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종교가 홈리스를 가장잘 케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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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람과 여유] 전원일기 17년※봄이 되면 만개한 꽃구경을 하고, 저녁이 되면 남한강 강물 위에 떠 있는 달빛을 보며 사색에 잠긴다. 가을이 되면 남한강변에 시장을 열어 사람들과 소통하고, 반상회를 열어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한다. 경기도 양평의 미래마을이다. 자신이 정한 이름 ‘감사하우스’의 안남섭(61)씨가 사는 법이다. 외로움에 사무칠 줄 알았던 그의 전원생활. 이제는 더불어 사는 전원생활이라 인생이 즐겁다. 10년의 독일 주재원 생활을 청산하고, 17년 전에 시작된 그의 행복한 전원생활에 대해 들어본다. 서울에서 남한강을 따라 액셀을 밟는다. 회색의 높은 빌딩은 사라지고 시야가 탁 트일 때 즈음 상쾌한 바람을 맞은 자동차 창문도 하얗게 변한다. 서울에서 전투태세로 무장돼 있던 몸과 마음도 이곳 경기도 양평에 이르자 이내 무장해제되는 기분이다. 양평의 두물머리를 지나 청국장의 구수한 향이 풍기는 음식점들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간다. 그 길의 초입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아낙네를 보니 미래마을은 그 길에서 꽤나 멀리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예상을 깨고 언덕 하나를 넘자 이국적인 풍경의 마을이 나타났다. 안데르센 하우스, 대박이네, 라일락집, 감사하우스 등 집집마다 붙어 있는 집 이름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햇빛에 반사해 금빛을 발산하는 남한강, 깔끔하게 정비된 조경과 전원주택이 조화를 이룬 마을. 미래 마을이다. 지금이야 유럽의 한 마을에 온 것과 같이 이국적인 정취를 뽐내는 곳이지만, 안씨가 이곳에 터를 잡았던 17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한 시골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집을 짓고, 꽃을 심고 마을에 공을 들이기 시작하자 점점 전원마을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꽃과 사람 그리고 자연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화 마을이 됐다. 안씨의 삶의 질과 행복도도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전원생활을 택한 이유 34세에 시작한 독일 주재원 생활. 10년간 이어진 그 생활 속에서 여권에 찍힌 국가의 도장만 해도 수십 개가 넘는다. 세계 74개국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삶의 콘텐츠를 경험한 안씨는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이라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면 이웃과 단절된 도시 생활이 아닌 함께하는 전원생활을 하기로 한 것이다. 다양한 삶과 문화를 경험한 덕분인지 꽃이 많은 마을의 풍경과 주택의 모습은 유난히 외국의 어떤 모습들과 닮아 있었다. “유럽이 아름다운 이유는 꽃이었다고 생각해요.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꽃이 많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마을을 네덜란드의 한 마을처럼 만들고 싶었어요. 마을 사람들과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었거든요. 뿐만 아니에요. 뭔가 자연친화적인 집을 만들기 위해 새집을 모티브로 집을 지었어요. 자연은 손대지 않고, 경사지에 집을 지어 붕 떠 있는 집을 만들었어요.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고, 자연과 인간이 만나도록 말입니다.” 안씨가 전원생활을 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자는 것이었다. 도시 생활, 직장 생활에 젖어 자신을 돌아볼 수 없게 돼 무엇을 하고 싶은지 까맣게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바쁜 일상에 쫓겨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으니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맞는지, 삶에서 정말 행복한 일인 것인지 몰랐던 것이다. 즉, 내 삶이 아닌 남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안씨는 나홀로 사색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온전히 자신의 마음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 말이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저는 사회가 요구하는 경쟁과 소유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속에서 성취를 이뤄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 겁니다. 남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전원생활을 하면서 사색하고, 실천해보고, 제 마음에 집중하니 행복한 삶을 위한 길이 보이더군요.” ◇아내를 위한 카푸치노와 전원생활의 맛 매일 아침 안씨는 아내 이화경(60)씨에게 손수 만든 카푸치노를 대접(?)한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항상 주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또 주위에서 그것들을 채우는 날들이 늘어나면 자동적으로 행복해진다는 것. 그래서 아내를 위한 카푸치노는 그에게 소소하지만 중요한 일상이 됐다. 누가 커피 한 잔의 여유라 했던가? 카푸치노로 하나 된 부부의 대화는 여유롭지만 그 무엇보다 진지하고, 미래지향적이다. 그들의 전원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이웃이다. 이 부부의 전원생활에서 이웃은 그들의 행복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다. 그들이 더욱 이웃에게 투자하고, 공을 들이는 이유다. 그렇다고 이웃이 무엇을 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웃이 주는 행복은 거창하지 않고 꽤나 소박하다. 함께하는 것. 이야기하는 것. 삶을 공유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1년에 4번 열리는 반상회를 통해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하거나, 포트락(Potluck: 각자 음식을 조금씩 가져와 나눠 먹는 것)파티를 열어 일상을 충만하게 하는 것 말이다. 이곳 미래마을에서는 품앗이도 하나의 일상이다. 산귀래 문학상 시상을 하는 수필가 박수주씨의 행사를 도와주면, 박씨는 안씨 아내가 운영하는 가게에 직접 심은 꽃을 대주기도 한다. 마을 한 곳에 모여 한 달에 두 번 차 모임을 갖는 화정다락회도 벌써 10년이나 됐다. 대한민국 다도의 원로격인 신운학 선생의 다실 화심정은 차도를 배우려는 미래마을 이웃들로 북새통이다. 가을 남한강변은 끼와 재능 발산의 장이다. 문호리 리버 마켓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피자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팔도의 사람들을 만나 소통하면서 웃음꽃을 만개시키는 것. 그 구수하고 사람 냄새나는 전원생활의 맛에 17년째 중독되고 있는 안씨 부부다. 안씨는 이제 이웃을 빼 놓고는 양평 생활을 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저번에는 옆집에서 급하게 전화가 오는 거예요. 아저씨가 쓰러졌다면서 말이죠. 자식들은 멀리 있고 도움을 청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곳이 저희 집이라고 하더군요. 이제는 정말 이웃이 사촌인 이웃사촌이 된 것이죠.” ◇전원생활을 꿈꾸는 이에게 안씨는 전원생활을 통해 정신적인 것과 대인관계의 부분에서 자신이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한순간에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좋은 것을 얻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전원생활 신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웃에 대한 투자는 성공적인 전원생활의 필수 조건이라고 말한다. “아마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외로움일 거예요. 저 또한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이곳에는 집집마다 담이 낮다보니 사소한 것부터 나누고, 얘기하고, 상의하니까 외로움이 점점 사라지게 됐어요. 사소한 것부터 주변과 나누니, 그 행복이 고스란히 저에게 돌아오더라고요.” 전원생활을 꿈꾼다면 가장 먼저 홀로되기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외로움’이라는 근심을 피하려 하지 말고 맞서라는 뜻이다. 안씨는 자신이 전원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즐거운 홀로서기 방법에 대해서 설명했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때 즐겁게 지내기 위한 사색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아내에게 카푸치노 타주기도 그 일환이었다. 사색의 시간을 통해 하고 싶은 것을 바로 실행하는 것. 그것이 홀로서면서 행복해지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남이 무엇을 해주기 전에 제가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돼요. 남을 통해 행복해지는 것 보단 홀로 생각하며 행복해지는 것이죠. 사람이라는 게 주면 바로 오는 게 있잖아요. 물질적인 것이든 안 그렇든 말이에요. 