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절은 다음의 몇 가지 이유로 중요한 음운론적 단위로 인정 된다

국어 어휘의 특성에 대하여

심재기/서울대 교수·국어학

   국어가 다른 언어와 구별되는 점이 무엇인가를 어휘의 측면에서 밝혀 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대략 칠천만 명이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는 우리 한국어가 몇 십만의 어휘 목록을 보유하고 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어림잡아 30만 단어쯤으로 추산되는데, 이런 규모의 언어라면 이 세상에 있는 언어들 가운데서는 대단히 큰 언어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하여 칠천만 명이 사용하며, 30만의 어휘 수를 가진 국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식과 노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앞으로의 세계를 위하여 훌륭하게 이바지하는 좋은 언어가 될 것인지 아닌지를 판가름나게 할 것인데 그러한 세계사적 사명감과 결부시켜 국어를 생각하고자 할 때에 국어 어휘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기초 작업이 될 것이다.    국어 어휘는 무엇보다도 먼저 국어 표기의 수단으로 창제된 한글로 완벽하게 표기될 수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이 사실은 한글의 우수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좀 더 깊이 궁리하여 본다면 국어 어휘의 특성이 한글 표기로 아주 잘 드러날 수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런데 한글에 의한 국어 표기 방법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본적으로 음소 문자인 한글이 음절 구성체로 조립되어 표기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한글은 음소 문자이면서도 음절 문자로 운영된다는 이중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음절 문자식 표기 방안이야말로 국어 어휘의 특성을 검토하는 대전제가 된다. 그것은 국어 어휘가 음절을 기본 단위로 하여 분석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한글을 서유럽의 알파벳처럼 풀어쓰자는 논의가 금세기 초엽부터 나돌기 시작했으나 그것이 하나의 기발한 착상에 머물고, 결코 실용 단계로 발전하지 않은 까닭은 표기 관습의 전통 또는 보수성 때문이 아니라 어휘 구조의 본질을 파괴한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한 한글 창제 당시에 자모 하나하나는 음소 문자로 만들었으면서도 漢字의 발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음절로 조립하는 표기 방안이 개발된 것이라고 하여 음절 구성의 조립 방식이 순전히 漢字 때문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것도 올바른 견해는 아닌 듯하다. 국어 어휘가 음절 단위로 파악된다는 사실과 漢字가 음절 단위로 파악된다는 것이 다행스럽게도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국어 어휘가 음절 단위로 파악된다고 하는 이유를 내세울 때에 우리가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기초 어휘 가운데 상당수가 단음절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눈(眼), 코(鼻), 입(口), 귀(耳), 손(手), 발(足), 등(背), 배(腹), 살(膚), 피(血), 뼈(骨), 애(腸)’ 같은 신체 어휘나, ‘물(水), 불(火), 뭍(陸), 땅(地), 앞(前, 南), 뒤(後, 北), 나(我), 너(汝)’ 같은 일반 어휘가 단음절로 되어 있다는 것은 원시 국어 이래 어휘의 생성 발달이 음절을 기초로 하여 전개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언어에 공통되는 현상 일런지도 모르지만 국어 어휘의 특성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마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인 것만은 분명하다.

   국어 어휘는 개별 낱말의 起源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系譜에 따라, 고유어, 한자어, 외래어로 나눈다. 고유어는 원시 국어 이래 순수한 국어 낱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고, 한자어는 漢字로 표기가 가능한 모든 우리말 단어이며, 외래어는 금세기에, 서양 여러 나라에서 새로운 문물 제도와 더불어 들어온 낱말들이다. 엄격하게 따진다면 한자어도 중국 문화의 산물이요, 중국을 기원으로 하는 것이므로 서양 외래어와 함께, 외래어로 취급되어야 마땅할 것이지만, 그 한자어들이 모두 국어 음운 체계에 동화되어 완벽한 한국 한자음으로 읽힐 뿐만 아니라, 고유어와도 이질적인 느낌을 별로 주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결합하기 때문에 특별히 한자어라는 명칭을 두어 半固有語의 대접을 한다. 그러나 국어 어휘의 특성을 논할 때에는 고유 특성이 중점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고유어의 어휘적 특성은 ‘배의성(配意性)’ 또는 ‘유연성(有緣性)’이라는 낱말로 응축시켜 표현하여 왔다. 낱말을 의미 분석이 가능한 어휘 형태 단위로 쪼개어 놓았을 경우에, 낱말의 의미 형성 과정이 명쾌하게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즉 의미의 배열 상태가 쉽게 나타나는 특성을 ‘배의성’ 또는 돋움 ‘유연성’이라 이름 붙였던 것이다.
