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발전하면서 사람은 왜 육체노동을 기피하는가

기독교적 노동관

손 봉 호

<어려워진 경제상황>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노동문제가 심각한 반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노사분규가 많이 일어났고, 임금은 많이 올랐으나, 생산성은 떨어지고 있으며, 실업자는 상당수 있고 24세 이하의 실업률은 해마다 늘어나는데도 불구하고, 필요한 노동인력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라 합니다. 어려운 생산직에는 인력이 턱없이 모자라고 써비스 업종에 노동력이 모인다 합니다. 많은 공장에서는 주문을 받아 놓고도 약속한 기일내에 제품을 공급하지 못하고, 어떤 회사에서는 외국의 주문을 아예 거절하지 않을 수 없다 합니다. 그래서 국제 경쟁력이 떨어져서 수출이 잘 되지 않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 경제의 전망을 매우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상승하고 생산성이 떨어지는것은 사회복지 정책이 잘 되어 있는 선진국의 전형적인 현상이기때문에, 우리에게도 불가피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 선진국 문턱에 들어서지도 못했는데 이런 현상이 오고 있으며, 그렇게 되는 원인에는 선진국들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어서 걱정됩니다. 선진국도 아니고 복지정책도 충분히 시행되고 있지 못한데 벌써 이런현상이 생기니 우려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전만 해도 외국사람들이 한국인들은 워크홀릭 (workholic) 에 걸렸다고 야유 반 부러움 반 말했습니다. 즉 알콜 중독증에 걸린 것이 아니라 노동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정신없이 일만 한다는 인상을 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갑자기 임금은 아세아에서 가장 많이 올라 갔는데 생산성은 가장 떨어져서, 이제 소위 아세아의 네마리 용 가운데 한국은 용이아니라 지렁이란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어떤 분들은 그 책임을 좌익운동에다 돌립니다. 좌경사상을 가진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노동자들을 부추겨서 노동자들이 정치적이 되고 분수에 넘치는 권리를 요구하게 되었다고 분통을 터트립니다. 그런 설명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우리나라 근로자들이 과거에 정당한 대가와 올바른 인간 대접을 받지못했다는 사실도 우리가 솔직히 인정 해야합니다. 우리 경제가 이만큼이라도 발전한것은 물론 기업가들의 피땀흘린 노력에도 힘입은바 크지만 주로 노동자들의 희생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기업가들은 그래도 물질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어느정도의 보상을 받았지만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노력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정의감이 강한 학생들은 그러한 불평등을 노동자들에게 의식시켰고, 거기서 생긴 불만이 민주화 과정을 통해서 한꺼번에 폭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우리가 언젠가 반드시 한번 거쳐야할 과정이기 때문에 비록 어렵기는 하지만 견뎌낼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계속해서 고도성장을 해오고 무역수지도 몇년 흑자를 기록하다가 다시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 섰기때문에 우려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책임이 단순히 노동자에게만 있는것이 아니라 기업가들에게도 있다고 합니다. 기업이 흑자를 낼 때 기술개발에 투자하기보다는 부동산에 투자했고, 값산 노동에만 의존해서 기업을 경영해 왔기때문이라 합니다. 어쨋든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은, 많은 외국인들이 부러워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낙관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판단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가져온 요건들 그 자체들이 매우 부정적인 것들이기때문에 더욱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경제침체외에 다른 많은 문제들을 동시에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때문입니다.

<잘못된 노동관>

 지금의 심각한 경제상황의 가장 중요한 원인가운데 하나를 우리 국민들이 가진 노동관의 취약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우리 경제현실에 벌어지고 있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좌경운동, 노동자, 혹은 기업가들이 모두 부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다 기본적인 것은 우리의 전통 문화에 건전한 노동관이 존재하지 않았고, 최근에도 노동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와 태도가 형성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기업활동도 노동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노동관은 올바른 기업관도 포함합니다.

