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얼마나 큰 영예이며 얼마나 큰 기쁨

12:1

아브람의 소명(창세기 12:1-3)

여기서는 아브람이 그의 본토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소명을 받는 사건을 볼 수 있다. 이는 그것을 통하여 그의 믿음과 순종을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또 장차 계획된 특별한 일과 은총을 위해서 그를 구별하려고 계획된 일이었다. 이 소명의 전후 사정은 사도행전 7장 2절에 있는 스데반의 말에서 다소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거기에서는 다음 사실을 배울 수 있다.

1.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같은 소명을 주시기 위해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이 소명의 권위를 조금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현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후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서로간의 교제를 세우시고자 하시는 이 같은 최초의 교통에서는 하나님께서 "영광의 하나님으로서" 그에게 나타나시사 말씀하신 것이다.

2. 이 소명은 그가 하란에 거하기 전 메소포다미아에 있을 때에 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갈대아 우르에서 이르시니" 라고 읽는 것이 옳다. 스데반이 이에 관하여 이야기한 바와 같다(행 87:4). "아브람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약 5년간이나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니" 새로운 명령을 다시 주셔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나안 땅으로 옮기셨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하란은 갈대아 지방 안에 있어서, 역시 아브람의 본토의 일부나 다름이 없었다는 것이며, 또는 그 곳에 5년간이나 머물렀으므로, 아브람은 그 곳을 자기의 본토라고 부르기 시작하다가 그 곳은 하나님께서 원하기는 곳이 아님을 알게 될 때까지는 자기의 근거를 두고자 했다고 한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긍휼함을 마련하여, 우리들이 가나안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서 안식을 취하려는 것을 그냥 묵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선한 역사가 이룩되고, 우리 영혼이 오직 하나님의 품안에서만 편히 쉬게 되기까지 계속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금 부르실 것이다. 소명 그 자체에는 다음과 같은 계율과 약속이 내포되어 있다.

Ⅰ. "너는 너희 본토를 떠나라" (1절). 시험해 보는 계율이 있다.

1. 이 같은 계율로써, 그가 자신의 본토와 절친한 벗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또는 하나님과 동해하기 위하여 그러한 온갖 것을 저버릴 수 있을 것인지를 시험해 보신 것이다. 그의 본향은 우상 숭배로 변모해 버린지 오래며, 그의 친척들과 아버지의 집이 그에게는 끊임없는 유혹이었다. 또 그들에게 물들어버릴 위험 없이는 그들과 계속 교제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너는 떠나라" (rlArl: Vade tibi), 급히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지 말라" (19:17)고 하셨다. 죄 많은 상황 속에 있는 자들은 가능한 한 급히 서둘러서 그 곳을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해야겠다.(혹자는 이 구절을) "너희 스스로를 위하여 떠나라" 고 해석하니, 이는 곧 너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자신의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자는 그 같은 변화로 인하여 스스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을 얻게 된다는 것을 명시하라(잠 9:12).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이 같은 명령은 신실한 아브람의 모든 영적 자손들을 하나님과의 계약으로 인도하는 복음과 매우 일치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본능적인 욕심은 하나님의 은총에서 양보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귀한 것이고, 친척들은 더욱 귀중하며, 아버지의 집은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마땅히 미워해야 한다(눅 14:26).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그리스도보다는 덜 사랑해야 하며, 그와 비교할 때에는 미워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 중에 어느 것이라도 그리스도와의 경쟁의 대상이 될 때에는, 언제나 그것은 뒤로 미루고 예수의 뜻과 그 영광을 택하여야 한다.

(2) 죄와 죄악에 대한 온갖 기회는 물리쳐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쁜 교우 관계를 타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온갖 죄악의 우상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정결을 해치지 아니하고는 지켜 나가지 못할 것이 있을 때에는, 가장 아끼던 것이라도 기꺼이 작별해야 한다. 오른 눈이 우리를 죄악으로 이끌면 그것을 빼어버리고라도(마 5:29)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결심하는 자는 행악자들의 사회를 떠나야 한다(시 119:115; 행 2:40).

(3) 이 세상과 그 가운데서 누리는 온갖 우리들의 기쁨을 거룩한 냉정과 경멸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우리들의 본향, 우리들의 집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나그네 숙소로 생각해야 하며 따라서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살아야 하며 그 애착에서 떠나야 한다.

