 국채부담이 가장 많았던 건 바로 환율방어에 쓰인 돈이라는 건 쉽게 기록으로 확인된다. 왜 이 부분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 나가는 것일까? 체감하는 이들도 많은데, 정작 체감은 직접적이라기 보다는 간접 적인 사람들이 많아서 그럴까? 우리가 주도하지 않는 게임룰이란 생각 때문에 그 럴까? 하나의 국가가 국가 공공재라고 할 수 있는 공기업을 민영화시킨다는 의미도 마 찬가지다. 산업은행이 저토록 한국의 제조와 고급기술, 부동산, 금융에 이르기까 지 모두 지분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정부재원 즉, 세금이 투입되었기에 그렇다. 쉽게 말해서 국민의 돈으로 구조조정을 했다는 말이다. 그런 산업은행을 한 방에 민영화하겠다고 덤벼들었던 사람들은 어떤 정신일까? 마찬가지다. 정부재원-세 금과 빚이다-을 들여서 금융기관에 마구잡이로 정책자금을 지원해준 바로 그 자 리에 정작 국민은 없었다. 저축은행 사태가 벌어졌지만 어느 누구도 저축은행 운 영진의 도덕적 법률적 잘못을 말하지만 국가가 저지른 범죄 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게 일부 금융감독기관의 판단오류 수준은 아니지 않는가. 이처럼 국가경제는 감추어진 내용이 아주 많다. 그 판의 국가범죄 를 말해야 하는데 이걸 덮어주는 건 바로 사법부, 입법부다. 그들끼리 협력을 한다. 대중은 상관하지 않는다. 이들을 견제하는 곳으로 불리는 게 바로 언론계다. 언론을 제4 부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언론은 이미 제4부 이름을 붙이기에 는 너무 퇴락했다. 이런 걸 대중이 모두 아는 게 탐탁지 않은 게 위정자들이다. 무지 속에서 대중이 백날 경제 를 말해도 그건 국가경제의 현실이 아니고 개인 경제 에 불과하다. 경제가 좋아야 내 주식도 오를 텐데, 월급 제대로 받을 텐데 뭐 그 수준이다. 간단하다. 개미와 호랑이가 한 번 구르는 차이처럼 그렇게 구른 다 는 말은 같아도 동작이 다르다. 불공정, 불공평, 불평등한 경제 가 존재한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국가가 대중으로부터 거둬들인 세수( 稅 收 )를 기반으로 하는 것인데, 정작 대중은 여기에 주인은 아니다. 사실 공물( 貢 物 )인 셈이다. 안철수 등장 이후에 흥미롭게 본 것이 이 대목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제시 되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새로운 경제 성장동력을 말하면서 <혁신( 革 新 )>을 꺼내 는 건 아주 전형적인 초보 선동에 해당한다. 이 용어, 좀 구태의연하다. 이건 김 대중 정권의 벤처열풍을 교묘하게 포장한 것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술혁 신만이 살 길이라는 구호이기도 하고, 좀 더 쉽게 보면 그가 몸담았던 융합기술

페이지53 이란 영역의 예처럼 다양한 사회요소가 결합된 통섭 의 범주를 만들어 새 에너지 를 찾자는 말이다. 마치 화석 에너지가 고갈되어가니 대체 에너지로 풍력, 태양열, 조력 등을 찾아보자는 것과 비슷하다. 듣기엔 참 좋다. 마치 그 유명한 <시대정 신> 3편의 그 광고물처럼 말이다. 그러나 내용이 좀 다르다. 혁신의 가장 기본은 이 사회의 지배적 에너지가 몰려 있는 곳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곳이 어딘가? 바로 정부 다. 혁신의 제 1 대상은 입법, 사법, 행정이다. 그렇다. 곧 국가 전체라 할 수 있는 주축들이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 되는 자리다. 그러나 입법부와 사법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행정부에 대한 혁신 프로그램도 없는 상태에서 입법, 사업을 건드릴 재간은 없다. 지금 기술, 기업, 체질 혁신을 말하지만 그건 대체로 경제영역 가운데서도 기업 에 포커스를 둔 것 에 불과하다. 방향 자체가 너무 말단으로 내려와 있다. 그게 안철수의 한계일지 모르겠고, 이 점에서는 박근혜보다 오히려 문재인이 더 나은 인지를 가졌을 거란 생각도 든다. 노무현 정권 시절 관료에 의해 된통 당해본 적이 있으니까.(그 자신 이 아직도 당했다 생각 못하면 이건 말하나마나다.) 그 정도 가지고는 절대 혁 신 못한다. 한국 사회가 대중의 욕망으로만 굴러가는 곳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 아야 하는데, 그 바탕조차 없단 소리니까. 대중 개인의 행복지수는 국가경제의 수치와 전혀 동일하지 않다. 개인소득 1만불 이면 어떻고 5만불이면 어떤가. 그런데 안철수는 벌써 그 소득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는 앞서 그런 모습을 봤다. 하나의 국가 속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한다. 국민소득 몇 만 불이 선진국의 지표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국가의 혁신이 국민에게 어떤 행복을 줄 수 있을만한 모습을 보이는가에 달린 것이지. 역대 정권 어디에서도 오히려 정부가 왜 필요한가, 이런 소리 안 들은 곳이 없다. 정부의 효용가치가 대체로 통제적 역량에만 집중되어 있고 그 방향이 대중과는 한참 먼 생각들로 채워져 있다는 인식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랬기 에 지적되는 이야기다. 이걸 노력했다 수준에서 말하고 만다. 참 쉽다. 행복의 혁신. 대중은 이제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경제와 복지를 말하기 보다는 저 영역 속 에서 국가, 정권이 얼마나 엉뚱한 짓을 하는지를 더 살펴볼 역량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가지면 무엇 하나? 이명박 정권을 보면서 느낀 소회는 보긴 봤는데 정작 고칠 방법은 없었다는 패배주의 아닌가. 4.11 총선을 치렀고 정당정치는 저렇게 다시 여당 야당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중 누가 과연 이 정권의 엉뚱한 짓을 말 리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없었다. 몇 가지 사건들은 있었지만 그건 정권말기에 나오는 갈등 수준이었고. 그러고 보면 선거로 선출된 정권이란 건 참으로 무소불위하다. (노무현처럼 탄핵 소추를 당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한 번 뽑혔다는 걸로 5년을 제왕적인 권력

페이지54 을 휘두른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방향, 잘못 되어도 대중은 개인이 이를 막거나 혹은 저항할 방법이 너무 적다. 이래서 인생을 패배주의적 상황의 연속이라 부르 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이게 현실이다. 이 속에 행복을 말한다. 저기 영화의 주인공처럼 주식중개사를 해서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주식판에 갔다가 쪽박 찬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인가. 사회는 실패한 자들의 이야기 보다는 성공한 자들을 보여주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라고 말한 다. 동자동 쪽방의 사람들에게 행복을 물어보면 어떤 이야기를 할까 생각한다. 마 찬가지다. 행복은 결국 자기 마음 속에 있으니까. 그렇지만 경제와 복지를 통해서 행복을 구할 생각은 하지 말기를. 이건 행복이 가진 감성적인 판단의 영역과는 다르게 아주 건조하고 기계적인 정책과 정치가 연동되어 있다. 이 말은 정치에서 행복을 구하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와 같다. 어떤 정치인도 당신에게 행복을 주지 는 못한다. 자칫 분노와 슬픔을 줄 뿐이지. 그럼에도 어떤 정치는 당신에게 행복 의 바탕은 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정치를 보는 것이지 정치인을 보는 건 아니다. 사람이 정치를 한다고? 그런 거짓말을 하지 말기를. 대한민국의 입법, 사법, 행정의 꼭대기에서 관여하고, 또 한 번이라고 관여했던 사람들은 저 시스템 에 절대 대중을 끼워줄 생각이란 눈곱만큼도 없다. 그냥 대중은 늘 먹이감, 명분, 그에 더하여 위하여 의 한 구호 대상물일 뿐이다. 정작 그들은 이 사회에서 대중 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 글자를 다시 곱씹는다. Happyness 아마 행복이란 단어는 즐거움이 쭉 이어져야만 가능하다는 것이겠지. 그런 일이 있나? 없다. 그래서 잠깐의 행복 은 있을지 모르나 내내 행복한 경우는 없단 소리가 되지 않겠나 싶기도 하고. 이 패배주의를 극복해야 하는데 말이다. 10. 투표의 이유 태백산행 / 정희성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 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입곱 살이야 열아홉 살이야 구시렁 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페이지55 칠십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때다 좋을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민주주의에서는 투표할 일이 제법 많다. 표( 票 )라는 게 종이 한 장이지만-방법 에 따라서는 한 장이 아닐 수도 있다-그게 바로 자신의 의사를 나타내는 것이니 그 종이가 나 를 대리하는 셈이다. 거수( 擧 手 )를 하는 경우도 있고 요즘 유행하 는 방청객 투표처럼 버튼을 누를 수도 있지만 일단 그 행위는 자신의 의사를 표 시하는 일이고 민주주의에서는 이걸 강제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물론 경우에 따 라 강제투표가 벌어지기도 한다. 회사에서 의사결정을 하자고 하는데, 중간은 없 다고 보스가 선언하면, 그게 곧 규칙이 되니까. 그걸 민주주의에 반한다고 말하기 도 애매하다. 일단 투표는 이유가 있다. 찬반이나 혹은 대표를 뽑거나 하는 것인데 이걸 종합 하면 가부 ( 可 否, 찬반)과 그 사람 으로 요약된다. 후자의 경우는 어디에 소속된 그 사람 으로 가게 되는데, 바로 그 어디 라는 말과 그 사람 이 종종 같은 평가를 받기가 어려워서 고민을 하게 되기도 한다. 사람은 좋은데, 거기는 아니야 라든가 아니면 거기는 좋은데 사람은 아니야 같은 식으로 말한다. 대체로 전자가 많이 드러나는 편이다. 우리는 정치인을 뽑을 때, 저런 투표를 할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페이지56 이명박 정권의 탄생은 세 가지 중요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진보정권이라 는-사실 전혀 진보와는 무관했지만-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대중이 아주 심한 피 로감을 느꼈다. 그건 일종의 배신감이기도 했고, 경제적으로 시장만능주의가 가져 온 불안정감에다 그 시스템 속에서 허우적대며 더 자극적인 성장을 요구했던 이 들의 마음까지 합쳐져 정권피로감은 극도로 치달았다. 둘째, 새로움에 대한 요구 와 그 욕망의 충족 카드를 이명박이 꺼냈다. 토건국가를 만든다고 욕을 먹었지만 4대강 사업이 아닌 대운하는 재개발 열풍과 맞물려 묘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 렇게라도 하면 뭔가 그 이전과는 다른-사실은 당시 기준 현재와는 달라진-패러 다임이 등장할 것 같았다. 그에 대한 검토도 제대로 해보지 않았다. 그냥 방향이 좋으니 라는 말로 공감대가 확산되었다. 셋째, 좋고 나쁜, 그러니까 가부( 可 否 )의 기준이 너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이걸 호불호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지만, 보수언 론들이 물고 늘어진 여러 테제(이슈)가 대중에게 마치 기준을 정하는데 있어서는 이걸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는 인식을 각인시켜 버렸다. 그래서 선거 전에 이미 선거가 끝나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것은 열린우리당의 해체 이후 급속하게 드 러난 인식확산이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하게 봐야 할 대목이 바로 방향 이란 단어다. 혹자는 대선 후보나 그 당파 혹은 세력이 정책을 꺼냄에 있어 세세한 것을 내놓는 것보다는 방향 에 주목한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이 함정은 이명박 정권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듯 이 그걸 만드는 건 철저한 이슈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역 시 총론이 아닌 각론이 관건이 되었다. 심지어 공약( 公 約 )은 공약( 空 約 )이다, 누가 선거 때 하는 말을 참말로 듣나! 라는 유명한 정치적 발언처럼 방향 으로 부르는이슈화의 한계 파악을 대중은 전혀 하지 못했다는 걸로 본다. 대중은 개인 적으로는 똑똑할지 몰라도 집단으로는 우매하다는 말은 아마 요즘 집단지성 을 말하는 시절에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일지 모르지만 사실일 때도 있다. 그런 적이 더 많았다. 진짜 집단지성이 되기 위해서는 방향 이 옳은지 아닌지 정도는 알아 야만 한다. 그로부터 출발되어야 하지만 다른 곳을 만지작대는 집단지성은 중우 화의 지름길로 간다. 왜 투표를 하는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당파)을 찍으려고? 내가 좋아하는 정책을 고르려고? 내 의사를 표현하려고? 잠시 생각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최선의 정치인을 뽑는 게 아니라 최악의 정치인을 안 뽑는 것, 최선의 정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최악의 정치를 배척하는 것 최선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키신저와 비서실장 이야기는 많이 회자된 이야기다. 외교정책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자 키신저는 물었다. 이것이 당신의 최선인가? 라고. 불만족할 거라는 걱정에 비서실장은 다시 보고서를 검토하겠다 하고 2주 후에 다시 제출했다. 키신저는 그 보고서를 보지도 않고 1주일 동안 보관하고서

페이지57 이것이 최선의 결과가 확실한가? 라는 쪽지를 붙여 돌려 보냈다. 비서실장은 보 고서를 다시 고쳐 들고 갔고 이렇게 말했다. 장관님, 이것이 최선의 결과입니다. 그제서야 키신저는 읽어 보겠소 라고 말했다. 최선을 생각하지만 최선이 없을 때, 그럴 때는 차선, 차차선을 말한다. 그러나 이 또한 타당성을 잃게 마련인 것이 차선도 차차선도 최선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보 니 불만투성이는 고스란히 남는다. 그렇다면 마음을 달리 먹으면 어떨까? 바로 최악을 방지하는 것, 선택하지 않는 것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 최선을 찾을 수밖에는 없는 법이지만, 종종 선택이란 최선만 우리 앞에 주는 건 아니다. 그럴 경우에도 반드시 방향 은 필수적인 관찰대상이다.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언뜻 보기에 좋게 보이는 걸 자꾸 포장하면 그에 홀딱 넘어간다는 것이다. 선거 판이 서커스판이란 건 누구나 안다. 거기는 쇼가 가진 모든 요소가 결집된다. 기 획도 공연도 관객동원도 그리고 클라이막스도. 아직 10월은 이 쇼의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그래서 오히려 10월에 볼 수 있는 게 이 서커스의 각 천막에서 하는 쇼의 프로그램 흐름을 보기에 적절한 때라고 본다. 이 시기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몰아 붙이는 시기가 온다. 그 때가 되면 이것저것 뭐 가릴 것도 없이 혼탁스럽기만 하다. 사건 사고는 줄줄 이어질 것이다. 선거란 게 그냥 정상적인 순서대로 가는 게 아니다. 편법, 꼼수도 난무할 것이다. 나는 아직도 김대업 사건의 그 황당함을 기억한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이미 져버린 선거에서 무슨 할 말이 있었나. 한 가지 생각이 더 미치는 건, 최선의 정치세력은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어떤 정치세력에게 요구할 것이 많아야 한다. 문재인, 안철수가 인터넷 상에서 다양한 정책을 모으는 일을 시작한 건 참 흥미롭고 바람직한 일로 본다. 그게 대중적 요

페이지58 소를 흡수하겠다는 의지표현이고 또 그를 통해 얻어질 것도 많다. 요즘은 워낙 정보홍수의 시대라서 아이디어가 오히려 결핍되어 있는 때이기도 하니까. 관건은 그것들을 어떻게 잘 모아서 생산적인 에너지로 만드는가에 있다. 과거처럼 정당정치가 모든 해법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정당은 의 회민주주의에 있어 하나의 도구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정당이 최선의 정치세력 과 동일어는 아니다. 최선이란 말을 붙일 수 있는 정치, 정치세력은 이 시대에는 그에 합당한 공감되는 정책을 모아두고, 또한 과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 한 실패들에 대해 검토하고 분석 평가하며 발전할 수 있는 걸 뽑아낼 때 탄생한 다. 그렇다고 해서 어중이떠중이 모아서는 해답이 안 나온다. 모인다고 모두 혁신 이 될 것 같으면 누군들 못하겠는가. 아이폰의 신화를 자꾸 새기지 말기를. 그렇 게 모아서 성공한 전례는 정말 극소수에 불과하다. 역시 누가 뭐래도 1%의 특기 할만한 영감이 때로는 나머지 99%의 보통의 생각과 가치를 뛰어 넘게 되는 때 도 있다. 흉내를 내는 건 좋으나 그 또한 바탕이 있어야 한다. 결론으로 보자면, 전제는 불만족스럽다. 최선의 정치, 정치세력은 없다고 밑을 깔 고 최선의 그것들을 찾아야 하는 아주 고통스러운 선택의 기로만 있을 뿐이니까. 그래도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대중으로써의 한 의무 는 된다. 하기 싫으면 투표 안 해도 된다. 안 하는 것도 투표다. 무효표가 투표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나. 투표율 독려도 결국 선거운동인 것처럼 무효표를 많이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모든 일이 최선이 없기에 벌어지는 거라 여긴 다. 정치, 이게 바로 한계다.

페이지59 2012 시대의 민낯 제 2 부 (2012.9.24~2012.9.26) 담담당당 2012.9.24 오전 9시 박근혜가 기자회견을 했다. 과거사 정리. 그렇게 정리하는 것이 한 방법임에는 분명하다. 그녀는 박정희에 대한 역사를 정리한 것은 아니다. 역사 이야기를 간단하게 평가한 것이었다. 아직 한국의 현대사는 올바로 평가되 고 공감을 가진 정의가 나온 것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 사실로 우리의 판단 테이블 위에 올라오지 않아서이고 공과( 功 過 )를 따지는 국민의 마음 이 여전히 역사를 볼 때 사용되는 서늘한 눈 이 없어서다. 저 눈은 어떤 희생을 각오하고라도 지킬 수 있는 가치를 말함인데, 이것은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내걸 었을 때,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원죄( 原 罪 )를 타고난 이 땅의 한계로 앞으로도 오랫동안 가지기 힘든 목표가 되어 버렸다. 아프지만 현실이다. 그래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는 작업은 더 깊이, 더 정밀하게 들어가봐야 한다. 복잡한 걸 싫어하는 현대인의 마음에 이런 관찰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보는 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숱하게 쏟아 지는 뉴스의 홍수, 그 속에 담긴 분석들은 때론 엉성한 선전문구 같기도 해서 보 기 참 불편하다. 역시 사실을 사실대로 내놓는다 는 말은 참 어렵구나, 이해 관계라는 것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구나 여기게 된다. 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볼 것을 보자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언젠가 이 기록을 보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 라도 여기는 사실을 적어야겠다는 마음만 더 깊어질 뿐이다. 1. 최악의 정치, 정치인은 무엇이고 누구인가? 2. 역지사지( 易 地 思 之 ) 백날 해도 소용 없다. 3. 왜색보수가 국수주의가 아닌 이유 4. 원칙이란 벙커에 숨다. 5. 천박한 듣보기장사꾼의 세상 6. 피를 섞어가는 것도 세계화라고? 7. 디스 8. 노무현의 다( 多 )문화 정책은 사기다. (1) 9. 노무현의 다( 多 )문화 정책은 사기다. (2) 10. 더 드릴 말씀이 없다.

페이지60 1. 최악의 정치, 정치인은 무엇이고 누구인가? 소릉조 / 천상병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산소에 있고 외톨박이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노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앞서 투표의 이유를 생각해봤다. 최선의 정치, 최선의 정치인을 고르는 것이 아니 라 최악을 뽑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얘길 했다. 사람마다 이 기준은 다르다. 그러니 이를 하나의 프레임 속에서 붕어빵 찍어내듯 그렇게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공감을 확대해 보면 나오는 최악의 경계는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들 간에도 모순은 발생할 수 있겠지만-그것은 판단보다는 이 해관계 때문에 더 그렇다-그렇다 해도 최악의 표본은 만들어져야 할 때인 건 분 명하다. [게릴라칼럼] 무너진 박근혜 대세론에서 얻어야 할 교훈 (2012.9.2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1771&cmpt_cd=p000

페이지61 0 위의 글은 오늘 읽은 글 가운데서는 가장 좋은, 아니 그간 보았던 어떤 정치평론 가운데서도 읽을만한 독자 의 글이다. 물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라는 타이틀이 있기는 있었지만, 매우 중립의 가운데서 새옹지마( 塞 翁 之 馬 )의 현실세계와 역사 의 성찰( 省 察 )이란 우리가 갖출 주제의식을 너무 잘 버무린 글이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 사람의 과거를 보고 미래를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더 정확히 하자면 그의 과거가 아니라 과거를 바라보는 성찰의 능력 을 살펴봐야 한다. 성찰은 그나마 과거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간의 능력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위 글, 전대인) 혹자들은 아니 진보의 편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의 집권이 역사의 후 퇴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일면적 으로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올해 대선이 사생결단을 할 만큼 결 정적인 역사의 한 국면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 권력의 칼춤에 희생된 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진지하게 대선에 임하는 자세가 필요하 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이 글의 제목으로 단 것이 문재인은 노빠를, 박근혜는 아빠를 넘어야 로 되어 있 지만 이 글의 필자가 이 제목을 원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넘어야 한다는 것 은 극복 ( 克 服 )보다는 성찰 ( 省 察 )에 더 무게가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단어 참 적절하다. 첫째, 성찰( 省 察 )하지 못하는 정치, 정치인은 최악이다. 새누리건 민주통합이건 둘 다가 정권을 쥐기도 놓치기도 했던 정당이다. (이 점 에서 안철수는 그런 경력자를 모은다는 점에서 똑같다.) 그들에겐 분명 과거 가 있다. 즉, 공과( 功 過 )가 이미 있단 소리다. 성찰( 省 察 )의 본질은 마음으로 반성 하고 살피는 것 이다. 바로 벌어진 일에 대해서, 또한 현재의 상황에서 이 마음을 가지는 것, 이게 정치, 정치인의 경우에는 속으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정치, 정치인은 일단 공과( 功 過 )에 있어 과 ( 過 )보다는 공( 功 )만을 앞세울 공산이 크다. 그렇게 가면 최악은 금새 온다. 자화 자찬이 지나치면 독선( 獨 善 )으로 가고, 비판을 싫어하면 바로 아집( 我 執 )에 빠진 다. 그런 모습 보이는 자는 누가 뭐래도 최악이다. 둘째, 비 현실적 구호에 익숙한 자는 최악이다. 대중은 교활하나 어리석다. 대개 정치의 구호는 슬로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 을 미혹하게 하는 선전의 역할을 한다. 관건은 이것이 전혀 비 현실적인 것을 현 실적이라고 속이는, 그런 접근법을 구사하는 자는 교언영색 ( 巧 言 令 色 )을 거듭할

페이지62 확률이 너무 높다는 점이다. 왜 대중이 교활한가 하면 자기 이익을 기본으로, 자 기 이해관계에서 이( 利 )를 기본으로 하기에 시간이 지나 자기 죽을 줄도 모르고 오늘 눈 앞의 이익만을 탐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런 구호, 선전 의 약발도 통한다. 그러나 이런 식 접근을 하는 건 정치의 기법일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지나치면 속내는 전혀 다른 곳에서 움직인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셋째, 능력을 가지지 못한 자는 절대 최선을 만들지 못한다. 정치가 사회를 선도하는 위치에 있다는 건 어쩔 수 없는 대의민주주의의 프레임 이다. 그 대표성은 자연스럽게 그들이 앞에서 끌고 가는 형태로 대중이 뒤를 받 쳐주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 능력이 단순하게 한국 사회에서만 작동하 는 것이 아니라 국가 대 국가라는 관계, 그리고 그 당대를 살아가는 시대라는 틀 에 들어가게 되기에 이를 원활히 처리할 수 있는 역량을 요구한다. 이것은 능력 이란 단어로도 표현되지만 그만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로 치환해서 사용해 도 좋다. 철학이 없는 자는 절대 한 시대를 5년 임기의 짧은 시간이지만 구현하 는 모습조차 보이질 못한다. 이건 국회의원이나 선거를 통해서 형성되는 어떤 정 치, 정치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넷째, 구태( 舊 態 ) 속에서는 신태( 新 態 )가 나올 수 없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 중의 하나는 권력의 부정부패다. 이것 은 매우 구조적인 것도 작동을 했다. 정치권력의 경제권력과의 결합은 정치 상층 부의 부패를 심화시켜왔다. 여기에는 구태 관료들도 당연히 포함된다. 우리는 지 난 시간에서 관료집단이 어떻게 전문성을 가지고 비전문가인 정치집단, 정치인들 을 농락하는가 모습을 봤다. 노무현은 그 폐해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 참혹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또한 정치다. 이렇게 이어져온 것이 바로 구태 정치이고 구태 정치인이다. 이 사람들과 가까이 해서는 신태 를 만들 수 없다. 그 들과의 결합은 곧 새로운 구태를 만들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실제로도 구태는 그 전염성이 무척 강하다. 현실적으로 떨쳐내기 어려운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 로 정치의 난점을 말하는 것도 우습다. 당연히 그럴 때는 새로운 정치 를 말하면 안 된다. 앞서 방향 을 봤지만, 방향이 잘못되면 죽었다 깨어나도 신태를 찾긴 어 렵다. 다섯째, 용서와 관용을 남발하는 자는 최악이다.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 가운데 최악으로 볼 수 있는 장면은 구태의 연장에 있다. 그것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를 경륜 으로 포장하는 건 미친 짓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이번과 같은 경우에서는 권력의 칼춤 을 대중을 아예 무 시하고 춰버린 자들의 모습이 지금도 여전하다. 바로 이명박 정권에 대한 이야기 다. 이들을 단절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일단 최악이다. 또한 이들을 용서하자는 식 의 이야기를 꺼내는 자들도 최악에 속한다. 이들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분석-평

페이지63 가->비판->단죄 에 이르는 경로를 포기하는 자는 현 시점 한국 사회에 적절한 정치, 정치인은 되지 못한다. 구태를 그냥 덮고 지나가자는 최악 중의 최악이다. 여섯째, 희망을 보여주지 못하는 정치, 정치인은 최악이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희망은 있어야 산다. 그것은 삶의 에너지이기도 하 다. 정치와 정치인이 대중을 떠나 살 수 없듯이 대중 또한 정치를 외면하고 살기 는 힘들다. 그것이 결국 입법, 사법, 행정이란 이 국가의 틀 속에서 자신에게 영 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레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와 정치인은 또 다른 하나를 줄 수 있어야 한다. 바로 희망 이다. 그것은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 정치와 정치인이 대중에게 선물하는 가장 큰 에너지다. 만일 그것을 주지 못하는 정치, 정치인이라면 그 또한 자격 미달이다. 물론 그 희망의 애드벌룬이 전혀 비 현실 적인 것이라면 그 또한 그걸 꺼내는 자의 미숙함이고, 만일 그것이 다수의 희생 에 의하여 소수의 행복과 희망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그런 정치는 개나 줘버 려라 말해야 한다. 그건 정치가 아니라 사기( 詐 欺 )다. 일곱째, 함께 하는 정치, 정치인이라야만 한다. 혼자 가려는 자는 최악이다. 앞서 독선과 아집을 봤지만 이것은 정책의 문제보다는 정치에 임하는 자세( 姿 勢 ) 에 관한 것이다. 흉내는 쉽게 낼 수 있다. 시장통에도 가고 어디에도 가서 고등어 한 마리 꼬리 들고 사진 찍고. 그런 것은 함께 가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 짓이 여전히 이어지고 뉴스가 되는지 모르지만, 그런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회의 소외된 속의 사람들을 애민( 愛 民 )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그 바탕이 없다 면 아무리 좋은 정책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모두 병들고 만다. 한 번 유심히 어떤 정책, 정부 예산들이 위에서 아래로 오는 과정에서 얼마나 왜곡 되고 또 중간에서 아무런 가치 없는 것으로 변하는지를 보라. 그럼 아주 쉽다. 아 래로 내려오는 길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걸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정치를 불신한 다. 행정부를 장악하는 대통령, 혹은 그런 정치적 직책에 있는 자들이 만들어낸 부패의 상황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걸 제도로 풀 방법은 이제 한계다. 오직 하나 가 남아 있다면 우선 함께 하는 마음 만이 지독스런 이 굴레를 개선할 수 있다. 경제, 복지, 외교, 통일 국방, 문화 등등 국가 사회의 많은 부분이 우리 곁에 있 고 정치와 정치인은 그 일들에 접근해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대중의 입 장에서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요구는 그들의 그러한 집행력을 발휘하기 이전에 아주 간단한 몇 가지의 선결조건을 가진다. 거기서 최선과 최악이 구분된다. 어쩔 것인가. 이것 또한 구분법의 하나이긴 하나 정답은 없는 것을. 그래도 이 수준에 접근하는 자를 거꾸로 돌아볼 수밖에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페이지64 2. 역지사지( 易 地 思 之 ) 백날 해도 소용 없다. 김씨 / 임희구 쌀을 씻어 안치는데 어머니가 안 보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어머니가 계실 것이다 나는, 김씨! 하고 부른다 사람들이 들으면 저런 싸가지 할 것이다 화장실에서 어머니가 어! 하신다 나는 빤히 알면서 뭐해? 하고 묻는다 어머니가 어, 그냥 앉아 있어 왜? 하신다 나는 그냥 불러봤어 하고는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인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똥을 누려고 지금 변기 위에 앉아 계시는 어머니는 나이가 여든다섯이다 나는 어머니보다 마흔 한 살이 어리다 어려도 어머니와 아들 사인데 사십 년 정도는 친구아닌가 밥이 끓는다 엄마, 오늘 남대문시장 갈까? 왜? 그냥 엄마가 임마 같다

페이지65 만일 내가 이명박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런 생각은 전혀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고, 그건 전혀 현실적이지도 않을 거니까. 그래도 참 아쉽다. 이명박 정권 5년은 아마 한 국의 현대사에서 최악의 시간이었다는 기록을 앞으로도 상당 기간 깨기는 어렵게 보인다. 만일 내가 노무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봉하마을로 가서 그 참혹한 외로움 속에 있었던 장면 속에서, 통치사료마저 빼앗 기고-자기가 만든 것인데-주변 사람들을 모두 마구잡이로 털어대는 검찰을 본 전직 판사이자 전직 대통령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참혹하다. 어이없는 마지막에 또 한숨이 나오지만, 한편으로 내가 그토록 외로워진 노무현이라면 어 떻게 했을까 생각하지만 소용이 없다. 공과( 功 過 )는 너무 무섭게 작동된다. 다 벌어진 일이다. 그건 책임질 일은 책임지고, 따질 것은 따지면 되는 일이다. 이게 대중이 가진 권력에 대한 눈 이고, 또 그것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게 된다. 이 무서운 잣대를 생각하면 그 말이 맞긴 맞다. 권력 주변에서 그 권력의 최고 자리를 본 사람이 툭툭 던진 몇 마디 말 가운데 한 마디다. 저렇게 하려고 대통령 한 건 아닐텐데 종종 생각해보면, 역지사지( 易 地 思 之 ) 이 말처럼 가당치 않은 주장은 없다 싶은 생각이 든다. 가정법( 假 定 法 )은 역사에 통하지 않듯이 어느 개인이 보내는 시간 도 마찬가지다. 선택은 더욱 그렇고, 그 결정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신할 수가 없 다. 성장과 분배. 이 두 개의 축이 과연 역지사지로 해결될 수 있을까 생각한다. 지금 나온 대선주 자들은 열심히 착한 성장 이란 말로 포장하며 성장과 분배를 뒤섞어 조절할 수

페이지66 있는 능력을 보이려고 한다. 그러나 이 둘 간의 관계는 순환이지 단절은 아니다. 분배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성장은 갈등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걸 무시하고 성 장 일변도를 주장했던 것이 지금까지 정권이었다는 걸 부인해서는 안 된다. 그것 이 진보로 타이틀을 내걸건 보수라고 하건 간에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시장만능 주의로 불린 신자유주의 시스템이건 아니건 그도 거론할 바는 아니다. 중요한 건 권력을 가진 자의 입장에서 성장과 분배에서 늘 중심이 되었던 건 성장 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건은 성장을 선택한 그 방법에 있다. 세 가지 가장 나쁜 범례가 최근의 시간대 에 우리 곁에 정착해있다. 하나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다가온 국제금융카르텔의 습격이다. 기업구조조정이 란 명분으로 주주자본주의가 들어오고 금융자본주의가 이 땅의 한 축을 차지해버 렸다. 지금도 주식시장 뉴스는 보기에도 아슬아슬하다. 확실한 공인된 도박판이다. 그렇다고 개미들이 돈을 버느냐, 그건 기대할 바도 없다. 정치 테마주를 예를 들 어 뉴스가 나온다. 돈 잃는 건 순식간이다. 정보의 차이? 단순하게 그것만 있을까? 오히려 도박판에서 돈을 왜 잃느냐고 물으면 운이 나빠서 라는 답이 나오는 것 같이 이유도 잘 모른다. 개인에겐 힘든 일이겠지만 이 정도는 국가가 빠진 도박 의 함정에 비하면 약과다. 아예 대놓고 공기업 민영화를 부르짖은 IMF이후 이 땅의 모습을 보라. 세금으로 거둬들인 정부재원은 마구잡이로 사용되었고, 국가자 산을 해외 카르텔에게 팔아먹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거기다가 도대체 어디 쓴 건지도 모르는 국가채무는 왜 이렇게 늘어만 가는 건지 한 번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어디 썼을까? 그 통계 한 번 자세하게 본 사람이 있다면 공개 한 번 해주면 좋겠다. 이건 우리 경제의 시스템 문제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저 국제금융 카르텔의 습격은 한미FTA까지 이르면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한국 사회 대중의 삶을 퍽퍽하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비는 없다. 그냥 이게 개방 통상국가의 피할 수 없는 운명 처럼 말 할 뿐이다. 다른 하나는 성장동력의 부재다. 삼성이 한국 경제의 25% 수준이라고 했던가. 대한민국이 아니라 삼성민국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한다. 나는 재벌에 대한 반감 은 없다. 문제는 이들이 노리고 있는 또 다른 경제 다. 공공성 의료민영화를 깨려 는 그들의 시도가 노무현 정권 하에서 어떠했는지를 생각한다. 노무현을 원망하 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관료와 측근의 술수에 의해 삼성 의 편을 들은 것까지는 좋은데 그 의미도 모르고 자발적으로 한미FTA를 하자고 덤벼든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렇게 만든 그 접근법에 경악한다. 그 시도는 이 정 권에서도 앞으로도 계속 시도될 것이다. 그게 마치 우리의 성장동력인 것처럼, 마 지막 남은 최후의 시장인 것처럼 선전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해놓고도 중소기업을 키울 수 있는 동력은 정작 찾지 못했다.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도둑질도 막지 못했다. 자영업이나 서비스업도 마찬가지다. 골목상 권을 위협하는 대기업의 손쉬운 돈벌이 접근법을 막지도 못하고 있다. 그런 대중

페이지67 이 소외된 성장을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 정작 앞으로 기술에 관해서는 끊임 없이 미국과 유럽 등 FTA를 체결한 국가들로부터 위협을 당하게 될 것이다. 돈 없으면 하지 못할 그런 특허니 디자인 전쟁을 치러야 한다. 속절없이 당해봐야 알 듯한 그런 상태에서 문을 열어두고 새로운 건 찾지 못하는 정권들이 선택하는 것이라곤 토건 밖에 없으니 한심할 지경이다. 마지막으로 사회 내에 팽배한 패배주의다. 이것은 양극화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상 다극화로 돌입해 있다. 1%의 99% 독식구도로 향하는 길에는 중산층이 없다. 하우스 푸어가 양산되는 이유가 주택 소유욕만이 아니라 투기 열망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바람을 넣고 나서 지금 그 바람이 빠지게 되는 차에 아무런 대책이 없다. 바람 넣은 자는 어디로 가고 바람 든 자들만 남은 공 간이 되었다. 대중에게 있어 주거환경은 더욱 열악해지고, 세대에 관계없이 무한 경쟁의 깃발 아래 내몰리고 있다. 계급사다리는 더 강화되었고, 폭도 더 넓어졌다. 심리적 패배주의가 가장 큰 문제로 등장한다. 그걸 해소시키는 것이라곤 몇 가지 알량한 성공신화를 보여주는 수법 외엔 없다. 정작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들이 수탈해가는 건 보여주지 않고 겨우 개미구멍 몇 가닥 열어둔 것을 가지고 대중을 농락한다. 그것도 무한히 경쟁해야만 얻어낼 수 있는 것이지만 그 또한 바로 손 에 잡힐 수 있는 도박판의 주사위처럼 던져둔다. 시간이 지나면 패배주의는 고착 화된다. 거기서는 어떤 생산적인 에너지도 나오기 어렵다. 여기서 분배를 말하는 것도 때론 쇼처럼 여겨진다. 포퓰리즘 운운하는 말들을 듣 다 보면 과연 저들이 대중을 어디까지 패배주의로 이끌어야 속이 시원할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여기는 역지사지가 도저히 성립되지 않는 공간이란 것이 다. 이미 저들과 대중 간에는 상당한 벽이 형성되어 있다. 그 벽은 대화와 타협으 로 해결될 숙제가 아니다. 오로지 유일한 방법은 정확하게 집행 가능한 정책 요 구만이 남아 있을 뿐이고, 그들의 하염없는 지배욕망을 막는 수단과 방법을 강구 하는 것 외에는 없다. 이것은 투쟁이라고 봐야 옳다. 그 의욕마저 버린 사람들이 라면 그냥 노예가 되면 된다. 그러나 혼자 되어야 할 일이지 함께 그리 되자고 보채지는 말기를. 지배하는 자들은 더 욕심 내어도 된다. 그 속에는 공생( 共 生 )은 그냥 구호일 뿐인 것을 잘 안다. 결국 복지란 문제는 곪아 터질 때까지 가서 폭 발하게 되어 있다. 무슨 험한 꼴이 벌어질지 모른다. 지금 정도면 이제 욕심보다 는 한 발 후퇴하는 법도 배울 때가 되었건만 여전히 욕심 부린다. 그러면서 내거 는 변명은 하나다. 아직 배가 고프다. 그래! 서로 배고픈 자들끼리 빵 한 조각을 놓고 싸우는 게 아니라 빵과 피를 두 고 싸우는 여기에 무슨 역지사지가 통하겠는가. 정치가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빵과 피를 버무려서 서로 나눠 먹자는 거다.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불가능하다. 그러니 빵은 빵대로, 피는 피대로 서로 체하지 않게 잘 먹여주는 게 정치란 생각 을 한다. 이들 입장을 한 통 속에 넣고 휘젓지는 말기를. 자꾸 대선주자란 사람들 이 그런 꼴을 보인다. 아직도 정신들을 못 차린 모양 같기도 하고 그렇다. 여전히 대중들 알기를 호구로 알아서 그런 건지.

페이지68 3. 왜색보수가 국수주의가 아닌 이유 정도리에서 / 나희덕 모난 돌은 하나도 없더라 정 맞은 마음들만 더는 무디어질 것도 없는 마음들만 등과 등을 대고 누워 솨르르 솨르르 파도에 쓸리어가면서 더 깊은 바닥으로 잠기는 자갈들 그렇게도 둥글게 살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건 아니다 안개는 출렁거리지 않고도 말한다 저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조각배는 뭍에 매어져 달아나지 못한다 묶인 발을 견디며 살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건 아니다 좌파와 우파에 관해서는 <2012 시대읽기> 본편 8부에서 잠깐 살펴본 적이 있다. 그 정의는 대체로 아래 설명이 타당하다고 본다. 좌파 우파는 어떤 특정의 이념이나 실천과는 독립적으로 기존의 지배적인 정치 적 내지는 사회적 가치 및 이에 근거한 체제를 신봉하는 세력은 우파로, 이에 반 해 기존의 가치체계와 제도를 비판하고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인 정 치적 및 사회적 가치와 제도들을 모색하는 세력은 좌파로 규정된다. 실제 좌파와 우파의 경계는 특정 이념보다는 지배적 가치와 체제를 둔 접근방법 의 차이에서 나눠진다고 본다. 그 가치를 신봉하면 우파, 우파성향이고 그에 비판 하고 다른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 좌파, 좌파성향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좌파, 우파 논쟁은 이 기준에 의한다면 특별 히 문제가 될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아주 빠른 속도감을 동반한 변화가 한국 사 회의 지난 70여 년간 있어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모든 정치세력은 기본적으로 좌파적 성향을 가지고 또 우파적 성향 또한 가졌다. 거기에 지배적인 정치적 내

페이지69 지 사회적 가치, 그리고 그에 근거한 체제 는 특정 이념의 문제보다 더 강력하게 시장만능주의 시스템을 통해 정치 사회 전반에 깊숙하게 들어오고 난 이후 다른 어떤 것에 우선하여 지배적 프레임을 구축해버린 상태가 되었다. 이것은 말하자 면 한국 사회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와 사회, 체제가 모두 바깥으로 열린(개 방이 아니라 개방 당한) 상태에서 새롭게 재편되는 시스템이 형성되었음을 말한 다. 이 현상은 그 이전 사회 내에 강하게 뿌리내린 지배적 가치가 이데올로기 변수보 다는 경제변수로 확실하게 넘어간 것을 말한다. 여기서 경제는 바로 금권 ( 金 權 ) 에 해당한다. 정치가 권력 측면에서 경제권력과 시스템에 종속되는 현상이 만들 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것은 한국 내의 경제권력이 아니라 국외로부터 들어 온 권력에 의해 정치가 지배적 가치를 가지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우리 에게 IMF사태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되었다. 김영삼, 김대중이 항복문서에 서 명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항복 이후에 지배시스템을 넘겨주었다는 사실, 이것이 더 큰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그 점에서 보자면, YS가 1994년 추진했던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과 DJ가 2000년 진행한 제1차 남북정상회담은 그 궤를 달리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전자 의 경우는 최소한 지배적 정치 사회의 가치를 최소한 유지한 상태였음에 비해 후 자는 이미 그 시점에서는 국제금융카르텔에 의해 우리 경제 시스템을 연동시켜야 하는 상태였고 더불어 독자적인 대안제도의 형성에 한계를 가진 상태였기 때문이 다. 이 제한성은 이후에도 쭉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 김대중 정권 하의 시장개방은 단순히 경제측면의 카르텔들만 불러 들인 것이 아니었다. 개방이란 이름으로 일본 세력의 직접적인 진출을 허용 하게 된 것도 그 때부터다. 다국적 금융기업은 그 원천을 알 수 없고 또 알리지 도 않는다. 그들에겐 돈이 최고의 선 이며 나머지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그 길을 열어준 것은 김대중 때부터였다. (2008 시대읽기를 읽어보시길 바란다.) 그 후 2000년대의 한국에서는 그들 일 본을 뿌리로 하는 세력들이 한국 땅에 우파적인 기반을 포장하면서 침투하기 시 작했다. 이를테면 변장인 셈인데, 이들은 특정 이념과 실천과는 무관한 좌파 우파 구분에 그것을 당연시하는 <극좌 극우파론>을 입히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반공 ( 反 共 )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활용한 것이기도 하다. 변화된 우파적 시스템인 신자유주의의 시장만능주의-김대중 정권은 진보가 아니 다.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경제정책이 아니라 바로 정치 사회 시스템이다.-와 자 신들의 접근법은 전혀 다르다는 식 접근법을 강화하려면 당시에는 반드시 두 가 지 전제가 따라야만 했다. 하나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세력의 집권, 다른 하나는 반 공 이데올로기에 가장 충실할 수 있는 남북한 간의 대치국면 심화가 바로 그것이 었다. 2000년대 초반 이회창-노무현의 대결은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노무현 자

페이지70 신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준비된 대통령이 아닌 정권 이 만들어졌다. 얼 마나 급했으면 대통령 탄핵소추를 할 생각까지 했을까 생각해보자. 그런데 여기 서 반전이 하나 나온다. 노무현이 김대중의 경제정책과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아 예 한 걸음 더 들어간 것이다. 한미FTA를 하자고 덤비고, 양극화에 시달리면서 도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에 매몰된 노무현 정권에서는 오히려 반공 이데올로기를 사용하기 더 적절한 요소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왜색보수는 극우의 가면을 쓰고 그렇게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사실 뉴라이트 라는 존재는 저런 여건이 형성되자마자 그들이 가진 정권교체의 속내를 숨기지 않고 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했는데, 그 전위( 前 衛 )가 바로 한나라당이었고 이명박 이었을 뿐이었다. 이명박-박근혜의 경선도 어떤 측면에서는 그들이 데리고 놀기 편한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자리에 불과했었다. 노무현 정권은 속절없이 이들에게 놀아났다. 극우로 포장된 왜색보수에게 말이다. 극좌, 극우를 사전적으로 구분하면 이렇게 말한다. 극좌; 극단적으로 사회주의적이거나 공산주의적인 성향, 또는 그 성향을 가진 사 람이나 세력 극우; 극단적으로 보수주의적이거나 국수주의적인 성향, 또는 그 성향을 가진 사 람이나 세력 자! 우리는 왜 이들이 극우 ( 極 右 )가 아님을 확인해야 하는지 이 사전적 해석 속 에서도 그 전말을 금새 찾을 수 있다. 바로 국수주의적인 성향 에 그 해답이 있 다. 이들은 자신들의 친일성향 및 친일에 의해 지배된 구도를 감추기 위해 국수 주의( 國 粹 主 義 )를 포장해야만 했다. 국수주의란 자기 나라의 고유한 역사 전통 정치 문화만을 가장 뛰어난 것으로 믿고, 다른 나라나 민족을 배척하는 극단적인 태도나 경향 을 말한다. 지금 일본의 극우와 극우주의자들의 모습을 상기하면 된다. 그러다 보니 이승만도 띄워야 하고, 박정희도 꺼내야 했다. 더불어 친일인 사였으나 대한민국에 기여했다며 백선엽 같은 자를 앞세워야 했다. 일종의 양념 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국수주의자가 아니었다. 당연히 극우도 아니다. 왜냐하면 진정 한국의 정치 사회적 극우라면 제일 먼저 배척해야 하는 건 바로 일본이 되는 건 기본이기 때문이다. 일본 우습게 아는 당신, 이걸 읽어보시오! (조갑제)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20937 이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철저한 반공 ( 反 共 )으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이른바 탈북자 단체를 비롯한 극우 성향을 띨 수밖에 없는 단체들에 대한 지원을 하면서 분위기를 잡아갔다. 그것이 정권까지 가지고 갈 정도에 이르 렀다는 건 2007년 당시 한국 사회가 그만큼 김대중-노무현에 이르는 정치 사회 시스템의 변화가 아닌 경제 체제의 변화에 식상하고 피로감을 느꼈다는 반증이지 만, 이 틈을 뚫고 들어와서 이런 난장( 亂 場 )을 벌일 것을 예상했던 사람들은 당

페이지71 시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 대부분은 이 사실을 잘 알지만 말이다. 이것이 지금 남아있는 왜색보수, 극우로 포장한 자들의 실체다. 이 과정에서 통합진보당처럼 극좌의 노선 속에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 모두 드러 났다. 그러나 그들과 이들 왜색보수를 같은 선상에서 평가하는 건 잘못된 것이다. 전자가 우리 사회 내부의 일이라고 보면, 후자는 절대 우리 사회 내부에서 소화 해서는 안될 이종( 異 種 )의 불편함이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이들을 받아줘야 할 정도로 일본이 그간 보인 태도는 물론이고 지금도 보이고 있는 모습 자체가 정상적이지 않다. 그들은 그들 식의 극우, 국수주의를 여전히 고수한다. 그걸 들 고 한국에다 심겠다고 설치는 꼴이 과연 타당하겠는가. 그에 앞서는 자들은 전부 정신병자들이라고 보아야 하는 게 그게 바로 지극히 정상적 인 것이다. 간략하게 그간 왜색보수, 극우라고 포장하고 나온 그 자들의 정체를 봤다. 이번 대선에서도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진정한 보수인 것처럼 행세를 하며 설친다. 꼴 사납다. 진짜 보수는 침묵하는 다수 속에 있다.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 의미가 없 는, 그것보다는 진짜 이 시대에 맞는 실용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는 때에 왜 저 런 공허한 외침에 골몰할까를 생각한다. 진짜 외치는 각도가 옳다면 지금은 그들 도 반성하는 기미라도 보여야 한다. 무슨 놈의 극우가 국수주의가 뭔 뜻인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나 말이지! 4. 원칙이란 벙커에 숨다. 허수아비 / 황대익 심장없이 사는 세월이라고 끝없는 기다림이 없으랴 다가설 수 없는 삶이라고 어찌 사랑이 없으랴 바람이 지나간 허기진 가슴.. 홀로 추는 춤사위 쓸쓸해도 그대를 향한 내 사랑의 노래는 멈추지 않으리

페이지72 원칙주의자 이야기는 시대읽기 에서 한 번 훑어 봤다. 그건 원칙이 뭔가 그 정체 를 명확히 정하지 않으면 대단히 위험한 것이기도 하고, 또 그 원칙이 일정한 융 통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고지식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원칙의 다양성 을 생각하면 사실 원칙 은 없다고 해야 옳다. 이처럼 흔들흔들 상황에 따라 줏대 가 없는 게 그 속성이니 말이다. 그래서 원칙 은 때로 아주 악용되는 경향을 많이 보인다. 정치인의 원칙, 기업인 의 원칙, 세상사는 모든 사람의 나름 원칙은 늘 충돌하고, 그 때마다 원칙이란 이 름으로 힘 싸움을 한다. 바로 그 싸움질의 도구가 원칙이란 것이다. 원칙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강요하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원칙 을 지키며 살겠다는 잘못된 인생 목표를 세운 사람들은 사회에서 멸시 받거나 불 행의 늪에 빠진다. 반면에 원칙이란 남에게 강요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실천하 는 인간들은 정치가나 기자나 공무원이 되어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 거나 또 다른 원칙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다투면서 그 원칙과 전혀 관계없는 행복 한 인생을 꾸려 나간다. ( 막시무스의 지구에서 인간으로 유쾌하게 사는 법 중에서) 대체로 정치인들이 자주 꺼내는 이 단어의 속성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도 말해지 지만-자랑하는 것처럼-타인에 의해서 평가 잣대로 불쑥 튀어나와 아주 강렬한 에너지를 지닌 것처럼 포장되기도 한다. 박근혜의 경우는 보수언론이 꺼내는 정 치인 박근혜에 대한 정의 중에는 원칙과 신뢰 가 빠지지 않는다. 그 때의 원칙은 이를 테면 면도날 테러를 당한 후에 바로 대전은요? 라고 묻는 정치인의 집념일 수도 있고, 정몽준과의 단일화를 추구하다가 정몽준이 10.26의 주범 김재규의 변 호인이었던 강신욱을 영입하자 포기해버리는 것일 수도 있고, 천막당사를 결정한 것일 수도 있는 등 다양한 형태를 포괄한다. 소통이 안 된다는 불통( 不 通 ) 이미 지도 그래서 연결이 된 셈이다. 원칙을 지킨다고 그 원칙 바깥의 것과는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소통불가의 상황이 된다. 이건 때론 카리스마로 보일 때 도 있지만 융통성이 없게 비춰지기도 한다. 그 모습에는 다양함이 존재하는 것이 다. 그럴 때는 원칙이 중요한 것일 것 아니면 소통이 중요한 것일까? 노무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겪어본 바에 의하면, 이 분도 만만치 않게 원칙주의자였는데, 특히 자기가 한 번 옳다고 규정한 바는 철저하게 타인에게 자 기원칙임을 강조하는 스타일로 보였다. 법 공부를 했던 이들의 엇비슷한 수학적 인, 기계적인 접근법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이 원칙고수라는 건 한 번 저 결정 (마음먹기)이 잘못되면 누구도 쉽게 꺾진 못한 외고집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런 데 그 모습을 지금 문재인에게도 본다. 이를 테면 어려울수록 원칙으로 돌아가라.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는 말이 문재

페이지73 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회자된다. 그런데 이게 원칙이 뭔지 정해지지 않을 때 생기는 상황과 그 원칙이 잘못된 것으로 평가될 때, 그리고 애매할 때가 각각 다 르니 문제다. 위의 막시무스의 말마따나 원칙은 싸움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보면, 문재인이 아무리 노 전 대통령의 탈상 날에 뛰어넘자 고 말을 해도 그것이 친노 프레임을 무너뜨린 건 결코 아니란 것이다. 나는 친노가 확실하고 친노라는 딱지를 떼고 싶지도 않다. 자! 이 말에서 친노의 욕망 이 읽혀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것은 친노집단 을 우리 아니면 적이라는 프레임이 확고한 세력 이란 평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좀 더 가보면, 그것은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건 간에 은폐( 隱 蔽 )이고 실제로는 친노 프레임을 통한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 문재인의 원칙이란 사실이 확인된다. 이른바 이것이 바로 폐족부활( 廢 族 復 活 ) 의 기치다. 그의 원칙은 노무현의 그것 인 셈이다. 안철수의 원칙은 기업가로서 살아온 날의 원칙과 그 이전으로 나뉘어진다. 할 일 을 한다, 하고 싶은 걸 한다, 밀어 붙인다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사회적으로 부 나 명예에 성공한 자가 뱉을 수 있는 일정한 레토릭에 해당한다. 오히려 나는 최 근 들어 그가 말하는 원칙이란 단어에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혁신 ( 革 新 ) 이란 단어다. 경제도 혁신경제 를 붙인다. 당연히 경제에 그 정도 이름이 붙여지 면 사회도 혁신사회 가 나와야 하는데, 이게 좀 애매하다. 혁신 의 본래 뜻은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 게 한다 는 것이다. 말뜻대로만 한다면 안철수의 혁신 은 가짜다. 그가 말하 고자 하는 건 새롭게 하는 것 에는 해당되지만 완전히 바꾸는 것 은 아니다. 이 른바 융합이론 을 꺼내고 통섭 ( 統 攝 )을 말하지만 그것이 방법상의 차이를 말하 는 건 아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새롭게 내놓는 것도 아니다. 그런 차에 이헌재를 데리고 등장한 장면은 쉽게 말해서 이것이 혁신이 아니고 혁신의 흉내를 내는 것 이란 걸 보여준 하나의 단초( 端 初 )임을 볼 수 있다. 잠정적으로 거리를 둔다고 해서 해소될 일은 아니다. (이 부분은 뒤에서도 자세히 짚어볼 기회가 있을 것 같아 여기서 줄인다.) 지금 정치인들이 숨고 있는 벙커는 한결 같이 원칙 이다. 그걸 포장해서 내놓 는 것이 원칙주의자라는 것인데, 그 또한 마찬가지다. 외부에 비춰지는 이미지로 는 이것을 결단력 이란 단어와 동일하게, 또 그런 이마쥬를 양산해보려는 것이지 만 그 속살을 챙겨 들어가면 아주 영악한 접근법이 등장한다. 막시무스를 다시 꺼내봐도 비슷한 결론인데, 이건 원칙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성찰하기 보다는 상 대에게 강요를 하는 것이고, 다른 원칙들과 다투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결 국 이것이 아젠다 수준으로 가기는 어렵다는 것인데, 그래도 이 말이 사회에선

페이지74 먹힌다. 간단한 이유에서다. 뭔가 멋있어 보인다. 뭔가 (카리스마) 있게 보인다. 강요당하면서도 강요가 아닌 희망과 기대를 준다. 그걸 리더십과 연결해서 써먹 는 책들이 많이 나온다. 스티븐 코비의 책도 그런 류라고 나는 본다. 처세술을 학 술적인 것으로 포장한 것인데, 나름 독자들은 많다. 처세는 잘 하고 싶으니까. 그 러나 자기를 보지 말고 상대의 그런 모습을 잘 보면 흥미롭다. 결론은 겉만 봐서 는 다 뻥 이다. 너도나도 저 원칙 을 보강하기 위한 개념으로 실용( 實 用 )을 말한다. 실제 써 먹지 못할 원칙이란 상대(대중)에게 다가서지 못한다는 걸 알아서다. 그러나 실 용의 핵심은 원칙이 아니다. 실사구시( 實 事 求 是 )의 제 1 원칙은 실사( 實 事 )에 있 다. 바로 현재한 사실 이란 것이다. 그래서 감추고자 하는 이들은 늘 포장지를 끼 고 살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용물이 드러나지 않는 건 아니다. 단지 시간문 제일 뿐이지. 그마저 감춘다면 그는 천재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그건 성공한 것이지 실패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걸 믿고 정치인은 원칙 을 꺼내면서 사실 과 다른 것을 보이지 않게 포장한다. 여기에 속으면 그건 뻥에 속은 것이 된다. 뭐, 다른 방법이 없다. 속는데, 속고 싶다는데 더할 말이 있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속아주는 것과 그냥 속아 넘어가는 건 다르다. 그러니 최소한 저 원칙 이란 말이 나오면 한번쯤은 이 글을 새겨보기 바란다.

페이지75 5. 천박한 듣보기장사꾼의 세상 야생사과 / 나희덕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선명한 저녁이었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새가 쪼아먹은 자리마다 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었다 나는 개미들을 훑어내고 한 입 베어물었다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를 그들이 사라진 수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바람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그들이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물었을 뿐인데 천박( 淺 薄 )하다 는 말은 함부로 쓰면 큰일난다. 왜냐하면 이 말처럼 상대를 비하 ( 卑 下 )하는 말을 고르기도 쉽지 않아서다. 그럼 넌 뭐 잘났느냐 소리가 절로 나 와버린다. 특히 천박 ( 淺 薄 )이 가진 뜻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에 그런다.

페이지76 단어로 보면, 천박( 淺 薄 )은 학문이나 생각 따위가 얕거나, 말이나 행동 따위가 상스러움 을 뜻한다. 사실 이 기준이라면 욕 한마디 걸쳐도 저 소리 듣겠거니 생 각하지만, 이건 좀 더 가보면 다른 의미가 나온다. 사회적 의미로써의 천박하다 는 학문, 생각, 상스러움 이것과는 다른 내용물이 하나 있다. 바로 천박( 舛 駁 ) 하다 는 것이다. 이 한자는 잘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 게는 이 글자 새기기가 쉽지 않다. 어그러질 천( 舛 ), 얼룩말 박( 駁 )이다. 해석하 면 뒤섞여서 고르지 못하거나 어수선하여 바르지 못하다 는 뜻이 된다. 우리는 주로 이 후자의 천박하다 는 말을 쓸 때가 있는데 전자로 해석되는 경우를 만나 기도 한다. 장사꾼 은 장사치 처럼 장사하는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장사하는 사람들 욕보일 듯해서 차라리 사용할 말은 오히려 듣보기장사치 란 말 로 설명하는 게 좋겠다. 한군데 터를 잡고 하는 장사가 아니라 시세를 듣보아 가 며 요행을 바라고 하는 장사를 낮춰 부르는 말이다. 장사 는 한자말이 없는 순수 한 우리 말이다. 상 ( 商 )이란 글자가 있긴 하지만 이것이 장사 란 말을 대처할 수 도 있고 없기도 하다. 우리 말이 가진 묘미다. 장사는 이윤을 얻기 위해 사고 팔 고 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사고 파는 이 행위에도 장사의 법도( 法 度 )가 있 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게 무너지면 모두 장사판이 아니라 개/판이 된다. 사람 살 이 그래도 짐승들의 약육강식과는 다른 뭔가 있는 것인데, 그것마저 깨지면 이건 애니멀 킹덤으로 차라리 가는 게 옳다. 지금 그런 전개가 벌어지고 있다. 시장만능주의, 그러니까 시장이 최고다, 이 전제조건에서 시작된 논리는 마침내 무한경쟁은 최선이다 로, 마침내는 수 단 방법은 가릴 필요 없고 법대로만 하면 된다 로 이어진다. 저 논리는 법을 장악할 힘이 있는 자에겐 가장 베스트의 구도다. 법대로만 하면 된다. 대형할인마트가 시내 중심에 떡 하니 들어올 수 있는 구도, 골목길 상권은 도외시하고 아예 그 옆에 대형 체인점이 들어와서 서민상권을 죽여버려도 할 말 이 없는 구도, 제빵 학원을 마치 무슨 생계재활 프로그램인 것처럼 선전하고 학 비도 지원하면서 제빵 인원 키워놓았지만 슬그머니 대형 체인점을 내주고 마는 그런 구도, 재래시장은 정치인이 선거철만 되면 가보는 장소이고 유통구조에서 경쟁이 되지 않는 마트형 시장이 그 옆에 함께 경쟁하도록 게임 시키는 판 등이 벌어지는 나라다. 여기엔 법은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니까 최초의 전제로 돌아가 게 된다. 시장이 최고다 라는. 참 별난 대중이다. 저렇게 해서 새로운 일터가 생기고 또 뭔가 신선한 것이 들어 온다고 생각을 했지만 결국 저 구도에서 승자는 소비자가 아니고 노동자도 아니 었다. 유통업자가 먹고 살고, 마트 주인이 돈 챙기고, 노동자는 비정규직 시급 노 동자이고, 물건을 값싸게 사서 좋긴 한데 어느 날엔가 보면 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는 걸 보게 되고. 조삼모사( 朝 三 暮 四 )가 때로 없다.

페이지77 시장이 최고 최선이라 부르짖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밑진다는 거 이게 다 거짓말 인 건 뻔히 아는 이야기지만-그래도 밑지는 사람도 생긴다. 장사 감각을 탓해야 지 뭐 별 달리 방법도 없다-속담 가운데 오 리를 보고 십 리를 가는 장사꾼의 머리 쓰는 걸 생각하면, 시장만능주의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은 뭔가 좀 특별 나단 생각을 한다. 그 머리 대중이 못 따라가고, 정책도 법도 헉헉댄다. 왜? 준비 를 안 했으니까 그렇다. 천박하다는 말로 돌아가보자. 도대체 뭐가 천박한 것인지 보자. 이들의 말이나 행동은 어수선하다. 시장은 늘 변하는 걸 알아서다. 그러나 아주 교활하다. 문제가 될 성 싶으면 바로 지나쳤다 느니 하면서 살짝 빠졌다가 슬그 머니 배후 작업을 거쳐서 법대로 하는 걸요! 하면서 다시 진입한다. 차라리 일 관성 있게 나는 당신 주머니를 털어야겠고, 이 판을 모두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 으니 물러나쇼! 꼽더라도! 이러면 말은 된다. 그런데 절대 이렇게는 말 안 한다. 끝끝내 하는 말은 유통 선진화를 위해서는, 선진국에서도 이러지 않는데 하 면서 엉뚱한 곳에 손가락질을 한다. 이미 그런 장사꾼들의 입맛에 녹아난 정책 집행자도 똑같이 앵무새처럼 그 패턴을 따라간다. 초록은 동색이 아니라 그냥 같 은 색깔끼리 만난 거다. 요즘 다시 문제제기 된 2005년 삼성(삼성생명)이 만든 의료민영화 대책보고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공공 의료보험 제도를 깨기 위해 삼성은 노무현 정부 구워

페이지78 삶기에 골몰을 했고 그 결과 단계를 정했다. 바로 실손형 의료보험이란 거다. 이 건 문제가 다발하게 되어 있다. 실손 의 심사 문제가 걸린다. 진료비의 적정성 평 가는 드라마 골든타임 에서 본 건강보험 심사평가원(심평원)에서 한다. 그런데 이 실손형 의료보험은 민간이 하는 것이라서 심평원이 아닌 새로운 조직을 만들 자고 하는 게 금융위 의견이다. 가칭 보험정보원 은 민간심사위탁 대행기관인 셈 인데, 이게 참 골 때린다. 심평원이 독점했던 진료비 자료가 민간기관과 공유하 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의료보험 체계의 공적 통제를 깨는 것, 이게 바로 삼성 이 노린 것이었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안다. 이걸 노무현 정권이 받아 주었다는 것만 해도 참 기가 막힐 일인데, 그 당시 상황만 보면-관료에 놀아나고 삼성 손 바닥을 못 벗어나고-이제 와서 문제가 되는 것도 다행이다 싶다. 이건 딱 잘라 서 말하자면 공기관 민영화 수준이 아니라 국민건강의 공공성을 민간에게-삼성 에게-넘기자는 소리와 같다. 이게 뻔하게 진행 중이란 사실에 참 숨이 막힌다. 이거 장사치 맞다. 그리고 이런 걸 일러서 하는 말이 바로 듣보기장사치 라고 부르는 거다. 이익이 나면 그냥 마구 질러대는 것인데, 이 이익 너무 크다고 본 거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걸 선진형이라고 부른다. 미국도 그런다는 거지. 웃기 는 소리인데, 이 말을 들어둔 사람들, 그리고 그 말에 따르는 이 땅의 관료는 도 대체 누구 편인가 하는 소리 절로 나온다. 명분이야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잔머리를 쓰면서 여기저기 때론 요행 ( 僥 倖 )도 바란다. 몰라줬으면, 내가 지금 이렇게 접근하는 목적을 몰라줬으면 하는 바람이 그 속에 가득 차 있다. 4대강이 홍수 예방에 도움이 되었느니 하는 소리는 이제 좀 지겹다. (이건 뒤에 이야기 기회가 있다. 이명박 정권 전반을 모두 그 이면을 뒤져보는 작업을 할 것 이니까.) 그런데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지는 거지? 천박한 장사치들이 날뛰 면서 저지른 이 숱한 쓰레기들을 누가 치워야 하는가 말인가? 대중이 정치에 기대를 거는 것과 기대 바깥에 서 있는 건 다른 이야기다. 지금 대선주자들 모두가 나름 집권공약을 꺼내기 참 바쁘다. 아직 준비도 못한 사람도 있고, 슬그머니 그 사람 편 들어 주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방향만 옳으면 되고 집 권하고 집행하는 거지요!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또한 참 웃기는 소리다. 이미 벌어진 일,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명확한 견해도 없는 자가 나중에 하겠 다는 소리는 다시 장사치 수법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 서 방향 은 반드시 그 방향의 실천, 즉, 실사구시( 實 事 求 是 )가 무엇인가를 따지게 되어 있다. 드러난 일에 관해서는 방향을 말하는 거이 아니라 선택 을 요구하게 되는 것은 기본에 속한다. 도대체 이런 일들의 선택은 무엇일까? 한 번 자세히 정리 해봐야겠다. O X 이건 4지 선다형이건 간에 시험지를 만들어야 할 때가 아 닌가 싶은 거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 무한경쟁 속에 있는지 모르겠다. 그럼 이렇게 하면 된다. 무

페이지79 한경쟁에서 도저히 무한 ( 無 限 ) 영역까지 가기 싫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무슨 혁명이라도 해보자! 이걸 혁신 으로 포장하면 되지. 한국혁신당, 이름 참 좋다. 그런 당을 만들든지 아니면 그런 개/판을 강령으로 두든지 어떤 방향이건. 방향만 맞으면 무조건 집권하고 다 할 수 있다고 땜질을 하는 그런 것도 듣기 지 겨우니. 진짜 해보자! 6. 피를 섞어가는 것도 세계화라고? 사람의 가을 / 문정희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 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 사이 너와 나 사이 가을 이왔습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 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 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 새들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것만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새, 별 꽃, 잎, 산 옷, 밥, 집 땅, 피, 몸, 물, 불, 꿈, 섬 그리고 너와 나 이미 한편의 시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 가을 날 좀 까다로운 문제를 이야기 해야겠다. 바로 다문화니 불법 이주노동자 문제다. 구 로나 안산을 가본 사람들은 안다. 이 사안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그러나 방 치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값싼 노동력을 제공한다는 사실, 그 하나

페이지80 때문에 사회 전체가 불법을 용인하는 시스템이 굴러가는 중이다. 오원춘 사건 이 후에 약간 변한 것이 불법 가운데서도 호적을 아예 바꾼 경우에 대한 단속 뉴스 가 나오고 불법 가운데서도 심각한 것들, 예를 들어 조폭 수준의 사건에 대해 관 찰하고 있다는 수준의 기사들은 나온다. 그러나 본질적인 건 그들이 이 사회에 들어오는 건 한국 사회의 문제이지 그들에 게 원인이 있지는 않다는 걸로 귀결된다. 그 명분은? 다문화라는 거다. 그런 세 계 조류라는 거지. 참 빌어먹을 이야기도 다 있다 싶다. 문화라는 것이 저렇게 정 체성 없이 쓰이는 걸 보고 있는 것도 한심하지만, 그걸 노동력과 결합시키는 것 도 모자라서 이제는 불평등을 감수하라고까지 한다. 어느 수준인지 확인해야 할 부분이지만 왠지 쉬쉬하며 오히려 진보로 불리는 신문이니 언론들에서는 다문화 이야기를 더 떠드는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 이게 진보? 뭔 이런 진보가 다 있나 생각하게 된다. 이 사연을 길게 설명하면 복잡해지니 간단한 한 마디를 통해서 과연 무엇이 올바 른 대책인가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피를 섞어 가는 것도 세계화다. 2006.5.25 노무현 대통령은 충북 청원군 현도면 주민 한마당 행사에 참가했다. 바로 저 발언이 나온 날이다. 당시 이야기를 종합한 기사의 인용 원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휴대폰 많이 팔아 먹는 시장이 세계에 있다고 하는 것만이 세계화가 아니라 사 람의 피를 섞어 나가는 것도 (세계화에) 포함된다. 한국이 백의민족 순혈혈통이라 고 해도 그만큼 교류가 빨라지고 어떤 인류학자가 200년 후에는 얼굴을 보고 민 족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미 그렇게 된 나라가 있다. 장기적으로 그렇게 (피를 섞어) 나가는 것을 역사로 본다면 저항하지 말자. 말이 잘 안 통하 고 습관도 다르고 어렵겠지만 앞으로 좋아질 것이다. 우리나라에 돈 벌러 오는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취업해서 합법적인 신분인데도 보호가 완전하지 못하고, 또 불법 취업하면 불법 신분이 되니 어렵고 한국 사람들이 받는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인권 침해도 당하고 해결할 방법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부끄럽고 가슴 아 프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국가는 항상 현재의 이익을 보호하는 그런 조 직이고 현재 우리 국민의 기득권을 기초로 존재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우리 국민 들의 일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외국인을 들어오게 할 수도 없고, 그 사람들이 눌 러 앉아 우리 국민들과 잘 어울렸으면 좋겠는데 법으로는 (외국인 불법 체류자 를) 내쫓게 돼 있지만 그건 너무 가혹하다. 그래서 정부로서는 법을 어정쩡하게 운 용하고 있다. 합법은 아니지만 불법인데 돌봐줘야 하고 이렇게 어려운 게 외국인 노동자 정책이다. 점차 이민법을 완화해서 한국에 와서 오래 노동하고 한국에 와 서 어울릴 수 있도록 우리 이민 정책을 새로 다듬어 보자고 준비하고 있다. (결 혼해 한국에 온 외국인 여성들이) 어떻게 사나 보니까 잘 어울려서 잘 산다. 결 혼하는 쪽에서 한국 국민들이 잘 어울리지 않고 폐쇄적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보 니까 그렇지 않고 이 마을도 그렇고 해서 우리도 전체적으로 외국인 정책을 자신

페이지81 감 가지고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 나는 노무현의 인식에서 대단히 이해하지 못할 철학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를테면 불법체류도 기득권에 대한 저항으로 간주한다 는 발상이다. 하나의 국 가에서 국민이 가진 권리는 헌법의 보장에 의한 바로 그 권리다. 그런데 이 양반 은 당시 불법 체류자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하는 모습인데, 정 말 법률 공부했던 사람이 맞는지 머리에 지진이 날 정도다. 부끄럽고 가슴 아프 다 고 했는데, 도대체 무엇이 부끄럽고 무엇에 그리 가슴 아픈지, 내 가슴이 다 아프고 부끄럽고 그렇다. 첫 머리로 돌아가보자. 세계화 라는 단어를 참 함부로 쓴다. 이것은 세계 속의 여러 나라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당연히 이해 가 첫 걸 음에 속한다. 그런데 이 말은 뒤 이어 아주 우습게도 사람의 피를 섞어 가는 것 도 포함된다 고 해버린다. 피를 섞어? 왜? 그것이 이해라고? 휴대폰과 피(혈통)을 하나로 묶어버린 이 어처구니 없는 발상법에서 나는 인간 노무현은 차치하고 대통령 노무현이란 존재, 그 주변의 공부방향을 본다. 기본적 으로 유럽 사회학을 흔히 공부한 자들이 가진 민족은 없다 는 논리, 즉, 혈통이 나 민족이란 근대에 와서야 형성된 개념이란 공부를 받아들인 것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이 논리가 얼마나 보편적이지 않은 것인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에 대 해서는 오리엔테이션 20편 가운데서 설명했다.)는 진보라 불리는 많은 자들이 이 런 공부 속에서 불법체류자 문제를 대한다. 그런데 그 정도가 2006년 그 즈음에 서는 점입가경이었다. 아예 피를 섞자, 그게 세계화다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 비유의 대상이 휴대폰이란 것도 우습다. 삼성 애니콜이 한창 잘 팔리던 시절이었 던 때였던 듯하다. 이것은 그 뒤로 가면 갈수록 더 심각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불법 취업자의 법적 보호 문제를 언급하면서 법으로는 (외국인 불법 체류자를) 내쫓게 돼 있지만 그건 너무 가혹하다. 그래서 정부로서는 법을 어정쩡하게 운용하고 있다 고 고 백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불법 체류자를 이처럼 환대할 수 있을까? 대통령이 나서서 법 집행을 어정쩡하게, 그러니까 잡지 않고 내버려두는 방식으로 운용하 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불법은 대통령의 이 한 마디에서 불법이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 사회 내의 소외 받는 자의 이야기도 아니다. 당시의 분위기에서 불 법 체류자의 범죄가 방송을 타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저 말에 녹아 있다.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의 댓글에는 노무현 정권 당시 이런 철학(?)을 그 정권의 사람들이 어떻게 실제로 구현하려고 했는지 보여주는 요약편이 많이 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페이지82 문재인-페스카마호 집단살인 조선족 변호 유시민-외국인 무료진료사업 시행지침 1인당 1천만원까지 천정배-외국인 노동자 내쫓는 MB정부 국격 운운 노회찬-여수 외국인 보호소 참사 인권 2천불짜리 수준 진중권-불체자 추방 운운하는 사람들은 한국판 네오나찌 전병헌-인종차별금지법 발의 강금실-외국인 지문날인 폐지 이걸 어떤 블로거는 국제매매혼 하면 돈 대주는 개/한민국! 이라고 썼다. 이걸 막말이라고 한 건 나뿐만 아니었다. 당시 이후에도 쭉 이 말은 살아서 오늘까지 이어져 온다. 왜냐하면 정책 자체가 그 방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 바로 노무현 정권의 일관성이었기 때문이고, 지금도 그 영향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를테면 소득이 높은 다문화 가정도 바로 그 이유만으로 유아교육비를 지원받는 아주 우스운 불평등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어서다. 노무현 정권 시절 벌어진 실제 사건으로 봐도 저것은 엄격한 자국민 불평등에 해 당한다. 어느 공장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인 노동자 간에 싸움이 생겼다. 실컷 두들겨 맞은 건 한국인 측이었고. 그런데 조사과정은 간단했다. 경찰은 사건을 외국인 편 에서 취급했다. 인종차별이란 요소가 작용한 것이었는데, 그 이면에는 이 사건 자 체를 그렇게 몰고 가고픈 세력들이 존재했다. 그 외국인 노동자는 이미 개인 노 동자가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그룹, 인종차별주의 반대 그룹, 그리고 다문화주의자 그룹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게임은 너무 간단했다. 감옥도 가지 않고 그냥 비행기 값 줘서 자기 나라 돌려보내는 걸로 끝났다. 어느 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가? 한국 참 살기 좋은 나라다. 누구에게? 페스카마 호 사건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겠다. 간단하게 말해 조선족 선원 6명이 선상 반란을 일으켜서 한국인 선원과 외국인 선원들 11명을 도끼 칼로 다 죽여 버리고 바다에 던지고 나서 배를 중국에 가져가서 팔려다가 항해 기술이 부족한 데다 기름까지 떨어져서 표류했고, 그러다가 일본에서 발각되어 체포된 사건이었 다. 그걸 우발적이라고 한 이 사람은 도대체 뭔가! 변명이 가득 담긴 기사를 그 대로 싣는다. 누구 말이 맞는지 한 번 생각해보라. [사건과 사람] 선상폭력이 빚은 조선족의 우발적 범행 운명 처럼 변호 맡았다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110/h2011101502303521950.htm

페이지83 다문화=세계화 라는 이 환상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일까? 또 저렇게 운명 이란 말을 함부로 붙이는 저 사람의 시각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다. 운명, 참 값어치 없게 쓰인다. 반드시 묻고 싶은 말이 있다. 정말 우발적으로 6명이 11명을 집단 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불가능한 일에 이상한 명분을 붙였다. 왜 저럴까? 노무현의 말이 갑자기 오버랩된다. 불법인줄 알지만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소위 다문화정책의 핵심인 것일까? 그렇게 한 번 분위기가 잡히고 나니 우리 사회는 아주 지독스런 모순 속으로 들 어가는 현상을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걷잡아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다. 민족은 허상이라고 말하는 서구 철학의 영향을 고스란히 대입시켜 보자고 했는데 중국의 재중동포(조선족) 문제는 심층 보도하면서 우리는 한 핏줄이다 를 말한다. 뻔히 국적으로는 외국인인데 그 사람의 원적( 原 籍 )도 아니고 혼혈 수준의 한국인 이라고 해서 한국계를 붙이지도 않는데도 자랑스런 한국인 을 운운한다. 더 심각 한 것은 한국 국적에서 외국국적으로 소속을 바꾼 상태이고, 그 국적을 바꿔치기 한 이유가 병역기피를 위한 것이었음에도 한국에 와서 버젓하게 자랑스럽게도 연 예인 활동을 하는 자를 외국국적의 이름이 아닌 원래 한국 이름으로 불러준다. 개명( 改 名 )을 했으면 그 이름이 자기 이름인데도 말이다. 솔직히 병역 의무를 다 하고 나가서 국적을 바꾼 남자들을 나는 이해한다. 그 정도는 최소한 되어야 인 정되는 그 기준점이 있는 것이다.

페이지84 인종차별금지법안이란 것도 그렇다. 다문화주의자들 눈에는 재중동포들을 동원해 서 자신들도 인종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시위를 하면 다문화주의가 명분을 더 얻 을 수 있을 거라 여겼는지 국회 공청회에서 깽판을 친 기록도 남아있다. 그러니 까 다문화라는 건 진보 한다는 이들 입장에서 보면, 이게 여러 모로 쓸모가 있는 건 틀림이 없어 보인다. 그렇게 난장을 떨면 떨어지는 떡고물이 있었을지도 모른 다. 인종차별? 솔직히 대한민국에서 무슨 인종 차별을 할 일이 있나? 여기 외국 인의 비중이 그만큼 많기라도 한가? 오히려 인종차별이 아니라 자국민 차별금지 법안을 발의해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이건 국수주의가 아니다. 엄연히 벌어지는 현실이다. 그러나 다문화건 세계화건 혹은 민족주의건 간에 더 중요한 건 바로 정체성 에 관한 것이란 걸 노무현도 그랬고 지금 진보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우 리 사회와 역사에 관한, 그리고 우리 현재에 관한, 나아가 우리의 미래에 대한 공감을 가진 바로 그 존재의 본질과 성질 말이다. 피를 섞고 자시고 문제가 다문 화는 아닌 것이고, 세계화는 당연히 아닌 것이다. 그게 어디 휴대폰 몇 대, 아니 몇 억 몇 조가 팔린다고 해서 바꿔질 수 있는 가치가 아닌데, 그걸 후다닥 팔아 먹어버린 저 노무현이란 사람과 더불어 그 아류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중에 정리하겠지만, 나는 반드시 물어볼 말들이 참 많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 가운데서는 납득되지 않거나 혹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그 일들은 모두 정책과 연동된다. 왜냐하면 정권을 가지기도 또 잃기도 했던 사 람들이고 그들이 만든 정책이 벌인(만든) 일들이어서 그렇다. 여기에 무슨 빠 의 심정으로 덤비지는 말기 바란다. 중요한 것은 바로 현재, 지금 이것을 납득하는가 못하는가, 이성적인 판단이 더 핵심이니까. 7. 디스 겨울바다 / 조병화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페이지85 가을 가고 조개 줏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담배 이름 디스 를 떠올리면 아마 40대 이상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그 이하에도 이게 뭐지? 이러면 아마 요즘 유행은 잘 모른다고 봐야 할 것이고. 나도 사실 요즘 아이들 쓰는 말을 잘 모른다. 그래도 레알(real)같은 말은 안다. 모르면 뒤져본다. 이런 새로운 말들이 신조어라면 신조어인 것이고, 세대도 구분 하는 기준점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응답하라 1997 이란 드라마를 마지막 편만 봤는데, 보다가 씩 웃게 되기도 했다. 다 그런 시절이 있긴 있으니까. 디스. Disrespect의 줄임말인 이 말은 힙합에서 연유한 것 같다. 다른 그룹이나 사람을 폄하하거나 공격하기 위한 행동 혹은 노래를 말한다고 하고 그 역사도 제 법 오래 된다. 힙합이란 장르에서는 경쟁적으로 이 디스곡을 만들어내면서 보편 적으로 자리잡는 듯하고, 무조건 폄하 공격보다도 무례나 혹은 친한 친구 사이에

페이지86 서도 디스 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다양한 듯하다. 일단 그래도 코드는 폄하, 경멸 등 의미로 상대를 깐다 라고 봐야 할 것 같은데 개그콘서트 애정남의 정의 로만 빌리자면 둘이 있을 때 얘기하면 농담, 사람이 많을 때 얘기하면 디스 라 고 하니 아마 내 글 가운데 대부분은 일단 디스 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디스 당하지 않는 이유도 있고 당하는 이유도 있겠다. 이건 대체로 존중(repect) 받지 못하느냐 아니냐 구분에 속할 듯하다. 디스의 경우엔 경쟁심 때문에 그렇게 하는 예도 있겠지만 일단 존중은 매우 구체적인 이유가 나오는 법인데, 그 이유 가 타당하지 않을 경우, 그 반대편에 형성되는 건 일단 무시 폄하(disrespect)가 작동할 테니까.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나는 어떤 일(사람)에 대해 존중(respect) 모드인데, 다른 측(사람, 단체 등)은 그게 아닌 디스(disrespect)일 때. 이건 종종 겪는 일이다. 서로 의견교환으로 이 문제를 풀기 어렵다면 힙합에서야 그냥 가사건 노래건 행동이건 디스 곡으로 까면 되지만 일반인의 경우에는 이걸 표현할 장소가 참 마땅치가 않다. 이진법 (인터넷)은 그런 점에서는 이 디스의 천국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디스를 표현하 고 그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합쳐지면 디스는 그냥 하나의 트랜드로 자리잡는다. 이걸 왕따로 표현해도 좋을 거다. 카카오톡에서 이른바 카톡왕따 가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이건 정말 디스 왕따가 맞다. 그런데 그 왕따를 당하면, 인터넷을 안 보면 그만인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손연재가 악풀에 시달려서 슬럼프를 맞았다는 기사를 보면서 그래 디스당하면 기분이 그렇긴 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 기도 하는데, 정작 나는 디스라는 말이 그렇게 나쁘게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유가 있는 디스라면 꽤 유심히 보는 편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 아 니면 뭐 실없는 사람들 말까지 내가 챙겨봐야 할 의무는 없단 편한 마음이 있어 서 그런지 별로 대수롭지 않다. 나도 때론 정신병자 같은 댓글을 보기는 한다. 흥미롭게도 이런 경우에 내가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건 좀 긴 글을 한 번 써봐라 요청하는 건데-마치 디스곡처럼 나름 작품이 되게 말이지-그건 못하는 경우가 거의 99.9%였다. 이명박 정권 들어 생긴 하나의 인식 구조 가운데 하나가 인터넷 여론의 폄하였다. 이 정권은 가급적이면 인터넷에서 형성되는 의논( 議 論 )은 가치를 평가절하했다. 이게 분명 디스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이걸 뒤져봐야 하는 것도 사실이니 이러 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일관하다 정권 끝까지 이르렀다. 그에 비 해 상대적으로 이번 대선은 처음부터 인터넷 선거전이 요란하다. 서로 디스를 하 는건데, 이건 메이저 언론 방송 등에서는 점잖게 접근하지만 사람들을 동원하여 -지지자이건 아르바이트 건 간에-심각한 수준까지 서로 디스를 못해 안달을 하 는 풍경을 요즘 본다. 전쟁통이다. 그런데 제대로 작품처럼 내놓는 건 없으니 볼 게 없다는 하소연도 한다. 시끄럽기만 하지 음악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거다. 힙합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좋은 곡은 듣기도, 들어도 좋더라.

페이지87 자! 이게 현실이다. 이 정도면 디스도 하나의 문화인 셈이다. 잠깐 지나갈 그런 트랜드는 아닌 것 같 고 투팍과 노토리어스 B.I.G 간에 벌어졌던 1996년 투팍 총격 사건 같은 수준으 로까지 번지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고 보여진다. 한국에서야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그 정도가 되려면 우리 사회가 말하는 빠 수준은 되어야 한다. 앞 서도 잠깐 거론했지만 나는 비이성적 빠 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미쳐야 미친 다 ( 不 狂 不 及 )이야 좋은데, 그런데 제대로 미쳐야 그것도 어느 구석엔가 닿는(미 치는) 일이 생기는데 지나치면 오히려 반감을 사기 딱 좋게 되어 있다. 빠가 디 스 당하는 예 는 흔히 본다. 일종의 패거리로 으쓱 했다가 난데없이 소속도 없는 네티즌에게 마구잡이 공격을 당해버린다. 반박을 할 준비를 못한 어느 빠 는 씩 씩대면서 글을 남기는데, 그 글이 마치 빠를 공격하는 자 전부가 바보라는 식 을 유지하면 그 순간 한 번 더 디스 당한다. 앞 편에서 본 것이 피를 섞어가는 것도 세계화라고? 라는 제목이었는데, 그 때 당시의 기사에도 그런 일은 있었다. 이게 고도의 디스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그 정도의 말솜씨는 아닌 것 같았다. 혹시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불법체류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합법 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좁은 생각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닐까요? 만약에 이 땅에 주인이 대한민국이 아니라 세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불법 체 류자에게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는 생각 같습니다. 불법체류자가 증가하는 것은 상관 없을 거 같은데요. 중요한 것은 피가 섞임으로써 세계인이 탄생한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요? 만약에 노무현 대통령 (말)대로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 람들이 외국인과 피가 섞이고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진다면 세계화가 되어서 지 역감정이라는 것도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 아니겠습니까? 노대통령 역시 자기 소 신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노대통령은 한반도의 세계화를 위해서 이제 그만 자리 를 양보할 때가 됐다는 말이죠. 우리도 몇 천년 동안 이 땅에 살았으면 이제 외 국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다른 곳을 알아볼 때가 된 겁니다. 이 아동틱한 말은 과연 디스일까 디스 당하는 노 전 대통령을 안쓰럽게 편들기 한 것일까? 맹동주의( 盲 動 主 義 )란 말이 있다. 아무런 원칙과 주견이 없이 덮어 놓고 남이 하 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라 움직이는 경향 을 말한다. 이 말은 중국공산당 제6차대 표대회(1928.6.18~7.11) 기간, 그 이전 당을 이끌던 취치우바이( 瞿 秋 白 )의 지 도노선을 좌경맹동주의 로, 쳔두시우( 陳 獨 秀 )의 노선을 우경 기회주의 로 공식 규정하면서 그 이후 보편적으로 맹동주의라고 하면 좌경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한국에선 걸핏하면 나오는 것이 바로 좌파 맹동주의라는 단어인데 이건 이데올로 기적 표현으로 각인되게 구사하는 용어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말이 오히려 저

페이지88 변명도 아닌 말들에 더 적합하게 여겨지는 건 왜일까? 문재인-안철수 양자 간의 이진법 상의 호불호에서는 확실히 문재인 류(노빠 류 로 짐작되는)의 독설( 毒 舌 )같지 않은 댓글들이 많이 눈에 띄는 시기다. 앞으로 더해질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이상하다. 단일화를 지향한다면 오히려 이런 식의 물고 뜯는 글은 서로 삼가 하는 것이 기본 아닌가? 서로 디스를 하는 과정 에서 나타날 또 하나의 현상은 둘 다가 폄하되는 현상이다. 까기만 하나, 끼임도 당하는 거지. 그럴 소재야 너무 많아 탈이 아닌가 싶다. 오히려 이런 디스는 접속해제(disconnection)이 더 적절한 표현일 듯하다. 여하 튼 빠 가 되는 것도 조금은 자격을 필요로 하는 듯하다. 최소한의 이성적 판 단법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댓글이라도 잘 쓰지. 8. 노무현의 다( 多 )문화 정책은 사기다. (1) 줄탁 / 김지하 저녁 몸속에 새파란 별이 뜬다 회음부에 뜬다 가슴 복판에 배꼽에 뇌 속에서도 뜬다 내가 타죽은 나무가 내 속에 자란다 나는 죽어서 나무위에 조각달로 뜬다 사랑이여 탄생의 미묘한 때를 알려다오 껍질 깨고 나가리

페이지89 박차고 나가 우주가 되리 부활하리 다문화정책이란 말의 원조는 누구일까? 여전히 논란은 많지만 일단 용어상으로 만 보자면 노무현이다. 2005년 말~2006년 초부터 사용된 이 말은 지금 우리에 겐 아주 지울 수 없는 멍에처럼 다가오고 있다. 그 내용을 한 번 자세하게 살펴 보자. 김대중 정권 시절 받아들인 신자유주의 노선을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바 로 국민연금이다. 이것이 왜 강제가입이란 형식으로 유지되는지 생각하면 대단히 불유쾌하기 그지 없는 강제복지를 시킨 셈인데, 그것이 국민을 고려한 달콤한 것 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건 거의 직접세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후손들을 담보로 한 아주 비정상적인 강제복지를 만들어낸 것이고,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 로도 도대체 어느 수준의 문제를 일으킬지 상상이 가지 않는 제도에 해당한다. 또한 비정규직 법도 따지고 보면 제도적 저임금화 구조를 정착화 시키기 위해 만 들어진 것이다. 왜 이렇게 노동시장에서 저임금 노동력이 급하게 필요했는가는 IMF사태를 해결한다는 명복으로 백기항복을 했다는 한국 경제의 구조조정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본질은 노동시장의 견고성 해체다. 기업구조조정이 문제가 아 니라 노동시장 자체가 유연화란 명목으로 해고 고용의 주도권을 기업에게 넘긴 것이고, 그 기업은 낮은 임금의 노동력을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필요로 했고 정부 는 이에 맞춰주는 형식으로 후진국 노동력을 대규모로 불러 들이는 작업이 개시 된 것이었다. 이것이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분으로 내걸렸다. 시장만능주의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IMF 하에서 한국은 주주자본주의를 실현함 으로써 이미 금융자본주의 카르텔에 의해 국경 제약이 없이 이익을 실현할 장소 로 활용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특히 주주자본주의는 상당수 한국 기업의 지 분을 해외 금융카르텔에 넘겨주는 것으로, 당연히 이들의 이익 극대화, 분배 극 대화를 위해 노동임금의 저하는 첫 번째의 조정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대 중의 노예화가 진행된 셈이고 그 기초 가운데 기초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노동 시장인 셈이다. 이것을 그냥 진행하면 반발이 당연히 나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저임금 노동력의 대량 유입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데, 한국처럼 민족주의적 기반이 강한 나라의 경 우에는 이것을 해체할 방법을 찾기가 무척 어려웠지만 IMF사태는 그것을 가능하 게 만들었다. 즉, 기업구조조정으로 인하여 노동시장뿐만 아니라 국민정서가 국가 생존(금 모으기 운동을 떠올리면 된다.)에 모아지는 등 일단 혼잡국면에 들어간 상태에서 단순 노동자를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네팔,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중국 등에서 마구잡이로 들여오기 시작한다. 물론 이들에게는 한국 노동시장의 최저 수준이 그들의 수십 배 수준에 달하기 때문에 목숨을 걸만한 가

페이지90 치가 있는 대상이 되었고, 그에 비해 서민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유입으로 오히려 노동시장 자체가 왜곡되는 걸 감수해야만 되는 구조가 아주 강제적으로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사회의 암묵적인 공감대가 있는 것처럼 포장되며 형성되어 버린 것 이다. 정권과 국제금융카르텔, 기업의 의도는 그렇게 적중했다. 여기에 분위기를 잡기 위해 동원된 것이 바로 소위 인권단체들이다. 외국인인권 단체를 비롯한 어디 듣보잡의 사이비 단체들이 인권 하나를 무기로 나섰는데, 이것은 꽤 돈벌이가 되는 장사로 번졌고 그들의 활동 영역은 자꾸 넓어지기 시작 했다. 이를테면 국제결혼 비즈니스도 그 중 하나에 속한다. 이 형태가 자꾸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나온 것이 바로 노무현 정권에서 나온 다문화 인데, 인권에서 다문화단체로, 그리고 한 걸음 더 나가서 국제결혼을 통한(외국 남성과 한국 여 성간) 다인종 혼혈화 증대까지 급속하게 진행이 되는 중인 것이다. 여기에 탈북 자 브로커를 비롯하여 비자 장사 등은 이 흐름 가운데 끼인 하나의 작은 사건들 처럼 툭툭 불거졌지만 이 또한 큰 흐름을 탄 사건사고였음은 당연하다. 왜 이런 상황을 언론이나 어떤 정치세력도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 것일까 의아하 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이 단순히 사회가 암묵적인 동의를 했기에 침묵 하는 것인가를 두고 갈등이 많이 생겼다. 그 바탕의 이유를 찾아가보자. 우선 그 이유의 첫 머리는 이해관계가 같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흔히 김대 중-노무현 정권을 진보라고 부르지만, 여기서는 전혀 진보와는 상관이 없는 정책 행동이 벌어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단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기업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책노선에서 서민은 노동시장에 있어서의 기 업 이윤 극대화를 위한 매개에 불과하고, 또 그렇게 취급되었다. 저임금화를 통한 기업경쟁력 강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 그래서 줄기차게 대두되는 사회의 양극화 구조조차 외면하고 성장우선이라는 기치를 저 2개의 정권 모두 표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겐 명분이 하나 있었다. 이론적인 것만을 배워서 민족은 근대에 형성된 개념 이라는 것, 그래서 민족주의에 함몰되는 것은 세 계화에 뒤떨어지는 것이라는 바로 이 엉터리 관념이었다. 이걸 국제금융 카르텔 은 적절하게 활용하였고, 보수라 불리는 한국 내의 신자유주의에서의 지배적 계 층 또한 이를 최대한 이용해먹었다. 그들에겐 저임금의 시장이 무너지면 한국에 서의 장점이 사라지고, 또 이미 주주자본주의화 된 기업(대기업) 입장에서는 그 렇게 될 경우 이익 극대화를 꾀할 방법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 오히려 이 2개 정권에서 시행해준 노동시장 유연화와 다문화 정책은 반가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 다. 여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다문화가 가진 문화 라는 단어였다. 이것은 문화가 가진 속성이 오랜 시간, 최소 몇 백년에 걸쳐서 형성되는 것이다 보니 이를 문화화해서 선전하는 것에는 분명 제약이 있었다. 특히 앞서도 언급된 것처럼 다문화는 정체성 이 없다 보니 사실 문화가 아니다. 문화의 핵심은 정 체성이다. 그걸 만회하기 위하여 다문화 가정을 우대하고, 또 방송은 연일 다문 화를 받아들이는 것의 장점과 애환 등에 호소하는 프로그램을 연신 내보내게 된

페이지91 다. 이건 아주 지독스러운 세뇌작업이었다. 거기다가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를 꺼 내면서 다문화가 마치 선진적인 하나의 현상처럼 그렇게 읊어댔다. 그러나 이건 사기였다. 미화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목적은 단 한 가지로 압축되었다. 바로 한 국 노동시장의 저임금화였고, 그것은 장기적으로는 한국 사회 내에 잘 길들여진 서민층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특 단의 대책이 없는 한 쭉 이어질 일이다. 그러나 정작 다문화 정책은 유럽 각국에서는 이미 실패라고 손을 든 상태다. 이 뉴스는 한국에서는 그냥 묻어버리고 지나가려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그에 대한 심층분석을 하는 언론이 단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그게 진보건 보수 딱지를 붙 이건 간에-은 이 사안 자체가 대단히 통제되고 있는 문제라는 걸 잘 알 수 있다. 유럽의회도 다문화주의 실패론 동의 (2011.2.1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916976 토르뵤른 야글란 유럽의회 사무총장은 FT와의 인터뷰에서 다문화주의 탓에 국가 안에서 별개 사회 (parallel society)들이 성장하고 있다 면서 이를 당 장 중지해야 한다. 일부 별개 사회는 위험하고 급진적인 생각을 전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르코지도 다문화정책 실패 선언(2011.2.11)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view.html?cateid=1046&newsid=20110211153110424&p=m unhwa 사르코지 대통령은 "물론 우리는 모든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지만 우리들은 여 러 커뮤니티가 공존하는 하나의 사회를 원한다"며 이렇게 밝혔다. 그는 "만약 당 신이 프랑스로 왔다면 (프랑스라는) 한 사회에 녹아 드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프랑스에서 환영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하고 "프랑스는 오랜 생활방식, 남성과 여성 간의 평등 그리고 어린 소녀들이 학교를 다닐 권리 등에 대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들은 이민자들이 어느 곳에서 왔는가라는 그들의 정체성에 대해 너무 많은 관심을 쓰 는 바람에 정작 그들을 받아준 프랑스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 았다"고 설명했다. 캐머런 英 총리 다문화주의 정책은 실패 (2011.2.6)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2/06/2011020600235.html?dep1=news&dep2=h eadline1&dep3=h2_02 캐머런 총리는 이날 독일 뮌헨 안보 회의 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참 석한 패널 토론에 참석해 영국은 그동안 서구적 가치를 거부하는 민족적 혹은 종교적 소수 집단에 대해 불접촉 관용(hands-off tolerance) 정책을 써왔 지만 이런 정책은 실패했다 며 대대적 정책 전환을 시사했다.

페이지92 메르켈, 독일은 다문화 사회 구축에 실패했다. (2010.10.17)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01017_0006424100&cid=10105&pid=10 100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16일 다문화 사회를 이룩하려던 독일의 시도는 " 완전히 실패했다"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이날 베를린 남쪽의 포츠담에서 자신 의 기민당(CDU) 청년 당원들에 행한 연설을 통해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 람들이 독일 사회에 통합되지 않은 채 우리와 이웃해 살도록 허용하는 (다문화) 접근방식은 400만 무슬림이 살고 있는 독일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며 이같이 평가 했다. 자! 결국 돌아오는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다문화 정책은 유럽에서는 실패로 낙인이 찍혔다. 그 원인도 정체성 문제와 별개 사회 형성 그리고 소수의 집단화 로 인한 문화적 공감대 형성 불가까지 다양하다. 저곳이 유럽이란 걸 생각하자. 민족이란 근대에 만들어진 개념을 전파한 곳이다. (그것은 유럽이기에 가능한 분 석 결과였다. 아시아의 특색은 유럽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곳에서조차 다문 화는 공존하기 어려운 이슈가 되어 버렸다. 한국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유럽 경제에서 금융투기자본이 대 량의 동유럽계 저임금 노동자가 파고든 것은 물론이고 북아프리카 및 중국, 중동 등 저임금 외국인이 유입된 결과가 바로 저런 현상이다. 다인종과 저임금은 항상 함께 가는 개념으로 작동했고 그것은 유럽이나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피 해를 가장 많이 보는 계층 또한 지배층이 아니라 바로 서민층이다. 다수의 대중 이 그로 인해 희생을 당한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에서 지난 10여년 간 형성된 이른바 사이비 인권단체( 인권쟁이 로 부르는 게 더 정확한 표현 같 다.), 다문화 센터, 그에 동조한 관공서와 지방자치단체, 더 나아가 바로 정권이 있었다는 사실이 차이라면 차이일 수 있다. 그 중심에 노무현 정권이 있다. 바로 다문화 라는 것이 어떤 작용을 할지 뻔히 알고도 그것을 열심히 선전하기 시작한 바로 저 정권 말이다. 그에 대한 책임을 만일 노무현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변명할지 나는 많이 아주 많이 궁금하다. 약속 이나 한 것처럼 2010년부터 유럽은 독일, 영국, 프랑스, 유럽의회에 이르기까지 다문화정책의 실패를 거론했다. 노무현 사후 말이다. 그럼 누가 이 다문화정책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어서 그 선택의 피해가 도대체 우리 사회의 어디까지 미쳤는지 보기로 하자.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현재 시점, 그리고 미래의 문 제이며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정체성에 관한 아주 심각한 위협에 해당하기 때문이 다.