  이 유연성은 음운론적인 현상과 형태론적인 현상으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음운론적인 유연성은 음운 교체성(音韻 交替性)이라는 명칭으로도 설명될 수 있겠는데, 하나의 어휘 형태소에서 음운론적으로 대립이 되는 음운들이 서로 교체되어 쓰임으로써 크게는 그 낱말의 의미의 분화를 초래하고 작게는 어감의 차이를 불러일으키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러한 음운 교체에는 모음 교체와 자음 교체의 두 가지가 모두 존재한다. 한편 형태론적인 유연성은 형태 첨가성(形態 添加性)이라는 명칭으로도 설명될 수 있는 현상으로 하나의 기본 어간 형태소에 다른 형태소가 그 앞이나 뒤에 결합하여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이 형태 첨가의 방법은 형태소들의 의미가 대등한 자격으로 결합하느냐, 하나가 다른 것에 종속되는 형식으로 결합하느냐에 따라 복합법(複合法)이니, 파생법(派生法)이니 하는 명칭으로 구분하여 왔었다.
  우리는 먼저 음운론적 유연성이라 할 수 있는 음운 교체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국어의 모음은 양성 모음과 음성 모음이라는 대립의 체계를 유지하여 왔다. 국어에서 이른바 모음조화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음의 양분된 대립 체계가 이른 시기부터 확립되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어휘의 생성과 분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국어 자료가 15세기·중세 국어 자료이므로 이 시기의 자료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1. 맛(味):멋(外形的 風味) 살(歲):설(元旦) 갓(皮):것(表面) 나(我):너(汝) 마리(匹, 頭):머리(頭) 남다(餘):넘다(溢) 밧다(脫衣):벗다(避免) 할다(誹謗):헐다(破壤) 다다(盡):더으다(增) 2. 곧다(直):굳다(堅) 곱다(曲):굽다(屈) 녹다(鎔):눅다(緩) 보랍다(軟):부드럽다(柔) 졸다(減縮):줄다(減縮) 노다(黃):누르다(黃) 3. 다(刮):긁다(搔) 다(衰殘):늙다(古老) 다(明):븕다(赤) 다(燒):슬다(消) 초다(下):느추다(緩)   위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어간 모음의 교체는 때로는 독립된 낱말을 만들기도 하였고, 때로는 ‘노다(黃):누르다(黃)’에서처럼 기본 의미는 고정되었으면서도 느낌이나 대상물 본성의 작은 차이를 표현해 장치로 기능하여 왔다. 예컨대 ‘염치(廉恥)’라는 한자어는 그 낱말이 지닌 기본 의미의 중후성에도 불구하고 ‘얌체’라는 어간 모음 교체에 의한 변이형을 가지게 됨으로써 본래의 낱말 ‘염치’와는 개념상 정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경우까지 생기게 되었다. 현대 국어에서는 대부분의 의성 의태어가 어간 모음의 교체로 어감상의 차이를 나타내는 어휘군을 형성하고 있다.
  몇 예를 보인다.
4. 팔랑팔랑:펄렁펄렁 아장아장:어정어정 캄캄하다:컴컴하다 오물오물:우물우물 꼬물꼬물:꾸물꾸물 꼼지락거리다:꿈지럭거리다   자음의 교체도 어감상의 차이를 나타내는 어휘군을 만든다.
5. 감감하다:캄캄하다:깜깜하다 댕댕하다:탱탱하다:땡땡하다 발발거리다:팔팔거리다:빨빨거리다 잘랑잘랑:찰랑찰랑:짤랑짤랑   그러나 위와 같이 자음 교체에 의해 생성된 낱말들은 모음 교체의 경우처럼 각기 독립된 의미 영역을 확보한 개별 낱말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중세 국어에서 ‘람(風):람(嘯) ’이 주목할 만한 예가 되고 있다. 물론 ‘람’은 ‘람’ 앞에 ‘ㅎ’이 개입되어 생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형태론적 유연성은 어휘 형태소들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특성이다. 어휘 형태소들이 다양한 첨가 방법으로 만들어내는 국어 어휘는 국어 어휘 형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형태소의 첨가 방법은 복합법과 파생법의 두 갈래로 나뉜다. 먼저 파생법에 의한 낱말 만들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하나의 어간 형태소가 의미 중심을 지키고 있고 그 앞이나 뒤에 새로운 의미를 첨가하기 위한 접사(接辭)가 붙음으로써 파생법에 의한 낱말이 만들어진다. 기본이 되는 어간 형태소의 앞에 접사가 붙는 것을 접두 파생법이라 하며, 뒤에 붙는 것을 접미 파생법이라 한다. 다음과 같은 것이 접미 파생법에 의한 낱말들이다.

6. 짐, 잠, 꿈, 걸음, 놀음, 울음, 웃음, 앎, 게으름, 괴로움, 그리움, 기쁨, 슬픔, 그림, 그믐 7. 내기(勝否), 보기(例), 되매기(轉賣), 사재기(買借), 더하기(加算), 빼기(減算), 글짓기(作文), 뽑기(選拔)   위의 예들은 모두 동사나 형용사 어간에 {-ㅁ}이나 {-기}라는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를 붙여 명사가 된 것들이다. {-ㅁ}과 {-기}는 어떤 동사 어간이나 형용사 어간에도 첨가가 가능하므로 ‘먹음, 읽음, 돌아봄,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 ’와 같이 일반적으로는 동명사를 만드는 것이지만 위의 6과 7의 예들은 처음 만들어질 때에는 동명사로 쓰이었을지 모르나 거기에 새로운 특수 의미가 일반화함으로써 용언이 지닌 문법적 기능을 상실하고 완전히 명사로 굳은 이른바 전성 명사들이다. 다음은 처음부터 전성 명사를 만들기 위하여 특정한 동사 어간 형태소에만 결합하는 접미사와 합쳐져서 생성된 명사들이다.
