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쌍놈에 자식 무슨 신분

<연재> 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이런 쌍놈에 자식 무슨 신분

선비는 없고 양반만 있다

그렇다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좌절된 동학농민혁명의 꿈, 다시 말해서 전봉준과 조선 민중들이 만들고자 했던 새로운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들은 수 천년동안 내려온 불평등한 신분제도를 바꾸어 양반이나 관리만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농민대중이 중심이 되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세상을 이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평등(내가 보기엔 아직도 불평등한 요소가 많이 있지만 그래도 그 때에 비하면)한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그 당시 농민대중들이 받던 불평등한 처우를 잘 모르고 있지요. 당시의 눈이 아닌 지금의 눈으로 보면 이해가 잘 안되거나 실감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그 당시에 태어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과연 어떤 신분이었을까요? 나는 오랫 동안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쳐오면서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많이 했답니다. ‘여러분들이 조선시대에 태어났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신분이었을까요?’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양반’이라고 대답하지요. 다시 ‘그럼 난 어떤 신분이었을까요?’ 역시 아이들은 입을 모아 ‘상놈’이라고 하며 마구 웃는답니다. 물론 내가 유도해낸 답이지요.

그때부터 난 정색을 하고 말합니다. “그래 난 ‘상놈’이었을 것이다. 아니 상놈으로 태어났기를 바란다. 양반이랍시고 손에 물 한방울 안 적시고 흙 한번 만지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천시여긴 ‘상놈’들이 피땀 흘려 생산한 것을 빨아먹는 기생충 같은 양반들보다는 정직하게 하루하루 땀흘려 일하고 부족하나마 그것으로 내 가족, 이웃들과 함께 나누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그런 ‘상놈’이고 싶단다.

평소 땐 가장 나라를 생각하는 척 하며 자기들 이익만을 위해 무리 지어 싸우다가도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백성들을 등지고 가장 먼저 도망치는 ‘양반’들보다는 인간대접도 받지 못했던 이 땅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의병’으로 나섰던 미련한 ‘상놈’이고 싶단다. 그런 ‘양반’과 ‘상놈’ 중 누가 진정한 나라의 주인인가?”

어느새 아이들은 내 얘기에 빠져들고 우린 ‘상놈’으로 불리는 ‘천민’의 입장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예로부터 ‘선비’란 학문하는 이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양반’이 주는 ‘상놈’과 대비되는 신분적 명칭이 아닌 문화적 명칭이지요. 그리고 그 ‘선비’가 학문을 하는 목적은 경세(經世), 즉 언젠가 세상을 경영하며 스스로 학문을 통해 새긴 뜻을 펼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 몸을 먼저 갈고 닦아야 이를 바탕으로 타인을 위한 경륜을 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선비’란 명칭에 종종 붙는 수식어가 있지요. 바로 ‘대쪽같은’이란 단어랍니다. ‘선비’란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즉, 앎과 삶이 따로 놀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랍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엔 이런 ‘선비’는 보기 힘들고 양반만 있었답니다.

강아지 복구에게도 벼슬을 주고 벼슬 값을 독촉하다

 갑오년 이전 당시 전해 내려오는 실화 하나 소개하지요.
충청도 바닷가 강씨 집안에 늙은 과부가 하나 살았는데 살림은 다소 여유가 있었지만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이름을 복구(福狗)라고 하였답니다.

어느 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복구를 부르는 과부의 목소리를 듣고 그만 과부의 아들로 착각을 했답니다. 그래서 그 나그네는 손색을 밝히고 과부댁에 강복구(姜福九)라는 이름으로 감역(監役, 조선시대 선공감에 속한 종9품 관직으로 궁궐·관청의 건축과 수리공사를 감독하였다) 벼슬을 강제로 떠맡기고 그 벼슬 값으로 돈을 요구하게 되자 과부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손님께서 복구를 보시겠소?” 하고는 소리를 내어 복구를 크게 부르니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습니다. 이에 나그네는 멋쩍은 웃음을 남기고 돌아갔답니다. 이로 말미암아 충청도에는 개 감역이 있게 되었다고 하니 다른 일들은 미루어 짐작이 가지요.

