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때라도 앞만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어요

안내자

이재웅

어떤 때라도 앞만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어요
 
어떤 때라도 앞만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어요
 
어떤 때라도 앞만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어요

어떤 때라도 앞만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어요

1.

이 노인은 곡물 창고를 정리하러 현관문을 나섰다. 곡물 창고는 본채 건물의 뒤란 쪽에 위치해 있었다. 뒤란은 풀이 무성히 자라 큰 돌과 웅덩이를 가리고 있었고, 그래서 이 노인은 뒤란 쪽에 백열 전등을 하나 달아 두었지만 그것은 고장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노인은 발로 풀 밑을 더듬으며 나아가야 했다.
이 노인은 틈틈이 곡물 창고를 정리해 왔고 또 근래에 들어서는 거의 사용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곡물 창고는 이 노인이 신경 써 하는 것만큼 더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역시 소소한 무질서가 있긴 했다. 며칠 전 사용했던 농기구들이 창고문 앞에 널브러져 있었고, 또 바닥은 꽤 오랫동안 쓸어내지 않았기 때문에 흙먼지가 쌓여 있었던 것이다. 앤이 보내온 쌀자루와 결명자가 든 플라스틱 통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 노인은 창고 안의 불을 켜고 문 앞에 서서 그것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농기구부터 하나씩 정리해 가기 시작했다.
이 노인은 차밭지기였다. 벌써 삼 년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차밭의 주인은 강 모라는 중견기업의 회장이었다. 그는 해마다 차를 재배해 그것을 지인들에게 나눠 주는 것을 일종의 낙으로 삼고 있었다.
이 노인이 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것은 차밭에서 오 리쯤 떨어진 K리에 차밭의 업무를 총괄하는 Y라는 또 한 명의 차밭지기가 있었고, 대부분의 일은 그를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노인은 자신이 별로 할 일이 없는데도 왜 차밭지기 일이 계속 주어지고, 낡긴 했지만 차밭지기의 집과 또 약간의 월급이 주어지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강 모 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장 모 선배가 강 모 회장에게 이 노인의 말년을 부탁하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장 모 선배는 이 노인이 젊었던 시절 이런저런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을 함께했었고, 후에는 대학교수가 되어 꽤 저명한 원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자네도 처신을 잘해 주게나. 우리는 늙었고, 시대는 변했다네."
장 모 선배는 말했다.
창고 정리는 사십여 분 만에 끝이 났다. 이 노인은 다시 본채로 돌아왔다. 그는 거실 한쪽에 걸린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아홉 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그는 서재로 사용하는 방으로 갔다. 그리고 낮에 읽다 만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는 열한 시 전까지는 책을 완독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대여섯 장 정도를 남기고 열한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 왔다. 이 노인은 책읽기를 멈추고 종소리가 들려 오는 거실 쪽을 바라보았다.
일 주일 전 저녁 해거름 무렵이었다. 그 때 이 노인은 현관 앞에 내놓은 나무의자에 앉아 서쪽으로 져 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중턱에 자리 잡은 그의 집은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졌다. 그래서 아직 들판에는 빛이 남아 있었지만 그의 주위는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는 약간의 졸음을 느꼈다. 그래서 눈을 감고 졸음에 의식을 기댄 채 이제 집 안으로 들어가 저녁식사를 하고, 그 후에는 또 책을 읽다가 잠들 것과 내일은 시장에 가서 무엇무엇을 사야 할 것이다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 때 그의 귀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차밭 옆으로 난 좁은 풀밭 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이 노인은 차밭의 철책문을 잠갔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들은 철책 울타리를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에 권우와 준호가 서 있었다.