8. 날개, 덮개, 지우개, 집게, 지게 노래(놀+애), 마개(막+애), 저지레(저지르+에) 놀이, 다듬이, 미닫이, 잡이, 풀이, 높이, 깊이 꾸중(꾸짖+웅), 마중(맞+웅), 노랑, 빨강   위의 예에서 우리는 {-개}{-애}{-이}{-ㅇ} 같은 접미사들을 뽑아낼 수 있는데 이것들은 각각 물건의 이름, 행동, 또는 척도(尺度) 등의 이름을 나타내는 명사를 만들기 위하여서만 쓰이는 접미사들이다.
9. 털:터럭, 줌:주먹, 갖:가죽, 잎:잎사귀, 목:목아지, 말:망아지   9에서는 {-억}{-욱}{-아지} 같은 접미사를 가려낼 수 있는데 이것들은 새로운 의미를 첨가한다기보다는 어감의 차이를 나타내는 정도의 기능을 하고 있다. 물론 현대 국어에서 ‘줌’과 ‘주먹’은 각기 다른 의미 영역을 나타내고 있다.
  접미 파생법에 의해 낱말 만들기는 동사·형용사의 경우에도 광범하게 나타나고 있다. 다음의 예들을 보자.
10. 밥하다, 떡하다, 나무하다, 한잔하다, 벗하다, 복되다, 참되다, 헛되다, 순화되다, 진실되다 일시키다, 공부시키다, 운동시키다, 말시키다 그늘지다, 기름지다, 값지다, 건방지다, 멀어지다, 써지다 겹치다, 감치다, 몰아치다, 마주치다 멋적다, 열적다, 귀살적다, 괴이적다 어른스럽다, 촌스럽다, 사랑스럽다, 엉큼스럽다, 게걸스럽다 사람답다, 신사답다, 아름답다, 아리답다    10에서는 {-하-}{-되}{-시키-}{-지-}{-치-}{-적-}{-스럽-}{-답-} 같은 접미 형태소들이 그 앞에 놓인 형태소와 결합하여 특이한 의미의 동사나 형용사를 만든 낱말들을 보인다. 이 용언을 만드는 접미 형태소들의 문법적 기능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또 그들의 차이를 구별하려는 노력은 지난 반세기 국어 문법 연구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그중에서도 논쟁의 초점이 되었던 것은 {-히-}와 {-지-}를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는 대단히 흥미 있는 접미 형태소임이 밝혀졌는데 그 특성은 명사 어간을 상태 동사 어간으로 바꾸어 주고(멋:멋지다), 상태 동사 어간을 자동사 어간으로 바꾸어 주며(멀다:멀어지다), 자동사 어간을 피동사 어간으로 바꾸어 주고(달리다→달려지다), 타동사 어간을 피동사나 자동사 어간으로 바꾸어 주는(열다→열어지다. 쓰다 →써지다) 기능을 한다. 국어의 접미 형태소들이 갖고 있는 이와 같은 폭넓은 의미 기능의 예를 다른 언어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지만 국어에서 특별히 보편적인 현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듭 강조해도 좋을 것이다.
11. 달구다, 엉구다, 비우다, 걷우다, 낮추다, 멈추다 곪기다, 남기다, 늘리다, 빨리다, 넓히다, 궂히다 미덥다, 서럽다, 놀랍다, 그립다, 기쁘다, 아프다   11은 {-우-}{-이-}{-ㅂ-} 등을 기원적 형태소로 하여 그 앞에 있는 동사나 형용사를 통사적 기능이 다른 동사나 형용사로 만든 예들이다. 가령 ‘낮다(低)’는 형용사이지만 ‘낮추다’는 타동사가 되었고 ‘놀라다(驚)’는 자동사이지만 ‘놀랍다’는 형용사로 바뀌었다. 한때는 이들 {-우-}{-이-}{-ㅂ-} 계통의 접미 형태소들을 ‘보조 어간’이라고 잘못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것들이 보조 어간이라고 한다면 ‘낮다’와 ‘낮추다’ 는 어감은 다르나 하나의 낱말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그런 견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다.