그럼 이토록 조선후기 양반사회가 부패 타락한 원인은 무엇이고 그 모습은 어떠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조선건국이래 국가가 안정되고 문화발달의 최고 전성시기는 세종∼성종의 시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맞이하여 조선 사회는 전반적으로 침체되는 어려움을 겪게됩니다.
<다음호에 계속>

[편집자] 이 글은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이신 조광환 선생님(전북 학산여중)이 들려주는 청소년을 위한 동학혁명이야기입니다.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고 그 의미를 상기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란 생각에서 연재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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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전서>에서 정약용은 자신의 소망을 털어놓는다. “내가 바라는 바는 온 나라를 양반 되게 하여 온 나라에 양반 없게 하는 것이다.” 정약용이 정말 온 나라 양반 되기를 바랐는지 학자들 사이에서 말이 많다. 아리송한 다음 말이 논란을 부추긴다. “천한 자가 있어야 귀한 자가 드러나는 것인데, 만일 다 존귀하다면 이는 곧 존귀한 사람이 따로 없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정약용이 온 나라 양반 되기를 바라긴 했지만 당시 양반답지 않은 자들의 행세를 비판했을 뿐이라고 해석한다. 실제로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관작이 없는 자도 스스로 귀족이라 칭하고 군역과 요역을 면하는 바람에 나라가 가난해지는 폐단이 벌어지고 있다며 당대 온 나라 양반 되기를 질타한다.

이런 쌍놈에 자식 무슨 신분

김상준 교수는 ‘온 나라 양반 되기’란 논문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양반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를 문화적으로 설명한다. 양반은 관직의 획득과 혼인을 통해 되는데 이는 꼭 사전에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현실에서 양반으로 대접받으려면 해당 가문이 유교적 예법 실천과 학문 수련을 통해 지역 사회에서 어느 정도 사회적 평판을 획득해야만 한다. 조선 후기에 양반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양인들이 양반 신분으로 행세하기 위해 양반들이 독점하고 있던 유교적 예법과 학문 수련을 모방하면서 평등화 현상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신분 자체에 대한 냉소, 회의, 부정이 증가하면서 반(反)신분적 평등화가 싹텄다.

이러한 설명을 입증이라도 하듯 일제강점기에도 족보와 문집 발행 등을 통해 양반이 되려는 사람들이 대폭 늘어났다. 하지만 온 나라 양반 되기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다. 이혜령 교수는 ‘양반은 말해질 수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일제강점기 상놈이 양반 되는 것을 양반들이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양반들은 “상놈의 자식이 글을 배워 알게 되면 양반의 세력이 없어질 터이니 미리 예방”하기 위해 지역에 야학이 개설되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향촌사회에 상놈이 양반 되지 못하게 하는 운동이 광범하게 벌어졌다. 상놈이 학문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

한때 누구나 대학 가면 계층 상승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사실 학벌의 획득을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시도는 근대 한국의 온 나라 양반 되기의 주된 형태였다. 이제 이런 희망은 무참히 꺾이고 있다. 대학 나와도 좋은 직장을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령인구가 줄어들자 대학위기론이 힘을 받고 있다. 서울의 몇 개 대학만 학문하는 곳으로 놔두고 나머지는 모조리 취업훈련소로 만들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특히 지방대에는 어차피 학문할 사람도 없으니 아예 취업사관학교로 개편하자고 한다. 이광수가 <흙>에서 “서울 양반”과 “시골 상놈”이라 대비해서 불렀던 양극화 현상이 조만간 광범하게 실현될 태세다.

지금 지방대생은 저임금과 장시간의 탈숙련된 단순 반복 노동, 그것도 비정규직과 파견직으로 가득 찬 지방의 열악한 노동시장에 최적화된 존재로 키워지고 있다. 사회에 온전히 참여하여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원천적으로 박탈당한 상놈으로 전락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지방대는 취업 교육에 몰두하고 있다. 취업률 지표로 대학의 생존 여부가 결판나는 지금 모두 단기 이윤을 내라는 경영 언어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은 ‘인서울’ 대학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 양반이 상놈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김문용 교수는 ‘정약용의 변등론과 유교 사회윤리의 확장 가능성’이란 논문에서 정약용의 진짜 걱정은 다른 데 있었다고 말한다. “온 나라가 다 귀해지면 누가 천한 일을 맡아서 할까?” 미국에서 노예제를 반대하던 백인들이 하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노예가 해방되어 모두 자유인이 되면 그들이 맡아 하던 천한 일을 누가 대신할까? 하지만 온 나라 상놈 되는 상황을 우울히 지켜보고 있는 나는 다른 걱정을 한다. 생존 문제에 몰두하느라 모두 학문에 뜻을 두지 못한다. 이러다가 “온 나라가 다 천해지면 누가 귀한 일을 맡아서 할까?”

