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s Sermon:November 30, 2022본문: 시편 138:1-9
무엇에 대해 감사드리는가서론:오늘 우리는 한해의 추수감사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1621년 신대륙에 도착한 필그림 선조들(Pilgrim Fathers)이 그 해의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린 사실을 기념하는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순전한 청교도들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급진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고, 순전한 청교도들은 1625년 이후 영국 왕 찰스 1세의 핍박을 받으면서 신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청교도와 추수감사주일은 별상관이 없다고 봐야한다고 말합니다. 미국은 링컨 대통령이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도 지키자고 선포하여 이 날은 기독교적 행사라기보다 국가적 명절로 지켜지고 있고, 캐나다는 1872년 국회에서 통과시켜 현재까지 국가 축제일로 지키고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기독교인들이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계속 남습니다. 시편 136편에는 ‘감사’라는 단어는 성경 중 시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데 75번 사용된다. 그런데 감사라는 단어는 서원 또는 감사제와 함께 등장하든지 아니면 고통 가운데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는 구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별히 감사제란 화목제를 의미하는데(레 7:15; 시 50:14) 어려움과 힘든 역경 가운데 서원을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서원하여 어려움을 극복하겠다거나 피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에 맞서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어려움을 통해 자신의 부족을 느끼면서 회개에 이르고 그 회개를 통해 평생 베푸시는 그분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고난이 유익함을 깨닫게 된다(시 119:71).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지만 감사제 또는 화목제는 그 제물을 드리는 자도 함께 먹는다. 화목제는 감사와 서원의 요소로 구성된다(레 7장). 이것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후 7:3). 어려움을 비겁하게 피하지 않고 담대하게 맞이하여 그분과 함께 긴 터널을 능히 지나가겠다는 자세를 서원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평생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남은 삶도 그분과 함께 살겠다는 것이 서원으로 나타난다(시 50:14, 욘 2:9).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감사의 의미이며 헌신으로 그 감사를 나타내게 됩니다. 감사의 정식 영문학적 단어는 Gratitude입니다. 이것은 thankfulness, or gratefulness를 의미하는데, is from the Latin word gratus, which means "pleasing" or "thankful." 사람들은 gratitude가 gratus와 atitude합성일것으로 추측합니다. 오늘 감사주일에 우리는 어떠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표해야 하며 무엇에 대해 감사드려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감사하는 심정은 자신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어떤 어려움을 직면하더라도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기뻐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토마스 칼라이은 “마음은 물건보다 강하다. 마음은 물건의 창조자로서 형성자이다. 이세상의 왕자는 물력도 아니고 다만 신념과 신앙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둘째, 초대교회의 삶의 양식이었기 때문이다(행 2:46~47).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서 특별히 “기쁨과 순전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경건한 자들의 기쁨은 임무를 완성하는 것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곧 성령의 열매와 관련을 맺으면서 감사와 관련을 맺게 된다. 셋째, 감사하는 심정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심정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는 것에서 비롯된다. 초대교회 교부들 중 가장 존경받는 한 분은 아타나시오스(296~373년)이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삼위일체론을 반대한 자들의 핍박 속에서 목회 46년 동안 6차례, 즉 24년 동안 추방당했습니다.세 번째 추방을 당할 당시 그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AD 356년 2월 8일 아타나시오스는 도시에서 가장 큰 교회인 데오나스 교회에서 성찬식을 준비하는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회가 포위되고 교회당 문이 부서졌습니다. 이 명령을 내린 자는시리아누스였습니다. 하지만 아타나시오스는 조용히 제단 의자에 앉아 집사님에게 시편 136편을 낭송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자 회중들은 낭송되는 각 구절마다 큰 목소리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러자 무장한 군인들은 성단소( chancel)를 에워쌌습니다. 하지만 회중들과 감독은 두려워하지 않고 아타나시오스의 예식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가 기도를 시작하자고 권하자 군인들은 회중들과 예식을 인도하고 있는 성직자들을 모두 교회당 밖으로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래도 아타나시오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예식을 이끌었습니다. 