 노동이라는것은 육체노동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생산적인 활동을 다 포함하는 것인데, 우리의 기업가들도 노동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노동관을 갖고 있지않습니다. 노동자들이나 기업가들이 가지고 있는 건전하지 못한 노동관때문에 오늘 날 노동자들은 근로의욕을, 기업가들은 기업의욕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 건전하지 못한 노동관이란, 지극히 상식적인 것으로, 모든 일이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위해서만 하는 것이며, 그 대가란 어디까지나 돈의 액수로 산정되는 경제적인 보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노동관에 의하면, 사람은 생존하고 향락하기 위하여 돈이 필요하고, 그 필요한 돈은 노동을 통하여 번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한국의 노동자들과 기업가들은 이 지극히 상식적인 원칙에 의하여 활동해 왔습니다. 생존에 위협을 당하니까 일하지 않을 수 없고, 즐기기 위하여 혹은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기 위하여 열심히 기업활동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비록 정의롭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일을 많이 하면 그만큼 보상이 많아졌고, 열심히 뛰면 그만큼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돈벌기 위하여, 돈 버는 재미로 한국의 노동자들은 일했고, 한국의 기업가들은 기업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지극히 상식적인 원칙이 최근 별로 먹혀들어 가지 않고 있으므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 원칙에 입각해서 생각한다면, 1) 일해도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때, 2) 일하지 않거나, 쉽게, 혹은 적게 일해도 상당할 정도의 경제적 보장이 이루어질 때, 3) 그리고 경제적 수입 그 자체가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을 때는 일할 의욕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그런 요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생겨나기때문에 우리나라의 노동문제가 심각한 상황에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1) 의 경우가 심각합니다. 최근 많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이 정당한 대가를 못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농부들의 경우에는 이것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정당한 대가에 대한 객관적 기준은 만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항상 상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전까지는 우리나라 근로자들이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거나, 의식했더라도 그 상황을 고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여 주어진 상황에 숙명적으로 적응했습니다. 그러나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그들의 노동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의식화시켰고, 민주화과정을 통하여 노동조합운동이 활발해짐에따라 그런 상황을 고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노동자들은 임금인상투쟁을 벌렸고 그것은 노동자들의 소득을 과거에 비해 많이 올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물론 수출경쟁력의 약화, 인플레, 경기침체등 여러가지 부작용을 가져왔지만, 그 자체로 반드시 부정적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와 합리적인 사회를 이룩하는 과정에 반드시 한 번은 거쳐야 할 불가피한 단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장 중요한 원인가운데 하나는 몇년 전에 갑자기 상승한 부동산 가격인데, 많은 근로자들이 그 때문에 자기 집을 장만할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동안 집 한칸 마련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고 저축했는데, 그렇게 저축한 돈으로는 집을 장만하기가 전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 장만할 의욕을 상실하고 모아둔 돈으로는 자동차등 소비재를 구입하여 향락에 몰두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근로의욕이 생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임금과 생산의욕 약화는 기업가들에게 문제를 불러 일으킵니다. 이득이 있어야 기업활동을 할텐데, 노동자들의 저임금으로 돈을 벌던 것에 익숙해진 기업가들이 갑자기 올라간 임금때문에 기업의욕을 잃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직까지는 그런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앞으로 나빠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2)의 경우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심야영업 단속이 이루어지기전에는 많은 생산근로자들이 써비스업으로 몰렸는데, 그 이유는 자명합니다. 생산직보다 일이 쉽고 수입이 많았기때문입니다. 특히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생산적인 사업에 투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면, 그 기회를 왜 놓치려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증권이나 부동산 투기에 관심을 기우리고, 즉석복권이 잘 팔리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입니다. 그리고 사회질서가 무너지면, 땀흘려서 일하는 것보다 사기, 강도, 절도, 투기등의 방법이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불로소득에 대한 유혹들이 너무 많이 있고, 정부의 경제정책도 이를 제거하는데 매우 소극적입니다. 금융실명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재산세가 턱없이 낮아 온갖 비리와 부동산투기를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3)의 경우도 이제 조금씩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경제적 수입 그 자체가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 것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이미 필요한 돈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어서 더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고, 돈을 어느 정도 모아도 그것으로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너무 부족하기때문에 아예 포기해버라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돈이 많지 않아도, 욕망이 너무 낮으면 그것으로 만족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노동자들가운데는 이런 특이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비록 소수이긴 합니다만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돈이 많은 것보다는 삶을 즐겁게 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여유가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생기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과거에는 돈이 있어도 좀 더 벌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그런 생각들이 좀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월급이 높은 직장이 반드시 좋은 직장이 아니라, 인간대우를 해 주고 자유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는 일을 찾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수당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정해진 여덟시간 이상을 일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수가 부쩍 늘었습니다. 요즘 많은 생산공장들이 인력란에 허덕이는데, 그것은 일자리가 늘어서가 아니라 과거처럼 시간외에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어져서 그렇다 합니다. 조금 벌더라도 좀 즐겁게 지나자는 풍조가 노동의욕을 감퇴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 일해서 6-7만원 벌면, 그것으로 며칠동안 살 수 있기때문에 노름이나 하고 지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합니다. 지금 건설현장에 허드레 일을 하는 사람들을 구하기 어려운 이유가운데 하나는 그런 개으른 사람들이 많기때문이라 합니다. 요즘 흔히 말하는 바 3D, 즉 더러운 (dirty) 일, 위험한 (dangerous)일, 어려운 (difficult)은 일을 기피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생존에 위협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래저래 노동의욕과 기업의욕이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재미있게 노는 것이 매우 중요한 가치로 등장하여, 이제는 휴가란 것이 옛날처럼 일을 더 잘 하기 위한 휴식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습니다. 일하기 위하여 쉬는 것이 아니라, 놀기 위하여 일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습니다. 삶을 즐기자는 것을 비판할 수 없으나, 쉬는 시간이 삶의 목적을 이루는 기회가 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노동의 가치를 수단적인 것으로 만들어 그 가치를 떨어트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일하는 시간을 상대적으로 더 괴로운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미 선진국들에서 조금씩 나타나는 경향인데, 그것이 결코 노동자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주말을 바라보며 일주일동안 일하고, 여름 휴가를 위하여 일년동안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일하는 시간에는 아무 즐거움과 의의를 느끼지 못하고, 다만 일이 끝나는 시간만 바라보아야 하니, 그 시간이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이 되겠습니까.