페이지93 9. 노무현의 다( 多 )문화 정책은 사기다. (2) 우표 한 장 붙여서 / 천양희 꽃 필 때 널 보내고도 나는 살아남아 창모서리에 든 봄볕을 따다가 우표한장 붙였다 길을 가다가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부치고 돌아서려고 내가 나인 것이 너무 무거워서 어제는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 않는 네 슬픔 같아 떨어진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빗속을 지나간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미움도 늙어 허리가 굽었다. 꽃 질 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 볼 때까지 험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 벽이 될 때도없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한 한 사람의 눈먼 자 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한 적 있나 누가 한 사람을 나 보다 더 사랑한 적이있나 말해봐라 우표 한장 붙여서 부친적이 있나

페이지94 2005.1.16 박노자의 한겨레 칼럼은 시점 상으로 봐서도 이른바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대한 하나의 사건을 정의한 내용으로 현재 드러난 한국 사회의 외국인 문 제를 들여다 보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다. 박노자의 칼럼은 그가 한국학을 전공한 푸른 눈의 한국인으로써 한국을 제3자의 시각에서 보는 이미지 속에서 꽤 많은 이들이 열독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진보로 불리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 의 한국 귀화 전 이름은 티코노프 블라디미르. 러시아인이고 또 진보주의 역사학 자, 안티 파시즘적 언론인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한국 사회의 각 분야 모순 점을 진보주의 관점에서 지적하고 있으나 그의 시각이 외국인 노동자에 이르면 또 다른 모순을 낳고 있음을 잘 볼 수 있다. 반한 단체? 출입국관리사무소!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1013000/2005/01/001013000200501161827006.html 한국에서 수년 동안 피땀을 흘려 일해온 노동자들이 불법 외국인 이라는 딱지가 붙여져 친구나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말도 못한 채 길 가다가 잡혀가고, 합법 체류 의 노동자들마저도 불법 동료들의 주소를 대라 는 단속반들에게 난타를 당하고, 심지어 안산외국인노동자 센터의 목사인 일개 성직자마저 구타와 모욕을 당하는 광경을 보고 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공포를 느끼며 살고있다. 이슬람 테러가 살인을 다반사로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 단속반은 누굴 죽인 것도 아니지 않았느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국에 오기 위해 사채로 천만원대의 빚을 지고 정당한 월급도 받지 못한 채 강제로 내보지는 것은 그들에게 사형선고에 가 깝다는 사실을, 사채업자의 횡포가 극심한 한국에서라면 이해돼야할 만도 하다. 단 속반의 업무수행 에 대한 공포로 몇 개월 동안 안식처를 떠나지 못하고 끼니도 못 챙기는 국가적 테러리즘 피해자들의 사정을 생각보야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 관련의 방침이 위에서 하달되는 것이고 단속반이 집행할 뿐이라는 변명의 소리가 들릴지 모른다. 그러면 동북아 허브 를 꿈꾸는 국가에서 유쾌한 체류 분위기를 조성하라 는 방침을 내렸을 법한 많은 합법 체류자를 대하는 태도 를 보자. 이 국가를 손아귀에 넣어 보려는 구미인 일본인 투자자들이야 당연히 편 의를 제공받아 목동에 가서 떨 일이 없지만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한국인 남편을 둔 필리핀 부인이나 베트남 유학생, 중국인 강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말투와 고 압적 태도로 누명이 짙은 그 곳으로 갈 때마다 무서운 공포를 느낀다 고 말한다. 차별과 멸시의 벽이 허물어져 유쾌한 체류 분위기 가 조성됐다면 한국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연결시켜주는 친한파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일상적 공포에 적대감만 느끼는 영원한 이방인 으로 만드는 것이 반한 활동 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근엄한 정장 풍의 이 반한 분자 들이 끼치는 해악을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을까? 숙련 비숙련을 포함한 외국노동에 대한 근로허가제와 차후 영주권 부여의 가능성 을 근간으로 하는 포괄적인 근로이민 수용의 제도가 근본대책이 되겠지만, 우선

페이지95 빠른 시일 내에 인종차별을 방지하기 위한 법적 행정적 장치들이 마련돼야 한다. 미국 사업가에게 깎듯이 존댓말을 썼다가 옆에 있는 베트남 노동자에게는 갑자기 봉건시대 노예 대하듯 하는 관료가 자신의 행동에 무거운 법적 책임이 따를 줄을 알게 되어야 한다. 나는 이 칼럼을 3번 정독 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 것이 박노자는 정상적인 한 국 사람이 아니란 것이다. 그가 아직도 이런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아래의 견해 를 잘 살펴봐야 한다. 첫째, 수 년 동안 피땀 흘려 일한 노동자들이 불법 외국인 이란 딱지를 붙인 다고 아예 정의한 대목이다. 구로 안산 등지에 있어본 사람들은 안다. 그곳에서 과연 피땀 흘린 사람들만 있는지 아닌지. 박노자의 눈에는 한국으로 들어온 모든 외국인들이 아주 선량한 외국인 노동자로만 비친 모양이다. 아니다. 어떤 사회건 마찬가지겠지만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주 질 나쁘고, 또 한국에 들어와서 그렇 게 질이 나빠진 케이스가 대단히 많다. 어떻게 외국인 노동자=피 땀 흘린 사람 이란 정의를 이렇게 간단하게 할 수 있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 단순화다. 둘째, 유쾌한 체류 분위기를 조성하라 는 대목이다. 아마도 외국인 노동자에 게도 관광객 같은 그런 편안함을 조성하는 것이 평등이며 또한 인권이라는 시각 같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바로 외국인에 대한 차별에 해당한다. 그토록 박노자 가 말하는 바로 그 내용이다. 한국 사회는 이 사회가 가진 보편성이 존재한다. 누 군가를 특별하게 대한다는 것이 필요가 없다. 백인에게만 친절하다? 그 또한 웃 기는 환상이다. 왜 특별한 분위기, 그런 유쾌함을 우리가 주어야 할 이유가 있는 가? 거기에 무슨 동북아 허브 운운을 하니 이 사람 정말 제정신인가 싶다. 동북 아 허브는 정치적 용어이지 이런데 사용할 말이 아니다. 아! 2005년이지. 정부의 애드벌룬을 끌어오느라 너무 수고했지만 인용문구가 틀렸다. 셋째, 인종차별을 방지하기 위한 법적 행정적 장치를 말한다. 박노자는 알고 있 으면서도 이런 소리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유럽에서 말하는 인종차별은 외국인에 대한 편안한 분위기의 조성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2010년부터 유럽 전역에 걸쳐 만들어지고 있는 다문화 정책의 실패에서도 드러 나듯이 외국인 노동자의 영입을 통한 저임금 구조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안전 장 치로 형성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잘 구사하기 위한 모델을 적용함에 있어 인종차별이 가진 유럽 내의 반발심을 법률적으로 억제하기 위하여 강력한 인종차별금지 정책이 사용된 것이다. 앞서도 봤지만 2005년 시점엔 90년 대부터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IMF사태 이후에 급속하게 한국의 저임금 구조 만들기 목적으로 도입되고 있던 때였다. 역으로 인종차별이 벌어지던 때였다. 바 로 한국 내의 서민들이 이들로 인하여 역차별에 시달리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이 었다. 그런 상태에서 인종차별 운운을 했다. 결국 인종차별법안도 공청회를 거쳐 발의되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누구를 위한 법률이었는가를 생각해보자. 그들이 과연 한국 사회 문화의 정체성 속에 녹아들 수 있는 기본이 되어 있는가? 없다. 지금까지는 전혀 그런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

페이지96 넷째, 외국인 노동자로 인한 유럽의 폐해를 정말 박노자는 모르고 하는 소리였을 까? 유럽에서 네오 나치즘이 나타난 배경에는, 유럽에서 인구 증가정책으로 아기 1명을 낳을 때마다 월 수십 만원씩의 보조금을 주고, 이 보조금은 불법 입국자 등에게도 적용하고, 아기를 낳을 경우 합법체류 자격을 주는 제도를 시행했었는 데, 아프리카-중동 쪽에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럽으로 입국하여 아기를 낳고, 아기를 낳고서 받는 보조금으로 휴가도 다니고, 전자제품을 사는 데에 정부 재정이 낭비되면서, 진짜 도움이 필요한 유럽인들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못한 상황이 수십 년을 지속하면서 발생했다. 스웨덴의 경우에는 출산장려금으로 16세 까지 매월 1050크로나(약 16만원)을 지불하는데 피임개념이 없는 이민자들이 아기를 3명 이상 낳고 그 보조금으로 놀고 먹는 꼴을 보면서 분통이 안 터지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이 이제 한계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 로 유럽이다. 그걸 2005년 당시에는 몰랐던 것인가? 다섯째, 박노자는 이런 외국인 노동자 우대정책이 한국 사회에 어떤 폐해로, 대 중 다수에게 어떤 악영향을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한 적이 있는가? 저 짧 은 칼럼에서는 다 담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전혀 그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친한파? 그게 잘 대해준다고 형성되는 건가? 반한 활동? 뭔 이런 단어를 구사하 나 싶다. 소수를 위하여 절대 다수가 희생을 해야 하는 구도에 대한 고려를 아예 하지 않는다. 파시즘 연구가 지나쳐서 그런가? 한 마디로 이 칼럼을 읽고 난 느낌은 2005년 당시에 왜 급속하게 다문화와 다문 화 정책으로 연결되었는가를 이해하기에 족하다는 것이었다. 묘하게 노무현의 얼 굴이 자꾸 오버랩된다. 딱 1년 정도 뒤에 충청도에 가서 했던 발언이 떠오르는 것이다. 피를 섞는 것이 세계화 라 했던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폐해를 모두 보고 있다. 기사 하나 링크 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서 벌어진 일이지만 이제는 알려진 것 만 해도 수백 건은 되고 알려지지 않은 것을 합치면 도대체 상상이 잘 가지 않는 다. 오원춘 사건이 우리에게 준 충격은 빙산의 일각이란 판단은 과히 틀린 것 같 지 않다. 13세 女 중생 잔혹살해 왜 언론은 침묵했나 http://www.breaknews.com/new/sub_read.html?uid=79375&section=section3 한 마디로 메이저 언론은 이런 기사 잘 안 다룬다. 그러니 이 기사의 댓글 한 번 자세히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130만 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라고 하지만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건전한 노동 과 관련이 없는 범죄자 혹은 범죄 예비자라고 하는 건 오원춘 이 너무 잘 확인시 켜주었다. 지문은 남아있지만 나오지 않는 경우, 그건 거의 100% 외국인 노동자 다. 왜냐하면 지문날인제도가 폐지되고 나서 벌어지는 아주 웃기는 해프닝이다. 난 강금실이 왜 외국인 지문날인을 폐지했는지 아직도 궁금해 미치겠다. 그럼 저

페이지97 사람들을 식별할 방법은 도대체 뭔가?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길래 그냥 포기 한 것인지 궁금하다는 말이다. 도대체 노무현 정권의 정체성은 무엇이었는지 다시 새겨보게 된다. 외국인 지문날인제는 반드시 다시 부활되어야만 한다. 소위 인권단체라는 사람들의 행태를 한 번 보자. http://blog.daum.net/choi1220hm/8483370 위장결혼에 협조해주고, 서류 위변조를 협조하는 브로커다. 한 마디로. 단체의 규 모가 크면 클수록 이들은 가히 불법도 인권, 그것도 외국인 인권이란 명목으로 마구잡이 저지른다. 물론 합법의 틀을 유지하면서 하지만 결론은 불법이다. 왜 손 대지 않는 걸까?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eejik2006&logno=120163678 참 좋은 인권단체. 외국인 노동자 쉼터도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원칙을 지키 는 것, 이게 중요하다. 이를테면 정상적인 방법 으로 또 불법체류자를 수용하지 않는 것은 기본에 속한다. 가출한 국제결혼자나 행동이 이상한 외국인 은 그런 곳을 기웃거리다가 별로 이익이 없을 것 같으면 이익을 만들어줄 단체로 몰린다. 그렇게 소문이 나면 그곳으로 많이 몰릴 수밖에 없고 그 순간, 거기는 브로커 천 국이 된다. 이런 식이라면 소문난 곳이 오히려 불법의 온상이라고 보는 것이 정 상적인 판단일 것이다. 그러나 특히 여성인권단체 가운데 이주민여성지원단체만 해도 지금 수백 개가 난 립해 있다는 걸 아는 이들은 드물다. 수백 개? 그럼 이들의 소득원은 도대체 뭔 가? 바로 이주민 외국여성이다. 그들이 있으니 정부지원금을 받으면서 활동한다. 그들은 어떤 입장일까? 외국인 여성은 피해자, 한국 남성은 가해자 라는 공식 이 정해져 있다. 매년 5천 건 정도의 결혼 사기가 발생하는데, 그 중 상당수는 여성에 의한 것이다. 돈만 들고 도망가는 경우, 소위 다문화센타 이주민 여성지원 단체는 모두 남편 측의 폭력 때문이라고 낙인을 찍어 버린다. 그리고 앞서 본 사 례처럼 남편이 없이도 그 여성이 요구하는 가족 초청부터 시작해서 아예 결혼사 진을 위조까지 해서 업무처리를 하는 브로커 집단도 있다. 이들이 팔고 있는 인 권 은 장사수단에 불과한 셈이다. 월 100만원 간신히 버는 한국인 비 정규직보다 월 150만원 에 하루 10시간 남 짓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더 보호해야 한다는 인권쟁이들 의 주장과 미성년자 를 성폭행하는 외국인노동자를 비호하면서 합리적인 성욕해소 방법이 없는 한국 이 문제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인권쟁이들까지 이르면 도무지 인권 을 정의하는 국어사전을 다시 써야 할 판이란 생각에 미친다. 예전에 베트남신부가 정신병자 신랑에게 죽은 일을 가지고 몇 년을 진보 언론이

페이지98 란 곳에서 우려먹은 적이 있다. 한국인 신부였더라도 똑같은 일을 당했을 상황이 었다. 정신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치료와 요양이 가능한 정신병 원은 전국적으로 3개뿐이 없다고 한다. 그나마도 월 120정도를 가족들이 부담해 야 하는 실정이란다. 월 120만원을 꼬박꼬박 부담하는 것보다 몇 백 만원 돈을 들여서 여자를 사오는 게 더 싸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현실이 문제라는 것을 생각 해야 한다. 이런 문제 때문에 외국에서 여자를 사오는 외국인 신부제도는 다른 나라에서도 부작용이 심해서 비영리단체의 비영리적 운영만 허용하면서 차츰 개 선이 되었는데, 한국에서는 여전히 그런 제도를 도입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너 무 커진 사이비 인권단체 여성단체 외국인지원단체들의 입김이 이런 건설적인 제 도를 도입하는 것마저 막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지방자치 단체의 경우 외국인 신보와의 맞선비용, 결혼 성공 시 천만 단 위의 정착금, 외국인 신부의 모국 방문 비용, 신부 친정 식구들의 수술비용, 다문 화 가정 아이들의 학비와 문구류 비용 등을 지원하고, 대학 입학 때 특례 입학 등의 혜택도 준다. 게다가 다문화 가정에 대해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원했는지 여 부를 중앙정부에서 일정 기간마다 감사를 해서, 지원한 실적이 없거나 목표치에 미달하면 재정지원 등에서 불이익을 준다. 어떤 사회복지 지원에서도 이런 식의 후속조치를 하는 경우는 없다. 게다가 이건 다문화가정지원법이라는 법적 보장까 지 하는 것이다. 파워블로거 일본 여성 고마츠 사야까가 한국의 선심성 다문화 정책을 정면 비판 하고 공개적으로 무료보육료 지원혜택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 2012.1.15의 일이었다. 그녀가 블로그에 올린 내용을 보면 너무 흥미롭다. 다문화 가정이라서 보육료가 전액 공짜라는 것. 주변 한국인 가정을 비교해보면 재산에 따라 보육료도 결정되고 공립 어린이집 들어가는 것도 참 어려운데 주 위에 억대 연봉을 받는 한국 지사의 외국인 중역이 한국여자와 결혼해 보육료를

페이지99 지원 받거나, 어린이집에 등록만 한 채 다니지 않으면서 현금만 받는 다문화 가 정도 있다 고 꼬집는 대목에서는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건 그냥 주먹구구식이 아니다. 뭔가 홀리지 않고서는 이런 정책을 쓴다는 게 나라살림을 하는 자의 기 본이 되기는 어렵다. 이게 단순히 정권 홍보만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일일까? 아니다. 이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특히 노무현 정권 시기 최악으로 돌입해서 마침내 지금은 이를 고착화하는 쟁이들 이 개입하여 인권이란 이름으로 외국인 복지라는 명분으로, 또 시장만능주의를 포장하기 위한 다문화주의를 내세우는 사 기 목적으로, 궁극적으로는 한국 사회 내의 서민들을 저임금 구조에 묶고 다인종 사회니 뭐니 하면서 정체성과 고유한 특성 자체를 말살하려는 계략으로 밖엔 보 이지 않는다. 한 마디로 정신 나간 짓을 버젓하게 하고 있다. 건강보험의 경우를 보면, 한국에서는 외국인노동자 10여명 이상이 1명 것을 가 지고 돌려쓰는 형편이고, 이걸 단속하거나 의사가 고발하면 반인권적인 행동으로 비난 받고 공격받는다. 신고해도 형식적 단속만 할 뿐이다. 완전히 자국민 불평등 대우법을 적용하는 셈이다. 심지어 이런 건강보험 미 가입자를 위해 보건부에서 시행하는 제도를 보면, 건강 보험 미 가입 외국인노동자들에게 1회 1천 만원까지 의료비를 지원하고, 1천 만 원을 초과하더라도 형식적인 절차를 통해 승인 받으면 거의 한도 없이 의료비- 수술비를 포함해서-를 지원받는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냐 하면, 이 게 아시아 전체에 소문이 나서, 동남아 재벌급의 부자들이 한국에 관광 와서 의 도적으로 체류기간을 넘겨 불법체류를 하고, 종합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이며 요양 을 받는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현상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이런 제도 를 고치자고 하는 정부도 없고, 또 사이비 인권 단체는 이런 제도를 고치는 것이 반 인권적이라고 헛소리를 한다. 왜 그렇게 인권 타령을 하는 것인지, 외국인 인 권이 뭐길래 그렇게 하는지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수습기간에 월 90만원~100만원을 받는 외국인노동자는 불쌍하고, 정식직원인데 도, 철야 근무하면서 월 100만원 받는 내국인 노동자는 외면하는 이 위선적인 인권쟁이들의 진면목이 까발려져야 한다. 다문화 센터니 외국인여성센타니 외국 인권센타니 하면서 불법체류자들, 의도적 가출 사기결혼 여성들에 불법입국 알선 까지 이르는 저 과정에서 벌어지는 그 떡고물의 정체가 면면 세세히 밝혀져야만 한다. 미성년자를 성폭행하는 외국인노동자가 잘못된 게 아니라, 외국인노동자의 성욕을 해소시키기 위한 제도와 방법을 제공 못한 한국이 잘못이라는 이 엄청난 궤변쟁이들의 진면목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뻔히 선상반란으로 십여 명을 집 단 학살한 조선족들을 변호하면서 우발적 범행 운운 해버리는 그 작태에는 한숨 이 절로 나온다. 그걸 인권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잘못된 것이다. 차라리 그냥 국선변호사 세우는 걸 지켜봤어야지 무슨 뉴스에 나올 이야기라고 등장하고, 그 리고 운명 을 말하는 문재인의 모습이 다문화 정책과 겹쳐지면서 대단히 짜증스

페이지100 럽게 오버랩된다. 네팔 근로자 시신이라도 고향에 보내줬으면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20926160614340 이 기사의 댓글을 한 번 유심히 보기 바란다. 140만원 월급 받는 사람이(네팔에 서의 돈 가치로 따지면 1400만원은 넘는다.) 빚 때문에 자살했다고 시신 운구비 용을 말하는 이런 목사에게 이제 사람들은 동정심을 가지지 않는다. 왜? 인정에 호소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부당성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독거노인들, 결손가 정을 생각하기에 그렇다. 어디서 묘한 인정주의를 자꾸 집어 삼키려고 한다. 거기 에 인권을 붙이는 일, 이젠 그만해야 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반이다. 지독스럽게 허술한 인권개념을 어디서 주워 듣고 그것이 마치 대단히 최선이고 자랑할만한 적선( 積 善 )의 일인 양 생각하는 자나 혹은 그걸 이용하는 자들, 그 길을 활짝 열어준 노무현 정권의 그 결정을 생각하게 된다. 소위 진보쟁이 로 앞줄에 선 자들이 한국에 적용하려고 했던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알고나 있 는지 묻는다. 그건 그들이 그토록 열심히 목청 높인 노동자의 인권을 유린하고 또 서민의 복지를 빼앗아가며, 더불어 한국 사회의 정체성과 고유한 특색을 말살 하는 시도를 방조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기름에 불을 끼얹는 행위였다는 걸 물 어봐야 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이 원죄( 原 罪 )를 도대체 누가 짊어 지려나 모르 겠다. 10. 더 드릴 말씀이 없다. 살그머니 / 강은교 비 한 방울 또르르르 나뭇잎의 푸른 옷 속으로 살그머니 들어가네, 나뭇잎의 푸른 웃도리가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브롯치도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도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가슴호주머니도 살그머니 열리네 햇빛 한 자락 소올소올 나뭇잎의 푸른 줄기세포 속으로 살그머니 살그머니 걸어 가네 나뭇잎의 푸른 가슴살을 살그머니 살그머니 쓰다듬네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 폭풍에 펄럭펄럭 휘날리는데

페이지101 나뭇잎의 푸른 가슴살 살그머니 살그머니 빙하로 걸어가는데 살그머니 살그머니 빙하를 쓰다듬는데 나뭇잎의 푸른 웃도리 나뭇잎의 푸른 브롯치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 나뭇잎의 푸 른 가슴호주머니, 나뭇잎의 푸른 피톨들을 살그머니 살그머니 살그머니 감싸안는 데 살그머니 너의 속살을 벗기고 가슴호주머니를 만지니, 살그머니 열리는 너의 수 천 혈관의 문 시간이 한층 두꺼워지네 우리의 사랑도 살그머니 두꺼워지네. 우리는 어떤 사안에 당면한 상태를 입장 ( 立 場 )이란 단어로 자주 쓴다. 이건 일 본에서 들어온 말이다. 다치바 라는 건데, 우리말로는 이게 아마도 처지 ( 處 地 ) 정도가 옳을 것이다. 그런데 처지라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가 이미 입장 을 너무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위치, 형편, 상황, 자리, 직책, 방침, 자세, 견해, 의견, 주장, 판단, 해명, 생각, 체면, 시각, 인식, 원칙, 뜻, 심정, 동향, 노선, 의지, 결심 등의 경우에도 사용을 해버린다. 참 복잡하다. 대신 만병 통치약처럼 그렇게 입장이 라고 해버리면 그게 통하기도 한다. 물 건너 불 보듯 참 재미난 말이라서 한 번 뽑아본다. 일이 잘되건 못되건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 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의 정치가 그렇다는 말이다. 지난 세월 정치의 효용성을 말할 때 제법 많이 인용된 것이 이건희 회장의 베이징 발언이 있다. 행정규제, 권위의식이 없어지지 않으면 21세기에 한국이 일류 국가로 될 수 없 다. 우리나라는 행정력은 3류급, 정치력은 4류급, 기업경쟁력은 2류급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YS시절이었다. 1995.4.13 중국 방문 중에 디오오위타이( 釣 魚 臺 ), 베이징 주재 특파원과의 오찬을 겸한 기자 간담회 장에서 1시간 35분에 걸친 발언 중에 나온 이 말로 YS가 격노했다. 여러 버전이 전해지지만 전부를 옮겨보면 이렇다. 대통령의 개혁의지에도 불구하고 행정규제와 권위의식이 없어지지 않는 한 21

페이지102 세기에 우리가 앞서 나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현재 위치를 지키 는 것조차 어려울지도 몰라요. 반도체는 장쩌민( 江 澤 民 )중국국가주석이 몇 비트 냐, R&D 비용은 얼마냐 고 물을 정도로 관심을 많이 갖는 분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반도체 공장 건설을 신청해도 허가가 나오질 않아요. 공장 건설 하는 데 도장이 1천 개나 필요합니다. 첨단산업이라고 우대받는 반도체가 이 정도니 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정 부는 행정규제가 많이 완화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인 데 이 정권 들어서고 나서도 크게 완화된 게 없습니다. (중략) 솔직히 얘기하면 우리나라는 행정력은 3류급, 정치력은 4류급, 기업경쟁력은 2류급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삼성과 정부에 대해 밀월관계란 말도 있지만 사실은 가장 앤티(anti 적대적) 한 관계입니다. 자동차 허가도 부산시민이 반발하니까 내준 것뿐이지요.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00000000007/3/70000000000007/19980924/7380898/1 이건희 XXX 알려진 바대로 YS 입에서 육두문자가 나왔다는 거다. 선거에서 덤벼든 정주영 현대 회장을 사정 없이 혼내고 있던 차에 벌어진 이 해프닝은 그냥 끝난 게 아니 라 허겁지겁 발언 와전으로 달래고, 4월 18일 귀국회견에서 아직도 사회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는 이회장의 말이 나오고도 한참 곤욕 모드를 유지했 다. 그 후 8월 4일이나 되어서야 YS 독대 지시가 나오고 7일 만나고서야 끝났다. 이어 10일 파격적 중소기업 지원방안 발표로 용서를 더 갈구하는 납작 엎드리는 형세로 끝마무리 되긴 했다. 꼬박 넉 달 걸린 셈이었다. 장면이 바뀌어 2011.3.10 전경련 회장단 모임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화 도 회자 되었다. 현 정부(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답은 이 랬다. 참 어려운 질문이다. 그래도 계속 성장해왔으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이 흡족하다는 말인지? 였는데 그 답은 이랬다. 흡족하기 보다는 낙제는 아닌 것 같다. 또 청와대는 난리가 나고 삼성은 발언의 핵심은 과거 10년에 비해 상당한 성장 을 해왔다는 것이며 이는 잘해왔다는 의미 로 해명했다. 그래도 앙금은 그냥 남 아 있었다. YS에 비해 이명박의 권력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이건희의 힘이 너무 커져 있었다. 해법은 과거와는 달랐다.

페이지103 그러고 보면 1995년 당시 사회공부 를 말했던 이건희 회장은 당시의 삼성그룹이 YS를 이기기는 역부족이란 걸 인정한 셈이었던 것인데, 왜 2011년에는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했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 외부적인 평가는 간단한 지표들, 말들로 나눠진다. 이를테면 당시 삼성이 2류였 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초일류다, MB가 YS의 권력 집행력을 따라가기는 내공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 현대 오너도 아닌 고용주였던 MB가 어떻게 이건희를 이기나 등등 많이 나왔다. 그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럼 그 중간으로 가보자. DJ시절 삼성은 어떤 인연을 맺고 있었을까? YS를 겪었던 이건희의 처세는 어떤 것이었을까? 우선 눈에 띄는 건 삼성자동차 사건이다. 1995년 출발해서 1998년 영업 시작. 닛산과 기술제휴해서 공장 설비 및 자동차 부품을 수입 주립판매 개시. 그러나 1997년 IMF로 1998년 르노삼성 SM5로 나오고, 르노가 2000년 지분 80.1% 인수, 사명까지 르노삼성자동차로 변경. 삼성카드가 지분 19.9% 보유. 삼성 브랜 드 임차 대신 영업이익으로 매출의 0.8% 로열티 받음. 이 정도가 간략한 내용이 다. 잠시 그 당시 히스토리만 보면 이렇다. 1987년 12월: 이건희 회장이 비서실에 승용차 사업 진출 방안 수립을 지시. 1994년 4월 28일: 도쿄 긴자에 있는 닛산 자동차 본사에서 기술제휴 계약서에 서명. 1994년 12월 2일: 김철수 상공부 장관, 삼성자동차 허용방침 발표. 1994년 12월 5일: 삼성, 닛산 자동차와의 기술도입 계획 상공부에 제출. 1998년 3월: 르노삼성 SM5 시리즈 양산 시작. 1998년 12월: 대우그룹의 대우전자의 삼성그룹의 삼성자동차 빅딜 협의, 추후에 실패 1999년 6월 30일: 누적되는 적자로 삼성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페이지104 2000년 9월 1일: 프랑스 르노가 인수 후 르노삼성자동차 출범. 2000년 12월 12일: 삼성상용차 파산. 한국의 대표적 외제 고급 자동차 수집광이 이건희 회장이다. 매니아다. 혹자는 자 동차 광이 아니라 희귀 고급자동차를 통한 투자, 즉, 인플레 효과를 너무 잘 알아 서 자동차에 적용한 것이라는 설명도 한다. 그러나 자동차에 대한 관심은 이건희 회장의 일관된, 아주 흐름이 일정한 집착과도 같은 걸 보여준다. 이것은 2005년 소위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 도청팀의 X파일이 공개되면서 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DJ측에서 당시 국민회의 대선 후보시절에 (홍석현 사장 에게) 삼성의 기아자동차 인수 지원의사를 밝히며 당 정책위에 검토시키겠다 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지며 자동차와 DJ-삼성은 한바탕 긴밀하게 묶이게 되었지만 녹취 파일이 공개되면서 이 부분도 정리되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0908 당시로서는 아무래도 이회창 대세론이 맞던 때였다. 그렇게 외환위기에 신자유주 의 물결이 들어오고 삼성도 구조조정을 거쳐 본격적인 주주자본주의로 전환했다. DJ는 그래도 YS와 같은 노련한 정치인임은 분명했다. 이미 YS에게 한 칼 먹은 이 회장이 경거망동할 대상은 아니었다. 기아자동차도 놓치고 삼성자동차도 실패 했다. 그러나 오히려 다른 기회를 잘 보면서 활용했다. 집권하고 얼마 되지 않아 DJ는 건강이 정상이 아니었다. 이 회장은 그 기회를 잘 타고 있었다. 노무현 정권이 등장한 과정을 봐도 2002년 11월 이전까지는 의외의 변수였지 이회창 대세론은 여전할 때였다. 삼성은 당선된 노무현과 그 측근을 아주 효율적 으로 공략했다. 그리고 삼성에 통제된 노무현 정권을 이끌고 갔다. 정치적으로는 대통령 탄핵소추에 열우당 탄생, 여야의 피 말리는 기 싸움을 이어져갔지만 노무 현 정권 내내 삼성은 사실상 독주가 가능했다. 머리를 빌려준 대가치고는 엄청난 특혜를 많이도 누렸다. 그렇다고 큰 돈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삼성 입장에서 보 면 노무현은 다루기 손 쉬운 하수( 下 手 )였다. 자! 이 시점에서 다시 순위 매기기에 들어가보자. 1995년 당시 이건희의 평가에 서 2류는 기업경쟁력, 3류는 행정력, 4류는 정치력이었다. 여기에 입법이나 사법 영역은 각각 정치와 행정 쪽으로 편입해주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모두 합쳐서 정치력으로 보내거나 아니면 입법은 정치력으로(아무래도 정치 쪽에 가깝 다) 사법은 독립된 것으로 놓고 보는 것도 방법이 된다. 아무래도 이 회장의 발 언으로 보면 후자가 더 적절할 듯하다. 검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임용까지도 챙긴 삼성이라는데, 자기 편으로 끌고 들어가는 정도로만 봐서는 이 정도는 평가해주 는 것이 좋을 거다. 노무현 정권 시절로 가보면, 1류는 기업이었다. 2류는 사법부, 3류는 행정력, 4류 는 정치력으로 가는 게 정답일 듯하다. 그러니 1류와 2류, 3류가 합쳐서 4류를

페이지105 완전히 물 먹였다. 이명박 정권에서는 좀 다르다. 1류는 기업, 2류는 없고, 3류도 없고, 4류에 사법, 행정, 정치력이 모두 포함되는 형태가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적 해법으로 사법, 행정을 가지고 놀았지만 정작 기업은 프랜들리 하면 가까워지려고 무척 노력했는데 사실은 따로 놀 수밖에 없었다. 워낙 수준 차가 컸다. 이게 흡족하지 는 않지만 낙제는 아니다 는 말의 본심에 가깝다. 사회공부 많이 해서 내공이 탄 탄해진 이 회장 입장에서 볼 때는 사법이건 행정이건 정치건 간에 모두 꼬마들- 다루기 쉬운, 가지고 놀기에도 적절한-로 보였던 듯하다. 노무현 정부보다 더 심 한 것은 그 때는 장악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꼼수가 필요했다는 것이고 이명박 정권에서는 그걸 활용하기 보다는 프랜들리에다 정권이 가고 싶은 방향을 잘 맞 춰서 움직이며 이해관계를 맞춘 느낌이 강하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아마도 다시 이건희 회장에게 차기 정권은 어떨까요? 도대체 어떤 수준평가를 해야 할까요 물으면 어떻게 답할까? 아마 이 대답이 아 닐까? 더 드릴 말씀이 없다. 입장 참 고약한 질문일 수 있다. 그래서 더욱 더 차기 정권의 시작시점에 받아들 성적표 아닌 성적을 그려보게 된다. 거기에 대중은 몇 류일까? 순위는?

페이지106 2012 시대의 민낯 제 3 부 (2012.9.26~2012.9.28) 담담당당 안철수 측이 연신 대선주자 3자 회동을 외친다. 이유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급수 ( 級 數 )를 유지하자는 거다. 삼정( 三 鼎 )의 구도를 고착화하자는 이야기다. 여기서 해법은 나온다고 보는 것이고. 그런 접근법을 보면 이 사람은 타이밍의 예술을 잘 안다. 그래서 안철수가 정치 모른다는 이야기는 이제 하지 않으련다. 이 사람 대단히 영악한 측면도 있다. 그게 지지율로 나타나는 듯도 하다. 아무래도 지난 시절 묻은 게 많은 것이 기성 정치인이다. 그래서 그 부분을 많이 보게 된다. 특히 집권의 경험까지 있는 사람들이고 보면, 그 굴레를 벗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연신 반성 의 이야기를 하지만 골자는 성찰 ( 省 察 )에 있다. 그러나 그런 모습 구경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다. 왜 그런가 보니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지를 팔아먹는 정치인의 모습을 정치라고 해석한다. 선거판이니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보기에 안쓰럽다. 어쩌면 안철수가 말한 진심 ( 眞 心 )이 이 정치판의 구도 를 바꿀 수 있는 에너지가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펀뜩 하게 된다. 그 또한 워 낙 진심이 부족한 기성정치여서 그렇다. 시대의 민낯 은 앞서 시대읽기 에 비해 직설적인 대목이 많다. 물론 아직 시작한 수준에 불과하다. 진짜 이야기를 하기에는 대선의 구도는 앞으로 대략 3번 이상 에 걸친 고비를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라서, 그 추이를 보고자 할 뿐이다. 10월, 11월, 12월은 각 한 번 내지 두 번 이상의 고비길이 나올 것이다. 그건 굽은 것 으로 때론 아주 날카로운 것으로 대중에게 다가올 수 있다. 그 속에서 요동이 많 이 벌어질 건 뻔한 일이다. 그래서 지금은 철저하게 각주구검( 刻 舟 求 劍 )하더라도 묶어두고 하는 심정으로 그 리 하는 것인데, 이 또한 한국 사회의 특징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내 소관 바깥의 문제다. 이야기를 더 이어가는 것, 그것이 내가 할 몫이다. 숲으로 들어가 면 갈수록 숲은 아름다울 수도 어두울 수도 있는 법이다. 1. 도라산에 다시 선다고 해서 2. 안경론( 眼 鏡 論 ) 3. 전략기획통 윤여준 4. Intellectual Integrity 5. 왜 이러는 걸까요? 6. 박근혜의 진짜 한계를 보면 7. 문재인의 진짜 한계를 보면 8. 안철수의 진짜 한계를 보면

페이지107 9. 목에 걸린 가시 10. 그러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1. 도라산에 다시 선다고 해서 장대비 / 조용미 오래된 쇠못의 붉은 옷이 얼룩진다 시든 꽃대의 목덜미에 생채기를 내며 긴 손톱이 지나가는 자국 아픈 몸마다 팅팅 내리꽂히는 녹슨 쇠못들 떨어지는 소리 하얀 마당에 푹 푹 단내를 내며 쏟아지는 녹물들 붉은 빗금을 그으며 머리 위로 떨어지는 닭벼슬! 맨드라미! 백일홍! 해당화! 엉겅퀴! 큰바늘꽃붉은잎! 신음소리를 내며 막 벌어지는 상처의 입들, 눈동자를 붉게 물들이며 나쁜 피를 다 쏟아내는 저녁 2012.9.25 문재인이 드디어 대북 카드를 꺼냈다. 뭐, 해답은 정해졌다. 그 이전 에 보였던 키워드는 평화 이것이니까. 남북한 문제는 매우 까다로운 접근법을 가진 난제( 難 題 )에 혹한다. 그러나 지금 접근법은 일종의 가장 평범하게 들어가 는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등장인물 가운데는 임동원도 보인다. 임동원? 바로 DJ정권 대북정책의 핵심인물이다. DJ의 햇볕론이 아니라 임동원의 그것이라고 주장하다가 살짝 한 걸음 물러난 상태. 워낙 DJ가 가진 기운이 세서 그런지 모르 겠지만 일단 그런 상태다. 문재인-임동원. 두 사람 간에는 겉으로는 악연이 있다. 대북송금특검은 문재인의 발의로 노무현이 특검을 받아 들이기로 결정한 사안으로 알려져 있는데, 두 사람

페이지108 이 함께 하는 장면에서 정치란 역시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는 게임 같은 거란 생 각을 하게 된다. 임동원, 이종석 등은 오래 전부터 민주통합당에 슬그머니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갈 곳이 없다. 한 번 정권에서 큰일을 맡아서 거 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인물이 다음 정권에서도 힘을 발휘하는 경우를 찾기란 쉬운 게 아니다. 특히 실패한 정책을 편 사람들에게는 그럴만한 공간을 준다는 건 상상 밖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몇 개의 정권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 았던 인물들은 대단한 거다. 이헌재처럼 DJ-노무현 두 정권 시기에 모두 모피아 의 보스로 정권을 쥐락펴락했던 경제통도 있다. 그런 그도 MB정권에서는 물 먹 었다. 임동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제자 같은 이종석이 있긴 했지만 대북송 금특검과 도청사건으로 그는 일단 지워졌던 인물인데 문재인이 그를 꺼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성공 케이스라고 본 것인가? 좀 뜨악하다. 2003.11.18 월간조선 12월호는 <정상회담 대북 뒷거래의 전모>라는 기사를 게 재했다. 해프닝도 벌어졌다. 월조 측이 취재과정에서 입수한 2000여쪽의 수사기 록 전문을 홈페이지에 띄우고 판매를 시작해버린 것이었다. 전문 다운에는 1만원, 24간 열람 1000원 결제를 요구했다. 그럼에도 많이들 봤다. 수사기록을 판다? 참 재미난 발상이었다. 이걸 두고 단독입수냐 아니냐 말이 많았다. 그만큼 당시엔 이 사안 자체가 큰 관심을 끌었다. 대북송금특검법은 2003.3.15 법률 제6864호로 남북정상회담관련대북비밀송 금의혹사건등의진상규명을위한특별검사임명등에관한법률 이란 긴 제목을 가졌다. 그러니까 DJ정권 하에서 야당이 국회특검법을 발의했고 노무현 정권에서 이를 받아 들이면서 특검이 시작된 것이었다. 수사결과는 북한에 송금된 돈의 액수는 총 5억달러이며 이 중 5000만 달러는 현물로 보내졌다. 5억 달러 중에는 남북정 상회담 대가로 김대중 정부가 북측에 건네기로 약속한 1억달러가 포함돼있다 는 확인이었고, 진술 기록에서 현대상선 조달 2억 달러는 2000.6.9 대성은행 마카

페이지109 오 지점으로, 현대전자와 현대건설 조달 2억 5000만불은 홍콩과 싱가포르의 김 정일 비밀계좌로 간 것도 밝혀졌다. 노 대통령은 추가로 조사연장을 위한 대북송 금 새 특검법이 2003.7.15 국회 통과했지만 7.22 거부권 행사했다. 흥미롭게도 대북송금 특검 수사기록에는 DJ가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에게 실정 법에 어긋나더라도 대북 송금을 하라 고 지시한 내용도 있었다지만 DJ는 이에 대한 처벌을 아예 받지는 않았다. 그 후에도 끊임없이 추가 송금설이 나왔지만 특검법을 거친 상태에서 이 내용은 더 밝혀지지 못한 상태로 마무리 되었다. 그 와 함께 박지원의 현대비자금 150억 수수 사건이 함께 대두되었다. 이른바 무기 중개상 김영완과 이익치 등이 연루된 것이었는데- 이 사건의 시발점은 장모라는 사람이 김영완 집에서 양도성 증서를 강탈한 사건으로 크게 번져버린 사건이었는 데- 어쩐 일인지 슬그머니 덮어버리는 구도로 가버렸다. 한 편의 코미디같다는 말도 많이 했다. 그러나 이건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코미디가 되지 못했다. 2003.8.4 새벽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이 사체로 발견되었다. 현대 비자금 사건으 로 7월 26일과 31일, 8월 2일 대검 중수부에서 조사 받은 뒤 벌어진 사건이었다. 서둘러 그의 죽음을 자살로 규정하고 검찰 경찰은 사건을 마무리했지만 사건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유서 5장 중에서 1장이 사라졌고, 현대그룹 본사 12층의 가로 95cm, 세로 37 cm에 불과한 개폐식 창문에서 투신했다는 점, 외상이 전혀 없었다는 점, 전날 함께 했던 고교동창 등이 전혀 낌새를 채지 못했다는 점 등 수수께끼를 남겼다. 월간조선이 2006년 2월호에 타살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추가 조사에는 실패했다. 이를테면 당시 저 개폐식 좁은 창문 부근 어디에서도 고 정 회장의 지문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 사 건은 그 후에도 2007년 10월초 현대그룹 엔지니어 출신 박모씨의 정회장 타살 주장 녹취록이 당시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에 의해 물증으로 제시되었지만 노무현 정부 하에서 슬그머니 묻혀졌다. 물타기 되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사건은 덮였다. 미스터리가 아니라 저것은 의문사 영역 속에 있다고 보 는 것을 전제로 해야 옳다고 본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질 확률 같은 셈인데, 그 걸 검찰 경찰이 조사했다 그러면 그냥 끝나는 세상이 참 우습기도 하지만 말이 다. 장준하 사건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건 왜 일까? 아니 그보다 더 지독스럽다. 여하간에 그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에 대북송금 사건은 2003.11.28 임동원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이근 영 전 산업은행 총재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 박상배 전 산은 부총재 징역 2년 6월 집행유예 3년이 고법 선고됨으로써 사실상 마무리 되었다. 그 다음해에 이들 과 관련자들은 박지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특별사면 처리되었다. 정치권은 이 사 안을 두고 말이 참 많았다. 바로 그 즈음인 2003.11.11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 다.

페이지110 사건은 그 다음해에 아주 긴박하게 전개되었는데, 2004.3.9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제출되었고, 3.12 통과되면서 대통령 직무수행이 정지된 것이었다. 우여 곡절 끝에 열우당이 국회 의석 과반수 이상(152석)을 차지하고 헌재가 기각 결 정을 내림으로써 사안은 마무리 되었지만 하여간 이 해프닝은 오래도록 기억될만 한 사건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임동원에 대한 사건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2005.11.15 임동원, 신건 두 전직국정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이른 바 통신비밀보호위반법이라는 불법도청 사건이었다. 임동원의 경우에는 1999.12~2001.3 기간 도청 전담부서인 8국(과학보안국)을 통해 주요인하 통화 도청 및 도청보고를 받은 혐의로, 신건은 2001.3~2003.4 기간 불법도청 및 증 거인멸 시도 혐의도 받았다. 각계 주요인사 1800명의 휴대폰 전화번호를 감청 장비에 입력 상시 도청한 것이었다. 임동원은 구속되기 전에 국민들에게 국정원 도청사건으로 심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하다. 국정원 재직기간 동안 불법 도청을 적발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느낀다 고 말했다. 여기서 도 흥미로운 것은 검찰은 임동원 신건 전 국정원장이 당시 도청을 근절하라 는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를 정면 위배했다는 것을 혐의로 내세운 점이었다. 물론 임 동원 신건 두 사람 모두 불법감청 보고 받은 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이 사건도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그리고는 또 해프닝 이 벌어졌다. 2007.12.20 항소심 선고->27일 상고 취하->31일 특별사면 수순 을 밟은 것이었다. 형 확정 4일만에 특별사면이 벌어진 케이스였다. 2007년 그 시점은 이미 MB가 대통령 당선자였던 시절이었는데, 노무현 정부가 DJ정부의 아픈 구석 하나를 털어주고 지나갔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였다. 이것이 인연이 된 것일까? 남북한 관계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한 부로 소개하기로 한다. 잠시 도라산 역에 선 저 사람들을 보니 갑자기 옛날 일들이 생각나서 한 자 적었다. 2. 안경론( 眼 鏡 論 ) 求 道 / 이성선 세상에 대하여 할 말이 줄어들면서 그는 차츰 자신을 줄여갔다.

페이지111 꽃이 떨어진 후의 꽃나무처럼 침묵으로 몸을 줄였다. 하나의 빈 그릇으로 세상을 흘러갔다. 빈 등잔에는 하늘의 기름만 고였다. 하늘에 달이 가듯 세상에 선연히 떠서 그는 홀로 걸어갔다. 흔히 안경을 낀다고 하면 시력이 나쁜 눈을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 쓰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냥 폼 내려고 쓰는 사람도 있고, 바람이나 먼지를 막는 용도나 강 한 햇빛을 막는 선글라스 같은 쓰임새도 있다. 안경을 쓰다 고 하는 말은 관용적 으로는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선입견을 가지다 는 뜻(물론 술집에서 술잔을 겹 으로 받았을 때도 쓰긴 한다)인데 이 때는 아무래도 한 번 마음에 든다 아니다 결정해버린 그 선택이 뭔가 있는 그대로 가 아니란 의미가 들어가 있다. 안경은 독특하게도 무엇에 걸려 있도록 꿰거나 꽂다 는 뜻을 가진 끼다 와 얼굴에 어떤 물건을 걸거나 덮어쓰다 는 뜻의 쓰다 를 함께 쓴다. 얼굴에 끼고 쓰고 다 되는 모양이다. 안경의 원리는 11세기 아라비아 학자 알하젠(Alhazen)이 볼록렌즈 확대이론을 완성한 것을 최초연구로 본다. 사용은 문헌상으로는 13세기 이태리 피렌체 귀족 샬비노 다르마토의 묘소 비문에 안경의 발명자 여기에 잠들다 라는 것이 있고, 초상화에서도 토마스 위고 추기경 초상화(1352)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안경을 낀 그림으로 남아있다. 이 땅에는 조선 영조 정조시대 중국으로부터 많이 수입되 어 보급된 것으로 보이며, 안경 쓰는 법이 엄격해서 윗 어른이나 노인들 앞에서 는 안경을 벗었고 절할 때나 제사 중에도 그런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안경의 발 달과정도 꽤 흥미롭다. 알하젠의 볼록렌즈 확대이론은 로저 베스콘(영)이 입증하 고 노안경으로 이용하였고, 15세기 노안경의 수요가 증대하였으며 근대적인 안경 은 1623년경 스페인에서 제작되었다. 기술적으로도 1611년 독일 케플러(kepler) 의 근시안경 이론체계, 1704년 영국 뉴우튼(Newton)의 원시안경 이론체계를 거 쳐 1785년 프랭클린의 이중초점 렌즈 제작까지 발전을 거듭했다. 그 후 렌즈의 다양화가 진행되어 난시용 안경렌즈, 삼중 다초점 렌즈, 누진 다초점렌즈(미국 에

페이지112 브스, 1904)까지 쭉 이어진다. 안경테도 초기는 나무, 가죽, 우각 등 재질이었지만, 점차 금속(은, 철, 구리, 금, 백금, 니켈 등)을 사용하고, 현대에는 산플라티늄, 니켈, 스테인레스, 양백, 티반 등 금속과 셀룰로이드, 아세테이트, 에폭시, 카본 등의 비금속도 사용된다. 디자 인도 다양화 되었고 소재도 변색 없이 비중이 가벼운 카본 티탄 등이 등장했다. 단순한 듯하지만 안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안광학 공부가 있어야 한다. 결국 빛 이 관건이기 때문에 기하광학(빛이 전파되는 통로인 직선 모양의 광선 개념을 가 지고 빛이 전파되는 모양을 살피는 학문)이 필요하고, 빛의 성질과 빛의 반사(정 반사와 난반사), 반사의 법칙도 알아야 한다. 당연히 인간의 눈에 대한 이해는 기 초에 해당할 것이다. 그것이 현대의 안경광학과 안광학, 안과학, 조제 가공 및 처 방 등에 이르는 이론 임상으로까지 이어진다. 간략하지만 안경을 본 뜻은 맨 처음 거론한 바로 안경을 쓰다 는 말과 연결되어 서다. 짐작하듯 우리는 어떤 사실 을 가지고도 각자의 입장이나 혹은 분석결과, 이성이 아닌 감성적인 측면 등이 복합되어 다양한 견해를 내놓는다. 그들이 한결 같이 일치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토론이 필요하고 조정하는 작업이 들어간다. 이 때 과연 무엇이 가장 필수적인 과정이 될까를 안경을 통해 한 번 살펴보려고 하 는 것은 나름 흥미로운 접근일 것도 같다. 안경을 사용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자. 첫째, 안경을 쓸 건지 말 건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게 없다면 굳이 안경은 필요가

페이지113 없으니까 그 다음 이야기는 필요 없다. 둘째, 안경을 어떤 용도로 사용할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시력교정도 있지만 바람 등, 햇볕 등의 방지도 있고 요즘은 패션 안경도 있다. 셋째, 용도에 따라 재질이 결정된다. 이건 선택일 수 있을 것이지만, 시력의 경우 에는 반드시 안기능 검사(Clinical Refraction)이 따른다. 넷째, 나타난 기능상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안경과 안경테를 결정한다. 다섯째, 안경을 착용한 상태에서 눈의 안정감을 점검해야 한다. 여섯째, 관리와 유지보수, 시력이나 용도의 변화 등에 따라 대처해야 한다. 라식 수술이란 것도 있지만 일단 여기서는 안경을 보는 걸로만 하자. 한국의 정치판은 대개 정치세력들 특히 지배층이 그렇듯이 완전한 모습의 사실 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안경을 쓴다는 개념이 가진 착각이나 혹은 함정 가운데 하나가 이것인데, 아무리 정밀한 안경이라 해도 눈에 현미경을 달고 살 재간은 없다. 그래서 교정된 시력이라 하더라도 정작 정밀한 관찰을 필요로 하는 용도에 서는 또 다른 도구를 필요로 한다. 권력자들이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 보라고 내 미는 건 대강 최대치가 교정시력으로 보는 수준까지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현미 경을 대는 건 또 다른 몫인데, 사회 내에서 이걸 하는 세력이 바로 알 권리 를 말하는 언론 정도가 있을 것이고, 그 사안을 깊이 들여다보기 위한 전문가 혹은 비전문가 그룹을 포함한 학자, 관찰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보 이지 않았던 사실 은 전부는 아닐지라도 나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대중도 그 걸 일정 부분 보게 된다. 당연히 대중 모두가 그걸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단지 눈을 빌리는 것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에 눈(시각이나 인지력 등)을 맞추는 것이고 그렇게 보는 것이다. 관건은 안경이 아니라 늘 자신의 눈, 즉, 안( 眼 ) 기능이란 기초에 있다. 시력 교 정용이 아닌 패션 안경을 원하거나 아니면 햇볕 차단용 선글라스 등을 끼면, 일 단 세상은 그 색깔로 배합을 한다. 본다는 개념은 똑같지만 색 ( 色 )이란 요소가 하나 더 붙는 셈이다. 오목이니 볼록이니 다초점이니 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 된다. 한방에서도 기를 돋궈야 할 때 죽이는 약을 쓰거나 기능이 과다해서 좀 눅 여야 할 때 돋구는 약재를 쓰면 동일한 약재라도 완전히 다른 결과가 오듯, 안경 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목에 볼록 렌즈를 쓰면 이상하게 되는 것이고 근시 원 시 난시 정도로 구분하지만 이에 따른 처방이 각각 다 다르다. 앞서처럼 권력자가 보여주지 않는 걸 찾아서 보게 만드는 과정에서 만일 장난이 들어간다면-현미경으로 본 결과가 애초 잘못된 내용으로 변질된다면-뒤에서 백 날 잘 봐도 소용이 없는 것이고, 내 눈의 기능 자체를 잘못 판단해서 그릇된 안 경을 쓰면 그것도 보는 건 맞지만 잘 보는 건 아니게 된다. 좀 장황해졌다.

페이지114 현실로 돌아와보자. 시장만능주의 는 대중의 눈에 상층부보다는 하층부의 드 러난 결과로만 비춰진다. 이를테면 금융자본주의의 특성상 금융은 제노바의 상인 들이 그렇게 했듯이 탁자에 종이와 펜 하나만을 가지고 시장을 가지고 놀았듯이 그렇게 소수에 의해 큰 덩치, 흐름이 움직인다. 그 내용물을 알기란 정말 어렵다. 접근을 잘 허용하게 하지도 않는다. 뭔 그런 요란을 떠는지 아주 복잡한 함수들 을 그 안에 넣어서 아주 골치 아프게 수학적인 것까지 범벅을 해서 대중이 알기 정말 어렵게 만들어 두었다. 이게 바로 월스트리트의 악마의 계산법인 셈인데, 이 걸 알고 있다고 해도 대중이 뭔 손을 직접 쓸 방법이 뾰족하게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알고 있다는 것으로 파생되는 많은 것들을 보는 눈이 정확해지는 것이지. 그리고 그만큼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는 기본이 생기는 것이고. 막장으로 솟구 쳐 오를 때는 그나마 많이 보인다. 지금처럼 막장 금융주의 판으로 굴러가면 일 단 보는 것보다 불안감이 먼저 음습해온다. 이건 고스란히 체감 영역과 상황이 일치하는 때다. 바로 그걸 보게 만드는 기본 중의 기본 상황이 정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 이다. 이게 막 우리 눈 앞에서 앞뒤 가리지 않고 빠르게 순환하는 셈이다. 앞서 다문화사회의 허구라는 걸 봤지만, 그에 앞서 벌어진 일은 막장 금융자본주의가 사실상 노동력의 갈취 상태를 심화시키고, 나아가 대중을 계급사다리의 하부로 자꾸만 밀어내는 장면으로 연결되는 것을 본 상태에서조차 그런 정치를 이어가겠 다는 사람을 대의민주주의에서 선출한다면 그 또한 선택이 되는 셈이다. 나는 노 예로 살고 싶다는데 말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그 선택이 제대로 보고 그 런 방향으로 간 것이라면 모를까 그도 아니라면 이건 소수이건 다수이건-대의민 주주의니 다수는 아닐 것이지만-의견은 철저하게 소외되는 셈이 된다. 물론 정치는 이보다 복잡한 요인이 범벅 된다. 이해관계라는 것이 대중 내부에서 도 각자 다르기 때문인데, 이걸 확인하는 건 아주 쉽다. 야당이란 민주통합당 내 에서도 한미FTA 찬성론자는 득실거리고, 여당인 새누리당에도 농촌지역 의원은 이를 반대한다. 진보정권 1기라는 김대중 정권에서 시장만능주의는 완전히 깃발 을 꽂았고 2기라는 노무현 정권에서 꽃을 피워버렸다. 오히려 MB정권에서 그들 을 앞세우며 선전하는 우스꽝스러운 형편도 봤다. 참 복잡하지만 이게 정치다. 사회에 나와 업무를 시작한 후 6번째의 대통령을 맞이하는 것이 개인적인 경험 이지만 각 정권을 겪을 때마다 이상할 정도의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우리 사회가 가진 진보니 보수 같은 이상한 타이틀들이 정작 현실 에서는 전혀 그들 어느 쪽도 실사구시의 판이 되기 어렵다는 한계를 봐서 그럴지 모르겠다. 그것이 대한민국 권력의 속성이라면 현실 정치는 기대할 것이 없다. 그럼에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면 우선 잘 보고 알아야 한다는 경고의 말은 죽는 날까지 거듭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이 글을 쓰는 목적 또한 거기에 있다. 잘 살펴보자는 말이다. 또 다시 트라우마를 겪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은 정치 시즌, 대중의 입장에서 보자면 또 다시 안경을 맞추기 위해 여러 경로를 거쳐야 한다. 그럴 때다.

페이지115 3. 전략기획통 윤여준 저녁노을 / 이 해 인 있잖니, 꼭 그맘때 산 위에 오르면 있잖니, 꼭 그맘때 바닷가에 나가면 활활 타다 남은 저녁놀 그 놀을 어떻게 그대로 그릴 수가 있겠니. 한번이라도 만져보고 싶은 한번이라도 입어보고 싶은 주홍의 치마폭 물결을 어떻게 그릴 수가 있겠니. 혼자 보기 아까와 언니를 부르러 간 사이 몰래 숨어버리고 만 그 놀을 어떻게 잡을 수가 있겠니. 그러나 나는 나에게도 놀을 주고 너에게도 놀을 준다. 우리의 꿈은 놀처럼 곱게 타 올라야 하지 않겠니. 때가 되면 조용히 숨을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니. 어쩐 일이지? 윤여준이 민주당 캠프로 갔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문재인 대선 캠프에 합류했다. 한나라당 싱크탱크 여의도연구소장 두 차례에 이회창으로부터 장자방( 張 子 房 ) 소리를 들은 그의 이력이 간단치는 않다. 국민통합추진위원장 타 이틀로 문재인을 맞을 준비를 하는 모습에 여러 사람들이 좀 질려 한다. 강금실 은 윤여준이 오세훈 선대위원장 할 때 그녀의 천적이었던 사람이니 펄쩍 뛰고 있 고, 진보를 말했던 이들 중에서도 이게 좀 너무 심한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 다.

페이지116 구구한 그의 이력은 일단 접고 그에게 붙여진 전략기획통 이란 단어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가 왜 이런 결정을 한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자 세히 접근해볼 일이지만 언뜻 보면 문재인이 지금 전략기획이란 항목에서 대단히 목이 말라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일은 지난 9월 초의 문재인-법륜 스님 간의 회동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졌음도 물론일 것이고. 그렇다 면 이 결정의 이해득실을 문재인은 따졌을 게 분명한데, 그 내용물을 감안하면 일단 전략기획 이란 이 대목에서 해법을 찾아보면 답은 나올 것 같긴 하다. 기업에서도 이런 용어는 자주 쓴다. 한 마디로 브레인 이다. 그냥 그렇고 그런 머 리가 아니고 총괄하고 기획하는 것인데, 그건 전략 ( 戰 略 )이란 단어가 있어서다. 군사적으로도 많이 사용하지만 이건 일단 전반적 흐름의 조율 이다. 그리고 결정 적인 승부수를 꺼내는 책략( 策 略 )을 말한다.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 하는 전술( 戰 術 )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위 개념이다. 그런 환경이나 판을 짠다는 것이 핵심이 다. 2007.10.22. 윤여준의 정치카페(http://yooncafe.net/96)에 올라온 글 한 편의 내용 을 잠시 훑어보자. 제목은 지도자는 길러진다 이다. 리더는 대개 3단계를 거쳐 길러진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학습 단계이고 두 번째는 전문화 단계, 세 번째는 활동 단계이다. 학습 단계는 학교 교육을 의 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인으로서의 정신, 의식, 자세, 책임감 등을 기르는 과정이 며, 전문화 단계는 자기분야에서 경험과 전문성을 쌓는 과정을 말한다. 세 번째인 활동단계는 현실정치에서 적응력을 길러 본격적인 정치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이 다. 이 세 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과 나 자신부터 수양하고 남을 다스린다는 수기치인( 修 己 治 人 ) 정신을 체득해야만 훌륭한 정치지도자로서 의 자질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정치지도자 가운데 그런 과정을 거쳐 길러진 분은 극히 드물다. 우리 정치인들은 야망을 기르는 데는 적극적인 반면 자질을 기르는 데는 매우 게으르기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대부분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 도 따지고 보면 야망과 자질이 일치하지 않는데 근본 원인이 있다. 문제는 선거 가 반드시 훌륭한 리더를 뽑는 제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대통령선거 가 이를 입증한다. 오죽했으면 우리보다 민주주의 역사가 긴 나라에서조차 '선거 란 차악을 선택하는 것'(picking the best from the worst)이라는 말이 나왔겠는 가?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가 훌륭한 지도자의 등장을 가로막는 제도라니 이 얼 마나 아이러니컬한 일인가? 우리가 5년마다 손가락을 자르고 싶은 후회를 하지 않을 방법은 한 가지뿐.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과연 이 시대, 이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되 기 위한 자질을 기르는 과정을 제대로 거쳤는지 철저히 따져보는 것이다. 그래서 술수와 책략, 거짓말과 선동으로 국민의 눈을 속이려 드는 저질 정치인들이 감히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해야 한다. 지도자와 민주주의의 수준은 결국 그

페이지117 나라 국민의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을 우리 모두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할 때 다. 2007년 10월은 18대 대선이 한참일 때였다. 그는 당시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글 한편 대목을 더 보자. 2007.11.23 선거 막바지 단계였고 글 제목은 하이에나 의 정치 (http://yooncafe.net/111)다. 그렇다고 하이에나 정치 가 곧 소멸될 것 같지는 않다. 이 후보의 연루 여부에 대한 검찰의 발표 시기가 늦으면 늦을수록, 그 내용이 애매하면 애매할수록 이 후보가 비록 사냥감은 되지 않더라도 깊은 상처를 입을 공산이 크다. 그것이 어 쩌면 하이에나 정치 가 거둘 최상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명박 후보가 사퇴하 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으면서 그 지지도가 현저하게 줄어 이회창 후보 지지도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상황, 그래서 두 후보들이 각기 끝까지 완주할 수 밖에 없는 사태를 조성하는 것이야 말로 범여권 최대의 소망일 것이다. 자신들은 서부 벨트를 다시 잇는 범여권 후보 단일화를 극적으로 이루어 정권연장에 성공할 수 있다고 볼테니까... 그렇게 된다면 김대업 정치 는 하이에나 정치 에게 그 영예를 기꺼이 넘겨주게 될 것이다. 제목이 벌써 말해주지만 윤여준의 입장은 이명박에게 있었다. 보호하는 관점이란 것이 눈에 확 띈다. BBK 사건을 두고 김경준 등을 하이에나 로 표현했는데, 이 관점에서 보수에 힘을 실어주는 글을 썼던 것이다. 그것도 선거를 겨우 20여일 남겨둔 상태에서, BBK가 온통 까발려질 만큼 그 내막이 드러난 때였다는 점에서 이 글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지금 윤여준의 정치 카페(윤카페)는 2007년 이후 휴식에 들어간 상태인 듯하다. 그 후의 활동은 알려진 대로다. 안철수가 등장하고 청춘콘서트에다 안철수의 멘 토 부인, 윤여준의 안철수 정치 자격논란 반박 등으로 쭉 이어져온 행보가 있다.

페이지118 자! 다시 전략기획통으로 가보자. 전략은 무조건 이겨야 하는 전쟁을 상정하는 것이라 보면 틀림이 없다. 기업도 상전( 商 戰 )을 치르고 정치인은 선거전( 選 擧 戰 ) 을 치른다. 모든 전쟁은 잘 준비된 자의 승리라고 할 수 있지만 천시( 天 時 )도 있 으니 꼭 사람이 모든 일을 다하는 건 아니라고 한다. 인력으로 불가능한 상황도 늘 벌어지기는 하니까. 그러나 뛰어난 책사( 策 士 )는 그마저도 헤아린다고 한다. 그런데 어쩔 것인가! 아뿔싸! 이 글 한 편, 하이에나의 정치에 담긴 뜻으로 윤여 준은 스스로 나는 선거꾼이다 라고 고백해버린 꼴이 되었다. 안타깝지만 한국정 치에는 전략가라고 이름 붙이는 것보다는 선거전에서는 꾼 이 더 맞는 표현이란 것도 새삼 느끼게 된다. 2007년 10월에 말한 길러지는 지도자 로 거슬러 가보자. 리더는 대개 3단계를 거쳐 길러진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학습 단계이고 두 번째는 전문화 단계, 세 번째는 활동 단계이다. 여기에 문재인을 대입해본다. 학습단계는 공인( 公 人 )이 되는 기초조건에 해당한 다. 인정해주자. 그래도 한 정권의 민정수석에 비서실장도 했으니. 전문화 단계는 경험과 전문성에 관한 것이다. 자! 이것도 인정해주자. 실패한 경험이라도 전문성 은 생기는 법이니. 활동단계는 현실적 적응력인데, 그래도 제1야당 민주통합당의 대선 후보로 경선을 치러 올라온 사람이니 이도 인정하자. 그럼 윤여준이 말하는 조건에 문재인은 적합한 것이다. 여기까지 인정하자. 그런데 그 뒷말이 애매하다. 이 세 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과 나 자신부터 수양하고 남 을 다스린다는 수기치인( 修 己 治 人 ) 정신을 체득해야만 훌륭한 정치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아뿔싸! 이게 걸린다. 왜 세간에서 문재인=문제아 라고 놀리는지를 모른다. 물론 최근에는 지지율이 상승추세다. 그나마 기댈 언덕이 당의 모습으로 있는 곳이라 서 선거 초반인 지금은 그렇게 가긴 한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이 무슨 짓을 했는 지는 윤여준 본인이 더 잘 알 것이니 여기서는 생략하고,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 한지 아닌지는 솔직히 문재인의 말에서 그런 걸 구분해낼 수 없으니 일단 제쳐두 고, 나 자신부터 수양해야 하는 바로 그 대목, 이게 참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노무현 정권 내내 벌어진 엉터리 진보개념은 알고는 있는지? 페스카마 호 사건 변론이란 것이 2011년 10월의 일이었다. 지금부터 1년도 안된 바로 직전의 일 이었다. 다문화 사회를 부르짖던 바로 그 노무현이 이 사회의 서민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지? 그게 그래도 보수라는 바닥에서 진짜 보수입네 하던 사람의 전략분석 인가 실망을 금치 못한다. 여기서 거꾸로 들어가면 모든 것이 줄줄이 무너진다. 윤여준도 문재인도. 왜? 정체성이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 냥 평생 내가 보수요 말했던 이가 자질로 보면 지도자는 길러지니 내가 한 번

페이지119 길러보겠다 하면서 엉터리 진보로 달려간다? 그걸 전략적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신기한 일이다. 워낙 이상했던지 여러 사람이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9월 27일 손석희의 시선 집중에 윤여준이 등장했다. 그의 말 몇 대목을 옮긴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20927105549&section=01 (국민통합추진위가) 선거운동 일선에 나서는 것도 아니고 전략을 만드는데 참여 하는 것도 아니지 않냐. 선거운동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 (중략) 제 업무의 성격이 그렇지 않다는 걸 조금 오해하신 것 아닌가 싶다. (저는) 수류탄이 될만 한 대단한 폭발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중략) 국민통합을 위한 일이 민주당만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새누리당도 거의 똑 같은 기구를 만들어서 한다고 하고 안철수 교수도 통합행보를 하고 있지 않냐, 통합이 사상적 전향이 필요한 일이냐. (중략) 어느 당에도 입당은 안 한다. (중략) 단일화는 제가 관여할 만한 성격이 아니고 법륜 스님도 본인의 본분을 벗어난 일은 하지 않을 분 내용만 보면 국민통합 하나를 위하여 기꺼이 몸을 움직였다는 것이고, 자신의 특기인 전략기획은 물론이고 아예 사상적 전향-그러니까 보수라는 틀을 말한다 -은 필요하지 않다고 못 박는다. 거기에 법륜 스님의 문재인-안철수 단일화 문 제 개입여부에서는 현실성이 없다 고 말한다. 본분 이 나오니 참 애매하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에 이해찬이 가세했다. 9월 28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서 (윤 전 장관이) 자기의 경험이 정권교체 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나이가 많아도 기여를 하겠다고 오신 것 이라고 자발적 참여론을 폈다. 그런데 26일 이미 대선 기획단 박영선 기획위원이 문후보는 최근 윤 전 장관을 만났고, 이 자리에서 이 념-지역-당파 등으로 쪼개진 한국 사회가 공존하는 통합의 지혜를 찾아내야 한 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 했다. 사회통합을 위한 역할을 부탁 드린다 는 문 후보의 요청을 윤 전 장관이 받아들였다 고 밝혔던 바 있다. 몇 시간 설득했다는 것인데, 이게 이해찬에 의해 자발적으로 운운 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해프닝 수 준에서 그친다 하더라도 이해찬의 이 말은 파장이 적은 것이 아니다. 윤여준은 솔직히 민주통합당 내부 갈등이 어떻게 번져 가는지 모습을 이제부터 슬슬 보기 시작할 거라는 예고편을 보고 있는 셈이다. 한 마디로 이건 꼼수 가 아니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거다. 이해찬은 일 단 윤여준 식의 전략기획, 그러니까 문재인 주도형 전략짜기에 불만을 툭 던진 것으로 봐야 하고, 그 제물로 윤여준을 대상 삼았지만 문재인과의 갈등 또한 숨 기지 않았다. 이해찬은 지금 문재인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전략 기획은 약간 다른 방향에서 그 길을 찾아야 한다. 이를테면 말이다. 문재인-윤여

페이지120 준-법륜-안철수 로 이어지는 노선 같은 것이다. 9월 29일 윤여준이 CBS시사자키 정관용과 아주 긴 인터뷰를 했다. 내용을 보다 가 많이 웃게 된다. 딱 부러지게 이야기하는 윤여준의 스타일이 전혀 보이지 않 고 말이 빙빙 돈다. http://media.daum.net/issue/366/newsview?issueid=366&newsid=20120929130010719 좀 심하다 싶을 정도다. 저 인터뷰 정도로 이겨도 그만 이기지 않아도 그만인데 대선 캠프에 가입했다? 그 말이 제일 웃긴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기 보다는 사 실 거기에 참가하지 않아야 되는 게 상식이다. 그게 전략이면 말은 달라진다. 극 구 단일화에 역할요청은 하지 않을 거라고, 그 일은 안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 연 그럴까? 한 번 인터뷰를 잘 보시고 평가해보자. 아! 또 실수했다. 이게 기획이지. 꾸미는 것이고 감추기도 해야 하는 것이고. 지 금은 그런 현실성을 꺼낼 단계가 아니라는 거다. 역시 국민통합 하나에 문재인에 게 가는 모습을 만든다는 게 보편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비춰지 지 않는 것, 그게 바로 지금까지 윤여준이란 인물의 행적이었고 초상(이미지)이 였으니까 그게 문제다. 댓글도 그렇게 달린다. 겉 모습은 나름 꾸며지기는 했는데 모양은 영 버렸다. 이런 전략기획 과히 좋은 그림 아니게 되었다. 4. Intellectual Integrity 각축 / 문인수 어미와 새끼 염소 세 마리가 장날 나왔습니다. 따로 따로 팔려갈지도 모를 일이지요. 젖을 뗀 것 같은 어미는 말뚝에 묶여 있고 새까맣게 어린 새끼들은 아직 어미 반경 안에서만 놉니다. 2월, 상사화 잎싹만 한 뿔을 맞대며 톡, 탁, 골 때리며 풀 리그로 끊임없는 티격태격입니다. 저러면 참, 나중 나중에라도 서로 잘 알아볼 수 있겠네 요. 지금, 세밀하고도 야무진 각인 중에 있습니다. 지적 정직성 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 있다. 그래서 머리의 정직성 이라고 한 다. 니체 철학 가운데서 제법 멋지다 싶은 대목이 이 부분인데, 진실에 대한 의

페이지121 지를 너의 윤리 코드 제1번으로 삼아라! 라고 조용히 말하다가 파도처럼 출렁이 며 지식이란 게 끊임없이 출렁이는 과정이지만 완벽한 진실(absolute truth)이란 없으니 무엇이 진실인가에 다가서는 자기 가치판단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그 무모 하다 여겨지는 접근법이 때론 많이 생각이 난다. 그것이 자연과학 개척자에 대한 찬사로만 사용하기는 참 아깝단 말이지. 종종 이 말을 엉뚱한데 끌어다가 막 갖다 붙이는( 牽 强 附 會 ) 사람도 보긴 하지만 뭐 괜찮다. 갈등도 하고 경쟁도 하고, 모순이라 생각하면서도 진실이 뭔지 찾아가 다 보면 나오는 목소리가 가슴 아닌 머리에서 들리겠지. 그건 내가 생각하기에는 일정함 속에서,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는 속에서 찾아지는 거니까. 그렇지 두려움이란 느낌도 인간 행동의 공통된 근본적 느낌이 아니라 예외적인 느낌이란 말이 맞긴 맞아.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용기와 모험, 기쁨이 일반적인 느낌이지. 용기가 인간 선사시대 그 자체야, 인간은 가장 거칠고 가장 용감한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부러워했지. 동물들에게서 각각의 장점을 다 빼앗은 거야. 그렇게 해서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거지. 이 용기가 드디 어 보다 미묘한 것이 되고 정신적인 것이 되고 지적인 것이 된 거지. 나는 진실에 대한 의지 를 목숨을 걸고 믿는 편이다. 이것은 단순히 용기 차원의 문제가 아니고 진실을 본 사람의 두려움이 맞다. 이 글을 이어가면서 어떤 이로부터 의견을 전달 받은 것 가운데 하나가 있는데, 흔히 신문에서 보는 그 내용을 내게 제시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은 문재인-안철수가 합쳐서라도 정권교체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묻어둘 일들은 좀 묻고 지나가야 하지 않나요? 그렇게 모두 다 파헤쳐 서 이야기하면 그게 하이에나 같은 것이지 생산적이지 않잖아요?

페이지122 별로 흥미롭지도 않은 질문이었고 의견이었다. 하이에나 이야기는 윤여준의 글에 서도 이미 봤으니 그런 하이에나 는 더 이야기할 건 없다. 단지 진짜 하이에나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이 식육목 하이에나과의 짐승은 그 집단이 철저하게 서 열화 되어서 새끼 때부터 경쟁에 밀리면 죽는다. 서열이 낮은 하이에나는 굶어 죽는 경우도 있다. 종족이 죽어도 하루쯤은 기다렸다가 다음날 시체를 먹는다. 하 루 정도 기다려주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러나 하이에나가 다른 동물의 먹이를 강탈만 하는 게 아니다. 그들도 사냥을 한다. 그러나 이 최상위 포식자는 멸종 위 기종이 되기 딱 좋은 거친 환경에서도 잘만 버티고 있다. 하이에나의 먹이 사냥 습성은 관찰하면 할수록 두 가지의 아주 특이한 특징을 가 지고 있다. 첫째, 이 짐승은 자기보다 사냥을 잘하는 짐승들을 도구로 잘 부린다. 그들이 사냥한 것을 가로채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도구가 되지 않으려 고 포식자들이 움직이는 것 같다. 둘째, 끈기라는 심리전의 핵심 자세를 가지고 있다. 하이에나에게서 정치를 본다는 사람도 있다. 사실 이것이 바로 하이에나의 정치학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비유는 사실 이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재인은 문빠가 아닌 노빠 체제 속에서 태어난 사람이고 또한 노무현의 그림자가 아니고-노무현의 친구는 맞다-노무현 정권의 책임을 함께 져야 하는 바로 그 당사자이며, 개인 문재인의 선택 또한 사실로 드러난 부분은 책임을 져야 하는 공인( 公 人 )이다. 안철수도 마 찬가지다. 박근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대선에 나오지는 않았지만-나올 수도 없지만-이명박 정권의 MB 또한 이 사실 속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사실의 영역에 있다. 하이에나는 이 사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권교체의 방법론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건 간에 그건 그들의 선택이다. 그들이 대중의 열망을 안고 가건

페이지123 이고 가건 그건 그들이 하는 것이다. 각자 끝까지 가서 또 새로운 정치를 한다고 2개의 각각 다른 야당을 만들어낸다고 해서 무에 특별할 일도 없다. 요행히 그들 중의 하나가 정권을 가져 정책을 편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 관심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 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과거 노무현-정몽준의 단일화를 비교하여 문재인-안철수의 단일화를 따지는 건 그건 방법의 차원이지 정권의 연속성과 관련되지 않는다. 성질( 性 質 ) 에 관한 문제를 짚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방법, 선택에 관한 문제이 지 정권 의 행위 타당성에 관해 짚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문재인이 최근 책임총리제 도입을 말했지만 그것이 노무현-이해찬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는 건 하나의 사실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정권 대 정권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 다. 그 중간단계가 남아 있기에 오히려 노무현-이해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 이 타당한 사실접근에 해당한다. 가장 나로 하여금 솔직히 (그를) 비웃게 만든 대목이 묻어둘 일은 좀 묻어두고 라는 이야기였는데, 이건 마치 달려야 하는 자동차에 바퀴를 빼고 가속 능력을 시험해보자는 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단순히 앞뒤가 뒤바뀌더라도 괜찮은 수준의 부족함과는 질이 너무 다르다. 비슷하다 는 건 미흡한 일치로 정의한다. 미흡이 강한지 일치가 강한지에 따라 부사가 달라진다. 그냥 비슷한 것은 어느 쪽에도 기울어질 수 있다. 엇비슷하다 는 되어야 되는 거다. 그러나 저 말은 그 영역에 절대 들어갈 수가 없다. 왜 묻어야 하는가? 발음은 다르지만 묻다 는 두 가지 뜻으로 쓴다. 하나는 숨기고 감추는 것, 다른 하나는 설명을 요구하며 책임을 따지는 것이다. 왜 전자를 자꾸 추구하는지 모르 겠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말해야 하는 게 순서다. 우리가 어떤 과거 벌어진 사실 을 대할 때, 그것이 사실 로 존재하는데도 불구하 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고 돌아봐서 자신과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누군가를 찾는다. 그들이 <떼>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도망 가지는 않는다. 굳이 선악을 구분 안 하는 건-왜냐하면 일단 맹신이 있으니까- 이해한다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진실인지 여부까지 검증하지 않으려는 자세까지 취하는 경우를 보게 되면 약간 멍청해질 때도 있다. 그럴 때, 바로 저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기준을 세우고 있다 하면 서 진실인가 아닌가 비춰보고 입장, 이해관계, 관점 그리고 심지어 발생 가능한 모든 갈등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거론하면서 나는 그것을 사실로 보지 않습니다 고개 뻣뻣하게 세우고 말하면? 이것 참 다시 멍청해진다. 거기에 사실 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을 기본으로 진실 을 찾아가는 의지를 가진 사람일 뿐이기 때문이다.

페이지124 5. 왜 이러는 걸까요? 거울 / 이성선 흙탕물도 가라앉으면 거울보다 맑다 흐르는 개울물보다 오히려 하늘과 구름을 잘 내려비춘다 밤에는 별들이 빠져 더 빛난다 님이 다니시는 길가에 나도 흙물 되어 누워 어지러운 마음 가라앉히고 풀잎 궁둥이나 비추며 쳐다볼까 그렇게 기다릴까 기다리다가 그분이 지나시는 날 님의 바짓가랑이를 비출까 신발을 비추어 잡아둘까 개그콘서트가 유명하긴 유명한가 보다. 이 말은 온갖 곳에 사용된다. 2012년 7월, 묘한 책 하나가 나와서 서평에 줄줄 실렸다. 펜실바니아대 로스쿨 교수 레오 카 츠(Leo Karz)의 <법은 왜 부조리한가>[Why the law is So Perverse](와이즈베 리 출판)라는 책이었는데, 책의 골자를 소개하는 하단 라인에 왜 투표에서 엉뚱 한 인물이 당선되는가?, 법은 왜 우리의 도덕과 상식을 배반하는가? 라는 설명이 있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른바 선거 국면에서 뭔가 새로운 것이 들어있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 셈이었다. 내용은 투표와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저 perverse 라는 단어에 딱 어울리는 정도다. 물론 투표제의 모순과 법의 모순이 같다는 식의 전개를 하며 법의 모순도 엉뚱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긴 한다. 이것 이 특히 강조가 된 건 마케팅 차원일 수도 있겠다 싶긴 하다. 안철수 협박 기자회견으로 유명해진 금태섭 변호사가 감수한 책(동명이인은 아닌 듯하다)듯 한데, 사실 저 perverse 가 왜 부조리 로 번역되었는지 솔직히 불만스럽다. 이 단어는 삐딱한 이 딱 옳다고 보고 좀 더 나가면 엇나가는 것이 맞다. 난 삐딱하다는데 더 방점을 두고 싶다. 그러니까 저 책은 법은 왜 이리 삐딱한가 라고 하는 게 옳다는 거다. 부조리 ( 不 條 理 )는 이치와 도리와 상 관된다. 거기에 어긋난다는 것이라서 솔직히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어울리 지 않는다. 이미 이치, 도리라는 잣대가 있는 것이니까.

페이지125 여하튼 책은 크게 4부로 나눠져서 법은 왜 상생 거래를 거부하는가, 왜 허점투성 이인가, 왜 그렇게 이분법적인가, 우리는 왜 악행을 모두 처벌하지 않는가 구분하 며 사례를 들어 하나씩 재미나게 설명한다. 그런데 솔직히 이 책, 법이 삐딱한 걸 이해해라 자꾸 강조하는 것 같아 재미가 없다. 독자 가운데는 마이클 샌델의 <돈 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들며, 우리 사회가 우리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 사회가 시장경제(market economy)에서 시장사회(market society)로 옮겨가며, 이 시장사회가 만들어낸 부도덕과 부패로 인해 도덕적 가치가 하락하고 무조건 돈으로 사고 팔려는 인식이 팽배한 사회에 우려를 표명한 것에 비해, 저자는 시 장사회에 대한 신념이 강한, 그러니까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 지 않는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게 아닌가는 평가를 내비치기도 한다. 어쨌건 책은 한 번 읽어 볼만하다. 단, 전제조건을 반드시 한 번 훑어봐야 할 것 이다. 이를테면 이 삐딱한 법 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우 리의 생각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저자의 논리에 그냥 빠져 들고 만다. 그래서 삐딱한 법이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는 않다. 각 부에서 나타난 질문도 법은 이렇다 고 그냥 설명하는 듯한데, 이걸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다시 간추려서 한 번 저자의 의도를 넘어서보도록 하자. 법의 상생거래 거부에 관한 이야기다. 법은 거래 당사자가 모두 만족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해를 주지 않는 거래, 예건대 장기매매, 대리모 계약, 성매매 등의 거

페이지126 래를 금지하는데 법이 왜 어떤 것은 사고 팔 수 없게 규제하는 것일까?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아주 고약한 사람이다. 이걸 응급순위순환론이라고 해서 법이 요 구와 욕구, 이익과 선호를 달리 취급한다고 말하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그러니 까 법이란 어떤 요구를 인정할 때는 거기에는 암묵적으로 가치 또는 가격을 매기 고 동일 맥락에서 이 가격, 저 가격으로는 산정하는 게 곤란하며 두 개의 가치공 존으로 갈등이 발생하는 걸 배제한다는 것이다. 법적 모순들이 집단의사 결정과 정에서 일어나는 논리적 문제 라고 정의하고, 어디에 우선 순위를 두느냐에 따라, 또 당사자간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한 의사결정이 개입되면서 순환과 모순이 일어 나게 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 질문 가운데 하나가 왜 대리모 계약은 거래 양 측이 모두 만족하는데 법적 금지되는가? 같은 것이다. (성매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 번 다른 각도에서 설명해보자. 이것이 진짜 질문이 될 수 있는지 말이 다. 대리모의 경우는 거래 양측의 문제가 아니다. 성매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사회 전체에 피해를 준다. 사회의 기초 단위라고 할 수 있는 가정이 무너 지는 것, 그리고 가족이 파괴되는 것이 어떻게 당사자간 문제라고 정의하는 것인 것 기본 전제가 틀렸다. 그러므로 저런 질문은 논리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저 질 문을 저자가 꺼낸 의도는 아무래도 법 이란 것에 함몰되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269339 한국에서 벌어지는 청소년 성매매의 상황을 안다면-아마 저자도 알고 있을 것이 다. 미국도 만만치가 않으니까-저런 질문은 못한다. 이런 비유가 책 곳곳에 이상하게 많다. 그래서인지 너무 비유가 많아서 장황하다 는 느낌마저 든다. 특히 악행을 처벌하지 못하는 죄를 언급하면서 이른바 배은망 덕을 범죄로 규정하지 않는 과소범죄화 문제로만 규정하는 대목에 이르면 솔직히 법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느끼게 만들고, 그 해답도 제시하지 않는 저자에게 맥이 빠지는 느낌도 든다. 그래도 법적 판결이 이분법적인 것, 회색지대를 두려 하지 않고 기어코 경계를 나누려고 하려는 경향성을 언급한 대목에서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여러 재판들이 전혀 그렇지 못한, 이분법에도 미치지 못한 판결을 많이 하는 문제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이 단순한 불일치 영역이 아니라 정치적 판 결까지는 이 책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부조리 보다는 삐딱한 영역 을 다룬 책이라고 본 것으로 수준을 정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많은 독후감들이 인터넷에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한 견해를 거론하는 사 람은 없었던 듯하다. 아마도 이 책의 영어 제목에 유의해서 보지 않은 듯도 하다. 다양한 학문 이를 테면 철학, 통계학, 정치학, 심리학 등을 활용한 법의 이면 문 제를 설명한 건 좋으나 저자의 논지에서 분명히 흐르는 정서는 법의 허점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관용이란 점에서 불편한 구석이 많았다. 앞서의 예시처럼 법에 치 우쳐서 사회논리에서-이것은 저자가 꺼낸 사회선택이론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쉽게 설명 가능한 부분까지 의문을 추가한 사례로 예시한 것도 없지는 않았다.

페이지127 투표제의 모순과 법의 모순이 본질이 같다는 대목은 18세기 프랑스 수학자 장 샤를 드 보르다의 연구로 시작된 것인데, 우리가 민주적이며 공정하다 생각하는 다수결 투표제가 사실은 선호와는 달리 엉뚱한 사람을 뽑는 모순을 보인다는 점 을 지적한 것이다. 법의 제정과 집행도 여러 개의 대안이나 결정 기준을 놓고 순위를 매겨 하나의 대안을 선택하는 종합적인 의사결정 행위이기 때문에 두 개, 세 개의 대안이 등 장하면서 완벽한 선택이나 결과는 없어진다. 이건 투표의 역설(voting paradox) 또는 콩드르세의 역설(Comdorcet s paradox) 로 불리는 이론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각 유권자가 합리적인 판단으로 투표를 했지만 불합리한 투표 결과가 발생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세 개 이상의 대안이 경합되고 그 가운데 어 느 대안도 절대다수 유권자들의 첫 번째 선호가 아닌 상황에서, 대안들을 한 쌍 씩 비교항 표결하는 것이 '콩도르세 기준'이다. 이를 적용하여 과반수 의결로 최 종안을 결정할 경우, 어떠한 대안도 '콩도르세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투표의 역설'의 핵심이다. 여기에서 '콩도르세 승자'는 대안을 쌍으로 비교했을 때 어떤 쌍에서도 승자가 되는 대안을 말한다. 반대로 대안을 쌍으로 비교했을 때 어떤 쌍에서도 패자가 된다면 '콩도르세 패자'가 되는 셈이다. 투표의 역설 현상은 어 떤 집단의 민주적 선택이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수학적으로 증 명한다. 민주 사회에서 투표가 하는 역할을 형식적으로만 따진다면, 투표가 일정 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 측 면에서 말한다면 합리성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투표에서 조작이 가능할 수도 있 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셈인데, 이것을 저자는 법의 제정, 집행에서도 교묘하게 동 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언뜻 보면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과연 법이 논리적으로 명확한 명제, 하나의 사실적 명제-예를 들어 진위의 논리 타당성 같은 걸 말한다-를 가진 케이스까 지 무조건 콩도르세의 역설을 따른다면, 그것은 아마도 법의 존재가치는 논리성 의 바탕을 넘어선 것이 된다. 저자 또한 대안을 몇 개 가진 경우를 예시하고 이 의 모순을 논리적인 원인 이라 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요즘 같은 정치 시즌에는 사람들이 혹해서 볼만한 그런 내용들이긴 하다. 잘 가려서 읽어야 할 대목이 아 주 많기는 하다. 법의 허점을 말하면서 법의 모순과 그런 상황의 지속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부분은 대단히 못마땅하긴 하니까. 이 삐딱한 법이 사고를 쳤다. 이분법으로 난도질을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레오 카츠 교수의 말처럼 말이다. 2012.9.27 대법원이 곽노현 교육감에게 유죄를 선고 했다. 사후매수죄 라는 범죄명이 붙었다. 이걸 레오 카츠 교수 방식으로 의문을 제기하면 이렇게 된다.

페이지128 법은 무슨 권리로 타당하지 않는 논리를 꺼내 판결을 내리는가? 이거 아주 심각하다. 곽노현의 경우엔 지금 헌법소원심판이 제기 되어 사후매수 죄, 사후협박죄 같은 부류의 법이 타당한지를 심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심사의 와중에 대법원이 판결을 내려버린 경우라서 법 기관 내부에서도 이 문제는 과연 법률적 절차에 맞는가 아닌가 문제도 나올 수도 있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갈 등은 별개로 하고라도 말이다. 위의 질문으로 돌아가보면, 한국의 법이 가진 맹점 하나가 드러난다. 바로 타당 에 대한 기준이다. 이분법은 강제적인 논리집행에 해당한다. 거기에 권위를 싣는 것이 법인데, 그건 법이 아니라 법관이 그렇게 한다고 해야 옳다. (배심원 제도가 있다면, 법관의 단 독 결정은 내려지지 않을 것이기에) 다시 되풀이 되는 이야기지만 법의 판결이 논리학에서 말하는 검증된 명제 가 아닌 이분법을 선택했을 때, 과연 법과 논리 학은 함께 갈 수 있느냐는 과제가 남는 셈이다. 법이 사회에 엄청난 폐해를 끼치 는 셈이다. 이 기회비용은 도무지 산출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그 누 군가 는 져야 한다. 그러나 책임 당사자는 없다. 그냥 법과 법 기관만 덩그렇게 있다. 법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보다 더 지독하게 사람을 엮어 든다. 사람 이 살기 위해 만든 법이 사람 머리꼭대기에 올라와 있다면 법은 곧 신( 神 )이란 말인가? 그렇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적 지위로 생각한다. 그래서 법은 신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법을 최소화해야 한다던 함석헌 선생 말씀 생각이 난다. 그러나 법은 더 정밀해 지고, 복잡해진다. 그럴수록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은 공간을 가지고 이 분법의 영역을 넓히고 자의적 판단의 각도 또한 아주 예리하게 날을 다듬는다. 이렇게 가면 어디까지 갈까 싶다. 거기에 정치적 요소까지 마구 뒤섞이니 이거 원 진흙탕이 따로 없거나 아니면 깨진 유리조각이 깔린 바닥을 맨발로 걷는 것 같은 기분이다. 왜 이러는 걸까요? 이 질문은 그냥 툭 던지는 말이 아니다. 이 반복에 대해 뭔가 출구를 찾아야 한 다는 강한 요청이다. 잘못된 습속( 習 俗 )도 개선하고 발전을 시키는데 하물며 법 이란 제도를 수정 보완하는 작업은 왜 이리 더딜까? 또 왜 그 작업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머뭇댈까? 한국에서는 법을 고치는 게 마치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법부가 존재한다. 자정능력이 없는, 스스로 발전하고자 하지 않는 사법부가 존재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거듭 생각하게 된다.

페이지129 6. 박근혜의 진짜 한계를 보면 장작 / 김호진 골동품 가득한 토속음식점에 갔다 마당가에 놓인 소쿠리 비에 젖고 있었다 처마 밑 동개동개 쌓은 장작 다 젖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내 마음을 호박넝쿨이 둥글게 말아 올렸다 반쯤 젖은 장작 어깨 위로 둥근 호박잎 쫘악 몸 펼쳐 젖고 있었다 대신 젖는다는 것은 대신 아파한다는 것이다 아픔도 그리움의 모자를 쓰고 익으면 몸 속 깊은 향이 배여난다며 전골찌개 뚜껑 들썩이며 익어가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대선주자 분석들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아주 깊이 파고들기도 하 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들을 기본으로 해서 보는 경우도 있다. 선거가 가진 특징 상 이미지에 치중하는 측면도 있기에 겉수박 핥기도 상당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 매일경제의 정리(2012.9.28)는 그런 점에서 산뜻하게 전체를 조망해줘서 좋긴 하다.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SWOT분석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928143716627&right_comm=r5 Strength(장점), Weakness(약점), Opportunity(기회), Threat(위협)의 약어를 가지고 나름 재미나게 분석했다.

페이지130 진중권은 박근혜의 문제를 비리, 공작, 망언에서 찾았다. 모두 드러난 문제다. 솔 직히 이런 정리는 본질적이라기 보다는 지엽적이다. 비리의 경우엔 박근혜만이 아니라 새누리만도 아닌 한국 사회 전반에 흐르는 너무 강한 기운이고, 공작은 정치가 가진 전래된 습성이며, 망언은 그 내막으로 들어가면 결국 지키는 자와 뚫고자 하는 자의 투쟁에서 벌어진다. 근본적 문제라 보기에는 좀 어렵다. 현실적으로 문제를 찾아가면 박근혜의 단점은 속속 드러나게 된다. 그것이 개인 적인 것이건, 새누리당의 대선 주자로써의 자격에서 비롯되건 모두 문제 영역에 둬야 하지만, 한 사람이 만기친람( 萬 機 親 覽 )하지 못하는 조직의 특성을 감안해서 봐야만 하기에 되도록이면 직접적인 영향을 발휘하는 영역에서 다뤄야 한다. 이 를테면 회사가 전결규정이 있듯이 최종적으로 오너가 결재한 부분만을 다뤄보자 는 것이다. 여기에 꼼수로 책임을 하부로 미루는 그런 일도 있겠지만 그 또한 모 아보면 하나의 패턴이 되니 바로 그것이 지적할 한계가 될 수는 있을 터이다. 박근혜의 첫 번째 한계는 바로 사람 에 있다. 2007년 이명박과의 경쟁에서 드러난 바는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친박 이라 할지라도 갑작스럽게 부상하였으나 어떤 배후세력을 가진 친이 라는 집단을 따라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지금 상황은 다르다. 그렇지만 친박이 힘이 세어 져서 친이가 죽었다기 보다는 친이계라는 세력 자체가 합종연횡 수준이었다는 걸

페이지131 보여주는 증거는 많다. 그래서 지금은 흩어지는 중이고 그 대안으로 친박이 자리 잡은 것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누리로 당명을 바꿨지만 쓸만한 사람이 많지가 않다. 인재궁핍에 시달리는 셈이다. 이미 친이계가 장악했던 한나라당에서 마음이 떠나버린 사람도 많았고, 그렇다고 친박이 앞줄에 선 상태에서 제2선의 지지세력 이 될 마음도 없는 이른바 보수세력들이 박근혜를 관망하고 있다. MB정부에서 경력을 나름 단단하게 쌓은 친박은 최경환 전 지경부장관 정도. 거기다가 친박의 성격상 그간 박근혜의 전위( 前 衛 ) 역할을 많이 했다 보니 성격 상 약간 투쟁적이다. 그 말은 세력 자체가 외골수적인 측면이 있단 것이니 외부 인사들이 영입을 꺼려하고, 또 영입된 인사들도 이들과 많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 김종인-이한구의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논란도 그런 각도에서 보면 쉽게 보인다. 방안모색도 문제이긴 하지만 일단 경제정책의 주도권이 걸리게 되어 있 어서 갈등이 표출될 여지가 처음부터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는 신선한 이미지, 그 리고 정책의 융통성을 가질 수 있는 외부인사와 친박, 그리고 당내 소장파 등을 결합하는 안정화를 기하기가 극히 어렵다. 그래서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다 는 말이 나온다. 이게 첫 번째 한계다. 두 번째 한계가 바로 기존 보수세력의 울타리에 있는 재벌 등 경제 실체들과의 조화문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시장만능주의에서 기업규제를 더 풀고 경제우선의 전략, 즉, 성장 우선으로 당파의 논리를 전개하기를 요청한다. MB정부가 기업 프랜들리를 했지만 정권 막판에는 삐걱대는 모습이 곳곳에서 포착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는 친 기업을 위주로 가는 건 틀림이 없다. 지난 시간을 통해서 재벌 등 보수적 경제주체들은 힘을 많이 길러둔 상태이고 보면 박근혜에겐 이들을 달래는 것도 또 이번 선거를 치러야 하는 것도 난제에 빠진다. 사회의 요구는 분명 성장과 분

페이지132 배라는 두 틀, 성장과 복지의 강한 적정 순환을 정책기조로 선택하라고 가는 중 이다. 정책을 꺼내기가 두려운 상태가 온 것이다. 이건 일종의 딜레마로 볼 수 있 다. 이걸 조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정책이 나와야 하는데, 내놓아도 어느 주체도 만족시킬 수 없는 불가피함이 발생한다. 이 한계는 지금 시점에서 극복하기 무척 어려운 사안이다. 세 번째 한계로는 마땅한 대형 정책 이슈의 부재를 꼽을 수 있다. MB정권의 출범 시점에서 워낙 토건 국가로의 초대형 빅 이슈를 남발하여 지난 4년여 완전히 엉망이 된 상태에서 새롭게 경제를 살리고 내치( 內 治 ) 에너지를 함께 할 수 있는 묘안을 짜내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실천적인 대안을 내 놓지만 그건 임팩트가 약하다. 거기다가 현 정권이 저질러둔 너무 많은 찌꺼기를 모두 안아야 하는 부담이 있다. 정리하는 것도 그렇다고 새로운 걸 만들기도 어 정쩡한 자세를 이어가면, 이건 필패라고 보는 게 옳다. 상대의 입장에선 이 결점 을 꾸준하게 짚고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빅 이슈를 만든다는 건 하나 의 과제임에 분명하지만 대중이 공감할만한 것을 만들지 못한다면 차라리 그간 잘못된 것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도 종합정리가 가능해야 하는데, 그마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 이건 대단히 실무적인 정책작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장성 이 강한 과제이고, 한계이기는 하지만 극복방안을 반드시 내놓아야 하는 절체절 명의 숙제라 할 수 있다. 네 번째는 책임소재의 불명확성이다. 바로 현 정권과 선을 어디까지 긋고 있는가 하는 점인데, 이게 참 고약하다. 이명 박의 후계자 박근혜인지, 아니면 이명박과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리더 박근혜인 지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될 때 회색지대를 그냥 마구 달리고 있으면 취급되는 건 전자이지 후자가 절대 되지 못한다. 그 말은 차원이 똑 같은 인물 로 본다는 말이다. 정권과의 단절이냐 아니냐 차원으로까지 번지는 대목이지만, 그렇다고 샴 쌍둥이처럼 된다면 이 정권의 업보 또한 모두 짊어지는 것인데, 문제는 대통합이 란 구호가 언뜻 듣기엔 제법 괜찮은, 말하자면 그간 소외된 대중, 속칭 중도보수 이건 중도진보이건 계층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는 주제어 라고 선택했지만 진행과정에서는 아주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바로 저 전제조건 때문이다. 저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후자 또한 없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역시 이미지다. 과거사 정리 문제도 그렇지만 민심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역사의 평가는 말 그 대로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대가 오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세간의 인식은 역사 그 자체와는 다르다. 공과( 功 過 )에 있어 왜 과( 過 )를 중심으로 한 담론이 형성되는가 하면, 그것이 생산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적일 수 있다는 대 중의 묘한 감성적인 공감이 만들어져 있어서다. 그건 일종의 절대 권력에 대한 불만족한 감정이고 깊이 들여다보면 이명박 정권에 대한 깊은 생 짜증 류의 것도 엿보인다. 게다가 YS-DJ-노무현으로 이어져온 15년의 세월 동안 과거사는 나

페이지133 름 정리되고 또 프레임이 잡힌 대목도 많다. 이걸 모른다면 그 시간을 겪은 세대 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미지 문제는 공( 功 )을 내세우 는 것이 아니라 과( 過 )에 대한 반성 이후에서야 공( 功 )을 거론 가능한 위치로 간 셈이다. 비록 과거사에 대한 사과 혹은 인식 정리를 표명하기는 했지만 이 문제 는 불씨가 꺼졌다고 할 수는 없다. 세간의 이야기처럼 박근혜=박정희, 문재인= 문제아, 안철수=철부지 라는 말처럼 강한 이미지의 벽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지만 지금 벌어진 일에서는 분명 독 으로 작용했다. 여섯 번째 한계는 바로 브레인 이다. 선거를 많이 치러본 경험이 있는 조직에서 흔히 나오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선거 전날까지도 승리를 확신한다. 여론조사가 어떻게 되건 간에 아주 낙관적인 시각 을 드러내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걸 긴장시키고 또 새롭게 만드는 것이 브레인 의 역할인데, 지금 봐서는 새누리당, 박근혜에겐 그런 장자방이 보이지 않는다. 앞서 지적된 것도 그렇지만 이 정권이 행했던 정책 오류를 개선하는 방향을 여러 사안을 한 묶음으로 모아 그것을 잘 포장하고 내놓는 일조차도 하지 못한다. 내 부의 싱크탱크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는 것이고 이를 조율할 기능을 가진 브 레인도 없단 소리다. 이건 문재인, 안철수에게도 마찬가지로 드러날 문제이긴 하 다. 그러나 집권 여당이란 점에서 이 문제는 더욱 더 많은 요구를 받게 된다는 일종의 선험 부담이란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그 실망감도 크게 되는 것이다. 전 적으로 전략기획의 부재를 꼽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본다. 이 밖에도 홍보문제 등 지적하자면 나올 이야기는 많을 것이다. 이 한계 가운데 는 극복 가능한 것도 아닌 것도 있겠지만 그 성적표가 곧 대선의 결과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문재인, 안철수 두 측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분석을 뒤에서 해보기로 하자. 7. 문재인의 진짜 한계를 보면 그 사람에게 / 신동엽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 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페이지134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노빠 란 단어가 확실히 문재인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억지 춘향이야 아니지 만 신봉자로 인해 오히려 세력을 확장하기 어려운 이 곤혹스러움은 아무래도 스 스로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 친노가 확실하고 친노라는 딱지를 떼고 싶지 않다 고 해버리니 피아( 彼 我 ) 개념이 너무 명확해서 바늘로 뚫기도 어려우니 말이다. 그 상태에서 욕망을 숨기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그건 쉽게 감출 수 없는 낭중 지추( 囊 中 之 錐 ) 같은 것이니. 문재인의 한계는 이렇게 대체로 노빠, 짧은 정치이 력, 그리고 민주당의 한계 등이 지목되지만 여기에도 숨겨진 것은 많다. 그걸 찾 아내서 보자. 첫 번째는 정체성의 한계다. 이건 변하지 않는 성질과 상태를 말한다. 노빠이며 노무현의 친구, 노무현 정권의 핵심 등 많은 것이 정체성 속에 한꺼번에 버무려져 있는데, 이게 한계를 가졌다 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확장성의 여지가 잘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그런 이미지 를 가지고 있단 한계다. 윤여준의 영입은 골수 보수인사의 영입이 아니라 정체성 확장의 카드이긴 했지만 워낙 윤여준-안철수-법륜 스님으로 이어지는 고리가 있다 보니 문재인의 정체성에 도움이 되는 건 별로 없어 보인다. 오히려 용광로 선대위 라는 이름으로 내부조직을 꾸리는 과정이 더 먼저인 듯한데, 이마저 친노 진영의 2선 후퇴 요구를 하는 비 친노의 입장이 틀린 것 같지도 않게 보일 정도 로 친노는 매우 폐쇄적 프레임을 가진 건 사실이다. 문재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선거라는 형식에선 매우 복잡한 인물로 밖에는 이미지를 내보일 수 없다. 이 한계가 으뜸이다. 두 번째는 순혈주의의 바탕이 너무 세다는 것이다. 노무현도 그랬지만 순혈의 의미는 매우 고집스러운 원칙주의자란 것과도 통한다. 법을 공부한 사람의 기계적 접근법이 있다. 한 번 옳다 하면 그것이 틀려도 끝까 지 밀어 붙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견해를 잘 듣긴 하지만 결국 자기의 결정구

페이지135 도로 몰아가려는 속성, 그것이 순혈주의자들이 가진 특질인데, 문재인에게도 그런 모습은 강하게 비친다. 이게 노빠, 친노라는 단어와 어울리면서 입지를 좁힌다. 문재인 자신도 그걸 굳이 숨기지 않는다. 원칙으로 돌아가라, 지킬 것은 지켜라 는 말은 듣기엔 대단히 좋지만 정치 판에서는 고지식한 것으로 오해 받을 소지도 다분하다. 융통성이 없었던 노무현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이미지 는 일단 실패에 가깝다. 세 번째는 부채다. 빅텐트 I. 은 성공했다. 문재인은 일단 민주통합당의 대선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빅텐트 II. 를 포기하지 않는 소위 진보진영의 네트워크는 지금도 가동 중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 선거 판에서 지상 명령처럼 인식된다. 그건 때로 문재인의 무조건 양보를 불러올 수도 있다. 이 와 중에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력한 우위를 가져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도 나오고 앞으로도 나올 빅텐트 II. 에 대해 문재인은 나름 준 비는 하지만 그 상황에서 믿을만한 보루, 자신을 위해서 최후까지 버텨줄 진영은 갖추지 못했다. 이 점에서 문재인은 친노를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네 번째의 한계는 관계 구조다. 문재인의 사람들은 수직적이기 보다는 수평에 가깝다. 친노집단의 3철 로 불리는 이호철, 양정철, 전해철의 경우도 문재인이 맏형일 수는 있으나 보스는 아니다. 노무현도 그랬다. 정권을 잡고도 그는 보스라기 보다는 마치 맏형 같았다. 우리 노짱, 노짱 이란 말은 그저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수평성이 곧 능률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다른 세력이 매우 수직적인데 비해 이 수평구도는 서로 합쳐질 수도 그렇다고 연합하기도 어려운 구도여서 항상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외부 인

페이지136 사가 영입된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친노 독식의 미래, 친노의 욕망은 항상 의심받는 구도인 셈이다. 이걸 조화롭게 할 형식, 프레임을 갖추지 않으면 어떤 식이건 이탈자는 발생한다. 작거나 크거나 간에 그런 조짐은 문재인에겐 유리할 건 아무 것도 없다. 다섯 번째의 한계는 이해관계가 맞물린 사람들이다. 사람, 그것도 연합된 사람 중의 또 다른 거대 세력들이다. 이해찬-박지원의 퇴진 요구는 그냥 나온 건 아니었다. 이들이 경선을 흥행시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사 리엔 맞지 않다. 요구의 배경에는 이들이 가진 지독한 권력욕망에 대한 반감이 도사린다. 이해찬이 누군가? 노무현 정권의 실질적 2인자였고, 박지원이 누군가? 여전히 동교동의 새로운 수장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문재인이 노무현을 뛰 어 넘기 전에 이들을 뛰어 넘는 역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또 이들 또한 문 재인이 그렇게 나가는 걸 보고 있지는 않는다. 손학규-김두관-정세균 등 경선주 자들의 세력들도 이해찬-박지원-문재인 구도에서는 자신들이 당내에서 혹은 대 선 경선에서 어떤 위치에 처하게 될지를 안다. 겉으로는 연합이 될지 모르나, 말 은 백의종군이 가능할지 모르나 엄연히 민주당은 열우당이 깨지고 나서 몇 차례 의 질곡을 겪으며 만들어진 정당이고 그들에겐 주장할 지분이 있다. 그걸 모두 녹혀서 가겠다고 하지만 신뢰할 기반은 없다. 이 이해관계 조정이 지금과 앞으 로도 곤혹스런 과제일 것이다. 여기에 안철수 문제도 걸린다. 여섯 번째는 지역성이다. 안철수와 문재인은 부산이란 지역에 함께 걸려 있다. PK에서는 문재인이 지금은 조금 우위다. 그렇지만 민주당의 베이스는 처음부터 경상도는 아니었고 보면 어 느 순간 이 지역성은 출현할 수밖에 없는 이슈다. 새로운 형식의 지역감정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오히려 지금 지역성의 이점을 누리고 있는 것이 문재인이니까. 관건은 지역성 이슈가 돌출하면 상대적으로 안철수에게 유리한 공간이 형성될 개 연성이 아주 높다는 것. 이건 어떤 대책이 필요하지만 그걸 만들기는 역부족이다. 일곱 번째 한계는 권력 의지다. 문재인을 경선에서 뽑은 사람들 중에는 안철수와의 단일화를 기정 사실화하고 문 재인의 양보까지도 염두에 둔 사람들이 제법 있다. 비록 몸까지 안철수에게 가 있지는 않으나 어느 순간에는 친 안철수, 반 문재인으로 변할 내부 인사, 세력은 제법 많다는 의미다. 여기에서 버틸 수 있는 건 두 가지 요소다. 하나는 여론조사 의 결과라는 기계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권력의지가 당원, 대중에게 먹히 느냐다. 후보경선 이후 많이 달라진 모습이긴 하지만 여전히 이 부분은 강렬하지 않다. 여덟 번째, 감각이다. 정치인의 감각은 순발력과 그리고 순간적으로 대응하는 기민성에 있다. 그것이

페이지137 언어로 발휘되는데 노무현에 비해 문재인은 그런 감각이 많이 떨어지는-성격상 혹은 훈련미숙 등이 원인이겠지만-경향이 강하다. 대선은 이슈를 꺼내는 전쟁인 데, 본인이 그 이슈의 중심에 서지 못하는 밋밋함이 이어지면 연출을 해서라도 이 모습을 만들어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자신의 정치감각에 대한 화끈한 쇼맨십 말이다. 지금까지는 이 부분의 부족함이 메워진 흔적은 없다. 아홉 번째, 과거로부터의 아픔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 그는 민정수석,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 이전 법무법인 부산을 노무현과 함께 한 것, 노무현 정권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이러저러한 활 동을 통해 드러낸 정책적 오류들이 있다. 이건 행동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 질적 상황으로 눈 앞에 펼쳐질 때, 아주 대단히 곤혹스러움을 안아야 하는 숙제 다. 이를테면 한미FTA에 관해 재협상, 장기적 폐지 등을 말해도 그것을 받아들 이는 측에서는 민주당, 친노 내부의 친 한미FTA론자들의 성격적인 문제가 대두 될 것이고 상대로부터는 이런 접근을 공격받을 수 있을 터이다. 이건 매우 큰 주 제에 해당하지만 앞서 본 것처럼 노무현 정권 시기의 다문화정책이 가진 절대 오 류 또한 그런 유형에 속한다. 이 아픔들을 어떻게 치유하는가에 있어 컨센서스를 형성하기란 몹시 어렵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사안이어서 그렇다. 기타 문제들도 많다. 그것이 한계 영역에 있는 것은 수정을 의도하더라도 자칫 어정쩡한 수준에 그칠 우려가 많기에 그렇다. 이 모두를 한꺼번에 처리할 재주는 쉬운 게 아니다. 박근혜에게서 보았듯이 문재인의 곁에는 친노 이외의 브레인들 이 다가서려고 하지 않는다. 그 욕망 덩어리(나는 이를 폐족의 부활욕망 으로 부른다.)에서 과거의 실패를 실패로 인정하는 솔직함을 보기도 어렵다. 그러니 열린 자세의 브레인 워킹이 잘될 모양은 아니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사람이 먼저 다 는 슬로건이 무색해져 버린다. 위의 내용에 일부 포함되긴 했지만 바로 이런 점은 문재인이 처한 한계이며,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곧 정치인 문재인의 역량으 로 평가된다는 건 자명하다. 8. 안철수의 진짜 한계를 보면 피리소리 한 사발 / 김남수 식혜의 배경에는 싹튼 보리가 있습니다 달콤한 한 사발의 보리피리 소리를 원한다면 서두르지 마세요 젖은 보리에서 초록 눈이 올라오는 순간 겨울의 언덕을 건너

페이지138 맷돌에 부서지는 통증을 지나 엿길금 가루로 거듭 납니다 참고 기다리세요 어둠이 내리는 저녁 보리밭을 지나가는 고운 바람 한 되 체에 내리세요 한 동이 물과 만나 은근해지도록 그윽한 눈길 보낸 후 말간 보리의 눈물만 받아 하룻밤 재우세요 밤새 뒤척이던 소용돌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뜬소문도 삭아 내리면 투명한 그리움만 따라 내세요 선택된 눈물이 허기진 밥알을 만나 뜨거워지도록 배려하세요 미지근한 온도에서 끓을 수도 식을 수도 없는 발효의 시간 열어보지 마세요 해뜨는 아침부터 해지는 저녁까지 회한의 언덕을 지나 두둥실 떠오른 사랑 까칠한 신경질이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뜨거운 불에 한 번 더 올리세요 우르르 일어서는 덜 삭은 잡념 걷어내면 밥알 동동 들통에서 휘- 피리소리 한 줄기 남도의 푸른 들녘이 출렁입니다 눈물의 언덕을 건너, 인고의 피리 소리 한 사발 좋은 점이 참 많은 출발을 보였다. 과정도 괜찮다. 여론조사로는 일대일 승부에선 최강자니까. 이 정도면 갓 정치 입문한 사람치고는 신기록이 아닌가. 그런데 너무 아쉽다. 많은 부분이 그렇다. 물론 게 중에는 후발주자로써 어쩔 수 없이 벌어지 는 일도 있다. 그렇지만 그와는 다른 측면이 이미 발생했다. 앞서 안철수에 대한 아쉬운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런데 이건 여전히 이어진다. 중간에서 끝난 사안이 아니다. 이헌재에 관한 안철수의 코멘트는 지금까지 도와 주셨고 앞으로도 도울 것 이란 입장이고, 이헌재는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공직에 나서지 않는다고 분명히 얘기했고 변함이 없다 는 걸로 정리하려는 듯하 다. 그러나 이건 전혀 정리와는 다르다. 캠프에 참여하건 않건 간에 대부 의 역할

페이지139 을 하면 그게 바로 정치 다. 이건 이헌재의 이야기가 옳다. 경제는 정치다 는 말 은 정치를 직접 하지 않아도 경제를 움직이게 되면, 경제라는 요소에 개입하면 바로 그것이 정치가 되는 것이다. 여전히 마무리가 안 되는 것도 아래 안철수의 한계가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일지 모르겠다. 첫 번째 한계는 바로 융합 에 대한 집착이다. 이건 일종의 슬로건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혁신, 융합, 창의 라는 것도 그렇고 융합적 사고, 디지털 마인드, 수평적 리더십 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방향 으로 이것을 말하지만 융합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성공을 거둔 사례도 적거니와 그것이 사회의 제반 요소 속에서 적용되는 과정을 검증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오히려 이 융합의 현실성에 대해 매우 우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부 학문적인 사례를 사회 제 현실에 대입하려는 발상이 지나치면 그것이 곧 책상물 림 이 된다. 즉, 교과서적이란 비판이다. 두 번째 한계는 현실이다. 즉, 현실적으로 조직으로부터 시작해서 기성 정당이 가진 그러한 시스템을 선거 에 맞게, 수권 능력을 보여주면서 가는 것이 무척 힘들다는 점이다. 그래도 여론 의 지지에 힘 입어 이런 문제들이 나름 나이스 하게 정리되어 가는 모습도 보인 다. 그러나 시작 단계일 뿐이다. 여러 삐걱대는 모습이 나타나면 한 방에 무너진 다. 그게 정치 조직이다. 여기는 오너가 없다. 이합집산이지 힘을 가진 사람들끼 리의 합종연횡은 아니다. 그래서 모래알 같다. 조직을 대선에 맞게 구조화하는 작 업 자체가 한계를 가진다. 이 현실 극복은 시간이 필요한데, 이 또한 문제가 된다. 세 번째 한계는 이미지다. 너무 청렴한 이미지가 각인 되었다. 그래서 타이밍 정치 라는 말이 칭찬이 아니 라 사실은 욕이다. 기성 정치인 뺨치는 정치를 대선 출마 선언 전에 벌써 했다는 것이니까. 그걸 능력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가 않은 사람도 많다. 게다가 작은 사건들, 이를테면 다운계약서마저도 사과할 일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고개 를 숙이다가는 몇 번 안에 그냥 이미지 다운이 걸린다. 그는 자신의 저서 `안철 수의 생각`에서 "탈세가 드러나면 일벌백계로 엄중하게 처벌해서 세금을 떼먹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지난해 9월 한 언론사 초청 강연에서는 "경제사범은 잡히면 반은 죽여 놓아야 돼요. 그런 사람들을 왜 사형 을 못 시켜요. 경제사범이 많은 것은 한 번 해먹고 재산 은닉한 뒤 몇 년 교도소 에서 살다 오면 평생을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매일경제 기사 중에서, 2012.9.27)는 기사가 벌써 나온다. 마구 뒤진다는 소리다. 기대는 종종 환상으로 번지는데 그게 무너지고 그 사실이 고착화 되어버리면 순식간에 지지는

페이지140 쑥 빠진다. 지금 이미지 관리를 잘 하고 있는 축에 속하지만 이것의 관리가 기성 정치세력의 여러 공격에서 취약하다. 다운계약서도 윤여준 영입을 보고 바로 반 대진영에서 터트린 것이란 말도 있다. 문재인-안철수 간의 기싸움에서 어떤 상 황이 드러나면 그 이해관계를 따져야 할 때 반드시 안철수의 해가 더 크게 구성 되어 있다. 네 번째는 정책이다. 총론은 나왔다. 안철수의 생각 은 일종의 총론이었다. 각론이 나와야 한다. 그런 데 문제는 이 각론짜기를 위해 불러 들이는 사람들이 안철수의 생각 이란 교본과 맞지 않을 때 생기는 곤혹스러움이다. 이걸 융합이니 혁신이니 하는 단어로 넘어 갈 수 없는 건, 저 생각 이란 단어가 철학 이고 또한 집권을 위한 통치철학의 기 초 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당장에 고려대 장하성 교수를 영입하며 사건은 벌어진 다. 안철수의 생각 은 주주자본주의를 넘어선 이해 관계자 자본주의를 말한다. 즉, 기업들이 주주 중심주의라는 고립된 개념 아래 사회성과 공익성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지면서 국가, 노동자, 소비자, 지역 주민 등 이해당사자들의 이익을 외면하 는 경향이 커졌다 고 말했지만 장하성은 철저한 주주자본주의 옹호자이자 소액주 주 운동을 벌인 반 재벌론자(사실은 반재벌론자가 아니다. 주주자본주의 옹호는 곧 친재벌론자를 의미한다.)다. 그에 비해 이헌재는 관치금융 주의자이면서 개방 통상형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장만능주의를 선택하고 또한 금융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기조를 직접 정책에 적용한 인물이다. 이들 셋 다 따로 놀 고 있다. 이게 경제 하나에만 나타날 현상은 아니다. 당장에 외교 안보 통일 등 문제로부터 교육 등 사안까지 다양하게 안건들이 남아있다. 각론의 통일성을 만 들어내는 과정만 해도 복잡하고 또 이미 발표한,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기대하게 만든 안철수의 생각 과 일치성과 불일치성이 검증되는 때다. 쉬운 문제는 아닌 듯하다.

