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 카라수 내가 왜 널 믿어야 하지

Today's Sermon:

November 30, 2022

본문: 시편 138:1-9

무엇에 대해 감사드리는가

서론:오늘 우리는 한해의 추수감사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1621년 신대륙에 도착한 필그림 선조들(Pilgrim Fathers)이 그 해의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린 사실을 기념하는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순전한 청교도들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급진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고, 순전한 청교도들은 1625년 이후 영국 왕 찰스 1세의 핍박을 받으면서 신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청교도와 추수감사주일은 별상관이 없다고 봐야한다고 말합니다. 미국은 링컨 대통령이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도 지키자고 선포하여 이 날은 기독교적 행사라기보다 국가적 명절로 지켜지고 있고, 캐나다는 1872년 국회에서 통과시켜 현재까지 국가 축제일로 지키고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기독교인들이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계속 남습니다.

시편 136편에는 ‘감사’라는 단어는 성경 중 시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데 75번 사용된다. 그런데 감사라는 단어는 서원 또는 감사제와 함께 등장하든지 아니면 고통 가운데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는 구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별히 감사제란 화목제를 의미하는데(레 7:15; 시 50:14) 어려움과 힘든 역경 가운데 서원을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서원하여 어려움을 극복하겠다거나 피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에 맞서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어려움을 통해 자신의 부족을 느끼면서 회개에 이르고 그 회개를 통해 평생 베푸시는 그분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고난이 유익함을 깨닫게 된다(시 119:71).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지만 감사제 또는 화목제는 그 제물을 드리는 자도 함께 먹는다. 화목제는 감사와 서원의 요소로 구성된다(레 7장). 이것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후 7:3). 어려움을 비겁하게 피하지 않고 담대하게 맞이하여 그분과 함께 긴 터널을 능히 지나가겠다는 자세를 서원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평생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남은 삶도 그분과 함께 살겠다는 것이 서원으로 나타난다(시 50:14, 욘 2:9).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감사의 의미이며 헌신으로 그 감사를 나타내게 됩니다.  감사의 정식 영문학적 단어는 Gratitude입니다. 이것은 thankfulness, or gratefulness를 의미하는데, is from the Latin word gratus, which means "pleasing" or "thankful." 사람들은 gratitude가 gratus와 atitude합성일것으로 추측합니다. 오늘 감사주일에 우리는 어떠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표해야 하며 무엇에 대해 감사드려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감사하는 심정은 자신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어떤 어려움을 직면하더라도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기뻐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토마스 칼라이은 “마음은 물건보다 강하다. 마음은 물건의 창조자로서 형성자이다. 이세상의 왕자는 물력도 아니고 다만 신념과 신앙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둘째, 초대교회의 삶의 양식이었기 때문이다(행 2:46~47).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서 특별히 “기쁨과 순전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경건한 자들의 기쁨은 임무를 완성하는 것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곧 성령의 열매와 관련을 맺으면서 감사와 관련을 맺게 된다.

셋째, 감사하는 심정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심정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는 것에서 비롯된다.  초대교회 교부들 중 가장 존경받는 한 분은 아타나시오스(296~373년)이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삼위일체론을 반대한 자들의 핍박 속에서 목회 46년 동안 6차례, 즉 24년 동안 추방당했습니다.세 번째 추방을 당할 당시 그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AD 356년 2월 8일 아타나시오스는 도시에서 가장 큰 교회인 데오나스 교회에서 성찬식을 준비하는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회가 포위되고 교회당 문이 부서졌습니다. 이 명령을 내린 자는시리아누스였습니다. 하지만 아타나시오스는 조용히 제단 의자에 앉아  집사님에게 시편 136편을 낭송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자 회중들은 낭송되는 각 구절마다 큰 목소리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러자 무장한 군인들은 성단소( chancel)를 에워쌌습니다. 하지만 회중들과 감독은 두려워하지 않고 아타나시오스의 예식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가 기도를 시작하자고 권하자 군인들은 회중들과 예식을 인도하고 있는 성직자들을 모두 교회당 밖으로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래도 아타나시오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예식을 이끌었습니다. 교회당 밖으로 끌려 나온 후  6년 14일 동안 회중들을 보지 모했습니다.

넷째, 감사는 최상의 것을 받아서가 아니라 최선의 것을 받으므로 감사드려야 한다. 우리는 보통의 세상의 기준으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경우가 있다. 우리그리스도 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Best가  아니라 Valuable입니다. 감사의 표현은 바로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찬양은 곡조와 멜로디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을 읊으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 나타나는 곡조의 이름들이 그런 것 들이며 중세의 찬트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초기의 우리 한국교회에서 믿음의 선배들이 드렸던 찬송들은 가히 곧조를 읊으는 수준입니다. 우리 할머님 세대의 분들이 드리던 ‘예수 앞에 나오면’  ‘속죄함’등의 찬양이 그렀습니다.

끝으로, 시편 23, 136편등 위대한 시속에는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주 나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톱בוֹ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 “좋았더라”는 표현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곧 만물을 준비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의미한다.  특별히 23 :6절을 읽어보면,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라고 고백한다. 시편 136편과 같은 맥락이다. 그분은 아버지로서 그분의 자녀들과 늘 함께 하셨음을 다윗은 고백하고 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헤세드)이란 문구는 언약의 혜택이 나타나는 곳마다 표현된다. 그래서 경건한 자를 보호하시는 분이 곧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있어야 감사하는 심정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때 보이는 세상의 것을 보며 감사를 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사람과 비교하여 더 가진 것에 감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내가 영적으로 어떤 변화의 삶을 살게 해주셨고,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 배풀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November 13, 2022

본문: 요한복음 20:19-29

우리가 잃은 것과 얻은 것

서론: 우리는 감사의 달인 11월 두번째 주일입니다. 우리 성도가 그리스도안에 사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분별하는 척도는 바로 그 사람이 얼마나 그의 삶에 감사하며 기쁨 가운데 살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십가에 죽으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 16:22에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3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또 그것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해 주셔서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리 많지 않지만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이곳 산호세에 사는 교포들은 운동과 산책 겸으로 가족 또는 친구들과 함께Saratoga 산 기슭에 있는 밤나무 밭에 가서 밤을 손수 주어 값을 지불하여 가져오곤 했습니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산이기에 밤을 주은 다음에 무게만큼 돈을 지불하고 가져온다고 합니다. 밤을 지칭하는 카스타네아(Castanea)는 희랍어입니다. 여기서 ‘chestnut’이란 영어명이 나온 듯하니다. 우리말로 밤은 그 밤톨 안에 영양분을 듬뿍 저장하는 맛있는 열매로 야생동물들에게도 중요 먹이자원이다. 밤송이는 바깥 껍질에 억센 가시가 돋고, 속 알맹이는 다시 딱딱한 껍질로 싸여있다. 하나를 까먹는 데에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도록 포식자를 귀찮게 하는 열매식물의 방어전략이다.밤송이는 속이 다 익어 터지면서 열매가 밖으로 드러난다.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완전히 읽지 않은 밤송이를 발로 까다가 가시에 찔린적이 자주 있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찾아오는 진정한 평안은 우리가 밤을 까서 먹는 것처럼 고난과 아픔 이후에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찾아오는 평안이어야 더 기쁘고 평화롭고 소중하게 여기집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전에 약속하신대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Peace be with you!)”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분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 내용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주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그 마음속에 주님이 주신 평안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성경 구약과 신약에서 표현하고 있는 ‘평안’ ‘평강’이 의미를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평강’ ‘평안’ ‘평강’이라는 단어가 350여회 나온다. 구약에는 히브리어로 ‘평강’이라는 단어는 5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가 우리가 잘아는 ‘샬롬’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안전하다’ ‘평온하다’(레26:6)는 뜻입니다. 두번째, ‘뉴악’이라는 단어인데  ‘정착’, ‘쉬다’라는 의미이다(대상22:9). 그리고 ‘샤카트’ =쉬게하다. ‘라가’는 ‘평안을 잠시 찾다’(렘6:16)라는 뜻이다. 그리고 ‘샬라브’는 ‘번창하다’. ‘안전하다’는 뜻이다. 신약에는 ‘에이레네(평온)’ ‘카이로(유쾌하다)’ ‘율로게오(번영하다)’ ‘호론뉘미(안심하다)’로 표현되어 있다.

1985년경 한국의 조용필씨가 불러서 유행했던 노래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제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무엇인가 버린것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무엇인가? 남은 것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남은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둘째 평안은 어떤이들의 희생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집닙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 가장 쓰라리고 아픈픈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처음 우리에게 주신 음성이 “Peace be with you!”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상징적인 것입니다. 벧전3:18 말씀에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기쁨과 평안은 그 어떤 분의 고난과 희생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지해야 합니다.

끝으로 평안은 우리 마음속으로 부터 옴니다. 헬라어로 마음을 ‘카르디아’ 그리고 ‘누우스’라고 합니다. ‘누우스’는 생물학적 heart를 말하고 ‘카르디아’는 정신적 영적인 면을 뜻합니다. 이태리의 한박물관에 가면 ‘평안’이라는  주제의 그림 밑에 이런 글이 세겨져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안이란 외부의 환경과 조건에 의해 제약받는 평안이 아니며, 세상이 주는 평안도 아니다. 사람에게 들어와 마음속에 근심을 없애주고 그리스도인의 온화한  마음은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몰아낸다.

구약성서에서 평강이라는 단어가 등장할때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민수기6:25,26에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 평강이라는 단어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부분에 10회 이상 나오는데, 사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그리고 26:3에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하였다.

결론: 지난주 화요일이 미국의 중간 선거의 날이었다. 특별히 이번 선거는 대부분의 상원과 반이상의 하원의원을 그리고 주지사를 선출하는 날이다. 미국 국회 의사당안의 가장 평화스러운 방이 상원과 하원홀의 중간에있는데, 그 방안에는 미국 국민을 대표해서 무릎을 꿇고있는 조지 워싱턴의 그림이있고 판벽에는 “This nation under God”에 있고 커다란 유리창에는 13개의 별이 세겨져 있고 그 창 틀에는 초와 성경책이 놓여 있고 그 사이에는 119:105절 “주의 말씀은 내발의 등이요 내길의 빛이니이다.” 말씀이 인용되어 있다.  하나님의 권위와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미국민이 위대해지고 평안해진다는 진리를 가르쳐준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고 주의 말씀을 전파하는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할때 영국과 미국의 국력이 강력했던 때였습니다.

November 6, 2022

본문: 마가복음 8:34-38

한 생명의 가치 (The value of one life)

현대 경제학의 창시자이며 자본주의 경제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의 Adam Smith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식사를 위해 사온 빵는 빵집주인이 우리를 위해 그 자신을 헌신한 자비심에서 만든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기주의 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라고 성서 이래의 가장 위대한 책이라고 불리는 그의 책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2장에서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그전에 ‘도덕 감정론’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그를 그를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부르지만 정작 그는 한번도 ‘자본주의’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스미스는 인간의 더 큰 만족을 추구하는 공통적인 성향(propensity) 및 교역 본능을 억압하기보다는, 본래 이기적인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것 대신 남들이 원하는 것을 생산하게끔 유도하는 시장을 통해 본능을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 개인뿐 아니라 일반의 부를 추구하는데 유리하다고 지적했다. 공익을 추구하려는 의도도 없고 자신이 공익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조차 모르면서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자라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공익에 이바지하게 된다는 주장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또한 경제원리에서 '인간의 이기심'만을 강조하지 않고, "자연적 동정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을 절제하고 사회적 조화를 유지하게 해 준다"라고 말하며 인간 본연의 도덕적인 판단력을 신뢰하며 당시의 정부와 결탁했던 중상주의자들의 독점을 거듭 비판하고, 인간의 '이기심과 도덕성'을 동시에 믿기도 했습니다.

제가 오늘 서두에 아담 스미스와 국부론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8일 전에 우리는 우리는 한국으로 부터 156명의 젊은이들이 앞사했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권력을 소유한 자나 부를 가진 사람들은 제일 먼저 그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이기주의 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기적인 본성을 따르지 않고 아담 스미스가 말한대로 자연적 동정심을 가지고 자기의 이기적 행동을 절제하고 사회적 조화를 이루신것이 한 국가에 속하여 다른 사람을 이끄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본문 전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꾸중을 듣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특이 하게도 그 전에 엄청난 칭찬을 들은  바로 다음에 예수님께 꾸중을 듣는 이야기가 나옴니다. 예수님이 꾸중을 하는 이유는 바로 베드로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다는 예고를 제자들에게 하시자 예수님을 붇들고 나가서 제자인 그가 예수님을 오히려 꾸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찌보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제자 중 가장 이기주의자이며 변절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여서 예수님께서 복있는 사람이라고 신임하고 높여 주었더니 예수님이 자기를 조금 실망시키자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왜 이 귀한 자리를 잃게 만들라고 그러느냐고 예수님 오히려 꾸중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불속에도 물속에도 들어가겠다고 하더니 예수님이 붇들려 가니까 오히려 사람들앞에서 나는 예수와 전혀 관계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고 맹세했습니다. 또 갈라디아 2:11이하보니  유대인을 의식하여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들이 오니 그자리를 떠나 물러서 있었다. 이로 인해 바울에게 책망을 받기도 한 사람이 베드로였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배드로를 비롯하여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훈계하시는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이 사건은 세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데 마태는 제자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으로 나오고 누가복음에는 무리들에게 하시는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마가는 제자와 무리들에게 함께하시는 말씀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다움 인터넷에 어떤분이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말이 성서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쓴 글이 있던데,  마16:26 에 보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그리고 오늘 본문과 눅9:25도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의미인 것 갔습니다.

본문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이 말씀은 현세에서 모든것을 차지한다 해도 하나님 앞에 버린바 되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것이라고 독일의 신학자 벵겔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화) 한국의 가장 큰 제과 체인 본사 공장에서 일어난 슬픈사건.

우리속에 있는 이기적 사고를 버리려면 다른이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소중함을 세상의 어떤 사람들 보다더 우선시해야 합니다. 나의 영혼과 생명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한 것입니다.

둘째, 다른 연약한사람과 나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중소 기업인들이 일반 사원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회사가 잘되면 나는 당신들에게 가만있지 않고 많은 보상을 주겠다”고 합니다. 지금 조그만 것들을 사원들과 함께 나누지 않는 사람은 회사가 잘되어 규모가 커지면 배풀기가 더 힘이 듭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독교의 불변의 법칙은 35절 말씀대로 “제 목슴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키엘케골은 “온세상이 너를 비방한다 해도 너 자신을 잃지 않았으면 무슨 걱정이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고, 그분의 제자는 자기를 부인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다. 원어에 부인한다는 뜻은 자기를 무시하고 자기만의 생각을 버린다는 뜻이다. 즉 자기 야심을 무시하고 이기주의를 버린다는 의미인 것이다. 오늘 본문 35절에 ‘생명’이라는 단어가 ‘푸슈케’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것은 숨과 호흡을 말하지만 성서적으로는 ‘영혼’또는 ‘마음’이라는 의미이다. 최상의 물질문명의 끝자락을 살고 있는 이시대의 우리는육체적 생명보다 영원히 거하는 영혼을 중요시하여 우리의 영원한 삶을 갈망하자.

October 23, 2022

본문: 요한계시록 2:1-7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서론: 얼마전 미국의 기독교 기관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설문 조사를했는데‘성경에 나오는 요나가 누구냐 ?’라고 물으니 40%의 사람들이 “그가 노아의 아들이냐?”라고 대답했다. “성경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우엇이냐?”라고 물으니 “그 두사람이 부부냐? 라고 대답한 사람도 많았다.요즈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성경을 읽을려고 하기보다 그 시간에 인터넷의 세상의 흥미로운 뉴스나 유튜브의 동영상을 보는 것을 좋아 합니다. 그만큼 영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2-3장에 보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하늘 보좌에 계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해 밧모섬에 있는 사도요한에게 환상 중 초대7교회에 보낼 편지를 계시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첫째 교회인 에베소서 교회에 대한 편지입니다. 에베소는 도시는 그 당시 아시아의 수도라 불리웠으며, 소아시아 지방의 정치, 교통,문화,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에게해 바다를 대하고 있고 카이스텔 가변에 있어 ‘아시아의 별’이라고 Pliny라는 1세기 로마의 철학자가 기록하였습니다. 에베소에는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120개의 커라란 대리석으로 건설한 아데미신전이 있습니다.참고로 고대세계의 7대 불가사의는 B.C 2 경 수학자 필론이 그의 책 세계의 7대경관”이란 책에 기록한 것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 베벨론의 궁중정원, 오림피아의 제우스상,에베소의 아데미신전,힐카르나소스의 마솔레움,로도스섬의 거상,알랙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행18:19-21에서 기록된 대로 2차전도 여행중 설립했고, 3차 전도여행중엔 2년 3개월동안 머물면서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친 곳입니다(행 19:1-20). 그곳에 놀라운 회개와 부흥이 있어 복음을 듣고 그들이 변화되어 그 도시에서 우상을 다 물리치려하였습니다. 그러자 우상을 만들어 장사하는 데메드리오가 반란을 일으킨 곳입니다.사도요한은 도미시안 박해때 밧모섬에 유배를 갔다 네르바 황제때 유배를 마치고 마지막을 바울이 세운 에베소 교회에서 마쳤습니다.요한과 바울의 연합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본론:오늘 본문의 주님이 에베소교회를 향해 말씀하신 내용속에서 오늘 우리에게 교훈들을 나누어 보겠습니다.먼저 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님의 칭찬이 먼저 있었는데,그들은 거짓된 것을 담대히 말하고 고치도록 했습니다. 요한복음 2:12-17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청결한 기사가 나옵니다.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은 유일하게 공생애 초기에 성전을 청결하신 기사를 다루고있습니다.그리고 17절에”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의 처음 믿음과 사랑을 새상의 이익이나 타산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주의 진리를 쫓으려고 했습니다.

둘째,주의 이름을 위해 인내하고 게으르지 아니하고 수고하였습니다.게시록에는 29번의 어린양이란 단어가 나온다. 28회가 ‘아르니온’이다. 어린양이란 구원사적 단어가 이토록 그리스도에게 쓰이는 것은 그가 어떻게 우리를 위해 겸손했으며 인내하셨고 수고했는지를 암시해주는 것이다. 암노스는 한번. 갈 2:22,23에 성령의 9가지 멸매 중 첫째가 인내이지만 사실 9 열매 모두가 인내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시인 루크레디우스(B.C 96-55)가 말하기를,“떨어지는 물이 결국 바위를 뚫는다. 위대한 효과는 인내를 통해서 옵니다. 그 대담성이 정신의 나약한 부분을 묶고 동여매기 때문이다”영국의 철학자,법률가,과학자, 약1: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소망에의 인내.

셋째,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꾸짖으시며,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셨습니다(4,5절). 가장 진실한 교회는 처음 믿은 신앙을 지키는 성도로 이루어진 연합체입니다. 그만큼 순수하다는 말이다. 오는날 극좌니 극우니 하는 말이 한국에서 유행한다. 요즘 한국이 정말 많이 발전해서 한국의 여러가지 스파트폰,TV등의 전자제품, 대중문화 특히 방송 program까지 수출 한다. ex)masked singer, senior tour. 이제는 정치까지 수출해서 미국도 극보수와 개혁파가 나뉨.누가 옳고그르냐 상관 없다. 니편 내편. 우리말의 문자로 좌우라 한다. 기독교에서 진정한 보수주의 신앙은 나자신을 매일 하나님의 말씀대로 개혁해가는 신앙이다. “인간은 가만히 나두면 자기하고 싶은데로 한다”

넷째, 에베소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배격.’니골라’란 “백성을 이긴다”의 의미가 있습니다.14절의 발람{히-백성을 삼킴}다는 의미와 유사합니다. 이 니골라당에 대한 의미의 해석에는 두가지의 설이 있습니다. 첫째는 행6:5의 7집사 중 하나인 니골라가 변심하여 한 당파를 만들었다는 주장입니다.두번째는 14, 15절 처럼 무 율법 무도덕 주의자로, 1)율법시대는 지났으므로 그 법과 규례는 더이상 불필요하다는 것이며, 2)육은 악이요 영은 선이기에 육이 어떤일을 해도 상관없다. 3)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보호받기에 어디서 무엇을 행하던 상관 없다.오늘의 일부 성도들이 추구하는 신앙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7교회에 주신 편지 속에 모두 주님께서 “내가…을 알고”라는 의미의 헬라어‘오이다’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리가 보통 아는 단어인 ‘기노스코’는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나 ‘오이다’는 직관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본문 2,3절에 “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하였습니다.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지금의 모든 행위와 인내와 수고를 친히 보시면서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지금의 삶에서 믿음의 행위위 사랑의 수고와 소망에의 인내를 기억하시고 비록 이곳에서 그 보답을 받지 못한다면 더 영광스로운 것으로 보상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기는 이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의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하리라.”예화) ‘Annuit Coeptis’미국의 국새 이면.

October 16, 2022

본문: 이사야 55:1-6

주의 강가로 나오라

서론: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되었다가 태어날 때 육신의 부모가 기도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날 때도 하나님의 은혜와 지켜주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성장한 자녀가 되기 까지 부모의 전적인 도움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영적성장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공급하심이 절대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주의 은혜의 강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구원과 그분의 공급에로의 초청을 계속해서 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는 주의 백성을 위로하면서 주가 내리시는 복의 길로 부르시는 여호와의 초청이 주된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와는 목마르고 가난한 자들에게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주신다고 선포하시고 가장 기름진 곳으로 공급받아 기쁨을 누리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본문 서두에서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고 하시는데, 여기서 말하는 목마른 자들이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마 5:6의 말씀을 의미 합니다. 즉 영혼이 갈급하여 주를 고대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모스 8:11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였습니다. 지금 시대는 영적으로 주리고 목마른 상태에 이르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 갈급함, 다른이에게 사랑받지 못한 갈급함, 자기 마음과 몸에 즐거움을 만족을 얻기 위한갈급함이 사람들에게 가득합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굶주림, 지위에 대한 굶주림, 명예에 대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어것들을 얻기위해 해메고 있습니다. 본문에 이런 때에  주님은 본문2절에 우리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심니다. 여기서 “너희는 돈,시간, 노동을 우리의 갈급함과 굶주림을 해결하기에 사용하지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우리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영적 육적 목마름과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의 모든것의 주인이고 나는 그의 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영어로 이것을 ‘Lordship’이라 하는데, 나를 부르신 분도 주요, 나를 구하신 분도 주요, 나의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주의 것이라는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공부도, 나의 일도, 나의 사업도 주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둘로스(종,노예)’로 표현했습니다.

둘째, 겸손과 순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본문 2절에 “나를 좀 청종하라(Listen, listen to me!)라고 하였고, 3절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incline you rear and come, listen!)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 삶에서 자꾸 영적인 일을 무시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 예화 )한 아이의 엄마-우리는 일상의 작은일들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충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 4절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이것은 주 예수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 삶에 커다란 문제가 생겼을 때, 낙심, 탄식만 할 것이 아니라, 조용히 기도하며 선한 길을 찾으며. 주의 도우심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좁은 길이지만 진리를 사수하는 삶을 가져야 한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지팡이를 던졌을 때 그것이 뱀이 되었고, 그 꼬리를 잡았을 때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모세의 지팡이는 진리이신 하나님 말씀을 의미합니다.

넷째, 비 생산적인 삶보다, 생산적인 삶을 살아라. “소금이 되지 못해도 빛은 되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은 믿은 후 봉사활동등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일에 집중합니다. 개중에는 무엇에 이끌려서 그런지 그것에 지나친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과 행동이 사람들에게 곱지 않게 비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봉사만을 하다 스스로 burn out되는사람이 있습니다. 이사람은 주님이 말씀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적극적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의 빛이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결론: 지금의 사람들은 다른 삶으로 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해 주면 대단한  만족과 기쁨을 얻습니다. 하물며 만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로마서 14:17,18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딤후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하나님의 자녀의 궁극적 삶의 목표는 사람에게도 인정받고 하나님께도 인정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원 생수가 흐르는 강가로 나아와서 그 생수를 마셔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강가에서 주의 끈임없는 공급을 받아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October 9, 2022

본문: 시편 62:1-8

우리의 피난처와 산성이 되신 하나님

서론: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하나 꼽으라고 하면 단연코 은혜일 것입니다. 은혜를 구할 자격이 우리에겐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값없는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단어인 은혜를 히브리어로 은혜는 ‘헤세드(חסד)’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가 가장 먼저 언급되었던 곳은 창세기 19장 1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기에 앞서 롯에게 먼저 찾아가 그 사실을 알렸을 때, 롯은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천사가 롯에게 보여준 “호의”를 헤세드라고 합니다. 은혜, 즉 헤세드는 어떤 보상을 바라고 베푸는 동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신 조건 없는 사랑을 뜻합니다. '헤세드'는 '은혜,긍휼, 자비, 인자'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헤세드'는 '하싸드'라는 '사랑하다', '연모하다'   '자비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유래되었고, 하나님의 열심, '친절', '은혜', '인자', '자비',

'은총', '시기', '질투', '긍휼' 등을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헤세드(은혜)'는 에메트(진리)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진리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독생자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나타난 것이라고 요한1:14에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은혜'가 바로 '헤세드'이기도 합니다.

구약 시편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표현하는 형상이 있는데 그것은 ‘산성(fortress)’ ‘요새’ ‘피난처’입니다. 우리가 옛날의 산성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높은 요새 지역에  견고한 돌성이 둘려져 있고 성곽이 있고 망대가 있는 곳이 바로  ‘피난처(refuge)’ 산성 입니다. 힘과 보호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설명하는 비유로 이 말이 특히 시편에는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의지하는 주의 백성에게 다가오는 환란 속에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산성이요 요새이신 주의 도우심을 말씀하고 있다. 본문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헤세드)를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자녀에게 고난은 늘 찾아오지만 그것들 앞에서 의연하고 견고히 서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사악하고 거만한 자들의 음모와 핍박에 정면으로 부디치며 대적하였다. 그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을 굳게 잡고 의연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얀약한 인간이어서 흔들리는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다.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이 “흔들리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았다고 표현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의롭게 살다보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흔들리는 울타리와 넘어지는 담’으로 보일때가 많다. 그들의 눈엔 의인이 연약해 보이고, 세상에 공격에 금방 무너질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요한17:4을 보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삶, 그리고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에 모습을 보면서 위로를 얻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우리의 선진들의 삶이 늘 꺽이고 넘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왕성한 생명력을 주셔서 다시 일어서고 세상을 이끌어 왔다. 그 생명력은 갈릴리에서 지중해연안으로 그리고 세계로 퍼져 세계를 주도하는 역사가 된것이다. 한 때 인도가 정신 세계가 심오하여 사상 세계를 이끌거라고 한사람도 있었고, 중국이 앞으로 세계를 주도 할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들의 역사가 아직도 세상을 lead해 나가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12 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의인의 삶은 사랑과 정의의 삶이기에 항상 악한자의 핍박을 받는다. 본문 3,4절 보니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늘 악한 자들은 무리를 모아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을 공격합니다. 의인들을 천지 나락으로 떨어뜨리려 합니다. 입으로는 ‘자유’니, ‘민주’니 하면서 속으로는 선한 사람을 질투하여 자기 소유나 지위가 위협받을가 근심하여 선한 사람을 저주하고 틈 만나면 공격합니다.

끝으로, 아무리 세상이 사악하고 혼란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구원하시어 그의 산성에 서게 하시며, 그의 백성을 피난처에 거하게 하십니다. 19세기 초 80편의 찬송시를 쓴 영국의 Henry Francis Lyte 목사님은 고아였습니다. 왕실의 자선 학생으로 Dublin Trinity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천식폐렴으로 평생 고생하였으나, 영국의 해변도시 브릭스햄에서 과격한 어부들에게 봉사하며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 받게 하였다. 여기서 찬송가 ‘십자가를 내가지고’ ‘찬양하라 내영혼아’를 썻습니다. 이에 반하여 비슷한시대의 사람인 Cecil Rhodes 는 영국인으로  남아프리가 식민 통치 수상을 지낸 사람이다. 영국인과 남 아프리카의 보어 인간의 전쟁을 일으킨사람이다.  그 원인은 다이아몬드 광산을 획득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한 말이 있다. “나는 아프리카의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이젠 모두 남겨 놓고 갈 수 밖에 없다. 내가 얻은 것 중 하나도 가지고 갈 수 없다. 나는 영원히 존재하는 보물을 보지 못했고, 결국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노라.”라는 말을 남기고 48세의 인생을 마감했다.

결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을 살다보면, 고난을 만나며 핍박을 당하게 된다. 시대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여러모양으로 고난을 겪으며, 때론 난감한 상황에 빠지기도 한다. 예수께서 요16:33에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반드시 일으켜 세워 그의 산성에 이르게 하시며, 그의 피난처에 거하게 하실 것이다.

October 2, 2022

본문: 출애굽기 34:1-7,
      누가복음 3:8,9

돌이켜 하나님 앞에 다시 서라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기독교의 줄기는 유대교이다”라고합니다. 이 말은 맞은 말일 수도 있고, 틀린 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유일 신인 여호와를 믿는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3위를 가진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만을 여호와가 택하여 지킨 다는 사상을 가졌고 기독교는 하나님 본체의  제2위인  ‘페르소나’ 아들을 이세상에 보내시어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게 하셨으며,  3위격인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를 새상 끝날까지 지키신다는 것이 기본 교리사상인 것이다. 제가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교하거나 유대인의 전승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 선민에 비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약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상징적 의미를 깨닫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해야 할 일들이다. 그래서 오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내일, 모래 있는 유대인의 절기인 ‘ 얌 키퍼르’에 대해 살펴보고,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얌 키퍼르’는 우리말로 ‘대 속죄일’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욤 키퍼’날에 기려야 할 한 부분이다. 좀더 설명을 해보기 위해 출애굽기 32장이하에 내용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출애굽하여 첫 기착지인 시내산 밑 광야에 진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에 불러 친히 돌에 새겨 십계명을 받게하시고 많은 율법을 받게 하셨다. 모세가 더디 내려옴을 참지 못해 그들은 금들을 모아와 아론에게 주어 금송아지를 만들게 하였다. 아론은 백성들의 성화에 못이겨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것이 너희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다.”라고 선포하였다. 이것을 아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 돌판을 들고 하산케 하셨다. 이 상황을 내려와 목격한 모세는 하나님이 만드신 돌판의 십계명을 그곳에 던져 깨뜨려 버렸다. 이일로 하나님은 진노하여 3천명 가량이나 죽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려 하셨다. 그러나 모세의 중재로 이를 거두게 되는데, 대신 모세의 제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대 회개의 날을 행하게 한 것이다. 바로 이날이 바로 ‘욤 키프르’ 인 것입니다.

오늘 이 대속죄의 절기에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며 오늘  물질 만능과 형상을 쫒아 다는 이 세대 속에서 우리는 어떤 큰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첫째, 주의 말씀을과 규례를 받으러 시내산에 오른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우상을 만는 백성을 보면, 이 시대에 그릇된 기독교인들과 거기에 따라가는 사역자를 생각케 한다. 요즘 computer나 media game 영상에 디자인 된 모든 형상을 ‘Icon’이라고 부릅니다. 동방정교회의 지나친 형상(icon)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동방과 러시아 정교회에 대항하여 일어난 것이 현대의 공산주의 혁명이다. 그리고 서방교회의 지나친 형식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항하여 태동된 것이 인본주의와 주유주의 신학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면 우리를 버려두어 인간문화의 세력에 저항 받아 스스로 고생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보다 타락 인간 스스로 그 길을 택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와 형상 중심에 빠진것을 보고 더이상 그들과는 함께하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출33:3 에 보면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기독교인에게 가장 슬픈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 계시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없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서 눈을 돌렸다는 뜻이며, 관심 밖이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징계와 채찍은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타락한 백성들에게 진노하여 형벌을 내리려 하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한 모세를 보라. 출33:13-15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백성을 위해 주께 살신성인하는 모세의 모습을 우리는 배워야 하는 것이다.

네번째,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뵈올 때 그는 주가 예비한 번석 위에 서 있었다. “21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22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우리 구주 예수는 우리의 반석이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십자가 그늘 밑에 예수의 발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었다면, 모세와 여호수아 처럼 여호와의 장막 안에 거하며,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 회막 문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회막’이라 함은 그의 백성이 모이는 장막(The tent of meeting)인 것입니다.출33: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오늘날 교회에(the tent of meeting)서 멀어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은 물론 성막도이 없던 광야 초기 생활에서 그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를 채험하는동안 회막을 향하여 경배하였습니다. 출33:8 -10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코로나 사태 이후로 우리가 대면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면 온라인으로 라도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September 25, 2022

본문: 열왕기상 17:1-7

하나님의 응답

서론: 스라엘 나라는 두가지의 월력을 사용하는데 하나는 종교력으로 ‘니산’월력을 사용하여 우리의 음력 3월을 정월 여기고 여러 종교행사나 절기를 지킨다. 다른 하나는 민간력으로 ‘에타님’이라 하여 오늘 ‘티슈리’월 첫날 (음력9월1일)을 정월 첫날로 여겨 행정, 출산 경제등의 표준일로 삼는다. 레위기23:23이하에 보면 특히 오늘은 여호와께서  이 안식일 날 ‘나팔절’이라 하여 나팔을 불어 기념께하고 성회로 모이게 하였다. 나팔을 부는 이유는 그 소리를 백성들이 듣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영적 각성을 주기위함이며, 그 소리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은혜와 복을 내리시기 위함이었다.(민10:10) 이때에 부는 나팔은 동물의 뿔로 만들이 그소리가 멀리 퍼져 나간다. 교회의 사명 중의 하나가 죄악으로 짐들어 가는 이 세상을 향하여 경고의 나팔을 부는 것이다. 지금의 교회가 이런 예언자적인 직무를 소홀이 하지말고 세상을 일깨우는 나팔을 불어 경각심을 주어야 할것이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당시의 이스라엘의 지배자나 백성의 죄에 경고하고 질책하다가 수난을 당하였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가 바로 그런 선지자 입니다.

엘리야는 길르앗의  디셉 출신의 사람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 왕 시기에 예언하던 선지자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의 뜻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우상 숭배가 극에 달했던 시대인 주전 875년경에  예언 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우상숭배를 질책하고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임을 나타내려 하였기에 이 이름이 주어진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과 이세벨의 세대로 시작해서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와 아합과 이세벨의 차자인 여호람의 때까지 삼대에 걸친 가장 암울한 시대에 여호와의 종으로서 충성스럽게 맡기신 사역을 감당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악행을 저지르고 우상 숭배를 하며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자 엘리야는 아합에게로 몇 해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이스라엘이 극심한 가뭄에 시달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의미는 여호와만을 섬겨야 할 주의 나라에 이방신을 포교하는 주인공이 그 나라의 제 2위가 된것이다. 이는 공공연히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예식이 국가적으로 행해질 것이라는 것을 안 엘리야가 담대히 대적하는 하나님의 경고를 전한 것이 가뭄의 예고인것이다.  이로 인해 아합과 이세벨의 미움을 사 쫓기게 된 엘리야는 요르단 강 동쪽에 위치한  그릿 시내에 숨어지냈다. 물은 그 시내에서 마셨고 음식은 야훼가 명령한 까마귀들이 떨어뜨려 주어 며칠 동안 머물렀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응답은 어떻게 오시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간절한 기도의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까마귀를 통해 먹을 음식을 보내주셨다. 6절에는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라고 기록돼 있다.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제공한다는 말씀은 믿기 힘든 사실이다. 하나님은 죽은 고기를 먹어치우는 까마귀를 사용해 엘리야의 필요를 채우셨다. 기근으로 먹을 것이 부족한 때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물을 마시라고 하신 뒤 까마귀들에게 엘리야가 먹을 식량을 구하게 하신 것이다. 이사야 55:8-9 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신다.

둘째, 우리가 의지하는 세상의 것은 곧 사라진다. 세상의 시냇물은 곧 마르고 만다. 하나님이 비를 내리지아니하면 곧 말라 버렸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수의 강을 갈망해야지 세상의 시냇물에 집착해서는 않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세상의 돈 명예 권력을 자신의 시냇물로 여긴다. 그러나 그 세냇물은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지 아나하면 다 사라지는 것이다.

때론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하고있는 마지막 것도 일시적으로 거두어 가신다. 7절에 엘리야가 마시고 있는 시냇물 까지도 마르게 하신다. 하나님은이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를 원망하고 떠난다.우리는 성경에서 이 예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구약에서 욥의 경우를 보며 이 교훈을 얻는다.

셋째, 하나님의 종이라도 때론 극심한 기근과 환란을 만나게 하시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큰 은혜와 기적의 통로가 된다. 본문 다음 소절에 사랍다 과부의 아들과 함께 먹을 마지막 남은 식량을 엘리야를 위해 대접하게 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이 여인의 극기의 헌신으로 하나님은 놀라운 기적을 배푸십니다. 우리교회도 연약하고 궁핍한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배푸는 성도의 그런 헌신으로 이교회가 새워져 가고 있음을 마음속의 아픔을 느끼고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아름다운 헌신을 큰신 은혜와 기적을 우리에게  보이실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히브리어로 ‘이스라엘’이란 뜻은 “하나님과 겨루다”라는 의미이고, ‘유다’라는 뜻은 ‘찬양하다”라는 로호보암 때 이스라엘은 나라는 북은 이스라엘, 남은 유다로 나뉘어졌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이후로 여호와를 대적하는 일을 일 삼았다.  오늘 본문에선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왕의 아들인 아합이 왕위에 올라 사악의 상징인 이세벨 왕비로 삼았다.  이스라엘 역사상 극심한 우상 숭배와 심각한 종교적 타락 속에서도 하나님의 경고와 질책의 메시지를 전하고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뜻을 배격하는 세력에 굳굳하게 맏섰던 엘리야는 결국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는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유대인의 월력 정월 초하루 나팔절에 우리는 첫번째 나팔 소리로 오셔서 죄인들을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은 두번째 나팔소리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태내는 나팔소리를 내며  모든 믿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는 주를 기다리는 성도가 되십시다.

September 18, 2022

본문: 디모데전서 6:11-16

하나님의 마음 마음을 아는 자

서론: 1952년에 즉위하여 지난 70년간 왕좌에 있다가 지난 9월 8일 타개한 영국 여왕 엘리사벳 2세의 뉴스가 요즘 사람들의 화두입니다. 영국은18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한 때 해가 지지않는 나라라고 할 만큼 세계를 호령하던 나라였습니다. 1917년 이후 나라의 통치권한은 줄었지만 이런 나라의 국왕의 지위를 누렸던 여인의 삶도 96세를 일기로 마감을 고했습니다. 내일 19일에 1965년 처어칠 수상 장례 이후 최초로 영국의 국장이 거행됩니다. 세계의 대부분의 나라 지도자들이 고인을 애도하고 조의를 표하기 위해 이 장례식에 참석한다고 하니 세계적 관심이 집중되는 여인의 장례식이 될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삶을 평가할 때 무엇으로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사람이 어떤 지위나 무엇을 소유하고 살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인격을 가지고 어떠한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가장 아끼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리고 주의 제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권유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사람’이란 칭호는 구약에서 모세,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에게만 쓰이고, 신약에서는 본문과 딤후3:17에만 쓰인다.

제일 먼저 하나님께로 부터오는 의를 소유한 자가 되라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구약엔 ‘쩨대카’ 라고 표현되어 있고, 신약엔 ‘디카이오수네’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하나님께로 난의라 해석된다. 먼저 예수를 나의 구원자와 주인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길이다. 로마서 5:1,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고린도후서 10: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잠언14: 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34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의를 이루려면  본문, 전의 말씀3-11절의 기록된것들을 피하여야 하는데, 그것들은 무지하고 교만하여 변론, 언쟁하는 것,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을 갖는 것이다. 마음이 무패하여 진리를 잃어버리고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영국이라는 나라는 9세기 말 알프레도 대왕때 처음 성경을 번역하여 문서화 한 후 미개함과 무지와 분열에서 벋어나 문명국으로 도약하였다. 그리고 16세기 엘리자베드 1세 때 성경을 국가의 기본 경으로 만포한 후 강대국으로 발돋음 하였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의 기반을 삼아 해가지지 않는나라라고 불리워 졌습니다.

둘째,경건을 몸과 마음에 힘써 익혀야 한다. 신약에  ‘유세비야’라고 표기 되었는데 Godliness로 표현된다. 진리를 잃어버린 경건은 형식주의로 흐르기 쉽습니다.

세번째는 믿음을 가지라. 원어야 ‘피스터스’ 구약엔 ‘에무나’ 표기되었는데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뢰한다”라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기적을 믿는 것 보다 하나님의 인격의 신실함을 믿는 것입니다.

넷째, 사랑이란 ‘아가페’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필리아’ 와 ‘스톨게’도 포함시키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사람이다.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이 모든 사랑을 다 갖는 것이다.

다섯째는 인내(휘포오네)는 patience와 endurance를 다포함하는 것이다. 전자는 육체와 정신적 고통을 참아내는 겅이고 후자는 시간적 기다림을 뜻하는 것이다.  딤후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끝으로 온유(프라우파띠아)는 meekness로 해석되어, 친절. 얌전, 겸손, 동정심, 공손등을 포함한다. 이시대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가장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동정심 일것입니다. 예화) 25년전 있었던 마더 테레사와 다이아나 스펜서의 장례식

결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세상의 물질적 축복, 권세, 쾌락을 주시지 않는 이유는 혹시 우리가 이세상의 순간적 현시적 만족에 얽매어 살지 않을까 염려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앙의 철저한 원칙을 내새워 너무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삶을 살때가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 삶의 질에 너무 집착하여 소외된 자 빈약한 자에 대한  동정심이 사라지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르친 복음은 마태복음 25장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예수께서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마지막 예화를 말씀하신다. 25장34-36말씀 보겠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September 11, 2022

본문: 마태복음 9:35-38,
요한복음4:35-38

영적 추수할 일꾼

서론: 어제는 우리 한국의 2대 명절중의 하나인 추석이었습니다. 이곳의 있는 우리 2세들은 이날을 중요시 하지 않지만 우리 세대등은 마음속에 깊이 자리자고 있는 명절입니다 . 저희 집은 특별한 연유가 있어 미국에 온 이후에도 이날에  가능하면 다른 날보다 귀한 음식을 차려 식구들과 나누는 전례가 있습니다. 이날은 3개월전에 소천하신 저희 아버님의 생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제 어머님과 함께 돌아가신 이후 처음 맞이하는 생일과 함께 추석을 보내며 아버님 산소에도 다녀 왔습니다.

추석이란 우리 조상들이  미국의 추수 감사절 처럼 처음 추수한 곡식들에 대한 감사의 제를 시행하는 날입니다. 한해 처음으로 추수한 곡식과 열매들을 가지고 음식들을 차려 조상에 대한 감사와 재해에서 지켜주시고 귀한 환경를 허락하신 하늘의 신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처는 오늘 예수님께서 2천년전 이맘때에 들녁과 세상을 바라보시며 한탄하시며 하셨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 예수께서 본문37,38에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저는 오늘여러분들과 함께 영적 ‘추수할 일꾼’ 어떤 사람이며 이세대 가운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나누어 보겠습니다.

본문: 34절에는 예수께서 공생애 가운데 하셨던 3가지 중심사역이  등장합니다. 첫째가 ‘디다케’ teaching  즉 가르치는것입니다. 둘째가 ‘케루소’ preaching 즉, 전파하는것이며,  셋째가 ‘떼라퓨온’ healing 즉 치유하는 사역입니다. 참고로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 네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말씀 선포 (케리구마), 둘째가 가르침(디다케), 셋째가 교제(코이노니아),  넷째가 예배(프로스큐네오)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이 네가지의 기능을 다하고 있는지 우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오늘그리스도인의 신앙이 뜨뜻 미지근하고  교회의 본래 모습이 상실되어 가는 것은 추수꾼의 원래의 본분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오즉하면 이단인 ‘신천지’가 자기들을 추숫꾼이라 하여 기성교회에 침투시키겠어요? 이시대는 진정한 하나님의 추수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주의 추수할 일꾼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첫째, 하늘을 의지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들녁의 추수가 그렇하듯이 하나님의 도움없이 진정한 추수를 할 수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예화) 슬로베니아의 한 선교사 부부.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닥친 문제보다 주의 더 큰 은혜를 우리에게 주셔 그것을 이기게 해 주신다.

둘째, 수고한 열매를 기대해야 한다. 자기의 피땀흘린 열매를 기대해야 한다. 본문 요한복음 4: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사실 이 말씀처럼 오늘날의 이름없이 빛도 없이 수고한 성도들의 노력으로 많은 열매를 얻교회나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타성에 젖어서는 않됨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땀흘리지 아니한 것을 얻으려는 사행심리가 있습니다.

셋째, 예리한 눈을 들어 들녁을 바라보는 눈을 가저야 합니다. 옛날 제가 시골에서 성장할 때 보면, 부지런한 농부는 일직 일어나 들녁을 자세히 살펴보고 색채를 보며 그 상태를 진단합니다. 그것이 심상치 않으면 가까이 가서 수분의 상태를 보거나 병충해의 위협이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봅니다. 영적 추숫군은 시대를 직시하는 예리한 눈을 가지고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사람이 되어여 합니다.

넷째,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 4:35보면, 팔레스틴 지역에는 곡식이 익어 추수할 때까지 넉달이 걸린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고통과 지루함을 참는 사람이 참된 추숫군입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와 침한 더위를 견디며 그것들을 돌보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다섯째, 말보다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추수를 기다리는 사람은 사람과의 대화보다 농작물과의 대화를 하며 묵묵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옛말에 “먼저 행동을 하고 말을 꺼내라.” 격언이 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3차원의 생각을 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윤을 얻기보다 먼저 사람을 얻기 위해 애쓰라는 뜻입니다.

결론: 추수를 기다리는 사람은 늘 자기의 곡식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꿈을 꾸듯, 영적 추숫군은 주위 사람에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우리의 혀가  생물학상 보통 길게 네밀면 15cm, 무게는 100그램 정도 됩니다. 이혀를 훈련시키는 데는 2년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보통사람은 분당150마디의 말을하고, 빠른 사람은 180여마디를 한다. 그것으로 우리는 좋은 말, 나쁜말, 거짓과 참을 발설 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지루한 얘기는 1인칭, 남 험담은 3인칭, 훈륭한 대화는 3인칭이라 합니다. 말에는 문(door)이 3가지가 있는데 진실의 문, 긍정의 문, 유익의 문이 있답니다.

추숫군을 원어로하면 ‘다리스테스’라고 합니다. ‘다르세이’라는 동사에서 왔는데, 이 뜻은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안심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Fredrick Will. Robertson이라는 “진리는  그 사람의 인격에 있다. 예수는 진리를 간단하게 말하지 않았다. 진리는 하나의 단어가 아니다.  삶과 그 존재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September 4, 2022

본문: 시편 121:1-8

주 안에서 새사람을 입은 자

서론: 이번 주말이 미국의 노동절 연휴 기간입니다. 우리가 ‘노동’ 이란 단어의 뜻을 “work, especially hard physical work”이라 하고, 동사의 의미는 make great effort.”하여 “정신적,육체적으로 열심을 기울이다”를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을 쏟고 크던, 작던지 그 보상를 받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병원에 가면 신생아 분만실을 ‘labor department’ 이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힘쓰고 애써 우리의 영적삶을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약성경 갈라디아 2:22,23에 보면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사.희.화, 인.자.양, 충.온.절 이렇게 3자씩 첫자를 다 암기하면 9가지의 단어를 다 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주 안에서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의 9가지 성품이 나옵니다. 그  9가지 영적 성품을 나열해 보며 우리에게 어떤 성품을 말하며, 어떤 훈련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은자의 그 첫째 덕목은 긍휼입니다. 원어에 ‘스플랑크나 오이크티르모’ 영어엔 ‘compassion’으로 표현되어 고통이나 큰 슬픔을 당한 사람에 대한 부드러운 동감의 정을 말한다.

두번째, 자비는 ‘크레스토테스’ 로 영어로 merciful 또는 kindness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마음자체가 악의가 없고 너그롭고 친절한것을 가리킨다. * 인도의 우화 중에 한 농부의 이야기입니다.

세번째, 겸손이란 ‘타페이노프로슈네’라고 원어에 표기되어 있는데, 영어에 humility로 해석되었다.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낯추는 것이다. 시편10:17엔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마태 11:29에서 겸손을 인격의 초석으로 여기셨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5:6 에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였다.

넷째, 온유란 ‘프라우테스’로  ‘meekness’영어로 표현 합니다. 온순, 유순, 따뜻하고 브드러운 마음을 의미한다. 신령한자들이 지녀야 할 마음의 태도입니다. 민수기 12:3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라고 하셨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다섯째, 오래 참음이다.’마크로듀미아’로 ‘longsuffering’입니다. 시간상으로 오래 참음을 말하며 감정을 나타내기 전에 마음을 오래 붇잡는 것을 말한다.  ‘노동하다’ 라는 영어의 뜻을 찾아보면 have difficulty in doing something despite working hard라고 되어있다. 오래참음도 노동처럼 그 어떤 방해요소가 있어도 참는것이 인내이다.

여섯번째, 주 안에서 새 사람을 입은 자는 ‘용서’ 할 수 있어야 한다. 원어야 ‘아피에미’로 쓰여있다. 영어의 forgive처럼 ‘보내버리다’ ‘가게하다’라는 뜻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취헤야 할 기본적인 태도이다. 용서란 그 상대에 대한 미운 마음을 완전히 잊어벼렸을 때 완성됨니다.

일곱번째,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유카리스티아’란 말은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헬라어로 ‘만족’란 말이 ‘엠피플레미’인데, 마음이 흡족하다란 뜻이있다. 시편63:4,5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5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여덟번째,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거해야 하는 것이다. 주의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지혜로 이끄며, 우리의 삶을 바른길로 인도합니다.

나머지 두가지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부터오는 것이다.

결론: 헬라어로 절제란 마을 ‘엥크라테이아’ 라고 하는데, “알맞게 조절하고 자제하다”라는 뜻이 있다. 미국에서 19세기 초에 ‘Temperance movement’ 것이 있었다. 술 마시는 것을 금지하고 퇴패적인 행위를 삼가하는 운동이 1834년 부터 일어났습니다. 한국에서는 1905년 4대 금지 운동이 기독교에서 있었다. 그것은 ‘금주, 금연, 금박’, 금첩’운동이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첩을 금지하는것이었는데, 가정을 깨트리는 주 원인이라 여겼던 모양입니다.  이것은 평양 대 부흥 운동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잘못된 성품과  습관이 고쳐지지만 그런데 이 운동은 우리의 신앙의 부흥훈련과 함께  이루어져야한다. 예수를 잘 믿으면 자동으로 고쳐지는 것은 일시적으로 변화되다가 다시 옛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9가지의 주 안에서의 새 사람의 덕목은 삶에서 희생과 수고를 계속할 때 이루어져 갑니다. 우리삶에서 소중한것은 하나님이 주시던지 우리의 정성어린 수고와 희생으로 얻어집니다. 우리는 영적한 한 생명이 태어나고 성장되도록 수고어린 ‘labor’를 계속해야 하며, 우리는 오늘도 나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영적 labor를 이루어가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August 28, 2022

본문: 시편 121:1-8

우리의 도음이 어디서 오나 ?

서론: 15세기 프랑스에서 고작 17세의 여성으로서 구국의 영웅이며 성인으로 추앙 받았던 쟌다르크를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평민 출신으로 잉글랜드 왕국과의 백년전쟁(1337-1453) 말기에 오를레앙 전투에서 승전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역전시켰다. 그녀의 기적적인 활약으로 인해 결국 프랑스가 백년전쟁에서 이기고, 잉글랜드를 대륙에서 축출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잔 다르크 자신은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혔고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조국 프랑스로부터 구명도 받지 못했으며, 종교재판을 받고 억울하게 화형되었다. 그녀는 사후 프랑스 애국주의의 상징이 되었으며, 종교적으로도 성인에 복원되어 그 명예가 회복되었다. 그녀의 사후 25년 후에 교황 갈리스토 3세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종교재판소가 잔 다르크에 대한 심사를 재개하였다. 재심 결과 그녀에게 씌워졌던 모든 혐의에 대해서 무죄라는 판결이 내려졌으며 순교자로 선언되었다. 그녀의 인생은 너무나 극적이고 놀라운 것이어서 오늘날에도 종종 회자되는 살아있는 성녀의 모델이자 여성 영웅의 대표로 손꼽힌다. 17세의 평범한 문맹 시골소녀가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며 프랑스 왕실에 나타나 프랑스 왕국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반년 넘게 지속되던 오를레앙 전투에 6000여명의 신앙인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전쟁을 열흘만에 승리로 이끌어 프랑스 군인 ‘뒤누아’를 구출했다. 그리고 파테 전투에서 영국 최고의 명장 ‘존 탈보트’를 포로로 잡고 역사에 길이 남을 우회 대기동을 성공시켜 랭스를 함락시켰다.그리고 샤를 7세의 대관식을 거행케하여 백년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긴 인류 역사에서 불가사의해 보이는 일들이 많았지만, 신화 시대를 제외한 기록이 검증 가능한 시대에 이와 비견될 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녀가 활동하던 1400년대는, 중세를 넓게 잡는 관점에서도 중세 말에 포함시키는 시기이다. 그리고 중세의 편견과 달리 당대 지식인들은 어리석은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영국과 프랑스군에게 비슷하고 교차 검증 가능한 기록이 남았으며, 서로의 상황을 고려해도 두 나라에서쪽거의 동일하게 추앙받던 인물입니다.

잔 다르크는 아마도 세상에 살았던 이들중 가장 환상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도 이상해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법정에 있던 사람들, 그리고 그녀를 가장 적대시했던 적들로부터, 그녀가 아직 살아있던 시절에 기록되지 않았더라면 그 누구도 사실이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큰 공을 세운 구국의 영웅이 왕의 측근들의 시기로 영국군에 팔려 루앙에 유폐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그때에 박해자들이 “당신은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외톨이요”라고 빈정했다. “그러난 그녀는 그들의 조롱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편이 좋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자애는 나를 버리는 일이 없고 그의 사랑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오늘 본문의 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다. 구약 성경의 시가서등 여러 문헌들이 바벨론 포로기를 전후로 작성되고 편집돠었다는 공인된 학설이다. 실제로 107편 부터 시작되는 시편의 제 5권에서 137편 등은 바벨론 강가에서 시온산을 향하며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며 불렀던 시이다. 우리의 세상 삶에서 우리는 바벨론 강가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 같은 상황을 느낄 때가 많다. 이 세상에서 사람은 반드시 누구의 도움을 받고 살기 마련이다.  도움을 받고, 또 베풀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우리가 우리 삶을 돌이켜 보면 실실하신 하나님꼐서 우리의 환란날의 큰 도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던 흔젓들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우리의 두움이 되시는 지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 보고자 한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산을 바라보아야한다. 본문을 작성한 시인은 자신에게 절실히 필요한 도움울 찾기위해 방황하였습니다. 시인의 당한 곤경을 누구하나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그는 세상에서 오는 도움을 포기하고 산을 향하여눈을 들고 절대자의 도음을 기대하기로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기록자는 어쩌면 동쪽을 향하여 예루살렘의 시온산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을 향하고 절망하던 시각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절망은 하나님께 대한 소망의 출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향한 눈은 이미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눈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도우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의 독생자 예수를 보내셔서 멸망의 길에 들어선 인생을 돕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것만이 메시야적  사역이 아니라 환란을 당한 그의 자녀를 구원하시는 것도 그 사역의 일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도움은 영원한 멸망만 면케 한것이 아니라, 우리의 완벽한 보호자가 되시어 우리 인생의 환란때 도우시는 분 이십니다.

셋째, 인생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그저 살아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관여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5절 이하에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중동지방에서 태양 빛은 일사병 등 심각한 위협이 있으며, 밤의 달빛은 오랜시간 노출되면 현기증, 정신 착란등을 유발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미국사람들은 달빛이 환한 밤이 잘 무섭다고 말하는 유래가 생긴것 같아요. Purkiser라는 신학자는 ‘지키신다’라는 말을 성도의 perserverance와 연결시켜 “주께서는 우릴 범죄하는 것으로부터 지키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앞에서 범죄치않도록 하신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결론: 요즘 현대 기독교 음악의 한 축을 당당하고 있는 TobyMac의 노래 “Help is on the way” 곡의 가사의 일부입니다. “나는 당신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 밤중 또는 대 낮 일 수 있습니다. 결코 이른 것이 아니고 결코 늦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가 기도하는 것을 유지할 것이다. 나는 이제 증거할 만큼 충분히 성장했다. 도움이 오고 있습니다. 저 모퉁이를 돌아서 도움이 오고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오고 있습니다. 나는 증거할 만큼 충분히 성장했어요. 이제 주의 도움이 진행 중입니다. 가끔은 그날, 때로는 몇 년, 어떤 사람들은 평생 눈물을 흘리며 직면합니다. 그러나 그는 어둠 속에, 그는 추위에서도, 환한 아침처럼 그는 항상 보여 주시는데, 한밤 중 또는 한낮 일 수 있습니다. 결코 이른 것이 아니고, 결코 늦은 것이 아니다. 그는 그가 하시고하는 것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나는 말할 만큼 충분히 성장했다.주의 도움이 모퉁이를 돌며오고 있습니다. 나는 문제의 내 부분을 보았다. 하지만 주님은 아직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그래서 주님께선 “난 당신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어요” 주님이 다시 직접 나서고 있다는 것이여요, 주님이 나의   문제를 보았고  주님은 아직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세요. 나는 그대들에게 계속 약속을 지킬거야”

주는 우리가 사는 인생의 험한 순간을 우리가 견디고 있는 지를 보십니다. 그리고 어떤 삶이는 너는 그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그런 우리의 삶이 되라고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August 21, 2022

본문: 베드로 후서
1:4-11

잃어버린 하나님의 도성 (The lost city of God)

서론: 우리 한국의 영어명  ‘Korea’는  주후 920년경에 왕건이 한반도를 통일해 새운 나라였던 ‘고려’에서  왔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높은 곳에 있는 고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이 자부심을 갖는 것은   우리나라도 미국의 건국 이념처럼 언덕 위에 세운 도시’라는 것입니다. 미국 개척기의 지도자  John Winthrop(1588-1649)은 캠브리지대 출신의 법률가로 미국 개척의 정신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다. 철저한 청교도(puritan)이었던 그는 신대륙에 성경에 기초한 국가를 세우겠다는 이상이 불탔던 사람이다. 그는 청교도들이 Boston을 중심으로 세웠던 정치 공동체의 대표로 있으면서 과연 성경이 다스릴 수 있는 정부를 세울 수 있는지 여부를 시험하는 실험적인 정부를 세웠습니다.

그는 1629년 천여명의 청교도들을 다섯 척의 배에 태우고 신대륙을 향하여 가던 중 선상에서 ‘기독교의 사랑의 모델’이란 제목의 유명한 설교를 하였다. 역사가들은 이 설교가 미국 건국이념이 담긴 문서라 일컽는다. 이제 도착할 신대륙에서 청교도들이 어떤 모습의 공동체를 건설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지도 원리가 담겨져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설교에서 그는 자신들이 세울 공동체가 ‘언덕 위의 도시(a city on the hill)’가 되어 지상의 모든 국가와 교회가 우러러 볼 수 있는 공동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자신들의 이민이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를 맺게 되는 것으로,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에 맺어진 그 계약에 얼마나 충실한가에 달렸다고 설교 하였다. 만일 그들이 계약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 되어 그들로 새땅에서 성공케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관하는 거룩한 도성을 처음으로 문서화 한 사람은 주후 410년경의 성 어거스틴 입니다.  그는 로마가 초토화된 후 3년간 숙고하다가 413년에 ‘하나님의 도성’을 쓰기 시작하여 426년, 그가 죽기 4년 전에 이 대작을 완성했다. 그내용을 정리해 보면, 기독교의 가치와 덕의 전파가 곧 선교다. 기독교가 주도한 고급문화를 창조할 때 기독교가 전파되어 나간다. 우리가 갈 길은 이것뿐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이야기로 자만에 빠지면 안 된다. 로마공화국의 전성기에도 사도행전의 ‘유무상통 공동체’ 정신이 활발했다. 로마 역사의 빛나는 공동체적 희생 역사를 통해 도전받으며 우리 기독교 또한 하나님의 도성을 위해 불멸의 사랑, 헌신, 우애와 덕을 발휘해야 한다. (185면)

또 하나님의 도성을 천사와 인간의 합성구성체로 보고 지상 성도를 그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으로 가는 순례자로 보면, 기독교가 역사포기적, 세상 이탈적 소극적 기독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역사포기적인 기독교 신앙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이루려는 하나님의 뜻에 복무하기보다는 세상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심리를 자극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런 세상이탈적인 기독교 신앙은 이 땅 위에 공평과 정의,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건설하시려는 하나님의 열망을 대적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이 책에서 유의해야 한다.(360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가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국가적 종교로 영접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국가적으로 기독교를 수용했다고 해서 로마가 하나님의 도성으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카르타고의 터툴리아누스처럼 로마를 제2의 바벨론으로 보았다. 설령 로마황제가 로마교황을 겸하여 로마제국과 교회가 하나의 기구로 통합된다고 하더라도 그 통합된 기관도 하나님의 도성이 될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도성의 시민권은 개인단위의 결단을 통해 취득되는 것이지, 기구나 단체 명의로 취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 볼 때 한국의 보수교회 출신 정치가들이 특정지방자치 단체를 하나님에게 봉헌하겠다고 한다든지 ‘성시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교만한 시도인지를 깨닫게 된다. 최고지도자의 행정명령이나 법령으로 한 도시나 국가를 하나님에게 봉헌할 수 없기 때문이다. (700-701면)

기독교신앙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만 신봉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배타적이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지키려고 하는 그 배타적인 진리 자체는, 자기를 비워 스스로 가난케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하신 하나님만 인류가 믿어야 할 진리임을 세상 만민에게 보여주는 데 전력투구햐야 한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던 313년경에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면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황제는 기독교신앙의 배타적 통일성에 기대어 제국의 통합과 안정을 도모하려고 했다. 이들은 자기 부인의 영성, 이웃사랑을 위한 희생과 봉사의 가치를 대표하던 기독교영성을 통해 로마제국의 정신적 부패를 치료해보려고 했다고 한다. 725 그러나 이 ‘하나님의 도성’은 이 지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어거스틴도 알았다.

  2011년에 소천하셨던 고 David  Wilkerson 목사님이 생전에 가장 강력한 설교가 있습니다. 그분은 이 설교에서 “지금 교회에서 외치는 복음은 물질적 부와 이땅에서 잘사는 것에 집중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교회에서 가까운 브로드웨이 가서 기도하면서 “잃어버린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고통을 느꼈다”고 고백 하면서, 자신은 지금 주앞에 무릎 꿇고 통곡하며 부르짖으며 드리는 기도는 “제가 안락한 삶과 물질을 사랑하는 삶에 중독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주후 66년경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편지인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잃어버린 주의 높은 뜻을 가진 이땅의 ‘거룩한 도성’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도성은 나를 위해 자신을 낮추셨던 그리스도의 비하 정신을 기초로 해야 한다. 이것을 헬라어로 ‘케노시스’라 한다.빌립보 2장 5 절이하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도성의 임금으로 다른사람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가 있는 성이 아니라, 자신을낮추시고 복종하시고 생명까지 백성을 위해 내어주셨다. 우리의 교회도 마찬가지로

둘째, 세상의 물질주의나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영원한 신의 성품에 참여하여 믿음 위에 덕을 세우는 곳이다.영어 성경 NASB에 ‘덕’이라는 단어를 ‘moral excellence’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도덕적으로 철저한 신국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편리주의 안일하게 육신적 편함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힘든 일이 더 많은 정성을 기울이며, 좁고 협착한 길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 ‘힘써’ 게으르지 않고’ 라는 단어가 3번이나 등장한다. 참된 신앙인이란 자기 편한대로 예배를 드리고 자기 중심으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아를 깨트리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며, 좁고 협착한 문을 마다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결론: 1984년 제가 미국에 올 때 미국에 저보다 먼저 다녀왔던 선배가 그당시 미국을 향하여 몰락해가는 옛 로마제국 같다고 말했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이땅의 마지막 보루인 교회마저도 몰락해가고 있다. ‘City of the God’의 마지막 보루인 교회마저도 도덕적으로 몰락해가거나 기초적으로 무너져가고 있는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것을 사랑치 말고 주님께 마음을 집중시키라고 하십니다. 요일 2:15,16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제 우리는 개인이그리스도를 자기 부인의 영성, 이웃사랑을 위한 희생과 봉사의 가치를 대표하던 기독교 영성을 통해 지금 도성의  정신적 부패를 치료해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때 주님은 벧전 2:9,10말씀처럼 치찬하실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August 14, 2022

본문: 시편 19:7- 14

주의 말씀이 휘귀한 시대

서론: 내일은 대한민국의 광복 77년이 되는 날 입니다. 77년전 우리민족은 36년의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했었습니다. 우리의 조국은 비록 민족 상잔의 비극 6.25동란등 수많은 역경을 격었지만 77년이 지난 지금 세계10대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켜주심 임을 부인할 수 없다. 2021년 5월CNBC와 IMF에 따르면 경제 규모에서 2019년 12위였던 한국은 2020년에 러시아와 브라 질을 제치고10위로 2계단 올라섰다. 한국의 전년도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1조6309억 달러로 세계10위가 되었습니다. 전년(1조6467억 달러)보다 -1.0% 줄었으나, 그럼에도 순위가 오른 것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의 대응을 다른 국가에 비해 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제적 사회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지만,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만 타락의 길을 겉고 있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주전 750년경에 예언 되었던, 구약 성경 아모스8: 11-11에 보면 “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처럼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진정한 주의 말씀이 휘귀한 시대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문자로 기록된지 수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씀으로 우라에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시편 19편 말씀에는6가지의 하나님의 말씀에 특징이 있다고 분류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에게 임한 주의 말씀을 7가지로 분류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말씀들을 자세히 분류해보며 어떻게 우리에게 체험적인 고백으로 나타나는지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번째, 주의 말씀은 여호와의 율법입니다. 이단어는 원문에 ‘토라’로 기록 되어 있고,  영어로 ‘Law’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교훈’이나 ‘교리 ‘또는  ‘예언의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내 영혼을 소생시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오류와 부패로 부터  벗어난 흠없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며, 모든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한다고 딤후3:16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심니다. 육신을 위하여는 유익하고 세상적으로는 교훈이 되는 금언들이 있지만,  우리의 영과 영혼을 온전히 유익하게 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둘째,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 이 것을 원어로 ‘에드’라고 표현했고, 영어로 ‘testimony’,  ‘decree’라고 하여 법령, 또는 칙령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성품과 의지를 반영합니다. 그분의 증거는 성도들에게 확실한 위로의 근원이며, 끈임없는 소망의 근원이 됨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는 영원성과 통일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교훈은 정직하여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원어로 ‘무싸르’ 로 기록되어 있고, 영어로 ‘Precept’ 표현하는데, 행동 수칙, 계율등으로 해석이 됩니다.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 말씀을 기뻐하며, 그것을 준행키 위해 노력합니다. 불의한 자들이 득세하고 악한 자들이 부와 권세를 얻고, 또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며 추종할지라도 성도들은 말씀을 의지하며, 진실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하나님의 교훈은 우리들로 하여금 모든 일에 순전하며 진실하도록 정직한 마음을 회복시켜 주심니다. 시편 119:105 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합니다. 이 말을 원어로 ‘밋쯔’라하며 ‘comandment’ 해석했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길을 찾는 자에게 빛이 됩니다.그분의 계명은 우리의 죄악과 부도덕함과 더러움을 볼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밝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세대에 있어 참 선이며, 정결한 도이며, 영원한 진리입니다.  

