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는 유입되는 신호를 유전자에 의해 배선된 회로를 통해 처리한다. 그런 복잡한 과정이 생각, 결정, 선택 같은 형태로 그 결과물을 내놓는다.”『운명의 과학』을 통해 한나 크리츨로우는 모든 인간이 타고나는 영역과 각자의 고유한 유전적 특징 사이에서 ‘21세기 버전의 운명’을 탐험한다. 사진은 한나 크리츨로우의 TEDxExeter <How our brains shape our destiny>의 한 장면 (출처 TEDx Talks).
『운명의 과학』은 저자 한나 크리츨로우의 유전자 검사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검사 결과는 ‘이형접합 유전변이(heterozygous genetic variation)’. 혈색소증유전자는 갖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증상이 나타날 가능성은 낮다는 의미예요. 『운명의 과학』. 한나 크리츨로우(Hannah Critchlow) 지음. 김성훈 옮김. 브론스테인 (출처 로크미디어)
발달하는 뇌 갓 태어난 아기의 뇌 크기는 성인 뇌의 약 25퍼센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뇌 속의 신경세포(뉴런)의 개수는 성인과 비슷해요. 이렇게 자그마한 아기의 뇌는약 3년 동안 폭발적으로 발달합니다. 신경세포의 크기 자체도 커질 뿐만 아니라, 가지를 뻗어서 수많은 신경세포들과 연결됩니다. 뇌 안에서 일종의 ‘배선 작업(wiring up)’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죠. 이 시기를 거치면 아기의 뇌는 성인 뇌의 약 80퍼센트 크기로 발달합니다. 신경세포들이 바쁘게 가지를 뻗어가는 동안, 아기들은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어른들의 손가락을 빨거나 움켜잡으면서 유대감을 형성하기도 하고, 상대방의 눈을 빤히 쳐다보거나 그 표정까지도 흉내 내려고 하죠. 이를 통해 누군가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물론, 상대방을 이해하면서 기본적인 사회성을 기르게 되는 거예요. 꾸준히 운동을 하면 근육이 커지듯, 지속적인 학습을 거친 뇌도 그 부피가 늘어납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익힐 때마다 뇌가 커질 수는 없어요. 두개골이라는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10대에 들어선 우리의 뇌는 이전과 다른 매우 효율적인 전략을 선택합니다. 일단 새로운 내용을 학습하면 이전에 배웠던내용을 바탕으로 신경회로들을 정리해서 핵심적인 부분만 남기는 것이죠. 제한된 크기에서 최대의 효율을 끌어올리는, 바로 뇌의 가소성(plasticity)입니다. 우리는 이미 사회적 능력과 호기심을 갖고 태어난다. 유대감을 형성하고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욕구는 친구를 만들고, 짝을 찾고, 사회적 집단을 구성하는 것은 물론, 각자의 신념을 만드는 일까지 성장 과정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사회성과 호기심은 마치 운명처럼 인간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나만의 세상 만들기 뇌는 다양한 감각 기관을 통해 주변 환경을 받아들입니다. 두개골 안에 갇혀 있어 직접 세상을 경험할 수 없으니 감각에 의존해서 ‘세계 모형’을 구축하는 것이죠. 우리는 뇌가 만들어낸 서로 다른 현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70억 명의 사람들은 70억 개의 세상을 살고 있는 셈이죠. 불행하게도(?) 들어온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는 크고 작은 결함이 있습니다. 들어오는 정보의 양이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세계를 해석하고 각자 고유한 모형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오류는 감수해야 하는 것이지요. 쏟아지는 모든 정보를 정확하게 처리하려고 한다면 제아무리 복잡하고 정교한 뇌일지라도남아나질 않을 겁니다. 이렇게 받아들인 정보로 우리의 뇌는 신념을 만들어냅니다. 여기에는 각자가 보고 느끼는 현실이 잘 압축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 신념은 세상과 상호작용하는과정을 거치며 더욱 단단해지죠. 우리는 정치적인 성향이나 스포츠나 아이돌 팬심 이전에 이미 세상에 대한 나름의 신념을 갖게 됩니다. 과학저술가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는 신념을 ‘뇌의 고질적인 패턴 추구 습성이 낳은 부산물’이라고 말합니다. 뇌가 끝없이 들어오는 정보로부터 의미를 찾아내려는 ‘신념 엔진’이라는 것이죠. 