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술(李觀述, 1902년 4월 25일 - 1950년 7월 3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자 고문 조작 사건의 피해자, 학살 피해자이다. 이재유, 박영출과 함께 경성재건그룹의 지도부였으며, 경성콤그룹의 창건자이자 지도자였다. 민족주의자 교사였는데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한 제자들이 일제에 연행되고 폭행당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을 따라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이후 경성반제동맹, 이재유 그룹, 경성콤그룹에서 광복 순간까지 휴식기 없이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일제의 폭압이 가장 극심했던 1930 -1940년대 끝까지 저항한 몇 안 되는 독립운동가이다. 광복 후 ‘선구’에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여운형·이승만·김구·박헌영에 이어 5위의 인기를 누리던 대중적 정치인이었다. 박헌영파와 반박헌영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던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였으며,[1] 조선인민공화국 선전부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었다. 그러나 학술적으로 조작된 사건으로 판명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투옥되었고 대한민국 국군에 의한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첫 피해자가 되었다.[2] 2015년 대한민국 사법부는 이관술에 대한 대한민국 국군의 학살이 불법임을 인정하며 유족에게 국가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관술은 월북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죽었으며,[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았으며,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하거나 국가보안법을 어긴 사실도 없음에도 미서훈 독립운동가로 남아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4] 호(號)는 학암(鶴巖)이다. 유년기·청소년기[편집]이관술의 고향은 대한제국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 평천동(現 대한민국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이다. 아버지 이종락(李宗洛)은 울산군 범서면 입암리의 유서 깊은 양반 가문의 장자였다. 이관술은 가족이 잠시 울산을 떠나 울릉도에 거주할 때인 1902년 태어나 1905년쯤 울산으로 돌아와 성장했다. 이관술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사별하고 할아버지의 보살핌 아래 입신학교를 다녔다. 이관술은 어려서 천재라고 불렸다. 성격은 친척과 친구들에 따르면 자신감 넘치고 장난을 좋아했다고 하고 제자들과 하급당원에 따르면 자상하고 차분하며 유순했다고 한다. 공통된 증언은 끊임없이 농담을 하는 재미있는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또 언제나 여유롭고 태연했으며 두려움을 몰랐다. 따라서 이후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에 검거되어 고문을 당하는 도중에도 미소를 보이거나, 지명수배자 신분이면서 변장하고 경찰서 바로 앞에서 경찰의 동태를 살피는 행동을 자주 하거나, 고문당하고 갇혀있는 신세면서도 오히려 검사를 동정한다는 말을 하거나, 무기징역형이 선고되어 다른 피고인들이 통곡할 때도 혼자 태연하거나,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인다.[5]
다른 특징으로는 독서를 매우 좋아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상황에서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글씨체가 예뻐서 각종 인쇄물의 글씨를 직접 썼고,[6] 기본적으로 동남 방언으로 말했다.[7]
2019년 이전까지는 이관술이 근대교육 대신 마을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깨우쳤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울산교육청이 2019년 울산교육 독립운동 TF팀을 꾸려 연구조사를 하다 이관술이 입신학교에 다녔다는 사료를 발견했다. 입신학교는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1년, 사립학교규칙이 제정되면서 전국 2000여 개 사립학교가 잇달아 폐교할 때 폐교했다. 일제 당국이 사립학교가 공립학교를 대신해 민족계몽에 힘쓰는 근대교육을 펼치자 통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입신학교가 폐교하자 이관술은 울산간이농업학교에 입학해 1917년 졸업했다. 하지만 상급학교인 고등보통학교 입학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집안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아버지 이종락의 반대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종락은 진학보다 결혼을 서둘렀다. 그래서 1921년 경주 외동에서 태어난 박가야와 부부의 연을 맺고 난 뒤에 당시 경성부 종로 수성동에 있었던 중동고등보통학교(현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8] 중동고등보통학교에서 이관술은 독보적인 전교 1등이었다. 그런데 이관술의 아버지가 대학교 진학을 반대했다. 이관술은 "일본에서 제일 진학이 어려운 학교가 어디냐? 내가 그 학교에 입학하면 우리 아버지도 진학을 막지는 못하실 거다"라고 자주 친구들 앞에서 말했다고 한다. 동경제국대학(현 도쿄대학)이 최대 명문이었으나 이 당시 그보다 더 들어가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진 곳이 동경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대학)였다. 졸업만 하면 평생 교사직이 보장되어 일본과 조선은 물론 중국에서까지 수재들이 몰려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이관술은 몰래 일본으로 가 시험을 본다. 이관술의 아버지는 이관술의 동경고등사범학교 합격 소식을 중동고에서 보내온 전보를 통해서 처음 접했다. 이관술은 1925년 3월 중동고를 수석 졸업하였다.[9] 청년기의 민족계몽 활동[편집]이관술은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사회주의를 접한 적도 있으나 1929년 전까지는 사회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민족주의자였다. 동경고등사범학교 유학 시절 방학 때마다 조선으로 돌아와 교육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민족계몽 활동을 했다.[10] 당시 북경에 머물던 심산 김창숙이 만주에서 무장독립군을 양성하는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김창숙은 이후 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이 된다. 그런데 김창숙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이 발생해 손후익이 수십 리 밖까지 마중 나가 입암으로 업어서 데려왔다. 손후익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딸이 독립운동가들의 비밀편지를 전달한 숨겨진 독립운동가이자 나중에 김창숙의 며느리가 되는 손응교였다.[11] 김창숙이 돌아간 직후 일제 경찰의 검거가 시작됐다. 일경은 특별조사반을 구성해 수사했고 전국에서 약 50명을 체포했는데 입암마을에서 손진수, 손후익, 이우락, 이재락이 체포됐다. 2차 ‘유림단 사건’의 시작이다.[12] 유림단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이관술이 동경고등사범학교를 다니던 때였다. 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와 보니 마을 전체가 유림단 검거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김창숙과 연관돼 손응교의 집에서 두 명이나 체포되자 마을 사람들 인심이 흉흉해졌다. 그런데 이관술이 적극 변호하고 나섰다.[13] 손응교가 자필로 쓴 회고록을 보면 “우리 집을 무슨 범죄의 온상처럼 보는 사람이 얄밉기만 했는데 이관술 씨가 우리 집은 훌륭한 가문이고 우국지사의 집이라고 칭찬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적고 있다. 이관술은 움츠려 있는 손응교 형제들을 위로했고, 범서보통학교 입학까지 소개해줬다. 손응교는 그 전까지 일본식 교육을 받으면 안 된다는 집안 어른들 입장 때문에 처음 학교에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색다른 경험은 조부 손진수가 출소하면서 다시 끝나게 된다.[14] 이관술이 이듬해 방학 때 돌아오자 손응교는 마을 아이들과 함께 배움을 청했다. 손응교의 회고록에서 이관술을 통해 “신학문도 배우고 독립사상도 지도해주기에 무척 따랐고 잡지 개벽, 시집, 소설 등을 탐독하며 이상과 꿈을 키워 왔다”고 기억했다.[15] 이후로도 김창숙, 손응교와의 인연은 계속된다.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위원회 2010년 보고서> 5권, 손응교가 알려준 이관술 학살 날짜 이관술은 1929년 3월 동경고등사범학교 지리역사과를 졸업하였다.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편집]동덕여고보 교사 시절 이관술(중앙에 양복 차림), 그 옆 한복 차림이 조선어교사 신명균.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29년 서울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이관술은 조선어 교사였던 이윤재와 특히 친했다. 이후 조선어 교사는 신명균으로 바뀐다. 이관술은 역사와 지리 과목을 맡았다. 체벌을 비롯한 군국주의 교육 방식에 익숙한 다른 일제강점기 교사들과는 달리 어떤 상황에도 체벌하지 않는 진보적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던 이관술은 동덕여고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최고의 인기교사가 되었다.[16] 이관술은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수업준비도 열심히 했다. 이관술 생가 다락에서 손바닥만한 수첩이 발견되었는데 경동지괴니 리아스식 해안이니 하는 지리 용어와 그림으로 된 해설이 정성스레 적혀 있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장난기 어린 농담을 끊임없이 했다. 동덕여고보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생들이 이관술의 수업시간인 지리와 역사 시간을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17] 동덕여고보 출신 독립운동가 이효정(2006년 건국포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효정은 이육사의 친척이기도 하다. 동덕여고보 1932년 졸업앨범. 왼쪽부터 이관술, 이순금, 이종희, 이효정이다.
