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어느 계절이라도 춥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 새벽은 어느 계절이라도 춥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인생은 우여곡절 속 리듬” 1976년 연극 ‘하멸태자’로 데뷔 후 46년째 연기의 길을 걷고 있는 배우 남경읍. 그는 배우이기도 하지만 조승우, 황정민, 소유진, 오나라 등 4000여 명의 제자를 양성한 뮤지컬계 대스승이다. 그런 그가 공교롭게도 뮤지컬 ‘올드 위키드 송’에서 슬럼프에 빠진 천재 피아니스트를 가르치는 ‘요제프 마쉬칸’ 교수 역을 맡았다. 후배들이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빛을 함께 찾아주며 멘토가 되어주었던 그에게 이번 작품은 어떻게 다가올까. 또 이 자리에 서기까지의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했을까. 인생을 하나의 ‘슬럼프’라고 비유한 배우 남경읍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요제프 마쉬칸’은 어떤 인물인가? 마쉬칸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겪었던 홀로코스트의 트라우마를 감추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특유의 유쾌함과 웃음으로 그 아픔을 가리며 살아가는 인물이에요. 그래서 더욱 괴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죠. 하지만 ‘스티븐 호프만’을 만나고 사제 간 음악으로 하나가 되면서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기 시작합니다. Q. 스승으로서 작품이 주는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제자들을 가르치다 보면 다양한 학생을 만나게 되는데요. 보이는 것이 전부인 학생이 있고, 지금은 재능이 보이지 않지만 숨겨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학생도 있어요. 좋은 선생은 그런 재능을 가진 학생을 찾아내고, 키워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또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중요하죠. 많은 제자의 재능을 끌어내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경험이 도움되었습니다. Q. 사제 간 교감을 극대화하는 넘버가 있다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슈만의 ‘시인의 사랑’은 숨은 열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메시지가 강한 곡이에요. 그중 마음이 가는 노래는 제1곡 ‘이 아름다운 5월에’입니다. 마쉬칸이 이 곡을 가르치면서 스티븐의 열정을 끌어내기 위해 하는 말이 있어요. “인생이란 건 언제나 그렇게 명확할 수만은 없는 거야. 이 안에 마음이라는 게 있어. 그걸 움직이라고!” Q. 연기하며 와 닿았던 대사는? 마쉬칸의 대사 중 이런 말이 있어요. “비탄 속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비탄을 모르니 커다란 기쁨에 대해서 이해하지도 못하는 거야.” 그의 말처럼 항상 행복한 사람도, 슬럼프를 겪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아요. 누구에게든 슬럼프가 오지만, 그것을 극복할 때 행복하고 기쁘죠. 좋고 나쁜 일을 번갈아 겪다 보면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슬럼프이며 터널이지 않을까요? Q. 슬럼프를 극복한 일화가 있다면? 힘든 시기에 겨울 산을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찬바람과 싸우는 나목의 황량한 모습이 그 당시 저와 참 비슷하다고 느꼈죠. 한참을 바라보다 문득 ’아! 다른 계절에는 나뭇잎 때문에 햇빛이 땅까지 비추지 못하지만, 잎이 다 떨어진 겨울 산은 햇빛이 오롯이 땅을 비추고, 그 덕에 땅속에서 수많은 광합성이 일어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제 현실이 겨울이라도 춥지만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죠. Q. 관객에게 전하는 위로의 한 말씀 코로나19 또한 인생의 우여곡절, 리듬이라고 생각해요. 영원한 어둠은 없습니다. “기쁨과 슬픔의 결합. 이게 바로 핵심이야!“라는 마쉬칸의 대사처럼 지금은 큰 비탄을 겪고 있지만, 두 주인공처럼 커다란 기쁨을 이해할 날이 곧 오겠지요. 그 시간을 견디는 가운데 이 작품이 희망의 메시지가 되어주리라 생각해요. 뮤지컬 '올드 위키드 송' 일정 3월 1일까지 장소 예스24스테이지 3관 연출 우진하 출연 남경읍, 남명렬, 이재균, 정휘, 최우혁 등2021-02-17 10:08
  • 새벽은 어느 계절이라도 춥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메마른 감성을 적셔줄 2월의 문화 소식● Exhibition ◇신의 예술가, 미켈란젤로 특별전 일정 5월 2일까지 장소 M컨템포러리 16세기 르네상스 거장 미켈란젤로의 걸작을 미디어 아트를 통해 한자리에서 조망한다. 드로잉, 유화, 프레스코, 조각, 시 등 5가지 장르를 통해 그림을 시작했을 때부터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미켈란젤로의 전 생애 작품을 살펴보고, 그의 예술세계를 탐구한다. 전시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연대기와 작업 방식을 살펴보는 공간으로 시작한다. 이어 그가 남긴 드로잉으로 작품을 위해 수없이 그어야 했던 선을 확인한다. 회화 부문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유화 작품과 시스티나 예배당 프레스코 등을 조명한다. 이곳에서는 ‘아담의 창조’를 비롯한 유명 프레스코화를 미디어로 재해석해 환상적인 볼거리를 선사한다. 이 외에도 3D 영상, 홀로그램 등 다양한 미디어 기술과 접목한 조각품으로 몰입도를 높이며, 미켈란젤로의 시를 함께 전시해 그의 생각을 엿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미켈란제로의 작품을 색칠하는 컬러링 존을 통해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환기가 필요한 일상에 영감을 제공하는 이번 전시는 실제 작품을 감상하기 어려워진 관객들에게 색다른 방식으로 위로를 전하고, 지성을 불어넣는다. ◇마티스 특별전 : 재즈와 연극 일정 4월 4일까지 장소 마이아트뮤지엄 앙리 마티스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진행하는 국내 최초 마티스 단독 전시회가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진행되고 있다. 앙리 마티스는 강렬한 색채가 특징인 프랑스 야수파 화가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예술가로 손꼽힌다. 50년간 유화, 드로잉, 조각, 판화, 컷아웃, 책 삽화 등 방대한 작품을 제작했으며, 주요 작품은 ‘모자를 쓴 여인’, ‘춤’, ‘붉은 화실’, ‘폴리네시아 하늘’ 등이 있다. 그중 마티스의 컷아웃(종이 오리기) 기법은 20~21세기 추상미술, 미니멀리즘 디자인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번 전시는 컷아웃 기법으로 제작된 ‘재즈’ 시리즈와 드로잉, 석판화, 발레 공연을 위해 디자인한 무대 의상, 로사리오 성당 건축 등 작품 120여 점을 다채롭게 소개한다. 특히 대표작 ‘재즈’를 통해 마티스 특유의 생생한 색채와 선을 조명하고 작품과 어울리는 재즈 음악을 큐레이션해 그림과 음악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 도슨트의 풍부한 해설로 작품의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시간도 마련한다. 전시를 통해 만나볼 수 있는 마티스의 예술적 순수함과 열정은 코로나19로 메마른 감성에 단비가 되어준다. ● Book ◇노인을 위한 치료백과 (분당서울대병원 노인의료센터 저·알에이치코리아) 시니어에게 자주 나타나는 여러 질환을 한 권에 모아 소개한다. 질환뿐 아니라 간병, 요양병원 등 복지서비스까지 총망라했다. 시니어라면 집에 한 권 두고 틈날 때마다 찾아볼 만하다. ◇억척의 기원 (최현숙 저·글항아리) 중장년 여성의 구술 생애 작업을 이어온 최현숙 작가가 이번엔 60대 나주 농민의 이야기를 실었다. 