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얼마나 잘못되었고 니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성경 찾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4절부터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4~1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거기까지. 마태복음을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지난 주일에 마태복음 18장 앞부분을 공부하면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아서 천국에 가는 것도 하나님께 돌이켜 어린 아이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어린 아이같이 되어야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는 솔직하고 겸손하고 단순하고 또 자기의 어떤 힘이 없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그런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교만하고 완고하고 또 하나님을 향해서 반항하고 대적하는 마음이 있고 자기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습니다. 이제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같이 솔직하고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구원받은 사람,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인 마음속에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 솔직한 마음 또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신앙적으로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하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었을 때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은 다 천국에 가는데 천국에서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다는 것을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큰 자라고 하는 것은 더 주님 앞에 영광을 받는 사람을 큰 자라. 이 세상에서 또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잖아요. 큰 자라고 하는 자는 위대한 자. 그것은 키가 커서 큰 것이 아니라 훌륭하고 많은 사람 앞의 존경과 높임을 받는 사람을 큰 자라고 일컫습니다. 천국에 가서도 큰 자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했어요. 누가 큰 자냐? 이 세상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 어린 아이같이 겸손하고 솔직하고 정말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큰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큰 자라는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에서 아주 유식한 사람,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높임을 받는 사람, 위대한 권력을 가진 사람, 이 세상에서 큰 자라고 하겠지만 천국에서는 다르다 그 말이에요. ‘너희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뭇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죠. 자기를 낮추는, 이 낮춘다고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교만한 마음,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마음, 섬김 받고자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교만한 자들이 있는 곳에는 항상 다툼이 있고 분쟁이 있고 시끄러움이 있습니다. 서로 남을 짓 밝고라도 올라가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 같은 아주 겸손하고 순진한 남을 섬기기를 좋아하는 사람, 아주 순전하고 순종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마 우리가 천국에 가면 세상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하나님 앞에 높임을 받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안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고 말씀하셨죠. ‘청함 받거든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희가 높은 자리에 앉으라 할 때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으리라’ 그런 말씀도 있잖아요. 하여튼 이 신앙생활은요, 낮아지고 겸손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그 자리가 가장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훌륭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그 자리에 계셨거든요.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천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종처럼 되었습니다. 내가 섬김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다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종이 하는 일이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이름을 뛰어나게 하시고 모든 사람의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셨다고 예수님이 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겸손의 본을 또 보여주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네 멍애를 메고 내게 배우라’ 빌립보서 2장에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의 마음을 품으라 그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보면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자꾸 돋보이려고 하고 높아지려고 남을 판단하고 남을 깔아 내리고 짓 밝으려고 하고 높아지려고 하는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래서 낮은 자리, 그 낮은 자리가 가장 아름다운 자리. 주님 보시기에 존귀한 자리. 그런 자가 주님 앞에 크다 일컬음을 받을 거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원받고 나면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죠. 어린아이 같은 마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질 때 다른 사람을 그렇게 섬길 수 있을 겁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자, 이 말씀은 특별합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육신적으로 어린아이 하나 영혼도 어른의 영혼이나 아이의 영혼도 주님 보실 때에 존귀합니다. 그 어린 아이 하나도 주님이 위해서 죽으신 생명입니다. 그가 구원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는 아주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영접하는 거다. 그래서 주님을 영접하는 마음을 가지고 어린 아이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영접할 것을 여기에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실제로 어린아이들에게 영혼을 사랑해서 말씀을 전하고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그 형제자매들 그 위치가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 그것이 바로 주님에게 하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어린 아이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것도 결코 그 상을 잃지 않을 거라고.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께 하듯 한다면 주님이 그 사람에게 아마 큰 상을 주실 겁니다. 오늘은 6절 이하에 있는 말씀을 좀 자세히 공부하려고 합니다. 18장 6절을 봅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실족케 한다고 그랬죠. 실족케 한다는 것은 넘어지게 한다, 죄를 짓게 한다, 실망을 시킨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실망을 시키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소자, 여기에 소자를 실족케 하면 큰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실족케 하는 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도 무시하고 그 사람을 넘어지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주님이 그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존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남을 넘어지게 하느냐? 자기 스스로 높아져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그런 일을 합니다. 사람에게 실족케 하는 것은 그게 바로 주님께 죄를 짓는 겁니다. 내가 잘못하고 내가 부주의해서 나 때문에 연약한 자가 넘어지고 그 사람이 실망하고 낙심케 되고 실족케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됩니다. 이 어린 아이 하나를 실족케 한다는 그 말씀은 실제로 나이가 어린 사람도 있지만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어린 아이 즉, 초신자 라고 그러죠? 구원받은 지 얼마 안 되는, 믿는지 얼마 안 되는 그 사람이 어린 아이입니다. 그 연약한 자를 가르쳐서 ‘소자’라고 그렇게 표현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그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실족케 하는 것이 바로 주님께 큰 죄를 짓는 거다. 자, 이 실족케 한다는 문제가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 마음대로 화도 내고 성질도 부리고 감정을 표현하고 그러니까 함부로 행동을 해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 사람에게 실망을 주고 넘어지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냥 자기는 잊어버려요. 그리고는 한다는 소리가 ‘내 성격이 더러워서 그러니까 이해를 하라’고 그러면 또 잊어버려요.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사람은 상처는 깊이 있습니다. 오래 오래 남아 있습니다. 그 죄를 짓는 겁니다, 바로. 그래서 내가 죄를 지음으로서 내 잘못이 또 다른 사람이 죄를 짓게 하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하고 죄가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켜서 그 죄에 대한 그 행렬이 계속해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요즘에 구제역으로, 한 곳에 구제역이 퍼져가지고 많은 짐승들이 죽습니다. 그것이 또 다른 곳으로 옮기고 또 다른 데로 옮기고 연쇄적으로. 지금 전국에 퍼져서 약 3백만 마리에 가까운 가축이 살 처분 되고 땅에 묻힙니다. 그렇지 않아요? 대량학살입니다, 이것이. 이래서 절에서는 그 옛 얘기, 죽은 짐승들을 위해서 기도도 하고 합디다만요, 하여튼 그 때가 되기 전에 그렇게 죽어가는 것은 왜요? 그 병들을 옮긴 게 누구입니까? 사람입니다 사람. 그렇죠. 연쇄적으로 계속 그 병이 옮겨지고 그로 말미암아 많은 짐승들이 죽습니다. 애매하게 죽습니다. 이 죄는 구제역보다도 더 빨리 진행되어 가지고 그 죄가 또 다른 죄를 짓게 하고 또 다른 죄를 불러오고 또 다른 죄를 죄의 행렬이 계속 되서 그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고 그 영혼이 멸망하기까지 하는지 모릅니다. 