페이지141 다섯 번째는 선택이다. 문재인은 슬그머니 책임총리제까지 흘린다. 그렇지만 그런 형식의 담합적 공동정 부 형태가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는지는 미지수다. 비록 출마의 변에서 민 주당의 근본적 개혁과 국민의 동의라는 두 옵션을 단일화의 전제로 걸었지만 이 건 일종의 좌표 같은 것이지 사실 막연하다. 그래서 단일화라는 것이 주는 임팩 트가 어느 시점에 어떻게 번질지, 또 그에 어떤 평가를 하고 이끌어갈지에 대해 서는 전적으로 선택의 문제가 남는데, 이게 바로 한계다. 노무현-정몽준과도 상 황이 전혀 다르다. 정몽준은 당시 정당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무소속으로 가겠 다고 강을 건너고 다리를 부쉈다 고 말한 상태에서 과연 선택의 혼선을 누구와 어떻게 공유할 건지도 궁금해진다. 끝까지 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여섯 번째는 경험과 인식의 문제다. 흔히 안철수를 엘리트 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한국 사회에 서 서울대 출신 엘리트들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그들의 카르텔이 어떤 건지를 아 는 사람들에겐 이 말은 당연하게 들린다.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기초와 본질 모두에서 엘리티즘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군 생활을 하면서 매주 비 행기를 타고 서울로 오간 걸 폭로(사실상 이런 건 폭로에 해당한다)하면서 더 확 산될 수 있다. 대중의 입장에서는 안철수를 통해 보고자 하는 건 신선함도 있지 만 기성 정치가 보여주지 못한 참신한 인식과 그걸 해낼 수 있는 경험의 실증을 바란다. 그런데 이게 한계가 있다고 드러나면 이건 큰일이다. 잘 관리해야 하는 항목이지만, 경험과 인식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 그 프레임에 딱 맞추는 것이 가 능한 게 아니다 보니 엇박자가 자꾸 나올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비판은 따를 수 밖에 없다. 도대체 혁신 이 뭐냐고 묻는 질문은 항상 따라다닐 것이다. 일곱 번째는 안철수 자신의 성향이다. 보수와 진보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실용주의는 정책 속으로 들어가면 매우 당 혹스런 결과를 나타낼 때도 있다. 생각하지 못했던 사안들이 툭툭 불거질 수 있 다. 그런데 안철수는 이 모든 문제들에 있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면 전문가의 입장을 빌려오더라도 또 자신이 한 번 더 생각해야 하는 체질인 듯하다. 자연과 학도 특유의 기질이 있다. 그리고 어떤 전문가의 눈을 통해서 봐야 하는가 기준 의 문제도 있는데, 이걸 융합이란 과제로, 혁신이란 테마로 자꾸 토론과 결론도출 에 이르는 많은 시간을 요하게 하는 특징도 있다. 대선 판의 긴박성에 비추어 이 렇게 토론하면 아마 도끼자루 썩는 걸 모르게 될 것이다. 이 한계는 꽤나 극복이 쉽지 않을 주제다. 믿을만한 사람을 통한 작격( 作 格 )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렵 다. 안철수의 생각 이란 책이 가진 한계와 비슷하다. 이 밖에도 많다. 그러나 최소한 저 문제들, 한계들을 뛰어 넘지 않고는 집권이란 그냥 꿈이 될 수 있다. 기성 정치권의 공격은 몹시 치열할 것이다. 이제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10월도 어쩌면 오픈 게임 수준에 불과하다는 생각마저

페이지142 든다. 안철수에게는 말이다. 9. 목에 걸린 가시 송곳눈 / 조정권 내가 아는 환쟁이 영감은 그림 한장 그려달라고 하자 보는 앞에서 제 눈을 송곳으로 찌른모양이야 보기 싫은 작자 영 보지 않겠다고 제 눈알을 파버린 셈이지 재미있는 것은 그 영감이 파버린 눈으로 세상을 보며 그림을 그려왔다는 점이야 두눈을 뜨고 두루 세상을 보는 것보다 한쪽 눈만을 송곳처럼 뜨고 보는 편이 훨씬 참을 만했다는 거지 송곳 같은 눈으로 그림을 그렸으니 무엇을 그렸겠나 그려놓고 나선 찢고 그려놓고 나선 찢고 그림이란 그가 물 위에 써놓고 간 흔적일 뿐이지 물 위에 이름 뿌리고 간 그 영감 어느 바위틈에다 송곳눈을 박아 놓았을지도 모르지 사람 영입전이 한창이다. 앞으로 더할 것이다. 인재라 해야 하나 아니면 세력이 라 해야 할까, 나는 후자로 본다. 지금은 세( 勢 )를 만들 때다. 진용을 짠다는 것 이다. 전쟁의 북소리는 커졌고 이미 봉화도 올랐고 군데군데 치열한 전투도 벌어 지는 중이다. 안철수는 여러모로 추석 전에 타격을 입는다. 다운계약서 논란은 어쩌면 안철수 의 도덕성보다는 그에 대한 심리적인 충격을 주는 폭로처럼 보인다. 이건 검증 축에 낄 사안이 못 된다. 워낙 이런 게 많았다. 위장전입부터 시작해서 그보다 더 한 것도 있었으니 다른 이들이야 별로 이런 일에 충격이 없는데, 좀 유별나다 싶

페이지143 게 도덕성을 강조해온-그 자신이 스스로 멍에를 짊어질 발언도 했었기에-사람 이라서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위축될 수도 있는 일이고, 또 어떤 일이 벌어 질까 우려도 되고 그럴 것이다. 대한민국 정치인은 그런 일 정도는 가볍게 넘어 가야 하는데 말이다. 지금 잘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연속되는 상황에서 어떤 변수 가 튀어나올지는 미지수다. 여전히 잠복하고 있는 문제는 많다고 봐야 한다.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세 사람의 진짜 한계를 살펴 보면서 느낀 생각이지만, 이들 가운데 누가 이명박 정권에게는 가장 최악의 카드일까? 역대 정권은 한 번도 예외 없이 정권이 바뀐 이후 현재 권력이 과거 권력에 대해 일정한 수준의 제재 를 가했다. 노태우가 전두환을 백담사에 보내고 그런 노태우 도 감옥에 가고, YS 아들 현철이 감옥 가고, DJ는 두 아들 감옥 보내고 최측근인 박지원도 그랬고, 임동원까지 법정에 섰다. 노무현은 형과 측근이 감옥 가고 후견 인이랄 수 있는 박연차, 강금원도 심하게 당하면서 그 스스로가 봉하에 거의 유 폐된 생활이 되었다가 서거하였다. 이 정도면 정권이 과거형이 되는 순간부터 이 사안을 대비하는 게 정상적이다. 이명박 정권은 벌써 5인방 중 3명-이상득, 최시중, 박영준-이 감옥에 간 상태다. 그러나 정권 기간 중의 일로 문제가 된 건 박영준 수준인데, 그 정도로 그칠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주변의 이야기인 걸 감안하면 솔직히 어떤 대비를 MB가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나 말고 많은 이들이 막걸리 한 잔 하면서 하는 이야기의 골 자는 간단하다. 건수가 너무 많지 않나! 대선 레이스에서 차마 이 이야기는 나오지 못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그렇지도 않 다. 문재인 측에선 정권심판론으로 4.11 총선에 임했지만 사실 이 이슈가 별 재 미를 못 봤다. 박근혜가 너무 셌다. 패인 가운데 하나기도 했지만 총선 때만 하더 라도 이명박-박근혜는 적어도 이명박근혜 로 분류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묘하게 총선 이후 대선 레이스에서 9월 청와대 회동 이후에 분위기가 약간 역전되더니 별 다른 의사표현이 없어도 이명박근혜 가 자꾸 나온다. 무상보육비를 두고 약간 알력이 있는 듯 하고, 친이계의 대선 캠프 합류가 극소수라는 점에서 서로 갈등 요인이 있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딱히 심판론 이 가동되지도 않는다. 그러는 사이 이 아젠다는 이제 문재인에게 넘어가 있는 상황이라고 해야 옳다. 민주통합당 입장에서는 정권심판론을 잘못 꺼내면 이상하게 왜곡된다는 걸 걱정 하는 모양이다. 4.11 총선의 후폭풍인데, 그건 현실인식 자체가 잘못된 거다. 이 를테면 네거티브 선거, 피 튀기는 선거의 구호를 싫어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여 성들이 주로 가지는 심리라는 분석이 나오는데, 정작 이것은 누군가는 정리해야 하고, 지금이 그럴 때라는 건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남은 정권 기간 이 아직도 내년 2월까지인데, 어지간한 증거는 인멸하고 난리도 아닐 것이다. 검 찰이 여전히 정권 손아귀에 있는 상태이고 보면 말이다.

페이지144 검찰이야 워낙 정권 말기만 되면 이상하리만치 조직 생각을 하면서 살짝 비틀고 조직보호 심리를 동원하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그곳 아닌 다른 곳에서 터지는 일들까지 모두 통제할 재간은 없을 듯하다. 박근혜, 문재인 둘 가운데 누가 이명박 정권의 과오를 심판하는 적임자일까 물으 면 대부분 그래도 야당이 잘 하지 않겠는가 말한다. 진짜? 좀 우스운 케이스일 수 있지만 역대 정권 가운데 가장 경미하게 지난 정권을 심판한 것이 바로 DJ정 권 시절이다. 야당은 강성 이미지를 포장하기 위해, 혹은 다른 타협의 이유로 무 슨 관용과 사회 통합을 꺼내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이명박 정권이 집권하자마자 사정 없이 노 전 대통령을 쳐대는 모습에서 기가 질린 사람들이 많다. 물론 검찰 을 동원해서 전방위로 속말로 조져댔던 그 광경을 한 번 떠올려 보라. 차별화를 위해서 여당은 그런 일을 더 잘한다. 그에 비해 야당은 조금 쑥맥처럼 일처리를 하는 경향이 강하다. 왜 그럴까 이유 를 따라가보면 의외의 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자신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접 근하는 경향이다. 그래서 정치인 중에 믿을 놈 없다는 소리가 나온다. 다 그 나물 에 그 밥이란 거다. 언론은 사건이 툭 불거져야 그 때부터 난리가 난다. 이 정권 기간 내내 정권보호 에 앞장을 섰던 소위 보수언론들이 아직 MB정부를 나름 보호하는 이유는 선거 기간 동안 보수표라고 불리는 집토끼 관리가 안되어서 그럴 뿐이라는 시각이 지 배적이다. 자꾸만 현 정권과 여당을 동일시 해버리다 보니 민심을 자극하지 않으 려고 여기 저기서 사건이 터질 때를 선거라고 끝난 이후로 억지로 돌리는 것이고, 그 때 가서 터지면 그냥 사정없이, 정말 인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이 몰아붙일 준비를 한다. 그들이 정보보고가 없어서 끙끙대며 참는 건 아니다. 4대강 사업은 그런 점에서 보면 국토부가 아무리 이러니 저러니, 청와대가 무슨 홍수방지 효과를 봤느니 마느니 해도 핵심은 바로 돈 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사회 구조를 아예 눈 감고 모르면 모를까 건설 판에서 리베이트 없는 공사가 있 었던 적이 없다는 게 기본생리인데, 저 사업 털면 털수록 온갖 일이 벌어질 거라 고 보고 있고 언론이라고 이걸 모를 턱도 없다. 아무리 증거를 지운다고 해도 현 장에서 공사하고, 또 여러 건설사들이 개입되어 있다 보니 요즘 들리는 말에는 4 대강 업무 했던 대기업 주요 인물들이 서둘러서 한국에서 빠져나가려 해외 근무 나가려고 한다는 말도 들린다. 특정 상고 인맥이 다 해쳐 먹었다는 이야기는 일 부 언론에서도 검증된 바 있지만 그 이후 후속 보도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걸 모두 밝히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이건 국내 사안이고 해외 사안은 없을까? 이미 사우디 원전으로부터 아프리카까 지 툭툭 튀어나온 사건은 많다. 그 내막이 모두 다 알려진 것일까? 아니다. 그냥 단편적으로 나오고 덮고 그러고 지나가는 중이다. 이 일들을 가장 잘 알만한 곳

페이지145 은 그냥 침묵한다. 마치 인삼 씨앗 뿌려두고 시간이 지나야지 거두지 않으면 약 효가 없다는 식 말이다. 궁금한 건 안철수의 인식이다. 아니지, 생각은 필요 없고, 이 부분에 대해 어떤 조치 방법을 생각하고 표현할까 하는 것인데, 그간 발언이나 안철수의 생각이란 책으로만 보자면, 분명 엄중 처벌하자 주의라고 보여지긴 한데, 이상할 정도로 이 사안에 대해서는 명확한 말을 몹시 아낀다. 리스펙트? 여전히 현재 권력이기 때 문에? 이임식 하기 전까지는 정권이라고? 목에 가시가 걸린 측은 어느 쪽일까? 누가 이걸 빼지? 어떻게? 이 가시 누군가는 빼내야 한다. 자꾸 맨밥 먹으면 내려간다 소리에 민간 처방 자 꾸 썼다가 이게 묘하게도 일자( 一 字 )로 후두를 막고 있으면 쭉 내려가면서 찢어 진다. 그 때는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수술까지 생각해야 하는데, 자꾸 더 방 치하면 할수록 사안은 더 엄중해진다. 요행을 바라지는 말아야 할 터이다. 통증은 시작되었고 상세를 보아 하니 중증으로 가는 단계다. 그래서 다시 본다. 누가 저 목에 가시를 빼야 하나? 언제? 어떻게? 이것이 대선 레이스의 관전 포인터 가운 데는 몹시 중요한 팩트에 해당한다. 민심을 생각하면 말이다. 테크니컬 한 접근이 옳은지 아니면 일도양단이 좋은지, 그건 알아서 선택할 일이다. 완벽한 정권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권 같은 권력은 두 번 다시는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본다. 방법은 없다. 있는 대로 털어야 한다. 괜히 사회 안정 운운하는 자를 가장 경계할 때다. 노무현 퇴임 후에 털린 건 털 린 것도 아닐 듯하니까. 인과응보( 因 果 應 報 )라는 것도 있는 세상이지 않나! 10. 그러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땅끝 / 나희덕 산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렸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페이지146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글을 내보내면서 나는 종종 이 글을 쓰는 나의 마음이 어느 정도 분노를 안고 있 는가 생각하게 된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 가운데는 사람의 힘으로 말릴 수 없는 것도 있고 또 사람의 힘으로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것도 있다. 분노는 불가항력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다. 그냥 원망( 怨 望 )만 할 뿐이지. 멍하니 하늘 보 면서 씩씩대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한숨 푹 쉬는 거 말이다. 그에 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있을 때는 화가 난다. 축구장에 들어간 선수가 게임 중에 골을 넣을 수 있는데도 못 넣었을 때 기분이 어떤가? 물론 상대 선수가 그러면 잘 했 다고 박수 치지만 내가 응원하는 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입에서 욕 나온다. 둘 다 응원할 일이 없이 게임을 즐길 때는 탄성만 지른다. 어이쿠! 역시 분노는 네 편 내편이 가려졌을 때 나오는 게 바탕인 모양이다. 우리 사회에 대해 입에서 욕설이 나올 때는 그게 불만족의 표현일지라도 애정이 있어 그런 거라고 난 생각한다. 성격에 따라 그마저 하지 않고 꾹꾹 누르는 사람 도 있고, 아예 관심 없다 딱 자르고 이런들 저런들 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 냥 보편적 정서에서는 잘할 수 있는데 못하면, 놓치지 않아야 할 일을 망치면 화 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까지 내가 겪은 정치권력들은 대체로 낙제점이 맞다. 그들 의 선택은 아주 자주 대중의 많은 이들을 희생하더라도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고 또 주머니를 채우는 용도에 머물렀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흘러가며 변화는 일어 나고 발전인지 아니면 정체인지 퇴화인지는 언뜻 봐서는 구분되지 않지만 자세히

페이지147 보면 알 수 있는 그런 일들이 반복되거나 새롭게 터지고 그랬다. 그에 정치권력 은 많은 실수를 서슴지 않았고 또 고의적으로 그렇게 만들기도 했는데, 이것이 포장되는 과정을 보면 그들만의 리그였지 그 속에 대중이 있는 예는 극히 일부분 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미 정치판은 그들만의 안드로메다가 되어 있다. 그런데도 대선은 다른 어떤 선거보다도 더 호응을 받는다. 최소한 우리의 국가 사회의 대 표성이 있음을 알기에 그렇다. 대통령의 한 마디, 하나의 행동에 칠정( 七 情 )이 담 기기도 한다. 대표니까. Because I m choosing it. 영화 매트릭스의 어느 대사 한 구절 같았는데, 장면은 잘 기억나진 않는다. 3편이 었던 것 같은데. 그 번역이 그러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이렇게 자막으로 나왔다. 다른 건 대충 잊었는데 저 말이 이 글을 쓰며 떠오른다. YS가 최근에 대선 후보 가운데는 고를 사람이 없다고 했단다. 오래 살고 볼 일 이란 생각도 들긴 한다. 선택할 사람이 없다는 것, 그것도 곤욕스러운 일이다. 대 의민주주의에서 선거라는 것이 최선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최악을 피하고 차악을 선택하는 것 으로 만들게 한 주범은 누구일까 생각한다. 최선이 없다는 건 왜 일 까? 경험으로 봐서 아무리 좋은 이미지의 인물이라도 그가 최선일 수 있는 확률 은 거의 없다는 것이 원인이다. 그렇다면 최악의 기준은 무엇일까? 차악은 또 뭔 가? 최선이 없는 이유는 모든 계급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계급론적 접근도 있겠지만, 오히려 최선의 방안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말과 통하지 않을까? 이해관계를 최선 으로 조정하고 국가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그런 대통령을 우리는 만난 적이 없다. 그러니 현대사 이야기만 나오면 코끼리 만지는 장님 세상이 된다. 그 짐승은 원래 모양이 있는데 만지는 측의 문제라는 거다. 이번 대선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사람마다 기준은 모두 다르다. 추구하는 바에 따라 다르긴 하다. 최선, 최악의 중 간(원근은 따져야겠지만)에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 차악 수준일텐데, 최선도 차선, 차차선을 말하니까 진짜 그 중간 지점이 어딘가도 따져봐야 하겠고 참 복잡하다. 안철수 캠프에 합류한 장하성 교수가 안철수 아니라 안철수 현상 이라는 시대정 신을 선택했다. 장하성이 어떤 것이나 어느 자리를 이루려는 게 아니라, 이상을 쫓기로 했다. 오랜만에 한국 사회가 진정한 변곡점이 서 있는 것 같다. 이제는 기 존의 틀이 아니라 새로운 틀로 변화를 만들어내야 할 때이다. 새로운 세대에게 새로운 아젠다를 맡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2012.9.27 한겨레 신문과 전화 인터뷰)는 말을 남겼다. 안철수는 뭐고 안철수 현상은 뭘까? 그걸 장 교수는 시 대정신이라고 말한다. 그 뒤의 말을 이어보면 진정한 변곡점, 새로운 틀, 새로 운 아젠다 가 등장한다. 시대정신이라!

페이지148 문득 노무현 정권 초창기가 생각이 난다. 마이너리티의 마이너리티라는 노무현 세력의 등장, 그리고 대통령 탄핵소추, 열린우리당으로 이어지는 길은 한국 현대 사에서 없었던 일이 분명 벌어졌다. 그것도 변곡점은 맞았다. 그러나 어떻게 진행 되었나를 본다. 참담하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보수의 준동 때문에 그랬다는 식의 접근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새로운 틀이 그 때도 주어졌다. 이명박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시작 전에는 뭔가 아주 새롭게 프레임이 구성될 것 같은 기대감이 있었다. 그렇게 이미지를 심었다. 결론은? 완전 뻥 수준이 아니라 이건 뭐 변곡점 이 부러졌다. 물론 이것도 아주 새로운 프레임인 건 사실이다. 새롭다는 선전은 의미 없다는 게 증명이 된다. 어떻게 새로우냐의 문제이고 그것 이 대중에게 공감이 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적용이란 과정의 경과로 결과로 공감 이 이끌어져 나와야 한다는 것도 봤다. 새로운 아젠다는 없다. 하늘 아래 뭐가 새 로울 게 있는가! 여기서 빌리고 저기서 빌리고 그러는 거지. 자연과학의 새로운 발견에 비해 인문사회과학은 새로움이라고 내놓는 것을 찾기가 무척 어렵다. 하 물며 정치는 어떠한가. 적어도 이번 대선은 새로움을 찾기 위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토론하는 자 리가 되어주길 바라지만 진행되는 꼴을 보면 그것도 기대 이하인 건 사실이다. 그래도 최악과 차악을 구분하는 건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그래서 생각한다. 어떤 정치 사회 등 전반적인 사안을 두고 최선, 최악, 차악으로 구분해서 답변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대선주자용 설문지 말이다. 번거롭지만 시 험 치게 해보자는 거다. 그래도 뭔가 구분을 할 때는 시험이 최상의 방법으로 검 증된 건 사실이니까. 이건 공약은 아닐 수 있지만 정확한 의견은 내놓을 수 있 으니 선택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편안한 기초 구분자료는 될 성 싶다. 대선주자 TV 토론회야 열릴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이야기하는 주제는 너무 거 시적인 것이 많아서 하나씩 검증해볼 기회는 사실 잘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게 1000개의 문제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서면으로 받아보는 거다. 그리 고 떡 인터넷이건 아니면 종이 신문도 좋으니 거기 게시하는 거다. 백날 나온 사 람 얼굴을 봐도 그게 그거니까. 얼굴도 중요하지만 그건 꾸며진 관상 보는 것일 뿐이라 생각하고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 그게 능력도 정책도 사람도 보는 지름길 이 아니겠나 싶다. 어떻게든 막연한 희망과 기대를 주입시키려 공약 을 내놓으면 서 안간힘을 쓰지만 앞서 이미 말짱 도루묵도 숱하게 봤는데, 그 구태의연한 선 택방법을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능력을 부정하는 꼴이 아닌가 생각하 는 거다. 이 설문 작업은 하루 이틀에 끝날 건 아니다. 10월말 정도에는 1차라도 완성하여 내놓을 수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분노를 삭이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어쩌겠 는가. 그래도 하긴 해야 할 일 같으니 할 거다. 기대하진 말고 나오면 보시길 바 란다. 답은 해줄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질문으로 정리해놓으면 답하지 않으면 그건 반칙이 될 거라 생각한다. 아주 상세하게 한 번 정리해볼 참이다.

페이지149 2012 시대의 민낯 제 4 부 (2012.9.28~2012.9.29) 담담당당 추석 전 대선 3자 회동을 외치던 안철수가 혼나고 있다. 다운계약서가 아내 것만 것 아닌 자신의 것도 있다는 것, 호화 군생활 논란, 그리고 논문 표절 의혹 등이 줄을 잇는다. 핵심은 그런 일들에 대한 비판이나 상황에 대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니 이게 자승자박( 自 繩 自 縛 )의 케이스가 된 것이다. 말이 참 무섭다는 생각 이 절로 들 것이다. 이런 일은 이어질 것이다. 그 때마다 트집 이라고 말하는 것 도 좀 이상한 일이다. 정말 그런 식으로만 대응하면 아마 정치인 다 됐다는 소리 를 듣기 딱 좋을 것이고. 오늘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이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할 것이고, 앞으로 이 수준에서 그칠 것 같지도 않다. 어차피 예상된 일이지만 검증은 매우 사납고 집요하게 들어오는 참이다. 역시 예상한대로 안철수는 이 부분에 있어서 는 준비된 사람은 아니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이 삼정 ( 三 鼎 ) 구도가 당분간 변할 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 정희의 출마 이후 노회찬-심상정-유시민 쪽에서 만들어질 새로운 형태의 접근 방식이 변수요인으로 들어올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때다. 10월의 일이다. 11월에 는 또 다른 변화는 능히 가능하다. 막판으로 가면 갈수록 이 흐름은 더 지독스럽 게 출렁일 것이니까. 저 흐름을 보면서 지금 짚어보지 못한 많은 문제들을 하나씩 더 깊이 가보도록 하자. 이 글이 시작된 원인이며 또한 이유이기도 한 것이 바로 보자! 는 것이니 까. 1. 경제민주화의 목적과 초점 2. 파부침주( 破 釜 沉 舟 )와 송양지인( 宋 襄 之 仁 ) 3. 말도 안돼요, 정말 안되지요 4. 트라우마 & 편도체 5. 한 번은 비극, 한 번은 뭐라고? 6. 한국의 진보 는 왜 욕을 먹는가? (1) 7. 한국의 진보 는 왜 욕을 먹는가? (2) 8. 한국의 진보 는 왜 욕을 먹는가? (3) 9. 학생인권조례와 인권문제 10. 코르사코프 증후군

페이지150 1. 경제민주화의 목적과 초점 저물어가는 강마을에서 / 문태준 어리숙한 나에게도 어느 때는 당신 생각이 납니다 당신의 눈에서 눈으로 산그림자처럼 옮겨가는 슬픔들 오지항아리처럼 우는 새는 더 큰 항아리인 강이 가둡니다 당신과 나 사이 이곳의 어둠과 저 건너 마을의 어둠 사이에 큰 둥근 바위 같은 강이 흐릅니다 강 건너 마을에서 소가 웁니다 찬 강에 는개가 축축하게 젖도록 우는 소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낮 동안 새끼를 이별했거나 잃어버린 사랑이 있었거나 우는 소의 희고 둥근 눈망울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리숙한 나에게도 어느 때는 당신 생각이 납니다 어떤 전략 전개에 있어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다목적 이다. 이를테면 댐 하나를 만들 때도 농업용, 용수용, 홍수방지용 등 목적을 여러 가지로 붙이는 경우가 있 는데 이것은 그런 목적 모두가 상황에 따라 충족되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다목적 이 모두 유용한 것만은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목적 자체가 분산되는 상태에서 정작 초점을 두지 못하고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즉, 다목적으로 포장되지만 실제 로는 외부로 다초점으로 다가서는 일들이 많은데, 이것은 한 가지의 목적을 가지 고 움직일 때도 있다. 지난 정권에서 보인 모습 가운데서도 그런 점은 확실히 볼 수 있다. 하나의 국가 사회는 다양한 계층(사실상 계급이다)에 분야, 직업, 그리고 입장, 이해관계가 얽 혀 있다 보니 어느 곳으로 집중한다는 건 곧 편파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어 있 다. 이건 피할 수 없다. 그런데 편파성을 강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초점의 오류 가 되고 이 정책(전략)의 실패는 파장을 크게 부른다. 이명박 정권에서 내놓은 소위 트리클 다운 (Trickle- down, 落 水 )은 검증된 이론이었다. 성공이 아닌 실패로 말이다. 가깝게는 아버지 부시 시절에 선택했던

페이지151 것인데, 대기업의 성장 장려를 통하여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 긍정적인 에너지가 아래로 내려가며 이것이 부( 富 )의 혜택이 하부 전달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틀린 말인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IT, 자동차 등 분야에서는 이 구 조는 형성되어 있다. 대기업 중에서 IT군은 기업 발전이 부품 장비업계로 번져나 가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가 생긴다. 바로 이 과정에서 대기업의 전횡도 생 긴다는 점이다. 물이 아래로 자연스럽게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통제된 상태에서 (지배된 구조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협동의 클러스터라기 보다는 지배와 종속을 강화하는 형식도 만들어진다. 또한 이것이 어느 산업분야에서는 통용되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벌어지는 일은 전혀 아니란 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산업에서 는 아래로 내릴 것도 없이 기본적으로 종속구조를 전제로 한 약육강식만 남아 있 는 경우가 많아서다. 그래서 MB는 대기업 빵집을 다시 욕한다. 이게 참 이상한 일이다. 그 자신이 트리클 다운을 말할 때는 이전 실패의 사례에서 이런 일이 벌 어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생각했어야만 하는데, 그 통제권은 거의 전적으로 기업, 그것도 대기업에 두고 정책을 이끌었던 걸 잊은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효과가 완전히 없다고는 말 못한다. 관건은 이 정책을 양 극화 해소의 방안 으로 내놓았다는 점이다. 즉, 부의 혜택은 아래로 내려가지 않 는다는 것이고 말단에서는 그 물 구경 을 못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가난한 자 는 더 가난해지는 구조가 고착화 되어 버리는 정책이 바로 저 이론의 결과물이 되었다. 이것은 감세 증세 논란으로 즉각 이어진다. 고소득층에 대한 감세가 소비로 연결 되고 이것이 생산 매출 고용 등으로 연결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이론구조에서 감세가 소비로 연결되지 않고 개인 투자와 부채상황, 유보로 들어가는 상황(이건 고소득층-대기업을 함께 보면 된다.)에서는 효과가 형성되지 않는다. 아버지 부 시-아들 부시까지 이어지며 지금까지 미국에서 나타난 모든 현상이 실증으로 확 인된다. 동반성장에서 이 이론 적용은 실패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것 이 여전히 쟁점이 되고 있는 셈이다. 이 이론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를 잘 보 여준다. 기업 프랜들리 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정책기조는 이명박 정권의 핵심으로 자 리 잡았다. 그 과정에서 양극화는 더 심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는 당연한 일이었 지만 이 방향을 절대 벗어나지 않았다.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정권의 기본이 지 배와 종속 강화였기 때문이다. 절대 대중에게 정책의 목적성을 부여하지 않고, 국 가 사회를 막장 금융자본주의의 프레임에 맞춰서 가는 걸 목적의 초점으로 잡았 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시장만능주의의 초점은 대단히 좁은 구멍을 가지고 있다. 시장 이란 단어에도 집중해서 봐야 하지만 만능 ( 萬 能 )을 감안해봐야 한다. 그것은 자유시장경제 가 자기 앞가림을 못하는 사회적 약자를 끌어 안는 것은 사회적 시장경제와 다를 바 없다 는 말에 녹아 있다. 글 한 편을 부득불 가지고 와야겠다. 2007년 말, 경

페이지152 제학자 안국신 교수의 시평인데, 이 짤막한 글 속에서 시장과 정부가 한꺼번에 보인다. 논문 수십 편보다 오히려 보기 세상 이해하기가 참 편하다. 물론 잘 읽어 야 하지만. [중앙시평] 시장만능주의 와 정부만능주의 (2007.12.4)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20&total_id=2969373 메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 들어라 는 격언에 따라 보자. 그러면 참여정 부가 지향해 온 경제는 영 미식의 자유시장경제가 아니라 유럽대륙식의 사회적 시장경제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자유시장경제는 경제활동에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중요시한다.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하라 는 것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국가의 책임을 강조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 주는 복지사회를 지 향한다. 참여정부가 보기에 자유시장경제의 두드러진 특징은 주주자본주의로서 이해관계 자 자본주의보다 시야가 좁고 짧아 장기적으로 문제가 많다. 최근 국제금융시장 과 외환시장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시장은 변덕스럽고 불안정하며 비인간적이다. 우리나라는 1인당 소득이 2만 달러로 올라서고 있는데 복지는 열악한 후진국 수준 이다. 따라서 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해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공동체 경제로 서의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구해야 한다. 주주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참여정부의 인식은 적절하다. 그러나 시장과 복지에 관한 인식은 피상적이다. 자유시장경제가 자기 앞가림을 못하는 사회적 약자를 끌어 안는 것은 사회적 시장 경제와 다를 바 없다.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다는 고상한 명분으로 후하게 복지혜 택을 주려는 유혹을 애써 경계한다는 점이 다르다. 후한 복지는 두 가지 중대한 문제를 일으킨다. 하나는 자조( 自 助 ) 정신을 해치고 도덕적 해이를 일으켜 수혜자가 사회적 약자로 계속 묶이는 역기능을 한다는 점 이다. 다른 하나는 후한 복지가 높은 세금과 규제를 수반하게 마련인데, 기업과 사람의 나라 간 이동이 자유로운 세계화 시대에 이런 체제를 유지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를 택해 온 유럽대륙 국가들이 복지축소 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시장의 실패보다 정부의 실패가 더 문제라는 것이 20세기의 교훈이다. 참여정부도 헌법 제119조 2항을 너무 앞세우다가 지난 세기의 교훈을 새삼 각인시켜 주었다. 경제원리를 무시한 부동산정책과 민영화를 배제한 공기업정책이 대표적인 정부 실 패의 예다. 자유시장경제의 두드러진 특징은 경제활동에 관한 결정을 가급적 개인의 자유와 창의에 맡긴다는 점이다. 헌법 제119조 제1항이 규정하는 것처럼 자유시장경제 를 기본으로 하되 주주자본주의 대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

페이지153 직한 제3의 길 이다. 그래야 우리 경제의 역동성을 살리면서 잘사는 나라, 따뜻 한 사회 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영 미식의 주주자본주의가 자유시장경제의 두드 러진 특징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작은 규제와 적정복지가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북돋는다. 승자 독식의 시장지상주의 니 시장만능주의 니 하는 말은 틀린 말이다. 정부만능 주의 의 이런 선동적인 말이 더 이상 난무하지 않아야 한다. 참여정부 말기 무렵에 나온 이 글은 경제학자들이 한국 사회와 경제를 보는 눈을 너무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것인가 하면 바로 다 ( 多 ) 초점 이다. 위의 주장을 주요 부분을 재정리해서 보면 이렇다. - 우리나라는 1인당 소득이 2만 달러로 올라서고 있는데 복지는 열악한 후진 국 수준이다. 따라서 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해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공동체 경제로서의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구해야 한다. - 자유시장경제가 자기 앞가림을 못하는 사회적 약자를 끌어 안는 것은 사회 적 시장경제와 다를 바 없다. - 시장의 실패보다 정부의 실패가 더 문제라는 것이 20세기의 교훈이다. - 영 미식의 주주자본주의가 자유시장경제의 두드러진 특징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작은 규제와 적정복지가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북돋는다. - 승자 독식의 시장지상주의 니 시장만능주의 니 하는 말은 틀린 말이다. 정부만능주의 의 이런 선동적인 말이 더 이상 난무하지 않아야 한다. 요약하자면,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구해야 하지만 앞가 림 못하는 약자를 끌어안는 건 경계해야 한다. 민영화를 배제한 공기업 정책 등 정부의 실패가 시장의 실패보다 더 크다. 작은 규제와 적정복지가 맞다. 만능주 의 구호는 선동적이다 라는 정도가 된다. 지금 드러나고 있는 MB정부의 정책방 향과 한 번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앞가림 못하는 약자를 끌어안는 것보다는 트리클 다운 이론을 기본으로 가고, 공 기업 민영화를 모토로 마구잡이 민영화를 진행하고-이것도 조금 더 봐야 할 부 분이 있긴 하다. 수공 같은 경우는 4대강 덤터기를 그냥 뒤집어 쓰며 그냥 죽기 일보직전이니-정부가 실패하지 않으려고 시장에게 책임을 더 강화시켜 버리고, 기업규제는 축소하지만 적정 복지는 기업규제의 하위 순으로 배치하며 이것이 절 대 승자독식 구조는 아니라고 하는 바로 이 상태! 완벽한 막장 금융자본주의의

페이지154 구조적 우산 아래로 대한민국과 대중이 모두 함께 가는 바로 이 길! 사실 목적을 앞에 많이 두고 갔지만 초점은 역시 다시 하나로 모아진다. 바로 이 것이 시장만능주의라고 불리는 신자유주의 정책구조다.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프 레임인 것이고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시장만능주의와 정부만능주의가 같은 몸통 이지만 균형잡기 힘든 야누스 라고 봐야 한다. 이중성의 위선이 아니라 이 바탕 에서는 무조건 야누스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야누스 본래의 조화되어야 할 요소가 나타나지 않는 상태인 셈이다. 그러니 불균형에선 모순과 갈등이 없어질 턱이 없다. 지금 열심히 대선주자들은 이른바 경제민주화 이슈에 골몰한다. 그러나 그거 사실 민주화 란 이름만 붙었지 별 것도 아니다. 민주 라는 말도 이젠 좀 지겹 다. 바로 저기 위에서 해답을 찾으면 된다. 예를 들어, 작은 규제와 적정 복지 를 말했던 정부가 작은 규제를 해주며 왜곡된 기업지배구조를 건드리느냐 마느냐 는 것과 적정 복지의 수준 상승을 위해 트리클 다운 이론을 대폭 수정해서 증세 정 책으로 가느냐 마느냐 등의 질문으로 정리되는 것이 핵심이다. 이 질문들은 아주 많이 나올 수 있다. 복잡한 경제이론을 들먹이는 건 대중이 알아 듣기에는 불편 하다. 그러니 지금 드러난 일들을 토대로 해서 그 목적과 초점을 분명히 하는 것, 그게 가장 올바른 대중 설득의 지름길이 될 듯하다. 2. 파부침주( 破 釜 沉 舟 )와 송양지인( 宋 襄 之 仁 ) 일가 / 문태준 귀뚜라미 한 마리가 내 방에 찾아왔네. 사실은 내가 귀뚜라미를 불러들였지. 과일이 썩으면서 벌레를 불러들이듯이.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어제보다 훨씬 커졌지. 내 이가 다 시릴 정도였으니. 새벽녘 한참을 울 적엔 서로에게 마치 엉성하게 쌓인 돌담이라도 되어 너도 나도 더는 갈 곳 없어 더는 갈 곳 없이

페이지155 서로에게 받힌 돌처럼 앉아서. 파부침주 는 초패왕 항우( 項 羽 ) 이야기다. 사기( 史 記 )에 나오는 이야기로 전국 시대 초( 楚 )나라가 조( 趙 )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진( 秦 )과 한 판 붙을 때의 일이 다. 원정대장은 송의( 宋 義 )였으나 싸움을 하려고 하지 않고 나중 이익을 생각하 며 병사를 움직일 생각이 없어 항우와 갈등을 일으키다. 끝내 항우의 손에 죽는 다. 그 상태에서 저 일이 벌어진다. 출병 준비를 명령하며 먹거리를 해결하는 솥 을 다 부수고( 破 釜 ), 강을 건너자마자 배를 다 침몰시킨( 沉 舟 )일을 말한다. 그리 고는 딱 3일치 식량만 휴대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결론은 9전 9승. 이 일로 항우 는 영웅이 되었다. 물론 고사 가운데 송의 이야기는 아는 이는 좀 드물다. 항우 의 호전성 이야기를 말하는 이도 드물다. 승자의 논리이기도 한데, 결국 항우는 진( 秦 )을 멸망 시킨다. 그에 비해 송양지인 은 조금 다른 각도의 전쟁 이야기다. 버전이 몇 가지가 있다. <십팔사략( 十 八 史 略 )>, <춘추좌씨전>의 경우엔 송나리 양공이 운석이 떨어지는 걸 보자 패자( 覇 者 )가 될 야망을 품고 패권을 다투는 상황에서 자기를 무시하고 초나라와 통교한 정( 鄭 )나라를 친다. 그에 구원하기 위해 파병 나온 초나라와 싸 우는 과정에서의 일을 다룬다. 그러나 버전이 다른 이야기도 등장한다. 한비자( 韓 非 子 ) 제32편에 나오는데, 송나라 양공이 그 주인공이다. 이것도 초나 라 군대와 싸우는 상황이다. 탁곡 강가를 두고 싸움을 하는 상황에서 송나라 군 대는 전열이 정비된 상태이고 상대인 초나라 군대는 아직 강물도 건너고 있지 못 한 상황에서 우사마였던 구강이란 인물이 양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초나라 군대는 많은데 우리 송나라 군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초나라 군대를 중간쯤 건너오게 하여, 진열을 갖추기 전에 그들을 공격하도록 빨리 결심해 주십 시오. 그렇게 하면 적은 반드시 패배할 것입니다. 양공이 그 요청에 이렇게 답한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군자는 이미 상처를 입은 자에게 재차 상처를 주지 않 으며, 또 백발 노인을 체포하지 않으며, 사람을 곤경에 빠지게 하지 않으며, 협 소한 곳에 몰아넣지 않으며, 전력을 갖추지 못한 적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초나라 군대가 완전히 건너오기도 전에 습격을 한다는 것은 도의가 허락하지 않는다. 초나라 군대가 완전히 강을 건너고 진을 구축한 다음 북을 치고 공격해야 할 것이다. 결국 송나라 군대는 크게 패했고 양공도 다리에 상처를 입고 사흘 만에 죽었다. 인의를 행하려다 입은 피해라고 해서 쓸데 없는 인정이나 호의나 지나친 인심을 쓰다 오히려 당한 고지식한 행동(판단)으로 이 고사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물

페이지156 론 송양공의 예 ( 禮 )라는 것이 일종의 아주 귀한 브랜드였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한비자의 그 다음 부분이 사실 재미나다. 군주가 스스로 행한 다음에 백성으로 하여금 실천하도록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다. 군주가 스스로 경작하여 식량을 만들고, 병사와 함께 싸워 시범을 보인 뒤에 비로소 백성에게 농사를 짓도록 하거나 전쟁을 하도록 한다면, 그러한 일은 곧 군주에게 위태로운 결과를 초래한다. 백성만을 평안히 하기 위해서 군주가 희생 할 수는 없다. 억! 뜬금이 없는 해설이 뒤에 이어진다. 군주 차별화 전략을 말하고 있다. 송양지 인이란 고사의 숨겨진 1인치 같은 대목인데, 이것은 앞서의 버전과 비교하면 좀 앞뒤가 안 맞는 해설이기도 하다. 일단 이 이야기를 더하면 머리가 아프니 우리 가 아는 파부침주, 송양지인 수준에서 보도록 하자. 안철수가 한 말은 이렇게 정리된다. 대선에서 완주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제가 지난주 수요일에 이미 강을 건넜다 과 하며 건너온 다리를 불살랐다 는 말이 이 어지는 구도다. 9월 27일 안 캠프에 합류한 장하성 교수도 이에 호응해서 합류의 변으로 자신의 아버님께서 지금까지 네가 살아온 인생을 불 사르고 가라 고 하 셨다는 말을 꺼냈다. 바야흐로 불사르기 판이다.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불살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은 참 많은 오류 속에 살기 때문에 그것이 발목을 잡는 경우가 왕왕 아니라 아주 자주 있다. 거의 매달 고 산다 해도 좋다. 다운계약서니 논문이니 이렇게 줄줄 나오는 판도 그런 종류 에 해당한다. 강을 건너긴 했지만 여전히 강을 왜 건넜으니 묻는데, 그 강을 어떻 게 건너왔냐고 묻는 꼴이다. 내가 안철수라면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는 있는 그대 로 인정할 건 인정하고 그냥 지나가겠다 싶다. 왜? 강을 건넜다는 것인데, 정치 속에 들어왔는데, 대한민국 정치가 도덕 속에 살지 않은 적이 언제부터인데, 그리 고 정치가 무슨 도덕군자의 세상은 아닌데 말이다. 그 점에선 차라리 장하성의 저 말이 좋게 들린다. 지금까지 산 인생을 불사르는 것.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안철수의 이미지는 바로 그 강을 건너오기까지의 과정이 포장된 것이라서 그렇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 그 강을 건너온 장면들을 너무 미화한 측면도 빼놓을 수는 없다. 이헌재 부분이 다시 등장한다. 어떻게 강을 건넌 것인지, 등장인물 하나가 그냥 고스란히 다 보여줘 버렸다. 뒤에 병풍을 두고, 아래에 잠수함 하나 두고 배가 파 도를 가르면서 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안철수의 성공에 어떤 밑거름 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벤처의 성공에서는 금융의 지원 없이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란 건 누구나 안다. 그런데 하물며 대한민국 경제를 쥐락펴락 하는 재무부 출신 카르텔의 최고 좌장이 그를 돌봐주었는데 이건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는 결 론이 나온다. 악전고투를 한 건 아니란 소리다. 물론 힘든 시기를 초창기엔 많이 겪었지만 1999년 이후엔 별로 그런 모습 없었다.

페이지157 송양지인 으로 가보자. 난 이 고사에 예 ( 禮 )라는 브랜드를 절대 바꿀 수 없는 가치라고 주장하는 견해를 보면서 약간 기분이 묘해졌다. 분명 전쟁터 이야기였 다. 전쟁에서의 예의라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전쟁을 치르면서도 서로 사신을 주고 받는 것, 그런 멋진 광경도 있지만 아주 인정사정이 없는 것이 본래 전쟁의 율법이 아니었던가. 전쟁의 칼은 인정이 없는 법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사는 종종 싸움판에서 지나치게 예의 하나만을 고수할 경우에 생기는 폐해를 말해주는 건 분명하다. 아마도 문재인-안철수 두 사람 사 이에서도 이 상황은 발생할 것 같다. 안철수-박원순의 경우는 상황이 완전히 다 르다. 그건 박원순의 권력의지가 당시로 봐서는 안철수의 한참 위에 위치했으니 까. 그러나 강을 건너고 다리를 불사른 안철수 입장에서는 권력에 대한 의지를 가진 전쟁을 하고 있다. 둘 간의 예의가 가진 접점은 쉽게 나오기 어렵다. 그렇다 고 아주 어렵지는 않다. 송양지인의 전례를 지금 두 사람이 따르는 듯 겉으로는 보인다. 그런데 아니다. 인터넷 상에서 보면 소위 노빠들이 안철수를 깎아 내리는 듯한 댓글들을 많이 보게 된다. 굉장히 조직적이다. 그에 비해 안철수는 안빠 가 아직은 없는 듯하다. 이게 재미난 상황이다. 권력에 대한 의지, 조직적인 의지 의 표현에 있어 안빠 는 왠지 물러 터지게 보인다. 지금 상황대로라면 말은 거창하게 다리를 불살랐다 하지만 3일치 식량마저 가지 지 못하고 전쟁터로 가서 이기겠다고 구호를 외친 꼴이 될지 모른다. 물론 지금 은 기세가 등등하다. 여론조사라는 바탕이 있으니. 그러나 과연? 모두 이걸 걱정 한다. 전쟁의 율법에 따르면 배가 고프면 전쟁은 절대 승리하기 어려운 걸로 공 식이 짜지니까.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안철수는 다시 한 번 솥을 깨고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여론조사 저 놈의 숫자는 참 희한하게 사람을 매혹시키 는 재주는 있다. 전쟁통이다. 아주 지독스런 꼼수의 전쟁. 여기에 예의는 그냥 겉모습일 뿐이다. 3. 말도 안돼요, 정말 안되지요 평구( 平 邱 )에서 / 정약용 최( 崔 )가 종, 너와 헤어진 십여 년 만에 오늘밤 찾아와 네 집에서 자는 구나 너 이제 집을 이뤄 살림살이 넉넉하여 단지 그릇 물건들이 모두가 빛이 나네 밭에는 채소 심고 논엔 벼 심고 아내는 주막일 아들놈은 배를 타니

페이지158 위로는 매질 없고 아래론 빚 없어 한평생 호탕하게 강변에서 사는 구나 내 비록 벼슬하나 무슨 보탬 있으리요 나이 사십 오히려 번민만 더해가니 천 권 책 읽었어도 가난 면치 못하였고 고을살이 삼 년에 조그만 땅도 없네 흘겨보는 백안( 白 眼 )이 온 세상에 가득하여 젊은 몸이 초췌하여 문 항상 닫고 사네 아무리 재어보고 달아보아도 일백 번 네가 낫고 내가 못하네 때마침 가을 바람에 순로( 蓴 盧 )의 흥 빌어다가 욕을 씻고 분을 갚아 너하고 같이 살리 시민경제사회연구소. www.piess.or.kr 아직 홈페이지는 전 소장인지 아니면 공동 소장인지 박주현 변호사의 인사말이 남아 있다. 요즘은 홍현호 연구위원이 소장 타이틀로 글을 발표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듯하다. 이 연구소, 홈페이지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연구 범위가 상당하다. 물론 이명박 정권의 거짓말에 대해서 꼼꼼하게 지적하는 걸 잊지 않는 좀 보기 드물게 나름 체계적 접근을 하는 연구소다. 규모가 크다고 잘하는 건 아니다. 이 를테면 대기업 산하 연구소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온갖 보고서를 내놓고 있지 만(금융기관 연구소도 그렇다) 정작 연구의 방향 자체가 사람들을 홀리는데 집중 하는 경향도 있는-이건 반박소지도 있겠지만 그런 보고서가 제법 된다.-반면에 여기는 아주 드라이하다. 딱딱하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아 주 강하게 왜 이 정부의 정책접근이 잘못되었는지 설명한다. 보고서도 나름 충실히 나오고 자료실에 주택정책, 일자리창출, 중소기업정책, 농 산촌 프로젝트, 조세개혁, 경제일반, 재정정책의 분류로 묶어둔 점도 눈에 띈다. 단지 일하는 사람들 소개 란이 비어 있는 점도 눈여겨 보게 된다. 연구소의 사명 은 사회통합과 삶의 질 추구. 그 걸 위해 가는 과정에서 딱 드러나는 것 중 하 나가 서민과 중산층의 이해를 반영한 정책개발 이란 대목이 보인다. 핵심은 여기 에 있다. 결국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통합적 접근이란 구호가 이 연구소의 활동 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연구소의 성향이 정치적으로 어느 쪽이건 상관이 없다. 올바르게 접근하고 있다는 느낌이 기본적으로는 든다는 말이다. 물론 이 연구소 의 성향은 내가 볼 때는 진보, 그러니까 정치적으로는 특정 정당 쪽으로 가 있 다는 생각도 든다. 미디어 오늘 2012.9.28자에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실렸다. 보통 일반 신문들은

페이지159 이런 방식을 다룰 수가 없다. 문답형의 글이다. 묻고 답하는데, 자기가 묻고 자기 가 답하는 식이다. 개인적 입장에서 나는 어떤 사안에 대한 검토에서 이 질의응 답 방식은 최고 수준의 유용함이 있다고 본다. 안철수가 못 미덥다는 사람들을 위한 40가지 질문 [대선쟁점 40문 40답] 안철수는 정말 외줄타기 곡예사일까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234 솔직히 질문 자체가 조금 더 깊은 각도에서 조망되어야 하는데 부족하다는 느낌 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런 방식 자체를 선호하는지라 유심히 봤다. 그 중 안철수 에 대한 부분만 몇 가지 옮겨와서 본다. 다 옮기면 좋긴 하겠지만 너무 양이 많 다. 특히 안철수를 통해서 경제정책 전반을 보는 부분은 매우 볼만한 내용인데도 말이다. 내용을 읽다 보면 안철수 측이 무엇이 부족한가를 조목조목 들어가고 있 는 것이 보일 것이다. 그런데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영역도 건드린다. 사회연 구도 있으니까 가능하긴 할 것이다. 좀 깊숙하게 들어간다. 2인자 문제를 거론하 는 것도 그렇고. 일종의 비판 성격의 문답 글이라고 보면 될 것 같긴 하다. 안철수를 향한 민주당 의 시각이 고스란히 이 안에 묻어난다. 당연히 비판 받을 수 있는 내용들이라서 굳이 이런 것이 숨겨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잠깐 느낀 점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소위 진보진영에서는 안철수를 좀 묘한 프레임 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연한 것이 이헌재 등장 이후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안철수 식 정치전개는 상당히 위험하게 보이는 대목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세 간에서 보는 것과 상관이 없다. 그건 이미지 이지만 현실 은 아주 많이 다르다. 에둘러 표현하지 말고 한 마디로 해봐, 이런 주문도 나올 법 하다. 가능하긴 하다. 이를테면 안철수는 여전히 철부지다 라는 말이나 혹은 안철수는 역시 아마추어 다 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문답형이 재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이 런 말 대신에 나온 것이 바로 이 문답형이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선 뭐 자꾸 빙빙 돌린다는 생각도 들 수 있다. 이게 아마도 문답형 글을 보는 한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길어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결론만 딱 이야기하는 그 조급함으로 보면 지겹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러나 그런 결론 한 줄 딱(이건 마치 수험생 시험 준비에 암기식 하는데 익 숙한 유형으로 보이지만 이게 사람 망친다.)에 물들다 보면 호흡이 짧아진다. 벌 써 세상이 그렇게 가고는 있지만. 보는 이의 관점이 더 중요하다. 여기 실린 것 말고 전문은 위의 링크에서 보기 바란다. 사족의 말은 집어 치우고 아래를 잠깐 보도록 하자. 1. 최근 서울신문(9월 26일)은 안철수 대선후보의 캠프를 일컬어 외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하다고 표현했습니다.

페이지160 그 기사 내용이 안 캠프 현실과 100%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50%만 일치한다 해도 안 캠프가 아슬아슬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2. 이 기사에 따르면 안 후보가 조직 내 라인 형성 을 극도로 경계해 안 캠프에 는 학연 지연 혈연을 고리로 한 연줄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고를 기반으로 한 실세도 없고 역설적으로 연줄의 힘 을 통해 만들어지는 조직력도 없다 합니다. 라인, 실세, 조직이 전무한 3무( 無 ) 캠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학자들에 따르면 정치란 사회적 자원 배분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이고, 권력 은 곧 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정치과정에서 어느 캠프가 라인, 실세, 조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최고권력자의 영향력만을 인정한 다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안 후보는 왜 동서고금의 행정학 자들이 공식조직과 비공식조직의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해 균형있게 인정하고 있 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 안 후보는 2인자 행세를 하려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내치는 행동을 보여 주목 받기도 했습니다. 2인자에 대한 지나친 경계심도 좋지 못합니다. 이상적인 정치지도자와 2인자의 관계는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와 같아야 한다고 봅니다. 전자에게는 덕( 德 )이 있 어야 하고, 후자에게는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 후보는 자신에게 덕 ( 德 )과 통찰력, 모두가 있기 때문에 2인자는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지 나친 자기확신 입니다. 4. 역대 대통령들이 2인자 행세를 하는 사람들 때문에 크게 낭패를 보았기 때문 에 안 후보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 아닐까요? 2인자의 역기능을 최소화하고 순기능을 최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선후보 가 2~3명 이상의 2인자 그룹을 인정하고 이들을 서로 경쟁시키는 게 좋습니다. 예를 들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김종인 위원장과 이한구 원내대표를 경쟁시키 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은 용인술은 집토끼와 산토끼를 동시에 겨 냥해야 하는 대선주자로서는 적절한 것입니다. 2인자 그룹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안 후보 용인술보다는 낫다는 뜻입니다. 6. 또 이 신문에 따르면, 안 캠프는 논쟁 자체를 해본 적이 없고, 대부분의 회의 는 박선숙 총괄본부장이 주재하며, 중요한 결정은 안 후보 혼자서 한다고 합니다. 안 후보가 선호하는 이런 의사결정 구조는 거대한 행정조직이나 정치조직을 운 용하는 데는 득보다 실이 큽니다. 정치조직과 행정조직은 그 특성상 연구조직, 기 업조직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페이지161 7. 또 이 신문에 따르면, 안 캠프는 구성원 모두가 수평적 관계에 놓인 가운데 안 후보 홀로 정점에 서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후보가 어느 순간 독 선적 결정을 내리려 할 때 개방성이 순식간에 폐쇄성으로 변질될 수 있는 구조입 니다. 어느 경우든 극단은 좋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지나치게 수직적인 조직들이 많기 때문에 조직을 수평화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대안이 극 단적으로 수평화된 조직이 될 수는 없습니다. 8. 정책 이야기로 넘어 가겠습니다. 안 후보는 대선출마 직후부터 혁신경제 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이 무엇입니까? 안철수 캠프의 유민영 대변인이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9월 26일) 에 출연해 발언한 바에 따르면, 정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대기업 중심에서 중소 기업, 중견기업, 창의적 기업 주도로, 제조업 중심에서 지식경제산업으로 발전하 는 궤도의 전환이 필요한데, 그것의 키워드를 혁신으로 보고 있다 고 합니다. 13. 안 후보는 혁신경제를 핵심구호로 내세우면서 민간자율 을 강조했습니다. 그 리고 또 민주당의 재벌개혁론에 대해서는 근본주의적인 접근이라 비판했습니다. 근본주의적인 접근이라는 비판은 상당히 강도 높은 비판인데, 민주당의 재벌개 혁론이 근본주의적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극단적인지는 의문입니다. 민주당의 재 벌개혁론은 강도가 세지 않습니다. 민주당은 미국식 주주자본주의 모델 내에서 재벌개혁을 추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근본주의적인 게 아니라 점진적입니다. 일부 이해관계자자본주의적 요소가 가미되기도 하지만 그 부분은 극히 적습니다. 14. 주주자본주의와 이해관계자자본주의는 어떻게 다른가요? 대표적인 기업지배구조 모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주주자본주의모델(미국 식)과 이해관계자자본주의 모델(독일식)이 그것입니다. 전자는 기업을 주주들의 재산으로 보고 기업경영의 목표 역시 주주들의 이익극대화에 둡니다. 반면 후자 는 기업을 사회적 공기( 公 器 )로 보고, 모든 이해관계자의 부의 창출을 강조하며 주주, 경영자, 채권자, 근로자, 소비자, 지역단체 등의 공동이익을 중시합니다. 15. 두 가지의 기업지배구조 모델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주주자본주의모델은 이사회 중심의 일원적 기업지배구조를 갖는 반면, 이해관 계자자본주의 모델은 이사회와 감사회로 구성되는 이원적 기업지배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감사회의 권한이 막강합니다. 감사회는 회사의 장기전략 또는 주요결정에 대한 사전승인 또는 사후보고를 받으며 이사의 임면에 개입하고 기업의 경영진을 감독,견제합니다. 독일의 경우 감사회는 종업원 대표와 주주가

페이지162 동등한 비율로 참여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습니다. 종업원 대표를 제외한 나머지 감사들은 주주총회에서 선출합니다. 16. 지금 민주당은 이해관계자자본주의 기업지배구조모델(독일식)을 지향하지 않 고, 단지 주주자본주의 모델(미국식)을 견지하면서 점진적인 재벌개혁을 추진하 고 있는데, 안 후보가 이를 두고 근본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것 인가요? 그렇습니다. 17. 안 후보는 그의 책, <안철수의 생각>에서 진보진영의 법인세 인상론에 대해 상당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안 후보는 민주당의 법인세 감세철회론과 통합진보당의 법인세 인상론에 대해, 우선 감면제도를 손질해서 실효세율을 높이고, 그 다음에 구간 조정을 검토하자 고 주장했습니다. 단계론적 접근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입니다. 법인세 감세철회 인상과 조세감면 감축은 병행과제이지 단계론적 과제 가 아닙니다. 23. 진보진영의 대선후보가 지향해야 할 전통시장 혁신전략은 어떤 겁니까? 진보진영 대선후보의 혁신전략은 저 사람들이 저렇게 잘하고 있으니 당신들도 노력해서 잘해 보세요 라고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대선후보는 자신이 집권하면 전 통시장 혁신을 위해 제도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그 복안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다. 27. 안 후보의 경제멘토로 알려진 이헌재씨가 2005년 당시 경제 부총리 아니었 나요? 경제관료들이 자영업 자격증제를 발표한 시기는 2005년 6월이고, 이헌재 경제 부총리가 부동산 투기로 불명예 퇴직한 시기는 3월입니다. 3개월 간의 차이가 있 습니다. 그러나 당시 자영업 자격증제가 여러 연구기관의 연구결과와 동시에 나 왔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6개월~1년 이상 준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8. 당시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주요 정책들을 보면, 매우 위험한 정책들이 많았 습니다. 당시에 그가 추진했던 위험한 정책들을 몇 개 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는 개방과 경쟁을 통한 서비스업 미국화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 정책은 의료 민영화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둘째, 최근 맥쿼리인프라 문제로 그 심각 성이 노출된 민간투자사업 확대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셋째, 세제선진화라는

페이지163 미명 하에 부자감세를 추진했습니다. 넷째, 동북아 금융허브를 구축한다는 미명 아래 금융자본의 이해를 주로 대변했습니다. 다섯째, 부동산 규제강화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서 신중론을 펴 노무현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40. 마무리합니다. 지금 이 시기 안철수 대선후보가 시급하게 고쳐야 할 점은 무 엇입니까? 안 후보의 책, <안철수의 생각>을 보면 그가 대단한 학습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운영은 개인의 대단한 학습능력만으로 가능 한 것이 아닙니다. 수백 년, 수천 년의 인류 경험을 토대로 동서양 행정학자들이 수직적 조직과 수평적 조직의 순기능과 역기능, 공식조직과 비공식조직의 순기능 과 역기능에 대해 균형있게 인식했다면, 안 후보도 이것들을 균형있게 인식해야 합니다. 정치인은 결코 극단을 선택해서는 안됩니다. 4. 트라우마 & 편도체 큰 노래 / 이성선 아, 설악산 나무 나는 너를 본 일이 없다 전신이 거문고로 통곡하는 너의 번뇌를 들은바 없다 밤에 길을 떠나 어느 분을 만나고 돌아오는지 본 일이 없다 우리는 모두 트라우마를 가진다. 사람은 그렇다.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는 현대인이라면 없다 말하면 이상한 질병이다. 그래서인지 너무 손쉽게 이 병명을 타이틀로 붙인 환자들도 많다. 이걸 진짜 가짜 구분하는 건 참 쉽지 않다. 저렇게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한 마디로 스트레스 장애다. 과민반응, 충격 재 경험, 감정회피 또는 마비 등으로 구분되지 만 가볍건 무겁건 우리 곁에 항상 있는 그런 질병, 그런데 이게 만성적이 되면 좀 골치 아픈 그런 정신적 장애의 하나다. 이왕 보는 김에 스트레스 에 대한 설명 한 번 보고 지나가자. 서울대 김경진 교 수의 칼럼이다. 스트레스의 신경생물학: 스트레스에 대한 대처

페이지164 http://www.brainfrontier.or.kr/newsletter/letter_contents.php?publishno=2&news_seq=8 스트레스는 다양하다. 무더위, 추위, 소음, 환경오염과 같은 외부환경의 변화는 물리적 스트레스라고 하고, 과로, 감염과 같은 것은 생리적 스트레스라고 하며, 직장이나 학교에서의 인간관계, 직장생활의 불만, 다가올 시험, 배우자의 죽음, 해고의 좌절감, 신문에 보도된 무서운 사건, 노후에 대한 불안 등은 사회적 혹은 심리적 스트레스라고 한다. 우리 몸은 외부 환경 변화로부터 체내 환경을 일정히 유지하려는 성질 즉, 항 상성 혹은 호메오스테지스(homeostasis)를 지니고 있어 정상적인 건강상태에서 몸의 혈당, 체온, ph, 호르몬 등은 일정한 정도로 유지된다. 이 때 항상성을 깨뜨 리는 요소가 스트레스이며 항상성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일련의 생리학적 적응 과정을 스트레스 반응(stress response)이라고 한다. 의약용어로서의 스트레스는 몸과 마음을 변형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즉, 육체적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심리적 스트레스를 포함한다. 외부에서 가해진 자극을 스트레서(stressor)라고 하나 일반적으로 스트레스와 스트레서를 구별하 여 사용하지 않는다. 스트레스라고 모두 꼭 같은 것은 아니다. 같은 종류의 스트레스라도 사람이 처 한 입장이나 환경에 따라 다르며 연령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스트레스는 심기일 전하여 활력으로 작용하기도 하나같은 스트레스라도 과중하게 지속되거나 다른 스트레스와 겹쳐지면 사람을 짓눌러 질병을 유발하기도 한다. 따라서 스트레스에 는 좋은 스트레스도 있고 나쁜 스트레스도 있다고 생각된다. 신체적으로 트라우마의 알고리즘에서는 뇌 속의 편도체(amygdata)가 작용을 한 다. 대뇌번연계에 존재하는 아몬드 모양의 뇌 부위에 해당 하는데 이건 감정을 조절하고 공포에 대한 학습 및 기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연구에 따르면 편도 체 주위의 해마(hippocampus)의 크기에 따라 크면 클수록 트라우마 극복력이

페이지165 있는 것으로도 나오지만 사람이 뇌 속까지 모두 보면서 살 수 없으니 보통 사람 은 알 길이 없다. 편도체를 가진 여러 임상실험을 보면, 쥐의 편도체를 파괴할 경 우 고양이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의 경우엔 지능은 정상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거나 공격적이 된다고 한다. 공포, 불안에 관여하는 이 뇌 부위가 사실 우리의 트라우마에 깊숙한 관련이 있는 셈이다. 트라우마와 편도체라는 이 글 제목은 왜 붙였을까? 아는 게 병이 될 때가 있다 는 생각이 불쑥 들어서다. 지난 경험으로 인한 충격, 그런 두려움이 우리 머리 속 에 남아 있다. 특히 과거의 어떤 장면이 고스란히 현재 되풀이 될 때, 그럴 거라 는 느낌이 들어오면 우리에겐 보이지 않지만 뇌는 반응을 한다. 공포나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이다. 차라리 이 반응을 하지 않으려면 머리를 열고 뇌의 편도체를 없애든지 해야 하는데 그게 말이 되지도 않고 말이다.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트라우마를 강하게 준다. 지금 느끼는 스트레스로 인해 과 거의 스트레스가 막 살아나기도 한다. 뇌가 두려움과 공포에 민감한 이유는 아마 도 사람이 생존이란 과제에 그만큼 강하게 반응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존, 그건 먹고 산다는 의미보다 더 큰 이유를 가진다. 잘 산다는 건 나쁜 스트레스를 최대 한 적게 받는, 견딜만한 그런 정도를 유지하는 것이 될 거다. 그게 존재의 커다란 이유 속에 분명히 있다. 지금 보고 있는 정치는 우리에게 좋은 것보다는 나쁜 스트레스를 주는 존재다. 뭔가 아주 즐겁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속이 뒤집어지게 한다. 그런데 가만히 더 들어가보면 트라우마가 살살 겹쳐진다.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오는 두려운 마음도 든다. 또 한 번 어떤 상황의 반복이 기다릴 것 같아서 말이다. 주변에서 하는 말을 모아 보면 이런 의견도 있다. 꼭 제2의 노무현을 보는 것 같아. 이 말은 안철수에게 느낀 아주 불안스러움을 감정으로 표현한 것이다. 노 전 대 통령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무현 식의 현상 즉, 겉으로는 똑똑한 척 했는 데 실상은 누군가에게 완전히 지배되고 종속된 그런 상황, 그 허망할 정도의 먹 먹한 무기력함-그걸 헛똑똑하다 고 하는-이 재현될 것 같은 두려움이다. 겉과 속이 다른 게 아니다. 그냥 기본적인 자질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이건 지식적 능력과는 다르다. 대통령이란 직위가 그리 호락한가? 아니다. 결정 하나 하나가 대중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어떤 이들에겐 살고 죽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또 얼마나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려고. 이 말은 문재인을 보며 하는 친구가 툭 던진 거다. 아주 짜증스러움이 묻어났던 기억이 난다. 친노 세력은 그들 스스로 폐족 을 말했지만 다시 부활하려고 한다. 아니, 부활했다. 그 대표주자가 문재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었

페이지166 는가? 아니다. 감성으로 다가오지만, 그건 감정적이지 결코 이성적이지 않다. 그 들이 반성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여전히 고스란히 우리 사회에 남겨져 있다. 그 래서 개판 이란 용어까지 나온다. 구태를 청산 한 번 해보라고 했더니만 그들이 구태보다 더한 짓을 해버린 그 실망감이라고 할까. 정치에 대한 근본적 불신을 더 심화시킨 그들에게 가지게 된 분노라고나 할까. 저 굴레를 진짜 다 벗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박근혜에 대한 이야기다. 박정희란 원초적인 굴레를 말하는 게 아니다. 새누리당 이란 곳, 한나라당으로 거슬러가고 줄줄 가다 보면 항상 지배층의 심볼로 남은 정치세력이다. 그건 보수가 아니다. 정치적 기득권으로만 살아온 사람들, 사회 기 득권에서만 행세한 사람들의 모임 같은 공간이다. 그들이 대중 가운데 서민들을 위해 마음을 쓴 적이 있었던가? 입법, 사법, 행정이란 나라의 축에서 무조건 권력 자로 행세한 그 프레임을 깰 수 있을까? 그 굴레를 헤쳐 나올 그럴 가능성이 너 무 희박하다고 보는 것이다. 깊어지는 의구심을 떨칠만한 동기도 주지 않아서 그 런 것이다. 이 모두가 불안감이다. 나쁜 에너지를 가진 스트레스이고 트라우마다. 그래서 선 거가 최악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것인가 싶다가도 알고 지켜보면 이건 완전히 동 일한 불안 공포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뭔가 안정되고 여겨지는 게임이 아니다 보 니 속이 상하는 거다. 식상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끼리끼리 잘 하세요 외면할 수 도 없다. 이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다음의 세대를 생각해야 하는 의 무와 책임에 속한 것이니까. 그래서 기꺼이 그 트라우마도 안는 건지 모른다. 그 렇다 해도 참 지독스럽다. 선거가 끝난다고 해서 그 트라우마가 없어질까? 그것도 아니다. 이명박 정권이 우리에게 준 트라우마를 어떻게든 정리해야 한다. 몇 사람 감옥 간다고 해결될 수준이 아니다. 국토를 저렇게 발칵 뒤집어놓고 거기다가 도무지 사람이 어디까 지 천박해질 수 있는지 경계를 무너뜨린 것도 생각해야 하지만 그보다는 대놓고 들어온 이 놈의 21세기 왜색의 친일화 작업은 어떻게든 정리하고 지나가야 한다. 이건 단순히 우리가 끙끙 가슴에만 안고 있을 트라우마가 아니다. 누구나 마음 속에 호불호는 있다. 그러나 좋고 나쁨은 그냥 감성이다. 트라우마는 그에 한 걸음 아니 수백 걸음은 더 들어간다. 그래서 일시적인 쇼크는 그냥 지나 간다 하지만 이미 들어온 만성적인 트라우마를 안긴 것은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 약물이건 아니면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한 번 씻고 지나가야 된다는 거다. 그러지 않으면 다음 세대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당신의 편도체를 아예 자르지 않 겠다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편도체를 과도 활성화 시킨 그 원인을 찾아서 그건 해 소하려고 덤벼보자! 한 번 덤벼볼 때도 되지 않았나!

페이지167 5. 한 번은 비극, 한 번은 뭐라고? 사모곡 / 김종해 이제 나의 별로 돌아가야 할 시각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지상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어머니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나의 별로 돌아가기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부르고 싶은 이름 어.머.니 카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를 쓴 것이 1848년 2월이었다. 유럽경제는 1840년대 공황을 거쳐 1850년대에 호황을 맞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프랑스 에서는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 체제가 등장을 한다. 1848년 12월 선거 에서 중간계층과 농민들에게는 질서와 번영을, 빈곤층에게는 지원을 약속하며 선 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고, 1851년 12월 쿠데타를 일으켜 1852년 11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프랑스 제2제정의 황제로 인정받았다. 그 과정을 보면서 마 르크스는 1850년 <프랑스에서 계급투쟁>, 그리고 이어 1852년 <루이 보나파르 트의 브루메어 18일>(Der 18te Brumaire des Louis Napoleon, The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Napoleon)을 내놓는다. 이 책은 1851~1852.3 간 쓴 것으 로 원본은 뉴욕에서 출판되는 월간지 Die Revolution에 독일어로 출판된 것이다. 왜 이 소책자가 유명해졌는가 하면 바로 헤겔철학으로부터 출발했던 마르크스가 청년 헤겔주의자와 결별을 한 후 발표한 1846년 <독일 이데올로기>에 이어 <공 산당 선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선상에 있는 글로, 헤겔의 역사인식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아래 대목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기 때문이다. 원문으로 보자.

페이지168 Hegel remarks somewhere that all great world-historic facts and personages appear, so to speak, twice. He forgot to add: the first time as tragedy, the second time as farce. Caussidière for Danton, Louis Blanc for Robespierre, the Montagne of 1848 to 1851 for the Montagne of 1793 to 1795, the nephew for the uncle. And the same caricature occurs in the circumstances of the second edition of the Eighteenth Brumaire. 이 글과 뒤에 이어지는 단락까지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다. 들뢰즈에 의해( 차이 와 반복, 1968) 역사의 반복 문제는 다시 담론으로 제기되어 많은 이들이 들뢰 즈의 시각을 섞어 분석한 철학서는 많다. 그러나 원문을 그대로 읽는 것도 제 맛 이 있다. 헤겔은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들과 인물들은 두 번 나타난다 (*주; 들뢰즈는 두 번 반복한다 로 번역하고 있다)는 것을 도처에서 주목한다(*주; 헤겔의 역사철 학 에서). 그는 첫 번째는 비극이고 두 번째는 웃음거리(farce)라고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당통(Danton)에 대하여 꼬시디에르(Causssidière), 로베스삐에르 (Robespierre)에 대하여 루이 블랑(Louis Blanc), 1793에서 1795년 산악파에 대해서 1848에서 1851년 산악파, 삼촌[Napoléon]에 대하여 조카[Louis Bonaparte], 그리고 안개 달 18일의 두 번째 판본(*주; Gerard Cornillet의 판본

페이지169 에는 1851년 12월 2일 쿠데타를 지칭한다고 주를 달아놓았다)이 나타나는 상황 들에서 동일한 흉내를 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만에 의해서 선택된 조건들에서 자신들의 운동으로 역사를 만들지 못하나, 사람들이 직접적으 로 발견하고 자신들에게 주어지고 전수된 조건들에서 역사를 만든다. 이미 죽은 모든 세대들의 전통이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의 머리 속에 악몽처럼 짓누른다. 심 지어 인간이나 사물이나 간에 아주 새로운 어떤 것을 스스로 창조하고자 스스로 변혁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지려 할 때, 정확히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 사람들은 걱 정스럽게 과거의 정신을 자신들의 동요에 호소하고, 존경할 만한 변장된 모습과 빌 려온 언어로 역사의 새로운 장면에서 역할을 하기 위하여 정신에게 그의 명칭, 계 층, 의상에 맞는 이름을 빌려준다. 이렇게 해서 루터(Luther)는 사도 바울(Paul) 의 가면을 쓰고, 1789년에서 1814년까지의 혁명은 로마 공화국의 의상과 로마 제국의 의상을 연속적으로 갈아입는다. 1848년의 혁명이 때로는 1789년을, 때로 는 1793에서 1795년의 전통을 보다 더 잘 풍자(parodier)할 수 없다. 그것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초보자가 새 언어를 항상 자기의 모국어로 번역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초보자는 이 새로운 언어의 정신을 깨우치지 못한다. 단지 태생의 언 어를 잊고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면서, 과거를 회상하지 않고서 새로운 언어의 상 태로 활동할 수 있을 때, (* 새로운 공동체 즉 새로운 사회형성체를) 자유롭게 창조하기 위하여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는 정도에서 (* 형성체를 변형시키는) 그 런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걸 아주 대놓고 헤겔의 이야기인 것처럼 인용하는 글도 신문에서 종종 보게 된 다. 그건 좀 지나친 정도를 넘어선 것이고, 일반적으로는 대체로 이런 식 인용이 많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코미디로 그러나 우리가 아는 비극과 희극도 아니고, 비극과 코미디를 섞다 보니 좀 우스 운 상황도 연출된다. 단어가 가진 어감이 확실히 다르다. farce 는 소극( 笑 劇 0, 그러니까 익살극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웃음거리 란 의미도 동시에 가진다. 영영사전으로 봐도 이건 희극(코메디) 개념보다는 개그, 그보다도 더 조롱 (사실상은 장난 으로 읽는 것도 타당하다.)에 가깝게 보는 게 옳을 듯하 다. 1. a light, humorous play in which the plot depends upon a skillfully exploited situation rather than upon the development of character. 2. humor of the type displayed in such works. 3. foolish show; mockery; a ridiculous sham. 좀 장황하게 설명을 한 뜻은 우리 감성에서 비극, 희극이라는 형식보다는 마르크 스의 저 조롱 속에 담긴 의미를 다시 보자는 뜻이었다. 그는 나폴레옹 1세를 팔 아서 다시 나폴레옹 3세가 되는 저 모습을 풍자한 것이었지만 집권 초기의 나폴

페이지170 레옹 3세는 대중인기에 영합하는 법과 제도 형성에 신경 쓰고 공공사업 철도건 설 은행 사업을 비롯해 공업 농업발전도 촉진시켰다. 가난하지만 부지런한 사람 들을 사랑한다 는 그의 약속처럼 빵값 안정화, 노동자주택 건설 등 정책도 폈다. 그러나 중산계급은 그를 사회주의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보호자로 여겼을 뿐 그 의 구상은 이상향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대외적으로 많은 전쟁에 개입했다. 1866년 조선과도 이른바 병인양요도 나폴레옹 3세 때의 일이었다. 하 층계급에 있어서는 그가 조롱거리는 아니었던 셈이다. 역사의 반복은 헤겔철학이 가진 매우 중요한 이슈이고 그 후에 많은 철학자들이 이에 의견을 달았다. 슬라보예 지젝도 여기에 한 말을 붙여서 희극으로 반복되 는 것이 원래 비극보다 훨씬 더 끔찍할 수 있다 고 했지만, 이게 원문상으로 희 극 이었는지 웃음거리 나 장난 으로 표현되었는지는 찾아보지 않았다. 엘빈 토플 러는 역사는 필연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앨빈 토플러의 예측은 지금 틀린 것이 너무 많아서 이 말도 신뢰성 이 있느냐 없느냐는 다른 관점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반복 ( 反 復 )이란 말은 헤겔에서도 카를 마르크스에서도 단어로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들뢰즈는 반복을 말했고 위의 글 의미는 그렇지만. 반복되느냐 아니냐는 논점 바깥의 문제다. 비슷한 여건, 상황은 언제나 되풀이 되 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그러나 역사가 반복되느냐 아니냐는 다른 문제다. 그에 비해 사건 은 반복을 자주 한다. 불법도청 사건이 이명박 정권의 전매 특허 는 아니다. 우리는 김대중 정권 시절에도 불법도청을 봤다. 이 정권에서 보인 아 주 특수한 사건이 뭘까? 4대강 사업 같은 대규모 토목 사업은 과거 경부고속도로 건설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에 속한다. 그것은 언뜻 보면 비슷한 반복일 수 있지 만 사업의 본질과 진행과정이 너무 다르다. 그래서 새로운 형식의 사건 으로 규 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IMF사태 이후 한국 사회에 도입된 신자유주의 노선도 마 찬가지다. 막장 금융자본주의가 한국 땅에 상륙하고 이걸 마치 개방형 경제, 시장 경제의 총화를 이룬 것처럼 선전하는 장면도 사건 으로는 처음 시작된 것이다. 물론 이것도 DJ정권 이후 한미FTA까지 가는 판이 된 현재까지 이미 역사성이 붙기 시작하고 있다. 엄밀히 이것은 우리 역사의 반복과는 다르다는 건 분명하다. 사건이 우리 사회에, 시대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경우, 그것은 단순히 사건으로 남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사회 체질과 의식까지, 그리고 미래까지 영향을 미치 는데 어떻게 사건 수준에서 평가를 하겠는가!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의 역사를 만든다. (중략) 정확히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 사 람들은 걱정스럽게 과거의 정신을 자신들의 동요에 호소하고, 존경할 만한 변장된 모습과 빌려온 언어로 역사의 새로운 장면에서 역할을 하기 위하여 정신에게 그의 명칭, 계층, 의상에 맞는 이름을 빌려준다.

페이지171 카를 마르크스의 이 대목이 눈에 다시 들어온다. 과연 우리는 역사를 만들고 있 기는 있는 것인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당연히 역사를 생각한다면, 우리 시대 에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사건 에 관해서는 반드시 정리를 해야 할 것이다. 그것 이 그래도 이 시대를 사는 자의 몫이 되는 건 틀림이 없다. 6. 한국의 진보 는 왜 욕을 먹는가? (1) 적막 / 박남준 눈 덮인 숲에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겨울을 건너는 몸이 자주 주저앉는다 대체로 눈에 쌓인 거울 속에서는 땅을 치고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 어쩌자고 나는 쪽문의 창을 다시 내달았을까 오늘도 안으로 밖으로 잠긴 마음이 작은 창에 머문다 딱새 한 마리가 긴 무료를 뚫고 기웃거렸으며 한쪽 발목이 잘린 고양이가 눈을 마주치며 뒤돌아갔다 한쪽으로만 발자국을 찍으며 나 또한 어느 눈길 속을 떠돈다 흰빛에 갇힌 것들 언제나 길은 세상의 모든 곳으로 이어져왔으나 들끓는 길 밖에 몸을 부린 지 오래 쪽문의 창에 비틀거리듯 해가 지고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보수도 왜색보수까지 엉키면서 욕을 먹지만 한국의 소위 진보 와 진보 진영 도 싸잡아 그에 못지 않게 욕을 먹는다. 아니 더 먹는다고 해야 옳 다. 왜 그럴까? 워낙 진보진영(여기서는 한국의 진보라는 이름을 내건 세력과 집단을 통칭하는 말로 쓰겠다.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지만 일단 진보 의 개념이 아니라 한국형 진 보를 말한다.)이 보수진영을 기득권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정치적인 공방으로 가

페이지172 버리다 보니 자신들이 욕을 먹는(비판 받는) 그 이유를 잊어버리는 건 아닌가 생 각이 들 정도다. 물론 자기반성이 곳곳에서 나오기는 한다. 진보는 죽었다 고 외 치는 사람들도 있다. 단순히 세력간 갈등에서 터져 나온 소리는 아니다. 한국의 진보가 가진 제 문제들을 감안해서 쓴소리를 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도 별로 달라진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특히 지금 같은 선거 국면에서는 무슨 정 권교체가 마치 진보진영 전체의 승리인 양 포장되며 구호로 나온다. 극히 위험한 발상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아무런 자기 반성이 없는 그런 진보구호는 공감을 얻기가 무척 어렵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않는 듯하니 말이다. 진보 보수에 대한 관점은 <2012 시대읽기> 본편 8부 6편에서 살펴본 바 있다. 그 일부를 옮긴다.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차이는 역사적 진보 자체에 대해 긍정과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 변화의 진행과 추동력에 있다 며 사회적 변화의 포괄적이 고 빠른 진행에 대한 수용 태도와 그러한 변화를 수행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의 정도에 있다 고 말한다. (중략) 이러한 진보와 보수의 개 념은 정치적 이념이나 가치성을 지니지는 않는다. (김경미) 진보는 기존 질서에 대한 변화를 긍정하고 보수는 이를 거부한다. 좌파는 이데 올로기적 의도를 가지고 특정 체제를 지향하며 우파는 기존 체제 질서를 경영하 려고 한다. 그렇다고 좌파와 우파가 특정 이념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가지는 이념이니 지향하는 체제는 지속적으로 갱신된다. 한국 사회에서의 좌파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사회주의 지향성을 핵심요소로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을 포함한 피지배계급의 이익확대를 목표로 하며, 체제적 대안의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변혁이나 수정을 모색하는 운동 으로 정의된다. (채 장수) 이념갈등을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적 형태로 구분하면서 이를 설명하는 개념 중의 하나로 좌우 개념을 꼽는다. 그는 진보 보수를 설명하기 위한 4가지 차원으 로 첫째, 좌우개념, 둘째, 권위와 자유주의, 셋째, 근대적 가치와 탈근대적 가치, 넷째, 반공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입장 차이를 이용한다. 좌우 개념을 경제적/물 질적 가치의 배분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평등과 효율, 국가와 시장, 분배와 성장, 노동과 자본 등으로 양분하여 설명할 수 있는 개념으로 간주한다. (강원택) 이렇게 보면,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란 문제는 별로 거론할 과제가 못 된다. 진보적 변화와 추동력 을 구분 차이로 봐야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게 보이기 때 문이다. 무조건 발전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진보/보수라는 이분법은 한 국 사회에서 별로 특별한 구분법의 잣대가 되기 어렵다. 오히려 강원택의 한국 사회가 가진 좌우개념이 더 타당하게 보인다. 평등과 효율, 국가와 시장, 분배와 성장, 노동과 자본 등으로 양분된 개념이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게 한국형 진

페이지173 보와 보수 논쟁으로 번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이데올로기를 앞세워서 정 치적으로 거론하는 건 지금 진보/보수를 봐야 하는 논점에서는 별로 어울리지 않 는 프로파겐다 성격이 강하다. 물론 한국이 가진 특수한 정치적 위치인 분단상황 에서 이것이 활용된 측면이 워낙 강하다 보니 이것이 확정된 구분 잣대처럼 내세 워지지만 경제가 정치를 압도한다고 까지 말해야 하는 지금에는 사회주의 혁명 운운하는 건 기본 성립 자체가 안 된다. 그러므로 변화와 추동력 에 대한 견해, 그것을 한국의 보수(우파) 관점에서는 효 율을 앞세우고 시장을 우선하고, 성장을 지향하며 자본을 중심으로 둔다는 것으 로, 진보(좌파) 관점에서는 평등을 우선시 하며, 이를 위해 움직이는 국가의 시 스템을 갖추는 걸 지향하고 분배에 초점을 두며, 자본보다는 노동의 질적인 향상 에 관심을 두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현실성이 있다. 일단 이렇게 나누는 것으 로 전제한다. (*주; 부족한 부분이 있음은 사실이지만 이 정도 수준에서 볼 수 있 다 판단하는 것은 김경미의 의견처럼 변화와 추동력을 찾는 요소 자체가 어디에 있는가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 사회에서 소위 진보 라 불리는 제1야당 민주통합당의 모습으로 가보자. 당사에서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 사진이 걸린 기사 를 봤다. (난 민주당을 방문한 적이 없어 실제 그런지는 모르겠다.) 분명 뒤에 걸린 사진들은 두 전 대통령의 것이 맞다. 그렇다면 민주통합당이 진

페이지174 보를 자처한다면 세간에서 바로 저 두 사람이 진보 의 1기, 2기란 타이틀(라벨이 라 해야 하나)을 가지고 있으니 그로부터 출발한다고 봐야 한다. 앞서 많이 봤으니 일단 구구절절 이야기는 생략하자. 김대중, 노무현 두 사람은 진보가 아니다. 오히려 지독스럽게 자본 에 충실했던 보수다. 게다가 시장과 성장 이란 측면에서는 더 심각하다. 아예 시장만능주의를 받아들여서 확산하고, 성장을 위하여 분배를 죽이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분배의 싹을 자르는 지경까지 갔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이 두 사람이 진보라 할까? 역사의 진보로 말하는 지엽적인 몇 가지의 정책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저 커 다란 흐름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의 초상을 걸어둔 민주통합 당은 김대중-노무현 노선의 정치단체일 수는 있으나 진보 라는 이름을 사용해서 는 안 된다. 순수성은 없단 소리다. 흔히 진보의 보수화, 즉, 이를 좌우 개념으로 봐서 중도좌파 혹은 우향우 현상 정 도로 표현하는 일이 지금 선거판에서 민주당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이 점은 새 누리도 좌향좌 현상이 있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보면 한국 사회에서 진보/보 수 개념보다는 오히려 좌파/우파 개념이 훨씬 더 타당한 접근법이라는 걸 말해주 는 하나의 징표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진보/보수는 일종의 진보적 가치, 진보적 성향이란 말과 보수적 가치, 보수적 성향이란 말의 수준에서 봐야지 이것이 진정 한 의미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적인 집단의 틀로 구분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민주통합당은 일단 진보 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보면 새누리당 도 보수 는 아니다. 민주통합당이 진보적 가치와 성향을 가지고 있는 곳은 맞다. 새누리당이 보수적 가치와 성향을 띠고 있는 곳도 맞다. 그렇다고 해서 보수 는 아니다. 거기도 진보적 성향은 뒤섞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좌파 우파를 좀 더 자세히 한 번 볼 필요도 있다. 좌파 우파는 어떤 특정의 이념이나 실천과는 독립적으로 기존의 지배적인 정치 적 내지는 사회적 가치 및 이에 근거한 체제를 신봉하는 세력은 우파로, 이에 반 해 기존의 가치체계와 제도를 비판하고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인 정 치적 및 사회적 가치와 제도들을 모색하는 세력은 좌파로 규정된다. (김경미) 한국 정치환경에서 색깔론은 솔직히 더 이상 거론할 가치가 없다. 이것은 우리 사회를 진보적으로 이끄는데도 혹은 보수적 가치를 드높이는데도 별로 기여하는 바가 없다. 이른바 반공주의를 토대로 한 접근법은 이명박 정권에서 지독스럽게 왜색보수들이 사용하는 일종의 정치공세로, 또한 반공( 反 共 )과 반일( 反 日 )을 동 일 선상에 올리려는 꼼수에 불과하다. 기억해보면 쉽다. 월간조선 편집장이었던

페이지175 조갑제가 사퇴를 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친북보다는 친일이 낫다 는 말이었다. 그걸 사회는 용납할 수 없고, 지극히 당연한 불용납의 이유가 있다. 그 후에 다시 저러한 꼼수가 등장한 배경은 이미 많이 설명했으므로 생략한다. 아직도 이런 이 데올로기적 접근에 함몰되어 있다면 참 한심한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이 불을 다시 지핀 대목도 있다. 그것은 이 사회의 발전으로 본다면 아주 지독한 패착이 었다.) 이렇게 보면 우파가 주장하는 자유시장주의라는 것도 여기서는 별로 힘을 잃는다. 오히려 엉뚱한 요소 하나가 불쑥 튀어 나온다. 효율-시장-성장-자본 은 모두 그 대부분이 기업으로 초점이 모아진다. 물론 정부와 민간의 기업 외 요소도 개 입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미지나 현실이나 그곳으로 모이는 건 틀림이 없다. 이른바 이것이 친기업 이냐 아니냐를 둔 내용이다. 김경미의 구분법이 여기서는 또 통하지 않는다. 지배적인 정치적 사회적 근거를 둔 체제를 신봉한다는 점에서 새누리-민주통합 둘 다 자본주의,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벗어나는 곳은 없다. 오 히려 기업규제를 축소하고 정부 개입을 줄이는 방식, 즉, 신자유주의를 해석함에 있어 어느 쪽이냐를 둔 구분법이 작동된다. 이것은 DJ정권 이후 생겨난 분석법에 의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 점에서 보자면 새누리-민주통합 둘 다가 적정한 기업규제, 그리고 정부개입 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말하니 신자유주의 체제 하의 잣대에서는 누가 어 느 쪽에 중점을 더 두는가 하는 문제만 남는다. 이를테면 이명박 정권은 어느 쪽 인가 하면 처음부터 기업 프랜들리 했으니 편향을 말하고 시작한 것이고, 노무 현 정권은 어느 쪽인가 하면 겉으로는 진보 운운했지만 실제로는 기업편향을 지 독스럽게 했고, 김대중 정권은 아예 금융자본주의 주주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며 한 국의 경제체질을 신자유주의에 맞게 바꿔 버렸으니 원조 편향이라 말해야 한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여기 무슨 진보가 있고 보수가 있나? 이어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일단 여기까지 보면, 진보 보수 논쟁은 의미가 없다. 좌파 우파 논쟁의 경우도 이데올로기 부분을 빼면 별로 볼 것이 없다. 단지 제도적 관점의 쟁점은 남는다. 이 부분은 뒤에서 이야기를 해보자. 7. 한국의 진보 는 왜 욕을 먹는가? (2) 아득하면 되리라 / 박재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아득하면 되리라.

페이지176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 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 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한국의 진보 가 자신들을 부르는 거의 공식적 명칭은 평화민주통일개혁세력 이다. 길다란 이 이름은 다양하게 사용된다. 이 가운데서 민주세력을 떼서 부르 거나 혹은 민주개혁세력, 때로는 세 가지를 합성해서 민주통일개혁, 평화통일개혁 을 다양하게 사용한다. 이 단어 합성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단어들의 조 합이 바로 아젠다의 장악과 관련되어서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은 평화통일 노력의 선도역할이란 명분으로 전국 각 지역 및 해외까지 지부를 두고 활동한다. 그러나 이 단체는 진보적인 색채가 아닌 철저하게 친 정부적인 기반을 둔다. 더군다나 이 기구의 설치는 헌법 제68 조에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설치가 명시(1980.10.27)된 것을 토대로 1981.3.14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법 (법률 제3383호)이 공포되고 이어 4.7 시행 령이 공포됨으로써 사실상 헌법기관이란 이름으로 활동을 한다. 이것은 1987.10.29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로 명칭이 변경되지만 관련 활동은 쭉 이어진 다. 2011.7.1 김현욱 수석부의장, 2012.2.4 남성욱 사무처장이 취임했다. 활동은 3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대통령의 통일정책 전반에 대한 자문 건의 기능, 그리고 통일에 관한 범국민적 합의조성과 역량결집,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국 내외 대표성을 지닌 2만명의 지도급 인사를 자문위원으로 구성하여 활동하는 것. 한 마디로 이 기구는 철저하게 정권 차원에 기능하도록 만들어진 기구다. 바로 이 아젠다라는 부분에서 민주평화통일 이란 용어 자체는 1980년 이후 사실 상 정권 장악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1980.10.27 헌법에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바로 그 시기, 제5공화국 헌법 제9호로 불리는 이 헌법은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 한 대통령 선출선 규정한 이른바 체육관 선거 형식을 확정한 개정헌법이다. 이

페이지177 헌법에 바로 문제의 민주평통자문위가 들어가 있다. 그것도 제3장 정부 제2절 행 정부 제2관 국무회의란에 당당히 들어있다. 제68조 1평화통일정책의 수립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평화통일 정책자문회의를 둘 수 있다. 2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의 조직 직무범위 기타 필요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이 헌법 개정은 1980년 신군부와 직결되는 사안이다. 1980.5.13 김대중은 서울 의 봄 시기 기자회견에서 북한 공산집단이 우리의 과도기를 이용하여 남한에 대 해 폭력에 의한 그들의 야욕을 성취하려는 음모를 획책하려는 일이 절대 없기를 엄중히 경고한다. 국민과 학생, 근로자들은 질서를 지키고 사회 안정을 유지하여 북한 공산집단이 오판할 계기를 주지 말아야 한다 라는 내용을 밝힌다. 그러나 1980.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에 이어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 인사들이 체포 되었고 우리가 잘 아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벌어진다. 김대중내란음모 사건 으로 불리는 이 일은 1981년 1월 대법원은 군사재판에서 김대중에 대해 사형을 선고하였으나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등 미국 의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의 사 형중단 압력이 거세지자 1981.1.23 무기징역 감형되고 얼마 후에 다시 20년형 으로 감형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사건만으로 보면 1995년 YS정부 시절에 광주 민주화에 관한 특별법(5.18 특별 법)이 제정되어 관련자 재심청구 및 명예회복이 이루어졌고, 김대중은 대통령 임 기를 마친 2003년 재심 청구, 2004년 무죄선고를 받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 종 료되었지만, 바로 저 1980년 제5공화국 헌법에 규정된 아젠다는 그 이후에도 쭉 이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1987.10.29 전부 개정된 헌법 제10호(시행 1988.2.25)에서도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조항과 명칭이 변경되며 아주 중요한 변화 하나가 살그머니 그 안에 숨었다. 거기에 민주 라는 단어 하나 가 첨가 되었다. (헌법 제4장 정부 제2절 행정부 제2관 국무회의 제92조) 제92조 1평화통일정책의 수립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민주평화 통일자문회의를 둘 수 있다. 2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조직 직무범위 기타 필요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아젠다는 완벽히 장악되었고, 또한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87년 이전 소위 반독재 반민주 투쟁이라고 불리는 정치세력의 입장에서는 이 아 젠다에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은 듯하다. 물론 가졌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것이 헌법이며 또한 저 아젠다를 헌법 조항에 삽입해 둔 상태에서 반독재 반민주라는 이름으로는 87년 이후의 이슈를 만들어가기 어 려웠다는 점은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긴 했지만 말이다. 엄밀히 말해서 1987년의 개정된 헌법 제10호로 인하여 반독재 반민주 진영은

페이지178 남았지만 진보 는 더 이상 민주/평화/통일이란 이슈에 접근하기 어려운 상태 가 되었다. 특히 민주라는 아젠다의 경우가 그러했다. 이것을 더욱 명확하게 만들어버린 것이 바로 1991년 9월 남북한이 UN에 동시 가입하고 이어 1991.12.12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 간의 이른 바 남북기본합의서(1992.2.18 정식 효력 발생)와 1992.9.16~9.17 기간 열린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합의서 이행과 관련한 3개 부속합의서(남북화해 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합의서, 남북불가침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 남 북교류협력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가 체결됨으로써 단순히 헌법에서 의 아젠다가 넘어간 것이 아니라 남북한 양측에 의한 합의문안이 명시됨으로써 사실상 아젠다 가운데 평화 통일도 정부 주도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7.4 남 북공동성명을 한 차원 넘어선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제 다시 우리가 진보 라고 부르는 진영의 구호로 돌아가보자. 왜 민주평화통일 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는지, 왜 평화민주통일 이나 평화민주개혁 이란 이름 을 사용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아젠다가 장악된 상태에서 덧붙일 말은 하나 밖에 없었다. 바로 개혁 이란 단어다. 개혁 이란 참으로 애매한 의미를 담고 있다.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 고 침 이란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것은 제도 기구라는 이미 만들어진 것을 바꾸 는 것에 초점이 모아진다. 교육개혁이니 사법 개혁이니 하는 것도 그렇지만 경제 개혁의 경우에도 정책이 관건이 아니라 제도가 바꿔지는 것을 말하는 셈이다. 이 자체가 바로 진보 가 말하는 의미와 잘 통하기는 한다. 그러나 진보 보수가 진보 적 변화와 추동력 의 차이 혹은 그 관점이나 방향의 차이에 있다고 보면 이것만

페이지179 으로는 절대 차별화를 기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것은 기존의 가치체계와 제도를 비판하고,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인 정치적 및 사회적 가치와 제도들을 모색하는 것 이 좌파라는 논리에 더 접근해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진보 는 개혁이란 목표를 내걸었다면 좌파 라는 이름이 적절하지 진보라는 명칭 자체를 붙이는 건 대단히 어색하기 그지 없는 논 리가 되어 버린다. 이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이란 10년의 집권 기간이 있었다는 변하지 않는 사실까지 감안하면 진보 는 죽었고, 좌파는 지금도 살아있다는 논리적 결론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이 틀을 무너뜨리려고 한 것이 김대중이었던 것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2000.8.15 남북간의 공동선언(소위 6.15 공동선언)과 노무현의 유사한 활동(2007년의 10.4선언)이 바로 연장선상에 있다. 통일 아젠다를 가지고 오려는 노력이 있었다 는 의미다. 특히 6.15선언의 경우는 민주평통이라는 헌법 기구에 대응하여 6.15 선언실천위원회를 민주평통과 유사하게 네트워크로 구성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지 금도 이 조직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한계를 드러낸다. 바로 6.15선 언이나 10.4선언이 이미 앞서 진행된 남북한간 기본합의서(1991)를 넘어설 수 있는 아무런 특별함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사실, 그 이후에 진행된 일련의 집권 기간 중의 남북한 간의 금강산관광, 개성공간이란 두 결과물에도 불구하고 기본 합의서의 파행( 跛 行 )은 쭉 이어져 왔다는 사실 등에서 평화통일이란 기반에 접근 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판단이 내려질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하여 평화통일 이란 이슈가 소위 진보진영 의 단독의 지속적 아젠 다로는 남아있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다. 종합해보면, 남겨진 것은 하나 바로 개혁 이란 아젠다이지만, 이 또한 커다란 문 제를 안아 버린 상태다. IMF사태 직후 집권한 김대중 정권은 한국의 국가 사회의 체계 가운데서 특히 경제를 중심으로 한 프레임을 신자유주의의 틀에 완전히 복 속 시켜 버렸다. 그것은 냉정하게 말하면 성공이 아니라 새로운 체계를 자체적으 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국제금융 카르텔이 요구하는 바대로 했다는 점에서 진 정한 의미의 개혁 은 아니었다. 노무현 정권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갔다. 자발적 으로 한미FTA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아예 김대중 정권의 프레임 개정을 공 고화 하는 작업에 들어간 셈이었다.. 이 과정을 통하여 김대중-노무현 두 정권은 개혁 이란 아젠다마저 소위 진보진영에서 빼앗아간 장본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초상을 걸어둔 민주통합당의 정체성은 무엇이라고 봐야 하 는 것일까? 민주도 평화통일도 나아가 개혁도 아젠다 속에 있지 않다. 물론 이것은 상대적인 측면이 남는다. 전두환-노태우-YS 그리고 MB까지 이어지는 노선에서는 분명 일정한 단절이 있다. 그것은 YS-이회창-MB로 이어지는 노선에서의 각기 차별

페이지180 적인 운영과도 관련이 된다. 오히려 헌법에서 규정한 민주평통자문위의 아젠다 점유 방식이 쭉 이어지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바로 이 상태-아젠다를 정권이 포획하는 프레임-를 활용하지 못한 것이 김대중-노무현의 10년이라는 사실이 드 러나버린다. 이것이 바로 10년 세월 동안 집권했음에도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 았으면서 어떻게 개혁 을 말하는가 하는 비판의 핵심 중의 핵심에 해당하는 것이 기도 하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한국 사회의 오늘에서 진보 라고 자신의 이름을 특정하 는 정치세력, 그리고 시민사회세력이 왜 비판 받으며 또 욕을 먹는지(비난 받는 지) 그 상세한 내용까지 들어가보도록 하자. 8. 한국의 진보 는 왜 욕을 먹는가? (3) 상여를 멨던 느낌 / 유홍준 상여를 메면 기분이 좋았지 상여를 메려고 목장갑을 끼면 기분이 정말 좋았지 나도 이제 어른이라는 생각, 나도 이제 어엿한 장골이라는 생각 나도 이제 비로서 한몫한다는 생각 이것이 바로 우쭐, 하는 것이라는 생각 상여를 멘다는 것은 이쪽저쪽 편을 갈라 흰 목수건 목에 걸고 흰 장갑 끼고 하얀 광목줄을 잡으면 이것은 마치 운동경기라도 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 한 사람의 주검의 무게는 둘이 메도 똑같고 열이 메도 똑같다는 말 그말을 실감하는 것이라는 생각

페이지181 어서어서 이 주검을 운밚고 돌아가야겠다고 광목줄이 어깨를 짓누르는 언덕빼기로 올라가는 것은 주검도 짐이라고 은근슬쩍 한 푼이라도 더 노잣돈을 뜯어내려고 장난을 걸어보는 것은 사는게 별 게 아니고 목숨이 별 게 아니고 죽음이 별 게 아니고 그냥 모든 게 별 게 아니라고 느껴보는 것은 자! (1), (2)를 통하여 한국의 진보 가 어떻게 아젠다를 빼앗기고 또 멍청하게 행 동하면서 민주니 평화통일, 개혁을 말하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아젠다를 잃고 나면서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걸 잃 어 버렸다. 그것은 바로 애민 ( 愛 民 )의 방식이 왜곡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서민( 庶 民 )의 뜻은 앞서도 잘 보았다. 친 서민의 구호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그냥 구호였을 뿐이었지만 특히 김대중-노무현 시기는 최악을 달렸다. 그것은 국가의 운영 시스템을 바꾸면서 마구잡이로 비정규직이 양산되면서 서민은 확대 되고 열악해진 환경에 빠지는 상황을 초래했다. 노동의 질은 떨어졌고, 심지어 노 무현 시기에는 저임금 구조의 정착에 기여하는 것을 뻔히 아는 다문화정책을 외 국인인권이란 미명 하에 확대 선전하는 극악한 일도 벌어졌다. 그러니까 이들은 친 대중적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린 셈인데, 그 이유는 의외로 아주 간단했다. 바 로 국가지배논리라고 불리는 파워 엘리트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집 권 이전까지 구호로 내세웠던 민주 평화통일 그리고 그 이후에 붙은 개혁이란 명 분이 그들의 기득권화에 동원되는 것이었지 정작 친 서민, 친 대중을 목표로 하 는 것이 아니란 걸 증명해준 결과를 만들었다. 이는 보다 확대 되었는데, IMF사태 이전 형성되었던 한국 사회의 중산층이 서서 히 붕괴하는 기초도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일 이었다. 시장만능주의의 기초는 정부가 주도하여 국가주도가 아닌 시장을 중시하 는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막장 금융자본주의의 꼼 수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고 이를 막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부분은 IMF 사태의 원인과 과정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한다.) 그것이 오히려 확산되고 고착화하는데 절대 기여를 한 것이 바로 그 이전 반독재 반민주 구호를 통해 진 보 를 말하던 좌파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좌파가 집권의 기반을 유지하기 위하 여 받아들인 것이 바로 대기업 논리이며 또한 그 도입한 시스템이 국제금융 카르 텔이 그토록 갈구하던 목표였다는 점에서 친 서민 친 대중은 그 속에서 펼쳐질래 야 지기 어려운 구도였다.

