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비평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비평&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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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며 종교에 관심이 꽤 있는 편이고, 오직 예수님만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이다. 교수님께서 고전 두 권을 소개하시며 한 권을 골라 과제를 하라고 하셨을 때에도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택하였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제목을 보고는 기독교를 다루는 내용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어 흥미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열어 저자의 서문을 읽어 보고는 ‘저자가 하나님을 충분히 알만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믿지 못하고 죽어버렸다면 지옥에서 고통스럽게 지낼 텐데 정말 안타깝다.’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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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행한 1927년에 행한 강연,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 대한 요약과 평가이다. 국내에는 동일한 제목으로 여러 편의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는 책들이 출판되어 있지만, 본 리뷰는 그 책 전체가 아닌, 한 강연에 대한 것임을 밝혀둔다. 

출처: Russell, Bertrand: Why I am not a Christian and Other Essays on Religion and Related Subjects, Routledge, 1~19


요약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

기독교인이란 무엇인가What is Christian

기독교인이란 단순히 선량한 사람이 아닌, 두 개의 조항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첫째, 하나님의 존재와 불멸을 믿을 것, 둘째,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믿음'을 가질 것. 

따라서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불멸, 그리스도를 가장 높은 도덕적 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 외의 것, 예를 들어, '지옥'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The Existence of God

가톨릭 교회는 이성으로 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논해왔다. 이하는 그 증명법들 중 대표적인 것들이다.

제일원인 신존재 증명The First Cause Argument

만물에는 원인이 있고, 제일원인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 바로 제일원인 신존재 증명이다. 그러나 나는 어릴 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었다. '신은 누가 만들었는가?'(Who made God?). 모든 것에 원인이 있어야 한다면, 신에게도 원인이 있어야 한다. 제일원인 신존재 증명은, 마치 세계가 코끼리의 등에 떠받쳐 있고, 코끼리는 거북이의 등에 떠받쳐 있다고 주장하는 힌두교도에게 '그렇다면 거북이는?' 이라고 물었는데, 화제를 돌린다는 것과 같다. 

"세계가 시작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대상에 시작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사실 우리의 상상력의 빈곤으로 인한 것이다."(There is no reason to suppose that the world had a beginning at all. The idea that things must have a beginning is really due to the poverty of our imagination.)

자연법칙 신존재 증명The Natural Law Argument

뉴턴 이후 그리고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우주에는 질서 혹은 법칙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몇 가지 지적할 것이 있다. 먼저, '자연법칙'이라고 여겨지는 것 중, 많은 것은 실제로는 "통계적 평균들"(statistical averages)이다. 그리고 자연법칙은 인간법칙(Human laws)을 혼동해선 안 된다. 인간법칙은 당위와 금지를 인간에게 명령하고 인간은 그것을 지키거나 지키지 않을 자유가 있지만, 자연법칙은 사물에 대한 명령이 아니라, 단순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기술(description)에 불과하다.

혹여나 만약 신이 자연법칙을 만들었다 할지라도, 왜 신은 그러한 자연법칙을 만들었는지 대답하기 어렵다. '그의 기쁘신 뜻'에 따른 것이라면, 자연법칙은 일관성을 잃게 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신이 자연법칙에 종속된다.

설계에 의한 신존재 증명The Argument of From Design

우주는 우리가 살아가기에 적합하게 설계되었다는 논증이 있다. 그러나 볼테르가 풍자하였듯, 이 논증은 코가 안경을 끼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졌다는 것과 같다. 다윈 이후 생물이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 우주에는 엄청난 결함들이 많다. 과연 이것을 전지전능한 신의 수백만년(millions of years, 비록 러셀은 현대 학문적 의미에서 우주나 지구의 나이, 생명의 기원과 진화의 기간에 대해서는 정확한 지식을 갖지 못했던 것 같지만 의미는 정확하게 전달된다-서평가주)에 걸친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도덕적 신존재 증명The Moral Argument for Deity

도덕적 신존재 증명은 임마누엘 칸트가 개발한 것이다. 선악의 구별은 신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명령이 곧 선이라면 선악 구별의 의미는 상실된다. 만약 선악 구별이 본질적이라면, 신보다 선행하는 것이 된다. (물론 세계를 만든 신 위의 상위의 신이 있다는 그노시스파의 입장도 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이 세계는 신이 보지 않는 사이 사실상 악마가 만든 것이 된다.)

