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초보 성향녀를 진단하다 2

 미혼여성과 초보주부를 위해 주부가 쓴 성(sex)이야기


   지은이: 이재경, 김은미
   출판사: 지성사
 

  코큰 남자와 입큰 여자의 허울벗기기


  머리말


  성(sex) 이제 솔직히 말하자


  여자가 성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을 의
미한다. 여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한다는 `수치심`, 공작부인처럼  우아하게 지켜
야 할 `품위`,  또 사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안락한 익명성의 울타리 등
등. 물론 버려야 할 것들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신기루 같은 굴레들이다. 남자
아이들이 치마를 들추는 짓궂은 장난을 걸어오면 부끄러움과 분노로 달아오르던
어린 시절부터 만들어지지 시작한 정체 없는 것들이다.
  “여자애는 일찍부터 남자애들과 어울리면 안 돼.”
  “여자는 옷을 바꾸어 입어도 잠자리는 바꾸는 것이 아니다.”
  “여자란 밖에서 말이 많고 웃음이 많으면 헤프게 보이는 법이야.”
  “여자란 고운 것만 보고 예쁘게 말하고 얌전하게 행동해야 돼.”
  “여자란...”
  여자라는 이름 앞에  붙여진 규범은 정말이지 너무나  많은 것이 나를 비롯한
모든 여자들의 현실이다.  때로는 질식할 것 같은 그렇지만 때로는  달콤한 울타
리로 다가서기도 하는  그 굴레들을 목청 높여  이야기해야 한다는 결심을 갖게
해준 건 고맙게도 남편을 통해서였다.
  아니 어쩌면 성이 함께 지고  가야 할 동반자인 `사랑` 때문이었다. 성의 의미
를 사랑으로 깨우쳐주고 그것이 어둡고 침침한 뒷골목의 그 무엇이 아니라 밝고
따뜻한 곳에서 당당히 이야기해야 하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이다.
  나 역시 대부분의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결혼 전에는 남자  경험이 없는 `
처녀`임을 통탄해하며(?) 실제로는 은근히 자랑하는 고단수의 꾀를  부리고, 듣게
되는 음담패설에는 박장대소하며 반가워하면서도 내 자신이 직접 음담패설과 같
은 지저분한 이야기는  입에 담지 않는 고고한 규수이고자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개방적인 현대여성이면서도 품위 있는 여성이 가져야 할 규범
이라고 믿었다.  성에 대해 열려있지만  결코 헤프거나 주책스런  여성으로 낙인
찍히지 않으려면 적어도 입을 다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다 그런 침묵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덫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런 덫에 걸려 상처를 입은 이들과  만나게 되었다. 나와 가깝게 생
활하는 친구들이나 직업 때문에 만나는 세상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많은 이야기
들이 괴로웠고 분노가 치밀었다. 성이라는 결코 내세울  수 없는 덫에 걸려 말도
못 하고 상처만 키워가는 그들에게  때로는 내 자신에게 무언가 자꾸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괴롭기도 했었다.
  남편은 그런 내  생각에 성실히 동조해주었다. 남편은 나에게 거의  유일한 대
화창구가 되어주었고 또 세상 밖으로  목소리를 실어 보낼 수 있는 용기를 주었
다. 아마도 `주부`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에서 성에 대해 그나
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여성들이란 바로 `아줌마`들인 것처럼, 또
성에 대해 체험할 수 있는 공식적인 특권자들인 것처럼 말이다.
  사실 성에 대한  이야기는 교과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 주변에는
먼지만 잔뜩 쓰고  앉은 성교과서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갈증이 났던  것은 자
신과 똑같이 성과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내  자신의 이야기였다.
누구에게든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성이야기들과 만남으
로써 성의 정체를 알고 무지로 인해 생길지도 모를 혹은 이미 겪고 있는 문제들
과 맞설 수 있고 보다  지혜롭게 사랑의 방정식을 풀어갈 수 있으리라는 욕심이
났다.
  때문에 이 책을 통해 소개되는 이야기들은 `나`라는  이름으로 이야기 하는 우
리 두 아줌마와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친구, 동료들의 솔직한 경험담들이다. 직
업적인 만남으로 도움을 받은 이야기도 포함되었다.  이런 작은 이야기들을 하는
데에도 큰 용기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우리사회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면서 이렇
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지성사 가족들께 감사를 드린다.
  1995년 3월 지은이

  함께하는 글
  생활 속의 성에 관심을...


 우리사회는 유독  성에 대한 터부가 강하다.  물론 이는 동양권  전체에 공통된
현상이긴 하지만, 같은  유교문화권 가운데서도 유달리 엄격함을  고집해온 우리
의 문화는  생활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성이라는 빼놓을 수 없는  현실을 애써
감추려 해온 게 사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고, 그것이 남자의 경우는 어느 정도
용인되긴 하지만, 이같은  사정은 남녀 모두에게 마찬가지이리라. 간혹 남자끼리
술자리에 음담패설을 쏟아내면서 깔깔거리긴 해도 돌아서면 그런 화제를 주도한
사람을 괜히 값싼 녀석으로 치부하는 풍토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당연히 정숙해야만  되는 것으로 감히 그런 얘기를 입 밖
에 꺼내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주부가 성에  관한 얘기들을 솔직하고도 공감대
있게 엮어낸 것은 놀라운 일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했을  생활 속의 성에 대한  관심을 담백하게 써 내려간
용기가 부럽고 더구나 이같은 아내의  모험(?)을 격려까지 해준 남편의 `깨인 사
고방식`은 정말 대단하다. 특히 이런 종류의 책이 자칫 빠지기 쉬운 말초적 관심
을 피해가면서도 설득력 있는  상식의 잣대로 얘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은 글쓴이
의 생활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정도라면 이미 결혼한 사람은 물론
결혼을 앞둔 모든 사람이 한번 볼 만하리라.


  1995년 3월
  케이블 티비 `캐치원` PD 김익상
  천사 같은 성, 동물 같은 성


  어릴 적 동생이 아버지에게  아기를 어디로 낳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국민
학교에 다니던 나는 마치 풍문처럼 아이가 여자의 성기를 통해 나온다는 이야기
를 들은 기억이 있어 어리둥절하던  차에 궁금해 하며 함께 아버지의 답변을 기
다렸다. 아버지는 말똥말똥  눈동자를 굴리며 쳐다보는 막내  동생에게 “배꼽으
로 나오지.”하며 웃어 보이셨다.  옆에 있던 나는 진지하게 “진짜 배꼽으로 나
와요?”하며 되물었다. 내심 `듣기로는 아니던데?` 하면서 말이다.
  아버지는 돌연한 내 질문에 저으기 당황해 하시며 허허 웃음만 웃으셨을 뿐이
다.
  내게 있어 성이란  늘 그렇게 다가왔다. 그저 풍문처럼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어지럽게 전해지다가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도 할  수 없이 그저  `그런 것`으로
간주되는 바로  그런 절차로 되풀이되었다.  어린 시절엔 아이가  도대체 어디서
만들어지고 어디로 나오는 건지, 조금 자란 후부터는 남녀가 만나 `잔다`는 것의
실체는 어떤 것인지 등등이 또래 친구들의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깃거리
로 구성되었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성의식  속에서의 남자란 때로는 무섭고 징그러운 대상
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데렐라의  왕자님 같은 신비한 존재였다.  고등학교에 진
학하고 남자 친구들이 생기면서도 그런  생각은 내 의식 밑바닥에 잠자는 듯 숨
어서 여전히 `성`에 관한 인상을  결정 지었다. 남자란 곧 성이나 섹스로 이어지
는 개념이었고 섹스와 이어진 남자는 늘 잠자는 사자와도 같은 위협적인 존재였
다.
  그러나 사랑과 성에  대한 유혹적인 손짓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여고생
이라는 당시로서는 순결하기  그지없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시절에도  `입맞춤을
하게 되면 어떤 느낌일까?`,  `만약 사랑하는 남자가 함께 자길 원한다면 어떻게
거절해야 우아할까?` 하는 식의 생각을 해보곤 했다.
  때로는 남자 친구들로부터 성적인 유혹을 받기도  했었다. 물론 성의식이 허약
하기만 했던 그 시절의 그런 유혹은 지독한 불쾌감만을 안겨주었지만 반드시 기
분이 나쁘기만한 일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분명했던 것은 `첫날밤`에 대한 지극히 미학적인  상상과 동시에 그 당
시 호기심에 몰래 성인처럼 행세하고  보았던 영화 `변강쇠`에서처럼 `우르릉 꽝
꽝` 뭐 대단하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이었다. 아울러 첫날밤의 순결은 장래에 결혼
할 지아비를 위해 꼭꼭  숨겨두어야 할 `재산목록 1호`이자 `선물`쯤이라는 이상
한 신념도 대단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십여 년 동안 탑을 쌓듯이 차곡차곡 다져진 그런
생각들은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바로 성이 가진 그  `
신기루`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결혼을 하지 않은  몸으로 사랑이라는 거창한 명제
를 달고 지금의 남편과 첫 경험을 나누었다.  사실 여고 시절 성적으로 문란하다
는 문제 학생들을 바로 짝으로  두고 살았던 나는 혼전의 성경험에 대해 지독할
정도로 결벽을 떨었던 터라 지금 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알 수 없
을 정도다. 사랑으로 인해  겪게 될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돈키호테 같은 연
정이 컸기 때문이라는 점만은 확실했다.
  비장한(?) 각오로 마음을 다지고 다진 후에도  남편과의 성적 접촉은 아무래도
자연스레 이루어지진  못했다. 아마 남편  역시 갈등하고 주저하는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나는 참으로 부산했다. 불안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 인
생이 끝나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 때문에 혼자 웃기도 했고 춘향이 같은
순정을 바칠 준비가  되었다는 비장한 생각에 눈물까지 찔끔 났다.  어떻게 해야
마치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 배우처럼 촌스럽지 않고 당당하게 아름다울 수 있을
까 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짧은  순간에 참으로 많은 생각이 스
쳐 지나갔다.
  ...
  그렇게 신기루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그런데 참 싱거웠다. 인생이 끝나지도 않았고 무언가  내가 바칠 것도 남지 않
았으며 별로  우아하지도 못했다. 사랑을  위해 그토록 비장했던  다짐과 불안은
그 속으로 들어갈 때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었던  것이다. 다만 남아 있었던 것은
더욱더 인간적으로 내 옆에 다가서 있던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성에 대한 의식은 늘 깨지면서 성숙되는  듯하다. 적어도 성교육이라는 혜택과
남녀공학이라는 환경을 모르고 자란 세대에게 있어서는 예외가 없다.
  삼신할머니가 아기의 궁둥이를 `딱`쳐서 세상으로  내보낸다거나 내가 갖게 될
풍만한 젓가슴이 캘린더 속의  모델과 같지 않고 새가슴이었다는 사실을 성장과
함께 확인하면서 이미 겪어온 것이다.
  무지로 인한 두려움에는  신비함이 곁들여지기 마련일까?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는 공포감과 함께 신비한 매력을 함께 던져주듯이 성 역시 어머니와 선생님
의 오랜 훈계  속에서 반비례하는 매력을 던져주곤 했다. 아마도  그것은 자녀나
제자가 성에 눈뜨길 원치 않으면서도 성적으로 부족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하시던 `잔소리`속에서 필연적으로 빚어지는 결과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두렵고 신비롭기만  하던 성과 만나고 또한 가깝게(?) 된  후부터는 성
에 대한 막연한 생각으로 인해 가져야 했던 부담감과 환상이 그저 추억거리로만
반추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성에 대한 왜곡된 환상이나  두려움은 사실
지나치게 소모적일 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여러 가지 병폐를 만들어주는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환경이 가부장적 권위가 우선시되고  있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는 유독 여성에게 억압의 원천 역할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물론 요즈음에는 여성들이 그저 순결 이데올로기에 빠져 성적으로 무지하기만
한 세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세상은 많이 변해서 성에  있어서 소극적
이고 움츠려 있는 여성들보다는  성에 있어서도 당당하고 자유로운 여성들이 각
광(?)받는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는 요즘 `무릎 까진 여자`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한다. `무릎 까진 여자`
란 섹스를 할  때 상위 체위를 즐기는 여성들을  빗댄 말로 성에 있어서 그만큼
대담해지고 당당해진  여성들의 성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결국  요즘 여성들은
성적 경험이 풍부해서 예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렇다고 해서 성에 대
한 왜곡된 환상이나  신비감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더욱 부풀려지
고 묘하게 뒤틀려져 있을  뿐이다. 새롭게 등장한 성의 왜곡은 `변강쇠론`이나  `
옹녀론`으로 축약될 수 있다. 이른바 자기 과시의 시대에 걸맞도록 성의 환상 역
시 윤색되었다고나 할까?
  사실 이런 성에 대한 환상은 처녀 총각만  가지는 것도 아니다. 이미 성생활을
하고 있는 기혼자들 중에도 성에 대한 환상은  여지없이 존재한다. 성에 대한 환
상이나 터무니없는 신비감, 혹은  두려움의 주요한 원인이 바로 `무지`에서 비롯
되기 때문이다.
  사회가 발전해도 사람들은  성에 대해 무지하다. 나 역시 그랬던  것처럼 성은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어서 굳이  연구하거나 알아볼 필요까진  없다거나, 성을
거론하는 것은 지성인으로서  품위에 손상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
기가 성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그냥 `몸으로 깨우쳐  얻으면 되는`것이라는
통설 때문에 많은  왜곡이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진위를  알고 싶어하
지만 체면상 그럴 순 없고 단지 풍문처럼 들리는 음담패설이나 영화를 교과서로
삼을 뿐이다.
  그런데도 한편으로 사람들은 성이 너무나 중요한  무엇임을 알고 있다. 공식적
으로는 멀리  두어야 할 `요강`이나 `화장실`처럼  천시하지만 몇 사람만 모이면
은근히 가장 중요한  화제가 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심지어  직장에서 까탈스
러운 상사를 두고 부하 직원들이 그의 성적 취향을 빗대가며 음담패설을 일삼는
일들도 따지고 보면 성이 지배하는 비공식적인 범위의 지대한 넓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성은 그렇게 비공식적으로  인간 생활의 `책`노릇을 해서는 안된다. 성
이란 태초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인간들에게 있어 생활의 일부였다.  모든 생활
이 성에서부터 나왔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기  위해서 군집을 이루고 가정을
이루며, 먹기 위해 사냥하고 추위를 가리기 위해  옷을 만들어 입으며 모여 삶으
로써 사랑을  키워갔듯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활`이었을  뿐이다. 성이 있어야
할 위치는 바로 `생활 속`인 것이다.
  성이 비공식적이고 은밀한  가운데 치열함만 더해져갈수록 왜곡은 가속화되고
진실이나 생활과는 멀어진다. 가끔씩 성경험이 많은  중년의 남자나 자칭 카사노
바를 주장하는 젊은 남자들 그리고 음담패설을 좋아하는 여자들의 논리를 잘 추
적해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속설이나 단편적인 의학지
식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주장은 대부분 상황이나
조건을 거의 무시한 자신의 성경험으로 그럴 듯하게 치장하지만 그것도 역시 지
극히 주관적이거나 진위를 의심케 하는 무용담 같은 이야기들뿐이다.
  성에 대한 무지나 그릇된 인식으로 인한 막연한 신비감이나 왜곡은 자칫 삶에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것은 타인에  의해 덧씌워
지기도 하며  때로는 자신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현재의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 순결하지 못했다는 죄의식  때문에 고민하다 끝내 자살했다는 어느 주부나
성적으로 열등하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성불구자가 되어버린  어느 젊은 남성의
이야기는 그저 주간지나 일간지 사회면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의외로 많
은 수의 사람들이 왜곡된 성의식과 잘못된 환상으로 인해 시달리면서도 정작 자
신은 알지 못하거나 혹은 알면서도  확인할 길 없이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
문이다.
  94년 모 일간지에서 20대 남자 대학생과 근로자를 대상으로 성의식에 대해 조
사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  남자들의 대부분이 20살을 전후해서 성경험을 하며
상대자의 가장 많은  수가 윤락녀라고 한다. 여자들과는 아마도 아주  다른 결과
일 것이다. 나는 이  결과를 접하면서 그들이 접하게 된 성이  어떤 모습을 띠고
있으며 얼마나 많이 왜곡된지에 대해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남자 대학
생 M.T 장소가 모  윤락가니, 군대 가기 전 동정신고가 어떤  것이니 하는 이야
기는 오래 전부터 나온 것이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처음 성을 접하는 실태에 대
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은 너무 아름답게  윤색되어서도 곤란하지만 지나치게 비하되거나 터부시되
어서도 안 된다.  인간이 천사가 아닌 동시에  동물도 아닌 이치와 같다. 그러나
세상에는 누구나 똑같이 성을 경험해도 천사같이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동물
같이 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의 차이는 얼마나 성에 대해 바로  알고 있으며 건
강하게 즐기고 있느냐에 있다. `사랑`이라는 진부한  주제도 중요한 몫이다. 천사
같은 성과 동물 같은 성, 선택은 언제나 자신이 해야 하는 법이다.

  오르가슴의 미학

  성에 눈뜨기 시작한 여자가 비로소  갖기 시작하는 관심사 중 하나가 바로 오
르가슴이다. 성에 접하기 이전에는 주로 처녀막으로  상징되는 순결이 주요한 관
심거리겠지만 일단 성에 관해 어느 정도 신비감과 막연한 두려움이 걷히고 나면
오르가슴의 구체적인 실체에 다가서게 된다.
  마치 보다 성숙된 사랑의 언어를  배우고 난 후 그 언어로 만들어낼 문학작품
에 관심을  집중시키듯이 오르가슴이란 섹스가 도달해야  할 목표처럼 암암리에
여자들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간다. 여성지에 실린 기사를 보면 결혼한  이후 오
르가슴을 한 번도 느끼지 못해 불만이라는 투고  기사가 나오고, 자신 역시 비슷
한 것 같아서 왠지  없던 고민이 생겨나게 된다. 또 어떤  책에 의하면 오르가슴
이란 본디 남자들만 느낄 수  있는 성적 쾌락이라고 하니 여자란 역시 성적으로
남자보다 열등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대학에 다닐 무렵 친구들과 M.T를 갔을 때의  일이다. 집 밖에서 밤을 보낸다
는 그 즐거움 때문에 친구들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수다를 떨다가 문득
친구 하나가 은밀하게(?) 묻는다.
  “너희 오르가슴이란 말 들어봤니?”
  쑥스럽게 대답하는 친구들.  숙맥같이 생각되던 친구들 모두  이미 오르가슴이
란 게 뭔지 알고  있다. 어디서 어떤 경로로 전해 들었는지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미 성숙한 여성으로  성장한 그녀들이 오르가슴에 대해 알지 못한다
면 사실 그것이 더욱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알긴 알되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가 더 문제다.
  “오르가슴이란게 섹스를  하면 느끼는 건데,  그걸 알게 되니까  일단 남자랑
잔 여자들이 섹스 없인 못살게 된대.”
  “오르가슴을 못  느끼면 결국 남자와  헤어질 수밖에 없다더라.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란다.”
  “들은 이야기 갖고는 안 되겠다. 너희 중에 누구 오르가슴 느껴본 사람?”
  까르르 웃는  친구들. 어쩌면 경험한 친구들이  진짜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는 나 역시 그 궁금함이  쑥스럽고 멋쩍어서 그저 박장대소 하는 것으로 대
신해버렸지만 오르가슴이란 성이 주는 가장 신비한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컴컴
한 극장 안에서 야한 영화를 볼 때 듣기 거북할 정도로 거칠던 여배우의 호흡처
럼 끈적거리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너무 두근거려서 아프기까지
한 가슴언저리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곤 한창 결혼이 붐을 이루던 시기가 지나면서,  혹은 남자와 한 번쯤의 성
경험을 하면서 정작 여자들의 오르가슴에 대한  궁금증은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가라앉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밀해지고  치열해진다. 나는
오르가슴을 왜 못 느끼지?  어떤 여자들은 섹스를 하다가도 울거나 기절까지 한
다는데, 그이도 그다지 허약하진 않은 것 같은데... 누가 이야기한 대로 오르가슴
이란 애 둘은 낳아야 알  수 있는 건가? 혹시 전에 경험했던 그것이 오르가슴이
란 걸까? 그렇다면 너무 시시한데...
  어디에든 확인할 길이  없으니 그저 여성지만 뒤적거린다.  오르가슴이란 것이
무엇일까? 섹스를 하면 다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걸까? 마치 오르가슴을 느
끼기 위해 섹스를  하는 것처럼 궁금증은 증폭된다. 가끔은 이런  궁금증과 협소
한 지식이 불러일으키는 오해로 사랑하는 사람과 혹은 남편과 괜한 성적 트러블
까지 생기게  된다. 성에 대해 교육을  받아도 섹스는 교육받을 수  없는 것처럼
섹스를 알게 되어도 곧 오르가슴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
전체가 쉬쉬하다 보니  우리의 성 상식이 그만큼  얇고 편협해져서 그저 떠도는
이야기에도 솔깃 솔깃 귀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오르가슴. 오르가슴이란 열정이  끊어오른다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오르간`에
서 유래된 말이다. 그것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섹스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성감이자 기쁨을 의미한다. 느낌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람
마다 다르다고 하며,  여성과 남성 모두 느낀다고 하지만 일부  연구자들은 남성
만이 혹은 여성만이  느낄 수 있다고 보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학자
들이 인정하듯이 혹은 경험을 통해 증명되듯이 오르가슴이란 남녀 공히 느낄 수
있는 섹스의 극치감이다.
  다만 느끼는 감도나 시기 등 그 내용은  다르다. 대체로 남성은 사정을 하면서
느끼고 여성은 완만히 쾌감이  증가하다가 일정 수위에 오르면 다발적으로 느끼
게 된다고 한다.  또한 여성의 오르가슴은 대체로 골반 근육과  클리토리스의 수
축현상을 수반하게 된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만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것이  바로 오
르가슴이다. 유명한  문학작품들만 보아도  오르가슴을 표현하는 문구들이  정말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아득한 4차원의 세계로 순간 이동을  한 것 같
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끝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생각건대 `말로는 형언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오르가슴의 형이하학적  근원은 `성감대의  자극`에서 비롯된다. 클리토리스나
자궁을 포함한 신체의 각  부위를 접촉하고 자극함으로써 쾌감을 높여가며 도달
하는 것이다. 때문에 기본적으로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남녀 서로 신체
의 성감대를 찾아  끊임없이 자극하는 구체적 행위가 전제된다. 그것은  꼭 삽입
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각각의 특성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때로는 입맞춤만으로도 오르가슴을 느낀다는 이들도 있다.
  사람들이 종종 범하기 쉬운  오류는 오르가슴이 입맞춤이나 삽입과 같은 구체
적인 접촉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서 체격 조건이나
섹스 테크닉만이  과포장되는 사례가 많다.  물론 체격이나 섹스  테크닉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섹스  테크닉은 쾌감을 높이고 사랑을 발전시키는 데  필수 불가
결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빼놓기 쉬운  것이 바로 `사랑`이란 이름의 친밀감이다. 심리적
으로는 화합하는 마음이요,  흔히 표현되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오르가슴은 서
로 친밀감과 능동적으로 화합하려는 의지, 그리고  섹스등 복잡다단한 요소가 충
족되어 만들어지는 성적  기쁨이다. 어느 것 하나도 빠지면 이루어질  수 없으므
로 오르가슴은 그리 `쉬운`것이 아니다. 동시에 오르가슴은 매 섹스마다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상대자에  대한 사람의 감정에 따라 다르고, 상대자의 테크닉
에 따라서도 다르며 본인의  기분에 따라 느낄 수도 못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오르가슴이 없다고 해서 섹스가 즐겁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커다란 오
해가 아닐 수 없다. 꼭 디저트가 나와야만  식사가 즐거운 것은 아니듯이 오르가
슴이란 섹스의 질에 따른 부산물이지 섹스의  종착역이 아니다. 어떤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오르가슴을 지나치게 염두에  두고 섹스를 하게 되면 오히려 오르가슴
에 도달하기 어렵다고 충고한다. 서로를 사랑하고  즐거움을 나누는 과정중에 자
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평생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했어도 성생활은 즐겁고
행복했다고 이야기한다. 섹스란 오르가슴을 느끼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을 확인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부언하면서,  교과서 같은 이야긴지는 모르지만
너무나 당연하고 지혜로운  대처가 아닐 수 없다. 오르가슴에 대한  과도한 환상
이 따르고 동시에 과도한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은 바로 오르가슴의 이러한 성
격을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거기에다 성감이란  끊임없이 개발되는
것이고 보면 오르가슴도 역시 그 연장선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오르가슴이
란 그 연장선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녀에게 신이  베푼 일종의 은밀한 `보너스`라
고 할 수 있다.
  오르가슴에 집착할수록 섹스와  사랑은 황폐해지는 법이다. 마치  선물만을 기
다리는 이의 양심과 염치가 망가져가듯이 말이다.  또한 생활의 오르가슴을 느끼
며 사는 이들에게 섹스의 오르가슴이란 그렇게 신비롭고 갈증 나는 무엇이 아니
다. 영화 속에서 하룻밤 몇 번이고 사랑을  나누는 신혼부부를 보며 가졌던 환상
이 깨어져 본 사람이라면 오르가슴  역시 이미 만들어져 있을 환상에 대해 어느
정도 장막을 걷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르가슴이란 더
할 수 없이 즐거운  것이기도 하다. 보너스도 안 받는 것보다는  받는 것이 즐거
운 법이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랑하는  이의 보너스를 위해 노력하는 사
랑의 마음일 것이다.

<작은 사랑의 노래>에 실린 사랑의 의미

  언제인가 동네 대중 목욕탕에서였다. 여느 때처럼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와 욕
조를 채우며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로 시끄럽던 목욕탕에서 나는 물을 사용하기
좋은 장소를 골라 자리를 잡았다.
  머리 속에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한참 샤워를 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다섯 살
쯤 되었을까? 바가지에 물을 퍼담고 물총을 쏘며 위험하다는 엄마의 잔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목욕탕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이에 열중이던 남자  아이였다. 자
주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그 아이 역시 아빠를 따라가지 못하고 엄마 손에 이
끌려 금남의 집에 들어온 불청객이라면 불청객이었다.
  장난이 좀 시들해졌는지 엄마의 야단이 어느새 그친 후 나와 가까운 한구석에
그 아이가 서 있었다. 나는 왜 저 아이가  저리 조용해졌나 싶어 삐쭉이 서 있는
그 아이를 무심코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그 아이는 자신의  성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놀라운  것은 그 어린 남자
아이의 성기가 발기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어린 남자 아이도  발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충격적이다 싶을 정도로 놀란 나는 얼른  목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버렸다.
어린 아이도 성적  욕구를 느끼고 성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일까? 기분이 찜찜할
정도로 꼬리를 무는 의문 때문에 외출한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궁금증
을 풀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프로이드가  유아 성욕을 이야기했다지만 그
건 왠지 인간이 가지는 순수한 영역이 침해당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싱겁게도  남편으로부터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대답만을 들었을
뿐이다. 과연 인간은  언제부터 성욕을 느끼는 것이며 성적인 존재가  되는 것일
까?
  아이를 키우는 주부들은 가끔씩  아이의 이와 같은 성적인 행동을 목격하고는
당황하게 된다고 한다.  성을 가르쳐야 할 시기는 청소년기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의외로  성에 관해 빨리 눈뜨는  자녀를 발견하곤 한다는 것이
다.
  사실 나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쾌감을 배우
게 되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성적 체험과 이어지게 된다. 인간은  어쩌면 본디부
터 성적인 존재인지도  모를 일이다. 갓난아기 시절의 일들을 기억하는  이는 드
물지만 유년기의 기억으로도 고추 달린 남자 아이들과는 거리를 두며 놀았던 일
들만 해도 이것과 연관이  있다. 때로는 그저 별다른 이유 없이  한 남자 아이에
게 따뜻한 연정이 피어나기도 한다.
  어릴 적에 적어도 한번 이상은 `의사놀이` 혹은 `병원놀이`라는 것을 해보았을
것이다. 이 놀이는 어린 아이들이 신체에 대해  갖는 호기심이 표현되는 가장 대
표적인 사례이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발달과정의  한부분이다. 자세히 놀이의
발전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그저 무대가 병원이지만  점차 내과, 외과, 치과, 산부
인과 등으로  세분화된다. 여자 아이나 남자  아이를 구분할 줄 아는  모습도 이
놀이에서 발견하게 된다.
  요즘엔 비디오 문화가 일반화되면서  아이들이 신체 변화나 성에 대해 접하는
계기가 더욱  앞당겨지고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해였지만 지금은...”으로 시작하는 공익성 광고만  보아도 잘 알 수 있
다. 부모가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두  남매가 영화 베드신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는 기사로 인해 한동안 온 사회가 떠들썩하기도 했었다.
  아이는 완전한 성인이  되기 위해 성장하는 예비성인이다.  예비성인이기 때문
에 인간이 가진 모든 호기심과 욕구를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 성장이란 그 본
능을 조절하고 표현하며 때론 승화시키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사랑의 감정
이나 성적 욕구도 마찬가지로 그 방법을 배우는 것일 뿐이다.
  인간이  사랑과 섹스에  대해  가지는 욕구를  일컬어  심리학에서는  `리비도
(libido)`라 부른다. 쾌감이라고도 표현한다. 태어난 직후 혼돈된 흥분기를 지나면
리비도가 입  주변에 집중되어 아이는  무엇이든 빨기를 좋아한다.  엄마의 젖을
빨면서 배고픔과 포만감을 동시에  해결하던 아이가 젖을 뗀 후에도 손가락이든
자기 옷이든 무조건 손에 잡히면 입으로 가져가는 이유는 빠는 행위로부터 쾌감
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리비도가 항문으로  집중되고 아이들은 배설을 훈육받으면서 배설과
관계된 쾌감을 배운다. 때론 배설하면서 쾌감을  얻고 배설을 스스로 억제함으로
써 즐거워지기도 한다.
  어린 아이의 욕구란 사실 식욕과 배설욕으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곧 먹고 배설하는 욕구 외에도 별개의 욕구를  함께 느끼게 된다. 이것이 성욕으
로 발전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아성욕이란 성인이  된 후에 갖는 성욕과는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성인이 갖는  성욕이란 구체적인 성행위를 포함하는  보다 미분화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이들의 욕구는 보다 근원적이다. 그래서 찬반논란이  많은 리
비도 학설도 리비도의  개념을 성적 욕구라기보다는 보다 폭넓은 삶의  본능, 에
로스의 본능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입과 항문에 집중되던 리비도가  성기에 집중되는 시기에는 아이들이 주로 이
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는  곧바로 잠복기로 들어가게 된다. 이 기간이 유아
의 성욕을 보다 발전된 형태로 발현시키는 시기와의 교량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성적인 호기심이나  에로스의 감정이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시기는 역시
청소년기이다.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과 사랑을 표현하는  시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요, 성적인 존재로서 다시 태어나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요즘엔 그 시기도 차츰 빨라진다고도 한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여학생반,  남학생반 혹은 여학교,  남학교를 엄격히
구분하던 시대에 학교를  다녀서 성에 대해 접촉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부채질한 감도 없지 않다.
  사실 당시 하얀 칼라의  교복을 입고 다니는 여중생이 성경험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은 아무도 없었지만  결코 작지만은 않은 숫자가 이미 성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 형태야 성추행이나 강간 등의  형태를 띠기도 하지만 남자 친구
와의 구체적인 성  접촉을 가진 아이들도 있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물론 더욱
많았다. 그때 이미 호기심에 찬 성접촉이라기보다는  성숙한 연애를 즐기는 아이
들도 있었으니까.
  “얘 누구는 벌써 남자랑 잔 적이 있다더라!”
  “어머 어떡하니? 걔 앞으로 어떻게 시집 가니?”
  이런 대화도 이미 격세지감이  느껴질 말이긴 하지만 결코 성이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엘  가면 연애를 통해 즐길 수  있는 존재는 이미 아니었던 것이
다. 물론 워낙 학교생활과 공부에 대한 통제가  심한 것이 우리의 가정 문화이고
보면 그것은 참으로 큰 위험과 두려움을 동반하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리 멀리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신체는 이미  이성에 대해 반응하는 성숙된 여자
요, 남자가 되어버린 때였던 것이다.
  중학교에 다닐 무렵 한때  일본 작가가 쓴 <작은 사랑의 노래>라는 삼류소설
이 유행처럼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아마  열다섯쯤으로 기억되는 주인공 두 소
년 소녀가 서로  사랑을 느끼면서 성적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남에게는
그저 부모의 보호를  한창 받고 있는 어린애들에  지나지 않았지만 서로는 깊고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다. 그러다  여자 아이가 임신을 하게 된다. 학교에서도 가
정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가족들의  따뜻한 도움으로
아이를 출산하고 가정을 꾸미게 된다.
  당시로서는 이 소설의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아무리 다른 나라
이야기라 해도 어린 여자 아이가  임신을 하고 사랑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우리
현실로서는 너무나 납득하기 어렵고 한편으로는 `부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수
업시간에도 책상 밑으로 넘겨가면서 읽혀지던 그 소설을 통해 아마도 많은 소녀
들이 대리충족의 즐거움을 맛보았으리라.
  사랑과 섹스에 대한 감정과 욕구는  스물네 살 대학을 졸업한 후 결혼 상대자
를 만났을 때 갑자기 생겨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오랜 기간을 통해 이미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에로스의 감정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신체와 마음이 준비
되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사랑의 완성이 신체적 성숙과 마음의  준비로만 이루
어지는 것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사랑의 감정이란  정말이지 큐피드의 장난과 같
아서 객관적으로 준비가  됐건 준비가 되지 않았건 불쑥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
감정이 억압된 사회에서는 그래서 이를 금지된 장난이라 부른다.
  금지된 장난, 사회나 부모는 이 금지된 장난에는 아주 심한 벌을 주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가끔 스물이 넘도록, 서른이 넘도록 흔한  금지된 장난 한 번 못 해
본 채 스스로의 벽에 꽁꽁 싸여 앞으로  닥칠 험난한 파도(?)를 준비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있다. 또는 금지된 장난도 너무 몰래  하다 보니 도대체 사랑이 무엇인
지 알지 못한 채 얼치기 경험만으로 파도타기를 하려는 이들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에  대해, 남자에 대해 안다는 것은 결혼한  여자들만의 특권
이다. 물론 결혼 자체가  사랑과 성에 대한 실체를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유일한
출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성과 사랑이 금지된 장난이 되다 보니 억울한 쪽은 대부분 여성이라는
것이 탈이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
써야 가능한 것이 현실이고 보면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젠 금지된  장난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려야  할 때다. 사랑을  배우게 하는
가르침이란 역시 사랑일 수밖에 없듯이  사랑을 통해 사랑을 배울 수 있어야 하
는 것이다.  이제 목욕탕에서 그 소년을  만나면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어야겠다.
부디 아름답고 건강한 사랑을 배울 수 있기를 바라면서.

무릎 까진 여자 - 달라지고 있는 여성들

  요즘 여자들이 변하고 있다. 누구나 느끼겠지만  요즘 여자들은 옛날의 여성들
과는 많은 면에서 다르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모두가 급변하고 있다.
각종 매스컴은 달라지고 있는 여성들에 대해  보도하기 바쁘고, 기업들은 변화하
고 있는 요즘 여자들을 상대로 한 상품을 개발해내기에 분주하다.
  왜곡되긴 했지만 이같은 변화의  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
가 `미시 선풍`이다. 모 백화점의  광고에서 비롯된 이 말은 이제 국어사전 개정
판에라도 오를 듯하다. `미시`는  달라지고 있는 여성들의 변화에 포인트를 맞춰
성공시킨 하나의 상품이다.
  미시의 이미지는  `자기 주장이 있고 자신을  가꿀 줄 아는`  주부라는 것으로
압축된다. 때문에 주부이면서도  미혼의 여성과 다름없이 아름답고  열심히 일하
며 육아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감각과 정보로  해내는 것이 바로 `미시`다.
결혼이 곧 아름다움이나 직장에서의  은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도 미시를 하
나의 `세태`로까지 격상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다.
  TV 광고마다 요즘 유행하는 옷차림에 배낭을  메고 아이를 안은 `신주부`즉 `
미시`가 등장한다. 광고에  등장한 여성들은 어느새 거리에도 넘쳐 흐른다.  이들
은 자신과 아이,  그리고 집안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꾸미기  위한 소품들
을 쇼핑하기에 바쁘다.  자기 주장과 자기 가꾸기는 아마도 백화점이나  각종 쇼
핑가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 듯 미시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주로 상품이
있는 곳이다. 쇼핑가에서만이  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기업 입장
에서 보자면 광고의 성공을 의미하겠지만 주부 입장에서 보자면 그리 반가운 일
이 아니다. 소비의 대상으로 철저하게 전략되는  대가치고는 미시의 모습은 너무
나 어릿광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미시 선풍이 상업전략에 놀아난 세태라고 혀를 차기는 해도 기
존 주부들의 이미지를 많이 변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자기표현이 과감해지고 정
보에 민감해진 주부들에게 드디어 약간이나마 `용기`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변화는 주부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주부의 변화를 부추
기는 근원은 전체 여성들이 변화하고 있다는 거대한 흐름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
각된다. 특히 `신세대`라고 불리는 세대의 변화는  혁명적일 정도다. 미시와는 비
견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된 여성들, 이른바  신세대 여성들의 변화는 마치 한민
족의 여성사 속에서 돌연변이를 형성하고 있는  느낌이다. 아마도 그것은 전통적
인 여성관으로부터 탈출한 첫 세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세대 여성들의 가장  큰 변화는 우선 전통적  여성관이나 성 관념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가장 으뜸가는 미덕이었던 순종의  개념은 이제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주장하는 것이  더 아름다운
여성의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여성의 삶이란 궁극적으로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현모양처가 되는  것으로 완성된다는 의식도 점차 희박해지고 있
다. 이에 따라 순결 이데올로기나 정조론 역시 낡은 `잔소리`가 되어가도 있다.
  신세대 여성들의 대표적인 성의식 변화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역시 연애와 결
혼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신세대 여성들은 `사랑과 결혼은
별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랑과 결혼을 따로따로 하겠다는 의미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랑을 꼭 결혼이라는 전제하에서 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이다.
  동시에 혼전순결에 대한 의식도 많이 달라졌다.  사랑하면 혹은 그들 표현대로
`마음이 통하면` 성적인 관계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은 이미 보편화된 추세라고
볼 수 있다. 지난 93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만 18세에서부터 34세의 미혼남녀
6천여 명을 조사한  순결의식 조사에서 바로 이같은  추세를 그대로 읽을 수 있
다. 꼭 지켜야  한다고 대답한 응답자가 남자의 경우는  40.7퍼센트, 여자의 경우
는 그보다 조금 많은 46퍼센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미 절반 이상의 수가 순
결이나 정조를 목숨처럼 여기던 전통적인 성관계에서는 한 걸음 물러나 있는 것
이다.
  그런가 하면 대학가와  공단 주변에 동거족이 늘어나는  풍속도 주목할만하다.
아직은 전체에 비한다면 아주 적은  수라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만만찮은 수치
들이 확인되고 있다.  역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93년 조사자료를  보면 남성의
8.1퍼센트, 여성의 2.9퍼센트가  혼전 동거 경험이 있거나 동거중인  것으로 나타
났다. 동거가 사실상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는 이들을  잠정적으로 감안한다면
실제 수치는 이 결과를 웃돌 것이 분명하다.
  예전에 우리의 어머니들은 남편이  속을 태울 때면 `살아보고 결혼을 할걸  잘
못했다`는 푸념을 심심치  않게 하곤 했었다. 살아보고  겪어보기 전에는 누구도
진짜 배우자의 모습을 속속들이  알기 어렵다는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살
아본 후 결혼할 수는 없는 현실의 반어적인 표현이었다.
  그러나 요즘 여성들은  다르다. 예전의 여성들이 점집에서  사주궁합을 보듯이
이제는 실제 속궁합을 맞추어보고  있는 것이다. 혹 `살아보고` 결혼하지 않더라
고 트러블이 많아지면  이혼도 스스럼없이 불사한다. 이혼사례를  분석해보면 결
혼 후 파경에  이르는 기간이 세계적으로 가장  짧은 나라가 한국이라는 사실도
이를 반증해준다. 이혼의 평균연령은 남성은 37세,  여성이 33세라고 한다. 이 연
령도 점자 낮아지는 추세다. 요즘엔 신혼 파경도  부쩍 증가하고 있다 어쩌면 부
부 삶의 고비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여자들은 더 이상 이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도 신세대 문화의 파급효과일까?
  가치관의 변화에 따른 결혼의 파경 조기화 현상은 여성들의 경제적 활동 능력
이 그만큼 향상되어  남성에게 의존성을 어느 정도  벗어버린 것은 물론 자식에
대한 `굴레`에 더 이상 속박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전의 여
성들이 이혼을 주저하는  큰 이유로 경제적 무력감과  아이 양육의 문제를 꼽았
다. 그런데 이 두 과제가 예전 같은 위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요즘엔 이혼을 할 때 자녀 양육을 서로에게 떠넘기려 애쓰는 신풍경이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70~80년대 최루성 영화의  단골 소개로 남편이 바람을 피
워 파경를 맞거나 첩살이 끝에 버림을 받은 여성들이 울며불며 아이만은 뺏어가
지 말라고 애원하는  풍경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대부분 부권  우선인 법
률이나 사회인식에 밀려 `부당하게` 아이를  강탈당하는 피해자는 바로 여성이었
던 것이다.
  그런데 서울시 가정상담소의 통계만 보더라도 이혼 여성들의 60퍼센트 이상이
아이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일수록 더욱 두드러진다고 한다. 아이
란 남편과 가정을 포함해 여성  자신을 억압하는 족쇄이며 이젠 그 족쇄에서 탈
출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다.  한편으론 착잡하면서도 마음 한편은  후련하게 느
껴지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성이 달라지고 있다고  해서 여성이 온전히 성 이데올로기에서 자유
로워진 것은 결코  아니다. 여성들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사
랑을 즐기며 경제전선으로 뛰어들고  있다고 해서 여성들이 처한 현실구조 자체
가 뒤바뀐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작  변화되어야 할 세상의 절반인 남
성들이 대부분 그대로 머물러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에다 여성들의 변화
가 반드시 바람직하다고만은 볼 수 없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다.
  때문에 지금  사회는 오히려 이중의  규범, 이중의 세태가  공존하는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다.  각종 성 규범과 결혼에 구애받지 않고  사랑하며 일하다가도
정작 결혼에 당면해서는 예의  전통적인 여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여성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결혼에 있어서 여성의  순결과 과거는 치명적인 꼬리
표로 남아 있다. 방법은 가면을 쓰는 일 밖에 없다. 처녀막 재생수술이라는 해괴
한 의료행위가 등장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그러고 보면 여성들의 변화란  성 구조 자체의 변혁이라기보다는 억압된 현실
에 대응하는 여성들이 `영악`해지고  있다는 정도로밖에는 보지 않는다. 물론 그
렇게만 보기에는 너무나  흐름이 거대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성에 관한  일대 변
혁을 예고하는 서곡쯤일 수도 있겠다.
  바람직하든 그렇지 않든  새로운 문화가 가장 먼저 선을 보인다는,  그래서 신
세대의 거리로  불린다는 압구정동에는 보다 개발되고  과감한 몸짓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을 오늘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이미 어제의 그들이 아니고 날마
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얼굴들이다.
  나는 압구정동엘 가면 나 역시 젊은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표류하는 젊음
과 혼돈된 성을 느낀다. 그것은  비단 부자인 부모 덕에 돈으로 치장한 `야타족`
이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미 시작된  여성들의 변화가 어딘지 모르게 부
자연스럽고 과장된 치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소 모자라고 어설프다 하더라도 그 변화가  `의미 있는` 움직임이 되
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는 변화라 할지라도 말이다.
성의 자유를 꿈꾸는 그 혼란한 몸짓이 결국 새로운 성의 시대를 여는 건강한 흐
름으로 모아지길 바라는 마음이 어찌 나 하나뿐이라...

