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생전 좋은일 했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느냐

살아생전 좋은일 했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느냐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온 이스라엘 집안인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내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7,1-14

그 무렵 1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시어,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내려놓으셨다.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2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4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5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6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7 그래서 나는 분부받은 대로 예언하였다.

그런데 내가 예언할 때, 무슨 소리가 나고 진동이 일더니,

뼈들이, 뼈와 뼈가 서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8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며

그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숨은 아직 없었다.

9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숨에게 예언하여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숨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10 그분께서 분부하신 대로 내가 예언하니,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11 그때에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한다.

12 그러므로 예언하여라.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13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4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살아생전 좋은일 했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느냐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또는, 기념일 독서(1테살 2,2ㄴ-8)와 복음(요한 21,15-17)을 봉독할 수 있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뼈로 가득 찬 계곡으로 데리고 가시어 마른 뼈들을 살리시며, 이스라엘을 무덤에서 자기 땅으로 데려가시겠다고 예언하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의 물음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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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키엘 예언자가 계곡에 있는 뼈들이 부활하는 환시를 본다. 주 하느님께서는 뼈들에 숨을 불어넣어 살아나게 하시고, 영을 불어넣으신다. 이는 이스라엘을 다시 회생시켜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시고 백성이 주님을 알게 하리라는 약속을 의미한다(제1독서).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한 율법 교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하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며,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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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는 약자 보호법이 있다. 이방인을 억압하지 말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라는 가르침이다. 가난한 이와 병약한 이를 돕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본받는 행위다(제1독서). 환란 속에서도 기쁨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믿음의 확신을 주시려고 우리를 선택하셨다.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교우들을 격려하고 있다(제2독서).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마음과 목숨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천은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가르침이다. 어떻게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어릴 적 캄캄한 밤하늘에 아름답게 빛나던 별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십계명 가운데서 한 계명을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따르면 십계명은 하느님에게서 직접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진 법, 하느님께서 돌판 위에 직접 새겨 주신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을 십계명이 아닌 신명기와 레위기에서 한 구절씩 선택하셨습니다. 

십계명은 부정형의 엄중한 명령문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계명,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놀라움을 주는 것은 예수님의 두 번째 대답입니다. 본래의 질문은 가장 큰 계명 하나를 뽑아 달라는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첫째 계명에 이어 둘째 계명을 더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서 두 번째 계명이 첫 번째 계명과 같다고 하십니다. 누가 감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 그 두 계명을 다르게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만 하고 살 수 없습니다. 기도와 침묵, 피정과 묵상을 하면서 하느님을 만나고, 내적이며 영적인 삶을 가꾸는 일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칫 사람들과 멀어지게 하는 경향을 낳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그 또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가 사람들에 대한, 또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낳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성경의 전통, 교회의 가르침에서 모두 동떨어진 것입니다.(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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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루살렘 멸망 이후의 구원과 희망의 신탁을 전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라는 표현은, 새로운 신탁 또는 새로운 장을 나타내며, 상징적 표현인 ‘바싹 말라 버린 뼈들’은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으로 이어져,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구원과 희망의 문을 열어 놓습니다.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 인간이 보기에는 조그마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만이 구원을 이루실 분이라고 제시합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별적인 육신의 부활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불충으로 그들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졌지만, 그 관계의 회복은 온전히 하느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영의 그 뜨거운 ‘숨’을 다시 불어넣으시어 말라 버린 뼈들을 다시 살리시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한처음에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생명체가 되게 하셨던 창세기를 떠오르게 합니다(창세 2,7 참조).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이 더 절실한 오늘날에 다시금 그분의 ‘숨’이 우리 안에 불어넣어지고, 그분의 ‘손’이 우리에게 내리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이를 준비하도록 예수님께서 큰 계명을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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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시지요. 당시 유다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나온 것입니다. 이들이 율법 학자, 곧 율법 교사들이지요. 

그런데 유다인들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이민족이 침입하여 유다인들의 종교심을 훼손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에 종교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바리사이가 등장합니다. 바리사이란 분리된 자들이란 뜻이지요. 그들은 율법 학자들이 해석한 율법을 정성껏 지키려고 온 힘을 다했습니다. 모든 계명을 다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그렇게 경건할 수 없었고, 직업에도 충실했지요.

문제는 그들이 율법 자체에만 집착하다 보니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잃어버린 적이 많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계명의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기계적인 신앙생활이 되기 쉽습니다. 원칙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큰일 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시각에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전례의 정신도 마찬가지이지요.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계명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자칫 글자 그대로의 계명에만 집착한다면 그만 사랑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 “내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 이같이 스스로 자문하는 습관을 길러 나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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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현대 수묵화를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월전 장우성 화백의 수필집 『월전수상』에는 ‘흑과 백’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흑과 백은 절대 상반의 두 개의 원색이다. (중략) 그래서 이 두 원색은 어떠한 경우에도 혼동이나 착란을 일으킬 수 없다. 그러기에 옛날에서 현재까지 뚜렷한 대조를 표시해야 할 경우에 항상 흑백을 이용한다. (중략)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러한 색상 감각의 표준 의식이 흐려졌거나 삐뚤어져 버린 것 같다. 번연히 흰 것을 검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옻빛같이 검은 것을 눈빛같이 희다고 억지 쓰는 친구들도 있다.”

수묵화의 세계와는 달리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려운 상황들을 자주 만납니다. 판단을 해야 할 때 섣불리 자신의 직관에 의지하기보다는 찬찬히 관찰하고 경청하는 태도와, 사람마다 자기 ‘나름의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자세가 인생의 지혜이자 현대 사회가 조화롭게 유지되는 조건입니다.

이처럼 인생사는 오히려 마치 경계를 꼭 집어 말할 수 없도록 미묘하게 색이 변해 가는 수채화의 세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 지혜’가 구체적 상황에 적용되려면 역설적으로 그 중심에 근본적 원리에 대한 분명하고 타협 없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흑백 논리’로 삶의 복잡다단함을 재단하지 않는 관용의 태도는 섬세하고 호의적인 배려가 아니라 무책임한 상대주의나 자기 위주의 주관주의로 귀착될 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흑이 백이 될 수 없는 수묵화의 세계처럼 우리에게도 삶의 최종 가치에 대한 양보 없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투신입니다. 이 ‘원리’에는 어떠한 모호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계명의 분명한 요구가 삶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수묵화의 은은한 운치를 느끼며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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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가씨가 두 남자와 선을 봅니다. 모두 조건이 좋은 남자입니다. 첫 남자와 데이트를 했습니다. 마을 뒷산을 돌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남자가 멈춰 서며 말합니다. “잠깐, 뱀이 있는 것 같군요.” “어머나 어디에요?” 아가씨는 놀라 소리칩니다. “저기 나무 밑을 보셔요. 아, 죽은 것 같군요. 너무 놀라실 것 없습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표정은 굳어집니다.

다음 날 두 번째 남자와 산책을 합니다. 일부러 그녀는 어제 그 나무 옆을 지나갑니다. 그러자 남자가 말합니다. “그냥 똑바로 가시지요.” “왜요? 뭐가 있는가요?” 아가씨는 퉁명스럽게 묻습니다.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대신 저기 들꽃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돌아오는 길에 여자는 남자에게 묻습니다, 나무 밑에 죽은 뱀이 있었는데 왜 못 보게 했냐고. 남자가 대답합니다. “안 좋은 것은 한 사람만 보는 것으로 족하지요.” 아가씨는 마음속으로 그를 선택합니다.

사람에겐 운명적으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면 그만큼 인생은 행복해집니다. 누구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라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실천의 첫걸음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입니다. 좋은 정보와 좋은 말을 전하다 보면 자동적으로 사랑의 관계는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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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자분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어떻게 다른지 질문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이 둘은 따로 구분할 수 없는 한 몸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도 이것을 따로 떼어 하느님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을 떼어 놓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요? 생각이나 말로 하느님께 사랑을 고백한다고 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하느님이 보여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라고 했지요. 이 말씀은 우리 안에 덕지덕지 붙은 죄의 불순물들을 없애야 하느님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깨끗한 마음일 때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윤리적 질서를 지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맑고 깨끗하게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말로 이러한 질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 삶의 표현 방법입니다.

우리 삶에서 윤리적 기초가 무너져 있으면 아무리 교회에 봉사하고 이웃을 사랑해도 내적으로 평화와 기쁨을 잃게 됩니다. 반대로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살아도 이웃을 위한 봉사와 사랑이 없으면 삶의 의미와 보람이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삶의 짐을 지우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누리는 인생의 참된 행복에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살아생전 좋은일 했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느냐

살아생전 좋은일 했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느냐

싼 가격과 간단한 조리법으로 인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주식 겸 간식 중 하나로 자리매김해서 엄청난 소비량을 자랑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라면’입니다. 1인당 기준으로 1년에 70~90개 이상의 라면을 먹으면서 전 세계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모든 국민에게 사랑받은 음식입니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인스턴트 라면은 대만계 일본인인 안도 모모후쿠의 발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배 후 미 군정 지배 때의 구호물자인 밀가루가 남아도는 것을 보고 지금의 튀긴 라면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미국에 갔다가 사람들이 면을 부숴서 머그잔에 넣고 물을 부어 먹는 것을 보고는 지금의 컵라면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그다음의 일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즐겨 먹는 라면이기에 엄청난 돈을 벌었을 것으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개발한 모든 라면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라면은 가난한 사람들이 배불리 먹기 위한 음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기에,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라면이 된 것은 아닐까요?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랑을 실천하는데 늘 주저합니다. 사랑하고 나면 행복한데, 그전까지 세상의 기준이 내 앞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실제로 바리사이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는 참 어려웠을 것입니다. 세부조항까지 613개의 율법 중에서 어떤 계명이 가장 큰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계명을 우선하여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을 알고 계셨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탈출기와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쓰인 말씀들은 모두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두 계명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사랑이 먼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사랑보다 앞서는 것은 없습니다.

남편의 사랑이 지극할 때, 아내의 소망은 작아진다(안톤 체호프).

고통을 피하지 마세요.

세상에 상처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제가 있는 성지에는 많은 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잘 보면 거의 모두가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물며 인간은 어떨까요?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절대로 고통을 겪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모든 사람은 다 비슷합니다. 누구나 지우고 싶은 고통의 시간은 있습니다.

“너의 상처를 별로 만들어라.”라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영어로 보면 상처와 별은 철자 하나 차이입니다. 즉, ‘Scar’와 ‘Star’입니다.

아름다운 진주도 상처의 고통으로 생겨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은 상처의 고통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릇된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릇된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역사 안의 여러 인물들이 잘 드러낸 바 있습니다. 그릇된 신념의 소유자들로 인해 선량한 소시민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은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영화 ‘대부’의 실제 인물이었던 이탈리아계 미국인 조폭 두목 알카포네(1899~1947)는 지하 암흑 세계의 일인자로서, 평생토록 도박, 밀주, 매춘, 폭력, 탈세 등등으로 얼룩진 인간 말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성실한 납세자였으며 나쁜 일을 한 적이 없다.”

최근 나라 전체, 국민 모두의 분노 게이지를 한껏 올려놓고 있는 ‘국민 민폐’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남을 죄짓게 만드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셨는데, 그는 지금 존재 자체로 사람들 입에서 자동으로 욕이 나오게 하고, 죄를 짓게 만드니, 그의 미래가 참으로 걱정입니다.

그릇된 신념에 그릇된 종교적 신념이 더해지만 백퍼센트 IS라더니, 전광훈이라는 자가 꼭 그꼴입니다. 그런 자의 뒤꽁무니를 깃발 높이 쳐들고 쫓아다니는 분들의 인생 역시 참으로 불행합니다.

예수님 시대 때도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과 사사건건 부딪치던 사람들, 아니 거의 일방적으로 예수님을 몰아붙이던 사람들,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원래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서로 번갈아가며 공격했습니다. 때로 합심해서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기를 썼습니다. 오늘 복음에 그런 흔적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마태오 복음 22장 34절)

한없이 부드럽고 온유한 예수님이셨지만 이 사람들 앞에서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공격 앞에 끝까지 대적하시며, 그들의 악행을 낱낱이 고발하시면서, 그들의 회개나 변화를 기대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그릇된 신념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과도한 선민의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위선적인 삶, 타성에 빠진 신앙, 정성이나 영혼이 사라진 예배, 삶 따로 신앙 따로의 이중적인 삶은 점점 더 심각해졌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그들의 하늘을 찌르는 교만이었습니다. 장황하고, 잘난체 하며, 고리타분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과는 동떨어진 경직된 율법주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화의 대가였습니다. 그 어떤 가르침이든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미있고 감동적인 예를 들면서 설명하셨습니다. 당연히 구름 군중이 몰려왔고, 크게 환호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시기 질투는 커져만 갔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616항이나 되는 율법조항들과 알을 까고 새끼를 친 수많은 규정들을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시니, 사랑의 이중 계명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라고 정리해 주십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율법 교사가 진정 이 사랑의 계명을 몰랐던 것인가, 아니면 알고자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율법 교사라면 평생을 율법에 대해 가르쳐 온 사람인데도 왜 이것을 모를까요? 십계명에서 613가지의 율법 조항, 그리고 관습법과 전통법까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십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아주 조금만 생각해도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율법 교사는 율법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너무 명확해지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너무 명확해지면 율법 규정대로 사랑해야만 합니다. 율법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 교사는 율법을 이해하고는 싶었지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려고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깨달아 사랑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해하지도 않으려 한 것입니다. 진리를 거부하는 이들이 다 이렇습니다. 알게 되어 변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친구로부터 잘 훈련된 사냥개 두 마리를 선물 받았습니다. 몹시 기뻤던 그는 사냥개를 데리고 토끼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사냥개들은 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빈둥빈둥 누워 있었습니다. 화가 난 그는 사냥개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냥개를 선물한 친구에게 화를 냈습니다.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개들을 왜 내게 선물했는가? 그 쓸모없는 사냥개들을 내가 모두 죽여버렸다.” 그러자 놀란 친구는 말했습니다. “그 사냥개들은 토끼가 아니라 호랑이와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훈련받은 개들입니다.” 

자 여기에서 진실을 한 번 찾아봅시다. 알렉산더의 잘못은 무엇인가요? 성급한 마음인가요? 아닙니다. 알렉산더가 진실로 숨기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친구를 사랑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친구가 자신에게 그런 훌륭한 개를 주었을 리가 없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개의 목을 치는 것입니다. 알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여 그 귀중한 선물을 한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목을 치는 것입니다. 오늘 율법 학자가 그런 사람이고 진리를 듣지 않으려고 하는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선물의 목을 칩니다. 알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닫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려는 사람만이 진리를 깨닫고 이해하고 단순하게 가르칩니다. 이해하려면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예전에 성 프란치스코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본 기억이 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본래 아씨시의 친구들과 먹고 놀고 즐기는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변해서 거지의 모습으로 세상의 모든 쾌락을 끊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와 함께 놀던 친구들도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함께 공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친구만이 프란치스코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도 악영향을 미칠까 봐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란치스코가 진짜 하룻밤 재워달라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프란치스코와 그를 따르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들어준 다음 미소를 짓고 한 번 안아주고는 골방으로 들어가 그 친구를 위해 밤새 기도합니다. 이 모습을 살짝 엿본 친구는 그제야 자신도 제자가 되겠다고 나섭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를 기쁘게 안아줍니다.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설득할 때, 말로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녀가 성당에 안 나온다고 수없이 설득합니다. 당연히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그런 말을 하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나를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말보다 사랑을 먼저 베풀어야 합니다. 고마우면 내가 하는 모든 말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사람은 머리보다 가슴을 더 신뢰합니다. 가슴부터 점령해야 머리도 점령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더운 여름입니다. 산보 시간을 앞당겼습니다. 아침 6시에 물 하나 들고 길을 나섭니다. 묵주기도를 마치면, 이어폰을 연결해서 음악을 듣습니다. 자칫 무료할 수 있는 산보가 음악이 함께하면 추억의 책장을 넘기는 여행이 됩니다. 노래의 제목도 감미롭습니다. ‘제가 먼저 사랑할래요. 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를 들었습니다. 멀리 다리가 보이고, 다리 아래에는 바닷물이 반겨줍니다. 바다와 노래는 더위를 잊게 하고, 잠시 지난날을 돌아보게 합니다. 가사도 좋습니다. ‘그대와 나 만약에 사랑을 할 때, 제가 먼저 사랑할래요. 사랑을 받는 것도 행복하지만, 주는 마음도 햇살입니다. 생각나면 둘러봐요. 조그만 길모퉁이 찻집. 아직도 흘러나오는 노래는 옛 향기겠지요. 하늘가에 피어나는 무지개 따라 지나버린 그 시절 돌아가고파.’ 오늘은 뉴욕에 온지 1년이 되는 날입니다. 공항에서 내렸을 때의 느낌은 덥다는 거였습니다. 1년이 지났지만 역시 덥습니다. 작년의 더위가 막연한 걱정과 긴장이 함께한 더위였다면 지금의 더위는 넉넉한 여유와 웃음이 함께하는 더위입니다. 2020년 코로나19와 함께한 날들이지만 내년에는 코로나19도 먼 옛날의 추억으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30일 피정을 할 때입니다. 학생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따라서 묵상합니다. 큰 주제는 ‘두개의 깃발,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 겸손의 3단계,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3주간이 끝나면 오늘의 성서말씀인 에제키엘 37장을 묵상하도록 하였습니다. 피정을 통해서 지난날의 모습을 새롭게 개선(Reformation)하고, 개선된 모습으로 변화(Transformation)되고, 변화된 모습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Conformation)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30일 피정을 통해서 학생들도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 나눔의 우산, 사랑의 우산을 기증해 주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고 성당에 왔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면 우산을 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분들이 나눔의 우산을 기증해 주셨습니다. 본당에서 준비한 사랑의 우산을 쓰면서 비를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외로움의 비를, 슬픔의 비를, 고통의 비를 맞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우산을, 작은 봉사의 우산을, 희생의 우산을 나누어 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하루의 생활을 성찰하고, 이웃을 도와주며, 가진 것을 나눈다면 우리의 몸은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을 보고 흘러가는 구름을 볼 수 있다면, 아무런 욕심과 미련 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강물을 볼 수 있다면, 아무런 대가 없이 아름답게 피었다가 지는 꽃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영혼을 보여주는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임도 알게 될 것입니다. 

뉴욕에서의 1년을 돌아보는 제게 예수님께서는 가야할 방향을 명확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신발 끈을 다시 매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가려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사랑이 사랑을 낳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듯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듯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를 사랑하듯

내가 너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듯

네가 나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듯

네가 너를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너를 사랑하시듯

네가 너를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너를 사랑하시듯

네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요한1서 4장 10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그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랑하며 살아갈 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도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그 존재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그리스도교는 설교와 찬양이 아닌 정의를 제대로 세우는 사랑실천이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쫒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예수님께서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를 통한 사랑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삶을 쫒으려 하지 않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자기 안락과 편안함을 목적으로 치부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거부했습니다. 오늘의 교회 모습입니다.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고 편암함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런 그리스도교는 사이비가 되었고 타락했습니다. 삶이 없는 설교와 찬양은 이론일 뿐이고 의미를 잃었습니다. 어째 이지경이 되었나 걱정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삶으로 실천할 때, 이론은 살아 움직이고 그리스도는 진리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심은 극진한 인간 사랑이고, 그로부터 시작한 낮아짐의 극치가 십자가였습니다. 덕분에 그를 믿고 따랐던 모든이가 하늘로 드높여졌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없는 설교와 찬양은 거짓과 결탁하게 만들고 타락하게 만듭니다. 제대로 사랑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22,37-40).

하느님 모시고 가족처럼 살기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율법 전문가가 예수님을 시험해봐 점수 매기려다 정답 앞에 승복했죠.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란 것입니다.