두 여자의 굴곡진 삶을 통해 그들이 억척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풀어낸다. ◇어른의 말공부 (사이토 다카시 저·비즈니스북스) 나이가 들수록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품격 있는 언어 습관을 소개한다. 필요한 말만 하는 분별력, 진심을 담는 전달력 등 말의 내공을 갖추는 방법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 Stage ◇얼음 일정 3월 21일까지 장소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연출 장진 출연 정웅인, 이철민, 박호산, 이창용, 신성민, 김선호 등 ‘충무로의 이야기꾼’ 장진 감독의 화제작 연극 ‘얼음’이 초연 후 5년 만에 돌아왔다. ‘얼음’은 독특한 구성의 2인극으로, 2016년 초연 당시 장진 감독 특유의 작가적 상상력과 뛰어난 이야기 구성, 긴장감 넘치는 연출로 화제를 모았다. 작품은 잔인한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18세 소년과 그 소년을 범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두 형사의 이야기를 다룬다. 무대에 등장하진 않지만 강렬한 존재감을 나타내는 소년과 살인 사건이 일어난 날의 정황을 짚어가는 두 형사 사이 팽팽하게 펼쳐지는 심리전이 극에 긴장감을 더한다. 이번 공연에는 내로라하는 실력파 배우들이 대거 캐스팅되었다. 배우 이철민과 박호산이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초연에 이어 이번 무대에 다시 오르고, 배우 정웅인, 이창용, 신성민, 김선호가 새롭게 합류해 작품에 힘과 활력을 불어넣으며 짜릿한 연기 앙상블을 펼칠 예정이다. ◇위키드 일정 2월 16일~5월 1일 장소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연출 조 만텔로 출연 옥주현, 손승연, 정선아, 나하나, 서경수, 진태화 등 초록 마녀 열풍을 일으켰던 뮤지컬 ‘위키드’가 다시 무대에 오른다. 위키드는 ‘오즈의 마법사’를 유쾌하게 뒤집은 그레고리 맥과이어의 소설을 뮤지컬화한 작품으로, 두 마녀 ‘엘파바’와 ‘글린다’의 우정과 사랑, 용기 등을 다룬다. 거대한 타임 드래곤, 날아다니는 원숭이, 350여 벌의 의상 등 화려한 무대와 마녀들의 매혹적인 노래가 마법에 걸린 듯 시선을 사로잡는다. ◇붉은 정원 일정 2월 5일~3월 28일 장소 유니플렉스 2관 연출 성재준 출연 박은석, 이정화, 조현우 등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러시아 3대 문호로 꼽히는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을 각색한 창작 뮤지컬이다. 감수성이 풍부한 18세 소년 ‘이반’과 치명적인 매력의 ‘지나’, 이반의 아버지이자 유명 작가인 ‘빅토르’의 위험한 삼각관계를 그린다. 섬세한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대사들과 클래식하면서도 세련된 음악들로 원작의 감동을 구현했다.2021-02-0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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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운 겨울 따뜻하게 채워줄 1월의 문화 소식● Exhibition ◇Hullo Hullo Following on: 로즈 와일리 일정 3월 28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34년생 80대 할머니 화가 로즈 와일리의 세계 최초 대규모 개인전이 한국에서 열린다. 어린 시절부터 화가를 꿈꾼 로즈 와일리는 결혼을 하며 꿈을 접고 40대에 들어서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그녀는 당시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매일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76세의 나이에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주목을 받으며 신예 작가로 떠올랐다. 현재는 세계 3대 갤러리 중 하나인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 전속 작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로즈 와일리의 열정적인 미술 인생을 엿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회화, 드로잉, 설치미술을 포함한 원화 150여 점을 단독으로 선보인다.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 VIP룸에서 전시했던 희귀작뿐 아니라, 영국 프리미어 리그 토트넘 홋스퍼에서 활약 중인 손흥민 선수를 그린 작품까지 국내 최초로 공개한다. 로즈 와일리의 작품은 일상 속 순간이나 영화의 한 장면같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을 소재로 한다. 어느덧 90세를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그녀의 천진난만한 예술세계는 회색빛으로 물든 우리네 일상에 긍정의 힘을 전파한다. ● Book ◇클로리스 (라이 커티스 저·시공사)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남아 산속에서 길을 잃은 70대 노인 클로리스와 그녀를 찾는 구조대원 루이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인물과 삶에 대한 독창적인 통찰로 출간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미국 주식으로 은퇴하기 (최철 저·황금부엉이) 유튜브 채널 ‘미주은’이 알려주는 미국 주식 투자 노하우. 시니어들의 풍요로운 은퇴를 위해 실전 용어부터 유망 종목 분석 등 미국 주식을 시작할 때 알아야 할 정보를 총망라한다. ◇채우지 않아도 삶에 스며드는 축복 (정애리 저·다산북스) 수십 편의 작품으로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연기 활동을 해온 배우 정애리의 세 번째 에세이. 화면에서는 볼 수 없는 그녀만의 소소한 일상과 진솔하고 따뜻한 내면을 기록했다. ● Stage ◇명성황후 일정 1월 19일~2월 26일 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연출 안재승 출연 김소현, 신영숙, 강필석, 손준호 등 한국 창작뮤지컬의 가능성을 보여준 ‘명성황후’가 25주년 기념 공연을 올린다. 조선조 말 고종의 비로서 격변의 시대 열강에 맞서 나라를 지켜야 했던 명성황후의 삶을 그린다. 이번 공연은 노래로만 진행되는 ‘송스루’ 형식에서 벗어나 대사를 추가하고, 의상과 소품을 시대에 맞춰 새로 디자인하는 등 대대적인 변화를 통해 한층 완성도 높아진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앙리할아버지와 나 일정 2월 14일까지 장소 예스24스테이지 1관 연출 이해제 출연 이순재, 신구, 유리, 박소담, 채수빈 등 프랑스 극작가 이방 칼베락의 작품으로, 홀로 사는 고집불통 할아버지 ‘앙리’의 집에 대학생 ‘콘스탄스’가 룸메이트로 들어오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꿈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콘스탄스를 위해 그녀의 ‘인생 멘토’가 되어주는 앙리의 모습이 훈훈한 감동을 자아낸다. 국민 배우 이순재, 신구와 상큼 발랄한 여배우들의 귀여운 ‘케미’를 확인할 수 있는 연극이다.2021-01-07 16:24
