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기타 어느 60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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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기타 어느 60 대

"누나 사온 통키타로 G코드 잡으며 화음 배웠습니다. 군부대 대민봉사에서 기타 친 게 밴드활동 계기가 됐다고해야겠네요"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의 주인공 김목경씨는 중학교 2학년 때 기타를 처음 시작했다고 말했다. 1970년대 초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선배들이 나와서 우리나라 음악을 바꿔놓기 시작한 때 음악을 시작했다고도 회고했다. 일산에서 라이브공연을 하고 있는 그를 만나 얘기를 나눴다. 그는 대화를 하는 중간에도 음악에 대한 강한 열정을 내보였다. 가수가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음액에 애착이 강한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항상 공연하죠. 10월엔 홍대에서 했고, 11월엔 일산에서 합니다(필자와는 11월 공연 전에 만났다). 작년보다는 못한 것 같아요. 예년과는 다르게 이번 해에는 대선이 있어서 그런지 행사가 별로 없어요. 큰일 났습니다.(웃음) 12월에라도 행사가 많았으면 좋겠네요. 곡을 안 쓸 때는 주로 바둑을 둡니다. 요즘 들어 새로운 취미가 생겼는데요.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고 있어요. 저는 솔직히 즐기는 편은 아니고 주변 분들이 집 앞에 와서 기다리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타게 됐습니다." 

-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중학교 2학년 때 기타를 처음 시작했어요. 1970년대 초반은 ‘기타를 못 치면 간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 국민이 기타를 연주하던 시절이었어요.  너도나도 기타를 배우려고 하던 시기였는데 마침 음악을 하는 누나가 작은 클래식 통기타를 사왔어요. 방과 후 집에 와보니 기타가 보이길래 세광음악출판사에서 나온 노래책에 코드 잡는 방법이 나와 있어서 책을 보고 따라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네요. 지금 생각해보니 가장 기본적인 G코드였어요. 한번 쭉 쳐보니까 화음이 나오는 거예요. 제가 그 때 처음 하모니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 날부터 주로 포크송 위주로 기타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블루스는 고등학교 들어가서 전자기타를 배우면서 알게 됐습니다. 고등학교 때 유행이었던 백판(해적판) 모으기가 제 취미였어요. 1970년대에는 국내에 음반 라이선스가 없어서 정식 앨범이 국내에 유통이 안 되던 시기였거든요. 복사본을 청계천에서 팔곤 했었죠. 당시엔 희귀한 LP를 수집하는 걸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친구들보다 더 희귀한 음반을 사려고 청계천에 항상 갔던 기억이 나네요. 우연히 LP 한 장을 골랐는데 그것이 바로 블루스 기타 음반이었어요. 집에 가서 턴테이블에 LP를 올려놓고 듣는데 기타의 모든 비밀이 그 음반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그 전에 제가 책을 보고 흉내 내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간단명료하게 다 있어서 이것이 뭘까 하는 호기심이 생기게 됐죠. 비비킹, 알버트 킹, 브래드 킹과 같은 흑인 블루스 뮤지션, 즉 오리지널을 찾아서 음악을 듣고 수도 없이 연습하곤 했어요. 그 때부터 블루스라는 장르에 매력을 느껴서 지금까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2~3학년 때 본격적으로 정통 블루스에 빠지기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포크음악이 대세였어요. 하지만 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블루스라는 것을 고등학교 재학시절에 알게 됐으니까요."

- 밴드활동은 언제부터 하셨는지.

"고등학교 때 친구네 집 지하실에 밴드 시설을 만들어 놓긴 했는데 지속적으로 하지는 못했어요. 친구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었거든요. 이후 대학 때 동아리에서 밴드생활 조금하다가 군 입대를 하게 됐어요. 기타 특기생으로 군악대에 들어가서 트럼펫을 1년 정도 했죠. 2년차 때 부대 내에 밴드를 결성해서 대민봉사 다니면서 기타를 쳤죠. 그 때부터 밴드 활동을 지금까지 쭉 이어오고 있습니다."

- 블루스에 대해 설명 해주시죠.