우리의 뇌는 들어오는 입력 정보를 그대로 저장하기보다는 서로 비슷한 정보들을 묶어서 일종의 패턴으로 해석합니다. 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만들어진 신념은 정말 단단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신념에 의문을 제기할 때 곧바로 반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죠. ‘생물학적 운명’을 이야기할때, 신념은 빼놓을 수 없는 개념입니다.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감각과 지각의 결함부터, 각자가 품고 있는 고유의 기억, 유전적으로 결정된 신경회로의 작은 부분까지, 신념은 이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입니다. 인간의 본성 따위는 없다 “인간은 미리 조립되어 나오는 존재가 아니라, 삶이라는 접착제로 단단히 이어 붙여진 존재다.” 조지프 르두, 『시냅스와 자아』 중에서 최근의 뇌과학은 운명이라는 키워드를 뇌 안으로 끌어왔습니다. 우리의 행동과 성격과 같은 성향들의 밑그림을 갖고 태어난다는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죠. 마치 타고난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해버린 것처럼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인 배선만 짜여 있을 뿐 우리의 뇌는 삶의 과정 속에서 운명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한나 크리츨로우는 아니라고 답합니다. 인간이라면 갖고 태어나는 생물학적인 특성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물려받은 유전 형질이 각자의 삶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도 인정하죠. 그렇다고 인간의 본성을 이렇다 저렇다 단정 지을 순 없는 일이에요. 삶을 통해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온 뇌 회로들과 수많은 학습과정을 거쳐서 구축한 고유한 세계 모형들을 부정할 수 없으니까요. 델포이의 신탁이 그토록 애매했던 이유 태양의 신 아폴론이 운명을 일러준다는 델포이의 신탁(Oracle of Delphoi). 그런데 이 신탁은 운명을 정확히 알려주기는 커녕 오히려 신탁을 받으러 온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기 일수입니다. 이를테면 “크레타로 가라”라고 알려주면 될 것을 “소를 따라가라”는 신탁을 준다거나, “뼈를 준 아비를 죽이고 살을 준 어미로 짝을 삼는구나!”같은 식이죠. “신경생물학이 우리의 행동을 어떻게 주도하는지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감에 따라 실제로 통제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결정을 내릴 때 더 나은 위치에 설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림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의 <피티아에게 신탁을 묻는 리쿠르고스 (1835-1845)> 뇌과학이 풀어낸 인간의 운명 또한 델포이의 신탁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생각과 행동에 대한 각자의 성향은 그 밑그림만 타고날 뿐, 윤곽이 드러나고 그위에 다양한 색깔이 덧입혀지는 작업은 삶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일거에요. 타고난 유전자는 나무에 달린 이파리와 같습니다. 이파리 하나하나는 중요하지만 이파리 하나가 나무 전체가 드리우는 그늘에 미치는 영향은 작죠. 끝으로 『운명의 과학』은 우리가 “각자의 몸에 배어 있는 별난 점들을 받아들이고 개개인의 관점과 정보 처리 과정에서 존재하는 내재적 결함을 가치 있게 여기면서 그와 동시에 서로 다른 현실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이롭다”라고 말합니다. 마치 신탁의 내용을 애매모호하다며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해 아폴론이 신전 문 앞에 새겨놓은 말처럼 말이죠. “너 자신을 알라!” 곁들이면 좋을 책 『빈 서판』.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 옮김. 사이언스북스 『본성과 양육』. 매트 리들리 지음. 김한영 옮김. 김영사 『시냅스와 자아』. 조지프 르두 지음. 강봉균 옮김. 동녘사이언스 『공감은 지능이다』. 자밀 자키 지음. 정지인 옮김. 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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