그 하나님이 지극히 귀하게 여기는 그 생명들을 실족케 한다면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될 것을 말합니다. 그 죄에 대한 형벌이 큽니다. 실족케 하는 죄. 내가 말을 잘못하고 행동을 잘못하고 내가 죄를 지어서 또 다른 사람으로 죄를 짓게 한다면 그 죄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있잖아요. 그게 실족케 하는 겁니다. 그게 얼마나 큰 죄라는 것, 그걸 주님이 말씀합니다.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낫다. 연자 맷돌이라는 것은 이제 맷돌 알잖아요. 그런데 연자 맷돌이라는 것은 아주 큰 겁니다. 나귀를 메어가지고 나귀가 돌리게 하는 아주 큰 맷돌입니다. 연자 맷돌. 로마에서는요 부모를 거역한다든지 아니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다든지, 구약성경에 보면 이런 사람을 돌로 쳐 죽였잖아요. 로마법에 의하면 그런 사람을 목에다가 큰 맷돌을 매어가지고 깊은 바다에 그냥 갖다 넣어버리는 거예요. 사형법이 그런 무서운 사형법이 있었답니다. 예수님께서 이 실족케 하는 죄를 지을 바에는 차라리 목에다가 연자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 남을 실족케 하는 것 보다 자기가 먼저 죽는 것이 낫다하는 말씀입니다. 왜? 그 죄에 대한 그 형벌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 실족케 하는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잘못해서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한다. 넘어뜨린다. 이 실족케 한다는 말이나 범죄케 한다, 넘어지게 한다. 같은 말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잘못해서 다른 사람을 실족시켜 놓고는 그냥 잊어버리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죄를 지적하십니다. 그 죄에 대해서 형벌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7절 봅니다.


마태복음 18장 7절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 때문에 세상에 화가 있다. 세상에 많은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실족케 하는 죄 때문에 있을 것을 말씀했습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실족케 하는 일이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나 실족케 해서는 안 된다.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도다. 자, 우리 신앙생활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은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서로 죄를 짓고 같이 넘어집니다. 그렇죠. 사탄은 뱀을 통해서 하와를 넘어뜨리고 하와는 아담을 안고 자빠졌습니다. 그것은 실족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죄 가운데서 서로 붙잡고 자빠지고 죄 가운데서 삽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실족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에요. 안 믿는 사람도 실족케 할 수 있고, 제가 종종 그 말을 듣습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나는 안 믿는다, 죽어도 안 믿는다고 합니다. 왜 안 믿느냐 물으니 우리 집 아내를 보니까 예수 믿을 마음이 없다고. 그 아내가 도대체 어떻게 믿었길래 남편이죽어도 안 믿도록 만들어 놨잖아요. 어떤 사람 ‘아, 예수 믿는 사람들 거짓말쟁이, 사기꾼, 도둑놈 나쁜 사람들 많대’ 그래서 자기는 절대 안 믿는대요. 물론 그 사람이 잘못된 사람이죠. 그러나 그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이 절대 못 믿게 만드는 거예요. 천국 문을 닫고 자기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사람, 그것도 역시 실족케 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은 받았는데 우리가 생활 속에 구원받은 형제자매를 내가 실족케 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아직 어린아이나 아니면 믿음이 연약한자 신앙이 성장한 사람은 어지간해서 넘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서 그렇게 신앙에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믿음이 굳게 서있기 때문에. 그러나 어린아이 같은 사람, 신앙이 아직 어린 사람은 잘못하면 넘어집니다. 그래서 ‘그 실족케 하는 일로 인해서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도다’ 반드시 화가 있다는 그 말씀은요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요. 무슨 화가 있을지, 반드시 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되는데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 실제로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 잘못함으로 하나님 앞에 진노와 징계를 받는 일이 얼마나 있다는 것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로마서 14장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14장 4절.


로마서 14장 4절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리스도인이 높은 위치에 있어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남을 평가하고 자기 표준에 맞춰 가지고 어떤 사람은 잘하느니 못하느니 평가를 하고 판단합니다. 그것 때문에 형제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다 그 말이에요. 판단을 인해서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 보면 형제자매들이 그것도 구원 받은 지 오래 되었다는 사람들이 말을 함부로 해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말을 해가지고 상처를 주고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10절 보겠습니다. 밑에 내려가서 10절 같이 읽어봅시다.


로마서 14장 10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그 사람을 세우시든지 넘어지게 하든지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 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기가 판단할 만한 위치에 있느냐 그 말입니다. 재판장 위치에 있냐는 그 말이에요. 자기는 모든 것이 완전하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도 심판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그것은 멸망 받는 심판은 아니고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야 됩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사람인데 왜 네가 남을 함부로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판단하는 것은 업신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거예요. 자기보다 훨씬 그 사람을 못 되었다고 잘못 되었다고, 자기는 그 사람보다도 훨씬 더 우월하기 때문에 신앙이 더 낫기 때문에 그래서 남을 판단합니다. 13절 또 보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3절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여기에,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자.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 ‘주께서 오실 때 까지 아무도 판단치 말라’ 주님오실 그때에 각 사람에게 칭찬이 있고 책망이 있고 주님이 판단하실 텐데 그때까지 판단하지 말라. 고린도 성도들은요 그들은 자기 육신에 빠져 있으면서 바울사도를 판단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죠. 그래서 바울사도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이 아주 작은 일이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나를 판단하시는 이는 주님이시다. 어떻게 그 위대한 사도를 판단하느냐. 그래서 바울사도는 나는 신경 안 쓴다. 바울 같은 사람이니까 그렇지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남이 판단하고 업신여김을 받으면 아주 실족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그 사람 앞에 부딪히는 것, 거치는 것 걸려 넘어지는 것 실족케 하는 것을 그 앞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남을 실족케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8장에 보면요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우상 섬기는 사람의 집에 가서 그 집에 앉아서 음식을 먹으면 다른 사람들이 보고 마음에 담대함을 얻어서 그 사람도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겠느냐. 네 자유함이 남을 실족케 했은즉 죄를 짓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위해서 죽으신 형제를 식물로 망하게 하지 말라’ 내가 고기를 먹어서 형제를 실족시키는 것이라면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 내가 먹는 것도 함부로 먹는 것이 남을 실족케 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이에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하고 모여서 술을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데 어떤 형제가 봤습니다. ‘구원 받은 지 오래된 형제가 술을 잘 잡숩네. 나도 먹어도 괜찮은 가보다.’ 그것도 실족케 하는 겁니다. 아세요? 말을 함부로 해서 실족케 하는 것도 실족케 하는 거고. 그렇죠. 자기 자유함이 남을 실족케 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이에요. 넘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먹는 것도 내가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자유도 있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걸림이 되고 실족케 한다면 먹지 말아야 된다. 바울사도는 내가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하는 사람 있다면 나는 고기를 평생 먹지 않아서 형제를 실족케 않겠다. 실족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 라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장애물을 주어서 걸려 자빠지게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 그 말이에요.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말과 행동이 그리고 자기의 생활 태도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영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책임을 느껴야 됩니다. 아무렇지 않게 내가 말하고 행동해서 사람에게 걸림이 된다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고 그 죄 때문에 화가 있을 거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편한 대로 자기 성격대로 자기 원하는 대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이에요. 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실족케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서 예민하고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겁니다. 마태복음 18장 다시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8절입니다.