 한국 남자들의 콤플렉스

  `야, 그 녀석은 배꼽을 넘는대.`
  `그럼 넌 안 넘어?`
  `...아~안 넘긴 임마. 나야 당연히 넘지. 너는 ?`
  `내가 기형이냐? 그렇게 크게?`
  `...`
  남편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난 한참을  웃었다. 웃으면서도 한편으론 측은
한 생각이 들어 서글펐다.  우리 시대의 남성들은 정말 불쌍하다. 자신을 부풀리
고 과장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늘 `크고 강하고 능력  있
는` 존재이기를 요구받으니  말이다. 마치 둥실 둥실하게  배를 부풀리고 억지로
그려 넣은 미소를 달고 다니는 삐에로의 어눌한 재주를 보는 느낌이다.
  사실 그런 사례는  남의 이야기나 우스갯소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가
까운 내 가정에도  존재하고 있다. 나의 친정 부모님들은 우리  형제들을 키우면
서 특별히 아들과 딸을 차별하진 않았다.  모든 부모님들이 그렇겠지만 아들이든
딸이든 지극히 사랑해주셨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유독  남동생에 대해서만
큼은 냉담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엄히 키우지 않았나 싶다. 그때야  딸이라는 달
콤한 특권을 누리느라 별다르게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건대 아마도 아
들은 어떤 시련에도 강한  남자로 성장하게끔 만들고 싶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
한다.
  추운 겨울날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를  하느라 새까맣게 등이 터진 손으로 돌아
온 남동생에게 감기  들 정도로 밖에서 벌을 주시거나, 여간해서는  겨울 내복을
내어주시지 않았던 점, 벌을 주셔도 딸들에겐  마루청소나 설거지 등을 시키면서
남동생에겐 화장실 청소나  마당 청소를 시키던 일,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
딸들에겐 야단을 치지 않아도  남동생에게만큼은 매를 드시거나 엄히 꾸중을 하
시던 일 등.  외아들이니 더욱 애지중지할 것이 보편적인 통념이지만  오히려 우
리 부모님의 아들 사랑법은 조금 의외였다. 그  때문에 아래위로 여자 형제를 두
니 사내자식 기가 죽는다고 할머니께서 혀를 차실 정도로 남동생이 가끔은 풀이
죽어 다녔던 것도 기억에 새롭다.
  남자들은 대부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처럼 지나칠 정도로 험하게 자
라도록 배려(?)를 받는다.  늘 입버릇처럼 `사내자식이 그  정도 갖고...`, `남자란
모름지기...` 라며 나무람을 듣거나  독려를 받는 것은 남자라면 누구든 경험해본
일일 것이다.  남자란 언제든 어떤  상황에서든 사소한 어려움에는  개의치 않을
정도로 강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묵시적인 사고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다.
  항상 자신이  여성을 존중하는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나의 남편의 경우도
예외라고는 볼 수  없다. 가사일을 분담하고 집안 대소사에 여성의  결정권을 존
중하면서도 그는 남자로서의  `가장의식`이 너무 투철한 나머지 종종  나를 놀라
게 만든다. 어려움이 닥칠 때 아내는 흔들릴  수 있지만 자신만은 꿋꿋해야 한다
고 생각하는 것도 거의 강박관념에  가까울 때가 있다. 또한 가끔씩은 `여자들은
저래서 안 돼`라든가 TV나 영화들을 통해 유니섹스풍의  남자들을 보면서 `사내
망신은 저 녀석이 다 시킨다.`는 말을 하고는 옆에서 흘겨보는 내 눈초리에 겸연
쩍어하곤 한다. 남편 역시  모든 남자들처럼 아주 오랫동안 `집안의 기둥`이자  `
강한 남자` 이데올로기로 성장해온 탓이리라.
  남자 친구들을  만나면 그것은 더욱더  선명하게 확인된다. 늘  자신의 아내를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사랑을 과시하면서도 그들에게  있어 `여자`란
늘 열등하므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 같다.  아내들 역시 평소에는 감동할 만
큼 역동적이고 악착스럽게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남편의 울타리 안에서는 여지없
이 한 마리 작은 파랑새가 되어버린다. 마치 서로의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려
고 노력하는 듯 남편은 크고  튼튼한 울타리로 아내는 그 안에서 노니는 파랑새
로 돌아간다. 울타리안에 갇힌 아내의 처지도  그렇지만 일평생 견고한 울타리라
는 이름으로 파수꾼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어야 하는 남자들의 현실이 아직은 달
콤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이내  술이라도 한 잔 걸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직 젊
은 나이인 그들은 앞으로 꾸려가야 할 가정과 `견뎌내야 할` 직장이 부담스럽고,
`바구니에서 물  빠지듯` 빠져나간다는 정력을 붙잡기위해  보신탕이나 추어탕을
비롯한 각종 정력제를 계획한다. 이것이 그들 울타리의 밑바닥이다.
  성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나 심지어는 외모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항상 생존경쟁과  같은  치열함으로  강해져야 하는 남자들.  강해져야만 한다고
교육받고 있는 남자들. 이들 역시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억압된 현실을 살아가는
세상의 절반이다.
  남자들을 억압하는 현실.  요즘엔 이렇게 스트레스와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남
자들도 목소리를 높여  자신들의 `해방`을 부르짖고 있다.  더 이상 아버지와 남
편, 그리고 늘 강해야만  인정받는 남성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이다. 여
성들도 동정하며 동의한다.
  그런데 또 다른  일부 여성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혹시 이것은  못난 남자들
의 넋두리이거나  변명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남자들이 괴로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여성에게 괴로움을 주는  가해자가 바로 남성이 아닌가? 이것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시기하는  못난 마음에서 만들어진 변명의 출발은 아닐까? 그렇
다면 세칭 잘 나가는  남자들에겐 이런 어릿광대같은 콤플렉스와 아픔이 존재하
지 않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 걸맞을 사례가  하나 있다. 글을 쓰는 일 때문에  알게 된 신경정
신과 전문의를 통해 접한 이야기다. 사십대를  바라보는 그는 일하는 의사치고는
젊은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늘 인자함과 푸근함이 흠씬한 미소를 잃지 않아서 만
날 때마다 마치 고등학교 은사를 뵙는 듯한  느낌을 주곤 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그런 푸근함 탓인지 그를 찾아  삶의 아픔을 호소하는 이들이 무척이나 많은 편
이다.
  그의 환자나 내담자들 중 적지 않은 수는 남자들이다. 말 그대로 `고민하는 남
자들`이다. 고민을 호소하는 남자들의 수도 세월이 흐를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한
다. 정신과  상담의 문턱이 예전보다  낮아진 까닭도 있겠지만  그만큼 남자들이
가지는 고민도 다양해지고 깊어지고 있는 추세라고도 했다.
  `요즘 남자들, 나도 요즘  남자지만 참 고민이 많아요. 세상 살기가 그만큼  어
렵다는 것인지... 내가 얼마전에 한국 남자의  일곱 가지 콤플렉스라는 책을 소개
한 기사를 읽었는데  그게 그럴 듯하더군요. 아주 오랫동안 남자들이  자의든 타
의든 가정과 사회로부터  교육받아 온 여러 가지 `콤플렉스`들은  남자들의 삶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대장부 콤플렉스, 온달 콤플렉스, 성  콤플렉스, 지식 콤플렉스, 외모 콤플렉스,
장남 콤플렉스, 만능인 콤플렉스... 이런 콤플렉스들이 요즘 한국남자들의 발목을
조이는 삶의 굴레들이다.  물론 의학적인 개념은 아니지만 그의 말처럼  이런 콤
플렉스들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남자들이 겪는 아픔의 여러 가지 얼굴인 것이
다.
  `사람들은 의사라고 하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인생을 순탄하게
살아서 남부러울 것 없는 상류층쯤으로 생각한다지요? 사실 몸이건 마음이건 아
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들 중에도 마찬가지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의대 동창 중에 가난한 집에서  어렵게 의학공부를 시켜주어서 그 어
려움 때문에  아주 열심히 공부했고 또  유능한 의사가 된 친구가  하나 있어요.
참 검소하고 털털한 친구였습니다. 가난한 집안이지만  똑똑한 장남을 잘 나간다
는 의사 만들고 돈 많은 며느리 보아서 집안 번성케 하는 바람만 의지하며 살아
온 부모 때문에  그 친구 항상 스트레스가 많았지요. 부모님  바람대로 아버지가
중소기업을 한다는 여자를 만나 결혼해서 처가 도움으로 개업도 했는데 이 친구
가 얼마전부터 자꾸 엉망이 되어 가는 거예요.  하루는 술에 떡이 되어서 찾아왔
는데 언제인지  모르게 성생활이 원만치  못하답니다. 원인은 발기부전이었어요.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더군요.  그저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와 달리  참 많
은 생각을 하게 만들더군요.`
  나는 사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의사들도 보통 남자들과 똑같은 고민에 시달
리고 있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의사는  신랑감으로 수위를
달리는 이들이다. 신랑감이란 것은 통념적으로 최고의  남성을 가리는 가장 대중
적인 시험장이지 않는가?  물론 단세포적으로 의사가 최고의 남성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런가  하면 학교에 다닐때에도 의대 가던 친구들은  주로 고민도
수학적으로 계산할 정도로  똑똑하고 깔끔하고 치밀한 녀석들이어서 의사들이란
다 그런 존재인가  했었다. 그런데 그들도 역시 그저 평범한  `남자`였다. 남자들
이 가지는 콤플렉스란 어디든 성역이 없었던 것이다.
  TV 모 CF는 사무실에 앉아 피로와 싸우며 야근하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아내
를 더 걱정한다는 한  중년 가장의 모습을 그린 내용이 등장한다.  이 시대 사회
를 움직여가는 주역들이라고 할 수 있는 중년 남자들을 상징화한 단막 드라마이
다. 스트레스성 각종  질병으로 인한 40대 사망률 최고라는 통계적  수치를 굳이
들지 않아도 오늘날의 남자들이 힘겨워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읽을 수 있
다.
  남자들을 괴롭히는 것들. 때로는 불안케 하고  답답하게 만들며 그러나 때로는
그로 인해  웃고 즐거워지기도 하는.  그렇게 마치 조울증을  앓듯이 병들어가게
만드는 것들. 그것은 과연 누가 만들어내고 누구에  의해 강요되어지는 걸까? 여
자들일까? 어머니이자 딸들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일까?
  요즘 남자들의 사고방식을 정리한  모 주간지 기사에 의하면 대부분의 남자들
은 자신이 성적으로 우수하지 못해 갈등하고  있으며, 아울러 경제적으로도 능력
이 신통치 않아 열등의식을 느낄 때가 많다고  한다. 또한 가능하다면 아내나 연
인의 도움으로 자신의 능력을 보충하거나 어려움  없이 출세하고 싶으며,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아내가  자신보다 유능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
다. 참으로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그런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남성들의 현실도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변강쇠`처럼 성적으로 강함은 물론  `프리티 우먼`의 리처드 기어처럼 경제적
으로나 일에 있어서나  유능한 존재이어야 하고, `전원일기`의 `김  회장`처럼 가
장으로서의 권위가 있어야 하며, 때로는 색소폰을  멋지게 부는 차인표처럼 매력
적이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 이것은 모든  남자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지만 반대
로 그들의 목을 조이는 커다란 굴레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여자들은 이런 굴레를  가능한 한 많이 가진 남자들을 더 좋아한
다. 크게 출세하진  않아도 사회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요, 가정에는 따뜻하고 듬직한 가장이어야 하고  아내에겐 늘 매력적인 남
성으로 존재해야 한다. 남자들이 `애인 같은 아내`를 좋아하듯이  여자들도 `애인
같은 남편`을 바라는 것이 요즘의  풍속인 것처럼. 그러니 이상적인 남성상이 되
기 위해 올라가야 할 남자들의 산은 얼마나 험난한가?
  나는 성이나 삶의  문제가 곧 여성만의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  성이 신분과
국경과 노소를 초월한 공통의 문제인  것처럼 남자 역시 똑같이 아픔을 앓고 있
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남성들이 `남자다워야 한다`는 미명 아래 병들
어가고 여성들에게는 군림하고자 하는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아픈 현실의
동지`라는 연대적인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첨예하게 문제에  부딪히는 성 문제 역시 그렇다. 침실에서의  문제 역시
변강쇠가 되려는 남편과 남편이  변강쇠와 같은 비정상적인 존재가 되길 바라는
아내 모두 그런 굴레와 짐을  벗어버릴 때만이 가장 아름답고 달콤한 밤을 보낼
수 있고, 또한 삶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강간을 꿈꾸는 여자들(?)

  밀려드는 수입 영화들의 등쌀에 설 곳이 없다는 한국 영화의 자존심 세우기에
일조한다는 의미에서 아주 의욕적으로 한국 영화를  보러간 일이 있었다. 주제도
차별에 맞서는 신세대 여성을 그린 영화라기에 더욱 구미가 당겨 선정한 영화였
다. `가슴 달린 남자` 라는 다소 성적이면서도 코믹하고 음미하기에 따라서는 상
당히 정치적인(?) 제목을 가진 영화였는데 의외로  지극히 여성을 비하하는 통념
이 곳곳에 배어 있어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영화의 내용은 능력과 자질이 충분한  한 여사원이 그저 복사와 차 심부름 외
에는 할 일을 주지 않는
회사를 박차고 나와 남자로  변장하고 위조해 직장에 입사하면서 벌어지는 에피
소드와 성공담을 그리고 있다. 실제로는 여자인 주인공 `가슴 달린 남자`가 자신
이 여사원으로 근무하던 기억을  되살려 여직원들에겐 늘 친절하면서도 능력 있
는 사원으로서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한다. 사내의  여직원들은 모두 그를 동경하
고 좋아한다. 문제의 장면은  여기에서 돌출된다. 한 여직원이 그 앞을 지나가는
주인공을 보며 그에게(그녀에게) 강간당하는 환상에 빠지는 것이다.
  강간을 꿈꾸는 여자들이 강간당하길 꿈꾼다고 믿고  있다. 스스로도 알거나 혹
은 불특정의 여자를  상대로 강간하는 상상을 하거나  꿈을 꾸기도 한다는 것이
다.
  강간에 대한 성적 공상은  실제로 많은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자연스
러운 증상이라고도 한다.  헌트(Hunt)라는 심리학자에 의하면 남자들의  경우 수
음을 할  때, 그리고 여자들의 경우는  수음이나 성관계 중에 성적  공상이 많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때 남자들은 여자에 비해  낯선 이와의 성관계나 집단혼,
강간을 행하는 내용을 갖게 되고, 여자들은  알고 있는 누군가로부터 강간당하는
공상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 다소 다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강제적인 성관계를 꿈꾼다고 해서 그 강제의
의미가 모욕적이거나 동물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즉 강제라는 의미는
지극히 심리적인 것으로 수치감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매우 자기고양적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쾌감을 증폭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의미에서다.
  그래서 성적 공상으로서의 강간이  심리적 테두리 안에서 존재할 때만이 의미
가 있다는 것은  강간의 공상내용 연구결과에서 더 자명해진다. 사실상  성적 공
상의 주제 중 70~80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은 역시 남녀 공히 사랑하는 대상과의
관계라는 점이다.  낯설거나 사랑하는 대상이  아닌 평소에 알고  있던 이더라도
대부분 강간하는 대상이나 강간당하는 대상은 자신이 그런 행위를 하는 데에 일
종의 보상이 따르는 존재라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즉 평소에 금전이나 친분관계에 있어서도 청산해야  할 빚이 있다거나, 집안끼
리 원수가 질 정도로 사이가 나빠져서 내심 그 집안이 손해를 볼 일이 생기거나
엎드려 사과할 일이  생기길 바라던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
국 심리적인 보상체계 속에서 꿈이나 공상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설명해준다.
  더욱 재미있는 보고는 최근  미국에서 조사된 것으로 가정이 안정되고 학력이
나 사회적 인정도가  높은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꿈을 잘 꾼다는  사실이다. 아마
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  부족함이 있거나 지나치게 수동적인 여성들이 아니
라는 점에서  적잖이 놀랄 것이다. 자신이  겪지 못한 미지의 경험을  꿈 속에서
즐기는 것 자체가 건강함의 반증인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러한  심리적 경험이나 사실들이 잘못 이해되어 위험스
럽게 변질된 논리나  폭력과 만날 때가 있다. 여자는 강간당하길  은근히 바란다
거나 강간하는 것에서 남성다움을 느낀다는 식의 통념이 바로 그것이다.
  요즘 컴퓨터 통신이 활발해지면서  대화의 방으로 마련된 곳에서의 내용 중에
서도 이런 통념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천리안에 제공된 `성에 관한 남성들의 고
정관념 12가지`라는  자료에는 남성들의 왜곡된 `섹스관`을  엿볼 수 있다.  주로
봉건적인 여성관을 밑바닥에 둔 항목으로 대표적인 것에는 `여자의  싫다는 말은
좋다는 의미이다`라든가,  `접촉의 최종 목표는 섹스다`,  `느낌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 `섹스의 주역은  페니스다` 등이 있다. 그리고  섹스를 여성에게 주는
일종의 `호혜`쯤으로 생각하고  있고 여성은 선천적으로 강하고 힘있는  것에 끌
리게 되어 있으며 고통도 즐기는 것이 여성의 본성인 듯 생각하고 있다는 점 등
은 다수의 남성들이 참으로 심각하게 왜곡된 성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한다.
  여성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막연히 힘과 섹스를  결합시켜 남성
다움의 이미지를 연상함으로써 강간까지  달콤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하는 여
성은 예외 없이 강간을 경험하지 않은 여성들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차이는 매
우 커다란 차이다.  여성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강간의 실제를 깨달을  수 있지만
남성은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그 실제를 깨닫지 못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은 이렇듯 막연하고도 달콤한  강간이 상상 속에 존재하지만 남성은 실제화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런 통념이 유발하는 많은 성범죄들이  우리 주변에는 존재한다. 그것
은 비단 길 가던 처녀를 겁탈하는 폭력배들의 전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도 아
니다. (그러나 실제로  강간범의 대부분은 생면부지가 아닌  면식범이다). 강간은
부부의 침실에서도 일어난다.  일방적으로 남편이 원할 땐 아내는 항상  응할 의
무가 있다는 보이지 않는 규범도 강간의 다른 모습이다.
  폭력 남편으로부터 시달리는 여성들의 쉼터를  마련해주고 있는 `여성의 전화`
상담사례 중 35퍼센트는  아내 강간이 차지한다. 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폭행 다
음에는 많은 경우  성관계가 정해진 과정이라고 한다. 놀라운 것은  남편의 대부
분이 폭행 후의 강제적인 섹스가 화해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거부의 의사를 보
이더라도 맞아서 화가 좀 나서  그러려니 하면서 결국 섹스로 마음이 풀릴 것이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힘있는 섹스를 아내가 원하고 즐길  것이라 생
각하기도 한다고 하니...
  남성들이 여성은 잠재적으로 강간을 바라고 있다고 굳게 믿는 그 믿음의 출처
가 도대체  무엇인지 나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혹자는 이런  현상이 남성과
여성이 가진  본성 때문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한다. 남성은  본디 사디즘적
기질을 갖고 있고  여성은 마조히즘적 기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변태적인 포
르노성 영화 중에는 이런  관념에 기초해서 얼토당토 않은 스토리를 만들어내기
도 한다.
  그러나 조금 더 사디즘과 마조히즘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잘못된 근
거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디즘이란 1704년  프랑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사
드 후작의 정신이상적 호색담에서 유래된 말이다.  가학적인 섹스를 즐기고 수간
까지 일삼았던 사드 후작의 행적이 회자되던 와중에 정착된 이상행동 용어인 셈
이다. 그러나 여성의  본성처럼 종종 회자되는 마조히즘 역시 사드  후작과 같은
오스트리아의 한 남자에게서 유래됐다. 루드비히 판  자허 마조호라는 긴 이름의
귀족에겐 연상의 여인이자  맹렬여성이었던 부인이 있었는데, 그의  성적 취향은
주로 이성에게 학대를 받음으로써 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사디즘과 마조히즘적 행동은  사랑에 따르는 이상행동이다. 심리학에서
의 사람은 누구나 사디즘적  기질과 마조히즘적 기질이 공존한다고 하지만 그것
이 행동으로 나타나면  이미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강간을  모두 정
신이상자가 저지른다고 단정  지어서도 곤란하다. 강간은 소수를  제외하곤 지극
히 평범해보이는 이들이 저지르고 있다. 강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사회적 요인
을 원인으로 갖고 있다는 것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상식적으로는 정신이상적 행
동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반에 너무나 일상화되고 만연돼 있는 여성에 대한 그
릇된 인식이 `이상`을 `정상`처럼 만들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첩첩산중이라고 한 것은  앞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여자들 중 상당수가
실제로 강간의 본질은 모른 채 환상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남성과
여성 모두가 왜곡된 성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이것 역시 한마디로 여성을  천시하고 비하하는 사회풍조와 여성을 성적 대상
으로 전락시키는 사회구조에 까닭이 있다. 가끔  남성도 강간을 당한다거나 성폭
력에 노출된다는 궤변을 늘어놓는  이들까지 있고 보면 왜곡되어도 한참 왜곡되
어 있다.
  언젠가 한국성폭력상당소에 취재차  갔다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누구도 강간당하길 바라지 않는다`라고. 그렇다. 잠시라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자
명한 일이다. 강간은 섹스가 아니라 섹스를  빙자한 폭력일 뿐이다. 정신적인 이
상자가 아니라면 누가 폭력에 노출되길 바라겠는가? 강간당하길 꿈꾼다는 그 위
험한 환상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 인생의 항로마저 바뀌는 사례들을 굳이 열거하
지 않아도  너무나 당연하다.
  이에 대해 우스갯소릴  남편이 하는 말이 있다.  `아름다운 변태`라는 말도 못
들어 봤느냐는. 그래도 허용되는 범주는 있지 않을까라는. 물론 꿈으로서의 강간
이 자기고양의 의미인 것처럼 `부부 고양`을 도울수 있는 `그 어떤 것`으로 존재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강간이라 부르지 말  것을 당부하
고자 한다.  강간을 꿈꾸고 있다는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폭력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으므로. 또한 강간을 꿈꾸는 것으로 인해  왜곡되는 성의식 역시 절대로 용
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강간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입큰 여자가 그것도 크다(?)

  요즘엔 글을 쓰는  프리랜서, 자유기고가들도 많아져서 내게도  동료들이 부쩍
늘어난 편이다.  동병상련이라던가? 때로는 오랜  친구보다도 더 친근한  교류를
나누게 되는 그들과의 만남이  빈번해진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르겠
다. 사실 대화가 잘되거나 성향이 비슷하면 곧잘  어울리는 게 이곳 바닥의 생리
이기도 하다.
  그런 연유로 만난 한 동료가 있었다. 그녀는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매서인
지 동그란 얼굴과 까무잡잡한 피부가 강하게 두드러져 보이는  `화려하지 않음에
도` 야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이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그녀는 유난히 남성들로부터  관심을 끌었고 노골적인
대시도 많이 받는 편이어서 비슷한 또래의 동료나  `싱글`로 있는 선배들의 시기
어린 따가운 눈총을 받곤 했다.  그때만 해도 나 역시 `싱글`이었기 때문에 남성
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후배를 그렇게 좋게만 볼 수는  없었다. 같은 여
성이면서 그녀처럼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내심 인정할 수 없는 못난 마음 때문
이었는지 `헤프게 보였으니까 남자들이 만만하게  본 것뿐`이라고 치부하려고 했
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남자 못지않게 넓은 마음을  가지려고 하는(?)` 나조차도 그녀의 행동이 결코
예쁘게 보이지 않았는데 다른  동료와 선배들에게 즉흥적인 성격의 그녀가 곱게
보였을 리가 만무했다. 성격  탓인지 아니면  남성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던
탓인지 실수를 해도 그녀는 너그럽게 용서받지 못해 항상 괴로워했고 특별히 가
깝게 사귀는 친구도 없어 늘 외로워하곤 했다.
  그런 그녀가 안쓰러운 탓도 있었지만 더 솔직히는 남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
고 있는 그녀가  가진 매력의 정체를 알고 싶어  그녀와의 미팅을 가진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런  호기심으로 그녀를 만나면 `동그란 얼굴과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그저 그렇지만  웃을 때마다 눈웃음 치는  눈매와 오물거리며 야무진 예쁜
입`이 평범하지 않은 인상이라는 이미지만 받을 뿐이었다.
  그녀와 헤어져 돌아오는 내내 그녀의 이미지는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후에 주
변 동료들에게 그  생각을 털어놓고서야 `이상한 그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그런 인상을 두고  흔히 `섹시하다`고 표현한다는 것이었
다. 그렇다고 당사자에게 실제로 그런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뭇남성들로
부터 유난히 많은 야유를 받은 것은 그녀에게  풍기는 특유의 `섹시함` 때문이었
을 것이다.
  항간에는 `코가 크면 그것도 클 것이다`라든가 `검은 사람이 정력이 좋아 그것
도 강하다`는 등의  그럴 듯한 속설로부터 시작된 `남성의 성기는  커야 하고 여
성의 질 입구는 좁아야 오르가슴을 극대화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진리처럼 떠돌
고 있다. 거기다 그 속설에 관한 억측까지 마구 나돌아 `코가 큰 남성을 보게 되
면 그것도 클 것`이라고  생각하듯 후배 동료의 경우도 까무잡잡한 피부에  작고
예쁜 입을 가진  경우 `그것`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은  연상효과를 일으키게 했
던 것이다.
  이렇듯 속설은 성에 대한 지식이 충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마치 진실인 것
처럼 받아들여져 웃지 못할 일을 자초하기도 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벌이게도 한
다.
  그런데 이런 속설에 대해  해부학을 전공한 의사들 가운데 일부는 신체기관이
생성될 때 신체의 들어가고 나오는 그 구조의 정도가 서로간에 비슷할 것이라는
추측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그 속설이 사실인 것처럼 인식된다는 것
이다. 밖으로 돌출된 코와  마찬가지로 돌출된 남성 성기, 그리고 안으로 함몰된
입과 여성 성기가 서로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바로 그런 속설을 만
들어놓았을 것이라는 게 의학계의 분석인 것이다.  의학계에서의 제법 그럴 듯한
이야기들과 성에 관련된 여러  속설들이 나돌게 되자 영구불변의 의학법칙인 양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어 그 억측이 더욱 사실인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비뇨기과에 성기 단소의  고민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코가 한결같
이 작지만은 않다는 것이 `코와 그것의 관계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여성의 성기와 입의  유관설도 역시 근거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근거
없는 속설 탓인지 입이  큰 여자, 더군다나 큰 입을 벌리고  신명나게 웃는 여자
는 왠지 점잖지  못하고 주책스럽다는 이미지를 쉬이  벗어 버리지 못하게 하는
것도 그 속설이 작용한 탓일 것이다.
  외국에도 이와 비슷한 속설이  있는데 그들은 우리처럼 여성의 입으로 그것의
사이즈를 점치는 것이아니라 발 사이즈에 견주어  판단하는 풍습이 있다. 신데렐
라 동화도 바로 여성의 성기와 발의 유관설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어릴 때는 부모에게, 어른이 된 뒤에는  애인이나 남편에게 의지하려는 여성이
동화 속의 신데렐라처럼 자기의 인생을 뒤바꿔 주는 왕자를 만나 부귀영화를 누
리게 된다고 해서  모둔 것을 갖춘 남성을  꿈꾸는 여성을 놓고 흔히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가졌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마치 중국 여인에게 전족을 채웠던 이유가 단지 작은 발만을 탐해서가 아니라
전족한 발을 끌고 걸을 때마다 몸을 기우뚱거려 괄약근 운동이 자연스럽게 이루
어져 `명기`가 된다는 것처럼 신데렐라의 동화가 성기와  발에 얽힌 속설의 유래
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니 이미 볼장 다  본 아줌마의 주책스
러움이 될지 모르지만 어쨋거나  신데렐라 동화를 외설스럽게 해석할 수도 있다
는 자체가 나에겐 흥미 있는 일이었다.
  원래 알려진  그 동화에 속설을  얹어서 해석하면 아주  재미있어진다. 본래의
동화 내용대로 `요정의  도움으로 왕궁에서 왕자와 함께 춤을  춘다`는 대목까지
는 별 차이가 없지만 `신데렐라를  찾는` 부분에 가게 되면 해석이 좀 달라진다.
신데렐라가 떨어뜨린 작고 예쁜 구두를 보고 그녀의 그것도 작을 것이라는 기대
로 결국은 전국을 뒤지면서까지  작은 구두의 주인을 찾는다는 부분이 바로  `성
기와 발의 유관설의 유래`가 되는 것이다.
  신데렐라를 찾기보다는 작고 예쁜 구두에 맞는 발을 가진 사람이 더 중요하니
까 신데렐라가 아닌,  예쁜 유리 구두에 맞는 사람이면 무조건  왕자와의 결혼이
성사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작고 예쁜 발을 소유한 여성은  멋진 왕
자를 만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되는 것으로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대한 해석
도 달라질 일이다.
  성형외과와 산부인과는 작고 예쁜  발을 원하는 여성들과 작은 그것을 만들기
위한 여성들로 장사진을 이루게 될 테고...  그런데 애석하게도 여성의 질 크기는
앞쪽에서 잴 때의 길이가 7센티미터, 뒤쪽에서 잴 때의 길이가 8.5센티미터가 평
균치인 것으로 나타나  여성의 질은 사다리꼴로 생겨  재는 부위에 따라 길이가
다르다고 한다. 보통보다 큰 입을 소유한  여성의 질도 평균치보다 2센티미터 이
상 길이가 긴 여성은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남성의 평균 페니스 사이즈는 11센티미터 정도로 입이 큰 여성이든 그
렇지 않은 여성이든 누구나  질의 길이가 길어야 9센티미터 정도에 불과해 남성
의 페니스보다 2센티미터  정도가 모자르다. 또한 남성의 최대  길이 19센티미터
정도와 견줄 만한  여성의 최대기록은 찾아볼수가 없다고  하니 여성의 입과 그
것, 그리고 발에 얽힌 이야기는 그야말로 속설에 불과한 셈이다.
  남성들로부터 갈채를 받고 있는  후배 동료의 또 다른 매력의 정체였던  `검은
사람은 정력도 강하다`는  것 역시 코와 입에  담긴 속설만큼 그 계통의  정답인
양 자리잡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코와 입에 얽힌 속설만큼 근거 없기는 마찬
가지다.
  피부과 의사들에 의하면 피부의  색깔은 장기간 태양 광선에 노출되어 생기는
멜라닌 색소의 다과에 따라 흑과 백 그리고 황색이 결정될  뿐이지 `인종별 섹스
능력의 우열을 가리게 하는 요소는 못 된다`는 것이다.
  태양광선이 작열하는  열대지방에서는 강한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작용으로 멜라닌 색소가 많이 침잠해 피부빛이  검은 흑인이 된 것이고, 강
한 태양으로 식물이 빨리 성장하는 것처럼 사람도 빨리 성장해서 성적으로도 조
숙해져 보통보다 일찍 결혼하고 아이도 일찍 낳을 뿐이라는 것이다.
  추운 지방인 한대 사람은 추운  기후 탓에 털이 유난히 많고 열대지방 사람들
과는 달리 초경도 늦고 배란도 더디다고 한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러시아의 가
장 추운 지역에 사는 주민들 중에는 백 살이 넘도록 장수하는 것은 예사고 고령
에도 섹스를 즐긴다는  뉴스가 외신에 오르내릴 정도다. 그런 이치에서  보면 적
당한 태양열로 황인종이 된  우리들은 더운 기후로 식물이 급속도로 성장하듯이
성적으로도 일찍 성숙해서 빨리 아이를 낳고 일찍 폐경을 맞는 열대지방이나 초
경이 늦고 폐경도  늦어 오래도록 성생활을 즐기는  한대 지방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성숙해지고 적당한 나이에 결혼을 해 아이를
낳으며 적당한 시기에 폐경이 되는 기후 조건에 살고 있으니 그 자체가 복이 됨
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검은 피부와 입과 성기의 유관설이 그저 재미로 만들어져 진실인 양 행세했다
면 후배  동료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작고  야무진 입은 단지 매력  포인트일 뿐,
작고 예쁘다는 것과 검다는 것만으로 그녀의 정력도 셀 것이라는 추측은 그야말
로 속설에  불과했다. 오히려 그 속설  탓으로 남성들이 그녀를 대할  때 그녀의
그것을 연상하고 `이상야릇한 분위기`를 즐겼을  것을 생각하니 그녀에게 안쓰러
운 마음까지 들어 공연히 그녀에게 가졌던 질투 어린 마음은 사라지고 말았다.

  98%의 여성, 98%의 남성

  고등학교 시절, 여자라는 것  때문에 하고 싶은 게 많아도 뜻대로  할 수가 없
을 때 엄마한테 `왜 날 여자로 낳았어!` 라는 소리를 곧잘 하곤  했다. 마치 남자
로 태어나지 못해 공부도 못 하고 남자로 태어나지 못해 운동도 못 하는 것처럼
애꿎은 엄마에게 화풀이를 해댄 것이다.
  그 시절 읽었던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남성이 되고 싶어하던 여자 아이가
들판을 달리다 보니까  어느새 남자로 변해 있었다.”는 구절을 보고  몹시 반가
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다면 수상록에 나
오는 그녀처럼 되고 싶어할 정도로 너무도 목마르게 남성이 되고 싶어했었다.
  유난히 남자가 되고  싶어한 내가 좀 별난  경우였지만 부모나 주변 어른들의
강요로 여자임에도 남자처럼  키워지는 경우도 간혹 있는  모양이었다. 언제인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텔레비전의 아침 프로에 `태생은 여자였으나  남자처럼 키워
지다가 첫 생리를 하게 된  고등학생 때부터 비로소 여자처럼 하고 다니게 되었
다`는 어느 여인의 이야기가  화면을 가득 메워 잠시 그 앞에 앉아 있었던  적이
있다.
  `내리 딸만 낳다 보니까 한 명쯤은 아들처럼  키웠으면 좋겠다`는 부모의 바람
으로 좀 남성스럽게 생긴 막내를 사내애처럼 키워 초경이 있기 직전까지 본인도
남자인 것으로 알고 자란 그녀는 항상 짧은 머리와 바지 차림으로 여자들보다는
주로 남자들과 어울려 팽이치기, 딱지치기를 하면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중학교에 가서도 본인이 여성이라는 특별한 인식 없이 평소에 하던 대로 행동해
친구들 사이에서는 `남자애`라는 놀림을 받는 건 예사였고  어느 날 갑자기 맞게
된 초경은 그녀에게 충격적이다시피 했다고 한다.
  20대 중반의 멋진 숙녀가 되어 있었던 그녀는 이야기를 하는 중간중간에도 눈
물을 보이곤 했다.  본인은 여성이라는 특별한 의식도 없었고 오히려  남자가 되
어주길 바란  부모의 기대 때문에 `남성`인  줄 착각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맞게
된 그 징후로 `여성`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첫 징후가 있은 이후로 충격을 감추지 못해 몇 달 간 두문불출한 끝에 조금씩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자각해갔고 부모도 그녀에게 다가온 신체의  변화로 `딸
은 역시 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처럼 부모의 기대 때문이 아니더라도 성숙한 여성이거나 성숙하지 않더라
도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부딪혀 본 여성들이라면  `여성이
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행동 제약`으로 누구나 한번쯤은 `남성으로 태어나길` 원
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게 됨과 동시에 일종의 피해의식이  밑바닥에 깊숙하
게 자리하고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하는 바람이 태생적으로 주어진 여성을 거
부하면서까지 남성이 되고 싶은 욕구를 갖게 하기도 한다.
  간혹 일반적인 통념을 깨고 혼자서 며칠씩 산을 타거나 외국으로 여행을 다니
는 우먼 파워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대
부분 혼자서 여행을 하다 보면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 까 하는 피해의식이 있기
때문에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학습되어 온  행동제약을 스스로도 받아들이고 만
다.
  어려서부터 피해의식을 가지고  자라온 여성들이라면 남성이 가진 자유로움을
부러워하고 적어도 한 번쯤은 남녀가 다른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
았을 것이다.
  남녀의 차이를 불러오게  한 근본적인 원인을 놓고 `생물학적  요인 때문`이거
나 `사회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혹은 생물학적 요인과 환경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나뉘어진다.
  생물학적 요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남성과 여성은 성기 모양이 크게 다
를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행동  면에서도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반면 환경, 사회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얼마전 서울방송에서  창사특집으로 마
련한 `문화대탐사` 프로에서 방영되었던 것처럼  여성의 권한이 남자보다 강하고
절대적인 중국의 깊은 오지나 아마존 강유역, 남태평양 예를 들기도 한다.
  사실 대부분의 의학자들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분담을 `생식생리의 토대  위에
서 설명하면서 여성의 수태와  출산 그리고 수유로 아기를 양육하고 집안살림을
도맡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남성과 여성의 차별은  `태생적으로 어
쩔 수 없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한다. 게다가 사회 환경설이나 교육결정설대로라
면 텔레비전에  나온 여성처럼 여성임에도 남성처럼  키워진 경우에는 변함없이
남성화되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간혹 병원을 찾는 사람들  중에 `여자인 줄 알고 여성스럽게 키웠음에도  나무
에 기어오르거나 사내 아이들과  어울려서 야구, 유도, 레슬링 놀이만을 즐겨 아
무래도 이상하다`며 성별 감식을 의뢰해오는 부모들도 있는데 이들  부모들은 성
별감별을 한 결과 여자  아이가 아닌 `남자 아이`임이 밝혀지면 `그러면  그렇지,
뭔가 잘못되지 않고서야 그럴리가 없다`는 반응들을 보인다고 한다.
  아무리 부모가 남자  아이를 여성처럼 키우려 해도 어쩔 수  없는 `남성성` 때
문에 도저히 여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유치원 과정에서조차 `남자 아이는 자
동차, 비행기 따위의 움직이는 물체를 즐겨 그리는  데 비해 여자 아이는 사람을
흔히 그릴 정도`로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는 자라면서 더욱  현격한 차이가 있다
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로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남성다움이나  여성다움이 판이하게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훈육
이나 교육만으로 형성되지 않고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결정하는 뇌의 성분화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 의학자들의 견해다.
  비뇨기 전문의 한 사람은 좀 다른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다.
  “아기가 태반에 있는 초기 상태에선 남성 생식기와 여성 생식기를 함께 가지
고 있고 이는 장차 완전한 성으로 분화될 원시 조직으로 남성과 여성 모두가 처
음에는 양성이었다.”는 이론이었다.
  그에 의하면 “처음에는  두 가지 기관을 모두 가지고 있다가  태생기의 6,7주
에 이르면 생식기간은 한 가지의 성을 향해 발전하기 시작해 반대되는 성기관은
점차 퇴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남성과 여성으로서의 완전한 구별이
이루어져 각각 특이한 성징을 분명히 나타내게 되지만 한쪽 성은 퇴화될 뿐이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어서  두드러지게 표출되지만 않을 뿐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몸 속에 자기의 성 외에 반대되는  성징을 조금은 지니기 마련이다. 또한
한쪽 성의 발달로  퇴화한 나머지 성기는 20여 년  후 어른이 된 후에도 퇴화한
채 남아 있다고 한다.
  성장한 남성에게는 질의 원시  조직의 잔재가 아주 조그마한 흔적으로 변화되
어 방광의 가장자리인 전립선 바로  근처에 붙어 사정할 때 정액이 방광 쪽으로
역류하지 못하게 하는  임무만을 가진 채 남아  있으며 여성 역시 남성상징물인
그것의 잔재가 여성의 요도구 양옆에 바싹 붙어 무덤속까지 따라가게 된다.
  `남녀양성론`대로라면 100퍼센트 남성, 100퍼센트 여성은 없는 것으로 그의 주
장대로 해부학적 구조상으로 볼 때 98퍼센트의  남성, 또는 98퍼센트의 여성이라
고 하는게 오히려 더 과학적이고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성이 발전하고 다른 성은  퇴화하는 신체의 성분화는 태생기
때부터 이루어지고 동시에 남자  생식기를 가진 경우 태아의 고환에서 분비되는
남성호르몬에 의해서 남성의 뇌가  임신 12주부터 22주에 걸쳐 태아의 고환에서
성인 수준의 남성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이 시기에 신체와 함께 뇌도 남성호르몬
의 영향을 받아 남녀의 차이가 움트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의 뇌가 생겼다고 해서 남성다움을 곧 행동으로 드러낼 정도로 분
화하는 것은 아니고 엄마의 뱃속에서 비로소 인간의 모습이 되는 태생기와 유아
기에 뇌가  서서히 발달하면서 생후의  환경이나 학습에 따라  남성은 남성답게,
여성은 여성답게 뇌가 완성되는 것이라고 한다.
  철들 무려까지 남성은 처음부터 엄격한 차이를 가지고 태어나 어느 여성도 남
성처럼 될 수 없다는 그  사실을 본원적인 것으로 알고 있던 나에게 남녀양성론
과 교육, 학습과정에서 본래의 양성적인 면이  한쪽성으로 기울어지게 된다는 이
야기는 암흑 속에 스며든 빛처럼 반가운 소식이었다.
  양성론대로 해석하면, 남성과  여성은 신체적인 차이가 있을 뿐 그  차이가 인
간의 차별성을 갖게  하는것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다만 우리의  환경과 교육
은 차이를 차별화시켜 여성은 더욱 여성스럽게 (물론 여성스럽다는  표현조차 사
용하고 싶지 않지만) 남성은 더욱 남성답게 대립시켜 온 것이 된다.
  남성과 여성은 단지  신체적인 차이에 불과할 뿐인데  그 차이가 마치 남녀를
차별화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회풍토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의학자
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남자가 될 아이의  경우 고환의 원시 조직이 음낭주머
니 속으로 빠져 나오는 따위의 복잡한 대이동과정을 밟아야 하지만 태아가 여자
로 성장할 때는 태생 초기에 고환과 같은 위치에 있는 난계는 본래의 위치에 그
대로 있으면서 음순과 질이  성장하므로 남성보다 발생학적 과정이 매우 간단하
다는 태아여성설을 펴며 해부학의  한 분야인 태생학이라는 학문에 종사하고 있
는 여성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또한 `병아리처럼 진화가 덜된 하관동물들,  일명
남자들은 배설과 생식기능이 같은 한 곳을 통해 나오지만 여성들은 목적별로 세
분화되어 소변과 대변을  배설하는 곳 그리고 생식을  위한 기관이 각각 독립해
있어 역할대로 기관 이 진화되지 못한 남성은 원시에 가깝다는 재미있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 동안 남성중심적인 학문에 눌려  숨 한번 제대로 못 쉬었는데 좀 어렵지만
태생학의 학문에서 그나마 여성의 우월성을  펼 수 있는 학설이 있어 모처럼 묵
은 체증이 내려가는 호쾌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학자처럼 `태생학
적, 여성우월론`을 남편에게까지 전개하면서 `고로 여성이 우월하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남성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는 줄만 알았다가 그럴  듯한 근거들로 `남성
에 비해 오히려 여성이 우월하다`는 학설이 나온 그 자체가 반가운 것이다. 간혹
여성우월론을 전개하면서 근거 제시로 이용할 수도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초경과 몽정