<기독교적 노동관에 대한 관심>

 이런 이유들과 현상들가운데는 물론 우리보다 앞선 선진국들이 우리의 경제수준에서 경험했던 것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겪지 않았던 상황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걱정스럽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이 선진국들에 있어서는 우리들의 것과 많은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선진국들이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쳤는데도 잘 버티여 나갔으니, 우리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좀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주로 기독교적 문화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기독교 자체는 매우 약해졌지만, 그 종교가 형성해 놓은 가치관과 세계관은 아직도 남아 있으며, 그것은 아직도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적 노동관입니다. 비록 그것도 많이 약화되고 퇴색된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그 자취는 모든 사람들의 의식속에 강하게 남아 있어서 지극히 당현한 것으로 작용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전인구의 약 1/4을 차지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사회전체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노동관은 우리 사회에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그것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나 관심조차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교회가 우리 사회에 끼칠 수 있는 매우 중요하고 긍정적인 영향력 하나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고, 그것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자신들뿐만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도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국민은 좀 더 건전한 노동관을 가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토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적 노동관을 하나의 중요한 선택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요,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그 노동관에 입각해서 일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일은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

 특수한 소수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합니다. 그리고 일하는 시간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루 24시간 가운데 1/3을 우리는 잠자는데 보냅니다. 그것은 곧 우리 일생의 1/3을 수면으로 보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물도 잠을 자고, 동물의 잠과 사람의 잠이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으므로 사람의 사람다운 삶은 실제 생존연수의 2/3에 불과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1/3은 밥먹고, 옷입고, 쉬고 일 준비하는데 보냅니다. 그것들도 우리에게 중요한 시간들입니다만, 그러나 거기에 우리는 우리 삶의 의미가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쉬는 사람을 멋있는 사람, 훌륭한 사람이라 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역시 일하는 여덟시간입니다. 그 시간동안 우리는 가장 긴장하고 우리의 모든 정력을 쏟아 넣으며,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땅위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90년을 산다해도, 잠 자는 30년과 쉬고 준비하는 30년을 빼고 남은 일하는 30여년간이 우리 삶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잠자는 것도 중요하고 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일을 하기 위한 것이고 일을 더 잘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와 삶의 가치가 자는 것이나 쉬는 것에 달려 있지 않고 일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일에 대하여 우리는 심각하게 반성해 보아야 하고 따져 봐야 합니다. 짐승처럼 생각이 삶과 행동방식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면, 반성이란게 그렇게 중효할 이유가 없겠지만, 우리가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그리고 그 생각에 따라 일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따라 우리 삶의 질과 가치가 결정되기때문에 반성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실 자기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일하는 시간이 불행하다면, 그 사람의 일생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한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행. 불행과 개인의 삶의 의미가 모아져서 사회 전체의 질을 구성하기때문에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다른 말로 말해서, 한 사람, 한사람이 행복하게 일하고 보람있게 일하면, 그것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한 개인이 불행하게 일하고 보람없는 일을 할 때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기독교는 일과 육체에 대해서 긍정적>

 기독교는 모든 종교들가운데 일에 대해서 가장 긍정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이 세상, 즉 시간계 혹은 역사의 세계를 긍정적으로 보기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불교나 힌두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그림자의 세계도 아니요, 언젠가는 없어질 임시적인 세계도 아닙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지금도 다스리시며, 특히 이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인간의 형상을 입으시고 들어 오신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그의 영원한 왕국을 땅위에 건설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 세상이 죄로 가득차 있고 죄로 특징지워졌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무의미한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여기시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역사가 인간의 노동으로 이루어진다면, 그 노동도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것을 다스리십니다. 다른 말로 말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십니다 (요 5:17).

 노동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것과 육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것은 서로 상관관계에 있습니다. 물론 정신노동도 힘들고, 현대에 와서 정신노동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만, 옛날에는 노동은 곧 육체노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대의 많은 종교와 철학사상에서는 육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아마 육체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고통을 느끼게 하며, 마침내 죽어 없어지는 것이기때문에 천하고 열등한 것으로 본 것 같읍니다. 그리고 많은 종교에서는 인간의 모든 욕망과 악이 육체에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가능한 한 다스려야 하고, 무시해야 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노동도 천하고 가치없는 것으로 본 것 같습니다. 위대한 철학자였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노동을 천시하고 노동자를 천시한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고대인의 의식속에 얼마나 깊히 뿌리박고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당신의 귀한 딸을 어떻게 노동자의 아내로 주겠느냐 고 말한 일이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노동자가 천한 것은 허리를 궆혀 일하기때문이라고 말 한 일이 있다 합니다.

 우리는 비슷한 태도를 전통적인 동양사상에서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습니다. 양반은 일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사농공상 (士農工商)의 차별도 어느 정도 정신과 육체의 구별과 연결되어 있다 할 수 있습니다.개화(開化)때 어느 대신이 그 때 막 우리나라에 소개된 테니스를 치고 있었는데 그것을 본 고종황제는 땀을 뻘뻘 흘리는 대신을 보고 그런 일은 종들에게 시키라고 타 일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활동은 하층계급의 사람만이 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태도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짙게 남아있고, 고졸 근로자는 부족하고 실업자는 대졸가운데 가장 많은데도 불구하고 대학 선호도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런 전통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육체를 천시하는 가르침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만 지으신 것이 아니라 육체도 창조하셨으며, 구체적인 인간을 중요하게 보시기때문에 육체도 중요하게 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육체로 이 세상에 오셨고, 육체로 부활하셨으며, 앞으로 육체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입으시고 육체로 부활하셨다면, 그것이 그 자체로 악하거나 천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인들이나 동양사상에서 나타나는 바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이원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기독교에서는 육체노동이 정신노동보다 더 천할 이유가 없고, 노동 그 자체가 부정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노동을 무시하지 않았고, 직업에 있어 귀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현대문명에 대한 기독교 전통의 가장 중요한 공헌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땅위에서는 목수였고, 사도들의 대부분은 어부였으며, 바울사도는 선교사역중에서도 계속해서 육체노동을 쉬지 않았습니다. 계명에서는 엿세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 을 명령하고 (출 20:9), 바울 사도는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살전 4:12),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하라 (살후 3:10)고 가르쳤습니다.