2. 이 계율은 그가 지금 눈으로 보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본토를 떠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 줄 땅" 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내가 너에게 주고자 하는 땅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가 네게 보여줄 땅" 이라고만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에게 그것이 어떠한 땅이라든가 또는 어떤 종류의 땅이라는 것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대체로 하나님을 따르려고 자신의 본토를 떠나는 것으로 인해서 손해 보지는 않을 것이라는 특별한 보장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따랐던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은 신뢰로써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일을 위해서 보이는 것들을 버려야 하며, 현재의 고난을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영광의 소망 가운데서 달게 받아야 마땅하다(롬 8:18). 이는 "우리가 장차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요 13:2). 더욱이 장차 나타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지시하고자 하신 땅으로 부르시어 그의 눈으로는 언제나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에 따라 살도록 가르치시고자 하셨을 때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던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Ⅱ. 여기에는 크나큰 힘이 되는 약속이 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도 이것은 부유하고도 굉장히 크고 귀한 약속의 복합체라고 하겠다. 모든 하나님의 계율이란 순종하는 자에 대해서는 약속을 수반하고 있음을 명심하자. 그가 친히 우리에게 명령자로서 그 이름을 알리고자 하실 때에는 역시 상을 주시는 자로서의 이름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 명령을 복종하면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여기에는 여섯 가지 약속이 있다.

1.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그의 백성으로부터 빼내었을 때에, 다른 한 백성의 머리가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빼내었을 때에, 다른 한 백성의 머리가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로 하여금 선한 감람나무의 뿌리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들감람나무 가지에서 갈라 내셨다. 다음과 같은 약속이다.

(1) 아브람의 짐을 덜어 주는 큰 위안이 있다. 그는 자녀가 없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의 궁핍과 필요에 따라 그의 은총으로 채워 주시는 방법을 알고 계시다는 점을 주목하자. 모든 상처에 대한 처방 약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가장 아픈 상처를 위해서 먼저 한 처방을 마련하여 주신 것이다.

(2) 이 약속은 아브람의 믿음에 큰 시험이 되었다. 그의 아내는 오랫동안 임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만일 그가 믿는다면, 희망할 수 없는 일을 믿는 것이었다. 그의 믿음의 순전히 "단지 돌로부터는 아브람의 자녀가 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는 그 능력 위에 서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깊이 명심할 것이 3가지 있다.

[1] 하나님께 민족을 이루신다. 즉 그로 말미암아 민족이 "순식간에 났으며" (사 66:8), 또 말씀하시기를 "민족들을 건설하고 심으리라" (렘 18:9)고 하신다.

[2] 어떤 민족이 크게 부강하게 되었다면, 그것을 크게 일으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께서는 마른땅에서도 큰 민족을 세우실 수 있으며, "지극히 작은 하나로 수천이 되게" 하실 수가 있다.

2. "내가 복을 내리리라" 하셨다. 이는 특별히 아담과 노아를 축복하셨던 것과 같다. 열매 맺고 번성하게 하는 축복을 함께 한 것이든지 또는 총괄적으로 "내가 상하의 근원을 막론하고 온갖 형태의 복을 내리리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그리하면 너의 조상의 축복보다 더한 아버지의 축복을 네게 주리라" 는 것일 것이다. 순종하고 믿는 자는 분명히 축복을 상속받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3.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자기의 본토를 떠남으로써 그는 그 곳에서는 이름을 상실했다. "그러나 그것은 염려 말고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그 곳에서 지금까지 얻을 수 있었던 이름보다 더 크게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자식은 없었는데, 어떻게 그 이름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또 그 같이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실 것이다. 다음을 명심하자.

(1) 하나님은 명예의 근원이시며, 온갖 번영은 그로부터 유래된다(삼상 2:8).

(2) 순종하며 믿는 자들의 이름은 반드시 축복 받고 크게 된다. 우리 선진들이 믿음으로써 얻었던 바가 가장 훌륭한 증거이다(히 11:2).

4.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이는 다음 사실을 뜻한다.

(1) "너의 행복은 온갖 행복의 모본이 되어, 자기의 친구들을 축복하려는 자는 룻기 4장 11절에서와 같이 단지 저들을 아브람과 같이 되게 해 줍시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된다" 는 뜻이다. 순종하며 믿는 자들과의 하나님의 교제는 지극히 인자하시고 은혜로와 우리들 자신이나 친구들이 보다 나은 다름 교제를 맺기 원한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하나님을 우리의 벗으로 가지는 것은 충족한 축복이 되기 때문이다.

