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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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셨을까
왜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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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셨을까
  
왜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셨을까

왜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셨을까

출처 : 마님(2015)_네이버 영화

실 '마님은 왜 돌쇠에게 쌀밥을 주었을까?' 질문에 대답하기 전, 이 시답지 않은 질문에 다시 한번 반문해야 한다. '마님은 이쁘냐?' 장난스러운 질문에 사뭇 진지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원초적 본능'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솔직하게 끌어낸 질문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좋은 삶은 '나의 본능에 충실할 수 있는 삶'이다. 우리의 삶은 모든 순간이 실전이다. 한 번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다. 이렇듯 일회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면, 본능에 충실히 응답하며 세상에 '나'를 표현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본능에 충실하게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홀로 사는 위험보다 '함께' 무리 지어 살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사회 속에 편입될 때는 꼭 지켜야 하는 최소의 기준이 있다. 그것을 '법'이라고 말하고 '윤리'라고 부른다. 여기에 '눈치'가 하나 더 들어간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사회 속으로 들어갈 때 '과도하게 눈치'를 본 나머지, 자신의 본능과의 교류를 끊고, 타인과의 교류에'만' 집중한다. 내 마음을 헤아려 움직이는 것이 아닌, 타인의 마음에 '들게'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의 문제는 욕구 불만족이라는 장애로 우리 안에 공허의 유산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왜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셨을까

공허함은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다. 원초적인 본능을 막아 놓은 채 거짓된 욕구로 자신을 치장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공허함을 채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용기 내야 한다. 공허함을 채우려는 허례허식을 떨치고, 공허함을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분단된 자신의 본능과 교류를 이어나가는 솔직한 악수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욕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깊숙한 내면의 울림에 귀 기울여보자.

목표라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사소한 욕망에서 잉태된 감정의 배설물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욕망의 물레 방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욕망'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목표'를 설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경험'이라는 부산물을 얻게 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우리는 '성장'을 한다. 성장을 하면 처음에 잉태되었던 감정의 부산물보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할 수가 있게 된다.

왜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셨을까

욕망의 물레방아

왜냐하면, 최초의 욕망을 가졌던 '나'보다 성장을 했기 때문에 처음 목표를 가졌을 때와 다른 '눈높이'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최초의 욕심을 가졌을 때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나의 세상을 조망할 수 있기에, 나의 욕망을 더 자세하게, 더 밀도 있게 실현시킬 수가 있게 된다. 즉 목표라는 것은 나의 본능을 충실하게 정제하며 현실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본능의 실현 수단이다.

그런데 이 한 바퀴의 물레 방아가 돌아가고, 다음 바퀴를 돌리려 할 때 자신이 성장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한 판별법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알아야 다음 바퀴를 돌릴 수 있는 자격이 생길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판별법이라는 것은 의외로 쉽다 심지어 너무 쉬워서 의아스러울 것이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에게 있어, 최고의 장애물은 '불안'이다. 그 불안이 내가 이 목표를 하는 것이 맞는지 틀린 지에 대한 의구심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의구심'이 '성장했다'라는 작은 증거다. 앞서 말했듯 과한 '눈치'는 '자신'을 잃게 만든다. 하지만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을 본능을 드러낼 때의 불안함... 그것이 '의심'이라는 '성장통'이다. 그렇다면 이 의심이라는 성장통이 우리를 어떻게 아프게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

왜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셨을까

출처 : 아가씨(2016)_네이버 영화

우리는 '인생의 주인'으로 너무 짧게 살아왔다. 어릴 적에는 부모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학교를 다닐 때는 선생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직장에서는 상관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의 삶에 주권을 찾는 즉시 '타인의 욕구의 식민지'로 살아간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런데 목표를 도달하는 데 있어서... 타인의 욕구의 식민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를 도달할 수 있는 쉬운 길 일수 있다.

왜 그럴까? 누가 길을 알려주면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느 정도의 보장된 성과를 얻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의 '대가'는 크다.나의 자유를 타인에게 넘겨주고, 타인의 '욕망의 도구'로 자신을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그 길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책임'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타인이 시켰으니, '책임'질 것이 없다? 그런 게 아니다 감정적인 책임소재를 상대방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망가지는 것은 '나'인데, 망가지면서도 감정적으로 누군가에게 '탓'을 돌려 '자신은 죄가 없다' 말하는 거짓된 순결함을 취하는 우리 자신의 못된 성미를 꾸짖고 싶다.

마님이 돌쇠에게 쌀밥을 주는 이유 또한 돌쇠를 자신의 '욕구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수순인 것이다.