국법은 체제유지와 지도자들의 위치확보를 위해 수정 조작한 게 많죠.

공산독재 정치의 유지는 신법 아닌 국법을 앞세워 인간가치 망쳐놨죠.

UN가입국들은 신법기준으로 국법 조종해 서로 평화롭게 살잔 겁니다.

가톨릭은 신법으로 하느님과 인류관계라서 세상권력 자리가 없습니다.

국가권력은 국민에게 봉사할 의무일 뿐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류의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 모시고 가족처럼 살기 긍정하시는지요?

<가장 큰 계명>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금요일>(2020. 8. 21. 금)(마태 22,34-40)(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랑이 없으면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닌 생활입니다.

지금 말하는 사랑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모두 포함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또 하느님과의 사랑 안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일이 완성될 날이 오기를 희망하는 사람이고, 그 일치를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과 다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선(善)이고, 선을 지향하며, 선의 실현을 위한 노력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자신을 ‘선의 실현’을 위한 도구로 내놓는 일입니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마태 22,35-36)”

여기서 ‘시험하려고’ 라는 말은, ‘논쟁하려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율법 교사가 말한 ‘가장 큰 계명’은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은 무엇이 더 중요한 계명인지에 대해서 자주 토론했는데, 계명들을 중요도에 따라서 분류하는 것은, 중요한 계명을 먼저 지키고, 덜 중요한 계명을 지키는 일은 뒤로 미루거나 무시하겠다는 속마음이 숨어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면, 율법 교사는 그 말씀에 대해서 반박하면서 논쟁을 벌였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계명의 근본정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는 말을 근거로 해서,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은, ‘계명의 근본정신’으로(또는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는 ‘황금률’을 계명의 근본정신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황금률’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압축한 것과 같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다 바친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것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모두 해당됩니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사랑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분들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라는 말에서, “사랑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모하고 섬기는 일”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소망을 품고 있다면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정의는 신앙인의 ‘아가페’뿐만 아니라 세속에서의 연인이나 부부 사이의 사랑에도 모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루카 5,11). (모든 것을 버렸다는 말을 “모든 것을 바쳤다.”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이 버린 것은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 전부를 버렸고, 또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것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8-9).”

바오로 사도는 ‘잃었다.’ 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바친’ 것입니다. 쓰레기로 여긴다는 말은, “그것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즉 “주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라는 말은, “주님과 사랑으로 일치하려는 것입니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은, “하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해야 한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실천하게 되는 계명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사용된 말이고, 뜻으로는, “신앙이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다.”입니다.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기쁨 가득한 생활이고 행복한 생활입니다. 사랑은 원래 기쁨과 행복의 씨앗입니다. (눈물의 씨앗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과정에서 아픔이 따르기도 하지만, 그 아픔마저도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은 당연히 이웃도 사랑합니다. (두 사랑은 사실상 하나의 사랑입니다.)

이웃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와 똑같은 자녀이고,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웃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이 되어 주십니다.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에제 37,2)

주님께서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보여 주신 뼈들은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뼈 안에 흐르며 양분을 나르던 윤기 가득한 생명의 힘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마른 뼈들이란 회복의 희망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흉물에 불과합니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에제 37,5)

실제로 예언자 앞에서 뼈들이 서로 이어 붙더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고 살갗이 덮였습니다. 또 그들 안에 숨이 들어가 제 발로 일어서서 살아 움직입니다. 아무도 상상조차 못 한 일이 마른 뼈들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에제 37,14)

이 놀라운 광경은, 회복의 가망 없이 처절히 무너진 이스라엘이 다시 생명을 받아 되살아나리라는 당신 계획을 하느님께서 분명히 보여주신 것이지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에제 37,14)

마른 뼈들은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대로 다시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언자가 주님께서 예언하라고 하신 것을 그대로 따르고는 그 실행을 눈앞에서 목격했으니 그야말로 생생한 증인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그 자체로 이루어지는 효력을 지니십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마른 뼈들이 다시 생명을 얻듯이, 이스라엘도 주님의 말씀대로 언젠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하느님 백성의 자리를 되찾을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문답이 펼쳐집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이 질문은 몰라서 하는 질문도 아니고, 더 깊은 가르침을 듣고 배우고 싶어서 하는 질문도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을 시험해 올가미를 씌우려는 기득권자들의 음흉한 모략이지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39)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모르지 않으시면서도 첫째 가는 계명을 물론 여쭙지도 않은 둘째 계명까지 친절히 일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던 정답을 콕 집어서 맞추신 것일까요? 오늘의 정황과 말씀에 머물러 보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세세하게 곁가지를 치다 못해 덩쿨로 무성히 얽혀 버린 율법 조항들 안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뿌리와 줄기를 짚어 주신 것입니다. 그건 그들이 잊어 버렸거나 간과했던 골수와 같은 본질인 것입니다.

정신은 희미해지고 형식이 방만해진 율법 조항들의 무게는 민중에게 과도하고 부담스런 짐이 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중요한 건 그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세부적 상황도 중요하고 구체성도 간과할 수 없지만, 이 모두는 중심이 되는 근본 원칙에 초점을 맞춘 다음의 문제지요. 그 근본 원칙이 바로 사랑입니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모범이 되고 철저히 계명을 준수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지향이 사랑이 아니라 자기영광이나 완벽주의적 성향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결여된 율법주의적 삶은 수분과 양분과 골수가 다 빠져나간, 바싹 마른 뼈와 다를 바 없을 뿐더러, 거기에는 생명력도 온기도 없습니다. 그저 흉물일 따름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짚어 주신 두 계명,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답변은 그 자체로 이미 그들과 우리에게 내리신, 반드시 이루어질 "말씀"입니다. 이 "사랑"으로 예수님은 바싹 말라버린 뼈들처럼 되어버린 바리사이들, 율법 학자들의 마음에 숨을 불어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회복의 희망 없이 나락에 떨어진 우리에게도 새 생명의 희망을 안겨 주시는 것이지요.

그들은 이 "사랑"이라는 참 명령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요. 오히려 온갖 형식의 잣대로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울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가 사랑을 잃어버리고 말라버린 생명 잃은 뼈처럼 되었다면 주님께서 주시려는 생명의 숨을 힘껏 빨아들여야 살 수 있습니다. 재기할 가망 없이 실패했거나 더 떨어질 수 없이 곤두박질 친 밑바닥이라도 주님 말씀은 우리에게 힘줄을 잇고 살이 오르게 해 주시는 생명의 힘이니까요.

모든 걸 다 잃었어도 사랑하고 있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세상 눈에는 실패자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느님과는 견고한 사랑으로, 세상 영혼들과는 애정어린 기도로 단단히 엮여 있으니, 오히려 더 생생히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어지럽고 혼란하고 실망스러운 세상의 소음 속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다시 생기를 찾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의 말씀이 윤기 잃은 영혼 안에 사랑의 진액이 되어 흐르길 바랍니다. 어떤 어려움이라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면 주님은 우리에게서부터 다시 새 창조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아멘.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함승수 신부님

육지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다가 길을 잃었을 때, 나침반도 갖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럴 땐 ‘북극성’을 찾으면 된다고 합니다. 다른 별들은 지구가 자전함에 따라 조금씩 위치가 바뀌는 반면, 지구의 정확히 ‘정북쪽’에 있는 북극성은 언제나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 있기에, 그 별만 찾으면 정북쪽이 어디인지 그리고 자신이 나아갈 방향이 어디일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극성을 찾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많은 방법을 동원할수록 오히려 방향을 잃고 같은 장소를 빙빙 돌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이면서 동시에 ‘율법교사’이기도 한, 한 사람이 예수님께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 사이에서는 613가지나 되는 수많은 율법조항들 가운데 무엇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인지를 가려내고자 하는 논의가 활발했던 것입니다. 워낙 지켜야 할 조항들이 많고 하나를 지키자니 다른 하나를 어기게 되는 일이 생기다보니, 그나마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을 찾아내어 그것만이라도 지키려는 사람들의 문의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은 정말 그 답을 듣기 위해서였다기 보다는 예수님께 시비를 걸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의 계명을 제시하시면 다른 계명을 들며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냐’고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그가 예상치못한 것이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은 한 두가지의 계명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계명 전체를 관통하는 ‘근본정신’이 ‘사랑’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길을 잃었을 때,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를 알 수 없어 답답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 삶에서 일으키시는 여러 가지 ‘신비’로운 일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길이 없어 막막할 때, 하느님께서 나로 하여금 왜 그런 일들을 겪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몰라 도망치고만 싶을 때, 한 가지 중요한 사실만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나는 내가 받은 그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그분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구원’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지요. 이에 대해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이웃사랑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하느님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강령’으로 덧붙이신 것이지요. 우리는 ‘이웃사랑’을 충실히 실천함으로써 ‘하느님 사랑’이라는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이고, 그래야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 찬미 노래를 바치는 교회

성 비오 10세 교황의 ‘성무일도에 관한 교황령’에서 (AAS 3[1911], 633-635)

성서에 수집되어 있는 시편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쓰여진 것이다. 교회는 초기부터 신자들의 신심을 기르는 데 시편을 사용하여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다. 이 시편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자기 입으로 찬양했다.” 더욱이 시편은 옛 법의 관습을 따라 거룩한 전례와 성무일도에서 주요한 부분을 담당해 왔다.

성 바실리오는 시편을 “교회의 소리”라 하고 우리 선대 교황 우르바노 8세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옥좌 앞에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거룩한 찬미가의 메아리”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성 아타나시오의 말에 의하면, 시편은 특히 자신의 주요 직분이 하느님을 예배하는 데에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무슨 말로 합당하게 찬미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따라서 성 아우구스티노는 아름다운 말로 이렇게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이 당신을 합당하게 찬양할 수 있는지 보여 주시고자 먼저 당신 스스로를 찬양하셨고, 이렇게 하심으로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법을 배웠다.”

시편은 또 우리 영혼 안에 모든 덕행을 얻고자 하는 열의를 불붙일 힘을 지니고 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하듯 ‘성경은 신구약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는 데 유익한 책’이지만 시편집은 성경의 다른 모든 책들의 열매를 담고 있는 정원처럼 찬미가를 부르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열매와 다른 책들의 열매를 모두 보여준다.”고 아타나시오는 말한다. 그는 계속하여 이렇게 덧붙인다. “시편은 그것을 부르는 사람에게 거울과도 같아 그 안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감을 볼 수 있으므로 그 정감의 생생한 표현이 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여, 나는 당신 교회가 부르는 감미로운 노랫소리에 가슴 뭉클하여 당신을 노래하는 찬미가와 찬가의 아름다움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나이다. 이 노랫소리는 내 귀에 흘러 들어가 진리가 내 마음을 축축히 적셔 주게 하고 내 신심의 정이 불타오르게 하여 눈물이 쏟아지게 했나이다. 이때 내 마음은 그 찬미 노래로 얼마나 행복에 넘쳤는지 모르나이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엄위와 그분의 전능하심과 표현할 수 없는 정의, 그분의 선과 자비 그리고 그분의 다른 무한한 속성을 그렇게도 숭고하게 전하는 시편의 많은 부분들을 들을 때 감동받지 않을 이 누가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시편에 나오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에 대한 감사의 노래, 소망하는 은총에 대한 겸손하고 신뢰에 찬 기도, 그리고 죄를 뉘우치는 영혼의 외침에 감동받지 않을 이 어디 있겠는가?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모든 시편 속에서 노래하시고 애통하시며 희망에 부풀어 즐거워 하시고 고뇌에 차 탄식하시는” 구속주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불타오르지 않을 이 누가 있겠는가?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성 비오 10세 교황 축일입니다. 비오 10세 교왕 영명축일을 축하드립니다. 비오 10세 교황님은 183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858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20년 가까이 본당 사목자로 활동하다가 만투아의 주교와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를 거쳐, 1903년 교황으로 선출되셨습니다. 비오 10세 교황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립하고자 노력하셨습니다. 특히 광대한 교회법을 현대화하여 새 법전을 편찬하고, 성무일도서도 개정하셨습니다. 또한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을 해치며 교회를 위협하는 오류들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1914년에 선종한 비오 10세 교황은 1954년에 시성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모여와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묻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37-40절) 라고 답해주십니다.

  가끔 가톨릭은 까다롭고 어렵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결국 따지고 보면, 하느님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축약됩니다.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얼마나 많이 헌금하고, 얼마나 많이 봉사활동을 하느냐 하는 문제들은 결국 한 가지, ‘얼마나 사랑하느냐?’로 귀결되는 듯합니다. 스스로 성찰해 봅시다.

최악이 되는 최선의 사랑

한재호 루카 신부님

소와 사자가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수많은 반대에도 결혼합니다. 신혼이 시작되어 소는 아침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풀을 요리해 사자에게 주었습니다. 사자는 힘들었지만 참고 먹었습니다. 저녁이면 사자가 소를 위해 살코기를 요리하여 주었습니다. 소 역시 괴로웠지만 사자를 사랑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참을성도 한계가 있어 결국 둘은 다투게 되었고 끝내 헤어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들은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말합니다. “난 최선을 다해 사랑했어.” 소는 소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소의 눈으로 사자를 사랑하였습니다. 사자 역시 사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사자의 방식으로 소를 사랑하였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랑은 오히려 상대에게 부담과 어려움을 줍니다. 소와 사자는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사랑하였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사랑했어도 그 사랑은 최악을 낳았습니다. 우리말 ‘사랑’이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에 대한 학설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는 생각할 ‘사(思)’를 가리키고, ‘랑’은 헤아릴 ‘량(量)’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생각하고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또 다른 능력이다. <마태 22, 34-4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모든 일은 능력의 힘으로 이루어지고 성장한다. 마음만 가지고 사랑하고 사랑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사랑을 배우거나 받지 않으면 사랑을 할 수 없다. 생명은 부모로부터 받지만 사랑은 어머니로부터 받는다. 사람들은 당신을 죽기까지,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한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어머니는 죽기를 한하고 아기를 가지고, 자신의 배 안에 10개월 부자유스럽게 품고 있다가 마침내 죽음을 경험하듯 산고를 겪고 한 생명, 바로 당신을 세상에 사랑받는 생명으로 내려놓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은 특별합니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 어머니의 사랑을 잃거나, 어머니 태 안에서 사랑 없이 10개월 성장하는지 사랑받고 성장하는지에 따라 사람이 달라집니다. 만일 생긴 생명을 지우려고 했거나 약을 먹거나 했다면 태어났어도 사랑의 힘을 많이 받지 못하고 상처받은 사랑이 됩니다. 그러나 이를 깨달은 사람이 나서 사랑을 더하면 나아지기는 하지만 상처를 안고 성장합니다. 또한, 부부간의 사랑을 느끼고 자라는 아이와 느끼지 못하고 갈등과 싸움을 보고 자라는 아이는 사랑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사랑의 능력이 자라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로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하였습니다.

사랑의 능력을 갖추고 성장하는 길은 후천성이라 말하는데 그 힘은 하느님 믿음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은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 희망을,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심어주어 사랑을 배우고, 힘을 기르고, 사랑의 능력이 향상하도록 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 중 하나는 사랑을 모르고 사는 사람에게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실천하도록 능력을 키우고 죽을 때까지 깨닫고 사랑하며 행복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저는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을 듣고 볼 때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느끼고 전에 못 한 일을 뉘우치고 사랑하겠다고 다짐해봅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나를 낳고, 기르고, 보호하고, 안정을 주고, 미래의 삶을 보장해주시려고 온갖 수고를 다하셨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나를 없는 가운데 존재하게 하시고, 이 순간에도 숨을 쉬도록 공기를 주시고, 태양 빛을 주시고, 땅에서 온갖 먹거리를 만들도록 하늘과 땅을 만들어 서게 하시고, 걷게 하시고, 여기저기 사람을 만나게 하셨으며, 손을 주셔서 일하도록 하시고, 자연 안에 온갖 지식을 얻도록 크고 작은 책을 만들어 펼쳐주시고, 무엇을 생각함으로써 문화적 문명적 삶을 살게 하시고, 존엄하신 하느님을 알고 믿도록 하신 크나큰 은총을 생각하도록 능력을 주셔서 날로 생각이 자라나 크게 성장하도록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인간에게 봉사하고, 나누고,  친교를 맺도록 능력 주심은 참으로 한시도 잊지 못할 사랑의 힘입니다. 더구나 나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내 마음을 다하고, 내 목숨을 다하고, 내 정신 다하여 주 나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네를 내로, 너의 하느님을 내 하느님으로 바꾸어 쓴 이유를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사명과 본질은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가정에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자라면 다른 공동체 교회나 수도회나 사회 공공단체에서 학교, 직장 등에서 배울 수 있지만 상처받은 것을 치유해야 합니다.

교회 현존의 의미, 수도자의 존재 의미는 하느님을 통해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규율보다 사랑을 저는 더 높이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도록 기도합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함께

이웃을 향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기에

시끄럽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랑이기에

서로를 살립니다.

사랑은 이웃과

하나되게 합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대답하십니다.

사랑은 먼저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이야기하는

종교에 참된

사랑이 없음을

반성합니다.

요즈음 드러나는

종교인의 행태를

보면 사랑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참혹한 아픔과

분노로 우리를

슬프게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함께 살아가는

소중한 이웃을

먼저 생각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내가 부서져서

너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진실한 사랑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살아생전 좋은일 했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느냐

살아생전 좋은일 했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느냐

정신과 의사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고 합니다.

“좋은 치료자 백 명보다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을 만나는 게 낫다.”

그렇다면 정신과 치료를 왜 받아야 할까요? 그냥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다 괜찮아지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사랑을 만들어 나갈 수만 있다면 내 자신을 훨씬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하긴 사람에게는 누구나 감추고 싶은 약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약점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지고 사랑해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부족한 사람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좀 더 자신감 있게 그리고 긍정적인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만드는 사람은 훌륭한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 진정으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좋고 훌륭한 사랑을 하는 것이 나을까요?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나을까요? 당연히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우리는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키워갑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자신의 기준만을 내세워서 아름다운 사랑을 욕심과 이기심으로 눌러버립니다. 이로 인해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없으며 발전된 나를 만들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된다면 분명히 내 자신에게 더 좋습니다. 그런데 내 기준이 가득 담겨 있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제대로 된 사랑을 만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늘 불평불만이 있는 것이지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만난 바리사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으로 주님께서 만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바리사이들은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님을 이기려고만 합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되지 않자, 오늘 복음에서처럼 무리를 지어서 그분을 이기려고 한데 모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아니라 이겨서 복종시키려고만 하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스스로를 낮춰서 그 사랑과 함께 하기 위해 철저히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두 율법서와 예언서의 정신이 사랑에 담겨 있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이 세상의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참 기쁨과 행복의 길에서 ‘사랑’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누군가에게 좋은 마음을 전한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가. 크든 작든 당신의 정성이 상대에게 가는 동안 당신이 먼저 기쁠 것이다(변종모).

나무가 된 아이(‘좋은생각’ 중에서)

이제팡은 가족과 중국 상하이에서 살다 일본 도쿄로 이주했다. 그녀는 회사에 취직하고 남편은 중의학 진료소를 열었다. 시간이 흘러 외아들이 명문대학에 들어가 기쁨을 주었다. 모두 순조로웠다. 그러나 얼마 후, 아들이 등굣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삶이 무너졌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이제팡은 유품을 정리하다 아들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 텔레비전에서는 중국 북부 지역을 휩쓴 모래 폭풍 문제를 다뤘다. 아들은 그 내용을 유심히 보다 말했다. “엄마, 은퇴하면 네이멍구 사막에 나무를 심는 게 어때요? 나도 졸업하고 가서 도울게요.”