  아직 `어린 아이`라고만  생각하던 딸아이에게 어느 날 갑자기  초경이 찾아왔
다면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30대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초경을  맞았을 때의 그 암담함과 당혹감을 기억한
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당한  입장이라고나 할까. 그 사실이 왠지 부끄러워 친구
들에게도 쉬쉬할 정도였고 자신이  혐오스러워 바깥 출입마저 삼가고 누구를 만
나는 것까지 기피했던 묘한 기분을.
  그런데 그 무렵부터 조금씩 엄마의 잔소리가 많아졌던 것도 함께 떠올릴 수가
있다. 생리를 하기 전에는 예사로  넘어갔는데 생리를 하게 된 이후부터는 `여자
애가 그게 뭐니. 좀 얌전하게 걸어라`, `좀 다소곳하게 앉는 습관을 들여라` 등등
사사건건 엄마의 잔소리가 끼어들곤 했다.
  성장할수록 부모의 간섭은 더욱 심해져 움직일 수 있는 폭은 매우 제한되었고
나보다 고작 세 살밖에 많지 않았던 오라버니는 상대적으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는 채 무한한 자유로움을  누렸다.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로 견딜  수 없을 때
면 `왜 엄마는 나랑 오빠를 차별하는 거야`라며 몹시 대들기도 했었다.
  당시로서는 왜 그토록  오라버니와 `내`가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 차별의 원인이 `초경`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이
해하기가 더욱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후에 어른이 되어도 `난 절대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오기와,
설령 결혼을 해서 딸아이를 낳게 된다면 우리 부모처럼은 자식을 키우지 않겠다
는 다짐을 하게 된 것이. 그러나 막상 결혼을  해서 딸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니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어린 딸아이
를 보고 느끼는 묘한 불안함과 과한 애정이 잔소리로 표현되었고 그것이 후에까
지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든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딸애에게  초경이 있기 전까지는 크게 `여성`이라는  사실을 인
식하지 않다가 그것이  막상 현실로 닥치면 사정은 달라지는 모양이다.  선배 언
니 역시 국민학교 여자 아이들이  초경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어도 그저 남
의 이야기로 여기다가 막상 자신의 아이에게 그런 일이 닥치자 사실로 받아들이
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국민학교 4학년이 된 딸아이가  갑자기 `엄마, 밑에서 피가 나와`라는 말을 들
었을 때 놀라긴 했지만 그것이 초경인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다고 한다. 그저 `
신체에 무슨 이상이 생긴  것`인 줄 알고 딸의 손을 잡고 들어서기가 어색한  산
부인과를 찾아가서야 그것이 초경임을 확인하고  `어떻게 딸아이를 키워야 하나`
하는 생각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니 그 심경이 이해될 정도다.
  그 나이 또래의 엄마들에 비해 그래도 딸아이를  비교적 `막 키운다`는 소리를
듣던 그 언니가 비상사태를 맞고는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이제부터 어떡하면 좋으니,  치마를 입을 때도 이런 저런 속옷을  챙겨야 하
고 옷매무새도 항상 조심시켜야 할 노릇이니 앞으로가 걱정이다.”
  초경만 했다뿐  아직 11살밖에 안 된  딸아이를 선배 언니는  `어린 아이`라는
인식에서 갑자기 `임신이 가능해지는 예비숙녀`로  껑충 건너뛰어 해석하고 있었
다. 여자 아이들은 초경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여자로 키워지는 것일까. 혹은 이
미 그 이전부터 우리의 엄마들이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주고 있는 것은 아
닐까?
  어떠한 편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마음껏 자라나야 할 아이들이 은연중에 내뱉
는 부모들이나 주변 어른들 말 때문에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미리부터 형성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얼마전 대중 목욕탕에서 겪은 일이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동네 대중탕인 탓에 아는  얼굴을 대하는 건 으레 있는 일로,  그날도 역시 이
웃집 여자가 5살 난  딸을 데리고 와 인사를 나누었다. 조금 후  얼굴이 익은 또
다른 여자가 4,5살된 아들아이의 손을 잡고 목욕탕을  찾았는데 그 아이는 내 이
웃에 사는 5살  난 여자 아이와 한  유치원에 다니는 또래친구인지 여자 아이를
보자마자 `○○이가 벌거벗었대요. 나는 봤대요` 하면서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
고 놀림을 당한 여자 아이는 엄마 뒤로 몸을 숨기고 말았다.
  5살 난 여자 아이는 결국 `집에 가겠다`며  밖으로 나갔고 딸아이 때문에 머쓱
해진 이웃집  여인은 한참을 머뭇거리고서야 아이를  부르며 허둥지둥 뒤쫓아가
대중탕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한바탕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4,5살된 아
이들이 뭘 알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4,5살이나 된  남자 아이를 버젓이
데리고 여탕을 찾는 것도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아직 성에  대해 특별히 알아야 할  것도 없는 아이들이 부끄러워하는
게 귀엽기고 했지만  유독 여자 아이가 부끄러움을  탄다는 사실이 역시 의아한
부분으로 남았다. 여자  아이가 남자 아이에 비해 같은 나이라도  더 성숙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남자에 비해 여자가 `성에 대한  고정관념
을 일찍부터 형성하게 된 탓`이기도 했다.
  어리다고만 생각하고 있던 딸아이가 또래 남자친구를 보고 부끄러워하는 일이
비단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흔한 예로 두세 살된  남자 아이들은 아무데
서나 바지를 내리고 `쉬`를 해도 부모들이 별로  당황해하지 않지만 여자 아이들
만은 유독 사람 눈을 피하면서 `쉬`를 해야 하는 차별대우를 받는다. 차별대우는
자랄수록 더욱 심해져 목욕탕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여자 아이들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는데 초경
이후에는 딸아이에 대한  부모의 태도는 더욱 완고해지게 된다. 남자  아이와 별
구분 없이 키우던 선배 언니조차 달라질 정도로 딸아이에게 온 변화는 부모에게
는 일대 비상사태가 되어버리지만 첫 몽정을 경험하는 아들을 가진 부모의 심정
은 딸아이의 초경을 맞는 것처럼 심각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들이  `첫 몽정을 경험했을 성싶어도` 털어놓지  않기 때
문에 간파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목욕을 하는  중에 예전처럼 들어가기라도 하면
유난히 싫어한다거나 속옷을 내놓지 않으려는 따위의 행동으로 그저 막연하게만
짐작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미주알  고주알 얘기하던 아이가 갑자기 말수가 적어
지고 부쩍 성숙해졌다는  것을 느끼면서 왠지 낯설어질 때, 이제  아들이 예전의
어린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첫 사정` 경험
으로 유난히 잔소리를 하는 따위로 간섭의 영역이 넓어지지는 않는다.
  첫 몽정을 경험한 아들 역시 갑작스런 신체의 변화 때문에 두려움으로 고민하
는 정도랄까? 그래도 막상 그 경험을 한 남성들은 여성이 초경을 경험했을 때만
큼의 충격은 아니라고 해도 놀라움은 큰 모양이다.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아래가 축축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더라고.  그렇다고
해서 여성과의 섹스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이기 때문에  성행위를 하는 꿈을 꾼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기억하지 못할 뿐  여성이 꿈속에 나타나는 정도의
어떤 자극이 있긴 했을  것 같은데 기억이 없는 거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동네
형들과 어울린 자리에서야  그것이 몽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리고  그 무
렵부터 조금씩 체모가 나오고 수염도 나게 되면서 가족이나 어머니에게 벗은 몸
을 보이지 않게 되더라고.”
  남편의 첫 몽정에 대한 경험담이  제법 그럴 듯하게 들리긴 하지만 그때의 그
막연한 두려움이 여성이 처음 초경을 맞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어머니에
게 털어놔야 했던 것 등  앞으로 살아갈 날이 너무도 두려워 회피해버리고 싶게
했던 초경에 대한 기억은 역시 남성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여성이 남성에 비해 유난히  차별대우를 받는 것은 바로 그 초경 때
문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월경을
신성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귀찮고 불결하고 종교적으로는 부정한 것으로까지 치
부해왔었다. 여성의 월경에  대한 부정은 아프리카도 예외는  아니어서 월경중에
있는 여성이 만진 그릇은 불결하므로 사용치 못하게 했으며 여성 스스로도 월경
을 수치심으로 여겨  종교적 행사나 제사와 같이  성스러운 일을 준비할 자격이
없는 것을 당연시했다.  마치 달이 기울고 차는 원리처럼 여성의  신체리듬과 달
의 원리가 신비로운 유대관계가  있다고 믿어 월경은 불가사의한 여성의 힘으로
비쳐졌고 그 믿음은  여성의 월경을 억눌러야 하는  힘의 존재로 비쳐졌던 것이
다. 이제  그런 의미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딸 아이의 초경을  경험한 부모들의
심경은 한결같이 불안한 `그 무엇`이 되고 있다.
  “생리를 하게 되었다는  게 무슨 뜻이니. 엄밀한 계획 아래  움직이는 어른의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 아니니. 그러니 이제  우리 딸도 임신이라는 것이 가
능해진 단계가 되었는데 어떻게  각별히 신경을 안 쓸 수가 있겠니?” 여자에게
만 있는 그  `생리`가 죄는 아닐 텐데 그것이 있게  되면서부터 딸아이는 걱정하
고 보호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우리도 부모에게 그렇게  제약받으면서 자랐는데 우리마저 자식에게 그렇게
한다는 건 잘못된 인습만 반복하는 거니까 딸아이라도 자유롭게 키워야 하지 않
겠어?”라는 동생의 우려를 언니는 한마디로 일출해버린다.
  “너도 당해봐라. 그렇게  남 말 하듯이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복잡해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여자는  우선 조심하는 수밖에  없어.” 아직
철없는 어린 아이가 신체적인 `이상 징조` 때문에  부모의 달라진 눈길을 받으며
자랄 것을 생각하니 두 돌을 바라보는 딸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의 묘한 공감탓
인지 일부 잘못된 사고방식을 탓하기보다는 `왜 여자로 태어나서  부당한 대접을
대접을 받나`하는 안쓰러움이 앞서는 건 왜 일까.

  프리섹스(?)

  결혼을 할 적령기가 되어서까지 성교육이라고는 중학교 때와 고등학교 때 1시
간 정도를 받은  것이 고작이다. 그것도 학교 선생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에
서 온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내용도 그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었다. `여성의 신체구조와  생리, 임신`에 대한 추상적인 몇 마디를  떠들고는 상
투적으로 `물어볼 것 없어요.  없으면 마치겠습니다`는 말과 함께 그들이 다니는
회사마크가 찍혀 있는 생리대를 한 개씩 받는 것이 성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의 전부였다.
  그 시간에 머리  속에 남겨지는 것은 `여성은 임신이 된다`는  그 사실 하나뿐
이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임신이  될 거라는 것도 믿기지 않아 그저 남의
얘기, 먼 이웃  얘기처럼 들리기만 했었다. 어쩌다가 가끔, 교실  뒤에 있는 아이
들이 `학교 화장실에 갓난 아이가 빠져 있었대` 하는  말을 들어도 그 말이 성교
육 시간에 들었던 내용과 전혀 연결되지 못한채 넘어가기가 예사였고.
  남자에 대해 가끔 몇  마디를 들려주던 부모님과 수업시간에 들은 선생님들의
얘기가 `편협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그래도 항상 접할  수 있는 일종의 성
교육이었던 셈이다.
  `아무데서나 소변 보면 안 된다`, `여자는 남자하고 잠을 자면 아이를 갖게  되
므로 남자를 가까이  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따위의  엄마의 잔소리와 `남
자에게 여자는 항상  익은 과일과 같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여자는 접시와
같아 집 밖으로 내둘리면 깨지는  법`이다 등. 혹은 `남자는 아무리 양처럼 순하
고 어질다 해도  아버지나 집안 형제 외에는 다  양의 탈을 쓴 늑대이므로 절대
마음을 놔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몇 마디가  당시 부모에게 들을 수  있었던
성교육의 전부였다.
  왜 익은 과일이고  왜 집 밖으로 내돌리면 안  되냐고 물어보면 들을 수 있는
답변은 `남자에게 여자는 익은 과일처럼  언제든지 따먹고 싶은 존재니까`거나 `
여자는 접시와 같아  깨지면 안 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처럼 `익은 과일이
고, 접시와 같다`는 따위의 말 속에는 여자들의 몸은 한번 깨지면 영영 쓸모없이
쓰레기통에 버려져야 하거나 누구나 탐을 내서 먹고 싶어하는 물건과 같은 것이
라는 인식이 자리하게  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  여자의 몸은 외부의 손길로부터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비밀의 성처럼 인식하게 되었다.
  `남자는 다 늑대와 같다`는 소리도 늑대와 같은  남성들의 성충동 때문에 여자
는 태도나 언행,  옷차림에서도 정숙한 여성으로서의 행동양식을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중, 고등학교 때 소풍 갔다가  누군가의 눈을 피해 급하게 볼
일을 봐야 할 때도 그 말은 문득 문득 되살아나 어김없이 뇌리를 스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려서부터 듣게 된 남자는 전부 늑대라는 말은 오히려 남성
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갖게 해 남자는  멀리해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강박관념이 되어 소꿉친구인 남자친구들마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회피하게
만들었고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은 `큰 죄를 짓는`  엄청난 금기사항이 되게 하고
야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  대한 호기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억눌려진 마
음은 샘물 솟  듯 솟아오르는 그들에 대한 호기심은  감히 표현하지 못할 뿐 더
커져가기만 했었다.
  그러나 이성에 대해 커가는 호기심을  꽁꽁 숨긴 채 가슴에 품었다 해도 성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 여자들과는 너무도 다른
존재일 것이라는 쓸데없는  환상만을 키운 셈이었다. 그런 환상을 가진  채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나온 세상은 온통 성에 관한  것들이 널려 있었다. 성은 너무도
가까이에,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조금만 발을 떼면 성으로 뒤범벅이 된 비디오와 잡지, 만화, 영화 따위의 각종
성 산업에 접할 수 있었고 그것들은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들어와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이전에는 감히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던 영화관을 우르르 달려가서 본 성
인영화의 내용은  `그렇고 그런 것`으로 얼굴이  붉어지기가 예사였고, 부모님이
안 계신 틈을 타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앉아 구경한 비디오 내용도 우리에게는
별천지였다.
  그렇게 하나둘 접한 각종  매체의 영향으로 성이 단순한 생식기능만이 아니라
는 것,  성으로 인생의 또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정도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어린시절부터 학교나 가정에서  성에 대해 과학적이고 체
계적인 지식과 정보를 얻지 못하다가 갑자기 성산업과 연관된 매체를 접한 탓에
왜곡되기가 일쑤였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영화나  만화, 비디오물의 내용들은  한결같이 남성이
원하면 여성은 언제든지 성행위를 해야 하고 성행위는 항상 남성이 리드해야 하
며 여성이 먼저 성행위를 유혹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간혹 여성이 적극적으로 성에 대한 의사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어도 그런 여성들
은 `술집에 있거나 몸을 파는 그렇고 그런 여성`으로 설정되거나 `오로지 성밖에
모르는 인물`로 묘사되기가 예사였다.
  대중매체나 어른들이 얼핏 하는 말을 들으면서 `성행위를 말하거나  먼저 요구
하는 여성`은 품행이 방정치  못한 여성이라는 생각을 머리 속의 한구석에  키워
갔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으로 성에 대한 일방적인 생각이 더욱 견고해져 갔다.
  스물 하고도  여덟, 아홉이 되어서야  얼마전까지 가졌던 나의  성인식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지만 이미 어려서부터 오랜 세월 길들여진 그 생각
이 쉽게  달라질 수는 없었다. 결혼  적령기가 되어 혹 좋아하는  남성을 만나게
되어도 내 쪽에서 먼저 `좋아한다`는  표현을 할 수도 없었고, 어쩌다가 갖게 되
는 데이트 때도 남자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느낄 때,
철들 무렵까지 머리 속에 자리해온 그 생각들이 얼마나 무섭고 질긴가를 깨달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건  나만이 가졌던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얼마전  함께 일하는
동료 몇이 저녁을  하는 자리에서 한 친구가  느닷없이 프리섹스를 화제로 꺼냈
다.
  “왜 우리는 유럽처럼  프리섹스가 되지 않는 걸까. 아니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요즘 신세대처럼 왜 성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걸
까?”
  “그거야 뻔하지  않아. 워낙이 완고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으니  그 유교적인
생각이 어디 갔겠어? 당신들이  그저 일밖에 모르고 성이라곤 그저 아이를 낳기
위한 것 정도의 기능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으니 그 밑에서 자란 자식세대인 우
리가 크게 달라질 수가 있나.”
  대화는 결국 요즘 20대의 젊은 세대와 20대 후반을 넘어선 샌드위치 세대간의
문화와 의식의  차이로 이어졌다. 프리섹스를  화제로 꺼낸 친구는  생각과 몸이
전혀 다르게 노는 것이 답답하다는 듯.
  “정말이지 난 내 행동에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다니까. 신세대들처럼 사랑하
지도 않으면서 혹은 뒤에 생길 여러 가지 문제를 염려하면서 성관계를 자유자재
로 갖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려면 섹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융통성 있게 생각하고 대처해야 된다는게 그저 생각뿐이지 몸이 좀체
말을 들어야지. 우리 세대는  정말 불쌍하고 억울한 것 같아. 어려서부터 부모로
부터 유교적인 가르침만을 받고 자랐지  성에 대해서는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있나. 그런데  성인이 되어서 바라본  세계는 우리가 미처  소화하고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급속도로  변해가고 있으니 어떡하냔 말이야. 시대 흐름을  따라갈 만
큼 의식도 변해야지 쓸데없는 것을 싸안고 고민하지는 않을 것 아니야.”
  이제는 여성도 성에 대해 수동적인 자세로만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구태
의연한 `순결관`에 빠져 있는  것은 시대적 오류라는 사실을 성토했다. 그렇다고
다른 선진국의 경우처럼 프리섹스를 목소리 높여  외치지는 않았다. 다만 사랑하
는 사람과 있을 수  있는 성관계에 대해서만이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의식
과, 후에 그 관계가  깨진다 하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듯 툴툴  털어버릴 수 있는
정도의 의식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날  저녁시간의 일치된 내용이었다. 그러면
서도 한편의 의식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한 것에 스스로 진저리를 치고 있
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너나 없이 몇  마디씩 지껄이고 나서야
우리를 흘끔거리며 쳐다보는 주변사람의 눈길을 의식할 수가 있었다.

  남녀 - 성의 메커니즘

  얼마전 친정엄마가 다친 허리가 심하게 아파서 평소 알고 있던 한약상에서 약
을 지어온 적이  있다. 그런데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친정엄마
가 은밀히 건네는 말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었다.
  “한약상에 갔더니 먼저 와 있던 손님 중에 한 사십대 초반쯤 됐을까 싶은 여
자가 있었는데  뻔뻔하기도 하지. 글쎄  젊은 약사에게 남편의  정력이 좋아지는
약을 지어달라지 않겠니.  여자는 40대가 고비이긴 하지만 우리 때는  그런 것도
모르고 살았는데 요즘은  세상이 어찌 된 건지 여자들이 더  설치니 원 쯧쯧쯧...
” 엄마는 계속 그것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혀를 차며 딸을 건네보는  친정엄마의 눈길에는 `우리 딸은 나이가 들어도  그
렇지 않을` 믿음을 갖고 싶어함이 서려 있어 일순 동조하지도, 그렇다고 쉽게 부
정하지도 못한 채로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친정엄마가  먼저 “
너는 아직 젊어서 잘모르겠지.”라는 말로 친정엄마가 꺼낸 `40대 여인의 과잉행
동`에 대한 매듭은 지어진 셈이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아무리 친구같이 지내는 딸자식간이라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
간에 감히 그런 얘기를 나누리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친정엄마는 자연스럽게 결혼한 딸에  대한 교육이라고 생각한 탓인지 가끔씩 동
네 여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공공연한 사실들을 언급하면서 내가 미처 살
지 못한 사오십대 주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곤 한다.
  화제에 오르는 사오십대  여인들의 얘기 중에서도 일반적이기보다는 `좀  특이
하고 기괴하다`  싶은 것들이기가 쉬운데 점잖아야  할 그 여인들의  이야기들이
난무하는 것도 사실은 `여자 나이 40이 가장  고비인 사춘기`이기 때문이라는 것
이다. 성에 대해 알  만큼 다 알고 아이도 거의 다  키운 상태이기 때문에 `섹스
없이는 못살 정도`가 되어  젊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할 얘기들이  떠돈다
는 것이다.
  “지금 네 나이는 아직 젊으니까 그까짓 것 안 하고도 살 수 있다고 할 지 모
르지만 내가 그  나이를 지나오고 나서 보니까  40대 여자들에게서 듣기에 좋지
않은 이야기가 들리는 것도, 한약상에 남편 보약을  지으러 온 여자도 모두가 그
사춘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는  거란다. 그렇다고 그 여자들
이 잘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실을  미리 알아두라는 거다. 그래야 스스
로 대처하는 지혜가 생길 테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그 얘기에 쉽게 동조할  수는 없었다. 친
정엄마의 그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대학시절 우스갯소리처럼 불러대던 노래가
갑자기 생각났다.
  `물개 같은 정력, 신기하고  놀라워`라는 가삿말이 몇 차례 반복되는 노래였는
데 그 당시에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따라 불렀었
다. 결국 남성들이 그렇게  정력을 운운하는 것도, 중년의 여성이 남편의 보신을
위해 그렇게 동분서주하는 것도 모두가 바로 그 `정력`때문이었다.
  아직 결혼생활도 오래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40대 주부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는`게 사실이다. 워낙 만혼인 탓에 남편이나 나나 이십대다운 정력
이 없어서 `크게  달라졌다든가, 예전 같지 않다든가`  하는 식으로 전과 지금을
비교할 만큼 결혼생활이 무르익지도  못했으니 남편의 정력보신을 위해 약을 지
어가는 40대 아주머니를 무조건 손가락질할 수만은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남성
의 성욕과 정력은  젊은 시절 혹 `물개 같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이가 들수록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이다.
  정상적인 남성 성기능의 기준을 의학적으로는, `합리적인 환경 아래 섹스를 했
을 때 오르가슴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페니스의 발기가 소멸되
는 이변이나 조루현상이 없이 페니스를 무사히 삽입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불감
증 같은 성적 결함이 없는  정상적 여성이면 충분히 오르가슴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섹스 시간을 연장할 수 있는 능력`이라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과연 남성들이  이 규정만큼의 성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물론 대부분의
남성들치고 왕년에  카사노바나 변강쇠 아닌  사람이 없다. 마치  무슨 영웅담을
얘기하듯 떠벌리는 여성편력은 의학적으로 규정 내린 그 성기능의 정상범위보다
뛰어난 전적으로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듣는 사람들도 역시 반은 에누리 하거나
`그저 허풍이려니` 하는 게 예사다.
  가래나 호미로도 못 막는 세월만큼 나이가 들수록 남성의 성욕과 성 능력에도
변화가 오게 마련이다. 남성의 성역할을 가능하게  하는 호르몬도 급격하게 떨어
지게 된다. 왕성하던 발기력도 약해지고 지속시간도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힘이
약해지는 만큼 제 2,3의 시도는 더욱 어려워진다.
  남성의 성기능을 촉진하는 힘이  되는 호르몬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효능을
가진 테스토스테론은  사춘기 때인 12세와 13세부터  급격히 상승해서 21세에서
30세에는 최절정에 달하게 된다고 한다.
  최절정에서 30세를 고비로  완만하게 하강하여 61세에서 70세에는 최절정기의
절반도 안 되는 양을 분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간혹 40세에서 50대 남성의 몸에
도 15세에서 20세 수준의 남성  성호르몬이 흐르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런 경
우는 아주 특이한 케이스에 불과할 뿐이다.
  마치 자동차 튜브처럼 부풀었다 사그라지는 남성의 페니스는 해면체에 혈액이
충만해지면서 발기하고는 그것을 다시 배설하고 싶어지는 사정욕이 생기게 되는
데 이 사정력도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20대 남성이라면 혈류량의  증가로 페니
스의 길이가 거의 절반 이상  늘어나고 볼륨은 두 배가 넘게 커지고 거의 1미터
를 날아갈 만큼 힘차  모두가 `변강쇠`지만 나이가 들면 전혀 `아니올시다`가 되
어버린다.
  게다가 노인이 되면 뇌동맥경화증으로  인해 뇌 속으로 흐르는 혈류량이 감소
되어 남성호르몬과 정액  생산이 감퇴되어 아예 성욕발진이  부진해진다. 페니스
에 들어왔던 혈액도 밸브의 고장으로 몸 속으로 빠져 나가지도 못한 채 쉽게 없
어져 발기가 되더라도 오래도록 지속시키지 못하게 된다.
  또한 남성들이 가장  떠벌리기 좋아하는 `차렷` 자세를 갖추는  시간과 차렷한
상태에서의 부동자세 시간에도  역시 큰 변화가 온다고 한다. 청년일  때는 고작
3초에서 5초 만에  `차렷` 자세를 하던 것이 중년 이후가  되면서는 3분에서 5분
으로 늘어나 무려  60배의 시간을 소요해야 하고  평균 50분이나 끄떡없던 발기
지속시간도 60세 이상의 노령이 되면 10분밖에는 견디지 못하게 된다.
  섹스 횟수에도 물론  변화가 온다. 비록 시간은 꽤 오래되었지만  1960년 서울
대학 이희영 교수가 조사발표한  데이터에 의하면 우리나라 남성들의 일주일 섹
스 횟수가 21세에서 25세가 2.442회로  26세에서 30세가 2.31회, 31세에서 35세가
2.217회인 것으로 나타났고 36세에서 40세가  1.95회, 41세에서 45세가 1.83회, 46
세에서 50세가 1.61회,  51세에서 55세가 1.42회, 56세에서  60세가 0.92회로 나타
나 있다. 이렇듯 나이가 들면 남성의 성 매커니즘의 모든 것은 달라져버린다.
  그러나 이와 같은 데이터는  어디까지나 수학적인 평균치에 불과할 뿐 개인차
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개인차가 있다  해도 대부분의 남성들은 나이가 들수
록 성  메커니즘이 약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  현실은 생각하지
않고 `예전 같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여성의 지나친 욕심일 수밖에 없다. 혹은
남성이나 성 메커니즘이 달라지고 있는 연령대의 가장을 둔 여성들은 자기의 남
편이 영원히 청년 같은 정력을  보유하고 있기를 바라겠지만 만 명에 한 명에게
나 있을까 싶은 선천성을 기대하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
이다.
  개개인의 심리상태와 직업 그리고 성에  대한 관심에 따라 크게 다른 것이 바
로 남성의 섹스 능력이라고 한다면, 섹스 횟수와  시간 따위에 지나친 관심을 기
울여 그 평균치에 미치지 못하기도  하면 마치 큰일이라고 난 것처럼 걱정을 하
고 그 기준치를 따르기 위해 무모한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개개인의 특성에 따
라 다른 성 능력으로 두 사람만의 멋진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보통 남성이 한 번 사정하는  정액의 분량은 티스푼 하나가 될까 말까한 양으
로 그 속에는  자그만치 3~5억 마리의 정자가 헤엄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남
성이 일생 동안  치를 수 있는 섹스 횟수는  무려 3천에서 4천회가 된다고 하니
일생동안 생산되는 정자수는 무려 1조5천억 마리가  넘는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
나 이렇게 많은  정자 중에서 산아제한으로 고작 2,3개의 정자가  난자와 결합하
게 되므로 정자야말로 낭비가 많은 물질이 아닐 수 없다.
  정자수만 낭비되는 것이 아니라  섹스 그 자체로 소비되는 에너지가 또한  `별
것 아닌`게  아니게 된다. 중병에 걸린  환자들에게 의사들이 `금욕해야  한다`는
것은 섹스로  이한 체력소모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그와는
달리 `정말 별  거 아니`라고 하는 삶도 있다.  실제로 섹스를 통해서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정액의 주성분은 물이기 때문에 한 번 섹스로 사정한다 해도 정액으
로 많은 에너지가 소모될 리  없고 하루에 10회 정도의 섹스를 하더라도 정액이
배출로 생기는 남성측의 에너지 손실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섹스로 소모되는 에너지는  배출된 정액의 손실만 가지고 따져서는 안
될 것  같다. 하기에 따라서는 섹스  자체가 정신적 흥분 속에  자행되는 격렬한
전신운동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의 한 번 섹스시 보통  20분 이상을 한다면 체력을 소모는 전문의의 표현
을 빌면 최소 2백 미터에서  1천 미터를 전속력으로 질주한 체력 소모와 맞먹는
다고 한다. 만약 그런 섹스를 하루에 3회  이상 갖게 되면 소모된 남성의 에너지
는 엄청날 것이고 물론 그 이상이 된다면 에너지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돼
어떤 영화의 주인공 남자처럼 서른 살도 안되어  `사지가 떨리는`불행을 맞게 되
고야 만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히려 여성이 훨씬 유리하고 편리하다. 흔히  말하듯 남성
의 성은 발기와 사정이 있어야만 오르가슴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에 제2,3의 오
르가슴을 위해서는 계속해서 발기와 사정현상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성은 한
번 오르가슴을 느끼게  되면 연속적인 중첩이 가능해  다시금 그 절정감을 위해
힘든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어 연속된 오르가슴에도 겨우 `50미터 정도를  달린
에너지 소모`에 그칠 뿐이다.
  거기에 비해 남성은 많은 에너지가  드는 발기와 사정을 거친 이후 다시 오르
가슴을 느끼려면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남성은 격한  엑서사이스에 지쳐
깊은 잠에 빠지지만 여성은 섹스 후에 파상적으로 엄습하는 도취의 여운으로 편
안한 잠에 빠질 수 있어 이 점만 보더라도 남녀의 에너지 소모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또한  여성은 절정감에 도달한 이후 감도가 식어가도  서서히 그 절
정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어 남성에 비해 여성이  `훨씬 욕심꾸러기`인
셈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성 생리를 놓고  `남성은 홈런 단타형`인 반면 `여성은 다발
단타형`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남성은 사정으로써 비로소 쾌감을 얻게 되고 한
번의 사정을 위해 오랜 시간을  달려야 하지만 여성은 많은 에너지 소비없이 기
분 여하에 따라 오르가슴을 몇 번이고 만끽할 수가 있으니 말이다.
  여태까지 남성들만이  카사노바고 변강쇠인 줄 알았던  사람들은 여성의 훨씬
유리한 정력 앞에서는 두손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제 아무리 카사노
바를 뺨치는 막강한 정력의 소유자라 해도 자기 부인을 전적으로 흡족하게 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결국 남성의 성욕과 정력은  나이와 비례관계에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하락
할 수밖에 없다. 대신 여성의 성욕과 그  메커니즘은 남성보다 훨씬 유리해서 나
이가 들어도  남성만큼 하락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 차이가  여성으로 하여금
남편에게 `보신용`을 철마다 구해 살뜰히 챙기게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성에도 경제학이 있다.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또한 상대의 특징을
알고 나면 차이를 극복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만은 않다. 중요한 것은 `성적 능
력`이 아니라 서로의 다른  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서로에 맞게 발전시켜  가느
냐에 있는 것이다.
  막대한 돈을 써가며 보신용을 구하는 노력을 들이기 앞서 이렇듯 다른 남녀의
다른 성 반응을 여성 쪽에서 먼저 귀띔해주는  건 어떨까. 문제는 남성의 강력한
성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보다는 남편의  아내에 대한 친절과 예의, 배려,
애정이 전제된 섹스를 원한다고. 그러면 비록  잦은 횟수가 아니더라도 영국신사
못지않은 친절과 부드러운, 깍듯한 예의로 멋진 찬사를 받을 수 있다고 말이다.

  환경에 따라 변한 처녀막

  아직 처녀숭배사상이 완고한  탓일까? 요즘 주간지에는 처녀막 재생수술이 주
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지난 94년 2월에는 한국에선  처음으로 세계적으로도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처녀막 소송 문제가 제기되었다. 언론계는  일제히 촉수를
세웠고 `희귀한 그 주인공`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39세의 여성이  `의료진의 과실로 처녀막이  파열됐으니 정신적.물리적 피해를
보상하라`며 소송을 제기하면서 언론의 관심이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이 화제의
대상이 된 것은 아직 우리사회에서 중시 여기는 처녀막에 대한 가치논쟁이 기어
코 법정까지 갔다는 데 있었다.
  법적인 싸움으로 가기 전 그녀는 여성계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여성계는 `처녀
막에 대한 가치가 법정에서  가려진다`는 사실을 우려해 그녀의 도움을 선뜻  받
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사실 나로서는 기사를  처음 읽었을 때 그녀  말마따나 정말 처녀막이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싶은 생각부터 들었다. 이미 아이까지 낳
은 가정주부라서 성적 매너리즘에 빠진 탓인지 처녀막의 소중함을 인식할 수 없
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회분위기는 여성의 처녀성을 강력히 요구했지
만 점차 많은  수의 미혼여성들은 그 처녀징표를 점점 떼어내고  있었다. 여성의
처녀성이나 남성의 동정은 `언젠가는 반드시  떼어내야 하는 꼬리표에 불과하다`
는 그 말처럼 나 역시 `언젠가 떼어내야 할 것을 떼어낸, 그래서 오히려 부쩍 성
숙해진 느낌을 받아 결코 싫지 않은 기억`이 바로 그  처녀징표를 떼어냈을 때이
기도 하다.
  그렇다고 처녀징표를 상실한 많은 여성들의 생각이 반드시 나와 같은 것은 아
니었다. 몇 년 전, 나이가 더  많고 또 나이가 많은 만큼 편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친하게 지냈던 동료로부터  숨기고 싶은 그녀의 과거 얘기를 들은 적
이 있었다.
  `현재의 결혼상대자를 만나기 전에 사랑하는 남성이 있었는데 그와는  깊은 관
계까지 갔었다. 그런데 그가  배신하는 바람에 그만 헤어지고 말았다. 괴로운 나
날이 흘러 현재의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지만 과거의 사실이 드러날
것이 두려워 결혼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든다. 그러나 포기하기에는 너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고민을 함께  나누다가 결국은 산부인과에서 처녀막재생수술을 받기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바람직한 결론이 아니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녀 스스
로가 자신의 행동을 책임질 만큼  당당하지 못하다는 점과 첫 관계를 가졌던 그
남자가 아닌 사람과 결혼해서 공연히 갖게 될 죄의식으로 행복한 결혼생활이 어
려워질 것 같아 그녀의 마음이라도 우선 가볍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술을
권했었다.
  수술은 물론 수술  이후의 처리까지 모든 과정을  꼼꼼히 알아본 뒤에 어렵게
시간을 내어 처녀막재생수술을 받고 그녀는 무사히  결혼식을 치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그저 그녀가  진정으로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꾸리길 바랄 뿐이었
다. 그런데 결혼식 이후, 그녀로부터 일절 연락이 없어 또다시 그녀에 대한 안타
까움으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었다.
  실제로 우리사회에는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단순한 쾌락을 위해 이 사람 저
사람 불나비처럼 회유하다가 처녀막재생수술을 받고 유유히 결혼하는 부류도 있
지만 그녀처럼 사랑하는 사람과의  정신적 육체적 결합으로 처녀성을 상실한 후
과거의 사실이 들통날까봐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두려워하거나 죄책감으로 고민
하는 여성들이 많다.
  그 중에 많은  여성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처녀막재생수술을 받고  있어 처녀
성을 잃는(?)  혼전성관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동을 책임질만큼  자발적이고
주체적이지 못한 게 젊은 여성들의 현주소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여성들만 주체적이고  성숙하지 못하다고 탓할 수만은  없다. 그녀처
럼 수술을 받는 여성들이 생기는  이유는 아직 이 사회가 여성에게 처녀성을 요
구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인품이나 건강에 못지않게
처녀성 여부도 결혼상대를 선택하는  귀중한 전제조건으로 삼는 것이 우리의 현
실이고, 혹 결혼대상의 여성으로부터 처녀성을 확인할  수 없으면 방종하거나 크
게 잘못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 단정해버렸던 것이 이제까지 여성
에 대한 우리사회의 인식이었다.
  우리사회가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처녀막에 대한 집착은 부실한 성교육으
로 인한 의학적 지식 부족과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인 양 취급되는 사회적 인식
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단적으로 `첫  섹스 때 반드시 출혈한다`는
공리는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아는 이들이 너무나 적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렇다.
  첫 섹스에서 통증이나 출혈이 없는 여성은 세 명  중에 한 명 꼴로, 어떤 여성
은 태어날 때부터 흔적 정도일  뿐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처녀막을 갖고 태어
나는 수도 있고 또 어떤  여성은 너무 심한 운동을 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사
이 이 귀중한 보증서(?)를 찢어버리기도 한다.
  설령 남성과의 성관계가 없다  해도 처음부터 아예 처녀막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지 않은 여성이 있고 운동으로 처녀막을 상실하는 여성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
은 `첫 섹스`가  아니어도 누구나가 처녀막이 손상될 수 있다는  가능성 역시 증
대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처녀막도 시대와 함께 변하는 모양이다.
  물론 과거엔 처녀막에 얽힌 일화가 많았다.  중국에서는 40년대까지 신랑이 첫
날밤 신부의 핏자국이 있는 이불을 동네  사람들에게 공개해야 했고, 사우디아라
비아에서는 남편에게  처녀성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  다음날 쫓겨나거나 심지어
수장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우리나라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녀성을 입증할 만한  혈흔의 없어 많은 여성
이 혼례를 올린 지 하루  만에 문 밖으로 내침을 당하는 일이 있었고 그 징표가
하필이면 쫓겨난 다음날 발견되는 여성도 있었다.
  이런 비극을 남자에게도 똑같이  주지 않고 여성에게만 만들어놓은 이유는 무
엇 때문일까? 처녀막이 태생하게 된 원인은 여성호르몬 분비가 모자라는 미성년
기 세균감염이나 이물의 침입을 막아주기 위한  보호장막의 기능 때문이었다. 어
쩔 수 없는 보호장막의  기능으로 존재했던 옛날에는 특히 여성들의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탄력성이나 신축성이 약한  것이 원인이 되어 첫 섹스에서 심한 출혈
이 보이기  마련이었다. 또한 오늘날과는  달리 여성들이 스포츠를  즐기거나 문
밖 활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손상 없이 그 원형을 보존할 수 있어 첫 섹스 때
의 심한 출혈이 있었던 것이다.
  문명과 사회여건의 발전과 더불어  체격이나 체질 따위가 예전보다 개선된 현
대사회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사회활동을 하고 스포츠도 즐기고 있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처녀막의  신축성이 높아져 얇게 흔적만 붙어 있는  게 보통이다.
또한 대부분 심한 운동으로 훼손되거나 첫 섹스때 손상을 입게 마련이지만 체질
적으로 처녀막의 신축성이 아주  좋아 섹스시에는 옆으로 젖혀지기만 하고 여러
차례의 분만에서도 끄떡없이 보존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는  여자에게 아직도 하늘거리며 붙어 있는 처녀막으로
산부인과 의사들조차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라고  하니 처녀막으로 동정을 표시
하던 처녀막의  의미는 `온데 간데 없어진`셈이다.  생리적으로 처녀막이 처녀를
상징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쩌다 한 번이긴 하지만 아주 드물게나마 완전히 밀폐된 처녀막이 있는 경우
도 있다고 한다. 이런 처녀막은 질구 가장자리에  문풍지처럼 붙어 있는 다른 처
녀막과는 달리 성문처럼 입구를  완벽하게 막고 있어서 아예 섹스가 불가능하고
생리마저 방해해 당사자에게는 여간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고 한다. 생리를 한
다 해도 밖으로  흘러나갈 수가 없어서 수술을  받아야 치유가 가능할 정도라고
하니 완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이런 처녀막은 오히려 여성에게 해가 되는 셈
이다.
  이런데도 아직까지 첫 교섭  직후의 출혈의 흔적을 발견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나라의 경우를 비롯한 몇몇 나라들이 유난스레 결혼
직전 여성의 성생활에 문제를 제기하지 사실 대부분의 나라들은 그렇지 않은 모
양이다. 우리나라 남성들의  의식과는 달리 독일과 미국의  미혼남성들은 신부의
동정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고 `다소 기교가 연마된 섹스어필한 여성을  오히려
더 좋아한다`고 한다. 독일과  미국남성들의 이런 사고방식도 우리로서는 상상하
기 힘들다고 할 수 있겠다. 거기다 카톨릭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북구제국에
있어서의 성풍속도는 한 수 더 떠서 `프리섹스`라고 한다니...
  그렇다고 이들 나라의 프리섹스가 `성의  무질서`, `성도덕의 붕괴`의 의미처럼
아무 책임  없는 무절제한 성문화라고  단정 짓기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만 결혼 전에만 성관계의 자유로움이  인정되는 `혼전의 프리섹스주의`를 주창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프리섹스주의를 잘 반영해주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의 시청사 앞 광장에 뿔피리를 불고 있는  두 사람의 바
이킹상 아래로 숫처녀가  지나가면 뿔피리가 울린다`는 말이 언제부터인가  전해
져 내려왔지만 현재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녀도 한 번도 그 뿔피리가 울린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나라  대학의 동상들에 얽힌  일화도 여기에
근거를 둔 것이라 짐작된다.
  왜 그런 말이 돌게 되었는지  잘은 모르지만 그 도시에서 숫처녀 보기가 그만
큼 힘들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 게다.  우리와 다른 점이라면 처녀가 없다
는 사실을 우리들처럼 `개탄`하는 이들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전설이 내려올  만큼 덴마크의 여성들은 자유로운 섹스를 즐기고
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그 나라  남성들이다. 그들은 남성 경험이 전무한
여성과 결혼하면 남편에 대한 몰이해로 불화, 파경의  과정을 밟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결혼하기 전에 많은  남성들과 다양한 접촉을 가졌던 여성들이 오히려
남성을 잘 이해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덴마크 남성들의 `관대한` 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 나라 여성들이 자유
로워서 남성들이 예전부터 아예  생각을 달리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행운의
(?) 덴마크 여인들은 가능한 한 빨리 많은  남성들과의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생
각하고 있다. 심지어는  결혼하기 전까지 평균 15명 정도의 남성과  섹스를 경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한다. 가능하면 `자신이 첫 남성
`이길 바라는 우리나라의 미혼 남성들이나, 결혼상대자에게는 `첫 경험인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안고 있는 우리나라 여성들로서는 별천지  같은 이야
기가 아닐수 없다.
  사실 우리사회도 점차 성이 개방되고 있어 과거처럼 `여성에게  첫날밤의 혈흔
이 없다`고 해서 문전박대하는 일은 없어지는 편이다. 그러나 덴마크처럼 자유로
운 연애 경향에다 섹스의 만족을 행복의 중요한 요소로 보는 그들의 의식구조가
창출해낸 프리섹스와는  아직은 거리가 멀다. 그나마  `성개방`이니 운운할 만큼
개방되었다 하더라도 왠지 `양복에 갓을 쓴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그렇다고 그들의 프리섹스는 무조건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활하는
데 부분적인 요소가 되는 성에 대한 일부의 기억이 마치 전 인생을 좌우할 만큼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우리의 성의식에 아직도 문제가 많다
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과거처럼 혈흔이 없다고 쫓겨나거나 목을 매는 현상은 벌어지지 않으니
까 여성들의 의식도 크게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점점 많아지고 있는 혼전 성
관계에 비해 후배동료의 경우처럼 그 책임질 만큼 의식은 육체를 따라가지 못하
는 기형적인 모습을  한 것이 바로 우리사회의 얼굴이다. 대체  언제쯤이나 우리
사회의 여성과 남성들은 처녀막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여성에게도 참을 수 없는 성욕이 있다

