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무슨 일이든 되게 하라

아이팟은

2001년 첫 출시 이후

 경이로운 속도로 성장했다.

 단순한 아이디어 하나가

 세계적으로 7천만개 이상으로

 팔려나간 히트 상품으로

변신한 것이다.

​애플 스티브 잡스

고정관념을 깨다.​

아이맥

아아팟

아이폰

아이패드

지금까지는 없었던

생각하지 못한

고정관념을 깬제품들

이라는 점이

애플 i시리즈의

특징이다.

이전에 스티브 잡스는

픽사를 발굴해

고정관념을 깨는

3D 애니메이션으로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것이 바로

토이스토리다.

이후 걸작들이 연이어

나왔다.

벅스라이프

언터처블

니모를 찾아서

몬스터 주식회사

월 E

라따뚜이

겨울왕국

메리다와 마법의 숲

모두 흥행에 성공하면

역대 흥행영화의 역사

들을 다시 썼을 정도다.

지금도 픽사의

영화 흥행률은

100%를 자랑한다.

헐리우드의 영화 흥행률은

고작 15%에 그친다.

100편의 영화중

15편 만이 흥행에

성공한다는 점에서

픽사의 흥행 기록은

기적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정도다.

스티브잡스는

애플에 복귀하기 전에

픽사를 거대 기업

월드 디지니와 합병해

월트디즈니는

영화 제작비를 대고

픽사는 영화를 만들고

디즈니는 배급만 하는

구조를 만들고

자신이 최대 월트디즈니의

최대 주주로 들어가

디즈니는

제작비만을 대고

픽사가 영화를 어떻게

만들던지 어떤 영화를

만들든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조건으로 계약서에

서명함으로써

픽사의 지속가능한

경영이 가능하도록

토대를 마련해 놓았다.

픽사가 없었다면 지금의

디즈니도 없을 것이면

애플도 없었을 것이고

아이팟도

아이맥도

아이폰도

아이패드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믿음이다.

​조지루카스가 지원하고

드림웍스가 만든

슈렉과 쿵푸팬더 같은

애니메이션도 모두

픽사가 제공한

애니메에션 프로그램들로

만들어진 영화들인 것이다.

조지루카스는 루카스필름을

스티브 잡스에게 팔면서

픽사가 만드는 모든

애니메이션 특수효과

프로그램 툴들을

무상으로 조지 루카스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계약해

얻어낸 결과물들이었다.

당시 조지 루카스는

이혼 소송으로

루카스필름을 유지할

재력을 갖고 있지 못해

결국 3000만달러에

루카스 필름을

잡스에게 매각하게

되었다.

이 루카스 필름이

이름을 픽사로 바꿔

토이스토리를

1995년 11월 추수감사절을

맞춰 개봉했고

이것이

타이타닉과

라이언 킹에

이은 흥행 수입을

올리면서 다시 잡스는

억만장자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

토이스토리 개봉 후

픽사는 나스닥에

주당 22달러에 상장해

스티브 잡스를 다시

억만 장자의 반열에 올려

놓았고 스톡 옵션을 받은

애드 캣멀과

감독 존 라세터도

또한 엄청난 갑부가 되게

된다.

잡스는 무려 5년이라는

시간동안 수입 한푼 나지

않는 픽사 전직원의

월급을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댓고 결국 픽사의

임직원들은 이런

잡스에게 보답했다.

당시 잡스는 자신이

애플을 떠나 오면서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단 한주만 남기고 팔아

마련한 현금의 절반을

모두 이 픽사에 쏟아

부었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픽사에 쏟은 정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첫 장편 3D애니메이션은

전세계 영화 흥행 3위

라는 경의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픽사의 존재감을

전세계에 알리게 된다.

픽사의 혁신이

지금의 애플을 있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픽사는 시대를 앞서간

일을 해낸 것이다.

당시 스티브 잡스는

넥스트사의 컴퓨터

즉 맥킨토시 컴퓨터와

같은 컴퓨터 1100대를

병렬로 연결해 고해상도의

스크린에 생생한 화질을

구현하는데 성공하게

된것이다.

이것은 영화사에

길이 빛나게 될 대 역사를

이뤄낸 사건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 영화사에

CG의 원류라고 한다면

단연 픽사의 컴퓨터그래픽

3D애니메이션을

꼽지 않을 수 없다​.

http://cosmonwin.blog.me/10185028527?Redirect=Log&from=postView

스티브 잡스 무슨 일이든 되게 하라

.

스티브 잡스

모두가 알아봐 주시니 좋군요.

아이팟 신화

스티브 잡스처럼 생각하라

아이팟 보다 더 놀라운건

아이팟의 성공을 둘러싼 이야기

다.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온
남자

스티브 잡스와 아이디어의

탄생,

-EBS 다튜10 아이팟 성공스토리 중에서- 

아이팟 신화
스티브 잡스처럼 생각하라

제프리 영
<iCon 스티브 잡스>의 저자
뮤직 애플에게는

완벽한 도구 였다.

잡스는 음악이 본능이라는

걸 알았던 것이다.

개발 과정도 드라마틱했다.

8개월 만에 아이팟을 개발
했으니 정말 바빴다.

스티브 잡스
바로 여기 있습니다.

 아이팟을 들어 보이며 기자들에게
설명하는 스티브 잡스

아이팟이 단순한

IT제품에서 문화현상으로 변한데는
행운도 큰 몫을 했다.

 이어폰 잭에 신경을 쓴 회사는
없었다. 하지만 하얀 이어폰은 유행의 상징이 됐고
사람들은 말했다. 저건 뭐야?라고 말이다.

스티브 잡스는 전세계 음악 시장을 판도를 뒤흔들었고
컴퓨터 회사인 애플을 음반 업계의 거물 자리에 올려 놓
았다.

