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골 거기서 네가 왜 나와

내용

◈ 설교말씀

십자가는 인류 역사 상 가장 잔인한 사형 제도였습니다. 죄수를 고문하고 채찍질한 후 십자가에 못 박아 피를 흘리고 진을 다 뺀 후 죽게 만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잔인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3절.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곳의 지명은 ‘해골’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골고다’인데, 이 단어가 라틴어 Calvarium을 거쳐서 영어의 Calvary 즉 갈보리가 됐습니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지형 상 특징 때문입니다. 멀리서 보면 그 모습이 마치 해골처럼 생겼기 때문입니다.

골고다는 예루살렘 성 밖에 위치한 언덕인데 대로변에 있어 공개 처형 장소로 적합했습니다. 로마제국은 이스라엘을 식민 통치하면서 한편으로는 유화정책을 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정책을 폈습니다. 십자가형은 공포정치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형은 항상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는 장소에서 공개 집행됐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절차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 때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 있었는데, 두 명의 행악자입니다. 행악자는 한 마디로 죄수(Criminal)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강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예수님이 두 죄수 사이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십자가형은 아무에게나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노예, 살인강도, 반역자 중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시행했습니다. 그러니까 두 죄수는 아마도 살인강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리고 공범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혹시 공범에 아니었다고 해도 최소한 비슷한 죄목을 가진 죄수들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그 두 죄수를 나란히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은 그 옆에 따로 못 박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두 죄수 사이에 못 박았을까요?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다분히 빌라도 총독의 심리 상태가 반영된 의도적 조치였을 겁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렇게 추정합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고소한 예수님을 아무리 심문해 봐도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고소한 죄목은 반역죄였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증오하고 죽으려 했던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고 했다는 겁니다. 자칭이 아니라 사실이죠. 오히려 그들이 인정하지 않은 게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오해하고 신성모독죄라고 몰아세우며 마땅히 죽여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법정에서는 이미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사형에 한해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집행할 수 없습니다. 로마 당국에 고소해서 로마법에 따라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당연히 사형 집행도 로마 당국이 맡아서 합니다. 문제는 로마법으로는 유대인의 신성모독죄가 사형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그들은 죄목을 반역죄로 슬쩍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 총독이 아무리 심문해 봐도 예수님은 무죄입니다. 당연히 석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데모를 했고, 그 여론에 밀린 빌라도는 하는 수 없이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그 과정이 눅23:22~2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4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빌라도는 유대인의 악한 의도를 알았지만 자칫 잘못해서 민란이라도 나면 총독 자리가 위태로워질 까봐 굴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불법으로 사형선고를 내린 빌라도는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겁니다. 그는 이를 은폐하고 합리화시키려고 일부러 두 죄수를 떼어 놓고 그 가운데 예수님을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이 마치 그들과 공범인 것처럼 모양새를 갖춘 겁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골고다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나란히 세워졌습니다. 흔히 이 장면을 그린 성화들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뚝 솟아 있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화가들이 그렇게 표현한 것뿐이고, 실제로는 세 개 모두 비슷한 십자가였을 겁니다. 그래야 효과적으로 물 타기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의도를 바꾸어 당신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예수님이 두 죄수 사이에 못 박히신 그 모습을 통해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메시지를 표현하셨습니다.
[1] 죄인처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빌라도가 예수님을 두 죄수 사이에 끼워 넣은 것을 통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락없는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구약 이사야 선지자가 십자가를 내다보며 예언한 말씀이 나오죠. 그 중에 사53:3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악한 자들에게 체포되어 이러 저리 끌려 다니며 고문당하다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게다가 악한 자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하신 예수님! 영락없는 죄수의 모습입니다. 사53:12 보면 그런 사실을 증거합니다. “ ...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 ” 예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완전한 죄인의 모습을 고난 받으시고 피 흘려 죽으셨음 나타냅니다.
[2]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그러면 죄인이 아니신 분이 왜 이처럼 철저하게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셨을까요? 그것은 죄인이 아니신 의로우신 분이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극한 고통 가운데 십자가에 매달린 채 어떻게 하셨습니까?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34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죄인들을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감내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사실을 미리 내다보고 예언했습니다. 사53:4~6 말씀입니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는데,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리신 피는 죄인들의 죄를 속하기 위한 죄 값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속의 십자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실을 고후5:21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알지 못했다는 것은 지적으로 몰랐다는 게 아니라, 경험한 적이 없는, 즉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의로우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분에게 죄를 덮어 씌워 영락없는 죄인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죄를 사하심으로 죄인이 의인 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래 전에 미국의 한 교회에 방문한 적 있습니다. 주일학교를 어떻게 운영하는지 살펴보려고 교실마다 돌아보는데 한 교실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나무로 큼직하게 십자가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십자가 위에 작은 나무판에 각자 자기 이름과 죄를 써서 망치와 못으로 붙이고 있었습니다. Bob's Sin, John's Sin, Jane's Sin, Helen's Sin ... 그들의 표정을 보니까 무척 진지하고 어떤 아이는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느끼는 표정입니다.