(백승종, 신동아, 1999년 9월호)/한국 족보연구소 자료집.
우선 왜 상놈이라는 명칭이 생겼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일부의 견해로는 사농공상 분류 중 상인이 가장 천한 직업이었기 때문에 상놈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아니면 보통 사람이라는 뜻으로 상(常)놈이라 했다지만 신뢰성이 떨어진다.

이런 쌍놈에 자식 무슨 신분
노컷 조선 왕조 실록 책커버

조선 오백 년을 양반과 상놈 대립의 역사라고 일컫지만 대체 그 상놈이란 어떤 부류인가. 그 숫자는 얼마나 됐는가.

우선 왜 상놈이라는 명칭이 생겼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일부의 견해로는 사농공상 분류 중 상인이 가장 천한 직업이었기 때문에 상놈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아니면 보통 사람이라는 뜻으로 상(常)놈이라 했다지만 신뢰성이 떨어진다.

또 중국 남부에 서쌍반납이라는 야만족이 살았는데 그들을 비하하여 쌍놈이라 부르던 것이 전래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떻든 이 상놈이라는 호칭은 우리 역사를 관통하여 비천한 계급을 가리키는 총칭이다.

상놈으로 불리는 백성은 표현을 바꾸면 노비라는 말과 거의 동일어다. 하천배라는 말도 마찬가지인데 지극히 천한 일에 종사하는 백성을 그렇게 불렀다.

노비는 팔고 사는 물건 같은 신분이다. 노비의 계급도 두 종류인데 왕궁이나 관청에서 일하면 관노비고 일반 민가에서 일하면 사노비다. 관노비들은 먹고사는 걱정이 없지만 사노비들은 땅 한 뙈기 없어 부자 주인댁에 빌붙어 살거나 가난한 주인댁이면 여기저기 품팔이를 하고 나무꾼 같은 일을 하면서 오히려 주인댁에 돈을 내기도 했던 그야말로 거지나 다름없던 백성들이다. 게다가 살림이 기울면 주인들은 가축처럼 노비를 내다 팔았다.

관노비들이 한 곳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일을 한 반면 사노비들은 언제든 매매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대체 조선 시대 상놈 숫자는 얼마나 됐는가?

임진왜란이 터졌을 당시 서울 인구는 12만 명이었다. 그중 절반이 노비였다. 노비 외에 중인이라고 불리는 하급관속이나 땅을 가진 농민이 상당수 있었고 그 외에 한 줌의 양반이 있었다.

노비는 기본적으로 관노비나 사노비 할 것 없이 양반들이 마음대로 사고팔 수 있는 가축이나 마찬가지였다. 왕실의 노비는 왕 마음대로 포상으로 나눠 줬다.

성종 1년 3월 봉선사에 노비 40구를 내려 주다  현종 1년 11월 고부사 정유성에게 노비 7구를 하사하다 세종 1년 1월 한확에게 노비 10명을 내려 주다 숙종 7년 12월 역적 허견 등으로부터 몰수한 노비 500여 구를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다.

마치 물건을 배급해 주는 듯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각 관청, 지방, 공신들에게 나눠 줬다. 왕실 가족이 결혼식이 있으면 선물로 줬음은 물론이다. 사람이 아니라 시체나 가축을 헤아릴 때 쓰는 호칭인 몇 구(軀)라는 말을 썼다. 몇 명이라는 말도 한참 지나서 썼다.

숙종 12년 3월 현감 김창국의 딸을 숙의로 삼고, 노비 150명을 내려 주다 중종 2년 11월 적몰 노비를 1등 공신에게 나눠 주다. 또 노비가 모자란 종친부에도 배당을 하다. 때로는 외국 사람에게도 나눠 줬다. 세종 6년 2월 중국인 장청 일행에게 살림살이와 전토 및 노비 3명씩을 주다.