마태복음 18장 8~9절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 보면 표현이 너무 강렬해 가지고요 마음속에 무서움을 느낍니다. 그렇지 않아요? 또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은 너무 지나친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이게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한다, 이 범죄케 한다는 말이나 그 밑에 실족케 한다고 그랬죠? 같은 뜻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죄를 짓게 하는 거예요. 때로는 이 손이 죄를 짓게 하고 발이 죄를 짓게 하고 눈이 죄를 짓게 하고 그래서 온몸이 그리고 영혼까지 지옥에 떨어지게 한다그 말이에요. 만일 손이나 발이 범죄 하면 찍어 내버리라.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있다가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눈이 죄를 짓거든 빼내버리라. 빼어 내 버리라. 한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에 영원한 불이라, 지옥 불이라고 이렇게 강하게 표현했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느니라 사람이 불로써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 똑같은 말씀이 뒤에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지체가 죄를 범하잖아요. 죄를 범하는데 그 죄 때문에 한 지체가 죄를 짓는데 온 몸이 지옥가고 마태복음 10장 28절에 ‘영혼과 몸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영혼과 몸을 지옥에 멸하시는 자라고 하잖아요.그래서 만일 내 팔을 잘라서 지옥에 안갈 수 있다면, 발을 잘라서라도 지옥에 안갈 수 있다면 눈을 빼서라도 영생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거 할 수 있느냐 그 말이에요. 이 말씀대로요 죄를 범하면 손이 죄를 지으면 잘라버리고 발이 죄를 지으면 잘라버리고 눈이 죄를 지으면 빼버리고 그러면 해결 되겠느냐 그 말이에요. 죄가? 죄를 지을 때마다 찍어버리고 빼버리면 하면 뭐가 남을까요? 오른손이 죄를 지으면 오른 손 잘라버리고 왼손이 죄를 지으면 잘라버리고 한쪽다리 자르면 한쪽다리는 죄 안 짓겠어요? 눈이 죄를 지을 때 오른 눈만 죄를 지어요? 왼눈은 가만히 있어요? 잘라버리고 빼버리고 그러면 남을 게 아무 것도 없을 거예요. 그렇죠.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생각하면요 ‘아 그러면 지옥에는 전부 두발 가진 사람, 두 손가진 사람, 제대로 생긴 사람 다 지옥에 가 있고 천국에는 전부 왼쪽 눈만 있고 절뚝발이만 있고 손 하나 없는 사람 천국에 있는 모양이다’ 물론 그런 뜻은 아닙니다. 신체 한 부분을 잘라 버린다고 죄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죠. 어떤 사람이 길가에서 구두를 깁고 있는데 눈이 하나 없더래요. “당신 눈이 왜 없습니까?” 그러니까 아가씨들이 지나가는데 자꾸 눈이 돌아간다 그거예요. 송곳으로 눈을 콱 찔렀다는 거예요. 그러면 한쪽 눈만 죄 짓느냐고? 이쪽 눈은 왜 가만히 두느냐고? 어떤 사람은 노름을 하는데 노름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손가락을 다 잘라버렸대요. 나중에는 발가락으로 하더래요. 발가락으로. 죄가 어디서 나오는데요? 어떤 산에 가보니까 바위 위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더래요. 당신 왜 그러고 있냐고 하니까 손이 버릇없이 자꾸 죄를 지으려고 그래서 길을 들이려고 손을 들고 있다고 그래요. “여보시오 마음을 고쳐먹어야지 그런다고 해서 해결 되겠소” 하니 주먹을 쥐고 “이놈의 새끼” 때려죽이려고 하더래요. 보라고. 죄가 어디서 나오는데, 죄는 마음속에 저 속에 있는 거예요. 죄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데요? 이 주님의 말씀은 죄를 얼마나 미워해야 될 걸,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걸, 그 작은 죄가 온 몸을 영혼까지 지옥에까지 떨어지게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지체를 잘라서 지옥에 가지 않을 수 있다면 다 자르고 빼버리고 팔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목을 잘라서라도 천국에 갈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겠죠. 이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여기서 설명하는 겁니다. 죄에 대한 심판과 형벌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그리고 이 심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 간절함 마음이 있어야 되는 것을 말해요. 어떤 사람 이 성경을 듣다가 작두를 갖다놓고 팔을 자르려고 했다고, 자른다고 되겠어요? 술주정뱅이를 없애버리려면 어떻게 하면 되요? 슈퍼마켓에 있는 술병을 다 깨버리면 될까요? 술 공장을 없애야 됩니다. 그죠? 술 공장에서는 한없이 자꾸 만들어 내는데, 죄가 어디서 나오는데? 예레미야 17장 9절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 아담의 죄의 씨를 받아서 모태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죄를 짓잖아요. 예수님 말씀에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에 간음 했느니라’ 죄가 어디서 나오느냐? 마음에서 나옵니다. 마음에서. 그렇잖아요. 마음에서 마가복음 7장을 찾아봅시다. 마가복음 7장 21절부터 23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마가복음 7장 21절~23절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얼마나 정확하게 말씀하셨어요? 사람 속에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게 주먹에서 나오는 거예요? 발에서 나오는 거예요? 눈에서 나와요? 아니에요. 마음에서 나와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음란,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과 흘기는 눈, 눈이 요리저리 돌아가는 게 눈에서 나오는 거예요? 속에서 나오는 거예요. 훼방과 교만과 광패, 광기입니다. 그건, 미친 짓 하는 사람 있죠?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속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 하신 이 말씀은 그 죄의 근원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오른손 잘랐다고 왼손 잘랐다고 발 잘랐다고 눈 뺐다고 다 자르고 뺀다고 해결 되겠느냐 그거에요. 죄는 바로 마음에서 나온다고 주님 말씀하셨잖아요. 우선 이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죄의 형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 마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어떻게든지 심판을 피할 수만 있다면 팔을 자르던지 다리를 자르던지 눈을 빼던지 뭘 어떻게 하던지 심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 말이에요. 독사에게 손이 물렸습니다. 손가락이 이제 독이 온몸에 퍼집니다. 가만히 놔두면 죽습니다. 그렇죠. 그럼 어떻게 해요? 손가락을 잘라야 되요. 그래도 퍼졌으면 팔을 잘라야 되요. 그 독이 온 몸에 퍼지기 전에 그 독이 그 사람을 죽이기 전에 그걸 차단시키려면 다리를 자르든지 그렇게 하는 수가 있습니다. 죄는 독사의 독보다 더 무섭기 때문에 죄에 대한 심판이 얼마나 무섭다 라는 것을 생각해야 된다 그 말이에요. 근데 사람들은 이 죄를 별로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죄를 아주 심상하게 여기고 죄를 짓고 나서도 뭐 핑계가 많죠? 어떻게든지 죄를 자기가 죄지은 것에 대한 것에 합리화 시키려고 변명하려고 그러고 오히려 죄를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건 독사를 가슴에 품고 그냥 사는 사람과 한가지에요. 죄와 그 심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만일 이 심판과 멸망을 피하기 위해서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눈을 빼서라도 천국에 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님 뭐라고 하실까? ‘네가 다 자르고 빼고 다 해도 안 된다.’ 