(2) "너의 삶이 네가 가는 곳에 복이 되리라" 는 뜻이다. 선한 사람들은 그 나라의 축복이며, 그같이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큰 영예요 행복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자.

5.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 이것은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맹약, 곧 공수동맹의 형태를 삼으셨음이다. 아브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대의를 지지했고, 또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일에 관여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1) 하니님께서는 아브람의 친구에 대해서는 친구가 되고, 아브람에게 보이는 친절을 하나님 자신에게 배운 친절로 받아들이셔서 거기에 따라 보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위하여 어떠한 형태로나 역사하시어서, 어는 누구도 잃어버리는 자가 되지 아니하도록 돌보시며, 단 한 잔의 냉수까지도 보답하여 주신다.

(2) 하니님은 아브람의 원수들과는 마주 싸우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아브람에게도 그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무고한 저주가 아브람을 해칠 수 없는 반면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저주가 그들을 뒤따라 멸하실 수 있을 것이다(민 24:9). 이것이 바로 우리가 왜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가 된다. 하나님이 "저들을 저주하신 것으로써" 족하기 때문이다(시 38:13-15).

6.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나머지 모든 약속의 최후를 장식하는 약속이었다. 이것은 메시야를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시야에게서 모든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1)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큰 축복이요, 지금까지 이 세상이 누린 바 가장 놀라운 축복이라는 사실이다. 또 그는 한 가정의 축복이니, 그로 말미암아 구원이 그 집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눅 19:9). 우리가 우기 가정의 축복을 헤아릴 때에는 온갖 축복 중의 첫 축복으로서 그리스도를 맨 먼저 세워야 한다. 이 땅 위의 많은 가정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낯선 자들인데, 어떻게 모든 가정이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 받을 것인가? 그 해답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복받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복받기 때문이다(행 4:12).

[2] 어떤 가정이든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은 그 안에서 축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이 세상의 모든 가정 중의 어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축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4] 이 땅 위에 모든 가족들이 그리스도를 인하여 함께 받는 축복이 있으니, 복음의 구원은 공통적 구원이기 때문이다(유 3).

(2) 그리스도와 관계 맺는 것은 큰 영광이다. 이것은 바로 아브람의 이름을 위대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것보다도, 메시야가 그에게서 계승되어 오게 되었고, 따라서 자연히 아브람이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 더 큰 영광이 된 것이다. 은혜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지극히 큰 영광이 될 것이다(마 12:50).

12:2 없음.

12:3 없음.

12:4

아브람의 가나안 도착(창세기 12:4-5)

Ⅰ. "이에 …… 아브람이 떠났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자기 본향, 즉 처음에는 우르를 나중에는 하란을 떠나가는 아브람의 이동이 나타나 있다. 그는 하늘의 환상에 대하여 불순종하지 않았다.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했고(갈 1:15, 16), 명령받은 대로 행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순종은 지체함이 없는 신속한 것이었으며, 아무이의 없이 달게 받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히 11:8). 그러나 누구를 따르며 누구의 지시를 따라가는 지는 알고 있었다. 이같이 하여 하나님은 그를 불러 "그의 발 앞에 이르게 하셨다" (사 41:2).

Ⅱ. 그가 이동할 때의 나이는 "75세였다." 그런 나이에는 오히려 안정과 휴식이 있어야 할 나이였다. 그러나 이제 그같이 연로한 나이에 세상을 다시 시작하게 하시니, 그는 복종할 따름이다. 여기에 회심의 실례가 있다 하겠다.

Ⅲ. 그와 동행한 일행과 대동한 점이 있다.

1. 그는 자기 아내와 조카 롯을 동행했다. 그것은 강제로나 그들의 뜻을 무시하고 한 처사가 아니라, 설득으로 이뤄진 일이다. 그의 아내 사래는 그와 함께 가지를 바랐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서로 결합케 하셨으니, 아무것도 그들을 서로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이 못하고 있었으나, 아브람이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다. 아브람으로서는 그의 여로에 그 같은 반려자, 즉 돕는 배필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 지극히 다행한 일이었다. 부부가 함께 하늘 나라의 길을 가고자 합의한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위안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주목하자. 그의 혈족인 롯 역시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 아마 자기의 보호자가 되었던 아브람의 선한 모범에 감화를 받아서, 그와 함께 가기로 하였다. 가나안으로 가는 자는 홀로 갈 필요가 없음을 기억하자. 좁은 길을 찾는 이가 거의 없다손 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은 그대로 몇몇 사람들은 그 길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저들이 어디를 가든지 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들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지혜가 된다(슥 8:23).