페이지182 허겁지겁 양극화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꺼내긴 했으나 김대중 정권은 미봉의 수준에서 다루었고, 노무현 정권은 아예 이것을 고착화하면서 진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 사이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의 안정이란 기반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부 동산 정책을 비롯한 많은 정책들이 정상적인 운영이 아니라 버불로 투기로 판이 형성된 것도 이 때부터 였다. 주주자본주의를 도입하면서 벌어진 한국 사회 내의 투기판은 주식시장뿐만 아니라 부동산, 유통 및 서비스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 하게 펼쳐졌고, 그 와중에 대기업은 그들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오히려 이러한 정권과 담합하고 또 그 방향으로 유도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복지 문제가 이 사이에 묻혀진 데는 커다란 이유가 존재한다. 바로 통제권과 통 제방식이 그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이슈 가운데서도 복지는 존재했다. 그 시기는 시장만능주의, 무한경쟁적 경제환경, 사회환경의 도입이 촉진되고 있던 단 계였고, 그 사이에 복지가 뚫고 들어갈 틈도 좁았다. 정권은 오히려 이 이슈를 담 기 보다는 개방통상형 국가라는 명분을 앞세우면 파이 키우기를 선 순환의 과제 로 삼았고, 결국 복지의 씨앗을 배태하는 작업 자체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양극화 대책은 그렇게 실패했고, 민심은 노무현 정권 말기에 급속하게 이탈했다. 그 사이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2003.11 열린우리당 창당, 그리고 대통령탄 핵소추, 이어 2004.4.15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우당 과반수 이상 차지, 5 월 14일 헌법재판소 대통령 탄핵소추가결안 기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은 대중이 주었던 사실상 마지막 기회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이를 살릴 수 있는 철학적 기반과 선택의 단호함을 전혀 갖추고 있지 못하고 오 히려 대중을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지게 했다. 이 시점에서 친 서민은 의미를 잃었고, 친 중산계급마저 약해진 중산계급의 기반에서 성립되지 못하는 과제로 남게 되었다. 그렇게 정권은 경제살리기 테마를 들고 나온-이건 당시로써는 가 장 빅 이슈 에 해당되었다-이명박에 의해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다. 아젠다를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서 정책적 능동성마저도 잃어버린 김대중-노무현 이 기댈 구석은 다시 과거의 아젠다를 꺼내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만 들어진 것이 바로 민주통합당이다. 빅텐트 I.으로 불리는 체제가 2012.4.11 제 19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패배한 이유는 간단했다. 전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 았다는 것이 작용한 결과다. 한국 사회의 내부에서 친 서민의 방향에서 정책을 연구하는 많은 연구소 등 단체 나 혹은 그런 방향의 시민운동을 전개하는 조직들의 경우, 이러한 상황에서 진보 라는 이름을 다시 살리기 위하여 민주통합당이란 기성 정당의 틀로 급속하게 흡 수되었던 것도 2012년 초의 특기할만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나마 남아있던 진보 적 가치를 추구하던 세력마저도 이렇게 구조화된 틀에 들어감으로써 사실상 한국 사회에는 진보는 죽었다고 보는 것이 옳고 단지 진보적 가치를 꺼내는 정치세력 만 덩그렇게 남아있는 결과를 가져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페이지183 더군다나 김대중-노무현 시기, 이른바 진보라는 이름으로 꺼낸 많은 정책들 가 운데서 발생한 오류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지방자치제의 경우도 현 시점에서는 친 서민적 기반의 형성에 도움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기득권을 형 성하는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중이란 지적을 한다. 그것은 정치적 시스템이다. 정 치 속에 있는 세력들은 기 집권의 맛을 보고, 정치를 통한 집권, 권력의 형성과 발동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게 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그랬듯이 절대 친 대중 성향을 가지지 않으며 또한 개혁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변형된 지배세력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수준이다. 이 문제는 앞 으로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주 대폭적인 개혁을 필요로 한다. 제도 하나를 만드 는 것도 어렵지만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어쩌면 이것이 진보라 불리는 세력의 원천적인 한계가 될는지 모른다. 박원순의 서울시장 보궐선거 승리는 예상 외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MB정권 의 지독한 실정( 失 政 )이 가져다 준 새로운 기회 부여라고 보는 편이 옳다. 성패 에 관해서는 아직 거론할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기성 정치 전반에 대한 진보 로 자칭하는 세력에 대한 용서가 아님은 이미 4월 총선에서 드러났다. 혹자 는 전체 개표의 숫자를 대비하여 새누리당의 승리는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전체 투표수 대비 비례 대표 득표율은 새누리당 42.80%, 민주통합당 36.45%, 자유선진당, 3.24%, 통합진보당 10.30%, 창조한국당 0.43%, 국민생각 0.73%, 진보신당 1.13%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빅 텐트I.을 통해 총선 승리를 장담하 던 민주통합당의 패배를 지금도 제대로 분석하는 결과는 없다. MB정권의 이 지 독한 실정의 상황에서조차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꿰뚫 어보는 진보 진영 의 반성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걸 인정하기 위해서는 이 글의 앞서 설명된 내용을 모조리 설명해야만 하는데, 그렇게 될 경우 그들은 단순히 반성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통합당사에 걸린 두 개의 초상을 떼어내어야 하는 중 차대한 모순을 안고 있어서다. 진보 라는 이름을 이제 마치 민주통합당의 전유물인 것처럼 사용하는 건 어려울 듯하다. 그것은 통합진보신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정희의 대선 출마 여론조사 가 3%대 지지율이 나왔다는 기사를 봤지만 그것은 이미 집권 수권의 역량을 기 대하기 어려운 실질적인 사표( 死 票 )의 수준에 불과하다는 걸 생각한다. 진보라는 이름이 죽었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한국 현대사의 이 과정에서 진보는 제 이름값을 못했고 이렇게 죽었다. 더불어 좌파 또한 죽었다. 남은 것은 정체성이 모호한, 그러면서도 구호만 내걸고 있는 정치집단, 수권의 경험을 가진 그들이 생 각하는 수구( 守 舊 ) 속으로 들어가는 비( 非 ) 친 서민, 비( 非 ) 친 대중의 정치적 욕망 덩어리만 남아 있는 셈이다. 왜 반성을 촉구하는가? 간단하다. 이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이들의 구태의연함 은 앞으로 더 많은 역사적인 조롱거리 를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안철수의 등장 이후,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또 다른 형태로 변이( 變 移 )를 만들 것을 주문하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여론이란 향배( 向 背 )에만 귀를 쫑긋 세우는 그런 정치집단이 어떤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경험은 너무 많은 것을 말

페이지184 해준다. 이는 고언( 苦 言 )이다. 그러나 들어줄 귀는 없는 듯하니 안타깝기 그지 없 다. 9. 학생인권조례와 인권문제 언젠가 많은 것을.. / 프리드리히 니체 언젠가 많은 것을 일러야 할 이는 많은 것을 가슴속에 말없이 쌓는다 언젠가 번개에 불을 켜야 할 이는 오랫동안 -- 구름으로 살아야 한다. 2012.9.28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재수감되었다. 8개월 남은 형기를 살아야 하 는 사후매수죄에 대한 대법 판결의 결과다. 민선 교육감에 대한 정부(교육부)의 견제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 말은 곧 이명박 정권 자체가 곽 교육감의 노선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학생인권조례 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곽 교육감이 수감 들어가자마자 교육부에서 파견된 권한대행 이대영 부교육감의 일성은 학생인권조례를 꼭 따르지 않더라도 각 학교 자율로 학칙을 제 개정하도록 교장회의 등을 통해 안내하겠다 고 해버렸을 정도다. 전교조는 시 의회 결의와 시민의 뜻을 부정한 것이라 하고, 교총은 조례로 학교 를 욱죄면 학교현장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학교 구성원에 자율성을 줘 학생 과 학부모, 교원이 민주적으로 학칙을 개정할 수 있도록 한 상위법령인 초중등교 육법을 따라야 한다 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여론이 어떤 것 같은가? 곽노현에 반대하는 의견이 없는가? 아 니다.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럼에도 곽노현은 야당이 장악한 서울시 의회 와 9만 여명의 발기인을 가지고 이걸 밀어붙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말로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아도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 지켜주는 것 바로 그것이 진보적 가치라는 것이다. 왜 그게 진보적인 거지? 보편적인 사회 상식에서 생각하면, 이것이 진보적 가치라는 것이 언뜻 이해가 잘 안 된다. 학생의 인권을 말한다? 아! 그렇다. 바로 인권 이란 항목을 꺼내면 한국 에서는 진보적 가치 류에 속한다고 하는 것이 인정된다고 보는 것이지. 그러나 앞서도 본 바처럼 무분별하게 인권만을 꺼내서 사회를 개판으로 만든 외국인인권 이라는 이상한 항목도 있었다. 그것은 외국인인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한국인의

페이지185 사회 내부 인권을 짓밟는 구도 속에 있었다는 걸 말이다. 인권 을 꺼낸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이게 무조건 만능( 萬 能 )은 아니다. 그렇다면 성인과 미성년의 구분은 왜 하는 것인가? 이 관점이 툭 튀어 나온다. 성인의 경우에는 자율이 있는 반면 책임 의무가 따른다. 학생인권을 보장하고 학 생의 권리를 말하면 책임은 어떻게 정의되는 거지? 지금 자율 수준에서도 학교의 교육질서는 갑갑한 수준이라는데 거기에 자유를 말한다? 교육현장에 가 보라. 이 론이 맞는지 실제가 어떤지, 저런 교육철학으로 학생들이 책임은 모른 척 해버리 고 자유만 배워서 교권이 짓밟혔다는 사실을 아는가? 등등의 의견이 줄을 잇는다. 물론 찬성 의견도 있다. 그러기에 저 조례가 발의가 되고 통과가 된 것이니까. 인 권도 책임감도 가르치면 되는 것이고 인성이란 것을 집에서 가르치는 거지 학교 가 그걸 가르치는 곳은 아니지 않는가, 순치( 馴 致, 길들임)가 교육의 목표는 아니 지 않는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머리 마음대로 못하고 선생이 모욕적인 언사를 해 도 참고, 무차별적으로 매를 들어도 보호할 권리가 없는데 당연히 학생인권은 있 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것이 사실 서울시의 경우 9만여 명의 주민이 발의한 힘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이 사태를 지켜보는 눈 가운데는 이해관계 없이-이를 테면 이미 중고등학생도 없는 집도 있다. 다 키워 서-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문제는 지금 드러난 현실이다. 학교폭력도 문제지만, 학교 내의 교육현실은 상상 을 초월하는 수준의 바닥인 경우와 사례들이 눈에 보이고, 또 점점 사건화, 확대 화 되는 단계다. 이건 몇몇 언론들이 과장해서 보도하는 그런 내용의 문제가 아 니라 학교 근처에서 살아보면 안다. 참 쉬운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 인권 을 말하 는 것이 너무 비현실적이란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일부 의 사례로 전체를 모두 희생시키면 안 된다는 논리가 여기에 반박으로 나온다. 이게 바로 문제의 시발점이다. 일부와 전체, 그렇다면 그것을 충족할만한 방법이 그간 없었던 부분은 무엇인가를 봐야 한다. 전교조 교사에 대한 명단 공개 등 강력한 보수적-사실 보수라고 하기는 어렵다. 거의 전쟁 상대방을 대하듯 했으니까-반발도 있었지만 방법이 잘못되어 조전혁 은 곤욕을 치렀다. 그에 슬그머니 전교조의 이데올로기적 편향성을 언론에 흘리 면서 학생인권조례는 타당하지 않다 주장했지만, 이게 잘 먹히지는 않았다. 오히 려 학교폭력, 교육현장의 이야기가 대중에게는 현실로 다가왔고 성인과 미성년의 차이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과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의견이 나왔고, 학 생인권조례의 초안을 보고 두발이니 자율학습 폐지를 보고 이건 뭔가 좀 잘못되 었다 생각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거꾸로 인권 은 아이들에게도 필요하다는 견해 나 왕따를 막기 위해서라도 이런 조치는 필요하다, 내 아이가 무조건 소중하다는 인식, 공교육 현장에 대한 지독한 불신은 거꾸로 학생인권조례가 필요하다는 쪽 의 생각으로 기울게 했다. 현실로 보면, 이건 진보적 가치가 어디 있는지 말하기 너무 애매한 구도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모두 현실적인 바탕이 짙게 깔린 이 유들이지 단순하게 인권 이란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페이지186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전문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56852 제1조(목적) 이 조례는 대한민국헌법, 교육기본법 제12조 및 제13조, 초ㆍ중등교육법 제18조의4 및 유엔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에 근거하 여 학생의 인권을 보장함으로써 모든 학생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 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이루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전문을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이건 학생도 청소년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라는 기본에 입각해서 만든 조례다. 인권 을 말하는 것이 사실 요체인 셈이다. 혹 자는 이 조례에서 제18조(의사 표현의 자유) 3항 학생은 학교 안팎에서 집회를 열거나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4항 학생은 학교 안팎에서 모임이나 단체활동 및 정치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는 조항이 촛불집회를 맨 처음 시 작한 학생들의 힘을 소위 진보진영이 여전히 빌리고자 함이 아닌가 지적하는 사 람도 있다. 프랑스처럼 최근에도 고등학생들이 극력 시위를 했던 장면이 연상된 다는 사람도 있다. 기득권 입장에서는 다수가 모여서 토론하는 것도 지겨운데, 이 런 시위를 보장하는 것까지 가는 건 정말이지 경기를 일으킬 정도의 사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엄연히 우리 역사에서 4.19도 학생으로부터 시작된 궐기였음을 감 안하면 이 반대 주장도 별로 타당성을 가지지 못한다. 종교사학재단이 몸을 부르르 떨 조항도 들어가 있다. 제15조 (양심 종교의 자유) 가 그것이다. 기독교 등 종교과목 이수를 못 박아둔 학교는 우리 사회에 너무 많 다. 그것을 건학이념으로 내세우며 학생들에게 선택여지 없게 강요한다. 그 틀이 이것으로 무너진다. 이게 오히려 강하게 작용할 것 같다. 종교의 자유를 아이들에 게 보장하는 것, 그것은 인권이라기 보다는 기본권 영역에 속한다. 그것이 지금까 지 너무 깊숙하게 침해되어 왔지만 종교사학들의 입김에 교육부가 침묵했던 대목 이다. 그러니까 이 조례가 심기를 건드리는 세력들이 많다 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례 속의 쟁론이 될만한 요소도 없지 않다. 학생의 두발 과 복장 자율화 문제, 소지품 검사 문제, 보충수업 선택권 문제 등은 논란의 여지 가 아주 많다. 이것이 논의에 들어가는 구도가 만들어지기 전에 일단 조례부터 통과하는 것으로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발전적인 과정은 생략되어 버렸다. 그만큼 곽노현식 교육개혁은 논란 소지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위 보수단체는 오히 려 정치참여 이 부분, 교권 추락이란 부분보다 이상하게 특정 종교단체의 생각을 빌어서 그런지 동성애 부분까지 꺼냈지만 일단 조례가 통과하는 일이 벌어진 셈 이고 곽노현은 사후매수죄라는 참 이상한 법 조항으로 일단 유죄 판결이 내려졌 다. 혹자는 이 문제를 매수냐 아니냐 보는 것도 쟁점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의 선 거판에서-그것이 정치 영역이건 교육이건 어느 곳이건 막론하고 선거가 있는 곳 에서는- 돈이 오가는 구도가 형성되는 자체가 문제가 되니, 이 판결도 그런 각

페이지187 도에서 이해가 된다는 사람도 있다. 그것도 현실이니 틀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에 위헌 제청이 들어가 있는 사안을 대법원이 서둘러 법리까지 나열하 면서-법리의 타당성만 따지는 대법원이-원심을 뒤집는 법리를 꺼내고서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문제가 될 사안 같다. 법의 원칙이 개/판이 되었다는 의미니까. 보수적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곽노현 교육개혁의 핵심인 이 조 례는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다. 뜻은 좋지만 진행되면서 벌어질 일들에 대한 대 책이 없어서다. 나도 그런 우려가 없지 않다. 그 보완을 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일단 맞으니까 시행부터 하자는 식이면 뭐 진보니 보수 모두 다를 바 없다. 그냥 세력 싸움이 불과하게 보이니까. 공교육이 힘을 쓰지 못하는 입시제도의 프레임 속에서 과연 학생들 사회에서 벌 어질 교육 양극화 현상은 어떻게 될까 생각한다. 그래서 논의가 더 필요했던 부 분들이 있다고 본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교육에 대한 일정한 보수성, 보수적 가치 존중의 풍토를 생각하면 그렇다. 안타깝게도 이런 것이 바로 진보적 가치의 구현이 가진 한계일 수 있다. 성인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이 학교라는 공 간을 두고 에피고넨의 되어 벌어진다. 개인적으로도 우려되는 다른 것도 있다. 과연 학생의 인권을 저렇게 보장하고 나 서 학생이 책임질 일이 많이 발생할 때, 누가 그 책임을 대신 져야 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성인 사회에서는 자기 밥그릇을 자기가 못 챙기면 자기 책임일 수밖에 없다. 그럼 학생이 자기 밥그릇인 교육을 못 챙기는 걸 순전히 학생 책임으로 둬 야 하는 것일까? 따로 학교사업이, 행정이, 입법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성년이다. 그들에게 성년의 책임을 고스란히 부과하는 것이 과연 인 권일까? 아이의 잘못에 부모에게 책임을 물리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다면 학생의 잘못에 책임을 부모의 그것으로 규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왕따 학생이 자살을 선택한 기사를 읽어 보면, 학교는 이를 수수방관했던 흔적이 역력한 케이스도 보 인다. 그 일의 처리방식에 학교는 쑥 빠지고 피해자/가해자만 남는 모습에서, 결 국 학생의 인권이란 것이 현실적으로는 학교 내에서 관리되지 못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걸 오히려 관리하는 것이 학교가 아닐까? 이것이 순치 ( 馴 致 )라 말하 는, 학생을 길들이는 것 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가 아닐까? 문득 고리타분하다 여길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의 한 축을 차 지하는 유교적 교육이념이 생각난다. 그 첫 머리는 항상 수기치인 ( 修 己 治 人 ) 이 차지한다. 그리고 도덕적 입장을 강조하고, 비종교적인-종교를 통한 내세 등 을 배격하는-현실지향을 특징으로 한다. 과연 학생인권조례가 학생을 단순히 인 간으로 보고 인권을 말한다면 교육은 어디 가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수기( 修 己 ) 의 풍토가 사라진 교육현장이 오히려 더 큰 문제 아닌가 싶다. 무한경쟁만 강요 하는 시대 풍조가 교육이 가진 것을 인권으로 자꾸 커버해보려고 한다는 생각마 저 든다. 그것을 만든 원인부터 찾아가서 그 전체의 흐름을 꺼내놓고 봐야 하는 데, 단지 인권조레가 적절하니 않니 따지는 것이 너무 지엽적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안 접근방식이 그렇지만 말이다. 그러나 최소한 그

페이지188 일을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것, 부모에게 인식시키는 것, 학교에서 알고 있는 것, 이런 전제가 있어야지 인권을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보수적 가치의 출발점 이다. 이런 가치도 포괄하는 그런 조례를 만들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 같은 것이다. 조례를 두 번 읽어봤다. 몇 군데의 내용만 수정하면 딱 좋을 텐데 말이다. 아쉬움은 더 커진다. 10. 코르사코프 증후군 꽃을 심었다 / 윤제림 할머니를 심었다. 꼭꼭 밟아주었다. 청주 한 병을 다 부어주고 산을 내려왔다. 광탄면 용미리, 유명한 석불 근처다. 봄이면 할미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화증( 作 話 症, confabulation)이란 증상이 있다. 허담증( 虛 談 症 ), 공화증( 空 話 症 ) 이라고도 한다. 코르사코프 증후군(Korsakoff s syndrome)으로도 부른다. 없었 던 일을 마치 있었던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말하며, 일어났던 일을 위장하거나 왜곡한다. 망상적인 환자가 이런 경향을 병적으로 과장되게 나타내며, 사실을 오 해하고 왜곡하며, 자신의 공상을 덧붙이고, 사실에 근거가 없거나 적은 일을 사실 처럼 말한다. 이건 분명히 병증이다. 그런데 거짓말과는 다르다. 자신이 허구로 메워버린 기억을 사실로 알고 있어야 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결손 부분을 위장하 거나 왜곡한 기억으로 채우는 것인데, 그게 너무 확신 있게 들어가게 된다. 만일 이것이 검증되지 못하는 경우라면 그게 사실로 된다. 그냥 말짓기하는 거라 면 악의 없는 거짓말(white lie)도 있다. 그런데 악의 있는 거짓말 (balck lie)의 경우는 때로 심각한 문제로 번지기도 한다. 거짓말과 관련해서는 리플리 증후군 (Ripley syndrome)이 있다. 2011년에 미스 리플리 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이 것은 1955년 페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쓴 수설 재능 있는 리플리씨 (The talented Mr.Ripley)에서 따온 것이다. 반사회적 인격장애인의 증후군으로 현실 적으로 있지 않은 허구의 세계를 진실로 믿고 각종 거짓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 증상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증후군 환자는 일단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을 사실로 굳게 믿는 특징도 있다. 자신이 거짓말을 했지만 되풀이 되면서 사실로 굳게 믿 는다. 루이스 윌퍼트의 믿음의 엔진 (2007, 에코의 서재)이라는 책의 소개글을 쭉 읽

페이지189 어본다. (책은 못 읽었다.) 이 책은 진화심리학과 생물학을 토대로 인간 믿음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책이다. 우리는 왜 타당한 근거가 없는 것들을 믿는가? 라는 의문에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저자는 믿음의 엔진 자체가 진화 속에서 발달한 인과적 믿음으로부 터 시작된다고 주장하는 과학도서다. 그는 믿음 이란 것이 얼마나 불안한 상태에 있는지를 여러 사례로 설명한다. 충분히 우리 자신의 믿음, 마음, 인가의 행동, 언어 등에 대해 믿는가 못 믿는가를 따지는 건 너무 자주 있는 일이니 쉽게 이해 가 된다. 믿음이란 말뚝 같아서 그 깊이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깊으면 깊을수록 고통도 커진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 이유는 그것을 믿는 것이 용이하기 때문, 전형적(일반적)이기 때문, 그리고 고정적이기 때문 이다. 이해하기 쉬우면 믿음 의 관성이 생기고, 전형성은 바넘효과 (Barnum effect,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 지고 있는 성격이나 심리적 특징을 자신만의 특성으로 여기는 심리적 경향) 같으 며, 고정성은 믿음은 반증되지 않고, 주로 입증된다 는 인간의 보수적 사고로 설 명된다. 윌퍼트가 이야기하는 거짓 은 매우 매력적인 사고다. 자신을 방어하고 동시에 스 스로를 불안에 떨게 만들기 때문에 거짓말의 논리는 더욱 견고한 쪽을 지향한다. 어떤 인간의 거짓말이 공개되었다고 해서 그 누구 하나 정직하게 살고자 거짓말 을 근절하는 사람은 없다. 착각도 거짓말이다. 그것은 의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착 각했다 인지했을 때 이미 이성은 착각에 굴복한 상태가 된다. 거짓말은 사소한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강박증, 식이장애, 공황장애, 우울증, 조병, 통제망상, 최 면 등도 포함된다. 믿음이 주는 긍정과 부정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가 요구되는 것일까? 윌퍼트는 근거로써 생각하는,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은 모른다 며 영역을 지키는 지식인들의 관용을 강조한다. 마치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 는 공자의 가르침과 똑같다. 그러면서 결론으로는 믿음도 권리이며, 그 권리는 존 중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마친다. 책 말미에 있는 글이 이것이라고 한다. 베르길리 우스는 로마의 국가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저자다. 단테의 신곡에서 저승의 안 내자로 그를 선정하였다. 사물의 원인을 이해할 수 있는 자가 행복하다. (베르길리우스, Publius Vergillius Maro) 베르길리우스의 저 경구( 警 句 )도 사실은 동양에서의 오랜 가르침인 격물치지 ( 格 物 致 知 )에 해당한다. 사물의 이치를 반듯하게 안 연후에 앎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는 인식방법론이다. 이 때 格 物 은 어설프게 접근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지점까지 추구해 나가야 하는 것을 말한다. 致 知 는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토대로, 다시 더 알고 싶은 대상의 이치를 완벽히 알아내고자 하는 행위

페이지190 를 의미한다. 이것의 주체는 마음( 心 )이고 대상은 이치 도리의 바로 그 이( 理 )에 있다. 머리 아픈 글을 쭉 나열한 듯하다. 거짓말 수준이 아니라 많은 부분이 고의이건 고의가 아니건 간에 마구 횡행하는 곳이 바로 정치라는 영역인 듯하다. 많은 것을 감추고, 때로는 작화증의 그것처럼 자신들이 했던 말도 그냥 꿀꺽 삼켜 버린다. 그리고는 새로운 기억을 거기에 덧 붙여서 이어간다. 내가 보았던 많은 이들의 자서전 혹은 살아있는 자들의 자서적 글 가운데서 본 엉뚱함은 그런 것이었다. 우선 솔직하지 못했다는 걸 말해야 하고, 고의적이건 아 니건-이 말은 참 중요하다. 고의성을 입증하기 쉽지 않아서-중요한 내용을 빼먹 는다. 이를테면 문재인의 운명 에서는 분명 아주 강하게 노무현 정권의 초기 중 기 말기로 이어지는 패착의 근본원인을 모두 빼놓고 가버린다. 김대중 자서전의 경우도 그랬다. 이헌재의 책은 아니지만 중앙일보 연재를 보면서도 그랬다. 박근 혜의 경우도 박정희에 대한 기억은 인정할 것이 인정되지 않고 지나간다. 중요한 부분들을 빼놓고 가는 논술법은 안철수에게도 예외는 아닌 것이 지금 자꾸 입증 되는 중이다. 그것은 역시 주관적인 것이 객관적 검증에서 걸러지는 과정을 거치 면 비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일까 하는 의문으로 남게 된다. 살아있는 자는 그에 대한 변명 혹은 해명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나마 지속 검증 이 된다. 그러나 죽은 자에게는 그것을 물을 수 없기에 거짓을 검증하는 단계가 조금 다르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정치세력에게도 마찬가지다. 앞서 왜 한국의 진보 가 욕을 먹는지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지만 보통의 일상을 사는 사람에게 이것은 연구대상일 필요는 없다. 믿음 이란 것도 그래서 말뚝의 깊이가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 속에 몸 담고 있다는 주장하고 또 자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투명하게 들여다 보지 않고 계속 거짓말로 이어간다는 것은 곧 거짓의 연속성에 빠지고 그건 고착 화를 지향하게 되어 있다. 그 순간, 그것은 리플리 증후군인 것이고 작화증이며 공화증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을 믿어달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논리나 감성 모두 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때로 하나의 사회가 그 사회 속의 권능( 權 能 )을 권력의 지형에서만 찾기도 하지 만, 나는 그것을 부정한다. 그건 그저 세력이 만들어둔 허상에 불과하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진실이 사실이 어디 도망가는 건 아니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하지만 그 또한 믿지 않는다. 역사를 찾아보는 자가 없게 만든 것, 기록을 남기 지 않는 것이 가진 어려움은 존재하지만 역사 속의 많은 일들은 재해석되고 또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 오늘 정치를 하고 권력을 쥐면 내일 죽어도 좋다고 덤벼드는 많은 이들을 보는 계절이다. 그러나 허상에 집착하기 보다는 실상으로 접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페이지191 대중에게 믿음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 자세가 아니고서는 어렵다. 공허한 구호는 이제 그만. 지금은 사실 이 실천되는 바로 그 역량-그것이 개인이건 혹은 집단이 건 간에-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의 소망이 아닌가 생 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저렇게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는 상태에서도 믿음을 얻 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과연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를 생각한다. 아마도 이 사회의 가치는 그만큼 더 떨어지고 그 후의 모든 부담은 고스란히 이 사회가 짊어져야 할 몫이 될 것이다. 그런 일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는 점이 안타깝지만, 그렇게 간다 해도 달이 차면 기운다 는 말을 나는 믿는다.

페이지192 2012 시대의 민낯 제 5 부 (2012.9.29~2012.10.1) 담담당당 추석 전날이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4부를 한꺼번에 끝내고 나니 드는 생각이 참 많다. 이 글을 남기려는 뜻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대선이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이 글을 쓸 수밖에 없긴 했지만, 이 내용은 대선이 끝난 이후에도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다. 관건은 새로운 정권이 지향해야 하는 방향에 있다. 한국 사회는 지금 중대한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에 와 있다. 그것은 중국의 지도부 변경과 북한 지도부의 변화, 그리고 일본의 우경화와 절대 적인 관계를 가진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격변 의 요건을 자꾸만 갖춰가고 있는 세계와 동북아를 잇는 이해관계의 복잡성이다. 남북한 관계라는 프리즘을 통해 히스토리 컬렉터로 산 지가 금년이 대충 해서 23년이 지나간다. 제법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보지 못한 것이 있었 다. 바로 한국 사회다. 나는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셈이다. 범위가 너무 넓기는 하지만 현장이란 조망의 초점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고, 그 점에서 대선 이라는 이 선거판은 한국 사회를 잘 들여다보기 참 좋은 기회다. 묵은 것들을 토대로 지금과 앞으로의 이야기를 쭉 더 정리해보려 한다. 1. 욕망과 권력, 그리고 책임 2. 내가 만들 세상이 마음에 들어? 3. 참 재미난 글 한 편 4. 역술 마케팅과 심상 5. 동기화( 同 期 化 )와 비동기화( 非 同 期 化 ) 6. 출제 시험문제 7. You are blind! 8.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할 기회 9. 느껴지나? 희망이 무너지는 걸? 10. 너는 옳다! 그건 사실이야! 그러나

페이지193 1. 욕망과 권력, 그리고 책임 바람과 바람막이 / 나희덕 바람막이에 금이갔다 금이 금을 불러와 번지더니 쩌억 벌어져 쪼개지기 직전이다 차가 속도를 낼수록 바람막이는 이빨 부딪치는 소리를 낸다, 딱, 딱, 딱, 딱, 소음을 견디다 못해 벌어진 틈에 얇은 휴지 한 장 끼워넣는다 하,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소리를 삼킨 몸이여 차라리 비명이라도 지르는게 나았을까 타악--- 결국 바람을 견디지 못한 한 조각이 쪼개져 날아갔다, 돌팔매처럼 바람막이는 금보다 무거운 침묵을 얻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삶에 욕망을 가진다. 그것 없으면 에너지가 없어서 못 산다. 부족함 을 채우기 위해 보다 나은 혜택을 위해 욕망(욕구)는 움직인다. 때론 그 욕망 하 나만으로 모든 도덕을 지우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도 욕망의 종류를 나눌 수는 있으나 욕망이 가진 한계를 말하지는 못한다. 오직 욕망을 품은 자들이 만 들어낸 사건들에서 그 욕망을 정리할 뿐이다. 권력은 그런 욕망의 두터운 팽창이다. 성취에 대한 일반 욕구가 아니라 무제한

페이지194 작용하는 역사의 순환과 팽창이 바로 권력을 규정한다. 이건 브레이크가 없다. 일 단 시작되면 그 순간부터 자신을 통제하는 건 오로지 자신에게 가해지는 도덕 이 외에는 없다. 그 또한 타인에 의한 규정이 아니라 자신만이 가진 제한이다. 그래 서 이 권력은 통제 받는다. 정치권력은 겉으로는 시간의 제약을, 물질권력은 정치 권력이 만들어둔 사회 제도 속에서 욕망을 다룬다. <권력전쟁>(뤄위밍 駱 玉 明, 에버리치홀딩스, 2011)은 중국 역사인물 11인의 권 력에 관한 접근을 다룬 책이다. 책에는 피 냄새가 참 많이 난다. 제목만 대충 봐 도 우선 험악하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권력욕이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역사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권력만큼 인간을 열정과 격정에 휩싸이게 하는 것은 없다. 권력은 단 한 번도 인류에게 도덕을 요구한 적이 없다. 기회가 포착되면 모든 것을 걸어라, 사람을 꿰뚫고 시대를 거머쥐어라, 쓸모 없다면 과감히 내쳐라, 자신을 성인군자로 포장하라, 야망의 발톱은 내면 깊숙 이 숨겨라, 수단과 방법은 담대하고 냉혹하게 써라, 권력에는 금기가 없다, 권력자를 미색으로 다스려라, 권력자는 단 하루 만에도 뒤바뀐다, 경쟁자를 결코 허용하지 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 현답이다 권력을 가진 자는 현대 사회에서는 분명 공인( 公 人 )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 하는 권력자들의 세계는 존재한다. 바로 그들만의 리그다. 세상엔 감춰지지 않은 것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 보이지 않는 손 은 있다. 그래서 때로 겉으로 드러난 권력, 권력자일지라도 그들도 정확하게 어떤 다른 권력의 마수( 魔 手 )에 사로잡힌 경우도 흔하다. 2012년 TV 드라마에서 권력욕망의 압권을 보여준 건 아마도 추적자 라는 시리 즈였을 것 같다. 우리는 그 허구의 드라마에서 현실을 봤다. 많은 이들이 보는 내 내 살이 떨렸다고 했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 험상궂은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그 리고 그렇게 벌어진 전례들이 드러나지 않을 뿐, 여전히 기록 재정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고, 새롭게 유사한 일들이 벌어질 준비를 하는 것도 있다. 전관예우를 받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궤변을 늘어 놓아도 거짓 증언을 해도 다 통하는 장면은 부러진 화살 은 그냥 애들 장난처럼 만들어버린다. 조작사건을 만 들어내는 정치와 법조계의 담합 앞에 그래도 법을 다룬 경찰출신 아버지는 힘이 없었다. 마치 김훈 중위 사건에 전직 장성급 아버지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것 처럼 그렇게 오로지 끈질기게 권력의 폐해를 추적하는 서민의 얼굴만 남았다. 그 래서 많은 이들은 씁쓸해 했다. 패배주의를 심화시키기 딱 좋은 이 드라마의 내 용에 그나마 남은 에너지는 바로 분노 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패배주의를 극 복하는 원동력이었다. 도덕이 아니었다.

페이지195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 안철수의 아파트 다운계약서 논란이 나오기 시작하더 니 마침내 검인계약서 의 출처가 어디냐는 논란이 불거졌다. 계약서는 본인이나 본인의 동의를 받은 대리인이 아니면 열람할 수 없다. 추적해보니 새누리당 의원 이 국정감사용 자료로 요청한 기록이 불거졌다. 어떤 기자는 이런 식으로 사안 자체에 사과를 해놓고 출처 추적을 하기 위해 들쑤시는-아마도 보도한 기자들을 족친 모양인데-경우는 없었다며 흥분하는 기사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앞서도 그런 이야기는 한 적이 있다. 안철수의 대선출마 직전 금태섭 변호사의 기자회견 으로 안철수에게 가해진 새로운 논란은 바로 준비되었느냐 는 것이었다. 권력욕망을 품었다면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무슨 준비를 했느냐는 질문이었는 데, 아마도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여전히 나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는 말을 되풀 이하는 것 같아 마음이 저어하다. 이 정도 준비로 어떻게 험난한 국가경영이란 걸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기본적인 우려로부터 시작해서 다시 저 욕망이란 단어를 꺼내보게 된다. 금기( 禁 忌 )가 없는 권력. 이것을 좀 더 확장해보면, 오늘 한국 사회가 어떤 무자 비한 권력으로부터 당하고 있는지 그 실체를 벗기는 작업이 필요한 것을 자연히 알게 된다. 그것을 알고 당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크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다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도 분명 있을 터이다. 일부 계층은 분 명히 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와 군림, 그리고 당하게 하는 걸 즐기고 있을 것이 고 또 일부는 지금 자신들도 권력의 그 상층부에 아주 가깝게 있다 여기지만 시 간이 지나면서 그렇지 않을 수 있을 확률에 불안해 하는 경우도 있다. 마치 어느 지역의 아파트가 로또 복권 당첨 맞은 것처럼 대박이었다가 지금은 쪽박보다 못 한 신세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선택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 더 중시한다 면 그 또한 그럴 일이다. 그것은 개인의 인지 자유에 해당하니까. 앞서 본 레오 카츠의 법은 왜 부조리한가 (법은 왜 삐딱한가)라는 책에는 이런 질문 하나를 툭 던지는 대목이 있다. 히틀러는 악명 높은 안락사법을 제정해 정신박약 장애인과 정신이상자를 포함 해 모든 지체부자유자를 강제로 안락사 시켰다. 이 법안이 통과되자 관련 기관에 서 근무하던 의사들 중 일부는 사임을 했고, 일부는 마지못해 법을 준수했다. 열 성적으로 이를 준수한 의사들도 있었다. 이런 계획이 집행되는 것을 훼방하려고 병원에 남기로 결심한 의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가족들이 요양원에서 환자를 데 려가도록 적극 권하거나 환자가 안락사법에 해당되지 않도록 재 분류하는 등 여 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그 와중에 어쩔 수 없이 강제 안락사 조치에도 가담했다. 이후 전범 재판에 회부된 의사들은 긴급피난의 항변을 들어 무죄를 주 장했다. 안락사 시킨 사람보다 살려 낸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원은 긴급피난의 항변을 인정하지 않았다. (중략) 사임한 의사들은 남부끄러운 행위를 피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곳에 남아 있어야만 수행할 수 있었던 인명구조의 기 회를 회피했다. 누가 더 좋은 의사고, 누가 더 나쁜 의사일까?

페이지196 권력이 대중에게 혹은 일부 집단에게 부도덕하거나 혹은 불합리, 불법의 행위를 통치행위라는 미명으로 강요하였을 때,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문제에 해 당한다. 전범 재판도 법률적인 판단이었는데, 이 삐딱한 법률 은 사임하지 않고 안락사에 참여한, 그러나 나름 의사의 소임을 했던 사람들에게 유죄를 인정했다. 그 중엔 쉰들러 리스트는 아니겠으나 그 비슷한 경우도 없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 다. 이 사안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상황은 현대사에 비슷하게 많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유신헌법을 불법적 인 것이었다고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당시 법관과 법학자들이 그에 참여 했다는 것에 대해 부끄럽다는 말을 남겼다. 똑 같은 구조다. 유신헌법을 만듦으로 인해 참으로 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다. 그러니 그 제정에 동참했던 법학자들은 사 실상 공범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처벌받지 않는 것일까? 이론적으로 보면, 사회집단(의사이건 법관, 법학자이건)이 어떤 사회적인 행동을 요구 받을 경우, 그 판단 또한 집단으로 가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특히 직능일 경우에는 그렇다. 그러나 그건 이론일 뿐이다. 거기서 개인의 선택이 나눠진다. 만일 집단으로 대응이 되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요구를 했던 주체,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히틀러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게 그 책임이 돌아가는 구조 가 형성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질문은 누가 좋은 의사이고, 누가 더 나쁜 의사일 까를 묻는다. 똑같이 유신헌법의 경우에 (내가) 참여하지 않아도 다른 이들이 참 여해서 (더 열악한) 법을 만들 것이기에 참여한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반박도 나 올 수 있다. 그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은 과연 고고한 법관, 법학자로 존재 가능한 것일까 하는 의문도 남는다. 이게 바로 사회책임이란 것이다. 개인의 책임 의무라 는 영역의 상위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서는 여지 없이 무너진다. 그러니 좋은 의사 나쁜 의사, 좋은 법관/법학자, 나쁜 법관/법학자의 구분을 하지 않고 지나가게 된다. 물론 전자의 경우에는 전범재판이라도 열렸다. 권력 욕망의 한계는 어디일까? 그것은 1차적으로는 욕망을 품은 자의 책임으로 모두 귀결된다. 말이나 글, 행동이건 간에 모두. 또한 선택도 마찬가지다. 수단과 방법, 금기의 벽을 모두 뛰어 넘는다 할지라도 권력을 가지겠다면 그 마음을 먹 은 사람으로부터 한계는 출발한다. 그리고 2차적으로는 권력 행위로써 벌어진다. 이어 3차는 어떤 형식으로건 사람은 죽게 되어 있기에 역사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이 또한 그저 이론일 뿐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그 책임을 죽어서 지는 사람 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죽은 자에게 부관참시( 剖 棺 斬 屍 )를 한들 무 슨 책임이 있겠는가 마는 역사는 그것을 기록이란 페이지 속에 담아둔다. 이게 사실 욕망에 대한 평가와 자기실현과 맞물린다. 살았거나 죽었거나 간에. 대선 레이스가 한창이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은 누가 권력욕망에서 성취에 대한 집념이 강한 것인지를 볼 수 있을 것이고, 또 대중은 그 욕망의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지를 구분하여 선택해야 한다. 단순히 참 거짓을 나누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복잡한 건지도 모르겠다.

페이지197 2. 내가 만들 세상이 마음에 들어? 눈물 / 이성선 앉아서 어둠을 보고 있는 이 앉아서 눈물을 보고 있는 이 눈물을 버리고 고요로 앉은 이 고요마저 버리고 보이지 않는 이 아직 공약은 다 나오지 않았다. 아니다. 나오고는 있지만 총론만 있지 각론은 없 다. 그냥 그 방향 정도로 간다는 수준이지. 대체로 앞선 모든 정권이 그랬다. 왜냐하면 미래의 상황을 예측해서 정책을 이야 기하는 자리는 아니니까. 그러나 어렴풋하게 그림은 그려진다. 정작 알고 싶은 건 진짜 정책의 결정은 누가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대통령 혼자서 결정하는 건 아 닌데도 마지막 방점은 청와대가 찍는 게 대통령중심제 하의 결정 권력이다. 이건 일종의 선택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형태다. 그래서 대통령 한 사람의 생각이 아주 중요하다. 그를 둘러싼 세력도 잘 봐야 하지만 그 사람의 성향을 봐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게 파악이 쉽지가 않다. 지난 대통령들의 성향을 한 번 보자. 이건 순전히 나 개인의 대강 평가에 해당한다. 박정희는 자신이 정책을 짜내는 전형적인 학습 및 자기 선택 선호형이었다. 만년 에 이지가 너무 흐트러졌다. 장기집권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보여준 케이스다. 전두환은 머리를 빌렸다. 단호함이 특징. 사고 많이 쳤다. 아웅산에서 잃어버린 인재들이 너무 아까운, 그래서 아쉬운 대목이 많았던 시기다. 노태우는 여러 이야 기를 골고루 들었다. 선택 선호형이지만 머리를 빌린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그 러나 이야기를 들을 줄은 알았던, 그래서 물통령 소리도 들었지만 때론 중립이 아주 강한 무기가 된다는 걸 확실히 보여준 케이스다. YS는 그 자신의 말마따나 머리는 빌려도 건강은 못 빌린다는 주의자. 반독재에 민주 구호에서는 강자였는 지 모르지만 머리는 정말 없었던 사람이었다. 결국 막판에 큰 사고를 친다. 자신 의 결단력을 보여 호기( 豪 氣 )를 자랑하려는 속성도 강하다. 지금도. DJ는 스스로 머리가 좋은, 생존력이 강한 사람에 속한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상태에서 너무 건강이 좋지 않았다. 자기 머리만큼 선택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했다. 너무 나이 먹

페이지198 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준 사람. 노무현은 어떤 콤플렉 스가 강했던 사람 같다. 그럼에도 지나칠 정도의 원리주의자였다. 그러나 선택적 선호도 강해 한 번 결정하면 어떻게든 논리를 대어 합리화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 람이었다. 큰 사고 쳤다. 그래서 도대체 어떤 흐름에서 이런 인물이 나왔는지 모 르는-분명 이 사람이 등장한 왜색의 흐름은 있지만-MB를 출현시켰다. 이렇게 보면, 누구 하나 롤 모델이 될만한 사람은 없다. 모두 약점을 강하게 드러 냈다. 김대중-노무현 시기 시장만능주의 도입이 초래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변 화는 많은 치명적인 병증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정책노선을 따른다는 말 은 어색한 게 아니라 엉터리라는 결론이 나온다. 장점을 따라야 한다는 건 기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장점만 모아서 구성해도 마 치 세계 미남 미녀의 이목구비 장점을 모아둔다고 해서 그것이 최고의 미남 미인 도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장점은 균형이 관건이라서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단점 을 보는 이유, 그걸 극복하려는 지혜, 철학, 이성, 결단력, 여건을 갖추고 있는가 를 보는 것이 바로 이번 대선 레이스의 핵심으로 보는 이유다. 프랑케슈타인 하나(이건 개체니까) 조합해서 만들어보는 것도 방법이다. 물론 어 떤 부품(?)인가가 중요하지만. 최소한 아래 4가지의 덕목을 한 번 생각하자. 첫 번째는 철학이다. 이거 참 어렵다. 경험에서 나온 인생관, 신조( 信 條 ) 그리고 본질을 찾아보려는 인식이 철학이다. 논문 쓰라는 철학은 아니다. 제대로 보려면 인생을 다 봐야 한다. 부분을 떼서 봐도 안 된다. 지금 가진 바로 그 철학이 과연 한국의 미래를 위해 오늘이 어떤 모습으로 투쟁해야 하는 건지 사회에 이야기를 한다. 견고함이 무척 요구된다. 현대사는 복잡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이명박 정 권에서 우리는 철학이 없는 듣보잡 장사꾼의 저렴한 인식을 봤다. 여의도 정치도 문제가 많지만 대통령 한 사람의 철학 부재가 어떤 결과를 가지고 있는지 지켜봤 다. 그래서 철학이 중요하고 그걸 또 평가해야 한다. 두 번째는 여건이다. 인재라고 해야 하나, 시스템이라 해야 하나. 시스템 측면에 서 여의도는 매우 강한 힘과 중요도를 가진다. 국회가 대통령의 발목을 잡은 경 우도 적지 않았다. 여당에서 대통령이 나오는 것, 야당에서 대통령이 나오는 것 이 둘 다 문제가 있었다. 그 꼴이 보기 싫어서-정답이 없으니-기성 정당의 정치 운용에 짜증이 난 대중이 많아진 셈이니까. 폭력 속의 국회가 정당하지 않은 것 처럼 토론과 협의가 없는 국회의 결정 또한 정당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인재는 백 번 천 번 이야기해도 모자란다. 고소영 과 회전문 을 보여준 이 정권의 모습에 서 인재풀이 얼마나 힘든가를 봤지만 이전 정권들도 그렇지 않았는가 하면 엇비 슷했다. 인재간 알력도 심하지만 무엇보다 인재 자체의 결함마저 통제되지 않는 판단력이 문제인 적이 많았다. 책상물림, 그저 이론만 있는 사람들을 많이 기용했 던 결과는 모든 정권이 거의 동일하게 문제를 드러냈다. 세 번째는 결단력이다. 이건 판단능력과 직결된다. 옳다고 판단하는 데까지는 깊 은 고뇌를 해야 하지만, 그 결정이 내려지면 밀어붙이는 것이 바로 결단력이다.

페이지199 여기서 대부분 깨진다. 판단능력이 모자란 상태에서 나온 결정을 밀어붙이는 건 최악이니까. 집권한 정치권력의 승부가 판단->집행력 이란 두 개의 포커스에 모 두 모아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책의 방향도 중요하지만 바로 이 부분은 미래 영역에 있어 모조리 지금 예측만 해야 하니 선거가 어렵다. 이 능력은 보여 지는 게 아니라 추정해야 한다. 그러나 철학을 통해 이 능력은 투영된다. 네 번째는 이성과 지혜다. 이 둘을 합친다. 사익( 私 益 )을 우선하는 대통령 아래 권력은 더욱 부패하게 되어 있을 것이다. 이건 이성의 영역이다. 무릇 대통령 정 도라 하면 그런 일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권력이 금력과 동반되어 한 번 올라간 자리를 영원히 유지하고픈 욕망 속에 휩싸이는 예가 흔하다. 추한 권력일수록 이 욕망을 잘 숨긴다. 그러나 숨기지 말고 차라리 지우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혹자 는 노무현의 실패를 자신의 사익은 통제했으나 정작 주변은 막지 못해 벌어졌다 고도 한다. 그 또한 마찬가지다. 권력이 자신의 눈을 가릴 때는 이성 외에는 해법 이 없다. 지혜는 처리하는 능력 이다. 이건 가방끈이 아니다. 잃고 얻고 옳고 그 름을 가려내는 깨달음이 우선이고 그걸 처리하는 정신능력을 가리킨다. 5년짜리 대통령을 다시 뽑는다. 나는 이 글을 적으면서 위 4가지의 기준에 맞는 사람을 고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추고, 또 어떤 미래를 말해야 하는가 문 제에 있어서는 다르다. 그걸 하나씩 지금껏-이 정권을 포함해서-드러난 현실적 사안을 토대로 해서 정리해서 질의하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내용은 100개의 질문이건 1000개의 질문 그 이상이건 간에 정리하겠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만 물리적 한계가 있으니 최대한 10월 이내에 해보도록 할 생각 이다. 3. 참 재미난 글 한 편 떠도는 자의 노래 / 신 경 림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페이지200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뉴스가 재미난 글쓰기는 아니다. 딱딱하다. 글 잘 쓰는 이도 있지만 대체로 보면 짧은 매수가 정해진 뉴스 보도는 대체로 천편일률적인 패턴이 있다. 대충 몇 개 골라보면 그 날 뉴스들의 논조가 딱 나온다. 여기는 이렇게 저기는 저렇게, 보도 하는 매체마다 성향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어떤 것 속칭 빨아주고, 어떤 건 속칭 도끼질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 방법도 참 교묘하다. 그래서 기자는 나름대로는 글쟁이라는 쟁이 과( 科 ) 에 속하는 건 틀림이 없다. 아 다르고 어 다른 표현기법 을 구사하여 대중들을 살짝 혹은 아주 휘청거릴 정도로 미혹시키는 재주를 가진 큰 글쟁이는 이제 잘 보이지 않긴 하다. 추석 연휴라서 그런가 재미나게 대선 주자들을 묘사한 글들이 쏠쏠하게 올라온다. 그 중에서 보다가 어라! 이거 나름 흥미로운데 생각한 글 한 편을 옮겨본다. 박근혜는 목마 안철수는 롤코 그럼 문재인은?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308083 솔직히 제목이 마음에 안 든다. 글에서는 모두 다 비유 를 해놓고서는 유독 문재 인에게만 물음표(? )를 떡 붙인 게 좀 그렇다. 헤드라인을 뽑는 한계도 있겠다만. 차라리 대선랜드 사장이 누군지 밝히고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놀이기구 이야기로 대선주자 3인을 설명한 대목을 발췌해보자. 먼저 회전목마 박근혜 후보를 살펴볼까요? 회전목마 는 대선랜드 놀이기구들 사이에서 가장 오래된 터줏대감 이에요. 이렇게 연륜 있는 회전목마를 구성하는 완고한 말들 사이에서 문제가 생기면 쇄신 이라는 이름으로 혜성처럼 나타나 그 네 처럼 위에서 아래로 지시를 내려 바로 일을 처리하는 말이 바로 박근혜 말이 랍니다. 그래서 말들 사이에서 박 후보에 대한 신망은 매우 두터워요. 충성도 가 매우 높지요. 대장말 인 박 후보 말만을 타겠다는 팬들은 회전목마 안팎 으로 상 당히 많답니다. 회전목마처럼 차분하고, 안정적이고, 믿음직스럽거든요. 안정과 신뢰의 리더십 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 랍니다. (중략) 사실 회전목마야말로 놀이 공원의 영원한 로망 아니겠습니까.

페이지201 다음은 우리 대선랜드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된 완전 신상 롤러코스터 안철수 후보입니다. 안 후보는 본래 아이들을 태우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역할만을 해 왔어요. 신나는 상담가 와 같은 역할이랄까요. 그래서 안 후보를 찾는 대부분은 20~30대의 젊은 손님들이 많지요. 하지만 워낙 인기가 좋다 보니 요즘에는 어르 신들도 안 후보를 많이 찾는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어요. (중략) 타기 전엔 줄을 이어 열광하던 이들도 타고나선 오버이트를 해야 하는 게 롤러코스터의 매 력(?) 아니겠습니까? 회전목마와 롤러코스터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3D입체영상관 문재인 후보의 매력은 반신반의 에 있지요. 손님들은 매번 회전목마와 롤러코스터 사이를 걸어 가며 3D입체영상관 인 문 후보에게는 재미있을까? 라는 물음표만 던져요. 근데 막상 타보면 은근히 재밌거든. 요새는 이 놀이기구의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입소문을 타고 있거든요. 경쟁 에 지친 손님들이 움직이는 의자에 탑승해 짧은 시간이나마 화면 속 환상의 세계로 빠지면서 마음의 여유 를 얻는 거에요. 부드럽게 손님들을 이끄는 매력이 있는 거지요. (중략) 3D입체영상 관'의 문제 하나 더 들어볼까요? 예전엔 놀이공원에서만 즐기던 입체 영상관은 이제 집마다 3D 모니터를 들여놓을까 말까 고민하는 시대가 된 관계로 신선하진 않다는 얘기지요. 뭐 하지만 단체로 꺅꺅 소리 내며 입체를 즐긴다는 장점은 아 직도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요. 데일리안의 매체 성향이 어떻건 간에 이 글을 쓴 조소영 기자는 나름 중립적 입 장에서 사실을 많이 보도한 사람이어서 쭉 보게 된다. 매체와 기자, 이 관계는 기 자 중심으로 한 번 기사의 성향을 분석하고 정리해서 사람들이 알게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기사의 핵심은 박근혜는 회전목마, 안철수는 롤러코스터, 문재인은 3D 입체영상 관이란 놀이기구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뭐, 적절한 듯하다. 회전목마는 안정성이 있는 대신 지겨운 감도 있고, 롤러코스터는 재미나지만 한 번 타고나면 어찔해서 두 번 타기는 고개를 저어야 하고, 3D 입체영상관은 과거엔 신선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특별한 걸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선택에 따른 부담이 있다. 그런데 궁금한 건 이 기사가 말한 사회자, 대선랜드 의 사장 이고니 란 인 물이다. 누굴까? 이고니 를 발음 뒤편을 열어보면 이거니? 라고 들리는데, 다시 들으면 이건희 가 되니 말이다. 삼성이 다시 이 대선 판을 벌여놓고 손님을 끌면 서 놀이기구를 보여준다는 뜻이 된다. 설마? 아니라고 말하기도 좀 어색하다. 지 금 봐서는 조소영 기자의 이 기사, 제법 재미났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으니. 대선랜드의 사장은 대중이 아닌 건 확실하다. 표 끊고 들어와서 어느 걸 골라 타 겠냐고 호객하는 곳도 있겠지만 장사 잘 되는 곳은 그럴 필요도 없다. 골라 타는 건 선택의 맛이고, 많이 고르면 입장객이 제한되니 한참 기다려야 한다. 보고 나

페이지202 서 어지간하면 두 번 타지 않지만 나중에 다시 찾으면 또 그 맛을 못 잊어서 또 탄다. 무슨 매니아가 아니면 하루종일 롤러코스트만 열 번 스무 번을 타지는 않 으니까. 회전목마도 비슷하다. 어찔해지기 싫으면 가장 안정되게 즐기는 거니까. 그렇다고 다른 것이 안정감이 없느냐 하면 그도 아니다. 호러 굴에도 들어가는데 이것쯤이야. 아! 백날 기구를 타면 뭘 하나. 제일 빵빵 하게 수익을 거두는 건 역시 매표소 직원도 아니고 랜드 주인인 것을. 관객은 어쩔 수 없이 랜드 주인 입맛에 따라 펼쳐둔 놀이기구에서 놀 뿐이지. 기사 재미있다. 4. 역술 마케팅과 심상 서귀포 / 이홍섭 울지 마세요 돌아갈 곳이 있겠지요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구멍 숭숭 뚫린 담벼락을 더듬으며 몰래 울고 있는 당신, 머리채 잡힌 야자수처럼 엉엉 울고 있는 당신 섬 속에 숨은 당신 섬 밖으로 떠도는 당신

페이지203 울지 마세요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명절은 명절인가 보다. 관상 역술로 대선주자를 이야기하는 언론들이 많다. 이건 아마 앞으로 더 다양한 형태로 나올 것 같아서 미리 한 번 정리해본다. 그냥 몇 개만 골라보자. 너무 많이 나와서 식상하니까. 역술인들, 박근혜 손학규 부모 묘 가봤더니 http://weekly.hankooki.com/lpage/sisa/201202/wk20120204070105121200.htm 관상학자, 대선주자 3 人 중 대통령감으로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20926000914&md=20120929110721_f 운명과 풍수로 보는 대선향방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2/08/21/201208210500015/20120821050001 5_1.html 역술인이 점친 올해 대선 이 사람이 대통령 http://mbn.mk.co.kr/pages/news/newsview.php?news_seq_no=1242571 역술 마케팅과 정치는 깊숙하게 닿아있다. 이건 일종의 미래예측에 관한 궁금증, 불안감, 그리고 호기심 등이 연결되어 있는데 과거의 전례를 들어 내가 맞췄다 는 식으로 접근까지 하며 용하다는 소문까지 나면 정치 시즌엔 그 집 앞이 문전 성시가 된다. 우리가 흔히 하는 역술은 과연 이렇게 미래를 꼬집어서 이야기를 할 정도로 정확 도가 높은 것일까? 결론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는 것이다. 아니라고 하고, 사이비라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나의 결론은 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정확도가 높아진다는 점에서 적어도 요행은 아니라고 보기에 저렇게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문제 하

페이지204 나가 생긴다. 진짜 그렇다면 세상이 재미가 없어지지 않느냐는 것인데, 그 말도 맞다. 재미가 없다. 누가? 그걸 맞춘 사람이 재미가 없단 소리다. 듣는 사람은 어 떤 한 사람의 말만 믿는 게 아니라 워낙 다양하게 소리가 나오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 정도에 웃어주면 된다. 미래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다. 그러나 본디 역술(역, 명리)의 의미란 미래보다는 과거를 되돌아보는데 더 큰 의 미가 있다는 걸 사람들은 종종 잊어버린다.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성찰( 省 察 )하 면 미래가 종종 보이고, 그 보일 때는 맞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건 이건 실증 된 과학의 범주에 속한다. 역술이 공부라는 말은 그래서 한다. 그런데 이런 과정 을 거치지 않고, 대충 세상 돌아가는 것 정도만 읽고 이런저런 역술에서 말하는 잡다한 용어만 나열하며 자기 빠져나갈 구멍 다 열어놓고 말하는 이들은 십중팔 구가 아니라 십중구 정도가 사이비 영역에 있다.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 역술의 방언( 方 言 )이 아니다. 그런 탓인지 이상하게 용하다 소문난 역술인 가운데서는 실제 능력 이상 포장된 사람들도 제법 많은 듯하고, 공부를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데 종종 틀리는 경 우를 당하면 몇 년간 쑥 어디로 갔는지 나타나지 않기도 하고, 요행히 하나 맞추 는 것이 매스컴에 뜨면 바로 그 순간 대목 만난 장사꾼처럼 설치는 사람도 보이 기도 한다. 이런 모습들은 역술이 단순히 마케팅 영역에 머물러 있게 하는데 결 정적인 역할을 한 사이비 혹은 덜 배운 역술인들의 역할 같기도 하다. 어디까지 배워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건 공자도 주역을 3000번 이상 읽 었다고 하니, 그에 관해 나는 이 정도에서 역( 易 )도 술( 術 )도 심지어 기( 氣 )도 다 통했다 말하는 사람을 검증해볼 수가 없어서다. 그렇다고 무조건 공부만 해서 도 되는 게 아니고 배움을 구하는데 그만한 스승 만나기도 쉬운 일도 아니니 이 건 뭐 공부하는 자의 입장에선 교육 분위기는 최악인 분야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강남이나 홍대나 어디 가면 흔히 보는 타로점집이나 그 런 곳을 심심풀이 들어갔다가 난데 없이 뒤통수를 호되게 터진 것처럼 머리가 무 거워져 나오는 사람들도 많아진 세상이라서, 이 트랜드를 전혀 무시는 할 수도 없다. 심심해서 한 번 보는 일이 습관처럼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바로 이것이 정치인들이 역술가를 찾아가는 이유가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종교는 상관이 없 다. 내가 본 인물 가운데는 목사도 점집과 역술인을 찾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 말은 곧 공부의 차이라기 보다는 불안감 혹은 미래예측 자체는 특정한 종교 영역 이 아니란 의미와도 통한다. 풍수도 비슷하다. 노 전 대통령을 일러 풍수학적으로 집에 내려가 사는 것이 (봉하마을) 터의 기에 눌리는 형상이었다 고 역술 자문을 한 사람도 있다. 물론 사건 이후 일이다. 그런데 이런 역술인들을 끌어들여 종합일간지에서도 혹은 종 합편성채널에서도 기사와 방송을 하는 일이 잦아지는 시기에 들어가니 생각 참 많아진다. 이걸 대선 마케팅의 한 분야로 인정하자는 의미인지, 그야말로 심심풀 이라는 건지 말이다.

페이지205 거꾸로 가보면 참 쉽다. 2007년 초에 대선주자 이야기를 담은 뉴스 기사 하나다. (본 뉴스 링크가 없어 퍼 담은 블로그를 연다.) http://blog.daum.net/shbaik6850/9152746 (이 전시장은) 천운이 없어 대통령까지 가지 못한다 (무속인 심모), (이 전시장 은) 3~4년 전에 운이 모두 끝났다. 백약을 써도 당선이 어렵다 (역학연구원장 남 모), 다음 대통령은 보통 키에 일자걸음을 걷는 과묵한 인물로, 명문학교 출신으 로 외국 유학을 다녀왔다 (역술인협회 백모)는 예측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명확 하게 맞추지 못했다. 이런 현상은 2002년 대선에서는 더 심했다. 최근에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고미숙, 이번엔 사주명리학에 꽂히다 는 책을 쓴 모 양이다. 읽지는 않았다. 기사가 나온 걸 보니, 그토록 익숙한 서양과학식 사고방 식을 한 평생 했던 이가 어느 역술원을 찾아간 모양이었다. 가자마자 들은 이야 기가 아줌마는 공부를 해야겠네요. 자식이나 재물, 이런 거하고는 영 인연이 없 어요 라는 마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는 걸로 시작을 한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185 그런데 기사에 사진이 함께 있어 저 말과 사진을 몇 번 비교해봤다. 나도 그렇게 말할 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걸 가지고 놀라는 걸 보니 이 분이 사주명 리학을 어떻게 접근했을까 살짝 걱정도 되었다. 그 아래 말이 재미나다. 사주를 보고 불안해 하는 사람이 많다. 원리를 모르면 영향을 받는다. 일단 자 기 몸 안에 있는 원리를 깨우치면 삶을 어떻게 바꿀까 방향성을 부여하게 된다고, 팔자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약간 더 불안스러워진다. 원리를 모르면, 이렇게 말하는 대목에서 걸린다. 사주 명리 관상이나 풍수 모두 마찬가지다. 공부를 책으로 한 사람들은 우리가 정치에 서 흔히 보는 박사 교수 출신들이 저지르는 책상물림의 오류 를 똑같이 저지르는 걸 많이 봤다. 책은 책일 뿐이다. 그로부터 모든 답을 얻는 건 아니란 소리다. 그 럼 지혜를 책에서 빌린다고 해야 하는데, 책은 참고서적 정도일 뿐 정작 지혜는 경험에서 더 많이 나온다. 팔자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란 것도 그렇다. 나름 정해 져 있다. 단지 그 진폭이 큰 사람과 좁은 사람, 바꿀 수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 의지를 가진 사람과 아닌 사람 등등 그 변수들이 많을 뿐이지. 바야흐로 정치의 역술 마케팅 시대로 접어 들었다. 지금부터는 이런 말들을 들으 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렇다고 믿음을 접어란 소리는 아니 다. 사람은 기본 심성이 참 약하다. 그러나 자기를 거울처럼 한 번 들여다보는 힘

페이지206 이 있는 백성은 자기가 살아가는 시대를 허투루 하지는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맹자( 孟 子 )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 天 時 不 如 地 利 地 利 不 如 人 和 ) 천시( 天 時 )는 지리( 地 利 )만 못하고 지리( 地 利 )는 인화( 人 和 )만 못하다. 그런 인화( 人 和 )도 심상 에 미치지 못한다. 어떤 심상? 心 象, 心 相, 尋 常? 5. 동기화( 同 期 化 )와 비동기화( 非 同 期 化 ) 쟁반탑 / 복효근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 5층탑이네 좁은 시장골목을 배달 나가는 김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 쟁반이 탑을 이루었네 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 사리합 같은 스텐 그릇엔 하얀 밥알이 사리로 담겨서 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 다보탑이겠는가 한 층씩 헐어서 밥을 먹으면 밥 먹은 시장 사람들 부처만 같아서 싸는 똥도 향그런 탑만 같겠네 사람의 모든 행동은 동기( 動 機 )가 부여된 결과가 많다. 이게 소위 말하는 모티브 다. 이 단어도 외래어 가운데는 우리말처럼 쓴다. 이제 보자 하는 건 동기화( 同 期 化, synchronization)에 관한 것이다. 컴퓨터 용어 다. 작업들 사이의 수행시기를 맞추는 것.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거나, 일정한 간

페이지207 격을 두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어나도록 시간의 간격을 조정하는 것 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은행에서 10만원을 뽑을 때 10만원만 나오는 이유도 동기화된 시스템이 있어서다. 은행 서버에 접속하는 클라이언트 계좌가 서로 데이터 일치 하기 때문에 이게 가능하다. 이 일치를 동기화라 부른다. 동기화하지 않으면 기 기 사용이 안되니 이 부분을 스마트폰이나 프로그램의 경우 동기화(synchronise) 하는 작업은 아주 중요한 기초작업에 해당한다. 그에 비해 비동기화는 desynchronize(비동기화하다), asynchronous(비동시성의, 비동기의) 단어를 통해 표현된다. ATM(asynchronous transfer mode, 비동기전 송방식)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비동기화는 데이터의 송수신이 일정 간격으로 이 루어지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비동기 통신에서는 각 문자 앞뒤에 시작 비트와 정지 비트를 넣어서 데이터를 전송한다. 디지털 송수신에서 동기화 비동기화를 보면 100110101001101100 의 방법으로 데이터를 받을 때, 동기 비동기 모두 패킷 단위 데이터를 전송하는데 동기인 경우는 만일 200개 패킷으로 전달한다면 첫 번째 전달 패킷에 헤더를 붙여 정보를 보내고 나머지 199개 패킷은 데이터 부분만 연속해서 보내면 타이머에 의해 010010010의 정보를 읽지만, 비동기의 경우에는 200개 패킷 하나 하나에 헤더가 달린다. 동기화 비동기화 각각 응용에 서 장단점을 가진다. 기술적인 것은 전문가들이 더 잘 알 것이니 여기서는 생략하자. 나도 그에 관해 서는 초보적인 것 외엔 모른다. 데이터를 읽는 방식, 그에 관해서 일단 관심을 두 며 이 주제를 본다. 데이터 읽기를 예로 들어 동기적이라면 읽기 요청을 하고 동시에 그 호출한 상태 에서 멈추는 것이고, 요청만 보내고 읽은 데이터가 준비됐다 는 신호를 받아서 처리하는 것이 비동기라는 것인데, 동기화 시켜서 완료될 때까지 기다리는 상태 를 블로킹(bloking)이라 하고 비동기의 경우에는 함수 호출을 하면 바로 다음 것 을 수행하고 처리 완료 이벤트가 올 때 처리를 해주는 방식이니 넌 블로킹(nonbloking)이라고 한다고 설명된다. 내가 관심 있는 건 우리의 경험이나 혹은 인식-역사이건 혹은 역사를 통해 배운 학습적 접근이건-이 과연 동기적인 것일까, 비동기적일까 하는 것이다. 데이터를 전제로 본다면, 누군가는 그 (경험, 인식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 있어 우리에게 그러한 데이터를 주는 것이고 이게 자동으로 시간의 간격을 맞추어 우리에게 동 시에 전달되는 상황에서 동기화가 벌어지지 않는다면 아예 블로킹이 벌어지지 않 을 것이고, 아예 그 기록이 비동기화된 것이라면 순차 진행되는 동기화와는 다르 게 요청하고도 데이터 준비가 되었다는 싸인이 들어와야 그 다음으로 옮겨가게 되는 셈이다. 확실히 지금 우리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동기화보다는 비동기화된 영역이 많다. 그렇다고 비동기화 데이터의 수신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페이지208 <2012 시대읽기> 1부 1편은 소통 에 관한 이야기였다. 정치와 정치인의 소통방 식이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문제였는데, 그것은 위에서 언급된 데 이터의 동기화, 비동기화와 매우 흡사한 프레임의 싱크로를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보자. 어느 정치인이건 모두 소통 을 말한다. 그 대상 또한 국민이다. 그러나 그 국민들 가운데는 다양한 계층이 존재한다. 각각에 보낼 소통을 위한 데이터가 필요하다. 이를 패킷으로 묶어서 처리를 해야 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것 을 동기화 처리하는 방법은 쉽지가 않다. 현재까지 기술로는 불가능하다. 특히 소 통이 단순하게 말로만 그치거나 약간의 쇼맨십으로 처리되지 않는 건 아니라는 절대 명제가 있다. 서로가 구하는 바를 일치시키기 위해 열린 자세를 가지고 개 선해나가는 과정, 그리고 제3자를 통해 그 과정변화에 대한 평가가 소통된 것 으 로 나와야만 그것이 소통의 완성이다. 그 이전은 모두 그냥 소통을 위해 가는 길 일 뿐이다. 이건 아주 전형적인 비동기적 현상이다. 현상으로만 보자면, 과거로부터 얻어지는 경험 데이터의 처리도 비슷하다. 거창하 게 역사를 꺼내지 말고 당장 이 정권과 지난 정권만 묶어서 보도록 하자. 데이터 는 기록으로 남겨졌고 지금도 하루 하루마다 남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 데이터를 꺼내서 사용하려고 하는 요청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비동기적이어서 전혀 데 이타를 송수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데이터가 정리되어 있지 않다. 이는 아예 불 ( 不 ) 동기적인(unsyschronized) 상황을 의도한 것으로 고착화된다. 바로 몇 년 전의 과거와도 이렇다. 지금과도 마찬가지인데 미래라고 다를 것이 있겠는가 하 는 강한 의문이 남는다. 우리에게 노무현 정권과 그 이전의 기억(김대중-노무현 시기)는 이명박 정권 시 기와 함께 반드시 데이터로 정리되어야만 하는 자료다. 그걸 꺼내오는 작업이 지 금도 어렵다면 세월이 도대체 얼마나 지나야 할까? 결국 이건 동기적, 비동기적 인 차원을 넘어서 기초적인 데이터 정리마저 안된 것으로 결론내려진다. 자! 여기에 소통과 데이터를 한 번 함께 엮어보자. 무엇으로 소통하자고 하는 것 일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2005.5.3 속칭 과거사법으로 불리는 진 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의해 2005.12.1 출범한 조직이다. 이 한시 조직은 입법, 사법, 행정 3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활동을 시작하여 2010.6.30 4년 2개월간의 조사 활동을 완료했고 2010.12.31 해산했다. 총 11,172건의 조 사를 했는데 그 대상은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 및 해외동포사, 한국전쟁 이후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 권위주의 통치기의 인권침해. 조작의혹사건, 의문사, 대한 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에 의한 테러, 인권유린, 폭력,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위원회가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사건 등 현대사의 거의 모든 영역을 아울렀다.

페이지209 그러나 위 법 제25조 조사기간을 4년간으로 설정하고 2년 이내 연장할 수 있다 는 조항은 적용되지 못했다. 제25조 (조사기간) (1) 위원회는 위원회가 구성되어 최초의 진실규명 조사개시 결정일 이후 4년간 진실규명활동을 한다. (2) 위원회는 제1항의 규정에 의한 기간 이내에 진실규명활동을 완료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기간 만료일 3월 전에 대통령 및 국회에 보고하고 2년 이내의 범위에 서 그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3) 위원회는 제1항 및 제2항의 규정에 의한 조사기간 만료 이전에도 조사의 필 요성이 없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위원회 의결로서 조사기간을 만료할 수 있다. 노무현-이명박 정권으로 넘어오는 동안 사실상 과거사진상조사는 딱 그 수준에 서 머물렀다. 입법, 사법, 행정을 초월한 과거정리도 한계가 있다는 걸 보여준 셈 이다. 그럼에도 많은 데이터는 여기 축적되었다. 과거사진상위 조사보고서 http://www.jinsil.go.kr/information_notice/report/index.asp 개인적으로는 과거사진상위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조사를 필요로 하는 상설화된 조직으로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서는 이 수준에서 더 이상 과거가 쟁점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여겼던 듯하다. 역사의 데이터와 이를 현재에 반영하는 동기화는 절반의 성공 수준에 그쳤다. 오늘 대선 국면에서 과연 대중은 어느 수준으로 현재의 정치, 정치인과 소통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한 다. 워낙 소통을 부르짖으며 온갖 곳을 다니지만, 정작 과거와는 제대로 소통하고 있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

페이지210 6. 출제 시험문제 동구( 洞 口 ) / 문태준 아주 오래된 사랑이 있어요 마루와 섬돌의 관계라고 하면 어떨까요 이삭에서 좀체 안 떨어지는 조처럼 아주 가까운 사랑이 있어요 고사리 몇 이엉을 인 기왓집 과부를 닷새장으로 풀어주고 북어 한쾌를 들고 잔뜩 취한 마상의 김씨를 끙, 마실로 들여주는 꼭 호박잎 같은 그런 사랑이 우리네 세월 그 길목에 있어요 누구에게나 시험은 괴로운 일이다. 그 준비도 그렇다. 나는 종종 시험 의 정의가 뭔지 참 궁금했다. 이럴 때는 사전 뒤지는 게 최고다. 그건 최소한 우리가 그 언 어(단어)를 쓰고 살아오며 집합된 뜻의 창고이기에 그렇다. 1) 재능이나 실력 따위를 일정한 절차에 따라 검사하고 평가하는 일 2) 사물의 성질이나 기능을 실지로 증험( 證 驗 )하여 보는 일 3) 사람의 됨됨이를 알기 위하여 떠보는 일. 또는 그런 상황 대체로 사람들은 어떤 시험이건 가볍게 보지는 않는다. 그 시험을 칠만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생사를 걸고 시험을 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지금 대선 레이스에 들어간 사람들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한강 물 다 먹어야 짜냐 그런데 시험이 딱딱 채점 기준이 명확하면 좋은데, 이게 객관식 4지 선다형이 아 닌 주관식은 채점하는 사람 마음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논술 시험 같은 경우 도 채점자가 딱 보고 알아 버린다. 그러면서 저 말을 한다. 무슨 일이건 조금만 봐도 전체적인 걸 짐작해서 볼 수 있다는 건데, 그게 프로들이라면 대개 그런 평 가를 할만한 자격이 있는 거다. 슈스케니 경쟁 프로그램의 심사위원들을 보면 공 부를 하고 오는 건지 말도 참 잘한다. 그들의 전문 분야이니 그 말을 경청한다. 나이를 먹어가며 드는 생각은 매일 시험치는 기분이란 것인데, 그건 뉴스를 보면 볼수록 느껴지는 감상에 이르면 특히 더 그렇다. 신문 하나 볼 때와는 다르게 인 터넷에 어지간한 매체의 뉴스는 비교해서 볼 수 있기에 예전보다 더 복잡해졌다. 속살을 아는 뉴스, 그걸 찾아서 봐야 하는 뉴스들이 겹친다. 종종 기사 같지도 않

페이지211 은 기사들도 보게 되지만 그럴 때는 그냥 웃고 지나간다. 언젠가는 그런 기사들 모음집도 나올 거라는 기대도 하고, 기자평가 사이트, 기사평가 사이트도 나올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있다. 물론 엇비슷하게 하는 곳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아예 전문적으로 그것만 집중하는 사이트 말이다. 대선주자들의 추석 행보가 이어지면서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이 나온다. 이걸 시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시험문제가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한다. 당연히 레이스에 들어 간 사람들은 매일 시험장에서 사는 기분이겠지만 진짜 시험문제를 누가 내는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TV토론 같은 프로그램이 나오려면 아직 멀었고, 혹 누군가 문 제를 내준다고 해도 10월말이나 되어야 본격적으로 등장할 것 같고, 문제 낸다고 모든 문제마다 답을 해줄 것 같지도 않다.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잘 모르겠다 고 답할 것도 있을 터이고, 때론 아예 침묵으로 갈 경우도 있을 테니. 보통의 경우엔 이런 인터뷰니 기자회견 후의 질의응답을 할 때는 치밀한 사람들 은 최소 100문 100답 정도는 생각하고 간다. 그런데 의표( 意 表 )를 찌르는 질문 을 할 수 있다면 속내를 보기는 더 쉽다는 건 분명하다. 그런 질문 있으시면 메 일 보내면 지금 종합하고 있는 것에 담을 수 있을 거다. 현재 상태에서는 시험 문제 가운데 좀 지독스럽게 들어갈 대목들이 경제와 복지, 성장과 분배 이런 항목들이겠지만, 실제로 나오게 될 주제들은 외교 안보 국방 사회 문화 등 아주 많다. 과거 비슷하게 출제된 것들을 벌써 참모진들은 참고는 하고 있겠지만, 이제부터는 애매하고 모호한, 그러면서도 그냥 원론 수준으로 그 치는 건 추석 이후에는 어렵다. 그럴 때는 지나간다는 소리다. 기자들이라고 해서 질문 잘하는 사람들만 모인 것도 아니다. 어떤 때는 뻔한 질 문들만 늘어놓는 경우도 흔하다. 이상하리만치 질문 공부를 안 한 기자들도 제법 보인다. 기자라는 게 사실 질문 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글을 뻔지르 르 하게 쓰는 건 아닌데 말이다. 알 권리 를 생각하면 무엇을 알고 싶은지 를 먼 저 떠올려야 하는 건 기본에 속한다. 그러니 질문 못하는 기자는 기자도 아니다. 사전적 의미의 1), 3)번 그러니까 재능, 실력, 사람 됨됨이 등을 알아보는 건 겉 으로 질문만 해서 다 채워지는 건 아니지만 대충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2)번이다. 여기서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해야 옳다. 즉, 사람의 성질, 그 기능을 실지로 증험( 證 驗 )해보는 일이다. 일종의 실험실습 같은 것이다. 박근 혜, 문재인의 경우에는 정치 이력과 정권 경험이란 것이 있으니 이 문항은 짜질 수 있다. 그런데 안철수의 경우엔 답변 자체가 모두 누군가로부터 빌려와야 한다. 이게 한계다. 경험이 직접적이지 않고 간접적인 경우, 그것은 반드시 자기의 직접 적 경험과 간접적으로 섭취된 영양분 지식 간에 모순이나 혹은 갈등을 양산하는 공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직도 자꾸 원론적인 얘기에 머무는지도 모른 다. 그 틀을 벗는, 탈을 벗어제치는 그런 몸짓은 보이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 니다.

페이지212 왜 그 사람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사람 됨됨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작 이 시험은 사람 좋다고 될 일은 전혀 아니다. 재능, 실력을 검사하는 방법이 일정한 절차 가 있다. 지금껏 그 절차들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적이 많아서 대중이 만족할만한 대통령이 없었던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렇다. 그런 측면이 아주 강하 다. 무슨 사주 명리학으로 따질 일이 아니라 아주 건조하게 내용을 살피고 검사 를 했어야 하는데, 지난 대선의 경우에도 참 우스운 상황들이 많이 연출되었다. 한 가지 가장 괴로운 일은 대선 레이스라는 것이 절대 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라 는 점이다. 겉보기에는 절대 평가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두 1등급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니 모두 괜찮은데 그 날 운이 좌우할 거다 는 식은 이 시험의 일정한 절차에 맞지 않는 답이다. 어쨌든 단 한 표라도 뒤지면 지는 게임, 이건 확실히 제로섬 게임룰이 적용된다. All or Nothing의 게임이다. 그러니 시험도 살벌할 수 밖에 없다. 시험문제들을 계속해서 정리하는 중임은 앞서 밝혔지만, 공개적인 질의는 아주 정밀하게 치우침이 없이, 편견도 가지지 말고 나아가 그 대답을 본인의 의사뿐만 아니라 주변의 참모들, 지지자들과도 공유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이게 교과서 참고서까지 놓고 하는 오픈 테스트인 셈인데, 그렇다 해도 분 명 이 시험은 문제를 통해, 답변을 통해, 답변의 유무에 전혀 상관 없이 의미가 있을 거라고 판단한다. 서둘러 봐야겠다. 7. You are blind! 가을비 / 박문옥 다 젖거라 가을비에 흠뻑 젖거라 저 대지도 저 강물도 부슬부슬 젖거라 이토록 사무치게 그리운 가을날엔 바람 소리도 흠뻑 젖거라 다 젖거라 가을비에 흠뻑 젖거라 고추잠자리 은행나무도 차디차게 젖거라 어디쯤 가고있을 무정한 님의 얼굴도 쓸쓸함으로 흠뻑 젖거라 다 젖거라 가을비에 흠뻑 젖거라

페이지213 음악소리도 커피 향기도 구슬프게 젖거라 이토록 사무치게 그리운 가을날엔 그리움 마저 흠뻑 젖거라 다 젖거라 가을비에 흠뻑 젖거라 저 마을도 저 지붕도 아스라이 젖거라 미치도록 사람 하나 그리운 가을날엔 사람 하나 그리운 가을날엔 질문도 답도 모두 이런 반응에 대한 평가는 대중 각자의 몫이다. 온갖 뉴스들에 너무 머리가 아프다 하는 사람은 해당 뉴스를 자기 질문으로 바꿔서 보는 습관을 들여보면 그것도 아주 재미나다. You are blind! blind 는 눈이 멀었다는 뜻이지만 인식하지 못하는(알지 못하는)이란 의미도 담 는다. 심지어 이것은 맹목적( 盲 目 的 )이란 형태로도 사용된다. 주관이나 원칙이 없 이 덮어놓고 행동하는 걸 말한다. 그러니까 저 말은 뭘 모르는군! 이라고도 해석 될 수 있고, 덮어놓고 나서지 마! 도 되는 셈인 듯하다. 나는 왜 문재인 안철수를 지지하는가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53882.html 기사 제목만 봐도 어느 신문인지 알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그렇다. 이건 한 겨레 신문 2012.9.30 추석날 올라온 기사다. 문재인 지지자 2명, 안철수 지지자 2명, 야권 단일후보 지지자 2명이 참가한 좌담회다. 참석자는 수도권에 거주하는 34~45살 남녀 유권자. 내용이 제법 길어서 이걸 정리하려면 좀 애를 먹겠다 싶 었는데 5개의 질문만 들어간 것이어서 그렇게 난이도가 높지는 않다. 오히려 여 기 참가한 사람들이 대표성을 띠는 건 아니어서 의견 취합이 오히려 조심스럽다. 그래도 좌담회라는 형식이었으니 살펴보는 것도 도움은 된다. 아예 표를 만들어서 한 번 보기로 하자. 질 문 문재인 지지 안철수 지지 단일후보 지지 (둘 다 지지도 포함) 나는 왜 이 후보를 지 - 노무현 서거 후의 -시대흐름과 맞게 소 -문재인의 책 운명 이 지하는가? 절제된 행동. 절제된 통할 수 있을 것 같다. 재미없었다. 강단과 진 모습으로 과거 정리 - 국민을 기망하지 않 심은 느껴진다. 필요 을 것 같고 주변 사람 - 안철수는 기다리다 - 무소속 후보를 선뜻 들도 그를 속이지 않

페이지214 두 후보에 대한 구체적 인 이미지는? 내 지지 후보가 상대보 다 더 나은 이유 야권 대선 후보 단일화 후보 단일화 이후의 선 택은? 지지하기 어려움. - 최소한 참여정부와 유사한 밑그림 기대 -안철수라는 그림이 불확실하게 보인다. - 안철수에 대한 이미 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잘 모르겠다. - 안철수는 경영자로 써의 장점을 가진 것 - 문제해결 여부는 살 아온 궤적을 봐야 한 다. -정치개혁의 증거를 못 내놓는다. 경험이 없어 시행착오 가능성 이 있다. - 문재인도 빚진 게 없다. 당내 입지로 돌 파력도 있다. - 안철수의 소통 리더 십은 의문이다. - 안철수 문재인 둘 다 정책이라 할만한 게 없다. - 단일화가 지상최대 명제라 생각 않는다. - 안 해서 져도 그 현 상 자체를 받아 들여 야 한다. -단일화 안 되면 고민 하다 안철수 찍는다. 을 것 같다. - 안철수의 생각 이란 책의 약속이 나와 생 각 일치했다. - 문재인은 절제력은 느껴지나 참모형이다. - 문재인은 이미지로 정약용, 안철수는 세종 대왕 - 안철수의 정책 돌파 력이 낫다고 본다. - 엘리트 이미지보다 양국화문제의 실질적 해결 여부가 더 중요 -안철수가 무소속이어 서 지지 (참여정부 민 주당은 역사적 책임을 져야) - 안철수가 되면 정계 개편이 될 수밖에 없 다. - 당이란 간접정치 구 도 아니라도 정치 가 능하다. -단일화 안 해도 박근 혜가 안될 것 같다. - 국민이 담판하라 압 박해선 안 된다. - 단일화 후보 지지 - 문재인 단일화 되면 투표장 안 갈 것 같다. - 안철수 민주당 입당 하면 표 많이 빠질 것 좀 지쳤다. 문재인 쪽 으로 기운다. - 문후보는 안정감, 안후보는 경제, 과학기 술에 강점이 있을 것 같다. - 둘이 연대하길 바란 다. - 문재인은 서민 배려 가 느껴지나 안철수는 사회 상류층 이미지 - 안철수는 교과서적 가치 - 문재인은 부대끼며 헤쳐나가는 이미지, 안 철수는 땀냄새 나는 스킨십 기대가 어렵다. - 안 하면 무조건 진 다. - 담판이 좋다. - 어느 시점에 어떤 결심이 될 거로 믿는 다. - 단일화 후보에게 투 표 - 단일화 하더라도 다 른 한 쪽을 배제하는 시스템 아니길 희망 솔직한 느낌을 그대로 적어보면, 이 토론은 지금 야권지지의 성향을 본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의미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그냥 술자리의 신변잡담 수준으로 보 이는 건 정작 짚어야 하는 것이 전혀 토론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 단하다. 대상들이 특별히 해야 할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안철 수의 포지션은 아주 애매하다. 이미지는 남아 있으나 그 이미지 파워가 정작 선 거 내부의 불안감을 달래주지는 못한다. 무소속의 한계 등을 감안해보지 못하고 막연한 기대가 넘친다. 문재인의 경우에도 비슷하다. 둘 다 정책이라고 나온 것이

페이지215 없다고 인정하는 대목에서는 헛웃음이 나온다. 그것이 핵심인데 말이다. 시험을 치고 있다. 그런데 아직 문제출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야권의 모습이다. 그 러니 저 소리 나온다. You are blind! 8.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할 기회 온다던 사람 오지 않았다 / 이재무 온다던 사람 오지 않았다. 밤 열차 빈 가슴에 흙 바람을 불어넣고 종착역 목포를 향해 말을 달렸다 西 山 삭적개비 끝에서 그믐달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주먹의 불빛조차 잠이들었다 주머니 속에서 때묻은 동전이 울고 있었고 발끝에 돌팍이 울고 있었다 온다던 사람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오지 않았고 내 마음의 산 비탈에 핀 머루는 퉁퉁 젖이 불고 있었다 2009.9. 미국 미니아폴리스 주민 공청회에서 버락 오바마가 한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회자된 적이 있다. 미국 의료시스템에 대해 한 말이었다. I will not accept the status quo. I won't stand by while special interests use the same old tactics to keep things exactly the way they are. 지금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 돌아가는 상황을 그 대로 고수하기 위하여 특수이익집단들이 흔해빠진 술책을 사용하는 일을 난 가만 히 방관만 하지 않겠다.

페이지216 현상유지 (status quo)는 나쁜 것일까? 아니다. 때로 그 상태 그대로 있어 야 하는 것을 개혁을 한답시고 건드리며 생기는 문제가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언뜻 보기에 대중은 현상유지보다는 변화를 희망하는 경향이 강하다. 관건 은 이것이 변화욕망이지 개혁이라고 하며 자신들의 일상을 송두리째 뒤집어 엎는 건 극히 소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대중은 기본적으로 현상유지편 향 (status quo bias)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것은 행동양식의 변화를 요구할 때 아주 심각하게 드러난다. 행동은 습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불편 과 연결된다. 몸이 편해야 마음도 편하다는 식 접근이 이 루어진다. 익숙함을 찾아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문제는 변화의 욕망이 어느 수준으로 극대화되어 가는가 하는데 따라서 정책 심 지어 제도도 바뀌어야 하는데 바뀌지 않을 경우다. 이것은 바뀌는 것의 불편 문 제가 아니라 이미 습관을 고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를 정책과 제도를 운용하 는 자에게 계속 보내게 되고 그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대중은 그것을 나쁜 정책 수준에서 보는 게 아니라 무능한 정권 으로 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난 정권의 입법, 사법, 행정 3부 모두에서 이 무능하고 또 한편으로는 변화해 야 하는 극한에 서 있는 모습을 많이 봤다. 2007년의 정권 교체는 그런 의미에 서는 변화 욕망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종종 현상유지 에서 그쳐야 하는 때, 정치권력은 이를 뒤집고자 하는 욕심을 드 러내는데, 이 때 붙이는 명칭이 바로 개선 ( 改 善 )이란 말이다. 개혁 ( 改 革 )은 제도의 개선을 첫 단계로 해서 기구까지 모두 바꾸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곧 정책적인 변화로 이어진다. 물론 이를 더 잘 실행하기 위한 개혁도 있다. 이를 빙자하여 개혁이란 이름으로 벌어진 개악( 改 惡 )이 벌어지는 경우, 대중은 이름 뿐인 개혁은 개악 이란 인식을 해버린다. 무조건 바꾸자고 덤벼드는 것이 개혁은 아니란 이야기다. 변혁( 變 革 )은 아주 급속한 변화와 개혁을 말한다.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시간 이 제법 걸리는 뜯어 고치는 작업이 이루어지는데, 이 상태에서 대중이 가진 현 상유지편향 은 강하게 도전을 받는다. 이걸 두려워하는 그런 마음, 그런 정책 선 호가 바로 흔히 말하는 보수적 경향 이다. 그러니까 대중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 라 해도 좋은 셈이다. 그럼에도 사소한 변화들을 희망하고, 불편이 극한으로 가 면 개혁, 변혁을 요구하게 된다. 2012년의 한국 사회는 강한 변화를 요구 받고 있다. 강제적으로 현상유지의 프 레임을 깬 IMF사태 이후 느껴진 지독스런 피로감이 작동한다. 그것은 이명박 정 권이 준 선물(?)이기도 하다. 개선 개혁을 말하면서 개악을 했을 때, 그것이 대중

페이지217 보다는 사욕( 私 慾 )의 영역에서 머문다고 인식되고, 더 나아가 개악의 목적이 소 수의 이익에 집중된다고 느껴지게 만든 것은 큰 성과(?)에 해당한다. 드디어 현 상유지 편향 과 진정한 개혁 간의 차이를 조금은 이해하게 만들어주었으니 말이 다. 정책담당자들이 내놓는 뭐라 이름을 붙인 여러 정책보고서를 보면, 그 속에는 제 도의 변혁보다는 개선을 염두에 두고 붙여진 이름들이 대부분이다. 변혁은 몹시 정치적인 행위다. 그러니 입법, 행정, 사법 3부에서 이런 급진적인 변혁에 동의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대중의 욕망이 극한으로 가 있어야만 하고 그들이 그렇게 인식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책담당자는 항상 딱 그 수준의 변화 혹은 변 화를 포장한 앞뒤 돌려 막기만 할 뿐이다. 그것은 복지부동( 伏 地 不 動 )이란 말로 대표된다. 기업과 같은 이윤을 모토로 하는 조직의 경우 경영자는 이런 상태를 가장 두려워한다. 이건 안정( 安 定 )과는 다른 차원이다. 정리해보자. 우리는 변화를 요구하지만 개혁은 원하지 않는 여러 사안들을 접한 다. 그러나 요구해도 바뀌지 않으면 현상유지편향의 심리는 깨진다. 그것은 강한 변화 즉, 개혁을 요구하고 이에도 응하지 않으면 개혁은 변혁 요구로 다가선다. 속도가 아주 빨라지는 것이다. 그마저 듣지 않으면? 그건 극단을 벗어나는 상황 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혁명은 그런 정도가 되어야 생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혁명이 필요한 정도의 사안이 있는가? 있다. 그래 서 위정자들은 대중을 변화(욕망) 수준에서 묶어두려고 안달한다. 꼼수도 부린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보수적 성향을 가진 집단들은 홍보와 선전, 그리고 여러 술 수들을 부리면서 이것을 개혁까지는 가지 않게 만들고자 한다. 그 사이에서 개선 이 아닌 개악을 포장하는 일도 벌어진다. 대중이 정말 하고픈 말을 할 기회는 잘 주어지지 않는다. 이진법(인터넷)의 요구 를 무마하는 방법도 이미 위정자들은 나름 터득하고 있다. 방통위가 헌법재판소 의 인터넷 실명제 위헌 결정이 나온 이후에 내놓은 대안을 보면, 이건 한마디로 개악( 改 惡 )을 개선( 改 善 )으로 포장하기 위해 안달하는 수준이다. 이 사태의 핵심 은 하나다. 인터넷이란 열린 공간이 통제되지 않으면, 대중의 변화 욕망이 개혁으 로 변혁으로, 그 이상으로 번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려움이다. 그래서 할 말을 해야 하는 때는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개인은 작은 존재일 뿐이 지만 대중이 가진 현재의 변화 욕망이 현상유지편향이란 밑바닥의 심리마저 깰 수준임을 보여주지 않으면 사회의 아무 것도 진정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 사이 위정자들은 바꾸지 않아야 하는 것도 바꾸려고 한다. 버락 오바마가 저 말을 했 던 이유를 생각한다. 미국의 의료시스템은 전혀 선진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미국 은 선진의 표본이 아니다. 그 제도를 한국 사회에 마치 무슨 대단한 개선과 개혁 인 것처럼 심고자 하는 움직임은 그래서 아주 지독한 사욕( 私 慾 )이며 또한 대중 을 기만하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가장 큰 변화 욕망을 가지는가? 하고픈 말도 정제되어야 한다. 그 말을 할 기회에 주저하지 말고 그 방향에 힘을 보태지 않으면 세상은 늘 조그

페이지218 마한 변화 속에서 돌아갈 뿐이다. 9. 느껴지나? 희망이 무너지는 걸? 녹차한잔 / 이정자 어느 깊은 산골짜기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햇살을 담고 청솔바람에 나부끼어 마을 사람들의 숨결이 온몸으로 맑게 맑게 퍼져 갑니다 이대로 그대에게 다가가 손 내밀고 싶습니다 매 5년마다 주기적으로 우리는 나름 어떤 희망을 말한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 다. 그리고 경제적 동물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도 하고 또한 인간은 언어 를 사용하여 만드는 자신들의 세상을 가지는 문화적 동물이라 말해도 된다. 그리 고 인간은 희망의 동물이다. 기대하고 소망하는 바를 위하여 시간과 마음을 건다.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 인간은 절망의 동물이 되는 것일까? 정치판을 보는 눈은 여러 형태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뻔히 강 건너 불구 경을 하기도 하고, 불을 끄려 불길에 뛰어 들기도 혹은 새로운 불을 지피려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도 힐끗 보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한 소리를 걸친다. 그래도 이번엔 지금보다는 나아지지 않겠어? 그 희망의 근거가 무얼까 생각한다. 뭐, 특별한 것이 없다. 과거에 쭉 실패해봤으 니 이번은 잘 할 거라는 기대, 이 상상 초월하는 정권을 겪고 나니 느껴지는 이 제 이만하면 다 겪었을 거 라는 내성( 耐 性 )이 길러진 것에 대한 소회 같은 것, 또 는 패배주의 속에서도 그걸 이겨내기 위한 자력구제의 한 방편, 그래도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는 것에 만족하는 심리 등 이런 류에서 파생된 것이 아닐까 싶다.

페이지219 아주 강력하게 이 사람이어야만 해, 이런 말을 할 절대적 지지자는 형성되지 않 고 아주 강하게 부닥치는 대선주자들의 레이스가 형성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 중은 각자가 기대를 건다. 그 속에는 다양한 이유들을 대입한다. 가만히 보면 기대와 희망이 먼저인지 아니면 누구 를 통하여 새롭게 그걸 가지고 자 하는지 모를 일이다. 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시간은 행 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기대와 희망이 모든 사람이 똑같지는 않다. 그 러니 갈등은 생긴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기다리는가? 지구의 미래를 희망하며 평생을 침팬지와 함께 한 제인 구달이 말하는 희망의 이유 (Reason for Hope)도 고통을 말하지 않는 건 아니다. 우리는 다만 다른 사람의 고통과 힘겨워하는 모습에 감정적으로 어떻게 대처해 야 할지도 모르고, 또 한편으로는 아마도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고통을 떠올 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중략) 우리는 호스피스, 의사, 간호사, 장의사 같은 사 람만이 죽음에 익숙해져 있는 기묘한 가공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희망은 침팬지와 지구로 향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정말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후손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계를 기대할 수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나무들이 살아 있고 그 사이로 챔팬지들이 노니는 세계. 푸른 하늘이 있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 는, 그리고 원주민들의 북소리가 어머니인 지구와 위대한 신이 우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힘차게 되새겨주는 그런 세계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 다. 지구의 자원은 고갈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지구의 미래를 진정으로 걱정한다면, 모든 문제를 저 밖에 있는 그들에게 떠넘기는 짓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내일의 세계를 구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바로 당신과 나의 일인 것이다.

페이지220 아! 저렇게 거대한 이슈, 바로 세계를 말하고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는데도 결국 다시 돌아오면 당신과 나의 일 이 등장한다. 이 말을 바꾸면 바로 당신은 알아 들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 한국 사회의 내적 힘은 고갈되어가고 있 다. 우리가 한반도의 미래를 진정으로 걱정한다면, 모든 문제를 저 밖에 있는 그 들에게 떠넘기는 짓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내일의 시대를 구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일이다. 바로 당신과 나의 지금 해야 할 일인 것이다. 희망의 이유를 물을 때 <멜랑콜리아> http://www.pckworld.com/news/articleview.html?idxno=54328 영화 및 문화평론가인 최성수 목사가 쓴 글이다. 리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 리아 (2011)에 대한 감상평이다. 물론 목사라는 신분으로 한국사회의 교회 이야 기를 말한다. 종교 차원은 떠나서 이 짧은 글의 아래 부분은 새겨볼 대목이 있어 옮기고 싶다. 세계 경제와 정치가 우울한 정서로 가득하고 또 지구 종말론이 만연한 현실에 직면해서 기독교인이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일까? 세상 은 지금 희망의 이유를 묻고 또 찾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경적인 종말론에 근거해서 희망의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과잉경쟁에서 도태될 염려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는 가운데 세상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는 가능 성을 제시해야 할 것이고,또한 종말적으로 보이는 상황에 직면해서 절망하는 인 간을 돌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교회마저 과잉경쟁에 빠지고 또 세상의 요동에 동요한다면,사람들은 도대체 희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희망을 찾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필요한 이유를 먼저 생각한다. 그만큼 변화 속 에 희망을 가진 에너지를 필요로 하게 세상은 많이 퍽퍽해졌다. 윤기( 潤 氣 )가 사 라지고 건조하고 메마른 시절이 이어지는 시대, 그래서 뭔가 재미난 구석을 찾으 려고 온갖 엔터테인먼트가 난무한다. 마치 그것이 우리가 희망을 가질 대상인 것 처럼. 그러나 희망은 그것 때문에 필요한 게 아닌 듯하다. 당신과 나의 지금 해야 할 일 때문에 그 희망은 필요하고 그걸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일 뿐이다. 희망이 무너지는 날에도 희망을 떠올리는 에너지를 생각한다. 마치 그것이 사람 만이 가진 불굴의 의지인 것처럼 여기며 희망을 버리고 희망을 찾는다. 요즘 정 치판을 보면서 드는 깊은 소회가 그것이다.

페이지221 10. 너는 옳다! 그건 사실이야! 그러나 바닷가 산책 / 박재삼 어제는 가까운 신수도 근방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오르고 있어 열댓 살 적으로 돌아와 그리 마음 가려워 사랑하는 이여, 안으로 홀로 불러보았고, 오늘은 멀리 창선도 쪽 아까운 것 없을 듯 불 붙은 저녁놀에 스물몇 살 때의 열기를 다시 얻어 이리 흔들리는 혼을 앗기며 사랑하는 사람아, 입가에 뇌어 보았다 사랑은 결국 곱씹어 뒷맛이 끊임없이 우러나게 하는 내 고향 바닷가 산책이여! 기성 정당에 의한 정치가 지겨운 건 사실이다. 속말로 정치 프로라면서 정치 이 따위로 하느냐는 이야기 들어도 반박할 말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그들은 고개 숙이지 않는다. 자기네 외에는 정치 못한다는 독과점 의식이 가득하다. 국가 와 사회를 움직이는 입법, 사법, 행정 3부의 의식이 정치 현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보니 대중은 말한다. 지겨워! 정말 지겹다구! 안철수의 등장은 늘 반복되던 제3후보 패턴과는 다른 건 틀림이 없다. 본질은 같 지만 형태는 아주 강한 기성 정치의 불신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안철수의 강 을 건너고 다리를 불태운 바로 그 순간부터 안철수도 정치의 물결 속으로 들어 갔다. 곤혹스러운 대목이 마구 드러난다. 기성의 벽( 壁 )은 높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게 아니라 몹시 강하고 두터우며 또 한 지능적인 벽으로 존재한다. 여의도 정치의 실상은 여의도를 본부로 하고 전국 에 네트워크를 형성한 시스템이다. 그것은 수직적 사회구도 속의 최상부에 위치 하면서 그들과 엇비슷한 영역의 존재들인 금력( 金 力 )과 사회 영향력을 가진 집단 과 교류한다. 그들이 피라미드의 상층부에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에 이 벽은 절대 수평적이지 않다. 오늘 한국 사회의 대중은 이를 수평적인 것으로 요구하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

페이지222 만도 아니다. 이 사회구조 자체를 완전히 역 피라미드로 만들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수직이건 수평이건 간에 온전한 정치, 온전함이 있는 구도를 바란다. 그 러나 이 틀은 정확하게는 경제적인 요인을 겉모습으로 하는 정치적인, 그것도 한 국 정치만이 아닌 것에 의해 무너졌다. 이것은 타의적인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권력 상층부의 자발적인 움직임에 의해 변형된 것이다. 나는 이것을 변용 ( 變 容 )이라고 부른다. 얼굴이 바뀌긴 했으나 지배구도는 공고화된 시스템이 만들어졌고 지금도 운용된다. 그 속으로 들어간 안철수의 행보가 이 벽의 바깥에 있는지 안에 있는지를 따져본 다.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는 것만으로 그가 이 벽의 안쪽에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리석다. 안랩 정도의 기업으로 대한민국에서 기업 CEO로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도 참 어리석다. 재벌그룹의 방계 기업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의 크기이고 규모다. 완전한 성공을 말하기도 어려운 입장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람이 처한 자리는 어디일까? 안철수의 생각 이란 책을 읽고 그를 지지한 사람들은 과연 그 책 속에 있는 것을 하나씩 변형하고 있는 안철수의 정치 행보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렇다고 안철수 의 생각 속에 있는 시스템을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었던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갈등은 제법 두텁게 번진다. 책은 완결된 것을 던진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보자면 십 수년 전에 쓴 책의 오류를 발견하고 난 이후, 그 주제의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다시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하물며 지식이 아닌 생각 을 전하는 것으로 가보면, 이것은 애초 갈등을 일으킬만한 소재에 해당되었다는 판단을 한다. 왜 애초 이런 판단을 하지 않았을까? 왜 저런 형식으로 정치에 접근했을까? 대중의 지지라는 여론조사의 결과는 민심청취라는 행보 속에서도 그 영향력을 쉽 게 지우지는 못했던 듯하다. 민심의 가변성은 놀라울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믿음의 강도( 强 度 )는 항상 검증된다는 것이다. 그게 대중 의 힘이기도 하다. 이것이 하나의 방향으로만 향하게 될 때, 파시즘은 등장한다.