 사실 우리 몸을 살펴보면 우리는 본래 일하도록 만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인이 육체노동을 전혀 하지 않거나 충분히 하지 않기때문에 운동이 부족해서 여러가지 병에 걸리는 것만 보아도 우리 몸은 움직이도록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많이 유행하고 있는 수지침(手脂針)의 기본전제는 몸의 모든 중요한 기관이 손바닥과 발바닥에 대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바닥의 어떤 곳을 침으로 자극하면 그와 관계되어 있는 기놘이 활성화되어 튼튼해지고 거기에 생긴 질병을 고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은 역시 손으로 일하고 발로 걸어다니도록 만들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발로 걸어다니고 손으로 일하면 자연히 몸의 모든 기관이 활성화되어 건강을 유지하도록 되어 있는데, 현대인이 차를 타고 다니고 손으로 일하지 않기때문에 침으로라도 자극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은 구태여 운동을 따로 할 필요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노동을 하도록 만들어진 인간이 노동을 하는 것이 결코 부정적일 수 없습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 몸의 기관들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욱 튼튼해진다 합니다. 심장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심장은 어머니 배속에서 이미 뛰기 시작해서 죽는 순간까지 한 번도 쉬지 않습니다. 심장이 쉰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얼핏 생각해보면, 그 심장을 조금이라도 적게 뛰게해야 덜 피곤하게 만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의사들은 심장을 튼튼하게 하려면 운동을 해야 한다 합니다. 즉 심장을 더욱 더 뛰게 해야 더 튼튼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여러기관들은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 튼튼해지고, 우리는 일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노동에도 비슷합니다. 우리의 두뇌는 사용하면 할수록 둔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민감해지며, 더욱 명석해집니다. 정신노동을 하던 사람이 은퇴한 후에 계속 활동하는 경우와 정신활동을 정지해버리는 경우를 비교해 보면, 후자의 경우에는 노쇄현상이 훨씬 더 뚜렷합니다. 쾌테는 그의 유명한 파우스트의 집필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만약 그가 그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훨씬 일찍 죽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노동은 그 자체로 의미있고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하시는 것이므로 신성하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돈을 버는 것과 같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일이 그 자체로 가치있다 해서 다른 사람과 사회에 해를 끼치는 일이라도 그 자체로 가치있다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추상적인 책이 아니고, 우리의 현실도 추상적이 아닙니다. 모든 일은 반드시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 덕을 끼치거나 해를 끼칩니다. 덕도, 해도 끼치지 않는 일 그 자체란 다만 추상적으로 생각해 낼 수 있지,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구체적인 일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반드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일은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그래서 좀 더 자세히 가치의 순서를 정하자면, 다른 사람과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 가장 고귀하고 가치있으며, 그 다음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요, 가장 나쁜 것은 다른 사람과 사회에 해를 끼치는 일입니다. 위에서 일 그 자체가 가치있다 한 것은, 돈이 생기지 않는 일은 가치없다고 보는 많은 현대인의 생각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라도 그 자체로는 가치있다는 추상적인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일을 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은 품군의 삯을 떼어먹는 것을 매우 큰 죄로 취급합니다. 일하는 소에게는 망을 씌우지 말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신 25:4,고전 9:9). 그러나 돈이 생기지 않는 일은 가치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기독교적 노동관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이웃과 사회에 유익한 일이라면 돈이 생기든 생기지 않든 그리스도인은 일할 의무가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일을 할 것인가는 그것이 얼마나 많은 돈을 받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 앞과 사람앞에서 얼마나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적 노동관은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어짜피 우리 사회도 복지사회로 변해 갈 것이고, 또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돈버는 것이 기업과 근로의 유일한 목적이라면, 복지국가에서는 기업인들의 기업의욕도 감소하고 근로자들의 근로의욕도 줄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무리 많이 투자하고 열심히 기업해도 이윤은 그렇게 많이 생기지 않고, 아무리 일하지 않고 놀아도 먹고 살 수는 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 돈버는 것이 기업과 노동의 유일한 목적이라면, 복지정책은 결과적으로 사회전체를 가난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앞에서도 살펴 보았습니다만, 선진국들에서 이런 현상을 볼 수 있고,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현상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긍정적인 가치를 가진 일은 그 자체로 가치있다는 기독교적 노동관이 일반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원칙을 빙자로 해서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이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 사장이 그리스도인인 사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사회에 유익한 일이니까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어떤 일이 의미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일하는 사람 자신이 스스로 이해하고 결정할 문제지 다른 사람이 결정해서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적 노동관이 근로자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과다한 이익을 추구하는데 이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그것이 자본주의 이념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부지런히 일할 것을 가르치지만, 품군의 삯을 정당하게 지불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됨을 동시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노동에 대해서는 정당한 금전적, 사회적 대가를 지불하여야 하고, 자기 자신의 노동에 대해서는 금전적인 대가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고려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혀 이윤이 생기지 않거나 앞으로 생길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업을 계속하기는 어렵고, 생활을 할 수 없는 임금을 받아도 긍정적인 일이니까 계속하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인간은 이상적이 되면 좋겠지만, 역시 먹어야 사는 동물이고, 욕망이 어느 정도 충족될 수 있어야 행복해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기독교적 노동관을 기대할 수도 없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그 원칙에따라 희생을 감수하며 일하기를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돈을 위해서만 일하고 기업하는 대부분의 태도를 조금이라도 극복할 수 있으면, 그것은 사회의 분위기를 상당할 정도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일반화되면, 사회의 갈등은 상당할 정도로 줄어질 것이고, 생활수준은 올라가도 생산성은 줄어지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괴로운 일>