스티브 잡스는 이것만 한것이 아니다. 애플에 복귀하기
전 스티브 잡스는 픽사로 3D애니메이션 영화 시장에서
대박을 냈으며 픽사를 월트 디즈니에 인수 합병 시키면
서 영화업계에서도 거물급 영화 제작자가 되었다. 픽사
가 만드는 애니메이션 영화는 흥행 100%라는 진기록을
세웠고 헐리우드 영화 시장에 컴퓨터 그래픽 붐을 잃으켜
놓았다. 그 대표작으로 나온 것들이 스타워즈 1,2,3 이며
그 유명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다. 이 아바타는
바로 픽사의 토이스토리와 픽사의 흥행영화들에 기술적
인 영향을 받은 영화들이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는 96년
애플로 복귀하게 된다. 스티브 잡스가 없었다면 픽사도
없었을 것이고 픽사가 없었다면 스티브 잡스고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와 픽사가 없었
다면 아이맥도 아이팟도 아이튠즈도 아이폰도 없었을것
이고 지속가능한 수평적 의사결정구조라는 기업경영 문화
도 만들어 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가능케한 것은
지금도 현직에서 일하고 있는 픽사의 CEO 애드 캣멀이
스티브 잡스와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속 가능한 경영을 부러짓고 기업내 수평적 의사결정
구조를 주창한 사람이 바로  픽사의 CEO 애드 캣멀이었
기 때문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철저하게 픽사의 지속가능
한 경영방식을 애플에 적용했다. 잡스가 죽고 없는 애플
이 지금까지 지속가능한 경영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기업경영 방식때문이다.

6년전에 애플이 거대한

음반 업계가 될거라고 말했다면
나를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저를 이상하게 봤을 겁니다.

아이팟 혁명의 역사를 한번 돌아 보자~!
쉽게 믿기지는 않겠지만 아이팟의 이야기는
미소에서 시작되었다. 1996년 12월 2일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복귀하면서 지은 미소다.
잡스의 애플 복귀가 발표되던 날 그는 활짝 웃었다.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났던 스티브 잡스

그가 돌아오기 전 1995년 11월 스티브 잡스는 픽사에서
토이스토리1이라는 3D애니메이션을 개봉해 흥행 대박
을 냈다. 당시 영화 흥행기록으로 타이타닉과 라이언킹
다음으로 토이스토리가 3위에 랭커되면서 잡스는 픽사를
나스닥에 상장하고는 다시 억만 장자의 반열에 올랐고
이듬해인 1996년 연말에 잡스는 애플에 복귀하게 된다.

잡스를 쫓아냈던 존 스컬리는 잡스를 애플의 구원 투수로
재 복귀를 시키면서 애플의 역사는 다시 쓰여지게 된다.
85년 애플에서 쫓겨나 변방으로 떠돌아가 픽사의 애니메
이션영화 흥행 대박으로 다시 재기에 성공한 잡스는 애플
로 화려하게 복귀하는데도 성공하게 되고 연이은 구조
조정으로 애플을 조직문화와 제품 개발 팀들을 대폭 정리
하면서 아이맥을 출시하고 9개월 만에 사실상 파산한 애플
을 흑자로 돌려 놓았고 아이팟을 출시하게 된다. 다음 이야
기는 아이팟의 성공신화 이야기다.

스티브 잡스는 픽사를 발굴하고 토이스토리를 개봉해 흥행
에 성공하고 애플에 복귀해 아이맥을 출시하고 아이팟을
출시해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고 이것은 다시 아이폰을 출
시하는 밑걸음이 되었고 애플은 아이폰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초 우량기업이 되었다. 애플은 한때 시가총액
이 8000억달러에 달했으며 2012년에는 한개 분기에 매출
순이익을 10조원을 달성하는 회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2013년에는 우리나라의 삼성이 한개 분기에 10
조원이라는 영업순이익을 내는 기업이 되었다.

앞으로 당분간 어떤 기술적인 혁명이 다시 일어 나지
않는 이상 영업순이익 한개 분기 10조원을 달성하는 회사
는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난지 11년만의 복귀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연극같은 이야기 이다. 잡스는 1985년 애플을
떠났다. 존스컬리의 반란에 쫓겨난 것이다.

(존스 컬리는 잡스가 평생 설탕물만 팔다가 죽을 거냐는
말을 해 영입해온 팹시콜라의 사장이었다. 이 존 스컬리
에게 쿠데타를 당해 축출되어 애플에서 퇴출되었던 것이다.)

스컬리는 잡스가 직접 고를 경영자였지만 둘은 경영 전략
을 두고는 사사건건 다퉜다. 스컬리호 애플은 수렁에서
발버둥 쳤다. 신제품을 내놓아도 신통치가 않았다.

앨런 도이치먼
(못말리는 CEO 스티브 잡스)의 저자

잡스가 돌아왔을때 애플은 연간 10억달러의 적자를
보고 있었고 주식은 60달러에서 17달러로 떨어져 있었다.

업계 전문가 대부분은 애플이 쇠락의 길에 들어 섰다고
봤던 상태였다. 죽음의 내리막길?

더글러스 앳킨스
<브랜드 숭배>의 저자
브랜드와 품질 경쟁력 이미지에서 모두 떨어졌다.
열혈 애플 고객들도 마이크로 소프트로 넘어가기 시작
했고 애플로써는 끔찍한 시기였다. 이사진에서는 애플
매각까지 검토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애플은 사실상
파산한 회사나 다름이 없었던 상태였다고 할 수 있었다.

잡스의 귀환은 구세주의 등장이었다. 귀한한 잡스는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곧바로 비대해진 애플의 생산 라인
부터 줄려 나갔다.

애플이 개발한 세계 최초의 PDA 뉴턴의 생산량부터 감축
했다.

스티브 잡스가 제일 먼저 손을 덴 것이 바로 뉴턴이었다.
뉴턴은 스컬리 시절에 개발된 PDA로 손글씨 인식도 가능
했던 제품이었다. 그런면에서 괜찮았지만 그것은 스컬리의
작품있었고 잡스는 거기에 큰 돈을 투자할 생각이 없었다.
잡스는 연구 개발 프로젝트도 50개에서 10개로 대폭 줄
였다.

잡스는

애플이 생산하는

모든 제품을 살펴본 다음 엔지니어
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문제가 뭔지 알겠어요?

엔지니어들이 우물 쭈물 하자

잡스는 말했다.
쓰레기라는 게 문제입니다.

애플에 돌아온 뒤 잡스는 공포정치를 했다. 직원을 마주치면
자네는 누군가? 무슨일을 하지? 라고는 물었다. 그리고
결국은 이런 소문까지 나돌았다. 사내 엘리베이터에서
모르는 직원을 마주치면 잡스는 그 사람을 곧바로 잘라
버린다는 말이 나돌 지경이었다. 직원들은 실제 잡스 앞에
서 대답을 못하거나 소신있는 답변을 못할 경우 엘리베이터
에서 내린 즉시 회사에서 쫓겨나는 사람도 생겼다.