  • 새벽은 어느 계절이라도 춥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TV에 3초 나오지만 열정은 주연급이에요”떡볶이집 주인부터 전단지 아주머니, 진상 고객까지 스쳐 지나가는 드라마 속 찰나의 장면에서도 열연을 펼치는 배우가 있다. 단역 배우 임유란(50) 씨다.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한 뒤 주부로 살다 40대 중반에 다시 연기 활동에 발을 들인 임 씨는 5년간 50여 개의 역할을 맡으며 단역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비록 역할에 이름 하나 없고 대사는 길어야 세 마디지만, 촬영장에 갈 때마다 짝사랑하는 소녀처럼 가슴이 떨린다는 그녀를 만나 단역 배우의 삶을 들어봤다. 단역 배우 임유란을 소개하자면 이 영화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극한직업’이다. 그녀는 영화 시작 단 2분 만에 관객들의 폭소를 유발케 한 장면, 바로 ‘벤츠신’의 주인공이다. 일명 ‘벤츠 아줌마’로 15초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극의 분위기를 휘어잡은 임유란은 단역 배우 인생 처음으로 대중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자칭 천만 배우 임유란입니다. ‘극한직업’에서 경찰에 쫓기는 마약범에게 차를 빼앗겨 넘어졌다가, 찰진 욕을 하며 마약범을 때려잡는 역할이었어요. 영화에서는 짧게 나왔지만, 사실 4시간 동안 촬영한 장면이에요. 40℃ 가까이 되는 더운 여름에 넘어지고 또 넘어졌죠. 그래도 너무 감사해요. ‘극한직업’ 덕분에 천만 배우라고 말하고 다닐 수 있게 됐거든요.(웃음)” 잠깐의 대화에서도 유쾌한 에너지와 남다른 끼가 느껴지는 그녀는 보기와 달리 꽤 평범한 삶을 살았다. 대학 시절 마당극 동아리에 들어가 장진 감독과 연극을 함께하고 졸업 작품으로 배우 김나운과 함께 춘향전을 공연했지만, 졸업 후에는 연기의 길을 걷지 않고 비서 일을 하다 스물여섯 살 되던 해 결혼했다. 이후 가사와 육아에 충실했던 그녀는 우연한 계기로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한동안 잊고 살았던 연기에 다시 눈을 뜨기 시작했다. “9년 전쯤, ‘이승연과 100인의 여자’라는 프로그램을 보는데, 주부 판정단에게 주는 선물이 너무 좋아 보이는 거예요. 바로 방청 신청을 했죠.(웃음) 그런데 방송국에 주부 모델 캐스팅하는 분들이 오시더라고요. 제가 부끄럼 없이 말을 잘하니까 그분들 눈에 띈 거죠. 자연스레 방송국을 드나들다 보니 단역 배우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연기는 내 길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모든 게 물 흐르듯 착착 맞아떨어져서 신기했죠.” 카메라 뒤편 보이지 않는 고충 약 20년 만에 단역 배우로 다시 발을 내디딘 임 씨는 20대의 마음으로 달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단역의 세계는 열정 하나만으로 버티기에는 녹록지 않았다. 대사 없이 스쳐 지나가는 역할 하나를 따내는 데 최소 5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했고, 복잡한 오디션을 거쳐야 했다. 어렵사리 역할을 얻어 수 시간씩 촬영을 해도, 정작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은행 인질 역에 캐스팅돼서 추운 겨울날 2박 3일 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던 적이 있어요. 무릎보호대까지 차고 촬영했는데, 본방송에서는 아웃포커스로 나오더라고요. 주변 사람도 저인 줄 몰랐을걸요.” 임 씨는 단역 배우의 또 다른 고충으로 불안정한 고용 상태를 꼽았다. 극에서 비중이 있는 캐릭터가 아닌 만큼, 언제까지 출연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일회성 촬영을 제외하고 임 씨는 자신의 역할이 대본 속에서 사라질까 가슴 졸여야 했다. “가사도우미 역이 단역 중 안정적인 편이에요. 작품이 끝날 때까지 웬만하면 계속 출연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언젠가 한번은 갑자기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유를 물어 보니, 주연 배우가 극 중 가사도우미로 취직을 했대요. 제가 주연을 어떻게 이겨요.(웃음)” 열정의 분량은 단역 아닌 ‘주연급’ 배우보다 주부로서의 삶이 더 길었던 그녀지만, 사실 임 씨는 어렸을 때부터 연기에 대한 열정이 컸다. 맞벌이였던 부모님이 직장에 나가고 집에 홀로 남으면 친구를 데려와 상황극을 하며 놀았고, 매년 성탄절엔 교회에서 연극을 올리며 한 해를 마무리했다. 결혼 후에는 문화센터에서 아이들에게 전래 놀이를 가르치며 “여기가 내 무대야” 하고 속으로 되뇌기도 했다. 실제로 임 씨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어디든 무대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50여 차례의 단역 활동을 비롯해 홈쇼핑 광고, 중년 의류 브랜드 모델 등을 겸하며 다방면으로 뛰어다녔다. 그녀에게 대단한 연줄 하나 없이 끝없는 러브콜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을 묻자, “자신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와 배움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작은 역이라도 어떻게 하면 캐릭터를 더 잘 살릴 수 있을지 연구했어요. 미용사 역을 맡았을 땐 얼룩이 묻은 앞치마에 빗 3개를 꽂아 갔고, 전단지 돌리는 아주머니 역을 할 땐 선캡과 장갑을 준비했죠. 자식들한테 전단지 돌리는 연습도 했어요. 노력한 게 보였는지, 촬영 당일 카메라에 잘 나오는 자리로 바꿔주시더라고요.” 임 씨의 ‘열정 행보’는 촬영장 바깥에서도 이어졌다. 그녀는 SNS를 활용해 자신의 이름을 꾸준히 알렸다. 지난 4월 유튜브 채널 ‘주부 배우’를 만들어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 속 장면을 올리며 자기PR을 했고,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통해서는 협찬과 광고를 받아 일이 들어오지 않을 때를 대비해 부수입을 올렸다. “유튜브요? 어려웠죠. 그래서 발품을 팔았어요. 찾다 보니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편집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 있더라고요. 저자 분께 ‘선생님, 저 영상 배우고 싶어요’ 하고 다짜고짜 메시지를 보냈어요.(웃음) 어려워도 배우면 돼요. 계속 공부하면서 스스로 발전해나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연기 향한 순애보의 짝사랑 초점 하나 제대로 잡히지 않은 채, 주연 배우의 곁에서 맴도는 단역 배우에게 카메라는 어느 노래 제목처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같은 존재. 임 씨는 연기하는 자신을 떠올리면, 좋아하는 마음도 몰라주고 곁을 내어주지도 않아 야속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짝사랑을 하는 소녀 같은 기분이라고 설명한다. “단역 배우는 늘 선택받아야 하는 입장이잖아요. 또 선택받았다고 해서 화면에 다 나오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단역이라고 배우가 아닌 건 아니거든요. 제가 본 영화 중 이런 장면이 있어요. 영화감독 아버지를 둔 주인공의 친구가 주인공을 놀리려고 ‘너네 아빠 작품도 없는데 영화감독 맞냐?’ 하고 빈정대요. 그러자 주인공이 ‘수박 장수가 수박 안 팔린다고 수박 장수 아니냐?’ 하면서 맞받아치거든요. 저는 힘들 때마다 그 대사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아요.” 지난해 초 임 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해는 한 달에 세 번만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다”며 소박하지만 간절한 소원을 적었다. 그 소원이 이루어졌냐고 묻자,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돌아오는 새해 소원은 무엇일까. 2년 전에 비하면 한층 더 커다래진 포부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인지도를 보유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이름까진 바라지도 않아요. 얼굴만 보고 ‘저 사람 어디 나왔잖아’ 하고 알아봐주신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할 거고요. 언젠가는 꼭 이 짝사랑의 결실을 볼 거예요.”2020-12-18 09:32