페이지223 파시즘의 본래는 바로 국가, 인종, 민족이 개인보다 중요하다는 전체주의적 생각 이지만, 이 경우에는 기성정치는 바뀌어야 한다 는 명제가 과연 대중 전체에 기 성과 기득권에 저항하는 파시즘의 바탕을 근간으로 하는 동의를 구할 것이냐에 관건이 있다. 당연히 기성과 기득권에 관한 관찰과 분석은 지금보다 더 깊이 했어야 한다는 과 제가 숙제로 남는 중이다. 기성의 벽은 높다. 기득권의 장막은 그 속을 보기가 어 려울 정도로 두텁다. 그것이 지겨움 하나만을 가진, 그런 변화 정도의 욕망만 가 진-그러나 한 표의 투표권을 가진-대중에게 먹히기 위해서는 보다 정제된 접근 이 필요하다는 것도 가르쳐주고 있다. 지금으로써는 안철수의 성공 가능성이 수치로는 더 많이 나오지만 우려의 바탕에 는 바로 이것이 도사린다. 안철수의 생각이 옳았다는 판단을 나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앞서 주장했던 바와 같은 이유다. 그것은 총론이었지 각론이 아니었고 또 한 총론에서 각론으로 이행하기 위한 다리 (브릿지)가 없어 보였다. 가장 큰 불 안의 시작은 정당정치를 이기기 위한 무소속 이라는 것의 모순이다. 이건 한마디 로 정치 속에 들어가면서도 정치를 부정하는 행위가 되어 버린다. 이 지적을 하 지 않는 것이 참 이상한 현상이긴 한데, 이렇게 간다는 건 어느 순간에 결국 기 성정당과의 후보 단일화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밖엔 비춰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렇게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단일화를 위한 피 터지는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서 중점으로 내세워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오로지 대중의 지지도 하나에 묶여 있다. 정치는 대중의 투표 숫자로만 결정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그냥 표상일 뿐이다. 투표 이외에도 정치적 견해를 표명할 방법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투표만이 민주주의의 오로지 하나 남은 권리라고 주장하는 건 엉터리다. 그런 말에 세뇌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 정신을 해친다. 많은 이야기가 안철수의 입을 통해서 나오고 있다. 정제된 언어에서 이제는 준비 된 언어 패턴을 보이려는 단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프레임에서 생 각한다. 당신의 생각은 옳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이렇게 가는 건 오로지 후보 단일화를 염두에 둔, 권력의 분점 혹은 공동의 플랫폼을 겨냥하는 행위로밖에는 비춰지지 않는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렇게 가는 것이 옳은 거다. 정치의 정도가 숫자 싸움을 통해서 최후의 승자가 독식하는 구도로만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지 금 시대의 정치는 변화 수준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을 요구한다. 그것을 부 드럽게 실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 강하게 적용해야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그 다음 차원이다. 나는 안철수의 생각이 옳다고 인정한다 해도-백 번 양보해서-지금 가는 길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페이지224 2012 시대의 민낯 제 6 부 (2012.10.1~2012.10.3) 담담당당 추석 다음날이다. 길게 담배 한 개피 피우면 연기 뿜고 나니 생각 더 많아진다. 우리가 처한 시대 의 환경은 몹시 거칠어질 공산이 커지는 듯하다. 11월이면 중국의 5세대 지도부 가 등장한다. 이른바 시진핑 시대다. 패권을 둘러싼 미중 간의 격렬한 밀당 이 21세기 초에 예고 수준은 넘어선 상태. 한반도는 그 격랑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양측 모두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 통제권, 나아가 전선을 흐트러트릴 생각 이 없다. 그만큼 동북아에 있어 한반도는 더 긴박한 지대로 변하고 있다. 그 와중에 올바른 정치가 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대를 헤치고 나갈 역량이 없 어진다. 일본의 우경화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앞으로도 쭉 이어질 것이다. 아무리 유럽의 일본에 대한 비난이 있을망정 그것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극우 일본 정치인들의 행태와 그 믿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두려움 에서 찾는다. 그들은 뭔가에 아주 조급해져 있다.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가 없다. 역사도 흐름을 배신하지는 않는다. 면면 이어져 가는 중에 마치 폭우에 강물이 거칠게 흘러갈 때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그 강 물 거슬러 가기는 어렵다. 아무 움직임도 없이 강물에 몸을 맡기지 않고는 그 물 살을 대응할 수 없다. 그러나 어디 사람이 그런가. 그 강물을 대하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하기에 생각이 많은 거다. 대선 레이스는 약간 소강, 그리고 이 명절이 끝난 후에는 다시 한 번 출렁일 것 같다. 10월, 11월, 12월에 각각 변수가 한 번씩은 주어질 것 같은 강한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가는 중에 또 숱한 사건들이 뒤를 이을 것이다. 흥미롭게 보지만, 단순히 그렇게 보지 못하는 건 순전히 이 시대가 다음 5년에 많은 변곡점의 기 회가 주어질 듯해서다. 이야기를 더 이어간다. 1. 5.22 사태 를 아십니까? 2. 뭘 두려워하지? 3. 정권심판론은 뜨거운 감자인가? 4. 누군가 설계하는 꿈 5. 수상( 殊 常 )한 정치 6. 성공 스토리 = 돈 사건? 7. 나머지는 네가 해야지! 8. 덜 떨어진 딱지

페이지225 9. 구체성의 결여( 缺 如 )를 벗어나는 법 10. 냄새 나지 않는 X은 없다. 1. 5.22 사태 를 아십니까? 흰 부추꽃으로 / 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2007.5.22 5년여 전의 그 날, 참여정부는 대단히 무서운 결정 하나를 내렸다. 정권 막판, 그것도 5년 차 시점에서 벌어진 이 일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이 를 5.22 사태 라고 규정한 것은 언론과 당시 야당의 시각이었지만, 지금 봐서도

페이지226 그건 일종의 사태였음은 분명하다.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 으로 이름 붙인 이 사건은 22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를 통해 결정되었다. 37개 정부부처 내의 브리핑 룸과 기사 송고실을 정 부중앙청사와 과천 제3청사, 대전청사 3개로 통폐합하는 것이 그 골자였다. 사실 상 언론과의 전면전 선포였다. 이 방안에 의해 기자들은 공무원 집무실의 무단 출입을 방지하는 것으로, 출입 통제대신 전자브리핑시스템을 도입해서 실시간 중 계하는 것, 언론의 개별 취재질의 답변도 이 시스템에서 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전 있던 각 부처의 기자실은 모두 공사에 들어가 없애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알 권리 를 제약한다는 점에서 국내에서는 난리통이 벌어졌고 노무현 정권의 막판에 언론사의 말초에 해당하는 기자들의 원성을 사게 만든 대사건이었 다. 졸지에 취재방식에 제약을 받고 편하게 취재하던 관행마저 적용이 어렵게 되 었다. 공무원과 기자 간의 담합마저도 쉽게 이루어지기 어렵게 만들었으니 불편 한 건 기자들만이 아니었다. 적절하게 사건 흘리기를 해야 하는 검찰도 상당히 곤혹스러운 입장이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미국의 평가가 알려진 것은 2011년이 되어서다. 노무현 사후의 이야기다. 위키리크스를 통해 알려진 사태 발생 1개월 후인 2007.6.26 본국 보 고한 내용에 의하면 당시 대사 버시바우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盧 정부 기자실통폐합에 美 대사 공감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1/09/29/0608000000akr20110929190700009.html 알려진 내용을 잠시 보자. 버시바우 대사는 전문에서 한국에서 진행되는 기자실 통폐합 조치의 경과와 언 론 및 정당들의 반응 등을 상세히 소개한 뒤 끝 부분 논평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언론과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언론에 일부 제약을 가하려 하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 언론은 현재 정부 각 부처와 당국자들에 대한 놀라 운 수준의 접근권을 누리고 있다"며 "대사관 직원들은 (한국 정부) 부처 로비에서 뿐 아니라 복도에서 돌아다니는 기자들을 자주 만난다"고 적었다. 또 "고위 당 국자들에 대한 기자들의 접근이 쉽다는 점은 명백하다"며 "정부의 내밀한 정보가 신속하게 유출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부연했다. 버시바우 대사는 "따 라서 정부 부처에 대한 기자들의 접근권에 제약을 가하는 것이 한국이 풍부하게 누리는 언론 자유를 짓밟는 것이 아니라 미국 등 외국에서는 흔한 ` 경계 '(boundaries)를 치려는 노력으로 봐야 한다"고 평가했다. 취재 접근권 훼손에 대해 버시바우는 한국 언론의 접근권이 놀라운 수준이며 정 부의 비밀 보고도 신속하게 유출되는 것이 보통의 일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단순히 긴장관계 유지 문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노무현이 박은 이 말뚝은 제거 되었다. 폐쇄하고 다시 만들고 예산만 무지막지

페이지227 낭비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남 게 되었다. 노무현은 왜 저런 결정을 내렸을까 하는 것이다. 기자실 통폐합을 결정한 이후 기성 언론의 태도는 누가 조선이고 한겨레인지 구 분이 가지 않았다. 동아 경향도 따로 없었다. 조중동은 언론탄압 을, 한겨레와 경 향은 알 권리 축소 라는 쪽에 방점을 두었다고 했지만 비판의 논조는 한결같이 노무현 정부 자체의 문제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당연히 그런 논조를 유지하는 가운데, 지적된 언론의 보도태도, 기자들의 취재습관에 대 한 문제점에 대해서 자기 반성은 하나도 없었다. 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분석이라고 나온 것은 레임덕 방지, 연말 대선 친노세력 결집이란 의도가 있었다, 노 대통령은 늘 논의의 중심이 되고 싶어 하고 화두를 던져 존재감을 드 러냈으니 이번의 경우도 언론이 대응하면 할수록 더 좋아할 것(정형근), 자신의 구상이 예상외로 모든 언론의 반발을 불러오자 구도를 정권 대 언론 에서 언론 기득권 대 국민 으로 옮겨가려 한다(민병두), 정국 주도권을 끌고 가기 위한 전략 으로 이번 정책을 마련하면서 전 언론의 반발을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청와대 가 실수한 것(최재천)같은 것이었다. 구체적인 배경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 이 후에는 언론권력이 사정없이 막말 수준으로 노무현을 공격했다. 언론을 향한 증 오심의 마지막 발작, 병적 귀기( 鬼 氣 ), 사냥개 인간, 강아지 권력 (조선일보 2007.12.18), 언론탄압 광기, 민주언론사를 유린한 망나니 (동아일보 2007.12.19) 등의 표현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참여정부는 기본적으로-사실 노무현에 대한 조중동 등 기득권의 마이너리티 권 력에 대한 공격으로 평가하지만-초기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것은 2007년 초 시 점에서는 언론에 대한 불만이 노무현 개인에게는 대단히 중요하게 인식되게 되었 다. 이것이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2007.1.4 경제점검회의 발언이었다. 사실과 다른 엄청난 많은 사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기사로 마구 쏟아지고, 누구의 말을 빌렸는지 출처도 불명한 의견이 마구 나와서 흉기처럼 사람을 상해 하고 다니고 그리고 아무 대안도 없고 대안이 없어도 상관없고 그 결과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배상도 안하고 그렇게 하는 상품 이게 노무현이 본 언론이었다. 혹자는 2007년 5월 즈음해서 복지정책 패러다임 의 전환을 예방적 복지 정책으로 전환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가지들에게 풀(홍보) 했는데 뉴스와 기자를 보니 선거를 앞둔 선심성 정책 남발로 규정하는 걸 보고 화를 많이 내면서 이 조치까지 이어졌다고도 한다. 실제로 조중동 등은 2006년 경부터 집요하게 선심성 남발정책 관점으로 부동산 정책을 조망하기도 했다. 그 러나 이 사건들은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서 기사나 담합하는 기자들의 모습으로 각인되었고, 결국 언론과의 처절한 대치국면까지 이어진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렇게 언론과의 건전한 긴장관계는 고사하고 오히려 서로 악의적인 대립

페이지228 을 가져온 이 사건은 퇴임 후의 노무현과 그 주변부 사람들의 사건에 대한 언론 의 보도 태도에서 보복에 가깝게 드러나 버렸다. 기성 언론 전부가 여기에 동참 했다는 건 익히 잘 아는 바이다. 이것은 확실히 노무현의 완패였다. 정권 말에 말뚝으로 박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등을 찍어버린 사건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 서 기성 언론의 힘이 약화된 것도 아니다. 종합편성채널까지 이르면 오히려 기성 언론 그 가운데서도 보수언론의 힘을 배가 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본다. 여기서 우리는 데자뷰에 직면한다. 기성 언론이 국회의원들과 똑 같은 모습을 보 인다는 점이다. 슬그머니 세비 올리고 그에 반성하지 않는 그들이나 취재 및 보 도 태도의 문제점에 대해 자성( 自 省 )하지 않는 언론은 동일선상에 있다. 국민의 알 권리는 그냥 그들 네트워크의 명분일 뿐이라는 것, 그래서 가급적이면 어떤 입장에 있더라도 기성 언론의 태도는 잘 새겨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2007년 1월 국무회의 발언 한 대목이다. 참여정부는 87년 체제를 마감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소위 특권과 유착, 반칙과 뒷거래의 구조를 청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가장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는 집단이 바로 언론 집단입니다. 대개 87년 체제의 마무리가 되고 다음 정부에 정권을 넘겨줄 것으로 생각하지만 언론 분야 하나만 은 제대로 정리가 안 될 것 같습니다. 어떤가? 노무현이란 사람, 정말 순진하지 않는가? 저렇게 하는 걸 정리라고 생각 한 것도 그렇지만, 정작 특권 유착 반칙 뒷거래에 자유롭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 운지 패배주의를 너무 많이 이 사회에 심어준 것 같지 않은가? 참여정부로 불리 는 노무현 정권은 이처럼 매우 아마추어적이었다는 걸 오히려 이명박 정권의 언 론 통제방식과 비교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언론도 이명박 정권에서는 조중동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정작 피해자가 되었다. 그들도 노무현의 말뚝에 아프 다고 비명을 지르면서 노무현을 공격했지만 이 정권 하에서는 그들이 공격 당하 고 아파한다. 묘한 순환을 발견한다. 자정능력이 없으면 이런 일은 앞으로 어떤 사태로 발전할지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건 지금 기성 언론은 신뢰의 한계에 자 꾸 부닥치고 있다는 점이다. 알 권리가 문제가 아니라 쓰레기로 취급되기 시작하 면 걷잡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진다. 정보의 새로운 전파 시스템이 나오지 않으 리란 법도 없다. 언론 권력에 대한 통제는 다음 정권에서도 쉬운 과제는 아닐 듯하다. 그러나 반 드시 하지 않고 지나갈 일은 아니다.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한다면 말이다. 대선 주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보다 직접적으로 말해서 지금 같은 언론 구도를 손볼 것인가 말 것인가? 그리고 언론 판의 사람들은 자기 밥그릇 건드린 다고 또 어떻게 대응할까? 자정능력이 없어진 기득권력의 욕망으로는 세상에 온 전한 알 권리 를 충족시키기는 어려울 텐데 말이다.

페이지229 2. 뭘 두려워하지? 겨울 들 / 천양희 마들에 나가 들판을 본다 눈 끝의 새 본다 들풀에도 새가 앉네 새는 가벼우니까 들판의 새보다 더 가난한 게 있을까 가난은 가도가도 가벼운 것 가벼운 것이 들 한쪽 물고 어둔 구름에서 나온 번개같이 날아간다 거침없이 허공을 무서운줄 알아야 한다고 경고라도 하듯 거침없이 하늘 추워지고 꽃 다 진다 꽃 진 자리에 새 울음 남아 있다 저 울음보다 맑은 가난이 또 있을까 허허들판. 2012.1.5 고도원의 아침편지의 제목은 두려움 이었다. 배우는 삶 재단 의 설립자 인 가이 판리(Guy Finley)의 내려놓고 행복하라 (흐름출판, 2011)중의 한 대목 이 적혀 있었다. 어떤 고통이나 불편이 느껴지는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은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이런 순간에 우리를 제한하는 것은, 부 딪혀 극복하는 것을 가로막는 우리의 두려움이다. 누구나 두려워한다. 그것이 어색한 건 아니다. 그러나 너무 자주 그 두려움이 찾

페이지230 아오고 그에 빠지게 된다면 그 삶은 분노 혹은 좌절 같은 감성으로 빠져들지 모 른다. 공포( 恐 怖 )는 극렬하게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비이성적인 두려움이다. 여러 유형이 있다. 고소공포증이니 광장공포증, 폐쇄공포증 등이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자꾸만 데자뷰로 반복될 것 같은 느낌의 두려움은 무엇이라고 부를까? 두려 움의 반복이라는 공황장애가 아닌 불안을 동반한 두려움 말이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흔히 두려움을 건넌다 하는-은 여러 가지가 제시된다. 부교감 신경을 활성화한다, 다른 감정을 일으킨다. 원초적인 생명력을 느낀다, 좋 아하는 이미지를 상상한다, 자신에게 편지를 쓴다는 등이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 면서 말한다. 두려움에 머물 것인가, 두려움의 저편으로 넘어갈 것인가. 이명박 정권을 겪으면서 많은 이들이 하는 말은 짜증스럽다 는 것이었는데, 그것 은 아마도 야구로 따지자면 지나친 스몰볼 의 경기운영처럼 자꾸만 사회의 많은 것들을 아주 잘게 부수면서 찜찜하게 만들어 많은 이들에게 괴롭다는 느낌을 준 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저 감정은 좀 더 확대되어 이제는 어떻게 저런 일이 라는 어이없는 지경도 벗어나는 듯하다. 아직도 자전거길 을 운운하는 사람이 있 고 보면, 정신상태의 검증을 해야 한다는 견해까지 과히 틀린 것 같지는 않다는 동감이 든다. 거기다가 최악 중의 최악은 여전히 반성할 줄 모른다는 점인데, 이 건 지난 4년 여 후안무치( 厚 顔 無 恥 )라 불러야 하는 국가 사회에 대한 접근법에 대해 어느 시점에선가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어야 하는 기본에 속한다. 앞서 트라우마 를 잠깐 봤지만 다시 이런 정권이 나온다는 건 정말이지 상상하기 싫다. 짜증이니 분노 수준이 아니라 이건 종종 두렵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왜 박근혜가, 새누리에 반감을 가진 사람이 많은가 보면, 대부분은 이러한 두려움의 지속, 연장선상에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 까지도 있어서다. 그래서 박근혜의 제1 과제는 정책을 내놓으며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보다 이 정권, 그러니까 이명박 정 권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슬슬 그런 조짐이 보인다. 정권 말기의 보편적인 현상과는 조금은 다른 현재권력 과 미래권력 간의 강한 갈등이 시작된 느낌이다. 이 대통령 박근혜 흔들기 나섰나 왜? 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209/h2012093021260321060.htm 기사 가운데 2가지 팩트가 눈에 쑥 들어온다. 이상득에 대한 조기 석방 의사를 보였는데 반대해서 갈등이 생겼다는 것, 9월 13일 박근혜의 대북정책 관련 인터 뷰가 MB의 북한 이벤트 계획을 빛 바래게 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소식통 을 통해 들어온 것이긴 하지만 딱히 틀 린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MB가 안철수를 밀고 있다는 루머는 오래 전부터 돌았 던 내용이다. 그것이 이명박-박근혜의 결별 수순의 후속조치라는 것이었고, 그를

페이지231 통해서 최소한 퇴임 후의 입지는 보장 받기 위해 애쓴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여전히 현재권력인 MB 입장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여권 대선후보를 압박할 수 있는 카드가 있다. 보통 생각하면 과연 권력기관의 미래권력에 대한 충성을 감안 하면 이게 쉽게 벌어질 일은 아니지만, 여전히 권재진 체제의 친위형 사법권력을 운용하는 MB 입장에선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벌써 납 득하기는 타이밍에 현영희-홍사덕으로 이어지는 사건이 터졌다. 갈등은 현재화 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친이계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박 후보 측이 군림하듯 대통령을 무시하고 MB계 인사들을 홀대해선 곤란하다. 대통령의 도움이 없으면 박 후보의 대권도 멀어질 수 있다. (친이계 인사) 이 정도면 협박도 좀 질이 낮다. 거래할 품목을 꺼낸 것 치고는 좀 하수가 아닌 가 싶을 정도다. 오히려 거래에 담합하는 순간, 사실 박근혜는 대선 레이스의 최 하위에 떨어질 각오를 해야 할 정도라는 걸 생각하면 말이다. 5년의 집권 기간이 긴 듯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경험을 해본 이들은 알 것 이다. 이제부터는 이른바 청소 타임이 다가온다. 이명박은 배고프다? 이 말이 이렇게 끔찍할 줄은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267 이명박 정권에 대해 아마도 상당수 언론사들은 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을 것 같 다. 흔히 말하는 몇 년 근( 根 )을 들고 있으면서 있는 곳은 언론만이 아니다. 검찰, 경찰, 여의도 등 다양하게 정보를 취급하고 있는 곳들, 정보력이 있는 곳은 이 정 권의 치부를 들고 있다. 인삼에 빗대어 하는 1년 근, 3년 근, 5년 근 하는 식으로 묵혀둔 정보를 시의적절 하게 사용하는 것인데, 그에 이 정권도 예외는 아니란 의미다. 마찬가지로 현재 권력도 그걸 이용해서 대선 레이스에 활용하면서 거래 혹은 담합을 할 확률도 커진다. 그에 누가 힘을 보탤 건지도 보는 게 이 게임의 관전 포인터가 된다. 5년 권력의 순환이란 이처럼 재미난 장면도 연출한다. 그러 나 왠지 이 게임 자체가 좀 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기성 언론이건 어떤 소위 언론 이란 타이틀을 단 곳에서 이 사안을 어떻게 다룰지도 관심거리다. 노 전 대통령은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듯하다. 순진했다는 말은 그래서 나 온다. 정권 말기에 아주 치고 받고 언론권력과 싸웠다. 기자실 통폐합을 해버리고 조중동이건 한겨레, 중앙 등 언론이라고 이름 붙인 모든 곳과 싸웠다. 오마이 뉴 스는 아니었던 듯도 하지만. 그렇게 하고서도 나름 대책이라고 할 방안도 생각은 했을 터이다. 대통령 사료( 史 料 )도 그래서 벌어진 것일 터이니. 민주주의 2.0 같 은 경우도 비슷한 대비에 해당했을 것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명박 정권의 성격 규정에 노무현은 실패했던 게 가장 큰 패착이었다는 판단을 해본다. 결론은 속말 로 전임 대통령 대접을 전혀 받지 못했다 로 귀착된다. 그에 협조했던 이들이 지 금 민주통합당에는 아주 많다.

페이지232 역사는 동일한 여건이 없지만 그래도 프레임이 유사한 경우가 주어지면 늘 결론 까지 이르는 과정과 결론 근처에서 진행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보였 다. 이번엔 어떤 과정을 거칠까?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까? 비극 혹은 장난? 아무 렴, 장난처럼 그렇게 지나가는 건 좀 어렵지 않겠는가. 그렇게 내버려두면 이 시 대가 너무 안타까워지지 않겠는가. 도대체 이명박 정권은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장난 으로 만들지 못할까 해서? 그렇게 빠져나가지 못하고 비극적인 상황이 닥칠까 봐서일까? 우리는 이제부터 그것을 지켜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이 정권 이 똑같이 되풀이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은 대중의 많은 이들이 가졌다. 마찬가지 로 이 정권이 제대로 심판되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거의 공포적 감정이다. 그래서 언뜻 생각한다. SLS 이국철로부터 로비 자금을 받 았다고 구속된 이상득 하나를 조기 석방하는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정권의 썩은 속살을 어찌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거기다가 아직 매듭도 제대로 짓지 못한 저 축은행 사건은 또 어떻게 하는가. 그냥 그렇게 일사부재리 해버리고 입 씻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게 보인다. 그렇게 처리하고 다 음 정권의 수권능력을 말하는 건 국민에 대한 기망이다. 그래서 대중이 원하는 바는 간단하다. 이 정도에선 현재 권력과 단절을 약속하는 대선 레이스가 펼쳐져 야만 한다는 것. 이거 참 간단하다. 단절하지 않는 건 곧 덮겠다는 소리와 똑같다

페이지233 고 보니까. 은행에 돈 맡긴 죄로 거리에서 1년 6개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4340&cmpt_cd=p000 0 우리가 이러한 권력비리를 처리하는 전체 과정에 주목하는 뜻은 간단하다. 그러 한 일의 재발 방지를 위한 것이다. 전례를 보면 이런 일은 쓱싹 처리하고 묻히고 만다. 마치 그것이 권력의 마패를 든 자들의 특권인 것처럼 말이다. 사회 정의니 하는 말은 다 개/뿔이다. 그런데 너무 오래 반복된다. 이번도 되풀이 된다면? 대 중에게 그 트라우마를 어떻게 또 감당하라고 하는 것일까? 두려움이 자꾸 거듭되 면 그것은 좌절보다는 극심한 분노에 가깝게 옮겨간다. 이런 상태에서도 그걸 (권력을 동원해서) 막는 게 사회안정성의 확보라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3. 정권심판론은 뜨거운 감자인가? 가는 길 / 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페이지234 에릭 홉스봄이 세상을 떠났다. 너무 유명한 지식인이어서 더 설명이 필요할까 하 는 생각마저 든다. 영원한 공산주의자,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타계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276 현재로써는 가장 몰두해야 할 일이 미국을 말리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미국을 교육하거나 재교육하는 것 이란 말로 미국의 힘에 의한 폭력신화를 반드시 의심 해야 할 위험한 사상 으로 못박은 사람이다. Age 를 타이틀로 한 소위 시대 시리 즈 4부는 필독서라 할 수 있다. 혁명의 시대 (The Age of Revolution: Europe 1789-1848) (영어판: 1962년 / 한국어판: 1982년 까치, 1998년 한길사) 자본의 시대 (The Age of Capital, 1848-1875) (영어판: 1975년 / 한국어판: 1998년) 제국의 시대 (The Age of Empire) (영어판: 1987년 / 한국어판: 1998년) 극단의 시대: 단기 20세기사 (Age of Extremes: the short twentieth century, 1914-1991) (영어판: 1994년 / 한국어판 : 1997년) 그가 호기심을 가져라. 호기심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자산 이란 유언 을 남겼다고 한다. 의외라고 생각하나? 아니다. 역사학자라는 타이틀을 생각하면, 이 말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역사라는 건 지난 일들이지만 그건 호기심이 없으 면 절대 추적하거나 수집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남긴 말이 공감 간다. 이명박 정권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다양한 각도로 조망이 이루어질 것이다. 마이 클 무어처럼 한국의 맥쿼리 커넥션을 파헤친 다큐멘터리 <맥코리아>(김형렬 감 독 작품, 10월 18일 개봉)도 나온다. 민자사업을 둘러싼 이 정권의 국익과는 전 혀 상관 없는 개별 커넥션에 대해 맥쿼리 를 통하여 보는 것이다. 말도 많고 탈 도 많았지만 어쩌면 권력이 금력과 결합했을 때 얼마나 대중에게 무정( 無 情 )한 존재인지, 그리고 대중은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볼 수 있을 거란 기대도 된다. 이 작업도 시작은 호기심부터였다. 들어가다 보면 온갖 고난을 겪게 된다. 방해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정도 되면 정권 말기가 아니라면 쉽게 나올 수 있지 못한 주제라는 평가가 나올 만도 하다. 그것이 안타깝다. 맥쿼리 이야기 는 정권 초반부부터 줄기차게 등장했던 소재니까. 오히려 힛트앤런 방식으로 치 고 빠지고 난 다음 상투 잡는 격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필요한 일이다. 너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이유는 이명박 정권의 철저한 분석과 비평 속에서 자세 히 보도록 하자. 지금 시점에서 이 정권이 제대로 된(정상적) 권력으로 기능했다 고 보는 사람은 내 주변만 보면 열 가운데 하나도 안 된다. 하나가 안 된다는 사 실은 매우 의미 있다. 전체적인 공감까지 이를 수 있단 의미니까. 하나의 정치 권력은 집권이란 과정이나 혹은 집권하지 않고 정당 혹은 정치세력

페이지235 으로 남아있더라도 그 권력을 가진 바에 의해 책임을 져야 한다. 당연히 집권이 란 형식으로 국가 권력을 가졌다면 그 권력의 실행에 무한 책임을 진다. 생각해 보면 5년은 정말 짧은 시간이다. 365일 x 5년 = 1825일. 겨우 이 정도인데 어 쩌면 온갖 비리비리한 사건들이 이 속에서 끊이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권력욕망이 강하더라도 올라가지 전과 올라간 이후는 다르다. 내려와야 할 때가 되면 맨 처음 1일을 시작했을 때가 기억날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아무래 도 상관이 없는 건 그 권력의 욕망은 강제적으로 식어버리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기에 그렇다. 그 조망되는 바는 실제로 그 욕망의 시작부터겠지만 대체로 집권의 전후가 아닌 집권 전의 상황부터 훑어보게 되는 게 기본이다. 파이시티를 둘러싼 이명박 측근들의 행보처럼 말이다. 정권심판론은 미래권력이 현재권력에게 항상 하는 말 가운데 하나다. 그 말을 숨 기건 아니건 관계 없다. 한국에서 말하는 보수가 보수로 진보가 진보로-이 말 자체를 인정하지 않긴 하지만-권력을 이어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엄밀히 이것 은 집권 시기의 과( 過 )에 집중되어 있으니까. 현재로 봐서 정권심판론의 가장 불편한 당사자는 박근혜다. 새누리당의 개명 전 이름은 한나라당이고 여당이며 나아가 집권당이란 이름을 들었다. 이명박근혜 의 구도로 도매금으로 넘어가야 할 일도 적지 않았다. 당내 사정이야 친이 친박이라 는 친 정권파와 친 박근혜파의 계파가 있었다지만 그건 내부 사정이고 그 프레임 은 분명히 친 정권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니 현재권력인 이명박 정권- 이 단어도 재미나다. 여러 앞선 집권자들이 국민의 정부니 참여정부니 이름을 붙 였는데 이 정권은 유별나게 이명박 정부라고 했다.-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 듯 이명박의 개인 사당( 私 黨 )처럼 집권 초기 움직였다. 많은 이명박 정권의 욕망 에 새누리당은 눈을 감았고 동조했다. 마치 그것이 정치인 것처럼 말이다. 침묵도 하나의 언어라는 사실, 이게 대단히 중요하다. 이명박 정권의 행보에 침묵 으로 화답을 했던 이들이 절치부심해서 당내의 계파 전쟁에서 승리를 했다고 해 서 절연( 絶 緣 )이 되었나? 아니다. 갈등은 있을망정 지금도 정권심판론에 있어 이 명박-박근혜는 이명박이 당적( 黨 籍 )을 유지하는 한 한몸으로 엮인 존재다. 대선 이 80일도 남지 않은 지금, 이 사실이 그토록 중요한가 반문도 있겠지만, 답은 중요하다는 걸로 귀착된다. 왜냐하면 이 구도는 한 몸이지 타자( 他 者 )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새누리는 정권비리가 대선 전에 터져 나올까 봐서 노심초사하 는 움직임이다. 이건 아주 심각한 빌미가 되고, 다른 어떤 것보다는 이미지의 타 격이 가장 크다. 선거는 이미지 전쟁 준비가 전체 영향력에서 최소 50% 이상을 차지하는 화력이라고 하니까. 그래서 망설이는 흔적이 역력하다. 선거가 끝나지 않았으니 지금 할 말은 아니지만 만일 패배한다면, 가장 큰 패인은 여기에 있을 지 모른다. 미래권력이 엉망진창이 된 현재권력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이미지 를 대중에게 준다는 건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니까.

페이지236 국민 대통합을 말하는 박근혜의 입장에서도 친이계를 수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순간, 미래권력이 손에 쥐어진다고 해도 그 굴레를 벗 어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요즘 부쩍 협박을 많이 받는 모양이다. 협조 받지 못 하면 (선거를) 장담할 수 없다 는 식이다. 그런데 친박 쪽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건 수용 가능한 패턴은 아니란다. 고개를 숙여도 모자랄 판에 저런 태도는 아니 란 게 요점이다. 두 세력 간의 알력은 이어지는 셈인데, 이런 어정쩡함은 속말로 양다리 걸치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문재인의 경우엔 칼을 갈고 있는 게 눈에 선히 보인다. 아무리 겉모습으로 편하 게 포장한다 해도 사람은 말투 하나 행동 하나에 그 속내가 엿보인다. 노무현- 이명박으로 이어지는 시기, 폐족( 廢 族 )을 말하던 사람도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던 이도 지금은 정치 일선으로 나왔다. 친노가 부활했다는 말은 거짓은 아니다. 다시 마이너리티에서 메이저를 넘볼 수 있는 자리로 왔다. 이건 대단한 일이다. 그만큼 야당의 경쟁력이 형편이 없다는 소리도 되지만. 그 가운데를 칼을 든 사람 하나 가 보인다. 병사도 많다. 그러나 지난 4.11 총선에서 패배를 하고 나서 어쩐 일인지 동력을 잃었다. 정권 심판론이 아닌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선거였다. 잘 먹 히질 않았다. 곰곰이 그 경과를 거슬러 가보면 바로 박근혜라는 개인의 존재 하 나가 있었다. 정권심판론을 막고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다. 아무리 여론조사의 수 치가 좋게 나와도 지금 정권심판론을 다시 꺼내야 하느냐 마느냐에 주저하는 모 습도 엿보이는 건 그런 전략적 선택에 망설이는 모습 같기도 하다. 이건 마찬가 지 패착이다. 지금 시점에서는 정확하게 정권심판론이 나와야 한다. 엉성한 각도 에서 총선용으로 말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닌 좀 세밀한 부분이 건드려져야 한다. 어쩌면 그런 분위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변수가 바로 피를 싫어하는 유권자 층 에 대한 분석이다. 아무리 타당 한 이유가 있어도 칼바람에 피가 흩뿌려지는 걸 싫다고 고개를 돌리는 그런 유권 자-특히 여성-를 고려한 부분이 있다. 더 나가 보면 정작 정권 단죄라는 항목은 민주통합당이 베이스로 깔고 들어온 것이니 굳이 이 사안을 부각하지 않아도 좋 겠다는 전술적 선택도 있다. 과연 이 분석은 타당할까? 개인적 관점에서는 이것도 패착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안철수에게서 찾을 수 있 다. 기성정치에 대한 혐오는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새로운 정치 프레임 에 대한 기대는 긍정적인 것으로 향한다. 안철수 현상의 핵심은 기성에 대한 반 발이다. 그 속에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건 바로 집권한 자들에 대한 의구심이다. 그에 이명박 정권이 빠질 수는 없다. 관건은 이것을 부각해야 하는 시점이겠지만 여전히 정권 말기에도 검찰 등 사법 권력을 놓치지 않고 있는 이 정권의 꼼수에서 사건화 시켜서 이끌고 가기 힘든 구조가 형성된 것도 사실이고, 재미나게 대선 주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여러 사건 들로 물타기를 시도하는 검찰의 행태에 야당이 놀아나고 있기도 하는 상태이니

페이지237 이게 참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안의 올바른 길은 정확한 입장을 밝 혀주는 것에 있다. 그것이 오히려 민주당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는 것이다. 안철수의 경우는 참 애매하다. 정확한 레토릭이 구사된 적이 없다. 모두 애매하 다. 네 편 내편 하는 식의 접근은 처음에는 가능하다. 그러나 평가에 의해 편을 가르고 난 다음엔 무얼 하고 어떻게 하고가 나와야 하는데 그게 없다. 이 모호한 입놀림에 진력이 난 사람들이 많다. 이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정권을 단죄하자는 건지 아니면 난 네가 싫어요 수준인지 그 경계조차 애매하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안철수 카드라는 것이 MB가 키운 일종의 캐스팅 보트처럼 등장했다는 말을 한다. 그걸 해소할 생각도 없는 듯하다. 네거티브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곧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 아야 한다는 것과 통하는 건 아니다. 전혀 다른 일이다. 그런데도 그저 뜬구름 잡 는 이야기만 한다. 소통이니 혹은 혁신이니 하는 말들은 그 단어 자체는 좋지만 반드시 과정의 검증을 기본으로 한다. 즉, 어떻게 라는 후렴구가 붙게 되어 있다. 이를테면 내가 저 태평양을 건너가겠소 라고 말하면 환호하지만 그 박수의 끝에 는 반드시 어떤 도구로 어떻게 험악한 기후조건의 예측 난망한 변화 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준비로 가야 하는가를 말해야만 한다. 그게 없다. 이 사안에서도 똑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현재 권력의 단죄 문제도 통섭( 統 攝 )의 지혜를 꺼낼 참인가? 좀 우스운 일이 되고 있다. 정권심판론, 정권 단죄는 전혀 뜨거운 감자가 아니다. 솥에 넣고 삶지도 않았는 데 무슨 놈의 뜨겁다는 소리가 나오는가! 이 하나의 사안에서 아주 빠른 시간 내 의 미래를 본다지만 나는 그보다 더 긴 시간 이후의 미래가 떠오른다. 한 번은 하고 지나가야 한다. 피할 수 없는 길이다. 4. 누군가 설계하는 꿈 장대비 / 조용미 오래된 쇠못의 붉은 옷이 얼룩진다 시든 꽃대의 목덜미에 생채기를 내며 긴 손톱이 지나가는 자국 아픈 몸마다 팅팅 내리꽂히는 녹슨 쇠못들

페이지238 떨어지는 소리 하얀 마당에 푹 푹 단내를 내며 쏟아지는 녹물들 붉은 빗금을 그으며 머리 위로 떨어지는 닭벼슬! 맨드라미! 백일홍! 해당화! 엉겅퀴! 큰바늘꽃붉은잎! 신음소리를 내며 막 벌어지는 상처의 입들, 눈동자를 붉게 물들이며 나쁜 피를 다 쏟아내는 저녁 조영래 변호사. 이 아깝디 아까운 진짜 천재의 1981년 12월의 어록 하나를 꺼내 본다. 지금까지 충분히 실천은 못하였으나 4개월 동안 내가 수행하려고 하는 제일보 는 피의자 또는 참고인, 가족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 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 록, 다른 것은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은 수가 없겠다. 만약 친절히 해서 일이 안 된다는 것을 내가 마침내 승인하게 되는 일이 만의 일 이라도 생긴다면 그것은 나에게 더할 수 없는 심대한 패배가 될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혹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서는 안 된 다고 한다면, 인간성에 거는 우리의 모든 신뢰와 희망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를 추모하는 책의 이름이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창작과 비평, 1991)이었던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 썼던 익명으로 출판 했던 바로 그 책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 사회에 서 전태일 은 묻혀지거나 잊혀진 죽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탄생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 분의 뜻이 과연 오늘 그 곳에서 제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가는 정말 의문이다. 사회는 90년대 이후 지난 20여 년간 정말이지 복잡해지고 변수가 많으며, 위정자들은 더욱 변명할 여지가 많아진 세상으로 변해 있다. 이럴 때, 고 조영래 변호사를 떠올리는 건 당연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안타까운 요절( 夭 折 )이란 이런 경우 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는지. 그가 남긴 저 어록의 세상은 두 가지로 충족이 가능하다. 하나는 권력이 우월감 으로 대중을 위압하여 위축되게 만들지 않는 세상, 다른 하나는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인간성의 기본에 대한 희망이 있는 세상이다.

페이지239 아무리 많은 정치적인 견해( 政 見 )이 나와도 이보다 더 강할 수는 없다. 가장 기 본 중의 기본인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나머지는 모두 허상이니까. 그 속에 아 무리 잘난 경제가 있어도 소용이 없고, 아무리 편안한 미래가 있어도 모두 반가 운 일은 아니다. 권력의 개가 되지는 않겠다고 말해도 권력 스스로가 대중을 개 로 만들어버리는 땅에서 개가 되지 않는 방법은 오로지 사람이라고 자각하는 방 법 외에는 없으니 말이다. 정치를 보면서 그들이 설계하는 세상에 대한 꿈을 본다. 마치 이것은 우리가 그 꿈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굴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여기에 공생( 共 生 )의 묘미는 없다. 아프리카 초원의 그 넓은 대지 위에 펼쳐진 풍경과 그 속의 삶은 다른 문제다. 그러나 그런 아프리카가 요즘 몸살을 앓고 있다. 가뭄 때문이다. 물 부족이 우려 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유를 찾아 가면 인간이 나온다. 밥을 해먹기 위해 사용하는 연료는 숯이다. 숯은 나무를 통해서만 나온다. 케냐 나이로비에서 하루 에만 필요한 숯의 양은 나무 800그루 분량이라고 한다. 전체를 따지면 도저히 나무의 자라는 속도와 숯의 소비 간에 균형이 맞을 턱이 없다. 가뭄은 나무가 사 라진 숲에서 쉽게 오는 자연재해지만, 이건 사람으로 인한 재해라고 봐야 옳다. 정치는 대중을 권력이란 이름으로 죽인다. 명분을 대어 억압한다. 그러나 그런 숲, 초원에서는 정작 정치가 사는 게 아니라 정치가 죽는 길 밖엔 없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금권은 노동자를 도구로 생각하지만 결국 어느 시점이 되면 경제가 죽는다. 그걸 죽지 않는 길이 아닌 죽음을 연장하려고 간 길이 바로 금융자본주 의이고, 생산이 없는 경제로 만들어 놓고 생산을 통제한다. 막장 금융자본주의의 속성은 대중에게 빼먹을 만큼 고혈( 膏 血 )을 모두 빼먹어가며 생명을 연장한다. 여기에 분배는 아주 자그마한 생명선일 뿐이다. 그래도 정치에 기대는 건 최소한 이런 일의 균형을 맞춰주길 바라서다. 조영래가 말한 인간성에 거는 신뢰와 희망 은 정치건 경제건 사람이 하는 일이라 보기에 그리 말한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한국의 정치는 강하게 사람이 아닌 카르텔에 예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명 박 정권의 경우 그 일례를 명확하게 보였다. 마치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처럼 포장했지만 그 속살은 참으로 더럽고 천박한 왜색주의에다 듣보기 장사꾼 수준으로 엮어진 것에 불과했다. 그 카르텔이 잠식했던 지난 5년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생각해야 한다. 그 알량한 경제살리기 구호는 마침내 숱한 죽음을 불 러 왔다. 이 시대가 먼저 죽었다.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져온 어리석기 그지 없 이 선택해버린 한 사회의 카르텔 예속 구조는 이명박에 와서 공고한 수준이 아니 라 활개짓을 펼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들의 사욕( 私 慾 )이 너무도 지나쳐서 그 정체가 일찌감치 드러난 것일 뿐. 누군가 우리의 꿈을 이렇게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소름이 끼친다. 맥

페이지240 쿼리 이야기의 골자는 민자사업이 아니라 향후 30년이란 구도다. 한미FTA의 경 우도 마찬가지. WTO 설립을 위한 마라케쉬 협정에 의해 최소 10년간 유효하고 역진방지장치(ratchet)에 의해 최소 10년간 그 효력이 더 지속된다고 한다. 20년 이다. 그 동안은 사법주권, 입법주권, 행정주권의 실질적인 제한이 작동한다. 미 래 세대를 걸고 들어간 도박이다. 그것도 누군가에게 퍼주기 위한 것이지 결코 대중을 위한 것은 아닌 구조 속에서 말이다. 전체를 위해 일부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를 꺼내는 경우, 이것은 마치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 는 말의 연장으로 들린다. 전체는 무엇이고 일부는 또 무엇일까? 그들은 대중이 아 닐까? 여기서도 결국 이해관계가 나온다. 사회 속의 일부는 이해관계의 희생자가 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전체의 1%가 아닌 99%를 걸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런 구도를 만들고자 하는 자체가 사람을 사람 아닌 개체로 본다는 뜻과 일치한다. 흔히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전술을 수행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한 특공대처럼, 혹 은 작전 성공을 위하여 주위를 돌리기 위해 쓰는 버리는 카드 처럼 그렇게 누군 가, 어떤 전쟁 수행 집단이 희생양이 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 대선 레이스 속에서 자꾸만 사람을 찾게 된다. 누가 과연 사람을 사람답게 생각 하고 있는가를 보는 셈이다. 겉치레의 용어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막연한 꿈 속을 헤매게 만들 그런 입에 발린 소리에 현혹될 필요도 없다. 정작 봐야 하는 건, 바로 저 꿈 가운데서 지금 살아가는 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걱정하 고 가는 마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본다. 참으로 황망( 慌 忙 )하지만 그런 이가 보 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렇게 한 번 해보라고 글을 쓴다.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걸 보여봐라 말하는 거다. 그래도 나오지 않고 있다. 참 갑갑한 정치판이다. 5. 수상( 殊 常 )한 정치 진흙탕에 찍힌 바퀴자국 / 이윤학 진흙탕에 덤프트럭 바퀴자국 선명하다 가라앉은 진흙물을 헝클어뜨린 바퀴자국 선명하다 바퀴자국 위에 바퀴자국 어디로든 가기 위해남이 남긴 흔적을 지워야 한다 다시 흔적을 남겨야 한다 물컹한 진흙탕을 짓이기고 지나간

페이지241 바퀴자국, 진흙탕을 보는 사람 뇌리에 바퀴자국이 새겨진다 하늘도 구름도 산 그림자도 바퀴자국을 갖는다 진흙탕물이 빠져 더욱 선명한 바퀴자국 끈적거리는 진흙탕 바퀴자국 어디론가 가고 있는 바퀴자국 심상( 尋 常 )은 수상( 殊 常 )의 반대말이다. 심상치 않다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한자로 보는 세상] 尋 常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982620&ctg=13 왜정 시대 초등학교는 소학교( 小 學 校 )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거기에 앞에 붙은 말 이 바로 심상( 尋 常 )이란 단어가 붙었다. 그러니까 보통학교라는 말이었는데, 이 말은 1941년 국민학교 령 에 의해서 명칭이 국민학교 로 바뀌었다. 사실 이 말 은 심상 ( 尋 常 )이란 단어의 유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민( 常 民 )들이 다니는 학 교라는 아주 계급적인 용어가 포함된 것이었는데, 그것이 국민 ( 國 民 )이 되었다 해서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왜냐하면 국민학교 령 자체에서 국가 ( 國 家 )는 이 미 황국 ( 皇 國 )이 되어 있어 국민 자체가 모두 일왕의 백성(상민)으로 규정되어 있어서다. 혹자는 심상 이란 단어를 일본이 개념적으로 그대로 옮긴 한자말로 생각하지만 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유광종 부소장의 설명처럼 저것은 엄연하게 원전( 原 典 ) 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두보( 杜 甫 )의 시편에도 나오는데 곡강 ( 曲 江 )이 란 시는 칠십 세를 뜻하는 고래희 ( 古 來 稀 )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속에도 심상 은 있다. 가는 곳마다 외상 술값은 늘 있는데/인생은 예부터 칠십 살기 드무네( 酒 債 尋 常 行 處 有 / 人 生 七 十 古 來 稀 ) 나이 70 이전에는 외상 술값을 보통 깔아두고 사는 게 인생 진짜 맛인지도 모 르겠단 생각도 든다. 지금은 그런 맛도 별로 없지만 말이다. 잡설은 좀 미루고, 정치가 수상하다 했으니 무엇이 그런가를 봐야 한다.

페이지242 만기친람( 萬 機 親 覽 )이란 말이 등장했다. 다시 만기친람 인가? (2008.9.29)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929160336&section= 리더의 스타일에 관해서는 무엇이 정석이다 말하기는 어렵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에는 CEO 스타일이라 해서 무엇이건 자신이 다 봐야 한다는 저 단어가 등 장한 적이 정권 초기부터 몇 차례 된다. 그 이후에는 과연 정말 만기를 친람을 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가 보고픈 것만 챙기는지 모를 지경도 있었지만, 여하튼 스타일의 정의는 일단 만기친람 이란 단어에 녹아 있다. 거기에는 민의를 녹이거 나 혹은 정치의 전후좌우를 살피는 것이 없다는 볼멘 소리도 섞였지만 기업형 리 더는 하나라도 다 챙기지 않으면 어디에서 어떤 사고가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작은 기업이라면 그렇게 해야 큰 사고 없이 굴러가기에 그렇게들 한다. 큰 기업이라고 해서 이 패턴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철저하게 만기친람 하는 구도를 짠다. 그래서 이 스타일이 나쁘니 좋으니 말할 건 없다. 문제는 국가운영이다. 전봇대 뽑을 때부터 봤지만 반짝 하는 아이디어 형 지적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큰 그림에 맞게 전체를 시스템화해서 움직이는 건 합리적인 역할 분담을 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게 말이 쉽지 그리 되지를 않 는다. 권력은 절대 분산되어서 가동되는 게 아니란 범례도 있으니까. 2인자의 고 통을 말했던 고 허주( 虛 舟 )의 이야기가 들리는 듯도 하다. 스타일로만 본다면, 박근혜와 안철수는 각각 만기친람 형의 전형을 보여준다. 문 재인의 경우는 딱히 이 스타일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워낙 민주당 내의 계파간의 갈등이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연합을 시도해야 하는 과정에서 만 기친람보다는 다른, 그렇다고 합리성이 강조되기 보다는 정치적 목표에 기대는 모습을 보인다. 이게 아마도 빅 텐트II. 라는 과제 때문에 그렇기도 할 것인데- 여기는 안철수를 끌어 들이는 문제도 당연히 포함된다.-그에 과거 친노세력이 가졌던 방식인 협의체적인 토의도 한 몫을 단단히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리더의 자질 문제를 말할 때 흔히 사용하는 비판의 레토릭은 독재성향, 2인자를 허용하지 않는 구도, 모든 최종 결정은 리더 혼자 등이 나오는데, 이건 과연 그런 비판이 타당한가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너무 민주 ( 民 主 )라는 말헤 미혹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좀 더 들어가보면 자라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보고 놀란 식으로 이명박 정권에서의 이명박 대통령이 꺼낸 여러 행동양식 들이 좀 코미디 같은 레토릭으로 점철된 만기친람 형이었다는 걸 빗대어 나온 것 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나도 왕년에 라는 말이 유행했지만 그렇게 접근하 는 세세한 지시는 큰 그림과 어울리지 않았고, 그러니 보는 이 입장에선 이게 무 슨 엉뚱한 이야기냐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페이지243 사람들은 여러 가지를 보고 리더의 자질 문제를 거론한다. 성공한 사람들의 경우 에는 성공 이후에 그 자질 이야기를 정리해서 내놓는 경우가 많다. 스티븐 잡스 리더십이나 링컨 리더십이니 하는 건데, 나는 솔직히 이런 책을 귀감으로 삼는 것 자체가 별로 내키지 않는다. 그건 성공한 자의 그냥 정리에 불과하다. 실패한 자의 리더십 가운데서도 그와 똑 같은 패턴을 구사한 자는 많다. 성공과 실패는 그렇게 구분되기 보다는 여러 다른 요인들이 너무 많아서 모두 담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보자면, 이런 책들이 별로 보기도 내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질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그건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니까. CEO의 한계를 말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안철수는 거대 기업을 경영하고 정 치 일선에 나왔던 정주영의 실패와는 또 다른 각도가 엿보인다. 좀 과장되어 있 다. 안철수의 성공의 이면에는 그가 배치했던 여러 전략들이 있다는 소리다. 벤처 기업이 투자를 받고 그리고 금융 카르텔의 지지를 받으면서 성장하는 구도는 한 국 실정에서 보자면 그 자체가 특혜였다.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고 사업화에 뛰어 들었지만 실상을 뒤집어 보면 아니었다는 대표적인 사례는 심형래 케이스에서 본 다. 한참 잘 나갈 때, 그가 했던 인터뷰를 보면 이건 뭐 애국 신드롬이 따로 없지 만 정작 그 속살은 형편없이 무너져 있었다는 것, 포장만 그리 되었다는 거다. 안 철수에게서도 이 검증 과정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올 것 같다. 박근혜의 경우에도 퍼스트 레이디로 6년을 활동한 과거가 있다. 정치를 오래 전 부터 했다는 것이고 박정희 시대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나온다. 친이계와의 험난한 싸움에서 이겼다는 점을 높이 사는 사람도 있다. 정치 적 자질이란 면에서는 누가 여기에 함부로 말할 사람은 없다. 심지어 수첩공주라 는 별칭까지도 그렇다. 그러나 중요한 사안마다 선도적인 결정보다는 사태 추이 를 봐서 자신의 입장을 내놓는 이른바 관찰 후 태도확정의 모습은 결단력보다는 기다림이 강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것도 함부로 호불호를 말할 수는 있겠으나 옳 다 그르다 말할 소재는 아니다. 2인자를 두지 않는다는 등의 말을 들으면 솔직히 좀 웃긴다 싶다. 대선 레이스에 나온 사람이 벌써 2인자를? 문재인의 경우는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연합세력의 수장이다. 그러나 진짜 수장 이 맞는지도 솔직히 의문이다. 배후가 너무 많다. 그건 단순히 병풍이 아니라 거 의 그들의 입김이 크게 작동하는 모양새다. 민주진보진영이라는 그곳은 그래서 하나의 세력이긴 하지만 다양한 목소리, 권력의지를 숨긴 곳으로 보인다. 그걸 다 채워주려면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겠다 싶은 우려도 함께 나온다. 리더십이 정말 필요한 공간이 거기겠다 싶은데, 그래서인지 문재인에게는 변화될 수 없는 원칙이 많이 있는 듯하다. 융통성은 오히려 아주 낮다는 판단도 든다. 그래도 겉 모습에서는 속 좋은 사람으로 비춰지니 그러한 리더십도 있다고 봐야 한다. 적어 도 대선주자가 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니까. 이런 일들은 보통의 과정은 아니다. 정치란 것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은, 세상살이 가 압축된 공간이란 말도 한다. 어차피 수상한 정치다. 그래서 더 수상한 구석들 을 보면서 한국에서 정치란 게 이렇게 가면 나 죽기 전까지 어디까지 갈까, 변할 게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내일 당장에 정권이 바뀌면 세상이 잘난 구석으로 확

페이지244 변할 거라는 그런 환상은 버리고 말이다. 6. 성공 스토리 = 돈 사건? 사는 이유 / 최영미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 웃음이 생각나면 구길수 있는 흰 종이가 창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 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미국이란 국가 사회는 확실히 계급 사다리의 꼭대기에 금융 을 올려둔 건 분명한

페이지245 듯하다. 그게 금융자본주의가 추구하는 최상의 목표, 그러니까 모두 돈 벌레 로 만들면 돈을 쥔 자(경제를 쥔 자)가 정치를 쥔다 는 것과 연결되는 트랜드와 비 슷하게 돌아간다. 어쩌면 국제 금융카르텔 입장에서 보면, 이런 판이 벌어져야 놀 기 좋은 무대가 만들어지는 셈이고, 이것이 아니고 고전 경제학이 말하는 생산과 소비의 기초 순환에서는 별로 제 맛을 못 느끼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제 노바 상인들이 그랬듯이 지금은 컴퓨터 기능을 가진 기계면 그 작업이 다 가능하 게 되었으니 기름 묻히고 화공약품 냄새 나는 곳을 들락거리지 않아도 돈은 여기 서 저기로 옮겨 다닌다. 돈 놓고 돈 먹기가 아니라 이진수 속에서 돈이 마구 만 들어지고 마구 쌓인다. 이제 돈 놓을 필요 없다. 숫자만 관리하면 된다. 잡일은 못난 대중이 하면 된다. 페이스 북 이야기를 다룬 영화 <소셜 네트워크>(The Social Network, 2010)가 과연 마크 주커버그의 성공담일까를 두고 여러 영화평들이 있었다. 성공 이야기? 어떤 성공? 지금 페이스 북은 여러 가지로 기업공개 후 곤혹을 치르고 있지만 이 영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문장이 바로 이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영화 포스터 의 구절이다. You don t get to 500 million friends without making without a few enemies 그냥 번역해보면 몇 명의 적도 만들지 않고는 5억 명의 친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인데, 친구를 만들려면 일단 적이 생긴다는 소리가 아니라 돈을 벌려면 친구도 적이 된다는 소리로 들린다. 그러니까 돈이 논제( 論 題 )가 된다. 사업을 구상하고 어떻게 했다는 스토리는 그냥 이에 양념 같다. 영화 내용도 비슷하다. 기업가치가 올라가고 소송 등 복잡한 문제에 휩싸이고, 그 속에 돈으로 얼룩진 사업 하나가 덩그렇게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보게 된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성공한 사업으 로, 또 흥미로운 인터넷의 공간으로 활용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부분 은 일단 지나친다. 음모, 배신, 반목 그러면서도 고독 같은 것이 특히 제법 규모 가 생기는 목표를 가지고 가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계산법이 되어야 한다는 거다. 참 냉정하게 세상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마크 주커버그 주변 사람들 가운데는 이상하리만치 함께 잘된 사람은 없고 어떻게든 실패 쪽으로 기울어지는 모습에서 참 묘하다, 묘한 일이다 입으로 중얼거린다. 아! 마크 주커버그는 유태인이었지, 잠깐 그 생각도 들긴 한다. 성공 스토리라는 건 성공을 위하여 많은 실패를 밑바닥에 깔고 가는 게 대부분이 다. 누군가의 성공은 누군가의 실패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또 한 경쟁이라고 하면 경쟁일 수 있다. 그래서 일상에서 아주 자주 무엇이 정상 (normal)이고 무엇이 비정상(abnormal)인지 모르겠다 생각되니 사람들은 규칙 이 정해진 스포츠-그것도 재미나야 하지만-를 찾는 게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거기는 세상살이처럼 규칙이 있는 듯 아예 없지는 않으니까. 그나마 일정한 수준 은 지켜지는 그 모습이 좋아서 찾는 것 말이다. 한국 사회를 보면서 정말 많이 궁금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정치인의 성공

페이지246 이 그들의 재화( 財 貨 )로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부분이다. 국회의원은 세비 받 는다 백 번 양보한다 치고 낙마한 정치인도 많은데 그들이 대체로 잘 먹고 잘 산 다. 국회의원 출신으로 노숙자 된 사람도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정말 일부에 불 과하니 전체를 따질 입장도 아니고, 정치 일선에 물러나서 어떤 모습이 되었느냐 는 직접 정치 현장의 그것과 연동되는 것도 아닌데 그럴 때는 평생복지 개념을 적용하는 꼴도 우스꽝스럽다. 개념혼동이 너무 많다는 소리다. 시사 칼럼니스트 김광휘씨의 김영삼-김대중 두 사람의 촌지 습성을 소개한 일화 다. (강준만의 김대중 죽이기 중에서) 김영삼 총재가 가장 덕을 보는 것이 언론이라고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기자들이 털어놓는 일화가 있다. 신문사의 차장급이나 당사 출입기자인 경우에는 몇 번 만나고 나면 적당한 시간에 촌지를 건네주는데, 이봐, 한 동지. 오늘 저 녁 술값 없지? 하, 이거참. 나도 오늘 마침 가지고 온 것이 이것뿐이야. 자, 지갑 째 가져가. 내 밑천 전부야. 이러면서 김총재는 대개 100여만원이 든 촌지를 주는데, 미리 준비한 가죽지갑에다가 그 돈을 넣고 속을 다 까 보인 다음에 이것 뿐이라면서 지갑째 준다는 것이다. 지갑을 홀랑 뒤집어 보이며 지갑째 몽땅 주는 김총재의 그 특유한 애교에 기자들은 홀랑 넘어가게 마련이고,.여기에 비해 김대중 대표의 경우에는 촌지를 줘야 할 때, 저, 김 기자, 잠깐 기다려. 이러 고 나서 뒤로 돌아서서 자신의 지갑을 꺼내고 돈을 차근차근 세어서 봉투에 넣어 주는데, 그 돈의 액수가 YS와 비해서 대충 10분의 1 정도가 된다는 얘기다. 기 자가 보는 앞에서 꼼꼼하게 세어주는 모습이 좀 상스럽고, 액수가 적다는 면에서 또 한번 기분이 상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김대중의 경우에는 부인할래야 하기 어려운 공천장사 대금에다 기업인에 게 받은 돈, 그리고 전라도를 기반으로 해서 올라온(들어온) 막대한 정치성금에 다 정치판의 정적에게까지 받은 돈도 있으니 그 부수입이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야당 생활했다고 해서 돈이 없는 건 아니었고, 늘 풍족하게 살았다는 의미다. 대 통령 3번 나와서 다 떨어지고도 그럴 수 있었던 그 배경에 이 사람의 정치는 자 신의 비즈니스 수단이었다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집권 하고서도 소위 대 재산가 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을 아들들이 했다는 걸 보면, 이건 도대체 무슨 비즈 니스를 했는지 쉽게 이해가 된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IMF사태 이후에 왜 김대중의 주머니에만 돈이 그득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방만한 공적 자금 운영부터 시작하면 돈 나올 구멍은 참 많았던 듯하고, 그 내용은 지금도 밝혀지지 않으니 참 우습게 여겨진다. 참고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시점의 재산 신고액은 8억 8천만 원이었다. 2010년 2월 상속재산은 12억여 원이라고 밝혔고. 그런데 흥미롭게도 상속 재산은 모두 예금 재산이었고 부동산은 없다고 했다. 이 일을 언론들이 건드리지 않은 건 아니다. 여러 언론들 이 의혹을 제기하고 심지어 중앙일보는 2010.9.4 문창극 칼럼에서 마지막 남은 일 이라고 사후에라도 DJ 비자금 조성과 재산 해외도피 의혹은 해소되어야 한다 고 문제제기를 했다. 아주 격렬하게 김대중 측은 반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대

페이지247 체 어떻게 돈을 벌고 썼는지에 대해 언급한 건 아무 것도 없다. 지금으로부터 겨 우 십 년도 안된 시점에도 정권을 쥔 사람의 이야기니 그 시절 정치는 그랬다고 말하면 안 된다. 왜 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가 하면, 바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속칭 주머 니 탈탈 털리는 과정이 하나의 명확한 사례로 나와 버렸기 때문이다. 형평성의 원칙이란 것이 있는데, 검찰이 이런 일을 누구에겐 하고 누구에겐 하지 않으면 검찰의 존재 이유는 사라진다는 걸 말하고 싶은 셈인데, 거슬러서 DJ 비자금까 지 낱낱이 조사하면 좋겠지만, 일단은 이명박 정권의 MB에 대한 재산 문제를 건 드리지 않고 지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란 말을 에둘러 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엄처 시하( 嚴 妻 侍 下 )에서 눈치보고 그러겠지만, 미래권력이란 건 분명히 이걸 덮고 지 나갈 수는 없다. 아마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허니문 시기에 벌써 이 이야기는 대중으로부터 나올 게 뻔하다. 미리미리 준비해둬야 할 일에 속할 거다. 당연히 그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이 정권이 해온 방식으로 봐서는 열 두 번도 더 속칭 게이트 가 터져도 터졌어야 하는데 그걸 말리고 있는 그 엄청난 힘 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게이트를 말린다는 건 상상이 어려울 정 도로 강력한 힘인데 말이다. 노무현의 경우, 갑작스런 서거가 오히려 그의 주변을 샅샅이 건드리지 않는 걸로 일단락을 지은 측면도 강하다. 그러나 그 범례에서도 정치권력은 금력과 절대 무 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니 씁쓸하기 그지 없기도 하다. 어떤 권력도 금력과 결합한다. 한국에서의 정치권력은 곧 정치=비즈니스 라는 걸 모토로 삼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민주당에 비례대표 공천을 위해 서슴없이 거액을 바친 사람 은 회계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계산이 밝으면 밝을수록 정치를 탐하는 세상이란 소리다. 이런 정치를 보면서 무슨 청렴 을 목소리 높여 말하는 게 멍청한 일 이란 걸 (대중은) 깨달아야 한다. 오히려 그러지 못하게 만들려면 (미리 앞선 범 례들을) 낱낱이 좀 털어주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하지 않는 직무 유기하는 곳도 많다. 그냥 세상이 그렇고 그렇다는 식으로 끝낼 일이면 이런 토론 백날 해봐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제대로 세상 이야기를 토론할라치면 최소한 이런 이야기는 계속 나와야 한다. 마크 주커버그는 5억 명 친구들을 만들려고 몇 사람의 친구들을 적으로 만들었 다. 그런데 진짜 그 5억 명은 친구가 맞긴 맞는 건가? 지금 5천만을 적으로 돌리 더라도 해야 할 이야기는 해야 하는 건 간단한 이유에서다. 진실이 파묻히기 시 작하면 그냥 허상으로 똘똘 뭉친 우상만 남게 되고, 그건 우리에게 결코 올바르 지 못한 역사로 자리매김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정치가 어리석은 백성을 더 어리석게 만들려면 돈으로 밀당을 하면 된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 돈으로도 도저 히 이룰 수 없는 성공 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저 영화는 보고 나서 찜찜한 기분 이 드는 구석이 많긴 하다. 묘하게도 한국 대선 레이스의 세 사람 모두가 떠오른 다. 정치란 게!!

페이지248 7. 나머지는 네가 해야지! 등 / 김선우 아이 업은 사람이 등 뒤에 두 손을 포개 잡듯이 등 뒤에 두 날개를 포개 얹고 죽은 새 머리와 꽁지는 벌써 돌아갔는지 검은 등만 오롯하다 왜 등만 가장 나중까지 남았을까, 묻지 못한다 안 보이는 부리를 오물거리며 흙 속의 누군가에게 무언가 먹이고 있는 듯한 그때마다 작은 등이 움찟거리는 듯한 죽은 새의 등에 업혀 있는 것 아직 많다 뉴데일리가 흥미로운 뉴스 하나를 내놓았다. 워낙 이 매체야 이미 정평이 나있는 편향성을 가진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종종 자료만큼은 챙겨 볼만한 부분이 있는 데 마침 이번이 그런 듯하다. 從 北 진영 大 選 정책, 원탁회의 에서 나오나?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24582 진보의 원로모임인 희망2012 승리2012 원탁회의 에서 발표한 <대한민국을 변 화시킬 20대 약속>이란 문서를 입수해서 실은 것이다. 이건 지난 4.11 총선에서 범야권공동정책 합의문 이란 것의 부속서류라는 것인듯한데 알려지지 않은 내용 들이어서 보면 볼수록 흥미롭다. 왜냐하면 이 약속 이란 것이 총선용이 아니라

페이지249 진보 진영의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 설정된 것인 듯하고, 또한 이게 국민에 대한 약속이라고 말하니 보지 않을 수가 없다. 20개 약속을 한 번 보고 평가를 해보도 록 하자. 물론 여기서 내가 하는 건 아니다. 직접 해보란 이야기다. 원탁회의 참가자는 다음과 같다. 김상근(61.5 남측위 상임대표), 김윤수(전 현대미술관장), 문재인(노무현재단 전 이사장, 현 민주통합당 대선주자), 박재승(전 대한변협회장), 백낙청(서울대 명예 교수), 오종렬(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윤준하(6월 민주포럼 대표), 이김현숙(전 평화를만드는여성회 공동대표), 이선종(원불교 중앙중도훈련원장), 이창복(민주통 합시민행동 상임대표), 이해찬(전 국무총리), 임재경(민주언론시민연합 상임고문), 청화(전 실천승가회 상임의장), 함세웅(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남윤인 순(내가꿈꾸는나라 공동준비위원장), 문성근(국민의명령 대표), 박석운(한국진보 연대 공동대표), 백승현(희망과대안 공동운영위원장), 이학영(진보통합시민회의 상임대표), 이형남(민주통합시민행동 상임집행위원장), 황인성(시민주권 공동대표) [대한민국을 변화시킬 20개 약속] 2012년의 총선과 대선은 단순한 또 한 번의 선거가 아닙니다. 새로운 대한민 국, 새로운 민주공화국 을 건설하고자 하는 모든 국민들의 절실한 염원을 실현하 기 위한 선거입니다. 이를 위해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및 시민사회는 다음과 같 은 20개 정책방향을 합의하고, 합심하여 공동으로 추진할 것을 국민 앞에 약속 드립니다. 1) 좋은 일자리를 획기적으로 확대하고, 일하는 사람이 존중 받는 사회를 만들겠 습니다. 사회서비스의 확대와 공공화, 그리고 근로시간의 단축을 통해 좋은 일자리를 대폭 확대 창출하고, 중소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통해 젊은이들이 가고 싶은 일자 리가 만들어지도록 중소기업 지원을 강화한다. 비정규직 관련법을 개정하여 비정규직 사용제한을 강화하고 정규직 전환을 촉 진한다. 또한,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 기업 노동자의 차별을 줄여간다. 노동관계법상 노동자와 사용자 개념을 확장하여 간접고용노동자와 특수고용노 동자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한다. 최저임금을 평균임금의 일정 비율(50% 이상)로 법제화하고, 엄정한 법집행을 통해 최저임금이 실제 보장되도록 한다. 산업별 단체교섭을 법제화하고, 복수노조의 자율적 단체교섭을 보장하는 등 노 동3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한다. 아울러, 노동조합의 조직률 향상을 위해 모든 필 요한 법적, 행정적 지원을 한다. 2) 청년에게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병역 부담을 줄이겠습니다. 공공 부문과 민간 대기업의 청년고용할당제, 창업지원, 해외일자리 진출지원을

페이지250 포함한 종합적 청년뉴딜정책(적극적 노동시장정책에 의한 지원)을 추진한다. 군복무기간을 단축하고,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를 위한 대체 복무제를 신설 한다. 청년층을 위한 1인 가구용 임대주택을 확대 공급하고, 대학기숙사 설립을 지원 한다. 시간제 아르바이트, 청년층 등 노동약자들의 노조설립을 지원하고, 이들의 직장 에 대한 근로 감독을 대폭 강화한다. 3) 토건 중심의 경제를 개혁하고, 사람이 살 만한 주택과 주거환경을 제공하여 보 편적 주거복지를 실현하겠습니다. 부동산 가격을 안정화시키며, 현재의 부동산 거품 폭발이 야기할 서민 삶의 위 기에 대한 대책을 수립한다. 전월세 상한제 및 전월세 보조금제를 실시하고, 공공임대주택과 공공전세주택 을 전체 주택의 일정 비율(10% 이상)로 대폭 확대한다. 1인 가구, 노인 및 장애인 가구를 위한 맞춤형 주택 공급을 확대한다. 쪽방거주자, 홈리스, 고시원거주자 등 주거취약 계층을 위한 맞춤형 응급주거를 제공한다. 4)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확대하고, 모든 사람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보건의 료제도를 확립하겠습니다. 치료 목적의 모든 합리적 의료비에 대해 건강보험을 적용하여 건강보험 보장성 을 80%까지 끌어 올린다. 또 장기요양환자의 간병경비까지 포함하여 의료비 본 인 부담이 연간 100만원을 넘지 않도록 한다. 이를 위해 포괄수가제, 주치의제도 등 제도를 개혁한다. 저렴하고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공공의료시설을 30% 이상으로 확대하고, 민간의료기관의 공공성을 강화한다. 보건의료 공급부족 영역인 임신과 출산, 장애, 노인 등에 대한 부족한 보건의료 서비스를 강화한다. 보건소를 현대화하여 도시 보건지소 망을 구축하고, 농촌 보건지소를 노인건강 센터로 강화하며 학교보건과 산업보건을 아우르는 평생건강관리체계를 구축한다. 5) 아동, 노인과 장애인의 돌봄 서비스를 충분히 제공하고, 모든 국민들이 빈곤에 빠지지 않도록 기본적인 소득을 보장하겠습니다. 국공립 보육시설을 30% 이상으로 확대하고, 아동수당, 무상보육 및 출산 관련 의료비 지원으로 육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화한다. 요양, 간병, 장애인 활동보조 등 돌봄의 사회화와 공공화를 통해 사회와 국가가 돌봄을 책임지는 사회를 만든다. 돌봄의 품질을 높이고, 돌봄 노동 일자리를 좋은 일자리로 만든다. 기초노령연금 인상과 국민연금개혁 등 소득보장과 공동체의 지원을 통해 노후 생활의 불안을 근본적으로 없앤다. 장애인 연금을 장애로 인한 추가 비용을 보전하는 수준으로 증액하며 장애인의 의무고용률 높이고, 장애인의 안정된 주거를 보장한다. 고용보험의 실업급여를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구직촉진수당으로 실업부조제도

페이지251 를 도입한다. 직업능력훈련을 대폭 강화하고 중소기업과 자영업 종사자, 실업자와 비경제활동인구에게도 제공될 수 있도록 한다. 부양의무자 기준 완화 등 기초생활보장제도를 획기적으로 보강하고, 각 부처의 빈곤대책을 연계하여 빈곤층의 기본적 삶을 보장하고 빈곤의 예방과 탈출 대책을 대폭 강화한다. 신용불량자 문제 해결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고금리수준을 대폭 하향 조정하고, 공공적 소액금융제도(마이크로 세이빙과 마이크로 크레디트)를 확충한 다. 6) 조세정의 실현을 통해 복지예산을 확보하고, 사회보험 운영에 시민의 실질적 참여를 보장하겠습니다. 종합부동산세 등 자산세를 강화하고, 소득세의 누진율을 강화함으로써 자산 및 소득 재분배를 통해 투기 없는 정의로운 경제를 지향한다. 부자감세를 철회하고, 불로소득에 대한 중과세와 조세기반의 확대를 통해 조세 수입의 규모를 확대하고 재분배 기능을 강화하며 조세행정을 투명화 한다. 2030년에는 GDP대비 교육과 공공사회지출의 비중을 OECD국가 평균수준으로 올린다는 목표아래 5년 단위 중기재정계획과 15년간의 장기재정계획을 수립하여 실행한다. 사회보험 운영에 당사자와 시민이 참여하는 민주적 가버넌스를 구축한다. 7) 재벌중심의 독과점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중소기업과 서민에 초점을 맞 추는 쪽으로 경제정책기조를 바꾸겠습니다. 재벌의 소유구조 및 경영 지배구조를 민주화하고, 편법적 승계 등을 근절하며 기업집단을 하나로 규율하는 입법조치를 강구한다. 또한, 재벌과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집단소송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며 이윤공유제 등의 도입으로 중소기업의 경제 활동을 보호한다. 아울러, 기업 활동에 관련된 범 죄에는 엄격히 법을 집행하며 사면권을 남용하지 않는다. 연기금의 주주권을 엄정히 행사하고, 연기금 운영이 대기업에 편중되지 않도록 하며 연기금의 공공적 기능을 강화한다. 환율과 금리 등 거시정책은 중소기업의 생산성 향상과 서민의 삶이 개선되는 쪽에 초점을 맞추고, 수출 대기업 위주의 환율 금리 정책을 지양한다. 중소기업 및 중소상인 적합업종을 보호하여 대기업 진출을 제한하고, 대형마트 와 기업형 슈퍼마켓(SSM) 규제를 강화한다. 또한, 국가의 연구개발 예산은 중소 기업에 실질적인 이익이 돌아 갈 수 있도록 운영한다. 농업은 미래세대를 위한 경제체제의 핵심 토대라는 인식아래 식량주권을 확보 하고, 먹을거리의 지역순환체제를 구축하여 지속가능한 경제체제를 구축한다. 공정거래위원회의 민주적 구성과 독립적 운영을 확립하여, 재벌과 대기업의 경 제적 특권과 반칙을 없애고, 공정한 시장 질서를 확립한다. KTX, 인천공항, 산업은행, 수자원공사 등 공공부문의 민영화를 중단한다. 8) 미래성장동력을 확충하고, 대기업 중소기업의 상호협력,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의 육성, 고용확대와 기업혁신을 통한 성장 방안을 확립하고, 추진하겠습니다. 재벌의 독점체제를 해소하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이 대등한 관계로 경제활동에

페이지252 참여할 수 있도록 대기업 중소기업간 협력관계를 강화한다. 또한, 중소기업이 대 기업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 국제교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중소기업의 수평적 네트워크에 지방대학 및 연구소, 그리고 사업서비스를 결합 하여 중소기업 중심의 국가혁신체제 및 지역혁신체제를 구축한다. 교육제도를 창의와 협동의 방향으로 전환하고, 인적자원 수급을 조절하며 평생 교육과 직업능력 훈련을 대폭 강화한다. 이렇게 키워진 인적자원이 중소기업으로 도 충분히 연계되도록 한다. 지역공동체에 뿌리박은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을 육성하여 사회적 경제 생태 계를 조성한다. 9) 거시건전성 규제를 강화하여 경제의 안정성을 높이고, 통상교섭에 대한 국회의 통제권을 강화하는 등 대외경제정책을 민주화하겠습니다. 금융감독기구의 민주적 구성과 독립적 운영을 통해 금산분리와 금융의 공공적 기능을 강화한다. 금융소비자보호법을 제정하고, 독립적 기관인 가칭, 금융소비자보호원을 설립한 다. 단기자금의 유출입 방지를 위해 외환거래세를 도입하고, 외환가변유치제 등 거 시건전성 규제를 강화한다. 또, 이의 실현을 위해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 한다. 이명박 정권이 체결한 한미 FTA는 국익과 민생, 입법주권과 사법주권을 심대 하게 침해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존엄과 국민의 자존심에 반하는 굴욕적인 협상 으로 무효이다. 이에 야권은 재협상과 폐기라는 각 당의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이 체결 비준한 한미FTA의 시행에는 전면 반대한다. 통상절차법과 국내이행법을 보완하는 등 통상교섭 관련 민주적 절차를 강화하 고, 국회의 통제권을 확대하여 대외경제정책에 국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10) 즐거움과 희망을 주는 교육, 차별 없는 교육을 실현하고, 공교육의 혁신을 통 해 학부모의 사교육비 부담을 대폭 경감시키겠습니다. 입시제도의 전면 개혁과 학교혁신을 통해 공교육을 강화하여 입시 사교육이 필 요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며 학력 학벌 지역 등에 따른 차별금지를 법제화한다. 학교당 학급수와 학급당 학생수를 축소(25명 이내)하여 학생들의 특성과 요구, 수준에 맞는 맞춤형 학습과 창의적 협동학습이 가능하도록 한다. 외국어고교를 원래의 목적으로 전환하고, 일반계 고교의 학교간 격차를 줄인다. 동시에 전문계 고교를 본래 목적대로 강화하고, 혁신학교를 대폭적으로 늘린다.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을 확대하고, 모든 의무교육 기간에는 친환경무상급식을 실시한다. 장애인 등을 위한 특수교육을 교육기회의 균등을 이루는 수준으로 강화한다. 초중등 교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대대적 투자를 한다. 11) 대학등록금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대학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하며 사학 비리를 척결하겠습니다. 국립대학 법인화 추진을 중단하고, 지방대학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로 대학의 서열화를 없애며 대학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한다.

페이지253 분쟁과 부정이 잦은 부실대학의 국공립화 방안을 포함하여 국공립대학의 학생 비중을 50%로 높인다. 인수된 대학의 일부는 평생교육 등 사회교육기관으로 전 환한다. 대학등록금후불제와 등록금상한제 도입 등으로 반값등록금 이하로 등록금을 낮추고, 공공성이 낮은 대학에 대해서는 정부지원을 중단한다. 사학비리를 척결하고, 비리 관련자의 복귀와 비리사학재단의 전횡을 원천봉쇄 한다. 12) 성평등을 실현하고, 여성의 경제사회적 참여를 확대하여 양성이 모두 행복해 지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성평등이 정착되도록 한다. 가족과 직장, 사회 전반에 내재한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없앤다. 여성이 좋은 일자리를 가지도록 여성고용률을 70% 수준으로 높이고, 일과 가 정의 양립을 위해 가족친화기업을 지원한다. 여성이 정당한 정치적 대표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고용 임금 승진 등 직장 에서의 성차별을 금지한다. 성별영향평가와 성인지예산에 기초한 국가정책 및 예산수립을 통해 궁극적인 성평등 사회를 지향한다. 또한, 모든 국가통계는 양성을 구분하여 작성하도록 한 다. 13) 원자력 등을 주축으로 하는 에너지체제를 녹색 대안 에너지체제로 전환하고, 자연과 인간의 공생을 중시하는 생태적 사회경제구조를 만들겠습니다. 4대강사업 후의 환경상황을 철저히 평가하여 생태적 건강성을 되살린다. 아울 러, 갯벌, 하천, 삼림 등의 파괴된 자연을 복원하고, 갯벌 매립은 원칙적으로 금 지한다. 원전 추가 건설을 중단하며 원전정책을 전면 재검토한다. 또한 댐 추가 건설의 경우도 전면적 재검토를 통해 자연친화적으로 수자원을 관리한다. 산업, 교통, 생활 등에서 적극적인 수요관리로 물과 에너지의 소비를 줄이고, 재생가능에너지의 생산을 대폭 확대한다. 또 기업 특혜적인 현행 전기요금 부과 체계를 개선하고, 특히 대기업에 대해서는 전기요금을 현실화한다. 한반도 생태 축을 복원하는 종합적 국토관리전략을 수립 실행하며 그린벨트를 철저히 보전한다. 국제적인 환경 활동에 적극 참여한다. 아울러, 탄소배출을 최소화하고, 환경교 역 조건의 강화에 조속히 적응한다. 14) 종합편성채널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정립하고, 언론의 다양성과 공공성을 획기 적으로 강화하겠습니다. 언론의 다양성과 방송의 공공성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편집(편성)의 자율성 을 보장하도록 미디어관련법을 개정한다. 종합편성채널 방송사업자 선정과정에서 나타난 위법 반칙 특혜에 대한 국정조 사를 실시하며 종편채널에 대한 부당한 특혜를 바로잡고, 관련 정책을 전면 재검 토한다. 종편방송사까지 포함한 모든 방송사의 제작 편성과 광고영업이 철저하게 분리

페이지254 되는 방향으로 미디어랩 법을 전면 개정한다. 방송통신위원회를 폐지하고, 방송과 통신의 공적 규제를 담당할 독립적 규제기 구를 설립한다. 또 미디어 관련기관과 공영방송 구성의 민주성과 정치적 독립성 을 강화한다. 15) 문화기본권과 문화다양성을 보장하여 문화적 가치가 꽃피는 문화의 나라 를 만들겠습니다. 문화산업 중 시장경쟁력의 열세에 놓인 분야나 시장에만 맡길 수 없는 예외적 분야에 대해서는 적절한 사회적 지원을 제공하고, 기초예술의 지원을 획기적으로 늘린다. 개개인의 문화적 역량을 확대할 수 있는 문화예술교육, 능력개발, 창작, 기타의 문화 활동을 적극 장려하고 지원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문화 사업을 계획 시행할 때 시민사회 문화단체들과 소 통하는 협력적 가버넌스를 구축한다. 문화재의 지정을 근대문화재 등으로 넓히고 보호와 복원을 강화한다. 16)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공공성과 생태가치를 증진시키는 과학 기술정책을 추진하겠습니다. 미래 성장 동력을 확충하기 위해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지원을 강화한다. 기본적으로 공공재인 과학기술의 성과를 특정 기업이나 계층이 독점하는 것을 막고, 사회전체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공공성과 생태가치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과학기술정책을 추진한다. 17) 식품과 의약품의 안전성을 대폭 강화하고, 재난 사고 유해물질로부터 국민을 보호하여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기상재해를 비롯한 각종 환경재난 등에 대한 대비를 강화해 국민들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한다. 도로, 건축물, 산업장의 안전 기준과 관리를 강화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사 고발생률을 10년 내에 OECD 평균 수준으로 낮춘다. 아동, 장애인, 임산부, 노인 등 교통취약계층의 요구에 맞추어 도로 등의 구조 를 개선하고 적절한 교통수단을 확보한다. 어린이, 노인, 빈곤층 등 사회적 취약계층의 건강보호를 국가의 최우선과제로 삼는다. 식품과 의약품의 안전성을 강화한다. 일상생활 속에 만연해 있는 석면 등 발암물질과 유독성물질에 대한 규제를 대 폭 강화하고, 암과 아토피 등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관련 정보를 체계 적으로 제공한다. 18) 자주외교 균형외교 평화외교를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체제를 정착시키 고, 평화통일이 우리 세대에 이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들겠습니다. 6.15, 10.4 등 남북 정상간 합의를 존중하며, 상호체제 인정과 국민적 동의에 기초하는 평화통일을 추진함으로써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와 시민참여의 기회를 확대한다. 호혜평등과 평화지향적인 자주외교를 추진하며 비핵화 및 평화체제 구축을 목

페이지255 표로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한다. 남북과 동아시아 국가들의 협력을 강화한다. 가스관 사업, 유라시아 철도 연결 을 추진하며 앞으로의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을 위해 치앙마이 협정의 확대, 공동 대외보유고 관리 등을 추진한다. 제주평화의 섬 건설을 위해 제주해군기지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국가 안보문제 전반에 대한 결정에서 시민참여를 보장한다. 19) 권력기관의 개혁을 통해 국민 참여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국민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는 선거제도를 만들겠습니다.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군공안기구 국세청 등 권력기관을 민주적으로 개혁하고, 국가인권위원회 등의 독립성 강화로 국민의 인권을 적극 보장한다.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포함하여 인권을 탄압하는 반민주악법을 개폐한다. 쿠데타 기구에서 통과되었거나, 국회에서 날치기 처리한 악법은 전면적 재점검 을 통해 개정하거나 폐지한다. 온-오프라인에서의 의사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문 사상 언론 문화의 자유 를 가로막는 각종 검열 및 통제장치를 폐지하며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관련 제도를 개선한다. 헌법상 보장된 교사와 공무원의 정치활동을 보장하여 정당한 정치 활동에서 배 제되는 집단이 없어지도록 한다. 공직사회와 기업에서의 공익제보자 보호 의무를 대폭 강화한다.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등 국민의 의사가 정확히 표현되고, 반영될 수 있 는 선거제도와 정치개혁을 추진한다. 예산과 정책 결정 등에 있어 직접민주주의와 민관협치적 방식의 국민 참여를 대폭 확대한다. 20) 지역자치를 획기적으로 확대 강화하고, 지역격차 해소와 지역균형발전을 추진 하겠습니다. 수도권과 지역 사이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적극적인 지방분권과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실행한다. 이의 실현을 위해 기존의 획일적 균 형정책을 탈피해 지역주민이 참여하여 스스로 결정하는 균형정책을 추진한다. 중앙정부의 업무와 재정을 획기적으로 지방에 이양하여 지방의 행정적, 재정적 자율성을 대폭 확대하고, 지방자치를 실질화한다. 반면, 중앙정부는 국가의 장기 비전 수립, 전국 공통의 제도 개혁, 분야별 정책 입안 및 지방정부 평가 기능을 강화한다. 자치조직권과 자치입법권을 대폭 강화한다. 지역공동체 스스로 지역의 특색에 맞는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지역 내의 역량을 동원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지역에 자치경찰을 설치하고 그 책임자의 선출과 운영은 지자체와 주민이 스스 로 결정하도록 한다. 교육 및 직업능력훈련, 보건의료, 복지, 보육, 근로감독, 고용지원, 민생치안, 소 방, 안전 및 방재 등 공공서비스의 제공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책임이며 이를 위 한 공공인프라와 인력을 대폭적으로 강화한다.

페이지256 8. 덜 떨어진 딱지 소리들 / 나희덕 승부역에 가면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 이 봉우리에서 저 보우리로 구름 옮겨가는 소리 지붕이 지붕에게 중얼거리는 소리 그 소리에 뒤척이는 길 위로 모녀가 손 잡고 마을을 내려오는 소리 발 밑의 흙이 자글거리는 소리 계곡물이 얼음장 건드리며 가는 소리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송아지 다시 고개 돌리고 여물 되새기는 소리 마른 꽃대들 싸그락거리는 소리 소리들만 이야기하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겨울 승부역 소리들로 하염없이 붐비는 고요도 세 평 딱지 떼기 란 말이 있다. 초보 운전 딱지를 떼는 것도 있고 처녀 총각 딱지 떼기 란 말도 흔히 사용한다. 딱지는 그냥 스티커를 연상하면 되는데, 어떤 상태를 의 미하는 단어가 되어 버린다. 그걸 떼내는 거다. 그 이후에는 떼낸 딱지 아닌 상태 가 된다. 노무현이 대선 후보가 될 즈음해서는 딱지 모으기 라고 해서 국민경선 의 선거인단 모집을 위해 친인척 명의로 등록을 했던 적도 있다. 정동영의 박스 떼기 사건은 제법 유명하니 생략해도 좋을 듯한데, 이처럼 딱지라는 게 표심으로 작동한 흔적도 있다. 보통의 경우엔 딱지는 부동산 재개발 딱지가 연상되는 것도 사실이다. 프리미엄 붙여서 파는 그거 말이다. 요즘도 이런 부동산 불경기에는 참 보기 드문 일이지만. 딱지가 덜 떨어진 건 뭔가 치기( 稚 氣 )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건 어린아이 머리 위의 쇠딱지 라는 게 있어 그게 떨어지지

페이지257 않은 걸 의미하는 거다. 이미지 하나가 고정되면 그걸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대선 레이스에 서는 나름 언론들은 주자들에게 각각 많은 이미지를 붙이는 작업을 한다. 사람들 의 입에 회자될 정도면, 그건 이미지 메이킹에 꽤 치명적인 고정화 상태에 접어 들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박근혜의 경우엔 수첩공주란 별명이 있지만 전라도 지역에서 슬그머니 나온 말쌈 지 가운데 하는 이런 것도 있다. 박근혜 박정희, 문재인 문제아, 안철수 철부지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지금 열심히 전라도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야권의 기반이 그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 과정에서 둘에 대한 평가를 저처럼 적나라하 게 말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참여정부의 전라도 홀대론은 그냥 불만 표현이 아 니라 여러 요인이 합쳐져 있다. DJ정권 대북송금 특검으로부터 열린우리당 창당, 전라도에 정부부처 및 공기업 배정 불균형 등 많은 사안을 제기한다. 농촌이 많 으니 한미FTA 문제도 그에 한 몫을 한다. 일단 쌓인 이미지는 노무현은 배신했 다는 것, 전라도만 이용당했다는 것이 이 불만의 주종을 이룬다. 안철수는 상대적 으로 그의 말마따나 빚진 게 없다. 그런데 왠지 아주 불안하다. 제2의 노무현 같 기도 하고, 안정감이 떨어지기도 하고, 표방하는 구호가 좋긴 한데 말뿐으로 전락 할 우려도 크고, 거기에 사건 몇 가지가 검증과정에서 툭툭 불거져도 일단 아마 추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며 저 소리 나온다. 철부지 란 말은 순수한데 뭘 모 른다는 해석이고, 문제아 는 사건을 이전에도 쳤고 지금이나 나중에도 반복될 것 같은 판단이 들어가 있다. 박근혜의 경우엔 다른 무엇보다 일단 박정희란 그림자 가 앞줄에 온다. 박정희 집권 시기에 조금이나마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그 기억 에서 박근혜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박근혜 이명박근혜, 문재인 문노무현, 안철수 제2이명박 또는 제2노무현 이 라벨이 아주 보편적으로 붙은 딱지다. 대중이 붙여주는 별명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명박근혜 는 이명박-박근 혜를 동일선상에 두고 본다. 아주 간단한 상황극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의 지난 4년 여 기간 동안 박근혜가 이 정권의 주요 사안의 중심에 선 적은 딱 한 번 있 는 듯하다. 바로 세종시 문제다. 그 이외의 사안에서는 대선 행보가 진행되기 전 까지는 특별히 반대 노선에서 입을 뗀 것이 없다. 그러니 당연히 동일 노선을 말 하는 게 틀린 말도 아니다. 구 한나라당 자체가 그랬다. 물론 4.11총선 이전에는 시쳇말로 친이계 판이었다. 그래서 냉정하게 볼 대목도 나온다. 18대 국회의원 선거 날은 2008년 4월 9일이었다. 한나라당 153석, 통합민주당 136석, 자유선진당 18석, 친박연대 14석, 민주노동당 5석이었다. 이명박 정권

페이지258 개시 40여일만에 치러진 이 선거에 한나라당과 친박연대 합쳐서 167석을 몰아 준 것이 바로 국민이었다. 그 가운데서 친이계와 친박계는 공천과정만으로 본다 면 친이계의 비중이 거의 60%를 넘었던 듯하다. 박근혜는 메이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 여당의 제2계파 수장이 아무런 정책적 의사표현을 하지 않는다는 건 결국 동조란 소리 밖엔 안 된다는 것이 바로 저 명칭의 배경이다. 타당하다. 그래서 박근혜 스스로 지금 친박계로 채워진 19대 국회의원 선거를 바탕으로 이제 색깔을 내란 소리를 한다. 그 색깔 아직도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계속 그러면 이명박근혜 란 소리도 정당하다. 문재인의 경우에는 친노세력의 새로운 수장 운운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도 않다. 친노를 발판으로 해서 가장 잘 경선을 치른 케이스다. 배후에는 이른바 진보 원로들의 원탁회의 라는 것도 있다. 그 멤버 가운데 한 사람이 문재인이다. 그냥 똘마니 로 밖엔 비춰지지 않는다. 냉정하게 말해서 문재인이 노무현의 부채 를 책임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스스로 그걸 통해서 힘을 얻고자 했기에 문노무 현 이란 명칭은 타당하다. 당연히 부채를 짊어져야 한다. 그런데 정작 짊어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과연 문재인은 무슨 색깔이냐고 묻는다. 그 는 말한다. 나는 친노다 라고. 이 황당한 시추에이션이 이어진다. 모호한 게 아니 라 뭔가 특단의 대책이 없으면 안 되는데 벌써 지지율이니 이런 숫자에 함몰된 기미가 역력하다. 솔직히 다시 노무현을 대통령 삼으라면 큰일날 소리라고 말해 주고 싶다. 안철수의 별명은 두 가지가 있다. 제2이명박, 제2노무현이란 별명은 각각 의미를 다르게 가진다. 전자의 경우에는 기업 CEO를 내세운 사람이 얼마나 경제와 사회 를 모르는가 하는 점에 초점이 있고, 후자는 노무현의 경우처럼 관료 다루기에 실패하고 정치 또한 조화를 못 이룰 엉성한 대통령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서 그 렇다. 둘 다 최악이다. 이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 안철수 나름은 노력한다. 실체로 들어가면 지금 나오는 여러 검증이란 게 문제가 아니다. 정작 봐야 할 건 바로 이 별명들이 가진 유사한 패턴인데, 이건 대중 입장에서는 하나씩 따져볼 일이 되니 골치 아파서 그런지 막연히 감만 성행을 한다. 분명한 건 안철수에게 이런 두 가지 모습 모두를 볼 수 있다는 것이고, 그걸 탈피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걸 안철수는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쭉 가면 틀림없이 저 두 스타 일 가운데 하나이거나 아니면 복합형이 나올 공산은 더 커진다. 노력들은 한다. 어차피 대선이란 목숨 걸고 들어가는 피 튀기는 전쟁터니까. 그러 나 세 사람 모두에게 발견되는 공통점은 자신들의 단점을 극복할만한 묘수가 잘 안 나온다는 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등장한다. 지금도 그런데 집 권한다 해서 달라지겠느냐는 비관론이다. 맞는 말이다. 지금 보일 모습을 보이지 않고 진정성 운운하거나 통합, 소통을 말하는 건 위선이다. 흔히 정견 발표를 보 고, 정책을 보고 결정하자고 하지만 그런 거창한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귀찮 아지는 측면도 있다. 딱 부러지게 보자면 한 가지만 보면 된다. 자기에게 붙은 최

페이지259 악의 라벨을 어떻게 떼어내는가 하는 것이다. 셋 다 실패 중이니 더 할 말도 없다. 겨우 이 정도로 대통령하겠다고 나왔나 싶 기도 하다. 9. 구체성의 결여( 缺 如 )를 벗어나는 법 언젠가도 여기서 / 조은 언젠가도 나는 여기 앉아 있었다 이 너럭바위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지금과 같은 생각을 했다 그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 가슴속 응어리를 노을을 보며 삭이고 있었다 응어리 속에는 인간의 붉은 혀가 석류알처럼 들어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슬픔의 정수리로 순한 꽃대처럼 올라가 숨결을 틔워주던 생각 감미롭던 생각 그 생각이 나를 산 아래로 데려가 잠을 재웠다 내가 뿜어냈던 그 향기를 되살리기가 이렇게도 힘들다니... 구체적이란 말은 직접 경험이나 지각이 가능할 정도로 실제적이고 세밀한 부분까 지 담고 있는 걸 말한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해봐서 그 해답이 나와야만 되는 것이고, 앞서 말로만 해서 될 게 아니다. 말은 말일 뿐이고 절대 구체적인 말이란 없다. 말과 행동은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보통 어떤 일의 대책을 내놓을 때, 구체성(specificity)이 없다고 하면 대책의 내 용이 미흡하다는 것이고 글이나 말로 표현된 것이 알맹이가 없단 소리가 된다. 대표적인 것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MB의 라디오 연설 같은 것인데, 이 게 왜 엉뚱하게 매주 나온 건지 사람들이 좀 한심하게 생각한다. 그래도 꾸준하

페이지260 게 하는 걸 보면 때로 이런 기획도 줄기차게 밀어 붙이네 싶어 한숨이 나온다. 실패한 대책과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밀어 붙이기도 몰아 붙이기도 아닌 그저 고집으로만 비춰진다. 말의 경우에 구체성 은 의사소통과 직결된다. 여기도 소통 이란 항목이 나오는데, 이것은 구체성을 띤 것은 항상 대상자가 있다는 것이고, 전달하는 말의 내용을 자세하고 명확하게 하여 접근하게 하고 집중하게 만드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 대선이 아니라 미국 대선에서도 비판에 이런 이야기는 꼭 등장한다. 지난 9 월에 뉴욕타임즈에 칼럼을 연재하는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가 낙관주의 괴짜 라는 제목으로 공화당 밋 롬니 후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요지는 간단하다. 아무런 구체적인 정책도 없이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경제가 살아날 거라고 주장 한다는 거다. 칼럼은 시작부터 롬니의 5개항 경제계획이 거의 실질과 무관 하게 막연한 시사를 하는 것이라고 까고 들어간다. 그러면서 공화당의 경제신념(도그 마)을 아무런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 고 주장한다. 이어 쭉 경제정책에 관한 소견 들이 나열되어 있다. 폴 크루그먼 입장에서는 롬니를 정치인 의 보편적 행태로 편입시켜서 비판한 듯하다. 그것은 바로 두리뭉실 이다. 정치인의 화법은 특히 빠져나갈 여지를 항상 만들면서 진행된다. 왜냐하면 그것 에 대해 구체적 설명을 요구 받을 경우 자신을 한번 더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구체적 설명을 하는 사람은 그 변호의 기회를 잃 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꾸만 두리뭉실한 대화법의 유혹을 가장 많이 받는 것 이 정치인, 정치판 속의 인물들이다. 거기에 정치 구호에서 보여지듯 추상적인 단 어를 끄집어 내면 학구적이거나 고상해지는 효과도 있어 일거양득인 측면도 있다.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는 접근방식인데, 이것은 한 가지 결정적인 결함을 가진다. 애매한 상태는 항상 경계를 불러온다는 점이다. 구체성과 신뢰의 관계는 이렇게 형성된다. 일단 두 가지 경우가 생긴다. 하나는 구체성이 결여된 말을 계속 하는 정치인은 신뢰가 없다는 것. 다른 하나는 구체성을 포함한 말이 현실성(실현성)이 없는 경 우다. 전자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이 속말로 주둥이만 있는 경우이고, 후자는 말은 번지르르 해도 알맹이가 없는, 그것도 거짓에 가깝다. 이 둘 간에 어느 쪽 이 그나마 나은 건지는 모를 일이다. 대체로 지금까지의 전례를 보면 전자보다 후자가 더 위험했다는 건 분명하다. 왜냐하면 말에서 신뢰를 잃는 경우는 선택을 하지 않지만 후자의 경우는 현실에서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또 한 번 두리뭉실 넘어가는-이를 테면 롬니처럼 자기가 대통령 되면 경제는 산다는 식-가능성이 있어서다. 판단 못하면 그건 뭐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결국 이 현실성(실현성) 이란 걸 두고 다투는 것이 구체성으로부터 이어지는 최

페이지261 종 승부에 해당한다. 대체로 아젠다는 경제민주화, 일자리, 복지 등으로 쭉 이어 진다. 아마도 이게 시대적인 아젠다인 건 틀림이 없다. 안철수의 경우엔 이렇다 할 정책 자체가 나오지 않았다. 지금 나온 것만 종합해 봐도 총론이지 각론은 없으니 평가 대상에서 제외해도 무방하다 본다. 이제 막 시작한 정책 네트워크 내일 에 장하성 교수가 합쳐서 소위 혁신 경제론 의 내용 을 채우려고 한다. 아직 그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문재인의 경우, 담쟁이 포험 을 싱크탱크로 해서 움직이는 모양새다. 위원장은 노무현 정부 초대 정책실장 이 정우다. 이 말은 곧 노무현 정부에서 시행한 경제정책의 재평가 작업을 통해 각 론을 이끌어낸다는 의미가 된다. 박근혜는 2010년 12월 출범한 국가미래연구원 (김광두 원장)이 주축이다. 거기에 경제민주화추진단의 김종인 위원장이 있고 일 자리, 중소기업, 정부개혁 등의 소 그룹이 있는 형태다. 물론 아직 이렇다 할 정 책이 나온 건 아니다. 그간 나온 것만 박근혜, 문재인 두 사람의 경우 몇 가지 비교를 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정리가 된다. 구 분 박근혜 문재인 경제민주화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경 제 확립 조세정의 실현, 경제민주 화 실현, 공정거래질서 확 립 고용, 일자리 영향력이 큰 기업일수록 사회책임을 다하는 일자 리 창출 고용률 중심 국정운영 대통령 직속 국가일자리 위원회 설치 매달 일자리 점검 범 정 부 회의 개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차별철폐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신 규고용 확대 노인 일자리 확대 복지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 제도 복지수준과 조세부담에 대한 국민 대타협 강한 복지국가 가족 돌봄 공적 서비스 확대 아무리 인력 풀이 많이 투입된다고 하더라도 공약이란 건 대충 거기서 거기, 글 자 몇 자만 바뀐 경우를 흔히 본다. 비슷하다. 이번 대선의 키워드가 공정과 신 뢰 라는 점을 감안하면 특히 신뢰 라는 부분은 구체성과 반드시 결합되어야 할 개념에 속한다. 그러나 지금 나오지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이어져야 할까?

페이지262 아주 쉽게 생각해보면, 문재인이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재평가를 한다 는 의미가 당시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이라고 보여지지만 근 본적인 부분에서는 해소가 되지 않는 상황이 있다. 바로 경제의 전체적인 기조 자체가 그것이다. 일단 박근혜 문재인 두 사람 모두에게서 공통으로 보이는 건 시장만능주의 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그 방식에 있어 경제민주화, 노 동(고용), 복지가 나오는 건 성장과 분배 의 적정배합이란 시대적인 요청과 맞물 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예를 들어 고용 이란 면에 서 어떻게 확대할 건지에 대해서는 전혀 구체성이 있는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한계인 셈이다. MB정부의 고용정책에 대한 회고( 回 顧 )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새로운 정책 을 만들어내려(사실 구호를 만든다는 말이 적절한 수준이라 혹평하고 싶지만) 노 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실패한 사례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를테면 MB정부의 정책 실패를 어떻게 수정하고 보완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방 식 말이다. 이 비교표를 먼저 내는 정치세력이 보다 구체성을 가진 정책을 지향 하는 정치세력 이 될 것이다. 민주당의 경우, 노무현 재평가를 한다고 하지만 과 연 그 당시의 어떤 부분의 선택이 패착이었는지 그 비교표도 만들어야 한다. 이 것이 구체성의 결여를 벗어나는 방법이고, 또한 대중을 배려한 정책 접근이 될 것이다. 누가 먼저 할까? 궁금하다. 10. 냄새 나지 않는 X은 없다. 은행나무 / 곽재구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맑은 바람결에 너는 짐짓 네 빛나는 눈썹 두어 개를 떨구기도 하고 누군가 깊게 사랑해 온 사람들을 위해 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 신비로와라 잎사귀마다 적힌 누군가의 옛추억들 읽어 가고 있노라면

페이지263 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마저 금빛 추억의 물이 들게 한다. 아무도 이 거리에서 다시 절망을 노래할 수없다. 벗은 가지 위 위태하게 곡예를 하는 도롱이집 몇 개 때로는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가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가지 끝에 걸고 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선다 해도 수천만 황인족의 얼굴 같은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희망 또한 불타는 형상으로 우리 가슴에 적힐 것이다 착한 돈 바람 은 불 수 있을까? 대중은 늘 그것을 꿈꾼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 니다. 왜냐하면 돈, 그 자체가 이미 착하지 않은 구조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은 아 닐까? 사람냄새 나는 돈이 세상을 바꾼다. http://worldcup2010.hani.co.kr/arti/series/125/209172.html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 저)에는 사회적 경제 를 이 렇게 정의하고 있다. 사회적 경제란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커뮤니티 비즈니스처럼 경제주체들이 이윤 극대화 이외의 다른 동기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제영역, 탐욕 대신 이타심, 상호성, 협동, 사회적 목적, 명예와 헌신 같은 동기가 이 사회적 경제를 움직인 다. 2011.9.17 뉴욕 주코티 공원에 수 천명이 몰려들어 99%가 뭉치면 1%의 특권 층이 주도하는 사회를 바꿀 수 있다 고 외쳤다. 이 물결이 전 세계로 퍼져서 동 시 집회 시위가 이어졌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뭐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냥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 왜? 99%의 집회자들 속에서 99%의 사람들을 위한 정책적이건 혹은 현실적이건 간 에 대안 을 제시하는데 실패해서다. 그 후 여러 대안들이 나오긴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협동조합 이란 형태다. 이것이 기업으로 발전한 형태, 그러니까 협동조합 기업 에 관해서는 2011년 국회 통과된 협동조합기본법으로 규정되었다. (발효는 2012년 12월이다.) 5명만 모이면 할 수 있기 때문에 일정한 생태계가 만들어질 움직임은 보인다. 이것이 도시형으로 정착 가능한 부분도 있기에 주목되는 것도 사실이다.