다섯째, 주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게 합니다.이것을 원어에 ‘야레’기록했는데 영어로 ‘fear of the Lord’로 효현되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율법의 목적입니다.  그분을 경외하는 것은 타락한 풍습과 저속한 관습에서 벗어나 정결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섯째, 주의 규례는 확실하여 의롭습니다. 원어에 ‘훅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영어로는 ‘judgement’, ‘ordinance’ 표현되어 법령을 뜻합니다. 허나님의 말씀은 죄를 판단하고 역사를 심판하고, 모든 풍습과 관습들을 주관합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의를 불의가 심판할 수 없습니다. 주의 말씀은 그 규례대로 온전히 성취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우리삶에 성취 될것입니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마지막으로 11절에 나타나 주의 ‘경계’란 단어를 하나님의 말씀의 종류에서 경히 여기는 경우가 있다. 원어로 이 단어가 ‘아자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경계에 대하여 3절이나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세대 속에서 오류에 대한 ‘경고’의 message로 나타난다는 것을 있습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을 보고서도 타락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때에 우리가 돌아서도록 경고의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결론:  신명기32:1,2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찌어다.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 성경에 순종과 복종이란 말이 나옵니다. 구약에서 순종은 ‘샤마’ 신약에는 ‘휘파큐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원하여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복종은 구약엔 ‘카나’ 신약엔 ‘휘포타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떤 힘에 눌러 굴복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요한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우리가 체험한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랑에 감복하여 그의 말씀에 자원하여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시편37:4-6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 질것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5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6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암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August 7, 2022

본문: 하박국 3:16-19

근심하는 자에서 예배 드리는 자로

서론: 2020년 들어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해 세계가 고통 속에서 신음했고, 2년여 기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세상은 그고통 속에 있는데, 여기에 세계는 전쟁과 기근이 닥쳐와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갑니다. 이런 세대 속에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극복하며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이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수많은 사람들 질병에 노출되고 죽어 갈 때, 이런 여파로 인해 사업이 어려워질 때, 직장 생활이 불안할 때, 내 앞길이 매우 불투명하고 불안하게 보일 때, 그때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많은 불평하고 원망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무수한 사람들이 기도로 살다가 응답의 역사를 맛보았다. 여호수아는 태양을 중천에 머물게 한 기도를 드린 것으로 유명하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를 드려 그대로 응답 받았던 자이다(수10:12-14). 기드온은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알기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사람이다(삿6:34-40).  다윗의 기도는 이스라엘 후손대대로 물려줄 다윗의 왕국을 세우게 함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그 터를 닦아 놓은 기도였다. 솔로몬의 기도는 이스라엘을 평화롭게 잘 다스리는 지혜와 여러 가지 은총을 얻게 했으며.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지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훌륭한 도구가 되게 하였다.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는 3년 6개월 닫혔던 하늘을 열어 다시 비를 내리게 하는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게 했고(왕상18:41-46), 사르밧 여인의 죽은 아들까지 살리는 생명의 기도를 드렸다(왕상17:17-24). 엘리사의 기도는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역사를 일으키게 했으며(왕하4:32-37), 사환의 눈을 열어 천군 천사를 보게 하였다(왕하6:15-17). 사형선고를 받은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는 자신의 생명은 15년이나 더 연장하게 하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 치료의 기도였고(왕하20:1-6), 또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훼방하는 산헤립을 하룻밤 사이에 물리치고 대승리를 이루게 한 기도였다(대하32:20). 느혜미야의 기도는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한 기도였다. 예레미야가 흘린 눈물의 기도는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사랑과 회개, 그리고 메시아를 더욱 소망하게 한 고귀한 기도였다(애1:20-22) 오늘 본문의 하박국 선지자의  시대적 배경은 B.C. 625-606년경으로 폭군 유다 왕 여호야김의 정책은 무죄한 사람들을 죽이고 탄압하며, 부정과 착취가 만행 되고, 악이 득세하고, 의인이 멸시를 받는 암흑시대였다. 이 때에 사역했던 하박국 선지자입니다.
본론: 본문은 하박국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 내용입니다. 하박국이라는 말은 '포옹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시대의 고통을 끌어안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절망하고 원망하기 보다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지금의 상황처럼 어두워질 때 드렸던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에서 무엇을 발견 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지금의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어떤 현대 신학자는 현대인들의 신관이 매우 주관적이고 선택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즐겨 이야기합니다. 평화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는 하나님에 관한 토론이 주제요 설교의 주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판의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이라는 주제에 관해서는 별로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를 계속적으로 언급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단어가 무려 375번이나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속성은 크게 두 가지로 성경에 강조되어 있는데 의로우시고 거룩하십니다. 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한 모든 현실, 불의한 모든 대상을 향해 진노하십니다. 또한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한 것, 추하고 죄악된 모든 것을 향해 진노하십니다.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이스라엘 민족이 분단되었을 때 갑자기 강대국으로 부상한 바벨론이 유다의 심장을 겨누기 시작하자 유다 왕국의 국가적 운명은 한순간에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황하면서도 기도하는 사람은 적었습니다. 이때 하박국 선지자는 이런 운명을 끌어안고 주님 앞에 나아가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계시를 접했습니다. 1장에서 하박국은 하나님께 낙심에 찬 원망을 했습니다. 그러나 3장에서 하박국의 기도는 질적으로 달라졌습니다. "하나님, 내가 깊이 생각하고 깊이 기도해 보니까 이 민족이 매맞고 바벨론의 짓밟힘을 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겠네요. 하나님, 그동안 많이 참으셨네요. 이 민족의 어둠을 보시면서, 이 민족의 부도덕을 보시면서, 이 어려운 현실을 보시면서도 잘도 참으셨어요. 하나님, 이제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해서 저는 이의가 없습니다." 하박국은 이런 결론에 도달했으면서도 주님 앞에 엎드려 울며 호소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보니까 하나님이 옳습니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항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둘째로,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해야 합니다. 
점점 더 깊이 기도하면서 하박국은 그 민족 앞에 다가오고 있는 두려운 현실의 정체를 직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의 눈은 하나님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두 번째 시선이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는 하박국서 전체의 주제를 설정하는 책 이름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두려움에서 믿음으로"라고 했습니다. 하박국은 마침내 두려움을 넘어섰습니다. 두려움을 대신해 자기 마음속에 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던 하나님, 그리고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아직도 나와 함께 계심을 그는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만 함께하신다면 나는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것의 구원되신 하나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나는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겠습니다. 내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박국의 고백입니다. 

셋째로, 희망의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고통 속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19절). 하박국서는 항변의 기도로 시작되었다가 하프로 드리는 노래로 끝납니다. 참된 기도를 드리면 마지막에 찬양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기도입니다. 어떤 성경학자가 이 하박국서의 문헌학적 구조를 연구하면서 1장의 분위기가 마치 골짜기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3장은 언덕의 정상입니다. 그 정상에서 찬양하는 모습입니다. ‘워런 위어스비’라는 목사님이 하박국의 변화를 세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1장에서 그는 염려자(Worrier)로 시작해서 2장에서 그는 관찰자(Watcher)가 되었다가 3장에서는 예배자(Worshiper)가 되었다.”

하박국의 기도 중에 하나님이 다가오사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위로와 사랑을 느꼈습니다. 2장 4절은 이 하박국서 전체의 주제가 되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 768~814 재위)는 흔히 칼 대제라고도 잘 알려진 프랑스와 독일 지방의 옛 왕국인 프랑크의 국왕이었습니다. 샤를마뉴는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신자였고 그의 서유럽 통일로 인해 유럽이 종교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을 뿐 아니라, 이슬람의 침입을 저지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권력과 영광만을 위해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고 난 후 나를 무덤에 묻을 때, 로마 황제의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 그대로 꼿꼿하게 앉힌 채, 머리에는 왕관을 씌운 채로, 그리고 손에는 내가 살아서 권위를 휘두르던 황제의 홀은 내 손에 쥔 채로 장사지내라. 또 잊지 말 것은 내 몸과 어깨에 황제의 망토를 걸치고 내가 원하는 책 한 권을 펴 놓은 상태로 내 무릎위에 올려놓도록 해다오.”

마침내 황제는 주후 814년에 죽게 되었고, 그 후 약 200년의 세월이 지난 후(997년) 오토 3세라고 하는 황제는 기록을 통해 샤를마뉴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호기심에 신하들을 명하여 과연 샤를마뉴 황제의 유언에 따라 유족과 신하들이 샤를마뉴 황제의 시신을 장사지냈는지의 여부를 확인해 보도록 했습니다.

무덤발굴단은 조사에 들어가서 조사한 결과, 모든 것이 샤를마뉴 황제의 요구대로 시행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렇게 대리석 옥좌에 앉힌 황제의 모습은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황제의 망토는 좀 벌레에 의해 거의 다 갉아 먹혀 버렸고, 황제의 몸은 뼈만 남은 채 그의 과거의 위엄과 권위로 가득 찼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섬뜩한 분위기 속에 앙상하게 드러난 그의 무릎 뼈 위에는 자신이 원했던 책이 그대로 놓여있었고 손가락 뼈 중 하나는 그 성경의 한 구절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가복음 8:36)

결론: 오늘 내 인생이 깊고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끝날 것 같지 않은 깊은 골짜기, 그러나 기도하면 이 골짜기에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여기 이 골짜기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계십니다. 주의 임재를 느껴 보십시오.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저 높은 언덕을 향해 계속 오르십시오. 마침내 내 발을 저 높은 곳에 세우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고통은 마냥 계속되지 않습니다. 곧 끝날 것입니다. 미국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던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가장 적절한 행복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인간이 육신적인 출생으로 받은 것들로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다.” 하박국이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하나님의 진노가 세상의 모든 죄에 임하는 진노였습니다. 그 진노 가운데 예수님이 고통을 참으실 수 있었던 이유를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July 31, 2022

본문: 다니엘 6:16-24

기독교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서론: 21세기 들어 서면서 기독교 복음의 세계적 전파는 아프리카의 소수 부족과 남아메리카의 밀림 지역 외에는 거의  이루어져가고 있다. 요즘 한국과 미국에서 기독교인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문제들이 회자되고 있다. 다음 제가 말씀드리는 통계는 어느 한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 것이 아님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지난 2020년 미국의 조사기관인 Pew Research Center에서  미국 6395명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 나오는 대통령 후보들에 대한 종교적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질문의 내용은 나온 후보들이 자기들이 속한 종교에 대해 실실한 종교인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먼저 Donald Trump대통령의 대한 질문에서 조사한 사람의 63%가 그는 기독교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고 대답했고 34%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다. Joe Biden에 대해선 그가 Catholic 교인인데, Americans are more likely to say that Joe Biden, who is Catholic, is at least somewhat religious (55%). 미국인들은 가톨릭 신자인 조 바이든(Joe Biden)이 적어도 55%의 사람들이 어느정도 종교적이라고 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어떤 한나라의 통치자나 왕이 원래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닌 이방인 이어도 하나님의 구원사에 이용되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선처를 베푸는 사건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요셉의 때에 바로 왕이 그랬고 출애굽 후의 이스라엘을 환대했던 왕들이 그러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너무나 우리가 많이 들은 ‘다니엘의 사자 굴 사건’입니다. 다니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의 이름처럼 하나님은  옳다 판단하시고 그의 의에 대해 대적하는 자를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오늘 제가 설교에서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언제 이 사건이 있었으며. 이사건의 영향으로 다니엘과 이스라엘 민족들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신실한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주는지 함께 보겠습니다.

먼저, 다니엘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있고 하나님이 친히 그를 지켜주는 사람이었다. 바벨론 왕이 지어준 이름이 ‘벨드사살’이었는데 이 이름의 뜻은 “신이 그를 지켜준다”는 뜻이다. 그는 그 세대에 자타가 공인한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었다. 그는 그가 속한 사회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주의 자녀였다. 그의 친구들 또한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따랐기에 하나님이 함께한 사람들이었다. 다니엘의 3친구의 풀무사건 (단 3:19-25) 시기는 B.C 580년이었습니다. 단3:25에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라 기록되어 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한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후에 하나님을 높인 느브갓네살은 세상을 다스리고 그 제국은 전 지중해 연안을 호령했지만  B.C 562년 느브갓네살은  죽고 만다. 그의 아들 벨사살은 다시 여호와를 경시하고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바벨론은 쇠퇴와 멸망을 가져옵니다.,  B.C 539년에 바사,즉 페르시아 왕인 고레스는 바빌론을 점령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국가나 통치자는 결코 오래가지 못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주를 믿는 통치자라도 공의 롭지 못한 사람은 그 지위가 길지 않습니다. 단4:27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였느니라”고 다니엘 바벨론 왕에게 권고한 말씀을 이 시대의 지도자는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둘째, 다니엘의 사자굴 사건의 영향으로 고레스는  1차로 이스라엘 민족의 포로를 해방시켜 본국으로 보낸다. 이때가 B.C 538년이고 그 해에 다니엘의 사자 굴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에스라서 2장을 보면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1차 해방된 민족을 인솔하고 본국으로 가 먼저 하나님 전을 건축하였다. 그가 사자 굴에 있어도 하나님이 지켜 주셔 구원함을 본 디리오 왕은 이스라엘의  포로해방의 조서를 내림니다. 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의 신실한 삶으로 한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16세기 말의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인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영국 경험론의 시조이며, 데카르트와 함께 근대 철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우리에겐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말하기를 “사람을 튼튼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를 먹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음식을 소화 시키느냐 에 달렸다 .부자가 되는 것은 얼마를 버느냐가 얼마를 모았느냐 에 달렸고, 사람을 박식하게 하는 것은 얼마나 책을 읽었느냐도 얼마나 그것을 기억하느냐도 아니고 진리대로 얼마나 실천했느냐 에 달렸다”고 말했습니다.

셋째, 다니엘은 이들과 같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7년후 이국 땅에서 이세상 삶을 마쳤습니다. 그 누구보다 영적인 사람이었고 주 앞에 신실한 사람인 다니엘이 본국에 가보지 못하고 이국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본국으로 돌아가 민족들과 함께 해방의 기쁨을 누리고 인도자의 길을 갈 수 있었는데도 그는 페르시아에 머물며 주의 뜻을 준행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자기가 바라보아야 할 진정한 본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가 고대하고 바라보아야 할 본향은 이세상의 땅보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그 나라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결론:  단 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 되매” 다니엘은 그의 친구들과 풀무속에서 함께했던 하나님의 아들을 환상 중에  보게되는 영광을 맛보았다. 그는 주가 세상에 오시기 550년 전에 주를 만나는 영광을 않았다. 다니엘은 바로 자기백성이 본국으로 돌아오도록 결정적 헌신을 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환상 속에서 주하나님과 그의 독생자를 보는 영적 사람이었고 그의 삶 속에서는 어떤 환란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수행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우리가 사는 삶과 시대에 비춰보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한다.

July 24, 2022

심지가 견고한 자

서론: 현대인들의 마음을 가리켜 어떤 사회학자가 말하기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요동치는 물결과 같다.”고 표현 했습니다.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나오는 아리아에서는 '변하기 쉬운 여자의 마음'을 갈대로 비유를 했었죠. 바람에 날리는 같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을 갈대로 비유한 말에서 유래됬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격랑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21세기와 들어서면서 인간의 존엄성이 더 승화되고 존중되어 가리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국가 간의 전쟁도 거의 없어지라고  예측했고, 질병은 줄어들 거라고 우리는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2020년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전세계적으로 전에 경험하지 못한 질병으로 인해 640만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으며, 5억이 넘는 사람들이 이 질병에 감염되어 신음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 잡히지도 않았는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발발해서 군인들은 물론, 무고한 생명들이 오늘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미국은 40년만에 최고의 물가 폭등과 함께 심각한 inflation 상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적 혼란  상황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심지가 견고한 성도가 되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지금부터 2700여년전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격동기에 예언하며 주의 백성을 일깨웠던 이사야가 우리에게 주는 주의 교훈이 쓰여져 있습니다. 역사가 그렇듯이 한 나라의 경제적 안정적 번영은 종교, 도덕적으로 북이스라엘은 물론 남 유다까지 극도로 타락하게 되었고, 웃시야 왕의 죽음 직전의 시점부터 이사야의 대언 활동이 시작됩니다. 본문 3절에 ‘심지(心志)’라는 말은 마음 ‘심’자에 뜻 ‘지’로 해석이 됩니다. 영어로 본문을 표기 한 것을 보니 ‘the steadfast  of mind’로 ‘NASB’ 역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 ‘심지가 견고한 자’는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심지가 견고한 성도는 그 안에 예수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본문 1절에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우리 성도의 진정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은 ‘무신론 (atheism)’ 보다 ‘범신론(pantheism)’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범신론’은 우주, 세계, 자연, 인간의 모든 것이 신이라고 하는 세계관이다.모든 것은 신의 발현이며 그 속에 신을 포함한다고 한다. 무신론이라는 것은 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다고 하는 쪽이고, 범신론은 사람에 따라 이 세상 만물 자체를 '신'으로 보기 때문에 다른 개념이다. 이런 범신론의 개념은 이 시대의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개념을 언급하는 것이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감지한다. 목사님들의 설교와 성도들의 신앙의 대화 속에 이 주제들이  등한시 되고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없이 이루어 질수 없다. 벧전3: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행전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는 고백을 드릴수 있는 사람이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다. 한국의 성결교단과 신학교를 세운 Charles E Cowman은 우리 구주인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건축가에게는 모퉁이의 머리 돌, 천문학자에겐 의의 태양, 예술가에겐 눈이 부시도록 우아한 분, 제과점 주인에겐 생명의 빵, 의사에겐 위대한 치료의사, 교육가에겐 위대한 교사선생, 농부에겐 씨부리고 추수하는 주인, 종에게는 선한 주인, 학생에겐 성육신한 진리, 집 짖는 사람에겐 확고한 반석의 집터, 목수에겐 통하는 문, 설교자에겐  하나님 말씀의 선포자, 생물학자에겐 생명, 피곤한 노동자에겐 안식을 주시는 분, 죄인에겐 죄를 도말해 주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기록했다.

둘째, 아무리 그가 높은 곳에서 있어도 낮은 위치를 바라볼 줄 알아야한다.(5,6절) “높은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높은 위치에 올라간 후에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 베드로 요한 그리고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이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낮추었슴니다.

셋째, 심지가 견고한 자는 어떤 상황속에서도 정직하며 의롭게 행한다.(7,8절)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현대의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믿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열정은 있으나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해  사회의 지탄을 받습니다.

결론: 이러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완전한 평안이다. 요한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끝으로 Mark Shultz가 부른 “Remember Me”는 찬양의 가사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날 기억해요. 세월이 흐르면서 금이 가고 퇴색된 성경을 보면서 날 기억해요. 묵묵히 기도하는 성소에서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 갈수록 그리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은혜와 평강으로 묶여진 놀라운 주의 자녀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인 나는 주님을 기억했습니다

날 기억해요. 석양의 붉은 노을색이 하늘을 채울 때 날 기억해요.

당신이 기도하고 기쁨의 눈물이 당신의 눈에서 떨어질 때날 기억해요.

아이들이 웃는 얼굴로 그들의 주일학교의 문을 나설 때 날 기억해요.

그 아이들이 가르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설교할 수 있을 만큼 되어  우리를 떠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날 기억해요.

July 17, 2022

하나님께 인정 받는 사람

서론: 요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더 이상 두 나라의 전쟁이 아니고 강대국들의 대립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원래 전쟁은 결코 일반 백성이나 국민의 요구에 의해 일어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전쟁은 한나라의 군주나 통치자의 뜻에 의해 일어났으며, 많은 선량한 사람이 그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옛날 로마의 ‘시이저’가 그랬고,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그랬고 근세에 제 2차대전의 ‘히틀러’가 그랬습니다. 이 우크라이나 전쟁도 군사적 강화와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통치자의 야심으로 기인됐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세계적 전쟁이 다시 일어나면 전 인류는 파멸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본문 속에서는 4천년 전 부족국가에서 일어난  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전쟁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벌인 동방의 시날 왕은 그 때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창 10:9-14을 보면 시날 왕국은  가장 강한 영걸인 니므릇이 세운 부족국가 입니다. 그들의 땅은 후의 앗수르 땅은 물론 바빌론 땅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강력한 부족사회의 국가였습니다. 창 10장의 바벨탑을 세운 부족도 여기서 나왔고, 후에 다윗 솔로몬 때까지 이스라엘 침략했던 블레셋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강력한 부족 국가들을 향해 약소 부족집단인 아브라함이 대결을 벌였다는 사실은 참 놀라운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전쟁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가 영적 전쟁과 삶을 승리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인정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 인정 받는 사람은 첫째 다른 사람을 동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3,14절에 보면, 자기가 먼저 가서 차치한 소돔, 고모라 땅에 살다가 사로 잡혀간 조카 롯을 모른척할 수도 이었지만, 그는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위험을 무릅쓰고 출정해 조카 롯과 모든 소유와 부녀들과 인민들을 다시 찾아 왔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은 고통 당하는 형제의 슬픔을 보고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동참을 요구하면 대답하는 말이 “그 사람들 내게 도움 준 적이 없는데” “그 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돕겠소” 하며 핑계를 댑니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용어 중 ‘친한 친구’라는 말의 의미는 “내 슬픔을 등에지 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주 예수는 우리의 친구로서 우리의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도 어려운 이웃의 친구가 되십시다.

둘째,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용기의  사람, 능력의 사람입니다.(15,16절) 인간적인 생각으로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동방의 네 왕의 세력이지만,  담대하게 자신이 훈련한 사람 318인을 거느리고 출정해 그들을 기습해 쳐서 파하고 조카 롯의 모든 소유와 가속들 뿐만 아니라 사로잡혔던 선민을 되찾아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의 사람은 위대한 일을 주를 믿고 담대하게 시도합니다.  주께서 연약한 자를 능력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위대한 믿음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담대하게 시도합니다. 아브라함은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충만하게 입고 전쟁에 나아가 승리하였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승리자가 되려면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과 연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정직한 자립의 사람입니다.(23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그는 소돔왕에게서 아무것도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실 보상으로 일어서려고 하였습니다. 아브람은 다른 사람의  거저 주는 도움이 아닌 정당한 가운데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려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뉴욕에서 정신과 의사를 25년 이상 하신 분이 말하기를 “나의 정신과 의사 생활 중 기도를 진실히 할 줄 아는 사람은 나의 환자에 없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끝으로 ,하나님이 친히 인정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18,19)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믿음의 싸움에서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돌아온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인 살렘왕 멜키세덱을 보내시어 친히 영접하게 하고 축복을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날 사역자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 스스로 영화를 느리려고 하거나 치부하려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복을 내리시기 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비록 이곳에서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늘에서 받겠지 하면서…,

July 10, 2022

본문: 마태복음 5:13-20

세상에 복을 선포하는 성도들

서론: 지난 2년반이 지난 코로나 상황으로 한국에서는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가 20%가 감소했다고 합니다. 원래 한국 인구의 20%정도인 1천만여명의 사람들이 기독 교인이었는데, 코로나 이후로 200만 여명 정도가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들이 코로나로 인해 아직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못 나오는 사람보다   기독교인에 실망해서 나오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합니다. 코로나 기간 중에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해서 나오지 않는 사람이 대다수라고 합니다. 요즘 이들을 가리켜 ‘가나안’ 교인들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 말의 이스라엘 땅의 옛이름 가나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가나안’ 을 거꾸로 발음하면 ‘안나가’ 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나가지 않아서 ‘가나안 교인’이라 합니다. 지금 영국에 역사적으로 남아있는 교회가 4천여개되는데 그 중의 1500여개 건물이 대여되어 이교도의 건물, 파티 전문 장소 등 다른 용도로 쓰여지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은 자기를 희생해서 보존하고 맛을 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빛은 자기자신을 태워 온기를 주고, 세상을 밝히는 것이다.  요즘 복을 주제로 해서 말씀을 전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기복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스러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창세기 12장3절에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라고 하였는데, 다른 이에게 복스러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모두가 들었고 받아드렸던 ‘복음’도 바로 복스러운 소식을 의미합니다. 이’복음’은 한 개인 한 나라 만이 아닌 이 세상 모두에게 똑같이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복덩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이 사람이 우리 곁에 있으므로 우리에게 복이 임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떤 사람이 세상에 복을 주고 또 그 복을 다른 사람에게 선포하는 성도일까 생각해 보려 하는 것입니다.

첫째, 그는 기독교의 조그만 계명도 중요시 하며 잘 지키는 성도입니다. 본문 18절 이하에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어의 일 점은 ‘요드’를, 1획은 와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의에 대한 간절한 간절한 소망이 있는 자입니다.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한 것은 진리에 대해 갈망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요즘 우리는 세상의 소식이 너무 좋아서 주의 말씀의 묵상과 나의 마음과 입술의 기도를 등한시 하고 있습니다. 세상 것에 눈과 귀를 여는 보다 쉬운 일보다 주를 향한 기도와 찬양 말씀에 묵상에 정성을 쏟는 강한 의지가 필요한 때입니다.

셋째, 자신을 낮추는 성도가 복을 선포하는 성도입니다. 예수께서 오늘 본문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조금 칭찬을 하셨는데, 원래 이들을 질타하신 이유는 그들이 자신을 낮추는 행동을 보이지 않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기관과 율법학자들은 정성이 대단했습니다. 성경에 전승에 대단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로 말하면 교만한 사역자들과 같았습니다. 바리새인은 그 사회의 리더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교만 해저 월권하여 하나님의 권한까지 대행하려 했습니다. 한국의 작지 않은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날 모든 성도에게 세배를 하라고 요구한적이 있었습니다. 마하트가 간디가 기독교인을 향하여 한말이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있음을 느껴야 하는데, 그들을 보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넷째, 자기 스스로에게 복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갓이다. “환란과 곤고가 나를 골방으로 넣어 기도하게 하고 그 기도는 그 환란과  곤고를  내 주변에서 떠나게 한다.”라고 필립 멜란톤은 주장했다. 지금은 은퇴한 한국의 박지성 선수가 유럽에 처음 진출하여 축구 잘 되지 않아 홈 관중들 마저도 야유를 할  때 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자신을 기본적인 동작부터 칭찬하기 시작했다. 연습시간에 동료에게 짧은 패스 하나 하고서도 “너 참 잘하는 구나. 너 더 잘할 수 있어”하며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자신을 북돋우었다고 합니다.

결론: 로마서 12:9-14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4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Scotland의  New Hebrides 에 가면 선교사 Dr. Geddie의 묘비에 새겨진 글이 있다. “1848년 그가 이 섬에 왔을 때 기독교인은 한 명도 없었다. 1872년 이 섬 을 떠날 때 이교도는 한 명도 없었다.

July 3, 2022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

서론:

내일은 246주년을 맞이하는 미국의 독립 기념일 입니다. 독립기념일은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의 대륙의회에서 미국이 대영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날입니다. 제2대 대통령 John Adams는 독립선언이 선포된 바로 그날, 미국 독립의 깊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위대한 구원을 얻었다." 그래서 아담스는 미국의 독립 기념일이 기독교적 축제의 날이 될 것으로 믿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이며 6대 대통령인 J. Quincy Adams 역시 1787년 그가 69세가 되던 해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왜 미국인들은 독립 기념일을 크리스마스 다음으로 중요하게 기념하는가?. 미국의 탄생은 전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는 데에 비약적인 진보를 이루는 시점이 됐습니다. 미국의 독립 선언문은 구세주가 명령하신 사명을 성취하기 위한 언약이었으며, 사상 최초로 기독교 원리에 의거한 정부를 탄생시켰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독립선언문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이 끝납니다. “대영제국과 결별한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할 것을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재산과 우리의 신성한 명예를 걸고 이에 서약합니다. 이런 기독교 청교도의 정신으로 세워진 나라이기에 200년 가까이 부요하고 부강한 나라와 국민이 되었습니다. 건국 245년이 흐른 지금,  신앙의 전통은 허약 해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정부, 법원, 국회와 학교는 세속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독립을 이끌었던 개신교 신앙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교단이나 교회는 신앙의 개별화, 믿음의 개인화( privatization)에 굴복하고, 동성애, 문화전쟁과 종교적 다원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퇴조를 겪고 있습니다. 건국 시절 초기에 가졌던,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며 예루살렘과 같은 “언덕 위의 집”을 지으려던 선조의 믿음은 점차 엷어 지고 있습니다. 이 상황의 원인은 이 나라와 국민 더 이상 영적으로 부요하지 못해졌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영적으로 부요한 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영적인 부요한 자는 성령을 통해 속사람이 강건한 자여야 합니다.(16절) 이것은 우리의 영성을 말하는데, 육의 소욕과 영의 소욕이 싸운다는 것은 영적 건강함을 뜻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안에 영적, 육신적 대립이 없는 사람이 영성이 좋은 사람인 줄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속에 영육의 대립이 없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다. 영적으로 삼층천 까지 가보았다던 사도 바울 선생도 롬7:19이하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하셨다.

둘째, 그리스도가 그 안에  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자 입니다.(17절) 이것은 우리의 믿음을 말합니다. 최신 엔진을 가진 기차가 빠르게 지나가던 것을 본 기차역 직원 두 사람이 보며 하는 말 “기차가 아무리 힘이 좋고 모든 것이  갖추었어도 철로를 떠나면 달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안에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린 자  입니다. 이것은 성화의 단계를 말합니다. 영국의 Powerscout란 백작 부인이 임종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찾아온 친구가 환하고 빛나는 얼굴을 보며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느냐고 묻자 백작부인은 친구에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이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 주신다”라고 고백하며 평안하고 밝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 세상의 돈, 권력, 지위, 명예, 학식 등은 세상을 떠날 때는 걸치는 악세서리에 불과합니다.

넷째,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깨닫는 자. 이것은 영적 헌신의 단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매순간 드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잠언 16:1,2, 16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고 말씀하신다.

다섯째,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비밀을 아는 자입니다. 이것은 겸손을 뜻합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백악관 현관에서 자신의 구두를 닦고 있었다. 이것을 말리는 비서에게 자기 손으로 자기 구두를 닦는 일은 당연한 것이며, 구두를 닦는 일은 천한 것이 아니다. 대통령도 구두닦이도 세상을  위해 하는 일이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19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결론: 우리는 세상의 것으로 부요한 자가 아니라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어 영적싸움에 승리하는 강한 영성을 가지며,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의 터를 굳게 잡아 굳게 내리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매일 깨달어가며, 지식을 초월하는 주의 사랑의 비밀을 아는 겸손을 가지자.

June 26, 2022

주의 복을 받는 자

서론: 어제는 한국 역사의 가장 비극의 날인  6.25 한국 동란의 72 주년이 되는 날 이었습니다. 72년이 지난 지금도 그 비극의 상처는 남아 있습니다. 물론 비극의 잔재는 아직도 우리 한국인들 사이에 남아 있어 서로가 반목하고 있어 지금은 신 삼국의 시대라 어떤 역사학자들이 주장합니다. 이런 상황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며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이 아닌 하나님으로 오는 복을 찾아 나서야 할까요. 오늘 본문 시편 1편과 마태복음의 8복은 우리 주로부터 오는 복을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을 ‘아쉐레 하이쉬’ 라고 히브리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엄격하게 바른 자”라고 해석할 수 있다.  Kirk Patrick은 이 부분을 “이런 자는 복이 있으며, 이런 자는 형통하게 될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본문에서 악인을 악인을 ‘레솨임’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뜻은 불안함 부조화 적인 사람을 의미한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을 뜻한다.  신학자 Purkiser는 확고한 신앙으로 살지 못하는 자이며 악인과 친하여 그들과 지속적인 교제를 나누는 자라고 말한다.

본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꾀)이나 죄인(길)이나 오만한 자(자리)가 아니라고 제시하였습니다, 이 말은 복 있는 사람이란 ‘선한 자’나 ‘의로운 자’나 ‘겸손한 자’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쉬운 복 있는 사람의 개념을 더 나아가  본문에서는 ‘복 있는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하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을 설명하며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으로 분류하고 있다.

소극적인 면의 첫째는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가치관의 문제이다. 악인은 하나님을 공경치 않는 불 경건한 소극적 죄인이며 도덕적 가치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여기서 ‘꾀’는 ‘아차트’로 표현했는데, 사람의 계획, 시도, 경영을 뜻한다. 이는 악인의 인격에서 나오는 사상과 계획에 추종하지 않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인간의 도덕성 타락은 악인들 과의 접촉, 불 경건한 도서와 인터넷 글과 방송을 접하며, 악한 생각들을 되풀이 함으로 저가도 모르게 양심의 도덕적 감각이 무디어 진다. 창 3장의 화와의 범죄는 자신의 가치관이 사단 앞에 승복한 경우이다. 예) 개미와 청색 모충.

두번째,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관을 말한 것인데, 길은 방향을 의미한다. 악인은 의도적이고 행동적으로 야비하게 분명한 죄를 공공연히 짓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동적인 측면에서  분명히 죄를 일삼으며 사는 상습적 고의적 범법자이며,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사는 자입니다. 신명기30: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라고 하신다. 인간은 선택의 여지에 따라 선인이 될 수도 있고 죄인이 될 수도 있다.

세번째, 복인은 오만한 자리에 않지 않는다. 이것은 종교적 가치 문제 입니다. 오만은 히브리 말에서 3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첫째가 ‘홀렐’ 이것은 영어로 ‘arrogant’인데, 스스로 자신을 자랑하며 잘난 체 하는 자입니다. 둘째, ‘레침’ 이란 말인데 ‘mocker’로 표현되는데, 남을 경멸하고 방자한 사람을 말한다.  세번째, ‘샤이난’으로, 영어의 ‘insolence’ 에 속하며, 자만하여 차기도취에 빠진 자를 말합니다.  ‘오만한 자’란 종교를 비방하고 거룩하고 진실한 것에 조소하며 멸시하는 태도를 갖는 자입니다. 이들에게 있어 종교는 무력한 자의 도피처이며, 거룩과 진실은 위선과 허구로 보입니다.그들은 철저하게 자기 또는 인간의 능력에 최대한 경의를 나타냅니다. 그들은 창 11장에서 바벨탑을 쌓는 무리와 같습니다. 4절에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능력의 오만, 지식의 오만, 도덕적 오만 그리고 영적인 오만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론: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책으로 알려진 토마스 아켐퍼스는 “ 우선 네 자신속의 평화를 지키라.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평화를 줄 수 있다. “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중의 하나는  남의 의견을 듣지 않는 사람이다.” 어느 시사 평론가가 이야기 했다.

어제가 6.25의  72주년이었는데, 6.25의 주된 원인이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이것이 영토 침략 야심을 앞세운 강대국의 약 소국 침탈로 발전된 것입니다. 6.25가 일어나기 몇 일전 평양 장로교 총회에서는 목사들의 심한 다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우리 교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자유 민주 주의가 어떻고, 종북 좌파가 어떻고 하면서 교회가 제일 크게 떠들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좌와 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란 나는 한 것이 많지  않은데,  하나님이 내게 복을 베푸심으로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내가 제일 잘한 일은 내가 주님을 믿는 것이다.”고 오늘도 고백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June 12, 2022

본문: 

호세아 6:1-3,

빌립보서 3:7-12

예수를 아시나요?

지난 달 17일에 소천하신 저의 아버님 고 윤 영민 목사님께 저희 자녀들이 사춘기 때 아버지는 신앙은 너무 고지식하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그러면  아버님께서 저희들에게 가끔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느그들이 제대로 예수를 알어?”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의 의미는 “너희들이 예수가 누구인지 정말로 체험하였느냐?” 라는 것이다. 지난 주는 감리교의 교단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요한 웨슬리의 회심을 기념하는 날(5월 24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32살이던 1735년 어느 가을 날 그는 미국으로 선교 여행을 가기 위해 동생과 함께  배를 타고항해 하던 중 심한 풍랑을 만났습니다. 배에 탄 영국인 80여명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27명의 모라비안 교도들은 두려워 하지 않고 함께 모여 오히려 찬송을 기쁘게 드렸습니다. 좐 웨슬리가 그들에게 다가가 담대한 그들에 믿음을 묻자 그들이 질문한 말이 “Do you Know Jesus?”입니다. 17세에 옥스퍼드 전신인 대학에 들어가 신성 club을 조직하는 등 철저한 원칙적 신앙주의 자(Methodist)라고 불릴 만큼 열심히 신앙활동을 한 그에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사도 바울의 회심이 스데반의 순교 후부터 시작된 것처럼 그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신앙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때문인지 2년여의 미국 선교는 거의 성공적이지 못했다. 여기서 잠깐 모라비안 교도에 대해 살펴보면, 모라비안 교회의 탄생은 가장 중요했던 한 사람, 세계사에도 이름이 잘 알려진 ‘진젠돌프’라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 진다.  모라비안 교회가 된 것은 모라비아는 옛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행정구역으로, 1029년에 보헤미아에 합병되었다. 진젠돌프가 평생토록 가졌던 한 구호가 있다. “나는 하나의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웨슬리는 영국으로 돌아와 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의 모라비안 교회 집회에서 비로서 신앙의 회심을 경험한다.

호세아 선지자는 BC 750년에서 북왕국이 멸망한 BC 722년경까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을 했던 선지자입니다. 당시 여로보암 2세가 죽고 난 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패역한 상황이었습니다. 호세아는 4장 1-2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뒤이음이라.” 여기의 ‘안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야다(yada)인데 ‘체험적으로 안다’ 는 뜻입니다.

즉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았고, 열심히 제사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지식으로 머리로 교리적으로만 알았지 인격적인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도 살지 못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왜 하나님의 선지자 호세아는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강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무엇을 알라는 말씀입니까? 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헤세드의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녀와 같이 방탕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고멜과 같이 세상 연락을 좇아 음란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실하신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호세아서 본문에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하는 이유가 세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주께 돌아가기 위해서 입니다. 필립 카츠(Philip Katz)는 컴퓨터 파일을 압축하는 집(Zip)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여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2000년 4월 14일 미국 중서부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싸구려 호텔방에서 시체로 발견 되었습니다. 마시다 만 위스키 병이 왼손에 쥐어져 있고 머리는 무엇에 부딪혀 한쪽이 움푹 패어 있었습니다. 한때 수백만 장자로 돈 많은 재벌이었던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몰골이었습니다. 그는 23살에 획기적인 압축프로그램을 개발했고 PK웨어라는 회사를 차려 Microsoft와 IBM등 세계적인 회사들을 고객으로 확보하여 일순간에 백만장자로 뛰어 올랐고 주체할 수 없이 돈을 벌었습니다.

한 때 미국의 메스컴이 그에 대해서 말하고 사람들이 천재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는 자기 인생을 절제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술을 마시고 방탕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술 중독에, 성 중독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퇴폐로 재산을 모두 탕진했고그 결과 몇 년 후에 빈털털이가 되어 싸구려 호텔방을 전전하다가 37세의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죽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집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주님의 통제를 받고 주님 품안에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고 살려고 하십니까? 불편하고, 싫어도 하나님의 통제를 받고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다 용서하시고, 하나님이 가지신 온갖 좋은 것으로 먹이시고, 입혀 주십니다.

본문 1절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 돌아가는 것은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즉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죽음의 골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피 끓는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주께로 돌아가는 것만이 삶의 길이라고 외칩니다. 신앙생활은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를 알게 된 후 이전에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갈지자 행보를 계속하는 까닭은 아직 중심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기독교 작가이며, 1996년 복음주의 기독교출판협의회(ECPA)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던 《우리가 알지 못했던 예수》(The Jesus I Never Knew)의 저자인 필립 얀시(Philip Yancey)의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 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 해드립니다. 스페인 선원들이 대서양을 건너 남미 대륙에 도착했을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스페인 선원들이 탄 돛배가 아마존 강 상류에 도착했습니다. 강폭이 너무 컸기 때문에 선원들은 아직 대서양에 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긴 바다를 항해한 그때 선원들 중 여러 사람이 갈증으로 죽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짠 바닷물 위에 떠 있는 줄로 알았기 때문에 강물을 떠 마실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풍부한 생수의 한 복판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갈증으로 죽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바다와 물에 대해 최고의 지식을 자랑했던 스페인 선원들은 안타깝게도 바다와 물에 대한 무지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기본적인 지식을 알지 못한다는 교훈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정반대의 상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망망대해가 다 강물 인줄 알고 마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로 주 앞에 거하며 살기 위해서 입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일제 때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의 일입니다. 외솔 선생의 집 앞마당이 항상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에 마당을 쓸고 가는 낯선 청년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이웃 사람이 청년에게 매일 아침 마당을 쓰는 까닭을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함흥 감옥에서 선생님과 한 방에 있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배탈이 나서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보시고 굶으면 낫는다고 하시며 혼자는 어려울 터이니 같이 굶자시며 종일 저와 함께 굶으셨습니다.  선생님은 밤늦게까지 저의 아픈 배를 어루만지면서 정성껏 돌봐 주셨지요. 아무도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는 감옥에서 받은 은혜를 어떻게 해서라도 갚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없는 처지라 선생님의 집 마당이라도 쓸어 드리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살려주면 그의 앞에 있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일으켜 세워놓으면 도망가 버리고 맙니다. 속담처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놓으면 보따리 내 놓아라는 배은망덕한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의 앞에서란 말은 그의 얼굴 앞에서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까닭은 그의 얼굴 앞에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우리가 사라지면 하나님은  정말 안타까워하십니다. 죽었던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자기 욕심대로 사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프레드릭 마이어(F.B. Meyer)가 말하기를. “인간에게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자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일으킴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영원히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입니다.

셋째로 내 삶이 주를 맞이하고 모시기 위해서 입니다.본문 3절에 보면. “새벽같이 어김 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호세아는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은혜는 예기치 않게 찾아옵니다. 마음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사람은 알아차릴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심코 지나칠 것입니다. 삶이 어려울수록 하나님은 먼 데 계신 분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힘써 하나님을 알 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익숙한 모습으로도 다가오시지만, 때로는 아주 낯선 모습으로도 다가오십니다. 아니 주님은 벌써 우리를 향해 오고 계십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 때 주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결론: 기독교회와 이단교회의 건물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단 교회는 대개 십자가를 크게 세우지 않습니다. 십자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예수를 생각하게 합니다. 만유 일력의 법칙으로 유명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노년에 기억상실증에 빠져 이름도 몰랐습니다. 나이도 몰랐습니다. 답답해하던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알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내가 다만 아는 것은 두 가지인데 나는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내 구주시라는 것이다”.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힘써 알아야 합니다. 힘써 주님을 아는 것만이 사는 길입니다.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가을의 길목에서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길입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을 맞이하는 길이 됨을 믿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June 5, 2022

성령충만의 결과

서론: 오늘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오순절’이라는 말의 뜻은 유월절로 시작해서 50일째 되는 날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에서 성령강림절은 성탄절, 부활절과 함께 3대 절기로 꼽힌다. 특히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탄생일’로 기념되고 있다. 이 날은 유대 절기로 ‘칠칠절’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에 안식일(7일)이 7번 지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7은 완전수이다. 그런데 그 완전수인 7이 7번 있다는 것은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이 완벽한 날이라는 뜻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이 더 이상 손댈 필요가 없이 완벽함을 기념하는 날이다. 신명기에 보면 이 안식일의 개념이 한 단계 더 진전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로 지킨다.(신5:15) 오순절은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이 완전함을 나타내는 날이고 그것에 대한 징표로 성령이 오신 것이다.예수님의 부활 후 50일째이자 승천 10일째 되는 날로, 이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행 2:1)이다.

오순절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날, 또 신약에서는 교회가 시작된 날로 구속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성령강림절은 유대교의 3대 절기인 ‘오순절 (Pentecost)’과 같은 날이기도 하다(레 23:9-11). 오순절 절기를 맞아 초대교회 성도들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으며, 함께 성령을 받았다. 그럼, 왜 성령이 오셨는가. 그것은 칠칠절과 관련이 있다. 칠칠절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과 율법을 받은 날이다. 하나님이 직접 돌판에 쓰셨다. 이것은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언약을 맺었다는 것이다.(렘31:33)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언약을 어겼다. 이 깨어진 언약을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언약을 회복하는 의미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돌비’에 새겼는데, 신약에서는 오순절에 임한 성령이 우리의 ‘마음판’에 새겼다고 얘기한다.(고후3:3) 이 오순절 날은, 우리를 족쇄처럼 묶어 두었던 모세의 율법을 성령이 산산이 부숴버린 날이라는 의미이다. 더 이상 우리는 율법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입었음을 성령 하나님께서 확증해 주신 날. 그게 바로 오순절이다. 이 오순절 날에 임했던 성령 강림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우리의 영의 회복이다. 오순절 이전에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항상 거하지 않았다. 들락날락했다. 우리는 처음에 창조될 때에 다른 동물들과 달리 하나님이 손수 흙으로 빚으사 우리 코에 생기(영)을 불어 넣으셨다. 즉, 성령이 거하는 상태로 창조가 되었다. 하지만, 그 후 인간들의 죄악이 만연해지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창6:3)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적인 사망을 선고 받은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에 그 하나님의 영, 그 성령이 우리에게 임했다. 무슨 의미인가. 깨어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누가는 의도적으로 성령의 임재 사건을 두 가지로 표현했다. 하나는, ‘온 집에 가득’하고 다른 하나는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고 기술했다. 예전에는 성전에만 임했던 하나님의 영이 각 사람에게 임했다는 것은 우리 각 사람이 이제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성도가 ‘교회’가 된 것이다.

교회는 더 이상 건물이 아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고 성도가 모이는 그 모임을 교회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하나님은 예배당에만 계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도 자신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이 어려운 시기에 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기억해야 한다. 지금 내 안에, 그리고 그 모임에 하나님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마음 다해 내가 선 곳에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신다.

둘째, 언어의 회복으로 서로가 일치된 마음을 뜻을 갖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 다락방에 모인자들이 서로 다른 언어(방언)를 말했다. 이것과 비슷한 사건이 있다. 바벨탑 때에 모인자들이 똑같이 갑자기 다른 언어를 하기 시작했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같으나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바벨탑 때에 사용한 언어는 서로 못 알아듣게 하기 위함이고, 오순절 때에는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바벨탑 때에 무너진 인간의 언어가 오순절에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제 복음은 유대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에게 알려야 함을 의미한다.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한 가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여 볼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5절에 보면 마가 다락방에 모인 사람이 120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원어 성경에는 “약 120여명 정도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약 120명이나 되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고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글을 다 읽게 되면 120명밖에’라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간 이 땅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증거에 따르면, 약 600여 명의 사람들을 만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전 15:4-8에 의하면, 예수님을 부활 후 뵌 사람은  1) 열두 제자2) 오백 형제3) 야고보(예수님 동생)4) 모든 사도(70문도) 5) 바울 순으로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만나신 후 40일째 되는 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과 함께,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한 날부터 이들은 마가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 하며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순절 때 모인 무리의 수가 120여 명 밖에 안 됐다는 점입니다. 40일간 약 600여 명의 무리가 예수님의 부활체를 직접 눈으로 보았는데, 정작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10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한 사람들은 불과 120여 명 밖에 안되었습니다.  성령이 내린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불과 10일 뒤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것을 본 이들 480여 명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불과 10일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에 “기다리라”는 명령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간 것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말세에 하나님의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라” 는 요엘 2장 28-32절 예언이 실현되는 역사적 현장에 참여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세번째, 성령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초대됩니다.  이제 오순절에 임한 성령으로 인하여 언어가 회복이 되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상한 점이 있다. 이렇게 배우지도 않은 말을 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굳이 왜 번거롭게 사람들에게 복음 전파 사역을 맡기시는 것일까? 하나님은 더 큰 기적을 통해서 충분히 혼자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할 수 있는데 굳이 왜 성도들을 쓰시는 것일까.  ‘로고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전파, 증거된 말씀이 ‘레마’라고 한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일을 성령 하나님께 위임하여 더불어 우리를 그 사역에 동참시키십니다. 그 말은 곧,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의 관계처럼 우리를 대우해 주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 사역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내가 방언과 각종 은사를 받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다. 이 성령은 12사도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모인 120명 성도 모두, 각 사람 전원에게 임했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을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자녀로 대우하신다는 것이다.

결론: 에베소서 4:3-6 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하셨다. 성도들이 한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세상이 좋아서 떠나는 것보다 “다른 성도가 나와 같지 않아서” 라고 합니다. 자기 중심의 신앙은 겸손함이 없으며,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며 성령세례를 받았다면, 각 신자가 개인적으로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계속 받는 것이 성령의 충만이다.”라고 J.O Sanders는 주장했다.

May 29, 2022

성도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What Men Live for?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가 1885년에 저술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 외’라는 소설속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천상에서 하느님을 모시던 대 천사 미카엘이 하나님으로부터 한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라는 명을 받았는데, 그 여인은 정말로 슬픈 운명을 지닌 갓난 두 여자 아이의 엄마였다. 그 여인은 미카엘에게 자신은 벌목 사고로 남편을 잃고 갓 태어난 아이들만 남았으며 “이 아기들은 부모 없이 살 수 없으니 제발 제대로 클 때 까지만 기다려 주소서”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말에 안타까워진 미카엘은 아이들에게 젖을 물려주고는 하늘나라로 돌아가서 "저는 차마 그 여인의 영혼을 데려올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자, 그래도 그 여인을 데려오거라. 그러면 내가 네게 세 가지 뜻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세 가지를 알게 되면 하늘나라로 돌아오게 되리라."라고 말했다. 결국 미카엘은 여인의 영혼을 빼앗았고, 이 과정에서 여인의 시체에 깔린 한 아기는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리고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던 미카엘은 폭풍에 휘말려 추락했고, 여인의 영혼만 하늘나라로 가게 됐다. 그리고 미카엘 자신은 날개가 부러진 채 이세상에 떨어져 어느 교회 옆의 길에 누워 있다가 구두 수선가계의 주인인 세묜에게 발견된 것이다. 처음에 미카엘은 세묜의 첫인상을 보고 '저런 사람이 날 어떻게 도와줄까'라고 낙심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세묜은 돌아와서 자신을 구해줬고, 그의 아내 마트료나도 무작정 화를 냈지만 세묜의 말을 듣고 화를 풀었다. 그리고 이때 미카엘은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웃는다. 이후 일을 하던 중 부자가 와서 장화 타령을 했을 때, 미카엘은 세묜이나 마트료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천계 시절 동료인 죽음의 천사가 부자 옆에 붙어 있는 걸 보았다.

즉, 이 부자는 자기가 오늘 죽는 걸 모르니, 사람에겐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는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고 동료였던 천사를 만난 것도 반가워서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오늘, 6년 전에 자신이 죽을 거라고 걱정했던 두 여자아이가 마음씨 좋은 마을 사람들의 도움과 아이들의 양부모인 이웃 부부의 손에서 잘 자란 것을 보고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고 웃었던 것이다.이렇게 세 가지를 알게 되었기에 그는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세묜과 마트료나, 그리고 아이들 앞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아닌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진리를 설파한 뒤 찬송을 드리면서 하늘로 승천하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끝이 난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였던 것은 단순히 그들의 죄의 결과만 아니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광야의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그를 섬기는지를 알려고 하신 하나님의 기쁜 뜻이 있다. 실제로 그들은 40년 광야 생활의 연단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고 섬기게 되었다.

본문:  3절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란 이 명제는 모든 사람이 제기하고 규명하려 애써 왔습니다. 철학, 예술, 교육, 그리고 모든 종교 분야를 통해 이 명제를 해결하려  부단히 애썼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단순히 존재하는 것 만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우리 인생에서 세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찾 을수 있습니다.

첫재, 물질적인 것이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란 말 말속엔 단순이 먹는 것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요, 모든 물질적인 것을 의미 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물질적인 것을 떡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는 것은 인간이 물질적인 존재만은 아니라는 의미 입니다. 선진국일수록, 문명국일수록 자살률이 높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고전 13:13 “믿음, 소망, 사랑은 향상 있을 것인데”에서 믿음을 먼저 언급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삶을 뜻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믿고 맡기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생명의 동력은 소망에서 비롯됩니다. 소망이 있을 때  활기가 넘칩니다. 고전4:18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셋째, 사랑과 희생으로 이루어 지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수직적인 사랑 수직적인 사랑 모두 하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 우리가 사랑을 논할 수 없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사랑은 활동하며 생명이 있는 곳에  희생으로 주고 사라집니다. 사랑은 하늘로서 오지만 그 표현은 땅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늘로부터 온  사랑은 인간속에 이루어지고 다시 하늘로 올라갑니다.

결론: 우리가 성찬식 때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본문의 나타난 만나와 떡의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6:48-51에 보면,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광야에서 만나가 그리스도의 살이라고 하면 광야에서의 생수는 주의 흘리신 보혈 같습니다. 저는 이틀 전 있었던 저희 아버님의 천국의 환송예배를 통해 부모님들의 헌신과 희생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세대가 열리기 위해 가시는 세대의 분들은 수많은 사랑과 희생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의 의미처럼 우리는 그분들에게서 사랑과 희생의 발자취를 발견합니다.

May 22, 2022

본문: 

신명기 6:4-9

디모데 후서 1:3-7

믿음의 유산

지난 화요일에 원로 목사님 이신 윤 영민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셨습니다. 오늘 저의 설교는 아무래도 고 윤 목사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뜻을 기리는 내용이 주를 이룰 것 같아 여러분께 양해를 구합니다. 그리고 5월은 가정의 달이기에 저는 오늘 ‘믿음의 가정의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정확히38년 전인 1984년 5월에 지금의 친교실 자리에 있었던 이 교회 본 성전에서 ‘한인 선교교회’란 이름으로 저희 교회는 시작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아직도 몇 분의 산 증인들이 계십니다. 오늘은 윤목사님께서 저희들에게 보여 주셨던 믿음의 유산들과 우리 성도들이 이어가야 할 믿음의 유업들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아 들으라’라고 시작된다. 히브리어로 ‘쉐마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자녀교육의 원리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이 말씀을 자녀교육헌장으로 여겨서 지킨다고 한다. 

예수님도 계명 중에 가장 우선되는 계명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에 대해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니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쉐마 이스라엘)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마가복음12:29,30에 말씀하십니다. 신약 본문에서 바울의 가장 아끼는 디모데는 그의 외조모 로이스 로부터 믿음의 전통이 시작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유대인 전통에서는 어머니가 유대인이여야 유대인으로 인정해준다. 아버지만 유대인일때는 정통 유대인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어머니의 한가정에서 영향은 그토록 지대한 것이다.

몇 년 전 한국교육개발원에서 800명의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부모에게 설문조사를 한 것이 있습니다. “자녀 성공요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 비기독교인 부모의 대답을 보면 첫째는 성실성과 노력(41.3%), 둘째가 학벌과 연줄(33.8%), 셋째가 가정배경(14.4%)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800명의 기독교인 부모들에게 물었더니, 첫째는 학벌과 연줄(39.7%), 둘째는 성실성과 노력(27.%), 셋째는 신앙(16.2%)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녀들에게  어렸을 때 ‘예수님을 최고로 모셔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   부모들은 예수님은 첫째가 아니었고. 둘째도 되지 못하고. 셋째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주님 안에서 우리 가정에 신앙의 전승을 세우며 유산을 남겨야 하는가?

우선  예배의 유산을 남겨야 한다. 제가 한국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에 저의 집은 아침에 가정예배를 드렸다. 학교를 가야하는 우리는 그때는 그것이 참 못마땅했다. 그래서 우리를 때론 아버지께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둘째, 주일 성수의  유산을 남겨야 한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디에 있던지 주일날은 가까운 교회가 예배를 드리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는 것을 자녀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스스로 모본을 보여야 한다. 자녀들은 우리의 말을 듣고 행하기보다 부모들의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따라하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다른 사람과 나누고 그들에게 베푸는 신앙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 창 18장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므로 후손의 복과 그로인하여 많은 이들이 복을 받는 주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자주 방문하였다. 하루는 외롭게 사는 농부를 방문했는데 , 그의 얼굴이 밝고 환하여 여왕을 맞이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고 물었더니, 자신은 필요한 것이 없고, 오히려 여왕이 자기에게 약속할 것이 있는데, 자신과 천국에서 만나겠다는 약속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결론: 많은 사람들은 자녀에게 많은 재산을 또는 지위를 물려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안에서 영적 유산과 아름다운 기독교적 전승을 물려줘야 할 것이다.

May 15, 2022

성도의 영성과 삶

오늘은 가정의  달  5월의 셋째 주일입니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이르러 교파를 초월하여 교회안에서 집중하는 세가지의 목표가 있다. 첫째가 ‘영성훈련’, 둘째가 ‘공동체 훈련’ 셋째가 ‘치유의 사역’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교회 안에서 수그러드는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영성 훈련이다. 성도가가 세상에서 삶을 열심히 살수록 우리에게는 영성훈련이 필요하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갖는 종교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기독교가 단지 이슬람, 유대교, 힌두교 등과 같은 또 다른 종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기독교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종교처럼 취급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죽음 이후에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지켜야 할 규칙과 의식의 집합일 뿐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가 아닙니다. 엄격히 말하면 진정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삶입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메시아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에도 지켜야 할 “의식”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례와 성찬이 그렇습니다. 기독교에도 따라야 할 “규칙”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 서로 사랑하라” 등. 그러나 이러한 의식과 규칙들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의식과 규칙은 구원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으면, 그 믿음을 공표하기 위해 세례를 받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성찬을 지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분이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로 인하여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목록을 따르게 됩니다.

영성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는 많은 영성의 형태들이 있고 그 형태들 모두가 똑같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특이한 신체 자세로 묵상하는 것, 자연과의 대화, 영의 세계와의 대화를 추구하는 것 등은 "영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거짓 영성입니다. 참된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참된 영성은 성령께서 사람의 삶을 통해 맺는 열매입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5:22-23 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로  9가지 성령의 열매를 말하고 있습니다. 영성은 영이신 하나님 (요한복음 4:24)을 더욱 닮아가는 것이며, 우리의 성품이 그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라고 본문 로마서 12:1-2에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삶속에서 자신과 기독교,성경의  교훈 사이의 접합점과 교차점을 모색, 크리스챤  삶의 의미를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감정(emotion),덕목(virtues),의지 (will)의 의미를 창출하는 가운데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하는 문제 해결의 열쇠를 가지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겠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삶과  인격이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며(like christ)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삶의 노력이 요구되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닮 은 아름다운 인격이 표현되어지는 삶이  되도록 힘쓰고 애쓰는 신앙의 몸부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출현한 교리중심의 개신교는 바른 진리를 수호하고 조직하는 일에는 유능했지만,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영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영성적 측면에 있어서는 미흡한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18세기 영미의 대각성운동, 19세기의 성결운동, 20세기의 오순절운동 등이 연이어 출현했습니다.   이 같은 운동들은 그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하나같이 인간이 거룩하신 초월자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그 분과 동행하고 일치하는 신령적인 삶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과 인도를 힘입어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했습니다. 1960년대 이래로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영성운동 역시 이 같은 역사적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래 영성(Spirituality : Spiritualitas)이라는 말은 5세기경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모든 욕망을 부인하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하나님과 동행하려는 일체의 영적 노력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이 용어가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진영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20세기 후반부터 그 역사적 의미가 재조명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성향과 노력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다시금 사용되게 된 것은 2천년 교회사에서 볼 때 극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현대의 영성신학자인 Richard Foster는 그의 기도라는 책에서 우리의 영성을 3가지인 위로 향하는 영성, 안으로 향하는 영성, 밖으로 향하는 영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영성을 키워가며 우리 삶에 적용해 가야하는 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위로 향한 영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성도들이 보통 영성하면 바로 위로 향하는 영성만 생각하는데, 그동안 우리는 예배와 찬양을 통해 이것에 많이 치중해 왔기에 자세히 언급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두번째, 안으로 향하는 영성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성령의 열매는 안으로 향하는 열매를 6가지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입니다. 앞의 3가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요, 두의 3가지는 내가 내면적으로 쌓아야 할 덕목인 것입니다. 사랑(아가페)는 성부적인 것이고, 희락(카라)은 성령적인 것이며(살전1:6), 화평(에이레네)은 그리스도 적이다. 오늘 이곳에 오신 분은 그동안 거의 듯지 못했던 영적 사실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최대의 덕목이며, 모든 성도 신앙의 기초다”라고 신학자 Lightfoot가 말하였습니다. 인내는 ‘마크로뚜미아’로  ‘긴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자비는 롬3:12절에 ‘선’으로 번역되었고 부드럽고 인자하고 친절한 행동을 말합니다. 양선은 ‘능동적 자비’를 뜻합니다.

세번째, 밖으로 향한 영성이 바로 ‘충성(faithfulness) ,온유(gentleness), 절제(selfcontrol)’입니다. 이것들은 단체와 대인 관계에서 필요한 덕목입니다.

결론: 우리가 천국에 가면 영성이 라는 것은 따로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 자체가 거기서는 영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영성은 성도가 이세상에서 갖는 것입니다.  영성은 본질 상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삶 그 자체입니다. 다시 말해, 잠시 그 원리를 배우거나 깨닫는데 그치지 않고 삶으로 구체화되지 않으면 영성의 의미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기독교 영성은 일상생활 속의 영성, 곧 생활 영성이라는 사실은 인식하고 날마다 삶 가운데 영성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생활 영성이란 문자 그대로 성령의 지도와 인도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을 끊임없이 인식하면서 매순간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May 8, 2022

본문: 

잠언 15:16-21 ,

에베소서 6:1-3

주 안에서 경건한 부모

서론:오늘은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본래 어버이날은 어머니날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일찍이 미국의 필라델피아 웹스터라는 마을에서 26년간 주일학교 교사로 있었던 애너 제비스 여사를 추모한데서 유래했습니다. 원래 1907년에 시작하여 1914년부터 공식적으로 매년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날로 정했습니다.

우리나라는 1973년부터 어머니날을 어버이날로 바꾸었는데 미국에서는 1916년부터 6월 셋째 주일을 아버지날로 정했습니다. 어머니 주일에는 카네이션을 꽂아드리는데 아버지날은 자녀들이 아버지를 의자에 꽁꽁 묶어 놓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게 하는 풍습이 있었서 아버지날은 실로 아버지들이 곤욕을 치르는 날이었습니다. 18세기 말에 스위스에서 태어났으며, 교육학자이자 사상가인 페스탈로찌(Johann Heinrich Pestalozzi)를 잘 아십니다. 고아들의 대부이고, 어린이의 교육에 있어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였습니다. 19세기 이전에 이미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삼아 간주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주장하기를 “가정은 최초의 가장 훌륭한 인간 관계의 터전이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한 인간의 인격 형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어떤 집단을 형성하여 관계속에서 생활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고 또한 후에 스스로 가정을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가정은 관계적 존재 로서의 인격형성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장과 발달의 최초의 환경이며, 최초의 교육 환경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더욱 가족 모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관계 형성의 기초인 가정에서 개인들이 지켜야 할 우선순위가 있는데, 그 첫째가 자녀들의 부모 공경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이유가 출20:12에 보면 나옵니다.
 

첫째, 하나님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출20:12)창세기부터 아버지를 공경하는 자는 축복을 받았고 아버지에게 불경하는 자는 벌을 받는다고 합니다(창9:25-27).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해야 함을 십계명에 넣으시고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삼으셨습니다(출20:12). 예수님은 부모님을 잘 순종하여 받드셨으며(눅2:51) 심지어 십자가상에서도 어머니를 염려하셨습니다(요19:27). 실로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상급인 동시에 열매입니다(시127:3). 부모는 하나님의 대행자로 축복도 하며(창28:6) 예언도 했습니다(창49:1).
두번째, 이것은 도덕적 계율이기 때운이다(엡6:1-3) 이미 성경 여러 곳에서 상세하게 강조된 것과 같이 인간 윤리는 부모에 대한 효행에서 시작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가정윤리 기초요 모든 인간의 행위 첫 규범입니다. 인간 최초, 최소의 공동체는 바로 가정 입니다. 이 가정제도는 신 구약 신학의 원리요 평생 수행해도 못 다할 인생 과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낭독한 엡6:1-3에는  부모 공경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주안에서 순종하라 십니다. (엡6:1)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안에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원리를 총망라한 설명입니다. 아무리 효행이 중요해도 우리의 신조와 신앙 원리를 초월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즉 주 안에서란 말은 하나님 섬김의 표준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을 수는 없고 부모를 향한 애정이 계명을 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귀히 여기고 섬기는 나머지 신앙의 대상이거나 어떤 종교적인 의식인 형식은 더욱 죄를 지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함이다(엡6:2). 여기서의 공경의 의미는 무겁게 대하다, 혹은 명예를 높이다, 그리고 섬기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이는 부친은 공경하나 어머니는 함부로 대하고 또 다른 곳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부모는 마땅히 자녀들로부터 사랑과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이 말의 반대는 멸시와 천대, 그리고 버림을 받거나 학대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를 부끄럽게 한 함은 저주를 받았고 수치를 덮어 준 셈은 종교적인 축복을 받았고 야벳은 땅위에서 창대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창9:25,26). 아버지 다윗을 죽이려던 압살롬은 나무에 매달렸으나(삼하18:14), 부친의 명에 순종하던 솔로몬은 성전을 완공하게 되었습니다(왕상6:38).
세번째, 부모를 우리가 공경해야 할 이유는 약속 있는 첫 계명(엡6:3)이기 때문입니다. 제5계명은 다른 계명과 달리 명령형과 약속, 그리고 거기에 따른 축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한 이 구절은 명령과 약속, 그리고 의무와 축복을 함께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구약에 다 기록이 되어 있고 그 보증은 주의 보혈과 성령입니다.

중국의 장개석은 자기 생일이면 어머니의 산고를 생각하고 금식했습니다. 또 오래전에 11년 동안 연세대 총장을 역임했던 박대선 목사님은 모친(김순이 여사)을 극진히 봉양하여 우리들의 귀감이 된 사실은 너무도 유명한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나 교회사에 나오는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얘기는 너무도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19남매중 15번째의 아들 요한 웨슬레를 세계의 부흥사로 키운 수산나는 길이길이 빛날 모친상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요한 하인리히 파스탈로찌는 할아버지가 손수 손주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요한은 복음서의 세례요한에  그리고 교회를 보호한 군주 하인리히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의사였던 아버지 요한은 페스탈로치가 5세가 되던 해, 3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페스탈로치는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실천하는 따뜻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개신교 목사인 그의 할아버지는 손자와 산책하면서 교우를 만나면 "잘 지내십니까?"라고 물으며 가난한 교우들에게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고, 어머니는 두 아들을 혼자서 돌보면서도 고아원에 틈틈이 음식과 옷을 보내고는 하였다. 별세한 그의 아버지도 가난한 사람들을 주로 진료하였다. 여린 시절에 요한은 건강이 좋지 못했지만, 할아버지와 산책을 하면서 몸이 건강 해졌고, 몸이 건강해 지니 자신감도 자랐다. 그는 할아버지에게서 인격 형성의 영향을 받고 성장했습니다. 요즘 조 무모님들은 손자 손녀를 대면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영향을 줄 지혜를 찾아야한다. 예화) 나의 어린 시절의 교회의 권사님들이 모습이 떠오름니다.

결론: 요즘 젊은이들은 효도의 이론과 이치는 잘 알면서도 직접 실천하는 모습은 정작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것은 가정 안에서의 도덕과 창조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옛말에 ‘동가 식 서가 숙’란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부모가 먼저 효행의 본을 자녀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가정에서 우리가 자녀로서  먼저 해야 할 참된 효행은 바로 효도관광이나 묘를 향해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영혼을 구원하고 심령을 평안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May 1, 2022

가장 복된 가정

서론: 5월은 우리가 모두 아는 데로 가정의 달입니다. 오늘은 성경속에서 가장 복된 가정 중에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우신 인간의 제도 중 가장 오래된 것인 결혼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가정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들을 축복해 주시고 또한 복된 가정으로 세워 주시기 원하신다. 그래서 계시의 말씀인 성경에 믿음의 가정들의 모습을 기록해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가정들을 본받아 복된 가정을 세우도록 하셨다. 오늘은 하나님을 경외함과 사랑과 믿음(기도)에 기초한 가정이었고, 신약성경에서 이방인 가정 가운데서 최초의 기독교 가정이 되었던 고넬료의 가정을 살펴보고자합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초대교회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고넬료의 배드로 초청은 유대인과 로마인의 만남이며,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만남 이며, 이방인과 기독교인의 만남이다. 고넬료의 가정은 기독교에 있어 최초의 이방인 개종자 가정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세계적 종교가 되었는데, 세계적 종교로 발전하는 그 출발선상에서 그의  가정은 귀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믿음의 가정들을 살펴볼 때,  복된 가정을 세울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이 고넬료 가정의 모습처럼 경건과 사랑(섬김)과 믿음(기도)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복된 가정을 세우는 은혜의 수단들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고 가족과 이웃들을 더욱 사랑하고 그리고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모든 일들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살아갈 때 우리의 가정은 복된 가정으로 세워져 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넬료 가정은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복된 가정에 대한 모범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복된 가정들의 모습과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정에 대하여 주신 말씀들을 살필 수 있다. 고넬료란 사람의 집안을 살펴보면, 원어 성경에 보면 ‘코넬리우스’라고 나와 있다.  주전 82년에 1만명의 노예들을 해방시킨 ‘코넬리우스 슐라’의 가문으로 추측된다. 가이사랴에 있는 다섯군대 중 로마인 지원병들로 구성된 ‘이탈리야 대’의 백부 장이었다. 그는 로마의 명문 출신이고 유명한 장군이었으나, “경건하여 온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고 2절에 나와 있다. 한절로 표현된 이 이방인의 가정이 얼마나 주 앞에 복된 가정이었는지를 알 수있다.
 

성경에 기록된 복된 가정들을 살필 때 나타나는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복된 가정들 모두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된 삶을 살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실제로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보습과 다른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실례 로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헤어질 때 그가 보여준 태도가 바로 이런 모습들 가운데 하나이고(창13장),

복된 가정들에  나타나는 공통점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가족들의 관계를 설정해 주는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 원칙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복된 가정을 세우도록 주신 말씀들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모든 시대 자녀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해 주셨고, 또한 부모들에게는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아내들에게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말씀하셨고 남편들에게는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엡5:22-25). 이와 같은 말씀들이 가정에서 가족들 간의 관계를 설정해 주는 말씀들이다. 여기 관계라는 말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가정에서 가족들 뿐만 아니라 어떤 공동체 안에서도 구성원들 사이에 바른 관계를 갖게 될 때 모두가 복을 누리지만 그렇지 못할 때 불행해 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복된 삶은 관계에 기초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번째, 복된 가정들 가운데서 볼 수 있는 공통점들은  장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3절에  “그가 기도중에 꿈(vision)을 통하여 확실히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다.” 그는 영적인 꿈을 사람임을 볼 수 있다 . 구약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자신을 통하여 한 민족을 이룰 것을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생산한 자녀는 이삭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삭과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결국은 한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그의 꿈은 후손들에게 믿음의 유산이 되어 후에 이스라엘 가운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신앙의 고백을 갖게 된 것이다. 이 고백 자체가 이스라엘에게는 꿈이었다. 그리고 이 꿈은 그들로 하여금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소망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소망은 우리의 가정을 복된 가정으로 세워주는 것들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다. 따라서 꿈을 가지고 있는 가정은 복된 가정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네번째로,  오늘 본문에서 고넬료는 그의 집 하속들이나 군 부하에게도 신앙의 모본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7,8절에 보면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여기서 devout표현된 그의 하속들이 주인과 상사에게 헌신된 자들이었음을 볼수있고,  그들에게 신앙적 환상까지도 다 설명하고서 그들을 베드로에게 보냈음을 볼 때 고낼료와 그들과의 관계가 어떠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가정속에서도 자기중심과 사고가 가득 차 있다.  자신의 배우자에게도 “당신은 내 배우자니 당연히 내게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녀에겐 “내 자녀니 부모인 나에게 당연히 잘해야 한다.” 고 생각하며  자기 권리를 주장한다. 심지어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고용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대가를 받고 고용된 사람이 그들이 당연히 주인 가정에 헌신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마지막으로 적용하기 원하는 것은 우리의 가정에서 사용하는 부정적인 언어를 버리고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복된 가정을 세우는 일에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은 부정적인 언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들을 깨뜨리고, 우리의 장래를 믿음으로 전망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네 장래는 창대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가족의 연약함을 보고 무능하다고 말하거나 가능성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런 부정적인 말들은 믿음을 세워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경우도 가족들에게 유익을 줄 수 없고 또한 복된 가정도 세울 수 없다.

목회자로서 그동안 배우고 확신한 진리들에 비춰 말할 수 있는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우리 가운데 사용하는 부정적인 언어를 버리고 믿음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정에서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 만으로도 우리의 가정은 보다 더 복된 가정으로 세워질 것이다.