  {-ㅂ-} 계열의 접미 형태소와 관련하여 국어 어휘의 생성과 소멸에 매우 흥미 있는 현상을 살펴볼 수 있다. 중세 국어에서 ‘곯다, 앓다, 깃다, 믿다 ’ 등은 타동사였다. 그런데 이들 동사 어간에 {- -} 또는 {-브-} 접미 형태소를 첨가시키어 ‘골다/고프다, 알 다/아프다, 깃브다/기쁘다, 믿브다/미쁘다’라는 새로운 낱말들을 만들어 냈는데 이것들은 모두 현대 국어에서 통사적으로는 형용사의 기능을 갖는 낱말로 바뀌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하-} 접미 형태소를 또 다시 첨가하여 ‘고파하다, 아파하다, 기뻐하다 ’와 같은 낱말을 만들어 냈다‘미뻐하다’는 아직 생성되지 않았다). 이들 낱말이 타동사임에는 틀림없으나 ‘곯다’와 ‘고파하다’ , ‘앓다’와 ‘아파하다’는 의미 영역이 다른 별개의 낱말로 쓰인다. 이와 같이 국어 어휘의 생성에는 접미 파생법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접두 파생법은 국어에서 새 낱말을 만드는 중요한 장치이기는 하지만 접미 파생법만큼 생산적은 아니다. 또 접미 파생법에 의한 어휘 생성에서는 통사적 기능에 변화가 와서 품사가 바뀌는 경우가 많으나 접두 파생법에서는 낱말의 의미 중심이 접두 형태소를 앞에 거느리게 되어 있어서 품사가 바뀌는 경우는 발생하지 않는다. 다음 예를 보자.

12. 개떡, 개살구, 개나리, 개판, 개소리 날고기, 날것, 날탕, 날김치  맨손, 맨밥, 맨주먹, 맨입 한겨울, 한더위, 한밤중, 한여름   12에서 ‘개-, 날-, 맨-, 한-’ 등은 기원적으로는 독립된 낱말에서 나온 것이지만, 독립성을 상실하고 뒤에 오는 낱말과 결합하여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내고 있다. ‘개-’는, ‘질이 낮은, 막되어 먹은, 야생의’의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개소리’는 {개-}를 접두 형태소가 첨가된 파생어로 파악할 경우, ‘돼먹지 않은 말’이란 뜻을 갖게 되어 ‘개가 짖는 소리’라는 낱말과는 다른 낱말이 된다. ‘개나리’도 ‘품질이 떨어지는 나리꽃’이라는 뜻으로 ‘개-’와 ‘나리’가 결합한 접두 파생어인데 일반 언어 대중은 그 낱말에 너무 친숙해져서 ‘개-’를 접두 형태소로 인식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언어 대중의 통속적인 언어 인식과 어휘 형성론의 논의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13. 들볶다, 들쑤시다, 들부수다, 들먹다 빗나가다, 빗보다, 빗듣다, 빗맞다 새빨갛다, 새노랗다, 새파랗다, 새까맣다 얄밉다, 얄궂다, 드물다, 드세다   13은 접두 형태소를 갖고 있는 동사 또는 형용사의 예들이다. ‘들-, 빗-, 새-, 얄-, 드-’ 같은 접두 형태소들도 애초에는 독립된 낱말로 쓰이던 것이었을 터이나, 여기에서는 뒤에 놓인 동사나 형용사의 의미를 제한하는 기능을 나타낼 뿐, 그것들이 독립하여 쓰일 경우의 형태를 추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형태상의 변화를 입었다. {들-}은 ‘심하게’라는 뜻을 나타내고 {빗-}은 ‘빗기어, 부정확하게 ’의 뜻을 나타내고, {새-}는 ‘더욱 세게’의 뜻을 나타낸다.
  명사 어간 앞에 놓이는 접두 형태소는 후행하는 명사를 수식하는 관형어의 구실을 하며, 동사 어간 또는 형용사 어간 앞에 놓이는 접두 형태소는 후행하는 용언 어간을 한정하는 부사어의 구실을 한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 국어 어휘의 형성에도 국어의 통사적 특성이 그대로 반영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접두 파생법은 접두 형태소가 독립성을 갖는 낱말이 아니라는 점만 제외하면 다음에서 논의할 복합어 형성과 본질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파생법과 짝을 이루고 있는 복합법은 두 개의 독립적인 형태소가 대등한 자격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낱말을 형성하는 낱말 만들기 방법이다. 국어 어휘가 형태론적 유연성을 강하게 반영한다고 말할 때에, 우리가 머릿속에 상상하는 것은 복합법에 의한 단어 형성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의 예들은 국어의 형태론적 유연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주 인용되었던 것들이다.

14. 거즛말(僞+言)      목숨(頸+息) 한숨(大+息)           (粉+雨) 믈(眼+水)         믌결(水+理) 복(腹+核)         눈(米+眼) 목구무(頸+穴)      입시울(口+弦)   14의 예를 영어 단어와 대응시켜 보면 이들 낱말이 얼마나 쉽게 분석할 수 있는가가 판명된다. 가령 ‘거즛+말 ’을 ‘ lie ’와 대비시켜 보거나 ‘목+숨 ’을 ‘ life ’와 대비시켜 보면 국어 어휘의 유연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돋보인다.
  중세 국어에서는 현대 국어에서 이미 쓰이지 않거나 형태상의 변화를 입은 상당수의 복합 동사가 있는데 그것들을 보면 국어의 복합어 생성이 얼마나 생산적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다음에 몇 예를 보인다.