이후 직원들은 출근시간에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 일이
생기기까지 했다. 잡스와 출근길에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였던것이다.

 
구체적인 제품개발 계획은 없는 상태였다. 잡스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분위기를 다잡고 있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전광석화처럼 낚아 챌 분위기를 만든 것이었다. 잡스는 여
러번 이렇게 말했다.

"어떤 제품을 만들거냐고 묻지 마라~! 어떤 제품을 원할지
는 소비자들도 모른다." 제품을 직접 봐야 그걸 원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잡스는 외부인들이 애플을 보는 시각 소비자들이 애플을
보는 시각, 직원들이 애플을 보는 시각을 바꿔야 했다.
그래서 나온게 "다르게 생각하라 광고였던것이다." 

광고는 갬패인이었다.
그 전에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애플은 시장 점유율이
낮다. 그러니까 패배자고 업계의 주변부다. 다시 말해 별로
다라고 생각하는 태도였다. 잡스는 이런 생각을 이렇게
바꿨다. "그렇지 않다 전체에 2~3%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독창적이고 모험을 즐기는 혁신가들이다"라고 말이다.

잡스의 주장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1년후인 1998년 5월
애플은 신제품을 선보였다. 눈에 확뛰는 디자인에 아이맥
컴퓨터였다. 열혈 팬들을 거느리고도 망하는 브랜드가
많지만, 맥킨토시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화려한 색깔의 일체형 컴퓨터는 이메일을 보내고 웹 서빙
을 하는 새 디지털 환경에 잘 어울렸다.

아이맥은 판매시작 단 45일 만에 30만대가 팔렸다.
복귀후의 데뷔작은 멋진 인상을 남긴다.

스티브 잡스
너무 멋져서 핥아보고 싶을 겁니다.

아이맥은

아이팟의 성공에

기초가 됐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아이맥은

새로운 컴퓨터였던

것이다.


청소년들의 취향에 딱 맞는 히트 상품이었던 것이다.

다른 컴퓨터들은 하나같이 지겨운 회색이었지만 스티브
잡스는 패션어블한 컴퓨터를 내놓았던 것이다.
아무도 본적이 없는 제품이었던 것이었다.

아이맥으로 애플은 본궤도에 올랐지만 아이팟 탄생의
촉매제는 다른 곳에서 날아왔다. 숀펜닝이 다니던 노스 이스
턴 대학에서였다. 
 1998년 숀페닝은 노스이스턴 대학교 1학년이었고 패닝의
룸메이트는 원하는 MP3파일을 찾을 수 없다며 늘 불평을
했다. 음악 사이트에 들어가도 그 노래를 듣지 못할때가
아주 많다고 했다.
그 대학생들이 원했던건 아주 소박했다. 친구들과 음악을
공유하는 거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서비스는 아직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 패닝은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게 된다.
냅스터 탄생
몇달 후 숀 패닝은 인터넷 사용자들이 MP3파일을 공유
할 수 있게 해주는 소프트웨어를 공개했다. 소프트 웨어의
이름은 패닝의 인터넷 아이디로 지어졌다. 냅스터였다.

조던 리터
넵스터 공동창립자
숀패닝은 소프트웨어를 제공했고 친구들은 다른 친구들
에게 전파해 넵스터 이용자들은 일주일 만에 50명에서
2000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용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났다. 그달 말이 되자 1만명에 육박하게 된다.

패닝의 기숙사 방에서 공개된 냅스터는 1년만에 전세계
6천만 이용자의 방으로 퍼져 나갔다.
넵스터를 역사상 가장 빨리 성장한 회사인 동시에 전세계
음반 업계가 가장 미워하는 적이 되었던 것이다.

음반업계는 공포에 질렸고 몇달 후에 넵스터를 고소하게
된다. 고소를 앞두고 음반회사의 대표들은 힐러리 로즈를
불러 회의를 했는데 로즈는 넵스터 사용법 부터 보여 주었
다. 

많은 음반회사 대표들이 한방에 모였다. 미국 음반 업계
에서 가장 막강한 분들이 다모였다.
우리는 자리에 앉았고 45분동안 그분들은 노래 제목을
댔다. 히트곡이든 유명하지 않은 곡이든 제목을 대면 거걸
넵스터에서 그걸 검색해 봤는데 그분들이 말한 모든 곡을
넵스터에서 다운 받을 수 있었다.
결국 회장님들은 격분한재 방을 나서게 되었다.

미 연방대법원은 음반업계의 소송 제기에 따라 넵스터
서비스 중단을 허가했습니다.

넵스터의 서비스를 저지하기 위해 모인 음반업계는 한가
지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줬다. 디지털 음악혁명이 일어
났다는 사실이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그점을 간파했다.

잡스와 애플 경영진들은 지금 인터넷에서 음악혁명이 일어나고
있고 자신들이 지금껏 그 기회를 놓쳐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사진이나 영화를 내려 받는 것과는 달리 음악을 내려 받아
CD로 굽는 기능은 두번째 아이맥 모델에서나 가능했던
일이었다.

넵스트의 성공은 분명했고 잡스는 그것을 직시하게 된다.
음악을 사업에 이용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시작한것은 CD를 맥킨토시 컴퓨터에 넣고 컴퓨터 파일로
만든 다음 컴퓨터로 듣는 것이었다.

애플 출신 직원이 많은 한 회사가 있었는데 그 회사에서 사운드
잼이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애플은 사운드 잼을 샀고 몇달 후
새프로그램을 내놓게 된다. 메킨토시에 딱 맞는 아이튠즈였던 것이다.

2001년 스티브 잡스는 센프란시스크에서 아이튠즈를 처음으로
소개했다.

음악 소프트웨어

 아이튠즈는 디지털 음악산업으로 가는
첫 걸음이었다.

아이팟과 아이튠즈가 나오기까지 넵스터 음악 다운로드
프로그램 서비스중단 조치
97년 애플 복귀 98년 다음해 아이맥 출시 단 45일 만에
45만대 판매

아이팟은 9000만대 판매

힐러리 로즌
前 미국 음반협회 회장


인터넷에서 음악 혁명이 일어나고 있음을 간파해냄
사운드잼--아이튠즈

아이맥2에서 CD로 굽는 기능 서비스였다.

음악소프트웨어공개는 디지털 음악산업으로
가는 첫걸음이 되었다.