결론: 주 앞에 신실한 고넬료의 가정은 그의 경건함 속에서 온 집안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구제하며 하나님께 항상 기도드리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은 이런 가정을 부르시어 기독교가 이방으로 전파되는데 큰 기초석이 되게 하셨다. 우리도 주의 귀한 가정이 되기 위해 믿음의 주인 그리스도위에 가정을 세우며,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꿈을 가지며, 빛된 삶을 살며 기도와 언행으로 주께 영광돌립시다.

April 24, 2022

본문: 

시편57:7-11,

로마서 13:11-14

새벽은 어둠 속에서 시작

서론: 우리 부모님들께서 저희가 청소년기였을 때 우리가 아침에 늦잠을 자면  가끔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지는 해를 붙잡지 말고 뜨는 해를 붙잡으라.”는 말씀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부지런하게 하루를 살라고 권고의 말씀입니다. 또 한가지의 교훈은 젊었을 때 더 시간을 내어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 삶의 지혜는 많이 터득할 수 있지만 우리 배우고 몸에 익히는 것이 더디어 지는 것입니다. 저도 벌써부터 새로운 것을 접하고 익히는 것이 더디어 짐을 느낍니다. 오늘 구약 시편 말씀은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고 사울을 피해 굴에 숨어 있을 때에 기록한 시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시인들만 쓸 수 있는 문구가 하나 나옵니다.  그것은 8절의  “새벽을 깨우리 로다” “I will awaken the dawn ”라는 문장입니다. 과학적으로는 표현하고 이해하기 힘든 문장입니다.  우리가 사는 하루는 분명히 자정부터 시작 되는 것입니다. 밤이 가장 깊은 시간부터 새로운 하루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신약의 본문은 기독교 신학을 체계화한 사람이라고 평가받고 교회 역사에 큰 공헌을 한 성 어거스틴이 회심할 때 주께 받은 말씀입니다. 어느 날, 그는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함께 살아 오며 세속적 쾌락을 추구했던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자기와의 치열한 내면적 투쟁을 벌이던 중이었습니다. 그의 영혼 속 깊숙이 숨겨져 있던 그 자신의 비참한 모습이 눈앞에 스크린처럼 드러나고, 폭우 같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추구했던 모든 것들을 끄집어내어 놓으니, 그것이 모두 헛된 것이며,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혀 통곡하였습니다. “나는 왜 나의 더러운 생활을 이 순간에 깨끗이 끝내지 못합니까?” 그때 갑자기 이웃집에서 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소년인지 소녀인지가 구별은 안 갔지만 “tolle lege”(집어서 읽어라!)라고 들렸습니다. 이러한 어린 아이들의 목소리는 마치 그에게 하늘로부터의 명령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서신을 펴들고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곳을 읽었습니다. 롬 13:13~14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렇게 밝은 시대는 아닙니다.  지난 2년동안 코로나 전염병으로 만 세계에서 625만 여명이 사망했고, 우리가 사는 미국에서 100만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이제 우크라이나서의 전쟁으로 수천명이 사망하고 있고, 몇 십년 동안 건설해왔던 도시들이 폭격으로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세계가 두편으로 나누어져 대립하는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깊은 어둠 속에서 우리 성도들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새벽을 기다리며 또 새벽을 깨워야 할까요?

첫째, 밝아오는 새날에 대한 꿈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내 마음이 확정되었 사오니” 라는 원래의 의미는 견고하여 흔들림이 없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15:58)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앞이 캄캄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주 안에서 가진 꿈은 잃지 말아야 한다.

둘째, 감사의 찬양을 나의 신앙을 일깨워야 한다. 옛날의 찬양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나가며 도전해보는 찬양도 내게  중요하다.  “내 영광아,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라고 하는 것은 나의 영혼을 일깨우는 나의 영혼을 일깨우고 긍정적 힘을 주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동원해 찬양 할 수 있어야 한다. 비파는 관악기이고 수금은 현악기이다.

셋째, 단순히 새벽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의 있는 어두움들을 하나씩 물리쳐 내야한다. 내 가정안에 있는 부정적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야 한다. 어떤 가정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만 보면 질투와 시기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 나와 출신계층이 다른 사람을 우선 경계와 조롱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실망을 쉽게 하고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끝으로, 새벽을 깨우기 위한 가장 요소는 우리의 기도이다. 어두움 속에서 자신과 싸움을 이기고 기도의 문을 열어야 한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속에서  여러 사람이 연합하여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윤 동주 시인이 쓴 ‘쉽게 쓰여진 시’ 에 이런 부분이 나온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 환란 속에서도 자신을 일으켜 새워 겸허하게 주님께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한다.

우리는 내 영혼의 잠을 깨야 한다. 악의 세력이 좋아 하는 것은 나태와 게으름에 빠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롬13:12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하신다. 앞의 시편 본문 서두에 “내영광아 깰지어다.”는 나의 영혼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말로 ‘영광’이란 “영원한 빛”을 뜻합니다. 밤 하늘에 주님이 만드셔서 초롱 빛나는 수많은 별빛처럼 우리도 어둠 같은 이 시대 속에 초롱 초롱 빛나는 별빛 같은 성도가 되자.

April 17, 2022

하나님 나라의 백성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기쁜 날이고 축제의 날입니다. 부활절은 전 세계교회가 춘분후 첫 만월이 된 다음에 오는 첫 주일을 부활절로 지킵니다. 때문에 언제나 3월25일-4월 25일 사이에 옵니다. 보통 부활절을 축하하는 표어가 “Blissful Easter”입니다. “기쁨이 충만한 부활절” 또는 “더 없이  기쁜 부활절” 이라는 뜻입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의 부활은 어느 절기보다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축제의 날입니다. 기독교를 대변할 때 성탄의 종교라고 하기보다 부활의 종교라고 합니다. 성탄절과 함께 부활절이 가장 크고 성대한 축제의 절기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X-mas와 같이 Easter Tree를 환하게 장식하여 그리스도의 부활과 소망을 만방에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부활절 새벽은 어느 때보다도 칠흑 같이 어둡고 침울하고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 찬 새벽이었습니다. 이틀 전인 금요일 오전,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전 인류의 구세주요 희망으로 오신 예수님을 가장 흉악한 죄인이라고 재판을 하여 십자가에 처형을 하였습니다. 모든 공관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던 순간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졌고 천둥과 벼락이 내리치는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제6시부터 제 9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계속되었습니다. 6시에서 9시란 지금의 시간으로 정오로부터 오후 3시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큰 소리를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던 그 순간에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고 땅이 진동하여 바위가 터졌습니다(마27:51-52). 무덤들이 열렸고 잠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태27:54절에 보면,  백부장과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며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Truly this was the Son of God!)라고 스스로 증언을 하였습니다. 헬라어로 “알레도스 데우 휘오스 엔 후토스(이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고  아주 중요한 증언을 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던 사람들의 증언이었고 십자가 밑에서 말한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스타시스”이고 영어로는 Resurrection인데,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다”,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겨울에 죽은 듯하던 대지의 모든 식물들이 새싹이 돋아나고 본래의 모습으로 소생하는 것을 뜻합니다. 만물이 생기를 회복하는 계절에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신앙과 건강과 생활과 환경을 새롭게 하십니다. 주님의 몸 된 하나님의 교회는 부활신앙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부활주일에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셨던 부활과 그리고 우리가 주일마다 사도신경을 통하여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는 신앙고백을 하는 부활의 의미는 무엇이며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떤 성도인지를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였습니다. 죽음 앞에서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탄생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고 소망을 주지만 죽음은 사람들을 슬프게 만들고 비통함과 절망을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최대의 적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왕 노릇을 하고 사탄과 마귀가 지배하기 때문에 그렇게 두려운 것입니다. 롬5:17절에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탄 마귀가 죽음의 검은 그림자의 사자가 되어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엡2:2). 인간들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안간힘을 써 왔습니다. 옛날 중국의 진시황제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불로초와 불사약을 구하려고 애를 쓰고 죽음이 두려워 자기의 지하 묘에 흙으로 만든 수만의 병사들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오래 살지 못하고 51세에 죽었습니다. 모든 노력이 허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바로 인간의 최대 적인 죽음을 정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몸으로 살 것을  예시해줍니다. 고전15장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하셨습니다. 살아 있는 우리 성도는 물론 이미 무덤속에 부패해 간 성도들의 몸도 주님처럼 부활 할 것이라는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가 승리한 것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진리 즉 바르게 사는 길, 올바른 이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통 당하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고, 사람을 괴롭히고 이용하는 귀신들을 추방하셨습니다. 낙심한 사람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천한 취급을 받던 사람들을 친구로 삼아 주셨습니다. 당시에 어린아이들을 무시할 때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고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까지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땅 위에는 진리나 참된 것 보다는 거짓과 남을 모함하는 일과 남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심히 핍박하였고 심지어는 나사렛 촌사람이라고 무시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사람들을 매수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유일하신 독생자 예수님을 이길 수 없었고 말씀이나 행동을 당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사람들을 충동질하였고 로마에서 황제가 파견한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이 무죄임을 알고도 백성들의 위협에 못 이겨 사형하도록 허락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진리를 죽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신앙을 가진 우리 성도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첫째,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기쁨과 소망을 가지십시다. 십자가 없으면 영광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 “No Cross, No Crown”이라고 합니다. 언제나 십자가 고난 다음엔 부활의 기쁨과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인류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오직 먹고 마시고 세상의 향락을 누리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고 삽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쁨과 희망이 없고 재미가 없으니까 더 재미있는 것, 더 짜릿한 것, 더 자극적인 것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언제나 부활신앙을 가지고 행복하게 만족하게 기쁘게 삽니다. 상당한 집을 가 보아도 믿어 부활신앙을 가지고 세상을 떠난 초상집은 하늘나라의 소망과 기쁨을 가지고 찬송하고 감사합니다. 예수부활 후의 처음으로 예수님을 보았던 마리아(요한20:14)나,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 나오는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도 실망하고 낙심했을 때는 주님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의 삶엔 실망이 없고 감사가 넘칩니다. 그리고 새로운 소망을 찾습니다.

둘째,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기독교의 본래의 진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태 28장에 부활하신 주님은 무덤에 찾아 온 여인들에게 “가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이 평소에 제자들과 함께 사역을 하신 곳입니다. 갈릴리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을 만나 부름을 받았던 곳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하신 곳입니다. 즉 복음 전파의 한복판이요 본거지가 갈릴리입니다. 만남의 현장이요 기적의 현장이요 전도의 현장인 갈릴리로 가서 만나자는 말씀입니다. 여인들이 달려가 그 소식을 전하여 제자들이 갈릴리로 갔더니 이미 부활하신 주님이 와 계셔서 제자들을 맞아 주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그 때부터 부활하신 주님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론: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온 때가 바로 1885년 4월 5일 부활절이었습니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부활의 복음을 들고 은둔의 나라, 어두움으로 덮여 캄캄하던 이 나라에 들어온 지 금년이 선교 13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오늘처럼 부활절에 시작한 한국교회가 시련의 세월속에서도 부활의 신앙으로 견디어 내고 오늘의 선교대국이 되었습니다. 부활 신앙은,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셨음을 믿는 것”과, “이 예수의 역사적 부활을 믿는 자로서 나도  다시 살아나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에 거하며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을 믿는 것” 입니다.

April 10, 2022

하나님 나라의 백성

서론:오늘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에 승리의 입성을 하는 날인 종려주일 입니다. 예수께서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땅에 펴며 종려나무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다고 해서 우리는 이날을 종려주일 이라 합니다. 역사적으로 7,8세기 이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여 종료 주일이 지켜졌습니다. 군중들이 주님이 오시는 길에 펼치고, 손에 들고 흔들었던 종려나무의 의미를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종려나무는 히브리어로 ‘타마르’ 라고 한다. 종려나무의 식물학 이름은 "phoenix dactylifera"이다. 불사조를 뜻하는 헬라어 phoenix가 붙어 있는 것이 재미있다. 종려나무는 다 베고 남은 그루터기를 불에 태워도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고 자라난다. 이런 종려나무의 특징 때문에 유대인에게 종려나무는 존경과 기쁨, 승리와  번영, 기독교적으로 부활을 상징합니다. 종려나무는 로마의 압제를 받으며 로마에 대항한 유대인들의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나무가 되었다. 열왕기상6:29~35에 의하면 솔로몬 성전의 내외 사면 벽에 종려나무가 아로 새겨진 것 오랜 역사를 가진 생명의 나무 로서의 상징 관념이 작용했다고 생각되는데, 그 주된 의미는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 이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성전의 커다란 방의 천장은 잣나무로 만들고, 그 위에 종려나무와 사슬 형상을 새겼다(대하3:5). 이것은 여호와를 믿지 않는 사람이나 여호와를 거역하는 사람이 넘어서는 안되는 거룩한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종려나무는 높고 숭고한 것을 비유한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지혜가 "엔게디의 종려나무처럼…무럭무럭 자랐다"고 했다(시라크서24:14).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한다(시92:12). 요한복음 12:12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무리는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다.

요한계시록(7:9)의 예언에서는 순교자들이 어린 양의 피에 씻어 희게 한 옷을 입고 손에 종류 가지를 들고 있다.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종려나무 가지는 그들이 지상적인 것을 극복하고 이미 썩지 않는 영원한 보장을 손에 넣은 것을 암시한다.교부들은 아가서7:7의 "네 키를 종려나무 같고"의 종려나무는 마리아의 상징이라고 보았고 종려나무의 열매는 그리스도라고 여겼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직접 주님이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나귀를 준비시키셨습니다. 저는 오는 자원하여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입성과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펼치고 종려나무를 흔들며 주를 맞이하는 예루살렘 군중의 모습속에서 우리에게 주는 은혜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려 합니다.

먼저, 겸손함과 정결함 나타내는 것이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앞에 정결한 속죄 제물이 되시기 위해  아무도 타보지 않은 순결한 어린 나귀를 준비시키셨고, 겸손한 선생과 왕이 되시기 위해 어린 나귀를  타셨다. 오늘 읽은 본문 5절은  스가랴9:9 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휘황찬란한 왕의 안장을 지운 백마를 탈 수도 있었고,  유대의 열심당원과 독립운동가들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함과 정결함을 택하셨다.

둘째, 예수님은 참 평안과 해방을 갈망하는 순수한 군중과 공감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사기 10:4, 삼하 19:26에 보면, 나귀는 평화와 겸손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입성하시는  또 하나의 연유가 있었다. 그것은 군중의 뜻을 공감하고 그들의 눈 높이에 맞추시려 한 것이다. 그리고 순순한 사람들과 함께 했으며,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 처지와 그들의 생각에 공감하려 하신 것이다. 요 10:11 이하에  예수께서 선한 목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4,15).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27) . 눅19: 41,42에 있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 때 성 가까이 오셨을 때 하신 말씀을 보면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주께서 얼마나 그 무리 속에 마음을 같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로마의 하수인이라 치하는 세리인 마태도 있었고, 자기 생명을 나라를 위해 바치기 위해 가슴에 비수를 소지하고 다니는 열심당원 시몬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제자들을  함께 포용하며 주의 공생애 사역을 하셨다.

셋째,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맞이한 무리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순수함을 지녔고, 자기 가진 것을 사심없이 예수님 내놓을 수 있는 소박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 당시 옷감이라는 것은 귀한 것인데 그것을 예수님의 오시는 길에 펼쳤던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할 때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환영하던 대부분의 군중이 5일이 지나 마음이 변해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으라고 외쳤다고 설교한다. 그런데 오늘 분문 이후의 말씀을 보면 많은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때와 성전안에서 행사 때 호산나를 외쳐 댔다고 나와 있다. 이 무리들은 바로 어린 자녀들 과도 함께한 무리였음을 알 수 있다. 주의 입성에 함께한 무리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는 무리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자기 자녀들과 어린 아이들 앞에서 유대사람들에게 칭송 받는 민족의 선생을 침략군들에게 내어주고 그것도 침략국 로마에서 가장 극악한 죄인의 사형집행인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라고 외친 포악한 무리들과는 다른 군중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소수의 사악한 무리들이 자기의 유익을 쫓아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행렬에 참여 했다가 자기들의 목적을 이룰 수 없어 변절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란 우리 예수님 같은 겸손하고 평안을 이루는 왕을 모시는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예수님을 순수하고 소박하게 맞이했던 사람들, 예수님의 슬픔의 길을 비통에 젖어 따라가는 그런 사람들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하늘나라의 백성들인 것이다. 겸손하며 순수하며 소박한 꿈과 이상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이세상에서부터 조금씩 이루어 가는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April 3, 2022

본문: 

이사야53:7-12,

마태복음5:43-48

무저항의 그리스도인

서론오늘은 사순절의 5번째 주입니다. 다음 주는 종려 주일이어서 사실상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깊히 새기며 지내는 마지막 주일 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을 담당하기 위해 수난을 당하시는 사역의 모습을 상고하려 합니다. 본문 서두에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의 모습과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의 무저항적 모습으로 주의 고난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양은 선한것이 그 성품의 특성입니다. 양은 거칠게 다루어도 큰 반항을 하지 않습니다. 메시야를 양에 비유하는 것은 주의 메시야 사명 수행이 결코 폭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나타냄니다. 비 폭력 무저항의 침묵으로 그의 사역을 수행합니다. 이 두가지 면의 수난 속 그리스도의 표현은 하나는 그 마음을, 하나는 그 행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속의 예언된 고난을 당하신 메시야의 모습 속에서 어떤 은혜를 우리가 깨닫고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첫째, 그리스도의 침묵 이유는 아버지로 부터 위임 받은 사역의 완수를 위함입니다. 본문7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말하기를 “겸손함과 침묵이 신자의 미덕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말이모두에게 다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해당되는  부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억눌리고 약한 자를 말하고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삶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분이 가끔이야기 하기를 저의 설교가 좀 어렵다고 알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저의 표현력이 부족해서 그런것 같습니다. 조금 집중하며 생각해보면, 우리의 사회엔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사회 인도자와 지도자는 겸손함과 침묵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권력을 함부로 자기를 휘두르고, 참지 못해 아무말이나 사용하면 우리는 그를 부족한 지도자라고 합니다.

어떤 농부와 아들이 추수때가 가까워지자 같이 밀 밭에 나갔습니다. 바람에 물결치는 것 처럼 보이는 황금 들력을 바라보다가 아들이 곡식 벼들을 자시히 보며 말하기를 “아버지, 밀 벼가 바람에 흔들리다가 다시 곧곧히 일어서는 것은 건강해 보여 참 보기가 좋군요. 그런데 바람에 구부러졌다가 금방 일어서지 못하고 고개를 제대로 들지못하는 밀벼는 참 약해보이는 군요.” 그러자 아버지는 그 두 가지의 밀 벼를 끊어다가 손바닥에 비벼서보여 주었다. 고개를 빳빳하게 처들고 있던 이삭 속에는 곡삭 낟알이 많이 들어 있지 않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이삭속에는 황금 낟알이 가득히 차 있었다.  우리 말에 “읶은 곡식일수록 고개를 숙인다”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기가 신앙의 연륜이 깊어 갈수록 우리는 오늘 본문의 그리스도의 수난 속 모습을 되새겨야 합니다.

둘째 인내의 모범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벧전2:19-21”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 삶속에서는 때때로 우리가 상상하지 감당하기 힘든 시련들이 닥쳐 옵니다. 우리를 세계사 속에서 ‘무저항 주의’를 외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세상의 그 어떤 위인보다 무저항 주의를 실천하신 우리주 그리스도 예수심니다.

셋째,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 위해 그분은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창세기의 요셉의 모습을 보십시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통과 시련을 견디며 인내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사실 많은 신학자들이 요셉을 예수님과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은 30냥에 팔린 것, 고난속에서도 묵묵히 견디며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 등입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그가 어려운일을 당하고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도 실망이 컷다라는 부분은 찾아볼 수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나라의 국기에도 상징으로 새기는  다윗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했습니다. 삼상24장에 보면 사울이 군사 3000을 거느리고 다윗을 잡으려 다니다가 하필이면 다윗이 쉬고있는 굴에 들어와 피곤하여 잠이들었다. 6절에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아마도 후대에 도 그를 위대한 왕이라 칭하고, 우리 성도는 그를 위대한 신앙의 스승이라 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인생에서 한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오지 않는다고 가르침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그렇게 살 필요는 없다. 오히려 긍휼과 침묵을 지키는 것이 주님 앞에서는 목이됩니다.

결론: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고 통에 직면 합니다. 고난을 대하는 모든 사람의 태도는 각각 다를 수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모를 정도로 억울하고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당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한 고난을 내가 꼭 당해야 하는가? 구세주 이시며 완신완인이신 주님처럼 우리가 인내하며 침묵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핏값으로 얻어진 주의 자녀이며,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친구라고 부르시지 않습니까? 또한 그분의 제자라고 불리우는 우리도 있구요. 이런 깊은 연관이 있는데 좀 그분의 고난속 모습을 조금씩 따라해 보는 것이 구속함을 얻은자의 도리가 아닐까요? 우리 성도 중에도 짧지않은 삶을 살면서 그때는 도저히 감당할 수 고통의 신음만하며 모진 세월을 견디어 낸이도 있습니다.

March 27, 2022

선한 힘을 가진 성도

서론방금 우리가 드린 찬양은 탁월한 신학자이면서 예언자적인 시인의 감성을 가진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님이 쓴 시에 지크프리트 피에츠(Siegfried Fietz)가 곡을 붙인 노래 입니다. 본회퍼 목사님이 나치제국의 독재자 히틀러에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테겔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타자로 시를 썼습니다. 모두 7절로 돼 있는데.  글을 쓴 날짜는 1944년 12월 19일, 표제에는 "1945년 신년"이라고 쓰여 있다. 다가올 새해를 생각하며 주님을 신뢰하며 쓴 이 시는. ‘Von guten Machten’ 제목의 시이며 본회퍼 목사의 옥중 유고중의 하나입니다, 사형당한 그해 새해에 어머니와 그의 약혼녀에게 바친 그의 마지막 글이자 시입니다. 이 시는 독일 교회에서 매우 사랑받는 시이며 찬송가입니다. 우리말 가사에는  4절까지만 되어 있지만, 그 전문을 잠시 보면,

"선한 능력에 언제나 고요하게 둘러쌓여서, 보호받고 위로받는 이 놀라움 속에 여러분과 함께 오늘을 살기 원하고 그리고 여러분들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기 원합니다.

옛 것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어두운 날들의 무거운 짐은 여전히 우리를 누르지만, 오 주님, 내몰려 버린 우리의 영혼에게 주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주옵소서!

주님께서 쓰라리고 무거운 고통의 잔을 가득 채워 저희에게 주셨으므로 저희는 그 잔을 주님의 선하고 사랑스런 손으로부터 떨림없이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이 세상에서 기쁨과 빛나는 햇빛을 주기 원하십니다.그러기에 저희는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며 저희의 생명을 온전히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어두움을 밝히신 촛불은 오늘도 밝고 따뜻하게 타오르게 해 주십시오,우리가 다시 하나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는 압니다, 당신의 빛이 밤을 비추고 있음을.

이제 저희 주변 깊은 곳에 고요가 편만할 때, 저희 주변을 보이지 않게 에워싼 세상에 온전히 울려 퍼지는 소리를 저희들로 하여금 듣게 하옵소서.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소리 높여 부르는 찬양을.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의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낭독한 본문은 사도 바울이 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며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본문 전  3장 서두에서는 19가지의 타락한 신자의 죄의 목록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가지는 죄, 사람에게 가지는 죄 하나님께 대한 죄로 분류되어있다. 오늘 본문은 앞의 죄와 대조적으로 참 선한 주의 일꾼의 행할 바를 가르친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어떤 하나님께로 오는  어떤 선한 선한 힘을 가져야 할까요?

첫째,  선한 능력을 가진 성도는 마음에 선한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를 받으면 선한 힘이 항상 그대로 유지되는 것으로 착각하여 자기 마음과 생각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선과 악의 모습이 시시각각으로 나온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이 주시는 선으로 채워 나가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금방 악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마태 12:35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둘째, 선한 힘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의 눈이 선하다.

잠22:9“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L.A.에 사는  클라크라는 한 미국 부인의 간증을 읽어 본 일이 있습니다. 그 부인은 농장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가을철 추수 때가 되어 감자를 거두어 들 여야 했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 그의 능력으로는 그것을 다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딸에게 임금을 줄 터이니 감자를 거두어 들이자고 해서, 그 딸은 땀을 흘리고 애를 써서 감자를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만족감과 감자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한 가지 불평이 생겼습니다. 아버지께서 겨울에 자기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자기가 애써 거둬들인 감자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클라크는 그 감자가 너무도 아까웠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수고한 감자를 아낌없이 주는 아버지가 서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버지에게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얘야, 감자라는 것은 나누어주어야만 우리에게 남는 법이란다. 나누어주지 않으면 남은 감자가 썩어 버린단다." 그러나 클라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해 봄까지 감자가 썩지 않고 남아 있던 집은 클라크네 집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웃집들은 감자를 나누어주지 않고 그대로 쌓아 두었기 때문에 썩어서 남도 못 주고 자기도 못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클라크네 집은 남을 나누어주어 서로가 정답게 나누어 먹었고 자기네 집의 것도 썩지 않아 봄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움켜쥐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나누어 줄 때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잠19:17절에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후하시고, 부하시며, 모든 능력이 있으십니다. 이런 분이 갚아주면 얼마나 더 유익이 되겠습니까?

선한 눈은 남의 필요를 알아채고 도와주려는 마음을 가진 눈입니다. 자기가 먹을 양식을 지금 양식이 떨어진 사람을 보고서 나누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남의 필요에 선하게 반응하는 눈이 복을 받는 것이지요. 필요를 알아채고도 선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반응하고 선하게 반응하고 순종으로 반응해야 복이 되는 것이지요. 사람은 반응을 잘해야 합니다. 특히 믿음에 반응을 잘해야 복을 받습니다. 예화) 나의 소년기 큰영향을 준 은사

셋째, 그 사람의 말에 선한 힘이 있습니다. 마12:34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그 사람이 하는 말에 따라 우리는 쉽게 그 사람의 악함과 선한 면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결론: 아무리 신실한 사람에게도 선과 악은 종이 한장 차이다. 우리는 늘 말씀으로 무장해 가지 않으면 어제가 내가  오늘의 나와 같음을 보장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을 통해서 선한 교훈,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받자.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되자.

March 20, 2022

본문: 

시편119: 65-72 , 요한복음 15:18-23

고난의 중심에서 (In the middle of tribulations)

서론시편 119편은 22  소절(Paragraphs)로 이루어져 있다. 히브리어 알파벹이 모두 22개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각 소절 앞의  단어가 각 알파벹의 순서에 의해 시작하는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119편은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을 신기하게도 22개의 다른 단어로 표현되어 있다. 예를 들어 1절에 ‘여호와의 법’으로 시작하여,  여호와의 증거, 주의 도, 주의 법도, 율례, 계명, 의로운 판단, 말씀, 입의 규례, 증거의 도, 기이한 법, 규례, 율례의 도, 진리의 말씀, 율법,옛 규례, 의로운 규례, 입의 법, 판단, 입의 증거, 말씀의 강령등이다. 이런 오묘하고 다양한 수 십가지의  주의 말씀과 계명을 따르다 보면  명철과 지혜과 주어지지만, 우리에게 피할 수없는 것은 우리에게 닥처오는 고난, 시련이다. 오늘 본문에서 고난을 통해 더 놀라운 은혜와 지혜를 장착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두 가지 교훈이 있다. 첫 번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준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라고 하셨다. 구원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었다. 그래서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배척하고, 그리스도인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찾아온다. 고난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된 자, 즉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을 자임을 증거해 준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소망을 버리고 하늘의 소망을 더 키워 가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의 개혁 이후 구원받은 사람들을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렀다. 프로테스탄트란 ‘반역자’란 의미다. 죽은 물고기는 물살대로 떠내려가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거센 물살을 거스르고 올라가며 그 속에서 힘을 얻고 생명을 번성케 한다. 우리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오면 우리가 죄악을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죄악과 형편을 거스르며 이 땅에 하나님의 생명을 번성케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거스름이 고난이다. 롬 8:18,20,21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고난이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 힘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다. 옥합이 깨어질 때 향기가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과 내 계획을 깨뜨릴 때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순수함과 지혜와 거룩함이 나타난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지 않음으로 인해 엄청난 고난을 맞았다. 왕이 그들을 풀무 불 속에 던져넣었다. 그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결박한 세 사람을 던졌는데, 불 속에서 결박되지 않은 네 사람이 자유롭게 다니고 있었다. 느부갓네살은 너무 놀라서 하나님 앞에 굴복했다. 곧 세 사람을 불에서 나오라고 했다. 극렬한 불은 세 사람을 태울 수 없었고, 오직 그들을 결박한 줄을 태울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결박에서 벗어나 자유할 수 있었고, 불 가운데서 그들을 능히 지키시는 하나님의 천사와 동행했다. 그처럼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 앞에 분명히 나타났다. 이처럼 고난은 욕망의 줄을 끊어 주며, 나의 아집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해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한다. 이제 우리는 이런 고난 속에서 어떤 마음의 자세를 취해야 하며, 어떤 행실을 보여야 할까요?

첫째, 주의 말씀을 대하기를 힘쓰라(65,66절). 고난이 극에 달하면 대부분 기도가 잘 나오지 않는다. 우린 너무 힘들면 그냥 “주여 어찌하면 좋습니까?” 단지 탄식하며 절규하기만 합니다. 이럴때는 무조건 주의 말씀을 대하여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성경을 꼭 읽지 않아도 인테넷에 성경 말씀을 입체적으로 낭독해주는 곳이 많다. 그런데 말씀을 너무 듣는데만 치중하지 말고 묵상하고 기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필사나 경건의 시간을 통해 말씀을 음미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고난과 속박에서 벗어 나십시오. 요8:32절을 우린 너무 잘 압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헬라어 ‘엘류데로오’는  "자유롭게하다, 해방하다, 면제하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이 진리는 자유 하게 하며이 올무에서 벗어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앞절에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거한다’는 의미의 ‘메이네테’는 "거하면, 거주하면, 함께 살면"이란 뜻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은 분리될 수 없으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곳 그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이다.

둘째, 고난의 이유야 어떻는 다른이를 원망, 비판하지 말고 그 고난에 함께한 모든 사람이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감싸 안으세요.(68절) 요일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세상은 그들과 다른 우리를 미워하게 된다고 오늘 우리가 낭독한 예수님의 말씀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가 함께 고난 속에서 견디고 위로하고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만드세요. 예화) Pizza delivery single mom.

셋째, 그 고난을 쉽게 속히 벗어나는 법을 택하지 말고, 멀고 힘들지만 주의 말씀에 부합하는 길을 선택하세요.(69,70절) 본문 말씀에 주의 말씀에 떠난자의 마음을 살찌고 지방(grease) 같다고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세상의 법과 형태는 육신이 살찌고 배부른 길을 선택하고, 기름처럼 미끄러져 자기만 요리저리 빠져나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결론: 우리는 지금 세상의 미래를 알수 없는 어두운 밤의 경점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지난 주가 토로나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퍼진지 2년째 되는 주였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세계가 초긴장 속에 빠져 있는데, 지난 16일 일본에선 7.3도의 강진이 발생해 90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피해가 적지 않다. 환난의 중심에 서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이를 대처하며 고난을 해쳐 나갈 것인가요?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주의 말씀과 주님이 친히 가르치신 형제 자매의 사랑과 고난을 내게 유익으로 삼는 신앙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자.

March 13, 2022

 고난의 여정

서론우리가 지내는 사순절이 실제는 46일 동안 지내는 절기이다. 사순절이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하고 40일 말한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6번의 주일을 보냄니다. 7번째 주일이 부활절이다. 우리는 오늘 잠시  사순절을 이렇게 길게 잡아 지키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에게 삶이란 고난의 여정이라는 점을 잊어서도 않됩니다. 많은 성도들이 적어도 초창기에는 예수를 믿으면 기쁘고 즐거운 일만 계속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면 그리스도도인 삶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가수  Sandy Patty가 1989년 불러 발표했던 노래 ‘The Via Dolorosa’ 노래를 아실 것입니다.  이 제목은 원래 라틴어 말인데 "Sorrowful Way",  "Way of Suffering"란 의미이다. 우리말로, “슬픔의 길”, “눈물의 길”이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길은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의 길, 그리고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노래의 가사를 잠시 소개해 보면,

“그날 예루살렘의 고난의 길을 따라서...군인들은 좁은 길을 통제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갈보리에서 죽기로 정죄된 한 남자를 보겠다고 밀어댔죠. 그분은 매를 맞아 피를 흘리고 계셨어요. 그분의 등에는 채찍자국이 있었죠. 그분은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계셨죠. 그분은 한걸음 한걸음 그분의 죽음을 외치는 이들의 조롱을 참아내셨죠. 고난의 길이라 불리는 비아 돌로로사를 따라서...어린 양 처럼 오신 메시야, 왕 되신 그리스도. 하지만 여러분과 절 위한 사랑으로 그 길을 걷기로 선택하셨죠. 갈보리를 향하는 고난의 길을 따라서.. 모든 이의 영혼을 깨끗케 할 그 피가 예루살렘의 심장을 향하는 길을 만들어냈죠”

사실, 성경 속에서 자세히 보면 주님의 고난의 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감행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의 책임을 축소해 보려고 그당시 앞제 자였던 로마 군인들의 행동응 더 조명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가장 미워했던 사람도 유대 종교 지도자이고 그들의 명을 받은 유대 병정이 직접 체포해서 심문하고 정죄하고 로마군에게 넘긴 것입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된 것도 유대인 그들인 것이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공관복음서 모두에 유사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서에 만 나오는 표현은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는 부분이다. 오늘 저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흘려 기도하시며 온세상의 죄를 감당하고 큰 고통 앞박 중에도 고난의 길을 결심하신 주님의 기도를 살펴보며,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고난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또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의 삶을 어떻게 해쳐나갈 것인지를 상고하여 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 성도의 길은 기쁨의 순간보다 고난고난의 시간이 더 길다는 것이다. 우리가 공관 복음서의 주님의 수난을 언급한 기사가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마태복음서에는 겟세마네 동산부터 시작한 주의 고난이 107절, 마가 복음에는118절, 104절을 할애하여 언급하고 있다. 주께서 마지막 고난 주에 당하신 기사만 이정도인데 그분의 33년 삶속에서는 얼마나 많았을까? 조금 우스운 이야기로 요즈음 한국에서 ‘황제 군 복무’ ‘황제 직장 근무’ 란 유행하다. 어떤 법률가 출신 목사님이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실 때 어떤 죄인의 사형 집행이든 짧은 고통중에 죽으셔도 공의적 입장에선 하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만왕의 왕된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외의 고통도 오래동안 견디시며 그것을 다 감당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감당하신 긴 고난의 이런 사실을 보면 우리 성도의 긴 고난의 여정도 우리에게는 터다란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사야 53:3-5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둘째,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이 대부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오는 경우가 많다. 오는 본문 바로 전에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기사중 내용중 3가지가 있습니다.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암시하는 것과 제자들이 예수 앞에서 누가 크내고 다투는 것과 베드로의 예수 부인에 대한 예언입니다. 우리 성도에게 찾아오는 고난이 나와 밀접한 곳에서 나와 가까왔던 사람으로 부터 온다는 사실이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합니다. 육체적 고통도 견디기 힘들지만 정신적인 고통과 상처는 더 오래 가며 치유되기 힘듬니다. 자기 제자인 유대의 배반과 수제자인 베드로 자기 선생 부인을 미리 아신 예수님의 고통은 어떠했을까요? 사 53:6 -8“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끝으로, 우리가 드리는 기도도 기쁨 속에 드리는 기도보다 고통 속에 드리는 기도가 더 많다는 것이다. 기도가 감사와 기쁨속에 드리기도 하지만, 저마다 고통을 가슴깊이 안고 애통하며 우리는 기도를 많이 드림니다. 자기 자신보다 소중한 자기자녀의 질병과 고통을 위해 쓰라린 마음으로 기도드림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서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 하심니다. 고린도후서 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결론: 어떤 성도는사순절에 46일 동안 그리스도의 그 고난 만 생각하는 것이 너무 길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우리 인생은 기쁨은 잠시고 그 대부분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며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통속에서 인생을 배우고 고난과 시련속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시련을 함께한 신앙의 동지들을 얻을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저 하늘에서 영원이 함께할 친구입니다.

March 6, 2022

본문: 

이사야 43:1-7,

요한복음 15:9-12

우리를 잘 아시는 주님

서론지난 수요일 부터 올해의 사순절 기간이 시작됬습니다. 우리 신교(Protestant)는 지난 주의 ‘Ash Wednesday’를 그렇게 중요하게 지키지 않지만 Catholic에는 중요한 교회적 행사로 여깁니다. 성도들이 이날에 교회에 가서 사제들로 부터 이마에 십자가 모양의 재를 그려 받습니다. 이 재는 지난 해 종려주일에 썻던 종려 나무 가지를 태워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재의  수요일’이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 모든 죄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우리몸에 재를 뿌리고 하는 회개 예식의 일부를 뜻합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 기간 동안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를 기리고 자신을 돌아 보며 진정한 회개를 의미를 되새기며 늘 겸허하게 우리 자신을 가다듬습니다. 오늘 사순절 첫번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를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시고 자기몸을 버리시고 십자가 길을 것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 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 문장들 속에서 가득히 넘치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낌니다.

지금부터 30여년 전인 1994년 80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신  현신애 권사님이란 분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분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 분은 한국 교회의 현대사에 여성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중에 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한국 교계에서 많은 분들이 한국교회 신유 은사가로 유명한 이분의 신비주의적 목회 활동때문에 이의를 재기 하기도 하지만, 80-90년대  한국 부흥사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 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원래 병이 많으셨던 분인데 이병에 시달리다 갑자기 숨을 거두고 영혼이 천국에 갔었다고 합니다. 가서보니 자신은 수많은 환자들을 고쳐주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다가 갔으므로 자신의 집이 크게 지어져 있을 줄 알았는데 보잘것 없는 초라한 집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기를 모르느냐고 물어보았다. 예수님은 모른다고 하였다. 자신이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신실하게 잘 섬기고, 병고치는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을 고쳐주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왜 예수님께서 저를 모르십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내 능력을 가지고 네 장사를 하였지 언제 나에게 영광을 돌리고 나의 일을 하였느냐고 반문하시면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수많은 병자를 고치신 것은 주님만을 바라보며 사는 그들을  내가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고치셨다고 한다. 너무나 놀라서 한번만 회개할 기회를 달라고 예수님께 사정을 하여 허락을 받아 되살아나게 되었다. 마침 시신은 칠성판에 뉘워둔 채로 미국에 살던 아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입관을 미루고 있었다고 한다. 살아나서는 그동안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헌금한 것을 모아둔 것이 수십 억이 있었는데 그것을 전액 북한 선교원에 헌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그 후의 모든 집회에서 시종일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말을 했고 자신은 낮추었다. 치료는 예수께서 하시는 일임을 누누이 강조했다. 따라서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을 의지하라는 권고를 많이 했다. 기도 받을 때도 자신의 몸을 붙잡으려고 하지 말고 편안한 자세로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할 것을 그녀는 가르치고 또 주의 사랑을 가르쳤다.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이비성 신유은사자들과는 유를 달리했다. 예수께서 그 권사님께 가르치신 우리를 향한 사랑을 이 사순절 첫째주에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실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분은 우리를 친히 창조하시고 조성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 이심니다. 하나님을 나를 많이 사랑한다는 알아가는 것이 우리성도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기본 줄기이다. 하나님을 우리를 통해 사업을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사랑의 관계 유지하며 그 속에서 속에서 우리의 풍성케 하시려는 것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이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 요 10:10의 말씀이 그 뜻이다.

둘째,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 어떤 고통중에도 함께하신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국의 한 유명한 방송인이 “자신은 늘 내가 지금 이순간 좀 운이 좋았을 뿐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 신앙인에게 운이란 말이 이상하지만 늘 이런 형태의 겸손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대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큰 환란을 만나도 어쩌나 자신의 잘못인지 아니면 사탄의 시험을 잠시 만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It will be we better” “곧 괞찬아 질거야”라는 마음으로 기도 가운데 시련들을 견디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셋째, 우리를 통하여 주의 복음을 전파하고 우리가 주님의 영광이 나타게 된다. (7절)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우리는 아버지의 영광이 되기위해 우리의 입술과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요즘 한국에서 대통령 선거 기간인데 기독교인들의 site 에 어떤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든 사실의 참과 거짓을 떠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성도들이 그런 비 생산적인 일에 몰두 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 사려 됩니다. 글은 곧 그 사람의 마음과 삶의 표현이라고 어떤분이 말씀했다. 잠언 15:1,2,4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온량한 혀는 곧 생명 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조선시대에 유명한 제상이었던 '황희 정승'에게 어느 날 하인이 찾아와  다른 하인과 다투었다 면서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황희 정승은 그 이야기를 다 듣고서는 '네가 옳다'고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하인은 의기양양하게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와 다툰 다른 하인이 황희 정승을 찾아와 자신이 옳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정승은 그에게도 '네가 옳다'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 하인도 의기양양하게 돌아갔습니다.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부인이 황희 정승에게 따졌습니다. "아니 둘 중에 하나가 그르거나 옳은 것 같은데, 대감은 왜 줏대도 없이 둘 다 옳다고 하십니까?" 그러자 황희 정승은 '부인 말도 옳으이'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말이란 사람을 찌르는 무기도 될 수 있고, 치료하는 약도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말을 함부로 하면 무기가 되어서 상대편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말을 겸손하게 사용하면 상처난 사람을 치료하는 약도 됩니다. 말로 입은 상처는 수술도 안되고 약도 없습니다. 속담에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황희 정승은 어떠한 사람에게도 상처주지 않고 용기를 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고, 품위이고, 신앙입니다. 엡4: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벤자민 볼름은 “언어 환경이 물질환경보다 중요하다”

삼상25장을 보면, 다윗의 군사들이 나발의 목자들을 보호해 주었는데, 다윗이 나발에게 군사들이 먹을 양식을 구하자 나발이 이를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군사를 동원하여 나발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 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남편을 대신하여 용서를 구했습니다. "나발은 미련한 사람이니 상관하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피를 흘리지 마십시오"하고 아비가일이 용서를 구했을 때, 다윗은 마음의 분노가 가라앉아 나발을 치지 않았습니다. 후에 남편 나발이 갑자기 죽어 아비가일이 과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용모가 단정하고 친절하고 말을 잘하는 지혜로운 여자인 아비가일을 불러오게 했고, 아비가일은 다윗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결론: 성경의 기자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세밀하고 감격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사람이 사도요한입니다. 요한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에서 ‘내 사랑’ ‘테 아가페 테 에메’는 ‘내것인 그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누구나 사랑한 것처럼 나도 어누누구나…

February 27, 2022

다시 세워지는 교회

서론지난 주 중에는 21세기의 또 하나의 세계적 사건에 발생했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입니다. 2020년 시작과 함께 온 세계를 긴장시키며 퍼지기 시작한 COVID-19 감염병은 역사유래 찾아 보기 힘들게 온세계에 퍼져 이번주 현재 4억 5000만명을 감염시켰고, 600만명 가까이 사망자를 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 만 해도 8천만명의 누적 감염자가 생겼고, 98만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런 대역병이 수그러들자 이제는 큰 전쟁의 소식이 우리에게 들려 옴니다. 마가 13:7,8 말씀에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예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21세기 최 첨단 과학 문명의 시대,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중요시한다는 지금 세계에서 서로를 죽이는 큰 전쟁이  발발되었다는 사실은 참 충격적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예언하신 말씀이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극작가 ‘장 콕토’가 세상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당신의 집에 불이 났다면 당신은 먼저 무엇을 갖고 나오겠는가?” 사람들의 대답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그야 말할 것도 없이 귀중품부터 챙겨야지” 그러면서 어떤 사람은 현금이 우선이다. 어떤 사람은 보석이 먼저다. 또 어떤 사람은 땅문서를 가지고 와야지.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각기 다른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장 콕토 자신의 대답은 아주 특이했습니다. “나는 불을 갖고 나오겠소.” 그 말의 의미는 불을 갖고 나와야 불을 끌 수 있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도전적인 불의 열정을 갖고 나오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불 속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불의 열정만 건진다면 잃은 것의 전부보다 더 큰 것을 얻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서 극히 작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하박국서는 매우 짧지만,  이 책은 그 어느 성경에 못지않게 깊고 심오한 교훈과 영적 생동감을 우리에게 안겨 줍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서를 일명 구약의 로마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많이 부르는 가스펠 송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2:14)”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박국서는 전체 3장으로 되어 있는데, 각장마다 독특한 색깔이 있습니다. 1장을 보면 하바국 선지자의 가슴은 냉랭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슴 속에는 원망과 불평이 가득했습니다. 1장을 보면 ‘어찌하여’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1:2,3, 12-17).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2:20).”

그런데 3장의 하박국 선지자의 모습은 1장과 전혀 다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자 하바국 선지자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의 가슴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 하나님의 불이 붙으니 원망이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불평이 찬양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의와 반항이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그의 가슴에 불이 얼마나 크게 붙었든지 하바국 자신도 놀라 충격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기오놋에 맞추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의 마음에 불길이 타오르자 꿈을 잃고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2).”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 성령의 불길이 타올라 우리 세대에 심령의 부흥이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박국 처럼 절망과 고통을 뛰어 넘어 성령의 임재를 느끼며 마음에 불길이 타오를 수 있을까요?

먼저, 감사가 넘치며 찬송이 입술에서 가득합니다. 1장은 하박국 선지자의 탄식과 절규, 그리고 불평과 의심의 회색칼라입니다. 반면에 3장에는 탄식과 절규의 모습이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찬양과 감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시기오놋’라는 단어는 악기 중에 하나인 ‘수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고, 악기가 아니라 ‘심오하고 격렬한 느낌을 나타내는 곡조’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찬양과 관계된 그 무엇이라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19절에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3장은 찬양이되 빠른 곡조의 찬양입니다. 들으면 절로 어깨춤이 덩실덩실 나오는 빠른 곡조의 음률입니다. 1장에서 의기소침해 있던 그가 3장에 와서는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흥겨움에 겨워 춤을 추며 찬양했습니다. 불만과 불평을 쏟아내던 그 입에서 찬송과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3절에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데만에서 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도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오신다는 단어가 2번 나옵니다. 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데만에서 나오시고 바란 산에서 나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데만’과 ‘바란 산’은 시내 산 가까운 지역들로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를 상기시키는 지명들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부흥’이란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신다’고 했습니다

둘째, 모든 일에 내가 아닌 주게서 내자신을 주관하도록 하는 것이다. 본문 3장 전체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주께서’입니다. 주께서 말을 타시며(8).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살을 발하셨고. 주께서 하수들로 땅을 쪼개셨고(9). 주께서 노를 발하시고(12).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13).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고(14). 주께서 말을 타시고(15). 이와 같이 3장은 ‘주께서’ 하신다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주무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외면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잠잠하고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동서남북, 원근, 고저, 산하 곳곳에서 일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이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셨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산들도 주님을 보고 흔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다가 손을 높이 들고 항복하는 것을 목도했습니다(10절). 하늘의 해와 달들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서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11절). 이러한 하나님을 뵙는 순간 하박국 자신 또한 창자가 흔들렸고,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16절).

하박국이 살았던 시대는 강포와 간악과 패역과 겁탈과 변론과 분쟁 등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은 상태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거기에다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성전이 언제 파괴될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조국이 망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는 현실을 목도하는 순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그는 하루 속히 부흥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부흥에 대한 소망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는지 그는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미국의 그랙 로리 목사님의 주장에 의하면, 교회에서 성도들이 가장 전도를 많이 할때가 주 안에서 거듭난지 2,3년 될 때라고 합니다.

지금의 교회가 내적으로는 실용주의와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안일주의가 교회에 들어오면서부터 교회는 제 기능을 상실하고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론조사 기관 한국갤럽의 조사 결과 2014년 한국의 개신교 분포가 21%, 천주교 7% 였고, 불교가 22% 였고, 무종교가 50% 였다. 그런데 2021년개신교 인구는 17%인 것으로 나타났다. 불교 인구는 16%, 가톨릭 인구는 6%로 집계됐다. 무종교인은 60%로, 한국갤럽이 조사한 이래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당시 나타난 19.7%와 비교해도 3%가량 줄었다.

교인들의 종교 활동은 2014년에 비해 눈에 띄게 감소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종교 행사 참석 인원 제한 등 방역 조치가 이뤄진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교회를 찾는다는 개신교인은 57%로, 2014년 조사 당시 80%를 기록한 데 비해 23% 감소했다. 가톨릭 교인의 종교 활동도 2014년 59%에서 2021년 42%로 다소 감소했다. 개인 경건 생활도 감소했다. 매주 1회 이상 성경을 읽는다는 개신교인은 42%로 2014년 조사 당시 56%에 비해 14% 줄었다. 매일 1회 이상 기도한다는 개신교인은 37%로, 52%로 나타난 2014년에 비해 15% 감소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 한국에서 교회에서 부흥회 광고 벽보를 보면  ‘심령 대 부흥회’라고 쓰여 있습니다. 부흥이란 하나님의 교회가 생명의 능력이 약화되어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침체되어 있을 때 회생시키는 심령을 새롭게하는 운동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소생시키고 회복시키며 촉진시키는 하나님의 운동입니다. 죄인들에게는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에게는 변화와 풍성한 삶을 의미합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회복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의와 진리와 거룩과 사랑입니다(레11:45,46,엡4:24,요일4:16). 그리고 인간은 사명을 가진 존재입니다(창1:28). 이처럼 부흥은 하나님이 본래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과 사명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 가정에 두신 사명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부흥이란 교회에 두신 본래 사명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February 20, 2022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자

서론지금부터 20년 전인 2002년에  그 당시 복음송 가수였던  Michael Card에 쓰여젔던 ‘Scribbling in the Sand( 땅에 쓴 글씨)’ 책이 있었다. 이책은 많은 그리스도 인들에게 감명을 주었는데, 그가 쓴 노랫말 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그의 영감의 근원, 즉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 예수 안의 창조성이다. 이 책에서 마이클 카드는 성경적인 토대 위에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창조성의 의미를 찾는다. 우리가 스스로를 창조적이라 여기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 모두는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창조성은 제자도의 중요한 표현이다.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델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성을 아는 지식이 어떻게 겸손과 순종의 생활 양식과 연결되는지 보여 주고, 우리에게 예배와 공동체를 통해 창조성의 소명을 받아들이도록 도전한다. 우리에게는 Amy Grant가 불러 유명한 찬양  "El Shaddai"의 작곡자이기도 하다. 그가 이책을 토대로 작곡하여 부른 ‘땅의 쓰신 글씨’ 노래의 우리말 가사를 잠시 적어보면 “폭도들 한가운데 겁에 질린 여인이 홀로 서 있네. 돌에 맞아 마땅하다 성난 외침 들리나 주님 곁엔 소리 없는 넉넉한 사랑만이 흘러 넘쳤네. 참으로 영광스런 가르침을 행하시다 자기 의를 과시하는 경멸과 분노 앞에 마주하셨네. 몸을 굽히시사 태풍의 눈처럼 고요를 만드시며 음흉한 요구에 말없이 대답하시네. 흙 위에 끄적이실 때, 순간 속에 영원한 삶이 있네. 그것은 침묵, 그것은 음악, 그것은 예술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 몸을 굽히사 한마디 말씀도 없이 거대한 울림을 이루셨네. 십계명을 새기신 그 위대한 손바로 그 손가락으로 흙 위에 끄적이시네.”되어있다. 우리가 잘아는 「예수님처럼」의 저자  맥스 루케이도는  "나는 마이클 카드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그와 함께 있노라면 늘 예수님이 생각난다. 마이클 카드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가장 탁월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이 외에도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떤 사회적 문제를 조명할 때  “누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라는 주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이신 예수 그리스의 마음을 발견하는데. 여기에서 특별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서두에서 “예수께서 감람산으로 가시다”는 그전날 밤이고 다음날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성전 뜰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다. 물론 성전 밖이지만 엄연히 이곳도 성스러운 곳이다. 밤에 기도하시고 성전에 들어오신  예수님 앞에 간음 현장에서 붇들린 여자를 데려와 문제를 야기하는 그들은 이미 거룩한 신을 섬기는 모습이 사라진 간사한 종교인의 모습이 되어 살기를 품은체 예수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레20:10, 신22:22의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통하면 남녀를 다 같이 처형하라.” 인용하며 힐책하였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살기기 등등하여 오히려 그들에 살인에 예수님을 끌어드리려 하는 것이다. 종교 지도자가 거만해지면 더 무서운 일을 저지른다는 말이 있다. 요즘 한국이나 미국에서 유행하는 국민적 주제가 하나 있는데 ‘패권주의(supremacy)’ 라는 것이다. 헬라어로 ἡγεμονία (헤게모니아), 영어로: hegemony 표현된다. 미국내에서 자신들이 세계 유일의 패권주의 국가가 즉,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이 자신이라 생각한다. 심각한 것은 기독교파들 중 자신들만이 보수적 복음주의, 복음주의 기독교 우파라고 주장하며 이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이들은 미국을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한 청교도들처럼 미국을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펼치기 위한 선택된 백성이라고 믿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들의 패권주의에 즉, 미국의 세계지배에 위협이 되는 반미주의적인 정치세력과 국가들은 폭력으로 짓밞아야 한다고 믿는 반(反)평화적인 기독교인들이 있다.

본문에서 땅에 쓰셨던 예수님은 왜 갑자기 땅에 무언가를 쓰셨으며, 주께서 땅에 쓰셨던 내용이 무엇이었을까? 신학자들의 견해를 살펴 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 성도에게 불의에 항거보다 중요한것은 자신을 돌아 보눈 것이다. 예수께서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를 쓰신 이유는 그들에게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자신들을 돌아볼 그시간들을 주시기 위함이다. 영국 격언에 침묵도 또한 답이다. 신학자 제롬은 이때 예수께서 땅에 쓰신 글이 율법 중에 돌로 쳐서 사람을 죽일 죄목이 아니었을까 추측하지만, 확실한것은 아니다. 그런데 몇 초서체 사본에 보면 “그 여자를 송사한 저들의 죄와 모든 남자의 죄” 말이 설명에 첨가 되 있다는 주장이 있다.

둘째, 격분한 마음을 가지고는 신앙적인 어떤 일도 재대로  할 수없다. 아무리 높은 지식을 가졌고, 현인이라도 그 속에  격분한 마음이 있으면 잘못된 말과 행동이 표출된다. 본문에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되어었는데 ‘죄없는 자’를 의미하는 ‘엔아마르테토스’ 이곳에 만 나타나는 단어로 “단지 죄를 범하지 않은 정도가 아닌 죄를 지을 욕망까지 없는 상태를 말한다고 Bernard 와Plummer 주장한다.

셋째,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보다 선행되는 것은 정죄하지 않는 것이다. 헬라어 본문에 ‘카타크리노’라고 표현 되어있는데 ‘정죄’라는 의미이다. ‘심판’을 의미하는 ‘크리노’ 조금 다른 의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직접 관련이 없는 타인의 잘 못을 보면 먼저 자신은 누군지 모르는 듯 정죄에 열정을 갖는다. 그에 대해 불쌍이 여기는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다.

결론: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이 회복하는 인간이 해야 할일은 하나님의 마음을 해아리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다해아릴 수 없다. 우리는 주님과 대화하며 주의 마음을 해아리는 것이 영적자녀로 우선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 한다. 우리 부모님에게 우리가 그 은혜를 다 해아릴 수도 보답할 수 없는데, 우리 주님의 뜻을 어찌 다해아리겠는가? 우선 우리가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마음을 조금 이해 할 수는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과 하신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은 애해할 수 있다.

February 13, 2022

본문: 

출애굽기 3:1-5, 에베소서4:1-6

주의 부르심에 합당한  삷

서론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할 때 쓰는 신앙적 단어 중 ‘소명(召命)’이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역자들이나 성도들이  “나는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것을 영어로 ‘call to order’ 즉, “생명을 드리도록 요구 한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다는 것은 내가 주를 위해 목슴까지도 드릴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소명을 생각할 때는 늘 겸허하며 두렵고 떨림의 자세로 임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김춘수라는 시인이 쓴 ‘꽃’이라는 시가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말로 시의 서두를 장식합니다. 이 시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시기 전에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다만 죽음 향해 치닫는 육체에 불가했다. 우리가 주 예수를 만난 후에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분으로 부터 소명을 맏는 대화의 인격체가 되었다. 이런 우리가 모인 이 교회를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이 의미도 “불러내심을 받은 무리”라는 뜻이다.

오늘 구약 성경 본문은 미디안 광야에서 평범한 인간이 되어 양을 치며 살던 80세의  모세가 호렙산 기슭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기사가 나온다. 저는 오늘 성도님들과 함께 모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기 전의 삶은 어떠했으며, 소명받을 때의 모습과 자세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그는 40년 전 에굽의 궁중에 있을 때는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는 아직 주께서 아직 그를 부르신 때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기 전에 자기가 그린 자신의 소명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자기가 애굽의 왕자로서 권좌에 있으면서 자기민족을 권력을 가지고 자기 민족의 영웅이 되어 자기 백성을 인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었다. 오늘날 많은 성도나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자신의 계획으로 주의 소명을 이루러 한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 모세는 부르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둘째, 그는 자신의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있었다. 본문 3: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모세는 그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둘보며 자기의 맞겨진 일에 충성되이 봉사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부르시는 사람은 자기에게 맞겨진 일의 낮고 높음, 귀천에 상관하지 않고 충실 임무를 다하는 사람이다. 꼭 그것이 교회의 일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라도 그 일을 충성되게 주님이 보고 계시다는 것으로 여기고 진실하고 근면되이 일하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남에게 보이려고만 일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어떤 기독교인은 “나는 받은 만큼만 일한다.”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다.

셋째, 하나님의 소명은 멸시받고 연약한 사람에게 찾아온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산이 호렙산인데 원래 히브리어로 호렙이라는 말은 ‘버려진’ ‘쓸모없는’ 이라는 뜻이다. 쓸모없는 버려진 광야와 산에도 하나님이 계시면 위대한 영광스러운 꼿이 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불은 크고 울창한 나무에 나타나지않았고 가시덤불에 나타났다. 본문의 떨기나무는 그 지역에서 ‘Seneh’ 불리는 일종의 아카시아 나무인데, 세상으로 부터 멸시받는 백성 이스라엘이 굴욕가운데 있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떨기나무의 불은 고통을 순화시키며 형벌을 없이하는 상징이라고 신학자 Keil과 Lange는 주장한다. 또한 불에도 나무가 타지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지시만 그의 자녀는 멸허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약자와 멸시받는 자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게 하시며 큰 일꾼으로 쓰신다.  잠29: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넷째, 하나님의 부르심은 겸손하고 정결한 사람에게 온다. 5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것은 ‘전능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다. 그당시 종은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맨발로 다녔다고 한다. 여화와께서 모세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의 과거의 더렵혀진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주의 거룩한 소명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40년 전의 애굽인 살인을 비롯하여 부정한 세상을 딛고 다녔던 그 신발을 벗으라는 것이다. 대게 많은 성도들이 주의 부르심을 받고도 세상의 잘못된 습관을유지하며. 자신의 악한 습성을 버리지 않는다. 교회에 나와서는 다른이에게 미움과 질시를 하기도 한다.

요한 12:1에 보면 예수께서 죽은지 4일이 지나서 살리신 나사로가 예수와 함께 앉은자 중에 있더라고 하십니다. 예수께 큰 이적과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다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처럼 큰 은혜를 예수께 받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나사로는 주님의 제자는 아니었다.요즘 같으면 아마도 큰 부흥사가 되었을 것이다. 대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 중 대분분이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함에 너무 감사해서 자기가 사역자와 헌신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부르심이 있어야 교회의 리더가 되고 사역자가 되는 것이다.

결론: 오늘 신약 본문 엡4:1-3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셨다. 또, 민수기 12:3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7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소명의 합당한 자세와 삶이란 겸손과 온유함이요, 인내와 사랑으로 다른이를 감싸안고 평안를 끼치는 사람이되자.

February 6, 2022

그리스도인의 최선의 삶

서론작년에 한국에서 개봉된  ‘최선의 삶’이란 영화가 있었다. 이영화는 임솔아라는 작가가 2015년에 쓴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이 소설의 줄가리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지만 우린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 어른이라 생각했던 고등학교 소녀들의 이야기다. 세상의 전부라고 느꼈던 친구들과 함께 모든 걸 차가운 길바닥에 내던질 수 있었던 무모한 그때. 소녀들은 나의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보통 우리 삶에서 ‘최선의 삶’이란 의미는 내게 주어진 환경속에서 그래도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해서 가는 길을 말한다. 그런데 본 소설에서 세 소녀는 자신들에 미래를 위한 최선이 아니라 지금 상항에서 임기 응변의 삶을 선택했다. 원어적 의미로 ‘최선의 삶’이란  한 개인에게 주어진 여건속에도 최고의 선택(Most potential life)을 하며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마치 최고의 선을 추구하는(Most Valuable Life)삶으로 만 생각한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미래 지향적 삶 즉, 최선의 삶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삶이 최선의 삶일까 상고하여 봅시다.

먼저, 최선의 삶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속에서 가장 소망이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먼저주신 권한은 다스림과 선택의 권한이었다. 그런데 인간은 미래의 소망이 아닌 현재의 즐거움을 선택했다.  선택한다는 것은 미래를 향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다음 시간, 다음 해 또는 그 너머를 살짝 엿보고 거기에 근거해 결정을 내린다는 뜻이다. 인도계 이민자 여성으로 선택 연구의 최고 권위자가 된 컬럼비아 대학교 쉬나 아이엔가 교수는 그녀의 자전적 심리 에세이 책에서, "선택은 우리가 삶을 만들어나가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선택하는 주체이며, 또한 선택에 의해 형성된다. 더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과학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선택의 핵심은 여전히 하나의 예술이다. 선택으로부터 최대한의 것을 얻어내려면 불확실성과 모순을 감수해야 한다."고 기록하였다. 우리 성도는 두번째 아담인 예수께서 가르치신 삶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사는 최선의 삶의 추구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도 큰 유익을 준다. 동물원에서 태어난 코끼리의 평균 수명은 17년밖에 되지 않는다. 야생 코끼리의 경우 평균 수명이 56세다. 동물원에서 온갖 물질적인 안락함을 제공하고, 서식처를 가능한한 자연 상태에 가깝게 만들어줘도 야생 때보다 1/3밖에 살지 못한다. 우리 성도가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 가장 미래적인 것을 지향하고 살아가는 순간에 우리의 육과 영이 더 건강해지는 것이다.

셋째, 때때로 가장 고상하고 최상의 삶만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많은 사역자들이 성도에게 율법에 근거하여 완벽한 삶을사 살라고 요구한다. 성도의 삶속에 만나는 환경에서 차선의 해결책을 요구할 때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완벽한 신앙의 선택만 하다가 오히려 상처만 받는 삶을 살 때가 있다.  흔한 예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가 있다.  사실 우리 성도들은 세상문화와 갈등속에서 갈등한다. 그런데 우리 한인 성도들은 확실한 그리스도인의 문화가 정립되어 있지 않다.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너무 고지식한 신앙만 고집하지 말고 미래적이며 긍정적 차선의 선택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성도로서 주안에서 살아야 하지 상고하여 봅시다.

우리 성도가 최선의 삶을 살기위해 세상에서 가장 명약인 구약과 신약을 사용해야 한다. 성경 속에 우리 주의 자녀들이 선택해야 할 수만가지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문건이 있다. 우리 성도가 뽑아들어야 주의 우리를 향한 미래적 문건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그 약속들을 하나님 앞에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큰환란을 만나 정말 기도할 힘도 없을 때는 먼저 하나님이 자기의 지금의 상황과 같은 자에게 무슨 말씀을 주셨나 한번 찾아보고 그 말씀을 근거로 제시하고 하나님을 회유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환란을 만나면 기도할 때 자꾸 주께 “ 하나님! 입장을 바꿔놓고!” 그렇게 외치는 가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지말고 모세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을 꼼작 못하게 해야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여호와께로 부터 십계명과 언약의 말씀을 받는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드어 숭배하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려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여호와께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고 설득하며 소위 요즘 속어로 여호와 하나님을 말씀으로 “들었다, 낫다” 하였다.

또한, 자기희생적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19-21에 부탁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19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10:23,24 “23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자.

마지막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위해 절제하며  내 자신을 쳐 주께 복종하는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 본문27절에서 원어에 ‘휘포피아죠’란 말은 고대에 노예가 말을 않들을 때 채찍으로 때려  넙죽 땅바닥에 엎드려 지도록 까지 거칠게 학대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의 최선의 삶은 때론 그리스도를 위해 가장 비참하게 낮아 질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소망 가은데 최선의 선택의 삶을 살아야 한다.

결론: 이번 주부터 북경에서 동계 올림이 시작되었어요. 참가한 선수들은 상을 얻기위해 그동안 고통을 참으며 훈련했고, 이제는 달려야 하며 싸워야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최선의 삶은 우리가 가진 소망과 미래의 구원을 위해 오늘 더 단련해야하며 주님이 부름시는 부르심의 상인 면류관을 위해 확실한 방향을 가지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딤후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의로우신 재판장인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정상참작’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싸운 그 선한 싸움 그 자체와 경주를 마침과 믿음을 주를 향한 믿음을 지킨 것 그 이외의 공적은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January 30, 2022

하나님의 전신갑주 (The Full Armor of God)

서론오늘은 미식축구(NFL)의 양대 conference 결승이 있는 날입니다. 특별히 이곳에 연고를 두고 있는 S.F 49ers 가 NFC의 결승에 올라 오늘 잠시 후에 경기를 갖게 되서 많은 이지역 주민들이 큰 기대감 속에 경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NFL playoff 에서 전해 내려오는 관습이 있는데, 적어도 championship 경기서에는 대부분 수비를 잘하는 팀이 공격을 잘하는 팀보다 승률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결론입니다. 지난 20여년 동안 conference championship이나 Super Bowl 경기의 70%이상이 수비력 순위가 높은 팀이 이겼다는 통계이다. 우리 성도들은 주안에서 영적 싸움을 해야 하는데, 오늘 본문 서두에서 우리가 싸워야 대상이 누구인가를 말씀해 줍니다. 1)정사와 권세, 2)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3)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말씀합니다. 이것을 자세히 표현하면, 우리 심중에서 일어나는 영과 육간의 전쟁,(갈5:17) 이단설과의 전쟁(유3절), 그리고 약 5:1-6절에 언급한 사회의 악과의 전쟁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전쟁을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 The Armor of God)’를 입어야 한다. 그리하여 사탄의 계락과 공격으로 부터 견디며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을 해야 하는지 말씀해주고 있다. 본문에서 7가지의 영적무장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데 그중의 6가지가 수비적인 수동적 무장을 보여주고 있다.

본론: 먼저, 우리는 진리의 허리띠를 띠어야 한다. 진리는 먼저 그리스도 예수를 말한다. 어떤 성도는 처음부터 기도중 성령의 은사만 먼저 체험하여 나의 중심에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이 정착하지 되지 못한사람도 있다. 성령의 은혜를 받았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영인지도 인식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 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리고 진리란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이 성실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덕이 않되는 살면 주 예수를 올바로 전할 수가 없다. 본문에서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무장을 언급하기 전에 “Stand firm” 이라는 단어가나온다.원문에 ‘스테테’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확고히 서다’ 의미의 동사  ‘스태리죠’의 복수 명령형이다. 신, 구약 성경에 ‘나짜브’ ‘아마드’란 말로  566회 이상 나오는데 신약에는  170회 나온다. 이것은 또 하나의 의미로 “자기의 진지를 확보하다”는 뜻도 있다.   빌1:27에 보면 이 단어의 뜻이 정확히 나와 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단순한 신앙의 열정을 뜻하는 것만 아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견고히 서서 많은이들에게 그리스드인의 덕을 은은하게 내 뿜는 것을 말한다. 우리 성도등은 이 덕을 세워 주와 다른 사람 앞에 서야한다. 병자를 많이 고치고 귀신을 많이 쫓아 냈다고 영적 전투에 승리했다고 말할 수 없다.

둘째, 의의 흉배를 붙혀야 합니다. 흉배(breastplate)는 생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심장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고대 전사의 흉배는 굳은 가죽, 쇠, 또는 구리로 만들어 가슴에 정첩과 가죽줄로 잡아 매었다. Edie Harless 란 사람은 “ ‘의’는  신앙에서 나오는 곧은 성격인데 영적생명을 보호해준다.” 하였다. 이것은 영적전투에서 수비능력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많은 어떤 사람이 악의 공격에서크게 상처를많이 받는 것이 마음의 상처이다. 어떤이는 마음의 상처를 견디지 못해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살전 5:8에서 이 chest protector를 믿음과 사랑이라 하였다.

셋째,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합니다. 성도는 가는 곳마다 평화가 깃들고 화해를 이루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trouble maker가 아니라 peace maker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3 W’ 있는데, ‘Worker’, ‘Watcher’ ‘wicked person’ 가 있다고 한다.

넷째, 믿음의 방패를 갖어야 한다. 이것을 원문에는 ‘뚜레온’ 이라하였는데, 타원형의 문처럼 생긴 전신을 방어하는 방패를 밀합니다. ‘악한자 화전’을 소멸한다는 마귀의 불같은 공격을 견디어 낸다는 말이다. ‘빈센트’란 신학자는 “사탄은 의심을 받을 수 없는 선한 일을 통해서 공격한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한 점의 악의 힘이 있고, 그리고 불길이 퍼져가는 한 죄는 다른 죄를 끌고 온다. 시험은 우리의 약한 재료, 곧 자신을 자기도 모르게 타버릴 재료에 온다. 주께대한 믿음만이 이 화전을 막을 수 있다.