불의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신존재 증명The Argument for the remedying of injustice

이 세계는 불의하고, 이 세계에 대한 정의가 있기 위해서는 신이 있어야 한다는 논증이 있다. 즉, 내세가 있어야 온전한 정의를 희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이상하다. 우리는 현재 존재하는 우주만을 관찰한다. 그리고 만약 현재가 좋지 않으니 나중이 좋을 것이라는 결론이 날 수는 없다. 과학적, 논리적 관찰은 오히려 정 반대로 세계에 불공정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이 세계에는 정의가 없다(Here we find in this world a great deal of injustice and so far as that goes that is a reason for supposing that justice does not rule in the world)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스도의 인격The character of Christ

다음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는 가장 선하고 가장 지혜로운 인물이었나?'(whether Christ was the best and the wisest of men)

우선, 그리스도의 훌륭한 교훈은 그리스도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이전에 노자나 석가가 주었다. 그리고 한편, 그리스도의 교훈을 문자적으로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적다. 오른 뺨을 치면 왼 뺨을 돌려대라는 것을 현 수상(Prime Minister, 스탠리 볼드윈)이 지킬까? 심판받지 않으려면 심판하지 말라는 말을 법원들이 지킬 수 있을까? 구하는 자에게 주고 거절하지 말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시행될 수 있을까? 나 자신조차 지킬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 않지만 훌륭한 교훈인,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는 것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이 있을까?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결점들Defects in Christ's teaching

비록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최고의 선, 최고의 지혜는 아니다. 비록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는지 의심스럽지만(Historically it is quite doubtful whether Christ ever existed at all), 그것은 제쳐두겠다. 나는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말하겠다.

그리스도는 자신과 함께 사는 자들이 죽기 전, 자신의 재림을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초기 제자들의 믿음이자 그리스도의 교훈의 바탕이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급진적 교훈은 이러한 주장 위에 서 있다. 그러한 재림에 대한 주장은 '현명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도덕적 문제The Moral problem

그리스도는 지옥을 믿었다. 인간적(humane)인 사람이라면 결코 영원한 형벌인 지옥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매우 강렬한 어투로 몇 번이고 강조했다. 소크라테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다. 그리고 그의 형벌에 대한 어투에는 일종의 통쾌감(a certain pleasure)도 수반되어 있다. 즉, 지옥에 대한 가르침은 이 세계에 잔인을 퍼트렸다. 이 세계의 잔인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 

그리고 악마를 돼지 떼에게 보낸 이야기,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이야기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감정의 요소The Emotional factor

사람들은 이성보다는 감정으로 인해 종교를 긍정한다. 종교가 사람을 선하게 만들어준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기독교가 없으면 사람들은 악하게 된다는 주장이 있지만, 정작 그런 주장을 고수한 사람들은 지독한 악인들이었던 것 같다.(It seems to me that the people who have held to it have been for the most part extremely wicked.) 즉, 교리에 사로잡힌 자들일 수록 종교재판, 마녀사냥에 열을 냈다. 수많은 사람이 종교의 이름으로 억울하게 죽었다.

또한 교회는 세상의 진보들, 인종 차별 문제, 형법 개선 문제, 전쟁 반대 문제, 노예 제도 문제 등에 늘 방해가 되었다.

