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왜 청춘 이 아니란 말인가

 정신노동자이자 활동가인 인문학자 엄기호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서 지난 2년간 덕성여대와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학생들과 함께 쓰고 토론하고 강의한 내용을 담았다. 지금의 대학생들이 세상, 즉 정치와 경제, 가족과 연애, 돈과 소비, 때로는 생명에 대해 어떻게 경험하고 어떤 언어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공유한 지적 대화의 기록으로 이것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시대,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부 ‘어쨌거나 고군분투’에서는 지성인에서 잉여가 된 대학생, 대학 서열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우리 사회의 대학생의 현실을 드러고 2부 ‘뒷문으로 성장하다’에서는 교육, 대학, 민주주의, 돈, 사랑, 가족 등과 맞닥뜨리면서 쌓아온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20대들이 가장 치밀하고 가장 속 깊게 그린 삶의 세밀화로 그동안 20대를 ‘위한’, 20대에 ‘대한’ 담론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이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이자,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사회가 이들과 함께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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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노동자이자 활동가인 인문학자 엄기호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서 지난 2년간 덕성여대와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학생들과 함께 쓰고 토론하고 강의한 내용을 담았다. 지금의 대학생들이 세상, 즉 정치와 경제, 가족과 연애, 돈과 소비, 때로는 생명에 대해 어떻게 경험하고 어떤 언어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공유한 지적 대화의 기록으로 이것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시대,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부 ‘어쨌거나 고군분투’에서는 지성인에서 잉여가 된 대학생, 대학 서열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우리 사회의 대학생의 현실을 드러고 2부 ‘뒷문으로 성장하다’에서는 교육, 대학, 민주주의, 돈, 사랑, 가족 등과 맞닥뜨리면서 쌓아온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20대들이 가장 치밀하고 가장 속 깊게 그린 삶의 세밀화로 그동안 20대를 ‘위한’, 20대에 ‘대한’ 담론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이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이자,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사회가 이들과 함께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著者について

 울산에서 나고 자랐다. 초등학교 때 폭력적이고 부패한 교사를 만나 교육과 학교에 대한 문제의식에 눈떴다. 전교협 해직교사들의 편지글 모음인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에게》를 중학교 때 읽으며 다른 교육의 가능성을 갈망하게 되었다. 사회학과에 진학하였지만 학부 시절에는 거의 공부를 하지 않고 가톨릭학생회 동아리 활동에 푹 빠져 있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고서야 공부를 시작하였지만 곧 국제단체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국제가톨릭학생운동 아시아?태평양 사무국에 나갔다. 당시 한창 달아오른 반세계화 현장에 참가하며 주로 대학생들의 사회의식을 고양하는 양성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했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하자센터에서 글로벌학교 팀장을 하고 늦은 공부를 마무리하기 위해 문화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가 신자유주의와 청년 하위문화를 주로 연구하였다. 돌아보면 늘 교육의 언저리에서 살아온 셈이다.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의 페다고지를 만드는 것을 삶의 화두로 삼고 있다. 2013년 박사학위를 마치고 현재는 덕성여대 겸임교수, ‘교육공동체 벗’에서 발간하는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을 하고 있다. 저서로 《닥쳐라, 세계화!》(2008),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2009),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2010),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2011)를 냈고, 이 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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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읽고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은 ‘그래서! 20대인 나는, 청춘인 나는 어떻게 대처하란 말이지?’였다. 책의 저자는 이 시대 ‘대학생(청춘)’들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들춰 내고 있다. 처음에는 그 까발림이 무척 반가웠다. 우리와 같은 처지도 아닌 어른이 우리의 상황과 생각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를‘인간이 빛나던 위대한 시대’라고 추억하고 있는 386세대들의 눈에 오늘날의 대학생은 그저 자기 이익에만 사로잡힌 보수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비춰지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청춘이 이렇게도 보잘것없을 수 있느냐?”며 비난하기 일쑤다. 그러나 이 시대의 청춘들이 어떻게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맨 꼭대기만 살아남는 구조에서 한 번도 제대로 셈이 되어본 적이 없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의 ‘까발림’은 더욱 신선하고 반갑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네 청춘의 환경을 분석했을 뿐, 여전히 명쾌한 답을 제시해 주지는 않고 있어서 답답했다. 이제 겨우 스물 하나인 나는 세상을 마주하는 게 아직은 버거운 나이다. 그래서 내가 직면한, 그리고 직면할 문제들을 아무런 해결책 없이 던져만 놓은 것이 불안하고 불편했다.