그날 잡스의 프리젠테이션은 록스타의 공연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한눈에 반해 버렸다.


아이팟 등장 2001년 센프란시스코 맥월드 엑스포에서
아이튠즈를 공고했다. 음악 재생프로그램의 수준을 한단계
높이는 소프트웨어 였다. 디자인도 아름다웠고 사용법도
쉬웠다. 그리고 윈도우에서도 사용이 가능했다. 애플이
디지털음악 산업에 깊이 발을 들여 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에게 중요한건 음악입니다. 잡스에게 음악은 본능
적인 것이었다. 애플에게 음악은 완벽한 도구였고
음악은 인간의 DNA에 각인되 그 어떤 것이었다.

잡스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았고 디지털환경과 결합
시키면 아주 중요한 뭔가가 될거라고 생각했다.

 윈도우가 나온지 6년만의 일이다 윈도우 95가 나오고
6년뒤 2001년 아이튠즈가 나왔다.
애플이 디지털음악 산업에 깊이 발을 들여 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컴퓨터는 20세기의 산물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면
모니터를 보는 건 사실 본능적인 것이 아니었아.
그러나 음악은 본능적이며 원시시대때부터 전해
내려오던 것이었다. 잡스는 그런 성질을 이해하며
디지털환경과 결합시키면 아주 중요한 뭔가가 될거라고
생각했다.
스티브 잡스의 이런 생각은 애플을 완전히 변모 시킨다.

1996년 애플에 복귀한 잡스는 수렁에 빠진
애플을 구해낸다. 2001 년 1월 아이튠즈를 공개한다.
그러면서 애플을 디지털음악혁명에 동참시켰다.
그리고 아이팟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제프리 영
<iCon 스티브 잡스>의 저자

아이튠즈는 음악파일을 옮기고 조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한건 음악을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조깅을 하면서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MP3시장을 조사했으나
다이아몬드사의 MP3플레이어인 리오 최초의
MP3플레이어의 MP 그리고
컴팩컴퓨터에 기반을 둔 제품도 있었지만 전부
비싸고 인지도가 낮았다.

잡스의 마음에 드는 제품은 시장에 하나도 없었다

이상한 건 소니가 음반시장의 잠재력을 몰랐다는
것이다. 소니는 세계 최초로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만들어 세계를 정복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뒤쳐지고
말았다. 넵스터가 히트를 쳤을때 관련업계는 디지털
음반시장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서비스제공을 모색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기존의 음반시장구조에
매달리고 있었다.

소니는 MP3플레이어를 만들지 않았고 그럴계획도
없었다. 스티브 잡스는 기회를 직감하게 된다.

2001년 초 애플은 MP3플레이어 시장에 진입하기로
결정했다. 토니 퍼델이라는 엔지니어도 그당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리앤더 카니
<컬트 브랜드의 모든 것, 아이팟>의 저자

2001년초 MP3플레이어 시장에 진입하기로 결정한
애플은  필립스와 소프트회사인 제너럴 매직에서 일 
하며 소프트웨어와 휴대용기기를 개발한 퍼델과 접촉
하기 시작했다. 토니 퍼델은 온라인 상점과 연결되는
MP3플레이어를 만들고 싶어 했다.

제프리 영
<iCon 스티브 잡스>의 저자

잡스는 초기부터 디지털음악시장의 잠재력을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토니퍼델을 영입했다. 애플은 이렇게
생각은 이랬다. 그래 자체적으로 개발할 수도 있지

그러면 1~2년이 걸려 하지만 아이튠즈때 처럼
타인의 아이디어에 우리들 만의 색깔을 입힐 수도 있어
그러면 시간은 절약되지~!

아이튠즈를 출시한 2001년 1월 스티브잡스는 애플의
역사를 바꿔놓을  아이팟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철저한
보안 속에서 개발팀을 꾸렸다. 이들에게 주어진 기간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9달남은 추수감사절 연휴에 출시를
마치라는 것이었다.

벤 노우스
前 아이팟 개발팀 책임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9달이었다. 시간이 정말
부족했다. 시작파티 같은건 생각도 못했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출근을 했다.  스케쥴이 빡빡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젝트 돌입 한달 후 우리는 쿠퍼티노로 가서 애플
사람들과 접촉했다. 애플의 수뇌부가 10명정도 있었는데
토니 퍼델이 이렇게 말했어요. 여러분 이프로젝트는 애플을
바꿀 겁니다. 10년후 애플은 컴퓨터회사가 아니라 음반회사가
됩니다.

프로젝트 초반에는 스티브 잡스가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매주 한번하던 회의가  매일로 바뀐 후반엔 프로젝트
에 적극 참여했죠. 음직에 관한 의견을 많이 냈다. 스티브 잡스는
귀가 아주 예민해서 좋은 소리와 나쁜 소리를 쉽게 구분해 낼
정도였다. 버튼의 반응 속도를 높여사 클릭세번만에 원하는
음악을 찾아야 한다는 주문도 했다. 잡스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
하는 건 단순함이다. 매킨토시의 처음 모델에는 커스키가 없었다.

다른 컴퓨터에는 다 있는 커스키가 없었다는 점이다.
아이팟에서는 켜짐 꺼짐 버튼을 없애 버렸다. 최소한의 버튼만
남겼다.

 
리앤더 카니
<컬트 브랜드의 모든 것, 아이팟>의 저자

제품의 광택 작동방식 인터페이스 모든
것에 관여했다. 아이팟은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게 잡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출시 예정일 3달을 남겨두고
아이팟에서는 심각한 결함이 발견 된다.
개발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애플이 생산
라인을 준비할 무렵 전력통제 장치에서
결함을 발견하게 된다.

벤 노우스
前 아이팟 개발팀 책임자

프로젝트 마감직전에 3시간만 지나면
베터리에가 다 달른다는 걸 알게 됐다.

 출시가 불가능한 결함을 발견했고 우리는 그걸
고치지 못하면 쫓겨날 거라고 생각했다.

엔지니어들을 꼬박 8주일을 베터리에 매달렸고
결국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불가능해보이던
기한 안에 발매 준비도 끝났다. 스티브 잡스는 이
메일을 보내 그의 신제품 출시에 기자들을 초대
했다.

 제품설명은 한 문장 뿐이었다.

맥은 아닙니다.

2001년 10월 23일

스티브 잡스는 야심찬 신제품을
언론에 공개한다.