  • 새벽은 어느 계절이라도 춥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노역배우'로 돌아온 송승환, 인생 3막을 열다 ‘난타’의 제작자이자 공연 연출가,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막식 총감독까지 인생의 화려한 2막을 그려온 배우 송승환이 연극 ‘더 드레서’로 돌아왔다. 연극으로 무대에 서는 건 2011년 ‘갈매기’ 이후 9년 만이다. ‘더 드레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전쟁통 속에서 공연을 올려야 하는 한 극단 대표이자 노배우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는 주인공이 걸어온 삶의 길이 자신의 인생을 닮은 것 같아 이 작품을 택했다. 아역배우에서 중견배우로, 이제는 노역배우로 인생 3막을 열어갈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랜 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소감은? 연극은 방송이나 영화처럼 편집이 없어요.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를 관객들에게 온전히 보여줄 수 있지요. 그래서 더 설레고 기대가 됩니다. 이번 공연을 시작으로 관객과 자주 만나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기 위해 더 열심히 준비 중입니다.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이제 내가 ‘노역배우’로 활동할 수 있겠다 싶은 순간 만난 작품이에요. 극작가 로날드 하우드는 워낙 훌륭한 작가죠. 여러 작품을 두고 고민했는데, ‘더 드레서’는 일단 제 삶과 가장 많이 닮은 이야기 같았어요. 극중 ‘선생’은 한 극단을 책임지는 대표이자 배우입니다. 저 역시 제작자이자 배우의 삶을 살고 있잖아요. 여러 가지 공감 가는 부분이 많은 작품이어서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노배우’ 역을 연기하며 느낀 점은?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노인 역할을 멋지게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노역을 제대로 연기해보는 게 처음이라 스스로도 기대감이 큽니다. 특별히 와 닿았던 대사가 있다면? 배우로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특히 “배우는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은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거야”라는 대사가 와 닿았어요. 영화나 드라마는 영상 기록이 남지만, 연극은 현장 예술이기 때문에 작품을 목격한 관객의 기억 속에만 남잖아요. 요즘 공연을 영상화하자는 얘기도 많은데, 저는 ‘생선회를 통조림에 넣은 것과 같다’고 비유해요. 연극은 관객과의 호흡과 소통을 통해 완성되는 거니까요. 작품 외에 준비 중인 일은? 최근 이순재 선생님, 오현경 선생님, 김영옥 선생님을 뵈었어요. 요즘 준비 중인 유튜브 방송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프’ 촬영 때문이었죠. 이 방송은 제가 원로 배우 선생님들을 인터뷰하는 내용인데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아카이브로 만들고 싶어서 기획한 채널이에요.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느낀 점은? 사적인 자리에서 선생님들의 그 시절 방송, 영화, 공연 이야기를 들으면 참 재미있어요. 방송국에서 거의 생방송으로 드라마를 촬영하던 때의 이야기는 그분들이 아니면 들을 수 없죠. 지금까지 세 분을 뵈었고, 앞으로도 더 많은 배우 선생님들을 만날 예정인데, 언젠간 제 이야기로 끝을 맺을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앞서 배우의 길을 걸어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참 많이 존경스럽고, 배울 점도 많은데요. 저도 그렇게 제 이야기를 남길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나이 들고 싶은지? 지금까지 배우로 살아오며, 연기에 대한 마음가짐이나 자세가 바뀌진 않았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상대 배우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태도는 깊어진 것 같아요. 그렇게 쌓여가는 연륜을 받아들이면서 나이 들어가고 싶어요. 앞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역할로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질 거라 생각해요. 꾸준히 연기하고, 공연 제작하면서 재밌는 일을 할 겁니다. 연극 '더 드레서' 일정 2021년 1월 3일까지 장소 정동극장 연출 장유정 출연 송승환, 안재욱, 오만석, 정재은 등2020-12-09 10:17
  • 새벽은 어느 계절이라도 춥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브라보 독자를 위한 10월의 문화 소식● Exhibition ◇남겨진, 미술, 쓰여질, 포스터 일정 10월 24일까지 장소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광고나 홍보를 위해 사용된 미술 포스터를 한데 모아 선보인다. 전시기간이 지나고 나면 본연의 목적은 사라지지만, 포스터가 지닌 예술·기록적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 기획했다. 전시작은 박물관이 자체적으로 입수해 소장하거나 기증받은 것으로, 총 1000여 점의 포스터 중 미술사적 의의가 큰 작품 60여 장을 선별했다. 1960년부터 2010년까지 시대별로 다양하게 만들어진 포스터의 발전 과정과 이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호랑이는 살아있다 일정 12월 19일까지 장소 스페이스 씨 한국을 대표하는 동물이자 한민족 정서 깊은 곳에 자리하는 존재, 호랑이의 상징성을 유물과 회화, 설치 작품 등으로 살펴본다. 액운을 물리친다고 알려진 호랑이 발톱 노리개부터 조선시대 무관의 의복을 장식한 호랑이 문양 흉배 등 특유의 용맹성과 강인함을 엿볼 수 있는 작품 위주로 전시한다. 더불어 도상의 전통적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잃어버린 호랑이를 찾아서’ 등 현대적 관점이 담긴 동시대 작가의 작품도 함께 소개한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 호랑이 기운을 얻어 힘을 내길 바란다는 관장의 소망이 담겼다. ◇장 미쉘 바스키아 · 거리, 영웅, 예술 일정 10월 8일~2021년 2월 7일 장소 롯데뮤지엄 ‘그라피티의 제왕’이라 불린 흑인 낙서 화가 장 미쉘 바스키아 기획전으로 바스키아가 남긴 예술세계 전반을 조망한다. 대표작 150여 점과 팝아트계의 거장 앤디 워홀과 협업한 작품도 선보인다. 바스키아는 1980년대 초 미국 뉴욕 화단에 작품을 공개하며 이름을 알렸고, 2년 뒤 첫 개인전을 열며 인기 작가 반열에 올랐다.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미술뿐 아니라 음악, 패션 등 여러 영역에서 해석되고 있다. ◇1978, 우리 가족의 라디오 일정 11월 15일까지 장소 서울생활사박물관 1978년 서울에 사는 가상 캐릭터 영희의 집을 재현해 당시 유행하던 라디오 문화를 되짚어본다. 택시 운전사인 영희 아버지의 카 라디오부터 오빠의 휴대용 라디오, 영희의 카세트 라디오까지 다양한 추억의 라디오와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프로그램을 조명한다. 영희의 방에서는 1970년대 라디오 프로그램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진행했던 황인용 전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들어볼 수 있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인 금성 A-501과 1960년대 라디오 편성표 등 라디오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 ● Movie ◇돌멩이 개봉 9월 30일 장르 드라마 감독 김정식 출연 김대명, 송윤아, 김의성 등 지적 장애를 앓고 있는 30대 청년 ‘석구’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범죄자로 몰리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드라마 ‘미생’의 김 대리,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양석형 등 다양한 작품에서 입체감 있는 캐릭터로 존재감을 드러낸 배우 김대명의 섬세한 연기력이 돋보인다. 실제로 김대명은 8세 지능을 가진 어른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연기를 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빌런’으로 종종 등장했던 배우 김의성은 석구의 보호자인 노신부 역을 맡아 인자한 매력을 선보인다. 2017년 한 배우 오디션에서 4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만장일치로 합격한 신예 배우 전채은의 활약 또한 주목된다. ◇테슬라 개봉 10월 21일 장르 드라마 감독 마이클 알메레이다 출연 에단 호크, 이브 휴슨 등 교류 전류 전송 장치를 비롯해 라디오, 무선 원격 조종 기술, 리모컨 등 유용한 발명품을 만들어 오늘날 천재 과학자로 평가받는 니콜라 테슬라의 삶을 조명한다. 