  그런데 일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이요, 그리스도인들은 놀기보다는 일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일이란 역시 괴로운 것이요 하기싫은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괴로운( 勞 ) 움직임( 動 )입니다. 그것은 우리말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언어에서도 마찬가지라 합니다. 히브리어에서 노동이란 말은 아보다 (abodah)라 하는데, 그것은 종 혹은 노예 를 뜻하는 에베드 (ebed)란 단어에서 유래하고, 독일어의 알바이트 (Arbeit)는 가난하다는 아름 (arm)이란 말과 연관이 있다 합니다. 희랍어로 노동을 포노스 (ponos)라 하는데, 그것은 고통, 힘드는 것등을 뜻합니다. 일이 힘들고 일하기가 싫은 것은 구태여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오늘 날에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거의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일은 힘들고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과 유희를 대비시킵니다. 노동은 어떤 가치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움직임이고, 유희는 움직임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즉 못질을 하는 것은 집을 지어 그 속에서 살거나 팔아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지만, 마당에서 공놀이를 하는 것은 공놀이외에 어떤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공놀이 그 자체가 그 움직임의 목적입니다. 만약 프로 축구 선수처럼 돈을 벌기 위하여 공놀이를 한다면, 그것은 유희가 아니고 노동이 될 것입니다.

 유희나 노동이 다 사람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집니다만, 유희는 즐거운 움직임이고 노동은 괴로운 움직임입니다. 유희와 노동에 사용되는 몸의 칼로리는 비슷합니다. 어린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공을 차고 제기를 차며, 일하는 것 못지 않게 몸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운동의 양은 비슷하고 소모되는 열양도 비슷한데, 하나는 괴롭고 하나는 즐겁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리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입니다. 육체노동으로 매우 피곤해진 몸으로 쉬는 시간에 배구놀이를 하는 청년들을 물리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왜 일은 하기싫고 유희는 재미있어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일은 마지 못해서 하는 것이기때문에 하기 싫고, 노는 것은 즐겨하기때문에 힘들지 않는다는 설명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오히려 설명해야 할 것을 전제로 하는 논리적 모순을 저지릅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설명이 시도되었습니다만, 그 어느 설명도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못합니다.

<소외된 노동>

 이제까지 제시된 설명가운데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마르크스 (Karl Marx)의 설명입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이 왜 괴로운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대답을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노동에 대한 그의 이론과 언급들에 빛추어 노동이 괴로운 이유에 대한 그의 설명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노동을 철학적 논의의 중요 문제로 가장 먼저 상정한 것은 헤겔 (G.W.F.Hegel)이란 철학자였습니다만,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마르크스는 노동을 그의 사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등장시켰습니다.

 마르크만큼 노동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기우린 사상가는 없었습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인간이 된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사람은 자연의 힘을 이용하여 생존할 수 있으며, 그것은 노동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연정복 혹은 이용은 혼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공동작업이 필요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과 같이 일할 필요가 없었다면 언어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사회가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벨탑을 짔다가 언어에 혼란이 생기니 그 이상 건설작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언어는 노동에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에게 언어가 없고 다른 사람과 같이 사는 사회가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가 아는 바 그런 사람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언어가 있기때문에 사람은 생각할 수 있고 문화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화와 사회생활을 통하여 사람은 계속 발전하고 바꾸어져 갑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노동을 통하여 사람이 될 수 있고 노동을 통하여 스스로를 만들어 나간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노동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소외(疏外)된 노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철학에서 이 소외란 개념은 매우 중요하나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한 철학적 설명을 들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사람은 노동을 통하여 사람이 되거니와, 사람의 가치는 그가 하는 노동의 가치와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물건을 만들었다면, 그 물건의 가치는 그것을 만들기 위하여 쏟아부은 노동의 가치와 같다는 그 시대에 유행하든 이론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자본가가 돈과 다른 생산수단을 투자해서 이윤을 남기기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노동자가 생산해 놓은 가치의 한 부분을 착취한다는 것입니다.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데, 자본가는 일하지 않고 이윤을 쳉기니까 결국 그것은 노동자들이 생산해 놓은 가치의 한 부분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자가 생산해 놓은 가치의 한 부분이 부당하게 자본가의 손에 가버리므로 생산자와 생산품사이에 소외(떨어짐, 서먹서먹해짐)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곧 노동이요, 노동의 가치는 생산품의 가치와 같으므로, 생산품의 한 부분이 생산자로부터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생산자 자신, 즉 노동자 자신의 한 부분이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본가의 이윤은 다시금 생산에 재투자 되고, 그것은 다시 이윤을 남김으로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노동자들이 생산해 놓은 것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이해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의 소외현상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견해에 의하면, 바로 이런 소외현상이 노동을 괴롭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노동자가 완전히 자급자족하면, 즉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만들어진 생산품을 전적으로 자신이 소유하고 자신이 사용할 수 있다면, 그 노동자와 노동은 소외된 것이 아닐 것이고, 따라서 결코 괴롭지 않을 것입니다. <독일의 이념>이란 책에서, 그는 일하는 자 와 일한 결과를 즐기는 자 의 분리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외현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소외되지 않는 노동은 그 생산품이 생산자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것, 즉 일하는 자가 곧 즐기는 자가 되는 노동입니다.