교회당 밖으로 끌려 나온 후 6년 14일 동안 회중들을 보지 모했습니다. 넷째, 감사는 최상의 것을 받아서가 아니라 최선의 것을 받으므로 감사드려야 한다. 우리는 보통의 세상의 기준으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경우가 있다. 우리그리스도 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Best가 아니라 Valuable입니다. 감사의 표현은 바로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찬양은 곡조와 멜로디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을 읊으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 나타나는 곡조의 이름들이 그런 것 들이며 중세의 찬트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초기의 우리 한국교회에서 믿음의 선배들이 드렸던 찬송들은 가히 곧조를 읊으는 수준입니다. 우리 할머님 세대의 분들이 드리던 ‘예수 앞에 나오면’ ‘속죄함’등의 찬양이 그렀습니다. 끝으로, 시편 23, 136편등 위대한 시속에는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주 나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톱בוֹ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 “좋았더라”는 표현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곧 만물을 준비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의미한다. 특별히 23 :6절을 읽어보면,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라고 고백한다. 시편 136편과 같은 맥락이다. 그분은 아버지로서 그분의 자녀들과 늘 함께 하셨음을 다윗은 고백하고 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헤세드)이란 문구는 언약의 혜택이 나타나는 곳마다 표현된다. 그래서 경건한 자를 보호하시는 분이 곧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있어야 감사하는 심정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때 보이는 세상의 것을 보며 감사를 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사람과 비교하여 더 가진 것에 감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내가 영적으로 어떤 변화의 삶을 살게 해주셨고,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 배풀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November 13, 2022본문: 요한복음 20:19-29우리가 잃은 것과 얻은 것서론: 우리는 감사의 달인 11월 두번째 주일입니다. 우리 성도가 그리스도안에 사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분별하는 척도는 바로 그 사람이 얼마나 그의 삶에 감사하며 기쁨 가운데 살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십가에 죽으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 16:22에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3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또 그것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해 주셔서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리 많지 않지만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이곳 산호세에 사는 교포들은 운동과 산책 겸으로 가족 또는 친구들과 함께Saratoga 산 기슭에 있는 밤나무 밭에 가서 밤을 손수 주어 값을 지불하여 가져오곤 했습니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산이기에 밤을 주은 다음에 무게만큼 돈을 지불하고 가져온다고 합니다. 밤을 지칭하는 카스타네아(Castanea)는 희랍어입니다. 여기서 ‘chestnut’이란 영어명이 나온 듯하니다. 우리말로 밤은 그 밤톨 안에 영양분을 듬뿍 저장하는 맛있는 열매로 야생동물들에게도 중요 먹이자원이다. 밤송이는 바깥 껍질에 억센 가시가 돋고, 속 알맹이는 다시 딱딱한 껍질로 싸여있다. 하나를 까먹는 데에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도록 포식자를 귀찮게 하는 열매식물의 방어전략이다.밤송이는 속이 다 익어 터지면서 열매가 밖으로 드러난다.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완전히 읽지 않은 밤송이를 발로 까다가 가시에 찔린적이 자주 있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찾아오는 진정한 평안은 우리가 밤을 까서 먹는 것처럼 고난과 아픔 이후에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찾아오는 평안이어야 더 기쁘고 평화롭고 소중하게 여기집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전에 약속하신대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Peace be with you!)”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분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 내용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주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그 마음속에 주님이 주신 평안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성경 구약과 신약에서 표현하고 있는 ‘평안’ ‘평강’이 의미를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평강’ ‘평안’ ‘평강’이라는 단어가 350여회 나온다. 구약에는 히브리어로 ‘평강’이라는 단어는 5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가 우리가 잘아는 ‘샬롬’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안전하다’ ‘평온하다’(레26:6)는 뜻입니다. 