이 노비들은 모두 관노비들이다. 국가 소유 노비로서 모든 관청과 지방 향교 등에는 노비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대궐의 장예원은 그 노비들의 보급창이었다.

이 노비들은 사고팔 때 가격이 얼마였을까? 태조 때 노비 값이 너무 싸기 때문에 가격을 좀 올리자는 제안이 나왔다. 태조 7년, 형조에서는 “무릇 노비의 값은 많아도 오승포 150필에 지나지 않는데 말 값은 4, 5백 필에 이르게 되니, 이것은 가축을 중하게 여기고 사람을 경하게 여기는 것이므로 도리에 거슬리는 일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나이 15세 이상에서 40세 이하인 자는 4백 필로, 14세 이하와 41세 이상인 자는 3백 필로 정하소서” 해서 왕의 허가를 받았다. (오승포는 중하급 정도의 베, 무명으로 포 1필의 가격은 쌀 5되 정도였다.) 이 가격은 그 뒤 들쭉날쭉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조선 내내 노비 가격은 조랑말 한 마리의 절반 수준이었다.

이 많은 노비들은 대체 어디에서 생겼나?

정조 9년 3월 역적 모의자 주형채를 능지처참하고 처자식을 노비로, 재산을 적몰하도록 청하였으나 불허하다종 즉위년 10월 반역죄를 범한 이방간의 아들 맹종의 노비 128명을 관속시키다

광해군 즉위년 8월 역적 집에서 몰수한 노비 등에 대해서 숫자를 파악하고 각 관아에 나눠 지급하라

예종 1년 역적으로 처형된 강순의 처첩과 자녀들을 노비로 보낸 정경은 참혹하다.

“난신 강순의 아내 부귀를 곤양에, 그 첩 춘월을 웅천에, 아우 강말생을 해남에, 서얼 아우 강춘생을 고성에, 아들 강석손의 첩 옥금을 하동에, 첩 관음비를 사천에”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하지만 끔직하다. 죄인의 처첩 자식은 물론이고 부모형제까지 노비로 삼아 전국에 뿌려버린 것이다. (강순은 영의정까지 거친 무장으로 남이 장군의 역모 사건 때 모함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러나 사후에 모함이었음이 밝혀져 사면되었다.)

심지어 근대 시기인 고종 때에도 이런 전통은 변하지 않았다.

제천의 죄인 남종삼을 가둔 다음 그 처는 창녕현에, 9세 딸은 산청현에, 7세 딸은 영산현에서 계집종으로 삼고, 4세 아들은 의령현에서 종으로 삼도록 한다, 이런 식이다. 각각 다른 곳 노비로 보내자는 보고가 올라오자 고종은 어린 아이들을 뿔뿔이 흩어버리지 말고 어미가 있는 창녕현으로 같이 보내라고 명하였다.

그렇다면 이 많은 노비들은 모두 죄인의 가솔인가?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고려에서 조선왕조로 넘어 오면서 상당한 숫자가 노비로 전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계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사람이니 전 왕조의 인물은 모두 정적이 된다. 당연히 정적 제거가 제1차 목표였을 터이므로 그들을 노비로 신분을 강등시켜 버리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있었을 것이다.

노비들이 많아진 이유 중 다른 하나는 노비가 낳은 자식 역시 노비가 되는 제도 때문이다. 한 번 노비이면 평생 노비이고 그 자손도 노비가 되는 것이 조선의 전통이다. 당연히 숫자가 늘어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조선은 노비의 나라가 됐다.

노비 다음으로, 사고파는 신분은 아니지만 역시 사람대접 못 받는 천민이라 불리는 신분이 또 상당수 되었다. 팔천(八賤)이라면 사노비를 포함하여 광대, 공장(대장장이, 옹기장이), 도살업자, 기생, 무당, 승려, 상여꾼을 일컫는다. 지금으로 치면 대중 예술가, 기술자, 종교인 모두 천민이다. 각종 장사꾼, 가마꾼, 역졸들도 모두 같은 처지였다. 팔천을 싸잡아 모두 백정이라 불렀다. 그리고 별도로 호적관리를 했다.