다섯째,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 이는 소망을 뜻한다. 투구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머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뱅겔(Bengel)’은 이를 그리스도 예수를 뜻한다고도 한다. 성도의 구원은 과거의 구원보다 현재와 앞으로의 구원이 중요하기에 소망중에 거하여야 비로소 구원을 이룰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검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레마’로 표현했는데 이것은 원래 ‘발언된 말씀’ 전파된 말씀을 의미한다. 나에게 나타나 보여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결론: 18절에서는 영적 싸움의 방법을 말한다. 기도(prayer), 간구 (petition) 통해 싸워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주목하고 그 분의 뜻에 동의한다는 뜻이며, 간구는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며 그의 초청을 맏아드리는 뜻이 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첫 부분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하셨다. 여기에 기도와 간구의 의미가 나타나있다  많은 사역자들이 예수를 적극적으로 믿으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수비적인 신앙을 뒤로한채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나가다가 무너지는 신앙인들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예수는 믿는다기 보다 믿어지는 것입니다.

January 23, 2022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품

서론그리스 철학자이며, 스승인 플라톤과 함께 2천여 년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위인인 아리스토 텔레스가 “인간에게는 다른사람를 감화시키는 3가지 인성이 있는데 첫째가 logos(논리성), 둘째가 ethos(도덕성), 셋째가 pathos(감성)이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수사학 ; The art of Rhetoric>에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감화시키는 세가지 요소 즉,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에 대해 말하고 있다.제 1요소인 ‘Logos’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익숙한 단어이다.신약 성경에서는 로고스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있는데,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 Logos’를 그리스도로 표현하고 있다. 원래 log는 통나무를 의미한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옛사람들은 통나무에 글자를 새겨넣었다. 여기서 비롯된 말인 ‘logos’는 ‘글, 논리’를 지칭하는데,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상대방에게 명확한 증거를 제공하기 위한 논리’를 일컫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결정할 때 합리적인 이치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논리와 증거를 갖추지 못하면 설득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에토스는 설득하는 사람의 고유한 성품, 매력도, 카리스마. 진실성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대화자를 신뢰해야만 설득이 가능하다고 했다. 파토스는 듣는 사람의 심리상태를 말한다. 상대방의 심리 또는 감정 상태는 설득에 영향을 큰 영향을 미친다. 기쁘고 호감을 느낄 때의 판단은 고통과 적의를 느낄 때의 판단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서두에서 17절에 새상적인 사람의 특성을 4가지로 표현했다. 18,19절에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하였다. 이4가지는 거의 서로가 연관되어 있다. 원래 마음을 헬라어로 2가지로 표현하는데, 하나는 ‘nous’이고 다른 하나는  ‘cardia’이다. 전자는 단순한 정신을 가리키며, 후자는 깊은 마음의 심정 상태를 가리킨다. 앞에서 말한 아리스도텔레스의 3가지 인간의 품격에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기능인 ‘프뉴마토스’를  더해 네가지가 주축되는 영적 품격을 가저야 한다. 오늘 본문 끝에서 그리스도안에서 새사람을 입은 성도의 성품을 3가지로 말했는데 의와 진리와 거룩함이다. 이 세가지는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와 접목시켜 은혜를 나누어 보고자 한다.

먼저, 우리는 어떤 영적인 품성을 가져야 할까요? 사실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신 예수를 logos로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가 그분을 만나고 그의 영이 내속에서 역사하는 것이 영적 새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대개 예수를 한번 영접하면 영적인 품성이 계속되는 것으로 착각된다. 19절은 다시 세상적으로 돌아간 사람의 마음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교만해져서 마음의 감각이 둔해져 죄의 감각을 느끼지 못하여 예수를 믿기 전의 상태보다 더 심각해진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치유하는 것은 상한 심령으로 자신의 그 상태를 통분히 여기며 간절히 드리는 기도만이 그것을 치유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우리 인간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그렇게 많지 않다.

두번째, 우리는 ‘Logic’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이런 그리스도인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은 말씀이라도 영적 양식이 되도록 말씀을 음미하고 깊히 묵상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시편19:8-14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10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는 마음으로 말씀을 깊히 묵상 좀 하는 성도가되자.

세번째, 도덕과 윤리에도 예민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 헬라어의 ethos란 말에서 ethic이란 말이 나왔다. 사실 ‘Christian ethic’이라는 것은 성도가 대인 관계에 괌범위하게 응용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Ethic’의 뜻을 도덕이나 윤리 규범이라 여겨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사람의 고유한 성품, 매력도, 카리스마. 진실성을 의미한다고 앞서 언급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부족한 것이 이것이다.

넷째, 성도가 가져야 ‘Pathos’ 의 성품은 본인 자신의 심리니 감정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심리 또는 감정 상태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한국인의 감성은 다른 민족보다 특별하다고 한다. 우리는 이것을 상대방의 감정과 심리를 배려하는데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8복과 그외의 교훈이 나타나는데, 대부분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상대방을 해아리고 이해하는데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긍휼히 여기는 자, 화평케하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서 다른 사람으로 부터 핍박을 받는 자는 하늘의 큰복을 받을 것이라는 주의 말씀 그 예입니다.

결론: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그룹으로 지목을 받고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감화시키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우리는 지난 30년 이상 성령의 은혜를 받아 복음을 담대하게 외치는데만 치중해왔던 것이다. 이젠 다시 주의 또 다른 권능을 구해야 할 때이다. 주의 말씀을 더 깊히 묵상하고 다른 이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감화를 주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지난주에 제가 "인간의 욕망은 상향성의 삶을, 소명은 하향성의 삶을 추구한다”고 말씀 드렸다. 본문의 20,21절 말씀에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라 하였다. 참된 주의 복음 진리는 지금 우리교회가 세상에 보이는 모습과 많이 다르다. 인간은 세상의 흐름 속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하며 주시 중심으로 치우친다. 보수는 옛것을 지킨다는 것인데 그만큼 성령의 능력을 제한시킨다는 의미도 된다. 이제 우리는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자.

January 16, 2022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행복

서론한국에서 이시대의 지성과 철학자라고 불리우는 노령의 그리스도인이 있다. 올해 103세인 김형석 교수에게 새해 벽두에  78세인 제자 박순영 박사가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한가지 질문을 드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맞이하는 길고 어두운 세계적 감염병의 상황속에에서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겠는가?”하고 물었다. 그분의 대답이 자신은 일제시대, 6.25 전쟁등 격동기의 시대를 온몸으로 체험했는데,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 있어도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면 행복할 것이다.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었다” 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한국이나 미국의 기성교회들이 너무 신앙적 교리나 전승 그리고 관례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 다시 조명해야 할 때이다. 사실 우리가 신약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나 직접 가르치신 진리를 다루는 4복음서가 먼저 등장 한다. 그러나 시대적 기록연도를 따지면 바울 서신인 데살로니가 전서와 갈라디아서가 4복음서보다 먼저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4복음 서중  마가복음이 주후 60년대 말에 기록된 것으로 많은 신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초대 기독교사를 보면 바울이 중심이 되어 이방의 복음 전파가 되었고, 교회가 세워졌다. 이 때 세워진 교회들에게 교리적 서신들을 보낸것이 신약 성경의 시작이다. 오늘 제가 이 설교를 통해 여러분들에게 전해줄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바울은 주로 그의 서신을 통해 기독교의 교리를 세워주고 신앙관을 정립해주고 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의 형상과 음성을 들었으나 실은 예수의 공생애를직접 목격한 분은 아니다. 주후 70년경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기독 교리보다 사도들이나 예수님의 공생애에 참여 했던 제자들로 부터 원래 말씀하시던 진리와 주의 공생애 사역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던 마가라 하는 요한이 마가복음서를 기록하므로 복음서의 기초를 세웠고, 이를 기초로하여 누가와 마태복음이 보완되어 기록되었다는 것이 신학계의 정설이다. 우리 성도가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진리와 보여주셨던 삶의 모습이다. 오늘 본문이 나와 있는 누가복음서의 주제 중 하나는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예수”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행복이란 무엇이며 행복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삶을 살야야 하는지를  다짐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제가 언젠가 설교 가운데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신약 보다 구약 성경을 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약은 공관복음, 사도행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책들이 교리와 신앙관의 정립에 관해 쓰여 있다. 사실 목회자의 설교가 교리나 신앙관만 전하면 설교자체가 성도가 감화력 부족하다고 한다. 많은 분들의 견해가 목회자의 설교는 성도에 삶에 대해 도전을 받게 해야 하고, 어떤 신앙인의 삶을 살 것인가 고뇌하도록 해야 것이라고 한다. 구약 성경에는 믿음의 선진들의 삶의 좋은 모습 잘못된 모습이 여과 없이 실질적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들을 찾는다. 설교는 교리 선포인 ‘케리구마’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치는 ‘레마’가 함께 병행 해야 한다. 구약을 설교 때 많이 인용한다고 해도 설교의 기본에서 떠난 것은 아니다.  성도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나 관습을 통해 하늘이 주는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진리를 찿았을 때 기쁜 것이며, 그분과 함께 하는 나의 삶이 행복한 것이다. 옛날 공자 선생 논어 1편에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진리를 배우고 때 맞추어 터득하고 익히니 , 또한 기쁘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요한 8:31,32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리고 이 행복은 어린 아이 처럼 순수한 자가 얻는다.(21절)

둘째, 진정한 신앙인의 행복은 그의 삶에 나타나는 것이다. 행복은 혼자만이 가질 수는 없다. 공동체의 삶에서 어려움에 함께 동참하며 그것을 서로 나눠 갖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인도나 중국의 사상이 한 때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그들이 세계의 주도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함께 나누어 공존하는 삶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김형석 교수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이 신앙이 있다면 우리속에서 자연이 이 마음이 생겨나야 한다. 미국이 참전한 원남전이 한참이던 때 원남전쟁에서 부상당한 장병들을 위한 대대적인  대대적인 위문공연을 준비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프로그램의 총책임자인 감독은 다시에 코미디언으로 유명한 밥호프(Bob Hope)를 위문공연에 초대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밥호프는 너무나 바쁜덷가 선약이 있어서 갈 수 없었다고 거절했습니다. 당시에 밥 호프가 없는 공연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감독은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을 위로해 주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 라고 여러번 간곡한 부탁을 했습니다. 밥 호프도 감독의 부탁에 그러면 제가 5분정도만 얼굴을 보이고 내려와도 괜찮겠습니까? 말했습니다. 주최측에서는 그렇게라고 해 주는 것 고맙겠다고해서 밥 호프는 그 위문공연에 출연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드디어 공연 당일 5분을 약속하고, 밥 호프가 무대에 올라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밥호프는 5분이 지나도 끝낼 생각은 않하고 10분,  15분, 25분이 넘어도 공연을 계속했습니다. 밥 호프는 거의 40분동안 공연을 하고 내려왔는데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감독은  밥호프에게 5분을 약속하고 40분 이상을 하게 된 경위와 눈물을 흘리는 이유에 대해 물었습니다. 밥 호프는 눈물을 닦으면서  저 앞줄에 있는 두 친구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감독이 무대에 나가 보니 맨 앞줄에 상이군인 두 사람이 열심히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 모습이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오른팔을 잃어 버려고 다른 한 사람은 왼팔을 잃어 버린 상태 였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함께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며 밥 호프는 “저 두사람은 나에게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가 가르쳐 주었습 니다. 한쪽 팔들을 잃어버린 두 사람이 힘을 합하여 함께 기뻐해 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참된 행복을 배웠습니다.”라고 하였다 오늘 본문 20절에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우리 성도의 큰 기쁨 하나는 나로 다른 사람이 주께 돌아 오는 것이다.

셋째,  믿음의 참된의미는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의 참된 행복은 기다림 끝에 찾아오는 것이다. 롬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결론: 우리 모두는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느냐가 중요한거이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고 어떻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우리 성도들은  비행를 타고 여행을 마치고 자기의 홈타운에 상공에 도달하면 밖을 내다 보면서 자기와 연관되는 무엇인가를 찾으려 한다, “우리 집은 어디쯤이며, 교회는 어디인가”고 찾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찾을 수 없습니다. 찾는 것은 학교, 공원, 운동장, 큰 건물 뿐임니다. 우리 성도가 속한 교회는 이렇게 세상에 비하면 작다. 우리가 사는 대부분의 삶을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속의 나보다 성도로서 세상속의 나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교회보다 ‘하나님 나라’를 언급 하셨다.   "인간의 욕망은 상향성의 삶을, 소명은 하향성의 삶을 추구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리스도 인들은 각자에게 주께서 주신  각자의 소명이 또는 십자가가 있다. 우리는 삶에서 감당해야 한다. 감염병 상황이 2년을 넘겨 어둡고 긴 처널을 지나는 것같다. 앞에서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 있어도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면 행복할 것이다. 사랑이 있는 고생은 행복이었다”고 했다.  고전 13장을 ‘사랑’ 대신에 ‘예수’라는 단어를 넣어 낭독해보자.

January 9, 2022

하늘에 속한 사람

서론여러분들은 2001년 출판 되었던 기독교 서적중에서  중국의 지하교회의 leader 였던 원 형제가 기록한 The Heavenly Man(하늘에 속한 사람)’ 을 보신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16세에 어머니의 영향으로 처음 예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읽고 싶고 가지고 싶어서 100일 이상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의 긍휼로 성경을 선물로 받았을 때는 밤낮 가리지 않고 성경을 읽었고, 나중에는 성경을 외우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신약 성경 전체와 일부 구약성경을 암송할 만큼 말씀의 사람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로지 기도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시작된 복음 전도자로서의 삶은 말로다 표현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의 연속이었다.

결혼 생활 20년 동안 30차례 이상 중국 공안에게 붙들렸고, 그중 7년간은 수감생활,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공안의 추격을 피해가며 복음 전도자로 살았다. 수감생활 7년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시간들이었다.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 죽도록 매를 맞았고, 고통이 손끝 발끝까지,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전기봉으로 많은 고문을 당했고, 손톱 밑으로 커다란 바늘을 수셔넣는 등 도무지 인간이 감당하지 못할 고통을 당하였다. 공안에게 고문을 당하고 돌아오면 감방의 죄수들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윈 형제의 얼굴에 소면을 뿌렸으며 오줌통에 얼굴을 집어넣었고 대변통에 굴렸으며 빈약한 음식마저 빼앗겨 버렸고, 얼음장 같이 추운 감방에서 그나마 가졌던 의복과 담요를 빼앗기기는 등 짐승이하의 고통을 당했다.

이런 극악의 고통 속에서도 최장 70여일간 금식기도하며 버텼고, 음식을 탐하는 죄수들과 자신의 것을 나누었고, 할 수만 있으면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그를 고문하든 공안들, 공안의 부모, 같은 감방의 죄수들까지 윈 형제의 삶과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에 두려움으로 복음을 영접하였고, 출옥 후에는 중국 가정교회의 영적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중국교회의 부흥과 일치를 위해 헌신하다 다시금 수감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결국 1997년 도무지 탈옥을 꿈꿀 수 없는 장저우 최고 감옥을 마치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천사의 도움으로 탈옥한 것처럼 걸어서 탈출하였고, 독일로 망명하여 지금은 세계 곳곳을 다니며 간증을 통해 전도하고, 중국 교회와 세계 선교를 위해 사역하고 있다. 그가 감옥에 있을때 심한 고문을당하고 감방으로 돌아와서도 동료 죄수들로 학대를 받았을 때 주님께서 떠오를게 하셨던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후반부 입니다.  “17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저는 이책을 보면서 떠오르는 구약성서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그가 어렸을 때 꾸었던 꿈으로 인해 형제들의 질시로 인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가나안 땅의 가장 부유한 부족중의 한 가족안에서 총애를 받던 소년이 어느날 갑자기 노예로 팔려 갔으나, 그는 누구를 원망하기 보다 그곳에도 주 여호와가 함께 함을 느끼며 주의 이를을 욕되지 않게 최선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도 그의 삶은 꼬여만 갔다. 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는 대가는 가혹하여 이제 죄수의 신분이 되었다. 그곳에서도 최선을 다한 선한 삶을 살아 훈륭한 평가를 받았지만 그를 귀히 여겨준 주류를 맏은 관원장도 결국 그를 배신하였다. 낙심이 가장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은  모든 시험을 통과한 것으로 여겨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하녔다.  오늘 본문 말씀과 요셉의 삶과 그보다 더 기구하고 처절한 삶을 산 ‘윈 형제’를 통해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살펴 보고자 한다.

첫째, 하늘의 속한 사람은 하늘이 주신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어렵고 비참한 상황을 만나도 기본적으로 선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둘째, 결코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창세기 39장 이하에 나타난 요셉의 삶을 보면 상상치 못할 역경 속에서 그가 실망하거나 슬퍼했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주님이 그곳에도 같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은 천국시민의 삶의 방식을 택해야 한다. 17절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서두에서 말씀 드린대로 윈 형제가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고 감방 바탁에 내 쳐지고 몸을 일으키기도 힘든데, 같은 방의  죄수들이 핍박과 능욕할 때  주께서 떠오르게 하신 말씀입니다.

넷째, 골방의 능력을 채험하자. 마태 6:6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위대한 신앙의 위인들의 인격은 다 골방의 기도로 형성됬다. 세상에 나타난 기적은 다 자신과 다른 성도의 골방 기도로 시작 됬다. 우리가 기도할 때의 첫번째 마음의 자세는마태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이다. 사역자들과 성도들이 장기간 금식기도나  단식 기도를 드리면 무슨 영적 power를 받는 것 생각한다. 그것은 부수로 따라올수도 있으나 원래 금식 기도의 참된 의미는 나 자신의  회개로 시작하여 영혼의 정화와 하늘의 의에 대한 갈망을 갖기 위함이다. 제가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40일 금식기도를 드리고 강단에서 하신 첫 말씀이 떠 오른다. “성도 여러분! 제가 40일 금식 기도중 크게 깨달은 것 중하나는 나는 죽은 개와 같다는 사실 입니다.

결론:  우리 성도는 하늘 나라의 신민권을 가졌으므로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Heavenly mind를 가져야 한다. 예수님 말씀대로 우리가 지금의 삶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이는 것이요. 지금 삶에서 모든 것이 풀리면 하늘에서도 풀어져 주가 주신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January 2, 2022

본문: 

이사야 61:1-3,

마태복음 28:18-20

보라! 내가 새 일을

서론: 대망의 202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성도님과 가정에 하나님께로 오는 평안과 수 많은 복들이 가득하기를 기도드립니다. 미국에 코로나 19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한지가 2년이 됬습니다. 지난 3년간 우리는 새해가 밝아오면 기대와 희망보단 걱정과 두려움이 우리에게 다가왔습이다. 그러나 금년 2022년에 들어선 우리는 3차 감염이 확산되는대도 지금 마음에 그래도 평정심을 어느정도 갖을 수 있게되었습니다. 아마도 백신접종이 많이 되어지고 새로 개발된 치료약에 대한 신뢰 때문이 아닌가 생각 해봄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새해가 되면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이사야 43:19-21 “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인은 환란과 역경속에서 새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 하나님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하며 주의 주시는 새일을 찾아 봉사행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2022년에 새로운 해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길이 어떤 길이며,  맞기신 새일이 무엇인지 찾아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의 강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너무 우리가 걷던 옛날의 길에서 돌이켜 광야의 길이지만 하나님이 열어주신 길을 걸어야 합니다. 코로나 19 이후에 교회의 예배나 사역이 광야의 교회가 되어야한다는 주장들이 목회자들사이에 제기되고 있습니다. 어느교회는 이 사역의 명칭을 ‘에레모스 교회’라 칭했습니다. 헬라어로 광야를 ‘에레모스’라 합니다. 지금 모든 교회는 코로나19 이전과 같이 예배드린다는 사실상 힘들게 됬습니다. 그 옛날 모세가 광야에서 성막을 짓고 성례 예식을 하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다. 지성소 하나가 성막(tabernacle)의 대부분을 차지했기에 모세와 아론의 자녀들 외에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고 백성들은 밖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 위에 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차피 성도가 사는 이세상은 광야와 같다. 광야에 사는 사람은 영혼이 창조자에 갈급해야하며, 오래도록 한 곳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코로나 사태 이후의 우리 모든 예배자는 어떤 형태의 예배 속에서 갈급한 심령으로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주의 임재를 기다려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공동체의 개념이 분명해야 한다. ‘기름을 붇는다’는 말은 구별되이 사는 삶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히브리말로 ‘메시아’ 헬라말로 ‘그리스도’라 한다. 구약에 기름 부은 자는 왕,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였다. 종교 개혁자 Luther가 개혁의 모토로 삼은 것 중의 하나가 “만인 제사장설”  그러므로 우리성도는 각자가 하나님 앞에 자기 삶에서 제사를 드려야하는 ‘기름부은 자’ 그래서 우리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여러분들이 이 교회당 안에 앞자석이나 강단에 올리브 기름병이 있다. 이곳 미국교회에 목사님께서 성도들에게 기도하면서 기름을 머리에 붓기 위함이다. 우리성도는 세상의 잘못된 풍습으로 부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한국의 중견 연예인 중에 젊은 시절에 사역자까지 하다가 지금은 완전히 세상의 풍속에 젖어 사는 사람이 있다. 이사람이 방송에 나와 자신의 과거사를 실토는데, 나는 그의 타락의 두가지 결정적 요소 두가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가 끊을 수 없었던 두가지 습관 때문이다. 세상 사람과 구별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성도는세상과 단절해서 살수는 없지만 분명히 세상의 사람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음이 상한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며, 갇힌자에게 놓임을 전파해야 한다. 이런 성도가 되려면 마음이 넓어야 한다.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지배를 받는자와 지배하는자, 가진자와 가난한 자, 갇힌 자와 자유로운 자, 병든 자와 건강한 자가 있다. 성도는 이 모든 사람에게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 성도가 특별히 관심을 더 가지고 보살펴 주어야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바로 억압받고 상처받은 자들이어야 한다. 사 43:20 대로  “승량이와 타조”가 함께 뛰노는 것이 하나님이 에배한 세상이다. 새해가 되면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은 ‘기’ 또는 ‘기운’을 받기 위해 높은 산에 오르거나 바닷가에 나가 첫 ‘해돚이’ 광경을 보려한다.  새해에 우리는 하나님으로 부터 선하고 아름답고 긍휼의 기를 받아 억압 받고 상처받은 자들들에게 부어주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교인들이 새상을 지나치게 판단하고 멸시하는 모습들을 보여왔다. 사회에 긍정적  에너지를 주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부정적 기를 부어주는 모습을 보여 준것이다. 빌립보서 2:3-7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기신 부탁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도할 때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일방통행을 주로 해왔다. 우리가 주께기도할 때 주로  내가 주님과의 대화의 주관자이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시간이 없이 기도와 예배를 드려왔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릴 때이다. 지난 2년여 동안 성도들은 예배를 드리거나 공적 기도회에 많은 제약을 받아 왔다. 이제 우리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짐을 네려놓고 마음을 쏟아 노으면 그 은밀히 보시는 주님이 큰 은혜를 배푸실 것입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새것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 반응을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광야의 길과 사막의 강들을 우리를 위해 예비하실 것이다.

December 26, 2021

지난 날의 교훈

서론: 성도 여러분! 어제 성탄절은 가족과 함께 주 안에서 평안한 가운데 잘 보내셨는지요? 오늘이 금년 2021년도 마지막 주일 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매년 한해가 다 지나가는 시점에 서면 우리가 인지하는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지만 그 날을 향하여 우리가 더 가까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본문을 읽게 되면 공통되이 느끼게 되는 사실은 우리의 눈의 보이는 세상의 무상함과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데한 소망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전 40일 금식 기도를 하시고 사탄에게 이끌려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첫째 시험은 심하게 주린 예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이 떡이 되게하라.” 이 유혹에  대해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것이니라.”고 물리치셨다. 두번째 유혹은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라고 시편 91편을 이용하여 주를 시험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라하시며 그것을 물리쳤다 그러자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유혹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라고 물리치자, 천사들이 와서 시중을 들었다. 여기서 말씀을 유심이 살펴보면 예수께서 사탄을 대적할 때 보이셨던 두가지의 표현은 주의 말씀과 우리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것을 말씀하시며 시험을 이기셨다.

벧전1:23-25에 오늘 우리가 읽은 유사한 말씀이 나온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세상에 있는 것은 보이는 것이며 있다가 사라지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썩지 아니하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 영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 할까요?

먼저, 선구자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3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650년 후의 기록된 마태 3:3,4을 보면 세례요한을 예언한 말씀으로 기록되어있다. 세례요한은 희생과 겸손으로 주의 길을 굳게 한 사람으로 예수께서도 여자가 난자 중에 세례요한과 같은이가 없다고 하셨다.

둘째, 우리들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바나바’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son of encouragement’ 뜻이다. 위로란 ‘comfort’ 과 ‘encourage’를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4절에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라 하였는데 산은 흔히 교만한 자, 약하고 의로운 사람들을 억앞하고 괴롭히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를 말하는데, 이런사람들은 지금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서  낯은데 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골짜기와 같은자’ 약하고 가난하고 억눌림을 받던자는 주가 통치하는 나라에서는

셋째, 영적으로 자라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 빛과 생수를 하나님께로 부터 받아 늘 푸르고 자라나는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까지 우리 모두가 영적 성장이 이루어 져야 합니다.(엡4:13)

넷째,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풀과 같이 자라서 꽃만 피우고 시들지 말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하나님의 생수와  빛되신 말씀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자. 생수는 성령의 은혜요 빛은 생명의 말씀인 것이다. 진정한 영적 열매를 맺을 때에 우리 성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19세기 말에 태어나 4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작가 Anton Pavlovich Chekhov는 교양있고 품격있는 인간에 대해 정의를 몇가지 서술했다, 첫재,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따라서 언제나 관대하며, 온유하고 은근하며,고자세가 아니다. 둘째, 그들은 걸인이나 개, 고양이게만 동정이 깊은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도 마음을 쓴다. 그들은 타인의 재산을 존중하고 빚을 체불하지 않는다. 셋째, 그들은 정직하고, 거짓말을 불같이 두려워한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거짓말은 상대를 모욕하고, 말하는 본인을 비열하게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넷째, 타인의 동정을 사기 위해 자신을 멸시하는 흉내를 내지 않는다. 타인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는다. 5째, 그들은 허영심을 갖지 않는다. 6째, 재능을 갖고 있으면, 그 재능을 소중히 여긴다. 그 재능을 키우기 위해 안일도, 주색도 허영도 모두 희생한다. 마지막, 그들은 자기 끊임없이 내부의 미학을 기르고  키운다. 이 시대에 우리가 키워야 할 기독교인 상이 이런것이 아닐까요? 엡6: 4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December 19, 2021

본문: 

이사야9:6-7,

마태복음 1:18-25

구주 탄생의 조연자

서론: 오늘 우리가 성탄 축하주일로 지키는 이 주일에 지금으로2017년 전경 로마제국의 속국이 된 팔레스틴에서 탄생하여 인류의 역사의 중심이 되신 되신 한 왕의 탄생과 그왕의 탄생의 주위에서 하나님 뜻을  순종과 겸손, 헌신으로 화답한 진정한 조연자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한다. 그당시의 유대왕인 헤롯 대왕 안티파터는 하스몬 왕조를 무너뜨리고 BC 63년 유대를 로마의 속국으로 넘긴 인물이다. 그는 유대를 로마에 넘기고 로마로 가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정복한 지금의 서유럽(갈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하며 자신의 아들인 헤롯을 유대인의 왕(분봉 왕)으로 임명하도록 옥타비안 황제를 설득했다. 그리하여 BC 37년부터 BC 4년까지 유대를 다스리게 된 헤롯은 건축 왕이란 별명처럼 유대 곳곳에 크고 작은 건축물들을 많이 세웠는데, 대표적으로 로마 황제를 위한 ‘가이사랴’라는 신도시와 유대인들을 위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진행하여 로마와 유대의 환심을 동시에 사고자 하였다.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유대는 이 헤롯 대왕이 통치하였으며, 예수님 가족이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 다시 돌아올 때는 그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 지역과 사마리아와 에돔 지역을 다스렸다(마 2:22). 아켈라오는 매우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정치를 펼쳤기에 후에 참다못한 유대와 사마리아 귀족들이 로마 황제에게 대표단을 파견해서 그를 숙청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결국 AD 6년에 아켈라오는 왕위에서 쫓겨났고, 그때부터 유대 지역은 로마 총독에 의해 통치를 받게 되었다. 기독교적으로 BC 350 년 부터A.D 4년 까지를 ‘중간사’라 그리고 이 시대를 ‘암흑기’라 부른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로 기독교 역사의 잠복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의 상황 속에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다.

지난 4월에 있었던 미국에서 가장 큰 영화제였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사람으론 최초로 배우 윤여정씨가 여우 조연상을 받았습니다. 한 한국인 이민 가정의 삶을 그린 ‘미나리’라는 영화에서 할머니 역활을 사실적이고도 훈륭하게 연기하여 이 세계적 권위의 영화제에서 ‘most supportive actress’ 분문에서 오스카상을 받았습니다. 오늘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주일에 2020년전 구주 예수의 탄생에서 가장 희생적인 삶으로 주께 기여한 사람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먼저, 마리아와 요셉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감당하게 힘든 역활을 주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들은 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마리아는 그시대에는 도져히 용납되지 않았던 처녀의 몸으로 정혼한 남자의 아이가 아닌 혼외의 임신을 강당해야 했습니다. 요셉 또한 자기가 정혼한 여자가 자기가 모르는 아이들 가진것을 받아드려야 했으며, 비록 천사의 지시지만 또 그 여인을 보호해주고 지켜 주어에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약혼녀가 정조를 잃으면 돌로치라 한것을 의롭고 선한 인격의 두면을 보여주려고 조용히 끊으려 했습을 본다. 그리고 천사의 고시에 손종하였다. 거기에다 두사람은 마리아가 만삭인데도 로마 황제명의 인구 조사에 응하기 위해 갈릴리 나사렛에서 다볼산, 에발산,그리심산, 감람산 등 산을 세계나 넘어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까지 긴여행을 해야 했다. 예수님의 탄생 후에도 해롯의 유아 살해를 피해 애굽까지 피신을 해야 했고 해롯 안티바가 죽자 나사렛으로 가야 했던 것이다.

둘째의 조연자는 동방으로 부터 별의 인도함을 받아 아기 예수께 경배키 위해 산넘고 물을 건너온 그들의 조력이다. 그들은 베들레햄 말 구유 위에 까지 찾아 경배한 분들로 누가복음의 목자들과 함께 성경속의 몇 안되는 사람들이다. 그들도 또한 예수님의 보호를 위해 헤롯의 감시를 피하려  잠행을 하며 본국으로 바쁜 발거름을 해야 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예수님의 탄생에 와서 경배를 했던 성경속의 사람들은 다 비 종교인이며, 자기의 전문적 일에 충실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동방의 박사들이 그랬고, 들에서 양치는 목자들이 그랬다. 이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9:6,7에 예언한 그 말씀을 환상으로 본것이다. 여기 말씀에 “한 아기 우리에게 낳고(born)”는 인성을 나타내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given to us by God)는 신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탄생한 아기왕께 경배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하고 예루살렘을 먼저 찾아 왔다. 이 소식을 들은 헤롯과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미가서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에 의거하여 메시야가 나실 벧을레햄을 가르쳐 주었다. 동방 박사(Biblical Magi, Three Wise Men, Three Kings) 또는 마구스(magus; 복수: magi)는 기록에 따르면 예수가 탄생하고 나서 얼마 후 베들레헴까지 직접 찾아온 것으로 알려 진파르티아로 추정되는 동방의 박사들이다.한국어 성서에서 동방 박사로 번역된 헬라어 마구스는 마술사, 점성술사를 뜻한다. 그래서 이들은 별을 보고 그리스도요 유대인의 왕인 예수가 태어났음을 깨달았다. 마태복음서에 따르면 별은 먼저 이들을 헤롯왕에게로 인도했고 이후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고 황금, 유향, 몰약을 선물한 후 헤롯 대왕에게로 다시 가고자 하였으나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는 결국 다른 길로 귀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오클라호마 대학의 종교학과 교수인 브렌트 란다우(Brent Landau)는 ‘동방박사의 묵시’라고 불리는 성탄절이야기를  2011년에 소개하였다. 란다우 박사가 소개한 ‘동방박사의 묵시’는 바티칸도서관에 소장된 주후 8세기의 시리아 사본에 기록된 동방박사 내용을 번역했다. 비록 시리아 사본은 주후 8세기의 것이지만, 시리아 사본의 원본은 주후2세기 중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란다우박사는 믿는다. 만약 그렇다면 시리아 사본의 원본은 마태복음이 기록된지 1세기후에 기록된 것이다. 시리아 사본에는 동방박사의 신비로운 기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반짝이는 별, 베들레헴으로 동방박사들을 인도하는 기적적인 이야기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박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고국에서 그들의 형제와 이웃들에게 기독교의 믿음을 전한 이야기, 그리고 도마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동방박사의 묵시’에 기록되었다.

셋째, 예수님의 탄생에 악역의 약할을 한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성경은 거룩한 책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성경에는 부도덕한 사건 잔인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이런 셩경말씀을 통해서 두가지의 교훈을 얻는다. 부도덕하고 잔인한 사건에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않된다는 가르침을 얻는 것이고 , 아름답고 성스러운 사실은 우리가 그것을 배우고 우리의 영과 몸에 익히라는 교훈인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속에서 잔인의 극치의 역할로 등장하는 해롯을 보면서 우리는 결코 그런 인간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영악한 정치 감각으로 예수를 로마 제국의 간접 통치자인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인물로 지목한 헤롯은 독재자가 권력 유지를 위해 흔하게 사용하는 무기인 폭력으로 예수를 없애려고 했지만, 이 사실을 안 예수의 가족은 이집트로 피신해 화를 면하였다. 많은 교회에서는 이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한 사건을 예수가 자신을 드러낸 사건으로 해석하여 주현절로 기념하기도 한다.

결론: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성탄 주일에 2020년 전 이 땅에 구주 예수 탄생을 위한 ‘unsung hero’,  숨은 공로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우리는 이제 그 구주예수의 전파와 다시 오실 예수를 예비하는 진정한 조연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에서나 삶에서 주연자가 되려고만 하지 말고, 말없이 주의 나라를 확장을 위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는 성도가 되자. 만왕의 왕되신 나타내고 그분을 더 높이기 위해 자기는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그런 조연자가 되자.

*황금은 잘 알려진바 대로 음이온의 작용으로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혈액순환을 도와 건강한 피부를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유향과 몰약은 광야의 오지에서 자라는 감람과나무의 천연수지로 채집이 어렵기 때문에 귀하고 값비싼 약재다. 이것들은 고대부터 이스라엘과 이집트, 중세유럽 귀족들의 미용과 피부질환 치료에 사용되어 왔다

December 12, 2021

본문: 

시편91:9-16,

누가복음 2:8-14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

서론: 어느 마을에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돈이 많아 여유 있고 호화스럽게 생활했지만 마음속은 늘 불안하여 편치가 않았다. 궁리 끝에 그는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그림을 한 점 구해 거실에 걸어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름난 화가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후하게 대접한 뒤, 마음에 평안을 주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 대가로 거액을 내놓고 전시회도 열 계획이라고 하자 화가들은 각자 성의를 다해 그림에 몰두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드디어 작품 전시회가 열렸다. 아름다운 산과 호수의 잔잔한 수면을 멋지게 묘사한 그림도 있었고, 한적한 시골 마을의 평화로운 풍경을 담은 그림도 있었다. 부자는 보기만 해도 저절로 마음이 넉넉해지는 여러 작품들을 하나 하나 주의깊게 감상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고, 간혹 어릴 적 일을 회상하며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하지만 그 중 어떤 그림도 그의 마음을 깊은 평안으로 이끌진 못했다.

전시된 그림을 따라 전시장 안을 거의 다 돌았을 즈음, 그는 맨 마지막 그림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한동안 그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것은 거대한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벼랑 한쪽 틈에 둥지를 튼 로빈새가 알을 품고 있는 그림이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금방 폭포수에 휩싸여 천길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지만, 알을 품고 있는 어미 로빈새의 눈 속에는 불안이나 공포의 기미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림을 감상하던 그는 갑자기 '바로 이거야!'라며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옆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을 택한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바로 이 그림 속 로빈새에게서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되지 않는 마음의 참 평안을 얻었습니다.'“평화는 소음과 문제와 힘든 일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마음의 평정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런 평안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는 ‘평화’ ‘평안’ ‘평강’이란 말이 모두 합해서 210회 정도 나옵니다. 구약에는 ‘샬롬’ 이란 히브리말로 신약에는 헬라어 ‘에이레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샬롬’이란 말이 그들의 인사임을 여러분은 아십니다. 오늘시편 91편은 Matthew Henry등의 주장에 의해 다윗이 기록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과 역경속에서 건져내어 피난처가되시며, 그런상황 속에서도 평안에 거하게 하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주안에서 평안에 거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누가복음서는 서두에서  4복음서 중 예수님의 탄생배경과 그 시대상황을 가장 많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세레요한의 탄생 배경까지도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점령국인 로마의 횡포는 극에 달해서 점령국들의 인구를 조사해 세금이나 군사적 이권을 챙기려 하는 상황이고, 식민지 국가인 이스라엘의 사회질서와 윤리는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어느시대이건 임산부는 보호를 받아야 마땅한데 여관주인이 임산부를 마굿간에 자게하는 사건은 그시대의 사회적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적으로도 타락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레위기 19:34에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신10:19)

오늘 본문 말씀중 누가 2:14절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 성도가 추구하는 평화의 개념이 잘 나타나있다. 우리말 성경에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의 평화로다.”라고 해석되어 있지만, 원어 성경뜻으로 해석하면 원어 ‘유도키아’의 뜻은 ‘선한 뜻’  ‘선의’를 말한다. “On earth peace among men with whom he is pleased!”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에게만 찿아오는 평화라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평안이란 그 마음속에 선한 뜻을 품은 사람에게만 찾아 온다는 것이다. 선의를 의미하는 명사 ‘유도키아’는 ‘인정하다’ ‘결정하다’는 의미인 동사 ‘유도큐’에서 온것이다. 하나님 주시는 평안은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찾아 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를 깊이 드리고 나면 우리속에 깊은 평안이 찾아온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기가 드린 기도가 응답되었는지 느 낄 수 있는 것은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 왔을때 그 기도가 응답된 것으로 여긴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를 드리면 무슨 희안한 경지에 도달하고, 주로부터 큰 능력을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고전13:1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사랑은 마음의 평안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 평화는 세상에서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충성되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찾아 오는 것이다. 본문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있는 곳이 1000년전 다윗이 양을 첫던 들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들의 목자들은 자기들이 진정한 다윗의 직업전통을 이어온 사람들이에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다윗의 고향 ‘벧 을레헴’의 들에서 밤 늦도록 양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기쁜 구주 예수의 탄생 소식만 들은 것이 아니라, 550년전 다니엘 보았던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와 천군 처사들을 보았던 것이다. 단니엘7:13,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 목자들은 선지자만 보았던 놀라운 환상들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그들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되신 아기 예수를 맨 처음 찾아뵈는 영광을 누렸다.  누가복음 서두에 세례요한, 주예수의 탄생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음이 선하고 자기의 본분들을 충실히 이행했던 사람들이다. 사가랴, 엘리사벳 요셉 마리아, 그리고 주의 탄생 후의 평생을 시므온과 여 선지자 안나 등은 평생토록 그의 삶을 의롭고 경건하고 충성되이 산 사람들이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알기위해 힘쓰는 자에게 평안은 물론 영광스럽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본문 시편 91:14,15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예수께서도 주의 성령이 임하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평안이 있습니다.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결론:  지금 온 세계가 역사상 가장 큰 전염병에 몸살을 앓고 있다. 거기에 많은사람들은 코로나 예방접종이 효능이 없어 맞지 말아야 한다고 대립하는 형태이다. 오늘 하나님은  위로와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91:4-7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6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December 5, 2021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

오늘은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하기 위해 400년의 세월이 지나야 했습니다. 물론 그 기간 모두 기다림의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상당히 긴 기간 동안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의 약속을 기다리며 참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왔던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그들은 여호와가 약속한 메시야를 기다림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기다림에 매우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그 주님을 만난 사람 시므온이 소개됩니다. 그의 기다림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자는 뜻으로  제목을 붙였습니다. 본문 25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6절에는 시므온이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9절에는 그가 성취된 약속으 보고, 이제 죽어도 좋다는 고백을 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 하였는데 주의 율례와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기다림이란 무엇입니까? 기다림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행운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느날 내게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기쁜일이 있겠지 하고 막연히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고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확률에 의한 행운을 기대합니다.

둘째는, 열심히 수고한 후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막연한 행운을 기다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좋은 결과가 기다리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한 후에 좋은 학교에 입학할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비즈니스를 열심히 하고, 그 결과 부요해지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있고, 그로 인한 결과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기다림은 모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며, 또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반드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모두 불확실함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다른 요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요인들이 작용할 때 우리는 우리의 기대가 컸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셋째는, 확실한 미래(약속)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성탄절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즐거운 놀이도 하고, 교회에서 연극이나, 성탄절 연주회를 하든가, 아니면 고대하던 선물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성탄절을 기다립니다. 성탄절을 기다리는 것을 결코 불확실하지 않습니다. 또 생일을 기다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은 생일을 기다리는 마음이 덜할지 모르지만, 어린아이들은 생일을 많이 기다립니다. 생일을 잊어버리고 지나갈 수는 있지만, 생일 자체가 우리를 배신해서 오지 않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기다림은 고난을 이기게 한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확실한 미래를 기다리는 경우는 고난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즐거운 일을 기다릴 때는 절대 아프거나 피곤하거나 지치지 않습니다. 성도의 기다림은 바로 소풍이나 자기 생일을 기다리는 어린 아이의 기다림과 같습니다. 성도가 천국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것은 마치 이와 같은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믿음으로 주의 약속하신 것을 믿고 바라고 살아갈 때 성도는 고난을 이깁니다. 어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피곤도 이기고, 고통도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기다림은 죽음의 위협과 두려움도 극복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간 길이 바로 그런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점검해야 합니다. 성도가 소망하는 것은 확실한 약속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성도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보면서 기다리면서 누리는 기쁨은 그 기다림이 성취된 후에 얻는 기쁨과 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믿음의 원리이며 개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첫째, 주의 임재를 기다리는 사람은 먼저 성령이 그위에 머무르는 사람이어야 한다.(25절)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는 사탄이 그 위에 머물렀다. 옛 말에 “우리 머리위로 새가 지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우리 머리 위에  앉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성령이 우리 위에 머무르게 해야한다. ‘시므온’이름의 뜻은 ‘경청하다’란 뜻이 있다. 주의 말씀을 잘 경청하는 사람이 되어 믿음에 살아가는 하는 것이다. 로마서 10:17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신다. 다른 사람을 오해 잘하는 사람의 특징이 경청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성도의 기다림은 확실한 약속에 대한 믿음의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냥 어떤 바램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막연한 소망에 근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위로(consolation)’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즉 이것은 구체적인 어떤 인격체를 의미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이 약속을 구약 어디를 근거로 기다렸는가를 볼 때 그가 찾은 것은 이사야서였을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1절에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리고 이사야서는 40장 이후로 계속해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42장에 가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여기서 그 위로자가 누구인지를 좀 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는 “내가 붙드는 나의 종”입니다.

둘째, 성령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26절을 보면,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는데,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명확한 표현은 그가 장차 오실 분이 바로 어떤 분이신지를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이 말씀은 그가 얼마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자였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믿음과 기다림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기다림은 그냥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매일매일 말씀을 읽고 또 읽고,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니면 말씀을 듣고 그것을 일주일동안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되새기는 시간들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 성령에 감동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도의 기다림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안에서의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첫째 문제가 말씀에 기초한 확실한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고 했디만, 둘째 문제는 그 말씀을 주시는 분, 하나님, 바로 그분에 대한 인격적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확실해도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없으면 절대로 약속을 붙들고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요셉을 가리켜 애굽와 바로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시므온은 아이 예수님을 보는 것으로 자기의 소망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가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 세대에 완성되기를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 가지 못했다.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우리의 자녀들이 예수 안의 구원을 믿고 살아가는 것에 만족 해야한다. 내가 좋아 하는 것만하고 내게 맞는 삶만 생각하지 말고 자녀들의 믿음이 자랄수 있는 여건을 좀 조성해 주자.

November 27, 2021

본문: 

여호수아 10:8-14,

로마서 8:31-35

신실하신 하나님

서론: 오늘은 대강절의 첫째 주일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보면, 창조와 노아의 홍수 사건 이후에 가장 놀라운 기적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 본문의 나와 있는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구가 도는 것과 태양의 인력을 거의 온종일 멈추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이야기는 6절 말씀을 보면 기브온 이라는 작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여호수아를 찾아 옴으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을 위해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아이성 마저 정복했다는 소문이 가나안 전 지역에 퍼져갔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가나안 지역에 있는 나라들은 매우 긴장하였고, 서로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대항할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브온 사람들과 그 인근에 있는 네 성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기브온은 지금 이스라엘이 머물고 있는 길갈에서 약 40km 정도되는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오기까지 여러 족속들을 무찌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이스라엘 대적하는 것보다는 그들과 화친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치밀한 작전을 짭니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사는 족속들과는 화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주 먼 곳에서 온 사람들처럼 행색을 꾸미고, 다른 조건 없이 무조건 항복하여 그들의 종이 되겠다고 한다면 화친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사자들을 이스라엘로 보내어 미리 이스라엘의 하인들이 되겠다고 무릎을 꿇었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대로 화친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한 강한 족속이 있었는데 바로 아모리 족속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기브온이 화친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에루살렘 왕 아도니세댁등 아모리의 5왕이 연합하여 기브온을 먼저 치려하자.  이들은 다급히 여호수아에게 원정을 요청합니다. 여호수아는 고심 끝에 가나안의 연합군과 전쟁을 치루기 위해 용사들을 거느리고 기브온으로 향하려 할때 여호와의 능력의 말씀이 8절에 나온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완벽한 승리를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보증 서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여호수아의 간구에 지구와 전체 태양계가 그 궤도에서 23시간 20분 동안 '태양의  회전을 중단한 사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기적이다. 더욱이 긴 낮의 초자연적 현상으로 말미암아 파괴적 우박이 수반되었다(11절). 이에 대해서 성경 자체도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4절). 또한 이는 성경의 증거 외에도 고대 중국의 문헌과 페루의 잉카(Inca), 맥시코의 아즈텍(Aztecs) 및 고대 바벨론(Babilon)과 페르시아(Pelsia) 등의 문헌에도 분명히 기록되어져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천 년이 지난 현대의 과학은 다음과 같이 성경의 기록과 완전 합치되는 수치를 계산해 냄으로써 성경 기록의 사실성을 확증하고 있다.

우주 개발 관계 과학자들 단체인 해롤드 힐(Harold Hill)의 연구팀은 인공위성의 궤도를 작성하기 위하여. 전자계산기로 지금부터 10만 년 전까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사이의 태양과 달의 궤도 진행을 살피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궤도 진행상에 '꼭 하루가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하루, 즉 24시간이 어디로 가버렸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아무리 계산을 해보아도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옛날 여호수아 때에 태양이 정지했다는 성경의 기록을 바탕으로 잃어버린 하루를 찾기 위해 전자계산기를 그 당시로 돌려 여호수아 시대의 궤도를 조사한 결과 정확히 23시간 20분 동안 궤도가 정지했었던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는 없어진 하루와 완전히 일치하는 수치가 아니었다. 아직도 40분의 행방이 묘연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곧 성경에서 왕하20:8-17있는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태양의 그림자를 10도 뒤로 물러가게 하신 사실을 찾아냈다. 놀랍게도 그 10도는 시간으로 계산할 때 정확히 40분에 해당된다. 이로써 그들은 여호수아 때의 23시간 20분과 합하여 정확히 궤도 진행상에 없어진 하루의 원인을 알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지금부터 3500여년전에 있었던 본문의 기적의 사건을 통해, 주께로 부터 오는  우리 신앙의  몇가지 큰 교훈을 수 있습니다.

본론: 첫째 하나님은 자신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은 물론 한 이방 민족을 위해서도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고 그들을 세워 하나님의 전에서 봉사하는 특권을 주셨다는 것이다. 기브온 족속은 죽을 목숨인데 이제 영원히 살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택하신 곳, 성소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브온 거민들은 영적 이스라엘 백성으로 편입됐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편입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로 편입돼서 성소에서 제사장들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도와주고 회중들에게 봉사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일하는 거룩한 자들이되어, 나중에는 느디님(Nethinim) 자손들이 됩니다. 이 기브온 거민들을 나중에 하나님께서 아껴주십니다.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의 기본목표가 잃어버린 자들과 상처받은 자와 소외된 자들이 나와 주앞에서 평안을 얻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나 간구때 그말들이 문맥이 않맞고 학문적 근거가 없어도 당신의 백성의 소리에 귀기울이시며,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본문 12절에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라고 여호와께 간구하며 외쳤다. 그는 지구의 자전을 알았고 태양의 인력을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은 지구를 멈추고 태양의 인력을 멈추어서 여호수아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우리의 기도가 체계적이고 성경적이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 “도토리 키재기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표현이 잘 못되었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자녀의 일은 좀 잘못된 것 같아도 주의 약속은 선하고 신실하게 이루신다. 주의 사역은 선하게 진행되며 주의 약속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꼭 이루어진다.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기브온 백성에 속은것 같았지만 이는 오히려 아모리 다섯왕을 한번에 궤멸시키는 승리를 가져왔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출정을 결정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는 어떤 전쟁이든 하나님이 함께하신 다는 것과 가나안 복지 점령에 대한 약속을 믿고 출정을 서두루자  8절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라는 확신을 주셨다. 오늘 신약성경 롬 8:35의 7가지 성도에게 찾아오는 시련이 있습니다. 그 중 ‘적신’이라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귀모노테스’ 헐벗음을 말함니다. 우리가 입을 것이 없어서 헐벗을 때보다 다른 사람에게 속거나 배신을 당했을 때 우리 속에 느끼는 아픔중 하나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속을 다보인 것 같아 수치스럽고 참담함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에게 처음 이런 능욕을 받았을때 이것을 이겼다.

결론: 14절 말씀을 보면.“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한낫 작은 가나안의 족속을 돕기 위한 전쟁속에 오셔서 하나님은 태양계를 멈추신 기적을 배프셨습니다.

November 21, 2021

본문: 

시편 107:1-9 

빌립보서 4:4-7

감사해야 할 이유

서론: 올해는 바로 청교도들이 1621년 처음 추수 감사절을 지킨지 400주년이 되는 귀한 해인 것이다. 우리가 매년 지키는 미국의 추수 감사절이 11월 넷째 주 목요일이다. 사실 이 추수감사절은1789년에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처음으로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지정하게 되었는데 1801년에 제퍼슨 대통령 때 영국 왕의 관습이라에서 국경일에서 폐지 되었다가 1863년 10월 3일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 중에 11월 26일 목요일 추수감사절을 연례 국경일로 선포하고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하였다. 이는 Godey's Lady's Book의 저자인 사라 헤일 여사가 링컨대통령에게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독립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받아들여져서이다. 그리고 1941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11월의 4번째 목요일로 하기로 정하였다. 그 후  교회에서는 11월  셋째주 주일을 추수감사 주일로지킨다. 우리가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북미 대륙을 개척한 청교도들(Pilgrims)의‘감사’에 있다. 400년 전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지의 북미 대륙으로 온 경건한 신앙인들이다. 청교도들이 북미로 오게 된 '역사적 배경'은 영국 헨리 8세와 제임스 1세, 찰스 1세 때 이어진 종교 박해였다. 순례자의 조상들(Pilgrim's Fathers)이라 불리는 영국 청교도들은 1600년대 초기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미 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미 대륙으로 이주한 것이 직접적인 유래에 해당한다. 청교도들은 영국 남해안 플리머스(Plymouth) 항구에서 1620년 8월 5일(지금 달력으로 8월 15일) Speedwell과 Mayflower호를 타고 美 대륙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초반에 스피드웰 배가 고장나 물이 새 다시 귀항했고. 한 달 후인 1620년 9월 6일, 결국 메이플라워호만 25명의 선원과 102명의 청교도들이 승선하여 미국 동해 중부지방 버지니아(Virginia)를 목적지로 삼고 재차 출발했다. 남자 78명과 여자 24명 등 전체 102명이 출발했으나, 항해 도중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탄생했다. 그들은 그해 11월 11일 버지니아 대신 미국 동북부 메사추세츠 케이퍼 카드(Cape Cod) 해안가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5일간 주위를 답사한 후 11월 16일 현재의 플리머스(Plymouth)에 정착했다. 63일간 3,400마일(5,440km)의 멀고도 긴, 그리고 위험한 항해 끝에 닻을 내렸던 것이다. 오늘 감사절에 우리는 보이는 외적인 추수 감사를 우리는 영적인 추수의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본론: 다윗은 오늘 시편 본문에서 여호와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4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5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6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7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8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기독교에서 ‘구속(redemption)’이라는 단어와 구원(salvation)이라는 단어가 있다. 구속( 페듀트)은 어떤 값을 지불하고 속량한 상태이고, 구원(예수아)은 위기가운데 구출 또는 큰 도움을 말한다. 다윗이 시편에 쓰는 단어가 구원이 많은데 본문은 “값을 지불하고 사다”는 의미인 “가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먼저, 감사라는 것은 구속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를 수많은 사람들가운데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자년 삼아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8형제 가운데 자기를 택하여 주신 여호와께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삼상 16:6  이하에 다윗이 사무엘로 부터 기름 부음 받은 기사가 있다. 7형제들은 성결하는 예식을 마치고 사무엘 앞에 섰으나,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시고 소외되어 들에서 양치고 있는 자신을 불러다가 사무엘을 통하여 기름을 부르셨던 것에 대한 감사가 늘 그의 마음속에 넘쳤던 것이다. 오늘 이시대를 사는 어떻게 감사를 그려야 할까요?  마태13:37-40에 보면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고 예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보잘것 없는 우리를 불러내어 바로 천국의 아들, 딸들이 되게하여 주신 신것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이 추수의 절기에 나를 쭉정이 속에서 알곡으로 구별해 주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 잉글랜드에서 온 이민인 청교도들은 바로 닥친 추위와 굶주림에 대처햐야 했고, 자신들의 전통적인 종교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든 인디언들의 항쟁과도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청교도들이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보아줄 것으로 믿고 감사를 드린 일에서 유래한 명절이 추수감사절이다. 오늘의 삶의 순간 순간의 환란 역경 속에서 배푸신 주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드려야 합니다. 미국의 도착한 청교도들을 Pilgrim이라고도 부름니다. 처럼 다윗 또한 젊었을 때 목축을 하는 순례자 였습니다. 양때를 이끌고 가다보면  재해의 밤의 추위의 위험 사나운 짐승의 위험등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젊은 청년으로 혈기 왕성한 시절 속에 그는 고독함과 지루함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금을 익혀 주를 찬양 했습니다. 그가 쓴 시들이 바로 이 시절의 경험으로 쓰여졌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시편 23이 바로 그것입니다.

셋째,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도록 나를 도왔고 지금도 나를 곁에서 지키거나 내게 도움을 주는 분들에 대해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있었던 100여명 중에서 농업이나 어업 등의 생산직 종사자는 거의 없었고, 농업 도구와 종자는 커녕 낚시를 위한 낚시대 하나 가져간 사람이 없었다. 이러니 당연히 도착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절반 이상이 기근과 풍토병으로 죽어갔다. 만약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인 알곤퀸족이나 모히칸족들이 종자를 나눠주고 옥수수 농사 기법 등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이들의 상황은 더 참담 하였을 것이다. 첫해에 추수감사제를 드릴 때90명의 원주민 인디언들은 칠면조 구운 요리와 pumpkin pie를 가져와 같이 친교를 나눴다. 그것이 유래가 되어 추수감사절에는 칠면조 고기와 호박 파이를 먹게 됐다. 저는 오늘날 제가 이곳에 서기까지 나를 기르고 가르치고 도움을 주셨던 분들이 감사절이 되면 더욱 떠 올라 그분들에 주의 커다란 복이 있으길 기원합니다.

결론: 우리가 성경을 보면 감사라는 단어가 184회 신구약에 등장한다.189회 신구약에, 153가 동사,형용사는 15회 명사는16회에 불과하다. 구약에 ‘토다’라는 단어로 139회 신약에 ‘유카리스티아’57회, 바울 서신에 43회,옥중 서신에 12회. 그리고 빌립보서에7회. 감사는 어려운 상황일수록 더욱 드려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복음송 가수 Josh Baldwin이 부른 The evidence의 가사를 소개하며 이 말씀을 마침니다. “내 인생 여정 전체에 걸쳐 주님의 성실함이 나와 함께 했습니다. 험한 겨울 폭풍은 내게 봄을 만들었어요. 세월의 흐를 때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나는 주님의 선하심의 증거를 봅니다. 내 평생 동안 나는 주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봅니다. 내 평생 동안, 내가 약할 때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내게 두려움은 올지 모르지만 두려움은 곧 떠날 것이다. 주님은 내 마음을 승리로 이끕니다. 주님은 나의 힘이시고, 주님은 항상 거기 사랑처럼 계실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선하심의 증거를 봅니다.내 평생 동안에.나는 주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봅니다. 십자가를 보고, 빈 무덤을 생각하면, 주님 때문에 내 모든죄가 사라졌어요.나를 끝없이 사랑하신 증거를 봄니다.  나는 주의 선하심의 증거를 봅니다. 내 평생 동안 나는 주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봅니다.”  이제 다시 우린 우리의 입술로 삶으로 복음의 씨를 뿌림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시 126:6)

November 14, 2021

그리스도의 신부

서론: 감사의 달 11월의 두번째 주를 맞이 하여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우리가  감사를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려 합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 우리 모든 성도는 주  예수라는 신랑과 약혼한 신부입니다. 우리를 자신의 신부로 삼기 위해 우리를 위해 온갖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다시 신부인 우리를 맞이하기 위하여 오실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즉 주님의 교회를 소개하는 은유 중에 굉장히 마음을 뛰게 하는 은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교회를 당신의 신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를 자신의 신부와 같다고 하심니다. 세례요한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신랑’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마태 25장의 예수님의 비유 중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한밤중에 등불을 들고 나가서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로 비유하고 있으며, 에베소서 5장에서 사도바울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고 변화된 Christian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로 설명하고 있다. 또 요한계시록 19장에는 마지막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천국에서 펼쳐지게 될 어린양 예수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의 혼인잔치를 보여줍니다. 유대의 결혼 풍습에 ‘정혼’ 절차 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약혼 규례보다 훨씬 강하다. 예비 신랑과 정혼을 한 신부는 거의 결혼한 것과 같은 효력을 의미한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시온과 예루살렘 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시온’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150번 이상 나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요새화"를 의미하며 "기념물"로 세워질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온은 다윗 성 및 하나님의 성으로 묘사됩니다. 성경의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시온이라는 단어는 범위가 확대되고 영적 의미가 추가됩니다. 성경에서 시온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사무엘하 5:7에 나옵니다.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시온은 원래 예루살렘 성에 있는 고대 여부스 족의 요새였습니다. 다윗이 요새를 정복한 후에,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왕궁이 세워졌으며 시온, 곧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왕국의 권좌가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그리스도의 예비 신부가된  우리가 장차 거룩한 성 시온에서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혼인을 갈망하고 있다. 이 혼인을 준비하는 신부로서 나를 어떻게 변화시켜가며, 예비신부의 수업을해야 하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우리는 주의 ‘헵시바’가 되어야 합니다. ‘헵시바’라는 뜻은 “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 “하나님께서 좋아 하는 여인”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기슴이 벅차오르고 기쁨이 용솟음 침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늘 그리스도가 내게 찾아와 내게 신랑과 주가 되셨던  그 구원의 기쁨을 되새기며 살아야 합니다. 감사의 달에 그 기쁨을 회복하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 합니다. 오늘 본문에 ‘새 이름’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주의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새 이름으로 불리운다는 것은 이전의 과오와 허물을 없이하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성품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성경에서 이름은 참 중여하다. 그사람의 이름이 그의 속성, 영적상태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창11:9) 그래서 창17:5처럼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거나 야곱처럼 온전한 새 이름을 지어 주시기도 하였다. ‘세 이름’은 성품과 내용의 완전한 변화를 뜻한다.

두번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쁄라’가 되어야 합니다. ‘쁄라’란 ‘결혼한 여인’ 뜻이다. 이것을 너희 땅으로 본문에 땅으로 묘사했는데, 영적으로 땅(territory)이라는 의미는 사람의 마음 밭을 뜻합니다. 마음 밭이 선하고 온유해야 하는 것이다.  어젠가 저희 어머님이 제가 20때 초반일 때 우리 앞에서 너희들이 “장차 결혼 배우자를 선택할 때 신앙이 아주 좋은 사람인데 성격이 그런 사람과 신앙은 별로인데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 있으면 후자를 택하라”고 조언하신적이 있다. 그 이유는 결혼 생활은 두사람이 부딪치며 조율해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때론 좋을 수도 있고 그렇치 않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

벧전3:3,4”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한국에 고전 이야기 가장 유명한 것 중에 하나가 ‘춘향전’이다. 이 소설의 주제는 ‘정절’과 어떤 상황속에서도 변함 없는 마음이다. 비록 사랑하는 이가 자기가 소망했던 꿈의 모습이 아니고 걸인 이었어도 그를 지아비로 섬기려있다. 여러분 중에 혹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받아 들이지 못했다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시고 예수님의 정혼한 신부가 되십시오.

결론: 고후11:2”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말씀한 것처럼 제가 한 사역자로서 성도 여러분에게 할 일은 여러분에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이름을 갖게 하는 것이고, 온전한 주의 신부로 준비 되어 가도록 신부수업을 시키는 일이다.” 미국의 기독교인 작가이며 시인Charles Hanson Towne라는 사람은 “이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것은 결국 침착하고 고요한 생애이다. 그들은 한곳에 머무는 별과 같다. 정해진 장소에 머물며 하나님이 주시는 빛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유성(meteor)은 굉장한 광채로 하늘을 가로지르므로 사람들은 환성을 터트려 경탄합니다. 그러나 그 유성이 사라져버린 뒤에도 그 항성(star)은 계속 빛나고 우리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별은 고요하여 결코 힘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구릉(hilly)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멋지게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데요.”   

고후3:2,3”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November 7, 2021

감사하는 자 (A person who to be thankful)

서론: 이제 감사의 달인 11월의 첫 주일 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 선생이 로마 감옥에서 소아시아에 있는 골로새 교회에 쓴 편지의 일부입니다. 골로새 교회를 설립한 에바브로디도가 로마의 감옥을 방문 했을 때 소식을 듣고 쓴 서신이 골로새서 입니다. 그 당시 골로새 교회는 요한 계시록의 7교회중 라오디게아 교회와 근접해 있는 교회로 동방의 신비주의, 유대의 율법주의, 그리고 헬라 철학적 사변종교에 휩싸여 여러 신앙적 문제에 직면해 있있다. 바울은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참 신앙과 진리를 사수할 것을 권고하기 위해 이 서신을 기록하였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안에서 감사하는 자는 어떠한 마음을 가졌으며, 또 어떤 삶을 사는 성도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Gratitude, thankfulness, gratefulness로 표현되는 ‘감사함’이란 말은 헬라어 ‘유카리스티아’  그리고 라틴어 gratus "기쁨, 감사함"에서 유래하며 친절, 선물, 도움, 호의 또는 기타 유형의 관대함을 받는 사람이 느끼는 감사의 느낌, 또는 이와 유사한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감사’라는 논제는 역사적으로 여러 세계 종교의 초점이었습니다. 그것은 고대, 중세 및 현대 철학자들의 관심 주제였고, 현대 철학자들이 계속해서 연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심리학 부분내의 ‘감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Martin Seligman이 심리학의 새로운 분과인 긍정 심리학을 도입한 1998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긍정적인 특성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둔 심리학의 한 유형. 심리학에서 감사에 대한 연구에는 감사의 감정(상태), 사람들이 감사를 느끼는 빈도(특성 감사)의 개인차, 이 두 측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와 감사의 감정에 대한 단기 경험에 대한 이해가 포함됩니다. 옛말에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었더니 내 보따리 어디다 두었느냐?”고 투덜댔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영원한 형벌에서 구해져 영원한 삶을 이미 시작됬습니다. 나의 생명을 구해 준 사실보다 더 감사할 것이 세상에 있을까요? 롬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제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할까요?

: 먼저, 감사하는 사람은 그 마음의 상태가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로 가득 채워쟈야 한다는 것이다.(12절) 감사를 의미하는 ‘Gratitude’의미는 받은것에 대한  고마움이 항상 마음과 몸에 배어 있어 attitude로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 제가 하는 설교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감사는 어떤 사람에게 부채를 느끼고 그 대상에만 잘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에게도 자기가 은혜입은 것처럼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고 죽으심이 우리에게서 보상을 받으려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둘째, 감사는 작은 것부터 시작됩니다. 눅16:10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마태25장에도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는 바로 감사함의 표현을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 선지자는 나와 보지도 않고 사환을 시켜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을 하라고만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화를 내면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아람 나라에 요단강만한 강물이 없어서 목욕하려고 여기까지 왔겠느냐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때 참모들이 나아만 장군에게 만약에 선지자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았겠느냐고 조언했습니다. 재산 전부를 달라고 해도 주었을 텐데 목욕 하는 것 같은 작은 일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하는 합리적인 제안 이었습니다 (

셋째, 감사하는 자세는 마음의 평강이 우선이다. (15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예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제일 처음 하셨던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Peace unto you!)” 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처음 신앙을 갖었 때  무엇인가 우리속에 밀려오는 기쁨과 평안이 있어요. 그리고 지나친 과욕을 부리다 보면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지 않고 감사드릴 수 없 습니다.

넷째, 감사함의 표현은 바로 찬양입니다.(16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그 감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원어 성경을 보니 프살모이스(시), 휨노이스(찬송), 오다이스 프뉴마티카이스(영적인 음률) 로 감사하라 하였다. 많은 성도들이 기쁠 때만 감사 찬양하는 것으로 착각 합니다. 욥기와 시편은 고난속에서 지어진 글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욥이 자기의 식솔들과 가산을 다 잃고 고백한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욥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저에게 많은 분들이 제가 듣지 못한 찬양을 많이 골라서 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찬양을 선택하는 기준이 본문16절과 엡 5:19절에 있습니다. 우리의 시련과 역경을 시적으로 받아 드려 주께 기도하며 천국의 소리로 감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Amazing Grace’ 찬양 좋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곡의 가사를 지은 ‘존 뉴튼’이 아프리카나 가리브해 섬에서 노예들을 납치해다 파는 배의 선장을 하다가, 주께 회개하고 돌아오고서도 7년 더 인간을 가축이하로 취급하는 노예선을 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의 찬송가 속엔 독일, 웨일즈 , 영국 국가가 등이 있어 우리가 자주 부르고, 사람들이 망년회때 부르는 노래가 우리가 쓰는 찬송가에 있어 우리가 회개할 때 자주 부르는 곡이 되어 있다. 여러분은 내가원하는 것 내게 배어 있는 다 옳다고 생각하지만 말고 우리의 다음 세대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지순례에 가면 갈 곳들이 오늘 본문에 나온 골로새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에 가면 저는 마음이 정말 슬플것 같습니다. 이곳은 지금 이미 오래전에 이슬람권에 들어가 그 복음의 꽃을 피웠던 곳은 이제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저는 가끔 교회사를 살펴보면서 한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고 복음의 확장된 후 그 지역에서  1세기 이상 번성 하지 못할까 의문점을 제기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님께 구했으나, 아직 주께 받지 못한 것들을 위해서도 감사하십시오. 이 말은 요즘 미국에서 유명할 뿐만 아니라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 배우인 Denzel Washington이 어느 대학 졸업식에서 한 말입니다.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 했으나, 아직 응답 받지 못했지만 어느날엔가 주실 것이라 확신하고 믿고 감사하십시오, 나의 세대가 아니면 다음 세대에라도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무엇에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께 감사하라” 말씀처럼 내게 감사하는 마음을 달라고 주께 기도 하십시오. 인간의 성격과 삶을 바꾸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가 순간 순간 감사를 표현하는 삶을 살기위해서는 내마음 자체가 감사하는 인격을 갗추어야 합니다. 기쁠 때만 아니라 시련과 역경속에서도 견디며 마음을 가다듬고, 주의 뜻을 해아리는 세상이 보기엔 이상한 말을 을퍼야 하며, 천국의 소리로 감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감사하는 자’라는 원래의 뜻은 ‘감사를 ‘창조하다,’ ‘이루다’, ‘실천하다.’입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만 감사하는 part time 기독교인이 아니라, 늘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가 주관하심으로 어떤상황 속에서도 감사가 흘러 나오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자체가 ‘감사하는 자’가 되야 합니다.

October 31, 2021

본문: 

역대하 34:29-33, 로마서1:15-17

제 2의 종교개혁

오늘은 전세계 모든 개신교가 종교개혁 기념 주일로 지키게 날입니다.  그 이유는 1517년 10월 31일에 종교 개혁자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그 교회당 정문에다가 95개조 항의문을 써 붙이고 종교개혁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종교개혁에 관한 역사들을 알고 있지만 저는 이시간을 통해 종교개혁의 요지 사항을 잠시 살펴보고 오늘 본문의 요시야의 개혁을 살펴보려 합니다. 

기독교는 주후 590년까지를 고대 교회사라고 하고, 주후 590년-1517년 까지를 중세 교회사라 하며, 주후 1517년 이후 현대까지를 근세 교회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후 590년-1517년 까지를 또 다른 말로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 시대라고 하며, 이 1,000년의 중세사를 암흑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초기 그토록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공인을 받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교회는 커다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황제의 비호를 받게 되자 물질적으로 풍성해지고 발언권이 강해지며, 신앙 외적인 것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교회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잃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교권이 하늘을 찌를 듯 해서 황제의 권위까지 짓누르게 되었습니다. 곧 교황이 황제의 우위에 있게 된 것입니다. '카놋사의 굴욕'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는데, 당시 로마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3일 동안이나 교황에게 맨발로 눈밭에 서서 잘못을 빈 유명한 사건입니다.