두번째, ‘뉴악’이라는 단어인데 ‘정착’, ‘쉬다’라는 의미이다(대상22:9). 그리고 ‘샤카트’ =쉬게하다. ‘라가’는 ‘평안을 잠시 찾다’(렘6:16)라는 뜻이다. 그리고 ‘샬라브’는 ‘번창하다’. ‘안전하다’는 뜻이다. 신약에는 ‘에이레네(평온)’ ‘카이로(유쾌하다)’ ‘율로게오(번영하다)’ ‘호론뉘미(안심하다)’로 표현되어 있다. 1985년경 한국의 조용필씨가 불러서 유행했던 노래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제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무엇인가 버린것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무엇인가? 남은 것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남은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둘째 평안은 어떤이들의 희생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집닙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 가장 쓰라리고 아픈픈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처음 우리에게 주신 음성이 “Peace be with you!”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상징적인 것입니다. 벧전3:18 말씀에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기쁨과 평안은 그 어떤 분의 고난과 희생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지해야 합니다. 끝으로 평안은 우리 마음속으로 부터 옴니다. 헬라어로 마음을 ‘카르디아’ 그리고 ‘누우스’라고 합니다. ‘누우스’는 생물학적 heart를 말하고 ‘카르디아’는 정신적 영적인 면을 뜻합니다. 이태리의 한박물관에 가면 ‘평안’이라는 주제의 그림 밑에 이런 글이 세겨져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안이란 외부의 환경과 조건에 의해 제약받는 평안이 아니며, 세상이 주는 평안도 아니다. 사람에게 들어와 마음속에 근심을 없애주고 그리스도인의 온화한 마음은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몰아낸다. 구약성서에서 평강이라는 단어가 등장할때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민수기6:25,26에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 평강이라는 단어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부분에 10회 이상 나오는데, 사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그리고 26:3에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하였다. 결론: 지난주 화요일이 미국의 중간 선거의 날이었다. 특별히 이번 선거는 대부분의 상원과 반이상의 하원의원을 그리고 주지사를 선출하는 날이다. 미국 국회 의사당안의 가장 평화스러운 방이 상원과 하원홀의 중간에있는데, 그 방안에는 미국 국민을 대표해서 무릎을 꿇고있는 조지 워싱턴의 그림이있고 판벽에는 “This nation under God”에 있고 커다란 유리창에는 13개의 별이 세겨져 있고 그 창 틀에는 초와 성경책이 놓여 있고 그 사이에는 119:105절 “주의 말씀은 내발의 등이요 내길의 빛이니이다.” 말씀이 인용되어 있다. 하나님의 권위와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미국민이 위대해지고 평안해진다는 진리를 가르쳐준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고 주의 말씀을 전파하는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할때 영국과 미국의 국력이 강력했던 때였습니다. November 6, 2022본문: 마가복음 8:34-38한 생명의 가치 (The value of one life)현대 경제학의 창시자이며 자본주의 경제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의 Adam Smith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식사를 위해 사온 빵는 빵집주인이 우리를 위해 그 자신을 헌신한 자비심에서 만든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기주의 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라고 성서 이래의 가장 위대한 책이라고 불리는 그의 책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2장에서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그전에 ‘도덕 감정론’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그를 그를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부르지만 정작 그는 한번도 ‘자본주의’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스미스는 인간의 더 큰 만족을 추구하는 공통적인 성향(propensity) 및 교역 본능을 억압하기보다는, 본래 이기적인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것 대신 남들이 원하는 것을 생산하게끔 유도하는 시장을 통해 본능을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 개인뿐 아니라 일반의 부를 추구하는데 유리하다고 지적했다. 공익을 추구하려는 의도도 없고 자신이 공익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조차 모르면서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자라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공익에 이바지하게 된다는 주장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또한 경제원리에서 '인간의 이기심'만을 강조하지 않고, "자연적 동정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을 절제하고 사회적 조화를 유지하게 해 준다"라고 말하며 인간 본연의 도덕적인 판단력을 신뢰하며 당시의 정부와 결탁했던 중상주의자들의 독점을 거듭 비판하고, 인간의 '이기심과 도덕성'을 동시에 믿기도 했습니다. 