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8 헌법 전문에 왜 넣어야 하나

5 18 헌법 전문에 왜 넣어야 하나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2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광주MBC-TV와 인터뷰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극우의 왜곡·폄훼과 관련해 “5·18을 폄훼하고 왜곡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단호한 대응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광주MBC-TV가 녹화방송한 < 5·18 40주년 특별기획 - 문재인 대통령의 오일팔>에 출연해 “민주주의의 관용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여러가지 폄훼에 대해서까지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용서도 진실 위에서만 가능…5·18 남은 진실 다 밝혀야

5 18 헌법 전문에 왜 넣어야 하나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무참히 폭행하는 모습. 5·18기념재단 제공

문 대통령은 “법적으로 다 정리된 사안을 지금까지도 왜곡하고 폄훼하는 발언들이 있고, 일부 정치권조차도 그런 주장들을 받아들여서 확대재생산하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면서 “이런 식의 고리를 끊어야 사회가 보다 통합적인 사회로 나갈 수 있고, 정치도 보다 통합적인 정치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5·18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해내는 것도 그런 폄훼나 왜곡을 더 이상 없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라며 “마침 (지난 12일) 5·18진상조사위원회의 본격적인 조사 활동이 시작됐는데, 이번에야말로 아직 남은 진실들이 전부 다 밝혀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여전히 발포의 말하자면 명령자가 누구였는지, 발포에 대한 법적인 최종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이런 부분들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다. 또 “아직도 행방을 찾지 못하고 시신도 찾지 못해서 어딘가에는 아마 암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 학살자들 그 분들을 찾아내는 일들, 또 헬기 사격까지 하게 된 경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대대적으로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한 공작의 실상들까지 다 규명돼야 한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어야 화해가 있고 국민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며 “그 출발은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는 것(이고), 그 진실의 토대 위에서만 화해가 있고 통합이 있을 수 있다. 용서도 진실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5·18 민주화운동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필요성도 거듭 밝혔다. “제가 (2018년 3월) 발의한 개헌안 그 전문에 5·18 민주화운동의 이념의 계승, 이것이 담겨 있다”면서 “비록 개헌이 좌절되었지만 앞으로 언젠가 또 개헌이 논의가 된다면 헌법 전문에서 그 취지가 반드시 되살아나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 바깥에서 광주의 진실을 가장 먼저 접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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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 소식을 전한 1980년 5월19일자 경향신문.

문 대통령은 1980년 5월 서울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서 5·18민주화운동 소식을 처음 접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저는 5·18 전날인 5월17일 비상계엄령이 확대되고, 그날 바로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이 되었다”면서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 수감이 되었던 중에 저를 조사하던 경찰관들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당시 그 경찰관들은 계엄군이 광주에 투입된 그(것)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며 “계엄군의 발포로 많은 광주 시민들이 사상을 당한 사실, 경찰은 발포 명령을 거부해 진압에서 배제가 되었다는 사실, 시민군들이 예비군이나 경찰 무기고를 열어서 무기를 들고 맞서고 있다는 사실, 저에게 경찰정보망을 통해서 올라오는 이런 소식들을 매일매일 전해주었다”고 했다.

