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를 잘라내고 너무 아파서 누구 이름을 부를 뻔했다

봄,

폐를 잘라내고 너무 아파서 누구 이름을 부를 뻔 했다. 울지 마 울지 마, 괜찮아 괜찮아, 하고 보내주는 문자를 기다렸다. 종점 같은 데서 기침은 피가 잔뜩 묻어야 쏟아지고 주기도문을 열세 번쯤 외우다가 뒷 문장을 고쳤다 다만 다만, 그다음을 고쳤다 수없이 고쳤다 한번도 말하지 못하고 고치기만 했다.

여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2400만원 보이스피싱 당하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 해 여름은 깊어만 가고 습관처럼 소나기가 가끔 쏟아졌다. 매일 푹 잤지만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았다.

가을

어제는 항상 리허설

어제 본 풍뎅이 한마리 한번 쓰러지면 날개를 아무리 푸드덕거려도 일어나지 못했다. 풍뎅이가 깔고 누운 방바닥은 어떤 위로도 없었다. 풍뎅이가 몇바퀴 도는데 일어나는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공기는 풍뎅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담담히 마른 공기를 뚫고 목숨이 연거푸 지나갔다. 풍뎅이는 절뚝 거리며 새벽을 횡단하더니 까르르 까르르 넘어갔다.

교회 갔다 와보니 남편도 까르르까르르 넘어갔다. 날개는 어쩌고 풍뎅이처럼 넘어갔다. 서글픈 리허설을 끝내고 어제로 넘어갔다. 봄처럼 떠들지 않고. 어떤 허망한 것들과 함께 넘어갔다. 보였다 안보였다하는 오늘을 넘어갔다. 부스러기를 조금씩 흘리며 식물처럼 어떤 계절을 붙들고 넘어갔다. 까르르까르르 넘어갔다. 마지막엔 소리 안나던 풍뎅이처럼

겨울

감기마저 아프지 않았다. 기어이 내게서 하차하려는 그들에게 안녕을 연습했다.

(최문자, <2013년> 전문)

오늘은 입추(立秋), 가을로 들어가는 초입이다.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 창밖 매미 우는 소리가 드높다. 익은 오디가 더욱 붉듯이 모든 존재들은 자신이 존재했음을 남기기 위해 마지막 목울음을 우는 법이다. 최문자 시인의 <2013년>을 읽다가 몇 시간을 창밖의 나뭇잎과 바람과 매미소리로 허비했다. 2013이라는 시간이 자꾸만 아파왔다.

2013년,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내가 하는 일과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어쩌면 유일하게 일치했던 시간이었을까? 그런데 정말 그랬던 것일까? 아무리 강한 세제를 사용해서 씻어내려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그 시간이 내 시간의 곳곳에 남아 나를 지배한다. 이미 현재가 아닌 그 시간이 아프진 않다. 다만 그 시간을 함께 했던 그 사람이 아프다. ‘기어이 내게서 하차하려는 그들에게 안녕을 연습’했지만 ‘여기’는 여전히 그들의 목소리들로 인해 고통스럽다.

문득,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이 다가왔다. 나는 파를 좋아한다. 파전 같은 거보다는 생파의 비릿한 향기를 더욱 좋아한다. 코끝을 시리게 하는 그 알싸한 느낌을 사랑한다. 그런 사람들이 그립다.

나쁜 습관이 있다.

중요한 것을 팔아서 덜 중요한 것을 사버린다.

참으로 무익했다. 어쩌면 나는 하찮은 것에 매혹된 자였고

이 매혹이 나를 매일매일 놀라게 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세상의 중요한 약속들을 어기거나 포기하고 많은 것들과

결별할 때 시가 써졌다.

파의 매운 기분을 사랑했다.

온 군데 매운 파를 심어놓고 파밭에 나가 있었다.

그들은 힘껏 파랬다. 파밭에 서 있으면 쓰라린 파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2015년 여름, 파밭에서

최문자

(최문자, [파의 목소리] <시인의 말> 전문)

캄캄한 그 어디에서도 지금 잡은 내 손을 놓지 마. 네가 실재하는 곳에 내가 있어야 해. 우린 불편한 영혼을 공유했잖아. 우리는 미래가 닮아 있으니까.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돼서 좋아. 주머니에 늘 수면제를 넣고 다니는 습관까지. 칼자국이 희미해지지 않는 자해의 흔적까지. 유령처럼 하얗고 작은 발가락까지.

비릿하고 나쁜 꿈을 꾸고 일어나면 온몸에 개미떼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나쁜 게 뭘까. 좋고 싫은 건 있어도 착하고 나쁜 건 모르겠어. 근데 오늘 우리는 나쁜 꿈속에 버려져 있는 것 같아. 세상에 너하고 나, 둘 뿐인 것 같아. 가위로 우리 둘만 오려내서 여기에 남겨진 것 같아. 이런 게 나쁜 거야? 난 차라리 다행인데.

유서를 쓸 땐 서로 번갈아가면서 쓰자. 네가 한 줄, 내가 한 줄, 이 개 같은 세상에 실컷 욕이나 하고 죽자. 쓸모없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너희들이라고. 지상에서 가졌던 너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라지면, 그땐 나도 없어지는 거야. 자주 마음이 바뀌어도 네 자리를 대신하는 마음은 없어. 반성 같은 건 안 해. 밤이 하얗게 번지는 사이 우리가 언제 둘이었던 적이 있었어? 아니, 우린 빗방울이야.

2013년

최문자

  봄

  폐를 잘라내고 너무 아파서 누구 이름을 부를 뻔했다. 울지 마 울지 마, 괜찮아 괜찮아, 하고 보

내주는 문자를 기다렸다. 종점 같은 데서 기침은 피가 잔뜩 묻어야 쏟아지고 주기도문을 열세 번

쯤 외우다가 뒷 문장을 고쳤다 다만 다만, 그다음을 고쳤다 수없이 고쳤다 한 번도 말하지 못하

고 고치기만 했다.

  여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2400만 원 보이스피싱 당하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해 여름은 깊어만 가

고 습관처럼 소나기가 가끔 쏟아졌다. 매일 푹 잤지만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았다.

  가을

  어제는 항상 리허설

  어제 본 풍뎅이 한 마리 한 번 쓰러지면 날개를 아무리 푸드덕거려도 일어나지 못했다 풍뎅이가 깔고 누운 방바닥은 어떤 위로도 없었다 풍뎅이가 몇 바퀴 도는데 일어나는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공기는 풍뎅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담담히 마른 공기를 뚫고 목숨이 연거푸 지나갔다 풍뎅이는 절뚝거리며 새벽을 횡단하더니 까르르까르르 넘어갔다

  교회 갔다 와보니 남편도 까르르까르르 넘어갔다 날개는 어쩌고 풍뎅이처럼 넘어갔다 서글픈 리허설을 끝내고 어제로 넘어갔다 봄처럼 떠들지 않고. 어떤 허망한 것들과 함께 넘어갔다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오늘을 넘어갔다 부스러기를 조금씩 흘리며 식물처럼 어떤 계절을 붙들고 넘어갔다 까르르까르르 넘어갔다 마지막엔 소리 안 나던 풍뎅이처럼

  겨울

  감기마저 아프지 않았다. 기어이 내게서 하차하려는 그들에게 안녕을 연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