제가 오늘 서두에 아담 스미스와 국부론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8일 전에 우리는 우리는 한국으로 부터 156명의 젊은이들이 앞사했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권력을 소유한 자나 부를 가진 사람들은 제일 먼저 그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이기주의 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기적인 본성을 따르지 않고 아담 스미스가 말한대로 자연적 동정심을 가지고 자기의 이기적 행동을 절제하고 사회적 조화를 이루신것이 한 국가에 속하여 다른 사람을 이끄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본문 전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꾸중을 듣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특이 하게도 그 전에 엄청난 칭찬을 들은 바로 다음에 예수님께 꾸중을 듣는 이야기가 나옴니다. 예수님이 꾸중을 하는 이유는 바로 베드로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다는 예고를 제자들에게 하시자 예수님을 붇들고 나가서 제자인 그가 예수님을 오히려 꾸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찌보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제자 중 가장 이기주의자이며 변절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여서 예수님께서 복있는 사람이라고 신임하고 높여 주었더니 예수님이 자기를 조금 실망시키자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왜 이 귀한 자리를 잃게 만들라고 그러느냐고 예수님 오히려 꾸중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불속에도 물속에도 들어가겠다고 하더니 예수님이 붇들려 가니까 오히려 사람들앞에서 나는 예수와 전혀 관계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고 맹세했습니다. 또 갈라디아 2:11이하보니 유대인을 의식하여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들이 오니 그자리를 떠나 물러서 있었다. 이로 인해 바울에게 책망을 받기도 한 사람이 베드로였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배드로를 비롯하여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훈계하시는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이 사건은 세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데 마태는 제자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으로 나오고 누가복음에는 무리들에게 하시는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마가는 제자와 무리들에게 함께하시는 말씀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다움 인터넷에 어떤분이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말이 성서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쓴 글이 있던데, 마16:26 에 보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그리고 오늘 본문과 눅9:25도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의미인 것 갔습니다. 본문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이 말씀은 현세에서 모든것을 차지한다 해도 하나님 앞에 버린바 되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것이라고 독일의 신학자 벵겔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화) 한국의 가장 큰 제과 체인 본사 공장에서 일어난 슬픈사건. 우리속에 있는 이기적 사고를 버리려면 다른이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소중함을 세상의 어떤 사람들 보다더 우선시해야 합니다. 나의 영혼과 생명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한 것입니다. 둘째, 다른 연약한사람과 나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중소 기업인들이 일반 사원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회사가 잘되면 나는 당신들에게 가만있지 않고 많은 보상을 주겠다”고 합니다. 지금 조그만 것들을 사원들과 함께 나누지 않는 사람은 회사가 잘되어 규모가 커지면 배풀기가 더 힘이 듭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독교의 불변의 법칙은 35절 말씀대로 “제 목슴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키엘케골은 “온세상이 너를 비방한다 해도 너 자신을 잃지 않았으면 무슨 걱정이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고, 그분의 제자는 자기를 부인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다. 원어에 부인한다는 뜻은 자기를 무시하고 자기만의 생각을 버린다는 뜻이다. 즉 자기 야심을 무시하고 이기주의를 버린다는 의미인 것이다. 오늘 본문 35절에 ‘생명’이라는 단어가 ‘푸슈케’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것은 숨과 호흡을 말하지만 성서적으로는 ‘영혼’또는 ‘마음’이라는 의미이다. 최상의 물질문명의 끝자락을 살고 있는 이시대의 우리는육체적 생명보다 영원히 거하는 영혼을 중요시하여 우리의 영원한 삶을 갈망하자. October 23, 2022본문: 요한계시록 2:1-7처음 사랑을 회복하라서론: 얼마전 미국의 기독교 기관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설문 조사를했는데‘성경에 나오는 요나가 누구냐 ?’라고 물으니 40%의 사람들이 “그가 노아의 아들이냐?”라고 대답했다. “성경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우엇이냐?”라고 물으니 “그 두사람이 부부냐? 라고 대답한 사람도 많았다.요즈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성경을 읽을려고 하기보다 그 시간에 인터넷의 세상의 흥미로운 뉴스나 유튜브의 동영상을 보는 것을 좋아 합니다. 