2. 그들은 모든 동산(動産)을 함께 가지고 갔다. 즉 "그들이 모든 소유" 와 이동할 수 있는 물건들을 가지고 갔다.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어서였다.

(1)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처분해 온전히 맡겨버렸고, 귀중한 것은 조금도 남겨 두려하지 아니했으며, 소유물은 훌륭한 기초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철저히 모험을 했던 것이다.

(2) 어디든 그들이 가는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 가정에 양식을 충당하는 데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기로 약속하셨다 하여, 자기 소유물을 버리고 만다는 일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소행이지 결코 그를 신뢰하는 행위는 아닌 것이다.

(3) 그들이 되돌아가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발자국마저도 뒤에 남기지 아니했으니, 이는 발자국 때문에 자기들이 떠나온 땅을 다시 염두에 두지 않기 위함이었다.

3.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그들이 얻은 사람들" 을 이끌고 갔다.

(1) 그들은 가장인 아브람이 돈을 주고 사들였던 종들을 뜻한다. 그것은 그들의 소유의 한 부분이었으나 "사람들" 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것은 주인들로 하여금 그 가련한 종들도 영혼의 소유자들이라는 사실, 즉 주인들이 마땅히 돌보아 주어야 하고 그들의 편익을 위해서 음식을 마련해 주어야 마땅한 귀중한 영혼의 수유자들이라는 것을 상기케 하지 위함이었다.

(2) 또 그들이 돌이키게 했던 개종자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참예하게 되었고, 또 가나안까지도 함께 가게 된 사람들이니, 곧(어느 랍비가 표현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보좌의 날개 아래 모은" 영혼들이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자들은, 남들도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함을 명심하자. 이러한 영혼들을 저들이 "얻었노라" 고 이르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스스로 진정한 획득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Ⅳ. 저들은 여행 목적지에 즐거이 도착한다.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전에도 저들이 그리하고자 했다(11:31). 그러나 미처 다다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저들이 여행을 계속하고, 또 저들의 하나님의 인자하신 손길이 저들 위에 임하여 가나안 땅에 도달하게 되었다. 거기서 새로운 계시가 임함으로써 그 곳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시하시고 약속하신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여행 도중에 겪었던 많은 고난으로 인해서 의욕이 꺾이지도 아니했고, 오직 "재촉하여 전진하였다." 다음을 기억하자.

1. 아직 앞에 있는 것에 도착하지는 못하였어도, 하늘 나라를 향하여 떠난 자들은 끝까지 참고 견디어야 한다.

2.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우리가 맡은 바 일을 다하고 겸손하게 그의 섭리를 따르는 일은 분명히 성공될 것이며, 결국에는 안위로 끝맺게 될 것이다.

12:5 없음.

12:6

아브람의 헌신(창세기 12:6-9)

혹자는, 아브람에게는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특별한 부름이 있었으니, 그가 그 곳에 이르렀을 때에는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하여 가능한 모든 영예와 존경의 표적을 가지고 아브람이 소개되어야 하며, 가나안의 왕은 즉시 그에게 왕위를 양도하고 충성을 명세하여 신하가 되었어야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가 그 땅에 오는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조금도 사람의 주목을 받지 아니했다. 이는 그가 약속의 땅에 들어와 있을 때까지도, 하니님은 그를 믿음으로 살게 하시고, 가나안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다음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Ⅰ. 그가 당도한 땅에서 그는 별로 안위를 찾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1. "그 때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거하였다" 그는 그 땅을 자기 소유로 삼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이 땅에 가나안 사람이 가득하고, 그들이 이 땅을 소유하고 있음을 아브람은 알았다. 그들은 아마 사악한 이웃이요 악한 지주들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마 아브람은 그들의 허락이 없이는 자기의 장막을 칠 땅조차도 아브람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 처하여 있었던 것 같다.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보다 땅을 더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자.

2. 그는 그곳에 정착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였고" (6절0 "산으로 옮겨" (8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다" (9절). 여기서 다음을 살필 수 있다.