"블루스는 모든 음악의 뿌리입니다. 음악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요. 음악을 듣고 마음에 동요가 있으면 되는 거죠. 들어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역사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흑인 사이에서 생긴 음악인데 당시 백인 지배계급이 갖고 있지 않았던 음계가 있었어요. 다섯 개의 음계로 이루어진 블루노트라는 거죠. 백인들은 그럼 감성을 갖고 있지 않았어요. 유럽에서 온 클래식과 아일랜드 민요인 컨트리 음악이 전부였죠. 아일랜드 민요가 결국 미국의 컨트리 음악으로 발전하게 되는 겁니다. 컨트리 음악에 블루노트를 도입한 게 다들 알고 있는 로큰롤(rock’n’roll)이라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로큰롤의 황제 앨비스 프레슬리도 이때부터 활동을 시작한 거죠."

- 블루스 음악을 고집하는 이유는.

"전 블루스가 더 쉬웠어요. 많은 분들이 블루스가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블루스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진한 감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쉽게 이해하는 것 같아요. 블루스 느낌이 들어있는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이 정말 좋아요. 사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부르지마’ 같은 곡은 블루스가 아니에요. 그냥 대중가요입니다. 하지만 블루스의 영향을 많이 받긴 했어요. 제 생각엔 블루스보다는 컨트리 쪽 인 것 같아요."

- 1집을 직접 제작하셨다고 들었는데요.

"1990년에 1집을 영국에서 제작해서 한국에서 발매 했어요. 타이틀 곡 ‘내가 본 마지막 그녀’도 영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겁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2년 전부터 영국인 친구들과 블루스밴드를 같이 했어요. 밴드 멤버들이 앨범을 같이 만들어줬죠. 런던에서 8곡을 녹음했는데 7곡은 밴드 멤버들이 이해를 했지만 유독 한곡만은 이해를 못하더라고요. 그 곡이 바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였습니다. 말로 설명해도 이해를 못하고 멜로디 자체도 흥미를 끌지 못했어요. 문화적 차이였던 것 같아요. 곡은 지금도 쓰고 있습니다. 요즘엔 옛날보단 멜로디가 덜 떠오르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밤에 누우면 멜로디가 떠올라서 잠을 못 이뤘거든요."

-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탄생 배경은.

"1988년 영국유학시절 5년차 됐을 때, 제가 살던 방(2층)에서 옆집 뜰이 보였어요. 정원이 꽤 넓은 집에 영국 노부부가 살고 계셨는데 매달 아들이 손자를 데리고 오더라고요. 노부부가 현관에서 아들과 손자를 배웅하고 뒤돌아서서 걸어들어가는 모습을 우연히 몇 번 봤어요. 한 달에 한번 찾아오는 아들을 보고 곡을 쓰게 됐죠. 그러다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생각하게 됐죠. 영국에서는 ‘막내아들 대학시험…’,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 주던 때’ 이런 가사가 현실로 일어날 수가 없어요. 영국은 공부하라고 이야기도 하지 않을뿐더러 같이 밤새워 주는 일이 없거든요. 하지만 ‘큰딸아이 결혼식 날 흘리던 눈물방울…’ 이 가사는 동·서양의 문화가 어우러지는 것 같네요."

"사실 이 노래는 故 김광석 씨의 곡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故 김광석 씨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받아서 리메이크한 것이예요. 김광석 씨 덕분에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김광석 씨 외에도 많은 가수들, 서유석 선배, 송대관 선배, 서수남 선배, 홍경민 씨, 박완규 씨, 박승화(유리상자) 씨, 아이유양이 불렀는데 더 많은 가수들이 제 노래를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뭔가요.