부부는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네이멍구 지방 정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아들 이름으로 10년간 110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20년간 관리한 뒤 무상으로 돌려주겠다.”라는 계약을 맺었다.

부부를 말리는 사람도 많았다. 노후를 위해 재산을 남겨 두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부부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는 세상을 떠날 때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어요. 이 돈으로 나무를 심으면 세월이 흘러도 전해지겠죠.” 부부는 모든 재산과 아들 보험금을 나무 심는 데 쏟아 부었다.

그렇게 2015년까지 총 200만 그루를 심었다. 끝없이 이어지던 모래 언덕은 초록빛 가득한 숲으로 바뀌었다. “사연을 듣고 자녀를 잃은 부모가 나무 심으러 많이 와요. 그때마다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아이는 나무가 되어 세상에 오래도록 남을 거라고요.”

아픈 가슴을 이렇게 좋은 쪽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겠지요. 아들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아들이 살아생전에 했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습니까?

이렇게 사랑의 힘은 큽니다. 그런데 왜 사랑을 하지 않으려고 할까요?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온 이스라엘 집안인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내겠다." 독서: 에제키엘 37,1-14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귀 들린 딸을 위해서 예수님은 찾아왔던 이방 여인은 예수님께서 아들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잘 참으며 끝까지 예수님께 딸의 치유를 청합니다. 자신은 할 수 없고 주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결국 그 믿음으로 딸을 악에게서 구원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 믿는 이를 통해 당신 성령을 보내시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반면 영화 ‘곡성’에서 아버지가 악령에 시달리는 딸을 구하지 못한 이유는 그 아버지가 친구들이나, 무당, 성당이나 한 여인, 어떤 누구에게도 끝까지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을 너무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힘으로 딸을 구할 수 있다고 믿으니 자신이 도움을 청했던 이들이 조금만 이상해지는 것 같으면 상대를 믿지 못하게 됩니다. 한 예로 무당이 굿을 하는데 딸이 아파하자 참지 못하고 자신이 원해서 불러놓은 굿판을 다 뒤집어엎습니다. 조금만 더 참으라는 한 여인의 말을 뿌리치고 자신이 직접 딸을 구하러 갔다가 마지막 순간을 맞게 됩니다. 무엇이 중한지도 모르는 이 아버지는 자신만 믿는 교만 때문에 아무도 끝까지 믿지 못하여 가족도 잃고 자신도 잃게 됩니다.

오늘 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 내용 중 가장 잘 알려지고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에 의해 패망하고 성전까지 허물어진 상태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절망감에 신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주님은 에제키엘에게 이런 상태의 이스라엘 백성을 골짜기의 깡마른 뼈 무더기들로 표현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한다.”

그런데 주님은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그런 뼈들이 다시 생명이 될 수 있는지를 물어보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에제키엘 예언자는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의심을 품지 않고 모든 것은 주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모든 것은 주님께서 알고계신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르고 오로지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되어져간다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뼈들에게 다시 살아날 것임을 ‘예언’하라고 하십니다. 도저히 알아들을 것 같지 않은 뼈들에게 에제키엘 예언자는 순명하며 예언합니다. 어떻게 인간이 죄를 이기고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을 영위하게 될 것인지 도저히 불가능해보이기만 할지라도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그래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예언해야 합니다. 그랬더니 곧 뼈들에게서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며, 그 위로 살갗이 덮이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아직 그것들이 ‘숨’을 쉬고 있지는 못합니다. 아담의 코에 불어넣어 주셨던 생명의 성령이 그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성령님은 하느님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한 인간인 에제키엘에게 성령께도 예언을 하라고 명하십니다.

“숨에게 예언하여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숨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정말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느님께서 사람의 명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사제들은 예언자로서 말씀의 전례 때 구원의 희망을 안겨주고 성찬의 전례 때는 성령을 불러내려 빵과 포도주를 축성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살아 숨 쉬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만듭니다. 성령을 불러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 명령할 권한을 성직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사제들은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지 의심을 품고 두려움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성령을 보내시어 백성을 축성해 주시도록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하신 약속은 결단코 어기는 일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고 그대로 실천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저 믿고 예언하고 축성하여 백성을 살리는 일을 하면 됩니다. 즈카르야는 의심했고 성모님은 믿었습니다.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었고 성모님은 구원을 낳았습니다. 믿고 실행하면 구원을 낳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실제로 뼈와 같았던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나는 것들을 목격하며 주님의 말씀엔 거짓이 없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에제키엘 예언자처럼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내몰린 뼈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살려낼 도구로 쓰이려면 주님께서 나를 통해 그렇게 하실 수 있음을 믿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겨운 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오후 한 아이를 "큰집"에서 데려오는 차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오랜만에 쐬는 바깥공기에 기분이 좋아진 아이는 "마치도 길고도 깜깜한 터널을 막 빠져 나온 느낌이다"고 말했습니다. 그간 아이의 고생이 손에 잡힐 듯 했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홀로 이곳 저곳을 전전해서 그런지 아이는 자기표현이 뚜렷했습니다. 제가 "적군"이 아님을 확인한 아이는 자신의 지난 스토리를 스스럼없이 아주 소상하게 들려주었는데...참으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아이의 기막힌 사연을 들으면서 진흙탕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를 건져줄 다른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아이 홀로 헤쳐나가기 어려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혼자 발버둥쳐도 진흙탕에 빠진 사람은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이 있더라구요. 알아서 뭍으로 올라오겠지 생각하고 방치해두면, 더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 결국은 헤어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하루였습니다.  

힘겨운 날 어깨를 기댈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다는 것처럼 슬픈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그런데 때로 이 세상 어딜 가도 의지가지 하나 없이 홀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아이들을 만납니다. 너무도 가엾어서 할 말을 잃고 맙니다. 

결코 길지 않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힘겨운 날, 이 세상에 그나마 당신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계셔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사랑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힘겨운 순간 함께 같이 길을 동행해주는 일, 깊은 좌절로 인해 일어설 힘조차 없을 때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고통이 눈물 되어 흘러내릴 때 조용히 어깨를 감싸 안아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돈보스코 성인의 교육학 안에 참으로 중요하며 효과적인 도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친절한 사랑입니다. 돈보스코 성인에게 있어서 친절한 사랑이란 아이들의 영혼을 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전략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친절한 사랑은 살레시오 정신 안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입니다.    

친절한 사랑이란 잘 대해준다든지 공감해준다든지 상냥하게 대하는 그 이상의 태도입니다. 친절한 사랑이란 상대방의 무례함이나 부족함을 끊임없이 인내하는 덕 중의 덕입니다.친절한 사랑은 상대방의 성장을 위해 기꺼이 한 알 썩는 밀알이 되고자 하는 바램의 외적 표현입니다. 친절한 사랑은 인격 전체의 투신을 요구하는 영웅적인 행위입니다. 친절한 사랑은 이웃에게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개방하고 이웃을 진정한 형제로 받아들이는 복음적 삶의 방식입니다.

가장 큰 계명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시자 군중은 예수님을 우러러 보았다. 바리사이들은 무리의 힘으로 예수님을 이기려고 한다.논증으로는 그분을 이길 수 없다고 느끼자 무리로 그분을 이겨보려고 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떠보려고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다. 예수께서 계명을 달리 말씀하시면 그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36절) 이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그리고 무언가를 배우지도 않고도 그분을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그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절)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며 첫째 계명이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과 관련한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선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9절)는 것이다. 둘째 계명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첫째 계명은 둘째 계명을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고, 둘째 계명에 의해 증명 된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굳게 서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있어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 가치관이 확실히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모든 것 위에, 즉 우리의 가치관의 첫 자리에 하느님이 자리하고 계셔야 한다. 하느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른 것이 첫 자리를 차지할 때는 우상숭배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하느님-인간-세상 재물로 순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올바로 실천할 수 없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은 사랑을 할 줄 알고 사랑을 해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모상대로 지으셔서 이 세상에 당신의 대리자로 세우셨다면, 우리는 그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을 관상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기에 우리가 보는 나의 이웃은 바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또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겠는가? 그런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하였다. 상대도 하느님의 모습이고 나 자신도 하느님의 모습이라면 인격적인 사랑의 나눔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고생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관심이 가는 유물은 ‘화석’입니다. 화석을 연구하면서 생물의 발전과정을 알게 됩니다. 화석을 연구하면서 인류의 진화를 연구합니다. 화석을 연구하면서 지구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멸종된 생물도 알게 됩니다. 화석은 화산활동과 지각의 활동과 퇴적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화석을 모티브로 한 영화 중에는 ‘쥐라기 공원’이 있습니다. 상상의 산물이지만 쥐라기 공원을 통해서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공룡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화석이 된 생물을 복원시키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필요한 것인지, 그것이 신앙 안에서 합당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석을 통해서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는 생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또 다른 차원에서 후손들에게 삶의 발자취를 남겨주고 있습니다. ‘구전, 책, 언어, 상상력, 신화, 종교, 문화, 전통, 역사, 저장장치, 타임캡슐, 우주선’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화석을 남기는 생물들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양식입니다. 

옛 어른들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무덤에 묻힌 육신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화장한 뒤에 남은 ‘유골’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합당한 삶을 살았느냐 입니다. 땅에 묻히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어떤 모습으로 남는가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백성을 사랑하였던 세종대왕,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용감히 싸웠던 이순신 장군, 독립을 위해서 평생을 바쳤던 김구 선생님,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이태석 요한 신부님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무덤과 유골을 기억하겠지만, 우리가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들의 열정과 그분들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기억하시는 것은 무덤에 묻힌 유골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과학으로 복원할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헤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억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동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충실하게 살았는지를 기억하십니다. 그 기억만으로도 먼지가 된 사람들까지도 다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땅에 묻힐 우리의 육신을 위해서 살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위해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율법학자는 어느 것이 중요한지를 질문합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질문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명확하게 답변해 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고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생명과 사랑의 말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과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고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평생공부가 사랑이고 평생체험해야 할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여 시토회에서는 공동체를 ‘사랑의 학교’라 칭하기도 합니다. 

살아있다 하나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없으면, 희망이 없으면 살아있다 하나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사랑입니다. 말씀은 생명입니다. 말씀은 희망입니다. 말씀은 빛입니다. 말씀을 통한 하느님 만남의 체험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닌 평생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야 삽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자의 환시가 상징하는 바 참으로 심오합니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시어,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내려 놓으셨다.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바싹 마른 뼈들이 상징하는 바, 바빌론에 유배되어 희망을 잃고 절망과 죽음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아니 오늘날 하느님을 잊은, 잃은 세상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바싹 마른 뼈들이 살아 날 길은 단 하나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뿐입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삽니다. 말씀이 사라졌기에 어디나 마른 뼈들 가득한 세상 같습니다. 생명을, 사랑을, 희망을 잃으면 누구나 마른 뼈들입니다. 

그러니 우선 들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에 목마르고 굶주리면 예외없이 누구나 마른 뼈 인생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살아나는 마른 뼈들의 기적은 얼마나 통쾌한지요.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내 백성아, 너희를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 가겠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희망이, 생명이 사라지면 마른 뼈 인생이요 거기가 지옥입니다.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은 생명의 말씀, 희망의 말씀, 사랑의 말씀 즉 하느님의 말씀뿐입니다. 우리를 진정 살아있게 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절망과 죽음의 무덤으로부터 우리를 끌어내어 우리 삶의 자리로 인도하시고, 당신 말씀을 통해 당신 영을 넣어 우리를 살려 내십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말씀에 이어지는 오늘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율법교사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주님의 명쾌한 답변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 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하느님께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갈림없는 사랑, 순수한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듯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른 뼈들 같은 우리를 당신 사랑의 영으로 끊임없이 채워 주시기에 가능한 이런 사랑의 실천입니다. 하느님 다운 사랑, 바로 아가페 사랑입니다. 내 성향에 따른 변덕스런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이웃을 이웃으로’ 사랑하는 항구하고 한결같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별될 수 있지만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이웃 사랑을 통해 입증되기 마련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사랑이 빠지면 '사람'도 '삶'도 실종되어 헛것이, 절망과 죽음의 마른 뼈 인생이 됩니다. 희망과 생명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마른 뼈들 같은 우리를 당신 사랑의 영으로 살려 내시어 하느님과 이웃을 충실히, 항구히 사랑할 수 있게 하십니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107.1참조). 아멘.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명함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1요한4,16) 우리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마태5,45).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주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그 깊이 또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알려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채 주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시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도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4,20-21).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명함입니다. 다른 명함은 거짓이며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3.35 참조). 우리는 지치지 말고 일치로 향하는 길과 서로를 갈라놓는 장애와 장벽을 넘어 하나가 되는 다리를 만들고 또 만들라는 부름 받았습니다. 믿는 이들은 언제나 상호 존중과 대화로서, ‘주님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경쟁은 누가 더 큰 사랑을 내어 놓을 수 있는지를 찾는 것'(요한 바오로 2세, 2001.09.27 강론)임을 알고, 모범이 되어 서로 도와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선물, 그것은 사랑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므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규범과 형식을 뛰어넘는 사랑의 본질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바리사이들이 그들 가운데 한 율법 교사를 보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22,34-36). 예수께서는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십니다(22,37-38).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가는 당시 유다교 학파들의 중요한 논쟁거리였습니다. 사실 이런 시도는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더 잘 실행함으로써 주님께 찬미를 드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의무적 준수에만 몰두함으로써 그 본질을 망각한 채 율법을 영혼을 속박하는 굴레로 변질시켜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시험하려는 그들의 의도를 꿰뚫어보시고 율법의 근본정신을 명쾌하게 알려주십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바로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전 존재와 인격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을 항상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당신을 항상 갈망함으로써 ‘넋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며, 우리의 모든 지향을 당신께 두고, 모든 것에서 당신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정신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주님의 기도’ 묵상 5) 

전 존재를 바쳐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셨고, 내 삶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근원이요 뿌리인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내 밖의 존재를 사랑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존재의 제 1원인’이신 하느님을 떼놓고 삶의 이유와 목적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 또한 하느님 사랑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우리에게서 눈길을 뗄 수 없고,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동료 인간을 사랑하려면 먼저 나에게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도 모르면서 남을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은 좋은 감정이나 내 생각만으로 어림도 없지요.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려면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하느님을 마음과 생각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로만 떠들어댄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 사랑입니다. 이렇듯 하느님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바리사이들처럼 율법의 의무적 준수만으로 구원받기에 충분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을 항상 생각하고, 항상 갈망하고, 모든 지향을 하느님께만 둠으로써 온 존재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여 더불어 행복해짐으로써 주님을 찬미하는 ‘행동의 찬가’가 울려 퍼지길 기도합니다.

필요한 것과 중요한 것은 구별할 줄 알아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바리사이들이 주님께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묻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을 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이랄까 의문이 드는 겁니다. 사랑을 꼭 계명으로 해야 하나? 마음에서 우러나와 저절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하느님께서도 계명으로 하는 사랑, 다시 말해서 해야 되니까 하는 그런 사랑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사랑을 더 원치 않으실까요?

물론입니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사랑, 우러나와서 하는 사랑을 하느님께서는 더 원하시고, 그럴 때 계명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오죽 좋겠습니까마는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계명으로라도 사랑하려고 하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왜 계명으로라도 사랑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을 계명, 그것도 가장 큰 계명으로 주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임을 우리는 착각치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애정 결핍자이시기에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고, 원하실 뿐만 아니라 계명으로 사랑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잘 아시다시피 하느님은 존재가 곧 사랑이시고, 사랑이 충만하여 결핍이 전혀 없으시며 오히려 그 사랑이 넘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지요.

그러니 사랑할 것을 계명으로 주신 이유는 사랑할 줄도 모르는 것은 물론 왜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우리가 왜 사랑해야하는지를 알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위한 것이고, 나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것이 나를 위한 것, 나의 행복을 위한 것임은 알아도 제일 중요한 것이라는 점은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돈이나 인기나 지식 같은 것들이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는 해도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점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과 중요한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깨달아야하고, 그리고 깨달은 대로 실천해야 할 것이 바로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해서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해서도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는 사랑이 돈보다 내 행복을 위해 중요하다는 걸 알고, 그래서 사랑하려고 무척 노력을 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하느님 사랑이라는 것이 너무 요원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보다 더 내가 감각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이 있고, 무엇보다 하느님 다음으로 선인 인간이 감각적으로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감수성이 아직 없을 때 이런 좋은 것들이 감각적으로 가까이 있기에 하느님은 요원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하느님 사랑 대신 이런 것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감수성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이게 참 사랑의 관건인데 오늘은 이만 하고, 이것은 다음 기회에 얘기하는 것으로 미뤄야겠습니다.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에제 37,5)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때론 우리 삶이 너무도 무미건조하여 사는 재미가 없습니다. 말이 사람이지 영혼 없는 돌덩어리 같기도 합니다.

우리 영혼에 생기가 돌아야 비로소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매일같이 영이 살아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느님만이 그 영을 불어넣어 주실 수 있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은 사람도 무소불위의 권력자도 결코 영을 살아움직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허락하시는 축복이요 선물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그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겠다네요. 그 영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하느님을 최우선적으로 사랑하고 또 이웃도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네요. 

하느님이 주시는 영의 숨을 받아 매일의 삶이 영이 살지고 생기가 넘치는 아름다운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살아 있습니까?

<하느님의 고귀한 피조물의 이웃이 되어주어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 어른이 흙길을 기어가는 지렁이를 잡아 손바닥 위에 놓았습니다. 옆에 있던 한 아이가 놓아주라고 보챕니다. 사람의 체온 때문에 지렁이가 화상을 입기 때문이랍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본 내용입니다. 짧게 스쳐간 장면이지만, 기쁨을 주는 긴 여운으로 남습니다.

지렁이가 화상을 입을까봐 걱정하는 아이는 지렁이의 가장 귀한 이웃이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지렁이는 징그러운 벌레가 아니라, 어느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하느님을 믿는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구의 시선조차 끌지 못하는 자그마한 생명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은 의식하지 못해도 그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처럼 보듬음으로써,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단지 나와 얼굴 맞대고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안을 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빚으신 모든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응답하라<마태,22/34-4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랑을 해야 할 의무는 어디서 나오는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맡을 수 없고 손에 닿지도 않고 입맛에 드는 것도 아닌데 사랑하라니 그것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소리는 일방적으로 감사하라, 찬미하라, 하시니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해주셨다는 말입니까? 

나만 힘들게 하고 내 바라는 것은 하나도 들어주시지 않고 가는 길에 장애물만 놓여 있고 길도 없고 갈 수도 없는데 사랑하라고 하니 손해 보는 것 같아 망설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에도 사랑하라하시는 이유를 찾아야 바른 의식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사랑을 실천하며 노래하던 구약의 시인들 안에서 찾아보니 시편 2장 7절에 많은 고난과 적들의 왕까지 합세하여 괴롭히는 가운데 주님은 “ 너는 내 아들 내가 너를 오늘 낳았노라.... 나의 재산을 땅 끝 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 모두.” 주님은 나의 보류되시고 땅의 모든 것을 주시는 분십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저의 아버지! 기도하듯이 시편 8편에 “ 하늘에 당신의 엄위를 새우신분, ..... 인간이 무엇이 옵니까? 당신이 기억하고 돌보시 나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닭이 알을 품듯 품고 안전하게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양들의 목자처럼 시편 23편과 같이 “ 아쉬울 것 없이.” 푸른 풀밭, 잔잔한 물가, 영혼이 생기를 돋게 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십니다.