제가 하고 싶은 일 중 ‘사랑에 붕 뜬 장학회’라고 해서 주위에 해외로 가는 아이들에게 100달러씩 장학금을 줬는데요. 이것이 꽤 보람 있더라고요. 이 돈을 쓸 때 제 생각하면서 고맙게 느끼겠죠. 그 마음이면 충분해요.” ◇‘후두염’엔 ‘감기주사’ 안씨는 미래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후두염을 앓고 있었다고 했다. 아! 여기서 후두염은 후두에 염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안씨가 말하는 ‘후두염’은 후회, 두려움, 염려를 줄인 것이다. 하루가 바쁘고, 돈에 쫓기다 보니 엄습하는 ‘후두염’에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는 것. 그는 전원생활을 통한 ‘감기주사’처방이 ‘후두염’을 다스리는 특효약이라고 말했다. 감사할 줄 알고, 기뻐할 줄 알고, 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안씨가 말하는 감기주사다. “여기에서 평정심을 찾으니 여유가 생기면서 제 마음을 다스릴 방법이 보이더군요. 그것이 전원생활이 준 선물인 거죠.” 2015-02-0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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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_1955년生 블루스②]진수희 前 장관이 말하는 1955년생의 힘베이비붐세대의 맏형, 1955년생.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으며 모든 것이 격변하는 2000년대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의 신념과 가치관, 그리고 맏형으로서 지탱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1955년생의 대표주자를 만나 그들의 삶과 미래를 파악해보기 위해, 먼저 그 첫 주자로 진수희 前 보건복지부 장관을 만나봤다. 새누리당의 브레인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으로서 17, 1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NGO시민단체 선정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6년 연속 자리매김한 그녀는 제48대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거치면서 자신의 길을 탄탄히 쌓은 1955년생 대표주자다. 그녀가 말하는 삶과 미래의 이야기. 사진 최유진 기자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된 진수희 전 장관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그녀가 과거에 공직에 있었을 때, 항상 정장을 반듯하게 입고 어딘가 경직된 모습으로 사안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글라스를 낀 채 캐주얼하게 옷을 입고 정동극장에서 만난 그녀의 모습은 한층 자유롭고 부드러워 보였다. 정치에서 물러난 후 뭔가 달라진 것일까? 영화광이기도 한 그녀는 얼마 전 개봉한 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제 별명 알푼수(알면 알수록 푼수)에요” “요즘은 조용히 지내는 편이에요. 주로 중고등학교 오래된 4인방 단짝 친구들과 만나며 시간을 보내고 있죠. 희한한 게, 이 친구들과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에요. 10년 전만 해도 만나면 뭔가 미묘하고 서로에 대해 완전히 열지 못한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걸 털어놓고 얘기하는 사이가 됐죠. 자연스럽게 그리 되더라구요.”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졌다는 건 그런 생활적인 면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부드러워졌다고 말하자 웃으며 대답했다. “언론을 통해서 절 보면 날카롭고 차갑다고 하지만 직접 만나면 푼수끼도 있다고 하고 그래 요. 제 별명이 알푼수(알면 알수록 푼수)거든요.”(웃음) 어렸을 때부터의 꿈, 기자 1955년 생, 진 전 장관은 대전에서 7남매의 여섯 째, 딸 중에선 막내딸로 태어났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서울을 가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의 형제자매들이 모두 서울로 간 상황이어서, 아버지가 다 보낼 수 없다 하여 대전에서 계속 공부해야 했다. 그러나 대학교는 어쨌든 서울로 가야 할 상황이 됐고, 대개 여자들은 이화여자대학교를 가는 걸 목표로 삼았지만 그녀는 연세대학교를 선택했다. “공부는 반에서 한 5등 내외였어요. 우리 때 대학 진학률은 높지 않아서, 고3 때 부지런히 공부하면 대학 갈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담임 입장에서는 연세대를 간 선배가 없어서 연세대에 나를 지원한다 해도 갈 수 있을지 안 될지 확신이 없어서 안 써주려고 했어요. 그래도 난 바락바락 가겠다 하여 마침내 갈 수 있었죠.” 연세대에서 그녀가 선택한 학과는 사회학과였다. 어렸을 적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기자가 되어 사회의 부조리를 없애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연구원, 교수라는 연구직을 거쳐 국회의원, 장관의 길을 걷게 됐다. 그녀의 삶은 자 신이 바라는 걸 못 이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성공한 삶의 기준은 아이들의 눈 “사실 제 삶이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과 비슷한 행보였지 않았나 싶어요. 기자를 꿈꿨던 것과 삶의 커리어가 비슷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제가 하고 싶었던 걸 하려고 노력했다고 판단해요. 성공이란 표현까지 쓰긴 그렇지만.” 그녀는 삶의 성공 기준을 돈을 많이 벌고 무언가를 물려주려고 하고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라는 사람이 어떻게 기억되느냐’가 성공의 기준이라고 밝혔다. 자신이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보는 아이들이 판단하는 게 더 옳다는 것이다. “제가 판단이 흐려질 때면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보며 바르게 살려고 하게 만들고자 하는 걸. 제 자식들이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건 싫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치열하게 살았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순간순간 열심히 산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열심히’라는 것에는 모종의 자기반성적 측면이 꾸준히 따라다니고 있었다. 정치인이라면 수없이 내놓는 도서 커리어에서도, 그녀는 지금껏 단 한 권의 책만을 썼을 뿐이었다. 장관직을 수행한 이후 내놓은 가 그것이다. “당시에는 복지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어요. 그래서 복지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을 내놓을 필요가 있었죠.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을 책은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부끄럽거든.” 열심히 살았다는 그녀의 말은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돌아가고 싶은 시절? 별로 없는데…, 제가 다니던 때는 툭하면 휴강에 휴교에 서슬퍼런 시절이라 대학 4년간 공부를 잘 못했던 거 같아서 돌아간다면 그 시절로 가고 싶어요. 굳이 꼽자면 여행 많이 가고 싶다는 생각 들고.” 74학번 대학생 진수희에 물었다. 그녀는 한달 2만~3만원을 주는 입주과외를 하는 등 과외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가난한 고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입주과외는 대학생이 과외 학생의 집에 상주하면서 학습과 생활 전반을 살펴주는 방식이지요. 1970년대에는 대학생 수가 적었고 마땅한 사교육 인프라도 구축되어 있지 않던 터, 주로 정부의 고위 관료나 기업가들이 이런 식으로 대학생을 고용해 자녀들을 교육시켰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직 자신의 집을 갖지 않은 그녀는 집 외에 소유하고 싶은 것에 대해 묻자 ‘내 일, 내 시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쯤되면 진 전 장관의 삶에 대한 애착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곡절 속에 키워온 어울림과 개척정신 그녀의 삶은 일견 순탄했던 코스로 보인다. 그러나 대 학생 시절엔 아버지가 사업 사기로 인해 집안이 몰락했고 그로 인해 경제적인 고생에 시달려야 했다. 1955년생들이 이후의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겪어야 했던 곡절 또한 그녀에게 어김없이 찾아왔던 것이다. “1955년생의 특징이라면, 다형제들이 많다는 걸 들 수 있겠네요. 그리고 시골 사람들이라는 것. 장·단점이 있는데, 장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우선 형제자매들이 많은 가족 안에서 자라는 게 좋아요. 독선적이지 않을 수 있고 서로 어울릴 수 있는 방법도 알게 되고. 그리고 우리 부모 세대가 어려운 세대다보니 각자 알아서 커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율성과 개척정신,절실함을 갖게 됐죠. 뭔가 이뤄야 한다는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어요.” 그녀는 요즘 세대는 부모들이 여유가 있다 보니 절실함과 자율성이 다소 약하다고 지적했다. 잘 살아 보겠다는 치열함과 절박함의 원초적인 힘이 사회에 더 기여한다는 자부심. 