테슬라의 라이벌이자 상사였던 토머스 에디슨과 결별한 뒤 자본가 J.P. 모건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 ‘커런트 워’가 테슬라와 에디슨의 대결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영화는 오로지 테슬라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감독은 선댄스영화제에서 네 차례나 상을 거머쥔 마이클 알메레이다가 맡아 과학 영화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감각적 비주얼을 연출했다. ◇언힌지드 개봉 10월 예정 장르 스릴러, 범죄 감독 데릭 보트 출연 러셀 크로우, 카렌 피스토리우스, 가브리엘 베이트먼, 지미 심슨 등 도로 위에서 크게 울린 경적 때문에 분노가 폭발한 한 남자가 복수를 하기 위해 운전자를 뒤쫓는 내용으로, 현실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보복운전을 소재로 한 영화다. 영화 ‘레미제라블’, ‘노아’ 등에서 활약한 배우 러셀 크로우가 필모그래피 사상 최악의 악역으로 변신해 눈길을 끈다. 러셀 크로우의 살기 가득한 눈빛 연기와 도로 위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액션이 극한의 공포를 선사한다. 북미 개봉 당시 셧다운 이후 극장가에 처음 선보인 영화로, 북미 및 해외 7개국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코로나19를 날려버릴 최고의 스릴”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 Book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 (김재환 저·북하우스) 김재환 영화감독이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을 촬영하며 3년간 느낀 점을 섬세한 시선으로 풀어낸 책이다. 문해학교에 다니며 한글 공부를 하고 아들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써보는 등 배움과 설렘으로 가득한 칠곡 할머니들의 노년을 유쾌하고 따뜻하게 그려냈다. 칠곡 할머니들이 직접 쓴 순수하고 담백한 시도 함께 실었다.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0 (최윤 외 공저·생각정거장) 올해 한국문학을 빛낸 단편소설을 엄선한 작품집이다. 총 여섯 작품이 수록됐으며 대상작은 최윤의 ‘소유의 문법’.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내용을 다뤘다. 수상작 외 최윤의 자선작 ‘손수건’과 지난해 대상 수상작가 장은진의 자선작 ‘가벼운 점심’도 함께 수록됐다. ◇척추·관절 되살리는 자생력 스트레칭 (이진호 저·비타북스) 자생한방병원이 집필한 척추·관절 종합 건강서다. 척추·관절에 통증이 생기는 원인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결리고 뻐근한 목, 묵직한 허리 등 통증을 관리할 수 있는 부위별 스트레칭 55가지와 질환별 스트레칭 45가지를 담았다. 스트레칭 전후 지압하면 효과를 높여주는 혈자리도 소개한다. ◇우리 술 한주 기행 (백웅재 저·창비) 코로나19로 ‘혼술’, ‘홈술’을 즐기는 이들이라면 주목해볼 만한 도서. 한주 전문가 백웅재가 양조장의 메카 홍천, 충주, 문경 등 전국 각지의 특색 있는 양조장 20여 곳을 소개한다. 한주 관련 산업에 종사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전통주에 얽힌 이야기를 구수하고 맛깔스럽게 풀어낸다. ◇길 (박노해 저 ·느린걸음) ‘하루’,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에 이은 박노해 시인의 세 번째 사진 에세이. 20여 년간 지도에도 없는 길을 걸으며 직접 담은 37점의 흑백 사진을 실었다. 인류 최초의 문명길 차마고도, 눈 덮인 만년설산과 끝없는 사막길 등 길 위의 다양한 풍경을 소개하며 ‘나만의 길’을 찾아나갈 것을 제안한다. ● Stage ◇오만과 편견 일정 9월 19일~11월 29일 장소 예스24스테이지 3관 연출 박소영 출연 김지현, 정운선, 홍우진 등 영국이 사랑하는 작가 제인 오스틴의 동명 연애소설을 2인극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18세기 영국, 명망 있는 가문의 신사 ‘빙리’와 ‘다아시’가 조용한 시골 마을로 와 베넷 부부의 다섯 딸을 만나며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고전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인 만큼 다양한 방식의 각색본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연극 ‘오만과 편견’은 단 두 명의 배우가 21개 캐릭터를 연기하는 독특한 연출이 돋보인다. 배우들의 퇴장과 무대의 이동 없이 의상과 소품만으로 캐릭터를 전환하는 것도 작품의 관람 포인트다. 제인 오스틴의 섬세한 감성에 극적인 매력이 더해져 고전 특유의 클래식한 아름다움과 로맨틱한 서사를 한층 더 입체적이고 매력적으로 풀어낸다. ◇머더발라드 일정 8월 11일~10월 25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연출 김은영 출연 김재범, 김소향, 이건명 등 욕망을 향해 가는 세 남녀의 비틀린 사랑을 대담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뮤지컬판 ‘부부의 세계’다. 결혼 후, 무료한 일상에 지친 ‘세라’와 그녀의 곁을 지키는 남편 ‘마이클’, 한때 불같이 사랑했던 옛 연인 ‘탐’과의 엇갈린 관계를 그려낸다. 귀를 사로잡는 강렬한 록 음악과 배우들의 폭발적인 가창력이 시너지를 이뤄 대사 없이 노래로만 극을 이어가는 송스루 뮤지컬의 진면모를 엿볼 수 있다. ◇아들 일정 9월 15일~11월 22일 장소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연출 민새롬 출연 이석준, 이주승, 정수영 등 프랑스 유명 극작가 플로리앙 젤레르의 ‘가족 시리즈’ 중 마지막 작품이자 최신작으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관객을 찾아간다. 이혼한 부모와 그 사이에 놓인 아들의 갈등을 통해 가족의 해체와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마음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가족 간 발생하는 불편한 상황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준다.2020-10-12 10:46
  • 새벽은 어느 계절이라도 춥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생채식 식당과 작은 책방의 조합 ‘날일달월’ 몇 년 전부터 나만의 북큐레이션으로 무장하고 독자와 호흡하는 소소한 이벤트로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던 동네 책방을 되살려내고 있는 책방지기들이 등장했다. 이곳 동네 책방 한쪽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며 조용히 책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가슴속 묻어뒀던 작은 행복 하나가 ‘똑똑’ 심장을 두드리며 응답한다. “남에게 보이는 것보다 내가 행복한 삶’이 좋다. 오늘 당장 떠날 것, 가까운 동네 책방으로!!”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에 가입된 독립서점들을 살피다 보니 눈에 확 들어오는 이름이 있다. 마치 “저를 찾아와주세요… 저요, 저요” 하고 손을 드는 것처럼 시선을 붙잡아 맨 곳. 바로 ‘날일달월’이다. 일단 인터넷에서 ‘날일달월’ 웹사이트와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을 찾아봤다. 색다르다. 비건식당? 아니, 책방에서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음식을 판다고? 컴퓨터 모니터 화면 속에는 컬러풀한 채소들로 가지런히 상차림한 사진이 올라와 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이번 호에 소개할 동네 책방으로 선택했다. ‘날일달월’은 2호선 강변역 근처에 위치해 있다. 