그래서 비록 어둠의 골짜기에서도 두려움 없이 사는 것은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사랑은 삶 속에서 체험된 사람만이 사랑을 알고 율법의 정신을 따라 하느님의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범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으로 낳기 까지 온갖 시련과 고통을 참고 견디셨듯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부활의 새 생명을 주시려고 죽으시고 부활 하셨습니다.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 사랑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토록 크신데 우리는 그 사랑을 위하여 온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은 눈에 보이는 것 보다 귀로 듣는 것 보다 맛을 보는 것 보다 만지는 것 보다 더 분명한 주님의 품 안에 현존하고 있으니 사랑하라고 명하신 것 같이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주님이 사랑의 좌표를 잃고 해매는 사람 들이 여름이 지나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오듯이 하느님의 생생한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기도합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 3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 사랑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우리의 율법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하느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만이

우리의 삶을

정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기에

끝까지 가는 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진실의 본질을

일깨워 주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성숙입니다.

삶의 모든 선물은

하느님 사랑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바탕 또한

하느님 사랑과

함께 어울려져야 할

사랑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지켜야 할

사랑보다

함께 해야 할

사랑의 본질입니다.

살아생전 좋은일 했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느냐

살아생전 좋은일 했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느냐

사랑이 언제나 즐거움을 줄까요?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어떤 부부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주례를 섰던 부부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던 중에, 기다리던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더욱 더 서로 사랑하면서 아기를 잘 낳으라는 말을 건넸지요. 몇 년 동안의 노력 끝에 얻게 된 아기였기에 이 부부는 정말로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그토록 원했던 딸을 낳았습니다.

딸을 낳은 지 얼마 뒤, 이 부부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기가 기쁨만이 아니라 고통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말을 하더군요. 밤에 잠 좀 잤으면 좋겠는데,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 칭얼거려서 아빠, 엄마 모두 피곤함을 안고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것만이 아니더랍니다. 아기가 태어난 후에 수입은 그대로인데 지출은 한도 없답니다. 또한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를 생각하니 때로는 눈앞이 캄캄해진다고 하더군요.

사랑만으로 충분히 즐거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말. 충분히 공감은 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들만이 내 앞에 다가와서 한없이 힘든 상태를 유지시키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그 관계 안에서 얻게 되는 커다란 기쁨은 현실적인 문제로 인한 고통과 시련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줍니다.

결국 사랑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쁨만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현실을 극복하고 참 행복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근본적인 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사랑의 길을 향해 가라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사랑의 길보다는 현실의 길에서 좌절하고, 욕심을 부리면서 내 것만을 간직하려고만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주님과 함께 걸을 수 없음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명 준수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 청년은 그 모든 계명을 다 지켜 왔다고 말하면서 무엇이 부족한가를 다시 묻지요. 그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이 말에 부자 청년은 슬퍼하며 예수님께 뒤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 줍니다. 바로 이 장면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실 우리는 가진 것이 많습니다. 돈은 별로 없다고 해도, 물질, 재능, 친구, 가족, 미래, 사랑 등등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지요. 주님의 뜻인 사랑에 의해서가 아닌, 내 욕심을 채우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인 ‘사랑’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슬퍼하며 주님을 떠나는 모습이 아닌, 기뻐하며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압니다. 당신들 중에 진정한 행복을 경험할 사람은 봉사하는 방법을 찾는 사람입니다(알베르트 슈바이처).

친절과 사랑

인터넷에서 본 글입니다.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친절과 사랑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그러자 한 소년이 벌떡 일어나 대답했다.

“배고플 때 누군가가 빵 한 조각을 주는 것은 친절이에요. 하지만 그 빵 위에다 제가 좋아하는 초콜릿 시럽을 얹어준다면 그건 사랑이에요!”

우리는 친절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친절의 모습보다는 사랑의 모습으로 살아갔으면 합니다.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한국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시고 돌아가십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 교황님을 기억하면서 우리 모두 사랑의 실천을 다짐했으면 합니다.

교황님! 안녕히 가십시오.

하느님 사랑 먼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일랜드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을 때, 수업시간에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조건들을 중요한 순으로 쓰라고 했습니다. 저와 같은 그룹 학생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사랑, 가족, 건강, 직업 등을 나열했습니다.

저는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 ‘믿음’이라고 썼습니다. 그랬더니 한 폴란드 여자가 자신은 그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학생은 “행복은 사랑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신을 믿는 것과 사랑은 서로 관계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제가 신을 믿으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흥분하나 모르겠지만 그래도 ‘믿음이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설명해 주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래도 팔짱을 굳게 끼고 자신은 결코 믿음이 행복의 조건임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고, 한 프랑스 여학생도 자신도 신을 안 믿는다고 거들었습니다. 반 아이들 중 행복의 조건으로 믿음이나 종교를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청년들이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알았지만 반의 모든 학생이 종교에 대해 그렇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조금은 놀랐습니다.

그들은 종교가 삶을 억압하여 사랑을 가로막고 행복을 가로막는 세상에서 빨리 없어져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즉,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하면 믿지 마십시오. 아니면 그 사람에게 먼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말하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곧 사랑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한 자매가 저에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면서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 자매는 2년 동안 남편이 외도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는 그 충격으로 암까지 걸려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힘들어서 자신의 딸과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 때 저에게 전화가 왔었는데 저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하느님께 의탁하라고 밖에는 해 줄 말이 없었습니다. 남편의 외도로 아내가 암이 걸려 세상을 먼저 뜨는 경우도 종종 보았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고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 자매는 정말 신앙의 힘으로 그 때를 잘 극복했습니다. 지금은 몸도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고 딸과 함께 나름대로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첫 번째로, 두 번째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자살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니 자신도, 하느님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만약 딸과 함께 죽었다면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이웃의 생명까지 끊는 것이므로 두 번 살인을 하게 될 뻔 했던 것입니다.

만약 위의 자매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이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좀 비약해서 말한다면, 딸은 엄마의 믿음으로 산 것입니다. 엄마의 믿음이 딸까지 살렸으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이웃사랑으로 실천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요즘 젊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들은 하나도 지니고 있지 못했습니다. 가난했고 과부였고 외아들마저 죄인으로 굴욕의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모님을 세상에 살았던 이들 중 가장 행복한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분도 모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다만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기로 하셨고 그 믿음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못 박는 이들도 용서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을 먼저 사랑하셔서 용서하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당신 아들도 용서하셨기에 당신도 용서하신 것입니다.

남편을, 혹은 아내를, 가족을,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먼저 하느님을 더 사랑하도록 노력합시다. 신앙이 없이는 내 자신도, 이웃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래서 행복해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고교 때인가 루이제 린저의 ‘왜 사느냐고 묻거든’이란 작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나와 각자 직업을 가지든 어떤 활동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나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던 결국 자신을 내신 주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 흠숭하며 왜 자신을 세상에 내셨는지를 헤아려서, 함께 살도록 허락하신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서로의 역할을 다하며 사이좋게 사는 것이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마치 사람의 생성을 무슨 시뮬레이션을 바라보듯 묘사합니다. “무슨 소리가 나고 진동이 일더니, 뼈들이, 뼈와 뼈가 서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며, 그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분께서 분부하신 대로 내가 예언하니,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에제 37,7-8.10)

주 하느님께서 이렇듯 숨을 불어 넣어 우리를 내셨으니 주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라고 말씀하신 대로 살아야겠습니다.

사랑은 모두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형제님과 함께하니 참 좋습니다."

하루 파리 순례를 마친 후 저절로 나온 고백입니다. 혼자였으면 어려움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사랑의 도반임을 깨닫습니다. 그냥 도반이 아니라 '사랑의 도반'입니다. 새삼 사랑에 대해 많이 묵상하게됩니다. 몸들은 멀리 이국땅에 떨어져 있어도 많고 많은 사랑으로 하나로 굳건히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실 하느님 사랑, 형제들 사랑 속에 살아 온 우리들입니다. 이런 사랑 있었기에 이번 순례도 가능했습니다. 

우리에게서 사랑 빼면 무엇이 남겠는지요. 완전 제로일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공부하라 순례를 보내신 주님이십니다. 평생해도 다 못할 공부가 사랑공부입니다.

하느님 은총의 바다, 사랑의 바다 안에 살아가는 물고기 같은 우리들입니다. 이런 은총, 사랑에 비하면 우리의 죄는 물한방울 같습니다. 이런 사랑의 깨달음이 우리를 치유하고 구원하고 새롭게 창조합니다. 우리를 너그럽게, 자비롭게 합니다. 문제는 모두 내 안에 있고 답은 모두 하느님 사랑 안에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사랑예찬이, 하느님 예찬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랑이 빠지면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1독서 중 '넓은 계곡 바닥 가득한 마른 뼈들' 상징하는 바, 사랑이, 희망이 사라진 이들입니다. 

아마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마른 뼈들 가득한 세상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아, 이게 바로 미사전례 은총입니다. 순례은총입니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께로부터 새롭게 창조될수록 하느님은 우리의 유일한 주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거푸 말씀하십니다.

"숨에게 예언하여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숨에게 말하여라.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꼭 순례여행을 떠난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육에 이어 영까지, 영육의 온전한 창조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어제 형제의 조언에도 감동했습니다.

"미사도구 치우지 말고 그대로 두시죠."

민박집 한 방에는 세 침대가 있고, 그 중앙에는 식탁이 있는데 그 식탁에서 셋이 미사를 드리니 아주 행복했습니다. 미사를 드린후 치우려 했을 때 한 형제의 조언이었습니다. 즉시 형제의 마음을 알아채고 그대로 두니 방안의 분위기도 거룩하고 좋았습니다. 식사는 침대위에 차리고 조촐히 했습니다. 졸지에 식탁은 제대가 되었습니다. 두분 형제의 배려의 사랑이 참 놀랍습니다. 하여 우리가 할 수행은 단 하나 사랑의 수행뿐임을 깨다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간곡한 요청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생공부할 사랑은 이 사랑의 이중계명뿐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도 이 사랑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하느님과 이웃을 항구하고도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107,1). 아멘.

당구공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자명한 진리입니다. 성경 전체가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쓰여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은 당구공처럼 이리 부딪히고 저리 팅기고 합니다. 혼돈 그 자체입니다.

물리적 감정적 힘만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힘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찬찬히 묵묵히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의도적으로 나 자신을 깊이 바라보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내 안에서 사랑의 숨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깊이 의식할 때 나는 물리적 감정적 힘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먼저 더 많이 사랑하시는 주님을 깊이 깊이 느끼고, 자연히 나의 죄와 허물을 주님께 겸손되이 고백할 때 나는 비로소 사랑의 힘에 따라 살아갑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반영억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1요한4,16) 우리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우리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하느님께서는“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마태5,45).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그 깊이 또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알려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채 주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시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도 “이 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랍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4,20-21).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성 아우구스띠노).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말과 혀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사랑에 대한 보상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번 교황님의 방한 중에 일부 개신교에서 반대 집회를 하였습니다. 어떤 교회는 목사님께서 교황님 방한 한달 전부터 가톨릭과 교황에 대해서 비난하는 설교를 하셨다고 합니다. 명동에서 있었던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중에도 일부 개신교 분들이 피켓을 들고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말과 표징을 보고 믿으십시오.’ 

방한 중에 하셨던 교황님의 말씀은 사랑, 겸손, 용서, 평화 그리고 화해였습니다. 그분은 겸손함을 보여주셨고,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 억울하고 아픈 이들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아직 남아있는 세월호의 실종자 가족들에게 직접 편지를 써 주셨고, 유족 중의 한 분에게 세례를 주셨고,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평화는 정의의 결과여야 한다고 하셨고, 용서는 모든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분에게서 사랑을 보았고, 그분을 통해서 위로를 받았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 나눔의 우산, 사랑의 우산을 기증해 주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고 성당에 왔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면 우산을 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분들이 나눔의 우산을 기증해 주셨습니다. 본당에서 준비한 사랑의 우산을 쓰면서 비를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외로움의 비를, 슬픔의 비를, 고통의 비를 맞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우산을, 작은 봉사의 우산을, 희생의 우산을 나누어 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진심을 다해

사랑한 그 힘으로

자식들은 자라납니다.

어머니에게 배운 삶은

언제나 기도와 사랑의

삶입니다.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사랑은 다 주는 것이며

사랑은 끝까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되어 사는 삶이

첫째가 되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길임을 믿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듯이

사람은 어머니를 통해

사람이 되어 갑니다.

모후이신 동정 마리아를

기억하는 것은

다시 아드님께로

돌아가기 위함이며

다시 삶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어머니가 계시고

어머니가 계신 곳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탯줄은

분명 어머니같은

사랑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이

이웃과 우리의 사랑이

어머니의 각별한 사랑안에서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생명은 하느님의 것이라면

사랑은 어머님의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대신하듯

언제나 풍성합니다.

모든 것을 다 주어야 사랑이듯

우리의 어머니는 전체가 되시며

삶의 모든 것이 사랑이게 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어머니처럼 언제나 함께

오늘도 필요한 우리의 삶입니다.

삶의 어머니가 되는

은총의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어머니처럼

멈추지 않는 것이

참된 사랑의 여정입니다.

살아생전 좋은일 했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느냐

살아생전 좋은일 했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느냐

인도에 가면 타지마할이라는 인도 이슬람 예술의 걸작이 있습니다.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22년 동안 지은 무덤으로, 한 남자의 시공을 초월한 사랑이 깃들어져 있는 작품이지요. 이 타지마할은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데, 순백의 대리석은 태양의 각도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색을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 흰 대리석에서 나는 빛나는 윤택이 점점 사라져가기 시작했답니다. 깨끗이 닦고 청소를 해도 그때뿐이지 채 한 달이 못되어서 아름다운 빛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그 이유를 전문가들에게 의뢰해서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이유가 인근의 공장들이 들어서면서부터 생긴 공해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지요.

인도 정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타지마할을 보존하기 위한 법을 만들어서, 타지마할 반경 45킬로미터 이내의 모든 공장의 문을 닫게 할 수 있는 조례를 만들어 통과시켰습니다. 이 법에 따라 근처의 모든 공장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타지마할의 흰 대리석은 다시 빛이 계속해서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대적 책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즉, 나 혼자 잘 살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너 나 잘해.’

사랑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연대적인 사랑의 실천이 있을 때에 비로소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느님 나라가 바로 지금 완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만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너만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실천해야 할 것이 이 사랑인 것입니다.

사실 이 사랑이 중요하고 그래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멋 옛날부터 우리에게 전해져왔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 복음에서도 나오듯이 먼 옛날에 이미 주어졌던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십니까?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사랑’에 있다는 것이며, 지금 역시도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이야기해주시지요. 그런데 왜 이 사랑을 남 이야기처럼 여기고 있을까요?

자신의 사랑 실천은 마치 손해를 보는 것처럼 생각하고, 남들의 행하는 사랑의 실천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이기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 자신이 받고 싶은 사랑을 이제는 적극적으로 또 기쁘게 전해 줄 수 있는 이타적인 모습에서만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니까요.

웃음은 두 사람 간의 가장 가까운 거리다(빅터 보르게).

기도(‘AMBLER’ 중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테레사 수녀가 인터뷰할 때의 일이다. CBS 아나운서인 댄 래더가 물었다.

“수녀님은 기도할 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테레사 수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하지 않고 듣습니다.”

의외의 답변을 들은 래더가 다시 질문했다.

“그러면 하느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분도 듣고 계시지요.”

당황한 댄 래더에게 테레사 수녀가 말했다.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 한다면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테레사 수녀님의 이 말씀이 이해되십니까? 사실 우리들은 기도라고 하면 무엇인가를 바라거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듣는 것입니다. 들음이 바로 기도이고, 이 들음을 통해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간직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기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과 율법사이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율법의 본질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존재하지 않으면

율법은 서로를 죽이는 해로운 악법이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율법은 그저 율법일 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율법은 일상안에 스며있는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함으로

율법은 사람을 지켜주는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늘 불안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에게 평화를 줍니다. 

하느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의 고통과도 함께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은 우리를 자라게 합니다.

하느님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빠져버린 율법은

율법이 아리라 족쇄이며 올가미가 됩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모든 것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십자가는 언제나 함께 합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십자가또한 풍요로워집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은총이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복잡할수록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온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모든 것은 눈물어린 아름다움이며

축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하루되십시오.

살아생전 좋은일 했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느냐

많은 부모들은 조건을 내세우는 사랑을 곧잘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번 시험 잘 보면 아이폰 사주마.”, “아빠 말 잘 들으면 이번 주말에 에버랜드 데려갈게.”식의 말입니다. 즉, “~하면 사랑을 주겠다.”라는 식의 말을 너무나 자주합니다.

이러한 조건적 사랑은 편향된 성장을 유도한다고 하지요. 대신 상대를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고 사랑하는 무조건적 사랑을 받아왔던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자신감에 차 있어 스스로의 인생을 적극적으로 이끌어간다고 합니다.

따라서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무조건적 사랑이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끊임없이 조건을 내세웁니다. 그리고 그 조건의 결과로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착각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사랑을 하면 건강도 얻을 수 있음을 록펠러의 이야기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록펠러는 53세에 억만 장자가 되어 세계 최고의 부호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돈이 많았음에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머리카락과 눈썹이 빠지는 탈모로 고생했고, 이로 인해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의사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듣지요.

“이 상태로는 1년을 넘기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삶을 맞이했지요. 먼저 사재를 털어 리버사이드 교회를 세웠으며,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의료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이들을 도우며 살다보니 건강이 호전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55세를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의사들의 진단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98세까지 살았습니다.

사랑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커다란 힘이 되는 것이며, 행복으로 나아가는 열쇠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조건이 붙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봉헌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보내신 이 세상 안에서의 커다란 행복이 남의 이야기만이 아닌, 바로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눈동자에서 반짝이는 빛은 마음에서 나오는 빛이다(루미).

일류 검객의 조건(‘행복한 동행’ 중에서)

엄한 스승 밑에서 힘들게 수련하던 한 제자가 조심스레 스승 곁에 다가가 물었다.

“스승님, 훌륭한 검객이 되기 위해선 얼마나 수련을 쌓아야 합니까?”

“최소한 10년은 필요하다.”

스승의 대답에 제자는 다시 물었다.

“제가 평소보다 갑절로 노력한다면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을까요?”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 20년은 더 걸릴 것이다.”

스승의 답을 듣고 제자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혹시 잠도 자지 않고 수련에만 전념한다면 일류 검객이 될 수 있을까요?”

스승은 제자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절대 일류 검객이 될 수 없다. 일류 검객이 되기 위해서는 한쪽 눈은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남겨야 한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반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너의 두 눈은 모두 ‘일류 검객’에 고정돼 있는데 어찌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겠느냐?”

사람의 눈이 두 개인 이유는 따로 있다. 하나의 눈은 나의 목표를 보고 또 다른 눈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교회의 청년들이 살아나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합시다.

김기현 신부님

오늘 독서 서두에 보면, 하느님께서 에제키엘 예언자를 넓은 계곡 한 가운데에 내려놓으십니다. 그곳에는 사람의 뼈가 가득 차 있었는데, 그곳을 둘러보고 나서 하느님이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마른 뼈들... 그것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영적으로 죽어있는 청년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의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의 아들아, 교회에 청년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당에 아이들이 많이 있죠. 그 아이들에게 자라라고 명령해야 자라나요? 그렇지 않죠.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자라납니다. 밥을 굶기거나 위험한 상황에 방치 해 두지 않는 이상 자라나고 성장합니다. 만약 그 아이들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는 거겠죠.

마찬가지로 생명체인 교회도 자라고 성장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성장하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거겠죠. 만약 우리 교회의 청년들이 영적으로나 수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면 뭔가 질병이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겁니다.

그 질병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텐데요. 가장 큰 질병은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막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10년에 한 번 비가 내리기도 하고, 100년에 한 번 내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하늘로 올라가는 수증기 양이 적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수증기가 많이 증발해서 올라가면 비가 되어 내릴텐데, 하늘로 올라가는 수증기의 양이 거의 없기 때문에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나오는 청년들이 기도 자리에 나와 기도하지 않고 미사 자리에 나와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늘로 올려지는 기도가 없으니, 하늘에서 뿌려지는 은총도 적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드문드문 적게 뿌려지겠죠. 더 많은 은총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기도와 찬미가 하늘로 올려져야 합니다.