그렇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모습으로 죄인들 사이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죄인들을 대속하셨음을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천국 백성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진실로 십자가 복음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피 흘려 죽으셨음을 믿습니까? 그러면 어엿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3] 두 죄인을 영원히 갈라놓으신 예수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고 없고가 얼마나 중요한지 본문의 두 죄수의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두 죄수 사이에 못 박히신 것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영원히 다른 길로 갈라짐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죄수 두 명 중 하나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하고, 다른 한 명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을 보면 두 명 다 조롱하고 욕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강도들’이라고 했으니까 분명히 두 죄수가 함께 욕한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처럼 의심합니다. 그런 게 아니고, 잘 봐야 합니다. 4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 부활 사건을 기록한 책인데, 조금씩 기록의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그것은 다르거나 틀린 게 아니고 관점이나 강조점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종합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걸까요? 한 쪽에서는 두 명이 다 욕했다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한 명만 욕했다고 하고 ... 종합해 보면 이런 겁니다. 처음에는 두 명이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한 게 맞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한 명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십자가 세 개가 서 있었는데 서로 가까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생생히 듣고, 예수님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백성들, 관리들, 로마 군병들의 말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메시야냐? 그러면 너 스스로 구원해 봐! 십자가에 내려와 보시지?’ 다른 한 죄수는 ‘그러면 나도 구원해 줘!’ 이렇게 조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서 저럽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 모습을 보면서 한 죄수는 마음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자기들은 고통 가운데 저주를 하고 발악을 하는데, 예수님은 온갖 욕설을 들으면서도 품위를 지키고 있는 겁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조롱하는 소리가 진짜 맞는 말인가? 맞아! 그래! 저 분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 맞아! 그리고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 거야! 그렇다면 부탁해볼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실 때 나도 함께 갈 수 있는지 여쭤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까 다른 죄수의 꼴이 밉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를 책망합니다. 40절~41절.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 말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자기 죄를 회개한 겁니다. 처음에는 억울하게 못 박혀 죽는다고 생각해서 저주를 하고 발악을 했는데 하나님의 의식하면서 자신의 죄악을 깨달았습니다. 사형당하는 것은 당연하고, 더 나아가 죽음 이후에도 영원한 지옥 형벌을 당하면 어쩌나 하고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죄수는 마침내 예수님을 향해 외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라는 신앙고백이요, 자기를 구원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42절.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그 때 예수님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무슨 말입니까? 그 죄수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천국 백성을 삼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가실 때 함께 천국으로 인도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 아슬아슬하게 구원을 받은 겁니다. 예수님의 육성을 통해 직접 구원과 영생을 보장받았습니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는 비록 평생 죄만 지었지만, 마지막 순간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 천국 입국을 위해서 그 어떤 인간 조건도 필요하지 않고 오직 믿음만이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위해서는 철저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누누이 강조합니다. 오직 죄인들만 있습니다. 그런데 두 종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회개하는 죄인이 있고, 자기가 의인일 착각하며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죄인이 있습니다. 그 중에 누가 죄와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막2:17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병자라도 자기가 병에 걸린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의사를 찾아가지 않습니다. 결국 병을 고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인인데도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혔다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고 믿음을 고백하지 않는 자는 그 죄가 그대로 있고, 그 죄로 인해 심판받고 영원히 지옥 형벌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3:16~18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예수님이 구원하러 오셨지만, 믿지 않고 거부하면 별 수 없습니다. 이미 죄인이므로 이미 심판받은 것과 같습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두 사람이 강물에 빠졌습니다.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강가에 있던 사람이 밧줄을 던집니다. 한 명은 고맙다며 덥석 잡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명은 밧줄이 끊어질 것 같아 보였는지 발줄을 잡지 않고 헤엄쳐 나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물살이 세서 떠내려가다 결국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왜 죽었나요? 강물에 빠져서 죽었나요? 맞는 말이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밧줄을 잡지 않아서 죽은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게 영원한 멸망에 대한 결정적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 대단한 조건이나 공로가 필요한 줄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 십자가를 붙들면 됩니다. 얼마 전 급성 백혈병에 결려 입원한 청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무균실에 있어서 면회가 안 되는데, 목사인데 잠시 기도만 해 주고 나오겠다고 사정해서 일행은 밖에 있고 혼자 들어가 만났습니다. 젊은 청년이 누워있는데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위로하면서 꼭 치유 받으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치유보다 중요한 것이 구원이요 천국임을 증거했습니다. 복음을 제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머뭇거립니다. 지은 죄가 많아서 아직은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려 죽은 게 아니냐고 다시 복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더니 그제서 ‘아멘!’하고 응답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런 회개와 믿음의 고백도 없이 죽었는데, 막연히 좋은 데 갔을 거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좋은 데가 어디입니까? 천국이잖아요. 누구 마음대로 천국에 들어갑니까? 천국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을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하고 반응하지 않고 이 한 가지가 두 죄수의 영원한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한 사람은 영원한 지옥, 한 사람은 영원한 천국으로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길로 각각 가게 됐습니다. 마치 백두산 천지에 있는 물이 같이 있다가 동쪽으로 서쪽으로 갈라지면 각각 동해와 서해로 갈라져 영영 만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부디 이 사순절에, 그리고 오늘 저녁부터 시작되는「새생명축제」를 통해 다시 한번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되었음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그 힘으로 날마다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이 쉬운 구원의 복음을 알았으니 가족과 이웃에게 꼭 전하시기 바랍니다. 이 한 가지를 소홀히 하다가 영원히 후회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서 복을 누리고, 이 세상 떠날 때 천국에 당당히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가족과 이웃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GOODTV Corporatio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