권우는 알렉스와 제니의 아들이었다. 알렉스와 제니는 필리핀의 이주노동자 출신이었다. 그들은 이주노동자로 들어왔다가 한국에 정착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준호는 아버지가 한국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필리핀인이었다. 어머니의 이름은 앤이었다. 그녀는 알렉스의 동생이었다. 말하자면 권우와 준호는 사촌 간인 것이다. 그들 두 가족은 이웃 간에 살면서 과수원을 운영하고 또 작은 논밭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 노인과 그들과의 인연은 김 모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김 모는 이 노인의 대학 시절 친구였다. 그는 대학 시절 수줍음을 많이 타고 말수가 적었지만 가끔은 반항적인 눈빛을 드러내곤 했다. 그는 그다지 정치라든가 운동이라든가 하는 사회적인 영역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선배들과 어울려 다니더니, 고학년 시절에는 학생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것이었다. 이 노인이 보기에 그 시절의 그는 젊음 본연의 반항심과 사회과학적 이상 실현으로서의 저항을 구분하지 못하는 운동원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학년으로 갈수록 객기가 사라지고 신중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노인이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예순을 코 앞에 두고서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다. 이미 그 때 김 모는 모든 활동을 접고 아내와 함께 낙향하여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소문을 전해 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노인이 차밭지기로 내려가기로 한 기일을 삼일 정도 앞두고 전화를 해 왔다. 그가 전해 온 내용은 K리에 가게 되면 알렉스와 앤을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의 오랜 친구로서 이 노인에게 많은 도움을 주리라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 모는 활동을 그만둔 후에도 십여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는데 알렉스와 앤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이 노인은 김 모에게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외국인계 한국인들에게 연락을 취한다는 것이 서먹하고 귀찮았기 때문에 그만두고 말았다. 또 김 모가 그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듯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노인이 도착하던 날, 이미 차밭 철책문 앞에는 알렉스와 앤의 가족들이 모두 나와 그의 이사를 도와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 모는 그들에게도 전화를 했고, 그들은 오래된 친구와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서 그 자리에 나온 것이다.
권우와 준호가 이 노인을 찾아온 것은 두 가지 부탁이 있어서였다. 하나는 S시의 J구역까지 동행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엽총을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복수를 하려구요."
권우는 말했다.
그들은 동갑내기로 올해 스물한 살이었다. 그들은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권우는 눈이 작고 눈썹이 짙으며 코끝은 뭉툭한가 하면, 준호는 입술이 얇고 입이 앞쪽으로 약간 튀어나왔는데 겁에 질린 듯이 큰 눈에는 안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필리핀계 외국인 노동자의 후손으로서, 그들 조상의 얼굴 특징을 공통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줄곧 P라는 회사의 생산직 직원으로 일해 온 모양이었다. 그 회사는 전자제품 단말기 조립을 하청 받아 납품하는 회사로 생산직 직원이 스무 명 정도 되는 작은 회사였다. 그런데 그 회사에서는 지난 해 넉 달 동안 임금을 체불한 적이 있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사장과 직원들 간에 마찰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사장은 결국 임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지만 대신 일곱 명을 해고시켰다. 모두가 권우나 준호와 같은 외국인 노동자의 후손들이었다.
권우와 준호는 인종차별이라며 그것에 반발하며 싸워 왔다. 하지만 이주 전에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모두가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나 버렸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지쳐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대로 물러나는 것은 너무도 억울하고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복수를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사장이 우리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실감할까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 그 집 개를 죽이기로 한 거예요."
권우는 말했다.
그들은 그 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것은 커다란 수컷 셰퍼드로 이름은 쫑이었다. 그들은 그 개를 두 번 본 적이 있었다. 한번은 개사 10주년 기념으로 사장이 직원들을 집으로 초대해 정원에서 직접 파티를 열어 주었을 때였다. 그 때 그것은 정원 옆 커다란 목조 개집 앞에 매어져 있었고,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 소리에 귀를 쫑긋거리곤 했다. 그것은 인간은 자신에게 해롭지 않다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잡혀 있는지 사람들이 접근해도 경계하지 않았고, 오히려 꼬리를 흔들거나 앞발을 번갈아 들어 올리면서 반겨 주었다고 한다. 
또 한번은 회사 체육대회 때였다. 그 때 사장은 가족들과 함께 그 개를 데려온 것이다. 그 때 사장은 개가 실컷 뛰어놀 수 있도록 개의 목줄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그것은 실컷 뛰어놀다가 나중에는 운동장 한쪽의 잔디밭에 배를 깔고 앉아 사람들의 움직임을 무료한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권우는 평소에 동물을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특별히 개를 좋아했기 때문에 개 옆으로 다가가 개의 목을 껴안기도 하고, 또 머리와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사장이 그것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권우에게 다가와서 이것저것 물은 다음 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것은 사장이 큰 형님에게 직접 분양받아 왔다는 것과 너무 일찍 어미 곁을 떠났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수유를 하고 돌봐야 했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자신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이기 때문에  한 달에 오륙십만 원 정도 소요되는 관리 비용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개가 죽으면 사장도 아프겠죠."
준호는 권우의 이야기 끝에 참견하듯이 말했다.
그런데 그 개를 죽이는 데에는 두 가지 애로 사항이 있었다. 하나는 일단 개를 꾀어내려면 사장의 집 정원까지 접근해야 하는데, 사장의 집은 S시의 J구역에 위치해 있었다. 