우리가 물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는게 빠를까요? 아니면 펌프로 물을 끌어올리는 것이 빠를까요? 그것도 아니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드럼통에 받는 것이 빠를까요?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드럼통에 받는 것이 가장 빠르겠죠. ...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총과 복을 내려주시길 바래야 합니다. 그래야 청년들이 모여드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자리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기도자리를 만드십시오. 함께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면 됩니다.

아니면 각자가 활동하는 단체 내에서 기도하는 자리를 만드십시오. 그것이 중요합니다.

캠프 준비 중에 교사들이 9일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말 좋았습니다. 그 나머지 기간에도 뭔가 기도 제목을 갖고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하늘에서 내리기를 기원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청년들이 많아지기를, 또 학생들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기도해 보십시오.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기도하는 것이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한 첫 걸음이리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독서 10절의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그분께서 분부하신 대로 내가 예언하니,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마른뼈가 군대와 같이 강한 생명체로 살아나기를 바란다면, 함께 기도합시다. 단체 내에 구성원들과 함께 기도하고, 함께 미사를 봉헌합시다. 기도가 하늘에 닿는 만큼 주님의 은총이 땅에 내리리라 생각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친구의 퇴소식을 보러 논산훈련소에 갔다.

항상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임에도 정말 깨끗했다.

어느 팻말을 보고 깨끗함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귀하의 자식들이 청소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고귀한 피조물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기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 어른이 흙길을 기어가는 지렁이를 잡아 손바닥 위에 놓았습니다. 옆에 있던 한 아이가 놓아 주라고 보챕니다. 사람의 체온 때문에 지렁이가 화상을 입기 때문이랍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본 내용입니다.

짧게 스쳐간 장면이지만, 기쁨을 주는 긴 여운으로 남습니다.

지렁이가 화상을 입을까 봐 걱정하는 아이는 지렁이의 가장 귀한 이웃이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지렁이는 징그러운 벌레가 아니라, 어느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하느님을 믿는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구의 시선조차 끌지 못하는 자그마한 생명을 사랑함으로써, 의식하지 못해도 그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처럼 보듬어 줌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단지 나와 얼굴 맞대고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안을 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4대강이 유린당하는 가슴 아픈 현실 속에서 신음하는 강물을 지켜 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사랑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느님 사랑

한은주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거짓말이에요. 그분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면 맛볼수록 더 목이 마르거든요.” 

올해 은경축을 맞으신 본당 신부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면서도 막 연애를 시작한 청년마냥 들뜬 표정이기도 했다.

 “아, 나는 언제 저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으려나.” 

마냥 부러웠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이 모든 것에 앞선 첫째 계명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신부님의 저 달디단 고백이 내 입에서도 터져나올 수 있을까? 너무 어려웠다.

이번에는 제대로 하느님을 붙들자. 마음속에서 그분을 알고 싶은 욕구가 커졌다. 주변의 어른들께 조언을 청하고 영성 서적들을 읽었다. 평일미사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규칙적으로 아침저녁 기도 시간을 가졌다. 처음에는 무척 힘이 들었다. 나름 바쁘다는 핑계거리가 있었으니까. 그러던 것이 하나둘 내 삶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웃음이 거의 메말랐던 내 입가에 웃음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신부님이 또 날 부추기셨다. 성경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관통하는 주제는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다른 건 다 몰라도 그것만 알아들으시면 돼요. 우리는 자꾸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유혹에 빠지지만 그냥 누리세요, 즐기세요.”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흔한 말씀이었다. 당신 아들은 날 위해 목숨까지 바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사랑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이 세상에서 ‘사랑’에 관한한 어머니들은 단연 전문가 아닐까. 나는 어머니께 그 사랑에 대해 여쭈었다. “하느님을 알게 해주신 것, 믿게 해주신 것 그게 다 날 사랑하셔서가 아니야?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하느님 사랑하는 방법이겠지. 자연이나 사람이나 모두를.” 그 대답이 얼마나 즉각적으로 나오는지 나는 놀랐다. 엄마는 몸과 마음으로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하고 계셨다. 그 사랑은 잦은 웃음과 낮은 성가의 읊조림과 너그러움으로 품어져 나온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안다는 진리가 여기에 있구나.

나는 요즘 걸어서 평일미사에 간다. 처음에는 운동 겸 시작한 길이었는데 요즘은 그 길을 사랑하게 되었다. 왕복 한 시간 남짓의 논두렁 길. 어느덧 나는 예수님과의 데이트 시간을 더할 나위 없이 즐기게 된 것이다. 하늘과 들꽃과 풀벌레, 그리고 쑥쑥 커가는 벼들과 소나무 숲. 모든 게 우리 둘의 만남을 위해 완벽하다. 볼수록 더 보고 싶은 당신, 고맙습니다. 요즘은 그저 그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고 기쁘다

사랑

박대남 신부님

‘사랑.’ 가장 쉬울 것 같은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가장 큰 원칙은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보이는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가장 큰 원칙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이 원칙은 머리로 이해되고, 머리로 받아들여지는 쉬운 원칙처럼 보입니다.

이 원칙을 온몸으로, 그것도 십자가로 보여주신 예수님. 우리가 이 원칙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 말씀을 실현해내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면서 보여주셨던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순명과 사랑,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지셨던 십자가의 인간사랑, 이 두 가지를 몸소 보여주신 그분의 사랑을 우리 삶 안에서 실현해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지금 나는 마음속에 누군가를 미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오늘도 누군가의 말에 특히 소외되고 아픈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렇게 이웃을 사랑한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하느님께 찬미 드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도 사랑하는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먼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일랜드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을 때, 수업시간에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조건들을 중요한 순으로 쓰라고 했습니다. 저와 같은 그룹 학생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사랑, 가족, 건강, 직업 등을 나열했습니다.

저는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 ‘믿음’이라고 썼습니다. 그랬더니 한 폴란드 여자가 자신은 그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학생은 “행복은 사랑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신을 믿는 것과 사랑은 서로 관계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제가 신을 믿으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흥분하나 모르겠지만 그래도 ‘믿음이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설명해 주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래도 팔짱을 굳게 끼고 자신은 결코 믿음이 행복의 조건임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고, 한 프랑스 여학생도 자신도 신을 안 믿는다고 거들었습니다. 반 아이들 중 행복의 조건으로 믿음이나 종교를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청년들이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알았지만 반의 모든 학생이 종교에 대해 그렇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조금은 놀랐습니다.

그들은 종교가 삶을 억압하여 사랑을 가로막고 행복을 가로막는 세상에서 빨리 없어져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즉,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하면 믿지 마십시오. 아니면 그 사람에게 먼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말하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곧 사랑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한 자매가 저에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면서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 자매는 2년 동안 남편이 외도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는 그 충격으로 암까지 걸려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힘들어서 자신의 딸과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 때 저에게 전화가 왔었는데 저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하느님께 의탁하라고 밖에는 해 줄 말이 없었습니다. 남편의 외도로 아내가 암이 걸려 세상을 먼저 뜨는 경우도 종종 보았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고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 자매는 정말 신앙의 힘으로 그 때를 잘 극복했습니다. 지금은 몸도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고 딸과 함께 나름대로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첫 번째로, 두 번째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자살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니 자신도, 하느님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만약 딸과 함께 죽었다면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이웃의 생명까지 끊는 것이므로 두 번 살인을 하게 될 뻔 했던 것입니다.

만약 위의 자매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이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좀 비약해서 말한다면, 딸은 엄마의 믿음으로 산 것입니다. 엄마의 믿음이 딸까지 살렸으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이웃사랑으로 실천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요즘 젊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들은 하나도 지니고 있지 못했습니다. 가난했고 과부였고 외아들마저 죄인으로 굴욕의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모님을 세상에 살았던 이들 중 가장 행복한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분도 모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다만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기로 하셨고 그 믿음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못 박는 이들도 용서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을 먼저 사랑하셔서 용서하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당신 아들도 용서하셨기에 당신도 용서하신 것입니다.

남편을, 혹은 아내를, 가족을,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먼저 하느님을 더 사랑하도록 노력합시다. 신앙이 없이는 내 자신도, 이웃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래서 행복해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힘겨운 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오후 한 아이를 "큰집"에서 데려오는 차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오랜만에 쐬는 바깥공기에 기분이 좋아진 아이는 "마치도 길고도 깜깜한 터널을 막 빠져 나온 느낌이다"고 말했습니다. 그간 아이의 고생이 손에 잡힐 듯 했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홀로 이곳 저곳을 전전해서 그런지 아이는 자기표현이 뚜렷했습니다. 제가 "적군"이 아님을 확인한 아이는 자신의 지난 스토리를 스스럼없이 아주 소상하게 들려주었는데...참으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아이의 기막힌 사연을 들으면서 진흙탕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를 건져줄 다른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아이 홀로 헤쳐나가기 어려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혼자 발버둥쳐도 진흙탕에 빠진 사람은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이 있더라구요. 알아서 뭍으로 올라오겠지 생각하고 방치해두면, 더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 결국은 헤어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하루였습니다.  

힘겨운 날 어깨를 기댈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다는 것처럼 슬픈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그런데 때로 이 세상 어딜 가도 의지가지 하나 없이 홀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아이들을 만납니다. 너무도 가엾어서 할 말을 잃고 맙니다. 

결코 길지 않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힘겨운 날, 이 세상에 그나마 당신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계셔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사랑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힘겨운 순간 함께 같이 길을 동행해주는 일, 깊은 좌절로 인해 일어설 힘조차 없을 때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고통이 눈물 되어 흘러내릴 때 조용히 어깨를 감싸 안아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돈보스코 성인의 교육학 안에 참으로 중요하며 효과적인 도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친절한 사랑입니다. 돈보스코 성인에게 있어서 친절한 사랑이란 아이들의 영혼을 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전략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친절한 사랑은 살레시오 정신 안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입니다.    

친절한 사랑이란 잘 대해준다든지 공감해준다든지 상냥하게 대하는 그 이상의 태도입니다. 친절한 사랑이란 상대방의 무례함이나 부족함을 끊임없이 인내하는 덕 중의 덕입니다. 친절한 사랑은 상대방의 성장을 위해 기꺼이 한 알 썩는 밀알이 되고자 하는 바램의 외적 표현입니다. 친절한 사랑은 인격 전체의 투신을 요구하는 영웅적인 행위입니다. 친절한 사랑은 이웃에게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개방하고 이웃을 진정한 형제로 받아들이는 복음적 삶의 방식입니다.

사람, 사랑, 삶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딘지 모르게 어감이 비슷하게 다가옵니다. 사람, 사랑, 삶이 같은 어원에서 나온 단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랑함으로써 참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사람의 삶이 아니요,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사람이 아닙니다.

이 당연한 진리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만큼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흔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사랑'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저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교회에 나오면 의례 듣게 되는 말이 '사랑하라'는 것 정도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첫사랑의 순간처럼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을까요? '사랑해' 라는 말이 그저 의례적인 인사 치례가 아니라, 진정으로 차가운 마음을 녹이고, 딱딱해진 가슴을 부드럽게 하는 감미로운 음성으로 전해질 수 있을까요?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과 마음으로 사랑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참된 사랑은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다가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사랑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내기 마련입니다. 마음과 의지, 생명까지도 사랑하는 이에게 온전히 내어놓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전하려는 '나'와 내가 사랑을 전해주고자 원하는 '너'를 온전히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 '너'를 또 하나의 '나'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참된 일치와 화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는 우리가 하나되는 데에 너무나도 커다란 장벽을 수없이 쌓아놓고 있습니다. 돈, 지위, 권력, 지식 등, 여러가지 잣대로 사람을 갈라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장벽을 허물고 모든 이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러기에 당시에 잘난 사람들, 사두가이파 사람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리고 율법학자들로부터 끊임없는 시기와 질투, 모함을 받으셨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게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자 가장 큰 계명을 물어온 것입니다. 율법에 능통한 율법학자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모를 리 만무합니다. 이들은 사랑이라는 계명을 알고 있되, 결코 사랑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무식한 형제 자매들을 자신의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많은 율법학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율법학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방해하는 온갖 유혹들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로 지금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때입니다. 바로 지금이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위하여 십자가 위해서 생명을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자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작은 사랑을 실천하면, 그 사랑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이웃에게 전파되어 서로 서로에게 사랑 넘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의 사랑이 지금 우리가 어울려 있는 교회라는 사랑의 공동체를 일구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사랑을 지피는 작은 불씨가 되어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첫째가는 계명

김광태 신부님

유다인들이 십계명을 근간으로 6백여 가지가 넘도록 율법 조항들을 세분화시킨 일을 너무 가볍게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삶의 모든 차원에서 극도의 경건함을 실현하려는 그들만큼 신앙의 열정을 지닌 민족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비판하신 까닭은 너무도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고 있지만, 그런 일들이 그 율법의 근본 바탕을 이루는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일 안에서 균형 감각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945년 4월 9일, 개신교 신학자 본 회퍼는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는 죄로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목사요 신학자가 어떻게 십계명의 제5계명인 사람을 죽이는 일을 시도할 수 있을까요?

본 회퍼는 감옥에서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미친 운전사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 위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목사인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사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본 회퍼의 이런 행동을 ‘폭력이냐 비폭력이냐’ 하는 잣대로 재서는 안 됩니다. 그에 앞서 도대체 십계명과 모든 율법 조문의 근본 정신이 무엇인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많은 율법 조문 중 첫째 가는 계명과 둘째 가는 계명만 언급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김보경 수녀님

예수님 당시 유다교 계명은 613개였는데 예수님은 그 계명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하셨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사랑은 사랑으로만 갚을 수 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말씀이다.

며칠 전 40대 초반의 요한(가명)이 간경화로 선종했다. 부인과 두 아들이 있었지만 매일 병원에 와서 돌보는 이는 말끔한 얼굴과 훤칠한 몸에 양복차림의 건강한 팔순의 멋쟁이 노신사였다. 32년 전 부인과 사별하고 다섯 자녀를 홀로 키웠고 성당에서 봉사를 많이 하신다. 요한에 관해 말하실 땐 늘 눈시울이 붉어지고 기도해 달라며 90도 절을 하신다. 내가 요한을 처음 만났을 때는 지쳐 보였으나 말도 하고 함께 기도도 했다. 얼굴은 황록색이고 눈자위는 샛노랬으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음을 알 수 있었다. 부인이 보기에 그는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내게는 노인이 보는 것처럼 사랑스럽고 착한 소년으로 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한은 신앙생활에 태만했다. 두세 달에 걸쳐 입퇴원을 거듭하던 그날도 요한은 힘없이 병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노인은 “얘가 누우려 하지 않고 자꾸 무엇이 보이고 들린다며 무서워해요”라며 보조침상에 앉아 요한의 무릎을 힘껏 감싸안으며 “눈을 떠봐, 수녀님이 오셨어. 내 몸 전부를 주어서라도(이식) 얘를 살리고 싶습니다” 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요한의 피부는 이미 검푸렀고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 수 있었으나 차마 노인에게 말할 수 없었다. 순간 요한에 대한 나의 사랑은 ‘요한이 임종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로이 하느님께 가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눈물을 글썽이며 노인에게 ‘임종경’을 바칠 것을 권했다. 마침내 요한은 아버지와 형들과 가족에 둘러싸여 임종기도를 받으며 참으로 평화로이 하늘나라로 향했고 노인은 기뻐했다. 다윗 왕이 자식을 잃고서 힘을 되찾은 것처럼.  

박재범 신부님

얼마 전 이스라엘이 헤즈볼라라는 무장 테러 단체 때문에 레바논을 무차별 공격한 것을 보았고, 들었습니다. 전쟁이 발발되자 레바논 정부는 평화협정을 맺자고 이스라엘 정부에 요청했으나 이스라엘은 거부했으며, 급기야 레바논 정부는 이 전쟁이 빨리 종결되도록 교황청에 중재 요청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휴전협정을 맺는데 한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은 이 전쟁에 대한 뉴스를 보고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테러나 전쟁이 사랑으로 표현되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 예수님의 말씀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끔은 내 자신의 이익이나 욕심에 의해서 예수님을 시험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힘들게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진정으로 네 마음과 목숨, 정성을 다하여 온전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셔야 하는 자리에 다른 세속적인 우상들이 자리를 잡기도 합니다. 둘째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데도 저의 감정과 제 계산에 의해서 움직일 때가 많습니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내 마음 가는대로 판단하고 오만과 편견으로 제게 잘하는 사람들만 좋아하고 그들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제가 하느님과 이웃을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내어주는 사랑이 아닌 겉으로 들어나는 내 욕심에 의한 사랑을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삶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그저 지켜야 하는 계명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제 주위에 있는 분들을 통해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평생을 삯바느질로 해서 번 돈을 장학금으로 내어 놓으신 할머니, 고아들을 거두어 드려 택시 운전을 하시며 그 아이들을 돌보시는 부산의 어느 스님, 우리나라 땅도 아닌 일본에서 철로에 쓰러져 있는 일본인을 구하려다 세상을 떠난 이수현님, 고향을 떠나와 30년 넘게 한국인을 위해 사목하시며 누구보다 한국인을 사랑하시고 한국이 고향이라고 말하시는 성 골롬반 선교사 신부님들, 그분들의 모습과 잔잔한 미소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그 순수한 사랑을 우리가 함께 찾고 그 사랑을 함께 실천하고 나누면 어떻겠습니까? 때가 묻어 있지 않은 사랑, 그 첫사랑을 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우리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이웃에게,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먼저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순간부터 사랑이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기 힘들 때 예수님께 기도드립시다. ‘하느님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했지만, 그럴 때에도 제 몸의 일부가, 제 마음의 일부가 하느님을 향해 있었음을 알아주소서. 이웃을 제 몸같이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지만 사랑하려고 노력했음을 당신께서 알지 않습니까? 주님, 사랑합니다.’ 

지용식 신부님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에 의해서 형성되어 진다고 합니다. 사제가 된 후에, 고해성사나 면담을 하면서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 한구석에 억눌려 있는 오래된 상처에 사로잡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 때마다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어떻게 기억하느냐의 문제는 곧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받아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들 합니다. 사랑은 자신이 받은 경험에 의해 기억되고, 또 그 기억에 의해 베풀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를 자기 자신처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께로부터 우리가 받은 사랑의 체험과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사랑에 대한 체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는 진정으로 남을 사랑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의 체험을 잊고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상처나 분노에 대한 기억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 그 기억이 늘 자신을 괴롭히고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게 됩니다. 반면 우리 마음 안에 기억된 사랑은 남을 용서하게 만들고,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욱 가까워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잠시나마 내게 사랑을 베풀어 준 고마운 분들을 기억하며,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요?  

사랑 하나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은 우리 삶의 의미이자 존재이유입니다. 먹고 숨 쉰다하여 다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정신이, 마음이, 영혼이 살아있어야 진정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내면에서 하느님 향한 믿음이, 사랑이, 희망이 사라지면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죽어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에제키엘이 환시로 본 마른 뼈들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바다이야기’로 온 나라가 술렁이는 세상, 혹자는 이 나라를 비하하여 도박 왕국, 술 왕국이라 합니다. 때로 술, 담배 안한다는 개신교 신자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예언하여라.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리고 가겠다.“

하느님을 떠나면 누구 할 것 없이 무덤 속 마른 뼈들 같은 존재로 전락됩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믿음, 우리의 희망, 우리의 사랑이 될 때, 비로소 세상 허무의 무덤, 무의미의 무덤, 허영의 무덤에서 벗어납니다. 살길은 단 하나 사랑뿐입니다. 사랑만이 우리의 유일한 존재이유입니다. 얼마 전 써 놓은 ‘삶’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여름/뙤약볕

작열하는/사랑

빨간 분 꽃/두 송이

눈부시다

삶은 기쁨/지금이 영원”

삶, 사랑, 사람, 같은 뿌리입니다.