  가까운 친척 중에 비뇨기 전문의를 하는 외삼촌 뻘되는 아저씨가 있는데 친정
엄마의 부탁 때문에 아저씨를  뵈러 남성들만 주로 출입하는 남성클리닉을 방문
한 적이  있다. 그나마 여자  간호사가 있어 쑥스러움은  덜했지만 병원대기실에
쭉 앉아 있는 젊은 남성들을 대하기가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저씨를 만나기 위해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원장실에서 중년쯤 되어 보이는
여성이 불쑥 나오는 모습이  있어서 `남성클리닉은 남성만을 위한 곳은 아닌  모
양인가`하는 의아함이 고개를 들었다.  의아함을 던져준 중년여성은 황급히 사라
졌지만 그 여인에 대한 궁금증이 남아있는 터라 얼마를 기다려서야 만난 아저씨
에게 용건보다는 그 여인이 병원을 찾은 연유부터 물었다.
  마침 성의학 칼럼리스트로도 유명한  아저씨는 결혼한 지 오래되지도 않은 조
카에게 들려주기가 어색하다는 듯 여러 번 말꼬리를 돌렸지만 짓궂을 정도로 아
저씨의 말꼬리를 놓지 않은 덕에 의외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방금 전 그 여인은 우리 병원의 단골환자로 지금은 성욕감퇴주사를 맞고 돌
아가는 길인데...”
  `성욕감퇴`. 여성들에게는 없는 것으로 알았던, 아니 있어도 `얼마든지 참고 견
딜 수 있는 것`으로 알았던 그 성욕으로 중년의 여인이 병원 문을 두드리다니...
  남편이 당뇨를 앓고 있어 거의  성생활을 못 하고 있는 그녀는 주기적으로 찾
아오는 성욕을 견디지 못해 병원에서의 도움을 받아야 성욕을 억제할 수 있다는
아저씨의 장황한 설명이  뒤따랐다. 그러나 성욕감퇴주사라는 그  한마디로도 그
동안 내가 가졌던 `성욕은 능히 참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생각은 여지
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저씨의 설명대로라면 처음 그녀가  병원을 찾아왔을 때 그녀의 모습은 정상
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안절부절 못했고 시선은 먼 곳을
향해 있을 뿐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여서 가까스로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한다. 아저씨는 약물 치료로 성욕을  잠재우는 방법
을 권했고, 그녀 역시  그 제의를 받아들여 한 달에 한  번씩 성욕감퇴주사를 맞
기 위해 병원을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성욕감퇴주사를 맞는
다는 것은 결국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성욕을 의사의 도움 없이 혼자서는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정도라는 것 아닌가.
  아저씨 말에 의하면 `여성에게도 거부할 수 없는  성욕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
는 학자들이 꽤 많다고 하니  여성의 억눌린 성이 조금씩 빛을 보게 되는 것 같
아 한편  반갑기도 했다. 여성의  성욕설을 주장하는 사람중에  인류학자인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현장에서 얻은  많은 실례를 들어 `여성의 성욕은 배란기에  확
실히 높아진다`는 성욕주기설까지 내놓고  있고, 젊은 학자들의 일부는 성주기에
만 발정해서 생식의 절대적  기회인 배란기에만 교미하는 원숭이의 예를 들면서
까지 여성의 성욕을 설명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능히 참을 만한 것으로 알았던 성욕에 대한 나의 인식에  `여성에게도 참을 수
없는 성욕이 있다`는 주장과 `주기적인  성욕설`은 막연한 생각에서 과학적인 근
거로 인한 명확한 지식으로의 전환을 이루게 해주었다.
  성욕주기설과 원숭이 사례를 드는 학자들은 기혼,  미혼여성을 대상으로 한 조
사에서 `미혼여성의 섹스는  단연 생리기간중에 많고 오르가슴의 빈도도  높았으
며 기혼여성은 미혼여성보다  빈도가 다소 저조했지만 마찬가지로 생리기간중에
욕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여성에게  원숭이처럼 생리기간에 대응하는 성
욕의 바이오리듬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것이
다.
  더구나 여성에게도 남성 못지않은  성욕과 주기가 있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해
서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니 놀라웠다. 다만 그 옛날 동물시대의  흔적이 엿보이
는 몇 가지 증거를  설명하기 위해 원숭이를 운운하면서까지 여성의 성욕주기를
설명하는 것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과 한낱 동물에  불과한 원숭이`를 마치 유사
한 부류인 양 취급하는 것 같아 다소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는 게 흠이랄까?
  발정기에 보이는 강한 성욕은 인간 종족을 위한 자연적인 섭리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생리기간중의 성욕은 설령 그렇다고 해도  선뜻 이해되기가 어려운 면이
없진 않았지만 원숭이의 실험을  들면서까지 여성의 성욕설을 연구한 그 사실에
는 일단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아마 남성이라면 아무리 사회적으로  그 성욕을
억제했다 해도 여성처럼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테니 여성의 인내력에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이제는 남성의 전유물로만 알았던  성욕을 여성도 통념 이상으로 느끼고 있다
는 사실을 굳이 젊은 학자들의 실험 결과는 들어서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체험
`으로 알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알고 있어도 자
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좀  점잖지 못한 끼 있는 여성한테서나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보려는 경향은 여전하다.
  역시 대부분의 남성들은 여성에게는  능히 참을 만한 것이며 남성의 능동적인
성욕에 비해 극도로 수동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쯤으로 이해하려는 경향 때문
에 `실제로 여성도  참을 수 없는(?) 성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여성에게 있어서 성욕은  능히 참을 수 있는
것이었던 게 아니라 사회가 여성에게 참도록 강요해왔다고 해야 옳은 표현인 것
같다. 어쩌면 아예  없는 것에서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생각을 수정하게  된 탓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참을 수 없는 성욕이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여성의 성욕이 `남성 못지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남성들은 부담
스럽고 버거웠을 것이다.  욕구를 채워주지 못해 갖게 되는 열등감도  그렇고 그
때마다 일일이 신경  써야 하는 부수적인 문제(예를  들면 피임 따위들)도 있고,
남편의 오랜 출장이나 병중에 있을 때 생기는 의처증 등이 있을 테니까.
 그래서 지난날 여성들, 특히 혼자된 여성들에게 그토록 정조를 중히 여겨 `열녀
비`를 세우면서까지 `독수공방`한 것을 찬미해  만인의 모범이 되게 했던 건지도
모른다. 성적 욕구란 어차피 생득적인 것이므로 아예  없애버릴 순 없고 하니 적
절한 `상벌`을 통해 길들이고 꽁꽁 묶어두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잔재가 아직까지 계속되긴  하지만 의학계의 일부에서 실험과 근거를 제시
하여 여성에게도 성욕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만으로도 여성의 성욕이 남성 못지
않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성욕이 `능히 참을 만한 것이냐
` 아니면 `남성들처럼 참지 못할 정도냐` 그 차이일 것이다.
  여성과 남성의 성 반응이  다르다는 사실이 바로 여성들조차도 여성에게는 성
욕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게 했던 요소일지도 모른다.  그 점이 남성과 여성의 성
욕에 대한 차이를 불러오게 한 것일 수  있었다. 즉흥적으로 발동하는 남자의 성
욕에 비하면 여성의 성욕은 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표시가 안 나는 게 보통이
다. 그래서 여성의 성욕은 적어도 표현하지 않는 한 타인이, 혹은 자신마저도 알
기가 어렵다.
  게다가 과거부터 워낙에 성을 부정하고 더러운 것으로 터부시해왔으니 그나마
표현을 하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여성의  성은 아예 드러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성에게는 성욕도, 성에 대한 반응도 없는 것으로 인식해왔던 것이다.
  요즘 들어서는  남성들의 사고방식도 많이 달라져서  오히려 무반응인 아내의
태도를 못마땅해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표현하지 않도록  길들여진 여성의 성이
달라지는 데도 역시 시일이 걸릴 문제다.
  아저씨가 도움이  될 거라며 건네준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내용을 발견했다.
여성의 성욕을 테스트하기  위해 미국에서 실험에 대한 내용이다. 한  사람의 여
성에게 남자 파트너를 교대로 섹스를 강행하여 30회를 넘었는데도 여성실험자는
여유만만했고 이 실험으로 여성 섹스능력의 무한성을 입증할 수  있었다니 `믿거
나 말거나`로 치부해버릴 이야기 거리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실험을 준비한
사람들조차 여성의 성적 능력의 무한성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하나 더 놀라운 것은 성 관계자들의 문헌에 남자가 섹스를 치를 수 있는 한계
는 `대략 70세까지인 것으로 확인된다`고 적고 있지만  여성은 연령에 제한 없이
무덤에 들어가는 날까지  섹스가 가능하고, 그에 비례할 만큼 강인한  정력을 비
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과거 여성들에게 성욕을 참을 것을 강요하거나 교육하지 않고 있는 그대
로의 느낌과 욕망대로 행동하게 했다면  현재 이 사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까.
  지금과 같은 부계사회가 되기  이전의 군혼사회로 거슬러 올라가면 여성이 한
명 이상의 남편을 거느리고  살았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때만  해도 여성이 담당
했던 일은 나물과 야채를 캐거나 과일을 따는 것으로 비교적 안정적이었지만 남
성들이 주로 담당했던 사냥은 언제나 충분한 먹을거리를 구해올 수 있다는 보장
이 안 되고 위험성이 따라  많은 사냥꾼을 필요로 해 여성의 확실한 종족번식능
력은 그 자체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다가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가축과 농사로 `있는 입을  채우기에도 급급
하던` 시절에서 여유분이 생기고 그것을 축적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군혼에서 일
부일처제가 되었다고 한다. 일부일처제는 말이 그럴싸하게  한 남편과 한 아내의
결합이라는 합당한 공식처럼 들리지만 실은 법적으로 정해진 한 아내에 의한 자
손으로 그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확실한 남편의 확실한 자
손`을 위해 비교적 자유로웠던 여성의  성을 억압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여
성의 성적 욕망도 `참고 견뎌내야 하는` 그리고  성에 있어서는 수동적인 자세를
강요받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도 인간임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그 동안 눌러왔던  여성의 성
욕은 더 이상 억제할  수 없는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마치 프리섹스 선언처럼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긴 하지만 이제는 여성도 성
적인 기지개를 펴야 할 시기가 된 것 같다.  여성도 성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는, 그리고 여성은  그에 걸맞는 성적 능력을 충
분히 가진 존재이며 존재의 권리를 마음껏 행사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깨달음
때문이다.

모자 쓴 남성을 사절해야 하는 이유

  요즘 남성들은 주변에서  굳이 귀띔해주지 않아도 결혼하기 전, 아니  훨씬 이
전부터 으레 치러야 하는 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있다. 결혼을 앞둔 사
람이라면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하는 포경수술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결혼초기
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혼생활을 하게 되면서 포경수술이
갖는 의미에 눈뜨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바깥사람도 기본적으로 했
어야 하는 것을 전혀 받지 않은 경우에 속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다른 사람은 다 알아서 한다던데. 이건 뭐야 기본적인
예의도 없으니.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하는 생각에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주변에 그런  남성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
었다. 물론 그런 남성들의 연배가 이미 30중반을 넘어선, 시대 감각에 좀 뒤떨어
질 소지가 많은  이들이었다. 아마도 요즘 사람들에게 만약 그런  이야길 꺼냈다
가는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느냐`며 되물음만 받게 될 것이다.
  몰랐다면 모르지만 안 이상에는 조급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것
은 일단 접어두더라도 문제는  `벗었다 썼다 하는 모자 때문에 발생하는  불결함
으로 여성에게 자궁암을 불러올 수 있다`고 한 친구의 말처럼  나의 건강과도 직
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결혼하기 전 했어야 하는  것을 치르지 않은 남편의 무성의에도 화가  나는데
남편의 그 무성의함이 나에게 치명적인 질병을 안겨줄 수도 있다니...` 싶은 생각
에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신혼 초만 해도 남편은  유난히 씻는 시간
이 길었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아예 세수도 하지 않고 그냥 잠드는 날이
많으니 남편의 청결함은 점점 신뢰도가 떨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하면서도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수술을 받게
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있었다. 그리고 남편을 설득시키려면  그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서점에 나가  관련서적을 구해보는 적극성까지 띠기
시작했다.
  `섹스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페니스의 모자는  귀두가 항상 포피로  덮여
있음으로 인해 페니스 포피에서 분비된 땀이나 피지 같은 것에 피부와 점막에서
나온 비듬 같은 것이 한 데 접혀서 항상 치구가 끼게 된다.`
  인간의 본원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는 배설욕과 성욕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그곳에 만들어진  일종의 `함정`이라고 해야 할까.  남자는 27센티미터에 달하는
긴 요도 때문에 오줌을 배설하고 난 후에도 약 7cc 정도의 잔뇨가 남아 있어 그
나마 말끔히  제거하고 닦아내면 다행이지만 만약  포경인 사람이 위생처리마저
제대로 못 하면, 오줌  방울은 포경이 된 포켓 속에 남았다가  온도의 변화로 인
해 오줌 속의 요소가 암모니아로 변하면서 일으키는 화학 자극으로 염증을 만들
어버리게 된다. 더구나  주성분이 피지이므로 고약한 냄새까지  동반하게 된다고
한다.
  또한 오줌찌꺼기로 발생한 암모니아의 화학성 염증에다 치구는 박테리아의 성
장에 더 없이 좋은 온실이  되어 세균성 염증을 페니스에 더해주게 돼 하루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심한 경우 남성의 기능에 치명적인 지장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남성의 모자로 생기는 치구도 억울할 텐데 귀두가 완전히 노출되
는 정상적인 페니스에 비해 포경인 경우는 7,8배나  성병에 잘 걸리는 것으로 조
사 결과 나타나 남성의 포경은 이래 저래 필요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시켜주
고 있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특히 난치성 성기허피스는 포경으로
잘 생기고 그 외에도  귀두포피염이나 요도염은 물론 남성 자신에게는 음경암을
가져다주고 여성에게는 자궁경부암의 주요 원인이 되는 허피스 바이러스가 82퍼
센트 이상 서식하고 있다가 상대 여성과의 성관계 때 치구가 씻겨 자궁경부암을
일으키고, 이외에도 여러 가지 부인과 질환을 불러오는 요소가 된다고 한다.
  이 정도가 되다 보면 제 아무리 잘 생기고 돈 많은 남성일지라도 악취를 발산
하는 음경의 주인과  즐거운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여성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포경이 주는  불결성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겠지만 남편으로부터  `
꼼짝 없는 항복`을 받아내려면  더 많은 항복조건을 만드는 게 나에게  유리하다
는 생각이 들어 그 책을 마스터하고야 말았다.
  모자로 인한 불경성도 큰 문제였지만 남성에게 가공할 만한 장해는 남성의 자
존심을 여지없이 뭉개버리는 새로운 사실에 있었다.  페니스의 귀두가 항상 포피
로 덮여 있어 귀두의 발육이 저조하고 코끼리 코 모양의 유아형 음경 때문에 같
은 사이즈라도 훨씬 작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들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공중 목욕탕에서 귀두가 충분히
발육된 다른 사람의  페니스를 곁눈질해 보면서 열등감을 느껴  `단소 콤플렉스`
를 갖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성숙된 페니스와 성숙된  그것 사이
에는 외관상 차이가  있게 마련인데 옆에서 보는  남의 것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신의 것이 크게 달라보일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결국 남성들의 단소 콤플렉스
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불결과 단소  콤플렉스라는 결정적인 `단서`를 가지고 남편  설득 작업에
나섰다.
  “포경은 치구를 끼게 하는데 그 치구가 남성에게는 각종 성병과 음경암을 일
으키게 하고 여성에게는 각종  부인병과 자궁암을 가져오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
래.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포경수술을 받지  않으면 귀두가 껍질로 싸여서 발달
이 안  돼 채 자리지 않은  모양으로 남아 있고 조루현상까지  불러온데. 그래서
남성들은 결혼 전에 반드시 수술을 받는 모양인가봐.”
  남편이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도록 하려고 되도록이면 간단히  말했고 `당연히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하기 위해 가볍게 말했지만 어딘가 엉성한  기분
을 떨치진 못했다.
  한편으론 왜  이러면서까지 남편의 수술을  권유해야 하나. 남편은  왜 스스로
알아서 하지 못해 아내로 하여금  별 것 다 신경 쓰는 여자로 만들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자 은근히 부아도 났다.
  물론 포경수술을 받으면 어떻게 달라지는지, 무엇이  좋은지 수술을 받은 이후
의 이점도 역시  전달해야 했다. 그런데 포경수술이 갖는 의미는  불결함과 단소
콤플렉스 제거보다는 음경암을 줄일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 같았다. 예로
부터 포경수술을 받아온 이스라엘,  파키스탄의 회교도와 피지섬의 주민들한테서
는 음경암이나 자궁암을  거의 발견 할 수가  없었고 성기의 손괴를 터부시하는
중국인에게는 음경암과  자궁경부암이 가장 많았다고 하니  수술 이후의 이점은
말할 필요조차 없지 않은가.
  그런데 포경수술은 정작 중년 이후의 남성에게  더욱 필요하다고 한다. 피부가
가죽처럼 질기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나이를 먹으면 피부의 탄력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섹스시 피부의 접촉을 노화된 포피가 감당하지 못해 섹스 때마다 과장된
포피가 접혔다 펴지면서 곧잘 찢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모자`는 처음부터  인간에게 귀찮은 존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인간이
두발로 직립하기 이전에는 동물처럼 음경이 배변이나 교미 등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만 골반 속에 숨어  있다가 외부로 돌출하곤 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하
니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직립하게 되면서 자체가 짊어지는  내장기관의 무게가 커감에
따라 내장되어 있다가 필요할 때만 돌출되는 음경의 자율적 기능이 크게 둔화되
는 대신 치질과 포경이라는 병고를 겪게  되었다. 가시덩굴을 헤치고 야생생활을
해야 하는 원시사회 그것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에 의해 태생학적으로 만들어진
포피과장은 치골 속에 숨겨져  있다가 돌출되는 기능을 잃어버린 후에도 숙명적
유산으로 남게 된 것이다.
  결국 야생생활의  유물로, 거친  자연환경으로부터 귀중한 신체부위의  손상을
막기 위한 일종의  덮개 같은 것이 바로  포경, 남성의 모자였던 것이다. 아직도
보수적인 노인들 가운데는 포피가 음경 보호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어 음경에 문제가 생긴다  해도 `포경수술을 받지 않고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동물에 예를 들면서 저절로 해결된다`고 마는 분들이 많다.
  골반 속에 깊숙이 감춰져 있다가 필요할 때만 돌출하는 동물의 음경은 포피와
음경의 길이가 꼭 맞아 사람처럼 평생을 짊어져야 하는 포경관련 질병이나 치질
이 없지만, 남성의 음경은 실체에 비해 포피가 훨씬 여유가 있는 편이다. 귀두가
포피로 반쯤 덮여 있다가 발기가 되어야 비로소 귀두가 노출되는 반포경 상태나
귀두부가 완전히 포피에 덮인 채 마치 코끼리  코 모양처럼 되는 가성포경 상태,
귀두가 완전히 포피로 둘러싸여  있지만 포피륜이 너무 좁아서 귀두가 벗겨지지
않는 진성포경 등이 이에 속한다.
  간혹 귀두의 완전 노출이 가능해서 그것을 자랑하는 남성도 있지만 과장된 포
피가 귀두를 다시 덮어씌워 귀두의 완전 노출된 상태가 오래 유지되지 못하기가
쉬워 수술을 받지 않는 한 모든 남성은 제대로 발육하지 못한 음경을 그대로 간
직할 수밖에 없다고 하니 `불쌍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성`이 아닐 수 없다.
  비록 30중반을  넘어서서 시대의 흐름을 기민하게  따라잡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불결의 대명사인 포경, 즉 모자를 쓰고  있는 남편과의 잠자리는 이미 실상을
알고 있는 이상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비뇨기병원에 전화상담을 하기까지
했는데 그 의사에  따르면 `출생 직후에 바로 수술을 받는  것이 가장 적기`라며
이미 남편의 `때늦음`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신생아는 아직 신경세포의 미숙으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별다른 마취 없이  수술이 가능하고 발기도 없어서  봉합과 발사의 과정은 물론
치료까지 생략할 수  있어서 편리하단다. 만일 그 적기를 놓쳤다면  아동 심리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나 수술의 편의상 사춘기 이후가 유리하다`고  설
명했다. 사춘기에는 남성의 심벌에 대한  수술로 `뭔가 달라진` 느낌을 줄 수 있
어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편의  경우는 `도저히 불가능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출생직후와
사춘기의 수술적정기가 지났다 하더라도 40대에 생길지도 모를 음경암과 자궁경
부암의 방지를 위해서 나이를 불문하고 하루 속히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
닌가!
  더 나이를 먹기 전에 남편의 포경수술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 이 나이에...` 라는 이유로 발뺌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선뜻 용단을 내리
게 할 뾰족한 대안이  없는 게 문제였다. 이미 할 만큼  노력을 했는데도 남편은
계속해서 미루기만 했다. 방법은  단 하나, 비상의 무기를 쓰는 도리밖에는 없었
다.
  “당신, 수술받기 전까지는 잠자리 같이 할 생각 말아요!”

여성의 불감증, 개발부족이 원인

  이젠 영락없이 아줌마가  되어버린 친구들과의 모임에서였다. 아이  키우는 일
이나 집장만에 얽힌  한참 동안의 수다가 시들해질  무렵 재미있는 주제가 불쑥
등장했다.
  “이런 얘기를 하려니 좀 어색하지만 너희들  아니면 물어볼 데도 없고... 내가
이상이 있는 건지 아이를 낳았는데도 오르가슴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 도대체
그 오르가슴이라는 게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건지 너희들 경험을 좀 들었으면 좋
겠는데...”
  느닷없고 엉뚱할 뿐더러 `잠자리학` 중에서도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는 오
르가슴이 화제로 오르자 전혀 예상하고 있지 못했던 친구들은 일순 긴장했고 한
편으론 `재미있다`는 듯 묘한 얼굴을 짓기도 했다. 단둘이 만났을 때라면 모르지
만 여럿이 만난  동창모임에서 그것이 화제로 꺼내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친구의  고민이 컸다고 볼 수도 있다.  질문을 던진 친구가 `괜스레
그런 말을 꺼냈나` 싶을  정도로 친구들 사이에는 어색한 웃음과 긴장이  감돌았
다. 말 많은 아줌마들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런  이야기를 화재로 삼을 만큼 뻔
뻔해지진 못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잠자리`만큼은  부부만의 영역으로 묶어두려
는 이기심이나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질문을 던진 친구가 `밑지는 장사를 했다`고 얼버무리려  할 정도로 얼마의 시
간이 흘러서야 그래도  제일 오랜 결혼생활의 경력을  가진 친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지. 마치 봇물 터지듯 한다고나  할까? 폭발하는 것 같
은 격렬함이 적절한 표현인 것 같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빠지게 되더라.”
  “나는 좀 틀려. 캄캄한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야. 바닥도 보이지 않
는 구덩이 속으로 끝없이 떨어지는 그런 느낌.  아마 어디 문학소설에 나온 표현
인 듯도 하지?”
  그 친구는 여러 명의 친구가 한 마디씩 하는 얘기를 듣고는 역시 그런 느낌을
가져보지 못했는지 더욱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르가슴에 관해 나름의 정
의를 내리고 있는 친구들의  얘기를 의미심장하게 듣고 있던 나도 그들처럼  `그
순간`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조금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 역시 오르가슴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 나도 불감증인걸까?`
  전문의들은 오르가슴도 느끼는 방법이  제각기 다를 뿐이지 오르가슴 만큼 불
확실한 것은 또한 없다고들 한다. 개인차가 큰 탓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쾌감
이 아닌지도  모르고 오르가슴에 도달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것이 황홀경이라
믿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활홀경이란 그만큼 다양하고 주관적이라
는 것이다.
  어디선가 얼핏 들은 이야기 중에 `여성도 포경수술을 받으면  성감이 촉진된다
`는 말이 있었다. 간혹 그 포경수술을 위해 비뇨기과를 찾는 여성들이 있다는 사
실에 우선 놀라웠다. 유명한 칼럼리스트가 쓴  사랑학 교실에서 여성의 포경수술
의 근원은 `아프리카의 할례의식`에  있다고 했다. 여성에게 있어서 성감이 높은
부위인 클리토리스를 어렸을 때  잘라 버리는 인습인데 여성에게 있어서 중요기
관이 제거되었으니 성적으로도 불행할  것 같지만 사실은 섹스의 내용이 농후해
져서 그 할례의식으로 오히려 여성을 더욱 즐겁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클리토리스가 없는 대신  피부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져 온몸이 클리토리스화할
뿐 아니라 남성들이 클리토리스가  제거된 여성의 핸디캡을 감안하여 온몸에 정
성껏 애무를 하여  섹스내용이 더욱 농후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여성
의 포경수술로 성감이 촉진됐다기보다는 `가장  예민한 부분이 제거되었다`는 사
실이 남성들로 하여금 충분한 전희를 갖게 해 여성을 절정의 순간까지 끌어올리
게 만든 것이었다.
  더욱 높은 성감을  위해 포경수술을 받는 것이라면 `불감증`을  의심한 여성들
보다는 설령 더 높아지는 성감을 경험하지 못해도 문제될 것은 없겠지만 불감증
을 호소하는 경우의 여성이 포경수술을 받은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
이었다. 그러나 성의학 전문가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자신이 불감증이라고 호
소하는 여성들의 70퍼센트는  불감증이 아닌 정상`이었다고 해 오르가슴을  느끼
지 못하는 여성을 놓고 `불감증 환자`로 보는  경향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을
정도로 불감증에 대한 의심도는  높다고 한다. 의사들이 상대한 `자칭 불감증자`
들은 의학적인  견지에서의 불감증보다는 성적으로 잘못된  편견이나 성 지식의
결여에 그  원인이 있는 경우, 혹은  남성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로  대부분 쉽게
고쳐져서 정상적인 성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본래 불감증이란 성행위시 신체상으로 고도의 환희점에 이르는 즐거움을 갖지
못하는 것을 일컬으며 정도의 차는 있겠지만 어쩌다 오르가슴을 한 번쯤 경험한
다 해도 극히 미미해 만족할 만한 경험이 못  되면 또한 `불감증`이라고 정의 내
리고 있다.
  `당신이 알고 싶은 성에 대한 모든 것`이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 데이비드 류
벤 박사는 저서에서 불감증이라는 표현보다는 성욕의  결여, 또는 성행위시 쾌감
을 느끼지 못하는 증세로 `오르가슴 불능`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에 의하면 불감증이라고 진단을  받은 대다수의 많은 여성들은 불감증이 아
니라 `단순히 성적 자극을 덜 받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또한 남성의 발기된 성
기가 여성에게 삽입되고 나면 여성이 오르가슴을 느끼거나 못 느끼는 것은 당사
자인 `여성의 책임`이라고 믿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이 바로 여성으로 하여금 `불
감증인가` 하는 좌절감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본래 성이란 부부가  함께 극도에 쾌감을 공유해야  하는 것으로 충분한 노력
없이 여성을 성적인 불감증 환자로 낙인 찍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한다. 그렇다
고 한다면  신혼 때부터 줄곧 `오르가슴  무감지 상태`가 지속된  친구의 경우는
자신의 사정 시간을 상대 여성의  오르가슴 도달 시간에 맞추지 못하고 일찍 사
정해버린 남편과 자신의 신체에  대한 연구와 두 사람만의 고유영역을 개발하고
노력하지도 않은 채 불감증의 원인이 자신의 육체에 있는 것으로 단정하고만 친
구에게 책임이 있었다.
  많은 남성들, 특히 성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한 남성들은 성관
계하면 으레 발기, 삽입, 사정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순서만으로도 쾌감
을 느낄 수  있어서인지 여성의 성도 막연히 `그럴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경우
가 많다. 그러나 여성의 성은 남성과 달리 좀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는 탓에 남
성의 성처럼 발기와 삽입, 사정만으로는 쾌감을 얻기가 어렵다.
  남녀의 성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설명할 때  흔히 `남자의 그것을 칼`이
라고 표현하고 `여성의 그것을  칼집`이라고 비유하는 것만큼 적절한 것은 없다.
어떻게 들으면 칼과 칼집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
계로 제법 그럴 듯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금새 벨 것처럼 칼은 날카롭
고 칼집은 그 날카로운 칼을 보호하고 감싸고 있을 만큼 무뎌 남녀의 성이 얼마
만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비디오나 외설소설 따위에서는 남자가 사정할 때 정액의 촉감을 여성이 질 속
에서 느끼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어 진실을 모르는 남성이나  여성들에게 `여성의
불감증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는`  헛된 환상만 만들어 주고 있지만 실제는  그와
달리 칼집에 해당되는 질구에서 2센티미터만 들어가면 거의 무감지대라고 한다.
  날카로운 칼에 비해 칼집이  얼마나 둔감한지 5명의 산부인과 의사가 900명의
여성성기의 각 부분을  바늘로 찔러 감각을 알아본  결과 가장 예민하게 반응을
보인 곳은 음핵이었고 그 다음으로 소음순,  질전정, 회음의 순이었다고 한다. 섹
스 때 가장 중추적 역할을 하리라고 상상했던 질벽이나 자궁경부는 거의 무감지
대인 것으로 밝혀졌고.
  `어느 정도로 여성의  질이 무감각한가` 하면 그 부위의 염증을  치료할 때 마
취 없이 절제하여도 전혀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통증이 있다면 아
기를 낳을 때 산도 확장으로  생기는 고통 때문에라도 아무도 아이를 낳으려 하
지 않을 것을 조물주가 미리 배려해서인지 그 부분에 각별히 지각신경이 분포되
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아이를  키우고 낳는 생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 성감을 위해 특별히  하는 일이 없는데도 많은 남성들은 섹스  때 생기는 쾌
감이 질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기가 예사다.
  그러나 섹스 때 생기는 쾌감은 질벽 바로 위에 있는 요도에 전달되는 자극 때
문이고 깊은 삽입으로 우러나는 쾌감은 질전정에 대한 가벼운 압박에 의한 것이
다. 사실 오르가슴이란 질  벽이 아닌 클리토리스에서 나오는 것이다(클리토리스
는 가장 예민한 성감대로 모든  성적 만족이 이곳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다).
  이렇듯 여성의 복잡한 성구조만큼  성에 임하는 신체상의 과정도 페니스의 발
기만으로 즉각  출동 준비를 마치는  남성에 비해 여성의  준비작업도 복잡하다.
우선 남자의 성적  접근을 받은 여성의 대뇌중추는  성적 흥분을 성기로 보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여성기에 분포하는 혈관들이  혈액으로 충만해져서 페니스의
발기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이때 질의 안 벽으로부터  윤활제가 분비되어 섹스를 부드럽게 진행시켜줄 만
반의 준비를 갖추게 되고 성의  가장 중심역할을 하는 질도 페니스에 알맞게 이
상적인 원통모양이 된다고 한다.
  이처럼 여성의 성이 남성보다 복잡한 과정과 구조로 된 탓에 여성이 오르가슴
을 경험하려면 적어도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충분한 섹스 시간이 있어
야 한다. 이런 사실은 잘 모른 채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하는 성관계가 계속해서
반복되다 보면 친구처럼 `잠자리의 이상`이 발생하게 된다.
  또한 불감증을 호소하는 여성은 자신이 불감증이라고 판단하는 순간부터 성적
좌절감이나 상대에 대한 자기방어의 관념 속에 지내게 되고 성적으로 만족을 얻
지 못하므로 감정적으로도 좋을  리가 없어 남편의 애정표현에도 감정적으로 반
대하거나 무감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거의 모든 여성이 3년  이내에 오르가슴을 느끼게 된다고 하지만 그 유예기간
이 지나도 느끼지  못한다고 불감증으로 단정하고 미리 체념해서는 안  된다. 상
대방을 위한 헌신적 노력의 자세만 확립돼 있다면 ` 관적인  판단으로 규정된 불
감증`  문턱을 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배로부터 들은 얘기 중에 30대 후반을 바라보는 어느 여인이 불감증을 고민
하다가 병원을 찾아 불감증을 말끔히 고친 예가  있었다. 그 여인은 바로 후배의
친언니였다. 적어도 후배가  보기에는 오히려 각별하면 각별했지  부부애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고 했다.  그 여인의 방문을 받은 병원에서는 남편의  상담까지 요
구해 두 사람을 다 진찰했지만`오르가슴 전선`에 문제가 될 신체적 이상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단지 특이한 것은 여성의 `과거`였다. 10세 무렵 우연히 어머니와 아버지가 성
관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여러 번 그 현장을 목격했을 뿐이
었는데 결혼을 한 지 5년이 돼도 오르가슴에 이르지를 못해 병원문을 두드린 것
이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어렸을 때의 그 일이 심리적으로 영향이  미쳤을 것
으로 보지는 않았다.
  여성 쪽의 오르가슴 불발의 원인을 성적개발의 미진에 있는 것으로 보고 병원
에서 여성의 신체부위에  자극요법으로 치료를 3개월 간 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자극 정도로 하다가 다음에는  크림을 이용한 마사지를 이용했고 다음에는 성감
도가 민감한 부위들을 집중적으로  자극하는 방법을 썼고 똑같은 방법대로 남편
이 실행토록 한 결과 3개월 만에 처음으로 오르가슴을 경험할 수가 있었다고 한
다.
  그러나 여성의 절정은 남성의 사정처럼 분명하게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또
어느 것이 진정한 오르가슴인지 파악하기조차 어려운,  다분히 심리적 요소와 관
련이 깊기 때문에 후배 언니의 경우와 같은 치료방법외에 심리요법이 필요한 경
우가 더 많다고 한다.
  후배 언니의 경우는  어렸을 때의 기억과 개발부족이 여성의  `오르가슴 불발`
을 초래케한 것이지만 대개의  여성들은 가정이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자신의 중요한 생식기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어 불감증이 찾아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혹은 어렸을 때 강제로 처녀성을  잃었다거나 부모의
성행위를 우연히 보고 나서 배신감이나 섹스에 대한 반항심 같은 것을 마음속에
키운 까닭에 성장해서도 원한이나  적개심을 갖고 있어서 오르가슴을 못 느끼는
경우가 있고 성행위에 대한  공포심이나 불안감이 커도 불감증이 초래된다고 한
다.
  한편 통증으로 고통을 받는  아내들도 있는데 이런 증상은 질감염증이나 자궁
내막증이 있을 때나 출산 직후 회음을 절개한  상처가 회복되지 않았을 때, 에스
트로겐 공급이 저하되면 질이 건조해지는 폐경기 때의 신체적 변화로 자주 발생
한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도 통증을 느낀다면  그 원인의 대부분은 성 지
식의 부족 때문이라고 한다.
  부부라면 남편과 아내가 똑같이 극치의 오르가슴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남성과 여성은 성반응과 그 과정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본격적인 성
생활에 들어가기 전  남성은 여성에 대해, 여성은 남성에 대해  충분한 사전지식
을 갖추어야 남편이나  아내로서의 자격이 비로소 주어진다. 그 노력  없이 남성
은 여성이 `반응이 없다` 혹은 여성은 남성이 `너무 무드가 없다`고 속단하는 것
은 함께 생활하고 성을 나누는 부부로서 자격이 부족한 탓이라고 볼 수 있다.
  부부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공히 극치의 오르가슴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상당수의 여성들에게 있어  오르가슴은 그리 공평한 존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여성은 물론 상대 남성까지 `무능력자`라는 열등감에
까지 이르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어느 한쪽이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한다면 결국은 다른 한쪽도 단순한
쾌감은 있을지 모르지만 두 사람의  조화된 하모니가 만들어질 때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오르가슴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삽입 위주의 성관계만을 일삼는  남편이라면 분명 남편의 책임이 크겠지만 남
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르가슴  불능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라면 여성의 수동
적인 자세에 더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다. 남편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주는 완벽한 존재가 될 순 없기 때문일 뿐더러 그런 기대 자체가 여성 스스로
자신의 성을 억압하는 행위인 탓이다.
  오늘부터 숙제  하나가 더 는  셈이다. 모든 감각과  신경세포를 동원해서라도
자기자신에 대해 탐구해보고,  남편에게도 일러주어야 하므로, 그것은 비단 불감
증의 극복이나 쾌감의  증대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부부 삶
의 행복지수를 증진시키는 일이라면 당연히 심혈을 기울여 노력해야 할 일이 아
니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너무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가능하다면 즐겁고  센스 있는
대화방법을 연구해보자. 기지와 센스가 살아 있는  부부의 성생활만큼 즐거운 일
이 어디 또 있겠는가?

아이를 낳으면 여자가 더 밝힌다는데...