S시의 J구역은 S시의 지역유지들과 고급관료들, 그리고 부유한 계급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그것은 한 번도 공개적으로 언급된 적이 없지만, S시의 시민들이라면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밤이 되면 그 곳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구축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J구역은 삼각 형태로, 세 가닥의 큰 도로가 그것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그 큰 세 개의 도로가에 자율방범지구대의 임시 사무소가 들어서고 또 경찰들이 수시로 순찰과 경계근무를 섰다. 그것은 오십대의 늙은 도둑이 한 고급관료의 집을 터는 것이 계기가 되어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 때 시경에서는 S시 J구역이 지난 10여 년 동안 다섯 차례나 강도와 절도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상시적 경계 강화지역으로 지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대책안을 내놓았고, 실제로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이것은 여론의 비웃음을 샀다. S시의 다른 지역에서도 그만한 강도나 절도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며, 심지어 더 자주 발생하는 곳도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만약 시경의 논리대로라면, S시 전체를 경찰로 뒤덮지 않으면 안 된다. 여론은 경찰과 공권력이 부자들의 보초병 노릇을 한다고 비꼬았다. 그러자 그 대책안과 그에 따른 조치는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다. 하지만 몇 년 후 어느 날, 그 대책안은 슬그머니 다시 시행되었다. 이 때에도 비판의 여론이 있었다. 하지만 전처럼 뜨겁지 않았다.
그 조치가 몇 년간 지속되면서 J구역에서의 검문과 감시는 일종의 관행처럼 굳어졌다. 사람들은 가끔 불평하듯이 투덜거릴 때도 있었지만, 그것을 일상의 질서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 때의 그들은 자신들에게 큰 불이익만 없다면 경찰들이 어떤 조치를 취하든 큰 불만이 없는 듯했고, 또 부자라면 위험성이 더 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 정도 특권쯤은 누릴 수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런 이유로 J구역에 진입해 들어가려면 경찰의 검문을 각오해야 했다.
"그러니까 경찰의 검문을 피하는 게 중요해요. 하지만 할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피부며 얼굴이 이래요.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검문 일순위의 대상자에요. 그리고 신원조회가 들어가면 우리는 이런저런 질문에 시달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청소년 시절은 순탄하지 않았으니까요. 우리는 세상의 편견과 싸워야 했으니까요. 그러면 우리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요."
권호는 말했다.
"엽총은 개를 죽이는 데 사용할 거에요. 우리는 개를 죽여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사실은 어떤 짐승도 죽여 본 적이 없지요. 그래서 권우와 아무리 이야기해도, 또 우리의 분노가 아무리 크다 해도 개를 때려 죽이거나 목 졸라 죽일 엄두가 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엽총으로 깨끗이 해치웠으면 합니다. 눈을 감고 개의 이마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일쯤은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준호는 말했다.

2.

이 노인은 엽총을 챙기고 현관문으로 나아가 실내를 한 번 둘러보았다. 현관문의 전등 외에는 모든 불빛들이 소등되어 있었다. 그는 마치 긴 여행이라도 떠나는 사람처럼 집안에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이 있나 생각해 보았다. 설거지도 마쳤고, 서재의 책들과 침실 옷장의 옷들도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평상시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가 지금 침대에 있지 않고 엽총을 든 채 현관문 앞에 서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는 현관의 전등을 끄고 밖으로 나섰다.
트럭은 이미 철책문 앞에 당도해 가르릉거리는 엔진 소리를 내며 정차해 있었다. 이 노인은 철책문의 자물쇠를 열고 쇠사슬을 풀었다. 트럭에서는 권우와 준호가 내려섰다. 그들은 이 노인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고, 철책문을 나서서 트럭으로 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이 노인은 운전 보조석으로 올라탔다. 권우와 준호는 트럭 좌석 뒤편의 좁은 공간으로 몸을 구기고 들어갔다. 트럭 운전석에는 이 노인이 처음 보는 낯선 청년이 앉아 있었다. 그는 권우와 준호처럼 얼굴이 검은 구릿빛이었고 짧은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있었다. 또 오랫동안 운동을 해 온 사람처럼 어깨가 넓고 팔근육도 잘 발달되어 있었다. 그는 트럭에 앉아 핸들에 두 손을 올려놓고 줄곧 세 사람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이 노인이 보조석에 오르자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검은 구릿빛 피부는 차 안의 어둠에 더 검게 보였다. 하지만 웃음으로 드러난 이빨은 젊은 코끼리의 상아처럼 싱싱했다.
"이쪽은 제 친구예요." 권우는 그 청년을 이 노인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역시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이 노인을 향해 어색한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 것이었다.