"글쎄요. 1집에 ‘Mr.Clapton’이라는 곡이 있는데요.  ‘Mr.Clapton’은 에릭 클랩튼을 생각하며 만든 곡이지 헌정 곡은 아닙니다. 영국 블루스 밴드 멤버들이 녹음한 곡을 듣고 그 친구들 표현으로 ‘Craker(크래커, 영국에서 최고라는 뜻)’ 라고 했어요. 1980년대 중반에는 에릭 클랩튼이 활동을 활발하게 하던 시기는 아니었어요. 제가 전자 기타를 처음 시작했을 때 영향을 줬던 가수인데 그 가수의 고향에 지금 제가 와 있는데 그분은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안타까운 마음에 곡을 만들게 됐어요. 기회가 되면 에릭 클랩튼에게 ‘Mr.Clapton’을 보내고 싶네요."

"2003년에 미국 멤피스에서 3일 동안 개최되는 빌스트리트 뮤직 페스티벌에 동양인은 저만 초청돼서 갔었습니다. 행사 시작 전에 저에 대한 프로모션을 하기 때문에 모든 자료를 미리 보내줘야 하거든요. 주최 측에서 제 곡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곡을 홍보했는데 그 곡이 바로 ‘Mr.Clapton’입니다. 막상 도착하니까 그 지역 분들이 저를 다 알고 있더라고요."

-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요즘에는 정규 앨범에 대한 의미가 많이 사라졌잖아요. 정규앨범보다는 4~5곡 정도의 싱글앨범을 준비 중이예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후배 양성을 하고 싶어요. 제가 매년 해외 블루스 페스티벌에 참가하는데 외국 분들은 한국에 블루스 시장이 넓고 페스티벌이 많은 줄 알고 있어요. 제가 차마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없더라고요. 재즈 페스티벌은 많지만 블루스는 없거든요. 사실 재즈는 블루스에서 파생된 장르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장르로 알고 있어요. 그게 참 안타깝네요. 블루스 페스티벌이 없는 나라는 한국, 북한, 중국 이 세 나라입니다. 저는 후배들을 해외 블루스 페스티벌로 보내주고 싶어요. 블루스를 사랑하는 후배들이 외국에 나가서 한국을 알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콘서트는 정기적으로 연 3~4회 정도 하고 있어요. 공연할 때 많이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것이 저를 도와주는 거고 저 또한 공연에 와 주신 분들에게 실질적으로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자리니까요. 관객들이야말로 저에게 또 다른 공연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들어 주시는 분들이기에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 영국 유학생활, 인생의 터닝 포인트

"제대 후 1984년에 바로 영국 유학길에 올랐어요. 1984년 1월에 제대를 했는데 복학하려면 9월에 했어야 했어요. 9개월 정도 시간이 비어서 영어를 배우러 영국으로 갔습니다. 부모님께는 3개월만 다녀오기로 약속을 했어요. 비용도 딱 3개월 치만 지원을 해주셨죠. 그런데 막상 영국에 가보니까 너무 좋았어요.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하루도 빠짐없이 클럽 공연을 보러 다녔어요. 정말 천국이 따로 없었죠."

"3개월이 지나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이 끊기니까 스스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어요. 아르바이트를 하루에 4건 정도 했던 것 같아요. 접시 닦는 것은 기본이고 페인트칠도 했어요. 제가 하숙하던 집 주인 할머니가 컨트리 음악을 엄청 좋아해서 주말만 되면 저랑 같이 클럽에 공연을 보러 다녔어요. 제가 기타 치는 걸 알고 할머니가 잘 아시는 밴드에 부탁해 저를 무대에 세우기도 했었죠. 제가 살고 있는 집 주방에 페인트칠을 해야 할 때가 됐는데 당시 영국에서는 페인트칠하는 전문 인력을 부르면 임금이 엄청 비쌌어요. 할머니가 잠깐 시장을 다녀오는 사이에 제가 깔끔하게 칠해놨더니 깜짝 놀라셨어요. 할머니가 이웃 분들을 소개해주셔서 동네 대부분의 집을 칠했던 것 같아요. 안정된 직업이었죠. 저를 영국에 오래있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 된 것 같네요."

"밤에는 클럽에서 연주하면서 생활했습니다. 1984년부터 1990년까지 7년 정도 체류했는데 한 번도 한국에 들어온 적이 없었죠. 한국에 들어오면 다시는 영국에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에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제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해요. 중간에 들어왔다면 저는 음악을 안했을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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