민족주의자였으나 제자들이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연행되고 폭행당하는 상황에서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이 학생들의 운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이자 실망해서 박진홍, 이효정 등 제자들을 따라 사회주의자가 된다. 동덕여고보가 참여한 경성 여학생 운동을 지도한 근우회는 사회주의 계열이 속속 연행돼 구속됐고, 민족주의 계열은 이들의 항일투쟁을 과격하다고 비판했다. 민족계몽을 명분으로 학교를 운영해왔던 인사들은 만세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휴교를 하거나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동덕도 학생 만세운동이 진행될 때 동맹휴업이 계속될 것을 우려해 겨울방학을 앞당겨 실시하면서 휴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월 중순으로 예정된 개학 시기를 늦췄다. 학생들은 학교재단이 겁을 먹고 굴종한다는 분노로 일렁거렸다.[18]
박진홍, 이효정 등 학생들은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독서회를 만들기 위해 교사인 이관술의 이름을 빌리려 했는데 이미 이관술은 독립운동을 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라 학생들의 활동을 활발히 지도하기 시작했다. 이후 제자들과는 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을 함께하며 가장 가까운 동지가 된다. 이관술은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지도하는 것으로 사회 운동을 시작하였다. 제자들의 독서회 모임과 이를 기반으로 한 '경성 여학생 만세운동'은 그의 끓는 피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관술의 이복동생 이순금도 1930년 3월에 동덕에 편입한 뒤 이효정, 박진홍과 함께 어울렸고 독서회에 참여했다. 이들이 광주학생운동 1주년에 맞춰 펼친 백지동맹을 주도했다. 이관술은 해마다 벌어지는 동덕여고의 학생시위를 적극 지지하고 격려, 지원한다. 제자들이 동맹휴학을 선동하면 다른 교사들은 학생들이 밖에 못 나가도록 교실문을 막았는데 이관술은 먼저 수업을 중단하고 밖에 나가도록 안내했다.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고 학교 측의 징계와 경찰의 연행에 반대해 앞장서 학생들을 보호한다.[19] 독립운동을 하던 학생들이 퇴학 처분을 받자 학생들을 지키려고 동료교사 신명균 등과 함께 교사들의 동반사직을 주동했고 결과적으로 학생들을 지키는 데 성공한다.[20] 1931년 6월, 동덕 동맹휴업 동조 교사들 총사직 선언(왼쪽)과 학생 단식농성(오른쪽)
이관술은 교사로 있던 시기 여자인데다 돈이 없어 학교를 못 가고 있던 손응교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손응교는 이관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감사를 표한 바 있다.
이효정의 아들 박진수는 “어머니가 울산에 가실 때는 이관술 선생님이 직접 차표를 사서 배웅하셨다고 해요”라고 증언했다.
조선반제동맹 활동[편집]1932년 11월 중순 이관술은 이순근, 조정래와 '조선반제동맹 경성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날 결정된 반제동맹의 활동 구호는 식민지 노예교육의 반대, 수업료 감면, 학교 내 경찰 침입 반대, 입학에 대한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 반대, 졸업생 취직에 대한 학교의 책임 부담, 여자 교육에 대한 남존여비적 교육에 반대 등 6개 조항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각 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한다. 이 결의 이전부터 이미 이관술은 독서회를 운영하고 있었다.[21] 반제동맹은 수차례 회합을 가지고 1932년 ‘조선자주독립선언 10개조’를 발표했다. 이 조선자주독립선언 10개조를 이관술이 기초했다.