강변역에는 동서울터미널이 있어 늘 사람이 북적이고 어수선한 곳이다. 이런 번잡스런 곳에 독립서점이라니? 의아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동네 책방이 산골에도 생기고 우리 동네 구석탱이에도 있는데 터미널이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건물 3층에 위치한 ‘날일달월’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열심히 채소를 씻던 분이 반겨준다. 먼저 점심 메뉴로 미역콩국수진지를 주문하고 창가에 앉았다. 한국의 마사 스튜어트라 불리는 이효재 씨와 언뜻 인상이 비슷하다.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광목 앞치마를 둘렀다. 한눈에 봐도 대표인 듯 보였다. 창가를 제외한 벽면에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다. 찬찬히 살펴보니 출판사별로 칸이 나뉘어 있다. 서가를 살펴보다 음식 준비에 바쁜 주방으로 다가가 물었다. “혹시 이곳 대표님이신가요?” 그러자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제가 이메일로 인터뷰 요청을 드렸는데 답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궁금해서 와봤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희숙 대표와 날일달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생채식 식당과 작은 책방의 조합 ‘날일달월’은 2018년에 문을 열었다. 비영리법인인 한국도서관친구들 대표를 맡고 있는 여희숙 씨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생채식 식당이자 작은 책방이다. 여 대표는 교사 생활과 독서시민운동 등을 하며 평생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오래전부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독서모임을 하고 저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2017년경 자녀들이 모두 성장해 독립을 하고 은퇴한 남편과 덩그러니 넓은 아파트에 살면서 큰 공간이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즈음 건강이 안 좋아진 남편 덕(?)에 먹거리도 완전히 바꾸게 됐다. 이래저래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패턴을 바꿔야 할 때 거추장스럽기만 한 대형 아파트를 호기롭게(?) 팔고 두 부부가 살기 적당한 크기의 아파트로 옮겼다. 그리고 집 앞의 빌딩 3층을 임차해 책방 공사를 시작했다. 나만의 공간인 동네 책방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나니 전국 각지의 ‘도서관친구들’ 회원 성원이 하늘을 뚫을 듯했다. 이왕이면 전국 곳곳에 그물망처럼 뻗어 있는 네트워크를 활용해, 친환경 농산물이나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드는 식재료를 소개하면 어떻겠냐는 의견도 많았다. 사실 전국에서 도서관 서포터즈를 하는 이들의 경우 귀농을 해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거나 여러 가지 먹거리 관련 일을 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공유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여희숙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책’과 ‘가장 필요한 생채식 먹거리’가 조합된 ‘날일달월’이 탄생했다. 책방에 식당?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날일달월에 들어서면 오묘한 조합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도 흔히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확’ 풍기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놀라게 된다. 여 대표는 생채식 먹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생채식이라 지지고 볶을 일이 없어요.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아서 책을 읽거나 고를 때 거슬리는 게 전혀 없습니다. 채식동호회나 환우회 카페 등을 통해 알고 방문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오히려 이분들은 ‘채식 전문식당인 줄 알고 왔는데 책방이네?’ 하며 놀라고 가요.” 낭독모임, 희곡 대본 읽기 등 프로그램 다양 여희숙 대표는 오랫동안 독서모임을 꾸리고 진행해왔던 터라 작은 책방을 열고 나서도 꾸준히 모임을 이끌고 있다. 현재 4팀의 독서모임을 이곳에서 하고 있는데 성격도 다채롭다. 주로 시니어들이 함께하는 월요일의 독서모임은 낭독모임이다. 얼마 전 1년간 이어진 ‘열하일기’ 낭독이 끝나고 현재는 ‘돈키호테’를 낭독 중이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새롭게 등장한 모임도 있다. ‘연극배우와 함께 희곡 대본 읽기’다. 연극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힘들어진 연기자들을 조금이나마 지원하고 싶어 ‘좋은 희곡 읽기 모임’ 대표인 장용철 연기자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희곡 대본을 함께 읽으며 연기의 맛을 조금 맛봤다. 이후 6주 코스로 ‘햄릿’을 낭독했고 현재는 ‘오이디푸스’를 함께 읽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들과 함께하는 독서모임도 2팀이나 있다. 22년간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한 여희숙 대표는 어린 시절의 독서 지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교사들과의 모임은 아무리 피곤하고 힘이 들어도 이끌어나가고 있다. “어느 날은 오전 오후 꽉 찬 독서모임을 하면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때가 많지만 마음만은 너무 행복하다”며 환하게 웃는다. 이밖에 ‘그림책 따라 그리기 100일 프로젝트’도 있다. 그림책 한 권을 정해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모임이다. 최근에는 안승준, 홍나리 작가의 ‘어느 날 우리는’을 따라 그렸다. 이 책에는 고양이와 사자, 돌고래 등의 동물들이 등장하며 그림책 속 QR코드를 스캔하면 노래와 함께 애니메이션 뮤직 비디오까지 감상할 수 있다. 젊은 친구들의 호응이 특히 높다. 또 백승우 감독이 진행하는 금요시네마는 2018년 8월부터 꾸준하게 진행해왔다. 한 달에 한 번 매월 둘째 주 금요일 백 감독이 큐레이션한 작품을 함께 보며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날일달월의 빼놓을 수 없는 대표 프로그램이다. 한편 8월부터 11월까지 마지막 주 금요일에는 ‘금요일, 달이 뜨면 심야책방으로!’ 이벤트가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사단법인 한국서점조합연합회가 함께하는 ‘심야책방 2020’은 서울 지역에서 ‘날일달월’을 포함, 15곳의 동네 책방이 참여한다. ‘날마다 달마다 좋은 책과 음식을 먹으면 밝아진다’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지었다는 ‘날일달월’. 이곳에서 금요일 둥근 달이 뜨면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조용히 책 한번 읽어보면 어떨까? 심야먹방 아닌 심야책방을 꿈꾸며. Mini Interview ‘날일달월’ 여희숙 대표 여희숙 대표는 출판계와 교육계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진주교대를 졸업하고 마산과 하동, 광양, 포항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22년을 근무했다. 교사 시절 교실마다 작은 학급 도서관을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책 읽는 선생님’으로 소문이 날 만큼 아이들에게 책 읽기의 생활화를 몸에 익히게 했다. 교사 일을 천직으로 알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왔던 여 대표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포스코를 다니던 남편이 서울로 발령이 나면서였다. 