13세기 초 교황 이노센트 3세 때는 교황권의 전성기였습니다. 어떤 날 교황이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공물을 교황청 창고로 싣고 오는 수레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는 신학자에게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다는 말은 이제 지나갔다. 저 많은 물질을 보아라”고 하자, 아퀴나스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말이 없어진 것처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도 없어졌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교회가 세속적으로 부유하게 되자, 성직자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성직을 돈으로 사고 파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구원을 돈으로 파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어졌습니다.

루터는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 당시 중세 교회의 타락상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황제가 일층 왕관을 쓰는데 교황은 삼층 왕관을 쓰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추기경들도 교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도적처럼 돈에만 정신을 팔고 있다. 교황청은 성직매매, 술주정, 사기, 도둑, 강도질, 사치, 매춘행위등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로 가득차 있다"했다.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1538년 서방교회 자체 내의 로마의 추기경들도 교황 바울 3세에 보낸 '개혁의 제안'라는 글에서 로마 교회의 비리와 타락상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첫째 병폐는 성직자의 임명 문제입니다.  전적으로 자격이 없는 무뢰한과 타락자들이 성직자로 임명되고 있습니다. 로마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사제들이 무식하고 부도덕하다는 것은 분통이 터지는 일이다. 로마시 안에는 창녀들이 귀부인들처럼 왕래하는데 그 뒤를 성직자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부끄러운 병폐가 중단되어야만 하겠다"

당시 교회는 교회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서 거대한 성당을 새로 짓게 되었습니다. 그 건물이 바로 오늘날의 바티칸 궁전이 있는 성 베드로 성당입니다. 얼마나 대단하게 지었든지 시작한지 백 년이 지났는데도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건축비를 모금하기 위해서 면죄부라는 것을 팔게 되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연옥이라는 것을 믿는데, 이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고통의 장소라고 일컬어 집니다. 연옥이란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선행이 부족한 사람들이 가서 고난을 받고 있다가, 천국으로 가게 되는 장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만일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공덕을 쌓아 주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 갈 수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면죄부를 팔기 위해 루터가 살고 있는 비텐베르크에 와서 면죄부를 사라고  선동하였습니다. 루터는 여기에 심하게 반발하면서 95개조 항의 항의문을 비텐베르크 교회당 정문에 붙여 놓고 공개 논의를 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그 날이 바로 1517년 10월 31일 지금으로부터 504년 전입니다. 이 사실이 급기야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되었고, 마침내 종교 개혁의 불길이 세차게 일어나서 교회의 모습을 새롭게 변화시켜 놓았고, 교회의 변혁으로 말미암아 중세의 막이 내리고 근대 사회로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개혁자들이 외친 종교 개혁의 원리들이 무엇일까요?  루터의 주장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Solus Christus, Soli Deo Gloria)이었다.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이것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밑에 두고 있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통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정경을 결정하였기 때문에 성경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우선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의 해석권이나 성경을 읽는 것까지도 평신도들에게는 제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은 모든 신앙 내용을 교회의 전통이나 교회의 권위보다 먼저 성경에 두었습니다. 교회가 결정하였기 때문에 성경이 된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의 권위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정경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에 신앙의 표준의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성경을 신자들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개방시킨 것이 종교개혁의 근본 의도이기도 했습니다. 칼빈은 "성서를 떠나서 신앙을 논하는 자들은 광난증 환자"라고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2. 오직 믿음(Sola fide): 마틴 루터를 종교 개혁의 선봉자가 되게 한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신득의' 'sola fide' 이것은 벌써 구약의 하박국서에, 그리고 바울의 로마서를 통해서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가르쳐 준 진리이지만, 천주교에서는 이러한 진리를 고의적으로 은폐해 버리고, 구원의 조건으로 인간의 공로나 적선을 내세우며,  신도들을 속이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개혁자들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같은 주장은 성경에 근거를 둔 구원관이며, 동시에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 즉 공로 사상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것입니다.

3. 오직 은혜(Sola gratia): 당시의 로마 카톨릭은 행위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있다고 하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고, 특히 교황 레오 10세 시대에는 면죄부를 사야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논리로 우매한 신자들을 속였는데, 개혁자들은 죄를 용서받는 일이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서만이 가능하다고 외친 것입니다. 이같은 주장은 행함으로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친 1000년이 넘는 로마 카톨릭의 '이행득구'주의 이단 사상에서 모든 영혼을 해방시킨 자유의 복음이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4. 만인 제사장(priesthood of all believers):이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개인은, 신부나 사제를 통하지 않고서도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있다는 사상이며, 속죄의 근거도 철저하게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루터가 외친 개혁은 성직자들의 타락과 인간중심주의적인 사상으로 오염된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이상과 같은 도전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1000여년 동안 버티어 온 중세 천주 교회의 썩은 뿌리를 흔들어 버린 하나님의 채찍이었습니다. 성경과 복음 진리에서 멀어져 있는 당시 교회를 향하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공개적으로  개혁을 제안 한 것이다. 로마 교황청이나 로마 천주교회에서는 루터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이름 없는 한 젊은 교수의 개인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자, 교황 레오 10세는 그 다음해인 1520년 7월 15일 루터에게 파문장을 발송합니다. “60일간의 여유를 줄 테니 그 주장을 철회하라”고 협박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 협박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521년 12월 10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황이 보낸 파문장을 불살라버렸습니다. 그것을 바라본 많은 독일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개혁의 불길은 퍼져가게 되었다. 종교 개혁을 일으킨 루터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죄로부터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교권의 탄압으로부터 자유를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자유를 소유한 자만이 진정한 자유자라 할 수있을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결코 죄의 종이 되거나, 황금과 정욕과 권세와 인기의 종이 되거나, 사람의 종이 되거나, 사업이나 일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루터는 교회 음악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했는데, 음악이 신학 다음으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하였다. 음악은 신학과 닮은 점이 많은데 특히 영혼을 고치고 영들을 소생시키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음악이 없으면 인간은 목석과 마찬가지이지만 음악이 있으면 마귀를 멀리 보낼 수 있다. 루터는 “음악은 나를 자주 소생시켜 주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음악은 또한 마귀를 몰아내주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음악은 사람의 모든 분노, 음란, 교만, 그리고 모든 악을 잊게 해준다. 나는 음악을 신학 다음으로 중요하게 보며 무한히 아낀다.”고 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기원전 639년부터 기원전 609년까지 유다를 통치한 요시야왕이 기원전 621년에 개혁을 단행하는 내용이 나옵니다(왕하 22~23장, 대하 34~35장).  왕하 23:25에 보면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고 합니다.요시야는 '여호와께서 후원하시리라, 고치시리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유다 왕국의 16대 왕입니다. 그의 아버지 아몬이 그의 조상 므낫세 시대부터 계속되어온 우상을 숭배하다가 부하에게 암살당하였고, 이에 요시야가 8세에 왕이 되었다.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잘 경배했다. 그의 치세 기간은 31년간이었는데 선정을 베푼 왕이며 유다의 마지막 최고의 선한 왕이라 할 수 있다.

성서에서 요시야왕만큼 완벽한 칭송을 받는 인물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개혁을 했기 때문입니다. 요시야 당시의 시대상은 스바냐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습 3:1-5). 스바냐는 요시야왕 시절에(습 1:1, 왕하 22:1-23:30) 유다에서 예언했으며 예레미야와 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렘 1:2).

요시야왕이 개혁을 단행한 이유는, 왕실 엘리트와 종교 지도자들만 부패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신앙을 타락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면서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여호와는 남유다를 심판하기 위해서 일어나실 것인데 그들에 대한 처벌은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스바냐는 선포합니다. 바벨론 포로 이전에 두개의 종요한 개혁이 일어나는데,  히스기야 왕의 개혁과 오늘 본문의 요시야의 개혁입니다.  히스기야의 개혁은 성전예식과  종교적규례에 대한 개혁이고 요시야의 개혁은 주의 말씀을 통한 이스라엘 백성을 돌이키도록 한 신앙과 삶의 개혁이다. 오늘 종교개혁 주일에  이시대의 우리는 어떤 신앙의 개혁을 단행 해야 할께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개혁되어져야 할 것은 없을까요?

먼저, 개인주의 세상속에서 나 중심의 삶을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믿고 학습을 받고 세례를 받고서도 옛 습관이나 관습 그리고 못된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없을 것입니다. 양심이 변하고, 언어가 변하고, 행동이 변화가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과거의 잘못된 관습을 버려야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인육을 먹던 식인종 추장이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나서 인육을 먹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떤 백인 상인이 상업차 아프리카에 가서 그곳의 추장을 만났습니다. 그 때 추장은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백인 상인은 경멸하는 태도로 "그 책은 옛날 인문이 발달되지 못한 시대에나 보던 책이요. 지금같이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는 그런 책을 볼 필요가 없소."라고 말했습니다. 그 추장은 한참 동안 백인 상인을 쳐다보더니 말하기를 "만일 성경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당신은 벌써 내 뱃속에 들어갔을 것이요. 세상은 변하여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변할 수 없소. 이 말씀이 사람을 잡아먹던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만든 것이요. 과학이 결코 우리를 변하게 한 것이 아니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상인은 부끄러운 얼굴로 그 자리를 떠나가 버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종교개혁 4번째 모토인 (Solas Christus) 깊히 새겨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자기중심적이었기에 예수님으로 부터 지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 청결을 행한 모습을 보자, 자기들이 몇백년 지켜오던 철밥통을 걷어 차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둘째,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개혁을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32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하셨다.  여러분의 부모나 배우자나 형제 자매가 미웁게 보이십니? 한번 그붇들의 옛날 사진을 유심히 처다보세요. 그 곱고 아름답고 멋있던 모습들이 변해 지금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참 안타깝고 측은해 보입니다.

셋째, 우리를 긍정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의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롬12: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6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 17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하신다.

결론: 종교개혁 504주년을 맞이하는 이날 교회와 사역자가 변하지 않는다고 불평할것이 아니라. 나 개인의 삶부터 개혁해야한다. 나와 생각이 다른 모두를 미움의 눈초리로 보지말자. 비록 나와 내집에 손해를 끼친 개혁이라도 그것이 말씀에 근거했다면 지지마하며, 주님이 바라보았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October 24, 2021

본문: 

베드로 전서  1:20-25 약1:2-12

우리 인생의 꽃을 피우자

서론성도 여러분은 ‘상아탑’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상아탑 (Ivory Tower)은 구약 성경에서 처음 나온 말이지만 지금 사용하는 의미의 상아탑은 19세기부터 사용되었다. 상아탑이란 실제 생활과 동 떨어진 학구적인 환경을 의미한다. 원래 구약성경 아가서  7장 4절 의 "너의 목은 상아로 만든 탑 같고"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현대적 의미로 상아탑이란 단어를 쓴 것은 프랑스의 비평가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가 쓴 "tour d'ivoire"라는 표현에서였다. 여성을 비유하는 의미였지만 뜻이 바뀐 경우이다. 카롤릭에선 성모 마리아를 상아탑이란 지칭한다. 지구에서 사는 동물 중 가장큰 동물이라는 코끼리는 큰 것은 4-5톤 정도 된다. 그 수명은  50-70년 정도 된다. 그들의 어금니 사이에서 길게 뻐쳐나오는 뿔을 가리켜 상아탑이라 부르는데 이 단어를 쓰게 된 유래가 있다. 그들은 수명이 다하여 동물이나 사람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죽는데 후에 그의 시체가 쩍어 없어지고 난 후에 그 자리에 남은 뿔을 포함한  뼈들이 아름답게 수축된 건축물 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또 하나 동물 중에서 옛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신비하게 여기는 동물의 죽음이 있다. 한국의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여러분들 중에 호랑이를 직접 보신 분들이 있으시지만 , 호랑의 위엄성은 대단합니다. 제가 몇년 전 Oakland Zoo에가서 실제 시베리안 호랑이를 보았는데  밀림의 왕이라 불리는 사자보다도 더 늠름하고 멋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호랑이는 추운겨울 깊은 산중에 사는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그런 호랑이가 늙어 죽을 때는 아무도 자기 시체를 시해하지 못하도록 은밀한 곳에서 숨을 거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 창조된 우리의 인간이, 만왕의  왕되신 그리스도를 주로삼은 우리 성도는 우리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후반기를 어떤 꽃을 피우며 어떤열매를 맻을 것이지, 또한 어떤탑을 지어놓고 무엇을 남기고 주앞에 가야 할것인가 상고해보겠습니다.

잠언 16:31에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어르신들이 연로해지시면 두상에 보이는 두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새월의 흐름과 시련속에서 깊이 패인 이마의 주름과 은색 빛갈을 내는 백발입니다. 지금 60을 넘긴 모든 분들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인생의 출발과 성공가도가 있는 중년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인생의 마무리는 더욱 중요합니다.

먼저, 우리는 고난에 직면하는 것에 낙심하지 말자.  야고보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호주 시드니에 사는 우리 교민 한분이 고국에 왔다가 개나리 꽃이 예뻐서 우여곡절끝에 한그루를 가지고 시드니 자기집 앞 마당에 심고 잘 거름과 물을 잘 주었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어 보니 가지와 잎은 잘 자라는데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식물 전문가에게 물어 보았더니 개나리는 추운 겨울을 지내야 봄에 꽃이 피는데 호주의 시드니는 추운 겨울이 없어 봄에 개나리의 꽃이 피지 않는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추운 겨울을 지나 봄이 되어서 꽃이 피는 것을 ‘춘화현상(vernalization) ‘이라 하는데, 러시아의 생물학자 트로핌 리센코에 의해 1920년대에 주장되었다.  이 춘화현상을 갖는 꽃들은 튤립, 백합, 라일락, 철쭉, 진달레등이 이에 속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 ‘춘화 현상’을 갖는 꽃과 같습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우리 인생의 꽃은 혹한의 겨울을 거친 뒤에야 꽃 망울을 맻히는 것이다. 봄에 뿌리는 한국의 보리보다는 가을에 파종하여 뿌려서 겨울을 견딘 러시아의 산 보리가 훨씬 수확량이 많다는 이야기도 저는 들었습니다. 인생의 열매는 또한 가을 보라와 같아서 인생의 겨울을 거치면서 그 열매는 더 풍성해지고 견실해지는 것이다. 많은 Silver라고 지칭 하는 어른들이 자기는 평생 고생만 했고 별로 이룬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춘화 현상의 꼿들처럼 이제 그꽃 망울을 터트리며 꽃을 피워야 합니다. 러시아산 보리처럼 고개가  숙여지도록 이제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야 합니다.

둘째, 이런때 일수록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더 큰 꿈을 가집시다. 약1:9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오늘 우리의 현실은 참 어렵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린 이중고의 삶에 직면해 있습니다.  경제, 취업, 인간 삶의 성공에 대한 확신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성도 여러분은 죄절하지 맙시다. 얼어 붙은 대지를 녹이는 햇빛같은 따뜻한 마음을 우리주님께로 부터 받도록 기도드립시다. 본문에22절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그리스도가 주신 사랑만이 얼어붙은 우리의 서로의 마음들을 녹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야구경기를 특별히 좋아하는데 야구는 끝나는 시간이 없습니다. 수비자가  마무리를 잘 하지 않으면 경기가 끝이 나지 않습니다. 축구도 농구처럼  이기고 있는팀이 적당히 시간을 끌으면 끈나는 경기가 아닙니다. 투수를 포함한 야수들이 남아있는 아웃 카운트를 잘 마무리에해야 경기가  끝이 납니다.

결론: 우리는  인생이란 연단의 풀무의 마지막 제련을 마치려는 정금들과 같습니다. 그 금이 연단의 풀무에서 나올 때 눈이 부시도록 반짝 반짝 빛날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인생에서 만개한 꽃의 시간은 아닐지라도 그 열매를 남겨야 할 때입니다.  욥의 고백처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 23:10)는 고백을 드리는 시간들입니다.

October 17, 2021

이미, 그러나 아직 (already, but not yet)

서론1999년 97세를 일기로 사망한 구속사 학파를 대표하는프랑스 출신으로 스위스에서 주로 활동한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이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다. 그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역사적인 구원’을 성서적 사고의 핵심으로 보며 사용한 단어가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인“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단어이다. 그는 "아직 아닌", 그러나 "이미" 일어난 우리의  그 구원사건을 믿으며 살아간 신학였다.

오스카 쿨만은 그의 생애에서 세가지 큰 업적을 남겼는데, 그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중심으로 한 구속사의 개념이 분명히 강조된 것이다. 그는 신약성서의 시간적, 역사적 특성을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감으로 설명한다. 쿨만의 견해에 따르면 성서의 역사는 계시의 역사이다. 모든 계시는 신약성서의 핵심에 자리하는 구원의 역사에 관련된다. 이미 일어난 사건과 이것으로부터 비롯된 "이미"와 "아직 아닌" 사이의 긴장,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사이의 긴장이 우리가 사는 시간의 특징이며 곧 교회의 시간이다.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으되 완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명실공히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구자이다. 그가 몸소 실천한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그의 저서 "다양성속의 일치"의 내용을 요약하면, 모든 다양한 교파들은 서로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에게서 보여지는 특별한 은사와 장점을 존중하며 도저히 풀 수 없는 차이점과 간격은 교회의 제도적 연합을 추구하면서 "믿음 안에서 약한 자"에 대한 배려로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서적 기도 우리에게 가르친 신학자이다.

셋째로,1994년 쿨만의 마지막 저서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그 저서는 "신약성서에서의 기도"에 관한 것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기도에 관한 중요 본문을 설명하고 이로부터 현대인이 직면하는 기도의 위기문제와 관련하여 신약성서의 기도론을 정리하였다.

오늘 본문이 나오는 계시록은 해석상으로 오류로 인한 위험성 때문에 설교에 그렇게 많이 인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2장-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 7교회에 대한 주의 편지는 바로 이시대의 교회에 대해 주는 교훈이므로 우리가 깊히 상고해에 한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낭독한 7번째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기독교의 중심적 사상인 구원론에 대한 구절들이 있다.

7번째 교회가 있는 라오디게아는 원래 기원전 2천 년경 그리스 본토에서 아나톨리아로 이주한 이오니아인들에 의해 세워져 디오스폴리스(Diospolis) 혹은 로아스(Rhoas)라고 불렸으나, 알렉산더 대왕 사후 시리아를 중심으로 세워진 셀류쿠스(Seleucus) 왕조 안티오코스(Antiochos) 2세가 기원전 261년과 253년 사이 도시를 재건하면서 자신의 부인인 라오디케(Laodike)의 이름을 따 라오디게아라 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에베소(Ephesus)에서 동쪽 수리아(Suria)로 가는 길에 있어,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길목 중 하나입니다. 아시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라오디게아는 금융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은 동방과 서방을 이어주던 실크로드 주요 지점에 세워진 관문 도시여서, 모든 물자와 사람들의 왕래와 거래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돈이 많이 몰리게 됐고, 금융 산업이 발달한 부유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의 기록에 의하면 라오디게아는 당시 지상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였는데, 주후 13년과 61년 대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을 때도 로마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지방정부만의 힘으로 재건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들의 첫째 문제점은 미지근한 신앙이었다. 그것의 가장 커다란 원인은 물질적 부유때문이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면 신앙인들의 대부분이 나태해지기 시작 합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자칭 부요한 사람'이라 할 정도로 부하여 하나님까지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또 그곳에서 생산하는 멋지고 아름다운 의복을 자랑했지만, 주님은 벌거벗은 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눈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과신했지만, 주님은 정작 자신들이 눈먼 줄 모르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신앙이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로부터 라오디게아로 흘러오는 물 같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예화 : 미국 남북전쟁에서 남군의 바지와 북군의 상의를 입은 병사.

그리고 두번째 문재점은 영적으로 곤고하며,가련하며 가난한자이며, 눈 먼것과  벌거 벗은 것을 알지 못했다. 사도바울은 롬7:24에서 “오로라 나는 곤고한 삶이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저내랴?”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곤고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Pascal이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자기를 죄인시하는 의인과 자기를 의인으로 여기는 죄인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고 영적 분별력이 없었다. 2장의 서머나 교화와 정 반대였다.

이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주님이 제안하셨는데, 그첫째가18에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금은 믿음과 주의 말씀을 불의 연단은 시련을 의미하는 것이다. 라오디게아는 금이 풍부했다. 시련에 연단된 말씀과 믿음은 그리스도의 에게서 사야한다. 시험과 핍박은 외부에서 오나 , 거기에 연단된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온다. 힌 옷을 입은 다는 것은 사죄를 받고 의롭다함을 얻은 자의 모습. 라오디게아는 직물의 명산지 였으나, 의의 옷은 그리스도에서  사야 한다. 안약이란 영계를 바라볼 수있는 성령의 투시력과 판단력이다.

셋째, 문밖에서 애타개 두두리는 주님의 노크노리를 듣고 문을 열어 그분을 영접하라.3:20절을 소재로 한  Holman Hunt의 그림인 ‘The Light of the world’ 유심이 음미하라. 예수님의 동작은 문 밖에 서서 두두리시며, 우리는 주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동작이 필요하다.  그리고 문을 열어 그를 맞이하면  쌍방의 동작인 식탁나눔이 있다.

결론: 많은 교인들이 일회적인 구원인 ‘이미’라는 단어만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이라는 영화로운 구원이 남아있다 . 하나님은 ‘아직’ 구원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두가지를 부탁하신다. 첫째는 회개하고 둘째는 ‘아직’ 이루지 못한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라.

October 10, 2021

일치와 조화의 신앙

서론우리가 네오나르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면  오른편에 여성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남성인 요한의 모습이 그려저 있다. 요한복음13: 23에  “그때 주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 곧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자가 예수의 품에 기대어 있더라.” 주님의 품에 기대어 있던 사람은 바로 요한이었다. 요한은 자기 자신을 언제나 이런 식으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자라고 지칭했다. 그는 요20:2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을 쓴다. “그녀가 달려가서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와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20:3,4,8에서는 자신을 가리켜 “예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라고 지칭했다. 저녁 먹는 자리에서 예수의 품에 기대어 앉아 있는 사람을 21:20에서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지칭했다. 이 사람이 요한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21:24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을 증거하고 또 이런 일들을 기록한 제가가 이 사람이라.”고 표현 되어 있다, 요한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이다. 요한이 자기를 이런 식으로 지칭하기는 했지만 그는 또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라(요13:1)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요한 자신만을 사랑하신 것은 아니라는 언급을 잊지 않고 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다보면 몇가지 놀라운 사실들이 있는데, 문장의 상세한 기록과 섬세한 표현력을 발견하곤 한다, 그중의 하나가 오늘 우리가 읽은 1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이다. 예수님의 기도를 어떻게 이렇게 사실적이며 시적이며 체계적 교리로 표현하고 있는지 경탄을 금치 못한다.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독일의 신학자 ‘멜란히톤’은 이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드린 이  기도보다 더 높고, 깨끗하고 , 아름다운 소리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들린적이 없다.” 라고 했다. 그리고 칼빈 선생은 “이 기도는 예수의 설교에 이 기도는 예수의 설교에 권위를 주는 인장이다.”라고 했다. ‘마틴 루터’는 “그 울리는 소리는 단순하나 그 깊이와 넓이와 풍성한 것은 이를 측량할 수 없다.” 또 신학자 ‘벵겔’은 “이는 성경 전체 중 말씀은 가장 쉽고 뜻은 깊은 한 장이다. 오늘 본문의 기도를 보통 “대 제사장의 기도”라고 한다.  참되시고 완전하시고,영원하신 대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계셔서 모든 교회를 위해 기도 하셨기 때문이다.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드리신 기도의 내용이 나오는  몇 곳이 있다. 산상보훈 중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기도문(마6:9), 갈릴리를 떠나실 때의 찬미의 기도(마11:25), 나사로를 불러내실 때의 기도(요11:41),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마26:39이하)등이 있다. 하지만 오늘의 기도처럼 길고 상세하고, 섬세하고 수사학적 기도문은 다시없다. 이기도의 내용은 1-5절 까지는 주님 자신을 위하여, 6-19절은 제사들을 위하여, 20절- 마지막26절까지는 주를 따르는 온 교회를 위한 기도이다. 오늘 본문의 기도를 유심히 살펴보면 ‘아버지’란 단어가 36회나 등장하는 것이고, “하나되게 해주세요”라는 말이 특별히 많이 등장한다.

이 기도의 중심 요지는 일치(unity,헤노테스), 그리고 조화(Harmony, 쉼피호네시스)이다. 먼저 우리 성도는 주안에서하나되야 하는 것이다. 엡4:3-6,1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먼저 ,인간이 선과 악의 열매를 먹은 이후로 그들에겐 분리하려는 시도가 끝 없이 계속됬다. 가인은 아벨과 자신이 하나님관계 속에서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아벨을 질투로 죽인 것이다. 하나님과 자기 관계에 방해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기도 아벨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망각한 이유는 비로 불리 의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하나님과 먼저 불리됬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같고 있는 자기 동생 아벨에 대한 미움과 질투가 싹텄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요한이 자신을 두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든가 “예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라고 지칭한 것은 주님께서 특별한 면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을 사랑하셨음을 의미하고 또 요한 자신은 다른 제자들보다 자기가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음을 나타낸다.

요한의 이러한 감정이나 표현은 유치한 사람들이 주님을 향하여 느끼고 말하는 그런 사랑, 사랑, 사랑 주님을 사랑해요 따위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사도요한의 성격은 다른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견고하며 옳지 않는 일에 대해서 칼날같던 사람이었으며 타협할 줄 모르는 대쪽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사랑이란 말은 그런 유치한 사람들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요한은 지금 주님의 가슴에 기대앉아 있다. 말하자면, 요한은 그 누구보다도 주님과 가까이 앉아 있는 것이다. 하늘의 그룹들도 요한만큼 주님께 그렇게 가까이 있지는 못했다. 요한은 지금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주님의 심장에서 맥박 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피의 고동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 성도의 신앙의 특성중 ‘조화’라는 너무도 중요하다. 우리는 좀 어려운 단어지만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인 “삼위 일체” 주요 요지는 ‘일치ενότητα’, ‘조화αρμονία’, 그리고 역동성δυναμισμός과 ‘다양성ποικιλία’이다. 우리 성도들은 주께서 모든 성도에게 개개인의 다영한 인격으로 찾아 오시는 것이다. 내가 이해한 한나님의 역사는 다른 사람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음악의 교향악을 ‘심포니’라 하는데, 이는 헬라어 동사 ‘쉼포네오’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는 성도 개개인의 특성적 신앙이 함께 연합하여 더 큰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사도 요한은 수제자 베드로에 비하면 예수의 공생애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나 그는 그자신 나름대로 자신이 가장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며 감사했고, 자기자신에게 다가온 주의 은혜를  영감을 받아 기록한 요한 복음과 서선을 통해 주의 제자중 가장 많은 사람을 주앞에 나오게 하며 기독교의 확장에 커다란 공헌을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그리고 그가 상세하고도 섬세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속에서 우리는 주안에서 우리가 하나되며 서로 조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October 3, 2021

영적인  감수성

서론오늘은 한국의 ‘개천절’, 즉 하늘이 열리는 날 입니다. 영어로는 ‘National Foundation Day’입니다. 단기 년수로는 4344년이다. 기독교 인들을 비롯한 많은 한국 사람들이 5000년전의 신화속 건국의 날을 우리나라의 정식 공휴일로 지키는 것에 반대하기도 한다. 우리 기도교인의 개념으로는 보기엔 우화처럼  우습고 흥미 있는 단군 탄생 신화를 보자. 고전문서인 ‘삼국유사’ ‘태백일사’ ‘환국본기’에 보면, 환인의 서자 환웅이 ‘홍익인간’의 뜻을 품고 풍백, 우사, 운사와 제세핵랑군 3천명을 거느리고 삼위태백산의 신단수 밑에 신시를 세웠다.그 도시의 이름이 ‘베달’이다. 이 때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사람되기를 빌어서 환웅이 둘에게 쑥 한심지와 마늘 스무개를 주면서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사람이 될 것이라 하였다. 이를 지켜 21일만에 여자가 된 곰이 환웅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며 이름을 단군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서 창세기인간 타락사를 보면 그렇게 단군 신화가 우리에게 황당한 신화도 아니다. 창세기의3장과 이사야 14장 12절 토대로보면  인간이 타락할 때 하늘 천사였던 루시퍼가 타락하여 동물인 뱀속의 들어가 인간과 같은 인격으로 대화하며 하와를 꾀어 타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계12:9에는 큰 용이 곧 옛 뱀이며 마귀이고 사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단군신화의 근거에서 출발한 우리 민족이 유대인의 관습과 비슷하여 범사에 종교성이 많은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닌가 한다. 이제 구약 성경속의 유대인의 역사로 가보자.

오늘 본문은  소 선지서의 가장 서두에 있는 호세야서의 마지막 장이다. B.C 722년경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스라엘이 주의 사랑을 저리고 타락하고 퇴폐한 길로 들어섰다, 결국 그들은 앗수르의 침공에 의해 함락되었다. 그들에게 호세야를 보내셔서 타락한 길에서 돌이켜 하늘의 백성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주 하나님의 애타는 부르심이 나타나 있고 또한 회개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의 뜻은  ‘구원’이다. ‘여호수아’ 이사야와 거의 같은 의미이다. 신약의 ‘예수’ 같은 의미인데 이는 헬라어식 표현이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 대신 참회의 기도를 드리고 여호와께 모든것을 마끼고 순종을 약속하라고 외친다.

우리가 보통 중.고등학교 때 I.Q Test라는 것을 했습니다. intelligence quotient라는 말인데, 이것은 지능 지수, 간단히 말해서 사람의 추론 능력의 척도입니다. 다시 말해, IQ 테스트는 정보와 논리를 사용하여 질문에 답하거나 예측을 할 수 있는 정도를 측정합니다. 또 요즘에 유행하는 능력 지수중 ‘E.Q 지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emotional quotient’이다.  감성 지능(감정 지수 라고도 함)은 자신의 감정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이해, 사용 및 관리하여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효과적으로 의사 소통하고,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도전을 극복하고 갈등을 완화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는 ‘S.Q’라는 지수가 필요합니다. ‘Spiritual Quotient’이 우리 주의 자녀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 능력은 사도 바울처럼 3층천을 가보는  그런 능력이나 심오한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것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예배와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를 체험하고 주님의 뜻을 발견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에겐 어떤 종류의 ‘영적 감성’이 필요한 것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 생각해 보려합니다.

본론: 먼저 주의 말씀을 인지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본문 2절에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 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들은 말씀을 인지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주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훈련들을 게을리하기에 그 말씀을 인지하여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작용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시편19편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10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4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둘째, 돌이키는 능력지수 높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원죄의 죄책을 유전받았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에게 의지하거나 세상의 제물과 명예와 권세에 의지하여 타락의 길로 빠져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더이상 죄책의 유전과 자발적 타락으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지 않도록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회개의 초청는 간절하고 고귀하며,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 초청은 값없이, 조건없이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직접 회개에의 욕구까지도 섭리하신다. 본문 3,4절에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찌니라 4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 지난 2주전이 유대의 속죄와 회개 절기인 ‘Yom Kipper’  기간 이었습니다. ‘욤 키프르’는 레위기23:27에 의하면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하셔서 유대교에서 일년 중 가장 거룩한 날이라 명합니다. 그 중심 주제는 속죄와 회개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이 거룩한 날을 하루 동안의 금식, 고해성사, 집중적인 기도로 지킵니다. 종종 하루의 대부분을 회당에서 보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인지하고 그 은혜 나의 위에 머물게 해야 한다. 5절”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6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7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찌라 저희는 곡식 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우리가 주의 은혜의 임재를 가장 크게 느끼는 곳은 예배 드릴 때 입니다. 요즈음엔 온-라인 예배를 많이 드리는데, 우리의 편리주의에 의한 예배가 아니라 가정에서도 열정,겸허, 거룩한 자세로 예배를 드리며 주의 임재를 체험해야 한다. 어떤 분은 찬양을 드릴 때 주의 은혜를 많이 받는 다고 하는 주의 임재를 진실로 느낄 때는 찬양을 들을 때 더욱 느낀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도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를 체험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배와 삶이 완전 분리되 있는 교인이 많은데 예배와 우리 삶은 항상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결론: 5절 서두에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이슬과 같다”고 하셨다. 옛날 광야에서 샘을 팔때 물줄기를 찾는 방법이 있는데, 새나 닭의 깃털을 밤에 평지에 꽂아 놓고 아침에 이슬이 내릴 때 그 깃털이 건조한 지점이 물줄기가 있는 곳이라 판단한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반대의 특이한 사실이다. 땅이 매마르면 아침에 이슬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한다. 우리 성도 들도 이슬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 성도의 심령이 더 갈급해야 한다. 시편 42:1-2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우리가 하늘이 열리며 주의 임재를 느끼기 위해, 오늘도 우리 육신의 욕구와 세상에 대한 욕망을 줄이고, 주의 은혜와 임재를 경험키 위해 우리의 심령이 더 갈급하며 영적 감수성을 더 키우는 성도가 됩시다.

September 26, 2021

성공과 실패보다 중요한 것

서론신약 성서에서 문장의 분량으로 봐서 가장 길게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누가’이다.  바울이 13개의 서신을 기록했으므로 각각의 책과 장,절은 가장 바울이 기록했다. 그러나 책의 문장의 분량은 누가의 기록이 가장 길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보면 각 장의 절이 오늘 눅15장 처럼 작은 절도 있지만, 평균 40절 이상이다. 누가복음은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 설화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이후의 사도들의 삶과 초대교회 설립, 발전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성령의 감화를 받아 기록한 누가의 문헌은그 분량과 사상에서 우리 기독교 중심이 된다 오늘 본문 15장에는 예수께서 선포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세가지의 주제가 비유로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잃은 양의 비유 그 둘째는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의 비유’, 셋째는 ‘탕자의 비유’이다. 여기 세가지 비유 재미있는 숫자적 비율이 나타나는데 잃은양의 비유는 100:1, 드라크마의 비유는 10:1, 탕자의 비율은 2:1이 된다.  눅19:10)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예수께서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15장의 세가지 비유는 기독교의 중심 사상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범죄한 이후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피조물이다. 세계에서 제일 큰 단일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했다는 한국의 조용기 목사가 지난 14일 86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많은 분들이 그 분을 진정 성공한 목회자라 하여 그의 공적을 기리고 추앙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에게 사적으로 수많은 교회 재산을 증여해주고 세금을 포탈하여 법원에서 유죄를 받은 것은 우리눈에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영어에 “Failure is but a stepping  stone to  success” “Failure is the only high road to success”란 말이 있다. 우리말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라는 말이다. “나는 99% 실패했고 성공한 건 1%에 불과하다. 중도에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너무 많았다.” 노벨 화학상을 받은 미국의 생화학자 Robert Lefkowitz가 한 말입니다. 레코프위츠는 외부 신호에 반응하도록 하는 '구아닌 단백질 연결 수용체'의 기본적 성질과 구조를 해명한 공로로 2012년 노벨 화학상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또한 우리가 자주 말하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패를 교훈 삼아 원인을 분석해 이에 대비하면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토마스 에디슨도 "실패한 것이 아니다. 잘 되지 않는 방법 1만 가지를 발견한 것", "나는 실험에 실패할 때마다 성공에 한 발씩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패 없는 성공이란 없다"는 말을 남겼죠. 과학계에서도 실패를 겪어본 사람들이 훗날 더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실패했더니 더 성공 하더라” 말이 있습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Center for Science and Innovation의 연구원인 Dashun Wang의 연구진은 '마태 효과'를 기반으로 연구를 했습니다. 마태 효과란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부익부 빈익빈'입니다. 연구진은 국립보건원 과학자들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1990~2005년까지 보조금을 신청한 초보 과학자 1,200여명의  연구진 과학자들 신청한 보조금의 획득 여부를 파악했습니다. 561명은 가까스로 보조금을 얻어냈고 나머지 623명은 보조금을 놓쳤다고 합니다.  5년 동안 보조금을 받은 과학자들이 획득한 보조금의 평균 액수는 130만 달러였다고 합니다. 연구진은 보조금을 받은 초보 과학자들의 10년 후도 분석했습니다. 연구진은 지원 받은 과학자들이 얻은 보조금, 과학자들이 발행한 논문, 그리고 이 논문들이 인용된 횟수 등을 활용해 과학자들의 성공 여부를 파악한 결과 보조금을 받은 과학자들은 마태 효과와 대체로 일치하는 결과를 보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보조금을 못 받은 과학자들이 보조금을 받은 과학자들보다 더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논문 인용 수도 훨씬 많았다는 점입니다. 이 과학자들은 연구에 사용하는 돈의 액수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10년 동안 가장 많이 인용된 상위 5%의 논문을 발표한 사람의 비율이 보조금을 받은 과학자들보다 21% 높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15장에 있는 세 가지 비유들을 자세히 살펴 봅니다. 곧 “잃은 양의 비유 (15:3-7),”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8-10)”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 (11-32)”. 이 세 가지 비유들은 내용은 다르지만 사실 같은 주제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잃어버린 것에 대한 주인의 안타까운 마음과 그것을 도로 찾았을 때의 기쁨”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다른 세 가지 비유들을 이용해서 이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면 이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주인의 안타까운 마음과 그것을 도로 찾았을 때의 기쁨”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지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은 자들’ 을 찾기 위한 하나님의 간절하신 뜻을 섬기시고자 이 땅에 오셨으며, 그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에게 이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드렸던 기도를 기억해 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주의 자녀들은 이미 인생을 실패에서 성공에 이른 사람들이다. 이제는 실패니 성공이니 그것에 매달린 그리스인이 되어선 않된다. 우리의 영적 삶의 과정과 방향에 우리삶에 focus를 마추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안에서 어떤 삶의 과정을 이어가며 목표를 설정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우리는 정말 존귀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너무 잘아는 벧전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둘째, 악을 쫓지 말고 선을 쫓아야 한다. 롬12:9,17.21에 보면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신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 속에서  집에 있던 큰 아들이 질투에 사로 잡혀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기원전 2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외경 ‘아담과 하와의 생애’란 문헌이 있다. 이 문헌은 우리가 아는 단테의 ‘신곡’과 밀턴의 ‘실락원’의 영향을 준 문헌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추방된 이후에도 사탄(루시퍼)은 그들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게 유혹한다. 그 이유는 아담과 하와 때문에 자기가 하늘에서 추방됬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기전에는 자기가 하나님께 주목받아 ‘아침의 별’이란 칭호까지 받았는데, 인간을 도와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여 하늘에서 쫓겨났다고 아담에게 사탄이 말한다 (문헌 15, 16장). 피조믈의 질투는 악으로 가는 첩경이다.

셋째, 우리 삶을  잃은 양 찾아 나서기와 돌아올 탕자를 맞이하는 일에 드려야 한다. 우리가 구원을 얻었을 때 감격해 했던 것은 하나님이 부족한 나를 찾아주셨기 때문이다. 시편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결론: 우리는 이미 모두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다. 세상에서의 성공의 갈증을 느끼지 마라. 세상이 나를 알아 주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마라. 잃어 버렸던 양같은 우리에게 목자같은 하나님이 독자 예수님 예수님을 동원하여 찾아서 우리르 그 품에 않고 있지 않는가? 내 뜻대로 살며 방황하다 인생의 뒤안길에 주저 앉았다가 아버지의 집이 그리워 그분의 집에 들어와 쉬고 있지 않은가요?

September 12, 2021

깨어있는 성도

서론어저께가 911테러 사건 20주년이었습니다. 20년전 어제 미국 역사상 최초로 민간인 신분의 미국인이 하루에 3000여명 이 사고로 목슴을 잃었습니다. 정확하게는 2996명이 무고한 시민들이 테러리스트 공격으로 가슴 아프게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모든사람들이 뉴욕의 Twin tower가 무너지는 광경과,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을 충격속에 넋을 잃고 바라보아야 했다. 지금도 그 상처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이 남아 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 온 세계는 코로나19바이러스로 2억 이상이 감염되었거나 지금고통을 당하고 있고, 그리고 460십만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한 전염병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의 이동이 통제되고 경제가 멈추어 버리자 생존이 걸린 가난한 사람들은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들은 현수막을 내걸고 코로나 전염병을 이기게 해주시고 물러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기도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죄악를 회개하며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를 구해야 할 시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때’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 때는 인간의 시간인 크로노스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은 화해, 용서, 사랑이 선재 되어야하는 것이다.

오늘본문 말씀을 통해서 큰 감화를 받고 회심하여 우리 신구교 기독교 역사에서 위대한 족적을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1600년전 아프리카의 해안 타가스테 지금의 알제리에서 기독교역사의 획을 그은 한 인물이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옵니다.  히포에서 (알제리) 출생하여 회심한 후 그곳의 감독으로 역사의 한 획을 굵게 그은 교부. 성 어거스틴(St. Augustin, 354-430) 입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어머니 모니카였습니다. 모니카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여 방탕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든 여인입니다. 모니카가 어거스틴을 육욕에서 벗어나 신앙적인 사람으로 만든 사람이라면, 밀라노의 감독이었던 암브로스는 어거스틴을 지적인 방황에서 벗어나 진리의 빛으로 인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암브로스 감독의 영향으로 서서히 이단 마니교에서 벗어나 올바른 신앙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지적인 회심은 그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진리를 깨달았지만 여전히 의지력이 약하여 악을 뿌리치지 못하고 쾌락을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이때 어거스틴에게 결정적으로 회심의 불을 붙인 사람은 그의 친구 폰티키아누스입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Monica)는 부드럽고 정숙하고 열열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어머니였지만, 그의 아버지 파트리시우스(Patricius)는 정열과 현세적인 야욕이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17살 때 카르타고로 유학을 가면서 방탕한 생활이 시작되고, 한 아프리카 여자와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모니카는 "기도의 아들은 망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십여 년을 하루같이 아들이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오도록 기도하였습니다. 모니카는 아들과 동거해 온 여자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세례를 준비하며 2년을 기다려 정식으로 결혼하라고 했지만 어거스틴은 2년을 기다리지 못하고 정욕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죄인 줄 알면서도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탄식하며 괴로워하였습니다. 이런 어거스틴에게 결정적으로 회심의 불을 붙인 사람은 그의 친구 폰티키아누스입니다. 그가 어거스틴을 방문하여 애굽의 수도사 성 안토니 이야기를 나눌 때, 정욕에 사로잡힌 자신의 비참한 모습이 눈앞에 스크린처럼 드러났습니다. 어거스틴은 정원 뜰로 나가 "왜 나는 이 더러운 생활을 깨끗이 끝내지 못할까?" 애통하여 부르짖으며 폭우 같은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 때에 갑자기 이웃집 뜰에서 아이들이 "집어서 읽어라, “tolle leg”집어서 읽어라"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는 서재로 뛰어가 성경을 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로마서 13:13절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광명한 빛으로 어거스틴의 영혼과 폐부를 찔렀습니다. 드디어 폭풍은 지나가고 평화가 그의 온몸에 가득하였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재물과 육신의 쾌락에 깊이 사로잡혔던 삶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어머니의 아들은 망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여인들이 되시길 바람니다. 오늘 말씀 통하여 하나님의 시간대를 사는 사람은 이 중요한 시대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상고해 보겠습니다.

첫째,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11,12절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했습니다.재가 앞서 여기서  말한 그 때, 인간의 시간인 크로노스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어둠의 그늘에서 깨어나 빛의 날을 준비해야 한다. 시57:8 “내 영광아 깰찌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깨어 있다는 것은 지금의 잘못된 생각과 삶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정결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 없는 생활을 청산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주 안에서 정결한 삶을 사는 것은 거짓과 탐욕을 버리는 삶입니다. 우리는 먼저 말할 때 진실한 부분만 말해야 합니다. 내가 들은 것을 말하기 보다 내가 확실히 본 것을 말해야 하고, 내 개인의 사견을 말하기보다 많은 사람이 수긍하는 자료를 통해 말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갈망하지 말고 지금 내 삶에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을 구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영육적으로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본문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는다”는 말은 주예수를 닮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4:13-14) We know we were made for so much more than ordinary lives. It's time for us to more than just survive- 우리는 우리가 평범한 삶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위해 창조되어졌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단순히 생존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할 때입니다.

마지막으로 지금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때 입니다. 오늘 본문8절에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지금은 누구의 잘못을 비판하고 책임을 추궁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하나님께 보여줄때입니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영생하도록 흐르는 생명수를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주님을 더 갈망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우리의 영혼을  하나의 소망으로 채우주십시오. 주님을 알고 주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높이 들어 올립니다. 태양처럼 빛나고 어둠이 도망하여 숨도록. 말할 수 없는 우리의 기쁨, 사그라들지 않는 믿음, 멈출 수 없는 사랑,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가능하록 해야 합니다.

September 5, 2021

수고로이 얻는 복

서론이번 주말이 미국의 노동절(Labor Day) 연휴 입니다. 원래 ‘Labor’ 란 말은 “work, especially hard physical work” 육제적으로 힘든 일을 말합니다. 창세기 3장에 인간이 타락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한 이후로 주께서 “너희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물을 먹으리라”(창3:17) 하셨다. 타락한 인간이 세상에서 복을 받아 봐야 일시적이며 제한적인 행복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에게 주시는 복도 수고하며 얻어지는 것이 더 소중한 복인 것이다. 저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잘 아는 역대상 4:9,10절의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수고로이 얻어지는 복에 대하여 상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언급하기전에 오늘 본문이 나타난 역대상의 기록과정을 잠시 살표보자. 역대상 바로전의 책 열왕기는 신명기 역사관에 기초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왜 멸망했고 포로가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멸망의 첫 단추는 솔로몬에게서 시작합니다. 솔로몬은 나단이 받은 다윗언약에 기초하여 다윗의 씨로서 영원한 왕권이 보장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성전을 건축하면서 여호와 신앙을 견고히 하였고 신28장의 언약적 복에 따라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고 모든 백성이 평화와 풍족함을 향유하지만 솔로몬 말년에 우상숭배가 확산되고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갈라지게 되고, 남북 각각의 왕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깨뜨리고 본격적인 우상숭배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물론 남쪽의 유다에 개혁적인 왕이 등장하여 여호와 신앙 회복 운동을 하였지만 일시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해, 각각 앗시리아에게, 남은 바벨론에 멸망하게 됩니다.  열왕기는 그 멸망의 책임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에게 있으며, 멸망의 이유는 신28장의 언약적 저주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열왕기는 남북 왕들의 하나님을 저버린 악행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비판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야베스의 복을 기록한 역대기는 바벨론 포로에서 70년만에 다시 유대땅으로 복귀하면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믿음을 통해 언약적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열왕기와는 달리 용서와 회복의 관점에서 기록하였으며(예를 들면 므낫세 왕의 회개의 모습을 상세히 기록),  성전 건축을 통한 여호와 신앙의 회복을 지향하는 점에서 역대기-에스라-느헤미야는 연속선 상에 있습니다.

역대기는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이 깊은 좌절과 절망에 있을 때, 비록 불순종과 바알숭배, 세속화와 인본주의로 주위의 열국에게 멸망당하였지만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하신다는 위로의 소망을 담고 있으며,  다시 회개하고 온전한 믿음을 가져 하나님께 겸손히 순종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면 하나님이 대대로 영원하며 형통하게 될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신다는 희망을 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대상4:10절은 ‘야베스의 기도’라고 알려져 있다. 이 부분을 통해 부르스 윌킨슨이 저술하여  2001년도 출판된 책이다. 내 삶을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원리라는 부제목이 있다. 야베스 기도는 2001년에 첫판이 나왔고, 필자가 받은 책은 2002년도에 153쇄의 책이다. 엄청난 판매를 기록한 책이다. 미국에서 출판 해당년도인 2001년에 800만권 이상이 팔린 책이다. 한국에도 엄청나게 팔리고 소개가 되었다.  야베스의 기도라는 찬양도 다양하게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워십 댄스도 유행했다. 또한 미국의 경우 야베스의 기도가 하나의 상품 로고가 되어서 엄청난 부산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실제로 뺏지 목거리, 장식 등이다. 또한 야베스의 기도 출간 이후 후속 책들도 많이 나온 것 같다. 대단한 영향력이다. 야베스의 기도가 브랜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의 가치는 실제로 기도가 가지는 힘과 능력을 성도들에게 소개하고 기도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에 있다. 한 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부담되지 않는 분량의 내용으로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다. 저자는 야베스의 기도에 나오는 내용을 기초로 삼아,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진 기도의 응답을 간증 형식으로 연결해서, 저자가 이해한 야베스 기도를 증명하고 이런 기도를 드리도록 격려한다.  읽어보면 나름의 감동을 우리에게 주고, 기도를 통해서 삶을 더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좋은 메시지를 준다. 이기도에서 야베스가 유다의 자손이었다는 것보다 고통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더 존귀한 자였다는 것이다. 힘들게 얻은 자녀가 더 귀한 것이다. 마치 신약에서 잃은 양과 탕자의 비유가 큰 의미를 주듯이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시기도 했지만 값을 지불하여 사기도 했다.

야베스의 기도의 본질에 충실하게 소개해 보자. “복에 복을 더하사 지경을 넓히시고 모든 환란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먼저 야베스의 기도의 주인공인 야베스에 대해서 살펴보자.

먼저, 야베스는 태어날 떄 부터 수고로이 어미가 그를 낳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야베스는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어머니가 지어 주었다. 본문에서 “수고로이 그를 낳았다”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야베스라고 이름을 지은 이유는 그 어머니가 수고하면서 아이를 낳았기 때문이다. 수고라는 단어는 고통이란 단어이다. 수고, 고통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야찹이다. 그런데 야베스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야차브라는 말의 자음 순서를 뒤바꾸어 놓은 것이다. 야차브가 아니라 야베츠이다. 두번째와 세번째의 자음을 교환했다. 신약에서 헬라어로 수고하다는 단어가 ‘코피아오’ 발음하는데 한국말로 좀 재미 있는 발음이다.(마11:28) 성경에는 야베스라는 이름이 이곳 외에는 나오지 않는다. 길르앗 야베스라는 말과 한글은 같지만 자음의 구성이 다르다. 고통스럽게 낳은 아들이기에 어미가 야베스라고 했는데, 성경에서 자녀의 이름을 어머니가 지어주는 경우는 흔하지는 않지만 드물지도 않다. 야곱의 열 두 아들의 경우 그들의 이름을 모두 레아와 라헬이 지어 준다.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특수한 경우이다.

둘째, 내게 복의 복을 더해달라는 의미는 영과 육의 복을 , 그리고 하늘 나라를 이땅에서 준비하는 복을 달라는 것이다. 오늘의 많은 기독교인은 그저 구원 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 복을 생각하면 이땅에서 부와 지위 명예를 얻는 것만 생각한다. 지금 교회의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은 야베스의 복에 열광하며서, 많은 물질적인 복, 현세적인 성공, 부와 명예, 많은 땅을 소유하는 복, 행복하게 오래 오래 잘 사는 복이 야베스의 복이 의미하는 것인 줄 착각하고 믿고 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라는 찬양을 하면서 야베스처럼 성공하게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진짜 야베스가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샤머니즘 기복신앙과 야베스의 복이 결합하여 복음이 더욱 변질된 것을 보면 역대기를 쓴 저자가 하늘에서 보고 얼마나 가슴을 치며 통탄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믿는자는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것이 첫번째 복이요. 여기에 복을 더하는 것은 이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J.S Mill이란 분은 “살찐 되지가 되는 것보다 고민하는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 했다. 부와 지위와 명예로 소유하는 자가 되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재하는가 즉, 삶의 질이 더 중요하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멸하도록 하자.(롬12:2)

셋째, 그의 긴구에서 첫째 언급되 있는 나의 지경을 넓혀 달라는 의미는 자기도 수고할 각오가 되있다는 말이다. 본문이들어 있는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주장하기를역대기는 문헌들이 유대인들이 70년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편집되었거나 삽입되었던 것으로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시기  야베스 기도에서 나의 지경을 넓혀 주라는 기도는 수 많은 수고와 시련을 각오하겠다는 것이다. 폐허된 고국 땅에서 자기의 지경을 넗혀 개척한다는 것은 수만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물론 구약시절의 땅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기업의 척도였다. 아마도 많은 목회자들이 이것을 부와 재물에 대한 간구로 해석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우리의 지경은 나의 영적 영향력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제 주의 자녀로서 나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 점검해야 한다. 그것이 미약하다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영향력 넓혀야 하는 것이다. 많은 성도의 취약한 영적지경 중 하나는 성도와의 관계 영역이다. 많은 분들이 서로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목회자도 예외는 아니다. 대개 성도간의 관계에서 상처 받으면 한 사람만 떠나면 되지 둘 다 떠난다. 우리를 우리의 지경을 넓히기만 신경쓰지 폐허된 지경을 다시 기경하고 지키는 것을 허술히 한다.  호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결론: B.C 43년경 쓰여진 오늘 본문에 유다의 계보에서 갑자기 나타난 야베스란 사람과 하나님이 허락한 그의 기도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그의 기도는 나의 삶에서 주의 자녀기 때문에 감내할 수고를 인정하는 기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두가지의 복을 다누리기를 소망하는 기도이다. 이제 나의  영적 지경을 넓혀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지경을 넓히자.

August 29, 2021

낮은자를  높이시는 주님

서론누가 4:11 에 예수께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경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중요한 신앙의 원리인데, 성경에서 이 교훈을 할 때 강조하는 것은 사람을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주권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상황은 도구입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의지하기보다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나를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기도했습니다. 삼상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 곧 교만한 자를 낮추십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교만이 생겨납니다. 물질적인 교만, 지적 교만, 도덕적이며 윤리적 교만, 영적 교만등 입니다. 그리고 교만이라는 질병에는 몇 가지 두드러진 증상들이 있습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말이 많아지고,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자리에 앉으려 하지요. 그렇지 못하면 기분이 상하지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려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과 주고 받는 것이 잘 안 됩니다. 은혜 받는 일이 어려워지고,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감사, 찬양, 예배, 헌신)을 드리는 일도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주고 받는 일은 위아래로 일어나는 일이어서, 내가 낮은 자리에 있을 때만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의 영역에서 우리 자신을 낯추어야 될까요?

첫째, 자신을 낮춘다고 할 때 핵심은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도 마음은 교만할 수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지만 마음은 겸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공부는 영어 공부도, 과학 공부도, 법학 공부도 아니라 마음의 공부요 정신 공부입니다. 세상에서 마음공부가 제일 중요한한 이유는 세상 만사가 다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세계를 밝힐 수도 있고 어둡게 할 수도 있다. 슬프게 할 수도 어둡게 할 수 있다. 더러운 마음을 정결하게 씻는 훈련이 마음공부이다. 그리고 이 공부는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옛날 BC 3세기경  중세 애굽을 중심으로 통치한  톨레이마스 왕이 그리스의 수학자 유클리드에게 기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 공부가 할 수록 어려워 진도가 잘 나가지 않자 왕이 그 선생이었던 유클리드에게 “내가 이 나라의 왕인데 기하학을 방법이 없겠느냐?”고  묻자 우클리드는 “폐하 ! 학문에는 왕도가 없사옵니다.(there’s no royal road to geometry)”라고 했다.  다윗은 광야에서도, 왕궁에서도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 뜻을 신뢰하면서 자신의 삶을 맡겼고, 왕궁에서는 이 자리가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알고 감사하고 황송하게 여겼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어디에 있든지 자신이 예배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서 그를 빛나게 하셨습니다. 단지 왕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왕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는 왕으로 그를 높이셨습니다. 다윗의 삶이 빛났던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은 어떻게 자신을 낮추었고, 하나님은 어떻게 그를 높이셨습니까? 행13:22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A man after my own heart). 마태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둘째, 자기 자신을 낮추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세겜의 마므레 상수리나무 아래서 겸손히 예배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렸고.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밧단 아람으로 향하던 중 벧엘에서 제단을 쌓아 겸손히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사무엘이 어려서부터 부터 성전에서 겸손히 예배를 드리며 마지막 사사와 최초의 선지자가 되지않았습니까? 얼마나 겸손하였스면 하나님이 계시의 음성을 들려 주실때 그 소리가 엘리 제사장의 소리로 착각 했을까요? 자기는 하나님을 직접뵈올 수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을 낯추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많은 사역자와 치리자들이 자기에게 지위가 주어지면 갑자기 말소리부터 변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의 말과 행동이 낮아야 합니다. 삼상2: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우리  한국의 본래의 언어는 자기 자신을 낯추는 말들이 대분이며 그 억양 또한 그러하다.  마가복음 10:45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그렇게 사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베드로전서 5:5-6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우리에게 권면하십니다.

결론: 주님이 가르치신 도는 세상의 도와 다르다. 예수께서 마태 20:26-28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전 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말씀을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원하시는 겸손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생각해 보십시오.

August 22, 2021

하나님의 사람

서론성경에는 많은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대부분 남성들의 사건속에 보조역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드보라 사사의 경우처럼 한 여인의 생애와 활약상을 비중있게 그려 놓은 곳은 거의 없다.  드보라는 랍비돗의 아내였고, 그 이름은 ‘꿀벌’이라는 뜻이었다. 여 선지자였던 그녀는 사사와 선지자의 사명을 겸한 이스라엘의 네 번째 사사였다. 여자였지만 통찰력과 판단력이 예민하고 정확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감이 풍성하여 백성들의 어려운 문제를 재판했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풍속과 통념 속에는 사회생활에서 여자들의 발언권이나 권위가 경시되었는데 드보라가 한 시대의 통치자였다는 것은 그의 인품과 능력을 가히 짐작할 만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 나타난 역사를 통해 족장시대나 사사시대를 막론하고 여성의 권익과 사회적인 지위를 인정해 주심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재직기간은 BC 1304년부터 1264년까지 약 40년간으로 알려져 있다. 군대 장관 시스라가 이스라엘을 학대하고 침략했을 때 드보라는 바락을 격려하며 그와 함께 싸워서 가나안 군사를 물리쳤다. 드보라의 동일 사건을 4장은 서술체로, 5장은 구원사건을 기념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시가체로 한 사건을 두 장이 보완해주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승리에 대한 내용이 ‘드보라의 노래’라는 아름다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삿5장) 드보라의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그녀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정의로운 길로 이끄시고 인도하시고자 세우신 사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수호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성실히 수행하도록 돕기 위해 세워진 지도자입니다. 그녀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그녀가 사사기에 기록된 유일한 여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렇게 이례적으로 보이는 일을 성경은 굳이 이례적인 일로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드보라의 리더십 아래 바락은 이스라엘을 군사적 승리로 이끌고 이스라엘 땅에 40 년 동안 평화를 회복합니다. 그럼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하나님 목전에서 악을 행하기 전까지 40 년 동안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게 됩니다. 우리가 특별이 드보라를 예수님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입니다. 드보라는 한 시대의 이스라엘의 사사(judge)였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심판자(또는 사사, judge)입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의 왕, 제사장, 선지자가 되십니다. 드보라는 가나안 족속에게 억압받던 이스라엘을 군사적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중재 했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그들에게 드러내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드보라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삶을 살았고 또 하나님의 전쟁에서 승리했는지 살펴보자.

첫째, 드보라가 민족의 사사이었지만 그녀는 먼저 한 남자의 아내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드보라가 예쁘고 가정에서 살림잘하고 호리호리하고 칼 하나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그런 여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안 하고, 여자지만 어깨가 딱 벌어지고 약간 부리부리하게 생겨서 칼을 장난감 다루듯이 하는 어떤 여자일 거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읽는다. 그런데 드보라는 여자인데다가 랍비돗(횟불)의 아내다. 평범한 가정주부를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로 부르시고 세우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본문을 읽을 때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읽는다. 뭔지는 모르지만 특별하고 도드라진 어떤 부분이 있었던 여자이겠지 자꾸 이렇게 생각한다. 성경은 드보라를 랍비돗의 아내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4 그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직역하면 “드보라, 여선지자, 랍비돗의 아내 그 여자가 이스라엘의 여 사사가 되었다.” 여자라는 말이 5번이나 명백하게 나온다. 5에보면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고 그의 직무와 직무대행이 나온다. 나무가 이름으로 칭해져 “드보라의 종려나무”로 불릴 정도로 그녀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덕망이 있었고, 이스라엘을 판단하는 판결, 재판을 잘해 사사 역할을 굉장히 잘 수행했다. 사사들은 평범에도 이르지 못한 사사가 많다. 에훗 왼손잡이, 삼갈은 소치는 사람,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었다. 드보라는 특이하게 여자 사사였다. 계수에도 포함되지 못한 여인이었다.

둘째, 우리의 타락의 주된 원인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다. 본문 1절에 보면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이스라엘이 또 여호와를 버리고 악을 행한다. 사람은 자꾸 잊어먹는다. 이스라엘이 편안해지자 하나님 의식하지 않고 또 죄를 짓는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다가 끝까지 돌이키지 않으면 형벌하신다. 하나님이 하솔을 통치하고 있던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이스라엘을 팔아버리신다. 이 이름을 여호수아에서 본 적이 있다. 이 시대에서 150년 전이 여호수아시대다. 북쪽의 왕을 칠 때에 규합해서 여호수아를 대항했던 왕이 하솔의 왕이다. 하솔을 통치하던 왕을 대대로 야빈이라고 불렀다.(수11:10-11) 당시 하솔은 가나안 땅의 머리였다. 그가 여호수아의 손에 죽고 호흡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불타버린 땅에 하솔 땅이다. 150년이 지난 이 시점에 그곳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솔을 다시 일으키셨다. 그곳에 왕 야빈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왕은 전부 이방왕이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들이 정복했던 가나안왕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특별하게 아픔이 가중된 것이다. 자기들이 진멸시킨 국가의 왕이 다시 힘을 얻어서 이들을 다시 다스리고 괴롭히니까 더 괴로울 것이다. 성경에서는 정확하게 “이스라엘을 팔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을 이끌어가실 때 그의 생명을 살리고 온전케 하실 때 사용했던 방법들이 그를 대적의 손에 파는 일이었다. 성경에서 “판다”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본문은 에서가 장자권을 판 것과  요셉 사건에서이다. 형들이 동생 요셉이 미워서 이스마엘 족속에게 팔아버린다. 그는 종의 신분으로 떨어졌지만 요셉을 하나님이 형통케 하셔서 애굽에서 국무총리 자리에 오르게 한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구원자 역할을 감당하게 한다.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이스라엘을 파신 것은 이스라엘을 형통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삶에 고통, 고난,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쳐올 때 하나님이 나에게 위대한 계획을 실행하시는구나 하고 기대하라. 그를 통해 나를 성장시키실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솔왕 야빈은 굉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철병거가 900승이다. 한국이 제일 좋은 K1 탱크 1000대 정도를보유하고 있다. 한 나라가 가진 게 1000대인데 조그만 도시국가에 900대의 탱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막강한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학대하기 시작하고 무참히 짓밟아버린다. 압제가 20년간 지속된다. ‘학대, 쥐어짜다, 짓눌러서 터뜨리다’는 뜻이다. 그냥 통치한 게 아니라 원한과 억울함을 가지고 겁박하고 괴롭혔다. 이에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하나님이 구원자 사사 드보라를 일으키신다.

셋째, 하나님은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함께 할 사람을 보내신다. 드보라는 여선지이기 때문에 전투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락이라는 장수를 붙여준다. 대부분의 사사는 사사 하나로 등장하는데 하나님이 바락을 붙여주신다. 바락과 드보라가 동역하는 사사인 것이다. 드보라는 사람을 보내 납달리 게데스에 있는 바락을 불러온다. 바락에게 스불론 자손과 납달리 자손 중에서 만 명을 데리고 다볼산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을 전한다.(6-7절) 갈릴리 북부에 있는 하솔은 원래 납달리지파의 땅이었다. 그 옆에 바로 붙어있는 스불론 지파가 야빈에게 가장 많은 압제를 당했던 것 같다. 두 지파의 만 명을 데리고 장정들과 함께 시스라를 물리치라는 명령을 내리자 바락이 망설인다.

‘바락’은 ‘번개’라는 뜻인데 ‘주저하는 번개’가 된것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셨고 가기만 하면 승리한다”고 드보라의 입으로 말을 전해주셨는데 드보라가 함께가면 가고 함께 안 가면 안 간다고 말한다. 전쟁터에 가서 적을 궤멸시켜야 될 장수가 여자의 치마폭 뒤로 숨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해가 간다, 하나님이 드보라를 통해서 말씀하시니까 하나님이 드보라에게 응답하실 거라고 느껴지니까 바락이 여호와의 약속과 말씀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약속과 말씀보다 드보라를 붙들고 있다.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신앙적으로 성숙해 보이고 괜찮아 보이는 드보라와 함께 가면 하나님의 도움이 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드보라를 붙들고 있다. 이 시대는 남성들을 통해 주되게 일하는 시대다. 지금과 다르다. 3000년 이전의 이야기이다. 전쟁을 위해 바락을 세웠는데 “당신이 가야 나도 간다”고 말한다. 바락은 전쟁을 잘하는 용사이지만 믿음이 부족하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뭔지를 모르고 사람을 붙들고 있다. 이 바락의 모습은 이방종교 같고 샤머니즘 같다. 이방종교나 샤머니즘은 더 신령해 보이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기도해 주면 더 잘 들어주실 것 같은 존재가 있어 보이지만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셋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할 때 그 순종이 열매를 맺혀내는 것이다. 때문에 말씀 확실히 붙들고 딱 나가야 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바락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세상종교처럼 어리석게 드보라의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하나님, 여러분을 부르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 딱 붙들고 한 걸음 나가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텐데 여자의 치마 두에 숨어있다. 바락의 이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의 보편적인 영성을 보여주는 모습이고 오늘 여러 형태로 한국교회 남성들이 영성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한국교회 많은 남성들이 기도생활을 아내에게 맡긴다는 우스은 이야기도 있다.

바락의 대응에 일면 이해가 간다. 철 탱크 900대가 진치고 있으니 전쟁에 능통한 자일수록 뻔한 싸움이라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가? 수17:16을 보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철병거로 인해 자기에게 주어진 기업을 차지하지 못하고 실패한 장면이 나온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철병거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청동기 문화라 철을 다루는 기술이 없었다. 둘이 싸우면 당연히 철이 이긴다고 생각했다. 말 900마리가  소리를 내며 철병거를 끌고 갈 때 말발굽소리, 철병거 바퀴 도는 소리까지 나므로 이스라엘은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은 정규 군대가 아니라 민병대다. 평소에 군대가 있는 게 아니라 위기상황에 끌어다 쓰는 예비군 같은 개념이다.  그러나 바락이 잊고 있었던 것이 있다. 여호와의 전쟁은 여호와께서 승리를 준다는 것이다. 드보라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가라! 이길 것이다. 전쟁은 나에게 속한 것이다.” 하지만 바락은 쉽사리 안 나간다.

가나안 여리고성 첫 전투는 강대한 무기가 아닌 다만 일곱 바퀴 돌고 양각나팔을 부는 것으로 치렀다. 순종하면 이긴다는 걸 경험한 민족이다. 그러나 그 1세대가 다 죽고 없어 그 사실을 직접 경험한 게 아니라 전해 들었다. 바락은 이스라엘 전체 모습을 대변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머리속으로는 아는데 가슴 가운데에는 박혀 있지 않았다. 마음에 믿음으로 그것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드보라가 질책도 하고 동행을 약속한다 .하나님은 그 영광을 한 여인의 손에 파실 것이다. 장수의 목을 치는 영광을 바락에게 주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본문에서 여인인 드보라를 주목하라. 시스라의 목을 친 여인도 헤벨의 아내다. 왜 여성에게 집착하고 부각시키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셨을까? 사사기 전체의 주제는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암흑기였다. 가장 암흑기에 가장 경건한 여성 드보라를 세워 역사하신다.

랍비돗의 뜻은 ‘횃불’이라는 의미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드보라는 ‘횃불의 여자’라고도 한다. 하나님이 빛을 허락하셨다. 전쟁은 강인한 힘의 대결이기에 그 시대의 지도자는 강한 남성, 전쟁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게 왕의 직분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드보라를 통해서 “그 능력이 힘에 있지 않다.”고 보이셨다. 계수에도 포함시키지 않고 천히 여기던 하나님은 한 여인을 통해서 한 나라를 경영하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바락은 강한 자인가 약한 자인가? 한 나라의 군대장관으로서 전투를 지휘하는 사람이 약할 리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강자를 통해 적군의 머리를 베게 하지 않고 순종한 한 여인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어간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 나라의 그림이다. 강한 힘이 통치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여야 한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주를 신뢰하고 있는가? 사역지, 직장, 영적 전투의 현장을 두려워하면 우리는 바락과 같다. 우리는 이미 승리했다. 약한 여인을 쓰신 하나님이 승리를 약속하셨다.

삿 4:11- 24 에서 드보라와 바락을 앞세운 이스라엘 백성은 대승을 거둔다. 바락이 주저하였기에 적장의 목을 베는 명예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긴다. 이기면 되지 목을 누가 베든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 고대인들에게는 적장의 목을 베는 것이 큰 명예였다. 야엘은 ‘산염소’, 드보라는 ‘꿀벌’이라는 이름 뜻을 갖고 있다. 드보라는 종려나무 아래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지도했다. 당시 종려나무에서 나오는 시럽을 꿀로 사용했다고 한다.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서 가르쳤는데 그 나무에서 꿀이 나오고 드보라는 꿀벌이다. 꿀은 말씀이다. 야엘은 ‘산염소’다. 산염소 야엘이 시스라 적장에게 우유를 먹여 재운다. 산염소가 젖을 낸다. 이 젖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회복되어진다. 벌의 꿀과 산염소의 젖이 큰 역할을 한다. 가나안 땅을 회복하려면 꿀이 필요하고 젖이 필요하다. 젖이 뭐냐? 젖은 용기 있는 순종이다. 내 앞에 닥친 시험과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실 때에 바락처럼 주저하지 않는, 야엘처럼 단행하는 용기 있는 순종을 뜻한다.