반제동맹 산하 독서회는 보성고보, 보성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경성부기학관, 경성기독청년학관으로 확대되었다. 이관술은 동덕여고보 재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두 개의 독서회를 직접 지도했다. 교내 독서회는 이경선(2021년 건국훈장 애족장), 임순득, 김영원, 박인순을 중심으로 사회과학 도서를 공부했다. 그리고 동덕여고보를 졸업한 여동생 이순금과 윤금자, 김길순이 가두독서회로 참가했다.[22] 경성반제동맹은 1932년 11월 하순, 12월에 동경에서 열릴 예정인 ‘태평양연안제국 반제국주의민족대표자회의’에 대표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이들은 조선에서도 반제국주의에 앞장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23] 반제동맹은 1933년 초부터 일제에 체포되기 시작한다. 동대문경찰서 관할로 시작된 검거로 연행된 숫자 미상의 인원 중 43명이 정식으로 경성지방법원으로 송국된다.[24] 이관술이 체포된 것은 1933년 1월이었다. 임순득, 이경선, 김영원, 임택재와 함께 독서회 사건으로 종로서에 체포된다. 이관술은 맨 처음 체포된데다가 주모자였기 때문에 지독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고문은 서대문형무소에 넘어가서도 계속되었다. 일제는 예심제도를 두어 정식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무한정 시간을 두고 조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특히 사회안전법 관련자들은 예심 기간만 1~2년이 걸렸다. 예심 기간에 끊임없이 검찰과 경찰에게 재조사를 받아야 했는데 형무소에 넘어간 후에는 형무소 지하에 있는 보안과에서 고문이 행해졌다. 이관술을 고문한 고문기술자 노덕술(앞줄 왼쪽의 안경 쓴 사람)과 고문기술자 최난수(앞줄 오른쪽의 양복 입은 사람) 취조 과정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고문이 뒤따랐다.[25] 일제가 독립운동가에게 주로 자행한 고문으로는 물고문, 전기고문, 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는 고문, 벽관 고문, 단근질 등이 있다. 이 때 당한 물고문 후유증으로 이관술은 평생 폐병에 시달린다. 이관술은 구속 16개월 만인 1934년 4월 9일 폐병 때문에 병보석으로 가석방된다.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난 것이다.[26] 이관술, 일제강점기 감시대상 인물 신상 카드, 1933년, 서대문형무소. 1933년 4월 26일 신문 기사를 보면 이관술이 동덕여고보 교사직을 ‘사임하게 됐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재유 그룹 활동[편집]이관술이 석방된 지 4일 후인 4월 13일 이재유가 서대문경찰서를 탈출했다. 이재유의 탈주 소식에 막 석방된 이관술은 설렜고 당장이라도 운동선상에 복귀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이관술은 폐병으로 건강이 몹시 나빴다. 그는 당시 기분을 회상기에 써놓았다.[28]
반제동맹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이순근 정도를 빼면 모진 고문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운동을 포기한다.[29] 이관술은 이재유를 찾으러 1934년 8월 하순 경성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1934년 9월 중순 이순금의 노력으로 이재유와 접촉한다. 이관술과 이재유는 장충단공원 뒤 <앵구> 약수터에서 암호에 의해서 서로 알아보고 손을 잡았다.[30]
이재유와 만난 첫날 이관술은 지식인으로서의 약점을 극복하기 노동자가 되어 공장에서 일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재유의 생각은 달랐다. 이재유는 이미 이관술에게 몇몇 학교의 독서회 조직을 맡기려 계획하고 있었으며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적당한 부서에서 당장 활동을 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31] 이관술은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의 문제도 이재유와 상의한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이관술의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관술은 상의 결과 재판에 출석하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는다.[32] 트로이카에서 이관술은 학생부문을 맡았다. 이재유는 출판, 이관술은 학생운동, 박영출(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은 노동운동 분야를 총괄했으니 이관술은 이재유와 나란히 경성재건그룹의 핵심 인물이 된 것이다. 이관술은 이 때 이미 거물급 노동운동가가 되어 이재유와 함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진행해나갔다. 정책적 대안 마련을 위해 '노동조건조사표'를 작성해 공장의 노동조건을 조사하기도 했다. 일본 제국 경찰이 그린 경성재건그룹 조직도. 맨 위에 박영출, 이관술, 이재유의 이름이 있다. 이관술이 트로이카 조직론에 따라 활동한 조직의 정식명칙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재건그룹'이며 상당한 조직적 성과를 거둔다. 경성재건그룹의 목표는 연말연시를 기해 투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경성의 또다른 노동운동 조직인 권영태 그룹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일을 이관술이 맡았다. 이관술은 연말의 총파업을 준비하자는 내용의 팸플릿 등 경성재건그룹 문건을 가지고 권영태 그룹과 접촉한다. 권영태는 자신이 프로핀테른의 지시를 받아 파견되어 왔으므로 이재유 그룹은 자신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권영태는 이관술의 제안을 일축했고 경성 지역 양대 조직의 통합은 실패한다.[33] 경성재건그룹은 학교와 공장에 독서회를 만들어 지도하고 여러 종류의 팸플릿을 발간해 경성과 인천 지역에 배포한다. 석 달 만에 조직원이 오십 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석 달 만인 1935년 1월 검거 선풍을 맞는다. 이인행과 박진홍이 체포되었다. 조직원들은 돌아올 시간을 정하고 돌아올 시간이 10분 이상 늦으면 몸을 피해 주변에 숨고 한 시간 이상 돌아오지 않으면 완전히 체포된 것으로 간주해 도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붙잡힌 조직원은 24시간 동안 고문에 버티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재유는 이관술의 은신처로 피신했지만 수십 명이 연행되었다. 이관술과 이재유는 비밀 서류들을 땅에 묻어 두고 목적지를 정하지도 못한 채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34] 이관술의 회상기에 따르면 경기도 경계를 넘은 두 사람은 강원도 수성을 지나 홍천과 춘천까지 도보로 배회한다. 두 사람은 새로운 지역에 들어갈 때마다 그곳에 맞는 복장으로 변장하고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구실을 짜냈다. 이 때 이재유는 이관술에게 변장법을 알려주었다. 여관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자고 식당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밥을 사먹는가 등 지하생활에 필요한 지침을 알려주었다. 이관술은 이때의 배움을 밑천 삼아 변장술의 귀재라 불릴 정도의 도피술을 터득, 해방이 되기까지 왜경을 농락한다.[35]