페이지264 <2012 시대읽기 오리엔테이션> 13. 네이션 탐구 편에서 과거에 있었던 협동종 합의 역사를 잠시 본 적이 있다. 조합주의적 사회주의화. 현실은 스미스의 사태 파악을 배반했다. 자본제 생산은 그 자체가 차액(잉여가치) 을 낳으며 계급문제를 가져왔다. 그와 같은 현실에 대항하여 사회주의적 사상이 나왔다. 1820년대에 리키도파 사회주의자(Ricardian socialist)가 나온 것처럼, 스 미스의 도덕=경제론은 그의 의도와는 달리 사회주의를 낳았던 것이다. 국가가 아닌 즉 독립생산자의 협동조합에서 구하는 사회주의, 그와 같은 사회주의를 추구 했던 것은 낭만파였다. 영국의 낭만파 중 많은 이가 사회주의자였다는 것은 주목 할 만한 가치가 있다. <사회주의와 협동조합운동>(김창진, 한울아카데미, 2008)은 러시아 차르 체제와 전시 공산주의 그리고 스탈린 체제 하의 국가권력과 역동적인 상호작용하면서 흥 망성쇠를 거듭하는 과정을 통해 러시아 사회주의 체제의 실패가 러시아 인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층과 도시 노동자 층의 공통 이해관계를 제도화하는 데 실패한 것에 그 원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2부에서는 1905~1930년 기 간의 국가 사회주의 협동조합운동을 자세하게 조망하고 있다. 러시아에서의 협동조합은 레닌의 논문 협동조합에 대하여 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 첫 머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스탈린 체제 이후 이 논문은 거의 금서 취급을 당했다. 실패한 정책에 대한 조치와도 같았던 셈이다. Ⅰ. 우리나라에서의 협동조합운동에 대해서는 충분한 주의가 기울여지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들이 지금, 10월 혁명의 시기이래 또 NEP와는 전혀 상 관없이(이와 정반대로,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우리는 NEP 덕분이라고 말해야 한 다.) 우리의 협동조합 운동이 커다란 중요성을 가진 운동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 과거의 협동조합 주창자들의 꿈속에는 많은 환상적 요소가 들어 있었다. 때때로 그것들이 환상적이었던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였는가? 그 이유는 사람들이 착취자들의 지배를 전복시키기 위한 노동자 계급의 정치투쟁 이 가지는 근본적이고도 심층적인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착 취자들이 지배를 뒤집어 엎었으며, 과거의 협동조합 주창자들의 꿈속에서는 환상 적, 심지어는 낭만적이고 진부한 것이기조차 하였던 많은 것들이 지금 아무런 꾸 밈도 없는 현실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다. ( 시장경제와 사회주의-제 3의 길 중에서, 요하임 비숖/미하엘 멘아르트, 새물결) 베네수엘라의 경우, 우고 차베스 집권 초기 생활 협동조합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 다. 그 후 수십만 명을 고용하는 수만 개의 협동조합이 존재했지만 그 상당수는

페이지265 사실상 실패했다. 그간의 경험은 인민의 삶을 법령을 통해 위에서 아래로 변화시키는 것이 얼 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다. 정부는 2006년에 14만 개의 협동조합을 만들었 지만, 올해 인민경제부 장관은 7만 4천 개가 있다고 발표했다. 상황은 더욱 악화 되어, 최근 조사에 따르면 단 4만 8천 개만 남아있다. 많은 협동조합들은 애초에 시작되지도 않았고, 어떤 경우에는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창업자본과 서류상 등재 된 고용자에게 줘야 할 임금을 그냥 챙겨버린 경우도 있었다. 친차베스 의원 중 한 명은 지금까지, 어떤 사람도 협동조합 계획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 사 실, 그 동안 지출된 자금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보여줄 만한 것이 현재 없다 고 말한다. Venezuelanalysis.com, 2007년 8월 28일 베네수엘라는 아주 독특하게 200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영향력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그 원인으로는 첫째, 정부 자산을 채워주고 지정학적 중요성을 증가시킨 석 유가격의 상승, 둘째, 미국과 긴밀히 연결된 국내 자본가들에 대한 정권의 상대적 인 독립, 셋째, 이라크에 발목 잡혀 축소된 남미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 능력 감소를 꼽는다. 한국의 상황과는 많이 다르다. 특히 산유국인 베네수엘라와 한국 과 단순 비교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잘 봐야 할 부분이 있다. 차 베스 입장에서는 미국의 지배 핵심기구를 세계은행과 국제금융기구(IMF)로 봤고 2007년 5월 이 두 기구에서의 탈퇴를 선언했다. 그래도 성공한 모델 가운데는 캐나다를 드는 예가 많다. 1980년대 초 경기침체 에 빠졌던 퀘벡 주에서 고용안정을 위해 노동자연맹과 합의해서 노동연대기금을 설립하고, 주 정부가 기금에 매칭펀드 형태로 참여하면서 연방정부가 세수 감소 를 보전하는 방식이 적용되었다. 지역사회경제개발기업이 간병, 환경, 재활용, 관 광, 주거, 직업훈련 등 분야에서 복지 서비스를 시작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시 스템은 들어와서 지자체에서 적용되었다. 그러나 통진당 사태에서 민간위탁의 특 혜 의혹이 불거지며, 이런 지역사업에 낀 거품의 일부가 알려진 적도 있다. 사회 적 기업에도 이권이 작동하는 예였는데, 이를 효율적으로 통제할 장치가 없는 상 태에서는 이런 일은 여러 지자체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질 거라는 추정이 가능한 일이었다. 경제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고용-생산-소비-재투자 의 선순환은 이론으로는 타 당하지만 현실에서는 갈등을 일으키는 모델이 되기도 일쑤다. 지역경제의 경우기 업을 유치하거나 일자리를 많이 만들겠다고 약속하지만 실제 효과는 미미하다. 일자리 창출이 되더라도 질이 낮고 오히려 주변 영세업체를 무너뜨리는 형태로 진행되다 보니 정작 지역에서는 원성을 산다. 사회적 기업도 예외가 아니었던 셈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 시행되는 협동조합의 조기 활성화를 위한 지자체 의 활동은 확대되고 있다. 충청남도의 경우에는 2012.8 충남 사회적경제 육성지 원 조례 를 마련해 사회적기업뿐만 아니라 마을기업, 자활기업, 협동조합 등에 대 한 제도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런 사회적경제 현지화 정책이 지역 단위의 경제 저변을 어느 만큼 확대해줄지 시험무대에 올라간 셈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페이지266 것은 대안의 하나이지 결코 중심은 아니란 사실이다. 또한 성공의 가능성에 대해 서도 낙관적으로 예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순환과 공생이란 주제가 널리 확산되 는 계기는 될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선거 판의 혹은 정치권의 몹시 정치적인 구호를 듣다가 현장에서 벌어지 는 이런 상황들을 대입해볼 때 종종 괴리감을 느끼는 예는 흔했고 지금도 마찬가 지다. 과연 지금 시점에서 지난 시간 동안 누적된 악성의 구조적인 문제까지 포 함해서 그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을 수 있겠는가, 솔직히 단기적 측면에서 는 대단히 부정적이다. 이러한 대안적 활동의 상층부에 위치하는 바로 그 핵심에 있는 막장 금융자본주의이고 이 놈은 저러한 선순환 이론의 적용을 전혀 받지 않 고 움직이는 생물 인 점이 늘 걸린다. 이들은 외계생물처럼 그 변이를 짐작하기 도 어렵다. 환경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그 중에서 으뜸은 바로 저기로부터 출 발해야 한다. 쉬울까?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대단히 폭식성( 暴 食 性 )이 강한 생물이다. 냄새 나더라도 X을 먹는 자들이니까. 그래서 막연하게 일자리를 무조건 늘리겠다는 선거 공약에 믿음이 가지 않는 것 이고, 또 마치 지금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사회적 기업이나 혹은 협동조합 법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사회의 빈자리가 그것으로 채워지리란 막연한 기대도 하 지 않는다. 결국 핵심은 이것을 운용하는 조직적인 접근에 있다고 본다. 그 점에 서 반드시 봐야 하는 건 실패의 사례다. 왜 실패했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유사한 프레임을 반복하려는 건 치명적인 또 다른 실패를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다. 깨 끗해지려면 우선 X부터 치워야지 그걸 그냥 두고 냄새 나지 않길 바라는 건 희 망이 아니라 절망이다.

페이지267 2012 시대의 민낯 제 7 부 (2012.10.3~2012.10.5) 담담당당 추석과 개천절 연휴 기간 동안 이어 글을 썼다. 그 사이 많은 변화는 아니나 그 래도 변화라 부를만한 일들은 생겼다. 안철수에 대한 검증이 강하게 대두되었고, 그 결과는 추석 이후 여론조사의 약간 변화로 드러났다. 그러나 아직 본 게임은 시작하지 않은 듯하다. 검증은 이어질 것이고 더불어 많은 거품들이 빠질 전망이 다. 여전히 많은 이들은 이번 선거의 초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그 이유를 생각 해본다. 이유는 정책이 나와서 그를 검증할 시간을 주는 게 아니라 거의 인기투 표 비슷한 형태로 진행되는 탓인 듯하다. 대통령을 뽑는 건지 아니면 관상 좋고 이력 좋고 하는 사람을 챙기는 건지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자본에 대한 생각을 한다.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가진 사회 그리고 문화, 나아가 거칠고 오래된 역사성이 아니라 바로 가까운 과거로부터 형성된 그 런 자본의 횡포 말이다. 그들이 과연 우리와 공존이 가능한 대상인지 아닌지 염 두에 두면서 봐야 할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이번 대선 은 그 숨겨진 몇 인치의 화면이 더 중요하다. 어디서 그것을 찾아봐야 하는지, 그 걸 모르면 이 관전은 모두 엉터리가 된다. 글을 이어 나간다. 민낯 시리즈도 10부까지 이어진다. 그 사이에도 사건은 벌어 지겠지만 민낯 이후에도 다음 시리즈가 이어지는 건 분명하다. 시대읽기까지가 오리엔테이션이라면 이 민낯 시리즈는 세세한 문제들을 보는 중간단계 정도로 생 각하면 될 것 같다. 1. 살 맛 없는 길로 가면 2. 장준하와 노무현 3. 8가지 어리석음 4. 지역구도 해체법 5. 시장의 배반, 정치의 배신 6. 네거티브 경쟁구도의 허허실실 7. 나도 그저 풀인 줄 알았지. 8. 묻지마 범죄에서 묻지마 의 의미 9. 기득권이 겸손해져야 하는 이유 10. 경제 문화 사회 자본의 세습

페이지268 1. 살 맛 없는 길로 가면 키 큰 남자를 보면 / 문정희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세상의 많은 일들이 겉으로 드러나있다. 대체로 그걸 보고 사람들은 판단이란 걸 한다. 사건이건 혹은 사안이건 마찬가지다. 그 모습에서 해답을 구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많이 벌어진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때가 생긴다. 사건/사안이 (처리) 진행 중이거나 혹은 다 끝난 이후에서야 어! 그게 뭐지? 라는 찜찜한 기 분이 도는 바로 그 때, 우리는 보이지 않은 진실을 깨닫게 된다. 멍청해진다. 그 리고는 생각한다. 그래! 보이는 건 전부는 아니야! 그러고 나서 또 망각으로 돌 입한다. 여전히 이런 상황을 반복한다. 확실히 사람은 빨리 잊고 빨리 판단하는 버릇을 가진 동물이란 생각마저 든다. 정말 그럴까? 이면( 裏 面 )을 보는 법은 간단치가 않다. 그건 지식의 세계가 아니라 경험이나 정 보, 나아가 탐색 수준이 아닌 끈질긴 탐구( 探 究 )를 기본으로 한다. 감각적이기 보 다는 매우 건조한 접근법을 가진다. 영화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 론 하워드 감독, 2006)는 댄 브라운의 2003년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로마 카톨릭이나 일부 기독교계 는 이 영화를 논쟁의 여지가 있는 해석과 왜곡된 기독교 역사를 담았다고 비판하 고 심지어 보이콧 운동도 전개했다. 그러나 영화는 성공했다. 거기에 등장하는 조

페이지269 직 오푸스 데이 (Opus Dei, 하느님의 사역)은 실제로 성 십자가와 오푸스 데이 (Praelatura Sanctae Crucis dt Opus Dei)라는 로마 카톨릭의 성직 자치단 중 하나다. 그들은 영화 제작자에게 영화 초입부에 작품이 허구란 사실을 공포하라 고 주문했지만 제작사 소니 픽쳐스는 영화는 허구일 뿐 이란 논리로 대응을 했 다. 그렇게 영화는 세상에 나와서 흔히 성공한 영화가 그렇듯 대중에겐 아주 강 하게 종교적 비밀조직이 있을 거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인터넷 개봉된 <시대정신>(Seitgeist, 피터 조셉 감독, 2007)의 경우, 특정 집단 의 이윤을 위해 전 세계를 움직이는 집단 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런 데 흥미롭게도 이에 반박하는 내용도 나왔다. (자막이 없어 좀 불편하긴 하지만 어떤 반박인지는 화면에서 다 보여준다.) Zeitgeist Refuted Final Cut (Full Movie) http://www.youtube.com/watch?v=1hgx6w4u-2o http://orthodoxy.tistory.com/345 refute 는 논박( 論 駁 )하다는 뜻이다. 즉,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비판을 요약하면 세 가지로 거론한다. 첫째, FRB에 대한 대안 없는 비판이며 둘째, 사실 을 무시한 선동적인 수사법, 셋째, 극 최상위층의 소수 자본세력의 상정을 들면서 이걸 공산주의 이념 기반 제작 영상이라 한다. 좀 우스운 반박이긴 했지만 그 다 음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바로 종교, 그 가운데서도 기독교가 얼마나 공산주의를 미워하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구절이 등장한 다. 또 하나 이것이 공산주의적 선동이라는 점은 전체적으로 보면 더 극명하게 드 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경제학적 환원론입니다. 이 영상을 본 사람이라면, 이 영 상 전체를 곰곰이 곱씹어보면 무의식 중에 느끼고 있었던 흥미 있는 사실을 발견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영상에서는 모든 것이 '돈'에 의해서 설명됩니다. 돈이 전부 입니다. 정치도 전적으로 돈에 달려있으며, 기독교도 돈을 벌기 위한 세속적 도구 이며, 법률도 돈에 의해, 사람들의 행복도 돈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돈으로 환원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유물론적 공산 주의라 명명합니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거부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종교가 돈에 매이지 않는 인간정신의 숭고함을 부르짖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상을 볼 때에 상당한 주의와 분별을 가지고 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영상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쉽다고 썩은 동아줄을 잡을 수는 없 는 노릇이라고 필자는 믿습니다. 그러나 정작 미국 FRB에 대한 설명은 없다. 마치 그것이 대안이 없으면 가만히 있어라 식 의 접근처럼 말이다.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확실히 내가 본 시대정신 이란 저 다큐멘터리는 돈 에 대한 이야기가 1, 2, 3부를 채운다. (솔 직히 대체에너지 부분 등 몇 군데는 나도 전혀 동감하지 않는다.) 전체의 골자

페이지270 는 종교, 9.11사건, 그리고 FRB에 관해서다. 그 중에서 돈 은 이 다큐멘터리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반박을 딱 하나 한다. 공산주의 이론이다 고. 그러나 이에 대한 논박( 論 駁 )이 왜 나왔느냐를 보면 그게 오로지 종교적 이 유에 초점을 맞춰 간다는 점에서 이건 이미 논리적 사유와는 벗어난 듯하다. 그 래서 이 반박의 영상은 원판에 비해 아예 퍼지지도 못하고 존재감마저 없어졌는 지 모르지만. 탐욕스런 국제금융 카르텔의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다. 그러니까 허구( 虛 構 )가 아 니란 소리다. 음모론은 사실에 바탕 하지 못했을 때 그 비판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이 드러났을 때는 그것을 음모 ( 陰 謀 )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것마저 모르면서 지식 운운하는 자들이 많은 세상이라서 좀 우습기는 하다만. 또한 더 중요한 포인터는 원래 이 음모라는 단어 자체가 나쁜 목적으로 라는 접두 수식어 를 가진다는 점이다. 좋은 일에는 음모가 없다. 그리고 꾸미는 일 자체가 대단히 흉악 ( 凶 惡 )하다. 악하고 모질고 지독하다. 그러니까 목적도 그 프레임을 명확히 가진 상태에서 시작하는 모양인 것이다. 이들은 결코 태생부터 대중을 좋게 할 목적을 가진 집단은 아니다. 이 바탕을 생 각하고 봐야만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있다. 아주 간단하게 보면, 수십 년 간 회자되는 신자유주의 의 핵심은 바로 이들 집단에 의해 움직이는 거다. 그들 에겐 돈 을 목적으로 하는 모진 구석이 있고, 거기에는 단 한 치도 인정이란 게 없다. 냉혹한 무한경쟁만이 있고, 그렇기에 적용하는 방식 자체도 시장만능이란 틀에서 숫자가 모든 걸 지배하는 구조에 있다. 이들에겐 최악의 적이 바로 공산 주의 혹은 사회주의적 접근 인 셈이다. 그것은 돈의 가치를 경쟁에서 찾지 않는 다. 그러니 그들 입장에서는 절대악인 셈이고, 그들은 그들의 이익을 위하여 단결 하여 대응한다. 그 모습이 지금 세계가 가진 바로 오늘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정은 자본에는 없다. 태생이 그렇기에 그 성장도, 그리고 운용도 마찬가지 작용원리를 가진다. 이것이 우리에게 심어진 것, 그것이 바로 IMF사태 이후다.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나서 우리를 그곳으로 몰아 넣은 사람들 은 누구인가를 생각해보자. 어쩔 수 없었다고?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나! 그렇게 포장했고 또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자꾸만 자본논리를 더 심어주기 위하여 노력을 했을 뿐이다.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감춰진 커튼을 젖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지식이 건 경험이건 양지( 陽 地 )의 모습을 볼 자격은 주어지지 않는다. 워낙 신자유주의 운운하는 그 보기엔 모호한 단어에 매몰된 감이 없지 않으나 적어도 이 사실적 바탕을 모르면, 우리는 영영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감춰진 것에도 진실이 있지만 스스로 진실의 문을 닫으려고 하지는 말기를. 살 맛 없어 지는 길을 왜 걸어가는지 모르겠다.

페이지271 2. 장준하와 노무현 마음에 부치는 노래 / 함석헌 세상이 거친 바다라도 그 위에 비치는 별이 떠 있느니라 까불리는 조각배 같은 내 마음아 너는 거기서도 눈 떠 바라보기를 잊지 마라 역사가 썩어진 흙탕이라도 그 밑에 기름진 맛이 들었느니라 뒹구는 한 떨기 꽃 같은 내 마음아 너는 거기서도 뿌리 박길 잊지 마라 인생이 가시밭이라도 그 속에 으늑한 구석이 있느니라 쫓겨가는 참새 같은 내 마음아 너는 거기서도 사랑의 보금자리 짓기를 잊지 마라 삶이 봄 풀의 꿈이라도 그 끝에 맑은 구슬이 맺히느니라 지나가는 나비 같은 내 마음아 너는 거기서도 영원의 향기 마시기를 잊지 마라 아주 대단히 민감한 문제 하나를 꺼내보자. 바로 장준하 선생과 고 노무현 대통 령 이야기다. 장준하 사건은 단순하지 않다. 여러 언론보도들이 나오긴 했지만 정 치적인 것, 그리고 의학적인 걸 합하여 충격적인 내용은 바로 정의화 전 국회부 의장의 견해표명이었다. 의사 출신 정의화 장준하 선생 두개골 타살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121433231&code=910402 정의화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은 타살 입증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12/2012091201570.html?dep0=twitter

페이지272 국내에서 손꼽히는 신경외과 전문의, 뇌혈관 분야 권위자인 정의화의 말은 경향 조선 등에서 모두 받았다. 이설( 異 說 )의 여지가 없어지는 한 장면이었다. 과거사 진상조사위에서도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는 점에서 정의화의 이 태도는 여러모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15~19대에 걸쳐 부산 중구 동구에서 선거로 당선 된 인물이다. 그러니까 1996년부터 지금까지 국회의원을 하는 장수 정치인인 셈 인데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생각을 하게 만든다. 혹자는 정의원이 친이계로 분 류된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도 이명박 정권의 꼼수에서 보자는 의견도 나오지만 정의화의 전문성에 이 말도 살짝 묻히는 감이 있다. 국회의장 자리를 놓고 친박 계 강창희와 2파전을 벌였으니 그런 말도 나올 법은 하다. 그렇지만 친이계 주류 라는 딱지가 붙었어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공동대표를 했다는 점 등 때문 에 일단 합리파로 불렸던 인물인 것도 사실이다. 장준하 암살의혹규명 국대위가 100만인 서명 운동을 벌이면서 이 사안은 이제 법의학자 손으로 넘어가는 모양새다. 장준하 의문사 진상 규명, 민간에서 밝힌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059 그래도 매장 37년 만에 검찰이 실족에 의한 단순 추락사 라고 했을망정 매장을 선택했기에 이 논쟁도 가능하게 되었다. 만일 그 때 화장을 선택했다면 이런 논 쟁은 전혀 불필요했을 것이다. 서둘러 매장이라도 한 것이 다행이었다는 이야기 다. 당시 누가 매장을 결정했는지는 드러나지 않으니 모르겠다. 1975.8.17이니 당시 사회분위기로만 보자면 화장은 대세가 아니었던 건 사실이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20%에 미치지 못했으니까. 통계로 보면 1971년 7.0%, 1980년

페이지273 13.9%, 1990년 17.5% 순으로 변화는 있었다. 그러니까 70년대는 10% 안쪽이 었던 상황이었다고 보면 된다. 2012년 현재는 10명 중에 7명꼴이 화장을 한다고 통계가 나온다. 그러나 화장 아닌 매장을 했기에 6*7cm 크기로 원형 함몰된 사진이 공개된 것 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의문사진상위 조사에서 여기까지 가지 못한-유골을 봐야 하니까-바로 그 한계는 지금도 여전할 것이다. 아니, 아예 그 다음 수순을 밟기 도 어려운 의문사로만 남았을 게 분명하다. 그나마 준 수사권을 가진 기관조차도 그랬다. 그러니 지금은 유골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고, 그 답을 말해야 만 할 입장이 되었으니 한층 진상에 가깝게 된 셈이다. 정치적인 호불호는 예외 의 문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시신을 화 장한 전례가 전혀 없다. 유서에 적힌 화장해달라는 부탁이 정말 자신의 사후를 정리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나 하는 의문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 리 튀기 좋아한다 해도 유체( 遺 體 )를 스스로 훼손해달라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에 이름 석자 대면 알만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특히 그렇게 하는 이가 드물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다. 유서에 따라 화장을 결정한 건 순전히 유족의 몫이다. 누가 왈가왈부할 사안은 아니다. 장준하 선생도 이장과정에서 37년만에 다시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마저 모두 없애버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와 장준하 선생은 확실히 비 교가 크게 된다. 유서 내용에서 화장과 관련한 대목은 다음과 같았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작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오래된 생각? 나는 아직도 어떤 언론에서도 이 오래된 생각 에 대한 측근이건 가 족의 증언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냥 덜렁 저 글 하나만 남아있다. 참 괴로운 일 이다. 이건. 정말!!

페이지274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 는 말이 어색하게 보인다. 그래 알기는 아는데 무엇을 알 고 어디까지 아는가? 느낌이 아니라 현실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데, 이 결정은 정말이지 서툴렀다. 최소 한 이 정권 동안은 가묘를 사용하더라도 매장을 선택했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 장준하 선생처럼 이장을 하면서 갔어야 하는 것이 한국이란 나라의 국민들을 위 한 길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노무현 장의위원회와 가족까지 포함해서 결정을 내린 그 그룹에 대해 묘한 반감을 가진다. 스스로 증거를 없애고 마음이 편했을 까 모르겠다. 의문사를 의문사로 말하지 않는 그 명확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마음이었는가 묻고 싶다. 밝혀주길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불편한 가? 정말 불편한가? 나도 많이 불편하다. 3. 8가지 어리석음 빈 들 / 김용택 밥풀 같은 눈이 내립니다 빈 들판 가득 내립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당신으로밖에는 채울 수 없는

페이지275 하얀 빈 들을 거머쥐고 서서 배고파 웁니다. 추석이 지난 후의 민심을 반영한 여론조사가 흥미롭다. 3자 대결에서는 여전히 박근혜가 우위지만 양자대결 구도에서는 모두 패배했다. 안철수-문재인이란 두 카드는 박근혜보다 앞선 이미지 구축에는 성공하는 듯 보인다. [한국] 안 49.7% vs 박 41.1%, 문 47.0% vs 박 43.7% http://media.daum.net/issue/289/newsview?issueid=289&newsid=20121004023907147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박근혜 추석역전 실패, 박 44.7% vs 안 50.4%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21004000010&md=20121004063800_f 이에 대한 분석은 향후 네거티브 공세 강해질 것 으로 정리된다. 朴 하락세 진정 文 꾸준한 상승세 安 선방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304 이유는 간단하게 분석을 한다. 부동층이 많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미 추석 전에 마음을 정하고 그에 따라 특별한 변동이 없이 대선 레이스를 본다는 것이 전문가 들의 견해다. 그래서 상대의 표를 줄이지 않으면 내 표가 올라가지 않는다는 인 식에서 네거티브에 대한 유혹이 강해질 거라고 보는 것이고, 아마 그렇게 갈 것 이라고 본다. 선거판이 전쟁통이 될 수밖에 없는 모든 조건을 이번 대선은 착착 갖춰가고 있는 중이니까. 그러나 분명한 건 과거 방식으로 이번 대선 레이스를 재단하고 평가해서는 그 해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이 3자 구도에서도 잘 나오고, 문-안 두 사람 의 단일화 선호도에서도 드러난다. 과연 단일화가 될 건지에 대한 부분도 눈여겨 볼 수 있는 대목인데, 이게 팽팽한 구도라면 단일화 추진에서도 마찰음이 드러날 수도 있는 등 변수가 여전히 많다. 물론 앞서 언급된 네거티브도 그렇지만, 이 과 정에서 오히려 정책에 대한 관찰이 무뎌질까 참 걱정된다. 이 부분은 좀 더 보완 하도록 하자. 댓글을 보면, 새누리를 찍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거론하는 부분이 많다. 새누리 =박근혜 이고 여전히 새누리=MB=박근혜 로 연결된다. 그걸 한 번 정리해보자. 물론 이건 댓글을 바탕 한 의견 정리다. 여기 언급되지 않은 내용도 많다.

페이지276 첫째, MB 4년여를 겪고도 또 찍은 뒤 먹고 살기 힘들다고 울부짖는 사람들(댓글 에는 이걸 장애인으로 묘사했다. 아래 똑같다.) 확실히 이 부분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MB라는 인물에 대한 소견은 여론조사 의 그것(그래도 잘한다는 비율이 30%대가 나오는 것)을 도저히 나는 믿기 어렵 다. 이 정권은 앞선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비해서도 더욱 사악한 접근법을 가지 고 있었다는 건 누차 이야기했다. 그 중심에 MB가 있었다지만 그 배후에 구 한 나라당(지금 새누리)이 있는 건 부인 못한다. 그러나 좀 더 좁혀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정확하게 정권 분석이 가능하다. 친이계로 표상되는 MB를 보수라고 정의 하기는 어렵다. 특히 친이계의 극단적 MB 추종자들은 내 관점에서는 몹시 지능 적인 왜색이면서도 자기중심주의, 극단적 이기주의에 가까운 모리배들이었다고 본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정리되어야만 한다. 둘째, 비정규직 주제에 서민복지 삭감 해 부자 감세하는 새누리당 찍는 사람들 부자감세 로 인해 세수의 형평성이 무너졌기에 복지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건 통계로도 나온다. MB감세로 덜 걷힌 세금 63조원 http://media.daum.net/economic/newsview?newsid=20121002195710778 정확하게는 지난 5년간 63조 8000억원이 세수 감소효과를 보인 것이다. 그 효 과를 본 곳이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집중된 것이 요점이다. 이건 감면 이란 형식 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소득세, 법인세, 부가가치세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 나 전체 63조를 대기업 등에서만 경감된 건 아니다. 중소기업 중산층 서민층에 32조 5000억원, 대기업 고소득층에 31조원의 분포를 가졌다. 부자감세 의 문제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기업 고소득층의 전체 국민에서의 비 중을 먼저 거론한다. 당연히 부의 집중 문제를 말한다. 실제로 위의 비율에서 보 듯이 상위 1~5% 내의 세수 감면액이 전체 95~99%에 맞먹는다.

페이지277 그러나 복지를 줄인 것의 원인은 이런 세금감면에서 찾아야 할 건 아니다. 오히 려 재정의 불합리한 집행에서 그 근본적 대책을 꺼내야 한다. 내년 국가채무가 464조 8000억원, 금년보다 19조 6000억원이 늘어날 전망이란 점에서 보면, 위 의 세수 감면이 모든 원인의 시발점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셋째, 영세 자영업자 주제에 영세 자영업 몰살하는 FTA 지지한 사람들 솔직히 여기엔 할 말이 없다. 한미FTA를 두고 내 주변에서도 그거 해야 사는 거 아니냐고 했던 이들이 많다. 구구절절 설명을 해줘도 잘 못 알아 듣는다. 영세 자 영업 하는 친구들, 후배들이 그렇다. 특히 해외 무역이라도 하는 친구들은 무조건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미FTA의 경우는 체질을 바꾸는 것이지 단 순히 무역 통상만 내용물에 있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어쩌면 이 단순함이 자기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것도 모르는 근본원인일 수 있겠다 싶었다. 도저히 말로 해서는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들 많았다. 넷째, 지 땅 한 평 없으면서 남의 세금(종부세) 걱정하며, 노통이 서민에게 세금 폭탄 터뜨렸다며 새누리당 찍은 사람들 2008.11.13 헌법재판소는 종부세의 세대별 합산부과를 포함해서 위헌 결정을 내 렸다. 1주택 장기보유자에 대한 부과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사실상 종부세 는 제도는 있으나 실효성이 없게 되었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말이 많았다. 그 러나 논리적으로는 보수와 진보로 표상되는 언론간의 논쟁에서 보수가 우세하게 결론이 내려졌다. 왜냐하면 진보의 논리 자체가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향 한겨레의 촌스런 헌재 비판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4582 분명한 건 헌재가 종부세의 정당성은 인정했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세금폭탄 이 란 프레임으로 비판을 시작한 보수 언론들의 말이 맞는 걸로 전환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사실 노무현 정권의 패착은 일을 풀어나가는 얼개를 맞추는데 너무 아마 추어적이었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는다. 이를테면 종부세의 경우도 사실은 불로 소득 환수목적의 세금이고, 이 불로소득을 환수하지 않으면-그런 세금이 없으면 -부동산이 없는 사람들이 차별 받는 구조가 생긴다는 접근법이어야 마땅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접근을 했다면, 아마도 노무현 정부에서 종부세는 튼튼 하게 하나의 세금항목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거기에 종부세를 폐지하면 부동 산 가격이 폭등한다 는 논리는 좀 구차하게 보인다. 그렇게 말하면, 부동산을 가 진 사람들은 당연히 반발하게 되어 있다. 대한민국에 생각보다는 부동산을 가진 이들이 많고 또 가질 것이라고 명확하게 기대를 가진 사람도 많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세금폭탄 의 레토릭을 만들어준 것이 누군가를 생각해야 한다. 단순하게 남 의 세금 을 말할 건 절대 아니다.

페이지278 다섯째, 달랑 집 한 채 있으면서 지가 부자인줄 알고 부자들따라 새누리당 찍는 사람들 이 말은 앞서 종부세의 경우에서도 봤지만, 기대와 희망 이란 점을 무시한 거다. 부동산에 대한 투기열풍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가장 안전한 투자자산 으로 각광 받을 때, 사람들은 빚 내서 투자를 했다. 사실 투자가 아닌 투기였다. 그렇게 해서 집을 장만하고 나서 그 투자(투기)의 덕을 좀 보자는 심리는 사실상 안전자산 이란 개념보다 상위에 있는 게 대부분이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부자 맞 다. 집도 없고 집을 가질 수 있는 희망이나 기대의 근거도 없는 사람들이라면 모 를까, 저런 경우에는 부자가 맞다 봐야 한다. 여섯째, 그 놈이 그 놈이라며 투표 날 투표 안 하고 놀러 가는 사람들 침묵의 자유도 있고, 선거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나는 사실 이런 식으로 마치 투 표가 민주주의를 표상하며,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 이 있다. 당신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싶나요? 그럼 이렇게 답을 할 거다. 이건 싫고 좋고가 아니고 해야 할 일이다 라고. 그렇다면 다시 이렇게 묻는다. 그 해야 할 일을 누가 정하는 거지요? 투표하건 않건 간에 그건 문제가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투표하지 않았으면 투 표를 통해서 결정된 것에 관해서는 비판할 자격이 없는 것일 뿐이다. 사실 이 말 도 틀린 이야기일 수 있다. 왜냐하면 투표가 모든 민주주의의 행동양식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놈이 그 놈인 경우는 벌써 확정된 사실이다. 정치, 정치인이 대중을 위해 서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으니. 그렇지만 정치를 말하는 건, 그 정치가 우리의 시간을 좌우해서다. 정치와 정치인이 우리에게 직간접으로 시 간을 잡아 먹는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한다. 당신들은 이건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저건 저렇게 하면 안 되고, 잘하는 건 박수치고, 못하는 건 사정없이 비판하고. 그래서 이런 말은 정말이지 너무 하수들이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오히려 좀 더 세련되게 투표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마세요 라고 하든지, 차라리 투표하지 말고 비판도 하지 마세요 라든지, 그도 아니라면 투표도 열심히, 비판도 열심히 라고 구호를 외치든지 해야 한다. 투표할 마음 나지 않게 하는 정치, 정치인을 탓해야 지 침묵의 자유를 건드릴 사안은 아니다. 게다가 투표 않는 사람을 모두 도매금 으로 몰아 넣는 저 방식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일곱째, 사학법 반대한 새누리당 반값 등록금 공약 믿고 새누리당 찍은 사람들

페이지279 사학법, 정확하게는 사립학교법 이다. 노무현 정부가 반드시 개혁을 다짐했던 이 른바 4대 개혁입법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 중 의 하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법안은 2007년 6월 국회 통과 되었다. 물론 내용상으로는 처음 개혁을 말했던 때와는 다르게 제법 누더기 티가 나게 되었지만 법은 법대로 통과된 셈이다. 여기에는 아주 복잡한 정치공식이 숨겨져 있는데-사실은 복잡하 다기 보다는 이해관계라고 해야 옳다-이것이 여야의 타협으로 이루어졌다는 사 실이 무엇을 말하는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노무현 정부는 민생을 정략 수단으로 삼는다 고 당시 한나라당을 공격했다. 그러나 속전속결 처리된 데는 그만한 이유 가 있다. 그것도 정권 말기에 말이다. 열린우리당을 아쉬워하는 건 고 노 전대통령만의 뜻이 아니다. 최소한 과반수 이 상의 의석을 몰아준 민심이 기대한 건 그만한 일을 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하 지 못했다. 그래서 이 사학법과 반값 등록금을 결부시키는 건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다. 반값 등록금은 오히려 이명박 정권의 공약 에서 찾아야 한다. 후보시절에 그는 등록금 절반 인하 를 분명히 후보의 약속범위 속에 두었다. 그런데도 그 후 이렇 게 말했다. 이는 한나라당 공약이었지, 이 대통령의 공약이 아니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사실은 사실로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포장을 거쳐 사실이 허위 로 둔갑하는 경우에도 사실의 존재가치가 변하지는 않는다. 면밀함이 부족해서 숱한 정치, 정치행위들의 모순을 지적하지 못한 전례가 너무 많다. 그래서 오히려 더 세세한 관찰이 필요한 것이다. 하기야 이렇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물감을 훌훌 섞은 것처럼 단순화 해버리는 것이 사람이다. 싫다, 좋다 는 이분법, 흑백론은 그 래서 나오는 것이니까.

페이지280 4. 지역구도 해체법 숨기고 싶은 그리움/ 한용운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않은 어느 햇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내 안에서만 머물게 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람 같은 자유와 동심 같은 호기심을 빼앗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내게만 그리움을 주고 내게만 꿈을 키우고 내 눈 속에만 담고 픈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내 눈을 슬프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마음을 작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만을 담기에도 벅찬 욕심 많은 내가 있습니다.

페이지281 어찌 되었건 간에 이번 대선은 지역성에 있어서는 몹시 묘한 형태를 갖췄다. 박 근혜는 경북, 문재인 안철수는 부산 경남인 구도. 흔히 TK, PK로 불리는 곳 출 신들이 대선주자로 나왔으니 지역감정은 좀 없어져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 런데 그게 아니다. 지금 나오는 여론조사를 보면 이게 아주 극명하다. 전라도의 민주통합당 선호는 기본적으로 민주당이 지역정당이라는 걸 명확히 보 여준다. 그렇다고 새누리당이 지역 정당이 아닌가? 그도 아니다. 이들은 각각 모 태를 두고 움직인다는 점에서 거의 스타일이 흡사하다. 겨우 지금 중심을 잡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서울 경기지역이다. 여기는 다양한 지역 출신들이 모 인 공간이다. 사실 서울 토박이는 그리 많지도 않다. 그래서 이 지역의 결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지도 모른다. 서울인구는 1945년 광복 당시에는 90만 1천명 수준이었다. 이것이 1946년에 126만 6천명으로 증가하였고, 1948년에는 인구 170만 7천명, 1949년에는 141 만 8천명으로 늘어났다. 전쟁 이후 1955년 157만 4천명, 1960년에는 347만명 으로 급상승을 한다. 1970년 552만 5천명, 1980년 836만 4천명, 1985년 232 만 5천 가구에 인구 964만 5천명에 이어 드디어 1988년 인구 1,000만명 이상 의 거대도시가 되었다. 그 이후 주변 지역의 개발과 함께 인구 분산정책이 시행 되었지만 여전히 서울의 인구는 1,021만 9천명(2012.9 현재)으로 대도시 수준 을 유지한다. 경기도는 2012.9 현재 1,204만 7천명 수준이다. 그러니까 대략 잡아도 총인구수 5,089만 1천명(2012.9 기준) 중에서 2천만 명 이상이 서울 경기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이것은 유권자로 보면 정치 영향력 집중 도를 쉽게 알 수 있다.

페이지282 지역별 유권자 수는 지난 19대 총선 기준으로 보면 전체 4,018만 1623명, 그 중에 서울이 838만명, 경기도가 923만 9000명 이었다. 유권자의 약 43.8%가 서울 경기지역에 몰려 있는 셈이다. 이건 캐스팅보트 수준이 아니라 이 숫자로만 봐도 서울 경기가 정치 결정력이 얼마나 센 곳인지 드러난다. 사실상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여기에 인천의 인구가 283만 1천명 수준이란 걸 감안하 면 실제로는 서울, 인천, 경기는 지역 자체로 이미 50%에 육박한 유권자를 확보 한 곳임을 알 수 있다. 2007.12.19 치러진 제17대 대통령 선거는 유권자 3,765만 3,518명 가운데 2,369만 385명이 참가했다. 약 62.9%가 참여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래 서 이명박의 압도적 표차 당선에도 불구하고 이 투표율 속에는 여러 허수가 존재 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것은 18대 대통령 선거 분석에서도 다양하게 활 용이 된다. 지역별 득표 분포를 한 번 보자. (출처; 위키피디아) 위의 결과만 본다면, 서울 인천 경기뿐만 아니라 당시 얼마나 이명박 진영의 정 치적 구호가 사람들을 미혹( 迷 惑 )하게 만들었는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물론 여기 서도 전라도는 정동영에 거의 몰표가 나왔다. 지역성향을 떠나서 서울 인천 경기 가 가진 지역 유권자의 인지력 혹은 판단력을 보기에는 이 자료가 아주 미흡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현재 보고 있는 이명박 정권의 현실과 투표 당시의 내용물을 비교해보면 객관적으로 후보에 대한 판단의 오류 가 있었 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분석가들은 17대 대선을 보수니 진보 이런 이념의 대결이 아니라 아예 당시 현

페이지283 재권력이었던 노무현 정권에 대한 호불호 투표라고 부르기도 했다. 맞는 말이었 다. 그러나 국민들, 특히 서울 인천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투표의 결정권을 가진 지역 유권자들이 놓친 것이 바로 그 미래세력 이 가진 특질( 特 質 )이었다. 그들은 아주 영악스럽게 들어왔지만, 결론은 딱 하나로 모아졌다. 바로 왜색 정치 세력을 등에 업었고, 거기에 경제를 덧입힌 형태로 위장되었던 것이다. 지역구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18대 대선에서도 판단의 결정력을 아주 심하게 요 구 받는 곳은 이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정보량이 많고 또한 서울이 가진 특징이 정치 경제의 중심이라는 점, 서울 인천 경기를 포함한 지역이 수도 광역 권의 범주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동되고 있다는 점, 그만큼 매체나 혹은 통신 등 에 의한 수단이 아니라 직접적인 맨투맨의 인적 정보가 넘친다는 점 등이 고려되 는 것이기에 그만한 요구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밖의 지역에서 정보량이 적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만큼 지역적 긴밀성을 가진다는 의미지만 그렇다고 이 한 치의 차이가 결코 적은 변수는 아니다. 이미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라는 행사에서 서울 인천 경기는 단순히 지역적인 호불호를 말하는 공간이 아닌 곳이 되었다. 어느 지역 출신이건 간에 1945년 100만 명도 안 된 그 서울 인구를 감안하면, 지금 모인 이들은 모두 토박이가 아닌 것이고 또한 세월이 지나면서 이 지역 토박이가 된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 래서 17대 대선의 오류도 혹은 그 이전까지 생각하여 패착이 나올 수 있는 공간 자체를 충분히 감안해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 셈이다. 개인적 생각이지만 일단 지역구도는 해체되지는 않았으나 완전한 변수로 자리잡 은 건 아니라고 본다. (이렇게 말한다고 지역적 편중이 없단 소리는 아니다. 이건 지금 혹은 그 이후에도 비슷하게 벌어질 것이다.) 지역적 몰표는 해체의 수순을 밟아야 할 대상이며, 그 중심에는 서울 인천 경기라는 새로운 유권자 층의 강자 의 역할이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도시의 속성상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서로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엮여 있지만, 최소한 얻어진 정보에서 함부로 판단하지는 않을 그런 공간이 아닌가 믿고 싶은 마음도 있다. 과연 선택이란 점 에서 봤을 때, 어떤 정보가 가장 유용하게 이 지역에서 먹히는가를 보는 것, 그것 이 단순히 18대 대선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후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5. 시장의 배반, 정치의 배신 한 세월이 있었다 / 최승자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페이지284 그 사막 한가운데서 나 혼자였었다 하늘 위로 바람이 불어가고 나는 배고팠고 슬펐다 어디선가 한 강물이 흘러갔고 (그러나 바다는 넘치지 않았고) 어디선가 한 하늘이 흘러갔고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시장의 배반>(존 캐서디, 민음사 2011)은 저널리스트(The New Yoker)인 존 캐서디(John Cassidy)의 2009년 책이다. 책 소개가 늦게 나왔지만 이것은 분명 히 2008년의 금융위기를 분석한 글에 속한다. 원제는 How Markets Fail 인데 부제가 옆에 하나 붙어 있다. The Logic of Economic Calamities, 즉, 경제재 앙의 논리 다. 여러 책 소개가 있다. 시장실패경제학 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http://www.minumsa.com/minumsa/front/mf/content/bookslife_view.php?wc_idx=133 보이지 않는 손 이 있다고?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1121601032630065001 책의 소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미 선진국의 경제학계는 시장 만능주의 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단지 그 여파가 아직 한국에까지 미치지 않았을 뿐이거나 애 써 외면하고 있을 따름이다. 뭔가 생각나는 것이 없으신가?

페이지285 이 책은 사실 시장만능주의 라는 개념 자체를 첫 머리에서 부정한다. 시카고 학 파의 신자유주의는 파산했고,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에서 다양하고 폭 넓은 경제학 의 사조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우석훈의 표현처럼 인간들의 경제 적 삶을 다루는 학문에 인간이 빠져서야 어찌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 는 것이 이 책에서 표현한 경제학적 사조의 앞길을 말해주는 것 같다. 이른바 유 토피아 경제(Utopian economies)의 허구가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도 말해준다. 그 범례로 지목된 것이 주식시장 버블, 부의 불평등, 환경오염, 신용경색, 부동산 시장 붕괴 등 현실적인 실패의 사례들이다. 사실 환상은 이미 2008년에 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오늘에선 아직도 그 환상을 이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현실과 동 떨어진 탁상공론의 현장을 보고도 아직도 그걸 카드로 꺼 내는 경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까 하는 문제는 심각하게 고려할 대상이 된다. 그걸 환상이 아니라고 자꾸만 들쑤시는 외부의 세력도 있는 듯하다. 이건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다. 민음사 책 소개의 첫 부분을 소개한다. 시장의 배반 은 시장 실패 경제학 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시장 실패 라는 개념을 처음 쓴 사람은 하버드 대학교 명예교수인 프랜시스 베이토다. 아무리 완 벽하게 예측이 가능한 세계에서도 시장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세 가지 있 다. 첫째는 독과점, 두 번째 시장 실패는 기업이 교량, 병원, 공원, 소방서 같은 가치 있는 것들을 생산할 인센티브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와 아서 피구가 다룬 공공재 의 문재이지만 로잔학파와 시카고학파는 이 문제를 얼 버무렸다. 세 번째는 과잉효과(혹은 베이토가 만든 용어인 외부효과 )다. 이런 시장 실패들이 경제학 교과서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주요 분석에서 참고 정도로만 다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 결과 시장 실 패는 자유시장이라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특수한 예외로 치부되고 만다. 이처럼

페이지286 주류 경제학은 시장이 실패할 경우를 예외로 치부하고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책 결정자들은 코앞에서 부동산 거품이 터지고 금융 시장이 붕괴되고 있는데도 제때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대안이 없다는 소리다. 시장실패 를 조금 더 들어가보자. 국제수지 불균형 같은 거시적 시장 실패도 있 지만 미시적 시장실패의 경우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직접적인 타격을 시장에게 전 달한다. 독과점 산업의 형성으로 인한 불완전 경쟁산업의 존재, 평균비용 체감산 업의 존재, 시장 상태에 대한 불완전한 정보(정보시장을 포함)의 존재, 위험과 불 확실성이 존재할 경우에는 효율적 자원배분이 이루어질 수 없는 한계를 가진다. 또한 경쟁적 메커니즘 하에서도 어떤 재화는 외부성, 공공재 등 베이토가 말한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할 인센티브가 없는 상태에서 효율적인 자원배분이 이루어지 지 않는다. 이런 시장실패의 치유에 있어 정부가 실패할 경우, 또는 치유수단이 부적절하거나 치유방법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경우는 이는 즉각적인 정부실패 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런 시장실패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정부의 시 장 개입을 말하는 수정자본주의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 또한 실패한 이후에 등장 한 것이 신자유주의이지만 이 또한 한계상황, 즉, 시장만능주의가 만능이 아니게 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장의 실패에 대한 대안을 명 확하게 제시한 곳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더불어 시장실패를 정부개입으로 해결 하고자 하는 상황에서도 동일한 패턴이 반복된다. 한국의 경우, 정부개입=정치적 해법 으로 여겨질 공간이 많다. 즉, 정책이란 측면 이 매우 정치적 환경에 좌우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시장의 실패-> 정치적 해법 실패 -> 정부 실패의 부인-> 새로운 정부의 출현 이라는 악순환의 고리 속을 헤매고 있다. 그 속에서 절대 시장은 만능이 아니지만 만능으로 자꾸만 둔갑한다. 실패의 원인을 제도보다는 외부적 환경으로 돌리려고 하는 경향도 마찬가지다. 저축은행 사태를 보자. 저축은행 사태에 왜 정권 실세들이 쇠고랑을 차나?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20509180454 2002년 상호신용금고에서 저축은행 타이틀로 바뀐 이 금융기관은 그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 이후 더욱 덩치를 불렸다. 그런데 이 과정을 가만히 보면, 정치권력 이 여기에 개입을 하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그 래서 지금도 검찰이 이 문제에서 쉬쉬하며 만족할만한 조사결과를 절대 발표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도저히 정상적인 경제행위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결과 를 감당해야 하는 건 결국 국민 이 되어 있다. 그 원인을 따라가 보자. 지금 나오는 건 소액대출이니 PF(프로젝트 파이낸싱)을

페이지287 부실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이것은 엄밀히 이야기해서 금 융당국 이란 정부의 실패이자 좀 더 들어가면 정부의 배신 이 그 속에 도사리고 있다. 상호신용금고를 상호저축은행으로 바꿀 때, 은행이란 타이틀을 붙여줌으로 써 국민을 은행 이란 이름 하에서 안심하게 해준 것부터 시작해서, 경영진이 방 만하게 경영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준 것도 당국이다. 저축은행의 돈을 받아 쓰려면 주주나 혹은 특수관계가 아니면 불가능하게 만든 것은 예전부터 이 업계에선 소문이 날만큼 난 일이다. 이른바 그들만의 ATM기기 를 만들어준 것이었는데, 이건 전혀 정상적 금융시장과는 관계가 없다. 바로 부패 와 관련 될 뿐이다. 그래서 부실이 만들어지면 낙하산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로비하고 막고 다시 더 키우고를 반복한 끝에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공멸의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이 또한 거슬러 가보면 딱 마주치는 곳이 바로 김 대중 정권부터다. 그로부터 노무현, 이명박 정권까지 이르는 전 노선에서 저축은 행은 한국의 경제와는 별도로 놀았다. 아니다. 정치 속에서 놀아났지 국민경제 속 에서 기능하지는 않았다고 해야 옳다. 그 처리를 둘러싸고 나오는 논란을 봐도 마찬가지다. 또 공적자금 넣고 책임규명하자는 식이다. 시장 속에서 만들어지는 해법이 나오지 않거나 혹은 달리 나올 수 있다고 해도 해봐야 아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도 금융당국이 져야 할 책임은 뇌물이니 하는 본질에서 어긋나는 이야기만 계속 나온다. 저축은행의 자산을 다 합쳐도 90조 미만, 전체 은행과 보험과 비교해서 총자산 대비로 5%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래서 해법을 공적자금으로 다시 거론하는 경향도 있다. 책임을 명확히 하자는 의미에서. 그러나 과거 10여년 동 안 이어진 전례를 생각해본다. 그럼 왜 이 문제가 이제서야 툭 불거진 것일까? 그것은 시장이 일단 실패국면으로 가서 자정능력이 없어졌기에 나온 것이다. 이것은 사태로 드러난 것이기에 이렇게 접근이라도 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들 어서 진행된 여러 시장경제 를 표방한 사업들 가운데는 이와 비견하기 어려운 정치적 경제 가 흔하게 있다. 그것은 시장의 실패와는 또 다른 각도에서 거꾸로 정부실패를 감안하고 추진된 것이란 점에서 보면, 지금 왜 4대강 사업을 성공적 이었다고 자꾸 말하는지 납득은 된다. 실패를 인정하면 그것은 곧 실패를 언제부 터 인지했느냐는 문제가 거론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봐서는 이것은 처음 부터 정부실패를 감안한 일이었다. 그래서 도무지 이런 일을 하면서 경제 를 운 운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지나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국민 실패 를 하게 되는 꼴이 된다. 실패는 거듭한다고 해서 절대 좋지 않다. 특히 심각하게 한 시대를 유린하는 행위는 그 로 인한 트라우마가 너무 강하다. 한국의 오늘 현실에서 실패경제학 을 반드시 재정리하고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많이 든다. 누군가는 해줄 것이다. 전문가들이 많으니. 그 결과물에 대해 우리가

페이지288 생각할 바는 하나다. 다시는 이런 일을 완전하게 없애기 위한 장치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 그것은 언제 가능할지 생각이 많아진다. 6. 네거티브 경쟁구도의 허허실실 공백이 뚜렷하다 / 문인수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붙였던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 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시방 벽이 거짓말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 주일이, 한 달이, 헐어놓기만 하면 금세 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 해가 갔다. 공백만 뚜렷하다. 이 하얗게 바닥 난 데가 결국, 무슨 문이거나 뚜껑일까. 여길 열고 나가? 꽝, 닫고 드러눕는 거? 올해도 역시 한국투자증권. 새 달력을 걸어 쓰윽 덮어버리는 것이다. 반간계( 反 間 計 )라는 병법이 있다. 잘 알려진 병법 36계의 33계에 해당한다. 아주 전형적인 이간책이다. 이 방법의 운용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걸로 알려진다. 하 나는 적을 매수하여 간첩으로 만드는 것, 다른 하나는 허위 정보를 흘려서 혼란 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가 더 붙는다. 아예 상대방으로 위장해서 엉뚱한 짓을 하면서 사기를 떨어뜨리거나 혹은 전술 전략 목표를 방해하는 것이다. 이건 이간 ( 離 間 ) 시킬 목적보다는 파괴까지 염두에 둔 강한 자폭( 自 爆 ) 행위다. 인터넷에 떠도는 댓글을 보면서 종종 나는 이것이 무슨 작전이지 그러는 경우를 많이 본다. 아주 뻔하고 유치한 글을 반복해서 올리는 건 오히려 상대를 더 이롭 게 하는 것인데, 그런 글이 버젓하게 유통된다. 마치 골통 인 것처럼 늠름하게 포 장하고 말이다.

페이지289 우매, 무지, 구원, 축복, 선진통일한국 뭐 이런 단어들이 쭉 나열되는 걸 보면 틀 림없이 이건 좀 빠 가운데서도 흔히 속말로 하는 개/독성 왜/빠 에 속한다고 평 가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런 글을 한 번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올린다. 도대체 어떤 효과를 노리는 것일까? 이를 테면 인터넷의 게시판의 댓글달기는 그 프로그램이 그래서인지 일단 아래로 10여 개가 달리면 페이지가 넘어가게 된다. 그걸 일일이 하나씩 챙겨보는 이도 드물다. 그래서 계속 페이지마다 이런 글을 줄기차게 다는 것일까? 그래서 효과 를 본 것이 뭘까? 세뇌 마케팅이라고 해서 역설적 조건반사를 만들어내는 지속적 반복->세뇌의 공 식을 가진 접근법에는 대략 화면, 음성의 CM이 주종을 이룬다. 거기는 분명 목 표가 있다. 브랜드 인지를 높이거나 혹은 거기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그것도 아니다. 한 번 이걸 애플과 삼성 두 제품에서 적용한다고 해보자. 내가 애플을 띄우기 위 해 방법상 삼성 편에 서서 열심히 애플을 비난한다. 그런데 그 내용으로만 보면 언뜻 애플의 약점을 말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삼성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를 속 속 보이는 방식이다. 이 수법을 사용하려면 최소한 어느 수준이 되어야 한다. 적 어도 자기가 하는 이야기(혹은 글)가 상대에게 나 지금 뭣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겁니다 라는 걸 노출은 시키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알려지면 뭐 그건 한 마디로

페이지290 웃기는 일이 된다. 그걸 혼자서 하지 않고 누가 시켜서 했다면 더 그렇고. 좀 골치 아픈 듯도 하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이 어찌 세상을 봐야 하는 지, 어떤 소견을 가져야 하는지 설명한 대목, 주역( 周 易 )의 관괘( 觀 卦 第 二 十 )를 한 번 살짝 보자. 1. 동관( 童 觀 ): 어린아이의 소견으로 본다는 뜻이다. ( 小 人 道 也 ) 2. 규관( 闚 觀 ): 엿본다는 뜻이다. 스스로 밝게 보지 못하는 상태다. ( 亦 可 醜 也 ) 3 관아생( 觀 我 生 ): 자신의 언행부터 본다는 뜻이다. 이렇게 진퇴( 進 退 )하면 실수 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未 失 道 也 ) 4. 관국지광( 觀 國 之 光 ): 나라를 귀히 보는 소견인데, 위정자를 돕다가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가져야 하는 마음 정도로 해석된다. ( 尙 賓 也 ) 5. 관아생( 觀 我 生 ): 위의 관아생( 觀 我 生 )은 진퇴( 進 退 )를 말하며 일반 백성의 경 우라고 해제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관민 ( 觀 民 也 )이란 정치하는 사람의 태도를 말한다. 6. 관기생( 觀 其 生 ): 자기가 뿌린 것, 펼친 것을 본다는 뜻이다. 대중이 바르지 않 으면 윗선이 나빠서 그런 거라는 뜻이기도 하다. ( 志 未 平 也 ) 그냥 평범한 사람 입장에서 보자면 어린아이 치기 어린 소견은 가지고픈 생각이 없고, 그저 힐끗 엿보면서 살고픈 마음도 없고 그러니 그냥 내 삶을 돌아보는 그 런 볾( 觀 我 生 )이 그저 최고일 듯도 하다. 흥미롭게도 여기 맨 마지막 관기생 ( 觀 其 生 )은 정권을 쥐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꼭 주고픈 안경 같은 것이다. 정책을 펴면 그것의 결과는 반드시 나온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얼마나 황폐해졌는지, 행 복해졌는지 말이다. 그걸 보고도 모른 척하면 그거야 말로 최악이다. 지금처럼 말 이다. 다시 위의 댓글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과연 이 글을 어떻게 해석하는 게 좋을까 하다가 결국 주역까지 보게 되었지만, 워낙 이진법(인터넷)의 글은 정체가 묘연( 渺 然 )한 상태 가 많아서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 그냥 보기엔 치기 어리다 하고 웃어 넘기고 싶다가도 쭉 적어온 글을 보 면 그도 아닌 듯싶기도 한 그 애매함 말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를 나는 차라리 관( 觀 )이 없는 상태 라고 해버리고 싶다. 본 것이 없단 소리다. 분명 호박을 보았 는데 그것이 호박이란 건 없고 둥글다는 것만 가지고 신나게 이야기한다면, 굳이 질문을 할 필요조차 없어지게 된다. 그건 본 것이 아니라 눈을 감은 것보다 못하 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걱정도 살짝 된다. 이게 마타도어의 한 수법이라면, 그를 통해서 어떤 이 익을 누리고자 한다면 이거야 말로 대한민국 선거운동 역사에 새롭게 한 페이지 를 추가해서 마타도어 란 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글 내용 자체가 너무 질이 낮아서 두 번 보기는 좀 그렇긴 하다. 부탁하건대 일정한 수준으로 글의 내

페이지291 용이나 혹은 논리, 좀 심하게 말하자면 글공부 조금 더하는 것이 어떤가 싶은 생 각이 든다. 네거티브가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되어 간다. 그런 여건이 충분히 조성되었고, 그 수준도 높아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와중에 그냥 한 자 생각나는 보는 법 에 관해 살펴봤다. 7. 나도 그저 풀인 줄 알았지. 저녁 무렵에 오는 첼로 / 박남준 - david darling의 dark wood로부터 그렇게 저녁이 온다 이상한 푸른 빛이 밀려오는 그 무렵 나무들의 푸른빛은 극에 이르기 시작한다 바로 어둠이 오기 전 너무나도 아득해서 가까운 혹은 먼 겹겹의 산 능선 그 산빛과도 같은 우울한 블루 이제 푸른빛은 더이상 위안이 아니다 그 저녁 무렵이면 나무들의 숲 보이지 않는 뿌리들의 가지들로부터 울려나오는 노래가 있다 귀 기울이면 오랜 나무들의... 고요한 것들 속에는 텅 비어 울리는 소리가 있다 그때마다 엄습하며 내 무릎을 꺽는 흑백의 시간 이것이 회한이라는 것인지 산다는 것은 이렇게도 흔들리는 것인가 이 완강한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나는 길들여졌으므로 그의 상처가 나의 무덤이 되었다 검은 나무에 다가갔다

페이지292 첼로의 가장 낮고 무거운 현이 가슴을 베었다 텅 비어 있었다 이 상처가 깊다 잠들지 못하는 검은 나무의 숲에 저녁 무렵 같은 새벽이 다시 또 밀려오는데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풀은 쓰러진다. 그렇다. 바람이 세게 불면 그렇다. 잠깐 세게 불고 그치면 다시 일어난다. 오랫동 안 불면 쓰러진 채 그냥 자라야 한다. 그렇게 설 때마다 바람 불어 눕히면 누워 야 한다.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러나 풀은 눕지 않으려고 한다. 바람 불지 않은 때 를 기억해서 일어난다. 그런 기억이 아스라해도 그런 기억을 찾으려고 한다. 민초( 民 草 ). 이 단어는 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그건 아마도 내 가슴 속에 든 저 말의 기운 때문이 아닐까 종종 생각한다. 친일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지식인들이 일본이라 할 때 대다수 민초들은 왜놈, 왜년이라 하네. (박경리 선생의 토지 중에서) 질긴 생명력을 가진 백성이 잡초처럼 한 소리를 툭 뱉는 건 그것이 결코 오래 갈 바람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 간다고 하더라도 바로 서서 자라야 하는 숙명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민초 는 기본이 자연법이라 한다. 인간 의 법이 아니고, 무슨 종교적인 법도 아닌 바로 자연 그 자체의 법 말이다. 자연 법에 따라 순응하고 또 포용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래서 그저 밟으면 밟히는 민 중을 민초라 하는 것도 사실 거부한다. 보다 넓게 봐서 가장 힘센 세력임에 분명 한데 어떻게 약자로 포장을 하느냐는 것이다. 저기 박경리 선생의 글에 나온 이 야기로 봐서도 마찬가지다. 지식인, 친일파 운운하는 자들이 어떻게 왜놈, 왜년 하는 이들의 앞줄에 설 자격이 있는가 말이지. 1997년 외환위기는 대체로 다음 네 가지의 원인을 꼽는다. 첫째, 금융기관의 부실. 둘째, 차입위주의 방만한 기업경영으로 인한 대기업 연쇄 부도. 셋째, 대외 신뢰도 하락. 넷째, 단기 외채의 급증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이기도 하다. IMF 사태의 정치적 희생양 이라 주장하는 김영삼 정권 당시 대통령경제수석 비 서관 김인호의 몇 가지 의견을 톺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2002년 중앙일보에 IMF환란 스토리를 연재하다가 중지했다. 그 중 일부다. 외환위기는 제대로 기록되어 역사에 남아야 한다. 외환위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 았다. 그러기에 나는 우리 사회의 그 망각 을 되살리려 한다. 외환위기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기에 나는 그 왜곡 을 바로 잡으려 한다. (중략) IMF지원을 받으면서 우리의 계획과 이지에 의하여 구조조정이 가능한 기회였다. 당초 합의 때

페이지293 이루어졌던 IMF와의 신뢰를 깨지 않았다면, 우리 협상팀이 거시정책에 대한 인식 을 제대로 갖고 있었다면, 우리가 구조조정을 스스로 해나가려는 의지를 분명히 했 다면 긴축정책은 얼마든지 협상에 의해 거부할 수 있었다고 본다. 당시 한국은 엄낙용 재경원 차관보, 한국은행, 임창열 부총리까지 나서서 일본에 자금을 구하러 갔었지만 거절 당했다. ABS(자산유동화증권) 발행도 시기적으로 불가능했다. 모든 경로가 막히는 데까지 경제팀이 손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본 다면, 입에 열 개라도 할 말은 없는 상태였지만 김인호는 그래도 당시에 정부나 구성원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 보기에는 IMF 결정 과정이나 협상, 발표 자체가 석연치 않았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고 여겨진다. [ 어느 민족주의자의 시대경고(I) 중에서] 그리고 노무현의 한미FTA, 정권의 최측근은 물론이고 거기서 기능한 김현종, 김 종훈, 김진표 등으로 이어지는 관료 노선들, 동북아 금융허브 운운했지만 결국 누 가 그 원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어 있는지 구도가 뻔히 나오는 그림을 우리는 보고 있다. 뼛속까지 친미, 친일 은 논의의 대상에서조차 거론되기 어렵다. 그들 이 민초에게 선사한 것은 고통이었지 행복은 아니었다. 그러나 민초는 결코 똑똑한 무리들은 아니다. 얕은 꾀에 너무 쉽사리 넘어가는 속성도 가진다. 그래서 늘 기득권은 민초에게 적당하게 먹거리를 던져준다. 정치 적 사건이 크게 날만하면 툭툭 불거진 연예인 사건들하며, 저축은행 비리의 핵심 인 은진수가 출옥을 한다는데 여전히 그 사건의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고 이상득의 법정에 하소연만 하러 간다. 대선 레이스를 불 붙이면서 온갖 이야 기를 내놓는 사이 슬그머니 큰 사건들을 묻어버리려는 뻔한 시도는 잘도 먹힌다. 무한경쟁이라고 판을 벌려 놓으니 아귀다툼이 따로 없게 된 사회에 점차 온기가 사라져가는 방구들을 보면서도 어떻게 불을 다시 지펴야 할지도 때론 장작을 마 련하는 일도 잊어버린다. 남이 하겠지 해버리고 끝난다. 머리 속에는 하늘을 닿을 생각들이 넘치는지 모르나 겉으론 움직여지는 게 없는 침묵의 무관심 이 지배한 다. 민초는 이래서 일단 스스로 목숨 줄을 놓자고 덤비는 듯도 하다. 아직도 왜 지난 십여 년간 IMF사태 이후 소위 시장만능주의가 들어오면서 우리 사회가 파괴되었는지 그 가닥을 헤아리기 보다는 무슨 놈의 우상화에 열을 더 올 린다. 김대중-노무현 노선은 결코 민초를 이롭게 한 시간이 아니었다. 더불어 MB정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온다. 아직 살만한가 보다 고. 민초로 살기도 힘들지만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민초들을 계속 보기도 섭섭하다. 노무현 정권 말기 생각이 절로 난다. 참여정부평가포럼이란 것이 생겨서 소위 반 작용현상 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벽을 미는 힘이 아니라 벽이 미는 사람을 밀어내 는 바로 그것, 그 와중에 대통령 치적을 운운할 때 변양균 스캔들이 터지고, 김용 철 변호사가 삼성과 청와대의 유착관계를 말하고, 그렇게 사람들은 노무현에게 등을 돌리면서 이명박을 향해 걸어갔다. 그 걸음의 결과가 어디로 향했는지 당시 사람들은 몰랐다. 그건 과거 우리를 흑인처럼 취급했던 백인이라 생각하는 자들

페이지294 의 세상이었다. 오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인간사랑, 2003)의 서문 마지막 문장은 많은 이야기보다 더 압축적이긴 하다. 무의식은 역사가 없다 는 프로이트의 보편 주의 정신분석학과 파농의 경험적인 화두 무의식은 역사가 있다 는 것의 대결을 생각하면 말이다. 흑인 백인보다 더한 갈등의 악순환이 지금 민초와 기득권 간에 펼쳐지고 있다. 아주 점잖게 뒤섞여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속으로 들어가 면 파농의 그 화두 흑인은 백인과의 관계에서만 흑인이다 는 것과 조금도 다르 지 않다. 단지 겉모습에서 흑인이 아닌 백인의 모습이고 싶었던 마이클 잭슨의 그 얼굴이 떠오르지만, 오히려 파농의 이 말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게 된다. 물론 여기도 정답은 없다. 백인에겐 하나의 사실이 있다. 스스로를 흑인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사실 말이다. 흑인에게도 하나의 사실이 있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들 사상의 풍요로움과 그들 지성사의 뒤떨어지지 않는 가치를 백인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쓴 다는 사실이다. (중략) 백인만의 세계란 없다. 백인만의 윤리도 없다. 백인만의 지성이라는 것은 더더욱 없다. 나는 역사의 포로가 아니다. 나는 그곳에서 내 운 명의 의미를 찾고 싶진 않다. 나는 항상 다짐한다. 진정한 도약이란 늘 뭔가 새 로운 것으로 진부한 존재를 채워나가는 것이라고. 내가 순례하는 세계에서 나는 내 자신을 무한히 창조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나도 존재의 한 부분이다. 내가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는 한에서 말이다. 그리고 사적인 문제를 통해서 우리는 행동의 문제 그 대강을 본다. 여러 곳에서 바람은 부는 모양이다. 민초라는 목숨이 바람 앞에서 흔들린다. 그저 풀은 없다. 살아있는 풀은 있지. 물론 사는 동안에는 풀의 율법은 지켜야 한다. 그저 자라는 건 아니니까. 8. 묻지마 범죄에서 묻지마 의 의미 플라타너스 / 김 현 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페이지295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 神 )이 아니다! 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오늘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플라타너스 나는 너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묻지마 범죄 는 명확한 사회 범죄다. 이 말은 사회안전망이 무너졌다는 의미와 동일한 것이고 바로 우리 자신 의 문제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불황이 양산한 묻지마 범죄 안전망 시급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08/25/0200000000akr20120825003200002.html 병든 사회의 경고 묻지마 범죄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82712562994216 경제가 안 좋으면 묻지마 식의 범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실직자가 늘고 취 업에 여러 번 실패해 생활고가 심해지면 분노가 쌓이고 그 원인을 개인이 아닌 사회적 구조 탓으로 돌리게 되기 때문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묻지마 식 범죄는 불황이나 실직과 같은 경제적 원인과도 관련이 깊다. 갈수록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해지고 경쟁은 심화하고 있어 상대적 박탈감을 지닌 낙오자 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페이지296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원인이라면서 인성교육을 운운했지만 이 문제의 핵심에는 사회 경제적인 불안요인이 있다. 경쟁위주의 불평등한 사회구조 속에서 쌓인 불 만과 좌절감이 사소한 동기를 통해 극단적인 분노와 증오로 표출된 것 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대경제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국민 중 절반가량(50.1%)이 자신을 저소 득층으로 여기며 특히 98.1%가 계층 상승이 어렵다 는 좌절감에 빠진 것으 로 조사되었다. 일단 이 수치는 계급사다리 가 전혀 의미 있는 대안으로 제시되 고 있지 못하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이것은 절망의 사회, 기회상실의 사회 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이것을 정신적 병리상태 로만 진단하고 접근하는 방식은 좀 구태의연한 듯 보인다. 일본에서도 이를 도리마 ( 通 り 魔 )라고 부른다. 만나는 사람을 해치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악마란 뜻이다. 미국, 중국,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이런 사건은 이제 보편적으로 벌어진다. 그것이 알고 싶다 (2012.9.15 방송분)에서도 이 사안을 다뤘다. 여러 케이스들 을 보여주며 결론은 한국 사회가 무방비 도시 가 되어가는 중이라는 걸 강조했다. 확실히 한국 사회의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묻지마 범죄의 증가는 아주 긴밀 하게 연동된다고 보여진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803 묻지마 범죄 는 이 세상에 없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154 묻지마 범죄 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경고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548446.html 그러나 대책이라고 제시되는 건 거의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말뿐이다. 이 이상의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묻지마 범죄를 막으려면 치안 강화 등 형사정책 차원에서 범죄를 예방하기 위 한 조처가 필요하다. 그러나 극단적인 성장지상주의, 경제지상주의 아래서 외면해 온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갖추는 것이 더 긴급한 과제다. 은둔형 외톨이로 인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지원센터를 만들어 상담활동과 교육 취업훈련을 병행하는 일본의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위 한겨레 사설 중에 서)

페이지297 묻지마 범죄라든지 성범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때마다 강력한 처벌 또는 범 죄자에 대한 응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근원적인 처 방입니다. 교정행정이 많이 선진화되고 발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미흡합니다. 여 러 문제들이 해결되어 제대로 된 교정과 치료가 이루어진다면 우리 사회가 더 건 강하고 안전해질 것입니다. 국민들께서도 많은 성원을 해 주시기를 당부 드립니 다. (2012.9.2 KBS 일요진단, 권재진 법무부 장관) 근원적 처방? 뭐가 있는가? 맨날 말하는 사회안전망 운운하는 이야기는 좀 심하게 말하자면 사 회의 양극화가 해소되지 않으면, 혹은 해소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가 없으면 절대 성립되기 어려운 해법이다. 대선주자들이 경제민주화를 말하고 복지를 꺼내 도 이것이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는 기대치를 높여주지 못한다면 아마도 그 평가 는 냉혹하게 내려질 것 같다. 실업문제를 방치한 채로 묻지마 범죄 에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하는 것은 모 기들이 알을 낳는 웅덩이는 그대로 놔두고 눈에 띄는 모기만 열심히 잡겠다고 하 는 것과 마찬가지다. 특히, 현재의 청년실업 문제를 방치하는 것은 미래의 묻 지마 범죄 를 사회적으로 예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전우영 충남대 심리 학과 교수) 실업대책을 대선주자들이 열심히 내놓는 까닭 중 하나로 이 묻지마 범죄라는 변 수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듯하다. 한국 사회가 지금 어느 위치에 와있는 지 아직도 기득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니면 알면서도 이것을 방치해도 관 계없다는 식인지, 그도 아니라면 자신들의 안전을 더 강화하는 방식으로 얼마든 지 이 정도는 견딜 수 있다는 식인지 구분이 모호하다. 묻지마 범죄의 묻 지마 는 확실히 이유를 묻지마 가 아니라 이유는 알고 있으니까 더 물을 것 없잖아!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 사안은 시간이 간다고 해결되는 게 아 니라 더욱 더 심각하게 번질 조짐이다. 쉬쉬한다고 해서 덮어질 문제도 아니다. 어떻게 하지? 이 사회에 그렇게 많은 심리학자에 컨설턴트, 의사가 있는데 왜 이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는 걸까 생각한다. 다 입으로만 떠들지 정작 사회가 안전망 을 갖출 수 있도록 움직이는데 힘을 보태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닐까 싶다. 9. 기득권이 겸손해져야 하는 이유 돌살이 / 서정춘 당신은 지금

페이지298 천 년 전 애인 만나 돌집 속에 세들어 살고 있어요 집도 절도 버리고 먹거리도 신발도 다 버리고 돌의 고요 속에 살고 있어요 숨 쉬는 소리만 돌려주고 돌려받고 천 년 전 애인 만나 살고 있어요 그것도 천 년 뒤를 내다보고 살고 있어요 결국은 둘이서 돌이 되어서 인터넷에 계속 퍼 옮겨지고 담기고 하는 글 가운데 이런 게 하나가 있다. 제목이 흥미롭다. 한국기득권 세력의 실체-홍라희 집안의 위엄 이란 것이다. 이 내용이 퍼지는걸 막을 수도 없고 이젠 이 내용 정도는 오히려 한국 사회의 기득권은 이 런 것이다 정도로, 어쩌면 오히려 이런 이야기들로 위세가 더 강화된 듯한 모습 이 된 걸 즐기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인 그런 글들이다. 그 중 하나를 골라본 다. (다른 버전도 인터넷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가계도까지 첨부된 것도 있다.) 다들 한번씩은 본 것일 테지만 이 내용 가운데 어떤 부분도 공식적으로 부인이 된 것이 없다는 점에서 이게 한국 최상층부 기득권의 한 패턴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오타만 일부 수정해서 올린다.) http://www.thisisgame.com/board/view.php?id=336422&category=601&subcategory= http://www.seoprise.com/board/view_nw.php?uid=177&table=honor

페이지299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한민국 기득권 세력은 재벌-한나라당-조중동-검찰을 연결해서 말하고, 여기에 목사들하고 예비역 대령연합회 같은 애들이 끼어들기도 합니다. 좀 광범위합니다만 정확히 실체가 뭘까요. 저는 이거 핵심은 이병철하고 홍진기라고 생각합니다. 홍진기는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의 아버지입니다. 일제시대에 판사였으며, 친일파 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홍진기는 해방 후 이승만에게 달라붙어 살아 남았는데,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홍진기는 법무부 장관으로 있으며 이승만에게 계엄령을 건의했고, 4.19가 일어나 경찰이 시민에게 발포했을 때, 경찰을 지시하는 내무부 장관이었습니다. 4.19로 세상이 뒤집어진 후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손을 써서 빼낸 게 삼 성 이병철이었습니다. 이병철이 홍진기를 빼낸 후, 돈을 줘서 만든 게 중앙일보입니다. 현재 중앙일보는 홍씨네 거로 알려져 있지만, 기실 아직도 삼성 이씨네가 주인입니다. 김용철 변호 사가 이건희의 지분을 홍씨 명의로 위장해놓고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 라고 폭로 했었죠. 재밌는 게, 홍진기가 장관으로 있으면서 폐간시켜 버린 게 경향신문입니다. 경향신문은 나중에 부활했고, 홍진기는 중앙일보를 차렸으니, 두 신문은 악연이 깊습니다. 홍진기는 단순히 이병철의 얼굴마담이 아니라 기득권 세력의 한 축이었는데, 자 신의 자식들을 여기저기 시집보내 네트워크를 구성합니다. 홍진기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그 핵심인 중앙정보부장 신직수 와 사돈을 맺습니다. 그리고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집권하자 안기부장 노신영 네에 다른 딸을 시집 보냅니다. 이렇게 해서 일제시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현재도 로열 패밀리로 살 아가는 홍씨 일가가 완성되었습니다. 정리하자면, 홍진기의 맏딸 홍라희는 삼성 이건희의 아내입니다. 홍진기의 아들 홍석현은 중앙일보 회장입니다. 박정희 중앙정보부장 신직수 집에 장가갔습니다. 홍진기의 딸 홍라영은 5공 안기부장 노신영 집에 시집갔습니다. 홍진기의 아들 홍석조는 검찰에서 고검장까지 지냅니다.

페이지300 홍진기가 사돈 맺은 사람들을 좀 더 살펴보면, 신직수는 박정희가 5사단장 할 때 법무참모였습니다. 대위였습니다. 그 연줄로,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후 이 젊 은 애를 바로 검찰총장으로 임명했습니다. 36살. 대한민국 최고로 어린 검찰총장 이고 앞으로도 기록이 깨지지 못할 겁니다. 신직수가 들어오자 검찰 간부들은 대 거 사표 내고 나갔고, 신직수가 검찰을 장악합니다. 신직수는 8년간 검찰총장을 지내고, 그 다음 법무부 장관 3년, 그리고 나서 중앙 정보부장을 지냅니다. 박정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데, 1,2차 인혁당 사건을 만들어낸 것도 신직수입니다. 74년 유신으로 정권에 대해 여론이 안 좋자, 가짜 간첩단 사건을 만들어내서 싹 쓸어버린 거죠. 민간인을 잡아다 간첩으로 몰아 죽 여서 분위기를 평정하는... 노신영은 전두환에게 총애를 받아 안기부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입니다. 노신 영은 안기부장으로 있으면서, 검찰에서 똑똑한 애를 뽑아 안기부로 보내라고 시 킵니다. 그때 뽑혀온 게 정형근이었고, 노신영 밑에서 트레이닝을 받습니다. 정형 근은 공안검사로 생활하다가 나중에 한나라당에 공천받아 국회의원으로 진출합니 다. 한나라당에 검찰 출신 (특히 공안검사 출신들)이 우글거리는 데, 그 축이 됩 니다. 곁다리 얘기지만, 한나라당에는 검찰 출신 의원들이 우글거리는 데, 타당에는 거 의 없습니다. 한나라당에 16명, 17명씩 있는 데, 민주당에는 0명이거나 1명 그렇 습니다. 이전에는 한나라당이 장기 집권했으니 그리 갔다지만, 지난 10년 민주당 이 정권 잡아도 검찰은 한나라당으로 공천받으러 갔습니다. 검찰인맥이 완전히 한나라당과 얽혀 돌아가는 걸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최근(2008)에, 이건희-홍라희 부부는 딸(이서현)을 동아일보 김회장네에 시집 보냅니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사돈이 되는 순간입니다. 한편 홍진기 아들 중에 똑똑하다는 홍석조는 검사가 되었는데, 검찰내부에 삼성 돈을 뿌리고 다니는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 검찰이 삼성에 장악 당했다느니, 삼성장학생이라느니 라는 말이 나오는 게 홍석조가 내부에서부터 포섭을 해온 결과이죠. 홍석조는 고검장까지 올라갔다가 삼성 도청테이프 사건이 터져서 물러났습니다. 그 도청테이프에서, 중앙일보 홍회장이 삼성 이학수 부회장을 만나 이건희 회장 에게 받은 지시를 논의합니다. 누구에게 돈을 먹일까. 거기서 이번 명절에 홍석조 더러 검찰 안에 똑똑한 쥬니어들에게 돈 좀 주라고 하죠 라고 말하는 게 나오거 든요. 이게 9시 뉴스에 방송타면서 홍석조는 물러나게 됩니다. 홍석조는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했습니다만... 네~ 결백할 겁니다. 그래서 삼성 장학생 임채진이 검찰총장이 되었죠. 현 검찰총장 임채진이 삼성장학생인 것은 소문으로 떠돌다가 김용철변호사가 기자회견을 열어 폭로하면서 알려졌고, 인사

페이지301 청문회에서 노희찬 의원이 삼성 베네스토 골프장에서 삼성 사장들하고 골프 치면 서 로비 받은 적 있느냐는 질문에 기억이 안 납니다 라고 임채진이 답변하는 게 TV 생중계 되면서.. 확정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삼성 그룹 법무실에서는 밖에서 검찰에 돈을 먹이고, 안에서는 홍석조가 먹이고.. 안팎에서 먹이면서 검찰을 장악한 것이죠. 검찰이 재벌들 수사할 때 봐주는 경향 이 예전에도 있기는 했지만, 현재는 완전히 삼성 손아귀에 있습니다. 덕분에 검찰 에 걸리면 타 재벌들이 삼성에 부탁을 하는 상황입니다. 대상그룹이 2008년 검찰수사에 걸렸을 때, 삼성에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잘 처리가 안된 모양입니다. 대상그룹 임세령이 삼성 이재용과 이혼하는 사유 중 하나가 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했던 내용 중에 신세계 그룹(이건희 누나)쪽 에서 검찰에 잡혀 들어갔는데 이건희가 조카를 봐주기 위해 손을 써줬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건희가 친가 쪽에는 후한 데, 며느리 쪽에는 냉정했던 모양. 이렇게 해서 조중동-삼성-한나라당-검찰 이 연결됩니다. 결국 우리나라 기득권 층 이라는 거대 카르텔은 이병철-홍진기 이 두 집안이 대한민국 전체에 영향력 을 확장해 장악해가는 걸 포장해놓은 것입니다. 이명박이나 박근혜는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습니다. 몇 년 지나면 갈아치울 얼굴 마담이고, 실체는 이병철-홍진기 이 두 집안이 대한민국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검찰, 언론, 한나라당에 계속 돈을 먹여 타락시키고 자기 말을 듣도록 길들인 거죠. 과연 대단한 집안입니다. 기득권 ( 旣 得 權 )이란 단어는 사전을 뒤져보면 <법률> 이라고 적힌 부분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법률적인 단어(명사) 해석이란 뜻인데, 내용은 특정한 자 연인, 법인, 국가가 정당한 절차를 밟아 이미 차지한 권리 로 설명되어 있다. 아 마도 여기서 정당한 이란 것이 가장 관건이 될 듯하지만 이 또한 크게 영향을 받 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건 법률적으로 하자( 瑕 疵 )만 없으면 된다는 뜻으로 확대 해석이 언제든 가능해서다. 안철수가 언급한 기득권 을 한 번 보자. 앵그리버드(*주; 모바일 게임 이름, 새 캐릭터)는 의미가 깊다. 새들이 평화롭 고 착하게 사는데 돼지들이 알을 먹어 치우고 사라진다. 이에 새들이 몸을 던져 그 성채를 깨는 것이 바로 앵그리버드다. 여기서 새들의 알을 훔쳐 먹는 돼지는 기득권 층을 의미한다. (2012.4.3 전남대 특강 중에서)

페이지302 확실히 흥미로운 묘사다. 그러나 안철수의 경우엔 지금 기득권을 공격적으로 말 할 입장은 아닌 입장이다. 힐끗 보게 되면, 새들의 알을 먹은 돼지 는 제법 상징 적이지만 여전히 모호하기 그지 없듯이 그에겐 어떤 수준에서 기득권을 정의해야 하는 것인지 여전히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측면도 있다. 물론 지난 강연 등을 통 해서 보면, 대체로 기업 단위에서는 매출 1조원을 넘긴 곳, 그리고 그룹들이 일 감 몰아주기를 하면서 자기네들끼리의 리그를 통해서 기업을 키워가는 것에 대해 서는 반감을 가진 듯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자산의 절반을 사회환원한 것을 겸 손한 것으로 보지 않는 건 아니다. 그건 대단한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철수가 절대 이 기득권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판단을 자 꾸 하게 되는 건 순전히 첫 자리부터 데리고 온 이헌재 라는 인물과 그 이후 그를 처리하는 방식에서 원인을 찾는다. 이건 순전히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 모른 다. 그렇지만 그 길은 기득권과의 타협을 아예 전제로 하고, 나아가 어떤 또 다른 형식의 타협과 담합을 융합 으로 착각하는 모습이었다는 나의 판단은 여전히 유 효하다. 문재인의 경우는 빅 텐트 I. 에서도 기득권을 내려놓는 연대를 말했지만 지난 민 주당 내 경선 과정에서는 손학규 등에게 당내 기득권이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친노세력들이 문재인의 기득권, 기득적 기반이라 공격받은 셈이다. 지금도 그렇지 만 민주당의 기득권은 문재인-이해찬-박지원 이라는 연합조직에 있는 건 분명 하다. 그래서 이 세력이 과연 제 기능을 할까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구성 멤버는 절대 기득권을 내놓을 사람들이 아니란 전망을 가졌기에 그렇다. 그 러나 마치 미국 공화당의 롬니 후보처럼 정권교체는 특권과 기득권의 벽을 넘는 것 이란 표현으로 대통령이 되면 특권과 기득권이 사라질 것 같은 이미지를 주는 선거전략을 펴고 있음도 분명하다. 문재인보다 더 심각한 수준으로 기득권을 절 대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기득권이 민주당 내에, 문재인 주변에 너무 많다. 그러 니 문재인도 결코 기득권의 사슬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본인 도 말은 기득권의 벽을 꺼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방법에 있어서는 참 모호하다. 한미FTA가 어떤 것이었나를 생각하면 말의 진실성이 자꾸만 뭉개지는데 가장 힘을 많이 보태는 건 역시 주변의 기득권, 그리고 재평가 수준으로는 기별도 가 지 않는 바로 참된 반성의 모습이 없다는 바로 그 점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듯하 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정치적으로 문재인, 안철수 양자는 지지층을 중심으로, 특히 문재인 쪽에서는 기득권을 수구 기득권 이란 이름으로 부르면서 새누리당을 공격 한다. 이건 확실히 반작용현상의 효과를 노리는 경향도 있다. 박근혜와의 대결구 도는 기득권과 비( 非 ) 기득권이란 것이다. 이건 사실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레토 릭에 불과한 듯하다. 여기에서 묘한 현상 하나를 보게 된다. 사실 이들 모두가 저 단어의 뜻으로만 보 자면 한국형의 기득권 이다. 그들끼리 싸우는 것이다. 앞서도 그런 지적을 했지만 한국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치고 기득권과 연결되지 않은 인물은 없다 해도 과언

페이지303 이 아니다. 오히려 더 힘센 기득권의 세력과 연대하지 못해서 안달을 하는 모습 이 더 많이 눈에 띈다. 이에 대항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타협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도 정치권력은 일시적이지만 기득권력은 매우 뿌리가 깊기 때문에 이들을 넘어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란 현상을 인정하는 바탕이 깔려 있다. 오히려 서로 혼인 등을 통한 인맥관리를 더 철저하게 한다. 그러고 보면 기득권도 작은 것 큰 것, 중간 것 등 그 권력의 크기에 따라 계급화 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이걸 계급화된 기득권 정도로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 계급들끼리 싸우는데, 그게 누가 좋은 놈이고 나쁜 놈이고 가리기가 쉽 지 않은 셈이다. 분명한 건 겸손하지 못한 기득권은 현 시점에서는 최대의 골치 거리가 된다. 대중은 선거를 통해 기득권과도 함께 공생하는 공동체를 원하지만 정작 최상위층 기득권은 그럴 마음은 없는 듯 보인다. 이런 판에서 그들의 겸손을 바라는 것 자 체가 무리란 소리다. 어쩌면 이런 시스템에서는 90% 이상의 국민이 계급사다리 를 타고 올라가지 못한다는 포기와 좌절이 더 정당한 기득권에의 열망 포기인지 도 모르겠다. 그럼 어떤 결과가 오는 걸까? 진정한 진보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또한 올바른 공동체의 형성은 요원한 꿈이 될 것이고, 나아가 한국 사회를 바라 보는 눈이 극단적 패배주의가 늘어나거나 아니면 극단에 가까운 분노지수의 증가 를 가져오게 될지도 모른다. 골목상권을 위협하는 자본권력이나 빵 가게마저도 침범해버린 전례, 그리고 마구 집이로 서민의 생활형 상업을 금력으로-그러나 법에서는 정당한 바탕을 만들어 서-공격하고 취득해버리는 시스템에서는 기득권의 벽은 절대 무너질 턱이 없다. 정치가 그런 기득권을 어느 수준에서 제어할 수 있을까? 법대로, 원칙대로는 그 들에겐 잘 통하지 않고, 일부나마 벌어지는 재벌 혹은 준 재벌들에 대한 처벌은 그들 간의 알력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 사회 정의가 구현되어 일어나는 일이 아 니란 것을 고려해보면, 이 기득권의 벽에 망치를 들이댈 사람들이 늘어나지 않으 리란 보장도 없다. 법과 원칙을 말했으면 지키면 되는 일인데 그게 안된 것은 지 난 어떤 정권도 이 정권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음 정권은? 기대 않는다. 그러나 최 소한 변화되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너무 많이 생겼다. 지난 정권으로부터 쭉 추구해오는 이 당치도 않은 리틀 아메리카 론 의 실체에서 도 기득권의 뜻은 새겨진다. 미국이라 해서 기득권이 없나? 아니다. 사회계급은 더욱 더 철저해진 감이 들 정도다.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그들은 심지어 어느 출 신의 조상 후손인지를 따진다. 영화에서 보는 프리티 우먼 은 그저 영화일 뿐이 다. 히스패닉 계가 늘어나면서 이 인종적 제약은 더 심화되는 느낌이 든다는 분 석도 나온다. 한국의 경우에는 이자스민 같은 다문화 찬양에 동원된 인물까지 나 오는 걸 보면 솔직히 위험한 지경에 이미 들어갔다고 생각된다. 왜 재벌기업들이 다문화 캠페인을 벌이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한국 사회를 인종적 계급 화하려는 술책이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가? 다문화 가정 자녀를 위한 기술교 육위주 실업고 운운하는 소리까지 들어가면 이 리틀 아메리카 론의 허구를 금새

페이지304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완득이를 보고 다문화로 인해 생긴 문제들에 일련 의 애틋한 감정이 생긴 사람이 있다면 그 인간적인 감상을 보다 더 깊숙하게 감 추고 이 상황을 잘 봐야 한다. 한국 사회는 정치를 통해 기득권의 타파를 말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판단도 든다. 오히려 정치 내부에서 사회구조의 불안정성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다는 자각이 나 와야만 겨우 기득권에 대해 약간의 손질이라도 하게 될 듯한 셈이다. 그것이 언 제일까? 바로 지금이다. 여기서 기득권을 최소한 범위에서라도 제어하지 못한다 면, 아마 한국 사회는 절망의 집단화 를 맛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예감이 너무도 강하게 든다. 그것이 바로 기득권의 반대말이 우리 말에서 제대로 없는 이유다. 지금은 그 반대말의 의미를 새길 때인데도 말이다. 기득권이 겸손하게 사 회의 오늘을 보지 못하면 그 사회는 진보보다는 퇴보하는 공동체가 된다. 결국 퇴보의 뒷걸음질에 밟히는 건 대중이기도 하겠지만 기득권도 예외가 되기는 어려 울 것이다. 대선 레이스에서 온전하게 기득권을 현 시점에 통제하고 제어하는 프레임이 막연 한 구호가 아닌 현실적인 기반을 가지고 제시되지 않는다면, 아마 이번 대선은 대선을 치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치르고 난 이후가 더 큰 사건으로 번질지도 모른다. 세상의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흐름은 있다. 이건 참 무서워해야 할 경고에 해당하지만 이마저 무시할는지, 어떨는지. 난 내 할 말은 했다. 10. 경제 문화 사회 자본의 세습 밤 / 오탁번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아있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페이지305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흔히 혼동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차이( 差 異 )와 차별( 差 別 ) 이다. 차이는 일단 같지 않은 거다. 그래서 다르다고 하는 것이고. 차별은 그걸 등급화해서 차 이 를 둬서 나누는 거다. 이건 구분하다 와 구별하다 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 속담에는 음식은 한데 먹고 잠은 따로 자라 는 말이 있는데, 이건 먹거리에 있어서는 구별하지 말고 서로 챙겨 먹지만 잠을 자는 건 품위나 습관 등과 관계 되는 것이고 구분을 해서 자라는 뜻이다. 역시 의식주의 기본은 먹는 것에 둔다. 한가마밥을 먹다 는 말도 비슷한 뜻이긴 하다. 우리 사회는 지금 중산층이 깨어 질만큼 깨진 상태다. 이 뜻은 어떤 누구도 최상 위의 극소수 퍼센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언제 최하층의 바닥을 헤맬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말과 통한다. 어느 밥그릇이 크다는 말은 함부로 못한다는 소리다. 2007.10.2 차별금지법 입법예고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는 듯하다. 이 제 겨우 5년 전의 일인데도 말이다. 노무현 정부 말기 법무부는 헌법상 평등의 원칙을 실현하는 최초의 기본법 이라는 거창한 제정 이유를 밝히면서 차별금지 법제정안 을 입법예고 했다. 이건 노무현 말기의 초대형 사건 가운데 하나였는데 도 이 사안의 후속처리는 지금도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이유가 뭘까? 입법예고안에는 " 헌법 의 평등이념에 따라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범죄전력, 보호처분, 성적지향, 학력( 學 歷 ),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 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하고 예방하며 불 합리한 차별로 인한 피해자에 대한 구제조치를 규정한 기본법을 제정함으로써, 헌법 및 국제 인권규범의 이념을 실현하고 전반적인 인권 향상과 사회적 약자 소 수자의 인권보호를 도모함과 아울러 궁극적으로 사회통합과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법적 근거가 제시되었지만 10월 31일 일단 입법예고 차별 금지 대상에서 성적지향, 학력,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병력, 출신국가, 언어, 범죄 및 보호처분의 전력 등 7개 항목이 삭제되었다. 이것은 익히 예상된 일이긴 했다. 우선 경총을 비롯한 재계와 보수 언론들이 들 고 일어난 항목은 학력, 병력( 病 歷 ) 에 의한 조항이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막는다 는 이유로 반대의견이 제시되었고 일부 보수 기독교 단체가 성적지향 이 동성애

페이지306 허용법안 이라고 삭제 요구를 했고 이에 7개 항이 삭제된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오히려 이 법안 자체가 차이와 차별 가운데서 차별 받아야 하는 사 람을 구분해버린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생각해봐야 한다. 결국 17대 국회에 서 이 법안은 제정되지도 못하고 끝났다. 2010.4.9 법무부가 다시 차별금지법 특별분과위원회 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차별 금지법 초안을 마련하고 공청회를 열기로 한다. 동성애차별금지법 일단은 막았다.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6866&section=sc1 동성애가 나온 걸 보면 이 단체는 보수 기독교 계열이라고 보여지는데 역시나 반 대를 주도한 단체는 첫 머리에 바른교육을위한교수연합이 등장한다. 경원대 무역 학과 이용희 교수가 이끄는 단체다. 이 법안 반대 말고도 나꼼수, 학생인권조례, 탈북자 강제북송, 레이디가가 내한 공연 등에 늘 앞서는 자리에 있다. 자신을 우 파가 아닌 윗파 라고 하면서 통일한국은 선교한국을 위해서도 필요한 과정 이라 며 남북한 문제에서는 통일문제에 교회가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참 재미나다. 동성애라는 문제만 빼면 그럼 하나님 앞의 평등이라고 하며 이용희 교수는 이 법안에 동의를 할 건가? 그에 관해서는 어떤 의견도 없다. 그 냥 차별금지법을 동성애차별금지법 으로 불러왔다는 것 외에는. 2010.8.13 대통령령으로 출범한 사회통합위원회가 있다. 참 묘한 곳이다. 그곳에 서 차별금지법 권고법안을 내놓았다고 나오는데 홈페이지 (www.harmonykorea.go.kr)에서는 찾기가 어렵고 구글에만 내용이 있다. http://www.google.co.kr/url?sa=t&rct=j&q=%ec%b0%a8%eb%b3%84%e A%B8%88%EC%A7%80%EB%B2%95&source=web&cd=19&ved=0CFYQF jaioao&url=http%3a%2f%2fwww.harmonykorea.go.kr%2fcommon%2fin c%2fdownload.asp%3ffilename%3d20100207154315086.pdf%26filerealn ame%3d%25ec%25b0%25a8%25eb%25b3%2584%25ea%25b8%2588%2 5EC%25A7%2580%25EB%25B2%2595%25EA%25B6%258C%25EA%25B3 %25A0%25EB%25B2%2595%25EC%2595%2588%25EB%2582%25B4%25 EC%259A%25A9.pdf&ei=RMFtUPaPCcSQiQKth4HgDg&usg=AFQjCNGYob Qcnm7J97ABGsk3LXgPz6L2ZQ&cad=rjt 2012.7 현재 학벌차별금지법을 만들겠다고 공약하는 대선주자들이 아직 나오고 있는 걸 보면 노무현 정부 말기의 차별금지법은 여전히 갈 길이 멀게 보인다. 경 총을 비롯한 재계와 보수 언론이 요구해서 당시 삭제된 7개항에 학력 이 들어있 었던 것을 기억하면 쉽다. 이 말은 거꾸로 해석해서 재계는 학벌 차별을 절대 포 기하지 않겠다는 말로 해석된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자본 구분법처럼 경제자본, 사회자본, 문화자본 어느 쪽도 기득권은 자신들의 기득 권력을 양보

페이지307 하거나 혹은 차별을 두지 않고 대하는 걸 거부한다는 말이다. 좀 더 들어가면 그 냥 세습 을 허용하는 체제로 가자는 뜻이다. 그것이 학벌이건 학력이건 골치 아프게 따지지 말자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사회에서 서울대는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자본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최고 의 지배학벌이다. 그러나 서울대의 지배권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사회적 자본을 지배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문화와 정신의 영역에까지 미친다. 대중의 의식을 보이지 않게 통제하는 언론의 경우에도 서울대는 확고한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어 서 그들의 계급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서울대 신화와 일류대 신화를 노골적으 로 확대 재생산한다. (김상봉교수, 학벌사회 중에서) 서울대 의학박사 출신인 안철수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많다. 학력과 학벌이란 문 제가 아니라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자고 감히 말할 입장이겠는가 하는 점이다. 차별금지법은 국가인권위원회법과는 달리 법원의 시정명령 및 손해배상 청구까지 가능하고, 고용, 재화와 용역의 공급이나 이용, 교육기관의 교육 및 직업훈련에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차별하는 행위, 법령과 정책의 집행에 있어서 특정 개인이 나 집단을 차별하는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 괴롭힘 등에서도 차별을 규제하 는 것을 그 입법 초안으로 하고 있다. 당연히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차 별이 아니란 규정도 있다. 할 수 있을까? 이 법에 관해서는 문재인, 박근혜 양자의 의견도 들어야 하는 입장이다. 막연하고 모호한 이야기 말고 하자, 말자 를 결정하는 것 말이다. 법무부가 2007년 입법 예고하고 또 수정하고, 그리고 국회 회기 끝나고 2010년 다시 제기하고 공청회 하고 등등 이어지는 이 기나긴 길에서 아직도 맺음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 한다. 학력, 병력을 기득권은 왜 반대하는 것일까? 모두 이유는 있다. 그러나 그 것이 과연 공생을 위한 길일까? 우리 사회는 현 시점에서는 분명히 차별 사회 다. 모든 분야에서 극심한 차별이 벌어진다. 그 중에서도 경제자본, 문화 자본, 사회자본 전반에 걸쳐 차별을 공고화하려는 움직임은 모두 기득권으 로부터 출발을 한다. 그들은 절대 이에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매일 확인한 다. 이렇게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페이지308 2012 시대의 민낯 제 8 부 (2012.10.6~2012.10.7) 담담당당 시대 시리즈의 두 번째가 민낯 이다. 그리고 세 번째의 시리즈도 이어질 것이다. 필요하면 네 번째로 이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 사이 많은 주제를 건드렸지만 아직도 겨우 시작단계의 이야기만 한 듯하다. 이제 대선주자들의 선거공약이 나온다. 그걸 하나씩 톺아보는 작업도 매우 중요 한 부분일 것이다. 그와 더불어 우리가 잊고 있던 얼마 전의 과거를 다시 꺼내보는 작업, 그리고 현 재 시점에서 당연히 봐야 하고 또 보지 않고 지나갈 수 없는 바로 이 정권에 관 한 이야기는 더욱 더 중요하다는 걸 많은 이들은 생각하고 있다. 낱낱이 보자 했 는데 어제 뉴스엔가 4대강 사업에 관여한 1000여명의 훈장 포장 이야기가 나왔 길래 그냥 웃는다. 이게 어디 웃고 지나갈 일인가 싶지만 지금은 그런다. 하나의 정권이 끝나면 정리 단계에서 쓰레기가 참 많이도 나온다. 그 쓰레기를 누가 치울 건지 지금은 그게 더 궁금할 뿐이다. 물론 여기엔 책임소재란 것이 반 드시 붙게 된다. 이어가 보자. 1. 정치혁신의 제 1 과제 2.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없앨 때? 3. 사법개혁은 피할 수 없는 대세다. 4. 검찰개혁은 시급한 수준을 넘어섰다. 5. 법원 조직법과 사법개혁 6. 몽 펠르랭 소사이어티(Mont Pelerin Society) 7.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8. 정치라는 직업병에 시달리는 사람들 9. Coriolanus 10. 금융위, 정권 말기의 추악한 꼼수

페이지309 1. 정치혁신의 제 1 과제 너를 이루는 말들 / 김소연 한숨이라고 하자 그것은 스스로 빛을 발할 재간이 없어 지구 바깥을 맴돌며 평생토록 야간 노동을 하는 달빛의 오래된 근육 약속이라고 해두자 그것은 한 번을 잘 감추기 위해서 아흔아홉을 들키는 구름의 한심한 눈물 약속이 범람하자 눈물이 고인다 눈물은 통곡이 된다 통곡으로 우리의 간격을 메우려는 너를 위해 벼락보다 먼저 천둥이 도착하고 있다 나는 이 별의 첫 번째 귀머거리가 된다 한 도시가 우리 손끝에서 빠르게 녹슬어간다 너의 선물이라고 해두자 그것은 상어에게 물어뜯긴 인어의 따끔따끔한 걸음걸이 반짝이는 비늘을 번번이 바닷가에 흘리고야 마는 너의 오래된 실수 기어이 서글픔이 다정을 닮아간다 피곤함이 평화를 닮아간다 고통은 슬며시 우리 곁을 떠난다 소원이라고 하자 그것은 두 발 없는 짐승으로 태어나 울울대는 발 대신 팔로써 가 닿는 나무의 유일한 전술

페이지310 나무들의 앙상한 포옹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상처는 나무 밑둥을 깨문 독사의 이빨 자국이라고 하자 동면에서 깨어난 허기진 첫 식사라 하자 우리 발목이 그래서 이토록 욱신욱신한 거라 해두자 혁신 ( 革 新 )은 자주 쓰는 단어이지만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되는 무서운 말이다. 완전히 다 바꾼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이 단어가 새로움의 상징인 것처럼 흔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이노베이션 (Innovation) 바람 때문이었다. 기술혁신, 그러니까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그를 통해서 바뀌어지는 경제적인 현상을 보자는 것인데, 이건 혁신보다는 변혁( 變 革 )으로 봐야 한다. 급격하게 바꾸어 아주 달라지게 한 다 는 것으로 의도하건 아니건 간에 기술이 그렇게 변혁되게 만들어 버리니 차라 리 이 말은 타당하다. 쿠데타(coup d Etat)는 무력을 통해 정권을 빼앗는 것이긴 하지만 이것이 곧 체 제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은 아니다. 지배계급 내부의 단순한 권력이동이니까. 사회변혁은 사회 내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개량적이거나 혹은 혁명적인 방법으로 체계를 바꾸는 걸 뜻한다. 엄밀히 봐서 한국 사회는 혁 신, 변혁을 말하지만 그 단계까지 가고 있는 건 변혁 당한 기술세계 외에는 없 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건 사회변혁에서 요구되는 모순과 위기, 갈등은 그 정도가 이제는 거의 극한 지대까지 오지 않았나 싶은 판단도 든다. 그 모든 일이 지난 15년여 사이에서 벌어졌다는 건 놀랄 일은 아니다. 그만큼 강하고 억 센 힘이 작동한 시기였다는 것, 그걸 인정하고 지금의 사회를 볼 수밖에 없다. 정치혁신은 정치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일까? 이 답은 아니다 라고 정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정치하는 사 람들만의 결정권을 인정하고 만다. 대의민주주의는 정치혁신에 있어 중간단계가 생략된 시스템이다. 투표를 통해 뽑고 나서 그걸 재 검증하는 과정을 주지 않는 다. 5년, 4년마다 대통령, 국회의원을 뽑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 이후에는 맡 겨진 상태에서 그냥 지켜본다. 비판도 하고 비난도 하지만 실질적인 개입을 할 여지는 없다. 그 기간은 민주주의 자체가 공백으로 남는다. 이를 개선할 여지를 만드는 숱한 시도는 있었지만 얼개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으 니 특별한 개선책도 나오기 어려웠다. 오히려 정치를 정치인들이 하는 시스템은 더 고착화된 느낌마저 든다.

페이지311 안철수 정치혁신 포럼 발족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158 아젠다 측면에서 안철수의 접근은 발 빠른 느낌이 든다. 소통과 참여를 위한 정 치혁신 포럼 의 발족은 몇 가지 포석을 깐 제목임에 분명하다. 하나는 기성 정치 와 구분하고 있는 안철수식 정치의 안정감을 이것으로 확보하고자 하는 것, 다른 하나는 기존 정치권과의 차별성을 부각하고 자신의 참신성을 높이자는 것이 그 바닥에 깔려 있다. 이것이 포럼 이란 형식임을 감안하면 아마도 정당정치와 시민정치의 생산적 결 합을 모색하는 민주 생활 상식 통합 네트워크 정치 를 추구한다 (유민영 대변인) 는 말에 그 해답이 있는 듯하다. 좋은 말은 다 들어가 있다. 민주, 생활, 상식, 통 합, 네트워크는 각각 정치가 뒤에 접미어로 붙으면서 하나의 테마가 된다. 이들을 최종적으로 네트워킹을 하는 게 해답이란 소리다. 안철수, 단일화 질문에 정치 혁신에 달려 기존입장 재확인(2012.10.4) http://news1.kr/articles/838984 진정한 정치 혁신이 일어나는지, 그것을 국민들께서 정치 혁신이라고 판단하시 는 지에 달려 있는 것 같다. 그런 방향으로 계속 노력할 생각 이란 말에서 단일 화의 전제조건인 민주당의 정치혁신이 여전히 테마로 남아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민주당은 전혀 정치혁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복잡하게 얽힌 민주당 내의 계파들을 생각하면 혁신 이란 말을 적용할 여지는 없는 상태니까. 그럼 안철수는 왜 이런 혁신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것일까? 그 혁신의 방향이란 무엇일까? 던져진 건 포럼 이 하나 달랑 있고, 그리고 방향 도 저기 네트워크라 는 것 하나로 모아져 있을 뿐이다. 마치 우공이산( 愚 公 移 山 )을 말하는 듯하다. 결국 어느 시점에선가는 문재인-안철수 단일화 문제는 아주 첨예한 논쟁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과연 단일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솔직히 안개 속인 건 분명하다. 그래서 시나리오로 볼 수밖에 없다. 첫째, 단일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안철수가 단일화를 원치 않는 경우를 생 각하자. 아마도 이 경우에는 안철수가 가진 정치적 야망이 지금이 아니라 다음까 지 이어진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25% 이상의 대선 지지율을 확 보 가능하다는 예상을 한다면 충분히 그 선택이 가능하다. 정당을 만들지 않고 선거가 끝난 이후에 만들어도 된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여전히 국회의원 보궐 선거는 많이 남아 있고, 또 무소속이란 형식으로 대선을 완주한 마당에-이렇게 한 전례는 없었으니까-차차기를 노린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검증과정에서 드러난 걸 보완하고 5년 후를 노릴 때, 누가 상대할 사람도 마땅하지 않을 것 같 기도 하다.