천직을 포기할 수 없어 주말 부부로 살기를 3년. 결국엔 사직서를 쓰고 남편과 합류하면서 서울 광진구에 정착했다. 낯선 서울 생활은 오로지 동네 도서관에서 책 읽는 즐거움으로 버텨냈다. 독서시민운동에 나서게 된 계기 역시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여희숙 씨를 사서가 눈여겨보고 도움을 요청하면서였다고. 이후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서관친구들’ 활동을 시작해 현재 전국 회원 1만2000명에 달하는 비영리법인 대표를 맡고 있다. ‘도서관친구들’은 보령, 정읍, 남원, 광주, 진주, 울산, 창녕 우포, 부산, 제주, 부천 등 전국 16개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2004년부터 활동했으니 16년의 세월이다. 이렇듯 오랜 시간 독서시민운동가로 활동한 여 대표는 KBS, EBS, 교통방송 등을 통해 아이들의 독서와 토론 지도를 위한 학부모 강좌를 진행하거나 패널로 출연, 독서 토론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펴낸 책으로는 2001년 ‘1년을 쓰고 50년을 간직할 독서노트’를 시작으로 ‘책 읽는 교실’, ‘토론하는 교실’, ‘도서관 친구들 이야기’, ‘아이는 도서관에서 자란다’ 등이 있다. ‘날일달월’ 서울 광진구 구의강변로 57 서림빌딩 3층2020-09-04 09:56
  • 새벽은 어느 계절이라도 춥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추천 영화 '비밀의 정원'8월 셋째 주인 지난주 화요일과 토요일, 일주일에 두 편이나 영화를 봤다. 코로나 정국에 일주일에 두 번씩 극장행(?). 아무리 대책 없는 인간이라고 취급을 받아도 어쩔 수 없었다. 한 편의 독립영화는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고 싶었고 또 한 편의 영화로부터는 화면 가득한 초록 영상을 보며 안구를 정화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솟구쳤다. 근데 이게 무슨 우연일까.화요일에 본 영화는 한국 독립영화 ‘비밀의 정원’. 토요일에 본 영화는 외국 판타지물 ‘시크릿 가든’(The Secret Garden)이었다.의도하고 본 것은 아니었는데 보고 나니 우연찮게 두 편의 영화가 제목은 같고 내용은 완전히 다른 영화였다. 먼저 한국 독립영화 ‘비밀의 정원’을 소개한다. 비밀의 정원… 10년 전 그날 스포츠센터 수영 강사로 일하는 정원과 남편 상우는 젊은 부부다. 좁고 낡은 아파트에서 살다 상우의 부모님이 물려주신 역시 낡은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 짐 정리에 바쁘다. 포장이사를 할까 반포장 이사를 할까 빠듯한 돈 계산을 하며 이삿짐 싸기에 바쁜 와중에 정원에게 걸려오는 낯선 전화. 정원은 형사로부터 10년 전 사건의 범인이 붙잡혀 새롭게 조서를 써야 하니 경찰서로 와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10년 전 여고생일 때 정원은 늦은 밤 갑자기 아픈 동생을 엄마와 함께 병원으로 데려갔다. 동생을 돌보기 위해 엄마는 병원에 남고 정원은 다음 날 등교를 해야 해서 새벽에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모르는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만다. 당시 DNA를 증거로 채집했던 경찰이 10년이 지나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가까스로 상처를 다독이며 결혼해 남편과 살고 있는 피해자에게 조서를 다시 써야 한다며 무덤덤하게 전화를 해댄 형사. 정원이 전화를 잘 받지 않자 형사는 집까지 찾아온다. 말하고 싶지 않았던 정원의 비밀이 ‘수사기록’이라는 서류로 형사에 의해 남편에게 까발려지는 황당한 상황은 스크린 너머의 관객들까지 당황하게 만든다. 부부의 평화로웠던 결혼생활은 이렇게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소통이 단절된 채 메말라간다. 아니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남편 상우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정원의 위태로운 일상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정원의 상처는 그 나이에 걸맞지 않게 모든 것을 경험한 듯한 관조적인 자세로 마음에, 수영복 슈트를 입을 때마다 언뜻언뜻 비치는 목 뒤의 칼로 베인 듯한 자상의 흔적으로 몸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정원은 서울에 시험을 보러 온 동생을 고향 태안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남편 상우와 함께 밤 운전을 해 고향집에 도착한다. 그리고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과거의 장소들을 찾아간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정원과 자신 때문에 언니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고 자책하며 의기소침하게 지내며 언니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동생 소희는 그곳에서 과거의 상처와 기억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태안 바닷가에서 옅은 미소를 띠며 함께 걷는 이들 부부의 마지막 장면을 지켜보며 그 후는 어떻게 됐을까 나름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함께 상처를 어루만지며 일상으로 돌아왔을까? 아니면 한 번 벌어진 균열이 점점 더 벌어졌을까? 영어 제목 ‘Way Back Home’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족은 깊은 상처를 받고 물 위를 떠도는 듯 부유하는 정원에게 든든한 두 다리가 돼주고 너의 잘못이 아니라며 어깨를 내어주고 토닥여줬을까? 하지만 영화 속에서 정원의 가정은 그리 하지 못했다. 10여 년이라는 시간을 엄마와 동생과 떨어져 서울에서 사는 이모와 이모부와 함께 지내며 이들을 더 가족으로 느끼며 살아왔으니 말이다. 2017년에 발표해 각종 단편영화제 수상을 휩쓴 ‘미열’을 약 3년 만에 장편영화로 제작한 박선주 감독의 작품이다. 연극계에서 튼튼한 연기를 밑바탕으로 드라마 및 영화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유재명(이태원 클라쓰, 장대희 회장 역), 염혜란(동백꽃 필 무렵, 홍자영 변호사 역), 전석호(미생, 하대리 역) 등의 배우들이 신예 감독의 독립영화에 출연해 힘을 보탰다. 코로나19로 영화 개봉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공들여 제작한 신예 감독의 작품이 쇼케이스로만 끝나지 않고 빠른 시간 안에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 2020-08-28 09:39
  • 새벽은 어느 계절이라도 춥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다르게 기억되는 과거들 '프랑스여자''프랑스여자'가 독립영화로서는 드물게 잔잔한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독립영화의 흥행 기준으로 불리는 1만 명 관객을 개봉 일주일 만에 돌파했다. 6월 20일 기준 관객 수가 1만7270명이다. 지난 6월 4일 개봉했으니 하루에 1015명 정도가 이 영화를 관람한 셈이다. 코로나 정국에서 독립영화가 건져 올린 결과라는 점에서 이 숫자의 의미가 눈물겹다. '사랑의 불시착'에서 귀때기로 활약한 데 이어 '부부의 관계'에서 쉴 새 없이 바람을 피던 회계사로 나와 눈도장을 강하게 찍었던 김영민, 전원일기의 영원한 복실이 김지영의 출연으로 개봉 전 미디어의 주목을 받은 영향도 있을 듯하다. 김희정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영상미는 잔잔하지만 어딘지 미숙한 느낌도 주는데 이 또한 의도된 듯하다. 미숙하지만 순진하고 열정적이고 마치 어린 싹이 살아 숨 쉬는 듯한 영상들이 장점이다. 아마 이 주제를 세련되게 연출하고 영상을 뽑았다면 아련한 느낌이 없어져 가슴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훨씬 작았을 것이다. '프랑스여자'는 한때 배우를 꿈꿨지만 파리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프랑스인과 결혼해 살고 있는 미라의 한국 나들이 이야기다. 20년 전 배우의 꿈을 안고 공연예술아카데미에서 함께 공부했던 옛 동료들을 만나는 간단한 플롯으로 구성돼 있다. 