죄는 죄 값이 지불되어야 됩니다. 그렇죠? 뭐 눈이 죄지어 눈 뺀다고 죄 값이 해결 되겠어요? 팔 자른다고 되겠어요? 남을 실족시켜서 죄를 짓게 하는 것도 죄고 자기가 자기 죄를 짓게 하는 것도, 그래서 영혼이 지옥에까지 떨어지게 하는 것도 생각해 봐야 된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살인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 했느니라. 이게 마음에서 나오는 죄입니다. 그 죄 문제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눈을 빼고 다해도 안 되는 그걸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죄 값을 지불해 주셨잖아요. 죄 없는 자기 독생자를 사람의 모양으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몸으로 지은 죄를 죄 없는 그 몸에다가 죄를 짊어지었습니다. 요한1서 3장 5절에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죄 없는 그 분이 우리 죄를 없이하려고 오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우리 죄를 예수님의 몸에다 담당하고 우리 대신 찔리고 상하고 우리 대신 심판을 받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몸이 죽었습니다. 친히 그런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은 그가 대신 찔리고 상하고 대신 심판 받아서 우리는 심판 안 받게 되었다, 이제는 우리가 자르고 빼고 하지 않아도 된다 그 말이에요. 우리 몸이 지은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대신 찔리고 상하고 예수님이 죄 없는 그 분이 십자가를 지어서 죄 값을 다 갚아 주셨습니다. 이제는 눈을 빼고 손을 자르고 하지 않아도 그 죄에 대한 심판을 이제 면하게 되었다 그 말이에요. 그 죄에 대한 심판과 영원한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주셨다. 그것은 이제 주님이 우리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셨다는 사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받아야 될 저주와 심판을 그가 대신 담당했다는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그 길밖에 없다.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서 말씀하신 겁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우리가 착한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종교적인 어떤 행위를 하고 자기의 죄를 없이하기 위해서 고행을 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자기 영혼을 구원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겁니다. 디도서 3장을 보겠습니다. 디도서 3장 4절,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디도서 3장 4~5절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 자비라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겁니다. 세리가 엄청난 죄를 짓고 성전에 나와서 기도했잖아요. ‘하나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말이에요. 우리 구원은 순전히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우리의 행한 의로운 행위, 종교적인 행위. 어떤 사람은 그 죄를 벗어나기 위해서 온갖 고행을 하잖아요. 티벳 사람들 보면요 세 걸음 가서 탁 엎어져서 기도하고 또 세 걸음 가서 또 엎어지고 그걸 막 수 백 킬로를 그래 가지고 갑니다. 평생, 고행을 하고 죄를 안 지으려고 자기 육신을 괴롭게 하고. 그런다고 해결 되겠습니까? 물론 안 되죠.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 십자가는 뭐에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중생은 거듭남, 거듭나면 두 가지 있죠? 씻음과 죄 씻어주시는 것.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로써 우리 죄를 영원히 씻어 주셨고 우리를 사랑하사 그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말씀에 다 우리 죄에서 우리를 씻어주시고 같은 뜻입니다.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죄를 씻어주셨을 뿐 아니라 그 사실을 믿는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선한 성품을 심어주십니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속죄와 새 생명,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 죄를 씻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씻음과 새롭게 하심, 죄만 씻어주셔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죠. 하나님의 선한 생명을 우리 안에 심어주셔야 됩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을 때에 첫째 믿는 것은 첫 번 믿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받을 저주와 심판을 주님이 받으셨다. 주님의 피로 내 죄를 영원히 씻어 주셨다는 것을 첫 째 믿습니다. 그렇죠? 그 다음에 깨EKE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의롭다 할 뿐 아니라 그 부활의 생명을 내게 주셨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 하나님의 자녀로 새 생명으로 태어났다. 새 생명으로 태어난 겁니다. 우리가 육신이 태어날 때에 아담의 성품을 그대로 이어 받았어요. 그렇지 않아요? 죄악 중에 출생했습니다. 육신으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죄 씨를 가지고 같이 태어났습니다. 그 타락된 옛 성품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 할 때에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동시에 그 하나님의 선한 성품을 내 안에 받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성품을. 그게 기적입니다. 그러니까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 우리 죄를 씻어 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선한 성품을 우리 안에 심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우리가 무슨 착한 행실을 해서 내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깨달아 믿을 때 구원받은 동시에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안에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님의 성품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구원받고 나면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옛사람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멸망 받을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죠. 죄 가운데 태어났던 사람이 이제 하나님의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성품, 그리스도의 영이 안에 계신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로마서 8장 1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 이 물건은 떨어집니다. 자동적으로 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인력의 힘입니다. 당기는 힘으로 인해서. 그러나 붙잡고 있으면 못 떨어지잖아요. 왜? 떨어지는 인력의 힘보다 더 강한 힘이 붙잡고 있기 때문에. 제가 인력의 법칙을 거슬려서 창공을 솟아오릅니다. 총을 맞아 죽으면 떨어집니다. 생명을 잃으면 떨어집니다. 