아이팟 출시행사는 일종의 클라이맥스였다.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신제품을 보여드리려
나왔는데 좀 뜸을 들여야 겠습니다.라고 말이다.
그러다가 청바지 주머니에다가 손을 집어 넣고
아이팟을 꺼냈다.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는 말했다. 오늘은
혁명의 첫날입니다. 이 작고 놀라운 기계는
1000곡을 담은 채 주머니에 쏙 들어가죠.

행사장에 와있던 기자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말했다.  저건 뭐야라고 말이다. 다들 어리둥
절해 했다. 애플이 MP3플레이어를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이제 누구나 1000곡의 노래를 갖고 다니며
원하는 곡을 더 빨리 찾을 수 있습니다.

아이팟은 예전의 MP3플레이어 보다 사용방법
이 훨씬 쉬웠다. 

스티브 레비
<완벽한 제품>의 저자

아이팟 출시후 빌게이츠가
뉴욕에와 기자들 몇명과 같이 저녁을 먹었는데
전 새로산 아이팟을 그 자리에 가져갔다.

빌게이츠는

아이팟을 몰랐고 제가 그걸 내놓자
눈이 휘둥그래저서

단추를 눌러보며 사용법을 묻더군요. 맥킨토시
와 호환이 되겠죠? 라고 물었다.

아이팟의 창조를 지휘한건 스티브 잡스였지만
아이팟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된데에는 행운
이 큰 몫을 담당했다. 아이팟은 2001년 10월
23일 출시 됐다. 새로운 IT제품을 시장에 내놓
기엔 최악의 시점이었다.


 제프리 영
<iCon 스티브 잡스>의 저자

출시 시점은 그 보다 더 나쁠 수가 없었다. 이용자
들은 충격에 빠졌다. 한달전에는 911 테러가
일어나 미국 전역이 충격에 빠져 있을 때였다.
2001년에는 닷컴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고
실리콘 벨리는 무너지고 있었다.

실리콘벨리에 불황 기미

신제품에 대한 성공을 기대할 만한 거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몰리 우드
CNET 네트워크 IT평론가


아이팟은 때이른 감이 드는 제품 이었는데 당시
디지털 음악 산업의 미래는 불확실해 보였는데
애플은 장례가 불분명한 시장에 거액을 투자 했
으니 위험해 보였다.

 리앤더 카니
<컬트 브랜드의 모든 것, 아이팟>의 저자

아이팟이 출시 됐을때 사람들의 사람들의 시각은
회의적이었다. 400달러로 값은 비쌌고 맥에만 연결
되어 있으니 아이팟의 뜻이 얼간이가 정한 가격 이라
든가 안 CD플레이어가 더 좋아 라든가 하는 농단
이 나돌았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아이팟에는 유리한 요소들이 있었다.

피터 로자스
테크놀로지 전문가

다른 MP3플레이어와 다른 점이 있었다.
차별화된 아이팟만의 특징

첫째는 아이팟과 아이튠즈의 철저한 결합이었다.
애플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완벽하게 연결
시켰는데 이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일이었다.

데이비드 포그
<뉴욕타임스> IT전문 칼럼니스트

출시 당시에도

아팟은 최고의 제품이 아니었다.

용량이 제일 크지도 않았고 제일

저렴하지도 않았
다. 하지만 아이팟은

하나의 패션 소품이었다.
보석같이 아름다운 제품이었던 것이다.

엘이엇 밴 버스커트
<와어드뉴스> 칼럼니스트
노래를 많이 저장하는 것과 노래를 쉽게 찾는 것은
다른 문제다.
기존기기들도 가수별 제목별로 플레이 리스트에
담긴 노래들을 찾을 수 있게 해줬지만 클릭 클릭 클릭
수도 없이 클릭을 해야했다. 수천곡이 들어 있다면
노래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아이팟의 스크롤기
능은 어 하고 버튼을 누르면 주룩하고 화면이 내려
가게 되어 있었다.
금새 대단해 라는 소리가 나오게 될 지경이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애플이 열혈 맥킨토시 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이팟 숭배
더글러스 앳킷스
<브랜드 숭배>의 저자

애플엔 다른 어떤 회사에도 없는 자산이 있다.
충성도 높은 열형 사용자들이다. <충성고객>
애플에서 아이팟이 출시되자 애플의 열혈 사용자들은
포교활동을 하듯이 열심히 신제품의 소식을 알리기 지작
했고 친구 가족 아무나 붙잡고 선전을 했다는 사실이다.

섀런 리
청소년문화 전문가
IT제품 중에는 마니아 그룹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IT제품이 패션이나 자동차 음악 스포츠
등과 결합을 하면 그 제품은 거대한 물격을 잃으키게
된다. 많은 유명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아이팟도 그런 거대한 파장을 잃으켰다.
출시 두달만에 아이팟은 미국의 유행을 선도하는
12만 5천명의 손과 귀를 점령했다. 하지만 IT제품
메니아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아이팟을 인식하게
된건 순전히 운 때문이었다.

리앤더 카니
<컬트 브랜드의 모든 것, 아이팟>의 저자
처음에는 맥킨토시 사용자들만이 아이팟을 샀다.
그러다가 대도시의 젊은이들은 흰색의 이어폰을 눈여겨
보게 된다. 이어폰 색깔에 신경을 쓴 회사는 없었다.
하지만 하얀 이어폰은 유행의 상징이 됐고 사람들은 말
했다.  하지만 흰이어폰은 마케팅 포인터가 되고 만다.

본체는 주머니나 가방에 넣고 다니가 때문에 눈에 뛰지
않지만 이어폰은 눈에 확띄게 되어 있다.


섀런 리
청소년문화 전문가

길에서 멋진 사람을 봤는데 한번도 보지 못한
엑세사리를 본 것이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들게 된다.
뭐지 뭘달고 있는 걸까?

그러다 문득 깨닫는 것이다. 거리에서 만난 멋진 사람은
하나 같이 그걸 달고 있는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 사람들은 멋쟁이 축에 끼기 위해 그걸 원하게 된다.
그것이 21세기의 문화 IT제품일 때는 더 그렇다.

이것을 간파한 애플은 멋쟁이는 흰 이어폰을 꽂고 다닌다
고 광고를 내보냈다. 흰 이어폰은 왕이 됐다. 그것은
문화적인 상징이었고 우리 같이 되려면 흰 이어폰을
사라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 되었다.