또 “저는 그런 얘기들을 들었기 때문에 그런 사실들이 당연히 다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며 “나중에 석방되고 난 이후에 보니까 그런 사실들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고 오히려 반대로 폭도들의 폭동인양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는 광주 바깥에서는 어떻게 보면 가장 먼저 광주의 진실, 그런 것을 접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서울역 회군에 반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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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15일 ‘비상계엄 해제’ 등을 요구하며 서울역 앞에 모인 군중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문 대통령은 1980년 5월 경희대 복학생 대표였던 자신이 학생운동 지도부의 이른바 ‘서울역 회군’ 결정에 반대했다고 회고했다. 광주의 참상이 벌어지기 사흘 전인 1980년 5월15일 서울에서만 수십만의 학생들이 “전두환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등 구호를 외치며 서울역 광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군대가 시위를 강제로 해산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자 당일 밤 학생운동 지도부는 일단 시위를 멈추고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하는데, 이를 ‘서울역 회군’이라고 한다.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심재철 미래통합당 의원 등이 ‘회군’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 대통령은 “제가 광주 5·18 소식을 들었을 때 ‘민주화의 아주 중요한 그 길목에 다시 군이 나와서 군사독재를 연장하려고 한다’ 그 사실에 굉장히 비통한 심정이었고, 한편으로 광주 시민들이 겪는 엄청난 고통을 들으면서 굉장히 큰 죄책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유를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80년 5월 초부터 매일같이 서울역에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모여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시위를 열었는데, 그게 날이 갈수록 숫자가 불어서 5월15일에는 무려 20만 명이 서울역에 운집을 했다”며 “그런데 그 상황에서 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그런 소문이 쫙 퍼졌는데, 그러자 당시 그 집회를 이끌고 있던 서울지역 각 대학 총학생회의 회장단들이 말하자면 해산을 결정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게 이른바 ‘서울역 대회군’이라고 부르는 것”이라며 “군이 투입될 수 있는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라는 명분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군이 투입되면 아주 희생이 클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상황이 좋아지고 난 이후에 다시 모여야 한다, 그런 의견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나는 그 때 그 결정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며 “나는 그때 경희대 복학생 대표였는데, 나뿐만 아니라 대체로 복학생 그룹들은 말하자면 민주화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군과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군이 투입되더라도 사즉생의 각오로 맞서야 한다, 그 고비를 넘어야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국제사회가 주시를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서울지역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아주 가혹한 그런 진압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금 그 때 총학생 회장단들의 결정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매일 서울역에 모여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집회를 함으로써 결국은 군이 투입되는 그런 빌미를 만들어 주고는 결국 결정적인 시기에는 퇴각을 하는 그런 결정을 내린 것 때문에 광주 시민들이 정말 외롭게 계엄군하고 맞서게 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은 “그 사실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고, 저뿐만 아니라 광주 지역 바깥에 있던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들 모두가 광주에 대한 어떤 부채의식, 그것을 늘 가지고 있었고 그 부채의식이 그 이후 민주화운동을 더욱 더 확산시키고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5·18 기념식 폄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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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18일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아버지를 잃은 유족 김소형씨를 안아주며 위로하고 있다. 광주 | 이준헌 기자

문 대통령은 취임 첫 해인 2017년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뒷얘기도 풀어놓았다. 문 대통령이 당시 기념식 도중 5·18 유족인 김소형씨를 따듯하게 위로하는 장면이 먹먹한 감동을 주며 한동안 회자됐다.

문 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이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때 그 기념식에 대통령들이 참석하지도 않고, 또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도 못하게 해서 유족들이 따로 기념행사를 가지는, 그런 식으로 5.18 기념식이 조금 폄하된다할까 하는 것이 참으로 분노스러웠다. 굉장히 민망하고 부끄러운 심정이었다”고 했다.

이어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5.18 민주화운동을 광주 지역의 기념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대한민국 전체의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로 승화시키고, 대통령으로서도 해마다 참석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두 해의 한 번 정도씩은 참석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도 허용하고, 그래서 좀 제대로 기념식을 치러야겠다는 그런 식의 각오를 갖고 있었는데, 그런 제 각오와 약속을 실천할 수 있게 되어서 아주 뿌듯하게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광주를 ‘확장’한 노무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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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27일 고 노무현(영정을 든 이) 전 대통령과 문재인(노 전 대통령 왼쪽) 대통령이 이태춘 열사의 영정사진을 들고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이태춘 열사는 그해 6월18일 전두환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문 대통령은 ‘5·18 하면 생각나는 인물’을 묻는 질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 그러니까 그 당시의 노무현 변호사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80년대 이후 부산 지역의 민주화운동은 광주를 알리는 것이었다”면서 “광주를 알게 될수록 시민들은 그 당시 광주가 외롭게 고립되어서 희생당했는데 거기에 동참하지 못하고 그냥 내버려두었던 그 사실에 대해서 큰 부채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민주화운동의 하나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6월항쟁이 일어났던 87년 5월 당시 노무현 변호사와 제가 주동이 돼서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5·18 광주 비디오, 말하자면 관람회를 가졌다”며 “영화 상영하듯이 하루 종일 모니터로 광주 비디오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회고했다.

문 대통령은 “그런 것이 부산 지역 6월항쟁의 큰 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부산의 가톨릭센터가 6월항쟁 때 서울의 명동성당처럼 자연스럽게 부산지역 6월항쟁을 이끄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면서 “그런 일들을 함께했던 그 노무현 변호사, 광주 항쟁의 주역은 아니지만 그러나 광주를 확장한 그런 분으로서 기억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