이관술과 이재유는 두 달 간 강원도를 배회한다. 이관술은 친척들에게 이 당시 이재유와 겪었던 일화를 이야기해주곤 했다. 폭설이 산야를 뒤덮은 산중에 갇힌 이관술과 이재유는 꼼짝 못하고 눈 속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1월의 한파 속에 노숙을 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두 사람은 옷을 몽땅 벗어 바닥에 깔고 알몸으로 서로를 부둥켜안은 상태에서 서로의 온 몸을 손으로 문질러 열을 냈다고 한다. 알몸으로 부비기 사흘 만에야 마을을 만나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36] 두 사람은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 신주막동 비석골, 지금의 서울 창동 부근으로 와 수해민 형제로 위장한다. 이관술은 김대성, 이재유는 김소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버려진 임야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집을 지어 살았다. 나중에 이 곳을 방문한 기자에 따르면 그 좁은 방에서 어떻게 장정 둘이 지냈을까 놀랄 만큼 협착했다고 한다.[37] 이관술과 이재유가 살았던 노해면(창동) 아지트. <매일신보> 1937.4.30. 이재유는 경성에 드나들며 조직 재건을 담당하고 이관술은 각종 팸플릿과 기관지의 제작을 책임진다. 기관지 <적기>는 상당히 두꺼운 분량으로 이관술은 거의 모든 시간을 <적기>의 제작에 쏟았다.[38] 한편 이관술과 이재유는 김희성의 '콩그룹'과 연대하려 했는데 거부당한다. 이후 이관술과 이재유는 조직 명칭을 '경성재건그룹'으로부터 '경성준비그룹'으로 바꾼다. 적기 제1호가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 기관지부 명의로 1936년 10월 20일에 발행되었다. 안재성의 평에 따르면 "상당한 명문장으로 이루어졌다".[39] 적기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최저임금 확립, 실업보험·의료보험·재해보험·노약자보험·사망보험 등 국가보험의 즉각 실시를 주장했다. 안재성의 평에 따르면 "오늘날까지도 다 이루지 못한 선진적인 구호들을 담고 있다".[40]
이들은 적기 제2호를 11월, 제3호를 12월에 완성했고 모두 두꺼운 분량이었다. 적기는 여러 운동가와 신문기자와 학생들에게 널리 배포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왔고 불안한 상황에서도 이관술은 1936년 12월 24일까지 적기 인쇄를 계속했다.[41] 1936년 12월 25일 성탄절 이재유는 집을 나서며 돌아오지 못할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 이관술에게 굳은 악수를 청했다. 이재유가 집을 나선 건 조직원 최호극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재유와 이관술은 몰랐지만 최호극은 이미 경찰에 잡혀 이재유와의 약속을 경찰에 말한 상태였다. 이재유는 이관술에게 두 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체포된 것으로 알고 달아나라고 재차 확인한다. 체포된 이재유는 고함을 치며 이관술이 자신의 체포 사실을 소문으로라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이재유 체포를 보도한 <경성일보> 기사 "집요흉악한 조선공산당 마침내 궤멸되다" 1937.4.30 <매일신보> 이재유와 이관술…악수로 이별에 / 문제되는 이관술 행방 이관술은 오후 2시가 넘어가자 집을 나서 강원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재유의 체포와 이관술의 도주 소식은 철저히 보도가 금지되었다가 4개월이 지난 1937년 4월 30일 이후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체포 당시 철저히 비밀로 붙이며 보도를 통제한 것은 이관술을 비롯한 남은 세력을 모두 잡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경성 트로이카의 마지막 핵심 지도자가 되어버린 이관술은 잡을 수 없었다. 홀현했던 이관술 미궁에 잠영. <동아일보> 1937.7.23. 이관술은 후일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줬던 동지와 통탄의 작별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관술은 해방 후 일제강점기 항일 혁명운동가 중 가장 으뜸으로 이재유를 꼽았다. 이관술과 이재유는 동거한 기간만 2년이 넘는다. 강원도로 빠져나간 이관술은 산중의 외딴집에서 새끼를 꼬아 망태와 멍석 만드는 일을 하며 겨울을 나는데 그를 좋게 본 주인이 데릴사위로 삼으려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 집을 나왔노라고 나중에 가족들에게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42]
1937.7.23. <조선일보> ‘이재유 일당 이관술 돌연 경성에 출현, 여의도서 발견…’ 동료들이 대부분 운동을 포기하거나 아직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1937년 6월 이관술은 조직 재건에 착수한다. 이 때 박진홍이 석방되어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관술은 박진홍과 1937년 7월 1일 접선한다. 보통 접선은 반시간에서 한시간 정도인데 선생과 제자 사이었던 이관술과 박진홍은 너무 반가워서 7월 더위에도 하루 종일 걸어다녔다.[43] 박진홍은 이관술의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 이관술은 동덕여고보 교사 시설에는 언제나 깔끔하게 양복을 입고 다녔는데 궤짝을 메고 있는 허름한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관술은 궤짝에서 잡화품을 하나 꺼내 박진홍에게 선물로 줬다고 한다. 박진홍은 그런 이관술을 기억하며 ‘명랑한 혁명가’라는 칭호를 붙여 줬다.[44] 박진홍과의 논의 내용에 따라 당시 활동중이던 콩그룹이라는 활동가들과 접촉한다. 이관술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직이 형성되게 된다. 경성트로이카 출신과 콩그룹 출신이 모인 조직이다. 그런데 이 조직은 이순금과 박진홍이 검거되어 금방 와해된다.[45] 이관술 회상기에 따르면 그 후 이관술은 대구에서 "반전반제적인 소그룹 다수 지도했다." 대구에서 전에 동덕여고보 청강생으로 넣어 공부를 도와주었던 손응교를 만나지만 쫓기는 몸이라 눈으로만 반가움을 표시한다.[46] 이 때 이관술은 대담하게도 변장하고 대구경찰서 앞에서 일경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고 한다. 변장하고 경찰서 앞에서 일경의 동태를 살피는 것은 이관술이 자주 하던 행동으로, 이관술은 1940년에도 구두닦이로 변장해 서대문서 앞을 정찰한 바 있다.[47] 손응교는 이후 시내 이층집에 불이 나서 불을 끄다 보니 다다미 밑에 많은 책이 숨겨져 있었는데 이 책이 이관술의 책으로 드러났다는 소문을 듣는다. 이관술이 여러 개의 독서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고 추측된다.[48] 이재유 사건의 거두 이관술 출현설. <매일신보> 1937.7.23. 경성콤그룹 활동[편집]
동생 이순금이 석방되자 이관술은 이순금과 1939년 1월 초 김삼룡과 이옥숙 부부를 찾아가 새로운 항일운동 조직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들은 이 때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태창직물 소그룹을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6개의 공장 세포와 10개의 가두세포(조직원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는 조직)를 형성한다. 이들이 활동을 재개하자 이현상과 권오직이 합류한다.[49]
그때까지 체포되지 않고 전향하지도 않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대부분 그가 만든 경성콤그룹에 가담한다. 1939년 4월경 경성 콤그룹의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1939년 5월에는 석방된 박진홍과 정태식도 가담한다. 이관술은 경성콤그룹의 지도자로서 노동자 모임 교재를 집필하고 '메이데이 투쟁방침서', '8.1 캄파니아 투쟁지침서'를 만든다. 이관술은 이론적 지도와 기관지 책임도 맡았다. 이관술은 1939년 9월에 기관지 『공산주의자』를 월간으로 창간해서 20부를 발간했다. 기관지는 1940년 3월호까지 이관술이 편집했다. 경성콤그룹의 기관지는 전국에 배포되어 읽히게 된다. 이관술은 기사를 직접 쓰면서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해나간다. 이관술은 특기인 변장을 하고 돌아다녔는데 고생이 심했는지 지방에 다녀오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50] 기관지는 이관술이 직접 남선 일대와 청진, 함흥 등 북선 일대에 정밀한 배포망을 조직하여 노동자, 농민에게 배부하였다. 아래 '월간 출판물'이 경성콤그룹의 기관지를 말한다.[51]
경성콤그룹은 사실상 일제강점기 마지막 공산주의자 조직인 동시에 국내의 마지막 저항운동 조직으로서 일제에 꺾이지 않고 버틴 활동가들이 대부분 합류한다. 경성콤그룹은 1941년 대규모 검거를 겪게 될 때까지 국내 항일독립운동단체 중 가장 선명하게 활동한 조직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검거를 피한 이들은 지하로 내려가 끈질기게 항거하며 해방의 순간까지 버텨내게 된다.[52] 또한 이관술과 김삼룡은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데 있어 ‘공산당’ 재건을 조급하게 서두르기보다 노동자를 중심에 둔 조직 확장에 무게를 두는 것에 동의했다. 그 결과 실제로 주력의 상당수가 노동자가 되었다. 경성콤그룹은 노동운동을 근간으로 했다는 데에도 의의가 있다.[53] 경성콤그룹은 조직 보위에 매우 신경을 썼다.