"이 친구는 필리핀 본토에서 왔어요. 이름이 하스에요."
준호는 보충 설명을 해 주었다.
이 노인은 자신이 무표정할 때에는 차갑고 고집 센 늙은이로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분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하스를 향해 눈빛만을 건넸다. 그러자 하스는 역시 어색한 한국말로 "얘기 들었어요, 얘기." 하고 순진하고 들뜬 아이처럼 말했다.
트럭은 곧 출발했다. 그리고 시골마을의 콘크리트길과 들판의 흙길을 가로질러 도시로 접어드는 국도를 잡아탔다. 그동안에 세 청년은 긴 침묵을 유지하거나 한국말과 이 노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언어를 섞어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 노인은 줄곧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제 권우와 준호가 처음 그를 찾아왔을 때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노인은 권우와 준호의 계획을 듣고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째서 나인 거냐? 도움을 청할 만한 어른들은 많지 않니?" 하고 물었다.
"맞아요. 우리는 할아버지를 찾아오기 전에 두 어른을 찾아갔습니다. 두 어른 모두 진지하게 우리 이야기를 들어 줬어요. 그리고 자신의 일처럼 공감했지요. 하지만 우리의 복수 계획을 듣게 되면 그건 옳지 않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식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와 준호는 그럼 어떤 식이면 좋겠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두 분은 어물쩡거리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식이면 도울 수 없다는 거예요. 그분 중에 한 분은 정말 순진하게도 법이나 정부나 어쨌든 그런 기관이 억울함을 풀어 줄 거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우리는 정말 그래서는 안 됐지만 웃고 말았어요."
권우는 대답했다.
"너희 부모님은 알고 계시니?"
이 노인은 다시 물었다. 그러자 권우는 그 물음에는 갑자기 흥분해서는 "우리는 어린애들이 아니에요!" 하고 말했다. 준호가 그것을 제지하며, 대신 말했다.
"아세요. 권우 아버지께 말씀드렸거든요. 혹시 우리 계획에 도움을 주실까 해서요. 권우 아버지는 적어도 법이나 정부기관을 들먹거리지는 않습니다. 권우 아버지는 경험을 통해서 그것이 겨우 싸움의 시작인 것을 알고, 또 그 싸움이 고된 것도 알고, 결국에는 별로 얻는 것도 없이 싸움이 종결될 거라는 것도 알고 계시니까요. 하지만 우리 계획에는 반대예요. 우리의 가장 현명한 선택은 그냥 모든 것을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해요. 허튼 짓으로 괜한 불씨를 만들지 말고 그냥 잊으라는 거예요. 권우 아버지는 우리가 이 곳에서 살아가려면 그 정도 연습은 해 둬야 한다고 했어요. 그분은 자기 세대가 이 곳의 외국인 노동자들로서 어떤 고생을 겪었는지 이야기해요. 몇 가지 말씀도 해 주셨죠. 손이 절단된 분의 이야기라든가, 강제출국 당한 분들, 성폭력을 당한 분들의 이야기요. 그분들 세대의 이야기지요. 그분은 흥분해서는 그게 이 땅에서 필리핀이라는 꼬리표를 단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소리쳤어요. 그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그분은 우리가 그런 고생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철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고 했어요."
"우리 아버지 말은 할 필요가 없어. 우리 아버지는 내가 미워서 그러는 거야. 나와 우리 아버지는 원래 개와 고양이 사이야. 내가 하는 일이라면 그렇게 화부터 내고 반대부터 해."
권우는 말했다.
이 노인은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갑자기 수치스런 기분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것은 그 다음에 준호가 "어쨌거나 우리들이 할아버지를 찾아오기 전에 다른 분들을 찾아뵌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그분들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종의 차선책으로 할아버지를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할아버지는 가장 확실한 히든카드였기 때문에 가장 나중에 찾아온 거예요. 우리는 할아버지의 과거를 알고 있어요. 할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에요. 우리는 할아버지가 우리의 고통과 입장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이 노인은 당시 그 말을 들었을 때, 거대한 수모를 당한 듯 얼굴과 등이 후끈거렸었다.