 소외된 노동의 또 한가지 특징은 분업에 의한 노동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읍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성을 높혀서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분업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일을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일하도록 만들어진 인간이 동일한 일은 단조롭게, 거기다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닌 방법으로 하루 종일, 일년 내내 일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한다는 것은 여지간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만약 노동이 돈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돈과 바꿀 수 있는 상품의 생산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런 분업은 불필요하게 될 것이란 것입니다. 아침에 고기잡고, 오후에 사냥하고, 저녁에 부인의 요리솜씨를 평가하는 분업이 없는 삶에는 소외현상이 생기지 않고, 그런 상태에서의 일은 결코 괴롭지 않을 것이란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이런 설명들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명을 받아 들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은 자신을 위한 노동보다 더 괴로울 것은 사실이고, 한 사람이 여러가지 일을 번갈아서 할 뿐 아니라 어떤 생산품을 처음부터 완제품에 이르기까지 혼자서 다 만든다면 그 즐거움은 그 한 부분만 만들어 낼 때보다 더 클 것은 능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노동의 괴로움에 대해서 이만큼 설득력있고 논리적인 설명은 아직도 제시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소외되지 않는 상태는 땅위에서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고, 만약 가능하더라도, 그런 상태에서는 일이 전혀 괴롭지 않을 것이라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옛 날, 농부가 농사지어서 그것으로 먹고 살있으며, 씨앗을 고르는 일부터 추수해서 도정을 하기까지 다양한 작업을 혼자서 다 감당해도 역시 일은 힘들고 하기 싫은 것이었습니다. 일이 괴롭고 하기 싫은 이유를 자본주의 경제체제 안에서의 소외현상에서 찾는 마르크스의 설명은 충분하다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자급자족하는 노동의 괴로움은 소외된 노동보다 좀 덜 괴로울 것이라고 상상할 수는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동을 육체와 연결시켜서 노동의 괴로움과 육체의 비천함과 연결시켜 설명했다는 사실은 위에 이미 설명했습니다. 정신은 능동적이요, 육체는 수동적이며, 수동적(passive)인 것은 고통 (passion)을 당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죄가 괴로움의 원인>

 이들 설명과는 달리 성경은 일의 괴로움이 인간의 범죄에서 비릇된 것으로 가르칩니다. 범죄하기 이전, 에덴동산에서도 아담과 하와는 일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땅을 정복하라 (창 1:28)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일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범죄한 뒤에 비로써 일이 힘들게 되었다고 기록되었기때문입니다. 범죄한 후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제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체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창 3:17-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빛춰볼 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전에는 일하는 것이 괴롭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 농사짓기가 어렵도록 되어 있지 않고, 수고하지 않아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그렇게 쉽게 상상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대부분의 일은 괴롭고, 대부분의 유희는 즐겁습니다. 일이 유희처럼 즐거운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죄가 왜 일을 괴롭게 하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상상이나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그것이 너무나 큰 신비인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한 번 사색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일이 괴로운 것은 하는 수 없이 해야 한다는 요소가 있기때문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희는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입니다. 그것이 유희의 본질이니까요. 그런데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일이란 것도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 정도의 것이라면 그렇게 괴롭지 않을 것입니다. 하기 싫어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기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닌가 합니다. 축구의 예를 한 번 들어 봅시다. 마을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공차기를 하는 것은 꼭 해야 하기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지만, 그래도 한 번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프로 축구 선수가 되어 축구경기를 하는 것은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구단으로부터 많은 돈을 받았기때문에 공을 차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을 차는 것은 이제 직업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친구들과 학교운동장에서 찰 때 그렇게 재미있던 축구가, 경기장에서는 매우 힘드는 노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보호와 보증을 받고 살았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일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를 먹여 살렸고, 그렇게 하실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한 이후,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즉 하나님의 보호와 보증을 상실하였고, 보호와 보증이 있었을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스스로 자신들의 생존과 안전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었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난 가인은 두려움에 젖었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와 그의 자손들은 성을 쌓고 (창 4:17)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창 4:22). 그런 활동을 그들이 즐겁게 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때문에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일을 괴로운 노동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존과 안전에 대한 위협은 범죄한 인간사회에 있어서는 상대적이 되었습니다. 즉,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위협으로부터도 보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문화가 발달됨에따라, 사람의 생존과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자연의 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인의 두려움이 바로 그런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쫒겨난 가인은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 4:14)하고 사람을 두려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대적인 위협은 그 한계가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하면, 약한 편은 두렵기 마련이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하게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다시 상대편에게 위협을 주고, 상대편도 더 강해지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수억만금을 가지고, 온갖 무기로 호위를 받아도 인간은 역시 두렵기 마련입니다. 인간활동의 대부분은 그런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요, 그것은 하는 수 없이 해야하는 활동이기때문에 괴롭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석을 마르크스의 설명과 비슷한 요소가 있고, 우리의 구체적인 체험과도 어울립니다. 마르크스는 소외된 노동이란 강제적인 노동이요, 그것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하는 수 없이 하는 노동이요, 그 결과도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버리는 노동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설명에 의하면 일은 다만 노동이 소외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만 괴롭고, 그런 소외가 없는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괴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노동의 괴로움은 경제체제 이전, 인간의 근본적인 죄악성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괴롭습니다.