보통의 노비들은 조선 중기 이후 악착같이 돈을 모아 관아에 바치거나 주인댁에 바치고 노비 신분을 벗어나는 사례가 많았다. 가난한 주인댁을 나와 따로 살면서 노비문서를 없앴다. 평민 혹은 중인, 양민이라고 불리는 계층이 된 것이다. 농민은 조선 시대에 세금을 내는 계층으로 바로 이 계급이었다. 이들 숫자가 많지 않은 것은 땅 가진 사람들이 그만큼 적었다는 의미다.

한 계급 올라간 사람들은 그다음 각 지역 이방들에게 뇌물을 바쳐 성씨를 얻고 호적을 만들었다. 그것이 일반적인 순서다.

지역에서 이방을 포함한 육방(六房)은 가장 막강한 실력자였다. 드라마에서는 사또 옆에 두 손 맞잡고 서거나 부복하여 아첨을 하는 계급으로만 그려지고 있지만 지방관으로 부임한 수령도 이들의 도움이 없으면 정사를 펼칠 수가 없었다. 이 육방이야말로 지방 토호세력의 상징인데 그런 힘 가진 세력에게 잘 보이면 호적 정도는 쉽사리 고쳤으리라 추정된다. 그렇지만 백정 신분은 조선이 망한 뒤에도 그 멍에를 벗지 못했다. 따로 특별 관리를 하는 호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조선이 망하고 난 마지막까지도 백정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천민들과 노비, 하천배를 모두 일컬어 상놈이라 부른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전 인구의 70퍼센트 정도가 상놈이었다. 그러다가 후기로 갈수록 상놈은 급속히 줄어들고 그 대신 양반이 증가했다.

하버드 대학 교수였으며 교환교수로 국내에서 강의도 했지만 지금은 타계한 한국학의 전문가 와그너 교수의 논문이 있다. 그는 「1663년(현종 4) 한성부 북부지역 호적을 통해 본 조선사회의 구조」라는 논문을 통해서 지금의 서대문구와 마포구 일대, 수색리, 가좌동, 연희궁, 합장리, 여의도, 홍제동 일대 681호 총 인구 2,374명 중 양반이 220명으로 9.27%, 양민이 334명으로 14.7%, 천민이 1,820명으로 76.7%라는 숫자를 내놓은 바 있다.

이런 옛 자료들은 숫자가 불확실한 경우가 많아서 들쭉날쭉하지만 몇 가지 자료를 종합하더라도 천민은 절반을 훌쩍 넘는다. 물론 그쪽은 원래 천민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라는 반론이 있기는 하다.

우리 나라에서 신분제 사회의 변동을 가장 먼저 광범위하게 연구했던 사람은 일제 때인 1937년경의 일본학자 시카타 히로시이다.

지금도 조선시대 호적 자료가 남아있는곳은 대구와 울산 지역이 대표적인데 이곳의 자료를 토대로 대부분의 연구가 이뤄졌는데 결과는 서울과 대동소이하다.

그가 1684년 숙종 10년 대구 지역의 성분 분포를 연구한 자료를 보면 양반호는 5% 내외, 중인이 20% 내외, 나머지 75%가 천민계층이다. 그러던 숫자가 1858년이 되자 완전히 뒤집어져서 양반으로 호적에 올라가있는 인구가 70.3 %로 늘어나고 있다.

(상민호 통계가 빠졌고 또 호적 자료상 1690년 대구의 상민호는 53.7%, 노비호는 37.1%로 나옵니다) → 삭제 필요

우리나라 호적 전문 연구자들이 김용섭,정석종,최재석, 소머 빌등 내외국인 합해 10명 정도인데 자료가 서로 차이가 있고 분류방식도 달라 일률적으로 단정 짓기가 어렵다. 그러나 김영모씨의 자료도 위의 수치와 대동소이하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통적인 것은 조선왕조 후반기 들어 급속도로 양반 계층이 늘어나고 있는것이며 그만큼 상민들은 줄어 들고 있다. 심지어 그 많던 노비들의 숫자가 2.2%까지 줄어 들었다. 불과 100년 사이에 일어 난 변화이다. (김영모 자료)

팔고 사는 노비 신분은 조선 후반기 들어 언양지역은 심지어 0.3%로 거의 사라진 상태가 되었다.(1861년.철종12년).