(1) 때때로 불안한 상태에 놓이고 그들의 거주지를 할 수 없이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때가 있는 것이 선한 사람들의 운명이기도 하다. 경건했던 다윗도 유리하며 방황이하였다(시 56:8).

(2)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이동으로 인하여 각가지 조건에 처하게 된다. 아브람은 처음에는 평지에 체재하였고(6절), 다음에는 산에서 묵었다(8절). 하나님은 서로 대립되는 것을 나란히 놓아두신다.

(3) 모든 선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요 기류자라고 생각해야 하며, 또 믿음을 가짐으로써 이 세상은 타국인 것같이 생각하여 집착하지 아니해야 한다. 아브람 역시 그같이 처신했다(히 11:8-14).

(4) 우리들이 여기 현세에 머물려 있는 동안은 나그네 길에 있으나,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자처럼 있는 힘을 다하여 계속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Ⅱ. 그러나 그는 자기가 따랐던 하나님에게서 얼마나 큰 위안을 찾았던가! 그가 가나안 땅에서 그들과 맺은 교제에서는 조금도 만족함을 얻을 수가 없었으나, 그를 거기에 이끄시고 그를 떠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친교를 통해서는 큰 기쁨을 맛볼 수가 있었다. 하니님과의 교통은 말씀과 기도로 유지된다. 이로 인하여, 그리고 그러한 섭리에 따라서 아브람과 하나님과의 친교는 그의 순례지에서 계속되었다.

1.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되, 아마 환상 가운데 그에게 인자한 말씀과 위로의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1) 어떠한 장소나 조건에서든지 인생을 은혜롭지 찾아 주시는 하나님의 위안에서 우리를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브람은 가나안 사람들 사이에서는 안정되지 못한 기류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거기서 자기에게 생명을 주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대적자들이 우리와 우리의 장막을, 그리고 우리와 우리의 제단 사이를 떼어 놓은 수는 있어도,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이간할 수는 결코 없다.

(2) 더욱이 본분에 충실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설사 그들을 친구 가운데서 이끌어낸다고 하더라도 은혜를 주셔서 그러한 손실을 보충해 주신다는 점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계율을 성실하게 지키고 순종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분명하고 만족을 주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부름심에 순응하기 위하여 자기의 귀중한 것을 버리거나 잃는 자는, 그 대신에 다른 보다 나은 것으로 풍성하게 받을 것이 분명하다. 아브람은 그의 "본토" 를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 그럼 내가 이 땅을 네게 주리라" 고 말씀하신다(마 19:29).

(4)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과 은총을 자기 백성들에게 점차적으로 계시하신다. 전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땅을 "지시하시겠다" 고 약속하셨고, 지금 그 땅을 그에게 "주신다" 고 약속하시니, 은혜가 성장하듯이 위로함도 성장한다.

(5)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위안을 받는 일이다. 그것은 섭리로써만이 아니라 약속으로써도 된다.

(6) 자녀에게 대한 자비는 부모들에게도 자비가 된다. "내가 그것을 줄 것이나, 네게가 아니라 너의 자손들에게니라." 그것은 그의 자손들이 장차 받을 은사인데, 아브람도 역시 장래 향유할 보다 나는 본향으로서 자신에게 주시는 은사로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이 그 한 형태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히 11:16)

2. 아브람은 자기가 세운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겼다. 즉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7,8절).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이것은 특별한 기회에 이룩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겠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였을 때, 그 때 거기서 그는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제단을 쌓았다. 이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오심에 보답하였고, 하늘과 교제를 맺었다. 그는 결코 지는 일이 없어야겠다고 결심한 자처럼 했다. 그는 자기에게 은혜롭게 방문하여 주시고 약속을 주신 하나님의 자비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에 대한 그의 신뢰와 확신을 입증하였다. 적극적으로 믿는 자는 아직 성취되지 아니한 약속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함을 드리고,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해도 그에게 나타나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제단을 쌓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2) 그가 어느 곳으로 옮겨가든지, 이것은 변함없는 의식(儀式)으로 지켰다. 아브람은 가나안에 당도하자, 자기는 비록 거기에서 이방인이요 기류자에 불과하지만 자기 가정을 통하여 즉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의식을 세우고 지켰다. 그는 자기가 장막을 치는 곳은 어디이든 거시서 하나님을 향한 제단을 쌓았으며, 그 제단은 기도로써 성별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신앙의 의식적인 부분, 곧 제물을 드리는 일을 잊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하나님을 사모하는 당연한 의무와 그 이름 부르는 일, 곧 하나님께서 지극히 기뻐하시는 영적인 제물을 드리는 일을 유념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에 관한 것을 전파하였으니, 곧 참된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믿음에 대한 지식을 그의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은" 훈련을 받았었다. 그러나 또한 계속하여 가르침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신실한 아브람의 자녀임을 자처하고 그의 축복을 상속하고자 하는 자는 거룩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 특히 자기 가정에서 아브람의 모범에 따라 예배를 성실하게 지키지 않으면 안 됨을 깊이 명심하자. 가정 예배 방법은 상당히 오래된 방법이라서, 조금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모든 옛 성도들이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아브람에게는 부유함과 큰 가족이 있었고 이제 불안정하게 원수들의 한가운데 들어 있었으나, 그는 자기의 장막을 치는 모든 곳에서 제단을 쌓았던 것이다. 우리도 어디를 가든지 우리의 믿음을 함께 지니고 가야 할 것이다.