 이렇게 일이 괴로운 것은 사람에게 비참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가장 깨어있고 긴장해서 활동하는 시간이 일하는 시간이고, 그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사람의 삶을 특징짓고 결정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하는 활동이 괴로운 것으로 특징지워지니, 사람의 삶 자체가 괴로운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인들은 삶을 험한 바닷길, 가시밭 길에다 비유했습니다. 사실, 삶의 행복을 찬양하는 노래보다는 삶의 슬픔과 괴로움에 대해서 탄식하고 불평하는 시가 더 많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현대인은 일하는 시간을 줄여보려 애씁니다. 일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기때문에 그 불행한 시간을 가능한 한 짧게 하고 그 대신 노는 시간을 늘이려 합니다. 그래서 선진국이면 선진국일수록, 경제사정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일하는 시간이 짧아집니다. 최근 우리나라 근로자들이 비록 수당이 많아도 시간외 노동을 기피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대부분의 노동이 기계화되면, 노동시간은 그만큼 짧아질 것이고, 일의 괴로움도 그만큼 줄어질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늘어난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가도 심각한 문제일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여가가 주로 노동으로부터 휴식, 혹은 더 잘 일하기 위한 준비로서의 의미만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이 지나치게 길어지면, 그 자체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될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사람들은 그 여가를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파괴적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큽니다. 역사학자 토인비 (A.Toynbee) 같은 사상가는 이를 매우 우려했습니다. 향락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므로, 사람이 계속해서 더 즐겁게 될 수는 없을 것이고, 파괴적이 되면, 그것때문에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오히려 노동의 괴로움보다 여가의 지루함과 파괴성이 인간에게 더 큰 고통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일의 괴로움이 죄로 말미암았다면, 일을 하지 않음으로서의 해결이 진정한 해결은 될 수 없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즐겁게 일할 수 있어야>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용서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노동에 임하는 태도에 대해서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합니다. 일의 괴로움이 죄때문이라면, 그 죄를 용서함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일이 괴롭지 않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죄의 구체적인 결과는 생존과 안정에 대한 위협인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케 된 그리스도인은 그런 위협과 불안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그가 하는 일은 괴롭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일은 괴로운 노동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즉 하는 수 없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일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행복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도 일하시고, 사람도 본래 일하도록 지음을 받았으므로 일하지 않는 것, 즉 여가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뜻일 수가 없고,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할 이상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일해야 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일하도록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일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본 바와 같이 바울은 사람들이 자기 일을 하고,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살전 5:10) 했고,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 (살후 3:10)고 명령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하라고 했을 때,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분명히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있었읍니다. 아마 그런 사람들은 단순히 개을러서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하므로 일하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소유는 다 팔아버리고, 일은 하지 않으면서 성도들 가정에 돌아다니며 먹고 산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규모없이 행하는 사람들, 혹은 일만 만드는 자들이라 책망했습니다 (살후 3:11).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자신들의 소유까지 다 판 사람들을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라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책망한 것은 바울사도와 성경이 노동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랑클린 (Benjamin Franklin)이 말한 것으로 알려진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 는 것이 이 경우에 잘 적용된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좋으나, 그 때까지 우리는 모두 열심히 우리 맡은 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은 하나님의 이 노동명령을 즐거히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루터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직업은 하나님의 소명 (召命 = Beruf, 영어로는 calling)이라 했습니다. 중세기에는 성직만이 하나님의 소명으로 취급했습니다만, 개신교에서는 신자의 모든 직업이 다 하나님의 소명이며, 따라서 성직과 근본적으로 다름이 없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성직자가 성직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듯,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직업과 직책에 충성을 다 하여야 합니다. 충성은 즐겁게 일할 때 가능한 것이지, 억지로 충성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에게 일하라고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니라, 중증 장애자등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에게 일할 수 있는 능력과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전서 12장의 은사(恩賜)에 대한 가르침과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은사에 대한 가르침에서 우리는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재능이 각각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학문에 뛰어난 은사를, 어떤 사람은 전기기술의 은사를,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정치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더 귀하고, 어느 것이 더 천하다 할 수 없습니다. 루터가 소명을 이야기하면서 직업의 귀천이 있을 수 없음을 주장한 것은 올바른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달란트 비유는 사람들이 받은 능력의 정도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충성을 다 했을 때 동일한 칭찬을 받았습니다. 달란트를 많이 받는가 적게 받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받은 달란트를 얼마나 충성스럽게 이용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은 원칙적으로 일해야 하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도적질해서 먹는 것과 같습니다. 불로소득은 그 자체가 부정적이고 비성경적이며 비기독교적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동산 혹은 증권투기를 해서 소득을 얻는 것은 불로소득이고, 그것은 정당하지 못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방법으로 이득을 보는 것이 죄인줄 알아야 합니다. 은행에 예금하여 이자를 받아 살거나, 거액의 증권을 사서 그 이윤으로 생활하는 것도 도덕적으로 그렇게 자랑할만한 것이 못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은행에 예급하여 법정 이자를 받거나, 증권에 투자하여 정당한 배당을 받는 것은 불가피하나, 일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에만 생활을 의존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일이 가져다 주는 이익과 관계없이 일 그 자체의 가치때문에 일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금전적인 대가는 적더라도, 그 일이 가치있는 것이라면 즐겁게 할 수 있어야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가치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고귀해서 도저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도 볼 줄 알아야 하고, 그런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라면 즐겁게 일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노는 것보다는 일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고, 우리의 삶의 가치가 우리가 하는 일에 의하여 평가된다면, 우리는 단순히 돈만 위해서 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돈만 바라보고 일하는 사람은 일생을 돈을 위해서 보내는 사람이 될 것이요, 자신을 돈의 노예로 격하시키는 것이요, 자신의 노동과 자기 자신을 돈과 바꿀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 는 잘못된 속담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태도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이 돈을 많이 벌면, 그 돈으로 하나님의 사업도 하고 구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돈은 하나님 나라에 궁극적으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 일을 못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돈이란 대가만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가능한 한 일은 적게하고 돈은 많이 벌려 할 것이요, 그런 사람들은 부동산 투기등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려는 유혹을 느낄 것입니다. 돈과 관계없이 일 그 자체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올바로 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돈을 전혀 받지 못하거나, 그렇게 많이 받지 않더라도 중요한 일에는 온갖 정성을 다 바쳐서 일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수많은 일꾼들이 그런 정신에서 일하지 않습니까. 바울 사도와 같은 분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의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돈을 위해서 일생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유희의 특징이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만, 일 그 자체가 가치있기 때문에 일할 수 있다면, 그 일을 유희처럼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돈을 전혀 받지 않고 일을 했을때 그것이 가져다주는 기쁨은 돈을 받고 일했을 때보다 더 클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찬양대 지휘자는 십여년동안 교회로부터 양말 한 컬레 제대로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찬양대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면서, 대원들에게 연락하는 전화료를 스스로 지불하면서 희생적으로 봉사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크나 큰 기쁨으로 찬양대를 지휘하고, 찬양대의 수준은 매우 높아졌습니다. 만약 교회가 그에게 얼마의 사례를 했다면, 그는 아마 그 사례만큼만 일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처럼 그렇게 즐겁게 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우리 주위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장애자들을 위하여,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자원봉사하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사랑을 위한 노동>