그만큼 영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2-3장에 보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하늘 보좌에 계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해 밧모섬에 있는 사도요한에게 환상 중 초대7교회에 보낼 편지를 계시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첫째 교회인 에베소서 교회에 대한 편지입니다. 에베소는 도시는 그 당시 아시아의 수도라 불리웠으며, 소아시아 지방의 정치, 교통,문화,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에게해 바다를 대하고 있고 카이스텔 가변에 있어 ‘아시아의 별’이라고 Pliny라는 1세기 로마의 철학자가 기록하였습니다. 에베소에는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120개의 커라란 대리석으로 건설한 아데미신전이 있습니다.참고로 고대세계의 7대 불가사의는 B.C 2 경 수학자 필론이 그의 책 세계의 7대경관”이란 책에 기록한 것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 베벨론의 궁중정원, 오림피아의 제우스상,에베소의 아데미신전,힐카르나소스의 마솔레움,로도스섬의 거상,알랙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행18:19-21에서 기록된 대로 2차전도 여행중 설립했고, 3차 전도여행중엔 2년 3개월동안 머물면서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친 곳입니다(행 19:1-20). 그곳에 놀라운 회개와 부흥이 있어 복음을 듣고 그들이 변화되어 그 도시에서 우상을 다 물리치려하였습니다. 그러자 우상을 만들어 장사하는 데메드리오가 반란을 일으킨 곳입니다.사도요한은 도미시안 박해때 밧모섬에 유배를 갔다 네르바 황제때 유배를 마치고 마지막을 바울이 세운 에베소 교회에서 마쳤습니다.요한과 바울의 연합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본론:오늘 본문의 주님이 에베소교회를 향해 말씀하신 내용속에서 오늘 우리에게 교훈들을 나누어 보겠습니다.먼저 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님의 칭찬이 먼저 있었는데,그들은 거짓된 것을 담대히 말하고 고치도록 했습니다. 요한복음 2:12-17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청결한 기사가 나옵니다.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은 유일하게 공생애 초기에 성전을 청결하신 기사를 다루고있습니다.그리고 17절에”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의 처음 믿음과 사랑을 새상의 이익이나 타산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주의 진리를 쫓으려고 했습니다. 둘째,주의 이름을 위해 인내하고 게으르지 아니하고 수고하였습니다.게시록에는 29번의 어린양이란 단어가 나온다. 28회가 ‘아르니온’이다. 어린양이란 구원사적 단어가 이토록 그리스도에게 쓰이는 것은 그가 어떻게 우리를 위해 겸손했으며 인내하셨고 수고했는지를 암시해주는 것이다. 암노스는 한번. 갈 2:22,23에 성령의 9가지 멸매 중 첫째가 인내이지만 사실 9 열매 모두가 인내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시인 루크레디우스(B.C 96-55)가 말하기를,“떨어지는 물이 결국 바위를 뚫는다. 위대한 효과는 인내를 통해서 옵니다. 그 대담성이 정신의 나약한 부분을 묶고 동여매기 때문이다”영국의 철학자,법률가,과학자, 약1: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소망에의 인내. 셋째,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꾸짖으시며,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셨습니다(4,5절). 가장 진실한 교회는 처음 믿은 신앙을 지키는 성도로 이루어진 연합체입니다. 그만큼 순수하다는 말이다. 오는날 극좌니 극우니 하는 말이 한국에서 유행한다. 요즘 한국이 정말 많이 발전해서 한국의 여러가지 스파트폰,TV등의 전자제품, 대중문화 특히 방송 program까지 수출 한다. ex)masked singer, senior tour. 이제는 정치까지 수출해서 미국도 극보수와 개혁파가 나뉨.누가 옳고그르냐 상관 없다. 니편 내편. 우리말의 문자로 좌우라 한다. 기독교에서 진정한 보수주의 신앙은 나자신을 매일 하나님의 말씀대로 개혁해가는 신앙이다. “인간은 가만히 나두면 자기하고 싶은데로 한다” 넷째, 에베소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배격.’니골라’란 “백성을 이긴다”의 의미가 있습니다.14절의 발람{히-백성을 삼킴}다는 의미와 유사합니다. 이 니골라당에 대한 의미의 해석에는 두가지의 설이 있습니다. 첫째는 행6:5의 7집사 중 하나인 니골라가 변심하여 한 당파를 만들었다는 주장입니다.두번째는 14, 15절 처럼 무 율법 무도덕 주의자로, 1)율법시대는 지났으므로 그 법과 규례는 더이상 불필요하다는 것이며, 2)육은 악이요 영은 선이기에 육이 어떤일을 해도 상관없다. 3)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보호받기에 어디서 무엇을 행하던 상관 없다.오늘의 일부 성도들이 추구하는 신앙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7교회에 주신 편지 속에 모두 주님께서 “내가…을 알고”라는 의미의 헬라어‘오이다’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리가 보통 아는 단어인 ‘기노스코’는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나 ‘오이다’는 직관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본문 2,3절에 “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하였습니다.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지금의 모든 행위와 인내와 수고를 친히 보시면서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지금의 삶에서 믿음의 행위위 사랑의 수고와 소망에의 인내를 기억하시고 비록 이곳에서 그 보답을 받지 못한다면 더 영광스로운 것으로 보상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기는 이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의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하리라.”