결론바락이 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볼산에 진을 친다. 철병거 900대를 갖춘 시스라가 보기에 만 명은  적은 수다. 20년 동안 시스라의 막강한 군사력에 지배를 당했던. 바락과 이스라엘이 만 명이라는 민병군으로 시스라에 나섰다. 하나님의 전쟁의 승리가 수에 달린 게 아니라는 말이 여호수아 정복 전쟁의 메시지다. 하나님은 여기서 그 증거를 다시 보여주셨다. 그리고 바락이 진을 친곳은 또 다른 이름으로 ‘알 므깃도’인 것이다. 므깃도의 산이라고 불린다. 히브리말로 ‘하르므깃도’, 헬라어로 ‘아마겟돈’이다.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벌일 마지막 전투지다. 므깃도 전투는 쉽고 편한 전투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투였다.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나갔을 때 그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전투를 기적같이 이긴 전투가 므깃도산 전투이다. 요한 계시록16장에 ‘알마겟돈 전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아마겟돈 전쟁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믿음의 선한 싸움에 나선 성도들과 신앙을 무너뜨리려는 악의 세력과 영적 전쟁을 의미한다. 마지막 때 일어날 하나님의 전쟁을 의미한다. 우리는 드보라의 때처럼 우리가 마주친 전쟁에서 하나님이 앞서서 싸워주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지금 수많은 영적 전쟁에 직면에 있다. 영적 전쟁에 승리하려면 우리는 꿀같은 하나님 사모하는 데보라(꿀벌)이 되어야하며 순종하여 젖을 먹이는 야엘(산양)이 되어야 하며 라비돗(횟불)을 든 성도가 되어야 한다.

August 15, 2021

주 안에서 해방된 자

서론오늘은 대한민국의 8.15해방의  76번째 맞이하는 날 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도 어언 ¾ 세기를 지나 한 세기를 향해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은 아직도 양극화 되어 친일과 애국, 좌와 우로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 사실 우리가 말하는 ‘애국자’ 란 나라를 위해 자기와 자기 가족을 희생시킨 사람이고 ‘매국노’ 자기와 자기 가족의 영달ㅇ을 위해 나라를 희생시킨 사람이다.  요즘 한국의 교계 형태를 보면,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예외도 아니다. 보수주의자니 진보주의자이니 하면서 양분화 되어 예수와 그리스도가 나뉘어져 있다. 이 말이 무슨뜻이냐 하면, 1953년에 한국에서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가 나누어 진 계기가 있었는데, 성서의 비평 문제로 두파로 갈라졌다. 이 때의 미국의 선교사가 본국에 보고하기를 한국에서는 예수와 그리스도 다투고 있다고 전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참고로,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와 기타 국가기관에 등록된 개신교 170개 교단 중 장로교가 명칭에 들어 있는 교단은 118개라고 한다. 이중의 소위 예장 보수교단이라는 90% 이상이다. 보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분리됬다는 증거이다. 1919년 기미 독립선언 문의 서명자 33인 중 반이상(17인)이 기독교인이었다. 1919년 당시 전국 인구는 1600만명 정도였지만, 기독교 인구는 2%도 채 되지 않는 1.8% 정도였다. 하지만 고을마다 만세운동이 일어날 때 상당수 지역에서 거점은 교회였다. 경기도 화성 제암리교회 순교사건 역시 3.1운동 여파였다. 기독교 인구가 1.8%도 않됬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썼던 우리 믿음의 선진 얼마나 나라를 사랑 했으나 해방된 조국을 소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외국인 분포가 3.5% 가까워지는 이시대에 너무 민족이니 내나라니 하는 것은 시대 뒷쳐진 생각일 수 있지만 오늘 광복절을 맞이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아야 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이다라고 다짐한다. 성경의 교리를 하나로 묶어논 책이 로마서이며 그 중심장이  8장이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안에서 참으로 해방된 자는 어떤 성도일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해방 된 자라서 그런지 너무 자유가 많다. 1절 말씀에 “예수 안에 나에게는 결코 정죄 없나니” 해서 그런지 우리그리스인들은 너무 자유스럽다. 우리 말에 “자유가 지나치면 방종이 된다”는 말이 있다. ‘정죄(카타그리마)’의 반대 말은 ‘칭의(디카이오우)’이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원래 의로운 자(디카이오스)라고 착각한다. 우리 성도들은 별볼일 없는 우리를 의롭다 인정해 주셨다. 우리는 주앞에서는 물론 다른 사람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주장하면 모순이 있다. 오직 우리가 사탄 앞에 서서 우리가 이제 의인이라 주장 할 수 있다. 예화 ) 애국지사에서 변절자가 된 사람들의 특성- 자기중심주의.

둘째, 우리의 복음을 전하는 공관과 대상이 자유로와야 하는 것이다. (3절 )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너무 과소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태어날 나실때 부터 우리가 예상했던 곳으로 오시지 낳으셨고, 우리가 예상했던 곳에 사시지 않으셨고, 우리가 상상치 못한 일읊행하셨다.

셋째, 해방된 자는 새로운 것들을 추구해야 한다. 생각이 과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않된다.우리가 예상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거주지에 살고 있다.  육신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않된다. 고후 5:17의 새로운 피조물인 것이다.

넷째, 해방된 자는 좀 마음이 넓어야 한다. 우리나라 속어에 “쓸데 없는 일에 목슴 건다.” 우리 기독교 용어로 “조그만 한 일에 순교하려 한다.”라고 표현 할 수 있다. 기독교 복음 전파 과정 속에서 탄압을 받아 희생된 사람을 우리는 순교자라 한다. 요즘 한국이나 미국에서 기독교 탄앞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안에서 예배를 못드리게 한다거나 공공 장소에서 복음 전파를 못하게 하는 것이 탄앞이 될 수 있다. 이것에 대해 우리의 의사를 표현할 수 이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은 ‘돌격 앞으로’ 하면서 자기가 먼저 이성을 잃은 사람들이 있다. 불의에 대해 분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며 나의 삶의 자리를 변화시켜 가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당에서 마스크 쓰고 예배드리는 것보다 밖에서 형식이 부족할 찌라도 해방된 자의  마음으로 자유롭게 주께 드리는 예배가 소중하다. 우리는 우리 성도들과의 관게속에서도  어떤 사람이 나를 헐뜻거나 비방해도 온몸으로 대항하지 말고 나 자신을 돌아보고 기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결론: 고후 6:4-10에보면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했으나  6오히려 우리는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8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우리가 암송하는 빌 4:13은 바로 이런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성도는 해방된 자로 끝나지 말고 광복을 추구하는 자로 살자.

August 8, 2021

지혜와  계시의 신앙

서론오늘 새벽 제32회 하계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세계적 대역병의 위험속에서 걱정속에 치뤄진 이 올림픽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걱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 올림픽의 기본 정신을 살펴보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이를 위해 분투하는 것이고, 올림픽에서 가장 중요한 것 역시 승리가 아니라 참가 자체에 의의가 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잘 싸운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올림픽이 과잉 상업주의에 빠져 막대한 경비 투자와 선수들의 지나친 약물 복용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이번에 IOC는 올림픽 선수들의 참가신청서 4조에 ‘대회 참가때 벌어지는 심각한 상황속에서 부상이나 사망에 대한 위험성을 잘 알고 있고 이는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는 내용을 넣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앞서 6차례의 동·하계 대회의 참가신청서에는 없던 감염증, 사망이란 문구가 등장한다.  코로나 19 사태의 가장 큰 피해를 받고 있는 미국이 이번에 그래도 선전하여 모든 메달을 가장 많이 획득한 것을 보았다. 모든 악 조건속에서도 발휘된 선수들의 투혼의 정신과 피땀어린 경기에 박수를 보낸다.

프랑스 출신의 종교개혁자 존 칼빈(1509-1564)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지혜, 곧 참되며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은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만들어 내는가를 구별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연구하는 학문을 철학이라고 합니다. 철학은 주로 지혜와 관련이 있습니다. 철학을 연구한 사람은 지혜롭습니다. 반면에 신학은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주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의존해서 연구합니다. 칼빈의 말처럼 우리 자신을 연구하는 철학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학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를 쓸 때, 종종 편지 안에 그의 기도를 포함시킵니다. 에베소서 1:15-23 말씀이 바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사도 바울의 기도입니다. 에베소서에는 사도 바울의 기도가 한 번 더 나오는데, 이 기도는  에베소서 3:14-21 말씀입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또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 믿음이 표현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함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행함입니다. 이것을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20-21 말씀을 봅시다.”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오늘 본문에는 우리 기도교인들이 지녀야 할 두가지의 신앙이 나오는데, 그것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입니다. 오늘 저는 지혜와 계시란 어떤것이며,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적용해야 할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지혜’란 말이 신구약을 통틀어 490회, 잠언에 117회,전도서 54회 등장한다. 신약에는 87회만 나오는데, 히브리어로 ‘호크마’ 헬라어 론 ‘소피아’이다. 구약에서 특이한 사실은 손로몬이 관련된 문헌에서 대부분 지혜란 말이 등장한다는 것과 욥기에 ‘지혜’란 말이 34회나 나온다는 사실이다. 지혜는 그리스도인이 가저야 할 첫 번재 덕목임을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있다.

둘째,‘계시’라는 말은 신구약에 13회 밖에 나오지 않는다. 히브리어론 ‘크하존’인데 ‘주시하다’는 의미의 ‘크하자’에서 유래했다. 헬라어로 ‘아포칼립시스’ 인데, ‘폭로하다’는 의미를 가진 ‘아포칼립토’에서 유래했다. ‘아포’는 “–에서 떨어져서”란 의미이다. 계시는 어떤 희안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와 상황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요엘 2:28-30”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많은 성도들이 ‘계시’하면 하나님과 직통해서 무슨 히안한 능력을 받는 것으로 착각한다. 계시는 시대를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결론: 우리가 지혜와 계시를 가질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감사하는 마음인것이다. 바울은 18절에서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하였다. 잠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감사할 것이 없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넓히면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에서 “사촌이 땅을 사니 참으로 감사하다.”로 바뀌면,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은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으로 인하여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목장과 기도 모임과 말씀 묵상 모임에서 서로를 인하여 감사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때, 우리는 좀 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좀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July 25, 2021

주 안에서 소망을 가진 자

서론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보면,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세 단어가 나온다. 그것은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다. 성경에서 ‘믿음’이라는542회 나오고, ‘사랑’ 이라는 단어는 630회 나온다. 그리고 ’소망’이라는 단어는 104회 쓰여 졌다. 원어 성경에 보면, ‘믿음’과 ‘사랑’이라는 단어는 대부분 동사로 여 졌고, 소망이라는 단어는 명사로 쓰여 졌다. 이 의미는 믿음과 사랑은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 때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속에만 가지고 있으면 않 되고 밖으로 표현해야 한다. 사랑도 우리는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안에서 가진 소망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해야 한다. 아마도 그래서 소망은 대부분 명사로만 기록된 것 같다. Hebrew말의 소망이라는 단어를 ‘Tigba’라고 하는데, 이말의 의미는 ‘끈’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가진 소망은 어떤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꼭 붙들고 놓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구약의 Job이라는 성경은 환난, 고난 그리고 시험을 겪는 Job의 신앙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책에 소망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온다. 우리가 어려운 고난을 만나도 우리가 가진 소망을 결코 잃지 말아야한다. 주 안에서 소망을 가진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 상고하여 보겠습니다.

첫째, 성도가 범죄한 것을 보거든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온유한 심령으로 기도로서 바로 잡아라. 심지어 교회 사역자가 잘못한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을 성도들에게 알리기 전에 하나님께 애통하는 심령으로 기도하자. 골3:13,14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 “

둘째, 사람이나 단체에게 과잉 충성하지 말고 하나님께 과잉 충성하자. 교회 안에서 여러 문제들을 야기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에 사람에게 과잉 충성하는 것이다. 골3:23.24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셋째, 심은 것을 거두는 소망을 가지라. ‘심음’의 행위는 반드시  ‘거둠’의 결과를 낳는다. 육체와 몸을 위한 심음은 욕심, 불신앙, 거짓말, 게으름, 음란, 불순종 등이고, 영적인 것은 믿음, 사랑, 헌신, 눈물, 기도, 구제, 봉사등 하늘에 쌓아 놓는 의로운 것들의 행함을 뜻한다. 시편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심음과 거둠의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의 중요성입니다.

이스라엘의 요단 계곡에 세 그루의 나무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 세 나무들은 각자 자기의 희망을 이야기 했다. 먼저 첫 번째 나무가 말했다. "나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의 제단이 되었으면 좋겠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경배하러 오면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될 거야!" 이 말을 하면서 첫 번째 나무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러자 두 번째 나무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말했다.

"내 꿈은 사람들을 섬기는 거야. 나는 지중해의 해변으로 가서 커다란 범선이 되어 검푸른 지중해를 가로지르며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배가 되어야지!"두 번째 나무는 이 말을 하면서 벌써 어깨에 힘이 들어가 의기양양했다. 그때 세 번째 나무가 가지를 쳐들고 이야기 했다."나는 혼자 여기에 남고 싶어, 그래서 높게 자란 나를 쳐다보는 사람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찬양하게 하고 싶어. 그리고 뜨거운 여름철에는 피곤한 길손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싶어." 그리고 세월이 흘러 세 그루의 나무가 나름대로 재목으로 쓰일 만큼 성장한 어느 날이었다.

드디어 나무를 베려는 도끼의 날이 첫 번째 나무 밑에 와서 닿았다. 첫 번째 나무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이 되고픈 자기의 꿈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찬란한 그의 꿈은 깨어지고 첫 번째 나무는 베들레헴 시골의 어느 집 작은 말구유가 되었다. 그 나무는 심한 수치감에 몸을 떨었다. "내 꿈은 어디로 사라지고 겨우 말먹이나 담는 말구유가 되다니..."

그리고 얼마 후 두 번째 나무도 베어졌다. 그 나무는 자기가 바라는 대로 배를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졌다. 가는 길 내내 두 번째 나무는 콧노래를 부르며 말구유가 되어 사라진 첫 번째 나무를 비웃었다. 그러나 그의 꿈도 허무하게 깨지고 말았다. 큰 범선이 되겠다는 꿈은 간 곳 없고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조그만 비린내 나는 어선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나무는 자신이 그렇게 보잘 것 없고 무명한 존재가 되고 만 것에 대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세 번째 나무도 역시 잘려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다. 세 번 째 나무는 특히나 마음 아팠다. 그 자리에 오랫동안 살아남아서 사람들에게 평화와 자연의 정취를 남겨 주려던 꿈은 이미 포기했지만, 설마 목수들의 손에 의에 죄인을 처형하는 세 개의 십자가 형틀이 될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세 번째 나무는 마치 자신이 천하에 다시 없는 죄인이 된 것만 같아서 절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보잘 것 없는 말구유가 된 것을 불평했던 첫 번째 나무는 동정녀 마리아가 메시야 예수님을 낳아 눕혔던 바로 그 말구유가  되었다. 지금까지 어느 성전의 제단도 이와 같은 명예를 얻지는 못했다.

두 번째 나무는 커다란 범선 대신에 아주 작은 고깃배가 되었지만 그 배의 주인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였다. 그는 비록 초라해 보였지만 어느날 예수님께서 타시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심으로써 어떤 범선보다도 더 큰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나무는 비록 죄인을 매다는 십자가가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지금까지도 수 많은 사람들이 그 나무를 본 따서 십자가를 만들고 보고 또 사랑하게 되었다. 이 세 나무는 처음에 소망하던 그 꿈들이 산산이 부서진 것 같으나 하나님은 더 위대하게 쓰임받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꿈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 그러나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좌절해서는 안된다. 왜냐면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축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기쁨과 평강을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시고, 우리가 환영하고 인정하고 모셔들인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꿈과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결론: 지스문트 겟치라는 화가의 “버림받은 예수”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의 내용을 보면, 성 바울 대성당의 계단에 예수님이 서 있다. 그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스포츠 신문을 열심히 읽고 있는 청년, 휴가 여행을 위하여 택시를 잡으려는 젊은 남녀, 길을 가면서도 시험관을 들여다보는 과학자,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이 거기에 서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다. 신부 서너 명이 둘러서서 팔을 휘두르며 열렬히 토론하고 있지만 예수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직 한 사람, 간호사 제복을 입은 여성만이 잠깐 멈추어 곁눈으로 예수를 볼뿐이다. “세상에 가만히 않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말이 있다. 하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것을 지향하며 영원한 소망을 품은 우리는 지금 우리 삶 속에서 얼마나 귀한 것들을 심어 가야 하겠는가? 소중한 시간을 떼어 주께 심으며, 주님이 나의 모든 삶에 주인이 주인이 되며, 오늘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도 거기서 적응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July 18, 2021

주의 십자가를 영화롭게

서론오늘 저는 기독교사의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또 하나의 여성을 소개하려 합니다. 주후 250년경 소아시아의 비티니아 주에 있는 드레파눔에서 태어났다. 평민이었던그녀는  본래 타고난 미모에다 아름다운 마음씨의 소유자였으므로 마침 그곳에  근무 중이던 로마군의 장교 콘스탄티우스의 눈에 들게 되어,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결혼 후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옮겨 다니는데, 지금의 세르비아에 해당하는 나이수스라는 곳에서 첫아들 콘스탄티누스를 출산한다. 그러는 동안 남편인 콘스탄티우스는 차차 승진해 로마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중신이 되고 부하들의 신망도 컸으므로, 곧 로마 제국 서부지역의 총독으로서 갈리아 지방, 즉 프랑스와 남부 독일, 스페인, 브리타니아 등 넓은 지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즉 먼저 그의 부인인 헬레나를 버리고 막시미아누스의 의붓딸인 테오도라와 결혼할 것과, 다음은 그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볼모로 동로마 지역인 소아시아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콘스탄티우스는 그런 무리한 요구에 처음에는 응하려 하지 않았으나, 그의 야심은 마침내 부인과 아들을 희생시키기로 결심했다. 헬레나는 억울하고 안타까웠지만, 비참히 그 자리에서 물러나 추방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아들 콘스탄티누스는 인질로 소아시아를 향해 떠나게 되어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갖은 고생을 통해 세상의 쓴맛을 다 맛본 헬레나는, 연기와 같이 허무한 세상의 영화에 마음을 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헬레나는 영원불멸의 행복과 구원을 말하는 기독교에 더욱 마음이 끌리어 신앙을 이때 갖게된다.

  어린 콘스탄티누스도 동로마의 니코메디아로 보내져 동로마제국 황제의 궁정에서 자랐으며, 동로마 황제 밑으로 들어가 군복무를 하면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의 여러 도시들과 문화 속에서 큰 영향을 받게 되며, 기독교와 접촉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로마제국은 쇠퇴기였다. 로마의 평화시기는 막을 내리고 변방에서 밀려오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늘 불안한 가운데 살아야 했던 암울한 시대였다. 이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등극하여 로마제국은 사두 정치를 실시하는데, 사두정치란 넓은 로마제국을 황제 한 사람이 다스리기에는 어려우므로, 서로마와 동로마에 각각 황제와 부제를 두어, 곧 4명의 전제군주가 공동으로 위기에 처한 로마제국을 다스리는 정치체제였다. 그런데 AD293년 콘스탄티우스가 바로 이 사두정치의 부황제(케사르)의 지위에 올라 콘스탄티우스 1세라는 칭호를 얻었고, 로마 황제(아우구스투스)인 막시미아누스 밑에서 부황제로 일하기 위해 서로마로 갔다. 그리고 AD305년 로마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던 서로마와 동로마의 두 황제가 퇴위하자, 서로마의 부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는 공동황제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얼마후 콘스탄티우스의 정적들은 병에 걸린 콘스탄티우스를 무시하고 새 황제를 세웠으며, 중병에 걸린 콘스탄티우스는 동로마에 있던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보내달라고 요구했고, 이것을 안 동로마의 황제는 콘스탄티누스를 독살하려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독살 위험 가운데서 겨우 목숨을 건져 아버지에게로 왔고, 부자는 함께 브리튼 섬(지금의 영국)으로 건너가 AD306년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죽을 때까지 변방 브리튼 섬 북부에서 숨죽여 지낸다. 그러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죽자 아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의 혼란 가운데서 군부의 지지를 받아 서로마 황제로 추대된다. 그는 즉시 어머니 헬레나를 자신의 별장에 모시고 가서 잃어버린 그녀의 황후로서의 지위와 권리를 복구시켜 주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AD 312년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며 정적들과 반란군을 무찌르는데,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군대가 로마 인근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밀비안 다리의 전투’로 알려진 유명한 전투를 치르게 된다. 이때 그 유명한 십자가 환상을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보고서 그는 그 십자가를 내세우며 그 뒤를 따라 진군하였고, 그 결과 그는 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서로마제국의 황제로 정식 등극하게 되며,  로마제국 내에 기독교가 공인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그 후 콘스탄티누스황제는 모친 헬레나에게 왕대비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보내고 아울러 조폐권(造幣權), 곧 로마제국의 화폐를 제조하는 권리를 주고 어머니 고향인 드레파눔을 헬레노폴리스 즉 헬레나의 도시(市)라 개칭하여 영원히 그녀의 이름을 기념케 했다. 당시 헬레나는 왕대비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고 또한 조폐권까지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부유함과 권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었고, 세상의 모든 아름답고 귀한 것을 소유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헬레나는 자신의 엄청난 재물을 빈민에게 희사하였으며, 예배당 건축을 위한 것이라면 한 푼도 아끼지 않고 모든 원조를 제공했다. 헬레나는 자기의 존귀한 신분을 잊고서, 미천한 사람들과 함께 흔쾌히 모든 예배의식에 참여하였으며,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헬레나의 타고난 아름다운 성품과 이같은 모범적인 신앙행위는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로마제국 내에 기독교가 확산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더구나 효성스러운 아들 콘스탄티누스황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AD313년 밀라노칙령을 발표하게 하는데, 이 칙령은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인정이었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지난 300년 동안 지속되어온 수난과 박해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아들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동로마제국에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게 되었을 때, 헬레나는 예수께서 일생을 지내신 팔레스틴 지방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살게 됨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였으며, 또한 그녀의 지상 소망인 성지 순례를 마침내 AD326년에 이루게 된다. 하지만 헬레나의 성지순례 여행은 행복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당시 콘스탄틴 황제의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 사이의 불화로 인해 가정에 불행이 깃들고, 맏손자가 안타까운 죽임을 당하게 되는  참 가정사의 비극을 신앙으로 극복하기 위해, 헬레나는 거의 나이가 80이 다 되어 예루살렘으로 순례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헬레나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과 삼 일간 묻히셨던 거룩한 무덤 터,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 감람산 등에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설하였고, 헬레나의 이러한 신앙적 노고는, 이후 이슬람교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황폐화 되었을 때도, 성지의 모습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십자가를 비롯 발굴을 통해 얻어진 각종 유물들을 가지고 콘스탄티노플에 귀환한 헬레나는 얼마후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났으며, 그때 그녀의 나이는 만 80세였다. 초대 교회의 유명한 역사가인 유세비우스는 헬레나에 대해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와 같이 그녀의 신앙은 견고하고 열의는 뛰어났다”고 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어느 때나 많은 일군들을 필요로 한다. 특히 헬레나와 같이, 모든 외형적인 인간의 조건을 뛰어넘어, 자신을 드릴 수 있는 헌신된 여성이 필요하다.

지난 주에 우리는 향유 옥합을 깨트려 헌신한 마리아를 생각해 보았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주의 십자가를 어떻게 영화롭게 해야 하는지를 깊이 묵상하자.

먼저, 제가 방금전 벼드렸던 헬라나가 주님의 심볼을 들고 아들 콘스탄틴이 전투에 나가게 한 것처럼 주의 십자가 ‘스타우로스’를 더욱 영화롭고 존귀하게있게 만들어야 한다.  오늘 본문 후에 27,28절 보면”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둘째, 주의 십자가를 능력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헬레나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신앙심으로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골고다 언덕을 순례하는 중에 주님이 지셨던 거룩한 십자가를 발견하게 된다. 당시 골고다 언덕에는 십자가가 아니라 비너스여신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헬레나는 인근 여러 곳을 발굴해 고생 끝에 마침내 그곳에 묻혀 있던 세 개의 십자가를 발견하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이고 다른 두개는 강도들의 십자가였는데, 예루살렘 주교의 말에 의하면, 오직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만이 치료의 기적을 일으켰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강도들의 십자가를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십자가를 발견할 당시 나무 십자가 뿐만 아니라 못과 같은 잔여물도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콘스탄티누스황제에게 보내져서, 하나는 황제의 헬멧을 조이는데, 그리고 또 하나는 말의 굴레를 채우는데 사용되어졌다고 한다.

셋째, 십자가를 봉사와 헌신의 표상으로 삼아야 한다. 2016년 한국에서는 소록도병원에서 43년간 나병환자를 위해 헌신했던 수녀 두 분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로 했습니다. 두 분은 실은 수녀가 아니고 간호사입니다. 병원에서는 ‘큰 할매’, ‘작은 할매’로 불렸습니다. 두 할매는 오스트리아인 마리안느 스퇴거(82)와 마가렛 피사렛(81)입니다.

두 사람은 소록도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천주교를 통해 접하고 20대 미혼의 나이에 소록도에 와 평생을 보냈습니다. 마리안느는 1962년부터 2005년까지 43년간, 마가렛은 1966년부터 39년간 나병환자를 돌봤습니다. 이들은 간호사로 왔지만 수녀님으로 불렸고, 환자들로부터는 그냥 할매로 불렸습니다. 언론은 ‘소록도의 천사’로 불렀습니다.

두 사람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하얀 가운만 걸친 채 치료했습니다. 짓물러 달라붙은 환자의 발가락과 손가락을 만지고 몸 구석구석을 직접 소독해 주었습니다. 그것도 맨손으로. 상처의 피고름이 얼굴에 튀어도 담담했으니, 오히려 환자들이 가슴을 쓸어 내렸다고 합니다. “두 수녀님들은 정말 살아있는 성자였다.” 고 완치된 주민의 말합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약이 모자라면 오스트리아에 호소해 약을 가져와 치료했고 소록도의 쓰러져가는 집들을 두 팔 걷어 직접 고치기도 했습니다. 수녀회에서 보내온 생활비는 환자들의 간식비로 썼습니다. 두 사람이 묵었던 3평 남짓한 방에 있는 거라곤 작은 장롱뿐이었습니다. 조용히, 하지만, 꾸준하게 이어온 두 수녀들의 치료는 무려 40여 년간 계속됐습니다. 그 사이 6,000명에 달하던 환자는 600명으로 줄었습니다.

나병은 지금은 한센병, 환자는 한센인으로 불립니다. 노르웨이 의학자 한센이 1873년 병원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한센병은 정확한 감염경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호흡기나 상처가 있는 피부를 통해 침입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다만 대부분 사람은 한센병에 대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고, 실제 감염되어도 한번의 약물치료로 쉽게 치료 가능합니다. 마리안느, 마가렛 수녀는 한센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치료하는 모습으로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깨뜨렸습니다. 지금 소록도병원 간호사들은 맨손 치료는 기본이라고 합니다.

결론: 우리가 기독교의 심볼이라 내세우는 주의 십자가를 우리는 영광스러운 십자가로, 약한자라도 귀한 능력을 나타내는 십자가, 그리고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한센병 환자를 돌보기전 거실 복도에 있는  주의 십자가를 보고 마음을 추수렸던 것처럼, 이 사회와 세계를 사랑과 봉사, 또 헌신으로 변화시키는 표상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를 내가 져야 할 힘든 것으로 여기기보다 나에게 능력을 주는 십자가 나를 훗날 영화롭 할 십자가로 생각해야 한다.

July 11, 2021

그리스도의  향기

서론Elisabeth Schüssler  Fiorenza 란 교수가1983년에  쓴 책인  ‘In Memory of Her’: 이 있다. 이 책은 이름은 바로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의 사건을 기초으로 해서 쓴 책입니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어렸을때  독일 로 이주한 후 Catholic을 배경으로 성장한 여인이 나중에 Harvard대학에 제직중 이책을 썻다. 이책의 주재는 오늘 본문에서 처럼 초대교회에서 공헌한 여인들이  많이 있었는데 남성 중심 의 교회사 속에서 이런 여인들의 행적이 전해 지지못했고 그들의 평가 또한 절하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과  유사한 말씀은 3공관 복음서에 유사하게(마태 26:6-13,누가7:36-50) 다루고 있고, 요한 복음(12:1-8)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하는 구절이 있는 곳은 마태26장과 오늘 본문에 2곳 뿐이다.  또 한가지 신학자들간의 논란은 이 일을 행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였느냐는 것이다. 요한 복음 12장에는 마리아가 비싼 향유 한근을 가져다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었다고 되어 있다. 이 사건이 오늘 본문과 동일한 것이라면 본문에 나오는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 인 것이다. 누가복음에 는 향유옥합을 부은 여인의 사건이 공생애 초기의 있었던 사건이기에 다른 여인 일수도 있다. 초대교회의 교부이며 ‘황금의 입’ 불리워 졌던 크리소스톰은 이 모든 사건을 동일한 것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Calvin, Bengel, Westcott등은 누가 복음과  마가,마태의 사건을 다른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 사건에사 이 여인의 향한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기에 예수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고 하셨을 까 깊이 상고해 보려 합니다.

첫째, 이 여인은 가장 순수하고 온전한 헌신을 예수께 보여준다 . 원어에 ‘나알드 피스티케스’로 되어 있는데 , ‘순수한, 준수한’의 뜻을 가진 말 ‘피스토스’ 의 변이형이다. ‘나알드’는 인도산 식물의 뿌리에서 짠  귀하고 갑진 향유이다.그 가치는  300데나리온이나 되는데, 1데나리온은  한 장정의 하루 품삯이니 그 가치가 대단한 것임 알 수 있다.  유대 풍속에 젊은 여인들은 이것을 조금씩 결혼전까지 모아  결혼 할 때 가지고 가는 것이다. 그것을 주의 머리와 몸에 부은 것이다.  이 모습이먀말로 주를 향한 순수함과 온전한 헌신의 결정체인 것이다.

둘째, 주인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그의 겸손함의 극치인 것이다. 본문에서 향유를 머리에 붓는 것은 주인을 영화롭게하고 존경하는 표식이며요한 복음의 보면 발에 입맏추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극치를 나타내는 것이다.빌 2: 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벧전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셋째, 예수의 귀하심을  더욱 나타내며 자신 또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묻어 있어 다른이에게 전하는 것이다. 제가 아직 한국의 신학자나 사역자중 이런 주석을 하는 분은 본적이 없는데, 미국에선  이런 해석을 한 노래를 발견하였다.  “세상의 그 어떤 향수도 주님에게 나는 향기와 비교할 수 없어요. 내게서 주님의 향기가 나게 해주세요.”   라는 깨달음을 마리야가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는 장면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올해 초 목사이며 , 복음송 가수인 ‘단테 보위’라는 분이  - Maverick City Music 과 함께 찬양한 “Move Your Heart” 라는 찬양입니다.

“예수님, 예수님 귀하신 주님 같은 지구상에도 없고, 천국 위에도 없어요

 내가 찾은 가장 아름다운당신은 나의 보물입니다

주님이 주신나의 큰 보상입니다.주의 마음을 제가 움직이고 싶어요

내가 표현하고 싶은 전부의 경외심으로 주 앞에 서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내 사랑을 부을래요. 어떤 값이 들더라도

나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온전히 바칩니다.오, 예수님! 주님의 사랑은 나에게 한 길을 열어 주셨어요.

예수님, 내 헌신, 내 모든 야망,나의 희망, 나의 꿈 그리고 여기 내 삶, 희생이있습니다, 주님

오,  복되신 주님! 주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어요.

 주님의 시선에 사로 잡혀, 바로 여기 주의 얼굴 앞에서  하나님의 앞에선 나

내가 머물고 싶은 곳. 오, 주의 집에 거하기 위해 당신에게 내 모든시간과 날들을 바쳐요.

오, 주여! 제게서 주의 향기가 나나요? 내가 주께 기름을 부어 내 삶이 온전히 드려진 건가요?

그런 다음 여기서 서원합니다.내가 부르는 노래 ,그리고 여기 모든 멜로디가

당신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세요. 무엇이 당신을 움직이는 지 가르쳐 주세요

그리고 당신에게 내 사랑을 부워 바칠래요.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나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온전히 바칩니다.” 이 가사의 내용을 음미하다보면 내가 온 정성을 다해 주의 몸과 머리에 부은 향유가 그리스도의 몸에 흐르면 더 아름다운 향기가 나지않을 까하는 상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모세가 온유가 지면에가득하여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을 설득했던 것처럼, 다윗 잠든 사울 앞에서  주님이 기름 부웠던 자를 내가 해칠 수 없다고 말한 것처럼 더 높은 마음 ,하나님을위해 우리는  Extra mile을 가야 합니다.

결론: ‘In memory of her’ 기독교 역사를 보면 수많은 여인들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역사가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사 드보라, 이방여인 룻, 미갈, 훌다, 민족을 살린 고아 소녀 에스더, 마리아 그리고 초대교회 브리스길라, 뵈뵈 , 루디아등이다. 모두가 주를 위해 상상을 초월한 Extra mile 간 분들이다. 그들의 행적을 기억하며 그들의 삶을 본 받자.

July 4, 2021

진, 선, 미의 그리스도인

서론오늘은 미국의  245주년 독립 기념일 입니다.  세계 역사나 우리한국의 역사에 비하면 245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역사이다.  이런 짧은 기간에 미국이 위대한 초강대국이 된 데는 이 나라 건국자들의 이상과 그것을 따라 실천한 국민들의 역할이 있었다고 본다. 영국의 미 대륙 개발은 1607년 개척단을 파송해 버지니아 제임스 타운 설립으로 시작됐지만 미국의 정신은 영국 국교의 박해를 피해 1620년 뉴 잉글랜드로 이민해 온 ‘청교도’가 발전시켰다고 본다. 청교도는 성경의 사람들로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창조되고 창조주로부터 생명과 자유, 행복추구의 권리를 받았다고 믿었다. 이들에게 정부의 힘은 국민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동의를 얻는 데서 온다고 보았기에 정부 형태는 민주주의 공화 정치를 채택했다. 이들은 성경을 통해 인간 역사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활동하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세워 그 목적과 뜻을 이루고, 이를 위해 그들을 이민자로 부르시는 것을 보았다. 청교도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결속된 계약 백성으로써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살면서 온 세상 모든 민족을 향해 빛을 비추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사명을 가지고 미 대륙으로 건너 왔다. 성경에 근거한 사명을 가지고 나라를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를 먼저 실천, 실험하고 그것이 어떤 정치 제도보다 뛰어난 것을 증명한 후에 다른 나라에도 민주주의와 생명과 자유를 전하는 일을 하고 또한 온 세계에 기독교 선교사를 파송해 하나님의 빛과 생명을 나누는 일을 했다. 어느 나라나 건국 이념이 있다. 한국은 ‘홍익인간’ 곧 ‘널리 인간을 유익하게 한다’는 좋은 이념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오랜 역사에서 다른 나라를 유익하게 하는 큰 일을 이루지는 못한 아쉬움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념을 실천해 모두가 참 유익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예화 ) 영화 ‘Independence Day’

저는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나와있는 이 건국의 이념을 다시 되새겨 보려는 이유가 있다.  미국 서던 복음주의 신학교의  총장인Dr. Richard Land랜드 박사는 현대의 진보 주의 크리스챤들에 대해 “그들은 선언서가 아닌 헌법만을 원했다.  왜냐하면 선언서에는 ‘하나님’과 ‘전 세계 최고의 재판관’을 향한 호소와 ‘신성한 섭리의 보호에 대한 변치않는 의존’을 말하기 때문”이라면서 “그러나 선언서 원칙에 따라 정부를 구현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헌법’은  정작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오늘은 미국의 독립선언서의 원천적 근거가 되는 시편 1편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어떤 성도가 말하기를 영어로 시편을 무엇이고 하느냐 고 물으니 ‘ 풋쌈스’ 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영어론 ‘사-암스’라고 말음합니다. ‘풋삼스’란 말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님니다. 원래 히브리어 성경엔 ‘세페르 태힐림’ 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B.C  300년경에 이집의 알렉산드리아 에서 유대 학자들이 모여  최초로 헬라어로 번역 할 때 ‘프살모이’라 하였다.  현악기의  소리를 뜻하는  ‘프살모스’의 복수형이다.  그 의미는 ‘현악기에 마춰 부르는 노래들’이란 의미이다.  그후에 라틴어 성경으로 번역할 때 ‘리베르 살므름 (Liber Psalm)’ 불러서, 영어에서 ‘ Psalms’라고 표기하게 되었다.  시편은 다윗의 시가  73장, 아삽은 12개, 고라 자손(10), 솔로몬 2개, 헤만, ,에단 , 모세(90)등이 썻고 , 50개는 무명이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아쉐르)과 악인(레솨임)을 확실하게 구분해 놓았다. 히브리어 ‘아쉐르’는 확실  복있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아쉐르’ 에는 잠시 끊어 일으라는 메데그 표시가 있다. 굉장히 감격적으로 음미하며 읽으라는 표시.   오늘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참된 복된 사람이 될 수 있을 까?

본론: 첫째 , 성도는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1절) 예수님이 자신을 세상에서 나타내실 때  ‘인자’라고 표현 하셨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께 대하여 무엇이라고 불렀을까요?  주로 ‘선한 선생이여’라고 불렀다. 그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생각 할 때 ‘선한 선생’이라는 image 떠오르는 것이였다. 성경에는 ‘선하다’ 는  단어가 히브리어엔 ‘토브’ , 헬라어 ‘아가토스’ , ‘칼로스’로 25회 정도 나온다. 예수님 자신도 자기를 선한 목자라 하였다. 예수님의  동생인 우리는 다른 사람이 대해 악한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하며,  사람을 실족하게 만드는 일에 동조하지 않으며, 자기 잘난체 하는  자리에 서지 말아야  말아야 한다.

둘째, 진리를 찾아 해매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 인정함을 받기위해 살아 왔고, 또  우리는  앞으로 의와 진리가 어떤 것인지 부단히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야로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것이다.(2절) 시편 37:5-6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셋째, 우리는  늘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기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 어머니께서  어떤 사람을 칭찬할 때 쓰시는 말이 있다. “그 사람 다시 없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 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지나간 뒤에모든 것이 깨끝하게 청소되어 있고,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정리되어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발자취는  이러해야 합니다.

신30:19,20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June 27, 2021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자

서론제가 고등학교 때 교회 고등부에서 ‘심층 토론회’라는 행사를 가젔는데, 토론회의 주제가 “믿음이 먼저냐? 사랑이 먼져냐 ?”라는 것이었다. 모두가 참여하여 열띤 토론을 하여 한가지의 결론에 도달했는데 그것의 하나는 “믿음과 사랑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여서 둘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란 결론이었다. 우리가 굳이 그것을 역사적으로 따지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으며,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 입니다. 우리가 성도들이 기도할 때나 찬양을 부를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요” 라고 고백 할때가 있다. 엄격히 따지면 이 고백은 신학적으로 조금은 문제가 있는 말이다. 요한일서 4:7,8.10을 보면 “7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신약의 서신중 가장 유명한 3장이 있는데 먼저 고전 13장 사랑 장이고, 고전 15장의 부활 장이며, 오늘 읽은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이다.  “고전 13장은 아름다운 사랑의 송가요, 고전 15장은 부활에 관한 논문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오늘의 11장은 믿음의 역사요, 실증록이다. 그것은 믿음에 대한 장편의 개가, a long paean on pistis 다.”라고 신학자 Moffatt은 말했다. 오늘 저는 본장에 나와 있는 3 믿음의 선진들을 살펴 보면서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우리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 수 있는지를 살펴 보십시다.

먼저 아벨이란 분은 하나님께 참된 예배(worship)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분입니다. 창세기4: 3이하를 보면”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이 말씀을 원어적인 해석을 해보면  가인은 자기가 먹는 땅의 소산물로 드렸고, 아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첫양의 새끼 고기와 기름을 태워서 드렸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을 respect(신망)하였다라는 것이다. 아벨이라는 이름의 뜻은 ‘숨 쉬다’ “촉촉한 숨결”라는 뜻이  있다. 출 13:2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 시대에 살았던 아벨은 이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와 예배를 이미 알았다는 뜻이다. 아벨은  제사를 드릴 때하나님의 마음을 해아려 제사를 드렸고, 아버지로 부터 내려오는 전승을 따라 드렸다. 창 3:21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에덴 동산에서 쫏겨 날 때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해주신 것이 가죽 옷을 지어 그들에게 입히실 때 그 가죽을 얻기위해 짐승을 잡았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어 성경에 보면 이것이 속죄할 어린양 예수가 오실 예표라 표기되어 있다. 아벨은 부모님께 배푼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키는 제사를 드렸으며, 부모님 때의 아름다운 신앙 전승을 따라 드렸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신앙의 아름다운 전승을 무시한 채 자기 생각, 방식대로 예배드리는 교회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저께가 한국 동란 6.25의 72 주년 이었다. 나는 6.25를 생각하면 무고한 피를 흘리며 갔던 200만의 생명들을 떠올리며 카인에게 무고하게 살해되던 아벨을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 내게 호소하느니라” 아벨은 아무죄 없이 타인의 질투에 의해 살해 되었다. 우리 조국땅에서 무고한 생명이 죽어 갔던 것처럼…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핏소리를 분명이 들으셨다.

둘째, 에녹은 하나님과 교제를 잘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그것도 300년이란 긴세월 동안 하나님과 사귀었다. ‘에녹’이라는 ‘헌신하다’는 뜻이 있다. 그는 긴새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신을 헌신했던 것이다.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드셀라’인데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다. 그 이름의 뜻은 ‘목표 저점에 정확하게 도달한 사람’ 이다. 찬송가의 가사에  “옛날 선지 에녹같이 우리들도 천국에 들려 올라 갈때까지 주와 같이 걷겠네” 처럼.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은 한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많은 현인들도 이 죽음 앞에서 비굴해진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자기가  일구었던 명성을 까먹고 가기도 한다. 그런데 에녹은 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광스럽게 하나님 앞에 가셨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신실한 주의 종이며  훈륭한 부흥사 었던 한국의 고 이 성봉 목사님은 항상 오른 손을 옆으로 내밀어 살며시 쥐고 다시셨는데, 그이유는 하나님의 손을 붇드기 위해라라고 하셨다

셋째,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수고로이 일 함으로 그분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이다. 참고로 노아의 이름의 뜻은 ‘안식’라는 의미이다. 창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라고 하였다. 그는 그의 증조 할아버지 에녹저럼 하나님과 동행 했기에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자라 칭함을 받았다. 노아는 여기에 더해  하나님이 디자인 한 길이 160 미터 30미터, 높이 20미터의 방주를 100년 이상 지을 정도로 그의 삶에서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갔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이런 훈륭한 Civil engineer가  따로 있었을까? 그는 주위 사람의 조롱과 비웃음 속에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던 것이다.

결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보다, 아벨처럼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하는자가 되며 , 에녹처럼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다듬고 그분과 동행하며, 노아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우리 삶 속에서 철저히 지켜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도 드림니다.

June 20, 2021

본문: 

베드로전서 3:1-7,

엡 5:22-33, 6:1-4,

골3:18-22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 받을 자

서론: 오늘은 미국에서 아버지 날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가정을 위해서 어깨를 짓 눌르는 무거운 짐들을 온몸으로 견디어 내며 힘든 삶을 지탱하시는 이땅의 모든 아버지들께  큰 하나님의 위로와 복이 내리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제가 말씀을 전하기 전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려야 사항이 있는데, 제가 말씀을 전할때 사용하는 어떤 예화나 통계적 자료들 중에는 때때로 예외적인 부분도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아프리칸 미국인들의 사회 속에서 비치는 그들의 아버지 상은 그렇게 좋은 Image가 아닙니다. 대부분 그들에게 비치는 아버지의 개념은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다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그들은 잘이해하지 못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또한 여성 인권 운동가들 마찬가지다. 그들은 성경이 남성을 중심으로 만 쓰여졌기 때문에 이시대의 사회속에선 여성이나 중성의 개념 속에 재해석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에는 ‘아버지’란 말이 920회, 어머니란 말이 고작 177회 만 나온다. 우리말 성경엔 ‘아버지(444회)’ ‘아비(471회)’로 나워어져 있지만  원어엔 구약의 선 ‘아브’ 신약에선 ‘파테르’ 통일되어 있다. 구약에는 ‘아브’란 히브리어 말로 114회 나오는데, 이중 10번만 하나님을 가르쳐 아버지라 하였다. 성경에 하나님을 처음으로 ‘아버지’라 부른 사람은 다윗이다. 시편89:26”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신약에선 대부분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아버지’란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신약에서 아버지란 말이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은 요한복음(165회)이며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은 요한복음17장이다. 어떤 성도가 교회 예배에서 기도할 때  ‘아버지’란 단어를 너무 많이 쓰자 목사님이 그 횟수를 줄이라고 햤다.  옆에 있던 성도가 대답하기를 예수님은 요한17장에서 하나님께 기도할때 26절 중에서  40회나 ‘아버지’란 말을 사용했다고 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 말씀을 통해  참 아버지의 모습은 무엇이며 또 그외의 성도들은 어떻게 아버지를 생각하고 가정에서 그분의 자리를 인정해 주어야 하는 지를 생각해보자.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말씀 하기를, 어떤 심하게 궁핍해진 가정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한 가정이 되면 어머니는 자녀들의 배고픔과 헐벗음 그 자체에 슬퍼하지만 아버지는 거기에 더해 그 상황에 이르게 만든 자신의 비참함이 더해져 더 고통스러워 한다고 말했다. 어떤 여 성도님의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 술과 도박에 치우쳐 자신의 속을 썩히며 살다가 건강악화로 세상을 떠난후 자녀들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내게는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더 낳은 분이었다.” 우리들에게는 있을때 보다 없을 때 더 빈자리를 느끼는 분이 우리들의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먼저, 우리 기독교 가정의 하나님께서 오는 권위와 복의 줄기가  그 가장인 아버지를 통해 온다는 사실이다. 본문 1절의 말씀을 2천년 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대에도 적용 되는 것이다. 단지 복종이라는 단어가 순종이라는 단어로 발전되었을 뿐이다.

둘째, 그 가정 식구들에게 긍정적 힘을 주는 가장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아버지들의 언어속엔 자신의 상황만을 생각하고 함부로 내뱉는 말들이 많다. 평범한 삶속에서 그가장의 언어를 식구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희망과 긍정적 어너지를 주기도 한다. 언어의 힘은 대단하다. 한 기독교인 가장의 가족에 대한 언어는 그들의 복과도 연관이 있다.

셋째, 일방적 언어 통행은 금물 대부분의 자녀들은 아버지와 대화를 원하지 일방적 훈시를 싫어한다. 어떤 자녀는 아버지의 훈시가 시작되면 오금이 절여오는 이도 있다.

결론: 가정의 불화는 하나님과의 대화도 단절이 된다. 본문에서 “ 너희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기위함이다.”라고 했다. 다툼의 감정이 남아있는 부부가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다.

June 13, 2021

또 다른 할렐루야

서론: 지난 Memorial Day 주말에 미국의 네쉬빌에서 있었던 Christian music award 있었다. 여기서 John Cooper 란 분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가장 위대한 노래의 작사 자곡가는 다윗이라고 소개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다윗이 쓴 시편은 구약 성서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시이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노래이다.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선한목자와 사랑스러운 양의 모습으로 묘사한 생명의 시이다. H.W Beecher라는 사람은 이 시편 23편을 가리켜 “어두운 곳에서 수줍은 듯이 노래하는 평범한 빛갈의 깃털을 가진 작은새이지만, 아름다운 선율로써 온세상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나이팅케일 시편이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본시의 전반부(1-3절)는 선한길과 평안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하며 후반부(4-6절)는 환란과 역경속에서 지키시는 하나님을 나타낸다. 다윗의 시의 특징은 그의 삶 가운데서 체험적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음악이나 설교들이 삶과 동떨어진 그냥 예술적 perform들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19세기 이후에 찬송가 중에 가장 많이 기독교인에게 불리워졌다는 ‘Amazing Grace’ 흉악한 노예 장사를 했던 그의 삶의 경험과 회심에서 쓰여진 찬양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삶에 평안과 기쁨이 있으면 주를 기뻐하며 찬양 하지만, 환경과 역경을 만나면 우리 마음과 입에서 주를 향한 노래가 사라져 버린다. 오늘 저는 우리가 너무나 잘아는 이 시편 23편 속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미쳐 깊히 깨닫지 못한것 몇가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의 보조자가 아니라 우리를 주관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1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이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 ’내게’는 다르다는 것이다. 원문에 모면 목적격이 아니라 주격 ‘내가’의 의미(엑크사르)로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영어에도 “I shall not want”로 되어 있다. 많은이 들이 내 마음대로 하나님을 나의 필요로 내게 채울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내가 자신이 하나님 것 이외의 새상 것은 그리 필요하지 않다고 다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 삶을 주관하여 주시라고 나를 비워야 하는 것이다.

두번째, 양들이 푸른 초장에 누울때는 그들이 정말 평안때만 눕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몇가지 조건이 충족 되어질 때만  눕는데, 1) 양은 겁이 많기 때문에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기가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만 눕는다. 2) 양은 그 집단 속에서도 계층을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들간의 싸움이 벌어지면 질서의 혼란으로 눕지 않는다. 3) 양들은 무척 세심하고 민감해서 파리나 기생충에 시달리면 눕지 않는다. 4) 배부르게 꼴을 먹지 않으면 눕지 않는다. 다윗은 그가 친히 목동이었기에 이렇게 세심하게 관찰하여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양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푸른 초장에 눕는 양의 모습을 평안의 극치로 표현 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면 이토록 평안하고 또 우리는 평안해야 한다.

셋 째, 우리가 가진 의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데 쓰여져야 한다.(2절) 주기도문에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 하였다. 우리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는 훈련을 매일 해야 하는 것이다. 내 영혼을 나의 잘못들을 자백하는 일부터 시작한다.(요한1서 1:9). 하나님은 그의 자녀인 우리가 490이라도 잘못을 시인하면 용서해 주시고 소생시켜주신다. 비록 세상 사회는 그렇지 많지만 그분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등을 감싸 주신다.

네번째, 우리 인생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를 지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때도 우리 곁에 계시는 것이다. 목동의 막대기와 지팡이처럼 악한자로 부터 보호하시며, 여호와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 지팡이는 ‘쉬브테카(staff)’ 길을 인도하는데 쓰이며, 막대기 ‘쉬안테카(rod)’는 사나운 짐숭이나 공격자를 쫓는데 사용된다. C.S Lewis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가 평안에 거할 때는 우리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이지만 우리가 환란과 역경을 만나면 우리에게 크게 소리내어 말씀하신다.

결론: 저는 6.25 한국 동란을 겪지 않았지만, 6월이 되면 아직도 많은 분들이 6.25의 상처속에서 신음한다. 그때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찢어지가슴과 육체를 가지고 서도  하나님을 뜻을 알지 못한채 그분을 다시경배하며 슬픈 노래로라도 찬양해야 했다. 지난 1년반 동안 COViD 19사태로  6.25 한국 동란 이후에 가장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사망했다.

Worldometer의 통계로 보면,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세계에서 380만명 이상이 사망했고, 1억8천만명 정도가 감염됬다.  많은 기독교들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 주를 등한시 여기거나, 신앙의 나태함으로 교회에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다시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에서도 그분이 계시기에 다시 찬양해야 하며, 원수들 앞에서도 평안하게 정식 식사를 하는 포용과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또다른 할렐루야’로 주님을 찬양하자. 그의 선하심(보호,관찰)과 인자하심(용서와 포용) 정녕 우리와 함께 하심니다.

June 6, 2021

가장 아름다운 성도

서론: 제가 잘 아는 어떤 집사님이 부인의 생일날 저녁이 되어서 꽃을 사야 되는데 꽃 가게가 문이 닫아서 하는 수없이 집에 빈손으로 들어서면서 부인에게 하는 말이 “ 당신 자체가 꽃인데 무슨 꽃이 필요해” 라고 변명하였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창세기 1, 2장을 보면,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꽃은 인간의 창조인 것이다. 창2:7,8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하나님이 손수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신 그분의 작품인 것이다. 사람은 에덴 동산의 꽃보다도 아름답고 귀한 창조물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잃어 버린 낙원을 다시찾고 그동산의 어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 삶의 결국의 목표이다. 1989년 ‘안치환’이라는 가수가 불렀던 노래중 “꽃보다 아름다워” 라는 노래가 있다. 장지원이라는 사람이 쓴 가사를 잠시 읊어보면, “강물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정들어 가는지를.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되지 음 알게되지. 그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되고 산이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를 품고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사랑” 이런 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모습의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 아니 성도가 될 수 있을까?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가장 많이 강조한 사도는 요한 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사랑을 고전 13장을 통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 또한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가진 성도는 어떤 모습을 지녔는지를 말씀해 주고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가장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을 이세대에 나타낼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의 입과 몸과 아음을 항상 추스리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7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마지막을 의미하는 ‘텔로스’ 종말, 마무리, 완전, 결과라는 뜻도 포함한다. 원어 ‘엥기켄’은  “임박하다, 하나님의 보응의 때가 오다”라는 뜻이 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로 표현된 ‘소프로네사테’는 “건전한 정신을 가지다, 조용하다,겸손하다”는 뜻의 단어 ‘소프로네오’에서 유래됨. 영어엔  sober-mind라 표현됬는데, 이것은someone who is serious and sensible.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 부터 “지금 당장 네가 죽지 않는다. 하나님이 못먹을 것 심어 났겠어? 어디 한번 먹어봐” 라고 하며 인간을 현혹시켰다. 지금도 마찬가지 지금은 말세가 아니다. “사람들이 옛날부터 ‘말세’라고 했다. 더 느긋하게 즐기며 살아. 아직 세상의 끝은 아니야”라고 하며 우리를 나태하게 만든다.

둘째,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어주는 아름다움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8절).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모습은 많치 않습니다.  성프란시스의 기도에서 어떤내용이 있습니까?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수도원의 역사를 훑다보면 두 개의 거대한 봉우리를 만난다. 하나는 ‘성 베네딕도(480~547)’이고, 또 하나는 ‘성 프란치스코(1182~1226)’다. 베네딕도는 서양 수도원에 주춧돌을 놓았고, 프란치스코는 무소유의 삶으로 수도원에 영적 나침반을 제시했다. 특히 성 프란치스코는 가톨릭 역사를 통틀어 신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우리 한국에도 이러분과 같은 성자가 계신데 그분이 손양원 목사님이심니다.

셋째, 서로 대접하며 서로 봉사하는 모습은 인간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예수님께서 요한13:8에서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는 서로의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13: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또한 34 ,35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예수께서 여기서 3번씩이나 ‘서로(알레루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결론: 신약성서에는 청지기(오이코노모스)란 말이 10회 나온다. 이 말은 ‘시대’ 경륜’ ‘관할’을 뜻하는 ‘오이코노미아(9회)’란 단어에서 나온 말이다. 아름다운 성도는 시대를 직시할 줄 알며 종이 아닌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저의 집의 뒷 뜰에는 두가지의 장미가 있다. 하나는 붉은 색의 꽃만을 피우는 가시가 많은 장미, 다른 하나는 붉은색만 빼고 핑크, 오랜지, 햐얀색의 꽃을 동시에 피우는  가시가 거의 없는 장미이다. 우리성도의 삶은 두번째의 장미와 같은 모습을 지녀야 한다. 우리가 지나간 자리는 항상 정리되어 있고, 정결하며 우리의 뒷 모습이 꽃보다 아름다운 그런 성도, 그의 사는 삶이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성도가 되자.그의 외모나 세상의 좋은 것으로 감싼 모습이 멋있어 보이는 사람보다 영적으로 아름다운 주의 은혜를 받아 그의 삶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May 30, 2021

가장 행복한 사람

서론: 어떤 분이 저에게 이야기하기를 55이 넘으면 모든 사람들이 먹는 것이 비슷하고, 60이 넘으면 누구나 입는것이 비슷하고, 65세가 넘으면 거하는 곳이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극빈자나 천문학적 자산을 가진 사람은 조금은 다른 겠지요. 우리 삶에 있어 목표는 무엇이고,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선 건강해야 한다고 하고, 세상에서 지위가 높아져야 된다고 하고, 또 재산을 많이 모아야 한다고 욕심을 부립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살아가는데 확실히 필요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아닙니다. 세상에서 건강한 복 받고, 남보다 용모가 뛰어나게 잘 나고, 사회적 지위가 높고, 거기에 많은 재물 가지고 있으면서 유명해지고서도 불행에 울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건강하든지 않든지, 지위가 높든지 낮든지, 재물이 있든지 없든지, 유명하든지 않든지 흔들림 없이 행복을 잡고 사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 봉착하더라도 기뿜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인생이 참으로 행복이 아닐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행복을 찾아야 하지 않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행복은 이상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단순 이상만은 아닙니다. 태어난지 수십년이 됬지만 한발자국도 걸은 적이 없지만 기쁨에 넘쳐 사는 사람도 있고 2년전 페혈성 쇼크로 양팔과 양손을 잃고도 전혀 예상치 못한 삶인데도 부인과 4자녀와 함께 기쁨으로 자기의 주어진 삶을 살고 있는 미국의 Gary Miracle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저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행복관을 인용해 보고 싶습니다.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3,4,6,8절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5,7,9,10 절 이세상 나라에서 사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에 해당되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삶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기에 더해 이 시대에 가장 행복한 사람일 수 있는 세 부류에 속한 사람을 소개해 보려 합니다.

첫 번째는 성도들이 너무도 잘아는 행복한 사람 즉,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 주님이 그를 나의 친구라 부를수 있는 사람입니다.마태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하셨다. 만왕의 되신 주께서 나를 친구라 부르신다고 하니 얼마나 기쁨니다.

두번째, 주 안에서 나를 가장 잘 알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는 친구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나의 혈육 관계에 있는 사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니다. 제가 앞에서 언급한 Gary Miracle은 유명한Christian Group ‘Mercy me’ 의 leader인 Bart Milard의 친한 진구였습니다. 1년 반 정도 전에 그는 패혈성 쇼크로 쓰러져 응급실 8분동안 숨이 멋었지만 다시 소생했다. 그러나 두팔과 다리를 절단해에 했다. 그의 부인과 많은 기독인의 헌신과 기도로 그는 다시 소생하며 새로운 기쁨의 삶을 살고 있다.

세번째, 내가 주위에 없가나 세상을 떠났는데도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의 인생은 그 누구라도 몇10년 후면 다 마감해야 한다. 그 이후의 살아남은 분들이 우리를 어떻게 기억할까 생각해보자.  저의 어렸을때 취했던 기이한 행동 때문에 지금도 웃는 가족이있다.

마지막으로 행복은 내가 지키고 가꾸어 가는 것입니다. 너무나 단순한 이야기 입니다. 저의 가정에서 철칙이 하나 있는데, 저의 아이들이 있는데, 주의 성도들에 대한 흉이나 부정적인 면에 대해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시 우리아이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거나 세상을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염려해서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4:6-7”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끝으로 Gary Miracle을 위해 ‘Mercy me’가 헌정한 찬양 Say I wont’의 가사를 우리말로 적어본다

“ 오늘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됩니다.내 인생을다른 렌즈를 통해 처음 봤어요. 어제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로켓을 넣은 채 35 번을 운전하는 것럼.내가 뭘 가지고 있는지 몰랐어요.

내가 살기를 기다리는 동안 또다른 내 삶이 나를 기다리고있어요

나는 달릴거야 아니, 나는 날거야.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거야

그리고 단지 살아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 들을거야 난 외칠테니까.

그리고 상황이 음악을 몰아 낼 때 나는 춤을 추 겠지

포기한다고 하지 않을 거라고 부족한 내가 들은 것.하지만 그것은 거짓말 일거야

내부의 영은 내가 훨씬 더 많다고 말 하거든그러니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게 하십시오

오, 나는 그들에게 힘들지만 감히 시도해 본다고. 나는 달릴거야.아니, 나는 날거야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거야그리고 살아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들을거야. 난 외칠테니까그리고 상황이 음악을 몰아 낼 때 나는 춤을 추 겠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모든 일을 할 수있어 나에게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러니 계속 말하지만 않겠다고. 그리고 나는 당신이 틀렸다는 것을 계속 증명할 것입니다.

잠언4:23

May 23, 2021

성도의 삶과 소유

서론: 오늘은 성령 강림 주일 입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한 영화 중에 ‘젊은이의 양지( A Place in the Sun)’가 있었다.이 영화는 1951년에 개봉한 미국의 드라마 영화이다. 디어도어 드라이저의 소설 《미국의 비극》과 그를 기반으로 한 동명의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캔자스시티 출신의 시골 청년 조지 이스트먼은 야망을 안고 뉴욕에 상경하여 삼촌이 운영하는 회사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여기서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여인을 만나 서로 좋아하며 동거 하게되어 임신하게 된다. 어느날 삼촌의 파티에 초대되어 멋있는 상류층의 여인과 서로 호감을 느끼게 되어  또 다른 염분에 빠지게 되자 임신한 여인을 버리려 한다.  이것이 뜻대로 되려하지 않자 살인까지도 계획하게된다. 이로 인해 그의 인생은 비극으로 종결된다는 줄거리이다. 여섯 부문의 아카데미상과 골든 글로브상 극영화 부문 작품상을 받는 등 유명한 영화지만, 어린 중학생의 소화할 영화는 아닌데 왜 학교에서 단체 관람을 했는디 지금도 이해가 않된다.

독일 출신 유대인 에리히 프롬’은 190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마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정신분석학자며 사회학자 사상가다. 프랑크푸르트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졸업한 후, 1929년부터 1932년까지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의 강사로 있었다. 나치스가 대두하자 1934년 미국으로 망명, 귀화한 후 컬럼비아 대학과 베닌튼 대학을 거쳐 `52년 멕시코 국립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의 명저,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간의 생존 양식을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소유라는 삶의 방식에서는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유능한 인간으로 인정받는다. 때문에 인간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노력한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은 오히려 소유를 감소시키는 정도만큼 인간의 존재양식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인간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에리히 프롬’은 소유의 방식이 아닌 존재의 방식에 행복이 있다고 말한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유를 감소시키는 존재 방식에 방점을 찍는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것은 과도한 요구이다. 내가 만난 많은 종교인들 중 더 적은 소유를 통해 행복을 누리고 있는 분들은 극히 적다. 그분들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더 많은 소유를 통한 행복을 추구하고 있었다.

오늘 본문 전 11장 에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공격하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충실했으며 그들 나름대로 여호와께 충성하는 종교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정작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 항상 적대적이었다. 아마도 예수님이 그들에게 “화 있을 진저”라고 하며 강력한 경고를 하셨기때문이다. 왜 그러셨을까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 아마도 그들 자신이  스스로 거룩하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애썼기 때문이고, 하나님보다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 했고,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했고, 또 다른이를 이해하기보다 내 규칙에 따라 판단했다. 그리고 내용보다 형식적 의식에 치중하였다. 오늘 본문은 수만명이나 된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향하여 주께서 권면하시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이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며 무엇을 소유해야 하는지 살펴 보자.

첫째, 나의 소유 본능을 채우기위해 예수를 따라서는 않된다. 창세기 2장에서 에덴 동산에 있는 아담과 하와는 많은 것을 소유했다. 자기가 창조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을 다 소유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3장에서 사탄은 이들을 꼬여 결핍증에 걸리도록 유혹했다. 이 유혹에 넘어간 하와는 더 소유하려는 욕망에 사로 잡혔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하려는 욕망, 하나님 처럼 절대적으로 다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타락이 시작 되었다. 우리의 희망이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욕망이 죄가 되는 것이다. 탐심으로 소유하려 하면 죄가 되고 소유욕이 지나치면 그것이 우리의 우상이 되는 것이다. 제가 가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있는데 “세상에서 돈을 쫓지 말고 돈이 나를 쫓아 오게 하라.”

둘째, 내가 무엇을 소유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고전 13장은 우리가 잘 아는 ‘사랑의 장’이다. 이 주옥 같은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친다. 고전 12장은 ‘은사의 장’인데 우리는 12장 마지막 절을 유념해서 볼 필요가 있다. “31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성령의 은사도 내가 소유하는 것을 찾지 말고 성령에 의해 내가 지배되도록 해야 한다. 어떤 치유의 은사를 받았던  전도사님이 제는 성도들을 바라보면 사랑을 배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시는데 그것 가장 좋은 은사로 승격된 것이다

셋째,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여 주기를 갈망하는 사람도 소유욕에 집착한 사람이다. 세상의 지위, 권력에 대한 집착도 또 다른 인간의 소유욕의 발산이다. 세상에서 뿐만아니라 지금의 교회 안의 현실도 마찬가지 세상의 착하고 겸손한 집사님이 장로를 추대 된후 갑자기 인품이 변하는 시대이다. 고작 한달 정도 장로 고시를 준비하며 신학이나 교리에 대해 습득한 사람이 4년- 7년동안 시간과 열정을 바쳐 공부한 사역자를 무시하고 가르치려는 치리 장로들이 있다.

넷째, 모든 일이 자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이다.빌2:3-6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창세기3장에서 하와가 사탄에 꾀임에 넘어갈 때도 좀 남편인 아담과 의논하고 먹지 혼자 먹고 눈이 밝아지고 예뻐질려고 먼저 먹었다. 인간의 첫 범죄도 소유욕을 절제 못해서 그런것이다. 한국에 속된 말에 “돈 벌어서 남 주느냐?” 말이 있는데, 이 의미는 다 자가와 자기자신과 가족만 위해 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돈 벌어서 남 주자”라는 의식으로 살아야 한다.

결론:우리가 오직 소유에 집착해야 할것은 오직 한가지 주안에서 장차 다가올 소망과 환란 역경속에서도 매일 나의 몸과 영혼 갱신해 나가려는 열정인것이다. 영어로 ‘열정’ ‘열심’을’enthusiastic’이라 합니다. 원어 en=in와 theos=God의 합성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붇들린 그런 뜨거운 소망를 가져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원어로 ‘그리스도의 것’란 뜻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주’라 부름니다. 우리는 그분의 소유가 되어야 합니다.

May 16, 2021

빛의 열매를 맺는 삶

서론: 우리가 어렸을 때 아이들이 동네 어른에게 인사를 하면 어른들이 동네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있는데 그 첫째가 “착한 사람이 되어 좋은 일 많이 하거라!”  그 다음에 얼마큼 세월이 지나 60년데 말엔 “공부 잘해서 이 다음 훈륭한 사람이 되거라!”라가 되었다. 그리고 70년대엔 “이 다음에 돈 많이 벌어서 너네 부모 호강시켜 드려라.” 조금은 우수운 이야기지만 첫 번째 덕담이 가장 성경적이며 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크게 두가지 이유가 첫재는 ‘영생(eternal life)’를 얻기 위함이고 둘째는 형제사랑(Philadelphia)을 이루어 선한 이웃이 되는 것이다. 가정에 달을 맞이하며 우리는 우리 가정안에서 무엇이 기독교적으로 선한것인지 알게하며, 또 이 선한 일을 가르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오늘 분문 서두에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제물이 되신것은 우리 영생을 얻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의 삶에서 사랑 가운데 행하기를 위함도 있다고 말씀하신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십자가 죽으심을 우리가 갈 천국과 영생만 연결시킨다. 주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은 우리가 사는 지금의 삶도 포함하고 있다. 마5: 16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본문엔 이것을 빛의 열매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는가?

본론:  첫째 우리는 선한 삶으로 우리의 열매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을 말한다. 성경에는 ‘선하다’는 단어가 200여회 등장한다. 구약엔 ‘토-브’ 라는 단어로, 신약엔 ‘아가도스’ 단어로 나오는데 둘다 신적인 선을 말한다. 영어로 선하다는 단어가 ‘good’ 하나 뿐이지만 우리 말엔 ‘좋다’ ‘착하다’ ‘선하다’등 여러가지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의 ‘3대 예화’중의 하나인 누가 10:30-37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화는 우리에게 그 시대 종교 사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은연중에 보여주고, 참 선한 이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둘째, 의로운 삶이다. 도덕적 악과  불의를 버린 정직하며 성실함이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상한 심령이 된다는 말은 우리의 잔이 비었음과 우리의 마음이 파산하였음을 깨닫는 것이요.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비해선 정말로 하잘 것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깊이 느끼는 것이다."-마크듀퐁- 예화: 코로나 사태 전의 한국의 큰 교회들의 찬양 모습.

셋째, 진실한 삶이다. 허위 형식에 반대하는 진실을 말한다.(롬12:9) 독일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이 쓴 대표적 소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2차 대전 이후 독일의 궁핍한 사회상을 한 기독교인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두 부부를 통해 드러나는 전후의 사회상은 희망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남편 ‘프레드 보그너’는 전쟁 이후 무기력함에 빠져 있으며 다시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얻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지 못하고 있다. 케테 또한 이런 남편의 모습, 단칸방에서 주인 눈치를 보는 것을 견디지 못하며 이혼을 생각한다. 그리고 교회는 전후의 현실에 그리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피폐한 상황에서도 화려한 의식을 감행할 뿐이다. 또한 부분의 자녀들은 판자로 벽을 만든 공간에서 침묵을 강요 받아 어느새 웃음이 사라진 아이들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작가 뵐은 냉정한 현실을 과장 없이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회복의 길도 제시한다. 이소설 속에서 상이군인인 아버지, 바보 동생과 같이 살아가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푸는 간이식당의 소녀에게서 프레드가 감동을 받았다.