  임신 6개월이 된 상태에서 동창회에 나간  적이 있었다. 자리에 나온 친구들은
대부분이 남자들이었고 여자래야  고작 2,3명밖에 안 되었다. 남자동창들 중에는
이미 애들이 꽤 큰 친구들도  있었고 아이가 태어난 지 다섯 달 정도밖에 안 된
신참아빠도 있었다. 한동안  주거니 받거니 하는 술자리로  분위기가 떠들썩하는
중에 느닷없이 `아이를 낳으면 여자가 더 밝힌다고  하던대 너의 경우도 그랬냐`
는 물음을 신참아빠가 대뜸했다.
  내심 그런 말을 여러 차례  들어왔던 차였기에 질문을 받은 동창의 대답이 어
떨지 몹시 궁금했고 그의  대답이 신참아빠보다 더욱 진지해 농담인지 진담인지
를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 그 말은 맞는 말이야.  너도 곧 닥칠 일일 테니까 만반의 준비를 해야
될 거야.”
  거기에다 한술 더 떠서 `아이 2명을 낳은  여성은 더욱 그것을 밝힌다`는 말까
지 덧붙였다. 임신  상태의 여자동창을 두고 말하기가 불편하다는 듯  어색한 웃
음까지 띄워가며  건넨 그들의 대화는 너무  진지했다. 나 역시 아이를  낳은 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예 남편과의 잠자리를 피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
고 있었다.
  그들이 어색할 정도의 진지함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후에도 한동안 그들이 대
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성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풍부하게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결혼을 하게 되고 본격적인 성생활에 들어가게 돼 오르가슴이 무엇인지 채 느끼
지도 못하는 결혼생활을  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다가 임신을 하게  되면 오르가
슴과는 더  먼 성생활을 하게 된다.  임신이라는 어쩔 수 없는  생리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여성이 오르가슴을 느끼기가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닌데 임신마저 하
게 되면 몸 안에 한  생명을 키우고 있다는 또 다른 역할 때문에 정신적인 긴장
감은 커져서 오르가슴은 더욱 멀어지는 것이다.
  이토록 여성에게는  힘겹고 멀게만 느껴지는 그  고지가 남성들에게도 부담이
된 탓인지 항간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여자가 아이를  낳고 나면 성을 더  밝힌
다.` `여성은 악기를 연주하듯 다뤄야 한다`는 따위의 숱한 말들이 떠돌게 된  것
인지도 모른다.
  이런 설들은 남성들이 보다 좋은 성의 조화로움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상대 이
성을 빗대놓은 것이기도  하지만 술자리에서 안주 삼아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많기에 주로  남성들 중심으로만 만들어져왔다. 물론  이런 음담패설들이
반드시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어차피  술안주처럼 떠도는 이야기들이야 그저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순진한  남성들이 문제다. 그들은 그 말들을 전적으로  믿은 나머
지 오히려 성생활에 저해요소를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남성들 세계를 떠다니
는 설들이 여성만 일방적으로 대상화시켜서 그렇지 남성과 여성의 성이 아주 다
르다는 사실을 은연중 인정하고 있긴 하다. `악기처럼 연주해야 한다`는 것도 그
렇고 왜곡되긴 했어도 `아이를 낳은 여자가 더 밝힌다`는 따위가 그렇다.
  물론 남녀의 성구조나 성반응은 아주 다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성들은 사정
하는 순간에 쾌감이  있고 또 사정과 함께  절정감을 느끼는 탓에 여성도  `그럴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데 문제의 소지가 있다.
  남자들이 사정할 때의 기분은  배설욕구의 충족과 누적된 긴장의 일시적 완화
에서 오는 일종의  해방감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에 비해  여성의 클라이맥스
는 그 과정도 아주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다. 클라이맥스를 운운하기 전에 도달
은커녕 아예 없을  때도 있고 때로는 1회 섹스에 5,6회씩  중첩하는 경우도 있어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여성의 성이다.
  구조가 다른 탓인지 여성이 첫 섹스에서 절정감을 느끼는 경우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오히려 대개는 아프고 이물이 밀려 들어가는  것과 같
은 무미건조한 느낌밖에는  없다. 그런 만큼 조화로운 성을 만들어내는  데는 충
분한 기간과 상대  이성을 알려고 하는 노력이  소요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디 대부분의 남성들이 그런가. 보통 자기 기분이 중심이 되기 쉽
고 자기가 끝나면 여성도 끝나야 하는 것쯤으로 알고 있기가 예사이다.
  원래 성적 절정감이란 섹스를  통해 쾌감에 도달하였다는 증거지만 여성의 경
우는 성에 대한  공포심, 그리고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 자신에 대한 위화감
등 정신적인 요인에다 생리적  구조상의 차이로 인해 아무리 선천적으로 섹시한
여성이라 해도 쉽게 절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상례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성생활의 연륜에 비례해서 오르가슴 능력이 증진된다고 한
다. 20대 초반에 결혼하면 빠른 경우 1-2개월에  오르가슴을 느끼기도 하지만 평
균 2-3년 안에 오르가슴이란 것을 감지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심리적 장애가
있으면 그 굴레가 벗겨질  때까지 지연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갱년기에 들 무
렵 비로소 섹스의  참맛을 터득하는 대기만성형 여성도  있긴 하지만 거의 모든
여성이 3년 이내에 오르가슴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이 말은 역으로 해석하면  여성이 오르가슴의 진가를 알게 되기까지에는 최소
한 2,3개월의 경험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되고 길면 갱년기에  비로소 알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평균 2-3년 정도의 시간과  경험이면 절정감을 알기에 충
분하다는 해석이 되기도 하고 두세 명의 아기를 출산한 뒤부터 완숙되는 대기만
성형도 있어 항간에 떠도는 `아이를 낳으면 더  밝힌다더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
이다.
  이토록 편차를 보이는 여성의  오르가슴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혹은 파트너
의 기교 여하에 따라  질적 양적으로 달라진다.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는 성 반
응을 서로가 알고  익히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고 서로에게 익숙해져
긴장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여성은 비로소 오르가슴을 느
낄 준비가 완료되는 것이다.
  한 여성지에서  20대와 30대 주부들을 대상으로  `남편 외의 남성과  성관계를
하고 싶어하는지?` 있었다면 `오르가슴은 느꼈는지?`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거의 모든 여성들은  `남편 외 남성과의 성경험을 별로 생각해보지  않
은 것`으로 나타났었다. 교제중인 남성과의 성관계가 있었어도 처음 관계에서 오
르가슴을 느낀 경우는  아주 미미한 것으로 나타나  여성의 성은 충분히 익숙한
상태에게서만 절정에 오른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렇다면 여자가 아이를 낳고 나서 더 밝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잠재
되어 있던 성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하면서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다`로 해
석하는 게 더 옳을 것 같다. 다른 나라  여성들처럼 결혼 전의 성이 개방되어 있
는 것도 아니고 극히 개별적으로 몇 번 정도의 접촉이 있어도 성지식은 거의 전
무하다시피해 결혼을 해야 비로소 본격적인 성생활을 하게 되니 남성과 다른 여
성의 성 반응으로는 시간이 지나야 성을 알게 된다고 해석할 수가 있다.
  만약 결혼 초부터 바로 여성이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면 말 그대로 남성
의 `테크닉`이  우수하다는 것은 물론 `사랑은  마술사`라는 말처럼 사랑의 힘이
두 사람을 클라이맥스까지 오르게 한 것이므로 적어도 그 남성은  `여성의 성 반
응을 잘 아는 남성`으로 아낌없는 찬사를 받을 만하고 그들  사랑에 감탄할 만하
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성들은  오히려 `성 경험이 대단히 풍부했던`  것으로 오해
하고는 그 의심의  불씨 때문에 거의 매일을  부부싸움으로 보낼지도 모를 일이
다. 그렇다고 남편의  의심의 눈길이 무서워 일부러 나무토막처럼 굴  필요는 없
지만 어쨌거나 여성이 오르가슴을  늦게 느낀다는 사실은 그 이전까지 남편은  `
재미 없는 싱글게임`으로 끝나야 하는 것이므로 두 사람에게 좋을 것은 없다.
  다행인지 아직 주변 친구들은 아이를  낳은 뒤 더 밝히는 여성이 될지도 모른
다는 그 설을 애써 외면(?)하려는 듯 `아직까지  결혼 초와 아이를 낳은 뒤가 그
렇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는  반응들이었다. 도리어 늦깍이인 내가 어떻게 달라
질지에 대해 주시하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으로 박장대소하기도 했다.
  친구들 말마따나 앞으로 내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유심히 지켜봐야 한다는
숙제를 안은 셈이  되었다. 설령 내가 그 속설처럼 대기만성형이어서  아이 둘을
낳은 뒤 밝히게  된다 해도 남편이 `이상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믿고 싶다. 내 남편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이기적인 남성`이라는 사실
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 또 다른 어리석음이 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결혼 후의 자위

  얼마전 기분이 몹시 찜찜한 일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한가한 오전을 맞아 티
타임을 즐기고 있는 시각이었는데 여성지의 기자임을 자칭하는 젊은 남성으로부
터 느닷없는  전화가 걸려오면서 그  찜찜한 기분은 시작되었다.  질문의 요지는
간단한 성의식에  대한 것들이었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처지인지라 별 까탈 없이 순순히 응해주었다.
  처음의 질의 내용은 결혼은  했는가, 몇 년이나 됐는가, 아이는 있는가 따위를
통례상인지 간단히 물어보았다. 그 부분에서는 별  생각 없이 순순히 대답해주었
다. 급기야는 본격적인  내용으로 돌입해 남편과의 잠자리는 일주일에 몇  번 정
도 하는가, 만족한 경우는  몇 번 정도인가 따위를 물어왔다. 앞부분에 대해서는
성의껏 대답을 해줄  수 있었는데 부부만의 잠자리에  대해서는 그 질문을 받는
순간부터 `혹 잡지사가  아닌 엉뚱한 사람이 장난하는 것은  아닌가`싶게 석연찮
은 기분이 들어 `임신중이라서  거의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어서 만족한  경우도
없다`고 일축했지만 불쾌한 여운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질문이라면
서 `자위를 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석연찮은  기분은 `괴사내`
의 폰섹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당신 잡지사 직원 아니지?”
  따져들자 남자기자임을  자칭한 그 괴사내는 은근히  목소리를 깔면서 마지막
부분만 대답을 해달라며 진득진득하게 목소리를 늘어뜨렸다.
  더 이상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전화를 끊어버리자 2,3차례  다시 전화벨이
울렸고 불쾌한 기분은  온종일 가시지 않아 집안  구석구석 그 사내의 목소리가
배어 있기라도 하듯 하루종일 쓸고 닦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나 한편 마지막 질
문이라면서 물어온  그 대목부터 갑자기 가라앉고  늘어지는 징그러운 목소리에
온몸이 무슨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 같긴 했지만 여성지 기사 중에 부
부간의 성에 대한 전문가 어드바이스가  실리는 것을 간혹 본 적도 있고 창간일
이면 통상 몇천 명을 대상으로 성에 대한  의식조사를 하고 있는지라 `괴사내`로
부터의 전화도 진짜 설문조사를 위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가 남
자인데다가 질문에 답하기가  쑥스럽다보니까 본인도 자연스럽게 답변하지 못하
고 `성의식`을 운운한 그 자체에 내가 너무 경직되어  과민반응을 한 것일 수 있
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성을  터부시하고 있고 부부만의 은밀한 영역으로 이해하
고 있기 때문에 `무슨 무슨 조사`랍시고 물어와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아
무것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사람이 어느 날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서 금기의 영역
으로 여기는 그 부분을 갑자기 묻는 것이 효율적인 방법일 수는 없었다.
  그 즈음까지  생각이 이르자, `목소리만이라도  끈적끈적하지 않았으면 불쾌한
기분까지 들지는 않았을 텐데` 싶기도 했다.
  전화상의 질의 내용이긴 했지만 결혼한 주부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
가 결혼한 뒤의  `자위` 부분으로 은밀한 만큼 솔직하게 대답할  사람은 아마 아
무도 없었을 것이다.  나 같아도 설령 자위를 하고 있다고  해도 설문조사랍시고
묻는 부분에서 `그렇다`고 해버리면 일주일에 `몇번씩이냐` 혹은 `한 달에 몇 번
씩이냐`고 물을 테니 솔직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정말로 결혼한  이후에 자위를 하는 사람은 없는 것일까.  남편이 오랜
기간을 병석에 있다거나 해외근무로 몇 년씩 집을 비우는 경우라면 예외가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예외가 아니면 결혼하기  전 섹스 대상이 없어서 혼자의
게임을 즐기는  경우일 테고, 하지만  결혼해서까지 자위를 한다면  엄연히 섹스
대상이 존재함에도 홀로 게임을  하는 이유를 늘어놔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이라
도 대부분은 `하지 않고 있다`고 할 것이다.
  결혼한 지 비록 오래되진 않았지만  나 역시 섹스 대상이 있는데도 자위를 한
다는 것은 본인에게도 `민망한 노릇`같아 해본  적도, 생각해본적도 없었다. 결혼
한 뒤에 설령 자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해도 독신 때라면 모르지만 결혼
을 하고 난 후까지 자위행위를  즐기는 것은 못된 버릇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
은 데다가 자위가 도덕에  어긋나는 행위거나 순리를 거역하는 파렴치한 행위로
낙인 찍혀 엄격하게 금지되어 왔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더구나 여성이라면 전혀
발설하려 하지 않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그런지 자위행위에  대해 금기시하거나 죄악시하는 경향만큼 자위가  `
건강에 해롭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마음도  가세되어 자위
에 대한 터부가 더욱 견고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견해는 좀 다르다. `남녀를 막론하고 적당한 자위는 생리적
인 긴장을 완화하고 심리적  안정을 가져오면서 능률의 증진과 에너지의 순환을
돕는다`고 정의 내린다. 그것은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받아들이는 정계의 신
진대사현상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계는 항상 새로  생산된 정액을 받아들이기 위
해 낡은 정액을 쏟아버려야만 고환으로부터 남성호르몬의 분비를 고취하고 정충
의 생산의욕을 증진시킬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적당히`라
는 단서가 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 궁금해지는 것은 결혼한 여성의 자위부분이다.  특히 성의 영역에서는 여
성이 소외되어 있거나 적극적인  당사자라는 인식이 없는 탓에 자위에서도 여성
은 제외되기가 예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찾아온 후배는 그렇지 않다는 사
실을 입증시켜 준  것이다. 전날 심하게 부부싸움을 했는지 후배는  몹시 격양되
어 있었고 누구나  입에 담기를 꺼려하는 `이혼`이라는 말을 꺼낼  만큼 그 당시
의 입장에서는 곧  이혼이라도 강행할 것처럼 두  사람의 문제는 심각하게 보였
다.
  “언니, 다른 여자들은 포기하고  살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안 돼. 결혼하면
남자는 다 그렇고 그렇다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어. 내가 너무  욕심이 많은 건
가.”
  후배는 연애할 때와  결혼한 뒤 달라진 남편의  모습으로 갈등을 겪고 있었고
이제는 아내의 말 정도는 마치  소귀에 경 읽듯이 소가 닭 쳐다보듯 하는 그 무
심함 때문에 거의 짜증이 날 정도라고 푸념을 했다.
  “우리 부부 사이는 문제가 어느 정도냐 하면 늦은 밤에 남편이 곁에 누워 있
어도 나 혼자 비디오를 보면서 자위를 해.  나 혼자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오르가
슴을 느끼고 만족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지.”
  후배의 그 행동을 칭찬까지 해줄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
서는 금단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자위의  개념을 남편으로부터의 `자립`이라는 개
념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과 좀처럼  하기 쉽지 않은 은밀한 이야기를 선뜻 털
어놓는 후배의 용기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때만해도 나 역시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풋내기 티`를 못 벗은 터라 후배의 그런 행동은 대단히  충격적이
었다.
  한창 중동으로의 해외근로 붐이 일 때 매춘은 물론이고 알코올성 음료까지 엄
격하게 규제하고 있는 나라에 진출한 우리나라의 해외노동자들의 성적 에너지의
유일한 분출구가 되었던  것이 바로 마스터베이션이었다고 하듯,  섹스가 불가능
할 때 성적 충족감을 얻기  위한 차선의 방법으로 자위는 그리 낯선 이야기만은
아니다.
  중동에 파견되었던  해외노동자들의 경우는  강한 모슬렘(이슬람교도)의  영향
때문에 성관계가 자유롭지 못한 것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도 합법적
인(?) 섹스 대상이 없는 미혼남과 청소년의 경우는  자위로 성에 대한 갈증을 해
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지  마스터베이션은 여드름이 난  청춘 전유물인
양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여성들은 자위를 할 만큼  성충동이 없다
는 근거 없는 속설로 인해  자위를 논의할 때 처음부터 여성을 제외해놓고 이야
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거기다 정숙 제일주의의  사회 속에서는 여성 스스
로 시치미를 떼는 것이 한몫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킨제이  조사에 의하면 여성의 57퍼센트가  자위행위를 즐기는 것으로
돼 있어 마스터베이션을 남성 전유물인 양 착각하고 있는 남성들에게 자위를 즐
기는 절반의  여성은 어디에선가 “아둔한 자여,  그대 이름은 바로 남성이니.”
할지도 모를 일이다.
  자위를 `자립`으로 전환시켜버린 후배의  경우는 다분히 `작위적`인 데가 있긴
했지만 섹스에서 매번 쌍방이 충분하게 만족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고 보
면 자위를 반드시  독신남이나 청소년의 전유물로, 혹은 색기 있는  여자들의 전
유물로만 바라볼 일은 아니다.  주변환경과 날씨, 그리고 그날의 기분 등 성감에
영향을 주는 외부적 요인들 말고도 오르가슴을 느끼는 감각의 문턱이 사람에 따
라 다소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제 아무리 잘 맞는 찰떡궁합이라 하더라도 항상
성감을 일치시키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자위`도 섹스의 당당한 한 방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의 성생
활은 더욱 풍부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위를 입에 담는  일조차 부
끄러워하고 터부시하기  이전에 성적 쾌감을 구하고  그것에서 생활의 활력소를
찾는 인간적인 본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정다운 일인가.
  우리는 성에 관한 대부분의 것에 무조건적인 반감과 이질감을 먼저 갖는 편이
다. 나 역시 그런 편견의  소유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악기도 연
주하는 자에 따라  베토벤의 `운명`을 연주하는가 하면 듣기에도  거북한 불협화
음만을 내기도 한다.  건강한 정신과 사랑이 전제된다면 자위 역시  그런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로부터 온 성의 터미네이터

   “당신은 사람이 아닌 무엇과 섹스를 해보았습니까?”
  누구든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아마도 마치 자신이 동물쯤으로 취급받은 듯
불쾌해질 것이다. 사람이 아닌 무엇과 어떻게 섹스를  할 수 있다는 걸까 의아해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런 질문을  하는 이를 가엾은 정신이상자로 취
급할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인간이 아닌 무엇과 어떻게 섹스할 수  있다는 말인
가?
  그런데 현대의 문명은 바야흐로 사람이 아닌 그 무엇과 섹스를 할 수 있는 시
대를 만들어내려 하고 있다. 최근  뜨거운 논쟁거리로 떠오르고 있는 `사이버 섹
스`가 바로 그것이다. 미래판 포르노그라피라고도 표현되는 이 사이버 섹스란 다
름 아닌 `컴퓨터 섹스`를 의미한다. 세상에 컴퓨터와 섹스를 하다니!
  사이버 섹스는 이미 컴퓨터와 친숙한 청소년들 사이에서 마치 곧 출시될 흥미
진진한 컴퓨터 게임처럼 기대와 흥분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물론 개인
적으로 소장할 수  있는 시대에까지 이르기엔 아직 멀었다고 보지만,  오래지 않
아 상품으로 개발되어 전자오락실과 같은 곳에서 만나게 되거나 직접 사이버 섹
스 프로그램을 가동시키게 될 날이 오리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신세대에게
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이미 공공연히 뜨거운 화제가  된 지 오래인 이 신형
컴퓨터 섹스  게임에 대해 아마도 대부분의  `어른`들은 그 개념조차  이해가 안
돼 어리둥절할 것이다.
  사이버 섹스란 20세기 통신 제어이론이던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섹스가
결합된 말이다. SF작가인 윌리엄 깁슨이라는 사람이 `뉴  로맨서`라는 그의 작품
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사이버 핑크`라는 개념 이후  등장한 신조어이기도
하다. 이 개념은 간단히 말하자면 컴퓨터테크놀로지가  개입된 새로운 형태의 성
행위이다. 다시 말하면 컴퓨터로 섹스 시스템을 만들어 섹스를 즐긴다는 것이다.
  섹스 도구로서의 컴퓨터. 이것은 컴퓨터 화면을  통해 포르노 사진을 감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다. 비추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라고 불리는  이
기술은 실제와 똑같은  가상상황을 만들어낸다. 정지된 화면이건  동적인 화면이
건 시각만을 자극하던 종래에서  벗어나 실제상황과 똑같이 시각은 물론 촉각과
심지어 후각까지 제공하게 된다. 컴퓨터는 컴퓨터일  뿐이지 어떻게 컴퓨터가 성
감을 전달할 수 있단 말일까?
  서울랜드나 자연농원 혹은 엑스포  공원에 다녀온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화면
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가상현실을 담아 가상체험을 할  수 있게 하는 영화관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실제처럼 자동차  경주나 경마를 할 수  있고 우주탐험을
할 수도 있다. 원형의 큰 화면 앞에 앉아  실제와 같은 효과를 주기 위해 흔들리
도록 설계된 의자에서 꽤나 실감나게 경험하는  가상세계. 그러나 그것은 사이버
섹스에 비한다면 아주 초보적인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가상현실을 만들어 실체처럼 느끼게  하는 컴퓨터의 아주 기본적인 기능이기 때
문이다.
  얼마전에 나온 비디오 영화 중에 `해커스`란 작품이 있다. B급 SF영화라고 할
수 있는 근미래판 영화로  컴퓨터의 말썽꾼인 해커들간의 작은 전쟁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이 영화 중에는 바로 가상체험을  하게 하는 기초적인 오락게임이 나
온다. 주인공 소년이  백화점 한 코너에서 헬멧과 전자총을 들고  자신의 시야에
나타나는 가상의 상황에서  적과 맞서 싸운다. 물론 실제는 아니지만  게임 속에
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고 적을 죽일 수도 있다. 유치할  정도로 단순한 모형
이긴 했지만 컴퓨터 그래픽으로 나타나는 미로 같은 공간 속에서 주인공 소년은
그곳에조차 침투한 해커와  마주치기도 한다. 바로 이와 같이 실제와  같은 가상
체험이 사이버 섹스의  기초를 이룬다. 이미 이 컴퓨터 게임은  서울 압구정동에
도 등장해 있을 정도다.
  사이버 섹스의 구체적인  모습은 극장에서도 개봉돼 인기를 모았던  `데몰리션
맨`이라는 영화에 비로소 등장한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실베스타 스탤론은 LA경
찰이다. 그는 어떤 이유로 해서 캡슐에 갇힌  후 21세기에 깨어나는데 거기서 만
난 여경찰의 제의로 `섹스`를 나누게  된다. 그런데 1백 년도 채 흐르지 않아 섹
스의 문화도 바뀌어 그 방법이 전혀 엉뚱하다.  몸을 직접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헬멧을 쓰고  각자의 시스템을 연결하는 전선으로  접촉하면서 흥분하고 만족을
얻는 것이다.
  영화 속의 미래  사회에서 섹스란 구질구질하고 원시적인  행위로 취급받는다.
체액과 체액이  교환됨으로써 갖가지 질병을 일으키고  체력소모도 많기 때문이
다. 무엇 때문에 그런  원시적인 방법을 쓰느냐고 묻는 여경찰. 주인공은 헬멧을
벗어버린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건 아니야`라고 중얼거리면서.
  사이버 섹스란 바로  이와 같은 형식의 섹스다. 모 시사주간지에  의하면 얼마
전 미국의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인 리액터사는 `듀오`라는 이름의  사이버 섹
스 기계를 95년까지 개발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다른 경쟁회사들 역시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리는 만무하다. 이들이 개발한다는  사이버 섹스 시스템의 핵심은
컴퓨터와 소프트웨어지만 여기서는 흔히 우리가 사용하는 모니터나 키보드 대신
헬멧과 장갑, 그리고 성기에 부착하는 기구 등이 대체된다.
  `비셋`이라는 이름의  헬멧 모양의 모니터로는  주로 자신이 원하는  상대자를
보게 된다고 한다. 장갑으로는 그  상대자의 피부를 만질 수 있다. 옷을 벗길 수
도 있다. 고개를 돌리면 현실 풍경 그대로 모니터도 바뀐다. 상대자의 음성도 들
을 수 있다. 남자의  경우는 성기에 콘돔과 같은 기구를 끼워  가상의 여인과 실
제로 섹스를 하듯 하다가 사정할 수도 있다.  여자의 경우는 가슴을 만져주는 듯
느끼게 하는 기구를 사용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마조히스트에게는 채찍으로 때
리는 감촉까지 느끼게 해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일 수밖에 없다.
  격세지감. 바로 이런 걸 두고 격세지감이라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 PC가 보급
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컴퓨터로 섹스를  한다는 세상으로 달려와 있는
것이다. 하루가 다를 정도로 발전하고 변하는 것  같아 도대체 나 자신도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지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만약 이 사이버  섹스가 일반화된다면 참으로 재미있는(?)  가정들이 가능해진
다. 매개자를 놓고 하는섹스라면 서로 멀리  떨어진 연인끼리 온라인으로 섹스를
즐길 수 있는가 하면, 전문 매춘업소 대신  사이버 섹스를 즐기는 신종 유흥업소
가 등장할지 모를  일이다. 자신의 이상형에 따라 상대자의 얼굴과  몸을 조합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등장할 것이며,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할 일도 사라질지도
모른다. 실제와 다름없는 컴퓨터의 가상 상대자가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사랑이나 결혼이란 게 의미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결혼이란 그저 2세를 낳는 공
간적 의미만을 지니게 되진 않을까?
  컴퓨터가 제공해주는 가상의 상대자와 성적인 체험을 하게 하는 이 사이버 섹
스의 등장을 두고 사람들의 의견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
이 컴퓨터 기술의 신기원을 이룰  정도의 놀라운 성과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호
평한다. 마치 포르노 비디오가 비디오 산업 전반을 발전시켰듯이 말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삶의 활력을 주는 색다른 체험으로 미래사회의 새로운 오락
이 될 것이라고도 예언한다.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탐닉하고 이것을 공기처럼 호
흡하게 될 미래에는 이처럼 컴퓨터를 이용한 보다 발전된 오락이나 매춘이 생활
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여기에 더하여 지금의  현실과 비교하면
얼마나 깨끗한(?) 매춘인가라는 역설도 서슴치 않는다. 현대의 인류를 병들게 하
는 대표적인 질병인 에이즈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길이라고도
설명한다.
  어찌 생각하면 그럴 듯하다. 사이버 섹스가  늘 뒷골목 으스름한 불빛아래서만
이루어지던 매춘을  보다 밝은 곳으로 끌어내어  `건전한` 오락으로 발전시키고,
섹스의 대상을 충분히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으니 강간과 같은 성폭력도 사
라질 수 있지 않겠냐는 가정을 그대로 실현해낸다면 말이다.
  누군가 주장하듯이 진정한 성해방이 프리섹스의 실현으로 완성된다면 성적 상
대자를 마음대도 고를 수 있는  사이버 섹스란 곧 프리섹스 시대의 서곡인 것도
같다. 사실상 일부일처제가 자유로운 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자
연스럽지 못한 제도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겐 어느 정도 `숨통(?)`을 열어주는 일
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 모든 것을 과학이 가능케 해준다는데야...
  그러나 참으로 근시안적이고 편리주의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포르노의 등
장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문명놀음이 파괴해갈 인간사회의 총체적인 본
성을 돌아보지 못한 소치인 것이다. 이미 성이  상품화된 사회에 살고 있으니 어
쩔 수 없는 일일까?
  나는 모든 인간사의 기본적인  동기가 성적인 것에서 출발한다고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가끔 한심할 정도로  세상이 시끄럽고 타락해져간다고 느낄 때면 그것
이 바로 성을 팔고  사는 매춘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모
든 사회악이 매춘여성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들  역시 희생
자일 뿐이다. 문제는 성이  상품화되고 있다는 현실이고 사회다. 그 사회의 도덕
성을 가늠할 때 단적으로 짚어볼 수 있는 것이 성 윤리라는 말이 있듯이.
  그렇다고 해서  나는 순결 지상주의자나  결벽증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나는
자유로운 연애와 사랑을 동경한다. 성숙한 성인이 즐길  수 있는 성적 체험 역시
인정하는 사람이고, 또한  가까운 후배의 우스갯소리대로 성적 체험이 풍부한(?)
`아줌마`이기도 하다. 또한 인간에게  있어 성이 차지하는 위치도 경험으로 알고
있는 한 사람이자 여성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이 그렇듯이 나는  섹스란 곧 사랑의 표현이요, 교
감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섹스란 가장  인간적인 행위이자 인간 속에서만
이 가능한 사랑의  언어라고 믿는다. 아마도 누구든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그 감
정을 행동으로 표현해주었다고 해서 돈을 지불하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살 수 있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새로 나온 프로그램을
사듯이 새로운 섹스 상대자나 더 다양해진 체위를 담은 소프트웨어를 사는 식이
어서는 곤란하다는 이야기다.
  섹스가 사랑의 한  부분이라는 것. 나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이버 섹스라
는 `신종 괴물`의  등장이 우려스럽기만 할 뿐이다.  이 괴물은 인간세상에 다른
성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류를 또 다른 차원으로 끌고 가려는지  모른다. 그
러나 이것은  아마도 십중팔구 사랑을,  나아가서는 인간의 성  자체를 파괴시킬
것이다. 사이버 섹스로 벌어질 수 있는 그  구체적인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끔찍
하다.
  사이버 섹스를 특집으로 대서특필했던 모 주간지 기사에 소개된 것처럼 왜 사
람들은 이런  기술을 보다 교육적이고 건전한  오락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걸까?
물론 이것이 쓸데없는 의문이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다. 그만큼 `돈`이 되는 사
업이기 때문이니까.
  그러나 비추얼 리얼리티라는 기술을 이용해 궁극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분야
는 우리  주변엔 너무나 많다. 해부학  실험을 가상체험케 할 수  있거나 항공기
조정 연습이 가능하다. 흥미진진한 모험이나 탐험을 할 수도 있다. 왜 꼭 섹스를
통해 비추얼 리얼리티가,  혹은 세상의 과학이 발전할 수 있다고  하는 걸까? 설
사 섹스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무엇에 비해 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가져올 폐혜에  대해서는 왜 그리도 무감한 것
일까?
  아버지나 아들 혹은 어머니나 딸이건 같은 섹스 소프트웨어를 놓고 이러쿵 저
러쿵 이야기하는 시대.  사랑하므로 사랑하는 이와 나누는  즐거움을 느끼기보다
는 성적으로 완벽한 상대를 찾아 이미 그야말로  `동물적 본능`이 되어버린 성적
욕구만을 배설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될  시대. 추악한 과학과  아름다운 사랑을
맞바꾸고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포기하게 될  시대. 우리의 자녀가 주인공
이 될 그런 시대는 이미  황금을 쫓는 자본가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시작되고 있
다. 아마도 누구도 막지 못할 그 새로운  시작은 우리의 성문화에도 많은 변화를
겪게 할 것이다.
  우리 앞에 남겨진 것은 이제 `말할 권리`와 `선택`뿐이다.

낮에는 요조숙녀 밤에는 요부

  아래층 사는 여자가 몹시 한가했던지 좀체 이웃집 여자들과 왕래가 없는 나를
찾아왔다.
  “XX엄마, 커피 한잔 마시러 왔어. 지금 바쁘지 않으면 커피 좀 얻어 마실 수
있을까?”
  물론 썩 내키지는 않았다. 특별한 일 없이  집에 있는 아래층 여자의 성향이나
동네 또래 여자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별로 좋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지 않아
함께 있고 싶지는 않았지만 찾아온 손님을 문전박대할 수도 없어서 모처럼 한가
한 오전 시간을 아래층 여자와 담소로 꽤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특별히 할 얘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끝에 아래
층 여자는 “글쎄, 아직도 해괴한 여자가  있지 뭐야?”하면서 그 특유의 입담을
늘어놓았다.
  “30후반에 있는 여잔데 결혼생활 십 년이 넘도록 남편에게 한 번도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을 보인 적이 없대지 뭐예요.”
  30후반의 여자는 그녀가 잘 아는 학부형 중의 한 명인데 집안도 꽤 부유한 편
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남편을 둔 지극히 현모양처형의 여자라는  것이다. 그런
그녀는 결혼한 이후 지금까지 남편보다  먼저 잠든 적이 없고 남편보다 늦게 일
어난 적이 없을 정도로  `남편에게 극도로 긴장된 모습을 변함없이 보여주는  여
자`라는 것이다.
  아래층 여자는 그녀의 그런 긴장감이 오히려 감탄스럽고 대단하다는듯 자신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지만 게을러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며 30후반에도
계속되는 그녀의 그 긴장이 `남편을 꼼짝 못 하게  하는 방법`이기나 한 듯이 입
에 침이 마르게 그 여성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얘기를 듣는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왜 남편이 잠에 곯아떨어지도록 화장한
얼굴로 있어야 하는지  우선 이해가 안 되었다. 나는 화장하기를  싫어하는 편이
어서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아예 화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간
혹 화장을 하더라도 임신 때 낀 기미를 가리거나 자외선마저 쐬게 되면 더 많은
기미와 잡티가 얼굴에 끼게 돼 볼썽 사나워질까 염려되어 그야말로  `어쩔 수 없
이`하는 게 나의 화장이다.
  게다가 결코  깨끗하지 않은 맨 얼굴로  외부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타인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예의 없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화장을 할뿐, 외출해야 하
거나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일이 아니면 되도록이면 한꺼풀이라도 안 쓰려고 노력
하는 편이다.
  그런 거추장스런 화장을 남편이 잠들  때까지 하고 있어야 하는 그 여자의 인
내는 정말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쓸데없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는 것이 솔직한 내 생각이었으니  아래층 여자의 의견에 전혀 동조할 수가 없었
다.
  결혼생활이 십 년이 되도록 남편에게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는 것은 그 세월만큼 남편과의 관계가 전혀 편안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고 여전히  `보여지는 대상`, 소위 `꽃`으로서 자기  실체를 규정
지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남편에게  솔직한 한 인간으로 다가가기보다
는 `한꺼풀 덧  씌운 채 자신 없는  부분을 가리운 허상`을 보여준  것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나이의 다른  남성들처럼 외도를 한다거나 소위 바람을 피우는
외벽으로부터 남편을  보호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그녀 자신이
십 년이 넘도록  스스로를 꽃으로 전락시켜버린 것으로 생각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속에서 괜스레 흥분이 일었다. 흔히 남성들은 `여자란 낮에는 정숙하고 밤에
는 요부와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낮에는 그야말로 오로지 남편만 아는 요조숙
녀로 있다가도 밤에는 요부처럼 남편의 멋진 섹스 파트너가 되어주길 바라고 있
는 것이다.
  지금이야 시대도 많이  달라져서 유명한 광고카피처럼 `일하는 여성이  아름답
고`, `프로가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여성의  바람직한 상
은 `현모양처`였다. 현모양처는  말 그대로 `현명한 어머니와 양처럼  순한 아내`
를 의미하는 말로 오랜 세월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여성의 의식을 지배해온 일종
의 이데올로기였다.
  남성들 세계에서는 아내가  현모양처인데다가 테크닉마저 만점인 여우같은 여
자이길 바라면서 `여우 같은 마누라는 데리고 살아도 곰 같은  여자 하고는 못산
다`는 말이 진리처럼  통한다. 그러나 현재의 여성들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가고
있다. 나보다 6개월 정도 앞서 결혼한  친구의 경우만 해도 사회활동을 하는 `커
리어 우먼`으로 낮에는  정숙하고, 밤에는 요부의 이미지와는 사뭇 거리가  멀다.
`내노라`하는 제화회사의 주임으로  있어 한 달에 한 번씩은  반드시 지방출장을
갈 정도로 일이 많고, 바쁜 나날을 보내는  그 친구는 성격이 활달하고 붙임성이
`지나치게` 좋아  여성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남성스럽다는  말을 더 많이  듣는
친구이기도 하다. 출장이  잦다 보니 당연 남편의 불만이 높아질  법한데도 그녀
는 늘 자신이 더 적극적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반면에 결혼한 지 8년이나  된 전업주부인 친구는 오히려 적극적이 되기가 왠
지 어색하다고 한다. `낮에 할 일이 없으니까 그 생각만 하고 있다`는 편견 어린
눈총을 받을까 싶어서  자기도 모르게 수동적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집안 살림
을 하는 전업주부라고 해서 `하는 일 없이 노는`  거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어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가 하면 전업주부이면서도  늘 활기를 잃지 않는 친구들은 또  다르다. 늘
무언가 열심히 배우러  다니며 즐거워하거나 사회단체의 주부봉사원으로 활동하
는 친구들의 경우는 성적 트러블이 그다지 없는  듯이 보인다. 오히려 생활의 의
욕만큼 그들의 성욕이나 적극성은 높아보인다.
  `낮에는 정숙한 아내, 밤에는 요부`라는 말도 남성들이 바라는 아내에 대한 허
상일 뿐 현재 아내의 실체와 거리가 멀어  그 말 자체가 구태의연해진 느낌이다.
오히려 낮에도 활발하게 자기  일을 하는 여성이 침실에서도 적극적이고 능동적
이 되었다는 것으로 재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나의 경우도 낮에는 아이 키우고  가끔씩 해야 하는 일거리 때문에 밤에는 피
곤에 지쳐 쓰러지기가  예사다. 간혹 남편의 씻는 시간이  유난히 길 때면 `오라
오늘은 남편이 작정한 디데이구나!` 하고  간파하면서도 피곤하거나 내키지 않는
날은 도저히 `요부`가 되어줄  수가 없다. `낮에는 정숙한 아내이고 밤에는  요부
와 같은` 이미지대로 살려면 그야말로 슈퍼우먼이 되는 도리밖에  없을지도 모른
다. 그럴 때면  마음 한쪽에서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과 동시에  불안감도 머리를
내민다. 남편에게 언제든 매력적인 존재이고 싶은  마음이야 어느 아내인들 없을
까.
  물론 내가 외면(?)당하는 날도  있다. 남편 역시 항상 내게 매력적이고 섹시한
남성으로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제는 성적 신호를 보내는 데에도  제법 익
숙해져서 그다지 쑥스러운 일이 아니건만  남편 역시 `낮에는 따뜻한 연인, 밤에
는 매력적인 카사노바`의 진리에 순응하진 못하는가 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찬거리를 사러  시장엘 나갔다. 나는 거기서 유명
브랜드의 속옷을 놓고 세일판매를 하는 판매대를  만났다. 갑자기 흥미로운 생각
이 스쳤다. 사실  결혼 전만 해도 속옷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서도 한참 후에야 속옷이 가지는 은밀한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
었다. 부부 사이에  제 3의 언어 역할을 해주는  속옷. 나는 판매대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아무리 세일이라 해도  값은 비쌌다. 가장 경제적인 가격의 야한  속옷을 골랐
다. 누군가는 속옷으로 남편에게 성적 신호를 보낸다고 했다. 그래 오늘은 한 번
남편을 위해 밤의 요부로 돌변해볼까? 그런 생각에 속옷을 고르고 나니 애초 계
획하고 나왔던 찬거리의 내용도 대폭 수정하기로  했다. 남편이 좋아하는 대구와
갈비까지 사들고는 무거워진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콧노래까
지 불러대며 만찬을 준비했다. 뚝딱뚝딱 소리도  요란하고 좁은 주방을 이리저리
뛰어다닐 만큼  바쁘게 준비를 마치고  나니 정말 근사한  저녁상이 마련되었다.
보기만 해도 맛이 나고 배가 불렀다.
  마치 TV 광고에 등장한 주부 모델처럼 단장도  했다. 언젠가 이렇게 준비하다
가 바람맞은 주부의 이야기를 그린 여성지의 콩트가 생각이 나서 쑥스럽기도 하
고 왠지  불안했지만 이미 들떠 있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늘  자기 주장이
먼저인 아내를 만나 패미니스트를  자처하느라 다른 남자들에 비해 몸도 마음도
고달팠을 남편을 위해 모처럼 준비해보는 서비스였으니까.
  그런데 선물받은 고급 와인의 먼지를 걷어낼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이었
다. 이미 취기가 제법 오른 목소리로 하는  말이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났다고 했
다. 연락도  없이 지낸 친구들이 찾아와  좀 늦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고
한다. 역시 왠지 모를  불안감은 적중했다. 여성지에서 읽었던 그 콩트대로 말이
다. 남들은 텔레파시도 잘  통한다던데... 모처럼 요부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아내
의 눈물겨운 각오도 모른 채 남편은 그날 자정을 넘겨서야 잘 먹지도 못하는 술
에 취해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거듭하며 들어왔다.  나는 그날 내가 샀던 속옷과
준비한 만찬에 대해 일체  함구했다. 바가지도 긁지 않았다. 왠지 쑥스러웠기 때
문이다.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고도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사실 아무도  내게 낮에는
정숙한 아내가 되고  밤에는 요부가 되라고 명령하거나  강요한 적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해야만 하니 말이다.
  이렇듯 우리는 늘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이데올로기나 그럴 듯한 진리
의 함정에 빠져버릴 때가 많다. 특히 성에 관한 한 그의 함정은 무수히 많다. 주
로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져 온  그 함정은 정말 자신도 모르는 새 한 발자국 아
래 다가서 있다.  물론 내가 치렀던 그날의 해프닝처럼 그저  재미있는 추억거리
정도일 수도 있겠지만 삶을 좌우할 정도의 수렁이 될 수도 있는 함정이다.
  함정에 빠져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자신의 삶을 가두어놓지 않기 위해서는 용
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자신의 주변에 즐비하게 있는 갖가지 속설과  억압 이데
올로기의 함정을 성큼 건너 뛸 용기와 함정을 바로  볼 수 있는 혜안, 그리고 설
사 함정에 빠졌다 하더라도 헤쳐나올 수 있는  지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용기
와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면 아마도  자신을 함정 속에 가두지 않고도 남편을 위
해 예쁜 속옷과 만찬을 쑥스럽지 않게 준비할 수 있으리라.

