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간은 발정기가 정해져있지 않을까

과학의 언어

말 나온 김에 했던 이야기를 조금 더 정리하자면.

하품이 왜 일어나는가? 이런 것도 제대로 입증을 못하는게 기존의 과학임. 구조로 보지 않기 때문. ‘아니다. 그거 사실은 다 증명되어 있다. 니가 몰라서 그렇지’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 말의 맥락은 유효한 것.

어떤 학자가 상당한 연구비를 타먹고 ‘아기는 왜 옹알이를 하는가?’ 답.. ‘말을 배우기 위해서다.’ 우와 이거 엄청난 발견이다. 이것도 사실은 의미있는 연구야 하고 큰 소리 칠 수는 있겠지만, ‘놀고 있네’ 하는 비웃음을 사도 할말없음.

아기는 말을 배우기 위해서 옹알이를 한다. <- 이건 과학 아님. 그것은 사과는 무겁기 때문에 떨어진다는 말과 똑같은 것. 그렇다면 만유인력은 뭐냐고요? 사과는 무겁기 때문에 떨어진대매? 답 나왔네. 됐잖아? 그러나 답은 나왔는데 그게 쳐주는 답은 아님. 안쳐줌. 다른 분야에 응용할 수 있는 보편성 없기 때문.

하품을 왜 하는가? 뇌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서.(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런 말 많음.) 이게 사실이다 해도 이건 애초에 과학이 아님. 왜? 위하여니까. 위하여 어쩌구 하면 무조건 비과학임. 의하여가 맞음. 과학은 과학의 언어를 써야 하며 그것은 위하여를 배척하는 것임.

of(원인) by(제어) for(결과)

이러한 인과의 메커니즘을 드러내야 과학임. 하품이나 기지개나 같은 원리인데 기지개는 뭐 근육에 산소를 공급하려는건감? 하여간 이게 맞든 안맞든 이런 수준은 애초에 과학이 아니라는 거. 왜? 과학의 언어가 아니니까. 모든 ‘위하여’는 일단 비과학임.

이렇게 말하면 ‘과학인지 아닌지를 왜 니가 정하냐?’ ‘그거 과학인 것으로 다 되어 있다. 몰랐냐?’ 이런 식으로 나오면 대화 안 되는 거. 이 글은 과학의 패러다임, 방법론 전반에 걸쳐서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글임.

불확정성 원리나, super string 이론에 이러한 대칭성 개념이 적용되었는지 모르지만, 하품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칭성 개념을 적용 안 하고 있는게 사실. 그러니 물새가 왜 한쪽다리를 들고 있는지 모르는 것. 발이 시려서 한쪽다리 들고있는 물새도 아마 있기는 있을 것. 그러나 넌센스. 애초에 번짓수 잘못 짚었음. 그거 과학 아님. ‘위하여’는 무조건 과학 아님. 설사 발이 시려서 그랬다는게 사실로 밝혀졌다 해도 그거 과학 아님.

어떤 이유로 물새가 한쪽 다리를 들었든 상관없이, 애초에 물새는 한쪽다리를 들고 서도록 구조가 세팅되어 있었다는게 과학임. 물새가 먹이를 포착하려면 돌부처처럼 움직이지 않아야 물고기가 꼬이는데, 두 다리로 서면 반드시 꼼지락거리고 움직이게 됨. 왜? 뇌의 영역간에 충돌이 일어나. 두 다리 사이에 체중 배분해야 하므로 뇌가 피곤함. 바람은 불고, 물살은 세고, 물고기는 다 눈치채고 그러므로 한 다리로 서야 함.

새가 왜 날지? 날고 싶어서. 이건 과학 아님. 날개가 있으니까 나는 거지. 날고 싶다고 다 나는감? 필연적이고 구조적인 메커니즘을 가지고 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 그리고 이러한 메커니즘은 인과의 대칭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거.

과학 안에 이런 식의 비과학이 매우 많다는 거. 무조건 구조의 필연적 대칭성을 기초로 해서 논리가 전개되어야 함. 상부구조에 의하여라야 함. 상부구조가 제시되어야 함. 새가 한쪽다리로 선다면 상부구조는 뇌의 의사결정이고 하부구조는 다리, 체온 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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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은 발정기가 정해져있지 않을까

이 사진의 사람들은 자신이 목을 길게 빼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왜 사람들은 미녀 앞에서 목을 빼는 것일까? 1) 목을 길게 빼면 롱목미남으로 알고 여자가 데이트 신청을 할 것으로 착각해서. <- 기존의 과학은 이 수준.