구원받자마자 우리 속에 이 죄의 법보다도 죄와 사망의 법보다 더 큰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라는 그 힘입니다. 생명은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했을 뿐 아니라 죄를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죠. 생명은 땅을 뚫고 올라옵니다. 바위도 뚫고 올라옵니다. 생명이 얼마나 힘이 있습니까? 생명과 성령의 능력이 이 속에 있는 옛 성품 속에 있는 죄와 사망에 품에서 너를 해방했습니다. 그걸 거슬리고 올라가는 거예요. 구원받고 나면 이상한 힘이 생깁니다. 내 속에 있는 옛 성품보다 더 큰 힘을 내가 느낍니다. 신앙이 성장하는 만큼 내 옛 성품이 점점 무너지고 그리스도의 성품이 이루어집니다.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힘이 더 꿈틀거리는 것을 느낍니다. 이 세상에 대한 욕망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이 더 크게 됩니다. 그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했다는 게 이긴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그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이제 그 죄 때문에 그 정죄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된다. 지옥 안 간다 그 말이 아닙니다. 죄를 이긴다 그 말이에요, 죄를. 그래서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제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뭐가 역사하느냐? 하나님이 행하십니다. 성령이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는 것이 내 소원이 됩니다. 소원. 옛 육신의 소원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까? 어떻게 하면 부귀, 영광, 명예, 권세 육신이 좋아하는 것 다 얻어 볼까? 이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게 소원이 됩니다. 내 평생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 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이 세상 것은 너무 헛되고 아침 안개와 같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압니다. 다윗도 그랬잖아요.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헛된 일이라 그랬죠? 분요하나 재물을 쌓지만 그게 뭐냐? 아무것도 아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습니다. 앞에 있는 영광스러운 소망을 위해서 이 땅에 헛된 것을 져버릴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안에 이루기 위해서 썩어질 것을 피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생명의 능력으로 이 죄인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게 구원받은 사람 마음속에 주신 새로운 성품입니다. 그러니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 받고 구원받고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활이 변화되지 않는 한 이 육신의 죄의 세력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 심판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이제 구원받은 사람 속에 하나님의 새 생명과 성령의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말한 대로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이제 내안에 주님이 살아계십니다. 실제로 주님이 내안에 생명이. 주님이 내안에 능력이시오. 주님이 내 생에 주인이십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거다. 주님께 우리는 맡긴 생활입니다. 주님이 내 마음과 내 생애를 주장하십니다. 죄가 다시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이제 구원받은 사람 속에 하나님의 생명과 성령의 능력이 계시는데 아직 죄에 소욕이 남아있습니다. 옛 성품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이 자기 육체와의 싸움이 있죠.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제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이 남아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말한 대로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이 속에 다른 법이 뭐예요? 죄의 법이 남아있어요. 옛 성품이 남아있어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원하는 것과 싸워서 죄의 법으로 죄로 끌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 받았지만 아직 신앙이 어린 사람. 그리스도 안에 어린아이를 뭐라 그러느냐? 육체에 속한자라 그래요. 구원 받았지만 아직 육신의 탈을 벗어버리지 못한 사람. 그래서 영이 육체에 끌려가면서 고통 하는 겁니다.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 몸. 이 죄의 세력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래서 자기 육체와의 싸움이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갈라디아서 5장 16절 같이 읽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소원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따라 살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 죄를 짓지 않게 된다 그 말이에요. 구원받은 사람이 언제까지나 죄를 지어야 됩니까? 죄를 짓고 나서 막 ‘육체인지라 뭐 안질 수 있나요? 내 사정이 어째서 머시 어째서 죄를 안 짓고 살 수 있나요?’ 구원 받은 사람이 신앙이 얼마큼 성장하면 죄를 거의 안 짓고 살 수 있어요. 마음이 완전히 거룩함은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육체의 소욕이 죄가 우리 속에 남아 있지만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이 내 속사람이 강건해지면 에베소서 3장 16절에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내 속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강건해지면 육신을 이길 수 있어요. 그러면 죄를 안 짓고 살 수 있죠. 왜 죄를 지어야 되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절.


갈라디아서 5장 17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뜻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둘이 서로 대적하죠. 구원받고 나면 이중인격자가 됩니다. 속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고 그걸 싫어하는 옛 성품이 남아 있습니다. 둘이 싸웁니다. 까만 개하고 하얀 개하고 장날마나 싸움 붙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겁니다. 어떤 때는 까만 개가 이기고 어떨 때는 하얀 개가 이깁니다. 그런데 주인은 잘 압니다. 오늘은 누가 어느 놈이 이길지. 왜요? 한 놈은 밤새도록 굶겼거든요. 한 놈은 잘 먹였거든요. 잘 먹인 놈은 힘이 있으니까 이기죠. 힘이 없는데 굶었는데 며칠 굶었는데 뭘 이겨. 속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강건해지면요 육체를 이깁니다. 육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영적으로 약해지고 영양실조에 걸려있으면요 그 사람만 펄펄 있으면요. 이 속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했을 때 못하게 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 그걸 못하게 뭐가 방해 합니까? 육신이 방해합니다. 육신이. 로마서 8장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8장 7~8절 같이 읽겠습니다.