일제 경찰에 따르면 이는 '신전술'이었다. 사다리식 조직체계는 이재유 그룹의 트로이카 방식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56] 한편 당시 박헌영은 1939년 9월에 출소해 있었다. 이관술은 박헌영과 일면식도 없었는데 김삼룡과 이현상을 통해 박헌영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현상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 박헌영과 관계를 맺었다. 김삼룡은 이관술에게 ‘역사도 오래되고 운동 코스도 올바른 공산주의자가 지하에 잠복’하고 있다며 박헌영에 대한 접촉을 제안한다.[57] 박헌영이 경성콤그룹에 들어간 경위는 일제의 이현상 피의자신문조서에 나온다. 이현상 피의자신문조서에 따르면 경성콤그룹의 지도자였던 이관술은 이현상을 보내 출옥한 박헌영이 변절하지 않았는지, 항일운동을 계속할 생각이 있는지 수차례에 걸쳐 시험했다.
이관술은 1939년 12월 12일에 박헌영을 만나고 경성콤그룹에 영입하기로 결정한다. 이관술과 박헌영은 이 때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이관술, 김삼룡, 이순금, 이현상, 정태식, 박진홍 등은 이재유 그룹 출신이고 박헌영, 권오직 등은 화요계, 서중석 등은 상해파였다. 경성콤그룹은 계파를 불문하고 모든 운동가를 결합한 조직이었다.[58] 이관술은 그 후 함경도로 가서 지도부를 구성하고 광산 노동자 조직, 흥남비료공장 노동자 조직 등에 착수하고 노조를 개편하고 기관지 출판과 편집책임자가 되었다. 이관술은 함경도에서도 변장과 도피의 귀재답게 활동한다. 이관술은 광부들을 조직하여 자신이 쓴 팸플릿으로 학습을 지도한다. 많은 광부들이 조직되어 조선혁명계림탄광노동조합을 결성하기에 이른다.[59] 경성콤그룹은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다. 게릴라전에 대비해 전기배선도를 확보해 놓기도 했다.[60] 이관술은 노동자들과 산중에 동굴을 파고 은거하며 항일무장투쟁을 기획한다. 주을광업소 광산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도모한 일이었다.[61]
그러나 이관술은 곧 검거된다. 서대문경찰서가 주도하여 서대문사건이라고 불리는 경성콤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으로 김삼룡과 이현상이 체포되자 이관술은 이를 수습하고 인력을 재배치하기 위해 경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때 이관술은 대담하게도 구두닦이를 가장해 서대문경찰서 근처에서 구두를 닦으며 동정을 살폈다.[62] 일제 경찰은 수배 6년만에 붙잡은 이관술에게 기록적으로 잔혹한 고문을 가하는데, 이관술은 경성재건그룹(경성트로이카) 지도부였고 경성콤그룹의 창건자이자 지도자로 다른 조직원이 모르는 정보도 이관술은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긴 기간 수많은 고문기술자에게 고문을 당한다.[63]
이관술을 비롯한 경성콤그룹 피고인 명단. 이들은 모두 살인적인 고문 수사를 겪었다. 이관술을 고문한 고문기술자 중 가장 악명높은 고문기술자는 노덕술이다. 노덕술은 일제 고문 기술의 70%를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못상자 고문 등을 사용했다.[64] 노덕술은 독립운동 수배자 중 최상급에 속하는 이관술에게 그가 갖고 있는 고문기술을 총동원했다.[65] 그러나 노덕술은 이관술로부터 어떤 새로운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이관술은 경성콤그룹의 창건자로 투옥 기간 내내 다른 연루자들이 드러날 때마다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노덕술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독하게 버텼다. 이 때 1941년 검거되어 1943년 병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3년 가까이 고문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해졌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잔혹한 고문을 끝까지 이겨낸 이들에게 일제 경찰은 고문강자라는 ‘명예’를 붙여 주었는데 최고의 영예를 이관술이 안았다고 한다.[66]
[67][68] 일제강점기에 노덕술이 유독 이관술을 심하게 고문했다는 증언이 많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검거될 때마다 노덕술은 이관술까지 같이 고문했다고 한다. 1941년 붙잡혔는데 1943년 병보석으로 석방될 때 이관술은 감옥이 아니라 고문실에 있었다. 고문실에서 고문으로 얻은 폐병으로 피를 토해서 병보석되었는데, 이관술은 장난기 많고 농담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이관술 인터뷰를 보면 고문실에서 커피를 물고 있다 뱉었다 등 대수롭지 않게 농담을 했는데 이웃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피를 자주 토했고 사촌여동생 이차선에 따르면 피가 쏟아져 수건을 붉게 적실 정도로 피를 많이 토했다고 한다.[69] 서대문사건을 시작으로 경성콤그룹은 6월까지 백 명이 넘게 연행되어 구속되고 박진홍 등 중간 지도자들이 검거되어 조직은 급속히 마비되었다. 1942년 12월까지 계속된 검거선풍은 경성콤그룹을 와해시켰다. 검거된 조직원은 150명이 넘었다.[70] 한편 이관술의 할아버지는 이관술이 공덕리에 숨어살 때 세상을 뜨고 계모는 수배 중일 때 사망했으며 아버지 이종락은 이관술이 체포된 이듬해인 1942년 2월 6일 사망한다. 이관술은 그 어떤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다.[71] 체포된 지 3년 만인 1943년 12월 말 오랜 고문에 따른 고문 후유증으로 피를 토하는 일이 잦자 석 달 간 치료를 위해 가석방된다. 일제의 일급 요시찰 대상이었다.[72]
이 때 이관술은 이순금에 따르면 만신창이가 되어 생명이 위태로웠으며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고 한다. 당시는 일제 말기라 사상범에게 가장 가혹하던 시기였는데 이런 시기에 내보냈던 것을 보아 몸상태가 굉장히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추정한다.[73] 울산의 명의 안효식이 이관술을 정성껏 치료해주고 간호해줬다.[74] 그런데 이관술은 워낙 농담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병보석 받고 고문 후유증으로 사경을 헤멘 후에도 몸이 조금 회복되자 농담을 계속했다고 한다. 가족이나 동네 사람들에게 이재유와 공덕리에서 생활했던 이야기나 경찰서 앞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거꾸로 경찰을 감시했다는 등 재미있는 일화들을 들려줬다고 한다.[75] 1944년 3월 31일 병보석 기간이 만료되었으니 서대문형무소에 재수감하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이관술은 독립운동을 계속하려 잠적하는데 이관술 딸 이정환이 그녀의 외동딸에게 그날 밤의 기억을 말해준 바 있다.[76]
이관술이 사라졌다는 것은 알자 경찰은 이관술 가족과 친척, 이웃을 연행해갔다. 가족들은 물론 입암에서만 아홉 명이 연행되어 고문당했고 고모가 사는 망성 마을 사람들까지 경찰서에 끌려갔으며 삼촌은 마침 출타 중이었는데 붙잡혀 고문당할까 두려워 그 길로 도주해버렸다. 심지어 부산 사는 사촌여동생은 임신중인 몸으로 모질게 고문을 당했다. 또 이관술이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매일 집에 찾아와 군화발로 온 방안을 휘젓고 다니며 물건들을 흩어놓았다. 이관술의 사진과 편지를 모조리 압수해갔고 서가의 책도 불온서적이라고 뽑아갔다. 가족들은 그 와중에도 이관술의 동경고등사범 졸업앨범과 이순금의 동덕여고 졸업앨범을 마루 밑을 파서 깊숙이 묻어놓아 보존했다.[77] 이관술은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여서 멀리 달아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사일마을의 사일 서 씨 집안에 숨어 있었다. 회상기에 따르면 그 뒤 솥땜장이의 심부름꾼이 되어 전라도 산중으로 촌사람들의 솥을 때워주며 다녔다.[78] 이 때는 일제 말기로 전향공작이 극심했던 시기라 이재유를 비롯한 이관술의 동지들은 줄줄이 고문 후유증으로 죽어나간다.