아이팟의 경우

아이팟을 광고한건 제조사 뿐만이 아니
었다. 파티에 가지고 와서는 그것을

트는 멋진 DJ나
아이팟 전용 엑세사리를 만드는

유명 패션디자이너도
제품을 광고했다.

아이팟은 남다른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놀라운 인기를 감지한 언론도 아이팟의 물결에 동참한다.
아이팟은 조만간 시사주간지의 표지 모델이 되게 된다.
아이팟에 담긴 노래를 소개하는 유명인들의 기사는
아이팟 열풍을 부채질했다.

올해 디지털 기기 판매액이 1000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유행을 선도하는 미국 중심부를 점령한
건 흰 이어폰이 달린 아이팟입니다.

 제프리 영
<iCon 스티브 잡스>의 저자

스티스 잡스는 애플이 미디어 회사로 변신하는 중임을
깨달았다. 애플매출의 절반이상을 아이팟이 차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 기사
아이팟 주문 증가가 애플 수익의 대폭 증가를 견인하다.

아이팟이 애플을 이끌어 갈것을 예감했다.
출시 1년 반만에 흰 이어폰을 단 리플릿 플레이어는
100만명의 고객에게 다가갔다. 이른바 아이팟 신드롬
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음악 산업을 완전히
바꿔 놓은건 잡스의 다음 프로젝트였다.


아이팟의 판매량이 계속 증가하는 가운데 스티브 잡스는
디지털 음원 판매에 관심을 돌렸다. MP3파일 공유
소프트웨어 넵스트를 축출한뒤 미국 음반 업계는 온라인
으로 판매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조지프 멘
<광란의 전모>의 저자

넵스터를 쫓아낸 음반 업계는 먼저 방어에 치중했다.
대중은 디지털 음악 서비스를 원했지만 업계는 고개만
저었다.

힐러리 로즌
前 미국 음반협회 회장

넵스터가 음반 업계에

입힌 피해는 정확히
집계되지는 않았지만

넵스터가 넓게 퍼진 3년간  업계의
매출액은 연간 155억달러에서 125억달러로 줄어 들었
다.  주변에서는 사업을 더욱 확장할 기회라 생각했지만
음반 업계가 디지털 음원 사업을 시작하기엔 상처가 너무
컸다.

넵스터 시절 사람들은 무료로 디지털 음원을 공유했다.
이제는 디지털 음원을 얼마에 제공할지 결정하는 것부터
어려웠다.


힐러리 로즌
前 미국 음반협회 회장

어떤 사업 모델이 적당한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곡씩
할지 앨범을 통째로 팔지 결정이 어려웠다. 저작권료를
내는 업체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각 음반 회사들이 새 사업 착수를 위해 온라인 업체들과
논의를 진행하는 동안 잡스는 다른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음반회사에서 나온 수백만곡을 한자리에서 살
수 있는 온라인 음반 가게를 생각했다. 온라인 음반가게
에서 산 노래를 아이팟에 전송하는 것이었다.


 제프리 영
<iCon 스티브 잡스>의 저자

스티스 잡스는 사람들의 욕구를 알고 있었다.
이 음악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CD는 구입하면 자기것이 된다. 당시 음반 업계는 저작권료를
내는 동안 음악을 듣게 해주는 것이었다.

저작권료를 못내면 노래를 듣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노래를 빌려 듣는 것이었다. 스티즈잡스는 그런 방식
은 절대 안된다고 생각했다.

폴 레스티코프
<디지털뮤직뉴스> 편집장

애플은 업계와 사업을 함께할 생각이 없었다.  약 20년
전에 등장한 MTV와 음반 업계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잠작할 수 있다. MTV도 시장은 보잘것 없었다.
초기 MTV는 뮤직비디오를 보여주는 캐이블 채널에 불과
했는데 20년이 지나자 음반업계를 뒤흔드는 거대 권력이
되었다. 음반업계는 애플의 등장도 그렇게 봤던 것이다.

업계를 뒤흔들 거대 권력을 왜 또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고 음반 업
계도 곧 그걸 알게 된다.

힐러리 로즌
前 미국 음반협회 회장

잡스의 열정과 카리스마 그리고 아이팟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스티브 잡스는 일반적인 IT업계의 경영자와는
달랐다. 마이크로 소프트는 음반 업계와의 회의에 관련
계열사 부사장 보냈지만 컴퓨터업계의 CEO중에는 가수
들이 기꺼이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도 들물었지만 잡스는
달랐다.


음반 업계는 스티브 잡스의 주장에 끌렸지만 한가지 이견
도 있었다.

힐러리 로즌
前 미국 음반협회 회장

잡스는 한곡에 99센트를 받고 음원을 팔자고 했다.
일부 음반 회사들과 가수들은 앨범을 통째로 팔고 싶어
했다.

음반회사들은 노래를 한곡씩 따로 파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스티브잡스는 꼭 그렇게 팔아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전 그렇게 팔고 싶습니다. 그래야 잘 팔 수 있습
니다. 앨범을 쪼개서 팔아야 합니다.

힐러리 로즌
前 미국 음반협회 회장

UTO는 자기들의 앨범엔 하나의 스토리가 흐르니까 쪼개
서 팔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스티브 잡스는 UTO맴버들
과 오랜 시간 이야기 했고 일반 한번 시도나 해보자고
설득을 했다. 결국 UTO는 아이팟에 일등공신중에 하나가
됐던 것이다.


몇 달에 걸쳐 가수들과 음반회사들을 설득한 뒤인 2003
년 4월 28일 애플은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 서비스를
시작하게 된다. 미국 5대 음반사에서 발매하는 20만곡
이상을 판매하는 온라인 디지털 음원 가게였다.

힐러리 로즌
前 미국 음반협회 회장

잡스는 사명감을 갖고 음반회사 CEO들을 설득해 목표
를 이뤘다. 덕분에 새로운 형태의 음반 판매가 가능해 지
게 되었던 것이다. 담당자가 제게 사이트에 대해서 설명
하는 첫자리에서 스티브 잡스는 30분 가까운 시간을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란 글자의 위치와 크기에 대해 질문
을 해댔다.
그렇게 열정적인 CEO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인상적이면서도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폴 레스티코프
<디지털뮤직뉴스> 편집장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 서비스 개시는 아이팟이라는 제품
출시보다 훨씬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음원
시장은 복잡하다. 저작권자만 5명이다. 그 사람들을 한자
리에 모아서 서명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저작권관리
규정을 하나의 형식에 담아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스티브잡스의 이런 노력은 보상을 받는다. 이이튠즈 뮤직
스토어 서비스 개시 닷새만에 100만곡 이상을 판매했다.