페이지312 둘째, 단일화를 통해서 안철수가 대선의 단일 대항마가 되는 경우다. 민주당 입 장에선 대선주자를 내지 못하는 불임정당이 될 수는 없다. 그러니 그 조건은 기 본적으로 안철수의 민주당 입당을 전제로 한다. 이 조건, 대단히 까다롭지만 결국 단일화의 테마로 들어가면 안철수는 수용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무소속의 안 철수 아래로 민주당이 들어갈 재간은 없으니까. 이 형식은 결국 안철수 진영과 민주당의 문재인 진영 간의 결합을 의미한다. 민주당 내의 많은 계파들이 이 결 합에서는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처리할 사람이 안철수-문재인 양자가 되 어야 한다. 지금까지 민주당 내의 모습만 본다면, 솔직히 그 충돌도 만만치가 않 을 듯하다. 셋째, 단일화를 통해 문재인이 대선의 단일 대항마가 되는 경우다. 안철수는 당 을 꾸리지 않았다. 시간적으로도 지금 당을 만든다는 것도 좀 우습게 되었다. 그 러면 안철수 진영은 민주당에게 책임총리제를 포함해서 여러 요구를 하게 된다. 과거 노무현-정몽준 케이스에서 보았듯이 외교 안보 국방 등은 정몽준이 가지고 가겠다는 분할에 동의했으나 권력은 매우 냉정하다. 지금 DJP식 결합을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인데-안철수로의 단일 대항마 경우도 마찬가지지만-이 결합은 한 가지 아주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다. DJP에서 보았듯이 대통령은 자리에서 내려오 지 않지만 총리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그러니 책임총리제라는 말은 권력구도 로만 보자면 임시직이고 한시직이지 정권 내내 총리를 하게 한다는 소리는 아니 다. 숱한 사건이 벌어지고 총리가 책임질 일은 생기게 마련이니까. 이래도 좋다고 하면 여하튼 판은 짜지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정치혁신 이란 테마가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 는다. 저기 어디서 안철수가 꺼낸 포럼 의 내용물이 있는 거지? 민주 생활 상식 통합 네트워크 정치 민주정치, 생활정치, 상식정치, 통합정치, 네트워크 정치라고 분리해서 적어보자. 이 내용물이 가능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정치개혁 을 말했으니 여기서 찾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을 구체화하지 않으면 그냥 말장난 했다고 밖엔 생각 못하니까. 민주정치, 이건 더 설명이 필요 없다. 왜? 누구나 가져다 붙이면 민주 라니까. 생 활정치, 이것도 마찬가지다. 정치의 생활화, 생활 속의 정치는 그저 구호일 뿐이 다. 상식정치, 이건 말은 참 좋다. 보편적인 상식이 정치 속에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법은 왜 삐딱한가 에서 보았듯이 법이 이미 보편적인 상식 을 벗어나고 있는 판에 정치가 그렇게 가지 않는다면 이상하다. 보편적인 상식의 애매함을 통합 이나 통섭 에서 찾는다는 것도 우습다. 통합정치라는 말은 바로 저 보편 ( 普 遍 )의 문제를 정치가 수용하는가 않는가에 달려 있다. 우산장사와 짚 신장사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이 어렵지만 공생( 共 生 )을 생각하면 된다. 이게 그 토록 어려웠다. 네트워크 정치? 난 솔직히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서로

페이지313 연결된 이란 의미로 저 단어를 사용한 듯하다. 폼 나는 말이지만 차라리 공생정 치 가 더 타당하지 않나 싶다. 정치는 쇼 다. 좀 멋진 쇼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정치개혁을 말할라치면 지금 시점에서는 국회의원 숫자부터 대폭 줄이는 작업을 하면 어떨까? 많다고 정치가 나아지는 것도 없는데 그것부터 줄이자는데 동의하지도 못하면서 개혁을 말하는 것 자체가 너무 웃긴다. 백화점 식으로 나열하지 말고 딱 한 가지만 테마로 꺼내 면 좋겠다. 그것을 제 1 과제로 현실성 있게 말하는 것, 그것으로부터 개혁은 출 발할 수 있다. 혁신을 내걸지 말고 개혁부터 하자. 개혁의 방안이 나와야 그것이 혁신인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겠나 싶다. 2.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없앨 때?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이라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국회의원도 종류가 있다. 지역구에서 선거를 통해 올라온 사람도 있지만 비례대 표라는 이름으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도 있다. 명분은 간단하다. 정당에 대한 지지 도를 숫자로 계산해서 비례대표를 뽑을 권한을 그 정당에게 부여한 것이다. 그런 데 이게 과연 타당한 것일까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건 엄연히 대의민주주의가 직접 선출 방식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직접이 아닌 간접-정 당에게 선출권을 준-으로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걸 뭘 근거로 하는 건지 애매하 니까 말이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근거는 헌법과 공직선거법 이다. 1994.3.16 그 이전 있었던

페이지314 대통령선거법, 국회의원 선거법, 지방의회의원 선거법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 선거 법을 통합하여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 방지법 이란 이름으로 공포 제정되었다. 그 후에 2005.8.4 제21차 일부 개정으로 명칭이 공직선거법 이 되었고 제정이래 계 속 개정을 거쳤지만 큰 대강을 건드리지는 않고 이어져 오고 있다. 19대 국회의원은 총 300명 국회의원-299석을 여야 담합으로 1석 늘린 꼼수는 많이 알려졌으니 설명 생략한다.- 중에 지역구 246석, 그리고 54명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선출된다. 선거를 통해서 뽑기는 한다. 당의 이름 부분에 기표를 하는 방식이니까. 그래서 비례대표는 당적을 옮기면 직위가 상실된다는 전제는 있다. 문제는 이것을 운용하면서 늘 벌어지는 일이 비리 라는 점이다. 이건 당내에서 비례대표 순위를 정하는데 거의 매번 일어난다.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비례 대표라는 건 돈 먹이고 국회 들어가는 창구가 되어 있다. 지역구를 통해 자질을 검증 받는 게 아니라 정당이 그들의 기준 에 의해 뽑는 셈인데, 그 뽑은 사람의 얼굴 한 번도 못보고 국회의원 선거를 국민이 하는 셈이다. 이건 선택권을 처음 부터 제약시켜둔 상태에서 하는 것이니 이게 정상적인 절차라고 보기 어렵다. 국회의원은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국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빌 선거에 의하여 선출하며 그 숫자는 법률로 정하되 200인 이상으로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바로 이 헌법 제41조 1 국회는 국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구성한다. 에 과연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해당되는가를 따져봐야 한 다. 우선 비례대표는 정당이 추천한 자일 뿐이지 국민에 의한 직접 선거가 아니 다. 당 을 찍는 것이지 당 의 비례대표를 찍는 게 아니다. 그래서 헌법 제41조 3 국회의원의 선거구와 비례대표제 기타 선거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에 서 비례대표제를 언급하고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단 직접 선거 라는 원칙에는 위배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비례대표 국회의원 계산법을 한 번 보자. 유효투표총수의 100분의 3이상을 득표하였거나 지역구국회의원총선거에서 5 석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각 정당에 대하여 비례대표국회의원선거에서 얻은 득표 비율에 따라 비례대표국회의원의석을 배분한다. 득표비율은 상기 두 가지 요건 중 하나를 충족한 정당의 득표수를 요건에 해당하는 모든 정당의 득표수의 합계 로 나눈 수이다. 비례대표국회의원의석은 각 요건 해당 정당의 득표비율에 비례 대표국회의원 의석정수를 곱하여 산출된 수의 정수의 의석을 당해 정당에 먼저 배분하고, 잔여의석은 소수점 이하 수가 큰 순으로 각 정당에 1석씩 배분하되, 그 수가 같은 때에는 당해 정당 사이의 추첨에 의한다. 뭐 이런 경우도 있다. 추첨도 나온다. 뺑뺑이를 돌리거나 심지 뽑기도 아니고 말 이다. 이 정도로 엉성한 이 제도는 도대체 왜 나온 것일까?

페이지315 제헌국회로부터 제5대까지는 소선거구제이건 중대선거구제이건 지역구로 운영되 었다. 그러나 1963.11.26 선거가 이뤄진 제6대부터 비례대표제 전국구 44명이 등장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이번 4.11 총선도 예 외가 아니었다. 국회의원을 직접 뽑는 방식으로 왜 다시 돌아가야 하는가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다. 바로 제6대에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등장한 배경 자체가 제헌 국회의 국회의원 선출 정신과는 절대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언급되지 않은 건 아니다. 헌법재판소의 공직선거법의 1인 1표로 한다 는 대목이 위헌으로 나오고 선거법도 바뀌었다. 제10장 투표 제146조(선거방법) 1 선거는 기표방법에 의한 투표로 한다. 2투표는 직접 또는 우편으로 하되, 1인 1표로 한다. 다만, 국회의원선거, 시 도의 원선거 및 자치구 시 군의원선거에 있어서는 지역구의원선거 및 비례대표의원선거 마다 1인 1표로 한다. <개정 2002.3.7, 2004.3.12, 2005.8.4> 3투표를 함에 있어서는 선거인의 성명 기타 선거인을 추정할 수 있는 표시를 하 여서는 아니된다. [2002.3.7 법률 제6663호에 의하여 2001.7.19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결 정된 제2항을 개정함.] 헌법재판소는 법률적인 심의만 했으나 내용을 보면 그 심각성은 여전히 남는다. 즉, 비례대표를 뽑는 과정 자체도 당헌에 규정된 것으로 되어 있는 상태에서 과 연 유권자의 자유로운 선택권에 합당한가 문제가 있고, 또한 무엇보다도 이 비례 대표를 뽑는 과정 자체가 워낙 비리가 개입할 소지마저 있고 보면, 왜 이 제도를 운영하는가 의문이 남는 것이다. 그러나 헌법 제41조 3항에 비례대표 가 언급된 상태는 그 제도를 운영해야 한다 는 것이다 보니 이것을 없애지 못한다는 명분이 되고 있지만, 아마도 국민들의 절대 다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렇게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존재하고, 그를 통해 서 소위 직능대표가 국회에 들어가 사회의 능동적인 변화에 기여한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듯하다. 그러므로 이 헌법 조항의 개정에 관해서도 이 시 점에서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나 싶다. 대중의 다수가 국회의원의 숫자가 너무 많다고 하는 의견이 지배적이고 또한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거에 있어 정당이 민 주적인 절차를 확보하는데 실패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는 상태에서 굳이 이것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이미 19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상 태이므로 이제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해도 무방한 시점이 아닌가 보는 것이다. 아래 글을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1인 1표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위헌성 (동국대 법대 정연주 교수)

페이지316 -헌재 2001.7.19 2000헌마91, 112, 134(병합) 사건과 관련하여- http://m.ccourt.go.kr/home/mobile/promote/book_view.jsp?seq=7541&cname=%ed%97%8c%eb% B2%95%EB%85%BC%EC%B4%9D&eventNo=&eventnum=&pubflag=0&cid=05030802 이 논문의 주요 내용을 한 번 보자. 2. 현행제도의 문제점 이러한 비례대표국회의원 의석배분방식의 문제점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 과 같다. A지역구에 B정당 소속의 C후보가 출마했다고 가정하자. 유권자 갑은 C 후보에게 투표를 하고 싶은데 그가 속한 B정당은 싫어한다. 그러나 선거법 146 조 2항의 1인 1표제에 따라 갑은 선거에서 이 두 가지 의사를 다 반영할 수 없 으며 C후보를 찍든지, 안 찍든지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한다. 결국 갑이 C후보의 인물됨을 생각해 C후보를 찍었다고 하자. 이렇게 해서 지역구 국회의원 227명이 뽑힌다. 다음은 46석의 비례대표의석 배분. 앞서 언급했듯이 선거법 제189조 제 1항은 각 정당이 지역구에서 얻은 득표비율을 기준으로 비례대표의석을 배분하 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는 비례대표의석의 배분에서 유권자 갑의 의사가 정반대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B정당이 싫은데도 C후보를 선택했기 때문에 갑도 B정당의 비례대표의석을 늘리는 데 기여한 결과가 된 것이다. 이런 선거방 식은 유권자의 의사를 절반밖에 반영할 수 없어 절반의 선택권 을 빼앗기는 셈이 된다. 또한 1인 1표제는 우리 정치권의 가장 큰 병폐인 지역정당구도를 고착화하 는데 기여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유권자가 특정지역에 기반을 둔 A정당을 지지할 경우 다른 정당의 후보가 마음에 들더라도 일방적으로 A정당 후보를 지지할 수 밖에 없는 풍토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러한 현행제도는 지역구에서 5석 이상 또는 유효투표의 5% 이상 을 득표한 경우에만 비례대표의석을 배분하도록 하고 있는 이른바 저지조항과 결 합하여 소수ㆍ신생정당의 출현을 막는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정당이나 인물의 참신성보다는 거물이나 지역유지 등 당선될 가능성 이 있는 사람에게 투표하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 소수대표나 신인이 선출되거나 소수ㆍ신생정당이 의회에 진출하는 것을 어렵게 하며, 이를 그동안의 선거결과가 입증하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비례대표제의 이념과 본질에 반한다. 아울러 이는 각 정당의 득표율과 실제 의석수가 비례적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이 역시 투표의 성과가치의 평등을 이념으로 하는 비례대표제에 반한 다. 결국 현행 비례대표제의 경우에는 이처럼 비례대표제 본래의 이념을 실현하 지 못하는 결과 직능대표 내지 전문가대표의 이념이 실현되기 어렵고, 참신하고 진보적인 정책과 강령을 가진 신생정당이나 소수정당의 의회진출도 어려우며, 다 양한 정치적 세력과 견해의 반영 내지 대표가 어렵게 되어 헌법상의 복수정당제 와 정당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다원적 민주주의의 이념과 조화되기 어렵고, 다수대표제의 단점을 보완하는 기능을 가지지 못한다는 등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 다고 할 수 있다.

페이지317 1. 사건의 개요와 심판의 대상 가. 사건의 개요 (1) 2000헌마91 사건 청구인들은 가칭 청렴정치 국민연합 을 결성하여 신생정당 창당을 준비중인 33 인의 발기인들 중의 일부로서, 공직선거의 투표에 관하여 1인 1표제를 규정하고 있는 선거법 제146조 제2항이 청구인들의 헌법상 보장된 선거권, 공무담임권, 평 등권을 침해하는 위헌규정이라고 하면서 2000. 2. 10. 이 헌법소원을 청구하였다. (2) 2000헌마112 사건 청구인 A는 2000. 4. 13. 실시될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거권을 행사할 유 권자로서, 청구인 B는 같은 유권자이자 서울 노원구에서 국회의원 후보가 되고자 준비중인 자로서, 청구인 민주노동당창당준비위원회는 민주노동당을 창당하여 위 선거에 소속당원을 후보자로 추천하고자 하는 단체로서, 선거법 제56조, 제57조, 제189조로 인하여 자신들의 평등권, 피선거권이 침해된다는 등의 이유로 2000. 2. 16. 이 헌법소원을 청구하였다. (3) 2000헌마134 사건 청구인 C외 25인은 2000. 4. 13. 실시될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거권을 행사할 유권자들이고, 청구인 D, E는 새천년민주당 소속의 국회의원으로서 위 선 거에서 위 정당의 지역구후보로 공천이 확정된 자들이며, 청구인 F는 위 같은 정 당의 당원으로서 위 정당의 전국구비례대표후보자로 출마예정인 자인 바, 선거법 제189조가 자신들의 선거권, 피선거권 등을 침해한다면서 2000. 2. 22. 이 헌법 소원을 청구하였다. 나. 심판의 대상 이 글에서 논의되는 사안과 관련되는 부분은 선거법 제189조 제1항 내지 제7항 및 제146조 제2항 중 1인 1표로 한다 부분이다. 2. 결정요지 가. 선거법은 이른바 1인 1표제를 채택하여(제146조 제2항) 유권자에게 별도의 정당투표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지역구선거에서 표출된 유권자의 의사를 그대 로 정당에 대한 지지의사로 의제하여 비례대표의석을 배분토록 하고 있는바(제 189조 제1항), 이러한 비례대표제 방식에 의하면, 유권자가 지역구후보자나 그가 속한 정당 중 어느 일방만을 지지할 경우 지역구후보자 개인을 기준으로 투표하 든, 정당을 기준으로 투표하든 어느 경우에나 자신의 진정한 의사는 반영시킬 수 없으며, 후보자든 정당이든 절반의 선택권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신생정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어 기존의 세력정당에 대 한 국민의 실제 지지도를 초과하여 그 세력정당에 의석을 배분하여 주게 되는바, 이는 선거에 있어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고,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보장 할 것 등을 요구하는 민주주의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페이지318 나. 비례대표제를 채택하는 경우 직접선거의 원칙은 의원의 선출뿐만 아니라 정 당의 비례적인 의석확보도 선거권자의 투표에 의하여 직접 결정될 것을 요구하는 바, 비례대표의원의 선거는 지역구의원의 선거와는 별도의 선거이므로 이에 관한 유권자의 별도의 의사표시, 즉 정당명부에 대한 별도의 투표가 있어야 함에도 현행 제도는 정당명부에 대한 투표가 따로 없으므로 결국 비례대표의원의 선출에 있어 서는 정당의 명부작성행위가 최종적ㆍ결정적인 의의를 지니게 되고, 선거권자들의 투표행위로써 비례대표의원의 선출을 직접ㆍ결정적으로 좌우할 수 없으므로 직접 선거의 원칙에 위배된다. 다. 현행 1인 1표제 하에서의 비례대표의석배분방식에서, 지역구후보자에 대한 투표는 지역구의원의 선출에 기여함과 아울러 그가 속한 정당의 비례대표의원의 선출에도 기여하는 2중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데 반하여, 무소속후보자에 대한 투 표는 그 무소속후보자의 선출에만 기여할 뿐 비례대표의원의 선출에는 전혀 기여 하지 못하므로 투표가치의 불평등이 발생하는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자신의 지역구에 후보자를 추천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무소속후보자에게 투표하는 유권 자들로서는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투표가치의 불평등을 강요당하게 되는바, 이는 합리적 이유 없이 무소속 후보자에게 투표하는 유권자를 차별하는 것이라 할 것이 므로 평등선거의 원칙에 위배된다. 라. 선거법 제189조 제1항은 위와 같은 이유로 헌법에 위반되며, 선거법 제146 조 제2항 중 1인 1표로 한다 부분은 국회의원선거에 있어 지역구국회의원선거와 병행하여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면서도 별도의 정당투표를 허용하지 않 는 범위에서 헌법에 위반된다 할 것인바, 그로 인하여 유권자인 국민들의 비례대 표국회의원에 대한 선거권, 무소속후보자에 대하여 투표하는 유권자들의 평등권 등의 기본권이 침해된다. 마. 비례대표국회의원선거의 근간이 되는 선거법 제189조 제1항이 위헌이라면 그에 부수되는 동조 제2항 내지 제7항은 독자적인 규범적 존재로서의 의미를 잃 게 되는바, 그렇다면 이 조항들이 비록 심판대상이 아니지만 함께 위헌선언을 함 으로써 법적 명확성을 기하는 것이 상당하므로 그에 대하여도 아울러 위헌선언을 한다. 1. 현행 헌법상 비례대표제는 선택사항인가? 가. 헌법재판소의 입장 헌법재판소는 선거법 제146조 제2항 중 1인 1표로 한다 부분은 비례대표제를 실시하지 않고 단순히 지역구 다수대표제 선거방식만을 채택한다면 그 자체 아무 런 위헌성이 없으나, 그것과 병행하여 비례대표제를 실시할 경우에는 선거법 제 189조 제1항과 결합하여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여러 위헌적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선거법 제146조 제2항 중 1인 1표로 한다 부분은 국회의원선거에 있어 지역구국회의원선거와 병행하여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면서도 별도의

페이지319 정당투표를 허용하지 않는 범위에서 헌법에 위반된다. 라고 판시함으로써 비례대 표제를 실시하는 경우에 한해서 현행 1인 1표제가 위헌이라고 하는 한정위헌결정 을 내리고 있다. 이는 만일 비례대표제를 실시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당연히 1 인 1표제가 합헌이고, 이는 비례대표제를 실시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즉 현행 헌법상 비례대표제 자체를 실시하지 않아도 위헌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입법자는 현행 1인 1표제를 고수하고자 한다면 비례대표제를 폐지 하면 되고, 그렇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1인 2표제 등 정당투표제를 도입하여야 하 며, 따라서 입법자에게는 양자 사이의 선택권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 고 있다. 나. 비례대표제의 실시는 의무사항 (1) 그러나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입장은 타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헌법의 규정 또는 해석상, 그리고 연혁상 비례대표제는 반드시 실시해야 하는, 따라서 그 실시 여부에 대한 입법자의 재량의 여지가 없는 사항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헌법 제41조 제3항은 국회의원의 선거구와 비례대표제 기타 선거에 관한 사항 은 법률로 정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비례대표제의 실시는 이미 헌법 제정자 내지 헌법개정자의 결단이고, 그 실시에 관한 세부적인 사항(예컨대 명부 작성방식, 저지조항 등)만 법률에 위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연혁적 으로 이러한 비례대표제에 관하여는 과거의 헌법에는 명문으로 규정된 적이 없다 가 1980년 헌법에서 제8차 개헌을 통해 제77조 제3항에 처음으로 규정되었고, 이 규정이 현행 헌법 제41조 제3항에 같은 내용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례대표제의 실시 자체는 - 그 이전의 헌법 하에서와는 달리 - 이미 헌 법에 의하여 명령된 것이고, 다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만 입법자에게 위임 한다는 헌법개정자의 의지를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즉 비례대표제의 실시여부 자체는 이미 헌법상 정해진 것이므로 입법자에게는 그 실시 여부에 대한 재량의 여지가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굳이 헌법에 비례대표제에 대한 언급을 할 필 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비례대표제의 실시여부 자체가 입법자의 입법재 량에 맡겨진 것이라면 헌법 제41조 제3항에서 비례대표제에 대한 언급 없이 단 지 국회의원의 선거구와 기타 선거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는 식으로 규 정했었을 것이고, 또한 그것으로 충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예컨대 헌법 제61조가 1 국회는 국정을 감사하거나 특정한 국정사안에 대하여 조사할 수 있으며, 이에 필요한 서류의 제출 또는 증인의 출석과 증언이 나 의견의 진술을 요구할 수 있다. 2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절차 기타 필요 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경우 시행법률이 국정감사에 대하여만 규정하고 국정조사는 배제시킬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2. 비례대표후보자 결정절차와 관련하여 가. 헌법재판소는 비례대표국회의원 의석배분방식 및 1인 1표제의 위헌여부의 판

페이지320 단기준으로 제시한 민주주의원리와 관련하여 정당의 공직선거후보자의 결정과정 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즉 헌법 제8조 제2항은, 정당은 그 목적ㆍ조직과 활 동이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민주주의원리를 정당제도에서도 관철하 려 하고 있다. 정당은 선거에 있어 후보자를 추천ㆍ지지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자 활동의 하나인바, 그렇다면 비례대표국회의원선거에 있어서는 비례대표후보자의 선정과 그 순위의 확정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헌법이 요구하는 정당민주주의의 요청을 충족시키려면, 비례대표후보자의 선정과 순위확정이 당원총 회나 대의원대회 등을 통하여 민주적 절차를 거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현행 선거법은 그러한 제도적ㆍ절차적 규율을 충분히 하고 있지 않다. 선거법 제47조 제2항은 정당이 선거에 있어 후보자를 추천함에 있어서는 정당법 제31조에 따라 민주적인 절차에 의하여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으나, 정당법 제31조는 정당의 공 직선거후보자는 후보자를 추천할 공직선거의 선거구를 관할하는 해당 당부 대의기 관의 의사가 반영되도록 하여야 하며, 그 구체적 절차는 당헌으로 정한다 고 규정 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대의기관의 의사를 반영 할 구체적 절차를 당헌에 일임해서는 민주적 절차에 의한 비례대표후보자의 결정이라는 헌법적 요청이 충 족되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비례대표후보자가 민주적 절차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당 지도부의 영향력에 따라 일방적으로 결정된다면 그러한 비례대 표국회의원의 민주적 정당성은 대단히 취약할 수밖에 없다. 라고 한 판시가 그것 이다.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견해는 그 내용만을 놓고 볼 때에는 타당하지만 이를 비례 대표국회의원 의석배분방식 및 1인 1표제의 위헌여부의 판단기준과 관련해서 볼 때에는 문제가 있다. 즉 정당의 공직선거후보자의 결정과정이 민주적이어야 하 며,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원리 나아가 국민주권의 원리에 부합한다고 볼 수 없 다. 라고 한 헌법재판소의 언급에 비추어 볼 때 정당법 제31조의 규정에서처럼 비례대표후보자가 민주적 절차에 따라 결정되지 않기 때문에 현행 비례대표국회 의원 의석배분방식 및 1인 1표제가 민주주의원리에 위배되어 위헌이라는 견해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적절한 판시라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비례대표국회의원 의석배분방식 및 1인 1표제의 위헌여부가 그 후보자추천과정의 민주화여부와 직 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현행제도는 설사 당내 후보자추천과정이 민주 적이라 할지라도 위헌이며, 반대로 당내 후보자추천과정이 비민주적일지라도 정 당투표제를 도입한다면 비례대표국회의원 의석배분방식은 그 자체로서 별도로 합 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례대표국회의원 의석배분방식 및 1인 1표 제의 위헌여부와 관련한 헌법재판소의 공직선거후보자의 결정과정의 민주성에 대 한 언급은 - 그 내용 자체의 타당성은 별론으로 한다면 - 적절치 못했다고 여 겨진다. 나. 그러나 - 비례대표국회의원 의석배분방식 및 1인 1표제의 위헌여부의 판단 기준과 관계없이 - 정당민주주의 및 당내민주화는 그 자체 선거제도의 개선책을 모색한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의 상당한 의미가 있음은 물론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대 민주주의는 복수정당제를 바탕으로 한 정당민주주의와 다원적 민 주주의를 특색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정당을 매개하지 않는 정치 또는 민

페이지321 주주의의 실현 및 선거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러한 정당민주주의는 정당 자체의 민주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헌법 제8조 제2항도 정당은 그 목적ㆍ조 직과 활동이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정당내부의 민주화의 조건 중의 하나가 바로 선거에 있어서 후보자선출과정의 민주화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에서 소개된 견해는 지극히 타당하다고 하겠다. 후보자를 추천하고 결정하는 방법과 절차는 통치기관의 조직과 작용에 관한 기본 적인 사항이고, 선거권과 피선거권 등의 기본권에 관한 본질적 사항이므로 법치주 의원리상 당연히 선거법이나 정당법 등의 법률에 - 적어도 그 기본적인 사항을 - 정해야 하며, 이를 당헌에 위임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정당법 제31조는 법치 주의원리상 민주적인 후보자추천절차의 기본적인 내용을 정할 것을 전제로 위임 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선거법 제47조 제2항과 상호 조화되기 어려워 이른 바 체계정당성에 반하며, 법률유보의 원칙을 한 내용으로 하고 있는 법치주의원 리에 대한 위반의 소지마저 있다고 하겠다. 3. 사법개혁은 피할 수 없는 대세다. 한 아름의 실감 / 유홍준 빨래를 너는 아내의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안고 싶다 안아. 보고 싶다 실감, 한 아름의 실감이여 (허공은 백 번 안아 보아도 허공!) 고백하노니 가늘고 날씬한 여자는 싫다 아름에 꽉차는 오동포동한 여자가 좋다 마흔 셋 드디어 나도 실감을 느끼는 나이 실감을 좋아하는 나이가 되었다(너무 조숙한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한 아름, 한 아름의 실감이여 흐믓하다 안아 줄 수록 좋아하는 실감이 지금 나의 곁에서 살고 있다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아름답다 실감이 입었던 옷을 하얗게 빨아 너는 아내여

페이지322 사법부는 입법 사법 행정 3부에서 가장 전문성을 가진 곳이라 할 수 있다. 국회 의원의 전문성은 솔직히 인정하기 어렵다. 정치 전문성? 여의도 평준화란 이야기 가 나온 이유는 그곳으로 간 모든 사람들이 한결 같이 하향 ( 下 向 )을 선호하기에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 욕을 먹는다. 정치가 엉망진창이 되면 정치인은 덩달아 한 통속으로 취급 받게 되어 있다. 그런데도 웃는 걸 보면 신기하다. 그에 비해 행정 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지만 매우 편협한 구석을 가진다. 외교통상부가 가진 친 미 성향이나 금융감독기관의 지독스럽다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편집증적 조직보호 논리는 행정부가 가진 그들만의 기득권 유지심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보여준 다. 사법부는? 그에 못지 않다. 법치주의를 내세운 그들의 위세를 통제할 곳이 마 땅하지 않고 또한 그들 스스로도 굳이 자신들의 위세를 감추고자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사법부의 개혁이 없이 미래를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전혀 없다 는 볼멘 소리가 나오는 것도 그간 이들이 보여준 모습 자체가 미래지향적이라고 는 할 수 없었고, 또한 사회의 대중이 느끼기에도 이들이 반드시 통제를 필요로 하는 집단이란 인식이 강하게 대두되어서일 것이다. 그걸 알고도 자정능력을 보여주지 않는 건 왜일까?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다는 의미일까? 몇 가지 주목할만한 변화들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사법부는 여전히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왜? 국민과 너무 멀리 떨어진, 그러니 까 한국 내의 외계이며 외계인의 세상이란 인식이 너무 퍼져서 그런 건 아닐까? 그런 사법부도 최근 들어 많이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법원에 대한 공격이 많았는 데 형사단독판사의 자격을 문제 삼은 대목에서 경력 10년으로 올린 것이나 우리 법 연구회 가 논란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 대표적이다. 조중동이나 보수단체에서 집중적으로 우리법 연구회의 편향성을 물고 늘어진 케이스에서, 법원에 대한 공 격 성향이 내부적 갈등보다는 외부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금새 알 수 있다. 특히 좌편향 논란 은 본질 자체가 이념 논란이었다는 점에서 법원의 고심도 깊었다. 검찰개혁 문제는 법원에 대한 공격과는 사뭇 다르게 전개된 것도 특기할만하다. 사실 검찰이 가진 수사권, 기소권의 전횡은 견제장치가 없다는 점에서 비판의 모 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내부 개혁 주문이 끊이지 않았지만 검찰 특히 정치검찰 로 변질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극복한 전례가 없었다는 점, 그래서 개혁을 할 의지가 있는 건지에 대해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신 등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확실히 법원과는 다르게 검찰은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고, 또 정 치권력이 가장 먼저 통제하고자 하는 곳이 검찰인 것은 드러나 있는 상태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정화능력은 전혀 없다는 게 오늘까지도 판명이 난 결과다. 공수처 (공직자수사처)에 대한 논의는 어제 오늘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또한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당연히 공수처는 이 시점에선 필요한 조직임에 분명 하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이런 문제가 전부 해결될 수 있을까?

페이지323 대중의 관점에서는 정의롭지 않은 사회 에 사는 이유의 첫 머리에 사법부가 연 상되는 건 당연하다. 법치주의는 헌법의 평등권을 어느 만큼 잘 반영하고 있는가 를 늘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는 전혀 평등하지 않다. 고로 정의롭지 않은 것이고, 이것이 무너진 상태에서 법률체계 자체도 회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 를 과연 공수처 하나 달랑 만든다고 해서 개혁 혹은 개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인가? 사법정의 라는 단계까지 생각하면 기관 하나의 신설이 그 모든 걸 보장하 는 걸로 오히려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종종 대하는 이런 류의 생각-위 진중권의 트위터 글-은 또 다른 많은 생각을 이어가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법부의 판단은 적어도 언론 보다, 국회보다, 한나라보다, 민주당보다, 진보당보다, 나꼼수보다는 신뢰할만합니 다. 는 글 속에 있는 신뢰 가 무엇을 의미할까? 물론 적어도 라는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말이다. 진중권은 신뢰 ( 信 賴 )라는 말 자체가 굳게 믿고 의지한다 는 것 임을 모르는 것일까? 저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사법부는 이미 그 자체가 굳게 믿는다는 영역에 들어가는 것인데? 차라리 그나마 믿을 만 합니다 정도가 되 어야 올바른 표현이 아닐까? 문제는 적어도 에 있긴 하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낮게 평가해도, 마음에 안차더 라도 믿음은 줄 수밖에 없고, 또 그러지 않으면 법치주의 자체가 유지되지 않으 니까. 앞서도 망할 놈의 소크라테스를 끌어들여 악법도 법이다 라고 대중을 쥐락 펴락 하려고 프레임을 짠 것이 왜정의 계략임을 말한 적이 있지만, 그나마 법에

페이지324 대한 저항권을 가진 것이 대중이니까, 지금까지는 적어도 라고 말할 수는 있을지 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그 수준은 벌써 넘어간 것이 아닌가? 법이 무너지는 가장 첫 걸음이 바로 법 앞의 평등 이 깨질 때다. 이미 한국 사회의 법은 법 앞이건 아래이건 평등한 영역이 무너졌다. 이것은 비리나 부패 와는 다른 문제다. 비리 ( 非 理 )는 어그러진 상태 수준을 말한다. 그러나 깨진 것 은 바로 파괴 ( 破 壞 ) 즉, 와해되거나 무너진 걸 말한다. 법이 평등을 실현하지 않 는다면, 법치 자체는 이미 불평등한 속에서 진행된다는 의미가 되고, 그런 법이 민주를 말할 자격은 없어진다. 그냥 어그러진 정도가 아니란 뜻이다. 한국 사법부의 근본적 문제점 분석과 그 해소방안의 모색(신평) www.lawyershin.co.kr/down/down35.hwp 대구카톨릭대 신평 교수가 오래 전에 내놓은 글이다. 거의 10년 가까이 지난 글 을 뽑아본 것은 그 때와 비교해서 지금 어떠한가를 보자는 의미이기도 하다. 머 리말을 전문으로 소개한다. 뒤에 이어지는 사례들도 한 번 보라. 지금도 마찬가지 다.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 정권 들어 사법, 특히 검찰권력은 온갖 사 안에 있어 유감없이 편향성을 드러냈다. 아주 마음껏 말이다. 물론 여기서 다루는 건 사법부, 그 가운데서도 법원에 대한 부분에 그 핵심이 있다. 한국에서도 지금까지 자신의 최선을 다하여 국민을 위해 일해 온 많은 훌륭한 법관들이 있어왔다. 국민들은 그들을 존경했다. 지금도 이러한 상찬을 받을만한 다수의 법관, 법조인들이 땀을 흘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의 잘못된 사법제 도가 만들어내는 깊은 어두움과 국민들에게 작용하는 엄청난 질곡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여기에서 일시적으로 눈을 돌린들 없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그리 고 우리 법률가들은 여기에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법부에서의 불공정한 사건처리는 상당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 금이나 본질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 자체가 지 연, 혈연, 학연에 의해 형성되는 네트워크 속에서 공정성을 상실시키는 시스템을 여전히 온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뿌리 깊은 연고주의 문화는 정말 상상 을 초월할 정도이다. 연고주의의 만연에 그치지 않는다. 이에 편승한 의도적인 부정행위, 사리를 추 구하는 행위도 없지는 않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제껏 얼마나 많은 사법피해자가 양산되었는지 모른다. 그들의 가슴에 박힌 못이 만들어내는 비참한 원성은 이 땅 을 어둡게 물들이고 있다. 법조인들은 잠시 자신의 직업이 만들어주는 보호막을 떨치고 나와 찬 바람이 부는 거리로 나서보라. 이 말을 실감할 것이다. 외국에서는 우리처럼 사법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크지 않고, 나아가 우리처 럼 사법권력에 대하여 깊은 원한까지 품은 사람이 많지 않다. 왜 우리의 사법이 이처럼 국민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사게 되었는지 심히 통탄스럽다. 유전무죄, 무 전유죄 라는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유포된 말 이 한 가지에서도 우리 는 사법체계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원한의 냄새를 쉽게 맡을 수 있다. 그러면 사법부내의 구성원들은 단순한 가해자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그들

페이지325 역시 피해자이다. 과도하게 관료화, 계급화된 층층시하의 사법부 조직이 만들어내 는 답답함은 구성원들을 짓누른다. 그들이 하는 노동의 양이나 질적인 어려움은 타 직종의 것을 어떤 면에서는 압도한다. 직업적 자부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바 치려고 하기에는 근무의 조건은 열악하고, 신분보장은 미흡하다. 이같은 제반 조 건 하에서 그들 구성원의 인간적 존엄성이 무시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우리의 사법부는 이처럼 외부적으로, 내부적으로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파행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시급히 혁파되어서 정상으로 바로 돌려야 한다. 잘못된 우리 사법부의 모습을 보면서 민주주의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민 주주의는 권력의 분점과 권력행사에 있어서 견제 받음을 그 기본 원리로 요구한 다. 분점 되지 아니하여 집중된 권력이 견제 받지 않고 행사된다면, 그 권력은 독 재권력으로서 부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국민은 그 권력의 행사에 의해 심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사법권은 지금까지 소수의 사람이 독점해 왔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한 국의 사법을 철저한 국민 배제형 사법이라고 정의 짓는다. 그만큼 사법권 행사의 영역에 있어서 제도적으로 국민의 참여 보장마련이 소홀했고, 또 국민에 의한 통제 의 힘도 작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다. 아주 소수의 사법엘리트에 의한 사법권의 독점은 한국 사법의 가장 큰 특징이다. 당연한 말이겠 으나, 이는 민주주의의 기능원리에 완전히 역행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2003년 출범한 새 정부는 국민참여를 표방한다. 국민참여는 민주 주의를 실현하는 대단히 중요한 수단이다. 단순한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것 자체가 아주 고귀한 가치를 지니는 영역에 속한다. 21세기는 새로운 시민사회 로 특징 지워진다고 한다. 이는 시민이 이익향수의 주체 로부터 정책결정의 주체 로 바뀜을 뜻한다.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하여 시민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회가 21세기의 시민사회인 셈이다. 국민참여는 사법권 행사의 영역에서도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 사법권은 우 리의 신체, 생명과 재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토록 중요성을 가지는 사법 의 영역에서 또 이처럼 국민의 참여가 극히 배제되어 왔다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사법구성원인 그들만의 사법 으로 전락해서 그들 만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조직이 운용되어 온 사실은 절대 변명할 수 없다. 아 무리 그들이 사법의 전문성, 기능성을 강조하며 이를 합리화시키려 한다 해도, 그 렇게 될 수 없다. 혹자는 말한다. 우리처럼 능률적인 사법체계를 갖춘 나라도 많지 않으며, 사 법구성원들이 이처럼 땀 흘려 일하는 나라가 없다고 말이다. 이 말을 그대로 수 용한다고 치자. 그러면 왜 국민들의 사법체계에 대한 강렬한 불만과 원한이 삭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사법이 국민들의 참여를 거의 완벽하게 배제하고 있 기 때문이다. 잘 하든 못 하든 민주주의 원리나 우리 헌법상의 이념에 따라서 국 민들이 사법권의 행사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여 그들의 뜻이 반영되는 것을 볼 때, 국민들은 그 시스템은 바로 자신들이 형성한 것이라는 책임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것이 이루어내는 결과에 자연스레 승복하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을 전제로 하여 필자는 이 글을 풀어나가기로 한다. 하지만 그 설명이 추상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아무리 한국 사법부가 심각한 문제를 안 고 있다고 외친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잘못 되어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사법

페이지326 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의한 피해자가 아닌 한 이를 실감하기 어렵다. 그런 뜻에 서 다음의 항목에서는 우리 사법부에서 나타난 부정적 실상을 가감 없이 소개하 기로 한다. 신평 교수가 제시하는 해법은 다음과 같다. 1 관료화, 계급화의 지양 2 신상필벌의 원칙 확립 3 법원장 등 고위직 법원공무원 선거제의 시도 4 배심제 혹은 참심제의 채택 5 안식년제의 도입 등 법관의 처우개선 딱 첫 머리부터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관료화, 계급화 라는 단어 때문이다. 그 것은 매우 관념적이고 또한 현실적으로 해법으로 내놓을 수 없는 경우에 속한다. 여기서 신뢰 가 무너진다. 해법이 없단 소리처럼 들리는 것이다. 우리 사법부는 스스로 정화할 역량이 없으면 무조건 무너진 상태에서 법치주의만 적용하는 기 계적 법 전문가, 그러나 삐딱해도 방법이 없는 상태로 가게 될 뿐이다. 검찰의 개혁에 대해서 한 번 보자. 대검찰청 웹사이트 알림마당 에는 검찰개혁 이란 코너가 있다. 개혁? 그곳엔 그런 내용이 없다. 그냥 그들만의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자정능력을 한 번 가서 확인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http://www.spo.go.kr/spo/intro/vision/reform.jsp 2011.4.4 검찰개혁에 관한 문재인의 인터뷰 내용이 남아 있다. 당시로써는 정치 직접 참여를 하지 않는 쪽 생각을 할 때여서 진솔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싶어 다시 보게 된다. 특히 참여정부에서 검찰 개혁을 어떤 방향에서 했는지, 그 후 생 각이 어떤지를 보게 된다. 검찰 개혁, 중수부 폐지가 맞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9854 정치권력이 검찰을 정권도구로 만들어서 사용했다는 것, 참여정부에서는 공안부 축소와 중수부 폐지를 개혁안으로 내었지만 중수부는 축소 수준에 그쳤다는 것, 고위공직자 비리 조사처(고비처)-지금의 특별수사청 방안과 유사-의 수사대상 에 대통령 주변 실세 친인척, 고위 공직자, 판사, 검사, 국회의원까지 포함했는데 검찰, 국회의원이 반발했고, 국가청렴위 산하에 공직부패 수사처를 신설하는 법안 을 냈지만 정치권 반발로 무산되었다는 것, 국회의원을 빼더라도 고비처 설립을 추진했어야 옳았는데 지금은 후회스럽다는 것, 정치적 중립을 담보할 수 있는 장 치가 필요하다는 것, 검찰의 민주적 통제를 위해서는 특별수사청이 필요하다는 것 등이 언급된다.

페이지327 안타깝게도 참여정부는 과반 넘는 의석을 가지고도 고비처건 특별수사청이건 어 떤 것도 하지 못했다. 그 결과 퇴임 후의 노 대통령은 검찰의 칼날을 비켜가지 못했다. 그래서 고비처는 했어야 한다는 후회도 터져 나오는 듯하다. 이명박 정권은 일단 정치권력이 검찰을 철저하게 정권도구로 활용하는 방향에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그렇게 갔다. 지금도 그렇게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다음 정권도 그렇게 갈 수 있을까? 지금은 어느 누구도 그렇지 않을 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해온 행태를 보면 말이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게 가서는 안될 한계점에 다다른 건 분명해 보인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더 이어가 보도록 하자. 특히 검찰개혁 문제는 지금 시점에서는 반드시 토의해야 하고, 또 다음 정권이 누가 되건 간에 해야만 하는 과제가 설정되어 있어야만 할 중요한 숙제에 속한다. 4. 검찰개혁은 시급한 수준을 넘어섰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 유홍준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사람은 길쭉한 사람이다 다리도 길고 목도 길고 뒤통수도 길고 귀도 긴 사람이다 어깨 축 처진 검정옷을 입은 사람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 한가운데 서 보는 사람은 차마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 흙 먼지를 한 번 오지게 뒤집어 써 보는 사람이다 어디 피할 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이다 마치 고문 당하는 사람이고 마치 숙청당하는 사람이다 모름지기 인간의 그림자가 이렇게 길고 이렇게 훌쭉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사람이다

페이지328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스스로 고개를 꺾는 것이다 그림자 중에 가장 긴 그림자는 운동장에 드리운 그림자다 검찰은 엄연히 행정부에 속해 있다. 그러나 사법권력이다. 너무 비대해진 이 권력 으로 인하여 사회 전체가 패닉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은 타당하다. 그러나 누 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를 두고 참 말이 많다. 국회사법개혁위가 개혁 안을 내놓자 검찰총장이 사표를 내버렸다. 오만의 극치를 보여준다. 누가 이 오만 함에 대해 통제할 것인가? 검찰이 지금까지 해온 패턴을 본다면, 벌써부터 다음 정권이 누가 되건 간에 검 찰의 권력유지와 심지어 강화를 위하여 거래 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그 런 조짐을 상당히 보인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이런 사태는 검찰이 정권을 창 출하는 기관이며, 또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검찰 공화국 이라고 행 세해온 바와 무관하지 않다. 이 거대 권력집단은 도저히 자신들 스스로 정화할 능력을 상실한 것은 물론, 검찰청법에서 명시된 것처럼 검찰은 검찰총장과 검사 들 로 구성된 집단이며, 오로지 검찰총장에게 충성하는 행태에서 결코 벗어날 것 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볼 것인가 아닌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결론은 오래 전에 내려진 상태니까. 검찰권력이 얼마나 우스꽝스런 코미디를 연출하는가 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바 로 아래의 사례다. 검찰의 힘은 수사를 하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수사를 하지 않는 데서 나온 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수사만 하는 거지요. 이거를 견제할 수 있 는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예를 들어서 이 정권에 굉장히 유력자가 엄청난 부패 를 저질러서 고소했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거를 담당하는 검사가 대충 수사 해 가지고 기소를 안 하겠지요. 예를 들어서. 그러면 제가 거기에 대해서 검찰에 항고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체 제기수사라는 게 있습니다. 담당검사가 봐 가지고 내가 봐도 부실하니까 다시 하겠습니다. 고검으로 올라가지를 않는 겁니 다. 자기가 해 가지고 다시 또 무혐의를 합니다. 이거에 대해서는 검찰항고를 못 하게 돼 있고요. 이건 재정신청을 하게 돼있습니다. 법원으로 가지요? 법원이 재 정신청을 받아들이면 법원이 재정신청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바로 자동으로 기소 가 될 때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애초에 수사를 안 했기 때문에 증거가 없 어요. 그러니까 법원이 무리하게 재정신청을 받아들여서 기소를 했다 하더라도 증거가 없으니까 공소유지가 안 되는 겁니다. 재정신청 한 후에 공소유지를 누가 하느냐. 다시 검사가 하게 돼 있습니다. 우리나라 법이. 검사가 법정에서 무죄를 구형합니다. 이런 코미디가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고요. (최강욱 변호사)

페이지329 http://www.socialdesign.kr/news/articleview.html?idxno=6437 나쁜 검사들을 단죄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검찰개혁은 기본적 으로 의미를 잃는다고 본다. 지금까지 토의되는 모든 방안들을 대략 한 번 요약 해서 정리해보도록 한다.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으 로 말이다. 구 분 주요내용 비 고 중수부 폐지 중수부 폐지는 기본. 그와 함께 검찰의 조직문화를 바꾸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중수부만 없앤다고 정치적 편향이 없 어지는 건 아니다. 검찰권한 남용 방 지대책 인권친화적 검찰이 가능한가를 묻는 것 이다. 권한 남용에 대한 내부적인 통제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다. 시민위원회 활성화 내부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건, 시민위원 회를 통해서 해야 한다. 명목상으로만 설치된 시민위원회가 정기적 활동 내역 을 공개하도록 해야 한다. 검찰 과거사 진상 조사위원회 검찰 내부 부패방 지 대책 검찰의 정치화(정 검 유착) 방지 대 책 검찰의 자의적 법 검찰에 대해서는 역사청산 을 반드시 해 야 한다. 이는 검찰이 왜 검찰 내에 과 거사진상조사위 설치를 거부했는가를 보 면 잘 드러난다. 이를 한 번 털고 지나 가지 않으면 검찰의 과거는 자기네만의 역사로 묻히고 만다. 모든 행정기관이 그렇듯이 검찰도 이런 점에 내부 위원회가 있다. 그러나 작동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는 옥상옥이라 할지라도 공직자비리수사처나 혹은 참여 정부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고비처)의 형태는 반드시 필요하다. 1차적으로는 내부 감독시스템의 활성 화가 필요하다. 지금은 형식적인 설정에 불과하다. 전혀 기능하지 못 하며, 그렇게 만들 어둔 상태다. 반드시 해야 하는 과제에 속한다. 이 를 입법화하는데 주저해서는 안 된 다. 내부적인 비리도 법률적인 기소를 필요로 하게 되어 있다. 검찰이 기소 권을 가진 상태에 서는 내부관리가 자정능력에만 한정 된다. 정치와 검찰 간의 유착을 무조건 끊어야 평등권이 구현되지 한다. 이건 정검유착도 있지만 경검유착 않는 사회는 사회 도 있다. 금력과의 유착의 끈을 끊기 위 존립 자체가 위태 해서라도 만일 검찰이 정치권력, 경제권 롭다. 검찰권력의 력과 유착하는 사례에서는 검찰의 수사 불평등, 불공정을 기소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 막기 위해서는 이 이를 제어할 수단이 필요하다. 를 통제하는 장치 가 반드시 필요하 다. 최강욱 변호사의 위 사례는 그 일례일 자의적이라는 말에

페이지330 집행 통제 대책 검찰조직 민주화 내부의 공직자비리수사처 검찰총장 직선제 검찰권의 편파적 행사에 대한 구속 력 검경수사권 조정 개방형 도입 전관예우 금지 인사제도 뿐이다. 자의적 법 집행은 시민위원회의 방식이나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은 검찰총장과 검사들 이라 는 초 집중된 권력구조와 직결된다. 따 라서 지방 단위의 검사장이라도 직선제 를 시행해야 한다. 이 명칭이 여하하건 간에, 참여정부에서 거론된 고비처처럼 고위공직자, 검찰, 국 회의원 등을 포함한 비리수사처의 신설 은 시대적인 과제다. 검찰 내부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지방 검 사장은 물론이고 엄밀히 검찰총장의 검 찰 내부가 아닌 외부 기용도 고려해야 한다. 검찰의 자의적 법 해석과 편파적 행사는 시간이 지나서라도 그 내용이 밝혀질 경 우에는 철저하게 단죄해야 한다. 검찰의 수사권, 기소권은 분리되는 방향 으로 가야 한다. 일정한 과정을 거치는 것은 타당하지만 이를 분리하지 못하는 것으로 단정하는 건 위험하다. 검찰권력이 내부적 민주화를 달성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겠지만 최대한 개방 형 인사제도를 도입하여 검찰권력 내부 의 다양한 논의가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검찰을 떠난 사람이 검찰 내부에 영향력 을 행사하는 구도로는 검찰의 공평성은 확보할 수 없다. 서 드러나는 것처 럼 검찰의 수사권 과 기소권은 분리 를 지향하는 것이 옳다. 조직 내부의 민주 화가 없는, 검사동 일체 원칙 하에서 검사들은 검찰총장 한 사람의 지배적 구도를 벗어날 수 없다. 국회가 반대하고 검찰이 반발한다고 해서 이 사안을 집 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국민에 대 한 기만에 불과하 다. 외부인사를 포함한 광범위한 개방형 인사제도를 가동해 야 한다. 이런 편파성으로 인한 피해를 국가 사회가 언제까지 질 수만은 없다. 검경수사권 논의는 보다 더 진전된 방 향으로 가야만 한 다. 개방형 인사제도의 핵심은 검찰의 조 직문화 개혁에 있 어 핵심일 수 있 다. 전관예우라는 이 희대의 사기는 앞 으로도 계속될 듯 하다. 이 정도 수 준에서 금지될 것 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페이지331 지금 논의되고 있는 주제들만 모아보았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고등검찰청 폐 지 등 방안도 나왔었다. 검찰의 오늘을 생각하면 가장 우려되는 건 미래권력과의 또 다른 방식의 담합이다. 이건 이 사회를 혼란 속으로 다시 빠트리는 위험한 짓 임에 분명하지만, 이 혹시나 하는 일은 역시나 벌어질 것이란 예상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검찰의 개혁만으로 과연 사법개혁 전반에 걸쳐 벌어지는 비리, 부패, 불평등, 불 공정 등이 사라질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노력이 필요할 정도로 이미 검찰은 너무 큰 권력집단이면서도 중립적이지 않는, 불평등 불공정의 온상처럼 낙인 찍혀 있다. 그들이 자초한 것이다. 비록 내 부에서조차 정치검찰, 정치검사에 대한 비판이 터져 나오지만 본질적으로 검찰 자신들이 권력집단이라고 자위해버리는 상황에서는 정치적 편향성을 가진 정치검 찰을 없애는 건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제도는 그래서는 안 된다. 바뀌어야 할 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5. 법원 조직법과 사법개혁 물 / 함민복 소낙비 쏟아진다 이렇게 엄청난 수직을 경험해 보셨으니 몸 낮추어 수직으로 흐르실 수 있는 게지요 수평선에 태양을 걸 수도 있는게지요 아마도 일반인들이 일반 법관의 임기가 10년이란 걸 안 것도 서기호 판사 재임 용 탈락 사건 등 일련의 사법부 사건을 통해서였을 것 같다. 그들도 근무평정을 받고 그 심사에 따른다는 것도 말이다. 법원조직법 (시행 2012.1.1) http://www.law.go.kr/%eb%b2%95%eb%a0%b9/%eb%b2%95%ec%9b%90%ec%a1%b0%ec%a7%8 1%EB%B2%95 위 법원조직법에서 규정하는 일반 법관의 근무성적 평가 기준을 한 번 보자. 제44조의2(근무성적 등의 평정) 1 대법원장은 판사에 대한 근무성적과 자질 을 평정하기 위하여 공정한 평정기준을 마련하여야 한다. 2 제1항의 평정기준에는 근무성적평정인 경우에는 사건 처리율과 처리기간, 상소 율, 파기율 및 파기사유 등이, 자질평정인 경우에는 성실성, 청렴성 및 친절성 등

페이지332 이 각각 포함되어야 한다. 3 대법원장은 제1항의 평정기준에 따라 판사에 대한 평정을 실시하고 그 결과 를 연임, 보직 및 전보 등의 인사관리에 반영한다. 4 그 밖에 근무성적과 자질의 평정에 필요한 사항은 대법원규칙으로 정한다. [전문개정 2011.7.18] 문개정 2011.7.18] 제45조(임기 연임 정년) 1 대법원장의 임기는 6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 2대법관의 임기는 6년으로 하며, 연임할 수 있다. 3판사의 임기는 10년으로 하며, 연임할 수 있다. 4대법원장의 정년은 70세, 대법관의 정년은 65세, 판사의 정년은 63세로 한다. <개정 1994.7.27> 제45조(임기 연임 정년) 1 대법원장의 임기는 6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 2대법관의 임기는 6년으로 하며, 연임할 수 있다. 3판사의 임기는 10년으로 하며, 연임할 수 있다. 4 대법원장과 대법관의 정년은 각각 70세, 판사의 정년은 65세로 한다. <개정 2011.7.18> [시행일 : 2013.1.1] 제45조제4항 제45조의2(판사의 연임) 1 임기가 만료된 판사는 인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치 고 대법관회의의 동의를 받아 대법원장의 연임발령으로 연임한다. <개정 2011.7.18> 2대법원장은 다음 각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한다고 인정되는 판사에 대하여는 연 임발령을 하지 아니한다. 1. 신체 또는 정신상의 장해로 인하여 판사로서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 2. 근무성적이 현저히 불량하여 판사로서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 3. 판사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 3판사의 연임절차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법원규칙으로 정한다. [본조신설 2005.3.24] 근무성적평정은 사건처리율, 처리기간, 상소율, 파기율 및 파기사유 등, 자질평정 인 경우는 성실성, 청렴성 및 친절성 등이 각각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런 근무평정은 1995년 시작되어 부장판사 이하 판사에 대해 매년 1차례, 예비 판사에 대해 매년 2차례씩 평가해왔다. 그러나 지난 17년간 이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왜 그럴까? 결국 주관적 판단 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 서 개정안에는 오히려 수치화할 수 있는-개량화-항목들이 많이 추가 되었다. 그 런데 이것도 또 문제가 된다. 상소율, 파기율 등이 포함되면 일단 성과주의 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상소율 을 낮추려면 양형 수위를 낮추게 되고, 파기율을 낮추려면 대법원 판례를 무조건 따르면 된다. 이 말은 소신 있는 판결을 기대하기 더 어렵게 되었다는 뜻이다. 사건 처리율을 높이려면 사건처리만 신속하게 하면 되니까 일단 졸속으로 처리할

페이지333 가능성이 아주 높고, 사건 자체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시간만 맞추어 해버리면 되는 사태도 발생한다. 더 대충대충 해도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성실, 청렴, 친절에 관해서는 평가자의 임의적인 해석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그래서 광주고법은 지난 9월 모든 재판부에 대해 소송 관계인을 대상으로 상시 무기명 법정 설문조사를 한다고 밝혔다. 설문 내용은 개정시간 준수여부, 재판장 의 음성상태, 용어의 적절성, 재판경청 태도, 공정성, 피고인 존중여부, 진술기회 및 증거신청 여부, 재판의 신속성, 재판장의 쟁점숙지여부 등이 들어가 있다고 한 다. 법정 모니터링을 강화한 셈이다. 외부의 평가 시스템도 무시하기는 어렵다. 대한변호사협회의 재임용 법관에 대한 평가결과 공개, 서울지방변호사 회의 우수법관 발표 같은 것이 그 사례인데, 이것 도 문제 소지가 없지는 않다. 선수가 심판을 평가하는 것으로 수용할 수 없다 는 법원 측의 반응이 그것인데, 변호사와 법관 간의 관계에서 과연 공정성, 객관 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호사들은 개인이 아니라 법정단체임을 강조하며 변호사회의 설문을 통한 평가 자료를 법원이 수용해야 한 다고 주장하는 반면 법원은 이런 활동 자체가 마땅치 않게 여겨지는 것이다. 이 부분은 두 기관 사이의 일종의 힘겨루기 비슷한 형태로 진행되는 듯 보이기도 한 다. 한 쪽에서는 공정성을 높이는 계기라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변호사의 재판 개입에 해당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이는 둘의 주장 모두가 타당성을 가진다. 이러한 평가는 서울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중이다. 울산 변호사 회의 경우는 평가항목을 공정 청렴성, 품위 친절성, 직무성실성, 직무능력성, 신 속 적정성 등 5개로, A~`E등급으로 등급별 5~1점 점수배정으로 평가했다. 서울 과 마찬가지로 우수 평가자는 명단 발표했으나 하위 그룹은 공개하지 않았다. 법관의 근무태만 사례는 앞서 대구카톨릭대 신평 교수가 제시한 사례 하나에서 잘 드러난다. A판사는 법관으로서의 업무처리에 너무나 소홀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공연히 어떡하든 사건에 트집을 잡아 다음 기일로 넘겨버렸다. 보통의 법관은 2주 내지 3주 후로 사건의 속행 기일을 잡으나, 그는 2달, 3달 후로 잡는 것이 예사였다. 그가 주재하는 재판 기일에는 자주 진풍경이 벌어졌다. 사건이 하염없이 뒤로 미 뤄지다 보니 원, 피고 당사자 쌍방 측에서 제발 이제 결심해달라고 조르는 것이 었다. 남의 눈도 있고 하니 이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결심을 해준다. 그러나 별 다름이 없다. 두, 세달 후로 잡힌 선고 기일이 되면 다시 변론재개를 명하고, 변 론 재개 기일은 다시 선고 기일에서 두, 세달 후가 된다. 이렇게 잡힌 변론 기일 에서도 또 트집을 잡아 사건을 다음 기일로 넘겨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그가 선 고해주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당시 민사소송법 제137조에 의한 의제자백사건으 로 판결문 작성에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민사재판 장 업무를 담당하며 실제로 판결문을 거의 한 건도 작성하지 않았다. 대법원에서 도 그가 이처럼 근무를 태만히 하는 사실이 알려져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별다 른 조치는 전혀 취해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그곳에서 근무를 마치고 수도권으로

페이지334 전근하는 것이 순서였으나, 대법원에서는 그를 다른 지방의 법원으로 전보시켰다. 그러나 그 전보근무는 1년에 그쳤다. 1년 후 다시 그는 제자리를 찾아 수도권의 법원으로 갔다. 그러나 지금 사례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판사와 변호사 간의 유착관계를 통해 벌어지는 일도 만만치가 않다. 실제 재판을 진행해본 경험자들의 상당수는 특히 이권과 관계되는 경우 이런 사례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한다. 흔히 도장 값 이라고 해서 변호사 몇 사람의 도장으로 드러난 사실과 관계 없이 희한한 결론에 이르는 예도 많다. 그런 상태에서 변호사회가 판사 성적을 매긴다 고 하니 판사들이 웃을 수 밖에 없는 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자꾸만 나오는 것은 내부평가의 다면화 방안, 내부 모니터의 강화, 소송 관계인이나 시민 모니터 단에 의한 법관평가제도 상설화 방안 등이 제시되지만 사실 이렇게 진행하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다. 평가란 결과가 어떻게 나오건 간에 객관성 확보가 어려워 대단히 미묘하고 복잡한 반향을 일으키게 되어 있음 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법관인사제도 개선위원회가 2012.7.6 법관근무평정 및 연임제도 개선안 시행을 대법원장에게 건의했다고 한다. 그 내용에 따르면, 대법원이 2005년부터 A B C D E 5단계 평정을 상 중 하 3단계로 바꿔 평가해왔는데 그 비율은 20%, 70%, 10% 수준으로 이 중 하 를 받은 10% 법관을 세분해서 하 와 최하 등급으로 구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하 는 재임용이 어렵게 되는 셈이다. 지금 저 비율로만 보자면 전체의 10%의 절반 수준인 약 5% 수준이 그에 해당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당사자가 요청하면 평정 결과를 공개토록 했고 결과를 수 용하지 못할 경우에는 대법원장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의견도 제출할 수 있게 된 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하향식 평가의 폐해가 없어질 수 있을까? 평가를 공개하고 다면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지만, 이렇게 될 경우에도 평가결과를 보고 나면 재 판에의 부작용도 나타날 소지가 없지는 않다. 결국 하향식에서 바로 그 상부 평 가자가 공개되는 셈이어서 인간관계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고, 좁은 사법 부 판에서 이것이 상당히 영향을 미칠 소지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모양이다.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법원 내부의 평가가 여하하건 간에 법관의 판단 이 공정한가 아닌가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 그 점에서 보자면 상소율, 파기율, 사건처리율 같이 개량화를 전제로 해버리면 대법원 판례 자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법원의 법적안정성 지향은 더 높아질 거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소신을 가진 판결 이 없어진다면, 아마도 법은 더욱 기계적이 되어갈 우려가 있는 셈이다. 사법개혁과 맞물려 법관의 근무평정이란 문제가 제법 심각하게 대두된다. 법치주 의에서 법이 가진 삐딱한 성향을 과연 이런 평정제도로 커버할 수 있을까 하 는 근본적인 회의도 없지는 않다. 더군다나 많은 사건들에서 법원의 결정은 보편

페이지335 적 상식을 배반한 경우도 많았다. 법은 이렇게 본래 삐딱한 것이어야 하는지 생 각을 참 많이 하게 만든다. 6. 몽 펠르랭 소사이어티(Mont Pelerin Society) 네가 눈뜨는 새벽에 / 신달자 네가 눈뜨는 새벽 숲은 밤새 품었던 새를 날려 내 이마에 빛을 물어다 놓는다 우리 꿈을 지키던 뜰에 나무들 바람과 속삭여 내 귀에 맑은 종소리 울리니 네가 눈뜨는 시각을 내가 안다 그리고 나에게 아침이 오지 어디서 우리가 잠들더라도 너는 내 꿈의 중심에 거리도 없이 다가와서 눈뜨는 새벽의 눈물겨움 다 어루만지니 모두 태양이 뜨기 전의 일이다 네가 잠들면 나의 천국은 꿈꾸는 풀로 드러눕고 푸른 초원에 내리는 어둠의 고른 숨결로 먼데 짐승도 고요히 발걸음 죽이니 네가 잠드는 시각을 내가 안다 그리고 나에게 밤이 오지 어디서 우리가 잠들더라도

페이지336 너는 내 하루의 끝에 와 심지를 내리고 내 꿈의 빗장을 먼저 열고 들어서니 나의 잠은 또 하나의 시작 모두 자정이 넘는 그 시각의 일이다. 9월에 다뤄보려고 했는데 이제서야 이 주제를 정리하게 된다. 지난 9월 3일부터 8일까지 닷새 동안 체코 프라하 힐튼호텔에서는 전 세계 경제학자, 기업가, 연구 원 등 회원과 회원 추천 게스트등 350여명이 모여 경제현안의 논의 및 정보교환 을 했다. 이 몽 펠르렝( 순례자 란 뜻의 스위스 말) 소사이어티는 1947년 39명의 경제학자, 역사학자, 철학자들이 공산주의와 케인즈학파에 대항하려는 목적으로 창립되었는데, 당시의 좌장인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이후 이후 밀터 프리드먼을 거쳐 2006년 이후 시카고대 게리 베커 교수가 현재 좌장을 맡 고 있다. 시카고학파의 거두인 밀턴 프리드먼으로 인해 시카고학파라는 이름으로 도 잘 알려져 있다. 현재 회원은 699명이라고 한다. 이 총회의 목표는 사실상 자유시장경제가 왜 좋은지 매번 점검하고, 이를 전파해야 하는 사명감 을 확인하 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한국경제신문이 현장 취재까지 했는데 아래 사설 하나가 왜 한경이 이 총회에 관심을 가졌는가 그 이유를 잘 보여준다. 몽 펠르렝에 모인 자유지성들의 경고 (2012.9.6)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090540551&sid=0001&nid=900&typ e=1 자유주의 학파가 설 땅을 잃어가는 한국이다. 지금 한국 정치가 경제민주화 구 호를 요란하게 외치는 것과 무관치 않다. 시장 없이 경제가 없다. 시장에 대한 강한 선호도는 한국경제신문의 사실상 논조다. 기업을 중심에 둔 언 론의 기조인 셈이다. 이 총회에서도 마찬가지 견해들이 제기 되었는데, 견해를 요약하면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의 원인이 월스트리트의 탐욕에만 있는게 아니라 미국정부의 잘못된 저소득층 복지정책(클린턴 대통령 시기부터)에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벤 버냉 키의 양적완화 통화정책(QE3)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는 건 물론 계속되면 더 큰 재앙이 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는 것이다. 이런 발언들을 통해 금융위기 이후 재정투입과 통화확대를 통한 글로벌 경기부양책으로 나선 케인스학파에 대한 대 척점에 바로 이 총회가 있다는 걸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주요 발언 내용

페이지337 을 관련 기사에서 발췌해본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정부와 정치권의 섣부른 복지정책 때문이었 다. 빌 클린턴 정부에서 시작해 조지 부시 정부로 이어진 저소득층 주택갖기 정 책이라는 복지실험이 금융위기를 초래했다. 케인스주의자들은 돈이 어떻게 효율 적으로 배분되는지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앨런 멜처, 미국 카네기 멜론대 교수) 멜처 케인시안, 돈 퍼부을 줄만 알고 효율적 배분은 몰라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090405791 독일이 재정위기국에 긴축을 요구하고 있지만 경기침체가 3년 이상 지속되는 나 라에 실질 임금을 25~30% 더 삭감하라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 런 정책을 받아들이는 정부를 유권자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유럽중앙은행 (ECB)이 나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남유럽 국가들에 한시적으로 약( 弱 )유로정 책을 도입해야 한다. 이와 함께 재정이 탄탄한 유로존 국가들이 강( 强 ) 유로 정 책에 따라 재정을 긴축하면 재정 위기국들의 유로화 가치가 하락하게 될 것이다. 약 유로권 국가들의 실질임금이 줄어들면 재정건전성 유지를 약속 받고 다시 강 유로권으로 통합하면 된다. 약 유로가 허용되는 재정 위기국에서 예금이 대량 유 출되는 뱅크런이나 통화가 대거 해외로 빠져나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어 정부 가 한시적으로 자본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강 유로권인 독일과 프랑스 정부의 경 우, 재정위기국 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자국 은행들이 추가 손실을 볼 수 있기 때 문에 자본을 50% 더 확충하도록 조치해야 한다. (부족한 나머지 50% 자금은 독 일과 프랑스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 은행이 시장에서 자금조달에 실패할 경우엔 당국이 은행을 인수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면 자금 확보를 독려할 수 있다.) (앨 런 멜처, 미국 카네기 멜론대 교수) 사회주의적 복지로 덴마크가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실업자들이 받는 갖가지 수당이 여러 유럽 국가들의 기업 근로자들이 받는 급여보다 많을 정도로 복지시 스템이 너무 관대하다. 덴마크에서 자본가들은 사회복지국가 재원을 마련하고 수 천 가지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불쾌한 필수품으로 취급 받고 있다. 정치인들은 그런 자본가들을 규제하고 감독하기 위해 더 많은 공무원들을 고용하는 게 정답 이라고 생각한다. 국민들끼리 복지수당과 실업수당 남용, 세금 탈루를 고발하는 핫라인이 개설돼 있다. 감시활동이 늘어나다 보니 국민들과 기업 사이에 불신과 의혹도 생긴다. 성공하고 부자가 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규칙을 어기거나 편법 으로 규칙을 회피해야 하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덴마크 국민 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다. 민간 부문에서 일한 경험을 가진 덴마크 의원들이 거 의 없고, 주요 장관들도 당이나 정치적 조직 밖에서 활동한 경험이 전혀 없다. 전 체 560만명 인구 중 약 100만명이 15세 이하인 반면 연금 생활자, 실업자 등 부양해야 할 인구는 200만명이 넘는다. 공공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만도 80만명 에 달한다. 연소득 100만크로네(약 16만 6000달러)가 넘는 사람은 2만 8000명 에 불과하다. 정치인들이 열심히 일해 돈을 버는 2만 8000명보다 국가에 생계를

페이지338 의존하는 260만 유권자들을 더 챙긴다. (라스 크리스텐슨, 삭소뱅크 공동대표) 재정과 통화정책 확대로 경제의 결합을 수정할 수 있다는 믿음은 환상이다. 케 인스식 정책은 수요관리에 집착해 장기적 정책 비용을 무시한다. (피터 보이트케, 미국 조지메이슨대 교수) 금융위기 이후 늘어난 세금과 규제는 또 다른 사회주의 부활과 같다. (샘 펠츠먼, 미국 시카고대 교수) 몽 펠르랭 소사이어티 2012 서 재조명된 밀턴 프리더먼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090796841&menu=&sid=0001&nid= 900&type=1 지금 그리스가 유로존 전체를 인질로 잡고 있는 사례다. 유로존 은행들은 ECB 나 다른 유로존 중앙은행들이 그리스 국채를 담보로 받아줄 것으로 믿고 그리스 국채를 사들였다. 그리스는 디폴트로 위협했다. 그리스 국채 탓에 부실화된 은행 에 돈을 빌려주면서 그리스 국채를 담보로 잡은 ECB도 결국 사태에 휘말렸다. 그리스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다. 일반적으로 파산 위험을 제시하면서 중앙 은행을 협박하는 시중은행이 자살폭격기 라면 단일통화권을 위협하는 국가는 자 신보다는 무고한 인질에게 해를 가하겠다는 인질범 에 더 가깝다. 단일통화로 통합을 이루자는 게 유로존 구축의 기본 정신이었다. 재정위기로 회원국 간 불화가 발생하고 국수주의 부활 조짐이 일고 있는 현상은 통합의 기본 정신과 어긋나는 아이러니다. 독일인들은 그리스인들이 게으르고 부패했다고 비 난한다. 그리스인들은 2차 대전 전범국인 독일이 보상금을 더 갚아야 한다고 주 장한다. 이런 무임승차와 인질 전략이 통하게 된 데는 유로존 강국인 독일과 프랑스의 책임도 있다. 당초 유럽 국가들은 유로존 구축에 앞서 맺은 1997년 안정성장협약 을 통해 회원국들의 재정적자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3%를 넘지 않도록 규정 했다. 하지만 2003년 이 규정이 깨졌다. 독일과 프랑스의 재정적자 비율이 GDP의 3%를 넘어섰지만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올해 초 과도한 재정적 자를 낸 헝가리를 제재하겠다고 했지만 면목이 서지 않는 결의였다. 유로존 재정위기가 발생한 것은 무임승차가 가능하도록 제도적으로 EMU를 잘 못 디자인한 업보로 볼 수 있다. 회원국들이 단독 재정지출권을 갖지 못하도록 하고, 경제력에 따라 유로화 대신 다른 통화도 사용할 수 있도록 개선하는 게 제 도적 해결책이다. (조지 셀진, 미국 조지아대 교수) 자! 위의 내용만 봐도 지금 이 총회가 보고 있는 세계경제에 대한 관점은 충분히 나온 것 같다. 일단 벤 버냉키(별명이 헬리콥터 벤 이란다.)의 매월 400억달러에 달하는 주택

페이지339 저당증권(MBS) 무기한 사들이기-3차 양적완화(QE3)-는 시행 중인 장기채와 단기채의 맞교환 즉, 오퍼레이션 트위스트까지 합하면 대략 매달 800억달러의 돈을 풀겠다는 것이다. 이걸 총회의 차기 좌장으로까지 거론되는 앨런 멜처는 반 복적 재앙 을 가져올 수 있는 도박으로 규정한다. 솔직히 내년의 세계 경제가 과 연 이 돈 풀기 로 나아질 거라는 예상을 하기란 쉽지가 않다. 이미 2008년 보인 모습에서는 양적완화가 시장에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그만한 균형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럴만한 기초는 보이지를 않으니 말이다. 이 몽 펠르랭 소사이어티 이야기를 한국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한 자리에 모인 前 경제수장들 기재부에 훈수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418424 http://app.yonhapnews.co.kr/yna/basic/article/new_search/yibw_showsearcharticle_new.aspx?sear chpart=article&searchtext=%ed%95%9c%ec%9e%90%eb%a6%ac+%eb%aa%a8%ec%9d%b8&c ontents_id=akr20120924215500002 건전재정포럼 이 결성되었다고 한다. 2012.9.26 프레스 센터에서 발족식까지 열 었다. 前 부총리 쓴소리 예전엔 적자예산 편성은 금기 http://app.yonhapnews.co.kr/yna/basic/article/new_search/yibw_showsearcharticle_new.aspx?sear chpart=article&searchtext=%ec%a0%84+%eb%b6%80%ec%b4%9d%eb%a6%ac+%ec%93%b4%e C%86%8C%EB%A6%AC&contents_id=AKR20120926198700002 다시 복지 포퓰리즘 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포퓰리즘 은 앞서 자세히 봤다. 이것 은 절대 나쁜 말이 아니다. 그것을 조절하는 자의 문제이지. 내용상으로는 정치권 의 인기영합 복지정책에 대한 우려다.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재벌과 중소 기업, 부자와 서민을 갈라 놓는 계층간 갈등조장을 중단하고 복지공약을 남발해 선거에서 이기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에서 탈피해야 할 것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포럼 대표)이라는 말에서 이 포럼은 정치적으로 어느 편도 들지 않을 것 이란 말은 약간 무색해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훈수를 그냥 무시하기는 어렵다. 적자예산 편성이란 항목으로 가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런데 그 적자 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자세히 살펴볼 여유가 없는 것이 탈이라면 탈이다. 몽 펠 르렝 소사이터의 효과가 간접인지 직접인지 한국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적용된다 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정작 이 총회에 직접 다녀온 김인철 성균관대 교수는 매일경제에 다음과 같은 칼럼을 기고했다.

페이지340 [매경시평] 경제민주화와 재벌총수 (2012.9.23) http://news.zum.com/articles/3820492 따뜻한 자유시장 자본주의 라는 용어가 눈에 쑥 들어온다.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재벌기업과 그 총수, 내부감시와 사정제도를 확립하여야만 그것을 얻을 수 있다 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헌법 119조 1항, 2항을 설명한다. 대한민국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 성장과 적정한 소득분배, 시장지배와 경제력 남용방 지,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경제민주화는 대세다. 이것을 거스를 수는 없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 장 큰 문제는 끊임없이 대중을 어디론가 마구 무한경쟁 구도 속으로만 몰고 간 것에 원죄가 있다. 서로가 자유와 창의를 존중할 기본 자체를 아예 망가뜨린 잘 못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묻게 된다. 그 점에서 몽 펠르렝 소사이어티 총회는 두 가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하나는 결코 내년의 세계경제가 낙관적이지 못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어떤 형태로건 간에 조속히 한국 사회에서 기업과 국민 간의 공 감을 가진 공생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7.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탐매행 / 조용미 올 봄 늙은 매화나무 한 그루 만나러 나선 길이 멀었지 멀어서 참으로 아득하기 도 했지 허물어질 듯 네모난 연못가에 서 있던 매화나무, 산속 깊은 물소리에 해마다 매화 향을 얹어놓았겠지 바람이 차서 대숲 종일 소란스러운 이른 봄날엔 꽃잎을 멀리까지 살러 보냈겠지 멀리서, 매화가 처음 보는 객이 찾아왔다네 내 아는 매화나무 한 그루는 오래 묵어 검고 갈라진 살갗을 가졌네 꽃잎도 높은 가지 끝에만 잔설처럼 달려 있다네 내 아는 매화나무는 그 아래 지나다 문득 바라볼 일 없는 산속 깊은 곳에 있다네

페이지341 나는 한나절 앉아 매화나무 한 그루를 포획했지 물소리 쪽으로 기울어진 듯 자란 늙은 매화나무는 천리 길을 오게 하고 한나절도 모자라 하루, 이틀을 다시 올라와 앉아 있게하지 해 기울도록 앉아 있어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 고무신 한 컬레 털신 한 컬레 댓돌에 나란히 놓인 암자가 있는 곳 사백오십 년 묵은 산매화는 큰 절과 암자 뒤편 또 보이지 않는 암자 가는 길에 숨은 듯 피어 있지 물소리 여간해서 그치지 않는 곳, 바람 세찬 날 대숲의 키 큰 왕대들이 더걱더걱 부딪히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 곳 내 아는 매화나무 한 그루는 같은 곡( 曲 )이라도 연주에 따라 이처럼 다른 맛이 난다. 에릭 클립톤, 비틀즈, 산 타나, 조 루이스 워커 그리고 비니 무어까지. http://handosa.egloos.com/3481419 Songwriters: LENNON, JOHN / MCCARTNEY, PAUL / HARRISON, GEORGE I look at you all see the love there that's sleeping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I look at the floor and I see it needs sweeping Still my guitar gently weeps I don't know why Nobody told you, how to unfold your love I don't know how, someone controlled you They bought and sold you. I look at the world and I notice it's turning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With every mistake we must surely be learning Still my guitar gently weeps I don't know how you were diverted You were perverted too I don't know how you were inverted

페이지342 No one alerted you. I look at you all see the love there that's sleeping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Look at you all... Still my guitar gently weeps. 내 기타가 부드럽게 연주되는 동안에 나는 거기에 잠들어 있는 사랑을 느끼는 당신을 봅니다. 마루를 보았죠. 청소를 해야 하지만 나는 아직도 부드럽게 기타를 연주합니다. 나는 왜 사람들이 당신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다른 이는 어떻게 당신을 컨트롤 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당신을 사고 팔았죠. 내 기타가 부드럽게 흐느끼는 동안에 나는 세상을 바라보아요. 이제 세상은 뒤바뀌고 있네요. 모든 실수로부터 우리는 배워야 하죠. 아직도 나의 기타는 조용히 흐느끼고 있네요. 나는 당신이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지 몰라요. 당신은 타락했었죠. 나는 당신이 어떻게 인생을 뒤집었는지 알지 못해요. 아무도 당신에게 경고를 하지 않았죠. 내 기타가 부드럽게 연주되는 동안에 나는 거기에 잠들어 있는 사랑을 느끼는 당신을 봅니다. 당신 전부를 바라봐요. 아직도 내 기타는 조용히 흐느끼고 있네요. 정태인이 책을 냈다. <리셋 코리아>(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2012)라는 책 제목에 부제가 하나 붙었다. 18대 대통령이 꼭 해야 할 16가지 개혁과제 인데, 역시 미 래권력이 과연 이 주제어를 받아들일 건지 또 따져볼 일이다. 새누리당에서 손짓 을 한 것 같은데, 본인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가 레디앙과 인터 뷰한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많은 이들이 보지 못한 듯하니 여기 링크를 건다. 안철수, 생각 과 행동이 다르다? 문재인, 정책의 정치화 실패해 http://www.redian.org/archive/42816

페이지343 주목해서 볼 대목은 안철수에 대한 생각이다. 앞서 나도 안철수라는 인물에 대해 대단히 의심의 눈길을 버리지 않았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금융 쪽의 정책방향 자체를 제시하고 있지 못한 바로 그 대목에 계속 주시를 할 수밖에 없 다. 정태인의 경우도 이헌재의 등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에 주목한다. 또한 이헌 재의 경제 와 안철수의 그것이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 대목을 여기 옮긴다. 이광호: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등 주요 대선 후보 진영의 인물 영입이 경쟁적 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완성도 높은 공약들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서 현재까지 나온 것으로 볼 때 리셋 코리아 에서 제안한 내용 과 가장 거리가 가까운 정책을 제시한 후보는 누구인가? 정태인: 큰 기조에서는 보면 안철수 후보가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안철수의 생각 에서 했던 얘기와 그의 캠프 인선 내용이 안 어울린다. 또 안철수의 생각 에서 했던 얘기와 출마선언문이 다르다. 내가 이헌재와 안철수의 조합에 대해서 의심하고 또 공식적인 글은 아니지만 페이스 북에 심하게 비판적으로 언급한 것은, 안철수 후보가 혁신경제를 강조하 고, 분배뿐 아니라 성장 동력도 강조한 시점과 이헌재를 만난 시점이 겹친다는 점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안 후보의 이런 얘기들이 구색용일 수도 있지만, 생각 에는 없었던 이런 내용이 출마선언에는 들어갔으며, 이것이 이헌재와의 만남과 깊은 연관이 있을 거라고 본다. 최근 이헌재 씨가 낸 두 권의 책( 경제는 정치다, 위기를 쏘다 )의 핵 심 내용은 결국 이헌재 펀드 다. 기타 자질구레한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헌재 펀드는 그가 부총리 시절에도 한 얘기다. 사모펀드를 말하는 것이다. 그걸 가지고 임대형 민자 사업(BTL: 민간 자본이 공공시설을 건설한 후 정 부나 지방자치단체에 넘겨주고 일정 기간 동안 건설비와 일정 수준의 이윤을 분 할 상환 받는 방식)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페이지344 그런데 그걸 방향을 좀 틀어서 국민연금이 들어간 사모펀드를 수천 개 만들 어서 벤처에 투자하자는 이헌재의 제안과 안철수의 혁신경제가 이어지는 게 아닌 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안 후보는 벤처기업을 해본 사람이고, 자본이 없어서 고 생을 한 경험이 있다. 국민연금을 동원해 대규모 펀드를 조성하고 이를 통해 창업 열기를 일으켜 문제를 해결하자는 이헌재의 말에 안철수가 넘어간 것이고, 이게 결국 안철수 버 전의 혁신경제로 나타났으며, 안 후보가 이헌재에 대해서 위기 때 필요한 사람 이라고 얘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짐작한다. 그런데 내가 대학원 때 전공한 것이 실리콘 밸리다. 물론 벤처 캐피탈은 중 요하다. 하지만 수많은 나라에서 실리콘 밸리를 모방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 이 유는 그 나라들이 돈이 없어서 그런 건 분명 아니다. 정부와 기업 사이의 네트워 크, 기업과 대한 사이의 지식 교환 시스템이 훨씬 중요하다. 돈도 중요한 것은 맞 지만 쏟아 붓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만약 국민연금이 들어간 사모펀드가 조성되면 펀드의 안정성이 높아져서 일 반 투자자들이 대거 달라붙을 것이며, 결국 엄청난 규모의 금융 버블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건 혼자 생각해본 건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국민 연금은 쉽게 투자를 했다가 쉽게 빠질 수 없다. 근데 (사모펀드인) 벤처 캐피탈의 경우는 다르다. 벤처기업의 성공률이 5% 수준이라는 안철수 자신의 말처럼 위험성이 높은 곳에, 민간 펀드의 움직임은 손 쉽게 털고 나가거나 달라 붙을 가능성이 높아서, 결국은 국민연금이 다 책임을 져야 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결국 국민연금을 볼모로 삼아 사적 자본의 수익성 확보를 추구하겠다는 것이 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심하게 표현하면 모피아가 금융정책 만들고 시장에 서는 이헌재 사단이 사모펀드로 금융 장악하는 것인데, 이건 정말 위험한 상황이 다. 만약에 이런 우려가 확인된다면 나는 정말 완전히 실망할 것이다. 캠프 인선 을 봐도 정부를 끌고 갈 능력이 없는 것 같다. (그는 이 부분에서 안철수 캠프의 정책 생산 능력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표시했다) 안철수가 이헌재를 버리지 않는 이유는 간단한 듯하다. 앞서도 몇 가지 지적을 한 적이 있지만 안철수에게 이헌재는 병풍 같은 존재다. 그가 사업을 해서 성공 을 하는데도 이헌재의 도움은 있었고, 그가 한국에서 기업 차원이 아니라 국가경 제라는 그림을 그리는데도 이헌재의 영향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건 새삼 확인 된다. 그것은 한국의 경제를 벤처기업 수준으로 열기를 확산시키자는 뜻이고 그 를 관리하는 시스템을 금융, 특히 사모펀드 형으로 만들겠다는 걸 말한다. 그래서 지금 혁신경제라는 화두로 연결된 것이 모두 앞뒤가 맞지 않는 자극적인 것으로 일관한다. 왜냐하면 금융이 뒷받침 되지 않기 때문인데, 이헌재의 스터디 그룹에서 배운 것으로만 본다면 아무래도 이것은 간단한 것으로 설명을 들은 듯 하다. 벤처 캐피탈을 육성하자는 제안에 사모투자펀드를 키우는 것인데, 사모펀드 란 게 기업가치를 극대화해 몸값 높이고 투자자 배당에만 신경을 쓰지 결코 기업 을 키우는데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는 곳은 아니다. 물론 사모펀드가 경영권까지 인수한 기업들 가운데서는 실적이 좋아진 기업도 여럿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페이지345 이런 형태로 국가경제의 틀을 그린다는 것은 너무 질이 낮다. 착한 자본주의 라는 말로 표현되는 시장에 대한 믿음 은 마치 몽 펠르렝의 자유 시장 주의자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의 경제를 완벽하게 자유롭게 유 지하는 시장 은 없다는 걸 우리는 보고 있다. 시장의 실패, 배신은 늘 벌어진다. 그에 대한 대책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이 공허함 속에 혁신경제와 착한 시장경 제가 굴러간다. 재벌정책과 벤처 기술기업의 창업을 동일선상에 놓는 이 엉뚱함 이라니. 안철수의 자본주의, MB식 장돌뱅이 경제 와 다른 점은?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54494.html 국민연금 이야기도 나왔지만, 이 정권 들어서 맨 처음 저지른 꼴을 보면 산업은 행을 민영화하려다가 마침내 파산 직전의 리먼 브라더스를 인수시키면서 정권 ATM기기를 만들고자 했던 바로 그 작업처럼 국부( 國 富 )를 날리게 하는데 이골 이 난 짓을 또 이어갈 거라는 예상은 단순히 기우에 그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당신을 사고 팔았죠. 모든 실수로부터 우리는 배워야 하죠. 나는 당신이 어떻게 인생을 뒤집었는지 알지 못해요. 그냥 기타 소리에 맞춰 노래를 듣는다. 좀 제발 잊고서 살고 싶은데 자꾸만 기억 을 되살리게 한다. 그래서 나는 저 혁신경제 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제시되 는지 더 유심히 보려고 한다. 8. 정치라는 직업병에 시달리는 사람들 칼국수 / 문인수 어머니, 여름날 저녁 칼국수 반죽을 밀었다. 둥글게 둥글게 어둠을 밀어내면 달무리만하게 놓이던 어머니의 부드러운 흰 땅. 나는 거기 살평상에 누워 별 돋는 거 보았는데 그때 들에서 돌아온 아버지 어흠 걸터앉으며 물씬 흙냄새 풍겼다 그리고 또 그렇게 솥 열면 자욱한 김 마당에 깔려 아 구름 구름밭,

페이지346 부연 기와 추녀 끝 삐죽히 날아 오른다. 이 가닥 다 이으면 통화가 될까. 혹은 긴 긴 동앗줄의 길을 놓으며 나는 홀로 무더위의 지상에서 칼국수를 먹는다. 직업병(occupational disease)은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동안 불가피하게 발생되 거나 모든 종사자에게 발생 가능성이 있는 질병을 가리킨다. 이건 신체나 정신 모두에서 일어난다. 보통 직업병이라고 하면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작업형태 적 요인을 발생요인으로 본다. 특징으로는 크게 다음 6가지를 꼽는다. (1) 임상적 또는 병리적 소견이 일반 질병과 구분하기가 어렵다. (2) 폭로 시작과 첫 증상이 나타나기 까지 긴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 (3) 많은 직업성 요인이 비직업성 요인에 의해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4) 임상의사가 관심이 적어 이를 간과하거나 직업력을 소홀히 한다. (5) 인체에 대한 영향이 확인되지 않은 신물질이 많다. (6) 보상과 관련된다. 정치인의 직업병의 대표적인 예는 손목통증 이 있다. 유권자와 손을 잡는 스킨십 이 가져다 준 일종의 악수 후유증 같은 것인데, 그래서 지난 4.11 총선을 끝내고 박근혜 당시 선대위원장은 아예 손에 붕대를 감은 모습을 보인 적도 있었다. 과연 이걸 직업병의 범주에 넣어야 할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분명 직업 정치인의 경우엔 악수 노이로제를 가진 사람들이 많긴 하다. 그보다 더 심하게 아예 하이 파이브나 포옹 등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연예인들의 경우엔 최근에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인한 공황장애가 주목 받고 있 다. 인기 개그맨인 이경규의 고백 이후에 여러 사람들이 공황장애는 물론이고 폐 쇄공포증 등 다양한 병증을 호소하기도 했다. 극단적인 불안감은 때로 자살을 생 각하게 만들 만큼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한 케이스도 있었다. 분명 연예인이기 때 문에 감정을 참고 삭히는 경우나 혹은 잘 나가던 시절에서 갑자기 고독감이 들어 끝없이 스트레스를 안고 사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이걸 직업병이라고 하지 않을 수도 없다. 다시 정치인으로 돌아가보면, 흐루시쵸프의 우린 강이 없는 곳에 다리를 놓는다 는 유명한 말처럼 아주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예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게 딱 히 어느 구석으로 정의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래서 거짓말도 정치인의 하나 직업 병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애매해진다. 굳이 해외를 빌리지 않더라도 한국에서는 아주 손쉽게 이런 거짓말의 대가들을 만날 수 있다. 공약( 公 約 )을 공약( 空 約 )이 라고 대놓고 이야기도 하니까. 거기다가 우기기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얼굴에

페이지347 철판을 깔고 주어가 없다 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의 이력이 판사까지 했던 사람이란 걸 생각하면, 이건 정말 국어문법을 사법시험의 첫 번째 과목으로 삼지 않은 걸 후회하게 만든다. 좀 곱상하게 정치인의 직업병을 말하는 사람들은 정치병은 불치병 이란 말을 자 주 쓴다. 한 번 시작해서 맛을 들이면 가산탕진, 패가망신을 하더라도 정치는 해 야 한다고 끝까지 덤빈다. 이럴 때 정치인은 속성만으로 보자면 연예인과 비슷하 다. 끝없이 인기를 위해 포장하고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그 권력적인 상향 지향을 멈추지 않으려고 하는 기질은 정치가 가진 중독성을 잘 말해준다. 나대기 좋아하는 일부 정치인들도 나르시시즘(자기도취)에 가깝다는 분석도 있다. 심리학적으로 아주 불확실한 상황을 즐기는 성향, 위험마저 즐겁게 즐기는 매우 독특한 인간형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이것은 확실히 특이한 유형의 존재임은 부 인하기 어렵다. 심지어 권력자들에게 나타나는 자신의 소신을 국가의 최고선과 동일시하는 현상이 단순히 나르시시즘 수준이 아니라 그보다는 강한 위험을 즐기 려는 성향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자신을 일상적인 행동규범에 적용되지 않는 인간형이란 특권의식에 사로잡히게 하는데, 주변에 정치적 신봉자 가 많으면 많을수록 거의 종교적 수준의 불장난 같은 행위도 서슴지 않기도 한다. 18대 국회의 막판에 강용석 같은 이를 대중의 주목이 없으면 자기존재감을 느끼 지 못한다고 해서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기도 했지만-물론 실언의 탓이 더 컸지 만-그 후에도 끊임없이 사건을 만들어내면서 존재감을 확인하는 모습에서 정치 인은 악명이라도 자주 신문 방송을 타야 한다 는 특유의 사고를 짐작해볼 수도 있었다. 그것은 곧 정치인=익명성 은 곧 정치 세계 자체를 떠나야 하는 걸로 동 일시하고 있다는 것이어서 이런 것은 자기도취적 직업병이라 불러도 모자람은 없 을 듯하다. 여의도에만 가면 하향 평준화 된다고 해서 여러 우스개 말이 회자된다. 그 중에 서도 일석이조( 一 石 二 鳥 )는 제법 웃기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한 명의 여당 정치인과 두 명의 야당 정치인이 국회에서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끼리 싸우는 장면이 벌어진다. 여당 정치인 야~당 녀석들! 비겁하게 1대 2로 해보자는 거냐!! 야당 정치인 1.; 그래! 해보자! 덤벼! 야당 정치인 2.; 확! 이걸! 입을 막아버려! 이 상황을 정리하는 말이 바로 한 명의 돌대가리와 두 명의 새 대가리 라는 것이 다. 한국 정치의 현 주소가 저렇게 희화화된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그렇지만 이 시기만 되면 정치를 꿈꾸는 많은 이들이 여의

페이지348 도 주변을 기웃댄다. 거기는 기존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도 있지만 나름 성공했다는 많은 직업의 사람들이 그 안에 얼굴을 비친다. 마치 한 인생을 살아 마지막에 정치에 모두 배팅을 건 것처럼 온갖 수단 방법을 통해서 여의도 입성을 노린다. 그러나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299명(이번엔 300명이었지만)으로 제한 되어 있다. 좁은 문인 것이다. 대선은 그보다 판이 더 크다. 여기는 대통령만 뽑는 선거가 아니다. 대통령이 직 접 임명권을 행사하는 자리는 보통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그 대부분이 나름 먹고 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에선 기득권에 해당할 정도로 힘 을 쓰는 곳들이다. 그래서 폴리페서가 되더라도, 혹은 어떤 짓을 하더라도 될만한 대선후보의 주위를 기웃거린다. 이건 기성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더 좁 은 문들이 기다리는 셈이다. 매 5년마다, 그리고 매 4년마다-지자체 선거니 지방의회까지 포함하면 이건 정 말 선거 공화국이라 해야 하지만-대한민국은 정치 지망생으로 넘쳐나고, 그 직 업병을 앓는 사람들의 세상이 된다. 이게 아주 지독한 병증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병에 대해 제대로 분석하고 그 치유법을 내놓은 경우는 보지 못했다. 아마도 이건 난치병 영역에서 다루어야 할지, 그도 아니라면 고질병으로 봐야 하는지 모 를 일이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정치병이라는 직업병을 앓는다. 이 병증은 전염성이 아주 세 서 많은 이들을 약하건 강하건 이상하게 전염을 시켜버린다. 그 증상은 종종 멀 쩡하게 이지( 理 智 )가 있던 사람도 한 순간에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때론 아무리 좋은 시력을 가진 사람도 맹인( 盲 人 )으로 둔갑시킨다. 이 병을 치료하려면 우선 정치판 자체가 맑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다. 더 혼탁하고 그곳을 향해 달려 가는 사람들도 미나리 밭에서 구정물을 묻히지 않을 재간은 없다면서 뛰어 든다. 이런 상태에서 정치는 그리 재미가 없지만 그래도 권력의 야망이란 이름으로 온 갖 거짓말을 늘어놓게 한다. 확실히 정치판의 직업병 제 1 번은 거짓말 로 삼 아야 옳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걸 잘 골라서 봐야 하는 또 다른 직업병을 가진 집단이 바로 대중이 아닌지? 이 골라 본다 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9. Coriolanus 밀물 / 정 끝 별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페이지349 벌거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코리올라누스. 세익스피어가 1605~1608년경 쓴 것으로 보이는 비극 중의 하나 다. 기원전 5세기경 고대 로마의 전설적인 지도자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코리올라 누스(Caius Marcius Coriolanus)의 일생에 기초한 희곡이다. 로마가 볼스키 족 의 도시 코리올리 를 공략하면서 그가 빼어난 용맹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코리올 라누스 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를 소재로 하여 세익스피어가 맥베스, 오셀로, 햄릿, 리어왕의 4대 비극이 아닌 5대 비극인 코리올리 를 썼다는 사실은 그리 잘 알려 져 있지 않다. 이 이야기 자체가 정치성이 매우 짙어서 세익스피어 생전에도 연 극 무대에 올려지지 않았던 정도다. 이야기의 얼개는 간단하다. 전쟁 영웅으로 추앙 받은 카이우스 마르티우스가 원 로원의 지지를 받으며 집정관으로까지 거명되었지만 귀족 명문가 출신인 코리올 라누스가 건방지고 민중을 무시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호민관의 방해공작으로 마 침내 민중의 적으로 매도되고 로마에서도 추방된다. 그에 배신감을 느낀 그는 자 신이 쳐부순 볼스키족에게 가서 로마를 같이 치자고 설득하여 로마를 함락직전까 지 몰고 간다. 그 때 그를 회유하기 위해 어머니, 부인, 아들을 그의 진영으로 보 내고, 이것이 먹혀 들어간다. 황당해진 볼스키족의 아우피디우스 장군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코리올라누스를 칼로 찔러 암살한다.

페이지350 2011년에 랄프 파인즈가 현대를 배경으로 재해석한 영화 코리올라누스 가 나왔 다. 고전 연극체의 대사로 이어지는 영화, 배경과 의상은 현대라서 그냥 보기에는 몰입하기 쉽지 않지만 일단 세익스피어 원작이 그렇듯 연극의 핵심은 비극으로 가는 과정의 정치판, 배신, 음해, 반역, 선동, 그리고 코리올라누스라는 사람이 보 여주는 캐릭터는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천상 귀족 출신 장군의 곧은 성격, 융통성 없는 고집스럽고 불 같은 성격, 거기에 오만과 교만이 뒤섞이고 호민관이 그러했 듯이 이걸 잘 활용한 모함이 버무려지면서 희곡이 그랬듯이 마지막으로 달려간다. 영화평은 그리 좋지는 못했다. 그냥 랄프 파인즈만 보인다는 사람도 있었으니. 스토리야 저 정도에서는 볼 수 있지만, 정작 이 희곡은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그냥 연극이 아니라 해석에 따라, 또 각도에 따라 대단히 많 은 정치적 요소를 건져낼 수 있는 셈이다. 버전을 박근혜로 한 번 맞춰볼까. 천막당사를 비롯해서 박근혜로 인해 한나라당은 살았고 지금 새누리당이 되었다. 코리올라누스와 비교를 하자면 2007년으로 가야 사실 이야기는 맞다. 만일 그 때 이명박을 대선 주자로 하는 것에 반대하여 탈당을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 까? 당시 분위기로는 아마 박근혜가 설 자리가 많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그 후 친박연대까지 나와서 한나라당 내의 대주주가 되기는 했지만 그 당시로만 보면 친이계는 최대 강자였고, 친박계는 견제 대상 1호가 되어 있었으니까. 박근혜는 코리올라누스의 전철을 밟지 않았고 참고 견디는 과정을 거쳐 이를 테면 가장 유 력한 집정관 후보가 일단 되었다고 본다. 호민관의 꾐에 빠지지는 않은 셈이니. 그래서 이 희곡은 다른 방식으로 변주가 이루어지고 있다. 버전을 문재인으로 한 번 맞춰볼까. 빅 텐트I.을 통해 민주통합당을 만들고, 오히려 친노집단을 다시 꺼내서 경선에서 승리를 한다. 민주당 내의 여러 계파들이 연합까지 고려하고 공격을 했지만 살아 남았다. 그러나 여전히 호민관의 견제는 이어진다. 집정관 후보 자리도 불안한 상 태이고, 그 자리를 경우에 따라서는 누군가에게 내주고 백의종군해야 한다고 말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중의 인기가 좀 올라가는 듯하니 이제 본격적으 로 호민관을 내칠 준비를 한다. 친위세력을 전면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연합대 상이 바뀌고 있다. 자신이 중심이 되는 판을 그린다. 자신에게 싸우지 말라고 설 득하러 오는 사람들을 오히려 설득하며 자신의 지지영토를 늘려간다. 승리감에 도취된다는 의견도 있으나 냉정하게 최종적인 집정관 후보 자리를 지켜나가는 중 이다. 원로원의 강력한 지지까지 받고 있지만 다른 집정관 후보들과의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우위가 있다고 굳게 믿는다. 이 버전에서도 변형은 생기는 중이다. 버전을 안철수로 한 번 맞춰볼까. 가장 이 스토리를 변형하는데 있어 비슷한 구석이 있다. 성공한 CEO의 모습으로 등장해서 대중의 지지도 받고 있다. 다른 집정관 후보들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대

페이지351 중을 끼고 무소속의 집정관 후보로 자칭한다. 호민관이 자신을 민중을 배신할 수 도 있는 캐릭터라고 말하면 말할수록 더 대중 곁으로 가면서 다른 후보들을 견제 한다. 아직은 이 팽팽한 균형을 놓치지 않고 세력을 확대해나가는 중이다. 문제는 다른 후보들과는 달리 주변에 측근이라 부를만한 힘이 없다. 다른 후보들이 내놓 을 다양한 음해와 선동이 있을 거라 예측하지만 그에 대응할 역량을 갖추지도 못 했다. 대신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올곧은 성격과 기업성공에 바탕 한 약간 오 만과 교만을 잘 버무리면서 대중 속으로 더 파고들면서 기회를 노린다. 여전히 세력을 합칠 수 있는 대상도 있지만, 자신을 중심으로 한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 으면 굳이 먼저 통합을 시도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나 측근 부재의 현 실을 타개할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태에서 주변으로부터 다른 후보와 힘 을 합쳐서 집정관의 권력을 분점 하더라도 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 는다. 내부에서는 자신을 해칠 호민관이 없으니 현재로써는 이 스타일로 밀고 나 간다. 그러고 보면 코리올라누스는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다. 그에게 있어 민중은 나약한 존재이고 자신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존재일 뿐이다. 그것이 교만으 로 비춰질 때, 대중은 고개를 돌린다. 만일 그가 보다 열린 자세로 민중을 활용했 다면, 이 희곡은 비극이 아니라 전쟁 영웅이 집정관으로 새로운 정치를 펴는 이 야기로 바뀌었을 것이다. 대중은 어쩌면 모든 역사 속의 정치의 주인임에는 틀림 이 없다. 그러나 종종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만일 그가 로마에서 추방되고 군사를 이끌고 로마를 공략하러 왔을 때, 가족의 설득을 모른 척 무시했다면 전쟁의 승자는 자신일 수도 있었다. 호민관은 코리올 라누스의 보수성을 견제해야만 하는 입장에 있었다. 어쩌면 진짜 리더십은 리더 의 태도에서 일차 결정력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무조건 친화적으로 나온다고 해서 대중이 그를 포용하지도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힘을 현명하게 사용하지 않아서 생기는 누수현상도 만만치 않다.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세 사람 모두에게서 코리올라누스의 판에서 등장하는 다 양한 인물들의 배신과 음모가 읽혀진다. 당장 전임 집정관에 의해 선거를 조절하 려는 조짐도 보인다. 이건 호민관 수준의 술수와는 비교하기 어려운 꼼수에 해당 한다. 그러나 결국 비극으로 가게 된 원인은 민중의 배신으로부터 첫 머리가 출 발한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본래의 의미처럼 어리석음은 리더에게도 있으나 항상 민중에게도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중간 누군가(호민관)의 아주 기막히거나 너무도 간단한 술수로 드러난 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서 보다 큰 어리석은 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게 민중이니까. 이 연극, 그냥 희곡이라 하기에는 너무 많은 정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살 짝 머리가 아픈 주제이기도 하다.

페이지352 10. 금융위, 정권 말기의 추악한 꼼수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 장석남 저 새로 난 꽃과 잎들 사이 그것들과 나 사이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무슨 길을 걸어서 새파란 새파란 새파란 미소는, 어디만큼 가시려는가 나는 따라갈 수 없는가 새벽 다섯 시의 감포 바다 열 시의 등꽃 그늘 정오의 우물 두세 시의 소나기 미소는, 무덤가도 지나서 저 화엄사 저녁 종 지나 미소는, 저토록 새파란 수레 위를 앉아서 나와 그녀 사이 또는 나와 나 사이 미소는, 돌을 만나면 돌에 스며서 과꽃을 만나며 과꽃의 일과로 계절을 만나면 계절을 쪼개서 어디로 가시려는가

페이지353 미소는 웅진그룹이 꼼수를 피운 이야기는 대선 레이스 속에서 뉴스 취급도 못 받으면서 슬그머니 사라지는 추세다. 바로 추석 직전이었고 추석이 끝난 이후에는 대선주 자들의 지지율이 오르니 마느니 하는 뉴스들이 신문 방송을 장식하고 있는 참이 니. 그런데 웅진홀딩스와 극동건설이 법정관리 신청을 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 한 일이 벌어졌다. 2012.10.4 금융위원회가 기업구조조정 제도 전반을 건드리겠 다는 것인데, 그 내용이 언뜻 일반인들이 잘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 었다, 부실기업들이 지금까지 보인 행태는 이번 웅진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회장 부 인이 사전에 주식을 매도한 건 둘째치고라도-일단 도덕적인 해이를 피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도 법정관리를 신청하여 경영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경우가 흔했지 만 법원의 주도로 기업회생절차를 밟는 것이어서 채권단 개입 여지가 적은 형태 를 선택하는 경향이 컸다. 그에 비해 금융위가 말하는 손을 보겠다는 건 워크 아웃 즉, 채권금융기관의 역할이 강하지만 금융위의 입김이 작용하여 결국 공 적자금에 기초한 지원이 있는 구조가 형성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정보도 밖으로 나오지 않고 채권금융기관-금융위-워크아웃 기업 간의 담합에 의해 모든 일이 진행된다. 이것을 자율협정이라고 부르지만 전형적인 관치금융 개입의 사례로 봐 도 무방하다. 이걸 확대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모피아 김석동, 역시 관치의 화신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54494.html 여기서 김상조가 금융위의 불순한 의도가 엿보인다는 바로 그 기촉법 은 기업구 조조정촉진법 을 말한다. 정식명칭은 기업구조조정의 원활한 추진에 필요한 사항 을 규정하기 위해 유효기간을 정해 한시적으로 제정한 법률(2011.7.21, 법률 제 10866호로 일부 개정됨)을 말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16873&mobile&categoryid=200000277 이 법의 유효기간은 2013년 12월 31일까지다. 5장 30조와 부칙으로 된 이 법은 그간의 히스토리가 아주 중요하다. 2001년 기촉법을 도입해 2005년 12월 31일 까지 한시적으로 적용하여 채권금융기관 주도의 기업구조조정을 추진하였으나 계 속해서 채권금융기관의 자율적인 합의를 통한 기업구조조정의 관행이 시장에 정착 되지 아니하여, 기업구조조정이 신속하고 원활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 여 2010년 12월 31일까지 한시적으로 적용되는 기업구조조정 촉진법을 2007년 8월 3일 법률 제8572호로 다시 제정하였다. 그 후 2008년 2월 29일 법률 제 8863호, 2009년 10월 2일 법률 제9617호,

페이지354 2010년 11월 18일 법률 제10303호로 일부 개정되다가, 2010년 12월 31일에 유효기간의 경과로 효력이 상실되었다. 이후 워크아웃 추진과정에서 기업의 자율 성을 강화하고, 채권금융기관협의회의 의결에 반대한 채권금융기관 및 소액채권금 융기관의 권리 보호를 강화하는 내용으로 보완하여 2013년 12월 31일까지 한시 적으로 적용되는 일몰법안인 기업구조조정 촉진법 을 2011년 5월 19일 법률 제10684호로 다시 제정하게 된 것이다. 이 상태에서 2012.10.4 금융위원회가 기업구조조정제도 개선 검토방향이란 보도 참고자료를 내놓았다. http://www.fsc.go.kr/info/ntc_news_view.jsp?menu=7210100&bbsid=bbs0030&no=28845 III. 향후 기업구조조정제도 개선 검토방향 부실기업 중 회생이 불가능한 기업은 과감히 정리하되, 회생가능한 기업은 기 업의 자구노력을 전제로 금융회사의 신규자금 투입, 기존 여신 만기연장 등을 통 해 신속한 회생을 지원 이 과정에서 기업부실에 따른 손실은 경영진, 주주, 채권금융회사 등 이해관계 자가 책임을 적절히 분담토록 하여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방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 그간의 기업구조조정 관련 제도도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꾸준히 정비하여 왔으며,

페이지355 최근 워크아웃 건설사 이행약정(MOU) 가이드라인을 제정한 것도 건설사 채 권금융회사와 PF대주단의 도덕적 해이 방지 및 신속한 구조조정 추진을 위한 것 이었음 그러나, 최근 일부 기업의 회생절차 신청과 관련, DIP제도를 악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대두되는 등 기업구조조정 제도 개선 필요성이 증대 이에 따라, 금융위는 신속하고 효율적인 기업구조조정 도모, 이해관계자의 도 덕적 해이 방지 등을 위해 기업구조조정 제도 전반에 대한 개선방안을 검토할 계 획 기촉법의 워크아웃 신청주체 확대(현행은 기업만 채권단 추가), 상시법제화, 법 적용대상 신용공여 범위 확대 등에 대해 검토 통합도산법은 채권금융회사의 견제장치 강화 및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 방지를 통해 일반 상거래 채권자 보호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종합적 제도개선 방안 검토 향후 법무부 등 관계기관간 긴밀한 협조를 거쳐 제도개선을 추진할 계획임 *주; DIP(Debtor in Possession)제도는 예외적 사유(재산의 유용 또는 은닉이 있거나 부실경영에 중대한 책임이 있는 경우 등)를 제외하고 기존 법인대표자를 관리인으로 선임해야 하는 제도 그러니까 기촉법이 왜 일몰법안이 된 것인가를 슬그머니 감추고, 나아가 워크아 웃 신청주체도 확대하는 한편, 법 적용대상의 신용공여 범위 확대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건 한 마디로 거의 꼼수를 쓰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부분이다. 저 히스토 리를 감추는 것이 이 보도자료의 앞부분에 쭉 나열되어 있지만 말이다. 김상조의 지적처럼 이런 수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은 2008년 이후 누적된-그러니까 이명박 정권 내내 벌어진 일을 말한다-기업부실의 구조를 어떻게든 감추고 다시 덮고자 하는 의도를 그 근본원인으로 지적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일몰법안의 상시 법제화라는 건 한 마디로 왜 그 법안이 만들어졌는지 이유마저 폐기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여간에 참 이 사람들은 국민 알기를 뭔 호구로 안다. 금융위와 관련해서는 그 태동부터 지금까지를 한 번 상세하게 조명해보기로 하겠다. 그 첫 머리에 이헌 재 가 나온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페이지356 2012 시대의 민낯 제 9 부 (2012.10.7~2012.10.8) 담담당당 10월의 두 번째 주로 들어가기 직전이다. 그러고 보면 대선도 70여일 남았다. 참 빠르게 시간이 간다. 이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가는 길에 한반도에서 벌어질 많은 일들을 생각하게 된다. 미국, 중국, 일본 모두 정치적 격변 속으로 들어간다. 체 제가 바뀌건 아니건 간에 특별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오래 전부터 예정된 것처럼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던 일이니까. 단지 그것을 보는가 못 보는 가의 차이만 남을 뿐이다. 이명박 정권의 끝자락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끔 웃음도 나온다. 참 이런 정권이 두 번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이 한심함에 고개를 떨구기도 한다. 그러 나 어쩔 것인가. 지금 여기까지 왔다. 어찌 되었건 간에. 대선 레이스는 재미나게 돌아간다. 이제 10월의 격변이 대충 지금부터 10월 20 일 정도까지 이어질 듯하다. 각자도생( 各 自 圖 生 )의 판이다. 안철수는 선언문을 읽 고, 박근혜는 최경환을 잃고, 문재인은 여전히 이미지 관리에 몰입한다. 누가 이 레이스의 리더인지조차 희미해지는 시간이다. 그만큼 아직은 초반부에 불과하다 는 사실이 흥미로운 것이다. 여론조사는 무당파가 없다고 하지만, 글쎄다. 난 아 직도 그 말의 뜻을 잘 모르겠다. 민낯 시리즈도 9부와 10부, 스무 편이 남았다. 이어 가본다. 1. [전문]무소속 안철수 대선후보 정책비전 선언문 2. Implementation 3. 정치개혁은 정권교체의 상위인가? 4. La commedia & La divina commedia 5. 대한민국 중산층의 새 기준 6. 속담, 그 무서운 세상살이 이야기 7. 바람의 종류 8. 딜레마(Dilemma)와 트릴레마(Trilemma) 9. 경험의 함정, 인지의 함정 10. 사력( 四 力 )에 기댄 곳을 어찌 치려구?