로마서 8장 7~8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구원받은 사람도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세요. 원수가 된다는 건 하나님을 도전하는 거예요. 내 속에 하나님의 원수가 남아있다는 걸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지만 죄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죄는 미워하십니다. 우리 죄를 영원히 사했지만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는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육체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 되나니. 원수가. 우리가 하나님을 도전할 수도 있다는 것도 생각해봐야 되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가지고 복 받겠어요? 잘 되겠어요? 이 세상 사람들은 제 맘대로 살 수 있습니다. 가만히 나둡니다. 특별한 경우 외에는 하나님이 가만히 나둡니다.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기 21장에 있는 대로 죽을 때까지 형통하게 살도록 놔둬요. 죽으면 그냥 지옥으로 떨어질 테니깐 그때까지 놔둔다고요. 오래참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지옥 갈 때까지는 놔뒀다가 거기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뭐고 아무것도 없어요. 잔인하게 심판해요. 이제 구원받은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맘대로 사는 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우리 영혼이고 육신이고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아야 된다는 걸 알아야 되요.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려서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도 없다는 것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거스리고 내 수단 방법대로 살려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자녀면 하나님은 가만히 안 놔둡니다. 하나님은 우리 머리털까지 세셨는데, 그냥 모른척 하시겠어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도 하나님이 다 보시고 계시고 죄를 짓는 것도 머리털 세시듯이 다 보십니다. 세심하게 보십니다. 하나님 말씀 불순종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잘되기를 바래요. 잘되기는 어떻게 잘 됩니까.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으면서 무슨 축복을 받으려고 그래요.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 할뿐 아니라 할 수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얘기해봐야 목을 딱 굳게 해가지고요 귀머거리 독사처럼 안 들어요. 내 그런 것 가끔 느낍니다.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목을 뻣뻣하게 해가지고요 아무리 얘기해 봐야 까딱도 안 해요. 목이 터져라 아무리 얘기해도 ‘오냐 네 말해라 나는 내 마음대로 살겠다.’ 순종 안합니다. 굴복 안합니다. 육신이 얼마나 세력이 강한지 아세요? 하나님을 도전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구원받은 후에 우리의 삶이란 게 뭐예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에녹이 들림 받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는 증거를 얻었다고 했잖아요. 우리도 하나님 앞에 가기 전에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어야 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구원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었어요. 그 다음에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니까고린도후서 5장 9절 바울사도는 ‘내가 거하든지 떠나든지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기뻐하시는지 싫어하든지 말든지 내 좋을 대로 살아?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무슨 신앙생활입니까 그게. 자, 이제 구원받은 사람은 육체와의 싸움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죄는 독사의 독보다도 무섭게 생각해야 됩니다. 옛 뱀 마귀 사탄, 옛 뱀 마귀가 심어준 죄는 그 사탄의 독입니다 독. 독을 우리 속에다가 자꾸 뿌려놓는 거예요. 독사가요. 코브라 같은 건요 독을 팍 쏘죠. 한 2m이상 쏩니다. 그게 눈에 들어가면 눈이 멀어 버립니다. 아세요? 마귀는 우리를 향해서 독사의 독을, 죄의 독을 품습니다. 우리 영혼을 멸망시키지 못하지만 우리 신앙생활을 완전히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생활, 주님을 위해서 사는 생활을 완전히 박살낼 수 있습니다. 아세요? 그런데 이 죄를 심상하게 여겨요. 심상하게.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무서워 할 줄 알아야 됩니다. 독사의 독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암 덩어리가 생기면요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암 덩어리 잘라내어 버리듯이 이 죄는 암 덩어리처럼 잘라 내어 버려야 됩니다. 눈을 빼든지 팔을 자르든지 잘라 내버려야 된다고. 악한 친구도 잘라 버려야 되요. 나쁜 친구도 잘라 버려야 되요. 잘못된 습관도 잘라 버려야 되요. 나쁜 성격이 있으면 그것 고쳐 달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울면서. 그걸 자꾸 위로하고 합리화 시키려고 하지 말고. 나는 성격이 어때서 무엇이 어때서. 그게 좋은 거예요? 감춰 놓을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 영혼만 구원했습니까? 우리의 성격도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생활도 전부 변화시키고자 원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간증이 나와야 될 거 아니에요.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겁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정말 팔을 자르듯이 눈을 빼듯이 그런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죄를 미워해야 됩니다. 시편 97편 10절에 보면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죄를 미워해야 됩니다. 신라의 명장, 장군 김유신 장군 아시죠? 나라의 큰 공을 세우고 전쟁에 이기고 한 사람. 그런데 이 사람 가끔 기생집에 가서 술 마시고 잘못된 짓을 하고 그의 어머니가 말합니다. “너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말도 몰라? 네 몸을 닦아야 나라를 평정하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지.”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다신 안 그럴게요.” 그런데 하루는 술을 먹고 말을 타고 끄떡끄떡 오다보니까 기생집 문 앞에 와 있거든요. 말이 항상 습관적으로 기생집에 가는 거예요 말이. 말 타고 졸고 있으니까 말이 오늘도 알아서 가는 거예요. 기생집에. 김유신 장군이 칼을 빼가지고 자기 사랑하는 말의 목을 잘라 죽여 버렸어요. 그만한 용단이 있어야 됩니다. 죄를 사랑하면 안 됩니다. 죄를 즐기면 안 됩니다.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걸 알아야죠. 히브리서 12장 4절 봅시다. 히브리서 12장 4절 같이 읽읍시다.


히브리서 12장 4절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대항치 않았다. 죽기까지 싸워야 됩니다. 죄와 싸워야 됩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안했다. 아직 덜 싸웠다 그 말이죠. 죄와의 전쟁입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 내 육체를 쳐서 복종시킨다 그랬죠.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이 몸을 다스려야 됩니다.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됩니다. 죄 짓도록 놔두면 안 됩니다. 교만해지려고 시간만 있으면 지 맘대로 하려고 그러고 게을러지고 불순종하려고 그러고 형제를 미워하려고 그러고 세상으로 나가려고 하고 기도하기 싫어하고 순종하기 싫어하고 이걸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첫 번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에 이겨야 세상과의 싸움에 이기고 그 다음에 마귀와의 싸움에 이깁니다. 마귀가 시킨 대로 하면서 뭘 마귀와 싸워 이겨요? 골로새서 3장 보겠습니다. 골로새서 3장, 골로새서 3장 5~6절 같이 읽읍시다.