결론: “새 노래로 찬양하라” 시편 6회와 이사야 1회 는 ‘하다쉬 쉬르’로 표기했다. 창조의 자연을 보며 부르는  ’신선한 노래’를 의미한다. 계시록 2회- ‘카이노스 오데’의 의미는 ‘신선한 노래’란 의미로 종교적 찬양 ‘휨노스’ 가 아니다. 계시록3:20

May 9, 2021

고귀한 사랑

서론: 오늘 미국에서는 ‘Mother’s Day’, 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는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이땅의 모든 어머니께 하나님의 하늘 만큼 큰 복이 임하시기를 기도드림니다. 출애굽기 20:1-17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이 있다. 이중 제5계명이 12 절에 나오는데,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이는 처음으로 우리가 인간 사이에 주어 지킬 계명이다. 제1계명 에서 4 계명 까지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지켜야할 계명이며, 5계명에서 10계명 까진 인간 관계속에 해당된다. 그런데 5 계명은 지키는 자 대한 약속이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엡 6:2절에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 표현하고 있다. 또 한가지 재미 있는 사실은 십계명 중 “하지말라”는 계명이 8개고, “하라”개명이 둘 뿐인데, 4계명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과 오늘의 본문 말씀을 의미하는 제 5계명이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드리는 것은, “하지 말라”는 계명과 “하라”는 계명 중 어떤 것이 더 지키기 쉬울까요? 어떤 분이 좀 재미있는 대답을 하셨는데, “하지 말라”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셔요. 그 이유는 “하지말라”는 그냥 아무것도 않하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고, “하라”는 계명은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기에 더 어렵다고 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한계선을 정해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우리가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우리의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한계는 끝이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또한 그 한계가 없는 고귀한 사랑이기에 이 사랑에 대한 우리의 자세 또한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부모의 마음은 어떤것이며 이에 대한 우리의 취할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본론: 우리가 부른 ‘어머니 마음’ 이란 ​노래 가사를 보면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제 밤 낮 으로 애쓰는 마음.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 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하리오.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어려서 안고 업고 달래주시고, 자라선 문에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위에 주름이 가득.  땅위에 그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니의 정성은 그지 없어라. 사람의 마음속엔 온가지 소원.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녀 위하여 살과 뼈를 깍아서 바친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오리. 어머님의 사랑은 지극하여라” 먼저, 우리를 낳으시고,기르시고 그리고 요즘 같은 시절에는 먹이시느라 애쓰시는 부모의 마음과 사랑을 해아리는 마음 가짐을 먼저 가져야 한다. 언제 부터인가 우리는 특별한 때만 시간과 물질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라 착각한다. 우리의 부모들이 원하시는 것은 자녀들이 그들 가슴 속에 부모의 마음을 해아리는 마음 가짐이리라. 한국의 몇 부모님들은 자주 용돈을 쥐어 드리는 것이 효도라 하지만, 이곳 이민 사회의 부모님들께는 생각 날 때 늘 연락드리고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며 사소한 일에 관심 가져 주는 자녀가 가장 고맙다 하십니다.

두번째, 결혼 후 배우자들의 부모 또한 우리의 친 부모만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지금 세대의 많은 젊은 부부들이 야기 하기를 “나는 당신을 보고 당신과 결혼 했지 당신 부모와 결혼하지 않았다.” 특별히 요즘 기독교인의 부부들이 부모와 관련하여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 있는데,창세기 2:24의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입니다. 이것은 인간 사회의 가장 오래된 제도인 결혼 제도의 원칙을 말하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볼것은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분 이십니다. 인간에게 죄악이 들어 온것 자기의 원본(Identity)을 잃어버린 지나친 독립주의에서 시작 된 것이다. 자기가 어디로 부터왔는지를 망각할 때 인간의 비극이 시작됨니다.우리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잃어버림으로 에덴에서 추방된 비극을겪은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시대 우리 또한 내가 누구에게 부터왔고 또 자기의 배우 자 또한 누구 에게서 왔는지 생각하고 사랑하는 이를 지금곁에 있게 해준 부모들을 또한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세계적인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1828-1910)를 모두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명작에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고백록> <바보 이반> 외에도 많은 작품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러시아에서 귀족 출신으로 태어났지만, 법대에서 공부하다가 도중에 중퇴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여 평생 그 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톨스토이가 살았던 삶의 특징을 단 한 가지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평생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던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그는 이제목의 소설에서, 하나님이 한 영혼을 데려 오라고 명령하셔서 세상에 내려왔는데 하필이면 이제 갖 유복자 쌍둥아이를 낳은  엄마 였다. 천사에게 아이들이 죽게 될거라며 아이 엄마가 애원하자 그는 마음이 약해져 하나님께서 그냥 돌아와 말씀하신 내용을 지킬 수 없었다고 하나님께 돌아와 고백했다. 그러자 하느님은 미하일에게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세가지의 질문의 뜻을 알게 될 것"이라며 답을 찾을 때까지 사람들에게 가 있으라 명령하였다. 어렵게 사는 구두수선공 세몬은 어느 겨울날 교회 앞에 지나가다 추위에 떨고 있는 낯선 젊은이 미하일을 발견하고 고민 끝에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 물론 부인 마트료나는 처음에는 못마땅하였으나 남편 시몬이 “당신에게는 하나님이 없단 말이오?”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변하여 미하일에게 저녁을 대접하게 됩니다. 이후 저녁식사를 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통한 세 사람은 한가족 같이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됩니다. 이후 미하일은 구두수선공 세몬을 도와주며 지내게 됩니다. 시간은 어느덧 지나 8년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미하일은 고별인사를 하며, 자신은 하나님의 분부를 어긴 천사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3가지를 깨달으면 하늘나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 이 3가지를 본인이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인간내부에는 무엇이 있는가? 둘째,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셋쩨는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바로 인간내부에 사랑이 있어 타인을 도울 수 있고, 인간은 타인을 사랑함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지금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메시지도 이 소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셋째, 나의 부모가 기독교인이 아니더러도 우리는 그부모를 공경하고 그분들의 귀한 뜻을 잊지 말아야야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부모라도 그의 마음은 똑같다. 많은 기독인들이 믿지 않는 부모를 무시한다. 그분들은 단지 무엇이 진리인지 아직 깨닫지 못한 상태이지 만약 그것이 자녀들에게 소중한 진리라고 여긴 다면 그분들의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우리를 위해 기도 할 것이다.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부모가 어떤 분들이 셨던지 그분들로 인해 내가 있는 것이다.

결론: 우리는 어머니의 마음 속에서 발견한 것은 하나님 지켜주심입니다. 어머님은 늘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소원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당신의 자녀들을 위한 것입니다. 어머님의 손길로는 자녀를 위해 더 이상 할 수 없어  하나님의 손길을 구할 수 밖에 없으십니다.  이땅의 모든 부모는 저 하늘의 계신분도 지금도 자녀들을 위해 자신이 더이상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 구하십니다.

May 2, 2021

본문: 

 에베소서 4:1-6 , 

골로새서3:12-17            

어둠을 몰아내고

서론: 벌써 ‘가정의 달’인 5월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방금 전에 드렸던 찬양의 가사 중 “앞만 향해 나가자”는 찬양의 가사가 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앞만 보며 나가자”라는 의미와는 좀  다르다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전자는 우리가 나가는 방향과 목표를 향해 주의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굳굳이 나아가는 것이고, 후자는 옆과 뒤는 전혀 무시한 채 무조건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육상으로 말하면 전자는 장거리 경주이고, 후자는 단거리 경주 선수의 자세라 할 수 있습미다, 우리 성도들의 영적 삶은 장거리 경주와 같음을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회 학자들이 지금의 시대를 ‘가정의 위기’시대라고 말합니다, 그 만큼 지금의 가정들이 본래의 모습에서 무너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대가 하이택 시대이고 경쟁의 시대이니 내 가정과 나의 대인 관계가 그만큼 조용히 주위를 살펴볼 기회가 없이 앞만 보며 가아가다 보니 가정의 본래 모습이 무너지고 나의 진실한 인간관계가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소속되어 있는 그룹이 세군데 있는데 하나는 그 첫째가 가정, 그리고 둘째가 교회이고 셋째가, 내가 속해 있는 사회입니다. 오늘 우리가 낭독한 본문은 우리가 속해 있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치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3:14에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하는 띠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의 기초는 참된 가정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우리는 가정의 소중함을 더욱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랑의 띠로 우리 가정이 하나가 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첫째, 우리 가정은  종속적 관계가 아닌 희생을 통한 사랑의 관계라는 것이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성경구절은 요한 3:16입니다.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예수님의 십자가 발 앞에 있었던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에 의해  4복음서중 가장 먼저 쓰이진 마가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을 치유하신 다음에도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거듭 경계하셨습니다(막 5:42-43).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신 후에도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명하셨습니다(막 7:36).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후에도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셨습니다(막 8:29-30). 그리고 귀신을 쫒아 내신 후에 귀신들에게 함구령을 내렸고(막 1:34,)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을 보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막 3:11)라고 부르짖어도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셨습니다.독일 신학자 브레데가1901년에 쓴 ‘메시아의 비밀’(messianic secret)이라는 책에서이 이론을 주장하여 당시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아직 메시야로서의 자신을 내세울 시기가 아니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기적에 대해 함구령을 내린 것은,  아마도 세상을 사랑해서 오신 예수님의 본래의 모습이 희석될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주 앞에 나온것도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때문이었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통솔력을 가진 사람이 바람직한  한 가정의 가장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 정신을 가진 자가 진정한 가장인 것이다.

둘째, 질투와 경쟁적 관계가 아닌 아픔을 같이 나누고 상호 보조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가정 교육의 첫째 금하는 것은 다른형제와 그리고 다른 집의 아이와 자신의 자녀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앞만 보고 달려라”만 알하지 말고 주위 사람들을 좀 살펴보며 달려라고 조언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한국의 윤여정씨가 오스카 여우 조연상을 받은 후 기자 회견하며 하는 말이 떠오름니다. 자신이 상을 받은 작품의 감독인 교포 2세인 아이젝 정을 향하여, “이 시대에 순수함을 가지고 따스한 사랑을 표현하히기를 원하는 감독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민 1세인 저 자신도 이곳에 이곳의 많은 2세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셋째, 서로 배려와 관심의 관계이다. 어느 대학의 간호학과에서 학기말 시험이 치러지고 있었습니다. 조용한 가운데 시험은 진행되었고 드디어 학생들이 마지막 문항의 문제를 풀어야했습니다. 그때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졌습니다. 마지막 문제는 "우리 학교를 깨끗하게 청소해주는 아주머니의 이름은?"이었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그 아주머니를 봤을겁니다. 그것도 아주 자주 지나쳤었습니다. 검정머리에 보통키. 나이는 오십대 초반의 평범한 아주머니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마지막 문항을 공란으로 두고 시험지를 제출하였습니다. 답안지 제출 후,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마지막 문제도 점수에 반영 되나요?" "물론이지. 너희는 앞으로 간호사로서 많은 환자와 가족등 여러 사람들을 대하게 될 거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중요하지. 각별한 주의와 배려가 필요하지. 마지막 문제는 너희들 사랑의 온도 측정이지!"라고 교수는 대답했다. 이 예화는 제가 경험한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특별히 지금과 같은 상황 속엔 그들이 더욱 고맙습니다.  오늘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당부를 하면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 가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을 가르쳐줍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세상과 다른 가장 뛰어난 성품이 바로 사랑의 띠로 서로에게 묶여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띠는 바로 "사랑의 온도"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과 배려심을 갖고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렇게 Band로 연결되는 것도 사랑의 띠로 서로가 서로를 묶는 것입니다. Band라는 말은 원래 "띠로 묶는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또한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속회를 Band라고 칭했습니다. 사랑의 띠로 묶은 소그룹을 뜻합니다. *우리교회는 꼭 소수에 대한 다수의 배려가 필요합니다. 부족한 저도 여러분들의 배려로 이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한국에서 유행했던 노래중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사람이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사랑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며, 다른 사람이 잘못했을 때 ‘사랑으로’ 덮어주고 주고 감싸 주는 것이 진실 성도인 것입니다.

April 25, 2021

어둠을 몰아내고

서론: 우리가 보통 하루를 시작이 아침부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루의 시작을 저녁부터라고 시작하는 나라가 있다. 그나라는 바로 유대민족의 이스라엘이다. 유대인들의 하루는 해지는 저녁부터 이튿날 오후 해지기 직전 까지이다. 즉,어둠으로 지작하여 밝음으로 끝이 난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유대인들의 독특한 시간관이 그들을 비참한 고난의 역사속에서도 굳세게 살아남게한 원동력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오늘이 아무리 힘들어도 내일은 지금보다 낳을 것이니 참고 기다리자”라는 사상이 그들에게 있다.   「이스라엘 국가」의 곡명은「희망」. 히브리어로 하티크바이다. 그러니까 찬송가 「밝은 빛을 따라서」는 현 이스라엘의 국가 곡조인 것이다..

이 이스라엘 국가를 「하티크바」 혹은「하티카」라고도 한다. 작사자는 나탈리 헤르츠 임베르(Naftali Herz Imber, 1856~1909)로서, 그가 1887년에 가사를 썻는데, 이때는 유대인들이 나라없이 2천년 가까이 세계에 흩어저 살던 때이다. 1882년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태생이다. 편곡자는 몰다비아(Moldavia)에서 이민 온 사무엘 코언(Samuel Cohen)이이며, 곡조는 스메타나가 스칸디나비아 민요에 기초하여 주제로 한「몰다우강」에서 왔다. 원 곡조 가락은 히브리 전통 가락으로서 작곡자를 알 수가 없다. 미국에서는 여러 사람이 히브리어로 불러 CD를 냈다. 히브리어 글자는 어려워서, 영어로 번역된「이스라엘 국가」 가사를 인용해 보면 “As long as deep in the heart, The soul of a Jew yearns, And forward to the East To Zion, an eye looks Our hope will not be lost, The hope of two thousand years, To be a free nation in our land, The land of Zion and Jerusalem.” “마음속 깊이 유대인의 영혼이 동경하고 갈망하며 동쪽으로 시온을 향하는 한 눈을 가진 우리의 희망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천년의 희망, 우리 땅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자유 국가가되는 것.” 이곡은 1897 제 1회 Zionist 대회에서 찬가로 채택 되었고, 1948년 5.14일 이스라엘 독립되면서 국가로 불려졌다.  “세상의 모든 큰 사건은 밤에 이루어 진다.”(1937년 프랑스 영화).는 말이 있다

오늘의 본문 속에 깊은 절망의 밤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은 두 전도자의 신앙으로 많은 주님의 역사가 잃어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몇가지 큰 은혜를 받을 수있다.

첫째, 매를 맞고 사슬에 묻겨 어둡고 침침한 감옥에 던져진 그들은 희망의 찬양을 불렀다는 것이다.(24,25절) 드로아에서 밤에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굳게 믿고 아시아로 향하던 방향을 바꾸어 유럽을 향했다, 마케도니아 (유럽)의 첫 성 빌립보에서 그들은 뜻하지 않은 환란과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그들은 칠흑같은 어둔 감옥속에서 엄습하는 두렴속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찬양을 드렸다.

둘째, 자신들은 구원 속에서 또다른 영혼을 생각하는 배려하는 마음을 가졌다.(27,28절). 바울과 실라는 주의 능력으로  이로 인해 바울 선교의 삶에 있어 가장 중심이 되어온 빌립보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자주 옷감 장사 루디아 집이 첫 열매이고, 그 다음이 감옥의 간수장의 집이다.

셋째, 믿는 자의 구원은 나와 그리고 가정이다.(30,31절)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누가복음 19장에서 세리였던 삭개오의 회개의 삶을 보시며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로마의 신민지였던 유대 나라에서 세리는 지배자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누어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그런 그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자 예수님온 그의 온 집에 구원을 선포한 것이다. 바울은 옥의 간수가 구원의 조건을 물었을때 “너의 네 집이 주 예수를 믿으라” 했다.

결론: 하나님이 언젠가는 시온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는 약속을 믿는 유대인에게 하나님은 소망을 가졌다,윤동주의 시-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어두움을 내모는 찬송, 기도, 삶을 살자.

새 찬송 487(통535)장-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바람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 나며 수고한 후에 쉼이 있네.연약함 후에 강건하며 애통한 후에 기쁨있고 눈물 난 후에 웃음 있고 씨뿌린 후에 추수하네.괴로움 후에 평안 있고 슬퍼한 후에 기쁨 있고,멀어진 후에 가까우며 고독함 후에 친구 있네고생한 후에 기쁨 있고 십자가 후에 영광 있고,죽음 온 후에 영생하니 이러한 도가 진리로다

April 18, 2021

믿음의 경주 자

서론: 예수님의 산상 수훈이 마태 5-7장 까지 있는데, 5장은 천국 시민의 자격을 설명하였고, 오늘 본문이 있는 6장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 위해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시며, 또한 성도의 세상에서 삶의 목적과 방향을 제시하여 준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며 어떤 눈으로 사람과 세상의 것들을 바라 보아야 하는지 교훈하여 준다. 성경에 ‘눈’이라는 히-‘아인’, 헬-‘옵달모스’로  520회 이 이상 나온다.  신명기32:10 ”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시편17:8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라는 말씀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표현이 있다. 그것은 “눈동자 처럼 지키신다.” 구절이다. 그리고 잠언 7:2, 애가2:18, 스가랴2:8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있다. 영어 성경에는 “keep me as the apple of your eye”  히브리어적 해석엔 as the little maiden of His eye” 표현된다. 이 의미는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 매우 가까이 다가가 서로의 눈을 마주보면 상대의 눈동자 속에 자신의 조그만 모습이 반사되어 보인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가까이서 소중하게 바라보며 지켜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토록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어떤 눈으로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본론: 먼저, 교만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겸손한 눈으로 세상을 보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있는데, 교만한것이다. 잠6:16,17”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하늘나라 에서도 오래 전에 불상사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사14:12-15”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와 겔24:14,15 나온데로 천사장인 루시퍼가 거만하여 하나님을 배신한 것이다. 그러기에 교만한 자는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둘째, 거짓과 속임수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지말고, 순수함과 진실한 눈으로 사람을 보라. 주전 1세기 로마의 정치가 이며 법류가이며 작가인 마커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그때 당시 공화 정치를 주장해서 실현했고 ‘키케로의 국가론(De re publica)’, 《법론》(De legibus)등을 써서 오늘날 민주 공화 주의의 영향을 준사람이다. 그가  말하기를 “생활의 경건과 거룩함은 신을 감동시킨다.”고했습니다. 우리 성도가 추구하는 거룩함의 의미는 구별됨과 정결함과 정직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함니다. 롬12:1-2

셋째, 내를 대적하는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라. 세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처럼, 빌라도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처럼, 십자가에서 양 옆에 달린 강도들을 바라보는 눈으로 사람을 보라. 앞에서 언급한as the little maiden of His eye”말씀의 의미대로, 하나님이 주의 자녀인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가까이 보기를 원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다른이를 그런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결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떨때 보면 꿈이 너무 크다. 예수님처럼 완전한 인간이 되어 세상을살려고 한다.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하기보다 예수님이 세상을 바라보신 그런 눈으로 바라보기만해도 충분한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하시기를 “I’ll keep you as the little maiden of my eye”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기도로서, 말씀 묵상으로, 찬양으로 주앞에 더 가까이 다가가 예수님의 눈을 보아야 그 눈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 닮을 수 있는 것이다.하루를 시작하기전 단 5분이라도 드리는 기도속에서 우리의 눈은 점점 예수님의 눈을 닮아 갈  수 있다. 벧전3: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자를 바라보시며 우시던 주님의 눈,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통의 순간 속에서도 슬피우는 예루살램 여인들을 보라보시던 그 눈을 닮을 수 있도록 기도하자.

April 11, 2021

본문: 

디모데후서 2:1-8

히브리서 12:1-2                                                                                                              

믿음의 경주 자

서론: 육상경기에서 ‘home-stretch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final-stretch라고도 하는데 경주의 마지막 결승점을 향하여 치닫는 부분을 말함니다.우리의 신앙은 경주(競走)와 같습니다. 우리의 성도들은 우리의 삶에서 각자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그 경주의 마지막 결승 지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젊은이들 처럼 이제 경기의 반환점에 이르지 못한 사람도 있다.하지만  하나님의 역사속에서 보면 지금 이세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구원사의 final-stretch 지점을 달리고 있다고 봅니다.사도 바울 역시 신앙을 경주에 비유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 서두에선 좋은 하나님의 군사로 표현하고 있지만 결국은 승리하는 경주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 보면,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마라톤 경기를 보면, 출발점에서는 다들 비슷해 보입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출발합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중도에 포기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42.195㎞를 완주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 말씀에서 ‘경주’는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를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단거리가 아니고 장거리입니다. 마라톤 경기에서 경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크게 차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히브리서 12장 1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혼자서 달리면 쉽게 지쳐버립니다. 마라톤 경기를 보면, 길 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선수들을 격려합니다. 이처럼 격려는 경주하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경주는 외로운 싸움입니다. 신앙의 길 역시 외롭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응원군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으로 살았던 선진(先進)들이 우리의 응원군입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의 신앙 생활을 ‘영적 싸움’이라 하는데, 저는 이것을 ‘영적 경주’라고 표현하길 원합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은 더욱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도 그런 부분이 있겠지만 우리는 무슨 토론을 해도 목슴 걸고 하는것 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과 12장은 ‘이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연결되어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은 쉽지 않은 경기를 치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완주하여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응원군입니다. 성공한 사람, 승리한 사람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믿음의 경주자가 되어야 할까요?

본문 2절에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 여기서 충성된 자는 원어에 ‘파라쑤 피스토이스’라 했는데, commit to trustworthy 를 말한다. 경주자의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훈련할 때, 고난을 견디는 인내와 지루함을 다스리는 의지가 있어야 함. 그리고 꾀를 부리지 않고 부지런해야 함.

두번째, 경주에 임하려면 자기 몸을 가볍게 많들어야합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히브리서 12장 1절에도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무거운 짐은 경주자에게 있어서 실패의 요인이 됩니다. 무게를 줄이지 않으면, 속도를 낼 수 없습니다. 육상선수가 입는 옷에는 장신구가 전혀 없습니다. 육상선수가 입는 옷은 육상선수에게 제2의 피부와 같습니다. 요즈음은 운동선수가 착용하는 유니폼과 기구를 가볍고 편하게 하기위한 기술이 연구 발달되고 있다.

세번째,경기의 규칙을 잘 지키고 훈륭한sportsmanship을 가져야 합니다. 5절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네번째, 지혜로워야 합니다. 7절에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모든일에 심사숙고 하면 주께서 지혜를 주심니다. 내가 영적사람이니 그냥 바로 언행으로 옮겨도 되는 것이아니다.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을 생각하며 믿음의 경주를 달려야 한다.

결론: 우리가 학교에서 학업에 대한 평가에서 ‘절대 평가’와 ‘상대 평가’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절대평가입니다. 리오 올림픽 장거리 경주에서 한 미국 선수는 경주중 쓰러진 선수를 부축해서 많이 늦었지만 함께 결승점을 통과 했다. 딤후 4: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April 4, 2021

부활의 저편

서론: 기독교 절기 중에 가장 큰 절기는 물론 성탄절 성탄절입니다. 많은 사역자들은 부활절이 가장 큰 기독교의 절기이다 라고 주장하십니다. 아마도 그 분들은 주님의 수난까지 포함해서 포함해서 하시는 말씀이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전15:3-4을 보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부활절이 가장 중요한 절기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예언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온갖 수난과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우리 죄를 담당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의 자녀들이 성장해서 가장 귀하게 보일 때는 부모의 마음을 해아리고 있다고 느꼈을 때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성장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해아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기 위한 훈련들이라 저는 생각해 봅니다. 오늘 부활주일은 주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으니 물론 기뻐해야지요.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상황 속에서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 가장 고통스러울 때는 예수께서 온갖 멸시와 고통과 수난을 당하시고 십가가에 죽으시는 상황을 그대로 지켜보아야 했던 순간 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자리에선 고난과 십가가의 죽으심 보다 더 쉬웟을거라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이니까요. 그래서인지 성경에 부활에 관한 내용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오늘 부활절에 몇 개월만에 주의 성전 안에서 예배드리는 우리는 주님의 부활의 저편에 발견할 수 있는 몇가지 사실들을 발견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 먼저,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 승천했다고 해서 부활의 영광과 기쁨에 젖어 이전 하나님이 우리에게 배푸셨던 긍휼과 자비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롬6: 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며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거기에 더 중요한것은 그 분들께서 자녀들을고통을 참으시며 헌신의 새월을 보내셨기 때문에 더욱 그리해야 합니다. 저는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견디신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며 나의 신앙을 다시 가다듬습니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앞만 보고 달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내리막 비탈길을 치닫는 사람처럼 그렇게 정신없이 내달리는 성도들이 되서는 않됩니다. 우리는 가파른 등산길을 오르는 등산가 처럼 내가 올라온 길과 올라가야 할 길을 번갈아 살피면서 우리의 영적 경주를 해야 한다.

둘째, 주님의 부활이 기독교의 큰 의미 중의 하나인 것은 고통과 좌절 그리고 처절한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셨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사는 이세상의 삶은 고통 슬픔, 비통함으로 얼룩진다. 우리는 지난 일년여 동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주위의 사람들을 비통함에 보내야 했다.  처절한 예수의 십자가 고난의 길에도 그와 무리가 있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슬픔을 못이겨 울며 따르는 예루살렘의 여인들과 구레네의 시몬이 있었다. Glen Baker- “내 살결이 좀 검다고 해서 그것을 보고 나를 멸시하지 말찌니라. 그대들을 위해 주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이 어깨로 대신 짊어졌음을 잊지 말찌니라.”

셋째, 우리 또한 마지막 날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체처럼 우리도 부활한다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성경의 일시적 부활한 사람은 많다. 나사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 성 과부의 아들, 베드로의 기도에 의해 살아난 욥바의 다비다 등이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육체의 숨을 거두신 후 무덤이 열리며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다고 마태 27:52,53에 나와 있다. 그러나 예수님 처럼 영원한 육체로의 부활은 죽은자의 첫 열매로서 우리에게 커다란 예표를 주시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가슴 아프게 떠나 보낸  모든 성도들도 마지막 날에 다시 예수님처럼 영원한 육체로 부활 할 것이다.

론: 부활을 한 죽은자의 소생 그 자체로 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부활의 저편의 사실들을 늘 되새기며 우리가 사는 세상속에 부활의 신앙을 심으며 사는  성도가 되십니다. 고전15: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55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March 28, 2021

어린 나귀를  타신 왕

서론: 종려주일이 되면, 거의 대부분의 교회나 많은 목회자와 성도가 사용하는 분문이 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입성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읽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아쉬운 점일까요? 예수께서 사람을 시켜 자신이 타실 어린 나귀를 끌고 오라고 명하신  4복음서에 모두 나와 있는 성경 본문을 비교하며 읽어봅니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마 21:2-3)...."

이르시되,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막 11:2-3)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30).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고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눅 19:30, 31)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요한복음 12:14, 5)  오늘 우리가 읽은 스가랴서의 예언이 500여년이 지난 다음에 성취가 되는 것이 예루살렘 입성시 나귀를 타신 모습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라 많은 이들이 종려나무, 군중들의 호산나 외침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한 주의 모습을 상상하시겠지만, 저는 오늘 예수님의 나귀에 대해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나귀는 히브리어로 ‘하모르(숫)’ ‘아톤(암)’ 이며 어린 나귀는 ‘아이르’이다. 헬라어론 ‘오노스’ ‘폴로스(어린나귀)이다.

윤동주 시인이 “쓴  별을 헤는 밤”프랑스의 시인 프랑시스 잠의 이름이 등장한다. 19세기 초의 시인인  잠의 시 중 “나는 당나귀가 좋다”는 시가 있다. 그 시를 잠시 읽어 봄니다.

물푸레나무(동백나무) 긴 울타리를 끼고 걸어가는 순한 당나귀가 나는 좋다. 당나귀는 꿀벌에 마음이 끌려 두 귀를 쫑긋쫑긋 움직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태워 주기도 하고 호밀이 가득 든 부대를 나르기도 한다. 당나귀는 수챗가에 가까이 이르면 버거정거리며 주춤 걸음으로 걸어간다. 내 사랑은 당나귀를 바보로 안다. 어쨌든 당나귀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당나귀는 언제나 생각에 젖어 있고그 두 눈은 보드라운 비로드 빛이다. 마음씨 보드라운 나의 소녀야, 너는 당나귀만큼 보드랍지 못하다.당나귀는 하느님 앞에 있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 닮아서 당나귀는 보드랍다. 당나귀는 피곤하여 가벼운 모양으로외양간에 남아서 쉬고 있다. 그 가련한 작은 발은 피곤에 지쳐 있다. 당나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자기가 할 일을 모두 다했다. 그런데, 내 소녀냐, 너는 뭘 했지? 그렇군, 너는 참 바느질을 했지.하지만 당나귀는 다쳤단다.파리란 놈한테 찔렸단다. 측은한 생각이 들만큼당나귀는 너무나 일을 많이 한다. 내 소녀야, 너는 무얼 먹었지? 너는 앵두를 먹었지? 당나귀는 호밀조차 먹지 못했다. 주인이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이다.당나귀는 고삐를 빨아 먹다가 그늘에 가 누워 잠이 들었다. 네 마음의 고삐에는 그만한 보드라움이 없단다. 그는 물푸레나무 울타리를 끼고 가는 아주 순한 당나귀란다. 내 마음은 괴롭다.  사랑하는 소녀야나는 울고 있는 걸까, 웃고 있는 걸까? 가서 늙은 당나귀보고 이렇게 전해 다오, 나의 마음을. 내 마음도 당나귀와 마찬가지로 아침이면 신작로를 걸어간다고. 당나귀한테 물어라, 나의 소녀야.내가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를. 당나귀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당나귀는 어두운 그늘 속을착한 마음 한 아름 가득 안고서 꽃 핀 길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시를 읽다 보면 오늘 우리가 낭독한 본문과 비슷한 무엇안가를 느낌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비성시 타셨던 어린 나귀를 보며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먼저, 나귀는 순수함과 정결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도 타 보지 않은나귀를 타고, 새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새 예루살렘의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앞에 나아갈 때 얼마나 순수함과 정결함이 있는가?

둘째, 주인에게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등에 타도 저항하지 않고 많은 짐을 등에 실어도 조용히 그가 걸어야 할 길을 갑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났다”(삼상 15:22)

셋째, 자기 영광을 취하지 않는 겸손함의 의미가 있다.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사53:3)”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5:41”

결론: 예루살렘 입성하며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주님을 보며 이제 우리가 다시 주의 성전에 나아갈 때, 정결함으로 순종함으로 겸손함으로 주님앞에 서는 성도가 되야합니다,

March 21, 2021

새벽을 깨우는 성도

서론: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성도에게 많이 읽혀진 말씀이며 목사님들이 자주 인용하는 시 입니다. 오늘 본문 시를 ‘믹담’이라 하였는데 이 의미는 슬픔과 절망 중에 절규하며 외치는 소리를 의미한다.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라고 적혀 있는데, ‘영장’은 성전 공중 예배시 찬양을 지휘하던 사람이고 ‘알다스헷’ 히브리어로 “멸망시키지 마소서”. 뜻이다. 삼상22장 1절에보면 ”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로 되 있는 것처럼,  이 시는 다윗이 사울의 낯을 피하여 어둘람 굴에서 쓴 시이다. 여기와 거의 같은 본문이 있는데 그곳은 시편108편 1-5절이다.

본론: 먼저, 기도로 세벽을 깨운다.본장 2절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라고 되 있다. 하나님이 이 기도를 통해 응답해주신다는 확신을 가자고 기도여야 한다.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다.

둘째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 새벽을 깨운다. 앞에서 ‘알다스헷’ 란말의 의미는“멸망시키지 마소서”라고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멸망시키지 않고 구원해 주신다는 확신하는 사람만이 어두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수피 지아드란 사람이 자신의 회고록에 쓴 내용입니다. 젊은 혁명가였을 때 나의 기도는 ‘”주여 나에게 세상을 전복시킬수 있는  힘를 주소서” 였다. 그리고 중년에 이르러 내가 기도할 때는 “주여, 제가 만나는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내가 늙어 자신의 인생을 해아리며 드리는 기도는 주여, 저에게 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소서”라고 바꾸었다. 모든사람들이 이웃과 세계의 변화는 염원하지만 자기자신의 변화는 추구하지 않는다.

셋째, 준비하는 사람만이 새벽을 깨울 수 있다. 새벽이 오기를 준비해야 합니다. 일찍 일어나려는 일찍 자야합니다.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람많이 새벽을 깨울 수 있다.

넷째, 찬송으로 새벽을 깨운다. “내 영광아 깰찌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찬양하시면 영이 깨어난다.

결론: 새벽을 깨운다는 시는 오직 시인만이 쓸 수 있는 문구 인것처럼, 오직 주 안에 있는 성도만이 새벽을 깨울 수 있는 것이다. 겨울에 가장 추운 시간은 해가 뜨기 바로 전의 새벽이다.  아무리 어둠고 추운 그 때  새벽을 께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도드림니다.

March 14, 2021

수동적 신앙

서론: 오늘은 4순절의 4번째 맞이하는 주일 입니다. 우리가 Ash Wednesday부터 시작된 사순절에 6번의 주일을 지내면 부활 주일이 옵니다. 6번의 주일을 빼면 40일이 됩니다. 1년전 미국의 COVID-19이 전염이 시작되어 어제까지 누적 확진자가 3천만명에 이르렀고 사망자는 54만명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인구가 3억 3천이니, 10명중한 사람은 감염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가슴 아픈 사실이지만, 이제 하루 평균 5만명 감염, 사망 천명 정도로 줄은 것이 조금 위안을 느낌니다. 우리는 지난 일년간 고통과 슬픔을 견디는 그런 시련의 시간들을 겪었습니다. 우리 주의 자녀들은 더욱 아픔 당함을 인내와 연단과 포용의 훈련을 하여 수동적 신앙으로 성장 시켜야 했습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 신앙보다 온유와 순종의 삶을 사는 수동적(Passive) 신앙을 연습해야 했습니다. 빌 4:13의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을4:11절의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4)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의 말씀으로 이해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의 의미는 어떤 고통 당함속에서도 견디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1970년대 말 이후 미국의 로버트 슐러 목사님을 중심으로 시작된 긍정적, 능동적, 적극적인 신앙의 외침이 시작되었다. 제가 읽어본 그분의 책중에 ‘Move ahead possibility thinking’ 이라는 책이 있다. 이 message는 한국 교계에도 영향을 주어 한국교회의 사역자의 주된 선포 내용이고 교회 성장의 원칙이 됩니다. 얼마전까지도 Texas, Lakewood Church의 목사인 Joel Osteen에 의 설파된 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제 긍정의 신앙 위에 순종적 수동적 신앙을 정립할 시기가 되었다.    오늘 본문 3절 이하에는 ‘멸시를 받는다’ , “버림을 받는다”, “아픔을 많이 겪는다” “질고를 체험한다” “무시를 당한다”등의 말씀 들이 8절까지 계속 반복 된다.예수께서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가 오실 예수님의 모습과 그가 우리를 위햐여 겪으실 환란들을 예언한 것이다. ‘당하다’란 말이 성경에225회 나온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하며 이세대에 어떤 수동적 신앙인이 되어 순종의 삶을 살것인지 살펴보겠 습니다.

먼저, 수동적 신앙은 말하는 입이 열리는 것 보다 듣는 귀가 열리는 신앙이 되어야한다. 입을 열어야 할 사람은 몇 십명 중 한사람 뿐이다. 고통 당한 성도의 이야기도 좀 들어주고, 부족한 다른 사람의 찬양도 알지못한 찬양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좀 들어주는 성도가 되자.

둘째, 자기가 가진 사상과 관습이 옳다하여 무작정 변하는 시대를 거부하는 것보다 새로운 시대속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친 신앙과 사상을 정립하자. 우리가 지난 일년의 코로나 시대에 특징 중의 하나는 집에서 자녀와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저는 특별히 일주일에 두번 정도는 가정에서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시간을 갖으며 그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으며 그들이 가지고 생각들을 든는 좋은 시간들을 가졌다.

셋째, 최고를 추구하기보다 그 중의 기장 선을 선택하라. 우리가 받은 달란트는 각각 다르다. 마태 25:14이하의 말씀처럼 5달란트 , 두달란트 1달란트 받은자가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주석이신 김구 선생님이 쓰신 백범 일지에 ‘나의 소원 ‘중 내가 원하는나라’의 일부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

결론: 사순절 넷째 주간 우리가 묵상하해야 할 것은 고난 당하신 주님의 모습니다, 멸시를 받았고, 사람들에게 버린바되고 아픔을 느끼셨고, 질고를 친히 체험하셨고, 따돌림을 당하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다. 나의 죄 때문에 당하신 주님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흉내 낼 수는 없을까? 우리도 좀 당하는 삶을 살자.

March 7, 2021

십자가  주님 발 앞에

서론: 지난 월요일은 한국에서 3.1절 102주년 기념일 이었습니다. 우리민족의 가슴아픈 날이었지만 또한 가장 중요한 날이기도 합니다.여러분들이 Google search에 대한민국 독립선언일을 찾으면 1919 3월 1일이 나옵니다. 비록 일제의 치하에 있긴 했지만 대한 민국이 독립을선언 한 날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가장 가슴 아픈 날이지만 가장 중요한 날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유일하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발 앞에 서 있던 제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사도 요한 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요한은 자신을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했던 11명의 제자는 우리 기독역사상 가장 가슴 아프고 쓰라렸지만 그 중요한 순간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주가 가는 곳이면 죽는데라도 함께 가겠다던(눅22: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던  베드로도 거기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제자 주님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요한 뿐이었습니다. Kathryn Scott이 부른  ‘At the foot of the cross’ 찬양이 있습니다. 그가사 내용을 보면, 십자가 밑엔 은혜와 고통이 만나는 곳. 당신은 내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신이 받은 형벌을 통해 그리고 당신은 내 마음을 (영원히) 그리고 내 마음을 가져갔습니다. 이제 이 수욕을 아름다움과 교환 할 수 있습니다.그리고 내게 왕관 같은 용서를 주신 자비의 발에 입 맞추 러 옵니다.나는 모든 짐을 내려 놓는다. 십자가 밑에서. 내가 만들어진 곳 .거기서 당신은 나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당신은 나를 위해 처절한 죽음을 통해 그리고 당신은 내 마음을 가져가셨습니다 .그래 내 마음을 .주님은 내 마음을 갖었어요 (영원히) 이제 이 수난과 모욕 아름다움과 교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왕관처럼 용서를 입어 자비의 발에 입 맞추 러 온다.나는 모든 짐을 내려 놓는다. 십사가의 발앞에 선 사도 요한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떤 은혜를 느낄 수 있을 까요?

먼저, 우리 삶의 가장 힘든 순간에 우리는 주님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 발 앞에 요한이 서있었던 것은 주님의 가장 큰 고통 가장 슬픈 순간에 그분 곁에 있는 것입니다.  그도 유대 지도자들의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다른 제자처럼 느꼈을 것 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는 그 주님이 당하는 가장 큰 고통과 시련의 시간에 주님과 함께 하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한은 주의 어머니 마리아 등 가장 상처 입은 여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의 가장 수난의 시기다. 우리는 모두가 함께 하며 히10:24,25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둘째, 이 세상에서 기독교는 영광보다 수욕의 시간이 더 많다. 롬 8: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8: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8: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의 영화와 영광을 장차 올 영광보다 중요하게 여기고있다는 것을 저만 느끼고 있을까요?

셋째, 십자가는 낮아지는 자에게 복을 주는 비밀의 병기이다. 십자가가 치욕 갔지만 모든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고전1:18.19”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넷째, 십자가 주님의 발 앞에서 우리의 헌신을 보여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대면 예배를 못드리고 온라인 예배나 drive in 예배를  교회가 드리고 있는데 “교회당 안의 예배가 있어야 진짜 예배다.” 예배 분위기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아니라 아마도 우리의 헌신이 있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가 성전 안의 예배를 못드리니 나태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가 어느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던 우리의 참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결론: 4복음서를 보면 요한은 3복음서에 없는 문헌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나열된 29개의 기적 가운데 왕궁관리 아들의 치유와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위를 걸으시는 3개의 기적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그중 주의 사랑 (13:34)와  주의 십자가 달리실 때의 예화가 특별하다. 사순절 3째주를 맞이한 우리는 우리가 주의 십자가 발 앞에 우리가 서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자.

February 27, 2021

진짜 그리스도인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서론: 사순절 두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지나 주에 연하여 그리스도인의 인격에 대하여 상고해 보려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읽을 때 항상 긴장이 됩니다. 그 이유는 5가지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책망한 그들은 신앙 고백이 분명했는데 버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여, 주여 하면서 상당히 열성적으로 주를 섬긴다고 생각했는데, 버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들은 봉사와 사역가운데 남다른  은사와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큰열매를 맺은 사람이었지만 주께 버림 받았습니다.  넷째 ,그들이 가는 문은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끄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고 가니까 가는데  그 길이 잘못된 길이었습니다. 5번째 마지막 주앞에 서는 그날까지 그들의 진실한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늘 긴장하며 살아야 할 이유를 제공 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제비뽑기 놀이를 할 때 그 안에는 우리가 아무 것도 갖지 못하는 ‘꽝’이라는 표가 들어 있는데  그 것을 뽑은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벌칙이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옳은 길인지 알고 믿고 가다가 먼 훗날, 우리가 주앞에 서는 그날에 주님이 인정해 주지 않는 삶은 바로 ‘ 꽝’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여호와’ 7020회, 그리고’ 하나님’ 4070여회, 그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행하다’라는 단어가 2120여회가 나온다 .구약에는 ‘아싸’ 발음의 히브리어로 신약에는 ‘포이에오’’에르곤’이라는 헬라어로 등장한다. 우리의 신앙은 행위가 중요한 것 같다.

조금은 저의 자랑 갖지만  오늘도 지난 달 2일 소천하신 강성훈  목사님이 저를 성도들에게  소개할 때 다른 표현보다 그냥 ‘진국’이라고 소개하시곤 했습니다. 제가 진짜 그런지 저는 잘 모르지만 부족한 저에 대한 가장 감사한 표현이라 생각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성도들은 주님이 보실 때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과연 어떤 성도가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실천이 없는 고백을 자제하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하여  “주여! 주여!”하는 고백이 잘 못된 것은 아니다. 로마서 10:9,10에 보면 오히려 입술의 고백은 마음속 믿음의 완성이라 했다. 본문 속에 나타난 의미는 하나님의 뜻인 사랑의 실천이 결여된 고백이었다.

둘째, 성도에겐 선한 동기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결과보다 동기와 과정이 종요하다. 순수한 마음과 선한 동기가  있어야 한다. EX)저에겐 훈륭한 후배 목사님이 한 분 계시다. 요 10:37)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셋째, 자기 스스로 잘 났다고 하지마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아버지게 잘 났다고 인정해 주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종들은 주인이신 예수께서 인정해야 잘 난것입니다. (요 9:31)”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결론: 우리 큰 아이가 10대일 때 어떤 실력있는 운동선수를 설명할 때  “저 선수 잘 놀아요.” 라고 표현하곤 했다. 영어의 “He plays very well.”을  직역한 모양이다. 농구선수는 농구공가지고 , 야구선수는 ball, glove, Bat가지고, 축구선수도 공가지고 잘 놀아야 훈륭한 선수이다. 우리교회의 이름이 “믿음교회’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훈륭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서  “저 사람 예수 잘믿어.”라고 표현한다. 우리교회는 예수를 잘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이기를 기도한다.

February 21, 2021

그리스도인의 성품

서론: 지난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었습니다. 기독교에서 사순절(Lent)의 시작을 알리는 교회력의 절기를 말한다. 기독교인들은 재를 이마에 바르고 죄를 고백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40일간 묵상하는 사순절 의미를 생각한다. 이때 사용한 재는 작년 종려주일에 사용하고 보곤한 종려나무 가지를 태운 것으로, 천주교와 개신교의 일부 교파(성공회, 루터교, 감리교)에서 지켜진다. 사순절(Lent)은 '길이(length)'를 의미하는 앵글로색슨어 'lencten'에서 유래한 말로, 봄의 기간을 나타냅니다. 사십 일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고, 공생애를 준비하신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다가올 부활절을 대비하여, 회개하고, 금식하며,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또 자신의 신앙을 검토하고 성찰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새 신자의 세례를 위해 금식하고 준비하는 기간의 출발점이었던 초대 교회의 사순절은 점차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회하는 기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실 이 기간동안  우리는 영적 성품을 갈고 닦고 형성하는 기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성장하며 스스로의 지경을 넓히고, 때로는 무언가를 절제하거나 포기하면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자원봉사하는 일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주의 수제자 베드로를 통해 진실한 기독교인이 가져야 성품을 배울 수 있습니다.

본론: 첫째 그의 겸손함을 배울 수 있다. 5절”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어부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가 무엇인가 범상치 않은 선생의 조언에 순종하여 그물을 그것도 깊은 곳에 내린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분야에서 경력이 많아지고 지위가 오르면 다른사람의 조언을 듣지 않는다.

둘째,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영적 죄의 문제에 우리는 늘 민감해햐함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것, 남에게 악을 품는 것, 이기심, 교만함을 내가 가지지 않았는지 늘 예민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큰 기적을 보게 된 베드로. 갑자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는 외칩니다. "주님 저를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왜 베드로는 좀 쌩뚱맞아 보이는 이런 고백을 한 것일까요? 그동안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 여러 가지를 경험했습니다. 장모님의 열병이 떠나는 것도 보았고 배에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도 들었겠지요. 아마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베드로의 마음 속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이 싹트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깨닫고 나니 베드로는 두려워졌습니다. 이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이나 천사들을 만나면 두려워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거룩한 자(아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 까지는 몰랐겠지요?) 앞에 서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죄가 많은 자라는 것을 또한 깨닫게 되었을 것이고, 왠지 모를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을 것입니다.지금도 예수님을 믿는데는 이러한 자각이 필요합니다. 나는 죄인이며 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만이 그 도움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믿음의 길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지요.그래서 어떤 작가는 '기독교는 낭패감에서 시작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지요.이런 마음에는 예수님은 아직까지 주님이 아니라 선생님으로만 있게 됩니다. 역설적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손을 내미는 자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스스로 설 수 없음을 인정하고 엎드리는 자를 주님께서는 일으켜 주십니다.

셋째,예수가 내가 중심이 되어 사는 나의 삶의 조언자나 선생이 아니라, 그분이 나 자신과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는 것을 보고는 완전히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알았다기보다는 직관적으로 깨닫지 않았을까요? 어제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베드로가 이제는 '주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아, 그런데 이걸 인정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고 자부하거든요. 성인까지는 아니라고 인정하지만 또한 죄인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넷째, 과욕을버려야 합니다.11절에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오늘날 많은 교회의 사역자나 지도자들이 범하는 오류입니다. 성도들이 늘어 날수록 더 규모가 커진 교회를 같기를 원하고 교회 건물이 커질 수록  점점 더 큰 예배당을 지었으면하고 그러다가 어떤 목사님은 세계에서 제일 멋있는 교회당을 짖겠다고 강단에서 선포했다가 오늘까지 낭패를 보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어떤 분은 자기 시대도 모자라 아들 때까지 당회장 시킬려다 곤란을 당하기도 합니다.

결론: 사순절 첫 주일을 맞이하며 예수님만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도 좀 돌이켜 보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February 14, 2021

신앙의  암흑기

서론: 이번 주말은 미국에 사는 우리 한국 사람에겐 세가지의 기념일이 있는 날이다. 먼저 지난 금요일은 한국의 구정이었고 오늘은 미국의 Valentine’s Day 이다. 그리고 내일은 미국의 공휴일인 President’s Day 이다. 이렇게 3행사가 겹치는 주말이니 보통때 같으면 이곳 우리 한인들이 많은 Event를 하겠지만 올해는 코로나 사태를 집에서 조용히 지내야 할 것 갔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인들은 더욱  우리의 마음과 자세를 가다듬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행하며, 전체적 교회 성도로서 post COVID-19 새로운 시대를 해쳐 나갈 수 있도록 주께 지혜를  간구 해야 할 것이다. 오늘은 초대교회 가장 중심적 인물이며 야고보서를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 들에게 실천적 신앙을 가르쳐주는  예수의 인간적 형제 야고보(James the Adelphotheos)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는 신앙 윤리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야고보는 주의 형제 야고보(James, the Brother of the Lord)라고도 불린다.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그는 첫 번째 예루살렘 총회(행전 15장)의  총회장이고, 신약성서 야고보서의 저자이다.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바울은  갈라디아서 2:9에서 "기둥으로 인정받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라고 언급하여, 야고보가 교회의 기둥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영향력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야고보는 바울과 신학적으로 갈등을 겪은 인물이기도 한데, 이는 헬라파 기독교 지도자 바울이 믿음을 강조하며,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소문으로 인해, 바울을 유대민족의 전통을 위배하는 이단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주의 형제들 중 하나로 요셉, 시몬, 유다와 함께 언급된다.(마태 복음서 13:55, 마가 복음서 6:3, "야고보와 형제들" 사도행전 12:17). 야고보가 홀로 언급되는 것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1:19에서 한 것이다.바울은 야고보를 주님의 형제라고 부른다.(갈 1:19)

본론: 야고보 선생이 가르치는 본문 의 첫째 교훈은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 예수님과 어려서 부터 나사렛 동네에서 성장하며(마태13:55,56)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그 누이들”  예수님의 인간적 모습을 너무나 잘 아는 그가 예수께 받은 교훈이 바로 듣기는 속히 말하기는 더디하는 것이었다. 야고보가 흩어진 12지파들, 즉 유대 기독교인들을 위해 야고보 서신을 썼습니다. 야고보서는 총 108절로 기록되었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이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강력 명령형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표현한 명령어법은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문체이기도 합니다.

둘째, 분노와 악을 버리고 마음에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의 신앙에서 중요한 두번째 단계는 우리가 보이는 태도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쉽게 잊고 사는 것이 이것이다. 나와 하나님 관계만 제대로 설정하면 그만 이라고 생각한다. 내 이웃에 대해 내가 어떤 태도를 갖는 것도 우리에겐 중요합니다.약12:27”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우리의 삶엔 기쁨의 시간보다 고통의 시간이 더길며, 영적시간보다 육적시간을 더 길게 보내는 것이다.

셋째, 우리의 믿음은 행함으로 시험이 완성되는 것이다. 믿음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행함은 그 믿음을 의롭게 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을 언급하며 창 15장에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은 의는 초창기요 행함의 의는 20년 후의 이삭을 드린 행함으로 그믿음이 이루어진 것이다.

결론: 지난 3개월 동안 미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목슴을 잃은 사람이 하루평균 3000명이 넘었다. 미국 200년역사에서 미국 국민이 하루에 3000명 이상이 목슴을 잃은건 진주만 기습 때와  911사태 뿐이었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에게 지금 이 순간들은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답답하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이 아픔의 순간들에 대한 영적 응답을 꼭 주실 것이라 믿고 우리는 기다리며 지금의 우리의 믿음을 행함으로 보여야 할 때이다. 야고보 선생의 별명은 ‘낙타 무릎’ 우리의 신앙의 행위를 강조하셨지만 그 누구보다도 기도를 많이 하신 분이다. 우리는 ‘시대처럼 아침을 기다리며’ 지금 이순간 기도하자.

February 7, 2021

본문: 

역대상 4:9, 10.

마태 7:7-14

우리가 구하는 것

서론: 오늘은 미국에서 가장 큰 sports 행사중의 하나가 있는 Superbowl  Sunday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작년 이 때 부터 미국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한 지 일년째가 된 주입니다. 오늘 아침 보니 일년 동안 미국에서 Covid-19으로 사망한 사람이 47만 3천명에 이름니다. 이런 시점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해야하면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우리가 코로나 사태가 있기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읽고 묵상하던 성경의 기도가 있습니다. 역대상 4장 10절 의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부르스 윌킨슨이 쓴 책으로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서  이 책으로 일정 기간 동안 묵상하고 공부도 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구약성경 역대상의 저자는 우리에게 유다 자손들의 족보를 충실하게 알려주면서 이 지점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이름들 한 가운데서 그는 야베스에게 이르렀고 우리가 야베스에게 주목하기를 원했다. 성경의 야베스 고작 두절 밖에 나오지 않지만, 야베스는 참으로 신실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야베스란 원래 이름의 뜻은 ‘높은 자’ 이다. 우리는 그의 기도보다 9절을 더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10 절에서 지경은 우리의 영향력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마태 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도는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임을 가르친다.

많은 신자들은 효과적인 기도의 비결을 알고 싶어한다. 이제 효과적인 기도의 비결을 알아보면. 첫째, 은밀한 기도이다. 예수님이 좋은 모범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늘 물러가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했다(눅 5:16).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큰길이나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기도한 것과 크게 대조되는 장면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기도하며 보상을 기대하지 않았다.

둘째, 기도와 묵상의 관계를 아는 일이다. 우리의 기도는 성경 말씀을 섭취한 만큼 성경의 영감을 받게 된다. 성경 말씀은 묵상의 영양분을 공급하며 묵상은 우리의 기도를 힘있게 한다. 성경에 대한 묵상은 의미 있는 기도를 드리도록 도와준다. ‘묵상이 성경섭취와 기도 사이의 연결고리’라고 말한 사람은 도널드 휘트니(Donald Whitney)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하고 있었다. “만약 복음 지도자 조지 뮬러의 기도 생활에 비결이 있었다면 묵상과 기도의 연관성을 발견한 것이었다”.

셋째, 기도를 위한 은밀한 장소를 찾는 것이다. 기도 장소란 이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소음)를 차단하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음성(복음)만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장소이다. 위치가 어디냐보다, 동기부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따라서 우리를 산만하게 하는 세상의 거리보다는 좀 더 구별된 장소여야 한다.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골방, 교회 또는 조용하고 집중할만한 특정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좋습니다. 흔히 산상기도나 기도원을 찾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무엇을 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기도를 많이 했고, 기도의 비밀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북 전쟁이 시작되어 많은 병사가 죽어갈 때마다 동족을 잃는 쓰라린 아픔을 안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가 이끄는 북군은 병사의 숫자가 많고 또 여러 가지 여건상으로 보아 다 유리했지만 남군의 용장 로버트 리 장군 때문에 늘 지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루에 두세 시간씩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북군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대통령을 위로했습니다. 한 교회 대표가 링컨에서 다가와 말했습니다.  "각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북군의 편이 되셔서 북군이 승리하게 해달라고 날마다 눈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자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우리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항상 하나님 편에 서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결론: 우리는 이시점에서 에스라의 기도 같은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 보다 형벌을 경하게 하시고, 이 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일을 행하는 족속들과 연혼하오리이까 ? 그리하오면 주께서 어찌 진노하사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 없도록 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인하여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에스라 9:6-15) 그리고 우리가 가장 우리 삶에서  드려야 할기도가 또 하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우리의 눈이되어 우리가가는 곳을 지켜 주시기를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때에 현명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이노래가 우리의기도가 되게 해 주세요 당신의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십시오 우리가 안전 할 그 곳으로. 나는 우리가 당신의 빛을 찾을 수 있기를기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마음에 품게 해 주세요. 매일 밤 별이 반짝일 때 이것이 우리의기도가 되십시오

우리 삶에 어두운그림자가 우리 하루를 채울 때 큰 믿음으로 우리 우리가 이기도록. 우리가 그 곳에 이르도록 당신의 은혜로 우리를 인도해 주세요. 우리가 평안 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세요. 우리는 더 이상 폭력이 없고 정의와 희망이 있는 세상을 꿈 꾸고 있어요.

우리가 이웃의 손을 잡고 삶이 친절하고 평화와 형제애가 가득한 세상을 꿈꾸길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힘으로 우리삶이 평화로워 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늘 위에서 우리를 지켜봐 주소서. 우리 각 영혼이 사랑을 찾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당신 곁에서 사랑할 또 그 안에서 사랑할 또 다른 영혼을 찾도록 이것이 우리의기도가되게하십시오. 모든 아이들처럼 순수함으로 그곳를 찾을 수 있도록, 당신의 은혜 많이 우리를 인도해 줄 수 있어요. 우리가 안전 할 수 있도록 믿음을주세요.

January 31, 2021

믿음의 선구자

서론: 우리말 사전에서 ‘선구자’란 말을 찾아 보면 “어떤일이나 사상에서 다른 사람 보다 앞선 사람”이라고 되어있다. 성경에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가 선구자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엔 선구적 삶을 살았던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는 아브라함의 초기 여정이 나타나 있다. 11장 마지막에 보면, 그의 아버지인 데라와 함께 이미 가나안을 향한 여정을 계획하고 고향 우르를 떠났음을 알수 있다. 여기에 보면 아버지 데라가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그는 205세까지 하란에서 살다가 죽었다. 아브람이 75세에 하나님이 너의 갈 곳은 가나안 땅이라고 각인시켜서 하란을 떠났다.

본론: 신앙의 선구자들은 늘 보다 넓고 높은 신앙적 삶을 추구하였다. 기원전 6세기에서 2세기 저술된 것으로 추정된 외경 “제 2의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그의 아버지 데라에게 “우리가 신으로 모셔야 하는 것은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달도 아니요 아버지가 만든 우상들도 아니고, 하늘들과 해와 별들과  땅을 창조하고 바람과 비와 이슬을 창조한 그 분을 우리가 섬겨야 한다”고 요구한다. 

한국인 최초 여성 미국 유학생이자 최초 여성 의사로 기억되고 있는 박에스더는 이름을 셋 가지고 있는 특이한 전력도 있다. 그만큼 개화와 격동의 시대를 도전과 개척정신으로 살아낸 여성운동의 선구자였다. ‘김점동’에서 ‘김에스더’를 거쳐 ‘박에스더’로 바뀌면서 삶의 방향과 내용도 질적인 변화를 경험하였다. 첫 번째 이름 김점동은 1876년 3월 16일 서울 정동에서 가난하고 평범한 선비인 김홍택의 딸로 태어나면서 얻은 이름이다. 그녀의 언니 중에 정신여학교 초대 교사로 있었을 만큼 부친은 신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오자 아펜젤러의 집으로 들어가 잡무를 볼 정도였다. 나아가 스크랜턴 대부인이 이화학당을 열자 딸을 입학시키려고 하였다. 그녀는 이화학당에 입학하면서 새로운 학문에 호기심을 갖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영어와 오르간 연주에 흥미를 느꼈다. 특히 영어 실력은 남들보다 뛰어나 선교사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정도였다. 한편으로 기독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넘어 탐구하기 시작했는데, 찬송과 기도, 성경공부 등의 생소한 부분을 이해하고 실천해 나갔다.

1888년 어느 여름,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이었다. 기숙사 방 안에 있던 열두 살 소녀 김점동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선교사들이 설교 시간에 들려 주었던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생각났다. 무자비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닐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동시에 죄에 대한 두려운 인식이 엄습하면서 영혼까지 불안해졌다. 방에 같이 있던 학생도 같은 경험을 하고 있었기에 둘은 무릎을 끓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죄를 고백하며 구원을 비는 기도가 계속되면서 두려움과 불신이 사라지고 마음 속에 확신과 평안이 가득차는 체험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인생을 변화시킨 밤을 보내고 이튿날부터 동료 학생들과 함께 정기기도회를 시작하였다. 이 기도회는 학생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었다. 믿음의 확신을 얻은 그녀는 다른 학생 두 명과 함께 1891년 1월 25일 올링거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에스더’라는 이름을 받으면서 두 번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셔우드는 이 병원 의사이자 이화학당 교사로 일을 시작하였는데 영어를 잘 했던 김에스더가 셔우드의 통역을 맡게 되었다. 이처럼 셔우드와의 만남은 그녀의 인생을 다시 한번 변화시켰다. 회심체험을 통해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작정한 김에스더는 셔우드의 헌신적인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도 의료인으로서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셔우드 역시 그런 김에스더의 꿈을 살려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여성 환자들이 오기는 했으나 의사가 서양인이니 조선 여인들은 여전히 마음과 몸을 완전히 개방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셔우드는 ‘조선 여성이 조선 여성을’ 치료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보구여관 안에 ‘의학반’을 만들어 기초의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김에스더도 그 반에 들어가 공부하였는데 셔우드는 특별한 애정과 관심으로 그녀를 지도하였다.

1893년 5월 24일 박유산이라는 청년과 결혼하면서 서양식으로 남편 성을 따라 박에스더로 불렸으니 세 번째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박유산은 셔우드의 남편인 홀 선교사의 조수였다. 한편  홀 부부가 평양 선교를 위해 갔다가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의 여파로 발생한 전염병을 치료하던 중에 홀이 열병에 걸려 1894년 11월 24일 별세하고 말았다. 미망인이 된 홀 부인은 한 살짜리 아들과 함께 복중의 아이를 품고 미국으로 돌아갈 때, 그녀는 여기서 모험을 걸었다. 홀 부인에게 자신도 미국에 가서 의학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한 것이다. 그녀를 병원 후계자로 키우려 했던 홀 부인이었기에 흔쾌히 받아들여 부부도 미국길에 올랐다. 한국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 것이다. 미국에 도착한 그녀는 기초부터 다시 공부하였다. 홀 부인의 주선으로 1895년 2월 뉴욕 리버티 공립학교에 입학하였고, 그해 9월 뉴욕 유아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며 의료실습을 받기 시작하였다.그리고 1896년 10월 볼티모어 여자의대(존스홉킨스대학 전신)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의학수업을 받았다. 1900년 6월, 마침내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인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명예로운 졸업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은 기쁘지 않았다. 누구보다 기뻐하며 축하했을 남편이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박유산의 미국행 목적은 오직 아내의 유학 뒷바라지였다. 그는 아내가 공부하는 동안 홀 부인의 친정인 셔우드 집안 농장에 들어가 일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다. 그렇게 6년 동안 노동을 하며 아내의 공부를 뒷바라지 하다가 졸업과 귀국을 두 달 앞둔 4월 28일 급성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녀는 볼티모어 공동묘지에 남편의 유해를 묻으면서 묘지에 이렇게 새겨 넣었다. “I was a stranger and ye took me in.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 25:35) 귀국한 그녀는 서울의 보구여관을 맡아 비로소 ‘한국 여성이 한국 여성을’ 진료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후 그녀는 보구여관과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며 병원에 올 수 없는 여성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양 맹아학교와 간호사 양성원, 그리고 전도부인을 양성하는 여자성경학원 교수로 활약하였다. 그녀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갔다. 일반사회로까지 명성이 알려질 정도로 무리한 활동을 하다가 과로로 건강을 잃고 말았다. 수개월동안 투병하다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10년 4월 13일, 34세의 짧은 삶을 마감하였다. 병명은 남편과 같은 결핵이었고, 홀 부인이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지켰다. 김점동, 김에스더, 박에스더에 이르는 이름의 변화는 곧 삶의 변화였다. “밥 먹는 것 밖에 모르며 하나님이 계신 줄 몰랐던” 김점동이라는 소녀가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 되어 육신과 영혼의 질병에 빠져 있는 이 땅의 여성들을 위해 짧고도 굵은 인생의 흔적을 남길 수 있었던 힘은 하나님을 향한 선구자적 신앙이었다.

둘째, 인간의 종교와 사회 구조는 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어떤 독선적인 사람들에 의해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 40가까니 정치인의 길을 걸은 한국의 어떤 정치가도 “우리 사회의 구조와 정치는 식물을 가꾸듯 잘 가꾸고 길러야 옛 날의 잘못된 것으로 회귀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Ex) Robert Harold Schuller. Garden Grove Community Drive-In Church, completed in 1961. in 1968; the Tower of Hope rose 13 stories , 130 to 150 feet in the air, the tallest structure in Orange County at that time

셋째, 장년들은 자기 세대에게 이숙한 신앙의 관습을 청년 세대의 희생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찬양도 부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듣고 감상하는 것도 중요하다. 코로나 사태전까지 우리교회 안의 찬양 속엔 언제부터인지 한국의 노래방 문화가 들어와 있었다.

결론: 코로나 사태로 인해 우리가 상상치 못한 신앙 형태의 상황을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선진들의 행적을 보며 이시대의 믿음의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

January 24, 2021

본문: 

마태복음 28:18-20, 사도행전 1:6-11  

 땅끝의  증인들

서론: 지금 약 75 억 명의 전 세계 인구 중 기독교는 약 24 억 명의 신자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거의 1/3 을 차지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입니다.  가장 큰 세 그룹의 기독교는 가톨릭 교회, 개신교, 동방 정교회입니다. 가장 큰 기독교 교단은 가톨릭 교회로, 세례를받은 13 억 명의 회원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큰 기독교 지부는 개신교 (단일 그룹으로 간주되는 경우)와 동방 정교회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신.구교 합쳐 27.6%이며 이중 개신교는 19.7% , 카돌릭은 7.9% 이다.

미국에서 총 기독교 인구는 2000 년 이전에는 73% 였다. 2017년에는 65%로 줄었다. 개신교는  미국에서 가장 큰 종교 단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2017 년 Gallup 데일리 조사를 토대로  보면 미국 인구의 총 49 %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미국인의 약 3/4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미국인의 21 %는 공식적인 종교적 소속성이 없습니다. 2020년에 세계에 복음이 들어가지않은 곳은 거의 없다. 지금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계신 분들은 아직도 복음이 전파되지 못한 곳이 많다고 하신다. 어쩌면 그것은 기독교적 구원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는 의미이다. 실질적으로 아프리카의 여러 소수 부족과 종동의 모슬람 국가를 빼고는 복음이 거의 전파된상태이다. 그렇다면 우리 복음의 전파자들은 땅끝에 지금 서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 의해 수리아, 소아시아 부터 시작된 선교는 21세기 들어 끝에 ‘stan,이 들어가는 국가와 이란, 이라크에 이르면 땅끝이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땅끝에 거의 다달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분부한 어떤 명령을 되세겨야 하는지 생각해 보려합니다.

본론: 첫째, 천국복음을 전하고 땅 끝에 서 있는 자들이 세워야 할 나라는 이땅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 행전 1:6 절에 보면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라 기록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얻을 것 다얻고 힘이 주어지면 꼭 이세상에다 꼭 자기의 성루 같은 것을 짖고 안주하려고 한다. 요즈음 한국의 큰교회들의 건물을 보면 옛날 중세의 성곽이나 성채들을 연상케 합니다. 사도행전7, 8장에서 성도들이  서로 유무상통하며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는 중에, 스테반의  순교등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있어. 그들이 흩어지며 사마리아부터 전도했던 사건을 기억해보자. 행 6:1에”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이 말씀은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의 갈등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둘째, 복음을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제자를 삼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본문 마태 28:19 에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19절은 복음안에서 일치와 조화와 화합을 의미한다. 그리거 20절은 진실함과 행함이 있어야 한다. 바로 그럴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요한1서 3:18 절 말씀을 되세겨 보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발앞에 있었던 유일한 제자 사도요한의 권면이다. 요즘 우리는 코로나 사태 때문에 말과 혀로만 우리의 신앙을 다른이에게 보여주기 힘들다. 이제 그 행함과 진실함이 필요한 때이다.

셋째, 각자의 가정과 교회에서 2세들에게 이 세대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습을 반드시 보여 주어야 한다. 제가 어렸을 때 한국 서울에서 다니던 교회는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면 반드시 어른들과 주일 정식 예배를 드린 다음에 그들의 모임을 갖게 하였다. 어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전새대의 전승를 배우며, 청 소년에게  지루한 순서들 속에서 인내를 배우는 것이다. 저는 지금도 저의 진앙의 토대가 되었던 40년 전의 예배의 경험들이 나의 신앙 유산이며 지금 나의 힘이 되고 있다. 오늘날 정통 유대인들의 자녀들 교육이 어떤 것입니까? 아침 5시면 회당에 아이와 함께 가서  토라, 미쉬나,탈무드, 미츠모트등을 외우며 유대교적 훈련을 받는다. 그들이 ‘쉐마’라 하는 신명기6:4-9매일 어디에 있던지세번씩 암송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요즘 한국과 미국의 교회는 고등학교 때 까지 자기들 끼리만 모임을 갖는다. 우리 교회는 교회가 작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주일 예배의 대부분을 자녀들과 함께드리길 원한다.

결론: 코로나 사태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세상이 우리가 안주 할 수가 없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여러 목사님들이 사역자는 성지순례를 다녀오면 우리의 신앙과 목회 사역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신다. 많은 분들이 그곳에 가서 감격해하고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며,신앙적 큰 도움이 된다고한다. 저는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만약 제가 가면 기독교의 유적들을 보며 던지는 한가지 질문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요?” 

January 17, 2021

 빛을  발하는 성도들

서론: 그리스의 철학자인 '디오게네스'가 밝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이 너무 어두워 참 빛을 찾는다고 했답니다. 이 세상이 문화와 문명의 발달로 편리해 지지만, 문제는 점점 더 세상이 죄악으로 어두워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심은 세상이 그만큼 어둡다는 뜻일 것입니다. 성도님들 중시골에서 자란 분들은 호롱불을 켜고 살았던 아름다운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호롱불 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공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나마 기름이 아까워 일찍 끄고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저는 미국에 와서 14 년 가까이 산속 깊은 곳에 살았습니다. 겨울에 비바람이 칠때면 큰나무들이 전선위로 쓰러져 때론 촛불 만으로 며칠 밤을 지낼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한 두개의 촛불도 짙은 어둠을 밝히는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빛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십시오. 빛이 없는 곳에서는 생물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빛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어둠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두움 공간이라도 등불을 켜는 순간 어두움은 다 물러가고 밝아집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이고 시인 이신 윤 동주의 시 ‘쉽게 쓰여진 시’ 중 한 소절을 읽어 봅니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라는 시는 그의 삶의 거의 마지막 시였다.

많은 목사님들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설교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둠이 짙은 세상 속에서  빛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살려면 하나의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우리 성도가 지금 새상 속에 일어나는 일들 중 어떤 것이 빛이고 어떤 것이 어둠인지를 분별할 수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세상에 보이는 삼라만상 중 어떤것이 빛이고 어둠인지를 모르고 성도들이 빛으로 살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꾸짖으신 것은 스스로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는 그들이 빛이 무엇이며 어둠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빛으로 오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딤후 2:15)”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

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2006 년 한국에서 개봉된 영화 [친절한 금자씨]는 13 년 동안 감방에서 복역 후 복수를 꿈꾸는 금자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감방에서 기독교를 접하면서 종교적 구원이 아닌 죄책감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복역 후 그녀를 찾아온 교회의 환영식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한마디 하는데 "너나 잘하세요.."입니다. 원래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거룩성과 신앙의 경건성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거룩성과 경건성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구별됨과 깨끗함과 정직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 흑암을 밝혀줄 등불과 빛은 무엇일까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나는 세상의 빛이라'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에 오셔서 빛으로 어두움을 몰아내셨습니다(요8:12). 생명과 부활의 주님은 죽음과 어두움을 깨뜨리시고 생명의 빛으로, 부활의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 복음만이 죄악으로 어두워진 도성을 밝힐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빛은 생명의 빛으로 성도들에게 생명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이 빛을 받아 이 빛이 내 안에 있는 자는 참으로 행복자입니다. 어떤 성도님이 저에게 “힘든일 할 때면 일 그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라 마음이 힘들면 그 일이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마음이 평안하면 일이 힘들지 않다’고 하십니다. 요즘처럼 온 세상이 질병으로 슬프고 어지러워도 빛이신 그리스도의 평안으로 우리가 함께 한다면 우린 결코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 빛은 드러나게 비추어야 합니다 (14-15). 산위의 동네는 모든 사람이 다 볼 수가 있습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불을 올려놓는 기구인 등경위에 두어서 온 집안이 환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남에게 본이 되고 덕이 되고 유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고 예수 믿는 것을 감추지 말고 착한 행실로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16). 빛 된 삶은 선하고 착하고 정직한 삶입니다. 딤후 2: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딤후 2:7)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마지막으로 등불에는 반드시 심지와 기름이 있습니다. 그냥 빛이 발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 헌신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발적인 불편함을 선택하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자신의 기름을 태우고 심지를 태워야 어두움을 밝힐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와 자기가 속한 단체의 유익만 생각 세상이 어지러워도 대립과 반목 폭력으로 시는 때에 주의 빛을 든 우리는 공동 평화를 위해 자신을 조금 희생시켜야 합니다.