그 뒤로 고종시대에 비로소 노비매매 철폐, 완전 철폐령이 내렸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뚜렷한 과정이나 명령없이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시카타 히로시는 그 원인으로 조선 왕조의 국가 기강 해이, 사회문란을 꼽았다. 모두 매관매직이나 다름없는 가짜 양반,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국내 학자들은 사회문란이 아니라 사회가 발전하면서 중농층이 늘어나는데 따른 자연적인 신분 상승이라고 반론을 펴기도 하는데 (사학자 김용섭,정석조등) 누구 말이 맞는지는 여기서 거론할것이 아니다. 다만 신분 상승이 되었다 해도 없던 성씨를 부여하던 관청이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유럽에서는 평민이 귀족이 된다는 것은 큰 공로가 있어서 왕이 공식적으로 작위를 수여하는 경우가 원칙인데 우리나라는 그런 근거가 전혀 따르지 않은채 그냥 모두 슬그머니 양반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그런 분류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어서 양반으로 호적에 올랐다고 해도 실재사회계층에서도 그런 변화가 이루어졌는가, 라는 의문과 함께 다만 서류상의 문제일뿐 그들은 결코 양반으로 대접받지 못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갖는 것 같다.

결국 조선은 정직하게 말해서 기본적으로 백성의 태반이 상놈인채 국가 쇠망기에 접어 들었다. 그것이 정확한 비례라고 본다.

예전부터 이렇게 노비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일본 나라현의 정창원에는 신라 시대의 고문서가 한 장 남아 있는데 청주 부근 4개 부락의 인구 구조를 기록한 것이다. 거기에 보면 노비의 숫자가 전체 인구의 10퍼센트 미만이다. 고려 시대에도 매우 낮았다. 그러다가 조선에서 급증한 것인데 이유는 미스터리다. 연구 자료도 없고 결과도 없다.

우선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전쟁 포로를 노비로 삼는다. 우리나라도 가끔 왜구를 붙잡아 노비로 썼는데 그 노비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심지어 주인댁 여자를 강간하는 사례가 있다. 북쪽의 말갈족, 여진족의 도적들을 붙잡아다가 노비로 삼은 기록도 있다. 그러나 그런 숫자 아무리 보태어도 얼마 되지 않는다.

어떻든 죄인이나 포로 때문에 노비가 늘어난 것이 아니다. 결국 가장 큰 원인은 가난이다. 조선은 진실로 가난하고 힘든 나라였다. 지금도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말을 흔히 쓰는데 이것이야말로 조선의 대표적인 언어였다.

태조 때부터 빚 진 자는 양민이라 할지라도 노비로 삼았는데 그걸 부채 노비라 불렀다. 한마디로 가난한 백성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노비의 숫자도 불어난 것이다.

한일합방이 되어 조사를 해보니 서울의 양반촌은 북촌을 비롯하여 통틀어 800호 미만이었다. 궁궐과 권력자들이 노비의 태반을 소유하고 있었다.

흔히 인도의 신분제도가 최악이라고 하지만 그 나라는 우리와 다르다. 전쟁으로 빚어진 타 종족간의 대립이 그런 천민계급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단일종족이다. 똑같이 생겼고 똑같은 말을 쓰며 같은 땅에서 태어났다. 그런데도 같은 동족에게 그런 수모를 받으며 평생을 살았다. 일본도 황족과 무사계급인 사족, 그리고 보통 백성인 평민 외에 천민계급이 있었다. 그 천민은 죄인이나 전쟁 포로 등으로 우리나라에 비하면 형편없이 작은 숫자였다.

“도대체 자기 나라의 같은 민족을 이렇게도 많이 노비로 부리며 사고파는 나라가 동서고금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이이의 만언봉사 상소문)

그들은 상민들을 백성이라고 호칭하는 대신 하천배들이라고 불렀다.

조정 대신들이 어떤 사건에 대하여 ‘그렇게 하면 하천배들도 비웃을 것입니다’라는 식의 상소나 대화는 비일비재하다. 현종 1년에 좌참찬 송시열은 상소에서 도라지나물 같은 것은 하천배들이나 먹는 천한 것이니 나랏돈으로 사들이지 말라고 아뢰고 있다.