왜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셨을까
왜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셨을까

출처 : 인간중독(2014)_네이버영화

인간은 욕구에 의해 움직인다 그리고 욕구를 일으키는 자극에 의해 또 다른 욕구로 연결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욕구와 욕구 사이를 오가는 선택을 하며 자신의 본능을 은유적 표현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쾌감을 느끼는 삶에 중독되며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쉬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제되지 않은 감정으로만 분출시킨다면 짐승과 인간의 차이를 없애는 '인간실격'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법과 윤리라는 최소한의 기준을 지키려 한다. 이때 영악한 자는 편법을 수반한다.

왜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셨을까
왜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셨을까

출처 : 인간중독(2014)_네이버영화

김대우 감독의 <인간중독>에서는 크게 두가지 유형의 캐릭터가 존재한다. 욕구를 적극적으로 취하려는 자(온주완,조여정), 욕구를 실행시키는 자(임지연,송승헌)와 같은 능동적인 캐릭터와 수동적인 캐릭터들이 각각 존재한다. 여기서 영화의 주인공인 송승헌과 임지연은 그들의 욕망을 실현시키려는 꼭두각시로 등장한다. 포스터를 봐도 그것을 느낄수가 있다. 왼쪽 포스터에서는 온주완이 의자 위를 군림하듯 위압적인 모습으로 헐벗은 임지연(시스루의 의상, 벗겨진 구두)의 위에 서있고, 침대 위에 있는 조여정은 침대 위의 강함을 표현하기위해 섹시함으로 무장하면서도, 지적인 모습(안경과 책), 결혼반지(속박의 증거)를 강조하며 송승헌의 뒤에 앉아있는 장면이 각각의 캐릭터들을 잘 표현한 포스터로 영화의 내용을 암시해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 보듯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영악한 자는 타인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혼자보다 '타인과 함께' 할때 더 효율적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에 '타인과 함께'라는 말은 분명 부정적인 의미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과 함께'라는 단어보다 '타인을 이용' 한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적합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가 타인을 도와준다고 생각하는 것'과 '이용당한다'는 차이는 쉽게 구별하기란 힘들다. 그것이 우리의 미래처럼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모호함'을 강조하고 싶어 저렇게 표현했다.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모르는 것에 불안함을 느껴 '모르는 것'에 더 집중한다. 그래서 불확신한 점을 견디기보다는 타인이 알려주는 효과적인 방법 또는 효율적인 정답을 듣고 그것을 맹목적적으로 따른다. 나에게 맞든 맞지않든... 그리고 나에게 맞지 않다면, 그를 욕하고 다른 타인의 방법을 따른다... 물론 타인의 좋은 것을 배우고 따르는 것은 훌륭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적한 부분은 타인의 것을 '맹목적'으로,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자신'이 없는 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주체성'이 분명하게 들어난다...

왜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셨을까

가을에 단풍을 보고 쓴 나의 '시'이다. 낙엽이 펄럭거리며, 땅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내려오는 그들의 모습이 웅장해보여서 썼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 시를 써보겠다 마음 먹고 하루를 낯설게 살아보니 세상이 온통 '시'로 가득찼다. 낙엽이 떨어질 때 이전에는 하나의 낙엽일 뿐이라 여겼는데.. 이 녀석들을 낱낱이 들여다 보니 제각기 다른 크기와 다른 색깔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나뭇잎들은 나무라는 사회 안에서 제각기 생존을 위해 투쟁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을 맞으며, 차가운 비바람에 맞서며, 그들은 나무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떨어지기전 자신의 풍파의 세월을 보여주듯 단풍이라는 색(色)기로 자신을 찬한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낙엽은 하얀 눈에 뒤덮여 자신을 거름으로써 자기가 나고자란 나무로 다시 귀의한다. 그들의 생명은 다음 잎사귀에게 퍼질것이다. 참으로 격정적이게 살아온 그의 찬란한 유산이다 그것을 나는' 색(色)기있네'라는 시어로 은유한 것이다. 우리의 삶도 저 낙엽과 다를바 없다... 이제 이 글을 읽은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묻고 싶다.

봄의 기운을 받아 나뭇가지에서 태어난 잎사귀

여름의 격정을 이겨낸 찬란한 나뭇잎

가을의 시련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던 찬란했던 낙엽

나무에서 떨어 진것인가?

나무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 인가?

차이는 이것이다.

'능동적'으로 나의 본능을 '표출'할 것인가?

'수동적'으로 타인의 본능을 따라갈 것인가?

이 차이를 깨닫고 된다면, 당신의 삶을 좋은 삶으로 이끌어줄 '실마리'를 얻게 되는 것이라 여기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