준호가 그런 말을 했던 것은, 김 모가 권우와 준호의 가족들에게 이 노인을 괜찮은 늙은이로 소개하기 위해서 그의 과거 이력을 과장되게 부풀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권우와 준호는 그 영향으로 이 노인에 대해 존경의 호기심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알렉스나 앤의 심부름으로 이 노인의 집에 오게 되면 집안을 어떻게 꾸미고 사는지 살펴보려 했고, 또 이 노인이 소지한 책들의 제목을 훑어보는가 하면 진지하고도 심각한 표정으로 그 책을 펼쳐보기도 했다. 또 딱히 할 얘기가 없으면서도 이 노인의 주변을 맴돌고,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식으로 이 노인의 의견을 듣거나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다. 권우는 언젠가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 모순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셨죠?" 하고 마치 이 노인의 과거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보이며 묻기도 했었다.
이 노인은 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것은 권우의 말에 그가 진보의 이상을 따라 이런저런 활동을 할 때의 자부심이 아니라 비도덕적이고, 비열하며, 목소리만 컸던 모습들을 강렬하게 환기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는 권우의 말에 양심이 아팠던 것이다.
과거의 나는 스스로를 너무도 큰 인간으로 여기고 있었다. 나는 부도덕하고, 속물적이며 비열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이상적인 욕망에 도취해 너무 버거운 짐을 짊어지려 했던 것이다. 이 아이들은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얼마나 큰 분노인지 알기나 할까?
이 노인이 차밭지기로 온 것은 분명 경제적인 무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 한편으로는 그런 과거의 모습을 잊고 싶었고, 또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세상과 사람들로부터도 도피하고 싶었다.
이 노인은 이제 강 모 회장과의 미팅을 떠올렸다. 그 날 이 노인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세면을 하고 머리를 감고 면도를 했다. 그리고 그의 옷 중에서 가장 괜찮은 옷을 꺼내어 입고는 강 모 회장의 집무실이 있다는 H빌딩으로 갔다.
로비에 들어선 이 노인은 위축되고 말았다. 그것은 로비 자체가 세계적인 도시의 빌딩들이 갖춘 조명과 바닥을, 그리고 위엄을 연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옷은 유행에 너무 뒤처져 있었고 또 그 자신도 너무 늙어 있었다. 그는 자신을 항상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려 했고 또 행동해 왔다. 그러나 그 곳에서 그는 끊임없이 세계로부터 배척당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그가 모 회장의 집무실이 자리 잡고 있는 4층에 도착했을 때 그것은 더 강력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그 곳의 유리 출입문이 회사에서 부여한 ID카드가 없으면 출입할 수 없게끔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곳에서는 외부인의 경우 출입문 옆의 인터폰을 사용해 담당자를 호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관행화되고 사소한 불편이 이 노인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었다.
이 노인은 강 모 회장을 만나면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리라고 생각했다. 당신네 회사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렇게 저렇게 정립해 놓은 방침들이, 그러한 합리들이 누군가에게는 권위와 비인간적인 모독으로 다가갈 수도 있다. 당신은 세상에 대해 좀 더 다른 시각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가 강 모 회장과 만났을 때 그는 그런 것들을 까마득히 잊었을 뿐만 아니라, 강 모 회장이 어떠한 불쾌감도 느끼지 않도록 오히려 아첨에 가까운 조심스러움을 보이고 있었다.
"그 곳은 우리 선친이 저에게 물려준 것입니다. 저희 선친은 그 농사로 시작해 우리 형제들을 교육시켰습니다."
강 모 회장은 말한다. 그러면 이 노인은 겸손하고 이해심 많고, 약삭빠른 늙은이처럼 예예 하고 대답했을 뿐이다. 그는 강 모 회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목소리와 태도에 신경을 쓰느라고 자신이 그런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이 노인은 이 모든 것을 생각하자 몸서리가 처졌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틀 전 술을 먹고 Y의 집을 찾아가 반 행패를 부렸던 일을 또다시 떠올렸다.
이 노인과 Y는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사정은 이랬다.
Y는 전임 차밭지기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강 모 회장에게 그를 해고시킬 거리를 몇 번이나 보고해서 결국 해고시키고 말았다. 그 후에 그는 당숙인지 당숙의 자식인지를 앉히려고 했다. 그러나 강 모 회장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번에는 그의 부탁을 들어 주지 않고 장 모 선배를 통해 들어 온 이 노인을 선택했다. Y는 그것 때문에 처음부터 이 노인을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그가 드러내놓고 적의를 표출한다거나 또 업무에 있어서 부당한 시비를 잡는 일은 없었다. 단지 “뭐 차밭지기 일이 최고지. 어려운 일이 있나…… 월급이야 통장으로 따박따박 들어갈 거구.” 하는 식으로 괜한 소리를 하거나, 또 이 노인이 술을 자주 마시는 것을 알고 “말썽만 안 저지르면 돼요. 술만 안 먹어도 실수의 반은 줄이는 것이지. 칠 년 전에는 웬 미친놈이 와서는…… 차밭에 제초제를 뿌려서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하고 걱정을 하는 것인지, 놀리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가끔씩 빈정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노인에게 그것은 얼마든지 견딜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틀 전에는 갑자기 그가 미치도록 증오스러워져서 술을 잔뜩 먹고 그의 집에 들어가 대문이며 세숫대야며, 트랙터 몸체를 걷어차고 고함을 지르고, 창고 앞에 나란히 세워져 있던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넘어뜨리고 했다. 그리고…… 어제는 새끼 멧돼지 한 마리가 차밭에 내려온 것을, 총소리만으로도 그것은 달아났을 것인데, 사살해 버리기도 했다. 이 노인은 자신조차도 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그는 그렇게 한 연후에야 권우와 준호의 계획에 동참했던 것이다.