그 자부심에서 1955년생답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못 이룬 꿈 완성시키고 싶어 진 전 장관은 앞으로 대학교에서의 강의는 3년 정도 더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금 자신의 중심을 여의도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국회의원을 두 번 하면서 정말 하고 싶고 해야 했던 것들 중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너무 큰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정치를 바꾸는 일을 좀 하고 싶어요. 초선 재선일 때는 뭣 모르고 분위기에 휩싸이는 정치를 했었어요. 우리 정치가 욕을 먹을 때 저도 그 일원이었던 게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고. 세 번째 기회가 온다면 뭔가 더욱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그녀는 2012년 총선 때는 공천 과정에서의 불공정함으로 인해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고 말했다. 민심의 선택을 받지 못한 거였다면 억울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 만약 다시 정치의 기회가 온다고 했을 때, 그녀는 다시 복지를 파고들 것이라고 밝혔다. “정책적으로는 고령화와 저출산 등 복지 쪽에 여전히 관심이 많아요. 특히 보건복지부 장관을 하면서 통계 수치 두 개가 저를 괴롭혔어요. 바로 저출산율과 노인자살률이었죠. 그런 데다 고령화는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니….” 그녀 개인적으로, 다시금 보다 넓은 자리로 가고자 하는 사명감이 확고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제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다 커 갈 때니까, 제삶 자체가 중요한 때가 온 거 같아요. 제가 오랫동안 있었던 영역에서의 마지막 도전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2015-01-0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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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UR STORY] 도대체 제주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제주는 2009년까지 취업, 대학진학 등의 이유로 인구유출 현상이 심각했었다고. 그런데 2010년부터 인구 증가세로 전환되었다. 2010년에는 순유입자 수가 437명, 2011년 2342명, 2012년 4873명, 2013년 7824명 등 가파른 속도로 늘고 있다. 2014년에도 역시 제주 유입 인구는 고공행진 중이다. 일례로 서귀포시에서 주최하는 귀농 귀촌 교육의 경우 단 2시간 만에 마감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서귀포시에서는 이례적으로 주말반까지 만들었지만 수요에 비하면 부족한 반 편성이었다. 도대체 제주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제주의 매력과 신비가 갑자기 커진 이유가 무엇일까? 왜 우리는 벼락을 맞은 듯이 제주에 끌렸을까? 제주로 이주한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사연을 갖고 있다. 이미 여러 권의 책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아직도 그들의 사연은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제주도 안에서도 이런 현상에 대해 기대와 우려의 시선 두 가지를 갖고 있다. 100세 시대를 맞아 ‘인생 2모작’을 꿈꾸는 이들이 제주로 몰려들면서 제주도에 귀농 귀촌 바람이 부는 것은 제주도의 1차 산업 부흥을 의미한다. 농어촌 사회에서는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고 있고 도시 이주자들이 몰고 오는 문화 이민의 바람도 상당하다. 하지만 이들이 제주도에 뿌리를 못 내리면서 일어나는 갈등도 있고 은퇴자금을 앞세워서 부동산을 사는 바람에 제주도 땅 값이 들썩이는 역효과도 일으키고 있다. #올레길 벤치에서 터져 나온 아내의 소원, “여보, 부탁이 있어.” ‘달파란’(게스트하우스 & 카페)은 서귀포시 남원읍 태위로에 있다. '파란달’보다 ‘달파란’이 느낌이 있지 않은가? 달파란 게스트하우스 주인장 김태환(52)씨는 전직 국어 교사다. 지금은 교사직을 명예퇴직하고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으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달파란 게스트하우스는 2012년 12월에 오픈한 곳으로, 3층짜리 게스트하우스 과 별채 카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에게 게스트하우스 이름이 특이한 이유를 물었더니, “처음 위미리에 위치한 세천포구 바다를 봤을 때 그 느낌이 파란 달이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고 설명한다. 게스트하우스 이름도 시적이고 제주 정착기 역시 운명처럼 시적으로 시작된다. “올레길 10코스를 걸으면서 송악산 중턱에 위치한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을 때였어요. 참 좋다는 느낌을 갖고 한참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이렇게 말했어요.” -여보, 내가 소원이 하나 있는데, 들어 줄래? -뭔데? -우리, 여기서 살면 안 될까? 제주에 살고 싶어 “그 순간 제 입에서 너무 쉽게 그래. 라는 대답이 나왔어요. 제가 살면서 몇 가지 잘한 일들이 있는데, 이 순간이 바로 그 잘한 일이에요.” 정말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지 궁금했다. 물론 경제적인 여건도 궁금했고. “처음엔 그저 먹고 사는 정도만 수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시작했는데, 다행히 먹고 살면서 대학교 다니는 애들 등록금 댈 정도는 버는 것 같습니다. 제주에서 앞으로의 꿈이요? 시간이 지나면 규모를 줄여서 제 개성에 맞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싶어요. 저만의 시간적 여유를 갖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더 많이 하면서 사는 게 제 꿈입니다.” 선량하게 웃는 주인 부부의 얼굴을 보면 ‘제주의 마법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걸 내려놓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장사를 시작할 수 있는 용기. 제주에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심지어는 대학생 자녀들을 서울에 두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그 것. 우리는 이것을 ‘제주홀릭’이라 부른다. “지금도 저처럼 중년 분들이 많이 여행하러 내려와요. 우리 숙소에서 머물다 가는 분들 중에 진지하게 제주살이를 고민하는 분들도 많구요. 그분들에게 농담처럼 말해요. 올레길 자꾸 걷다 보면 저처럼 제주에 주저앉게 됩니다. 하구요.” #가수 장필순이 추천한 그 곳의 그 남자, “대기업에 다닐 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합니다.” ‘요리하는 남자’는 애월읍 하귀리에 위치한 작은 요리 주점이다. 멋진 미소의 이영태(52) 씨는 ‘요리하는 남자’의 주인공이다. 생전 요리할 것처럼 생기지 않은 외모지만 의외로 요리하는 모습이 편안하게 잘 어울린다. 평소에도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그는 현재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고 했다. 평촌에 살다가 제주에 온 것은 2011년 2월.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부장 직까지 하고 나면 그 이후엔 설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숨막히는 일상생활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귀농을 꿈 꿨고 그렇게 귀농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말했단다. “꼭 그렇게 깡촌으로 가야 해? 촌도 있고 도시 같은 분위기도 있는 제주는 어때?” 친구가 그냥 툭 던진 말이었는데 정말로 제주에 집을 구해서 내려오게 되었다. 늦둥이 딸이 중학교 입학할 때, 서둘러 떠나왔고 시내권 중학교보다는 시골지역에 위치한 학교로 보냈다. 딸은 제주 생활에 잘 적응했고 순박한 친구들과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행복한 중학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 딸은 올해 제주외고에 수석으로 입학했단다. 온 가족이 제주에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고 있었다. 원래는 농사일을 해보려고 땅을 알아봤지만 희한하게도 지금의 가게 자리가 나왔을 때, 끌리듯이 그 날 계약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50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피 속에 요리에 대한 애정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보시다시피 작은 가게잖아요? 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규모죠. 만약에 돈 벌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장사를 했다면 지금처럼 즐겁게 살지는 못했을 거예요. 딱 지금이 좋아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요.” 그러면서 그는 어떤 요리를 파는지 상기된 표정으로 설명했다. “초임 직장 시절에 일본에 파견근무를 나가서 5년 정도 있었는데, 그때 먹었었던 일본요리들을 제 손으로 만들어서 판매하곤 해요. 제가 맛있게 먹은 음식들은 흉내 내려고 노력하면 비슷한 맛이 나오더라구요.” 메뉴판에 있는 ‘간장새우’도 얼마 전 강남에 갔다가 맛있게 먹은 메뉴인데 제주에 내려오자마자 바 로 만들어 봤단다. 반응이 썩 괜찮다며 씩 웃는 모습이 참 해맑게 느껴졌다. 