대칭성 원리가 불확정성 원리나 초끈이론에만 적용될 성질의 것은 아니고 어디에나 적용되는 보편원리라는 것.

AB형은 이유없는 행동을 한다. <- 이런 말은 어떤 일본인의 장난이 아니고 최근 우리나라 웹에서 떠도는 표현일 것. 대칭성으로 본다는 것은 이게 AB형의 판단이 아니고 AB형 아닌 사람들의 판단이라는 것. AB형 자신은 다 이유가 있지. 이유없는 행동이 어딨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판단했다는 거. 이게 대칭성. 바넘효과는 자기판단에 해당됨. 대칭성은 타인의 판단이므로 해당안됨. A형이 어떻다거나 B형이 어떻다거나 다른 혈액형이 공격하는 말임. 이러한 공격행동은 실제로 존재한다는 거. 거기에 이유가 있다는 거.

비과학-선동렬은 야구를 잘 한다.(바넘효과 작동-주관)

과학 - 선동렬은 최동원보다 야구를 잘 한다(대칭성 있음-객관)

기존의 과학은 이러한 대칭성이 전혀 적용 안 되고 있으므로 엉터리라는 거. 전여옥이 일본은 없다에서 일본인 어떻다고 썼는데, 그거 다 모르고 하는 소리임. 예컨대 ‘일본인은 때를 밀지 않아서 몸에 때가 많다.’ 전여옥이 그렇게 썼는데 과연 그런가? 그렇든 아니든 그게 본질이 아님. 한국인이 그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한국인의 눈에 그게 띄었다는게 본질임. 즉 일본인이 과연 몸에 때가 많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떠나 한국인이 거기에 신경쓰는건 백프로 객관적 과학이고 사실임. 한국인이 일본에 콤플렉스가 있으니까. 혐한류도 마찬가지 자기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거.

한국에 온 미국인은, 한국인은 다 옥수수광이다. 심지어 식빵에도 옥수수를 촘촘히 박아서 먹는다. 한국에서 내가 먹은 거의 모든 음식에 옥수수가 들어있더라. 이건 착각임. 전혀. 한국인은 워낙 빵을 안 먹고, 샌드위치를 안 먹기 때문에 빵가게들이 옥수수라도 박아서 팔아볼까 하는 것. 즉 한국인은 옥수수광이다. 빨간모자 피자에 옥수수가 박혀있어서 먹다가 버렸다는 미국인 판단은 착오. 그러나 미국인에게 그게 문제가 된 것은 백퍼센트 사실. 미국인 판단은 착오지만 그 안에 과학적 진실이 숨어 있는 것. 기존의 과학 방법론은 이러한 점을 보지 못함. 그냥 미국인 착각이다. 끝. 이런 식. 이건 뭐 사과가 무거워 떨어진다는 식. 비과학임.

한의학에서 뭐는 몸에 좋다.. 실제로 그럴수도 있지만 그게 과학 아님. 메커니즘을 드러내야 과학임.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 사실이 그렇다 해도 조상의 지혜일 뿐 과학 아님. 그런 개별적인 경험의 집합을 과학이라 하면 곤란.

기압이 떨어지면 벌레가 빗방울을 피해 풀잎 뒷면에 숨고, 따라서 제비가 벌레를 찾으려고 낮게 난다. -> 이건 과학임. 대칭성 있음. of(원인) by(제어) for(결과) 작동.

1+1=2 이건 굉장히 고도의 함축이 들어가 있음. 이 안에 엄청난 방정식이 숨어 있다는 말. 이걸 알아먹는다면 이심전심이 통해서 직관으로 알거나 아니면 경험으로 아는 것. 그냥 사과 둘 갖고 와서 하나, 하나 자 둘이지? 맞지? 이건 과학이 아님. 이런 식으로 배운 산수는 산수에 지나지 않는 것. 1+1이 2가 되는게 아니고 2를 1+1로 정한 것. 이건 대칭성. 윷놀이 말판에서 오른쪽으로 가는게 +, 방향을 바꾸는게 -, 지름길로 가는게 곱하기, 그 반대로 가는게(윷말판에는 없지만) 나누기. 이런 전체의 모형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거. 그래야 대칭성이 작동하기 때문. -를 빼기라고 아는 한 착각. 방향전환이 맞는 거.