결론: 지금 한국과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순수해서 정치인들에게 다 이용 당하고, 교회의 사역자가 아닌 교주들에게 현혹 당하고 있다. 그런데 더 가슴 아픈 것은 본래 순수한 사람들이 용감해져 사리사욕을 쫓는 위정자들을 위해 돕는 것이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 착각하고 , 양들을 현혹하는 교주들에게 맹종하는 것이 어둠을 이기는 것이라 오판하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잠언 22:3 이 주는 교훈은 바로 이 말씀을 보충합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5:16  말씀을 읽고 마침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어둠이 짙을수록 조그만 한 빛은 더 밝고 아름답게 보인다.

January 10, 2021

 우리의  아버지

서론: 우리 기독교인이면 다 외우는 주기도문을 저는 오늘 본문으로 낭독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하루에 한번 이상은  이 주기도문을 낭독하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잠이 잘 오지않으면 주기도문을 계속 외우는 분도 계십니다. 새해에도 코로나의 바이러스의 전이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런 때에  ‘주님의 가르치신 기도’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다시 점검하고 기독교인들의 윤리를 다시 세울 수있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은 총 70개의 단어로 되어 있으며, 총 여섯 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특성은 간결성, 명확성, 단순성 그리고 공동체성이 있다. 그리고 오늘 특별히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주기도문의 특징으로 우리말 성경엔 ‘우리’라는 단어가 6번, 원어 성경엔 무려9번 (주격1번 ’헤메이스’, 소유격4번’헤몬’, 모적격4번’헤마스’ ’헤민’)이나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우리’라는 단어는 우리들에게 여러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본론: 먼저 기독교는 ‘나’라는 개념보다 ‘우리’라는 개념이 더중요하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에는 ‘나’라는 단어가 단어가 한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여 대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됨. 하나님의 독생자인 그리스도인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있는 것이다. 주님의  ‘나라’라는 개념 속에는 ‘우리’라는 단체적 개념이 있는 것이다. 마태 28:19의 주의 마지막 분부에도 나타나 있듯이 우리는 또 다른 우리를 만들기 위해 세상 모든 족속에게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마태12:3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요나 시대의 적국의 수도 니느웨 사람들도 하나님의 눈엔 ‘우리’의 개념으로 보인 것이다. 요나가 자기가 외친 회개의 촉구를 듣고 돌이킨 니느웨 사람들을 보고 오히려 불만을 하나님께 보이자 하나님께서”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고 말씀하셨다.

두번째, ‘우리’라는 말속엔 공동체의 개념이 있다. 예수께서 요한17장에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제자들을 ‘우리’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의 속된 용어에 ‘단체 기압’ 말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 개개인들은 기독교 공동체를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번째, 기독교는 나의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Christian Ethic)라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지켜야할 공도덕이 있다는 것이다. M. Luther가 작센의 한 마을에서 교리 문답을 하던중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는다”는 사람에게 ‘전능’의 뜻은 “나도 모르고 높은 학식이 있는 사람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가 되시며, 당신과 이웃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를 원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마태22:21에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로마의 식민 통치 시대에 살던 그때 유대 민족에겐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은 참 예민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의 윤리는 적은 한 정파의 유익 보다 큰 공통체의 유익을 위해 살라는 의미이다. 코로나 시대에 사는 우리도 나와 내 가족만의 안전을 생각하며 사는 것  보다 사회와 나라의 법과 윤리를 준수하는 하늘의 시민들이 되어야 한다. 사소한 개인의 편견보다 공공의 유익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적용 훈련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결론: 지금 미국과 한국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커다란 난제에 부딫혀 있다.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간에 그들은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자기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런 때에 우리 주님이 주기도문에서 가르치셨던 ‘우리’라는 개념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 중엔 로마의 식민지하에서 유대인 혈세를 거두어 드렸던 세리 출신 마태도 있고, 유대 독립운동을 위해 가슴속 비수를 소지하고 다녔던 열심당원 시몬도 있었다. 이들이 ‘우리’라는 개념안에 예수님을 위해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체험 했음에도 얼마되지 않아 곧 잊어 버리고 곁길로 나간 것처럼 지금의 이세상에 비추어지는 저를 포함한 그리스도인 모습은 이미 많이 기본에서 벗어났다. 내가 아닌 ‘우리’라는 개념을 다시정립 합시다.

January 3, 2021

죽어가는 곳에 생명을

서론: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신년 첫 주일이 되면  목사님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원문에 의거하여 다시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은 잊어라. 지나간 역사에 연연하지 마라. 다만, 깨어 있어라. 현재에 깨어 있어라. 이제 나는 전혀 새로운 일을 행할 것이다. 이미 시작되었다! 보이지 않느냐? 여기를 보아라! 내가 사막 가운데 길을 내고, 황무지에 강을 낼 것이다. 들짐승들이, 이리와 독수리들이 주께 '감사합니다!' 하고 외​칠 것이다. 내가 사막에 물을 가져오고 바싹 마른 땅에 강이 흐르게 하여, 나의 택한 백성이 그 물을 마시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위해 특별히 만든 백성, 나를 찬양하라고 특별히 지은 백성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부르실때 쓰는 가장 사랑스런 명칭이 있다. 그말은 바로 ‘여수룬’이라는 명칭이다. 그것은 성경에 4번 밖에 나오지 않는데, 그 뜻은 ‘옳은 자’ ‘의로운 자’ 의미이다. ‘올바르다’라는 의미의 동사인 ‘야샤르’에서 유래된 말이다. 신 32:15, 33:5, 33:22 과 이사야서에 나온다. ‘야곱’ 명칭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지닌 이스라엘을 표현할 때 쓰여졌으며, ‘여수룬’은 의로운 길을 가는 사랑스러운 자녀 같은 이스라엘의 부를 때 사용되었다.

오늘 2021 년새해 첫주일에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주께서 분부하신 명령은 무엇이며 어떻한 삶을 사는 자가 하나님의 여수룬 같은 자녀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론:첫째 우리는 과거의 일이나 인간 관계에 연연해서는 않됩니다. 본문43:18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은 잊어라. 지나간 역사에 연연하지 마라. 다만, 깨어 있어라. 현재에 깨어 있어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성도가 깨어있다는 것은 세상의 흥미있는 일에 시간을 쓰기 보다 기도와 말씀 읽는 시간을 드리며, 나에게 가장 옳은 일, 주님께 의로운 일을 찾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Ex Pastor Randle Cunningham.

둘째,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행하시는데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일년 전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많은 인류가 병에 시달리고 죽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will)아니지만 그러나 이 상황은 하나님의 섭리(Provision)가운데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동물속에 들어 있던 병균이 동물과 자연속에서 기거하지 못하고 인간속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셋째 , 하나님은 일은 죽어가는 곳에 생명을 불어넣는 역사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모두 여기에 촛점을 맟추어야 합니다. 교회당을 멋있게 짖는 것이 교회의 우선 순위가 되어서는 않된다. 지금의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 시인이고, 신실한 기독교인 이었던 윤동주의 서시에는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는 글이 있다. 사 42:3,4에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하셨다.  저에게는 자랑스러운 후배 목사님이 계십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이 심한 상황 속에서도 Seattle, Washington 에서 노숙자들에게 한 겨울에 따뜻한 국물과 침낭을 제공하며 또 그들에게 모텔에서 잠을 잘수 있도록 마련하는 일을 하는 둥지 선교회(Nest mission)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어제도 아침부터 밤늦노록 이들을 의류를  세탁하는 일과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에 동분서주하는 정목사님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2년 전부터  정 목사님의 사역을위해 기도하며 작은 정성이지만 헌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분은 이시대에 죽어가는 곳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여수룬이란 말의 원 뜻은 ‘의롭고 사랑스러운 내 아이’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운 길을 가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멋진 교회당 안에서 많은 사람이 아름다운 찬양과 뜨거운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여수룬’이 되지못합니다. 우리가 자신 영적인  훈련에 열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주를 위해 어떤 옳은 일을 할 것인지 생각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마태복음25:35,6절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올 한 해는 이런 주의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December 27, 2020

우리는 지금 어디로?

서론: 이틀 전 우리는 지금까지 한번도 지내보지 못한 형태의 크리스마스를 보냈습니다. 또한 지난 거의 1 년간 우리는 세계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대 유행병을 전세계적으로 거의 한순간에 겪었고 또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 장에 말씀하신 재림의 징조를 어느때 보다 더 되새겨 보는 한 해였습니다.   오늘은 코로나 대역병으로  점철해진 2020 년 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 했습니다. 전세계의 21억명 이상 되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아마도 한번은 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퇴치를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기도 때문인지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어 이제 조금씩 미국에서부터 공급되고 있지만 아직 우리의 갈 길은 멉니다. 우리 이민 자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평안치 않습니다. 더욱이 우리 성도들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우리의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은 어떤 것인지 오늘 다니엘의 기도를 통해 깊이 생각해보려 합니다.

어떤 사람이 부인과 함께 긴 기차 여행을 떠났다. 부인과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누고 책도 읽고 하다가 갑자기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잃어 버렸다. 그래서 부인에게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소?” 라고 뭇 자 그 부인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표를 보세요.”라고 대답했다. 지금 많은 세상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데 있고,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 들의 문제는 자기가 목적지가 적힌 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표를 준비하셔서 개인의 삶에 계획을 세우고 계신다는 믿음을 잃어버린 것 같다. 여기 우리보다 2500년 전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그가 속한 민족과 세계의 계획을 기도를 통해 발견했던 사람 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다니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릴 향한 계획과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어려워져 가는 세상 속에서 소망을 갖자.

 2주전 구약의 나타난 위대한 기도의  인물인 다니엘의 기도가 어떤 특징이 있는지 세 가지로 살펴 보았습니다. 세 가지 특징이 무엇인가? 첫째, 다니엘의 기도는 ‘뜻을 정한 기도’입니다. 항상 하나님께 때와 장소를 정해 기도하되 기도 때문에 손해 볼 각오, “죽으면 죽으리다” 각오하고 결단하여 기도한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둘째, 다니엘의 기도는 ‘타협하지 않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이 와도 절대 굴복하지도 타협하지도 않고 기도로 담대히 나아간 사람입니다. 셋째, 다니엘의 기도는 ‘비전을 보는 기도’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많은 환상과 ‘비전’(vision)을 보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온갖 환상과 비전과 미래의 일들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구체적으로 다니엘의 기도가 어떤 내용으로 드린 기도인지 오늘 함께 읽은 말씀, 정확하게 읽자면 지난 주일 읽은 말씀을 포함해 다니엘서 9:3~19에 나오는 다니엘의 기도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살펴볼 다니엘의 기도는 한 마디로 그 내용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같은 중보기도지만 민족 전체를 위한 중보기도라는 점이다. 3절 말씀을 보면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다니엘은 어떤 자세로 기도합니까?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금식을 하면서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는 것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간절한 기도를 할 때의 자세입니다. 그만큼 지금 다니엘은 절박한 마음으로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절박한 마음으로 나도 죄인이라는 자세의 기도입니다.

다니엘의 기도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회개와 자복의 기도(4-15절)입니다. 본문이 길어서 4~15 절 요약 해보면, 다니엘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미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해서 조국에서 쫓겨나 머나먼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오는 수치를 당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4-15 절에 가장 많이 나오는 낱말을 찾아보면 ‘범죄’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비슷한 뜻을 가진 ‘패역, 행악, 반역’ 등의 낱말도 여러 번 나옵니다. 또 ‘재앙, 수치’ 등의 낱말도 여러 번 나옵니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범죄=재앙’이라는 공식이 성립됩니다. 즉 지금 다니엘의 조국인 이스라엘 민족이 이렇게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포로로 끌려오는 수치와 재앙을 당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앙과 실패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늘어놓기 전에 먼저 내 모습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래서 만약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짓거나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지 못한 것이 발견되면 주저 말고 회개하고 죄를 자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내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자복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둘째, 간절한 기도입니다 (16-18 절). 다니엘은 이렇게 민족의 죄와 불순종을 회개하고 자복한 후 두 번째로 간구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간구일까요? 16-18절 ” 주여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따라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들에게 수치를 당함이니이다 17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다니엘은 16 절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거두어 달라”는 간구를 합니다. 17절에서는 “하나님이 귀를 기울여 자신의 간구를 들으시고 눈을 떠서 이스라엘의 비참한 현실을 보시옵소서” 하고 간구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어쩌면 다니엘의 기도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이 부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이스라엘 민족을 용서해달라고 간구하면서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 자신을 위해 용서하시옵소서” 하고 간구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미 앞서 15절에서 이렇게 기도한 바 있습니다.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결론:수많은 사건과 우리가 처음으로 겪었던 전세계적 역병 있었던 금년의 마지막 주일 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나라가 두번 바뀌고 왕이 다섯번이나 바뀌는 곳의 궁궐에서 내일을 장담할 수 없던 이국에서 다니엘이 굳건히 서서 다른 사람의 부러움과 질시의 자리에 머물며 신앙의 정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기도 뿐이었다. 기도의 항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입니다. 금년 한해를 돌이켜 보면 그래도 감사할 것이 많다는 발견할수 있다

December 20, 2020

그가 오셨네

서론: 오늘은 우리 교회가 성탄 축하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중간사 속에 있었던 한 사건인 수전절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예수가 오셨던 시기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헬라제국이 무너지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의 하나인 B.C 300 년경 로마제국이 탄생한다. 로마는 다니엘서 2장 ‘큰 신상’의 예언에서 ‘철로 된 종아리’에 해당되는 나라이다 (단 2:33, 40). 이 예언대로 로마는 ‘철의 제국’(The iron monarchy of Rome)으로 불렸던 강력한 제국이었다. 다니엘 7장에서 묘사된 네 짐승의 이상에서는 '무섭고 놀랍고 극히 강하며 큰 철 이'가 있는 짐승으로 묘사되었다.  이 철의 제국 로마가 BC 63 년 폼페이 장군을 앞세워 예루살렘을 함락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또 다시 새로운 제국의 지배를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폼페이는 유대를 점령한 후 힐카누스 2세를 유대 통치자로 세웠다. 폼페이가 유대 정복을 이루고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 로마는 BC 59 년에 Julius Caesar, (시이저)가 통령으로 선출되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1차 삼두정치를 하던 시대였다. 이후 주전 53년 파르티아와의 ‘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고, 폼페이우스와 권력다툼을 하던 카이사르는 주전 45-44 년에 원로원 세력을 물리치고 단독으로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로마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도 원로원에 의해 암살되고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가 되었다. 오늘은 로마제국의 속국이 된 팔레스틴에서 탄생하여 인류의 역사의 중심이 되신 되신 한 왕의 탄생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한다. 헤롯 대왕의 아버지 안티파터는 하스몬 왕조를 무너뜨리고 BC 63년 유대를 로마의 속국으로 넘긴 인물이다. 그는 유대를 로마에 넘기고 로마로 가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정복한 지금의 서유럽(갈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하며 자신의 아들인 헤롯을 유대인의 왕(분봉 왕)으로 임명하도록 옥타비안 황제를 설득했다. 그리하여 BC 37 년부터 BC 4 년까지 유대를 다스리게 된 헤롯은 건축 왕이란 별명처럼 유대 곳곳에 크고 작은 건축물들을 많이 세웠는데, 대표적으로 로마 황제를 위한 ‘가이사랴’라는 신도시와 유대인들을 위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진행하여 로마와 유대의 환심을 동시에 사고자 하였다.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유대는 이 헤롯 대왕이 통치하였으며, 예수님 가족이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 다시 돌아올 때는 그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 지역과 사마리아와 에돔 지역을 다스렸다 (마 2:22). 아켈라오는 매우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정치를 펼쳤기에 후에 참다못한 유대와 사마리아 귀족들이 로마 황제에게 대표단을 파견해서 그를 숙청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결국 AD 6 년에 아켈라오는 왕위에서 쫓겨났고, 그때부터 유대 지역은 로마 총독에 의해 통치를 받게 되었다. 기독교적으로 BC 350 년 부터A.D 4년 까지를 ‘중간사’라 그리고 이 시대를 ‘암흑기’라 부른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로 기독교 역사의 잠복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의 상황 속에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다

본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리에게 말씀하신 언어로 우리에게 오셨다.(요한1:1). 우리는 본문의 ‘말씀’이 ‘로고스’ 표현되어 있다. 이것의 철학적 의미는 교훈,진리, 만물의 원리인 이성 등으로 쓰이지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제 2 위 이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계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우리가 어떤 언어를 배울때 가장 빨리 습득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그 새 언어로 대화 할 수 있는 대상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인간과 대화와 사귐을 위해 오신것이다.  요일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둘째, 그분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오셨다.사7:14”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셋째, 그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표현으로 오셨고 그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오셨다. 요한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화) Colleen and Louie Evans, Bel Air Presbyterian Church, Marilyn Monroe: 우리가 함께 영화배우를 시작할때 어떻게 해서라도 나는 스타가 되겠다고 다짐했지. 나는 그꿈을 이뤘지만, 너무나 큰 대가를 치뤘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야.

결론: 예수는 예루살렘 궁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 마굿간의 말 구유 위에 나셨다. 예수는 유대 지도자와 율법가들 서기관의 무리와 지내셨던 것이 아니라, 갈릴리의 소박한 어부들과 함께 지내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위대한 승리자요 군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슬픔에 잠긴 여인들과 낙심하여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제가에게 나타나 대화하신 분이시다. 예수가 다시 오시길 기다리는 우리는 어쩌면 또다시 나약하고 힘없고 소박한 이의 눈물속에 나타나실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며 성탄을 맞이하자.

December 13, 2020

이 시대의 등불

서론: 이번주는 대강절의 두번째 주일입니다. 그리고 지난 10일 부터 유대인의 명절인 하누카 즉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수전절이 8일동안 지속됩니다. 우리가 유대인 들의 절기를 지킬 필요는  없지만,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예수께서 참여한 절기이므로 함께 살펴보며 교훈을 얻으려 합니다. 하누카(Hanukkah, 히브리어: חנוכה ‘봉헌’)는 유대교 축제일의 하나로, 키슬레브의 25번째 날부터 8일간 치르는데, 이는 11월 말이나 12월에 있다. ‘봉헌’이라는 뜻의 하누카(hanukkah)는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기원전 164년 마카베오 혁명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 공동 번역)에게 다시 봉헌한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이 마카베오 혁명에 대해서는 외경의 마카베오 상.하에 잘 나와 있다. 하누카는 BC.  165년경, 하스몬(Hasmoneans) 가문의 제사장 마타티아스(Mattathias)의 네 아들이 혁명을 일으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시리아계 그리스인 안티우코스 4세 (Antiochus IV Epiphanes)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민족의 성지인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한 마카비 전쟁을 기념하는 날이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Alexandros)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해 팔레스타인을 흡수했다. 서기전 320년에 그가 급사한 이후에는 프톨레마이오스(Ptolemy)와 셀레우코스(Seleucus) 장군이 20년 동안 권력 투쟁을 벌였다. 초기에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지배했으나, 시리아를 포함해 아시아 지역을 다스리던 셀레우코스가 이후 팔레스타인 통치권을 빼앗았다. BC. 2세기경 팔레스타인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와 시리아계 그리스 군이 공존하는 상황이었다.

BC. 173 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신을 믿으라고 강요하고 성전의식, 안식일, 할례, 토라 금지령을 내리며 종교를 탄압했다. 유대인들의 생활의 중심이자 신앙의 상징인 유대회당을 장악하고 이교도의 신과 올림포스의 제우스를 숭배하는 제단을 세웠으며, 그 제단에 돼지 피를 뿌리며 여사제들은 음행하는 행위를 하며 자신을 숭배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분노한 유대인들이 결국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 인근의 모딘 (Modiin) 이라는 마을에서 전투가 시작됐다. 주동자는 하스몬 가문의 제사장 마타티아스의 네 아들이었고, 이것이 바로 ‘마카비 전쟁’이다. 탈무드 (Talmud) 에 보면  마타티아스의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와 유대인 지도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그들의 성전을 되찾았다고 기록돼 있다. 이 반란군은 시리아 군대와 싸워 승리한 뒤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했다. 그리고 성전 안에 있던 이교도 우상을 치우고 다시 하나님께 성전을 봉헌하며 축제를 열어 기쁨을 나눴다.

성전을 정화한 뒤 하나님께 봉헌하는 과정에서 부정한 것들을 몰아내기 위한 의식을 행했는데, 이때 성전을 상징하는 촛대 메노라(Menorah)에 불을 붙이려 했다. 유대인들은 성전안에 이방인이 손을 대지 않은 순수한 기름 한 병을 발견했다. 그러나 기름은 하루 동안 메노라를 밝힐 양밖에 되지 않았다.

대제사장은 우선 그 기름으로 메노라에 불을 붙였다. 그로부터 새로운 기름를 만드는 데 8일이 걸렸으나, 놀랍게도 메노라의 불빛은 8일 동안 유지됐다. 유대인들은 기적적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성전을 탈환한 날부터 8일 동안을 봉헌절로 축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메노라의 기적을 기념하여 하누카를 ‘빛의 축제’라고 부르며, 하누카 기간이 이어지는 8일 동안 메노라에 불을 밝히는 것이 전통으로 이어지게 됐다.

본론:  오늘 대강절 두번째 주일인 오늘 우리는 오신 예수와 오실 예수께 정결한 마음을 드리는 것이 먼저이다. 히브리어의 하누카 란 말은 앞서 말한대로 ‘봉헌하다(dedicate)’ 는 뜻이 있다. 주님께 봉헌하기 위해선 정결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마카비우가 성전을 청결하기 전처럼 온갖 세상의 것과 우상으로 더럽혀져 있다. 그가 성전에 있는 모든 가증한 것을 치운후 ‘하누키야’에 촛불만 7 만 키고 오직 여호와의  기적만 바라보았던 것처럼, 우리의 영적 성전인 우리의 몸과 마음이 그리스도가 오실 수 있도록 청결하게해야 한다. 고전 3:16.17절 말씀 처럼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둘째. 본문에 유대인들이 예수께 “당신이 그리스도거든 명확하고 단순하게 밝히 말하라”고 질문을 던졌는데. 우리가 사는 성도의 삶은 단답형이나 , 사지선다형이 아니다. 그리스인으로서 우리의 답은 무한한 주관식의 논술형 삶인 것이다. 성경 속에 말씀들은 우리가 가진 의문점들이 단답형으로 나와 있지 않다. 늘 묵상하고 상고함으로 해답을 찾을 수 있고, 또 그 응답은 사람마다 다르기도 한다. 우선 마태 5장의 8 복을 보자.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셋째,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며 지키는 것이다. 신약 성경은 말씀이 대부분 교리나 포괄적 윤리로 되어 있다. 우리 삶에 상세히 적용할 수있도록 하기 위해선 더 깊은 묵상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주안에서 어느정도 성장한 성도는 구약의 말씀들을 상고할 필요가 있다. 비록 아주 오래된 사건들이 지만 거기에는 자세하고 실질적인 그들의 삶이 표현되어 있다. 잘못되고 실패한 그들의 사건들을 통해 그렇게 살지 않아야 교훈을 받을 수있으며, 아름답고 성공적인 사건들은 우리가 그들의 삶을 따라 살 수 있는 것이다.

결론: COVID19의 백신이 개발되어 공급이 시작 됬지만 아직은 갈수록 심각한 상황 속에 있다. 삼상 3:1-3)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대강절 둘째 주의 기간에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하는 영상에 시간을 드리는 것보다, 비록 책속의 문자이지만 그옛날 수전절에 유대인들이 성전 안에서 이방인이 손을 대지 않은 순수한 기름 한 병과 같은  성경을 가까이 하여 우리의 영혼을 정결케하고 살찌우는 성도가 되자.

December 6, 2020

하나님 나라에 사는 자

서론: 오늘부터는 대강절 (Advent)이 시작되는 첫 주일입니다. 대강절은 크리스마스 전 4주간 예수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 절기이다. 대림시기, 대강절, 강림절로도 불린다. 어원은 오다(Adventus)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 대강절(待降節=Advent), 혹은 대림절의   대(待)자란 말은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오기를 사모함을 의미하며, ‘강절’이란 말은 기차역과 공항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도착'을 의미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된 언어로서, 과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축하하였지만, 현재에는 신앙인 자신에게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자신을 가다듬는 절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도록 준비하는 기간을 대강절이라고 합니다. 대강절 첫째 주일은 해마다 11월 30일에서 가장 가까운 주일로 시작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왜 대강절을 지켜야 할까요? 이미 이천년 전에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또다시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삶의 현장에, 말씀과 성령으로 새롭게 임재하실 것을 기다리는 절기이므로 대강절을 의미있게 보내어야 합니다.

주님이 첫번째 오시기 550 년 경에 이미 주님의 모습을 보았고, 그분이 그들의  삶에 함께 하는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입니다.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도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이국의 삶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교훈을 발견하려 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니엘의 사자굴 사건이 있기전을 벨사살 왕때 다니엘이 본 환상입니다. 다니엘 이란 이름에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 뜻이고, 그가 바벨론에서 받은 이름인 ‘벨드사살’ 이란 이름의 뜻은 ‘신이 그를 보호한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단4:8) “그 후에 다니엘이 내 앞에 들어왔으니 그는 내 신의 이름을 따라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자요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  그가 포로되 잡혀간 나라의 사람들에 비친 그의 모습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본론: 첫째 우리 성도들은 내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고 하나님 나라 사람 임을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고후 2:14,15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 3:3)”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둘째, 본문에는 하나님의 제 2위인 아들을 뜻하는 단어 ‘인자 같은 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이 ‘인자’ 에대하여 Paulus, Baumgarten등 많은 신학자은 하늘 나라의 창설자인 신적인 사람인 메시야를 표현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그 나라에 살아야 합니다. 천국은 ‘헤 바실리야 투 데우’ 예수님이 통치하는 나라를 의미 하는 데,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삶을 통치하는 진정한 그 분 나라의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이 어느 곳이든 상관없습니다.

셋째 , 우리 그리스도인들 받는 꿈과 이상이 말할수 없이 황홀하고 큰 기쁨을 가져와도 우리의 삶의 환란은 더 크고 견디기 힘듬니다. 다니엘이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꿈과 이상 중에 하나님 보좌와 온갓 신비의 체험 속에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얼마되지 않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사자굴에 던져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의 나라에 산다는 것은 영광과 고난이 함께하는 것이다. 롬 8: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결론: 하나님은 성경전체를 통하여 많은 이에게 자신의 뜻을 꿈과 이상으로  자신의  뜻을 나타내셨다. 일정한 규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경우 많은 방법들을 통해 심지어 이방 사람들을 통해서도 그뜻을 나타내셨다. 하지만 성경 시대인 오늘날은 꿈과 이상을 통해 누군가에 나타내시기보다, 자신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기록된 성경을 통해 자신의 뜻을 충분히 나나내셨다. 리타 스노우든 이란 사람은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성경의 진리도 새로운 것과 그 유용성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준다. 항상 새로운 메시지는 셩경의 내용속에서 우리를 기다려 준다.” 고 했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면 때론 성경 글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은혜가 올때도 있다. 또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찬양을 통해 더욱 큰 신비의 은혜와 그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November 29, 2020

가장 영적인 사람들

서론: 미국에서 가장 많이 쓰고 있는 성경 인물 중에서 가져온 남자 이름 5개가 있다. 미국namecensus.com에 따르면 James가 가장 많고 John, Michael, David, Joseph, Daniel 순이다. James라는 이름이 구약의 야곱이란 이름에서 헬라식으로 표기된  이름이긴 하지만 구약성서의 인물 중 David 과 Joseph 그리고 Daniel 이 가장 많은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쓰고 싶어하는 다니엘이라는 사람과의 그의 친구인 사드락, 미삭, 아베느고의 생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다니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다. 그가 바벨론에서 가진 이름인 ‘벨드사살’의 뜻은 “벨(신)이 그를 보호한다”이다. 우리는 다니엘 하면 창시기의 요셉 보다 더 왕의 꿈을 알고 그의 해석을 잘하여 바벨론 국을 다스리는 3명의 총리중 한 사람이된 것 그리고 사자굴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신 사건들을 연상한다.

다니엘은 BC 605 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대를 공격하여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켰을 때에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그때 그의 나이 십대였다. 바벨론에서 왕립사관학교 학생으로 선발되어 3년 과정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 바벨론이 넓은 정복지를 다스리는 엘리트들을 양성시켜 국제경영을 원만히 하려는 교육정책으로 세운 학교이다. 왕국 안에 세워진 학교였기에 기름진 음식과 술을 언제나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었다. 다니엘은 사춘기에 치욕적인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곧은 삶과 신앙의 정절을 지킨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벨론 대제국의 여섯번이나 바뀐 왕 밑에서 세 번이나 국무총리를 역임한 사람입니다.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이 나라가 바뀌고 왕이 바뀌었는데도 신뢰를 받으니까 다른 총리들과 고관들이 시기가 나서 다니엘의 허물을 잡아서 고발하여 제거할 계획을 하였습니다. 그는 왕의 꿈의 내용까지도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보았고 해석하는 가장 영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는 정적들의 시퍼런 공격속에서 굳은 신앙의 정절을 그의 실제 삶속에 담대히 실천한 믿음의 선진이었다.


그의 친구인 하나냐, 미사엘, 야사랴를 살펴 봅니다. “하나냐”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미사야’의 뜻은”누가 하나님 같은가?” ‘아사엘’의 의미는 “여호와가 도우신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에서 그들 삶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역사를 나타내는 그들의 이름을 걸고 포로된

이국에서 주의 말씀과 율례를 지키며 충성되이 살았다는 것이다.

본론: 이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젊은 시절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몇가지 교훈을 생각해 봅니다. 다니엘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섬기며 절제된 생활을 하는 삶이 몸에 베어있었기에 주위의 사치스런 생활에서 자신을 지켜 물들지 않기로 다짐하였다. 절제된 생활과 경건한 삶으로 훈련시키기로 다짐하였다. 그는 포로였던 이국의 삶속에서 3가지를 실천하기로 결심하였다.

첫째는 왕궁에서 제공되는 산해진미 기름진 음식으로 자신의 건강을 무너뜨리지 아니하고 채식과 건강식으로 자신의 건강을 지켜 나가기를 결심하였다.

둘째는 바벨론 왕궁에서는 전국에서 모여 오는 각종 술들로 날마다 주연이 베풀어지고 있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술을 입에 대지 않기를 결심하였다.

셋째는 두고 온 조국 예루살렘 쪽을 향하여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결심하였다.

단 3:16-18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란 말씀을보자. 이 말씀은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란 사43:2 절을 연상케한다. 그런데 다니엘 친구들의 고백 가운데 “여호와가 불타는 용광로 속에서 우리를 건져주지 않는다 할 지라도 왕을 우상으로 섬기거나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를 환란에서 벗어나게 하실 때만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라 고난속에 머무른다 할 찌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라야 한다. 그분은 영원한 세계의 주관자인 우리의 주인 것이다. 그들은 그런 훈륭한 신앙을 지녔기에3장25절에 보면, 주전500년 전 그 타오르는 불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뵙고 그와 함께 거닐었다. 아마도 다니엘은 이 때 성자를 그리스도를 보았다.구약에 예수님을 지칭하는 아람어 ‘발 에나쉬’란 말이 유일하게 두번 나오는 것이 단7장13절과 10장16절이다. 신약에는 예수께서 자신을 지칭한 ‘인자’란 81회 나온다. 특별히 행전 7:55,56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우편에 서신것을 보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한 부부이 있다

*가장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이 보이신 이상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이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뜻을 모아 이들 앞서 언급한3가지 결심을 지켜 나가는데에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그렇게 절제된 생활이 그들로 하여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격과 실력을 갖출 수 있게 하였다. 다니엘서 2장에서는 다니엘이 학문에 출중하고 지혜로웠으며 비전과 꿈의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니엘서 6장에서는 다니엘의 탁월함을 다음같이 일러 준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다니엘 6: 3)이 말씀에서 민첩하다는 말의 뜻이 깊다. 민첩하다는 말은 2가지를 균형 있게 갖춘 상태를 일컫는다.

첫째는 정확한 판단력이다. 둘째는 과감한 실천력이다. 그는 이 둘을 동시에 갖추었기에 바벨론 왕에 의하여 재상의 자리에까지 발탁될 수 있었다. 십대 소년시절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당대에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가히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가 그런 자리에 올라 자신의 직무를 지혜롭게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십대시절부터 실천한 절제된 생활과 경건을 온 몸으로 익힌 노력의 열매라 하겠다.

결론:바벨론 1차 포로로 10대에 끌려가 3번이나 나라가 바뀐 타국에서 정적들의 모함 속에서 꾸준한 왕의 신뢰를 받고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위대한 영적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나니엘은 실제의 삶에서는 수많은 고난에 직면해 살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변하는그들의 이름을 걸고 삶을 담대하게 살았다. 오늘날 영적인 삶과 실제 삶이 전혀 조합이 않되는 성도가 많다. 가장 영적인사람은 가장 확실한 삶의 실천자가 되어야 한다.

November 22, 2020

본문: 

시편 136:23-26,

살전 5:15-22

감사하는 성도

서론: 라틴어로 10 년 주기를 한 Decade 라하는데 오늘은 2020년대 첫 Thanksgiving 주일 입니다. 이제 우리는 2020 의 해를 한달 남짖 남겨놓고 있다.올해 2020년은 우리에게 참 특별한 해였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우리가 한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전세계적 심각한 유행병이 되어 우리를 긴장시키고 있습니다.8개월만에 미국에서 사망자가 26만 명이 넘었다. 기독교의 역사속에서도 우리는 참 특별한 상황에 살고 있습니다.복음은 머지않아 지구의 구석 까지 닿을 것 같다.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통신 미디어의 기술은 internetwork 과 (solar panel) 태양 열판의 전기를 일으킬 수 있는 판넬을 개발해서. 남아메리카 밀림과 아프리카 사막에 영상의 정보까지 전달 되고 있다. 세계의 어떤 밀림이나 황야에서도 우리와 같은 통신 문명을 누리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마태 24:14”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위하여 온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이세상 끝이 오리라”것 처럼 그날은 멀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복음사적으로 소중한 추수의 시대에 살고 있다.추수감사 주일을 맞이한 우리는 오늘 또다른 의미의 추수감사를 드려야 할것이다.

11 월 셋째주 주일에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주일의 직접적이고 근대적 유래는 북미 대륙을 개척한 청교도들(Pilgrims)의‘감사’에 있다.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지의 북미 대륙으로 온 경건한 신앙인들이다. 청교도들이 북미로 오게 된 '역사적 배경'은 영국 헨리 8세와 제임스 1세, 찰스 1 세 때 이어진 종교 박해였다. 순례자의 조상들(Pilgrim's Fathers) 이라 불리는 영국 청교도들은 1600 년대 초기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미 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그 중에서도 102명의 청교도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미 대륙으로 이주한 것이 직접적인 유래에 해당한다.청교도들은 영국 남해안 플리머스 (Plymouth) 항구에서 1620년 8월 5일(지금 달력으로 8월 15 일) 스피드웰(Speedwell) 과 메이플라워 (Mayflower) 호를 타고 美 대륙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초반에 스피드웰 배가 고장나 물이 새 다시 귀항했다.한 달 후인 1620년 9월 6일, 결국 메이플라워호만 25명의 선원과 102명의 청교도들이 승선하여 미국 동해(대서양) 중부지방 버지니아(Virginia)를 목적지로 삼고 재차 출발했다. 남자 78명과 여자 24명 등 전체 102명이 출발했으나, 항해 도중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탄생했다. 그들은 그해 11월 11일 버지니아 대신 미국 동북부 메사추세츠 케이퍼 카드(Cape Cod) 해안가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5일간 주위를 답사한 후 11월 16일 현재의 플리머스(Plymouth)에 정착했다. 63일간 3,400 마일(5,440 km) 의 멀고도 긴, 그리고 위험한 항해 끝에 닻을 내렸던 것이다. 그들은 영국을 떠날 때 항구 이름을 따라, 그곳을 플리머스라 명명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감사라는 단어가 184 회 신구약에 등장한다.189회 신구약에, 153가 동사,형용사는 15회 명사는16회에 불과하다. 구약에 ‘토다’라는 단어로 139회 신약에 ‘유카리스티아’57회, 바울 서신에 43회,옥중 서신에 12회. 그리고 빌립보서에7회. 시편 136편엔 26전절에 ‘감사하라’가 들어감.

본론: 1. 감사는 Gratitude먼저 표현the quality of being thankful; readiness to show appreciation for and to return kindness. 감사는 표현 할 줄 알아야한다.엡2:8절-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선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 은혜도 하나님의 선물(롬5:8),우리에게 주신 성령도 하나님의 선물(행2:38 ).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약 4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1620 년 11 월 11 일, 유럽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 배를 타고 미 동부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에 도착하게 된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의 종교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오게 됐지만, 미국에는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죠. 새로운 땅에 도착한 첫 겨울, 혹독한 추위와 낯선 환경으로 인해 메이플라워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온 102명 이민자 가운데 46명이 그해 겨울 목숨을 잃었습니다.

2.  감사는 Thanksgiving 입니다 .많은 이들은 하나님이 주셨던 것만 감사를 드림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한다. 지금 어려운 상황이라도 앞으로 먼가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감사. 조그만 일에도 감사. 예)토마스 에디슨의 기차 회제사건),

3. Generous: 관대, 너그러움.1621년이들은 원주민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그다음 해 가을에 나름대로의 결실을 보게 됐죠. 그러자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도와준 인디언들을 초대해 그 해 거둬들인 농산물과 사냥으로 잡은 칠면조를 나눠 먹으며 감사의 축제를 벌였는데요. 이 감사 축제가 바로 추수감사절의 기원이라고 하겠습니다.감사를 자기와 하나님 만의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다른 사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감사하는 자의 덕목. 추수감사절의 전통은 후세대로 이어지긴 했지만 이후 2백 년 동안은 개인별로 혹은 각 주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보냈죠. 그러다가 남북전쟁이 한창인 1863년, 사라 헤일 여사의 주창으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을 국가 공휴일인 추수감사절로 지정하게 됩니다. 링컨 대통령은 추수감사절을 선포하면서 전쟁으로 고통받은 사람들, 전쟁으로 인해 과부나 고아가 된 사람들을 신께서 보살펴 주시기를 간청하는 날로 삼자고 선포했죠.

4.  감사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기뻐합니다(rejoice).히브리어로 ‘기뻐하다’는 말을 ‘크하페쯔’라 하는데 강한 의지로 표현한다는 뜻이 있다,헬라어론 ‘카이로’이다. 청교도들이 3개월 항해 동안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가? 찬송을 많이 불렀다. 그들은 후일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는 대부분 시편을 찬송으로 불렀다. 주일은 모두가 찬송만 불렀다. 그리고 기도를 많이 했다.”한다.* ‘근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Joseph Haydn은 모든 작품에 서두에 ‘주님의 이름으로’쓰고 시작하고 끝에는 ‘주님을 찬양한다’맺는다. 그는 “내가 하나님을 하나님을 생각하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춤을 추고 있으니, 내 마음도 춤을 출 수밖에 없다.”고백 했다.

결론: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인 믿음, 사랑, 감사, 기쁨은 거의 성경에 90% 이상이 다 동사로 쓰여졌음을 알았다.예화) Oscar Wild의 우화 단편 글중“예수가 치유해준 사람들”. Covid-19 사태속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마음과 말로만 감사와 기쁨을 갖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 삶 속에서 샘솟는 감사와 기쁨을 행동으로 보이자.

November 15, 2020

지금은 어떤 시간?

서론: 우리말 성경에 ‘훈련(訓練)’이란 말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대신 개역 개정판에 연단이란 단어로바꿈 ‘훈련’은 말 그대로 ‘가르치고 익힌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하니크, 헬라어로 귐나시아, 영어로는 ‘discipline’ 이라고 합니다. 이 말에서 ‘disciple (제자)’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간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 받았습니다. 모든 훈련이 그렇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겸손을 배웠습니다. 광야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백성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새벽마다 내려 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 “사람은 빵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신명기 8:3)” 는 귀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그들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민족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한 개인도 사용하시기 전에 먼저 훈련을 시키십니다. 하나님은 미디언 광야에서 40년 간 모세를 훈련을 시켰습니다. 40 년은 모세가 ‘자기 의 (self-righteousness)’를 내려 놓고 ‘하나님의 의 (God’s righteousness)’를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기간이었습니다. 미디언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모세는 80세가 되어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잠언 17:3 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도가니가 은을, 풀무가 금을 녹이듯, 여호와는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신다 (Fire tests the purity of silver and gold, but the Lord tests the heart).”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test하신 다음에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test하시는 과정을 우리는 ‘훈련의 기간’이라고 합니다. 모든 훈련이 혹독하듯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혹독하게, 고난을 통해서 훈련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지금의 어려 환란 가운데 혹독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코로나 상황과 한국과 미국의 정치적 혼란들을 통해 하나님은 그리시스도인들을 혹독하게 훈련하고 계십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사도 바울이 ‘멘토링’한, 제자 디모데를 훈련 시킨 말씀입니다. 여기에 육체의 연습 (physical training) 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그 당시에 physical training이 유행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올해에는 제32회 올림픽이 도꾜에서 열리기로 했었는데 코로나로 연기되어 내년에 결기로 했다. 올림픽의 역사를 살펴 보면, 이미 BC 776년에 최초의 스포츠 제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는 그리스가 도시 국가 형태를 가지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도시 국가들이 출전하여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도시 국가들 간에 동맹관계를 더욱 굳게 하기 위해서 4년마다 스포츠 제전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 때는 남자들만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고. 특이한 것은 모두 웃옷을 벗고 경기를 했다고 합니다. 경기 종목은, 처음에는 단거리 종목만 하다가 점차 중거리, 장거리 달리기도 포함 시키고, 복싱, 레슬링, 원반 던지기, 창 던지기, 전차 경기 등이 추가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스포츠 제전이 서기 393년까지, 293회나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로마에 의해서 중단되었다가, 1896 년 쿠베르탱이 근대 올림픽을 설립해서 다시 시작 되었다. 사도 바울이 있던 1세기는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던 때였습니다. 철학자 에픽테토스 (Epictetus, 55-135 그리스)의 글에 의하면,많은 청년들은 운동경기에 나가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스포츠 선수로 입문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에게 선수들이 겪어야 할 고충을 열거하면서 신중히 생각하라고 조언했던 글이 남아있다. 누구나 올림픽 경기에 나가 우승을 하고 올리브 관을 쓰고 싶을 것입니다. 훈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선우선 모든 것을 규칙에 따라 해야 합니다. 먹는 것도 엄격하게 가려야 하며, 때로는 맛있는 것도 못 본 척해야 합니다. 아무리 덥거나 추워도 지정된 시간에는 열심히 훈련하고, 찬물이나 포도주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습니다. 의사의 처방에 따르듯 트레이너의 말에 완전히 몸을 맡겨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했던 말,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도움을 주지만 (Physical training is good, but..”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모든 청년들이 몸을 만드는 physical training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청년들은 미론 (Myron, BC 480-440, 그리스)의 “원반 던지는 사람”의 멋있는 몸을 생각하면서 physical training 에 열중했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physical training 도 좋지만, 정작 크리스천들이 힘써야 할 것은 경건의 훈련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경건이라는 말을 영어 성경에 보면 대부분 godly라는 형용사를 씁니다. 명사형으로 하면 godliness가 됩니다. 이 말은 god (하나님)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godly라고 하면 ‘하나님을 닮는’ 이런 의미가 됩니다. 이것을 우리 말로 ‘경건’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의 속성(attribute)을 닮는 것이 경건입니다.  거룩하심, 사랑, 인자, 자비, 오래 참으심, 진실하심, 선하심, 순결하심, 의로우심, 이런 하나님의 성품들을 닮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바울은 ‘경건의 훈련’을 하면 여러가지도 유익한 것들이 많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에도 유익한 것들 것 많지만, ‘이 세상이 아니라 앞으로 오는 세상 (in this life and in the life to come)’을 위해서도 ‘경건의 훈련’은 매우 유익하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첫 부분에서 “나라가 이곳에 임하오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의 뜻은 바로우리가 경건의 훈련을함으로 그의 나라를 느끼며 하늘의 뜻을 이땅에서 이루라는 뜻이다.경건이란 네속에 있는 영성을 깨우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이곳 이루게하는 훈련이다.

첫째로, 우리는 ‘경건의 훈련’을 받음으로써 크리스천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충고하고 있는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너는 젊다는 이유로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고,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범을 보이도록 하라. 너의 말과 행동,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결하고 깨끗한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도록 하라..... 온 맘을 다해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며, 그대가 크리스천으로서 발전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라. 너는 삶과 가르침에 주의해서, 늘 올바르게 살고 가르치기에 힘쓰라. 열심히 성경을 읽고 사람들을 권면하며 잘 가르치라.” (디모데전서 4:12-14)

둘째로, 우리는 ‘경건의 훈련’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경기하는 사람이 규칙을 어기면 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And athletes cannot win the prize unless they follow the rules).”고 말합니다.한국의 CCC 총재였던 김준곤 박사님은”사람이 유명해지면 그들의 인격은 더 어두어진다.”

셋째로, ‘경건의 훈련’을 받아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시편26:2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그렇다면 어떻게 거룩함에 이르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까?

첫째 기도의 훈련인데, 예화=어떤 어린아이가 할머니께 자전거를 사 달라고 졸랐다.신앙삼이 깊은 할머니는 손자에게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했다. 그런데 그의 아빠가 그의 기도소리를 듣고 그것을 사주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기도는 우리의 육의 아버지께 하듯.

둘째, 말씀의 들음 읽음 묵상.-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묵상 이 중요하다. W. Shakespeare는 “구하여 얻은 사랑은 참 귀하지만 구하지 않고 구하는 사랑은 더 소중하다.

셋째 예배를 드림= 예배의 횟수,장소가 중요치 않다.  잠17:3)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결론: 누가18:11-13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책망한 바리세인의 기도는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는기도가 아님을 볼 수 있다.그리고 이 구절 전 8절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고 되어 있다. 믿음 있는 자의 기도는 남을 위한 기도도 중요하지만 내 영혼을 위해 애통하고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을 바꾸게 해달라는 기도가 더 소중한 것이다. 경건의 훈련을 통해 나 자신을 살피고 내 안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임하게 하자.

November 1, 2020

구도자의 자세

서론: 본문에서 ‘도’라는 단어는성경에는 이 단어가 84회 나온다. 구약에서 시편에 19회로 가장 많이 나오고, 신약에선 사도행전에 15회로 가장 많이 나온다.구약에선 히브리어로 ‘데레크’ 한 단어로 표현되 있다. 신약에선 헬라어로 ‘호도스’ 또는 ‘로고스’ 두 단어로 표현되어 있다. 오늘 본문에는 다 λόγος로 쓰여져 있는데, 영어엔 the word로 표현 되어 있다. 이 단어는 ‘말씀, 원인, 계획’등의 뜻도 있다. 그리스 철학에서 우주 만물의 변화 유전하는 동안에 존재하는 조화·질서의 근본 원리로서의 이법. 가톨릭과 개신교인 리스도교에서는 이를 하느님의 말씀. 또는, 그것이 형태를 취하여 나타난 삼위 일체의 제2위인 그리스도를 지치한다. 앞에서 사도행전에 15회나 이 ‘도’라는 단어가 표기되어 있음을 보면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바로 이 ‘도’를 ‘호도스’와 ‘로고스’로 표현 했슴을 알 수 있다. 어제가 ‘종교개혁의 날’ 이었는데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믿고 따르고 전해야 할 ‘도’는 어떤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본론: 마태 7:7,8“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것은 물질을 말하는 것보다 영적인 길 즉, 도(道)를 말하는 것이다. 먼저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영적인 하늘의 도를 말한다.

지난 25 일 세계에서 13대의 제벌인 삼성이라는 회사와  17조의 재산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난 이건희 삼성 그룹회장의 팽관이 그의 별세 3.4개월 전의 말을 옴긴 글이다. “목이 마르지 않아도 물을 마시며, 몸이 아프지않아도 해마다 건강 검진하며, 괴로운 일이 있어도 훌훌 털어 버리는 법을 배우며, 양보하고 배푸는 삶도 나쁘지 않으니 그리한번 살아보게나. 돈과 권력이 있다 해도 교만하지 말고, 부유하진 못해도 사소한 것에 만족을 알며, 피로하지 않아도 휴식할 줄 알며, 아무리 바빠도 움직이며 운동하게나. 우리가 입는 옷의 가치는 영수증이 증명해 주고, 우리가 타는 자가용은 지불한 수표가 증명해 주고, 5억짜리 짜리 집은 집문서가 증명해 주는데  사람의 가치는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건강한 몸이라네. 건강을 위해 들인 돈은 계산기로 두들기지 말게나. 당신이 건강할 때 가진 돈을 자산이라고 부르지만 그대가 아플 때지고있는 돈은  주는 그저 유산일 뿐이지. 세상에서 당신을 위해 차를 몰아줄 사람, 당신을 위해 돈을 벌어줄 사람은 많으나 ,당신을 위해 아파줄 사람은 없다네. 물건을 잃으면 다시 찾거나 사면 되지만,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것은 하나뿐인 생명이라오. 내가  이곳 병원에 있으니 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한한 재물의 추구는 나를 탐욕스러운 늙은이로 만들었네. 내가 죽으면 내 호화스러운 별장은 다른 사람이 살고 나의 고급차 열쇠는 누군가의 손에 넘어 가겠지. 인생의 전반전에서 돈, 권력, 지위를 가져 승리했다고 자부했던 나는 이제인생의 후반전에서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페배로 마무리 짓지만 그래도 이런 편지를 전할 수 있음을 따뜻한 기쁨으로 여기네.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그대들 자신을 사랑하며 돌보며 살아가기를 힘없는 내가 마음으로 나마 비네.”

둘째, 기독교의 도는 이세상에서 가장 불우한 사람들을 찾아 돌보는 것이다.27절의 고아와 과부는 그 사회의 가장 불우한 사람들의 대표이다.

칼빈이 말하기를 “ 우리는 홀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그 구원하는 믿음은 홀로 있지 않는다”(Faith alone saves, but faith that the saves is not alone.)

기독교 신학과 교리의 기초를 세웠던 분은 A.D 4세기의 성 어거스틴 이며, 이를 체계화하고 발전시킨 사람이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13세기의 교황 이노센트 3세 때는 교황권의 전성기였습니다. 어떤 날 교황이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공물을 교황청 창고로 싣고 오는 수레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자에게 행전3장6절의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에게 한 말인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라는 말은 이제 지나갔다. 저 많은 물질을 보아라”고 하자, 아퀴나스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말이 없어진 것처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도 없어졌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결론: 우리가 초대교회부터 중세의 기독교 유적지를 살펴볼 때면 늘 발견 하는 것들이 있는데,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 세계를 떠나 하나님께로 부터 오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의 도를 발견하기 위해 수많은 자기 수련과 헌신을 했슴을 볼수 있다. 우리의 기도나 삶 속에서 주께서 구하라 하셨던 참된 도를 발견하고 실천하기 위해 사도바울의 표현처럼 자신을 쳐 주께 복종시키자.

October 25, 2020

본문: 

역대하 20:14-19 로마서 1:16,17        

우리가 서 있는 곳

2003 년 10월 영화 ‘루터’가 미국에서 개봉되었고 우리나라 한국에는2017년 10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개봉되었다. 영화 ‘루터’는 법률가를 꿈꾸던 마르틴 루터가 무시무시한 벼락을 피해,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겠다고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수도승이 된 이후, 루터는 수도원에서 ‘자학적인’ 고행과 수련을 통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구원의 문제로 몸부림친다. 이후 로마로 파견되었을 때에 그는 연옥에서 고통 받는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면죄부를 사들고 높은 교회의 28개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는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로마 카톨릭의 ‘면죄부’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고 혼란스러워 한다. 믿음이 좋은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 황제에게 부탁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올라갔다고 하는 계단을 로마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그 계단을 가운데 두고 성당을 지은 것이 계단 성당입니다. 로마를 찾아온 사람들은 이 계단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가 사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루터는 당시의 전통을 따라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아픔은 컸지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참회하면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갔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로마서 1:17절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는 그 말씀속에 사로 혀 루터는 자신의 고해신부인 슈타우피츠의 권면을 따라 비텐베르크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신학박사가 된다. 그리고 그는 강의와 설교를 통해서 로마 카톨릭의 면죄부 판매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고, 결국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에 면죄부 판매를 반박하는 ‘95개조항의  반박문’을 내걸게 된다.

95 개조의 반박문은 삽시간에 독일과 유럽으로 퍼져 나갔고, 수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지지자가 된 반면 로마 카톨릭 측은 루터를 파면한다. 이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루터는”세상의 교회가 나를 파문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의 자식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지기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독일 황제는 교황과 대립을 피하려고, 결국 루터를 보름스에서 열린 국회에 소환해 루터는 카를 황제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카톨릭 교회 측의 주장에 자신의 신앙을 담대히 고백한다. “철회할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 서 있습니다. 다른 선택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도우실 것입니다.” 라고 담대히 선언한다.

종교개혁은 또한 당시 기사(騎士)의 난과 농민전쟁 등의 시대적, 정치적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도 했다. 루터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을 마친다. 그리고 영화는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회의를 통해서 루터교의 신앙이 자유를 얻는 것으로 마쳐진다.

이 영화를 보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소위 ‘암흑기’(the Dark Ages) 라고 불리는 그 시대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된다.   그 ‘암흑기’의 끝 지점에서 당대의 사람들이 “그리스·로마 문화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부활’ 혹은 ‘부흥’을 뜻하는 르네상스였다.  인간 중심이었던 고대문화를 회복하고자 했던 일련의 시대적 움직임. 중세가 르네상스를 낳은 것이다. 이것은 인간 역사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으로 고스란히 돌아간 것이다.

교황 이노센트 3 세 때는 교황권의 전성기였습니다. 어떤 날 교황이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공물을 교황청 창고로 싣고 오는 수레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는 신학자에게 행전3장6절의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에게 한 말인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라는 말은 이제 지나갔다. 저 많은 물질을 보아라”고 하자, 아퀴나스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말이 없어진 것처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도 없어졌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중세의 그 화려한 종교적 겉치레 속에서 복음에 대해 무지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인생들을 생각하며 잠시 그의 안에 머물렀던 절망의 신음이었다.  세상은 중세의 교회의 실패를 조롱하고, 그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비난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비난과 정죄를 받아야 할 대상은 우리 주님이 아니다. 그 정죄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죄악 된 본성을 지닌 우리 인간의 몫이다. 앞에서 소개한 영화 ‘Luther “속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습니다. 다른 선택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도우실 것입니다.”라고 루터가 보름스 국회에서 말하는 부분이 있다 말씀드렸다.  오늘의 우리 성도들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어느 곳에 서 있어야 할까?

본론: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 들이 서 있는 곳이 어느 곳이든 하나님을 만나 경배하는 곳이다. 우리가Covid 19 이후 변해야 할 교회에 대한 개념이 하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교회당 안에 가두어 두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 백성은 전쟁터 앞에서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중세교회에서 웅장함과 화려함과 형식속에 있는 건물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었던 것에 맛서 종교개혁이 이루어 졌던 것처럼 오늘 이 시대의 우리도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당 속에 하나님을 모셔 둘려는 것에 대한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 교회 안의 타락한 자에 대한 담대한 질책이 있어야 한다. 요즘 교회의 사역자나 성도들이 세상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비판을 잘하면서 정작 교회안의 비 성경적인 면에 대하여는 스스로 비판하고 수정하지 못한다.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기백성의 타락을 다른 나라를 통해서라도 심판하지 않으셨는가? 요즘 한국 교계의 지도자들이 교회 안의 문제에 시선을 돌리려 국가와 사회 문제만 비판하고 있다. 원래 세상은 비 성서 적이라는 알 면서도 자기들의 약점을 감추려고 세상의 타락만 외쳐 대고 있는 것이다. 출 3:4”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의미를 생각하자.

셋째, 하나님 만이 나를 이곳에 세우셨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루터가 지금부터 503년 섰던 곳은 다른 사람들이 결코 두려워하여 서려고 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하나님이 그곳에 세우셨고 그 분만이 자신을 도우신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둠을 더 사랑하여 세상의 어둠 속에 자신의 악함을 감추었던 자격 없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사건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율법 외에 다른 한 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복음의 의를 한 낮 인간 수준의 공로로, 동전 한 닢 수준의 싸구려로 취급하고 모독했던 악독한 인간들에게 당신의 아름다운 복음의 의를 빛과 같이 나타내신 교회를 향한 주님의 식지 않는 열정적 대사건이었다.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을 향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유일하고 완전한 칭의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이 세상과 온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주제! 모든 민족과 족속과 백성과 방언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기막힌 은혜의 개혁을 일으키시는 주님을 기대한다.

October 18, 2020

본문: 

요한복음4:35- 38, 마태 4:35- 38        

돌이켜 보는 신앙

서론: 이제 우리는 추수의 계절에 들어섰다. 2 주전에는 4대 명절에 속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인 한국의 추석이었다. 그리고 지난 월요일은 캐나다의 추수 감사절 이었고,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다음달이다. 오늘 우리는 영적인 추수의 의미를 함께 나누기를 원한다. 마태 9:37, 38 에보면,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38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이스라엘엔 3번의 추수때가 있다.4,5월엔 보리, 6,7 월엔 밀, 9,10 월엔 과수를 수확한다. 한국의 추석 때 가정에서 가장 큰 예식은 조상에게 차례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이 순서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추수하기 까지 보살펴 준 조상의 은덕을 생각하는 것이다. 어쨌든 추수때엔 자연환경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켜보며 감사하는것이 그리스도인의 도리이다. 이사야 62:9 을 보면”오직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나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요 거둔 자가 그것을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 하셨느니라”추수를 히브리말로 ‘카치르’헬라어로 ‘데리모스’라는데 수확의 과정, 시기, 수확물들을 다 포함한다는 말이다. 씨를 뿌릴때부터 이 모든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잘 못된 것은 뉘우치며,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취할 자세이다.

지난 10년간 평균으로 한국에서 매년 교회 100개 이상이 경매에 부쳐졌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 들어 코로나 사태 이후에 서울의 10개 이상의 대형교회가 강제경매 조치를 채권자들로부터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대부분의 원인이 교회건물의 건축을 위해 은행으로부터 무리한 대출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대출금을 갚지 못하기 때문에 채권자들이 경매 신청을 했다고 한다. 한인 교회들이 부동산 시장에 매물로 나오고 있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한인 교회들에 까지 영향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곳 미국에서도 상황이 비슷하다. 뉴욕시 일대 매물로 나온 큰 한인 교회의 수는 10 여곳에 달한다. 하지만 한인사회 토로나 사태 후 불경기와 맞물려 교회 매물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한편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가주에서도 코로나 사태이후 경기 침체로 한인 교회인 굳 뉴스(Good news) 교회, 나성 열린문 교회가 최근 경매 처분되는 등 남가주를 비롯, 미 전국에서는 모기지가 연체돼 차압매물로 나오는 교회 건물이 급증하고 있다. 올해 미국 전체적으로 차압된 한인 교회는 138 개, 2010년 이후로는 무려 270 개 교회에 달한다.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교회의 나아가는 방향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태 9:35)”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2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하셨던 일은 두루 순회하며 가르치시고 많은 병들을 치유하시며, 복음을 전파하셨다. -Missionary, Teaching, Healing, Preaching. 요즘 한국교회의 건물들을 보면 한곳의 철옹성을 짓고 그것에 안주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본론: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어떤 교훈들을 얻을 수 있을까? 요한 4:35’36을 보면,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먼저, 우리는 영적으로 우리의 시간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고후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진실한 X인은 시대를 직시 할 줄 알아야한다. 세상의 풍조가 그리스도와 멀어져 갈 때 그 길을 떠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갈수있는 X인이 되어야한다.롬 12:2.

둘째, 영적으로 추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마태12:39,4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많은 이들에게 내가 전도를 하지 못할 지라도 내가 몇 사람에게 삶으로 복음을 전한다면 이미 복음의 전파는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예화) 불가사리를 바다로 던지는 소년-  장영희 교수님의 유고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 보면 '나의 불가사리'라는 제목의 수필이 있습니다. 간밤에 폭풍우로 밀려온 불가사리들이 새까맣게 백사장을 뒤덮고 있었을 때 열 살 정도 된 소년 하나가 불가사리를 하나하나씩 바다로 던지고 있었습니다. 해가 뜨면 불가사리들이 태양열에 그을려 죽게 될까 염려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지요. 이 광경을 지켜본 남자 어른이 비웃었습니다. "얘야, 이 해변을 봐라. 폭풍우로 밀려온 불가사리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많은데 네가 하는 일이 무슨 도움이 되겠니?" 소년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불가사리를 힘껏 바다에 계속해서 던지며 말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방금 바닷속으로 던진 저 불가사리에게만큼은 도움이 되겠지요."

셋째, 구원은 세상 어느 누구나 받을 수있다. 마12: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구원(소테리아, 예수아)말은 도와서 건저준다는 뜻이다. 세상의 빈부 나 귀천, 얼굴의 다름, 국경에 상관 없이 그들이 구원을 얻도록 도와야 합니다. 원수라도 구원을 선포- 니느웨는 적국 앗수르의 수도.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예화 )제가 어렸을 때 어떤 목사님이 “김일성 우리 교회 장로 되게 해 주세요.”아마 우리는 “김정은 우리교회 장로되게 해주세요”기도 할 수  요나는 자기 조국에 대한 사랑이 너무강해서 이방인 회개와 구원을 질투함.

넷째, 영적 추수자는 자기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하며, 잘못된 것에서 돌이킬 수 있어야 한다.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욥바로 내려가고, 다시스로 도망- 히브리어 낯은‘페네이’로 여호와 임재를 나타냄. 요나의 하나님의 명령 거절은 타락 그리고 하나님과의 단절을 뜻함.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물론 바나바 처 럼 성도과의 관계속에서도 서로 위로하며 힘을 주어야 한다. 지금의 우리 상황속에서 의사에게 환자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가진 개인이 아닌, 수많은 '무더기 환자들' 중의 일부로 보일 수 있고, 교사에게도 학생 하나하나가 존귀한 개인 인격체가 아닌 무더기 학생들 중의 하나로 보일 수 있다. 목사도 그렇다. 교회가 커질수록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개개인의 아픔과 상처, 고민을 헤아리기 보다는 무슨 무슨 교회, 예컨대 '교회'라는 집합개념의 일부로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결론: 가을에 문턱에 들어선 우리는 야속한 세월의 흐름만 탙하지멀고 영적 추수의 때라 여기고 주와 멀어진 우리를 돌이켜 우리를 하나님의 추수꾼으로 봉사해야 함. 초대교회의 유명한 교부이며 황금의 입이라 칭함을 받았던 크리소스톰은 “현세는 일개의 극장에 불과하다. 사람의 사업은 연극 각본이며, 부자와 빈자 그리고 치리자와 백성들은 극장의 배역이다. 현세가 지나가면 극장은 폐쇄되고 가면은 벗겨진다. 그리고 나서 모든 삶과 업적은 심문 받는다. 그사람의 부와 지위도아니다. 그사람과 그의 일인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업적이 합격되기바란다.

October 11, 2020

장성한 분량에 이른 성도

서론: 구약 성서를 보면 사람을 제단의 제물로 바치려는 사건이 두 군데  나온다. 그 첫번째가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번제로 바치려 하는 사건이고, 또 하나는 사사기 11장에 이스라엘의 열 번째 사사 입다가 자신의 맹세대로 하나밖에 없는 딸을 바치려는 사건이다. 제가 어렸을 때 성경을 보며 가장 의문점을 가졌던 성경의 부분이 바로 이 두곳이다. 사사기 11장의 입다의 외동딸의 번제 사건은 입다 본인이 서원한 일로, 그때 당시 부족사회의  무속종교에서 가끔 일어났던 사건이기에 혐오스럽지만 조금은 이해 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입다의 사건이 논쟁거리로 남아있다.신학자E. W. Bullinger는 입다가 서원할 때 드린다는 대상이 남성 명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말 그대로를 놓고 보자면 맹세의 대상에 딸은 적합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 106:35-38을 보면 “그 이방 나라들과 섞여서 그들의 행위를 배우며, 그들의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들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그들이 그들의 자녀를 악귀들에게 희생제물로 바쳤도다. 무죄한 피 곧 그들의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로 더러워졌도다.” 라고 했다. 사57:5에도 유사한 내용의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부분이 나온다. 인간 번제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혐오스러운 일이었고, 하나님께서 받아들이거나 입다가 인간의 피를 바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친히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신 것이기 때문에 더욱 이해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인간들은 그렇다 치고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제물로 원하시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후에 저의 사춘기적 방황이  끝나고 그리스도를 진실로 내 영혼에 모신 이후에 한가지의 답은 얻었다. 하나님은 친히 당신의 독생자를 제단의 제물로 바치지 않으셨는가? 그것도 구원을 주시려고 한 인간들의 의해서 친히 제물로 바쳐지지 않았는가?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 하나님이 준비 하시거나, 100세에 하나님이 약속대로 주신 이삭이니 그를  데려 가셔도 다시 기적적으로 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믿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5세쯤 대는 이삭이 제단의 바친 나무를 가지고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의 산까지 사흘길을 갔고, 번제 나무를 이삭이 지고 산에 올라가 120세가 넘은 노인에게 결박 당해 제단에 까지 올려 지기 전까지 그는 아비에게 순종하지 않았는가? 어떤 한국 신학자가 주장하기를 “성경의 이삭은 그리스도를 표징하는 가상의 인물이다. “라고 까지 하였다. 그의 태어난 때는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1세 로 인간이 바랄 수 없는 중이었다. 사라도 주의 사자의 고시를 듣고 웃지 않았는가? 이삭은 그의 생애가 결점이 거의 없는 삶을 살지 않았는가?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것이었던 이삭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제단에 바치려 했다. 아브라함도 성격속의 그의 삶의 전반부에서 몇번의 실수를 하였지만 이 모리아산의 제물드림의 사건을 통해  그는 믿음의 아버지 형상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떤 교훈을 이 사건을 얻을 수 있는가?

본론: 먼저 그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명령에 대한 신뢰와 주의 예비하심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7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우리는 먼저 아브라함에게 이 사건이 있기 전의 상황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삭이 태어나고 그는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을 내 보낸 사건이 있었고 , 그는 블레셋 땅에 기거했으며 블레셋과 그랄 왕 아비멜렉이 두려워하는 큰 세력을 지닌 부족이 되었다. 그가 가정적으로 안정되어 가고 이방 땅에서 세상적으로 잘 나가던 때라  하나님의 도움이 많이 필요치 않았다. 하나님은 이제 그를 남방 땅에서 지금의 예루살렘 근처인 모리아 산으로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의 시험이 주어 진 것은 그에게도 원인이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우리를 훈련 시키시고 더 영적으로 성장한 위치에 서게 하신다.

둘째, 자기를 희생하는 순종과 충성을 했다. 순종과 충성은 환경이라는 시금석을 이겨 내야한다. “초목이 푸른 여름에는 소나무와 대나무의 절개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릴 때 소나무와 대나무의 절개를 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충성스런 재상을 알고, 집안이 어려울 때 어진 아내를 안다”는 옛 글이 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세 되어 천신만고 끝에 얻은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애정과 희망과 열망이 그 아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제 그를 제단에 바치는 행위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의미가 있다.

셋째, 두 사람 부자간의 동행이 있었다. 모리아 땅 까지는 사환들이 동행했고, 멀리 있는 산에 오를 때는 두 부자간만 동행했습니다.하나님과 아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구속하실 때 그랬듯이 그들은 동행했다. 시 40:8)”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둘은 6절에”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라고 되어 있다. 두사람은 짐을 서로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25세인 아들이 120가 넘은 아버지에게 묶이고 있었다. 교회안의 성도들은 늘 혼자가 아니라. 둘 이상이 하나님 앞에 같은 희생과 헌신이 이루어 져야 한다.

결론: 아브라함이 손에 들리어 졌던 것들은 불과 칼과 끈이 있었고, 그가 그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불은 하나님의 거룩함, 시험함, 소멸함을 나타냄. 칼은 하나님의 공의 로우심. 끈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고정시켰던 못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제단에는 거룩함, 공의로우심,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사랑으로 묶인 성도들이 있어야 합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장성하다는 헬라어 ’ 엘리키아” 는 장성한 나이를 의미한다. ‘어린아이’ 의 의미인 ‘네피오스’ 와  잘 대조해서 그리스도의 유년기가 아닌 그분의 공생애의 삶을 본받으라는 의미이다.

찬양 ) 생명나무: 갈보리 언덕에 주님의 십자가 그 피로 내 죄를 깨끗하게 씻었네

아하 생명의 꽃 피었네 열매 맺었네 나는 다시 태어났네 그 이름 생명 나무라

절망과 고통의 세상길 헤매일 때 예수님 품으로 나를 인도하셨네

아하 생명의 꽃 피었네 열매 맺었네 나는 다시 태어났네 그 이름 생명 나무라

지나온 인생길 부끄러움 뿐이지만 주님의 은혜로 감사만이 넘치네

아하 생명의 꽃 피었네 열매 맺었네 나는 다시 태어났네 그 이름 생명 나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