남성의 크기는 과연 얼마만큼 결정적일까

  결혼생활도 몇  해를 넘다보니 그야말로  `아줌마` 대열에 들어선  친구들과의
모임은 정말  감칠맛 나는 이야기들로  꾸며지기 시작한다. 나야  친구들에 비해
결혼이 다소 늦은 편에 속해서 아직도 `새댁`이라  불리지만 그녀들은 이미 스스
로 알 것 다 아는 아줌마로 생각해서인지 입담들도 걸어지기 때문이다.
  보통 결혼한 여자들이  그렇듯 처음에야 집안 치장이나  집안대소사, 시댁식구
들과의 불화며 육아에 따른 고민들이 대화의 주된 소재가 되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부부간의 성생활도 그에 못지않은 화젯거리다.  결혼 전에는 아줌마들이 모
여 섹스에 관한 수다를 벌이는  것을 두드러기라도 돋을 둣 싫어하던 나도 이젠
그녀들과의 대화가 재미있다. 여자가 성에 대해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표한할 수
있는 일종의 `면죄부`  아래에서의 자유를 즐긴다고 해야 할까? 혹은  이제 나도
섹스가 생활의 일부분으로 자리잡은 완전한 한 여성이 된 탓일는지도 모르겠다.
  아줌마인 친구들과의 성에 관련한  대화에서 간혹 양념 역할을 해주는 유머들
중에는 남성  심벌의 크기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끼여든다. 사실  성생활을 하고
있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크기론`의  진실보다도 크기에 얽힌 에
피소드를 즐긴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런 자리에서 미꾸라지는 한강에서 노는 것이  즐거울까. 좁은 개울에서 노는
것이 즐거울까라는 엉터리 퀴즈라든가 혹은 남편이 어느 날 퇴근해 돌아와 함께
누운 잠자리에서 심각하게 자신의 `크기`에  대한 만족도를 물어보았다든가 하는
식의 농담 반, 경험담 반의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남
자들은 자신의 크기에  대해 배우자가 느끼는 만족도에  대해 매우 궁금해 하는
듯하다. 객관적인 사실이야 어떻든  아내가 자신의 크기를 `인정`해주면 어린 아
이(?)처럼 기뻐하곤  하는 순진함이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것은 비단 아줌마들의  우스갯소리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싸구려 포르
노 영화는  물론 에로티시즘을 표방한 영화들  중에도 남성의 이  `크기`를 성적
모티브로 삼은 것들이 많다. 영화의 주인공으로는  신체도 우람하고 성기로 상징
되는 코가 큰 남자들이 희화화되어 등장하거나,  여자들이 그런 남자들에게 성적
으로 매료되고 종속되는  줄거리를 그리는 내용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영화라
는 것이 그  시대의 삶을 반영하는 지극히 대중적인  척도라고 볼 때 크기가 곧
남성다움이나 힘의 상징이요, 또한 쾌감의 밀도를  나타내주는 척도인 듯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가 하면 남성이나 여성이 크기에 대해 갖는 감정은 더 근원적이라고 보는
과학적인 학설도 있다.  특히 남성의 경우 유년기에 아버지의 성기와  비교해 왜
소하고 자신의 성기를 보고  느끼는 열등의식과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성격
이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이 곧 정신분석학자들의 주장이다.
  프로이드라는 대표적인 정신분석학자는  모든 남아는 어머니를 연모하면서 아
버지와 적대적 관계에 놓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곧 자신이 사랑
하는 최초의  여성인 어머니를 차지하고  있는 아버지의,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성기를 발견하면서 그 적대적 관계는  끝나 버린다. 승산 없는 싸움
을 포기한 후에는 오히려 자신의  작고 왜소한 성기가 침해받을 수도 있다는 불
안에 시달리게 된다. 이것이 곧 거세콤플렉스의 시발이다. 결국 성인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크기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도 아버지의 성기와 비교하면서 느끼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다.
  얼마전 나는 남편 덕택에 이렇듯  크기 콤플렉스를 겪고 있는 아주 가까운 사
례와 접한 적이  있다. 그저 친구들과의 잡담 속에서이거나 취재를  위해 조사하
던 자료 속에서 만나던 사례가 아니어서 새롭게 느껴지는 사실이었다.
  남편의 오랜 친구 중에 거의  유일하게 장가를 들지 못해 총각으로 외롭게 남
아 있는 이가 한 사람 있다. 고향친구라서 남편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그런데 아
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그의 장가 못 가는 이유를 헤아릴 수 없는
점이었다. 국내 굴지 회사에 `잘 나가는` 사원인데다 학벌도 좋았고 집안이나 인
물도 준수할 뿐더러 평소의 마음  씀씀이로 미루어 심성도 나무랄 데 없는 사람
이었기 때문이다. 그런지라  늦도록 결혼을 못 한 이 친구에게  선후배들이 앞을
다투어 중매에 열을 올리는 대상이기도 했다.
  나는 별 생각없이 그에겐 아마도 그의 젊음을 불태웠을 과거의 여인이 있으려
니 짐작만  했었다. 실제로 나의 친구들  중에는 한때의 열렬한 사랑  때문에 그
추억과 그때의 열정을 잊지 못해서 새로운 사람과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미지 못
하고 홀로 사는 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유사인물이라 생각됐던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 적당히 술을 마신 남편으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전해들었다. 바
로 그의 `장가 못 가는 이유`였다.
  그가 장가를 못 가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한마디로 크기가 작은 그의 남
성 때문이었다. 남편이 그의  작은 남성을 본 것은 목욕탕에서였다고 한다. 그것
도 왠지 쑥스러워하면서 부자연스러운  그의 행동 때문에 확인하게 되었던 사실
이었다. 그리곤 술자리를 빈 그의 어색한 고백으로 사실이 확인되었다.
  "생각해보면 그 녀석 아주 옛날부터  뭔가 좀 이상한 구석이 많았어. 자존심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인 놈이  어떤 경우엔 지나치게 자기를 비하하거나 자신
감이 없거나 했었거든.  그 녀석 공부도 친구들 중에서 항상  일등이었고 대학도
제일 잘 갔는데 말이야. 또 그 녀석이랑은  친구들 중에 이상할 정도로 목욕탕이
나 수영장엘 함께 간 놈이 하나도 없었어. 한  번은 군 입대할 때 친구들이 그놈
총각딱지 떼어준다고 기생방엘  밀어넣었는데, 한 30분인가 있다가 나왔었지. 친
구들이랑 헤어지고  나서 내가 물어보니  그냥 얘기하다 나왔다는  거야. 그때야
난 이녀석 되게 순수하구나  했지. 어쩌면 그런 면 때문에 내가  그 녀석을 좋아
하기도 했었는데..."
  그는 평소에는 여자에게 관심이  많고 또 적어도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사귀길
원했고 대부분의 여자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많은  여자들과 만나기도
했었다. 단 다소 문제라면  한 여자와 지속적으로 만나질 못했다. 사정을 모르는
주변인들은 그런 그를 일컬어 카사노바니 뭐니 하면서 놀리기도 했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여자와 관계가 조금 깊어질 만하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헤어졌노라고 이야기했다.  추측컨대 그는 성인된 남녀가  관계가 깊어지면
더욱 깊은 애정을  확인하는 그 절차가 두려워 스스로 교제를  회피했다. 그렇게
한해 두해가 지나다 보니 어느새 서른 중반의 노총각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남편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고 당장 그에게 달려가 그의 어리석은 콤플렉
스에 대해 이야기하고픈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야 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작
다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보내온 세월의 부피와 그가 꽁꽁 쌓았을 자신의 벽이
뒤늦게 가로막고 선 탓이다.
  남성의 크기는 과연 얼마만큼 결정적일까?
  사실 성을 생활로 경험하고 있는  여성들 중에서도 이 주제는 많은 이견을 불
어일으킬는지도 모른다.  남성들의 열등의식이야  여성이 느끼는 만족도에  대한
불안에서 야기되는 점이  많다고 쳐도 과연 여자들은  크기에 따라 다른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의학적 근거를  통해 과학적으로 밝혀보자면 크기는  섹스의 만족도에 그다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정론이다. 이는 여성들이  질을 통해서
쾌감을 얻기보다는 보다  외적인 요인이나 구체적으로는 클리토리스,  음순 등에
의해서 실제적인  자극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니  크기란 생식에 필요한, 바꾸어
말하면 정액을 질에 운반할 수 있는 정도 이상이면 온전히 남자로서 기능하기에
무방하다는 이야기다.
  의학자들이 말하는 남자 성기의  사이즈란 치골에서부터 귀두 끝에 이르는 배
면의 길이와 둘레를 말하는 것으로, 서양남자를  기준으로 했을때 발기한 상태의
정상 길이가 13센티미터,  둘레가 11.5센티미터이며 동양남자는 이보다 약 2센티
미터 작다고 한다.  이런 통계적 수치보다 더 간단한 기준으로는  자신의 가운데
손가락 정도의 길이면 `정상`의 범주에 들어간다고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것은 육안으로 `내려다본` 사이즈는 대개  정확도가 떨
어진다는 점이다. 흔히 남자들은 소변을 보거나 목욕을  할 때 자신의 성기를 내
려다보면서 사이즈를 짐작하곤 하는데  그럴 경우 대부분은 실제보다는 작아 보
이게 마련이어서  괜한 콤플렉스에 빠지기  쉽상이라는 것이다. 자로  잰 수치가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육안으로 본 것보다는 크다는  결론이 나온다. 일례로 미국
의 한 스포츠 클럽에는 샤워실을 겸한 화장실 변기에 조그만 확대경을 달아놓아
고객이 자신의 확대된 성기를  보며 즐거워하도록 `배려`를 해놓고 있다고 한다.
남자들의 사이즈 콤플렉스를 십분 이해한 배려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남자들의 과포장된 허영심과 콤플렉스를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사이즈와 성적 쾌감의 연관성을 과학적으로  알려고 하기보다는 막연히 귀
동냥으로 얻은 근거 없는 통설에 울고 웃고  하니 말이다. 사실상 여성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사이즈란 질  부위 중에서도 쾌감도가 높은  입구에서 전체의 약
1/3에 이를 정도라고 한다. 사이즈가 너무 크면 오히려 여성의 질에 상처를 입혀
고통만을 줄 뿐이다. 불감증을 호소하는 여자들의  상당수가 질의 침해에서 비롯
된 고통 때문에 섹스를 기피하게  된 경우라고 하니 무조건 크다고 좋아할 만한
것은 절대 아닌 것이다.
  성 의학과 관련한 상담으로 유명한 국내 모 의학박사는 남성의 크기에 관련된
콤플렉스와 접할 때 곧잘 비유하는 말이 있다. "악기도 콘트라베이스보다는 바이
올린이 더 감칠맛 있고 묘미  있으며 또한 예술성 깊은 음악으로 사람들이 좋아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연주기법이나 연주자의 예술성이라는 것이
다.
  물론 크기가 성감이  아예 무관하다고 결론 지어  버리면 아마도 많은 이들은
또 교과서 같은 이야기로구나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사실 많은 경험자(?)들에 의
하면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는 이야기도 설득력을 가진다. 성감에 있어서도 `포만
감`이란 결코 무시할 성질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분명히 동의
하는 것은 역시 `결정적`이진 않다는 점이다. 성감을 높이는 조건에는 크기나 포
만감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들이 많고 저마다 좋아하는  취향도 각각 다른 법이
아니던가.
  문제는 남성다움의 근원을  성적인 데서만 찾으려고 하는 사회에 있다.  나 역
시 종종 크고 힘센 체격보다는 자신의 일에 열정적으로 일하는 남자나 따뜻하게
길을 가르쳐주는  남자의 미소 속에서  남성적 매력이나 섹시함을  느끼곤 한다.
남성들은 크고 풍만한 볼륨을 가진  여자와 역시 크고 힘센 남자로 상징되는 쾌
락적이고 왜곡된 성문화를 만들어놓고 즐기면서, 결국  그것이 자신들의 가장 은
밀하고도 강력한 족쇄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니 스커트에 얽힌 이데올로기

  요즘 여자들은 정말  대범하다. 자기 주장이 분명하고 당당할 뿐만  아니라 자
신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가끔 압구정동이나 신촌에서 만나는  요즘 젊
은 여자들의 웃음은 정말이지 한치의 거리낌도  없다. 오히려 그녀들을 힐끔거리
는 내가 한층 주눅들어 있다.
  사람들은 여자들의 이런 당당함을  치마길이에 빗대어서도 이야기한다. 치마길
이가 길수록 무언가 숨길(?)  것이 많거나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예전보다야 신
장도 많이 커진  탓이겠지만 자신의 긴 다리를 거침없이 내놓고,  심지어는 배꼽
까지 내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자들. 그들에겐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에  못 할
그 무엇도 없다.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나 역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강요받는
그 무엇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부하는 족속이지만 가끔은 요즘 신세대
여자들의 당당함에는  주눅이 든다. 그나마  나이가 들었다고 세대  차이가 나는
까닭일까?
  그러나 취재나 자료를  찾는 일에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가끔 이  당당함에 부딪혀 당황할 때가  종종 있다. 한참 꾸벅거리며  졸고 있던
시야에 짧은 스커트 사이로 보이는 웬 여자의 팬티가 급작스럽게 출현했기 때문
이다. 남편과의 동행일  때면 더욱 몸둘 바를 모른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남
편은 그럴 때면 자신이 자동차를 가지고 다니는 점을 다행으로 알라고 우스갯소
리를 건넨다. 그런데 그렇게 졸고 있는 미니  스커트 주변에는 아니나 다를까 남
자들의 흘끔거리는 시선이 즐비하다.
  가끔은 나 자신도 그 즐비한 시선 속에 하나가 되어 그녀들의 곧고 건강한 다
리를 감상하기도 한다.  마치 훌륭한 조각품이라도 감상하듯이.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은 성을 초월한다던가.  그러나 그럴 때면 나는 한편으로 정말  세대 차이를
느끼기도 한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자란 신세대라지만 저렇게  건강하고 아름다
운 다리를 가지고 있다니  하면서. 꼭 `나 어릴 땐 너무  못 먹고 못살아서 예쁜
다리를 가진 여자가 드물었단다`하고 나이 들어 늙은 진짜 아줌마(?)처럼 변명이
라도 해야될 것만 같은 의무감에 시달리면서 말이다.
  어느 날인가 남편과  친구 집에 다녀오는 지하철  안에서 우리는 또 그  `미니
스커트`와 마주앉게 되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앞에 앉은 미니 스커트의 다리
를 감상하고 있는 내게 남편이 자꾸만 옆구리를  툭툭 치며 손신호를 보냈다. 나
는 왜 이 양반이 자꾸만 왜 이러나 싶어 짜증 섞인 눈길을 보내다 문득 앞에 앉
은 미니 스커트의 눈길이 심상찮음을 느끼게 됐다.
  내가 너무 그녀의 다리를 `째려봐` 그녀는 몹시 기분이 상했던가 보다. 아니면
정신이 약간 이상한 레즈비언쯤으로 보았거나... 나는 갑자기 무안하고 당황했다.
뭐 다른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자도 아닌 여자가 다리를 좀  `구
경`한 것 뿐인데 하는 속엣말을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이번 정차 역은 동대문 운동장, 동대문 운동장입니다`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
가 찬바람을 쌩 일으키며 불쾌하게 일어났고 나는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을 뿐이
었다. 그러자 남편이 물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쳐다본 거야? 사람 무안하게. 거참 이상한  취미 하나 생
겼군.”
  “그저 좀 불쌍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저렇게 당당하게 내놓은  다리 뒤에
풍선처럼 부푼 허영심과 삐뚤어진 페미니즘이 보이는  것 같아서. 미니 스커트를
입는 것은  자유이고 개성이며 남성들의 음흉한  시선에는 당당히 맞서겠노라고
큰소리 치며 다니고 있겠지. 결국은 스스로 성을 팔고 있는데 말이야.”
  “...”
  남편은 대답이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사실 속마음과는 다르게  한껏 떠들
던 나는 왠지 그 미소가 언짢아 더욱 열을  올려 `요즘 애들론`으로 목소리를 높
였다. 요즘 애들은  도대체 정신세계가 부재하고 그 때문에 개성이니  뭐니 하는
것이 그저 파격적인  옷차림 같은 외적인 치장에 그친다든가, 신세대  여성은 일
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며  거기에다 예쁘기까지 해야 한다는 상업주의적인 얕은
광고술수를 마치 대단한 `주의`처럼 신봉하고 있다든지, 사회가 성을 상품화하는
천박한 자본주의로 썩어가고  있다는 등. 사실 그런 길고 열성적인  연설의 내용
은 평소에 생각하던 바이기도 했고 글을 통해 알리고자 노력하기도 했던 바여서
내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그런데 나의 그런  열성에 비해 남편의 반응은 너무
엉뚱했다. 어쩌면 허를 찔렀다고 해야 할까?
  “당신 다리도 예뻐. 미니 스커트 입어도 예쁠 거야.”
  뒤통수를 묵직한  방망이로 얻어맞은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얼굴에 뜨거운
수증기를 불어놓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말에 갑자기 넋이라도  나간 듯 말
을 잃고  가만히 있었다. 내가 그렇게  말을 잃고 있자 남편이  오히려 머쓱해진
모양인지 미니 스커트를 그렇게 나쁘게만 보지 말아야 한다는 사설을 달기 시작
했다.
  내가 기억하는 남편의 논지는 이랬다.
  “옷이란 디자인에서 보여지는 느낌이란 것이 있는  법이다. 노출이 많다고 해
서 반드시 성  상품화를 부추긴다고만 단정 짓는  것은 유치한 흑백논리의 다른
면이다. 어느  정도 짧은 스커트는  경쾌하고 활동적인 느낌을  주어서 보기에도
발랄한 젊음이 표현되니  좋지 않느냐. 성과 관련있는 신체부위를 가능한  한 노
출하지 않아야 제대로 된 성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를 상품화하지 않는 여
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열등감의 표현이거나 오히려 보수적인 정조관을 가지고
있음을 자인하는 셈이다. 그러한 사고의 밑바닥에는  강요받아 온 정숙한 여성상
에 대한 강박관념이  숨어 있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것은  스커트의 길
이가 아니라 잘못된 의식과 사회구조에 있다...”
  그래도 그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숙녀복을 파는 상점 앞에서
미니 스커트를  입은 마네킹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쇼  윈도에는 끊임없이
미니 스커트를 입은  요즘 여자들이 흘러가곤 했고  고집스레 바지를 입은 나의
모습이 정지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여학생이란 말을 보배처럼  듣던 시절부터 유명한 `바지파`였다. 교복 자
율화 이후에는 치마를  교복처럼 입어야 했던 시절  나의 고집스런 투쟁은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매력적인 화제였다. 월요일마다 복장  검사를 하는 선생님의 얼
굴을 당당히 쳐다보면서 나는 매우 즐거웠고 아이들의 은근한 지지속에 나의 투
쟁이 지속되는 것이 통쾌했다.
  내가 바지를 고집했던  것은 뭐 그다지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치마로 상징되는 낭만적인 소녀의 이미지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꼭두새벽
부터 밤늦도록 좁은 교실 의자에  앉아 지내느라 퉁퉁 붓는 내 다리가 미워서이
기도 했다. 늘 `학생다운` 옷을 고집하던 어머니의 보수적인 의상관에 따라 발목
까지 오는 바보  같은 치마를 입느니 그냥 활동이  편한 바지를 입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치마거부 투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입시를 명분으로 가두고
금지만 하던 그  시절 학교나 선생님에 대한 답답함을 해소할  `이유 없는 반항`
이 준 매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후 대학에 진학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치
마를 입으려면 그에  걸맞는 구두며 핸드백이며 블라우스  등 준비를 많이 해야
구색을 맞출 수 있다는 경제적 조건도 그랬지만 평범한 유행을 거부함으로써 얻
는 쾌감도 컸다.
  그러다 치마에 얽힌  이데올로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조금  거창하게 들리겠
지만 치마로 감싼 여성의 몸이 지니는 여가적이고 정치적인 억압을 인식한 것이
다. 활동이 불편한  치마를 입고도 가사와 육아 노동에 시달렸던  우리 어머니들
의 현실을 보게 된 이후 나는  더욱더 치마 입기를 꺼렸다. 치마는 여성을 `두르
는` 억압의 장벽이자  소극성의 울타리였던 것이다. 하물며  미니 스커트인 바에
야.
  어떤 이는 여성이 미니 스커트를 입는 이유가 남성을 성적으로 유인하기 위한
잠재적 본능이 발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원시적  상태에서의 인간은 다른 포유
동물과 마찬가지의 섹스를 즐겼다고 한다. 그럴 때  가장 큰 성적 매력이란 엉덩
이의 모양이나 크기였고, 다른 동물이 그런 것처럼  인간도 섹스를 원할 때는 여
성의 경우 자신의 엉덩이를 상대에게 보여주면서 신호를 보냈다는 이야기다.
  결국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자들은  엉덩이를 가장 쉽게 드러낼 수 있는 옷을
입음으로써 잠재적으로 섹스 충동을 느끼고 있다는,  동물로 보자면 발정하고 있
다는 셈이다. 이런 주장은 곧잘 강간의 변론에 이용되기도 한다. 노출이 많은 여
자를 겁탈한 데에는 그 여자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논지로, 뒤집어보자면 노
출이 심한 여자는  겁탈당해도 싸다는 식이다. 노출이 심한 여자의  인권은 보호
받을 수 없다는 것일 게다.
  미니 스커트는 내 자신이 너무나 혐오하는 이런 궤변에 노출되기 싫어하는 요
건을 갖추고 있었다.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이런  주장에 이용되곤 하는 미니 스
커트를 굳이 입는 여성들도 곱게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바라보던 옷가게에서 내가 그리도
기피해 마지않던 미니  스커트를 샀다. 그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그후에도
스스로 잘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어쨌든 일명 `똥꼬치마`라고 부른다는 치마
를 사들고 집에 돌아와서는 거울 앞에서  스커트를 입어보았다. 다리가 굵을수록
짧은 치마를 입으라는  말이 있듯이 오히려 치마가  짧으니 다리도 길어 보이고
날씬해 보였다. 야,  이래서 미니 스커트를 입는 건가...  나는 솔직히 나르시시즘
에 빠진 사람처럼  거울 앞에서 떠나질 못했다. 나에게도 치마가  어울린다는 새
삼스런 발견이 생소하면서도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짧았다.  아무리 그런 대로 어울린다 해도 조금만  상체를 숙여도
금방 드러나는 팬티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서야 어디 일
하는 여성이 입을 만한 옷인가. 역시 요즘  치마길이는 정치적인 해석을 하지 않
으려 해도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수위임에 틀림없었다. 역시 안 되겠군.
  하지만 나는 그 사건(?) 이후로 치마를 입기 시작했다. 내 엉덩이를 보여서 남
자를 유혹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다리가 예뻐 과시하려는 것도 아니며 나도 치
마를 입을 수 있다는 아주 단순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치마를 입을 권리
를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나를 아는 사람들은 요즘 들어 가끔 치마 입은 나의 모습을 대하곤 화들짝 놀
란다. 그런 놀람을 즐기는 재미도  여간 쏠쏠한 것이 아니다. 늘 바지만 입고 다
닌 데다 치마에 얽힌  이데올로기를 침 튀겨가며 성토하던 고집쟁이였기 때문인
지 사람들은 더 많이 놀라는 눈치다.  어쩌면 놀라기 보다는 `당신도 어쩔 수 없
는 여자구려` 하면서 비웃는 이들이 더  많은 듯도 하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그다
지 기분이 나쁘진 않다.
  나는 여성 문제나 성에 얽힌  문제들을 생각할 때 나의 이 치마 입게 된 배경
을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요즘 여자들의 스커트  길이와 그에 대한 논란을 들으
면서 오늘을 사는 여성과 남성이  서로를 규정 짓는 수준이 가장 상징적으로 표
현되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치마를 입으며
다시금 당당해진 나의 작은 변화가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성병약을 사러오는 여자

  얼마전 한의약계와 약사들이 한창  힘겨루기를 벌이던 때 취재를 통해 친구처
럼 가까이 지내게 된  이가 있다. 나이는 나보다 어렸고 결혼도  하지 않은 그저
젊은 처녀약사였지만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든 탓인지 어떤 때는 혹은 간접경험
을 통해 산전수전(?)을 다 겪은 탓인지 어떤  때는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여성이
다. 한약처방을 하느냐  못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약재료 유통구조
에 문제가 있다고 성토하는 그녀의 주장에 열심히 귀기울이는 내게 호감을 느껴
서인지 취재를 마친 이후에도 그녀는 나를 언니라 부르며 잘 따랐다.
  취재 후에  일상적인 이야기나 살아가는 이야기들로  흉금을 터놓는 그녀와의
대화 중에는 그녀가  겪은 손님들의 이야기도 많았다. 약국이란 게  도심에 있는
일부를 제외하면 원래  `동네장사`라서 곧잘 아줌마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는 탓
에 여성들 삶의 찌꺼기들이 쏟아지는 그야말로  배설구이기도 했던 탓이다. 그녀
는 손님들과의 실랑이나 처방을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나에게 쏟아
붓는 것으로 얼마간 해소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카운슬링에 시달리는
정신의학자나 상담자들을 위해  그들만의 카운슬러가 존재한다는 말이 실감나기
도 할 만큼 그녀는 참 많은 이들과 접하면서 그와 똑같은 부피의 스트레스에 시
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님 이야기들은 쭈뼛거리며 콘돔을 사러오는 군인총각에서부터 늘 찌
푸린 인상으로 두통약을 찾는 수험생이나 생리가 없어 고민하던 끝에 생리가 있
게 만드는 약을 문의하는 여중생에게 이르기까지  참 재미있고 다양했다. 문제는
그런 것보다는 그녀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아줌마들의 이야기였다.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안 될  정도의 많은(물론 약국을 찾는 전체 손님수에  비
하면 미미하지만)  기혼여성들이 가끔씩  남편이나 자신의 성병약을  사러와서는
하소연까지 늘어놓고 간다는 것이다. 처음에야 딸같이  젊은 약사 앞이라 주저주
저하다가는 말문만  터지면 남편의 호색담이나 바람기는  물론 집안 대소사까지
하소연하는 것이 거의 정식화된 코스였다.
  하루는 약국 가까이에  사는 한 아줌마가 그저 놀러 왔노라며  찾아왔단다. 그
녀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두고  있는 아줌마였다.
곧잘 비슷한 연배의 동네 아줌마들과 고스톱을 쳐서 이긴 사람이 드링크제를 사
가기도 해서 인정 많고 사람 좋은 그녀들의 웃음과도 낯설지 않았던 터였다.
  웬지 어딘가 모르게 쭈뼛거리던  구석이 있다 싶은데 불쑥 그녀가 자신의  `한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많은 그녀의 이야기란  다름 아닌 남편의
호색사였다.
  “그저 여자만 보면 눈이 어떻게 뒤집히기라도 하는지, 내 참 연지(그녀의 딸)
보기도 창피해서. 내가 연애할 때 그 복잡한 여자벽을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언
제는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던 여사원이랑 눈이 맞아서 그렇게 속을 썩히더니 글
쎄 이번엔  아예 병까지 어디서 옮아온  거야. 친구들이랑 술 마시면  제일 먼저
여자 찾는 게 우리집 양반이라고 그러더니만 도대체  내가 정말 못살겠어. 그 양
반 친구들은 글쎄 그게 다 능력이래나 뭐래나.  이틀 전부터 병원 가기 창피하고
애들 보기도  창피하니깐 나더러 약을 좀  사오라는 거야. 다 늙어가는  통에 참
잘 한다고  내가 한참 퍼부었더니 그만  좀 하래. 이제 뭐하나  볼품없는 늙다리
허깨비인거 자기가 더  잘 안대나. 그래서 가끔은 호기도 부려보고  싶어지는 게
남자 마음인데 여편네가 그거  하나 헤아리지 못한다면서 눈물까지 글썽이는 거
야. 그러고 보면 좀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남자는 그저 젊으나 늙으나 다 동물
이야, 그치? 화장실도 잘  못 가고 거기다 몸살 난 것처럼 열도  있는 것이 어제
저녁에는 아예 밥도  잘 못 먹어. 그래도  어떡해, 죽으나 사나 애들  아빤걸. 약
좀 지어주오.”
  그녀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런 남편의 성병약을 사러오는 그 아줌
마의 행동이었다. 그것을  단순히 바람벽으로 이해하고 묵인해준다는  의미를 넘
어서 그녀의 입장에서는 적어도  성병약까지 사다준다는 행동 자체가 납득이 안
간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병원에 가서 정확한 진단을 받고 치료해야  한다는 충
고와 함께 적당히 그녀의 하소연을 듣고 돌려보냈지만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
닐 수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 그렇게 남편의 외도를  하나의 단순한 질병쯤으로 여기고 약으로 치유
하려는 여성들의 의식 저변에는 `나는  조강지처니까`라는 자부심이 깔려 있다는
점도 놀라운 사실이라고  한다. 남자들은 살다보면 바람을 필 수도  있고 적어도
살림을 내어 첩으로 들어 앉히지만 않으면, 설사  딴 살림을 내도 안주인은 자신
이라는 사실을 마치 관대한  아량을 통해 확인이라도 하려는 의도처럼 보인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가끔씩 약국에 놀러온 아줌마들  사이에 남편의 바람기를 겪지 않은 아줌마
들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냥 한번 홍역이라도 치른 것처럼. 아니면 아예 일상
사처럼 남편의 외도  경험을 이야기해요. 그리곤 대부분 결론이 이젠  좀 뜸해지
고 사람됐다는 거예요. 마치 오랜 방황을 마친  아이가 자신의 품 속으로 돌아온
것처럼 말이예요.”
  어린 시절부터 약사  꿈을 이루어 비록 아직  자신의 약국은 가지지 못했지만
약사의 삶을 살게  된 그녀는 이 직업 때문에  결혼에 대한 깊은 회의와 불신이
생겨나게 됐다고 푸념했다.  성이란 부부만의 혹은 곧 부부가 될  사랑하는 이들
의 은밀한 언어라고 믿고 있었던  그녀에게 세상 사람들의 성이란 너무 가치 없
고 지저분한 배설물들로 다가섰던 것이다. 그녀는  아내가 사랑하는 남편을 오염
된 세계로부터 지키기엔 너무나 세상이 썩어 있다고도 표현했다.
  실제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남성들은 많은 윤락여성들의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
다. 달리 표현하자면 돈을 주고 섹스를 할  수 있는 여성들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법적으로야  매춘이 금지되었다고  해도 매춘여성의 증가나  고급화는
오히려 그러한 묵인된 불법의 매춘이 더욱  공고해지고 잇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행복한 가정이 반드시 성도덕  속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정의 평안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그 편안을  위협하는 독소는 제거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
다.
  나는 가끔씩 내  남편이 이런 유혹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를
생각한다. 남편은 나와의 잠자리에서 혹은 일상  속에서 나만을 알고 사랑한다는
고백하고, 또한 나는 그 고백을 신뢰하지만  그것은 냉정히 이야기하자면 확인되
지 않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약국에  찾아와 하소연한다는 아줌마들 역시
내 이웃에  무수히 존재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사회에 존재하는
유혹의 덫들은 나의 침실까지 넘보고 있다.
  나라나 민족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에게 있어 성은 결혼한 이후 부
부간에만 합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법 규범을 떠나서 그것은  어쩌면 도덕
적 차원에서 더욱  엄격히 규제되고 있는 묵시적인 규범이다. 태초의  인류가 집
단혼제였고 남성이 여성을 재산처럼 소유하려고 만들어낸 인위적인 규범이 일부
일처제니 순결 이데올로기니 해도 어쨌든 현재 가장 도덕적인 것은 부부간의 성
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러나 역시 우리사회에는  이중의 규범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도 남성에게만
유독히 적용되고 또한 적용되야 한다고 믿는  이율배반적인 논리다. 심지어는 매
춘이 성범죄를 막는 자정역할을 하는 필요악이라는  궤변이나, 바람 피는 남자도
나쁘지만 그렇다고 그런 남자를 용서  못 하는 여자는 여자로서 부덕을 쌓지 못
한 더 나쁜 여자로 손가락질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사회가 우리의 현실이다.
  지난 90년 주부들의 고민을 상담하는  `주부들의 전화`가 사례분석한 내용에는
이같은 사실이 자명하게 드러난다. 이 자료에 따르면  주부 갈등의 가장 큰 원인
이 바로 남편의 `외도`로 지목되고 있다. 1,948건의 상담사례 중 23.7퍼센트에 해
당하는 462명이  남편의 외도 문제를 상담해왔고  부부간 성격 차이나 시댁과의
갈등, 자녀 문제  등이 그 뒤를 이었다. 특히  30대 주부들에게서는 49.1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그 수치가 높았다. 외도의  대상은 44.9퍼센트가 유흥접객업소의
종사자였고 직장동료나 부하 여직원이 23퍼센트,  일반 미혼여성이 8.2퍼센트, 유
부녀나 이혼녀가 각각 5.6퍼센트와 3.9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사회가
남편의 외도에는 열려 있다는 셈인 것이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외도하는 남편들의 태도다. 남편들의 27.1퍼센트는
자신의 외도 사실을 반성하기는커녕 당당하거나 오히려 배우자를 무시했고 19퍼
센트는 이중생활을,  17.9퍼센트는 부인에게  묵인하거나 이해해주기를 요구했으
며, 정리하려는 남편은 11퍼센트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가정을 돌보지 않거나 도
망까지 간 경우도 11.7퍼센트에 달했다고 한다.
  더욱 한심한 것은 부인들의 태도이다.  56.2퍼센트가 막연히 `그러다 끝내겠지`
하며 체념 반 관용  반으로 넘기고 있었고 이혼을 고려한 경우가 10.3퍼센트, 내
생활을 찾겠다는 경우도  4.9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주부들의  전화`의 관계자
는 이에 대해 아직은  우리사회가 보수적이고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사회라는 점
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결과라고  전한다. 남성 중심의  사회를 유지하려는
이들이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이 가세하고 있다는,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여성
이 오히려 그 왜곡된 질서를 지켜가는 장본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
론 스스로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임을 자각하지 못한 탓이라 여겨진
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요즘에는 성에 대해 자유로운 신세대들에 의해 성의식이나
풍속도도 많이 바뀌어가고 있다고 한다. 혼전  성경험의 증가나 신세대 남성이나
여성 모두 한 사람에게 구속되고  싶지 않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
이라는 점, 또한 남녀  공히 이를 인정할 수 있다는 등  각종 의식조사에서 밝혀
지는 이와 같은 결과들은 기존 성도덕의 범주에서 보자면 가히 혁명적인 전환이
다.
  그리고 이러한 풍조는  매스컴이나 기성세대들의 개탄에 상관없이 가속화되어
확산되고 어떤 방식으로든 정착되어질 것이다. 확실히  세상은 변하고 있기 때문
이다. 남녀가 근본적으로  평등해지기 위해서는 성이 자유로워야한다는  어느 사
회학자의 말처럼 남녀가 비교적 많이 대등해진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변화가 곧 사회 전반적인 흐름으로 굳어질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어머
니 세대 혹은 큰언니  세대는 참으로 불행한 이들이 아닐 수  없다. 남편을 통해
성에 눈을 뜨고  남편의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여성을 마감하는 마지막 세대가
바로 그들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기 때문에 요즘  같은 세상에
도 남편이 어디에서 묻혀왔을지 모를 성병의 병균을 씻어주기 위해 약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임신중의 섹스

  임신한 여성들 중  많은 수가 임신을 하고 난  뒤의 섹스를 탐탁해 하지 않는
다. `뱃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긴장하게 만드는 탓도 있지만 며느리
나 딸의 임신소식을 접한 대부분의 어른들로부터 `잠자리는 되도록  삼가도록 해
라. 임신해서도 계속해서  성관계를 갖게 되면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다`라는 충고를 듣게 됨으로써 긴장감을 갖게 된 영향도 크기 때문이다.
  굳이 그 말을 의식하지 않는다 해도 대부분의 임산부들에게 있어 남편과의 잠
자리를 부담스럽게 만든다. 임신은 여성에게 배불뚝이가  되는 형상을 하고 있어
야 하는 대가를 치르게 만들고 `아이를 제대로  낳을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까지
얹어주어 섹스에 관한 관심이나 욕구를 거세해 버린다.
  나의 경우만 해도  그랬다. 남편이 그리도 바라던 임신이 의심되어  병원에 갔
을 때의 일이다. 임신이 확인되자마자 담당의사는 먼저 바로 그 `주의`부터 일러
주었다.
  “앞으로 당분간 부부관계 하지 마세요.”
  그 말은 임신이라는 경이적인  사실과 접한 내게 일종의 `강령`같은 것이었다.
거역할 수도 없고 거역해서는 안 되며 거역하고 싶지 않은 계시였던 것이다.
  문제는 의사의 주지사항인 `열흘`이라는 기간이  지났어도 좀체 성욕이 생기지
않는 데 있었다. 임신 소식을  들은 주변 어른들은 한결같이 `잠자리 삼갈 것`을
당부해 열흘은커녕 한 달이 지났어도 `내가 언제  섹스를 통해서 아이를 가졌냐`
는 듯 남편 대하길 소 닭 보듯하자 남편은 은근히 불만을 표시했다.
  “이제 안전기간이 지나지 않았나?”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산부인과에서 우연히 뒤적거리던 잡지 중에 임산부들
을 위한 특집란으로  `알고 싶어요. 임신 후의 섹스는  어떤 가요?“라는 제목의
기획기사가 꽤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문가의 어드바이스에서 고려대 산부인과 강모 교수는 임신초기에 섹스와 유
산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섹스와 유산과는 상관관계가 없다
고 말하고 있다. 아직 태반이 형성되지 않은  임신 초기에는 유산될 가능성이 있
기는 하지만 초기유산의 원인은 대부분 태아에 있으며 섹스를 하지 않아도 유산
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섹스는 남녀 쌍방의 욕구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며 특히 임신 중에는
`여성의 욕구를 먼저  생각하도록 하라`는 귀띔까지 해주는 아량을  보이고 있었
다. “임신초기에는  입덧도 하므로 여성에게는  섹스를 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육체가 안정될 때까지 섹스는 피하고 무리한 행위는 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임신중의 섹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횟수가 아니라 바로 행위의 내용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건강한 임산부라면 연속된 오르가슴도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지
만 여러 번 거듭되는  오르가슴은 자궁수축을 강하게 하므로 아기에게 스트레스
를 주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보통 때보다 강하고 긴 수축을  느낀다면 너무 심
한 행위는 피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한다. 배를 압박하지 않으면서  깊은 삽입을
피하고 청결에 주의만 한다면 임신중에 섹스를 즐겨도 무방하다고 하지 않는가!
  오르가슴을 느껴 배가  `땡땡`해지면 아기의 산소 공급량이 다소  줄어들게 되
는데 물론 장시간에 걸쳐 배가 단단해지면 영향을 주겠지만 건강한 태아와 건강
한 태반을 가진 경우라면 큰 위험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임산모들이 내 경우처럼 임신과 동시에 성욕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 모양
이다. 먼저 아이를 낳은 친구에게 `성욕이 사라짐`에 대해 하소연했을 때 친구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성행위를 했는데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여성이 임신
을 했다고 해서 성적 반응에서도 변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임신 전에 있는 성적
반응이 그대로 있는 탓에  친구의 경우처럼 임신중에도 적극적으로 성행위를 원
하고 행하는 예가 있다고 한다.
  고려대 산부인과 모 교수에  의하면 임신중의 섹스나 오르가슴은 각자의 개인
적인 감성에 달려  있다고 한다. 질부나 복부에 통증이 있거나  자궁출혈이 있을
때, 혹은 만기 전 파수가 있거나 유산이나  조산의 위험이 있을 때처럼 의학적인
측면에서 봐서 문제가 될 경우에는  반드시 금욕을 해야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
니면 전기, 중기, 후기에 관계없이 섹스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흔히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 중에 `남성의 정액이 태아에게 나쁜  영
향을 준다`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그 의사는 그에 대해서도 이렇게 지적하고 있었다.
  “정액이 자궁 내에  들어갈 수 있는 시기는  배란 직후와 자궁경관의 점액의
상태가 양호할 때다. 그 이외에는 정액은 얇은  이중막의 주머니 안에 싸여 있어
서 아기가 정액에  싸이는 일은 없다. 질  속에 남아 있던 정자는 며칠  뒤 죽게
되고 질 밖으로 배출된다.”
  섹스가 태교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까?하는  노파심도 잠자리를 멀게 하는
원인이다. 마음이  안정되는 음악을 듣거나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좋은 감정에
빠지면 엄마의 그 감정이 호르몬의 활동에 의해 태아에게 전해져 태아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처럼  오히려 애정 있는 섹스는  여성의 정신을 안정시켜 주므로
태아에도 좋은 영향을 주게 된다고 한다. 그와 반대로 `싫은데도 불구하고` 남성
의 욕구에 억지로 응한다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게 되므로 태교에도 좋지 않다
는 것이다.
  이렇듯 전문의들이 `굳이  임신 초기나 후기에도 금욕할 필요는  없다`고 이야
기한다 해도 예전에야  어디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는가. 아내가 일단  임신을 하
게 되면 잠자리를  따로 펴고 사실상의 별거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통상이었다.
요즘 들어서야 성관계의  목적이 예전처럼 `출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섹스도 중요한 몫이 된 것이지...
  전문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나의 경우는 우선  성관계 그 자체가 귀찮았다. 배
가 그다지 부르지도  않은 임신초기에는 혹 `유산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그랬고, 배가 어느 정도 부르자 `모양이 우습다`는  것 때문에 싫었다. 다른 부부
들도 이때부터 부부간의 트러블이 발생한다고 한다.
  임신 6개월이었던 친구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남편이 혹 `다른  곳에서 충족
하려고 할까봐` 관계를 가졌다고 했다. 비단 친구만이 아니라 많은 임산모들이 `
혹 생길지도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의무방어`를 치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
즈음은 그런 대로 견딜 만한데 문제는 산후다.
  한 친구는 산후 3개월 간 잠자리를 멀리했는데 남편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며 반기를 들고 나와 친구는 `아내에게  그 정도 배려도 못 하느냐`며 싸움까지
벌이고 말았다고 한다.   마침내 두 사람은 싸우다 못 해  결국 비뇨기과 의사에
게 상담을 해서 그 의사의  말에 따르기로 합의를 보고 전문의의 조언을 구하는
해프닝까지 벌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극성스러운 열정으로 선택된  그 전문의
하는 말이 여성은 정신적으로  내키지 않는다 해도 생리학적으로 따지면 산전 6
주와 산후 6주  혹은 산후 금욕기간이 그  이상일 경우 남성의 금욕은 무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연령에 따라 남성의 성욕기가  다르지만 40대까지 생리적으로 고
환에서 생산된 정자가 3~4일이면  재고로 쌓이기 때문에 적어도 1주일에 1회 이
상 섹스를 치러야만 한다는 데 근거를 둔 말이었다.
  결국 그렇다고 아직 원하지 않는데 남성을 위해서 무조건 수용하는 것도 후에
부부의 성관계를 위해서는 바람직하지 않으니 여성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 밖에  없다는 의사의 부언을 듣고서야 두 사람의 격앙된
감정은 자연스럽게 누그러들었던 모양이다.
  친구나 나의 경우처럼 우리  주변에는 어른들이 들려주는 임신중의 지켜야 할
행동으로 부부관계의 금기에 대한  몇 마디가 오히려 도움이 되기는커녕 부부간
의 불화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임신초기에는  혹 생길지도 모를 유산의 위
험 때문에 병원에서도  `섹스를 삼가라`고 주의를 하지만 실제로  섹스의 클라이
맥스 때 생기는 자궁의 수축은 태아를 유산시킬 만큼 강렬하지 않다고 한다.
  다만 습관성 유산으로 자궁의 안정도가 낮은 여성은 임신 즉시 안정하는 재래
식 방법이 좋고 임신 4개월에서 막달에 이르는 동안은 복부에 강한 압박을 가하
게 되면 유산하기 쉬우므로 배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섹스를 해도 좋다는
것이다. 산달이 되면 출산이 쉽도록 자궁구가  부드러워지고 자궁이 민감하게 반
응하는가 하면 성기나 유방의 애무는 진통을 유발하게 되므로 성기나 유방의 애
무는 절대 금물이라고 한다.
  만약 오르가슴을 느끼게 되면  진통이 있기도 전에 조기파수를 일으켜 조산되
는 수가 있고 그렇게 되면 아기가 자궁내  감염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임신말기에 접어들게 되면  태아의 머리가 골반에 자리잡고 분만 태세를
갖추게 돼 오르가슴에 의한 자궁의  수축이 진통을 재촉하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하지만 아예 성관계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예정일이 넘어서도 분만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오히려 여성의 강렬한
오르가슴으로 자궁수축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분만을 위한 한 방법이 될 수 있
다고도 하니...
  산후 2,  4주일 동안은 자궁에서의  출혈이 계속되기 때문에  성관계를 갖기가
불가능하고 출혈이 멎으면  어느 정도의 성생활이 가능해진다.  사람에 따라서는
출산 후 정신적인 긴장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는데, 4, 5개
월 이상이 소요되는 경우도  있지만 산후 1개월의 검진에서 의사의 허락이 있었
다면 문제될 것은 없다고 한다. 간혹 회음  절개의 상처가 응어리가 되어 남거나
섹스를 할 때 통증을 느끼는  경우가 반년 정도 가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 1개월
에서 2개월 가량이 지나면 없어져 다시 성생활을 재개해도 무방하다는 것.
  그러나 친구들 중에  몇몇은 본인의 성욕이 되살아나서라기보다는 `더이상  미
루는 것도 남편에게는 못 할 짓인 것 같아서`라는 단서를  달며 성생활에 들어간
경우였다. 거기에  비하면 나의 경우는 좀  심한 케이스였다. 임신중기에 가졌던
남편과의 3, 4번의 잠자리가 임신중에  가진 섹스의 전부였고 분만 후에도 `성욕
이 영영 되살아나지  않을 것`처럼 그곳에 `상처를 입었다`는 피해의식과  `통증`
이 커서 산후 7개월까지 정상적인 성생활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가끔 친구들이 짓궂게 물어오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아니, 아직`이 고작이었
고 친구들은 마치  내가 남편에게 가혹한 형벌이라도  내리고 있는 것처럼 “네
신랑, 금욕주의자 만들 일 있니?”라면서 비웃음을 살 정도였다.
  친구들이 그렇게 이죽거린다고 해서 전혀 내키지 않으면서도 남편을  위해 `무
조건적인 봉사`를 할 수는  없었다.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첫  아
이를 분만하고  1년이 되도록 부부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조금씩 정상 페이스를
찾아갈 무렵 두  번째 아이를 가져 다시금  성생활과 멀어지게 되었다는 친구의
푸념으로 나의 유별남은 조금 위안을 받을 수가 있었다.
  임신중이나 분만 후 여성의 금욕으로 인해 남편이  `외도`를 한다는 말들이 아
줌마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아주 당연하다는 듯`  비집고 들어와 임산모들의 마
음을 불안하게 만들곤 하지만  출산 3개월 만에 잠자리 문제로 싸웠다는 후배남
편과 같은 경우는  사실 일부에 속할 뿐, 출산 7개월까지  금욕을 강요당해야 했
던 내 남편 같은 사람도 있으니 그건 분명 편향적인 생각이었다.
  여성들이 임신과 출산을 하면서  불안해지는 심리나 `혹 한눈을 팔게 되지  않
을까`싶은 기우 등으로  인해 마련되는 잠자리는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성생활이
정상궤도로 접어드는 데  장애요소가 되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부부간의 성이란
먼저 스스로 느끼고 그리고 함께 나눌 수  있어야 건강성이 유지되고, 또한 건강
성이 유지되는 성이라야 즐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과 마음이 `임신과 출산`이라는  오랫동안의 긴장으로부터 벗어날 무
렵, 남편은 아내가 자연스럽게  성생활에 진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아내는 남
편이 가진 사랑의 욕구를 해소할 수 있도록  지혜로운 방안을 생각해보는 것. 아
마도 열쇠는 이렇듯 단순한 진리에 있을 것이다.