골로새서 3장 5~6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그랬죠.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육신을 쳐서 복종한다. 바울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죽어야 됩니다, 날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 음란과 부정, 깨끗지 못한 것, 악한 정욕, 탐심, 이런 걸 죽여야 됩니다. 잘라버려야 됩니다. 사정없이 그냥 빼버리고 잘라버리고 내버리고. 뭐 보배덩어리라고 감추고 있어요.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이 진노가 무엇인지 아세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무조건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죄도 사랑하십니까? 우리가 잘못해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행하는 데도 하나님이 무조건 좋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섬기려면 이 세상 죄를 멀리해야 됩니다. 깨끗해야 됩니다. 죄까지 싸잡아가지고 하나님이 좋아하실 리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심상하게 생각하고 욕심도 부리고 이성적으로도 깨끗지 못하고 슬쩍슬쩍 죄를 짓고 그래도 입 싹 닦고 하나님 다 아십니다. 뭐 가만히 놔둘지 압니까? 그리스도인들은요 죄짓고 가만히 숨기도록 하나님이 허락 안하십니다. 다 드러내십니다. 다윗이 죄를 짓고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기는 했지만 다윗이 그 죄로 말미암아 얼마나 무서운 진노를 받았습니까? 자기 자식에 쫓겨 다니면서요. 죽을 고생을 하고 그렇게 수치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 죄의 대가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걸 아셔야 됩니다.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죄는 독사의 독보다 무서워 할 줄 알아야 되요 그걸 즐겨요. 죄를? 어쩌면 그럴 수 있어요? 그런 죄 때문에 자기 신앙생활을 망칠 겁니까? 로마서 8장 13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육신을 따라 살면 그 생활이 죽은 겁니다. 신앙생활은 완전히 파산입니다. 지옥 맛을 볼 겁니다.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는 구원 안 받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지만 구원 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지옥 맛을 볼 겁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죄를 즐기는 것하고 하나님의 심판하고 비교가 됩니까? 하나님 무서운 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입니다. 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겁니까? 그리스도인이. 이제는 하나님의 생명과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좀 멋있게 살다 가야 될 거 아니에요. 언제까지 육신 속에 엎치락뒤치락 해가지고 마귀에게 이용물이 되가지고 비실비실 해가지고 그러면 안 된다 그 말이에요. 마태복음 18장 다시 돌아가 봅시다. 마태복음 18장 10절 봅니다.


마태복음 18장 10절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소자 중에 지극히 작은 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마라’ 이제 지극히 적은 형제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아야 될 이유는 주님이 그를 귀중히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욥기 36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은 전능하시나 아무도 멸시치 않으신다고 했어요. 전능하고 존귀하고 위대한 하나님은 지극히 적은 사람 하나도 하나님이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귀중히 여깁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도 그를 귀중히 여겨야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사람이 다 중요합니다. 왜? 그 한 사람 한 사람 그리스도께서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가 대신 죽으신 존재들입니다. 구원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게 귀중한 존재들을 우리가 어떻게 업신여길 수 있느냐고? 더구나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이 소자 중에 라는 것은 구원 받은 성도들 하나도 업신여기지 마라. 우리가 잘못하면 형제자매를 업신여길 수 있습니다. 무시할 수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취급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요 교회당 안에도 가난하고 초라한 옷을 입고 나오면 그 사람 무시 한다 그러잖아요. 그러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겁니다. 하나도 업신여기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게 무슨 말씀이에요? 여러분 구원 받은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천사를 보내셨다는 것 아세요? 히브리서 1장을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 같이 읽읍시다.


히브리서 1장 14절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 하나님이 부리시는, 다스리시는 영으로 구원 얻을 후사들. 여기에는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상속자들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사도행전 12장에 보면요 베드로가 옥에 갇혔습니다. 먼저 야고보가 옥에 갇혀서 목 잘려 죽었습니다. 베드로도 목 잘려 죽이려고 옥에 집어 넣어 놨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죽이려고. 그런데 천사가 와서 쇠 고랑이를 벗어지게 하고 옥문이 열리게 하고 깊이 잠든 베드로 옆구리를 걷어 차가지고 ‘일어나’ 그랬어요. 지키는 군병들은 깊이 잠에 빠졌습니다. 첫째 문이 열리고 둘째 문이 열리고 셋째 문이 열리고 겹겹이 옥문이 다 열렸습니다. 베드로는 꿈꾸는 줄 알았습니다. 밖에 나와 보니까 천사가 가버렸어요. 그때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나를 구원하셨구나. 그래서 그 예루살렘 다락방에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그 집에 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똑똑똑. 루디아 라는 계집아이가 “누구요?” “나 베드로다.” 그러니까 깜짝 놀래가지고 문을 열지도 못하고 베드로 “사도께서 오셨습니다.” 하니까. “베드로는 옥에 갇혔는데 어떻게 와?” “아닙니다. 베드로 음성 맞습니다.” 그러니까 “아 그 천사가 온 모양이다. 베드로 천사가 온 모양이다” 그랬죠. 여러분 베드로에게만 천사가 있습니까? 이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도 그의 천사가 있다. 그의 천사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구원 받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수호천사가 있다는 것 아세요? 이 세상과 하나님 앞을 왕래하면서 그 사람에게 있었던 것을 전부 하나님께 보고 합니다. 누가 저를 욕하잖아요. 그럼 저를 지키는 천사가 하나님 앞에 전부 일러바칩니다. 아세요? 조심하세요. 그러니까. 저뿐 아니라 거듭난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그를 지키는 천사가 모든 것 다 하나님께 보고가 됩니다. 매일 보고 됩니다. 항상 하나님의 얼굴을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뵈옵느니라. 그러니까 아무도 멸시하지 마세요. 아무도 비판하지 마세요. 함부로 하지 마세요. 전부 보고가 하나님 앞에 올라간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이것을 알면 우리가 잘하는 것도 보고 올라가고 잘못 하는 것도 보고가 올라갑니다. 이것을 알면 형제를 함부로 미워할 수 없습니다. 비판하지 못합니다. 업신여기지 못합니다. 무시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알면 내가 함부로 행동할 수 도 없습니다. 왜?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보고가 됩니다. 천사가. ‘하나님. 하나님 아들 저 아무개 있잖아요. 누가 막 욕하네요.’ 그것도 올라가고 ‘하나님 아들 아무개 있잖아요. 참 너무 예쁘네요. 너무 잘하네요. 참 너무 순종 잘하네요. 주님을 위해서 사네요.’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 가서 칭찬하면 하나님이 만족해하실 겁니다. 그렇죠. ‘하나님. 하나님 아들 아무개요. 언제 철이 들까요? 하나님. 아직도 저러네요.’ ‘글쎄 말이다.’ 여러분 천사들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멸시하지 않습니다. 천사까지 하나님이 보내서 보호하는 그 귀중한 자들을 왜 우리가 멸시해야 됩니까? 왜 우리가 아무렇게나 해야 됩니까? 귀중한 존재들입니다. 천사들은 우리 주변에서 항상 우리를 지키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전부 하나님 앞에 알립니다. 아룁니다. 하나님을 얼굴을 뵙는다는 말은 전부 보고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 모든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마태복음 18잘 다시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2절.