이현상도 옥중 단식투쟁으로 손수레에 실려 나왔다가 도피에 성공하여 덕유산으로 올라가 경상도 쪽에서 도피 활동을 했다. 이렇게 탈출한 조직원들은 박헌영을 찾으려 했지만 박헌영은 광주에 은거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숨어 있었다. 그래서 조직원들은 박헌영이 해외로 탈출하지 않았나 추측하기까지 했다. 박헌영이 광주에만 있던 것과 달리 경성콤그룹 재건의 주된 장소는 대전이었다.[80] 이관술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대전을 중심으로 엿장수나 고물장수로 변장해 가며 조직을 재건하기 시작했다.[81] 소설가 김성동의 증언에 따르면 이현상과 이주상이 이관술을 찾아 대전으로 왔고 권우성, 김응빈, 김봉한 등 조직원이 함께 대전에서 활동했다고 하는데 이 증언은 교차검증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증언에서 이관술은 이후 해방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이현상과 만났다고 하니 적어도 이현상과 함께했을 가능성은 높다. 경찰이 대전의 이층집을 습격하자 활동가들이 불을 지르고 달아났는데 이념서적이 한가득 발견된 사건이 있었는데 안재성은 이것이 경성콤그룹 조직원의 거처라고 추측한다. 대규모 검거 이후에도 경성콤그룹 세력의 조직원 숫자가 상당했음을 의미한다.[82]
이관술이 구두닦이로 위장해 대전 경찰서 앞을 돌아다녔고 해방을 대전 고물상에서 맞이했다는 증언이 있다.[84] 즉 이관술은 일제의 고문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위험한 국내에서 해방의 날까지 일제에 저항했다. 이런 독립운동가는 극소수이다.[85]
광복 후 정치인으로서의 활동[편집]일제강점기 잠행 시기의 이관술의 행적은 거의 전설에 가까웠다. 그는 고물 장수 외에도 구두닦이, 깨진 솥을 수선하는 솥땜장이 등으로 위장해 일제 경찰의 눈을 속였다.[86] 이관술의 신출귀몰한 행보는 일제강점기 신문에 항상 보도되었으며 민중은 그의 행보에서 독립의 희망을 보았을 것이라고 역자학자들은 평가한다. 광복 직후 잡지 <선구>의 최초 정치여론조사(1945.12)에서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가장 양심적이고 역량 있는 정치지도자' 5위에 선정될 만큼 현대사 속 중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이관술은 전시체제였던 1930~40년대 일제에 끝까지 저항한 몇 안 되는 독립운동가였다. 이러한 사실을 국민들이 잘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것이 여론조사에 반영된 것이다.
1945년 9월 11일 조선공산당이 정식 재건된다. 이관술은 서완석, 김형선, 최원택과 함께 중앙검열위원으로 선출된다. 4명으로 이루어진 중앙검열위원은 당의 모든 분야를 감사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기구였으며 이관술은 중앙검열위원 서열 1위였다. 또한 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총무와 재정을 담당했다. 독립운동가가 된 후 처음 맞이하는 화려한 나날이었다. 가족들과도 재회한다.[87] 이석도는 짧은 그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설립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관술은 전국인민위원 명단에 다섯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이관술 앞에 있는 이는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이었다. 9월 14일 조선인민공화국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88] 김오성이 1946년 9월 쓴 <지도자 군상>에 따르면 "이관술이 중앙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한번도 그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무슨 권세의 자리처럼 자기의 실력도 없으면서도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애쓰건만, 이관술은 시종일관 사양"했다고 한다. 이관술이 고향 울산에 방문하자 지역 인민위원회 주요 인사들이 모두 환영했다. 이관술은 경성에 나가 있는 울산 출신 인사 중 가장 고위급 인물이었다. 1943년 병보석으로 풀려나 입암마을에서 요양하다 탈출한 뒤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상전벽해로 상황이 바뀌었다. 이관술이 고향 울산에 온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울산에서는 대대적인 환영 잔치가 벌어지는데 이관술은 이 때 "지나치게 좌익적인 구호나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적대적인 행동으로 민심을 이반시키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순금도 전국부녀총동맹 회의에서 "회의 분위기가 너무 극좌로 흐른 것은 앞으로 극복이 되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라고 말했다.[89] 조선공산당 내부에서는 파벌대립이 심했다. 이관술은 박헌영파와 반박헌영파 사이에서 박헌영에게 불만을 지닌 당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조율하는 역할을 하는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였다.