  성격차이와 성적차이

  결혼한 친구들 중에 금실이  좋으면서도 유난히 부부싸움이 잦아 그네들의 부
부사가 종종 화젯거리에  오르는 이가 있다. 뭐 그다지 화려한  연애경력을 가진
친구는 아니었다. 친척 어른의  중매로 만나 2년 정도 교제 끝에 결혼한,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순서를 밟았던 친구였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적극적이고  소유욕이 강한 그녀의 성격과는 달리 남편은
매우 정적이고 차분한 이미지라 참으로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이들이 만나 결혼
한다 싶어 조금  의외인 점 정도였다. 부부는 성격이나 취향이  비슷한 이들보다
는 반대되는 이들이 만나야 상보적이고 더 잘산다는 통설이 친구들 사이에서 오
르내리기도 했었다.
  하여튼 성격상의 다른 점이 구구한 이야깃거리가 되긴 했지만 그 부부의 금실
은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 중에서는 단연 으뜸을 차지할 정도로  좋았다. 야근하
는 남편의 회사로 매운탕거리를 들고 찾아가 동료 회사원들까지 함께 성찬의 야
식을 대접하는 친구의  열성도 그렇지만, 아내 친구들의 몫까지 연극  티켓을 예
매해서 선물하는 남편의 마음  씀씀이도 그네들의 유난스런 금실을 충분히 증명
해 주었으니까.
  문제는 그런 좋은  금실과 비례하여 잦은 그네들의  부부싸움이었다. 일주일을
넘기기가 무섭게 전화를 해서는 울고짜고  하면서 `못살겠다`는 푸념을 늘어놓다
가도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호들갑을 떨며 남편이 선물했다는 옷 구경을 오라
고 전화를 해대는 그녀를 대하며  나와 친구들은 어이가 없어 하곤 했기 때문이
다.
  친구들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나름대로 추측하기를 성격은 안 맞아도 속궁합
이 잘  맞는 탓인가 보다고 입을  모았다. 그렇게 자주 싸워도  이부자리에서 다
풀어지니까 다음날이면  까르르 좋아 죽겠다며 전화를  해대지 않겠냐는 것이다
사실상 결혼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도 잠자리에서 화해해본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 친구의 이야기가  속궁합으로 결론이 난 이유가 바
로 여기에 있다.  거기에다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데다 그렇게 잘  싸우면서도 쉬
이 화해하곤 하는 내력을 설명할 뾰족한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얘들아 사실 부부간 성격차이는 성적인 차이를  두고 하는 말이란다. 그래서
이혼사유도 한결같이 `성격차이`라는  거야. 어지간한 문제는 사실 이부자리에서
많이 해결되잖니? 부부란 게 살다보면 안 싸울 수도 없고 자로 잰 듯이 딱딱 맞
을 수만은 없으니  속궁합이라도 맞아야 한다는 거지. 성격이야 맞추면서  살 수
있다지만 속궁합이 맞지  않으면 그게 방법이 없단다. 사랑이 어쩌고  해도 속궁
합이 먼저란 얘기야. 그러니  결혼 전에 속궁합부터 먼저 확인하는 게 순서겠다.

  이쯤 되면 이젠 적어도  신혼의 단꿈에서 벗어난 친구들이 박장대소하며 맞장
구를 친다.
  “우리 남편이 그러는데  말야. 사랑이란 감정이 동물적으로는  서로 좋아하는
체취를 찾아 생겨나는 마음이란다. 보통 사람들이야  저 사람이 이러저러해서 좋
다고 하지만 사실상 이면에는 이미 신체적으로 반응이 오는 사람에게 애정을 느
낀다는 거야.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  거지 뭐. 궁합이란 게 결국 다 그런 것
에서 출발한 건지도 몰라. 근데  난 왠지 동물들 짝짓기 얘기 같아서 싫더라. 부
부 사이를 꼭 그렇게만 봐야 할까?”
  물론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는 친구들도 있다.
  “너희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난 말야 한달에 한번도 잘 안 해. 우리 남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뭐  크게 좋은지 모르겠더라. 우린 둘 다  일이 많은 직장엘
다녀서인지 집에 와도 씻고  자기 바빠. 섹스 같은 거 안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애. 그래선지 난 속궁합 안 맞아 이혼한다는 사람들은 이해가 안 가더라. 섹스
가 뭐 영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환상적인 것도 아니고.”
  그러나 결혼 전부터 다닌 직장에서 남자들 제치고 진급도 하고 늘 일 속에 파
묻혀 사는 친구의 이같은 이야기에는 이내 반론이 제기된다.
  “얘가 일벌레라서 뭘 모른다니까.  그러다 사고 나는 거야. 젊고 신혼일 때야
괜찮지. 문제는  서로에게 허전할 때 생기잖니?  그러고 보니 너  도대체 제대로
모르는구나. 오르가슴이란 말은 들어봤니? 서로에게  충분히 만족하면 그 허전한
느낌이 메워지는 거라구. 부부 사이 속궁합은  우리가 소녀시절에 플라투닉한 사
랑 이야기하듯 간단한 것만은 아니야.”
  변덕스러운 친구의 요란한 결혼생활 흉보기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새 부부
관계의 근원을 향해 줄달음친다. 누구나 이렇다 할  정답을 갖고 있지 못한 까닭
인지, 혹은 나름대로 자신에 맞게 정답을 갖고  사는 탓인지 몰라도 이런 이야기
들은 끝끝내 결론을 맺을 수가 없다.
  부부를 관계 지우는 조건. 나  역시 이 물음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처녀 총각
들은 대부분 당연히  `사랑`이라 대답하겠지만 결혼한 이들은 아마도  조금 다를
것이다. 기혼인 남자들은 내자식 키워주고 밤에는  화대없이 받아주니 아내와 함
께 산다는 이야기들을  공공연히(물론 같은 처지의 남자들끼리 모였을  때만) 주
고 받는다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상당수의 결혼한 여자들은 `정 때문에`라고 이
야기한다.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한  이들 중에서 일부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
이라고도 말한다. 여자들은  많은 경우 경제적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먹여
살릴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까닭일까?
  그런데 이 문제를 역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결혼생활을 도저히 지속
할 수 없는 이들의  대부분은 성적인 트러블이 근본원인이라는 이야기가 분분하
다. 이혼 사유  중 성격차이가 사실은 성적차이라는 말도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성격은 달라도  살 수 있지만 성적으로 다르면 도저히  살 수 없
다는 이야기다. 정말 부부  사이에 속궁합이란, 성적 교감이나 취향이란 결혼 자
체의 의미를 뒤흔들 만큼 그렇게 결정적인 것일까?
  나는 이 물음이 마음 속에  던져진 후 이와 관련된 근거나 자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부부를 규정하는 근원이란 건 너무 애매모호하니까 찾기 어려울 테고,
사람들 사이의 통설대로 더 이상  부부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이들의 사례를 찾
아보면 답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였다.
  우리나라 민법 제840조에는  이혼 사유로 다섯 가지를 명시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 다섯 가지  사유에 해당해야만 이혼 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나
는 이혼도 자기 마음대로 마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사실 이때 새삼
스레 발견했다.
  어쨌든 그  사유란 첫째는 배우자의 부정행위,  둘째는 악의적인 유기, 셋째는
배우자로부터의 부당한 대우, 넷째는  혼인을 계속할 수 없는 사유, 다섯째는 기
타 등이다. 이것만으로는 애매모호했다. 성격이나 성적 조건은 어느 항목에도 들
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법을 다루는 이들이 보수적이기  때문에 그저 모른 척 넘
어간 것은 아닐까?
  그런데 몇 해 전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 발표한 상담통계 자료에서 이 문제
에 상당부분 접근한 결과가 눈에 띄었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이혼 사례들 중에
새로운 이혼 사유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성격차이`라는 대목이었다.
  아울러 이 자료에는  성격차이에는 `성적차이`와 `생활태도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 등이 있고, 이러한 성격차이는 민법상의 이혼조건 5개 항목에 전부 해당한
다고 보고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발행된 신문에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한 분석
기사가 일제히 실려  있었는데, 어떤 가지는 평소 갈등이 많은  부부라도 성적차
이가 없으면 부부생활을 지속할 수 있지만 평소 갈등이 없더라고 성적차이가 있
으면 결국엔 갈등을 일으킨다는 주석을 달고  있다. 최근의 이혼풍속에서는 성적
인 갈들이 매우 결정적이라는 분석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부부의 성격차이가 이혼 사유로 등장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사실상  나는 이 자료를 접하고서 역시 사회가  많이 변화하
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예전에 이혼을 하던 부부들의  거의 대부
분은 남편의 외도나 시댁식구와의 갈등이 주 원인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직도 이와 같은 일들은  중요한 이혼 사유로 작용하고 있지만 부부 사
이의 성격 문제가 이혼의 사유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
면 바로 아내가 그러한 `차이`를 감수해야 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순
종해야 함은 물론  늘 돈을 벌어오느라 힘든  남편을 위해 하찮은 잔심부름부터
섹스에 이르기까지 봉사해야 하는 것이 아내의 본분이었던 것이다.
  여하튼 사회가 아내를 `인간`으로 대우하기  시작한 탓인지 이혼풍속에도 새로
운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격차이라는 이렇듯
포괄적인 주제로서는 성적인 차이의 그 `결정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성
적차이는 성격차이라는 사유 속에  확실한 정체를 파악하기 어렵게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혹시 성격차이와  성적차이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 혹시 잘못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빠져들었다. 과연 성적차이란  무엇일까? 속궁합
이 안 맞는다고 쉽게 이야기하곤  했던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고 또 그
것은 성격과 어떻게 다를까?
  역시 부부의  성 문제를 상담한 내용을  발표한 `주부들의 전화`  자료에는 성
갈등의 내용을 이렇게  종합하고 있다. 먼저 아내 입장에서의 성적  불만 사항으
로 횟수가 심하게  줄었거나 애정 없이 의무적이고  형식적인 경우와 남편의 불
능, 원하지 않을 때 강제로 요구하는 경우 등이 있었고, 남편 입장에서는 아내의
불감증이 성 갈등의 주 내용으로 꼽혔다.
  이와 비슷한  내용의 연구 결과로 성결교신학대학의  이영실 교수의 논문에는
성생활 갈등요인으로 성행위에 대한  부부간 의견 차이가 으뜸으로 보고되고 있
다. 다음으로는 남편이 성적 분위기를 만들지 못하는 점, 성생활에 대한 기본 지
식의 부족, 남편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자주 회피하는 경우, 그리고 애정의 결여
등이 지적되고 있다.
  두 결과를 놓고 보면 성적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은 성기능 장애와 의견 차이
로 크게 분류되었다. 물론 성을 금기시하는 사회에서  눈 먼 교육을 받았던 세대
로서는 어쩔 수 없이 성지식의 결여나 잘못된 성적 가치관도 적잖은 요인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배우지 못해서 모르고, 또한 모르기 때문에 저지르는 잘
못이나 갈등은 사실 부부관계의 근원적인 문제라고는 볼 수 없다는 가정에서 일
단은 접어두기로 했다.
  성기능 장애와 의견  차이. 나는 여기서 부부간의 속궁합 문제의  결론이 어슴
푸레 짐작되었다.  성기능 장애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성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일종의 환자나  무능력자를 의미한다. 대표적인 것이  남자들의 발기부전증
과 여성들의 불감증이다. 또한 이 중 상당수는  심리적 요인으로 인해 장애를 겪
고 있는데, 여성의  경우는 강간 등 어떤 모욕적이거나 충격적인  성경험으로 인
해 빚어지는 경우가 많고 남성은  성기 침해나 역시 모욕적인 성경험 등 자신의
성기에 대한 콤플렉스가 주요한 요인이다.
  사실상 이런 요인들은  부부를 헤어지게 만드는 갈등요인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는 치료를 받아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다. 물론 이 경우 그 치
료의 과정에는 의학의 역할이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서로간의 노력, 즉 사랑이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아예 무능력자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우리 주변에는  자신이 성
적으로 무능력자임을 숨기고 결혼해서  여러 사람들 사이에 물의를 일으키는 이
들이 멀게든 가깝게든  존재하고 있다. 부부란 서로의 애정과 상황적  조건이 상
충되는 지점에서 맺어지는 것이라고 볼  때 이 경우는 그 교차점이 어긋나게 되
는 것이므로 예외적일 수도 있다. 아니  예외적이라기보다는 다시금 두 사람간의
관계를 되짚어  보아야 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성품이나 외모, 가치관  등은 물론 그 사람의 성적 능력까지가  상대자에게 있어
애정의 조건이었다면 어쨌든 그 사랑을 받치고 있는 한쪽 디딤돌이 무너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경우를 제외한 성적 갈등의 요인은 대부분 의견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결과였다. 성생활에서의 남편의 일방적 태도, 즉 아내는 남편이 원
할 때는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든가,  자신이 원할 때는 가능하지만 피
곤하면 언제든 거부한다는 이기적인 태도가 주로  남편의 요인이다. 또한 아내의
경우가 항상 피해자인  것은 아니다. 성에 대해 지나치게 혐오감을  갖고 있음으
로 해서 남편의 성욕을  정상적인 애정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경멸하거
나 병적으로 냉담하고,  혹은 부부간 성생활의 질이 남편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
으며 성적 능력이  곧 남편의 능력이라고 과포장하거나  비하하는 일 등은 주로
여자인 아내가 갈등을 제공하는 경우이다.
  나는 사람들이 흔히 `성적 트러블`로 받아들이는 이것을 단순히 `성적 차이`라
고만은 단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격차이`에 가
깝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생김새나 성격이  다르듯이 사람마다 어차피 성적 취
향은 다르지 않겠느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차이`란 존재하는 것이므
로.
  그러나 그런 질문을 하다 보면  우리는 다시금 결혼의 의미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결혼이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란  말이 있다. 사
람들은 종종 이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산다.  연애하고 결혼을 꿈꿀 때는 그
렇게도 가슴에 와닿던  말이 결혼한 지 몇 해만  지나면 더 이상 가슴의 언어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은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함께 하려  하면서도 삐
걱거린다.
  우리나라에서 의학상담으로 꽤  유명한 한 의학박사는 `부부간 성생활의  갈등
은 대부분 정신적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전히 정신적인 것보
다는 무언가 보다 육체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하려 한다. 그것은
남편이 성기능 장애로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성적차이를 느껴 더  이상 살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만, 예전에  연애하던 시절처럼 그를  위해 더욱더
사랑을 갖고 치료과정에 뛰어드는 것은 생각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약속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차이`란 `극복`하라고
있다. 원래  맞추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궁합이 맞은 천생연분을  더 선호하는
것이 우리의 오래된 풍습이자 결혼관이긴  하지만 이젠 서로 다른 두 존재를 인
정하며 애정으로  극복해가야 할 시대이다.  자료를 찾으며 느낀  점이지만 어떤
부부가 성적인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차이를 인정하고 나아가 그 차이
를 즐기는 고수의 지혜란  다름아닌 무르익은 서로간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일진
대...

  성적 매력의 정체

  요즘의 TV 상업광고를 보노라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에 빠지
곤 한다. 짧은 시간 안에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내느라 들인 노력이 느껴질
정도로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리모컨을 눌러대며 광고 감상하
기를 즐긴다. 원래  영화를 무척 좋아해서 온갖 영상예술이라면 모두  애정이 가
는 편이지만 잘 만들어진 광고 한 편을 보면 기분도 깔끔해지는 것 같다.
  물론 모든 광고를 보고 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광고는
부실한 상품  선전에 급급해 보기에도  유치하거나, 아니면 보는  이를 고려하지
않은 소재들을 사용해 화까지 돋게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여자의 성적 매력을
소재로 한 광고들이다.
  예뻐지기 위해 가엾을 정도로 노력하는 여자들, 혹은 뭇남성들의 시선을 `모아
모아서` 바람처럼  화면을 가로지르는 여자... 육체의  아름다움을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켜 표현하겠다는 명분 아래 단수 높은 광고회사들이 만들어내는 감각적이
고도 기술적 완성도가 높은 광고는 그렇다치더라도 헛웃음까지 자아내는 유치한
광고들은 차라리 영상 공해들이라 해야 옳다.  그래도 표현양식이 많이 세련되어
진 것은 사실이다.  광고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상품은  섹스라던가? 광고업계에
서 일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말이기도 하지만 성적 모티브를 이용해 광고를 만드
는 일은 정말 부단히 발전을 해온 듯하다.
  이처럼 섹스 어필을 이용해 효과를 거두는 많은 광고들이 늘어가거나 혹은 발
전한다는 것은  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섹스 어필하는 광고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섹스와는 전혀 무관한 상품을  선전하면서도 은근하게
성적인 공상을 불러  일으키는 카피를 강조한다거나, 과장되게  선정적인 포즈를
연기하는 장면들은 아마도 사람들이  가지는 섹스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고 성적
매력에 끌리도록 유도하는 것이라는 심증을 지울 수  없다. 이런 현상은 비단 광
고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잡지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다. 아무리 금지
하고 불태우고 해도 버젓이  돌아다니는 포르노 비디오 테이프들이 우리 주변에
즐비한 바에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광고나  잡지 등의 매체들이 성공을 한다는 데에 있
다. 사람들은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들에 감흥하고 반응하는 속도가  빠르고 원
초적이기 때문이라는데, 도대체 그 성적 매력이란 무엇이길래 그런 것일까?
  성적 매력. 이것에 대해 궁금한 것이 또 하나 있다.
  거울을 자주 보는 여자들이라면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자신
의 얼굴이나 몸매가 섹시한지 살펴본 일이 있을  것이다. 물론 아무도 보지 않는
자기만의 시간에 살짝  말이다. 이왕이면 성적 매력도 갖추고 있어서  남편이 바
람을 피우지 않도록 잡아둘 수 있고 또한 가끔은 뭇남자들의 시선도 받을 수 있
다면 금상첨화려니 생각도  해보면서. 요즘엔 지성미와 섹시함이  갖추어져야 진
짜 미인이라지 않는가?
  그러다 대부분은 혼자만의 헛웃음 같은 바람으로  끝난다. 그래도 왠지 성적으
로 강조되는 것은 천박해보이기 때문이다. 광고에  나오는 모델처럼 빨간 립스틱
을 바르고 거울  앞에서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섹시한 표정을 짓다가도 그것은
그저 자신만이 간직한  해프닝이다. 무심한 남편이 귀가할 무렵 아껴둔  고급 슬
립을 입고 귀 밑에  향수까지 뿌려도 정작 돌아온 남편 앞에서 `왜 이렇게  늦었
어요!`라며 퉁명스레 재를 뿌리는 게 일반적인 아내들의 모습이다.
  친하게 지내는 선배 중에는  울적한 날이면 백화점을 돌아다니다가 아주 야한
속옷을 사들고 집에 돌아가는 습관을 지닌 이가  있다. 자신이 성적 매력을 가지
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는 그 선배는 `울적한 날에  속옷 사기` 행사
가 뭐 그다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 울
적한 날이 대부분  남편과의 불화에서 비롯된다는 점일 뿐. 숱하게  사들인 속옷
은 그저 장롱 속에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을 뿐 그저 스트레스 해소 차원이라는
것이다. 추측컨대  그녀 역시 성적인  무엇에 혐오감이나 천박함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광고나 영화 등 각종 매체들을  통해 성적 감흥을 그리도 잘받는 사람들이 정
작 성적 매력을 가지는 데에는 주저하고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또한 반대로 성적 매력을 그 천박함 속에 더욱 강조해 선전하는 이들이 그 선전
문들을 만들 때  삼는 기준은 대체 어떤 것일까?  성적 매력이란 원래 은밀하고
본능적이어서 천박한 그런 것일까?
  나에게도 이 성적 매력에 대한 묘한 경험이 있다. 재수를 하던 시절이었다. 모
든 입시생들과 다를 바 없이  날마다 늦도록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
아온 길에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던 이를  만나게 됐다. 내가 살던 동네는 마치
스탈린이 지도를 놓고 자로 금을 그어 구획을 정리했다는 것처럼 무허가 판자촌
과 서민가, 그리고 유럽식  뾰족 지붕이 아름다운 부촌이 삼등분되어 있었다. 그
는 판자촌에 살았었다. 공부를 잘하고 말수가  적은 까까머리 중학생이었고 남동
생과 형 동생하며 친하게 지냈던 걸로 기억이  났다. 물론 그때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지만.
  그는 그 당시 불량한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말 그대로 `양아치`가 되어 있었
다. 원래 혼혈아  아닌가 할 정도로 이국적인 인상을 하고  있었는데다 차림새도
마치 헤비메탈 음악을 하는 외국의 가수 같은 모습이어서 처음엔 잘 알아보지도
못했다. 거기에다 나로서는  흠칫 놀랄 정도로 교태롭고 퇴폐적인   인상의 여자
와 껴안다시피  한 채 걸어오고 있었다.  아는 척을 했기 때문에  기억을 더듬긴
했지만 나는 너무나 놀랐다.  두렵기까지 했다. 그와 함께 살았던 동네를 떠나온
이후 동생을 통해 가끔씩 불량친구를 사귄다느니, 학생깡패의 캡틴이 됐느니, 급
기야는 교도소에 갔느니 하는  소식을 들었던 기억이 한꺼번에 살아났기 때문이
다.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한 이후  나는 오랫동안 그 찜찜한 기억을 털어내지 못
했다. 두렵다기보다는 불쾌하면서도  끈적끈적한 이상한 느낌 때문에  입시에 바
쁜 가을이었건만 며칠간은 공부도 잘되지 않았다.
  돌이켜보건대 아마도  그것은 일종의 `성적 충격`이었던  듯하다. 마치 싸구려
포르노성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이 가진 그 야릇하고 천박한 성적 매력과 비슷한
`그 무엇`이 주는 충격 때문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이후 싸구려 벗기기성 영화는 이를  갈 정도로 싫어하기 시작했다. 음
담패설이라면 최신 시리즈까지 다  외우고 떠들고 다녀도 실체로 다가오는 것만
은 결벽적일 정도로  싫어했다.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이든 피했
다. 물론 관심까지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예민하
게 관심을 두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성적인  매력이란 방 한편에 타인이 벗
어놓은 불결한 속옷 같지만 신경이 쓰이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다 나는 남편을 통해 성적 매력이나 섹스  어필하는 `무엇`에 대한 편견에
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쩌면 건강한 성이 가지는 매력에 대해  제대로 눈을 뜨
게 된 것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결혼 전 따뜻한  볕이 내리쬐는 늦은 봄날이었다. 모처럼의 주말  오후 남편과
함께 자동차를 닦으며  물장난을 하던 때였다. 송글송글 맺힌 땀을  훔치며 환하
게 웃는 남편을 보다 문득 나는 그야말로 `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
은 초여름을 향해 치닫는  봄햇살처럼 강렬하면서도 가끔씩 주차장을 쓸고 지나
가는 바람처럼 상쾌한 느낌이었다.
  성적 매력이란 그렇게 상쾌하면서도  기분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때서
야 비로소 깨달았다. 성에  관한 한 그리도 결벽을 떨던 내가  혼전에 남편과 함
께 밤을 보낼  수 있었던 까닭도 그 느낌으로  인해 경직된 나의 사고가 전환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때의 경험 이후로  보다 다양하게
남편의 성적 매력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나를 위해 피자 한덩어리를 사들고
온 따뜻한 손을  통해서도 느끼고,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도 느낄  수 있
게 된 것이다.
  또 다른 변화라면 내 자신이  건강한 성적 매력을 갖고자 하고 또한 당당하게
표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남편에게서 느낀  성적인 매력에 대해 아낌없이
칭찬해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쑥스럽거나 주저할 무엇이 아니므로, 칭찬을 통해
서 발전하는 것은 능동성이다. 능동적이라는 것은  피곤한 남편의 옆구리를 찌르
며 `밝힌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능동적이라는 것은 곧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아직도 많은 부분  성적인 무엇은 천박하고 불결한 것이라고 생각하
는 것 같다. 사실 사회에 배설물처럼 흘러다니는  여러 가지 매체나 퇴폐적인 유
흥가들을 보면서 성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심지어
는 남편과 잠자리에 들면서도 왠지 불결하게 느끼고 때로는 자신의 성적 욕구까
지 숨기며 사는 아내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가끔씩 여성지에는 남편의 과도한  섹스 요구나 혐오감을 느낄 정도의 변태적
인 섹스를 강요당할 때 느끼는 거부감과 모멸감을 호소하는 상담 기사가 실리곤
한다. 물론  그것은 절대적으로 퇴폐적인  성에 길들여져 온  남편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내 혼자 성 상담을  해야할 정도로 대화가 없는 탓이기도 하
다. 그러나 나는  좀더 아내들이 건강하고 적극적으로 성적 매력을  느끼려 하고
또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적  매력이란 짧고 붉은 속옷을 입음으
로써만 발현되고 음침한  불빛 아래에서만 느낄 수  잇다는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건강한 성을 즐길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어차피 섹스란 곧 동물로서의  인간이 나누
는 언어라고. 성적  매력을 느끼고 흥분하는 것은 신체의 어떤  흥분물질이 분비
되기 때문이고 그것은 동물적인 배설  욕구를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을 보
고 느낀다는, 지극히  `하드웨어`적인 반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적 매력이란
곧 동물적인 매력인 셈이다. 엉덩이와 가슴은 크고  질은 좁아야 하며 다리는 길
고 허리는 가늘어야  한다든가, 가슴과 어깨는 넓고 장딴지가 두꺼워야  하며 페
니스는 크고 피부는 검어야 한다는 식의 기준이 곧 동물적 매력의 기준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다만 동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학자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섹스를  즐기는 동물이라고 주장한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단
지 번식을 위한  쾌락이 존재할 뿐이다. 동물들간에 나누는 교감이란  교미를 위
한 전 단계일  뿐이지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면 섹스를 한낱  육체적인 즐거움으
로만 즐기는 이들의 모습은 다름 아닌 하등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셈이다.
  성적이라는 것은  동물적인 본능만을 의미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아마도 성적 매력을 가꾸고 감상하는 일이란 참으로 유쾌한 일이 될 수 있을 것
이다. 그것은 아마도 일방적인 `봉사의 방`이나 말 그대로 `환락의 방`을 `사랑의
침실`로 바꿀 수 있는 일이 되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광고를 유쾌하게 감상하는 일이 될 것이다.

  변태와 정상간의 거리

  잘 아는 친구 중에 결혼한 지 3개월이 채  안 되어 이혼을 한 이가 있다. 남다
를 것 없이  평범하게 자라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엘 다니다가 부모님의 권유로
선을 봐서 결혼을 했는데 별다른 이유 없이  이혼을 해버렸다. 너무나 빠른 파경
때문에 친구들은 그녀의  이혼 소식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인
지는 몰라도 너무  빠르지 않느냐, 서로 몰랐었던 점이야 이해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등등 입바른 소리를 해가며 말리던 친구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결국 그녀의  입을 통해 밝혀진 이혼의  이유를 듣고는 아무도 그녀의
이혼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됐다. 그  이유란 다름 아닌 그녀의 남편이 변
태성욕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녀를 가엾게 여기는  친구들의 동정
에 찬 위로만 난무했을 뿐이다.
  변태성욕자와 산다면?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변태성욕자라면? 결혼을 앞둔 미
혼의 여성이라면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겠지만 아마도 결혼한 여성이라면 그리
낯선 물음만은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태성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명확히 알고 있지 못한  편이다. 어
디에서부터 변태이고 어떤 이들을 변태성욕자라고 부르는지 짐작만 할 뿐이다.
  우리가 흔히 `변태`라고 부르는 것도  심리학적 혹은 정신의학적 용어로는 `이
상`이라는 의미다. 정상적이지 않은 성적 욕구를 가진 이들을 호칭할 때도 `이상
성욕자`라고 한다.  그러나 정상이 아니라고 해서  이상 성욕자가 항상  `위험`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이상적인 요소란 누구나 가지고  있기도 하고
이상성욕자라고 늘 문제만을 일삼고 다닌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고향친구들의 모임에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었다.  한 남자친구가
종로에서 직장동료들과 함께 술을  한잔 하고 집에 돌아가려는데 일어났던 에피
소드였다. 이 친구는  꽤 늦은 시간에 극장 앞에서 택시를  잡으려던 참이었다고
했다. 금요일 밤이라  술에 취해 흥청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에  택시는 여간
해서 잡히지 않았다. 새치기하는 얌체족 때문에 가까스로  탈 수 있는 기회를 놓
친 그 친구는 짜증도 나고 해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그때였다.
  대학생인 듯 보이는 인상을 한  젊은 청년이 다가와 택시를 잡고 있느냐고 물
었다. 총알택시 기사쯤 되나 생각하면서도 별다른  관심 없이 그렇노라고 대답을
했다. 늦은 시간에 같은 방향 손님을 모아서  운행을 하는 택시들이 많았지만 이
친구는 자신의 집 방향이 흔한  곳이 아니라서 맞을 만한 손님이 없으리라 생각
하곤 일찌감치 합승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청년은 날씨가 쌀쌀해진다느니, 고향 아랫목이  따뜻하다느니 등등 좀 싱겁
다 싶을  정도로 계속 말을 걸어왔다.  창백해보일 정도로 하얀 피부에  가는 턱
선이 인상적이다 싶은 생각을 하던 차에 돌연 그 청년이 놀라운 제안을 했다.
  “어디 따뜻한 곳에서 같이 있지 않을래요?”
  무슨 말인가 싶어 그 청년을  돌아보다 이 친구는 갑자기 누군가 뒤통수를 꽝
하고 때리기라도 한 양 멍청해졌다. 말로만 듣던  `호모`였던 것이다. 술이 확 깨
는 듯하기도 했지만  그 친구는 술김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뭐라고 소리
를 질러댔는지도 모르지만  세상에는 아는 욕이란 욕은 다 퍼부었던  것 같았다.
그 청년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친구의 욕설을 한참 동안 듣고 있다가는 미안하다
는 한마디만을 남기고 골목으로 사라졌다.
  “내 평생  그렇게 이상한 기분은 처음이더라.  내가 호모같이 생겼나?  뭐 할
짓이 없어  멀쩡한 놈이 그러고 다니는지  내 참 기가 막혀서.  패왕별희니 뭐니
호모 나오는 영화는  그럴 듯하기나 하지, 너희 사내녀석들도 종로에  나가면 조
심해라. 내가 그 일 있고 나서 며칠은 입맛이 다 없어 밥을 제대로 못 먹었다.”
  그 친구는 그때까지도 `호모사건`에 기분이 상해 있는 듯했다. 그 친구 말로는
몸을 팔기 위해 유흥업소에 나와  있는 여동생 같은 여자들을 보아도 화가 나지
만 정말 멀쩡하게 보이는 `사내녀석`이 호모가 되어  거리를 돌아다닌다는 게 참
을 수 없다고 했다. 말세는  말센가 보다 혀까지 차가면서. 다른 친구들 역시 한
참 동안을 그  이야기로 안주를 삼아서 왁자하게 떠들어댔다. 직접  경험하지 않
은 이들에게야 그 사건이란 `호모시리즈` 유머 같은  그저 안주거리 정도였기 때
문이다.
  이런 사례도 있었다. 취재 건으로 만났던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모 기관
의 상담원이었다. 그녀는 카운슬러라는 독특한 직업  때문에 오늘날 가정 주부들
이 안고  살아가는 고민거리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는
남편의 이상성욕이나 자신의 이상성욕 때문에 고민하는 주부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다.
  한 주부는 남편의 성적 취향이 너무  여성적이어서 고민이라고 상담을 해왔다.
성관계를 할 때  자신이 남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불쾌하고 남편이 혹시
호모가 아닌가 의심이 생기자 기피증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떤 주부는
자신은 남편이 가학적인 섹스를 해주어야 쾌감을 느끼고 그 강도가 점점 심해지
는 것 같아  고민이었다. 남편이 `당신 혹시 변태  아니야?` 라고 한마디 내뱉은
이후부터는 눈치만 살피는  버릇이 생겼고 남편을 대하기가  거북해졌다. 남편만
보면 왠지 부끄럽고 자신이 없어지면서 심할 때에는 말도 더듬는 버릇이 생겼다
고 했다. 그런가  하면 남편이 동물적인 섹스를 요구하는 데  굴욕감을 느낀다든
가, 집에  있으면 자꾸만 이상한 성적  공상을 하게 된다든가 혹은  자신이 너무
야한 포르노성 영화만 좋아하는 게 이상하다 등  성에 관한 `이상여부`를 고민하
는 주부들은 그 수가 꽤 되는 편이었다.
  취재차 만난 그 상담원 여성은 대체로 심한 이상증세가 아닌 것으로 판단되는
이들도 자신과 남편에 대한 성적 취향에 많은 의구심을 가지는 편이라고 이야기
했다. 물론 학대받거나  변태성욕자인 남편에게 심하게 고통받는  주부들의 경우
는 예외였다.
  이상성욕을 가진 사람들. 우리 주변에는 이상성욕을  가진 이들이나 그로 인해
고민하는 이들이 꽤 많은 편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상`의 범위나 기준이 좀 애
매한 상태에서의  판단이긴 하지만, 자신이나  주변인이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의구심이 들면 대부분  불쾌해 하거나 고민에 빠지게 된다. 사실  드러내놓고 비
교해보거나 의논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이상`이 깊어지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남녀관계에 있어서 이상성욕의 문제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혹시
내가 이상성욕자인 것은  아닐까. 남편이 이상성욕자인 것은  아닐까 고민하면서
도 쉽사리 문제에  접근하기가 어려워서 더욱 그렇다. 때로 분위기를  달리한 섹
스를 즐길 때에 한 번쯤 의구심이 들다가도 그 불쾌한 기분이 싫어 그저 덮어두
려는 것이 보편적인 사람들의 심리인 것이다.
  이상성욕이란 무엇일까?  이상성욕은 인간을 위험에  빠뜨리고 피폐하게 하는
무서운 전염병 같은 것은 아닐까? 혹시 내가 이상성욕자는 아닐까? 원만한 남녀
관계 혹은 부부관계를 위해 아마도  이 문제는 꼭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일 듯하다.
  심리학자들은 이상성욕이란 어린 시절 정상적인 발달을 이루지 못하고 일정한
단계에서 고착이 생길 경우  나타나는 장애로 설명하고 있다. 구강과 항문, 그리
고 자신의 성기를 통해 쾌감을 터득하는 각 발달단계와 최초의 이성으로 만나게
되는 부모와의 사랑 등.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자신의 신체부위와 부모와의 관계
에서부터 근본적인 원인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상성욕은 크게 나누어  성의 대상과 목표에 대한  도착으로 구분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상의 도착에는 페티시즘(fetishism)이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동
성애가 속하고,  목표 도착에는 사디즘이나  마조히즘, 노출증,  흔히 관음증이라
부르는 절시 등이 속한다.
  유교적 색채가 짙은  문화적 환경 때문에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래도 그 수가
적은 편이지만 이상성욕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이다.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더 많고 또한 남성이  더 정상으로 회복되기 어려운 특징을 가지고 있
다. 남자 아이는 보통  아버지를 동일시하며 자라는 것이 보통인데, 어머니에 대
한 애착이 강해서 어머니와 동일시가 이루어진 경우 아버지와 같은 남자를 사랑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는 그와 반대이다.
  가끔씩 우리는 `여자 같은 남자`나 `남자 같은 여자`를 만나면 그 사람이 동성
애자가 아닌가 의심하곤  한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동성애는  단순히 남
성 성이나  여성 성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든  남성성이나 여성성은
공존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성애에 관한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남성적인  성 취향을 가졌다고 해서
곧 자신과 같은 여성을 사랑하게 되란 법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기 전부
터 양성적 존재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그것은 다만 `정도의  차이`에 지나
지 않는다. 비약한  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성애적 취향과 남성, 여성 등의
이상성욕은 적어도 심한 상태만  아니라면 대화나 따뜻한 사랑을 통해서 극복이
가능하다.
  사디즘이나 마조히즘, 절시 등은 거세 불안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사디즘이란
거세 불안에서 헤어나기 위해 자신을 거세하려는 입장에 올려 놓고 자신이 거세
당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확인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반면 마조히즘
은 거세 불안으로부터 자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미리 상징적인 거세를 하고는
앞으로 더  이상 거세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 스스로를  납득하려는 행위이다.
절시 역시 거세 불안에서 도피하려는 행위로 풀이된다.
  이처럼 대부분의 이상성욕의  원인은 거세 불안이나 남근선망으로 설명되어지
곤 한다. 물론 이미 알려져 있듯이 이  학설의 주창자인 프로이드는 그의 남근선
망이론에서 보여지듯이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시각을 가졌다는 점에서 인
정할 수만은 없는 가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쨌든  동성애나 사디즘 등 이상성욕이  정상적이고 조화로운 성장을
하지 못한 이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통계적으로 이미 증명된 사실이
다. 이상성욕은 부모의 사랑이 부족해서 나타나기도  하고 너무 과잉되어서도 나
타난다. 지나치게 깔끔해서 기저귀를 자주 갈아주거나  혹은 반대로 더러워 앙앙
울어대도 갈아주지 않는 바쁜 엄마를 둔 아이는 그 외의 다른 조건이 모두 같아
도 다른  성격과 다른 성 취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란 누구나
출생의 배경이나 성장이 조건이  형제일지라도 다를 수밖에 없으니 다른 성격과
다른 성 취향을 갖게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이상성욕자
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것이 단지 `다른 성 취향`인지  `이상성욕`인지의 문제다.
개성적인 성 취향을 포함해서  이상성욕이란 자신의 성장 배경과 관계되어 왔던
모든 환경, 그리고  자신의 의지가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합작품이다. 본능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이나 의지가 한 요소로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성욕이란 식욕이나
수면욕과는 달리 자아에 의한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통제가 가능하다면 그
것은 이미 `이상성욕`이 아니라 `다른 성 취향`일 뿐이다.
  다른 성 취향이란  남녀간의 사랑을 돈독히 해주는  데 아주 매력적인 조건이
다. 사랑의 감정이란  자신과 닮은 점을 찾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지만  결국 자신
과 다른 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듯이.
  희랍신화에 나오는 미소년 나르시스는  연못 속에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을 타
인으로 착각하고 그를 사랑하다가 결국 연못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나르시시즘
이란 말의 어원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가엾은 일인가?
  흔히 사람들은 사랑해서 결혼을  하더라도 전에 보지 못했던 성격이나 단점을
발견해서 자주  싸우게 된다. 그러다 보면  더욱 깊은 정이 생기고  서로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도 한다.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어차피
서로 다른 두 문화의 충돌을  수반하게 되어 있다. 성적인 만남 역시 그렇다. 서
로 다르다는 것은, 그리고  그 서로 다른 것이 만난다는 것은  더욱 발전된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성적인 만남
역시 그렇다. 서로 다른 성 취향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오히려 성생활
의 폭과 질도 향상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충돌을 발전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약간의 지혜와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늘 남편에게 묻는다.  그리고 남편은 내게 묻는다. 당신의 원하는 무엇을
주고 싶다고. 사랑은 주고 싶은 마음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만약 그것이 자신
을 병들게 하고  화나게 하는 것이라면 주저없이 이야기해야 한다.  사랑은 다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해야 하는 것이듯이. 그
래서 대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과연 정상일까? 이런  의문을 품어본 사람이라면 오늘밤엔 꼭 한 번쯤
남편에게도, 혹은 그이에게도 물어보자.
  “우리는 과연 정상일까?”라고.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의 나이는