15. 길잡다, 녀름짓다, 맛보다. 본받다 눈멀다, 믈들다, 빗다다, 짓다 믈잠다, 앞셔다, 뒤돌다 16. 나가다, 도라오다, 니러서다 라디다, 어디다, 러디다 17. 업시너기다, 갓고로디다 아니다, 몯다 18. 듣보다, 오리다, 나들다 놀다, 딕먹다, 빌먹다, 잡쥐다   15는 명사와 동사가 결합하여 복합 동사가 된 것들이다. ‘길(을)잡다, 녀름(을)짓다’의 경우는 목적격 조사의 생략을 상정할 수 있고, ‘눈(이)멀다, 물(이)들다’의 경우는 주격 조사의 생략을 상정할 수 있으며 ‘믈(에)잠다, 앞(에)셔다 ’의 경우는 처소격 조사의 생략이 추정된다. 국어 어휘의 형성에는 이와 같이 국어의 통사 규칙이 철저히 지켜진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16은 {-아/-어} 형태소가 동사 어간 다음에 덧붙어 있음이 주목된다. 현대 국어에서는 이 방법이 아직도 보편적인 복합 동사 생성 방법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 앞선 시기의 모습이 이들 중세 국어의 예에서 발견된다. 17은 부사와 동사가 결합한 것이고, 18은 두 개의 동사 어간이 나란히 대등한 자격으로 결합한 복합 동사들이다. 18과 같은 낱말 만들기는 현대 국어에서는 사라지고 없다. 흔히 이러한 중세 국어의 복합 동사를 비통사적 합성 동사라고 하는데 ‘듣(고)보다’ , ‘오 (고) 리다’ , ‘빌(어)먹다’ ‘잡(아)쥐다 ’와 같이 생략된 어미가 상정되기 때문에 비통사적이라고 하지만 국어의 통사 규칙을 어긴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음의 복합어를 살펴보자.
19. 밤, 밠바당, 쥐 나막신, 아랑곳, 달걀, 쇠고기   19에서 ‘밤’은 사이시옷이 들어 있고 ‘나막신’에는 ‘나모+신’ 사이에 사이시옷과 같은 기능을 하는 {악/억} 형태소가 끼어들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달걀’과 ‘쇠고기’에도 소유격 조사 {-의}가 들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처럼 복합어로 구성된 국어 어휘는 형태론적 분석이 가능하고, 그것들은 예외 없이 국어의 통사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곧 고유어, 국어 어휘의 형태론적 유연성이요, 형태 첨가성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국어 어휘 중에서 고유어 어휘의 음절성과 유연성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유연성은 음운론적 교체성과 형태론적 첨가성의 두 가지 방면으로 검토되었는데, 음운론적 교체성은 다시 모음 교체와 자음 교체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았고 형태론적 첨가성은 파생법과 복합법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특히 복합법에 의한 형태 첨가는 국어의 통사적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진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면 이제는 한자어의 어휘적 특성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결론부터 말하여, 음운론적으로 국어 체계에 완벽하게 동화되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어휘의 다른 면은 한자어의 본고장인 중국어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어가 국어의 어휘 체계 안에서 무리 없이 사용되는 까닭은 첫째, 음운론적 동화 이외에도 복합어 만들기에서 고유어와 무리 없이 결합할 만큼 고유어와의 親和力을 발휘하기 때문이며, 둘째 중국어 문법에 따르면 語句로 해석되는 3음절 이상의 漢字成句들이 국어의 체계 안에서는 하나의 낱말로 처리되는 현상 때문이다.
  먼저 고유어와 한자어가 이질감 없이 복합어를 형성한 예를 보기로 하자.

20. 밥床, 門설柱, 걸床, 藥밥, 洋담배, 色종이, 꼬마自動車, 窓살   위의 예들을 보면 한자어가 漢字로 표기가 되는 낱말일 뿐, 고유어와 특별히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복합어 결합 양상이 자연스럽다. 21. 어차피(於此彼), 급기야(及其也), 심지어(甚至於), 별안간(瞥眼間) 22. 동분서주(東奔西走), 금과옥조(金科玉條), 금의환향(錦衣還鄕), 무소부지(無所不知), 죽마고우(竹馬故友), 일거양득(一擧兩得)   21의 예들은 국어의 체계 안에서는 단일한 낱말이요, 품사상으로는 부사로 처리된다. 그러나 漢文 문법에 충실하게 그 의미를 풀이한다면 ‘어차피’는 ‘어떻든’이 아니라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의 뜻으로 풀어야 하고 ‘급기야’는 ‘드디어’가 아니라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러서’라고 풀이해야 한다. 그러나 국어의 체계 안에서는 단일한 부사로 취급될 뿐이며 또 그것이 이해하는 데 아무런 장애도 초래하지 않는다. 22의 예들도 그 뜻을 풀이하면 語句 내지는 文章으로 풀이하여야겠지만 국어의 체계 안에서는 단지 하나의 명사 구실을 할 뿐이다.