얼마 전, 모 잡지에서 가수 장필순씨가 자신이 자주 다니는 명소들을 하나씩 나열하면서 소개했는데 그곳에 요리하는 남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물었더니 장필순씨가 처음 가게에 왔을 때는 장필순씨인지 몰랐다고 한다. 여러 명이 와서 음악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시고 갔는데 얼마 뒤에 한사람이 찾아와서 -장필순씨, 안 왔어요? 하고 물었단다. -장필순씨가 여길 왜 와요? 하자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지난번에 같이 왔잖아요. 했다는 거다. 그때부터 장필순씨는 후배들과 자주 이곳을 찾았고 4,5개월 전부터는 이효리씨 부부도 데리고 왔단다. 아마도 행복한 주인장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 술이 잘 들어가게 되는 것 아닐까? ‘달파란’의 주인장 김태환씨, ‘요리하는 남자’의 주인장 이영태씨 모두 공통점은 예전 직장보다 지금 제주에서 하는 일이 훨씬 만족스럽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충고 또한 같다. 여행지에서 봤던 제주는 잊으라고. 바다를 감상하고 잔디를 다듬고 하는 로망은 일상생활이 되는 순간 또 하나의 삶이 된다고. 조선시대 윤선도의 는 실제 어부들의 삶과 비교하면 얼마나 황당한가? 실제 어부의 삶은 관념 속 어부의 삶과는 다르다. 한없이 한가롭고 유유자적할 수는 없다. 제주의 삶도 그렇다면 적절한 비유가 될까? 2014-11-1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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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 기자 리포트]은퇴후 첫 여름, 휴가다운 휴가를 다녀오다-정운관 시니어 기자 은퇴 이후 여가는 늘어났고 수시로 가까운 곳 혹은 먼 곳을 다녀와 보지만 굳이 휴가라는 느낌 없이 여행이라는 느낌이었으나 이번 여름 휴가는 특별하게 휴가 같은 휴가로 느껴졌다. 6박7일의 휴가는 과거 현역시절 꿈꾸던 여름 휴가기간이었다. 그때는 그것도 쉽지않고 회사의 눈치를 보아아 하던 때였다. 이번에는 그야말로 자유 의지로 설정한 휴가였으니 그것부터 달랐다. 강릉에 있는 처가에 가기로 했다. 처남이 과거 아내가 어린시절 살았던 옛 집터에 콘테이너를 들여와 욕실까지 갖춘 농막을 지었고 텃밭에다 감자며 옥수수 등 농작물을 심었는데 일손이 없어 방치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지 1달이 다 지나도 짬을 못 내다가 드디어 시간이 난 것이다. 마침 딸과 사위의 휴가기간과도 맞았다. 목요일 오후에 8살짜리 초등학교 1년생 준이와 3살박이 철수만 데리고 출발했다. 딸과 사위는 주말에 합류하기로 했다. 실상 딸과 사위는 휴가를 가는 양태가 우리와는 다르다. 세대 차이런가 혹은 성향 차이일지 모르지만 이들은 콘도에서 워터파크 등 주변 여러 가지 인공시설을 즐기는 것으로 해마다 휴가를 보내서 우리와는 달랐다. 하루만 강릉에서 머물고 바로 비발디로 떠난다고 해서 아이들만 우리가 데리고 떠났다. 이름하여 어린이 농촌체험 휴가였다. 출발하니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은 잠들었고 도착지 임박해서 잠이 깨는 모범적인(?) 탑승자였다. 대관령을 넘어 터널이 많은 하강구간에서 동승했던 처조카가 아이들에게 “차가 터널을 지날 때 눈을 감고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진대” 라고 하자 준이는 신이 났다. 터널길이가 긴 곳이어서 도저히 숨을 참지 못하다가 때마침 알맞은 길이의 터널을 지나자 참았던 숨을 내쉬며 준이가 말했다. “ 아 소원을 빌었어, 이모” “ 응 그래 무슨 소원 빌었어?” “ 반에 좋아하는 친구가 있는데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빌었어” 잠시 행복한 꿈을 꾸었나 보다. 도착해서 들어간 농막은 의외로 깨끗하게 잘 장단이 돼 있었고 세면장과 화장실도 현대식으로 갖추고 있어서 며칠 지내는 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창고에서 호미 3자루를 꺼내 아내와 준이 각각 한 자루 씩 들고 감자밭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잘 적응할까 하는 우려는 바로 사라졌다. 비가 내려 약간 촉촉해 진 땅에 호미가 잘 들어갔고 호미질 한 번에 감자 몇 알이 모습을 드러내니 아이들은 재미있어 했고 한 시간 이상을 감자 파내고, 주어 담고, 창고로 옮기는 작업에 열심히 동참했다. 태어나서 내 손으로 처음 농작물을 수확해 보는 재미에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문득 봄에 청계산 등산로 입구에서 가족 외식을 하고, 쉬는 시간에 준이 하나만을 데리고 등산로 입구를 오른 기억이 생각났다. 45도 경사도에 내려쬐는 햇볕에 쉽지 않은 길이었는데 준이가 한마디 했다. “할아버지, 어른들은 이상해”“뭐가?”“ 응 있잖아. 이런 힘든 산에 왜 에스컬레이터를 설치 않하고 있을까? 힘든데...” 과히 8살짜리 도회지 아이가 아니고서는 상상하지 못할 생각이다. 건강을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오르는 이 길에 에스컬레이터라니. 그랬던 준이가 감자 운반 손수레를 손수 끌고 창고로 가겠다고 나서니 갑자기 15살은 된 소녀로 보였다. 때마침 할머니가 입혀준 농사용 모자랑 옷도 잘 어울려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시골 아낙네로 보였다. 이렇게 하루종일 보내며 수확한 감자 구워먹고 옥수수 삶아 먹다보니 서울에서 준비한 각종 먹거리는 한쪽 구석에 쳐 박혀 있을 뿐 자연이 준 먹거리로 행복해했다. 아이들이 너무 잘 적응한다고 문자를 띄웠더니 딸과 사위가 일정을 하루 당겨 이튿날 내려왔다. 이튿날도 준이는 “할머니 심심한데 오늘 농사할 일은 없어?” 하고 텃밭으로 나가자고 조른다. 함께 또다시 감자 캐러 나갔으나 딸과 사위는 한 번도 밭에 나오지 않았다. 둘다 도회지에서 자랐고 아이들 같은 동심도 없으니 힘들고 흙덩이 밭에 나오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울까도 모르겠다. 저녁에 강릉 처가 가족들도 합류하여 저녁을 먹고 나자 자연스레 담소를 하게 되고, 아이들 재롱잔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다 딸이 9월 18일 국악원 공연을 앞두고 연습 중인 대금을 연주해 보겠노라고 하여 모두가 경청하게 되었다. 대금 연주를 연주홀이 아닌 시골마당에서 들으니 색다른 정감이 몰려 왔다. 주변 정경과 어울려 더욱 시골냄새와 정취를 더해 주었다. 한오백년과 강원도 아리랑을 다른 악기 협주나 반주 없이 독주로 들으니 잠시 황홀감에 빠졌다. 이에 질세라 대학교 1년생으로 홍대 입구 등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장래 래퍼 지망생 처 조카의 랩 송 3마디를 들었다. 대금 연주와는 또 다른 최 현대 음악이니 색다른 맛이었다. 이어서 준이의 ‘Let it go’ 등 노래가 뒤를 이었고 뒤 질세라 철수의 ‘반짝반짝 작은별’과 ‘로보캅폴리“도 무대를 장식하게 됬다. 10시가 훨씬 넘어 파한 가족 음악회에 모두 흥겨워했고 행복감에 빠졌다. 오늘의 이 일은 우리 아이들도 장차 어른이 되어서도 아련히 기억하겠지만 시니어인 우리 부부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밤일 것이다. 4박의 강릉 농막 생활을 즐겁게 마감하고 비발디 파크에 와서 하루종일 비오는 워터파크 물놀이를 했다. 준이가 그렇게 바라던 워터파크이니 6시간의 강행군도 부족한 듯 했다. 하지만 문득 강릉 송정 해변에서 준이와 철수가 동해안의 비교적 높은 파도와 놀던 모습과 오버랩 되었다. 비싼 워터파크가 아니어도 아이들은 자연과 잘 호흡하는데, 어른들의 시각은 워터파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국산업은행 -한주통산 이사 -세종공업 상무(슬로바키아 사장)2014-08-29 08:46
  • 어느 종교가 홈리스를 가장잘 케어하는가
    [우재룡의 모닝앙코르레터]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생활하는 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 농촌에서 태어난 한국의 중·장년층들은 시골생활의 삶에 대한 짙은 향수를 가지고 있다. 최근 수도권에 은퇴자들을 위한 전원마을이 많이 만들어지고, 도시인들의 귀농(歸農)과 귀촌(歸村)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그런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귀농과 귀촌을 비슷한 것으로 취급하지만, 내용 면에서 귀농과 귀촌은 상당히 다르다. 귀농은 도시민들이 도시생활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러 농촌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정부는 공식으로 도시에서 거주하다가 농촌의 읍·면으로 이사한 사람 중에서 각종 농업이나 축산업에 관련된 명부에 등록된 사람을 귀농인으로 정의하고 있다. 반면 귀촌은 그냥 시골로 돌아가 생활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귀촌은 시골로 돌아와서 농사를 하는지, 아니면 그냥 은퇴생활을 하면서 노는지 알 수 없는 개념이다. 가장 흔히 사용하는 전원생활이라는 말은 농촌으로 돌아가는 귀촌과 달리 꼭 농촌이 아니라 도시 주변에서도 전원을 가꾸면서 사는 생활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은퇴 후에 도시를 떠나 사는 생활은 크게 귀농과 전원생활 2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 빠르게 늘어나는 귀농·귀촌 인구 농림축산식품부의 조사에 따르면, 2013년 귀농 가구는 1만 923가구(1만 8825명)로 3년 연속으로 1만가구 이상이 귀농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년 전만 해도 귀농 가구는 연간 5000∼7000가구 수준에 머물렀으나, 2011년부터 연간 1만가구를 웃돌 정도로 큰 붐을 이루고 있다. 2013년 귀농 인구들이 많이 이주했던 곳을 살펴보면 경북이 2087가구로 가장 많았고, 전남과 경남, 전북, 충남도 1000가구를 넘어섰다. 