  친척 언니 중 한 사람이 맞선을 보았다. 서른을  넘긴 지 오래인 그 언니는 어
찌된 일인지 특별한  사연 없이 결혼이 늦어졌다. 전문대학을 나와  직장 생활을
하다가 조그만 화장품 가게를 얻어 장사를 하면서 그럭저럭 지낸 것이 유수같은
세월을 삼켜버린 것이다.  늘 혀를 차며 걱정하는 친지들의 성화에  못 이기기도
하고 자신도 결혼하기  위해 꽤나 노력하며 맞선을  보았지만 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맞선을 보는 날이면  전화통에는 불이 난다.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못 견딘
친지들의 확인전화임은 물론이다. 그 언니는 정말  선이라면 옆에서 보는 사람이
더 지겨울 정도로 많이 보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상대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면 둘러대는 그녀의 일관된 이유였다. 친지들의  성화와 관심에 미안하고 쑥스러
워서이겠지만 결과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행사할 압력에 쐐기를 박는 그녀 나름
대로의 히든 카드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란 바로 상대의 `나이`다.  어떤 경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은 남자는 아무리  자신이 나이가 많아도 징그러워 싫다든지, 이번  남자는 나
이가 연하이니  사람들 사이에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냐든가, 혹은  동갑은 많이
싸워서 결혼생활이 평탄치 못한 친구들을 많이  보았다든가 등등. 수없이 둘러대
온 `나이탓` 때문에  친지 어른들은 그녀가 나이 이야기만 하면  이미 맞선은 물
건너 간 이야기가  되었음을 짐작한다. 그렇게 되풀이된 행사도 여러  해를 넘기
다 보니 맞선보다 어른들 사이의 관심사는  부부궁합과 나이에 모아진다. 그녀가
제공한 이야깃거리로서의 남녀 나이는 어른들이 각각 살아온 풍상만큼이나 다양
하고 흥미롭다.
  대부분의 어른은 나이가 진득한  남자를 만나야 사랑과 귀여움을 받아 행복하
다고 이야기한다. 남편이 나이가 많아야 집안의 어른  노릇을 제대로 해낼 수 있
고 가정의 위계가 선다는 이야기다. 아울러 열  살이나 스무 살씩이나 위인 남편
을 만나 지극히 교육적인 가정을 만들었다는  이웃의 이야기도 곁들여진다. 또한
남편이 나이가 많으면 이해심도  깊어져서 여자가 다소 불미스런 일을 저질러도
너그럽게 용서해주고 집안 어른 모시는 일에도 솔선수범하게 된단다.
  반면 남자 나이가 적으면 여자가 남자를 넉넉한 품으로 안아주니 가정이 평화
롭다는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굳이 나이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내세우
는 어른들이 하는 말씀이다. 간혹 아내가 나이가  많아 빨리 늙어서 남편이 바람
을 피운다고도 하지만 그럴수록 남자들은 어머니 같은 아내 품으로 돌아가기 마
련이라고 한다. 옛날에야  민며느리로 들어가는 여자들이 남편의  기저귀까지 갈
아주면서 키워내도 잘만 살더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동갑내기가 잘산다는 의견도 빠지지 않는다. 동갑내기는  궁합도 안보는 게 상
례이며, 티격태격하면서 시소 타듯이 살아도 금실이 좋은 법이라면서 말이다.
  사실 종합해보면 다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고  결국 정답이란 없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부부의 나이란 그만큼 다양하고 사는 모습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의 나이에 대해 저술한 프랑스의 한 학자는 결혼이란 남
녀간의 신체적, 경제적 성쇠에 따라 보완되는 결합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
적으로 취약한 이십대에는 약 이십 년 간의 터울이 지는 상대를 만나는 것이 좋
다고 한다.  즉 이십대에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십대의 상대를  만나 경제적인
지원을 얻고 다시 사십대에는  이십대를 만나 경제적 지원을 함으로써 상쇄시킨
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뒤집어보면 성적인 능력에도  관계가 깊은 것으로 성적 능력이 왕성한
이십대는 정력을 상대자의  경제력과 교환하고, 사십대가 되어서는  반대로 자신
의 경제력과 상대자의 정력을 맞바꾸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바람직
한 결혼생활을 만들어줄 것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궤변이라고 일축해도 좋을 이야기다. 결혼을  돈과 섹스의 거래로 비하시
킬지도 모르는  이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었다. 그리고
돈 많은 유부녀를 넘보는  세칭 `제비족`들의 이론적 근거(?)가 되어주기도 했었
다.
  이에 반해 보다  과학적인 근거를 가진 입장도 있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의 나이란 크게 두 가지 기준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성적 능력
과 노화의 기준이다.  즉 성적 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와  신체적으로 늙어가는
수순이다. 여기에 여자의 경우는 임신과 출산의 시기가 조건화된다.
  <주역>과 한방  최고의 경서라 불리는  <황제내경>에 의하면 여성과 남성의
발달을 근거로 일종의 `궁합론`을 도출할  수 있다. 성 기능의 주요한 요체인 신
의 발달과 쇠퇴를 중심으로 `성합`을 가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발달의 구분은 여성의 일곱 살, 남성을 여덟 살을 주기로 구분한다. 즉 발달단
계가 여자의 경우 예로 들면 7세.  2X7세(14세), 3X7세(21세),4X7세(28세), 5X7세
(35세) 등의 방식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여자가 성적 능력을 갖게 되는 시기는 2X7세 즉 대략 열네 살 정도이다. 이때
여성의 생리를 주관하는 천개와 성이나 임신,  생활리듬을 조절하는 인맥이 생겨
난다. 성기능의 요체인 신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어 온몸에 확산되는 시기는 3X7
세 정도. 이  시기부터 4X7세까지의 기간이 여성으로선  신 기능이 가장 왕성한
시기이다. 그리곤  5X7세를 계기로 노화가  시작되는데 7X7세에 이르면  인맥과
천개가 다해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된다. 즉 폐경한다는 의미다.
  이 가정에 의거한다면 여성이 성적으로 사랑을 나누기에 가장 좋은 나이는 대
략 21세에서 28세 사이가 된다. 임신을 해도  산모나 아이 모두에게 좋은 시기이
므로 흔히 결혼의  적기라고도 한다. 요즘엔 여성들의 만혼이 부쩍  증가하고 있
는데, 신혼 초에 섹스가  가장 왕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상례라고 할  때 이 발
달과정론에 따르면 사실상  절정기에 비하면 다소 `무리`를 수반하는  일이 되기
도 한다. 임신 역시 마찬가지다.  너무 늦게 아이를 갖게 되면 그만큼 산모나 아
이에게 무리가 따르므로 출산 후 조리가 누구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반면 여덟  살을 단위로  구분하는 남자의  경우 가임 능력이  생기는 시기는
2X8세. 신체적으로나 성적으로  가장 절정을 이루는 시기는 3X8세에서부터 4X8
세, 즉 24세에서 32세 사이다. 5X8세부터는 신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6X8세
에는 양기가 쇠하는 등 급격히 노화하게 된다.
  결국 신 기능이  온몸에 퍼지기 시작해서 성적  능력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는
남녀를 비교하면 약  3~4세 가량의 터울이 생긴다. 부부간 평균  연령차가 3~4세
인 것은 아마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가 보다.
  그러나 노화의 과정을  보면 이것도 반드시 바람직한 것으로만은 볼  수 없다.
여성은 폐경을 이루는 49세까지는 왕성한  성 호르몬의 분비로 인해 잘 늙지 않
는다고 한다. 여성의  자궁 안에서 여성의 각종 질병과 생활리듬이  부분 조절되
어 남성보다 더 젊게 산다는 이야기다. 반면  남성은 대체로 40세를 계기로 급격
한 노화의 길로 접어들어 금방 `마음은 청춘, 몸은 할아버지`로 변해버린다.
  아내가 30대나 40대에도 여전히 왕성한  성 기능을 발휘할 때 남편은 슬슬 눈
치를 살피게  된다는 이야기도 그럴  듯한 가설이다. 노년의  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역시  남성의 급격한 노화에  다라 부부생활 후반기에는  남성의 여성화,
여성의 남성화 현상이  일어난다고 보고하고 있다. 부부생활의  주도권이 남성으
로부터 여성으로 전이되는 까닭도 여기에서 출발하는 셈이다.
  결혼생활이 결코 20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남성이 여성보다 몇 살
위인 것이 반드시 이상적인  결합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오히려 노화로 인
한 불일치의 시간이 긴 부부생활 후반기를 생각한다면 남성에 비해 여성이 나이
가 많은 것이 더 순탄한 부부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일는지도 모른다.
  내 고향 선배언니 중에서 세 살 아래의 남자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 이가
있다. 연하의 남자라고 집안에서 반대도 했고  시댁에서도 나이 많은 며느리라고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다 남편의  형과 학교 동창이기도  해서 관계도
조금 묘하게 얽혀 있었다.  이제 마흔이 다 된 그녀는 연하의  남자와 사는 느낌
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처음엔 늙어 보이는 게  그렇게 싫더라. 미장원에도 더 자주 갔었어. 피부도
탄력이 없어지나  해서 그 귀찮은  에어로빅도 했단다. 남편이  속상한 일이라도
만들면 나보다 어려서 그런다는 생각이 먼저 들곤  했지. 남편도 나이 차를 의식
해서 많이 조심하고 그랬던  것 같아. 그런데 살다 보니까 나이란  걸 전혀 의식
하지 못하게  되더라. 사실 뭐 스무  살씩 차이나고도 잘사는  사람들도 있잖니? 
가장 인간적이고 때로는 본능적인 모습으로 만나는 게 부부라서 그런지 이젠 그
저 인생의 친구 같고 피붙이 같기도 해. 나이는 처음 만날 때나 중요하지 뭐.”
  가장 이상적인 결합을 꿈꾸는 선남선녀들의 바람과는 달리 어떤 결합도 말 그
대로 일장일단이 있다. 동갑을 전제로 남성이 빨리 늙건, 성 기능이 가장 활발한
시기가 여자에게 더 먼저 오건  사실상 개인차도 크고 변수도 많아서 더욱 그렇
다. 부부간의 화합이  성적 결합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  따라 겪
는 삶의 풍상도 다르며,  늙음이란 게 자로 잰 듯 나이순으로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단지 여성에게  매우 중요한 `임신`의 시기만큼은 누구도  `적기론`을 부
인하지 않는다는 사실뿐.
  아마도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의 나이란 바로 지금 사랑하는 이의 나이라고 생
각하는 것이 제일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옛어른들이 혹은 주변의 기혼자들이 `
누구는 어떻더라`고 갖가지 다양한 사례를 열거하는 것처럼 모든  다양한 커플들
이 가장  이상적인 결합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나이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사랑이 아니겠는가?

  피임의 책임은 누구에게

  얼마전에 본 컴퓨터  통신란에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올라와  있었다. 제목은
다름 아닌 `내가 피임하기 싫어하는 이유`였다. 여러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올
려놓은 것으로 제목부터  구미가 당겨서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들만 참
여할 수 있는 난이었는지 의견을  낸 이들이 모두 남자라는 공통점이 있어 특이
했고 더욱 관심이  갔다. 부부싸움 원인 중에도 상당한 원인제공을  하고 있다는
피임에 관한 문제는 남자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관심사일 것이다.
  마흔네 살이며 은행원이라는 어떤 이는 `성은 본능이며 남성들은  강해야 한다
`는 제목 아래에  남성들의 정관수술론을 전면 반대했다. 성욕은 식욕,  수면욕과
함께 신이 준 기본욕구이며 인위적 방법으로 이를 역행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
라는 주장이었다.  특히 피임은 남자를  약하게 만들고 성적으로  무력하게 하는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자영업을 한다는 서른다섯의 K씨는 한층  더 발전해 `정관수술을 하면 합병증
이 생긴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정자가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 놓았으니 그것이
어디로 가겠는가, 몸 안에 고여서 다른 병을 유발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정관수
술은 결국은 남자의  건강과 정력을 해치는 것이다 등등. 아울러  관계마다 부인
이 수술을 하라고 성화지만 번거로운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콘돔도 싫고 수술 합
병증도 걱정되어 고민이라고도 했다.
  그 외에도 정관수술로 대표되는 남자의 피임에 대한 반대의견은 무수했다. `씨
없는 수박이 되긴 싫다`든가 그저 몸에 칼을 대기 싫다는  의견을 비롯해 피임기
구인 콘돔이 성감을 떨어뜨린다는 의견도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출산이 여자의 몫이듯 피임도  여자의 몫이다`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서른일곱의 회사원이라 명명한 J씨였다.
  “아기를 낳는 것은 여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에 관한 문제는 여자들이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생각한다.  피임기구가 많지 않았던 어머니
세대에서도 여성들은 지혜롭게 처리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하물며 오늘날과 같
이 피임방법이 다양해져서  여성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남자들이 해야만 하는 건지 의문이다. 바깥일을  하는 남자들은
그것에 신경을  쓰는 것만도 스트레스를  받기에 충분하다. 피임은  여자가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참 솔직한 의견들이었다. 물론 너무나 무지하고  이기적이어서 기가 막힐 지경
이었지만 남자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단 주제  자체가 그렇듯이
자신이 피임하는 것을 싫어하는  이들의 의견만을 모아놓은 것이어서 모든 남자
들이 피임을 싫어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피임을 누가 할  것인가를 포함한 피임 전반의  문제는 부부나 성숙한 사랑을
나누는 남녀 모두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숙제다. 섹스란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
지만 그저 사랑을 나누는 것 이상의 책임이 따르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임은  대부분 세 가지의  목적에 사용되고 있다.  조산아의 임신시기
조절이나 다음 아이와의 터울  조절, 단산 등이다. 물론 이것은 결혼한 부부들을
전제로 한다. 단순하게 잘라 말한다면 아이를 원치 않을 때 피임을 한다. 아이를
낳는 데 건강상의 무리가 있거나 경제적으로 곤란할  때, 혹은 부모의 역할을 하
는 데 준비가 미흡할 때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피임을 하게 된다. 때로는 생활
의 일부로서 섹스를 즐기고자 할  때도 그로 인해 아이를 갖지 않으려고 피임을
하기도 한다. 아이란 사랑하는 두 사람만이  즐기고 나누는 커뮤니케이션 이상의
보다 넓은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 존재이자 준비하고 계획하는 데서 얻어져야 할
책임의 결실인 것이다.
  피임은 대체로 성생활에 주도권을 가진 이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그 책
임을 담당하는 경향이 있다. 언뜻 생각하면  섹스를 능동적으로 이끌어가는 사람
이 피임 역시  주도할 것으로 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마치 섹스를
리드하는 대신 상대자가  피임을 책임지는 역할 분담처럼, 피임은 누가  더 용이
하거나 적합한가의 여부를 떠나 있다.
  우리사회에서 피임의 몫을 떠맡는 이는 대다수가  여성이다. 성생활에 있어 수
동적인 이들도 여성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물론 피임기구의 이용률을  보면 콘
돔의 사용량은 경구용 피임약에  못지않게 많다고 보고되고 있지만 그래도 각종
조사에서 보여지는 결과에는 피임의  책임이 여자에게 있다고 보는 이들이 상당
하다. 거기에다  여성 스스로도 피임은  여자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기혼 부부들의  경우 피임은 대개 아내가  담당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
다.
  여자들이 피임을 할 때 쓰는 일시적인 방법으로는 경구용 피임약을 먹거나 페
서리, 루프 등의  기구를 이용하는 방법 그리고  질세척법, 기초체온법, 배란주기
이용법 등이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피임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피임과 관련한
비공식적인 방법으로는 낙태도 있다. 역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은 호르몬제
인 피임약을 먹거나 배란주기를 이용하는 자연법이다.  반면 남자들은 거의 대부
분 콘돔을 사용하고 있고 이외에 정관수술, 혹은 질외사정법을 이용한다. 여자에
비해서는 간단한 편이다.
  각종 의료기관이나  의학자들에 따르면 피임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하는 것이
별다른 부작용이 따르지 않고  건강을 해치지 않아 바람직하다고 적극 권장하고
있다. 70년대 이후 산아제한을 위한 가족계획  캠페인이 벌어질 때도 피임교육의
주 대상자는 남자였다는 사실도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자보다는 남자가  피임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뒤집어보면 여자가
피임을 할  경우에는 어느 정도의  부작용이나 불편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여자의 피임법들은 때에  따라서는 매우 심각한 부작용을 수반하거나 불
편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경구용 피임약이다. 호르몬제인
피임약은 아직껏  암 유발설과 항암효과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으므로 무어라
단정 짓긴 곤란한  점이 있다. 그러나 최근 각종 호르몬제제로  인한 암유발설이
유력해지고 있는 사실과 더불어 위험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그러나 암을 유
발한다거나 오히려 암을  예방한다거나 뭐 그런 논쟁을  떠나 한 번쯤 피임약에
동봉되어 있는 설명서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피임약의 사용에 대해 다시 한번 생
각을 해보았음직하다.
  피임약 복용에는 여러  가지 주의사항과 감수해야 할 증상들이 있다.  첫째 피
임약은 매일 꼬박꼬박  날짜를 지켜가며 먹어야 하는 정성이 따르고,  속이 메스
꺼리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하는 등의 체질에 따른 갖가지 증상을  참아야 한다.
담배를 피우는 여성은 질 점막에 이상이 생길  수 있으므로 불가하다. 피임약 먹
는 것을 잊어버려서  깜짝 놀라 허둥지둥대거나, 늘 피임약을 먹었는지  먹지 않
았는지 불안해하거나, 생전 멀미라곤 안 하던  사람이 전철을 타고도 메스꺼리는
등의 경험을 해본 이라면 아마도  이 모든 조건을 감수하거나 혹은 불편을 느끼
지 않는 여성에겐 경의라도 표하고 싶을 것이다.
  페서리나 루프는 질  속에 장착만 하면 되는  것이지만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미처 제거하지  못하면 심각한 염증을  유발시킬 수 있다.  그리고 질세척법이나
기초체온법, 배란주기법 등은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사용되곤 하지만 널리 알려
진 대로 실패하기가 쉽고 늘  정해진 시간에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불편에 시달
리게 된다.
  또한 낙태는 여자들만이 불가피하게 치러내는 가슴  아픈 의식과도 같다. 사회
적으로 이미 낙태의 부작용과 비도덕성에 관한 문제는 널리 홍보되고 있는 형편
이지만 아직도 중절수술을 위해  산부인과의 문을 두드리는 여성은 끊임없이 증
가하고 있다. 특히  낙태는 영원히 아이를 갖지 못하거나 거의  대부분 건강상의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므로  너무나 커다란 대가를 치르는  방법이다. 아이러니하
게도 낙태의 큰 폐해나  비윤리성에도 불구하고 늘어만가는 낙태율은 오히려 피
임의 중요성을 실감케 하기도 한다.
  이처럼 여성의 피임과 관련해서  유의해볼 만한 것은 여성의 건강과 생식기관
의 질병에 따른 함수관계이다.  여성의 건강은 임신이나 출산, 생리 등 생식기관
과 관련해 생기는  질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성 암의  38퍼센트는 자궁경부
암, 유방암, 난소암 등 생식기계 암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임신중절 횟수도 91년
통계로 1인당 5.3회에 이른다고 하며 낙태경험자  중 30~40퍼센트는 피임에 실패
했기 때문이라고 하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반해 남자의  피임법은 부작용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굳이
들자면 콘돔의 경우는  번거롭고(?), 정관수술의 경우는 `아픔`을  동반한다는 정
도일까?
  물론 정관수술의 경우는 말 그대로  `수술`이라는 외과적 의료행위이므로 쉽다
고만 이야기하는 데 어폐가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신혼 초나 연애중인 상대자에
게 정관수술이 제일 간편하니 수술하라고 권할 수도  없고, 수술 후의 아픔 역시
만만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콘돔을  반드시 남성들만이 싫어하는 피임
법이라고 볼 수도  없다. 콘돔은 분위기를 깨트리고 일부 민감한  여성들에겐 알
레르기를 일으키거나 성감을 둔화시키는 미운 오리새끼 같은 존재로 백안시되는
방법이기도 한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피임법은  여성의 각종 피임법에 비해 단순하고 용
이함을 부정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실 나는  왜 피임을 누가 할  것인가, 혹은 피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따위의 문제가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주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는지에 대해 개탄
해 마지 않는다. 의학적으로 남자의 피임법이  당사자 모두에게 좋다고 권장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굳이 그 책임을 여성에게 떠넘기려고 하고,  또 감수하고
있는 것일까? 심지어 앞에서 나열한 것처럼 피임을 누가 하면 이런 것이 나쁘니
좋으니 하는 것조차 실제로는 그다지 현실적인 설득력을 발휘하진 못하는 것 같
다.
  남자들의 경우도 위와 같은 사실에 대해 예전처럼 무지하지만은 않은 것 같아
더욱 그렇다. 개중에는, 특히  내 친구들의 남편 중에는 아내의 건강을 생각해서
스스로 아내의 피임을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참으로 당연한 일인데도  나는 요
즘 그것이 그리 흔한 일이 아닌 것에 대해  놀라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오랜 역
사적 뿌리를 안고  있는 사회적인 문제일는지도 모른다. 아이를 낳는  일이 전적
으로 여자에게 책임이 지워지던 시대에서부터 임신과 피임의 문제는  `여자의 본
업`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결혼 전 서로  좋아서 만나 관계를 가진 후 임신을 하
게 되면 주로  여자가 칠칠치 못해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손가락질받는 이치와
같다. 심하게  표현한다면 남자들은 즐기는  특권이 있을 뿐이지  책임은 없다는
셈이다.
  사실 피임은 사랑을  나누는 데 있어 속칭 `분위기 망치는`  재미 없는 존재일
지도 모른다. 피임을  하기 싫어하는 남자들의 대부분과 일부 여자들은  특히 콘
돔을 사용한 피임이  성감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남녀 공히 기피한다고  한다. 가
까운 친구들 중에는 피임 문제로 티격태격하다 별거에까지 이른 적이 있는 이도
있으니 정작 사랑을  위한 행위가 사랑을 위협하는  존재로 뒤바뀌기도 하는 것
같다. 피임을 귀찮아하는  남편을 대하는 일도 편치 않아서 차라리  자신이 피임
약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감수한다는 친구도 있다.
  한 친구는 피임이든 무엇이든 섹스에  관한 그 어떤 요구를 한다는 것이 왠지
내심 정숙치 못해 보이는 것 같아 껄끄럽다고도  했다. 사실 많은 여자들은 섹스
와 관련된 그 어떤 것이든 요구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한
다. 남편이  피임을 번거로워하고 귀찮아하면  왠지 미안하고 자신의  책임인 듯
여겨진다. 그러다 보면  눈치를 보게 되고 그럴 바에야 자신이  불편함이나 부작
용을 감수한다. 때로는 `꼭 해야 하나?` 한탄도 하면서.
  그러나 피임이 사랑을 방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을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피임  문제는 반드시 사랑을 통해 해답을 풀어야  한다. 사랑으로
남자의 이기심을 이해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당장 여자들의  피임법이 건강을
해치는 마약 같은 존재라고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현대의학이 제시하
고 있는 답이자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극복될 수 있는 문제에 관해 해답을
`확인`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사랑하고  있다면 여자의 피임이 가지는 부작용이나 불편
을 외면하는 남자에게 당당히 요구하고 설득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사랑으로 설
득해도 외면한다면 사랑을  의심해볼 일이다. 생활에서는 남녀차이  없이 당당하
게 살면서도 정작  침실에서는 유약한 존재가 되는 여성들은 더욱  그렇다. 피임
에 관한 한 자신이 감수하려는 것보다는 피임을 요구하는 것이 능동적이고 합리
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단언하건대 피임지수는 곧  사랑지수이다. 이것은 남자의 피임법이  가장 바람
직하다는 너무나 자명하고도  과학적인 해답이기 때문에 가능한  명제다. 자신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매일 `약 먹는` 스트레스와  심지어 위험도 높고 복잡한
불임수술과 낙태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고 있는 이가 자신의 연인이요 남편이
라면 과연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사랑할 가치가 있겠는가 되물을
일이다.

  남편의 애인, 아내의 남자친구

  예전에 남자선배가  운영하는 출판사에 잠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출판사를
꾸린 선배는 결혼한  지 십 년이 넘는 삼십대 후반의  전형적인 `한국형 유부남`
이었다.
  12월 중반을 넘어선  어느 날이었다. 아침부터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오후 무
렵에는 푹푹 빠지는 눈으로  지척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는데 퇴근 후의  `소주
한잔`의 묘미를 아는  선배는 여자 후배가 있는  것도 의식이 안 되었는지  불쑥
이런 말을 내뱉았다.
  “이런 날 애인하고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 하면 기가 막히겠다.”
  아직 미혼인데다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결혼생활 10년이나 된 선배의 마음을
미처 헤아릴 수 없던  나에게 그 말은 `비도덕적`이니 `비윤리적`이니 하는 말을
다 연상해야 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남자들은 다 늑대요  도둑이라더니...` 하는
생각에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 출판사  사장선배를 쳐다보는 눈길에는  `선배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이라는 야유가 담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세월도  유수처럼 흘러 삼십 나이를  훌쩍 넘어선 `애  딸린 유부녀`가
되어서야 남자선배가 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결혼생활 십 년은커녕
고작 3년밖에 안 되었는데 그  선배의 심경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때 그
선배를 탓하던 내가 오히려 남으로부터 비난을 들어야 할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
다. 그래도 어쨌든 그건 사실이다. 가끔 비가 오거나 기분이 울적할 때면 이성적
인 느낌이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남편보다는 마음과 정서가 통하는  `친구도
아니고, 애인도 아닌` 그러면서도 `친구 같고 애인 같고 오빠 같고 남동생  같은`
남자와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카페에 앉아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말이 통하는 분위기 있는 사람. 책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스치듯 지나
쳤던 얼굴 없는 남성이어도 좋을 듯하다. 사실  상대가 어떤 사람이건 간에 연애
하던 시절, 혹은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기보다는  인간적인 우정을 쌓던 남자친구
들을 만나던 예전의 그 느낌이 그리워질 때면 상상만은 자유롭다.
  그런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그 꿈이 반드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모
양이다. 문학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던 후배가 글짓기 교사가  되어 그곳
교사들과 함께 풀어가는 관계가 나에게는 몹시 부러움을 안겨주었다. 6,7명 정도
되는 교사들 중에는 희곡을 쓰는 사람과 아직 대학에 재학중인 학생신분의 남자
교사 2명이 있는데 그 중에 학생교사와 후배는 좀더 친한 관계인 모양이었다.
  근 2년 만에  만난 후배는 비슷하게 아이가  둘 딸린 다른 유부녀들에 비해서
생기 있고 발랄했으며 그러면서도  항상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었고 문학에 대한
야무진 꿈마저 서서히 펼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고무적이다
시피 했다.  같은 문학도였지만 난 그런  계획은 아예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퍼질  대로 퍼진다는 아줌마`가  되어서도 끊임없이 신간소설과  시집을
구해 읽는 변함없는 열의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극제가 되어준 것은 같이 근
무하는 학생교사였다.
  “같은 국문과 출신에다가  작품선호도도 비슷하고 성향, 취향이  또한 비슷해
서 그 사람이 참 편하고 좋아. 그 사람  덕분에 잊었던 문학에 대한 꿈을 조금씩
되찾게 되는 것 같아.”
  얼마나 흐뭇하고  기분 좋은 일인가. 그  사람과 유독 얘기가 잘  통해 문학에
대한 꿈의 날개를 펼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런데 본인은 그렇게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선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워낙 `편협한 탓`에  `
별 문제가 없는 관계`조차  문제시되어버리는 일들이 곧잘 있어서 후배 역시  지
레 겁을 먹었던 것이다.
  결혼한 이후 남성이라곤  `남편밖에` 모르던 그녀는 글짓기 교사를  하게 되면
서 작가를 비롯해서 학생교사까지 교제의 폭이 넓어지게 되었고 새로 만난 주변
사람들로 인해  `삶의 윤활유`를 얻게 되어  좋긴 했지만 특별히  남자와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 때문에 쓸데없이 드는 `죄의식`으로 고민했다고 한다.
  “글짓기 교사를 하기 이전에  없던 생동감이 들게 되니까 유부녀들이 빠진다
는 그렇고 그런 유치한 사랑타령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고, 왠지 이러
면 안 될 것 같은 죄의식이 들어 한동안은 밤잠을 설치기도 했어.”
  후배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결혼을 하기  이전만 해도 결혼을 하게 되면
사랑은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으니까. 그리고 더 이상의 사랑은  없어야 하므로
굳이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결혼한  유부남, 유부녀가 된 이상
다른 이성에게 `정체  모를 묘한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니
까.
  그러나 지난  92년 여성지 `퀸`에서 전국 5대  도시 30대에서 40대 주부 500명
을 대상으로 성의 조사보고서를 낸 것에 의하면,  남편 이외의 남자 친구를 갖고
싶다고 응답한 주부가  무려 78퍼센트로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입증시켜
주었다.
  응답자 500명 중에서 애인을 원하는 주부는 무려 78퍼센트에 이르렀지만 실제
남자친구가 있는 사람은 24퍼센트였다. 교제 정도도  49퍼센트는 어떤 일이 생겼
을 때 의논 상대가 되어주는 정도의 관계였고,  30퍼센트는 몇 차례 데이트를 한
정도의 플라토닉한 관계, 11퍼센트는 서로 미묘하게  애정을 느끼고 있긴 하지만
아직 섹스까지 나누지는  않은 상태였고 그룹으로 만나는 정도는  6퍼센트, 그리
고 심각한 관계로 이혼까지 생각하는 경우는 고작 4퍼센트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대로라면 절반이 넘는  주부들이 정신적인 외도를 꿈꾸고 있다는 것이
된다. 남편과의 성관계 도중에 다른 남성을  떠올린 경우에 대해서도 32퍼센트가
`그런 적이 있다`는  의외의 답변도 나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편과의 성관계
를 보다 완벽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이미지 섹스`일 뿐이었다.
  통례대로라면 먼저 부부간의 약속을 깨고 외도를  하는 것은 남편들로, 누구나
가 남자의 바람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관용조이지만 결혼한 여성의 바
람은 거의 `죄`로 여기고 있다. 또한 보수적인 성윤리에 길들여진 여성들에게 남
편 아닌 남자와의 외도란 대부분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구체적
인 섹스`보다는 `정신적인  외도`를 꿈꾸는 비율이 많은 것이었다.  비록 `정신적
인 외도`라 하더라도 후배처럼 일  속에서 만나는 동료로서의 남성, 그리고 같은
꿈을 가지고 있는 동료로서의 남성과의 교제는 듣고 있는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가장 이상적이고 고무적이었다. 혹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 운운하며 염려
할 이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건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남성이 반드시 먹과 같
은 존재로 돌변할 것이라는 가정은 조금은 억지스러울 정도였다.
  후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부러움 탓이었는지 돌연 남편을 만나기  전 잠
시 알고  있던 어떤 사람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사람과  헤어져 남편과
결혼한 뒤에도 아주 비슷한 분위기의 사람을 만나게라도 되면 불현듯 그 사람이
연상되곤 한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죄의식`  같은걸 가져본 적은 없다.  남편과
연애할 때와 같은 애정이  전부일 수 없다는 것, 부부는 그  애정보다 더 질기고
강한 무엇이라는  나름의 애정관이 형성되면서 남편에  대한 사랑은 애정보다는
신뢰와 믿음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부 사이에  이상 전선이 생긴
것인가`하고 의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남편도 가끔은 나와 마찬가지 감정에 빠질 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담배를 피워  문 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이 생각에 잠겨
있는 느낌을 받을 때, `지나간 옛사랑의 그림자를 더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을 언뜻 해보곤 한다. 그리고는 조용히 남편의 옆을 스쳐 지나간다. 내가 그런
상태에 있을 때 간섭이라도 하게  되면 몹시 언짢은 것처럼 남편도 마찬가지 기
분일 것이라는 여유를 갖게되는 것이다.
  더 바란다면 남편과 함께  그 옛사랑의 기억을 더듬는 것이지만 남편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전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는 편이다. 남편이  자연스럽게 옛사랑을 들추어내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가벼운 자극제가 될 수도 있는데  남편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우리에게 이성 친구란, 자연스레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사람과의 추억이란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것일까? 그럴 때면 일부러라도
내가 먼저 바가지를 긁는다.
  어느 카페를 지나가다가도,  “혹시 저 카페 옛날 애인이랑 자주  드나들던 데
아니야? 카페만이 아니라 이곳 지역쯤은 아주 꿰고  있겠네. 자기 마누라와는 한
번도 안 와보고. 당신 그럴 수 있어?”
  그래도 남편은 빙긋이 웃고 말 뿐이다. 나는 조금 약이 오른다.
  “나는 예전에  이런 시시한 곳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태릉  안에 들어가면
아주 고급스런 레스토랑이 있는데 그곳에  단 둘만이 유일한 손님이 된 적도 있
었지. 마치 우리를 위한 곳처럼 피아노가 울려  퍼지고 아주 매너 좋은 웨이터가
있는 곳이었는데...”
  남편은 듣는지 마는지 별 반응이 없다.

  신나는 침실

  기원전 5세기경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이름도 유명한 펠레폰네소스 전쟁
이 한창일 때이다.  남자들은 대부분 전쟁의 용병이 되어 나가  싸웠고 여자들은
생계를 꾸리고 아이를  돌보느라 지쳐가고 있었다. 당시만해도  전쟁에서 패하면
남자들은 물론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승전국의 노예가 되어야 했으므로 전쟁에서
의 승리란 전리품을 얻는 것은 물론 모두의  삶을 좌우하는 중요한 과제였다. 따
라서 싸우는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 역시 전쟁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지리하고 소모적인 전쟁에 지쳐  아테네의 여자들이 마침내 반기
를 든다. 여자들은 이제  전쟁을 그만두고 평화롭게 살자고 주장한다. 오랜 전쟁
으로 황폐해지는 것은 결국 누구도 아닌 자신들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주장이 받아들여졌을 리는  없었다. 오히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사지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는 남자들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한 소견 좁은 투정
쯤으로 그리고 무지의 소치로 타박만 얻었을  뿐이었다. 급기야 여성들이 생각해
낸 기발한 아이디어는 바로 `성 스트라이크`였다.  섹스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아
테네의 젊은 부인인 리시스트라데에  의해 주도된 성 스트라이크는 집요하게 계
속됐다. 리시스트라데는 적과 아군 쌍방의 여성들이  모두 성 스트라이크에 참여
할 것을 호소하기에 이른다.
  섹스를 거부당한 남자들은 애가 탔다. 아기를  데려와 모성애에 호소까지 해보
는 남자들, 그러나 여자들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성 스트라이크에 그
치지 않고 군자금이 보존된 신전을 점령하여 `반전농성`을 벌인다. 꼼짝할 수 없
게 된 것은  물론 남자들이다. 스파르타 여성들의 합세와 더불어  이윽고 전쟁이
종료되고 두 나라에는 평화가 찾아오게 된다. 여성들에 의해 주도된 평화였다.

  컴퓨터 통신란에  소개된 바  있어 우연히 읽게  된 이야기다. 내용은  기원전
411년에 쓰여진 희곡 아리스토파네스의  `여자의 평화`에서 발췌한 것으로 `아테
네 여성들의 성 스트라이크`라는 제목도 흥미롭다.
  여성들의 성 스트라이크  참으로 재미있는 발상이었다. 물론  여성들이 거부한
다고 해서  단 한 번의 섹스도  없었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아테네의
용감한 여성 리시스트라데가  주장했다고 했듯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섹스란
남자들도 즐거울 리 없으므로 지속적이진 못했음이 짐작될 뿐이다.
  그런데 많은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역시 행복한  가정과 부부
생활은 남성과 여성이 함께 뜻을 모으고 즐거움을 자발적으로 나눌 때만이 가능
한 것이므로 섹스란 남녀가 화합해 만나 나눌 때만이 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사랑의 행위인 것이다.
  남편과 나는 가끔씩 `아테네의  스트라이크`를 재연할 때가 있다. 결혼한 사람
이나 사랑하는 이와 성적 접촉을  자주 나누는 사람들이라면 어느 한 사람이 성
을 거부할 때 다소 일방적으로 성을 요구하는 이의 비애감을 가슴 깊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깊은 모멸감을 느끼게 만들고  가슴 한구
석에 생채기를 내기도 하며 서로에게 넘기 힘든  벽을 쌓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
보다 괴로운 것은 사랑을 표현하고 싶을 때 표현하지 못하는 답답함과 외로움이
다. 외로워서  둘이 만나 하나처럼 의지하고  사는 것이 부부라는데 이게  웬 못
할 짓이란 말이다.
  사실 상대방이 느낄 아픔까지 계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정말 화가 나서
스트라이크를 선언할 때도 있고,  때로는 농담 속에서 `위협`의 수단으로 스트라
이크를 들먹일  때도 있다. 물론  스트라이크는 아내인 나만  선언하고 들먹이는
것은 아니다. 남편 역시 이  `아테네 스트라이크`의 위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다. 처음에야 맘대로  해라는 식으로 반응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지속되면 자
신이건 남편이건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하는 부부가 어떻게 삼백육십오
일을 스트라이크중이라는 데도 등돌리고 무덤덤히 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 부부는  `스트라이크` 선언만 등장하면 어지간한 일이면  그저 양
보하고 물러나버린다.  스트라이크를 선언할  정도라면 어떤 상황이든  상대방이
몹시 언짢거나 심사가 편치 못하다는 반증이므로 보다 조심스러워하고 존중하려
고 애쓴다. 누군가의 말처럼 부부 잠자리수의  행복지수는 모든 부부생활의 행복
지수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잠자리만 행복하면 부부생활이  행복하다
는 의미와는 다르다). 이처럼 부부의  혹은 사랑하는 사람간의 침실은 반드시 서
로 화합할 때만이  즐겁고 원만해진다. 그것은 반드시 어느 한  사람이 스트라이
크를 선언하든지  하는 다소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하더라도 마찬가지
다.
  언젠가의 일이다. 추진하던 일이 잘 풀리지 않은  데다 친정의 먼 친척에 불상
사가 생겼다는  소식까지 들어 심기가  불편하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나는 몸도
편치 않고 감기몸살이라도 날  듯한 조짐이 보여 무척 짜증스러워하며 귀가했었
다. 반대로 남편은  웬일인지 기분이 좋아서 저녁상까지 손수 보아놓고  나를 기
다리고 있었다.
  피곤한 얼굴로 집에  들어서는 내게 남편은 그날  있었다는 즐거운 일에 대해
장시간을 할애해가며 이야기를  해댔다. 원래 쫑알쫑알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
는 일은 내 전문이어서 뒤바뀐 역할이 조금은 재미있기까지 했지만 나는 남편의
그 같은 마음씀과 밝은 얼굴에 다소 기분이  나아졌다. 샤워를 하고 신선한 비누
냄새를 풍기며 침실에  들어온 남편, 그러나 나에겐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었
다. 언짢아 보이는 나의 안색을 걱정하는 남편과  보냈던 그날 저녁은 뭐 그렇게
저렇게 흘러갔다.
  훗날 나는 남편에게 그날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웬지 그날 따라 각별히
친절했던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소  놀란 것
은 남편에겐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내심 즐거운 척(?)  노력한 듯했는데
남편이 그날의 내 상태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섹스란 일종의 대화라고 생각해. 사람과 사람이  말을 나누다보면 그 사람이
어떤 기분인지 대충은 알  수 있잖아? 더구나 사랑하고 가까이서 생활하는 부부
라면 더 그렇지. 당신도 그런 건 이해할거야. 그렇다고 사람간의 대화가 항상 최
상의 즐거움만 주는  것은 아닌 것처럼 섹스도 마찬가지야. 부부  사이에도 굴곡
이 있는 거니까. 중요한 것은 대화하고 이해하는 마음 아니겠어?”
  나는 그때 사실 정말 감동했다. 내 상태를  세심하게 관심 기울여 살피고 있었
던 남편의 마음 씀씀이도 그랬지만 깨달음  때문이었다. 어린 아이들도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알아보고  따른다는데 하물며 성인된 남녀의 사랑의 표
현인 섹스에 담겨진 그 깊은 뜻을 어찌 모를 리 있을까?
  가끔씩 취재나 친구와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고민거리 중에 남편에게 충분히
자신의 마음을 터놓지 못해  생기는 불만과 거리감의 이야기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나  역시 가끔 괜스레 이러쿵 저러쿵 말하기  싫어진 때가 있었
고 그로 인해 그저 나 혼자 불만스레 밤을 보낸 일도 있었으니까.
  어떤 이들은 남편이 자신이  좋아하는 체위만 고집한다거나 자신의 마음이 움
직였을 때만 침실을 찾는 행동에  대해 이렇다 할 아무런 항의표현을 못 한다고
한다. 여자가 너무 밝힌다고 타박을 들을까 염려도  되고 섹스란 왠지 남자가 이
끄는 대로 따라가야  할 무언가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잘
아는 이 중에는 잠자리에서 남편으로부터  아주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난 후 혼
자 괘씸하게 여기다가 이런저런 일로 다툼만 되풀이한 끝에 이혼의 위기에 처한
경우도 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성적으로 문제가 생겨 이혼을 했느니 하고 뒷말을 일삼았
지만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성적인 문제라고만은 할  수 없다. 비록 성적 불
만이 동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역시 전반적인 부부생활에서 대화가 부족
하거나 바른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사실 오랫동안 성을 나눠온 부부들은 앞서 말한 대로 적어도 서로에게 관심만
기울인다면 상대의 느낌이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혹자들이 종종  표현하는 부
부 사이에 대화가 필요없다는 말은 여기서 근거한 이야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그런 와중에서 싹튼다. 대화가  필요없다고 생각하거나
굳이 대화거리로  삼기 어려운 일로부터  말이다. 그래서 가끔씩  친하게 지내는
부부끼리 모여 `야한  농담`이라도 나누다보면 부부끼리 서로 아주  다른 생각이
나 취향을 가졌음을  새삼 확인하고 본인들도 놀라워  하는 경우와 접하기도 한
다.
  일례로 남편의 친구 중에 아내가 키스를 지독히도 싫어하는 사실을 모르고 있
다가 결혼기념일에 함께 모처럼 영화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는 사람
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결혼하기 오래 전 사고로 인해 입술  부위가 찢어져 수
술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하필 치료받던 계절이 여름이어서 상처가  잘 아물지
않았고 늘 곪아 있던 입술 때문에 콤플렉스가  심했다고 한다. 상처가 치료된 후
에도 그녀는 자신의 입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하면서 늘 손으로 입을 가리는 버
릇이 생겼고 약간 남은 상처 때문에 성형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남편이  자신에게 키스를 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남녀의 아름다운 키스 신이 등장하는 장면을 이야기하다가 듣게 된 고
백이었다고 했다.
  물론 굳이 고백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숨어 있었던 사례이긴 하지만 부부간의
대화는 바로  이런 사실들을 사랑의  영역으로 불러들이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나는 부부생활에서  대화, 특히 성적인 대화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성적인 대화란 곧 말 그대로  성을 위한 대화이기도 하고 구체적인 성적 교감을
의미하기도 한다. 전자나  후자 모두 어느것 못지않게 잘 이루어져야  행복한 부
부생활과 즐거움이 보장됨은 물론이다.
  대화란 서로간의 차이나 이견을  좁히고 나아가 하나로 모아지는 결실을 맺어
내기도 하는, 요술방망이 같은  위력을 가진 아주 신통한 수단이다. 물론 대화에
는 인내심이 따르고  때론 고통이나 아픔을 감수해야 한다. 텔레비전을  통해 분
쟁을 맞고 있는 세력간  다툼에도 대화란 거의 유일무이하게 부각되어지는 창구
가 아니던가.
  그러나 사랑의 대화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일방만이 대
화를 고집하고 있는  경우라면 그것은 그저 잔소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성적
인 대화란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부부간에도 교환일기를 쓰거나  자신들만의 `일일 행복시계`를 마
련하고 있다고 한다.  `일일 행복시계`란 오늘은 매우  행복하다라든가, 우울하다
든가 당신에게 불만이 있다든가  하는 주제란에 각각 시계로 만들어놓고 자신의
상태를 눈금으로 매일 표시해놓는 일이다. 다소  강제적이긴 하지만 아주 효과적
으로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인위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도 일상적으로 대화가 잘 이루어지는 부부라
면 사실 성적인 대화 역시 원활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부간의 성이 생활의 일
부이듯이 생활 속에서 대화하는 것이 익숙한 부부라면 침실에서의 대화 역시 일
상화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를 하는 등의 가사 일부터 집안 대소사를 걱정하거나 가
계를 꾸려나가는 일 등 모든 분야에서 대화하는 그리고 조화롭게 하나의 결론을
모색해가는 훈련을 해야 한다. 굳이 스트라이크를  선언하지 않아도 문제나 벽을
발견하면 서로가 노력해서 해결해  가는 훈련은 침실에서의 사랑도 원활하게 도
와준다.
  또한 성적인 대화는 아주 구체적일수록 좋다.  오랫동안 성을 금기시하고 천시
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장해온 우리들은 자기표현이나 대화하기를 꺼려함으
로써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행복감을 스스로 반감시키곤 한다.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성적인 자기표현이란 남녀가 따로 없이 자연스럽고 자유
로워야 한다. `여자가..., 난 남자니까.` `남자는  자고로...`라는 말을 잘 쓰는 사람
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자연스럽고도 자유롭게  그리고 남녀가 따로 없
이 성적인 자기표현이 이루어진  후에는 단지 서로가 화합하는 마음으로 조정하
고 조율하면 될 뿐이다. 적어도 서로에게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성적인 대
화는 성적 즐거움의 밀도를 높여줄 뿐만 아니라 사랑의 친밀감을 배가시켜줄 것
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모든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할리우드에서 날아온 감미로운  애정영화나 그 밖의 사실들을 보면서 실
제의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치부해버리곤 한다. 물론 영화  속의 이야기
들은 문화적 차이가 있고 반드시 건강한 애정행태를 보여주는 것만은 아닌 까닭
에 그들의 사랑표현이  반드시 옳다고만도 할 수 없다. 다만  거리낌없이 솔직하
고 자연스러운 그들을 보면서 그렇지 못한 자신들의 아쉬움을 위안받을 뿐이다.
  사랑 표현에 구체적이고 솔직해지는  것, 그리고 함께 이해하고 나누는 것. 이
쉬운 명제가  바로 모두가 그리고 바라는  `신나는 침실`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고 또한 열쇠임을 아는 사람에겐 쉬이 열리는 문이 바로  `부부 행복의 문
`일진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