예화) ‘Annuit Coeptis’미국의 국새 이면. October 16, 2022본문: 이사야 55:1-6주의 강가로 나오라서론: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되었다가 태어날 때 육신의 부모가 기도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날 때도 하나님의 은혜와 지켜주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성장한 자녀가 되기 까지 부모의 전적인 도움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영적성장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공급하심이 절대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주의 은혜의 강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구원과 그분의 공급에로의 초청을 계속해서 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는 주의 백성을 위로하면서 주가 내리시는 복의 길로 부르시는 여호와의 초청이 주된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와는 목마르고 가난한 자들에게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주신다고 선포하시고 가장 기름진 곳으로 공급받아 기쁨을 누리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의 모든것의 주인이고 나는 그의 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영어로 이것을 ‘Lordship’이라 하는데, 나를 부르신 분도 주요, 나를 구하신 분도 주요, 나의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주의 것이라는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공부도, 나의 일도, 나의 사업도 주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둘로스(종,노예)’로 표현했습니다. 둘째, 겸손과 순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본문 2절에 “나를 좀 청종하라(Listen, listen to me!)라고 하였고, 3절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incline you rear and come, listen!)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 삶에서 자꾸 영적인 일을 무시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 예화 )한 아이의 엄마-우리는 일상의 작은일들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충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 4절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이것은 주 예수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 삶에 커다란 문제가 생겼을 때, 낙심, 탄식만 할 것이 아니라, 조용히 기도하며 선한 길을 찾으며. 주의 도우심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좁은 길이지만 진리를 사수하는 삶을 가져야 한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지팡이를 던졌을 때 그것이 뱀이 되었고, 그 꼬리를 잡았을 때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모세의 지팡이는 진리이신 하나님 말씀을 의미합니다. 넷째, 비 생산적인 삶보다, 생산적인 삶을 살아라. “소금이 되지 못해도 빛은 되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은 믿은 후 봉사활동등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일에 집중합니다. 개중에는 무엇에 이끌려서 그런지 그것에 지나친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과 행동이 사람들에게 곱지 않게 비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봉사만을 하다 스스로 burn out되는사람이 있습니다. 이사람은 주님이 말씀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적극적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의 빛이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결론: 지금의 사람들은 다른 삶으로 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해 주면 대단한 만족과 기쁨을 얻습니다. 하물며 만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로마서 14:17,18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딤후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하나님의 자녀의 궁극적 삶의 목표는 사람에게도 인정받고 하나님께도 인정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원 생수가 흐르는 강가로 나아와서 그 생수를 마셔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강가에서 주의 끈임없는 공급을 받아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October 9, 2022본문: 시편 62:1-8우리의 피난처와 산성이 되신 하나님서론: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하나 꼽으라고 하면 단연코 은혜일 것입니다. 은혜를 구할 자격이 우리에겐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값없는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단어인 은혜를 히브리어로 은혜는 ‘헤세드(חסד)’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가 가장 먼저 언급되었던 곳은 창세기 19장 1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기에 앞서 롯에게 먼저 찾아가 그 사실을 알렸을 때, 롯은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천사가 롯에게 보여준 “호의”를 헤세드라고 합니다. 