‘살아’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진정 이런 갈림 없는 집중된 하느님 사랑을 할 수만 있다면 웬만한 걱정 다 사라질 것이고 웬만한 병 다 나을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진정 온 마음으로 하느님 사랑하면 자연스레 이웃을 내 지신처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살기위해서, 무덤 속 마른 뼈들 같은 인생 되지 않기 위해서, 이 두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놓쳐버리면 곧장 중심을 잃고 고립단절 되어 허무의 마른 뼈들로 전락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오늘 하루도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을 하게 하십니다. 아멘.

사랑의 바다에 빠져라.

강영구 신부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그대에게

가장 큰 계명(誡命)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사랑에로 초대(招待)합니다.

계명(誡命)은 그릇입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담는 그릇입니다.

계명(誡命)은 너와 나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울타리입니다.

계명은 바른 삶을 위한 길잡이입니다.

계명이라는 그릇 속에서 비로소 출렁거리던 나도 잠잠해질 수 있습니다.

계명이라는 그릇에 담겨 쏟아지지 않고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계명의 인도를 따라 가면 사랑이라는 바다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흘러듭니다.

바다는 흘러드는 모든 것들을 말없이 받아들입니다.

바다는 온갖 쓰레기와 더럽게 오염된 강물들을 받아들이고 정화(淨化)의 과정을 거쳐서 새 생명을 선사합니다.

하느님은 바다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사랑의 바다에 빠지라는 말씀입니다.

바다에 빠지면 죽고 맙니다.

그러나 사랑의 바다에 빠져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새 생명으로 거듭납니다.

사랑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이재희 신부님

 바리사이파들은 항상 예수님을 눈에 가시로만 여겼습니다. 그래서 뻔히 다 알면서도 예수님의 속을 떠보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은 예수께 율법, 즉 의무 규정에 관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예수님은 사랑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 사랑이고 둘째 계명이 이웃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을 지키는 사람의 태도와 방법을 함께 말씀해주십니다. 즉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그러한 열정과 정신으로 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천주교 신자라면 이 두 계명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실천하기 어렵기에 사랑의 계명을 들을 땐 왠지 부담되고 의무만으로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실 때 율법과 의무사항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입으로만 사랑을 이야기하는 바리사이들과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분명 율법에 관해 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만족과 기쁨인 사랑에 관하여 대답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기록의 충실성에 관해 묻고 있는데 예수님은 사랑의 충실성에 관해 대답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율법의 순위로 말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의무 규정에 대해 묻고 있는데 예수님은 사랑함으로써 얻는 진정한 해방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대해서도 한계를 매기려 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의 근본적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힘들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님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과 죽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어느 날 복도를 가다가 복도 끝에 걸려있는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하느님의 사랑을 절실히 깨달았고 그 후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결국 사랑의 계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것을 얼마만큼 실천하느냐 일 것입니다. 얼마나 실천하느냐는 바로 자기희생을 얼마나 감수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랑이란 말보다 더 좋고 아름다운 말도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오아시스가 있어서 그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의 삶이 각박하고 메마르다 하더라도 서로가 오아시스 같은 충만을 누릴 수 있도록 사랑의 실천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누구나 다 알고는 있지만 그 실천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도 알기에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짐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2000여 년 전 예수님께 물었던 그 율법교사가 우리에게도 똑같이 묻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첫째 계명은 하느님 사랑이고 둘째 계명은 이웃사랑입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에 우리도 똑같이 대답을 별로 어렵지 않게, 별로 망설임 없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리를 아는 천주교 신자라면 질문자체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쉽지도 않게, 결코 쉽지 않게, 가볍지도 않게 간직해야 할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동시에 발생하는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

박상대 신부님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와 부활에 관해 논쟁을 벌이다가 낭패를 본 모양이다.(마태 22,23-33)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모세오경만 경전으로 여겼기 때문에 모세오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부활신앙을 배척한 사람들이다. 부활신앙이 경전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6세기경에서 2세기경 사이로서 이 시기에 기록된 예언서(이사야, 에제키엘, 다니엘)와 묵시문학(마카베오) 등에 부활신앙이 나타난다.

그들이 죽은 형의 가문을 이어주는 모세의 율법, 수혼법(嫂婚法; 창세38,8; 신명 25,5-10)을 근거로 예수께 괴변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다.’는 말씀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신 것이다. 소문이 퍼지자 ‘세금에 관한 논쟁’(마태 22,15-22)에서 예수의 대답에 탄복을 하고 물러갔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다시 몰려왔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진다. 이 시험은 어떻게 하든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다. 사실 율법교사들은 모세의 율법 중 248개의 행령(行令)과 365개의 금령(禁令) 모두를 똑같은 비중으로 여겼다. 이 중에서 가장 큰 계명 하나를 집어내라니(35절), 우리가 보기에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 하나를 제시하시고, 이 계명에 버금가는 제2의 계명도 잇달아 제시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알고 있는 ‘하느님 사랑’(신명 6,5)과 ‘이웃사랑’(레위 19,18)이다. 예수께서는 이 두 계명을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로 천명하신다.

613개의 계명들은 분명히 서로 다른 계명들이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은 모든 계명이 똑같은 비중을 지닌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 하나와 이에 버금가는 둘째 계명을 제시하시는 것일까? 기준은 간단하다. 무엇 때문에 계명이 존재하는 가를 따져보면 된다.

계명의 존재이유는 하느님과 인간(이웃)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계명인 동시에 모든 계명의 기본적인 정신, 즉 골자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인 셈이다. 사랑 없이는 어느 계명도 완벽하게 준수될 수 없고, 빈껍데기로 있을 뿐이다. 사랑이 하나의 계명을 성취시켜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구약의 율법(613개)을 몽땅 지키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한다면 율법을 능가하는 행위를 수행한 셈이 된다. 그런데 우리들 사이에는 하느님은 사랑한다면서 인간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이 바로 나라면 왜 예수께서 수많은 율법들 가운데 하나인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한데 묶어 가르치시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은 순서(first and second)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동시(synchronize)에 일어나는 일이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중에 이웃사랑에 대한 의지가 굳건해지며,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대한 순명이 확증된다.”(루돌프 불트만).

<네 마음을 다하고>(마태 22,34-40)

유광수 신부님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비록 율법교사의 의도가 순수한 마음으로 질문한 것은 아니지만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먼저 나 자신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과연 내 삶에서 반드시 지켜야하는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무슨 계명인가?

계명이란 "함께 보내다."라는 뜻이다. 즉 무엇을 향해서 내 자신을 내 던지는 것이다. 내가 지켜야할 계명이 있다면 내 몸과 마음이 그 계명을 위해 던져지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계명이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릴 때부터 이 계명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였다.

"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 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네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문설주와 대문에 써 붙여라."고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어린이들이 부모로부터 귀가 달도록 들어온 말이었고 또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왔다.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이시고 한 분뿐이시고,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는 계명은 어느 한 사람만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지켜야할 계명이었다. 전 국가적으로 이런 계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대-한민국"이라는 한 마디의 환호성이 좌절과 실의와 분열로 심체되어있던 온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고 일치감을 맛보게 했고 대- 한민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했고 긍지를 갖게 하였던 큰 에너지를 우리는 얼마 전에 경험한 바 있다. 온 국민의 에너지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어떤 구호나 교훈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구한 역사를 내려오면서 한결같이 그네들만이 하나로 뭉치고 통일된 정신자세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었던 위대한 힘은 바로 이 첫째 가는 계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우리는 단일 민족이라고 하면서 과연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줄 수 있는 어떤 위대한 가르침이 있었는가? 대-한민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해주고 대-한민국인으로서 흩으러지지 않는 자세로 살아갈 수 있게 바쳐주고 이끌어 주는 어떤 계명이 있는가? 오늘날은 물론 과거에도 좁은 땅 덩어리에서 끊임없이 갈라지고 서로 싸우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을 하나로 일치시켜 주는 어떤 위대한 계명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민족 전체가 공동으로 추구할 수 있는 어떤 정신적인 가치도 목표도 없다. 나라가 그러하고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갓 태어난 자식에게 이스라엘 백성처럼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전해줄 어떤 교훈이나 가르침이 없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들 때나 괴로울 때 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잘 판단이 서지 않을 때 내 인생의 지침이 되고 빛이 되어 줄 수 있는 어떤 가르침이나 계명같은 것을 부모로부터 전수받은 기억이 없다. 나뿐인가? 부모의 가르침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는 자식들이 얼마나 될는지 의문이다. 

우리네 부모들의 입에서 그냥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고 돈이나 많이 벌고 출세하라는 것 이외에는 별로 들어 본적이 없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인지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왜 믿어야 하는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왜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를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도무지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전달되는 것도 없고 또 전달하고자 하지도 않는다.너는 너로서 너의 생활을 하고, 나는 나의 생활을 하고 그저 오늘 하루 큰 사고 없이 생활했으면 되고 각자 먹고 각자 생활하고 언제 들어오고 언제 나가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서로 간섭을 하지 않고 기분 상하게 하지 말고 좋게 좋게 지내면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자기 마음 속에 담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완전한 모상인 하느님을 우리 마음 속에 담을 때만이 가능하다. 인간은 본래부터 혼자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반드시 자기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거들 짝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부족함을 채워 줄 거둘 짝을 찾고 있고 그리워 한다.  그리고 거둘 짝을 만났을 때 그를 사랑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와 함께 있으면 자기의 부족함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 속에 부족함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채우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내 마음 속에 담는 것이다. 

이태리 나폴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이 왜 사는지 또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몰라도 살아갈 수 있지만 사랑할 대상을 찾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 

사랑할 대상만 있으면 그냥 행복한 거다. 세월이 가든 말든, 차가 밀리든 말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으면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고, 눈이 내리면 눈이 내려서 더욱 좋다. 차가 밀려 늦게 도착하면 늦게 도착해서 좋고, 빨리 도착하면 빨리 도착해서 좋다.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있으면 늘 행복하다. 왜 사는 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그런 골치 아픈 것을 생각하지 안해도 이미 사랑하는 사람만 함께 있으면 그 자체로 행복하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다. 우리 마음을 완전하게 채워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이 첫째 가는 계명이다. 하느님을 내 마음에 담으면 영원히 행복할 수 있으니까.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요,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면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고 귀하고 좋은 법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아무튼 우리가 자식들에게 또 하느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식

김상욱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이성 간의 사랑처럼,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마음처럼 하느님을 대하고 계시나요? 하느님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계십니까? 단지 온갖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 죄악을 늘 용서해 주시고,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전지전능한 신으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마을에 신앙심이 돈독한 개신교 신자분이 계십니다. 일흔이 넘으신 이 형님은 어느 날 정기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갔다가 암에 걸렸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이 ‘사실’을 놓고 절망 속에서 며칠간 기도한 뒤 형님은 암에 걸린 자신의 생명에 대해 본인의 뜻과 하느님의 뜻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형님이 하느님을 열심히 섬기고 사랑해 왔기에 주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형님은 결과적으로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고 살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과연 우리도,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몰라도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들어주시지 않는 그런 분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사랑이란 사랑하는 상대의 실체가 눈앞에 있고 느껴져야만 더 진지해집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계십니까?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혜가 깊은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한다는 그 자체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 여러분도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행복감을 느끼고 계시나요?

<사랑으로>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이 말씀을 "'사랑으로써'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또 '사랑으로써' 이웃을 대해야 한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라는 계명들은 의무감이 아니라 사랑으로 지켜야 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제대로 지킨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것이 계명이기 때문에 가기 싫은데도 억지로 주일미사에 간다면 주일을 제대로 지킨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고 싶어 해서 주일미사에 가고,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주일 하루를 온전히 주님께 바치는 것, 그것이 제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다른 계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 없이 겉으로만 효도한다면, 그것은 효도가 아니라 부모를 속이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믿음이 있고, 남을 위해 자기의 재산과 목숨까지 내놓는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1코린 13,1-3).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말에 대해서, "사랑이 없는데도 남을 위해서 자기의 재산과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까? 그런 일 자체가 사랑이 아닌가?" 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대해서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마태 6,1-2)."

사랑 없는 선행은 위선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사실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과 선행이 위선인지 진짜인지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심지어 자기의 신앙생활과 선행이 위선인지 아닌지를 자기 자신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오직 사랑으로만 실천하려고 계속 꾸준히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나의 신앙생활과 선행이 위선이 아니라 진짜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평가하실 것입니다(마태 6,4).

"......을 하지 마라." 라는 계명들 같은 경우에는 사랑이 없어도(아무것도 안 해도) 잘 지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을 하지 마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라는 계명들은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잘 지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계명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는 계명을 지켰다고 할 수 없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목숨을 구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사랑으로써’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십계명 제5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됩니다.

'탈렌트의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은 자기가 받은 탈렌트를 땅 속에 숨겨 두었다가(마태 25,18)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줍니다(마태 25,25).

그는 자기가 받은 탈렌트로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주인은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라고 그를 꾸짖으면서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라고 명령합니다(마태 25,26.30).

주인이 그를 꾸짖은 것은 그가 아무것도 안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세 번째 종이 그렇게 한 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마태 25,25).

그는 주인을 사랑하지 않았고, 두려워하기만 했습니다.

'사랑 없는 두려움'이 그를 소극적인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처럼 사랑 없이 두려움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서 하느님 나라에 가기를 소망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그저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려워서 그것을 피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하면 지옥을 피할 수는 있겠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없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 나라는 들어가기를 간절하게 희망하고 그 희망을 능동적인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다.

박용일 신부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합니다. 어느 개그맨의 "그까이 거 대충"이라는 유행어처럼 하느님이나 이웃을 대충 사랑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온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해야합니다. 이웃 역시 자신이나 가족을 대하듯 사랑해야 합니다. 아니,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벅찬데 이웃까지 사랑해야 한다니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별개가 아닙니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하는데 이웃을 외면하거나,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느님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둘 중 하나만 사랑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말도 안 된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천성이 착한 사람들, 양심적인 사람들, 교양과 예의가 바른 사람 중에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사랑은 불완전합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순교자들은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마저 내어 놓았습니다. 신앙에 입각하지 않은 이웃 사랑도 그와 같을 수 있을까요? 자세히 바라보면 그저 취향이 같거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또는 어떤 보답을 바라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손해가 된다면 지속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과 연결되지 않은 인간들끼리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사랑,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무조건적 사랑을 제외하고는 결코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연관된 사랑만이 진정한 이웃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아무리 싫어도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을 한다는 속담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된 모든 것이 다 예뻐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좋아하고 사랑하시며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런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그분께서 아끼시는 우리의 이웃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결코 떼어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에게 시기와 질투의 눈빛을 보내는 것은 하느님을 미워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이 복음 구절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도 사랑할 수는 있다는 것을 전합니다. 아무리 기도와 봉사를 열심히 하는 신자일지라도 가족과 이웃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면 그는 결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끝나고 이웃과 싸운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느님과 이웃 사랑은 하나입니다. 두 사랑을 분리한다면 이는 결코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천 원짜리 지폐를 절반으로 자르면 500원짜리 지폐 두 장이 생길까요? 어느 한 쪽도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이웃을 사랑합시다.

거지에서 은인으로

최인각 신부님

새 복음화의 방법

사회가 어려워지면서 생긴 현상 중 하나가 노숙자(露宿者)의 증가입니다. 노숙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거리에서 잠을 청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입니다. 얼마 전, 이들을 위하여 ‘꽃동네’ 신부님께서 봉사자들과 함께 400여 개의 침낭과 빵을 나눠주며, 그들의 애환을 듣는 위로의 자리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신부님께서는 도움이 필요하면 꽃동네에 삶의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제의하셨고, 여러 명이 이에 따라나섰답니다. 신부님께서 “얻어먹는 거지가 되고 싶습니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하고 묻자, 이들은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인)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나누는 삶’을 산다면, ‘거지’에서 ‘은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전교주일을 맞이하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복음화의 방향을 생각해 봅니다. 복음화는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여 내적으로 변화되어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에 반대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가치관?관심?사상?생활방식 등을 복음의 힘으로 바로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목표에 따라 인류는 이천 년 이상 그 임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수고로 많은 이가 구원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미 복음화 된 개인이나 공동체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복음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새 복음화’라는 푯말을 들고 복음화에 더욱 매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복음화는 구원의 선물인 기쁜소식(福音)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내리사랑적인 또는 하강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도 기쁨의 존재가 되셨습니다. 여기서 새 복음화의 방향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창조주이며 구원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기쁨을 얻음과 동시에, 피조물이며 죄인인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들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 중 하나는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고 사랑하시는 인간(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 복음화’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다른 하느님의 자녀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 인간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는 것이며, 진정한 의미의 복음화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화와 영혼구원은 선언이 아니라 실천 사항입니다. 복음화와 영혼구원은 나의 행복과 구원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그 근원은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하고, 그 답 역시 하느님에게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 관상을 통해 교류하면서 살아갈 때, 비로소 공유하는 자유, 함께하는 기쁨, 나누는 생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복음화와 영혼구원의 방향이 하느님께 청하고 받는 거지 인생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하느님과 세상과 모든 영혼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 주는 은인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기쁨과 행복의 은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면면히 살펴보면, 인간을 위한 십자가 상 희생제사에 초점을 맞춘 삶이었다기보다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삶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인 예수님께서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 바쳐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이룩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하느님의 마음은 감동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감동시키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 이것이 복음화의 최고 단계이며 관상의 기도가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산다면, 그 영혼은 지상에서부터 천국까지 구원을 맛보며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걸어갈 것입니다. 그 영혼이 바로 당신이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전교

허영엽 신부님

“당신들 종교인들이, 믿지 않는 이들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닐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삶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리스도처럼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종종 가르치는 말과 행동이 달라서 종교인들에게 실망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는 싫다.” 인도의 지도자 간디(1868-1948)가 교회에서 쫓겨나면서 남긴 말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유학을 간 영국에서 우연히 성경을 읽고 많은 감동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는 미개한 나라였고, 인종차별도 심한 때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찾아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 차례 청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간디가 남긴 이 교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지금도 유효한 말이며, 이는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 해당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라고 합니다. 복음 선포는 우리 교회의 가장 중요한 첫째 사명이며, 존재 이유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며, 동시에 증거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실천하는 이웃 사랑으로 우리 삶 속에서 현존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세상의 빛이되고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진리를 다른 이에게 납득시켜야 합니다. 만약 우리 신앙인의 생활이 불성실하며 거짓말과 위선, 불의와 독선으로 가득 차있다면 결코 복음을 선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이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복음 선포이고 참된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 실천은 무엇보다 긴급한 요구와 특수한 상황에 무조건 응답하는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일시적인 요구만 충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어떤 사람들에게라도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웃사랑은 이제 외부에서 강요되는 계명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증거하는 우리를 보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여러분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며 칭찬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임숙희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날마다 ‘사랑’이라는 영적 투쟁을 겪는 우리에게 힘을 주십시오.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복음은 사두가이들과의 부활논쟁(마태 22,23­33)에 이어집니다. 이제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여듭니다.(34절) 시편 저자가 외친 것처럼 그들은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기름부음받은 이를 거스르기”(시편 2,2) 위해 함께 모입니다. 그 가운데 율법 전문가가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마태 22,36)라고 소리 높여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신명기 6장 5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모든 이스라엘이 하루에 두 번씩 외우는 셰마 기도문의 일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구약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이 사랑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그분의 사랑과 상응하는데(신명 4,37; 7,8; 10,15),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그분에게 봉사하는 의무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포함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살찌고 기름진 번제물을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도록 힘쓰는 것입니다.(호세 6,6) 하느님이 죄 때문에 우리를 치셨지만, 동시에 우리의 상처를 싸매고 고쳐주시는 분임을 알고 그분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언제나 팔을 벌리고 계시는 하느님께 돌아가 그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는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각은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귀 기울일 때 시작됩니다. 하느님은 성경을 통해서 뿐 아니라 ‘사건’ 안에서도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우리 생애에 일어나는 ‘사건’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신호’입니다.