또 귀농하는 가구주들의 나이는 평균 53.1세로 나타나 결국 40대와 50대가 귀농 인구의 주력 부대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최근 들어 베이비붐 세대의 귀농이 활발한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과거에 농사를 지은 경험이 있든 없든 간에 노후생활 장소로 농촌을 선택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트렌드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귀농은 앞에서 농사라는 비즈니스를 함께 하는 전원생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소일거리를 겸해서 농사를 짓는 가구들이 아주 많다. 예를 들어 귀농 인구의 작물재배 면적을 보면 0.5ha(1513평) 미만 경작이 전체의 72%를 차지하고 있다. 귀농 인구 10명 가운데 7명이 대략 1000∼1500평 정도의 땅을 경작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편 농사를 짓지 않고 농촌에서 생활만 하는 귀촌 가구도 귀농 가구 못지않게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2013년의 경우 귀촌한 가구수는 2만 1501가구(2만 7665명)에 달해 처음으로 연간 3만명을 넘어섰다. 귀촌 인구가 많이 몰려 간 지역은 경기도가 8499가구(40%)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충북, 강원, 전북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수도권에 인접한 지방자치 단체와 전원생활 여건이 좋은 지역으로 귀촌 가구가 몰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귀촌 가구주는 40~50대가 대부분이다. 50대가 가장 많이 차지해서 전체의 28.5%를 차지하며, 다음으로는 40대가 22.1%, 30대 이하가 17.7%를 차지한다고 한다. 귀농가구에 비해 귀촌가구의 연령대가 다소 젊다. 베이비붐 세대들이 직장에서 퇴직하고, 농사 경험이 있든 없든 노후생활을 위해 농촌으로 회귀하는 현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농촌의 생활비는 도시지역에 비해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후 자금이 부족한 서민과 중산층에게 새로운 은퇴 모델이 될 수 있다. 이들이 간단한 농업기술을 배워 실패 확률이 낮은 농작물들을 재배함으로써 소일거리도 찾고 생활비도 일부 조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귀농·귀촌은 젊은이들의 이탈로 인구가 급감하고 있는 우리 농촌을 되살리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으로 풀이되고 있다. 귀농·귀촌은 ‘사회적 이민social immigration’이라고 할 만큼 개인적인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큰 사건이다. 거주지를 옮기는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생활양식과 일터, 환경면에서 큰 변화를 동반하는 중요한 결정이라는 뜻이다. 성공적인 귀농과 귀촌을 위해서는 당연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농사를 겸하는 귀농을 할 때에는 사전 교육을 충실히 받는 등 세심한 준비를 해야 한다. 만약 영농기술과 영농기반 없이 무작정 귀농하거나 귀농 후 마을 주민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한 언론은 귀농에서 성공할 확률은 20∼30%밖에 되지 않는다고 분석하면서, 가능하면 40대 이전에 귀농하는 것이 실패 확률을 줄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만큼 귀농이 어렵고 힘든 결정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귀농을 추진할 때에는 농사를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소득규모와 자녀교육에 대한 고려도 해야 한다. 시골생활은 도시생활과 교육여건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귀농 후에 농사를 지어 얻는 소득이 생각했던 것보다 적다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특히 무엇보다 올바른 목표 설정이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귀농의 목표는 무엇인가? 농업에 정말로 관심이 있나? 이런 질문에 정확하게 답을 해야 농촌생활의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생활하는 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철저한 준비가 없으면 성공하기가 힘들다. 노후소득의 대부분을 농사로 조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최근 귀농자가 늘어남에 따라 정부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귀농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진행하는 귀농·귀촌 교육은 무료로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가능하다.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시농업기술센터(agro.seoul.go.kr), 경기도농업기술원(www.nongup.gyeonggi.kr), 경기농림진흥재단(www.ggaf.or.kr), 각 지자체 산하 농업기술센터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여러 민간·공공기관에서 시행하는 다양한 온·오프라인 귀농·귀촌 교육 과정은 그 선택의 폭이 넓다. 특히 농림축산식품부가 공모를 통해 지원하는 민간 오프라인 교육과정은 내용이 충실하다. 이 과정은 교육비의 70∼80% 를 국고에서 지원받는다는 점이 장점이다. 교육 참여가 아닌, 정보를 알고 싶은 사람들은 농어업인력포털(www.agriedu.net), 농진청 농촌인적자원개발센터(hrd.rda.go.kr), 농식품교육문화정보원(edu.okdab.com), 귀농·귀촌종합센터(www.returnfarm.com) 등을 이용하면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2014-07-08 10:55
  • 어느 종교가 홈리스를 가장잘 케어하는가
    은퇴하는 베이비부머를 위한 귀농 성공전략요즘 들어 인생2막을 시골에서 마무리하려는 귀농·귀촌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준비된 귀농’이 아니면 실패할 확률도 그만큼 높은 게 현실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장기화로 인해 경기가 좋지 않으면 귀농인구가 늘어난다. 더불어 인터넷 귀농카페의 회원들도 급증한다. 다음 우수카페 귀농사모(cafe.daum.net/refarm)의 경우 최근 몇 년 사이에 회원수가 급증하여 16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요즘의 큰 특징은 50-60대의 귀농·귀촌이 늘고 있다. 최근 은퇴하는 베이비부머들의 영향이다. 필자가 귀농할 1997년 당시엔 귀농정보가 없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귀농’이란 단어로 검색하면 아예 검색어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귀농정보가 넘쳐난다. 아니 너무 많다. 그러다보니 검증 안 된 잘못된 정보도 많다. 당시의 ‘도피’성 또는 ‘낭만적’인 귀농형태가 지금은 ‘준비된’ 귀농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있었다. 귀농 교육도 다양화되어 가고 있어 무작정 귀농 하는 것보다는 차근차근 귀농교육을 받아 귀농현장을 체험한 후 귀농하는 추세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귀농하는 이유는 연령대에 따라 다소 다르다. 3040세대는 대체로 아이들 건강과 교육을 위해서이거나 농사를 위해서이고, 5060세대는 여생을 농촌에서 자연과 함께 여유 있게 보내기 위해서이다. 즉 농촌에서 먹고 살아야 하는 생계형 귀농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자연환경이 주는 생태적인 ‘무형의 가치’를 추구하는 귀농도 최근 늘어나고 있다. 1020세대는 관심은 있으나 실행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농어촌이 차세대사업의 유망한 블루오션으로 판단한다면 깊게 고민하여 귀농하는 걸 권하고 싶다. 그들이 자연환경을 중시하는 차세대사회에서는 주류가 될 가능성이 많다. ‘패스트’라이프에서 ‘슬로우’라이프가 가능한 시대. 조금 여유 있는 삶 그게 매력인 것이다. 또한 ‘도시형 창업’은 포화 상태지만 ‘시골창업’은 아직도 미개척지이다. 요즘 TV방송의 예능프로그램이 거의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향후 농어촌이 젊은층의 창업대상이 되길 기대한다. 은퇴 후 전원생활을 위한 귀농은 단순한 전원생활보다는 농촌창업으로 봐도 좋을 듯하다. 도시에서 김밥집을 해도 교육받고 하듯이 귀농창업계획서를 작성하여 충분한 사전준비를 통해 귀농현장에 연착륙할 수 있는 나만의 귀농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영농기반이 없는 사람은 민관학계에서 하는 귀농관련 교육을 이수하여 도시의 경력과 연관 있는 분야의 창업을 추천한다. 귀농사모와 같은 온라인 카페에서 귀농창업선배들의 현장에서 경험을 쌓아 멘토로 삼고 귀농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농사지어서 돈 벌겠다’, ‘무작정 시골가면 먹고 살 수 있겠지’, ‘에라 모르겠다. 시골에나 가자’ 등의 무작정 대안 없는 귀농은 위험하다. 시골경제도도 도시경제만큼 어렵다. 시골창업시장이 블루오션이긴 하지만 3년간 철저한 준비 없이 귀농하면 3년 후 다시 도시로 갈 가능성이 많다. 심사숙고한 끝에 귀농을 결정했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귀농선배들의 경험담을 듣고 보고 경험한 후 가족동의를 구한다. 그런 후 ‘내가 왜 귀농하는가?’ 그리고 ‘난 귀농 안 하면 후회할 것 같다’고 생각되면 그때 귀농해야 한다. 그런 의지가 없으면 농어촌에서 난관에 봉착했을 때 극복하기가 어렵다. 귀농준비 시 농업·축산·어업·식품가공 등에 대한 사전지식을 충분히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양한 농림수산 축산 식품 산업 분야를 체험해 보고 ‘머리보다는 손으로 경험해야’ 한다. 