미라는 파리로 연기공부를 하러 떠났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연기 대신 동시통역대학원을 다니며 프랑스에서 한국 관련 일을 하며 정착한다. 꿈을 위해 떠난 유학이지만 바람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연기를 갈망하며 아카데미를 다녔던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고백한다. 미라는 지금은 연기를 하고 있지 않지만 공연예술아카데미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과 꾸준히 연락하며 지낸다. 이들 동기들은 영화제 참석을 위해 혹은 연출을 위해 파리에 방문하면 꼭 미라에게 연락해 만나면서 관계를 이어나간다. 미라는 동시통역대학원 후배와 바람이 난 남편과 이혼을 하고 한국을 찾는다. 도착하자마자 잘나가는 여성감독으로 카리스마 작렬 중인 영은과 연극 연출자인 성우를 만난다. 이들은 아카데미를 함께 다녔던 동료 중 가장 친했던 사이이기도 하다. 영화는 미라와 영은, 성우, 그리고 2년 전 자살한 해란 등 4명의 과거가 교차되면서 서로 다르게 기억되고 잊힌 사실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의식 속에서 스스로 삭제한 기억들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물어보는 미라는 과거에 갇혀 사는 유형의 인간이다. 꿈을 안고 외국행을 선택했지만 꿈도 생활도 뜻대로 이뤄진 것이 없다.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은 과거의 아름다웠던 시절을 함께했던 이들과 해후하면서 위안받는다. 미라는 이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과거의 어느 순간 속으로 홀로 들어가 시간여행을 한다. 이 기억들은 꿈일까? 아니면 망상일까? 혹은 사실일까? 미라에게서만 조각난 기억의 편린들일까? 영화 속에서는 아무도 미라의 불안정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타국에서 한국인으로 살다가 프랑스인 남편과 이혼을 하고 나서야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그녀. 꿈을 위해 노력했으나 이루지 못했다는 좌절감 때문에 함께 공부한 동료들에 대한 선망을 감추지 않는다. 경계인, 주변인으로 살고 있으나 마음만은 그 누구보다 뜨겁다. 하지만 차분히 스스로를 다스린다. 프랑스 국적의 한국 여자 미라는 스스로 빗장을 걸고 주변인으로 살아가며 스스로를 옥죈다. 해란에 대한 집착은 그녀의 자살이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죄의식이 남아 있어서다. 해란과 성우는 서로 사귀는 사이였지만 성우는 원숙한 누나인 미라에게 계속 구애 중이다. 파리로 떠나기 전 바다를 보기 위해 함께 떠난 여행을 기억하지 못하는 미라와 이를 일깨워주는 성우. 연인도 친구도 아닌 두 사람의 애매한 관계 속에서 홀로 전전긍긍하던 해란은 자해소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해란의 자해 이유는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 감정 기복과 변덕이 심한 여배우의 기질로 치부되고 만다. 미라만이 자신과 성우가 키스하는 걸 본 해란이 자해한 것 아닐까 추측해본다. 물론 이런 추측도 미라만의 생각이다. 미라는 확인하고 싶어 하지도, 말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 그래서 더 프랑스 영화 같은 작품 '프랑스여자'다. 우리의 기억들은 어떤가. 서로 다르게 기억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서 떠오르는 옛 기억들이 나를 어지럽혔다.2020-06-24 09:16
  • 새벽은 어느 계절이라도 춥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창극 '춘향’의 매력 나는 눈물이 메마른 줄 알았다. 환갑이 넘어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눈물은 없을 줄 알았다. 이 나이에 섣부른 감성에 젖어 눈물 흘리는 것은 사내대장부가 아니라고 다짐했었다. 여간해선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눈물은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슬픔의 눈물도 아니요, 분노의 눈물도 아니었다. 벅찬 감동의 눈물이었다. 춘향과 이몽룡은 남원 광한루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눈다. 그러다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떠나는 이몽룡과 헤어져 할 때 부르는 ‘이별가’가 애간장을 녹인다. 그 후 새로 부임한 사또의 끈질긴 수청 요구를 거절하고 감옥에 갇히는 춘향은 기약 없는 벌판에 내몰린다. 그러던 어느 날 몽룡은 거지꼴로 춘향이네 집을 찾아오게 된다. 실망한 춘향 어미 월매와 감옥에 갇힌 춘향을 찾는다. 목놓아 우는 춘향과 집안도 망하고 과거도 떨어져 거지꼴로 왔다는 몽룡, 이제 기댈 언덕이 없는 춘향이 이몽룡에게 부탁한다. "낼 처형되려 가거든, 무거운 칼끝이라도 거들어 주고, 죽으면 사체라도 수습하여 화장한 후 둘이 만났던 곳에 뿌려달라"고 애원한다. 다음날 이몽룡은 거지 차림으로 사또 잔치에 참여한다. 시 한 수 지어 올리니 암행어사 출두를 눈치채고 관리들은 도망하기 바쁘다. "암행어사 출두야!" 소리에 청천벽력이 쏟아지고 사또는 그 죗값으로 투옥된다. 춘향을 불러내 ‘어사또인 내 청도 거절할 거냐?’고 춘향의 의지를 떠본다. 춘향이 "어서 죽여달라" 청하니 드디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춘향과 극적 상봉하게 된다.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던 이 순간 그동안 쌓였던 화산이 폭발하듯 벅찬 감동이 치솟는다. 억울하게 당한 약자의 설움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역전 드라마다.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치며, 희망 없는 거지꼴의 낭군이 어사또로 나타난 기막힌 반전의 힘이다. 사실 고전 중 춘향전만큼 잘 아는 내용도 없다. 어릴 때부터 보고 들어온 게 춘향전이다. 소설로 연극으로, 영화로 뮤지컬로, 심지어 발레나 드라마로 춘향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그러니 사내가 체면 구기게 눈물까지 흘리겠나 다짐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무엇이 이렇게 무장해제를 시키는 걸까? 그것이 창극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공연을 보는 내내 관객은 몰입하게 된다. 배우의 몸짓 숨소리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다. 같은 춘향가 한 대목이라도 누가 부르는가에 따라 제각각의 소리로 표현하는 까닭에 언제 누가 불러도 새롭다. 춘향전이 그 오랜 세월을 사랑받는 까닭이다.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올려진 2020년 '춘향'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잘 살려냈다. 순종하는 수동적인 춘향이 아니다. 요즘 젊은 여성처럼 당차고 당돌하다. 백년가약을 약속하는 계약서를 존엄한 사또 자제 이몽룡이 보는 앞에서 좍좍 찢어 조각을 낸다. "이까짓 종이 쪼가리가 무슨 약조가 되겠느냐?"고 묻는다. 그러고는 천지신명께 맹세를 드릴 것을 요구한다. 사또와 어사에게도 끝까지 굴하지 않는 지조와 절개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거지 위장을 한 이몽룡이 춘향의 수청 사실을 떠보다 남원 농부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장면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의녀 춘향을 어찌 보는 거냐?"고 달려들어 쫓아 내 버린다. 당시도 그렇지만 오늘날도 춘향은 남원고을의 자랑이고 사랑받는 존재다. 수백 년을 흘렀어도 춘향이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오랜만에 따스한 눈물이 흐르는 감성을 되찾아 감사하다. 각박하고 힘든 세상에 단비 같은 창극 '춘향'이 반갑다.2020-05-19 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