마리아는 구유에 누운 갓난아기를 찾아온 목자들의 일(루카 2,8­19 참조)과, 열두 살의 소년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잃으셨던 사건(루카 2,41­51 참조)을 겪으면서 하느님께 귀 기울이고 예수님과 당신 생애의 의미를 해석하십니다. 바오로는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에 귀 기울이고 평생 이 ‘사건’을 성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한테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는 것을 사도직 모토로 삼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바오로처럼 외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둘째 계명도 첫째 계명과 같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레위 19,18 참조) 율법과 예언서의 모든 계명이 여기에 수렴됩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로마 13,10) 이웃 사랑은 ‘잘난 체하지 않고 서로 시비하지 않으며 서로 시기하지 않는 것’입니다.(갈라 5,26) 하느님의 사랑이 삶의 멜로디가 되어 춤을 추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이든지 정성껏 예의를 갖추어 대하고 결코 무례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진리를 발견하면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5­7 참조) 

묵상(Meditatio)

교회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본문이 이야기하는 내용과 유사한 체험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허락된다.”라고 가르칩니다.(<교회 안의 성서해석>, II, 가,2) 결국 체험하지 못하는 개인과 공동체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성실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투쟁’입니다. 사랑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저절로 찾아와 초인종을 누르는 그저 그런 손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찾고,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찾으려는 아담의 본성을 거슬러 그리스도 안의 자유인으로 비상하려는 ‘영적인 투쟁’입니다. 사랑은 거리로 나가서 찾고 무릎을 꿇고 눈물로 구하고, 제발 우리 집에 와서 머물러 달라고 손을 잡고 모셔 와야 하는 귀한 손님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으면 아무리 하느님의 일을 많이 한다 한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도(Oratio)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 저의 하느님, 이 몸 피신하는 저의 바위, 저의 방패, 제 구원의 뿔, 저의 성채이십니다.(시편 18,2­3)

살아생전 좋은일 했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느냐

저는 시력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근시, 난시가 함께 있어서 안경 없이 생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요즘에는 노안이 와서 돋보기안경까지 필요합니다. 이러한 저이기에 눈이 좋아 안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하나의 안경도 부족해서 또 하나의 안경(돋보기)까지 들고 다니는데, 안경 없이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서 내 눈의 시력이 2.0 정도가 아니라 한 5.0 정도의 시력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안경도 필요 없을 테고, 아주 멀리 있는 것도 잘 보이니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방송에서 5.0의 시력으로 어떤 것을 볼 수 있는지를 보여주더군요. 글쎄 미세한 먼지까지도 다 보이는 것입니다. 평범한 시력으로 보았을 때에는 그렇게 지저분하지 않은데, 5.0의 시력으로 보는 세상은 각종 먼지로 가득한 너무나도 더럽고 지저분한 세상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개처럼 냄새를 잘 맡으면 어떨까요? 이 역시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모든 냄새를 다 맡을 수는 있겠지만, 문제는 좋은 냄새뿐만 아니라 나쁜 냄새까지 맡아야 하기 때문에 힘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으면 어떨까요? 아주 작은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좋을 것 같지만, 듣지 말아야 할 나쁜 소리까지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역시 그렇게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들보다 잘 보고, 잘 듣고, 또 냄새를 잘 맡는 것이 내 삶에 있어서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채워야 행복할 것 같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계명. 즉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만이 가장 중요합니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 율법학자는 사두가이의 말문을 막아버린 예수님의 대답에 탄복하여 이러한 질문을 던졌던 것이지요. 그래서 “스승님‘이라는 존칭을 써서 부릅니다. 사실 당시의 율법에는 인간 생활을 외부적으로 종교화하여 지켜야 할 계명, 금기의 조항, 이 둘을 모두 합해서 총 613개의 조항으로 세분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잡다하고 많은 계명을 다 지키는 것도 힘들었지만, 613개 조항의 법규를 지키느라고 할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중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할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대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고 있는 우리는 이 계명의 중요성을 너무나 자주 잊어버립니다. 바로 주님이 첫 자리에 모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첫 자리에 모시려 하기에, 가장 중요한 계명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하찮은 요소까지도 지대한 관심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의 계단으로 오르는 문이 열린다(이외수). 

말씀과 전교

최대환 신부님

전교는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소명입니다. 이를 통해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감을 체험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이 가르침이 나의 체험이 되도록 하는 것이 전교 주일의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모든 율법의 요약이라 말씀하신 두 가지 계명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과 소중함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에 반응하는 나의 마음의 움직임일 것입니다.

이 귀한 말씀에 합당한 파장이 과연 내 안에 강하게 퍼져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말과 글이라도 시초에는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가능성으로만 존재합니다. 들을 줄 아는 마음을 만나 실제로 움직임이 발생하는 것은 각별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유명한 작가이자 양심적인 지식인인 오에 겐자부로의 에세이집 『회복하는 인간』의 짧은 글 한 편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책을 읽다가 어떤 낱말이 (어떤 문장, 그리고 때로는 책 전체가), 나 자신을 향해 쓰여 있다고 믿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작가로서 그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비밀은 이처럼 스스로 의미 있는 글들을 무심한 사실로서만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에게 각별하게 던져진 “친밀한 편지”로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그것이 선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내 마음이 말씀에 섬세하면서도 흔쾌히 반응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

김찬선 레오나르조 신부님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저는 성서 전체를 통 털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는 말씀과 오늘의 이 말씀이 가장 중요한 언표하고 생각합니다.

둘 다 사랑과 관련된 언표로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본질을 알게 하는 언표이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지를 가르쳐주는 언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장 중요한 것인데도 우리는 사랑에 자주 실패합니다.

왜 자주 실패할까요?

첫째는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치의 혼란이고 가치의 전도입니다.

이는 마치 은이 금보다 귀하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사랑보다 귀하다고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난이 사랑보다 귀하다고 하는 것이나 정의가 사랑보다 중요하다고 하는 것도 다 이런 가치의 혼란이고 전도입니다. 

둘째는 사랑을 하긴 하지만 온 마음과 온 정신과 온 힘으로 사랑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 중에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왜냐면 실제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아들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하느님의 일이 내 일에 항상 뒤로 밀리는 것입니다.

저만 해도 하느님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한 적이 많지 않고, 하느님 때문에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경우는 더 많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음식을 먹을 때 다 내가 먹고 싶은 대로 먹지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실지 생각지 않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먹거나 하느님 때문에 먹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정말 대단한 얘기를 합니다.

부스러기 사랑을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 당신을 항상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을 항상 갈망함으로써 목숨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지향을 당신께 두고 매사에 당신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생각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이렇게 얘기한 다음 “영육의 감각을 다른 데에 허비하지 않고 당신 사랑의 봉사를 위해서만 바침으로써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한 부스러기로도 우리를 채우나 우리는 부스러기 사랑을 하느님께 드려서는 아니 되고, 온 마음, 온 정신, 온 힘을 기울여 해도 부족합니다.

셋째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분리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 사랑인 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참 사랑이란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너를 위한 사랑입니다.

이 참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이웃은 분리되지 않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이웃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자기 사랑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배터리처럼 몇 번 사랑하고 나면 고갈되는 사랑입니다.

늘 하느님의 사랑으로 리필(refill)이 되어야 합니다.

보잘 것 없고 곧 고갈되고 말 사랑으로 억지 사랑을 하려 하니 힘은 힘대로 들고 얼마 안 가서 나가떨어지고 맙니다.

사랑은 대화다.

서인덕 신부님

아버지와 아들이 화상통화를 합니다. “우리 아들 커서 뭐가 될 거야?” “대통령!” “우리 아들 대통령 되면 이 아빠는 뭐 시켜줄 거야?” “탕수육!”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이지만 정작 상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이해를 바라고, 용서를 바랍니다.

그 기준은 나에게 향해 있으며, 사랑과 용서를 행해야 하는 사람은 상대인 것입니다. 정작 나는 받기를 바랄 뿐입니다.

내가 먼저 행하기보다는 더 많이 받으려고만 했던 저의 모습을 고백합니다.

먼저 내주기보다는 두 손을 움켜쥐고 있었던 제 자신을 반성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한번 떠올려보았으면 합니다.

그를 떠올렸을 때 그에게 준 것이 많았는지, 받은 것이 많았는지 헤아려봅시다.

받은 것이 많았다면 그에게 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는지도 생각해봅시다.

서두에서 아빠와 아들의 대화에서 무엇을 느끼셨나요? 그 대화가 만약 하느님과 나와의 대화였다면?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아들딸인 우리에게 물으신다면 과연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사랑. 이것을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부터 실천해야겠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에게 먼저 실천할 때 그 사랑은 더욱 큰 사랑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라, 사랑하라

배광하 신부님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막시밀리아노 콜베’(1894~1941) 성인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서슬퍼런 지옥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탈출한 수감자 때문에 차출되어 아사감방(물 한 모금 주지 않고 굶겨 죽이는 감방)에 끌려가던 10명의 수감자 중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한 명의 수인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었던 분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콜베 성인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는 예수님의 말씀을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콜베 성인 때문에 극적으로 살아난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랑과 은총의 주인공인 그의 이름은 ‘가죠프니체크’였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자신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으신 콜베 성인의 시복식에 참석하게 되고 영광스럽게 교황 바오로 6세도 알현하게 됩니다. 가죠프니체크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결하신 콜베 신부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어 내가 그분 죽음으로 덤의 생애를 살게 되었는데, 신부님의 숭고한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여 훗날 그분을 뵙기가 죄스럽습니다.” 

사도 성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에페 1, 7) 

진실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 많은 나를 위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끔찍한 죽음의 길을 가셨고, 그로 인하여 우리가, 내가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고귀한 사람이 나를 위하여 대신 죽음을 택하였다면, 우리는 남은 생애를, 그분 때문에 거저 얻어진 삶을 얼마나 더 잘 살아야겠습니까?

하물며 하느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음을 택하셨는데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얼마나 더 잘 살아야겠습니까. 실로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앞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드려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이지만, 미력하나마 우리의 전부인 사랑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분께서 전부를 다하여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씀을 뽑으라면 다음 말씀일듯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 27)

보잘것없는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 훗날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을 것을 뻔히 아셨던 하느님의 지극한 인간 사랑은 창조주인 하느님 모습으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을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까닭은, 당신을 볼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이 이웃들을 보면서 당신을 ‘보라’하신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사도 성 요한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 20)

내 곁에 있는 이웃은 바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대신 죽음에 보답해 드릴 수 있는 길은 이웃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구원으로 가는 길입니다. 

예전 어느 가수가 불렀던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랫말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어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로 갈 수 있다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지막 최종 목표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돌아가야 할 내 그립고 아름다운 별은 바로 하느님 나라, 그 별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별,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이웃이 하느님이고, 이웃이 예수님입니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의 가르침이 그러하고,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 가르침에서 엄히 지적하신 말씀이 그러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애덕송 기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근원이시며…” 사랑의 첫 발신지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의 전파를 받은 자녀들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은 보이는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

이기양 신부님

예수님께서 사두가이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통쾌해진 바리사이가 몰려와 예수님 속을 떠보려고 묻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 5절 말씀을 들어 답하시지요.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마태 22,37-38).

그리고 이어서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마태 22,3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웃과는 상관없이 혼자서만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은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또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웃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 당하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면 그 사람은 뭔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지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이웃 사랑이 결여돼 있다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사랑도 부족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를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요한1서 4장에는 오늘 복음이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이웃 사랑 방법은 참으로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도 이웃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해 주고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도 이웃 사랑일 것입니다.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 이 또한 하나의 이웃 사랑입니다. 오늘 저는 이웃 사랑의 한 방법으로 내 입장보다는 상대방 입장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가 자전거를 경매하는 장터의 맨 앞자리에 2달러 지폐를 한 장 들고 앉아 있었습니다. 경매 진행자가 첫 번째 자전거를 내 놓으면서 "값을 부르세요"하니까 그 꼬마가 "2달러요"하고 외쳤고, 다음 사람이 10달러, 그 다음 사람이 20달러를 불러서 자전거는 팔려 나갔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자전거가 경매에 나왔습니다. 꼬마는 다시"2달러요"하고 외쳤으나 그 자전거 역시 다음 사람이 15달러, 그 다음 사람이 25달러를 불러 팔려나갔습니다. 꼬마 옆에 있던 아저씨가 꼬마에게 넌지시 말했습니다.

"얘야, 자전거를 사려면 적어도 20달러는 가지고 와야 한단다."

꼬마가 대답했습니다.

"우리 아빠가 실직을 해서 돈을 벌지 못해요. 그리고 우리 엄마는 아파요. 오늘은 제 동생 생일인데 제 저금통을 깨서 자전거를 사주기로 약속을 했단 말이에요."

세 번째 자전거 경매가 시작됐습니다. 그것은 새 자전거였습니다. 꼬마는 다시 "2달러요"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아무도 값을 부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웃 사랑은 내 이익보다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먼저 배려하고 아껴주는 마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 골자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시고 좀 더 구체적으로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 실천을 통해 이웃 안에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는 한 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반성문 -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임현택 신부님

몇 해 전 우연히 읽은 노희경 작가의 글이다.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 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아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실연에 빠진 연인들이나 읽을 법한 이 글이 나에겐 종교적으로 다가왔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내 사제생활을 하면서 이런 지독한 보호 본능이 발동했으리라....

상처가 두려워서 사랑을 해야 할 때 뒷전이었고, 용기를 내야 할 때 고개를 숙이고 뒤로 돌아섰다.

본당 예산 절약한답시고 가난한 자에게 소극적이었고, 충돌이 싫어 입을 막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다. 사목의 주변에서 소외되거나 가난한 자들에게 미치도록 달려가거나 죽도록 사랑한 적도 없는 것 같다.

다 줘야 된다고 목청을 높였지만 주지 못했고,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했지만 최소만으로 체면을 유지했다.

‘지금 여기에’를 외쳤지만, 지금 여기서 우물쭈물 거렸고, 본받아야할 모범의 자리에 궁색한 변명으로 나를 포장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고 있을 때,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부끄럽다. 쑥스럽다. 얼굴이 빨개진다. 

예수님께서 오늘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말씀하셨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서 예언서의 골자이다.” 성경에는 전해지지 않으나 아마도 뒤이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한다. - 그리고 제자들과 군중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정신을 차려야겠다. 내가 왜 여기에 그리스도인으로 있는지, 왜 사제로 살아가는지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미치도록, 죽도록,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야겠다.

가장 큰 계명 – 참사랑

신은근 신부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 어떻게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것인가. 이스라엘은 율법 준수에서 답을 찾았다. 철저하게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이라 여겼다. 

계율에 충실할수록 그만큼 하느님 사랑에 충실하다는 논리였다. 그러니 율법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이 생각을 바꾸신다. 계율에 쏟는 정성을 이웃 사랑에 쏟으라는 것이다.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람을 사랑해야 하느님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이다. 율법의 자리에 사람을 놓은 것이다. 반발은 당연했다. 

예수님 제거까지 시도하였으니 당시 지도자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워 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율법보다 소중한 것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마음과 목숨을 다해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를. 너무 단순하게 모든 사람이라 생각해선 안 된다.

모든 사람을 그렇게 사랑할 순 없는 것이다. 우선은 나에게 맡겨진 인연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 가족이다. 그들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잣대라는 말씀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평생을 함께 해야 하는 가족이 사실은 가장 사랑하기 어렵다. 남에겐 잘하면서 가족에겐 잘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남에겐 친절하면서 가족에겐 까다로운 것이 인간이다.

왜 그럴까. 너무 쉽게 생각해서 그럴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 마음과 뜻을 다하라 하셨는지 모른다. 가족을 이렇게 대한다면 진정 사랑이 무언지 서로가 깨닫게 된다는 말씀이 아닐는지.

우리 삶의 이유는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그리하여 기쁨과 평화로 살기를 주님은 원하신다. 열정 없이 가능하겠는가. 어림없는 일이다. 그러기에 사랑을 위해 애쓰면 그분은 그런 방향으로 인생을 끌어주신다. 그분 역시 마음을 다해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해석은 참으로 많다. 그렇지만 아직도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다. 그 중 하나가 사랑의 욕심이다. 요구와 기대가 너무 많은 사랑이다. 힘든 인생에서 서로를 지치게 한다면 어떻게 참 사랑이라 할 수 있겠는가. 과욕이 사랑의 기쁨을 앗아간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망각한다.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 하셨다. 그건 바로 사랑에 노력을 쏟으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노력해야 참 사랑에 닿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냥 원하기만 한다.

마음만 먹으면 될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오는 사랑은 없다. 사랑도 결실인 것이다. 그리고 첫 단추는 욕심을 버리는 일인 것이다.

다섯 살 소녀가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 병은 소녀의 여덟 살 난 오빠가 얼마 전에 걸렸다 나은 병이었다. 소녀가 살 수 있는 길은 항체가 생긴 오빠의 피를 수혈하는 것뿐이었다. 의사는 오빠를 불러다 말했다.

네 피를 수혈해야만 동생을 살릴 수 있단다. 네 피를 동생한데 줄 수 있겠니. 그러자 소년의 눈에 겁이 서렸다. 잠시 망설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네, 선생님 그렇게 하겠어요.

수혈이 끝나고 한 시간 뒤, 소년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 선생님. 저는 언제 죽게 되나요. 그제야 의사는 소년을 사로잡았던 순간적 두려움을 이해하였다.

소년은 자기 피를 줌으로써 동생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참 사랑은 가족 안에서 먼저 이루어진다. 말씀을 실천하는 가정이 되자.

가장 크고 첫째가는

김영춘 신부님

인생의 경륜이 쌓이면서 제가 대답하기 싫어하는 종류의 질문이 있습니다. '가장' 또는 '최고'와 같은 수식어가 붙는 질문들입니다. 예를 들어, '신부님은 어떤 음식을 가장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곤란해집니다. 어떤 때는 한식이 좋지만, 어떤 때는 중식이, 어떤 때는 일식이, 어떤 때는 양식이 좋기도 합니다. 음식은 골고루 먹어야 건강한 것인데, 딱히 특정 음식을 집어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매운 음식 빼고는 다 좋아합니다'라고 두루뭉술하게 답변을 합니다.

본당에서 사목하시는 모 신부님은 몇몇 신자에게 자신이 최고로 좋아하는 음식을 솔직히 말했다가 후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구역반 모임에 갈 때마다 자신의 수저 앞에는 늘 그 음식이 올라와 곤혹스러웠다고 합니다. 실제로 '가장' 또는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는 질문은 즉각적으로 응해서는 안 되고, 시간적 여유를 갖고 신중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또한 답변을 할 때도 가급적이면 '가장'이나 '최고'라는 단정적 표현을 떼어내는 것이 현명합니다. 오직 한 가지만이 '가장'이나 '최고'가 될 수 있기에, 본의 아니게 그것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위험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질문을 받습니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는 표현대로, 그는 예수님의 답변에 시비를 걸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의 계명들이 613가지에 이르렀고, 바리사이들에게도 어떤 계명들이 보다 중요한가에 대한 일치된 견해가 없었습니다. 율법 교사는 그 많은 계명 가운데 예수님이 한 가지를 선택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저 없이 답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분명하게 덧붙이십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저는 이 표현에서 예수님의 강렬함을 느낍니다. 율법 교사는 시비를 걸려고 '가장 큰' 계명이라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가장 크고'에 덧붙여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단정적으로 답변하십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은 당시 율법의 613가지 계명에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둘째로 꼽으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 교사의 함정을 파놓은 질문에 빗대어, 시비 거리를 전혀 제공하지 않으면서도, 당시의 수많은 계명은 모두 제쳐 놓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훨씬 중요하고 큰 계명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더 나아가서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는 예수님의 표현은 사랑이 모든 계명과 가르침의 근본임을 극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최상급의 표현은 사랑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자 정체임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큰', '가장 우선적인', 그리고 '최상의' 계명으로 꼽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우리들 자신의 삶에서도 '가장 큰', '가장 우선적인', '최상의' 실천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하느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정지용 신부님

사랑이란 무엇일까? ‘함께’하고픈 그것이 아닐까? 함께 있고 싶고, 함께 하고 싶고,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두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하느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라고 표현해도 될까?