  한자어는 漢字를 이해하고 그 語源을 분석하는 관점에 설 경우에는 漢文 文法의 간섭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漢字를 모르는 경우에는 漢文 文法이 고려될 수 없는 것이라고 일단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감 ’이라는 개념이 ‘입학(入學)’으로 표현될 때 漢文 文法을 아무리 무시하려 하여도 ‘입학’의 ‘학’이 ‘학교’의 ‘학’과 같음을 알게 되고 결국 ‘입학’이 국어의 문법에는 맞지 않는 낱말 만들기에 의해 형성된 낱말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한자어 가운데에는 자연스런 국어 어순과는 다르게 결합된 낱말의 무리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데 그러한 어휘에 다음과 같은 것을 손꼽을 수 있다. 23. 피난(避難), 살생(殺生), 방화(防火), 관광(觀光), 휴회(休會), 개의(開議) 24. 견탈(見奪), 소정(所定), 소위(所謂), 피침(被侵), 피살(被殺), 소회(所懷) 25. 물론(勿論), 불리(不利), 비리(非理), 무죄(無罪), 부결(否決), 막역(莫逆) 26. 회중(懷中), 상한(傷寒), 의외(意外), 망명(亡命), 피정(避靜), 대입(大入)   23은 目的 구성의 낱말로 자연스런 국어 표현에서는 ‘난을 피함 ’ ‘생물을 죽임 ’ ‘불을 놓음 ’과 같은 해석을 하게 한다. 24는 彼動 구성으로 ‘빼앗음을 당함(빼앗김) ’ ‘정한 대로’ ‘ (세상에서) 일컫는 것을 따르면 ’과 같은 해석을 해야 하고, 25는 否定 구성으로 ‘말할 것도 없이 ’, ‘이롭지 않은 ’, ‘이치에 맞지 않은 ’ 등으로 모두 뒤에 있는 글자부터 해석을 요구하는 중국어(한문)의 통사 구조를 반영한다. 그리고 26은 省略 구성으로서 한문에 대한 소양이 없는 사람들은 조건 없이 암기하여야만 하는 낱말들이다. ‘회중’은 ’懷於身中(몸안에 지님) ‘에서 줄어든 낱말이고 ‘상한’은 ‘傷以寒(추위로 인하여 병을 얻음)’의 축약이다. ‘망명’은 ‘逃亡而救命(도망하여 목숨을 건짐)’의 뜻이지 글자대로 ‘목숨을 망하게 함’이 아니며, ‘피정’은 ‘避世靜靈(속세를 피하여 조용한 곳에서 영혼을 고요하게 함) ’의 뜻이지, ‘고요한 곳을 피함’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이렇게 본다면 한자어가 표면적으로는 음절 수에 관계없이 하나의 낱말 또는 명사 어근으로 취급되지만, 내면적으로 여전히 漢字 고유의 특성인 단음절 表意 文字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漢字가 국어 어휘 체계 안에서 일종의 단음절 형태소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을 뜻한다. 바로 이 점이 한자어가 국어 어휘 체계 안에서 지니고 있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한자어는 고유어와 대비하였을 때 의미론적으로 고유어와는 다른 점이 있다. 첫째는 고유어와는 다른 의미 영역을 담당하면서 고유어와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점이고 둘째는 한자어의 만들어짐이 고유어와는 다른 경로를 거치기 때문에 시대적인 단절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첫째로 한자어가 고유어와는 다른 의미 영역을 갖고 있는 점은 다시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고유어가 일반 생활 어휘 또는 기초 어휘를 담당하고 있음에 반하여 한자어는 전문 어휘, 특수 어휘 쪽을 담당하고 있는 점이다. 한자어의 유입 초기부터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개념어들은 儒敎經典과 佛敎經典을 통하여 물밀듯이 국어 어휘 체계 속에 쏟아져 들어왔다. 이러한 추세는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일반 생활 어휘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한자어 없이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을 만큼 한자어의 독무대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한자어의 세력은 조만간 일반 생활 어휘에까지 침투하여 한자어와 고유어가 짝을 이루는 동의어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자어는 존경 표현의 감정 가치를 지니는 점잖은 어휘가 되었고 고유어는 그와 반대로 상스럽고 교양 없는 표현이라는 통념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한 것은 물론 조선 왕조의 신분 사회, 그 상층을 구성하고 있는 양반 사대부들이었다. 요즈음에 와서 한자어가 반드시 존경 표현의 어휘는 아니라는 새로운 인식이 싹트고 있으나 이미 사회의 公認 과정을 거친 상당수의 어휘가 한자어는 존대어이고 고유어는 비존대어로 통용되고 있다. 어른의 나이를 ‘春秋’ 또는 ‘年歲’로 표현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통념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둘째로 한자어는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쓰이다가 시대의 변화로 소멸되는 수가 있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 또 다른 시대적 요청에 의해 만든 한자어가 우연히 전 시대에 다른 목적, 다른 의미로 쓰이던 것일 수가 있다. 예컨대 ‘放送’은 조선 왕조 시대에는 ‘罪人을 釋放함’의 뜻이요, ‘發明’은 ‘罪人이 자신의 無罪함을 辨明함’의 뜻이었다. 漢字가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意味가 중첩됨으로써 多義的 特性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科學 情報에 필요한 새 낱말을 漢字로 만들고자 할 경우, ‘放送’이나 ‘發明’과 같은 시대별 의미 차이가 문제되지 않는가는 면밀하게 조사하여야 할 것이다.