이 노인은 차창으로 흘러가는 촌가의 불빛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3.

트럭은 얼마 후 S시 변두리에 진입했다. 그 곳은 도시개발이 진행 중인 곳이었다. 들판 곳곳에 신축공사 중인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개발지임을 알리는 푯말이 박혀 있는가 하면 모래더미와 건축자재들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하스는 트럭을 시공 중인 건물 공터에 세웠다. 엔진이 꺼지자, 밤의 침묵이 갑작스레 찾아들었다. 멀리서 개구리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네 사람은 양쪽 문을 통해 차례로 내려섰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잠시 J구역이 속한 방향으로 고개를 둔 채 도시의 불빛들을 건네 보았다. 모두가 말이 없었다.
네 사람은 한참 후 침묵에서 깨어났다. 그제야 이 노인은 트럭에서 엽총을 가져와 그것의 상태를 점검하고, 탄환이 장전되어 있는지 간단히 살핀 다음 권우와 준호를 불렀다. 그리고 엽총에 대해 설명했다. 소음기는 이렇게 풀고 이렇게 장착한다, 탄환은 모두 두 발로 한 발이 장전되어 있으며 한 발은 예비분이다. 잠금장치는 이렇게 푼다. 총의 자루는 접이식이기 때문에 반드시 일자로 펴야 하며, 어깨에 단단히 고정해야 한다. 반동이 있을 테지만 당황할 필요는 없다. 하스도 어느덧 그들 곁에 서서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설명이 끝나자, 이 노인은 엽총을 권우에게 건넸다. 그러자 권우는 그것을 반으로 접어 준비해 놓은 책가방 안쪽에 밀어넣고, 가방 안의 옷으로 숨겼다. 그리고 그것을 어깨에 짊어지고는 하스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이 노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빠른 말소리로 무엇인가를 당부했다. 하스는 긴장한 얼굴로 어색한 웃음을 띠면서 "걱정 마라. 하스는 여기 있다. 하스는 음악 들으면 그만이다." 하고 서툴게 말했다. 이 노인과 권우와 준호는 J구역을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십여 분 후 큰 도로와 접해 있는 외진 골목에 도착했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골목의 벽 쪽에 붙어 섰다. 그리고 외진 골목의 어둠에 의지한 채 도로 주변의 경찰들을 바라보았다. 도로 건너편의 가로수 밑에는 경찰차가 한 대 주차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경찰이 경찰차의 보닛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다른 경찰들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횡단보도를 건너 J구역으로 건너오는 시민들이나 또 큰 도로를 지나쳐 가는 차량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 경찰은 두 명의 시민을 세워 두고 검문을 하는 중이었다. 이 노인은 그 광경을 보자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또 냉정해졌다. 그는 권우와 준호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들은 얼굴이 사색이 된 중에도 눈에서만은 이상한 광채를 내뿜으며 도로 건너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참 후 도로의 두 번째 횡단보도를 따라 도로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능하면 태연스럽게 행동하려고 했고, 그래서 경찰관과 우연히 눈이 마주쳐도 일부러 시선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통상 앞만 보고 걸었다. 하지만 신경은 온통 경찰관들에게만 쏠려 있어서 횡단보도 중간에 이를 쯤에는 경찰관들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반대편 인도에 이를 때쯤 경찰 한 명이 느리고 귀찮아하는 걸음으로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 노인과 두 청년은 시치미를 떼고 도로를 다 건너자 J구역으로 통하는 길로 곧바로 진입해 들어가려고 했다. 경찰관은 그제야 급한 걸음으로 다가와서는 그들을 불러 세웠다.