12:7 없음.

12:8 없음.

12:9 없음.

12:10

애굽으로 이주한 아브람(창세기 12:10-13)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훑어 볼 수 있다.

Ⅰ. 가나안 땅에는 기근이 있었다. 그것은 "심한 기근" 이었다. 그 비옥하던 땅이 황무지로 변모되어 버렸으니, 이는 거기에 살고 있던 가나안 사람들의 부정함을 벌하시기 위함이었을 뿐 아니라, 그 곳에 기류하던 아브람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매우 쓰라린 시련이었으며, 아브람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가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1. "굶어 죽게" 하려고 끌고 왔다는 불평하는 자손들과 마찬가지로(출 16:3), 여기까지 자기를 이끌어내신 하나님께 대하여 아브람이 뭐라고 말할 것인가를 시험했다. 지극히 강한 믿음이 없이는 결코 그 같은 하나님의 처사에 대하여 좋은 생각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2. 약속의 땅에 관한 생각을 시험하기 위함이다. 즉 그 땅을 주시는 은사를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또는 여기에 나타나 있는 바대로 그 땅이 거기에 "거하는 자들을 삼켜버리게" 된 그런 때에 버리고 온 자기의 본토가 오히려 값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나 않는지를 시험함이다. 또한 그는 자기를 가나안에까지 이끌어오신 하나님께서 그를 그 곳에서 안보하시리라는 흔들리지 아니하는 믿음을 지니고 있는지, 또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할 때에도 하나님을 자기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이었다(합 3:17, 18). 다음을 명심하라.

(1) 강한 믿음은 여러 시험으로 연단되어서, 그것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 는 사실이다(벧전 1:6, 7).

(2) 하나님은 때때로 아직 신앙이 작은 초심자를 큰 어려움으로 시험하신다.

(3) 의무를 다하고 복된 길에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큰 역경과 실망에 봉착할 수 있다.

Ⅱ. 이런 기근의 시기에 처하여 아브람은 애굽으로 이동한다. 한곳에 기근이 있을 때 다른 한 곳에는 풍성함이 있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 위대한 공동체가 지체들인 우리는 상호간에 "나는 네게 필요하지 아니하다" 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돌보심으로써 애굽 땅에 양식이 있게 하시었다. 아브람은 그 기회를 분별 있게 이용하였다. 그러므로 고난에 처해 있을 때에 우리를 안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여 주신 방법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고 믿지 않는 것이 된다. 즉 소용 없는 이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기서 아브람의 칭찬에 대하여 특별히 주목할 것은, 그가 이런 경우에도 자기가 떠나 온 본토로 돌아가자고 제의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곳을 향하지도 아니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본향은 가나안의 북쪽에 위치하였으며, 그는 잠시라도 가나안을 떠날 필요가 있을 때는 그와 정반대 방향에 위치한 애굽으로 가기로 했으니, 이는 그가 떠나온 곳을 다시는 돌아보지도 아니하려는 것이다(히 11:15, 16). 더 나아가, 그가 애굽으로 내려간 목적은 잠시 기류 하고자 함이었지 거기에 정착하기에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을 주시해야 한다. 다음을 명심하자.

1. 비록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가 나쁜 곳에 처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필요 이상으로 오래 지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안정하지 않을 곳에서는 잠깐 체류하는 것이 좋다.