스티브 잡스와 애플은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을 이뤄냈다.
디지털 음악 재생기와 디지털음원을 동시에 판매한 것
이다.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의 문을 열던 날 스티브 잡스
는 아이팟의 인기를 한층 더 높여줄 행사도 열었다.

2001년 10월 첫 출시 이후 8개월 만에 애플은 70만개
의 아이팟을 판매했다. 아이팟은 세계에서 제일 인기있는
MP3플레이어가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이팟은 맥킨
토시를 위한 틈새 시장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곧 변한다.

2003년 4월 28일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 서비스가 개시
되던 날 스티브 잡스는

3세대 아이팟을 선보였다.

New iPods
Third generation
감사합니다.

3세대 아이팟입니다.


1세대 아이팟을 따라잡은 회사도 없지만 우리는 3세대
아이팟을 출시합니다.

3세대 아이팟의 특징은 대폭 개선된 호환성이었다.
모든 컴퓨터 사용자가 아이팟을 쓸 수 있게 된건 3세대
부터다.

데이비드 포그
<뉴욕타임즈>IT 전문 칼럼니스트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팟은 맥 사용자들만을 위한 기기
였다. 잡스는 한동안 그것을 개선하지 않고 언론과 대중
의 관심이 커지길 기다렸다가 윈도우와 호환이 되게 한
것이었다. 수억명의 윈도우 사용자가 아이팟을 쓸 수 있
게 되자 판매량은 치솟게 된다.

더글러스 앳킨스<브랜드 숭배>의 저자

아이팟에 호환성을 개선하게 되자 사용자는 급증하게 된
다. 모든 PC사용자가 애플의 사과를 한입 베어물려고
달려드는 것 같았다. 애플이 표방해 온 독창성 근사하다
는 이미지를  원했던 것이다.

리앤더 카니
<컬트 브랜드의 모든것, 아이팟>의 저자

애플이 태도를 바꿨던 것이다. 예전에는 아이팟을 맥킨토
시 판매 촉진 도구로 봤지만 윈도우와 호환이 된 3세대
이후엔 그런 생각을 버렸다.
아이팟에 집중하자 라고 생각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
아이팟은 2년 만에 10억 달러짜리 사업이 됐습니다.
그러니 집중하는 게 당연하죠.

스티븐 레비 <뉴스위크> 편집장
우린 2004년 여름 뉴스위크 기사를 준비하며 아이팟이
문화현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표지에
싫었다. 스티브 잡스도 똑 같은걸 느꼈다고 말했다.

잡스는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몇달전 뉴욕 번화가에
갔는데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모두 흰 이어폰을 꽂
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어느 거리에나 마찬가지 였다는
그의 말이었다. 그래서 말했다고 한다. 드디어 시작됐어
라고 말이다.

아이팟 판매량은 하늘로 솟구쳤다. 2004년 말까지 애플
의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에서는 2억곡의 디지털 음원이
아이팟은 600만개 이상이 팔려 나갔던 것이다.  2005년
아이팟의 인기 상승을 감지한 스티브잡스는 새로운 모델
을 출시하며 공격적인 마케팅전략을 펼쳤다. 모든 크기의
주머니와 지갑에 맞는 아이팟이 출시된다.

스티브 잡스
저는 늘 그게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이젠 쓰임새를 알게
됐죠. 이것이 새로운 아이팟입니다.

폴 레스티코프
<디지털뮤직뉴스> 편집장

스티브 잡스의 전략은 이것이었다.

첫 제품을 내놓고 제품의 종류를 지속적으로 늘려 가면서
모든 스타일 취향 가격대의 제품으로 경쟁사의 틈새 시장
진입을 막겠다는 거였다.

애플은 모든 소비자의

입맛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2005년 스티브 잡스는 5세대 아이팟을 출시 했다.
October.2005
잡스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기능이 첨가 된다. 5세대
아이팟은 동영상을 보여 줄 수 있었다.

피터 로자스
테트놀로지 전문가

2005년 아이팟은
스티브 잡스가 절대 팔지 않겠다던 동영상 기능을 달아
아이팟을 출시하게 된다.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휴대용
기기에 작은 화면으로 영상을 보는 건 노래를 듣는 것과
는 달리 만족스럽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폴 레스티코프
<디지털뮤직뉴스> 편집장

스티브 잡스는 겉으로 동영상 기능에 반대 했었다.
하지만 속마음을 정반대였다. 그렇게 반대 했던건 다른
회사들이 아이팟 보다 먼저 동영상 기능을 추가하지
못하게 만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잡스는 그렇게 책
략에 능한 사람이었다.

2005년 한해에만 가격과 기능이 각각 다른 4가지 아이팟
을 출시했다. 소비자들이 아이팟의 유혹을 피하는 건
한층 더 어려워 졌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난 셔플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셔플 맞습니다.
그 아이팟 모델의 이름이 셔플이죠.
네. 셔플에 든 곡을 뒤섞으며 들어요.

스티브 잡스의 전략은 적중했다.

2005년 애플은 3200
만개의 아이팟을 팔았다. 1초당 하나꼴오 팔았다는 이야
기가 되는 것이다. 2005년 애를의 매출액은 이전 3년
보다 4배나 많아졌고 미국 MP3플레이어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무려 75%로 높아졌다. 경이로운 판매량보다
더 놀라운건 이 자그마한 기계가 미국이라는 문화를 바꿔
나가는 방식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2001년 첫 출시 이후 아이팟 판매량은 5년만에 7천만
개가 넘는 아이팟을 팔았다. 아이팟의 연 매출액은 50억
달러가 됐고 이는 애플 총 매출액의에서 약 40%를 차지
하게 되었다. 75%라는 시장 점유율은 IT시장업계 전문가
들에게도 놀라운 사실이었다.

마이클 가텐버그
주피터리서치 부사장, 에널리스트

아이팟의 시장 점유율은 놀랍습니다. 5년만에 미국 시장
에 3/4을 차지 했다. 시장 점유율이 30%만 되어도 엄청
난 것인데 75%는 전대 미문의 사건인 것이다.