교회들은 어떻게 진보를 지체시켰는가How the churches have retarded progress

낙태를 실례로 들어보자. 어느 한 여성이 자신도 모른 채 매독 환자 남성과 결혼하여 임신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교회는 그녀가 매독에 걸린 아이를 무조건 낳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는 자연스러운 동정심이 교리로 인해 마비된 가르침이다. "나는 이것을 악마같은 잔인함이라고 말하고자 한다".(I say that that is fiendish cruelty)

이것은 하나의 실례다. 교회는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죄없는 사람들에게 불필요하는 고통을 주고 있다. 교회가 하고 있는 일은 모든 방면의 진보와 개선을 가로막는 것이다. 

종교의 기반으로서 공포Fear, The Foundation of religion

종교는 공포에 기반을 둔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무언가가 힘이 되어줄것이라는 막연한 공포에 대한 반작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들은 각각 신비의 공포, 패배의 공포, 죽음의 공포(fear of the mysterious, fear of defeat, fear of death)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이것들은 교회가 맞선 과학에 의해 서서히 극복되고 있다. 과학은 하늘이나 상상의 동맹자가 아닌 우리 스스로 노력할 수 있게 만든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What we must do

신이라는 개념은 동양의 전제주의에서 나온 것이며 자유인인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죄인이니 하면서 스스로를 비하하지 말고,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또한 최선을 다해 세계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 좋은 세계를 위해 필요한 것은 지식, 친절, 용기다(A good world needs knowledge, kindliness, and courage). 


평가

러셀의 비판은 전통 교회에 대한 것으로 충분히 받아들일만하다. 러셀은 이 강연 외에 여러 강연이나 에세이를 통해 종교에 대하여 비판했다. 특히 러셀의 가장 핵심적인 비판서는 <종교와 과학>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의 리뷰를 참고하라.

https://science-infuse.tistory.com/341

https://science-infuse.tistory.com/363

러셀이나 기타 철학자들의 종교 비판은 언제나 전통 교회의 입장에 대한 것이다. 비록 그것이 상대하기 쉽고, 또한 대표적인 입장으로 여겨지기에 비판하기 편리하지만, 교회를 발전시켜오는 신학은 적어도 러셀의 비판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자세하게 교회를 비판해왔다는 것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 

러셀은 다른 강연인, "종교는 문명에 유익한 공헌을 했는가?(Has religion made useful contributions to civilisation?)의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류는 황금기의 문턱에 도달했다. 그러나 먼저 문을 지키고 있는 용을 죽여야 한다. 그 용이란 바로 종교다." (It is possible that mankind is on the threshold of a golden age; but, if so, it will be necessary first to slay the dragon that guards the door, and this dragon is religion.)

하지만 종교와 종교인 그리고 종교 단체는 언제나 문명과 상호작용을 했다. 문명을 설명하는 방식이기도 했으며, 문명을 일으킨 것이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종교가 도덕적 차원에서 철학적 성찰에 비해 뒤늦지만, 그럼에도 뒤늦게 따라간 도덕을 언제나 일반인들에게 촉구하여 지키게 만드는 집단이기도 하다. 그리고 교회가 갖고 있는 신학이라는 학문은 전통을 변증하는 무리에게만 할당된 것이 아니라, 교회를 가장 정확하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지성인에게도 할당된 것도 사실이다. 

또한 세계 해석이라는 차원에서 모든 세계 해석이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듯, 종교도 그러한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 윤리이며, 또한 신학의 제자리, 그리고 교회의 정상화를 위한 쇄신 등일 것이다. 물리쳐야 할 용은 러셀이 비판한 무지나 잔인성과 같은 것으로, 그것은 종교 역시도 싸우고 물리쳐야 할 용으로 인식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러셀과 같은 비판은 신학적 반성을 하지 못하는 모든 교회에 유용할 것이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비평
2004년 Routledge에서 재출간 된 러셀의 원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비평
사회평론에 나온 전체 완역판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비평
범우사에서 나온 일부 번역(전자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