박헌영에 적대적인 사람들도 같은 경성콤그룹계인 이관술에게는 적대적이지 않았는데 이관술의 성격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공산당의 대표적 반박헌영파였던 김철수(200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는 회고록에서 박헌영, 이현상, 이주하, 김삼룡 등 재건파를 모두 비판하는데 이관술은 좋게 평했다. 이현상과 사이가 나쁘고 이주하, 김삼룡을 제명시키라고 주장한 이영, 정백 등 반박헌영파가 이관술을 중재자로 지명했다. 이관술이 박헌영, 이현상, 김삼룡과 같은 경성콤그룹 출신임을 고려하면 이관술의 성격이 굉장히 좋았음을 알 수 있다.[90]
이관술은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여러 정치적 행위를 했다. 이관술은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독촉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1945년 11월 11일 기자 회견에서 이관술은 독촉 참가에 대한 질문에 통일전선을 이루기 위한 참가 결정이라고 밝혔다. 이관술은 기자들에게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완전히 제외한 통일전선”이어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통일전선이라는 미명 하에서 일본제국 잔유세력과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도발을 허하는 반민족적, 반인민적 전선”일 뿐이라고 경계했다.[91] 이관술은 중경 임시정부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92] 1945년 11월 19일 <자유신보> 중경 임정에 대한 이관술 담화
이관술은 12월 30일 미군정 사령관 하지를 만났다. 하지 중장이 각 정당 대표들을 군정청으로 불러 3상회의 결과뿐 아니라 신탁통치보다 앞서 만들 임시정부 구성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대담 결과는 이관술이 기자들 앞에서 직접 정리해 밝혔다.[93] 1945년 12월 31일 <자유신보> 하지 중장과 회견한 공산당 이관술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건국 활동에 앞장섰다. 조작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피해자[편집]이관술의 전성기는 8개월에 불과하였다. 이관술은 미군정이 주도해 조작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투옥되고 그 결과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당시 학살당하게 된다. 이관술은 1946년 7월 6일 체포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이관술을 수차례 고문했던 노덕술을 비롯해서 이구범, 최난수 등 친일경찰에게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검거되었다.
10월 17일 오전 10시, 서울지법 4호 법정에서 열린 이관술에 대한 첫 단독심리 현장은 매우 스산한 풍경이었다. 재판정을 취재한 기자들의 기사를 보면 방청석에 불과 10여 명이 앉아 있어 쓸쓸했다고 적고 있다. 반대로 출석한 이관술의 모습은 매우 침착했다고 전한다. 당시 <동아일보> 취재기자가 쓴 법정 스케치 기사를 보면 ‘이관술은 처음부터 온순한 태도를 유순한 언어로 침착하게 답변을 계속했다’고 적고 있다. 재판장이 보인 일방적인 자세에도 이관술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근거들을 조목조목 언급했다.[94] 1946년 10월 27일 <독립신보> 오히려 검사를 동정
1946년 11월 29일 <한성일보> 일장곡 일장가 / 이관술만은 태연자약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첫 피해자[편집]투옥 초반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서대문형무소의 경우 이관술은 반제동맹 사건과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모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기 때문에 세 번째 수감이었다. 이후 이관술이 항일 비밀결사를 만들던 중 광복을 맞았던 대전으로 옮겨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폐병을 앓던 이관술은 대전형무소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주사를 맞으며 지냈다.[96] 투옥 중인 1947년 반곡초등학교 건물을 신축할 때 542평(1791.74㎡)의 땅을 기부했다. 원래 대지주 집안 출신이었지만 1947년이면 해방 후 혼란상으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가던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을 기부한 것은 이관술이 원래 서울 동덕여고보 교사 출신으로 독립운동도 제자들이 독립운동 하는 걸 보고 시작했고 내내 제자들과 같이 활동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이관술은 동덕여고보 교사가 되기 전에도 유학 시절 방학 때마다 고향 울산에서 동기들과 함께 강습소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97] 이관술은 일제강점기에는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한 바 있다.[98] 한국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3일 이관술은 만 4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대전 산내에서 복역중이던 대전형무소 인근 골령골(현.대전시 낭월동)에서 불법적으로 학살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제9차 보고서 '2010년 상반기 보고서' 5권 428쪽
유언의 의미[편집]이관술의 유언은 "조선 민족 만세"이다. 1950년 이관술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 하나를 고르며 분단을 인정하는 유언을 남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이관술 연구자들은 이관술이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것을 보여주는 대답이라고 해석한다. 죽음을 눈 앞에 두었음에도 짧은 시간 내에 어느 한 체제 편을 들지 않을 수 있는 답을 찾아낸 것이다.[101] 유족의 고초와 복권 움직임[편집]이관술의 독립운동 때문에 일제강점기부터 고초를 겪던 이관술의 가족과 친척은 광복 후에는 이관술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학살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이관술은 1934년 제자였던 함흥 출신인 박선숙(朴善淑, 1909~?)과 혼인하였다.[102]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4명의 딸을, 두 번째 부인과는 1명의 딸을 두었다. 하지만 장녀의 남편은 좌익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장인이 이관술이라는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전쟁 당시 학살당했다. 이관술의 동생도 같은 이유로 학살당했다. 첫째 부인과 차녀, 3녀 및 둘째 부인과 그 딸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군사정권 시절 정보기관은 이관술의 유가족을 여러 차례 소환하며 조사하는 등 유가족들을 연좌제에 묶어놓고 괴롭혔다. 민주화 이후 그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비석이 울산의 이관술 친척 사유지에 세워졌는데 우익단체와 안기부의 협박으로 땅에 파묻어야 했고 땅에 파묻는 내내 우익단체는 망치로 비석을 훼손했다.[103]
이관술은 2014년 울산의 인물에 뽑혔는데 울산학센터, 울산발전연구원은 이관술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책자 발간 시 제외한다. 그런데 이관술은 대표적 국내파 독립운동가라 학계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독립운동가이다. 예를 들면 박찬승의 <한국독립운동사>와 같은 한국 독립운동을 한 권으로 압축한 개론서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중요한 독립운동가이다.[105][106] 울산학센터, 울산발전연구원이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대표적 국내파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이 사건은 유명해져서, 노덕술을 다루는 <대한민국 악인열전> 같은 책에서도 친일파 노덕술과 노덕술에게 수차례 고문당한 독립운동가 이관술을 대조하면서 울산발전연구원, 울산학센터가 2014년 한 이 행동을 언급한다.[107] 국가는 이관술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하지 않고 있지만 국가가 주도하여 편찬해서 무료제공하는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도 이관술의 분량이 상당하다.
이관술은 울산의 대표적인 미서훈 독립운동가이다.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한 울산 출신의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이 이승만 정권시절 3차례나 무공훈장을 받은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111] 유족은 2012년 국가 상대 소송을 제기해 2015년 승소했다.[112] 대한민국 대법원은 2015년 3월 31일 "수감 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부당하다"며 "국가는 유족에게 1억 6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113] 2015년 3월 27일 대법원은 "수감 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부당하다. 국가는 유족에게 1억 6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확정 판결을 내렸다. 이관술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한 국가배상 판결로 이관술은 약간의 명예회복을 했다. 이관술은 가장 유명한 피해자라 모든 골령골 학살 피해자 유족들이 주목했고 축하해 줬다.