이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경찰관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경찰관은 서른이 조금 넘어 보이는 외모로, 안경을 끼고, 깐깐한 인상이었다. 그는 직업상 그런 것인지 아니면 선천적인 기질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처음부터 이 노인과 두 청년을 범죄자로 확신하는 듯한 눈빛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이 노인은 그것이 두렵고 당황스러우면서도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담담했다.
"무슨 용무로 가십니까?"
경찰관은 다가와서는 간단히 경례를 붙이고는 물었다. 그는 그런 질문을 하는 일에 이골이 난 것처럼 태도가 자연스럽고 목소리도 형식적이었다. 그러나 두 눈만은 어떤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 노인은 준비해 온 거짓말을 했다. 그 거짓말 속에서 그는 영세한 화원의 주인이었다. 권우와 준호는 그 화원의 젊은 일꾼들이었다. 그들은 모처럼 시내로 회식을 나왔다. 그런데 J구역 안에 사는 이 노인의 절친한 친구인 모 회장이 그가 시내에 나온 것을 알고 자신의 집에 들러 가라고 했기 때문에 두 일꾼들과 함께 그 곳으로 가는 중이다. "외로워서 그러는 거지. 전화에 대고 자꾸……." 하고 이 노인은 말했다. 그리고 그는 경찰관의 이성을 흩뜨려 놓을 의도로 "그런데 내가 이렇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이야기해야 할 이유가 있나? 언제부터 시민을……." 하고 점잖게 윽박질러 보았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경찰관은 그 전까지는 조금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비로소 경직된 표정이 되었던 것이다.
이 노인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짐작했던 대로 경찰이 부자들의 보초꾼 노릇을 하지만 역시 민주적 가치들을 완전히 훼손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상부에서 이와 관련해 어떤 지침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약간 무시하면서 또 불쾌한 표정으로 경찰관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경찰관은 우물쭈물하면서 "그거야 뭐, 윗줄에서……." 하고 얼버무리듯 말했다. 하지만 그는 돌아가려 하지 않고, 다시 이성을 되찾은 듯한 음성으로 "두 친구는……." 하고 혼잣말을 하듯 하면서 이 노인의 어깨 너머로 권우와 준호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 노인은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더 늘어놓는 것은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다 생각하고 불쾌한 표정으로 잠자코 서 있었다. 그러자 경찰관은 갑자기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단번에 겸손해지더니 "가셔도 좋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해해 주십시오. 저도 뭐……." 하고 발뺌을 하듯이 말하고는 경례를 붙이고는 돌아갔다.
경찰이 떠난 후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나아갔다. 그들은 몇 블록의 상가 건물을 지나고 또 아파트 단지를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네 개의 분할된 공원으로 둘러싸인 J구역의 언저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노인과 두 청년은 한 상가 건물의 뒤편에 서서 J구역 쪽으로 넓게 뚫린 길이며, 밤의 불빛에 드러난 유럽식 건축양식의 집들, 침묵 속에서 고요하게 서 있는 나무들, 그리고 주변에 그윽한 불빛을 비추고 있는 가로등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먼발치에서 보이는 J구역은 도시 속의 작은 전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도시의 소음마저도 그 곳에서는 어떤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여기서부터는 저희 둘이 갑니다."
권우는 말했다. 이 노인은 그 소리를 듣고서야 눈앞의 세계에서 고개를 돌려 권우와 준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어떤 처분을 기다리는 것처럼 이 노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 노인은 그 모습을 보자 이상한 슬픔 같은 것이 전해져 왔다. 그는 어찌 된 까닭인지 권우와 준호를 향해서 얘들아 나는 위험한 늙은이란다 하고 말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는 이제까지 그랬듯이 그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이 감내해야 할 수치와 고통으로 남는 것이다.