그런 가난하고 헐벗은 백성들 위에 군림했던 나라가 조선왕조다.

세종 10년 5월 26일

좌사간 김효정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것을 엄히 다스려야 된다고 하는 상소를 올리다.

“천하의 이치는 명분입니다. 명분이 분명해야 상하가 서로 보전할 수 있고, 국가가 편안하게 다스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위에 하늘이 있고 아래에 못이 있는 것처럼 상하 귀천의 명분을 밝혀야 백성의 사는 것이 안정될 것입니다.

귀한 것은 천한 것 위에 군림하고, 천한 것이 귀한 것을 받들며, 위는 아래를 부리고 아래는 위를 섬기는 것은 곧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도리로서 당연한 것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의 근본입니다.”

지금 경주에 가면 양동마을에 노비들의 집이 남아 있다. 주인집 담장 밖으로 마치 가축우리 같은 노비 집들이 빙 둘러 가며 늘어서 있다. 이 노비 집들은 담장 밖에서 주인집의 경비초소 역할도 했다.

안을 보면 경탄스럽다. 이런 방에서 어떻게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방 한 칸과 그것에 연결되어 있는 아궁이 한 칸이 전부다. 마치 무덤처럼 작은 집이다.

이런 생활을 하며 천대를 받던 쌍것들이 그러나 결국 국가를 살렸다. 위기에서 나라를 살린 것은 이런 하천배들이지 사대부들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휘하 전라도 수군은 절대 다수가 전라도 쌍놈들이다. 쌍놈 중에서도 개 쌍놈이라는 사노비나 백정 출신이었다. 경상도 수군도 마찬가지다. 수군은 군대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힘들기 때문에 기피 직종 1순위였다. 조금만 요령이 있어도 다 빠지고 주인대감이 지목해서 강제로 내려 보낸 노비들, 관에서 징집한 천민들이 죄다 수군이 되었다. 권율 장군을 따라 서울까지 반격한 군대도 모두 전라도 충청도 쌍놈들이다.

전쟁이 끝난 후 그 공은 모두 양반들이 차지하여 쌍놈들은 싸우다가 죽는 일밖에 없었지만 우리나라는 결국 이런 쌍놈들이 살린 나라였다.

왜 그 쌍놈들이 도망가지 않고 용감히 나서서 싸웠을까? 나라를 지키기 위한 애국심에서? 그런 사람들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것은 노비로서 전쟁 중 공을 세우면 면천을 시켜준다는 영의정 유성룡의 당근책이었다.

선조가 이를 허락하자 머뭇거리던 전국의 쌍놈들이 모두 들고 일어났다. 왜군 목을 하나 자르면 상을 주고 둘 자르면 면천이고 셋 이상이면 관직을 준다, 이런 등등의 명령이 내려 왔으니 가만있을 쌍놈들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결국 쌍놈들은 사기를 당한 꼴이 됐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가면서 양반들이 들고 일어났다. 쌍것들이 쥐꼬리만 한 공로를 핑계로 양반이 되려 하니 나라의 근본이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이런 면천법은 취소해야 한다고 들고 일어나니 선조도 없던 일로 쳐버렸다.

그 뒤로는 조선의 어떤 왕도 반상철폐나 노비해방 등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의병이 거의 없었다. 강제로 동원되어 관군에 끌려왔지만 싸울 의지가 없었다. 전세가 조금만 위태로워지면 도망쳐 버렸다.

심지어 한일합방이 되었을 때 의병보다는 수수방관하거나 부화뇌동하는 인구가 훨씬 더 많았다. 일제 시대 전국에 의병이 넘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달랐다. 용인, 광주를 기반으로 싸웠던 의병대장 이익삼은 수하에 부하가 겨우 15명이었다. 1907년 가장 의병이 많았던 호남 지역을 토벌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일본군의 숫자가 2천이었고 당시 순국한 의병이 103명이었으니 숫자상으로는 보잘 것이 없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가 일본으로 장사나 공부를 하러 갔다.