  한자어가 중국을 원초적인 발상지로 하여 형성된 어휘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漢字로 적히는 어휘라고 하여 모두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한자어는 크게 나누어 세 나라를 발상지로 한다. 첫째는 중국이고, 둘째는 한국이며 셋째는 일본이다. 중국을 발상지로 하는 한자어는 다시 세 부류의 어휘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儒敎經典을 중심으로 한 古典漢文에서 낱말로 자주 쓰이게 되어 일반 어휘로 굳은 것, 佛敎經典을 중심으로 한 낱말로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를 原語로 하는 것(여기에는 音譯語와  意譯語의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中國白話文을 기원으로 하는 것의 세 가지이다. 다음에 그 예를 보인다.

27. 家庭, 感動, 改造, 儉素, 結婚, 孤獨, 故鄕, 機會, 努力, 農事, 德望, 動作, 明白, 保護, 分明 28. 乾達婆, 彌勒, 彌陀刹, 佛體, 南無佛, 業障, 緣起, 法雨, 大悲, 生界 29. 寶貝, 上頭, 木綿, 大紅, 紫的, 餠@, 砂糖, 帖子, 當直, 白菜   27은 古典漢文에 기원을 둔 한자어들이다. 오늘날에도 친숙하게 쓰이는 이들 낱말들이 얼마나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인가에 새삼 놀라게 된다. 28에서 ‘乾達婆’ ‘佛體’ 같은 것은 산스크리트 어의 音譯語이고 ‘業障’ ‘緣起’ 같은 것은 意譯語이다. 29는 모두 中國 文化와의 직접적인 접촉의 결과로 중국 문물과 함께 들어온 중국어 단어들이어서 한국 한자음으로 읽히지 않고 중국음으로 읽히기 때문에 漢字로 적히기보다는 ‘보패(寶貝), 상투(上頭), 무명(木綿)’ 등 한글로 적히는 경우가 많아서 한자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 것들이다.
  한자어는 한국에서 만든 것도 있다. 漢字를 眞書라 하여 한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우리 선조들이 스스로 한자어를 만들어 썼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30. 菜毒, 感氣, 身熱, 寒心, 四柱, 八字, 福德房, 書房, 道令, 査頓, 同氣   30의 예들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한자어들이다. 아마도 한자어를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에 두루 통하는 國際語라고 가정할 경우 한국 한자어는 다른 나라에서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순수한 고유어를 漢字로 音借하여 적은 ‘사돈(査頓) ’의 경우는 한자를 아무리 逐字的으로 분석하여도 바른 뜻을 찾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어휘가 본성적으로 한 나라의 문화사를 반영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일본을 발상지로 한 한자어를 보면 그러한 사실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금세기에 들어와 집중적으로 사용하게 된 日本 起源 漢字語는 새로운 과학 문명을 반영하는 것들이다. 일본이 동양에서 서양 문명을 제일 먼저 받아들여 소화하였음을 증명하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다음 예들을 보자. 31. 演繹, 歸納, 絶對, 先天, 範疇, 現象, 主觀, 客觀, 觀念, 哲學, 美術, 汽車, 討論, 神經, 元素 32. 編物, 市場, 入口, 浮橋, 內譯, 賣上, 貸切, 組立, 先拂, 花代, 場面, 見習, 役割, 呼名, 割引   31은 日本의 文化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낱말의 必要性을 절감하고 독자적으로 개발해 낸 한자어로서 開化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통용된 한자어들이다. 32도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인데 일본에서는 漢字를 訓讀하는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모두 訓讀하는 것들이다. ‘編物’을 ‘ amimono ’ , ‘入口’를 ‘ iriguci ’ , ‘組立’을 ‘ kumitate ’로 읽는다. 그러나 글자로 쓸 때에는 漢字를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한국 한자음으로 읽는 한자어가 되었다. 이것들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어휘로 증명하는 例證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한자어는 각 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국어 어휘 체계 안에서 숫자상의 팽창을 계속해 오면서 한편으로는 고유어의 세력을 약화 또는 소멸시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漢字로 표기될 수 없을 정도로 귀화 현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다음 예를 살펴보자 33. 믿글월: 原文                      믿얼굴: 本質 죽사리: 生死                      즈믄: 千 겨르다: 閑暇롭다             과그르다: 過激하다 알다: 通達하다                   바드랍다: 危殆롭다 어위크다: 寬大하다             마긔오다: 證明하다 34.  : 江, 湖水                   구실: 稅金 길, 길이: 利子                    누리, 뉘: 世上 도섭: 變化, 妖術                 머귀: 梧桐 즈름, 주름: 居間, 仲介人      가멸다: 富裕하다 35. 성냥(石硫黃), 대롱(竹筒), 숭늉(熟冷), 영계(軟鷄), 동냥(動鈴), 차례(次第), 배웅(陪行), 조금(潮減), 누비(納衣), 방죽(防築), 흐지부지(諱之秘之)   33의 예들은 고유어가 한자어의 세력에 밀려 완전히 소멸된 경우이고 34의 예들은 고유어의 생명이 아직 남아 있으나 거의 소멸의 위기를 맞은 것들이다. 35는 한자음에 변화가 일어나서 고유어처럼 된 낱말들이다. 이처럼 한자어는 국어 어휘 체계 안에서 고유어와 대립하여 고유어를 밀어내기도 하고 고유어의 모습으로 귀화의 길을 걸으면서 共存하고 있다.