2018년 송철호 울산광역시장이 광복절 기념사에서 이관술을 호명했다. 2019년 4월 24일 '이관술기념사업회'가 창립해 평생을 조국과 공익을 위해 헌신한 이관술의 독립유공자 서훈과 이관술 기념관을 추진하기로 했다. 미서훈 독립운동가 이관술의 서훈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학암 이관술 기념사업회는 일제 강점기하에 두 차례에 걸친 4년 6개월 감옥살이와 8년여의 수배생활, 또 모진 고문과 폭력을 이겨내면서 자신의 개인재산까지 바쳐 투쟁한 학암의 공적은 어떤 이유로도 외면돼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114] 기념사업회는 학암이 대한민국정부를 부정하거나 국가보안법을 어긴 사실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학암이 활동하던 해방 후는 8개월간 조선공산당은 국내 최대의 합법적인 정당이었고, 훗날 반공주의가 남한 이념이 되었지만 선생이 활동하던 시기까지는 정당하고 합법적이었다고 밝혔다.[115]
2019년 김종훈 국회의원은 이관술의 유공자 서훈이 필요하다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지정은커녕 빨갱이로 낙인 찍혀 후손들까지 피해를 입어왔다”라고 말했다.[117] 2020년 이선호 울산 울주군수가 ‘울주군 독립운동사 조사를 위한 연구용역’ 착수보고회에서 용역 수행사인 ㈜브랜드콘텐츠 측에 “진보든 보수든, 좌든 우든, 가리지 말고 독립운동사를 찾아내야 합니다.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되지만, 제대로 된 독립운동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꼭 필요합니다. 독립운동 이후의 역사는 다른 측면에서 평가가 이뤄지겠죠.”라고 말했다. 사실상 울주군 출신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이 용역 사업은 그동안 울주군지역에 전무하다시피 한 독립운동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기초적인 학술용역이다. 이에 ㈜브랜드콘텐츠의 박한용 박사는 “울주군 출신으로, 전국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친 중심적인 인물”이라며 “이를 배제하면 역사의 고리가 끊어질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118] 강사 출신 정치인 김찬휘는 이관술을 "1930년대부터 해방 때까지 가장 치열하게 선두에 서서 일제에 싸운 독립운동가"임에도 "조작된 정판사위폐사건으로 해방된 조국에서 또다시 야수적인 고문실에 갇혔다"라고 평했다. 이정호 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은 "학암 이관술의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이런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을 빨갱이로 조롱할 권리는 이제 소멸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며,[119][120]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전 울산매일신문 편집국장)은 "필자는 이관술 씨의 열병으로 시달렸던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이관술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었다. 울산 항토사회의 이관술 설화[편집]향토사회에 이관술 관련 설화가 전해져 내려와 향토사학자들의 연구대상이다. 이일환에 따르면 이관술은 "선바위가 있는 울산 입압마을 출신의 전설적 인물"이다.[121]
배성동 작가가 수집한 퇴역 빨치산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보급투쟁에 나가게 되면 반동 지주들을 건들기 마련인데 이관술 집이 있는 선바위마을은 건들지 않았어요. 물론 같이 간 동지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이관술 하면 물밑 50리를 가고 축지법으로 산을 넘는다는 영웅 아닙니까?"[122] 울산 사람들이 이관술을 기리는 명문을 대곡천 백보반석에 새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현재는 수몰된 상태이다.[123] 그리고 빗자루 설화가 있는데 정봉진 작가의 판화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대한민국 유공자 지정 논의[편집]이관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에 어떤 기여도 한 적 없다.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에 참여하지 않으면 독립운동가를 국가유공자로 지정해야 하기 때문에 이관술은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국가보훈처는 이관술의 유공자 심사를 보류한다는 결정서에 그 이유를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 이관술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당시 이관술은 정판사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전형무소로 이감돼 갇혀있던 때였다. 어떤 정치적 행위를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상징적으로 선출 명단에 이름이 올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관술 연구자들은 "보훈처 심의위원들도 이관술이 북한 정권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관술을 국가유공자로 서훈하게 된다면 당시 야당의 정부에 대한 공격이 거세졌을 것이란 게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라며 반발했다. 이관술은 유명한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 서훈하면 파장이 예상되는데 정판사 사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참여라고 보기 어려워 이를 이유로 들 수도 없기 때문에 이 선거를 이유로 회피한 것으로 보이며,[124] 똑같이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 있던 김철수의 경우 건국훈장을 받은 바 있다. 명단에는 이관술과 마찬가지로 감옥에 있었던 송언필도 있다. 이들은 출마 의사를 표명했을 가능성이 없다.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남한지역의 경우 지하에서 비밀리에 진행했기에 많은 한계가 있었으며, 선거인단은 출마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임의로 명단에 올리고 뽑았다. 1948년의 좌우대립 상황과 대한민국 형무소 면회 방식을 고려하면 이관술은 선거 출마 의사조차 표명했을 가능성이 없다. 그런데 국가보훈처는 이관술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어도 타인이 일방적으로 명단에 올렸다고 서훈을 주지 않겠다고 한다. 국가보훈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전혀 관계 없고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일방적으로 명단에 올려버렸으면 친북으로 간주하겠다고 한다. 자기 의지로 하지 않은 일까지 책임을 묻겠다고 한다. 이관술이 활동하던 시기 조선공산당은 일본공산당과 같은 합법정당이자 최대 정당이었다. 이관술이 광복 후 한 정치 활동은 당을 대표해서 입장을 발표하고 미군정 인사를 만나는 등의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활동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참여만 하지 않으면 독립운동가에게 서훈을 수여하도록 법이 개정되어 남로당원, 폭동 참여자, 남파간첩 혐의자 등에게 서훈을 수여한 바 있다. 반면 이관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적도 없고 남로당 간부였던 적도 없다. 이관술은 해방의 날까지 독립운동을 지속한 투사였으며 자신이 공산주의를 택한 이유는 민족해방 투쟁을 위해서였다고 수기에서 명시적으로 말했으며 월북을 거부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에 어떤 기여도 한 적 없고 최종 국적은 대한민국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는 납북 인사들에게 서훈을 주고 똑같이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 있던 김철수에게도 서훈을 줬음에도 이관술에게는 자신의 의지로 하지 않은 일에 책임을 묻는다. 이관술은 아무런 이적 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선거인단이 일방적으로 명단에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유공자 심사를 보류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입암리에는 이관술 생가가 있다. 그런데 이 생가는 입암마을이 공공주택지구 개발지역에 지정돼 완전히 철거될 위기에 놓여있다. 이관술은 향토사회에 전설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역사적 인물인데, 이관술이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해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125] 독립운동가 이관술을 체포하고 고문한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이 3차례나 무공훈장을 받은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126] 대중매체 및 예술작품[편집]
행사[편집]
참고자료[편집]
외부 링크[편집]
각주[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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