은혜, 즉 헤세드는 어떤 보상을 바라고 베푸는 동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신 조건 없는 사랑을 뜻합니다. '헤세드'는 '은혜,긍휼, 자비, 인자'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헤세드'는 '하싸드'라는 '사랑하다', '연모하다' '자비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유래되었고, 하나님의 열심, '친절', '은혜', '인자', '자비', '은총', '시기', '질투', '긍휼' 등을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헤세드(은혜)'는 에메트(진리)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진리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독생자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나타난 것이라고 요한1:14에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은혜'가 바로 '헤세드'이기도 합니다. 구약 시편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표현하는 형상이 있는데 그것은 ‘산성(fortress)’ ‘요새’ ‘피난처’입니다. 우리가 옛날의 산성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높은 요새 지역에 견고한 돌성이 둘려져 있고 성곽이 있고 망대가 있는 곳이 바로 ‘피난처(refuge)’ 산성 입니다. 힘과 보호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설명하는 비유로 이 말이 특히 시편에는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의지하는 주의 백성에게 다가오는 환란 속에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산성이요 요새이신 주의 도우심을 말씀하고 있다. 본문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헤세드)를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자녀에게 고난은 늘 찾아오지만 그것들 앞에서 의연하고 견고히 서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사악하고 거만한 자들의 음모와 핍박에 정면으로 부디치며 대적하였다. 그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을 굳게 잡고 의연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얀약한 인간이어서 흔들리는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다.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이 “흔들리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았다고 표현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의롭게 살다보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흔들리는 울타리와 넘어지는 담’으로 보일때가 많다. 그들의 눈엔 의인이 연약해 보이고, 세상에 공격에 금방 무너질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요한17:4을 보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삶, 그리고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에 모습을 보면서 위로를 얻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우리의 선진들의 삶이 늘 꺽이고 넘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왕성한 생명력을 주셔서 다시 일어서고 세상을 이끌어 왔다. 그 생명력은 갈릴리에서 지중해연안으로 그리고 세계로 퍼져 세계를 주도하는 역사가 된것이다. 한 때 인도가 정신 세계가 심오하여 사상 세계를 이끌거라고 한사람도 있었고, 중국이 앞으로 세계를 주도 할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들의 역사가 아직도 세상을 lead해 나가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12 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의인의 삶은 사랑과 정의의 삶이기에 항상 악한자의 핍박을 받는다. 본문 3,4절 보니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늘 악한 자들은 무리를 모아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을 공격합니다. 의인들을 천지 나락으로 떨어뜨리려 합니다. 입으로는 ‘자유’니, ‘민주’니 하면서 속으로는 선한 사람을 질투하여 자기 소유나 지위가 위협받을가 근심하여 선한 사람을 저주하고 틈 만나면 공격합니다. 끝으로, 아무리 세상이 사악하고 혼란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구원하시어 그의 산성에 서게 하시며, 그의 백성을 피난처에 거하게 하십니다. 19세기 초 80편의 찬송시를 쓴 영국의 Henry Francis Lyte 목사님은 고아였습니다. 왕실의 자선 학생으로 Dublin Trinity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천식폐렴으로 평생 고생하였으나, 영국의 해변도시 브릭스햄에서 과격한 어부들에게 봉사하며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 받게 하였다. 여기서 찬송가 ‘십자가를 내가지고’ ‘찬양하라 내영혼아’를 썻습니다. 이에 반하여 비슷한시대의 사람인 Cecil Rhodes 는 영국인으로 남아프리가 식민 통치 수상을 지낸 사람이다. 영국인과 남 아프리카의 보어 인간의 전쟁을 일으킨사람이다. 그 원인은 다이아몬드 광산을 획득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한 말이 있다. “나는 아프리카의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이젠 모두 남겨 놓고 갈 수 밖에 없다. 내가 얻은 것 중 하나도 가지고 갈 수 없다. 나는 영원히 존재하는 보물을 보지 못했고, 결국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노라.”라는 말을 남기고 48세의 인생을 마감했다. 결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을 살다보면, 고난을 만나며 핍박을 당하게 된다. 시대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여러모양으로 고난을 겪으며, 때론 난감한 상황에 빠지기도 한다. 예수께서 요16:33에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반드시 일으켜 세워 그의 산성에 이르게 하시며, 그의 피난처에 거하게 하실 것이다. October 2, 2022본문: 출애굽기 3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