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다는 생각 말고 어떻게 해낼 것인가

오늘날 창조가 왜 그토록 강조되는 것일까요?
박웅현(이하 박) 20세기 전반과 중반에는 산업화, 20세기 후반에는 정보화라는 동력이 있었지만 지금은 구체적인 동력 없이 개인의 재능에 기대어 세계가 발전해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시스템에 기대야 하는 시대가 시스템에 기댈 수 없어진 것, 그런 면에서 창의력이 각광받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은석(이하 최) 10년 전 <포천>에서 500대 기업을 뽑으면 1, 2등 기업이 액슨 모빌이나 GM 같은 하드웨어를 만드는 산업화 시대의 기업이었고, 정보화 시대에는 IBM이 등장했죠. 요즘에는 구글, 페이스북이고요. 꿈의 사회, 드림 소사이어티라고 하잖아요. 선진국에서는 이게 메가트렌드가 됐고, 여기에 구글과 애플의 창의성이 대두되니까 마치 창조가 우리를 먹여 살릴 것만 같은 느낌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물론 창조가 근본적인 트렌드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과연 창조가 돈이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과거 애플에서도 획기적이면서 창조적인 제품을 만들었지만 매출을 높이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외관이 아름답거나 기능이 혁신적인 것 모두 창조에 포함되기도 하고, 또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만 창조적인 것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게 다 돈이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예술은 표현이고 디자인은 배려입니다. 애플이 디자인에 힘을 들였음에도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간호섭(이하 간) 칼 라거펠트는 상업적으로 굉장히 성공한 디자이너입니다. 샤넬, 펜디, 클로에 등 1년에 12번의 컬렉션을 진행한다는 건 상업적으로 완벽하게 성공한 패션 디렉터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창조를 생각할 때는 그 사람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있어야 하는데 사실 칼 라거펠트만의 오리지널리티를 떠올리긴 어렵습니다. 샤넬의 트위드 재킷을 봤을 때 칼 라거펠트를 바로 생각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하지만 그가 여전히 기억되고 회자되는 이유는 오랜 전통의 명품 브랜드들은 레노베이션해서 모던화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죠.

오늘날 기업과 정부, 사회가 요구하는 크리에이터는 어떤 자질을 가진 사람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4H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이브리드(Hybrid)’입니다. 인문학과 예술과 기술의 교차점에 서 있어야 하는 거죠. 철학을 알면서 데생도 할 줄 아는 그런 하이브리드요. 두 번째로 ‘하트(Heart)’가 정말 필요한 것 같아요. 눈물을 흘리고, 감명을 받고, 또 그걸 표현할 수 있는. 또 요즘 빠질 수 없는 것이 ‘휴머니티(Humanity)’죠. 마지막으로 ‘헬스(Health)’. 아파트 건설 노동자분들과 맞먹는 체력과 잠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력, 클라이언트에게 깨져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강인한 인내력까지. 50살까지 주당 60시간 일할 수 있는 그런 체력을 길러야 합니다. 박 ‘촉수’ 같아요. 똑같은 걸 보고 다르게 느끼는 게 중요한 것 같고요. 또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인지도 중요합니다. 파리에도 서울에도 술집에도 답이 있어요. 촉수가 있는 사람은 답을 잡을 것이고, 없는 사람은 못 잡겠죠.

큰 그림을 그리면서 통합적인 사고를 하는 크리에이터는 어떤 사람일까요?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오. 과거 에르메스 광고 슬로건이기도 했던 “모든 게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Everything Changes, Nothing Changes)”는 우리의 인생을 단적으로 표현하죠. 광고 이론, 분석, 마케팅 이론 같은 것은 ‘Everything Changes’에 해당합니다. ‘Nothing Changes’는 우리가 소통해야 할 대상, 사람입니다. 이걸 잡고 있으면 칼 라거펠트처럼 영화도 만들고 디자인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관성 있게’ 하는 게 중요하죠.

본질 다음이 ‘변신’인 것 같습니다. 본질을 지키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특히 뉴미디어 분야에서 원하는 자질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시대상의 흐름이 빠르지는 않았으니까 예술가들이 자신의 모습을 휙휙 바꿀 필요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끊임없이 압축해서 성장하고 변화하는 21세기에 살고 있기 때문에 창조적인 사람에게 끊임없는 자기 변신이 필요하게 된 거죠.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계속 변신시키면서 만들어나가는 것이 현 시대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게 원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른 크리에이터일수록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중요합니다. 세 분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하는지 궁금합니다.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의 경우 내 일이기도 하지만 시청률 같은 상업적인 부분도 고려해야 해서 스스로 조절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방송에서 보여주는 비평보다 학생들한테 10배는 심하게 하는 것 같아요. 내가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라기보단 스스로 자존심이 상한 거죠. ‘내 작품을 이렇게 깔아뭉개?’ 하면서. 그런데 그 후에 발전하는 학생들이 있죠. 본인이 노력해서 진심을 갖고 한 작품과 그렇지 않은 것은 나중에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지죠. 반면에 상업적인 작업을 할 때는 방향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박 같은 페이지를 펼쳤는지, 즉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지를 늘 확인하죠. 저는 윗사람들이 잘하면 아래서도 잘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합니다. 윗사람이 정리를 잘 못해서 아랫사람에게서 나온 재능이 책상 위에서 버려집니다.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느냐, 그걸 최우선으로 확인합니다.