페이지357 1. [전문]무소속 안철수 대선후보 정책비전 선언문 소 /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웅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10월 7일 아침 뉴스가 요란하다. 안철수의 정책비전 선언문이 나왔다. 전문을 그 대로 게시한다. 볼만하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일단 비전 을 제시한다는 건 중 요한 일이다. 그 전문을 이어 붙이기 형태로 해서 다시 정리한다. 안녕하십니까. 안철수입니다. 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말씀을 드린 지 보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많은 현장과 지역을 찾아 뵈었습니다. 명절도 잊고 근무하던 소방서와 지구대의 고마운 손, 시장에서 앞치마에 물기 닦아 잡아주신 따뜻한 손, 광주항쟁 때 아들 을 잃은 아버지의 무거운 손. 그 손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 다. 그분들 앞에, 무거운 책임과 부끄러움을 느꼈던 이 마음을 갖고 가겠습니다. 정치를 바꾸고, 경제를 바꾸고 대한민국을 바꾸라는 그 간절한 바람을 실천하겠 습니다. 낡은 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로 가겠습니다. 제가 그 앞에 서겠습니

페이지358 다.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모든 국민과 함께 가겠습니다. 수십년 동안 정치와 경제 시스템을 장악하고, 소수 기득권의 편만 들던 낡은 체 제를 끝내겠습니다. 정권교체는 그 시작입니다. 정치개혁이 필요합니다. 지금 저의 앞에는 커다란 성벽이 있습니다. 철조망을 만들어 놓고, 흙탕물을 끼얹 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끝까지 정정당당하게 싸우겠습니다. 저는 모두가 안 된 다고 말할 때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밤새워 v3를 만들 때의 그 열의로 부정과 불 의, 부패한 낡은 체제와 싸울 것입니다. 국민이 선택하는 새로운 변화는 이미 시 작되었습니다. 저 안철수.. 오로지 저만이 정권교체와 정치개혁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모두 이룰 수 있습니다.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를 열겠습니다.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정치 시스템.. 정치혁신으로 바꾸겠습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목소리를 더 들어야 하고 청와대는 더 낮아져야 합니다. 또 국 회는 특권을 버리고, 일하는 국회가 되어야 합니다. 국민이 제일 위에 계십니다. 그 다음이 국회입니다. 제일 낮은 곳에 대통령과 정 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헌법의 정신입니다. 국민주권, 3권 분립의 정신입니 다. 저는 정치가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정치인은 모든 이권과 단절해 야 합니다. 또 모두에게 공정해야 합니다. 조직화된 소수보다 힘없는 다수의 편에 서야 합니다. 공직자의 독직과 부패에 대한 처벌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감사원 장은 의회의 추천을 받겠습니다. 아울러 대통령의 사면권은 국회의 동의를 거쳐 서 행사되도록 하겠습니다. 국회도 개혁안을 만들어 주십시오. 이대로 가면 안됩니다.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특권과 반칙으로 부가 집중되고, 기회가 박탈되는 낡은 경제에는 미래가 없습니 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서민들이 벼랑 끝에 내몰리는데 우리아이들의 미래가 어 떻게 되겠습니까? 중산층과 서민을 떠받치는 데 정부의 재원을 우선 쓰겠습니다. 토목공사보다 사 람에게 먼저 투자하겠습니다. 특권이 끊임없이 확대되는 불공정한 기득권구조를 바꾸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새로운 성장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층간의 이동이 차단된 사회시스템을 선순환 하는 복지로 바꾸겠습니다. 동일가 치노동 동일임금을 목표로 정부와 공공기관들부터 원칙을 지키겠습니다. 힘을 앞 세워 하도급업체에 희생을 강요하는 기업, 고용의 기본을 지키지 않는 기업들이 승승장구하는 경제는 미래가 없습니다.

페이지359 바로 지금이 바꿀 때입니다. 공정한 기회가 부여되지 않는 기득권 과보호구조는 우리의 법과 정책 곳곳에 숨 어 있습니다. 제가 정부를 맡으면 특권과 독점을 묵인하고 조장하는 정책은 폐기 하거나 조정하겠습니다. 국회에서도 우리 법 곳곳에 숨어 있는 특권과 독점체제 를 바꿔주십시오. 또 반칙이 통하지 않는, 상식적인 사법체계를 만들겠습니다. 검 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검찰공화국에 정의는 없습니다. 권력의 분산과 상호 견제, 민주주의의 기본요건입니다. 그 원칙에 따라 검찰을 개혁하겠습니다. 대통령으로부터 독립된 공직비리 수사처를 만들겠습니다. 전쟁과 가난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일어났습니다. 독재 하에서도 우리 국민은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냈습니다. 그 희생과 헌신 위에 오늘의 대한민 국이 있습니다. 이제는 대통령 한 사람이나, 정권에 따라 흔들리는 민주주의, 아직도 허약한 우리 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굳건히 세워야 할 때입니다. 권력기관이 국민의 권리를 함 부로 침해하지 못하도록 법령들을 정비하고 누구라도 권한을 남용하고 국민의 권 익을 침해하면 반드시 그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대북정책과 남북관계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야 합니다. 굳건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간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 한반도에 평화 를 만들어가겠습니다. 앞으로 남북한의 중요한 합의는 국회의 동의를 거쳐 법적 효력을 갖도록 하겠습 니다. 그래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바뀌고 남북관계가 오락가락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북한은 핵무기를 폐기해야 합니다. 남북한의 대화와 협력, 미국을 포함한 주변국과의 관계정상화를 통해 함께 사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체제를 만들어가기 위해 함께 노 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남북기본합의서로부터 6.15선언, 10.4선언 그리고 남북한 미,일,중,러가 함께 합의한 9.19공동선언의 합의정신입니다. 진심의 정치를 하겠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정치를 하겠습니다. 모두가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여야의 합의로 법 을 만들어 주십시오. 작은 차이라면 서로 양보하고 합의하는 것이 정치가 아니겠 습니까? 합의하지 못하는 정치는 전쟁과 다름없습니다. 국민을 기준으로 하면, 합 의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이 전쟁과 정치의 차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정치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탄식하는 국민들의 한숨이 들리지 않습니까? 자신들의 주의 주장이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국민의 눈물과 고통 앞에 하찮은

페이지360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세력의 이익이 그렇게 소중하다면, 정치가 아니라 차 라리 이익이 남는 장사를 하거나 사업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말은 무성하고, 실 천하지 않는 정치 그런 정치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국민의 결심이 저를 여기 세워 주셨습니다. 선거 때 급조한 무상보육정책을 몇 달 만에 뒤엎는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겠습니 까? 정치는, 정부는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고 약속을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 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선거의 과정에서 거창한 약속을 드릴 수 없습니다. 대신 정치 의 과정을 공유하겠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고 국민 여러분의 이해를 구하겠습 니다. 정책 실행이 위험하면 위험하다고, 안전하면 안전하다고 솔직히 말씀 드리 겠습니다. 공약과 정책은 진심일 때, 삶을 변화시킵니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지킬 수 있는 공약을 내놓겠습니다. 진심의 정치가 새로운 변화를 만듭니다. 안철수의 진심캠프는 국민들의 제안을 받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정책을 만들고, 참여할 수 있습니다. 벌써 500여 개의 포럼 개설 신청이 들어왔 습니다. 다듬고 반영하는데 다소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국민참여의 과정이 바로 변화의 시작입니다. 문제 해결 중심의 정책을 펼치겠습니다. 부처 간 칸막이를 세워 둔 지금의 정부 시스템은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지난 8월, 일흔 여덟의 이모 할머니가 기초생활수급 대상에서 제외됐습니다. 부 양의무자인 사위가 취직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위는 취직했지만, 할머니를 돌볼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할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이런 일 앞에서 저는 정말 화가 납니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와 정부가 할 일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기 때문에 기댈 데 없는 어르신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보건복지부가 국세청 일용근로소득 자료를 근거로 기초생활보장수급자 중 상당수 의 자격을 기계적으로 박탈한 결과입니다. 자식들은 자기 앞가림하기도 어렵고, 어르신들을 생계를 이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사회가, 정부가 국가가 이렇게 비정해 도 되는 것인지 저는 묻고 싶습니다. 국민을 보듬는 따뜻한 정부, 저의 꿈입니다. 저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사람에 대한 예의와 정성만 있으면 예산을 알뜰하게 쓰면서 이 분들을 돌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꼼꼼하게 현실적인 계획을 세운다면 노인빈곤을 제로로 만드는 시대를 열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시간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 최소한 10년은 걸릴 겁니다. 하지만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궤도를 벗어난 아폴로 13호입니다. 아폴로 13호가 나사를 떠나 우주에 발사된 뒤 문제가 생기자, 나사는 자기들이 해결할 수 있다고 고집부리지 않았습니다. 각계의 다양한 전문가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래서 복합적 사고원인 을 분석해냈고, 아폴로13호는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페이지361 지금 대한민국의 사회 문제는 서로 뒤얽혀 복잡합니다. 문제 해결을 중심에 놓고, 각 부처와 전문가, 그리고 국민들의 현장의 목소리가 함께 반영될 때 비로소 문 제를 풀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대한민국의 궤도를 바로 잡겠습니다. 함께 문제를 풀어가겠습니다. 대통령 혼자 나라를 끌고 가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전국 각 분야 전문가들과 국 민들이 대통령과 함께 답을 찾는 대화와 소통의 구조를 만들어내겠습니다. 대통 령이 군림하고 통치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대통령이 국민과 대화하고 협 력하는 협치의 시대를 열겠습니다. 함께 해주셔야 국민 여러분의 삶이 바뀝니다. 그 동안 저는 민심을 전달하는 사 람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국민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저 안철 수와 국민 여러분이 함께 만들어가는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1) 문제가 아니라 답을 주는 정치 정치가 문제입니다. 국민과 함께 정치를 바꾸겠습니다. 정치혁신은 모든 문제를 푸는 출발점입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한번 만들어진 집단은 자기중심으 로 돌아갑니다. 사람을 바꾸고 조직을 바꿔야 정치가 바뀝니다. 정부와 국회는 국민에게 고용된 기관입니다. 대통령과 정부는 국회를 존중해야 합니다. 대신 국회는 국민의 뜻을 반영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국민의 뜻이 행정과 의회에 반영될 수 있는 대화의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2) 개인과 기업이 함께 성공하는 경제 일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일할 수 있는 경제를 만들겠습니다. 청년과 여성, 어 르신의 경제 참여가 늘어야 합니다. 내수시장도 늘어나야 합니다. 서비스 산업의 생산성도 늘려야 합니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야 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을 뒷받침하고 공정한 거래가 이뤄질 수 있 도록 해야 합니다. 중소기업청을 확대 개편하여, 창업과 사회적 기업을 대폭 지원 하겠습니다. 한번 실패해도 두 번째 기회가 주어져야 새로운 도전의 에너지가 만 들어집니다. (3) 모든 가능성이 발휘되는 사회 교육이 문제입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좀 더 나은 내일이 온다고 믿던 그 시대 가 옛날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아무리 공부해도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산업화 시대에는 획일적인 교육이 통했습니다. 하지만 창의 의 시대에는 그런 교육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페이지362 누구나 자기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찾아낼 수 있도록 교육이 시대에 맞게 바 뀌어야 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입시지옥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꿈을 잃고 있 습니다. 이제 교육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합니다. 교 육은 실험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육이 우리 아이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학부모와 교사가 중심이 되는 대통령직속 교육개혁위원회를 신설해 서 정부와 머리를 맞대도록 하겠습니다. (4) 부담 없이 결혼할 수 있는 나라 결혼과 출산이 문제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는 사회, 그런 대한민국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등록금, 취직, 내집 마련, 출산과 육아에 대 해 지킬 수 있는 답을 낼 것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 꿈을 돌려주고 싶습니다. (5) 인간 존엄성을 지켜주는 나라 노후와 질병 걱정이 사라져야 합니다. 노인이 겪는 절망은 청년이 겪을 절망입니 다. 노인가난 제로계획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던 돈 때문에 치료받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성별, 장애나 학벌이 어떤 일을 하는 데 걸 림돌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다문화시대, 우리나라에서 살고 일하는 모든 이 들은 우리의 이웃입니다. (6) 다음 세대를 위한 사회 다음 세대에 짐을 넘겨주어서는 안됩니다. 환경, 에너지, 개발 문제가 모두 다음 세대에 빚을 지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회와 환경이 공생하는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가겠습니다. 원전 불안은 점점 심각해집니다.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로 근 본적인 전환이 필요합니다. 공동체와 협력을 원리로 하는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 합을 지원하여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하겠습니다. 정직한 기업,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기업이 성공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7) 강하고 당당하고 평화로운 한반도 튼튼한 안보와 유능한 외교 위에 남북 간의 대화와 협력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킬 수 있고 국민이 편안해집니다. 남북관계-북 핵문제-한반도 평화체제의 선순환을 이루겠습니다. 북방경제의 블루오션을 열겠 습니다. 과거와 단절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미래를 여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방법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정책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가던 길을 그대로 가는 게 쉽기 때문입니다. 낡은 정치는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습니다. 저는 빚진 게 없습니다. 그러니 갚아야 할 것도 없습니다.

페이지363 그래서 오로지 국민만 보고 갈 수 있습니다. 능력만 보고 공평한 인사를 할 수 있습니다. 공직은 전리품이 아닙니다. 대표적 사례로 국민의 소중한 재산을 감시해야 할 공기업 감사가 왜 논공행상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국민도 저도 납득 할 수 없습니다. 전 공직에 걸쳐 전관예 우나 낙하산 인사라는 말이 사라지도록 하겠습니다. 직간접적으로 청와대가 임명하는 자리가 만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을 1/10 이하로 줄이겠습니다. 제 선거를 도와주셨다고 공직을 나누지 않겠습니다. 만약 그런 생각으로 저를 도와주신다면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국민의 소중한 세금인 예산 역시 꼭 써야 할 곳에만 쓸 것입니다. 국민들이 제게 기대하는 새로운 정치가 그런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음 대통령은 다가오는 국제적인 경제위기와 우리 내부의 문제를 한꺼번에 풀어 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위기는 곧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위기와 갈등을 풀어내 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시대의 기반을 다지겠습니다. 저는 정치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더불어 함께 잘사는 경제 를 만드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이 모두가 저 혼자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참여가 세상을 바꿉니다. 2. Implementation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 정호승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어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페이지364 촛불도 꺼져가는 어둔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그리움 만나 얼씨구나 부등켜 안고 웃어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행정학 공부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프레스만과 윌다브스키(Pressman & Wildavsky)의 집행론 (Implementaion) 이야기는 한번쯤 다 봤을 것 같다. 1973년 출간된 이 책이 나름 충격을 준 것은 어떤 아주 특별한 문제-고의적 집 행 방해나 커다란 실수-가 아니더라도 여러 요인들의 결합으로 정책집행에서는 오류가 흔히 발생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것은 정책 총론과 각론에 있어서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개념으로 소개된다. 사례로 든 것이 바로 미국 연방정부의 일자리 마련 정책 중 하나였다. 미국 연방 정부 상무부내에 설치된 경제발전단(Economic Development Administration)에 서는 1966년 4월에 흑인 실업자를 취업시키기 위한 실험적 사업으로 오클랜드 (Oakland)라는 인구 36만 5천 정도의 작은 도시에 2천 3백만 달러의 거액을 투 입하여 비행장의 비행기격납고, 항구의 하역시설 등 공공시설을 건설하고 여기서 2200여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마련하고 추가적으로 160만 달러를 사기업체에 대여하여 800여 개의 일자리를 마련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3년 정 도가 지난 1969년에 약 3백만 달러가 겨우 지출되었고 새로운 취직자리가 마련 된 것은 약10개 정도에 불과하였다.

페이지365 지출된 돈도 돈이지만 이것은 일자리라는 측면에서 실험적 사업 자체가 보여준 저 초라한 성과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원인과 과정을 톺아 본 것이 프레스만 과 윌다브스키의 분석이었다. 그 이유로 제시된 것은 지금도 정책과제와 정책집 행이라는 측면에서 적용 가능한 논점이 많다. 첫 번째 든 이유는 집행과정의 참여기관과 참여자가 너무 많았다는 것이었다. 이 설명을 의사결정점(decision point)과 거부점(veto point)으로 압축해서 보게 되는데, 각 참여집단의 동의와 결정은 곧 의사 결정점=거부점 의 역할을 한다는 걸 전제로 그 과정을 봐야 함을 말한다. 즉, 참여자가 많으면 그 가운데 거부의 기회가 더 많이 생긴다는 걸 뜻한다. 거부기회란 곧 거부 역할을 하지 않더라도 가능성을 늘 내포한다. 잠재적인 거부자가 되는 셈이다. 두 번째 이유는 집행에 대한 기존 지지와 협조가 인적 교체로 인하여 발생하였다 는 점이다. 많은 경우에 이런 예는 발생한다. 의욕적으로 처음 정책을 집행한 사 람과 그 후임으로 온 사람 간의 차이는 그 정책 자체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 각하게 되고 이는 잠재 혹은 표면적 거부현상으로 나타난다. 세 번째 이유는 한국에서도 지금도 여러 곳에서 발생하는, 실현 가능하지 않는 정책 집행이나 그러한 고려의 상황이 지속되는 경우다. 이를테면 위 케이스에서 는 정책목표는 흑인들에 대한 일자리 제공이었지만, 마련된 자금은 일단 격납고, 부두시설 쪽을 건설하고 이에 일자리를 만드는 형식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참여 기업 선정에 있어 현장 적용이 어려운 조건들이 만들어지며 정책수단은 실현성이 뚝 떨어지게 된다. 담보능력이나 융자반환능력이 있는 회사는 일자리 마련이란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것이 충족되지 못하는 회사는 담보, 융자 등 참여 조건 충족이 되지 못했다. 네 번째는 정책 담당기관의 오류다. 부적절한 집행기관이 정책집행을 담당하면 타성적이거나 습관적으로 부적절한 정책수단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단순히 자본 시설에 정부가 투자하면 직접적 일자리 마련이 되고, 지역 경기가 활성화되며 다 른 기업이 활성화되면서 고용이 증대한다는 이론은 마치 이 정권 들어 말하던 트 리클 다운 정책 선전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당시 그 지역은 경기 자체는 호황이 었고 흑인이나 멕시코 계통의 인구들이 주로 실직상태였기에 이론대로 전혀 작동 하지 못했다. 이것이 공동행동의 복잡성 (Complexity of Joint Actions)이란 것인데, 어떤 정 책의 결정에 있어서 다자( 多 者 )가 개입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의견을 취합하는 과 정에서 결정권과 거부권이 혼재될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준다. YS정부 시절, 세계화라는 타이틀이 등장하고 한국의 정부 행정관리가 행정경영 이라는 이름으로 기업가적 정부 로 나가기 시작했음을 기억해볼 필요가 있다. 원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신 관리주의 (New Managerialism)가 당시 많이

페이지366 연구되고 소개 되기도 했고, 실제로 행정 일선에 적용도 되었다. 이것은 1980년 을 전후한 시기 OECD국가들이 시행했던 공공 및 민간 경제의 국제화와 병행해 공공관리의 국제화 가 진행된 것과 연결된다. 이런 시도들을 신 관리주의, 신 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라고 부른 다. 이 핵심은 첫째, 고위 행정가의 정책 결정 기능보다는 관리기술을 중시, 둘째, 과정 중심에서 산출 중심으로, 셋째, 공공 서비스 공급에서 통일적인 내부 생산에 서 계약경쟁체제로, 넷째, 고정임금에서 변동임금으로 요약한다. 이에 따라 통일 적 조직에서 개별조직으로 분산화 시키거나 공공조직간 또는 공사 조직간의 경쟁 이 강조되는 것, 민간관리기법의 공공조직 도입, 재량적 관리, 측정 가능한 업무 성과기준 강조, 미리 설정한 산출측정을 통한 공공조직 통제(예를 들어 성과급 등)가 그에 맞추어 도입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이론적인 여지도 생긴다. 이를테면 정부기관의 기능을 크게 정책-관리, 통제-서비스의 이원론을 적용하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공공행정 실 제에 있어 적용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다. 공공행정의 과정은 정책과 관리의 결합 적인 의사결정점(jointed decision making points)이 존재해서 정책과 관리의 이 원론 성립이 어렵다. 이는 필연적으로 많은 갈등을 일으키게 되어 있고, 정확한 위임구조가 있지 않으면 조화가 어렵게 된다. 신 관리주의에서는 공공조직 및 관리의 특수성을 부정한다. 정부기관의 목표가 경제성 합리성뿐만 아니라 정치적 합리성의 요인으로 모호성을 띄게 된다. 지지 집단의 연대를 이끌어내려면 나오는 모호한 표현(wolly wording)이 정치적이건 혹은 다른 형태건 간에 평가 시에는 적어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공 화 된 것 (publicness)의 문제는 늘 이 부분에서 중요한 평가기준이 된다. 왜 사 기업과 정부가 다른가? 이건 책임성 문제로 봐야 하는 것인데, 정부의 궁극적인 통제가 국민에 달려 있는 반면, 기업은 주주가 존재한다. 즉, 성격이 다른 것이다. 사회조직에 있어 정치성(권한)과 시장성(교환)의 측면에서 시민 대 소비자 관점 도 중요하게 대두된다. 신 관리주의는 합리성에 기초한 목적론, 효용론, 집합의 원리에 바탕을 둔 실질적 가치를 중시한다. 즉, 경제성, 능률성, 효과성의 가치가 지배적인 개념이란 것이다. 그러나 신 관리주의에서는 도덕성에 기초한 의무론, 계약론, 배분의 원리에 바탕을 둔 가치들인 형평, 정의, 대표, 참여는 별로 중요 하지 않은 의제로 다루어진다. 심지어 높은 생산성 추구에 방해되는 제약으로 간 주되기도 한다. 더 심하게는 이들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경제시장의 역동 성을 제약한다고 본다. 여기서 바로 신 관리주의적 접근-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처럼 -은 그 철학적 바탕 자체가 시민 (citizen)보다는 소비자 (consumer)로 대중을 보는 개념을 선호하고, 또 그렇게 사회조직에 접근한다. 이 차이는 현실에서는 매 우 커다란 행동양식의 차이로 만들어진다. 시민형이 가진 국가구성원으로 갖는 지위는 소비자형에서는 불평등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심지어 선택적인 것으로

페이지367 바뀐다. 언제든지 탈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소비자-대중을 소 비자 관점에서만 본다면-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권리가 부여되지 않는 국가의 탈 정치화 가 일어난다. 이를 테면 강원랜드의 경우, 사회적으로 낙후한 지역에 공공기관을 설치하여 어 떻게 이윤을 낼까? 이 고민 자체를 도박의 방식으로 해소해버린 케이스다. 아무 리 낙후지역 발전을 명분으로 내건다고 해도 그것이 정책적 효용에 있어 결코 그 지역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건 현상으로 드러난다. 경제성과 기업가성을 중시하는 행정개혁에도 상호 모순은 발생한다. 경제성의 합 리적인 행동양식과 달리 기업가성은 위험을 수용하는 혁신가 모델이 적용된다. 지금 지방자치단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이 공공성, 경제성, 기업가성이 마구 혼재되어 사건이 벌어지는 예는 너무 흔하다. 물론 근본적인 비리는 그 사 이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해당한다. 각 지자체가 무분별하게 벌이는 소위 사업 은 그 바탕 자체도 기업가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각 지역의 경제특구의 경우도 왜 한계를 드러내는가 보면, 그 정책 추진의 바탕 문제가 늘 중심에 있다.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이러한 신 관리주의, 신 공공관리라는 개념 적용 은 불투명했었다. 그러나 그 이후, 오늘까지 이르는 동안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가 만히 더듬어보자. 우리는 이미 지난 약 20년 동안 이 문제의 한 가운데를 걷고 있는 중이고 그만한 전례를 많이 만든 상태다. 많은 학자들이 현재한 문제들을 다루고는 있으나 그 근본 문제는 역시 정책 으로 모아진다. 이제는 지금까지 있 었던 문제들을 톺아 보는 작업을 해야 할 때다. 20년이란 시간이 결코 짧은 시간 은 아니란 의미다. 즉, 이 시점마저도 각론( 各 論 )의 해결책이 나오지 않으면 그건 너무 한국 사회를 평면적으로 본 것에 불과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안철수의 정책비전 선언문을 보고 든 생각을 그냥 정리해봤다. 언급된 하나하나의 사안은 다시 되짚어볼 것이다. 3. 정치개혁은 정권교체의 상위인가? 농담 /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페이지368 제대로 멋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사실 겉만 본다면 안철수는 대단히 용감한 길을 걷고 있다. 정당을 만들지도 않 고 무소속으로, 그러면서도 기성 정치에 강하게 압박을 가할 정도로 대중의 지지 세력까지 업고 있는 이만한 세력이 다시 출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그가 정책 비전을 발표하기 직전에 우석대에서 한 말이 정치개혁은 정권교 체의 상위 개념 이란 말을 했다. 안철수 대선 전이라도 경제민주화 등 합의하자.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6725&cmpt_cd=p000 0 그러면서 5가지 사항-경제민주화, 비정규직 철폐 및 근로시간 단축, 복지증대 및 조세부담, 합리적 대북정책, 정치개혁-을 대선 주자 3자가 위원회를 만들어 협의 하자고 사실상 한 걸음 더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어떤 평가를 하건 간에 이런 태도는 종래 기성 정치에서는 보기 어려운 매우 신선한 접근법이라는 인상을 주 기에 족하다. 어쩌면 한국 정치의 곪은 부분을 사정 없이 건드린다는 점에서 특 별한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가 발표한 정책비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총론과 각론 수준의 이 야기가 아니라, 당장 위의 5가지 사항마저도 총론 수준의 인식 외에 없는, 비전 이라고 말했지만 현실감이 떨어지는 대목들이 있다는 소리다. 그것을 가장 우려 하는 것이고, 그 걱정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깊어져만 가는 것도 부인하기 어 렵다. 지켜보는 이들이 아슬아슬할 정도라는 걸 안철수 측은 알고 있는지 모른 척하는지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분명 위험수위를 달려가고 있는 건 틀림이 없다. 그래서 한 가지 아주 손쉬운 제안부터 시작을 해볼까 한다. 왜냐하면 일단 안철 수 본인이 꺼낸 정치개혁 과 정권교체 라는 화두 간의 등호/부등호가 나온 상태 여서 이 질문이 이제 가능할 것으로 여겨지기에 그렇다. 안철수 진영은 이명박 정권의 단죄가 정치개혁의 우위에 있는가, 아니면 정권 교체와 동일선상에 있는 수준인가?

페이지369 질문이 좀 격한가? 그럼 이렇게 묻자. 아주 간단하게. 안철수 진영은 4대강 사업 등 정권 차원의 부패에 대한 모든 재조사를 포함해 서 이명박 정권의 모든 비리에 대해 조사하고 그를 국민에게 밝힐 용의가 있는 가? 이것이면 명확한 질문이 될 수 있겠다. 이 대답을 하는 것이 바로 위의 정치개혁 과 정권교체 의 우위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까지 안철수 본인의 입으로 이 정권에 대한 단죄 문제는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그저 모호한 이야 기들만 넘쳐 났을 뿐이다. 그런 정치적 -에둘러 도망갈 구멍을 마련하는-그런 화법이 더 이상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 주변에는 없었다. 어떤가? 답변 할 용의가 있는가? 정치개혁 이란 거대 담론을 던진 것이 10월 7일 안철수의 비전 선포식으로 보인 다.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그럼 이렇게 몇 가지만 물어보면 어떨까 싶다. 정당의 실질적 민주화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 것인가? 당신은 무소속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정치의 최소 단위는 이제 정당을 고려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정당의 정치개혁은 바로 저 문제에 있다. 그렇다면 어떤 방 법으로 당신의 정치개혁을 실현코자 하는 것인가? 정치개혁의 본질은 선거개혁에 있다. 정당이 아닌 상태에서 어떤 식의 공천개 혁을 이뤄낼 수 있는가? 정치는 경제의 거울이다. 경제구조의 부패구조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경제를 통 한 사회부패와 비리의 방지 프레임이 없다면 정치 또한 개혁은 고사하고 정경유 착의 사슬을 헤어나지 못한다. 당신의 정치개혁에 경제는 어떤 부패근절구조가 있는가? 대통령의 사면권 등 권한의 축소를 말했다. 그러나 정치개혁의 본질로 일컬어 지는 것은 소위 분권형 개혁을 말한다. 권력을 내놓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한국 에서 과연 권력이 분권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권한의 하방( 下 放 )이 아니 라 권력기구의 민주화가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 와 같은 분권,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인가? 왜 각론이 필요한가는 선명하다. 바로 주제 자체가 대단히 크고 범위가 넓다는 사실을 알고도 왜 총론만 자꾸 이야기하는가 묻는 것이다. 합의를 말하기 전에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요청은 절대 허투루 들을 말이 아니다. 정권교체 이전이 라도 합의되어야만 한다는 말은 타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그 방안을 짜고 또 누가 그 방안들을 검증한다는 말인가? 실현성이 없는 말은 선동적 언어 의 한계를 절대 벗어날 수 없다.

페이지370 참 간단한 저 질문에 대한 답이라도 속 시원하게 들으면 한다. 행여 이런 답을 하려고는 말기를. 현 정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나올 수 있으므로 지금 거론하는 건 시기상조다. 사회의 대통합을 위해서는 관용이 필요할 때도 있고, 이런 문제는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민의를 모아서 확정할 일이다. 나는 안철수의 입을 통해서 위의 저 답을 자꾸 말하는 걸 듣는 중이다. 기분 참 묘하다. 어떤 복화술을 자꾸 구사하는 듯해서 몹시 짜증이 난다. 4. La commedia & La divina commedia 비오는 날 / 천상병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 내린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1백 50원을 훔쳐 아침 해장으로 나간다 막걸리 한 잔 내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냐? 가방들고 지나는 학생들이 그렇게도 싱싱하게 보이고 나의 늙음은 그저 노인 같다 비오는 아침의 이 신선감을 나는 어찌 표현하리오? 그저 사는 대로 살다가 깨끗이 눈감으리요 다시 아주 골치 아픈 주제 하나를 건드려보자. 역시 종교는 비판이건 찬양이건 그리 쉽지가 않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고 지나가야 할 대목이어서 빠트리고 갈

페이지371 수는 없다. 개독 은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한자어로 다른 개독 은 있지만 개 같은 기독교 인 이란 뜻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혹자는 예전에는 개신교와 기독교를 그리 불렀 다고도 하지만 전거( 典 據 )는 찾지 못했다. 종교의 자유가 엄연히 보장된 한국에서 왜 하필이면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기독 교 특히 개신교의 경우, 이렇게 극단적인 비하( 卑 下 )를 할 정도의 용어가 사용되 는 것일까? 원인은 전적으로 그들만의 자유 를 거론하는 일부 개신교회와 기독교 인들에서 찾아야 한다. 그들은 상대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앞서 본 것처럼 침묵의 자유 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자유권 임에도 개독 은 그마 저 침범하는 것을 그들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걸 의무 라고 부르니 참 기 가 막힐 일이 늘 생기는 법이다. 제가 목사였던 사실이 슬픕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58056 이미 이 부분은 여러 형태로 많은 이들이 지적했으니 굳이 여기서 거론할 생각 없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란 구호를 타인에게 무작정 전파하고자 하는 파시즘 적 행태는 상식적인 사회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물들이고자 하는 광신( 狂 信 )에 불 과한 것으로 취급되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교회는 머리와 몸이 분리된 중환자입니다. 그것도 중추신경이 마비되어 뜻 대로 움직이지 않는, 그대로 두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심각합니다." (류 상태 前 목사) 증상을 설명한 대목이 이채롭다. 다름과 틀림을 구별하지 못한다 는 대목은 앞서 차이와 차별, 구분과 구별이라는 설명에 닿아있다. 바로 여기서도 배타성 이 첫 번째로 지목된다. 편하게 믿다가 천국에 가면 그만이라는 안일주의, 직제 구분에 불과한 목사와 장로, 집사를 신분 차별로 받아 들이는 권위주의, 문자주의에 갇힌 성서해석, 그 왜곡, 종말론적 환상주의 경향 등등의 열거는 비 신자라 하더라도 납득할만한 상태다. 그리고 더욱 공감하는 건 비기독교인들은 다 알아듣는데, 유 독 기독교인들은 못 알아들어요 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고개를 끄덕인다. 게다가 못 알아 듣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비난하고 저주 하는 것이 현실이란 점에서 씁 쓸해진다. 이 정권 들어 확실히 부각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형교회의 정치성향에 관 한 것이지만, 그에 앞서 이런 교회를 정치로 끌어들인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생각 하게 된다. 그건 교회의 목사건 지도급 인사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믿음을 보

페이지372 인 사람들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아니, 목사가 터무니 없는 논리를 대면서 이번에는 이 사람 찍어라 말하면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습니까? 나름 철학 공부에 제법 지식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는 그에게 했던 질문에 돌아온 답은 정말 엉뚱한 것이어서 경악을 한 적이 있다. 목사님 말씀이니까. 끝까지 들어야지요. 아마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나는 그날 20여분 논쟁을 하다가 마침내 이런 말까지 하게 되었다. 당신은 기독교를 믿는 게 아니라 목사를 믿는 환자입니다. 종종 공중파에서 먼저 아버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하는 어떤 수상소감이 나 혹은 그런 발표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꺼내는 말을 들을 때, 나는 생각하게 된다. 과연 대중을 향해 그렇게 말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가 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 행동 하나로 오히려 한국 사회에서 종교의 진정을 해치는 행위에 불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 뭐, 그것마저 아예 생각이 없는 사람도 워낙 많아서 이 런 지적을 할 가치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정말 보편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기독교인 이 아닌 이런 유형의 사람들 을 왜 이렇게 자주 보게 되는 것일까? 정말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나 서서 말 안 하고 다니는데, 오히려 온전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설친다 하기도 하 고, 그래야지만 뭔가 자신이 일한 보람을 느끼는 측면에서는 딱 정치인의 습성과 비슷하다는 판단도 있다. 이것이 이제는 좀 지나친 상태까지 가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지는 건, 한국 개신교 가 하나의 사회가 가진 보편적인 평화를 해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판단이 늘어 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접근법, 이를테면 그 어떠 한 죄악이라도 신이 용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논리는 열심히 믿는 척 해도 나쁜 짓 하면 구원이란 없다는 논리적 타당성에 비해 너무도 불합리한 것이어서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자와 상종하고 함께 산다는 게 불편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 논리가 마치 지금 이 정권에서 통용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하나의 정권에서 종교적인 트랜드가 있긴 있겠지만 지금처럼 거의 천편일률적인 배타성을 드러낸 적은 없었던 듯하다. 서울시를 봉헌하는 것도 모자라서 아예 대 통령이 기도하면 무릎을 꿇는 사태까지 본 터라서 그 주변의 인물들이 그 종교성 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건 쉽게 짐작이 가기는 한다. 그러나 그 처리방식에 있 어 이른바 인간법이 종교법을 넘을 수 없다는 그런 신념이 그들에게 있는 건 아 닌가 생각하게 된다.

페이지373 서경석 목사 제주도는 고향보다 조국을 생각하라 망발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864 이번 집회에 앞서 지난 서경석 목사는 지난 3월 1일 열린 기독교 범교단 단체 및 애국 단체 연합 3.1절 기념대회 에서 "3월 8일 제주 강정마을에 개신교인들을 몰고가 가톨릭과 맞장을 뜨겠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으며, 이에 집회 하루 전인 3월 7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이해학 목사)는 <일부 기독교인의 반( 反 )복음적 행동을 심각히 우려한다>는 공 식 성명을 통해 "서경석 목사의 발언은 개인의 왜곡된 소신일 뿐"이라며, 이미 목사로서 품격을 상실한 서경석 목사의 회개를 촉구하고, 집회 취소를 요구한 바 있다. 종교의 정치 참여에서 분명히 해야 할 상황이 벌어진 건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 니다. 이를테면 목사 라는 건 사회 내에서는 직업일 뿐이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 이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소신 일 뿐인 상황에서조차 목사 라는 직업이 타이틀로 사용된다는 건 우스운 일이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버젓하게 벌어 졌다. 한국의 지난 4년여 세월은 대통령 이명박 이 아니라 대통령 이명박 장로 였음은 취임 초기부터 봐온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표상일 뿐이다. 그에 숱한 공 직자들이 장관 000 집사, 장로 000 차관 으로 살았지 않겠는가. 그럼 도대체 그 계급은 뭐고 이 계급은 뭐란 말인가. 이해학 목사는 품격 ( 品 格 )을 말했지만 정 확하게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정확하게 밝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 종교의 자유가 있는 공간,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적절한 처신임에 분 명하다. 다행스러운 일인지 어떤지, 이번 선거에서는 이런 종교적인 편향성 혹은 그러한 모습은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이 정권과 같은 개독 이라 불리는 집단이 한국 사회와 정치 속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 이건 너무도 명확한 가이드라인인 듯하다. 정치적 신념을 운운하는 목사들의 말을 신성한 교 회에서는 듣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자 적는다.

페이지374 5. 대한민국 중산층의 새 기준 새로운 시간의 시작 / 정현종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아라 하나둘 내리기 시작할 때 공간은 새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늘 똑같던 공간이 다른 움직임으로 붐비기 시작하면서 이색적인 선( 線 )들과 색깔을 그으면서, 마침내 아직까지 없었던 시간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열고 있다! 그래 나는 찬탄하느니 저 바깥의 움직임 없이 어떻게 그걸 바라보는 일 없이 어떻게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 있겠느냐. 그렇다면 바라건데 나는 마음먹은 대로 모오든 그런 바깥이 되어 있으리니... 중산층. 언제부터인가 이 이름은 대단히 모호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산 ( 資 産 )의 질적 문제가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숫자로만 놀았다. 그러나 지금은 내용물이 뭔가를 보게 된다. 집 한 채 가지고 있다 해서 그 집이 다 똑 같은 게 아니다. 집도 집 나름이고, 집의 부채도 부채 나름, 그리고 현금 자산의 경우마저도 질이 구분되는 시절이 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중산층을 조사하는 여러 통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어느 기 준이 정확한가를 설정하는 건 어려움이 많다. 오히려 개별적인 설문조사를 통해 서 본다면, 자신이 중산층이 아니라고 답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난다. 이유는 현실 에 있다. 아무리 집을 가지고 안정적인 직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녀의 양육비 등을 감안하면 늘 마이너스로 살아야 하는 가계, 그렇다 해서 자녀들의 교육비를 줄인다는 것도 마땅치 않은 상태, 그렇게 겉모습에서는 누구 부러울 것 없지만 속살은 완전히 새까만 집들이 많다.

페이지375 가계부채 이야기는 여러 통계가 나와 있으니 생략하자. 대신 바로 이 중산층 이 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왜 이 계층은 이토록 쉽게 무너지는 중인 가?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춰보도록 하자. 2008년 경제위기로 美 중산층 재산 40% 줄어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61213581249352 2008 경제위기는 서브 프라임 사태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바로 금융권의 지 각변동이었고, 나아가 막장 금융자본주의가 가진 폐해가 직접 대중에게 전달된 것에 해당한다. 시장자유주의자들의 모임인 몽 펠르렝 소사이어티에서도 지적했 지만 이것이 빌 클린턴 행정부 이후 주택구입 붐을 일으킨 미국 정부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는 비판에는 왜 당시 미국 정부가 이러한 정책을 사용했는가 에 대한 이면의 원인 제시는 없었다. 무조건 시장이 좋아지리라는 생각만 하고 정책을 폈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정치적인 환대를 받기 위해 반짝 경기를 조 장했다는 말도 언뜻 들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하면 이것도 일리 에 닿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금융상품을 개발하는 사람들에는 유난히 수학자들이 많다고 한다. 이를테면 예일 이건 하버드에서 수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월스트리트로 스카우트 되어서 간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할까? 그냥 우리의 은행 창구처럼 입출금을 관리하는 수준이라 면 굳이 수학 이 필요하지는 않을 듯한데 말이다. 그들은 다양한 형태의 수학적 인 공식-난해하면 할수록 좋은-을 금융에 대입하는 역할을 했다. 가지고 노는 건 숫자이지만 대상은 바로 상품이고 또 사람이며, 행동양식이고 좀 더 깊이 가 면 심리까지 건드리는 바로 그런 목적물 이 있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보는 금융자본주의의 온갖 상품들이 다. 개발 끝에 실수해서 나온 악수( 惡 手 )인지, 어쩔 수 없는 한계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이젠 후자임을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싶다. 경제신문을 보면, 유난히 주식 이야기를 많이 한다. 주식으로 떼돈 번 사람 이야 기로부터 주식으로 돈을 날렸다가 다시 돈을 벌게 된 사연들이 아주 집요한 수준 으로 기사로 나온다. 주식상품은 참 다양하다. 그 중에는 도박이라고 불러야 좋은 시장도 존재한다. 투자가 아니라 투기, 투기가 아니라 도박판인 셈이다. 그것을 마치 생산적인 활동처럼 포장을 한다. 정작 어떤 주식보유자도 공장에 가서 손에 기름때 묻히면서 일을 하는 건 아닌데도 말이다. 주식을 사고 파는 것을 노동의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로 매길 수 있을까? 누군가 동일노동 동일보수라고 했는데, 그럼 주식시장에서 지수 화면을 보고 있으면 누구나 동일한 노동이라 불러야 옳 을까? 부동산 이야기도 빼놓을 수는 없다. 이 와중에도 부동산 10년 주기설은 나오고, 자영업자가 망해간다고 아우성을 치는 중에도 빌딩까지 구매해서 매월 1억 넘는 수익을 거둔다는 대박 가게 기사는 나온다. 그러나 정작 시장은 이미 부동산의

페이지376 뚜렷한 하락기조 수준이 아니라 버블이 확 꺼진 걸 기정사실로 여긴다. 그러나 이걸 감추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 또한 만만한 건 아니다. TV도 마찬가지다. 그런 방송을 한다. 물론 그런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비리도 종종 터 진다. 트루맛표 처럼 그렇게 아예 까버리는 이야기도 나온다. 부동산 시장의 새로 운 바람이라면서 소개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전체적인 흐름과는 무관한 아주 소수 영역에서의 성공을 마치 그 시장이 그런 것처럼 다룬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성공신화 자체를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 동분서 주한다. 이게 에너지임에는 틀림이 없다. 자! 이야기가 좀 옆으로 샜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바로 소수 와 다수 에 관한 것이다. 중산층 이 있어야 사회가 건강하다는 건 소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수가 공감대를 가지는 사회계층이 형성되어야 한다는데 기초한다. 이른바 럭비공 스 타일의 사회구조라면 상위 몇 %가 하위 몇 %를 먹여 살리지 않아도 중간계층에 서 충분히 하부를 커버할 수 있다. 이 말은 중간마저 없어지면 상부 몇%에 비난 이 자연 쏠릴 수밖에 없는 구조란 의미다.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은 엷어질 만큼 엷어진 상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언제부 터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인지.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90년대 중반을 넘기고 나서 맞이한 IMF사태로 중산층의 판을 한 번 뒤집어 엎었다. 숱한 이들이 사업장을 닫았고, 가게문을 내 렸고 직장에서 나왔고 그리고 무엇엔가 홀린 사람들처럼 그렇게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기 바빴다. 그 사태를 누가 만들었나? 사회는 그것을 정치의 탓으로 돌리 기보다는 국민 전체의 잘못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에서 금 모으기 라는 희대의 사기를 맛보았다. 그리고 완전히 재편되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 른바 신 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는 그렇게 우리 곁에 왔다. 대책도 없었다. 금융 자본주의의 대중을 향한 모르핀이라 할 수 있는 신용카드 와 신용 이 남발 되기 시작했고, 이들이 사회 내의 새로운 동력처럼 자리잡았다. 그러나 모르핀은 점점 더 사용량을 늘리지 않으면 안 되는 중독성이 강한 극약이다. 그 때, 중산 층을 자임했던 이들-이 또한 90년대와는 다른 중산층의 모습이었지만-이 지금 아우성을 친다. 간단하다. 약발이 더 이상 듣지 않는다는 거다. 돌려 막기 너무 힘들다는 거다. 이렇게 한국의 중산층은 일단 프레임으로만 보자면 다시 변화기 에 돌입했다. 이것이 2008년 미국 서브 프라임 사태의 후유증이라고 보는 건 지 독한 근시안이다. 그 일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마주칠 일이었다. 이제 우리 사회의 중산층은 다시 내년의 충격에 대비해야 하는 때가 왔다. 뭘 가 지고 준비를 해야지 하는 생각이 앞선다. 그런데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럼 이렇 게 한 번 해보자. 거꾸로. 한국에서 새로 생겨야 하는 중산층의 기준은 무엇이 되 어야 할까? 집을 한 채 가지고 현금자산이 있고, 안정된 직장 혹은 사업장(자영 업)을 가지는 것? 이건 모두 돈으로 따지는 것이다. 그렇게 따져서 봤는데 오히

페이지377 려 중산층은 IMF사태 후 10년 만에 또 한 차례 뒤집어졌다. 그 패러다임으로는 어렵다는 거다. 인터넷에 떠도는 영국, 프랑스, 한국의 중산층 기준 비교가 흥미롭다. 사실 이런 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영국이나 프랑스라고 해서 이른바 중산계층(middle class) 라는 소득이나 자산을 매개로 한 분석이 없을 턱이 없으니 이건 그냥 심심풀이로 읽어야 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읽고 나서 좀 생각이 많아진다. [프랑스] 01- 외국어를 하나 정도 구사하여, 폭넓은 세계 경험을 갖출 것 02- 한 가지 이상의 스포츠나 악기를 다룰 것 03-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별미 하나 정도는 만들어 손님접대할 줄 알기 04- 사회 봉사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할 것 05- 남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꾸짖을 수 있을 것 06- 사회 정의가 흔들릴 때 이를 바로 잡기 위해 나설 것 [영국] 01- 페어플레이를 할 것 02- 자산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03- 나만의 독선을 지니지 말 것 04-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05-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대한민국] 01- 부채 없는 아파트 평수 30평 02- 월 급여 500 이상 03- 자동차는 2,000 CC급 중형차 04- 예금액 잔고 1억 이상 05- 해외여행을 1년에 여러 번 가기 분명한 건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은 전환기에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주식을 하건 부동산을 하건, 어떤 경제활동을 통해서 살아가건 간에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자 부하고 살기가 쉽지 않게 된 시절이다. 정말 수상한 때라는 거다. 이럴 때, 우리 는 새로운 기준이 불쑥 튀어 나온다는 걸 많이 봤다. 그게 변화의 패러다임이니 까. 과연 무엇이 새로운 것이 될 수 있을까?

페이지378 6. 속담, 그 무서운 세상살이 이야기 취한 사람 / 이생진 취한 사람은 사랑이 보이는 사람 술에 취하건 사랑에 취하건 취한 사람은 제 세상이 보이는 사람 입으로는 이 세상 다 버렸다고 하면서도 눈으로는 이 세상 다 움켜쥔 사람 깨어나지 말아야지 술에 취한 사람은 술에서 사랑에 취한 사람은 사랑에서 깨어나지 말아야지 내 경우에는 어떤 글을 읽을 때, 먼저 보게 되는 건 그 사람의 성향이다. 그간 쭉 써온 글, 그것이 과연 일치된 견해였던가 아닌가를 본다. 중간에 말을 바꾸는 철 새의 유형도 많으니까. 그런 글은 첫 머리부터 보기가 싫어진다. 물론 반성 을 앞 자락에 깔면 다르다. 생각이 바뀐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니까. 속담은 그런 면에서 우리를 아주 다른 세계로 안내한다. 속된 이야기 라는 뜻도 있지만 본래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쉬운 격언, 잠언 을 말한다. 이거 뜻풀이를 봤 는데 다시 또 봐야 한다. 더 어려운 말이 툭 튀어 나와 버리니. 격언 ( 格 言 )은 오랜 역사적 생활체험을 통하여 이루어진 인생에 대한 교훈이나 경계 따위를 간 결하게 표현한 짧은 글 이고, 잠언 ( 箴 言 )은 가르쳐서 훈계하는 말 이다. 속담은 격언이 제 맛이다.

페이지379 절에 가면 중 노릇 하고 싶다. 일정한 주견( 主 見 )이 없이 덮어 놓고 남의 말을 따르는 경우에 사용된다. 도박판 에 가기만 해도 처음엔 구경만 한다 해놓고 나중에 보면 벌써 배팅을 걸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애초에 거기를 갔다는 뜻은 하려는 의사를 담고 있으니 그건 별로 이상한 일도 못 된다. 절에 가서 보니 한적하고 좋아서 중 노릇 한판 해볼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게지. 그러나 중이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시집살이보다 더 힘들다는 사람도 많으니. 결국 주관적 견해라는 건 필요한 일은 분명하다. 단지 그것이 주관에만 머무를 경우, 객관을 소화하지 않는 경우가 독선으로 가는 것이 고, 그런 의견은 제시되는 순간 이상하게 뭔가 자꾸 장막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숯이 검정 나무란다. 이 말은 종종 보기는 쉽지 않으나 비유치고는 제법 괜찮다. 자기 흠이 더 큰 사 람이 도리어 흠이 적은 사람 흉본다는 뜻인데, 세상살이 치고 흠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 비판의 각도가 자기반성이 아닐 경우, 객관성을 확보하지 않 았을 경우엔 이 말이 사용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딱 생긴다. 저 놈 의 객관성이란 게 늘 문제가 된다. 쉽지가 않은 단어니까. 소매 긴 김에 춤춘다. 내가 좋아하는 속담이다. 별로 생각 없던 일이라도 그 일을 할 조건이 갖추어지 면 하게 될 때를 말하는데, 살면서 이런 경우를 당할 때가 있다. 하고 싶지 않았 는데 등을 누가 밀어서 벌어지는 일도 있고, 나도 몰랐는데 내 소매가 길어서 툭 툭 흔들다가 춤이 되니 한판 춤사위를 벌일 때도 생긴다. 불가 예측의 세상 일이 니 어쩌면 춤 이라는 말로 곱상하게 표현한 이 말에 더 끌리는지도 모르겠다. [정연주 칼럼] 박근혜 대통령 불가론 의 출처, <조선>의 배신 (2012.10.7)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54648.html KBS 사장 하면서 막판에 온갖 곤욕을 치렀다. 언론장악을 하려던 이 정권이 내 버려 두질 않았으니 흔들흔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고생 많았다. 그런 그가 요 즘 칼럼을 쓴다. 나오면 읽어본다. 재미나다. 이번 주제는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당시의 이야기다. 이 사연은 <어느 민족주의 자의 시대 이야기>에서 다룬 적이 있다. 첫 도입부 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 당시 박근혜 편이었다-이 언론계란 곳을 반성하는 대목은 나도 인용을 했었다. 그 때, 조선일보는 박근혜를 이미지 정치, 식견부족, 박정희 후광, 유신공주, 연예 인 수준 인기, 독선과 고집, 사생활, 개인 성장사, 재산 의혹 등 건드리지 않은 게 없었다. 바로 약점 찾기의 진수를 보여준 셈인데 이런 몰이 에 조선일보 전 부사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결국 이명박을 내세우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페이지380 여기까지는 이 칼럼의 이야기가 맞다. 지금 그 내용을 다시 보기 위해 사람들이 방문하는 것도 흥미롭긴 하다. 검증의 일환이니 당연한 행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 칼럼이 짧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다루지 않는 것이 있다. 왜 당시 조선일보는 이명박에게 올인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21세기 왜색 의 본질이 한국 사회에서 지난 10여 년간 어떻 게 작동했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당시 이명박-박근혜의 대결은 한나 라당 내부에서 과연 누가 더 왜색심기에 유리한 파트너인가, 누가 더 자신들의 사욕 채우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할 것인가, 누가 한국 사회의 영향력 공고화에 도움을 줄 것인가 등 그들의 생존과 목적 문제와 직결된 승부였었다. 그 이후에 진행된 일련의 과정을 보면 그건 명확하게 드러난다. 종편이 그랬고, 보수세력의 중추로 여전히 조선일보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도 그렇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힘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 물론 지금은 이제 알만큼 알게 되었으니 노골적으 로 드러내긴 어려운 구도까지는 와 있다. 결국 그 승부에서 박근혜는 졌다. 흥미롭게도 당시 경선은 선거인단에서 박근혜 가 이기고 여론조사에서 졌는데, 그걸 주도했던 인물이 여론조사 전문가로 한참 활동했던 최시중이란 걸 나중에서는 밝혀진 걸로 안다. 결과는 이명박 대 박근혜 의 여론조사 16, 868 대 13,936, 선거인단 64,216 대 64,648, 총득표 81,084 대 78,634였다.

페이지381 조선일보 입장에서는 박근혜가 당시로써는 대단히 껄끄러운 상대였던 것이다. 지 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압박을 가하는 것이기도 하고. 성향 자체가 워낙 강성이 라는 이미지가 있다 보니 이명박처럼 잘 다룰 수 있는-이른바 거래가 가능한-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 사안은 뒤에서도 또 다뤄볼 것이다. 지금 여러 역학관계에서 이 부분은 아주 강하게 작동하니까.) 그런데 이 런 내용이 쑥 빠지고 나니 이 칼럼은 조선 비판 하나만 덩그렇게 남는다. 2007 년이면 5년 전, 그 이야기를 다 챙겨볼 사람은 잘 없으니. 그저 기억에만 의존하 게 되니 정확도가 확실히 떨어진다. 가난한 집 족보 자랑하기다. 참여정부, 나는 노무현 정권이라고 말한다. 그 시절 이야기에서는 할 말이 더 많 다. KBS가 공영방송이었기에 더 그 부분은 잘 알 거라고 생각한다. 당시 참 데모 많이 했다. 그러나 그 내용들이 모두 생존권과 직결된 것이 많았다. 참여정부를 마치 진보 2기의 정권으로 지금 포장하고 있지만, 그것이 아님을 그 속에 있었던 사람들은 안다. 그 이면으로 들어가면 더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지만 이상할 정도로 미화되고 포장된다.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앞선 사례에서 그 진정 에 대해, 혹은 진실에 대해 말하지 않고 어떻게 오늘의 권력에 대해 비판을 하고 내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가난한 집에서 족보 자랑을 백날 하는 모습 은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닌 것이다. 그저 속담 공부 한 번 해봤다. 7. 바람의 종류 약 속 / 조희선 오늘은 침묵하는 날 오늘은 나무가 되어 바라만 볼 수 있기를 새 한 마리가 바람 한 점이 사람 소리 하나가 오고 감을 아니 혹시 오지 않음에 대해서도 그저 바라만 볼 수 있기를

페이지382 바람 ( 風 ) 이야기 한 번 해보자. 요즘의 화두처럼 떠오르는 단어기도 하니까. 공기의 흐름을 바람으로 정의하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대기 중의 여러 물 질들이 움직이는 것, 그 흐름인데, 공간적 규모, 속도, 원인, 발생지역, 영향 등에 따라 분류가 되니 이게 제법 복잡하다. 규모에 따라 대규모 바람(대기 대순환), 종관규모 바람, 중간규모 바람, 비소규모 바람으로 나눈다. 우리 생활에서 구분되는 바람은 아마도 기상청의 분류법이 가장 익숙할 듯 하다. 기상청에서 풍력에 따른 등급을 나눈 '풍력 계급표'에 따르면 바람은 13가지로 분류된다. 고요 (Calm) 해상: 해면이 매끈하다 육상: 연기가 똑바로 위로 올라감 풍속: 0.0 ~ 0.2 (m/s) 실바람 (Light Air) 해상: 물거품이 없이 잔물결이 인다 육상: 풍향은 연기가 날리는 것으로 알수 있으나, 바람개비에는 감각 안됨. 풍속: 0.3 ~ 1.5 (m/s) 파고: 0.08 가량 남실바람 (Slight Breeze) 해상: 잔물결이 뚜렷해지나 흰물결이 나타나지 않는다. 육상: 바람이 얼굴에 감촉되고 나뭇잎이 흔들리며 바람개비에 감각됨. 풍속: 1.6 ~ 3.3 (m/s) 파고: 0.15 가량 산들바람 (Gentle Breeze) 해상: 물결이 약간 일고 때로는 흰물결이 많아진다. 육상: 나뭇잎과 가는 가지가 쉴새없이 흔들리고 깃발이 가볍게 휘날림. 풍속: 3.4 ~ 5.4 (m/s) 파고: 0.6 가량 건들바람 (Moderate Breeze) 해상: 물결이 높지는 않으나 파장이 길어지고 흰물결이 많아진다. 육상: 먼지가 일고 종이조각이 날리며 작은 나뭇가지가 흔들림. 풍속: 5.5 ~ 7.9 (m/s) 파고: 1.2 가량 흔들바람 (Fresh Breeze) 해상: 보통정도의 파도가 일고 파장이 길어지며 흰물결이 많고 때로는 흰거품이 인다.

페이지383 육상: 잎이 무성한 작은 나무 전체가 흔들리고 강물에 잔 물결이 일어남. 풍속: 8.0 ~ 10.7 (m/s) 파고: 1.8 가량 된바람 (Strong Breeze) 해상: 큰물결이 일기 시작하고 흰거품이 있는 물결이 많이 생긴다. 육상: 큰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전선이 흔들리며 우산 받기 곤란함. 풍속: 10.8 ~ 13.8 (m/s) 파고: 3 가량 센바람 (Near Gale) 해상: 물결이 커지고 물결이 부서져서 흰거품이 하얗게 흘러간다. 육상: 나무가 전부 흔들리고 걷기 곤란함. 풍속: 13.9 ~ 17.1 (m/s) 파고: 4.2 가량 큰바람 (Gale) 해상: 큰물결이 높아지고 물결의 꼭대기에서 물보라가 날리기 시작한다. 육상: 잔가지가 꺾어지고 걸어 갈수가 없음. 풍속: 17.2 ~ 20.7 (m/s) 파고: 5.5 가량 큰센바람 (Strong Gale) 해상: 큰 물결이 더욱 높아지고 물보라 때문에 시계가 나빠진다. 육상: 건축물에 다소 손해가 있음. 풍속: 20.8 ~ 24.4 (m/s) 파고: 7 가량 노대바람 (Storm) 해상: 물결이 무섭게 크고 거품 때문에 바다전체가 희게 보이며 물결이 격렬하게 부서져서 시계가 나쁘다. 육상: 나무가 뿌리 채 뽑히고 건축물에 큰 피해가 있음. 풍속: 24.5 ~ 28.4 (m/s) 파고: 8.8 가량 왕바람 (violent Strom) 해상: 산더미같은 파도가 일고 흰물거품으로 바다전체가 뒤덮이며 시계가 훨씬 더 나빠진다. 육상: 건축물에 큰 손해가 있음. 풍속: 28.5 ~ 32.6 (m/s) 파고: 11.2 가량 싹쓸바람 (violent Strom)

페이지384 해상: 산더미같은 파도가 일고 흰물거품으로 바다전체가 뒤덮이며 시계가 매우 나빠진다. 육상: 보기 드문 큰 손해를 일으킴 풍속: 32.7 ~ (m/s) 파고: 11.3 ~ 그러니까 10월 현재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칠 정치판의 저 바람은 대략 봐서는 센바람 정도 와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앞으로 큰바람-> 큰센바람-> 노대바람-> 왕바람-> 싹쓸바람이란 다음 단계가 남아 있다. 싹쓸바람까지 가지 않고 중간 정도에서 꺼질 수도 있지만 이번 판은 최소한 노대바람 이상 급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싹쓸바람은 늘 희망하는 이는 많으나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최소 한 대기의 대순환이 크게 영향을 받아 살짝 미치지 않고는 벌어지지 않을 듯하니. 순우리말로 된 바람의 종류도 참 재미나다. 풍력의 계급으로 나눠본 기상청의 그 것과는 다르게 뭔가 사계절 속에서 우리가 생활하면서 본 바람의 종류를 나눠놓 은 것 같아서 친근감이 든다. 가수알바람;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갈마바람; 서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뱃사람들이 일컫는 말 강쇠바람; 초가을에 동쪽에서 부는 센 바람 건들마; 초가을에 남쪽에서 불어오는 선들선들한 바람 꽁무니바람; 뒤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꽃샘 바람; 꽃 피는 것을 시샘한다는 바람 날파람; 무엇이 빠르게 날아가는 결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는 바람 남실바람; 바람이 얼굴에 스침을 느끼며 나뭇잎이 흔들리는, 바다에 잔물결이 뚜 렷이 이는 상태의 바람 세기 내기바람; 산 비탈면을 따라 내리부는 무덥고 메마른 바람. 바람이 높은 산줄기 를 넘거나 또는 산악 지대에 작은 고기압 중심이 있어 비탈면을 따라 내리불 때 일어난다. 노대바람; 나무뿌리가 송두리째 뽑히고 건물에 손해를 주며 풍랑이 대단히 심한 상태 높새 바람; 동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산을 넘어 내려 부는 마르고 더운 바람 높하늬 바람; 북서풍(뱃사람말) 덴바람; '된바람'이라고도 하며, 북풍을 가리킴. 도새; 주로 동해안에서, 봄과 가을의 흐린 날씨에 부는 안개 섞인 찬 바닷바람 (북한말) 된마파람; 동남풍으로 뱃사람의 말임. = 된마, 든바람, 샛마파람 된새바람; 북동풍 마칼바람; 북서풍 마파람; 남풍. '앞바람'이라고도 함. 맞바람; 양쪽에서 마주 부는 바람. = 맞은 바람 매운 바람; 살을 에는 듯 차갑게 부는 바람 명지바람; 이른 봄 부드럽게 부는 바람으로, '명주바람'이라고도 함.

페이지385 몽고바람; 몽고의 고비 사막으로부터 만주와 중국 북쪽을 향해서 불어오는 건조 하고 센 바람. 문바람; 문이나 문틈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 뭍가잔바람; 밤에 차가워진 뭍으로부터 바다쪽으로 부는 바람(북한말) 박초바람; 음력 5월에 부는 바람 보라; 재넘이의 한 가지. 고원에서 생긴 찬 공기가 고기압에 밀려서 갑자기 불어 내려오는 차고 센 바람 살바람; 좁은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 색바람; 초가을에 선선히 부는 바람 샛바람; 동풍을 가리키는 뱃사람들의 말. 농가에서는 '동부새'라고도 함. 서릿바람; 서리 내린 날 아침에 부는 바람 세칼; 서북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소리바람; 초봄에 제법 차갑게 부는, 살 속으로 기어드는 차고 음산한 바람 손돌바람; 음력 시월 스무날께 부는 몹시 추운 바람 싹쓸바람; 육지의 모든 것을 싹쓸어 갈 만큼 세차고, 바다에는 배가 뒤집힐 정도 로 세게 부는 바람. 아랫바람; 1물 아래쪽에서 부는 바람, 2연 날릴 때 동풍을 이르는 말 옆바람; 돛단배의 돛을 낚아채듯 불어 배를 움직이게 하는 바람 왜바람; 일정한 방향 없이 이리저리 부는 바람 용수바람; 용수철 모양으로 뱅뱅 돌면서 하늘로 치솟는 바람(=토네이도) 웃바람; 겨울에 방 천장이나 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 피죽바람; 모내기철에 아침에는 동풍이 불고 저녁에는 서북풍이 부는 상태 하늬바람; 서풍. 배를 타는 사람들은 '갈바람' 또는 '가수알바람'이라고도 함. 황소바람;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도 대단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회오리 바람; 나선상으로 일어나는 공기의 선회운동으로, 갑자기 한 곳의 기압이 낮아질 때 둘레의 공기가 한꺼번에 모여들어 나사꼴로 빙빙 돌며 올라가는 바람. = 회리바람 흔들바람; 잎이 많은 작은 나무가 흔들리고, 강물에 잔물결이 일며, 바다가 거의 흰 파도로 덮이게 부는 바람. 그러니까 색바람이 슬슬 불다가 왜바람에 이리저리 온갖 일들이 벌어지다가 서릿 바람이 닥치고, 음력 시월 스무날 즈음해서 손돌바람이 불면 마지막 투표일이 된 다는-올해 대선 선거일은 음력 11월 7일이다.-이야기다. 바람을 안고 가는 역풍( 逆 風 )도 만만한 존재는 아니다. 순풍( 順 風 )을 맞아야 하 는 건 우리 사회인데, 아무리 봐도 이번 선거판에 어느 누구도 역풍의 구도에서 는 쉽게 벗어날 듯하지는 않다. 그걸 누가 잘 조절하느냐에 승부가 달린 것 같기 도 하다. 걱정되는 건 역시 이 매운 바람 도 정치판에서는 늘 있는 일인 것처럼 초심을 잊어버리는 정치인들만 무성할까 하는 점이다. 선거 때의 얼굴과 집권하 고 난 그 얼굴은 얼마나 달랐는지! 이걸 무시한 사람들에게는 누구 할 것 없이 매운바람이 불어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참 갑갑한 것이 그렇게 되면 그 바 람이 결국 우리 사회도 시대도 그렇게 만들 것이니 역풍의 피해를 고스란히 입게 되는 셈인 점이다. 선택이란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바람이 우리 사

페이지386 회에 가장 좋은 영향으로 남을지는 재삼 재사 고려하면서 봐야 한다. 바람이 어 찌 문제일까마는 대중이 만들 바람이 무엇일지 또 한 번 눈 여겨 보게 된다. 8. 딜레마(Dilemma)와 트릴레마(Trilemma)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양자택일(alternative)는 흑백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 강제적인 구분법이 작동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 그러나 두 가지 더 선택은 주어진다. 둘 다 선택하

페이지387 지 않거나 둘 다 선택하는 것. 그래서 엄밀히 양자택일이란 조건은 양자택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는 상황과 양자택일 상황이 주어졌다 는 것을 구분하게 되는 셈 이다. 강제성이 동반된 경우에는 선택은 둘 중 하나로 좁혀진다. 이것이 바로 딜레마 다. 수학에서 제안, 명제를 뜻하는 레마 (Lemma)가 두 개(Di) 있 는 것이다. 여기는 일단 물러나거나 도망칠 공간은 없다. 이런 양자택일을 함정 ( 陷 穽 )으로 보기도 한다. 즉, 섣부르게 스스로 양자택일의 함정인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 저것 의 수순을 밟는 가운데 대안 을 꺼내지 못하는 예가 있다는 것이다. 이건 의사결정의 기회상실로 분류된다. 의도적으로 이렇게 몰아 붙이는 예도 있다. 협상에 있어서 상대에게 둘 가운데 하나만을 요 구하는 집요하고 단호한 설정을 하는 경우나 혹은 물건의 판매에서 제품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딱 두 가지로만 마케팅을 전개하는 예가 그것이다. 그렇게 운 신의 폭, 결정의 방향이 좁혀진 상태에서는 대안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이렇게 되면 선택의 함정에도 빠진다. 진폭이 좁다 보니 실수가 벌어질 개연성은 높아진 다. 그에 관해서는 대안을 강구하다가 선택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시기의 함정 도 존재한다. 이런 것을 가장 잘 살리는 것이 바로 도박판에서의 배팅 시간이다. 딱 제한을 두고 하는 것인 셈인데, 이게 규칙으로 설정되어 있는 경우에는 일단 의 사결정은 강요 받게 구성되어 있다. 이런 딜레마뿐만 아니라 트릴레마(Trilemma)의 상황도 나타난다. 자주 나타날 수 있지만 우리는 워낙 딜레마, 양자택일에 익숙해져 있어서 놓치는 경우가 많다. 트릴레마는 선택조건의 다양화와 연관되기도 하지만, 상황 자체가 분석해보면 두 가지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나타났을 경우에는 모두 적용이 된다. 예를 들어 지금 논의되고 있는 성장-분배라는 두 가지를 딜레마로 보는 견해가 왜 잘못된 것인가를 보면, 분명 성장-분배의 사이에는 성장을 해결하려면 분배 를 포기한다는 사고, 반대로 분배를 선택하면 성장을 포기한다는 사고가 존재한 다. 이분법적 이 사고가 바로 현재 한국 정치에서 선전에 활용되고 있는 방식이 다. 그러나 정작 내용은 전혀 다르다. 성장을 확대하고 분배 또한 증대하는 길 을 찾는 것, 이것이 대안이다. 없느냐 하 면 그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논의는 실종되고 없다. 있기 있지만 주목되지 못한 것은 마치 길거리의 옷장수가 호객을 하고 난 이후에 골라요! 싸요! 를 외친 것 이 아니라 살 겁니까, 말 겁니까 를 물었을 때 스스로 양자택일 속으로 걸어 들 어간 케이스가 되었기 때문이다. 분명 여기는 성장-성장/분배의 조화-분배 라는 트릴레마가 있다. 성장만을 희망하고, 분배만을 희망하는 측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 또한 딜레마는 아닌 것이다.

페이지388 경제정책에 있어서의 대표적인 트릴레마는 물가-금리-환율 이다. 이명박 정 권 들어 우리가 뼈저리게 본 케이스에 해당한다. 간단하게 보면, 물가긴축은 물가 안정의 기대도 있으나 경기침체->소비위축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환율의 경 우는 원화가치 하락은 수입물가 상승으로 물가안정을 위협하고, 원화가치 상승의 경우에는 수출경쟁력 저하로 경제성장 둔화가 초래될 수 있고, 금리의 경우 인상 시에는 성장 둔화가 인하의 경우에는 물가불안과 원화가치 하락을 초래한다. 이 세 가지의 고민을 해결하는 접점 찾기가 경제정책인 셈이다. 이것도 엄밀하게 보 자면 물가-금리-환율이란 세 가지에 부속되는 각각의 경우가 연동된다. 이런 현상은 경제의 실재( 實 在 ) 속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저성장-고물가-재정 적자의 경우, 고성장-저물가-재정흑자가 최선의 해결책이긴 하지만 경기상황 자 체가 이렇게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불황에서는 다양한 변종이 출현하기도 한다. 이른바 뉴노멀 (New Normal)도 그런 종류다. 저성장-저소비-고실업률 의 상태 가 이어지는 것으로 2002~2006년 기간의 올드 노멀 (Old Normal)과 대비되면 서 개념 제시된 것이다. 이를 비정상이 정상화 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습 (권 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위기 후 세상은 규제강 화, 부채축소, 저소비, 저성장이 새로운 표준, 즉, 뉴 노멀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기업은 정부와 악수를 해야 한다 (빌 그로스, 핌코 창업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파라노멀 은 여기서 한 걸음을 더 나가는 개념이다. 자원의 경우에도 에너지-환경-식량 은 주어진 선택가치에 해당한다. 이건 선 택의 문제를 벗어났다는 견해도 있다. 식량이 없는 인간세상을 떠올리기 어렵고 또 에너지가 없는 경제발전(혹은 경제행위)를 말할 수 없는 상태지만 환경 문제 가 곧 식량에 영향을 미치는 이상기후 현상이 잦아들고 있는 현실에서 이를 모두 조화할 수 있는 방법 찾기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자! 우리 정치로 다시 돌아와 보자. 우리 눈 앞에는 재미나게도 양자택일이 아니 라 트릴레마 가 주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세가 그렇게 간다. 그러나 여기도 분명 함정은 있다. 이를테면 이 3가지 모두 명제 (Lemma)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그렇다. 그래서 야권 단일화란 이름으로 이 중 2가지의 명제를 합쳐보자고 하는 의견들이 나오는 것이지만, 과연 2가지의 충족만으로 남은 1가지의 명제가 충족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럴 경우가 바로 딜레마와 트릴레마의 복합으로 볼 수 있는 것인데, 그에 대한 대안을 생각해보다가 결국 최종적인 것은 어떤 것에 가치를 더 부여할 것인가를 꼽게 되는 것이 바로 선택 이 된다. 그러므로 이 가치평가는 객관적이어야 하고 또한 명제, 즉, 주어진 것에 대한 충 분한 검토와 검증을 통해서 진행되어야만 하는 것이며, 이 가치평가에 별로 도움 이 되지 않거나 혹은 가치 자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에 관해서, 혹은 가치를 객관화 시키지 못하는 모호함에 대해서는 제거한 상태에서 봐야 하는 과제가 붙 게 되는 것이다.

페이지389 이 과정은 개인이 사회의 주인이 되어서 내리는 정책적 선택이라 해도 무방하다. 9. 경험의 함정, 인지의 함정 작은 이름 하나라도 / 이기철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 때 너무 멀어서 못 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 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페이지390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우리 모두는 경험 과 경험칙 ( 經 驗 則 )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다. 자신이 실 제로 해보거나 겪어서 얻은 지식 기능 때문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를 통해서 객관적인 대상에 대해 감각이나 지각을 통하여 깨닫게 된 바로 그 내용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지 않기에 그렇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 가운데서도 직접 경험 이란 걸 몹시 신봉하는 사람이라는 건 여러 경우에서 밝혀졌다. 우스갯소리로 왕년에 라는 말이 유행했으니 빈도가 적 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경험칙이 작동하기가 몹시 까다롭 게 되었다. 대통령이 되어본 적도 또 그 자리에서 내려간 적도 없으니 말이다. 서울시장을 해본 적은 있었지만, 그리고 국회의원 하다가 낙마한 전례는 있지만, 또 더 이전에 현대건설의 총수도 해보고 그만두기도 했지만 이것과는 많이 다르 다. 권력의 정점이 정치권력만이 아닌 이른바 역사라는 관점이 대두되었고 권력 을 집행한 권리가 아니라 이젠 책임에 관해서 거론되기 때문이다. 이것 참 무겁 다. 요즘 안철수 현상의 확산 이후 한국 사회에서 약간 바람처럼 부는 것이 기성 정 치 비판론이다. 정치인이 대통령 해야 하고, 정치 경험 없으면 대통령 못한다고 논리를 뒤바꿔서 정당정치 아닌 무소속으로, 정치경험 없이 대통령을 하는 것, 그 것이 정치인 대통령보다 나을 수 있다는 기대론이다. 이건 정치 9단이니 뭐니 다 소용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를테면 아마추어 기사( 棋 士 )가 프로 9단보다 못 한 게 뭐 있냐는 항변인데, 이건 프로 9단의 반상( 盤 上 ) 운영이 얼마나 개판이었 는지 욕 먹을만한 소리로 취급된다. 정치에 정답은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장면이 기도 하다. 그러나 추론은 때로 지나치면 프레임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검증은 반 드시 필요하고, 도대체 어떤 배경과 인지, 나아가 전문성이 프로 9단을 능가할 수 있다는 판단 혹은 선택을 가능하게 했는지 봐야 하는 것이다. 흔히 전문가의 함정을 말할 때, 쉽게 빠지는 매너리즘, 그리고 이미 길들여진 방 식만 선호하는 보수주의, 유연성의 부족, 다양성 확보의 실패, 경험에 대한 지나 친 확신과 독선, 아집 류의 발현 등이 꼽힌다. 이렇게 평면적으로 결함이 드러나 버리면 다른 어떤 반박도 소용이 없게 된다. 당신은 함정에 빠졌다 는 정의만 타 당하게 된다. 그걸 뒤집는 건 오로지 일의 결과가 있을 뿐이다. 할 수 있는가, 하 지 못하는가? 이건 명확한 양자택일 형의 결론인데, 이것이 가장 어정쩡한 것이 바로 정치 라는 묘한 분야다. 개량화가 쉽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선택과 집중 을 더 말한다. 이를테면 민주화 라고 모호한 개념설정을 하면, 그것을 어떻게 성취했 는가에 점수를 매기는 식이지만 정작 그것만이 아니라 경제민주화 라는 타이틀로

페이지391 가버리면 성장과 분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잘 잡았느냐를 따지게 되는 식이다. 물론 여기도 함정이 있다. 우선 출발점이 다르다. 하나의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운 용되는 제도가 있고 보면, 그것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저촉되나 감출 수 있는 범 위가 확장되어 있다면 저 구분법도 별로 소용이 없다. 모두 도둑놈이 되면 된다. 누가 함정에 빠졌니 따질 필요도 없고, 각자 알아서 해쳐먹으면 된다. 못하는 사 람이 바보가 되면 된다. 여기엔 효율성의 가치란 딱 하나, 얼마나 잘 해먹는가만 따지게 된다. 이런 상태라면 저 두 마리 토끼의 가치란 언급되지만 분석할 가치 가 없게 되는 셈이다. 예를 들어 어떤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하자. 한국 사회가 그나마 부패 비리가 많이 근절되지 않았나? 그래도 세금을 딱딱 전 산화해서 모두 철저하게 관리하는 걸 보면 과거와 비교해서 이만하면 그래도 부 패는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싶은데 경험은 약이 되지만 독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경험은 쌓인 상태에서는 노하 우 라고 말하지만 거기에만 의존하면 선입견 이 되기도 한다. 친구의 경험은 어느 개인이 사회 속에서 생존하면서 느낀 것이다. 틀린 건 아니다. 이 논쟁의 시작을 개인으로만 묶어 둔다면 이 말은 절대 틀리지 않다. 많이 좋아졌다. 과거와 비교 해서는 분명하다. 디지털화된 관리체계 하에서는 섣불리 장난칠 공간은 많지 않 으니까. 그런데 이것을 확장해버리면 이런 주제가 불쑥 튀어 나와버린다. 정치가 도둑질 해간 우리 세금은 뭐지? 이것은 개인이 자신의 경험 영역을 확장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 이다. 4대강 사업을 도둑질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 이렇게 묻는다. 공정위가 조사해두고도 내버려둔 담합이란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 말의 동의어는 바로 갈취 ( 喝 取 )다. 무엇을? 우리 세금이다. 곧 우리의 피와 살이란 의 미다. 소 도둑이 바늘 도둑 되는 이야기는 구태의연하니 접고,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을 이해하려면 우선 소 도둑의 기법이 바늘 정도를 훔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으로 부터 인지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바로 도둑 이란 단어에 함몰될 뿐이다. 겨 우 나누는 것이 큰 도둑, 작은 도둑 수준이다. 이런 관점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경험에서 잘 나타난다. 오만과 아집, 독선의 경우가 그렇다. 그것이 새로운 성공을 부를 때도 물론 있다. 그러나 이것 이 오류를 향할 때는 제법 재미난 현상이 벌어진다. 바로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 에 함몰된다는 것이다. 앞서본 전문가의 함정과 비슷하다. 상황을 모두 자신의 경 험칙에 대입하게 된다. 이걸 탈피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을 한 사람의 생

페이지392 철학으로 받아들였다면 그 고집 꺾기란 어지간해서 어렵다. 기업이나 주식, 부동산 등 돈이 굴러가는 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툭툭 던지는 말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다. 5천으로 5억 버는 판과 50억으로 500억 버는 판은 처음부터 다른 세상이다. 이건 객관적인 자기 비판이전에 벌써 판이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전제가 붙 는다. 인간의 주관적 판단이 의사결정과정에서 작용하는 7가지 위험한 심리패턴 을 정리한 <생각의 함정>(자카리 쇼어, 에코의서재, 2009)은 인지함정 을 다룬다. 이 책의 큰 제목 중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4. 만병통치주의, 과거의 성공이 미래 를 보증한다. 민영화의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는 소제목이 눈에 쑥 들어 온다. 이명박 정권 초창기 민영화 배우기 열풍에 초대되었던 일본인 하나의 이름 이 불쑥 생각나서다. 책의 한 대목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만 인정하기 힘든 것이 아니라 지지하는 대상의 실수 역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가족적 차원에서는 부모, 국가적 차원에서는 대통령에 비견할 수 있다. 지도자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을 때 당사자만이 노출불안에 시달리며 그 점을 인정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추종자들 역시 지도자의 오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지도자의 오류를 인정하는 것은 그를 지지한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 결론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고통 스런 경험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지도자의 완전무결성에 대한 신화에 집착한다. 이 케이스 지금 우리 곁에 고스란히 있다. 이명박 정권의 실패를 인정하는 사람 이 그들 내부에서 아직도 강력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시간이

페이지393 지나서 그렇지만 노무현 정권의 실패는 검증을 통해 드러났다. 그럼에도 지지한 자신들의 오류 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건 모두 인지의 함정에 빠진 모습이다. 조금 더 내용을 보자. 사람들이 정보를 범주화하는 방식을 알게 되면, 원형적 사고와 그로 인해 초 래되는 인지함정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범주화는 인간의 근본적인 능력 으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대상, 사건, 감정, 아이 디어 등 모든 것을 섬세하게 구별하고 연결시킨다. 심지어 우리는 동작마저 범주 화된다. 범주는 단어들, 문장들을 한 집단으로 묶는 것은 물론 음성의 형태도 분 류한다. 우리는 사람들, 표정, 국가는 물론 추상적인 개념들마저 범주화한다. 범 주화는 일상생활의 핵심이다. 우리가 범주화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추론하는 방식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된다. 상투적인 사고가 집요하게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이 왜 선전이나 선 동에 효과적인가라는 점을 이해하는 데는 원형적인 사고가 도움이 된다. '독신 남 성'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고급 아파트에서 여성들과 즐 기며 혼자 사는 젊은 남성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여기서 바로 '교황'을 떠올 리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황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 한 독신 남성에 대한 형식적인 정의인 '결혼하지 않은 남성'에 충분히 어울리는 인물이다. 역사가들은 오래 전부터 원형의 힘을 인정했다. 역사상 성공한 정치가들은 원 형 이미지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할 줄 알았다. 히틀러는 청중들에게 유대인의 이 미지를 환기시킬 때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강력한 원형적 이미지들을 작동시켰다. '파시스트'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대부분 의 사람들은 아마 히틀러를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사실 파시즘은 무솔리니의 통치아래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무솔리니가 그 단어의 정의에 보다 더 적확한 이 미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경험의 함정이건 인지의 함정이건 간에 그에 빠지지 않으려면 열린 자세 로 봐야 한다는 거다. 내가 하고픈 말은 아래에서 정의된 내용과 다를 바가 없다. 그 래서 이 내용을 맺음말 삼아 싣는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과도한 정보는 위험하며, 때로는 모르는 것이 상책이 라고 믿곤 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발상이다....지나치게 많은 정 보가 오히려 정신을 산만하게 만든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정보의 양은 관련 이 없다. 문제는 정보량이 얼마든 간에 그것이 갖는 관련성이다.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진다고들 한다. 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당연히 좀 더 지 혜로워져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과연 이 말이 사실인지는 그다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실제로 지혜는 경험 하나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성향을 태어날 때부터 부여 받을 수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페이지394 현명해지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말하자면 경직된 사고에 빠져들지 않도록 경계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상황에 서 한걸음 물러나서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곰곰이 성찰해 보라. 우리들은 모두 쉽고 명쾌한 해답을 원한다. 이것이 인지함정으로 유도하는 가장 큰 원인이 다. 이를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는 데 비약적인 발 전을 이루게 될 것이다. 10. 사력( 四 力 )에 기댄 곳을 어찌 치려구? 낮달 / 류제하 아아, 있었구나 늬가 거기 있었구나 있어도 없는 듯이 그러능게 아니여 내 너를 잊었던 건 아니여 결코 아니여 정말 거짓말 아니여 정말 해쓱한 널 내가 차마 잊을까 뉘 있어 맘 터억 놓고 나만 돌아 서겠니 암, 다아 알고 있어 늬 맘 행여 눈물 비칠까 도사리는 안인 거 울면서 씨익 웃음 짓는 늬 심정 다 알아 나 정말이여 나, 나 설운 게 아니여 정말 조각난 늬 아픈 델 가린다고 모를까 이렇게 흐느끼는 건 설워서가 아니여 정권 말기에는 별일이 다 벌어진다. 이걸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게 하는 게 대선 이란 이 서커스 판의 풍경인데, 그래서 때를 놓치지는 않은 듯하지만 이 상황 종 합정리를 다시 한 번 해보는 게 좋겠다 싶다. 안철수의 비전 선언(2012.10.7)에 포함된 내용 가운데 한 대목을 옮겨온다. 과 연 어떤 모순과 난관이 우리 앞에 있는지부터 봐야 한다. 공정한 기회가 부여되지 않는 기득권 과보호구조는 우리의 법과 정책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제가 정부를 맡으면 특권과 독점을 묵인하고 조장하는 정책은 폐

페이지395 기하거나 조정하겠습니다. 국회에서도 우리 법 곳곳에 숨어 있는 특권과 독점체 제를 바꿔주십시오. 또 반칙이 통하지 않는, 상식적인 사법체계를 만들겠습니다. 검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검찰공화국에 정의는 없습니다. 권력의 분산 과 상호 견제, 민주주의의 기본요건입니다. 그 원칙에 따라 검찰을 개혁하겠습니 다. 대통령으로부터 독립된 공직비리 수사처를 만들겠습니다. 선언이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나름 짜임새는 갖추었다. 먼저 행정부에 대해서는 특권과 독점을, 입법부에 대해서는 법의 개혁을, 그리고 사법부에 대해서는 반칙 없는 상식을 강조하고 주문했다. 그리고 검찰이 등장한다. 검찰이 입법, 사법, 행 정의 3부에 하나 더 붙은 4부임이 증명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무소불위( 無 所 不 爲 ) 라는 말에 검찰의 오늘이 다 담겨있다.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는 말이다. 엉! 이 정도면 거의 신(God)에 대한 표현법이다. 인간 세상에 어떻게 이 정도 수준으로 극찬(?)을 듣는 집단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분명 존재하고 있다. 일단 법 은 검찰에겐 명분으로만 작동되었을 뿐, 원 칙은 없었고 정의는 어디 팔아 먹었는지 보이지 않고 거기다 검찰의 구성원들은 양심이 없었다. 거기 어디에도 보편적 상식은 통용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건 사력( 四 力 )에 기댔다 고 하는 편이 딱 옳다. 그건 권력, 재력, 학력, 폭력을 말한 다. 연고주의의 폐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이명박 정권처럼 이렇게 철 저하게 수족( 手 足 )으로 검찰을 부린 전례를 찾기도 쉽지 않다. 그 점에서 보자면, 사실 지금부터가 더 걱정이 된다. 공직(자)비리수사처이건 참여정부의 고비처이건 그 형식이 중요한 건 아니다. 이 미 고비처가 왜 좌절되었는가 전례는 나와 있다. 국회의원, 검찰이 그 수사대상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정치권인 입법부와 행정부 소속이지만 이 무소불위한 검찰이 반대를 했던 전례를 상기해야 한다. 그런데 안철수는 이것을 바꿔달라고 국회에 부탁하고 있다. 여기서 아주 심각한 모순과 갈등 하나가 생긴다. 도대체 뭘 믿고 그런 부탁을 하는가 인데, 분명 힘의 논리로만 따진다면 지금 시점에서 저기 사 력 을 뛰어 넘는 힘의 근거를 제시해야만 이 말은 성립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것이 대중의 힘으로 된다? 아니다. 이미 18대 국회의원 선거 끝 났다. 공수처를 설치하려면 국회 통과가 되어야 한다. 공수처 법안이 좌절된 참여 정부를 생각하면 지금 해야 하는 일은 국회 의 동의가 아니라 여야의 합의가 필 요한데, 안철수에겐 국회의원 한 사람도 진영에 없다. (2012.10.9 현재 민주당 송호창이 합세해서 1인이 되었다. 이게 본격적인 현역 의원 빼기의 시발점이 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 또한 지지율에 따라 변동될 부분이기 때문이다.) 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210/h2012100914463421060.htm 진정한 힘을 보여주려면 안철수 진영은 지금부터 헤쳐 모여 구호를 외쳐야 한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이건 참 애매모호하다. 자신의 뜻에 따르는 정치력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치력을 집중해야 한다. 전혀 생각이 없

페이지396 는 모양새다. 공수처가 모든 일의 출발은 아니다. 이것도 엄격하게는 정치개혁의 한 주제어에 속한다는 논리를 꺼내면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명박 정권의 모든 힘은 검 찰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들은 언제든지 이 정권이 저질러둔 쓰레기 를 아주 교묘하게 물타기를 하건 아니면 기소권을 남용하건, 기소독점주의를 사 용하건, 그도 아니면 수사 단계부터 무소불위 권력을 사용하건 간에 무산 시킬 수 있는 개연성이 높다. 이 처리도 못하는데 무슨 놈의 개혁을 말할 수 있는가. 그러니 저런 부탁과 요청이 자꾸 나온다. 대중의 입장에서는 이 말이 시원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건 립서비스에 그칠 수 있다는 사실까지 온전하게 전달했어야만 한다. 구호를 외치는 수준은 지금까지 너무 오래 반복되었다. 공수처 이야기는 문재인의 입에서도 나왔지만 심지어 이재오도 그 말은 했다. 입 은 누구나 뗄 수 있는 것이고, 그 진짜 실행에 들어가면 열린우리당 시절 공수처 는 왜 좌절이 되었겠는가! 어차피 민주당과 문재인은 그 원죄에서 자유로운 사람 들이 아니다. 그럼 새누리당은 어떤가? 여기는 당시 공수처 반대의 선봉에 섰던 사람들의 계 모임이다. 왜 새누리당에 검찰출신이 저렇게 많은지는 앞서도 설명 했지만, 이들간의 유착은 새누리가 야당시절이라고 해서 사라졌던 적이 없다. 특 히 박근혜의 경우엔 아직 공수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 부패척결을 위한 특 별감찰관제 와 상설특검제 수준에서 그쳤다. 상설특검제 방안은 검찰이 공수처를 막기 위해 냈던 방안이었다. 물론 공수처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 그에 대한 발 언도 나올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현 상태에서 어떻게 공수처가 가능하겠는가 생 각하게 된다.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노무현 정권이 삼성과 유착관계가 있었음은 이젠 익히 잘 알려져 굳이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 참여정부 당시 내었던 고비처 방안마저도 문재인은 이것이 한나라당, 검찰의 반대 때문에 무산되었다고 (변명 을) 하지만 실상은 그에 다르다. 삼성 비자금 의혹 사건 특검이 거론되던 2007 년 당시 청와대는 삼성특검법과 공수처법을 연계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지냈던 이용철조차 청와대가 삼성에게 약점을 잡혀서 그런 것 같 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특검과 공수처법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두 가지 정치 이슈를 연결시키는 것은 납득이 안 가는 방식 이라고 했을 정도다. 그 때도 검찰은 특별수사 감찰본부 를 운운했다. 믿고 기댈 곳이 없단 소리고 금력에 대 한 부분이 여기서도 작동된다는 걸 말한다. 나는 아직도 김준규 전 검찰총장이 2010.5.12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연수 원생을 대상으로 특강을 빙자하면서 의도적으로 했던 그 발언을 잊지 않는다. 공 수처를 절대 반대하던 그는 사표를 던졌다. "검찰의 권한이 많으니까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있는데 (검찰)권력을 나눈다든가

페이지397 새 권력을 입히든지 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견제는 권력의 원천인 국민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고, 지금 수행하는 (검찰의) 권력과 권한에 국민의 견제가 들어가 는 것이 맞다. ('스폰서 검사' 파문과 관련) 추한 모습이 비춰진 것이 참으로 안 타깝다. (그러나) 검찰만큼 깨끗한 데가 어디있느냐. 검찰이 힘이 있다 보니 나무 가 크고 넝쿨과 잡초가 많이 끼었다. 나무를 고사시키는 단계까지 왔는데 방법은 넝쿨 밑둥만 잘라 버리면 된다. 검찰총장 취임 후 변모(transform)를 많이 했는 데 이제는 '다시 태어난다(reborn)고 해야겠다. (검사들이) 문화개혁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되고 주체가 돼야 한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00513034140498 너도 나도 입만 떼면 국민 이야기를 한다. 그 놈의 국민, 참 잘 팔린다. 현실은 이렇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천적인 방안을 내놓고 들어가야 한다. 공수 처라는 것-그 명칭이 어떻건 간에-일단 국회의원이 이 공수처의 수사대상에 들 어가지 않으면 검찰은 절대 이 방안을 받지 않는다. 그것이 차기 정권이 누가 되 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일본의 검찰심사회니 미국 연방대배심처럼 견제하 는 역할만 설정하고, 그것마저도 통제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것이란 건 삼척동자 도 뻔히 안다. 고삐가 길면 잡힌다. 보통의 경우에는 나쁜 일 오랫동안 하면 들키고 부끄러워할 줄 안다. 그러나 이 무소불위 검찰권력은 그런 걸 모른다. 이 조직을 보편적 상식으로 접근해서 다룬 다고 자꾸 구호만 외치면 그건 나는 그냥 껍데기만 알고 있소! 라고 선전하는 것 밖엔 안 된다. 진짜 방안을 내놓기를 바란다. 안철수건, 문재인이건. 그리고 아직도 공수처 방안을 내놓지 않는 박근혜도 마찬가지다. 그게 없다면 이번 대선 은 정말 서커스판의 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될 것이다.

페이지398 2012 시대의 민낯 제 10 부 (2012.10.8~2012.10.10) 담담당당 <시대의 민낯> 마지막 편을 시작한다. 이 10부가 끝난 후에는 새로운 이름의 시 리즈가 이어진다. 나도 시리즈의 끝이 어딘지를 모르겠다. 10월말부터 본격적으로 문재인-안철수 단일화 협상도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이런 액션의 의미를 안다.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돌아오게 될 비난을 안다. 그것은 비판이 아니기 때문에 협상은 서로 치열하게 명분을 뽑아내 는 작업을 해야 한다. 진정한 비판은 그들 간의 협의 가운데서 터져 나올 건 뻔 하다. 안철수가 전제로 내건 정치개혁 은 단순하지 않다는 건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그에 민주통합당 내부의 갈등이 완전히 봉합된 것도 아니다. 친노 노선과의 본질적인 갈등구조는 문재인만 안고 있는 불씨가 아니다. 안철수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관건은 안철수를 지지하는 세력과 문재인의 배후 간에는 분명 성격이 다른 존재 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접합이 불가능함을 뜻한다. 하나에 하나를 더 한다고 해서 결코 둘이 되기는 어려운 바로 그 난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 관점의 싸움이 시작될 듯하다. 민낯 시리즈는 현 시점 봐야 하는 문제들을 한 치 더 깊이 보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이야기를 남은 10편 속에 담아 보도록 한다. 다음 시리즈에서는 여기마저도 정리 못한 이야기, 여기서 다뤘으나 좀 더 깊이 실상을 다루어야 하는 주제들을 다룰 것이다. 1. 트적질, 생트집, 구해( 構 害 ) 2. 칼로 찌르고 침 놨다 하면 3. 공휴일과 역사 4. 거대담론으로 욕보이기 5. 쪽박과 벼락 6. 떡 만드는 법이 통일하는 법이지. 7. 쥐 구멍에 홍살문 세우기 8. 산 호랑이 눈썹 달라나 9. 숫자로 보는 대선 세부 방정식 (1) 10. 숫자로 보는 대선 세부 방정식 (2)

페이지399 1. 트적질, 생트집, 구해( 構 害 ) 각인 / 배한봉 이름부터 아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장수풍뎅이, 각시붕어, 닭의장풀꽃 사는 법 알면 사랑하게 되는 줄 알았다 아이는 한 송이 풀꽃을 보고 갈길 잊고 앉아 예쁘네 너무 예뻐, 연발한다 이름 몰라도 가슴은 사랑으로 가득 차 어루만지지도 못하고 눈빛만 빛내고 있다 사랑은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임을 내게 가르쳐 주고 있다 헛것만 가득한 내게 봄을 열어주고 있다 깨닫느니, 느낌도 없이 이름부터 외우는 것은 아니다, 사랑 아니다 생각보다 먼저 마음이 가 닿는 사랑 놀람과 신비와 경이가 나를 막막하게 하는 사랑 아름다움에 빠져 온몸 아프고 너를 향해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때 사랑은 웅숭깊어 지는 것이다 이름도 사랑 속에 또렷이 새겨지는 것이다 덮어놓고 이의를 내세우는 걸 트집잡는다 고 한다. 여기도 종류가 있다. 조그만 흠집을 들춰내는 것과 아예 흠집을 만들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대체로 전 자가 많지만 후자도 심심치 않게 트집 거는 경우엔 생긴다. 까닭도 없이 트집 잡 는 걸 생트집이라고 하는데 좀 어렵지만 트집을 잡아 상대를 해친다는 뜻으로 구해( 構 害 )하다는 말도 있다. 트집 부리는 짓을 트적질 이라고도 한다.

페이지400 누군가와 토론을 시작할 때, 이 트집 이란 단어처럼 상대를 자극하며 토론을 막는 경우도 흔치 않다. 그래서 괜한 트집 이라고 해버리면 도대체 문제가 뭔지 따져보기도 전에 서로 이야깃거리가 없어져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과연 건설 적인 토론에서 이 단어가 왜 필요할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좋은 말로 이걸 신경 전 이라고도 하지만 글쎄, 정치판에서 흔히 나오는 식으로 한쪽은 정치쇼 라고 하 고 다른 쪽은 트집잡기 라고 맞받아치는 것이 과연 제대로 정치하는 모습일까? 이런 경향은 언론에서 가장 강하게 볼 수 있다. 이미 대선 레이스에서 논조를 정 한 언론-특히 신문과 인터넷 매체 등-은 매일 나오는 기사마다 트집 이란 단어 를 거의 달고 산다. 이건 뭐 특별히 기사를 쓸 필요가 없다. 그냥 흠결( 欠 缺 ) 하 나를 잡았다 생각되면 그것으로 쭉 이어서 글을 써내려 가면 된다. 신문이나 포 털에 들어가서 한 번 그 날의 신문을 보길 바란다. 기사의 논조가 비판이 아니라 트집에 집중된 날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런 걸 기사라고 읽고 있는 사람 도 한심하지만, 문제는 이런 글을 계속 읽다 보면 중독이 된다는 점이다. 아이들 에게 이런 걸 토론이라고 가르쳐주고 싶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이건 정상적인 형태의 논의나 토론, 혹은 서로 간을 존중하는 의사표현의 방식은 아니다. 그 중독이 얼마나 강한가 하면, 인터넷의 댓글에선 약간만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그 즉시 나오는 말이 트집 운운이다. 그래서 인터넷의 토론문화는 이런 단어가 아니라 의식 속에서 황폐화 되어 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 하나가 생긴다. 상대가 처음부터 정말 트집잡기 로 일관하는 경우다. 시비( 是 非 )를 가리자고 하면서 낯 뜨겁게 육두문자를 써가면서 비난을 하기 어려울 경우는 아주 지능적인 흉내를 내면서 이 트집잡기 수법을 쓰는 예들 이 많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뭘 (말, 행동, 태도, 답 등을) 해도 트집을 잡는다 는 하소연이다. 정말 이것이 토론일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 후후 웃음이 나오는 장면에서 나는 사람의 언어가 무척이나 보잘것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스로 귀한 말을 귀하지 않게 취급해버리니 말이다. 트집잡는 행위는 네거티브와 직결된다. 일단 흠( 欠 )을 가지고 거론하기에 그것이 정도가 미약하건 아니건 관계하지 않을 때, 혹은 아예 만들어낸 트집거리로 일관 할 때는 아주 독한 네거티브 방식이 된다. 그래서 이런 류를 하지 말자고 말해도 결국 논쟁도 아니고 언쟁 수준의 주고 받는 대화가 이어지면 바로 격렬한 네거티 브로 번지게 된다. 이 점에서 트집잡는 건 비판이 아니라 비난 수준에서 보는 게 적당하다. 조선의 역사에서도 이런 사례는 찾을 수 있다.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후반 사 이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대결에서 기득권인 훈구파 세력이 개혁노선을 들고 나 온 사림파를 상대한 방법은 주로 비정상적이고 치졸한 방법의 방어였다는 평가가 내려진다. 그것이 일종의 매카시즘적인 트집잡기(사상적 검증을 포함한)이었는데,

페이지401 그 대표적인 사례가 사림파 성리학자였던 김종직( 金 宗 直 )의 조의제문 ( 弔 義 帝 文 ) 사건일 것이다. 이 글은 항우에게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초나라 회왕( 義 帝 )을 추모하는 내용이었는데, 1492년 그가 죽은 지 6년 후에서야 이것이 세조 왕위 찬탈을 비꼬는 내용이며 왕조의 정통성을 부인한다는 명분으로 무오사화( 戊 午 史 禍 )가 벌어져 부관참시( 剖 棺 斬 屍 )까지 당하게 된 사건이었다. 트집은 이처럼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서는 아주 지독한 사상검증이나 혹은 시대정 신의 배반으로 몰고 가는 매카시즘적인 성향을 띠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현실 속에 직면하는 대부분의 트집잡기는 저러한 거대 담론에 미치는 걸 구경하 기란 쉽지가 않다. 차라리 그 정도라도 주제가 되면 좋겠단 생각 들 때도 있다. 영어로 보니 트집쟁이는 대체로 carper, caviler, faultfinder, ankle biter, fusspot, nitpicker 등이 사용되는 듯한데, carper의 경우에는 someone who constantly criticizes in a petty way 으로 하찮게 계속 비판하는 것이나 비판을 위한 비판 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오늘 당신이 보는 언론의 논조에서 트집쟁이 를 가리는 작업을 해보길 바란다. 물론 트집이 아닌 것을 고르는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 구분법이 마음 갑갑함 을 조금은 해소시켜줄지 모르겠다. 내 각담이 아니면 아니면 내 쇠뿔 부러지랴 자기 잘못으로 생긴 손해를 남에게 넘겨 씌우려는 트집 잡는 걸 표현하는 속담을 찾아본다. 아마도 트집 가운데 이 정도면 적반하장 트집 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 면 오십보백보 트집 이라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것도 많이 눈에 띈다. 때 묻기 쉽지 않은 게 인생이라지만 혀 아래 도끼 들었다 는 속담도 번뜩 생각 나기도 한다. 선거판의 저 야멸찬 트집의 행렬을 보면서 다가온 격언 한 마디다. 이제라도 품격을 좀 높이면 어떨는지! 2. 칼로 찌르고 침 놨다 하면 쉬 /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페이지402 생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 몸,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헀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끼리끼리 라는 단어는 기본이 정치적이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 은 일단 정치적 해법을 근간으로 하고 있어서다. 이들은 일단 여럿이 모인 무리 라서 그들 간에 벌어지는 일은 그들 소관이라 여긴다. 문제는 이 끼리끼리 의 범위다. [국감] 심재권 외교부 감사원, 외교행낭서 거액의 달러뭉치 발견 은폐 http://news.nate.com/view/20121005n10996?mid=n0207 아마 이 기사를 읽어보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도대체 이 돈의 주인이 누구였을 까 할 것이지만, 이게 외교행낭으로 들어온 돈이란 점에서 주인은 당연히 국가 가 된다. 공무원이 사용하는 모든 공식적인 돈은 세금이란 의미다. 그런데 그걸 두꺼운 책을 파고 넣었다. 한 두 권도 아니고. 그걸 발견하고도 감사원은 눈 감았 다? 그럼 이 끼리끼리 는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런 짝짜꿍이하는 사건을 보고 나면 뭔가 사람이 자꾸 멍청해진다. 생각이 엉켜 서 그렇다. 이런 것을 기득권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공식적인 국가범죄라고 불 러야 하나 그 명칭부터 헷갈리기 시작한다. 더 우스운 건 이 일이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가 내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개인적인 패배주의를 느끼는 것과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국민이 패배주의 적 감상에 빠지는 건 다르다. 이것은 사회가 약속한 바탕 자체를 완전히, 처음부 터 끝까지 어긴 일이다. 그런데 아무도 분노하지 않는다. 마치 어느 길거리에 박 힌 경계석 하나가 부숴졌는데 그걸 치울 사람은 구청직원이지 내가 아닌 것처럼 그렇게 취급한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는 사이에 이 정도의 일은 막을 수 있

페이지403 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국부( 國 富 )를 다 털어먹는 것도 방관하고 만다. 뭐, 개인은 그럴 수 있다. 우선 그에 관여할 힘도 없고, 책임이니 의무니 따지는 것보다 개입 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해버린다. 그 바탕에는 최소한 국가라는 시스템이 이 정도 는 커버하겠지 하는 안일함이 있거나 아니면 우리 사회가 이 정도 일은 그냥 껌 값이잖아 라는 둔감함이 숨겨져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걸 적발한 곳이 감사원 이란 곳이다. 그거 한 번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감사원은 헌법에 의해 그 설치가 지정되고 권한을 받은 헌법기관이다. 국가의 세 입, 세출의 결산, 국가 및 법률이 정한 단체의 회계검사와 행정기관 및 공무원의 직무에 관한 감찰을 하기 위하여 대통령 소속 하에 감사원을 둔다,(제97조) 감사 원은 세입,세출의 결산을 매년 검사하여 대통령과 차년도 국회에 그 결과를 보고 하여야 한다(제99조)로 기능이 정해진 곳이다. 그래서 행정부에 속해있지도 않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에게 소속된 독립기관이다. 한 마디로 국가의 세입 세출에 대한 감사 기능을 가진 곳인 이곳에 대한 직무 책 임은 감사원장 한 사람에게 있을까? 감사원장은 국회비준을 거쳐야 하고, 대우도 부총리급으로 하는 대통령-총리-부총리라는 직제상으로만 봐서는 3인자 급에 해당한다. 그만한 권한이 주어진 만큼 책임도 막중한 자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007 영화에서나 볼 듯한 달러 뭉치돈이 그것도 외교행낭(파우치)를 통해 들어온 걸 발견하고도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