  그나마 희망을 갖게 된 것은 마지막 장에 덧붙인 글쓴이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교실이 불가능해지고 있는이시대에 교실에서 무엇을 하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 역시 교실에서 가능성을 찾고싶다.교실이 불가능해서, ‘그래서’ 절망하며 교실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실에서 제대로 된 진리의 공간을 만들자는 말에 공감한다. 대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결코 대학을 떠나지 않는, 떠나지 않음으로써 죽은 대학에 저항하는 청춘이 있는 한 우리의 교실은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곳에서 가능함을 상연하는’, 나도 그런 청춘이길 원한다.


조효정 (컴퓨터학부·3)

조효정 학생에 대한 멘토평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汽罐) 같이 힘 있다(…후략…)”. 민태원은 <청춘 예찬>에서 ‘청춘’을 이처럼 감격에 겨운 어조로 표현하였다. 그는 일제강점이라는 절망 속에서도 청춘의 정열과 이상, 그리고 건강한 육체를 예찬하며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민족의 수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기대감을 역설하였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의 기성세대는 이른바 ‘88만 원 세대’로 불리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무어라 말하며 힘을 북돋워 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성장’에 대한 신화와 강요 속에서 스스로를 한심한 존재로 여긴 채 절망에 빠져 있는 이 시대의 청춘에게 “그 정도면 너흰 괜찮아.”라고 다독인다. 이 책에 따르면 현실은 ‘성장’이라는 언어의 이데올로기로 20대 청춘들을 ‘포획’하고 있는 부정적 산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성세대의 시각과 논리에 따른 것이다. 조효정 양 역시 이 점을 간파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의 저자가 청춘들의 처지와 상황·기분 등을 이해하고 그 내면의 아픔을 하나하나 ‘까발려’주는 것에 반가워 한다. 그렇다. 이 책은 ‘대학·정치(민주주의)·교육·가족·사랑·소비·돈·열정’등 20대의 삶과 직결된 문제들에 대해 눈높이를 같이하고 있다. ‘요즘 애들은……’으로 시작하는 잔소리(?)가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공감하는 것에 이 책의 미덕이 있는 것이다. 물론 효정 양의 말처럼 이 책을 통해 ‘명쾌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그래서 오히려 불안하고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답은 어차피 스스로가 찾아야 하는 것! 그리고 효정 양은 이미 그 답을 찾았다. ‘여전히 교실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 깨달음이야말로 답이 아니겠는가.


차봉준 (베어드학부대학 교수)

조효정 (컴퓨터학부·3), 차봉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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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독후감을 쓰기위한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가는 길에 계속 생각했다. 무슨 과를 가서 어느 직업을 선택해야 할지를 말이다. 대세를 따라 경제학과에 가서 회계사 시험을 봐야하나, 아니면 절친한 친구처럼 행정고시를 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하나….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고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그와 비교하여 1학년이 끝나가는 시점인 지금까지도 적성도 흥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내가 한심스러웠다. 1년을, 아니 어떻게 보면 21년을 ‘잉여짓’을 하며 ‘삽질’했다는 생각에 괴로웠던 나에게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의 저자, 엄기호는 내가 한심하지 않다며 토닥여줬다. 왠지 모르게 참 안심이 되고 눈물이 핑 도는 위로였다.