 그리스도인에게 일은 괴로운 움직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실업자가 되거나, 몸 혹은 마음에 병이 나서 일할 수 없을 때, 일이 축복이요 선물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일 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이요 선물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가운데는 우리가 그저 즐기고 감사할 것들도 많지만, 어떤 것은 즐김과 동시에 사랑을 위해서 이용하여야 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일이란 생산적인 활동이고, 그것이 생산해 내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되어야 하며, 이웃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과 이웃에게 덕이 되는 것은 구별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일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활동이요, 우리의 일생의 가치가 우리의 일에 좌우된다면, 우리가 하는 일이 사랑을 위한 것이 되어야 우리의 일생이 사랑의 삶이 될 것입니다. 사랑의 삶이라야 사랑이신 하나님을 본받는 삶이 될 것입니다.

 사랑을 위한 노동이라 하면, 고아원, 장애자 시설, 양로원같은 곳에 가서 무료봉사하는 것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런 활동은 매우 고귀한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만이 사랑을 위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일이 올바른 목적과 마음가짐으로 이루어지기만 하면 사랑의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꼭 같은 일이라도, 그것이 자신의 생계와 이익을 위해서 이루어질 수 있고,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결과는 비슷하기때문에, 스미스 (Adam Smith)나 만더비어 (Bernard Manderville)같은 사상가들은 사람이 자기의 욕심을 체우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면, 그것이 곧 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만더비어는 사적인 악이 공적인 이익 (Private vices, public benefits)이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소위 보이지 않는 손 의 역할을 믿었던 그들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회에 큰 손해를 끼치면서도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목적과 마음가짐으로 일하는가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와 능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이웃과 사회전체에 유익한 것을 생산하려고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대가로 임금을 받고 적당한 이윤을 남기는 것은 결코 사랑에 역행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생존할 수 있어야 하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어야 계속해서 생산적인 노동을 할 수 있기때문에, 적당히 먹고 마시며, 옷을 사 입고 집을 작만해서 사는 것이 결코 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훌륭히 키워 그들로 하여금 사랑의 일꾼이 되게 하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가 가지 않는 범위내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즐기는 것이 결코 죄로울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고, 위대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나쁠 수가 없고, 부지런히 일해서 검소한 집을 장만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사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사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금 우리 대부분이 하고 있는 일은 사랑의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들고, 그것들을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일들을 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필요한 써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기때문입니다. 다만 건강에 해로운 물건을 만들거나, 공해를 많이 일으키거나, 퇴패를 돕는 것이거나, 청소년들에게 해로운 것을 만들고 유해한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결코 사랑의 일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반사회적인 일을 해서는 안될 것이며, 그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즉시 중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서 항상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정당하고, 이웃과 사회전체에 유익한 것이면 열심을 다 해 할 가치가 있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에게와 우리의 자녀에게도 유익을 가져 올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대개 세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즉 태어나지 않았으면 훨씬 좋았을 뻔 한 사람 , 태어나나 마나 한 사람 , 그리고 태어나지 않았으면 큰 일 날 뻔 했던 사람 이 있습니다. 일생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는 것보다는 해를 더 많이 끼치는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으면 훨씬 좋았을 뻔 한 사람이요, 다른 사람에게 끼친 이익이나 손해가 어슷 비슷한 사람은 태어나나 마나 한 사람이요, 다른 사람에게 끼친 손해보다는 이익이 더 큰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더면 큰 일 날뻔 했던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노동을 하는 사람은 그 마지막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요, 그들의 삶은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고, 사람들에게도 고귀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보람있고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천국의 일을 닮은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때문에, 우리는 천국에서도 일할 것이며, 그 일은 분명히 사랑의 일일 것이요, 매우 매우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땅위에서도 사랑의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천국을 맛보는 삶일 것입니다.

 이렇게 올바른 태도로 일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은 곧 뜻있고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뜻할 것이며, 사회전체가 그들로부터 많은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일할 의무와 특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