놀라운 시장 점유율의 비결은 경쟁사보다 앞선 신제품
출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06년 9월 한달동안 아이튠
즈 뮤직 스토어는 무려 15억곡의 디지털 음원을 판매했다.
하루에 판매되는 디지털음원은 300만곡이 넘는다. 덕분
에 애플은 미국에서 다섯번째로 큰 음반 순위 업체가 된다.
애플의 음반 매출액은 이미 파워 레코드를 추월했다.
아직도 디지털 음원 판매시자은 CD판매 시장을 따라
가지 못한다. 월마트에서  판매되는 CD가 훨씬더 많
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다운로드 숫자를 집계해 순위를
매긴다는 자체가 놀랍습니다. 6년전 제가 애플이 거대한
음한 판매 업체가 될거라고 말했다면 사람들은 저를 이상
하게 봤을겁니다.

노래뿐만이 아니다.

영화 다운로드 서비스를 시작한다는
발표가 나고 일주일 만에 12만 5천편의

영화를 판매 했다.


애플은 영화 다운로드 시장에서도 강자로 자리 잡아가고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이팟의 성공을 가능케 만든 첫
번째 요인은 아이팟 사용자들의 애정이었다.

아이팟에 대한 소비자들의 애정은 이전에 출시된 IT제품
들과 질적으로 다르다.

데이비드 포그
<뉴욕타임즈>IT 전문 칼럼니스트

 마이크로 소프트 직원들의 80%는 자사의 소프트웨어로
가동되는 기기가 아닌 아아팟을 사용한다는 점만 봐도
그 인기를 알 수 있죠.

  아이팟은 마치 종교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아이팟에
열광한다. 경쟁력있는 다른 제품도 많지만 아이팟이란
브랜드만 원한다.

사용자들은 갖가지 방식으로 아이팟에 대한 애정을 표시
한다. 켈리포니아에 사는 이 사용자 처럼 자신만의 아이팟
광고 동영상을 만드는 이들도 있다.

아이팟 마이 포드 닷컴 같은 업체에 돈을 지불하고 자기
사진을 아이팟광고로 만들기도 한다.
아이들 얼굴이 정말 멋진데~!

애플관련 제품의 정보를 제공하는 세계 최대 아이팟 커뮤
니티 아이 라운지 닷컴에는 수천장의 사진이 올아와 있다.
사용자들은 이곳에 사진을 올리며 자신만의 아이팟을 뽐
내고 아이팟 시험 경험을 공유한다. 

아이팟이 변화시킬 미래에 대해 매료될 준비가 된 사람들
은 다양한 관련 제품들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

아이팟 휴대전화는 이미 현실이 되었다.
초대형 아이팟 모니터도 현실이 될까? 아이팟은 독특
하다. HP가 어떤 컴퓨터를 만들어 낼지 궁금해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지위는 아이팟 만이 누리고 있다.
미국이나 영국의 대학가에서도 아이팟 열풍은 느낄 수
있다. 아이팟을 주제로 한 강의도 생겨나고 있다.
영국 서식스 대학의 마이클 볼 박사는 아이팟 교수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어디에서나 청각환경을 제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어떤 대학에서는 아이팟이 선후배 관계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몇년전 듀크대학은 신임생들에게
무료로 아이팟을 지급했다. 물론 학습용기기로 사용하기
위해서죠. 상급생들은 1학년들만 공짜 아이팟을 받자
화가 났다. 캠퍼스에서 흰 아이팟 이어폰은 1학년 이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아이팟을 가진 선배들은 다른 색깔의
이어폰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가기는 1학년이 아니란걸
보여주여고 말이다.

엘이엇 밴 버스커크<와이어드 뉴스>칼럼니스트

이런 설문 조사가 있었다. 캠퍼스에서 제일 인기 있는
게 뭔지 묻는 조사에서 1등은 항상 맥주였다. 하지만
최근의 조사에서는 아이팟이 맥주를 누를고 캠퍼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제품이 됐다.

문화현상으로 지칭되는 아이팟 열풍덕에 큰 돈을 번건
애플만이 아니었다. 아이팟은 3000여개의 소규모 주변
기기 업체들을 탄생시켰다. 그들은 아이팟 케이스 자동차
어답터 아이팟에 연결되는 애완용 로봇 각양각색의
아이팟 거치대들을 생산 판매한다. 아이프레스라는
아이팟 엑세사리는 음주 측정기와  FM라디오 기능을
가지고 있다. 나이키는 운동화 다닥에 넣어 두면 조깅
속도와 거리를 측정해주는 센서를 출시했다. 센서의 정보
는 아이팟에 전송되고 음성으로 안내 된다. 아이팟이 만들
어 낸 주변기기 사장 규모는 10억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자그만 MP3플레이어가 10억달러 규모의 주변
기기 시장을 창출해 낸 것이다.

몇몇 전문가들은 아이팟의 시장 점유율이 계속 유지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아이팟 사용자
들은 평균 100달러를 주변기기 구입에 지출하고 있다.

아이튠즈에가 산 노래들도 잊으면 안된다. 그건 아이팟
으로만 들을 수 있다. 그렇게 돈을 들인 기기를 금새 버
리긴 어려울 것이다.

아이팟의 아버지 스티브 잡스의 귀환은 완벽한 성공이었
다. 그는 문화현상으로 지칭될 제품을 만들었고 10억달러
이상의 주변기기 시장을 창출했다.

스티브 잡스
20년 전 소니의 워크맨이 휴대용 음향기기로 혁명을
일으켰듯이 아리팟은 디지털 시대에 혁명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혁명은 미소에서 시작되었다.

제프리 영
<iCon 스티브 잡스>의 저자
스티브 잡스는 결국 꿈을 이뤘다. 아이팟 덕분이었다.
애플이 MP3플레이어 시장에 뛰어들었을때 주변에선
그가 다들 미쳤다고 했지만 아이팟은 대박을 터트렸다.

예전에 애플하면 떠오는 이미지는 참신하지만 주변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승자는 늘 MS나 다른 PC제조
사들이었다. 하지만 아이팟은 애플을 중심부로 끌고 왔다.
그것 만으로도 큰 성공이지만 전 아아팟의 성공은 계속될
거라고 봅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항상 배고파 하라, 바보 짓을 해라.
스티브 잡스
2005년 스탠포드대학교 졸업식 연설 中


스티브잡스에게 이런 생각은 애플을 완벽하게 변모
시킨다.


다르게 생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