2. 선한 자도, 그가 이 세상에 속해 있을 동안에는 어디를 가든지 기류자에 지나지 않는다.

Ⅲ. 자기 아내를 부인하고, 그녀를 자기 누이로 꾸밈으로써 아브람이 큰 실수를 범한다. 성서의 말씀은 가장 축복 받은 성도들의 비행에 관해서도 공평하게 기록해 놓았다. 이는 우리가 모방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경고를 주기 위함이다. 따라서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1. 그의 실수는 사래와 자기의 관계를 속인 일이다. 또 그것을 모호하게 말하고, 자기 아내와 모든 시종들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을 것이다. 그의 말은 물론 어느 모르는 사실이었다(20:12). 그러나 속이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다. 더욱이 그는 진실을 속임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진실을 부정하게 되고 그 아내와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하고 말았다.

2. 이 사건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어느 애굽 사람이 사래의 미모에 매혹되지 않을까 하는 질투 섞인 그의 소심한 생각이었다(애굽 여인은 그런 미모를 낼 수 없었다). 만일 아브람이 그녀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처치해 버릴 것이며, 그들이 그녀와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간음보다도 그들이 극악한 살인죄를 범하리라고 생각하였다. 당시에는 간음을 또한 그렇게 극악한 죄로 여겼고, 결혼이란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아무런 합당한 이유 없이 "그들이 나를 죽이리라" 고 속단하였던 것이다. 인간의 두려움은 함정으로 끌고 가며,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 때문에 죄짓는 자리에 끌린다는 것을 명심하사(눅 12:4, 5). 가장 탁월했던 아브람의 미덕은 곧 그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두번이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후" 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신과 의혹 때문에 이렇게 넘어지고 만 것이다. 오, 슬프다! 삼나무가 흔들리니 버들가지는 어찌하랴!

12:11 없음.

12:12 없음.

12:13 없음.

12:14

아내를 부인한 아브람(창세기 12:14-20)

다음 사실을 여기서 살펴볼 수 있다.

Ⅰ. 사래는 애굽 왕에게 정절을 빼앗길 위험에 빠진다. 틀림없이 죄악의 위험이 우리가 처하는 가장 큰 위험이다. "바로의 대신들도(오히려 그의 뚜장이들이라 하겠다) 그를 보고" 또 그녀가 얼마나 아리따운가를 알아 보고는, "그녀를 바로 앞에 추천하였으나", 이는 참으로 그녀를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즉 그녀의 미덕과 정절과 믿음, 그리고 경건(이러한 것들은 그들의 눈에는 아무런 미덕도 아니었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아리따움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것이 사람을 사로잡기에 넉넉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녀를 왕에게 천거하여, 에스더가 아하수에로의 왕궁으로 이끌려 간 것 같이 (에 2:8), 이제 그녀는 바로의 왕궁으로 끌려갔다. 이는 그녀를 왕의 침상에 들이기 위함이었었다. 우리는 사래가 아름다운 여인으로 발탁된 것이 아니라, 시험에 빠져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 사건의 이유는 그녀의 미모(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혹의 함정이기도 하다)와 아브람의 애매한 언사 때문이었다. 이렇게 모호한 말을 써서 남을 속이는 일이 때로는 큰 죄악에 이르는 입구가 되는 죄가 되기도 한다. 사래가 이런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 아브람은 그녀로 인해서 보다 잘 지내고 있었다. 바로 그에게 양과 소등을 주었으니(16절), 이는 그의 동의를 얻고 자기 누이라고 했던 그녀를 보다 쉽사리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올 때에는 이 같은 일을 예상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더욱이 그가 자기의 아내를 부인하는 일을 꾀할 줄이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것에서 선을 이끌어 내셨다. 이같이 하여 죄인의 부귀는 어떻게 보면 의로운 자를 위하여 축적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Ⅱ. 사래는 이런 위험에서 방면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죄악과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자초하였고, 또 약속으로도 거기에서 해방 받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난국과 고통에서 하나님께서는 여러 차례 특전을 베푸사 우리를 구하여 내셨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곧 멸망했을 것이다. 아니, 훨씬 이전에 멸망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공과에 따라 우리를 다루시지 않는다.