귀농 귀촌 장소 선정이나 토지구입, 주택 마련 방법과 관련해선 동호회를 통한 검증된 멘토를 통해 공개적으로 구입하는 게 좋다. 가끔 잘못된 멘토가 있긴 하지만 그런 건 동호회 내에서 걸러진다. 자신의 상황에 맞게 귀농자본을 설정해야 한다. 귀농의 이유와 목적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따라 무리하지 않는 게 좋다. 철저한 준비 속에 귀농을 했더라도 실제 농촌생활에서 닥치게 되는 변수가 많다. 제일 큰 변수는 날씨. 농사는 하늘과의 동업이라고 한다. 천재지변 때문에 의외의 어려움을 많이들 겪는다. 이웃과의 소통도 문제가 된다. 이건 순전히 귀농인들 잘못이다. 그래서 시골교육을 받고 가야 한다. 귀농운전자금도 신경 써야 한다. ‘귀농 전 자금’보다 ‘귀농 후 운전자금’을 준비해 둬야 한다. 귀농인 에게는 기존 농산물 유통망보다는 소비자 직거래가 대세이다 보니 인터넷을 통한 판매가 유리하다. 인터넷동호회를 통한 소비자와 소통 그리고 그들과의 연대가 중요하다. 별도 사이트 구축보다는 큰 연간 비용이 안 드는 온라인 카페에서 판로를 개척하는 게 유리하다. 도심형 창업은 100명이 창업하면 3명이 성공한다고 한다. 그러나 귀농사모 카페 회원들을 보면 60%는 성공한다. 이런 창업시장이 있을까? 그러나 귀농을 ‘창업’이라고 보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도시형 창업만큼 만 준비하여 귀농하면 성공한다. 인생 2막을 농촌에서 보내는 건 나 자신을 위해서나 후손을 위한 우리들의 의무가 아닐까? 주저 마시고 귀농해 보시라! 당신의 마음 속 고향으로. 귀농사모 대표 정성근2014-06-17 16:53
  • 어느 종교가 홈리스를 가장잘 케어하는가
    [시니어 기자 리포트]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방과 후 수업을 맡으면 어떨까현대사회에서는 많은 것들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도의 발전에 힙입어 편안함과 안락함을 만끽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일의 업무량은 많아지는 등 복잡다변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여성들의 결혼 연령대가 바뀌고, 아이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그러면서 저출산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 고령화란 어떤 의미일까? 의술의 발달과 함꼐 우리 사회는 고령화사회에 접어들었다. 현대사회, 더 발전된 고도화된 미래사회로 갈수록 우리가 문제점으로 생각하는 논제들은 더욱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우선 결론은 받아들이자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부분에 대해서는 받아들이고, 저출산의 부분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 것이며, 고령화 사회로 접어드는 부분에 대해서는 고령화 아젠다 속에 있는 실버세대들의 전반적인 생활적인 부분에 대해서 개선대책을 내놓아야할 것이다. 고령화 사회의 실버들을 위해 생활적인 부분에 대한 대책을 내놓으려고 한다. 첫째로 실버세대들의 일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말하는 미래사회는 100세사회라고 일컬어지고 있고, 의학의 기술발달로 사람의 수명은 100세의 사회가 되고 있고, 이미 되었다고 말들을 한다. 대다수의 기업들은 58세가 정년퇴직이다. 실버세대들이 일할수 있는 일자리를 마련해야하고 장점을 살릴수 있는 실버세대들의 일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예를 들면, 학교를 예를 들수 있겠다. 시골 방과 후 수업에서 할머니가 어린 초등학생을 지도하고 있는 것을 TV를 통해서 접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 초등학교에서도, 정년퇴직한 분들 뿐만 아니라, 남녀 노소 구분없이 노년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방과 후 수업을 맡으면 정서적으로 좀더 다른 분위기의 학급 정서에 도움을 줄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실버 마일리지 카드 도입을 제안한다. 마일리지 한도 내에서 문화생활 다방면으로 할수 있고 저소득층도 이런 카드 있어서 책도 구입하고 영화도 볼 수 있듯이 이것은 마일리지 적립도 가능하도록 58세 이상부터 실버 마일리지 카드를 도입함으로써, 실버세대들의 전반적인 생활, 문화를 담당하는 새로운 문화를 장착시키자는 것이다. 지금 2014년의 시대에는 노인전문 복지 회관이 있지만, 가고 싶은 사람들만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교처럼 강제적인것은 아니지만, 필수도입을 위해서 그 사이 홍보 효과와 마일리지 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홍보 효과를 주고, 마일리지가 쌓이면 생활용품, 생활적인 면에서도 경제적인 면에서도 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실버세대들의 문화생활을 담당할 수 있는 마일리지 생활 카드를 장착시키는 것이다. 어떠한 대안에 대한 정책을 도입시키기 위한 과정은 어려울수 밖에 없지만, 그 과정이 있어야만 그 다음 시기에는 더 안정적이고, 더 발전된 정책안들이 나올수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실버세대들의 적극적인 활성화를 위해서는 마일리지 카드로 전담관리를 함으로써 좀더 편안하고, 제 2의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맞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가정의 문제들이 하나하나 해결되어 나간다면 그런 문제들을 해결 할수도 있고 문제가 어디서 발생 하는지도 알아서 잘 처리하고 재발도 막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시니어 기자 암매(岩梅) 최재영( ) △OCJP 국제공인자격 △RABQSA ISO9001 △27001 국제 심사원 △KBS n 리포터△정부3.0 맞춤형서비스 △생활공감정책모니터 용인시 대표 △서울시 인터넷시민감시단 △한국소비자포험 화이트슈머 △금융감독원소비자리포터('금소리') △한국가스안전공사 경영공시모니터 △분수네신문사 칼럼리스트 △직업 특강 & 컨설턴트 △IT 및 보안전문가2014-05-22 18:27
  • 어느 종교가 홈리스를 가장잘 케어하는가
    [귀농정착 성공사례(10)] “부지런해야 살 수 있기에 시골은 행복한 곳이죠” 지리산이 좋아 귀농을 마음먹은 젊은 부부. 어렵게 마련한 생활 터전이 산사태에 쓸려 나갔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나서 얻게 된 새로운 행복. 해야할 일이 무수히 많고, 할 일이 끊이지 않으며, 내 땅이 없다 해도 서글프지 않아서 행복하다. ◇지리산 여름휴가 왔다가 마음먹게 된 귀농 2012년 9월 17일 새벽3시, ‘뚜뚜, 뚜뚜, 뚜뚜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어…. 아직도 비가 오네?” 부스스 일어나 어두운 작업장에 불을 켠 후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시작하려는 순간. 왜일까? 오늘따라 얼굴과 몸 주위로 정전기가 일듯 기분 나쁜 전율이 느껴진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드리며 내 몸을 맴도는 정전기들을 날리고서 제빵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계량을 하고, 반죽기를 돌리고, 1차 발효…. 성형을 한 후, 다시금 2차 발효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후, 커피를 준비한다. 요 며칠 쉴 새 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눈을 뜨고 있는 이순간이 저녁인지, 아니 새벽이던가? 가끔 헷갈릴 정도다. 뭐 어찌됐던, 지리산에서 느끼는, 하루 중 가장 평온한 시간임은 분명하다. 2011년 4월 남편과 지리산으로 휴가를 왔다가 휴양림에 텐트를 치고 2박3일 야영을 하며, 둘레길을 돌았다. “와, 이런데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 이 한마디가 발단이 되어 3개월간 산청, 하동, 유림, 함양, 남원, 산내를 돌아다니며, 우리에게 모든 조건이 적당히 들어맞는 빈집을 찾아 나섰고, 우연한 인연으로 ‘동네 대소사는 나를 통해 움직인다’라며 스스로를 ‘할매이장’이라고 칭하시던 할머니 한분을 뵙게 되었다. 그분이 소개해준 허허벌판 그리고 싸리나무밭. “아뇨, 할머니 저런 벌판 말고, 기왕이면 빈집에 조그마한 마당도 있었으면 하는데요. 그런 곳 없을까요? 순간, 화색이 만연한 할머니에 미소를 보았다. “오호라, 그런데~ 있어, 있어. 난 또 집 짓는 줄 알았지. 이리와 봐, 여기” 이렇게 소개받은 이곳. 흡사 폐가를 연상시키는 첫인상에 과연 이집을 고칠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빈집 수리는 10여개월여의 공사기간 동안 1주일에 3일씩 공을 들였다. 직장 생활을 병행하면서 왕복 4시간의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집수리에 열정을 쏟았다. 먼저, 쥐가 뛰어다니던 천장을 빠루(지렛대)와 삽으로 뜯어내고, 콘크리트 드릴로 벽에 구멍을 촘촘히 뚫어 벽 하나를 허물어냈다. 고무대야와 삽만으로 시멘트 50포를 반죽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열 겹짜리 벽지를 떼어내고, 스크레퍼로 벽면을 고른 후 얼룩진 벽에 퍼티를 발랐다. 파벽으로 포인트도 주고, 자꾸만 떨어지는 천장지를 붙잡으려 겹치는 부분마다 얇은 몰딩을 대어주니 마치 일본 다다미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공사에 연속 뒤집어쓴 먼지를 씻어낼 곳도, 피곤한 몸뚱이를 잠시나마 누울 한 평 공간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추억이 된다더니, 그렇게 힘들기만 했던 시간이 지나고 2012년 2월 10일 완전 전입과 함께 ‘경축, 귀농생활’을 시작한지도 6개월이 지났다. ◇산사태로 쓸려간 보금자리 보고 ‘헛웃음만’ 2012년 9월 17일 오전 7시. 빵 굽기 완료. 남편이 빵 배달을 간다. 우산을 쓰고, 한손엔 빵 바구니를 들었다. 그 뒷모습이 오늘따라 측은해 보인다. 여전히 몸 전체에 정전기가 맴돌고 있다. “왜 이러지?” 아마도 비 때문일 거야 하고 넘겼다. 이후 시간이 지나 오후 12시 10분. 