작년에 ‘라이브파크’ 론칭 준비를 하면서 ‘프로토콜’을 맞춘다는 게 정말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여기서는 로봇, 저기는 뭐, 저기는 뭐, 서로 사용하는 단어가 너무 다르니까. 10초 안에 상대방과 소통이 가능한 단어나 문맥을 찾아서 대답을 받아내는 거죠. 저는 한국말을 문학전집을 통해 배웠어요. 구어체보다 문어체를 먼저 배운 거죠. 그래서 구어체의 뉘앙스, 그러니까 쓸데없이 감정을 담아 함정에 빠지는 오류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라이브파크를 론칭하면서 한 번에 200명, 300명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했죠. 내 작품으로 세상을 설득해야 하니까 내·외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정말 중요했습니다.

대림미술관 측에서 준비한 질문이 마무리된 뒤 이날 토크를 위해 미투데이를 통해 들어온 질문과 현장에 참여한 대학생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미투데이) 대학 입시만 네 번을 보면서 좋아하는 일을 찾기 위해 20대의 대부분의 나날을 보냈지만 여전히 방황 중입니다. 미친 듯이 빠져서 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으십니까? 무척 어려운 질문입니다만 ‘답은 내 앞에 있다, 아니면 없다’ 이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내가 만약 다른 직업을 선택했으면? 그 후의 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에서 ‘if’에 대한 답은 없거든요. 저라면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답을 찾을 겁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답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존을 지키고 내 앞에 답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가는 거죠. 이런 덕담밖에는 드릴 수 없을 것 같네요.

국민대 공업디자인과 OOO입니다. 무언가를 만들 때 레퍼런스를 참고하라고 하는데, 그 얘기는 솔직히 외국의 잘나가는 것을 하나 베끼라는 말로 들립니다. 단가나 시간 때문이겠죠. 이런 상황을 계속 참고 일해야 하는 건지, 그렇게 억눌렸을 때 어떻게 방향성을 찾아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기업이 산업 전반을 지배하는 ‘그룹사’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나라잖아요. 또 전 세계에서 인구 1인당 디자이너가 가장 많이 배출되는 나라이면서 디자이너의 은퇴율이 가장 높은 나라고요. 하청에 또 하청을 주는 구조, 크리에이터들에게 창의력을 요구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체력에 기반한 물리적 노동력을 요구하죠. 속도전이다 보니 벤치마킹, 즉 베끼는 능력을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게 현실이거든요. 저도 그게 싫어서 창업을 했고요. 지금도 여전히 크리에이터들을 착취하는 구조에서 못 벗어나요. 그렇다고 제가 대통령을 할 수도 없고. 현실을 한탄하지 말고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하거나 창업을 하거나, 아니면 대기업에서 확실히 정치해서 임원이 되는 것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 같아요.

홍익대 광고홍보학과 OOO입니다. 저는 또래에 비해 인풋이 무척 많은 것 같은데 만족할 만한 아웃풋이 나오지 않아 남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쯤 좋은 결과물이 나와 인정을 받고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22살이라고 했죠? 지금 아웃풋할 때가 아니에요. 인풋하세요. 재능은 쥐어짜는 ‘스퀴즈 아웃(squeeze out)’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스필 오버(speel over)’하는 게 좋아요. 40살까지 살고 죽을 거 아니면 인풋하세요. 자기 안에 쌓여 있으면 언젠가 흘러나올 겁니다. 그 흘러나오는 게 유명하게 만들어줄 거에요.

경희대 컴퓨터공학과 OOO입니다. 저는 패션디자인을 복수 전공으로 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불확실성 때문에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것 같아요. 저도 그 나이 때 그랬어요. 남자가 패션을 하는 건 더 불안했어요. 아까 방향성에 대해 얘기했잖아요. 나침반을 마구 흔들면 방향이 흔들리죠. 그래도 남과 북이 바뀌진 않잖아요. 두바이에 꽂아놓든 아마존 정글에 떨어뜨려놓든 본인만 확실하면 그 바늘은 항상 남북을 가리키는 것처럼. 자꾸 ‘셀프 리마인드’ 하는 게 제일 중요해요. 불안한 게 당연해요. 저희도 불안한데요. 지금 공대생이면서 패션 디자인을 복수 전공한다고 했는데, 어머님은 이거 알고 계세요? 패션은 하고 싶은데 월급도 너무 적고 집에서 욕먹을 것 같고 결혼도 못 할 것 같고, 그래서 남모르게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다 나중에 터트리는 거지. 그런데 그게 정말 행복한 고민이에요. 자꾸 그렇게 넘어가는 거예요. 하나 끝나면 또 큰 산이 나와요. 넘으면 또 산이 나오고. 희망일지 절망일지 모르겠지만 그 산이 결코 작아지진 않더라고요. 해답이 되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