  국어 어휘의 세 번째 계열을 이루는 어휘군은 서양 여러 나라 언어를 기원으로 하는 외래어이다. 이들 외래어의 상당수가 영어로서 현대 과학을 중심으로 한 여러 전문 분야의 용어들이다. 그러나 이들 외래어는 일본 식민지 기간 중에 일본어로 정착된 뒤에 국어 어휘 체계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지난 반세기 동안은 일본식 발음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예컨대 ‘컵’ (cup) ‘은 한때 ‘고뿌’라고 발음되었었고 ‘드럼(drum) ’은 ‘도라무’ , ‘캔(can) ’은 ‘깡’이라는 발음이 일반화되었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 이후 원어에 가까운 발음으로 교정하는 과정을 거쳐 현재는 원어와 국어의 음운 체계가 조화를 이룬 새로운 외래어 발음이 정착되었다. 이렇게 서양을 기원으로 하는 외래어는 국어 어휘 체계 안에서 두 번에 걸친 발음 정착 과정을 입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언어 현상이 정치 사회의 조건에 영향을 받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이들 서양 기원의 외래어는 대체로 특정 분야를 특정 언어가 담당하고 있다. 예컨대 음악 용어는 이태리어가 담당하였고 醫藥 분야는 독일어를 기원으로 했고 미술 분야는 프랑스 어를 기원으로 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외래어를 늘려 가는 창구를 영어 쪽으로만 열어 놓고 있는 현상을 보인다. 더구나 식견이 모자라는 일부 인사들이 아직 외래어로 정착했다고 볼 수 없는 생소한 외국어(주로 영어)를 일상 회화나 문자 생활에서 필요 이상으로 사용하는 풍조가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외래어의 증가 요소로 작용한다면 앞으로 이러한 외래어는 점점 더 그 숫자를 늘려 갈 것이다. 그러나 이들 외래어가 국어에서 모자라는 어휘를 보충해 주는 새로운 자원임에는 틀림없는 것인즉, 이들 외래어에 대해 지나친 경계심은 갖지 않아야 할 것이다.
  외래어가 국어 어휘 체계에 흡수될 때에는 그것이 원래의 말에서 어떤 문법적 기능을 가진 것이건, 名詞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은 특별히 주목되어야 한다. 가령 ‘카무프라즈(camouflage)’는 영어에서 명사와 동사의 두 가지 기능을 하지만 국어에서는 ‘카무프라즈-하다(겉보기 좋게 僞裝하다)’와 같은 형태로 쓰인다. 한편 이들 외래어가 二音節 以上의 낱말로 되어 있을 때에는 二音節 축약어로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음도 주목해야 한다. ‘데몬스트레이션(demonstration)"Courier New";’은 ‘데모’로 줄었고, ‘포토그라피(photography)’는 ‘포토’로 줄여 쓰는 것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물론 이러한 줄임말의 전통은 일본어에서 확립된 것인데 국어가 그러한 일본어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 외래어의 증가는 예측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현대 문명의 변화의 발전은 고유어나 한자어만으로는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하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국어 어휘의 총체적인 규모가 어떤 것이며, 그들의 특성이 무엇인가를 개관하였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간추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국어 어휘는 고유어를 중심 어휘군으로 하고 한자어와 외래어를 보조 어휘군으로 하는 三重 體系를 이루고 있다. 2. 국어 어휘는 音節 단위로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다. 3. 고유어는 유연성이 강한 어휘로 음운 교체성과 형태 첨가성의 두 가지 특성을 나타낸다. 4. 한자어는 국어의 통사 규칙을 위반한 漢文 文法의 특성을 반영한 어휘를 갖고 있으나 고유어와의 친화력을 유지하면서 고유어가 담당하지 못한 의미 영역을 표현하는 어휘를 확보하고 있다. 5. 외래어는 국어 어휘 체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제3의 어휘군이기는 하지만 고유어와 한자어의 二重 體系가 구성하는 단단한 구조에 나란히 맞서는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새로이 전개되는 새 시대에 맞추어 세력을 넓혀갈 것이 예상된다.   위와 같은 논의 이외에도 국어 어휘, 특히 고유어에는 音聲 象徵에 의한 의성 의태어가 다른 언어보다도 다양하게 발달하였다든가, 동일한 대상에 대하여서도 서로 다른 표현 가치를 나타내는 同義語 즉 尊待語와 一般語가 한자어와 고유어의 對立相으로 존재한다든가 하는 문제가 더 자세히 언급될 수 있을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관점을 달리하여 다른 자리에서 이 문제들을 다시 검토할 기회를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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