점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주방에 들어가기가 싫다. 계속 졸리고 춥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거실에서 인터넷 서핑 중인 남편 옆에 누웠다. 비몽사몽, 잠이 들었다 깨다를 반복하는데, 오늘따라 물소리가 참 크다. ‘안방에 들어가서 잘까?’ 생각하는 순간 “우르릉 쾅…….와지직 우당탕, 쿵쿵. 와장창.” 일순간 유리파편이 얼굴로 날아들고, 차가운 빗물이 머리위로 쏟아졌다. 그랬다 바위가 벽을 치고 거실 안까지 들어왔다. 아니다. 이미 우리 집 창고와 안방, 화장실은 쓸려가고 없었다. 무너진 천장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벽과 지붕도 없어졌다. 우리가 누워있던 거실 빼곤 모든 곳이 산에서 흘러내린 바위, 나무와 함께 휩쓸려 사라졌다. 1초, 2초, 3초…. 흙탕물이 밀려들어온다. 이건분명 현실이다. 거실 창문으로 간신히 빠져나오는 그 순간에 느낀 공포란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 집 앞 도로는 이미 계곡으로 변해있었고, 산에 박혀있던 중대형 사이즈의 바위들이 도로를 점령했으며, 우리 집은 앞 틀만 남고 옆과 뒤쪽은 모두 쓸려간 후였다. 떨리는 손을 꼭 잡고, 남편과 몸만 빠져나왔다. 그때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살았다. 남편과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우리 집 뒷산의 자랑이었던 30년 된 호두나무와 밤나무가 시뻘건 흙탕물에 엉켜 있었다. 눈물은 커녕 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앞으로의 일이 막막하게 밀려들었다. “거의 1년을 고치고, 딱 6개월 살았는데…….” “화목보일러에(기름겸용) 기름 200리터 채워놨는데…….” 현실을 무시한 바보 같은 미련들만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산사태가 나고 2시간 정도 지나니 비가 그쳤다. 어떻게 알았는지 마을 분들 모두 우리 집 앞에 모여 걱정이 많으시다. “어떻게 저산에서 산사태가 나지?” “산사태가 날 산이 아닌데….” “사람 몸 안 상한 게 어디냐, 젊으니까 다시 시작하면 된다”하시며 모두 응원에 말씀을 해주신다. 그래, 생각하면 할수록 당혹스러우나 그래 젊지 않은가! “역시 이래서 귀농할 거면 젊을 때 해야 해!! 그치?” “응, 응, 그러네요.….” 처음 빈집을 찾아 돌아다닐 때 소개받았던 그 허허벌판 땅에 재해협회(수재민 구호단체)에서 빌린 임시주택과 작은 컨테이너에서 2012년 9월 17일 낮 12시 10분, 3번째 태풍 ‘산바’로 인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산사태 1주일 후 제빵용 오븐과 소모품을 다시 사 모았고, 전기도 물도 없는 곳에서 50여 일을 보내야만 했다. 다행히 면사무소의 도움으로 수도가 들어왔다. 두달 후 전기가 들어오면서, 2012년 겨울 컨테이너에서 다시 빵을 굽기 시작했다. 한겨울 밖과 안에 온도 차이를 느낄 수 없는 그 서늘한 공간에서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가는 것도 모른 채 무조건 빵을 만들었다. 한 달 수입 단돈 3만1000원. “이런 시골에서 빵집이라니 그것도 우리 밀빵?” “유기농 설탕? 100% 우유버터는 뭐야? 뭐가 다른데?” “국산이나 중국산이나 먹어보면 차이도 모르겠는데 비싸기만 하고 에이, 장사가 되겠어?” 처음 빵집을 하겠다고 하니 모든 귀농인과 주민들에게 우려에 소리를 많이도 들었다. 역시나 쉬운 일도 없고 세상에 공짜도 없었다. ◇단조롭지 않고 할 일 많아서 즐거운 인생 새벽 3시에 일어나 반죽을 하고 빵을 굽고 포장까지 하려면 6∼7시간이 걸린다. 시장 빵과 프렌차이즈 빵집과의 차별화를 위해 매일 반죽을 하고 굽고, 정확한 시간에 배달했다. 그렇게 3개월쯤이 지나자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반품이 줄어들었다. 비록 10평 남짓한 작은 북카페이고, 1억5000만원이 넘는 빛을 안고, 매달 내야하는 이자에 허덕이며 살지라도 우린 힘들지 않았다. 우리가 꿈꾸는 삶이 허무한 요행과 단조로운 일상보다는 매일매일 새로운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고, 또 해야 할 일이 있는 이런 현실을 즐길 수 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우린 웃을 수 있었다. 산사태가 나기 전, 운영하고 있던 북카페. 그곳에 들렸던 대다수에 손님들은 자신들도 귀농을 꿈꾼다 했다. 하지만 막연히 시골생활은 평화롭고 안락하리라는 동경 속에서 환상과 헛된 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시련 속에서 견뎌낼 수 있을 지부터 상상해 보라고, 우선 온갖 벌레(지네, 나방, 거미, 개미 등)들과 집안에서 함께 생활 할 수 있는지, 한여름 뙤약볕에 썬크림 없이 서있을 수는 있을까? 그로인해 주근깨와 얇아진 표피층에 자외선이 닿아 검은 점들을 만든다면? 내가 산사태를 겪게 된다면 어떨까? 그 상황 안에서 잘할 수 있는 자신감이 넘친다면 귀농생활 성공확률 50%이다. 남은 50%는 근면, 성실함 등이 채워줄 것이다. 시골은 부지런해야 살 수 있고, 부지런하면 행복할 수 있는 곳이다. 해야 할 일이 무수히 많고, 할 일이 끊이지 않으며, 내 땅이 없다 해도 서글프지 않다. 이른 봄. 눈 녹기가 무섭게 산을 오르면서 산나물(다래순, 취나물, 곰취 등)을 뜯어 발효액도 만들고, 고로쇠 수액도 받는다. 여름엔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농사일로 바빠진다. 낮엔 더위를 피해 계곡에서 다슬기도 따고, 물고기를 잡기도 한다. 가을엔 호두, 밤, 감 등을 따고, 곶감, 고추도 말리고, 버섯, 오미자, 산머루 등 여러 약초들을 캐러 다니며, 그것으로 수입을 창출한다. 겨울엔 겨우살이 채취 또는 메주, 된장, 고추장, 김장김치(절임배추)를 담아 판매하는 사람도 많다. 무엇보다 귀농에 있어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자연과의 동화인 듯싶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확실히 부족하나 풀, 벌레, 새, 나무 등 자체의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느끼고, 또 즐긴다면 시골살이가 단지 고단함과 무료함의 연속이진 않을 것이다. ·귀농 전 거주 지역: 서울, 창원(주말부부) ·귀농 전 직업: 직장생활 ·귀농 결심동기: 시골생활에 대한 꿈 ·귀농 선택작목: 지역 특산품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없음 ·귀농연도: 2011년 ·귀농 시 나이: 39세 ·귀농지 선택사유: 지리산을 좋아해서 ·귀농시 영농기반: 없음 ·귀농 초기자금: 2억 2000여만원 ·현재 영농규모 : 고사리 1000평 ·연간 수익: 아직 없음(유기농 빵 판매로 연간 2500만원 정도) ·향후 계획: 다양한 많은 일들을 도전하고 싶다2014-05-22 17:26
  • 어느 종교가 홈리스를 가장잘 케어하는가
    [숲과 나무의 가치] 피톤치드는 장과 심폐기능도 강화시켜 줍니다 2006~2008년 보건복지부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1~11세 아이중 5명중 1명이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화학물질에 빈번히 노출이 되고 있기 때문이고 그중 피부가 약한 아이들이게는 만성적이고 재발성 피부염을 발생시켜 참기 힘든 가려움증을 유발시키고 있습니다. 아직 피부염의 발병원인은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산업화에 따른 환경요인의 변화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환경요인은 환경공해, 서구식 주거형태로 인한 카펫 침대 소파의 사용증가, 실내온도 상승으로 인한 집먼지진드기등 다양한 알레르기 원인 물질의 증가로 보고 있습니다. 다양한 알레르기 원인 중 특히 아파트등 공동 주택내의 실내 공기 오염문제가 아이들의 아토피 피부염의 주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데, 가장 많은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은 포름알데히드, 휘발성화합물, 미세먼지, 석면 등의 물질들이 원인이고 이것들이 새집증후군을 유발하고 아토피 질환을 발생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아토피를 유발시키는 물질들을 제거해줌으로서 아토피 피부염을 예방할 수 있으나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를 하거나 실내 공기를 상시 정화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려운 일 입니다. 이러한 유해물질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아파트의 어린아이방을 국산목재로 처리하여 자연환경을 만들어 주고 목재를 이용해 실내 내장을 마감하는 것으로 접착제 등에서 발생하는 유해 물질을 제거하고 콘크리트에서 나오는 유해물질을 저감시키기 위해 실내를 목재화(목질화)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목재는 유해물질인 포름알데히드 제거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국산목재의 경우 편백, 잣나무, 소나무가 20~35%로 다소 높고 낙엽송 11-16%, 삼나무 9~14%로 다소 낮은 제거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 면적이 넓을수록 효과가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산림과학원 2008 국산침엽수 포름알데히드 제거효과측정) 목재가 가지고 있는 테르펜류가 포름알데히드 제거에 관여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목재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는 러시아 생화학자 토긴이 처음 제안했고, 식물이란 의미의 phyton과 죽이다의 cide를 합친 말입니다. 인체에 유해한 것을 죽이고 유익한 것을 살리는 물질이라는 의미로 삼림욕을 통해 피톤치드를 마시면 스트레스 해소와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살균작용도 이루어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국내산 침엽수림의 정유함량(단위 ml/100g, 박재철 1991)은 편백나무는 겨울 5.2 여름 5.5 , 소나무는 겨울1.7 여름1.3, 잣나무 겨울1.6 여름2.1로 여름에 피톤치드가 많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토피 피부염이 있는 아이들에게 유해한 환경을 개선해줄 수 있는 방법으로 아이들방을 목재화(목질화) 해 꾸며주는 것이 어떨까요. 피톤치드의 좋은 점은 집중력 강화 외에 스트레스 완화 및 탈취능력 등 다양한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재로 꾸며진 방은 아이들에게 심적으로 안정감을 제공하고 심성을 순화시키는 다양한 순기능을 합니다.2014-05-16 17:44