조병준이 저술한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 그 책의 내용은 저자가 인도 캘커타에 있는 마더 테레사 집에서 봉사를 하면서 만난 친구들과의 소소한 일상을 정리한 것이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봉사자들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매우 감동적이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바라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부와 명예와 같은 세속의 허물을 벗고, 고통 속에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하며 그 안에서 참된 사랑을 찾고 있었다. 이들이 이웃과 함께 하고자 하는 모습 속에서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이들이기에 이웃과도 함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 참 쉽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줄 모른다. 우리를 위해서 간도 쓸개도 다 내어주실 하느님이신데, 우리는 주는 대로 다 받아 누리면서 그것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종종 감사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늘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 모습이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평소에는 서로 웃고 인사도 나누며 다정한 사이였다가도,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바로 얼굴을 돌려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다른 사람이 누리는 행복, 다른 사람이 이룬 성공만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면서 ‘왜 저에게는 남들과 같은 선물을 주지 않으십니 까?’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의 불행과 실패를 보면서 하느님께 ‘남들의 불행과 실패를 왜 저에게는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말을 하지는 않는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함께’라는 생각만 하고 지낸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바로 내 옆에, 우리 곁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만 알고 지낸다면, 내 가족을 비롯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소중한 내 이웃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함께 할 때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주신 두 계명을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울긋불긋 아름답게 수놓인 산과 들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고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가족에게 맑은 미소를 보내보자. 이 세상이 왜 살만한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최고의 계명 ‘사랑’

홍금표 신부님

『사랑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되게 하는 것/ 그 사람이 「장미」라면 「장미」가 되게 하고/ 그 사람이 「호박」이라면 「호박」이 되게 하는 것/ 「장미」에게 「호박의 열매」를 요구하지 않고/ 「호박」에게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찾지 않는 것/ 「장미의 가시」를 받아들이고/ 「호박의 추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라네/ 왜냐하면 사랑은 「결심하는 의지의 행위」이기 때문이라네』 

제가 존경하는 어느 교수 신부님의 사랑에 대한 말씀을 제 나름대로 정리해 본 시입니다.

이 내용은 사랑의 이중 계명에도 똑같이 적용해 볼 수 있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느님과 맘몬(돈)의 대립 속에서 하나를 선택함으로 얻게 되는 기쁨 뿐 아니라 그로 인해 감수해야 할 희생과 아픔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그리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가지는 장점과 더불어 그의 한계와 부족함까지 받아들이는 용기, 다시 말해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 사랑의 삶은 성숙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너무나 유명한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율법서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 하는 어느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이웃 사랑」이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유다교의 잡다한 613가지 계명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가 하는 문제는 예수님 시대를 전후해서 유다교 식자들이 자주 논했던 주제였습니다. 

물론 통일된 의견은 없었지만 대개 으뜸 계명으로는 「황금율」이나 (율사 힐렐) 「하느님 사랑」을 으뜸계명으로 여겼고(보통의 유다인들), 때로는 「하느님 공경과 이웃사랑」을 기본 계명으로 보는가 하면(필로) 135년경에 순교한 율사 아키바는 「이웃 사랑」을 율법의 통일 원리로 간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보면 이들이 주장한 으뜸 계명과 예수님의 이중계명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여기에는 근본적이고 중요한 두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사랑의 이중 계명에는 율법의 비판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으뜸 계명을 다른 계명보다 중요시했을 뿐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계명을 비판하거나 무효화할 의도가 없었던 반면 예수님은 모든 계명을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환원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것에 저촉되는 율법은 과감히 상대화하거나 폐기시켰다는 점이 독특한 점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이웃 사랑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라고 이 두 계명을 연결시킴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쓰이는 「이웃」이란 개념도 유다인들이 동족을 「이웃」으로 본 반면 복음서는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들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점이 유다인들의 관점과 차이가 나는 점입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로 정의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의 민족주의를 넘어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랑의 이중 계명을 이야기하면서 한번쯤 생각해 보고 싶은 점은 왜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최고의 계명」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의 현장에서는 자주 실패를 경험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사랑이라는 문제에 접할 때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자신의 책임에 대해 눈감고 그 실패의 원인을 다른 무엇에 전가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이 실패했을 때 그 이유를 저 사람이 나를 화나게 하기에, 또 생활이 바쁘고 힘들기에 등등 다른 사람이나 생활 환경에 책임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환경들은 분명 나의 사랑의 삶을 방해해 왔고 방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책임져야하고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환경이 사랑의 삶을 어렵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위로를 얻기 위해 실패의 책임을 다른 사람이나 생활환경에서 찾고자 하는 노력을 중단하고, 힘들고 고통이 수반되겠지만 나의 선택에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실패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으려 노력할 때, 우리 신앙인의 최고의 삶인 사랑은 좀 더 성숙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인 사랑

전동기 신부님

‘사랑’이란 글자와 ‘사람’이란 글자는 비슷합니다. 단지 ‘o'과 'ㅁ'이 다를 뿐입니다. 둥글둥글 하고 원만한 ‘ㅇ'은 사랑답습니다. 모가 나 있는 ’ㅁ'은 그 때문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상처를 겪고 고통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는 듯해서 사람답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다 보면, 모가 난 ‘ㅁ’이 깎이고 갈려서 ‘사랑’으로 가까이 가지 않나 여겨집니다. 그리고 ‘사람’이란 말을 축약시켜보면 ‘삶’이 됩니다. 따라서 ‘사랑’과 ‘사람’과 ‘삶’은 서로 무관하지 않는 것 같고,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것은 참으로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고, 둘째도 이와 같다고 하시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계명, 둘째 계명으로 분류하셨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계명인 것입니다. 이웃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있을 수 없고, 만일에 있다면 그것은 위선적인 사랑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은 눈에 보이는 이웃 사랑을 통해서 잘 드러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여러분은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어디서 나오는지 여러분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사랑할 수 있는 그만큼, 여러분은 지상에서 하느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무슨 응어리진 것이 생각나면 먼저 그와 화해하고 예물을 바치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성체 조배를 하고, 미사에 참여하고, 피정을 하는 그 모든 것도, 하느님과 함께 나 자신 그리고 이웃을 언제나 염두에 두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도외시한 채 행한 묵상과 관상은 의미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그 이웃 안에 있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한다면 참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바로 그 순간 바로 거기에 하느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설사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웃사랑을 온 정성으로 실천하면, 그는 어떤 넘치는 기쁨을 느낄텐데, 그 기쁨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구별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된 하나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우리의 기도 안에서 항상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여기저기서 글줄깨나 쓰고 말발깨나 있다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싸움을 걸어옵니다. 만만치 않은 그분과 논쟁을 벌이며 자신들이 옳음을 관철시키려 하지만 그들의 약점과 허점만 드러날 뿐입니다. 그들의 지식과 권위와 명성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34절) 예수님과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논쟁은 사실 터무니없었습니다(23­-33절).하느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고 하느님께 몸 바친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이지만, 부활이 지상 생활의 복사판은 아니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치에 닿는 몇 마디 말씀에 사두가이들은 말문이 막혔고 군중들은 그 가르침에 다시 한 번 탄복했습니다(33절). 바리사이들은 부활 문제에서 사두가이들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데다 사이도 좋지 않았던 터라 이 소문을 듣고 내심 통쾌해했습니다. 모처럼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두가이들 코를 납작하게 만든 예수님을 만나러 우르르 몰려옵니다.

“그들 가운데 율법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35절) 바리사이들은 종교 규정을 완벽하게 준수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과연 예수님께서 얼마나 알고 계신지 떠보려고 합니다. 뭔가 속셈이 엿보입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36절) 아주 오래된 질문입니다. 힐렐 랍비는 모든 계명 가운데 황금률(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7,12참조)을 최고 계명으로 쳤고, 샴마이 랍비는 모든 계명을 빠짐없이 철저히 준수하라고 가르쳤습니다. 613개나 되는 율법 규정 가운데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다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는 이들입니다. 백성들은 이 복잡하고 어려운 율법을 암기할 수도 지킬 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적어도 어디까지는 꼭 준수해야 하는지가 고민이었습니다.그래서 이 질문의 요지는 어떤 계명이 율법 전체를 하나로 요약하고 한번에 지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절)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고백문을 인용하여 하느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여기서 약간 수정하십니다. ‘힘을 다하여’를 ‘정신을 다하여’로. 마음과 목숨과 정신은 인간의 온전한 존재 전체를 가리킵니다. 곧 하느님께 생명과 인생 전체를 바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율법 전체를 ‘사랑’으로 요약하십니다. 사랑은 의무와는 다릅니다. 기꺼이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동이며 기쁨이며 충족입니다. 의무나 책임으로 똘똘 뭉친 율법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사랑은 율법의 해방입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38절) 첫째가는 계명이란 모든 종교적 삶을 결정짓는 주된 계명을 말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39절) 둘째 계명 역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알려진 레위기의 이웃 사랑을 꼽으십니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이스라엘 사람들한테는 동포만이 이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웃은 제한이 없습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따져가며 하는 사랑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도 같습니다. 모든 이가 내 이웃이고 나도 모든 이에게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기회가 똑같이 주어집니다. 나와 이웃은 모두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인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가는 계명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계명입니다. 마르코복음서에서는 조금 다르게 얘기합니다. 율법학자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 예수님은 그의 슬기로운 대답을 칭찬하시며,하늘나라가 그에게서 멀지 않다고 하십니다(마르 12,34).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40절) 바리사이들은 율법에 관하여 물었으나 예수님은 사랑 타령이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충실성을 얘기하는데 하느님은 사랑의 충실성을 말씀하십니다. 사랑에 충실하다면 613개의 율법 규정을 준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계명이 성경 전체를 폐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예언서를 더 올바른 시각으로 보게 합니다. 성경 전체가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습니다. 

종교에 그토록 열정적이던 바리사이들은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들 스승들이 가르친 것과도 통할 것인데 묵묵부답입니다. 백번 옳은 말씀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속셈 따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은 진리만을 말씀하십니다. 입만 떼시면 한결같이 진리의 말씀이십니다. 사랑에 충실하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든 강제적인 법 없이도 응답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곧 예수님은 수난을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사랑을 실현하실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원수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웃을 용서하시고 그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십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고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순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몇 일 출장 같다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아이들과 축구시합을 할 때였습니다. 몇몇 아이들이 "왜 한참동안 안보였냐? 도대체 어디 갔다왔냐? 놀러 같이 가기로 해놓고 혼자서만 그렇게 돌아다니기냐?"며 따졌습니다.

또 한번은 점심식사 시간 무렵 손님이 와서 아이들과 식사를 못했던 날의 일이었습니다. 간식시간에 만난 한 아이가 "점심식사 때 왜 안 나타났냐? 나이 들수록 식사를 제때 해야된다"는 등의 일장훈시를 제게 한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살맛 나는 순간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순간들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런 아이들인지요? 저희 아이들의 모습과 말투, 삶에서 아주 가끔씩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워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너무도 상습적으로 써먹는 단어, 눈만 뜨면 외치는 단어이면서도 정확한 의미를 잘 모르고 있는 단어가 "사랑"이란 단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유별나거나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란스럽게 갖은 미사여구를 동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바로 관심을 가져주는 것입니다. 궁금해하는 것입니다. 점심은 먹었냐고 물어봐 주는 것입니다. 요즘 어떠냐고 물어봐 주는 것입니다. 하는 일은 잘 되냐고 물어봐 주는 것입니다. 어디 아픈데 없냐고 신경 써주는 것입니다. 도와줄 일은 없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축구시합을 끝내고 씻으러 들어갈 때의 일이었습니다. 응접실에 불이 켜져있길래 들어갔더니 기숙생 친구 한 명과 면회 온 형이 앉아있었습니다. 얼마나 다정해 보이던지요?

형은 동생을 위해 없는 용돈을 쪼개 프라이드 치킨이며 피자며 잔뜩 사 가지고 와서 풀어놓았고, 동생은 신이 나서 먹으면서 형과 저보고도 먹으라고 했습니다.

두 살 차이인데도 형은 참으로 듬직해 보였습니다. 듣자하니 형은 동생을 만나기 위해 오후 4시에 도착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동생은 뮤지컬 젠베르데 공연을 보러 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 8시나 되서야 돌아왔던 것입니다.

"한참 기다려야 되는데...어쩌나"하는 사무실 직원의 걱정에도 형은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동생 얼굴 한번 본다면 그까짓 몇 시간 기쁘게 기다릴 수 있다고 말했답니다.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투자가 필요합니다. 그 투자는 다름 아닌 상대방을 향한 자기 희생, 상대방을 위한 인내, 상대방을 향한 배려, 상대방을 향한 친절입니다. 이런 사랑의 요소들-희생, 인내, 배려, 친절-바탕이 되지 않은 사랑은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살아생전 좋은일 했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느냐

먼저 오랜만에 인사를 올립니다. 저 빠다킹 신부, 지난번에 공지했던 대로 여름휴가 잘 다녀왔습니다. 8월 18일부터 21일까지 3박 4일 동안 제주도 일주 자전거 여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밤늦게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서 김포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새벽을 열며 묵상 글도 이렇게 늦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웬만하면 새벽 묵상 글은 빠짐없이 보낼 텐데, 이번 자전거 여행은 저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닌 자전거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고 인터넷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해서 묵상 글과 아침문자를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공지를 했고, 또한 8월 18일 새벽 묵상 글에도 이 내용을 공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지 내용은 전혀 보시지 않고 ‘왜 새벽 묵상 글과 아침문자를 보내주시지 않습니까?’라는 항의성의 메일과 문자 그리고 쪽지가 많이 도착해 있더군요. 약간의 서운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특히 아침문자 받는 분은 새벽 메일을 무조건 받아야 하기에, 분명히 아침문자가 오지 않는 이유를 새벽 카페에 들어오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러한 서운한 감정을 갖다보니 문득 제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들을 비판하고 있지만, 이 비판 역시 저의 주관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제 입장에서만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려고 했던 것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옳고, 다른 사람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들. 바로 내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에 대해서는 엄격한, 지극히 이기적인 저의 모습인 것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수많은 율법의 조항 중에서 어떤 계명을 가장 으뜸으로 생각해야 하냐는 질문인 것이지요.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의 핵심을 꼬집어서 말씀하시지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사랑’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나의 모든 생활이 이 사랑에 맞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에 대한 사랑에만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내가 아닌 하느님에 그리고 내가 아닌 나의 이웃에 사랑의 초점이 맞춰 있어야 하는데, 내 자신에게만 맞춰 있어서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내 마음에 언제나 꼭 맞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하긴 내 자신에 대해서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 대해서는 늘 만족스럽길 바랍니까? 이것 또한 하나의 큰 욕심일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만이 바로 주님의 뜻대로 사는 모범적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세요.

나는 이렇게 부탁했다('미국 뉴욕의 신체장애자 회관에 적힌 글' 중에서)

나는 신에게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신에게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난 가난을 선물로 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재능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난 열등감을 선물로 받았다.

신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나는 신에게 모든 것을 부탁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내게 삶을 선물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선물받았다.

나는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이다.

살아생전 좋은일 했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느냐

어떤 게으른 신자가 주일 미사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꼭 성당에 가야만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지요? 제가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성당에 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랑 가득하신 당신께서는 오늘 저에게 미사를 참석 한 사람보다도 더 멋진 메시지를 전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따라서 저는 지금 눈을 감고 성경을 어느 곳이든지 펼쳐서 손가락으로 딱 짚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제게 주신 것으로 믿어 그대로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좋은 말씀을 주소서. 물질의 복을 받으라든지, 장수의 복을 받으라는 그런 말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 그는 성경을 펼쳐서 손가락으로 아무 곳이나 딱 짚었습니다. 근사한 말씀이 나올 줄 알았지요. 그러나 그가 짚은 곳에는 이런 구절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마태오 27,5)

그는 깜짝 놀랐지요. 그래서 하느님께 따지듯이 말합니다.

“하느님, 어쩌면 이럴 수 있습니까? 제가 좋은 것을 달라고 했지, 이렇게 나쁜 대목을 달라고 했습니까?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진짜로 좋은 것을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성경을 펼쳐서 손가락으로 아무 곳이나 짚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런 대목이 나왔다고 하네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가 10,37)

우리들은 이렇게 자기 위주의 생각과 판단만을 고집합니다. 심지어는 하느님께도 내 생각과 판단을 따르라고 강요한 적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성당에 나가지 않겠다는 협박도 어떤 분에게 종종 듣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 “선생님, 율법들 중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라는 질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사랑의 계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느님과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만을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끊임없는 욕심을 부리고 있으며, 그 욕심으로 사람들과 하느님을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고양이와 개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웁니다. 그 이유를 서로 신호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어떤 인류학자가 설명을 했습니다. 즉,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기분이 나쁘면 꼬리가 아래로 내려가는데, 고양이는 정반대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지요.

개가 고양이에게 “I Love You~~”하면 사랑을 표시하면서 꼬리가 위로 올라갑니다. 하지만 꼬리가 위로 올라가면 고양이에게는 기분이 나쁠 때라는 표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고양이는 “왜 너는 나만 보면 기분이 나쁘다고 하는거야?”하면서 개에게 달려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달려드는 고양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서로 만나면 싸운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방법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자기만의 신호를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간직하고 있는 욕심과 이기심이라는 신호를 버릴 때만이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나만의 신호가 담겨있지 않은 진짜 사랑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싸우는 이유는 서로 신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신호를 맞춰서 싸우지 맙시다.

사랑하는 이가 있기에(퍼온 글)

삶이 힘들어 지칠 때면 나는 얼른

나를 사랑하는 이가 있음을 기억해 냅니다.

그러면 새 힘이 생기고 삶의 짊이 가벼워 집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나의 가장 큰 힘입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미움이 일어날 때면 나는 얼른

나를 사랑하는 이가 있음을 기억해 냅니다.

그러면 미움이 사라지고 다시 사람을 신뢰하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나의 가장 큰 힘입니다.

슬픔과 아픔이 나를 휩쌀 때면

나는 얼른 나를 사랑하는 이가 있음을 기억해 냅니다.

그러면 슬픔이 옅어지고 아픔이 치료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나의 가장 큰 힘입니다.

외롭고 쓸쓸하다고 느껴질 때면

나는 나를 사랑하는 이가 있음을 기억해 냅니다.

그러면 외롭고 쓸쓸함이 썰물처럼 밀려가고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정다운 모습이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나의 가장 큰 힘입니다.

좌절하고 낙심될 때면

나는 얼른 나를 사랑하는 이가 있음을 기억해 냅니다.

그러면 좌절의 늪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소망의 언덕에 서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나의 가장 큰 힘입니다.

일이 잘 안되고 실수하여 야단맞을 때면

나는 얼른 나를 사랑하는 이가 있음을 기억해 냅니다.

그러면 나의 부족함이 깨우쳐지고 겸손한 자세로

새로운 다짐과 노력을 하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나의 가장 큰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