책의 저자는 내가 날 한심하게 여겼던 것은 그다지 한심한 축에도 안 낀다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우선, 저자는 자신이 가르쳤던 연세대 원주캠퍼스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소위 ‘원세대’ 학생들은 졸업 후 더 좋은 대접을 받기위해, 더 유리한 위치에 놓여있는 것 같은 신촌캠퍼스의 학생이 되기 위해 경쟁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현재 그들의 소속을 부정해야 하기에 상당한 괴로움을 겪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괜한 엄살을 피운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학처장님의 말마따나 나는 전국 1.5 퍼센트의 수재들만 다닌다는 성균관 대학교의 학생 중 하나니깐 말이다. 원주 캠퍼스의 학생들은 성대에 다니는 내가 더 좋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까? 나는 여전히 연대, 고대생들이 부럽고, 그들한테 밑지는 위치에 있다고 은연중에 느끼는데 말이다. 나와 내 동기들은 연, 고대생들을 향한 일종의 열등감으로 성대가 ‘오버더스카이’를 하였다며 곧잘 말하곤 했지만, 그랬던 동기들 중에도 꽤 많은 친구들이 반수를 하여 성대를 떠나갔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연대, 고대생들이라고 서울대생 안 부러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대 인문학부에 재학 중인 친구가 경영학과 동기를 부러워하고 복수전공을 다짐했던 것까지 기억나자 우리 세대는 어느 위치에 있건, 더 나아 보이는 위치에 올라서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참으로 피곤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 경쟁 속에서는 어떤 지위를 쟁취하자마자 다시금 미래에 대한 걱정 하에 피곤한 원점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피곤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책의 전반에서 저자는 우리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철딱서니”에 불과하다는 기성세대에게, 우리를 비판하기에 앞서 우리를 이해하여야 한다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처해있는 시대적, 환경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도 지적하듯이 내가 속해있는 현 20대는 어려서부터 무한경쟁을 겪어온 세대이다. 하지만, 이러한 무한 경쟁을 계속하여 허용하는 경우, 무한 경쟁의 특성상, 경쟁이 끝난 후에도 경쟁의 패자들은 패자끼리 끊임없는 개미지옥의 경쟁을 계속해야한다. 또한, 경쟁의 승리자들 역시 새로운 강력한 경쟁자의 출현이나 패자들이 연대형식으로 공격하는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하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다. 무한경쟁 사회에서는 패자들과 승자들이 불필요하게 계속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쟁이 이처럼 무한히 확산되고 반복되면 사회적 갈등이라는 기회비용이 초래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회적 화합을 도모하는 비용은 누구도 무한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무한경쟁의 한계로 인해 끊임없이 누적되어 발생하게 된다. 무한경쟁의 이러한 엄청난 기회비용을 고려하면 무한경쟁을 완화시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해 보인다.

아직까지는 20대가 뭉쳐 한 목소리를 내기 보다는 뿔뿔이 흩어져서 소위 스펙을 쌓는데 여념이 없다. 겨울방학을 맞아 절친한 중학교 동창이 중국어, 영어, 컴퓨터 자격증, 일본어 학원에 등록한 것은 물론 요가까지 배우겠다고 선언한 것을 보고 나는 무엇을 해야 생산적으로 방학을 보내게 되는 것일지에 대해 고민에 빠져있다. 높은 학점, 외국어 구사능력, 자격증, 어학연수 등의 스펙을 쌓는 것은 개인의 인적자본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하지만 이를 달리 말하면, 우리가 스펙 쌓기에 치중하는 것은 곧 우리의 소득을 늘리기 위해 우리 자신을 상품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남들보다 더 잘 팔리고 매력 있는 상품이 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외모도 스펙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나와 여자동기들이 겨울 방학 동안에 기필코 성공하고자 하는 다이어트 역시 남에게 나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남에게 더 어필할 수 있는 하나의 ‘상품’이 되기 위한 발버둥일지 모른다. 인간의 삶이 상품에 견주어 진다는 것이 여간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독특한 교육환경 역시 우리 세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특징들 중 하나이다. 저자는 우리사회에서는 성장을 위한 참된 교육이 부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사람들이 교육에 대할 때 경제적 접근을 취하곤 한다. 우리나라에서 대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이 다른 나라의 졸업생들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소득을 벌어들이는 것을 근거로 교육에 들어간 돈에 비해 수익성이 낮다면서 말이다. 스펙을 통한 상품화나 이런 교육 시스템은 사람을 대상으로 시장 주의적 사고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잘못 되었다고 생각한다.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은 인간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진화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토발즈에 의하면 우리세대는 모든 일을 게임으로 생각하며 유희를 위해 산다고 한다. 인간사회가 재미를 위해 사는 단계로 넘어왔는데 기성세대가 문화지체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들의 시선으로 우리를 비난만 하는 것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물론 기성세대의 이해심 부족을 탓하면서 우리가 한심하지 않다는 저자의 위로에만 머물러 있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가 우리세대의 특징을 한껏 살려 기성세대를 향해 한 목소리를 낼 때 진정으로 한심한 세대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