  • 어느 종교가 홈리스를 가장잘 케어하는가
    [귀농정착 성공사례(9)] “직장과 농사 병행하며 ‘표고 전업농’ 준비해요”나는 면소재 중학교 교사가 되길 바라던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선택한 도시생활이었지만 50이 넘으면서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농촌의 현실은 아직도 어려웠다. 직장 생활과 농사를 병행하며 시골 살이를 시작했다. 이제 표고재배 등 새로운 희망을 품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 겪으면서 귀향 결심 ‘인간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나는 농촌의 중농가정에서 나서 성장하는 동안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동화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요즘이야 논농사, 밭농사 모두 기계화되고 일손이 많이 가는 농사는 기피하면서 단위 노동력당 경영하는 면적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60~70년대에는 논농사만 하더라도 두엄내기, 논갈이, 써레질 등을 전부 수작업으로 하거나 일부 축력에 의존했다. 간혹 기계를 사용했지만 아주 초보적인 기계에 의존하는 정도였다. 농촌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는 동안에도 퇴비장, 토끼사육장 같은 시설에서 토마토 같은 밭농사나 토끼사육 등 농사 체험을 배우고 익혔다. 이후 가까운 지역의 지명도 있는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공무원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들의 소망에 따라 농업관련 대학에서 공부했다. 이때 체계적이고 학문화된 각 부문의 농업이론을 배우고 실습을 하는 등 과정을 이수했다. 대학을 졸업하자 부모님은 중등교사 자격증을 이용해 면 소재 중학교 교사가 되길 바라셨지만 농촌생활의 갖가지 어려움, 각종 편의시설의 부족, 2세 교육을 위한 교육환경의 열악함 등을 이유로 대도시의 대기업에 입사했다. 부모님이 보유한 농지는 두 분이 충분하게 경작 가능하리라는 생각이었다. 80년대 말 변환기에 나와 중소기업에 몸담게 됐다. 그러면서 값싼 노동력을 찾아 회사가 중국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10여년 간의 중국생활을 했다. 한 때 거침없는 성장으로 코스닥에 상장했던 회사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영업이익이 공장손실을 메꾸지 못하는 등 경영 악화로 이어졌다. 공장을 통폐합하고 조직을 축소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이젠 떠날 때가 됐다고 판단돼 사직했지만 퇴직금도 못 받고, 회사주식에 투자했던 여유자금마저 상장 폐지되는 바람에 허공에 날리고 실업자가 됐다. 실업급여를 받는 6개월 동안 ‘취업이야 되겠지’하는 기대 속에서 인크루트를 비롯한 취업포털을 통해 수많은 회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취업에 실패했다. 50을 넘긴 나이가 핸디캡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작은 아이가 대학졸업을 3년이나 남겨두고 있어 하루라도 소득이 없어서는 안 되는 중차대한 시기였다. 가정주부라는 틀을 벗어난 적이 없던 안식구가 참다못해 월 100만 원 정도 급여를 주는 직장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팔순이 넘은 어머님 농사를 도우며 작은 농가 소득이라도 올리고자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계산해 본 예상농업소득만으로는 아이 대학 교육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됐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며 부업으로 직장에 다니는 동네 친구를 따라 월 130만원 정도의 보수를 받으며 출근을 시작했다. 출근해서 8시간 내내 예초기를 메고 도로 가장자리에 늘어지고 제멋대로 우거진 잡초와 작은 나무를 베는 일을 했다. 겨울에 눈이 오면 제설작업을 하면서 고된 2년여의 시간이 지나갔다. 고용노동부 취업포털인 워크넷(worknet)에 올린 내 이력서를 보고 주유소 소장을 제의해 온 주유소가 있어 일을 시작했지만 전 소장은 퇴사하지 않고 모든 일을 알아야 한다며 계산원, 주유원 등으로 월 130만원의 보수를 주고 일만 시켰다. 회사에 불만이 많은 가운데 계속적인 취업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한 지역 중소기업으로부터 입사제의를 받고 연 3300만원의 보수로 출하관리 업무로 출근하면서 농사일을 병행해 나갔다. 농사를 지으며 모르는 부분은 경험 많은 어머님이나 친구한테 자문을 구하며 또 남들이 하는 상황을 보거나 과거에 봐왔던 기억을 살려 해나가고 있다. 논에는 벼농사를, 밭에는 고추농사는 단모작, 감자농사는 후작으로 무를, 마늘 심은 후작으로 메주콩을 심고 논둑이나 유휴지에는 검은 콩, 들깨, 호박, 가지, 상추, 고구마, 쪽파, 시금치, 오이, 참외, 토마토 등 채소나 잡곡을 심어 자급하고 있다. 요즘엔 고라니가 많아져서 콩, 옥수수 등은 수확을 못 할 정도로 피해가 많고 논에도 수확기에는 적지 않은 피해를 준다. 하지만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다 지인의 표고농장을 보고 온 뒤 기대를 가지고 실험적으로 시작한 농사가 표고재배다. 매년 11월부터 1월 사이에 엔진 톱을 구해 산에 있는 참나무나 밤나무를 베어 1m 전후의 길이로 토막을 내고, 표고종균을 넣을 수 있는 가는 나무는 나무보일러에 들어갈 정도의 길이로 잘라두었다가 화목으로 쓴다. 1월말에 군 산림조합에 표고종균을 신청하고 3월말 종균이 도착하면 모아 놓은 참나무에 5cm 폭에, 길이 10cm 전후의 간격으로 천공기로 구멍을 뚫고 성형종균을 넣고 물 주기 좋게 쌓아두고 15일 간격으로 물을 주고 차양 막을 설치해 주는 등의 관리를 한다. ◇바쁜 일 없는 시기 수입 짭짤한 표고농사 관리를 잘 하면 종균을 넣은 당년 가을에 표고를 수확할 수 있다고 교재에 나와있지만 내 경우에는 다음해 가을에 표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수확된 생표고는 거래처가 없어 저장성을 높이기 위해 먹을 수 없는 부분을 다듬어서 햇볕에 말려 저장했다가 구매자가 나타나면 시중가인 1kg에 5만 원에 팔고 있다. 표고재배는 중장비 도움 없이 하려면 통나무를 자르고 나르고 세우고 하는 일련의 일들이 중노동이지만 표고수확이나 물주기 등이 비교적 수월한 일이다. 어느 곳에서나 중국산 표고가 넘쳐나기 때문에 가격이 낮아 일이 힘든 것에 비해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온성 표고를 선택하면 3~4, 10~11월에 수확되기 때문에 일이 없을 때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부족한 지식을 메우고자 산림조합에서 출간한 ‘표고재배기술’이라는 책자로 공부하고 의심나는 부분은 찾아 읽으며 다른 고수익 버섯품종도 찾아보았다. 표고 전업농이 되기 위해서는 3만본 정도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정도의 원목을 살 수 있는 거래처를 확보하고 급수 설비 등 시설에 대한 투자를 위해서는 토지 비용 제외하고 연 5000만원 정도 자금이 필요하다. 현재 실험적으로 재배하는 표고는 한 해에 200본씩 확보하여 5년 정도 지나면 1000본정도 되고 그 중 800본 정도가 수확된다. 연차적으로 농사에 필요한 40m×8m 규모의 못자리용 비닐하우스를 보조금 제외한 420만 원에 설치하고 백미 및 현미가공이 가능한 가정용정미기를 140만 원에, 비닐 피복 및 소규모 로터리 및 두둑 만들기가 가능한 아세아 관리기를 120만 원에 구입하는 등 최소 규모의 투자도 진행 중이다. ◇직장과 농사를 병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나이 들어 남의 밑에 가서 거슬리는 말 참아가며 직장 다니지 말고 농사에 올인 하면서 편히 살라고. 그러나 나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직장생활과 농사를 병행할 생각이다. 또 관심 있는 금송, 장뇌삼, 블루베리, 복숭아 등을 시험적으로 심고 가꾸면서 가능성도 따져보고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바로 낙원이라는데 직장을 정년퇴직하면 젖 짜는 산양도 두세 마리 키워서 산양유를 짜서 마시고 남으면 치즈 등 제품 개발도 해보고 싶다. 또는 벌통을 두세 통 사서 남향 따뜻한 곳에 놓고 주위의 아카시아나 밤꽃 등의 꿀도 따고 작물의 수분도 좋게 하는 일들도 좋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여러 곳에 흩어진 조상님들의 산소도 정리하고 내가 흙으로 돌아갈 준비도 착실하게 해 놔서 후세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조상을 숭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작은 바램이다. * 귀농 전 거주 지역: 중국 대련에서 10년 거주 * 귀농 전 직업: 생산관리 * 귀농 결심동기: 노후준비 * 귀농 선택작목: 벼, 무, 배추, 감자, 표고버섯 *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없음 * 귀농연도: 2008년 * 귀농 시 나이: 52세 * 귀농지 선택사유: 고향마을 * 귀농시 영농기반: 논 4000평, 밭 1000평 * 귀농 초기자금: 없음 * 재 영농규모 : 귀농시와 동일 * 연간 수익: 논 농사 800만원, 밭 농사 450만원(감자 100만원, 무·배추 100만원, 고추 100만원, 표고버섯 150만원)합 1250만원2014-05-14 1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