부끄러운 기록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가담한 조선 백성이 굉장히 많았다. 선조까지도 “지금 왜군의 절반은 조선 백성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웬 말이냐?” 묻고 있는 것이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호남에서만 20만 명의 농민이 들고 일어났다. 항일 의병은 그 숫자의 20분의 1도 안 되는 숫자다.

미국에서 영화는 애국심과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것들이 태반이다. 우리나라에서 지금도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국가를 매도하고 저항심을 기르는 것이 태반이다. 애국심을 고취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있다면 관제 작품으로 매도하고 만다.

그런 기질을 흔히 군사독재의 잔재, 일제의 잔재라고 진단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근본이 바로 조선 오백 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다. 국가와 사대부들에게 짓밟혀온 조선 상놈들의 한 맺힌 피가 우리 몸속에 암암리에 흐르고 있는 셈이다.

지금도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는 각종 계라든지 동창회라든지 향우회, 각종 조직이나 모임이 많다. 조금만 연줄이 닿으면 조직을 만들어 한데 모이려는 본능이 민족성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외국으로 이민을 가서도 마찬가지다. 너무도 많아 그 수를 헤아리기가 벅찰 정도이다. 남자들이 사회활동을 하게 되면 이리저리 얽혀서 열 개 이상의 모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다반사다.

왜 그렇게 서로 모여서 세를 불려야 하고 서로 등을 기대야만 안심을 하게 됐을까? 결국 그런 과다한 조직은 심리적인 불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그 원인의 해답 역시 조선 오백 년이라 생각한다. 사대부들에 눌려 질곡의 삶을 살아 왔던 우리 상놈들은 가문도 없고 성씨도 없고 오직 가족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약간의 친구나 이웃밖에 없었다. 국가나 지역 양반들에게 밉보이면 하루아침에 죽거나 몰락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 불안본능, 보호본능이 지금도 우리 몸속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모여서 뭉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 상놈들이 살 길은 그것뿐이다, 그런 의식이 우리 머릿속에 박혀 있는 것이다.

왜 그것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양반 상놈 사라진 지가 놀랍게도 이제 겨우 백 년도 안 된다. 해방 후부터 따진다면 겨우 육십여 년밖에 안 된다.

그 시절의 일본어가 지금도 사회 도처에서 아무렇지 않게 쓰이고 있는데 하물며 오백 년 깊은 한의 뿌리가 벌써 사라질 리 없다. 우리는 아직도 양반 상놈의 이분법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왜 우리는 이 작은 나라, 인구도 고작 육백 만밖에 안 됐던 소국에서 그런 가혹한 계급사회를 고집했을까?

유교는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없애고 가식적으로 만들며 지배층에게만 특혜를 주는 학문이라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물론 노비제도를 없애고 양반 상놈 가르는 신분제도도 없애야 한다는 고결한 제안이 드문드문 나오기는 했다. 그것도 조선을 통틀어 임진왜란 때의 유성룡이나 “우리나라의 노비법은 동서고금에 없는 천한 법이니 즉각 폐지가 어려우면 매매라도 금지하자”고 외쳤던 실학자 이익 등 겨우 몇 사람뿐이다.

우리나라가 우아한 선비의 나라였으며 우리가 모두 족보를 지닌 왕족이나 명문가의 자손이며 양반의 후예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편의 거대한 가식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진정으로 상놈들의 나라였으며 우리들 태반은 너 나 할 것 없이 헐벗고 굶주렸던 상놈들의 자손이다. 그 뿌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현실문제도 해결하기 어렵다.

우리 표현 중에는 ‘솔직히 말하자면’이라는 말이 일상화되어 있다. 평상시에는 거짓말만 하기 때문에 이제부터 솔직히 말해 보겠다는 신호인 셈인데 솔직히 말해 보자. 우리가 대부분 상놈의 자손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우리에게는 정녕 없는 것일까? 왜 상놈의 자식이라고 욕을 하면 화를 내는 것일까? 아니 왜 상놈이라고 욕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바로 지금도 그 상놈 자신이기 때문 아니겠는가.

<참고 문헌>

조선왕조실록/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선 후기 신분계층 연구.와그너/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웅진지식하우스)/조선후기 지역사회 구조 연구(정승모)/조선사회 이렇게 본다(조선사회연구회)/조선팔천(이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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