1.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징벌하셔서 그의 죄악이 깊어지는 것을 막았다. 죄의 길에 있는 우리를 저지하여 유효하게 우리의 본분으로 인도해 주시고, 특히 우리가 잘못 취하고 보류해 두었던 것을 회복시켜서 본분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복된 응징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바로 뿐만 아니라 그의 집에도 재앙이 내렸으니, 아마 사래를 바로에게 천거한 대신들에게 특히 그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살피자. 죄악과 한짝이 되었던 자는 마땅히 형벌에 있어서도 한짝이 되어야 함을 주목하자. 다른 사람의 정욕에 일익을 담당하는 자는 그들의 재앙도 함께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바로가 받은 재앙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아니했다. 그러나 그 재앙 속에는, 자기들이 재앙 받는 것은 죄로 인함임을 고백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거나, 또는 그 재앙에 대한 어떤 설명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2. 바로가 아브람을 힐책하고는, 정중히 그를 놓아 주었다.

(1)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고 하였으니, 이 힐책은 조용한 것이었으나 당연한 것이었다. 이 얼마나 온당치 못한 일인고! 현명하고 선한 사람에게 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일인가! 신앙을 고백하는 자가 부정을 행하고 성실하지 못한 일을 행하며, 특히 거짓말 같은 것을 말한다면, 이러한 힐책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또 이러한 힐책의 말을 해 주는 자들에게 감사해야 마땅함을 유의하자. 우리는 여호와의 예언자가 이방인의 한 선장에게서 마땅하게 꾸지람과 비난의 음성을 들은 것을 볼 수 있다(욥 1:16). 바로는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그가 만일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지 아니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당연한 이유 이상으로 남을 의심하는 일이 선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흔히 범하는 결점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 사람들이 보다 큰 미덕과 영예와 양심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는 때가 있다. 아브람이 예상했던 바 보다는 바로가 선량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브람과 같이, 그런 실망이 당하는 일은 우리에게 즐거운 일임이 분명하다. 사랑은 최선의 것을 희망하라고 우리에게 일러 준다.

(2) 그 석방은 친절하고도 지극히 관대한 것이었다. 그는 아브람의 아내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고 돌려 주었다.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19절). 죄악을 예방하고자 하는 자는 유혹을 멀리해야 하며, 또한 죄악의 길을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그는 아브람도 편안히 놓아 주었다. 아브람이 생각했던 것은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것이었으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아브람은 이것을 특별히 염려하였었다. 우리는 흔히 즉시 사실 무근한 것으로 드러나고 말 공포로 인해서 당황하고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하자. 흔히 아무 두려울 것이 없는 데서도 두려워하는 수가 있다. 사실상 아무런 위험도 없을 때에도 우리는 "멸하려고 예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사 51:13). 처음에 사실대로 이야기했더라면 아브람의 위신이나 안위를 위해서도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정직이 최선의 정책" 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로가 그의 사람들에게 일을 명하였다" (20절)고 했으니, 다음과 같다.

[1] 어떤 일이 있어도 아브람을 해치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명하였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자기들이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으로 족하게 여겨서는 안 되며, 그 종들이나 주위에 있는 자들도 남을 해하는 일을 삼가도록 억제해야 함을 유의하자.

[2] 기근이 끝나고 아브람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에 호의를 베풀어 안전하게 그 나라를 떠나도록 인도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아마 바로는 재앙 속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을 것이다(17절). 도 그 재앙을 통해서 아브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라는 생각을 바로는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런 재앙이 재발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기 나라에서 아브람이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도록 특별 배려를 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면 그들이 위험에 빠진다는 것을 알게 하심으로써, 그 백성들에게 유익한 친구들을 세워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의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실족케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스러운 일이다(마 18:6). 다른 많은 구절 가운데서도 특히 시편 기자는 이 구절에 관하여 105편 13-15절에서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라" 고 했다. 아마도 바로가 그를 약속의 땅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적대자들을 이용하시어, 이 세상이 저들의 안식처가 아니며, 따라서 그들이 그 곳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기억하게 하심을 유의하자. 끝으로, 애굽으로부터의 이같은 아브람의 해방과 그 후 그 자손들의 해방과의 유사성을 관찰해 보자. 아브람이 기근의 시기에 애굽으로 간 때로부터 430년 후에, 그 자손들도 역시 기근을 당하여 거기에 갔으며,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림으로써 그를 끌어내심과 같이 그들에게로 그러했으며, 아브람이 바로에게 놓임 받고 애굽 사람들의 노획물로 부유하게 된 것과 그들도 그러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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