대칭성은 모형 안에서 작동하는 거. 모형을 가지고 출발해야 과학임. 모형 안에서 포지션 지정으로 봐야 과학임. 그냥 더하기 빼기식의 접근은 비과학.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고 어쩌고 봉건지주가 농민을 착취하고 어쩌고 이건 사회주의권에서 쓰는 표현인데 과학의 언어가 아님. 감정이 들어가면 과학 아님. 콜롬부스가 남미에서 옥수수 감자 토마토 고추 담배 등을 들여와서 농업소득이 늘고, 따라서 인구가 늘고, 따라서 농민의 발언권이 커지고, 시스템구조 상 지배집단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버리고 이게 과학임. 메커니즘을 드러내는게 과학. 모순은 착취 때문에 있는게 아니고 생산력 증가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 생산력의 증대에 따른 집단의 의사결정 방식의 변화가 사회발전의 핵심동인.

생산력 증대(하부구조 변화)->의사결정구조 변화(상부구조 변화)

이건 대칭성 있으므로 적어도 과학적 표현이지만 내용은 마르크스의 착각임. 실제로는 의사결정수 수단인 금속활자가 먼저 보급됨.

의사결정수단의 변화(상부구조 변화) -> 생산력 증대(하부구조의 변화) 

상부구조가 먼저 변하고 하부구조가 뒤이어 변한 것이며 의사결정구조 변화가 먼저 일어남. 다만 정치판에서 적용되는건 다른 범주인데 이건 전지구적인 사건의 등장->지역으로 파급. 그러므로 이 역시 상부구조에서 하부구조로 이행함.

자본의 발달에 따라 지구적 차원의 문제 등장(제국주의 경향) ->봉건왕조 타도

봉건시대에는 생산이 국경 안에서 일어났으므로 국가적 의사결정구조가 작동하지 않음. 그러나 자본의 발달에 따라 남의 나라 기름을 빼오므로 지구적 차원의 의사결정 문제가 먼저 대두 -> 국가의 의사결정구조 변화(정치적 혁명)

여전히 전체의 변화->부분의 변화, 상부구조에서 하부구조로 진행함. 이러한 전개는 계속 구조의 대칭성을 따라가는 거. 착취니 분노니 이런 말 나오면 봉건언어로 퇴행.

과연 과학이 과학의 언어를 쓰고 있는가? 아님. 여전히 감정 들어간 봉건언어를 쓰고 있음. 아직도 ‘위하여’ 타령하고있음. 여전히 사과는 무겁기 때문에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음. 하품을 하는 이유가 뭐라고 밝혀지건 간에, 아기가 옹알이를 하는 이유가 뭐라고 발표하건 간에 그건 한의사가 ‘몸에 좋다’고 말하는 수준. 그건 비과학.

과학-이게 이렇게 되면 저건 저렇게 된다. 

비과학- 인삼 녹용 당귀 마황은 어디에 좋다.

세 남자가 미녀 뒤를 따라가면서 목을 길게 빼고 있는 이유는, 뇌의 판단을 몸이 흉내내어 따라하는 메커니즘이 존재하기 때문임. 하품을 하거나 기지개를 켜는 이유도 이 원리가 작동한 것. 전체가 모두 맞물려 하나로 되어 있으므로 뇌의 작은 판단이 몸 전체에 곧바로 영향을 미침. 아기가 저절로 말을 배우는 이유도 이 원리에 의해 일어남. 옹알이도 이 견지에서 접근해야 함. 부바키키현상으로 입증됨. 물새가 한쪽다리를 서는 것도 마찬가지임. 물새가 한쪽다리를 드는 이유는 알겠는데, 세 남자가 목을 왜 빼는지는 모르겠다면 그게 어째서 만유인력이겠느냐고. 

한줄에 꿰지 않고 각개약진하면 과학 아님. 전체의 모형 안에서 각기 포지션 지정 아니면 과학이 아님. 현대과학은 과학인가? 아님. 연금술 수준에 머물러 있음. 물론 불확정성 원리인지 초끈이론인지 따위에 대칭성이 적용되고 있다 해도 학계 전체의 패러다임이 여전히 봉건에 머물러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