마태복음 18장 12~14절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양 백 마리가 있는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으면 아흔 아홉 마리는 산에다 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간다고 그랬어요. 팔레스타인에서는요 양이 길을 잃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길을 잃은 양은 당황해 가지고 자꾸 가는 거예요. 길을 잃어버리면. 이 무리를 떠나서 길을 잃어버리면 양은 길을 못 찾아옵니다. 더 당황해가지고 점점 멀리 갑니다. 아무데나 갑니다. 골짜기나 계곡이나 어떨 때는 절벽으로 떨어지고 어떨 때는 엉겅퀴에 걸려가지고 오도 가도 못 하고 그래가지고 포식자들에게 맹수에게 물려 죽기도 하고. 그러면 목자는 그 양을 찾으러 나서는 거예요. 팔레스타인에서는 이 목자들이 양을 찾는데 아주 전문가들이랍니다. 나머지 양은, 양떼는요 대개 두세 사람이 함께 양을 기른대요. 그러니까 그 나머지 양은 동료 목자에게 맡기고 한 사람이 찾으러 가는 거예요. 어떨 때는 수km를 양의 흔적을 찾아서 가는 거예요. 위험을 무릎 쓰고 골짜기 계곡 절벽으로 내려가서 절벽에 떨어져 있는 양을 끌어올리기도 하고 그래서 위험을 무릎 쓰고 아주 어떤 수고와 희생을 각오하고 잃은 양을 찾으러 갑니다. 그러면 이제 목자 하나는 그 양떼를 저녁에 몰고 동네로 들어가서 우리 안에다가 양떼를 가둬 놓고 그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간 목자 오길 기다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립니다. 저 멀리 언덕 저 위를 계속 쳐다보면서 그 목자가 양을 찾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이 목자는 천신만고 양을 찾아 가지고 어깨에 메고 즐거운 마음으로 성큼 성큼 그 마을로 돌아옵니다. 그러면 온 동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가서 맞이해 준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어떻게 양을 찾았는지 잃은 양을 찾은 그 얘기를 하면서 같이 기뻐 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것을 말씀하셨죠. 누가복음 15장 1절에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잃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도 그 영혼이 잃어지는 것, 멸망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구원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귀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독생자까지 희생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한 그 생명. 그것을 우리가 안다면 하나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고 하루가 천년 같이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한 영혼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가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 마음에 원인이 되고 그것이 우리가 전도하는 원동력이 될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 마음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전도하겠어요? 이번에도 많은 영혼들이 구원 받아야 됩니다.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항상 집회 할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전도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어떻게 전도할까 하고 계획 세우고 지혜를 짜내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시간을 희생하고 우리가 물질을 희생하고 어떤 수고라도 희생할 각오가 있어야 되요. 하나님의 독생자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희생을 하셨는데 그 희생과 먼저 구원 받은 사람이 희생을 합해야만 죄인들이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번에 새해 처음 시작되는 전도 집회. 이번에 가장 많은 사람이 구원 받도록 우리가 함께 협력해야 됩니다. 이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같이 참여해야 된다 그 말이에요. 나는 상관없다. 왜 상관이 없습니까? 전도할 사람 다 했다. 이제 전도할 사람 없다. 찾아봐요. 또 있습니다. 그래도 없으면 같이 기도하세요. 전도할 사람 없어도 이번에 같이 참석하세요. 전도 집회 때는 마귀와의 전쟁입니다. 전시에 어떤 사람은 나가서 싸우는데 어떤 사람은 뒷짐 지고 딴 짓하면 되겠어요? 총동원해서 이번에 많은 사람이 구원 받도록 해야 됩니다. 구원 받지 않은 사람들, 전도할 사람들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세요.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바울 사도는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그러면 마땅히 할 말로써 복음을 담대히 증거 하리라 그랬어요. 너희는 기도함으로 나를 도우라.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내가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의 기도가 합해질 때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도 못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 내리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해야 될 것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새벽에 기도하십시요. 밤에 자다가도 기도하십시요. 낮에도 기도하십시요. 잊지 말고 기도하십시요. 밤낮 기도하십시요. 간절히 기도하십시요. 희생적으로 좀 몸부림치면서 좀 기도해 보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에 힘쓰고 애써서 간절히 기도하시니까 얼굴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더라. 핏방울처럼. 너무 간절히 기도하면 이 땀방울이 그 속에 피가 섞여서 나온답니다. 실제로.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으면, 형식적인 기도 그만하고 눈 감았다가 금방 뜨는 그런 간단한 기도 그만하고 이제 간절히 좀 하나님 앞에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토해내는 기도를 좀 하시라고. 그러면 하나님이 이번에 큰 역사를 이루실 겁니다. 저를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저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이 많이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큰 기쁨과 하나님 앞에 감사를 합니다. 바울 사도도 그렇게 능력이 많은 분도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그렇게 교회마다 부탁을 했는데 저는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해외에 나가서 전도하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요. 말씀 전하는 모든 분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십시오. 요즘에 전도인들이 많이 모자랍니다. 추수 꾼을 많이 보내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이번 전도 집회 때 많은 영혼들이 구원 받도록, 많은 영혼을 보내 달라고 기도 하십시오. 말씀 듣는 사람들 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구원 받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겁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