이 노인이 그런 생각에 잠겨 침묵만을 유지하고 있자, 권우는 그런 이 노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한 번 쳐다보고는 "저희는 갑니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이 노인이 신음하듯이 "으응." 하고 말하자, 준호에게 턱짓으로 신호를 보내고는 자신이 앞서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얼마간 공원의 잔디를 밟고 가더니, 그 다음에는 약간 언덕진 콜타르 길로 접어들어 조심스러우면서도 빠르게 걸어 나갔다. 이 노인은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상가 건물 뒷벽 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뒷벽 앞에 방치된 잡다한 물건 중 한 수납장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 노인은 이 곳까지 아주 손쉽게 온 듯했다. 그러나 자신의 역할에서 놓여나자, 비로소 자신이 극도로 긴장했으며 그래서 손에도 발에도 땀이 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겨우 4Km 남짓을 걸어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몇 배의 거리를 쉬지 않고 걸어온 듯했다. 그는 이제 몸이 풀리는 듯한 기분 속에서, 또 두 청년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 친구들은 아직 계급이나 조직에 대한 인식에 눈을 뜬 것은 아니다, 그들은 궁극적으로는 인종적인 것 때문이 아니라 계급적인 것 때문에 배척당하고 있다는 것을 아직 깨닫고 있지 못한 것이다 하고 생각했다. 또 그는 냉철해져서 그러한 인식이 없다면, 그것은 이득을 취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이것은 이 두 젊은이의 잘못이 아니다. 이것은 충분히 예견된 미래였다. 두 청년의 작은 복수가 세상에 드러난다면 세상은 또 그것을 범죄라는 이름으로 덮어씌우고 마치 외국인 노동자의 후손들이 이 땅을 더럽히고 있다고 요란을 떨 것이다. 두 녀석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보상받기 위해 자신들도 낯설고 두려워하는 복수의 방식을 택해 가는 것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래, 30년 만이라면." 하고 중얼거렸다.
권우와 준호가 다녀간 지 이틀 후였다. 이 노인은 읍내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알렉스와 마주쳤다. 알렉스는 논의 물을 조절하느라고, 삽을 짚고 길 옆에 서서 논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노인은 그를 지나쳐 가려고 했다. 그러나 알렉스는 먼저 이 노인을 발견하고는 인사를 건네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권우와 준호가 찾아갔지요?" 하고 물었다.
이 노인은 딱히 둘러댈 말을 생각지 못해 "뭐 그렇게 되었군." 하고 말했다. 그러자 알렉스는 좀전처럼 다시 논바닥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길가 옆의 뭉쳐진 흙덩어리를 삽날로 두어 번 내리꽂았다. 그것은 금세 가루가 되었다.
"그 녀석들은 철부지들이에요. 고작 스물한 살에 세상의 섭리를 아는 것처럼 구는 녀석들입니다. 난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요. 내가 이야기해 봤자 꽉 막힌 세대의 잔소리로만 알아듣지요. 결국 아저씨를 찾아간 거예요. 자식놈과 나는 서로 싸우기만 할 뿐입니다."
알렉스는 구릿빛 피부가 더 어둡게 되면서 화가 난 듯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나?"
이 노인은 물었다. 그 때 그는 한편으로는 알렉스가 아이들의 뜻에 명확히 반대해 주기를, 그래서 이 노인을 붙잡아 주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저씨께 드릴 말씀이 없어요. 그건 아이들과 아저씨의 뜻이에요." 하고 말했다.
이 노인은 그의 그런 태도가 모든 문제를 방기하는 무책임한 인간의 태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상하게 심통이 나서는 "잘하는 짓이군. 잘하는 짓이야." 하고 비꼬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귀찮은 어떤 것을 떨쳐낼 것처럼 손사래를 치면서 "내가 알아서 하지. 내가 알아서 해." 하고 말하고는 그에게서 멀어졌다.
알렉스는 이 노인이 십여 미터 정도 떨어질 때까지 역시 심통이 난 얼굴로 논바닥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그 녀석들은 철부지들예요. 하지만 녀석들의 계획대로 된다면 30년 만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30여 년 만이에요."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이 노인은 그 말뜻을 알 수가 없어 "뭐가 30년 만이란 말인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알렉스는 큰 소리로 말했다.
"복수요. 그 녀석들은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온전히 자신들의 힘으로 복수를 하는 겁니다. 나와 내 친구들은 젊었을 적에 그것을 소망했어요. 아시겠어요?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겁을 집어먹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국가나 법이나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댔던 거예요. 하지만 보세요. 녀석들은 이 땅 위에서 태어나서 이 땅 위에서 죽어가는 인간처럼 행동하고 있는 거예요. 녀석들은 철부지라서 그 객기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난 알아요. 그것은 그 녀석들이 이 땅 위에서 자랐기 때문이에요. 잠재된 용기 같은 거요. 닭도 제 집 마당에서는 매를 노려보는 법이에요. 그래서 나는 녀석들을 끝까지 말릴 수 없는 겁니다. 아저씨께는 죄송하지만 사실은 그래서 말릴 수 없는 거예요. 우리의 보복은 이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요."
이 노인은 이상한 추위를 느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눈을 뜬 채로 두 청년의 뒷모습을 놓쳤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는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고 두 청년의 뒷모습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공원의 나무숲 사이로 사라지고 없었다. 이 노인은 "그래, 그거면 충분한 거야. 충분하지. 모든 것은 그런 방식으로 시작되는 거야." 하고 중얼거렸다.  《문장웹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